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17_0664_b_01L
입대승론(入大乘論) 상권
017_0664_b_01L入大乘論卷上◀本無鬪第一品名目▶


견의보살(堅意菩薩) 지음
도태(道泰) 등 한역
김철수 번역
017_0664_b_02L堅意菩薩造
北涼三藏法師道泰等譯


1. 의품(義品)1)

[본래 제1품의 품명은 빠져 있음]
지금 대승의 뜻을 풀이해 들어가고자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대승의 뜻을 말하려고 하는가?
【답】내가 중생들의 고통의 원인[苦因]을 막아주려 하기 때문이니, 지금 그대는 마땅히 잘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악지식을 가까이하여 악에 의해 잘못 이끌리게 되면 치우치게 자기 자신의 법에 집착하거나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에 집착하니 뒤바뀐 생각을 하므로 진실한 뜻을 알지 못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으며, 성스러운 말씀을 비방한다. 성스러운 말씀을 비방하는 사람은 정법(正法)을 무너뜨리며, 정법을 무너뜨리는 사람은 큰 죄의 과보를 받게 되나니,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법을 비방한 죄는 오역죄(五逆罪)보다 중하여 악도(惡道)가 길고도 멀며 오랜 동안 고통의 과보를 받는다.”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017_0664_b_04L今欲解入大乘義問曰何故說入大 乘義答曰我爲衆生欲遮苦因故今當知或復有人近惡知識爲惡所 偏執己法專著邪見顚倒思惟解實義不順佛智誹謗聖說誹謗聖 說者則壞正法壞正法者得大罪報 如世尊說謗法之罪重於五逆惡道長遠久受苦報如偈說曰

대승법을 비방하면
결정코 악한 세계를 향해 나아가나니
이 사람이 업보를 받는 것이라고
여실한 지혜 갖춘 이께서 말씀하셨네.
017_0664_b_12L誹謗大乘法
決定趣惡道
此人受業報
實智之所說

지옥 가운데 떨어지는 몸을 받아 태어나면
큰 불길이 치성하게 몸을 불태운다.
불에 타는 그 고통 극심하니,
그 업보의 죄가 과연 이와 같구나.
017_0664_b_14L生墮地獄中
大火熾然身
焚燒甚苦痛
業報罪信爾

불에 단 커다란 무쇠쟁기가
오백 세를 가득 채우는 동안
그 혓바닥 위를 쟁기질하며
두루 그 몸을 부수어 고뇌케 하네.
017_0664_b_15L熾然大鐵犂
具滿五百數
而耕其舌上
遍碎身苦惱

만약에 지옥으로부터 벗어난다 해도
다시 다른 악한 과보를 받으니
여러 감각기관이 결핍되거나 이상이 있어서
영원히 법음(法音)을 듣지 못하네.
017_0664_b_16L若從地獄出
復受餘惡報
諸根常缺漏
永不聞法音

설령 그것을 듣는다 하더라도
다시 법을 비방하는 곳에 태어나
법을 비방한 인연으로
다시 지옥에 떨어지네.
017_0664_b_18L設使得聞者
復生於謗法
以謗法因緣
還墮於地獄

법을 비방하는 중생은 이와 같은 말을 듣고서 대승 가운데서 의심을 내나니, 존자 제바(提婆)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64_b_19L謗法衆生聞如是說於大乘中便生 疑心如尊者提婆所說偈

박복한 사람은
의심을 내지 않으나
의심을 내는 사람은
반드시 모든 존재의 세계[諸有]를 부수네.
017_0664_b_21L薄福之人
不生於疑
能生疑者
必破諸有
017_0664_c_01L
의구심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마땅히 법을 들으라. 듣고 나면 그 의미를 풀이하여 깨달음의 문을 열 수 있다. 깨달음의 문을 연 다음에는 신심을 내고 신심을 낸 다음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낸다. 기쁨과 즐거움을 낸 다음에는 이와 같은 순서대로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일을 하며 나아가 완전히 갖추어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는다.
대승을 비방한 원인으로 악도에 떨어졌더라도 대승을 말미암으면 모든 신업을 일으킬 수 있으니,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이 땅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 또 지혜를 바탕으로 하여 보리도에 나아가고, 또한 중생과 더불어 함께 화합된 세계를 이룬다. 만약에 중생을 떠난다면 보리도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중생계로부터 일체의 모든 부처님의 보리가 출생하는 것이다.
존자 용수(龍樹)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64_c_01L若有疑者皆應聽法聞已意解便得 開悟得開悟已卽生信心生信心已 便生喜樂生喜樂已如是次第生聞 思修乃至具足得一切種智因謗大 乘而墮惡道亦由大乘起諸善業人因地故倒還依地而起又因於智 趣菩提道亦與衆生共和合有若離 衆生則無有得菩提道者從衆生界 出生一切諸佛菩提如尊者龍樹所 說偈

허공을 바탕하지 않으면 존재의 세계[有]는 있을 수 없고
또한 땅을 바탕하지 않으면 종자가 생겨날 수 없듯이
다만 번뇌를 바탕으로 하여
보리를 증득하는 일이 성립한다네.
017_0664_c_11L不從虛空有
亦非地種生
但從煩惱中
而證成菩提

【문】 그대는 『입마하연론(入摩訶衍論)』을 능숙하게 설하는데, 이와 같은 공덕을 어찌하여 마하연이라 이름하는가?
【답】보살장(菩薩藏)이 있는 곳을 이름하여 마하연이라 한다.
017_0664_c_13L問曰汝說善入摩訶衍論如是功德 云何名爲摩訶衍耶答曰菩薩藏處 名摩訶衍
【문】 부처님께서는 삼승(三乘)을 또한 마하연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그렇다. 이 대승 가운데서는 또한 삼승을 설하고 있으니, 이를 삼장(三藏)이라 한다. 예를 들면 『보살장경』에서 부처님께서 아사세왕에게 고하신 것과 같다.
017_0664_c_16L問曰佛不說三乘亦摩訶 衍乎答曰如是此大乘中亦說三乘 卽名三藏如『菩薩藏經』中說佛告阿 闍世王
017_0665_a_01L“족성자여, 장(藏)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성문장(聲聞藏)ㆍ벽지불장(辟支佛藏)ㆍ보살장(菩薩藏)을 말한다. 족성자야, 성문승이기 때문에 삼장이라 하지 않고, 또한 벽지불승이기 때문에 삼장이라 하지 않으며, 오로지 모든 보살이 대승을 배우는 까닭에 삼장이란 명칭을 얻는다. 왜냐하면 무릇 설법자가 삼승을 구족해야만 삼장이라 이름하니, 보살은 법을 설하여 삼승(三乘)을 구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삼장이라 한다’고 설한다.
017_0664_c_19L族姓子藏有三種何等爲三 謂聲聞藏辟支佛藏菩薩藏族姓子 非以聲聞乘故名爲三藏亦非以辟 支佛乘故名爲三藏唯諸菩薩所學 大乘得名三藏何以故夫說法者具 足三乘乃名三藏以菩薩說法能具 三乘故是故我說名三藏耶
족성자여, 세 가지 종류의 학인(學人)이 있으니 성문학ㆍ벽지불학ㆍ보살학이다. 성문승자는 벽지불승을 수학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벽지불승자는 보살승을 수학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역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족성자여, 오직 모든 보살만이 비록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을 수학하더라도 성문도(聲聞道)나 벽지불도(辟支佛道)를 취(取)하여 증득하지 않고, 보살승을 수학하여 보살이 행하는 법을 깊이 깨달아 알아서 항상 즐거이 수순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보살승자를 삼장이라 하며 성문승이나 벽지불승의 경우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다른 경 가운데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설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만 간략히 설명할 따름이다.
017_0665_a_02L族姓子 有三種學人聲聞學辟支佛學菩薩 聲聞乘者不學辟支佛乘何以故 非所解故辟支佛乘者不學菩薩乘 何以故亦非所解故族姓子唯諸菩 薩雖學聲聞辟支佛乘而不證於 聲聞辟支佛道學菩薩乘深知菩薩 所行之法常樂隨順以是義故菩薩 乘者名爲三藏非謂聲聞辟支佛乘 於餘經中以具分別是故我今但略 說耳
그대가 생각을 두고 있는 것은 삼장이라 말할 수 없다. 그대는 지금 단지 『증일아함』ㆍ『중아함』ㆍ『장아함』ㆍ『잡아함』의 백천(百千) 등의 게(偈)를 일장(一藏)으로 여기고 비니(毘尼)ㆍ아비담의 이백천(二百千)의 게를 이장(二藏)이라 여기며, 이들을 완전히 갖추어 닦아 익히는 것을 삼장(三藏)이라 여긴다.
017_0665_a_12L如汝意謂非三藏者汝今但以 『增一阿含』『中阿含』『長阿含』『雜阿含』百 千等偈以爲一藏毘尼阿毘曇二百 千偈名爲二藏盡具修習名爲三藏
017_0665_b_01L만일 이와 같이 말한다면 삼장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머지 모든 경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이러한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아함ㆍ비니ㆍ아비담 등이 또한 삼장이라면 『잡장(雜藏)』ㆍ『사두라경(舍頭羅經)』ㆍ『태경(胎經)』ㆍ『간왕본생(諫王本生)』ㆍ『벽지불인연(辟支佛因緣)』 등 이와 같은 팔만사천법장이나 존자 아난이 부처님으로부터 받아 지닌 이와 같은 일체의 경전들이 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만약에 이러한 과실을 없게 하려면 일체가 다 부처님의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설해진 것이 모두 장(藏)이라면 이는 곧 백천여 가지의 장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대가 규정한 삼장이라는 말은 저절로 무너진다. 또한 아난은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지 20년 후에 바야흐로 승중(僧衆) 속에서 스스로 말씀하셨다.
“내 나이가 매우 늙어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법을 공급하여 전해야 하는데 어느 누가 내가 법을 공급하면 그것을 섬길 수 있는지 마땅히 스스로 감당할 수 있으면 말해 보아라.”
017_0665_a_15L 若如是說不名三藏所以者何諸餘 經等則非佛說有如是過阿含毘尼 阿毘曇等亦是三藏雜藏舍頭羅經 胎經諫王本生辟支佛因緣如是八 萬四千法藏尊者阿難從佛受持者 如是一切皆有非佛語過若無過者 當知一切盡是佛說如是所說若皆 是藏此則便有百千等藏汝言三藏 是語自壞復有阿難所不受者佛成 道二十年後方於僧中自言我年老 須供給人若能爲我作給侍者自言能
그때 대중들 거의 모두가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난은 곧 함께 범행을 닦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여래에게는 팔만사천의 법무더기가 있어서 제가 지금 다 능히 받아 지닐 수 있으나, 이전의 20년 동안에는 두 사람의 비구만이 받아 지닐 수 있었으니, 저는 그것에 관해서는 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017_0665_b_04L爾時大衆和合卽差阿難爲 佛侍者阿難便語同梵行人如來有 八萬四千法聚我今悉能受持唯先 二十年中有二比丘所受持者皆悉 不了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을 다문(多聞)이라 할 수 없다. 부처님께 법을 설하시는 동안에도 아난은 실제로 법을 받아 지니는 일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중아함』에서는 제석환인이 울다라(鬱多羅)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존자시여, 내가 타심지(他心智)를 얻어 염부제의 일체 중생을 관찰해보니 어느 누구도 불법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존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017_0665_b_08L以是義故當知阿難所受持者 不名多聞佛所說法中阿難實有不 任器者如『中阿含』說釋提桓因語鬱 多羅言尊者我得他心智觀閻浮提 一切衆生無有盡能受持佛法唯除 尊者餘不能了
017_0665_c_01L이러한 인연이 있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난이 일체의 불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문 제자나 아난은 불법을 감당할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다. 여러 대승경에서도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수능엄경』에서 부처님께서 정월장천자(淨月藏天子)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다.
“아난이 받아 지닌 것은 양이 적어 ‘받아 지닌 것이 한량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말하지 못하였다. 아난은 내가 설한 법 가운데 백천억분의 일도 지니지 못한다. 선남자여,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시방세계의 범석(梵釋)ㆍ사천왕ㆍ천룡ㆍ야차ㆍ건달바와 그리고 모든 보살이 다 모여들었을 때 그들을 위해 지혜를 밝히는 수다라의 게송ㆍ장구와 중생이 행해야 하는 모든 바라밀을 설하였고, 성문ㆍ벽지불승을 설하여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찬탄하였으며, 모든 바라밀을 만족하게 하였고, 나아가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자세하게 법을 펴기를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하였다.
017_0665_b_13L以是因緣當知阿難 非悉能持一切佛法聲聞弟子及以 阿難不任法器諸大乘經已具廣說 如『首楞嚴經』中佛爲淨月藏天子說阿難所持少不足言不受持者乃有 無量我所知法百千億分不說其一 阿難於我所說法中百千億分不持 其一善男子我於一日一夜十方世 界梵四天王夜叉乾闥婆及 諸菩薩一切來集爲說智慧修多羅 偈頌章句衆生所行諸波羅蜜及說 聲聞辟支佛乘厭惡生死讚歎涅槃 滿足諸波羅蜜乃至爲諸天子廣演 說法一日一夜
설령 염부제를 가득 채울 만큼의 미진수와 같은 다문(多聞)의 지혜가 모두 아난과 같더라도 저 하루의 낮과 밤에 비하면 백천억분의 일만큼도 갖출 수 없으며, 나아가 다시 시방의 미진수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의 다문이 모두 아난과 같다 하더라도 내가 하루 낮과 밤 동안에 설한 법을 받아 지닐 수 없음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017_0665_c_03L假使滿閻浮提如微 塵數多聞智慧皆如阿難於一日一 夜百千億分亦不能持具足一分至復滿十方微塵世界皆如阿難能盡持亦復如是
이렇듯 곳곳의 경전 가운데서 또한 아난이 부처님의 법을 감당하여 맡을 만한 그릇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아난이 일체의 부처님 법을 다 받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7_0665_c_07L處處經中亦說難不任法器以是義故當知阿難不 能盡持一切佛法
【문】 여래ㆍ세존께서는 아난에게 다문 가운데 제일이라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부처님께서 성문 대중들 가운데서 짐짓 아난을 제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보살이라고 일컫지는 않으셨다. 또한 그대들은 아난이 지닌 것도 다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대승이 갖추고 있는 깊은 뜻에 있어서랴. 그대의 생각이 만약 성문승을 보살승이라고 여긴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인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문승의 인(因)이 대승의 인과 다르지 않다면 과도 응당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과(果)가 다르기 때문에 인(因) 역시 다름을 알아야 한다.
017_0665_c_09L問曰如來世尊不 說阿難於多聞中爲第一耶答曰於聲聞衆中假說阿難以爲第一謂菩薩又復汝等於阿難所持尚不 盡聞況於大乘具足深義汝意若謂 是聲聞乘卽大乘者此事不然何以 因果異故若聲聞乘因與大乘因 而不異者果亦應不異現見果異故 當知因亦異
왜냐하면 성문을 배우는 사람은 단지 번뇌의 장애만을 끊고 무상행(無常行)을 관(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들어야 하지만, 보살은 미세한 모든 번뇌의 습기를 끊고 나아가 일체법이 결국은 공(空)임을 관하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연지(自然智)ㆍ무사지(舞師智)를 얻어 듣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성문승은 대승과 같을 수 없다.
017_0665_c_17L何以故聲聞學者但斷 結障觀無常行從他聞法菩薩所斷 微細諸習乃至究竟觀一切法不從 他聞得自然智無師智以是義故以聲聞乘同大乘也
017_0666_a_01L【문】 부처님께서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답】성문이 해탈할 때에는 자못 수미산 등으로 하여금 다 도량을 향하게 하고 그것들이 몸을 굽히도록 하거나, 광명이 시방세계의 80유순에 걸쳐 두루 비추어 일체의 악마들이 다 와서 항복하게 할 수 없으나, 보살이 해탈할 때에는 위에서 말한 것을 할 수 있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른 경전에서 비록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그 대소(大小)에는 실제로 차이가 있다‘고 하셨다. 비유하자면 충치나 겨자씨의 구멍이 비록 구멍[空]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시방세계 가운데의 공간[空]과는 동일하지가 않은 것처럼, 비록 빈 공간[空]이라는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그 규모의 크기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또 예를 들면 반딧불을 태양이나 달빛에 비교하고자 하는 것과 같고 또한 모기를 금시조와 비교하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사류지(娑留枝)비구가 부처님의 본행(本行)에 대해서 게송으로 설한 것과 같다.
017_0665_c_21L問曰佛不說解 脫無異也答曰聲聞解脫時頗能令 使須彌山等盡向道場悉皆曲躬明遍照十方世界八十由旬一切魔 衆悉來降不菩薩解脫如上所說悉 能爲之以是義故佛於餘經雖說解 脫相等無異大小實殊猶如虫嚙芥 子中空雖有空名當與十方世界中 空得爲一不空雖不異大小有別如熒火欲等日月亦如蚊子比金翅 如娑留枝比丘說佛本行偈

