한국불교전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 日本漂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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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풍계 현정楓溪賢正이 쓰다.

가경嘉慶 22년 정축년(1817년) 가을 해남 대둔사 완호翫虎 대사가 나에게 천불상을 조성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마침내 경주로 가서 불석산佛石山에 들어가 옥을 쪼아 천불을 조성하였는데 불상의 크기는 네댓 살 되는 동자만하였다. 암석은 쳐서 캐낼 때 큰 조각으로 깨져 나온 것이 모두 불상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완전한 것이었으니, 산 이름을 불석佛石이라 한 것 역시 허명이 아니었다. 겨울 11월에 공사를 마치고 16일에 천불상을 경주 장진포長津浦로 옮겼다. 때마침 그곳에 강진군의 완도 상선이 도착하였기에 그 배를 임대하여 천불상을 실었다. 18일에 배를 띄워 나아가 울산 장생포長生浦에 정박하였다. 나는 상좌 인담印潭과 함께 육로를 따라 22일에 장생포에 갔는데 그 다음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가 도착하였다. 배는 작고 불상은 무거워 배가 나아가기에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홍원洪原19) 상선이 해남으로 가려 하였기 때문에 또 그 배를 임대하여 불상 768좌를 옮겨 싣고 232좌는 완도 상선에 그대로 두었다. 24일 두 척의 배가 함께 출발하였다. 완도 상선에는 7명이 타고, 홍원 상선에는 승려 15명과 속인 12명이 탔다. 두 배가 70리를 나아가 울산 군령포軍令浦에 이르렀을 때 바람의 기세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배를 멈추고 유숙하였다.
25일에 동래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런데 동래로부터 수십 리 못 미친 곳에서 정오 즈음에 서북풍으로 생각되는 바람이 갑자기 일어났다. 그때 완도 상선은 배가 작았기 때문에 해변을 따라 동래로 들어갔다. 그러나 홍원 상선은 배가 컸기 때문에 내버려진 채 바다 가운데로 흘러들었다.

010_0711_b_02L日本漂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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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711_b_04L1)楓溪賢正錄

010_0711_b_05L
嘉慶二十二年丁丑秋海南大芚寺翫
010_0711_b_06L虎大師要余造千佛像遂往慶州
010_0711_b_07L佛石山琢玉造千佛像大小可如四五
010_0711_b_08L歲童子岩槌鑿之時以大片劈出者
010_0711_b_09L皆完金可造佛軀山名佛石亦不虛也 [3]
010_0711_b_10L冬十一月工訖十六日移運千佛于慶
010_0711_b_11L州長津浦則康津之莞島商船適到
010_0711_b_12L貰其船載千佛十八日發船使之進
010_0711_b_13L泊于蔚山長生浦余與上佐印潭從旱
010_0711_b_14L路二十二日往長生浦其翌日船始
010_0711_b_15L來到舟小而佛重不利涉又適有洪
010_0711_b_16L原商船將向海南故又貰其船佛七
010_0711_b_17L百六十八坐移載于洪原船二百三十
010_0711_b_18L二坐仍載於莞船二十四日兩船偕
010_0711_b_19L莞船則載七人北船則載僧徒十五
010_0711_b_20L名俗人十二名行七十里至蔚山軍令
010_0711_b_21L風勢不好故停船留宿二十五日
010_0711_b_22L發船向東萊未及東萊數十里午時
010_0711_b_23L量西北風忽大起時莞船軆小故
010_0711_b_24L海邊而行入東萊北船軆大故放在中

010_0711_c_01L그래서 급히 뱃머리를 돌려 다시 동래 방향으로 가려고 하였다. 배를 돌리려면 먼저 돛을 돌려야 했기 때문에 수십여 명이 힘을 모아 돛을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바람의 기세가 너무 심했고 파도가 산처럼 일어났으며 돛이 바람을 가득 안고 있어서 돌릴 수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모두 세 번이나 했지만 끝내 배를 돌리지 못하였다. 뱃사공이 말하기를 “바람이 이러한데 억지로 돌리려 한다면, 배가 곧바로 뒤집히는 환란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바람 부는 대로 놓아두어 가는 대로 맡겨 두는 것만 못합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몇 개의 푸른 산이 서북쪽으로 지나갔다. 뱃사람이 말하기를 “저것은 대마도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로는 망망대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는 오직 물빛만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배는 매우 빠른 속력으로 동남향(巽巳)으로 나아갔다. 바람이 그치면 배도 멈추고, 바람이 불면 배도 움직였다. 이렇게 하기를 이틀 밤 이틀 낮이 지나 27일에 해가 질 즈음에 멀리서 한 척의 흰 범선이 앞쪽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저 배는 필시 일본 배일 것이다. 저 배가 가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뱃사공이 그 배를 따라가서 어둠이 깊어진 후에 어떤 곳에 배를 정박하였는데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멀고 가까운 곳곳에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멀리 마을에서는 개 짖는 소리가 서로 이어졌다. 비록 어느 지방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일본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배가 정박한 후에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류하던 이틀 동안 한 톨의 곡식도 입에 넣지 못하였고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였는데 배고픈 줄도 몰랐고 잠 오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배가 정박하자마자 혼절하여 모두 죽은 것처럼 사람의 기색이 없어서 그날 밤은 배 안에서 유숙하였고, 28일 날이 밝은 후 모두 일어나 비로소 밥을 해 먹었다. 주변 지역을 살펴보니, 포구 마을이 있었는데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닷물이 한 굽이 흘러들어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호수의 넓이는 3리쯤 되었고 길이는 10리쯤 되었으며, 호수의 입구 밑바닥에는 뾰족하게 삐쳐 나온 암초가 곳곳에 있었다.

010_0711_c_01L及急欲回 [4] 入東萊 [5] 回船例
010_0711_c_02L回帆故數十餘人并力欲爲回帆
010_0711_c_03L風勢甚急浪起如山帆膓 [6] 風滿無以
010_0711_c_04L如是者丸 [7] 三次終不能轉回篙師
010_0711_c_05L風如許而强回恐致即刻覆舟之患
010_0711_c_06L不如順風勢任所向死生聽之天
010_0711_c_07L臾之間一抹靑山 [8] 西比 [9] 邊過去
010_0711_c_08L人曰此對馬島也其後則茫茫大海
010_0711_c_09L無一所見惟四面水色接天而起舟行
010_0711_c_10L甚疾直向巽巳而行風止則舟止
010_0711_c_11L起則舟行如是者爲二晝二夜二十
010_0711_c_12L七日日沒時望見一白帆船過前 [10]
010_0711_c_13L曰此必是日本船也向彼所去處而行
010_0711_c_14L船爲可篙師從之夜深後泊一處
010_0711_c_15L黑不辨但見遠近烟火錯落明滅
010_0711_c_16L村犬吠斷續相聞雖未知何許地方
010_0711_c_17L而意其爲日本國船泊後如有生意
010_0711_c_18L漂流兩日一粒不入口霎時不交睫
010_0711_c_19L而不知飢不知睡及船泊便昏倒
010_0711_c_20L無人色是夜留宿舟中二十八日天明
010_0711_c_21L舟中人皆起始炊喫飯周視地方
010_0711_c_22L浦村而四面山圍海水一曲流入爲湖
010_0711_c_23L其廣三里長近十里湖口水底石角
010_0711_c_24L撰者名編者補入

010_0712_a_01L어젯밤 어둠 속에서 배가 암초 사이로 지나온 것을 생각해 보니 다시 온 몸에 소름이 끼쳐 왔다. 배가 돌에 걸리지 않고 무사하였던 것은 진실로 천행이었으니 부처님의 가피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산의 형세는 맑고 아름다웠으며 물의 형세는 거울처럼 잠잠했다. 포구 마을 인가人家는 거의 30여 채 있었는데 기와집이 들쑥날쑥 있는 마을이었다. 방은 온돌이 없고, 나무를 엮어 마루를 만들어 대청마루 위에 다다미(舖席)를 깔아서 사계절을 지냈다. 땅의 기온이 따뜻하여 강가에는 얼음이 없었고, 나뭇잎은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아직 다 떨어지지는 않았다. 풀은 말라 죽지 않은 것 중에서 어떤 것은 꽃을 피운 것도 있었다. 무 채소는 모두 텃밭에 있었는데 이파리가 봄의 그것처럼 푸르렀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는 곳곳에 모여서 볼 뿐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장교將校 같은 어떤 사람이 종자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종이와 붓을 가지고 글을 써서 물었다.
“어느 나라 어느 읍 사람이오?”
나는 대답하기를 “조선국 전라도 대둔사 풍계 대사입니다. 천불상을 만들기 위해 경상도 경주 불석산에 가서 옥을 쪼아 천불상을 배에 실어 운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동래 앞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만나 표류하여 여기에 오게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 글을 써서 물었다. “여기는 어느 나라 어느 지방이오?”
답하기를 “일본 서해도(西海道, 사카이도) 축전국(筑前國, 치쿠젠노쿠니) 종상군(宗像郡, 무나카타군)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사람들은 정황에 대한 질문을 마치고 즉시 돌아갔다.
잠시 후 한 관리가 나타났다. 한 사람이 앞에서 인도하고, 또 두 사람이 국철월國鐵鉞 같은 것을 가지고 뒤에 서 있었다. 관리가 나오자 한 사람이 해당 포구 사람들을 앞세워 청백색의 장막을 가지고 한 곳에 임시 막사(依幕)를 설치하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군막軍幕 같았다. 그 관리가 나와 앉아 수험관搜驗官이라 칭하고 두 사람을 보내 검사하게 하였는데, 배 안의 온갖 물건과 몸에 입는 의복을 실오라기 하나 남김없이 모두 기록하였다. 기록을 마치자 관리는 들어갔고, 쌀과 온갖 물품들이 운송되어 왔는데, 1인당 하루에 쌀 1승升 5합合이었다. 그 나라의 법식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010_0712_a_01L錯落羅列黑夜中舟從石角間經過
010_0712_a_02L來更魂軆粟其不觸于石誠天幸
010_0712_a_03L非佛力何以有此山勢明媚水勢鏡
010_0712_a_04L浦村人家近三十餘瓦家相錯成
010_0712_a_05L房無火堗惟編木爲廳廳上舖席
010_0712_a_06L四時居住地氣和暖江邊無水凘
010_0712_a_07L葉雖脫亦未盡脫草不枯死或有開
010_0712_a_08L花者蘿葍皆在圃葉靑如春居人忽
010_0712_a_09L見我輩處處聚觀亦不近前而已
010_0712_a_10L若我國將校者一人又從者一人持紙
010_0712_a_11L筆書問曰何國何邑人也答曰朝鮮國
010_0712_a_12L全羅道大芚寺楓溪大師爲造千佛
010_0712_a_13L慶尙道慶州入佛石山琢玉造千佛
010_0712_a_14L將船運至東萊前洋遭風漂到 [11] 又書
010_0712_a_15L問曰此是何國何地方答曰日本西海
010_0712_a_16L道筑前國宗像郡大島浦也其人問情
010_0712_a_17L即爲回去少焉一官人出來一人
010_0712_a_18L前導又二人執如國鐵鉞者立于後
010_0712_a_19L官人出來一人前該浦人以靑白布帳
010_0712_a_20L依幕于一處有若我國之運幕
010_0712_a_21L官人來坐 [12] 以搜驗官遣二人搜驗
010_0712_a_22L船中雜物身上衣服無絲毫遺漏
010_0712_a_23L錄訖其官人入去粮米及雜物並爲輪
010_0712_a_24L每人日 [13] 米一升五合其國式例如此

