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16_1284_b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016_1284_c_01L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016_1285_a_01L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 : 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 : 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016_1285_b_01L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 : 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 : 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016_1285_c_01L첫째는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殊勝語]이고, 둘째는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셋째는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入所知相]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넷째는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彼入因果]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다섯째는 그것3)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彼因果修差別]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여섯째는 이와 같은 수행 차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일곱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여덟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아홉째는 그것의 증과인 단멸[彼果斷]4)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열째는 그것의 증과인 지혜[彼果智]5)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여기서 말한 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모든 문구로써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 말씀임을 나타낸다.
또한 능히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 말한 바 열 가지 포섭처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한 일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에서만 여러 곳에서 설하심을 본다. 이른바 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자체[體]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자성, 즉 첫째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고, 둘째는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며, 셋째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의 자체라고 부른다. 유식성(唯識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말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자체라고 부르고, 보살의 10지를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보살의 율의를 여기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자체라고 부르고, 수능가마(首楞伽摩)6)ㆍ허공장(虛空藏)7) 등의 여러 삼마지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의 자체라 이름하며, 분별없는 지혜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 무주열반을 그것의 증과인 단멸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고,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며,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한 열 가지 포섭처로 인하여 대승은 성문승과 다름을 나타내고, 또한 가장 뛰어남을 나타낸다. 세존께서는 다만 보살을 위해서만 널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지니, 다만 대승에 의지하는 모든 부처님 세존에게만 열 가지 행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씀이 있다.8)
016_1286_a_01L또한 어째서 이 열 가지 양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여래의 말씀으로 인해서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성문승은 대승의 종성[大乘性]임을 부정하는가? 이 열 가지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함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 안에서만 여러 곳에서 설함을 보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포섭처는대보리의 성품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내고, 잘 성립하고 수순하며 위배되지 않고,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게송이 있다.
이 말씀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네. 이것은 가장 뛰어난 보리의 원인이므로 대승은 참다운 부처님 말씀임을 인정하네.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므로 뛰어나네.
016_1286_a_05L此說此餘見不見, 由此最勝菩提因,
故許大乘眞佛語, 由說十處故殊勝。
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이 순서를 두어서 이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가?9) 보살은 모든 법의 원인에 대해서 모름지기 먼저 잘 알고서 비로소 연기(緣起)에 대해서 마땅히 잘 통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인연에 의해 생겨난 모든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잘 알아야 한다.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가지 극단의 과실을 능히 멀리 여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이처럼 잘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바르게 잘 취한 양상에 통달하고, 모든 장애로부터 마음을 해탈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통달하고서, 이전의 가행위(加行位)에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증득함으로써 마땅히 다시 매우 높은 의욕[意樂]10)을 원만히 이루어야 하니, 청정함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청정한 의욕에 포섭되는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10지 중에서 나누어 차이를 두어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이른바 3무수(無數)의 대겁11)이 경과함을 필요로 한다. 그런 다음에 보살의 3학12)에 대해서 마땅히 원만하게 해야 한다. 원만하게 하고 나서 그 증과인 열반과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마땅히 현재 평등히 증득해야 하기 때문에,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 데 이처럼 순서를 둔다. 또한 이 말 안에서 모든 대승은 다 구경을 얻는다.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界]14)이었고 모든 법이 평등히 의지하네. 이로 인하여 모든 윤회세계[諸趣]가 존재하며 열반을 증득하느니라.
016_1286_b_02L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
여기서 다시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86_b_04L卽於此中復說頌曰:
모든 법을 거두어 저장함은 일체 종자식에 의해서이네. 그러므로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니 뛰어난 자에게 나는 열어 보이노라.
016_1286_b_05L由攝藏諸法, 一切種子識, 故名阿賴耶,
勝者我開示。
이와 같이 아함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다시 무슨 까닭으로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유정의 잡염품의 법은 여기에 저장되어 결과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15) 또한 이 식은 그것에 저장되어 원인의 성품이 되기 때문에16)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혹은 모든 유정은 이 식을 저장하여 자아로 삼기 때문에17)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또한 이 식을 역시 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 아함은 『해심밀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다.
016_1286_b_13L復次,此識亦名阿陁那識。此中阿笈摩者,如『解深密經』說:
아타나식은 매우 심오하고 미세하며 일체 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느니라.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무리18)에게는 열어 보이지 않느니 그들이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니라.
016_1286_b_15L阿陁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무슨 까닭에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19)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감각기관[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은 이 집수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 또한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때에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 그러므로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
016_1286_c_01L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를 말씀한 바와 같다.20) 여기서 의(意)21)에두 종류가 있다.22) 첫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23)의 의지처의 성품이다. 무간멸(無間滅)의 식은 능히 의식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된다.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곧 식의 잡염의 의지처이다. 식은 그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난다. 두 번째는 잡염이다. 대상을 요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사량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룬다.
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알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이 없다면 곧 불공무명(不共無明)24)이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다섯 가지 식25)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識身)은 반드시 안근 등 구유의(俱有依)26)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석하는 말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정(無想定)27)과 멸진정(滅盡定)28)의 차이도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상정은 염오의가 나타난 바이고, 멸진정에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선정은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한 기간의 생에서도 마땅히 염오가 없어야 한다.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약 아집ㆍ아만이 없다면 또한 어느 때나 아집의 현행함이 현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에서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만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29) 나ㆍ나의 것이라는 번뇌가 현행하면 선ㆍ무기는 아니다. 따라서 만일 구유현행(俱有現行)30)을 안립하고 상응현행(相應現行)31)이 아니라면 이런 과실이 없다. 여기서 게송으로 말한다.
만일 불공무명, 다섯 가지 식,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가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016_1286_c_22L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016_1287_a_01L 무상천의 생은 아집이 유전함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어야 하네.
아집이 항상 따라서 모든 종류에 없네.
016_1287_a_01L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염오의를 떠나서는 두 가지가 없고 세 가지는 위배되네.32) 이것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아집은 마땅히 없어야 하네.
