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045_0356_a_01L조당집 제20권
045_0356_a_01L祖堂集卷第二十 江西下卷第七曹溪第六代法孫


오관산五冠山 서운사瑞雲寺 화상

앙산仰山 혜적慧寂 선사의 법을 이었다. 선사의 휘는 순지順之요, 속성은 박朴씨이며, 패강(浿江:大同江) 사람이다.
조부 때부터 가업이 융성하여 대대로 변방의 장수로서 충성스럽고 근엄하다는 명성이 향리에 퍼졌고, 어머니 소昭씨는 유순하고 모범이 되어 어머니로서의 위의가 구족하고 좋은 명성이 이웃에 자자했다.
태기가 있을 때에 가끔 길상吉祥한 꿈을 꾸었고, 탄생할 때에는 이상한 상서가 있었으니, 옛 현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 또 나타난 것이다.
죽마竹馬놀이를 할 때에 벌써 우거(牛車:대승)의 기량이 있어 무릇 장난을 하면 항상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하였고, 열 살이 되자 학문을 좋아하고 애써서 입을 열면 큰 뜻을 읊어 청운靑雲을 능가하는 기개를 보였다. 이치를 열어 현현한 진리를 이야기할 때에는 거울이 마주 비치는 것 같았다.
약관이 되자 도의 싹이 일어나서 시끄러운 곳에 있기를 싫어하고 고요한 환경에 왕래하기를 좋아하더니, 마침내 양친에게 출가할 뜻을 밝혔다.
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허락하니, 오대산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이어 속리산에 가서 구족계를 받은 뒤에는 행行은 결초結草 비구니와 같고, 마음 씀은 호아護鵝 비구니에 견줄 만하였다.
이어 공악公岳에 갔다가 갑자기 신인神人의 설법 요청을 받으니, 산이 궁궐로 변화해 마치 도솔천과 같았다. 설법하여 기연에 응하니, 순식간 모든 것이 없어져 버렸다. 만일 덕이 지극하고 행이 원만한 이가 아니면 그 어찌 이럴 수 있으랴.
045_0356_a_02L五冠山瑞雲寺和尚嗣仰山寂禪師師諱順之俗姓朴氏浿江人也祖考竝家業雄豪世爲邊忠勤之譽遺慶在鄕母昭氏柔範母儀芬芳閭里懷娠之日頻夢吉祥免腹之時卽多異瑞昔賢知此今又徵焉及乎竹馬之期漸有牛車之量凡爲嬉戲必表殊常已至十歲精勤好學屬詞詠志卽見凌雲剖義談玄如同照鏡旣登弱冠道牙早熟厭處喧華之地長遊靜默之中遂乃懇告二親將隨緇侶志不可奪所天容許便投五冠山剃髮仍適俗離山受具足戒行同結草心比護鵝因遊公嶽忽遇神人邀請化成宮闕若兜率天說法應緣倏焉殄滅若非德至行圓孰能致感如此也
대중大中 12년에 이르러 사사로이 서원을 세워 중국中國에 가기를 원하여 사신을 따라 바다를 건널 때, 한 척의 배를 타고 만 겹의 파도를 넘는데도 조금도 두려운 생각이 없이 까닥 않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
마침내 앙산 혜적 화상에게 가서 정성스럽게 발 앞에 절을 하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니, 화상이 관대히 웃으면서 말했다.
“온 것이 어찌 그리 늦었으며, 인연이 어찌 그리 늦었는가? 뜻한 바가 있으니 그대 마음대로 머물러라.”
선사가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현현한 종지를 물으니, 마치 안회顔回가 공자 곁에 있던 것 같고, 가섭이 부처님 앞에 있는 것같이 하니, 그때에 모였던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건부乾符 초엽에 송악군松岳君의 여자 단월檀越인 원창元昌 왕후와 그의 아들 위무威武 대왕이 오관산五冠山 용엄사龍嚴寺를 희사하여 곧 거기 가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서운사瑞雲寺라 한다.
045_0356_a_15L洎乎大中十二年私發誓願擬遊上國隨入朝使利涉雲溟乘一隻之過萬重之浪曾無懼念不動安禪逕到仰山慧寂和尚處虔誠禮足願爲弟子和尚寬爾笑來何遲緣何晩旣有所志任汝住留禪師不離左右諮稟玄宗若顏回於夫子之下如迦葉於釋尊之前彼中禪侶皆增歎伏乾符初松嶽郡女檀越元昌王后及子威武大王施五冠山龍嚴寺便往居焉今改瑞雲寺也
045_0356_b_01L선사는 언젠가 형상을 표현하여 법을 나타내어 무리들에게 진리를 증득하는 데에 빠르고 더딤이 있음을 말했다. 이 가운데 네 쌍의 여덟 모습이 있었다.
○, 이 모습은 열반으로 의지를 삼는 형상이라 하고, 또는 불성을 다스리는 형상이라고도 하나니, 뭇 중생과 여러 성인들이 모두가 이 형상에 의지하고 있다. 형상은 비록 다르지 않으나 미혹과 깨달음은 같지 않나니, 그러므로 범부도 있고 성인도 있다. 이 형상을 아는 이는 성인이라 하고, 이 형상에 미혹한 이는 범부라 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인도에서 설법할 때 대중에게 이 형상을 나타내어 보이니, 마치 달이 자리 위에 뜬 것 같았는데, 그 설법 소리만 들리고, 그의 형상은 볼 수 없었다.
그 무리 가운데 한 장자가 있었으니, 제바提婆라 하였다. 대중에게 이르기를 “이 상서를 알겠는가?” 하니, 대중이 대답하기를 “성인이 아니거니, 어찌 능히 알겠습니까?” 하였다.
그때 제바는 마음 바탕이 미리부터 고요해졌으므로 그 형상을 보자마자 잠잠히 깨닫고 대중에게 말했다.
“지금의 이 상서는 스승께서 불성佛性을 나타낸 것이요, 스승의 몸을 나타낸 것이 아니다. 무상無相 삼매는 그 형상이 보름달 같은데, 이것이 불성의 뜻이니라.”
말을 마치기도 전에 스승이 자리 위에 본래의 몸을 나타내고 게송을 읊었다.
045_0356_a_23L師有時表相現法示徒證理遲疾此中四對八○此相者所依涅槃相亦名理佛性相與群生衆聖皆依此相相雖不異迷悟不同故有凡夫有聖謂識此相者名爲聖人迷此相者名爲凡是故龍樹在南印土則爲說法對諸大衆而現異相身如月輪當於坐上唯聞說法不見其彼衆之中有一長者名曰提婆謂諸衆曰此瑞不衆曰非其長聖誰能辯耶爾時提婆心根宿靜亦見相默然契會乃告衆曰今此瑞者師現佛性非師身者無相三昧形如滿月佛性之義……語猶未訖師現本身座上偈曰

