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苦)를 생함이 헤아릴 수 없지만 선적(善寂:열반)의 취(趣)에서는 편안한 것을 그는 알도다. 중생을 자비롭게 여기시기에 영겁(永劫)토록 윤회하시네.
028_0716_a_04L知生苦無量, 善寂趣彼安, 用悲衆生故,
輪轉於多劫。
자신의 오묘한 착함을 버리시고 모두를 위해 법을 말씀하시네. 넓은 지혜로 모든 취(趣)를 없애시니 최고의 깨달음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
028_0716_a_06L捨己之妙善, 爲一切說法,
普智滅諸趣, 稽首禮最覺。
이 3법문(三法門)을 여시니 공덕이 돌아가는 곳이로다. 저 중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하시어 모든 고통을 벗어나게 하도다.
028_0716_a_07L開此三法門,
功德之所歸, 安快彼衆生, 離於一切苦。
먼저 선서(善逝)와 법(法)과 가장 뛰어난 대중에게 예배하오니 지금 설하시는 진제(眞諦)의 법은 삼삼품(三三品)이 그 뜻과 같아라.
028_0716_a_08L前禮於善逝, 法及無上衆, 今說眞諦法,
三三如其義。
말하기를 “지금 3법(法)에 대해 말하겠다”고 하였다.
028_0716_a_10L說曰:“今說三法。”
【문】존자가 3법을 말한다고 했는데, 3법은 어떤 뜻입니까?
028_0716_a_11L問:尊云說三法,三法何義?
【답】이 경(經)은 법을 말미암는 까닭에 다만 세 가지를 서로 이어서 글을 지었으니, 3법이란 가상(假想)이다.
028_0716_a_12L答:此經因法故,唯三相續撰。三法者是假想。
【문】무슨 까닭에 3법을 간추렸습니까?
問:何故三法撰?
【답】이 불경(佛經)은 헤아릴 수 없는 상(想)에 의지하니 중생은 악한 세상에 무너지고, 목숨은 먹는 것으로써 보존된다. 그 진(眞)을 구하고자 하니 그를 위해서 상을 열기 때문이며, 잘 간직하기 때문에 이 3법을 가려내었다. 모든 세간도 진상(眞想)과 가상(假想)에 의지하니 그러므로 상을 열었고, 그래서 3법을 가려낸 것이다.
착하고 뛰어난 것이란 즐겁고, 묘하고, 사랑스러운 것이니, 이와 같이 뜻을 견주어 착하고 뛰어나다고 말한다. 세간이란 즐거움이 많으며 즐거움을 향하지만 즐거움의 인(因)을 등진다. 즐거움이란 대열반이고, 병 없음은 즐거움이 많음이나 향하는 것이 다만 이 인을 등질뿐이다. 만약 이미 즐겁다면 향함은 말할 필요가 없다. 비유하면 인취(人趣)의 도(道)와 같아서 만약 이미 도를 안다면 도를 말하지 않으니 그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답】비록 이러한 말이 있지만 뜻은 그렇지 않다. 등(燈)의 비유를 취하겠다. 예컨대 등에 불을 켜면 곧 어둠이 없어지고 등에 불을 켠 후에 어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가 생기면 곧 착하고 뛰어난 지혜의 깨달음이 있게 되니, 이것이 한 가지 뜻이다.
【문】덕은 어떤 것을 이름 지은 것입니까? 중생의 수(數)입니까? 색과 맛과 향기에 견줍니까? 거두는 것입니까? 다투어서 조복하는 것입니까?
028_0716_b_15L問:德名何等?爲衆生數爲色味香比、爲攝爲諍伏耶?
【답】나는 즐겁지 않고자 하여 스스로 생각해서 경을 지었다. 이 중에서 덕이란 복(福)과 근(根)과 악하지 않음[無惡]이다. 복과 근과 악하지 않음, 이 세 가지가 덕의 상(想)이다. 백정법(白淨法)과 법의 과(果)를 나는 덕의 상이라 하니, 이 모든 것이 이 세 가지에 거두어진다. 지금 계속해서 드러내 보이겠다.
【답】복이란 보시와 계와 닦음[修]이니, 자주자주 착하고 뛰어난 것에 처하는 것을 복이라 한다. 또한 사람의 악을 드러내어 없애는 것을 복이라 한다. 이 세 가지가 보시와 계와 닦음이니 말한 것과 같다. 복이란 자주자주 사람을 착한 곳으로 인도하고 또한 악을 드러내어 없애도록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복이라 한다.
