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_0076_c_01L어떤 의미에 의지하고 어떤 원인으로부터 이 말을 짓는가? 넓고도 넓은 것으로서 알아야 할 바[所知]의 심오하고 광대한 법성에서, 만약 불보살의 위력을 떠난다면 누가 능히 이에 대한 석론을 지을 수 있겠는가? 또한 무슨 의미로 이 논서에 대해서 서두에 이와 같은 까닭을 말하는가? 만약 『아비달마대승경』이라는 말을 거론하지 않는다면, 곧 이 논서가 성스러운 가르침임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의미 때문이다. 또한 경전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십지경(十地經)』이라고 말함과 같다. 그러므로 이처럼 『아비달마대승경』이라고 말한다. 또한 다른 의미가 있다. 그 경전이 성스러운 가르침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서두에 이처럼 『아비달마대승경』이라는 말을 한다.
지금 이 논서를 짓는 이유는 무지한 자를 깨우치기 위해서이고, 법문의 별도의 명칭을 나타내기 위해서 ‘아비달마’를 들고, 공통된 명칭을 나타내기 위해서 ‘경(經)’이라는 용어를 든다. 성문의 아비달마와 구별하기 위해서 다시 ‘대승’이란 말을 든다. 요즈음 성인이 말씀하신 아비달마가 아닌 것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어떤 사람이 스스로 헤아려 아는 지혜로써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아비달마이다. 혹은 성문이 말한 것이거나 혹은 세속의 지혜로 지은 것이다”라고 말함과 같다. 또한 대승의 경전이라고 말한 것은 성문등과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보살장에 포섭됨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그것24)의 아비달마를 든다. 또한 장(藏)에 포섭된다 함은 이른바 자기 종(宗)의 경장[素怛纜藏]25)에 들어가는 것이며, 현재 자신의 미혹을 소멸한다. 율장[毘奈耶藏]은 대승 안에서는 보살의 번뇌를 가리킨다. 모든 보살은 갖가지 분별을 번뇌로 삼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아비달마에 위배되지 않는다. 광대하고 매우 심오함을 그 양상[相]으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서 3장(藏)은 첫째는 경장[素怛纜藏]이고, 둘째는 율장[毘奈耶藏]26)이며, 셋째는 논장[阿毘達磨藏]27)이다. 이와 같은 3장은 뛰어난 교법과 열등한 교법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2장(藏)을 이룬다. 첫째는 성문장이고, 둘째는 보살장이다. 이 세 종류와 두 종류는 무슨 인연으로 장(藏)이라고 부르는가? 능히 포섭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의미를 포섭한다.
017_0077_a_01L또한 무슨 이유로 3장을 건립하는가? 아홉 가지 이유에 의해서이다. 이른바 의혹을 다스리기 위해서 경장을 건립한다. 만일 그 의미들에 대해서 의혹이 있으면, 그 의미들을 결정하고 널리 말하기 위해서이다. 두 가지 극단적인 수용(受用)28)을 다스리기 위해서 율장을 건립한다. 이른바 과실이 있는 욕락에 집착하는 극단적인 수용을 막기29) 위해서이고, 과실이 없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극단적인 수용이 아닌 것을 열기30) 위해서이다. 자기 견해에 지나치게 집착함을 다스리기 위해서 논장을 건립한다. 모든 법의 전도됨이 없는 양상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능히 3학(學)31)을 말하기 위해서 경장을 건립한다. 능히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과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을 이루기 위해서 율장을 건립한다. 이른바 계(戒:尸羅)32)를 구족하면 곧 후회 등이 없고, 점차 능히 삼마지(三摩地)33)를 얻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매우 높은 지혜를 이루기 위해서 논장을 건립한다. 전도됨이 없는 의미를 능히 결택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능히 법(法)과 의미[義]를 말하기 위해서 경장을 건립하고, 법과 의미를 원만히 이루기 위해서 율장을 건립한다. 이른바 번뇌를 조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하는 자는 이 두 가지에 대해서 능히 통달하기 때문이다. 법과 의미에 대해서 결택을 잘 하기 위해서 논장을 건립한다. 이 아홉 가지 이유로 인해서 3장을 건립함이 인정된다. 또한 이것은 모두 생사를 해탈케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다시 어떻게 해탈할 수 있는가? 훈습함ㆍ깨침ㆍ고요함ㆍ통함으로 인하여 해탈할 수 있다. 이른바 들음으로써34) 마음에 훈습하기 때문이고, 사유함으로써 깨닫기 때문이다. 사마타35)를 닦음으로써 고요하기 때문이고, 위빠사나36)를 증득함으로써 통달하기 때문에 해탈할 수 있다.
017_0077_b_01L또한 간략히 말하면 이 경장ㆍ율장ㆍ논장에 각각 네 가지 의미가 있다. 보살은 이것에 대해서 갖추어 분명히 알면 곧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성품[一切智性]을 증득한다. 성문은 이것에 대해서 다만 한 게송37)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역시 번뇌가 다함38)을 얻는다. 어째서 능히 꿰뚫는다고 말해지는 이 세 가지39)에 각각 네 가지 의미가 있는가? 의지처이기 때문이고, 양상[相]이기 때문이며, 법이기 때문이고, 의미이기 때문에 경장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의지처는 이 장소에서 이것으로 인하여 이것을 위해서 말씀한 바가 있음을 말한다. 양상은 세속제(世俗諦)의 양상과 승의제(勝義諦)의 양상을 말한다.
법은 5온(蘊)40)ㆍ12처(處)41)ㆍ18계(界)42)ㆍ12연기(緣起)43)ㆍ4성제(聖諦)ㆍ4식(食)44)ㆍ정려(靜慮)45)ㆍ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46)ㆍ무색계ㆍ해탈ㆍ뛰어난 곳[勝處]47) ① 색상(色想)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색처(色處)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서 탐욕을 없앤다. ② 다시 색처의 대부분에도 이겨낸다. ③ 마음속에 색처가 멸했으나 다시 색처의 일부분을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낸다. ④ 다시 색처의 대부분도 이겨낸다. 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색상이 없고 다시 대경(對境)의 색채의 청(靑)ㆍ⑥ 황(黃)ㆍ⑦ 적(赤)ㆍ⑧ 백(白)을 관찰하여 이것도 이겨낸다. 이중에서 ①②③④는 초선(初禪)과 제2선에 의하고, ⑤⑥⑦⑧은 제4선에 의한다. 또한 ①②는 8해탈(解脫)의 제1, ③④는 제2, ⑤⑥⑦⑧은 제3에 해당한다. 참고로 8해탈은 탐심은 버리지만 아직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 ㆍ두루하는 곳[遍處]48)ㆍ37보리분법(菩提分法)49)ㆍ4무애해(無碍解)50)ㆍ번뇌가 없는 것[無諍]51) 등을 말한다. 의미는 비밀스러운 뜻에 따르는52) 것을 말한다.
마땅히 알라.53) 상대함[對]이기 때문이고, 헤아리기 때문이며, 조복이기 때문이고, 통달이기 때문에 아비달마라고 이름한다. 아비달마를 역시 대법(對法)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이 법이 무주열반(無住涅槃)54)을 향해서 능히 4성제ㆍ37가지 보리분법ㆍ세 가지 해탈문55)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를 또한 헤아림의 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법에 대해서 용어의 자상(自相)ㆍ공상(共相)56) 등 수많은 차이를 누누이 널리 말하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를 역시 조복의 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이것이 갖춘 논의 처소 등57)으로써 능히 다른 논을 승복시키기 때문이다. 아비달마를 역시 통달의 법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이것으로 인하여 능히 경전의 의미를 해석하고 통달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58) 죄를 범하기 때문이고, 함께 일어나기[等起]59) 때문이며, 다시 청정해지기 때문이고, 벗어남이기 때문에 율장이라 이름한다. 여기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다섯 가지 중죄(衆罪)60)를 말한다. 함께 일어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고, 방일하기 때문이며,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이고,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죄를 범한다. 다시 청정해진다는 것은 율의를 받아들임에 벌로 다스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017_0077_c_01L벗어남에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각각 서로 대해서 범한 바를 말로 참회함이고, 둘째는 벌로 다스림을 맹세하여 받아들임이다. 이른바 백중학(百衆學)61) 등을 주는 것이다. 셋째는 방해가 있으면 먼저 계율[學處]을 제정하고 나중에 이문(異門)에 의거해서 다시 열어 허락한다. 넷째는 별도로 다시 멈추게 한다. 대중이 화합해서 제어한 바를 다시 버리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의지처를 바꾸는 것이다. 비구ㆍ비구니가 남녀의 형태를 바꿈으로써 공통되지 않은 죄[不共罪]62)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는 참다운 관법에 의거함이다. 이른바 뛰어난 법인(法印:法鬱陀南)63)의 모든 작용에 대해 관찰한다. 일곱째는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에 의해서이다. 이른바 4성제를 관찰함으로써 부수되는 작은 죄가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된다.
마땅히 알지니, 율장에 다시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64)이기 때문이니, 세존께서 그것에 의지해서 계율을 제정한다. 둘째는 제도를 건립하기 때문이니, 그 보특가라가 범한 허물을 고백하고 나서 석존[大師]65)께서 대중을 모이게 하여 계율을 제정한다. 셋째는 분별이기 때문이니, 계율을 제정하고 나서 앞에서 간략히 말한 것을 다시 자세히 해석한다. 넷째는 결택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이 가운데 범한 바가 어느 것이 잘못이고 어느 것이 잘못이 없는가를 결정한다.
이제부터 본문을 해석하겠다. ‘박가범 앞에서’는 공경함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말이 없음을 나타낸다. ‘대승에 잘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다라니 등의 뛰어난 공덕의 의미를 얻음으로써 이미 이 모든 공덕 얻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의미에 대해서도, 문장에 대해서도 능히 바르게 지니고 능히 바르게 열어 보이는, 이와 같은 이를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의미를 위해서 말하는가? 대승 자체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한다. ‘나타낸다’는 것은 대승의 참존재의 위대한 자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대승에 의지한다’는 것은 대승에 의지해서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열 가지 양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 있다’는 것은, 그 열 가지 뛰어난 것과 뛰어난 말로 인하여 열 가지 양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라고 이름함을 말한다. 이 뛰어남이란 차별된 의미가 서로 상대함을 말한다. 이 의미는 “그것보다 뛰어나다”고 말함과 같다. 또한 최상의 의미 혹은 다른 부류가 뛰어나다는 의미이다. 의미의 원인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의 결과도 뛰어남을 말한다.66) 이제 이 열 가지 개별적인 양상을 말하겠다.