몸으로 보름달 모습 나타내어
여러 부처님의 바탕을 드러내니
설법은 그 형체가 없는지라
말하는 것, 성聲도 색色도 아니다.
045_0356_b_06L身現圓月
以表諸佛體
說法無其形
用辯非聲色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월륜상月輪相을 갖고 질문해 온다면 형상 중심에 우牛 자를 넣어 대답하라.
牛, 이 모습은 소가 인초忍草를 먹는 형상이라고도 하며, 또는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형상이라고도 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경에서 말하기를 “설산에 인욕忍辱이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제호醍醐를 낸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중생이 대열반大涅槃의 법을 듣거나 물어 배우면 불성을 본다” 하였으니, 풀은 묘한 법에다 견주었고, 소는 뛰어난 근기에다 견주었고, 제호는 부처에다 견주었다. 그렇다면 소가 풀을 먹으면 제호를 내고, 사람이 법을 알면 정각正覺을 이룬다. 그러므로 소가 인초를 먹는 형상이라고도 하고,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형상이라고도 하느니라.
○奔, 이 모습은 3승乘이 공함을 구하는 형상이니, 무슨 까닭인가? 3승들은 진공眞空이란 말을 들으면 있다는 생각으로 찾으려 하므로 진공에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원상 밑242)에다 ‘우牛’ 자 셋을 쓰는 것이다. 만일 이 형상을 갖고 묻는 이가 있다면, 차츰차츰 성품을 보아 성불하리라고 대답하리라.
045_0356_b_07L若有人將此月輪相來問相中心著牛字對也▼(○*牛)此相者牛食忍草相亦名見性成佛相何以經云雪山有草名爲忍辱牛若食者則出醍又云衆生若能聽受諮啓大涅槃則見佛性當知草喩妙法牛喩頓機醍醐喩佛如是則牛若食草則出醍醐人若解法則成正覺故云牛食忍草相亦名見性成佛相也○犇此相者三乘求空相何以故三乘人聞說眞空有心趣未證入眞空表圓相下畫三牛也若將此相來問以漸次見性成佛相對之
045_0356_c_01L[○*牛], 이 모습은 드러난 대지에 있는 흰 소의 형상이니, 드러난 대지라 함은 불지佛地 또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이다. 흰 소라 함은 법신法身을 이루는 묘한 지혜이다. 그러므로 한 마리의 소가 원상 안에 들어 있음을 표시한 것이다.
묻는다.
“어째서 둥근 달 모습 옆에다 세 짐승을 붙였으며, 달 가운데다 우牛 자를 붙여서 대답하였는가?”
답한다.
“달 아래 세 짐승은 3승乘을 뜻하는 것이요, 달 복판의 한 마리의 소는 1승乘을 뜻한다. 그러므로 권승權乘을 들어 진실로 깨달아 들어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묻는다.
“먼저는 달 복판에 우牛 자를 쓴 것을 말하고서, ‘소가 인초忍草를 먹는 형상이다’ 했는데, 어째서 또 달 복판에 우 자를 쓴 것은 드러난 대지에 있는 흰 소라고 하는가? 두 곳에서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우 자인데, 어째서 설명하는 글이 같지 않은가?”
답한다.
“설명하는 글은 다르나 형상과 소는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면 어째서 두 곳에서 같은 형상과 같은 소를 나타내는가?”
“비록 형상과 소는 다르지 않으나 견성의 빠르고 더딘 것이 같지 않으므로 두 곳에 같은 형상과 같은 소를 나타낸 것이다.”
“만일 견성의 빠르고 더딘 것이 각각 다름을 논한다면 인초忍草를 먹는 소와, 드러난 대지 위의 소 중에 어느 것이 빠르고 어느 것이 더딘가?”
“인초를 먹는 소는 화엄회상華嚴會上에서 진실한 성품을 활짝 깨치는 도리를 밝히는 소이므로 빠르고, 드러난 대지 위의 흰 소는 법화회상法華會上에서 3승을 모아 1승으로 돌아가는 도리를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설명하는 글은 다르나 진리를 증득하는 것은 같다. 그러기에 같은 형상과 같은 소를 들어서 이치와 지혜가 다르지 않음을 밝힐 뿐, 그 근본이 전적으로 같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045_0356_b_17L▼(○*牛)此相者地白牛相謂露地者佛地亦名第一義空白牛者諮法身之妙慧也是故表一牛入圓相也何故月輪相下著三獸又月輪相中心著牛字對之耶月輪相下三獸是表三乘月輪相中心一牛是表一乘是故擧㩲乘來現實入證對向前已說月輪相中心著牛是牛食忍草何故又言月輪相中心著牛者露地白牛相兩處皆是同相同牛何故說文不同耶文雖別相及牛則不異若也不異何故兩處各現同相同牛耶雖相及牛則不異見性遲疾不同故兩處各現同相同牛若論見性遲疾各別者食忍草牛與露地白牛誰遲誰疾耶食忍草牛則明花嚴會中頓見實性之牛露地白牛則明法華會中會三歸一牛故故說文雖則不同證理不異故擧同相同牛理智不異不言來處全同也
牛○, 이 모습은 결과에 계합하게 원인을 닦는 형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초발심주初發心住에 비록 정각正覺을 이루기는 하나 중생들의 행에 걸림이 없고, 지혜는 부처의 경지와 같으나 행行이 이 지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행하던 자취를 따라 행한다” 한 것이 이 형상이다. 누군가가 이 형상으로 질문을 한다면, 다시 달의 형상 가운데 만卍 자를 넣은 형상으로써 대답하리라.
[○*卍], 이 모습은 인因도 과果도 모두가 원만한 형상이다.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위에서는 달 위에다 우牛 자를 붙이고, 이제는 달 복판에다 만卍 자를 붙여서 대답하는가?”
답한다.
“달 위에다 우 자를 붙인 것은 과果에 계합하게 원인을 닦는 형상이다. 달 가운데 만 자는 인과 과가 원만한 형상이니, 인因을 들어서 과果가 나타난다는 뜻으로 대답했느니라.”
○牛, 이 모습은 공空을 구하여 부지런히 행하는 형상이니, 문 앞의 초암草庵에서 보살이 공의 이치를 구하기 때문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3아승기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서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한다” 하였나니, 이렇게 구하는 마음을 쉬지 않기 때문에 이 모습으로 표현하였느니라. 누군가가 이 형상의 뜻을 묻는다면 달 둘레 복판에 왕王 자를 붙여서 대답하리라.
045_0356_c_05L牛○此相者契果修因相何以故初發心住雖成正覺而不㝵衆慧等佛地行不過位故表此相也古人云踐如來所行之迹則此相也若有人將此相來又作月輪相中心著卍字對之▼(○*卍)此相者圓果滿相也何故月輪相上頭著牛字來輪相中心著卍字對之月輪相上頭著牛者契果修因相日輪相中心著卍字者因圓果滿擧因來現果對之○牛此相者求空精行相謂門前草庵菩薩求空故經云三僧祇修菩薩難忍能忍難行能行求心不歇故表此相也若有人將此相來問月輪相中心著王字對之
[○*王], 이 모습은 실제實際를 차츰차츰 증득하는 형상이니, 무슨 까닭인가? 어떤 보살이 여러 겁劫 동안 수행하여 4마魔의 도적을 무찔러 비로소 무루無漏의 참 지혜를 얻고 불지佛地로 깨달아 들어가 다시는 남은 습성에 끄달리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성왕聖王이 뭇 도적들을 항복시켜서 나라를 안녕케 하여야 다시는 도적들의 원성에 시달림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표현하였다.
아래의 두 쌍과 네 형상은 허虛를 보내 실實을 가리키는 것이다.
牛[○*人], 이 모습은 생각과 견해를 일으키는 교敎를 버리는 형상이니,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승의 평등한 법에 의하여 잘 연구하고 잘 해석하면 실로 잘못 아는 일이 없겠지만, 자기의 이지理智를 알지 못하면 온전히 다른 사람의 말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이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 형상의 뜻을 묻는다면 머리 위의 우牛 자를 떨어 버리고 대답하리라.
[○*人], 이 모습은 근본을 알아 근원에 돌아가는 형상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정신을 돌이켜 공空의 굴窟에 머무르고/ 조복하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난 뒤에/ 드러난 땅에 초연히 앉으면/ 음(陰:五陰)의 정체를 알아 반열반般涅槃에 든다”고 한 것이 이 형상이다.
045_0356_c_16L▼(○*王)此相者漸證實際相何以故若有菩薩經劫修行壞四魔賊始得無漏眞智證入佛地更無餘習所恒似聖王降伏群賊國界安寧更無怨賊所怛故表此相也此下兩對四相遣虛指實牛▼(○*人)此相者想解遣教相若有人依佛所說一乘普法善能討尋善能解脫實不錯謬而不了自己理智全依他人所說故表此相也若有人將此相來問則袪上頭牛字對之▼(○*人)此相者識本還源相經云迴神住空窟降伏難調伏脫魔所縛超然露地坐識陰般涅槃者卽此相
045_0357_a_01L묻는다.
“무슨 까닭에 머리 위의 우牛 자만 없애 버리고 복판의 인人 자는 버리지 않는가?”
답한다.
“복판의 인 자는 이지理智를 표현하고, 머리 위의 우는 사람의 생각과 견해를 비유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비록 교법에 의하여 3장藏을 분석해 알아도 자기의 이지가 드러나지 않으면모두가 상해想解, 즉 생각과 견해인 것이다. 이 상해가 나지 않아야 이지가 나타나니, 그러므로 머리 위의 우 자를 떼어 버리고 복판의 인 자는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병病만을 제거할 뿐 그 법은 제거하지 않는다’ 한 것이다.”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범부가 교법에 의하여 법法 배우기를 허락하지 않는가?”
답한다.
“만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교법에 의존한들 어찌 식심識心을 쓰겠는가? 그러나 범부들이 교법에 의존하는 것은 이익이 없다.”
묻는다.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3장藏의 경전은 쓸모가 있는 것인가?”
답한다.
“교법에 의하여 깨달아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교법에 의하여 상해를 일으키는 일이 허망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비록 시방여래의 12부경의 청정하고 미묘한 진리를 항하의 모래같이 많이 기억한다 하여도 다만 희론戱論만 더할 뿐이다’ 하신 것이다. 법에 의하여 상해를 일으키는 것은 이익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045_0356_c_27L何故袪上頭牛字不袪圓相中心人字耶圓相中心人字者表理智上頭牛字者喩人想解若有人雖依教分析三藏教典而未顯自己理智者盡是想解想解不生則理智現前袪上頭牛字不袪圓相中心人字是故經云除其病而不除法何故不許凡人依教學法若是智者依教何用識心凡人依教無益諸佛所說三藏經典有所用不不是不許教悟入依教想解祇是虛妄是故佛告阿難復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淸淨妙理如恒河只益戲論當知依教想解無益
묻는다.
“어찌하여 경에서 말하기를 ‘부처님의 교법을 들은 이는 모두가 성과聖果를 이루리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터럭 하나만한 선善이라도 행하기만 하면 곧 부처의 경지에 머무른다’ 하였는가?”
답한다.
“상근上根의 사람을 기준으로 보면, 교법에 의하여 단박에 깨달아 이지가 곧 나타나서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믿고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만일 하근下根의 사람을 기준으로 본다면 상해를 깨닫지 못해서 이익이 없을 것이니, 이러한 하근의 사람이 교법에 의해 종자를 익혀 후세後世를 기다린다면 누가 이익이 없다고 하겠는가? 교법을 듣기만 하여도 성과를 이루고, 터럭 하나만한 선을 행하여도 부처의 경지에 머무르는데, 하물며 경전을 널리 배우고 또 법문 듣기를 청하는 일이겠는가?”
牛, 이 모습은 머리에 미혹되어 그림자에 흘리는 형상이니, 무슨 까닭인가?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처와 정토淨土를 알지 못하고, 다른 세계의 부처와 정토만을 믿어 일심으로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를 뵙고 법을 구하기 위해 선행을 부지런히 쌓고, 부처님의 명호와 정토의 명호를 부지런히 외운다. 그러므로 이 형상으로 그것을 표시한다. 보지寶志 공이 비웃어 말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흡사 나귀를 타고 나귀를 찾는 것 같다” 하였나니, 이것이 바로 그 형상이다.
어떤 사람이 이 형상을 뜻으로써 묻는다면 동그라미 옆의 우 자를 없애 버리라고 대답하리라.
045_0357_a_09L何故教云聞佛教者盡成聖果又云一毫之善發迹駐佛約上恨人依教便悟直現理智決定明了若約下根依教不悟想解無益此下根人依教勳種待後世者誰言無益聞佛教者盡成聖果一毫之善發迹駐佛何況廣學經論及講說者▼(○*人)牛此相者迷頭認影相何以故若有人不了自己佛及淨土信知他方佛淨土一心專求往生淨見佛聞法故勤修善行念佛名號及淨土名故表此相也志公笑云不解卽心卽佛眞似騎驢覓驢者卽此相也若有人將此相來問袪圓相下牛字對之
[○*人], 이 모습은 그림자를 물리치고, 머리를 바로 아는 형상이다.
묻는다.
“어찌하여 동그라미 밑의 우 자만을 버리고 복판의 인 자는 버리지 않는가?”
답한다.
“중생들이 참 지혜가 열리지 않고 ‘참 공[眞空]’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오로지 다른 세계의 정토와 부처만을 구하여 그 정토에 태어나서 부처를 뵙고 법을 들으려 한다. 만일 중생들이 광채를 돌이키고 지혜를 일으켜 참 공과 자기의 부처와 정토를 깨닫는다면 일시에 다 함께 나타나서 마음 밖의 정토와 부처를 구하지 않게 되리라. 그러므로 동그라미 속의 인 자는 제하지 않고 원상 옆의 우 자만을 버리는 것이다.”