【답】말하지 않았는가? 모든 중생은 다만 이와 같은 사견(邪見)을 어리석음으로 하여 살생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도적질하며 여러 악을 짓지만 이 3귀의를 한 사람은 짓지 않으니, 이미 바른 견해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약 3귀의를 하였지만 바른 견해가 없다면 3귀의를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헤아릴 수 없는 중생에게 보시하지만 두려움 없음을 으뜸으로 삼는 데는 허물이 없다. 재시란 음식을 으뜸으로 삼으니, 다른 사람을 거두기 위해서 보시한다. 공양 등에서는 향과 꽃을 으뜸으로 삼으니 스스로 위하기 때문이고, 혹 다시 둘 다 갖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와 남에게 모두 덕이 되기 때문에 큰 과(果)를 얻는 것이다. 이 중에서 보시의 깨끗함은 널리 분별해야 한다. 다음에서 말한 것과 같다.
비유하면 나무가 그 뿌리를 쓰기[用]도 하고 어떤 때는 다시 가지를 쓰기도 하며 혹 둘을 다 쓰기도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일은 세간의 상도(常道)이다.
028_0716_c_18L譬樹用其根, 時復用於枝, 或有二俱用,
是事世之常。
이와 같은 방편이 이루어지면 이 보시로 큰 과를 얻게 되네. 인연의 깨끗함을 따르니 공덕을 함께 함도 그러하도다.
028_0716_c_20L如是方便成, 是施得大果,
有從因緣淨, 俱功德亦然。
【문】어떤 것이 계(戒)입니까?
028_0716_c_21L問:云何戒?
【답】계란 몸과 입, 이 두 가지로 다른 사람을 거두고, 괴롭히지 않고,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계에는 세 가지 모습이 있는데, 몸과 입에서 생기는 것이다.
028_0716_c_22L答:戒者身口二:攝他、不嬈、饒益。戒者有三相,從身口生。
【문】그 세 가지는 어떤 것입니까?
028_0716_c_23L問:此云何?
028_0717_a_02L【답】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攝他]과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不嬈他]과 널리 이익되게 하는 것[饒益]이다. 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은 흉년이 들어 물자가 부족할 때 중생이 목숨을 애착하면, 그때 중생을 자기 몸같이 보아 해치지 않는 것이며, 다른 사람이 재물을 잃거나 처자와 이별할 때도 이와 같이 대해 주는 것이다.
이간질하는 말ㆍ욕설ㆍ거짓말ㆍ꾸미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또 일곱 가지 항목에서 다른 사람을 핍박하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의지할 만한 곳이 없으면 구제해 주는 것이 다른 사람을 거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거두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잘 지켜서 복이 계속 생기면 이것이 널리 이롭게 함이니, 내가 지금부터 살생을 하지 않고 마음을 일으키면 요익이 늘어난다. 비유하면 사물이 나타나면 해가 자라게 하는 것과 같아서, 계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기면 착함이 이어지나 수(受)는 실로 이미 없어졌으니 마치 종자에 싹의 요익(饒益)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착함을 버리지 않고 서로 이어지게 한다면, 나아가 잠을 자더라도 복을 늘린다. 이것이 요익이고, 이것을 계라 한다.
【답】닦음이란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이다. 이것이 선행(善行)을 닦는 것이므로 닦음이란 꽃으로 마(麻)를 훈습하는 것과 같다. 익힘[習]은 닦음이니 왕을 가까이하는 것과 같아서 비유하면 왕과 신하가 가까워야만 반드시 그 결과를 이루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익힘과 닦음이어야만 반드시 좋은 과를 얻는다. 그러므로 선(禪)을 닦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러한 뜻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는 네 종류가 있다.
028_0717_b_02L【답】4무량심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捨를 뜻함)이다. 이 네 가지를 가상(假想)해서 무량(無量)이라고 말하고,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이 이 네 가지에 연(緣)이 되므로 무량이라고 말하며, 그 공덕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무량이라고 말한다.
자(慈)란 모든 중생의 마음씀씀이를 불쌍히 여겨 일체중생에게 이익이 되게 하겠다고 그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자(慈)이다. 비(悲)란 고뇌하는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 앞에서 걱정과 고뇌를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비이다. 희(喜)란 즐거움이 많은 중생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함이니, 이것이 희이다.
