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28_0555_b_01L수상론(隨相論)
028_0555_b_01L隨相論一卷


덕혜(德慧) 지음
진제(眞諦) 한역
조환기 번역
028_0555_b_02L德慧法師造
陳天竺三藏眞諦譯


논(論) 가운데서 16제(諦)1)또 대승의 보살은 처음 승지(僧祇)의 끝에 4선근의 가행을 마쳐서 분별이 일으키는 번뇌 또 대승의 보살은 처음 승지(僧祇)의 두 가지 장애를 다 끊어버리는 것을 견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의 무루지에 대해서 『구사론』에서는 8인(忍), 8지(智)의 16심(心)이 있다.
① 고법지인(苦法智忍)으로 욕계의 고제 아래서의 견혹(見惑)을 끊는 지혜이다.
② 고법지(苦法智)로 고혹(苦惑)을 끊는 지혜이다.
③ 집법지인(集法智忍)으로 욕계의 집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④ 집법지(集法智)로 집혹(集惑)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⑤ 멸법지인(滅法智忍)으로 욕계의 멸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⑥ 멸법지(滅法智)로 멸혹(滅惑)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⑦ 도법지인(道法智忍)으로 욕계의 도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⑧ 도법지(道法智)로 도혹(道惑)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⑨ 고류지인(苦類智忍)으로 상 2계의 고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⑩ 고류지(苦類智)로 고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⑪ 집류지인(集類智忍)으로 상 2계의 집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⑫ 집류지(集類智)로 집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⑬ 멸류지인(滅類智忍)으로 상 2계의 멸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⑭ 멸류지(滅類智)로 멸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⑮ 도류지인(道類智忍)으로 상 2계의 도제 아래서의 견혹을 끊는 지혜이다.
도류지(道類智)로 도혹을 끊어서 바른 이치를 증득하는 지혜이다.
인(忍)은 참고 견디어 허락한다[忍許]는 뜻으로 진리를 믿어 참고 견디어서 미혹을 일으키지 않는 경지로서 이를 단도(斷道)라고 한다.
욕계를 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전에 보여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상 2계를 욕심[欲]이라고 하는 것은 욕계에서 추론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 16심 가운데서 앞의 15심을 견도라고 하고, 뒤의 도류지만을 수도(修道)에 포섭한다.
를 풀이한다.
028_0555_b_04L論中解十六諦
【문】16제를 전체적으로 묻는다.
물(物)에 열여섯 가지가 있는가? 이름에 열여섯 가지가 있는가?
028_0555_b_05L十六諦摠問爲物有十六爲名有十六耶
【답】비(毘)[방(防)과 이(夷)의 반절(半切)]ㆍ바(頗)[판(判)과 하(何)의 반절]ㆍ사(沙)2) 비바사란 주석(註釋)의 뜻이다. 인도의 외도 경전과 논서에서는 본문에 상세한 주해(註解)를 더하고, 이 주해에 다시 주해를 더한 것이 불교에서도 사용되었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비바사론 가운데 모든 스승인 5백 아라한을 말한다. 이들은 각각 다른 뜻을 세워서 『발지론(發智論)』을 해석하였다. 이를 비바사론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모든 아라한을 지칭해서 비바사사라고 말한다.
[광해(廣解)로 번역한다.]의 논사(論師)는 물(物)에 열여섯 가지가 있기 때문에 16이란 이름을 세운다고 풀이하였다. 그 본체가 실제로 있기 때문에 물이라고 부른다.
028_0555_b_07L防夷反判何反翻爲廣解師解爲物有十六故立十六名實有其體故稱
경전의 우바제사(優波提舍)3)[탐욕을 여의고 선(善)을 닦도록 설한다고 번역한다.] 논사(論師)는 이름에 열여섯 가지가 있다고 풀이하였다. 물은 오직 일곱 가지만 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에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의 네 가지가 있고, 집착의 진리[集諦], 집착을 멸함의 진리[滅諦], 도에 이르는 진리[道諦]에 각각 한 가지가 있어 합쳐서 일곱 가지가 된다.
028_0555_b_09L經優波提舍翻爲離欲修善說師解名有十六物唯有七苦諦有四謂無常道三諦各一合爲七
부처님께서 본래 우바제사경(優波提舍經)을 설하여 모든 뜻을 풀이하셨다. 부처님이 입멸(入滅)하신 후에 아난(阿難)과 가전연(迦旃延) 등이 예전에 들은 내용을 돌아가며 암송해 경전 가운데 뜻을 풀이하였다. 마치 모든 제자들이 논서를 지어 경전을 풀이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전의 우바제사(優波提舍)’라고 이름한다.
비바사(毘婆沙)가 다시 우바제사 가운데서 간략한 우바제사를 만들어 내었다. 이는 이미 전해진 경전에서 나왔기 때문에 ‘경전의 비바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028_0555_b_11L佛本說優波提舍經以解諸義佛滅後阿難迦旃延等還誦出先時所聞以解經中義如諸弟子造論解經故名爲經優波提舍毘婆沙復從優波提舍中略優波提舍旣是傳出故不言經毘婆沙
이제 우선 앞의 것에 의하여 해석한다. 조건[緣]들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이고 유위법(有爲法)이라고 말한다. 힘이 없으므로 스스로 일어날 수 없으니, 조건들이 쌓여야 비로소 일어난다. 마치 갓난아이나 어린아이가 일어나지 못하고 다른 것들을 붙잡거나 지탱해서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앞에서 말한 조건이란 탐애(貪愛)와 업(業)이다. 반드시 이 두 가지 법을 갖추어야 5음(陰)이 비로소 발생한다.
028_0555_b_17L今先依前釋屬緣故稱無常有爲法無力不能自起藉緣方起嬰孩小兒不能自起藉他扶持方復得起所言緣者卽是貪愛及業必須具此二法五陰方得生
028_0555_c_02L업(業)은 능히 과보(果報)를 발생시킨다. 비록 다시 과보를 발생시킨다고 할지라도 만약 탐애(貪愛)의 애착이 없이 마땅히 발생하는 곳이 있다면 과보도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땅과 물 등이 곡식의 싹을 발생시키지만 사람의 노력이 없으면 씨앗을 땅 속에 묻어 두더라도 싹이 끝끝내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
028_0555_b_21L業能生果復能生若無貪愛愛著應生處者亦不起由如地水等能生穀牙若無人功以穀子安置地中牙終不得生
탐애 및 업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과보도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탐애 및 업의 인연이 화합하여야 비로소 과보가 발생한다. 발생한다는 것은 있다[有]는 것이다. 업의 힘이 만약 다하면 과보도 역시 사라져 없어져서 다시 없음[無]으로 돌아간다. 이것이 선후(先後)가 된다. 선후는 조건에 묶이거나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건에 속하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028_0555_c_03L未起貪愛及業時果則是無起貪愛及業因緣和合果方得生生則是有業力若盡果則謝滅還復成無卽是先後先後無繫屬於緣故言屬緣故名無常逼惱性故名苦
괴롭게 핍박[逼惱]하는 성질을 괴로움[苦]이라고 이름한다. 괴롭게 핍박함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괴롭게 핍박함에 거슬리는 것[違逆逼惱]이고, 둘째는 괴롭게 핍박함에 수순하는 것[隨順逼惱]이다.
만약 부처님의 제자들의 경우라면 괴롭게 핍박함에 거슬리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삶과 죽음 가운데서 항상 두려움이 생긴다면 이는 괴롭게 핍박함에 거슬리는 것이다.
028_0555_c_08L逼惱有兩種一違逆逼惱二隨順逼惱若於佛弟是違逆逼惱佛弟子於生死中恒生怖畏
경전 가운데서 비유하여 말한다.
“마치 날카로운 칼과 번쩍거리는 눈으로 사람이 칼을 잡고 옆에 있는 사람들을 해치고자 한다면 생각 생각에서도 항상 커다란 두려움이 생기는 것처럼, 부처님의 제자들이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와 같다.”
이 이하는 거슬림의 뜻이다. 태어남ㆍ늙음ㆍ병듦ㆍ죽음 등은 항상 서로 괴롭게 핍박하기 때문에 괴로움이다.
028_0555_c_11L經中譬云譬如燒利劍火光耀眼人執之在側欲以相害於念念恒生大怖畏佛弟子怖畏生死亦如此此下是違逆義而生老病死等恒相逼惱故苦
만약 범부(凡夫)들의 경우라면 이는 괴롭게 핍박함에 수순하는 것이다. 범부는 삶과 죽음에 애착하니, 이는 괴롭게 핍박함에 수순하는 뜻이다.
마치 형과 아우의 두 사람 가운데 형은 동생을 몹시 사랑하나 동생은 형을 괴롭게 한다. 형은 비록 괴롭힘을 당하지만 자신은 그 괴롭힘을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범부도 삶과 죽음에 애착하여서 비록 괴로움을 받지만 그 괴로움에 애착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괴롭게 핍박하는 성질을 괴로움이라고 한다.
028_0555_c_15L若於凡夫是隨順逼凡夫愛著生死卽是隨順義如兄弟二人兄甚愛弟弟恒惱兄兄雖受惱猶自愛之凡夫愛著生死雖復受苦猶愛著之故以逼惱性爲苦
‘나의 것[我所]’이란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이름한다. 범부들은 일체의 법(法)에 집착하여서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일체가 모두 ‘나의 것’이 아님을 밝혀 이러한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나[我]’란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무아(無我)’라고 이름한다. 범부들은 5음(陰) 등에 집착하여서 ‘나’로 여긴다. 이제 일체의 법에 ‘나’가 있지 않음을 밝혀 이러한 견해를 다스리기 때문에 ‘무아’라고 이름한다.[이 네 가지가 괴로움의 진리[苦諦]이다.(原註)]
028_0555_c_19L對治我所見故名空凡夫執一切法言是我今明一切悉非我所爲對治此見故名爲空對治我見故名無我凡夫執五陰等以爲我今明一切法悉無有我爲對治此見故說無我此四是苦諦
028_0556_a_02L다음에는 집작의 진리[集諦]의 네 가지 이름을 해석한다.
종자의 법[種子法]으로 도리(道理)를 삼기 때문에 원인이라 이름한다. 능히 과보를 낳는 것이 종자의 법이다. 네 가지 뜻을 갖춘 것이 그 도리이다.
네 가지 뜻이란, 첫째는 종자가 깨어지면 낳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종자를 집어서 갈아서 깨트리면 모든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싹이 생겨날 수 없는 것과 같다. 탐애 등의 번뇌도 그 종자와 같다. 만약 도(道)로써 번뇌의 종자를 깨트리면 나머지의 조건들을 다 갖추었더라도 과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다.
028_0555_c_24L次釋集諦四名種子法道理故名因能生果是種子法具四義是其道理四義者種子破則不能生如取種子磨之令破雖具諸緣不復能生牙貪愛等煩惱亦是生果之種子若爲道所破雖具餘緣不復能生果
둘째는 오래 묵혔기 때문에 비록 모든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싹이 생길 수 없다. 종자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이다. 탐애 등이 과보를 낳는 것도 이와 같다.
성문(聲聞)은 60대겁(大劫)을 수행하고, 독각(獨覺)은 백 대겁(大劫)을 수행하고, 부처님은 3아승기(阿僧祇)겁을 수행한다.
028_0556_a_07L宿故雖具諸緣亦不能生牙以種子經時節久故貪愛等生果亦復如此聲聞六十大劫修行獨覺百大劫修佛三阿僧祇劫修行
3승(乘)의 사람들이 아직 발심(發心)하기 전의 상태이거나 일천제(一闡提)4)의 상태에 있어서는 탐애 등의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는 업을 낳는다. 업은 과보에 감응한 것이다. 아직 과보를 받기 전이라면, 오랜 시간 동안 수행하여 공덕과 지혜가 이미 넓고 깊게 전전하여서 이전의 원인의 힘과 작용을 덮어버려서 쇠약하게 만든다. 비록 나머지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과보를 낳을 수 없다.
『대유경(大有經)』5)에서 말한다.
“아흔여덟 가지 번뇌[九十八惑]가 하나의 번뇌를 낳고, 하나의 번뇌가 아흔여덟 가지 번뇌를 낳는다. 탐욕으로 아흔여덟 가지 번뇌를 모두 낳는 것처럼 모두 탐욕을 낳을 수 있다.”
028_0556_a_11L三乘人在未發心之前於一闡提位中起貪愛等煩惱煩惱生業業所感果猶未受之從修行已去多歷時節功德智慧旣轉深廣映蔽先因力用衰弱雖具餘緣不能生果『大有經』說九十八惑生一煩惱一煩惱生九十八惑如因貪具生九十八惑皆能生貪
셋째는 시기를 놓치기 때문이다. 비록 나머지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싹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봄에 종자를 뿌리면 싹이 나오지만 겨울에 뿌리면 싹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이 시기를 놓쳐도 역시 과보가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앙굴마라(鴦掘魔羅)6)가 무명으로 인하여 2천 명의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죽어서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겠지만 현재의 몸으로 아라한을 이룬 것과 같다. 먼저 지은 악이 시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비록 나머지 조건들을 갖추더라도 과보를 다시 받지 않는다.
028_0556_a_18L失時故雖具餘緣則不生牙如春種則生則不生因失時亦不能生果如鴦掘魔羅因無明斷二千命死必應入地而現身得成阿羅漢先所作惡以時差故雖具餘緣不復得生果
028_0556_b_02L넷째는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다. 비록 종자가 깨어지지도 않았고, 오래 묵지도 않았고, 시기를 놓치지도 않았더라도 싹이 나오지 않는다. 마치 땅ㆍ물ㆍ사람의 노력 등 원인과 조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싹이 나오지 않는 것과 같다. 원인이 과보를 얻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비록 종자가 깨어지지도 않았고, 오래 묵지도 않았고, 시기를 놓치지도 않았더라도 원인과 조건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과보를 얻지 못한다.
028_0556_a_23L四因緣不具雖不破不陳宿不失時亦不生牙如地水人功等因緣不具故不能生牙因生果亦爾雖未被破未經久時及失時而因緣不具則不能生
만약 중생이 업을 지어 능히 과보를 이끌어 오려면 반드시 세 가지 일[三事]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는 것이며, 둘째는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선지식 등에 향하는 것이며, 셋째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악업은 반드시 이 세 가지 일에 반대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 가지 일이 없으면 원인과 조건이 다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과보를 얻을 수 없다.
『추루경(醜陋經)』7)에서 말한다.
028_0556_b_05L若衆生作業能牽生果須具三事親近善知識二有信向心三作功力惡業須三事對此求之若無三事緣不具則不能得果故『醜陋經』云
“만약 중생이 사람 가운데 태어나기를 원하더라도 업을 지으면 원인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윽고 짐승 등으로 과보를 받아 태어난다. 만약 악업을 짓더라도 원인과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이윽고 사람 가운데서 과보를 받아 태어난다.
마치 아라한이 비록 모든 업을 갖추고 있더라도 번뇌를 끊어 업을 다하고 번뇌가 없음을 벗하기 때문에 태어남에 이끌리지 않는다.
028_0556_b_08L衆生願生人中而作業因緣不具故乃於畜生等中受果若作惡業應於畜生等中受生因緣不具乃於人中受果如阿羅漢雖具有諸業以斷煩惱盡業無煩惱爲伴故則不能牽生
또한 중멸아나함(中滅阿那含)8)은 업의 작용이 이미 다 하였으나 탐욕의 애착이 아직 다 끊어지지 않아 색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을 수 없어 중음(中陰) 가운데 태어난다.
또한 처음의 과보를 얻고 마침내 수도(修道)에서 없애는 바의 번뇌를 일으킨다. 번뇌는 업을 낳아 비록 업과 번뇌를 갖추었더라도 견도(見道)에서 깨트릴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다시는 새로운 업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지 않는다.
세간의 종자법도 반드시 네 가지 도리를 갖추어야 비로소 싹이 난다. 탐애 및 업을 종자법으로 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반드시 네 가지 도리를 갖추어야 비로소 과보가 생겨난다. 과보가 생겨나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말한다.”
028_0556_b_13L又如中滅阿那含用業已盡而貪愛未盡不得受色界生生在中陰中如得初果竟起修道所滅煩惱煩惱生業雖具業煩惱由斷見道所破煩惱故不復得用新業受生世閒種子必須具四種道理方得生牙貪愛及業爲種子法亦爾必須具四種道理方能生果生果故名因
【문】업과 번뇌 가운데 무엇이 바른 종자인가?
028_0556_b_21L業及煩何者正爲種子
【답】번뇌가 바른 종자이다. 번뇌는 업을 낳고, 업은 번뇌를 낳을 수 없다. 번뇌가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업은 있고 번뇌가 없다면 결코 태어남을 이끌어오지 못하지만, 번뇌가 있고 업이 없다면 중음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028_0556_b_22L煩惱爲正煩惱生業業不能生煩惱煩惱是本故有業無煩惱必不能牽生有煩惱無由得中陰生
028_0556_c_02L두 가지가 현현(顯現)하기 때문에 집기(集起)라고 이름한다. 현현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탐애는 업과 상응하여 과보로 태어나게 만들고, 태어나지 않았을 때는 과보도 나타나지 않고, 태어났을 때는 과보도 현현한다.
둘째, 탐애는 대상[境界]을 현현하게 한다. 대상은 모두 천하고 추악한 것이지만 탐애가 마음을 바뀌게 한다. 대상이 좋다고 말하여 대상으로 하여금 좋게 현현하게 만든다.
마치 한 명의 여인을 세 가지 식(識)이 와서 볼 때 범부가 보면 가히 사랑할 만한 대상이라고 말하고, 호랑이가 보면 가히 먹을 만한 물건이라고 보고, 성인이 보면 뼈 무더기라고 말한다.
028_0556_c_02L二顯現故名集起顯現有兩義愛與業相應令果得生未生時果未生時則顯現貪愛能顯於境界境界實是鄙惡而貪愛轉心謂境界爲好卽顯現境界令好如一女人識往觀之凡夫見之謂爲可愛之境虎狼觀之謂是可食之物聖人觀之謂爲骨藏
이는 대상을 생각으로 재어서[稱] 아는 것이다. 이른바 가히 사랑할 만하다거나 가히 먹을 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다 탐애가 이 대상을 현현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탐애로 말미암아 현현하였으므로 태어나는 곳의 대상에 응해서 그 가운데서 오염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업은 과보를 낳을 수 있다. 만약 이 두 가지 현현이 없으면 과보는 생긴 수 없다.
이 두 가지 현현을 밝혀서 집기(集起)의 뜻을 해석하였다.
028_0556_c_10L謂爲骨藏此是稱境而知謂爲可愛可食竝由貪愛顯現此境故爾由貪愛顯現應生處境於中起染著故業得生果若無此二顯現則不得生明此兩種顯現爲釋集起
외도(外道)는 일체법이 오직 하나의 원인인 자재천(自在天)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말한다.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일체의 물(物)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제 이러한 견해를 깨트리고자 여러 조건들이 모여야 비로소 과보가 생길 수 있음을 밝힌다. 비록 또한 여러 조건들이 다 모여졌더라도 과보를 일으킬 수 없다면 이는 역시 원인의 뜻이 아니다. 다 모여져서 과보를 일으킬 수 있어야 비로소 원인이 될 수 있다.
028_0556_c_15L外道謂一切法唯有一因生言自在天一因生一切物今爲破此見衆緣集聚方能生果雖復衆緣集聚若不能令果起亦非因義集聚而令果起方得是因
두 가지 현현(顯現)도 역시 모여짐의 뜻을 밝힌 것이고, 역시 과보를 일으킴의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현현으로써 집기(集起)의 뜻을 해석하였다. 마치 도자기 만드는 사람이 진흙을 반죽하고, 새끼줄과 물 등의 갖가지 조건들을 함께 모아서 하나의 물병을 만드는 것과 같다.
능히 결과를 뽑아내어 성취할 수 있게끔 해야 조건[緣]이라고 이름한다. 원인은 곧바로 결과가 일어나도록 감응하는 것이고, 조건은 설사 어떤 기간 동안 과보를 갖추어 성취하더라도 과보가 생기도록 할 수 있다.
028_0556_c_19L二種顯現亦明集聚亦明令果起義故以顯現釋集起如窯師埏埴繩水等衆緣聚集共生一甁能拔出果令成就故名緣因直感果令起緣則能令果生使一期報得具足成就
028_0557_a_02L다음에는 멸함의 진리[滅諦]의 네 가지 이름을 해석하고자 한다.
5음(陰)이 다 없어져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멸함이라고 이름한다.
이는 과보에 근거하여 말한다. 현재의 5음이 다 없어지고, 미래의 5음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멸함이라고 이름한다. 지금 멸함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은 무위(無爲)를 본체로 한 것이다.
멸함의 진리[滅諦]는 스스로 무위를 본체로 함으로써 5음의 멸함을 취하지 않고, 생겨나지 않음을 본체로 한다. 5음의 멸함과 생기지 않음은 삼세(三世)가 있다. 멸함의 진리의 본체가 무위이므로 삼세의 법은 아니다.
028_0556_c_24L次釋滅諦四名五陰盡不生故名滅此據果報爲語現在五陰盡未來五陰不生故名爲滅今取滅名目無爲體耳滅諦自以無爲爲不取五陰滅不生爲體
5음의 멸함과 생기지 않음에 삼세가 있다는 것은 마치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犍連) 등의 5음이 과거에 멸하여 생겨나지 않고, 범부의 5음은 미래에 바야흐로 멸하여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현재 성인의 5음이라면 현재에 멸하여 생겨나지 않는다.
028_0557_a_05L五陰滅不生有三世滅諦體是無爲非三世法五陰滅不生有三世者如舍利弗揵連等五陰是過去滅不生凡夫五陰則於未來方滅不生若現在聖人五陰則是現在滅不生
무위법(無爲法) 가운데는 5음이 없다. 5음이 이 가운데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 없어지고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무위를 이름한다.
또한 5음이 다 없어지고 생겨나지 않는다고 할 때 바야흐로 이 무위를 증득(證得)하기 때문이다. 다 없어지고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무위라고 이름하므로 무위를 멸(滅)한다고 한다.
세 가지 불[三火]을 멸하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7_a_10L無爲法中無五陰五陰不於此中生故用盡不生義以目無爲又五陰若盡滅不生時方證得此無爲故以盡不生義目無爲故名無爲爲滅能滅三火故名寂
세 가지 불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세 가지 불로 삼는다. 이 세 가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첫째는 중생들의 모든 선근(善根)을 태울 수 있고, 둘째는 이 세 가지 번뇌는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 즉, 마음을 태운다는 뜻이 있다. 셋째는 삼계(三界)를 태울 수 있다. 그러므로 불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7_a_15L三火有兩種欲瞋癡爲三火三有三義故名火一能燒衆生一切善根二此三煩惱能使心熱卽有燒心義三能然三界故名火
이 세 가지 번뇌는 삼계 가운데 두루 퍼져 있어 6진(塵)ㆍ6근(根)ㆍ6식(識)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러한 번뇌의 근(根)ㆍ진(塵)ㆍ식(識)은 모두 유류(有流)9)이다.
이 세 가지 번뇌로 말미암기 때문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 세 가지 번뇌는 불처럼 태울 수 있고, 근(根)ㆍ진(塵)ㆍ식(識)은 섶처럼 태워진다.
028_0557_a_18L此三煩惱遍三界中從六塵六根六識生此煩惱根塵識皆是有流由此三煩惱故不得安樂三煩惱如火能然根塵識如薪是所燃
【문】무색계(無色界) 등의 상계(上界)는 성냄이 없는데, 지금 어찌하여 성냄이 있다고 말하는가?
028_0557_a_22L上界無瞋今那得言有瞋耶
【답】범부가 상계(上界)에 태어나는 것은 견제(見諦)10)의 번뇌를 갖추고 있다. 상계에는 그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없다고 말한다. 지금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따라서 말한 것이다.
028_0557_a_23L凡夫生上界者具有見諦煩惱在上界非無之但不得起故言今言有者就理爲語
028_0557_b_02L둘째, 세 가지 괴로움[三苦]11)을 세 가지 불로 삼는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중생을 태워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게 만든다. 만약 욕계라면 세 가지 괴로움을 갖추고 있고, 색계라면 괴고(壞苦)와 행고(行苦)의 두 가지 괴로움을 갖추고 있고, 무색계라면 오로지 행고만 있다.