일제의 모든 광명 가운데
등불이나 번갯불
별빛 그리고 달빛의 비춤에는 차이가 있으니
그 가운데 태양빛이 가장 으뜸이고
017_0666_a_08L一切諸光明
燈焰與掣電
星月照差別
日光最第一

날아다니는 곤충이나 짐승 가운데
모기나 날개미나 벌,
뭇 새들이 나는 것에는 가기 차이가 있으니
금시조가 가장 으뜸이어서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없네.
017_0666_a_10L飛行諸禽獸
蚊蟻及與蜂
衆鳥飛各異
金翅最不同

이러하기 때문에 비록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그 규모의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인(因)에 이미 차이가 있다면 어찌 그 과(果)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해탈에는 차이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와 같이 관찰하면 해탈이 똑같지는 않다. 성문해탈을 애진(愛盡)해탈이라 하나니, 이는 일체의 해탈은 아니다. 단지 둔한 근기를 지닌 지혜가 적은 중생을 위하여 짐짓 가명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대승의 해탈은 번뇌의 습기를 끊어 일체를 모두 다하는 것[盡]으로 근기가 뛰어난 보살을 위하여 구체적으로 분별하여 설하였다. 가령 그대가 지금 성문해탈이 곧 대승해탈이라고 한다면, ‘여래는 곧 일체종지가 아니다’라고 하는 이와 같은 허물이 있다. 예를 들면 부처님께서 몸이 조금 편찮으시자 목련을 파견하여 기국(耆毱)이 있는 처소를 찾아가 어떤 약이 필요한지 물어보라고 하셨다. 이때 기국이 이미 세상을 뜬 지 7일이 지나 도리천에 태어났기에 목련은 그 하늘의 처소에 찾아갔다. 그때 기국이 후원으로 들어오자, 목련이 곧 물었다.
“여래께서 환후가 있으신데 어떤 약이 필요합니까?”
017_0666_a_11L 以是故雖少相似大小有殊當知因 旣有異果豈同耶汝言解脫無異是觀察解脫不同聲聞解脫名愛盡 解脫非一切解脫但爲鈍根少智衆 生假分別說大乘解脫斷煩惱習一 切都盡爲利根菩薩廣分別說如汝 今說聲聞解脫卽大乘解脫者如來 則非一切種智有如是過如佛小疾 遣目連詣耆鞠所當須何藥是時耆 鞠已亡七日生忉利天目連卽便詣 彼天所爾時耆鞠將入後園卽便問 如來有疾當須何藥
이에 답하였다.
“우유를 발효시킨 소(酥)가 효용이 있을 것입니다. 하온데 여래의 몸은 마치 금강과 같아서 모든 악이 이미 멸하였을 텐데 어찌 병환이 있을 수 있습니까?”
017_0666_a_23L答曰用酥來身者猶如金剛諸惡已滅豈有疾 乎而問耆鞠
017_0666_b_01L그러자 기국에게 답하였다.
“예를 들면 바구라(婆拘羅)비구는 90겁 전에 같이 범행을 닦고 있었던 사람에게 하나의 약 열매를 보시한 공덕으로 몸에는 항상 병이 없었고 최후의 몸을 받아 사는 동안에는 그 나이가 80에 이르렀으나 처음부터 조금도 질병의 징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아리륵과(訶梨勒果)를 조금 보시한 인연으로도 질병을 얻지 않았거늘 하물며 여래께서 억백천만아승기겁 동안에 단바라밀(檀波羅蜜)을 구족하고 모든 공덕을 갖추었으며 나아가 몸과 수족을 잘라 골수ㆍ뇌ㆍ피ㆍ살을 병든 이에게 보시하였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어찌 병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017_0666_b_02L如婆拘羅比丘於九十 劫前以一藥果施同梵行者於九十 劫中身常無病於最後身年至八十 初無微病正以此一訶梨勒果微施 因緣尚得無病況復如來億百千萬 阿僧祇劫具足檀波羅蜜備諸功德 乃至截身手足髓腦血肉而施病者 以是因緣豈得疾耶
경에서 설하는 대로라면 여래는 일체지가 아닌 것으로 나타난다. 여래께서는 또한 어느 때 성으로 들어가 걸식한 후 발우를 비우고 돌아와 제바달다를 제도하여 출가시키셨다. 『고수경(枯樹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큰 불덩어리를 보고 그때 여러 비구들 가운데 퇴전하는 마음을 낸 자가 있자, 여래께서는 말을 부리는 만숙(滿宿)을 제도하기 위하여 바라문 탈뢰자(奪賴闍)ㆍ살차니건(薩遮尼乾)ㆍ손타리(孫陀利) 등을 꾸짖고 90일 동안 말보리죽을 드셨으며 목련ㆍ사리불도 질그릇 굽는 방에 들어가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만약 다른 업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여래는 이미 일체의 모든 악을 다하였고 일체의 한량없는 공덕을 가득 구족하셨으니, 다른 악업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커다란 과실이다.”
그대는 일찍이 여러 경 가운데서 여래께서는 일제의 번뇌 업과 번뇌 습기를 영원히 끊었다고 설하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 예컨대 마타차리(摩陀遮離)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017_0666_b_09L如經所說則現 如來非一切智如來又時入城乞食 空鉢還歸爲度於提婆達多令使出 如『枯樹經』說見大火聚爾時諸比 丘中便有生退心者爲度馬師滿宿 數數罵婆羅門奪賴闍薩遮孫陁利等於九十日中受食馬麥 目連舍利弗入於陶室乃有如是等 汝意若謂有餘業者此則不然以故如來已盡一切諸惡具滿一切 無量功德有餘惡業則有大過汝曾 不聞諸經中說如來永斷一切煩惱 業結習耶如摩陁遮離所說偈讚

