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_0379_a_01L 지심범천소문경(持心梵天所問經) 제1권 일명 장엄불법제의(莊嚴佛法諸義) 또는 불설등어제법경(佛說等御諸法經)이라고도 한다.
010_0379_a_01L持心梵天所問經卷第一 一名莊嚴佛法諸義,又名佛說等御諸法經
서진(西晉) 월지(月氏) 축법호(竺法護)한역 최봉수 번역
010_0379_a_02L西晉月氏三藏竺法護譯
1. 명망보살광품(明網菩薩光品)
010_0379_a_03L明網菩薩光品第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010_0379_a_04L聞如是:
한때에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에 있는 가린죽원(加隣竹園)에서 큰 비구 승단과 함께하셨으니, 6만 4천 명의 비구와 7만 2천 명의 보살과 함께 지내셨다. 모두가 위대한 성인으로서 신통에 이미 통달하였고, 총지(總持)를 깊이 얻었으며, 변재(辯才)가 걸림이 없고 삼매에 이미 깊이 들었다. 지혜에 있어 걸림이 없고 모든 법의 자연스런 행상에 대하여 환히 깨달았으며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또한 현호(賢護) 등 열여섯의 보살[正士]이 있었는데, 이들은 곧 현호ㆍ보사(寶事) ㆍ은시(恩施)ㆍ제천(帝天)ㆍ수천(水天)ㆍ현력(賢力)ㆍ상의(上意)ㆍ지의(持意)ㆍ증의(增意)ㆍ선건(善建)ㆍ불허견(不虛見)ㆍ불치원(不置遠)ㆍ불손의(不損意)ㆍ선도(善導)ㆍ일장(日藏)ㆍ지지(持地)이니, 이와 같은 부류가 7만 2천 명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대천왕(四大天王)과 천제석(天帝釋)과 제석(帝釋)을 따르는 무리들과 도리천(忉利天)의 여러 천신과 염천(焰天)과 도솔천[忉利諸天]과 불교락천(不憍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도 있었고, 또한 여러 범천(梵天) 등과 범신천(梵身天)과 남은 여러 천 및 다른 용과 귀신ㆍ건달바[揵沓和]ㆍ아수라[阿須倫]ㆍ가루라[迦留羅]ㆍ긴나라[眞陀羅]ㆍ마후라[摩睺勒]와 사람과 사람 아닌 것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010_0379_b_02L그때 세존께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천 무리의 권속들에 둘러싸인 채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다. 그때 명망(明網)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단정히 꿇어앉고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를 부처님 발에 대면서 예를 올렸다. 그리고는 이윽고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고 두루 온갖 꽃비를 내리어 그 모임 위에 흩뿌리며 세존께 말씀드렸다. “바르게 깨달으신 분이시여, 여쭈어 볼 것이 있습니다. 어리석어서 그러하니, 만일 듣는 이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감히 제가 진술하는 것을 허락해주시옵소서.”
부처님께서 명망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뜻대로 질문하라. 여러 현혹된 자를 위하여 여래ㆍ지진(至眞)은 마땅히 해설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겠다.”
010_0379_b_08L佛告明網:“恣所欲問,諸眩惑者,如來、至眞當爲解說,悅可爾心。”
이에 명망보살은 들어주시겠다는 허락을 받고는 곧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위의를 갖추신 모습에서 나오는 빛은 널리 비추어 감당하기 어려우니, 태양의 광명보다 억백천 배를 초월하십니다. 자태와 안색의 위엄은 이를 데가 없으며, 위로 지극하고 아래로 궁극적이어서 능히 이를 감당할 수가 없으며, 준수하고 굳세게 닦으신 바는 능히 헤아리거나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만일 어떤 중생이 지진(至眞)의 용모와 몸을 보고 그 행상을 사유하고 관찰한다면, 그것은 모두 위대한 성인이신 부처님의 위신력이 닿은 까닭이니, 문득 영원한 안식을 일으키고 그것에 이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중우(衆祐)에게는 ‘고요한 언사[寂然言事]’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 광명을 만나면 여래를 보고 그 형색을 관찰하여 안근이 명철(明哲)해진다. 그리고 일찍이 어두웠던 것이 없어진다. 또 여래에게는 ‘두려움 없는 변재[辯才無畏]’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여래에게 변재가 전개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질문하게 된다.
010_0379_c_02L 또한 여래에게는 ‘선한 덕의 모음[積善德]’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부처님에게 전륜성왕이 덕을 행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청정한 요지[淸淨了]’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부처님에게 제석천신으로 태어나는 것을 획득하게 되는 원인과 일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위엄 있게 불타는 등불을 얻음[逮威然錠]’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부처님에게 범천의 일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애욕과 티끌의 문을 벗어남[脫欲塵門]’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부처님에게 성문승(聲聞乘)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오로지 담담한 행을 준수함[專一遵澹泊行]’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부처님에게 연각승(緣覺乘)에 대하여 질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일체지를 간직하고 찬탄하고 용납함[一切慧持讚容]’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능히 부처님에게 대승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부처님의 지혜에 대하여 질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다른 걸음을 옮길수록 즐겁게 간직함[樂持異步]’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여래가 노닐며 거닐고 경행할 때 보호하는 안온한 광명이니, 만일 이 광명을 만나는 자는 목숨이 다하면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장엄된 일체의 청정한 영락[嚴一切淸淨瓔珞]’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여래가 성에 들어와서 이 광명을 놓아 이 광명을 만나는 자는 모두가 안온함을 얻게 되며, 그때에 그 성의 대중은 보배 영락으로 자연히 장엄한다.
또한 여래에게는 ‘부수고 제외함[壞除]’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여래는 이 광명으로써 능히 한량없고 이루 다 잴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이다. 요점을 말하면, 다시 명망아, 여래에게는 ‘안온함을 쌓음[積安]’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지옥의 부류들이 이 광명을 만나면 온갖 고뇌와 근심이 자연히 쉬고 그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초월적인 사랑[超慈]’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금수(禽獸)의 부류가 이 광명을 만나면 서로 악의를 일으켜 괴롭히거나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만들어진 것을 제도함[濟所造]’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아귀(餓鬼)와 아수라[儔倫]가 이 광명을 만나면 다시는 배고파하거나 목말라하지 않는다. 또한 여래에게는 ‘더러움을 떠남[離垢]’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눈먼 이가 이 광명을 만나면 눈을 뜨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귀로 들음[耳聞]’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귀먹은 자는 들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뜻이 있음[有志]’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산란한 자는 정상 상태가 된다.
010_0380_a_02L 또한 여래에게는 ‘즐거운 등불[樂錠]’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자연히 악한 것을 고치고 열 가지 선한 것이 확립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벗어남의 문[脫門]’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삿된 견해를 지닌 자는 바른 견해를 획득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천상으로 나아감[趣天]’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아끼고 탐착하는 부류가 은혜로운 보시를 선호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극심한 고뇌가 없음[無熱惱]’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죄악을 범한 자들이 모두 금기와 계율을 받들어 간직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지키는 마음[持心]’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성냄과 원한을 지닌 자는 인욕을 얻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은근함[慇懃]’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게으르고 나태한 자는 정진을 얻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바른 정[正定]’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방일하는 자가 선정을 얻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뚜렷하게 비춤[顯曜]’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여러 지혜가 모자란 자는 영리함과 지혜를 얻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맑고 깨끗함[淸澄]’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여우처럼 의심이 많은 자는 돈독한 믿음을 얻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모두 간직함[總持]’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아는 것이 적은 자는 많이 들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준수할 만한 구절의 흔적[遵句跡]’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자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 할 줄 알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소멸하고 제거함[滅除]’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탐착심을 지니고 음탕한 자들이 연정을 느끼는 상태를 멸하고 제거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안락(安樂)’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진에심(瞋恚心)을 가진 자는 분노하고 해치려는 뜻이 없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밝게 빛남[照曜]’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어리석은 성향을 지닌 자가 우둔함과 어두움을 제거하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두루 존재함[普存]’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이 광명을 만나면 등분(等分)하는 자는 등분을 빠짐없이 버리게 된다. 또한 여래에게는 ‘두루 형체를 지닌 몸을 보여줌[普現色身]’이라고 이름하는 광명이 있다. 만일 중생이 이 광명을 만나면 모든 여래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을 보게 되고, 계산할 수 없이 많은 백천 가지 형상을 보게 된다.”
010_0380_b_02L부처님께서 명망에게 말씀하셨다. “지금 나는 너를 위하여 대략적으로 요점만 든 것이다. 만일 1겁 또는 1겁이 넘도록 여래의 광명에 대해서 물은 것을 강설한다거나 경의 법을 논하고 천명한다고 해도 여래의 광명과 광명의 명호에 대해서 능히 다할 수 없다.”
명망보살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여래의 몸은 한량없고, 높고 높은 덕은 불가사의하고,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방편으로 경의 법을 부연하셨습니다. 저는 과거에서부터 일찍이 이러한 것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가피를 입었습니다. 만일 어떤 보살이 있어 이러한 광명의 명호를 듣고 환희하고 즐거이 믿는 자는 모두 반드시 여래의 몸과 같은 것을 얻어 우뚝 솟은 덕을 구족할 것입니다.