묻는다.
“어떤 것이 자기의 부처이며, 자기의 정토인가?”
답한다.
“중생이 참 지혜를 일으켜 참 공을 깨달으면 참 지혜 그대로가 부처요, 참 공 그대로가 정토이다. 만일 이렇게 깨달아 알면 어디에서 다른 부처와 다른 정토를 구하랴.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들음[聞]을 가지고 부처님을 수지하려 하기보다 어찌하여 스스로가 듣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가?’ 하였느니라.”
이 밑으로 다시 네 짝과 다섯 모습[四對五相]이 있다.
045_0357_a_20L▼(○*人)此相者背影認頭相何故袪下頭牛字不袪圓相中心人字耶生未發眞智未達眞空故專求他方淨土及佛往生淨土見佛聞法衆生若迴光發智達得眞自己佛及淨土一時齊現不求心外淨土佛故不袪圓相中心人字袪下牛字也如何是自己佛及自己淨土衆生若發眞智達得眞卽眞智是佛空是淨土若能如是體會何處更求他方淨土及佛也是故經云將聞持佛佛何不自聞聞又此下四對五相
045_0357_b_01L○, 이 모습은 함函을 들어뚜껑을 찾는 형상이라 하고, 또는 반달이 둥글기를 기다리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반달을 더 그려 대답하리라. 이는 묻는 이가 함을 들어 뚜껑을 찾기에 답하는 이가 뚜껑으로 함에 씌운다 한 것이다. 이는 함과 뚜껑이 서로 맞았으므로 보름달이 둥실 나타난 것이다. 둥근 모습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다.
243)○, 이 모습은 옥玉을 가지고 계합을 찾는 형상이니,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달 복판에 아무것이나 붙여서 대답하리라. 그 이유는 묻는 자가 옥을 가지고 계합을 찾았으므로 대답하는 이는 구슬을 알아보고 얼른 손을 놓기 때문이다.
[○*ㄙ], 이 모습은 갈고리가 끈에 들어간 형상이니,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아무 쪽에나 인 자를 붙여서 대답하리라. 그 이유는, 묻는 이가 갈고리가 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보배로운 그릇을 이루었다고 대답하느니라.
[○*佛], 이 모습은 이미 보배로운 그릇을 이룬 형상이다. 어떤 사람이 이 모습의 뜻을 묻는다면 또 둥근 달 복판에다 토土 자를 붙여서 대답하리라.
045_0357_b_01L此相者擧函索蓋相亦名半月待圓相若有人將此相來問更添半月對之此則問者擧函索蓋答者將蓋著函函蓋相稱故已現圓月相也圓相則表諸佛體也此相者把玉覓契相若有人將此相來問圓月中心著某對之此則問者把玉覓契故答者識珠便下手▼(○*ㄙ)此相者釣入索續相有人將此相來問某字邊添著人字對之此則問者釣入索續故答續成寶器也▼(○*佛)此相者成寶器相若有人將此相來問又作圓月相中心著土字對之
[○*土], 이 모습은 현현玄玄한 인印의 뜻에 계합하는 형상이니, 종전의 여러 가지로 나타난 형상을 멀리 뛰어넘어 다시는 교의敎意에 속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경지를 눈앞에 보여 주어도 전혀 보지 못하나니, 그러므로 3조祖가 말하기를 “털끝만치 어긋남이 있으면 하늘과 땅 차이로 어긋난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현현하게 아는 이가 없는 것도 아니니, 누가 이런 형상을 알겠는가? 만일 그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가만히 알아서 마치 자기子期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아는 것 같고, 제바提婆가 용수龍樹의 모습을 알아차리는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마주 보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마치 파인巴人이 백설곡白雪曲을 듣는 것 같고, 추자(鶖子:舍利弗)가 정명淨名의 법회에 든 것 같으리라. 가령 후학後學들 중에 근기가 영리한 자라면 이로 인해 활짝 깨닫기를, 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쪼고 쪼이는 것이 동시인 듯하겠지만, 성정이 둔한 이는 배워도 깨닫기 어려운 것이 마치 소경이 물체를 보는 것 같아서 더욱 알기 어려우니라.
045_0357_b_11L▼(○*土)此相者玄印旨相迥然超前現衆相更不屬教意所攝若有人似个對面付果然不見故三祖云毫釐有錯天地玄隔然無玄會之誰能識此相也若是其人見而諳會如子期聽百牙之琴提婆見龍樹之相不是其對面不識似巴人聞白雪之歌鶖子入淨名之會假使後學根機玄利將是則頓曉如鷄把啐啄同時相性遲鈍者學而難曉似盲人相色而轉錯耳
045_0357_c_01L선사가 어느 때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을 말하였으니, 세 번이란 다음과 같다.
“세 번의 성불이란 무슨 뜻인가? 첫째는 증리성불證理成佛이요, 둘째는 행만성불行滿成佛이요, 셋째는 시현성불示顯成佛이다.”
증리성불證理成佛이라 함은, 선지식의 말 끝에서 한 생각 돌이켜 자기의 마음 바탕에 본래의 한 물건도 없음을 활짝 깨닫는 것이니, 이것이 성불이다. 만행萬行을 차례로 닦아서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리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정각正覺을 이룬다” 하였고, 또 옛사람은 말하기를 “불도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돌이키면 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증리성불은, 안에서 체성體性을 말한다면 한 물건도 없지만 3신身을 통틀어 말한다면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없지 않다. 비록 세 사람이 있으나 지금 당장에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었으므로 부처가 되었다 하는데, 그 공은 문수에게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수는 부처님들의 어머니이다” 하니, 이 뜻은 부처님들이 문수에 의해서 생겼기 때문이다.
문수라 함은 실지實智인데, 모든 부처님이 그 실지에 의하여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에 문수를 부처님들의 어머니라 한다.
045_0357_b_19L師有時說三遍成佛篇於中有三意云何爲三一者證理成佛二者行滿成佛三者示顯成佛言證理成佛者知識言下迴光返照自己心原本無一物便是成佛不從萬行漸漸而證故云證理成佛是故經云初發心時便成正覺又古人云佛道不遠迴心卽是卽此義也此證理成佛中若說體性都無一物通論三身不無一佛二菩薩雖有三人而今見性成佛故得成佛在文殊故古人云文殊是諸佛母所謂諸佛從文殊生故言文殊者卽實智也一切諸佛因其實智而證菩提是故文殊是諸佛母耳
행만성불行滿成佛이라 함은, 비록 진리의 근원을 끝까지 규명하였지만, 다시 보현普賢의 행원行願을 따라 보살의 도를 두루 닦아 수행이 골고루 갖추어지고 지혜와 자비가 원만해지기 때문에 행만성불이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행하여 이른 곳은 곧 본래 온 곳이다” 하였으니, 그러기에 행할 바가 이미 원만하여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감을 알아야 한다. 본래의 곳이라 함은 곧 이치[理]이다.
이 행만성불의 증득한 이치가 앞의 증리성불의 이치와 다르지 않나니, 비록 이치는 다르지 않으나 행의 원인으로 결과에 이르므로 행만성불이라 한다. 이 행만성불 안에서 과덕果德을 말한다면, 다만 보현행普賢行으로써 불도를 이루는 것뿐이다.
3신身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한 부처와 두 보살이 있나니, 비록 세 사람이 있으나 지금에는 행이 원만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만을 취했으므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공이 보현에게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이다” 하였나니, 이른바 부처님들이 보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이라 하는 것은 곧 만행萬行이니, 모든 부처님들이 그 만행으로 인하여 보리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현은 부처님들의 아버지라 하는 것이다.
045_0357_c_02L言行滿成佛者雖已窮其眞理而順普賢行願㦄位廣修菩薩之道所行周備悲智圓滿故云行滿成佛也故古人云行到處卽是從來處故明知所行已周還至本處本處者卽理也行滿成佛所證之理不異於前證理成佛之理理雖不異行因至果故云行滿成佛也此行滿成佛中若擧果德但以普賢行成佛道論三身亦有一佛二菩薩雖有三人而今別取行滿成故得成佛功在普賢故古人云普賢是諸佛父也所謂諸佛從普賢生故言普賢者卽萬行一切諸佛因其萬行而證菩提是故普賢是諸佛父耳
한 부처님에 두 보살이라 함은, 이치의 비로자나毘盧遮那와 지혜의 문수文殊와 행行의 보현普賢이니, 이치와 지혜와 행, 세 사람은 한 몸[三人同體]이기 때문에 하나도 버릴 수 없다.
또 한 부처님과 두 보살은 서로가 주인과 손이 되니, 본체의 위없음으로는 비로자나가 주인이요, 성품을 보는 지혜의 공덕으로는 문수가 주인이요, 만행의 복력福力으로는 보현이 주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통현李通玄이 말하기를 “모든 부처님들 모두가 문수ㆍ보현 두 보살을 통해 부처의 보리를 이루었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문수와 보현은 부처님들의 큰아들과 작은아들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세 사람이 서로 주인과 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045_0357_c_14L言一佛二菩薩者遮那是理文殊是智普賢是此理三人同體故一不可捨也一佛二菩薩互爲主伴以本體無上遮那爲主以見性智功文殊爲主以萬行福力普賢爲主是故李玄通云一切諸佛皆以文殊普賢二大士成佛菩提也又云文殊普賢爲諸佛作少男長子故知三人互爲主伴耳
시현성불示顯成佛이라 함은, 앞에서와 같이 이치를 증득하여 행이 원만하고, 스스로의 행으로 부처를 이루는 일이 이미 끝났으므로 이제 중생을 위하여 부처 이루는 모습을 시현하여 여덟 가지 모습[八相]으로 도를 이루는 것이다.
여덟 가지 모습이라 함은,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오고, 태에 들고, 태에 머무르고, 태에서 나오고, 출가하고, 성도하고, 법륜을 굴리고, 열반에 드는 것 등 여덟 가지 모습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현성불이라 하나니, 이 여덟 가지 모습의 성불은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이고, 진신眞身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여래께서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셨으며 열반도 없다” 하였으니, 본원本願의 힘 때문에 자재自在한 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경은 보신과 화신 가운데서 참 부처를 말한 것이다.
045_0357_c_21L言示顯成佛者如前證理行滿自行成佛已畢今爲衆生示顯成佛八相成道矣言八相者兜率天退入胎住胎出胎出家成道轉法輪涅槃等八相成佛故云示顯成佛當知八相成是報化非眞是故經云如來不出世亦無有涅槃以本願力故示顯自在法此經報化佛中指眞佛也
045_0358_a_01L또 경에서 말하기를 “내가 성불한 뒤로 이미 한량없는 겁이 지났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석가여래께서는 이미 한량없는 겁 전에 행이 원만한 대각을 이루셨으나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비로소 정각正覺을 이루는 모습을 나타내어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이 석가부처님께서는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 가운데서 넷째 부처님이시니, 과거 장엄겁莊嚴劫의 천 부처님과 현재 현겁賢劫의 천 부처님과 미래 성수겁星宿劫의 천 부처님, 이와 같이 세 겁 동안에 여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셔서 중생을 교화하시고 차례차례 수기授記 주시기를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게 하셨다. 교전敎典을 보고 옛사람의 자취를 두루 살피어 한 사람이 성불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세 번 성불하는 도리를 알 것이다.
바라건대 부처의 지위를 연마하려는 이는 대략 제전(蹄筌:문자, 방편)을 살핀 뒤에 다시 먼저의 부처와 나중의 부처가 다 같은 길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길을 가는데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 같은 길이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에 기록해 두노라.
선사는 언젠가 3편篇의 법을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이요, 둘째는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이요, 셋째는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이다.
045_0357_c_28L又經云吾從成佛已來經無量阿僧祇故知釋迦如來無量劫前已成行滿大覺爲衆生故示顯始成正覺今此釋迦是賢劫千佛之中第四佛也過去莊嚴劫中一千佛現在賢劫中一千佛未來星宿劫中一千佛如是三劫中一切諸佛出現於世攝化群生相傳授記分毫不錯矣歡看教典推尋古迹通觀一人成佛方樣應知三遍成佛耳伏請欲磨佛位者看筌蹄卻自思惟前佛後佛皆同此路如人行新舊同轍故記而之也師有時說三篇於中有三意第一『頓證實際篇』第二『迴漸證實際篇』第三『漸證實際篇』