일체의 번뇌 습기가 다하여
오로지 세상을 구원하실 분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어 지니시고
공덕을 모두 원만하게 이루셨네.
017_0666_b_21L一切結習盡
唯有救世者
一切智所有
功德悉成滿
017_0666_c_01L
세 가지의 습기가 있으니, 이른바 업습(業習)ㆍ번뇌습(煩惱習)ㆍ위의습(威儀習)이다. 이 세 가지 습기를 여래께서는 영원히 다하였다. 이러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업이 존재한다고 여긴다면 이는 큰 과실이다. 그대가 지금 만약에 이것을 방편이라 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의 생각은 먼저 부처님 몸이 실재한다고 말했지 방편이라거나 응화(應化)라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가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부처님의 몸[佛身]은 하나이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다시 방편과 응화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어떤 경전으로부터 방편과 응화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경 가운데서는, ‘오로지 후변신(後邊身)만 존재한다’고 여기고, ‘달리 법신이 존재하여 응화신이나 방편신과는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십주경(十住經)』에서 설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니, 달리 법신이 존재하여 방편신이나 응화신과는 같지 않았다.
017_0666_b_23L有三種習所謂業習煩惱習威儀習此三種習如來永盡以是因緣若有 餘業此則大過汝今若謂是方便者 此亦不然何以故汝意先謂佛身是 不言方便及與應化汝常自言佛 身是一何得復有方便應化汝於何 經聞說方便及應化耶汝經中說唯 有後邊身不言別有法身與應化方 便身異而我『十住經』中所說別有法 不與方便應化身同
따라서 대승경 가운데서 ‘부처님은 일체지이시다’라고 설하는 것에는 과실이 없다. 그대가 소승 가운데서 일체지를 말한다면 이에는 커다란 과실이 있으며, 만약에 ‘성문승이 곧 대승이다’라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대승은 성은승과는 차이가 있으니 광대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생각하기를 만약에 ‘성문승 가운데서 대승을 나타내 보인다’고 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왜냐하면 이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성문승이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고 대선(大仙)의 승(乘)은 삼보(三寶)의 종성(種性)을 계승하여 단절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비유리보(毘琉璃寶)는 끝내 수정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그 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017_0666_c_10L是故大乘經 中說佛是一切智則無有過汝小乘 中說一切智則有大失若謂聲聞乘 卽是大乘此事不然大乘者與聲聞 乘則有差別以廣大故汝意若謂聲 聞乘中顯示大乘是亦不然何以故 理相違故聲聞乘者從他聞法大仙 之乘紹三寶種不斷絕故如毘琉璃 寶終不出於水精之中體差別故
017_0667_a_01L따라서 대승은 미묘하고 지극히 깊으며, 그 마음이 광대한 보살마하살이 차례대로 수학하여 초지(初地)로부터 시작해서 나아가 제십지(第十地)에 이르도록 일체의 공덕과 지혜의 업을 완전히 갖춘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마하연승(摩訶衍乘)이라 하셨다. 만약에 성문승이 마하연승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십지를 수학하면 일체의 모든 바라밀을 원만하게 갖추어 삼승(三乘)의 선법(善法)을 낳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십지경』에서 금강장(金剛藏)보살이 해탈월(解脫月)보살에게 말하였다.
“불자여, 비유하자면 문자ㆍ장구는 자본(字本)이 그 근원이니, 모든 문자는 다 자본으로부터 출현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법(佛法)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地)를 그 근원으로 삼습니다.”또한 지(地)로부터 구경(究竟)을 얻으면 자연지(自然智)를 이룰 수 있다.
017_0666_c_18L故大乘微妙甚深其心廣大菩薩摩 訶薩次第修學始從初地乃至十地 具足一切功德智業是故佛說名爲 摩訶衍乘若聲聞乘從摩訶衍出有是理是故菩薩修學十地具滿一 切諸波羅蜜故能出生三乘善法『十地經』說金剛藏菩薩語解脫月菩薩 佛子譬如字章字本爲初一切文 字皆出字本如是佛子一切佛法亦 復如是以地爲初亦從於地而得究 竟成自然智
따라서 대승을 지극히 깊다고 하며, 이는 일체 성문의 공덕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소승이 대승을 낳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십지는 마치 금덩어리를 가득 모아 잃어버리지 않은 것과 같으니, 어찌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래께서는 자비력으로 둔한 근기를 지닌 이들을 위하여 성문승을 설하셨으니, 그대는 이를 믿고 받아들여 스스로 편집되게 소승법을 받아 행하면서 대승의 평등한 바른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승이란 가장 길상하고 수승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017_0667_a_06L是故大乘名曰甚深生一切聲聞功德非謂小乘能出大 佛說十地猶如金聚具足無失何不受如來以慈悲力爲鈍根故說 聲聞乘而汝信受便自偏執受行小 不信大乘平等正教是故當知佛 說大乘名最吉勝
【문】 세존께서 지난날에 말씀하셨다.
“내가 멸도한 후에 다가올 미래세에는 많은 중생들이 쟁론을 일으켜, 이것은 불설(佛說)이니 이것은 비불설(非佛說)이니 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법인(法印)으로 그것을 인증(印證)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약 그 뜻이 수다라(修多羅)에 들어가고 비니(毘尼)를 수순하며 법상(法相)에 위배되지 않으면 이를 불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017_0667_a_12L問曰世尊昔說我滅後當來世中多有衆生起諸諍 此是佛說此非佛說是故如來以 法印印之若義入修多羅隨順毘尼 不違法相是名佛說
【답】부처님께서 또한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성문승은 이것을 내가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며 나아가 보살의 대승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름이 없고[不異] 평등한 하나의 양상[一相]이기 때문에 법인에 의해 인증할 수 있다. 그대가 말한 ‘들어간다[入]’는 것은 이 뜻이 수다라에 들어간다는 것이니 문자에 의해 들어간다는 말인데, 만약에 문자에 의해 들어간다면 이러한 처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십이부경(十二部經)은 일체 문장이나 게(偈) 그리고 장구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자로써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응당 알아야 한다.
017_0667_a_16L答曰佛亦不言 聲聞乘者非是我說乃至菩薩大乘 亦復如是佛說不異等一相故以法 印印汝言入者爲是義入修多羅文字入耶若以文字入者無有是處 何以故十二部經一切文偈章句各 是故當知非文字入
017_0667_b_01L만약 뜻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그 뜻이 수다라의 뜻을 수순하여 법상(法相)과 상응하면 그 뜻이 드러난다. 따라서 수다라를 수순한다고 한다.
만약 성문법을 드러내 보이면 성문승이 수다라를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벽지불법을 드러내 보이면 벽지불승이 수다라를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보살법을 드러내 보이면 보살승이 수다라를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내가 십지의 공덕을 드러내 보이고 보살행을 밝히면 이를 ‘진정으로 대승에 수순해 들어간다’고 한다.
단지 그대의 생각은 편벽되고 독선적으로 소승의 삼장(三藏)에 들어가는 것만을 말한다. 대승의 삼장 가운데서 내가 이미 대승에 들어가는 것을 설한 바 있다. 그러므로 삼장이란 곧 대승이다.
017_0667_a_22L若以義入不相違義者若順修多羅義與法相 相應其義顯現是故名爲順修多羅 若顯示聲聞法名聲聞乘隨順入 修多羅若顯示辟支佛法名辟支佛 隨順入修多羅若顯示菩薩法菩薩乘隨順入修多羅若我顯示十 地功德明菩薩行是名眞說隨順入 於大乘但汝意偏黨獨謂入小乘三 大乘三藏中我已說入是故三藏 卽是大乘
왜냐하면 십이부경 중에서 비불략(毘佛略)1)
이 곧 대승이라고 설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아함』에서 설한 것과 같다.
“무엇을 비구라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법을 알아서 십이부경의 수다라 내지 우바제사(優婆提舍)2)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017_0667_b_09L何以故十二部中說毘佛 略卽是大乘如『中阿含』說云何名比 所謂知法以能善解十二部經多羅乃至憂婆提舍
비불략이란 마하연이다. 왜냐하면 비불략의 경전에서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닦아 대치하는 법을 설하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한다. 또한 수많은 승(乘)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많은 장엄을 갖추었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한량없는 커다란 과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칭량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하며, 일체의 모든 잘못된 견해를 끊어 없애기 때문에 비불략이라 이름한다.
017_0667_b_12L毘佛略者是摩 訶衍何以故毘佛略經爲諸衆生說 修對治法故名毘佛略亦有衆多乘 故名毘佛略亦以多莊嚴具故名毘 佛略亦能出生無量大果報故名毘 佛略非是稱量所能知故名毘佛略 除斷一切諸邪見故名毘佛略
만약 그대가 생각하기를 ‘나의 성문법 가운데는 수다라와 게송의 장구를 널리 자세하게 설하고 있으므로 또한 비불략이다’라고 여긴다면 그렇게 생각할 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아함경』을 의지하여 비불략이라고 말하지만 단지 언어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일 언어뿐이라면 이는 믿을 수 없다.
017_0667_b_18L若汝 意謂我聲聞法中廣說修多羅偈頌 章句亦名毘佛略者無有是處何以 汝依阿含說爲毘佛略但有言語 若但言語此非可信
017_0667_c_01L만약에 『아함경』 가운데 반드시 이러한 뜻이 있다면 어떤 곳의 장구가 성문을 위한 말씀인가? 이 비불략은 결정적인 문자ㆍ장구가 없다. 따라서 비불략이란 대승을 드러내는 것이지 성문 소승의 언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대의 성문 경전의 일부에서는 끝내 백천게(百千偈)의 찬탄 문구가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억만(億萬)의 광대한 찬탄언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017_0667_b_22L若『阿含經』中必 有斯義何處章句爲聲聞說是毘佛 若無定文是故當知毘佛略者顯 發大乘非謂聲聞小乘說也汝聲聞 經一部所說終無百千偈讚文句復當有億萬廣說
여래ㆍ세존께서 모든 성문을 가르친 것은 오로지 무상(無常)을 현시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생사를 싫어하게 하여 고통의 근본을 알게 함으로써 속히 열반을 구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처음부터 이러하였고, 나아가 문구를 봉행하는 맛도 보잘 것 없어서 지극히 깊고 광대한 뜻이 없다. 대승 경전에서는 보살이 행해야 할 일이 지극히 깊고 광대하니, 예를 들면 『대유경(大喩經)』ㆍ『현겁삼매경(賢劫三昧經)』ㆍ『해탈경(解脫經)』ㆍ『화수경(華首經)』 등 이와 같은 것들은 다 마하연이므로 모두 다 비불략이라 한다.
017_0667_c_04L如來世尊教諸聲 唯示無常令厭生死使知苦本速 求涅槃從初如是乃至奉行句味尟 則無甚深廣大之義大乘經說菩 薩所爲其事深廣如『大喩經』『賢劫三 昧經』『解脫經』『華首經』如是等悉是摩 訶衍皆名毘佛略
『결해탈경』에서는 선재동자가 선지식 해당비구(海幢比丘)의 처소를 찾아가 12년 동안 대해삼매(大海三昧)에 들어가 해당비구에게 말하였다.
“이 삼매 속에서는 깊고 광대함이 가없으니 다시 어떤 법문이 이 삼매보다 크겠습니까?”
017_0667_c_10L如『結解脫經』中財童子詣善知識海幢比丘所十二 年中入大海三昧白海幢言此三昧 中深廣無邊更有法門大此三昧不
말을 마치자 대해삼매 중에서 커다란 연꽃이 보였고 부처님께서 그 속에서 출현하시어 오른손으로 해당비구의 이마를 만지시며 칭찬하시어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선남자여, 또한 보안법문(普眼法門)이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받아 지녀라.”
017_0667_c_13L說是語已於大海三昧中見大蓮華從中出卽以右手摩海幢頂讚言善哉 善哉善男子更有普眼法門汝當受
017_0668_a_01L해당비구는 보안법문의 장구를 받아들여 차례대로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설하였으며, 선재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여, 나는 일찰나 경에 보안법문을 받아 지녀 대해의 물을 다 사용하도록 먹을 갈아 거대한 종이 위에 쌓기를 마치 수미산처럼 하였다. 천하의 초목을 잡아 붓으로 삼고 삼천세계의 중생을 다 화가로 삼아 일찰나 경에 법문을 받도록 한다.”
백천분 가운데 그 일부분도 다 묘사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루 낮과 밤이나 나아가 12년 동안에 받아들인 지극히 깊고 한량없고 가없는 대분(大分)의 요의(要義)인 경우이겠는가?