010_0712_b_01L그러나 쌀을 공급하는 사람이 1인당 쌀을 아침 3합 저녁 3합만 배급해 주었다.20) 3합의 쌀은 거의 우리나라의 7합을 넘었다. 두부, 소금, 간장, 무, 쑥, 참기름, 땔나무 등의 물건은 사용하기에 알맞았고, 속인들에게는 생선 1미尾가 더 배급되었다.
배에서 육지로 내려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우리나라 선법船法에 다른 나라 배가 표류하여 오면, 선례에 따라 장기도(長崎島, 나가사키)에 간 이후에 비로소 육지로 내려옵니다. 그 전에는 육지에 내려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배 안에서 유숙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남자들은 두상頭上의 위쪽 머리카락을 남김없이 자르고 뒤통수의 머리카락만 남겨두고서 땋아 묶었다. 그리고 그 묶은 머리카락을 앞으로 향하게 하고 정수리(頂門)에 이르러 굽혀 묶었다. 나머지 머리카락은 잘라 버렸고, 남아 있는 한 마디 쯤의 머리카락은 꿀과 기름(密油膏)을 섞어서 두상頭上에 붙였다.
옷은 모두 비단(緞)으로서 우리나라의 통 넓은 소매가 있는 두루마기 같았는데, 색깔은 거의 검은색이었고 5~6겹을 입었으며, 옷에 달린 끈은 없었고 푸른 색 혹은 황색·녹색 공단貢緞으로 요대腰帶를 만들었다. 요대 길이는 [우리나라의 바느질에 쓰는 자(針尺)를 기준으로 했을 때]21) 7척쯤이고 넓이는 2마디쯤으로 이것으로 허리를 여러 차례 돌려서 묶고 필요한 온갖 물건은 모두 요대에 꽂아 두었다. 두루마기 속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칼을 좌측 요대에 꽂아 두었는데 귀천이나 노소할 것 없이 모두 이와 같았다. 관리들은 검은 두루마기 위에 무늬를 수놓은 두루마기를 덧입고 있었다. 그 길이는 무릎까지 내려와 그쳤는데 검은 두루마기와 비교해 볼 때 조금 짧았다.
바지는 평소 사사로이 있을 때에는 입지 않고, 여자의 고쟁이(裩襠) 같은 것을 둘렀는데, 끈으로 얽어서 허리에 묶었다.
신발은 우리나라의 미투리 같았는데 신발 밑바닥에 가죽을 대었다. 양 옆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앞에만 한 갈래로 땋은 총緫이 있어서 이것으로 엄지발가락을 옭았다. 신발의 뒤축이 없어서 신발을 끌며 다녔는데 신발의 끌리는 부분은 철 조각을 대었다.
버선은 신었지만 버선목이 없었다. 그리고 버선의 엄지발가락 부분이 옴폭 파여 오그라들어 있어서 신발의 총緫으로 걸기에 편리하였다. 진흙탕 길에서는 나막신을 신었는데 신발의 앞뒤로 이빨 모양이 나 있었다.

010_0712_b_01L而其供給人以每人米朝三合夕三合
010_0712_b_02L給之其三合米殆過我國七合米 [14]
010_0712_b_03L腐鹽醬蘿蒿眞油柴等物稱用俗人
010_0712_b_04L生魚一尾加給不令下陸曰我國船法
010_0712_b_05L他國船漂到則例爲運詣於長崎島後
010_0712_b_06L始許下陸其前則不得下陸故仍爲留
010_0712_b_07L宿舟中其男子頭上無所着薙髮而腦
010_0712_b_08L後髮則留之緫而向前至䪿門屈而結
010_0712_b_09L餘髮則截之餘一寸餘以蜜油膏
010_0712_b_10L調而貼于頭上其衣皆緞屬而如我國
010_0712_b_11L之濶袖周衣色尙黑着五六襲無系 [15]
010_0712_b_12L以靑貢緞或黃綠貢緞作帶長七
010_0712_b_13L尺餘廣二寸餘我國針尺 [16] 以此匝腰
010_0712_b_14L數次而結之隨身雜物皆置腰帶上
010_0712_b_15L周衣中 [17] 大小二劒佩于直 [18] 腰帶上毋論
010_0712_b_16L貴賤老少皆如此官人則黑周衣 [19]
010_0712_b_17L加着斑斕繡周衣其長至膝而止比黑
010_0712_b_18L周衣稱 [20] 短袴則不着私處以如女人之
010_0712_b_19L裩襠者包之組以纒腰結之 [21] 履則如我
010_0712_b_20L國之麻鞋而履之底以皮承之無左
010_0712_b_21L緫當前只留一緫以罥足拇後跟 [22]
010_0712_b_22L曳之以行履之曳處鋪以鐵片
010_0712_b_23L則着之而無襪領襪之足拇所接處
010_0712_b_24L凹縮 [23] 之以便履緫之罥泥濘則着木履

010_0712_c_01L나막신 윗부분은 일반 신발의 윗부분과 같이 앞에 하나의 총緫으로 엄지발가락을 옭았을 뿐이었다.
여자의 의복은 남자와 다름이 없었지만 옷깃은 꽃무늬로 수놓은 비단으로 만들었고, 옷의 아래 폭(下幅)의 무릎 아래 부분은 각종 꽃들로 수놓았다. 그리고 그 비단은 모두 단緞직물이었지만 이름과 색깔이 서로 달랐고 또한 바지를 입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았지만 두상頭上에 동銅실줄이나 금金실줄 혹은 은銀실줄로 환環을 만들어 머리카락 위에 얹고 있거나, 동실줄·금실줄·은실줄로 덮개를 만들어 덮고 있었다. 사면의 머리카락으로 환環과 개盖를 감싸고 그 위로 머리카락을 돌려 묶어 계발髻髮을 만드는데 혹시 남는 부분이 있으면 잘라서 꿀과 기름(油密膏)을 발라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금·은·호박琥珀·상아象牙 등 예닐곱 개의 보배로 만든 꽃 비녀(花鈿)를 꽂았다. 금비녀는 금꽃에 은잎이고, 은비녀는 은꽃에 금잎이며, 호박비녀와 상아비녀도 모두 금꽃·은꽃에 금은으로 만든 기이한 금수와 새를 꽃잎 위에 얹혀 놓은 모양으로 모두 생동감이 있었다. 또 비녀에 진주를 꿰매었다. 한 여인의 머리 장식이 값어치로 천금이 넘었다. 시집간 여자들은 치아를 검게 칠하였고 처녀들은 칠하지 않았다. 소·말·돼지·개고기는 먹지 않았지만, 물고기·자라·꿩·닭·물오리·기러기는 먹었다.
5일을 유숙했다. 본도本島22)에서 이국선異國船이 와서 정박했을 때의 처리에 대해 종상군(宗像郡, 무나카타군)에 답변하자, 해당 군에서 발송發送하는 비선飛船 40여 척과 호송하는 관선官船 1척과 지로선指路船 1척을 보내왔다. 비선은 매우 작아서 4명을 수용하였고, 지로선은 좀 더 컸다. 관선은 더욱 컸는데, 우리 배와 비교해도 더 컸다. 지로선이 앞에서 먼저 가고, 비선 40여 척이 3대로 나누어 1대가 앞에서 끌고, 2대가 좌우에서 끌었다. 관선은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 관인이 타서

010_0712_c_01L [24] 有前後齒履之上亦如履之上
010_0712_c_02L一前緫罥拇而已女子衣服與男子無
010_0712_c_03L而衣之領則以花紋繡緞爲之
010_0712_c_04L之下愊 [25] 膝下處則以各色花草繡之
010_0712_c_05L錦則皆緞屬而名色不一亦不着袴
010_0712_c_06L但不薙髮而頭上以銅絲或金銀 [26]

010_0712_c_07L
作環戴之又以銅金銀絲作盖覆之髮
010_0712_c_08L四面褁其環與盖而上仍盤結作髻髮
010_0712_c_09L或有餘則截之以油蜜膏貼之金銀琥
010_0712_c_10L珀象牙等六七寶釵花細揷其上金釵
010_0712_c_11L則金花而銀葉銀釵則銀花而金葉
010_0712_c_12L珀象牙釵亦皆金花銀花而以金銀造
010_0712_c_13L奇禽異鳥安于花葉上皆若 [27] 生動
010_0712_c_14L以眞珠綴之一女人首飾價爲千金餘
010_0712_c_15L女之嫁人者漆其齒處女則否牛馬
010_0712_c_16L猪狗肉 [28] 皆不食 [29] 食魚鱉及雉雞鳧雁
010_0712_c_17L留宿五日自本島以異國船來泊之意
010_0712_c_18L報于宗像郡則自該郡發送飛船四十
010_0712_c_19L餘隻護送官船一隻指路船一隻
010_0712_c_20L來到飛船則至小容受四人指路船
010_0712_c_21L稍大官船尤稍大比余 [30] 所乘北船加大
010_0712_c_22L指路船中流先行飛船四十餘隻分作
010_0712_c_23L三隊一隊 [31] 在前而引之二隊在左右而
010_0712_c_24L引之官船則大島浦官人乘之而護送

010_0713_a_01L우리 배를 호송하면서, 돛을 올리지 못하게 하고 노를 젓지 못하게 하여 자기들이 이끄는 대로 맡겨 두게 하였다. 12월 2일에23) 종상군(宗像郡, 무나카타군)의 진옥기포(津屋崎浦, 쓰야자키우라)24)에 정박하였는데 이날 30리를 이동하였다. 도착한 곳에 관리 두 사람이 군막을 설치하여 부월鈇鉞25)을 꽂고 강江의 동쪽을 끼고 서쪽으로 나와 앉아 있었으며 장교 4~5명이 나열하여 서 있었다. 그들의 복색은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에서와 같았다. 그들이 글을 써서 보이며 말하기를, “배가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지의 풍랑은 일정하지 않고, 푸른 바닷길의 험난함이 대체로 이러하니, 그대들이 매우 힘들었을 것은 짐작할 만합니다. 그런데도 배에 탄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아무 탈 없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관부는 표류한 그대들을 대우함에 있어서 본래부터 정해진 법도가 있으니, 먼저 표류한 사람들의 정상情狀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그대들은 조선국 사람들입니까? 살던 곳은 무슨 도 무슨 현 무슨 읍 무슨 리입니까? 지금 무슨 일로 어느 항구에서 배를 띄워 어디로 가려던 길이었습니까?” 이에 글을 써서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에서 답했던 것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처럼 세 가지 조항에 대해 몇 차례의 질문을 마치자 관리는 들어갔다.
강의 좌우에는 우리를 구경하던 남녀들이 서로 섞여 있었다. 인가人家는 거의 4~5백 호 정도 되었는데,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와 비교하면 자못 번화하였다. 밤이 되자 비선 40여 척이 모두 관으로부터 황촉26)을 공급받아 등불을 밝혔고 우리 배도 황촉 한 쌍을 공급받아 모두 등불을 밝혔으니,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그 나라의 부유함을 알 만하였다.
바람이 없어서 10일을 머물고 11일에 그곳 포구의 관리가 비선 40여 척을 이끌고 우리 배를 호송하여 남도포(藍島浦, 아이노시마우라)에 전치傳致27)하였고, 당백포唐白浦에 이르기까지 이날 90리를 갔다. 바람이 없어서 9일간 지내고 23일에 또 비선으로 백도柏島에 전치하였는데 이날 100여 리를 갔다. 24일에 또 비선으로 호자도(呼子島, 요부코)에 전치하였는데 물길 40리였다. 바람이 없어서 5일을 지내고 28일에 삼율도三栗島에 전치하였는데

010_0713_a_01L
我國船則不掛帆不搖櫓一任其引去
010_0713_a_02L十二日 [32] 引泊宗 [33] 像郡之津屋崎浦是日
010_0713_a_03L行三十里及到官人二員設軍幕
010_0713_a_04L鈇挾鉞 [34] 挾江東西出坐軍校四五人列
010_0713_a_05L其服色如大島浦以書書示曰
010_0713_a_06L漂舟爲暴風所放天地風浪之不常
010_0713_a_07L海行路之艱難大率如此舟人口辛苦
010_0713_a_08L可知但一舟之人無恙到于此地
010_0713_a_09L可不謂幸耶我官府待漂人自有定䂓
010_0713_a_10L先要知道漂人之情狀乃問曰汝等朝
010_0713_a_11L鮮國人耶其居係何道何縣何邑何里
010_0713_a_12L今以何故發何港而徃何鄕者耶
010_0713_a_13L答如大島浦所答如此數三條問訖
010_0713_a_14L官人入去江左右江 [35] 觀光男女雜畓
010_0713_a_15L人家近四五百戶比大島浦頗繁華
010_0713_a_16L入夜飛船四十餘隻自官皆給黃燭
010_0713_a_17L國船亦給黃燭一雙皆燃燈雖微事
010_0713_a_18L其國之富可知也無風留十日 [36] 十一日
010_0713_a_19L該浦官人領率飛船四十餘隻衛護
010_0713_a_20L致于藍島浦至于唐白浦是日行九十
010_0713_a_21L無風留九日二十三日又以飛船
010_0713_a_22L傳致柏島是日行百餘里二十四日
010_0713_a_23L又以飛船傳致于呼子島水路爲四十
010_0713_a_24L無風留五日二十八日傳致于三