또한 세존께서 연설하신 여래 부처님께서 소유하신 광명 중 ‘권하여 교화함[勸化]’이라는 광명의 이름을 듣고서 다른 방위의 다른 국토에서 노닐고 있는 보살 대사들이 서로 돌아가며 끌고 나아가게 하십시오. 서로 끌고 나아가서 빠짐없이 이 인계(忍界:娑婆世界)에 와서 모이게 하십시오.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 보살이 여래께 와서 경에 대해 의심나는 것을 여쭙게 하시고 그것에 대해 강설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는 명망보살이 여쭙는 청을 받아들이시어 곧 그와 같은 모습의 광명을 몸에서 방출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국토와 한계를 잴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의 세계를 두루 비추셨다. 또한 그 광명은 셀 수 없는 억천의 보살들을 부르고 청하여 인계를 찾아 모이게 하였다.
그때 동방으로 7만 2천의 여러 부처님 세계를 지나가면 한 국토가 있었으니, 그 이름이 청정(淸淨)이었고, 부처님의 명호는 일월여래(日月如來)였다. 당시 그 부처님 국토에는 한 범천이 있었는데, 이름이 지심(持心)이었다. 그는 보살 대사로서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머물렀다. 성스러운 지혜를 갖추고 신족(神足)의 힘으로 스스로 오락을 즐겼다.
그때에 그 광명을 만났는데 나아가기를 권하므로 곧 스스로 일월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의 처소를 찾아와서 머리를 발에 대고 예를 올린 뒤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인계에 가서 능인(能仁)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을 받들고 친견하고자 합니다.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공양하고 모시고서 질문하고 싶은 것을 여쭙고 배우고자 합니다. 인계의 성스럽고 존귀한 분께서도 저희들을 보고자 하십니다.”
010_0380_c_02L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거라, 범천아. 지금이 바로 그 때임을 알아라. 셀 수 없이 많은 수억의 여러 보살 대중들과 함께 인계를 방문하도록 하라.”
010_0380_c_02L其佛告曰:“便往,梵天!宜知是時,與無數億諸菩薩衆,尋至忍界。”
또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비록 인계에 간다 하더라도 너는 마땅히 이 열 가지의 의도와 성품의 행[十志性行]을 받들어 행해야 한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좋게 들리는 것과 나쁘게 들리는 것, 착한 것과 착하지 않은 것을 마땅히 수용하는 것이 첫째이다. 그런 것에 대해 슬픔과 애절함으로 행하는 것이 둘째이다. 하천한 자와 중간인 자와 높은 자에 대하여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셋째이다.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경우나 자신을 공경하는 경우에 한마음으로 향하는 것이 넷째이다. 타인의 모자라는 점을 꼬집지 않고 그 허물을 밝혀내지 않는 것이 다섯째이다.
여러 가지 승(乘)에 대해서 일미(一味)로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여섯째이다. 악취(惡趣)에 관한 소리를 듣더라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일곱째이다. 여러 보살들에 대하여 중우(衆祐)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여덟째이다. 다섯 가지가 탁한 세상[五濁世]에 대해 부처님 국토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아홉째이다. 여래ㆍ정등각을 친견하듯이 하는 것이 열 번째이다. 이것이 곧 열 가지 일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이 의도와 성품의 행을 부수지 말고 그 국토에서 유행할 수 있어야 한다.”
010_0380_c_12L佛言:“梵天!懷此志性可遊彼土。”
그러자 지심 범천이 그 정등각자께 말씀드렸다. “저는 감히 부처님의 면전에서 사자후(師子吼)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인연이 되는 행에 있어서 특기할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로지 이 의도와 성품의 행을 청정하게 닦고자 합니다. 그리고 동등하게 선정의 뜻을 확립하고 그 세계에서 유행하겠습니다.”
010_0381_a_02L그리하여 지심 범천은 1만 2천 보살과 함께 용맹한 장부가 오른팔을 굽혔다 펴는 정도의 짧은 시간에 그 부처님 국토에서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인계에 나타나서 능인부처님을 받들고 친견하였다. 그리고 땅에 머리를 대어 예를 올린 뒤 물러나 한쪽에 머물렀다.
그때 세존께서 명망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지심 범천을 보았는가?” 대답하였다. “이미 보았습니다.”
010_0381_a_06L於是,世尊告明網曰:“汝乃睹見持心梵天乎?”對曰:“已見。”
위대한 성인께서는 곧 말씀하셨다. “이 지심이라는 자는 방편을 환하게 요달하였고, 질문하는 바가 그윽한 곳에 머물고 있다. 존귀한 법을 분별하고, 변재가 훌륭하고 미묘하니, 이름이 나 있는 최상의 보살 대중들 가운데서도 최상인 자이다. 자애로움과 애절함과 지극한 정성으로 도의 이익을 권하고 교화하여 그가 노닐고 거주하는 곳마다 즐거워할 만한 것이 많은 자이다.”
010_0382_a_02L 그때 지심 범천은 이 게송을 설하며 부처님을 찬탄하고 난 뒤에 무릎을 꿇고 합장한 뒤에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어떻게 해야 보살의 의도와 성품이 견고하고 강건하여 그 뜻에 나태하거나 싫어함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말한 것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그 언사에 고뇌와 뜨거움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지은 덕의 근본이 여러 중생을 넘어서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의 위의가 안온하고 길상하여 졸속으로 갑작스럽게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청정하고 깨끗한 법을 늘리고 더하는 것이 많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국토와 대지에서 노닐고 거닐어 궁극에까지 이르게 됩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중생들에게 권화(勸化)와 방편(方便)을 행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그들을 잘 분별하고 교화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능히 도의 마음을 보호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오로지 중생에게 있으면서도 그 마음이 잡스런 행동이 없도록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열심히 선의 근본을 구하고 법을 논의하며 머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생각하는 것을 환하게 요달하며 믿음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괴롭고 수고로운 부분에 대해서 열어서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여러 대중의 모임에 참여하여서 권화와 방편을 행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법을 크게 천명하고 보시하고 유포하고 연설하고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과보와 상응하는 힘을 알며, 덕의 근본을 잃어버린 자를 알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중생의 일어나지 않는 지혜와 6바라밀[度無極]에 대해서 환히 깨닫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선정에 존재하는 방편을 창달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여러 부처님의 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보살이 여러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하여 위배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세존께서 지심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능히 여래에게 이와 같은 일에 대해 질문하고 있구나. 잘 듣고 잘 들어라. 그리고 그것을 잘 생각해 보아라.”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길 원하옵니다.” 그리하여 지심 범천은 가르침을 받아 귀 기울였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네 가지 법이 있어 그 의도와 성품이 견고하고 강건하여 그 뜻에 나태하거나 싫어함이 없게 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며, 정진함을 싫어하지 않는 것이며, 끝나고 시작하는 것을 꿈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에 평등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010_0382_b_02L다시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이로 인해 말한 것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그 언사에 고뇌와 뜨거움이 없게 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보살은 오로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여러 법을 분별하며, 보살은 오로지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할 일체 모든 취(趣)를 즐거워하지 않으며, 보살은 오로지 대승(大乘)을 찬양하며, 보살은 오로지 청정한 업을 강설하고 깨끗한 업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지은 덕의 근본이 여러 중생을 넘어선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며, 많이 듣는 것이며, 보시하는 것이며, 출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010_0382_b_06L又有四事,所造德本超諸衆生。何等四?禁戒、博聞、布施、捨家,是爲四。
다시 네 가지 법이 있다. 그것으로 위의가 안온하고 길상하여 졸속하거나 난폭하지 않다.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익이 없음이며, 명예가 없음이며, 명성이 없음이며, 고뇌가 없음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010_0382_b_08L又有四事,威儀安詳而不卒暴。何等四?無利、無譽、無名、無苦,是爲四。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청정한 법에서 공덕의 근본을 늘리고 더하는 것이 많아진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수행과 신앙을 구족하도록 권하는 것이며, 설령 보시를 하더라도 과보를 바라지 않는 것이며, 법을 증장하게 하고 수호하는 것이며, 여러 보살들을 위하여 지혜의 땅에서 널리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능히 도의 마음을 보호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뜻으로 항상 부처님을 억념(憶念)하는 것이며, 일체 덕의 근본이 항상 도의 마음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 선한 벗을 가까이 익히는 것이며, 대승에 관해서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010_0382_c_02L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오로지 중생에게 있으면서도 그 마음이 잡스런 행동이 없도록 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성문의 마음을 떠나는 것이며, 연각(緣覺)의 마음을 떠나는 것이며, 법을 구함에 싫어함이 없는 것이며, 법을 들은 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열심히 선의 근본을 구하고 법을 논의하며 머물 수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일체의 괴롭고 수고로운 병을 제거하여 치유하니, 의왕(醫王)과 같은 것이며, 덕의 근본에 순응하여 위배하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는 것이며, 여러 가지 도에 관해 논의하고 생각하여 온갖 많은 괴로움을 멸하는 것이며, 열반[泥洹]에 대해 사의(思議)하려는 의도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환히 요달하여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불기인(不起忍)을 일으키는 것이며, 불멸인(不滅忍)을 초월하는 것이며, 연기와 과보의 인(忍)을 얻는 것이며, 무소주(無所住)의 인을 얻는 것이니 왜냐하면 다른 마음이 상속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괴롭고 수고로운 부분에 대해서 열어서 교화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사의[議]에 순응하여 억념하는 것이며, 앞으로 금기와 계율을 보호하는 것이며, 여러 법의 힘을 환히 아는 것이며, 홀로 떨어져 거처하기를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여러 대중의 모임에 들어가서 권화와 방편을 행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법에 뜻을 두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며, 다른 이에게 공경을 받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것이며, 선한 덕을 구하고 찾되 스스로에게 베풀지는 않는 것이며, 지은 바 덕의 근본으로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기를 권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법을 크게 천명하고 보시하고 유포하고 연설하고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바른 법을 수호하는 것이며, 스스로와 남을 교화하여 지혜에 들어가는 것이며, 보살[正士]의 업을 닦는 것이며, 번뇌와 수고로움과 분노와 원한의 결박을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과보와 상응하는 힘을 알며 덕의 근본을 잃어버린 자를 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타인의 결점과 모자라는 점을 끝내 보지 않는 것이며, 여러 성내고 화내는 사람에 대해서 항상 자애로운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는 것이며, 상응하는 과보를 천명하는 것이며, 여러 가지 법에 관련된 일에서 항상 도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중생에 대해 일어나지 않는 지혜와 육바라밀에 대해서 환히 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보시로써 사람들의 무리를 위하는 것이며, 아울러 다른 사람을 교화하는 것이며, 네 가지 은혜를 잘 알아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며, 심오한 법을 선호하고 즐겨서 경전에 순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010_0383_a_02L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선정에 존재하는 방편을 창달한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마음의 일을 분별하고 죄와 복이 가는 곳을 분별하는 것이며, 정진의 힘을 덕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며,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며, 지혜와 방편을 잘 닦고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부처님 법에 대하여 물러나지 않는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장차 한량없는 생사의 근심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며, 셀 수 없이 많은 여러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모시는 것이며, 한량없이 자애로운 마음을 준수하고 수행하는 것이며, 한량없는 부처님의 지혜를 환히 알고 요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다시 네 가지 일이 있다. 그것으로 여러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 대하여 위배하거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것들이 네 가지인가? 본래의 지혜로부터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 말한 것과 행동이 상응하는 것이며, 무거운 탐욕을 버리는 것이며, 건립하는 것이 있다면 본성에 거처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
세존께서 이러한 네 가지의 일에 대해 전하고 설하셨을 때 항하(恒河)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수의 여러 천자들이 모두 위없이 바르고 진실한 도의 마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5천 명의 사람들이 불기법인(不起法忍)을 얻었다. 이 여러 보살들은 각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국토에서 이 모임에 온 이들로서, 세존을 공양하였으니 주변의 삼천대천세계가 두루 빠짐없이 꽃이 무릎까지 쌓였다.