017_0667_c_17L海幢卽受普眼法門章句次第爲 他廣說告善財言善男子我於一剎 那頃所可受持普眼法門用大海水 盡以磨墨積大紙聚猶如須彌山下草木持以爲筆三千世界水陸衆 生悉爲書師於一剎那頃所受法門 百千分中猶不能書盡其一分況復 一日一夜乃至十二年中所受甚深 無量無邊大分要義
선재동자가 한 선지식의 처소로부터 법을 들음이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없어 억천수(億千數)를 넘어서는데, 하물며 미진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께 자문을 구하고 선지식으로부터 받아들인 교법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러한 인연으로 대승을 구족하니, 비불략은 한량없고 가없는 것이지 성문은 아니다. 이 뜻은 지극히 깊다. 따라서 일체의 성문이 수행하는 법이 다 마하연의 도(道)에 들어가면 가장 길상하게 된다. 이를 수다라의 뜻에 수순하는 것이라 한다.
017_0668_a_02L善財童子於一 善知識所從聞法已能如是無量無 邊過億千數況復諮問微塵世界諸 佛等邊及善知識所受教法以是因 具足大乘名毘佛略無量無邊非 聲聞耶此義甚深是故一切聲聞所 修行法悉入摩訶衍道最爲大吉名隨順修多羅義
여기서는 다시 비니(毘尼)에 수순하는 것을 설명해 보기로 한다. 삼승의 성도(聖道)가 모두 한결같이 탐욕과 진에와 우치(愚癡)를 끊는 것을 비니라 한다. 수다라는 인과를 분별하는 것이고, 아비담은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것이며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이다. 마하연 역시 탐욕과 진에와 우치 및 번뇌 등 일체의 악법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성문에게 자신의 삼업(三業)을 깨끗이 하라고 가르치신 것을 비니라고 한다. 보살들에게는 그들의 삼업을 깨끗하게 하고 나아가 성불에 이르게 하며, 아울러 중생을 만족시키는 일체의 시바라밀(尸波羅蜜)을 가르치신다. 보살이 지니는 이 자성계(自性戒)는 보리심을 일으켜 진실한 과(果)를 얻는다. 그러므로 마하연이란 ‘비니를 수순하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017_0668_a_09L今當復說隨順比 三乘聖道皆同斷貪欲瞋恚愚癡 名爲比尼修多羅者分別因果阿毘 曇者分別法相亦斷煩惱摩訶衍者 亦說斷除貪欲瞋恚愚癡煩惱一切 惡法佛教聲聞淨己三業名爲比尼 爲菩薩說淨己三業乃至成佛兼及 衆生滿足一切尸波羅蜜菩薩所持 是自性戒發菩提心得眞實果是故 當知摩訶衍者隨順比尼
017_0668_b_01L‘법상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란 삼승의 경전에서는 십이인연을 위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승 역시 십이인연을 위배하지 않으므로 잘 관찰하면 대승이 곧 삼법인임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잘 관찰하지 못하면 대승은 존재하지 않으며 삼승을 갖출 수도 없다. 만약에 마하연을 비방하면 이것은 큰 허물이 있는 죄이다. 그대가 지금 만약 이것이 악마가 말한 것이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고 하고 모든 경전 속에는 진실로 이런 말이 없다고 하거나 만약에 단지 입으로만 대승을 말하면, 이는 악마의 말이니 끝내 믿을 수 없다. 만약에 그대가 이런 것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마치 사자의 몸속에 벌레가 생겨나 다시 사자를 잘아먹는 것과 같다. 삼승이 모두 다 그러하며 대승만 유독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하나니, 마하연이란 악마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며 오로지 부처님만이 설하실 수 있는 것이다.
017_0668_a_18L不違法相 三乘經說不違十二因緣大乘亦 不違十二因緣善觀察者能知大乘 卽三法印若不善觀察則無大乘亦 不具三乘若誹謗摩訶衍者是大過 汝今若言此是魔說佛所不說諸經中實無此語若但口言爲大乘 是魔所說終不可信汝意若謂是 佛說者猶如師子身中生虫則還食 師子三乘皆爾不獨大乘是故當知 摩訶衍者非魔所及唯佛能說
【문】 당신에게는 악마의 말이 아닌 것이 나에게는 악마의 말이 될 수 있는가?
【답】나와 그대 모두에게 악마의 말이 아니다.
017_0668_b_05L問曰 汝非魔說我是魔乎答曰我與汝等 俱非魔耶
【문】 만약에 나와 당신에게 모두 악마의 말이 아니라면, 악마의 말이라는 이것이 부정되지 않겠는가?
【답】나의 대승법은 뛰어나고 중생과 더불어 법상에 수순하기 때문에 악마가 행하는 많은 일이 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대승 가운데서 악마를 막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대의 소승법은 오로지 자신만을 제도하는 것이므로 악마가 교란하여 고뇌케 하지 않는데, 어찌 막는 일이 필요하겠는가? 이런 일에 대해서는 여래께서 옛날에 『법화경』이나 『반야경』에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당래세(當來世:미래세)에는 많은 중생들이 질투를 즐겨 일으킬 것이기 때문에 비방으로써 악취(惡趣:三惡道)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그대가 외워 익힌 어떤 부류의 경전에서, ‘마하연은 악마가 설한 말이다’라고 하였으나, 만약에 그대의 경전에서 ‘마하연은 악마가 설한 말이다’라고 하지 않는다면 이는 스스로 악마의 말을 하는 것이니 이것 역시 믿을 수 없다.
017_0668_b_07L問曰若謂我與汝等俱非 說言魔說者此則應遮答曰我大 乘法利及與衆生順於法相故多魔 是故如來於大乘中說言遮魔小乘法唯能自度魔不擾惱何須遮 是以如來昔於『法華』及『般若經』中 於當來世多有衆生喜起嫉妒故 遮誹謗墮於惡趣汝所誦習於何部 經中言摩訶衍是魔所說若汝經中 不言摩訶衍魔所說者自言魔說此 亦叵信
017_0668_c_01L그대가 만약에 성문법 중에도 또한 막고 끊는 것이 있으나 다만 그런 일이 이미 오래되어 멸하여 증거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 역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가령 막는다는 것이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수호하는 것’이라면, 이 법은 겁이라는 세월이 경과하여도 떨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대가 말한 ‘오래되었다’는 말은 단지 언어로 존재할 뿐이다. 설령 번뇌의 장애를 없앨 수 있고 정법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비록 악마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곧 정법으로써 부처님의 말씀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말씀대로라면 법에 의지하는 것이지 사람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바른 이치를 좇는 것이지 명자(名字)를 취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지장(智障:所知障)과 번뇌장을 멸한 자인데, 이 분이 곧 세존이다.
017_0668_b_17L汝意若謂聲聞法中亦有遮 但事已久滅難可證據此亦不然 何以故非處所故若假令遮佛以神 力則能守護此法經劫亦不墜沒故當知汝言久者但有言語假令魔 能除惑障不違正法雖曰魔說卽 是正法與佛語不異何以故如佛所 說依法不依於人是以我今但從正 不取名字又我等所求能滅智障 煩惱障者卽是世尊
만약에 진실로 악마라면 끝내 보살법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마는 보살이 선정으로부터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지혜를 나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탐욕이나 악 등의 선하지 못한 법을 염리(厭離)하지 못한다. 이 대승의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으니, 초지로부터 나아가 제십지에 이르기까지의 이와 같은 차례와 사선(四禪)ㆍ사무량심(四無量心)ㆍ사무색정(四無色定)ㆍ멸수상정(滅受想定)ㆍ보리심ㆍ모든 바라밀ㆍ상황에 잘 맞는 방편으로 중생을 성숙시켜 섭수하는 법ㆍ십선도(十善道)ㆍ계(戒)ㆍ문지혜(聞智慧)ㆍ불방일ㆍ세간의 여덟 가지 법을 떠남ㆍ팔성도(八聖道)ㆍ전법륜(轉法輪)ㆍ두타가 구족하는 공덕을 견고하게 지님ㆍ고(苦)ㆍ공(空)ㆍ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적멸(寂滅)ㆍ십이인연ㆍ모든 선(禪)에 들고 남[出入]ㆍ삼해탈문ㆍ모든 다라니ㆍ삼십칠품조도법ㆍ모든 신통문ㆍ실제(實諦)ㆍ사변(四辯:사무애해)ㆍ선(禪)과 지(智)라는 두 바퀴 등으로 스스로를 장엄하고 다 화합하여 모든 법에서 노닐되, 생사나 열반 가운데서 생사를 배반하지도 않고 또한 열반에 취향하지도 않으면서 마음이 항상 악을 싫어하고 모든 지(地)를 정관(正觀)하며, 모든 지에서 벗어나 성문ㆍ벽지불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017_0668_c_03L若實魔者終不 能說菩薩之法何以故魔不能知菩 薩從禪定生聞思修慧厭離欲惡不 善之法是大乘義唯佛能說從於初 地乃至十地如是次第四禪四無量 四無色定滅受想定菩提心諸波 羅蜜隨宜方便成熟攝衆生法十善 智慧不放逸離世八法八聖 轉法輪堅持頭陁具足功德苦空無常無我寂滅十二因緣出入諸禪 三解脫門諸陁羅尼三十七品助道 之法諸神通門實諦四辯禪智二輪 以自莊嚴皆悉和合遊戲諸法而於 生死涅槃等中不背生死亦不向涅 心常厭惡正觀諸地出離諸地墮聲聞辟支佛地
청정한 불국토가 수순하는 법인(法忍)은 무생법인3) 불퇴전지는 정위지(正位地)의 십력(十力)ㆍ사무외(四無畏)ㆍ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나 상호(相好), 법신 등을 받는다.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생사에 머물러[住] 구르는 것[轉]을 수순할 때는 결정적으로 따라 구르고 구르지 않는 것을 수순할 때는 결정적으로 구르지 않는다.
017_0668_c_18L淨佛國土隨順法 無生法忍不退轉地受正位地不共法相好法身爲衆生故住於 生死順轉決定轉隨順不轉決定不
017_0669_a_01L이와 같은 인과(因果)의 차제법과 불공법과 비각법(非覺法)은 악마가 설할 수가 없으니, 악마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악마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만약에 악마가 음(陰)에 대해 ‘나는 끝내 부처님께는 오음(五陰)의 몸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거나, 또한 다시 만약에 이것이 진실로 악마의 말이라면 이와 같은 말은 미륵보살도 역시 응당 막아 그치게 할 것이다.
017_0668_c_22L如是等因果次第法不共法非覺 魔不能說非魔境界故魔有四種 若言陰魔作是說者我終不說佛有 陰身又復若言實是魔說如斯語者 彌勒菩薩亦應遮止
또한 존자 빈두로(賓頭盧), 존자 라후라 등 16인의 모든 대성문(大聲聞)들은 여러 저(渚)에 흩어져 있으며 다른 경전 가운데서는 99억 대아라한이 모두 부처님 앞에서 법을 취하여 헤아리고 수호하여 그 세계에 수명이 다하도록 머물러 동방의 불바제저(弗婆提渚)ㆍ맥저(麥渚)ㆍ속저(粟渚)ㆍ사자저(師子渚)ㆍ염부저ㆍ대염부저ㆍ발제리가처(跋提梨伽處)ㆍ계빈(罽賓) 내지 아뇩대지(阿耨大池)에는 모든 현성(賢聖) 등이 다 머물러 불법을 수호한다. 만약 마하연이 악마가 설한 것이라면 이는 불법의 큰 병폐일 것이며, 모든 현성들이 막아서 끊어야 한다. 그러므로 악마의 말이라는 것은 다 망어(妄語)이며 공연히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또 대보살과 모든 현성 등이 다 대승을 수호하니, 이 마하연은 삼보의 종성(種姓)을 계승하여 단절되지 않도록 한다.
017_0669_a_03L又尊者賓頭盧 尊者羅睺羅如是等十六人諸大聲 散在諸渚於餘經中亦說有九十 九億大阿羅漢皆於佛前取籌護法 住壽於世界東方弗婆提渚麥渚師子渚閻浮渚大閻浮渚跋提梨 伽處罽賓乃至阿耨大池諸賢聖等 皆住守護佛法若言摩訶衍是魔所 說者則爲佛法之大患也諸賢聖等 悉應遮斷是故當知言魔說者皆是 妄語空作斯說又大菩薩諸賢聖等 皆護大乘是摩訶衍紹三寶種不令 斷絕
【문】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만약에 마하연이 삼보의 종성이라면 모두 보살과 성문을 옹호하여야 하는데, 지금 여기서는 어찌하여 대승을 비방하는 자를 막아 저지하지 않는 것인가? 이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악도로 취향해 가지 않도록 하고, 불법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답】업보는 결코 끊어 없앨 수 없다. 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결정적으로 증장하는 것이요, 둘째는 결정적으로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보살이나 성문 현성이 멸하여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업을 지으면 반드시 과보를 받게 되니 구제받거나 그치게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구가리(瞿迦離)는 『마하연경(摩訶衍經)』이 악마가 설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는데, 이 비구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구할 자가 없을 것이다.
017_0669_a_15L問曰如汝所說若摩訶衍是三 寶種皆悉擁護菩薩聲聞如今云何 於誹謗大乘者何不遮止使斯人輩 不墮地獄不趣惡道不壞佛法答曰 業報決定不可除斷業有二種一者 決定增長二者決定受報非諸菩薩 聲聞賢聖所能除滅造作惡業決定 受報不可救止如瞿迦離比丘誹謗 摩訶衍經是魔所說當知是人必墮 地獄無能拔者
017_0669_b_01L【문】 당신은 마하연을 비방하면 악도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 또만 거친 말[麤言]이어서 나는 아직 믿을 수 없다.
【답】그대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마하연을 악마가 말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곧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고 또한 일체 중생이 커다란 적이 되며, 말한 것이 지극히 거칠고 모질어 응당 악구(惡口)의 선하지 못한 대가로 중한 과보를 받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게를 설하셨다.
017_0669_b_01L問曰汝言謗摩訶衍 能入惡道亦是麤語我未信耶答曰 汝言佛說摩訶衍是魔語者卽是誹 謗三世諸佛亦是一切衆生大怨言甚麤獷當受惡口不善重報如佛 偈說

