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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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어제삼장성교서(大唐御製三藏聖教序)1)
016_1284_a_01L大唐御製三藏聖教序



대개 내가 듣건대, 하늘과 땅[二儀]은 형상[像]이 있어, 만물을 덮고 실음으로 모든 생명을 품고 있음이 드러나고, 네 계절[四時]은 형태[形]가 없어, 추위와 더위가 번갈아 가며 만물을 기르는 것이 감춰져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하늘과 땅을 자세히 살펴봄으로,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 하늘과 땅이 운행하는 이치의 실마리를 알게 되지만, 하늘과 땅의 이치인 음(陰)과 양(陽)을 명확히 꿰뚫어 보는 데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그 변화의 모든 수를 다 아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음양의 원리를 담고 있음에도, 음양의 이치를 쉽게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이 형상이 있기 때문이요, 음양의 이치가 하늘과 땅에 담겨있을지라도 그 이치를 온전히 다 알기 어려운 것은, 음양의 변화는 형태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016_1284_a_02L蓋聞二儀有像顯覆載以含生四時無形潛寒暑以化物是以窺天鑑地庸愚皆識其端明陰洞陽賢哲罕窮其數然而天地包乎陰陽而易識者以其有像也陰陽處乎天地而難窮以其無形也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형상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을 파악할 수 있으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미혹되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음양이 변화하는 모습이 감춰져 그것을 엿볼 수 없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오히려 미혹되어 도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불도(佛道)는 형상이 없이 텅 빈 가르침을 숭상하고, 깊고 현묘한 진리에 오르고 완전한 고요 속의 깨달음을 이끌어서, 모든 중생을 널리 구제하고 온 세상을 맡아 다스리며, 신령한 위엄을 일으키면 위로 그 한계가 없고, 그 신묘한 힘을 억누르면 아래로 그 끝이 없으며, 그 가르침을 거시의 세계로 확장하면 우주에까지 미치고 미시의 세계로 축소하면 터럭까지도 주관하니, 소멸하는 것도 없고 생겨나는 것도 없어서 천겁(千劫)이 흘렀어도 낡지 않고, 감춰진 듯 드러난 듯 온갖 복[百福]을 주관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도다. 현묘한 도는 그윽하고도 그윽하여서 그것을 아무리 좇아가더라도 그 끝을 알 수가 없고, 부처님의 법이 흘러 그 적멸의 경지에 깊이 잠기니 그 법을 아무리 퍼내어도 그 근원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므로 어리석고 평범한 사람들과 초라하며 못난 사람들이, 불법의 뜻에 자신을 던지면 이 세상의 어떤 의혹도 없앨 수 있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일어난 것은 서토(西土)를 기반으로 하였으나, 이제는 우리 당나라[漢庭]에 전해져 우리에게 희망의 환한 꿈을 꾸게 하는 것이요, 우리 중국에 부처님의 빛을 비추어 부처님의 자비가 흐르도록 한 것이다.
016_1284_a_08L故知像顯可徵雖愚不惑形潛莫睹在智猶迷況乎佛道崇虛乘幽控寂弘濟萬品典御十方擧威靈而無上抑神力而無下大之則彌於宇宙細之則攝於毫釐無滅無生歷千劫而不古若隱若顯運百福而長今妙道凝玄遵之莫知其際法流湛寂挹之莫測其源故知蠢蠢凡愚區區庸鄙投其旨趣能無疑惑者哉然則大教之興基乎西土騰漢庭而皎夢照東域而流慈
016_1284_b_01L옛날 온 세상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가르침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도 교화가 이루어졌으나, 현 시대에는 백성이 부처님의 덕행을 우러러보고서야 따를 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이 진리의 빛으로 돌아서서 법도가 바뀌고 시대가 변화함에 이르러, 이전에는 부처님 얼굴[金容]의 찬란한 빛이 가려져서 삼천대천세계[三千]를 비추지 못하다가, 지금은 부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펼쳐지게 되어 단정하신 부처님의 32상[四八之相]을 보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의 정미한 말씀이 널리 전해져서 중생을 삼도(三途)2)에서 구제하였고, 선각자들이 남긴 가르침이 널리 전파되어 중생을 십지(十地)3)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참된 가르침은 사람들이 받들어 따르기 어렵고 그 가르침의 뜻을 하나로 모을 수도 없으나, 세상에 아첨하는 가르침은 사람들이 따르기가 쉬워서 이에 참과 거짓이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만물의 실체가 없다는 공론[空]과 모든 현상의 본체가 있다는 유론[有]이 더러는 옛 습속을 따라 시비(是非)를 일으킨 것이고, 대승과 소승이 때때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번갈아 흥하고 망하게 된 것이다.
016_1284_a_18L昔者分形分迹之時言未馳而成化當常現常之世民仰德而知遵及乎晦影歸眞遷儀越世金容掩色不鏡三千之光麗象開圖空端四八之相於是微言廣被拯含類於三途遺訓遐宣導群生於十地然而眞教難仰莫能一其旨歸曲學易遵邪正於焉紛糾所以空有之論或習俗而是非大小之乘乍沿時而隆替
현장(玄奘) 법사라는 분이 있는데, 법문(法門)의 제일가는 스승이다. 그는 어려서 마음이 바르고 배우는 데 민첩하여 일찍 삼공(三空)4)의 마음을 깨달았고, 커서는 그 정신과 뜻이 불교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먼저 사인(四忍)5)의 수행을 감당하였다. 소나무 숲에 부는 맑은 바람[松風]과 호수에 비친 아름다운 달[水月]도 그의 맑고 아름다움 성품에는 견줄 수 없었으니, 신선이 먹는 이슬[仙露]과 찬란한 구슬[明珠]을 어찌 그의 환하고 넉넉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지혜는 모든 것을 통달하여 얽매임이 없고, 그의 정신도 모든 것을 헤아리며 막힘이 없어서, 이미 육진(六塵)6)을 초월하고 멀리 벗어나니, 아득한7)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와 상대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닦는 데 모든 마음을 쏟으며, 불교의 정법(正法)이 업신여겨지고 쇠퇴함을 슬퍼하였고, 불문[玄門]을 깊이 고찰하여 불법의 심오한 경문이 잘못 전해짐을 안타깝게 여겨서, 불교 경문을 조리에 따라 이치에 맞게 분석하여 전에 들은 것들을 확장하고, 잘못된 것들은 끊어내고 참된 것들을 잇게 하여, 후학들에게 올바른 길을 열어주고자 하였다.
016_1284_b_05L有玄奘法師者法門之領袖也幼懷貞敏早悟三空之心長契神情先包四忍之行松風水月未足比其淸華仙露明珠詎能方其朗潤故以智通無累神測未形超六塵而迥出隻千古而無對凝心內境悲正法之陵遲拪慮玄門慨深文之訛謬思欲分條扸理廣彼前聞截僞續眞開茲後學
이 때문에 그의 마음은 부처님이 계신 곳[淨土]으로 향하게 되어 멀리 서역(西域)으로 떠나게 되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떠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홀로 여행을 하니, 쌓인 눈이 새벽에 이리저리 날리는데 길에서 갈 곳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모래 바람이 저녁에 갑자기 일어남에 텅 빈 밖에서 갈 방향을 잃기도 하였다. 만리(萬里)를 가며 만난 산과 강을 지날 때에도 자욱한 안개와 노을을 헤치고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용감히 나아갔고, 온갖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서리를 밟고 비를 맞으며 묵묵히 앞으로 발을 디뎠다. 부처님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중히 여기고 자신의 수고는 가볍게 여기며, 자신의 깊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간곡히 구하여, 서역을 17년 동안 두루 다녔다. 그동안 불도가 전해진 지역을 모두 다니며, 정교(正教)을 묻고 구하였다. 그는 쌍림(雙林)을 지나고 팔수(八水)에 이르러, 부처님의 도를 맛보고 불도의 유풍[風]을 느낄 수 있었으며, 녹야원[鹿苑]에 가고 영취봉[鷲峯]에 올라 부처님의 신비하고 기이한 유적들을 우러러볼 수 있었다. 그가 앞선 성인들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들고 현인들의 참된 가르침을 이어받으며, 오묘한 법문을 깊이 탐구하고 심오한 가르침을 정밀하게 궁구하니, 일승(一乘)과 오율(五律)의 도(道)가 마음 밭에서 치달리며 뛰놀게 되었고, 팔장(八藏)과 삼협(三篋)의 문장[文]이 그의 입안에서 파도의 물결처럼 끊임없이 나오게 되었다. 이에 그는 자신이 지났던 나라들로부터 삼장(三藏)의 핵심 경문을 모두 모아 가지고 왔으니, 모두 657부(部)이다. 그리고 번역된 경문은 중국에 널리 배포되어, 그의 빼어난 공덕이 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016_1284_b_13L是以翹心淨土往遊西域乘危遠邁杖策孤征積雪晨飛途閒失地驚砂夕起空外迷天萬里山川撥煙霞而進影百重寒暑躡霜雨而前蹤誠重勞輕求深願達周遊西宇十有七年窮歷道邦詢求正教雙林八水味道飡風鹿苑鷲峯瞻奇仰異承至言於先聖受眞教於上賢探賾妙門精窮奧業一乘五律之道馳驟於心田八藏三篋之文波濤於口海爰自所歷之國摠將三藏要文凡六百五十七部譯布中夏宣揚勝
016_1284_c_01L그가 서역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구름을 이끌고 와서 중국에 불법의 비를 내리게 하니, 결함이 있었던 불교가 다시 온전해지고, 죄 가운데 고통 받던 중생이 다시 복(福)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불난 집[火宅]의 활활 타는 불꽃에 물을 뿌려서 다시는 미혹된 길로 가지 않게 한 것이고, 애욕의 캄캄한 파도에 빛을 비춰 피안(彼岸)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이것으로 사람들은 악(惡)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업(業)이 생겨 지옥으로 떨어지고, 선(善)을 행하면 그것으로 인해 극락에 오르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극락에 오르고 지옥에 떨어지는 실마리는 오직 사람이 행한 것에 근거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016_1284_c_02L引慈雲於西極注法雨於東垂教缺而復全蒼生罪而還福濕火宅之乾焰共拔迷途朗愛水之昏波臻彼岸是知惡因業墜善以緣昇墜之端惟人所託
비유컨대 계수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서 자라므로 구름이 내리는 깨끗한 이슬만이 그 꽃을 적실 수 있고, 연꽃은 맑은 물결 속에서 꽃을 피우므로 날리는 티끌이 그 잎을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연꽃의 본성이 본래 깨끗하거나 계수나무의 바탕이 본래 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계수나무가 자라는 곳이 높기 때문에 탁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요, 연꽃이 의지한 곳이 맑은 물속이기 때문에 지저분한 것이 더럽힐 수 없는 것이다. 무릇 풀과 나무가 지각이 없을지라도 오히려 좋은 조건에 의지하여 선(善)을 이루는데, 하물며 사람은 지각이 있어 복된 조건을 가지고 복을 이룰 수 없겠는가. 지금 이 경(經)이 널리 전해져서 해와 달처럼 다함없이 이어지고, 이 복(福)이 멀리 펼쳐져서 하늘과 땅과 함께 영원하고 광대하기를 바라노라.
016_1284_c_06L譬夫桂生高嶺露方得泫其花蓮出淥波飛塵不能污其葉非蓮性自潔而桂質本貞由所附者高則微物不能累所憑者淨則濁類不能沾夫以卉木無知資善而成善況乎人倫有識不緣慶而求慶方冀茲經流施將日月而無斯福遐敷與乾坤而永大