010_0383_b_02L또한 명망이여, 나라고 헤아리지 않고 동등하게 하며, 남이라고 헤아리지 않고 동등하게 하며, 법이라고 헤아리지 않고 동등하게 하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생기하는 것으로 질문하고, 소멸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질문하고, 거처하는 곳에 대해 질문한다면 그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질문이 있어도 법에는 일어나는 것이 없고 멸진하는 것도 없고 거처하는 장소의 행상도 없으니,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면 이것은 더럽고 수고스러운 욕심에 불과합니다. 만일 싸움과 다툼과 뒤바뀐 것에 대해 질문하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생사에 대해서 질문하고 생사를 건너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무위에 대해서 질문한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럽고 수고스러운 것을 질문한 것이 아니고, 전도된 것을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나고 죽는 것을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생사로부터 건너는 것을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열반에 관한 질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법(諸法)을 관찰해 보면 그것은 고요한 것도 아니고 애욕과 더러움과 뒤바뀜과 생사와 무위를 제거하는 것도 아니니, 그것이 순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질문에 획득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설령 다시 질문이 있고 증득하는 바가 있고 약속된 바가 있고 제거하고 단절하는 바가 있고 행하는 바가 있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또한 획득하고 수용하고 증득하는 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며, 온갖 상념으로 약속하는 일이 없을 때 집착하는 바도 없고, 단절하고 제거하는 생각도 없고, 행하고 보는 것도 없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일체를 위하는 까닭에 이 질문을 일으켰을 뿐 마음으로 집착하는 바가 없고 자신의 의도도 질문에 있지 않으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어떤 질문이 온갖 덕과 선에 대한 것이라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하거나 덕스럽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속의 일이고 저것은 세간을 제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죄 되는 일이고 저것은 죄의 업이 아니며, 이것은 여러 가지 번뇌이고 이것은 있는 것이고 저것은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두 가지 일을 만들어서 질문하는 자는 이 일체를 헤아렸지만 순응하는 것이 못 됩니다. 두 가지 일이 없으니 두 가지 질문을 보지 않는 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010_0383_c_02L 어떤 사람이 여러 부처님을 약간 본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며, 법을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며, 성스러운 대중을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중생을 약간 헤아리고 국토를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도(道)와 승(乘)을 약간 헤아리고 생각하지 않음을 약간 헤아린다면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에는 소속된 것이 없으니 그 약간조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로 사의하여 질문해야 하니, 이것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입니다. 일체 법은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일체 법은 그렇게 순응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범천에게 질문하였다. “어찌하여 일체의 제법이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면서 또한 일체의 제법은 순응함이 없는 것입니까?”
010_0383_c_04L又問梵天:“何謂一切諸法如爲應順?一切諸法爲不應順?”
답하였다. “일체의 제법을 능히 분별하는 자는 제법이란 그렇게 순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령 마음이라는 법이 있고 그 마음이 정진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순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의 법을 헤아리되 제법의 모습은 고요하고 공성(空性)이고 무소유라고 헤아린다면 이것이 순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요한 법을 흔쾌히 즐기지 않는 자가 또한 순응하는 자입니다. 오로지 한결같이 마땅히 지어야만 할 업을 짓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는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지은 바가 있고 그와 같이 행하는 자라면 이것이 또한 순응하는 것입니다.”
다시 질문하였다. “어떤 것을 일컬어 제법에 관찰되는 바가 있다고 합니까?” “이미 성품이 고요하고 애욕의 끝을 떠났으면 이것을 제법을 관찰한 것이라고 합니다.”
010_0383_c_11L又問:“何謂諸法有所觀察?”答曰:“己性寂然離欲之際,爲觀諸法。”
다시 질문하였다. “범천이여, 그와 같이 순응하지 않는 것을 요해할 부류는 적겠습니다. 애욕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에 대한 사의에 순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010_0383_c_13L又問:“梵天!少有是類了不應者,不離於欲而順道議?”
답하였다. “명망이여, 많은 족성자(族姓子)와 족성녀(族姓女)가 애욕의 끝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도를 사의하는 법에 대해 그렇게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이미 들어간 자도 있고 앞으로 마땅히 들어갈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혜의 법에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얻은 바도 없고, 또한 이미 들어간 사람도 없고, 앞으로 들어갈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크게 불쌍히 여기시는 세존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부처님께서 그렇게 설하신 법을 듣고 수행하고 정진한다면 그것이 곧 마땅히 설한 대로 받들어 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는 마침내 어떤 곳의 땅으로도 돌아가지 않으며, 존재하거나 얻을 수 있는 어떤 취(趣)로도 돌아가지 않습니다. 또한 다시는 생사도 없으며, 열반에도 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생사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열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환히 아셨기 때문입니다.”
010_0384_a_02L명망이 답하였다.
“아닙니다, 족성자여. 그 때문에 부처님 세존께서는 생사를 버리지도 않으시며 열반을 구하지도 않으십니다. 만일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생각을 가진 자라면 그는 제도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생사가 없으니, 무엇이 제도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열반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찌하여 생사와 열반이 평등하지 않겠습니까?” 범천이 답하였다. “나고 죽지도 않으며 또한 열반도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응하는 것에 관하여 설할 때에 2천 명의 비구가 번뇌가 다하였으며 마음으로 그 뜻을 이해하였다. “범천아, 또한 생사를 얻을 수 없고 열반도 없다. 여래께서 나고 죽는 일을 보이며 말한다고 하여도 윤회하는 자도 없고 멸도(滅度)하는 자도 없고 슬퍼하는 것도 없으며 또한 사람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범천아, ‘멸도한 자가 있다’고 누군가 사의한다고 하여도 실제로 그 사람에게는 생사의 법도 없고 열반의 법도 없는 것이다.”
그때 대중의 모임 가운데 있던 5백의 비구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적인 견해에 사로잡혀 떠나가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들이 보는 바로는 청정하게 범행을 닦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마땅히 멸도를 얻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멸도를 얻은 자가 없다’고 하시니, 이 도를 구하고 배우려고 의도했던 것이 다 공허한 것인가? 그렇다면 안정되게 지혜를 성취하겠는가!”
그때 명망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이 생기하는 것을 욕구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출현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에게는 생사의 어려움을 초월하고 건넌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그 사람은 열반을 보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010_0384_b_02L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이 바른 법과 율에서 출가하여 외도의 사견에 떨어진 자가 있으니, 그가 열반의 장소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유하면 삼 풀[麻]에서 기름이 나오는 것과 같으며, 낙(酪)에서 소(酥) 및 제호(醍醐)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제법을 멸진하고, ‘세존께서는 빠짐없이 영원히 멸도시키시니 그는 영원히 멸도한다’고 한다면, 저는 곧 그를 매우 교만한 자라고 일컫겠습니다.
이에 명망보살이 지심 범천에게 말하였다. “범천이여, 이것이 설해질 때 5백의 비구가 설해지는 법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개인적인 견해에 사로잡혀 허망하게 떠나갔습니다. 이들 부류의 의지의 움직임에 대해서 알아서 어찌 그들로 하여금 법에 들어가도록 하지 않습니까? 즐거이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으로써 여러 견해의 그물에서 제도하여 해탈시키시오.”
