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金剛三昧經論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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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금강삼매경론 상권(金剛三昧經論 卷上)

신라국 사문 원효가 서술하다新羅國 沙門 元曉 述
이 『금강삼매경』을 간략하게 네 부문으로 분별한다. 첫 번째는 경전의 대의를 서술하고, 두 번째는 경전의 종지를 판별하고, 세 번째는 경전의 제목을 해석하고, 네 번째는 경문의 뜻을 해석한다.

제1편 경전의 대의를 서술함(述大意者)
첫 번째, 경전의 대의를 서술한다. 대저 일심一心의 근원은 유有와 무無를 초월하여 그 자체로 청정하고, 삼공三空1)의 바다는 진眞과 속俗을 융합하여 담연하다. 담연하게 진과 속을 융합했지만 하나(一)가 아니고, 그 자체로 청정해 가(邊)를 벗어나 있지만 중中2)이 아니다. 중이 아니지만 가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유가 아닌 법이면서도 무에 즉하여 머물지 않고, 무의 형상이 아니면서도 유에 즉하여 머물지 않는다.
하나가 아니지만 진과 속을 융합하고 있기 때문에 진이 아닌 사事가 속俗이 된 적이 없고, 속이 아닌 이理가 진이 된 적도 없다. 진과 속을 융합했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과 속의 자성(性)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 없고, 염染과 정淨의 모습(相)이 구비되지 않음이 없다. 가를 벗어나 있으면서도 중이 아니기 때문에 유와 무의 법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 없고, 시是와 비非의 뜻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다.
이에 파破하지 않지만 파하지 못할 것이 없고, 세우지(立) 않지만 세우지 못할 것이 없다. 그래서 도리가 없는(無理) 지극한 도리(至理)이고, 그렇지 않으면서(不然) 바로 그러하다(大然)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금강삼매경』의 대의이다.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서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설명하는 주체인 언설(語)은 핵심(環中)3)에 묘하게 계합되어 있고, 도리가 없는 지극한 도리이기 때문에 설명되는 객체인 종지(宗)는 방외方外를 멀리 벗어나 있다. 파하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금강삼매金剛三昧’라 하고, 세우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 하며, 일체의 의義와 종宗이 ‘금강삼매’와 ‘섭대승경’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에 또한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도 한다. 이에 이들 가운데 하나를 제목으로 지목하여 첫머리에 두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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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剛三昧經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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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金剛三昧經論卷上

001_0604_b_03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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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國沙門元曉述

001_0604_b_05L
此經略開四門分別初述大意
001_0604_b_06L辨經宗三釋題名四消文義

001_0604_b_07L
第一述大意者
夫一心之源離有無
001_0604_b_08L而獨淨三空之海融眞俗而湛然
001_0604_b_09L湛然融二而不一獨淨離邊而非
001_0604_b_10L非中而離邊故不有之法不卽
001_0604_b_11L住無不無之相不卽住有不一而
001_0604_b_12L融二故非眞之事未始爲俗非俗
001_0604_b_13L之理未始爲眞也融二而不一
001_0604_b_14L眞俗之性無所不立染淨之相莫
001_0604_b_15L不備焉離邊而非中故有無之法
001_0604_b_16L無所不作是非之義莫不周焉
001_0604_b_17L乃無破而無不破無立而無不立
001_0604_b_18L謂無理之至理不然之大然矣是謂
001_0604_b_19L斯經之大意也良由不然之大然
001_0604_b_20L能說之語妙契環中無理之至理
001_0604_b_21L故所詮之宗超出方外無所不破
001_0604_b_22L故名金剛三昧無所不立故名攝大
001_0604_b_23L乘經一切義宗無出是二是故亦
001_0604_b_24L名無量義宗且擧一目以題其首

001_0604_c_01L『금강삼매경』이라 한 것이다.

제2편 경전의 종지를 판별함(辨經宗者)
두 번째, 경전의 종지를 판별한다. 『금강삼매경』의 종宗과 요要는 각각 풀어 주는(開) 측면이 있고 묶어 주는(合) 측면이 있다. 묶어 주는 측면으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핵심(要)이고, 풀어 주는 측면으로 설명하면 십중법문十重法門이 근본(宗)이다.

제1장 일미관행(合論)
관행이라 말한 것에서 관觀은 공간적으로 논한 것으로 경境과 지智에 통하고, 행行은 시간적으로 바라본 것으로 그 인因과 과果에 미친다.

1. 행行
1) 과果
과果는 오법五法4)의 원만함을 말한다.

2) 인因
인因은 육행六行5)의 완비를 말한다.

2. 관觀
1) 지智
지智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곧 두 가지 각이다.

2) 경境
경境은 곧 진眞과 속俗의 분별이 사라진(雙泯) 것이다.

진과 속의 분별이 없을 뿐이지 소멸된 것이 아니고, 본각과 시각이면서도 집착의 발생이 없다(無生). 집착의 발생이 없는 행은 그대로 분별상이 없음(無相)에 계합되고, 분별상이 없는 법은 순조롭게 본각의 터득(本利)을 성취한다. 터득(利)은 이미 터득된 본각으로서 새롭게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부동의 확실한 자리(實際)이다. 그 자리는 이미 확실한 자리로서 자성(性)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진실한 자리(眞際)도 역시 공空이다. 제불여래도 그곳에 들어 있고, 일체보살도 그 속으로 따라서 들어간다. 이와 같은 경우를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간다고 하니, 이것이 『금강삼매경』 여섯 품6)의 대의이다.

이 관문에서는 처음의 신해信解로부터 (여섯째) 등각等覺에 이르기까지 육행을 세운다. 육행이 원만해질 때 구식九識7)으로 전환되고 현현하니 무구식無垢識(眞如)을 현현시켜 청정법계로 삼고, 그 밖의 팔식八識을 전환시켜 사지四智8)를 성취하니 오법五法이 이미 원만해지므로 삼신三身9)이 갖추어진다. 이와 같이 인과 과는 경과 지를 벗어나지 않으며, 경과 지는 둘이 아니라 오직 일미一味일 뿐이다.
이와 같은 일미관행이야말로 『금강삼매경』의 종지이다. 그러므로 『금강삼매경』에는 대승의 모든 법상法相이 포함되지 않음이 없고, 무량한 뜻(義)과 근본(宗)이 들어 있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금강삼매’라는 명칭이 허황하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일미관행에 대하여 묶어 주는 측면에서 논하여 간략하게 서술하면 이와 같다.

제2장 십중법문(開說)
이제 다음으로 풀어 주는 측면에서 말하면 십문十門이 된다. 그 종지는 이른바 일문으로부터 증가하여

001_0604_c_01L故言金剛三昧經也

001_0604_c_02L
第二辨經宗者
此經宗要有開有合
001_0604_c_03L合而言之一味觀行爲要開而說之
001_0604_c_04L十重法門爲宗
[合論]
言觀行者觀是橫論
001_0604_c_05L通於境智行是竪望亘其因果
[行]

001_0604_c_06L謂五法圓滿
因謂六行備足
[觀]
智卽本
001_0604_c_07L始兩覺
境卽眞俗雙泯雙泯而不滅
001_0604_c_08L兩覺而無生無生之行冥會無相
001_0604_c_09L無相之法順成本利利旣是本利而
001_0604_c_10L無得故不動實際際旣是實際而離
001_0604_c_11L性故眞際亦空諸佛如來於焉而
001_0604_c_12L一切菩薩於中隨入如是名爲
001_0604_c_13L入如來藏是爲六品之大意也於此
001_0604_c_14L觀門從初信解乃至等覺立爲六
001_0604_c_15L六行滿時九識轉顯顯無垢識
001_0604_c_16L爲淨法界轉餘八識而成四智
001_0604_c_17L法旣圓三身斯備如是因果不離
001_0604_c_18L境智境智無二唯是一味如是一味
001_0604_c_19L觀行以爲此經宗也所以大乘法相
001_0604_c_20L無所不攝無量義宗莫不入之
001_0604_c_21L不虛稱斯之謂歟合論一觀略述如
001_0604_c_22L
開說
十門爲其宗者謂從一門
001_0604_c_23L

001_0605_a_01L십문에까지 이른다.

1. 일문一門
일문은 무엇인가. 일심一心 가운데서 일념一念(正念)이 작동하여 일실一實10)을 따르고 일행一行11)을 닦으며 일승一乘(대승의 가르침)에 들어가 일도一道(一實諦에 이르는 길)에 머물러서 일각一覺(一本覺)을 써서 일미一味12)를 깨치는 것이다.

2. 이문二門
이문은 무엇인가. 이안二岸에 머물지 않아 이중二衆을 떠나고, 이아二我(人我와 法我)에 집착하지 않아 이변二邊(有邊과 無邊)을 여의며, 이공二空(人空과 法空)에 통달하여 이승二乘(聲聞乘과 緣覺乘)에 떨어지지 않고, 이제二諦(眞諦와 俗諦)를 두루 갖추어 이입二入(理入과 行入)을 어기지 않는 것이다.

3. 삼문三門
삼문은 무엇인가. 삼신불(三佛)에 스스로 귀의하여 삼계三戒13)를 받아 삼대제三大諦14)를 따라서 삼해탈三解脫15)을 얻고 등각의 삼지三地16)와 묘각의 삼신17)이 삼공취三空聚18)에 들어가 삼유심三有心19)을 소멸하는 것이다.

4. 사문四門
사문은 무엇인가. 사정근四正勤20)을 닦아 사신족四神足21)에 들어가서 사대연四大緣의 힘22)으로 (행行·주住·좌坐·와臥의) 사위의四威儀에 항상 이익을 얻어 사선四禪23)을 초월하여 멀리 사방四謗24)을 여의고 사홍지四弘地25) 가운데서 사지四智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5. 오문五門
오문은 무엇인가. 오음五陰26)인 중생에게는 오십악五十惡27)이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오근五根28)을 심고 오력五力29)을 길러 오공해五空海30)를 건너고 오등위五等位31)를 넘어서서 오정법五淨法32)을 얻어 오도의 중생(五道生)33)을 건지는 것 등이다.

6. 육문六門
그리고 육문·칠문·팔문·구문 등은 무엇인가. 육도六度34)를 갖추어 육입六入35)을 영원히 제거한다.

7. 칠문七門
칠각분七覺分36)을 닦아 칠의과七義科37)를 소멸한다.

8. 팔문八門
팔식八識38)의 바다를 맑힌다.

9. 구문九門
구식九識39)의 흐름이 청정해진다.

10. 십문十門
이와 같이 해야 비로소 십신十信으로부터 십지十地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행이 구족되고 온갖 덕이 원만해진다.

이와 같은 십문의 모든 수행문이 바로 『금강삼매경』의 종지이다. 이것은 경문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므로 해당 경문에서 설명하겠다. 그런데 이 뒤의 아홉 가지 수행문은 모두 일문에 포함되고, 일문에 아홉 가지 수행문이 있으니 일미관행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측면으로 보아도 하나에서 늘어나지 않고, 총합적인 측면으로 보아도 열에서 줄어들지 않으니, 부증불감不增不減이 『금강삼매경』의 근본(宗)과 핵심(要)이다.

제3편 경전의 제목을 해석함(釋題目者)
세 번째, 경전의 제목을 해석한다. 이 경의 제목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섭대승경’이고, 둘째는 ‘금강삼매’이며, 셋째는 ‘무량의종’이다.

001_0605_a_01L增至十門
一門
云何一心中一念
001_0605_a_02L順一實修一行入一乘住一道
001_0605_a_03L用一覺覺一味
二門
云何不住二
001_0605_a_04L岸以遣二衆不着二我以離二邊
001_0605_a_05L通達二空不墮二乘俱融二諦不
001_0605_a_06L違二入
三門
自歸三佛而受三
001_0605_a_07L順三大諦得三解脫等覺三地
001_0605_a_08L妙覺三身入三空聚滅三有心

001_0605_a_09L
修四正勤入四神足四大緣
001_0605_a_10L四儀常利超出四禪遠離四謗
001_0605_a_11L四弘地中四智流出
五門
於五
001_0605_a_12L陰生具五十惡故植五根而養五力
001_0605_a_13L涉五空海䟦五等位得五淨法
001_0605_a_14L五道生如是等也
[六門]
云何六七八九等
001_0605_a_15L具修六度永除六入
[七門]
行七覺分
001_0605_a_16L滅七義科
[八門]
八識海澄
[九門]
九識流淨
[十門]

001_0605_a_17L從十信乃至十地百行備足萬德
001_0605_a_18L圓滿如是諸門爲是經宗皆在經
001_0605_a_19L文處當說然此後九門皆入一
001_0605_a_20L一門有九不出一觀所以開不
001_0605_a_21L增一合不減十不增不減爲其宗
001_0605_a_22L要也

001_0605_a_23L
第三釋題目者
此經之目有其三種
001_0605_a_24L一名攝大乘經二名金剛三昧三名

001_0605_b_01L이 가운데 첫째와 셋째의 명칭에 대해서는 이하 해당하는 곳에서 해석하겠다.
여기에서는 먼저 둘째에 해당하는 ‘금강삼매’라는 제목에 대하여 해석한다. 왜냐하면 ‘금강삼매’라는 명칭만 경전의 첫머리에 제목으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금강삼매’라는 용어를 둘로 나누어 먼저 ‘금강’에 대하여 해석하고, 나중에 ‘삼매’에 대하여 해석한다.

제1장 금강
‘금강’에도 두 가지의 경우가 있으니, 먼저 해석하고 뒤에 간별한다.

1. 금강을 해석함
“금강”은 비유를 들어 지칭한 것인데, 견실하다는 것을 체성으로 삼고 깨뜨리는 것(穿破)을 공능으로 삼는다. 마땅히 “금강삼매”도 또한 이와 같이 실제實際를 체성으로 삼고 깨뜨리는 것을 공능으로 삼는 줄 알아야 한다.

1) 실제를 체성으로 삼음
“실제를 체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이치의 궁극적인 근원을 깨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문에서는 “법을 깨치니 진실한 삼매였다네.”라고 하였다.

2) 깨뜨리는 것을 공능으로 삼음
“깨뜨리는 것을 공능으로 삼는다.”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모든 의심을 타파하는(破) 것이고, 둘째는 모든 선정을 꿰뚫는(穿) 것이다.

(1) 모든 의심을 타파함

“모든 의심을 타파한다.”는 것은 설법을 일으켜 의심을 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문에서는 “의심과 후회를 영원히 단절한다.”고 하였다.

(2) 모든 선정을 꿰뚫음

“모든 선정을 꿰뚫는다.”는 것은 이 금강삼매가 그 밖의 모든 삼매로 하여금 다 각각의 작용을 얻게끔 한다는 것이다. 마치 보배구슬을 꿰뚫어 쓰임새가 있게 하는 것과 같다.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서는 이에 대하여 “무엇을 금강삼매라 하는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삼매를 타파할 수 있다.”40)고 하였다. 저 『대지도론』에서는 그것을 해석하여 “금강삼매는 비유하면 금강과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 없다. 이 삼매도 역시 그와 같아서 제법에 통달하지 못할 것이 없고, 모든 삼매로 하여금 각각 그 작용을 얻게끔 한다. 그것은 마치 자거·마노·유리를 오직 금강만이 꿰뚫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41)고 하였다.
생각해 보면 『대품반야경』에서 말한 “모든 삼매를 타파한다.”에서 ‘타파한다(破)’는 곧 꿰뚫는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대품반야경』의 타파한다는 말을 ‘뚫고 들어간다(穿入)’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모든 삼매가 다 자성이 없다는 것을 통달하고 나면 그 모든 삼매로 하여금 자체에 집착하는 것을 여의게끔 할 수가 있다. 그것을 말미암아 걸림없이 자재를 얻는다. 명칭에 대한 해석은 이것으로 마친다.

2. 금강을 간별함
다음은 간별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1) 정定과 혜慧를 간별함
먼저 정定과 혜慧를 간별한다.

금강반야와 금강삼매를 모두 금강이라 부르는데, 어떤 차별이 있는가?
금강반야는 혜慧, 금강삼매는 정定이라는 차별이 있다.

001_0605_b_01L無量義宗初後二名次門當釋
001_0605_b_02L且先釋中間一目唯此一名在首題
001_0605_b_03L於中有二先釋金剛後釋三昧

001_0605_b_04L
[金剛]
初中亦二先釋後簡
[釋金剛]
言金剛者
001_0605_b_05L喩之稱堅實爲軆穿破爲功金剛
001_0605_b_06L三昧當知亦爾實際爲軆破穿爲
001_0605_b_07L
實際爲軆者證理窮源故如下文
001_0605_b_08L證法眞實定故
破穿爲能者
001_0605_b_09L其二義一破諸疑二穿諸定破諸
001_0605_b_10L疑者起說斷疑故如下文言決定
001_0605_b_11L斷疑悔故穿諸定者此定能令諸
001_0605_b_12L餘三昧皆得有用如穿寶珠得有
001_0605_b_13L用故如大品經言云何名金剛三昧
001_0605_b_14L住此三昧能破諸三昧彼論釋云
001_0605_b_15L金剛三昧者譬如金剛無物不陷
001_0605_b_16L此三昧亦如是於諸法中無不通達
001_0605_b_17L令諸三昧皆得有用如硨磲碼碯琉
001_0605_b_18L唯金剛能穿入案云經言破諸
001_0605_b_19L三昧者破之言穿論中穿入釋經
001_0605_b_20L破故達諸三昧皆無自性令彼三
001_0605_b_21L昧能離自着由是無碍得自在故
001_0605_b_22L釋名如是
[簡別金剛]
次簡別者於中有二

001_0605_b_23L簡定慧金剛般若金剛三昧
001_0605_b_24L名金剛有何差別解云彼慧此定

001_0605_c_01L또한 금강반야는 인因과 과果에 통하는데, 금강삼매는 그 가운데서 과지果地에 위치한다. 또한 반야로서의 금강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곧 그 체성은 견고하고 작용은 예리하며 형상은 넓은 부분과 좁은 부분이 있다. 그러나 삼매로서의 금강은 견고하고 예리하다는 뜻만 취한다. 이 점에서 서로 차별이 있다.