010_0713_b_01L물길 100여 리였다.
29일에 또 비선으로 서도(西島, 니시지마)에 전치하였는데 물길이 100여 리였다. 포구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어망을 볕에 말리고 있었다. 이날이 섣달그믐(除日)이었기 때문이다. 만 번 죽을 고비를 넘겨 심혼心魂이 놀랍고 두려운 상태로 멀리 바다 너머에 의탁하고 있는데 어망을 거두는 날이 되고 보니, 뱃사람들 그 누가 탄식하지 않으리오. 비록 생사의 기로에 내던져졌지만 이날은 일 년 중의 큰 명절이니,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릴 수는 없겠지만, 하물며 768좌의 부처님을 몸소 받들고 이곳에 표류해 왔으니, 이 부처님들께는 공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서 담당 관리에게 말하여 정해져 배급받는 양식 이외의 쌀을 요구했더니 쌀 한 말(斗)을 더 주었다. 마침내 쌀을 곱게 빻아 밥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하고 남는 밥은 바다에 흩어 해신海神에게 공양하였다. 하루를 머물렀다.
무인년(1818년) 정월 2일 또 비선으로 비전국(肥前國, 히젠노쿠니)28) 장기진長崎鎭에 전치하였는데 물길로 450리가 되었다.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에서 이곳까지의 물길은 양쪽으로 산들이 끼고 있었는데 바닷길을 관통할 때엔 때로는 한쪽으로만 산이 있었고, 때로는 한쪽 곁으로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지나는 곳은 모두 연해에 있었고, 산골짜기 사이로 조수潮水가 흐르고 있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이 왕래할 때 모두 배를 타고 다니는 것이 마치 육지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왕래하는 것 같았다.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에서 배가 출발할 때 뱃머리에 상서로운 무지개가 생겨났는데 마치 문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 배가 그 중앙으로 지나갔다. 옥기포(屋崎浦, 야자키우라), 남기포(藍崎浦, 아이노자키우라), 당백포唐白浦에서도 배가 나아가고 있을 때 모두 이러한 상서로움이 있었다. 뱃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고, 일본 사람들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장기진長崎鎭은 큰 도시이다. 누각과 저택이 장엄하고 화려하였으며, 여염집들이 즐비하였다. 중국 선박들과 아란阿蘭의 여러 나라 선박들이 모두 여기에 정박하였다. 큰 배들이 서로 인접하여 앞바다에 가득 차 있었고, 물화物貨가 폭주輻輳하고 사람이 많아서 이른바 ‘집집마다 금과 은이요, 사람마다 비단으로 수놓았도다’라는 말 그대로였으니,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고 황홀하게 하는 것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010_0713_b_01L栗島水路爲百餘里二十九日又以
010_0713_b_02L飛船傳致于西島水路爲百餘里
010_0713_b_03L島即浦村家家晒魚網是日即除日也
010_0713_b_04L萬死一生心魂驚悸遠托重溟又當
010_0713_b_05L除日舟中衆生孰不歎息雖死生流
010_0713_b_06L離之中一年大名日諸佛供不可關 [37]
010_0713_b_07L況又躬奉七百六十八佛漂海至此
010_0713_b_08L可供之乎以此意言于領來官人粮料
010_0713_b_09L外乞米則加給米一斗遂精舂作飯供
010_0713_b_10L于佛餘飯散供海神留一日戊寅正
010_0713_b_11L月初二日又以飛船傳致于肥前國長
010_0713_b_12L崎鎭水路爲四百五十里自大島浦
010_0713_b_13L至此水路兩山夾之而海水中貫或一
010_0713_b_14L邊依山或邊滂海茫無涯大抵所絲諸
010_0713_b_15L [38] 皆在濱海山谷之間潮水流通 [39]
010_0713_b_16L江人之徃來者皆乘船殆若陸地人乘
010_0713_b_17L馬徃來者大島浦發船時船頭有彩虹
010_0713_b_18L之瑞有若作門然船出其中屋崎浦藍
010_0713_b_19L崎浦唐白浦船行時皆有此瑞舟中
010_0713_b_20L人皆異之日本人尤異之長崎鎭
010_0713_b_21L都會也樓觀壯麗 [40] 櫛比唐人之船
010_0713_b_22L阿蘭 [41] 諸國之船皆泊於此舸艦相接
010_0713_b_23L彌滿前洋物貨輻輳人民衆多可謂
010_0713_b_24L家家金銀人人錦繡使人眩怳不可

010_0713_c_01L
이곳에는 조선관朝鮮館·당인관唐人館·아란관阿蘭館이 있었다. 조선관은 조선의 표류인이 머물러 있었고, 당인관은 중국 상선의 장사치들이 머물러 있었으며, 아란관은 아란국의 사람들이 와서 수자리하는 곳이었다. 표류한 승려와 속인 27명은 모두 여덟 곳의 조선관에 보내졌다. 본관의 고직庫直29)은 대마도 사람으로서 전례에 따라 와서 머물렀고, 대마도 관인官人 1명, 통사通事 2명, 훈도訓導 2명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간혹 표류하여 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항상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통사는 우리나라 말을 잘하는 데다가 관복을 입고 있어서 우리나라의 역관 같이 보였다. 그러나 훈도는 장교같이 보였다.
그런데 이곳 장기진長崎鎭에는 ‘장기長崎 도주島主’라고 칭하는 관대인官大人이 한 사람 있었는데, 표류한 사람들은 전례에 따라 가서 얼굴을 보여야 했다. 통사가 와서 말한 후 우리들을 인도하여 도주가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 이르자 지극히 높은 큰 대문이 있었고 하얀 담장이 빛나고 있었으며, 용마루의 수키와가 매우 높았다. 뿐만 아니라 그 건물의 규모와 배치가 우리나라 전주감영과 비교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문 안쪽에 사찰이 있었는데, 고승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였다. 다시 문을 세 곳 더 들어가 비로소 정당正堂에 이르렀다. 그곳에 한 명의 나이 어린 관인이 중앙에 앉아 있었는데 나이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고 용모는 지극히 사랑할 만하였다. 또 두 명의 관인이 있었는데 좌우에 앉아서 모시고 있었다. 통사는 두 사람의 시종 관인 뒤에 앉아서 우리들에게 앞에 나가 마주 앉도록 하였다. 나이 어린 관인이 묻는 바가 있으면 좌우의 두 관인과 좌우의 통사가 모두 합장하여 부복俯伏30)하며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차례 하여 접견의 예를 마치자 나이 어린 관인은 일어나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별당別堂이 있었으니 그가 평소에 거처하는 곳이었다. “저 나이 어린 관인은 누구입니까?”하고 묻자 통사가 대답하기를 “조선의 감사監司에 해당하는 관인으로서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죠)으로부터 왔는데 일 년마다 바뀝니다.”라고 하였다.

010_0713_c_01L勝言本鎭有朝鮮舘唐人舘阿蘭舘
010_0713_c_02L鮮舘則留接朝鮮漂流人唐人舘1)唐則
010_0713_c_03L留接唐船商賈阿蘭舘則阿蘭國人來
010_0713_c_04L戍處也漂流僧俗二十七人皆爲八 [42]
010_0713_c_05L於朝鮮舘本舘庫直乃對馬島人
010_0713_c_06L爲來住 [43] 對馬島官人一員通事二人
010_0713_c_07L訓導二人亦爲同住盖以我國人
010_0713_c_08L有漂到常令待令者也通事能我國言 [44]
010_0713_c_09L亦着官人服有若我國之譯官然訓導
010_0713_c_10L有若將校然本鎭有官大人 [45] 一員穪以
010_0713_c_11L長崎島主漂人例爲往見通事來言
010_0713_c_12L導吾輩以去至其處有大門極高大
010_0713_c_13L粉墻照耀甍桷穹崇其體勢鋪 [46]
010_0713_c_14L我國全州監營不啻倍篵入其 [47] 大門
010_0713_c_15L則門內有一寺刹即高僧所住處云
010_0713_c_16L三重門始至正堂有一年少官人
010_0713_c_17L中而坐年可二十許 [48] 貌極可愛
010_0713_c_18L有二官人左右侍坐 [49] 通事則又坐二官
010_0713_c_19L人之後 [50] 使吾輩進前對坐年少官人有
010_0713_c_20L [51] 則左右二官人左右通事 [52] 皆合
010_0713_c_21L掌俯伏而對如是數次接見禮畢
010_0713_c_22L少官人起入內內有別堂即其燕居處
010_0713_c_23L問年少官人誰某則通事曰 [53] [54]
010_0713_c_24L人如朝鮮國監司自大坂城出來而一
010_0713_c_25L「唐」疑衍字{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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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正堂은 십여 칸이 되는 것 같았는데, 방은 서너 칸이 되는 것 같았으며 마루는 일고여덟 칸이 되는 것 같았다. 기둥은 모두 검붉은 색으로 옻칠하여 거울처럼 사람을 비추고 있었으며, 벽은 금박지로 칠하여 좌우에서 서로 비추고 있었다. 대문마다 문을 지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통사들이 절을 하며 지나가는 것을 보니 문 지키는 자들은 미천한 부류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조선관에 이른 후부터 공급이 매우 풍부하여 매일 한 사람당 쌀 4승升 5합合과 반찬값으로 2냥兩 1전錢을 주었지만, 통사들이 다만 쌀 1승升 5합과 소금·간장·채소를 조금 살 수 있는 전錢을 지급할 뿐이었고, 속인들에게는 생선 1마리(尾)를 더 지급하였다. 그 나머지는 모두 투식偸食31)하였으므로 장기長崎 사람들이 모두 대마도 사람들을 도적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당인관은 조선관에 비해 더욱 크고 웅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여 접대할 수 있었다. 당선(唐船: 중국 선박) 8척이 매년 와서 정박하는데 한 척당 중국인 100여 명이 탄다. 그때에도 당선 8척이 와서 정박하였는데 4척은 먼저 돌아가고 4척이 머물러 있었다. 4척의 사람을 모두 합해서 473명이라고 하였다. 중국 관인 1명이 검칙檢飭으로서 그 역시 당인관에 머물러 있었다. 중국 상선이 와서 정박하면 싣고 있는 화물을 모두 당인관에 들여서 비단과 옥구슬 등 온갖 물건들을 모두 정비하였다.
당선唐船은 매우 높고 컸다. 그 길이는 거의 70여 파把,32) 높이는 거의 50파把였다. 배 안에 있는 방사房舍와 창호窓戶는 흡사 땅에 지은 집 같았다. 배의 위아래 전체에는 철정철갑鐵釘鐵甲으로 감쌌다. 또 갑선匣船을 만들었는데 두 배 사이에 유회油灰33)를 다지고 메워서 합하여 하나의 배를 이루고 있었다. 닻줄은 등교굴藤交屈로 만들었는데(나무 자를 사용했을 때 둘레가 2척 5촌이고 길이가 100여 파把가 되었다) 이러한 닻줄 네 갈래가 배의 사방을 묶고 있었으니 그 크기가 이와 같았다.