017_0078_a_01L첫째는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殊勝語]이고, 둘째는 알아야 할 바의 양상[所知相]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셋째는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入所知相]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넷째는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彼入因果]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다섯째는 그것67)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彼因果修差別]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여섯째는 이와 같은 수행 차이 중에서 매우 높은 계율[增上戒]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일곱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여덟째는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아홉째는 그것의 증과인 단멸[彼果斷]68)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고, 열째는 그것의 증과인 지혜[彼果智]69)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다. 여기서 말한 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말씀하신 경전의 모든 문구로써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 말씀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란 마땅히 알아야 할 바이기 때문에 ‘알아야 할 바[所知]’라고 말한다. 이른바 잡염과 청정의 모든 법이 곧 세 가지 자성70)이다. ‘의지처’는 원인의 의미이다. 이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는 뛰어나기 때문에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의 뛰어남’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뛰어나기 때문에 말도 뛰어나다. 이 의지처는 곧 아뢰야식71)이다. 이와 같은 것은 지업석(持業釋)72)이고, 나아가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도 역시 그러하다. 그 증과인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뛰어남’ 등이라고 말한다. ‘알아야 할 바의 양상’이란 알아야 할 바의 자성의 의미이다. 알아야 할 바는 곧 양상이기 때문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이라 이름한다. 이른바 세 가지 자성이다.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이란,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대해서 능히 들어가거나 혹은 바르게 들어가는 것이다. 곧 유식(唯識)의 성품이다.
017_0078_b_01L‘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란 능히 그것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곧 이 유식의 진여성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원인’은 가행위(加行位)73)에서의 세간의 보시 등의 바라밀이고, ‘결과’는 통달위(通達位)74)에서의 세간을 벗어나는 보시 등의 바라밀이다.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는 그것의 원인ㆍ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인ㆍ결과’라고 말한다. 곧 이 가운데 그것을 수행하는 차이이다. ‘수행’은 누누이 익힘이다. 이 누누이 익히는 것은 모든 지위에서 전전하여 뛰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차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곧 10지(地)이다. ‘이와 같은 수행 차이에서의 매우 높은 계율’이란 10지 중에서는 계율에 의지해서 수학하기 때문에 ‘매우 높은 계율’이라 이름한다. 즉 모든 보살이 갖는 율의는 모든 불선에 대해서 다시는 마음을 짓지 않는 것이다.75)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이란 내면에 머무는 마음이다. 혹은 마음에 의지해서 배우기 때문에 ‘매우 높은 마음’이라 부른다. 곧 모든 삼마지이다.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란 깨침에 나아가는 지혜이기 때문에 ‘매우 높은 지혜’라고 부른다. 혹은 지혜에 의지해서 배우기 때문에 ‘매우 높은 지혜’라고 말한다. 곧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이다.
‘단멸의 뛰어남’이란 가장 뛰어남76)과 품류의 차별77)과 스스로 내면에서 번뇌장78)과 소지장79)을 버리는 것이다. 곧 무주열반(無住涅槃)80)이다. ‘지혜[智]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이란 장애가 없는 지혜를 ‘지혜의 뛰어남’이라 이름한다. 그것의 분별없는 지혜에는 다스려지는 바가 있다. 이제 이 부처님의 지혜는 이미 모든 장애와 수면(隨眠)81)을 떠난다. 이것을 그것의 분별 없는 지혜에서의 부처님 지혜의 뛰어남이라고 부른다.
017_0078_c_01L또한 능히 무엇을 나타내는가? 이 말한 바 열 가지 포섭처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한 일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에서만 여러 곳에서 설하심을 본다. 이른바 아뢰야식을 알아야 할 바의 의지처[所知依]의 자체[體]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자성, 즉 첫째는 의타기자성(依他起自性)이고, 둘째는 변계소집자성(遍計所執自性)이며, 셋째는 원성실자성(圓成實自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의 자체라고 부른다. 유식성(唯識性)을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들어감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말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자체라고 부르고, 보살의 10지를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보살의 율의를 여기에서 매우 높은 계율의 자체라고 부르고, 수능가마(首楞伽摩)82)ㆍ허공장(虛空藏)83) 등의 여러 삼마지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마음의 자체라 이름하며, 분별없는 지혜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 무주열반을 그것의 증과인 단멸의 자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불신(佛身), 즉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고,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며,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한 열 가지 포섭처로 인하여 대승은 성문승과 다름을 나타내고, 또한 가장 뛰어남을 나타낸다. 세존께서는 다만 보살을 위해서만 널리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지니, 다만 대승에 의지하는 모든 부처님 세존에게만 열 가지 행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말씀이 있다.
‘무엇을 능히 나타내는가?’란 무엇을 반연으로 삼느냐는 뜻을 묻는 것이다.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말하여 그것에 들어가는 원인ㆍ결과의 자체라고 부른다’는 것은 유식성으로 인하여 세 가지 자성에 들어갈 때, 세간의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청정의 원인이라 이름한다. 능히 세간을 벗어남[出世間]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10지의 지위에 들어간 이후는, 그 보시 등의 바라밀다가 세간을 벗어남을 이루는 것을 청정의 결과라고 부른다. ‘보살의 10지를 그것의 원인ㆍ결과의 수행 차이의 자체라 이름한다’는 것은, 보살의 10지가 앞에서 말한 바라밀다의 원인ㆍ결과의 두 지위에서 수행의 차이임을 말한다. ‘분별없는 지혜를 이 가운데 매우 높은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성문들은 네 가지 전도됨84)의 분별을 여의는 것을 무분별이라 이름하고, 보살들은 모든 법의 분별을 여의는 것을 무분별이라고 부른다. 두 가지 무분별의 차이가 이와 같다.
017_0079_a_01L‘무주열반을 그것85)의 증과인 단멸의 자체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3학(學)의 증과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라 이름한다. 그것의 증과가 곧 단멸이므로 그것의 증과인 단멸이라 이름한다. 이 성품을 그것의 증과인 단멸의 자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곧 이것은 번뇌장과 소지장의 2장(障)을 단멸한다는 뜻이다. ‘세 가지 불신(佛身)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라고 부른다’라는 것은, 3학의 증과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라고 이름한다. 그것의 증과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것의 증과인 지혜라 이름한다. 이 성품을 그것의 증과인 지혜의 자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만약 자성신86)이 없다면 마땅히 법신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안근과 같다.87) 만일 법신이 없다면 마땅히 수용신이 없어야 한다.88) 비유하면 안식과 같다.89) 마땅히 알지니, 여기서 의지처[所依]와 능히 의지하는 것[能依]을 동일한 법의 비유[同法喩]로 삼는다.90) 만약 수용신91)이 없다면 이미 큰 지위에 들어간92) 모든 보살들에게는 법락을 수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만일 법락을 수용하는 일이 없다면 깨달음의 자량은 원만하지 않은 것이어야 한다. 비유하면 빛깔[色]을 보는 것과 같다.93) 만약 화신(化身)이 없다면 승해행지(勝解行地)의 모든 보살들, 모든 성문등 승해가 열등한 자가 최초로 발심하여 나아감은 모두 없어야 한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마땅히 3신(身)이 있어야 한다. ‘대승이 성문승과 다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성문승 안에서는 이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뛰어남을 나타낸다’는 것은 대승 안에서도 이것이 역시 가장 뛰어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어째서 이 열 가지 양상의 뛰어남과 뛰어난 여래의 말씀으로 인해서 대승이 참으로 부처님의 말씀임을 나타내고, 성문승은 대승의 종성[大乘性]임을 부정하는가? 이 열 가지는 성문승에서는 일찍이 설함을 보지 못했고, 오직 대승 안에서만 여러 곳에서 설함을 보기 때문이다. 이 열 가지 포섭처는 대보리의 성품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 내고, 잘 성립하고 수순하며 위배되지 않고,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두 게송이 있다.
이것은 또한 어째서 말한 이 열 가지를 다시 나타내었는가? 이것은 대보리의 성품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 내고 잘 성립하며 수순하고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보리의 성품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은 대보리가 능히 이끌어 내는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잘 성립한다’는 것은 바른 논리 등의 바른 인식방법에 의거해서 사량하고 간택함을 말한다. 마치 길 안내자가 말한 길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 ‘수순한다’는 것은 증득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수행할 때 수순해서 안주하기 때문이다. 길 안내자가 말한 바른 길에 따라 수순하여 안주함과 같다.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지위에서 장애의 원인이 없음을 말한다. 길 안내자가 말한 바에 따르면 도중에 도적의 겁탈 등 모든 장애의 어려움이 없음과 같다. 혹은 다시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가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다른 견해로, ‘이것이 대보리의 성품을 능히 최상으로 이끌어낸다’는 것은, 이것이 능히 희론이 없고 분별이 없는 지혜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잘 성립한다’는 것은 네 가지 도리94)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순한다’는 것은 세 가지 바른 인식방법[量]95)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먼저 수순하고 나중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처음에 사랑과 자비를 지니고 나중에 불선(不善)에 수순해도 흑백의 아견에 증익이 있다거나 또한 손감이 없네.
017_0079_b_19L“初任持愛悲, 後隨順不善, 非黑白我見,
有益亦有損.”
017_0079_c_01L ‘능히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위함’이란 모든 법에 대해서 최고로 간격 없이 모든 행상을 아는 지혜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잘 성립한다’ 등에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 이른바 ‘잘 성립한다’와 ‘수순한다’와 ‘위배되지 않는다’가 차례로 해석된다. 어떻게 잘 성립하는가? 능히 수순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능히 수순하는가? 위배되어 전전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어찌하여 이와 같이 순서를 두어서 이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가?96) 보살은 모든 법의 원인에 대해서 모름지기 먼저 잘 알고서 비로소 연기(緣起)에 대해서 마땅히 잘 통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인연에 의해 생겨난 모든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잘 알아야 한다. 증익(增益)과 손감(損減)의 두 가지 극단의 과실을 능히 멀리 여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 이처럼 잘 수행하는 보살은 마땅히 바르게 잘 취한 양상에 통달하고, 모든 장애로부터 마음을 해탈케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알아야 할 바의 양상에 통달하고서, 이전의 가행위(加行位)에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증득함으로써 마땅히 다시 매우 높은 의욕[意樂]97)을 원만히 이루어야 하니, 청정함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청정한 의욕에 포섭되는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10지 중에서 나누어 차이를 두어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이른바 3무수(無數)의 대겁98)이 경과함을 필요로 한다. 그런 다음에 보살의 3학99)에 대해서 마땅히 원만하게 해야 한다. 원만하게 하고 나서 그 증과인 열반과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마땅히 현재 평등히 증득해야 하기 때문에,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 데 이처럼 순서를 둔다.