028_0557_b_02L以三苦爲三火此三苦能燒衆生令不得安樂若欲界則具三苦色界則具壞行二無色界唯有行苦
세 가지 괴로움은 곧 세 가지 재앙[三災]이다. 고고(苦苦)는 불의 재앙[火災]이고, 괴고(壞苦)는 물의 재앙[水災]이고, 행고(行苦)는 바람의 재앙[風災]이다.
이 두 가지 종류가 있어 세 가지 불은 시끄럽게 움직인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세 가지 불을 멸하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7_b_05L三苦卽是三災苦苦是火災壞苦是水災行苦是風有此二種三火則喧動以滅此二種三火故名寂靜無三抂故名妙
세 가지 광(抂)이 없기 때문에 묘함[妙]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광(抂)이란 태어남ㆍ늙음ㆍ죽음으로 세 가지 괴로움이 된다.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삼계 가운데 평등하게 두루 퍼져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괴로움을 세 가지 광(抂)이라고 치우쳐 말한다.
삼계는 모두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태어남의 괴로움이 있다. 만약 욕계에서라면 머리카락이 희어지고, 얼굴이 쭈글쭈글해지는 늙음이 있다. 6천(天) 및 색계에는 이 늙어가는 모습은 없다.
또한 바뀌어 변함[改異]의 뜻이 있다. 마치 그림을 처음 그려놓았을 때는 색채가 분명하고 좋아할 만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색채가 흐릿하게 되는 것과 같다.
028_0557_b_08L抂者謂生死爲三苦此三苦平等遍三界中故偏說此三苦爲三抂界皆有生故有生苦若欲界則有頭白面皺之老六天及色界乃無此老相貌亦有改異義如采畫始時則分明可愛久則采色歇薄
상계(上界)의 색신(色身)도 또한 이러한 뜻이 있고 이를 이름하여 늙음이라고 한다. 무색계의 마음도 역시 늙음이 있다. 과보가 장차 다한 때 마음을 바뀌고 변하게 한다. 옛날에는 선정(禪定)의 마음이 견고하였으나 장차 무색계의 시간이 끝나감에 선정의 마음이 약해져 항상 물러서고, 타락해지려고 한다. 그러므로 삼계에도 모두 늙음의 괴로움이 있다.
028_0557_b_14L上界色身亦有此義卽名此爲老無色界心亦有果報將盡之時心用改異昔時定心堅固將終定心劣弱恒欲退墮三界皆有老苦
삼계(三界)가 모두 다 끝남이 있기 때문에 모두 죽음의 괴로움이 있다. 이를 광(抂)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은 범부의 성품이 항상 편안함과 즐거움을 구하고 세속의 선(善)을 닦아 즐거운 과보를 얻기를 바라지만 이 세 가지 횡액과 재앙은 그 괴로움을 받도록 시키기 때문에 세 가지 괴로움을 세 가지 광[三抂]이라고 이름한다.
무위(無爲) 가운데는 이 세 가지 광(抂)이 없다. 그러므로 묘함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7_b_18L三界皆有終盡故皆有死苦所以名此爲抂者凡夫之性恒求安樂所以修世俗善望得樂報而此三撗災使其受苦故名三苦爲三抂無爲之中無此三抂故名爲妙
【문】상계(上界)에 태어날 때는 자신이 괴롭지 않은데, 어찌하여 괴로움이라고 이름하는가?
028_0557_b_22L上界生時自不苦何故名爲苦耶
028_0557_c_02L【답】태어남의 괴로움[生苦]이 반드시 있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을 받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태어남이 괴로움의 근본이므로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무위는 태어남이 없는 까닭에 괴로움이 없다. 태어나고 죽는 것에는 태어남이 있는 까닭에 괴로움이 있다. 그러므로 태어남을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가령 지옥이란 어떤 장소의 이름이지, 그 장소는 실로 괴로움이 아니다. 다만 그 장소에서 괴로움이 능히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지옥은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7_b_23L未必生苦受故名苦生是苦本故名爲苦無爲不生所以無苦生死有生所以有苦故名生爲苦如地獄是處所之名處實非苦但處能生苦名地獄爲苦
【문】태어남의 괴로움이란 세 가지 괴로움 가운데 어떤 괴로움에 해당하는가?
028_0557_c_05L生苦三苦中是何苦
【답】만약 괴로운 느낌이 생겨난다면 고고(苦苦)이고, 즐거운 느낌이 생겨난다면 괴고(壞苦)이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생겨난다면 행고(行苦)이다.
욕계의 태어남은 이 세 가지 괴로움을 다 갖추고 있고, 색계의 태어남은 두 가지 괴로움인 괴고와 행고만 있고, 무색계의 태어남은 오직 행고만 있다.
늙음의 괴로움[老苦]도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을 다 갖추고 있다. “만약 즐거움을 괴로움으로 바꾼다면 고고이고, 만약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고,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바꾼다면 괴고이고, 만약 즐거움을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것으로 바꾼다면 행고이다.
삼계의 종류에 따르면 이 죽음의 괴로움[死苦]도 역시 세 가지 괴로움을 다 갖추고 있다. 그 종류의 예는 앞의 예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028_0557_c_06L若是苦受生是苦苦若樂受生是壞苦捨受生是行苦欲界生具有三苦色界生具二苦謂壞苦行苦色界唯是行苦老苦亦具三苦若轉樂爲苦則是苦苦若轉苦爲樂轉樂爲樂則是壞苦轉樂爲捨則是行苦約三界類此死苦亦具三苦類前可解耳
【문】경전 가운데 괴로움은 몇 가지가 있다고 말하였는가?
經中說有幾苦耶
【답】괴로움은 한량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말한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 이 외에도 다시 모든 괴로움이 있다고 분별한다. 다만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 옛날의 여덟 가지 괴로움 가운데 병의 괴로움[病苦]은 말하지 않고 일곱 가지 괴로움만을 말한 것으로 마친다.
‘그 밖의 나머지 모든 괴로움 등등’을 말한 것에서 병의 괴로움을 말하지 않은 까닭은 병의 괴로움은 욕계의 사람들 가운데에만 있고, 욕계의 천[欲界天] 가운데에는 두루 퍼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028_0557_c_13L說有無量苦此閒所說八苦以外分別復有諸苦但止說七苦耳舊八苦中不說病苦說七苦竟言等等餘諸苦所以不說病苦者病苦唯在欲界人中近不遍欲界天中故不說之
천(天) 가운데 병의 괴로움이 없는 까닭은 병이 내외(內外)의 조건들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외(外)의 조건이란 차가움과 뜨거움이 불평등하고, 음식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에 병의 괴로움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다.
내(內)의 조건이란 혹은 움직임이 많아 4대(大)를 약하게 하고, 혹은 앉아 있음이 많아 4대를 약하게 하는 것이다. 4대가 약해지면 병이 든다.
028_0557_c_18L天中所以無病苦者病從內外緣生外謂寒熱不平等飮食不調適故致病苦內者或行多令四大弱或坐多令四大弱四大弱故成病
028_0558_a_02L상계(上界)의 경우 외적으로는 차가움과 뜨거움의 불평등함이 없고, 음식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함의 조건이 없다. 내적으로는 4대가 이미 강하여서 움직임과 앉아 있음의 지나침과 차이남의 조건이 없기 때문에 병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왜곡해서 이해하는 것도 병의 의미를 가진다. 욕계 6천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여 혹은 3일 동안 먹지 않아서 7일까지 이르고자 한다. 7일이 되기 전에 죽음에 이른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4대가 약해진다. 이 또한 병의 괴로움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028_0557_c_22L上界外無寒熱不平飮食不調適之緣內四大旣强有行坐過差之緣故不得有病苦解亦有病義六天作欲事或三日不食乃至七日不至七日則死未死之前四大弱亦得名病苦
【문】나머지 네 가지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028_0558_a_04L餘四苦云
【답】5음(五陰盛苦)은 삼계에 통하고, 구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愛別離苦], 원수처럼 증오하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怨憎會苦]의 이 세 가지 괴로움은 상계(上界)의 두 계[二界]에는 결코 없다. 각각 스스로의 과보에 머무름으로써 섞여 있음이 없이 한 곳에 머물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괴로움이 없다.
028_0558_a_05L五陰若通三界求不得愛別離怨憎會此三苦上二界定無以名自住果報無有雜住一處故無此三苦
욕계(欲界)의 6천은 이를 갖추고 있다. 하품(下品)의 모든 천(天)은 상품(上品)의 즐거움을 원하나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즉, 구하나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다. 아수라(阿修羅)와 전투할 때는 원수처럼 증오하는 것과 만나는 괴로움이고, 전투가 여의치 않아 아수라에게 붙잡혀 묶이고 깨어지면 이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이다.
028_0558_a_07L欲界六天則具有之下品諸天願樂上品不得故生苦卽求不得苦與阿修羅鬪戰卽怨憎會苦鬪戰不如阿修羅所縛所破卽愛別離苦解脫一切失故名永離
일체의 잃음[失]에서 해탈함을 영원히 벗어남[永離]이라고 이름한다.
일체의 잃음이란 원인[因], 조건[緣]이 과보이다. 원인이란 번뇌이고, 조건이란 업이고, 5음(陰)을 받는 것은 과보이다. 이 세 가지가 과실(過失)의 법이다. 이 세 가지를 완전히 해탈하고, 잠시 해탈한 것이 아닌 것을 이름하여 영원히 벗어남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8_a_12L一切失者是因果報因是煩惱緣是業所受五陰是果報此三是過失法究竟解脫此三非蹔時解脫故名永離
【문】번뇌를 어떤 연고로 원인이라 부르고, 업을 조건으로 삼는가?
028_0558_a_15L煩惱何故稱因業爲緣
【답】번뇌가 종자이다. 태어남을 바로 이끌 수 있기 때문에 원인이라 이름한다. 만약 번뇌가 없다면 비록 업이 있더라도 바로 태어남을 이끌 수 없다. 만약 업이 없고 번뇌가 있다면 중음(中陰)으로 태어남을 얻는다. 만약 번뇌가 다하고 업이 장엄한 과보를 얻더라도 끝내 번뇌가 업을 낳기 때문에 과보를 얻는다.
028_0558_a_16L煩惱是種子正能牽故名因若無煩惱雖復有業則不能牽生若無業有煩惱猶得生中陰若煩惱盡業雖得莊嚴果終由煩惱生業故得果
다음에는 도의 진리[道諦]의 네 가지 이름을 해석한다.
이 가운데 행동하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무릇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12)무생지는 근기가 수승한 아라한에 한해서 있는 지혜이다. 이미 지혜ㆍ끊음ㆍ증득ㆍ수도의 과정을 마치면 다시 지혜ㆍ끊음ㆍ증득ㆍ수도의 과정이 없는 것을 무생(無生)이라고 한다. 이 무생을 자각해서 내가 다시 지혜ㆍ끊음ㆍ증득ㆍ수도의 과정이 없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를 행위의 주체[能行]라고 한다. 계율ㆍ선정ㆍ지혜는 행위의 객체[所行]라고 한다.
고법지(苦法智)에서부터 도비지(道比智)13)까지의 열두 가지 마음[十二心]14)은 모두 번뇌를 끊는다. 이를 진지(盡智)라고 한다. 열세 번째의 마음은 무생지(無生智)이다.
028_0558_a_20L次釋道諦四名於中行故名道凡有兩釋一云盡無生智是能行戒定慧是所行從苦法智訖道比智十二心皆斷煩惱是盡智第十三心是無生智
028_0558_b_02L계율에는 유류(有流)15) 4류(流)란, 첫째는 견류(見流)이고, 3계의 견혹이다. 둘째는 욕류(欲流)이고, 욕계의 모든 미혹이다. 단, 견 및 무명을 제외한다. 셋째는 유류(有流)이고, 상 2계의 모든 미혹이다.(단, 견 및 무명을 제외한다. 유란 생사의 과보가 없어지지 않았다는 뜻이고, 3계에 통할지라도 여기서는 따로 상 3계에서 이름한다.) 넷째는 무명류(無明流)이고, 3계의 무명이다. 유정은 이 네 가지 법의 작용에 의해서, 생사에 표류해서 쉼없기 때문에 유(流)라고 말한다.
와 무류(無流)16)가 있고, 근본은 유류이다. 두 가지 지혜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류의 정(定)을 이룬다.
또한 이 지혜에는 들음[聞]ㆍ사유[思]ㆍ수행[修]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수행의 지혜[修慧]에도 역시 유류와 무류가 있다. 또한 두 가지 지혜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류의 정(定)을 이룬다.
028_0558_a_24L戒有有流本是有流由兩智行之故成無流定亦如此有三種謂聞修慧亦有有流亦由兩智行之故成無流盡智行之者苦流智現前具八分聖道本是有流今爲盡智行之故成無流
진지(盡智)가 그것을 행한다는 것은 고법지(苦法智)가 현전(現前)하여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聖道]을 갖추는 것이다.
계율과 선정의 근본은 유류이다. 이제 진지가 그것을 행하기 때문에 무류를 이룬다.
진지(盡智)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바른 견해[正見]이고, 둘째는 바른 사유[正思惟]이다. 같이 무상(無常)을 관찰하지만 거침[麤]과 미세함[細]의 차이가 있다. 바른 견해는 미세하고, 바른 사유는 거칠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생겨나게 한다.
028_0558_b_06L盡智有二種一是正見二是正思惟同觀無常而有麤細正見細見思惟而此二互得相生
만약 바른 견해로 진지(盡智)를 삼으면 또한 바른 견해로 무류(無流)를 이루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침내 진지는 지혜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게 한다.
만약 이와 같은 뜻을 밝힌다면 한꺼번에 진지가 행한 바로 삼기 때문이다. 계율ㆍ선정ㆍ지혜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게 한다. 서로 성질이 다르기[異性] 때문에 같은 시간[同時]에 얻을 수 있다. 그리하여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다 이와 같다.
028_0558_b_09L若以正見爲盡亦得言使正見成無流終是比盡智令智慧成無流如此明義則一時中爲盡智所行故令戒定慧成無流以異性故得同時乃至阿羅漢悉如
만약 바른 견해로써 다시 바른 견해를 바라보고, 바른 사유로써 다시 바른 사유를 바라본다면 같은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앞의 바른 견해가 뒤의 바른 견해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게 한다. 바른 사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꺼번에 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은 하나의 성질에 두 가지의 법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뜻을 밝힌다면 다른 시간에 지혜를 밝혀서 진지가 행한 바로 삼는 것이고, 그리하여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다 이와 같다. 무생지(無生智)가 행한 바로 삼아 그리하여 아라한에 이르기까지 다 이와 같다. 무생지로 행하기 때문이다.
계율ㆍ선정ㆍ지혜로 무류를 이룬다는 것은 견제(見諦)에 뒤의 열 가지 마음[後十心]이 있고, 뒤의 열 가지 마음은 과보에 속한다.
028_0558_b_14L若還以正見望正見正思惟望正思惟者則不得同時必以前正見使後正見成無流正思惟亦爾一時中不得竝有一性兩法故若如此明義則異時明智慧爲盡智所行乃至阿羅漢悉如此爲無生智所行乃至阿羅漢悉如此爲無生智行故戒定慧成無流者見諦有後十心後十心屬
만약 수다원(須陀洹)17)의 사람이 열두 가지 마음을 내어 관찰한다면 이는 무생지(無生智)이다. 같은 시간의 계율ㆍ선정ㆍ지혜 및 다른 시간의 지혜로 하여금 무류를 이루는 것이다.
028_0558_b_22L若須陁洹人作十二心觀者則是無生智使同時戒定慧及異時慧成無流
【문】괴로움의 법을 봄은 곧 무생지(無生智)이다. 어찌하여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028_0558_b_24L苦法見卽是無生智何不說之耶
028_0558_c_02L【답】괴로움의 법을 봄은 형식으로 하자면 고법지(苦法智) 또한 그것이 무생지가 됨을 이름한다. 만약 고류지(苦類智)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시 고류지가 되어 상계의 번뇌를 끊는 본래의 작업을 하여 다시 진지(盡智)에 속한다.
이미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는 무생지이기 때문이다. 다 진지에 속한다. 오직 제13심(心)만 정해졌기 때문에 무생지라고 말할 수 있다.
028_0558_c_02L苦法見若形待苦法智亦得名其作無生智若望苦類智者其復爲苦類智作本斷上界煩惱復屬盡旣不定是無生智故悉屬盡智第十三心定故可說爲無生智
두 번째 해석에서는 “계율ㆍ선정ㆍ지혜를 무류 마음의 행위의 객체로 삼고 무류를 이루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즉, 무류의 마음으로 행위의 주체[能行]를 삼고, 계율ㆍ선정ㆍ지혜는 행위의 객체[所行]로 삼는다. 무생지가 다한 것이 마음을 돕는 법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028_0558_c_06L第二解言戒定慧爲無流心所行成無流故名道則以無流心爲能行戒定慧爲所行無生智是助心法故
앞의 해석과 뒤의 해석은 다르다. ‘이 가운데서 말한 것’이란 계율ㆍ선정ㆍ지혜 가운데 이치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같다[如]’고 이름하는 것은 만약 전체적으로 논하자면 네 가지 모습[四相]18)과 상응하기 때문에 같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개별적으로 논하자면 단절되는 것도 아니고 영원한 것도 아닌[不斷不常] 중도(中道)의 이치와 상응하기 때문에 같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치에 따른 지혜를 얻는다. 사악한 사유로써는 그것을 깨트릴 수 없고, 그 이루어짐이 여의치 않게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같다고 이름한다.
028_0558_c_09L前解異後釋言於中者於戒定慧中與理相應故名如者若通論則與四相應理相應故名如若別論與不斷不常中道理相應故名如如是得理之智若以邪思惟不如破之不能使其成不如故名如
바른 견해가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른 행위[正行]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성문의 사람이 바른 스승의 바른 가르침을 듣고 바른 가르침의 소리를 따른다면 바른 들음을 낳음[生正聞]이라고 이름한다.
바른 들음은 바른 수행을 낳고, 이와 같이 순서대로 학문을 익히는 것을 작용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만약 독각(獨覺) 및 부처님이라면 바른 사유가 바른 수행을 낳는다. 바른 가르침의 소리를 따라 바른 들음을 낳음이라고 이름하는 뜻은 없다. 이 두 종류의 수행인들은 근기가 뛰어나서 스스로 사유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028_0558_c_15L正見所作故名正行若聲聞人聞正師說正教從正聲名生正聞正聞生正修作如此次第習學名爲所作若是獨覺及佛則從正思生正修無有從正聲名生正聞義以此兩乘根利能思惟得悟
【문】독각 및 부처님은 근본적으로 다 경전의 법을 들었기 때문에 사유를 낳고 지혜를 수행할 수 있다. 어떤 까닭에 바른 들음이 없이 바른 사유를 낳는가?
028_0558_c_21L獨覺及佛根本悉經聞法故得生思惟修慧何故無正聞生正思耶
028_0559_a_02L【답】예전에 경전을 듣지 못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논서가 곧 표준[事]이고, 이는 예전에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한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가르침에 의지하고 이에 의지하여서 사유의 지혜를 낳아 바르고 올곧게 사유하여 스스로 깨달음의 진리를 얻으라.”
성문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것을 사유하는 것이다.
028_0558_c_23L宿世非不經聞今論卽非是憶昔所聞乎時師作此說此說依此而生思慧直端然思惟自得悟理聲聞則必依師語思惟之
영원히 넘어서기[過度] 때문에 벗어남[出離]이라고 이름하나니,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 해석은 삿된 사유로 말미암아 번뇌를 낳고, 번뇌는 업을 낳고, 업은 과보를 낳는다고 말한다. 이들은 모두 바른 사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무류의 지혜를 낳는다면 지혜는 계율과 선정 등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다 바른 것이다. 바른 것과 바르지 않은 것은 서로 상반된다. 바른 것은 바르지 않은 것을 넘어서고, 잠시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넘어서는 것이다.
028_0559_a_03L過度故名出離有兩解一解言由邪思惟故生煩惱煩惱生業業生果報此等皆是不正思惟故若生無流智智慧生戒定等皆悉是正正與不正相反正卽過度不正非蹔時過度及是永過度
또한 다른 한 해석은 번뇌는 넘어짐[倒]이고, 지혜는 넘어지지 않음[不倒]이다. 넘어짐과 넘어지지 않음은 서로 상반된다. 넘어지지 않음은 넘어짐을 영원히 넘어선 것이다.
앞의 해석은 포괄적으로 해석한 것이고, 뒤의 해석은 간략하게 해석한 것이나, 그러므로 쓰임에 차이가 있다.
앞의 해석을 따르는 학파는 또 하나의 해석으로 열여섯 가지 진리를 말[言]이라고 한다. 영원한 법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9_a_09L又一解煩惱是倒智慧是不倒倒與不倒相反不倒永過度前解則廣後解則略故有異用家又一解十六名言非永法性故名無常
만약 무위법이 본래 있는 것이라면 태어남[生]이 영원히 없고, 머무름과 소멸[住滅]이 영원히 없을 것이다. 유위법은 잠시 태어나고, 잠시 머물고, 잠시 소멸된다. 이러한 법의 성품이 그와 같으므로 무상이라 이름한다. 무명(無明)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란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세상의 일들을 이해하지 못함에 가까워 이미 자체가 괴로움이다. 하물며 진실하고 깊고 깊은 도리를 이해하지 못함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더욱이 이렇기 때문에 괴로움은 무명이 근본이다. 이 괴로움은 무명에서 연유한 것이고, 삶과 죽음의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장소가 없으면 괴로움이 없다.
028_0559_a_13L若無爲法本來是有永無有生永無住滅有爲法蹔生蹔住蹔滅法性爾故名無常從無明生故苦者不解世間事故苦近不解世閒事已自是苦況不解眞實甚深理邪彌是大苦無明根本是苦由無明故受生死報故生死無處不苦
중간은 보특가라[人]19)를 벗어났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이름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중간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취락(聚落)으로써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비유하셨다. 방금 앞에서 말한 중간은 취락의 중간을 말한다.
나[我], 보특가라가 이 중간에 없기 때문에 보특가라를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나, 보특가라가 벗어났기 때문에 공이라고 이름한다.
028_0559_a_19L中閒人所離故名空六根是中閒佛自以聚落譬六根今言中間如聚落之中間我人不在此中閒故言人所離以爲我人所離故名爲空
028_0559_b_02L자유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 없음[無我]’이라고 함은 자유자재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자재라고 이름한다. 만약 다른 태어남ㆍ머무름ㆍ소멸에 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유자재이다.
둘째, 마음대로 짓기 때문에 자유자재라고 이름한다. 만약 불을 차갑게 하고자 하면 불은 갑자기 차갑게 되고, 물에 습기가 없게 하고자 하여 물에 습기가 없어지면, 이것이 곧 자유자재이다.
028_0559_a_23L不自在故名無我者自在有兩義不依他故名自在不由他生住滅則是自在二者隨意所作故名自在若欲令火冷火輒冷欲令水不濕水卽不濕者此則是自
모든 유위법은 다른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태어남ㆍ머무름ㆍ소멸이 있고, 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만약 신통력이 있어 전변(轉變)할 수 있다면 반드시 선정 등의 수행을 배움에 의지하여야 비로소 이러한 작용이 있게 된다. 이미 의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자유자재가 없다. 이미 자유자재함이 없기 때문에 ‘나[我]’가 없다.
훗날에 나타나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이제는 순서대로 비유를 들어서 그것을 해석하고자 한다.
028_0559_b_05L一切有爲法依他故有生住滅不得如意若有神通能轉變者終須依定等修學方有此用旣不免依故無自在旣無自在故無有我來道理故名因今次第擧譬釋之
종자(種子)로 비유한다. 마치 종자가 나머지 조건들의 쌓임이 없어도 자체에 나무가 생기는 힘이 있는 것과 같다. 나무가 아직 생기지 않았더라도 종자는 이미 자라게 하는 힘이 있어 싹 등으로 하여금 뒤에 나오게 할 수 있다.