010_0714_a_01L年交通 [55] 正堂似爲十餘間而房則似
010_0714_a_02L爲三四間 [56] 廳則似爲七八間 [57] 棟柱皆髹
010_0714_a_03L漆光鑑人壁則塗以金薄紙左右相照
010_0714_a_04L耀每大門有守門者一人通事輩納拜
010_0714_a_05L而過守門者亦似非賤類矣到舘後
010_0714_a_06L供億頗豊厚每日每人米四升五合
010_0714_a_07L價錢二兩一錢而通事 [58] 只給米一升
010_0714_a_08L五合錢則鹽醬蔬萊略貿給俗人 [59] 則加
010_0714_a_09L給生魚一尾其餘皆爲偸食故長崎人
010_0714_a_10L皆言對馬島人無異盜賊云唐人舘則
010_0714_a_11L比朝鮮尤 [60] 宏傑可以容接多人盖唐船
010_0714_a_12L八隻每年來泊每隻唐人爲百餘名
010_0714_a_13L其時唐船八隻亦來泊而四隻先還
010_0714_a_14L隻姑留四隻船之人合爲四百七十三
010_0714_a_15L名云唐官人一員爲其檢飾亦爲來
010_0714_a_16L留舘中商船來泊則所 [61] 載物貨盡爲
010_0714_a_17L輸入舘中錦綺珠玉百物皆備唐船
010_0714_a_18L甚高大其長幾七十餘把高近五十把
010_0714_a_19L船中房舍窓戶宛如築居之室渾船上
010_0714_a_20L以銖釘銖甲 [62] 褁之又爲匣船而兩
010_0714_a_21L船之隙則以油灰築以塡之合爲一
010_0714_a_22L碇索以藤交屈爲之圓圍二尺五寸
010_0714_a_23L木尺長百餘 [63] 如是者爲四條係于
010_0714_a_24L船四方碇之大亦稱是駕海時日暮

010_0714_b_01L항해할 때에 날이 저물고 밤이 되어 나아갈 수 없으면 배의 사면에서 이 닻을 내려 배를 즉각 멈추게 하였는데 그 서 있는 것이 마치 큰 산악 같아서 비록 풍랑이 있더라도 요동하지 않았다. 배가 나아갈 때 역풍이 불어 배를 움직일 수가 없을 때에도 닻을 내려 배를 멈추었다. 배가 이와 같았으므로 해마다 일본에 들어와도 전복하거나 가라앉을 걱정이 없었다. 홍원선洪原船도 작은 배가 아니어서 돛대의 길이가 14파把쯤 된다. 그런데 시험 삼아 홍원선을 끌어다가 당선 옆에 두었더니 홍원선의 돛대 머리가 겨우 중국배의 중간쯤에 이르렀으니 그 배의 높고 크기가 이 정도였다. 그 배를 만드는 비용이 얼마인가 하고 물었더니, 은銀 2천 냥쯤 된다 하고, 당선은 왕래할 적에 반드시 길흉을 점치고 날짜를 택한 후에 비로소 배를 띄우는데 점을 치고 지불하는 비용(錢)이 천 냥이라고 하니, 사실의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대답이 이와 같았다. 당선은 왕래할 때에 반드시 제주도 앞쪽 바다 혹은 뒤쪽 바다를 지나는데 때로는 제주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였다.
아란관에 대해 장기長崎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란국은 일본의 남쪽에 있는데 백여 년 전에 일본이 가서 정벌하여 항복시켰다고 한다. 이로부터 아란이 조공하였고 그 나라 사람 백여 명이 항상 와서 장기진長崎鎭에 수자리한다고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눈이 깊고 붉은 눈동자를 가졌으며 콧마루가 오뚝하였다. 머리카락은 혹은 붉은색, 혹은 황색, 혹은 검은색, 혹은 회색이었고 그 길이는 불과 한 마디밖에 되지 않았으며 더부룩한 곱슬머리여서 마치 개털 같았다. 옷은 검은색으로 물들인 가죽으로 웃옷과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몸에 딸린 것은 남김없이 위아래에 모두 끈으로 묶었다. 머리 위에 쓴 것은 대광주리 같은 것으로서 흑공단黑貢緞34)을 입혔는데 용모가 흉측하여 마치 원숭이 같았다.
장기진長崎鎭에 머무른 지 3개월이 되었으므로 그곳 사람들과 친해진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중에는 때로 왕래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일본 풍속에 남녀 할 것 없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매우 흠모하여 평범한 뱃사람이라도 왜인들이 다투어 초대하고,

010_0714_b_01L夜黑不能行船則船四面下此碇
010_0714_b_02L即止而立若山岳雖有風浪不能搖
010_0714_b_03L行船時或有逆風無以行舟亦下
010_0714_b_04L碇止舟其舟如此故年年入日本
010_0714_b_05L無覆溺之患洪原船亦非小船帆竿長
010_0714_b_06L十四把矣試以此船曳置唐船之側
010_0714_b_07L則洪原船帆竿之頭僅至唐船之腹
010_0714_b_08L船之高大如此問其造船之價銀爲二
010_0714_b_09L千兩許唐船往來時必卜休咎又擇
010_0714_b_10L日始發船而卜價給錢千兩云其事 [64]
010_0714_b_11L雖未知其言則如此唐船往來時
010_0714_b_12L必絲 [65] 我國濟州前洋或後洋亦或逢見
010_0714_b_13L濟州人云矣阿蘭舘則長崎人言阿蘭
010_0714_b_14L國在於日本之南百餘年前日本往征
010_0714_b_15L而降之自此阿蘭入貢其國人百餘名
010_0714_b_16L常爲來戍於長崎鎭其人深目赤瞳
010_0714_b_17L梁斗起頭髮或赤 [66] 或黃或黑或灰色
010_0714_b_18L其長不過 [67] 一寸餘拳曲蒙茸 [68] 恰似狗毛
010_0714_b_19L所着則以黑染皮革爲衣爲袴貼身無
010_0714_b_20L上下皆以紐結之頭上所着若竹
010_0714_b_21L筐者而塗以黑貢緞容貌㐫恠殆若
010_0714_b_22L猴玃 [69] 之類也留長崎鎭凡爲三朔故
010_0714_b_23L其處人多親熟亦或往來而日本之俗
010_0714_b_24L毋論男女甚慕我國人雖尋常船人等

010_0714_c_01L그 집에 이르면 술과 음식을 권하여 다정하고 성의가 있어서 중국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모두 대답하기를 “조선은 부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그 나라가 우리나라를 흠모함이 예부터 이와 같았다고 한다. 남자들은 모두가 청명하고 빼어났으며 여자들도 그러해서 미모가 뛰어난 사람이 많았고 사람을 회피하지 않았다. 방사의 창호는 모두 지극히 화려하였으며 집기와 병풍도 매우 사치스러웠다. 그들의 풍속은 매우 정결하여 방이나 정원에는 티끌 하나 없었다. 귀천이나 상하 할 것 없이 매일 목욕을 하는데 심지어 목욕물을 가지고 판매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목욕이 성행함이 이와 같았다.
음식을 삶고 익히는 사람들은 작은 수건으로 입을 막아 침이 튀는 것을 막았다. 음식을 먹을 때는 손님과 주인뿐만 아니라 부부지간에도 상에 음식을 놓고 상 끝에 젓가락 한 저를 둔다. 그리고 각각 그릇 하나를 가지고 상 끝에 놓인 젓가락으로 자기 그릇에 음식물을 나누어 담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데, 그 먹는 젓가락으로는 음식물을 나누지 않았으니, 그들의 청결함이 이와 같았다. 음식을 먹을 때 자기 분량에 따라 그릇에 나누어 음식을 먹고, 먹던 음식을 남기지 않았다. 대체로 남은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먹이려 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남이 남긴 것을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모두 꿇어앉았는데 남녀노소가 모두 그러하였다. 비록 밥하는 계집종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꿇어앉아 불을 지폈다. 그러나 남녀 구별 없이 본국인 타국인 할 것 없이 함께 섞여 앉아도 조금도 부끄러워함이 없었으니, 그들이 서로 화간和奸35)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간통하고자 하였는데, 하천下賤의 여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는 곳에 와서 남녀의 성기(凹凸) 등을 말하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농담하는 것이 극도로 심하였다. 들으니, ‘왜녀倭女가 우리나라 사람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나라에서 지극히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왜녀들이 반드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자 한다.

010_0714_c_01L倭人競邀至家勸以酒食殷勤欵曲
010_0714_c_02L與待唐人 [70] 逈異問其委折皆曰朝鮮佛
010_0714_c_03L國也盖其國之慕我國自古如此云矣
010_0714_c_04L男子箇箇淸明秀發 [71] 女子亦然而多絕
010_0714_c_05L [72] 不爲避人房舍牕戶皆極華麗
010_0714_c_06L物屏帳又極奢侈其俗甚精潔房室
010_0714_c_07L [73] 無塵埃無論貴賤上下 [74] 日沐
010_0714_c_08L至有沐浴水業賣者其沐浴之盛如
010_0714_c_09L飮食烹飪之人以小巾緘其口
010_0714_c_10L防其咳唾食飮時不但賓主雖其夫
010_0714_c_11L妻之間置食物於床床傍又置一筯
010_0714_c_12L各執一器以其筯分其食物於所執器
010_0714_c_13L而始以 [75] 其所食之筯食之不以其所食
010_0714_c_14L之筯分其食物其潔如此食飮時
010_0714_c_15L其量以器分而食之不餘其所食之物
010_0714_c_16L盖不欲以其所餘食人人亦不食人之
010_0714_c_17L所餘平居皆跪坐男女老少皆然
010_0714_c_18L炊飯女之賤者必跪而炊之然男女無
010_0714_c_19L毋論本國人他國人與之雜坐
010_0714_c_20L少羞愧其相與和奸不言可和 [76] 尤欲
010_0714_c_21L與我國人相奸下賤女人則至於稠坐
010_0714_c_22L以凸凹等語戱我謔國人而極矣
010_0714_c_23L盖聞倭女通我國人生子則其國極爲
010_0714_c_24L貴重故倭女必欲通私其人 [77] 以此

010_0715_a_01L그 사람들은 이 때문에 혹시라도 우리나라 사람들과 정을 통하면 그 여자가 스스로 관부에 가서 말한다. 관부는 국왕에게 보고하고 출산할 달수를 계산하여 아이를 낳으면 관에서 돈을 준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모르겠다.
돌아올 때 부산진에 도착하자 관리가 “이번에 표류인 중에서 일본에 들어가 간통한 자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어떤 여자와 정을 통하였는데 그 여자가 관에 보고했다’는 내용이 도착했다. 이것이 만약 위의 감영에 보고되면 즉시 이물통간죄異物通奸罪36)로 다스려질 것이니 만 번 죽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을 어찌 차마 죽일 수 있겠는가. 아래서부터 미봉彌綘하여 그 말을 없애 버리겠다.”라고 하였다. 그 여자가 스스로 관에 보고한 것이 과연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 나라 법에 여자가 남자를 버리면 대죄大罪가 되지만, 절개를 잃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남편이 만약 여러 해 동안 멀리 나가게 되면 자기 처를 친구에게 맡기고 간다. 여러 해 후에 집에 돌아와 처가 그 사이에 아이를 낳았으면 본래의 남편이 그 아이를 자기 아들로 삼으며, 아이를 낳은 친아버지는 그 아이를 자식으로 삼지 못한다. 그러나 남편이 있는 여자가 간통을 하여 세 번 잡히면 간통한 남자를 죽음으로 논하고 그 여자는 벌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편을 잃으면 개가改嫁하지 않으며,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 의지하고, 딸이 있으면 사위에게 의지한다. 자녀가 없으면 삭발하여 비구니가 된다.
이곳 본도本島는 중국 물건과 남쪽 오랑캐 물건, 그리고 왜국의 금은 등을 유통하고 교역하는 곳이므로 매우 부유하고 번화하여 다른 도島와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런데 본도本島가 이러하다면 대판성(大坂城, 오사카죠)을 짐작할 수 있으며 왜국倭國이 매우 부유한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본도의 인구와 호수가 얼마 정도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대략 계산해 보면 거의 1만여 호를 넘는 것 같다. 매일같이 시장은 북적북적하고 시끄러운 모습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비록 ‘소매를 치켜들면 휘장이 되고 땀방울을 뿌리면 비가 된다’37)라고 하더라도 지나친 말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010_0715_a_01L得通我國人則其女自言於其官府
010_0715_a_02L [78] 轉聞于其國王計其朔數生子則自
010_0715_a_03L官付料云未知何故也還渡時到釜
010_0715_a_04L山鎭則鎭吏曰今番漂人入日本
010_0715_a_05L通奸者故自日本國以某人與某女相
010_0715_a_06L其女告官之意移文來到矣此若
010_0715_a_07L轉報上營則異物通奸即是一律
010_0715_a_08L死生還之人何忍殺之乎自下彌綘拔
010_0715_a_09L其語云云其女之自言告官果爲不虛
010_0715_a_10L其國法女子棄夫則爲大罪失節
010_0715_a_11L不爲罪夫或絲 [79] 年遠出則托其妻於其
010_0715_a_12L友而行 [80] 年還家而其妻其間生子
010_0715_a_13L則其夫取以爲己子其兒所生之父
010_0715_a_14L以爲己子然有夫之女人或奸之
010_0715_a_15L次見捉則其人論死其女則不罪
010_0715_a_16L子喪其夫則不改嫁有子則依其子
010_0715_a_17L有女則依其婿子女俱無則削髮爲尼
010_0715_a_18L本島即唐貨蠻貨倭國金銀物貨灌輸交
010_0715_a_19L易之所故其殷富繁華不與他島比
010_0715_a_20L而本島如此則大坂城可以推知倭國
010_0715_a_21L之殷富又可以推知也本島人戶多少
010_0715_a_22L [81] 不的知而略綽計之則似過萬餘戶
010_0715_a_23L每日市上擾擾紛紛不見涯畔雖擧
010_0715_a_24L袂成帷揮汗成雨未爲過也甲肆則