017_0080_a_01L‘어찌하여 이와 같이 순서를 두어서 말하는가’는 질문이다. ‘보살은 모든 법의 원인에 대해서 모름지기 잘 알아야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그것의 증과인 열반과 최상의 바른 깨달음을 마땅히 현재 평등히 증득해야 하기 때문에’는 대답이다. 모름지기 먼저 모든 법의 원인을 잘 알고 나서 다음에 연기에 대해서 비로소 잘 통달할 수 있다. 반드시 원인이 있음으로써 결과가 생겨날 수 있다. 자재천(自在天)100) 등이 아니다.101) 이로 인하여 능히 원인과 결과의 두 가지 지혜를 얻는다. 그 다음에 원인이 일으킨 모든 법에 대해서 마땅히 그 양상을 알아야 한다. 무엇을 양상으로 삼는가? 실제로는 변계소집이 있는 것이 아닌데 결정적으로 집착해서 있다고 하는 것을 증익이라고 이름한다. 비존재를 증익함으로써 참존재인 원성실성을 손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극단적인 과실을 멀리 여의기 때문에 잘 통달한다고 말한다.
다음에 이와 같은 취착된 인식대상[所取]의 모든 양상에 대해서 유식성에 의거해서 마땅히 바르게 통달하여 장애가 없어야 한다. 다음에 수순하여 유식성에 들어감에 있어서, 세속에서 증득된 세간의 여섯 가지 바라밀다는 승의(勝義)에 의거함으로써 마땅히 다시 증득해야 한다. 이것이 마땅히 닦아야 할 청정한 매우 높은 의욕이 포섭하는 의미이다. 다음에 10지(地)에서 나누어 차이를 두어서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요컨대 3무수의 대겁이 경과해야 함을 말한다. 성문이 매우 빠르게 3생(生)에 부지런히 닦아 다스려서 문득 증득하고 해탈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다음에 이와 같은 수행 안에서 매우 높은 계율 등의 보살의 3학을 원만하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 수학의 증과인 열반에 대해서 번뇌가 영원히 단멸됨, 최상의 바른 깨달음, 세 가지 불신을 마땅히 현재 평등히 증득해야 한다. 그러므로 열 가지 포섭처를 말하는 데 이와 같은 순서를 둔다.
모든 대승은 여기에서 구경을 얻는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연기를 말하고자 하면 곧 아뢰야식의 포섭에 들어간다. 만일 모든 양상을 말하고자 하면 곧 세 가지 자성의 포섭에 들어간다. 만약 증득을 말하고자 하면 곧 유식성의 포섭에 들어간다. 만일 바라밀다를 말하고자 하면 곧 바라밀다의 포섭에 들어간다. 만약 모든 지위를 말하고자 하면 곧 모든 지위의 포섭에 들어간다. 만일 모든 학(學)을 말하고자 하면 곧 모든 학의 포섭에 들어간다. 만약 단멸과 지혜를 말하고자 하면 곧 무주열반과 세 가지 불신의 포섭에 들어간다. 여기까지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오직 이와 같은 순서를 말한다.
아득한 옛적부터 원인[界]103)이었고, 모든 법이 평등히 의지하네. 이로 인하여 모든 윤회세계[諸趣]가 존재하며 열반을 증득하느니라.
017_0080_b_06L“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
여기서 아뢰야식은 그 자체[體]가 결정적으로 아뢰야식임을 증명한다. 『아함[阿笈摩]』104)은 박가범께서 서두에 말한 『아비달마대승경』 안에서 이와 같은 게송을 말씀하신다. 계(界)는 원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법이 평등히 의지하는 곳이다. 현재 세간에서는 금광(金鑛) 등에 대해서 계(界)의 명칭을 말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원인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 평등히 의지하는 바이다. 원인의 자체는 곧 의지처의 의미이다. ‘이로 인하여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법의 평등한 의지처로 인하여 존재함이다. ‘모든 윤회세계[趣]’는 생사 중에서의 모든 윤회세계이다. 윤회세계는 이숙과(果熟果)105)이다. 이 결과로 인하여 혹은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벙어리와 같은 부류가 있고, 혹은 세력이 있어서 능히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의 법의 의미를 알고, 혹은 능히 뛰어나게 증득하여 점차 뛰어난 지위를 증득한다. 혹은 번뇌가 의지하는 성품이 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맹렬한 번뇌, 오랜 기간의 번뇌가 있다.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이숙의 차이가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에 감당할 만한 능력[堪能]이 없다. 마땅히 알지니, 이것과 정반대인 것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오직 모든 윤회세계만이 이로 인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역시 이로 인하여 열반을 증득한다. 모름지기 잡염이 있음으로 인하여 비로소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함을 인용하여 증명하였다. 다시 무슨 까닭으로 이 식을 아뢰야식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유정의 잡염품의 법은 여기에 저장되어 결과의 성품이 되기 때문이다.106) 또한 이 식은 그것에 저장되어 원인의 성품이 되기 때문에107)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혹은 모든 유정은 이 식을 저장하여 자아로 삼기 때문에108)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이제 이 식의 아뢰야라는 명칭을 해석한다. ‘모든 유정[有生]’은 모든 윤회세계에 사는 생명 있는 부류를 다 유정이라 이름한다. ‘잡염품의 법’은 청정을 막는다는 의미이니, 그 안에서 전전하기 때문에 저장[攝藏]이라고 부른다. ‘혹은 모든 유정은 이 식을 저장하여 자아로 삼는다’는 것은 집취(執取)의 의미이다.
017_0081_a_01L 다시 『해심밀경(解深密經)』을 인용한다. 즉, 이 아함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광혜(廣慧)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광혜여, 마땅히 알라. 여섯 가지 윤회세계[六趣]의 생사에서 그들 갖가지 유정들은 갖가지 유정의 무리 속에 들어가서 난생(卵生)ㆍ태생(胎生)ㆍ습생(濕生)ㆍ화생(化生)으로110) 신체를 형성하기 시작하느니라. 그 중 최초에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심식(心識)을 성숙하고 전전화합하며 점차 광대해져서 두 가지 집수(執受)111)에 의지하느니라. 첫째는 승의근[色根]112)과 부진근[所依根]113)을 집수하고, 둘째는 대상[相]과 명칭[名]과 분별된 언설 희론의 습기(習氣)를 집수하느니라. 유색계에서는 이들 집수를 갖추나, 무색계에서는 두 가지를 다 갖추지는 않느니라.
광혜여,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이 식으로 말미암아 신체를 상속하고 집지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식으로 말미암아 신체(일체 법의 종자)를 섭수하고 저장하며 신체와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심(心)114)이라고 하는데, 그 까닭은 이 식으로 인하여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 등의 종자를 적집하고 성하게 하기 때문이니라.
광혜여, 아타나식을 의지처로 하고 건립함으로 여섯 가지 식(識)이 전변 생기할 수 있는데, 6식은 안식ㆍ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ㆍ의식이니라. 이 중에서 식이 있어서 안근과 색경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을 일으키느니라. 안식과 함께 따라서 일어나고 동시에 같은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전변하여 일어나느니라. 식이 있어서 이근ㆍ비근ㆍ설근ㆍ신근과 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의 경계를 연(緣)으로 하여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을 일으키느니라.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과 함께하며 동시에 같은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전변하여 일어나느니라. 광혜여, 만약 그때 하나의 안식이 일어나면 곧 그때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이 안식과 대상을 같이하여 일어나느니라. 만일 그때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의 여러 식이 일어나면 곧 그때 오직 하나의 분별의식이 있어서 5식과 대상을 같이하여 일어나느니라.
017_0081_b_01L광혜여, 비유하면 큰 폭포의 흐름에 만약 한 물결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現前)하면 오직 하나의 물결이 일어나고, 둘 또는 많은 물결이 일어나는 조건이 현전하면 둘 또는 많은 물결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이 폭포수 자체의 흐름은 항상 이어져 끊임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라. 또한 깨끗하게 닦인 거울면에 하나의 영상이 비치는 조건이 현전하면 오직 하나의 영상이 일어나고, 둘 또는 많은 영상이 비치는 조건이 현전하면 둘 또는 많은 영상이 비치느니라. 그러나 이 거울면 자체가 전변하여 영상이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영상의 수용작용이 다할 수 없음과 같느니라.
광혜여, 만약 모든 보살이 내면적으로 각기 다르게 진리 그대로 아타나[用]를 보지 않고 아타나식[體]을 보지 않으며, 아뢰야를 보지 않고 아뢰야식을 보지 않으며, 적집을 보지 않고 심(心)을 보지 않으며, 안근과 색경 및 안식을 보지 않고, 이근과 성경 및 이식을 보지 않으며, 비근과 향경 및 비식을 보지 않고, 설근과 미경 및 설식을 보지 않으며, 신근과 촉경 및 신식을 보지 않고, 의근과 법경 및 의식을 보지 않아야 비로소 승의(勝義)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시설해서 그를 승의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017_0081_c_01L광혜여, 이것에 한하여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여래께서는 이것에 한하여 시설해서 그를 심ㆍ의ㆍ식의 모든 비밀한 뜻에 잘 통달한 보살이라고 하느니라.’” 이 게송 중에서 거듭 그 뜻을 나타낸다. ‘아타나식’은 해석되는 것의 다른 명칭이다. ‘매우 심오하고 미세하다’는 것은 분명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체종자식은 폭포의 흐름과 같다’는 것은 차례로 전전하기 때문에 모든 종자가 찰나에 전전함은 폭포수의 흐름과 같이 상속해서 전전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분별하고 집착해서 자아로 삼을까 두렵기 때문’이란 하나의 행상으로서 전전하기 때문에 분별해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116)이라 이름하는가? 모든 감각기관[有色根]을 집수(執受)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은 이 집수로 인해서 파괴되지 않고,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 또한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때에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 그러므로 이 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
017_0082_a_01L‘모든 감각기관을 집수하기 때문’은 ‘무슨 까닭에 모든 감각기관은 이 집수로 인해서 수명을 다할 때까지 따라서 전전하는가’에 대한 해석이 된다 한다. 이른바 안근 등 여러 감각기관은 아뢰야식의 섭수하는 바이기 때문에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靑瘀] 등117)과 다르다. 만일 죽음에 이르는 때에 이것118)을 여의기 때문에 그것119)에 곧 시체의 푸르딩딩한 모습 등의 단계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지니, 이 집수 때문에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것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의 자체가 취하는 의지처이기 때문’은 ‘또한 상속해서 바르게 생을 받을 때 그 생을 취하기 때문에 자체를 집수한다’에 대한 해석이 된다. 이른바 이 식은 상속식이기 때문에, 상속해서 바로 생을 맺을 때 능히 생의 한평생의 자체를 섭수함도 역시 이 식이 섭수하는 것이다. 아뢰야식 중에서 한평생의 자체는 훈습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그것의 자체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 생’이라고 말한다. 그 생을 수용하기 때문에 ‘그 생을 취한다’고 말한다. 능히 취함으로 인해서 자체를 집수한다. 이런 의미 때문에 아뢰야식을 또한 아타나식이라 이름한다.