1. 돈증실제편頓證實際篇
넓은 들판에 해통該通이라는 선인仙人이 있었는데, 대중에게 말했다.
“만일 어떤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하여 삼계를 헤매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지혜로운 이가 참 교법을 연설하는 것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단박에 깨달아 문득 정각을 이루었다면, 차례를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돈증실제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설산雪山에 인욕초忍辱草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먹으면 바로 제호醍醐를 낸다’ 한 것이 이 뜻이니라.”
045_0358_a_11L廣野中有一仙人名曰該通爲大衆說若有衆無始已來不悟性地輪迴三界隨緣受報遇智者演說眞教頓悟性地便成正覺不依漸故名爲頓證實際是故經云雪山有草名曰忍辱牛若食者卽出醍醐是其意也
이때 대중 가운데 지통智通이라는 은사隱士가 있다가 선인에게 말했다.
“뭇 중생에게는 원래 성품의 바탕이 있음을 진실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일체지자一切智者께서 참 교법을 말씀하신 뜻은 한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참 교법을 다 같이 듣고서도 깨닫거나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인이 은사에게 말했다.
“중생이 비록 본래부터의 청정하고 뚜렷이 밝은 본체를 가지고 있으나 근본을 등지고 끝을 쫓으면서 여러 겁과 여러 시간을 보내면서 별별 몸을 받아 근기와 성품이 같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참 교법을 같이 들어도 깨닫고 깨닫지 못함이 각각 다르다. 이것은 지혜로운 이가 참 교법을 말씀하여 생긴 재앙은 아니니라.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마치 맑고 밝은 해를 소경은 보지 못하는 것같이, 지혜의 마음이 없는 이는 끝내 보지 못한다’ 한 것이니라.
은사가 다시 선인에게 말했다.
“고명하신 지도를 자세히 살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을 생각해 보건대, 지혜로운 이가 설법하는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함이 아니니,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어리석고 지혜로움에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고 지혜로움은 본래 각각 다른데, 설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045_0358_a_16L衆中有一隱士名曰智通啓仙人曰信知群品自有性地又一切智者演說眞教不爲一人何以故同聞眞教悟與不悟各各不同仙人告隱士言衆生雖有自性淸淨圓明之體背本逐末多劫多時受別異身根性利鈍不等故同聞眞教悟與不悟各各不同不是智者說眞教禍故經云猶如明淨日瞽者莫能見無有智慧心終不能見士啓仙人曰諦觀高指旦尋來言智者說法爲一人悟與不悟唯在愚智然則愚智本來各各不同說法有何所用
045_0358_b_01L선인이 다시 은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주의하여 들어라. 내 그대에게 말해 주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본래 깨달았던 것이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도 영원히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갑자기 참됨을 깨달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 부르니, 이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참된 교법에 의지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이며, 참된 교법에 의지하지 않고서야 어찌 영리함과 둔함을 가리리오.
그러므로 어떤 중생이 둔하다면 거듭거듭 참된 교법을 들어도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만일 영리한 중생이라면 참된 교법을 잠깐 듣더라도 단박에 성품의 바탕을 깨닫게 되나니, 이것을 지혜로운 사람이라 한다. 어디에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갈림이 있으랴. 그러므로 범부와 성인은 차이가 없고, 오직 근기에 영리함과 둔함이 있을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한 사람만을 위해서 설법하지 않는 것은, 마치 어미 닭이 알들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많은 알이 깨어나서 껍질을 벗어나는데 깨어나지 않는 것도 있는 것과 같다. 어찌 어미 닭이 많은 알을 사랑하되, 깨어나지 않는 알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깨어나고 깨어나지 않는 것은, 다만 알의 성품에 있고, 어미 닭이 알을 품어서 생긴 재앙이 아닌 것이다.
온갖 지혜를 가진 이도 그와 같아서 대중을 위하여 참 교법을 연설해 주면, 근기가 영리한 이는 단번에 깨닫지만 근기가 둔한 이는 깨닫지 못한다. 지혜를 가진 이는 근기가 영리한 이만을 사랑하고 근기가 둔한 이는 사랑하지 않나니, 이는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은 오직 근기에 있을 뿐 지혜로운 이가 설교해서 생긴 재앙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기를 ‘들은 법은 남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방편에 의해야 되는 줄을 알 수 있으리라. 지혜로운 이가 항상 법을 설하는데,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학인에게 있지, 지혜로운 이의 설법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045_0358_a_26L仙人告隱士言汝今諦吾爲汝說智人不是本悟愚人不是長迷人忽悟眞說智人不是外來若也不用眞教爭成智人若也不用眞教何處辯得利鈍是故衆生若是根鈍者再聞眞教不曉性地衆生若是利根者忽聞眞教頓曉性地便是智人也處愚智有隔是故當知凡聖不隔根有利鈍者說法亦不爲一人猶如母鷄抱卵衆卵皆發贊窠不發可卽母鷄唯不愛衆卵愛贊窠是則發與不發唯在卵性不是母鷄抱卵之禍一切智者亦復如是廣爲大衆演說眞教根利者頓根鈍者不曉可則智者唯愛利根不愛鈍根是卽曉與不曉唯在根性不是智者說教之禍是故經云所有聞法不由他悟然卽知假方便智者常說妙法悟與不悟此在學人不在智者
은사가 물었다.
“영리한 근기는 참 교법을 들으면 당장에 지혜가 생겨 성품의 바닥을 활짝 깨닫는다는데,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는 지혜로 문수를 비추는 경지이니라.”
“문수의 지혜로 비추는 경지는 어떠합니까?”
“문수의 지혜로 비춤은 성품에 있느니라.”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느니라.”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그 뜻이 무엇입니까?”
“지혜로 비춤은 증득하는 사람이요, 성품의 바탕은 증득할 법이니라. 그러므로 능能과 소所의 차이는 없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이 지각 없는 반야로 형상 없는 진제眞諦를 증득한다’ 하였으니, 지혜와 성품은 같지 않느니라. 또 증득하는 지혜로써 지각없 는 경지를 비추되, 증득할 성품의 바탕은 본체가 없으므로 능과 소가 있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지혜가 진여의 경지를 다하면 능ㆍ소가 모두 없어진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지혜로 비춤과 성품의 바탕은 다른 비춤이 없느니라.”
지통 은사가 선인의 말을 듣고, 고명한 지도를 받들자, 의심의 그물이 활짝 트였다.
045_0358_b_12L隱士問曰衆生若是利根忽聞眞教言下慧發頓悟性地此是何人仙人答曰此是智照文殊隱士問曰文殊智照在何處仙人答曰文殊智照是在性之隱士問曰照智與性地同異若何仙人答曰智照與性地不同不異隱士問曰照與性地不同不異其義如何仙人答曰智照是能證之人性地是所證之法故不無能所故古人云以此無知之般若證彼無相之眞諦故智與性不同又能證智照無知所證性地無不有能所是故古人云智窮眞際能所兩亡故智照與性地不異照隱士智通聞仙人說契高指頓決疑網也
045_0358_c_01L그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이미 지통智通에게 견성見性의 법을 말했다. 만약 중행衆行을 말한다면 이렇지는 않느니라.”
이때 이 대중 가운데 행통行通이라는 유자遊子가 있었는데, 선인에게 물었다.
“견성은 그렇다 치고, 중행은 어떠합니까?”
선인이 유자에게 말했다.
“어떤 중생이 갑자기 참 교법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활짝 본 뒤에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 지혜를 닦기 때문에 중행이라 부르느니라.”
유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내가 일찍이 선인의 설법을 듣건대,갑자기 참 교법을 듣고 성품의 바탕을 활짝 깨달으면 지혜로 문수를 비춘다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선인의 말씀을 듣건대, 성품의 바탕을 활짝 깨닫고 그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자리와 이타의 자비 지혜를 행하므로 중행이라 한다 하시니, 이러한 행을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러한 행을 행하는 사람은 보현의 지위에 해당하느니라.”
유자가 다시 선인에게 물었다.
“보현 대사大士는 어떤 지위에 속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원인인 5위位에 의지하여 결과의 지위에로 나아간다. 비록 지위에 이르렀으나 결코 이 지위에 머물러 있지 않느니라. 또한 중행衆行을 행할 때에 세 등급의 보현을 이루느니라.”
045_0358_b_24L于時該通仙人爲大衆說先爲智通已說見性若論衆行不必如此此衆中有遊子名曰行通啓仙人曰見性如此衆行若何仙人告遊子言若有衆生忽聞眞教頓見性地不住此處隨緣行自利利他悲智故名爲衆行遊子啓仙人曰我等曾聞仙人演說法聞眞教頓悟性地名爲智照文殊今承仙人說頓悟性地不住此處隨緣行自利利他悲智名爲衆行行此行者此是何人仙人答曰行此行者寄位普賢遊子問曰普賢大士寄何等位仙人答言寄因五位不至果位雖寄此位不住此位衆行行時三等普賢
유자가 다시 물었다.
“원인의 지위로부터 결과의 지위에 이르기까지에서 어떤 것을 세 등급의 보현이라 합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첫째는 출전보현出纏普賢이요, 둘째는 입전보현入纏普賢이요, 셋째는 과후보현果後普賢이니라.”
유자가 물었다.
“이 세 등급의 보현에서 수승함과 열등함의 이치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이 세 가지 보현의 수승함과 열등함의 등급은 그 이치가 같지 않으니, 이른바 출전보현은 성품을 본 뒤에 중행을 행할 때, 눈앞의 만 가지 경계를 대하면 언뜻 일어나는 마음이 없지 않으나 이미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으므로 환화幻化의 경계에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으나 끊는 지혜가 있다’ 하였느니라.”
유자가 물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증득하는 지혜를 일으키면 끊어야 할 장애가 완전히 없다’ 한 이치가 무엇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만일 증득하는 지혜를 일으키면 끊어야 할 장애가 완전히 없다 한 것은 문수가 미혹을 끊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문수가 성품을 상대할 때에 본체 안에는 다른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끊어야 할 장애가 없지 않으나 끊는 지혜가 있다’고 말한 것은 보현이 미혹을 끊는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보현이 여러 지위를 섭렵할 때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일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길은 같지 않다. 이 두 사람의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길을 알지 못하면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이치를 놓고 다투게 된다.”
045_0358_c_07L遊子問曰寄位於因乃至果位何等名爲三等普賢仙人答曰者出纏普賢二者入纏普賢三者果後普賢子問曰此三普賢勝劣等級其義如何仙人答此三普賢勝劣等級其義不同謂所言出纏普賢者見性之後行於衆行對前萬境不無瞥起之心已達心源不滯幻化之境故古人云不無所斷之鄣還有能斷之智遊子問曰古人云發能證之智全無所斷之障其義如何仙人答若發能證之智全無所斷之鄣此是文殊斷惑何以故文殊當性之時體中不有異相今言不無所斷之障還有能斷之智此是普賢斷惑何以故普賢歷位之時不無斷惑成德故是故兩人斷惑成德不同不會兩人斷惑成德相諍斷惑成德之義
045_0359_a_01L유자가 다시 물었다.
“문수의 미혹을 끊는 일은 이미 그런 줄 알았지만, 보현의 미혹 끊는 일을 말한다면 그것은 현행現行을 끊는 것입니까, 습기習氣를 끊는 것입니까?”
“보현의 지위로 말하면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겠지만 보현이 지위에 의탁하여 미혹을 끊는 것은 습기번뇌에 해당하느니라.”
“현행과 습기가 어떠한 것이기에 보현은 현행의 번뇌가 전혀 없고 오직 습기의 장애만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범부는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되 앞뒤의 경계를 알지 못해서 업을 짓나니, 이것이 현행이다. 지혜로운 이는 경계를 대하여 마음을 일으키되 경계가 허망한 줄을 알아서 앞 경계에 걸리지 않나니, 이것은 습기이기 때문이다.
보현은 성품을 본 뒤에 만행을 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현행의 미혹은 전혀 없고, 습기의 장애만 있다. 만일에 끊을 습기가 없다면 참기 어려운 일을 참을 필요가 어디에 있으며,자비와 지혜로써 성불하는 법이 없다면 행하기 어려운 행을 행할 필요가 어디에 있으랴.
비록 자비와 지혜, 두 문을 행하나 짓는 바는 본체에 의해서 행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짓는 바 모두 성품에 의지하여 공덕의 숲을 닦아 이룬다. 마침내 적멸에 나아갈 뜻은 없고 오직 중생을 제도할 생각뿐이다. 자비를 행하니 자비가 광대해지고 지혜를 쓰니 지혜가 더욱 깊어진다. 남을 이롭게 하며 자기를 이롭게 하는 일을 작은 성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으니라.
045_0358_c_21L遊子問曰已知文殊斷惑如此若論普賢斷惑斷現行耶斷習氣耶仙人答言若言普賢位中全無現行煩惱普賢寄位斷惑此是習氣煩惱遊子問現行與習氣如何普賢全無現行之惑唯有習氣之障仙人答言凡夫對境起心不識前境後境作業卽是現行智者對境起心知境虛幻不滯前境習氣故是普賢是見性之後行行之人故全無現行之惑唯有習氣之障若無習氣可斷何用難忍能忍若無悲智成佛何用難行能行雖行悲智二門所作依體成行是故古人云所作皆依性修成功德林終無取寂意唯有濟群心行悲悲廣大智智能深利他兼自利少聖詎能任
이것으로써 출전보현은 자비와 지혜를 두루 행하나 본체에 의해 수행하여 이루는 것임을 알 것이다. 또 자세히 보현의 중행을 말하자면 항포行布와 원융圓融으로 가지런히 나타나고,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일을 모두 갖추었고, 자기를 이롭게 하고[自利] 남을 이롭게 하는 일[利他]을 함께 닦으며 지문智門과 비문悲門이 나란히 이루어진 것이다. 행을 말할 적에 큰 작용이 일어나니, 일어났다 하면 반드시 온전히 진여요, 참된 행상을 말할 적에는 지위에 의해서 미혹은 끊는 법이 없지 않으니, 지위가 높아지면 습기는 차츰 옅어지고, 행이 넓으면 자비와 지혜는 더욱 깊어지니, 10주住로부터 10지地에 이르면 출전보리가 이미 원만해진 것이다.
입전보현入纏普賢이라 함은, 일체 중생에 대하여 동류대비同類大悲를 가진 이는 앞의 출전보현出纏普賢의 지위에서 자비와 지혜를 널리 행하고, 자리와 이타의 행을 행하는 까닭에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공이 없지 않다. 비록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는 공일지라도 출전의 법을 이미 만족한 뒤에는 출전 후에 근심 없는 곳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4생生 6취趣에서 대비를 널리 행하고 같이 끊으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입전보현이라 한다.
이렇게 입전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는 덕과 앞에서 출전出纏하여 행을 이루는 공, 이 두 마음의 공이 가지런히 행동하기 때문에 등각等覺이라 하고, 자비와 지혜가 원만하기 때문에 등각이라 하고, 출전과 입전에 집착하지 않고 대지와 대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묘각妙覺이라 하느니라. 비록 자비와 지혜와 입전과 출전에 집착하지 않으나 과덕果德을 말하면 취하지 않는 행이 없고 거두지 않는 지위가 없느니라.
045_0359_a_05L然卽知出纏普賢衆行悲智而依體修行又細說普賢衆卽行布圓融齊現斷惑成德俱有自利利他雙修智門悲門竝成言行也繁興大用起必全言行相也不無依位斷惑位高則習氣漸薄行廣則悲智增深從十住乃至十地出纏菩提已滿也所言入纏普賢者一切群品中同類大悲是前出纏普賢位中廣行悲智而自利利他行故不無斷惑成德之功雖斷惑成德之功纏已滿而不信出纏無患之處故於四生六趣廣行大悲同斷化物之名入纏普賢以此入纏化物之德與前出纏成行之功二心功齊平等故名爲等覺悲智圓滿故名爲等覺不取出纏入纏不取大智大悲故名爲妙覺雖不取悲智出纏入纏若論果德無行不取無位不收也
045_0359_b_01L과후보현果後普賢이라 함은 변행삼매遍行三昧를 이르는 말이니, 이른바 묘각의 지위에서 출전의 대비와 대지를 취하지 않으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도리어 출전과 입전의 대지와 대비를 향하여 역逆ㆍ순順ㆍ종縱ㆍ횡橫으로 모든 지위의 중생들 가운데서 같은 마음과 같은 종류가 된다. 또 어느 일정한 지위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마음대로 하여 널리 대비를 지으며, 모든 종류 가운데서 어느 지위도 결코 받지 않고, 짓는 것과 받는 것에서 짓지 않고 받지 않는 까닭에 과후보현이라 한다. 만일 이 사람의 행하는 바를 일정하게 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의 행하는 곳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이른바 세 등급의 보현이라 함은,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 행의 수승함과 열등함에 의하여 대강 세 등급의 보현으로 나눈 것이다.
이른바 한 사람이라 함은, 처음에 실제를 활짝 증득하는 것은 문수요, 지금 인연을 따라 행을 행할 때를 보현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 한다. 이는 안으로 증득함과 겉으로 교화함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만일 안으로 증득함과 겉으로 교화함이 같지 않다면문수와 보현은 두 사람이요, 만일 증득하는 이와 증득되는 대상, 그리고 여러 행이 같지 않음을 통틀어 취한다면 세 사람이 된다.
이는 대교(大敎:화엄)의 뜻이기도 하다. 『화엄경』 제목에서 대방광大方廣이라 함은 말씀하신 법이니 곧 비로자나요, 불佛이라 함은 증득하는 사람이니 문수요, 화엄華嚴이라 함은 인연을 따르는 행이니 곧 보현이다. 그리하여 한 부처님에 세 보살이니, 곧 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만일 보현의 행을 행하려는 이는 먼저 진리를 끝까지 궁구한 뒤에 인연을 따르는 행을 행하여서 지금의 행과 옛 어른의 자취가 부합되게 하여야 하나니, 마치 옛말에 문을 닫고는 수레를 만들고, 문을 열고는 수레바퀴를 꿰어 맞춘다는 것과 같다.
045_0359_a_19L言果後普賢者遍行三昧是也妙覺位中不取出纏大智大悲而不住此還向出纏入纏大智大悲逆順蹤撗於諸位中同類同心亦不定守一位隨緣任運廣作大悲於諸類中何位定不受於能作能受不作不受故名爲果後普賢若定取此人所行者未會此人行處也所言三等普賢者不是三人一人行行依行勝劣大三等普賢也所言一人者初頓證實際之時卽文殊今隨緣行行之時卽普賢故名爲一人此是通取內證外化也若以內證外化不同故文殊普賢兩人若以通取能證所證及衆行不同卽爲三人也此大教意說也謂大經題云大方廣者所說之法故卽遮那是也佛者能證之人也故卽文殊是也花嚴者隨緣之行故普賢是也此旦一佛二菩薩卽爲三人也若欲修行普賢行者先窮眞理隨緣行行卽今行與古迹相應如似閉門造車出門合轍耳