2) 다른 정定과 차이점을 간별함
다음은 다른 정定과의 차이점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금강삼매金剛三昧이고, 둘째는 금강륜삼매金剛輪三昧이며, 셋째는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이다. 『대품반야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떤 것이 금강륜삼매인가? 이 삼매에 머물면 다른 모든 삼매의 기능을 지니게 된다. 어떤 것이 여금강삼매인가? 이 삼매에 머물면 모든 법을 관통하여 통달하면서도 그 통달한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42)

위의 경문에 대하여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세 가지 삼매에 어째서 다 금강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는가?
첫째는 금강이라 했고, 둘째는 금강륜이라 했으며, 셋째는 여금강이라 했다. 여금강삼매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제법을 관통하고 꿰뚫지만 그 꿰뚫는 것을 내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금강삼매에 대해서는 “모든 삼매를 통달한다.”고 했으며, 금강륜삼매에 대해서는 “모든 삼매륜을 지닌다.”고 했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스스로 설한 뜻이다. 이에 대하여 논자들은 “여금강삼매는 일체번뇌의 속박을 남김없이 타파한다. 비유하면 마치 석제환인이 손에 금강을 들고서 아수라 군대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것은 곧 학인들의 말후심末後心이기도 하다. 이 말후심으로부터 점차 성문의 보리와 벽지불의 보리와 부처의 무상보리 등 세 가지의 보리를 터득한다. 논자들은 또 “금강삼매는 일체제법을 타파하고 무여열반에 들어가 다시는 중생의 업보(有)를 받지 않는다. 비유하면 진금강眞金剛으로 모든 번뇌의 산을 남김없이 파괴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논자들은 또 “금강륜삼매는 일체 모든 불법마저 타파해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다.”고 하였다.43)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모든 불법마저 타파한다.”는 것은 마치 전륜성왕의 윤보輪寶가 모든 왕들을 쳐부수고 그들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는 것과 같다.

001_0605_c_01L是爲差別又金剛般若通於因果
001_0605_c_02L金剛三昧位在果地又般若金剛
001_0605_c_03L具有三義軆堅用利形狀寬狹
001_0605_c_04L昧金剛但取堅利如是差別
次別
001_0605_c_05L餘定此有三類一金剛三昧二金
001_0605_c_06L剛輪三味三如金剛三昧大品經言
001_0605_c_07L云何金剛輪三昧住是三昧能持諸
001_0605_c_08L三昧分云何如金剛三昧住是三昧
001_0605_c_09L能貫達諸法亦不見達彼論釋言
001_0605_c_10L問曰三種三昧何以皆言金剛答曰
001_0605_c_11L初言金剛中言金剛輪後言如金
001_0605_c_12L如金剛三昧佛言能貫穿諸法
001_0605_c_13L亦不見是穿金剛三昧能通達諸三
001_0605_c_14L金剛輪三昧能持諸三昧輪
001_0605_c_15L皆佛自說義論者言如金剛三昧者
001_0605_c_16L能破一切煩惱結使無有遺餘譬如
001_0605_c_17L釋提桓因手執金剛破阿修羅軍
001_0605_c_18L卽是學人末後之心從是心次第得
001_0605_c_19L三種菩提聲聞辟支佛佛無上菩
001_0605_c_20L金剛三昧者能破一切諸法入
001_0605_c_21L無餘涅槃更不受有譬如眞金剛
001_0605_c_22L能破諸山令滅盡無餘金剛輪者
001_0605_c_23L能破一切諸佛 [1] 法無遮無碍案云
001_0605_c_24L此中破諸佛法者猶如轉輪聖王輪

001_0606_a_01L이런 까닭에 금강륜삼매는 위의 두 가지 삼매, 곧 여금강삼매 및 금강삼매와 다르다.

() 위의 두 가지 삼매, 곧 여금강삼매와 금강삼매는 무엇이 다른가?
() 다섯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는 비유의 차별이다. 말하자면 전자는 금강으로 아수라의 군대를 파하고, 후자는 금강으로 번뇌의 산을 파한다.
둘째는 법의 차별이다. 전자는 번뇌를 파하고, 후자는 제법을 파한다.
셋째는 수행 계위의 차별이다. 전자는 유학위有學位의 경지이고, 후자는 무학위無學位의 경지이다.
넷째는 명칭의 차별이다. 전자의 여금강삼매는 달리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후자는 단지 금강삼매라고만 할 뿐 ‘여如’ 혹은 ‘유喩’라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깨달음을 향한 과정의 삼매(因定)와 깨달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삼매(果定)가 다르기 때문이다. 과정의 삼매는 유공용有功用(수행에 대한 상이 남아 있는 경우)이다. 그러나 결과의 삼매는 무공용無功用(수행 및 깨달음에 대한 상이 없는 무집착의 경지)으로 초월하고 또 초월하여 무위無爲에 이르기 때문이다. 또한 여금강은 금강에서 일부분 엇비슷한 뜻만 취하므로 단지 번뇌만 파하고 그 밖의 법은 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금강은 금강과 완전히 똑같은 날카로움을 드러내어 일체의 색물色物을 관파貫破하지 못할 것이 없다. 삼매의 작용도 그와 같아서 일체제법도 역시 파하지 못할 것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다섯째는 교설의 차별이다. 말하자면 유학위의 여금강삼매는 『금강삼매본성청정부증불감경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44)에서 설한 것이고, 무학위의 금강삼매는 이 『금강삼매경』에서 설한 것이다.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 부처님이 들어간 삼매(定)는 일체법을 파하여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금강삼매라 말한 것이다. 금강삼매는 육종석六種釋45) 가운데 지업석持業釋에 해당하는데, 비유를 들어 명칭한 점으로 보면 인근석隣近釋에 해당하며, 금강삼매라는 명칭으로 경전의 제목을 삼은 점에서는 의주석依住釋에 해당한다. 이것은 삼매라는 정定에 주안점을 둔 까닭이다.

제2장 삼매
다음으로 두 번째 삼매의 명칭을 해석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해석하고 나중에 간별한다.

1. 삼매의 모든 명칭을 해석함
옛 논사는 “저 삼매라는 명칭은 번역하면 정사正思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언급한 이 설명은 문맥의 뜻에 합치된다.

001_0606_a_01L寶能破諸王無不伏故是故與前
001_0606_a_02L二金剛別前二金剛云何別者
001_0606_a_03L五差別一者喩別謂如金剛破軍
001_0606_a_04L金剛破山故二者法別前破煩惱
001_0606_a_05L後破諸法故三者位別前在學位
001_0606_a_06L後在無學故四者名別前名如金剛
001_0606_a_07L三昧餘處名金剛喩定後者直名金
001_0606_a_08L剛三昧除如及喩所以然者爲顯
001_0606_a_09L因果二定異故因有功用果無功用
001_0606_a_10L損之又損之以至無爲故又如金剛
001_0606_a_11L取其少分相似之義但破煩惱不破
001_0606_a_12L餘波故言金剛者顯其全同金剛之
001_0606_a_13L一切色物無不貫破三昧之用
001_0606_a_14L當知亦爾一切諸法亦無不破故
001_0606_a_15L五者敎別謂有學位金剛三昧則金
001_0606_a_16L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中所
001_0606_a_17L其無學位金剛三昧今此經中所
001_0606_a_18L說是也今此經中佛所入定破一
001_0606_a_19L切法皆無所得是故名爲金剛三昧
001_0606_a_20L六種釋中是持業釋取譬名者是隣
001_0606_a_21L近釋卽以是名目此經者是依主釋
001_0606_a_22L定爲主故
次第二釋三昧名者
於中
001_0606_a_23L有二先釋後簡
三昧之名 略釋如是
古師說言彼名三
001_0606_a_24L昧此云正思今述此說當文義故

001_0606_b_01L말하자면 삼매(定)에 들어 있을 때는 반연하는 경계를 잘 생각하고 제대로 살피기(審正思察) 때문에 정사正思라고 한다. 『유가론瑜伽論』에서도 “삼마지란 말하자면 대상에 대하여 잘 살피고 제대로 관찰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46)이다.”47)라고 했기 때문이다.

정定이란 반드시 고요한 것으로 한 경계에 조용히 머무는 것인데, 어째서 잘 생각하고 제대로 살피는 것이라 말하는가? 그리고 생각하고 살피는 작용은 심사尋伺48)라고 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정定을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가?
만약 한 경계를 지키는 것만을 정定으로 간주한다면 혼침의 상태로 한 경계에 머무는 것도 반드시 삼매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심사라 한다면 사혜邪慧로 추구하는 것은 심사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思察)에도 두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모든 사邪와 정正을 의언意言으로 분별하는 것을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심사로서 분별이 되고 만다. 그러나 만약 반연의 경계를 바르게 살펴 분명하게 깨닫는 것만을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삼매(定)의 작용이지 심사가 아니다. 삼매(定)는 분별과 무분별에 통하기 때문에 그 살핌의 바름으로써 심사와 간별한다.
또한 하나의 경계에 머무는 것(住一境)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한 경계에 머물더라도 혼미하고 어두워 잘 살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혼침이다. 그러나 만약 한 경계에 머물러 부침浮沈 없이 잘 생각하고 제대로 살핀다면 그것은 삼매(定)라 한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을 저 혼침과 간별한다. 이런 까닭에 머물거나 옮기는 것만을 기준으로 삼매(定)와 산란(散)의 차별상을 간별해서는 안 되는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불보살의) 빠른 언변49)은 비록 속도는 빠를지라도 삼매(定)에 있기 때문이고, (중생들의) 더딘 생각은 비록 오랫동안 대상에 머물지라도 산란(散)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금강삼매를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라 하였지만, (사실 금강삼매에는) 정正과 부정不正도 없고 사思와 비사非思도 없다. 그런데도 “제대로 생각하고 살피는 것”이라 한 까닭은 다만 분별하는 사념邪念과 간별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또한 허공처럼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과도 다르다. 억지로 “제대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일컬었을 뿐이다. 삼매의 명칭을 대략 이와 같이 해석한다.

2. 삼매의 모든 명칭을 간별함
다음으로 삼매의 모든 명칭을 간별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001_0606_b_01L謂在定時於所緣境審正思察故
001_0606_b_02L名正思如瑜伽言三摩地者謂於所
001_0606_b_03L緣審正觀察心一境性故定應
001_0606_b_04L是靜靜住一境云何乃言審正思察
001_0606_b_05L思察之用應是尋伺云何說定爲思
001_0606_b_06L察耶若守一境卽爲定者惛沈
001_0606_b_07L住境應卽是定若正思察是尋伺
001_0606_b_08L邪慧推求應非尋伺當知思察
001_0606_b_09L有其二種若通邪正意言分別名
001_0606_b_10L思察者卽是尋伺直是分別若唯
001_0606_b_11L審正明了緣境名正思察正是定用
001_0606_b_12L而非尋伺定通分別及無分別
001_0606_b_13L以審正簡彼尋伺又住一境亦有
001_0606_b_14L二種若住一境惛迷闇昧不能審
001_0606_b_15L察卽是惛沈若住一境不沈不浮
001_0606_b_16L審正思察是名爲定故以思察別
001_0606_b_17L彼惛沈是故當知不以住移簡別定
001_0606_b_18L散差別之相何以故捷疾之辯
001_0606_b_19L速移轉而有定故遲鈍之念雖久
001_0606_b_20L住境而是散故今此金剛三昧名
001_0606_b_21L爲正思察者無正不正亡思非思
001_0606_b_22L但爲別於分別邪念又不同於虛空
001_0606_b_23L無思所以强號爲正思耳三昧之名
001_0606_b_24L略釋如是
次簡別者
於中有二

001_0606_c_01L먼저 모든 명칭을 분별하고, 다음으로 통通과 국局을 간별한다.

1) 명칭을 분별함
삼매(定)의 명칭은 다양하지만 대략 여덟 가지가 있다.

(1) 삼마희다三摩呬多(等引)

첫째는 삼마희다三摩呬多이니, 여기서는 등인等引이라고 번역한다. 혼침昏沈과 산란(掉擧)에 치우치는 것을 초월하기 때문에 평등하다(等)고 하고, 신통과 같은 모든 공덕을 끌어들이기 때문에 이끈다(引)고 한다. 또 이처럼 평등하게 이끌어서 후회가 없고 환희롭고 안락한 경지에 이르기 때문에 등인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욕계의 삼매(定)와는 다르다.

(2) 삼마지三摩地(等持)

둘째는 삼마지三摩地이니, 여기서는 등지等持라고 번역한다. 등等의 뜻은 앞의 삼마희다의 경우와 같다. 번뇌의 마음은 잘 제어하고 청정한 마음은 잘 유지하여 산란하지 않도록 하므로 등지等持라 한다. 또 삼매(定)와 지혜(慧)가 평등하여 서로 벗어나지 않으므로 등지等持라고 한다. 구역에서 삼마제三摩提라 한 것 또한 등지等持의 뜻이다.

(3) 삼마발제三摩鉢提(等至)

셋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이니, 여기서는 등지等至라고 번역한다. 평등하게 유지하는(等持) 동안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므로 등지等至라 한다.

(4) 태연나駄演那(靜慮)

넷째는 태연나駄演那이니, 여기서는 정려靜慮라고 번역한다. 적정하게 사려하기 때문이고, 또 산란한 생각을 고요히 잠재우기 때문이다. 구역에서는 선나禪那라 하고 혹 지아나持阿那라고도 하였는데, 지역에 따른 다른 표현으로서 그 의미는 정려靜慮와 같다.

(5) 사마타奢摩他(止)

다섯째는 사마타奢摩他이니, 여기서는 지止라고 번역한다. 마음에 나타나는 분별경계를 그치도록 하므로 지止라 한다.

(6) 심일경성心一境性

여섯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하나의 경계에 집중케 하는 성품이므로 심일경성이라 한다. 구역에서 일심一心이라 표현한 것은 이것을 축약한 것이다.

(7) 정定

일곱째는 정定이다. 반연의 대상을 잘 다스리므로 정定이라 한다.

(8) 정사正思

여덟째는 정사正思이다. 뜻은 위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떤 논사는 “삼매와 삼마제라는 명칭은 모두 등지等持로서 다른 명칭이 아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저 『금고경金鼓經』(『合部金光明經』)의 십종지十種地의 삼매 가운데 앞의 세 가지 지(三地)에서는 삼마제라고 하였고, 뒤의 일곱 가지 지(七地)에서는 삼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50) 이와 같이 두 가지 명칭이 만약 동일하게 등지等持라면 무슨 까닭에 앞의 세 가지 지와 뒤의 일곱 가지 지에서 다르게 설했겠는가.
또한 이 두 가지 명칭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001_0606_c_01L別諸名後簡通局
定名不同定名不同略有
001_0606_c_02L八種一名三摩呬多此云等引
001_0606_c_03L離惛沈掉擧之偏故名爲等引發神
001_0606_c_04L通等諸功德故名爲引又此等引
001_0606_c_05L無悔歡善安樂所引故名等引由此
001_0606_c_06L不同欲界定故二名三摩地此云等
001_0606_c_07L等義同前能制持心令不馳散
001_0606_c_08L故名等持又定慧平等令不相離
001_0606_c_09L故名等持舊云三摩提亦卽等持
001_0606_c_10L三名三摩鉢提此云等至等持之中
001_0606_c_11L能至勝位故名等至四名駄演那
001_0606_c_12L此云靜慮寂靜思慮故又能靜散慮
001_0606_c_13L舊云禪那或云持阿那方俗異
001_0606_c_14L同謂靜慮也五名奢摩他此譯
001_0606_c_15L云止令心止境故名爲止六名心
001_0606_c_16L一境性令心專一於境之性故名心
001_0606_c_17L一境性舊云一心是略故也七名
001_0606_c_18L爲定審定所緣故名爲定八名正
001_0606_c_19L義如前說有師說言三昧之名
001_0606_c_20L及三摩提只是等持非是異名
001_0606_c_21L說不然所以者何如金鼓經十種定
001_0606_c_22L前三地中名三摩提後七地中名
001_0606_c_23L爲三昧如是二名若同等持何由
001_0606_c_24L改名前後異說又此二名何由不

001_0607_a_01L만약 지역적인 방언 때문에 다른 것이라면 한 곳에서 두 가지 명칭을 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경전을 전승한 사람의 시대적 차이 때문에 다른 것이라면 동일한 경본에 이 두 가지 명칭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저 삼마제와 삼마지의 경우에는 경전을 전승한 시대가 전후로 다를 뿐이어서 분명히 동일한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삼매의 명칭은 삼마제와 동일한 책에 들어 있으니 어째서 다르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삼매와 삼마제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분명히 다르다.

2) 통과 국으로 간별함
둘째, 다음으로 삼매의 통通과 국局을 설명하면 대략 네 가지 예가 있다.

(1) 정定과 등지等持

첫째는 정定과 등지等持이다. 이 두 가지 명칭의 범주가 제일 넓으니,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에 두루 통하고, 또 삼계에도 통하며, 욕계의 산란심에도 통한다. 왜냐하면 여섯 가지 심소心所51)와 별경別境의 다섯 가지 심소52) 가운데 삼마지가 있는데, 그것 또한 정定이라 하기 때문이다.

(2) 심일경성心一境性과 삼매三昧

둘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과 삼매三昧의 명칭이다. 이 두 가지의 범주가 두 번째로 넓으니, 비록 욕계에는 통하지만 오로지 산란한 마음에는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주삼매般舟三昧53)나 욕계에 결부된 아홉 가지 심주心住54)의 심일경성 역시 욕계의 방편심에 통하기 때문이다.

(3) 삼마희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

셋째는 삼마희다三摩呬多와 정려靜慮이다. 이 두 가지 명칭은 범주가 좁다. 욕계의 마음에는 전혀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오직 경안輕安(몸과 마음이 가뿐한 경지)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만 그 명칭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4)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

넷째는 삼마발제三摩跋提와 사마타奢摩他이다. 이 두 가지의 범주가 가장 좁으니, 선정의 경지 안에서 다시 간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마타는 네 가지 혜행慧行55) 가운데의 심일경성에는 통하지 못하고, 삼마발제는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세 가지 삼마지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삼매에 대한 여덟 가지 명칭의 넓고 좁음은 이와 같이 대략 서술된다.56) 이로써 셋째의 경전의 제목에 대한 해석을 마친다.

제4편 경문의 뜻을 해석함
『금강삼매경』의 처음 「서품」57) 이하는 본문에 해당하는데, 네 번째로 경문을 분과하고 뜻을 해석한다.
경전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서분序分이다.