이것을 또한 심(心)이라 이름한다. 세존께서 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를 말씀한 바와 같다.120) 여기서 의(意)121)에 두 종류가 있다.122) 첫째는 등무간연(等無間緣)123)의 의지처의 성품이다. 무간멸(無間滅)의 식은 능히 의식이 생기하는 의지처가 된다. 둘째는 염오의(染汚意)로서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첫째는 살가야견(薩迦耶見)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며, 셋째는 아애(我愛)이고, 넷째는 무명(無明)이다. 이것은 곧 식의 잡염의 의지처이다. 식은 그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난다. 두 번째는 잡염이다. 대상을 요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사량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룬다.
‘이것을 또한 심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심의 자체임을 말한다. 의(意)와 식의 두 가지 의미의 차이를 얻을 수 있다. 마땅히 알지니, 심의 의미에도 역시 차이가 있다. 이것124)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무간연의 원인의125)성품이 된다”는 것은 무간멸(無間滅)의 식이 의식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이것이 첫 번째 의(意)126)이다. 네 가지 번뇌로 인하여 항상 염오되나니, 이것이 두 번째 의127)이다. 여기서 ‘살가야견’128)은 자아를 집착하는 성품이다. 이 세력으로 인하여 문득 아만129)을 일으켜서 나[我]ㆍ나의 것[我所]을 믿어서 스스로 높인다. 실제로는 무아인 것에 대해서 자아가 있다는 욕심을 일으킴을 아애(我愛)130)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세 가지는 무명(無明)131)이 원인이 된다.132) 무명이란 곧 무지이다
017_0082_b_01L‘식은 그 첫 번째 의지처로 인하여 생겨나고, 두 번째 잡염은’이란 무간멸의 식을 말하여 의(意)라 이름한다. 장차 생겨나는 식에게 수용의 처소이기 때문에133) 생겨남의 의지처134)가 된다. 두 번째 염오의는 잡염의 의지처가 된다. 착한 마음인 경우에도 역시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135) ‘대상을 요별하는 의미이기 때문이고, 등무간의 의미이기 때문이며, 사량의 의미이기 때문에 의(意)에 두 종류를 이룬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 중에서 대상을 취하는 의미로 인하여 식이라 이름하고, 처소를 주는 의미로 인하여 첫 번째 의136)라 이름하며, 자아 등을 집착해서 잡염을 이루는 의미로 인하여 두 번째 의137)라고 이름한다.
또한 어떻게 염오의(染汚意)가 있음을 알 수 있는가? 만일 이것이 없다면 곧 불공무명(不共無明)138)이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다섯 가지 식139)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5식신(識身)은 반드시 안근 등 구유의(俱有依)140)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해석하는 말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정(無想定)141)과 멸진정(滅盡定)142)의 차이도 있을 수 없으니,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무상정은 염오의가 나타난 바이고, 멸진정에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두 가지 선정은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천(無想天)의 한 기간의 생에서도 마땅히 염오가 없어야 한다. 과실을 이루기 때문이다. 거기서 만약 아집ㆍ아만이 없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또한 어느 때나 아집의 현행함이 현재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의 마음에서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오직 불선의 마음만이 그것과 상응하기 때문이다.143) 나ㆍ나의 것이라는 번뇌가 현행하면 선ㆍ무기도 아니다. 따라서 만일 구유현행(俱有現行)144)을 안립하고 상응현행(相應現行)145)이 아니라면 이런 과실이 없다. 여기서 게송으로 말한다.
만일 불공무명, 다섯 가지 식,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가 없다면 모두 과실을 이루네.
017_0082_b_22L“若不共無明, 及與五同法, 訓詞二定別,
無皆成過失.
017_0082_c_01L 무상천의 생은 아집이 유전함이 없다면 과실을 이루어야 하네.
아집이 항상 따라서 모든 종류에 없어야 하네.
017_0082_c_01L無想生應無, 我執轉成過,
我執恒隨逐, 一切種無有.
염오의를 떠나서는 두 가지가 없고 세 가지는 위배되네.146) 이것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아집은 마땅히 없어야 하네.
017_0082_c_02L離染意無有,
二三成相違, 無此一切處, 我執不應有.
참된 의미의 마음이 장차 일어나는 데에 항상 장애가 되니, 모든 부분에 함께 작용함을 불공무명(不共無明)이라 이름하네.
017_0082_c_03L眞義心當生, 常能爲障㝵, 俱行一切分,
謂不共無明.”
이 의(意)는 염오이기 때문에 유부무기성(有覆無記性)147)이다. 네 가지 번뇌와 항상 함께 상응한다. 색계ㆍ무색계의 두 가지 전(纏)148)의 번뇌처럼 이것은 그 유부무기성에 포섭된다. 색계ㆍ무색계의 전은 사마타가 섭장(攝藏)하는 바이기 때문이고, 이 의(意)는 어느 때나 항상 미세하게 따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또한 다른 도리로써 염오의를 성립한다. 무엇을 성립의 도리라고 이름하는가? 만일 이것이 없으면 곧 불공무명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불공무명은 그 양상이 어떠한가? 아직 다스림을 생겨나게 하지 않은 때에149) 능히 참다운 지혜를 장애하는 어리석음이다. 이것[불공무명]은 5식에 대해서는 이치적으로 상응하지 않는다.150) 이곳은 능히 장애가 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처소로서 능히 다스림이 있다면 이곳에는 다스려짐이 있기 때문이다.151)
017_0083_a_01L또한152) 염오의 의식에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153)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불공(不共)의 명칭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154) 만약 이 번뇌가 염오의 의식에 존재한다고 안립하면, 궁극적으로 염오의 성품이 된다. 어떻게 보시 등의 마음이 선(善)이 될 수 있겠는가? 이 번뇌와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만일 의식과 선법이 함께 유전한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그 번뇌와 상응한다. 이 염오 의식이 능히 다스림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만약 염오의와 함께 유전해서 착한 마음이 있다고 말하면, 이 착한 마음은 능히 다스림을 이끌어서 이것155)이 생겨나고 그것156)이 멸하므로 곧 과실이 없다. 또한 다섯 가지 식 때문이다.157) 무슨 까닭인가? 비유하면 안식 등 5식은 반드시 안근 등 5근이 있어서 구유의(俱有依)가 됨과 같다. 이처럼 의식도 역시 반드시 구유의가 있어야 한다.
또한 해석하는 말 때문이다.158) 무슨 까닭인가? 능히 사량하기 때문에 의(意)라고 이름한다. 이 해석하는 말은 무엇이 의지처인가? 그 여섯 가지 식이 무간식(無間識)159)의 의지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마땅히 바른 도리이어야 한다.160) 이미 지나가서 멸했기 때문이다. 또한 두 가지 선정의 차이때문이다.161) 무슨 까닭인가? 만약 선정에 염오의가 있다고 말하면, 무상정에는 이 의(意)가 있고 다른 선정162)에는 없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것과 다르다면 두 선정 중에서 제6 의식은 함께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또한 무상천의 생에는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지위에서 염오의가 없다면 그 한 기간의 생에는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성인이 혐오하는 바가 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미 혐오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곳에 아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017_0083_b_01L또한 아집이 따르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보시 등을 행하는 단계에서도 역시 반드시 아집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 아집이 따르는 것은 무명을 떠나서는 도리에 맞지 않다. 이 무명은 의지처를 떠나지 않으니, 이 의지처는 염오의를 떠나서는 별도의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다. 거듭해서 그것을 나타내고자163) 네 개의 게송을 말하여 ‘만일 불공무명……’이라 자세히 말한다. 이 가운데 불공무명은 모든 선ㆍ불선ㆍ무기ㆍ번뇌ㆍ수번뇌 중에서 염오의와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무명이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큰 과실을 이룬다. 항상 괴로움 등에 대해서 지혜를 장애함을 일으킨다. 이것은 그 기능[業用]이며, 이것은 곧 그 기능이 없다는 과실을 나타낸다. ‘다섯 가지 같은 법’164)이란 다음과 같다. 제6 의식에는 5식과 비슷한 법이 있고, 그것에 5근이 있으며 아뢰야식을 구유의로 삼는다. 이것165)도 역시 그와 같이 염오의가 있고, 아뢰야식을 구유의로 삼는다. 이 다섯 가지 같은 법은 염오의를 떠나서는 반드시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 자성이 없다는 과실을 나타낸다.
‘해석하는 말에도 만약 없다면 과실을 이룬다’는 것은 인식대상의 모습을 취하여 사량하기 때문이고, 전찰나의 식에 간격없이 멸하는 때에도 능히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의(意)라고 이름한다. 과거에 이미 멸하여 사량하는 바가 없다면 어떻게 장차 능히 사량하는 성품이 있겠는가? 해석하는 말에도 없기 때문에 큰 과실을 이룬다.166) ‘두 가지 선정의 차이’란 멸진정 중에는 염오의가 없고, 무상정에는 염오의가 있음을 말한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이와 같은 두 선정의 차이는 없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큰 과실을 이룬다. 또한 만일 염오의가 없다면 무상천의 생에는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한다. 중생의 상속 중에 잠시라도 아집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마땅히 바른 도리이다. 염오의를 떠나서는 이와 같은 모든 과실을 반드시 다 이루기 때문에, 마땅히 결정적으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가 없다’ 등으로 말한다. 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다섯 가지 비슷한 법167)이다. ‘세 가지가 위배된다’는 것은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도 아집이 항상 따름을 말한다. 염오의를 떠나서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다 위배된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곳에서 마땅히 아집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염오의를 떠나서는 모든 종류의 선 등의 지위에서 아집이 항상 따르는 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염오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문장은 알기 쉬워서 다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로 심의 자체는 아뢰야식을 떠나서는 별도로 체성이 없다. 이것을 원인으로 삼음으로써 의(意)와 전식이 모두 생기할 수 있다. 마땅히 알지니, 견취(見取)의 전식은 역시 두 번째인 의를 취한다. 왜냐하면 그것169)이 장차 멸할 때에 의(意)의 명칭을 얻기 때문이다.