010_0715_b_01L갑의 가게에는 금은주옥이 찬란하게 빛났으며, 을의 가게에는 금으로 수놓은 비단이 향기를 무성하게 날리고 있었다. 술집과 떡 가게가 동쪽과 서쪽 여기저기에 있었고, 물고기와 자라는 (너무 흔해서) 값을 거의 따지지 않았으며, 채소는 겨울인데도 봄인 것처럼 시장에 있었다. 공가公家의 자식들은 땅을 밟으며 노래를 부르고 여자 아이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이루었으며 거문고를 타고 생황을 부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서경(西京: 평양)을 최고의 번화가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비교했을 때 잘은 모르겠지만 몇 단계 정도 내려가는 것 같고, 양양襄陽의 대제大堤나 강남의 항주杭州38)라면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창녀집이 당인관唐人舘 옆에 있었는데 높은 누각에 금으로 벽을 칠하여 지극히 휘황찬란했다. 창녀들은 30여 명이나 되는 것 같았다. 빛나는 옷들은 눈을 아찔하게 했고 향기는 날아서 코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구름 속의 선녀 같았지만 행실은 개나 돼지 같았다. 그 나라 사람들의 음란한 행동은 놓아두더라도 창녀들은 당인관에 날마다 갔으며 심지어 아란관에 가서 숙박할 정도로 극심하였다.
조선관 뒤에 한 왜인의 집이 있었는데 가까웠기 때문에 자주 그 집에 갔다. 그 왜인은 귀족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중인에 불과하며 재산도 부자로 이름난 사람이 아닌데도 저택이 우리나라의 관부에 못지않고 화려함은 오히려 지나쳤다.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는 잘 모르지만 외면적으로 보았을 때 의복과 음식이 지극히 풍부하였다. 그들 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기둥에 옻칠을 하였고 벽을 금으로 칠하여 햇빛에 사람이 반사되었다. 방안과 방밖은 모두 흰 자리를 깔았고 자리의 연결 부분은 청색 포로 선을 둘렀다. 자리 밑바닥은 볏짚을 고르게 정리하여 두껍게 깔아서 앉고 눕기에 편하였으며 또한 냉기와 습기를 방지하였다. 항상 향을 태워 향냄새가 바깥까지 흘러 나왔으며, 완호품玩好品들과 휘장 등의 도구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부부는 같은 방에서 함께 거처하지만 방 가운데에 좌우를 구분하는 여닫이문이 있어서 각각 거처한다. 그러나 만약 그 여닫이문을 열면 통하여 한 방이 된다. 그 지나치게 사치함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쟁기질하는 농부나 고용되어 일하는 여자라도

010_0715_b_01L金銀珠玉光彩璀璨乙肆則錦繡綾羅
010_0715_b_02L香飛蓊鬰酒家餅市東西錯落魚鱉
010_0715_b_03L殆不論錢菜蔬雖冬若春遊間 [82] 公子踏
010_0715_b_04L女兒處處成羣鼓瑟吹笙日夜不
010_0715_b_05L我國西京最稱繁華而比之於此
010_0715_b_06L不和 [83] 其落下幾層若襄陽之大堤江南
010_0715_b_07L之杭州庶或似之耶娼家在於唐人舘
010_0715_b_08L之傍高樓金壁亦極輝煌娼女似爲
010_0715_b_09L數三十人炫服眩眼香氣觸鼻望若
010_0715_b_10L雲中仙女而行則狗彘 [84] 國行淫
010_0715_b_11L無論唐人舘逐日曳屣甚至於徃宿於
010_0715_b_12L阿蘭舘而極矣舘後有一倭人家以其
010_0715_b_13L隣近故時徃其家其倭非貴族不過
010_0715_b_14L如我國之中人其家產亦非以富稱名
010_0715_b_15L而第宅不下於我國之官府而華美
010_0715_b_16L則過之財產雖未詳其多少而外面觀
010_0715_b_17L衣服飮食極爲豊厚入其室則漆
010_0715_b_18L柱金壁映日照人房內房外皆鋪白
010_0715_b_19L席縫則緣以靑布席底則厚鋪禾藁
010_0715_b_20L整齋平均以便坐臥亦防冷濕常焚
010_0715_b_21L香氣聞外 [85] 玩好之屬帳帟之具
010_0715_b_22L可殫記夫妻同處一房而房中左右間
010_0715_b_23L各爲居處若闢 [86] 其間隔則通爲一
010_0715_b_24L其侈靡如此雖耒耟 [87] 之農夫傭作

010_0715_c_01L의복이 찬란하였다. 심지어 거지들도 매우 깔끔(鮮明)하여 그 거실을 보니 그릇들이 정결하였고 게다가 금은전과 곡식이 있어서 우리나라의 넉넉한 집 같았는데도 오히려 때때로 나와서 구걸하였다.

❖ 일본의 부자들은 쌀이나 전錢이 많음을 가지고 부자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황금창고와 백금창고가 몇 칸이냐에 따라 비로소 부자로 인정받았다. 금과 은이 그 창고에 얼마나 많이 채워져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다만 그 금과 은이 창고에 있기 때문에 금창고 은창고라고 부를 것이다. 서해도(西海道, 사카이도)에 있는 9개의 나라에 각 나라마다 한두 명의 부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들의 크게 부유함이 이와 같고 쌀과 전錢은 비교하여 헤아리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거지 집에 갔을 때 그러한 점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거지 집도 쌀과 전錢이 등한시되어 방 밖에까지 나열되어 있었던 것이니, 도둑이 거의 없음을 알게 해 주며 또한 남는 쌀과 전錢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거지 집에서 쌀과 전錢을 이처럼 등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염의 각 집들도 이와 같았다. 방실房室의 창에는 원래 문고리가 없었고 우리나라의 영창映窓 같은 것으로 창문을 만들어 햇빛을 받아들일 뿐이었지만, 은창고의 경우는 자물쇠로 채웠다. 장기長崎 사람들은 항상 말하기를, “천하의 모든 나라 중에서 금은이 많기로는 일본보다 많은 곳이 없다. 금은이 가장 많기 때문에 매번 다른 나라의 침략을 걱정한다.”라고 하였다. 대개 금산金山, 은산銀山, 동산銅山이 곳곳에 있는 것이 우리나라에 철을 생산하는 곳이 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부자들이 모두 금창고 은창고를 가지고 있었고 당선唐船 만박蠻舶39)이 이 때문에 폭주輻輳해 왔던 것이다.

❖ 바다에 있는 어떤 섬을 ‘도적도盜賊島’라고 하였다. 일반 사람이 도둑질을 하다가 세 번째에 적발되면 그 처자와 권속까지 그 섬에 유배 보내고 배로 왕래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도둑이 한 번 섬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오지 못하고,

010_0715_c_01L之女子衣服粲粲至於乞人亦極鮮
010_0715_c_02L見其居室則器皿精潔又有金銀
010_0715_c_03L錢穀在我國當爲饒戶猶時時出而
010_0715_c_04L乞之

010_0715_c_05L
[88] 本之富人不以米與錢之多許其富
010_0715_c_06L惟以黃金庫白金庫幾間始許以富
010_0715_c_07L金與銀之充其庫未知其多少而惟其
010_0715_c_08L金與銀之在其庫故謂之金庫銀庫矣
010_0715_c_09L西海道有九箇國每一國各有數 [89]
010_0715_c_10L人家徃去時見之則其家亦有米與錢
010_0715_c_11L之等閑列置於房外者盜賊之絕少 [90]
010_0715_c_12L亦可以知其米餘錢之不甚關重
010_0715_c_13L但乞人家錢米之如此等閑閭閻各家
010_0715_c_14L亦皆如此房室戶 [91] 元無窓 [92] 扄鐍以如我
010_0715_c_15L國之映窓者爲窓取明而已至於銀庫
010_0715_c_16L [93] 鎻鑰之長崎人常言曰天下萬國中
010_0715_c_17L金銀之最多無如日本以其金銀之最
010_0715_c_18L多故每慮 [94] 他國之來侵盖金山銀山銅
010_0715_c_19L [95] 處處有之若有我國之産鐵故
010_0715_c_20L國富人皆有金庫銀庫唐船蠻舶 [96]
010_0715_c_21L以輻輳也

010_0715_c_22L
海中有島 [97] 謂之盜賊島凡人竊盜
010_0715_c_23L次見捉 [98] 則並其妻眷定配於其島
010_0715_c_24L令舟船徃來故盜一入其島更不得出

010_0716_a_01L여러 도둑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기 때문에 ‘도적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항에는 도둑이 적다고 하였다.

❖ 땅의 기온이 매우 따뜻하여 겨울부터 봄까지 눈을 보지 못하였다. 12월에도 죽순이 돋아나 캐서 먹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꽃과 나무가 곳곳에 피어났는데 매화가 매우 많았다. 양지 바른 곳은 풀색이 푸릇푸릇하여 흡사 2, 3월 같았다. 감자甘蔗는 매우 흔해서 우리나라의 무 뿌리(菁根)같이 많았다. 섬사람들이 자주 쪄서 보내왔는데 많을 때는 거의 3두斗나 되었다. 감귤(柑子)은 달고 향기가 있었으며 상쾌하고 약간 신맛이 있어서 정말로 신선神仙의 맛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감귤은 왜인들이 먹지 않았는데 그것의 신맛 때문에 즙을 짜서 초醋를 만들었으니 진짜 감귤은 애초에 우리나라에 보내지 않은 것이다.

❖ 왜인은 우리나라를 매우 흠모하였기 때문에 제주 사람이 혹시 표류해 오면 그 털모자(氊笠)와 엉성하게 만든 사발을 모두 귀중한 물건으로 보관해 두었다. 작년에 정의 현감旌義縣監이 체귀遞歸40)하다가 표류하여 왔을 때41) 이곳에 도착하여 일곱 달 동안 조선관에 머물렀는데 그가 쓴 붓글씨를 가지고 왜인들이 모두 족자簇子를 만들고 비단으로 장식하였다.

❖ 방역方域에 대해 말하겠다. 일본은 모두 8도道 66주州 628군郡이었는데 축전(筑前, 치쿠젠)과 비전(肥前, 히젠)은 서해도이다. 서해도는 모두 9주인데 축전주筑前州가 20군을 관할하고 비전주肥前州가 12군을 관할하여 주州가 각각 하나의 나라였다. 서해도는 남북으로는 12일 거리이고 동서로는 7~8일 거리이다. 그렇다면 길이는 1천2백 리이고 넓이는 7~8백 리이다. 한 도道의 크기가 이와 같으니 그 나머지 7도는 이것을 기준으로 더하고 빼면 일본의 국토 크기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010_0716_a_01L諸盜仍成村以居名之以盜賊島以此
010_0716_a_02L閭巷間竊盜鮮小 [99] 云矣

010_0716_a_03L
地氣甚暖經冬歷春不見雪臘月竹
010_0716_a_04L笋挺出採而食之不知名之花木
010_0716_a_05L處爛開而梅花極多向陽之地則莫 [100]
010_0716_a_06L色靑靑恰如二三月甘蔗至賊 [101] 如我國
010_0716_a_07L之菁根島人時時蒸饋其多幾數三斗
010_0716_a_08L柑子則甘香而爽微有酸意眞仙味也
010_0716_a_09L至於我國出來之柑子倭人之所不食
010_0716_a_10L而以其味酸故瀝之作醋用眞柑子則
010_0716_a_11L初不出送我國

010_0716_a_12L
倭人甚慕我國故濟州人或有漂到者
010_0716_a_13L則其所 [102] 着氊笠與麁劣砂椀亦皆以貴
010_0716_a_14L物藏置年前旌義縣監遞歸時漂到
010_0716_a_15L于此七朔留舘而其筆翰倭人皆造
010_0716_a_16L簇子以錦繡飾之

010_0716_a_17L
方域則日本凡八道六十六州六百二十
010_0716_a_18L八郡而筑前肥 [103] 即西海道也西海
010_0716_a_19L凡九州而筑前州管二十郡肥前
010_0716_a_20L州管十二郡州各名一國
西海道南北
010_0716_a_21L十二日程東西七八日程然則長爲一
010_0716_a_22L千二百里廣爲七八百里一道之幅圓
010_0716_a_23L之大如 [104] 其餘七道當準此而增損
010_0716_a_24L則日本之方域可以推知矣

010_0716_b_01L
❖ 공역과 부역(貢賦)은 원래 신역身役과 호역戶役이 없고 다만 토지에서 쌀을 세금으로 거두어들였는데 그 거두어들인 세금의 절반 정도를 국가의 경비로 사용하였다. 만약 국가의 경비가 부족하면 전錢을 주조하여 비용에 충당하였고 백성들에게 침범하여 징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부유하여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한 나라’라고 할 만했다. 왜인들에게 “이곳 사람들도 황제에게 납공納貢하는가?”라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납공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그러면 황제는 무엇으로 생활하는가?”라고 물으니, “황제국이 자체적으로 소유한 토지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비용을 쓴다. 혹시 부족하면 역시 전錢을 주조하여 비용으로 쓴다.”라고 대답하였다. 대개 그 나라의 법에 토지가 넓으면 거두는 쌀이 많아서 대국大國이 되고, 토지가 좁으면 거두는 쌀이 적어서 소국小國이 된다. 여러 나라들이 비록 세금을 납부하지 않지만 해가 바뀔 때면 관례에 따라 대판성大坂城에 가서 황제를 알현한다고 한다. 왜의 황제국에는 납공納貢하지 않지만 관백關白이 있는 곳에는 각 나라에서 반드시 납공納貢을 한다고 하는데, 함께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가령 우리나라의 지극히 변방에 사는 천인과 같은 사람에 불과해서 아마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 같다.