황제태자신치술성기(皇帝太子臣治述聖記)8)
016_1284_c_13L皇帝太子臣治述聖記



무릇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전함에,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면 그 가르침[文]을 널리 퍼뜨리지 못하는 것이요, 불법의 심오한 가르침을 받들어 분명히 밝히는 것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그 뜻[旨]을 정확히 확정할 수 없는 것이다. 대개 진여(眞如)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모든 불법의 궁극적 근원이요, 모든 불경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그 담긴 내용은 너무나 넓고 크며 그 오묘한 뜻은 너무나 아득하고 깊어서, 공(空)과 유(有)의 정밀하고 미묘한 이치도 완전히 꿰뚫게 하고, 삶과 죽음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도 체득하게 한다. 그러나 그 말씀은 너무 많고 복잡하며 그 도리는 너무 다양하고 넓어서, 불법을 찾는 자가 그 근원을 다 탐구하기 어렵고, 그 경문은 세상에 드러났어도 그 의미는 깊이 감추어져 있어, 불법을 실행하려는 자가 불법의 극의를 분명히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다.
016_1284_c_14L夫顯揚正教非智無以廣其文崇闡微言非賢莫能定其旨蓋眞如聖教諸法之玄宗衆經之軌躅也綜括宏遠奧旨遐深極空有之精微體生滅之機要詞茂道曠尋之者不究其文顯義幽履之者莫測其際
016_1285_a_01L 그러므로 부처님의 성스런 자비가 덧입혀져야 모든 중생의 업(業)이 선(善)으로 나아가고, 부처님의 신묘한 교화가 펼쳐져야 모든 세상의 인연[緣]에서 악(惡)이 끊어짐을 알게 되어, 불법의 그물[法網]이 넓게 펼쳐지고 육바라밀[六度]의 올바른 가르침이 널리 베풀어져, 모든 중생이 도탄(塗炭)에서 구원받고, 삼장(三藏)의 비밀스런 빗장[秘扃]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이름은 날개가 없어도 오래도록 세상에 전해졌고, 부처님의 도(道)는 뿌리가 없어도 영원히 견고하게 박혔으며, 부처님의 도와 이름으로 세상에 전해진 축복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감동시킨 부처님의 모습은 헤아릴 수 없는 겁이 흘러도 손상되지 않은 것이다.
016_1284_c_20L故知聖慈所被業無善而不臻妙化所敷緣無惡而不翦開法網之綱紀弘六度之正教拯群有之塗炭啓三藏之秘扃是以名無翼而長飛道無根而永固道名流慶歷遂古而鎭常赴感應身經塵劫而不朽
새벽의 종소리[鍾]와 저녁의 게송 소리[梵], 이 두 가지 소리가 영취봉[鷲峯]에서 어우러지고, 부처님의 지혜의 빛[慧日]과 불법의 맑은 물[法流]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 녹야원[鹿苑]에서 전해졌으니, 공중으로 치솟은 보개(寶蓋)9)는 떠도는 구름[翔雲]과 함께 나는 듯하였고, 들판의 무성한 봄 숲[春林]은 천화(天花)10)와 더불어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였다.
016_1285_a_03L晨鍾夕梵交二音於鷲峯慧日法流轉雙輪於鹿苑排空寶蓋接翔雲而共飛莊野春林與天花而合彩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께서는 불교의 깊은 이치를 숭상함으로 복(福)을 받아, 옷을 늘어뜨리고 손을 꽂은 채로 있어도 온 세상이 다스려졌고, 그 덕(德)이 온 백성에게 입혀져, 공손히 옷깃을 여미고만 있어도 모든 나라가 고개를 숙이고 조공을 바쳤으며, 그 은혜가 죽은 자에까지 이르러 무덤에도 불교경전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은택이 곤충에까지 미치어 금궤에도 불교의 게송이 담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아뇩달수(阿耨達水)11)가 중국의 중심12)에 흐르는 팔천(八川)13)과 통하게 되었고, 기사굴산(耆闍崛山 : 영취산)이 숭산과 화산[嵩華]의 푸른 봉우리와 맞닿게 되었다.
016_1285_a_06L伏惟皇帝陛下上玄資福垂拱而治八德被黔黎斂衽而朝萬國恩加朽石室歸貝葉之文澤及昆蟲金匱流梵說之偈遂使阿耨達水通神甸之八川耆闍崛山接嵩華之翠嶺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법의 본성은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온전히 불법에 귀의하는 마음이 없으면 불법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의 대지는 깊고 그윽하여 간절하고 지극한 정성에만 감응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니, 어찌 칠흑 같은 혼돈의 밤을 비추는 지혜의 등불이요, 화마가 휩쓰는 아침에 내리는 불법의 은택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모든 하천은 다르게 흘러도 모두 함께 바다로 모이고, 모든 만물의 이치는 나누어졌어도 결국 모두 만물의 실재를 이루니, 어찌 탕왕[湯]과 무왕[武]의 우열을 비교하며, 요임금[堯]과 순임금[舜]의 성덕을 서로 견주겠는가.
016_1285_a_11L以法性凝寂靡歸心而不通智地玄感懇誠而遂顯豈謂重昏之夜慧炬之光火宅之朝降法雨之澤是百川異流同會於海萬區分義成乎實豈與湯武挍其優劣舜比其聖德者哉
현장(玄奘) 법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담백하고 소박한 삶에 뜻을 두었으며, 정신은 어린 나이에도 한없이 맑았고, 신체도 세상 사람들보다 빼어났다. 선방[定室]에서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깊은 바위산[幽巖]에 자취를 숨겼으며, 삼선(三禪)14)의 세계에 오르고, 십지(十地)의 수행을 차례로 수행하였으며, 육진(六塵)15)의 경계를 초월하여 홀로 부처님의 땅[迦維 : 인도)을 밟고, 일승(一乘)의 뜻[旨]을 깨달아 그 근기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였다.
016_1285_a_17L玄奘法師者夙懷聰令立志夷簡神淸齠齔之年體拔浮華之世凝情定室匿迹幽巖拪息三禪巡遊十地超六塵之境獨步迦維一乘之旨隨機化物
016_1285_b_01L 현장은 중국에는 의거할 진경[眞文]이 없어 인도의 불경을 찾아서, 멀리 항하(恒河 : 갠지스 강)를 건너 불경을 가져오길 늘 바랐고, 이에 여러 차례 설산[雪嶺]을 넘어가 불경을 가져왔다. 도(道)를 물으며 인도에서 돌아오기까지 17년 세월 동안 불교 경전을 다 깨달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마음을 두게 되었다. 때문에 정관(貞觀) 19년 2월 6일 홍복사(弘福寺)에서 조칙[勅]을 받들어, 성교(聖教)의 중요한 문장을 번역하니, 모두 657부(部)이다. 이는 대해(大海)의 법류(法流)를 끌어다가 세속의 노고를 씻어서 마르지 않게 한 것이요, 지혜의 등불[智燈]을 전하여 세속의 어둠을 비춰 항상 밝게 한 것이니, 스스로 오랜 동안 좋은 인연을 심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불법의 뜻을 이렇게 드날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법상(法相)16)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 해ㆍ달ㆍ별[三光]의 광명처럼 분명하고, 우리 황제폐하의 복덕이 이 세상에 오는 것이 하늘ㆍ땅[二儀]의 견고함처럼 확실함을 말한 것이다.
016_1285_a_21L以中華之無質尋印度之眞文遠涉恒河終期滿字頻登雪嶺更獲半珠問道往還十有七載備通釋典利物爲心以貞觀十九年二月六日奉勅於弘福寺翻譯聖教要文凡六百五十七部引大海之法流洗塵勞而不竭傳智燈之長皎幽闇而恒明自非夂植勝緣以顯楊斯旨所謂法相常住齊三光之明我皇福臻同二儀之固
엎드려 황제폐하께서 지으신 여러 경론의 서문을 보니, 옛일을 비추어 현재를 뛰어넘게 한 것으로, 그 이치는 금석(金石)과 같이 웅장한 소리를 담고 있고, 그 문장은 풍운(風雲)이 뿌리는 은택을 간직하고 있다. 나(治 : 고종의 이름)는 이에 가벼운 티끌을 거대한 산악에 덧붙이듯, 이슬을 떨어뜨려 강물에 첨가하듯 내 글을 폐하의 서문에 덧붙임으로, 간략하게 그 대강(大綱)을 들어서 이 기문을 짓는다.
016_1285_b_07L伏見御製衆經論序照古騰今理含金石之聲文抱風雲之潤治輒以輕塵足墜露添流略擧大綱以爲斯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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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대승론본(攝大乘論本) 상권
016_1285_b_10L攝大乘論本卷上


무착(無着) 지음
016_1285_b_11L無著菩薩造
현장(玄奘) 한역
김묘주 번역
016_1285_b_12L三藏法師玄奘奉詔譯


1. 총표강요분(總標綱要分)
016_1285_b_13L摠摽綱要分第一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 가운데1) 박가범(薄伽梵)2) 앞에서 능히 대승에 잘 들어간 보살은 대승 자체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대승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 세존에게 열 가지 양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씀이 있다”고 말한다.
016_1285_b_14L阿毘達磨大乘經中薄伽梵前已能善入大乘菩薩爲顯大乘體大故說謂依大乘諸佛世尊有十相殊勝殊勝語
016_1285_c_01L첫째는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殊勝語]이고, 둘째는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셋째는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入所知相]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넷째는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彼入因果]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다섯째는 그것3)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彼因果修差別]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여섯째는 이와 같은 수행 차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일곱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여덟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아홉째는 그것의 증과인 단멸[彼果斷]4)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열째는 그것의 증과인 지혜[彼果智]5)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여기서 말한 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모든 문구로써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 말씀임을 나타낸다.
016_1285_b_18L一者所知依殊勝殊勝語二者所知相殊勝殊勝語三者入所知相殊勝殊勝語四者彼入因果殊勝殊勝語五者彼因果修差別殊勝殊勝六者卽於如是修差別中增上戒殊勝殊勝語七者卽於此中增上心殊勝殊勝語八者卽於此中增上慧殊勝殊勝語九者彼果斷殊勝殊勝語彼果智殊勝殊勝語由此所說諸佛世尊契經諸句顯於大乘眞是佛語
또한 능히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 말한 바 열 가지 포섭처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한 일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에서만 여러 곳에서 설하심을 본다. 이른바 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자체[體]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자성, 즉 첫째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고, 둘째는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며, 셋째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의 자체라고 부른다. 유식성(唯識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말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자체라고 부르고, 보살의 10지를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016_1285_c_04L復次云何能顯由此所說十處於聲聞乘曾不見說唯大乘中處處見說謂阿賴耶識說名所知依體三種自依他起自性遍計所執自性圓成實自性說名所知相體唯識說名入所知相體六波羅蜜多名彼入因果體菩薩十地說名彼因果修差別體
보살의 율의를 여기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자체라고 부르고, 수능가마(首楞伽摩)6)ㆍ허공장(虛空藏)7) 등의 여러 삼마지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의 자체라 이름하며, 분별없는 지혜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 무주열반을 그것의 증과인 단멸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고,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며,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한 열 가지 포섭처로 인하여 대승은 성문승과 다름을 나타내고, 또한 가장 뛰어남을 나타낸다. 세존께서는 다만 보살을 위해서만 널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지니, 다만 대승에 의지하는 모든 부처님 세존에게만 열 가지 행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씀이 있다.8)
016_1285_c_12L菩薩律儀說名此中增上戒體首楞伽摩虛空藏等諸三摩說名此中增上心體無分別智名此中增上慧體無住涅槃說名彼果斷體三種佛身自性身受用變化身說名彼果智體由此所說十處顯於大乘異聲聞乘又顯最世尊但爲菩薩宣說是故應知但依大乘諸佛世尊有十相殊勝殊勝語
016_1286_a_01L또한 어째서 이 열 가지 양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여래의 말씀으로 인해서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성문승은 대승의 종성[大乘性]임을 부정하는가? 이 열 가지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함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 안에서만 여러 곳에서 설함을 보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포섭처는대보리의 성품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내고, 잘 성립하고 수순하며 위배되지 않고,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게송이 있다.
016_1285_c_20L復次云何由此十相殊勝殊勝如來語故顯於大乘眞是佛語遮聲聞乘是大乘性由此十處於聲聞乘曾不見說唯大乘中處處見說謂此十處是最能引大菩提性是善成立隨順無違爲能證得一切智智此中二頌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 알아야 할 바의 양상,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 그것의 수행 차이,
3학, 그것의 증과인 단멸과 지혜는
최상의 교법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뛰어나네.
016_1286_a_03L所知依及所知相
彼入因果彼修異
三學彼果斷及智
最上乘攝是殊勝

이 말씀은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네.
이것은 가장 뛰어난 보리의 원인이므로
대승은 참다운 부처님 말씀임을 인정하네.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므로 뛰어나네.
016_1286_a_05L此說此餘見不見
由此最勝菩提因
故許大乘眞佛語
由說十處故殊勝