028_0559_b_09L以種子爲如有種子不藉餘緣自有生樹之樹猶未生而種子旣有能生力令牙等後時來
현재의 업을 나누면 네 부분이 된다. 처음 부분은 선업과 악업을 지었을 때 나머지 조건들의 쌓임이 없어도 자체에 과보를 감응할 능력이 있어, 과보는 목숨이 끊어지는 미래에 있는 것과 같다. 업은 이미 과보를 감응할 능력이 있어 과보가 훗날 나타나게 할 수 있다. 현재에는 능력만 있어 훗날에 그것이 나타나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훗날에 나타나는 이치에 맞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028_0559_b_12L現在業分爲四分分者當作善惡業時不藉餘緣便自有能感果力果至命終猶在未來業旣有能感果力能令果後時來在有能令來之道理故言來道理名
도리(道理)에서 나오기 때문에 집기(集起)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종자에 본래 나무가 생기는 능력이 있고, 나무의 싹ㆍ줄기ㆍ가지ㆍ잎 등은 본래 미래에 있다. 이제 종자가 흙 속에 있어 땅ㆍ물 등의 외부조건이 쌓여야 비로소 싹이 나오고, 싹이 나와야 현재의 종자는 소멸한다. 업도 또한 이와 같이 본래 과보를 감응할 능력이 있고, 과보는 미래에 있다. 현재의 과보는 이미 다하였다. 먼저 중음(中陰)의 태어남을 받고, 중음이 나타나자마자 업의 처음 부분은 소멸한다. 업은 중음이 나오게 하는 도리가 있다. 원인과 조건이 다 모여야 중음의 과보가 바야흐로 나타날 수 있다. 도리에서 나오기 때문에 집기(集起)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28_0559_b_17L出道理故名集起者種子本能生樹牙莖枝葉等本在未來今以種子內土中藉地水等外緣方得出牙牙纔起現在種子卽滅業亦如此能感果果在未來現在報旣盡先受中陰生中陰生纔起業初分卽謝有能出中陰之道理必須因緣聚集中陰果方生故言出道理故名集起
028_0559_c_02L행위가 건너가기 때문에 생처(生處)라고 이름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싹이 현재 먼저 나오고 싹으로부터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아직 꽃이 피지 않는 데까지 이른다. 미래에 계속 나오므로 행위가 건너간다고 이름한다. 행위란 점점 자라나는 것이다. 싹의 위치를 건너야 비로소 줄기가 나오고 싹이 곧 사라진다. 업도 또한 이와 같다.
먼저 중음의 싹이 나옴을 받고, 중음의 싹을 버려야 바른 태어남을 받고, 처음의 가라라(柯羅邏)20)로부터 제7 부분의 끝에까지 이르름을 행위가 건너감이라고 이름한다. 점점 자라나는 것을 행위라고 이름하고, 중음의 위치를 지남을 건너감이라 이름한다. 가라라(柯羅邏)가 겨우 생기면 업의 제2 부분은 곧 소멸한다.
028_0559_b_24L行度故名生處者牙先出現在從牙生莖從莖初訖至未生華以來名爲行度行者漸漸增長度牙位莖纔生牙便謝業亦如此先受中陰牙捨中陰牙受正生從柯羅邏初至第七分之終名爲行度漸漸增長故名行中陰位故名度柯羅邏纔生業第二分便謝
가라라 등은 차례로 생겨나기 때문에 생겨남이라고 이름한다. 이 생겨남은 업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업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장소로 삼기 때문이고, 행위가 건너감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생처(生處)라고 이름한다. 업의 제3 부분은 자체의 작용이 강하다.
만약 업의 작용이 없으면 비록 나머지 조건들이 있더라도 과보가 생김은 끝내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028_0559_c_09L柯羅邏等次第生故名生生從業生故名業爲處故言行度名生處業第三分自用强若無業用雖有餘緣生果終不得起
도리가 의지하기 때문에 조건[緣]이라고 이름한다. 먼저 줄기가 점점 자라 아직 꽃이 피지 않는 데까지 이른다. 꽃이 피고 나서 떨어져야 씨앗이 맺는다. 씨앗은 또한 미래의 나무를 자라게 한다. 모두 도리가 의지하는 바라고 이름한다. 꽃과 열매 등은 모두 이 위치의 종자에 의지하여 생겨난다. 꽃이 겨우 생기면 종자의 제3 부분은 곧 소멸한다. 업도 이와 같다. 처음은 가라라에서 생겨나 제7 부분에 이른다. 아직 태어남과 죽음의 원인 및 해탈을 이룰 수 없으나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갖추는 데까지 이르러 제2 찰나는 이미 지나간다.
028_0559_c_12L所依道理故名緣莖先漸長猶未生從生華以去至結子子又生未來皆名所依道理華果等皆依此位種子而得生華纔生種子第三分便業亦如此從柯羅邏初至第七分未能作生死因及解脫至六根具足第二剎那已去
태어남과 죽음, 해탈의 원인을 지을 수 있는 이 위치는 업의 제4 부분이다. 이 제4 부분의 처음은 지나간다. 만약 괴로움과 즐거움, 선과 악이라면 모두 업의 제4 부분에 의지한다. 업의 제4 부분은 이 도리에 의지하기 때문에 조건이라고 이름한다. 업의 제4 부분이 생기고 나서 업의 제3 부분은 곧 사라진다. 업의 제4 부분은 자체의 작용이 또한 강하다. 과보가 이미 생겨났으므로 나머지 조건들의 쌓임의 뜻은 약하다. 바로 업의 작용에서 연유하였으므로 과보를 갖출 수 있다.
028_0559_c_19L能造生死解脫因位是業第四分此第四分初以去苦樂若惡若善皆依業第四分業第四分是依道理故名爲緣業第四分纔生業第三分便謝業第四分自用亦强果旣已生藉餘緣義則弱正由業用故果得具足
028_0560_a_02L만약 업의 제2 부분이 중음의 태어남을 감응한다면 원인과 조건은 모두 약하다. 탐욕의 애착을 원인으로 삼고, 업을 조건으로 삼는 이 두 가지 일들은 모두 약하다. 종자로 모두 비유할 수가 없고, 적은 일부분만을 비유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앞으로 업을 지을 때 이 네 가지 위치를 감응할 수 있음을 갖추어 과보는 시절에 차이가 있다. 이 네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은 이 네 가지 위치와 대비한 것이므로 업을 나누어 네 가지 부분으로 한다.
028_0560_a_02L若業第二分感中陰生因緣俱弱以貪愛爲因業爲緣二事俱弱不可以種子全爲譬止少分爲譬耳當作業時具能感此四位果逐時節有異有此四種約此位故分業爲四分
【문】하나의 업이 어떻게 이러한 과보의 감응을 갖추는가?
028_0560_a_07L一業那忽具感此果
【답】1찰나를 택해서 하나의 업을 밝힌다. 또한 뜻을 나누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과 뒷부분은 약하고, 가운데 부분은 강하다. 약한 부분은 중음을 감응하고, 강한 부분은 과보를 낳는 것과 감응한다. 무류의 업이라면 처음 부분은 강하고 뒷부분은 약하다.
028_0560_a_08L就一剎那明一業亦得義分爲三分前分後分弱中分明强弱感中强感生果若無流業則初强後弱
【문】업이 과보를 낳는 것은 종자의 경우와 같은가 다른가?
028_0560_a_10L業生果與種子若爲異耶
【답】이 뜻이 같지 않다. 만약 살바다부(薩婆多部)21)의 부파에서라면 유위법이 모두 찰나라고 밝힌다. 찰나에 소멸하는 것은 하나의 종자이다.
우선 10찰나에 의거하여 말한다.
028_0560_a_11L此義不同若依薩婆多等部明有爲法皆剎那剎那滅者一種子且據十剎那爲語
만약 부분으로 나누어서 서로서로 낳음[相生]을 논한다면 제1 찰나는 제2 찰나를 생기게 할 수 있고, 제2 찰나는 제3의 항린(恒隣)을 생기게 할 수 있다.
다음에는 서로 서로 낳음을 밝힌다. 제1 찰나의 태어남은 곧바로 소멸하여 제2 찰나에 이르지 못하는데 어찌 제3 찰나를 낳을 수 있겠는가?
028_0560_a_14L若當分論相生者第一剎那能生第二剎那第二剎那能生第三恒鄰次明相生第一生而卽滅不至第二豈能生第三耶
만약 동분인(同分因)을 따라 상속함을 택하여 말한다면 제1 찰나는 동분인으로 곧 제2 찰나를 낳을 수 있다. 이후 나아가 꽃과 열매에 이르는 것은 동분인에 포섭된다. 이 업의 과보는 미래에 있다. 제1 찰나는 소멸하고 제2 찰나의 동분인은 곧 포섭된다. 제3 찰나 이후 과보는 미래에 있다. 이후는 차례로 이와 비슷하다.
028_0560_a_17L若就向分因相續爲語者第一剎那同分因卽能生第二剎那以去乃至華實同分因攝此業果在未來第一剎那滅第二剎那同分卽攝第三剎那以去果在未來後去次第類此
028_0560_b_02L만약 제1 찰나의 종자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면 제2 찰나, 제3 찰나는 있을 수 없다. 차례대로 상속하기 때문이다. 처음 제1 찰나의 종자를 얻음으로써 그 생길 수 있음을 말한다.
후에 모든 과보를 동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종자의 4대는 곧 네 부분이다. 하나의 과보를 같이 생길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있다. 업에는 함께 따라서 얻음[同隨得]이 있어 그 원인과 결과를 포섭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028_0560_a_22L若無第一剎那種子爲本則不得有第二第三剎那次第相續故初一剎那種子以得說其能生後諸果言同分因者種子四大卽四分同能生一果故有此名如業有同隨得攝其因果
만약 정량부(正量部)22)라면 색은 순간순간[念念]마다 소멸하지 않고 잠시 머문다는 뜻이 있다. 종자가 아직 싹이 나지 않았을 때는 단지 하나의 종자일 뿐이다.
만약 부분으로 나누어서 과보를 낳음[生果]을 논한다면 바로 싹과 과보를 낳는다. 만약 상속을 택한다면 줄기와 일 등이 생기는 등의 뜻이 또한 있다.
이후의 종류는 다 이와 같으나 업은 그렇지 않다. 업은 비록 스스로 소멸하나 무실법(無失法)이 현재에 있어 그 과보를 포섭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028_0560_b_04L若正量部色不念念滅有蹔住義種子未生牙只是一種子耳若當分論生果生牙果若約相續亦有生莖葉等義後去類皆如此業則不爾業雖自滅有無失法在攝其果令不失
또한 이제 계율의 선함에 의거하여 말한다.
계율에는 근본이 있고, 근본에는 이전의 방편[前方便] 및 바른 방편[正方便]이 있다.
이전의 방편[前方便]에는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 대중을 화합하여 계율 받음을 허락한 것이다. 둘째, 바르게 구걸하는 계율이다. 셋째, 시절(時節)이다. 시절이란 요컨대 몸과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려 모든 악을 멈추는 것이다.
028_0560_b_09L今且據戒善爲語戒有根本根本有前方便及正方便前方便有三事一大衆和合許爲受戒二正乞戒三時節時節者要期盡形壽息一切惡
바른 방편[正方便]이란 스승이 그것을 말씀하여서 일백삼갈마(一白三羯磨)23)에서 제3 갈마24)로 마치면, 곧 몸과 입의 선함을 얻는 것이다. 이 선함은 곧 계율이다. 요컨대 마음 등의 조건을 기다려서 그것을 포섭하는 것이다. 이것을 근본으로 삼아 몸과 목숨이 다하여도 소멸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나중에 상속하여 항상 흐른다. 만약 중간에 죄를 지으면 계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만약 참회를 마치면 곧 돌아와 다시 흐른다.
028_0560_b_13L正方便者師爲其說一白三羯磨至第三羯磨竟卽得護身口善此善卽是戒以要期心等緣攝之以此爲根本盡形壽不滅此後相續恒流若中間作罪戒則不復流若懺悔竟則還復流
흐름이란 말은 근본으로부터 흘러나온 1찰나의 계율의 선함이다. 흘러나온 것이란 또한 생겨나자 곧 소멸하는 것이다. 이 찰나의 계율이 생겨남을 따르지 않고 제2 찰나의 계율을 유출한다. 근본으로부터 제2 찰나의 계율을 유출한다. 이와 같이 뒤에 생기는 것은 근본으로부터 유출될 수 있다.
만약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뜻이라면 함께 따라서 얻음[同隨得]에 묶이는 계율의 선함이 있다. 생겨나서 비록 사라질지라도 함께 따라서 얻음에 묶인다. 그 머무름은 과거에 있고, 과보의 묶임은 미래에 있다.
028_0560_b_18L言流者根本流出一剎那戒善所流出者亦生卽滅不從此剎那戒生第二剎那還從根本流出第二剎那戒如此後生者能從根本流出若是薩婆多有同隨得繫之戒善生雖謝同隨得繫其住在過去繫果在未來
028_0560_c_02L만약 정량부(正量部)의 경우라면 계율의 선함은 이러한 선한 업을 낳아 무실법(無失法)과 함께 생겨난다. 이 부파는 업과 업의 주체가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본체는 생겨나자마자 바로 사라진다. 무실법은 사라지지 않고 업의 과보를 포섭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무실법(無失法)은 순간순간마다 소멸하는 법이 아니라 시간이 경과해야 소멸하는 법이다. 이것은 잠시 머문다는 뜻이 있고, 과보가 생길 때를 기다려 그 본체가 비로소 사라진다.
028_0560_b_24L若正量部戒善生此善業與無失法俱生其不說有業能業體生卽謝滅無失法不滅攝業果令不失無失法非念念滅法是待時滅法其有蹔住義果生時其體方謝
만약 정해진 계율[定戒]이라면 모두 근본을 따라서 상속하여 흐른다는 뜻이 있다. 물건을 보시하면 물건을 따라서 선함이 항상 흐른다. 만약 선함의 흐름이 없으면 과보를 얻을 수 없다. 무실법과 선함이 함께 생김이 없으면 나머지의 마음에서 무류의 선함이 항상 유출한다는 뜻이 없게 된다.
028_0560_c_06L若是定戒皆有隨根本相續流義布施物則隨物在善恒流若無流善不能得果無有無失法與善俱生無有出在餘心無流善恒流義
【문】업과 무실법(無失法)은 함께 생겨 모두 유위법이다. 업의 본체는 무슨 까닭에 소멸하고, 무실법은 소멸하지 않는가?
028_0560_c_10L業與無失法俱生同是有爲法業體何故滅無失法不滅耶
【답】선함은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생기자마자 곧 소멸한다. 무실법은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순간순간마다 소멸하지 않는다. 살바다부(薩婆多部)의 뜻인 함께 따라서 얻음[同隨得]도 순간순간마다 소멸한다. 다만 마음과 상응하는 법이 아니다. 종류가 자체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다.
028_0560_c_11L善是心相應法故生而卽滅無失法非心相應法故不念念滅薩婆多義同隨得亦念念滅但非心相應法種自相續不斷
【문】보시의 선함이 항상 흐른다고 정해진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028_0560_c_15L布施善恒流定云
【답】몸과 입은 업의 본체이다. 모습으로써 몸의 업[身業]으로 삼고, 언어로써 입의 업[口業]으로 삼는다. 손을 움직여 물건을 잡거나, 혹은 가지거나 집어서 앞의 사람에게 준다. 이것이 모습이다. 곧 이 모습으로써 몸의 업으로 삼는다. 소리쳐서 어떤 물건을 가지고 어떤 사람에게 보시를 하는 이것이 언어로 하는 입의 업이다.
028_0560_c_16L身口是業體以相貌爲身業語言爲口業運手捉物或取物或擎物與前人此卽是相貌卽以此相貌爲身業發言呼取某物施某人此語言卽是口業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는 조건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 가지 선근(善根)이고, 둘째는 세 가지 선근으로부터 생겨난 바른 사유이고, 셋째는 바른 사유로부터 생겨난 작의(作意)이다. 말하자면 보시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만약 전체적으로 논한다면 이 세 가지 조건이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고, 통속적으로 논하자면 바로 작의가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킨다.
028_0560_c_20L發起身口業緣有三種三善根從三善根生正思惟從正思惟生作意謂作施意若摠論用此三緣發身口業近論正是作意發身口業
028_0561_a_02L보시란 말은 세 가지 조건으로써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기 때문에 보시의 선함이라고 이름한다. 보살은 묵묵히 생각하면서 감로의 보석들을 내려주니, 뜻의 업[意業]도 역시 보시의 업이다.
028_0560_c_24L言布施者以三緣發身口故名布施善菩薩默念而雨寶業亦是施業
밭[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덕(福德)의 밭으로 부처님이나 보살 등과 같다. 둘째는 은혜로 길러준 밭으로 부모 등과 같다. 셋째는 가난하고 빈궁한 밭으로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중생 등이다.
만약 복덕의 밭에 보시하면 어리석음이 없는 선근이 많고, 만약 가난하고 빈궁한 밭에 보시하면 성냄이 없는 선근이 많다. 빈궁한 중생들에 대해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성냄이 없는 선근이 많다.
동일한 시간에 세 가지 선근을 갖추어 대하는 복전에 따르기 때문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없는 것이 아니다.
028_0561_a_03L田有三種一福德田佛及菩薩等二恩養田如父母等貧窮田卽饑寒衆生等若施福德田則無癡善根多若施貧窮田則無癡瞋善根多對貧窮衆生必起慈悲故無瞋善根多一時中乃具三善根所對田故不無多少之異
보시에 또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공경하는 보시[恭敬施]이고, 둘째는 이익을 주는 보시[利益施]이다.
만약 공경함으로 보시할 때라면 선함이 생기고 보시를 마치면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어찌된 까닭인가? 부처님께서 이미 열반(涅槃)에 드신 것과 같다.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옷과 음식 등으로써 공양을 한 것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옷과 음식 등으로 과거의 세존께 공양을 드린 것도 공경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물건을 받아 사용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선함은 일을 따라서 흐를 수 없다.
둘째, 이익을 주는 보시란 앞 사람의 4대(大)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앞 사람이 이 물건을 받아 사용함으로써 4대가 더욱 자라기 때문이다.
028_0561_a_09L施復有二一恭敬施二利益施若恭敬當施時善生施竟則善不復流所以爾者如佛已涅槃爲恭敬佛故以衣食等供養又如世人以衣食等供養過去世尊亦有恭敬故旣無人受用此物故善不得隨事而流二利益施者利益前人四大以前人受用此物四大增長故
이익을 주어서 보시하는 것은 선함이 세 가지 일을 따라서 항상 흐른다. 세 가지 일이란 첫째는 세 가지 선근이고, 둘째는 나머지 물건들이고, 셋째는 중생이다. 이 세 가지 일 가운데서 한 가지라도 갖추지 않으면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나머지 물건들이 나 없어지지 않고 중생이 그것을 받아 사용하더라도 시주가 이미 죽었거나 혹은 삿된 견해를 일으켜 선근을 끊으면 선함은 다시 근본이 없어서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만약 시주가 살아 있고, 선근이 끊어지지 않고, 이를 받아 사용할 사람이 없어지지 않았더라도 나머지 물건들이 없다면 선함은 다시 흐르지 않는다.
028_0561_a_17L爲利益而施者善則隨三事恒流三事者三善根餘物衆生三事中若一事不具善則不復如餘物雖未盡衆生猶受用之施主已死或起邪見斷善根善無復根本則善不復流若施主生存善根不斷能受用人未滅而餘物已盡亦不復流
028_0561_b_02L만약 시주가 선근을 끊지 않고 또한 죽지도 않고, 나머지 물건들이 다 없어지지도 않았으나 이를 받아 사용한 사람이 없어져 다시 이를 받아 사용할 사람이 없다면, 선함은 또한 다시 흐르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이 사용할지라도 시주의 본래 마음이 바라던 바가 아니다. 스스로 받아 사용함은 보시의 원칙에 어긋나서 선함은 끝내 자량(資糧)이 되지 않는다.
만약 단월(檀越)25)의 보시하는 마음이 넓다면 이는 따라서 사용해도 된다. 모두 선한 자량이기 때문이다.
028_0561_a_24L若施主不斷善根亦不死餘物又未盡而能受用人已謝滅復人受用之善亦不復流餘人雖用非施主本心所期唐自受用善終不若檀越施心通普此則隨用皆有善資
복전이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주를 받을 때 반드시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다. 만약 뜻의 작용을 따르도록 듣는다면 보시가 돌아옴에 따리 전해져서 복을 낳음이 끝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번번이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 시주의 마음과 어긋나 타인에게 시주가 돌아가 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죄를 초래하고 마침내 뒤에 악도(惡道)에 떨어져서 서로 과보를 갚는다. 이는 쉽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그것을 삼가야 한다.
028_0561_b_06L故爲福田者受他施時須將其若聽隨意用則隨所迴施傳傳生福則無窮若不爾者輒迴與他乖施主心迴施人非但無福亦更招罪至後應墮惡道中更相報償此不容故宜愼之
【문】선근을 끊어서 선함이 이미 다시 근본이 없다. 어찌 선함이 다시 생겨날 수가 있는가?
028_0561_b_11L斷善根竟善旣無復根本云何得更生善耶
【답】이는 마땅히 두 가지로 작용할 것이다.
028_0561_b_12L此應更作
【문】수다원의 처음 도는 무류(無流)이고 무류의 종류로 근본을 삼지 않는다. 어찌 아라한에서 물러나서 도를 닦아 깨트리는 번뇌를 일으킬 수 있는가? 번뇌가 근본으로 삼는 불선근(不善根)이 없는데 어찌 생겨날 수가 있는가?
028_0561_b_13L須陁洹初道無流無有無流種類爲根本何得以阿羅漢退起修道所破煩惱煩惱無不善根爲本云何得生耶
【답】생겨남[生]에 두 가지 종류의 원인[因]이 있다. 첫째는 먼저 생겨난 원인[先生因]이고, 둘째는 함께 생겨나는 원인[俱生因]이다.
028_0561_b_16L生有兩種因一先生因俱生因
먼저 생겨난 원인은 곧 세 가지 선근이고, 아직 선함을 짓지 않았으나 먼저 이 선근이 있어 앞으로 선함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먼저 생겨난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함께 생겨나는 원인이란 작의(作意)이고, 사택(思擇)함으로 선함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지 사택할 때는 선함이 생겨나는 때이다. 그러므로 함께 생겨나는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1_b_17L先生因卽是三善根未作善時先有此善根能生所作善故名先生因俱生因者卽是作意思擇故善只思擇時是善生時故名俱生因
028_0561_c_02L만약 선근(善根)이 아직 끊어지지 않고 선함을 짓는 때라면 두 가지 종류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약 선근이 끊어지고 선함을 짓는 때라면 곧 오직 함께 생겨나는 원인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약 선함이 생겨날 때라면 다시 세 가지 선근으로 돌아가 접촉하여서 선한 마음이 상응할 수 있게 한다.
선근을 끊음은 선근의 본체가 모두 다 소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삿된 견해로써 그 선근과 떨어지게 하여 선한 마음이 그것과 상응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를 끊음[斷]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1_b_20L若善根未斷作善之時從兩因生善根已斷作善之時則唯從俱生因若善生時還復接三善根令與善心得相應斷善根非是善根體都滅直以邪見隔之無復有善心與其相應名之爲斷
만약 무류(無流)의 도가 생긴다고 말한다면 이는 유류(有流) 선근의 본체가 곧 소멸하는 것이다. 수다원의 처음 도는 무류이다. 이전에는 무류 선근이 아직 없다. 오직 함께 생기는 것으로부터 아라한의 경지에서 물러나 번뇌를 일으킨다.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이 다 없어졌으므로 역시 다만 함께 생겨나는 원인으로부터 생겨날 뿐이다.
028_0561_c_03L若無流道生者有流善根體則滅須陁洹初道無流爾前未有無流善根唯從俱生阿羅漢退起煩惱三不善根已盡亦但從俱生因生
【문】소승에서도 부처님이 음식의 시주를 받아 이 음식을 먹을 때 대변과 소변26)을 본다고 하는가?