001_0607_a_01L若由方俗異故不同者不應一處
001_0607_a_02L俱說二名若由傳者前後故異者
001_0607_a_03L應一本有此二名如三摩提及三摩
001_0607_a_04L此由前後傳者不同故其是同
001_0607_a_05L灼然可見三昧之名與三摩提同
001_0607_a_06L在一本何由不異是故當知如前說
001_0607_a_07L
第二明通局者略作四例一者
001_0607_a_08L定與等持二名最寬通漏無漏
001_0607_a_09L通三界及通欲界散亂心中以六位
001_0607_a_10L心所別境五中有三摩地亦名定故
001_0607_a_11L二者心一境性及三昧名此二次
001_0607_a_12L雖通欲界不通一向散亂心中
001_0607_a_13L以般舟三昧或欲界繫九種心住心
001_0607_a_14L一境性亦通欲界方便心故三者
001_0607_a_15L三摩呬多及靜慮名此二是狹
001_0607_a_16L不通於欲界心故唯取輕安所含潤
001_0607_a_17L四者三摩䟦提及奢摩他此二
001_0607_a_18L最狹於定地內有簡別故以奢摩他
001_0607_a_19L不通四種慧行之中心一境性三摩
001_0607_a_20L䟦提不通於空無相無願三三摩
001_0607_a_21L地故八名寬狹粗述如是第三釋
001_0607_a_22L題名訖

001_0607_a_23L
[科文解釋]
1)經序品第一 [1]
001_0607_a_24L自下第四科文解釋文有三分一者

001_0607_b_01L둘째는 「제2 무상법품第二無相法品」 이하 여섯 개의 품58)과 몇몇 경문으로서 곧 정설분正說分이다. 셋째는 「제8 총지품第八總持品」에 들어가서 “그때 여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하의 두 쪽 분량으로 유통분流通分이다.59)

제1장 서분序分
서분에는 두 가지 서序가 들어 있다. 첫째는 통서通序이고, 둘째는 별서別序이다.60)

1. 통서通序
다음과 같이 저는 들었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대성의 기사굴산에서 대비구중 일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터득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사리불·대목건련·수보리 등 아라한이었다. 또한 보살마하살 이천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이름은 해탈보살·심왕보살·무주보살 등의 보살이었다. 또한 장자 팔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이름은 범행장자·대범행장자·수제장자 등의 장자였다. 또한 천룡·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 등 육십만억이 있었다.

통서通序에는 육사六事61)가 갖추어져 있다. 이 육사 가운데 앞의 세 가지는 부처님으로부터 친히 전승했음을 설명하는 것이고, 뒤의 세 가지는 대사大師62)의 설법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가운데 첫째는 여시如是(信成就)이고, 둘째는 아문我聞(聞成就)이며, 셋째는 일시一時(時成就)이다. 뒤의 세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교주敎主(主成就로서 부처님)이고, 둘째는 주처住處(處成就로서 왕사대성의 기사굴산)이며, 셋째는 도중徒衆(衆成就로서 성문·보살·장자·팔부신중 등)이다. 이 셋째의 도중徒衆에도 차례로 네 부류의 무리(衆)가 있다. 곧 첫째는 성문중이고, 둘째는 보살중이며, 셋째는 장자중이고, 넷째는 잡류중이다.63)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일반적인 설명과 같다.

2. 별서別序
그때 존자께서 대중에 둘러싸여 모든 대중에게 대승경전을 설하였다. 그 경전의 명칭은 일미一味·진실眞實·무상無相·무생無生·결정決定·실제實際·본각本覺·이행利行이었다.

001_0607_b_01L序分二者第二品下六品餘文
001_0607_b_02L正說分三者入摠持品爾時如來
001_0607_b_03L而告衆言已下二紙許文是流通分

001_0607_b_04L
序分
之內有二種序謂通與別

001_0607_b_05L
통서通序
2)如是我聞一時佛在王舍大城耆闍
001_0607_b_06L崛山中與大比丘衆一萬人俱皆得阿
001_0607_b_07L羅漢道其名曰舍利弗大目犍連
001_0607_b_08L菩提如是衆等阿羅漢復有菩薩摩訶
001_0607_b_09L薩二千人俱其名曰解脫菩薩心王
001_0607_b_10L菩薩無住菩薩如是等菩薩復有長
001_0607_b_11L者八萬人俱其名曰梵行長者大梵
001_0607_b_12L行長者樹提長者如是等長者復有
001_0607_b_13L夜叉乾闥婆阿脩羅迦樓羅
001_0607_b_14L緊那羅摩睺羅伽人非人等六十萬
001_0607_b_15L [2]

001_0607_b_16L
通序之中卽有六事前三明親承
001_0607_b_17L之傳後三證大師之說言前三者
001_0607_b_18L一如是二我聞三一時後三是何
001_0607_b_19L一敎主二住處三徒衆徒衆之內
001_0607_b_20L序四類衆一聲聞衆二菩薩衆
001_0607_b_21L長者衆四雜類衆於中委悉如常
001_0607_b_22L所說

001_0607_b_23L
[別序]
3) [3] 尊者一本作
世尊
大衆
[2] 圍繞爲諸大
001_0607_b_24L衆說大乘經名一味眞實無相無生

001_0607_c_01L만약 이 경전을 듣고 내지 하나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受) 지닌다(持)면 그 사람은 곧 부처님 지혜의 경지(佛智地)에 들어가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일체중생의 대선지식이 될 것이다.

이하는 별서이다. 여기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위의를 드러낸 부분(威儀分)이고, 둘째는 경전을 설하는 부분(說經分)이며, 셋째는 선정에 드는 부분(入定分)이고, 넷째는 중송重頌으로 설법을 드러내는 부분(重頌分)이다.

1) 위의를 드러내는 부분(威儀分)
첫째, 위의를 드러낸 부분은 경문의 “그때 존자께서 대중에 둘러싸여”에 해당한다.

2) 경전을 설하는 부분(說經分)
둘째, 경전을 설하는 부분은 경문의 “모든 대중에게 대승경전을 설하였다.”에 해당한다.

이 경문의 형세는 『법화경』의 서분과 비슷하다. 『법화경』에서 “그때 세존께서 사부대중에 둘러싸여 『무량의경』이라는 대승경전을 설하셨다.”64)고 하였다. 저 『법화경론』에서는 『무량의경』이라는 경명을 『법화경』의 다른 제목이라고 판별하였다.65) 곧 이것에 대하여 천친天親은 정설분正說分 이전의 설명으로 보았기 때문에 서분으로 간주한 것이다.66)
그러나 지금 이 경문의 형세를 보면, 모두 경전의 서序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에 의거하면 분명히 이것은 별도의 경전이다. 앞서 일미一味 등의 경을 자세히 설하고 나서 잠시 입정入定하였다가 출정出定한 뒤 『금강삼매경』을 설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경전의 종지를 설한 후에 그 경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이행의 명칭들은 『금강삼매경』에 앞서 자세히 설하신 경의 제목임을 알아야 한다.67)
이와 같이 두 경전68)은 대의는 비록 같을지라도 경문의 모습은 다르다. 전자는 자세하게 설한 법문으로 당시에 이익을 준 것이고, 후자는 간략하게 요약한 법문으로 말법세상末法世上에 이익을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자세히 설하신 것이 경을 요약해 다시 설하게 된 연유가 된다.
이 경전을 설하는 부분(經說分)의 경문도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001_0607_c_01L實際本覺利行若聞是經乃至受持
001_0607_c_02L一四句偈是人卽爲入佛智地能以
001_0607_c_03L方便敎化衆生爲一切生一本作
衆生
[3] 作大
001_0607_c_04L知識

001_0607_c_05L
4) [4] 下第二別序卽有四分一威儀
001_0607_c_06L二說經分三入定分四重頌分

001_0607_c_07L
威儀分者如經爾時尊者大衆圍繞
001_0607_c_08L
說經分者如經爲諸大衆說大乘
001_0607_c_09L經等故此經文勢似法華序如彼
001_0607_c_10L文言爾時世尊四衆圍繞說大乘經
001_0607_c_11L名無量義如彼論中判此經名
001_0607_c_12L爲法華經之異目彼意以爲在前說
001_0607_c_13L故名爲序分今看此經文勢皆是
001_0607_c_14L經家序辭以是准之應是別經
001_0607_c_15L前廣說說已入定從定起已方說
001_0607_c_16L金剛三昧經也說經宗後乃說經名
001_0607_c_17L當知一味眞實等名是前所說廣經
001_0607_c_18L之目如是二經大意雖同文相卽異
001_0607_c_19L前所說者廣說法門爲益當時
001_0607_c_20L所說者略攝法門爲利末世是故
001_0607_c_21L在前廣說以爲略經緣由此說經分
001_0607_c_22L

001_0608_a_01L먼저 경전의 명칭을 서술하고, 나중에 경전의 공덕을 찬탄한다. “만약 이 경전을 듣고 내지……”69)가 경전의 공덕을 찬탄하는 부분이다.

3) 선정에 드는 부분(入定分)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을 설하시고 나서 결가부좌하여 곧 금강삼매에 들어가니 몸과 마음이 부동하였다.

이 부분은 셋째, 선정에 드는 부분이다. 경전을 설하기 전에 먼저 반드시 입정하는 것은 오직 적정자寂靜者만이 법을 깨치고 법을 설할 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한 성현의 침묵과 성현의 설법은 수시로 작용하여 서로 무관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4) 중송重頌으로 설법을 드러내는 부분(重頌分)
이 부분은 넷째인 중송으로 설법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이전에 설한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이행 등의 경이 나중에 설하는 『금강삼매경』의 대의와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게송으로 이전에 자세하게 설한 경전을 요약한 부분이다. 이로써 간략하게 설하는 경70)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중송의 경문에는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중송의 발기에 대한 설명이고, 둘째는 중송의 내용이다.

(1) 중송의 발기에 대하여 설명함

그때 대중 가운데 이름이 아가타라는 한 비구가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71)로 경전의 뜻을 펴려고 게송을 설하여 말씀드렸다.

이는 경문의 서序로서 뒤의 중송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아가타”는 번역하면 없앤다(無去) 혹은 소멸시킨다(滅去)는 말인데, 약藥의 명칭이다. 모든 병을 다 없애 주기 때문에 무거無去라고 한다. 아가타보살 역시 중생의 모든 번뇌와 병을 치료하기 때문에 약의 이름으로 그 명칭을 삼았다.

(2) 중송의 내용

여덟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일곱 게송은 설하신 경에 대해 읊은 것이고, 마지막 한 게송은 삼매에 들어가신 것에 대해 읊은 것이다.

① 설한 경에 대하여 읊음

일곱 게송은 또 둘로 나뉜다. 앞의 세 게송은 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뒤의 네 게송은 개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가. 총론적으로 설명함


大慈滿足尊    대자대비를 만족한 세존께서는
智慧通無碍    지혜에도 통달하여 걸림이 없네
廣度衆生故    널리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說於一諦義    일실제의 도리를 설해 주셨다네

皆以一味道    모든 도리는 오로지 일미일 뿐으로
終不以小乘    끝끝내 소승의 도리가 아니라네
所說義味處    말씀하신 평등과 일미의 도리는
皆悉離不實    모두 다 진실 아닌 것이 없다네

入諸佛智地    일체제불이 터득한 지혜 경계인

001_0608_a_01L文相有二先序經名後歎經德
001_0608_a_02L聞已下是第二分

001_0608_a_03L
[入定分]佛說此經已結跏趺坐卽入金剛三昧
001_0608_a_04L身心不動

001_0608_a_05L
是第三入定分所以欲說經前先須
001_0608_a_06L入定者爲顯唯寂靜者於法能覺能
001_0608_a_07L說故又復爲顯賢聖默然賢聖說法
001_0608_a_08L隨時而用不相離故

001_0608_a_09L
爾時衆中有一比丘名阿伽陁從座
001_0608_a_10L而起合掌胡跪欲宣此義而說偈言

001_0608_a_11L
是第四重頌分爲顯前說一味之經
001_0608_a_12L與後所說大意不殊故以略偈頌前
001_0608_a_13L廣經因此發起後略說經故文卽
001_0608_a_14L有二先序後頌是經家序以發後頌
001_0608_a_15L阿伽陀者此云無去或言滅去
001_0608_a_16L是藥名能令諸病皆悉滅盡故名
001_0608_a_17L無去此菩薩亦如是能治衆生諸
001_0608_a_18L煩惱病故以藥名爲其目也八行頌
001_0608_a_19L中卽有二分前七頌頌說經後一
001_0608_a_20L頌入定初中亦二三頌摠明
001_0608_a_21L頌別顯

001_0608_a_22L
大慈滿足尊智慧通無碍廣度衆生故
001_0608_a_23L說於一諦義皆以一味道終不以小乘
001_0608_a_24L所說義味處皆悉離不實入諸佛 [4] 智地

001_0608_b_01L決定眞實際    궁극의 제일 실제에 들어갔으니
聞者皆出世    그 법을 듣는 자 모두 출세하고
無有不解脫    해탈 얻지 못한 자 아무도 없네72)

총론적으로 설명한 세 게송에 네 가지 뜻이 있다.

가) 능설能說의 덕을 찬탄함

첫째, “대자대비를 만족한 세존께서는지혜에도 통달하여 걸림이 없네.”라는 두 구는 능설能說의 덕을 찬탄하였다.

나) 능전能詮의 교를 찬탄함

둘째, “널리 중생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일실제의 도리를 설해 주셨다네. 모든 도리는 오로지 일미일 뿐으로 끝끝내 소승의 도리가 아니라네.”라는 게송은 능전能詮의 교를 찬탄하였다.

다) 소전所詮의 뜻을 찬탄함

셋째, “말씀하신 평등과 일미의 도리는 모두 다 진실 아닌 것이 없다네. 일체제불이 터득한 지혜 경계인 궁극의 제일 실제에 들어갔으니”라는 게송은 소전所詮의 뜻을 찬탄하였다.

라) 설교에 탁월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함

넷째, “그 법을 듣는 자 모두 출세하고 해탈 얻지 못한 자 아무도 없네.”의 두 구는 설교에 탁월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하였다.

둘째에서 말한 “일실제의 도리”란 일심이다. 일심법에 두 종류의 문이 있다. 두 가지 문이 의거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진실일 뿐이므로 일실제라고 한다. “일미의 도리”도 오직 일승일 뿐이다. 그 밖의 내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개별적으로 드러냄

이하의 네 게송은 개별적으로 문답을 찬탄한 것이다.

가) 질문이 넓고 깊음을 찬탄함


無量諸菩薩    한량이 없는 모든 보살마하살도
皆悉度衆生    그처럼 모두 중생을 제도하려고
爲衆廣深問    중생 위해 넓고 심오한 질문 하여
知法寂滅相    제법의 적멸한 모습을 알려 주어
入於決定處    궁극적인 도리에 들도록 하였네

이 다섯 구는 넓고 깊은 질문으로 적멸을 알려 주어 실제에 들도록 한 것을 찬탄하였다.

나) 부처님 답변에 탁월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함


如來智方便    여래가 사용하는 지혜와 방편은
當爲入實說    마땅히 실제에 드는 설법이라네
隨順皆一乘    그러므로 모두 일승법만 수순하여
無有諸雜味    그 밖의 뒤섞인 맛 전혀 없다네

猶如一雨潤    같은 구름에서 뿌리는 비이건만
衆草皆悉榮    갖가지 초목이 제각각 무성하네

隨其性各異    모든 성품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一味之法潤    일미의 법으로 똑같이 적셔 주어
普充於一切    빠짐없이 일체를 덮어 주는 것이
如彼一雨潤    마찬가지로 똑같은 비 맞았건만
皆長菩提芽    죄다 보리의 새싹을 길러 준다네

이 부분은 두 번째로 부처님 답변에 탁월한 이익이 있음을 찬탄하였다. 여기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법法이고, 둘째는 비유(喩)이며, 셋째는 합合이다.
순서대로 말하면 “여래가 사용하는 지혜와 방편은 마땅히 실제에 드는 설법이라네. 그러므로 모두 일승법만 수순하여 그 밖의 뒤섞인 맛 전혀 없다네.”의 네 구는 법이고, “같은 구름에서 뿌리는 비이건만 갖가지 초목이 제각각 무성하네.”의 두 구는 비유이고, “모든 성품마다 제각기 다르지만 일미의 법으로 똑같이 적셔 주어 빠짐없이 일체를 덮어 주는 것이 마찬가지로 똑같은 비 맞았건만 죄다 보리의 새싹을 길러 준다네.”의 다섯 구는 합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② 삼매에 들어감을 읊음


入於金剛味    금강과 같은 일미법에 들어가서
證法眞實定    법을 깨치니 진실한 삼매였다네
決定斷疑悔    의심과 미련을 영원히 단절하여
一法之印成    일법의 도장을 완전히 성취했네

이는 둘째73) 삼매에 들어가신 것에 대해 읊은 것이다.

가. 앞에서 선정에 듦을 그대로 읊음

앞의 두 구 “금강과 같은 일미법에 들어가서 법을 깨치니 진실한 삼매였다네.”는 앞서 선정에 들어가신 것을 곧장 읊은 것이다.

나. 이후에 시작될 설법을 미리 읊음

뒤의 두 구 “의심과 미련을 영원히 단절하여 일법의 도장을 완전히 성취했네.”는 이후에 시작될 설법에 대해 미리 읊은 것이다.74) 이후에 설해질 가르침에는 두 가지의 탁월한 효능이 있다.


001_0608_b_01L決定眞實際聞者皆出世無有不解
001_0608_b_02L

001_0608_b_03L
摠明三頌卽有四意一者二句歎
001_0608_b_04L能說德二者一頌歎能詮敎三者一
001_0608_b_05L頌歎所詮義四者二句歎敎勝利
001_0608_b_06L第二中言一諦義者所謂一心依一
001_0608_b_07L心法有二種門二門所依唯是一
001_0608_b_08L實故名一諦一味道者唯一乘故
001_0608_b_09L餘文可知

001_0608_b_10L
無量諸菩薩皆悉度衆生爲衆廣深問
001_0608_b_11L知法寂滅相入於決定處

001_0608_b_12L
此下四頌別歎間答此五句者
001_0608_b_13L問廣深令知寂滅入實際故

001_0608_b_14L
如來智方便當爲入實說隨順皆一乘
001_0608_b_15L無有諸雜味猶如一雨潤衆草皆悉榮
001_0608_b_16L隨其性各異一味之法潤普充於一切
001_0608_b_17L如彼一雨潤皆長菩提芽

001_0608_b_18L
是第二歎佛答勝利於中有三謂法
001_0608_b_19L喩合如其次第四句二句五句
001_0608_b_20L應知

001_0608_b_21L
入於金剛味一本
作昧
[5] 證法眞實定決定斷
001_0608_b_22L疑悔一法之印成

001_0608_b_23L
此第二頌入定上半正頌在前入定
001_0608_b_24L下半逆頌後起說法後所說敎有二

001_0608_c_01L
가) 영원히 의심과 미련을 단절함

첫째는 금강이 무엇이든지 파괴하듯이 영원히 의심과 미련을 단절한다.