【답】4무색정이란 공처(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처(處)란 이 네 가지에 의지한다. 공(空)이란 물질과 물질을 보는 허물을 제거한 것이니, 이것은 욕심을 벗어나서 한마음[一心]으로 허공[空]을 인연한다. 이 허공에 반연한 생각이 공처(空處)이다.
【답】근이란 탐욕이 없고, 성냄이 없으며,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다. 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것, 이 세 가지가 근의 모습이다.
028_0717_b_17L答:根者無貪、無恚、無愚癡。不貪、不瞋、不癡,此三根相。
【문】이것은 어떤 것의 근(根)입니까?
028_0717_b_18L問:此是誰根?
【답】앞에서 말한 것(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것)은 덕의 근본이 아니고, 저것(탐내지 않고, 성내지 않고, 어리석지 않은 것)은 모든 선(善)에 나아가는 뛰어난 법의 근본이다. 그러한 뜻에 따라 하나가 늘어나면 다른 것도 따라서 늘어난다. 예컨대 탐욕이 없는 것은 보시에서 늘어나고, 성냄이 없음은 계(戒)에서 늘어나며, 어리석음이 없음은 닦음[修]에서 늘어난다.
인욕(忍辱)이란 고(苦)이니 귀한 힘과 천한 힘에 대해 자제해서 화내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다. 인욕은 고통스러우니 귀한 힘이나 천한 힘에 대해 일에 따라 자제하여 화내지 않고 용서한다. 고통에 핍박당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은 감내(堪耐)한다는 의미이다. 귀한 힘에 핍박당해서는 화를 내지만 복수할 수 없다. 다만 폐악(弊惡)한 사람만이 화를 낸다. 만약 큰 힘에 핍박당하였지만 화를 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인욕이다. 천한 힘에 가격당하면 천한 힘에는 노여워하여 원수를 갚을 수 있다. 만약 보복하지 않으면 이것은 용서함[恕]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허물과 자기 행위의 허물을 감내한다는 이 뜻에 대해 설명하겠다. 고통이란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 바람과 햇빛 아래에서 열심히 일하여 피로한 것이니, 이러한 여러 고통에 의해 핍박되지만 스스로 이 고통을 자제해야 한다. 이 두 일(衆生因緣과 行인연)에서 번뇌를 일으키니 몸에 대해서는 화를 내지 않지만 무정물(無情物)에 대해서는 화를 내는 자에게는 중생인연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과 행위에 의해 몸을 핍박당하더라도 감인(堪忍)해야 한다.
논의 다문이란 경을 모두 다 분별하는 것이고, 율의 다문이란 위의(威儀)와 예절을 말하여 사람들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종류의 다문이다.
028_0718_a_06L阿毘曇者,於契經所有盡分別。律者,說威儀禮節令淸淨。是謂三種多聞。
이 가운데 율의 다문은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고, 논의 다문은 성냄을 제거하는 것이다. 논이란 모든 업의 성품을 말하여 이것으로 성냄을 그치게 하는 것이니 성냄으로 인해서 계를 범함이 일어나고, 계를 범함으로 인해서 지옥에 떨어진다. 경의 다문은 의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경이란 12인연(因緣)을 말한다.
【답】악을 행하지 않음이란 진정한 선지식[眞知識]과,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眞御意]과, 진실로 말미암음[眞由]이다. 진정한 선지식과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과 진실로 말미암음이 악을 행하지 않음이다. 진정한 선지식이란 자애롭고 착하고 능력 있는 스승과 제자와 동학(同學)이다. 자애롭고 착하고 능력 있다면 이것이 진정한 선지식이다. 그러한 세 가지의 스승과 제자와 동학(同學)이다.
【문】만약 자애로운 것은 스승이고, 착한 것은 제자이며, 능력 있는 것은 동학이라면 어떻습니까? 이와 같이 말합니까?
028_0718_a_15L問:云何?若慈是師、善是弟子、能是同學,說如是耶?
【답】그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말하는 데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자애롭고 착하고 능력 있는 것을 진정한 선지식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가르침에 대해 스승과 제자와 동학이라고 관하라. 이 중에서 자애로움이 가장 뛰어나고 나머지 두 가지는 가지[枝]로 이루어진 것이다.
혹은 자애로운 사람이 다만 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일을 알지만 능력대로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컨대 부모님이 나이는 많으시나 덕이 없는 경우와 같다. 혹은 능력은 있으나 착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이 비록 자애롭지만 착하지 못한 까닭에 악을 가르치니 육사외도(六師外道)와 같은 무리들이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었으면 이 사람이 진정한 선지식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혹은 스승의 잘못 때문에 진정한 선지식의 모습이 무너지고, 혹은 제자의 잘못 때문에, 혹은 동학의 잘못 때문에 무너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 가지를 갖춘 진정한 선지식을 구해야 할 것이다.