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이 순서를 두어서 이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가?9) 보살은 모든 법의 원인에 대해서 모름지기 먼저 잘 알고서 비로소 연기(緣起)에 대해서 마땅히 잘 통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인연에 의해 생겨난 모든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잘 알아야 한다.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가지 극단의 과실을 능히 멀리 여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이처럼 잘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바르게 잘 취한 양상에 통달하고, 모든 장애로부터 마음을 해탈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통달하고서, 이전의 가행위(加行位)에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증득함으로써 마땅히 다시 매우 높은 의욕[意樂]10)을 원만히 이루어야 하니, 청정함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016_1286_a_07L復次云何如是次第說此十處謂諸菩薩於諸法因要先善已方於緣起應得善巧次後於緣所生諸法應善其相善能遠離增益損減二邊過故次後如是善修菩薩應正通達善所取令從諸障心得解脫次後通達所知相已先加行位六波羅蜜多由證得故應更成滿增上意樂得淸淨故
그 다음에 청정한 의욕에 포섭되는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10지 중에서 나누어 차이를 두어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이른바 3무수(無數)의 대겁11)이 경과함을 필요로 한다. 그런 다음에 보살의 3학12)에 대해서 마땅히 원만하게 해야 한다. 원만하게 하고 나서 그 증과인 열반과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마땅히 현재 평등히 증득해야 하기 때문에,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 데 이처럼 순서를 둔다.
또한 이 말 안에서 모든 대승은 다 구경을 얻는다.
016_1286_a_15L次後淸淨意樂所攝六波羅蜜多十地中分分差別應勤修習謂要經三無數大劫次後於三菩薩所學令圓滿旣圓滿已彼果涅槃及與無上正等菩提應現等證故說十處如是次第又此說中一切大乘皆得究竟

2. 소지의분(所知依分)
016_1286_a_21L攝大乘論本所知依分第二
016_1286_b_01L
여기서 처음에 우선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는 곧 아뢰야식임을 말한다.13) 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 아뢰야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하여 설하셨는가?박가범께서는 『아비달마대승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16_1286_a_22L此中最初且說所知依卽阿賴耶識尊何處說阿賴耶識名阿賴耶識薄伽梵於阿毘達磨大乘經伽他中說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界]14)이었고
모든 법이 평등히 의지하네.
이로 인하여 모든 윤회세계[諸趣]가 존재하며
열반을 증득하느니라.
016_1286_b_02L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

여기서 다시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86_b_04L卽於此中復說頌曰

모든 법을 거두어 저장함은
일체 종자식에 의해서이네.
그러므로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니
뛰어난 자에게 나는 열어 보이노라.
016_1286_b_05L由攝藏諸法
一切種子識
故名阿賴耶
勝者我開示

이와 같이 아함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다시 무슨 까닭으로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유정의 잡염품의 법은 여기에 저장되어 결과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15) 또한 이 식은 그것에 저장되어 원인의 성품이 되기 때문에16)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혹은 모든 유정은 이 식을 저장하여 자아로 삼기 때문에17)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016_1286_b_07L如是且引阿笈摩證復何緣故此識說名阿賴耶識一切有生雜染品法於此攝藏爲果性故又卽此識於彼攝藏爲因性故是故說名阿賴耶識或諸有情攝藏此識爲自我故是故說名阿賴耶識
또한 이 식을 역시 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 이 가운데 아함은 『해심밀경』에서 말씀한 바와 같다.
016_1286_b_13L復次此識亦名阿陁那識此中阿笈摩者如『解深密經』說

아타나식은 매우 심오하고 미세하며
일체 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느니라.
나는 범부와 어리석은 무리18)에게는 열어 보이지 않느니
그들이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니라.
016_1286_b_15L阿陁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爲我

무슨 까닭에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19)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감각기관[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은 이 집수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
또한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때에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 그러므로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
016_1286_b_17L何緣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執受一切有色根故一切自體取所依故所以者何有色諸根由此執受無有失壞盡壽隨轉又於相續正結生時取彼生故執受自體是故此識亦復說名阿陁那識
016_1286_c_01L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를 말씀한 바와 같다.20) 여기서 의(意)21)두 종류가 있다.22) 첫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23)의 의지처의 성품이다. 무간멸(無間滅)의 식은 능히 의식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된다.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곧 식의 잡염의 의지처이다. 식은 그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난다. 두 번째는 잡염이다. 대상을 요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사량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룬다.
016_1286_b_23L此亦名心如世尊說心意識三此中意有二種第一與作等無閒緣所依止無閒滅識能與意識作生依止染污意與四煩惱恒共相應一者薩迦耶見二者我慢三者我愛四者無明此卽是識雜染所依識復由彼第一依生第二雜染了別境義故無閒義故思量義故意成二種
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알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이 없다면 곧 불공무명(不共無明)24)이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다섯 가지 식25)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識身)은 반드시 안근 등 구유의(俱有依)26)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석하는 말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016_1286_c_08L復次云何得知有染污意謂此若無不共無明則不得有成過失故又五同法亦不得有成過失故所以者何以五識身必有眼等俱有依故又訓釋詞亦不得有成過失故
또한 무상정(無想定)27)과 멸진정(滅盡定)28)의 차이도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상정은 염오의가 나타난 바이고, 멸진정에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선정은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한 기간의 생에서도 마땅히 염오가 없어야 한다.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약 아집ㆍ아만이 없다면 또한 어느 때나 아집의 현행함이 현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에서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만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29) 나ㆍ나의 것이라는 번뇌가 현행하면 선ㆍ무기는 아니다. 따라서 만일 구유현행(俱有現行)30)을 안립하고 상응현행(相應現行)31)이 아니라면 이런 과실이 없다. 여기서 게송으로 말한다.
016_1286_c_13L又無想定與滅盡定差別無有成過失故謂無想定染意所顯非滅盡定若不爾者此二種定應無差別又無想天一期生中應無染污成過失故於中若無我執我慢又一切時我執現行現可得故謂善不善無記心中若不爾者唯不善心彼相應故有我我所煩惱現行非善無記是故若立俱有現行非相應現行無此過失此中頌曰