나) 일승의 도장을 성취함

둘째는 무엇에도 파괴되지 않는 금강과 같은 일승의 도장을 성취한다.

뒤의 두 구는 능파能破와 불괴不壞라는 금강의 두 가지 뜻을 드러낸 것이다.
이상으로 경문의 서분에 대한 논의를 마친다.

제2장 정설분
정설분의 경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여섯 품은 개별적으로 관행觀行을 드러낸 부분이고, 마지막 「총지품」은 총체적으로 모든 의심을 제거한 부분이다.

1. 개별적으로 관행을 드러냄
개별적으로 드러낸 부분에 다음과 같이 여섯 개의 품이 있다.
첫째는 「무상법품無相法品」으로 분별상이 없는 관찰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는 「무생행품無生行品」으로 무생無生과 무생을 터득하는 행行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는 「본각리품本覺利品」으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입실제품入實際品」으로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섯째는 「진성공품眞性空品」으로 일체행이 진성과 진공에서 나왔음을 변별한 것이다.
여섯째는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 무량한 법문이 여래장에 들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여섯 품은 관행을 두루 다 갖춘 것이다. 왜냐하면 무릇 망상이 무시이래로 유전流轉하는 것은 단지 형상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번뇌 때문이다. 이제 유전을 거슬러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먼저 모든 분별상을 없애야만 한다. 그러므로 첫째로 분별상이 없는 법을 관찰할 것을 설명하였다.
비록 모든 분별상을 없앴다 하더라도 만약 관찰하는 마음이 남아 있으면 그 관찰하는 마음이 발생하기 때문에 오히려 본각을 모르게 된다. 따라서 관찰하는 마음이 발생하는 것도 없앤다. 이런 까닭에 둘째로 무생과 그 행을 드러내었다.
그 행이 무생이어야 바야흐로 본각을 알게 된다.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본각의 이익을 터득하게 하려고 셋째로 본각리문을 밝혔다.
만약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이 곧 허상으로부터 실제에 들어가는 까닭에 넷째로 입실제에 대하여 밝혔다.
내행內行에는 곧 무상법과 무생행이 해당하고, 외화外化에는 곧 본각리와 입실제가 해당한다. 이처럼 내행과 외화의 두 가지 수행의 방식(二利)으로 만행을 갖추는 것은 동일하게 진성에서 나오고 모두 진공에 따른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다섯째로 진성과 진공을 밝혔다.
이처럼 진성에 의하여 그 만행이 갖추어져야 여래장 곧 일미의 근원에 들어가는 까닭에 여섯째로 여래장을 드러내었다.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면 무소위無所爲의 경지가 되고,

001_0608_c_01L勝能一決斷疑悔如金剛能破
001_0608_c_02L印成一乘如金剛不壞下半二句
001_0608_c_03L顯此二義序分文竟

001_0608_c_04L
正說之中
大分爲二謂前六品別
001_0608_c_05L顯觀行摠持一品摠遣疑情
別顯
001_0608_c_06L之中
卽爲六分一無相法品明無
001_0608_c_07L相觀二無生行品顯無生行三本
001_0608_c_08L覺刹品依本利物四入實際品從虛
001_0608_c_09L入實五眞性空品辨一切行出眞性
001_0608_c_10L六如來藏品顯無量門入如來藏
001_0608_c_11L如是六門觀行周盡所以然者
001_0608_c_12L諸妄想無始流轉只由取相分別之
001_0608_c_13L今欲反流歸源先須破遣諸相
001_0608_c_14L所以初明觀無相法雖遣諸相若存
001_0608_c_15L觀心觀心猶生不會本覺故泯生
001_0608_c_16L所以第二顯無生行行旣無生
001_0608_c_17L方會本覺依此化物令得本利
001_0608_c_18L第三明本覺利門若依本覺以利衆
001_0608_c_19L衆生卽能從虛入實所以第四明
001_0608_c_20L入實際內行卽無相無生外化卽本
001_0608_c_21L利入實如是二利以具萬行同出
001_0608_c_22L眞性皆順眞空是故第五明眞性空
001_0608_c_23L依此眞性萬行斯備入如來藏一味
001_0608_c_24L之源所以第六顯如來藏旣歸心源

001_0609_a_01L무소위의 경지이기 때문에 하지 못할 것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 품을 설하여 대승을 섭수하였다.

또한 이 여섯 품에는 그 밖의 뜻도 들어 있다.
첫째의 「무상법품」은 관찰되는 법(所觀法)을 보인 것이다. 이 법은 일심으로서 여래장의 본체이다.
둘째의 「무생행품」은 관찰하는 주체의 행(能觀行)을 밝힌 것이다. 이 무생행은 분별없이 관찰하는 여섯 가지 수행(六行)75)이다.
셋째의 「본각리품」은 일심의 생멸문生滅門을 드러낸 것이다.
넷째의 「입실제품」은 일심의 진여문眞如門을 드러낸 것이다.
다섯째의 「진성공품」은 진眞과 속俗을 모두 없앴으면서도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버리지도 않은 것이다.
여섯째의 「여래장품」은 모든 품을 두루 거두어 그것이 일미임을 보인 것이다. 이처럼 이중구조의 여섯 품으로 대승의 뜻을 남김없이 섭수하였다.

또한 이 여섯 품을 합하면 삼문이 된다.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관행의 처음과 끝을 섭수한 것이고, 「본각리품」과 「입실제품」은 교화의 근본과 지말이며, 「진성공품」과 「여래장품」은 인因을 섭수하여 과果를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형상을 없애고 본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본각리품」과 「입실제품」은 본각으로부터 행을 일으키는 것이며, 「진성공품」과 「여래장품」은 본각으로 돌아가는 것과 본각으로부터 일으키는 것을 싸잡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이중구조의 삼문으로 대승을 남김없이 섭수하였다.

또한 이 여섯 품은 단지 이문二門일 뿐이다.
첫째의 이문이란 분별상(相)과 분단생(生)을 모두 없애는 것76)은 곧 본각리문이고, 입실제와 진성공은 곧 여래장문이다.
둘째의 이문이란 분별상과 분단생을 모두 없애는 본각리문은 허망을 없애는 것으로 인을 드러낸 문이고, 입실제와 진성공의 여래장문은 진여를 드러내어 과를 성취하는 문이다. 이처럼 두 가지의 이문도 역시 대승을 남김없이 섭수하였다.
또한 이 여섯 가지 품은 오직 일미일 뿐이다. 왜냐하면 분별상(相)과 분단생(生)에는 성품(性)이 없고, 본각에는 근본(本)이 없으며, 실제에는 끝(際)이 없고, 진성도 역시 공인데 무엇을 말미암아 여래장의 성품이 있겠는가. 그래서 「여래장품」에서는 “여래장식은 항상 적멸하다. 적멸 또한 적멸하다.”고 말하고, 「총지품」에서는 “제7식과 제5식은 불생이고, 제8식과 제6식은 적멸하며, 구상九相(제9식을 가리킴)은 공무空無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무소득無所得의 일미야말로 바로 『금강삼매경』의 종지(宗)이고 요지(要)이다.

001_0609_a_01L卽無所爲無所爲故無所不爲
001_0609_a_02L說六門以攝大乘又此六品亦有
001_0609_a_03L異意謂初品示所觀之法法謂一
001_0609_a_04L心如來藏體第二品明能觀之行
001_0609_a_05L行謂六行無分別觀第三本覺利品
001_0609_a_06L顯一心中之生滅門第四入實際品
001_0609_a_07L顯一心中之眞如門第五眞性空品
001_0609_a_08L雙遣眞俗不壞二諦第六如來藏品
001_0609_a_09L遍收諸門同示一味以此二重六門
001_0609_a_10L攝大乘義周盡又此六品合爲三門
001_0609_a_11L前二品攝觀行始終次二品者敎
001_0609_a_12L化本末其後二門攝因成果又前
001_0609_a_13L二品遣相歸本中間二品從本起
001_0609_a_14L後二品者雙顯歸起以此二三
001_0609_a_15L攝大乘盡又此六品只是二門
001_0609_a_16L生都泯是本覺利實際眞空是如來
001_0609_a_17L又前門者遣妄顯因其後門者
001_0609_a_18L顯眞成果如是二二之門亦攝大乘
001_0609_a_19L周盡又此六品唯是一味所以然
001_0609_a_20L相生無性本覺無本實際離際
001_0609_a_21L眞性亦空何由得有如來藏性如下
001_0609_a_22L如來藏品中言是識常寂滅寂滅亦
001_0609_a_23L寂滅摠持品言七五不生八六寂
001_0609_a_24L九相空無如是無所得之一味

001_0609_b_01L무릇 무소득이기 때문에 터득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래서 제문諸門(『금강삼매경』의 정설분에 속하는 여섯 품)으로 전개하지 못할 것도 없으므로 한량이 없는 뜻(無量義)의 종지를 일으킨 것이다. 비록 일미이지만 여섯 문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여섯 부분에 의거하여 경문을 나누어 해석하였다.

1) 「무상법품無相法品」

먼저 품명을 해석한다. 무상無相이란 무상관無相觀77)이니, 모든 형상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법法이란 관찰되는 법(所觀法)이니, 일심법이다. 무상관이란 앞서 언급한 여섯 부분 중 제1분의 뜻이고, 소관법이란 뒤에 언급한 여섯 문 중 제1문의 법이다.78) 이제 이 「무상법품」에서는 무상과 법의 두 가지 뜻을 드러냈기 때문에 「무상법품」이라 말하였다.
「무상법품」의 경문을 분과하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삼매로부터 나오는 부분(出定分)이고, 둘째는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起說分)이며, 셋째는 법문을 들은 청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得益分)이다.
첫째의 출정분出定分과 셋째의 득익분得益分은 경문(經家)의 서序에 해당하고, 둘째의 기설분起說分은 본격적인 부처님의 말씀이다.

(1) 출정분出定分

그때 존자께서 삼매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출정분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성취를 드러낸다.

① 설법의 시성취

첫째는 설법의 시성취로서 경문의 “그때”에 해당한다.

② 설법의 주성취

둘째는 설법의 주성취로서 경문의 “존자께서”에 해당한다. 다섯 가지 신통을 구비하고 세간의 존중을 받으며 심심한 법을 진여의 뜻대로 설하기 때문에 세존이라 칭한다.

③ 자재성취

셋째는 자재성취로서 경문의 “삼매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에 해당한다. 그것은 곧 여래가 삼매에 들어가면(入定) 누구도 깨울 수가 없고, 삼매에 머물러 있음(住定)과 삼매에서 나옴(出定)에 자재하기 때문이다.

(2) 기설분起說分

“제불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의 상에 들어간 것으로 결정성이기 때문이다.79)

이하는 둘째 본격적으로 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문(長行)이고, 둘째는 중송重頌이다.

① 산문(長行)

산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略標分)이고, 둘째는 자세하게 설명한 부분(廣說分)이다.

가.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略標分)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에서는 두 가지 뜻을 보였다.

001_0609_b_01L正爲此經之宗之要但以無所得
001_0609_b_02L無所不得所以諸門無所不開故
001_0609_b_03L作無量義之宗也雖是一味而開六
001_0609_b_04L門故依六分科文而釋先釋品名
001_0609_b_05L無相者謂無相觀破諸相故次言
001_0609_b_06L法者謂所觀法一心法故無相觀
001_0609_b_07L先六分中第一分義所觀法者
001_0609_b_08L後六門內第一門法今此初品顯是
001_0609_b_09L二義以之故言無相法品

001_0609_b_10L
1)無相法品第二 [5]

001_0609_b_11L
爾時尊者一本作
世尊
[6] 從三昧起而說是言

001_0609_b_12L
此一品文科分爲三分初出定分
001_0609_b_13L次起說分後得益分初後二分是
001_0609_b_14L經家序其第二分正是佛言初分中
001_0609_b_15L顯三種成就一說法時成就如經爾
001_0609_b_16L時故二說法主成就如經尊者故
001_0609_b_17L具五通達爲世所尊於甚深法如義
001_0609_b_18L說故三自在成就如經從三昧起
001_0609_b_19L說是言故如來入定無能驚寤
001_0609_b_20L定住出得自在故

001_0609_b_21L
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故

001_0609_b_22L
此下第二正發言說此中有二一者
001_0609_b_23L長行二者重頌初長行中亦有二
001_0609_b_24L一略標分二廣說分略標分中

001_0609_c_01L첫째는 무상관無相觀을 보였고, 둘째는 소관법所觀法을 보였다.

가) 무상관

무상관에도 두 구가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자신이 무상관에 들어가는 것을 보였고, 둘째는 다른 사람들을 무상관에 들어가게 한 것을 보였다.

(가) 여래가 무상관에 들어감

부처님 자신이 무상관에 들어가는 모습은 경문의 “제불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의 상에 들어간 것으로 결정성이기 때문이다.”에 해당한다.
‘제불의 지혜의 경지’라고 한 것은 곧 이전에 들어갔던 금강삼매와 상응하는 지혜가 일체의 공덕법을 주지住持하기 때문이다.
‘진실한 법의 상에 들어간다.’라고 한 것은, 이 제불의 지혜가 일체의 상을 타파하고 제법의 실상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결정성’이라 한 것은, 제법의 실상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부처님이 계시든 부처님이 계시지 않든 성품이 본래부터 그렇기 때문이다.
이어서 말한 ‘때문이다.’는 결정성으로써 상구上句를 해석했다는 것이다. 만약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면 곧 실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상구上句를 이어받아서 하구下句를 이루는 것이니, 여래가 스스로 제법의 실상에 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분별상이 없는(無相) 이익을 터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나) 다른 사람을 무상관에 들어가게 함

방편과 신통은 모두 분별상이 없는 이익이다.

이는 둘째 구절로, 다른 사람들을 무상관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방편”은 팔상八相80)의 방편이다. 말하자면 도솔천에서 내려온 것으로부터 내지 열반에 든 것을 가리킨다.
“신통”은 여섯 가지 신통이다. 말하자면 삼륜三輪81)으로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모두 분별상이 없는 이익”이란 이처럼 팔상의 방편과 여섯 가지 신통은 모두 여래 자신이 실상에 들어간 것으로부터 일어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분별상이 없는 이익을 터득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위에서 말한 무상관을 보인다는 것에 대하여 마친다.

나) 소관법

일각一覺과 요의了義는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승의 지견으로 들어갈 바가 아니다. 오직 불·보살만이 그 경계를 알아

이하는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 가운데서 둘째로 소관법을 보인 부분이다. 여기에도 또 두 구절이 있다.

001_0609_c_01L標二種義初標無相觀後標所觀法
001_0609_c_02L無相觀中有其二句先標如來自入
001_0609_c_03L無相觀後標令他入無相觀言自入
001_0609_c_04L如經諸佛智地入實法相決定性
001_0609_c_05L諸佛智地者謂如前所入金剛三
001_0609_c_06L昧相應之智住持一切功德法故
001_0609_c_07L實法相者謂此佛智破一切相通
001_0609_c_08L達諸法之實相故決定性者是實法
001_0609_c_09L非佛所作有佛無佛性自爾故
001_0609_c_10L次言故者以決定性釋成上句
001_0609_c_11L不決定卽非實相故又攝上句而成
001_0609_c_12L下句如來自入實法相故故能令他
001_0609_c_13L得無相利也

001_0609_c_14L
方便神通皆無相利

001_0609_c_15L
此第二句令他得入言方便者八
001_0609_c_16L相方便謂從兜率天退乃至入涅槃
001_0609_c_17L神通者六神通卽爲三輪化衆
001_0609_c_18L生故皆無相利者如是八六方便神
001_0609_c_19L通皆從自入實相而起能令他得無
001_0609_c_20L相利故標無相觀竟在於前

001_0609_c_21L
一覺了義難解難入非諸二乘之所知
001_0609_c_22L唯佛菩薩乃能知之

001_0609_c_23L
此下第二標所觀法亦有二句一者
001_0609_c_24L

001_0610_a_01L첫째는 소관법이 심오함을 보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그 심오한 법을 설한다.

(가) 소관법이 심오함을 보임

“일각과 요의”는 일심과 본각과 여래장의 뜻으로서, 결코 이것을 능가하는 다른 심오한 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뜻이 너무 심오하여 모든 이승이 지견知見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은 체體가 깊고 깊어 오직 불·보살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구後句로써 전구前句를 해석한 것이니, 처음 부분에서 드러낸 “제불의 지혜로 들어간 진실한 법의 상”이 곧 일심과 본각과 여래장법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이는 『능가경』에서 “적멸이란 일심을 가리키고, 일심이란 여래장을 가리킨다.”82)고 한 것과 같다. 지금 이 경문에서 말한 “진실한 법의 상”은 적멸의 뜻이고, 일각과 요의는 일심과 여래장의 뜻이다. 『법화론』에서는 “제불여래는 저 법이 구경이고 실상임을 안다. 실상이란 여래장과 법신의 체가 불변의 뜻임을 말한다.”83)고 하였다. 지금 이 경문에서 말한 “일각”은 일체의 제법은 오직 일심일 뿐이고, 일체의 중생은 곧 일심의 본각(一本覺)이라는 뜻이다. 이로 말미암아 일각一覺이라 말한 것이다.
이하의 해당 부분에서 다시 자세하게 분별한다.

(나) 다른 사람에게 소관법이 심오함을 설함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법을 설하였다.”

이 대목은 중생을 위하여 모두 깊은 법을 설했음을 설명한 것이다.
“제도할 수 있는 중생”이라는 것은 여래께서 교화하는 일체중생은 일심의 유전流轉이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일미법을 설하였다.”는 것은 여래께서 설한 일체교법은 일심과 본각과 일미에 들어가도록 함을 가리킨다. 곧 일체중생은 본래 일심과 본각이건만, 단지 무명으로 말미암아 환상을 따라 유전할 뿐이므로 모두 여래의 일미의 설법을 좇아 마침내 모두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음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경우에 무소득이기 때문에 일미라고 하니, 이는 바로 일승一乘이다.