028_0718_a_23L或有師過故壞、或弟子過、或同學過。是以具足成就三相眞知識當求。
028_0718_b_02L【문】이것은 진정한 선지식이고, 어떤 것이 진실로 마음을 제어함[眞御意]입니까?
028_0718_b_02L問:是眞知識云何眞御意?
【답】진실로 마음을 제어함이란 지(止)와 거(擧)와 호(護)의 상(想)의 용맹이다. 지상(止想)과 거상(擧想)과 호상(護想)은 이 가운데를 향하여 용맹함이다. 이 중에서 지상(止想)이란 마음의 방일한 뜻을 그치고 겸손하여 이 가운데에서 모습을 관하기 때문에 지라고 말한다.
거상(擧想)이란 마음이 유약하고 겁이 많으며 하열한 근력을 도와 일으켜 높게 하여 이 가운데에서 모습을 관하기 때문에 거라고 말한다.
028_0718_b_05L止擧者,意弱柔濡,下筋力扶起令高,此中觀相故說。
호상(護想)이란 평등한 마음으로 그 행위에 맡기는 것이다. 예컨대 수레를 잘 모는 것과 같으니, 느린 말은 빨리 가게 하고 빠른 말은 제지하여 평등하게 가도록 하여 잘 보호한다. 호상도 이와 같아서 4무량심 가운데 불가하다는 마음을 가진 중생을 보호하니 자(慈)가 으뜸가는 호이고, 여기서는 평등한 마음이 호이다.
【답】진정한 말미암음이란 방편의 과(果)를 갖추는 것이다. 진정한 말미암음이란 그에게 닦고 익히라고 말해주는 것이니, 이러한 진정한 말미암음은 방편의 과를 갖춘다.
028_0718_b_15L答:眞由者,具方便果。眞由者,向彼。或說習修是眞由,具方便果。
【문】어떤 것을 갖춥니까?
028_0718_b_16L問:爲誰具?
【답】앞에서 이미 매우 뛰어난 것을 말하였다.
答:前已說善勝。
【문】갖춘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이름한 것입니까?
028_0718_b_17L問:具名何等?
【답】갖춘다는 것은 선손(善損)ㆍ근(根)ㆍ선(禪)을 가까이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한 행의 근본 바탕[資]이 되므로 갖춘다고 말한다. 예컨대 행이 구족(具足)하다 할 때에 구(具)와 같다. 갖춘다는 것은 가지[枝]의 뜻이니, 이것이 세 가지 선(善)인 선손ㆍ근ㆍ선을 가까이 행하는 것을 갖춘다.
028_0718_c_02L 덜어내는 것이란 석공(石工)과 목공(木工)이고, 덧붙이는 것이란 니공(泥工)과 화공(畵工)이니, 그들이 두 가지 상을 만든다. 만약 덜어내는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것은 바람과 비를 견딜 수 있다. 다른 것은 비록 보기는 좋을지라도 바람과 비를 견디지 못한다.
이와 같이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재가(在家)와 출가(出家)이다. 출가한 사람은 집의 얽매임에서 그 마음이 해탈하였으니 이미 많은 도구를 버리고 덜어내는 것[損]으로 묘(妙)를 삼는다.
028_0718_c_03L如是二種人,在家及出家。出家者於家累意解脫,已捨衆具損爲妙。
재가의 사람은 처자와 친족으로 인해 늘리는 것[增]으로 삼아 많은 일을 이룰 수 있다. 재가의 사람은 비록 많은 도구를 가지고 있음을 좋게 생각하고 애착하지만, 다만 애상(愛相)ㆍ이별ㆍ근심[憂]ㆍ슬픔[悲]ㆍ투쟁 등은 비법(非法)에 무너지고, 마음에는 견딤이 없으니, 비유하면 그림 속의 모습이 바람과 비에 없어지는 것과 같아서 출가만 같지 못하다. 예컨대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난타야, 그대는 일 없음과 분소의(糞掃衣)를 어떻게 보는가? 이미 높은 경지를 즐거워할 줄 안다면 버리고 애욕에 물들지 말라.
028_0718_c_16L 難陀何見汝, 無事糞掃衣,
知已樂於高, 捨離不染欲。
이러한 까닭에 이 세 가지가 근본임을 알 수 있다.