지심이 답하였다. “족성자여, 그대가 항하의 모래알같이 많은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노닐며 지내 왔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만한 수의 겁 동안을 구하고 찾는다 하여도 떠남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아서 형상적인 법에는 또한 해탈이 없습니다. 비유하면 어리석은 사람이 허공을 두려워하여 버리고 도망가는데 머무는 곳, 이르는 장소마다 허공을 떠나지는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비구들 역시 그러합니다. 도달하고 행하는 그 한계를 측정할 수가 없다 해도 공성(空性)의 모습이 자연스러우며, 무상(無想)의 모습 역시 자연스러우며, 무원(無願)의 모습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비유하면 허공을 구하려는 두 번째 사람과 같습니다. 여덟 방향으로 그리고 위와 아래로 허공을 얻으려고 하여 ‘나는 허공을 얻고자 한다. 나는 허공을 얻고자 하여 욕구하는 대로 노닐고 나아가고자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지만, 그 사람은 입으로 스스로 허공을 말할 뿐이지 허공을 알지 못합니다. 말하는 것처럼 그 몸이 허공에서 나아가면서도 허공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010_0384_c_02L이와 같이 족성자여, 이 여러 비구도 멸도를 구하고 열반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멸도를 구하지만 이해하여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멸도(滅度)를 얻었다고 말하는 자는 단지 거짓된 명칭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으니, 만일 허공에서 다니고 허공에서 노닌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역시 공허한 것입니다. 그 열반이란 임시로 짐짓 만든 말일 뿐입니다.”
그때 5백 비구는 이렇게 설하는 말을 듣고 번뇌가 다하여 마음으로 해탈하고 신통력(神通力)을 얻었다. 그리고는 각자 찬송하여 말하였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온갖 법이 모두 빠짐없이 멸도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어떤 사람이 멸도를 구하고자 하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위대한 성인이시여, 저희들은 지금 범부가 아닙니다. 유학(有學)도 아니고 무학(無學)도 아닙니다. 나고 죽는 것에도 있지 않고, 열반에도 있지 않으니, 멸도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또한 여러 신통과 지혜에 있어서 저희들은 이미 존재하던 도와 지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부처님의 법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설합니까?”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사리불이여, 설령 더럽고 피로한 것을 단절했다 하더라도 문득 애욕의 티끌에 들어가게 되니 멸도를 욕구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저희들은 이미 들어가는 것을 얻었다고 말할 뿐입니다. 더럽고 피로한 것을 만들었지만 짓는 것은 없습니다.”
자비로운 행을 준수하고 수행하고 오염된 티끌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애련하게 여기는 행이 있어서 분노하거나 해치려는 바가 없네.
010_0385_b_22L遵修慈行,
不猗染塵, 專於哀行, 無有恚害。
어짊과 평정함을 더하고 어리석음도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b_23L加以仁護, 無有愚癡, 斯謂菩薩,
普無不入。
010_0385_c_02L 취락(聚落)에서 노닐어도 그러하고 한가하게 거주해도 그러하며
도시나 마을 등 복잡한 곳이나 대중의 모임에서도 차이 없다네.
010_0385_c_02L若遊聚落, 閑居亦然,
縣邑燕處, 衆會無差。
일찍이 위의와 예절을 위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03L未曾違失,
威儀禮節, 斯謂菩薩, 普無不入。
여러 부처님의 바른 법을 빠짐없이 두루 모두 믿고 자아가 없음을 설하는 경전을 또한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네.
010_0385_c_04L皆悉遍信, 諸佛正法, 又常樂憙,
無我之典。
기쁨에 찬 성스러운 대중에게는 논의하는 바가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06L悅喜聖衆, 無所有議,
斯謂菩薩, 普無不入。
색에 대한 애욕을 벗어 던졌으나 그 행하는 바를 알 수 없으며 진에(瞋恚)와 분노를 건넜으나 역시 건넌 바가 없네.
010_0385_c_07L脫於色欲,
不知所行, 度於瞋怒, 亦無所度。
온갖 행상이 돌아갈 곳을 환히 아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08L曉了衆行, 之所歸趣, 斯謂菩薩,
普無不入。
애욕의 세계에 대해서도 만들어 집착하는 것이 없고 형태 있는 세계에 대해서도 역시 안주하여 확립하는 일이 없네.
010_0385_c_10L亦不造著, 於欲之界,
亦不住立, 於形之界。
형태 없는 세계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모두 역시 그러하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11L不著無形,
皆亦如是, 斯謂菩薩, 普無不入。
제법이 모두 빠짐없이 공(空)이니 그것을 믿고 즐거워하네. 그런데 중생들은 이리저리 내달리고 사유하고 생각한다네.
010_0385_c_12L信樂諸法, 一切悉空, 然而衆生,
馳騁思想。
그런 까닭에 모든 번뇌를 멸진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14L由是之故, 不盡諸漏,
斯謂菩薩, 普無不入。
방편을 환히 알아 연각승(緣覺乘)에 대해서도 음성으로 보여 주어 그것으로 그들을 교화하네.
010_0385_c_15L方便曉了,
緣一覺乘, 示以音聲, 而教化之。
그러면서 부처님과 대승에 대하여 요달하지 않은 바가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16L於佛大乘, 靡不達了, 斯謂菩薩,
普無不入。
마땅히 이르는 곳마다 일체 것을 알고 인도하는 스승의 가르침을 일찍이 위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네.
010_0385_c_18L一切皆知, 所當至處,
未曾違失, 導師之教。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19L常行等心,
於諸憎愛, 斯謂菩薩, 普無不入。
일찍이 과거의 법을 상념하지 않고 미래와 현재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네.
010_0385_c_20L未曾想念, 過去之法, 當來現在,
亦復如是。
일체의 노닐고 거주한 것에 의지하거나 집착하는 바 없으니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두루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네.
010_0385_c_22L一切遊居, 無所猗著,
斯謂菩薩, 普無不入。
010_0386_a_02L 그때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무엇을 두고 보살이 세간법을 건넌다고 하며, 세간법에 처하지 않는다고 하며, 현재 세간법에 들어간다고 합니까? 그리고 세간법에 있어서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킨다고 하며, 세간을 평등하게 보이고 드러낸다고 합니까? 또한 세간법에 인연하여 세간에서 노닐고 비록 세간에 처하더라도 세간의 법을 파괴하지 않고 도의 법을 잃지 않는다고 일컫습니까?”
만일 세속을 관찰하되 몸으로써 자연의 본성을 본다면 그것은 곧 등정각(等正覺)이 시방에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
010_0386_b_11L假有觀俗者,
身以睹自然, 則見等正覺, 現在十方者。
제법은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제법에는 자연의 본성이 없다고 알아서 만일 인연을 세밀히 분석한다면 법의 이치에 통달하는 것이라.
010_0386_b_12L知諸法因緣, 諸法無自然, 若剖扸因緣,
則能綜理法。
그가 법을 이해하고 통달한다면 공성(空性)에 대해 환히 알게 되며 공성을 이해하고 식별한다면 인도하는 스승을 분별하리라.
010_0386_b_14L其能解達法, 則能曉了空,
設能解識空, 則能別導師。
설령 세간을 분별하고 강설할 때 그 음성을 구한다고 하면 비록 세간의 일을 행한다 하여도 세간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네.
010_0386_b_15L設分別講世,
而求於音聲, 雖行世閒事, 不與世閒俱。
만일 여러 견해에 떨어지거나 모든 것이 이것에 미치지 않으면 짐짓 이름으로 세간에 노닐어도 세속의 일에 집착하지 않네.
010_0386_b_16L若墮於諸見, 一切不及此, 假名遊於世,
而不著俗事。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이러한 인(忍)을 즐거워하는 자가 있다면 부처님은 곧 그 사람을 위하여 인도하는 스승이 되어 법신을 드러내시네.
010_0386_b_18L佛滅度之後, 其樂於忍者,
於彼佛現在, 導師之法身。
만일 이러한 법을 간직한다면 곧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 되고 세간에 처해 있을 때에는 인도하는 스승이신 세존께서 아시네.
010_0386_b_19L若持如此法,
則爲供養佛, 處世爲世尊, 導師之所知。
폐악무도(弊惡無道)한 악마 파순(波旬)이라도 만일 사람 사이에 머물면서 이 경을 자세히 설하는 이에겐 능히 그 기회를 얻지 못하네.
010_0386_b_20L設弊魔波旬, 不能得其便, 若在於人閒,
廣說斯經者。
이러한 이는 큰 지혜를 가진 것이며 일체를 보시하는 시주이며 계율과 금기를 구족한 것이며 인도하는 스승이신 부처님을 밝게 아는 이라.
010_0386_b_22L是黨大智慧, 主布施一切,
戒禁爲具足, 曉佛導師者。
그는 인욕의 힘으로 용맹스럽게 건너고 정진하면서 노닐고 거닐며 선정에 대하여 총명하게 통달하고 즐기고 세간을 분별하네.
010_0386_b_23L斯度忍力勇,
遊步於精進, 聰達樂禪定, 分別於世閒。
010_0386_c_02L 부처님의 공하고 없는 법을 설하니 이러한 것들을 듣는다면 그 대장부는 다시 오래지 않아
도량에서 악마를 항복받으리.
010_0386_b_24L說佛空無法, 其聞斯等類, 大士不復久,
處道場降魔。
4. 해제법품(解諸法品)
010_0386_c_03L解諸法品第四
부처님께서 다시 지심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이미 세간의 경계를 건넜기에 세속을 보여 주고, 세속에 대해 습기[習]와 즐거움[樂]을 가르치며, 또한 세속의 즐거움을 건너고 세속을 멸진하고자 한다. 이것을 일컬어 세간의 5음(陰)이라고 하는 것이다. 누군가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되, ‘세간과 자아를 벗어나야 세간을 멸진하니, 5음을 구해야 한다’고 하며, 도(道)에서 노니는 자가 있다면 이름하여 ‘두 가지 어긋난 길을 걷는 자[二所慕之徑]’라고 한다.