인간은 세간에서 살아가는 동안
마치 도끼를 입 속에 지니고 있는 것과 갈아
스스로 그 자신의 몸을 베어 해치니
이는 모두 악업으로 말미암는다.
017_0669_b_06L人生於世閒
如斧在口中
自斬害其身
斯皆由惡業

그대가 마하연도 이와 마찬가지로 거친 말이라고 비방하더라도 이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다만 그대로 하여금 비방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이익을 얻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병이 난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훌륭한 의사가 그 병을 진찰한 다음에는 음식을 금하거나 끊는 일에 관해 들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대를 가엾고 불쌍히 여겨 허망하게 꾸며낸 말로 ‘마하연은 악마가 한 말’이라고 한 것이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이미 마하연을 설하셨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응당 마하연을 설할 것이며,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지금 마하연을 설하신다. 이것을 ‘비방을 막아 끊는 마하연론’이라 한다. 보살은 대승을 비방하는 것을 끊는다. 따라서 법을 연설하는데 있어 맨 먼저 「마하연론품」에 들어간다.
017_0669_b_08L汝謗摩訶衍如是麤語非我所說今但欲令汝不起誹謗爲利益故便 作是說猶如病人食不應食良醫瞻 禁斷不聽爲憐愍汝妄作綺語摩訶衍是魔所說過去諸佛已說摩 訶衍未來諸佛當說摩訶衍現在諸 佛今說摩訶衍是名遮斷誹謗摩訶 衍論菩薩爲斷誹謗大乘是故演說 初入摩訶衍論品
017_0669_c_01L【문】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 대승을 비방하지 못하도록 막았는데, 지금 무엇 때문에 마하연행에 들어가는가?
【답】보살이 우선 종성(種性)을 갖추고 선행(善行)을 수순하면 깨달아 이해함이 광대해지고 내적인 마음이 광대해지며 계(界)의 영역이 광대해지고 종성이 광대해진다. 종성이 이미 구족되면 그 마음이 조화되어 부드럽고 점차적으로 번뇌를 여의며 탐진치가 적어지고 모든 선(善)을 닦기를 좋아하고 부지런히 힘써 보살의 대승법을 외워 익힌다.
이와 같은 중생은 육근(六根)이 광대하여 커다란 원(願)을 발현할 수 있으므로 불도를 구하려고 한다. 그 종성의 양상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하근하성(下根下性)은 도에 대해 뜻을 일으키는 것이 하(下)이고 원(願) 역시 하이다. 중근중성(中根中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중이고 원 역시 중이다. 상근상성(上根上性)은 도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도 상이고 원 역시 상이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께서는 그 근성(根性)에 수순하시어 자애로운 마음으로 분별하여 가르치신다.
017_0669_b_17L問曰汝已遮他不 令誹謗今當云何入摩訶衍行答曰 菩薩當先具種性隨順善行所解廣 內心廣大界分廣大種性廣大旣具足其心調柔漸損煩惱少貪瞋 好修諸善精勤誦習如是衆生六 根廣大能發大願欲求佛道種性相 如佛所說下根下性下發道意願亦下中根中性中發道意所願亦 上根上性上發道意所願亦上故諸佛隨其根性則以慈心分別教
【문】 만약에 모든 중생들이 각기 별도의 근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그 근성에 따라 법을 설해야 하는가?
【답】상근기의 중생을 위해서는 보살의 심오하고 오묘한 법장(法藏)을 설한다. 그 근성이 보살행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살장을 설하는 것이다.
017_0669_c_05L問曰若諸衆生各有根性云何應 爲隨根說法答曰上根衆生爲說菩 薩深妙法藏以知根性堪菩薩行故 說菩薩藏
【문】 보살장(菩薩藏)이란 어떤 지(地)에 머무르는 것인가?
【답】열 가지 종류의 행(行)이 있으며 해탈지(解脫地)에 이른다. 보살장을 청문(聽聞)할 수 있을 때에는 열 가지 종류의 법행(法行)을 얻을 수 있고, 해탈행을 떠나 곧바로 보살의 행으로 들어갈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의 해탈행을 닦는 것이니, 많든 적든 다 닦아 익힌다. 둘째는 보살이 지니고 있는 법이 많든 적든 모두 베껴 쓰는 것이다. 셋째는 보살장의 법이 많든 적든 다 공양하는 것이다. 넷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펼쳐 읽는 것이다. 다섯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섯째는 보살의 법이 말든 적든 다 받아 지니는 것이다. 일곱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익혀 외워 점차적으로 이로움에 통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다 분별하여 펼쳐 설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모두 사육하여 그 의미를 잘 알아내는 것이다. 열째는 보살의 법이 많든 적든 혼자 있는 처소에서 사유하고 닦아 지혜를 쌓아 늘리는 것이다. 이상을 보살의 십행(十行)이라 한다. 여덟 번째 것은 보살의 문혜(聞慧)라 하고, 아홉 번째 것은 보살의 사혜(思慧)라 하며, 열 번째 것은 보살의 수혜(修慧)라고 한다.
017_0669_c_08L問曰爲菩薩藏者當住何 答曰有十種行到解脫地能聽菩 薩藏時得十種法行離解脫行便得 入於菩薩之行何等爲十一者修菩 薩解脫行若多若少皆悉修習二者 菩薩所有之法若多若少皆悉書寫 三者菩薩藏法若多若少皆悉供養 四者菩薩之法若多若少皆悉轉讀五者菩薩之法若多若少皆悉聽受 六者菩薩之法若多若少皆悉受持 七者菩薩之法若多若少皆悉習誦 漸漸通利八者菩薩之法若多若少 皆悉爲他分別演說九者菩薩之法 若多若少皆悉思惟善解義趣十者 菩薩之法若多若少獨處思惟修集 增明是名菩薩十行第八者是菩薩 聞慧第九者是菩薩思慧第十者是 菩薩修慧
017_0670_a_01L【문】 보살이 이러한 문ㆍ사ㆍ수를 이미 얻었다면 어떤 행으로 들어가게 되는가?
【답】이미 지(地)를 얻었으면 해탈문으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차례에 의해 문ㆍ사ㆍ수가 생하면 법계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지(地)에 대해 얻는 바가 있으면 세 가지 해탈문을 닦는다.
017_0670_a_02L問曰菩薩得是聞思修已 當入何行答曰爲得己地入解脫門 如是次第聞思修生爲見法界得於 己地修三解脫門
【문】 무엇을 세 가지 해탈문이라고 하는가?
【답】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을 행하는 것이다.
017_0670_a_05L問曰何等名爲三 解脫門答曰行空無相無願
【문】 공이란 무엇인가?
【답】나[我]와 남[人]과 중생(衆生)에는 자체(自體)가 존재하지 않아, 그 성(性)과 상(相)이 항상 적정(寂靜)함을 관조하는 것이다.
017_0670_a_06L問曰何爲空答曰觀我人衆生無有自體 性相常寂
【문】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답】마땅히 십이인연에 들어가면 된다.
017_0670_a_08L問曰云何解了答曰當入 十二因緣
【문】 이 공해탈은 십이 인연법과 다른가?
【답】공과 십이인연은 똑같아서 다른 모습이 아니다. 공이 곧 십이인연이고 십이인연이 곧 공이다. 왜냐하면 인연은 가유(假有)로 일어나는 까닭에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존자 응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0_a_09L問曰是空解脫異十二因 緣法耶答曰空與十二因緣等無異 空卽十二因緣十二因緣卽是空 何以故因緣假起無有自體如尊者 龍樹所說偈

십이인연이 공이라는 것을
내가 지금 설명하고자 하니
가명인(假名因) 인연법,
이것이 곧 중도이네.
017_0670_a_13L十二因緣空
我今欲解說
假名因緣法
此卽是中道

일체의 모든 법은 다 공적하다. 왜냐하면 모두 인연에 속하여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017_0670_a_15L一切諸法悉皆空寂何以故皆屬因 無自性故
【문】 만약에 일체법이 인연생이라면 무엇 때문에 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이른바 인연은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설하는 것이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면 체성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멸함도 없고 무생무멸이니, 즉 진정한 적멸이다. 적멸이란 곧 일체 모든 법의 적멸을 말하는 것이니, 따라서 나는 일체제법에는 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017_0670_a_17L問曰若一切法因緣生 何故說言無體性耶答曰所言因 世諦故說第一義諦則無體性亦 無有生旣無有生亦無有滅無生無 滅卽眞寂滅眞寂滅者卽是一切諸 法寂滅是故我說一切諸法無有體
017_0670_b_01L예를 들면 『노모경(老母經)』 가운데서 세존께서 누이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사람과 북채와 북을 원인으로 해서 갖가지 조건[緣]이 화합하여 소리가 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소리는 과거ㆍ현재ㆍ미래세에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안과 밖 그리고 중간에도 있지 않으니, 그 성품[性]이 공적하여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누이여, 지금 마땅히 알아야만 하나니, 일체 모든 법의 체성도 역시 그러하다.”
017_0670_a_23L如『老母經』中世尊所說譬如因 人因桴因鼓衆緣和合便有聲出此之聲不在三世亦非內外及在中 其性空寂無生無滅姊今當知一 切諸法體性亦然
『노모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스스로 공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보살은 무량겁 동안 복덕을 쌓고 선정(禪定)과 지혜를 닦아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 생과 멸이 모두 공적함이 마치 허깨비ㆍ불꽃ㆍ건달바성과 같음을 잘 관찰하여 모든 것이 꿈속에서 변화된 것과 같다고 여긴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017_0670_b_04L『老母經』中佛自說 是故菩薩於無量劫修集福德禪定 智慧悉入三解脫法門善觀生滅皆 悉空寂猶如幻乾闥婆城皆同夢 如佛說言