028_0561_c_07L小乘佛受施食食此食時作便利不
【답】부처님은 대변과 소변이 없다. 부처님 턱 아래 양쪽은 목을 향하고 각각에 천 개의 근육이 있어 모든 맛있는 음식을 받는다. 음식을 먹으면 아래로 내려가 문득 피와 살로 변한다. 그러므로 대변과 소변이 없다.
전륜왕(轉輪王)의 경우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대변과 소변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삼승(三乘)에게는 범부와 같이 또한 대변과 소변이 있다.
만약 6천(天)이 음식을 먹는다면 수타(須陀)27)고 이름한다. 수는 선(善)이라 번역하고, 타는 정실(貞實:진실)이라고 번역한다. 이 음식은 정갈하면서도 오묘하여 또한 대변과 소변을 만들지 않는다
028_0561_c_08L佛無便利佛頷下兩邊向頸各有千筋受一切食味食下至此便變爲血肉故無便利轉輪王有兩一云有便利一云無有三乘同凡夫亦有便利若六天食名須陁須翻爲善陁翻爲貞實此食精妙亦不成便利
함께 묶여 있음[共繫]의 뜻이 없는 것이 소멸의 뜻이다. 함께 묶여 있음이 깨끗하게 다 하였으므로 소멸이라고 이름한다. 예는 앞의 것만 드는 것으로 그치나, 뒤에도 구절(句節)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앞의 구절이 있다는 것은 천축(天竺)의 말로는 니로다(尼盧陀)28) 소멸의 뜻인 멸(滅)을 나타내는 나로다의 범어는 nirodha이다.
이다. 이것은 한 가지 명칭에 열 가지 뜻이 있다. 복(覆)도 니로다이고, 난(蘭)도 니로다이고, 멸(滅)도 니로다이다.
여기서는 멸(滅)의 뜻만 밝히고 나머지 뜻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처음 구절에서 이것을 분별한 것이다.
028_0561_c_14L無共繫義是滅義共繫淨盡故名滅例前止應有後句而有前句者天竺云尼盧陁此一名有十義覆亦名尼盧陁蘭亦名尼盧陁滅亦名尼盧陁今示說滅義不說餘義故以初句分別之
『중아함경(中阿含經)』 가운데 묶임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경전에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탐욕의 애착이 그대들의 눈[眼] 속에 있다. 그대들은 이것을 반드시 소멸해야 한다. 만약 탐애(貪愛)를 소멸하면 그대들의 눈도 또한 소멸된다. 눈이 색을 대함을 원인으로 하여 탐애가 생겨서 함께 식(識)을 묶어버린다. 탐애는 번뇌에 묶여 있다. 눈 및 색의 경계는 묶임이다. 만약 탐애의 묶임을 소멸하면 눈 등의 묶임도 또한 깨어져 소멸할 것이다.’”
028_0561_c_20L『中阿含』中有『解繫縛經』云佛語比丘貪愛在汝眼中汝須滅之若滅貪愛汝眼亦滅因眼對色生貪愛共繫縛識貪愛卽煩惱繫縛眼及色境界是繫縛若滅貪愛繫縛眼等繫縛亦壞滅
028_0562_a_02L경전에서는 이를 비유하여 말한다.
“쇠사슬로 사람을 묶어 감옥에 가둔다. 쇠사슬도 하나의 묶임이고, 감옥도 하나의 묶임이다. 만약 쇠사슬을 부수어 없애거나, 감옥을 태워 없앤다면 이 두 가지 묶임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묶임이 중생을 함께 묶어두기 때문에 함께 묶음이라고 말한다. 탐애에서 해탈하기 때문에 청정[淨]이라고 말한다. 경계에서 해탈하기 때문에 다함[盡]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탐애를 멸한 것이 유여열반이다. 경계를 멸한 것이 무여열반이다. 눈이 이미 이와 같은 것처럼 귀ㆍ코 등도 모두 그와 같다.”
028_0562_a_02L經譬之云如以鎖鎖繫人置牢獄中鎖是一繫縛獄是一繫縛打除鎖又燒滅獄則離二繫縛兩縛共繫衆生故言共繫解脫貪愛故言解脫境界故言盡此卽是餘無餘涅槃貪愛滅是有餘涅槃境界滅是無餘涅槃眼旣如此耳鼻等悉然
세 가지 유위(有爲)의 모습을 해탈했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말한다. 세 가지 유위는 자체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삼세(三世)로 세 가지 유위의 모습으로 삼는 것이고, 둘째는 태어남ㆍ늙음ㆍ소멸함으로 세 가지 유위의 모습으로 삼는 것이다. 네 가지 모습 가운데서 머무름[住]을 밝히지 않은 까닭은 유위법은 머무름이 없고, 머무름은 무위의 모습이기에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삿된 사유로 기인하기 때문에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는 업을 낳고, 업은 과보를 낳는다. 이미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 생겨나 있기 때문에 삼세가 있다. 무위법의 경우 원인과 결과의 모습이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삼세가 없다.
028_0562_a_08L有爲相解脫故名寂靜三有爲自有二種一以三世爲三有爲相二以生老滅爲三有爲相所以不明有住者有爲法無住住是無爲相故不說之由邪思惟故起煩惱煩惱生業業生果報旣有因果相生故有三世無爲法無因果相生故無三世
유위법은 본래 이것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이 있다. 생겨남이 있기 때문에 늙음ㆍ소멸이 있다. 무위법은 본래 있기 때문에 생겨남이 없다.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늙음ㆍ소멸도 없다
유위법은 이 두 가지 종류를 갖추고 있다. 이 두 가지 모습이 시끄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적정하지 않다. 무위법은 이 두 가지 종류를 해탈해서 두 가지 모습29)의 시끄럽게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적정이라고 이름한다.
하나의 번뇌에 나아감에 하나의 해탈이 있으니 아흔여덟 가지 번뇌에 아흔여덟 가지 해탈이 있다.
028_0562_a_15L有爲法本是無故有生有生故有老滅無爲法本有故無生無生故無老滅有爲法具有二種二相喧動故非寂靜無爲法解脫此二種三相旣無喧動故名寂靜就一煩惱有一解脫九十八煩惱卽有九十八解脫
028_0562_b_02L모든 법[諸法]은 원래 생겨남이 없다. 생겨남이 없으니 곧 해탈이다. 중생이 뒤바뀐 생각[顚倒]을 내기 때문에 색 등에 대해서 탐욕과 집착을 일으킨다. 탐욕과 집착을 원인으로 하여 업을 낳고, 업은 과보를 낳는다. 번뇌로 색에 탐욕하고 집착하여 그를 다스리는 무위의 이치에 이를 수 없다. 다스리는 무위란 이 탐욕의 애착이 만약 끊어지게 된다면 곧 이 무위를 증득하기 때문에, 아흔여덟 가지 미혹에는 아흔여덟 가지 무위의 업 및 과보가 따른다. 번뇌에는 따로 무위가 없다.
028_0562_a_21L諸法本來不生不生卽解脫衆生顚倒故於色等而起貪著因貪著生業業生果報煩惱貪著色不能稱所對無爲之理所對無爲卽是此貪愛若被斷卽證得此無爲故九十八惑有九十八無爲及果報逐煩惱無別有無爲
진실의 선[眞實善]이기 때문에 묘함[妙]이라고 이름한다. 선(善) 자체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진실의 선[眞實善]이고, 둘째는 자성의 선[自性善]이고, 셋째는 서로 상응하여 뒤섞인 선[相雜善]이고, 넷째는 일어난 선[發起善]이다.
진실의 선[眞實善]이란 곧 열반이다. 나고 죽음[生死]은 악법이고, 열반은 악이 없다. 원인과 조건의 생겨남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선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2_b_04L眞實善故名妙善自有四種一眞實二自性善三相雜善四發起善實善者卽是涅槃生死是惡法涅槃無惡不從因緣生故名眞實善
자성의 선[自性善]이란 탐욕 없음[無貪]ㆍ성냄 없음[無瞋]ㆍ어리석음 없음[無癡]의 세 가지 선근이다. 이 세 가지 선근은 나머지 조건들을 빌리지 않고, 성품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세 가지 악을 다스린다. 열반은 이 세 가지 악이 없다. 이것은 열반과 서로 어울리기 때문에 선이라고 이름한다. 비유하자면 세 가지 약이 다른 조건들을 빌리지 않고도 성품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약이란 기름이 중풍 등의 풍병을 다스리고, 소(蘇)가 열을 다스리고, 벌꿀이 담(痰)30)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028_0562_b_08L自性善者卽是無貪無瞋無癡三善根三善根不藉餘緣性能對治貪瞋癡三惡涅槃無三惡其與涅槃相稱名爲善譬如三藥非藉餘緣性能治油能治風蘇能治熱蜜能治淡
서로 상응하여 뒤섞인 선[相雜善]이란 뜻으로 짓는 업[意業]의 선이다.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하기 때문에 믿음과 지혜 등의 선을 낳고, 믿음과 지혜 등이 생겨날 때 심법 및 심소법(心所法)31)이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하여 모두 선을 이룬다. 아직 섞이지 않았을 때 세 가지 선근은 각각 하나의 악을 다스린다. 심법 및 심소법이 세 가지 선근과 서로 섞이지 않았으면 악을 다스리는 작용이 없다. 서로 섞였을 때 비로소 모든 악을 다스리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마치 갖가지 약이 서로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각각의 병만을 치료할 수 있지만, 화합하여 섞은 이후에는 다스리지 못하는 병이 없는 것과 같다.
028_0562_b_13L相雜善者是意業善由與三善根相應故生信智等善信智等生時心及助心法與三善根相應悉皆成善雜之時三善根各能治一惡心及助心法不與三善根相雜則無治惡用相雜之時則能備破諸惡如衆藥未相和雜之時各能治病和雜以後則無所不治
028_0562_c_02L일어난 선[發起善]이란 몸과 입의 선이다. 몸과 입은 본래 선이 없다. 뜻으로 짓는 업의 선으로 말미암아 몸과 입의 선을 일으키기 때문에 몸과 입의 선을 낳는다. 비유하자면 물은 본래 약이 아니지만 약을 물에 타서 끓이면 약이 물에 스며들어 물도 약이 되게 만드는 것과 같다.
세 가지 선근은 모두 진실의 선을 따르기 때문에 선을 이룬다. 악은 거친 법[麤法]이나, 무위는 악이 없는 진실의 선이다. 그러므로 묘하게 좋은 것[妙好]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2_b_21L四發起善者是身口善身口本無善由意業善發起身口故身口生善如水本非藥以藥內水中而煮之藥發起水使水亦成藥三善根皆由隨順眞實善故得成善惡是麤法爲無惡是眞實善故名妙好
【문】심법(心法) 및 심소법(心所法)은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할 때 한꺼번에 세 가지 선근과 모두 상응하는가?
028_0562_c_04L心及助心法與三善根相應時一時中具與三善根相應不
【답】한꺼번에 세 가지 선근과 상응한다. 가령 믿음과 지혜 등이 현전할 때 이 마음이 진리를 벋으면 바로 어리석음이 없게 된다. 탐욕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으면 탐욕과 성냄이 없는 것이다.
028_0562_c_06L一時中具與三善根相應如信智等現前時此心得理卽是無癡貪瞋不起卽是無貪瞋
【문】심법 및 심소법이 세 가지 불선근과 상응할 때 한꺼번에 세 가지 불선근과 모두 상응하는가?
028_0562_c_08L心及助心法與三不善根相應時一時中具與三不善根相應不
【답】악한 마음이 현전할 때 이 마음이 진리와 어긋나 항상 무명(無明)과 상응한다. 만약 탐욕과 상응할 때라면 성냄과 상응하지 않는다. 악한 성품이 서로 상반되기 때문이다.
028_0562_c_10L心現前時此心乖理恒與無明相應若與貪相應時不與瞋相應以惡性相反故
【문】세 가지 선근은 심법인가?
三善根是心法不
【답】심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다. 마치 승기부(僧祇部)32) 등에서 ‘중생 마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나 객진(客塵)에 오염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청정함은 곧 세 가지 선근이다. 중생은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객진이 있으니. 이는 곧 번뇌이다. 번뇌는 곧 수면(隨眠)33) 등의 번뇌이다. 수면의 번뇌는 곧 세 가지 불선근이다.
028_0562_c_13L非心故有時不與心相應如僧祇等部衆生心性本淨客塵所污淨卽是三善根衆生無始生死已來有客塵卽是煩惱煩惱卽是隨眠等煩惱眠煩惱卽是三不善根
세 가지 선근이 있기 때문에 믿음과 지혜 등을 낳고, 믿음과 지혜 등이 생겨날 때 세 가지 선근과 서로 돕기 때문에 상응(相應)이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불선근이 있기 때문에 탐욕과 성냄 등의 불선(不善)을 일으키고, 불선이 생겨날 때 세 가지 불선근과 서로 돕기 때문에 상응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2_c_18L由有三善根故生信智等信智等生時與三善根相扶故名相應由有三不善根故起貪瞋等不善不善生時與三不善相故言相應
028_0563_a_02L만약 삿된 견해를 일으켜 세 가지 선근을 끊는다면 세 가지 선근은 잠시 소멸하되, 영원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뒤에 선이 생겨나면 다시 세 가지 선근과 접촉하여 생기게 한다. 만약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을 끊는다면 끊는다는 것은 곧 영원히 생기지 않는 것이다.
가장 뛰어나게 쉬게 하기 때문에 영리(永離)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가령 다음과 같다. 원수들 사이에 있을 때라면 사람이 안식을 얻을 수 없는데, 원수와 단절하여 떠날 경우, 만약 그들을 떠남이 멀지 않다면 안식에 이를지라도 가장 뛰어난 안식은 아니고, 만약 그 경계를 모두 벗어난다면 비로소 가장 뛰어난 안식이 된다.
028_0562_c_22L若起邪見斷三善根善根蹔滅非永滅後若生善還接之令生若斷三不善根者斷則永不生最勝息故名永離者如人處在怨賊之中則不得安息若斷離怨賊離之未遠乃有安息義非最勝安息若都出其境界者方是最勝安息
내부의 합침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번뇌라는 원수들 사이에 있을 때라면 도무지 안식을 얻을 수 없는데, 만약 비록 또한 조금 끊더라도 그들을 끊음이 미진하다면 안식에 이를지라도 가장 뛰어난 안식은 아니고, 만약 그를 다 끊어서 영원히 번뇌를 밖으로 내쫓는다면 비로소 가장 뛰어난 안식이 된다.
아라한은 번뇌를 모두 없애서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게 한다. 이것이 가장 뛰어난 안식이다. 수다원은 견제(見諦)34)의 번뇌를 모두 없애서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게 한다. 이것도 역시 가장 뛰어난 안식이다.
028_0563_a_05L內合亦若在煩惱怨賊中則都未安息雖復稍斷斷之未盡乃有安息義最勝安息斷之若盡永出煩惱外是最勝安息阿羅漢煩惱都盡永不復生是最勝安息須陁洹見諦煩惱都盡永不復生亦是最勝安息
삿된 도[邪道]를 다스리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아흔여섯 명의 사문(沙門)35)들은 모두 삿된 도를 행한다. 삿된 도라고 말하는 까닭은 이 도를 행하면 가더라도 도달할 곳이 없기 때문에 삿된 도라고 이름한다.
만약 계율ㆍ선정ㆍ지혜의 올곧은 도를 행한다면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 삿된 도를 다스리기 때문에 계율ㆍ선정ㆍ지혜를 도라고 말한다.
다시 풀이하여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마치 사람이 어느 곳에 도달하고자 마음먹는다면 먼저 반드시 길을 찾는 것과 같다. 만약 해탈을 구한다면 먼저 반드시 출세간의 도를 찾아야 한다. 계율ㆍ선정ㆍ지혜는 찾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도라고 이름한다.
028_0563_a_11L爲對治邪道故名爲道九十六種沙門皆行邪道所以稱邪道者行此道者去無所至故名邪道若行戒定慧正直道者得至涅槃爲對治邪道說戒定慧爲道又解言可覓故名道如人期心欲至一方先須覓道路欲求解脫須先覓出世道戒定慧是可覓之處故名道對治非如故名如
이치와 같지 않음[非如]을 다스리기 때문에 이치와 같다[如]고 이름하니,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이치와 같지 않은 것을 다스리는 것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이치와 같지 않은 행동을 다스리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028_0563_a_19L有兩解一明對治非如理二明對治非如行
네 가지 뒤바뀐 생각[四顚倒]36)은 이치와 상응하지 않는 것이 바로 ‘같지 않음’이라고 한다. 항상함[常]ㆍ즐거움[樂]ㆍ나[我]ㆍ청정함[淨]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두고, 영원하지 않음[無常]ㆍ괴로움[苦]ㆍ나 없음[無我]ㆍ더러움[不淨]으로써 열반 가운데 두고 이제 관찰하면 삶과 죽음은 영원하지 않음ㆍ괴로움ㆍ나 없음ㆍ더러움이고, 열반은 항상함ㆍ즐거움ㆍ나ㆍ청정함이다. 이는 곧 이치와 상응하므로 ‘같음[如]’이다.
028_0563_a_21L四倒與理不相應卽是非如以常樂我淨置生死中以無常苦無我不淨置涅槃中今觀生死是無常苦無我不淨涅槃是常樂我淨與理相應卽是如
028_0563_b_02L【문】소승에서 열반은 무엇인가? 이는 ‘나’를 얻는 것인가? 이것이 ‘나’라면 모든 법은 다 ‘나 없음’이 아니지 않는가?
028_0563_b_02L小乘涅槃云何得是我耶是我則一切法不皆是無我
【답】소승은 모든 법 가운데서 ‘나 없음’을 밝힌다. 그러므로 ‘나 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열반은 본체가 있고, 본체가 있는 것은 ‘법의 나[法我]’이다.
028_0563_b_03L小乘明一切法中無我故名無我耳涅槃有體有體卽是法我
같지 않게 행하는 것을 다스린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외도(外道)에는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 있다. 상견(常見)이란 ‘나’가 불멸하여 미래에 과보를 받는다고 생각함을 말한다.
028_0563_b_05L對治行不如者外道有常見斷見常見者計我不滅於未來受報
미래의 과보를 위하여 현재에 무릇 열한 가지 고행(苦行)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계속 앉아 있는 것이다. 항상 앉아 있고 일어나지 않는다. 둘째는 크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산과 계곡의 험난한 곳을 머물지 않고 피하지 않고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셋째는 먹지 않는 것이다. 단식하여 스스로 배고프게 한다. 넷째는 오래 의지해 있는 것이다. 항상 한 곳에 서 있는다. 다섯째는 태양을 따라 머리를 들고 해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동쪽을 바라보면서 해를 따라 머리를 들고 해질 때까지 눈을 풀지 않는다.
028_0563_b_07L爲未來報故於現在修苦行凡有十一事一永坐恒坐不起二大發行不住不避山谷險難而漫行三不食斷食自餓四長倚立一處五隨日仰頭視日朝則東視隨日上落視之不懈
여섯째는 다섯 곳에 뜸을 뜨는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로 머리에 뜸을 뜨고 사방에 불을 놓아 몸에 뜸을 뜬다. 일곱째는 가시 위에서 잠자는 것이다. 가시를 한 곳에 모아 두고 그 위에서 잠을 잔다. 여덟째는 바위를 던지는 것이다. 아홉째는 불길에 뛰어드는 것이다. 열째는 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열한째는 모든 하늘[諸天]을 공양하는 것이다. 스스로 근육을 드러내서 비파의 현처럼 근육을 퉁기고, 머리 조아려 모든 하늘에게 공양드린다.
028_0563_b_12L六五炙當晝大熱以日炙頭四邊燃火以炙身七眠取刺置一處以眠其上八投巖赴火十投水十一供養諸天自挑出筋爲琵琶弦彈之而預供養諸天
단견(斷見)이란 몸이 소멸하면 나도 역시 소멸하고, 현재와 미래도 없다고 생각하늘 것을 말한다. 방자만 마음으로 갖가지 죄를 짓는다. 이러한 행동은 바른 행동[正行]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같지 않은 행동[不如行]’이라고 이름한다.
이제 상견(常見)도 아니고 단견(斷見)도 아닌 견해로 관찰하고, 양쪽을 떠나서 중도(中道)로 행동하니, 열반국(涅槃國)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바른 행동’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3_b_16L見者謂身滅我亦滅無有未來現在恣心所作造種種罪此行竝不與正行相應故名不如行今觀不常不斷離二邊行中道與涅槃國相稱事名正行
열반을 나라로 부른 까닭은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아주 힘센 사람이 다스리기 때문이다. 아주 힘 센 사람이란 부처님 및 독각(獨覺)과 아라한이다. 열반을 증득하여 잘못이 없기 때문에 다스린다고 말한 것이다. 둘째는 원수나 도적이 침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 가운데서는 영원히 번뇌를 떠났으니, 이는 침범이 없다.
028_0563_b_21L所以呼涅槃爲國者有二義大力人所鎭故大力人卽是佛及獨覺阿羅漢證得涅槃無有過失言鎭怨賊不侵故涅槃之中永離煩惱卽是不侵
028_0563_c_02L어울리지 않는 것[不稱事]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긍정하여 따라가지 않음[不肯去]이고, 둘째는 길을 피함[僻路]이고, 셋째는 길을 의심함[疑路]이다.
만약 내가 있다는 견해[我見]를 일으킨다면 삶과 죽음을 양 극단으로 삼아 다시는 열반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곧 이것이 ‘긍정하여 따라가지 않음’의 뜻이다. 비록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하였으나 계금취견(戒禁取見)37)만을 닦는 것이 ‘길을 피함’이고 무류의 8정(定) 및 유류의 8정에서 어떤 것이 바른 길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이 ‘길을 의심함’이다.
028_0563_c_02L不稱事有三義一不肯去二僻路三疑路若起我見者生死爲極處不復進求涅槃卽是不肯去義雖欲進求而修戒取卽是僻於無流八定及有流八定不知何者是正卽是疑路
만약 무류의 지혜를 닦아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 이는 ‘길을 의심함’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미 ‘길을 의심함’을 제거하였으면 또한 ‘길을 피함’을 제거하는 것이고, 삶과 죽음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긍정하여 따라가지 않음’을 제거함이다. 무류의 지혜를 닦으면 내가 있다는 견해ㆍ계금취견ㆍ의심 등의 번뇌를 제거한다. 열반에는 번뇌가 없다. 곧 이것이 열반과 어울리는 일이다. 이는 삿되지 않기 때문에 바른 행동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3_c_07L若修無流慧分別是非卽除疑路旣除疑路亦除僻路不著生死卽除不肯去修無流慧除我見戒取疑等煩惱涅槃無煩惱卽是與涅槃相稱事此事不邪故名正行
모든 두려움을 다스리는 것을 벗어남[出離]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두려움에 대해 말한다.
“부처님께서 바사닉왕(波斯匿王)에게 물으셨다.
‘어떤 사람은 ‘어떤 커다란 산이 동쪽으로부터 뻗어 나와 아래는 땅을 지나고, 위는 태양에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차례로 어떤 사람이 ‘나머지 세 방향에도 커다란 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대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자 하는가?’
028_0563_c_12L對治一切怖畏故名出離一切怖畏者佛問波斯匿王有人說有大山從東方來下歷地上際日輪如是次第明有人說餘三方有大山來今欲作何計
왕이 부처님께 답하였다.
‘세존(世尊)이시여, 이는 부드러운 말[愛語]로도 물리칠 수 없고, 보시(布施)로도 물리칠 수 없고, 겁주는 일로도 물리칠 수 없고, 군대로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는 네 가지 방편으로도 다스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제 오로지 일심(一心)으로 팔정도[八分聖道]를 닦아 벗어나고자 합니다.’
028_0563_c_16L王答佛言世尊此不可以愛語而得卻之不可以布施而得卻之不可作怖畏事而得卻之不可興兵而得卻之非此四方便所如我今唯當一心急修八分聖道以求出離耳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가령 불이 그대의 머리에 붙고 그대의 옷을 태우고 있다면 그대는 먼저 불을 끄겠는가 아니면 먼저 8정도를 닦겠는가?’
028_0563_c_21L佛又問如有火來爛汝頭燒汝衣爲當先須滅火先須修八分聖道耶
028_0564_a_02L왕이 답하였다.
