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416_a_01L업성취론(業成就論)


천친(天親) 지음
비목지선(毘目智仙) 한역
김월운 번역


업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이다. 수다라(修多羅)에서 어떤 이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몸으로 짓는 업을 신업이라 하고, 입으로 말하여 짓는 업을 구업이라 하는데 이 둘에는 모두가 유작(有作:有表)과 무작(無作:無表)에 있고 뜻과 서로 응하는 업인 쪽으로 보면 의업이 되니 이 업 그대로가 생각[思]이다.”
위에서 소개한바 저들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뜻이란 어떤 법인가? 모든 몸과 뜻에서 모두 형상(形相)이 있는데 그것[思業]이 몸을 반연하여 몸이 생겼으니, 어떤 형상인가?
몸의 형상 그대로이다.
몸의 형상이라면 어찌하여 굳이 몸으로 짓는 업[身所作業]이라 하는가?
몸은 총체적인 지분[分]이어서 몸에 섭속되기 때문이며, 신대(身大:몸)를 반연하여 생겼기에 몸으로 짓는 업이라 하니, 부분[別]에 속하는 말을 총체적인 이름으로 부른 것이다.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성 안에 살고 있다 하는 경우나 숲속에 있다 하는 경우와 같다.
몸을 반연으로 생겼다면 무슨 까닭에 그렇게 말하는가?
입술 따위의 동작에서 생겼다거나 생각이나 형상에서 생겼다는 생각을 차단하려는 까닭이다. 그 마음은 입술 따위의 동작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며 형상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니 말[語]하려는 생각을 반연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또 앞의 원(願)에 의해 생긴다는 생각도 인정하지 않나니, 그 마음은 앞의 원을 반연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보(異報:異熟)의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뜻으로 일으킨 업[意起業]이라 하는가?
마음을 움직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형상(形相)이라 하는가?
이른바 길이[長] 따위이다
무엇을 길이 따위라 하는가?
이른바 길게 보이는 것들을 말한다.
그것은 어느 부류[入]에 속하는가?
색입(色入)에 소속된다.
길이 따위는 미진(微塵) 그대로의 색인가, 미진이 모인 집합체인가, 아니면 어떤 한 물건이 색진 따위에 두루해 있는 것인가?
만일 길이 따위가 미진 그대로의 색진이라면 그 길이 따위는 마치 물질을 부분부분 취하는 것과 같이 부분부분[分分]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길이 따위가 미진이 모인 덩어리라면 저 색의 미진과 그들의 모인 덩어리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 미진의 모임은 길이 따위와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일 한 물건이 색 따위에 두루했다면 그 한 물건이 길이 따위에 두루 있어야 하고, 만일 한 물건이 부분부분 속에 두루했다면 모두에서 잡을 수 있어야 하리니, 모든 곳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가 아니라면 부분부분으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아함(阿含)의 열 가지 입[十入]1)을 미진이 합해 모인 것이라고 한다면 부처님의 법은 무너지고 가나타(迦那陀:勝論派의 시조) 외도의 법이 성립할 것이다. 미진을 모은 무더기 중에 한쪽에서 긴 것을 보면 길다는 앎[知]을 내고, 국한된 것을 보면 짧다는 앎을 내고, 반듯한 것을 보면 방정(方正)하다는 앓을 내고, 두루한 것을 보면 둥글다는 앎을 내고, 중간에 튀어나온 것을 보면 높다는 앎을 내고, 낮은 것을 보면 꺼졌다는 앎을 내고, 가지런한 것을 보면 바르다는 앎을 내고, 갖가지 방면을 보면 들쭉날쭉함을 알고, 담요ㆍ털ㆍ비단 따위를 여여하게 보면 그 갖가지 형상에 따른 앎을 내나니, 그 갖가지로 다른 물건을 하나로 볼 수는 없고 색의 차별대로 보아야 한다.
만일 다시 생각하기를 모든 방위에 모든 형상이 있다고 한다면 인 이치가 옳지 못하니 이런 형상은 다른 물건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빛깔[色]도 그러하여서 방위와 곳에 따라 길고 짧은 따위를 보되 마치 나무나 새나 개미 떼 따위 같다 하면 그 논리에는 허물이 없다.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어둡거나 멀 때에는 빛[色]은 보지 못하며, 모여진 겉모습을 볼 때엔 어찌하여 전체는 보되 형상을 보지 못하는가? 마치 가로수의 행렬 따위에서 그 행렬의 무더기만 보고 형상은 보지 못하면서도 거기에 딴 물건이 없다고 하는 경우처럼 모인 무더기에 대하여 어둡거나 멀 때에 두 가지(개체와 전체)를 보지 못하거나, 보더라도 분명치 않으므로 ‘그게 어떤 물건인가, 저 보이는 것은 무슨 물건인가?’ 하거니와 비록 저 색(色:物)을 보되 분명치 않다. 그러므로 이것이 뜻의 형상이라 한다면 이치가 성취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마음이 그것[境]을 반연해서 생기는데 경계가 가므로 뜻[意]이라 한다고 하거니와, 그것을 반연해서 생긴다 함은 무슨 뜻인가? 입술 따위의 움직임에서 생긴다는 주장을 막아 정지하기 위한 까닭이다.
무슨 까닭에 감[往]이라 하는가?
이른바 저쪽을 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입(入)에 속하는가?
색입(色入)에 섭속된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저쪽으로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다르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불ㆍ눈ㆍ술[苦酒:또는 식초]ㆍ햇볕 따위가 변해 익는[變熟] 인연 때문에 들어왔다가는 곧 나가는데, 변해 달라짐[變異]은 볼 수 없으나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 경우와 같다. 또 불에 탈 수 있는 허수아비나 풀ㆍ나무 따위를 태울 때 별다른 불꽃을 볼 수는 없으나 불꽃과 다르지 않은 것은 아닌 것과도 같다.
처음 불에 들어갔을 때 변하지 않는다면 나중에도 변하지 않아야 하나니, 그 까닭은 그 인연이 별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섶나무나 풀 따위가 거칠고 고움이 균등치 않다면 불꽃의 분량과 밝음과 열량이 모두 달라서 같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같지 않게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쪽으로 가는 데서 생한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사라져 없어지는 원인[滅因]이 없기 때문에 감[往]에서 업이 생긴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마음[心]과 마음붙이[心數] 등의 법을 잡을 수 없는가? 소리[聲]나 등불 따위가 사라질 때에도 무엇인가 인연이 있을 것이요, 그 밖의 것도 그러하다.