2. 회점증실제편廻漸證實際篇
이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설법했다.
“어떤 중생이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삼계三界를 윤회하다가 3승乘의 점교漸敎를 듣고 3승의 법을 깨달았다 하자. 삼계의 환란 때문에 3승의 사람이 있게 된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참 교법[眞敎]을 듣고는 돌이켜 묘한 지혜를 이루어 실제實際의 경지를 끝까지 증득하기 때문에 점증실제漸證實際라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문 앞의 세 가지 수레는 방편의 법이니 드러난 땅의 흰 소라야 비로소 진실한 증득임을 밝힌다’ 하였으니, 바로 이 뜻이니라.”
지통智通 은사가 선인에게 물었다.
“이 회점증실제廻漸證實際를 얻은 이와 앞에서의 돈증실제頓證實際를 얻은 사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비록 앞에서 3승에 떨어졌으나 3승에 있지 않기 때문에 온 곳은 까마득히 다르나, 이제는 점교를 돌이켜 실제를 증득했으므로 저 돈증실제를 얻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1백 가닥의 개울이 바다에 돌아가서는 1백 가닥의 개울이란 이름이 없어지고, 3승이 1승으로 돌아가면 3승이란 이름은 없어진다’ 했으니, 이것으로써 이 점증실제의 사람이 저 돈증실제의 사람과 다르지 않음을 알 것이다. 회점과 돈증이 같은가 다른가를 걱정하지 말고, 인연을 따르는 마음을 스스로 돌려 실제의 이치를 돌이켜 비추어라.”
지통 은사가 참된 말을 깨닫고는 잠자코 아무 말도 없었다.
045_0359_b_08L『迴漸證實際篇』第二時該通仙人爲大衆說若有衆生無始已來不悟性地輪迴三界三乘漸教悟三乘法三界患故有三乘人此忽聞眞教迴成妙惠窮證實際故名爲迴漸證實際也是故古人云門前三駕車是㩲乘露地白牛方明實證卽其意也隱士智通啓仙人曰迴漸證實際之者與彼頓證實際之人同異如仙人答曰雖先已落三乘不在三乘故來處玄殊而今迴漸證實際故與彼頓證實際者不是故古人云百川歸大海無百川名三乘歸一乘無三乘名也然卽知此迴漸證實際之人與彼頓證之人不異也莫愁迴漸與頓證同異自迴隨緣之心還照實際之理也隱士智通奉領眞說寂然無言也
045_0359_c_01L이때 행통行通 유자遊子가 선인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선인이 말씀하신 바를 듣건대 어떤 중생이 성품의 경지를 활짝 깨달은 뒤,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인연 따라 여러 가지 행을 행하면 중행이라 하는데, 이러한 행을 행하는 이를 보현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회점증실제를 얻은 사람도 여러 가지 행을 행합니까, 여러 가지 행을 행하지 않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여러 가지 행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회점증실제를 얻는다는 것은 곧 드러난 땅에 있는 흰 소인데, 흰 소는 오락가락하여 드러난 땅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행을 행하는 이가 없지 않다. 이른바 드러난 땅의 흰 소라고 하는 그 드러난 땅은 증득해야 할 법이니 비로자나불이요, 흰 소는 증득하는 사람이니문수보살이요, 흰 소가 움직여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보현보살이다. 보현이 행하는 바가 곧 여러 가지 행이다. 두 편의 대의가 대략 이러하니, 그대들 스스로가 같고 다름을 잘 관찰하라.”
045_0359_b_22L于時遊子行通啓仙人曰我等曾聞仙人演說若有衆生頓證悟性地住此處隨緣行行名爲衆行行此行者名爲普今此迴漸證實之後有人行衆行耶無人行衆行耶仙人答曰不無行衆行者所以者何漸證實者卽露地白牛故白牛運轉不住露地不無行衆行人所言露地白牛者露地是所證之法故卽遮那是也白牛是能證之人故是文殊是也白牛運轉不住此處故卽普賢是普賢所行卽是衆行也二篇大意如此汝自諦同異自看耳