016_1287_a_02L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참된 의미의 마음이 장차 일어나는 데에 항상 장애가 되네. 모든 부분에 함께 작용함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하네.
016_1287_a_03L眞義心當生, 常能爲障礙,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이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33)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색계ㆍ무색계의 두 가지 전(纏)34)의 번뇌처럼 이것은 그 유부무기성에 포섭된다. 색계ㆍ무색계의 전은 사마타가 섭장(攝藏)하는 바이기 때문이고, 이 의(意)는 어느 때나 항상 미세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35) 심(心)의 자체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성취함으로써 심의 자체로 삼는다. 이것을 종자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식이 전변 생기한다. 무슨 인연 때문에 역시 심이라고 이름하는가? 갖가지 법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가 적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째서 성문승에는 이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아타나식으로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36) 이것은 매우 미세한 경계37)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에 대해서는 이 말을 하지 않지만, 지혜를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다. 보살이라면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한다. 만약 이 지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어렵다.
016_1287_b_01L또한 성문승 중에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스런 뜻[異門密意]38)으로써 이미 아뢰야식을 말했다.39) 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 아뢰야를 즐기며, 아뢰야식을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은 아뢰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말씀하실 때에공경히 귀로 받아들인다.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주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한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어, 이렇게 매우 기이하고 희유한 법인 정법이 세간에 출현하였다. 성문승의 『여래출현사덕경(如來出現四德經)』40)에서 이 다른 견해의 비밀한 뜻에 의거해서 아뢰야식을 나타낸다.
대중부(大衆部)의 『아함경』 중에서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한 뜻으로써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것41)과 같이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다. 화지부(化地部) 중에서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한 뜻으로 이것을 궁생사온(窮生死蘊)42)이라 이름한다. 어느 곳, 어느 때에는 물질과 마음이 단절됨을 보지만 아뢰야식 안의 그것의 종자에는 단절이 없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는 아뢰야식을 체성[性]으로 삼고, 아타나식을 체성으로 삼으며, 마음을 체성으로 삼고, 아뢰야를 체성으로 삼고, 근본식을 체성으로 삼으며, 궁생사온을 체성으로 삼는다는 등으로 말해진다. 이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은 대왕(大王)의 길을 이룬다.
또한 어떤 다른 부류에서는 심의식은 하나의 의미이며 글자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의(意)와 식의 두 의미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있다. 마땅히 알지니 심의 의미도 역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어떤 부류에서는, 박가범께서 말씀하신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에서 5취온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다른 논사는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다른 논사는 살가야견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이들 여러 논사는 교의와 증명에 의거해서 아뢰야에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다.
016_1287_c_01L이처럼 아뢰야라는 명칭을 안립하는 것은, 성문승에서 안립하는 도리가 있는데, 역시 상응하지 않는다. 어리석지 않은 자라면 아뢰야식을 취하여 그 말씀을 안립한다. 아뢰야라는 명칭은 이와 같이 안립하면 곧 가장 뛰어난 것이 된다. 어째서 가장 뛰어난가?43) 만약 5취온을 아뢰야라고 이름하면,괴로움의 세계[惡趣] 중에서 한결같이 괴로운 곳에 태어나는 것을 가장 혐오해야 한다. 그곳의 중생은 한결같이 사랑하고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안에서 집착하여 섭장[執藏]한다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는 항상 속히 떠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만일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제4 정려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갖추는 유정은 항상 혐오가 있다. 그 안에서 집착하여 섭장한다는 일도 역시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살가야견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이 정법 안에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에게는 항상 혐오가 있다. 그 안에서 집착하여 섭장한다는 일도 역시 도리에 맞지 않다.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세계[惡趣]의 한결같이 괴로운 곳에 태어나서 괴로움의 온[苦蘊]을 여의고자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我愛)가 따라서 계박되어 여의려 하지 않는다. 제4 정려 이상에 태어나서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항상 혐오가 있긴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해서 아애가 따라서 계박된다. 이 정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아견을 혐오하긴 하지만, 장식(藏識)에 대해서 아애가 따라서 계박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안립하여 아뢰야라고 이름하는 것은 가장 뛰어남을 성취하는 것이다.
016_1288_a_01L이와 같이44)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다른 견해들을 말하였다. 이것의 양상을 안립하는 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의 양상을 안립하는 데 간략히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체의 양상[自相]을 안립하고, 둘째는 원인의 양상[因相]을 안립하며, 셋째는 결과의 양상[果相]을 안립한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의 자체의 양상을 안립함은 다음과 같다. 모든 잡염품의 법이 훈습에 의지해서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고, 능히 종자를 거두어 지니고 상응함에 의거함을 말한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의 원인의 양상을 안립함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의 종자인 아뢰야식이 어느 때나 항상 그 잡염 품류의 모든 법이 현전하는 데 원인이 됨을 말한다.이 중에서 아뢰야식의 결과의 양상을 안립함은 다음과 같다. 그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옛적부터 있어온 훈습에 의지해서 아뢰야식이 상속하여 생겨남을 말한다.
또한 무엇을 훈습이라 이름하는가?45) 훈습은 능전(能詮)46)이니, 무엇을 소전(所詮)이라 하는가?47) 그것은 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 능히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성품이 있다. 이것을 소전이라고 말한다. 거승(苣蕂)48)에서 꽃의 훈습이 있는 것과 같다. 거승과 꽃이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한다. 이 모든 거승은 그 향기를 내는 원인을 띠고 생겨난다. 또는 인정되듯이 탐욕 등을 행하는 자의 탐욕 등의 훈습이 그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이 마음은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을 띠고 생겨난다. 혹은 많이 듣는 자의 많이 듣는 훈습은 듣는 작의(作意)49)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이 마음은 그것이 기억하는 원인을 띠고 일어난다. 이 훈습은 능히 거두어 지니기 때문에 법을 지니는 자라고 이름함과 같다. 마땅히 알지니 아뢰야식의 훈습의 도리도 역시 그와 같다.