001_0610_a_01L直標所觀法深二者爲他說是深法
001_0610_a_02L一覺了義者一心本覺如來藏義
001_0610_a_03L是永無餘深法故難解者義甚深
001_0610_a_04L非諸二乘所知見故難入者軆甚深
001_0610_a_05L唯佛菩薩乃能入故卽以後句而釋
001_0610_a_06L前句欲明初門所標佛智所入實法
001_0610_a_07L相者直是一心本覺如來藏法如楞
001_0610_a_08L伽經言寂滅者名爲一心一心者名
001_0610_a_09L如來藏今此文言實法相者是寂滅
001_0610_a_10L一覺了義者卽是一心如來藏
001_0610_a_11L法華論云諸佛如來能知彼法
001_0610_a_12L究竟實相言實相者謂如來藏法身
001_0610_a_13L之軆不變義故今此經言一覺者
001_0610_a_14L切諸法唯是一心一切衆生是一
001_0610_a_15L本覺由是義故名爲一覺至下演
001_0610_a_16L中當更分別

001_0610_a_17L
可度衆生皆說一味

001_0610_a_18L
此明爲他皆說深法可度衆生者
001_0610_a_19L來所化一切衆生莫非一心之流轉
001_0610_a_20L皆說一味者如來所說一切敎法
001_0610_a_21L無不令入一覺味故欲明一切衆生
001_0610_a_22L本來一覺但由無明隨夢流轉皆從
001_0610_a_23L如來一味之說無不終歸一心之源
001_0610_a_24L歸心源時皆無所得故言一味

001_0610_b_01L
이로써 위에서 말한 첫째의 간략하게 설명한 부분의 경문을 마친다.

나. 자세하게 설명한 부분(廣說分)

그때 해탈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이하는 산문 가운데 둘째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법을 청하는 것이고, 둘째는 설법하는 것이다.

가) 설법을 청함

설법을 청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청하는 사람의 위의를 서술하고, 둘째는 청하는 말을 밝힌다.

(가) 설법을 청하는 사람의 위의

위의를 서술함에도 두 부분이 있다.

㉮ 때에 의거하여 사람을 나타냄

첫째는 청하는 때에 의거하여 청하는 사람을 나타낸다.
“해탈보살”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똑같이 해탈하도록 하려는 까닭에 질문자에 의탁하여 설해질 법을 내보인 것이다.

㉯ 예의를 서술함

둘째는 예의를 서술한다.
경문에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합장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나) 설법을 청하는 말

이하는 둘째로 설법을 청하는 말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법이 해당되는 시절을 들고, 둘째는 해당하는 시절의 중생에게 설법해 주길 청한다.

㉮ 설법이 해당되는 시절

“존자이시여, 만약 부처님께서 입멸하신다면 이후에는 정법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상법이 세상에 머무를 것이며, 말법시대가 되면 오탁악세84)의 중생이 갖가지 악업으로 삼계에 윤회하여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먼저 “상법이 세상에 머무를 것이며, 말법시대가 되면 오탁악세의 중생이 갖가지 악업으로 삼계에 윤회하여 벗어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것은 이전에 널리 설해진 경전은 정법시절에 중생에게 이익을 주었음에 비하여 지금 『금강삼매경』은 상법시절에 중생을 교화하기 위함임을 가리킨다. 곧 시절에 따라서 시설된 설법의 깊고 얕음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 중생에게 설법해 주길 청함

바라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후세의 중생을 위하여 일미·결정·진실의 법을 널리 설하여 그들 중생이 함께 해탈하도록 해 주십시오.”

이 대목에서는 둘째로 설법해 주길 본격적으로 청한다.
“일미의 법을 널리 설한다.”는 것은 일각과 요의의 일미법을 설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결정·진실의 법을 설한다.”는 것은 진실한 법의 상에 들어가는 관찰법을 설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들 중생이 함께 해탈하도록 해 주십시오.”란 저 상법시대와 말법시대의 중생으로 하여금 함께 일미법으로 구경에 해탈토록 해 달라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말하자면 가르침에 네 구절이 있다.
첫째는 정법시절의 중생을 바르게 교화하고 아울러 말법시절의 중생도 이익토록 한다.

001_0610_b_01L是一乘初略標文竟在於前

001_0610_b_02L
爾時解脫菩薩卽從座起合掌胡跪
001_0610_b_03L而白佛言

001_0610_b_04L
此下第二廣說於中有二先請後說
001_0610_b_05L請中有二先序人儀後明發言
001_0610_b_06L有二句一依時表人解脫菩薩者
001_0610_b_07L令諸衆生同一解脫故寄能問人
001_0610_b_08L表所說法故二序禮儀如經卽從座
001_0610_b_09L起等故

001_0610_b_10L
尊者若佛滅後正法去世像法住世
001_0610_b_11L於末劫中五濁衆生多諸惡業輪迴
001_0610_b_12L三界無有出時

001_0610_b_13L
此下第二發言而請於中有二先擧
001_0610_b_14L所爲時節後請爲彼宣說初中像法
001_0610_b_15L住世末劫中者先廣說經爲益正法
001_0610_b_16L之時今此經者爲化像法之節
001_0610_b_17L時厚薄設敎異故

001_0610_b_18L
願佛慈悲爲後衆生 [7] 宣說一味決定眞
001_0610_b_19L令彼衆生等同解脫

001_0610_b_20L
此是第二正請宣說宣說一味者
001_0610_b_21L說一覺了義之味決定眞實者請說
001_0610_b_22L入實法相之觀令彼衆生等同解脫
001_0610_b_23L令彼像法末世衆生等同一味究
001_0610_b_24L竟解脫由是言之敎有四句一正

001_0610_c_01L정법시절의 경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상법시절의 중생을 바르게 교화하고 아울러 정법시절의 중생도 이익토록 한다. 『금강삼매경』 등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정법시절과 말법시절의 중생을 전체적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금강삼매경』 이외의 모든 경전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는 정법시절과 말법시절의 중생을 이익토록 하지 못한다. 위의 첫째와 둘째와 셋째의 가르침을 제외한 그 밖의 가르침이 이에 해당한다.

나) 설법함

이하는 둘째로 여래께서 설법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탈보살의 질문을 칭찬하고 설법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청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설법하는 것이다.

(가) 질문을 칭찬하고 설법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나한테 출세의 인연을 물어서 중생을 교화하고 그들 중생으로 하여금 출세의 과보를 터득하게 하려 하는구나. 이 일대사는 불가사의하니, 곧 대자이고 대비이기 때문이다. 이에 내가 그것을 설하지 않는다면 곧 간탐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은 일심으로 잘 들어라. 그대들에게 설해 주겠다.

첫째로 질문을 칭찬하는 가운데 “출세의 인연”은 실상관에 들어가는 것이고, “출세의 과보”는 일미법을 통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이 일대사”는 무상無上과 같다는 뜻이고, “불가사의”는 언설문자를 벗어나고 사려분별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법화경』의 “제불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하셨다.”85)는 말과 같다. 이에 대하여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일대사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무상無上의 뜻이다. 여래의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제외하고 달리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이다. 곧 『법화경』에서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중생의 지견을 청정케 하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다. 불지견이란 여래께서 증득한 여실지로서 중생의 뜻을 아는 것이다. 둘째는 동일하다(同)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과 부처님은 평등한 법신이다. 이것은 『법화경』에서 “중생에게 불지견을 보여 주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다. 평등한 법신이라 한 까닭은 불성과 법신이 무차별하기 때문이다.

001_0610_c_01L化正法兼利後時謂前經等二正
001_0610_c_02L化像法兼利前時謂此經等三通
001_0610_c_03L化前後謂諸餘經等四不利前後
001_0610_c_04L除上爾所敎

001_0610_c_05L
佛言善男子汝能問我出世之因
001_0610_c_06L化衆生令彼衆生獲得出世之果
001_0610_c_07L一大事不可思議以大慈故以大悲
001_0610_c_08L我若不說卽墮慳貪汝等一心諦
001_0610_c_09L [8] 爲汝宣說

001_0610_c_10L
此下第二如來爲說於中有二一者
001_0610_c_11L讃問許說二者對請宣說讃問中
001_0610_c_12L言出世之因者入實相觀故出世之
001_0610_c_13L果者一味解脫故是一大事者
001_0610_c_14L上同義故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
001_0610_c_15L如法華經言諸佛世尊唯以一大事
001_0610_c_16L因緣故出現於世論者釋言一大事
001_0610_c_17L者依四種義何者爲四一者無上
001_0610_c_18L唯除如來一切智智更無餘事
001_0610_c_19L如經欲開佛知見令衆生知得淸淨
001_0610_c_20L出現於世故佛知見者如來能
001_0610_c_21L證以如實智知彼義故二者同義
001_0610_c_22L諸聲聞辟支佛佛法身平等如經
001_0610_c_23L欲示衆生佛知見故出現於世故
001_0610_c_24L身平等者佛性法身無差別故

001_0611_a_01L셋째는 모른다(不知)는 뜻이다. 모든 성문과 벽지불 등은 그 진실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진실한 도리를 모른다고 한 까닭은 구경에는 오직 일불승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중생에게 불지견을 깨우쳐 주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다. 넷째는 불퇴전지를 증득케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무량한 지업智業을 시현해 주려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견에 들도록 하려는 까닭에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내용을 가리킨다.86)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 말한 일대사에도 또한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무상無上의 뜻이다. 위의 경문에서 말한 “제불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의 상에 들어간 것으로 결정성이기 때문이다.”가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동일하다(同)는 뜻이다. 위의 경문에서 말한 “일각一覺과 요의了義는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모른다(不知)는 뜻이다. 위의 경문에서 말한 “이승의 지견으로 들어갈 바가 아니다.”라는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넷째는 증득토록 한다(令證)는 뜻이다. 위의 경문에서 말한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법을 설하였다.”는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이상으로 질문에 대한 칭찬을 마친다.

둘째로 청을 받아들이는 부분에도 두 구절이 있다. 첫째 구절은 설법하지 않으면 허물이 된다는 것을 역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 구절은 설법할 테니 잘 들으라고 순차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나) 본격적인 설법

선남자여, 만약 중생을 교화하려면 교화한다는 분별상이 없어야 하고 교화하지 않았다는 분별상도 없어야 한다. 그래야 그 교화가 훌륭하다.

이하는 둘째의 본격적으로 설법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하여 자세하게 분별상이 없는 이로움을 설명하고, 둘째는 일각심一覺心을 드러내어 앞서 언급한 일심과 본각의 뜻을 펼친다.

㉮ 무상관을 설명함

무상관에도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직접적으로 관행의 모습을 설하고, 둘째는 문답을 통하여 모든 의심과 힐난(疑難)을 해결한다.

a. 직접적으로 관행의 모습을 설명함

직접적으로 관행의 모습을 설하는 것에도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방편관행을 설명하고, 둘째는 정관행을 설명한다.

a) 방편관행

방편관행에는 네 구절이 있다. 첫째의 1구87)는 교화하는 것을 말하고, 넷째의 1구88)는 교화가 훌륭함을 찬탄하며, 둘째와 셋째의 2구89)는 본격적으로 방편관상을 설명한다.
“교화한다는 분별상이 없어야 한다.”는 둘째 구는 처음 방편관을 닦을 경우부터

001_0611_a_01L者不知義以諸聲聞辟支佛等不能
001_0611_a_02L知彼眞實處故不知眞實處者不知
001_0611_a_03L究竟唯一佛乘故如經欲令衆生悟
001_0611_a_04L佛知見故出現於世故四者令證不
001_0611_a_05L退轉地示現欲與無量智業故
001_0611_a_06L經欲令衆生入佛知見故出現於世
001_0611_a_07L今此文中一大事者亦有四義
001_0611_a_08L一無上義如上文言諸佛智地入實
001_0611_a_09L法相故二者同義如經一覺了義難
001_0611_a_10L解難入故三不知義非諸二乘所知
001_0611_a_11L見故四令證義可度衆生皆說一味
001_0611_a_12L讃問已竟次許說中亦有二句
001_0611_a_13L初句反顯不說有過後句順明誡
001_0611_a_14L聽許說

001_0611_a_15L
善男子若化衆生無生於化不生無
001_0611_a_16L其化大焉

001_0611_a_17L
自此已下正爲宣說於中有二
001_0611_a_18L明無相觀廣明無相利後顯一覺心
001_0611_a_19L廣前一覺義無相觀中亦有二分
001_0611_a_20L一者直說觀行之相二者往復決
001_0611_a_21L諸疑難初中亦二先方便觀後明
001_0611_a_22L正觀方便觀中有其四句初一句
001_0611_a_23L牒能化後一句嘆化大中間二句
001_0611_a_24L正明觀相無生於化者初修觀時

001_0611_b_01L모든 유상有相을 타파하여 교화한다는 미혹한 분별상(幻相)까지도 마음에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교화하지 않았다는 분별상도 없어야 한다.”는 셋째 구는 이미 교화한다는 분별상을 타파하고 이어서 교화하지 않았다는 공상空相마저 버린 것이다. 그것은 교화하지 않았다는 공에 대해서도 역시 마음을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본래부터 마음이 분별상을 벗어나 있음을 모르고 끝없이 모든 분별상에 집착하여 망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모든 분별상을 타파하여 분별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비록 교화했다는 미혹한 분별상을 이미 타파했을지라도 아직 교화하지 않았다는 공성에는 집착한다. 공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공에 대하여 마음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다시 교화하지 않았다는 공성도 없애야 한다. 이런 경우에야 바야흐로 공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아서 반드시 무이중도無二中道를 터득하여 부처님과 더불어 제법실상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교화하기 때문에 “그 교화가 훌륭하다.”고 한 것이다.

이 방편관행은 어떤 계위에 속하는가?
만약 믿음으로 수행하는 경우라면 십신十信에 해당하고, 비슷하게 관찰하는 경우라면 삼십심三十心(十住心·十行心·十廻向心)에 해당하며, 순수하게 닦는 것으로 말하자면 사선근四善根에 해당한다. 초지初地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모두 방편이다.

다른 곳에서는 삼무성三無性(無相性·無生性·無眞性)90)에 대한 관찰을 설하는데, 무슨 까닭에 여기에서는 이무二無(無相性과 無生性)에 대해서만 설하는가?
무상無相과 무생無生은 모두 일변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버려야 할 상相과 생生이 똑같이 유有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관과 무생관에는 모두 심사尋思의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무성無性의 경우는 성性을 버리면 심사의 측면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낱낱으로(開) 보거나 전체적으로(合) 보거나 나름대로 도리에 통한다.
이상으로 방편관행에 대한 설명을 마쳤으니, 다음으로 정관행을 드러내 보이겠다.

b) 정관행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망심妄心과 망아妄我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망심과 망아는 본래 공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공한 망심을 터득하면, 그 망심은 환幻도 아니고 화化도 아니며 환도 없어지고 화도 없어져서 곧 무생이 터득된다. 왜냐하면 무생의 마음은 화化가 없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관행에 분별상이 없음(無二相)을 설명한 것이다. 정관행으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a) 소취를 벗어남

소취를 벗어난다는 것은 일체의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견리遣離이고, 둘째는 민리泯離이다.


001_0611_b_01L破諸有相於幻化相滅其生心故
001_0611_b_02L不生無化者旣破化相次遣空相
001_0611_b_03L無化空亦不生心故所以然者
001_0611_b_04L生本來迷心離相遍取諸相動念
001_0611_b_05L生心故先破諸相滅取相心雖復
001_0611_b_06L已破幻化有相而猶取其無化空性
001_0611_b_07L取空性故於空生心所以亦遣無化
001_0611_b_08L空性于時不生取空之心不得已會
001_0611_b_09L無二中道同佛所入諸法實相如是
001_0611_b_10L化故其化大焉此方便觀爲在
001_0611_b_11L何位若仰信修在於十信其相
001_0611_b_12L似觀在三十心論其純修在四善
001_0611_b_13L將入初地近方便故餘處說有
001_0611_b_14L三無性觀何故此中但說二無
001_0611_b_15L無相無生合爲一邊所遣相生同
001_0611_b_16L是有故又此二觀皆有尋思遣無
001_0611_b_17L性時無尋思故或開或合皆有道
001_0611_b_18L理故已說方便次顯正觀

001_0611_b_19L
令彼衆生皆離心我一切心我本來
001_0611_b_20L空寂若得空心心不幻化無幻無化
001_0611_b_21L卽得無生無生之心在於無化

001_0611_b_22L
是明正觀無二之相以離所取能取
001_0611_b_23L二故離所取者以離一切人法相故
001_0611_b_24L此有二種一者遣離二者泯離

001_0611_c_01L
ⓐ 견리遣離

“견리”는 이전에 집착한 분별상을 지금 없애는 것이다. 경문의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망심과 망아를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 민리泯離

“민리”는 이전에 집착한 분별상이 본래 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경문의 “일체의 망심과 망아는 본래 공적하기 때문이다.”가 이에 해당한다.
“망심妄心과 망아妄我”라는 것은, 인人이 망아이고, 법法이 망심이다. 마음은 제법이 의지하는 주主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과 법이 본래 공한 줄을 통달하는 때에는 이전에 집착한 분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견리와 민리가 동시에 성취된다.
이상으로 소취를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설명을 하였다.

(b) 능취를 벗어남

능취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일체의 능취하는 분별을 벗어나는 것이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본리本離이고, 둘째는 시리始離이다.