맨 먼저 십이인연이나 중생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찰나의 경각에 얻는 것이
허깨비나 불꽃이나 건달바성과 같네.
017_0670_b_08L初覺十二緣
衆生皆悉空
剎那頃所得
幻炎乾闥城

이러한 순서대로 공해탈문에 들어가면 그 마음이 유쾌하고 즐거우며 그 의의와 이익을 체득할 수 있다.
017_0670_b_10L如是次第入空解脫門其心快樂得義利
【문】 외도가 각기 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면 어떻게 이를 막아 끊을 수 있는가?
【답】가령 외도가 내외(內外)의 색(色)에 대하여 모두 물들어 집착하면, ‘나[我]’라든가, ‘나의 것[我所]’이라고 취착하여 생사의 흐름에 따르게 된다. 그 자신[我]에 대해 집착함이란 자신이 음식이나 재물의 이로움을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이며, 이와 같은 갖가지는 아견(我見)이나 중생견(衆生見) 등에 의지한다. 저 ‘나’와 ‘나의 것’이란 자신이 조작하여 ‘이것은 나의 항아리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칭 등은 아소(我所)에 의지한다. 그가 업을 지어 동일하든, 다르든, 동일하면서 다르든,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든 취하여 치우치게 집착하면, 단지 언어로써 세상을 속여 미혹하고 결국은 자신의 몸에까지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생사에 유전하고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법의 자성이 공임을 깨닫지 못한다.
017_0670_b_12L問曰外道各著我見云何遮 答曰如是外道於內外色皆生染 取我我所順生死流彼著我者能施與飮食財利如是種種依止我 衆生等見彼我我所者我之造作 是我甁物如是等名依止我所彼所 作業若一若異若一異若不一不異 取著偏執但以言語誑惑於世及以 己身以是義故流轉生死不解因緣 諸法性空
017_0670_c_01L【문】 이 모든 외로움은 인연을 이해하지 못하여 네 가지 집작을 일으킨다는데, 무엇이 그 허물인가?
【답】승거(僧佉)4)가 말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헤아리는 허물이 있으니, ‘지음[作]’과 ‘지어진 것[作者]’이 동일하고 ‘나눔[分]’과 ‘나누어진 지분[有分]’이 동일하다고 여기는 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동일하다고 한다. 우루거(優樓佉)5)는 다르다고 헤아린다. 니건타(尼健陀)6)는 동일하거나 다르다고 헤아린다. 약제자(若提子)7)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헤아린다. 일체의 외도과 마타라(摩他羅)8)등은 각기 다르게 헤아리지만 모두 다 이와 같은 네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017_0670_b_21L問曰是諸外道不解因緣 而起四執何者爲過答曰僧佉所說 有計一過作與作者一相與相者一 分與有分一如是等皆名爲一優樓 佉計異尼健陁計一異若提子計非 一非異一切外道及摩他羅等異計 皆悉不離如是四種
【문】 승거인은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하다고 말하는데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답】말에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지음은 인(因)이고 지어진 것은 과(果)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일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다른 것을 동일하다고 말한다면 지어진 것은 지음이 있기 때문이다. 지음과 지어진 것은 전후(前後)의 시간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017_0670_c_04L問曰僧佉人言 作與作者一有何過答曰語有二故 不名爲一作是因作者名果是事不 云何說一若實異言一此則顚倒 何以故以作者卽是作故作與作者 前後時異云何爲一
【문】 전과 후가 하나의 동일한 공용(功用)이 있는 경우, 즉 예를 들면 종자가 싹을 틔울 때 비록 먼저와 나중이 있더라도 다만 유사한 상속(相續)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답】이 역시 허물이 있다. 만약에 지음이 먼저 있고 지어진 것이 나중에 있거나 생겨남과 아직 생겨나지 않음이 다르다면 어떻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유하자면 어떤 항아리가 있다고 할 경우 끝내 서로 다른 물질을 한꺼번에 얻을 수 없으며, 소의 뿔이 서로 인(因)이 되어 생겨난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지음과 지어진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한 것이 아닌 까닭은, 소리가 다르고 뜻이 다르며 인연이 다르고 때[時]가 다르며 팔자가 다르고 체(體)가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을 동일한 하나로 본다면 많은 허물이 있게 된다. 만약에 단지 동일한 하나일 뿐이라면 두 가지 명칭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소리ㆍ뜻ㆍ체(體)ㆍ양상[相]의 선후가 다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한 것이라면,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는 도공은 한꺼번에 바퀴ㆍ노끈ㆍ우유제품 등의 사물을 모두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하나의 동일함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017_0670_c_09L問曰前後一用 如種生芽時雖前後但相似相續故 名爲一答曰此亦有過若作在先者在後未生異云何爲一譬如有 甁終不得竝如牛角不相因生作以 作者亦復如是復次所以作與作者 不得爲一聲別義別因緣別時別別體別若如是者則有多過若但一 不應二名聲義體相先後異故得爲一若作與作者一如取泥團輪繩酥酪等物皆悉應得以不得 當知非一
017_0671_a_01L예를 들면, 나의 마음은 동일한 하나라고 할 수 없다. 만약에 이것이 동일한 하나라고 한다면 허물이 있다. 마음은 항상함이 없기 때문에 나 역시 항상함이 없다. 이러하기 때문에 지음[作]과 지어진 것[作者], 상(相)과 상자(相者), 양(量)과 양자(量者), 분(分)과 분자(分者)는 모두 함께 논파된다. 존재하는 동일한 하나의 항아리 등도 역시 응당 논파되어 부정된다. 예를 들면 색(色)과 항아리가 동일하다거나 흰 무명천ㆍ푸른 잎사귀ㆍ길고 짧음ㆍ네모와 둥근 원 등 이와 같은 사물들이 응당 부정된다.
017_0670_c_20L如我心不得爲一若是 一者心無常故我亦應無常以是故作與作者相與相者量與量者分與 分者悉同是破有一甁等亦應破遮 如色與甁一及白㲲靑葉長短方圓如是等物亦悉應遮
【문】 비사사(比舍師)9)는 다르다고 헤아리는데,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다고 해도 역시 큰 허물이 있다.
017_0671_a_02L問曰比舍師計 有何過耶答曰若作與作者異有大過
【문】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그것을 설명해주기 바란다.
【답】만약에 항아리와 진흙이 다르다면 항아리를 만들 때 무명실을 취할 수 있고, 무명천을 짤 때 진흙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아리를 만들때 실제로는 무명실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항아리와 진흙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진흙덩어리는 미세한 흙먼지에 의해 이루어져 있고 항아리는 진흙덩어리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만일 항아리가 진흙과 다르다면 항아리는 몸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흙덩어리가 항아리를 이루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진흙덩어리는 미세한 흙먼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로부터 항아리가 만들어졌다. 만약에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다 해도 진흙과 미세한 흙먼지와 항아리는 단지 그 명칭만 다를 뿐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하기 때문에 지음과 지어진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무명실을 바탕으로 무명천이 이루어지고 부들[蒲]을 바탕으로 자리[席]가 이루어지는 것 등, 모든 것이 이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017_0671_a_04L問曰云何爲過唯願說之若甁與泥異作甁時應取縷作㲲 時應取泥以作甁不取縷故當知不 復次泥團因微塵成甁因泥團成 若甁異泥團者甁則無體泥團成甁 不得爲異泥團於微塵爲作者甁爲作若作與作者異泥於微塵甁 但名異不應有二以是故作與作者 不得爲異因縷成㲲因蒲成席皆亦 同是說
또한 하나의 항아리가 다르다고 한다면 일체의 법은 무너진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에 어떤 하나의 사물이 항아리가 아니라면 항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떠난 것이고, 만약에 어떤 하나의 사물이 항아리라면 많은 항아리가 있게 된다. 어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것들 역시 존재하지 않게 되니, 이러하다면 항아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3대가 다르다고 헤아린다면 일제의 법이 무너진다.
017_0671_a_13L復次若有一甁異則一切 法壞何以故若有一非甁離應有甁 若有一是甁則爲多甁有一非故亦應非是則無甁以是義故汝計異 者卽壞一切法
017_0671_b_01L【문】 이와 같이 말한다면 일체의 법은 무너뜨리지 알게 된다. 왜냐하면 어떤 하나의 사물을 의지하여 항아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하나의 사물이 존재하면 항아리 등 모든 사물이 성립하게 된다.
【답】만약에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가 항아리와 합해지면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는 응당 항아리이다. 만약 항아리가 존재하는 어떤 사물 하나와 합해지면 항아리 역시 응당 존재하는 어떤 사물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물 하나와 합해지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또한 어떤 것이 동일하거나 다르다면 마치 흰색 무명천과 같은데 이 또한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흰색이 곧 무명천은 아니며 무명천 역시 곧 흰색은 아니기 때문이다. 흰색과 무명천은 다르다. 다른 사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령 무명천을 태울 때 흰색은 응당 불타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무명천을 태울 때 흰색 또한 타오른다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지금 사물이 다르고 그 모습들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 일은 옳지 않다. 그대는 앞서 여섯 가지 일이 각기 다르다고 말했었는데, 이 일들은 응당 부정된다.
017_0671_a_17L問曰如此說者非壞 一切法何以故有一依甁立是故有 一甁等皆成答曰若有一與甁合一應是甁若甁與有一合甁亦應名 有一以有一合故不得爲異復次有 一異者猶如白㲲此亦有過何以故 白則非㲲㲲亦非白白與㲲異餘物 亦然如燒㲲時白不應燒若㲲燒時 白亦燒者不得爲異汝今以言物異相 此事不然汝先言六事各異此則 應遮
【문】 니건타는 앞서 동일하거나다르다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그대가 말하는 이른바 동일하거나 다르다는 말은, ‘지음과 지어진 것이 동일한 하나’라거나 혹은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거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많은 허물이 있다.
017_0671_b_04L問曰尼健陁先言一異有何過 答曰汝所謂一異者或說作以作 者一或說作以作者異此亦多過
【문】 어떤 허물이 있는가?
【답】만약 지음이 곧 지어진 것이라면 이런 일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지음과 지어진 것이 다르다면 이 일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인(因)과 과(果)가 서로 각기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하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여러 인연이 모여 과를 이루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짓는 모습[作相]과 지어진 모습[作者相]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017_0671_b_06L有何過耶答曰若作卽是作者則不成若作與作者異事亦不成以故因果各異云何爲一以衆緣成 果故不得爲異作相作者相亦皆如
【문】 가령 항아리의 모습[相]은 파괴될 수 있으나 그 체(體)는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다르다고 할 수 있으니, 제가 존재하는 것은 볼 수 있으나 그 모습은 파괴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항아리를 파괴할 때 본래 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다르다고 할 수 없다.
【답】만약에 동일한 하나라고 말하면 승거의 견해와 같아 논파된다. 만약에 다르다고 한다면 비사사(比舍師)의 견해와 같아 논파된다. 잎사귀와 푸른색, 무명천과 흰색 또한 모두 함께 논파된다.
017_0671_b_11L問曰如甁相破而體不破以體不 破故亦得爲異以見體在而相破故 若破甁時本成體無不得爲異答曰 若言一同僧佉破若言異同比舍師 如葉靑㲲白亦皆俱破
【문】 약제자(若提子)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헤아리는데,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습니까?
【답】앞의 세 가지 헤아림에는 각기 집착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대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면 이는 응당 다르다는 것이고, 만약에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이는 곧 동일하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가? 만약에 집착할 것이 없는데 허망하게 존재한다고 말하면, 이는 곧 법상(法相)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017_0671_b_15L問曰若提 子計不一不異有何過耶答曰前三 計者各有所執汝說不一應當是異 若說不異卽應是一何所執故而言 不一不異若無所執妄有所說則壞 法相
【문】 당신이 대승을 설하면서 대승에도 역시 집착할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신도 일체의 법상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답】내가 집착한다고 말했던 것은 세간에 드러나는 것으로, 즉 인연법이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단지 전도되어서 법상을 따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017_0671_b_20L問曰汝說大乘亦無所執汝亦 應壞一切法相答曰我之所執世閒 現見是因緣法汝之所說但是顚倒 不順法相故
【문】 법상이란 무엇인데, 내가 법상을 무너뜨린다는 것인가?
【답】체와 상(相)이 없는 것이 곧 법상의 체와 상이다.
017_0671_b_23L問曰何者是法相而說 我壞法相耶答曰無體相者卽是體
017_0671_c_01L【문】 어떻게 체와 상이 없는데, 체와 상이 된다는 것인가?
【답】공하므로 체와 상이 없다고 한다.
017_0671_c_02L問曰云何無體相爲體相耶答曰 空名無體相
【문】 어떤 것을 ‘공’이라고 하는가? 유위공(有爲空)인가, 무위공(無爲空)인가?
【답】나는 어떤 뜻이 있어서 공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뜻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유(有)와 무(無)를 떠나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존자 응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1_c_03L問曰云何名空以有爲 以無爲空耶答曰我不以有義故 名空亦不以無義故名空以離於有 無故名爲空如尊者龍樹所說偈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것을 상(常)이라 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헤아리는 것을 단(斷)이라 하니,
만약에 유와 무를 떠난다면
이를 진정한 공이라 하네.
017_0671_c_06L執有名爲常
計無則爲斷
若離於有無
是名眞實空