3. 점증실제편漸證實際篇
이때에 해통該通 선인이 대중에게 말했다.
“만약 어떤 끝없는 옛적부터 성품의 바탕을 깨닫지 못해 삼계를 윤회하면서 인연 따라 과보를 받다가 갑자기 점교를 듣고 믿음과 이해가 점차 생기게 되어 여섯 지위에 의지해 수행하면서 3아승기겁 동안 참기 어려운 일을 참고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여 미혹을 끊고 덕을 이루어 비로소 무루無漏의 참 지혜를 얻어 법신이 드러났다면 그것을 이름하여 ‘믿음의 싹이 일념에 생기게 되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다 아신다. 이것을 인해 닦으면 오는 세상에 과위를 증득한다 한다. 3대아승기겁에 6바라밀을 오랫동안 닦아서 무루의 종자를 익히어 이루면 비로소 부사의라 부른다’ 한 뜻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지통智通 은사가 선인에게 물었다.
“지금의 이 점증실제를 얻은 이와 아까의 돈오실제를 얻은 사람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릅니까?”
선인이 은사에게 말했다.
“비록 점漸과 돈頓이 같지 않으나 마침내는 하나로 돌아간다. 어째서 그런가? 냇물이 바다로 돌아가면 완전히 같은 한 맛이 되듯이 점해漸解가 진원眞源으로 돌아감이 어찌 둘이겠는가? 그러므로 점과 돈은 다르나 진원으로 돌아감에는 다르지[無二] 않은 것이다.”
지통은 선인의 가르침에 다른 견해를 내지 않고 물러나와 침묵했다.
045_0359_c_04L『漸證實際篇』第三時該通仙人爲大衆說若有衆生無始已來不悟性地迴三界隨緣受報忽聞漸教信解漸發寄因六經三祇劫難忍能忍難行能行斷惑成德得無漏眞智露現法身故名爲漸證實際也故古人云信根生一念諸佛盡應知修因於此證果未來時三大僧祇劫六度久安施薰成無漏種方號不思議是其意也時隱士智通啓仙人曰今此漸證實際之人頓悟實際之人異如何仙人告隱士言雖漸頓不同而終歸一所以者何小川歸海全同一味漸解歸源有兩般也是故漸頓雖異歸源無二耳隱士智奉仙人教不生異解退身默然也
그때 유행遊行하는 행자 행통行通이 선인에게 말했다.
“전편에서는 선인께서 돈증실제 이후에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다고 설했다고 들었습니다. 이 편에서는 점증실제를 밝히셨는데, 점증실제 이후에도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선인이 답했다.
“비록 행이 없지 않으나 그 행은 전편에서 밝힌 것과는 같지 않다. 돈증실제頓證實際 이후에 자리[位]에 따라 수행을 할 때, 구속에 들고 남[出纏入纏]과 과위에 오른 뒤의 3등等의 보현행이다. 지금 이 점증실제편이 의미하는 것은 점교방편에 의지해 3아승기겁이 지날 동안 보살행을 수행해야 비로소 무루의 참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무루의 참 지혜로 법신을 드러내는 까닭에 점증실제라 이름한다. 점증실제 이후에 비록 수행이 없지는 않으나 그 수행이 완전히 위의 등급에 의지하는 까닭에 전편에서 밝힌 것과 다른 것이다.”
045_0359_c_16L于時遊子行通啓仙人曰於前篇中聞仙人說頓證實際後有行人此篇所明漸證實際之者漸證實際已後有行人耶仙人答曰雖不無行行不同前篇所明者頓證實際已後隨位行時出纏入纏乃至果後三等普賢行今此『漸證實際篇』意者依漸教方便經三僧祇修菩薩行始得無漏眞以此無漏眞智露現法身故名爲漸證實際漸證實際已後雖不無行行而全依位等級故是故不同前篇所明也
045_0360_a_01L유행하는 행자가 물었다.
“전에 들은 두 편 가운데 모두 증득하는 사람과 증득되는 법, 그리고 나아가 연에 따라 행하는 사람이 각각의 이름을 밝혔다고 들었습니다. 이 편 중에도 증득하는 사람과 증득하는 법과 연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이름이 있습니까?”
선인이 대답했다.
“증득하는 이와 증득할 법과 인연 따라 행하는 사람의 이름이 없지 않나니, 이른바 증득하는 이라 함은 곧 무루의 참 지혜이니 보신불報身佛이요,증득할 법이라 함은 곧 실제實濟이니 법신불法身佛이요, 수행하는 사람이라 함은 곧 무루의 참 지혜가 과위果位를 지키지 않고 인연 따라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화신불化身佛이라고도 한다.”
선사가 나이 65세에 입적하니, 시호는 요오了悟 선사요, 탑호는 진원眞原이라고도 한다.
045_0359_c_25L遊子問曰曾聞前兩篇俱明能證之人所證之法乃至隨緣行人各有名此篇中還有能證所證及隨緣行人名請爲指出仙人答曰不無能證所證及隨緣行人名也謂能證之人者卽是無漏眞智亦報身佛是也所證之法者卽是實際亦名法身佛是也行之人卽是無漏眞智不守果位隨緣利名爲行人亦名化身佛是也和尚享年六十五遷化也謚號了悟禪師眞原之塔