ⓐ 본리本離

“본리”란 망심과 망아가 본래 공한 줄을 터득할 때 바로 본각의 공적한 마음이 터득된다는 것이다. 이 공적한 마음은 본래 능취를 벗어나 있다. 능취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본래 환도 아니고 화도 아니다. 경문의 “만약 공한 망심을 터득하면 그 마음은 환幻도 아니고 화化도 아니다.”라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환도 아니고 화도 아닌 것은 허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 시리始離

“시리”란 본각의 공적심을 터득할 경우 능취하는 분별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득심에 따른 환도 없어지고 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경문의 “환도 없어지고 화도 없어져서 곧 무생이 터득된다.”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리하여 비로소 무생심을 터득하고 본래 공적하여 화가 없는 도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무생의 마음은 화化가 없는 곳에 있다.”고 한 것은 심心과 경境을 가설한 것일 뿐으로 말로만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시리의 능취는 시각始覺의 뜻이고, 본리의 공적심은 본각本覺의 뜻이다. 뜻에는 비록 시리와 본리가 있지만 시리와 본리가 어울려야 일각이 성취된다. 능能과 소所를 벗어나는 것은 신新(시각)과 구舊(본각)를 벗어나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는 “시각은 곧 본각과 같다.”91)고 하였다. 그러므로 일각은 완전히 생·멸·시·종 등의 모습을 벗어나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처음의 초지로부터 최후의 불지에 이르기까지 다만 분分이냐 만滿이냐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001_0611_c_01L離者先所取相今滅除故如經令
001_0611_c_02L彼衆生皆離心我故泯離者先所
001_0611_c_03L取相本來空故如經一切心我本
001_0611_c_04L來空寂故言心我者人名爲我法
001_0611_c_05L名爲心心是諸法所依主故達諸人
001_0611_c_06L法本來空時先所取相此時不起
001_0611_c_07L所以二離一時成就已說離所取
001_0611_c_08L云何離能取謂離一切能取分別
001_0611_c_09L亦二種一者本離二者始離言本
001_0611_c_10L離者通達心我本來空時正得本
001_0611_c_11L覺空寂之心此空寂心本離能取
001_0611_c_12L離能取故本不幻化如經若得空心
001_0611_c_13L心不幻化故不幻化者非虛妄故
001_0611_c_14L言始離者得此本覺空寂心時能取
001_0611_c_15L分別不復得生隨所得心無幻化
001_0611_c_16L如經無幻無化卽得無生故
001_0611_c_17L是始得無生之心會本空寂無化之
001_0611_c_18L理故言無生之心在於無化假說
001_0611_c_19L心境故寄言在然始離能取是始
001_0611_c_20L覺義本離空心是本覺義義雖有
001_0611_c_21L混成一覺同離能所離新舊故
001_0611_c_22L如論說言以始覺者卽同本覺
001_0611_c_23L知此覺永離生滅始終等相始從初
001_0611_c_24L地乃至佛地但有分滿不同而已

001_0612_a_01L『십지경론十地經論』에서 “자체가 본래 공하므로 다름도 없고 다함도 없다.”92)고 자세하게 설명한 것과 같다.
또한 이 일각에는 본각과 시각의 뜻이 있다. 본각에는 본래 있는 것을 드러낸다(顯成)는 뜻이 있으므로 본래적인 수행(眞修)이라는 설이 도리에 합당하다. 시각에는 수행을 통하여 성취한다(修成)는 뜻이 있으므로 새로운 수행(新修)이라는 말씀이 도리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에만 집착하면 올바르지 못하다. 이제 교리에 대한 논의는 그만두고 본문으로 돌아가 해석한다.
무상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상으로 마친다.93)

b. 문답으로 의심과 힐난을 해결함

이하는 둘째로 문답을 통하여 의심과 힐난(疑難)을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 문답이 있어 차례대로 의심을 해결한다.

a) 총체적으로 유상문有相門을 타파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중생의 마음은 그 자성이 본래 공적합니다. 공적한 마음은 그 본체에 형색(色)과 생멸상(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수습해야 본래 공적한 마음을 터득할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에게 설해 주십시오.”

첫 번째 문답에는 질문하는 뜻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의 마음은 그 자성이 본래 공적하다. 그러나 망념을 움직이므로 무시이래로 유전한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수행해야 본래심을 터득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둘째는 “공적한 마음의 본체에는 색과 상이 없다. 그러나 중생은 본래부터 항상 유상有相에 집착한다. 그러면 색도 없고 상도 없는 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공적심을 터득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므로 경문에서 “어떻게 수습해야 본래 공적한 마음을 터득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중생심은 6식 등의 생멸심일 터인데, 그것으로 어떻게 일심의 본각을 알 수 있겠는가?
『기신론』에서 “어떤 법이 마하연의 신근信根을 일으킨다. 그 어떤 법은 말하자면 중생심이다. …… 일심의 법에는 두 가지 문이 있다. ……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다.”94)라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또 『능가경』에서 “적멸이란 일심을 말한다.”95)라고 하였다.
지금 이 경문에서 “공적한 마음의 본체에는 색과 상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언설(言)은 서로 다르지만 뜻(意)의 귀결점은 같다. ‘색이 없다.’고 한 까닭은 색깔과 형체 등이 없는 것이고, ‘상이 없다.’고 한 까닭은 생상과 멸상 등이 없기 때문이다.

001_0612_a_01L如十地論本分中說自體本來空有
001_0612_a_02L不二不盡乃至廣說又此一覺有
001_0612_a_03L本始義以有本覺顯成義故眞修之
001_0612_a_04L說亦有道理以有始覺修成義故
001_0612_a_05L新修之談亦有道理如其偏執卽
001_0612_a_06L有未盡且止乘論還釋本文廣無
001_0612_a_07L相觀竟在於前

001_0612_a_08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衆生之心
001_0612_a_09L性本空寂空寂之心軆無色相云何
001_0612_a_10L修習得本空心願佛慈悲爲我宣說

001_0612_a_11L
此下第二往復決疑有四問答次第
001_0612_a_12L決疑第一問中問意有二一者
001_0612_a_13L生心性本來空寂而猶動念無始
001_0612_a_14L流轉云何方修而得本心二者
001_0612_a_15L寂心體無色無相衆生本來恒取
001_0612_a_16L有相云何習無而得空心故言云
001_0612_a_17L何修習得本空心此中所說衆
001_0612_a_18L生之心應是六識等生滅心何以得
001_0612_a_19L知一心本覺起信論云有法能起
001_0612_a_20L大乘信根謂衆生心依一心法有
001_0612_a_21L二種門乃至廣說又如經言寂滅
001_0612_a_22L者名爲一心今此文言空寂之心
001_0612_a_23L體無色相言有左右意致還同
001_0612_a_24L無色者無顯形等色故無相者

001_0612_b_01L
이 대목은 일심의 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중생심은 일심의 생멸문(心生滅門)을 언급한 것이다. 곧 이것은 일심의 생멸문을 들어 일심의 진여문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자성이 본래 공적합니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생멸문과 진여문은 그 본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일심법일 따름이다.

(a) 본격적인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일체의 망심妄心과 망상妄相은 본래 근본이 없고 본래 근본의 처소가 없어서 공적하고 무생이다. 이에 망심을 무생케 하면 곧 공적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공적한 심지야말로 곧 심공心空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무상無相한 일심에는 망심도 없고 망아도 없다. 일체의 법상도 또한 이와 같다.”

이 부분은 부처님의 답변인데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답正答이고,96) 둘째는 결답決答이다.97)

ⓐ 정답正答

“보살이여”란 해탈보살을 부르는 말이다. 이하의 경문에서 부르는 말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일체의 망심妄心과 망상妄相”이란 일체의 팔식이 일으키는 망념(動念)의 심心과 심소心所에 상응하는 행行과 상相의 차별이다. 행과 상에는 모두 사상四相이 있다.
“본래 근본이 없고 본래 근본의 처소가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일체의 심心과 상相에는 종자가 근본인데, 그 근본종자는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현재가 되어 있거나 이미 과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현재가 되어 있는 경우는 곧 현재라는 과果가 구비되어 있어 근본과 지말에 차이가 없다. 그것은 마치 소의 두 뿔과 같다. 그리고 이미 과거가 되어 있는 경우는 곧 작인作因도 없어지고 체성體性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 이와 같은 도리는 본래 법이法爾이다. 그런 까닭에 “본래 근본이 없고”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생멸심이 생겨나는 경우는 반드시 근본의 처소에 의지하는데, 그 근본의 처소가 이미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말한 “근본의 처소”는 구유근俱有根98)이다. 오색근五色根(안근·이근·비근·설근·신근)은 원래 색법으로서 유방有方·무방無方에 관계없이 불가득이고, 나머지 세 가지 소의인 곧 제6식과 제7식과 제8식은 모두 무색법으로서 유시有時·무시無時에 관계없이 다 불가득이다.

001_0612_b_01L生滅等相故此文卽顯心眞如門
001_0612_b_02L言衆生之心且擧心生滅門擧生滅
001_0612_b_03L心顯眞如門以之故言性本空寂
001_0612_b_04L然此二門其軆無二所以皆是一心
001_0612_b_05L法耳

001_0612_b_06L
佛言菩薩一切心相本來無本本無
001_0612_b_07L本處空寂無生若心無生卽入空寂
001_0612_b_08L空寂心地卽得心空善男子無相之
001_0612_b_09L無心無我一切法相亦復如是

001_0612_b_10L
此答有二正答決答言菩薩者
001_0612_b_11L呼解脫菩薩之辭下文呼辭皆亦同
001_0612_b_12L一切心相者一切八識動念之心
001_0612_b_13L心所相應行相差別若行若相皆
001_0612_b_14L有四相故本來無本本無本處者
001_0612_b_15L一切心相種子爲本求此本種永
001_0612_b_16L無所得所以然者爲在現時爲已
001_0612_b_17L過去若在現時卽與果俱無本末
001_0612_b_18L如牛兩角若已過去卽無作因
001_0612_b_19L無體性故猶如兎角如是道理本
001_0612_b_20L來法爾以之故言本來無本又生
001_0612_b_21L滅心生必依本處本處旣無卽不
001_0612_b_22L得生言本處者謂俱有根其五色
001_0612_b_23L根旣是色法有方無方皆不可得
001_0612_b_24L餘三所依皆無色法有時無時並

001_0612_c_01L이런 까닭에 또한 “본래 근본의 처소가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본래부터 그 근본의 처소가 없다. 원래 근본종자가 없으므로 또한 근본의 처소도 없다. 그러므로 심心과 상相은 본래 무생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공적하고 무생하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심과 상이 발생할 수 없음을 관찰할 경우 그 관찰하는 마음도 또한 무생이다. 이때 곧 본래공적에 들어간다. 들어가야 할 공적의 경지가 바로 일심인데, 이것은 일체의 소의처이므로 지地라 말한다. 그러므로 “곧 공적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공적한 심지이기에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유전하여 항상 유상에 집착할지라도 이 공적문에 의지해 추구하고 관찰하면 본래의 공적한 마음을 터득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곧 심공心空을 터득할 수가 있다.”고 하였다. 심공心空과 공심空心은 말은 다르지만 모두 일심·본각의 뜻이다.
질문에 대한 본격적인 답변 부분은 이상으로 마친다.

ⓑ 결답決答

이하는 결답決答이다.
“무상한 일심”이란 일심의 본체를 언급한 것이다.
“망심도 없고 망아도 없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공적하고 무생이다.”에 대한 결론으로 무상심無相心 가운데는 심상心相도 없고 아상我相도 없음을 가리킨다.
“일체의 법상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은 심상이 공적하다는 것을 거듭 결론 맺은 것이다. 곧 심상과 아상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밖의 일체의 유위법과 무위법 내지 유상有上과 무상無上 등의 상相도 역시 무상심無相心 가운데서는 벗어나지 못할 까닭이 없음을 가리킨다.

b) 소멸견消滅見인 번뇌에 대하여 생제生際와 멸제滅際의 견해를 타파함

이하부터는 두 번째의 문답이다. 앞의 첫 번째의 문답은 총체적으로 유상문有相門을 타파한 설명이었다. 여기 이 문답은 개별적으로 두 가지 계박(二縛)을 벗어나는 문을 드러낸다. 곧 두 가지 병을 개별적으로 들어 그 처방약을 질문한다.

(a) 망아妄我와 망심妄心에 대한 질문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일체중생에게 망아妄我가 있거나 망심妄心이 있으면 어떤 법으로 중생을 일깨워 그 결박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까?”

“망아가 있다.”는 것은 인집人執(주관에 대한 집착)의 병이고, “망심이 있다.”는 것은 법집法執(객관에 대한 집착)의 병이다.

001_0612_c_01L不可得是故亦言本無本處謂從本
001_0612_c_02L來無其本處旣無本種亦無本處
001_0612_c_03L當知心相本來無生以之故言空寂
001_0612_c_04L無生如是觀察不得生時其能觀心
001_0612_c_05L亦無所生是時卽入本來空寂所入
001_0612_c_06L空寂卽是一心一切所依名之爲
001_0612_c_07L故言卽入空寂空寂心地雖諸
001_0612_c_08L衆生本來流轉恒取有相然依此
001_0612_c_09L門推求觀察卽能得本空心故言
001_0612_c_10L卽得心空心空空心語有左右
001_0612_c_11L是一心本覺之義正答所問竟在於
001_0612_c_12L此下結答無相之心者擧一心
001_0612_c_13L無心無我者結前所說空寂無
001_0612_c_14L無相心中離心我相一切法相亦
001_0612_c_15L如是者重結空寂非直離此心我二
001_0612_c_16L其餘一切有爲無爲乃至有上無
001_0612_c_17L上等相無相心中無不離故

001_0612_c_18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一切衆生
001_0612_c_19L若有我者若有心者以何法覺令彼
001_0612_c_20L衆生出離斯縛

001_0612_c_21L
自此已下第二問答前一問答摠
001_0612_c_22L明破有相門今此問答別顯離二縛
001_0612_c_23L別擧二病以問其藥言有我者
001_0612_c_24L人執之病若有心者法執之病

001_0613_a_01L
“그 결박”이란, 개별적으로 말하면 인집은 거칠고 무거운 계박(麤重縛)이고 법집은 분별상에 대한 계박(相縛)이며, 통틀어 설하면 인집과 법집에 모두 거칠고 무거운 계박(麤重縛)과 분별상에 대한 계박(相縛)이 있다. 또한 인집과 법집에는 모두 상응하는 계박(相應縛)과 주체적으로 반연하는 계박(能緣縛)이라는 두 가지 계박이 있는데, 『이장장二障章』99)에 그 뜻이 설명되어 있다.

(b) 망아妄我와 망심妄心에 대한 답변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집을 대치하고, 둘째는 법집을 대치한다.

ⓐ 인집을 대치함

인집을 대치하는 것에도 첫째는 총체적으로 대치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대치한다.

ㄱ. 총체적으로 대치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자아(我)가 있다고 보는 자에게는 십이인연을 관찰하게 하라.

이것은 총체적으로 대치하는 부분이다. 십이지인연의 관찰에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작자作者의 연이 없이 발생함을 관찰하는 것으로 작자에 대한 집착을 대치한다. 마치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둘째는 상주常住의 연이 없이 발생함을 관찰하는 것으로 상주에 대한 집착을 대치한다. 마치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다. 망아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것은 작자와 상주에 대한 집착이 근본이 된다. 그 근본이 없어지기 때문에 모든 지말도 따라서 멸한다.

ㄴ. 개별적으로 대치함

십이인연은 본래 인因과 과果를 따른다. 인과 과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心行)이 일으킨다. 그러나 마음도 없는데 어찌 몸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보는 자에게는 그 유견有見을 없애 주고, 자아가 없다고 보는 자에게는 그 무견無見을 없애 줘야 한다.100)

이것은 개별적으로 대치하는 부분이다.
개별적으로 대치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황치況治(번뇌를 비교하여 대치함)이고, 둘째는 축치逐治(번뇌를 따라서 대치함)이다.

ㄱ) 황치況治

황치의 경우 “본래 인과 과를 따른다.”는 것은 총체적 입장을 따라 개별적 입장을 내는 것이다. 총체적 입장에서 말하면, 오직 인因과 과果일 뿐이다. 과거의 인에서 무명無明·행行의 두 가지가 나오고, 현재의 인에서 애愛·취取·유有의 세 가지가 나온다. 현재의 과에서 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의 다섯 가지가 나오고, 미래의 과에서 생生·노사老死의 두 가지가 나온다.101) 또한 인에서 무명·행·식·명색·육처·촉·수·애·취·유의 열 가지가 나오고, 과에서 생·노사의 두 가지가 나온다. 그러므로 근본은 오직 인과 과일 뿐이다.
“인과 과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心行)이 일으킨다.”는 것은 인과 과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 근본임을 말한다. 마음이 인을 만들고 마음이 그 과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도 없는데 어찌 몸이 있겠는가.”라는 것은 위의 설명에 의거하여 인과의 도리를 관찰하면

001_0613_a_01L斯縛者別而言之人執是麁重縛
001_0613_a_02L法執是相縛通而說之二執皆有
001_0613_a_03L麁重相縛又此二執皆有二縛
001_0613_a_04L相應縛及能緣縛二障章中其義已
001_0613_a_05L答中有二先治人執後治法執
001_0613_a_06L治人執中先摠後別

001_0613_a_07L
佛言善男子若有我者令觀十二因
001_0613_a_08L

001_0613_a_09L
此是摠治觀十二支略有二門
001_0613_a_10L觀無作緣生治作者執如說是事有
001_0613_a_11L故是事有二觀無常緣生治常住執
001_0613_a_12L如說是事生故是事生存我之來此
001_0613_a_13L二爲本本旣除故諸末隨滅也

001_0613_a_14L
十二因緣本從因果因果所起興於
001_0613_a_15L心行心尙不有何況有身若有我者
001_0613_a_16L令滅有見若無我者令滅無見

001_0613_a_17L
此是別治別治有二一者況治
001_0613_a_18L者逐治況治中言本從因果者
001_0613_a_19L摠出別摠而言之唯因與果從因
001_0613_a_20L出二三從果出五二又從因出十支
001_0613_a_21L從果說二支故所從本但是因果
001_0613_a_22L因果所起興於心行者因果之起
001_0613_a_23L心行爲本心能作因心受果故
001_0613_a_24L尙不有何況有身者依上所說觀察

001_0613_b_01L마음도 없는데 하물며 마음이 만드는 색신이 어찌 있겠느냐는 것이다. 몸과 마음조차 없는데 하물며 자아가 있겠는가. 또한 마음이 없으므로 인과 과도 역시 공하다. 인과 과조차 공한데 하물며 자아가 있겠는가. 또한 인과 과가 공하기 때문에 십이지인연이 공한데 하물며 인을 만드는 자아와 과를 받는 자가 있겠는가. 경문에서 “보살은 십이인연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끝이 없다고 관찰한다.”102)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황치에 대한 설명은 이상으로 마친다.

ㄴ) 축치逐治

축치는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만약 자아가 있다고 보는 자에게는 그 유견有見을 없애 줘야 한다.”는 것은 위의 황치로써 남아 있는 아집을 타파하고 없애 준다는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만약 자아가 없다고 보는 자에게는 그 무견無見을 없애 줘야 한다.”는 것은 바로 무아에 집착하는 병을 따라서 타파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먼저 아집을 타파하여 외도의 병을 벗어났지만 다시 무아에 집착하여 이승의 병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무아에 집착하는 견해를 따라서 타파한다. 자아(我)도 본래 실유(有)가 아닌데 하물며 자아의 소멸(無)이 있겠는가.103)
이상으로 총체적인 관찰과 개별적인 관찰로써 아집을 타파하는 것을 마친다.