028_0718_c_17L以是故知此三是本。
다시 네 가지 애착으로 옷ㆍ음식ㆍ좌처(坐處)ㆍ유(有)가 생기니, 그러므로 이 가운데에서 옷의 애착에 대해서 분소의를 말하고, 음식의 애착에 대해서 걸식을 말하고, 좌(坐)의 애착에 대해서 일 없음을 말한다. 만약 이 세 가지 공덕을 성취한다면 방편으로 유(有)의 애착을 없애는 것이니 선손(善損)하기 때문이다.
다시 두 종류가 있으니, 아행(我行)과 아소작(我所作)을 헤아려 집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의ㆍ식ㆍ좌처를 탐착하므로 아소작이라는 계착(計着)이 생긴다. 이것은 세 가지 깨끗한 공덕을 멈추게 한다. 만약 한 가지 일이라도 없애려면 반드시 아(我)를 헤아리는 것을 끊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깨끗한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답】분소의란 3의(衣)와 전의(栴衣)로서 자리[坐]에 따른다. 이 분소의는 세 종류이니, 3의와 전의와 수좌(隨坐)를 가득 채운다. 만약 분소의가 다만 세 종류라면 아홉 종류의 깨끗한 공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경의 내용과 어긋난다. 분소의란 것은 무덤에서나 마을의 거리에서 다 해지고 떨어진 옷을 주워서 만든 것이다.
세존께서 그를 위해 말씀하시기를 “3의를 간직하는 것에는 여섯 종류가 있다. 겁패(劫貝)와 마침내는 비단과 삼과 베와 갈포와 모시이다. 이 가운데 하나만을 써야 한다”고 하셨다. 저 사람이 보고 나서 이것은 좋다고 하면 이 좋다는 것이 번뇌를 많게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위해서 전의(栴衣)를 말한다. 이와 같이 전의와 3의(衣)를 간직한다.
혹 대중 가운데 있거나 집의 상좌(床座)에 있으면서 만약 다른 좋은 자리를 보고 옮겨서 나아가 앉는다면 세존께서 그를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자리에 따라 이미 앉았으니 다른 자리가 좋다고 생각해서 자리를 옮기지 말라. 아(我)의 애착이 크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다른 자리로 일어나는 것이 수좌(隨座)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가 분소의(糞掃衣)의 이치를 가득 채운다.
이 가운데 정진하는 사람이 신심으로 보시하여 집을 짓고, 부드러운 것으로 큰 자리를 펴게 되면, 교화하는 사람이 탐착하게 된다. 세존이 이것을 아시고는 저런 사람을 위해 이 일을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집을 버리고 다른 집을 집착하지 말고, 신도가 지어준 이 집을 버리고 일 없음을 즐겨라”고 하셨다.
028_0719_b_02L저 사람이 이미 일 없음에 있는데, 다시 높고 큰 누각의 집을 짓는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일 없는 가운데에 있으면서 높은 누각의 집을 애착하고 즐긴다면, 말의 승마 도구를 나귀에 씌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무 아래에서 수지(受持)해야 한다.
저 사람이 이미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추악한 작은 나무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고, 다시 보기 좋고 큰 꽃의 과일 나무를 구한다면, 세존께서는 그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비바람을 맞는 것을 받아들이라. 너의 시주(施主)가 몸을 잘 보살펴 줄 것이니, 다시 어째서 이것을 위해 신선의 약을 배우려 하는가? 비바람을 맞고 너는 집이 없으나 애(愛)에 핍박당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저 사람이 이미 비바람을 맞고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어려운 행을 이미 행하였다’ 하고는 이로 인해 바른 사유를 버리고 곧 쓰러져 누워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잔다면, 세존께서 저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이 일은 옳지 않으니, 마치 어떤 사람이 귀를 자르고서 머리를 꾸미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는 정좌를 수지해야 한다. 그리고 풀을 깔고서 결가부좌하여 세간이 진(眞)과 같으나 스스로 업을 지음을 관하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일 없음[無事]을 구족한다.
【답】걸식이란 한 끼를 먹고, 중간에는 미음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무덤 사이에 출가한 자에게는 두 종류의 식(食)이 있으니, 승식(僧食)과 걸식(乞食)이다.