만일 불공무명,
다섯 가지 식,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가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016_1286_c_22L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016_1287_a_01L
무상천의 생은
아집이 유전함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어야 하네.
아집이 항상 따라서
모든 종류에 없네.
016_1287_a_01L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염오의를 떠나서는
두 가지가 없고 세 가지는 위배되네.32)
이것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아집은 마땅히 없어야 하네.
016_1287_a_02L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참된 의미의 마음이 장차 일어나는 데에
항상 장애가 되네.
모든 부분에 함께 작용함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하네.
016_1287_a_03L眞義心當生
常能爲障礙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이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33)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색계ㆍ무색계의 두 가지 전(纏)34)의 번뇌처럼 이것은 그 유부무기성에 포섭된다. 색계ㆍ무색계의 전은 사마타가 섭장(攝藏)하는 바이기 때문이고, 이 의(意)는 어느 때나 항상 미세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016_1287_a_05L此意染污故有覆無記性與四煩惱常共相應如色無色二纏煩惱是其有覆無記性攝色無色纏爲奢摩他所攝藏故此意一切時微細隨逐故
세 번째로35) 심(心)의 자체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로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성취함으로써 심의 자체로 삼는다. 이것을 종자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식이 전변 생기한다.
무슨 인연 때문에 역시 심이라고 이름하는가? 갖가지 법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가 적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016_1287_a_09L心體第三若離阿賴耶識無別可得是故成就阿賴耶識以爲心體由此爲種子意及識轉何因緣故亦說名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또한 어째서 성문승에는 이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아타나식으로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36) 이것은 매우 미세한 경계37)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에 대해서는 이 말을 하지 않지만, 지혜를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다. 보살이라면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한다. 만약 이 지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어렵다.
016_1287_a_13L復次何故聲聞乘中不說此心名阿賴耶識名阿陁那識由此深細境所攝故所以者何由諸聲聞不於一切境智處轉是故於彼雖離此說然智得成解脫成就故不爲說若諸菩薩定於一切境智處轉是故爲說若離此智不易證得一切智智
016_1287_b_01L또한 성문승 중에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스런 뜻[異門密意]38)으로써 이미 아뢰야식을 말했다.39) 그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 “세간의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 아뢰야를 즐기며, 아뢰야식을 기뻐하고, 아뢰야를 좋아한다”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은 아뢰야를 단멸하기 위해서 정법(正法)을 말씀하실 때에공경히 귀로 받아들인다.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안주하여 법을 따르고 법을 행한다.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시어, 이렇게 매우 기이하고 희유한 법인 정법이 세간에 출현하였다. 성문승의 『여래출현사덕경(如來出現四德經)』40)에서 이 다른 견해의 비밀한 뜻에 의거해서 아뢰야식을 나타낸다.
016_1287_a_20L復次聲聞乘中亦以異門密意已說阿賴耶識如彼『增壹阿笈摩』說世閒衆生愛阿賴耶樂阿賴耶欣阿賴耶憙阿賴耶爲斷如是阿賴耶故說正法時恭敬攝耳住求解心法隨法行如來出世如是甚奇希有正法出現世閒於聲聞乘『如來出現四德經』中由此異門密意已顯阿賴耶識
대중부(大衆部)의 『아함경』 중에서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한 뜻으로써 나무가 뿌리에 의지하는 것41)과 같이 근본식(根本識)이라 이름한다. 화지부(化地部) 중에서도 역시 다른 견해의 비밀한 뜻으로 이것을 궁생사온(窮生死蘊)42)이라 이름한다. 어느 곳, 어느 때에는 물질과 마음이 단절됨을 보지만 아뢰야식 안의 그것의 종자에는 단절이 없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는 아뢰야식을 체성[性]으로 삼고, 아타나식을 체성으로 삼으며, 마음을 체성으로 삼고, 아뢰야를 체성으로 삼고, 근본식을 체성으로 삼으며, 궁생사온을 체성으로 삼는다는 등으로 말해진다. 이 다른 견해들로 인하여 아뢰야식은 대왕(大王)의 길을 이룬다.
016_1287_b_05L於大衆部阿笈摩中亦以異門密意說此名根本識如樹依根化地部中亦以異門密意說此名窮生死蘊有處有時見色心斷非阿賴耶識中彼種有阿賴耶如是所知依說阿賴耶識爲性阿陁那識爲性心爲性阿賴耶爲性根本識爲性窮生死蘊爲性等由此異門阿賴耶識成大王路
또한 어떤 다른 부류에서는 심의식은 하나의 의미이며 글자가 다르다고 하는데,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의(意)와 식의 두 의미의 차이는 쉽게 알 수 있다. 마땅히 알지니 심의 의미도 역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시 어떤 부류에서는, 박가범께서 말씀하신 “중생은 아뢰야를 사랑하고……”에서 5취온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다른 논사는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하고, 다른 논사는 살가야견을 아뢰야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이들 여러 논사는 교의와 증명에 의거해서 아뢰야에 어리석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한다.
016_1287_b_13L復有一類謂心意識義一文異是義不成意識兩義差別可得當知心義亦應有異復有一類謂薄伽梵所說衆生愛阿賴耶乃至廣說此中五取蘊說名阿賴耶有餘復謂貪俱樂受名阿賴耶有餘復謂薩迦耶見名阿賴耶此等諸師由教及證愚於藏識故作此執
016_1287_c_01L이처럼 아뢰야라는 명칭을 안립하는 것은, 성문승에서 안립하는 도리가 있는데, 역시 상응하지 않는다. 어리석지 않은 자라면 아뢰야식을 취하여 그 말씀을 안립한다. 아뢰야라는 명칭은 이와 같이 안립하면 곧 가장 뛰어난 것이 된다.
어째서 가장 뛰어난가?43) 만약 5취온을 아뢰야라고 이름하면,괴로움의 세계[惡趣] 중에서 한결같이 괴로운 곳에 태어나는 것을 가장 혐오해야 한다. 그곳의 중생은 한결같이 사랑하고 즐거운 감정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안에서 집착하여 섭장[執藏]한다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는 항상 속히 떠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016_1287_b_21L如是安立阿賴耶名隨聲聞乘安立道理亦不相應若不愚者取此藏識安立彼說阿賴耶名如是安立則爲最勝云何最勝若五取蘊名阿賴耶生惡趣中一向苦處最可厭逆衆生一向不起愛樂於中執藏不應道理以彼常求速捨離故
만일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제4 정려 이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갖추는 유정은 항상 혐오가 있다. 그 안에서 집착하여 섭장한다는 일도 역시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살가야견을 아뢰야라고 이름한다면, 이 정법 안에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에게는 항상 혐오가 있다. 그 안에서 집착하여 섭장한다는 일도 역시 도리에 맞지 않다. 아뢰야식은 내면의 자아의 성품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세계[惡趣]의 한결같이 괴로운 곳에 태어나서 괴로움의 온[苦蘊]을 여의고자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한 아애(我愛)가 따라서 계박되어 여의려 하지 않는다. 제4 정려 이상에 태어나서 탐욕과 함께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항상 혐오가 있긴 하지만, 그는 항상 아뢰야식에 대해서 아애가 따라서 계박된다. 이 정법에 대해서 무아를 믿고 이해하는 자는 아견을 혐오하긴 하지만, 장식(藏識)에 대해서 아애가 따라서 계박된다.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안립하여 아뢰야라고 이름하는 것은 가장 뛰어남을 성취하는 것이다.
016_1287_c_04L若貪俱樂受名阿賴耶第四靜慮以上無有彼有情常有厭逆於中執藏亦不應若薩迦耶見名阿賴耶於此正法中信解無我者恒有厭逆於中執藏亦不應理阿賴耶識內我性攝雖生惡趣一向苦處求離苦蘊然於藏識我愛隨縛未嘗求離雖生第四靜慮以上於貪俱樂恒有厭逆然於藏識我愛隨縛雖於此正法信解無我者厭逆我見然於藏識我愛隨縛是故安立阿賴耶識名阿賴耶成就最勝
016_1288_a_01L이와 같이44) 아뢰야식을 안립하는 다른 견해들을 말하였다. 이것의 양상을 안립하는 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것의 양상을 안립하는 데 간략히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체의 양상[自相]을 안립하고, 둘째는 원인의 양상[因相]을 안립하며, 셋째는 결과의 양상[果相]을 안립한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의 자체의 양상을 안립함은 다음과 같다. 모든 잡염품의 법이 훈습에 의지해서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이 되고, 능히 종자를 거두어 지니고 상응함에 의거함을 말한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의 원인의 양상을 안립함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은 모든 것의 종자인 아뢰야식이 어느 때나 항상 그 잡염 품류의 모든 법이 현전하는 데 원인이 됨을 말한다.이 중에서 아뢰야식의 결과의 양상을 안립함은 다음과 같다. 그 잡염품의 법이 아득한 옛적부터 있어온 훈습에 의지해서 아뢰야식이 상속하여 생겨남을 말한다.
016_1287_c_15L如是已說阿賴耶識安立異門安立此相云何可見安立此相略有三種一者安立自相二者安立因相三者安立果相此中安立阿賴耶識自相謂依一切雜染品法所有薰習爲彼生因由能攝持種子相應此中安立阿賴耶識因相者謂卽如是一切種子阿賴耶識於一切時與彼雜染品類諸法現前爲因此中安立阿賴耶識果相者謂卽依彼雜染品法無始時來所有薰習阿賴耶識相續而生
또한 무엇을 훈습이라 이름하는가?45) 훈습은 능전(能詮)46)이니, 무엇을 소전(所詮)이라 하는가?47) 그것은 법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 능히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원인의 성품이 있다. 이것을 소전이라고 말한다. 거승(苣蕂)48)에서 꽃의 훈습이 있는 것과 같다. 거승과 꽃이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한다. 이 모든 거승은 그 향기를 내는 원인을 띠고 생겨난다.
또는 인정되듯이 탐욕 등을 행하는 자의 탐욕 등의 훈습이 그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이 마음은 그것이 생겨나는 원인을 띠고 생겨난다. 혹은 많이 듣는 자의 많이 듣는 훈습은 듣는 작의(作意)49)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에, 이 마음은 그것이 기억하는 원인을 띠고 일어난다. 이 훈습은 능히 거두어 지니기 때문에 법을 지니는 자라고 이름함과 같다. 마땅히 알지니 아뢰야식의 훈습의 도리도 역시 그와 같다.
016_1288_a_03L復次何等名爲薰習薰習能詮何爲所詮謂依彼法俱生俱滅此中有能生彼因性是謂所詮如苣蕂中有花薰習苣蕂與花俱生俱滅是諸苣蕂帶能生彼香因而生又如所立貪等行者貪等薰習依彼貪等俱生俱滅此心帶彼生因而生或多聞者多聞薰習依聞作意俱生俱滅此心帶彼記因而生由此薰習能攝持故名持法者阿賴耶識薰習道理當知亦爾
또한50)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품의 법의 종자는 별개의 것으로서 머무는가? 별개의 것이 아닌가? 그것의 종자는 별도의 실제 사물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이 안에서 머무는 것 역시 별개가 아닌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은 이렇게 해서 생겨나고 능히 그것을 생기게 하는 특수한 작용의 힘[功能]이 있다. 이것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 이름한다.
016_1288_a_13L復次阿賴耶識中諸雜染品法種子爲別異住爲無別異非彼種子有別實物於此中住亦非不異然阿賴耶識如是而生有能生彼功能差別一切種子識
016_1288_b_01L또한51) 아뢰야식과 그 모든 잡염법은 동시에 서로 원인이 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비유하면 밝은 등불의 불꽃과 심지가 생겨나고 타는 것이 동시적으로 다시 서로 그렇게 됨과 같다. 또한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하여 동시에 쓰러지지 않음과 같다. 마땅히 관찰할지니 이 가운데 다시 서로 원인이 되는 도리도 역시 그러하다. 아뢰야식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모든 잡염법도 역시 아뢰야식의 원인이 된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인연을 안립할 수 있고 나머지로는 인연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6_1288_a_18L復次阿賴耶識與彼雜染諸法同時更互爲因云何可見譬如明燈焰炷生燒同時更互又如蘆束互相依持同時不倒應觀此中更互爲因道理亦爾如阿賴耶識爲雜染諸法因染諸法亦爲阿賴耶識因唯就如是安立因緣所餘因緣不可得故
훈습에는 차이도 없고 잡염도 없는데, 어떻게 능히 그 차이가 나고 잡염된 모든 법의 원인이 되는가?52) 여러 무늬를 내는 도구와 무늬로 물들여진 옷과 같다. 그것을 물들일 때에는 아직 차이가 나고 잡염된 하나 아닌 품류를 얻을 수 없지만 염색 그릇에 들어간 이후에는 옷 위에 문득 차이가 나고 잡염되어 하나 아닌 품류의 염색이 물들여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뢰야식도 역시 이와 같아서 차이 나고 잡염된 능훈(能熏)이 훈습하는 곳이다. 훈습할 때에는 아직 차이가 나고 잡염된 것을 얻을 수 없지만, 결과가 생기는 염색 그릇이 현전한 이후에는 문득 차이가 나고 잡염되어 한량없는 품류의 모든 법이 현현한다.
016_1288_b_02L云何薰習無異無雜而能與彼有異有雜諸法爲因如衆纈具纈所纈衣當纈之時雖復未有異雜非一品類可得入染器後爾時衣上便有異雜非一品類染色絞絡文像顯現阿賴耶識亦復如是異雜能薰之所薰習於薰習時雖復未有異雜可得果生染器現前已後便有異雜無量品類諸法顯現
이와 같은 연기는 대승에서 극히 미세하고 매우 심오하다.53) 또한 간략히 말하면 두 종류의 연기가 있다. 하나는 자성을 분별하는 연기[分別自性緣起]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 이 중에서 아뢰야식에 의지해서 모든 법이 생기하는 것을 자성을 분별하는 연기라고 이름한다. 능히 갖가지 자성을 분별함으로써 조건[緣]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12지연기(支緣起)54)가 있으니, 이것을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연기라고 부른다. 살기 좋은 세계[善趣]와 괴로운 세계[惡趣]에 대해서 능히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음의 갖가지 자체를 분별함으로써 조건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
016_1288_b_11L如是緣起於大乘中極細甚深又若略說有二緣起一者分別自性緣起二者分別愛非愛緣起中依止阿賴耶識諸法生起是名分別自性緣起以能分別種種自性爲緣性故復有十二支緣起是名分別愛非愛緣起以於善趣惡趣能分別愛非愛種種自體爲緣性故
016_1288_c_01L아뢰야식에 대해서 만일 첫 번째 연기에 어리석을 경우에는 혹은 자성을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가 있고,55)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56) 혹은 자재천(自在天)의 변화를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고,57)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으로 삼아서 분별하는 이도 있으며,58)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분별하는 이도 있다.
만약 두 번째 연기에 어리석을 경우에는 자아를 짓는 자[作者]라 하고, 자아를 받는 자[受者]라고 하여 분별하는 이도 있다. 비유하면 많은 선천적인 맹인들이 일찍이 코끼리를 보지 못했는데, 어떤 이가 코끼리를 말하고 그것을 보여 주는 경우와 같다.그 선천적인 맹인들은 코끼리의 코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그 이빨을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그 귀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그 다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으며, 그 꼬리를 만져보는 이도 있고, 등을 만져보는 이도 있다.
016_1288_b_18L於阿賴耶識中若愚第一緣起或有分別自性爲因或有分別宿作爲因或有分別自在變化爲因或有分別實我爲或有分別無因無緣若愚第二緣復有分別我爲作者我爲受者如衆多生盲士夫未曾見象復有以象說而示之彼諸生盲有觸象鼻觸其牙有觸其耳有觸其足有觸其有觸脊梁
어떤 이가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는가?”라고 질문하니, 혹은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보습자루 같다고 말하고, 혹은 절구공이 같다고도 하며, 혹은 삼태기 같다고도 하고, 혹은 절구 같다고도 하며, 혹은 빗자루[箒] 같다고도 하고, 혹은 어떤 맹인은 코끼리가 산석(山石)59) 같다고도 한다.
만일 이 두 가지 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명의 선천적인 맹인도 역시 또한 이와 같아서, 혹은 자성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한다. 혹은 자재천을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고, 혹은 실체의 자아를 원인이라고 헤아려서 집착하며, 혹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고 헤아려서 집착한다. 혹은 자아를 짓는 자, 자아를 받는 자라고 헤아려서 집착한다.60) 아뢰야식의 자체의 성품ㆍ원인의 성품ㆍ결과의 성품 등을 이해하지 못하면 코끼리의 자성을 알지 못함과 같다.
016_1288_c_04L諸有問言象爲何相有說言象如犂柄或說如杵或說如或說如臼或說如帚或有說言象如石山若不解了此二緣起無明生盲亦復如是或有計執自性爲因有計執宿作爲因或有計執自在爲或有計執實我爲因或有計執無因無緣或有計執我爲作者我爲受阿賴耶識自性因性及果性等所不了象之自性
또한 간략히 말하면 아뢰야식은 이숙식의 모든 종자를 사용해서 그 자체의 성품[自性]으로 삼고, 능히 삼계(三界)의 모든 것의 자체(自體)와 모든 윤회세계[趣] 등을 포섭한다.
여기서 다섯 게송이 있다.
016_1288_c_13L又若略說阿賴耶識用異熟識一切種子爲其自性能攝三界一切自體一切趣等此中五頌

외부와 내부는 명료하지 않음과 명료함이네.
두 가지에 있어서 오직 세속이고
승의(勝義)이니 모든 종자는
마땅히 알지니 여섯 가지가 있네.
016_1288_c_17L不明了
於二唯世俗
勝義諸種子
當知有六種

찰나에 멸함[刹那滅], 함께 함[俱有],
항상 따라서 유전한다고 알아야 하네.
결정적임, 여러 조건[緣]을 필요로 함,
오직 능히 자기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이네.
016_1288_c_19L剎那滅俱有
恒隨轉應知,
決定待衆緣,
唯能引自果

견고함, 무기성, 훈습이 가능함,
능훈(能熏)과 상응함이네.
소훈(所熏)은 이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것을 훈습의 양상으로 삼네.
016_1288_c_20L堅無記可熏,
與能熏相應,
所熏非異此
是爲熏習相

여섯 가지 식에는 상응하지 않고
세 가지 차별로 서로 위배되며
두 찰나의 생각이 함께하지 않네
다른 것에 견주면 과실을 이루네.
016_1288_c_21L六識無相應
三差別相違
二念不俱有
類例餘成失

이 내부와 외부의 종자에
능히 생겨나게 함을 알아야 하네.
말라 죽음은 능히 이끌어내는 것에 의거하니
그런 연후에 자연스럽게 멸하기 때문이네.
016_1288_c_23L此外內種子
能生引應知
枯喪由能引
任運後滅故
016_1289_a_01L
내부 종자는 외부 종자와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두 게송으로 설한다.
016_1289_a_01L爲顯內種非如外種復說二頌

외부에서는 혹은 훈습이 없어도
내부 종자는 그렇지 않음을61) 마땅히 알지니
듣는 것 등의 훈습이 없이도
결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네.62)
016_1289_a_02L外或無熏習
非內種應知,
聞等熏習無
果生非道理