그 멸하는 인연이란 스스로의 인연으로 파괴되는 것이거늘 그 밖의 다른 법의 인연인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또 그 법에 멸하는 인연이 없다면 다른 법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만일 처음으로 불에 들어간 풀이나 나무 따위의 색(色:형체)이 본래와 같아서 다르지 않다면 뒤에도 그러하여서 다름이 없어야 할 것이거늘 어찌하여 등불의 빛이나 방울의 소리 따위가 바람이나 손이 닿자마자 곧 꺼지거나 그치는가? 그러나 이것(바람)이 끄는 것이 아니며 이것(손)이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불 따위나 나무 따위를 태우거나 말 때에 형체 따위가 사라지거나 하는 것이라면 처음으로 불에 들거나 나올 때엔 어찌하여 달라지지 않는가? 밖의 인연이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건이 익어지는 데는 미(微:下)ㆍ중ㆍ상이 있을 수 없거늘 처음으로 물건이 익어 변할 때엔 무슨 인연으로 변하는가? 인연은 오직 하나이지만 생기게도 하고 멸하게도 한다 하면 이는 바른 도리가 아니니, 하나의 인연이 두 법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중간에 다시 사라져 없어지게 하는 원인이 있다면 앞에서와 같이 취하고 버림에 다르게 상속(相續)할 것이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만일 사라지는 데 원인이 있다면 법도 없고 원인도 없다는 말이 되나니, 마치 마음 따위가 생기는 경우와 같아서 멸하는 법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일체 법이 모두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니, 사라지면 원인이 없어짐이 마치 불ㆍ눈ㆍ술ㆍ햇볕 따위가 익어 변하는 인연과 같다.
만일 사라짐이 원인이 있어 사라지는 것이 색과 같다면 이렇듯 없는 법이 인연이 있어서 사라지는 것이 된다.
생길 때에도 원인이 없거늘 그 달라지는 법칙을 보고서 이 법이 생기는 데는 실제로 원인이 있다고 한다면 앞 마음[前心]과 뒤 마음[後心]이 다 같은 마음이지만 중간에 익어 변했다는 말이 된다. 변해 익어진다 함은 마치 우유가 소락이 되고, 포도즙이 술이 되고, 술이 식초[苦酒]가 되는 것과 같으니 이렇듯 조그마한 법도 머무는 모습[住相]이 없다.
머무는 물건[住物]에는 지어감[行:변천]이 없고, 지어감이 없으면 머무름[住]인데, 만일 이렇게 본다면 그 본다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이곳의 물건을 보는 것이 그 어찌 저쪽의 땔감을 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쪽의 땔감이지만 보기에는 풀이라는 그림자 같을 뿐이요, 저쪽의 그림자를 여기에서 보는 것이 아니니, 마치 해가 머무른 것을 보는 것 같다. 이와 같이 해가 가깝고 멀게 회전하면서 그림자가 같이 늘고 주는 것을 도는 대로 보되 해는 일정한 방위와 자리에 있으나 그림자가 가릴 때에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따져 묻되, “이는 어느 곳의 물건인가? 앞의 물건이 회전해서 이리로 왔는가?” 하거든, 그에게 대답하되 이는 어느 곳의 물건인가와 그 향한다는 이치를 이제 설하리라.
이렇듯이 머무는 물건은 지어감이 없고, 지어감이 없으면 그 물건은 머무르나 밖의 인연들이 무너짐을 기다렸다가 나중에는 달라짐을 보고 잠깐잠깐 사이에 다르게 안다.
만일 다르게 알지 않는다면 그 물건은 달라진 것이 아니요 그 물건이 달라진 것이 아닌 줄 안다면 어찌 다르다 하지 않겠는가?
이렇듯 이 두 가지에서 모두 볼 수 없으므로 이렇듯 지어간다[行往]고 함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실제에는 지어감이 없건만 유위의 법체는 잠깐잠깐 사이에 스스로 무너지거든 그 과정에서 원인이 생기나니, 일어난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손ㆍ발 따위를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 지어가는 뜻[行意]이라 할 수 있다.
일출제자(日出弟子)는 이렇게 대론(對論)한다.
이는 어느 입(入)에 속하는가?
색입(色入)에 섭속된다.
그들(의업)은 무슨 까닭에 푸른 빛 따위처럼 분명하게 눈에 띄지 않는가?
만일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인다면 뜻[意:意表]이라 하겠지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니 어찌 뜻이라 하겠는가?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어찌하여 몸속에서 딴 곳으로 움직여 지어갈 때, 마음의 바람[心風界]이 생기는가? 이 바람의 요동이 이른바 다른 방위의 인연으로 생긴 것이라면 어찌하여 풀이나 잎사귀 따위가 바람을 따라 기우는가?
지어감[行]이란 것도 이와 같아서 다른 방위와 장소에서 생긴 것인데 지어감의 힘[行力]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분별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日出論者)이 이렇듯 몸 쪽[身方]에서 원인이 생겼다 하나니, 마음에서 바람(風界)이 나는 것, 이런 것들을 뜻이라 한다. 어찌 뜻 아닌 것을 뜻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석가자(釋迦子:種子)의 법에 촉입(觸入)은 선(善)도 불선(不善)도 모두 아니지만 저들은 이러한 마음이 다론 쪽의 몸에서 생긴다 하는데 이 생긴 것을 뜻이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뜻이란 오직 겉모습일 뿐이요, 실다운 물건이 없고, 몸은 여러 부분인지라 뜻 또한 뜻이 아니니, 마치 다른 사람이 맛 따위를 보는 것 같으리라 하거니와 석가자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맛 따위는 선도 아니며 불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 색(色)을 내기 때문에 그를 뜻이라 말할 수 있다.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체인 바람의 종자에서 생긴다 하거니와 석가자의 법은 그렇지 않으니 색입(色入)은 선도 아니며 불선도 아니기 때문이다.
색이 저쪽 방위에서 생긴다면 뜻[意]이란 것을 얻을 수 없으리라 하거니와 만일 그 물건이 하늘에 공양하고 얻어진다거나 또는 그 물건이 하늘이 없으면 줄 수 없으므로 얻을 수 없다 한다면 만들어내는 사람이나 물건이 다름이 없으니 무엇이 다름을 이루리오. 그런 이치는 얻을 수 없다.
이렇듯이 색 따위는 눈으로 볼 수는 있거니와 물건을 만들어내는 이치는 그렇지 않다.
이미 볼 수 없으면 어떻게 뜻이라 말하리오. 이는 전에 이미 말하기를 생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고 설하였듯이 색도 이미 그렇게 설해 마쳤다.
오직 지음 없음[無作]이 몸의 업이다. 무엇을 지음 없음이라 하는가? 법입(法入)에 섭속되는 것이니 두려움 따위의 색이다.
무엇이 지음 없음이기에 지음 없음이라 하는가? 만일 욕계의 일이 마음과 합해 움직인다면 앓[知]이요 색계와 합한다면 마음과는 다르려니와 무심(無心)이 될 때에는 두려움과 두려움 아닌 것을 마음과 함께 모두를 잃으리라. 만일 느낄 때에 세력이 있으면 뒤까지 항상 잃지 않는다.
계경(戒經)에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 잠자코 있었는데도 어찌하여 망어를 하느냐고 하셨다.