또한 존자 용수는 『중론(中論)』에서 다음의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1_c_08L復次如龍樹『中論』中說偈

유(有)에 집착하여 그 체와 상을 취하고
무(無)에 집착하여 체가 없다고 취착하지만
유나 무에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
이것이 진실된 관찰이네.
017_0671_c_09L執有取體相
執無著無體
不存於有無
是名眞實觀

이러하기 때문에 유와 무를 떠나는 것을 공이라고 하며, 단(斷)과 상(常)을 떠나므로 중도라 한다. 만약에 이와 같은 법상을 깨달을 수 있으면 불(佛)이라 한다. 그러므로 십이인연의 뜻을 이름하여 ‘공’이라 한다.
017_0671_c_11L以是故以離有無名空離斷常故名 爲中道若能覺悟如是法相故名爲 是故十二因緣義名之爲空
【문】 십이인연은 어떻게 증명해야 그것이 공이 됨을 알 수 있는가?
【답】항아리에 비유하자면 진흙덩어리ㆍ물레ㆍ노끈 및 도공 등 여러 조건이 화합한 후에야 항아리를 이룬다. 진흙덩어리를 곧 항아리라 할 수 없고, 또한 진흙덩어리를 떠나서도 항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다만 가명으로 항아리라고 말할 뿐 뭇 인연에 속하여 그 체와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체와 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남도 없으며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체와 상이 적멸하다.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모든 법이 결정적으로 자체(自體)가 존재한다면 인연에 가탁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상(自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항아리는 없는 것이며, 항아리가 없기 때문에 일체법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존자 제바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1_c_14L問曰 十二因緣以何爲證而知爲空答曰 譬如甁泥團輪繩及以陶師衆緣和 然後成甁非卽泥團是甁亦非離 泥團有甁但假名說甁屬衆因緣有體相無體相故無生無生故體相 寂滅因緣所成是故無體若諸法定 有自體不假因緣則無是處以無自 相故無甁甁無故一切法亦無如尊 者提婆所說偈
017_0672_a_01L
어떤 하나의 법이 만약에 체가 존재한다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일체법은 본래 없으니
인연화합한 것이므로 다 공하다.
017_0671_c_23L一法若有體
諸法亦復然
一切法本無
因緣皆悉空

진실로 어떤 하나의 법을 관찰해 보면
모든 법은 따로 두 가지 모습이 없네.
진정으로 이것이 공임을 깨달으면
일체가 다 공임을 알아볼 수 있네.
017_0672_a_02L眞實觀一法
諸法不二相
諦了是空已
則見一切空

【문】 인연에 의해 생겨난 법이 곧 체와 상인가?
【답】그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체와 상이 존재하든 체와 상이 존재하지 않든 그대가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인연법이 체와 상이 된다면 인연법은 다른 것을 따라서 생겨나는 것인데, 어떻게 체가 존재하겠는가? 체와 상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성품[性]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므로 인연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에 인연에 속하면 자성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니, 비유하자면 빌린 것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연법은 다른 것들을 빌려 성립하는 것이어서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용수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017_0672_a_03L問曰因緣生法卽是體相答曰是事 不然何以故若有體相若無體相汝所及如汝所說以因緣爲體相者 因緣從他生故云何有體言體相者 自性而起不屬因緣若屬因緣則無 自性譬如假借非自有也是故因緣 假他而成無有自體如尊者龍樹所 說偈

인연에 의해 생겨난 법은
자성이 존재하지 않네.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체와 상이 있을 수 있으리오.
017_0672_a_11L因緣所生法
是卽無自性
若無自性者
云何有體相

【문】 모든 법의 체와 상은 세간에 드러나 보이는데 어떻게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답】이 말은 옳지 않다. 무릇 어리석은 이들의 망령된 견해이니, 이는 믿을 수 없다. 생멸의 법은 모두 공이다. 생멸의 흐름은 빨라 잠시도 정지할 때가 없이 유사하게 상속하기 때문에 허망하게도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비유하자면 등잔이 불꽃과 같으니 생각마다 생겨나고 멸하지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의 불꽃으로 여긴다. 이것은 또한 마치 준마와 같이 달리는 물의 흐름ㆍ그림자ㆍ음향ㆍ마술사가 만들어 낸 불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마술이나 마술로 지어진 것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허망되게 보는 자는 그것들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실재하는 것들이라면 아귀는 물을 불로 보지 않을 것이고, 모래와 자갈을 피와 고름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중생은 선악에 있기 때문에 그 각각의 업에 따라 보게 된다.
017_0672_a_13L問曰諸法體相世閒現見云何無耶 答曰是事不然凡愚妄見此非可信 生滅之法皆悉是空生滅流速無暫 停時相似相續故妄見爲實猶如燈 炎念念生滅凡夫愚人謂爲一炎如駃流如佛所說幻及幻 者都無所有而妄見者謂之爲實
017_0672_b_01L만약에 마음이 깨끗한 근기가 훌륭한 중생은 공하다고 볼 것이고, 아귀와 야차는 멀리서 물로 보나 가까이에 이르면 불로 보고 의흑을 낸다. 만약에 사물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없고, 두 가지 견해가 있다면 실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지 허망한 견해일 뿐이니, 일체 모든 법은 다 그 체와 살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체와 상이 없기 때문에 모두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는다.
017_0672_a_20L是實者餓鬼不應見水爲火沙石膿 而諸衆生以善惡故隨業所見有淨心利根衆生則能見空夜叉餓 鬼遠見其水近則見火便生疑惑物有實不應二見以二見故則知非 但妄見故當知一切諸法皆無體 以無體相故都無生滅
【문】 만약에 일체법이 생겨남이나 멸함이 없다면 어떻게 오고 감이 있어서 단(斷)과 상(常)의 허물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답】종자[種]를 봄으로써 오고 감을 헤아리지만 만약에 법이 공하다는 것을 증득하면 단과 상을 떠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종자(種子)를 바탕[因]으로 하여 싹ㆍ줄기ㆍ가지ㆍ잎사귀ㆍ꽃ㆍ열매가 차례대로 존재하지만, 싹이 생겨났기 때문에 종자가 멸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와 같이 끊이지 않고 나아가 열매가 생겨났기 때문에 꽃은 멸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상(無常)의 허물에 관해서 존자 제바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2_b_04L問曰若一 切法無生無滅云何得有來去計常過答曰以見種子故便計來去得法空則離斷常如因種子有芽莖 枝葉花果次第而見芽生故種子滅 是以不斷乃至果生故花滅亦無常 如尊者提婆所說偈

모든 법이 상속하여 존재하면
이는 단멸함이 아니며
인(因)이 멸하는 까닭에 과(果)가 생겨나면
항상하다고 할 수 없네.
017_0672_b_10L諸法相續有
則非是斷滅
因滅故果生
不得名爲常

이러하기 때문에 인연법이 공함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곧 단과 상을 떠난다.
017_0672_b_12L以是故見因緣空卽離斷常
017_0672_c_01L【문】 어리석은 인연을 행한다면 어떻게 단과 상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가?
【답】무명(無明)을 인(因)하여 선과 악의 행이 존재하며, 나아가 생(生)을 인하여 노(老)와 사(死)가 존재한다. 범부는 인연의 상속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허망되이 실재한다고 헤아린다. 무명은 그 체가 공하기 때문에 행(行) 역시 그 체가 공하며, 나아가 생의 체가 공하기 때문에 노와 사의 체도 공하다. 세간의 가명(假名)은 상속이 존재하기 때문에 단멸이라는 허물이 없으며 생각마다 머 물지 않기 때문에 항상함이라는 허물이 없다. 범부중생은 이곳에서 죽어 저곳에서 태어나니 유사하게 상속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서는 어떤 중생도 이곳에서 죽어 저곳에서 태어나는 일이 없다. 단지 세제(世諦)이기 때문에 가명으로 설한 것일 뿐이다. 식(識)이 종자이면 행업(行業)은 밭이다. 교만은 흙이 덮는 것이고 무명(無明)은 분뇨이며 애(愛)는 물을 주어 적시는 것이다. 부모의 정기(精氣)와 여러 인연조건들이 화합하면 명색(名色)이라는 싹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명색에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017_0672_b_13L問曰因緣行云何而得離於斷常答曰無明故有善惡行乃至因生故有老 凡夫不解因緣相續妄計爲實明體空故行亦體空乃至生體空故 老死體空以世閒假名有相續故無 斷滅過念念不住無有常過以凡夫 衆生死此生彼相似相續故如佛所 第一義中無有衆生死此生彼以世諦假名說故識爲種子行業爲 以慢土覆無明爲糞愛水爲潤母精氣衆緣和合生名色芽是故名 色無有自體
비유하자면 상의 다리[床脚]와 같으니 상(相)을 빌려 사용하는 것이다. 수태된 첫 명칭은 가라라(歌羅羅)이고, 두 번째는 안부타(安浮陀)라 이름하며, 세 번째는 육단(六段)이라 이름하고, 네 번째는 견실(堅實)이라 이름하며, 다섯 번째는 제포개장(諸炮開張)이라 이름하고, 여섯 번째는 촉(觸)이라 이름한다. 태어나는 법의 차례는 상(相)을 빌려 존재하므로 단(斷)이라 하지 않는다. 보살은 인연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곧 그것이 공함을 안다. 인연법이 공하기 때문에 일체법이 공하며, 법이 공함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단이나 상의 허물이 없다. 예컨대 『출태경(出胎經)』 중에서는 다음의 게송을 설하고 있다.
017_0672_c_02L猶如牀腳相假而用名歌羅羅二名安浮陁三名肉段名堅實五名諸炮開張六名爲觸法次第相假而有不名爲斷菩薩善 解因緣法故卽知其空以因緣空故 一切法空解法空故無斷常過如『出 胎經』中佛所說偈

가유(假有)의 명자(名字)를 따라
모든 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명자 가운데는 어떤 법도 없으니
이것이 바로 진실이네.
017_0672_c_08L隨假名字
而得諸法
名中無法
是則眞實