또한50)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품의 법의 종자는 별개의 것으로서 머무는가? 별개의 것이 아닌가? 그것의 종자는 별도의 실제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안에서 머무는 것 역시 별개가 아닌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고 능히 그것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작용의 힘[功能]이 있다. 이것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 이름한다.
016_1288_b_01L또한51) 아뢰야식과 그 모든 잡염법은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면 밝은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것이 동시적으로 다시 서로 그렇게 됨과 같다. 또한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동시에 쓰러지지 않음과 같다. 마땅히 관찰할지니 이 가운데 다시 서로 원인이 되는 도리도 역시 그러하다.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모든 잡염법도 역시 아뢰야식의 원인이 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인연을 안립할 수 있고 나머지로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훈습에는 차이도 없고 잡염도 없는데, 어떻게 능히 그 차이가 나고 잡염된 모든 법의 원인이 되는가?52) 여러 무늬를 내는 도구와 무늬로 물들여진 옷과 같다. 그것을 물들일 때에는 아직 차이가 나고 잡염된 하나 아닌 품류를 얻을 수 없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간 이후에는 옷 위에 문득 차이가 나고 잡염되어 하나 아닌 품류의 염색이 물들여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뢰야식도 역시 이와 같아서 차이 나고 잡염된 능훈(能熏)이 훈습하는 곳이다. 훈습할 때에는 아직 차이가 나고 잡염된 것을 얻을 수 없지만, 결과가 생기는 염색 그릇이 현전한 이후에는 문득 차이가 나고 잡염되어 한량없는 품류의 모든 법이 현현한다.
이와 같은 연기는 대승에서 극히 미세하고 매우 심오하다.53) 또한 간략히 말하면 두 종류의 연기가 있다. 하나는 자성을 분별하는 연기[分別自性緣起]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모든 법이 생기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연기라고 이름한다. 능히 갖가지 자성을 분별함으로써 조건[緣]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12지연기(支緣起)54)가 있으니, 이것을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연기라고 부른다. 살기 좋은 세계[善趣]와 괴로운 세계[惡趣]에 대해서 능히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음의 갖가지 자체를 분별함으로써 조건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016_1288_c_01L아뢰야식에 대해서 만일 첫 번째 연기에 어리석을 경우에는 혹은 자성을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가 있고,55)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56) 혹은 자재천(自在天)의 변화를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고,57)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58)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분별하는 이도 있다. 만약 두 번째 연기에 어리석을 경우에는 자아를 짓는 자[作者]라 하고, 자아를 받는 자[受者]라고 하여 분별하는 이도 있다. 비유하면 많은 선천적인 맹인들이 일찍이 코끼리를 보지 못했는데, 어떤 이가 코끼리를 말하고 그것을 보여 주는 경우와 같다.그 선천적인 맹인들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그 이빨을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그 귀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그 다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그 꼬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등을 만져보는 이도 있다.
어떤 이가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질문하니, 혹은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보습자루 같다고 말하고, 혹은 절구공이 같다고도 하며, 혹은 삼태기 같다고도 하고, 혹은 절구 같다고도 하며, 혹은 빗자루[箒] 같다고도 하고, 혹은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산석(山石)59) 같다고도 한다. 만일 이 두 가지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명의 선천적인 맹인도 역시 또한 이와 같아서, 혹은 자성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한다. 혹은 자재천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며,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헤아려서 집착한다. 혹은 자아를 짓는 자, 자아를 받는 자라고 헤아려서 집착한다.60) 아뢰야식의 자체의 성품ㆍ원인의 성품ㆍ결과의 성품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코끼리의 자성을 알지 못함과 같다.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식68)은 다시 서로 연(緣)이 된다.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에서 설한 게송과 같다.
016_1289_a_10L如是二識更互爲緣,如『阿毘達磨大乘經』中說伽他曰:
모든 법은 식에 저장되고 식이 법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네. 다시 서로 결과의 성품이 되고 또한 마땅히 원인의 성품이 되네.
016_1289_a_12L諸法於識藏, 識於法亦爾, 更互爲果性,
亦常爲因性。
만일69) 첫 번째 연기70)에 있어서 이처럼 두 종류의 식이 서로 인연이 되면, 두 번째 연기71)에 있어서는 다시 어떤 연이 되는가? 이것은 증상연(增上緣)72)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식은 몇 가지 조건[緣]으로부터 생겨나는가? 증상연(增上緣)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연기, 즉 생사를 다할 때까지 계속하는 5온,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윤회세계, 능히 수용하는 것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춘다.
016_1289_b_01L이와 같이 아뢰야식에 관한 다른 견해 및 양상을 안립하였다. 또한 이러한 다른 견해와 이러한 양상은 반드시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고, 전식에는 그렇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지 않으면 잡염과 청정이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번뇌의 잡염이나 업의 잡염이나 생의 잡염도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세간의 청정도 출세간의 청정도 역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73)
어째서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74) 모든 번뇌와 수번뇌(隨煩惱)75)의 훈습이 짓는 바 그 종자의 자체는, 여섯 가지 식에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ㆍ수번뇌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며, 이것이 그 훈습으로 인하여 종자를 이루고 다른 곳에 있지 않다고 안립하면, 곧 이 안식이 이미 없어져 다른 식으로 듣게 된다. 이와 같은 훈습도 훈습의 의지처도 다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이전에 멸하여 다른 식이 듣게 되고 현재 자체가 없다면, 안식과 그 탐욕 등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것은 과거로 되어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서 현재 자체가 없는 업으로부터 이숙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과 같다.
또한 이 안식은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남도, 훈습도 역시 성취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훈습은 탐욕 중에 머물지 않는다. 그 탐욕은 능히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나머지 식에도 머물 수 없다. 그 식들은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체 안에서 머물 수도 없다. 그것의 자체는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에 훈습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이 식은 식의 훈습처도 아니다. 마땅히 알지니 안식에서 말한 것처럼 나머지 전식도 역시 이와 같다.