또 무기(無記)로는 업이 이루어지지 않지만 지음 없음인 무작(無作)은 두 종류, 즉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 그들은 찰나 사이에 지음 없음과 합해서 움직이는 것이 마치 신업과 구업의 색을 분별하는 것과 같으나 만일 선과 불선이 다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몸을 버리면 미래 세상의 사랑스럽고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를 끊어 없애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과거의 업이 있거늘 어찌하여 이루어지지 않는가?”라고 하거니와 만일 과거의 업이 미래 세상에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못한 두 가지 과보를 이룬다면 이는 종기[癰] 위에 종기를 보태는 격이요, 과거의 업에 다시 과거가 있다고 하면 이는 앞에서 있다가 뒤에는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백 겁을 지난다 하여도
업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
인연이 화합됨을 만나게 되면
그 때에 과보가 변하여 익어진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능히 과보를 주는 것이 과보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으로 처음의 두 구절을 풀이해 마쳤으니 뉘라서 영구히 과보를 얻는 일을 믿지 않겠는가?
과보를 얻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상속하는 것이 벼의 종자와 같고, 머무르는 것이 제 모습[自相]이러니, 이렇게 알아야 한다.
만일 머무르는 제 모습이 능히 결과를 준다면 잃어 파괴치 않는 것이다. 항상 결과를 내어 주느라 그의 제 모습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잃어 파괴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작용[作]하고는 다시 작용치 않는다는 뜻이니, 어찌하여 작용치 않는가? 과보를 거듭 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더 주지 않는가?
주는 일이 끝났기 때문이니 준 뒤에 다시 거듭 줄 수 없는 도리가 마치 물건이 생긴 뒤에 다시 생길 수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들 같은 부류의 과보[同類果]야 어찌하여 다시 주지 않는가? 어찌하여 과보를 다 준 뒤에는 생하는 법의 인연에 이러한 힘이 없는가? 누(漏)가 다한 사람이 마지막 생각에 누가 다하여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나중에 적멸[滅]이라 하겠는가? 이러한 힘으로 능히 과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만일 종자의 인이 결과에 대하여 힘이 있다면 인의 힘[因力]이 능히 과보를 준다 할 수 있으리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과거가 있다면 미래도 있다고 한다면, 무슨 까닭에 미래는 과보를 주지 않는가? 모든 시각[時]에 있다면 있다는 것이 어떤 물건이며 어느 때에 없어지는가?
그들이 다시 말하기를 화합할 수 있다면 과가 익어진다 하거니와 이는 옳지 못하다.
만일 어떤 사람의 힘이며, 어느 시각의 힘이며, 어떤 물건의 힘인가 하면 이 사람의 과보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나니, 과거의 업을 가지고 있다가 미래 세상에 과보를 얻는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선과 불선의 신업ㆍ구업 따위가 가만히 [陰] 상속하는 과정에서 마음 법[心法:意業]의 훈습을 여읜 것을 혹은 집(集)이라 하고 흑은 잃지 않음[不失]이라 하여 뒷세상에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만 과보를 얻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의업이 마음의 생멸과는 다르게 움직이거나 만일 마음을 훈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 과보를 얻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읽고 외우기를 오래하면 그가 보고 들은 사물들을 기억하는데 이렇게 훈습하는 것을 어떤 법으로 훈습하는가?
만일 어떤 사물을 기억해 낼 때에 그는 외웠던 것 따위를 분명히 보거니와 그 뒤로부터는 어디에서 기억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멸진삼매(滅盡三昧)에 들어 첫 마음이 이미 멸했거니 뒤에는 어디에서 마음이 생기겠는가?
자광즙(紫鑛汁)을 마등릉가수(摩登隆伽樹) 꽃에 바르면 그 두 가지가 모두 사라지는데 이런 과정에서 무엇이 그 과일을 물들였기에 나중에 적양(赤瓤:과일의 속이 볶은 것)이 생기는가?
법(法)에서의 문(聞)ㆍ사(思)도 이와 같아서 마음이 상속하는 힘과 훈습하는 힘이 뒤섞이면서[轉變] 후세에 과보를 얻게 하나니, 이렇게 알라.
마치 자광즙으로 저 마등릉가수 꽃에 물들이면 과일 속에 적양이 생기듯이 신업이 이와 같이 상속하면서 마음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렇듯 그 마음은 선ㆍ불선과 상대하지 못한다.
만일 이 사람이 선ㆍ불선의 업을 지으면 그 사람이 다시 애(愛)ㆍ불애(不愛)의 과보로 힘을 주어 상응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업이 멸해도 마음이 상속하기 때문에 후세에 과보를 얻는다면 어찌하여 무심(無心)인 멸진삼매를 얻거나 무상심(無想心)이 되면 상속심(相續心)이 멸하는가 하거니와 전세의 업과 과보가 그 몸을 의지하여 뒤에 생겨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이 마음에 훈습하여 상속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면 저 멸진삼매는 어디에서 상속하며, 삼마발제(三摩跋提)의 초심인연(初心因緣)은 어찌하여 오래되면 사라지며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되는가 하거니와 내가 이미 말하기를 과거에서 얻는 과보가 어느 곳이기에 이러한 마음의 과정에서 생기는가 하였다.
다시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근(色根)이 종자니, 그 종자 위에서 심왕[心]과 심소[心數]의 종자를 얻되 두 곳에 의지하나니, 말하자면 마음[心身]의 속과 색신[色根]의 속이다. 이런 순서로 마음이 차례대로 법을 만연하여 의식(意識)을 낸다.”
그렇다면 중간에는 마음이 없거니 그가 어떻게 생기겠는가? 또 종자가 있어야 의식의 모습[意相]이라 할 수 있나니, 응당 이렇게 알라. 인(因)이 곧 과(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기갈(飢渴)과 촉감[觸]의 경우와 같거늘 심왕과 심소에 어찌 모두 두 가지 종자가 있겠는가? 하나의 종자에 두 싹이 없듯이 이러한 한 인연 속에 여러 가지가 생기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허물도 이와 같으니 무심삼매와 무상정(無想定)에는 마음이 끊어졌다 하였거늘 어찌하여 업과(業果)를 뒷날에 받느냐고 한다면 동일한 허물[一箱過]이 된다. 어떤 종류의 동일한 허물이며, 어떤 사람의 경지인가? 무심삼매를 주장하는 사람이다.
다시 어떤 사람은 유심삼매(有心三昧)를 들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비바사론(毘婆沙論)』에 5백 아라한이 모인 가운데 바수밀다(婆修蜜多)대덕이 말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멸정(滅定)의 무심(無心)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이 허물을 얻으리니, 나의 멸삼매(滅三昧)는 유심(有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수다라(修多羅)를 인용하여 증언하되 몸이 지어감[身行]이 사라지면 모든 감관[根]은 움직이지 않으나 식(識)은 몸을 여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어떤 식을 받아들이는가?
어떤 이는 의식(意識)이라 하고서 여래의 말씀을 인용하되 “의의 인[意因]이 법(法)을 연함으로써 의식이 생기는데,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라 하고, 촉은 수(受)ㆍ상(想)ㆍ사(思) 따위와 함께 생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식이 있으면서도 세 가지 일에 화합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혹은 화합하되 쪽이 아닌 것도 있고, 혹은 촉은 되나 수(受)ㆍ상(想)도 아닌 것도 있는데, 이 경우 상(想)과 수(受)가 멸한다면 멸진(滅盡)이라 할 수 있다.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수다라에서 수(受)는 모두가 애(愛)의 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는가?