028_0719_b_14L答:乞食者,一食,過中不飮漿。塚間出家者有二種食:僧食及乞食。
승식(僧食)이란 항상 정진(精進)하고 집에서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혹 다시 정진하는 자는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 바깥에 방을 짓고 음식을 먹는다. 걸식(乞食)이란 집에서 집으로 밥을 빌어서 가장 적은 양을 먹으니, 이것을 걸식이라 한다. 나머지는 사명(邪命:잘못된 방법으로 밥을 얻는 것)이다.
저 승식하는 자가 생각하기를 ‘내가 저 시주의 음식을 먹었다’ 하고 자기를 높이는 큰 아만심을 일으킨다. 세존께서 이런 사람을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걸식하라” 하시었고, 저 사람이 걸식하고 나서도 자주 먹어 식사 때가 이르면 그 때문에 배움을 그만두니, 세존께서 이러한 사람을 위해 한 끼만 먹으라고 가르치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은 생각이 있어야 하나니 매번 식사할 때 조금 먹고 만족할 줄 알면 이것이 박(薄)과 절(節)과 소(消)를 수용(受用)해서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다.
028_0719_b_23L人當有念意, 每食自知少, 則是受用薄,
節消而保壽。
028_0719_c_02L
저 사람이 한 끼를 먹고 나서도 먹을 것을 집착하여 문득 생각하기를 ‘세존께서는 다만 미음을 먹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하고는 여러 종류의 미음을 구하니, 이것 때문에 배움을 그만둔다. 세존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가르치시기를 “그대는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경지를 얻을 것이니 미음을 버려야 할 것이고, 갈증이 나는 사람은 물도 삼가야 할 것이니, 때가 지난 중에는 미음을 마시지 않을 것을 수지(受持)해야 한다”고 하셨다.
저 사람이 이와 같이 조금 먹고 만족한 다음에 다시 몸을 씻고 몸을 칠하는 것[塗]을 즐겨하니, 세존께서 이런 사람을 가르치시기를 “이것도 먹는 생각으로 자기를 높이 올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은 먹는 것에서 보강되는 것이니, 비록 아주 살쪘다 해도 무덤가에 버려야 할 것이다.
【답】앞에서 이미 근(根)을 말하였는데, 해근(害根)이란 근을 조복할 수 없는 것이니, 비유하면 말이 비록 물과 곡식을 끊어 어떤 도(道)로도 조복할 수 없지만, 말이 물과 곡식으로 배불리 먹고 도(道)를 사용하면 조복되는 것과 같다.
028_0719_c_15L答:前已說根,害根者不能調根。如馬雖斷水穀無道不調,飽以水穀以道則調。
이와 같이 해근(害根)은 조복할 수 없지만, 모든 근을 거두면 조복된다. 만약 해근을 조복함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눈먼 사람이 욕심을 떠남이다. 그러므로 해근하지 말라. 다만 근을 경계에 바르게 제어하고 바르게 사유하여 거두면 곧 수(守)를 얻는다.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답】앞에 말한 선(禪)은 6취(趣) 생사에서 뛰어난 것이고, 이것은 6취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이다. 다음에 진제(眞諦)를 관찰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처음 넓은 들판을 건너 여러 종류의 아주 보기 좋은 꽃 연못에 맑은 물이 가득 차 있는 것과 정원에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가 장식되어 있음을 보았다.
음(陰)ㆍ계(界)ㆍ입(入)이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관찰할 때, 만약 즐겁고자 한다면 이것이 인(忍)이다. 바르게 사유하여 뜻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명(名)이다. 예컨대 꿈속에 어버이를 보는 것과 같고, 거울 속에 비친 영상과 같으니, 이와 같은 고관(苦觀)은 상(想)이다.
사(士)는 신행(信行)이 있어 성인에게 칭찬받는다. 무위(無爲)를 즐기는 자 모든 얽매임에서 풀려나리라.
028_0720_b_12L士有信行, 爲聖所譽, 樂無爲者,
一切縛解。
여기에 세 종류의 신(信)이 있다.
028_0720_b_14L是三種信。
【문】어떤 것이 세 종류의 신입니까?
問:云何三種?
【답】신이란 정(淨)ㆍ욕(欲)ㆍ해(解)이니, 이것이 신의 정ㆍ욕ㆍ해이다. 이 중에서 정이란 탁(濁)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탁이란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니, 성냄ㆍ거만함ㆍ무참무괴(無慙無愧)를 이것에 견줄 수 있다. 비유하면 코끼리와 물소 등이 물속에서 어지러이 날뛰고 있는 것을 탁이라 하고, 가만히 있으면 물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이 싫어하는 성냄ㆍ거만함ㆍ무참무괴로 뜻[意]을 어지럽히는 것에 견줄 수 있는 것을 탁이라고 하며, 이것이 없으면 정이라고 한다.