016_1289_c_01L또한 무상천 등의 상부의 여러 지위로부터 떨어져서 이 세간에 와서 태어나면, 그때 번뇌와 수번뇌에 잡염된 처음의 식이 있다. 그런데 이 식이 생기할 때에는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한다. 의지처와 그것의 훈습은모두 이미 과거로서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번뇌를 다스리는 식이 생기하고 나서 세간의 나머지 모든 식이 이미 멸하면, 그때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가 이 다스리는 식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이 다스리는 식은 자성 해탈이기 때문이고,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와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세간의 식이 생겨나는데 그때 만일 아뢰야식을 떠나면, 그 모든 훈습과 의지처가 오랫동안 과거로 되어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종자가 없는데도 다시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떠나서 번뇌의 잡염은 모두 성립될 수 없다.
어째서 업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76) 행(行)의 지분이 식(識)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는 것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없다면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됨도 역시 상응하지 않는다.
016_1289_c_11L云何爲業雜染不成?行爲緣識不相應故。此若無者,取爲緣有亦不相應。
어찌하여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77) 결생(結生)78) 상속의 시기에 상응하지 않기79) 때문이다. 만일 이 선정이 아닌 지위[非等引地]80)에서 죽어서 태어날 때 중유(中有)81) 단계의 의(意)에서 염오의 의식을 일으킴으로써 결생 상속하면, 이 염오의 의식은 중유 안에서 멸하고 모태 중에서 식(識)과 갈라람(羯羅藍)82)과 다시 서로 화합한다. 만약 의식과 그것이 화합한다면, 이미 화합하고 나서 이 식에 의지하여 모태 중에서 의식이 전전함이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마땅히 두 가지 의식이 있어서 모태 중에서 동시에 전전하게 된다. 또한 그것과 화합하는 식이 의식의 성품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염오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때로 중단됨이 없기 때문이며, 의식의 인식대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6_1290_a_01L설사 화합식(和合識)이 의식이라 하더라도 이 화합의 의식이 곧일체종자식인가? 이 식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다른 의식이 일체종자식인가? 만약 이 화합식이 일체종자식이라면 이것은 곧 아뢰야식이다. 그대는 다른 명칭으로써 안립하여 의식이라고 한다. 만일 능히 의지하는 식이 일체종자식이라면, 의지처의 원인으로서의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고 능히 의지하는 과보로서의 식이 일체종자식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 화합식은 의식이 아니고 다만 이숙식이며 이것이 일체종자식임이 성취된다.
016_1290_b_01L또한 그곳에서 만일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바로 현전하면 나머지 세간의 마음은 다 멸진하기 때문에, 그때 바로 그 세계를 떠나야 한다. 만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85) 무소유처(無所有處)86)에 태어나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현전할 때는 마땅히 두 세계를 다 여의어야 한다. 이 세간을 벗어나는 식은 비상비비상처로써 의지할 세계로 삼지 않고, 역시 마땅히 무소유처로써 의지할 세계로 삼지 않는다. 또한 열반을 의지할 세계로 삼지도 않는다.
어째서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88) 아직 욕계[欲纏]89)의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색계[色纏]90)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는, 욕계의 선심으로써 욕계의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이 욕계의 가행의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색계의 마음은 과거의 여러 생에서 다른 마음과 사이가 벌어져서 마땅히 지금 선정의 마음 종자가 되지 못하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색계 선정의 마음을 성취하는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이 전전히 전래하여 지금의 인연이 되고, 가행의 선심이 증상연이 된다. 이처럼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세간의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의어서는 도리가 성립될 수 없다.
016_1290_c_01L어째서 세간을 벗어나는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91)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남의 말과 내면적으로 각기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함에 의하며, 이것을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남의 말과 이치 그대로 작의함은 이식에 훈습되는가? 의식에 훈습되는가? 아니면 양쪽에서 함께 훈습되는가? 만일 그 법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사유하면 그때 이식은 우선 생기할 수 없다. 의식도 역시 갖가지 산란되게 움직이는 다른 식에 의해 중단된다. 만약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해서 생겨날 때는, 이 들어서 훈습된 의식과 그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로 되어 반드시 자체가 없다. 어떻게 다시 종자가 되어서 능히 나중에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또한 이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하는 것은 세간의 마음이고, 그 바른 견해와 상응함은 출세간의 마음이다. 예전에 때로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마음은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다. 이미 훈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따라서 세간을 벗어나는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을 떠나서는 역시 성립될 수 없다. 이 중에서 들음의 훈습이 그 종자를 섭수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어떻게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이 잡염의 원인이 되며, 또한 세간을 벗어나고, 능히 그것을 다스리는 청정한 마음의 종자가 되는가?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은 예전부터 아직 훈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훈습은 결정적으로 없어야 한다. 이미 훈습이 없는데 무슨 종자로부터 생겨나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들음의 훈습[正聞熏習]된 종자가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016_1291_a_01L이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의 자성인가,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닌가? 만약 아뢰야식의 자성이라면어떻게 그 다스림의 종자가 되겠는가? 만일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니라면 이 들음의 훈습의 종자 의지처는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나아가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시기까지, 이 들음의 훈습은 좇아서 한 종류의 의지처가 전전하는 곳에 있으며, 이숙식 안에 머물러서 그것과 화합하여 함께 전전한다.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92) 그러나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니니, 그 다스림 종자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하품(下品)의 훈습에 의지해서 중품(中品)의 훈습을 이룬다. 중품의 훈습에 의지해서 상품의(上品) 훈습을 이룬다. 듣고 사유하며 닦음에 의지해서 누누히 닦아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바르게 들음의 훈습된 종자의 하품ㆍ중품ㆍ상품은 역시 법신의 종자로서 아뢰야식과 서로 다르고 아뢰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세간을 벗어나는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성품이기 때문에, 세간이긴 하지만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의 종자의 성품이다.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이긴 하지만, 능히 모든 번뇌의 계박을 다스리고, 이미 능히 모든 험난한 괴로움의 세계를 다스리며, 이미 일체의 모든 악업을 쇠퇴시켜서 다스린다. 또한 능히 모든 불보살을 수순하며 만나서 섬긴다. 이것은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얻는 바도 역시 법신에 포섭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문과 독각이 얻는 것은 오직 해탈신(解脫身)에만 포섭된다.