ⓑ 법집을 대치함

이하는 둘째로 존심存心(마음이 발생하거나 소멸한다고 간주하는 것)에 대한 견해를 대치한다.104)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치正治이고, 둘째는 중석重釋이다.

ㄱ. 정치正治

그래서 만약 마음이 발생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소멸된다는 자성(滅性)을 없애 주고, 만약 마음이 소멸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발생한다는 자성(生性)을 없애 줘야 한다. 이처럼 없애 준다(滅)는 그것이야말로 견성으로서 곧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승인의 경우에는 법집이 마음에 남아 있어 생멸하는 무상한 마음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러므로 생멸을 타파하고 존심存心(생멸을 타파했지만 아직 생멸을 타파했다는 마음을 깨끗이 제거하지 못한 상태)에 대한 견해를 없애 준다. 만약 존심이 발생하여 병이 되는 자에게는 앞서 소멸되었다는 자성(滅性)으로 타파해 준다. 요컨대 저 소멸되었다는 자성에 의거하여 지금 발생한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후의 미래에 소멸하는 것을 보고 그 이전의 현재의 마음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마음이 설령 불멸한다고 해도 토끼의 뿔과 같은 경우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견해를 타파하여 발생한다는 자성(生性)을 없애 준다. 발생하는 것이 없다면 소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없애 준다(滅)는 그것이야말로 곧 견성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라는 것은 자성이 소멸한다고 보는 견해를 없애면 반드시 발생한다는 견해에 절대로 집착하지 않고,

001_0613_b_01L道理心不可得況心所作色身是有
001_0613_b_02L身心尙無況有我耶又心不有
001_0613_b_03L故因果亦空因果尙空況有我乎
001_0613_b_04L又因果空故十二支空況有作者受
001_0613_b_05L者等耶如經言菩薩觀十二因緣
001_0613_b_06L如虛空不可盡此之謂也已說況破
001_0613_b_07L云何逐治謂若有我者令滅有見者
001_0613_b_08L牒前況破滅存我執若無我者令
001_0613_b_09L滅無見者此正逐破無我之病所以
001_0613_b_10L然者先破我執離外道病而取無
001_0613_b_11L我墮二乘病故今逐破着無之見
001_0613_b_12L我本非有況有我無故摠別二觀
001_0613_b_13L破我執竟

001_0613_b_14L
若心生者令滅滅性若心滅者令滅
001_0613_b_15L生性一本云若心生者令滅生
若心滅者令滅滅性
[9] 滅是見性
001_0613_b_16L入實際

001_0613_b_17L
此下第二治存心見於中有二正治
001_0613_b_18L重釋二乘人等法執存心計有生
001_0613_b_19L滅無常之心故破生滅滅存心見
001_0613_b_20L若存心生而成病者破前滅性要依
001_0613_b_21L彼滅存今生故若見後滅執有現
001_0613_b_22L心設不滅如兎角故破如是見
001_0613_b_23L令滅生性無生有滅不應理故
001_0613_b_24L是見性卽入實際者破見滅性必

001_0613_c_01L자성이 발생한다고 보는 견해를 타파하면 자성이 소멸한다는 견해에 절대로 집착하지 않게 되며, 생·멸에 집착하지 않으면 반드시 존심이 없기 때문이다.

ㄴ. 중석重釋

왜냐하면 본생本生은 불멸이고 불멸은 불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멸은 불생이고 불생은 불멸인데, 일체법의 실상도 또한 그와 같다.”

이것은 거듭 해석한 것이다.
어째서 마음이 발생하는 경우를 보면 소멸된다는 자성으로 없애 주고, 마음이 소멸하는 경우를 보면 발생한다는 자성으로 없애 줘야 하는가. 바로 이런 까닭에 “왜냐하면”이라고 한 것이다.
다음은 이 질문에 대한 해석이다.
“본생은 불멸이다.”라는 것은 이전에 발생한 마음을 영원히 찾을 수가 없는데 찾을 수 없는 그 법에 어찌 소멸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의 마음에 소멸되는 자성이 없은즉 현재의 마음이 발생하는 것도 없다. 그러므로 “불멸은 불생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소멸되는 자성을 없애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다음의 “불멸은 불생이다.”라는 것은 과거에 소멸이 없다면 현재에 발생도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의 마음에 발생하는 자성이 없으면 곧 이 마음의 소멸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불생은 불멸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발생하는 자성을 없애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심법에는 소멸도 없고 발생도 없듯이 기타 제법의 경우도 역시 똑같이 관찰하기 때문에 “일체법의 실상도 또한 그와 같다.”고 말한다.

만약 마음이 발생한다고 계탁하면 발생한다는 바로 그 마음을 타파하면 될 터인데, 어째서 굳이 저 과거심이 소멸된다는 견해를 타파하는가?
지금 발생한 그 마음은 현재이므로 타파가 쉽지 않지만, 과거심은 이미 지나가 버렸으므로 공하다고 이해하기가 쉽다. 그러므로 먼저 쉬운 것을 타파하고 나서 어려운 것을 없앤다. 이런 차제에 의거해서 현재심이 발생한다는 자성을 타파하고, 그로 말미암아 미래심이 소멸한다는 것에 대한 집착까지도 없애 주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소위 의왕醫王(부처님)의 훌륭한 묘술이다.

c) 능멸견能滅見인 약藥으로 유변과 무변의 견해를 타파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만약 어떤 중생이 제법이 생겨난다고 본다면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

이하부터는 세 번째의 문답이다.
위의 문답에서는 소멸되어야 할 편견의 번뇌(病)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이 문답에서는 능멸能滅하는 견해에 해당하는 약藥에 대하여 드러낸다.

001_0613_c_01L不取生破見生性必不取滅不取
001_0613_c_02L生滅必不存心故

001_0613_c_03L
何以故本生不滅一本
作本
滅不生不滅
001_0613_c_04L不生不生不滅一切法相 [10] 亦復如是

001_0613_c_05L
此是重釋何以見心生者令滅滅性
001_0613_c_06L見心滅者令滅生性故言何以故
001_0613_c_07L次釋此問本生不滅者求前生心永
001_0613_c_08L不可得不可得有何法而滅如是
001_0613_c_09L不存前心滅性卽不得取今心之生
001_0613_c_10L故言不滅不生是釋令滅滅性之由
001_0613_c_11L次言不滅不生牒前不滅今不得生
001_0613_c_12L如是不得今心生性則不得取此心
001_0613_c_13L之滅故言不生不滅是釋令滅生性
001_0613_c_14L之由如於心法無滅無生其餘諸
001_0613_c_15L法亦同是觀故言一切法亦如是
001_0613_c_16L若計心生眞破此生何須破彼前
001_0613_c_17L心之滅今生是現破有不易
001_0613_c_18L心己過解空不難故先破易而遣其
001_0613_c_19L依此次第破今生性由是卽遣
001_0613_c_20L後滅之執是謂醫王善巧之術耶

001_0613_c_21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若有衆生
001_0613_c_22L見法生時令滅何見他本有見法滅時
令滅何見八字
[11]

001_0613_c_23L
此下第三問答次前問答明所滅之
001_0613_c_24L見之病今此問答顯能滅之見之藥

001_0614_a_01L또한 위에서는 생제生際와 멸제滅際의 견해를 타파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유변과 무변의 견해를 타파한다. 여기의 질문은 “만약 관행觀行하는 사람이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뜻을 따라 심법이 발생한다고 관찰할 경우,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하는가.”의 뜻이다.
“어떤 견해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까?”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뜻을 물은 것이다. 곧 마음이 발생하는 한 측면만 언급하고 있지만, 아울러 그것으로 발생된 마음을 없애 주는 관행의 측면까지 싸잡아서 드러내 준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중생이 제법이 생겨남을 볼 때에는 무無라는 견해를 없애도록 하고, 제법이 소멸함을 볼 때에는 유有라는 견해를 없애도록 한다. 만약 이와 같은 견해가 사라지면 제법의 진무眞無를 증득하여 결정성에 들어가는데, 그것이 곧 결정무생이다.”

“제법이 생겨남을 볼 때”란 세속법이 인연으로 발생함을 정관正觀하는 때이다. 이때 공에 집착하는 견해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세속이) 무라는 견해를 없애게 한다.”고 하였다.
“제법이 소멸함을 볼 때”란 세속법이 본래 소멸됨을 정관하는 때이다. 이때 유에 집착하는 견해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세속이) 유라는 견해를 없애게 한다.”고 하였다.
() 여기에서 무슨 까닭에 “없애게 한다.”고 말하는가?
() 부처님의 가르침은 관찰하는 자에게 관찰대상에 대한 집착을 없애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뜻을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관행을 닦는 자가 법의 발생을 관찰할 때에는 단지 없다고 집착하는 견해를 벗어날 뿐이지 생긴다는 생각을 두지 않고, 법의 적멸을 관찰할 때에는 오직 있다고 집착하는 견해를 벗어날 뿐이지 소멸하다는 생각을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생긴다는 생각을 두면 생기는 것은 본래 적멸한 것이고, 만약 소멸한다는 생각을 취하면 소멸이 곧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래 「진성공품」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因緣所生義    인연을 말미암아 발생한다는 것은
是義滅非生    소멸이지 발생이 아니라는 뜻이다
滅諸生滅義    발생과 소멸조차 없어진다는 것은
是義生非滅    발생한다는 뜻이지 소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양변을 벗어나고 중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무를 벗어나 유에 집착하거나 유를 타파하고 공에 집착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망공妄空이지 진무眞無가 아니다. 이에 비록 유를 벗어났지만 공에 집착하지 않아야만 내지 제법의 진무를 터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제법의 진무를 터득한다.”고 하였다.
“결정자성”에 대한 뜻은 위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진공을 터득할 경우에 심법이 불생임을 관찰하여 일체의 유심과 무심을 벗어난 까닭에 “결정무생이다.”라고 말한다.


001_0614_a_01L又前破生滅二際之見今破有無二
001_0614_a_02L邊之見今問意言若觀行者順佛
001_0614_a_03L敎意觀法生時令滅何見滅何見
001_0614_a_04L問佛敎意且擧一邊兼顯觀滅

001_0614_a_05L
佛言菩薩若有衆生見法生時令滅
001_0614_a_06L無見見法滅時令滅有見若滅是見
001_0614_a_07L得法眞 [12] 入決定性決定無生

001_0614_a_08L
見法生時者正觀俗法因緣生時
001_0614_a_09L時能離取空之見故言令滅無見
001_0614_a_10L法滅時者正觀俗法本來滅時此時
001_0614_a_11L能離取有之見故言令滅有見此中
001_0614_a_12L何故言令滅者佛敎能令觀者滅故
001_0614_a_13L此意正明修觀行者觀法生時只離
001_0614_a_14L無見而不存生觀寂滅時唯離有見
001_0614_a_15L而不取滅所以然者若存生耶生本
001_0614_a_16L寂滅若取滅耶滅卽生起如下頌
001_0614_a_17L因緣所生義是義滅非生滅諸
001_0614_a_18L生滅義是義生非滅所以能離二邊
001_0614_a_19L而不着中如其離無取有破有取空
001_0614_a_20L此爲妄空而非眞無今雖離有而不
001_0614_a_21L存空如是乃得諸法眞無故言得法
001_0614_a_22L眞無決定性義如前已說得眞空
001_0614_a_23L時觀心不生遠離一切有無心故
001_0614_a_24L故言決定無生

001_0614_b_01L
d) 허망한 견해 때문에 유생에 머물러 벗어나지 못함을 드러냄

이하부터는 네 번째의 문답이다.

(a) 무생에 대한 질문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저 중생으로 하여금 무생에 머물도록 하면 그것이 무생입니까?”

이전에는 참된 관행으로 양변을 벗어난 모습을 설명하였다. 여기에서는 허망한 견해 때문에 유생에 머물러 벗어나지 못함을 드러낸다. 말하자면 어설프게 관행을 닦은 사람이 의언분별意言分別로 법의 무생을 관찰하고 산란심을 섭수하여 무생의 경계에 머물게 되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생이다.”라고 간주하고, 나중에 출정해서는 증상만을 일으켜서 “나는 이미 무생법인을 터득하였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병을 타파하기 위하여 병을 거론하여 “무생에 머물도록 하면 그것이 무생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b) 무생에 대한 답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답변하고, 둘째는 거듭 상세하게 설명한다.

ⓐ 간략한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생無生에 머물면 그것은 곧 생生이다. 왜냐하면 무생에조차 머물지 않아야 곧 무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략하게 답변한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 구절이 있다.

ㄱ. 생을 순차적으로 설명

상구上句는 그것이 생生인 이유를 순차적으로 설명한다. 무생의 경계에 머무는 것은 곧 분별심이 발생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ㄴ. 무생을 역차적으로 해석

하구下句는 반대의 경우를 들어 그것이 무생인 이유를 역차적으로 해석한다. 만약 마음이 무생의 경계에 머물지 않으면 모든 분별을 벗어난 것으로 곧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머무름이 있으면 무생법인이 아닌 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역차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상으로 간략하게 답변한 경문을 마친다.

ⓑ 거듭 상세한 설명

보살이여, 만약 무생無生이 생기면 생生으로써 (경계의) 생김을 없애야 한다. 생과 멸이 함께 없어져 본래의 생이 생기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 공적하여 머무름이 없어 마음에 집착이 없으니, 이것이 무생이다.”

이것은 거듭 상세하게 설명하는 대목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생生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무생無生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만약 무생의 경계에 대해 머무름이 있는 마음(有住心)이 생기면 생生으로써 그 경계의 생김을 없애기 때문에 “만약 무생이 생기면 생으로써 (경계의) 생김을 없애야 한다.”라고 하였다. 비록 경계의 생김을 없앴지만

001_0614_b_01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令彼衆生
001_0614_b_02L住於無生是無生耶

001_0614_b_03L
此下第四問答前明眞觀離二邊相
001_0614_b_04L今顯妄解不離生住謂有寡學修觀
001_0614_b_05L行者意言分別觀法無生能攝散
001_0614_b_06L亂住無生境作如是念謂是無生
001_0614_b_07L後出定時起增上慢意謂已得無生
001_0614_b_08L法忍爲破是病擧病問言住於無
001_0614_b_09L生是無生耶

001_0614_b_10L
佛言住於無生卽是何以故
001_0614_b_11L住無生乃是無生

001_0614_b_12L
答中有二略答重詳此卽略答
001_0614_b_13L其二句上句順明是生住無生境
001_0614_b_14L卽是分別之心生故下句反釋無生
001_0614_b_15L若心無住於無生境離諸分別是無
001_0614_b_16L生忍故知有住非無生忍如是反釋
001_0614_b_17L略答文竟

001_0614_b_18L
菩薩若生無生以生滅生生滅俱滅
001_0614_b_19L本生不生心常空寂空寂 [13] 無住心無
001_0614_b_20L有住乃是無生

001_0614_b_21L
此是重詳於中有二先詳是生
001_0614_b_22L詳無生若有住心生於無生之境
001_0614_b_23L卽是以生滅其境界之生故言若生
001_0614_b_24L無生以生滅生雖滅境界之生而

001_0614_c_01L그것이 소멸한 무無를 취한다면, 소멸된 무의 경계에 대해 취하려는 마음(能取心)이 생겨 생과 멸이 함께 있게 되니 어찌 무생無生이라고 하겠는가. 이와 같은 두 구절은 앞에서 말한 생生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진정한 무생법인은 그렇지 않다. 밖으로는 집착되는 경계의 소멸이 남아 있지 않고 안으로는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생멸이 모두 없어진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 없어진다.’고 한 것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본생本生을 추구해 보면 그것이 생기는 것을 얻지 못한다. 이미 생기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어떻게 도리어 없앨 수 있겠는가. 이때 본래 공적함을 증득하므로 “본래의 생이 생기지 않으므로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의 경계는 능·소에 평등하여 공의 경계에 머무는 마음도 없으므로 “공적하여 머무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아야 무생법인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것이 무생이다.”라고 하였다.
무생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에서 마쳤다.

㉯ 일각심을 드러냄

이하는 일각一覺의 뜻을 펼친 것으로 여기에 여덟 가지 문답이 있다. 이것을 둘로 나누면, 첫째와 둘째의 두 가지 문답은 일각 여래장의 뜻을 바로 펼쳐 보인 것이고, 셋째부터 여덟째까지 여섯 가지 문답은 인론생론因論生論(총론을 인하여 각론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모든 의난疑難을 없앤 것이다.

a. 일각 여래장의 뜻을 바로 펼침

a) 시각이 본각의 여래장성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함

(a) 마음에 집착이 없음에 대한 질문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마음에 집착(有住)이 없는데 어떻게 닦고(修) 익히길래(學) 유학有學의 경지가 되고 무학無學의 경지가 되는 것입니까?”105)

지금 이 대목은 첫째의 문답 가운데 “마음에 집착(有住)이 없는 것”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다. 만약 유학有學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곧 무집착(無住)이 아닐 것이고, 만약 무학無學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곧 관행觀行도 없어야 할 것이다. 또 만약 유학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마음이 발생한 것이지만, 만약 무학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단지 헛된 도리(空理)에 불과할 뿐이다.

(b) 마음에 집착이 없음에 대한 답변

여기에서는 첫째로 도리를 드러내고, 둘째로 본격적으로 답변한다.

ⓐ 도리를 드러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무생의 마음이란 그 마음에 나고(出) 듦(入)이 없는 본각 여래장으로서 그 자성이 적연부동하다.