욕이란 뛰어난 것을 애착하고 즐기는 것이니, 비유하면 사람이 병에 시달리면 좋은 음식도 원하지 않다가 병이 낫고 나서는 얻고자 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악(惡)에 시달려 법을 듣고자 함을 즐겨하지 않다가 선지식을 얻고 나서는 법을 즐기며 문득 생각하기를, ‘이 법이 가장 미묘하다’ 하는 것과 같으니, 다시 이것을 욕이라 한다.
028_0720_c_02L해(解)란 집지(執持)이니, 비유하면 사람이 독사에게 물리면 사(師)가 독에 대해 주문을 외울 때, 그 사람의 뜻도 지극한 데 이르러 생각하기를, ‘실로 주문을 말한 것과 같이 이로부터 반드시 나을 것이다’ 하고 마음이 풀려 약을 구하는 것과 같다.
【답】근이란 기(起)ㆍ습(習)ㆍ전(專)이니, 기ㆍ습ㆍ전, 이 세 종류를 근(勤)이라 한다. 기란 처음 선(善)을 짓는 것이니, 비유하면 나무를 비벼 불을 피울 때, 많은 화구(火具)를 만드는 것과 같다. 습(習)이란 자주자주 짓는 것이다. 전(專)이란 꽉 잡아서 버리지 않고[不捨] 흩뜨리지 않아[不散] 뜻이 한결같은 반연[緣]을 이루는 것이다. 비유하면 머리가 불타는 것을 끄려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세 종류를 근(勤)이라 한다.
내가 한결같이 부지런히 수행하였지만 오랫동안 번뇌에 시달렸으니 혹 과(果)가 있건 없건 간에 버려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약 이 때문에 버리지 않고 정진한다면, 이것을 불사(不捨)라 한다. 이 세 가지 일로 반드시 과(果)를 얻을 것이다. 비유하면 행인이 도달할 곳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같다.
다시 안[內]이란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바깥[外]이란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는 것이고, 구(俱)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시 세 번뇌는 안에 있고 바깥에 있고 둘 다 있기도 하다. 안에 있다는 것은 욕(欲)이요, 밖에 있다는 것은 성냄이니, 성냄이란 다른 사람에게 성내는 것이지 자기에게 성내는 것은 아니다.
028_0721_a_02L 예컨대 경에서 말하기를, “사람이 여인을 보는 것이 안에서 근(根)과 어리석음[癡]이 함께 움직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 세 번뇌를 없애면 이것이 세 종류의 염이니 저 신(身)에 세 가지가 있듯이 통(痛)ㆍ심(心)ㆍ법(法)도 세 가지가 있어 모두 열두 종류의 염이 있다.
【답】이와 같은 것은 아행이 아니다. 아작은 가호(假號)이니, 다만 5음(陰) 가운데에서 아(我)를 헤아리는 것이 아행이다. 세존께서는 이것[我行]을 행하지 않으셨다. 만약 경계에 대해 아를 헤아리고 집착하여 허락한다면, 이것이 아작이다. 세존께서는 이것[我作]이 없다.
예컨대 『설처경(說處經)』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이 생각하기를, ‘아(我)와 열반은 이 세 가지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면 이것은 옳지 않다. 어째서입니까? 한 가지에 두 뜻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이란 세간을 벗어나 한결같이 연(緣)이 없는 것이니, 저 가운데 의아(意我)가 없는 것이다. 3세를 벗어나고 다시 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세 가지 가운데 세우기[立]를 즐겨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원이다.
028_0721_b_02L【답】무상이란 사(事)ㆍ작(作)ㆍ구(俱)의 상(想)이다. 사ㆍ작ㆍ구의 상을 벗어나는 것이니, 벗어남이 무상이다. 예컨대 경에서 “모든[一切] 유위(有爲)를 벗어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위에서 말한 일체(一切)란 사와 작이니, 지을 만한 것이 사이고, 지을 수 있는 것이 작이다.
예컨대 무명(無明)의 복(福)으로 말미암음이니, 무명의 복이 움직이지 않으면 행(行)을 짓는다. 저것(行)이 상속을 인연해서 식(識)이 생긴 것이 사(事)이다. 무명과 행이 작이니 이와 같은 것이 모든 유위이다. 만약 저것(事와 作)을 벗어나면 무상(無想)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다시 『성법인경(聖法印經)』에서 “무상(無想)이란 그 색(色)과 상(相)을 보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일체(一切)를 저 경에서 말하였다.