모든 수가 모두 애의 연이 되는 것이 아니요, 촉(觸) 또한 그러하여서 모든 촉이 모두가 애의 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래께서는 다시 수다라에서 달리 그 이치를 말씀하시기를 무명(無明)이 촉(觸)을 내고, 촉이 수(受)를 내고, 수는 애(愛)의 인연이 된다 하여 어디에서도 촉이 수와 상을 여의었다고 설한 곳은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의 허물이 이루어져서 막을 길이 없다.
세 가지 일이 구족하여야 화합이라 할 수 있나니, 그 세 가지 일이 없으면 상과 수가 생기지 않는다.
만일 이렇지 않다면 삼마지 속에도 그런 촉이 없거니 어디에 수와 상이 있겠는가 한다.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오직 하나의 의식(意識)이라 하는데 어떤 것이 식인가, 선인가, 물듦[染]인가, 더럽히는 무기[穢汚無記]인가? 하는데 이 이치를 이제 설하리라.
만일 선이라면 무탐(無貪) 따위의 선근과 서로 어울려야 하는데 선과 무탐 따위가 어찌 쌓임[觸]이 없다 하는가?
만일 선이 때와 인연의 힘으로 선해진 것이라면 선함 따위의 마음과 서로 여의지 않았다는 것인데 세 가지 마음[善ㆍ惡ㆍ無記]은 선함 따위를 내는 힘이므로 마음을 돌이킬 원인이 없다.
만일 물듦이라면 어찌하여 번뇌와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만일 물든 번뇌라면 어찌 닿음이 없다 하리요.
또 여래께서 십난수다라(十難修多羅)에서 말씀하시기를, “수음(受陰)ㆍ상음(想陰)ㆍ행음(行陰) 등이 있다면 그 음(陰)들은 모두가 닿임의 인연이 된다. 무상삼매에도 물듦이 없거늘 하물며 멸삼매(滅三昧)이겠는가?” 하였다.
만일 더럽히지 않는 무기[不穢汚無記]라면 그는 또 어떤 것인가? 보생(報生:異熟의 無記)인가, 위의(威儀:動作을 할 때의 無記)인가, 공교(工巧:工作을 할 때의 無記)인가, 변화(變化:神通變化를 보일 때의 습관)인가?
이제 그들에게 묻는다. 만일 보생이라면 어찌하여 유정삼마제(有頂三摩提)의 마음은 아래로 팔지(八地)까지는 중간에 끊겼거늘 욕계의 보식(報識:業識)이 마음과 상속하는가?
이렇듯 요동치 않았던 마음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상속하는가?
마하구치라수다라(摩訶拘絺羅修多羅)에서 여래께 묻기를, “멸삼매에서 일어나는 데는 몇 가지 촉에 닿습니까?” 하니, 여래께서 대답하시기를, “혜명구치라(慧命拘絺羅)야, 세 가지 촉에 닿아야 하나니, 이른바 무동(無動)ㆍ무상(無相)ㆍ무소유(無所有)이다” 하셨다.
앞의 마음이 시기를 맞추려는 힘 때문에 멸삼매에 들고, 앞의 마음이 꼭 시기를 맞추므로 시기를 지나지 않고 일어나는데 이 이치는 무엇인가?
어찌하여 모두가 멸진삼매를 반연하는가? 유정(有頂)의 마음이 마치더라도 앞의 욕계의 업이 마음을 훈습하여 과보를 얻거늘 무슨 까닭에 앞의 마음이 과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는가?
무슨 까닭인가? 만일 앞의 과보의 색(色)이 거기에 끊어져서 상속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뒤의 마음이 다시 상속하는가?
만일 위의(威儀) 따위가 거기에서 닿음이 없다면 어떻게 마음으로 위의 따위를 반연하겠는가?
그 유위의 선[有爲善]인 구차제정(九次第定)과 팔해탈(八解脫)과는 서로 응하지 않아야 할 것이요, 또 물듦 없는 마음과 무기의 마음[無記心]은 상속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유정삼매(有頂三昧)는 멸진정에 의지하여 기억해내고 반연함으로써 상(想)과 수(受)가 멸하는 경지에 드는데 만일 멸진정예 든다면 심식(心識)이 있은들 무엇을 반연할 것이며, 만일 멸진정을 반연한다면 어찌 선(善)이 아닌가? 만일 선이라면 탐욕과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서로 어울린다면 그것이 어찌 닿임[觸]의 인연이 아니며, 만일 다른 반연으로 멸진정삼매에 든다면 어찌하여 중간에 어지러운 마음과 서로 어울리는가?
스스로의 마음으로 분별하되 이것이 무기라 한다면 이렇듯 두 가지가 모두 서로 어울리지 못하리라. 이런 일은 모두가 아함(阿含)의 진실한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논사(論師)가 펄펄 뛰면서 말하되 멸진정의 삼매에도 역시 의식이 있음을 이렇게 분별할 수 있다 하거니와 어떤 것이 그 마음 있는 삼매[有心三昧]인가? 수다라법사(修多羅法師:經部論師)가 분명히 말한 것이 있다.
수다라법사가 어떻게 분명히 말했는가? 저 보식(報識:異熟果의 滅)의 모든 종자가 은밀히 업행(業行)을 속박하여 끊임이 없으므로 곳곳에서 보식을 내고, 그 무너지는 모습이 다시 계속하여 지어가며,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의 이런 말대로라면 분명 마음이 있어 육식신(六識身)과 다르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육식신이 움직이지 않는다. 처음으로 멸진정의 마음에 들어가서 힘이 늘어나면 그 때의 종자는 모두가 닫혀 숨기 때문에 무심(無心)이라 한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모든 종자를 거두어 모으는 마음[聚集諸種子心]이요, 둘은 갖가지 반연에 무너지는 마음[種種攀緣壞心]인데 이 중 둘째 마음을 여의었으므로 무심이라 한다. 마치 다리가 하나뿐인 평상을 두고 또 하나의 다리가 없으므로 다리 없는 경상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 종자가 닫혔을 때 보식의 생각[念]이 움직이는 데는 하ㆍ중ㆍ상의 차등이 있는 것이 마치 물이 끓는 것이나 화살이 날아가는 형세와 같아서 여기에서 저기에 이른다.
그 종자인 식(識)은 시기가 오면 다시 생기는데 어떤 인연을 따라 뒷날 다른 모습으로 갖가지 종자를 이루는가? 보식(報識)은 갈무리[藏]인지라 저마다의 다른 식이 법과 상대하여 함께 선과 불선의 훈습을 내되 마치 차례차례 종자의 힘으로 훈습한 것과 같이 된다.
만일 상속한다면 그 세력과 같이 미래의 몸을 훈습하여 그들에 맞는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한 과보를 얻게 하나니, 이것은 식의 인연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게송을 설한다.

이 심식(心識)의 종지는
끝없이 상속해서 지어가나니
스스로의 마음 속 인연으로
갖가지 종류의 힘이 생긴다.