❖ 군병軍兵은 여러 집을 편대로 하여 부대를 삼았다. 그런데 무예를 익히지는 않고 항오行伍42)를 훈련시켰다. 비록 활과 화살이 있었지만 활 길이가 거의 1장丈이나 되었고 또 각궁角弓이 아니기 때문에 활의 힘이 약하여 멀리 가지 못하였다. 창검鎗劒은 길이가 거의 1장 반이었다. 총은 백발백중이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쏘는 것 같았다. 예전에 들으니, 다이라노 히데요시(平秀吉, 풍신수길을 말함) 당시는 농민들에게 경작하도록 독촉하면서 낱낱이 헤아려서 취하여 병사를 길렀는데 병사들은 용감하고 건강하며 재주가 있는 자들을 취하였고 모집하여 부대로 삼았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금의 절반 정도를 사용하고, 군병은 모집하지 않고 여러 집을 편대로 하여 부대를 삼으므로 예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장기도長崎島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상인들이므로 다만 돈(錢貨)만 알고 문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010_0716_b_01L
貢賦則元無身役戶役惟收土地之稅
010_0716_b_02L而其收稅殆近半分以此爲國用
010_0716_b_03L用或不足則鑄錢以繼用不侵微 [105] 於百
010_0716_b_04L姓故百姓冨饒可謂家給人足之國矣
010_0716_b_05L問於倭人曰此處人亦爲納貢於皇帝
010_0716_b_06L曰不納也然則皇國用何帝以辨
010_0716_b_07L [106] 曰皇帝國自有土地之稅而用或不
010_0716_b_08L則亦鑄錢以用之蓋其國之法
010_0716_b_09L地廣者收米多而爲大國土地小者
010_0716_b_10L收米小而爲小國諸國 [107] 雖不納貢賦
010_0716_b_11L歲改則例往大坂城朝覲云矣 [108] 倭皇國
010_0716_b_12L則雖或不納貢關白處則自各國必有
010_0716_b_13L納貢而與語人不過如我國極遵 [109] 之賤
010_0716_b_14L或不能詳知也

010_0716_b_15L
軍兵則家家編以爲兵然亦不肄習武
010_0716_b_16L [110] 練行伍雖有弓矢弓長幾一丈 [111]
010_0716_b_17L又非角弓故弓力軟弱不能及遠
010_0716_b_18L劒則幾長一丈半銃則百發百中幾乎
010_0716_b_19L人人能之曾聞平秀吉時 [112] 督農民
010_0716_b_20L使之耕作而盡數取之以爲養兵 [113]
010_0716_b_21L兵則取其勇健藝才 [114] 募以爲兵云矣
010_0716_b_22L今土地所收幾爲半分運兵則不爲募
010_0716_b_23L家家編以爲兵與前有異長崎島
010_0716_b_24L [115] 居人皆商賈只知錢貨不知文獻

010_0716_c_01L자세히 알 길이 없었으니, 매우 안타까웠다.

❖ 학문은 황성皇城 등의 곳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경유했던 여러 곳을 논한다면 어느 한 곳도 학당이 없었고 어느 한 사람도 독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필담할 때에 겨우 의사를 통할 정도였다. 대개 그 풍속에 대관大官과 소관小官이 모두 세습되었고, 또 과거가 없어서 학문으로 입신양명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므로 학문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나 옥기포(屋崎浦, 야자키우라)의 관인이 정황을 물을 때 글과 필체 모두가 볼품이 있었다. 하지만 깊은 외딴 곳에 사는 왜인들은 아마 이곳의 실력만 못할 것이다. 대저 귀한 사람은 귀한 신분을 물려주고 천한 사람은 천한 신분을 물려준다. 고관들이 모두 세습할 뿐만 아니라 잡직雜職 천직賤職들도 세습되었고 농공상고農工商賈도 직업이 세습되었다. 그러므로 백공百工들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지극히 정묘하였고, 검 하나의 값이 은銀 천 냥에 이르는 것도 많이 있었다.

❖ 불법佛法에 대해 말하겠다. 집집마다 하나의 작은 부처님을 소조塑造하여 두고 음식을 먹을 때 반드시 부처님께 제祭를 올린다. 공후경상公侯卿相의 아들 중에 아우는 모두 승려가 된다. 지금 왜국의 황제 아우도 승려가 되었으니 그 존숭함이 이와 같았다. 또 재가在家의 승려들이 많았는데 부마駙馬43)가 된 자도 있었다. 그런데 승려들은 다만 법화경만을 염송할 뿐이었고, 다른 경전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44) 또 참선도 알지 못했으며, 수륙불사水陸佛事45)도 알지 못했으니 ‘그 이름만 있고 실제는 없어졌다’고 할 만하였다. 그 복식은 장삼과 가사를 입고 있어서 우리나라와 같았지만 장삼은 모두 흑색이고 주사朱沙가사46)는 붉은 공단貢緞이었는데 때로는 청색 공단이었다. 머리 위에는 쓰는 것이 없어서 머리를 빛내며 다녔는데 비가 내리거나 햇볕이 내리쬘 때에는 작은 일산日傘을 집어들 뿐이었다.

❖ 옥우屋宇는 상하 2층에서 거주하므로 거의 모두가 높고 큰 대들보가 5량梁이나 7량이다. 5량이나 7량 내에 편의에 따라 간격을 두어 방을 만들거나 마루를 만들거나 창고를 만든다.

010_0716_c_01L無以詳探 [116] 嘆甚嘆

010_0716_c_02L
文學則皇城等處未知爲如何而以余
010_0716_c_03L [117] 經各處論之無一處學堂無一人讀
010_0716_c_04L筆談之時僅僅通意盖其俗大官
010_0716_c_05L小官皆爲世襲又無科擧不以文學
010_0716_c_06L發身故其不貴文學盖由於此
010_0716_c_07L屋崎浦官人之問情文與筆皆成樣
010_0716_c_08L [118] 之倭似不如此島之貿也 [119] 大抵貴以
010_0716_c_09L傳貴賤以傳賤不但高官皆世襲
010_0716_c_10L職賤職亦爲世襲
以至於農工商賈
010_0716_c_11L亦爲世業故百工之於物極精妙一劒
010_0716_c_12L之價銀至千兩者多有之

010_0716_c_13L
佛法則家家塑一少佛飮食必祭公侯
010_0716_c_14L卿相之子若弟皆爲僧今倭皇之弟
010_0716_c_15L亦方爲僧其尊崇如此又多在家僧
010_0716_c_16L亦有爲駙馬者然其僧只誦法華經而
010_0716_c_17L他經則皆不解 [120] 又亦不解 [121] 叅禪
010_0716_c_18L不解水陸佛事 [122] 可謂有其名而無其實
010_0716_c_19L其服則亦着長衫袈裟如我國而長
010_0716_c_20L衫皆黑 □ [123] 沙袈裟紅貢緞或靑貢緞
010_0716_c_21L頭上則無所 [124] 光頭 [125] 行而或雨或日熱
010_0716_c_22L則手執小傘而已

010_0716_c_23L
屋宇則上下二層而居之故擧皆高大
010_0716_c_24L五樑或七樑五樑七樑之內從更間隔

010_0717_a_01L지붕처마는 구리 통으로 받쳐서 빗물을 받아 한곳에 모았다가 쏟아내어 처마에 물이 어지럽게 흐르지 않도록 하였는데, 집집마다 이와 같이 하였다. 담장은 돌로 쌓아서 그 사이에 회칠을 하였고, 숫돌처럼 다듬었다. 지붕 기와는 우리나라의 기와와 같았다. 어떤 집은 판목으로 덮는 경우도 있었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산골짜기에 있는 나무기와집 같았다. 또 풀로 지붕을 이은 집도 있었다. 식기 그릇은 채색한 자기磁器였고 금은이나 놋으로 만든 것은 없었다. 손님이 오면 먼저 차를 권하고 다음에 과일과 떡 등을 내놓으며 차례차례 내놓는데 많이 내놓지는 않으며 양에 따를 뿐이다. 밥은 우리나라의 밥과 같았고 쌀은 도미稻米였다. 술은 소주가 없고 청주만 있었는데, 술을 빚어서 1년이 되어야 비로소 익었으며 맛이 매우 좋았다.

❖ 매일 해가 뜨기 전에 어떤 마을 사람이 강변에 나가서 한 사발의 물을 떠서 손을 씻고 사방의 하늘을 향해 절을 하였는데 매일 이와 같이 하였다.

❖ 대화할 때에 ‘일본’이라고 말하면 좋아하고 ‘왜倭’라고 말하면 싫어하였다.

❖ 웃어른을 만날 때는 꿇어앉아 합장하고 몸과 머리를 숙여서 지극한 공경의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혹시 길에서 만나면 합장하고 머리를 숙일 뿐이었다.

❖ 비가 내릴 때에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기름 바른 우산(塗油傘)을 들었으며 해가 내리쬘 때에는 모두 색깔이 다른 작은 양산을 들고 다녔다. 시장에 가는 사람은 원래 물건을 짊어지지 않고 긴 장대의 양 끝에 물건을 걸고 그 장대를 어깨에 멨다. 관리가 출타할 때에는 조그만 교자를 탔는데 우리나라의 쌍교雙轎와 같은 모양이었다.

❖ 왜국 전錢은 유통하는 법에 96엽葉을 1냥兩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 크기는 당전唐錢 같았다. ‘관영통보寛永通寶’라고 새긴 왜전 5냥이 우리나라의 1냥에 해당했다.

❖ 모든 사상死喪은 매장埋葬할 뿐 묏자리를 살피지 않았다. 오직 사찰 근처의 들판에 가서 모두 매장하였는데 이곳저곳이 북망산北邙山47) 같았고 작은 돌 하나를 세우고 성명을 적어서 표시하였다.

010_0717_a_01L或爲房爲廳爲庫屋簷則承以銅筒
010_0717_a_02L雨水會注于一處不使簷水亂流
010_0717_a_03L家如此墻垣則石築而灰粉塗其間
010_0717_a_04L其削如砥盖屋之瓦如我國瓦或有
010_0717_a_05L以板木盖之如我國峽中之木瓦家者
010_0717_a_06L亦有以草盖之者飮器 [126] 皿則彩盡磁器
010_0717_a_07L無金銀鍮器凡待客先勸茶復以果
010_0717_a_08L品餅屬次次進之亦不多給惟隨量
010_0717_a_09L而已飯則如我國飯米則稻米酒則
010_0717_a_10L無酒 [127] 惟淸酒而釀一年始熟味甚佳
010_0717_a_11L每日日未出時一村人出往江邊酌水
010_0717_a_12L一椀以手灑之四面拜天日日如此
010_0717_a_13L言語時稱以日本則喜稱以倭則不悅
010_0717_a_14L見尊者跪坐合手俯身俯首極其敬
010_0717_a_15L或路上相逢則合手俛首而已

010_0717_a_16L
雨時則無論男女皆手執塗油傘
010_0717_a_17L1) [1] 則皆執各色小傘赴市者元不負
010_0717_a_18L以掛 [128] 于長竿兩端擔之于肩官人
010_0717_a_19L出行時則乘小轎如我國之雙轎樣
010_0717_a_20L二人前後擔之倭國錢通行之法以九
010_0717_a_21L十六葉爲一兩其大小如唐錢鐫以寛
010_0717_a_22L永通寶倭錢五兩當我國錢一兩

010_0717_a_23L
凡死喪埋葬無地術惟就寺刹近處平
010_0717_a_24L皆埋葬累累如北邙 [129] 竪一小石

010_0717_b_01L신주神主는 그 사찰에 두고 제사는 묘에서만 할 뿐이었다.

❖ 시장은 세금이 없었으나 장기長崎 도주가 매년 교체해서 돌아갈 때에는 시전상인들이 각각 전별금을 보냈다. 시전상인은 거의 5~6천 명이었다.