또한 이 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니니,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훈습이 하품ㆍ중품ㆍ상품의 순서로 점차 증가되면서, 이와 같이 이렇게93) 이숙의 과식(果識)이 순서대로 점차 멸한다. 곧 의지처를 전환한다. 이미 일체 종자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에, 곧 이숙과의 식과 모든 종자는 종자 없이 전환해서 모든 종자가 영원히 단멸된다.
016_1291_b_01L또한 마치 물과 우유처럼, 아뢰야식이 아닌 것과 아뢰야식이 동일한 곳에서 함께 전전하는데, 어떻게 아뢰야식의 일체종자는 멸진하고 아뢰야식의 일체종자가 아닌 것은 증가하는가? 비유하면 물과 거위가 마시는 우유와 같다. 또한 세간의 욕락을 여읠때, 선정이 아닌 지위[非等引地]의 훈습은 점차 감소하고 그 선정의 지위의 훈습은 점차 증가하여 전의(轉依)를 얻음과 같다.
또한94) 멸진정에 들어가도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음은 성인이 말씀한 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숙식은 마땅히 신체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95)을 다스리기 위해서 멸진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선정에서 나와서 이 식이 다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숙식은 중단되고 나서 결생(結生) 상속을 떠나면 거듭해서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의식이 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하면 이 마음이란 성립되지 않는다. 마땅히 선정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고,96) 인식대상과 인식작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善根)과 상응하는 과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불선과 무기는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의 심소가 현행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접촉[觸]의 심소가 있기 때문이며, 삼마지에서 작용의 힘이 있기 때문이고, 오직 표상작용의 심소만을 멸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의지[思]와 믿음의 심소 등의 선근이 현행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그 능히 의지하는 것을 부정하고 의지처를97) 여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고, 변행(遍行)심소가 아닌 것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016_1291_c_01L또한 이 선정 중에는 의식에 의거해서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면, 이 마음은 선ㆍ불선ㆍ무기가 다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98)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물질과 마음[色心]이 중단됨 없이 모든 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하면 이것은 성립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또한 무색계(無色界)나 무상천(無想天)에서 죽거나멸진정에서 나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있음이 인정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을 떠나서는 잡염과 청정이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양상과 같은 아뢰야식은 결정적으로 존재함이 성취된다. 여기서 세 게송이 있다.
보살은 청정한 마음으로 5식(識)을 멀리 여의는데 다른 것 없이 마음의 전의(轉依)를 그대는 장차 어떻게 이루겠는가?
016_1291_c_07L菩薩於淨心, 遠離於五識, 無餘,心轉依,
云何汝當作?
만일 다스림의 전의라면 단멸이 아니므로 성립되지 않네. 결과와 원인이 차별 없이 영원히 단멸함에 있어서 과실을 이루네.
016_1291_c_09L若對治轉依, 非斷故不成,
果因無差別, 於永斷成過。
종자가 없고 혹은 자체가 없음을 만일 전의라고 인정하면 그 두 가지의 없음은 없기 때문에 전의는 도리에 맞지 않네.
016_1291_c_10L無種或無體,
若許爲轉依, 無彼二無故, 轉依不應理。
또한 이 아뢰야식의 차별은 어떠한가?99) 마땅히 알지니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혹은 네 가지가 있다. 여기서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의 차별 때문이다. 첫째는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차별이다. 네 가지란 첫째는 이끌어내는 것[引發]의 차별이고, 둘째는 이숙(異熟)의 차별이며, 셋째는 형상을 반연함[緣相]의 차별이고, 넷째는 양상[相貌]의 차별이다.
이중에서 이끌어내는 것의 차별은 새롭게 훈습을 일으킴을 말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행의 지분이 식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고,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일은 마땅히 성립될 수 없다. 이 중에서 이숙의 차별은 행과 유의 지분을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이숙 차별함을 말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곧 종자가 없게 되므로, 다음 존재의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없어야 한다. 이 중에서 ‘형상을 반연함의 차별’이란 말나식[意] 가운데 아집의 형상을 반연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염오의 중의 아집의 인식대상이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016_1292_a_01L이 중에서 양상의 차별은 이른바 이 식에 공통된 양상[共相]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不共相]이 있고,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無受生種子]의 양상과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有受生種子]의 양상 등이다. 공통된 양상은 자연계[器世間]의 종자를 말하고,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각각 내부의 종자이다. 공통된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이다.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다스림이 생겨날 때는 오직 공통되지 않은 것만이 다스려져서 멸한다. 공통된 양상은 남의 분별에 섭지되어져서 다만 청정함을 볼 뿐이다. 관행을 닦는 자[瑜伽師]가 한 사물 중에서 갖가지 뛰어난 이해와 갖가지 소견을 다 성립할 수 있음과 같다. 여기서 두 게송이 있다.
단멸하기 어렵고 두루 알기 어려운 것을 마땅히 알지니 공통된 속박[共結]이라 이름하네. 관행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다르고 외부가 상대(相大)이기 때문이네.
016_1292_a_10L難斷難遍知, 應知名共結, 瑜伽者心異,
由外相大故。
청정한 사람은 단멸하지 않아도 그 안에서 청정함을 보네. 또한 청정한 불국토는 부처님께서 청정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네.
016_1292_a_12L淨者雖不滅, 而於中見淨;
又淸淨佛土, 由佛見淸淨。
또한 별도의 게송이 있어서, 앞에서 인용된 것에 대해서 갖가지 뛰어난 이해와 갖가지 소견을 다 성취할 수 있다.