‘세존이시여, 불이 나의 머리와 옷을 태울 때 제가 불을 끈다면 잠시의 괴로움은 면할 수 있으나 영원히 괴로움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8정도를 닦는다면 괴로움을 영원히 떠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연히 먼저 8정도를 닦겠으며, 불 끄는 일을 먼저 하지는 않겠습니다.’”
028_0563_c_23L王答言世尊火燒我頭及衣我若滅火乃是蹔時得免苦非是永免若修八分聖道則永離苦我當先修八分聖道不先滅火
사방의 산은 늙음ㆍ병듬ㆍ죽음ㆍ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을 비유한 것이다. 늙음의 괴로움은 젊음을 깨트리고, 병듦의 괴로움은 건강을 깨뜨리고, 죽음의 괴로움은 수명(壽命)을 깨트리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은 부귀와 즐거움을 깨트린다.
앞에서부터 설명해 들어온 것이 모두 벗어남의 다른 뜻을 밝힌 것이다.
천친(天親)38)논사가 주장한 것은 경전의 우바제사(優波提舍) 논사의 뜻과 같다.
028_0564_a_04L四方山卽譬老愛別離四苦老苦能壞少壯病苦能奪强健死苦能傾壽命愛別離苦能乖富樂前來皆是出異義天親所執同經優波提舍師義
논주(論主)가 말하였다.
“내가 믿고, 이해한 바를 나는 이제 설명하고자 한다.
태어남이 있고, 소멸함이 있는 것을 영원하지 않음[無常]이라고 말한다. 유위법은 태어남과 소멸함이 있기 때문에 이 영원함을 얻을 수 없다. 태어남은 곧 있음[有]이고, 소멸함은 곧 없음[無]이다. 앞에서는 있고 나중에는 없기 때문에 이는 영원하지 않음이다.”
028_0564_a_08L論主云如我所信所解今當說之有生有滅故名無有爲法有生滅故不得是常生卽是有滅卽是無先有後無故是無常
“태어남은 무슨 까닭에 영원한 태어남이 아니고, 소멸함은 무슨 까닭에 영원한 소멸함이 아닌가? 그리고 태어남과 소멸함은 영원하지 않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028_0564_a_11L生何故非常生滅何故非常滅而言生滅是無常耶
해석하여 말한다.
태어남은 소멸을 파괴하기 때문에 소멸은 영원하지 않고, 소멸함도 또한 태어남을 파괴하기 때문에 태어남도 역시 영원하지 않다.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5음(陰)은 괴로움의 덩어리이다. 항상 중생의 마음과 어긋나서 그로 하여금 괴로움을 받게 한다. 중생은 몸을 받아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갖가지 의복과 음식으로 길러지지만 이 은혜를 알지 못하고 항상 모든 괴로움을 내어 중생의 마음과 어긋난다. 옷과 음식이 증가하고 감소하는 사이에도 항상 번뇌가 생기고, 편안함 얻기를 바란다.
028_0564_a_13L解言生壞於滅故滅非常滅復壞生故生亦無常相違性故名苦五陰是苦聚恒違逆衆生心令其受苦衆生無不愛所受身以衣服飮食種種將養而其不知此恩生諸苦違逆衆生心於衣食增減之閒恒生苦惱欲令得安
오래 앉아 있는 까닭으로 괴로움이 생긴다. 앉아 있는 일에 염증을 내면 반드시 돌아다닌다. 오래 돌아다니면 또 괴로움이 생긴다. 이와 같이 4위의(威儀)39) 가운데서도 항상 서로 어긋난다.
중생의 마음과 항상 어긋나는 까닭은 조건이 되는 경계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어긋나서 괴로움을 낳는다.
028_0564_a_19L所以坐久則生苦厭坐須行久行又生苦如此四威儀中恒相違逆所以恒違逆衆生心由所緣境界非眞實故違逆生苦
028_0564_b_02L본체를 떠났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말한다.
일체의 모든 법들은 다 가명(假名)이다. 이름이 있고, 뜻은 있으나 본체는 없다. 화합하여 법을 낳을 수 있는 것[能生]이 원인의 뜻이다. 화합 가운데 원인의 이름을 세워서 생겨난 것[所生]이 결과의 뜻이다. 생겨난 것 가운데서 결과의 이름을 세웠으니, 원인과 결과에는 본체가 없다.
028_0564_a_22L體所離故名空一切諸法皆是假名有名有義而無有體和合能生是因於和合中以立因名所生是果義於所生中以立果名而因果無體
어찌된 까닭인가?
감각기관과 대상이 화합하여 식(識)을 낳을 수 있다. 감각기관과 대상을 떠나서 어디에 따로 원인의 본체가 있겠는가? 화합하기 때문에 식이 생긴다고 말한다. 화합을 떠나 밖에 어찌 다시 식의 본체가 생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28_0564_b_03L以故然根塵和合能生識離根塵外豈別有因體耶和合故說識生離和合外豈復別有識體生耶
원인과 결과가 다하더라도 능작(能作)과 능용(能用)이 없으니 원인과 결과가 없게 된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의 이름과 뜻이 있는 것이다. 능작(能作)이 없다는 것은 원인에 본체가 없으니 진실한 능작이 없다는 것이다. 능용(能用)이 없다는 것은 결과에 본체가 없으니 진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름과 뜻이 없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중간에 본체가 없다는 것은 본체를 떠난 바의 뜻이다. 그러므로 공이라고 말한다.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 없음’이라고 말한다.
028_0564_b_06L有因果無能作能用無有因果是有因果名義無能作者因無體無眞實能作無能用者果無體無眞實能受用苦樂名義中無體卽是體所離義故名空自人故名無我
부처님께서 ‘법이란 18계(界)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나’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어떤 계에 속하겠는가? 만약 18계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러므로 ‘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는 발화불다라가주자부(跋和弗多羅可住子部)40)의 뜻을 깨트린다.
028_0564_b_11L佛說有法不出十八若言有我是何界所攝若十八界不攝故知無我此破跋和弗多羅可住子部義
이 학파는 변론하여 말한다.
“‘나[我]’는 18계 가운데 두루한데 어찌하여 따로 하나의 계[一界]에 속할 수 있겠는가?”
이 학파가 집작하는 ‘나’란 말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不一不異], 말할 수 없는 창고[不可說藏]이다”는 것이다.
028_0564_b_14L其救義云我遍十八界中豈可令別爲一界所攝耶其所執我言不一不異是不可說藏
이제 이러한 견해를 다시 깨트린다.
“눈의 감각기관[眼根]과 색의 대상[色塵]은 소연(所緣)이고, 안식(眼識)은 능연(能緣)이다. 감각기관과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생긴다.
이제 먼저 소연을 택하여서 그것을 깨트린다.
028_0564_b_16L今更破之如眼根與色塵是所緣眼識是能緣緣根塵故生識今先就所緣中破之
‘나’가 감각기관과 대상에 두루하다면 하나가 되는가, 다른 것이 되는가?
만약 다른 것이라면 곧 마땅히 소연에 감각기관[根]ㆍ대상[塵]ㆍ‘나[我]’의 세 가지 법이 있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까닭에 두 가지만 말씀하시고 세 가지를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028_0564_b_18L我遍在根塵中爲一爲異若其異者則應所緣有根塵我三法佛何故止說二不說三耶
만약 ‘나’가 감각기관 및 대상과 다르게 있지만 부처님께서 소연으로 삼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 ‘나’는 곧 작용이 없게 된다.
또한 만약 감각기관 및 대상과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다른 것이 아니다[不異]’라고 말한 뜻이 여기서 깨어진다.
만약 ‘나’가 감각기관 및 대상과 하나라고 말하면, 곧 오로지 감각기관과 대상만 있다.
어딘가에 ‘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대가 ‘하나가 아니다[不一]’라고 말한 뜻이 또한 깨어진다.
028_0564_b_21L若言有我異於根塵而佛不說爲所緣者此我則無用若言異根塵者汝說不異義此則壞若言我與根塵一則唯有根塵何處有我則汝說不一義又壞
028_0564_c_02L다음에는 능연의 입장에서 이를 깨트린다.
‘나’는 식과 하나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다른 것이라면, 곧 능연에 ‘나’와 식의 두 가지 종류가 있게 된다.
만약 두 가지 법이 있다면, 부처님은 어떤 까닭에 말하지 않았는가?
만약 비록 두 가지 법이 있으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나’는 작용이 없게 된다.
또한 그대가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뜻이 깨어진다.
만약 ‘나’는 식과 하나라고 하면, 식은 조건들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이미 유위법이고, ‘나’도 또한 당연히 유위법이어야 한다.
그대가 주장한 “‘나’는 유위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다”라는 말이 깨어진다. 또한 그대가 말한 ‘하나가 아니다’는 말도 깨어진다.
028_0564_c_02L次就能緣破之我與識爲一爲異耶若異則能緣有二種謂我及識若有二法佛何故不說耶若雖有而佛不說則我無又汝說不異義則壞若我與識一識從緣生旣是有爲我亦應是有爲汝立我非有爲非無爲此言則壞汝言不一此言又壞
만약 외도의 ‘나’에 대한 견해를 깨트리면 외도는 ‘나’의 뜻을 세워서 네 가지 지식[四智]41)으로 ‘나 있음[有我]’을 증명하여 아나니, 첫째는 증지(證智)42)이고, 둘째는 추리지[比智],43) 셋째는 비지(譬智)44)고, 넷째는 성지(聲智)45)이다. 이 네 가지 지식으로 ‘나 있음’을 증명한다.
028_0564_c_09L若破外道計我外道立我義以四智證知有我證智二比智三譬智四聲智以此四智證知有我
외도는 상견과 단견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만약 단견이라면 이 몸이 ‘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몸이 소멸하면 ‘나’도 역시 소멸한다. 이미 대하고 있는 몸이 현재 몸이 있음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곧 증지(證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들이쉬는 숨, 내쉬는 숨 등 다섯 가지를 본다면 이것이 ‘나의 모습[我相]’이다. 이미 그 모습을 보았으니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들이쉬는 숨, 내쉬는 숨 등 다섯 가지를 본다면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이미 그 모습을 보았으니 ‘나 있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곧 추리지[比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나 있음’을 본다면 다른 사람의 몸에도 ‘나 있음’을 안다. 이것이 곧 비지(譬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스승이 ‘나’가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 곧 ‘나’가 있음을 안다. 이것이 곧 성지(聲智)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상견(常見)이라면 오직 추리지와 성지의 두 가지 지식만으로 ‘나 있음’을 증명한다.
028_0564_c_12L外道有斷常二見若是斷見者謂卽此身是我故身滅我亦旣卽身是現見有身卽是證智知有我若見出息入息等五種是我相旣見其相則知有我此卽是比智知有我若見自身有我知他身亦有我卽是譬智知有我聞聖師說有我則知有我是聲智知有我若常見者唯比聲二智知有我耳
028_0565_a_02L상견에 빠진 자들은 말한다.
“인허(隣虛)46) 및 ‘나’는 볼 수 없다. 증지로 ‘나 있음’을 증명할 수 없다.”
어떤 상견에 빠진 자들은 또한 말한다.
“‘나’를 증지로 증명한다.”
그들은 말한다.
“눈[眼] 가운데 흰 부분은 달[月]이고, 흰 부분 가운데 붉은 부분은 해[日]이고, 붉은 부분 가운데 푸른 부분이 허공이다. 푸른 부분 가운데 인자(人子)가 ‘나’이다. ‘나’는 영원하다. 이는 또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증지로 ‘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달은 어머니가 만들고, 해는 아버지가 만들고, 허공은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만든다. ‘나’는 원인으로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원하다.
푸른 부분을 허공이라고 이름하는 까닭은 그 부분이 덮여지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허공이라고 증명한다.”
028_0564_c_20L常見者言虛及我不可見非證智所知復有常見者亦言我是證智所知其說眼中之白精是月白之中閒赤精是日之中閒靑精言是空靑精中人子是我則常此亦可見故是證智所知月是母造日是父造空是自在天造我非因造故是常所以名靑精爲空若覆之則不見知其是空
천친(天親)논사가 이를 차례로 깨트린다.
“증지로 증명한 것은 6진(塵) 및 식의 일곱 가지 법에 지나지 않는다. 6진 및 식은 다 같이 ‘나’가 아니다. 어찌 증지로 증명할 수 있겠는가?
추리지[比智]로 증명한 것은 눈ㆍ색ㆍ허공ㆍ작의(作意) 등의 원인과 조건으로 안식을 낳는다. 식은 곧 밝음의 작용이다. 이미 그것에 작용이 있음을 본다. 추리지는 반드시 눈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니, ‘나’에 별도의 작용은 없다. 어떤 뜻으로 추리지로 ‘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028_0565_a_05L天親次第破之證智所知不過七法卽是六塵及識六塵及識竝非是我豈得爲證智所知耶比智所知者如眼作意等因緣生眼識識卽是明用見其有用比智知必有眼我無別用以何義比知有我耶
비지(譬智)란 집에 있는 소의 생김새를 보고 들판에 있는 소의 생김새와 형상이 이와 같음을 비교하고 유추하여 아는 것이다. ‘나’는 이미 증지로 중명할 수 없음을 밝혔으니 비지(譬智)로도 증명할 수 없다.
성지(聲智)란 그들이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는 스승이 ‘나’가 있다고 말한 것을 자신이 스승의 말씀을 믿는 까닭에 ‘나’가 있다는 입장을 세운 것이나, 이는 옳지 않다. 그대의 스승이 상견과 단견의 두 가지 견해에 떨어져 있다.
028_0565_a_11L譬智者如見家牛形容譬類知野牛形容狀亦應如我旣非證智所知亦非譬智所知聲智者其執我是聖師說言有我信聖師聲說故立有我此亦不然師有斷常二說
발바리가(跋婆梨柯)ㆍ아뢰가야(阿賴伽也)[양(揚)과 하(荷)의 반절]ㆍ우루가(優樓迦)[각(脚)과 하(何)의 반절]47) 등의 3명의 외도는 상견을 일으켜 집작하여 ‘나’가 있다고 말하고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가리다(訶梨多)ㆍ문다(聞陀)ㆍ아수라야나(阿輪羅耶那) 등의 세 명의 외도는 단견을 일으켜 집착하여 ‘나’가 없다고 말하고 미래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대의 스승들이 말한 ‘있다’와 ‘없다’는 스스로 결정되지 않았다. 어찌 이들로 ‘나 있음’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028_0565_a_16L若如跋婆梨柯阿賴伽也楊荷反優樓迦腳何反等三外道起常見執言有我說有未來若是訶梨多阿輸羅耶那等三外道起斷見執言無我不說有未來汝師所說有無自不定豈可以此爲證有我耶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나’를 잘못 헤아리는 자는 “‘나’는 5음(陰)의 주인이고, 홀로 5음 안에 머물고 있다. 마치 국왕이 나라를 자기의 소유로 하고 다른 누구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제 5음에 주인이 없음을 밝히므로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 없음[無我]’이라고 말한다.
028_0565_a_21L言無自人者計我者言我是五陰主獨居五陰中譬如國王國是自己所有與他共今明五陰無主故言無自人故名無我
028_0565_b_02L【문】외도는 ‘나’에 어떠한 작용이 있다고 밝혔는가? 만약 작용이 있다면 추리지로써 알 수 있다.
028_0565_b_02L外道明我有何用耶有用則可以比智知
【답】그들이 말하는 ‘나’에는 외적인 모습이 다섯 가지가 있고, 내적인 모습이 아홉 가지가 있다. 우루가 등이 이러한 집착에 매달려 있다.
외적인 모습의 다섯 가지란 첫째는 내쉬는 숨[出息]이고, 둘째는 들이쉬는 숨[入息]이고, 셋째는 눈을 깜박거림이고, 넷째는 보는 것[視]이고, 다섯째는 수명(壽命)이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나 있음’을 안다.
028_0565_b_03L其說我外相有五內相有九此是優樓迦等作此外相有五者一出息二入息三瞬四視五壽命具此五相故知有我
다섯 가지 모습은 다섯 가지 작용이다. 이제 이를 깨트린다.
만약 앞의 네 가지 모습으로 ‘나 있음’을 안다면 알[卵]은 앞의 네 가지 모습이 없는데 어찌 ‘나’가 있겠는가?
그들은 변론하여 말한다.
“비록 앞의 네 가지 모습은 없으나 다섯째의 모습이 있어서 ‘나 있음’을 안다.”
이를 또한 깨트린다.
수명은 반드시 몸과 서로 접해 있다. 그대는 ‘나’가 해탈을 얻을 때 ‘나’는 몸을 떠난다고 밝힌다. ‘나’가 몸을 떠날 때면 다시 수명도 없는데, 어찌하여 수명으로 ‘나 있음’을 증명하여 알 수 있겠는가?
028_0565_b_06L相卽五用今破之若以前四相知有我者如卵無前四相豈有我邪其救義云雖無前四相有第五相則知有又破之壽命必與身相接汝明我得解脫時我則離身我離身時則無復壽命豈得以壽命證知有我邪
내적인 모습이란 그 외도들이 말한다.
“‘나’는 영원하다. 마음은 인허(隣虛)이고, 마음도 역시 영원하다. 법과 법 아닌 것[非法]이 따로 있다. 법은 선이고, 법 아닌 것은 악이다. 법과 법 아닌 것이 ‘나’와 마음으로 하여금 함께 합하도록 하고, ‘나’와 마음이 함께 합해져서 아홉 가지 법을 낳는다.
‘나’와 마음으로부터 깨달음이 생긴다.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으로부터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긴다.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부터 탐욕과 증오가 생긴다. 즐거움에서 탐욕이 생기고, 괴로움으로부터 증오가 생긴다. 탐욕과 증오로부터 공력(功力)이 생긴다. 공력을 지어 괴로움을 소멸하고 즐거움을 구하고자 한다. 공력으로부터 법과 법 아닌 것이 생긴다.”
028_0565_b_12L相者其說我是常心是鄰虛心亦是別有法非法法者是善非法是惡法非法能令我心共合我心共合生九法從我心生覺能覺知故從覺生苦樂從苦樂生欲憎於樂生欲於苦起憎從欲憎生功力作功力欲滅苦求樂從功力生法非法
만약 상견에 빠진 자들이라면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에서 갖가지 고행을 닦는다. 이를 법이라고 말한다.
만약 단견에 빠진 자들이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현재에서 방자한 마음으로 갖가지 악을 짓는다. 이를 법 아닌 것이라고 말한다.
028_0565_b_19L若常見者有未來故於現在修諸苦行名之爲若斷見者計無未來故於現在恣心造惡名爲非法
028_0565_c_02L법과 법 아닌 것으로부터 수습(修習)이 생기고, 수습이 이미 성숙하면 그 작용은 매우 빠르다. 빠름을 수습하면 이것이 원인의 능력[因力]이다. 빠름을 수습하기 때문에 과거의 일을 빨리 기억할 수 있다.
법과 법 아닌 것이 따로 있어 이것과 합쳐지기 때문에 아홉 가지 법 가운데서 법과 법 아닌 것을 낳아 어떤 때는 선을 짓고, 어떤 때는 악을 짓는다.
법과 법 아닌 것이 따로 있으니, 무릇 다섯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불을 위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바람을 옆으로 진행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땅을 물속에 가라앉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인허(隣虛)들이 화합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나’와 마음을 화합하게 하는 것이다.
028_0565_b_22L從法非法生修習修習旣熟其用速疾修疾卽是因力修疾故能疾憶念過去事由別有法非法合之故九法中生法非法有時作善有時作惡別有法非法凡有五種事一能使火上昇二能使風傍行三能使地水沈下四能使鄰虛和合五能使我心和合
외도들은 두 가지 재앙[二災]이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중간의 재앙[中間災]이고, 둘째는 불의 재앙[火災]이다.
중간의 재앙이란 무릇 삼백천 구지(拘胝)48)를 지난다. 이는 곧 삼백천 구지의 겁(劫)이다. 백천의 구지는 불의 세계이고, 백천의 구지는 물의 세계이고, 백천의 구지는 바람의 세계이다.
불의 재앙 때에 세계는 1겁이 감소하고, 1겁이 생겨난다. 물과 바람의 재앙 때에도 역시 이와 같다. 소멸할 때는 거친 대상이 소멸하고, 근본의 인허는 서로 떨어져서 머문다. 생겨날 때는 법과 법 아닌 것이 그 인허들로 하여금 화합하게 한다. 법과 화합하여 선이 되고, 법 아닌 것과 화합하여 악이 된다.
028_0565_c_06L外道說有二災中閒災二火災中閒災者凡經三百千拘胝卽是三百千拘胝劫一百千拘胝火一百千拘胝水一百千拘胝風世界於火災時世界一劫減一劫水風時亦爾滅則麤塵滅本鄰虛相離而住生則是法非法使其共合法合爲善道非法合爲惡道
근본의 인허(隣虛)와 대상이 이미 화합하여 이로부터 자라나서 다시 갖가지 대상들을 낳아서 세계를 이룬다.
‘나’와 마음도 또한 외부 대상들의 뜯어짐과 화합을 따른다. 30만 구지를 지나 중간의 재앙이 끝나고 불의 재앙에 이른다.
다시 삼백49) 구지를 지나면 세계는 오로지 소멸한다. 근본의 인허와 대상은 오로지 서로 떨어져서 머문다. ‘나’와 마음도 또한 오로지 떨어져서 머물 때 ‘나’는 잠시 해탈한다. 삼백 구지를 지나 불의 재앙은 끝나고, 법과 법 아닌 것은 그들을 다시 합하게 한다.
028_0565_c_13L本塵旣從此增長更生諸塵故成世界心亦逐外塵離合度三百千拘胝閒災滿至火災時復經三百拘胝界一向滅本塵一向相離而住我心亦一向相離而住則我蹔時解脫三百千拘胝火災滿法非法復使其共合
【문】불은 무슨 까닭에 위로 올라가고, 바람은 무슨 까닭에 옆으로 가고, 땅과 물은 무슨 까닭에 아래로 가는가?
028_0565_c_20L火何故上風何故傍行地水何故下
028_0566_a_02L【답】불은 물질을 익게 할 수가 있다. 만약 불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면 중생들은 음식 등의 물질을 익힐 수가 없게 된다. 또한 불은 광명(光明)이 있어 지혜를 주인으로 하기 때문에 위에 있다.
자재천(自在天)의 몸은 6도(道)를 갖추고 있다. 심장[心]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인간과 천상이 되고, 심장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서 배꼽까지는 아수라 및 귀신이 되고, 배꼽으로부터 아래로 내려가서 발까지는 축생 및 지옥이 된다.
인간과 천상의 광명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위에 있고, 불은 광명이 있어 지혜를 주인으로 하기 때문에 위에 있다.
028_0565_c_21L火能成熟物若火不上昇衆生則無以得成熟飮食等物又火有光明主於智慧故在上自在天身備有六道從心向上是人天從心下向至臍是阿修羅及鬼從臍下至足是畜生及地獄人天光明有智慧在上火有光明主於智慧故在上
만약 바람이 옆으로 불지 못하면 중생들은 오고 갈 수가 없게 된다. 가령 바다에 배가 있는데, 바람이 아래로 불거나 위로 분다면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바람이 옆으로 불기 때문에 오고 간다
땅과 물이 아래에 있지 않으면 중생들은 의지처(依支處)가 없게 된다. 땅과 물은 어두워서 미혹을 낳는다. 미혹은 지옥과 축생에 속한다. 그러므로 아래에 있다. 지옥과 축생은 어두워서 미혹이 있다. 그러므로 땅 아래에 있다. 땅과 물은 어두워서 미혹을 낳기 때문에 아래에 있다.
028_0566_a_04L若不傍行衆生則無以得去來如船在海風若沈下上昇船則不得進風傍行故有去來地水若不在下衆生無依處地水闇生惑惑屬地獄畜生故在下地獄畜生闇而有惑在下地地水闇生惑故在下
영원히 해탈하기를 바라므로 계율ㆍ보시ㆍ고행ㆍ선정의 네 가지 법을 닦는다.
이 네 가지 법으로부터 바른 법[正法]이 생기고, 바른 법은 도를 얻음이다. 바른 법으로부터 즐거움을 낳고, 지혜를 낳는다. 지혜와 즐거움은 천상의 즐거운 과보를 받는다.