지은 것과 짓지 않은 것으로서 상실과 소득의
과실이 있으므로 서로 위배되네.
외부 종자는 내부를 반연으로 삼고
그것의 훈습을 의지하기 때문이네.
016_1289_a_04L作不作失得
過故成相違,
外種內爲緣
由依彼熏習

또한 마땅히 알지니, 그 나머지 전식(轉識)은 널리 모든 것 자체의 여러 윤회세계에 대해서 능히 수용하는 자라고 이름한다. 『중변분별론(中邊分別論)』에서 게송으로 설한 것과 같다.
016_1289_a_05L復次其餘轉識普於一切自體諸趣應知說名能受用者如『中邊分別論』中說伽他曰

첫째는 인연의 식[緣識]63)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수용의 식[受者]64)이라 부르네.
이 중에서65) 능히 수용함과
분별과 헤아리는 것66)은 심리작용[心法]67)이네.
016_1289_a_08L一則名緣識
第二名受者
此中能受用
分別推心法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식68)은 다시 서로 연(緣)이 된다. 『아비달마대승경(阿毘達磨大乘經)』에서 설한 게송과 같다.
016_1289_a_10L如是二識更互爲緣如『阿毘達磨大乘經』中說伽他曰

모든 법은 식에 저장되고
식이 법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네.
다시 서로 결과의 성품이 되고
또한 마땅히 원인의 성품이 되네.
016_1289_a_12L諸法於識藏
識於法亦爾
更互爲果性
亦常爲因性

만일69) 첫 번째 연기70)에 있어서 이처럼 두 종류의 식이 서로 인연이 되면, 두 번째 연기71)에 있어서는 다시 어떤 연이 되는가? 이것은 증상연(增上緣)72)이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식은 몇 가지 조건[緣]으로부터 생겨나는가? 증상연(增上緣)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等無間緣)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연기, 즉 생사를 다할 때까지 계속하는 5온,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윤회세계, 능히 수용하는 것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춘다.
016_1289_a_14L若於第一緣起中如是二識互爲因於第二緣起中復是何緣是增上如是六識幾緣所生增上所緣無閒緣如是三種緣起謂窮生死非愛趣及能受用具有四緣
016_1289_b_01L이와 같이 아뢰야식에 관한 다른 견해 및 양상을 안립하였다. 또한 이러한 다른 견해와 이러한 양상은 반드시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고, 전식에는 그렇지 않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만약 이와 같이 아뢰야식을 안립하지 않으면 잡염과 청정이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른바 번뇌의 잡염이나 업의 잡염이나 생의 잡염도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세간의 청정도 출세간의 청정도 역시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73)
016_1289_a_19L如是已安立阿賴耶識異門及相復云何知如是異門及如是相決定唯在阿賴耶識非於轉識由若遠離如是安立阿賴耶識雜染淸淨皆不得成謂煩惱雜染若業雜染若生雜染皆不成世閒淸淨出世淸淨亦不成故
어째서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74) 모든 번뇌와 수번뇌(隨煩惱)75)의 훈습이 짓는 바 그 종자의 자체는, 여섯 가지 식에 있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ㆍ수번뇌와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하며, 이것이 그 훈습으로 인하여 종자를 이루고 다른 곳에 있지 않다고 안립하면, 곧 이 안식이 이미 없어져 다른 식으로 듣게 된다. 이와 같은 훈습도 훈습의 의지처도 다 있을 수 없다. 이것으로부터 이전에 멸하여 다른 식이 듣게 되고 현재 자체가 없다면, 안식과 그 탐욕 등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것은 과거로 되어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로서 현재 자체가 없는 업으로부터 이숙과가 생겨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음과 같다.
016_1289_b_02L何煩惱雜染不成以諸煩惱及隨煩惱熏習所作彼種子體於六識身不應理故所以者何若立眼識貪等煩惱及隨煩惱俱生俱滅此由彼熏成種非餘卽此眼識若已謝滅餘識所如是熏習熏習所依皆不可得此先滅餘識所間現無有體眼識與彼貪等俱生不應道理以彼過去現無體故如從過去現無體業異熟果不應道理
또한 이 안식은 탐욕 등과 함께 생겨남도, 훈습도 역시 성취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훈습은 탐욕 중에 머물지 않는다. 그 탐욕은 능히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나머지 식에도 머물 수 없다. 그 식들은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자체 안에서 머물 수도 없다. 그것의 자체는 결정적으로 함께 생멸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안식이 탐욕 등의 번뇌와 수번뇌에 훈습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이 식은 식의 훈습처도 아니다. 마땅히 알지니 안식에서 말한 것처럼 나머지 전식도 역시 이와 같다.
016_1289_b_12L又此眼識貪等俱生所有熏習亦不成就然此熏習不住貪由彼貪欲是能依故不堅住故不得住所餘識中以彼諸識所依別又無決定俱生滅故亦復不得住自體中由彼自體決定無有俱生滅是故眼識貪等煩惱及隨煩惱之所熏習不應道理又復此識非識所如說眼識所餘轉識亦復如是應當知
016_1289_c_01L또한 무상천 등의 상부의 여러 지위로부터 떨어져서 이 세간에 와서 태어나면, 그때 번뇌와 수번뇌에 잡염된 처음의 식이 있다. 그런데 이 식이 생기할 때에는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한다. 의지처와 그것의 훈습은모두 이미 과거로서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016_1289_b_21L復次從無想等上諸地沒來生此閒爾時煩惱及隨煩惱所染初識此識生時應無種子由所依止及彼熏習竝已過去現無體故
또한 만약 번뇌를 다스리는 식이 생기하고 나서 세간의 나머지 모든 식이 이미 멸하면, 그때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가 이 다스리는 식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이 다스리는 식은 자성 해탈이기 때문이고, 나머지 번뇌와 수번뇌와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에 세간의 식이 생겨나는데 그때 만일 아뢰야식을 떠나면, 그 모든 훈습과 의지처가 오랫동안 과거로 되어 현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종자가 없는데도 다시 생겨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뢰야식을 떠나서 번뇌의 잡염은 모두 성립될 수 없다.
016_1289_c_02L復次對治煩惱識若已生一切世閒餘識已滅爾時若離阿賴耶識所餘煩惱及隨煩惱種子在此對治識中不應道理此對治識自性解脫故餘煩惱及隨煩惱不俱生滅故復於後時世閒識生爾時若離阿賴耶識彼諸熏習及所依止久已過去現無體故應無種子而更得生是故若離阿賴耶識煩惱雜染皆不得成
어째서 업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76) 행(行)의 지분이 식(識)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는 것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없다면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됨도 역시 상응하지 않는다.
016_1289_c_11L云何爲業雜染不成行爲緣識不相應故此若無者取爲緣有亦不相應
어찌하여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는가?77) 결생(結生)78) 상속의 시기에 상응하지 않기79) 때문이다.
만일 이 선정이 아닌 지위[非等引地]80)에서 죽어서 태어날 때 중유(中有)81) 단계의 의(意)에서 염오의 의식을 일으킴으로써 결생 상속하면, 이 염오의 의식은 중유 안에서 멸하고 모태 중에서 식(識)과 갈라람(羯羅藍)82)과 다시 서로 화합한다. 만약 의식과 그것이 화합한다면, 이미 화합하고 나서 이 식에 의지하여 모태 중에서 의식이 전전함이 있다. 만약에 그렇다면 마땅히 두 가지 의식이 있어서 모태 중에서 동시에 전전하게 된다. 또한 그것과 화합하는 식이 의식의 성품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염오에 의지하기 때문이고, 때로 중단됨이 없기 때문이며, 의식의 인식대상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6_1289_c_13L云何爲生雜染不成結相續時不相應故若有於此非等引地沒已生時依中有位意起染污意識結生相續此染污意識於中有中滅於母胎中識羯羅藍更相和合若卽意識與彼和合旣和合已依止此識於母胎中有意識轉若爾卽應有二意識於母胎中同時而轉又卽與彼和合之識是意識性不應道理依染污故無斷故意識所緣不可得故
016_1290_a_01L설사 화합식(和合識)이 의식이라 하더라도 이 화합의 의식이 곧일체종자식인가? 이 식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다른 의식이 일체종자식인가? 만약 이 화합식이 일체종자식이라면 이것은 곧 아뢰야식이다. 그대는 다른 명칭으로써 안립하여 의식이라고 한다.
만일 능히 의지하는 식이 일체종자식이라면, 의지처의 원인으로서의 식이 일체종자식이 아니고 능히 의지하는 과보로서의 식이 일체종자식이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므로 이 화합식은 의식이 아니고 다만 이숙식이며 이것이 일체종자식임이 성취된다.
016_1289_c_23L設和合識卽是意識爲此和合意識卽是一切種子識爲依止此識所生餘意識是一切種子識若此和合識是一切種子識卽是阿賴耶識汝以異名立爲意識若能依止識是一切種子識是則所依因識非一切種子識能依果識是一切種子識不應道理是故成就此和合識非是意識但是異熟是一切種子識
또한 결생 상속하고 나서, 만일 이숙식을 여의면 감각기관을 집수(執受)하는 일도 역시 있을 수 없다. 그 나머지 모든 식은 각기 의지처가 다르기 때문이고 견고하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모든 감각기관은 식83)을 떠날 수 없다.
016_1290_a_09L復次結生相續已若離異熟識執受色根亦不可得其餘諸識各別依故不堅住故是諸色根不應離識
만약 이숙식을 여의면 식과 명색(名色)84)이 다시 서로 의지하여, 마치 갈대 묶음이 서로 의지해서 전전하는 것과 같은 이런 일은 역시 성립되지 않아야 한다.
016_1290_a_12L若離異熟識識與名色更互相依如蘆束相依而轉此亦不成
만일 이숙식을 여의면 이미 태어난 유정의 식식(識食)은 성립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여섯 가지 식 가운데 하나의 식을 취해도, 삼계에 태어난 유정은 능히 음식작용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1290_a_14L若離異熟識已生有情識食不成以故以六識中隨取一識於三界中已生有情能作食事不可得故
만약 여기서 죽어 선정의 지위[等引地]에서 바로 생을 받을 때, 선정이 아닌 지위의 염오의식으로 인하여 생을 맺어 상속한다. 이 선정이 아닌 지위의 염오의 마음은 그 지위에 포섭된다. 이숙식을 여의어서는 다른 것의 종자의 자체는 반드시 있을 수 없다.
016_1290_a_17L若從此沒於等引地正受生時由非等引染污意識結生相續此非等引染污之心彼地所攝離異熟識餘種子體定不可得
또한 무색계에 태어나서 만일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의면 염오와 선의 마음은 마땅히 종자가 없어야 하고, 염오와 선의 마음은 마땅히 의지가 없어야 한다.
016_1290_a_21L復次生無色界若離一切種子異熟染污善心應無種子染污善心應無依持
016_1290_b_01L또한 그곳에서 만일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바로 현전하면 나머지 세간의 마음은 다 멸진하기 때문에, 그때 바로 그 세계를 떠나야 한다.
만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85) 무소유처(無所有處)86)에 태어나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현전할 때는 마땅히 두 세계를 다 여의어야 한다. 이 세간을 벗어나는 식은 비상비비상처로써 의지할 세계로 삼지 않고, 역시 마땅히 무소유처로써 의지할 세계로 삼지 않는다. 또한 열반을 의지할 세계로 삼지도 않는다.
016_1290_b_01L又卽於彼若出世心正現在前餘世閒心皆滅盡故爾時便應滅離彼趣若生非想非非想處無所有處出世閒心現在前時卽應二趣悉皆滅離此出世識不以非想非非想處爲所依趣亦不應以無所有處爲所依趣亦非涅槃爲所依趣
또한 장차 죽으려 할 때에 선과 악을 지은 것 때문에 혹은 아래부터 혹은 위로부터 의지처가 점차 차가워진다.87) 만약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믿지 않으면 이런 일이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의면 이 생의 잡염도 역시 성립될 수 없다.
016_1290_b_08L又將沒時造善造惡或下或上所依漸冷若不信有阿賴耶識皆不得成是故若離一切種子異熟識者此生雜染亦不得成
어째서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88) 아직 욕계[欲纏]89)의 탐욕을 여의지 못하고 색계[色纏]90)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는, 욕계의 선심으로써 욕계의 탐욕을 여의기 위해서 가행(加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이 욕계의 가행의 마음과 색계의 마음은 함께 생멸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16_1290_b_12L云何世閒淸淨不成謂未離欲纏貪未得色纏心者卽以欲纏善心爲離欲纏貪故勤修加行此欲纏加行心與色纏心不俱生滅故非彼所熏彼種子不應道理
또한 색계의 마음은 과거의 여러 생에서 다른 마음과 사이가 벌어져서 마땅히 지금 선정의 마음 종자가 되지 못하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색계 선정의 마음을 성취하는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이 전전히 전래하여 지금의 인연이 되고, 가행의 선심이 증상연이 된다. 이처럼 욕락을 떠난 모든 지위에서도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세간의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식을 여의어서는 도리가 성립될 수 없다.
016_1290_b_17L又色纏心過去多生餘心閒隔不應爲今定心種子無有故是故成就色纏定心一切種子異熟果識展轉傳來爲今因緣行善心爲增上緣如是一切離欲地如應當知如是世閒淸淨若離一切種子異熟識理不得成
016_1290_c_01L어째서 세간을 벗어나는 청정이 성립되지 않는가?91)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남의 말과 내면적으로 각기 이치 그대로 작의(作意)함에 의하며, 이것을 원인으로 해서 바른 견해가 생겨날 수 있다”고 하셨다. 이 남의 말과 이치 그대로 작의함은 이식에 훈습되는가? 의식에 훈습되는가? 아니면 양쪽에서 함께 훈습되는가? 만일 그 법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사유하면 그때 이식은 우선 생기할 수 없다. 의식도 역시 갖가지 산란되게 움직이는 다른 식에 의해 중단된다. 만약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해서 생겨날 때는, 이 들어서 훈습된 의식과 그 훈습은 오래전에 멸하여 과거로 되어 반드시 자체가 없다. 어떻게 다시 종자가 되어서 능히 나중에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하는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016_1290_b_23L云何出世淸淨不成謂世尊說依他言音及內各別如理作意由此爲因正見得生此他言音如理作意爲熏耳識爲熏意識爲兩俱熏若於彼法如理思惟爾時耳識且不得起意識亦爲種種散動餘識所間若與如理作意相應生時此聞所熏意識與彼熏習久滅過去定無有體云何復爲種子能生後時如理作意相應之心
또한 이 이치 그대로 작의함과 상응하는 것은 세간의 마음이고, 그 바른 견해와 상응함은 출세간의 마음이다. 예전에 때로 함께 생겨나고 함께 멸한 적이 없다. 따라서 이 마음은 그것의 훈습처가 아니다. 이미 훈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종자가 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따라서 세간을 벗어나는 청정은 일체종자의 이숙과식(異熟果識)을 떠나서는 역시 성립될 수 없다. 이 중에서 들음의 훈습이 그 종자를 섭수하는 것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290_c_09L又此如理作意相應是世閒心彼正見相應是出世心曾未有時俱生俱是故此心非彼所熏旣不被熏彼種子不應道理是故出世淸淨離一切種子異熟果識亦不得成中聞熏習攝受彼種子不相應故
또한 어떻게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이 잡염의 원인이 되며, 또한 세간을 벗어나고, 능히 그것을 다스리는 청정한 마음의 종자가 되는가?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은 예전부터 아직 훈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훈습은 결정적으로 없어야 한다. 이미 훈습이 없는데 무슨 종자로부터 생겨나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가장 청정한 법계(法界)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바르게 들음의 훈습[正聞熏習]된 종자가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016_1290_c_15L復次云何一切種子異熟果識爲雜染因復爲出世能對治彼淨心種子又出世心昔未曾習故彼熏習決定應無旣無熏習從何種生是故應答從最淸淨法界等流正聞熏習種子所生
016_1291_a_01L이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의 자성인가,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닌가? 만약 아뢰야식의 자성이라면어떻게 그 다스림의 종자가 되겠는가? 만일 아뢰야식의 자성이 아니라면 이 들음의 훈습의 종자 의지처는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나아가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증득하시기까지, 이 들음의 훈습은 좇아서 한 종류의 의지처가 전전하는 곳에 있으며, 이숙식 안에 머물러서 그것과 화합하여 함께 전전한다. 마치 물과 우유와 같다.92) 그러나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니니, 그 다스림 종자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016_1290_c_21L此聞熏習爲是阿賴耶識自性爲非阿賴耶識自性若是阿賴耶識自性云何是彼對治種子若非阿賴耶識自性此聞熏習種子所依云何可見乃至證得諸佛菩提此聞熏習隨在一種所依轉處寄在異熟識中與彼和合俱轉猶如水乳然非阿賴耶識是彼對治種子性故
이 중에서 하품(下品)의 훈습에 의지해서 중품(中品)의 훈습을 이룬다. 중품의 훈습에 의지해서 상품의(上品) 훈습을 이룬다. 듣고 사유하며 닦음에 의지해서 누누히 닦아 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바르게 들음의 훈습된 종자의 하품ㆍ중품ㆍ상품은 역시 법신의 종자로서 아뢰야식과 서로 다르고 아뢰야식에 포섭되는 바가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세간을 벗어나는 가장 청정한 법계로부터 평등히 흘러나오는 성품이기 때문에, 세간이긴 하지만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의 종자의 성품이다. 또한 세간을 벗어나는 마음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이긴 하지만, 능히 모든 번뇌의 계박을 다스리고, 이미 능히 모든 험난한 괴로움의 세계를 다스리며, 이미 일체의 모든 악업을 쇠퇴시켜서 다스린다.
또한 능히 모든 불보살을 수순하며 만나서 섬긴다. 이것은 세간이긴 하지만 처음 수행하는 보살이 얻는 바도 역시 법신에 포섭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문과 독각이 얻는 것은 오직 해탈신(解脫身)에만 포섭된다.
016_1291_a_06L此中依下品熏習成中品熏習依中品熏習成上品熏習依聞思修多分修作得相應故又此正聞熏習種子下中上品應知亦是法身種子與阿賴耶識相違非阿賴耶識所攝是出世閒最淨法界等流性故雖是世閒而是出世心種子性又出世心雖未生時已能對治諸煩惱纏已能對治諸嶮惡趣已作一切所有惡業朽壞對治又能隨順逢事一切諸佛菩薩雖是世閒應知初修業菩薩所得亦法身攝聲聞獨覺所得唯解脫身攝
또한 이 훈습은 아뢰야식이 아니니, 법신과 해탈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훈습이 하품ㆍ중품ㆍ상품의 순서로 점차 증가되면서, 이와 같이 이렇게93) 이숙의 과식(果識)이 순서대로 점차 멸한다. 곧 의지처를 전환한다. 이미 일체 종자의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에, 곧 이숙과의 식과 모든 종자는 종자 없이 전환해서 모든 종자가 영원히 단멸된다.
016_1291_a_18L又此熏習非阿賴耶識是法身解脫身攝如如熏習下中上品次第漸增如是如是異熟果識次第漸減卽轉所依旣一切種所依轉已卽異熟果識及一切種子無種子而轉一切種永斷
016_1291_b_01L또한 마치 물과 우유처럼, 아뢰야식이 아닌 것과 아뢰야식이 동일한 곳에서 함께 전전하는데, 어떻게 아뢰야식의 일체종자는 멸진하고 아뢰야식의 일체종자가 아닌 것은 증가하는가? 비유하면 물과 거위가 마시는 우유와 같다. 또한 세간의 욕락을 여읠때, 선정이 아닌 지위[非等引地]의 훈습은 점차 감소하고 그 선정의 지위의 훈습은 점차 증가하여 전의(轉依)를 얻음과 같다.
016_1291_b_01L復次云何猶如水乳非阿賴耶識與阿賴耶識同處俱轉而阿賴耶識一切種盡非阿賴耶識一切種增譬如於水鵝所飮乳又如世閒得離欲時非等引地熏習漸減其等引地熏習漸增而得轉依
또한94) 멸진정에 들어가도 식이 신체를 떠나지 않음은 성인이 말씀한 바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숙식은 마땅히 신체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95)을 다스리기 위해서 멸진정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선정에서 나와서 이 식이 다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숙식은 중단되고 나서 결생(結生) 상속을 떠나면 거듭해서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16_1291_b_07L又入滅定識不離身聖所說故此中異熟識應成不離身非爲治此滅定生故又非出定此識復生由異熟識旣閒斷已離結相續無重生故
또한 만약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의식이 있기 때문에 멸진정에 마음이 있다”고 하면 이 마음이란 성립되지 않는다. 마땅히 선정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고,96) 인식대상과 인식작용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선근(善根)과 상응하는 과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고, 불선과 무기는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표상작용[想]과 감수작용[受]의 심소가 현행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접촉[觸]의 심소가 있기 때문이며, 삼마지에서 작용의 힘이 있기 때문이고, 오직 표상작용의 심소만을 멸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의지[思]와 믿음의 심소 등의 선근이 현행하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고, 그 능히 의지하는 것을 부정하고 의지처를97) 여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비유가 있기 때문이고, 변행(遍行)심소가 아닌 것은 여기에 없기 때문이다.
016_1291_b_12L又若有執以意識故滅定有心此心不成定不應成故所緣行相不可得應有善根相應過故不善無記不應理故應有想受現行過故觸可得於三摩地有功能故應有唯滅想過失故應有其思信等善根現行過拔彼能依令離所依不應理故譬喩故如非遍行此不有故
016_1291_c_01L또한 이 선정 중에는 의식에 의거해서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면, 이 마음은 선ㆍ불선ㆍ무기가 다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98)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해서 말하기를 “물질과 마음[色心]이 중단됨 없이 모든 법의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고 하면 이것은 성립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또한 무색계(無色界)나 무상천(無想天)에서 죽거나멸진정에서 나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아라한 이후의 마음이 성립되지 않는다. 오직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있음이 인정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일체종자의 이숙과식을 떠나서는 잡염과 청정이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양상과 같은 아뢰야식은 결정적으로 존재함이 성취된다.
여기서 세 게송이 있다.
016_1291_b_20L又此定中由意識故執有心者此心是善不善無記皆不得成故不應理若復有執色心無閒生是諸法種子此不得成如前已說又從無色無想天沒滅定等出不應道理又阿羅漢後心不成唯可容有等無閒緣如是若離一切種子異熟果識雜染淸淨皆不得成是故成就如前所說相阿賴耶識決定是有此中三頌