016_1292_a_13L復有別頌:對前所引種種勝解,種種所見皆得成立。
관행을 닦는 이는 모두 한 사물에 대해서 갖가지 뛰어난 이해가 각기 다르고 갖가지 소견도 다 이루어질 수 있네. 그러므로 알지니 인식대상은 오직 식만이 존재하네.
016_1292_a_15L諸瑜伽師於一物, 種種勝解各不同,
種種所見皆得成, 故知所取唯有識。
만약 이것이 없다면 모든 자연계와 유정세간이 생겨나는 차별은 마땅히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또한 거칠고 무거움의 양상[麤重相]과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輕安相]이 있다. 거칠고 무거움의 양상이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이다.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은 유루 선법의 종자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초감된 이숙에 감당 능력이 없음과 감당 능력이 있음의 의지처의 차별이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016_1292_b_01L또한 수용의 다함이 있는 양상[有受盡相]100)과 수용의 다함이 없는 양상[無受盡相]이 있다. 수용의 다함이 있는 양상은이미 이숙과를 성숙시킨 선ㆍ불선의 종자이다. 수용의 다함이 없는 양상은 명언훈습의 종자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갖가지 희론에 의해 유전되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미 짓고 지어진 선악의 두 가지 업의 과보를 다 받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또한 새롭게 명언훈습이 생기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또한 갖춤의 양상[具足相]과 갖추지 않음의 양상[不具足相]이 있다. 모든 속박을 갖추는 자를 갖춤의 양상이라 이름한다. 세간의 욕망을 여의는 자를 감손의 양상[損減相]이라고 부른다. 유학의 성문과 모든 보살을 일부분을 영원히 없앤 양상[一分永拔相]이라 이름한다. 아라한ㆍ독각과 모든 여래는 번뇌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양상과 번뇌장ㆍ소지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양상이라고 부른다. 그 상응하는 바와 같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와 같이 잡염이 차례로 소멸하는 일은 마땅히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선과 불선의 법은 어떻게 이숙을 초감하는가? 그 이숙과는 무부무기이기 때문이다. 이숙과는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선과 불선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선과 불선은 서로 위배되기 때문에 만일 이숙과가 선ㆍ불선의 성품이라면 잡염과 환멸(還滅)은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이숙식은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일 뿐이다.
1)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 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운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를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는데, 태종이 작성한 서문이 바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이다.
2)죄를 지은 결과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세 가지 길로, 곧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을 말한다.
3)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를 말한다.
4)삼해탈(三解脫), 또는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한다. 아공(我空), 법공(法空), 아법구공(我法俱空)을 가리키기도 하고 삼공해탈(三空解脫), 무상해탈(無相解脫), 무원해탈(無愿解脫)을 가리키기도 한다.
5)여기서 인(忍)은 인가(忍可)ㆍ안인(安忍)의 뜻으로, 보살이 도리에 안주(安住)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인에는 무생법인(無生法忍)ㆍ무멸인(無滅忍)ㆍ인연인(因緣忍)ㆍ무주인(無住忍)이 있다.
6)인간의 심성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경계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육경(六境)을 말한다.
7)원문에는 ‘척(隻)’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맞지 않아 ‘형(夐)’으로 교정하여 번역하였다.
8)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것을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다. 황제술성기는 바로 고종이 기문을 썼다는 의미이다.
9)『유마경(維摩經)』「불국품(佛國品)」에 나오는 보옥(寶玉)으로 꾸며놓은 화려한 일산(日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상이나 탑의 상부를 장엄하게 꾸미는 데 사용된 덮개를 말한다, 본래는 천으로 만들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금속이나 목재로 조각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10)고승이 불경을 강론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11)향취산(香醉山)의 남쪽,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다는 상상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 연못은 둘레가 8백 리이며, 여기에 용왕이 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 흘러내려 섬부주(贍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12)경기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기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지역을 말한다. 즉 나라의 중심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3)중국 고대 관중지방에 흐르는 8개의 하천을 말한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이 바로 이 관중지방에 있다.
14)색계의 네 가지 단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세계로, 물질세계는 존재하나 감각의 욕망에서는 벗어난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15)마음을 더럽히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16)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1)이하 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관하여 말한다(第1 無等聖敎章).
2)산스크리트 Bhagavat의 음역으로서, 바가바(婆伽婆)ㆍ바가범(婆伽梵)이라고도 한다. 세존ㆍ중우(衆祐)로 번역된다. 박가범에는 유덕(有德)ㆍ자재ㆍ치성(熾盛)ㆍ단엄(端嚴)ㆍ명칭ㆍ길상ㆍ존귀 등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역하지 않는다. 5종 불번(不飜)의 하나이다.
3)유식에 들어감을 가리킨다.
4)증과인 단멸[果斷]은 열반을 가리킨다.
5)열반을 과단(果斷:斷果)이라 하는 데 대해서 보리(菩提)를 이렇게 부른다.
6)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 번뇌의 잠재 세력이다. 이에 대해 현재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이라고 한다.
7)범어 śūraṁgama의 음역으로서 수능엄(首楞嚴)이라고도 한다. 건상(健相)ㆍ건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이다.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에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8)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四空處定] 가운데 하나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9)이하 열 가지 의미의 순서에 관하여 말한다(第2 十義次第章).
10)범어 āśaya의 번역어이다. 휴식처ㆍ주처(住處)ㆍ사의(思意)ㆍ의향(意向)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의요(意樂)ㆍ의욕(意慾)ㆍ지원(志願)이라고 한역한다. 무슨 일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특히 선정 중의 작의(作意)를 가리킨다.
11)무수겁(無數劫)은 아승기겁(阿僧祇劫)의 번역어이다. 아승기는 범어 asaṁkhya의 음역어로서, 원래 발음은 아승기이지만 흔히 아승지라고도 한다.
12)매우 높은 계율[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이다.