지혜가 만약 뒤에 법과 법 아닌 것을 끊으면 ‘나’와 마음은 곧 영원히 떨어진다. 아홉 가지 법이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으면 곧 영원한 해탈을 얻는다.
만약 아견(我見) 및 인허(隣虛)에 대한 견해를 깨트리면 이러한 집착은 저절로 깨어진다.
028_0566_a_10L爲欲永得解脫故修戒苦行定四法從四法生正法正法者是其得道從正法生樂生智智樂者受天中樂果智慧若後時斷法非法我與心則永相離九法永不復得生則永得解脫若破我見及鄰虛此執自壞
애착과 욕심[愛欲]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나’에 집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별하지 않는 애착과 욕심이다. 둘째는 미래의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있음[有]을 분별하지 않는 애착과 욕심이다. 셋째는 미래의 ‘나’에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있다고 분별하는 애착과 욕심이다. 넷째는 있음[有]을 맺어주어 서로 이어지게 하는 애착과 욕심이다.
이제 우선 차례대로 그것을 해석한다.
028_0566_a_16L論云愛欲有四種一執我是不分別愛欲二執當我是不分別更有愛欲三執當我有勝劣是分別更有愛欲四結有相接愛欲今且次第釋之
첫 번째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현재 몸 가운데 ‘나’가 있다고 집착하여 말하지만 분별하지 않는다. 하나의 음(陰)에 집착하여 ‘나’로 삼고, 나머지의 음들은 ‘나’가 아니라고 또한 분별하지 않는다. 5음(陰)은 모두 ‘나’가 아니지만 ‘나’에서 애착을 낳고, ‘나의 것[我所]’인 색깔ㆍ향기ㆍ맛ㆍ접촉 등의 대상에서는 오염된 집착의 마음을 낳기 때문에 욕심이라고 말한다. ‘나’ 및 애착은 견도(見道)에서 깨트리는 것이고, 욕심은 수도(修道)에서 깨트리는 것이다.
028_0566_a_20L第一執我者現在執言身中有我而不分別執一陰爲我餘陰非我亦不分別五陰都非我而於我生愛於我所色香味觸等境生染著心故名欲我及愛是見道所破欲是修道所破
028_0566_b_02L두 번째 애착과 욕심이다. 상견(常見)에 빠진 경우 ‘나’는 소멸되지 않고 미래까지 도달한다고 하기 때문에 미래의 ‘나’의 분별이라고 이름한다. 앞에서 해석한 것과 다르지 않다. 미래에는 ‘나’가 다시 있고, 이 다시 있는 ‘나’에서 애착을 낳고, ‘나의 것’인 6진(塵)에서는 오염된 집착의 마음을 낳기 때문에 욕심이라고 말한다.
028_0566_b_02L第二愛欲者常見者謂我不滅得至未來故名當分別不異向釋未來言更有我更有我生愛於我所六塵生染著名欲
세 번째 미래의 ‘나’에 집착하는 것이다.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또한 분별하지 않으나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다. 이 분별은 미래의 ‘나’를 분별하는 것이다. 혹은 괴로움을 받고, 혹은 즐거움을 받고, 혹은 상지(上地)에 태어나고, 혹은 하지(下地)에 태어난다. 이것이 우수함과 열등함의 뜻이다. 다시 애착과 욕심이 있다.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028_0566_b_06L第三執當我如向釋亦不分別有勝劣是分別者分別未來我或受或受樂或於上地生或於下地生此卽是勝劣義更有愛欲不異向解
네 번째 애착과 욕심이다. 논하는 글에서는 ‘나’가 있다고 집착하여 말하지 않으나 역시 ‘나’에 집착한 애착과 욕심이다. ‘나’에 집착함을 분별하지 않는 것은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이른바 ‘나’는 소멸되지 않고 미래까지 도달한다. 미래에 태어나는 곳에서 오염된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 몸을 추측하여 뒤의 몸[後身]이 맺어지기를 애착한다.
앞과 뒤의 두 곳에 목숨이 서로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 것을 맺어짐[結]이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애착과 욕심이 있다. 앞의 해석과 다르지 않다.
028_0566_b_09L第四愛欲論文乃不說執我亦是執我愛欲執我無分別不異向解謂我不滅得至未來於未來生處起染著推此身卽愛後身結前後二有相接不斷故言結有相接愛欲不異向解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5음이란 애착과 욕심을 근본으로 삼는다. 애착과 욕심을 집기(集起)로 삼는다. 애착과 욕심을 태어나는 곳으로 삼는다. 애착과 욕심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말씀하셨다.
경전에서 또한 “애착과 욕심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하였다.
논에서는 다시 차례대로 앞에서 말한 이름들을 열거하고, 뒤에 이내 그것을 해석하겠다.
028_0566_b_15L論云經中佛說五陰者以愛欲爲根本愛欲爲集起愛欲爲生處欲爲緣經中復說愛欲有四種論更次第列前四名後乃釋之
근본 원인을 해석한다.
첫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의 최초의 근본이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종자와 열매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근본은 원인의 뜻이기에 최초라고 말한다. 인용한 경전에서 ‘애착과 욕심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함은 애착과 욕심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이제 근본으로써 원인의 뜻을 해석하겠다. 최초의 근본이라고 말한 것은 먼저 현재의 ‘나’에 집착하여 애착과 욕심을 낳고, 이 애착과 욕심은 미래의 과보를 감응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최초라고 말한다. 마치 어떤 종자가 곧 열매를 낳는 능력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종자와 열매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028_0566_b_18L釋因云一愛欲是五陰初根本故名因如種子與果者根本是因義故初引經言以愛欲爲根本卽是愛欲爲因今以根本釋因義言初根本者先於現在執我生愛欲此愛欲卽有感未來果故名初如有種子便有生果之力故言如種子與果
028_0566_c_02L집기(集起)의 뜻을 해석한다.
두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의 집기이다. 미래의 과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싹 등과 열매의 관계와 같다. 두 번째 애착과 욕심은 미래에 ‘나’와 모든 대상이 생기게 하는 조건이다.
애착과 욕심이 함께 화합함으로써 미래의 과보를 현재에 초래하기 때문에 ‘애착과 욕심을 집기로 삼는다’고 말한다. 마치 싹에서 꽃에 이르는 과정을 바탕으로 열매 등이 있는 것과 같다. 마디는 줄기ㆍ잎ㆍ꽃이고 과보는 열매이다.
028_0566_c_02L釋集起云第二愛欲者是五陰集起能令當果來故譬如牙等與果者二愛欲緣未來有我及諸塵生以愛欲共和合能令當果來現在故名愛欲爲集起由如牙乃至華能生實等節等莖葉及華果卽是實
나는 곳[生處]을 해석한다.
세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이 나는 곳[生處]이다. 우수하고 열등한 5음을 낳는다. 비유하자면 열매와 밭ㆍ물ㆍ땅 등의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향ㆍ맛ㆍ능력ㆍ다르게 익는 것ㆍ위덕(威德)50)이 있다.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으로 분별하며 미래에 우수하고 열등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과보를 받을 때 혹은 올라가고 혹은 내려간다.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우수하고 열등한 과보를 낳게 하기 때문에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을 나는 곳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028_0566_c_08L釋生處云第三愛欲者是五陰生處能生五陰勝劣譬如果與田水土等故有香變熟感德者第三愛欲分別未來有勝劣故受報之時有昇有沈由第三愛欲使未來勝劣報得生故名第三愛欲爲生處
두 번째의 비유에서 열매를 과보로 삼는다고 하였다. 여기서도 과보란 말은 열매를 택하여 과보로 삼는다. 열매가 이미 생기고 나서 밭 및 물과 토양 등이 결과의 조건이 되어 그것의 향과 맛 등을 기른다. 밭 등이 비옥한가, 척박한가 하는 등의 모든 능력과 작용이 같지 않다. 열매가 그 가운데 생기고 향ㆍ맛 등이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애착과 욕심의 분별에 따라 과보를 얻음에 우수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다.
028_0566_c_14L第二譬以實爲果言果亦取實爲果果已生田及水土等爲果作緣增長其香味等田等有肥瘦等諸力用不同果於中生香味等隨緣有異亦爾隨愛欲分別故得果有勝有劣
향(香)은 정량부(正量部) 및 외도(外道)의 주장에 의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향기이고, 둘째는 냄새이고, 셋째는 평등함이다. 평등함이란 향기와 냄새가 없는 것이다.
나머지 부파들에 의하면 향기와 냄새의 두 가지로 그친다. 다른 나머지 향기는 없다. 향기와 냄새에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증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줄어드는 것이다. 사향(麝香)의 경우 사람이 이것을 맡으면 코의 인허(隣虛)가 증가하고, 벌레가 이 향을 맡으면 코의 인허가 줄어든다. 똥 등의 냄새의 경우 사람이 이것을51) 맡으면 코의 인허가 줄어들고, 멧돼지나 개가 이것을 맡으면 코의 인허가 증가한다.
028_0566_c_19L香依正量部及外道立謂有三種一香二臭三平平者無香臭若是餘部止有香臭無別餘氣而香臭各有二種一增二損如麝香人若嗅之則增鼻鄰虛塵蟲有聞此香則損鼻鄰虛塵糞等臭人若嗅人損鼻鄰虛塵猪狗嗅之則增鼻鄰虛
028_0567_a_02L맛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단 맛ㆍ쓴 맛ㆍ매운 맛ㆍ신 맛ㆍ떫은 맛ㆍ싱거운 맛[灰味]이다. 떫은 맛은 날 명자나무[生査] 등과 같다. 싱거운 맛은 개개인의 경우로 말하자면 담백한 맛에 해당할 것이다.
028_0567_a_03L味有七種謂甜灰汁澀者如生査等灰味私謂只應是淡味耳
능력[力]에는 열 가지가 있다. 무거움ㆍ가벼움ㆍ차가움ㆍ뜨거움ㆍ매끄러움ㆍ꺼끌꺼끌함ㆍ견고함ㆍ부드러움ㆍ물 같음[漱][사(俟)와 구(苟)의 반절]ㆍ죽 같음[糗][구(丘)와 유(酉)의 반절]이다. 과실이 익으면 마치 능금[林擒]의 흐름과 같고, 그 속의 과육은 죽[糗]과 같다.
028_0567_a_05L力者有十種卽輕俟苟反丘酉反果子熟如林擒之其肉則糗
다르게 익는 것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달고, 둘째는 시고, 셋째는 맵다. 이들은 세 가지 맛이 아니니 세 가지 맛으로써 이름할 뿐이다. 과일을 먹어 뱃속에 들어가면 묽게[淡] 변하는 것을 달다고 말하고, 열(熱)로 변하는 것을 시다고 말하고, 바람[風]으로 변하는 것을 맵다[剌]고 말한다.
담백한 본체는 달고, 매끄럽고, 무겁기 때문에 담백함을 달다고 이름한다. 열(熱)의 본체는 신 것으로 하여 목을 메이게 하기 때문에 열을 시다고 이름한다. 바람[風]의 본체는 몸을 수척하게 하고, 얼굴을 거칠게 할 수 있다. 매움[剌]의 본체는 살찌지 않게 하고 얼굴을 거칠게 하기 때문에 바람이 맵다고 이름한다.
028_0567_a_07L變熟者有三種一甜三剌此非三味以三味爲名耳果入腹變熟成淡者名甜變熟成熱者名酸變熟成風者名剌淡體甜滑故名淡爲甜熱體使酢咽故熱名風體能使身瘦面澀剌體無肥而故名風爲剌
사람의 몸은 세 부분이 있다. 심장에서 위로 올라간 것은 담백한 곳이고, 심장에서 배꼽에 이르기까지는 열의 곳이고, 배꼽에서 발까지는 바람의 영역이다. 이 세 부분이 서로 통하면 조절이 적당하여 병이 없고, 닫혀 있어 통하지 않으면 병이 든다.
만약 여섯 가지 맛이 변화하는 경우라면 같지 않다. 단 맛, 짠 맛의 두 가지 맛은 변해서 난 맛이 되고, 시큼한 맛은 변해서 신맛이 된다. 쓰고, 맵고, 떫은 맛은 변해서 매운 맛이 된다.
028_0567_a_13L人身有三分從心向上是淡位從心下至臍是熱位從臍下至足是風位此三分若相通者則調適無病若壅結不通則成病若以六味約之變熟則不同甘醎二味變熟成甜酢味變熟成酸苦辛澀三味變熟則成剌
위덕(威德)이란 약과 약나무 등은 자체에 위덕이 있어 혹은 근본에서 광명을 낼 수도 있고, 혹은 귀신을 쫓아버릴 수 있고, 혹은 독을 제거할 수 있다. 마치 마가(摩伽)약이 나는 곳에서는 모든 독초가 다 독이 없게 되는 것과 같다. 능력과 결과가 조건에 따라 이처럼 같지 않다.
중생이 과보를 감응하는 차별을 비유로써 설명하였다.
028_0567_a_19L威德者藥木等自有威或根能出光或能卻鬼或能除毒如摩伽藥所生之處一切毒草皆無復毒力果隨緣有此不同以喩衆生感報差別
028_0567_b_02L조건을 해석한다.
네 번째, 애착과 욕심은 5음이 생기는 조건이다. 5음이 그 조건들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열매가 꽃이 지는 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것과 같다. 네 번째 애착과 욕심으로 미래의 날 곳[生處]을 오염되게 집착하여 두 가지 있음[有]이 서로 접촉하게끔 맺어준다.
미래의 5음은 그들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네 번째의 애착과 욕심을 조건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열매가 얻어지는 것과 같다.
028_0567_a_23L釋緣云第四愛欲者是五陰生緣陰從其起故譬如果緣華滅故生者第四愛欲染著未來生處結二有使相接未來五陰緣其得起故名第四愛欲爲緣如緣華滅故實得生
일이 끊어지는 것을 소멸이라고 이름한 것에 대하여 말한다.
일은 곧 열두 가지 조건들이 생김이다. 이들은 원인에 의거하여 일을 만든다. 원인이 끊어져 다시는 상속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멸이라고 이름한다. 곧 첫 번째의 애착과 욕심을 끊음을 밝힌 것이다.
이제 열여섯 가지 진리에는 열여섯 가지 물(物)이 있기 때문에 멸함의 진리[滅諦] 아래에서는 네 가지가 각각 하나의 법을 본체로 삼는다.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적정(寂靜)이라고 이름한다. 괴로움이란 괴로운 느낌에 의거한 말이 아니다. 앞의 것으로부터 생긴 것이 결과이고, 결과는 괴로움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7_b_05L事斷故名滅者事卽十二緣生此據因爲以因斷不復相續故名滅卽明第一愛欲斷今十六諦有十六物故滅下四各以一法爲體無苦故名寂靜苦不據苦受爲語從前生者是果果爲苦
앞에서는 원인을 끊는 것을 밝혔고 지금은 결과가 없음을 밝힌다.
만약 결과가 다시 생겨난다면 시끄럽게 움직임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닌데 어찌 적정이라고 말하겠는가? 아울러 결과가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적정한 것이다. 이는 두 번째의 애착과 욕심이 없음을 밝히는 것이다. 두 번째의 애착과 욕심은 처음의 애착과 욕심으로부터 생긴다. 이는 곧 과보가 위없음[無上]이기 때문에 미묘(美妙)라고 이름한다.
가장 뛰어나고, 이보다 뛰어난 것이 없고, 비교할 것이 없음[無等]을 위없음이라고 이름한다. 즉,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의 애착과 욕심은 이기고 짐[勝負]을 분별한다. 여기서는 오로지 뛰어난 것만 있고, 열등한 것은 없음을 밝힌다. 즉, 우수함과 열등함을 제거한다.
028_0567_b_11L前明因斷今明果無若果更生喧動不已豈稱寂靜竝由果無故所以寂靜此卽明無第二愛欲第二愛欲從初愛欲生卽是果無上故名美妙者最勝無過無等故言無上明無第三愛欲第三愛欲分別勝負今明唯勝無劣卽除勝劣
애착과 욕심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함을 영원히 떠남[永離]이라고 말한다. 만약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다면 이는 영원히 떠남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떠나고서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영원히 떠남이라고 말한다. 곧 네 번째의 애착과 욕심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네 번째의 애착과 욕심은 있음을 맺어주어 서로 접촉하게 한다. 이것이 다시 삶과 죽음에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 이 맺어줌을 끊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
028_0567_b_17L愛欲不更故名永離者若出而更還非謂永今出而不還故名永離卽明無第四愛欲第四愛欲結有令相接是更還生死今斷此結不得復還
무류(無流)의 마음[無流心]이 행하는 바이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한다. 도는 계율ㆍ선정ㆍ지혜를 주체로 한다. 무류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이를 행(行)이라고 이름한다.
무류의 마음 자체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완숙함[熟]이요, 둘째는 올곧음[直]이요, 셋째는 밝음[明]이다. 완숙하기 때문에 물러섬이 없고, 밝기 때문에 미혹함이 없고, 올곧기 때문에 이것은 참된 것이다.
028_0567_b_21L無流心所行故名道者道卽戒定慧爲體無流心生名之爲行無流心自有三一熟二直三明熟故無退明故不直故是眞也
028_0567_c_02L지혜를 닦아 산란하게 움직임을 떠나기 때문에 완숙하다. 완숙하기 때문에 다시 물러나지 않는다. 만약 마음이 어둡다면 대강에 미혹되지만 밝기 때문에 미혹되지 않는다. 만약 삿된 치우침이 있으면 올곧음을 얻을 수 없다. 바로 나아가 삿되지 않으면 올곧음이라고 이름한다. 올곧으면서 잡스러움이 없음을 참됨이라고 말한다.
무류의 마음에는 이미 이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여기서 생겨난 도에도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028_0567_c_02L得修慧離散動故熟熟故不復退失也若心闇則迷境明故不迷也若有邪僻則不得名直正趣不邪故名爲直直而無雜故稱無流心旣具此三德所生之道亦具三德也
진실한 대상[境]에 통달만 것을 같음[如]이라고 말한다. 4성제(聖諦)의 진리와 진실한 대상경계가 서로 일치하는 것을 같음이라고 말한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바른 행동[正行]이라고 말한다. 가령 경전에서 “오직 이 도 이외에 다시 다른 도는 없다. 청정한 견해[淸淨見]이기 때문이고, 이보다 뛰어난 견해가 없기 때문이고, 이와 비교할 것이 없기 때문에 결정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 이 법보다 뛰어난 법이 하나라도 있다면 결정되지 못함이 성립한다. 만약 이 법과 비교할 만한 법이 다시 있다면 이는 결정함이 아니다. 결정되지 못하면 바른 행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논에서 경전을 인유하여 정의(定義)를 증명하기 때문에 “오직 이 도만 있고, 따로 이보다 뛰어난 법과 비교할 법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또 다른 법은 없다고 말한다.
028_0567_c_07L通達眞實境故名如與四諦理眞實境界相稱故名如也決定故名正行如經說唯此是道更無別爲淸淨見故者無勝之無等之者故名決定若更有一法勝此法則成不定若更有別法等此法者亦非是不定則不得稱正行也論引經證定義故言唯此是道無別法等之勝故言更無別道也
견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치우친 견해[僻見]로 이는 다섯 가지 견해[五見]이다. 둘째는 바른 견해[正見]로 진지(盡智)이다. 진지는 아라한이 번뇌를 이미 다 끊어서 얻는 지혜이다.
치우친 견해를 끊어 없애서 아라한의 바른 견해를 얻기 때문에 ‘청정한 견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견도(見道)를 곡해하면 제13번째 마음[第十三心]도 바른 견해라고 말할 수 있다. 청정한 견해일 수가 있으므로 바른 견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만이 도이다.
이 이외에 어찌 다른 도가 있겠는가?
028_0567_c_15L見有兩種一是僻見卽五見也二是正見卽盡智也盡智卽阿羅漢斷煩惱已盡所得智能斷除僻見得阿羅漢正見故爲淸淨見故也若曲解見道第十三心亦得名正見以能淸淨見故名爲正行故唯正行是道此外豈復有別道耶
028_0568_a_02L‘완전히 마쳐[畢竟] 건너갔기[度] 때문에 벗어남[出離]이라 이름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한다.
멸제(滅諦)는 완전히 마침이다. 완전히 마쳐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무류의 지혜로 번뇌를 끊어 제거했고, 모든 흐름[流]을 넘어서 무위를 증득하였기 때문에 건너감이라 말한다. 무위는 이미 완전히 마침이다. 무위를 증득하여 건너감도 역시 완전히 마쳤기 때문이다. 멸제로써 완전히 마침을 건너감이라 이름하고, 완전히 마침이라 이름한다. 완전히 마쳐 건너갔기 때문에 벗어남이라 부른다.
028_0567_c_22L畢竟度故名出離者滅諦是畢以畢竟不生故也無流智斷除煩越諸流證得無爲故名爲度無爲旣是畢竟證得無爲度亦畢竟故以滅諦畢竟之名目度名爲畢竟以畢竟度故稱出離也
경전에서 또한 “중생들은 네 가지 견해[四見]가 있다. 첫째는 상견(常見)이고, 둘째는 낙견(樂見)이고, 셋째는 ‘나의 것’이라는 견해[我所見]이고, 넷째는 아견(我見)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네 가지 견해를 깨트리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음ㆍ괴로움ㆍ공ㆍ무아를 말씀하셨다.
028_0568_a_04L論云經中又說生有四見一常見二樂見三我所見我見佛爲破此四見故說無常無我
이 말을 해석한다.
이 견해들을 일으킬 때 반드시 아견이 먼저 일어난다. 아견(我見)이 일어나면 나머지 세 가지 견해도 함께 일어난다.
아견을 일으킨다는 것은 내가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곧 상견(常見)을 일으킨다.
내가 이미 영원하면 칼로도 벨 수 없고, 불로도 태울 수 없다. 이미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는 곧 즐거움이다. 이것이 낙견(樂見)이다.
이미 내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있는 곳이 곧 나의 것[我所]이고, 바로 나의 것이라는 견해[我所見]이다.
만약 아견을 깨트리면 나머지 세 가지 견해도 함께 깨어진다. 승거(僧佉:상키야)52), 비세사(鞞世師:와시셰시카)53) 학파 등은 아견 등의 이러한 집착을 한다.
028_0568_a_07L釋此語者起見之時必先起我起我見時卽具起餘三見起我見計我爲常卽起常見我旣是常刀不能斫火不可燒旣不可破壞卽是樂卽是樂見旣計有我我所在處卽是我所卽是我所見若破我見餘三見俱被破僧佉鞞世師等作此執也
승지, 비세사 학파 등은 또한 상견을 일으켜 말한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법이 없다면 항상 없는 것이므로 없음은 있음을 성립하지 못한다. 있다면 항상 있는 것이므로 있음은 없음을 성립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다 영원하다. 현재 보이는 모든 법이 생멸(生滅)이 있다는 것은 이는 전변하여 달라지는 것뿐이다. 그 본체는 처음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그 본체는 마침내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금이 바뀌어 가락지나 귀걸이로 되어도 금의 본체는 생멸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은 “자성(自性)54)이 공(空) 등의 5대(大)55)를 낳고, 5대는 다시 5근(根)을 낳는다”고 말한다.
028_0568_a_14L僧佉鞞世師等又起常見云不有有不無一切法無則恒無無不成有有則恒有有不成無故一切法皆是常現見一切法有生滅者此是轉異耳非其體始生非其體終滅金轉爲環玔金體不曾生滅也其說自性生空等五大五大復生五根
어떤 것을 자성이 허공[空]을 낳는다고 하는가?
허공은 소리[聲]와 함께 일어난다. 허공이 근본(根本)이고, 소리는 지말(枝末)이다. 소리는 허공의 덕(德)이다. 허공은 아주 미세하여서 어떤 물건으로도 그를 깨트릴 수 없다.
028_0568_a_20L者自性生空空與聲俱起空是本是末聲是空德空最細無物能破之
028_0568_b_02L자성이 바람[風]을 낳는다. 접촉과 함께 일어난다. 바람은 근본이고 접촉은 지말이다. 접촉은 바람의 덕이다. 바람은 거칠고, 허공은 미세하다. 허공으로써 바람을 깨트릴 수 있다. 바람은 허공과 뒤섞인다. 바람은 곧 두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접촉이고 다른 덕이 소리와 색이다.