그 차례는 잃어지지 않아서
때가 이르면 과를 얻는 것,
마치 마등륭가 나무에 자광즙을 바르면
화양(花瓤)이 생기는 것 같다.

이런 이치를 여래께서는 『심밀해탈대승경(深密解脫大乘經)』에서 이런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아타나(阿陀那)의 종자가
깊고 가늘게 고은 비같이 지어 감을
어리석은 자에겐 말하지 않노니
나라고 분별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무엇을 밝히는가? 거기에는 깊고 은밀하게 몸을 얽어매는 기능이 있으므로 아타나식이라 하고, 일체 법의 종자가 의지하는 곳이므로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하고, 전생의 업에 의한 과보이기 때문에 보식(報識)이라 한다.
만일 식이 없으면 몸이 어찌 느끼며[覺], 몸이 다하기 전에는 온몸에 두루하여 여의지 않는 것으로 이 외에 다른 식이 없다.
만일 이 식이 무언가를 대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 번뇌의 근본을 대치(對治)하는가? 번뇌와 근본은 합해진 것인데 어떻게 대치하겠는가? 그 이유는 두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든 행과 선한 행과 무루의 마음으로 짓는 행이 상속하는 것이라면 무색계에 태어날 때엔 어떤 행이 어떤 물건에 의지했다가 과보로 나타내는가?
만일 과보가 없어도 행할 수 있다면 그것(과보)과는 서로 응하지 못하리라.
유정천에서 닦아 익히어 누가 다한[漏盡] 아나함(阿那含)에게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 무루(無漏)가 나타났을 때 무슨 아소(我所)가 있어 유정천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있는가?
여러 구분[衆同分]이 화합된 것을 목숨[命根]이라 할 뿐, 딴 물건이 없다. 그 법에는 오직 보음(報陰)의 비슷해지는 세력[相似勢力]이 있어 움직이고 변할 뿐, 다른 물건이 없다.
비슷한 세력이란 마치 벼와 줄기[稻稈]들의 비슷한 세력과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렇게 알라.
다시 딴 의식이 있으니 식이 있음을 말한 것과 같다. 그들은 무엇을 반연하는가? 결정되지 않은 반연[不決定緣]이다.
어찌하여 이 식의 반연을 결정되지 않은 연이라 하면서 또 말하기를 식과 다른 것[異識]이 마치 멸진정[滅三昧]과 같다 하는가?
저 동색대덕(銅色大德)의 제자들은 이를 유분식(有分識)이라 하고, 다시 어떤 사람은 근본식(根本識)이라 하는데 어느 취음[取陰:蘊]에 속하는가? 이 이치는 식취음(識取陰:識蘊)에 속한다.
이를 수다라의 문자장구(文字章句)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했으며, 어느 식의 취음이라 했는가? 말하자면 육식신(六識身)이다. 이는 경에서 “행(行)이 식(識)에 반연이 되어 줄 때 그 식은 어떤 식인가? 육식신이다”라고 설한 경우와 같기 때문이니, 이 법설을 기억하건대 이 저 행음(行陰)에 있어서 “무엇이 행음인가? 육사신(六思身)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행음이라 할 때 육사신 이외에 다른 법은 섭속되지 않거늘 다시 무엇을 기억하는가?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 등에서 여래께서 모두 설하기를 “어리석은 범부에게는 내가 말해 주지 않노니 나라고 분별할까 두렵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다시 다음에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분별하는가? 저 유위의 법인 행(行:변천)이 곳곳에서 은은히 흘러 도는 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할까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말할 때 의지(依止)와 반연(攀緣)을 갖가지로 분별해 아는 쪽으로는 증상(增上)의 수승한 마음일 것이요, 번뇌를 대치할 때에 염(染)ㆍ정(淨)에 상응(相應)하는 쪽으로는 그를 종자식(種子識)이라 한다.
만일 과식(果識)으로써 이 식을 견주어 설했을 때 인식(因識)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면 그는 전도된 말이다. 이런 뜻에서 석기에 신식(身識:有分識)이 있다. 다시 다른 곳에서 신식을 차례대로 설한 것이 있는데 이 이치와 상응한다.
모든 수다라에 그런 말씀이 보이는 것은 아니나 뜻으로 보아 상응한다. 이렇듯 모든 수다라의 말씀은 아니나 모든 수다라에서 흔하지 알았다 하여 아뢰야식이 없다고 불쑥 말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두 가지의 심식(心識)이 함께 흐르나 한 곳에 모두 있으니, 이른바 보식(報識)과 이식(異識)이다.
만일 그렇다면 어떤 허물이 생기는가? 만일 두 가지 식신(識神)이 상속한다면 이는 두 생명[二衆生]이 있어야 하니 마치 몸 안의 식과 같은 것이다.
이렇지는 않으리니 저 종자와 과(果)가 서로 어울려 움직여서 보식이 흐르기 때문에 능히 이식(異識)을 훈습한다.
신식에는 이런 법이 아니니, 만일 이렇다면 이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또 종자와 종자에서 생긴 종자가 다른 것과 다르게 무너진다고 보는 일이 있다. 마치 사로가(奢盧迦:新譯에는 靑色) 우발라(優鉢羅:신역에는 蓮華)의 뿌리와 뿌리에서 생긴 것이 보일 듯도 하고 보이지 않는 듯도 한데, 진실로는 그렇지 않은가? 만일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허물이 없다.
그렇다면 실제로 아리야식과 육식(六識)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육식은 나에 의지하지 않는다 하는가? 어떤 식이 되는가?
만일 아(我)가 아리야식처럼 상속하는 인연으로 움직인다면[轉] 저것[識]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만일 저것과 동일하다면 끝내 움직이지[動] 않는 터인데, 어찌하여 식 따위가 훈습을 이루는 것이 마치 자광즙(紫礦汁)으로 저 마등륭가(摩登隆伽) 나무의 꽃을 훈습하는 것과 같은가?
만일 훈습하는 기능이 없다면 수승한 쪽으로 변하는 법칙이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먼저 알았던 일, 즉 욕심을 익힌 것 따위가 오랜 시간 뒤에 다시 기억나거나 욕심 따위가 자라나게 하는가?
나 속에는 마음이 없다면 어디에서 뒷날의 마음이 생기는가?
만일 나가 없다면 마음에 어떤 힘이 있기에 거기에 나가 의지해서 분별하는가?
만일 나가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차례대로 생길 수 있으며 만일 공동의 인연으로 저 다른 것들이 힘을 낸다면 어떻게 그 실상을 앞 수 있는가?
만일 그 힘으로 생기고 머무는 생각이 움직인다면 그는 과연 어떤 법인가? 만일 그렇다면 서로 비슷하지 않은 물건이 함께 의지한다는 것이니, 일체 법은 모두가 나가 없다고 한 아함(阿含)의 이치에 어긋난다.
이렇듯 이치에 맞지 않게 자의대로 분별과 생각으로 나라고 계교한다. 그러므로 생각[思]으로 아리야식을 훈습하기를 상속함으로써 후생 몸으로 과보를 얻는다 하면 이치가 설립되나 명상 있는 몸이나 입의 업 같은 것을 말하는 것과 같지는 않다.