무슨 인연 때문에 역시 심이라고 이름하는가? 갖가지 법에 의해서 훈습된 종자가 적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017_0083_c_06L論曰:何因緣故,亦說名心?由種種法,熏習種子,所積集故.
다시 명칭을 해석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한다. ‘갖가지 법에 의해서’라는 것은 각기 다른 품류의 법으로 인한다는 것이다. 훈습된 종자는 특수한 작용의 힘[功能差別]170)의 원인이다. ‘적집하는 곳이기 때문’이란 이것이 대단히 쌓이고 모여서 하나의 화합상을 이룸을 말한다.
또한 어째서 성문승에는 이 심(心)을 아뢰야식으로, 아타나식으로 이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171) 이것은 매우 미세한 경계172)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문은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그들에 대해서는 이 말을 하지 않지만, 지혜를 이룸으로써 해탈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다. 보살이라면 반드시 모든 대상에 대해서 지혜가 전전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한다. 만약 이 지혜를 떠나서는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증득하기 어렵다.
017_0084_a_01L‘이것은 매우 미세한 경계에 포섭되기 때문’이란, 이 경계가 매우 미세하기 때문에 매우 미세한 경계라 이름한다. 이것은 곧 매우 미세한 경계에 포섭되어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문은 모든 경계를 아는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바르게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고 오직 바로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기 때문에, 그는 거칠고 얕은 괴로움 등의 바른 지혜173)로 인하여 문득 능히 번뇌장(煩惱障)을 영원히 단멸하기 때문이다. 만일 보살이라면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번뇌장과 소지장(所知障)을 단멸하기 위해서 바르게 부지런히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말한다.
1)소지장은 지장(智障)이라고도 하며,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객관의 진상(眞相)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됨을 말한다. 여기서 소지장만을 들고 번뇌장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견해들을 논파하기 위해 이 논서를 저술하기 때문이다.
2)이하 여덟 게송은 삼보에 귀의함을 나타내는 귀경서(歸敬序)이다. 세친(世親)이 삼보에 귀의 예배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서 이 석론(釋論)을 짓는 인연을 밝힌다. 먼저 네 게송은 부처님[佛寶]께 귀의하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한다.
3)진소유성(盡所有性), 즉 속제(俗諦)인 현상계의 차별상[事相]을 말한다.
4)여소유성(如所有性), 즉 진제(眞締)의 이체(理體)를 가리킨다.
5)붓다가 세상에 출현하는 연유를 밝힌다.
6)붓다가 미혹을 끊고 불과를 증득함을 서술한다.
7)공용(功用)은 신체ㆍ입ㆍ뜻으로 짓는 동작ㆍ행위를 말한다. 보살은 공관(空觀)을 닦음에 있어서 7지(地)까지는 인위적인 행위가 가해지며[有功用地], 제8지부터는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공관이 이루어진다[無功用地]. 부처님께서는 전식득지(轉識得智)를 이루셨기 때문에, 의식적이고 인위적인 노력이 없이도 자연스럽게 중생교화 사업을 할 수 있다.
8)이하 두 게송은 붓다의 대지(大智)ㆍ대자(大慈)의 두 가지 덕을 서술한다.
9)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이다. 공해탈문(空解脫門)은 사람과 법의 본성이 공한 것을 관조하는 것이다.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다.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10)두 번째로 법보(法寶)에 귀의하여 공경히 예배한다.
11)이하 두 게송은 승보(僧寶)의 덕을 찬탄한다.
12)이 게송에서 붓다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쇠퇴해짐을 한탄한다.
13)이하 『섭대승론석』을 저술하는 취지를 밝힌다. 먼저 당시 사람들의 폐단을 통탄한다.
14)무착(無着) 논사를 가리킨다.
15)이하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받음[師承]을 서술한다. 먼저 스승인 무착(無着)의 덕을 찬탄한다.
16)무착 논사가 『섭대승론』을 짓게 된 경위를 밝힌다.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 의하면 무착 논사가 초지(初地)에 오르고 법광정(法光定)을 증득하여 큰 신통력을 얻고서 미륵보살을 섬겼다. 선정 중에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로부터 유가유식의 가르침을 듣고서 널리 세간에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17)삼마지(三摩地)는 범어 samādhi의 음역어로서, 흔히 삼매(三昧)라고 부른다. 정(定)의 일곱 가지 명칭의 하나로서 등지(等持)이다.
18)무착(無着)이라는 이름이 그 덕에 부합한다는 의미이다.
19)논주(論主)인 무착보살의 지혜로운 변재를 찬탄한다. 이하 두 게송은 무착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석론(釋論)을 저술함을 말한다.
20)『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 섭결택분(攝決擇分)을 가리킨다.
21)『유가사지론』 100권과 같은 광대한 논서를 독파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간결한 약석(略釋)을 저술함을 밝힌다.
22)이하 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관하여 말한다(第1 無等聖敎章).
23)산스크리트 Bhagavat의 음역으로서, 바가바(婆伽婆)ㆍ바가범(婆伽梵)이라고도 한다. 세존ㆍ중우(衆祐)로 번역된다. 박가범에는 유덕(有德)ㆍ자재ㆍ치성(熾盛)ㆍ단엄(端嚴)ㆍ명칭ㆍ길상ㆍ존귀 등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의역(意譯)하지 않는다. 5종 불번(不飜)의 하나이다.
24)대승을 가리킨다.
25)수다라(修多羅)는 범어 sūtra의 음역으로서, 소달람(素怛纜)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을 말한다. 경전[正經]ㆍ계경(契經:경전의 뜻이 위로는 진리에 계합하고 아래로는 중생의 마음에 맞고 뜻에 합당하며, 의리(義理)를 꿰어 중생을 잡아 거둔다는 뜻)으로 의역(意譯)한다.
26)비나야(毘那耶)는 범어 vinaya의 음역으로서, 비나야(毘奈耶)ㆍ비니(毘尼)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을 말하며, 율(律)ㆍ멸(滅)ㆍ조복(調伏)이라 의역한다.
27)범어 abhidharma의 음역으로서, 아비담(阿毘曇)ㆍ비담(毘曇)이라고도 한다. ‘교법에 대한 연구’의 의미로서 대법(對法)ㆍ무비법(無比法)ㆍ승법(勝法)ㆍ논(論)으로 번역한다.
28)극단적인 쾌락행과 극단적인 고행을 가리킨다.
29)여기서 막는다[遮]는 것은 유죄(有罪)로 규정해서 금한다는 의미이다. 즉, 극단적인 쾌락행을 금한다는 뜻이다.
30)연다는 것은 무죄(無罪)로 규정해서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즉, 자신을 괴롭히는 극단적인 고행을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31)계율[戒]ㆍ선정[定]ㆍ지혜[慧]의 3학(學)이다.
32)시라(尸羅)는 범어 śila의 음역으로서, 보통 계(戒)라고 번역된다.
33)범어 samādhi의 음역으로서 정(定)ㆍ등지(等持)라고 번역한다. 일반적으로 삼매(三昧)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망념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위(定位)ㆍ산위(散位)에 통하지만, 유심위(有心位)에만 통하고 무심위(無心位)에는 통하지 않는다.
34)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을 말한다.
35)범어 śamatha의 음역으로서, ‘고요ㆍ평온’의 의미이다. 지(止)ㆍ지식(止息)ㆍ적정(寂靜)ㆍ능멸(能滅)이라고 의역한다. 선정삼매를 본질로 하며 삼매(三昧:三摩地)ㆍ정(定)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한다.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정신통일의 상태[心一境性]에서 신체와 마음의 평안함[輕安]이 이루어진 상태이다. 사마타를 행함으로써 8선정(색계 4ㆍ무색계 4)을 이루고 5신통(神通)을 성취할 수 있다(漏盡通은 위빠사나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36)위빠사나(vipaśyanā, 毘鉢舍那)는 ‘꿰뚫어 봄’ㆍ‘통찰’ㆍ‘관찰’의 의미로서, 관(觀)ㆍ관찰ㆍ견ㆍ능견(能見)으로 번역한다. 사마타[止]에 의해 심신의 평안함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몸과 마음의 현상으로부터 연기ㆍ무아ㆍ중도ㆍ진여의 이법(理法)을 통찰한다. 위빠사나에 의해 8선정이 완전함을 이루게 되고, 멸진정(滅盡定)이 가능해진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완전히 소멸하고 견성ㆍ해탈ㆍ열반을 성취한다.
37)가타(伽他)는 범어 gāthā의 음역으로서, 풍송(諷頌)ㆍ게송(偈頌) 등으로 번역한다. 12부경(部經)의 하나로서 운문의 형식을 취한 경문(經文)이며, 흔히 교설의 끝부분에 서술되어 있다. 산【문】형식의 경문의 의미를 거듭 말하는 게송[祇夜, 重頌]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기송(孤起頌)이라고도 한다.
38)번뇌가 완전 소멸한 무루(無漏)의 성과(聖果)인 아라한과를 말한다. 이로써 생사윤회의 흐름이 그치게 된다.
39)경ㆍ율ㆍ논 3장을 분명히 알게 되면 능히 모든 것을 꿰뚫어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40)5온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有爲法]를 다섯 가지 요소[蘊]로 분류한 것이다. 색온(色蘊)은 물질(신체와 자연계), 수온(受蘊)은 감수작용, 상온(想蘊)은 표상ㆍ개념화 작용, 행온(行蘊)은 짓고 유지하는 작용, 식온(識蘊)은 식별작용 또는 식별작용의 주체이다. 유정의 심신은 이 다섯 요소가 잠정적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五蘊假和合]으로서 나[我]라고 집착할 실체가 없다.
41)12처는 일체법을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12가지 요소로 분류한 것이다. 이에 눈[眼根]ㆍ귀[耳根]ㆍ코[鼻根]ㆍ혀[舌根]ㆍ몸[身根]ㆍ의지[意根]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6內處]과, 빛깔[色境]ㆍ소리[聲境]ㆍ냄새[香境]ㆍ맛[味境]ㆍ감촉[觸境]ㆍ법[法境]의 여섯 가지 대상[六境:6外處]이 있다.