028_0568_a_22L自性生風與觸俱起風是本觸是末觸卽是風德風麤空細以空來破風風雜於空風則具兩德自德是觸德是聲色
자성이 불[火]을 낳는다. 불은 색(色)과 함께 생겨난다. 불이 근본이고, 색이 지말이다. 색은 불의 덕이다. 불은 거칠고, 바람은 미세하다. 바람으로써 불을 깨트릴 수 있다. 불은 바람에 뒤섞인다. 불은 세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색이고, 다른 덕이 소리와 접촉이다.
028_0568_b_03L自性生火火與色俱生是本色是末色卽是火德火麤風細風來破火火雜於風火具三德自德是色他德是聲
자성이 물[水]을 낳는다. 물은 맛과 함께 일어난다. 물이 근본이고, 맛이 지말이다. 맛은 바람의 덕이다. 물은 거칠고, 불은 미세하다. 불로써 물을 깨트릴 수 있다. 물은 불에 뒤섞인다. 물은 네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맛이고, 다른 덕이 소리ㆍ색ㆍ접촉이다.
028_0568_b_06L自性生水水與味俱生水是本味是末味卽是水德火細火來破水水雜於火水具四自德是味他德是聲觸也
자성이 땅[地]을 낳는다. 땅은 향기와 함께 일어난다. 땅이 근본이고, 향기는 지말이다. 향기는 땅의 덕이다. 땅은 거칠고, 물은 미세하다. 물로써 땅을 깨트릴 수 있다. 땅은 물에 뒤섞인다. 땅은 다섯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 자신의 덕이 향기이고, 다른 덕이 소리ㆍ색ㆍ접촉ㆍ맛이다.
5대(大)가 원인이 되어 5근(根)을 낳는다. 5근은 결과이다.
028_0568_b_09L自性生地地與香俱起地是本香是末是地德地麤而水細水來破地地雜於水地具五德自德是香他德是聲味也五大作因生五根五根是
허공이 귀[耳]를 낳고, 귀는 도로 허공을 취한다. 자신의 덕(德)은 다른 덕을 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소리만 들을 수 있고, 색 등을 보지는 못한다.
바람이 피부[皮]를 낳는다. 피부는 곧 피부와 살 등이다. 피부는 도로 바람을 취한다. 자신의 덕은 오직 접촉만을 취하고, 나머지 덕들은 취하지 못한다.
불로써는 눈[眼]을 낳고, 물로써는 혀[舌]를 낳고, 땅으로써는 코[鼻]를 낳는다. 앞의 두 가지 종류의 예로써 다른 내용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근은 이미 5대로부터 생긴다. 5근이 소멸하면 다시 5대로 돌아간다. 이근(耳根)이 소멸하면 허공으로 돌아가고, 그와 같이 비근(鼻根)이 소멸하면 땅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영원하다.
028_0568_b_14L空生耳耳還取空自德不取他德唯聞於聲不見色等也風生皮卽皮肉等也皮還取風自德唯取觸不取餘德也以火生眼以水生舌地生鼻類前兩可解耳五根旣從五大生五根滅還歸五大耳根滅還歸乃至鼻根滅還歸地故諸法是常
상견(常見)을 깨트린다.
아직 있지 않고 이미 있었던 것은 소멸하였으니,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음을 밝혔으므로 무상(無常)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 대해 아직 있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아직 있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본래는 없는데 지금은 있게 된다면 없는 것은 항상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는 것에 대해 이제 이미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밝힌다. 먼저 있었으나 현재 없다면 있다는 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028_0568_b_21L破常見者明未有已有滅卽是先無後無故是無常其言無不有今明未有有未有是無本是無今成有無不恒無其言有不無今明已有無先是有今成無則有不恒有也
028_0568_c_02L【문】불은 어찌하여 물을 깨트린다고 하는가?
028_0568_c_02L云何能破水
【답】색(色)은 불의 덕이다. 물 가운데 색이 있다는 것은 곧 불로써 물을 깨트린다는 것이다.
028_0568_c_03L色是火德水中有色卽是以火破水也
【문】어떤 것이 자성으로 그들이 다른 것들을 낳는 주체라고 말하는가?
028_0568_c_04L何者是自性說其能生耶
【답】세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자성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인(人)56)이라 이름하고, 셋째는 변이(變異)57)라고 이름한다. 세 가지 가운데 처음의 것만을 자성이라고 이름한다. 인은 단지 인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변이(變異)는 자성이라고 이름하기도 하고, 변이라고도 이름한다.
028_0568_c_05L有三種法一名自性二名人三名變異三種中初一但名自人但名人變異亦名自性亦名變
어찌된 까닭인가?
첫 번째 것은 앎[知]이 없기 때문에 인(人)이라는 명칭을 얻지 못하고, 전변이 없기 때문에 변이(變異)라고 부르지 못하고 다만 자성이라고만 말한다. 인(人)은 앎은 있으나 취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이라는 명칭을 얻지 못하고, 전변이 없기 때문에 변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다만 인이라고만 이름한다.
삼덕(三德)으로부터 이후는 모두 앎이 없다. 그것은 뒤에 태어남을 전해주기 때문에 성질이라고 이름하고, 다른 태어남으로부터 전변이 있기 때문에 변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8_c_08L所以爾者初一無知故不得名人無轉故不得名變異故但稱自性也人有知不能取不得名自性無轉故不得名變異但得名人也從三德以去悉無知其能傳生後故名性從他生有轉故名變異也
세 가지 법이 모두 다 영원하다. 앞의 두 가지는 영원하며 변이가 없다. 뒤의 한 가지는 영원하나 변이가 있다. 마치 금의 성질은 바뀌지 않았지만 반지ㆍ귀걸이의 차이는 있는 것과 같다.
인은 곧 ‘나’이다. 자성(自性)은 장님이 갈 수는 있지만 길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인(人)은 눈은 있으나 발이 없는 사람이 볼 수는 있지만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자성은 작용은 할 수는 있지만 알지 못하고, 인은 알 수는 있으나 작용은 할 수 없다. 자성은 인과 함께 합쳐져야 변이자성(變異自性)이 생긴다.
028_0568_c_13L三法悉是常兩是常而無變異後一是常而變異如金性不改而有環玔之異人卽是我也自性如盲人能行而不見路如有目而無足人能見不能行自性能作而不能知人能知而不能作與自性共合則生變異自性
자성에는 무릇 여덟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근본(根本)자성이고, 둘째는 삼덕(三德)자성이고, 셋째는 대(大)자성이고, 넷째는 아집(我執)자성이고, 다섯째는 유진(唯塵)자성이고, 여섯째는 대실(大實)자성이고, 일곱째는 지근(知根)자성이고, 여덟째는 업근(業根)자성이다.
028_0568_c_19L自性凡有八種一根本自性二三德自性大自性四我執自性五唯塵自性大實自性七知根自性八業根自性
58) 중의 첫 번째가 근본자성이고, 본래부터 그것은 있는 것이다. 근본자성으로부터 일곱 가지의 자성들이 생겨난다. 일곱 가지 자성들은 다 변이자성(變異自性)이다.
028_0568_c_22L三中之第一是根本自性本來有之從根本自性生七種自性七種自性竝是變異自性也
028_0569_a_02L근본자성으로부터 삼덕자성이 생긴다. 삼덕은 인도[天竺] 말이다. 첫째는 살타(薩埵)59)라고 이름한다. 뜻을 번역하기에 적당한 말이 없다. 억지로 번역하자면 묘유(妙有)이다. 이것이 생겨날 때는 정묘(精妙)하나, 본체는 있다. 둘째는 아라사(阿羅社)60)[상(常)과 하(荷)의 반절이다]라고 이름한다. 바르게 번역하자면 진(塵)이다. 움직이지만 오염될 수 있다. 오염되기 때문에 진이라고 말한다. 셋째는 다마(多摩)61)라고 이름한다. 바르게 번역하자면 어둠[闇]이다. 그 본체는 닫힘[塞]이다.
028_0569_a_02L從根本性生三德自性三德者天竺語第一名薩埵的相翻義翻應言妙有其生時精妙而體是有也二名阿羅社常荷反正翻爲動而能染染故名塵三名多摩翻爲闇其體塞也
만약 뜻으로 정립한다면 첫째는 가벼움과 광명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움직임과 지탱함이라 이름하고, 셋째는 무거움과 닫힘이라 이름한다. 모든 법이 내법(內法)이나 외법(外法)이거나 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먼저 외법을 논한다. 외법을 논하면서 4대를 들어 논하자면 공대(空大) 및 화대(火大)는 가벼움과 광명이고, 풍대(風大)는 움직임과 지탱함이므로 물건들을 지탱하여 떨어지지 않게 한다. 지대(地大)와 수대(水大)는 무거움과 닫힘이다. 그 본체는 무거움이며 어두워서 닫힘이다.
028_0569_a_07L若以義立者第一名輕光第二名動持第三名重塞切法若內若外不出此三種先論外外法約四大論之者空大及火大是輕光風大是動持而能持物令不墮落也水是重塞其體重而闇塞
6취(趣)를 들어서 논한다면 천(天)은 가벼움과 광명이고, 인(人)은 움직임과 지탱함이고, 네 가지 악취(惡趣)는 무거움과 닫힘이다.
만약 내법(內法)을 들어서 논한다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가벼움과 광명이고, 즐거운 느낌은 움직임과 지탱함이고, 괴로운 느낌은 무거움과 닫힘이다. 지혜는 가벼움과 광명이고, 탐욕은 움직임과 지탱함이고, 성냄과 어리석음은 무거움과 닫힘이다.
028_0569_a_13L約六趣者天是輕光人是動持惡趣是重塞也約內法論之者捨受是輕光樂受是動持心動搖而執捉於境苦受是重塞智慧是輕光貪是動持瞋癡是重塞也
처음 삼덕이 생겨날 때 내법의 묘유(妙有)62)가 처음 나타나고, 외법(外法)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바야흐로 나타난다.
삼덕자성으로부터 대자성(大自性)이 나타난다. 대(大)란 각(覺)63)이다. 각은 모든 앎의 근원이다. 깨닫고 살펴서 아는 작용이 있다.
대자성으로부터 아집자성이 나타난다. ‘나’가 있어 다른 것과 차이가 난다고 집착하여 말한다. 만약 승거학파의 주장이라면 아집으로부터 유진(唯塵)64)자성이 생기고, 유진자성으로부터 대실(大實)자성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만약 와이세시카 학파의 주장이라면 대실자성으로부터 유진자성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028_0569_a_17L初生三德時妙有始顯外法未顯後時方顯也三德自性生大自性大者是覺覺是諸知之本有覺察之用也從大自性生我執自性執言有我與他異也是僧佉義從我執生唯塵唯塵生大若鞞世師義從大實生唯塵
028_0569_b_02L지금은 우선 앞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유진(唯塵)이란 오직 5진(塵)만 있고 나머지 법들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5진으로부터 대실(大實)자성이 생긴다. 이는 곧 5대이다.
‘모든 법이 이 외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므로 대(大)라고 이름한다. 실(實)이란 모든 법이다. 오고 가는 것은 모두 이 다섯 가지 안에 있다. 모든 법은 자체에 변이가 있다. 그 본체는 영원하여 변이가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가령 안근(眼根)이 깨어져 공대(空大)의 돌아가는 경우와 같다. 안근 자체에는 깨어짐이 있으나 공대는 깨어짐이 없다. 나아가 비근(鼻根)이 지대(地大)로 돌아감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실(實)이라고 이름한다.
028_0569_a_23L今且依前釋言唯塵者唯有五塵餘法未顯也從五塵生大卽五大一切法無出其外者故名大也實者一切法去來皆在此五中一切法自有變異其體常在無異如眼根壞還歸空大眼根自有壞空大不壞乃至鼻根歸地亦爾故名實也
대실자성으로부터 지근(知根)이 생긴다. 눈 등의 5근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근으로부터 업근(業根)이 생긴다.
업근(業根)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이고, 둘째는 손이고, 셋째는 다리이고, 넷째는 항문이고, 다섯째는 남녀의 성기(性器)이다.
입은 말할 수 있으며 말의 감각기관이고, 말이 입의 업이다. 손은 붙잡는 감각기관이고, 붙잡음이 손의 업이다. 다리가 행동의 감각기관이고, 행동이 다리의 업이다. 항문이 내보내는 감각기관으로 똥과 더러운 것을 내보낼 수 있다. 내보냄이 항문의 업이다. 남녀의 성기는 자식을 낳을 수 있어 자식을 낳는 감각기관이고, 자식을 낳음이 남녀 성기의 업이다.
028_0569_b_07L從大實生知根等五根能知故也從知根生業根根有五一口二手三腳四尻五男女口能語爲語之根語卽是口業爲捉根捉是手業腳爲行根行是腳尻爲放根能放糞穢放是尻業女根能生子爲生子根生子是男女根業也
이것들이 25구(句)인 참다운 진리의 뜻을 이룬다. 5업근(業根)ㆍ5지근(知根)ㆍ5진(塵)ㆍ5대(大)가 20구이고, 아집(我執)이 21구이고, 대(大)가 22구이고, 삼덕(三德)이 23구이고, 인(人)이 24구이고, 자성(自性)이 25구이다.
028_0569_b_14L此卽是二十五句實諦義業根五知根五塵五大爲二十我執爲二十一大爲二十二三德爲二十人爲二十四自性爲二十五也
【문】5대를 들어서 삼덕을 논한다면 5대는 단지 대실자성에만 속할 것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삼덕에 속한다고 하는가?
028_0569_b_17L約五大論三德五大只應屬大實忽屬三德耶
【답】그 본체의 성품[體性]이 삼덕에 속한다. 5대 자체는 대실자성에 속한다. 마치 하나의 상아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거기에 말을 조각하든가, 코끼리를 조각하든가 간에 말과 코끼리는 비록 다를지라도 본체의 성품은 상아인 것처럼 5대도 역시 그와 같다. 5대 자체는 대실자성에 속한다. 그 본체의 성품이 속하는 것을 따라 스스로 삼덕에 속한다. 앞에서 자성이 공대(空大) 등을 낳는다고 말한 것은 근본인 자성이 5대 등을 낳을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028_0569_b_19L其體性屬三德五大自屬大實由如一牙分爲多牙或刻爲馬或刻爲象象馬雖異體性是牙五大亦爾五大自屬大實逐其體性相攝自屬三德也前言自性生空等卽說根本自性能生也
028_0569_c_02L승거학파의 뜻은 원인 가운데 결과를 갖추고 있음을 밝힌다. 마치 발다라(鉢多羅)65) 나무의 종자 가운데 이미 가지ㆍ잎ㆍ꽃ㆍ열매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자성 가운데 이미 일곱 가지 변이자성(變異自性)을 갖추고 있다. 인(人)은 그들과 합쳐질 때 일곱 가지가 차례로 현현(顯現)한다.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이름할 뿐이며, 앞에는 없으나 뒤에는 있음을 태어남이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028_0569_b_24L僧佉義明因中具有果如鉢多樹子中具足已有枝葉華果自性之中已具足有七種變異自性人與其合時七種則次第顯現名之爲生耳非先無後有名爲生也
【문】삼덕에는 지혜 및 세 가지 번뇌가 있다. 어떤 물(物)을 조건으로 하여 대상으로 삼는가?
028_0569_c_06L三德有智慧及三煩惱緣何物爲境
【답】그것은 묘유(妙有)의 법으로 대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일어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3선근(善根)과 3불선근(不善根)과 같다. 또한 어떤 조건으로 일어나겠는가?
028_0569_c_07L其是妙有法不緣境起佛家三善根三不善根復何所緣起
【문】삼덕 가운데 지혜가 있고, 대(大)는 각(覺)이라고 말한다. 어찌 갑자기 변이 자성이 다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가?
028_0569_c_09L三德中有智慧大言是覺那忽言變異自性悉非知耶
【답】인(人)은 아는 자여서 인은 알 수 있다. 일곱 가지 변이 자체는 앎의 작용이 없다. 마치 사람이 자르기 때문에 자를 수 있는 칼이라고 이름하고 칼 자체에는 실로 자르는 작용이 있을 수 없다.
028_0569_c_10L人是知者能知耳七種變異自無知用如人能斫故名刀爲能斫耳刀實不能斫也
【문】유진(唯塵)자성은 색 등의 5진이다. 어찌하여 진(塵)으로써 대실자성이 나타난다고 하는가?
028_0569_c_12L唯塵是色等五塵云何用塵來顯大實耶
【답】5대와 같이 인허(隣虛)도 볼 수 없다. 색 등의 5진은 5대의 지말이다. 지말을 보아야 바야흐로 근본이 나타난다. 색 등의 5진은 인허가 아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다.
028_0569_c_14L五大竝是鄰虛不可見等五塵是五大之末見末方得顯本色等五塵非鄰虛故可見也
【문】자성은 능생(能生)이고 능변(能變)이다. 삼덕이 자성을 바라보면 생겨난 것과 변이한 것이다. 대(大)를 바라보면 능생이고 능변이다. 무슨 까닭에 자성의 능생은 생김이라는 이름을 받을 수 있고, 능변은 변화라는 이름을 받을 수 없으나, 삼덕은 두 가지 이름을 모두 받는가?
028_0569_c_16L自性是能生亦是能變三德望自性是所生所變望大是能生能變何故自性能生得受生名能變不得受變名三德具受兩名耶
028_0570_a_02L【답】능변과 능생은 모두 다 원인의 이름이고, 소생(所生)과 소변(所變)은 모두 결과의 이름이다. 곧바로 변화라고 부르고 곧바로 생김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것은 결과의 이름이다. 결과가 일어나면 바야흐로 이를 변화라고 하고, 이를 생김이라 할 뿐이다. 원인은 아직 변화 및 생겨남이 없다.
지금 자성을 말함에 있어 능생은 곧 능변이다. 능변은 능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변화한 것이 없기 때문에 변화란 이름을 얻지 못한다. 삼덕은 능소(能所)의 두 가지 뜻을 함께 갖추고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이름을 얻는다.
028_0569_c_20L能變能生竝是因名所變所生竝是果名直呼爲變直呼爲生者此是果名果起方是變是生耳因未有變及生也今言自性能生者卽是能變說能變爲能生耳其非所變故不得受變名三德具能所二義故受兩名也
【문】어찌하여 능생(能生)을 자성으로 삼는가?
028_0570_a_03L何以能生爲自性耶
【답】능생은 근본이다. 근본은 자성의 뜻이다. 그러므로 자성이란 이름을 얻는다.
028_0570_a_04L能生是本本是自性義受自性名
【문】인(人)도 역시 근본인데 어찌하여 자성이란 이름을 얻지 못하는가?
028_0570_a_05L人亦是本何不受自性名耶
【답】그것은 작용이 없어 다른 것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이름을 얻지 못한다.
028_0570_a_06L其無作用不能變他故不受自性名也
낙견(樂見)에 대해서 말한다.
니건자(尼犍子)66) 등이 견해를 일으켜 말한다.
“삶과 죽음이 진실로 즐거움이고, 열반은 진실로 괴로움이다.”
그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 “마치 사람이 손이 하나 없고, 눈이 하나 없다면 이는 괴로움이 아니겠는가? 만약 이것이 괴로움이라면 손이 하나 없고, 눈이 하나 없는 것이 그 자체로 괴로움인데, 이 몸이 모두 없는 것은 어찌 지극한 괴로움이 아니겠는가? 열반 가운데는 이미 다시 5음이 없다. 그러므로 열반은 진실로 지극한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손이 하나 없고, 눈이 없는데 옆 사람이 치료하여 다시 손 하나, 눈 하나를 얻는다면 이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즐거움이라면 손 하나, 눈 하나를 얻는 것 자체가 즐거움인데 한 몸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 어찌 지극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현재의 삶에 이미 5근을 갖추고 있으므로 몸이 있음이 진실로 지극한 즐거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028_0570_a_07L樂見者尼揵子等起見言生死眞實是樂涅槃眞實是苦推之云如人無一手一目此是苦不若是苦者無一手一目以自是苦都無此身豈非極苦耶涅槃中旣無復五故云涅槃是眞實極苦也無一手一目傍人爲治更得一手一目時是樂不是樂者得一手一目以自是具足一身豈非極樂現在世旣具有五根故知有身眞實是極樂也
승거와 비세사 학파는 또한 낙견(樂見)을 일으켜 말한다.
“삶과 죽음은 진실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이 있다. 인간과 천상은 진실로 즐거움이고, 지옥과 축생 등은 진실로 괴로움이다.”
그들은 또 원인에까지 나아가 설명한다.
“원인은 이미 진실하고 선이 있고, 악이 있다. 악은 괴로움을 감응하고, 선은 즐거움을 감응한다. 원인이 진실하기 때문에 결과도 역시 진실함을 안다.”
028_0570_a_16L佉鞞世師又起樂見云生死眞實有樂有苦人天是眞實樂地獄畜生等眞實是苦其以因推之因旣眞實有善有惡惡能感苦善能感樂以因眞實故知果亦眞實也
028_0570_b_02L이 두 가지 견해를 깨트린다. 삶과 죽음은 서로 기대고 있기 때문에 즐거움을 낳을 뿐이다. 어찌 된 까닭인가?
거친 것으로 즐거움을 삼고, 미세한 것으로 괴로움을 삼는다. 아귀(餓鬼)는 지옥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스스로 그 과보를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으로 삼는다. 축생(畜生)은 아귀를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스스로 그 과보를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으로 삼는다. 아수라는 축생을 조건으로 하여 괴로움으로 삼고, 스스로 그 과보를 조건으로 하여 즐거움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인간ㆍ천상ㆍ색계ㆍ무색계 가운데 서로 형상을 기대어 망령되이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극에 이르면 비상(非想)이다.
028_0570_a_21L破此兩見者死互相待故生樂耳何以知然以麤爲樂以細爲苦如餓鬼緣地獄爲苦自緣其報爲樂畜生緣餓鬼爲苦緣其報爲樂阿修羅緣畜生爲苦緣其報爲樂如此人天色無色界中互相形待妄謂爲樂極至非想
만약 열반으로써 비상(非想)의 경지를 바라보면 비상은 괴로움이고, 열반은 즐거움이다. 이미 다시 열반보다 뛰어난 경지가 없기 때문에 열반이 진실한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은 진실로 괴로움이다. 만약 대승(大乘)과 3승(乘)의 열반이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이를 논하지 않는다.
028_0570_b_04L若以涅槃望非想非想爲苦涅槃爲樂無復有勝涅槃者故涅槃是眞實樂生死眞實是苦若大乘三乘涅槃復有異今不論此也
【문】항상 “제일 큰 죄는 지옥이고, 중간의 죄는 축생이고, 제일 아래 죄는 아귀이다”라고 말한다. 지금 어찌 축생이 아귀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028_0570_b_08L常言上罪地獄中罪畜生下罪餓鬼今那得言畜生勝餓鬼耶
【답】만약 소승이라면 인용한 것과 같은 것이다. 대승의 이치로는 축생은 아귀보다 낫다. 아귀는 불과 함께 다니므로 더 무거운 괴로움을 받는다. 목구멍은 작고 배는 크다. 항상 배고픔과 갈증으로 근심한다. 설사 맑은 물을 만나더라도 뜨거운 불길이라고 말한다. 축생 가운데는 그와 같은 일은 없다. 그러므로 더 나음을 안다.
028_0570_b_10L若小乘則如所引大乘理論畜生勝餓鬼餓鬼帶火而行受重之苦頸小腹大恒患飢渴設値淸流謂爲猛火畜生之中無此等事知爲勝也
뒤의 견해를 깨트린다. 삶과 죽음은 유류(有流)로써 원인을 삼는다. 비록 이것이 선한 원인이라도 선도 역시 유류이다. 이미 유류이므로 진실한 것이 아니다. 마치 좋은 음식이 있더라도 그 속에 독약이 있으면 좋은 음식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선이 이미 진실하지 못한데 즐거움이 어찌 진실이겠는가?