다시 범천아, 이렇게 5음이라 이름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5음이란 세속의 말일 뿐이다. 여러 견해를 구하는 까닭에 세속을 버리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하니, 그 보는 견해는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멸진이라고 하는 것이다. 멸진을 향하는 도는 여러 견해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세속의 욕망을 멸하는 것이며 바른 도를 향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범천아, 부처님은 이에 대해 이르시길 ‘세간에는 삼자(三刺)의 문과 삼중(三重)의 부담이 있으니, 세간에서 풍속을 익히는 것과 세간을 멸진하는 것과 세간을 멸진하여 해탈을 구하는 것이다’라고 설하셨다.”
그때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가령 여래께서 4제(諦)의 일을 말씀하셨는데 진리란 무엇에 귀착됩니까?”
010_0386_c_16L於是,持心梵天白世尊曰:“假使如來說四諦事,諦何所歸?”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괴로움에 대한 진리[苦諦]이며, 집기에 대한 습제(習諦:集諦)라고 하지만, 그것이 성스러운 진리[聖諦]는 아니다. 이것이 멸진에 대한 진리[盡諦]이며, 멸진을 향하는 도에 대한 진리[向道之諦]라고 하지만, 그것도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온갖 괴로움이 곧 성스러운 진리라면 일체의 소ㆍ말ㆍ당나귀ㆍ개ㆍ돼지 등의 축생도 모두 마땅히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를 획득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010_0387_a_02L 만일 온갖 갈애(渴愛)와 집착이 곧 성스러운 진리라면 5취(趣)에 태어나서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이 마땅히 성스러운 진리를 획득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만일 괴로움의 멸함이 성스러운 진리라면 일체의 중생이 단멸하는 일을 보거니와 그들은 모두 마땅히 멸함의 성스러운 진리를 지닌다고 해야 한다. 만일 도가 곧 진리라면 일체 유위(有爲)의 도에 의존하는 자도 모두 빠짐없이 마땅히 현성의 도라는 세력 있는 성스러운 진리를 획득한다고 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범천아,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성스러운 진리로 관찰할 때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 곧 괴로움이란 일어나는 일이 없다고 환히 아는 이것을 일컬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며, 그 사람이 갈애와 집착을 행하는 것은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 멸진의 법은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일컬어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 그리고 일체의 제법이 평등하여 둘이 없이 모든 길에 동등하게 대한다면 이것이 슬기롭고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진리라고 말하는 이유는 허위가 없다는 것인데 무엇을 일컬어 허위라고 하는가? 스스로 몸이 있다고 헤아리고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영혼이 있다고 집착하고 목숨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에 집착하고 3유(有)에 의지한다. 소유한 것을 떠난다 해도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고 멸하는 것에 의지하고 생사를 수용하고 열반을 믿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허위라고 한다.
이 여러 가지 수용되는 것은 여러 가지 수용되는 것에 있어 의지하는 바가 없고, 또한 구하는 바도 없다. 이것을 일컬어 진리라고 한다. 괴로움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허위라고 한다. 집기한 것을 멸하고자 한다면 이것도 역시 허위이다. ‘나는 마땅히 모두 증득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허위이다. 도를 수행한다고 하여도 이것 또한 허위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교화하시기 위해 세운 여덟 가지 도의 품목이 있는데, 예를 들어 4의지(意止)라면 이것도 역시 허위라고 일컫는다.”
범천이 다시 질문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부처님의 교화이며 마땅히 사유하는 바라고 하는 것입니까?”
010_0387_a_18L又問:“何謂佛之所教所當思者?”
“뜻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니 일체의 제법도 그와 같다. 이것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교화이며 마땅히 사유하는 바라고 하는 것이다. 4의지는 곧 머무는 바가 없으니, 여러 생각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이처럼 일체의 생각에도 이미 머물지 않는다면 곧 궁극적인 진실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실에 머문다면 이것은 곧 머무는 바가 없는 것이며, 뜻에 거처하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뜻에 머무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곧 실제가 아니니, 이름하여 허위라고 한다.
010_0387_b_02L그런 까닭에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한다. 실제도 없고 허위도 없는 것이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리고 관찰하는 것이 진리인데, 이른바 진리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진리다운 것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비록 출현하였다고 하나 일어난 바가 없으니 여래는 법의 성품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또한 항상 진리로서 관찰하여 정해진 생사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성스러운 진리에는 생사도 없고 열반도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에 순응하는 바가 있을 때에는 이 4제(諦)를 증득할 것이니, 이름하여 바른 진리라고 한다.”
010_0387_b_06L佛言:“梵天!若有順時證斯四諦,名曰正諦。”
다시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내세에 어떤 비구가 있으리니, 그는 능히 몸을 삼가지 못하고, 금기와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능히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밀한 지혜를 갖추지 못하면서 버젓이 강설하기를, ‘발생하는 것이 괴로움의 진리이고, 여러 갈래로 나아가는 것을 일컬어 집제(集諦)라고 한다.’고 하며, 또 ‘이곳에서 달리고 뛰며 여러 중생이 생하는 장소인 3유(有)를 파괴하는 것과 마땅히 길을 구하여 행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두 가지 진리라고 하니, 그 행상에서 달리고 뛰어야 한다.’고 설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말이다. 나는 그를 이름하여 외도의 무리라고 하니,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나의 성문도 아니다. 그 뜻은 나쁜 길로 나아갔으며, 바른 진리를 파괴한 것이며, 스스로 방일한 것이다. 내가 도량에 있는 불수(佛樹) 아래 앉아 있을 때 참된 진리[誠諦]에 귀착하지 못하였으나 허망함이란 없었다. 그리고 부처님은 여러 법에서 또한 나아가는 바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여래의 법을 구하되 두 가지로 보아서는 안 된다.
또한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물며 두 가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겠느냐?” 범천이 말하였다.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이시여.”
010_0387_b_18L勿言有二,爲二問也?”白曰:“不敢也。天中天!”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도되고 미혹된 길이다. 능히 일체의 나아가는 바를 제거할 수 없다.”
010_0387_b_19L答曰:“是爲顚倒迷惑之道,不能蠲除一切所趣。”
010_0387_c_02L이에 지심 범천이 세존께 말씀드렸다. “여래의 법에는 전도된 것이 없으며 또한 얻는 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성불(成佛)에 이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호칭을 ‘절대 평등한 깨달음의 지혜를 얻은 자[平等覺者]’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렇게 일컬었던 것입니까?” 대답하셨다. “범천아,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떻게 보이느냐? 내가 설한 법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실제의 것이냐, 허위인 것이냐?” 대답하였다. “허위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또한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에 편안히 이르러 머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여래가 나무 아래에 앉아 도량에서 머무를 때 애욕은 전도된 것일 뿐 본래 항상 청정한 것이며, 공이며, 저절로 본성이 없다고 환히 알았다. 그런데 환히 알았다는 것은 환히 안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또한 환히 알지 않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유로 내가 환히 안 법과 체득한 바른 깨달음이라는 것은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수용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고, 또한 자취도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일체의 모든 성품을 초월함으로써 말도 없고 언사도 없고, 글자도 없고 구절도 없으며, 또한 말로 가르치는 것도 없다. 이와 같이 범천아, 제법은 허공과 같은데 제법을 얻으려고 할 수 있겠는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또한 다시 세존이시여, 위대한 성인이신 여러 부처님은 도저히 가까이 갈 수가 없으신 분입니다. 일찍이 없었던 일로서 성실한 진리의 법을 구족하셨습니다.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는 큰 자비[大哀]를 지니시고, 고요한 법을 분별하고 환히 깨달으시어 문자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하십니다. 그리고 여래께서 설하시는 법을 즐거이 믿는 자는 여러 덕의 근본을 세우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구족하였던 자입니다. 이 중생들은 여러 부처님에 대하여 죄 되는 것이나 허물이 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세간이 빠짐없이 함께 그를 믿는다 해도 그의 뜻에는 집착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010_0388_a_02L또한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세간의 사람들은 법을 믿는데 법은 곧 자아의 소유입니다. 세속에 의지하고 법에 집착하지만 법에는 실제도 없고 허위도 없으며,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속의 사람들은 열반에 의지하고 기대지만 이것을 관찰해 보면 끝도 없고 처음도 없으며, 또한 열반도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선한 것과 덕스러운 것에 기댑니다. 그러나 선한 것도 없고 덕스러운 것도 없으며, 아울러 선하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안락한 것에 기댑니다. 그러나 괴로운 것도 없고 즐거운 것도 없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부처님에 기대고 부처님의 출현에 기댑니다. 그러나 역시 생하시는 일도 없고, 멸도하시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다시 법이 있고 마땅히 세심하게 살피고 드러내고 선양하는 성스러운 대중이 있다고 설하지만, 그렇게 세심하게 살피는 것은 무위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경전을 세간에서 가히 믿는다는 것은, 비유하면 물에서 불이 일어나고 불에서 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의 화합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티끌 같은 애욕이 곧 부처님의 도를 이룬다는 것을 깨닫고 요지해야 하니, 이는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번뇌와 괴로움을 깨닫고 요지하는 것을 바탕으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지만 그러면서도 바른 깨달음을 얻은 것은 없다. 이미 설한 것이 있다 하더라고 그 형체를 보지는 못하고 또한 생각하는 바도 없다. 또한 두 가지를 만들지도 못하고 증득하는 바도 없고 멸도를 얻지도 못하고 고요함도 없는 것이다.”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족성자와 족성녀가 이와 같은 법을 환히 알고 믿는 자가 있다면 여러 견해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을 얻을 것이니, 이와 같은 이는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하고 예를 올릴 만한 사람입니다. 과거의 부처님 여래를 받들었으니 이미 여러 가지 행을 실천한 자입니다. 그리고 선한 벗들이 보고 섭수하고 보호하니, 그의 의지는 즐거우면서도 미묘합니다. 온갖 덕의 근본을 심고 나서 안온한 진리의 곳간을 얻은 자입니다.