보살은 청정한 마음으로
5식(識)을 멀리 여의는데
다른 것 없이 마음의 전의(轉依)를
그대는 장차 어떻게 이루겠는가?
016_1291_c_07L菩薩於淨心
遠離於五識
無餘心轉依
云何汝當作

만일 다스림의 전의라면
단멸이 아니므로 성립되지 않네.
결과와 원인이 차별 없이
영원히 단멸함에 있어서 과실을 이루네.
016_1291_c_09L若對治轉依
非斷故不成
果因無差別
於永斷成過

종자가 없고 혹은 자체가 없음을
만일 전의라고 인정하면
그 두 가지의 없음은 없기 때문에
전의는 도리에 맞지 않네.
016_1291_c_10L無種或無體
若許爲轉依
無彼二無故
轉依不應理

또한 이 아뢰야식의 차별은 어떠한가?99) 마땅히 알지니 간략히 말하면 세 가지 혹은 네 가지가 있다. 여기서 세 가지란 세 가지 훈습의 차별 때문이다. 첫째는 명언훈습(名言熏習)의 차별이고, 둘째는 아견훈습(我見熏習)의 차별이며, 셋째는 유지훈습(有支熏習)의 차별이다. 네 가지란 첫째는 이끌어내는 것[引發]의 차별이고, 둘째는 이숙(異熟)의 차별이며, 셋째는 형상을 반연함[緣相]의 차별이고, 넷째는 양상[相貌]의 차별이다.
016_1291_c_11L復次此阿賴耶識差別云何略說應知或三種或四種此中三種者謂三種熏習差別故名言熏習差別我見熏習差別有支熏習差別種者引發差別異熟差別相差別相貌差別
이중에서 이끌어내는 것의 차별은 새롭게 훈습을 일으킴을 말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행의 지분이 식의 지분에 조건[緣]이 되고, 취(取)의 지분이 유(有)의 지분에 조건이 되는 일은 마땅히 성립될 수 없다.
이 중에서 이숙의 차별은 행과 유의 지분을 조건으로 삼아서 모든 윤회세계에서 이숙 차별함을 말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곧 종자가 없게 되므로, 다음 존재의 모든 법이 생겨날 수 없어야 한다.
이 중에서 ‘형상을 반연함의 차별’이란 말나식[意] 가운데 아집의 형상을 반연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으면 염오의 중의 아집의 인식대상이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016_1291_c_17L此中引發差別者謂新起熏習此若無者行爲緣識取爲緣有應不得成此中異熟差別者謂行有爲緣於諸趣中異熟差別此若無者則無種子後有諸法生應不成此中緣相差別謂卽意中我執緣相此若無者污意中我執所緣應不得成
016_1292_a_01L이 중에서 양상의 차별은 이른바 이 식에 공통된 양상[共相]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不共相]이 있고,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無受生種子]의 양상과 감각ㆍ지각작용이 있는 종자[有受生種子]의 양상 등이다.
공통된 양상은 자연계[器世間]의 종자를 말하고,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각각 내부의 종자이다. 공통된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없는 종자이다.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감각ㆍ지각 작용이 있는 종자이다. 다스림이 생겨날 때는 오직 공통되지 않은 것만이 다스려져서 멸한다. 공통된 양상은 남의 분별에 섭지되어져서 다만 청정함을 볼 뿐이다. 관행을 닦는 자[瑜伽師]가 한 사물 중에서 갖가지 뛰어난 이해와 갖가지 소견을 다 성립할 수 있음과 같다. 여기서 두 게송이 있다.
016_1292_a_01L此中相貌差別者謂卽此識有共相有不共相無受生種子相有受生種子相等共相者謂器世閒種子不共相者謂各別內處種子共相卽是無受生種子不共相卽是有受生種子對治生時唯不共相所對治滅共相爲他分別所持但見淸淨如瑜伽師於一物中種種勝解種種所見皆得成立此中二頌