028_0570_b_14L破後見者生死以有流爲雖是善因善亦有流旣是有流故非眞實如有好食以毒藥內中則不復成好食善旣非眞實樂豈是眞實
“‘나’가 세계를 만들기 때문에 ‘나의 것’67)이다”라고 말한다.
승거와 비세사 학파는 이러한 집착을 한다.
첫째는 내작기(內作器)68)이고, 둘째는 외작기(外作器)69)이다.
‘나’는 아는 자[知者]이고, 만드는 자[作者]이고, 향수하는 자[受者]70)이다. 아는 것은 ‘나’의 법이다. 곧 아홉 가지 법 가운데서 깨달음의 법이다.
마음은 ‘나’의 내작기이고, 근(根)은 ‘나’의 외작기이다. 진(塵)은 ‘나’의 자량(資糧)이다. 지(知)에 다섯 가지가 있고, 근과 진에도 각각 다섯 가지가 있다. 마음은 단지 하나이다. 마음 및 나는 영원하다. 법이 아닌 것[非法]이 그들이 함께 합쳐지도록 한다.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028_0570_b_18L論言我作器故名我所者僧佉世師作此執一是內作器二是外作我是知者作者受者知是我法是九法中之覺法也心是我內作器根是我外作器塵是我資糧知有五根塵各五心只是一心及我皆常法令其共合已前解所以
028_0570_c_02L작기(作器)라 이름하는 이유를 말한다. 세상에서 도끼ㆍ톱 등은 목수의 공구[作器]이고, 그들이 그것을 사용하여 책상ㆍ의자 등을 만드는 것과 같다. 마음 및 근(根)도 역시 이와 같다. ‘나’는 그들을 사용하여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것이기 때문에 작기(作器)라고 말한다.
028_0570_b_24L名作器者如世閒斧鋸等是工巧人之作器用之作牀机等心及根亦爾我用之見色聞聲故名作器
진(塵)으로 말미암아 지(知)를 낳기 때문에 자량(資糧)이라고 말한다. 내작기로써 ‘나’가 있음을 증명하고, 외작기로써 내작기가 있음을 증명하고, 자량으로써 근이 있음을 증명한다. ‘나의 법’은 ‘나’ 및 작기, 자량이 있음을 통틀어 증명한다.
028_0570_c_04L由塵生知故名資糧也以內作器證有我以外作器證有內作器以資糧證有根我法通證有我及作器資糧也
내작기로 ‘나’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나’가 만드는 자이다. 만약 ‘나’ 없다면 누가 눈에 혹은 귀ㆍ코ㆍ혀 가운데 마음이 있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8_0570_c_07L內作器證有我者我是作者若無有我誰使心在或時在耳鼻舌中耶故知有我也
외작기로써 내작기가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무릇 두 가지 뜻을 증명한다.
첫째는 마음이 하나라고 증명한다. 만약 마음이 많다면 무슨 까닭에 한꺼번에 다섯 가지 지(知)가 함께 생겨서 5진을 알게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단지 하나의 마음만이 있음을 안다. 마음이 눈 가운데 있으면 볼 수는 있지만 들을 수는 없고, 귀에 있으면 들을 수는 있지만 색을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5근은 함께 작용하지 않는다.
둘째는 마음이 있음을 증명한다. 만약 마음이 있다면 이미 항상 있는 것이다. ‘나’가 있으면 5근도 항상 있다. 무슨 까닭에 항상 지(知)가 생겨서 5진을 알지 못하는가? 마음이 근 가운데 있을 때는 바야흐로 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반드시 있음을 안다.
028_0570_c_09L外作器證有內作器者凡證兩義證心是一心若是多何故一時中不竝生五知以知五塵耶故知只是一在眼中則能見不能聞在耳中則能聞不能見色故五根不竝用也證心是有若有心者旣恒有有我恒有五根何不恒生知知五塵耶心在根中時方能知塵故知必定有心也
자량으로써 근(根)이 있음을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만약 외작기가 없다면 안근이 깨어졌을 때 어찌하여 다시는 색을 되지 못하겠는가? 그러므로 외작기가 반드시 있음을 안다.
028_0570_c_17L資糧證有外作器者若無外作器根壞時何故不見復見色耶故知必有外作器也
028_0571_a_02L‘나의 법’은 네 가지를 통틀어 증명한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마음은 지(知)가 아니고, 근과 진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나’가 없다면 어찌 지가 있겠는가? ‘나’는 아는 자이므로 ‘나’의 법이 이미 있음을 안다. ‘나의 법’은 ‘나’가 있음을 증명한다. 만약 마음이 없다면 한꺼번에 5지(知)가 함께 있어야 한다. 만약 색을 알 때면 소리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반드시 있음을 안다. 근 가운데 있기 때문에 지가 생길 수 있다. 또한 지로써 마음이 하나임을 증명할 수 있다.
028_0570_c_20L我法通證四事者心非是知根塵亦爾若無有我豈得有知我是知者故知是我法旣有我法證有我也若無有心則一時中竝有五若知色時不能知聲故知必定有心在根中故知得生亦得以知證心是一
마음이 만약 하나가 아니라면 다섯 개의 마음이 다 함께 근 가운데 있어 동시에 다섯 가지 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근이 없다면 근이 파괴되었을 때 무슨 까닭에 지가 생기지 않는가? 만약 5진이 없다면 무엇이 아는 것[所知]임을 알겠는가?
마음이 ‘나’와 함께 합쳐진 것을 내작기라고 말하고, 근이 ‘나’와 함께 합쳐지지 않은 것을 외작기라고 말하고, 진이 앞의 대상이 되어 ‘나의 법’이 생기도록 도와주는 것을 ‘나의 자량’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나의 작기’와 ‘나의 자량’을 ‘나의 것’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이다.
028_0571_a_03L心若不一五心竝在根中則一一時中應有五知也若無有根壞之時何故不生知耶若無有五塵知何所知耶心與我共合故名內作根不與我合故名外作器塵是前能資生我法名我資糧也其卽名我作器及我資糧爲我所也
승거학파는 ‘나’가 있음을 다섯 가지 뜻으로 증명한다.
첫째는 다 모아서 다른 이들을 위하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이 법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경서(經書)들을 모으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모으는 것과 같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상(床)과 의자를 모으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올 때를 헤아려서 모으는 것과 같다. 이미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모으는 것을 보았으면 곧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중생의 몸도 이와 같아 5진(塵)ㆍ4대(大)ㆍ5근(根)ㆍ5음(陰) 등을 모은다. 그 모음을 보면 반드시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른 것이란 곧 ‘나’이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028_0571_a_09L僧佉立有我以五義爲證一聚集爲他故知有我如世人爲弘通法故聚集經書非是自爲乃是爲他又如世人聚集牀席亦非自爲乃爲擬他見聚集爲他則有他人也衆生身亦五塵四大五根五陰等聚集見其聚集知非自爲必是爲他他卽是我故知有我也
둘째는 자성이 변이하여 삼덕(三德)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자성은 아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능히 변이하여 삼덕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될 수 없다. 이미 능히 변이하여 삼덕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되었기에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음을 안다. 다가와서 그것과 합쳐야 바야흐로 변이가 있을 수 있다. 아는 자는 바로 ‘나’이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028_0571_a_17L見自性變異爲三德等七法故知有我自性非知其不能變異爲三德等七法旣能變異爲三德等七法知必有知者來合之方得有變異知者卽是我故知有我也
028_0571_b_02L셋째는 변이(變異) 가운데 각(覺)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자성은 각(覺)이 아니다. 자성이 근본이고, 변이는 지말이다. 근본에 이미 각이 없으니 지말 가운데 각이 있을 수 없다. 변이 가운데 이미 각이 있다. 그러므로 각의 본체가 따로 있음을 안다. 아직 자성과 합쳐지지 않았으므로 변이 가운데 각이 있다. 각의 본체는 곧 ‘나’이다. 이것이 곧 ‘나’이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이 한 가지 일은 곧 ‘나’가 묶여 있음을 나타낸다. 각으로부터 아집이 생기기 때문이다.
028_0571_a_21L見變異中有覺故知有我自性非自性是本變異是末本旣無覺中不應有覺變異中旣有覺故知別有覺體未合自性故變異中有覺體卽是我是我故知有我也此一事卽顯我被繫縛以從覺生我執故也
넷째는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이미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작용의 주체가 반드시 있음을 안다. 자성은 작용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작용의 주체이다. 이미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보았으므로 작용의 주제가 반드시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그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여자는 작용할 수 있는 것이고, 남자는 작용의 주체이다. 여자가 있음을 보면 바로 남자가 있음을 안다.
028_0571_b_04L見有可用故知有我旣有可用必有能用自性是可用我是能用見有可用故知必有能用故知有我其譬云如女人是可用男子是能見有女卽知有男也
자성은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가 그것과 합쳐진다. 합쳐지기 때문에 변이하여 삼덕 등의 일곱 가지 법이 된다. 일곱 가지 법은 ‘나’에 묶여 있다. 나중에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문혜(聞慧)ㆍ사혜(思慧)ㆍ수혜(修慧)를 얻는다. 자성으로부터 이 묶임이 생겨서 삶과 죽음에 머물러 있게 함을 안다. 그리하여 자성 및 묶임에 혐오감을 낸다. 이미 혐오감이 생겨서 영원히 묶임으로부터 떠나게 되므로 ‘나’는 해탈을 얻는다.
028_0571_b_09L自性是可用故我與之合合故變異爲三德等七七法繫縛於我後聞師教得聞思修慧知從自性生此繫縛住在生死於自性及繫縛生厭惡旣生厭惡離繫縛故我得解脫
그것을 비유하여 말한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남자가 나병(癩病)이 걸린 여자와 성교를 한다. 자주 성교를 하여서 혐오감이 없지만 나중에 밝은 광명에서 그 여자를 보면 혐오하여 떠나고자 한다. 만약 강한 성질의 여인이라면 오히려 와서 이 남자에게 나아가겠지만, 만약 부드러운 성질이라면 한 번 혐오감이 생겼으므로 다시는 오려고 하지 않는다. 비록 그 때에는 오지 않지만 오히려 오려는 뜻이 있다. 자성이 한 번 혐오감이 생겼으면 영원히 ‘나’와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성질의 여인 및 이러한 부드러운 성질을 가진 자성은 하나도 없다.
028_0571_b_14L其譬云如男子於闇中與病癩女人共爲欲事數數爲之了無厭惡後於光明中見之卽生厭離若是强性女人猶來就此男若是軟性者一被厭惡卽不復來雖當時不來猶有來義自性一被厭則永不與我共合無一軟性女人及此自性軟性者也
028_0571_c_02L다섯째는 홀로 머무는[獨住]71) 뜻이 진실로 있기 때문에 ‘나’가 있음을 안다. 이미 자성으로부터 변이가 생겼기 때문에 묶여짐을 안다. 지혜를 닦아 얻어서 자성에 대해 혐오감을 낸다. 자성이 이미 ‘나’와 서로 떨어졌으므로 ‘나’는 홀로 머문다. ‘나’가 홀로 머물기 때문에 ‘나’는 해탈을 얻는다. 만약 ‘나’가 없다면 홀로 머무는 뜻도 없다. 홀로 머무는 뜻이 이미 진실로 있으므로 ‘나’가 있음을 안다.
나중에 따로 상세하게 아집을 깨뜨릴 것이므로 번잡하게 두 번 설명하지 않겠다.
028_0571_b_21L獨住義眞實有故知有我旣知從自性生變異故被縛繫修得智慧於自性生厭離性旣與我相離故我獨住我獨住故我得解脫若無有我則無獨住義住義旣眞實有故知有我也後別委悉破我執不復兩煩也
十六諦義出隨相論釋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16행도(行道)란 뜻이다. 견도(見道)와 같다. 견도란 3도(道)의 하나로 처음에 무루지(無漏智)를 내서 진제(眞諦)의 이치를 비추어 보는 경지이다. 도란 도로의 뜻으로 학인이 나아가는 도로이다. 3현(賢)ㆍ4선근(善根)의 가행(加行)을 쌓아서 세제일법(世第一法)의 무간도(無間道)에 낳는 무루의 참된 지혜이다.
  2. 2)산스크리트어 Vaibhāṣya의 음사. 방(防)과 이(夷)의 반절음을 사용하여 Vai(毘)의 음을 풀었고, 판(判)과 가(可)의 반절음을 사용하여 bhā(頗)의 음을 풀었다.
  3. 3)산스크리트어 Upadeśa의 음사. 묻고 답해서 이치를 논하는 불교문헌을 말한다. 십이부경(十二部經)의 하나이다.
  4. 4)산스크리트어 icchantika의 음사. 도저히 성불할 수 없는 중생을 말한다.
  5. 5)인도정통파 철학인 승론(勝論, Vaiṣesika)학파에서 일체법을 분별하기 위하여 세운 6구의(句義) 가운데 대유(大有)구의를 설한 경전이다.
  6. 6)산스크리트어 Aṇgulimāla의 음사. 부처님 당시에 사람을 죽여서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삿된 견해를 신봉해서 거리에서 9백99명의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해서 매달고 다니다가 부처님을 만나 개과천선해서 아라한과를 얻었다.
  7. 7)『잡아함경』 1063번, 한글대장경 『잡아함경』 3권 104~106쪽 참조.
  8. 8)Anāgamin의 음사. 불환(不還) 또는 불래(不來)라고 한역. 욕계의 번뇌를 끊어서 욕계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경지의 성인을 말한다.
  9. 9)이는 유폭류(有瀑流)라고도 한다. 일체의 선(善)이 물결에 밀려 내려간다는 뜻으로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108번뇌를 네 가지로 나눈 것에서 색계와 무색계의 탐(貪)ㆍ만(慢)ㆍ의(疑)의 스물여덟 가지를 말한다.
  10. 10)도리를 깨달아 증득함. 성문(聲聞)의 예류과(豫流果) 이상의 보살로, 초지(初地) 이상의 성자를 말한다.
  11. 11)3고는 탐탁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괴로움인 고고(苦苦), 좋아하는 대상이 변하여 없어짐으로 받는 괴로움인 괴고(壞苦), 세상의 일이 바뀌는 것을 보고 느끼는 괴로움인 행고(行苦)가 있다.
  12. 12)『구사론』에서 말한 10지(智) 가운데 두 가지이다. 진지는 이미 모든 지(智)의 번뇌를 끊고 다하면 ‘나’가 괴로움임을 알고, 집을 끊고 멸을 증득하고 도를 닦아야 함을 안다. 즉, 번뇌를 끊을 때에 생기는 스스로 믿는 지혜이다.
  13. 13)도류지(道類智)의 다른 번역이다.
  14. 14)앞의 열여섯 가지 마음을 참조하라.
  15. 15)유(有)는 3계의 과보, 유(流)는 네 가지 종류의 미혹이다. 3계의 과보가 실로 있다고 한다면 유(有)라고 말하고, 네 가지 종류의 미혹이 있어서 중생을 3계의 생사의 바다에 표류하게 하므로 유(流)라고 말한다.
  16. 16)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유류(有流)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과 궁(宮)본에는 유류무류(有流無流)로 되어 있다.
  17. 17)산스크리트어 Sotāpanna의 음사. 구역에서는 입류(入流), 지류(至流) 등으로 번역하고, 신역에서는 예류(預流)라고 번역한다. 성문 3과 가운데 처음의 과보이다. 3계의 견혹을 끊어서 이 과보를 얻는다.
  18. 18)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말한다.
  19. 19)산스크리트어로는 pudgala라고 한다. 인(人)이라고 한역.
  20. 20)산스크리트어 Kalala의 음사. 태에 들어가 제7일이 되었을 때를 말한다. 마음의 거풀처럼 끈끈하고 조금 굳어지는 것과 같다.
  21. 21)소승부파의 하나인 Sarvāstivāda를 말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하며 줄여서 유부라고도 한다.
  22. 22)소승부파의 하나인 Sammatīya 또는 Sammitīya를 말한다. 이 학파가 주장하는 내용은 『삼미저부론(三彌底部論)』을 보라.
  23. 23)승중에게 한 번 고지하고[一白] 또는 세 번 가부를 묻는 것[三羯磨]으로 구족계를 받을 경우나 승잔죄(僧殘罪)와 같은 중죄를 참회하는 경우에 채택한다. 백사법(白四法) 또는 백사갈마(白四羯磨)라고도 한다.
  24. 24)수계자에게 세 번에 걸쳐서 묻는 것을 말한다.
  25. 25)산스크리트어 Dānapatti에 해당하는데, 시주(施主)라고 번역한다. 줄여서 단나 또는 단월이라고 한다.
  26. 26)변리(便利)는 대ㆍ소변을 말하므로 뒤에도 모두 대변과 소변으로 번역했다.
  27. 27)산스크리트어 Sudhā의 음사. su는 ‘좋은’이란 뜻이다. sudhā는 ‘좋은 음식물’이란 뜻이다. 신들이 먹는 음식물, 신들이 마시는 술, 또는 꽃의 꿀을 말한다.
  28. 28)산스크리트어 nyagrodha의 음사. 나무의 이름. 인도에 있는 줄기에서 아래로 뿌리를 뻗어내리는 나무를 말한다.
  29. 29)원문을 보면, 앞에서는 두 가지 모습이라 하였고, 여기서는 세 가지 모습이라 하였다. 따라서 앞의 예에 따라 두 가지로 번역한다.
  30. 30)고려대장경 원문에는 담(淡)으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과 궁본(宮本)에는 담(痰)으로 되어 있다.
  31. 31)원문은 조심법(助心法)이라 하였으나 심소법으로 번역한다. 아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2. 32)소승부파의 하나인 Mahāsaṃghika를 말한다. 대중부라고 번역한다.
  33. 33)소승 유부의 입장에서는 번뇌의 다른 이름이고, 대승 유식의 입장에서는 번뇌장ㆍ소지장의 종자의 이름이다. 유부의 뜻은 탐욕, 성냄 등의 번뇌는 유정에 따라다녀서 떠나지 않는 것이므로 수(隨)라 하고, 번뇌의 모습이 알기 어려운 것이 마치 수면상태와 같다고 하여 면(眠)이라고 한다.
  34. 34)진리를 증득하여 깨닫는 것이다. 성문의 예류과 이상, 보살의 초지 이상의 성자이다.
  35. 35)이때의 사문이란 삿된 견해를 주장하는 인도의 바라문들을 말한다. 육사외도(六師外道)에 각각 15명의 제자가 있어 90명이 되고, 그들의 스승 6명을 합쳐서 96명이 된다.
  36. 36)네 가지 전도(顚倒)된 허망한 견해이다. 전도란 무상한 것을 영원하다 하고, 괴로움을 즐거움이라 하는 것처럼 바른 이치에 상반되는 허망한 견해를 말한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현상과 이치에 뒤바뀐 견해를 갖는다. 이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사의 무상(無常)ㆍ무락(無樂)ㆍ무아(無我)ㆍ무정(無淨)에 있어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에 있어서 무상ㆍ무락ㆍ무아ㆍ무정에 집착하는 것을 2승(乘)의 네 가지 전도된 허망한 견해라고 한다.
  37. 37)인(因)이 아닌 것을 인이라 하고, 도가 아닌 것을 도라고 하는 잘못된 소견을 말한다.
  38. 38)산스크리트어는 Vasubandhu라고 하며 세친이라고도 한역한다.
  39. 39)돌아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동을 말한다.
  40. 40)소승부파의 하나인 Vāsīputrīya를 말한다. 독자부(犢子部), 가주자부(可住子部)라고 한역한다.
  41. 41)이는 인도의 정통파 철학인 니야야(Nyāya)학파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42. 42)산스크리트어로는 pratyakṣa라고 한다. 직접지각에 의해 발생하는 지식을 말한다.
  43. 43)산스크리트어로는 anumāṇa라고 한다. 추리작용에 의해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연기가 나는 것을 보고, 저 산에 불이 있다고 아는 것을 말한다.
  44. 44)산스크리트어로는 Upamāṇa라고 한다. 다른 것과 비교하여 알게 되는 지식을 말한다.
  45. 45)산스크리트어로는 Ṥabda라고 한다. 어떤 권위 있는 스승의 가르침에 의거한 지식을 말한다.
  46. 46)인허진(隣虛塵)을 가리킨다. 극소의 물질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 신역에서는 극미(極微)로 한역하였다.
  47. 47)산스크리트어 Ulūka의 음사. 선인의 이름. 부처님이 나오기 전에 출현하여 6구의(句義)의 승론을 가르쳤다고 하는 사람이다.
  48. 48)산스크리트어 koṭi의 음사. 억(億)에 해당하는 숫자의 이름이다.
  49. 49)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삼백(三百)으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과 궁본(宮本)에는 삼백천(三百千)이라고 되어 있다.
  50. 50)고려대장경 원문에는 감덕(感德)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 3본과 궁본에 의하면 위덕(威德)으로 되어 있다. 원문에서도 이후에는 위덕으로 되어 있다.
  51. 51)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인(人)으로 되어 있으나 송ㆍ원ㆍ명 3본과 궁본에는 지(之)로 되어 있다.
  52. 52)인도의 정통철학파인 Saṃkhya학파의 음사이다. 수론(數論)이라고 한역.
  53. 53)인도 정통 철학파인 Vaiṣesika학파의 음사이다. 승론(勝論)이라고 한역.
  54. 54)산스크리트어로는 Prakṛti라고 한다. 물질의 근원으로서 삼덕이 균형을 이루고 아직 분화하지 않은 상태이다.
  55. 55)Pañcamahābhūta라고 한다. 5유(唯)로부터 발생하는 허공ㆍ바람ㆍ불ㆍ물ㆍ땅을 말한다.
  56. 56)산스크리트어로는 Puruṣa라고 한다. 신아(神我)라고도 한역한다. 승거학파에 있어서 정신적 원리를 나타낸다. 자성(Prakṛti)에 상대하는 것으로서 신아는 독존(獨存)하는 영체(靈體)이다.
  57. 57)산스크리트어로는 vikāra라고 한다. 전변하는 것을 말한다. 자성으로부터 5대(大)ㆍ아만(我慢)ㆍ5유(唯)ㆍ대(大, mahat)ㆍ11근(根)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58. 58)여기서 셋은 앞에서 나온 자성ㆍ인ㆍ변이의 셋을 말한다.
  59. 59)산스크리트어 sattva의 음사.
  60. 60)산스크리트어 rajas의 음사.
  61. 61)산스크리트어 tamas의 음사.
  62. 62)위에서 나온 sattva의 한역.
  63. 63)승거 철학에서 말하는 대(mahat)ㆍ각(覺, buddhi)ㆍ심(心, citta)를 말한다. 심리기관의 맨 위에 있는 것으로 이성(理性)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 특성은 결지(決智, adhyavasāya). 즉 추리판단을 시키는 곳이다.
  64. 64)5유(唯)을 말한다. 아만으로부터 나와서 소리ㆍ접촉ㆍ색ㆍ향ㆍ맛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으로부터 5대(大)가 생긴다.
  65. 65)산스크리트어 pāṭala의 음사. 나무의 이름. 엽수(葉樹)라고 한역. 아카시아와 비슷하다. 향기가 있고 꽃은 자주색이다.
  66. 66)산스크리트어 Nirgratha의 음사. 6사외도 중의 하나. 자이나교도를 말한다.
  67. 67)승거 학파의 견해에서는 아만(我慢)이다. 아마도 아만을 아소로 번역한 듯하다.
  68. 68)산스크리트어로는 antaḥkārana라고 한다. 순연한 정신기관으로 대(大)ㆍ아만ㆍ심(manas)으로 형성된 복합체로 감각ㆍ지각ㆍ개념 작용 등 우리의 모든 심적 생활의 기반이다.
  69. 69)산스크리트어로는 bahyam karana라고 한다. 외작기는 10근(根)이고, 10근의 작용은 이미 현재의 대상을 대상으로 하지만 각각 정해진 영역이 있어 그 영역을 넘어설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손의 작용은 현재에 있는 것을 잡는 것이고, 과거ㆍ미래의 것에까지 미칠 수는 없다.
  70. 70)산스크리트어로는 bhokṛti라고 한다.
  71. 71)산스크리트어로는 kaivalya라고 한다. 독존(獨存)으로 한역. 자아가 자성(prakṛti)으로부터 최종적으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혹은 육신 없는 해탈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