이렇기 때문에 언설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하여 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명자를 따라 법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법에는 많은 체가 존재할 것이다. 마치 공법(空法:비어 있는 법)처럼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것과 같다.
017_0672_c_10L以是故非言說故有法若隨名字有 諸法者法則多體猶如空法無一
【문】 만약에 일체의 법이 체가 없다면 당신이 말하는 것도 허물이 있다. 현재 당신이 말하는 그것이 나타나 보이기 때문이다.
【답】만약에 법이 존재하는 경우라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물이 된다. 하지만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어찌 언어에 허물이 있겠는가? 때문에 모든 법은 처음과 같이 나중도 역시 그렇게 공하다. 만약에 모든 법이 결정적으로 그 체와 사이 존재한다면 나중에 열반할 때 응당 단멸되어야 한다. 만약에 앞서 공하지 않은 것이 나중에 공하다고 말한다면, 이는 잘못된 견해이며 정법을 무너뜨리고 또한 해탈할 수도 없다. 존자 제바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2_c_13L問曰若一切法無體汝言有過見有故答曰若法是有言無則過旣非有云何言過以是故諸法如初 後亦復然若諸法定有體相後涅槃 時應是斷滅若先非是空後言空者 則是邪見壞於正法亦無解脫如尊 者提婆所說偈

처음에는 공하지 않은 것을 나중에 공하다고 여기고
내가 마땅히 열반을 얻었다고 하면
이것은 그릇된 견해로써 열반이 아니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신 바 있네.
017_0672_c_19L不空而見空
我應得涅槃
邪見非涅槃
如來之所說
017_0673_a_01L
모든 법은 본래 공하기 때문에 항상 공하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부처님께서 보셨던 공상(空相)은 지금도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내가 인연법이 공하다고 말한 것은 허물이 없다. 이와 같이 먼저 제일의제를 세우고 나중에 분별세제(分別世諦)를 설하니, ‘나’와 ‘중생’, ‘지음’과 ‘지어질 것’ 나아가 ‘동일함’과 ‘다름’이 아무런 허물이 없다. 존자 용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2_c_21L 諸法本空故恒見是空如過去佛所 見空相今亦復然是故我說因緣法 是則無過如是先立第一義諦分別世諦我及衆生作與作者乃至 一異則無過失如尊者龍樹所說偈

분별제(分別諦:세제)를 설하지 않으면
실제(實諦:제일의제)를 얻을 수 없고
만약에 실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을 수 없네.
017_0673_a_03L不說分別諦
不得於實諦
若不得實諦
則無得涅槃

또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3_a_05L復次說偈

모든 부처님들께서 펼쳐 설하신 법은
항상 이제(二諦)에 의존하나니
세제로부터 분별함과
그리고 제일의제라네.
017_0673_a_06L諸佛演說法
常依於二諦
分別於世諦
及與第一義

만약에 진속(眞俗) 두 가지 성제(聖諦)를
잘 분별할 수 없어서
이와 같다면
불법의 깊고 심오한 뜻을 알지 못하리.
017_0673_a_08L若不能分別
眞俗二聖諦
如是則不知
佛法甚深義

따라서 인연법이 공한 것을 진여ㆍ법성ㆍ실제(實際)라 이름하며, 이는 제일의선(第一義禪)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인연법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 곧 공해탈문이다. 만약에 공을 보면 모든 법의 상(相)을 보지 않으므로 이를 무상해탈문이라 한다. 상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원하여 구하는 바가 없으니, 이를 무원해탈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해탈문에 안주하여 식(識) 종자가 삼계 내에서 다시는 명색(名色) 등의 싹을 생하지 않으며, 식이 취착함이 없어 삼유(三有)10)의 고(苦)가 멸한다. 삼유의 고가 멸하기 때문에 적멸열반을 얻는다. 존자 제바는 다음의 게송을 설하였다.
017_0673_a_09L是故因緣法空名爲眞如法性實際 是名修習第一義禪見因緣空卽是 空解脫門若見空者則不見諸法相 是名無相解脫門見無相故無所願 是名無願解脫門安住如是三解 脫門識種子於三界內則更不生名 色等芽識無取著滅三有苦三有滅 得寂滅涅槃如尊者提婆所說偈

식(識)은 종자의 뜻이니
육처(六處)를 유행(遊行)하네.
만약에 모든 객진[塵]이 공하다고 보면
존재의 세계[有]라는 싹은 단멸되네.
017_0673_a_17L識是種子義
遊行於六處
若見諸塵空
有芽則斷滅
017_0673_b_01L
【문】 보살이 공에 이르러 생사로부터 벗어나는데, 어떻게 성문보다 뛰어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
【답】보살은 세간의 이익과 출세간의 이익을 얻어 이염지(爾炎地)를 건너기 때문에 비록 세간을 벗어나더라도 세간에 머물러 중생을 교화할 수 있으나, 성문은 그렇지 않다. 생과 사를 두려워하여 신속히 멸도(滅度:열반)에 이르기를 구한다. 출세간의 도(道)로 법계를 보고, 법계를 본 다음에는 열반의 언덕에 도달한다. 그러나 보살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의 고를 보고 대비심을 일으켜 중생을 교화하여 견고하게 안주하고 장엄하게 마기 위하여 아승기겁 동안에 출세간의 도를 닦아 일념의 경각에 일체의 법계를 관조하고, 법계를 관조한 후에는 중생을 위하는 인연 때문에 도중에 열반의 과를 취하여 증득하지 않으며 중생들을 인도하여 해탈시킨다. 부처님께서 『아뇩대지경(阿耨大池經)』에서 말씀하셨다.
017_0673_a_19L問曰菩薩度空出於生死云何能得 勝於聲聞答曰菩薩得世閒利出世 閒利度爾炎地故雖出世閒能住世 閒教化衆生聲聞不然怖畏生死速滅度以出世閒道見於法界見法 界已到涅槃岸菩薩不爾何以故薩見衆生苦起大悲心爲欲度彼堅 住莊嚴於阿僧祇劫修行出世閒道 於一念頃觀一切法界觀法界已生緣故不取果證乃能度脫如佛『阿 耨大池經』中說
“비유하자면, 두 사람이 산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 하자. 한 사람은 힘이 있고 선교방편이 있었다. 그 오묘한 방편 때문에 비록 뛰어내렸어도 다시 일어나 산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다른 한 사람은 힘이 부족하고 또한 방편이 없어서 한번 뛰어내려 떨어진 뒤에는 다시 일어날 수 없었다. 보살은 무위법 가운데서 취하여 증득하지 않으니, 훌륭하고 오묘한 방편을 지닌 사람만이 산의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것과 같다. 성문인은 무위를 증득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마치 방편이 적은 사람이 굴러 떨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017_0673_b_07L譬如二人欲墮山頂 一人有力善巧方便以巧便故雖墮 還起得昇山頂一人力少復無方便 卽住退墮不能復起菩薩於無爲法 中不證不著如善巧人得昇山頂聞之人以證著無爲故如少方便者 墮而不起
비유하자면, 어떤 장자에게 오로지 아들 하나만이 있었는데, 어렸을 적에 집을 나가 배를 곯고 풍족치 못한 형편으로 멀리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십 년의 세월을 보냈다. 한편 장자는 한 커다란 성 안에 살았는데, 그는 큰 부자여서 값비싼 보배를 많이 쌓아두고 있었다. 장자는 점차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였기 때문에 아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017_0673_b_13L譬如長者唯有一子以飢 儉故遠至他國經數十年長者後時 住一大城其家巨富多積珠珍漸得 傭力故還來本國
보살에게는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기 동안의 공덕이 있어서 이염지(爾炎地)에 이르고 열반을 향하지만, 중생을 애민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 생사에 들어가 아승기겁 동안 오래도록 애쓰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한다. 보살마하살의 수레[乘]는 커다란 수고스러움의 수레이니, 위없는 과(果)를 구함이 불가사의하여 일체의 성문ㆍ벽지불을 넘어서며 일체의 공덕과 지혜를 구족한다. 따라서 그들을 넘어서서 이염지에 이르는 것이다.
017_0673_b_16L菩薩有無量無邊 阿僧祇功德到爾炎地向於涅槃愍衆生故還入生死於阿僧祇劫久 受勤苦菩薩摩訶薩乘大苦乘求無 上果不可思議出過一切聲聞辟支 佛上具足一切功德智慧是故超度 爾炎之地
017_0673_c_01L무엇 때문에 보살의 수레를 커다란 수고스러움의 수레라고 하는가?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아갔는데, 몹시 심한 바람을 만나 파도가 산더미 같았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어려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마음이 다급해져 큰 공포를 일으켰으나, 이때 선장이 돛을 잘 조정하여서 온갖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017_0673_b_22L云何菩薩乘大苦乘譬如 有人乘舩入海遇大惡風濤波如山 有如是等無量衆難諸伴心急生大 恐怖是時舩師巧持帆故能度衆難
복덕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을 벗어나서 커다란 보배를 얻을 수 있으니, 보살마하살은 생사의 바다에 처해서도 역시 이와 같다. 그렇지만 악지식은 믿음이 없어 어려움에 처하면 악도로 취향한다. 제1 아승기겁 동안에는 청정한 지행(地行)을 닦아 청정한 해탈을 구한다. 제2 아승기겁 동안에는 청정한 선정행(禪定行)을 닦는다. 제3 아승기겁 동안에는 청정한 지혜행(智慧行)을 닦아 이염지의 장애를 제거한다. 따라서 보살승을 수고스러움의 수레[苦乘]라 한다. 십지를 원만하게 갖추어 닦고 의혹이나 장애가 없음을 증득하면 일체의 행이 구족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따라서 이염(爾炎)의 지혜로 커다란 과를 이룰 수 있다.
017_0673_c_02L有福德人得度難已獲大珍寶菩薩 摩訶薩處生死海亦復如是爲惡知 識不信所難趣向惡道第一阿僧祇 劫修治淨地行求淨解脫第二阿僧 祇劫修淨禪定行第三阿僧祇劫修 淨智慧行除爾炎地障是故菩薩名 乘苦乘滿足十地得無疑無障一切 行具足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以爾炎智得成大果
入大乘論卷上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 소제명(小題名)은 본래 고려대장경 원본에는 빠져 있으나 여러 증상을 참작하여 역자가 넣은 것이다.
  2. 1)범어로 vaipulya이며, 방광(方廣)이라 번역하는데, 일반적으로 대승을 방광이라 한다. 이는 어의적으로는 ‘갖가지 깊은 법의 뜻을 구체적으로 설한 것’이란 말로서, 본래는 소승부파에서 광설한 경전을 가리켰는데,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대승경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예컨대 『대방광불화엄경』의 경우에서와 같다.
  3. 2)범어로는 upadesa이며, 논의(論義)라고 번역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요약에 대한 해설을 의미하고 상세한 주석적인 설법을 가리킨다.
  4. 3)일체의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는 이치를 진실로 깨달아 흔들림 없는 마음에 안주하는 것을 말한다.
  5. 4)수론(數論)이라 하며, 범어로는 Sāṃkhya이다. 승거(僧佉)는 그 음역이다. 수론학파는 인도의 육파철학 가운데 가장 일찍 성립되었다. 그 시조는 kapila 선인(仙人)이라 한다. 이 학파는 일체의 사물은 모두 자성(自性), 즉 일종의 원시적 물질인 세성(世性)이 전화(pariṇāma)된 것이라 주장한다. 말하자면 일체의 사물에는 그 원형인 ‘자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6. 5)범어로는 Ulūka이다. 육파철학 가운데 승론(勝論)학파의 시조이다. 승론학파는 과(果)는 새로 생긴 것이지 결코 인(因) 가운데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7. 6)인도 고대 육사외도 가운데 하나로서 고행을 하고 세간의 옷과 음식의 속박을 떠나면 번뇌의 결박과 삼계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8. 7)자이나교의 개조(開祖)이다.
  9. 8)세계 만물의 성립 원인이 하나의 인(因)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외도 가운데 하나이다.
  10. 9)범어로 Vaiśeṣika이며 승론학파를 말한다.
  11. 10)유(有, bhava)는 존재라는 의미로써 ‘유’에는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의 삼유가 있다. 또한 유는 넓게는 현상적 존재세계를 지칭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