13)이하 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하여 말한다(第3 衆名章).
14)여기서 계(界)는 범어 dhātu의 번역어로서 층(層)ㆍ근기(根基)ㆍ요소ㆍ원인[因]ㆍ세계ㆍ경계 등의 의미이다. 일체법의 종자를 계(界)라고 할 때는 원인ㆍ요소의 의미이다.
15)제8식의 3상(相:自相ㆍ果相ㆍ因相) 가운데 자상인 장식(藏識)에서 장(藏)의 세 가지 의미[能藏ㆍ所藏ㆍ執藏] 가운데 능장을 해석한다.
16)소장(所藏)의 의미이다.
17)집장(執藏)의 의미이다. 제7식이 제8식을 의지처[所依]로 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所緣]으로 하는데, 여기서 제8식을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띤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함을 말한다.
18)여기서 범부[凡]는 일반 범부를, 어리석은 무리[愚]는 아공법유설(我空法有說)을 주장하는 소승을 가리킨다.
19)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20)이하 심ㆍ의ㆍ식의 명칭을 해석한다.
21)제7 말나식을 가리킨다.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22)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전자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낸다. 후자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23)4연(緣:因緣ㆍ所緣緣ㆍ等無間緣ㆍ增上緣) 가운데 하나이다. 전념(前念)의 식이 멸하는 것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됨을 말한다. 수역(隋譯)이나 진제 역본에는 차제연(次第緣)으로 되어 있다. 4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 논서 제2권 주 76) 참조.
24)무명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눈다.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참고로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25)여기서 5동법(同法)은 5식을 의미한다.
26)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된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27)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이다.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인데,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한다.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으며,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28)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다.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29)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다.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30)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하는 아집을 의미한다.
31)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이다.
32)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5식을 가리킨다. 세 가지는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을 말한다.
33)유부무기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을 말한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된다.
34)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범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35)식을 첫 번째로 말하고, 의(意)를 두 번째로 말하며, 이제 세 번째로 심(心)을 말한다.
36)이하 성문승에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먼저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37)세간의 총명한 지혜로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하다고 표현한다.
38)이문밀의(異門密意)에서 이문은 관찰점을 달리하는 견해이고, 밀의는 본래 취지를 은밀히 해서 표면에 나타내지 않음을 말한다.
39)이하 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40)『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중에 있다.
41)근본식의 범어는 mūla-vijāna로서, 마치 나무가 뿌리(mūla)에 의존하는 것처럼 이 식이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42)궁생사온(窮生死蘊)은 궁생사, 즉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범부의 6도 윤회나 성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윤회하는 주체라는 의미이다.
43)이하 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가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다.
44)색계의 제4선천(禪天)이다. 그 이상의 여러 지위는 무색계의 4천(天)을 말한다.
45)이하 훈습에 관하여 설명한다(第5 熏習章).
46)전(詮)은 나타내는 것의 의미이다. 능전은 어구(語句)ㆍ문장ㆍ교법 등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의의(意義)와 내용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47)훈습은 능전(能詮)의 언어이고, 이로 인하여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하는 그 의의(意義)를 묻는다.
48)호마(胡麻)로서 검은 깨와 참깨의 총칭이다.
49)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이다. 촉(觸)의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受]이 있게 된다.
50)이하 아뢰야식과 종자의 불일불이성을 논한다(第6 不一不異章).
51)이하 아뢰야식과 잡염품이 서로 원인ㆍ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第7 更互爲因果章).
52)이하 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개별이면서 개별이 아닌 속성을 띰을 말한다(第8 因果別不別章).
53)이하 연기(緣起)에 관하여 설명한다(第9 緣起章).
54)일반적으로 12연기(緣起)ㆍ12인연(因緣)이라고 한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12단계로 설명한다. 즉 무명(無明:진리에 대한 無知)→행(行: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식(識: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명색(名色: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6입(入: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촉(觸:6根과 6境과 6識의 화합)→수(受:감수작용)→애(愛:갈애)→취(取: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유(有: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생(生:태어남ㆍ삶)→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이다.
55)인도의 6파철학(派哲學)의 하나인 상캬(Sāṃkhya)학파의 주장이다. 여기서 자성은 프라크리티(prakṛti)로서, 근본 원질(原質)ㆍ근본 자성ㆍ제1 원인[勝因] 등의 의미이다. 상캬학파에서는 세계를 푸루샤(puruṣa, 神我:순수 청정한 정신성)와 프라크리티의 2원론(元論)으로 파악하고,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한다. 여기서 프라크리티는 라자스(rajas, 動質)ㆍ사트바(sattva, 純質)ㆍ타마스(tamas, 暗質)의 세 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 만물의 차이는 이 세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그 중의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프라크리티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 즉, 붓디(buddhi:大ㆍ智)→아만→5유량(唯量:色ㆍ聲ㆍ香ㆍ味ㆍ觸)→5대(大:地ㆍ水ㆍ火ㆍ風ㆍ空)→11근(根: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손ㆍ발ㆍ입ㆍ생식기관ㆍ배설기관ㆍ心根)이 전개된다고 한다.
56)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ika)의 주장이다. 그들은 세간의 모든 원인은 다만 과거에 지은 것만이 있을 뿐으로서, 현재 노력하는 것은 결과를 초감할 수 없다고 하였다.
57)자재천(自在天)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을 논파한다. 이들은 다만 자재천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계(千界)를 주관한다고 한다(혹은 욕계의 제6天主라고도 한다). 이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이 자재천의 인(因)이 자아 등으로 하여금 선악을 일으키고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나중에 혐오를 일으켜서 해탈을 구하게 만든다고 한다.
58)바이세시카(Vaiśeṣika, 勝論)학파의 주장이다. 이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유물론적(唯物論的) 다원론(多元論)으로서 세계의 구성을 여섯 가지 범주[六句義], 즉 실체[實]ㆍ속성[德]ㆍ행위[業]ㆍ보편성[同:大有性]ㆍ특수성[異:同異性]ㆍ내재성[和合性]으로 설명하고, 이것들은 식에서 떠나 별도로 상주의 자체[體]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59)능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돌이다.