❖ 말과 소는 있었지만 노새(騾)와 가라말(驪)은 없었다. 매년 아란국에서 코끼리 한 마리를 바쳤다.

❖ 고래가 근해에 들어오면 비선飛船 20척이 출동하여 마른 새끼줄로 만든 어망 천여 파把로 먼저 주위를 둘러치고 비선이 잇따라 빙 둘러싼다. 한 비선이 긴 갈고리 창을 바로 앞에서 찌른 후에 급히 노를 저어 가면 다른 비선이 또 이와 같이 하여 20척의 비선이 돌아가면서 이렇게 한다. 일식경(一食頃 : 약 30분 정도)쯤 후에 고래가 죽어서 수면 위로 떠오르면 20척의 비선에 묶어서 끌고 돌아온다. 큰 고래는 그 길이가 40파가 되고 작은 고래도 37~8파인데, 고래가 있으면 그때마다 잡는다. 일본 근해에는 원래 고래가 없고 모두 우리나라 근해에 몰려 있는데 일본인이 거기까지 가서 잡아온다고 한다.

❖ 장기도長崎島에 이르러 관례에 따라 3개월 15일을 머무른 후 비로소 귀국이 허락되었다. 일본에서 정한 한 관리가 배에 타서 양식을 실었고, 또 훈도訓導 4인을 정하였는데 모두 대마도 사람이었다. 사공 2인이 우리 배에 타서 배를 몰았다. 4월 14일에 배를 출발시켜 도마치道馬峙에 도착하였는데 물길 10리였다. 4일 머문 후 배를 출발시켜 복전포(福田浦, 후쿠데우라)에 도착하였는데 물길 40리였다. 2일 머문 후 배를 출발시켜 평호도(平戶島, 히라도시마)에 도착하였는데 물길 300리였다. 다음날 풍본도豊本島 일명 일기도(一崎島, 잇키시마)에 도착하였는데 물길 500리였다. 11일간 머물렀는데 여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역학譯學이 통신사通信使로 대마도에 와서 정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48) 5월 3일에 배를 출발시켜

010_0717_b_01L其姓名以表之神主則置于其寺祭則
010_0717_b_02L惟祭于墓而已

010_0717_b_03L
場市無稅而長崎島主每年遞歸時
010_0717_b_04L則市㕓諸人各以寶貨餞 [130] 㕓人近五
010_0717_b_05L六千

010_0717_b_06L
有馬牛無騾驢每年阿蘭國貢象一

010_0717_b_07L
鯨魚或入近洋則飛船二十隻出去
010_0717_b_08L藁索作網千餘把先爲周圍飛船從以
010_0717_b_09L環圍一飛船以長鈎鎗直前叉之
010_0717_b_10L [131] 急搖櫓去之他飛船又如此二十隻
010_0717_b_11L輪回如此一食頃許鯨死浮水面
010_0717_b_12L則係之綆二十隻船曳而歸鯨之大
010_0717_b_13L其長四十把小者亦三十七八把
010_0717_b_14L有則輒捉故日本近洋元無鯨皆聚
010_0717_b_15L於我國近洋日本人又往而捉之云

010_0717_b_16L
到長崎島 [132] 留三朔十 [133] 五日後始許還
010_0717_b_17L自日本定一官人騎船載粮饌
010_0717_b_18L定訓導四人皆馬島人 [134] 沙工二人 [135]
010_0717_b_19L入我國船主張行船四月十四日發船
010_0717_b_20L到道馬峙水路十里留四日後發船
010_0717_b_21L到福田浦水路四十里留二日後發船
010_0717_b_22L到平戶島水路三百2)翌日到豊本
010_0717_b_23L一名一崎島水路五百里留十一日
010_0717_b_24L到此始聞我國對 [2] 3)島消息五月初三

010_0717_c_01L대마도에 도착했는데 물길 480리였다. 대마도 풍속은 지극히 교묘하게 속여서 일본과 달랐다. 표류한 사람의 옷과 음식은 본래 일본이 공급해 준 것인데 이것을 속여서 탈취하였으니 장기長崎 사람들이 대마도 사람들을 도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대개 이러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학일행譯學一行49)이 4월 그믐날 이후 대마도에 정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본 것은 만사일생으로 살아난 후이니 그 기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마도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어가 능하였다. 우리를 보러 온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도 조선인이다.”라고 하였다. 평소의 언어는 조선어와 일본어였으며, 한번도 일본을 본국이라 말한 적이 없었다. 대체로 일본과 다르며 일본의 순신純臣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도착한 후에 동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대마도는 본래 우리 땅이며 그 사람들도 우리나라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마도 사람들이 와서 ‘나도 조선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대마도 사람들이 몰래 말하기를 “매년 조선에서 보내오는 미포米包와 잡물雜物을 대마도주가 절반을 절도하였다. 살마(薩摩, 사츠마) 도주島主가 관백關白에게 이 사실을 고하였지만 대마도주가 도리어 살마薩摩 도주를 무고하였고, 이에 살마薩摩 도주가 죽임을 당하였다. 살마薩摩 도주의 아들이 이어서 말했다가 또 죽임을 당하였다. 그 장손이 계승하여 살마薩摩 도주가 되었고, 그 동생이 거지처럼 행장을 차려 대판성에 들어가서 그 아버지와 조부의 억울한 죽음과 대마도의 전후 거짓과 은폐의 정황을 자세하게 진술하였다. 이 때문에 대마도주가 죽임을 당하였고 살마薩摩 도주의 어린 자식이 대마도주가 되었는데 지금 18세이다.”라고 하였다.

010_0717_c_01L日發船到對馬島水路四百八十里
010_0717_c_02L馬島風俗極巧詐與日本有異漂人衣
010_0717_c_03L [136] 之自日本造給者欺而奪之長崎人
010_0717_c_04L以馬島人謂之盜賊盖以有如此事故
010_0717_c_05L [137] 四月晦日已來泊本4)島故得見
010_0717_c_06L我國人萬死一生之餘其喜可知
010_0717_c_07L島人多能朝鮮語來見多 [138] 吾亦朝鮮
010_0717_c_08L平居言語曰朝鮮曰日本未甞 [139]
010_0717_c_09L日本謂其本國盖與日本有異非日本
010_0717_c_10L之純臣也到我國後聞東萊人言
010_0717_c_11L馬島本我國地其人亦我國人子孫云
010_0717_c_12L如是也故所以馬島人來言我亦朝鮮
010_0717_c_13L人云也

010_0717_c_14L
馬島人潜言曰每年朝鮮國所送米包
010_0717_c_15L及雜物對馬島主折半竊盜薩摩島主
010_0717_c_16L告于關白對馬島主反陷以誣告薩摩
010_0717_c_17L島主因此被誅其主 [140] 之子繼言又被
010_0717_c_18L其長孫繼爲薩摩島主其弟裝行乞 [141]
010_0717_c_19L已入大坂城細陳其父其祖寃死
010_0717_c_20L及對馬島前後欺隱事狀因此對馬島
010_0717_c_21L主被誅薩摩島主之小子爲馬島主
010_0717_c_22L年今十八云矣

010_0717_c_23L「執」疑「熱」{編}「黑」疑「里」{編}底本頭注
010_0717_c_24L曰「聞我國譯學以通信事來泊對馬島」{編}

010_0717_c_25L底本頭注曰「譯學一行」{編}

010_0718_a_01L
❖ 관례에 따라 45일을 머물고 6월 17일에 배를 출발시켜 화천촌化泉村에 도착하였는데 물길 300리였다. 그 다음날 배를 출발시켜 대풍소待風所에 도착하였는데 물길 60리였다. 대마도의 남쪽 선박처로부터 대마도 북쪽 대풍소까지의 거리는 하루 일정인데, 배를 타고 갔기 때문에 물길을 따라 동쪽을 비스듬히 하고 또 서쪽을 향하여 대마도를 끼고서 둘러 갔다. 그러므로 물길이 360리였다. 대풍소에서 즉시 배를 출발시켜 동래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 밤중에 갑자기 동풍이 심하게 몰아쳐서 웅천熊川 가덕도加德島 천성진天成鎭에 표류하였는데 물길 480리였다. 일기도(一崎島, 잇키시마)로부터 대마도까지는 480리가 넘었고 대마도로부터 동래까지는 480리가 못 되었다. 가덕도에서 며칠 머문 후 배를 출발시켜 7월 14일에 해남 앞바다에 정박하여 대둔사에 천불을 봉안하였다.50) 배가 정박했을 때 대둔사에 급히 소식을 알렸더니 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기이하게 여기며 다투어 와서 보았다. 모두 다시 살아나 만난 것같이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으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먼저 완도 상선의 소식을 물었더니, 지난 겨울에 동래에 도착하여 소식을 기다렸지만 날이 오래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먼저 돌아와 몇 월 며칠에 해남 앞바다에 정박하여 232좌51)의 불상을 불전에 봉안하였다고 하였다. 마침내 768좌 일체를 불전에 봉안하고 별도로 천불전이라고 불렀다. 아! 그 위급한 때를 만나 내 어찌 나무 인형(木偶) 같은 부표浮漂가 되어서 물고기 배속에 장사지내겠는가. 사는 것도 허깨비(幻)며 죽는 것도 허깨비여서 모두 하나의 허깨비에 돌아간다. 비록 도력道力이 없더라도 이것이 바로 의義이다. 조사에게 들으니, ‘비록 맹렬한 회오리바람이 불어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이 놀라운 파도가 산처럼 일어나더라도 저와 나는 본디 한 몸이어서 놓아 버리면 통달하리니 두려움이 없도다’라고 하였다.

010_0718_a_01L
依例留四十五日六月十七日發船
010_0718_a_02L化泉村水路三百里翌日發船 [142] 到待
010_0718_a_03L風所水路六十里盖自馬島之南船泊
010_0718_a_04L距島之北待風所爲一日程而以
010_0718_a_05L其有 [143] 船隻故從水路迤東又向西抱馬
010_0718_a_06L島而周廻故水路 [144] 爲三百六十里自待
010_0718_a_07L風所 [145] 即又發船未及東萊夜半忽東
010_0718_a_08L風甚惡 [146] 流于熊川加德島天成鎭
010_0718_a_09L路四百八十里盖自一崎島至對馬 [147]
010_0718_a_10L百八十里强自馬島至東萊四百八十
010_0718_a_11L里弱留加德如干 [148] 自加德發船
010_0718_a_12L月十四日來泊海南前洋奉安千佛于
010_0718_a_13L大芚寺旣泊亟報寺中渾寺驚奇
010_0718_a_14L來相見俱若再生重逢喜歡相賀
010_0718_a_15L須言喩先問前船消息則言前冬某月
010_0718_a_16L來泊東萊待候日久杳然莫憑
010_0718_a_17L得已先還已於某月日來泊二百二十
010_0718_a_18L三坐奉安于佛殿遂以七百六十八坐
010_0718_a_19L一軆奉安于佛殿別稱千佛殿 [149]
010_0718_a_20L其危急其爲吾時木偶之漂乎 [150] 吾其爲
010_0718_a_21L魚腹之葬乎其生也幻也其死也
010_0718_a_22L幻也同歸於一幻雖無道力斯義也
010_0718_a_23L聞諸祖師雖狂颷掀天驚濤如山
010_0718_a_24L [151] 自我捨去達去 [152] 了無怖悸但玉佛

010_0718_b_01L옥불 1천 좌는 단지연비斷指燃臂52)하는 온 정성을 들여 만들었으니, 만약 침몰했더라면 땅강아지 같은 미천한 이 목숨이야 불쌍할 것이 없겠지만 768좌의 부처님은 어떻겠는가. 다섯 감각기관을 태우는 것 같을 것이고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이다. 다행히 천행의 도움을 받아 칠흑 같은 밤중에 축전국(筑前國, 치쿠젠노쿠니)의 도포도(都浦島, 미야코우라)에 정박하였고 계속 옮겨 장기도長崎島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어서 평호도(平戶島, 히라도시마)와 일기도(一崎島, 잇키시마)와 대마도對馬島를 지나서 본사에 돌아왔으니 이 어찌 사람의 힘이 미칠 바이겠는가. 도포도都浦島에 정박했을 때에 호수 입구의 물 가운데에 뾰족한 암초가 많이 늘어서 있었으니, 비록 물길을 잘 아는 사람이 이곳에 이르러 키를 틀고 노를 저어 그 위험한 곳을 피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칠흑 같은 밤중에 아무 탈 없이 건너가는 것이라면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여러 섬에서 배를 출발시킬 때에 상서로운 무지개가 호송하였으니, 이역異域의 무지한 백성들도 놀라 소리 지르며 기이하다고 말하였으니, 이 어찌 부처님의 가피력이 더욱 밝게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어떤 산과 냇가에 놀러가더라도 기록을 남겨 두어 후세에게 전하는데, 지금 경유했던 곳은 지극히 험난한 곳이었고 도착한 곳은 이역이었으니 어찌 기록해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풍토를 기록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진관津關의 도회지와 사람들의 번화한 모습, 즉 재화가 쌓여 있고 남녀가 섞여 있는 것들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 행동하는 절도, 고기 잡고 나물 캐는 사소한 것에 이르기까지 빠짐없이 서술하여 후세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본주本州 목사 이공李公이 듣고 시를 써 주었다. 그래서 편말編末에 실어둔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扶桑曉日慈帆開  동쪽에 해 뜨자 자비의 돛 열려
半夜驚濤萬里回  밤중에 놀란 파도 만리를 돌아왔네.
自是天敎行道意  이에 하늘이 갈 길을 가르쳐 주시니
倭人爭說達摩來  왜인들이 다투어 달마가 오신다 말하네.