42)18계에서 계(界)는 부류ㆍ층ㆍ종족이라는 의미이다. 일체법을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여섯 가지 인식대상[六境], 여섯 가지 식[六識]으로 분류한 것이다.
43)일반적으로 12지연기(支緣起)ㆍ12인연(因緣)이라고 한다. 현상세계에서 인간이, 특히 인간의 괴로움이 존재하게 되는 방식을 열두 단계로 설명한다. 즉 무명(無明:진리에 대한 無知)→행(行: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하려는 형성작용)→식(識:식별작용ㆍ윤회의 주체)→명색(名色: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6입(入: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의지)→촉(觸:6根과 6境과 6識의 화합)→수(受:감수작용)→애(愛:갈애)→취(取:愛의 대상에 대한 집착)→유(有:생사하는 존재 자체의 형성)→생(生:태어남ㆍ삶)→노사우비뇌고(老死憂悲惱苦:늙고 죽음ㆍ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의 괴로움)이다.
44)4식(食)은 유정의 신명(身命)을 유지시키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음식작용물이다. 첫째, 단식(段食, 團食)은 밥이나 나물처럼 형체가 있는 음식으로서, 이것을 쪼개고 으깨서[分分段段] 먹어 능히 신명을 무너지지 않게 한다. 둘째, 촉식(觸食)에서 촉(觸)은 육식에 상응하는 심소(心所:심리작용)이다. 사랑할 만한 대상에 접촉할 때 희락의 쾌감을 일으켜서 신체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능히 음식작용물의 뜻이 있게 된다. 셋째, 의사식(意思食 또는 思食)에서 의사는 의식에 상응하는 사(思)의 심소이며, 이 심소가 욕구[欲] 등의 심소를 동반해서 사랑할 만한 대상을 희구해서 심신을 자양(滋養)하기 때문이다. 넷째, 식식(識食)은 앞의 세 가지 음식작용물의 세력에 의해서 증장할 수 있고, 이 식이 모든 감각기관이나 4대(大)를 장양(長養)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45)정려는 범어 dhyāna의 의역(意譯)으로서, 선나(禪那)ㆍ선(禪)ㆍ사유수(思惟修) 등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오로지 기울여서 자세히 사유하는 것으로서, 정(定)과 혜(慧)가 균등하다. 정려라는 용어는 현장의 신역(新譯)이다.
46)4무량심(無量心)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이다. 한량없는 중생을 상대로 하고, 또한 한량없는 복과를 얻기 때문에 무량(無量)하다고 한다. 자(慈)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는 괴로움을 없애 주는 것이며, 희(喜)는 남이 즐거워함을 보고 같이 즐거워함이고, 사(捨)는 남에 대해서 애증원친(愛憎怨親)의 마음이 없이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47)승처(勝處)는 제입(制入)ㆍ제입(除入)ㆍ제처(除處)라고도 한다. 대경(對境)을 제복(制伏)하여 자재를 얻는 차이에 따라 여덟 단계로 나누어 8승처라고 한다. 즉, 욕계의 색처(色處:볼 수 있는 대상, 즉 色想)를 관찰함으로써 이를 이겨내서 탐욕을 제거하는 다음과 같은 여덟 단계이다.
48)변처(遍處)는 변입(遍入)ㆍ일체입(一切入)ㆍ변처정(遍處定)이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지(地)ㆍ수(水) 등 열 가지 법이 온갖 장소에 널리 퍼져서 틈이 없다고 관찰하는 열 가지 관법(觀法)ㆍ관상(觀想)이다. 열 가지는 지ㆍ수ㆍ화ㆍ풍ㆍ청ㆍ황ㆍ적ㆍ백ㆍ공(空)ㆍ식(識)이며, 각기 지변처(地遍處)ㆍ수변처(水遍處) 등으로 말한다. 이 관법은 8해탈ㆍ8승처를 닦은 다음에 행한다.
49)37보리분법은 37조도품(助道品)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의 경지(열반)를 실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37가지의 실천수행법을 말한다. 이에 4념주(念住)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가 있다.
50)4무애지(無碍智)ㆍ4무애변(無碍辯)라고도 한다. 마음의 측면에서는 지(智)ㆍ해(解)라고 하며, 입의 방면에서는 변(辯)이라고 한다. 첫째, 모든 교법에 통달한 법무애(法無碍)이다. 둘째, 모든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의무애(義無碍)이다. 셋째, 여러 가지 말을 알아서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사무애(辭無碍)이다. 넷째, 일체 교법을 말하는 데 자재한 요설무애(樂說無碍)이다.
51)여기서 쟁(諍)은 다툰다는 의미로서 번뇌의 이명(異名)이다. 무쟁은 모든 유정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탐욕ㆍ성냄 등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지혜이다. 또한 남의 번뇌를 쉬게 하는 힘이므로 부처님과 아라한만 갖고 있을 뿐, 다른 이는 아무도 도저히 미치지 못하는 뛰어난 덕력(德力)의 하나이다.
52)여기서 밀의(密意)는 교설에 함축되어 있는 부처님의 본래 취지를 말한다.
53)이하 논장을 해석한다.
54)진여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모두 벗어난 열반이다. 네 가지 열반(본래자성청정열반ㆍ유여의열반ㆍ무여의열반ㆍ무주처열반) 가운데 최상의 경지이다. 대지(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고 대비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는다. 유정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하더라도 항상 고요하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한다.
55)해탈에 들어가는 문이 되는 세 가지 선정을 말한다. 첫째, 공해탈문(空解脫門)은 사람과 법의 본성이 공함을 관조하는 것이다. 둘째,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차별상을 떠나는 것이다. 셋째,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원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56)자상(自相)은 그것만의 고유하고 특수한 양상으로서 불공상(不共相)이라고도 한다. 공상(共相)은 다른 것과 공통되는 일반적인 양상을 말한다. 낱낱의 색법의 공상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 등이다. 또한 승의제(勝義諦)인 진여는 유위법의 진실한 성품으로서 모든 법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것이므로 공상이라고 한다.
57)『유가사지론』에 나오는 일곱 가지 인명[七因明]을 가리킨다. 논의를 결택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요건을 말한다. 첫째는 논의(論義)의 체성(體性), 둘째는 논의의 처소, 셋째는 논의의 의지처[所依], 넷째는 논의의 장엄, 다섯째는 논의에 지는 것[墮負], 여섯째는 논의의 벗어남[出離], 일곱째는 논의의 다소작법[多所作法]이다.
58)이하 율장을 해석한다.
59)등기(等起)는 범어 samutthāna의 번역어로서,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업(業)에서 의업이 원인이 되어 신업과 구업을 이끌어 내어 함께 작용함을 말한다.
60)비구ㆍ비구니의 죄를 다섯 부문[五科]으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 바라이(波羅夷)는 살생ㆍ음행 등 가장 무거운 죄로서 다시는 비구(니)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 승잔(僧殘)은 이 죄를 범하면 죽게 되어 있으나 겨우 목숨이 살아남아 있는 정도의 죄로서, 대중에게 참회하고 남은 생명을 보존한다. 셋째, 바일제(波逸提)는 지옥에 떨어지는 죄이다. 넷째, 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는 다른 비구(니)에게 참회하면 없어짐을 받는 죄이다. 다섯째, 돌길라(突吉羅)는 그 지은 바가 나쁘지만 가장 가벼운 죄이다.
61)응당학(應當學)이라고도 하며, 돌길라(突吉羅)죄의 계법이다. 비구ㆍ비구니의 복장ㆍ위의ㆍ식사 등에 관한 세칙을 규정한 것을 중학(衆學)이라고 한다. 수가 많아서 범하기 쉽고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학습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중학이라 한다. 지금은 그 중에서 백 계(戒)만을 들어서 백중학이라 한다.
62)비구ㆍ비구니의 어느 한 편에서 규정된 죄과(罪過)를 가리킨다.
63)울타남(鬱陀南)은 범어 udāna의 음역으로서, 울타나(鬱陀那)라고도 한다. ① 무문자설(無問自說:12部經의 하나) ② 법인(法印)ㆍ집시(集施)로 번역한다. 많은 의미를 함축한 게송을 말한다. 네 가지 법인(法印)은 제행무상(諸行無常)ㆍ일체개고(一切皆苦)ㆍ제법무아(諸法無我)ㆍ열반적정(涅槃寂靜)이다.
64)보특가라는 범어 pudgala의 음역이다. 구역에서는 인(人)ㆍ중생ㆍ유정(有情)으로, 신역에서는 삭취취(數取趣)로 번역된다. 유정이 누누이[數] 5취(趣)를 취착(取着)해서 윤회하기 때문에 유정 또는 유정의 자아를 말한다.
65)여기서 대사(大師)는 위대한 스승이신 석존을 가리킨다.
66)의리(義理)를 표현하고 언어로 되기 때문에, 의미는 원인이고 말은 결과이다.
67)유식에 들어감을 가리킨다.
68)증과인 단멸[果斷]은 열반을 가리킨다.
69)열반을 과단(果斷:斷果)이라 하는 데 대해서 보리(菩提)를 이렇게 부른다.
70)3성은 의타기성ㆍ변계소집성ㆍ원성실성이다. 진제(眞諦) 역본에는 의타성ㆍ분별성ㆍ진실성으로 되어 있다.
71)범어 ālaya-vijāna의 음역으로서 8식(識) 가운데 제8식이며, 유정의 근본적인 식체(識體)이다. ālaya는 저장ㆍ집착ㆍ무몰(無沒)의 의미이다. 이 식에 종자를 ‘저장’하고, 제7 말나식에 의해 상주불변의 자아로 착각 ‘집착’되며, 아득한 옛적부터 해탈에 이르기까지 이 식의 흐름이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근본식ㆍ본식ㆍ장식(藏識)ㆍ이숙식(異熟識)ㆍ일체종자식ㆍ아타나식(阿陀那識)이라고도 한다. 진제는 아리야식(阿梨耶識)ㆍ아려야식(阿黎耶識)으로 음역하고, 무몰식(無沒識)으로 의역하였다.
72)지업(持業)은 어떤 체(體)가 그 용(用)을 능히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지업석은 6합석(合釋)의 하나로서, 전절(前節)의 문언(文言)이 후절(後節)의 문언에 대해 형용사ㆍ부사 또는 동격의 명사의 관계를 갖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장식(藏識)이라고 할 경우에 장(藏)은 용(用)이고 식(識)은 체(體)로서, 식[體]에 장[用]을 갖고 있으므로 지업석이다.