60)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가 있어서 모든 것의 작자(作者), 즉 원인이고 또한 그 과보를 받는 자라고 주장함을 말한다.
61)외부 종자는 훈습이 없이도 생겨나지만, 내부 종자는 훈습에 의하지 않으면 생기(生起)할 수 없다.
62)듣고 사유하며 수행함[聞思修]은 훈습이 없이도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63)아뢰야식을 가리킨다. 모든 식이 전변 생기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64)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고 한다.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식, 즉 전식(轉識)이다.
65)다음의 두 구절은 수용식의 작용을 구별해서 말한다.
66)헤아리는 것[推]은 사(思)ㆍ작의(作意) 등의 심소법을 말한다.
67)여기서 심법은 심소법(心所法:심리작용)을 말한다.
68)근본식인 아뢰야식과 전식인 7식(識)을 말한다.
69)이하 네 가지 연[四緣]에 관하여 말한다(第10 四緣章).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이 발생함에 있어서 그 연(緣)을 인연ㆍ증상연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70)앞에서 말한 자성을 분별하는 연기[分別自性緣起]를 말한다.
71)앞에서 말한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
72)증상연(增上緣)은 그것이 생겨나는 데 외부로부터 도와주는 힘을 말한다. 이에는 유력(有力) 증상연과 무력(無力) 증상연이 있다. 전자는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는 조건[緣]이고, 후자는 다른 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조건이다.
73)이하 앞에서 말한 이문(異門)과 양상들이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고 다른식에는 없으므로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을 번뇌의 잡염ㆍ업의 잡염ㆍ태어남의 잡염ㆍ세간의 청정ㆍ출세간의 청정ㆍ도리에 수순함이 성립되는 순서대로 설명한다.
74)이하 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다(第11 煩惱染章).
75)수번뇌(隨煩惱)는 근본번뇌[貪ㆍ瞋ㆍ癡ㆍ慢ㆍ疑ㆍ惡見]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분노[忿]ㆍ원한[恨]ㆍ질투[嫉]ㆍ속임[誑]ㆍ아첨[諂]ㆍ게으름[懈怠]ㆍ혼침(婚沈)ㆍ들뜸[掉擧] 등 20가지를 말한다.
76)이하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업의 잡염품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第12 業染章).
77)이하 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다(第13 生染章).
78)결생(結生)은 윤회하면서 중유(中有)가 없어지고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함을 말한다.
79)여기서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80)등인(等引)은 범어 samāhita의 번역으로서 선정(禪定), 즉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켰다는 의미이다. 등(等)은 마음에 혼침과 들뜸[掉擧]이 평정되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선정을 닦으면 등(等)을 일으키므로 등인이라 이름한다. 본문에서 비등인지(非等引地)는 선정이 아닌 지위, 즉 산지(散地)인 욕계(欲界)를 의미한다.
81)중유는 4유(有) 가운데 하나로서, 죽은 뒤 다음의 생을 받아 날 때까지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82)갈라람(羯羅藍)은 범어 kalalaṃ의 음역으로서 가라라(柯羅邏) 등으로 음역되고, 응골(凝骨)ㆍ잡예막(雜し膜)ㆍ시태막(始胎膜) 등으로 의역된다. 수태(受胎)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이다. 갈라람은 식(識)과 수정란의 물질적 요소[四大]가 화합한 것이다. 아뢰야식이 갈라람에 의탁함과 동시에 중유(中有)가 소멸되고,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4대와 작용하기 시작해서 미세한 감각기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시작된다.
83)아뢰야식을 가리킨다.
84)명색(名色, nāma-rūpa)은 정신적인 것[名]과 물질적인 것[色]이 결합된 상태이다.
85)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제4천이다. 이 하늘은 삼계의 최고 위치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칠은 표상작용[想]이 없기 때문에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미세한 표상작용이 있으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고 한다. 비유상(非有想)이므로 외도들은 이곳을 참다운 열반[眞涅槃處]이라 하고, 비무상(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도 생사윤회의 범주에 넣는다.
86)무색계의 제3천으로서, 제2천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인식대상[所緣]의 공함을 관하여 무소유의 지혜를 얻고 그 수행한 힘으로 나게 되는 하늘이다.
87)생전에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임종할 때 식이 4지(肢) 말단에서부터 머리쪽으로 점차 거두어지고, 반대로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머리부터 식어져서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고 한다.
88)이하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第14 世間淨章).
89)욕전(欲纏)은 5욕락(欲樂:재물욕ㆍ식욕ㆍ수면욕ㆍ음욕ㆍ명예욕) 등에 얽매인 욕계를 말한다.
90)색전(色纏)은 물질[色]에 얽매이는 색계이다.
91)이하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설명한다(第15 出世間淨章).
92)물과 우유는 화합하긴 하지만 그 성품이 다르면서 함께 생겨난다. 이처럼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과 성품이 다르긴 하지만 그 안에 화합하여 머물러서 함께 생멸함을 말한다.
93)훈습이 순서대로 증가함에 따라서 반대로 이숙식은 순서대로 점차 멸해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94)이하 도리에 수순함을 말한다(第16 順道理章).
95)아뢰야식을 가리킨다.
96)멸진정은 의식의 작용이 멸하는 선정이기 때문이다.
97)여기서 능의(能依)는 표상작용[想] 등의 여러 심리작용[心所]을, 소의(所依)는 그들 심소법이 수반되는 심왕을 가리킨다.
98)이하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중단됨이 없이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99)이하 아뢰야식의 품류의 차이를 논한다(第17 差別章).
100)수용의 다함이 있는 것[有受盡]이란 종자의 작용의 힘[功能]을 다 수용해서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선ㆍ불선의 과거의 업종자는 이숙(異熟)의 과보를 초감하기 때문에 남는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