미米 화상

양주襄州 왕경초王敬初 상시常侍의 법을 이었고, 서경西京에서 살았다. 기록을 보지 못해 씨족을 알 수 없다.
선사가 어떤 스님더러 앙산仰山에게 “지금도 깨달음을 의지하여야 합니까?” 하고 물으라 했다. 앙산이 대답하기를 “깨달음은 없지 않으나 제2의 무리에 떨어지는 것이야 어찌하랴?” 하고 말한 것을 듣고는, 선사가 앙산을 긍정했다.
어떤 노숙老宿이 선사를 공양에 청하였다. 선사가 왔는데도 자리를 권하지 않고 노숙이 혼자서 한쪽에 앉으니, 선사가 얼른 자리를 펴고 노숙에게 절하였다.
노숙이 벌떡 일어나자 선사가 얼른 앉았다. 그러자 노숙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땅 위에다 자리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는 밤이 되자 대중에게 말했다.
“그가 만일 불법에다 마음을 쓴다면 사흘 만에 문득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보지 못한다면 나는 모를 일이다.
선사가 사흘 뒤에 이르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제는 도적을 맞았다.”
045_0360_a_05L米和尚嗣襄州王敬初常侍在西京未睹行錄窮氏族師因教僧問仰山今時還假悟也無山云悟則不無爭奈落第二頭何師肯之有老宿屈師齋師來不排座位老宿在一邊坐師便展座具禮拜老宿老宿便起師便坐老宿都不作聲乃展席地上而坐到夜間告衆曰他家若在佛法中用心三日便合見若不見則不知到三日後來云前日著賊

어떤 스님이 경청鏡淸에게 물었다.
“미 화상이 돌아온 뜻이 무엇입니까?”
경청이 대답했다.
“송곳 끝이 예리한 것만 보았고, 끌 끝이 평평한 것은 보지 못했다.”

임제臨濟가 선사에게 물었다.
“십일면관세음十一面觀世音이 어찌 성인이 아니겠소?”
선사가 대답했다.
“그러하다면 어떤 것이 본래의 얼굴입니까?”
임제가 한 주먹으로 때리니, 선사가 말했다.
“장로長老는 좀더 관대하소서.”
임제가 손바닥으로 때렸다.

선사가 수업사受業寺에 돌아가니, 어떤 노숙이 물었다.
“달밤에는 끊어진 두레박줄을 사람들은 뱀[蛇]이라 하는데, 스님께서는 무엇이라 부르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만일 부처라는 견해를 내면 중생이라는 견해와 같으니라.”
그 노숙이 말했다.
“천 년 묵은 복숭아로군.”
045_0360_a_13L僧問鏡淸米和尚迴意如何只見錐頭利不見鑿頭平臨濟問師十二面觀音豈不是聖師云是也作摩生是本來面臨濟一摑師云長老且寬寬濟側掌師歸受業寺有老宿問月中斷井索時人喚作蛇審吾師喚作甚摩師云若有佛見則同衆生見其老宿云千年挑核

보수寶壽 화상

임제臨濟의 법을 이었고, 진주鎭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소沼이며, 행적을 보지 못해 생애를 기록할 수 없다.
선사가 호정교胡釘鉸244)에게 물었다.
“정교釘鉸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호정교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허공을 때울 수 있겠는가?”
“화상께서 허공을 때려 부숴서 가져오십시오.”
선사가 곧 그를 때리니, 정교가 대답했다.
“저를 잘못 때리지 마십시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뒷날 말 많은 중이 나서서 그대를 점검하고 부숴 주리라.”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조주趙州에게 이야기하니, 조주가 말했다.
“이 한 틈조차도 어찌하지 못하겠구나.”
동산이 제1좌第一座를 대신해서 말했다.
“만일 제 손아귀에 있다면 어떤 틈인들 때우지 못하리까?”

선사가 처음 개당開堂했을 때, 삼성三聖이 어떤 스님 한 사람을 앞으로 밀어내니, 선사가 때렸다.
이에 삼성이 말했다.
“장로께서 그렇게 사람을 분별하다가는 진주성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할 것입니다.”
045_0360_a_19L寶壽和尚嗣臨濟師諱沼在鎭州未睹行錄決化緣終始師問胡釘鉸見說解釘鉸是不對曰是也師曰還解釘鉸得虛空摩對曰請和尚打破將來師便打之對曰莫錯打厶甲師云向後有多口阿師與你點破在有人擧似趙州趙州只者一縫尚不奈何東山代第一云若是某甲手裏阿那个縫閉不釘師初開堂時三聖推出一僧師便打之三聖云長老與摩識弁人卻鎭州城裏人眼去在
045_0360_b_01L
관계灌溪 화상

임제臨濟의 법을 이었고, 담주潭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지한志閑이며, 행장을 보지 못해생애의 시종을 기록할 수 없다.
어느 날 도오道吾가 와서 절도 하지 않고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지위가 없느니라.”
“그러시다면 허공과 같겠습니다.”
“예끼, 이 백정 놈아.”
이에 도오가 말했다.
“죽일 생명이 있다면 권태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사가 말산末山 비구니 처소에 가니, 비구니가 물었다.
“어디서 오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노구(露口:입이 드러났다는 뜻)에서 옵니다.”
“어째서 덮지 않으십니까?”
이에 선사가 도리어 물었다.
“어떤 것이 말산입니까?”
비구니가 대답했다.
“정수리를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말산 안의 사람입니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닙니다.”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변할 수 있습니까?”
“귀신이 아닌데 무엇으로 변합니까?”
이에 선사가 긍정하였다.
045_0360_a_28L灌溪和尚嗣林濟在潭州師諱志閑未睹行錄決化緣始終後道吾參師不禮拜便問什摩生師云無位吾云與摩則同空去也師云這屠吾云有生可殺則不倦師到末山師姑處姑問從什摩處來師云露口來師姑云何不蓋師卻問如何是末山師姑云不露頂進曰何是末山中人姑云非男非女相進曰還變也姑云不是鬼神變什摩師肯之

동산洞山이 협산夾山에게 물었다.
“어떠하십니까?”
동산이 대답했다.
“그저 그러합니다.”
이에 동산이 긍정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 일을 선사에게 이야기하니, 선사가 말했다.
“금으로 금을 치고, 물로 물을 씻느니라.”
운문雲門이 이 일을 들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금으로 금을 치고 물로 물을 씻는 것이겠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호떡이나 드십시오.”
“그렇게 말해서 되겠는가?”
스님이 말했다.
“종은 벌써 쳤습니다. 떠들지 마십시오.”
이에 운문이 긍정하였다.