온갖 법을 관람하고 간직하여 온갖 죄를 멸한 자입니다. 도의 업을 건립하여 귀한 종성을 성취한 자입니다. 여래께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신 것 중에서 으뜸이 되는 것을 다 간직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큰 보시를 삼는 자입니다. 집착과 번뇌를 내버렸으니, 곧 계율을 지키는 힘을 지닌 자입니다. 애욕을 없애는 힘을 지녔으니, 곧 인욕의 힘을 지닌 자입니다. 또한 불길한 것이 없고 화내는 일이 없고 용맹한 정진력을 지녔으니, 나태하거나 싫어하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선정의 힘으로 죄업을 내던지고 제거한 자입니다. 지혜의 힘으로 삿된 견해를 버리고 여읜 자입니다. 그리하여 일체의 모든 악마가 움직이고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며, 적과 원수가 능히 그를 이길 수 없으니, 끝내 속이고 미혹하게 할 수 없는 자입니다.
010_0388_b_02L 세간 사람들이 말한 것에 대해 지극한 정성으로 강설하는 자입니다. 제법이 본래 청정함을 환히 아니 진실한 자입니다. 또한 구경의 법을 설하니 그는 곧 여래가 섭수하고 보호하는 자이며, 즐겁고 어질고 온화하게 안온한 곳에서 노닐고 거주하는 자이며, 슬기롭고 성스러운 업으로 재물이 많고 부귀한 자이며, 슬기롭고 성스러운 행으로 만족함을 아는 자입니다. 훌륭하게 돌보고 오래 보살피며 은근히 공양하고 섬기니, 곧 마땅히 보고 믿어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자입니다. 그리고 뜻으로 벗어나려는 자를 격려하는 자입니다.
즐거이 해탈을 얻으려는 자를 열심히 제도하는 자입니다. 의지할 데가 없는 자로 하여금 기대게 하는 자입니다. 무위를 즐기는 자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하는 자입니다. 도를 즐기는 자에게 넓고 큰 것을 갖추게 하는 자입니다. 초월하는 것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것을 드러내어 보여주는 자입니다. 여러 방면의 의술에 있어서 의왕(醫王)인 자입니다. 일체의 병든 자에게 좋은 약을 지어 주는 자입니다. 지혜에 이르려는 자에게 힘을 지원해 주는 자입니다. 세력을 얻으려는 자를 즐겁게 하여 그것으로 자재함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따르지도 수용하지도 않는 자입니다. 사람들이 삼가거나 두려워하여 옷이나 털이 곤두서지 아니함이 없는 자입니다.
또한 사자의 걸음과 같이 미묘한 수레를 얻은 자입니다. 천신이나 용과 같이 그 마음이 안온하고 조화로운 자입니다. 비유하면 잘 훈련된 코끼리와 같이 대중들 가운데서 머물고 노닙니다. 마치 신선과 같은 용맹함에 도달한 자입니다. 원한 맺힌 적들에게 항복받고 큰 모임에서 노니는 자입니다. 뜻이 강하여 두려움이 없으니 결과적으로 뜻대로 하여도 무서워하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바른 진리를 설하되, 그 어떤 것에서도 어려움이 없습니다. 더럽고 수고스러운 법을 제거하여 보름달과 같은 자입니다. 지혜와 광명의 횃불이 멀리 비추는 것과 같은 자입니다. 해가 떠오를 때처럼 비추지 못하는 것이 없는 자입니다. 온갖 어둠을 멸진하고 제거하는 것이 밝혀 놓은 등불과 같은 자입니다. 또한 여러 집착을 떠나되 늘어나거나 줄어든 것이 없는 자입니다.
010_0388_c_02L 온갖 행을 지니되 땅과 같아서 중생들이 그를 우러르고 살아가는 것이 마치 좋은 밭에 백 가지 곡식을 윤택하게 심어 놓은 것과 같은 자입니다. 일체의 더러운 것을 세탁하는 것은 비유하면 물과 같은 자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을 멸진하고 제거하는 것이 마치 불과 같은 자입니다. 일체 법에 집착하는 것이 없으니 마치 바람과 같은 자입니다. 흔드는 것이 불가능하니 수미산과 같은 자입니다. 뜻과 성품이 견고하고 강건한 것이 마치 금강 철위산과 같은 자입니다. 여러 외도와 이교도가 능히 당해내지 못하는 자입니다. 성문과 연각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자입니다.
법에 대해 동등한 맛이니 바닷물의 맛이 한맛[一味]인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곧 제도하는 스승이 되는 자입니다. 또한 일체의 더러움과 피로함의 갈증을 제거하는 자입니다. 경의 법을 사모하고 구하여 만족하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곧 지혜에 있어 흘러넘치는 일이 없는 자입니다. 그는 곧 성스러운 제왕이 되어 법륜을 굴리는 자입니다. 얼굴과 용모가 수승하고 기이한 것이 제석천과 같은 자이며, 마음으로 자재를 얻는 것이 범천과 같은 자입니다. 법을 연설하는 것이 하늘에서 벼락과 우레가 치는 것과 같은 자입니다. 감로의 법을 내리는 것이 때맞춰 내리는 비와 같은 자입니다.
또한 그는 5근(根)과 5력(力) 그리고 7각지(覺支:覺意)를 능히 더욱 늘릴 수 있는 자입니다. 그는 생사의 근심을 초월하여 건널 수 있는 자입니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에 문득 들어갈 수 있는 자입니다. 부처님의 바른 도에 접근해 도달할 수 있는 자입니다. 마땅히 널리 듣는 것을 획득하였으니, 필적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측량할 수 있는 한계를 지나갔으니 모든 것이 한량이 없는 자입니다. 지혜와 변재에 있어서 동등한 반려가 없는 자입니다. 다라니(陀羅尼)를 얻었으며, 뜻과 성품이 견고하고 강건한 자입니다. 의지가 총명하여 중생들의 성품을 보는 데에 도달한 자입니다.
두루 여러 법을 관찰하되, 그 의도가 결과적으로 선양되는 자입니다. 세간에 사는 사람에게 항상 자비와 불쌍하고 애절히 여기는 마음으로 행하는 자입니다. 세속의 일을 초월하는 것을 이미 얻은 자입니다. 집착하는 바가 없이 행함이 비유하면 연꽃과 같은 자입니다. 세속 법에 의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자입니다. 밝은 지혜를 가진 여러 사람들이 빠짐없이 사랑하고 공경하는 자입니다. 식견이 넓은 사람들이 깊이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온갖 지혜 있는 장부들이 항상 공경하고 순응하는 자입니다. 여러 천신과 세상 사람들이 빠짐없이 받들고 섬기는 자입니다. 선정의 사유에 든 여러 대중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리는 자입니다. 슬기롭고 성스러운 여러 대중들이 모두 와서 으뜸으로 모시는 자입니다.
010_0389_a_02L 성문과 연각이 함께 흠모하고 축하하는 자입니다. 토지의 행상을 멀리 떠나는 것을 좋아하니,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없고 이익을 탐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 위신이 우뚝 솟아 슬기롭고 성스러운 이의 자취를 밟는 자입니다. 단정하고 수승하고 단아하고 색이 좋은 용모가 미치기 어려운 자입니다. 휘황찬란하게 빛나 궁극적으로 칭할 수 없는 자입니다. 그는 상호를 갖추어 스스로 장엄하는 자입니다. 그는 능히 부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파악하고 간직하는 자입니다. 그는 여러 교법과 교훈과 귀감이 되는 것에 능히 순응하고 보호하는 자입니다. 슬기롭고 성스러운 대중들에게 중생 제도를 장려하는 자입니다. 여러 부처님의 바른 깨달음을 항상 보는 자입니다.
마땅히 여러 부처님의 눈을 속히 성취할 원인을 지닌 자입니다. 여러 부처님께서 보시고 기별[記]을 주게 되는 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세 가지 인[三忍]을 획득하고 구족하는 자입니다. 마땅히 부처님의 나무 아래를 찾아가 앉을 자입니다. 능히 악마와 그 관속을 항복시킬 자입니다. 여러 신통과 지혜를 얻어 법륜을 굴리는 자입니다. 여러 부처님 일을 능히 일으키고 세우고 만들어서 깊은 법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하늘 중의 하늘이시여, 제가 1겁 또는 1겁 이상 그와 같은 바른 장부들에 대해서 묻고 드러내고 선양하여도 마지막까지 그 행한 바로 도달하게 되는 복덕의 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로 여러 부처님의 도가 심오하고 미묘한 것은 그와 같으니 수용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보는 것이 불가능하고, 환히 알기 어렵고, 요지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수용하고 간직하고 읊고 암송하고 읽으며, 또한 받들어 행한다면, 그리고 만일 능히 널리 펴고 두루 시행하게 하고 나누어 베풀며, 다른 사람에게 법을 설한다면, 대중들에게 제일가는 돈독한 믿음을 확립시킬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여러 바른 대장부에 대해 묻고 답한 것에는 그들의 지극히 진실한 덕이 능히 안온하게 궁극적으로 다 파악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이 궁극적으로 파악한 것은 능히 알지 못하고, 그것에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 여래는 걸림 없는 지혜로써 그 덕을 펴고 창달한다. 그리하여 그 궁극적인 내용을 모두 통달하고 요지한다.