단멸하기 어렵고 두루 알기 어려운 것을
마땅히 알지니 공통된 속박[共結]이라 이름하네.
관행을 닦는 사람은 마음이 다르고
외부가 상대(相大)이기 때문이네.
016_1292_a_10L難斷難遍知
應知名共結
瑜伽者心異
由外相大故

청정한 사람은 단멸하지 않아도
그 안에서 청정함을 보네.
또한 청정한 불국토는
부처님께서 청정함이라고 보기 때문이네.
016_1292_a_12L淨者雖不滅
而於中見淨
又淸淨佛土
由佛見淸淨

또한 별도의 게송이 있어서, 앞에서 인용된 것에 대해서 갖가지 뛰어난 이해와 갖가지 소견을 다 성취할 수 있다.
016_1292_a_13L復有別頌對前所引種種勝解種種所見皆得成立

관행을 닦는 이는 모두 한 사물에 대해서
갖가지 뛰어난 이해가 각기 다르고
갖가지 소견도 다 이루어질 수 있네.
그러므로 알지니 인식대상은 오직 식만이 존재하네.
016_1292_a_15L諸瑜伽師於一物
種種勝解各不同
種種所見皆得成
故知所取唯有識

만약 이것이 없다면 모든 자연계와 유정세간이 생겨나는 차별은 마땅히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또한 거칠고 무거움의 양상[麤重相]과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輕安相]이 있다. 거칠고 무거움의 양상이란 번뇌와 수번뇌의 종자이다. 가볍고 평안함의 양상은 유루 선법의 종자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초감된 이숙에 감당 능력이 없음과 감당 능력이 있음의 의지처의 차별이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016_1292_a_17L此若無者諸器世閒有情世閒生起差別應不得成復有麤重相及輕安相麤重相者煩惱隨煩惱種子輕安相者謂有漏善法種子此若無者所感異熟無所堪能有所堪能所依差別應不得成
016_1292_b_01L또한 수용의 다함이 있는 양상[有受盡相]100)과 수용의 다함이 없는 양상[無受盡相]이 있다. 수용의 다함이 있는 양상은이미 이숙과를 성숙시킨 선ㆍ불선의 종자이다. 수용의 다함이 없는 양상은 명언훈습의 종자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갖가지 희론에 의해 유전되는 종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미 짓고 지어진 선악의 두 가지 업의 과보를 다 받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또한 새롭게 명언훈습이 생기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016_1292_a_23L復有有受盡相無受盡相有受盡相謂已成熟異熟果善不善種子受盡相者謂名言熏習種子無始時來種種戲論流轉種子故此若無者已作已作善惡二業與果受盡應不得成又新名言熏習生起應不得成
또한 비유의 양상이 있다. 이 아뢰야식은 요술ㆍ불꽃ㆍ꿈ㆍ흐리고 어두움을 비유로 삼기 때문에, 만일 이것이 없다면 참다운 것이 아닌 변계소집의 종자로 인하여 전도된 반연의 양상은 이루어질 수 없어야 한다.
016_1292_b_06L復有譬喩相謂此阿賴耶識幻炎夢翳爲譬喩故此若無者由不實遍計種子故顚倒緣相應不得成
또한 갖춤의 양상[具足相]과 갖추지 않음의 양상[不具足相]이 있다. 모든 속박을 갖추는 자를 갖춤의 양상이라 이름한다. 세간의 욕망을 여의는 자를 감손의 양상[損減相]이라고 부른다. 유학의 성문과 모든 보살을 일부분을 영원히 없앤 양상[一分永拔相]이라 이름한다. 아라한ㆍ독각과 모든 여래는 번뇌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양상과 번뇌장ㆍ소지장을 전부 영원히 없앤 양상이라고 부른다. 그 상응하는 바와 같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와 같이 잡염이 차례로 소멸하는 일은 마땅히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016_1292_b_09L復有具足相不具足相謂諸具縛者名具足世閒離欲者名損減相有學聲聞及諸菩薩名一分永拔相阿羅漢覺及諸如來名煩惱障全永拔相煩惱所知障全永拔相如其所應此若無者如是次第雜染還滅應不得成
선과 불선의 법은 어떻게 이숙을 초감하는가? 그 이숙과는 무부무기이기 때문이다. 이숙과는 무부무기이기 때문에 선과 불선이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선과 불선은 서로 위배되기 때문에 만일 이숙과가 선ㆍ불선의 성품이라면 잡염과 환멸(還滅)은 성립될 수 없어야 한다. 따라서 이숙식은 오직 무부무기(無覆無記)일 뿐이다.
016_1292_b_15L何因緣故善不善法能感異熟其異熟果無覆無記由異熟果無覆無記與善不善互不相違善與不善互相違故若異熟果善不善性雜染還滅應不得成是故異熟識唯無覆無記
攝大乘論本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 : 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운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를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는데, 태종이 작성한 서문이 바로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이다.
  2. 2)죄를 지은 결과 태어나서 고통을 받는 세 가지 길로, 곧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을 말한다.
  3. 3)성문ㆍ연각ㆍ보살의 삼승이 공통으로 닦는 열 가지 수행 단계를 말한다.
  4. 4)삼해탈(三解脫), 또는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한다. 아공(我空), 법공(法空), 아법구공(我法俱空)을 가리키기도 하고 삼공해탈(三空解脫), 무상해탈(無相解脫), 무원해탈(無愿解脫)을 가리키기도 한다.
  5. 5)여기서 인(忍)은 인가(忍可)ㆍ안인(安忍)의 뜻으로, 보살이 도리에 안주(安住)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인에는 무생법인(無生法忍)ㆍ무멸인(無滅忍)ㆍ인연인(因緣忍)ㆍ무주인(無住忍)이 있다.
  6. 6)인간의 심성을 더럽히는 여섯 가지 경계로,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육경(六境)을 말한다.
  7. 7)원문에는 ‘척(隻)’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맞지 않아 ‘형(夐)’으로 교정하여 번역하였다.
  8. 8)당(唐)의 현장 법사가 새로 불경 번역을 완성하자, 이것을 기념하여 태종과 고종이 서문과 기문을 작성하였다. 황제술성기는 바로 고종이 기문을 썼다는 의미이다.
  9. 9)『유마경(維摩經)』「불국품(佛國品)」에 나오는 보옥(寶玉)으로 꾸며놓은 화려한 일산(日傘)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상이나 탑의 상부를 장엄하게 꾸미는 데 사용된 덮개를 말한다, 본래는 천으로 만들었으나 후대에 내려오면서 금속이나 목재로 조각하여 만들기도 하였다.
  10. 10)고승이 불경을 강론할 때 하늘이 감동하여 하늘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11. 11)향취산(香醉山)의 남쪽, 대설산(大雪山)의 북쪽에 있다는 상상의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다. 이 연못은 둘레가 8백 리이며, 여기에 용왕이 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물이 흘러내려 섬부주(贍部州)를 비옥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12. 12)경기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기는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으로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 지역을 말한다. 즉 나라의 중심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3. 13)중국 고대 관중지방에 흐르는 8개의 하천을 말한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이 바로 이 관중지방에 있다.
  14. 14)색계의 네 가지 단계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세계로, 물질세계는 존재하나 감각의 욕망에서는 벗어난 청정(淸淨)한 세계를 말한다.
  15. 15)마음을 더럽히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16. 16)모든 현상의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나 상태를 말한다.
  17. 1)이하 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관하여 말한다(第1 無等聖敎章).
  18. 2)산스크리트 Bhagavat의 음역으로서, 바가바(婆伽婆)ㆍ바가범(婆伽梵)이라고도 한다. 세존ㆍ중우(衆祐)로 번역된다. 박가범에는 유덕(有德)ㆍ자재ㆍ치성(熾盛)ㆍ단엄(端嚴)ㆍ명칭ㆍ길상ㆍ존귀 등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역하지 않는다. 5종 불번(不飜)의 하나이다.
  19. 3)유식에 들어감을 가리킨다.
  20. 4)증과인 단멸[果斷]은 열반을 가리킨다.
  21. 5)열반을 과단(果斷:斷果)이라 하는 데 대해서 보리(菩提)를 이렇게 부른다.
  22. 6)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 번뇌의 잠재 세력이다. 이에 대해 현재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이라고 한다.
  23. 7)범어 śūraṁgama의 음역으로서 수능엄(首楞嚴)이라고도 한다. 건상(健相)ㆍ건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이다.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에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24. 8)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四空處定] 가운데 하나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25. 9)이하 열 가지 의미의 순서에 관하여 말한다(第2 十義次第章).
  26. 10)범어 āśaya의 번역어이다. 휴식처ㆍ주처(住處)ㆍ사의(思意)ㆍ의향(意向)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의요(意樂)ㆍ의욕(意慾)ㆍ지원(志願)이라고 한역한다. 무슨 일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특히 선정 중의 작의(作意)를 가리킨다.
  27. 11)무수겁(無數劫)은 아승기겁(阿僧祇劫)의 번역어이다. 아승기는 범어 asaṁkhya의 음역어로서, 원래 발음은 아승기이지만 흔히 아승지라고도 한다.
  28. 12)매우 높은 계율[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이다.
  29. 13)이하 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하여 말한다(第3 衆名章).
  30. 14)여기서 계(界)는 범어 dhātu의 번역어로서 층(層)ㆍ근기(根基)ㆍ요소ㆍ원인[因]ㆍ세계ㆍ경계 등의 의미이다. 일체법의 종자를 계(界)라고 할 때는 원인ㆍ요소의 의미이다.
  31. 15)제8식의 3상(相:自相ㆍ果相ㆍ因相) 가운데 자상인 장식(藏識)에서 장(藏)의 세 가지 의미[能藏ㆍ所藏ㆍ執藏] 가운데 능장을 해석한다.
  32. 16)소장(所藏)의 의미이다.
  33. 17)집장(執藏)의 의미이다. 제7식이 제8식을 의지처[所依]로 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所緣]으로 하는데, 여기서 제8식을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띤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함을 말한다.
  34. 18)여기서 범부[凡]는 일반 범부를, 어리석은 무리[愚]는 아공법유설(我空法有說)을 주장하는 소승을 가리킨다.
  35. 19)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36. 20)이하 심ㆍ의ㆍ식의 명칭을 해석한다.
  37. 21)제7 말나식을 가리킨다.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38. 22)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전자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낸다. 후자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39. 23)4연(緣:因緣ㆍ所緣緣ㆍ等無間緣ㆍ增上緣) 가운데 하나이다. 전념(前念)의 식이 멸하는 것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됨을 말한다. 수역(隋譯)이나 진제 역본에는 차제연(次第緣)으로 되어 있다. 4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이 논서 제2권 주 76) 참조.
  40. 24)무명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눈다.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욕[貪]ㆍ성냄[瞋]ㆍ어리석음[癡]과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참고로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41. 25)여기서 5동법(同法)은 5식을 의미한다.
  42. 26)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된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43. 27)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이다.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인데,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한다.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으며,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44. 28)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다.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45. 29)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다.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46. 30)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하는 아집을 의미한다.