“어떤 것이 해치지 않는 구절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끊임없이 말해도 저촉됨이 없느니라.”
선사가 처음에는 관계산灌溪山에서 살다가 나중에는 악록嶽麓 지방을 교화하였는데, 매양 다음과 같이 말했다.
045_0360_b_08L洞山問夾山作摩生對云只與洞山肯之有人擧似師師云金打金水洗水雲門拈問僧作摩生是金打金水洗水僧云喫餬餠與摩道還得摩僧云搥了莫鬧雲門肯之如何是不傷之句師云滿口道不觸師初住灌溪山次化嶽麓每有一言

5음陰의 산 속 옛 불당에
밤낮으로 비로자나불이 원광圓光을 뿜는다.
045_0360_b_13L陰山中古佛堂
毘盧晝夜放圓光

열반에 든 뒤에 악록산嶽麓山에 탑을 세웠다.
塔于嶽麓山

흥화興化 화상

임제臨濟의 법을 이었고, 위부魏府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존장存獎이며, 행장을 보지 못해서 생애를 기록할 수 없다. 칙명으로 시호를 광제廣濟 대사라 했고, 탑호를 통적通寂이라 했다.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최崔 선사의 처소에서 왔습니다.”
“할喝을 가지고 왔는가?”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최 선사에게서 온 것이 아니로다.”
이에 스님이 얼른 할을 하니, 선사가 때렸다.

또 어느 때 어떤 스님을 부르자 스님이 대답하니, 선사가 말했다.
“출석을 부르면 오지 않는구나.”
또 다른 스님을 부르니, 스님이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에 선사가 말했다.
“왔으면 출석을 부르지 않는다.”
045_0360_b_14L興化和尚嗣林濟師在魏府師諱存奬未睹行莫決終始勅謚廣濟大師通寂之塔師問僧甚摩處來對云崔禪師處來師云還將得喝來也無對云不將來師云與摩則不從崔禪師處僧便喝師便棒打師又時喚僧應喏師云則不到又喚別僧僧云作摩師云到則不點

어떤 이가 물었다.
“국사께서 시자를 부른 뜻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한 소경이 여러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니라.”
이산怡山이 이 일을 들어 대중에게 물었다.
“어디가 국사께서 눈먼 곳인가?”
그리고는 스스로 대신 말했다.
“저 집에 무엇이 모자라는가?”

동광제同光帝가 물었다.
“짐朕이 지난날 하남河南에서 보배 구슬 하나를 얻었는데, 아무도 값을 매기지 못하는군요.”
선사가 말했다.
“황제께서는 보배 구슬을 보여 주옵소서.”
황제가 두 손으로 복두건幞頭巾의 각을 활짝 열어 보이니, 선사가 말했다.
“황제께서는 만대의 보배 구슬이신데, 누가 감히 값을 매기겠습니까?”
045_0360_b_20L國師喚侍者意作摩生師云一盲引衆盲怡山拈問衆什摩處是國師盲處自代云他家欠少甚摩同光帝問師朕昨來河南取得一个寶珠無人著價師云請皇帝寶珠看帝以兩手撥開幞頭角師云皇帝是萬代之寶珠誰敢著價
045_0360_c_01L
후노조後魯祖 화상

관계灌溪의 법을 이었고, 등주鄧州에서 살았다.
“어떤 것이 쌍림雙林의 나무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형상이 있는 몸 안에 형상이 없는 몸이니라.”
“어떤 것이 형상이 없는 몸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금 향로 밑의 무쇠 곤륜崑崙이니라.”
“어떤 것이 외딴 봉우리에서 홀로 자는 사람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한밤에 해가 밝고, 한낮에 3경更을 치느니라.”
“격외格外의 일은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교화의 인연이 끝난 뒤에는 허공도 저쪽이 되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전진해 나아갈 문이 없을 때는 어찌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몹시도 둔한 놈이로구나.”
“둔하지 않은 이가 바로 전진해 나아가려 해도 문이 없을 때는 어찌합니까?”
“신령스런 기미는 변제邊際를 논한 적이 없고, 법에 집착하면 처음부터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것이 학인이 힘쓸 곳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봄이 오면 풀이 저절로 푸르고, 해가 솟으면 하늘이 밝으니라.”
“어떤 것이 힘쓰지 않는 곳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산에서 돌이 무너져 내리고, 평평한 개울에 불길이 타오르느니라.”
045_0360_b_25L後魯祖和尚嗣灌溪在鄧州如何是雙林樹師云有相身中無相身進曰如何是無相身金香爐下鐵崑崙如何是高峯獨宿底人師云夜半日頭明午時打三更挌外事如何師云化道緣終後虛空更那邊僧問進向無門時如何師云太鈍生進曰不是鈍生直下進向無門時如何師云靈機未曾論邊際執法無來在暗中如何是學人著力處春來草自靑日上已天明進曰如何是不著力處山頭石崩落平川燒火行

은산隱山 화상

동산洞山이 행각할 때에 산에서 길을 잘못 들어 선사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선사가 물었다.
“이 산에는 길이 없는데, 어디로 왔는가?”
선사가 대답했다.
“오는 곳이 없지 않습니다. 화상께서는 어디로부터 들어오셨습니까?”
“나는 구름이나 물을 따라 오지 않았다.”
“그러면 화상께서 먼저 사셨습니까, 이 산이 먼저 살았습니까?”
“모른다.”
“화상께서는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봄도 가을도 오지 않아서이다.”
동산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객 가운데 주인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흰 구름이 청산을 덮었느니라.”
“어떤 것이 주인 가운데 주인입니까?”
“여러 해 동안 문 밖을 나서지 않았느니라.”
“객과 주인의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양자강 위의 물결이니라.”
“객과 주인이 만났을 때 어떠한 이야기를 나눕니까?”
“청풍이 백월白月에 부느니라.”
선사가 또 다음과 같이 송했다.
045_0360_c_07L隱山和尚洞山行腳時迷路入山恰到師處此山無路從什摩處來對云來處則不無尚從什摩處入此山隱山云我不從雲水來尚是先住此山是先住不知和尚爲什摩不春秋不到來洞山便問如何是賓中主白雲蓋靑山如何是主中主長年不出戶主相去幾何長江水上波賓主相見有何言淸風拂白月又偈曰

청산은 흰 구름의 아비요,
흰 구름은 청산의 아들이라.
흰 구름이 종일토록 의지해 있어도
청산은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속의 뜻을 알고자 하는가?
한 치의 걸음도 옮기지 않는다.
045_0360_c_15L靑山白雲父
白雲靑山兒
白雲終日依
靑山都不知
欲知此中意
步不相離

동산이 이 게송에 응하여 송했다.
洞山因此頌曰

도는 무심하여 사람에게 합하고
사람은 무심해야 도에 합한다.
이 경계의 뜻을 알고 싶은가?
하나는 늙고 하나는 늙지 않는다.
045_0360_c_17L道無心合人
人無心合道
欲知此中意
一老一不老

이로 인해 용아龍牙 대사가 송했다.
045_0360_c_18L因此龍牙大師造頌曰

마음이 공한 것이 도의 공함에 미치지 못하니
도와 마음이 공한 것 모양은 한 가지일세.
현현함을 참구한다는 것, 도가 공한 사람이 아닐런가.
잠시 만나더라도 보기는 쉽지 않다.
045_0360_c_19L心空不及道空安
道與心空狀一般
玄不是道空士
一乍相逢不易看

이 게송으로 인하여 조산曺山 대사가 말했다.
045_0360_c_20L因此曹山大師造頌曰

금년의 농사가 아직 익지 않았으나
내년의 씨앗은 기약이 있다.
나이 젊은 아비를 종사한다면
반드시 머리 흰 아기를 찾으라.
045_0360_c_21L今年田不熟
來年種有期
愛他年少
須得白頭兒


흥평興平 화상

동산洞山이 절을 하니, 선사가 말했다.
“늙어 빠진 나에게 절하지 말라.”
동산이 다시 말했다.
“늙어 빠진 이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절을 받지 않는다.”
동산이 다시 말했다.
“멈춘 적도 없습니다.”
동산이 하직을 고하니, 선사가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가?”
동산이 대답했다.
“흐름을 따르므로 머물 곳이 없습니다.”
“법신이 흐름을 따르는가, 보신이 흐름을 따르는가?”
“그러한 견해를 전혀 짓지 않습니다.”
선사가 손뼉을 치면서 놀라워했다.
이에 보복保福이 말했다.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이가 몇이나 되던고?”
045_0360_c_22L興平和尚洞山禮拜師云莫禮老朽洞云禮非老朽者師云他不受禮洞山云亦未曾止洞又師云何處去沿流無所止師云法身沿流報身沿流摠不作如是見解師拍掌訝之福云覓不得幾个
045_0361_a_01L또 물었다.
“어떤 것이 옛 부처님의 마음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그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 하나 그것은 제가 질문한 요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라.”
동산이 다시 말했다.
“저에게 한 구절이 있는데, 여러 성인의 입을 빌리지 않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일러 보라.”
동산이 말했다.
“저는 아닌데, 묻는 사람이 있더군요.”
045_0360_c_27L又問如何是古佛心師云汝心是雖然如此猶未是厶甲問處師云若與問取木人去厶甲有一句子不借諸聖口汝試道看洞山云不是厶甲有人問

미령米嶺 화상

어떤 사람이 미령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누더기 밑의 일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추하고 더럽거든 그대 마음대로 싫어하라. 그러나 구름이 노을빛에 걸리지는 않으리라.”
045_0361_a_02L米嶺和如何是納衣下事師云醜陋任君嫌不挂雲霞色
祖堂集卷第二十
  1. 242)고려대장경은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므로 원상 밑에 분犇 자가 쓰여 있으므로 ‘원상 밑’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가로쓰기이므로 원상 옆에 분犇 자를 썼다. 이하 ‘밑’이라는 표현이 나올 경우 ‘옆’으로 번역한다.
  2. 243)고려대장경에는 로 되어 있으나, 『인천안목人天眼目』 제4권을 참조하여 로 고쳤다.
  3. 244)본명은 호영능胡令能이다. 정교釘鉸는 금이 갔거나 구멍 난 냄비 따위를 때우는 일이다. 여기서는 그런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