73)유식학에서는 보살의 수행 계위(階位)를 41단계[10住ㆍ10行ㆍ10廻向ㆍ10地ㆍ佛地]로 인정하고, 이것을 5위(位:자량위ㆍ가행위ㆍ통달위ㆍ수습위ㆍ구경위)에 배대한다. 가행위(加行位)는 제2위로서 수행심을 더욱 경책해서 정진을 가행하도록 하는 단계이다. 이 지위에서 네 가지 선근[煖位ㆍ頂位ㆍ忍位ㆍ世第一位]을 닦는다.
74)통달위는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한다. 이 지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된다. 10지 중에서 초지(初地:환희지)의 입심(入心)의 수행위이다.
75)계율을 호지(護持)하기 때문에 불선(不善)을 짓는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76)전의(轉依)의 증과인 단멸이 모든 법에 있어서 가장 승묘(勝妙)하기 때문이다.
77)전의의 품류(品類)의 차이를 말한다.
78)중생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 열반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번뇌로 인한 장애이다. 여기서 번뇌는 제7 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의 견분을 대상으로, 그리고 의식이 5취온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집착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아집의 번뇌로 인해 열반을 장애하고 생사에 유전하게 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79)알아야 할[所知] 모든 대상을 덮어서 바른 지혜가 생기는 것을 방해하는 번뇌로 인한 장애이다. 즉,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인식대상[所知]의 참다운 모습[法空]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들 번뇌를 소지장(所知障)이라 한다. 법집(法執)을 근본으로 하며 보리를 장애한다. 참다운 지혜가 발현함을 장애하는 점에서 지장(智障)ㆍ보리장(菩提障)이라고도 한다.
80)무주처열반ㆍ무주상열반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열반(본래자성청정열반ㆍ유여의열반ㆍ무여의열반ㆍ무주상열반) 가운데 최상의 열반이다. 부처님께서는 대지(大智)이므로 생사에 머물지 않으시고, 대비(大悲)이므로 열반에 안주하지 않으신다.
81)번뇌의 종자를 가리킨다. 번뇌의 잠재세력이다. 이에 대해 현재 작용하는 번뇌를 전(纏)이라고 한다.
82)범어 śūraṁgama의 음역으로서, 수능엄(首楞嚴)이라고도 한다. 건상(健相)ㆍ건행(健行)ㆍ일체사경(一切事竟)이라고 의역(意譯)한다. 부처님께서 증득한 삼매의 이름이다. 건상이란 당기(幢旗)가 견고함에 비유한 것으로서, 부처님의 덕이 견고하여 모든 마군에 의해 파괴될 수 없음을 나타낸다. 일체사경은 불덕(佛德)의 구경(究竟)을 나타낸다.
83)무색계의 네 가지 선정[四空處定] 가운데 하나로서,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허공처정(虛空處定)ㆍ허공기삼매(虛空器三昧)라고도 한다. 물질[色法]에 얽매임을 싫어하여 마음에 색상(色想)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을 관(觀)의 대상으로 하는 선정이다.
84)현상계의 존재[有爲法]들의 실상(實相)이 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고(苦)ㆍ부정(不淨)임을 알지 못하고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전도(顚倒)된 견해를 일으키고, 또한 열반계가 상ㆍ낙ㆍ아ㆍ정인 것을 무상ㆍ무아ㆍ고ㆍ부정이라고 망령되게 집착함을 말한다.
85)계ㆍ정ㆍ혜 3학을 의미한다.
86)2공(空) 소현(所顯)의 진여로서의 자성을 말한다. 자성신은 완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행 이전에 본래부터 원만히 성취되어 있는 성품이 현현된 상태이다. 본래의 자성청정세계ㆍ진여 법성이 전의(轉依)에 의해 드러난 세계, 즉 깨달음의 세계 그 자체이다.
87)수용신은 법신에 의지하면서 불국토에서 법락을 향수하기 때문이다.
88)안근에 의지해서 안식이 일어남과 같다는 뜻이다.
89)안근이 있기 때문에 안식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90)감각기관[根]이 의지처[所依]이고 식이 의지의 주체[能依]인 것처럼, 법신과 자성신도 역시 각각 의지처ㆍ의지의 주체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91)수용(受用)은 향수(享受)의 의미이다. 보살이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하여 청정국토와 대법락(大法樂)을 향수함을 말한다. 수용신은 복덕과 수행을 닦아서 성취되는 불신(佛身)으로서, 스스로 대승 법락을 향수할 뿐만 아니라 지상(地上) 보살을 위해 대승법을 설하여 법락을 수용하게 한다.
92)10지 중의 초지위(初地位)에 들어감을 말한다.
93)안근에 의지하여 안식을 일으켜서 빛깔을 봄으로써 인식작용이 완료됨과 같다는 의미이다.
94)네 가지 도리(道理)는 관대(觀待)도리ㆍ작용(作用)도리ㆍ증성(證成)도리ㆍ법이(法爾)도리이다. 첫째, 관대도리는 필요로 함을 관찰하는 도리, 즉 모든 유위법이 생겨날 때에 반드시 갖가지 연(緣)을 필요로 함[待]을 관찰하는 도리이다. 둘째, 작용도리는 작용의 도리, 즉 인연에 의해 생겨난 유위법에는 반드시 일을 이루는 작용이 있음을 말한다. 셋째, 증성도리는 증명하여 성립되는 도리이다. 즉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성교량(聖敎量)에 의해 증명되고 성립되는 참되며 바른 도리이다. 넷째, 법이도리는 법의 본래부터의 도리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거나 출현하시지 않음에 관계없이 법계에 안주하는 본래부터의 도리이다. 예를들면 연기법ㆍ선인낙과 악인고과(善因樂果 惡因苦果)의 인과법 같은 것을 말한다.
95)바른 인식방법[量, pramāṇa]으로서 현량ㆍ비량ㆍ성교량을 말한다. 첫째, 현량(現量, pratyakṣa)은 감각기관과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아는 감각지(感覺知)이다. 예를 들면 안식이 눈[眼根]을 통해서 빛깔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 등이다. 둘째, 비량(比量, anumāna)은 이미 아는 사실을 가지고 비교해서 아직 알지 못하는 사실을 추측해서 아는 추리지(推理知)이다. 예를 들면 연기가 있음을 미루어서 불을 안다거나, 나비와 벌이 모이는 것을 미루어서 꽃이 있음을 아는 것 등이다. 셋째, 성교량(聖敎量, śabda)은 성언량(聖言量)ㆍ정교량(正敎量)ㆍ지교량(至敎量)이라고도 한다. 성자의 말씀에는 잘못이 없다고 해서 이것에 의해 여러 가지 사실을 미루어 아는 것이다.
96)이하 열 가지 의미의 순서에 관하여 말한다(第2 十義次第章).
97)범어 āśaya의 번역어이다. 휴식처ㆍ주처(住處)ㆍ사의(思意)ㆍ의향(意向) 등의 의미가 있으며, 의요(意樂)ㆍ의욕(意慾)ㆍ지원(志願)이라고 한역한다. 무슨 일인가를 하고자 하는 생각이며, 특히 선정 중의 작의(作意)를 가리킨다.
98)무수겁(無數劫)은 아승기겁(阿僧祇劫)의 번역어이다. 아승기는 범어 asaṁkhya의 음역어로서, 원래 발음은 아승기이지만 보통 아승지라고 부른다.
99)매우 높은 계율[增上戒], 매우 높은 마음[增上心], 매우 높은 지혜[增上慧]이다.
100)자재천을 섬기는 외도의 주장을 가리킨다. 자재천은 색계의 초선천(初禪天)에서 3천 계(界)를 주관한다고 한다(혹은 욕계의 제6 天主라고도 한다). 이 신(神)이 세계의 본체 또는 창조의 신으로서, 만물이 자재천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된다고 한다. 이 신이 기뻐하면 중생이 편안하고 성내면 중생이 괴롭게 된다고 한다.
101)자재천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역시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102)이하 제8식의 여러 명칭에 관하여 말한다(第3 衆名章).
103)여기서 계(界)는 범어 dhātu의 번역어로서 층(層)ㆍ근기(根基)ㆍ요소ㆍ원인[因]ㆍ세계ㆍ경계 등의 의미이다. 일체법의 종자를 계(界)라고 할 때는 원인ㆍ요소의 의미이다.
104)범어 Āgama의 음역이다. 일반적으로 아함(阿含)이라 번역한다. 여기서 광의(廣義)로는 성교(聖敎)의 의미이다. 즉, 교증(敎證)으로서 열거한다.
105)이숙과의 업인(業因)은 선이나 악인데 결과가 무기(無記)임을 말한다.
106)제8식의 3상(相:自相ㆍ果相ㆍ因相) 가운데 자상인 장식(藏識)에서 장(藏)의 세 가지 의미[能藏ㆍ所藏ㆍ執藏] 가운데 능장을 해석한다.
107)소장(所藏)의 의미이다.
108)집장(執藏)의 의미이다. 제7식이 제8식을 의지처[所依]로 하면서 동시에 인식대상[所緣]으로 하는데, 여기서 제8식을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을 띤 자아로 착각하여 집착함을 말한다.
109)여기서 범부[凡]는 일반 범부를, 어리석은 무리[愚]는 아공법유설(我空法有說)을 주장하는 소승을 가리킨다.
110)유정이 태어나는 네 가지 형태를 말한다. 첫째, 태생(胎生)은 모태를 통해 태어나는 것으로서, 사람이나 짐승 등이다. 둘째,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서 조류 등이다. 셋째, 습생(濕生)은 습기로 태어나는 것으로서 파리ㆍ모기 등이 있다. 넷째, 화생(化生)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업력에 의해 변화로써 홀연히 태어나는 것으로, 하늘이나 지옥에 나는 것이다.
111)집수(執受, upātta)는 ‘감수 유지작용’의 의미이다. 외부대상을 접촉하여 그것을 섭지(攝持)해서 잃어버리지 않고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지각하는 작용이다.
112)여기서 색근(色根)은 승의근(勝義根)을 가리킨다. 승의근은 ‘뛰어난 의미[勝義]의 감각기관’이라는 뜻이다. 미세 청정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즉, 신경(神經)과 신경전달물질이다. 감각기관[根]의 기능인, 식을 일으켜서 대상을 파지하는 것[發識取境] 가운데 식의 작용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113)여기서 소의근(所依根)은 부진근(扶塵根)을 말한다. 외부대상[塵]을 파지하는[扶] 감각기관이다. 안구ㆍ귀 등 눈에 보이는 기관이다.