여래가 설한 구절과 의미와 취지와 의취(意趣)를 그 여러 바른 장부는 빠짐없이 마땅히 요달할 것이다. 그리고 두루 순종하여 거역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는다. 하는 바가 지극히 정성스러워 미혹해 하지 않는다. 빠짐없이 바른 의미와 의도를 건립하여 아무 곳으로나 뛰고 달리지 않는다. 장엄하고 장식하는 일에 있어서 밝으니, 상응하는 언사에 있어서와 같다. 곧 여래가 자세히 말하고 가르치는 바와 같아서 비유하자면 위대한 성인이 정성스러운 진리의 법을 강설하는 것과 같다.
010_0389_b_02L또한 만일 여래가 법을 설하면 다시 이것을 초월하여 문장과 구절을 장엄하고 장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능히 존재하는 것에 순응하는 것도 없고, 거스르는 것도 없고, 제어하는 것도 없고, 통달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궁극적으로 모두 깨닫거나 요달하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통달하고 식별하고 불방일(不放逸)하다. 그리하여 장엄하고 장식하는 데 있어 언사로써 알게 된 바를 따르지 않는다. 만일 언사가 없다면 그것이 곧 여래가 설법하는 언사이다. 여래가 가히 강설하는 경이라는 것은 방편으로 법을 선양하는 것이다. 여래는 끝이 없는 슬픔을 일으켜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널리 진술한 것이다.”
다시 질문하였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일컬어 여래께서 5력으로 치료한 것이라고 합니까?”
010_0389_b_08L又問世尊:“何謂如來五力所療?”
위대한 성인께서 답하여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법에 관련된 언사가 있고,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설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잘 권하는 방편이 있고, 법을 밝게 드러내어 구절의 의미를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도의 자취를 분별하여 큰 자비에 들어가는 것이 있다.” 부처님께서 다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을 여래가 5력으로 치료하는 것이라고 하니, 일체의 성문이나 연각 등이 능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가르침이 있다. 애욕에 더럽혀진 말이 있고, 전도된 말이 있다. 세속적인 말이 있고, 세속을 건넌 말이 있다. 유루(有漏)에 관한 말이 있고, 무루에 관한 말이 있다. 집착하는 것에 관한 말이 있고, 집착이 없는 것에 관한 말이 있다. 유죄의 말이 있고, 무죄의 말이 있다. 존재하는 것에 관한 말이 있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말이 있다. 자아와 인간과 수명(壽命)이라는 조작되어 증득된 언사가 있다. 생사윤회 또는 멸도에 관한 언사가 있다.
범천아, 이것이 여러 가지 언설이요, 온갖 언사라는 것이다. 언사를 허깨비와 같이 관찰해야 하니, 이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사를 꿈과 같이 관찰해야 하니, 실제가 없다고 보는 까닭이다. 언사를 되돌아오는 메아리와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소리에 의존하고 대하는 까닭이다. 언사를 그림자와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인연이 화합한 존재가 드러난 까닭이다. 언사를 거울에 비친 영상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비치어서 나타나는 까닭이다. 언사를 흔적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도장을 찍은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언사를 불꽃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전도된 채로 보는 까닭이다. 언사를 빈 것과 같다고 관찰해야 하니, 존재하는 것이 다해 버린 까닭이다. 언사를 말이 없는 것이라고 관찰해야 하니,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다.”
010_0389_c_02L부처님께서 범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이 제법의 언사를 환하게 안다면 이 보살은 제법의 언사를 강설할 수 있다. 또 제법에 대해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없으니, 기대는 것이 없기 때문에 걸림 없는 변재를 능히 얻게 된다. 걸림 없는 변재를 능히 얻게 됨으로써 그는 여러 걸림이 있는 대중을 위해 평등한 것을 밝게 드러낼 수 있다. 또한 똑같은 곳에서 경의 법을 강설해도 걸리는 일이 없다. 일체의 언사에 있어서 법의 성품을 부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언사에서 노닐지만 그것은 부서져야 할 것이기에 어느 것에도 기대는 일이 없다.
범천아, 설사 여래가 설한 것이라 하더라도 언사가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곧 법을 강설하는 것이 된다. 범천은 어느 곳에서 보살이 여래에 대하여 참된 진리의 일을 행하는 것인지와 그에 대해 선하게 권하는 방편에 대해 알고자 하였다. 범천아, 여래는 번뇌에 결박[結]과 한(恨)이 있음을 드러낸다. 또한 결박과 한에 더러움과 피로함이 있음을 드러낸다. 보살은 마땅히 빠짐없이 그러한 거취를 환하게 알아야 한다.
범천아, 무엇을 여래가 더러움에서 결박과 한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느냐? 더러움과 피로함은 자연적으로 평등하여 차별이나 특이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결박과 한에 더러움과 피로함을 드러낸다. 그리고 결박과 한에 의지하여 은혜와 보시와 열반과 청정함을 행한다. 말하자면 여러 어리석은 자들은 온갖 번뇌가 지닌 근심을 환히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보살은 온갖 보시할 만한 일에 대해서 환히 안다. 그것은 나중 세상에서 큰 보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취가 없다. 거취가 없는 것은, 말하자면 무위의 금기(禁忌)이니 참된 열반이다. 그들에게는 모두 존재하는 것도 없으며, 해당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010_0390_a_02L인욕(忍辱)은 무위이니, 허위이며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정진(精進)도 무위이니, 뜻을 준수하고 닦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정(禪定)도 무위이니, 즐거워할 바가 없는 까닭이다. 지혜(智慧)도 무위이니, 모습을 잡고 얻은 까닭이다. 탐욕에 대해서는 탐욕을 떠나는 것이 본래의 실제이니 법의 성품에는 애욕이 없는 까닭이며, 진에(瞋恚)을 여의는 것이 본래의 실제이니 법의 성품에는 결박과 한이 없다고 헤아리는 까닭이다.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이 본래의 실제이니 법의 성품에는 어리석음이 없다고 헤아리는 까닭이다. 생사가 무위의 본래의 실제라는 것은 생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위라는 것은 생사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정성스러움을 허망함이라고 하는 것은 언사를 본 것에 불과하며, 허망함을 지극히 정성스러움이라고 한 것은 곧 교만함과 방자함에 이른 것이다.
다시 범천아, 여래는 차례대로 진실한 진리를 원인으로 하고, 그 인연을 따르기에 상주하는 것이 있다고 헤아린다. 또한 나의 자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을 배제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또한 삿된 견해를 가진 자임을 자처하기도 하고 돈독한 믿음이 없는 자임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것은 반대되는 업을 일으키고 만들어서 반대되고 되풀이되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곧 믿음이 없는 것을 제거하고 소원을 빠짐없이 제거한다. 삿된 견해를 가진 자를 여래는 빠짐없이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을 위하여 분별하고 설한다. 상응하는 것을 보는 자가 있으니 여래는 그를 위하여 참된 진리의 가르침을 설한다. 가령 중생이 버릴 점이 많고 손상된 자이면서 스스로 위대한 일을 하는 자라는 교만을 지니어 스스로를 높이면 여래가 곧 참된 진리의 가르침으로써 그에게 강설하는 것이다.
범천아, 이것이 여래ㆍ지진(至眞)이 하는 일이니, 지진은 보살에게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가르친다. 그러면 마땅히 보살은 그 방편의 행을 깨달아 알게 되니, 만일 이 모든 설한 것으로 권화와 방편에 돌아가게 하면 여래를 만난 자는 문득 해탈을 얻게 된다. 그리고 사악하지 않은 일에 대해 돈독하게 믿는 자는 곧 여러 색신의 과보와 상응하는 바를 보아 중생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문득 여래로 인하여 해탈을 얻게 된다.
만일 법신을 연설하면 문득 여래의 진실한 진리[眞諦]의 언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사악한 법에서 해탈하여 강한 믿음을 행하게 된다. 법으로 말미암아 문자를 공경하고 헤아리는 자는 중생의 무리이니, 그들을 위하여 그것을 설할 수 없다. 삿된 견해의 법에서 해탈하고 일찍이 이것을 믿은 적이 없으며, 또한 얻은 바도 없고 차별하는 것도 없다.
010_0390_b_02L열반이 있다고 말하면 곧 잘못된 믿음이 된다. 전도된 더러움과 피로함에 거처하는 것은 무위이며 멸도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곧 믿고 해탈을 얻는 것이다. 생하는 바가 없는 법은 여러 법을 부수지 않는다. 또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곧 잘못된 믿음이 된다. 고요함에 들어가 건너려고 하지만 문득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잘못된 자는 곧 스스로 진실한 진리의 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에 있어서 범천아, 여래ㆍ지진은 어떤 방편으로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가? ‘보시하는 자는 큰 부귀함을 얻으며, 계율을 간직한 자는 천상에 태어나며, 인욕하는 자는 단정해지며, 정진하는 자는 밝음을 얻는다. 만일 선정에 드는 자는 희열에 도달하고 산란하지 않다. 지혜를 배운 자는 더러움과 피로함과 애욕에의 집착을 멸진하고 제거한다. 많이 들은 자는 빠르게 지혜를 얻고 열 가지 선을 행하게 된다. 그리하여 천상에 있게 되거나 인간에 머물게 된다. 자비와 기쁨과 평정을 실천하여 범천에 오르게 된다. 고요하고 담백한 것을 관찰하여 결과를 획득하고 유학(有學)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아가 무학(無學)의 경지와 연각(緣覺)의 경지와 청정한 부처님 중우(衆祐)의 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설한다. 그리하여 시현한 지혜는 그 끝이 없고 열반에 대해서도 평등하게 대하여 일체의 괴로움을 멸진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나는 곧 그때 훌륭한 권화와 방편을 쓴 것이니, 여러 중생을 위하여 베풀고 알리고 드러내어 보인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상법(像法)이니, 여래는 일찍이 마음으로 온갖 생각을 품어서 나의 자아와 사람과 수명(壽命)을 헤아린 적이 없는 것이다.