  47. 31)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이다.
  48. 32)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5식을 가리킨다. 세 가지는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을 말한다.
  49. 33)유부무기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을 말한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된다.
  50. 34)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범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51. 35)식을 첫 번째로 말하고, 의(意)를 두 번째로 말하며, 이제 세 번째로 심(心)을 말한다.
  52. 36)이하 성문승에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먼저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53. 37)세간의 총명한 지혜로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미세하다고 표현한다.
  54. 38)이문밀의(異門密意)에서 이문은 관찰점을 달리하는 견해이고, 밀의는 본래 취지를 은밀히 해서 표면에 나타내지 않음을 말한다.
  55. 39)이하 두 번째로 성문승에 이미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56. 40)『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중에 있다.
  57. 41)근본식의 범어는 mūla-vijāna로서, 마치 나무가 뿌리(mūla)에 의존하는 것처럼 이 식이 모든 식의 근본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른다.
  58. 42)궁생사온(窮生死蘊)은 궁생사, 즉 생사를 거듭하는 것을 마칠 때까지-범부의 6도 윤회나 성현의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이르기까지-윤회하는 주체라는 의미이다.
  59. 43)이하 대승이 안립한 명의(名義)가 가장 뛰어난 것임을 나타낸다.
  60. 44)색계의 제4선천(禪天)이다. 그 이상의 여러 지위는 무색계의 4천(天)을 말한다.
  61. 45)이하 훈습에 관하여 설명한다(第5 熏習章).
  62. 46)전(詮)은 나타내는 것의 의미이다. 능전은 어구(語句)ㆍ문장ㆍ교법 등을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의의(意義)와 내용을 소전(所詮)이라고 한다.
  63. 47)훈습은 능전(能詮)의 언어이고, 이로 인하여 무슨 의미를 나타내는가 하는 그 의의(意義)를 묻는다.
  64. 48)호마(胡麻)로서 검은 깨와 참깨의 총칭이다.
  65. 49)대상을 인식함에 있어서 심왕과 심소(心所:심리작용)를 대상에 주의시켜서 인도하는 작용이다. 촉(觸)의 심소(心所) 다음에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감수작용[受]이 있게 된다.
  66. 50)이하 아뢰야식과 종자의 불일불이성을 논한다(第6 不一不異章).
  67. 51)이하 아뢰야식과 잡염품이 서로 원인ㆍ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第7 更互爲因果章).
  68. 52)이하 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에 개별이면서 개별이 아닌 속성을 띰을 말한다(第8 因果別不別章).
  69. 53)이하 연기(緣起)에 관하여 설명한다(第9 緣起章).
  70. 54)일반적으로 12연기(緣起)ㆍ12인연(因緣)이라고 한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12단계로 설명한다. 즉 무명(無明:진리에 대한 無知)→행(行: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식(識: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명색(名色: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6입(入: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촉(觸:6根과 6境과 6識의 화합)→수(受:감수작용)→애(愛:갈애)→취(取: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유(有: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생(生:태어남ㆍ삶)→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이다.
  71. 55)인도의 6파철학(派哲學)의 하나인 상캬(Sāṃkhya)학파의 주장이다. 여기서 자성은 프라크리티(prakṛti)로서, 근본 원질(原質)ㆍ근본 자성ㆍ제1 원인[勝因] 등의 의미이다. 상캬학파에서는 세계를 푸루샤(puruṣa, 神我:순수 청정한 정신성)와 프라크리티의 2원론(元論)으로 파악하고,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한다. 여기서 프라크리티는 라자스(rajas, 動質)ㆍ사트바(sattva, 純質)ㆍ타마스(tamas, 暗質)의 세 가지 속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 만물의 차이는 이 세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그 중의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프라크리티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 즉, 붓디(buddhi:大ㆍ智)→아만→5유량(唯量:色ㆍ聲ㆍ香ㆍ味ㆍ觸)→5대(大:地ㆍ水ㆍ火ㆍ風ㆍ空)→11근(根:눈ㆍ귀ㆍ코ㆍ혀ㆍ피부ㆍ손ㆍ발ㆍ입ㆍ생식기관ㆍ배설기관ㆍ心根)이 전개된다고 한다.
  72. 56)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ika)의 주장이다. 그들은 세간의 모든 원인은 다만 과거에 지은 것만이 있을 뿐으로서, 현재 노력하는 것은 결과를 초감할 수 없다고 하였다.
  73. 57)자재천(自在天)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을 논파한다. 이들은 다만 자재천이라는 하나의 원인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계(千界)를 주관한다고 한다(혹은 욕계의 제6天主라고도 한다). 이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이 자재천의 인(因)이 자아 등으로 하여금 선악을 일으키고 생사에 윤회하게 하며, 나중에 혐오를 일으켜서 해탈을 구하게 만든다고 한다.
  74. 58)바이세시카(Vaiśeṣika, 勝論)학파의 주장이다. 이 학파는 극단적인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유물론적(唯物論的) 다원론(多元論)으로서 세계의 구성을 여섯 가지 범주[六句義], 즉 실체[實]ㆍ속성[德]ㆍ행위[業]ㆍ보편성[同:大有性]ㆍ특수성[異:同異性]ㆍ내재성[和合性]으로 설명하고, 이것들은 식에서 떠나 별도로 상주의 자체[體]가 있다고 인정하였다.
  75. 59)능에서 산신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돌이다.
  76. 60)상일주재(常一主宰)의 자아가 있어서 모든 것의 작자(作者), 즉 원인이고 또한 그 과보를 받는 자라고 주장함을 말한다.
  77. 61)외부 종자는 훈습이 없이도 생겨나지만, 내부 종자는 훈습에 의하지 않으면 생기(生起)할 수 없다.
  78. 62)듣고 사유하며 수행함[聞思修]은 훈습이 없이도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의 결과가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79. 63)아뢰야식을 가리킨다. 모든 식이 전변 생기하는 인연이기 때문이다.
  80. 64)수용식ㆍ수식(受識)이라고 한다. 외부 대상을 수용하는 식, 즉 전식(轉識)이다.
  81. 65)다음의 두 구절은 수용식의 작용을 구별해서 말한다.
  82. 66)헤아리는 것[推]은 사(思)ㆍ작의(作意) 등의 심소법을 말한다.
  83. 67)여기서 심법은 심소법(心所法:심리작용)을 말한다.
  84. 68)근본식인 아뢰야식과 전식인 7식(識)을 말한다.
  85. 69)이하 네 가지 연[四緣]에 관하여 말한다(第10 四緣章). 정신과 물질의 모든 현상이 발생함에 있어서 그 연(緣)을 인연ㆍ증상연ㆍ소연연(所緣緣)ㆍ등무간연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86. 70)앞에서 말한 자성을 분별하는 연기[分別自性緣起]를 말한다.
  87. 71)앞에서 말한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을 분별하는 연기[分別愛非愛緣起]이다.
  88. 72)증상연(增上緣)은 그것이 생겨나는 데 외부로부터 도와주는 힘을 말한다. 이에는 유력(有力) 증상연과 무력(無力) 증상연이 있다. 전자는 다른 법이 생겨나는 데 힘을 주는 조건[緣]이고, 후자는 다른 법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지 않는 조건이다.
  89. 73)이하 앞에서 말한 이문(異門)과 양상들이 오직 아뢰야식에만 있고 다른식에는 없으므로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을 번뇌의 잡염ㆍ업의 잡염ㆍ태어남의 잡염ㆍ세간의 청정ㆍ출세간의 청정ㆍ도리에 수순함이 성립되는 순서대로 설명한다.
  90. 74)이하 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번뇌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다(第11 煩惱染章).
  91. 75)수번뇌(隨煩惱)는 근본번뇌[貪ㆍ瞋ㆍ癡ㆍ慢ㆍ疑ㆍ惡見]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유식학에서는 분노[忿]ㆍ원한[恨]ㆍ질투[嫉]ㆍ속임[誑]ㆍ아첨[諂]ㆍ게으름[懈怠]ㆍ혼침(婚沈)ㆍ들뜸[掉擧] 등 20가지를 말한다.
  92. 76)이하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업의 잡염품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第12 業染章).
  93. 77)이하 아뢰야식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태어남의 잡염이 성립되지 않음을 말한다(第13 生染章).
  94. 78)결생(結生)은 윤회하면서 중유(中有)가 없어지고 모태에 다음 생을 위탁함을 말한다.
  95. 79)여기서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의미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96. 80)등인(等引)은 범어 samāhita의 번역으로서 선정(禪定), 즉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켰다는 의미이다. 등(等)은 마음에 혼침과 들뜸[掉擧]이 평정되어 평등하다는 의미이다. 선정을 닦으면 등(等)을 일으키므로 등인이라 이름한다. 본문에서 비등인지(非等引地)는 선정이 아닌 지위, 즉 산지(散地)인 욕계(欲界)를 의미한다.
  97. 81)중유는 4유(有) 가운데 하나로서, 죽은 뒤 다음의 생을 받아 날 때까지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98. 82)갈라람(羯羅藍)은 범어 kalalaṃ의 음역으로서 가라라(柯羅邏) 등으로 음역되고, 응골(凝骨)ㆍ잡예막(雜し膜)ㆍ시태막(始胎膜) 등으로 의역된다. 수태(受胎)로부터 1주일 동안의 태아이다. 갈라람은 식(識)과 수정란의 물질적 요소[四大]가 화합한 것이다. 아뢰야식이 갈라람에 의탁함과 동시에 중유(中有)가 소멸되고, 아뢰야식 안의 종자가 동력인(動力因)이 되어 4대와 작용하기 시작해서 미세한 감각기관이 생겨날 가능성이 시작된다.
  99. 83)아뢰야식을 가리킨다.
  100. 84)명색(名色, nāma-rūpa)은 정신적인 것[名]과 물질적인 것[色]이 결합된 상태이다.
  101. 85)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무색계의 제4천이다. 이 하늘은 삼계의 최고 위치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칠은 표상작용[想]이 없기 때문에 비상(非想) 또는 비유상(非有想)이라 한다. 그러면서도 아직 미세한 표상작용이 있으므로 비비상(非非想) 또는 비무상(非無想)이라고 한다. 비유상(非有想)이므로 외도들은 이곳을 참다운 열반[眞涅槃處]이라 하고, 비무상(非無想)이므로 불교에서는 이곳도 생사윤회의 범주에 넣는다.
  102. 86)무색계의 제3천으로서, 제2천인 식무변처(識無邊處)에서 인식대상[所緣]의 공함을 관하여 무소유의 지혜를 얻고 그 수행한 힘으로 나게 되는 하늘이다.
  103. 87)생전에 선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임종할 때 식이 4지(肢) 말단에서부터 머리쪽으로 점차 거두어지고, 반대로 악업을 많이 지은 사람은 머리부터 식어져서 점차 아래로 내려간다고 한다.
  104. 88)이하 아뢰야식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말한다(第14 世間淨章).
  105. 89)욕전(欲纏)은 5욕락(欲樂:재물욕ㆍ식욕ㆍ수면욕ㆍ음욕ㆍ명예욕) 등에 얽매인 욕계를 말한다.
  106. 90)색전(色纏)은 물질[色]에 얽매이는 색계이다.
  107. 91)이하 아뢰야식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출세간의 청정이 성립되지 않음에 관하여 설명한다(第15 出世間淨章).
  108. 92)물과 우유는 화합하긴 하지만 그 성품이 다르면서 함께 생겨난다. 이처럼 들음의 훈습은 아뢰야식과 성품이 다르긴 하지만 그 안에 화합하여 머물러서 함께 생멸함을 말한다.
  109. 93)훈습이 순서대로 증가함에 따라서 반대로 이숙식은 순서대로 점차 멸해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110. 94)이하 도리에 수순함을 말한다(第16 順道理章).
  111. 95)아뢰야식을 가리킨다.
  112. 96)멸진정은 의식의 작용이 멸하는 선정이기 때문이다.
  113. 97)여기서 능의(能依)는 표상작용[想] 등의 여러 심리작용[心所]을, 소의(所依)는 그들 심소법이 수반되는 심왕을 가리킨다.
  114. 98)이하 신체의 물질과 마음이 중단됨이 없이 종자를 생겨나게 한다는 견해를 논파한다.
  115. 99)이하 아뢰야식의 품류의 차이를 논한다(第17 差別章).
  116. 100)수용의 다함이 있는 것[有受盡]이란 종자의 작용의 힘[功能]을 다 수용해서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선ㆍ불선의 과거의 업종자는 이숙(異熟)의 과보를 초감하기 때문에 남는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