028_0721_b_07L復次如『聖法印經』所說:“無想者不見其色相。”如是一切,彼中亦說。
이 세 가지 사(事)ㆍ작(作)ㆍ구(俱)를 벗어난다. 저 일체가 세 가지 뜻인데, 다만 말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예컨대 “강에 물이 없어 물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한 가지 뜻에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공ㆍ무원ㆍ무상도 이와 같으니, 이것이 정(定)이다.
【답】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니 성지(聖地)ㆍ근(根)ㆍ역(力)ㆍ각(覺)ㆍ도(道)의 지(枝)와 실답게 닦는 것이 습(習)의 뜻이다. 예컨대 순수한 재로 옷을 빨 때, 비록 때를 제거해서 희고 깨끗하더라도 오히려 재의 기운이 남아 있으니, 그런 다음에 만나화(蔓那華) 등의 모든 향기로운 꽃으로 훈습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견지(見地)이다.
욕계의 애착은 고의 원인이고, 이 법지(法智)는 관지(觀智)이니,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미지지(未知智)이다. 이것이 습(習)을 보는 3지이다. 욕계가 없어짐이 법지이고, 이것이 곧 관지이며, 이와 같이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미지지이다. 이것을 견이 다하는 3지라고 한다.
【답】수지란 상(相)과 행(行)과 종(種)의 지(知)이다. 상지(相知)ㆍ행지(行知)ㆍ종지(種知), 이 세 가지가 수지(修地)이다.
028_0721_c_12L答:修地者,相、行、種知。相知、行知、種知,此三修地。
【문】어떤 것이 상지입니까?
問:云何相?
【답】상지란 기(起)ㆍ주(住)ㆍ괴(壞)이니, 기란 생하는 것이고, 주란 이루는 것이며, 괴란 무너지는 것이다.
028_0721_c_14L答:相者,起、住、壞。起者生,住者成,壞者敗。
【문】생각나는 대로 말하자면, 중생과 열반에 대해 의심이 있으니 중생과 열반도 이 상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만약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크게 잘못된 주장이니 무상(無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이 경에 잘못이 있습니다. 기ㆍ주ㆍ괴가 유위(有爲)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했어야 합니다.
028_0722_a_02L【답】행지란 무상(無常)ㆍ고(苦)ㆍ비아(非我)의 견해이니, 행지란 모두 지혜인 것이요, 이것이 행지의 뜻이다. 이 상지는 행지를 말미암는 것이니, 이것이 행지의 뜻이다. 5음(陰)은 무상하니 만약 무상하다면 고(苦)요, 만약 고라면 자재하지 못하니 그러므로 비아이다.
【답】종지란 미(味)ㆍ환(患)ㆍ이(離)이다. 종지란 이것이 미이다, 이것이 환이다, 이것이 이라는 것이다.
028_0722_a_06L答:種者,味、患、離。種者是味、是患、是離。
【문】이것이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028_0722_a_07L問:是誰?
【답】이것은 유위(有爲)이다. 이 가운데에서 미는 묘(妙)한 것이고, 환은 추악한 것이며, 이는 모두 쉬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천(天)과 인(人)의 즐거움은 미이고, 3악도(惡道)의 고통은 환이며, 죄와 복을 떠남이 이이다.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하면 정견(正見)의 공덕이니 그러므로 해탈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종지(種知)이고, 이것이 수지(修地)의 지혜이다.
천이(天耳)란 선정의 힘 때문에 한 연(緣)에 거처하여 4대(大)의 깨끗함을 늘리는 것이니, 이와 같이 천인(天人)이 악취(惡趣)에 이르러 소리를 듣는 것도 그 힘에 따른 것이다. 비유하면 눈으로 가까운 것을 보거나 먼 것을 보거나 간에 그 눈의 힘에 따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 선정의 힘에 따라 천이를 얻는다.
성자재란 장수하도록 변화할 수 있고, 물을 변화시켜 연유[酥]로 만들고 흙을 변화시켜 금은(金銀)으로 만드니 이와 같이 비유할 수 있다. 이것이 여의족이니 성인(聖人)이 길이 길러야 할 것이다. 여의족ㆍ천이ㆍ타심지, 이것들은 통(通)인데, 숙명지(宿命智)와 생사지(生死智)까지 포함하면 범부의 다섯 가지 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