또 이러한 몸과 입의 업이 수다라에서 설한 삼업(三業)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 이치가 무엇인가? 이 이치는 여래께서 설하신 바와 어긋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이는 허물이 없다.
이렇게 말하면 어찌하여 허물이 없는가? 이 도리를 이제 말하리라. 무슨 까닭에 세 가지 업을 설하는가? 무엇이 몸이며, 무엇이 업인가? 무슨 까닭에 몸이라 하며 무슨 까닭에 몸의 업이라 하는가? 무엇이 몸의 업인가 하듯이 입의 업도 그렇게 설하리라.
무슨 까닭에 몸 따위의 업이라 하고, 눈의 업 [眼業]이라 하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이런 이치를 설하는가?
십선업도(十善業道)를 삼업(三業)에 섭속시켜 보이기 위한 것이니 많이 말하면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 때문이다.
비리지자(毘離支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가지 계를 배울 때 세 가지 업을 말해 주거든 몸으로 지을 뿐이요, 입도 아니고 뜻도 아니다.”
오직 하나만을 분별하고는 다시 다른 사람에게 걸해 준다 한다.
“몸의 업의 모습에서 몸은 다시 근대(根大)에 섭속되니, 대(大)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몸의 업이라 하면 이는 생각이 집결했다는 뜻이요, 신대(身大)라 함은 대(大)로 이루어진 미진의 무더기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한 것을 몸이라 하나니, 부정한 물건이 화합해서 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하늘 사람의 몸은 몸이라 하지 않는다.”
뜻으로 짓는 지어감[行:행위)을 뜻의 업[意業]이라 하고, 몸으로 짓는 업을 몸의 업[身業]이라 한다.
생각[思]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생각함[思量]과 결정함[決定]과 나아감[進趣]이다.
몸으로써 몸을 움직여 상속하는 동안에 생긴 원인[因]인 바람[風界]에 의해 불리어진 것을 몸의 업이라 하는데, 그 중간 구절은 생략했다. 마치 사라유(沙羅油)라 하는 것 같고 혹은 바람에 의해 날리는 미세한 먼지를 줄여서 바람 먼지[風塵]라고 부르는 경우와 같으니, 신업을 말할 때 삼업도(業道), 즉 살생ㆍ투도ㆍ사행(邪行)은 생략되는 것과 같다.
그들을 어찌하여 생각[思]이라 하는가? 그 몸붙이[身數] 섭속되기 때문이니, 그 몸의 업이 움직여 살생ㆍ투도ㆍ사행을 할 때, 그 몸의 업이 움직임에 따라 몸이 상속하여 일으키는데 그것을 일러 짓는다 할 수 있다. 마치 도적이 마을과 섶나무[薪草]를 태우는 일이나 밥을 익히는 일과 같다.
생각[思]을 어찌하여 업의 길[業道]이라고도 하는가? 악도(惡道)를 행하는 업이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 혹은 몸을 움직여 굴리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한다.
또 세 가지로 생각하는 업이기 때문에 업의 길이라 하나, 그 생각이 제자리에 머무르면 살생과 투도와 사행을 한다.
또 세제(世諦)에 의해 몸의 업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고 말하며, 또 그 문(門:身)에는 그 생각이 있으므로 세간을 왕복하면서 서로 응하는 도리가 있다고 한다.
만일 생각이 이렇듯이 건과 불선의 업이라면 수다라에는 어찌하여 몸으로 짓는 세 가지라 하는가? 생각의 업[思業]이 모이면 불선한 일을 지어 고통의 씨를 내고, 괴로운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 문[身]이 그 반연들을 지탱[住持]해 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뜻[意]이 있으시다
저 생각이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에 사의업(思意業)이라 하니, 오직 뜻과 상응할 뿐 몸과 입에는 움직이지 못한다. 무슨 까닭에 여래께서는 사사업(思思業)을 말씀하셨는가? 앞에 말하기를 생각에 세 가지가 있다 했는데 그 중 두 가지는 생각[思]이요, 셋째는 나아감[進趣]이다.
그 생각 그대로가 업이요, 말[語言]은 곧 메아리인데 메아리는 이해할 수 잇겠거니와 그 업이 생각으로 전진해 나아가는 이름과 모양으로 말하기 때문에 말[言語]이라 하고, 기억해 생각해내는 이치로 말하기 때문에 말이라 한다.
업은 앞에 말한 바와 같으니, 말[言語]로써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입의 업 [口業]이라 하되, 중간의 말을 제외한다.
식(識)의 뜻[意]을 뜻[意:意業]이라 하는데 뜻(의업)이 곳곳에서 생길 때, 의업의 경계 또한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앞에 말한 바와 같다.
만일 몸의 업에 생각하는 자[思者]가 꼭 있어야 하나니, 그것은 심(心)이나 무심(無心)과는 다르다. 그럴 때에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이 있겠는가? 생각하고 훈습하는 기능이 무너지지 않으므로 두려움과 두렵지 않음이 있게 되니, 사의(思議:생각과 말)의 기능이 가장 수승하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두렵지 않은 뜻이 일어나서 분별한다.
그 뜻에 훈습된 것을 어떻게 하여야 파괴하겠는가? 만일 스스로 증득해서 막힘[遮]과 막하지 않음[不遮]을 알면 생각[思]이 다시는 생겨날 원인이 없어진다.
그 중에서 무엇이 무너지는가? 두려움을 버리거나 두렵지 않음을 버릴 때에는 생각이 그 원인이요, 뜻이 일어나 분별한다.
또 버림으로써 인을 삼는 법이 있으니, 눈[眼業]ㆍ말[語業] 따위의 업이다.
각업(覺業)을 설했고 조작업(造作業)은 설하지 않았다. 어떤 것이 각업인가? 말하자면 뜻 지음[作意:노력]으로 행하는 일이요, 어떤 것이 조작업인가? 눈 따위가 어디에서나 차례대로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세 가지 업은
법과 이치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셨는데
내가 해설한 업으로 복을 이루어서
중생들과 함께 성불하게 하여지이다.