신사년(1821년) 7월에 능주綾州 쌍봉사雙峰寺 승려 풍계가 기록하다.

능주는 돌아가신 숙부 도정공都正公이 일찍이 부임하셨던 읍이다. 내가 경술년(1850년) 여름에 또 왕명을 받들어 이 능주에 왔다. 그리하여 숙부의 지난 행적을 추억하여 감동되고 흠모함이 심하였다.

010_0718_b_01L一千坐殫精弊神以代 [153] 斷指燃臂之獻
010_0718_b_02L若或 [154] 沈沒則螻蟻微命固不足恤
010_0718_b_03L其於七百六十八坐佛何哉五內如焚
010_0718_b_04L四軆不分賴天之幸漆夜之中得泊
010_0718_b_05L筑前國都 [155] 浦島轉到長崎島鱗次歷
010_0718_b_06L平戶一崎島對馬島得返本寺此豈人
010_0718_b_07L力所 [156] 及哉至於泊都浦時湖口水中
010_0718_b_08L [157] 角森羅雖諳熟水路者到此當捩柁 [158]
010_0718_b_09L回棹以避其險而漆夜中如涉安流
010_0718_b_10L孰使而然哉況各島發船時祥虹護送
010_0718_b_11L異域蠢蠢之氓亦嘖嘖 [159] 稱異此豈非佛
010_0718_b_12L力之尤彰明較著者哉凡遊一山一水
010_0718_b_13L亦有紀述以傳諸後今所 [160] 經至險也
010_0718_b_14L [161] 到異域也其可無記迷爲紀其風
010_0718_b_15L土故津關之都會人物之繁華 [162]
010_0718_b_16L之委積男女之雜畓無不畢記 [163] 以至
010_0718_b_17L於飮食之事 [164] 行動之節漁採之微
010_0718_b_18L無爲遺漏以備後覽焉本州牧使李公
010_0718_b_19L聞之贈以詩故亦載於編末其詩曰
010_0718_b_20L扶桑曉日慈帆開半夜驚濤萬里回
010_0718_b_21L是天敎行道意倭人爭說達摩來

010_0718_b_22L
辛巳七月日綾州雙峯寺僧楓溪記 [165]
010_0718_b_23L綾是先叔父都正公曾荏之邑余於
010_0718_b_24L庚戌夏又奉是州之命追憶徃蹟

010_0718_c_01L부임해 온 지 3일이 지나 개천사開天寺 승려 인월印月이 소매에서 1권의 책을 꺼내 보여 주었는데 풍계 대사 표해록이었다. 인월 스님은 풍계의 전발傳鉢 제자였던 것이다. 그 책을 다 읽어 보니, 마지막 부분에 숙부의 절구시가 있어서 차운하여 시를 지어 주었다.

전편

船頭忽見彩虹開  뱃머리에 홀연히 채색 무지개 나타나자
漂泊東南載佛回  동남으로 표박하다 부처님 싣고 돌아왔네
萬死一生滄海外  창해 밖에서 만사일생으로 살아났으니
分明天意護如來  이건 분명 하늘의 뜻이고 여래의 가호일세

후편

盥手摩挲寶墨開  손 씻고 어루만지자 보묵이 열리니
山人擎自梵家回  산승이 높이 들어 절집 안에 돌아오도다.
欲言往事止先感  지난 일 말하자니 감정이 먼저 북받치나니
三十年如一夢來  30여 년 세월이 일장춘몽 같아라

죽수竹樹의 관리 이장우李章禺 삼가 절하다.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을 마치다.
석곡石谷이 삼가 글씨를 쓰다.
임오년(1882년) 7월 일에 베껴 쓰다.53)

010_0718_c_01L感慕罙深抵任之越三日開天寺
010_0718_c_02L僧印月袖示一卷書乃楓溪師漂海
010_0718_c_03L而印月即楓溪傳鉢者也披玩竟卷
010_0718_c_04L卷末有先叔父絕句詩韵謹次而還
010_0718_c_05L先船頭忽見彩虹開漂泊東南載
010_0718_c_06L佛回萬死一生滄海外分明天意護
010_0718_c_07L如來又盥手摩挲寶墨開山人擎自
010_0718_c_08L梵家回欲言徃事止先感三十年如
010_0718_c_09L一夢來竹樹吏李章禺謹拜

010_0718_c_10L
日本漂海錄終

010_0718_c_11L
石谷謹書

010_0718_c_12L
010_0718_c_13L壬午年七月日騰書

010_0718_c_14L壬午捌七月日騰書
  1. 19)홍원洪原 : 함경남도 홍원군의 군청 소재지인 읍으로서 함경선咸鏡線의 중요 역이며 남동 1km쯤에 외항 전진前津을 끼고 있는 수륙 교통의 요지이다.
  2. 20)원래 공급량은 1승 5합인데, 공급해 주는 사람이 하루에 6합만을 준 것은 착복한 것으로 생각된다.
  3. 21)영남대 소장본에는 이 부분이 괄호로 묶여 있다.
  4. 22)이 글에서 말하는 본도本島는 장기(長崎, 나가사키)를 말한다.
  5. 23)『한국불교전서』와 송광사 소장본에는 “十二日”이라고 되어 있으나, 영남대 소장본에는 “十二月初二日”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영남대 소장본을 따랐다.
  6. 24)진옥기포(津屋崎浦, 쓰야자키우라)는 과거 복강현(福岡縣, 후쿠오카켄) 종상군(宗像郡, 무나카타군) 진옥기정(津屋崎町, 쓰야자키마치)에 속했는데 2005년 1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재는 복진시(福津市, 후쿠쓰시)에 속한다. 아래 글에서는 진津자가 빠지고 옥기포(屋崎浦, 야자키우라)라고만 되어 있는데 풍계 대사가 그 지명을 잘 몰랐거나 글자가 누락된 것 같다.
  7. 25)부월鈇鉞 : 작은 도끼와 큰 도끼로 모두 형벌에 사용하는 도구이다.
  8. 26)황촉 : 밀랍으로 만든 초.
  9. 27)전치傳致 : 인계하다는 의미.
  10. 28)비전국(肥前國, 히젠노쿠니) : 일본의 서해도(西海島, 사카이도)에 위치해 있고, 현재의 장기현(長崎縣, 나가사키켄)에 해당한다.
  11. 29)고직庫直 : 창고를 지키고 출납을 맡아본 관리로 조선의 고직은 대개 이속吏屬들이 임명되었으며 임기는 2년이었다.
  12. 30)부복俯伏 : 고개를 숙이고 엎드림.
  13. 31)투식偸食 : 공금 등을 도둑질하여 먹음.
  14. 32)파把 : 길이의 단위인 발의 의미이다. 한 발은 두 팔을 양 옆으로 펴서 벌렸을 때 한쪽 손끝에서 다른 쪽 손끝까지의 길이다.
  15. 33)유회油灰 : 기름, 재, 솜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접착제로 사용한다.
  16. 34)흑공단黑貢緞 : 흑색의 공단. 공단은 두껍고 윤기가 도는 비단으로 고급 비단에 속한다.
  17. 35)화간和奸 : 남녀가 서로의 동의 아래 정을 통하는 것을 말한다.
  18. 36)이물통간죄異物通奸罪 : 국가의 허락 없이 외국인과 정을 통하는 것을 말한다.
  19. 37)『사기史記』 권69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있는 말로서 사람이 많이 모여 북적거리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다만 「소진열전」에는 ‘擧袂成幕 揮汗成雨’라고 되어 있어 휘장(帷) 대신에 장막(幕)으로 묘사되어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20. 38)중국의 대제와 항주가 당시 가장 번화한 도시로 여겨졌던 것 같다.
  21. 39)만박蠻舶 : 네덜란드 선박을 말한다. 원래 ‘만蠻’이란 남쪽 오랑캐라는 의미로서 10세기의 『일본기략日本紀略』에 “南蠻人が九州の大宰府管內の諸地方を荒らした”(남만인이 구주의 대재부 관내에 있는 여러 지방을 황폐화시켰다)라는 말에서 처음 나온다. 그 후 1542년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표착한 이후로는 주로 서양인을 지칭하였다.
  22. 40)체귀遞歸 :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감.
  23. 41)『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제2권 「표인영래차왜漂人領來差倭」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순조 16년 병자(1816년) 정의 현감旌義縣監 이종덕李種德이 비전주肥前州에 표류해 들어갔는데, 그는 다른 표류민과는 달라서 대차왜大差倭가 데리고 왔다. 처음 있는 일이므로 특송선과 표차왜漂差倭의 사이를 참작하여 향접위관鄕接慰官으로 접대하였다.”
  24. 42)항오行伍 : 군대를 의미한다. 25인을 항行이라 하고 5인을 오伍라고 한다.
  25. 43)부마駙馬 : 원래 임금의 사위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일반 가정의 사위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26. 44)법화경만 염송했다는 구절로 볼 때, 천태종 승려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천태종은 일본에서 가장 큰 종단의 하나였다.
  27. 45)수륙불사水陸佛事 :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에게 공양供養을 드리는 불교의식으로서 수륙재水陸齋, 수륙도량水陸道場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부터 비롯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971년(광종 22년)에 수원 갈양사葛陽寺에서 혜거 국사惠居國師가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28. 46)『한국불교전서』에서는 이 부분의 글자를 판독하지 못하여 ‘▣沙袈裟’라고 하였고, 송광사 소장본과 영남대 소장본에서는 ‘走沙袈裟’라고 하였으나 붉은 안료를 의미하는 ‘주사朱沙’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9. 47)북망산北邙山 : 원래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뤄양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을 말한다. 이곳에는 많은 귀인·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부분 북망산에 묻혔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30. 48)송광사 소장본의 본문에 ‘聞我國對馬島’라고 되어 있고, 두주頭註에 ‘聞我國譯學以通信事來泊對馬島’라고 하였으므로 두주의 내용이 본문의 我國과 對馬島 사이에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31. 49)송광사 소장본에는 두주頭註에 ‘역학일행譯學一行’이라 되어 있으므로 본문에서 말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통신사 일행임을 알 수 있다.
  32. 50)앞에서는 동래에 도착하여 대마도가 조선 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동래에 갔다는 말이 없고 해남 앞바다에 도착하여 천불을 봉안했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런데 대마도에서 6월 17일에 배를 출발시켜 7월 14일에 해남 앞바다에 도착했다고 하였으므로 시간적으로 너무 오래 걸린 셈이다. 아마도 가덕도에 표류한 후 동래에 들렀다가 해남으로 간 것 같다.
  33. 51)『한국불교전서』와 송광사 소장본에는 223좌라고 되어 있고 영남대 소장본에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그런데 『한국불교전서』와 송광사 소장본의 223좌는 232좌의 잘못이다.
  34. 52)단지연비斷指燃臂 : 손가락을 자르고 팔에 불을 붙인다는 의미이다. 단지는 손가락을 자르거나 깨물어 수행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고, 연비는 수계할 때 심지에 불을 붙여 살갗을 태워 계율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35. 53)원문에는 “壬午年七月日謄書”와 “壬午捌七月日謄書”가 나란히 적혀 있다.
  1. 1)撰者名。編者補入。
  2. 1)「唐」疑衍字{編}。
  3. 1)「執」疑「熱」{編}。
  4. 2)「黑」疑「里」{編}。
  5. 3)底本頭注曰「聞我國譯學。以通信事。來泊對馬島」{編}。
  6. 4)底本頭注曰「譯學一行」{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