114)심(心)의 범어 원어는 citta로서 집기(集起)의 의미이다. 제8식에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의 인식내용이 종자의 형태로 적집되고 성장되므로 심이라고 부른다.
115)여래의 교법에 안주해서 법문을 안립하고 시설하는 지혜이다.
116)아타나(阿陀那)는 범어 ādāna의 음역으로서, 유지ㆍ보존의 뜻이다. 제8식이 신체와 종자를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117)시체의 부정한 양상들을 가리킨다. 이에 시체가 부어서 마치 곡식 담긴 자루처럼 팅팅한 모습[脹相], 시체의 가죽과 살이 문드러지고 오장이 썩는 모습[壞相], 시체의 온몸이 피고름으로 더러워진 모습[血塗相], 시체에서 고름과 벌레가 흘러나오고 살이 흩어져서 여러 군데에 낭자한 모습[濃爛相], 시체가 바람에 쏘이고 비에 씻겨서 피고름이 엉겨 푸르퉁퉁한 모습[靑瘀相], 시체가 새ㆍ짐승ㆍ구더기에 파먹히는 모습[霙相], 가죽과 살이 없어지고 뼈만 붙어 있으면서 머리와 다리가 뒤섞인 모습[散相], 백골이 낭자한 모습[骨相], 불에 타서 그슬리어 악취가 나고 재가 되는 모습[燒相]이 있다. 5욕락을 즐기는 미혹을 없애기 위한 관법인 부정관(不淨觀) 가운데 9상관(想觀)은 이들 시체의 부정한 모습들을 관찰한다.
118)아뢰야식을 가리킨다.
119)감각기관을 말한다.
120)이하 심ㆍ의ㆍ식의 명칭을 해석한다.
121)제7 말나식을 가리킨다. 이때 의(意)의 범어는 manas(思量)이다. 그런데 제6의식을 mano-vijāna라고 해서 똑같이 manas가 사용된다. 따라서 제6 의식과 구분하기 위해서 단지 의라고 부르거나 말나식(末那識)이라는 음역어를 사용한다.
122)의(意), 즉 제7식에 무간멸의(無間滅意)와 염오의(染汚意)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전자는 제7식이 제6식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임을 나타낸다. 후자는 제7식으로 인하여 무명[我癡]ㆍ아견 등의 근본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123)4연(緣:因緣ㆍ所緣緣ㆍ等無間緣ㆍ增上緣) 가운데 하나이다. 전념(前念)의 식이 멸하는 것이 후념(後念)의 식이 생겨나는 연(緣)이 됨을 말한다. 수역(隋譯)이나 진제 역본에는 차제연(次第緣)으로 되어 있다.
124)심(心)ㆍ의(意)ㆍ식(識)의 세 가지 차별상을 가리킨다.
125)논(論)에는 ‘의지처[所依止]의 성품’으로 되어 있는데, 석(釋)에는 그 의미를 따라서 원인의 성품이라고 한다.
126)무간멸의(無間滅意)를 가리킨다.
127)염오의(染汚意)를 말한다.
128)살가야견(薩迦耶見)은 범어 satkāya-dṛṣṭi의 음역으로서, 유신견(有身見)이라 번역하며 신견(身見)ㆍ아견(我見)이라고도 한다. 자아(Ātman)가 실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제7 염오말나식이 제8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제6 의식이 5취온(取蘊)을 대상으로 해서 자아로 착각하여 나[我]와 나의 소유[我所]로 삼고 집착함을 말한다. 이것을 기본으로 해서 아만과 아애(我愛)를 일으킨다.
129)살가야견에 의해 설정된 자아를 의지처[所依]로 삼아서 자기는 존재한다고 교만하게 뽐내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 아만은 5취온을 나와 나의 소유로 집착하여 교만한 것을 의미했었다. 유식학파에서는 말나식이 아뢰야식을 자아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더욱 대상화하고, 대상화된 자기를 근거로 교만하게 뽐내는 것을 근본적인 아만으로 생각하였다.
130)아애, 즉 자아에 대한 애착은 일상생활에서 갖가지 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이다.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추기는 근본원인이 된다.
131)무명, 즉 근본적인 무지는 자기 본질의 이치[無我]를 모르는 아치(我癡)를 말한다. 무명은 초기불교 이래 4성제ㆍ연기의 도리에 무지한 것으로 설명되었다. 유가유식학파도 근본적으로 이런 입장에 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야말로 근본적인 무명이며, 그것이 항상 말나식과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한다.
132)여기서 무명은 구체적으로 무아의 이치를 모르는 아치(我癡), 즉 제7식이 제8식을 대상으로 상일주재성(常一主宰性)의 자아로 착각함을 의미한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번뇌가 이 무명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이 네 가지 근본번뇌가 생겨나는 순서는 무명→아견→아만→아애이다.
133)전찰나의 식이 멸하는 곳에 다음의 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134)다음 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의지처라는 의미이다.
135)선심(善心)도 번뇌가 있는[有漏] 동안은 아집을 근본으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를 의지처[所依]로 한다.
136)무간멸의(無間滅意)를 말한다.
137)염오의(染汚意)이다.
138)무명을 불공무명(不共無明)과 상응무명(相應無明)으로 나눈다. 불공무명은 독두무명(獨頭無明)ㆍ독행무명(獨行無明)이라고도 하며, 탐(貪)ㆍ진(瞋)ㆍ치(癡)와 상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생기하여 진지(眞智)를 장애하는 근본적인 무명이다. 무아의 이치에 미혹한 아치(我癡)의 무명으로서, 제7식에만 상응하고 다른 식에는 수반되지 않는다. 참고로 상응무명은 6식(識)에 상응하는 무명으로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 등의 번뇌와 상응하는 무명이다.
139)여기서 5동법(同法)은 5식을 의미한다.
140)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두 가지 이상이 서로 의지하여 동일한 결과를 낼 때 동시 의존의 인과관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심왕(心王)이나 심소(心所)와 동시에 있으면서 의지처가 된다. 5근(根)ㆍ의식ㆍ말나식ㆍ아뢰야식을 말한다.
141)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는 원인이 되는 선정이다. 인도의 외도가 닦는 선정인데, 그들은 상념을 생사의 근본이라 생각하고 6식의 현행을 소멸하고자 한다. 색계의 제4선(禪)에서 닦으며, 이것을 얻으면 참열반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142)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도 하며, 진제(眞諦) 역본에는 멸심정(滅心定)으로 되어 있다. 무상정은 외도 수행자도 도달할 수 있지만 멸진정은 불교에서 말하는 뛰어난 선정이다. 무상정에서는 아직 제7 염오의(染汚意)가 작용하고 멸진정에서는 소멸된다. 멸진정은 성자가 모든 심상(心想)을 없애고 적정하기를 원하여 닦는 선정이며, 6식의 심(心)ㆍ심소(心所)와 제7식의 유루의 일분(一分)을 현행하지 못하게 하는 분위(分位)이다. 무색계의 제4 유정천(有頂天)에 해당된다. 소승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의 성자가 닦는 멸진정은 유루정(有漏定)으로서 제7식의 아집작용까지 소멸된다. 대승의 보살이 이것을 닦는 것은 무루정(無漏定)으로서, 제7식의 법집작용까지 소멸된다.
143)아집은 불선의 마음만이 아니다. 선(善)과 무기(無記)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144)다른 미혹과 상응하지 않고 의(意)와 함께 하는 아집을 의미한다.
145)불선과 상응해서 일어나는 아집이다.
146)두 가지는 불공무명과 5식을 가리킨다. 세 가지는 해석하는 말, 두 가지 선정의 차이, 무상천의 생에 아집이 항상 따르는 것을 말한다.
147)유부무기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지혜의 발생을 방해하는 성품을 말한다. 제7식이 선ㆍ불선이 아니므로 무기이면서 아집과 상응하기 때문에 유부무기성이 된다.
148)전(纏)은 범어 paryavasthāna의 번역어로서 번뇌, 특히 수번뇌(隨煩惱)의 다른 이름이다. 마음을 얽어매어 선(善)을 행할 수 없게 방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149)다스리는 수도[對治道]에 의지해서 참다운 지혜[眞智]를 생겨나게 함을 말한다.
150)안근 등 5관(官)에 의지하는 5식 자체에는 장애가 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151)앞의 문장의 의미에 대한 까닭이다. 능히 다스리는 지혜가 생겨나는 곳에서는 반드시 다스려지는 미혹의 장애가 있다. 그런데 5식에는 능히 다스림[能治]이 없기 때문에 다스려지는 것[所治]도 역시 없다는 의미이다.
152)이하 불공무명은 염오의 의식에 있지 않음을 밝힌다.
153)이 무명이 염오의 의식에 없는 까닭을 밝힌다.
154)이미 염오의 의식이라면 다른 미혹이 현행하여 상응함이 있기 때문에, 만일 이곳에 불공무명이 있다면 그것은 불공이 아니어야 함을 말한다.
155)선심(善心)을 가리킨다.
156)염오(染汚)를 말한다.
157)이하 5식과 비교해서 염오의(染汚意)를 성립한다.
158)의(意)라는 명칭을 해석하여 염오의를 성립한다. 의의 범어인 manas는 동사 √man(사량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이기 때문이다.
159)전념(前念)의 6식(識)을 가리킨다.
160)전찰나의 6식은 이미 멸하여 체(體)가 없기 때문에 의지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161)무상정ㆍ멸진정의 차이에 의해서 염오의를 성립한다.
162)멸진정을 가리킨다.
163)이하 게송의 문장에 따라서 앞의 의미를 거듭해서 해석한다.
164)5식을 가리킨다.
165)그것은 5식, 이것은 제6 의식을 가리킨다.
166)의(意, manas)의 글자 뜻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염오의가 없다면 과실이 있다는 의미이다.
167)5식을 가리킨다.
168)식을 첫 번째로 말하고, 의(意)를 두 번째로 말하며, 이제 세 번째로 심(心)을 말한다.
169)전식(轉識)을 가리킨다.
170)공능차별의 범어는 śakti-viśeṣa 또는 sāmarthya-viśeṣa이다. śakti, sāmarthya는 ‘작용을 가진 힘ㆍ세력[功能]’이고, viśeṣa는 ‘특별[差別]’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자는 공능차별(功能差別), 즉 특수한 작용의 힘, 특수한 정신적인 에너지의 의미이다.
171)이하 성문승에도 이문밀의(異門密意)로써 제8식을 말함을 밝힌다. 먼저 대승과 소승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