017_0416_a_01L業成就論翻譯之記大國將寧必感靈瑞以爲嘉兆鄴隍方盛聖降神寶以爲祥徵天親菩薩造業成就論出於今世以示太平此乃大魏都鄴安固之兆也法行有時寄必得人興和三年歲次大梁七月辛未朔二十五日驃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御史中尉渤海高仲密衆聖加持法力資發誠心敬請三藏法師烏萇國人毘目智仙共天竺國婆羅門人瞿曇流支釋曇等在鄴城內金華寺譯四千八百七十二字業成就論 卍天親菩薩造 元魏天竺三藏毘目智仙譯業有三種所謂身業口業意業此是修多羅有人說言身所作業是名身業口言說業是名口業此二皆有作無作意相應業是名意業此業是思彼今思量意是何法所有身意皆有形相彼緣身生是何形相是身形若身形相何用說名身所作業身摠分爲身攝故緣身大生名身作別中之語於摠中說譬如人言於城中住於林中住彼攀緣生何故言彼遮脣等動及形相故彼心非緣脣等動生非緣形生緣語生故不取前願彼心不緣前願而生異報因緣是故心生何故言意起業心轉他人知故何者形相所謂長等何者長等謂見長等是何入攝色入所攝長等爲是微塵色耶爲如微塵共聚集耶爲是一物遍色等耶長等若是微塵色者則彼長等可分分取如色分取若如微塵共聚集者彼色微塵與彼聚集爲有何異彼微塵集無異長若是一物遍色等者則彼一物遍在長等若一物遍於分分中皆應可以一切處皆具有故若非一者分分取阿含十入微塵和集佛法則又迦那陁異法則成微塵取集面見長則生長知局見短知正見方周見圓知中出而見則生高知見下知齊見正知種種面見則參差見氍毹錦如如而見則生彼彼形相等知彼異異物不得一見如色差別若復意謂一切方處一切形相是義不然如是形相無有異物色亦如是於方處住見長短等如樹鳥蟻義成無過若如是者云何闇遠而不見色見集形相云何皆見未見形相如樹行等見彼行聚不見形相彼無異物於聚集中若闇若遠不見二種雖見不了爲是何物彼見何物雖見彼色而不明了應如是知此意形相義成就復有人言心緣彼生往故名意攀緣彼生爲是何義遮脣等動何故名往謂向彼方是何入攝謂色入攝云何知此往彼方去以不異見如彼火雪苦酒日等變熟因緣入已卽出未見變異然非不異如然可然傭草木等不見異焰焰非不異初入之時若不變者後亦不變以彼因緣不別異故若薪草等麤細不均焰量明熱皆異不同以不同見向彼方義則不相應若無滅因何故不得心心數法聲燈等滅有何因緣餘亦如是彼滅因緣自因緣壞餘法因緣何故不爾又如彼法無有因緣餘亦如是若初入火草木等色如本不異後亦如是不應有異云何燈明鈴等音聲風手初觸卽滅卽止非此能滅非此能止若如火等木等燒等色等滅等初入出時何故不異以外因緣不別異故熟物不應有微中上初變熟物何因得變因緣唯一能生能滅此非道理非以一因能成二法如是中閒更有滅因如前取捨異相續轉應如是知若滅有因無法無因如心等生滅法不成以一切法皆有因故滅則無因如彼火雪苦酒日等熟變因緣若滅有因應滅如色如是無法有緣滅生亦無因見彼異法謂是此法生實有因前心後心如心中閒熟變熟變如乳爲酪蒲萄汁酒酒爲苦酒如是無有少法住相住物無行無行則住若如是見彼見何物見此處物豈非見彼處方新彼處方新而見如草然影非彼方影於此處見如日所如是日者近遠迴轉如影增減轉而見日在方處映障不見若復有人如是難言此何處物是彼前物轉向此方答彼人曰此何處物向義今說如是住物則無有行若不行物則是住等外因緣壞後則異見念念異知若不異知彼物不別知非彼物何不言異如是二種俱不可見是行往義則不成實無行往有爲法體念念自壞方中生因起心爲因手足等動得言行意日出弟子作如是說是何入攝色入所攝彼何以故眼所不見如靑等色若他人見可得言意他人不見云何言意云何知有云何身中異處動行心風界生此風界動所謂異方因緣而生云何草葉隨風界傾行亦如是異方處生行力不成何用分別彼如是身方生因者心生風界如是名意云何非意而得言意釋迦子法觸入非善亦非不善彼如是心異方身生此生名意若如是者意唯相貌無有實物身則多分意亦非意味等他人釋迦子法則不如是味等非善亦非不善心生色故彼得言意非彼心生自風種生釋迦子法則不如是色入非善亦非不善色彼方生意不可得若有彼物供養天得若彼物無天不能與則不可得生物無異誰能成異彼不可得如是色等如眼能見生則不爾旣不可見云何言意是先已說如生不爾色已說唯有無作是身之業何名無作法入所攝怖畏等色云何無作得言無作若是欲界與心合轉則知色界是則異心及無心時怖與不怖共心俱失若受時勢力後常不失戒經中說丘默然云何妄語又無記業則不可成無作二種謂善不善彼剎那閒作合轉如彼分別身口業色若善善二俱不成何以故捨身則斷於未來世愛不愛果則不可得復有人言過去業有何故不成若過去業於未來世得愛不愛二種果報此則癰上復生癤子過去業有過去者名前有後無若如來說雖復經百劫 而業常不失 得因緣和合爾時果報熟此偈云何能與果報是不失義如是已釋初半偈竟何人不信久遠得果得果何義若相續轉如稻種子若住自相應如是知若住自相能與果者則不失壞應常與果彼無自相故失壞又不如是作已不作云何不作果不重與何故不與以與竟故不可與已復更重與如物生已不復更生彼同類果何不更與云何果報皆悉與竟生法因緣無如是力盡漏之人後念盡漏不與果報云何後時而得言滅非如是力能成果報若種子因於果有力得言因力能與果報若何等人有過去者則有未來何故未來不與果報一切時有有何等物於何時無彼如是說若得和合果報則熟此則不然若何人力於何時力是何物力此人此果究竟不成有過去業於未來世得果報者如是不成復有人言彼善不善身口等業陰相續中離心法熏若說名集若名不失後世則得愛不愛果若意業異心生滅轉若不熏心云何後世而得果報若人讀誦久時憶念彼見等物如是習者以何法熏若念何物彼見誦等後時何處憶念心生滅盡三昧初心旣滅後時何處有心生起以紫鑛汁塗彼摩登隆伽樹華彼二共滅如是中閒何物染菓後赤瓤生法中聞思亦復如是心相續力熏力轉變後世得果應如是知如紫鑛汁染彼摩登隆伽樹華果中赤瓤身業如是相續熏心故故不得如是彼心與善不善而共相對若其此人作善不善彼人如是愛不愛果與力相應非異相應若復業滅心相續故後世得果云何無心滅盡三昧及無想心相續心斷前業果報卽彼身上於後時生復有人言彼熏於心相續而得彼滅三昧何處相續三摩跋提初心因緣云何久滅云何因緣我先已說過去得果何處如是心中閒生復有人言色根種子彼種上得心心數種二處依止謂心身中色根身中如是次第如心緣法而生意識中閒無心彼云何生復有種子得言意相應如是知說因爲果如飢渴觸心心數法云何皆有二種種子一種子中無二種芽不見如是一因緣中不見多生彼過亦爾無心三昧無想心斷云何業果於後時得此一箱過是何物箱隨何等人無心三昧復有人言有心三昧