여래가 행한 바는 또한 얻은 바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인색하고 탐착하는 것이 없고, 또한 베푸는 것도 없다. 또한 계율을 간직하는 것도 없고, 금기를 어기는 것도 없다. 또한 인욕하는 것도 없고, 화내는 것도 없다. 또한 정진하는 것도 없고, 게으른 것도 없다. 또한 선정에 드는 것도 없고, 그 뜻이 산란한 일도 없다. 또한 지혜도 없고 어리석은 일도 없다. 또한 도가 있다는 것도 없고, 멸도하는 것도 없다. 안락해 하는 것도 없고, 온갖 근심도 없다.”
010_0390_c_02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범천아, 중생을 교화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고, 오로지 닦고 받들어 행하게 한다. 부지런히 정진하게 하고 오로지 닦고 받들어 행하게 한 것을 원인으로 하여 마땅히 이 법에 들어가야 하니, 본래 의도한 서원과 같아야 한다. 혹은 예류과[預流果:道跡, 須陀洹)ㆍ일래과[一來果:往來, 斯陀含]ㆍ불환과(不還果:阿那含)ㆍ무착(無著:阿羅漢)과 연각(緣覺)에 이르기까지 획득하는 경우가 있다. 다시 위없는 바르고 진실한 도를 성취하는 데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무위(無爲)에 이르러 건너는 경우도 있다.
“무엇을 일컬어 여래가 설한 것이라고 합니까?” “법에는 눈이 없으니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도 없다. 귀ㆍ코ㆍ입ㆍ몸ㆍ뜻도 또한 이와 같으니, 벗어나는 일이란 없다. 왜냐하면 눈은 곧 공이니 나[我]가 있지도 않고, 또한 나의 소유[我所]도 없어 곧 모두가 본래 청정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이 일체는 모두 해탈의 범주에 돌아간다. 그리고 그 돌아가는 곳은 현혹되는 곳이 아니다.2)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 이 여섯 가지가 또한 그러하다. 일체의 법은 모두 빠짐없이 공이고 무상(無想)이고 무원(無願)이며, 일어나는 것이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또한 머무는 것도 없고 머물지 않는 것도 없다. 말하자면 뜻에 머무는 일이 없이 생하는 것이니, 본래 청정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담백한 것이며, 고요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여래는 일체의 문자로써 해탈의 범주를 연설한다. 그리고 어리석은 문구를 원만하게 제어함으로써 두루 문자에 수순하여 마음으로 마땅히 그것을 관찰하니, 그것이 진실한 진리의 가르침인 것이다. 여래는 일체의 분별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탈에 이르게 한다. 감히 설하셨던 것은 모두 참된 진리의 구절들이다. 여래가 경을 설하면 티끌이나 수고스러운 것이 없다. 연설한 법은 모두 해탈에 들어가고3) 멸도로 돌아간다. 이것이 바로 여래가 설한 전적(典籍)이다.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이라고 한다.”
010_0391_a_02L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여래ㆍ지진은 어떤 방편에 입각하여 두루 큰 자비를 닦는 것이며, 중생을 위하여 법을 강설하는 것인가? 여래는 곧 서른두 가지 일로써 일으키고 전달하니, 큰 자비를 더하여 중생을 제도한다. 어떤 것이 서른두 가지인가?
첫째, 나의 자아란 없으니, 일체 법에서 중생의 부류로 하여금 몸이 없음을 이해하고 믿게 해야 한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둘째, 일체 법에서 중생은 사람이 있지도 않은데 반대로 사람이 있다고 한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셋째, 일체의 제법에는 명근(命根)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명근이 있다고 헤아린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넷째, 일체의 제법에는 수명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수명이 있다고 헤아린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다섯째, 일체의 제법은 무소유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처소가 있다고 헤아린다. 여래는 여기에서 큰 자비를 일으킨다. 여섯째, 일체의 제법은 도무지 의지할 바가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의지하고 집착할 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일곱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허무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즐길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덟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나[我]라는 자아가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나라는 자아가 있다고 헤아린다.
아홉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주인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오로지 뜻으로 탐착하고 받아들인다. 열째, 일체의 제법은 수용할 만한 것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모습에 의지하고 기댄다. 열한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생겨난 일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생겨나는 것에 집착한다. 열두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사라지는 것이 없는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생사에 탐착한다.
010_0391_b_02L열셋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애욕의 티끌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티끌과 더러움에 빠지고 잠긴다. 열넷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탐착과 욕심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오염되어 있다. 열다섯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성냄과 노여움을 떠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분노를 품고 원한에 맺힌다. 열여섯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어리석음을 떠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미혹하게 된다.
열일곱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온 곳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나아가는 것을 즐기고 그것에 기댄다. 열여덟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가는 곳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끝과 처음이라는 것에 의지한다. 열아홉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짓고 행하는 것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열심히 수행할 것을 건립한다. 스무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방일함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방종하고 방자하게 뛰고 달린다.
스물한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공이며 청정한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본 것에 머문다. 스물두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생각함이 없는 것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생각하고 행하여 그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스물셋째, 일체의 제법은 모두 바람이 없는 것[無願]인데도 중생들은 반대로 요행으로 얻는 것에 뜻을 둔다. 스물넷째, 이미 멀리 떠났는데도 몇 가지 일에 집착하는 바가 있는 자에게는 세속은 괴롭고 분노하는 곳이며 원한을 맺는 곳이어서 근심하고 싫어하는 것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원수 및 적과 함께하지 않으려고 하나 모이고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러 참을 수 없는 곳에서 어질게 화합해야 한다.
스물다섯째, 전도된 것을 준수하고 닦으니 세간에서 익히는 것은 사악한 길에서 노니는 것이다. 그에게 능히 태어나야 할 곳을 포기하고 제거하게 해야 한다. 스물여섯째, 그는 길을 살피는 일 없이 나아가니 세속에서 의지하는 바인 재물과 이익에 의하여 괴롭게 된다. 그러면서도 뜻으로 모든 자산과 사업을 그리워한다. 그를 마땅히 억제하여 욕심내는 일이 없도록 하여 슬기롭고 성스러운 재화를 구족하게 하고, 믿음[信]ㆍ계율[戒]ㆍ부끄러움[慚愧]ㆍ들음[聞]ㆍ보시[施]ㆍ지혜(智慧)를 건립하여 이에 일곱 가지 재산을 구족하게 한다.
010_0391_c_02L스물일곱째, 나는 중생을 은혜와 사랑의 노예라고 일컬으니, 중생들은 그것들이 견고하지도 요긴하지도 않은데 견고하고 요긴하다는 생각을 한다. 재산과 사업과 집과 거처와 처자가 있어 즐겁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코 편안한 것이 못된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일컬어 은혜와 사랑의 노예라고 한 것이다. 중생들은 견고하지도 요긴하지도 않은데 견고하고 요긴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을 위하여 강설하니 상주하는 것이 있다고 헤아리는 자에게 무상함을 드러내어야 한다. 스물여덟째, 중생이란 재산과 이익과 사업을 구하지만 그것은 원수라고 나는 일컫는다. 그러나 중생들은 반대로 그것이 친한 벗이라고 하니, 나는 친한 벗의 행을 건립하고 드러내어 힘들고 괴로운 근심을 제거하고 궁극적인 멸도를 성취하게 한다.
스물아홉째, 중생이란 반대로 사악한 업으로 생계를 꾸려간다고 나는 일컫는다. 그리고 각각 몇 가지 말과 가르침에서 머문다. 이들을 위하여 마땅히 청정하고 미묘한 무업(無業)의 명령을 강설하고 분별하고 설법한다. 서른째, 중생이란 여러 가지 티끌과 더러움에 있으면서 오염된 것을 나타낸다고 나는 일컫는다. 집에서 거주하는 일에는 근심과 손해가 많고 힘든 사무도 많다. 이들을 위하여 삼계를 벗어나고 일제히 함께 건널 수 있도록 설법한다.
서른한째, 일체의 제법이 지어지는 곳에 거처하니, 그것은 탐욕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고 머문다. 온갖 인연들이 거처하는 것이 여러 가지가 세워지는 모습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그곳에서 닦기를 게을리 한다. 그리하여 이들을 위하여 성스러운 해탈에 이르도록 설법하고 정진을 권하여 견고하고 긴요한 것으로 건너게 하고, 경의 법을 설하여 빠짐없이 안락함을 획득하게 한다. 또한 여기에 더하여 다시 반대로 걸림 없는 지혜를 버린다. 서른두째, 하천한 성문과 연각에 대하여 가장 존귀한 멸도라고 뜻을 둔다. 그리하여 마땅히 이들을 위하여 미묘한 행을 드러내고 보여 주려 한다. 여래는 이로 인하여 중생에게서 큰 자비를 일으키고 천명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범천아, 만일 보살로서 이러한 서른두 가지 일을 받들어 행하고 큰 자비를 합하고 모으는 자가 있다면 이러한 보살은 위대한 중생[大士]으로서 이름하여 큰 복전이며 큰 위신력을 지닌 자라고 한다. 그는 우뚝 솟은 것을 좋아하여 불퇴전의 경지에 이른다. 그리고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필요한 행을 만들어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