若毘婆沙五百羅漢和合衆中婆修蜜多大德說言若何等人滅定無心彼得此過我滅三昧是有心故引修多羅以爲證言身行則滅諸根不轉識不離身又復彼人信受何識有人意識如來說意因緣法而生意識種和合故名爲觸觸共受想思等俱云何有意識非三事和合或有和而非是觸或復有觸而非受想受滅得言滅盡云何如來修多羅受皆緣愛非一切受皆因緣愛觸亦應爾非一切觸皆因緣受如來亦於修多羅中別說彼義無明生觸生於受受因緣愛無處說觸離於受如是不說彼過則成而不可遮三事具足得言和合無彼三事不生若不如是三摩提中尚無彼觸何處受想復有人言唯一意識彼何者識爲善爲染穢污無記此義今說若是善者則無貪等善根相應善無貪等云何無觸若善卽時因緣勢力若是善者與善等心則不相離三種生善等勢力心迴無因若是染者云何不與煩惱相應若染煩惱云何無觸又復如來於彼十難修多羅說若有受陰想陰行陰彼一切陰皆觸因緣無想三昧猶尚無染況滅三昧如其彼是不穢污無記彼復云何是報生爲是威儀爲是工巧爲是變今當問彼若是報生云何有頂三摩提心下至八地中閒懸絕欲界報與心相續如是復有不動心起何相續如摩訶拘絺羅修多羅中如來言起滅三昧幾觸所觸如來答慧命拘絺羅三觸所觸所謂無動無相無所有前要期力入滅三昧心要期不過時起此義云何云何皆緣滅盡三昧有頂心終前欲界業熏心得報何故非是前心得報何以故若前報色於彼斷絕不相續者云何後心而復相續若威儀等彼處無觸云何以心緣威儀等彼有爲善九次第定及八解脫則不相應彼無染心及無記心則不相續有頂三昧依止滅定憶念攀緣入想受滅若入滅定有心識者何所攀緣若緣滅定云何非善若善則與不貪相應若相應者云何不得是觸因緣若異攀緣入滅三昧云何中閒亂心相應自心分別謂是無記如是二種皆不相應如是不知阿含實義彼論師者踊躍而言滅三昧中猶有意識如是分別云何彼是有心三昧如修多羅法師信說修多羅師云何信說說彼報識一切種子密繫縛業行不斷絕彼彼處生報識壞相相續而行乃至涅槃而不斷絕彼若如是得言有心異六識是故不轉初入滅定心增上力時種子皆悉隱閉故名無心有二種一者聚集諸種子心二者種種攀緣壞心離第二心故名無心如一腳以無餘腳名無腳牀彼種子閉報轉有濡中上如水如熱放箭等勢從此到彼彼種子識期至復生何因緣後時別異種種種子報識是彼彼異識對法共生善不善熏彼次第種子力熏若相續轉如彼力熏於未來身則得彼彼愛不愛果識因緣故如是說此心識種子 無邊相續行 自心中因緣彼彼種力生 彼次第不失 時至則得果如摩登隆伽 塗花瓤時現如是之義如來於彼深密解脫大乘經中有偈說言阿陁那種子 深細稠雨行 不爲愚夫說畏分別我故此偈明何義彼復有中密縛取身故名爲阿陁那識是一切法種子依是故名爲阿梨耶識前生業報故名報識若無彼識身以何覺身未盡遍身不離更無異識若更無對物對治煩惱根本煩惱根合云何對無二法故染行善行無漏心行如是相續無色界生彼何者行依何物報若爾無報亦應得行彼不相應如彼修集有頂漏盡阿那含人無所有處無漏現前有何我所有頂不退衆分和合名爲命根更無異物彼法唯有報陰相似勢力轉行非有異物相似勢力猶如稻稈相似勢力應如是知更有異識如說有識彼何所緣不決定緣云何識緣言不決定復說異識如滅三昧如彼大德銅色弟子說有分識復有人言是根本識何取陰攝如是之義識取陰攝此修多羅文字章句云何而說何識取陰謂六識身如行緣識是何者識六識身故憶此法說如彼行陰何者行陰六思身故不攝異法復何所憶深密解脫修多羅等如來皆說愚凡夫我不爲說畏分別我復何因緣如是分別彼有爲行處處流轉恐人不知若說如是依止攀緣種種了知增上勝心若彼煩惱對治相應染淨等說彼種子識若以果比說如是識不說因識彼顚倒說如是意故此有身識復有身識如次第說此義相應非見一切修多羅說義相應故如是非諸修多羅說莫以一切修多羅中皆不說故便謂無有阿梨耶識如是二種心識竝流一處皆有所謂報識及以異識若如是者有何等過若有二種識身相續如是則應有二衆生如身中識不得如是彼種子果共相應轉報識流故能熏異識身識中閒不如是法若如是者此則無過復有種子種子所生異異壞見如奢盧迦優鉢羅等根根所生若見不見如是不爾若如是說彼則無過如是實有阿梨耶識六識何故不依止我得何者識若如阿梨耶識相續因緣而轉彼有何異彼若是一畢竟不動云何識等而得成熏如紫鑛汁熏彼摩登隆伽樹華若無熏者無轉勝法云何先知如習欲等久時憶知欲等生長我中無心而於何處後時心生若無我者心有何力而於彼我依止分別若有我彼心云何次第而生若共因緣彼異生力云何可知若是彼力生住念轉爲是何法若如是者不相似物而共依止則違阿含說一切法皆無我義如是非理自意分別思量計我是故思熏阿梨耶識相續不斷後身得果則成就非如說相身口之業又復如是身口業無違修多羅有三業說此義云何此義不違如來所說如是無過如是能說云何無過此義今說以何義故說三種業何者爲身何者爲業何義名身何義名業何者身業如是口業亦如是說以何義故說身等業不說眼業以何義故說如是義十善業道三業攝示多說恐人如毘離支子學三種戒說三種是身所作非口非意唯分別復爲餘人說身業相身復攝根大大所成集故名身業者是思集義身大大所成微塵聚集復有人言不淨名身以不淨物和合集故彼天人身不得言身意所作行是名意業身動集業是名身業思有三種所謂思量決定進趣若以身動彼身相續方中生因風界所吹是名身業除中閒句如娑羅油或如風塵說三業道殺盜邪行彼云何思彼身數攝彼身業動殺盜邪行彼身動轉身相續作彼得言作如賊燒村薪草熟飯思復云何得言業道行惡道業故言業道或身動轉故名業道三種思業得說爲業彼思住持則得殺生竊盜邪行復依世諦而說身業有善不善復說彼門以彼思故世閒往返相應之義若思如是善不善業修多羅中云何說言身三種作思業集作不善生苦得苦報故彼門住持彼攀緣者佛如是意彼思異故說思意業唯意相應身口不轉何故如來說思思業如前所說思有三種彼二種思第三進趣彼思是業語言是響響若可解彼業趣思名字相說故名言語憶念義說故名言語業如前說言語起業故名口業除中閒語識意名意意處處境界亦心餘如前說若身業中要有思者異心無心爾時無思云何而得有怖不怖思熏不壞得怖不怖思議最勝若怖不怖意起分別彼意所熏云何破壞如自證知遮與不遮思復無因彼何者壞若捨怖畏捨不怖畏思是其因意起分別復有捨因眼語等業已說覺業非造作業何者覺業謂作意行何者造作眼等何處次第力轉如來說三業 依法義成就 我解業成福願衆生成佛業成就論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12입(入) 중에서 법(法)과 의(意)를 제외한 근진(根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