첫째의 도리를 드러낸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001_0614_c_01L取其滅之無於滅無境能取心生
001_0614_c_02L生滅俱存豈曰無生耶如是二句
001_0614_c_03L詳前是生眞無生忍卽不如是
001_0614_c_04L不存於所取之滅內不生其能取之
001_0614_c_05L以之故言生滅俱滅然此俱滅
001_0614_c_06L非謂還無推求本生不得其生
001_0614_c_07L不得生何得還滅于時證會本來空
001_0614_c_08L故言本生不生心常空寂如是空
001_0614_c_09L寂能所平等無能住心住於空境
001_0614_c_10L故言空寂無住如是乃名無生法忍
001_0614_c_11L故言乃是無生演無生觀竟在於
001_0614_c_12L

001_0614_c_13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心無有住
001_0614_c_14L有何修學爲有學也爲無學也

001_0614_c_15L
此下廣一覺義於中有八問答科爲
001_0614_c_16L二分前二問答正廣一覺如來藏義
001_0614_c_17L後六問答因論生論遣諸疑難
001_0614_c_18L此初問問心無住若有學者卽非
001_0614_c_19L無住若無學者卽非觀行又若有
001_0614_c_20L學者應有心生若無學者只是空
001_0614_c_21L

001_0614_c_22L
佛言菩薩無生之心心無出入本如
001_0614_c_23L來藏性寂不動

001_0614_c_24L
此中先顯道理後正對問顯道理

001_0615_a_01L
무주의 경지를 터득할 경우에 무생의 마음이란 그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관행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고, 본래 무기無起임을 통달하는 것이기에 또한 애초부터 들어간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나고 듦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에 이미 나고 듦이 없음을 관찰하면 그것이 곧 본각인 여래장심이다. 이것은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동일함을 설명한 것이다. 이 무생의 마음은 이미 본각인 여래장으로서 그 자성이 적연하여 다시는 기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찌 들고(入)·나며(出)·일어나고(起)·쉼(息)이 있겠는가.
이것은 “나고 듦이 없다.”는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 질문에 답변함

그래서 또한 유학有學도 아닐뿐더러 또한 무학無學도 아니다. 유학과 불학이 없는 그것이 곧 무학이고, 유학이 없지 않은 그것이 곧 소학이다.”

이 대목은 둘째로 질문의 뜻에 본격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정적인 방식의 답변이고, 둘째는 긍정적인 방식의 답변이다.
이미 애초부터 들어감이 없으므로 유학이 아니고, 또한 끝내 나옴이 없으므로 무학도 아니다. 또한 능주심能住心(수행의 상에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유학이 아니고, 무주심無住心(수행의 상에 머묾이 없는 마음)이 없지 않으므로 무학도 아니다. 이것은 모두 부정적인 방식으로 부정하고 그치게 하는 구절이다.
“유학과 불학이 없는 그것이 곧 무학이고”라는 것은 별도로 익혀야 할 것이 없은즉 그것은 능학이 아니다. 이런 뜻에서 곧 무학임을 긍정한 것이다. 이것은 유학이 아니라는 뜻에 의하여 그것이 무학임을 긍정한 것이다.
“유학이 없지 않은 그것이 곧 소학이다.”라는 것은 비록 유주有住의 관행은 아닐지라도 무주無住의 관행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뜻에서 곧 유학을 긍정한 것이다. 이미 유학이기 때문에 이하에서는 그 경지가 소학이 된다. 이것은 무학이 아니라는 뜻에 의하여 곧 유학을 긍정한 것이다.
이 대목은 유학과 무학을 모두 긍정하여 자재하게 답변한 것이다.

b) 여래장성은 은장隱藏되어 부동임을 설명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여래장의 자성이 적연부동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하 부분은 둘째의 문답이다.106)
첫째의 문답에서는 시각이 본각인 여래장의 자성과 다르지 않음을 설명하였다.

001_0615_a_01L得無住時無生之心心常寂滅
001_0615_a_02L無有出觀達本無起亦非始入
001_0615_a_03L之故言心無出入如是觀心旣無
001_0615_a_04L出入卽是本覺如來藏心是明始覺
001_0615_a_05L卽同本覺此無生心旣是本藏
001_0615_a_06L來性寂不復起動云何得有入出起
001_0615_a_07L此言重成無出入義

001_0615_a_08L
亦非有學亦非無學無有學不學
001_0615_a_09L卽無學非無有學是爲所學

001_0615_a_10L
此是正對問意於中有二先遮後許
001_0615_a_11L旣非始入故非有學亦無終出故
001_0615_a_12L非無學又無能住之心故非有學
001_0615_a_13L不無無住之心故非無學此是俱遮
001_0615_a_14L遮止句也無有學不學是卽無學者
001_0615_a_15L以無別所學卽不是能學由是義故
001_0615_a_16L許是無學此依非有學義許是無學
001_0615_a_17L非無有學是爲所學者雖非有
001_0615_a_18L住之觀非無無住之行以是義故
001_0615_a_19L許是有學旣有學故下地所學
001_0615_a_20L依非無學義許是有學也此是俱許
001_0615_a_21L自在答也

001_0615_a_22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如來
001_0615_a_23L藏性寂不動

001_0615_a_24L
此下第二問答前明始覺不異本覺

001_0615_b_01L여기 둘째의 문답에서는 여래장의 자성은 은장隱藏되어 부동임을 본격적으로 설명한다. 이제 여래장의 뜻을 간략하게 설명한다.
여래장의 문에는 두 가지의 해석 혹은 세 가지의 해석이 있다.107) 소위 세 가지 해석을 『부증불감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계에는 세 가지 법을 보였는데, 그것은 모두 진실하고 여여하여 서로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다. 세 가지 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여래장은 본제에 상응하는 자체이고 또 청정한 법이다. 이 법은 여실하여 허망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떠난 적도 없어 지혜가 부사의한 법이다. 시작이 없는 본제本際로부터 온 것이다. 이것은 곧 청정한 본제로서 진여에 상응하며 법계의 자체이다. 둘째, 여래장은 본제에 불상응하는 자체이고 번뇌에 얽힌 불청정한 법이다. 이것은 본제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그로부터 떠나 있고 불상응하며 번뇌에 얽혀 있는 불청정법이다. 그래서 오직 여래가 깨친 지혜로만 단제할 수 있다. 셋째, 여래장은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다. 곧 이것은 일체제법의 근본으로서 일체법을 갖추고 일체법이 온전하여 세간법 속에서도 떠나지 않는다.108)

생각해 보면 이것은 세 종류의 여래장의 문을 드러낸 것이다. 세 종류는 무엇인가.
첫째는 능섭여래장能攝如來藏이다. 자성에 머무를 경우에 과지果地의 여래의 공덕을 능섭하는 것이다. 여래를 능섭하므로 여래장이라 말한다.
둘째는 소섭여래장所攝如來藏이다. 말하자면 번뇌에 얽혀 있는 불청정법의 일체가 다 여래의 지혜에 들어 있어서 모두 여래에게 섭지攝持되어 있다. 여래에 소섭되므로 여래장이라 말한다.
셋째는 은부여래장隱覆如來藏이다. 말하자면 법신여래가 번뇌에 묻혀 있는 것이다. 여래가 자체를 감추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말한다.109) 곧 진제삼장은 이와 같이 말했다.110)

글의 내용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다.”라는 것은 일심의 본체가 과거제·현재제·미래제에 편재한다는 것이다.

001_0615_b_01L如來藏性今者正顯如來藏性隱
001_0615_b_02L藏不動此中略明如來藏義如來藏
001_0615_b_03L門有二有三所言三者如不增不
001_0615_b_04L減經言衆生界中示三種法皆眞
001_0615_b_05L實如不異不差何謂三法一者
001_0615_b_06L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此法如
001_0615_b_07L實不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
001_0615_b_08L始本際來有此淸淨相應法軆二者
001_0615_b_09L如來藏本際不相應體及煩惱纒不
001_0615_b_10L淸淨法此本際離脫不相應煩惱纒
001_0615_b_11L不淸淨法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
001_0615_b_12L三者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
001_0615_b_13L有法卽是一切諸法根本備一切法
001_0615_b_14L具一切法於世法中不離不脫
001_0615_b_15L是顯三種如來藏門何等爲三
001_0615_b_16L一者能攝如來藏住自性時能攝
001_0615_b_17L果地如來功德能攝如來名如來藏
001_0615_b_18L二者所攝如來藏謂煩惱纒不
001_0615_b_19L淸淨法一切皆在如來智內皆爲如
001_0615_b_20L來之所攝持如來所攝名如來藏
001_0615_b_21L三者隱覆如來藏謂法身如來煩
001_0615_b_22L惱所覆如來自隱名如來藏眞諦
001_0615_b_23L三藏作如是說消其文者言未來
001_0615_b_24L際平等恒及有者一心之體遍於三

001_0615_c_01L그런데 앞의 첫째와 둘째에서 이미 본제를 드러냈기 때문에 셋째에서는 후제 곧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법임을 설명하였다. 또한 ‘여래’의 뜻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 소위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하다.”는 것은 ‘여’의 뜻이고, 또 “존재하는 법”은 ‘래’의 뜻이다. 이는 『불성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과 같다.

보살의 일심진여는 진여가 없는 가운데서도 진여이고, 진여가 없지 않은 가운데서도 또한 진여이다. 그러나 이승의 진여는 진여가 없는 가운데서는 진여이지만, 진여가 없지 않은 가운데서는 진여가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이승인은 허망한 관찰에 의거하여 무상無常 등의 형상(相)을 진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허망한 관찰은 오직 인지因地에만 있고 과지果地에는 없다. 이런 까닭에 이승의 진여는 성成과 괴壞에 있어서 인지에서는 성成이지만 과지에서는 괴壞이다. 그러나 보살의 진여는 허망을 벗어나 참된 자성에 의거하여 진여를 관찰한다. 그러므로 보살의 진여는 인지와 과지에 다름이 없이 오직 성成일 뿐, 괴壞는 없다. …….111)

그러므로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하다.”는 것은 대승에서 말하는 진여의 뜻을 곧장 드러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존재하는 법”이 ‘래’의 뜻이라고 한 것은 유루의 제법이 지나가는 것(去)임에 상대하여 일심은 다가오는 것(來)임을 드러낸 것이다. 저 제법이 지나가는 것에 대하여 말하자면 오취온법五取蘊法의 경우는 과지에 이르지 못하여 지나가면 돌아오지 못하지만, 일심진여의 경우는 과지에서도 존재하여 영원히 지나감이 없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법은 여래에서 ‘래’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불성론』에서 “자성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지득至得(佛地를 가리킨다)에 이른 것이다.”112)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일심은 두루 일체의 염染과 정淨 등 제법이 의지하는 바이므로 곧 “제법의 근본이다.”라고 하였다. 본래의 적정문寂靜門으로 항사의 공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으므로 “일체법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수연의 기동문起動門으로 항사의 염법을 구비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일체법을 구비하였다.”고 하였다.
염법을 가지고 심체心體를 향하면 두루 통하지 못하기 그러므로 그로부터 벗어나고 떠나버린다.

001_0615_c_01L然前二門中已顯本際故此門
001_0615_c_02L中明後際等又欲顯其如來之義
001_0615_c_03L謂未來際1) [6] 等恒者卽是如義
001_0615_c_04L及有者是其來義如佛性論云
001_0615_c_05L眞如者非如中有如無非如亦如
001_0615_c_06L二乘如者是非如中如無非如中非
001_0615_c_07L云何如是二乘之人約虛妄觀
001_0615_c_08L無常等相以爲眞如此虛妄觀唯
001_0615_c_09L因中有果地則無是故此如或成
001_0615_c_10L或壞菩薩如者離虛妄約眞性以
001_0615_c_11L觀如故於因果二處無異唯成無
001_0615_c_12L乃至廣說故知後際平等恒者
001_0615_c_13L正顯大乘之如義也所言及有明來
001_0615_c_14L義者對凡法去顯一心來如凡去
001_0615_c_15L時五取蘊法不至2) [7] 去而不來
001_0615_c_16L此一心如果地猶有永無過去
001_0615_c_17L言及有卽顯來義如論說言從住
001_0615_c_18L自性來至至得正謂此也如是一心
001_0615_c_19L通爲一切染淨諸法之所依止故
001_0615_c_20L是諸法根本本來靜門恒沙功德
001_0615_c_21L無所不備故言備一切法隨緣動門
001_0615_c_22L恒沙染法無所不具故言具一切法
001_0615_c_23L然擧染法以望心體不能遍通
001_0615_c_24L

001_0616_a_01L하지만 만약 심체를 가지고 염법을 향하면 두루 모든 염법에 통하지 못함이 없다. 그러므로 “세간법에서 떠나지도 않고 진실한 일체법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다.”는 뜻은 은부여래장隱覆如來藏의 뜻이다.113)
이 셋째, 곧 은부여래장은 일심이 동과 정에 두루 미쳐 염染과 정淨의 소의所依가 됨을 총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둘째, 곧 소섭여래장은 일심이 기동문에 개별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염법染法의 소의이다. 첫째, 곧 능섭여래장은 일심이 적정문에 개별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정법淨法의 소의이다.

둘째에서 “여래장은 본제에 불상응하는 자체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번뇌의 제법이 일심의 자체에 위반되는 것을 불상응이라 한 것이다. 일심의 자체는 기동문을 수연하는 여래장의 소의이기 때문에 그것은 불상응법의 체이다.
“번뇌에 얽힌 불청정한 법이다.”라는 것은 능의의 법이 일심의 자체에 의거하여 전변하면서 자심의 체를 얽어서 그에 따라 물들이기 때문에 능의법과 소의법을 합하여 둘째의 여래장의 자체로 삼은 것이다.
“오직 여래가 깨친 지혜로만 단제할 수 있다.”는 것은 해탈도解脫道로만 염법을 제대로 단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뜻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하였다.114)
첫째에서 “본제에 상응하는 자체이다.”라는 것은 본래의 적정문에 항사의 공덕을 갖추고 일심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것을 상응하는 공덕의 자체라 한 것이다.
“청정한 법이다.”라는 것은 능의의 공덕성은 염오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능의법과 소의법을 합하여 첫째에서 여래장의 자체를 삼은 것이다.
“이 법은 여실하여 허망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떠난 적도 없어 지혜가 부사의한 법이다.”라는 것은 ‘상응’의 뜻을 해석한 것인데, 이것은 법신의 뜻과 모든 공덕법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의 『부증불감경』에서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단절된 적도 없고 변이한 적도 없으며 부사의한 불법에 상응한 것을 법신이라 한다.”115)는 말과 같다.

() 이것은 무슨 뜻인가?
() 이 일심의 자체에 대략 다섯 가지 모습이 있다. 그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001_0616_a_01L以離脫若擧心體望諸染法遍諸
001_0616_a_02L染法無所不通故言於世法中不
001_0616_a_03L離不脫不離脫義是隱藏義此第
001_0616_a_04L三門摠明一心通於動靜爲染淨
001_0616_a_05L第一 [14] 門者別顯動門染法所依
001_0616_a_06L第一門者別顯靜門淨法所依
001_0616_a_07L二中言本際不相應體者諸煩惱法
001_0616_a_08L違反心體名不相應一心之體隨
001_0616_a_09L緣動門爲彼所依故是不相應法之
001_0616_a_10L言及煩惱纒不淸淨法者彼能依
001_0616_a_11L法依心體轉纒自心體令隨染故
001_0616_a_12L合取能依所依之法以爲第二如來
001_0616_a_13L藏體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者
001_0616_a_14L唯解脫道能正斷故此義具如二障
001_0616_a_15L章說第一中言本際相應體者
001_0616_a_16L來靜門備恒沙德與心相應故
001_0616_a_17L相應功德之體言及淸淨法者能依
001_0616_a_18L功德性離染故合取能依所依之法
001_0616_a_19L以爲第一如來藏體此法如實不
001_0616_a_20L虛妄不離不脫智不思議法者釋相
001_0616_a_21L應義是法身義與諸功德法相應故
001_0616_a_22L如上文言不離不脫不斷不異不思
001_0616_a_23L議佛法相應名爲法身是義云何
001_0616_a_24L此一心體略有五相何等爲五

001_0616_b_01L
첫째는 집착되는(所取) 차별상을 멀리 떠난 것이다. 둘째는 집착하는(能取) 분별집착을 해탈하는 것이다. 셋째는 삼세제에 평등하지 않음이 없이 편만한 것이다. 넷째는 허공계처럼 편만하지 않음이 없이 평등한 것이다. 다섯째는 유有·무無·일一·이異 등의 변견에 치우치지 않아 마음으로도 헤아릴 수 없고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항사보다도 많은 본유공덕本有功德(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공덕)에도 또한 다섯 가지 뜻이 있어서 일심의 본체에 상응한다.
첫째는 낱낱의 공덕이 소취의 분별상을 떠나 있으므로 법신을 떠난 적이 없다. 이것은 일심의 자체에 있는 다섯 가지 모습 가운데 첫째의 모습에 상응한다. 『부증불감경』에서 “떠난 적도 없다.”고 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낱낱의 공덕이 능취의 집착상을 벗어나 있으므로 법신을 벗어난 적이 없다. 이것은 일심의 자체에 있는 다섯 가지 모습 가운데 둘째의 모습에 상응한다. 저 경문에서 말한 “벗어난 적도 없다.”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낱낱의 공덕이 삼세제에 편만하므로 종적으로 전·후제에 단절됨이 없다. 이것은 일심의 자체에 있는 다섯 가지 모습 가운데 셋째의 모습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단절된 적도 없다.”고 하였다.
넷째는 낱낱의 공덕이 허공계처럼 평등하므로 횡적으로 피·차의 처소에 다름이 없다. 이것은 일심의 자체에 있는 다섯 가지 모습 가운데 넷째의 모습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변이한 적도 없다.”고 하였다.
다섯째는 낱낱의 공덕이 모두 변견을 떠나 분별사량의 경계가 아니고 언어문자의 표현이 끊겨 있다. 이것은 일심의 자체에 있는 다섯 가지 모습 가운데 다섯째의 모습에 상응한다. 저 『부증불감경』에서 “부사의한 불법이다.”라고 한 것이 이에 해당한다.
모든 공덕법에 이 다섯 가지 뜻이 있어 일심의 자체와 차별이 없고 일미에 융통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상응’이라 하는데, 저 심왕心王과 심수心數의 경우처럼 개별적인 자체로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어 지혜가 부사의한 법이다.”라고 한 것은 모든 공덕 가운데 대략 일각의 뜻(覺義)만 언급하고 그 다섯 가지 상응에서 간략하게 세 가지 뜻만 설명한 것이다.116) 여래장의 세 가지 뜻 가운데 이것은 첫째인 능섭여래장에 해당한다. 이로써 여래장의 세 가지 뜻을 약술하였다.

둘째의 소섭여래장에 대하여 『승만부인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이시여, 공여래장이란 법신으로부터 떠나 존재하고 벗어나 존재하며 다르게 존재하는 일체의 번뇌장입니다. 세존이시여, 불공여래장이란 항사겁이 지나도록 법신으로부터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달라진 적도 없는 부사의한 법입니다.117)


001_0616_b_01L遠離所取差別之相二者解脫
001_0616_b_02L能取分別之執三者遍三世際無所
001_0616_b_03L不等四者等虛空界無所不遍
001_0616_b_04L不墮有無一異等邊超心行處
001_0616_b_05L過言語道過恒沙等本有功德亦有
001_0616_b_06L五義與體相應一者一一功德
001_0616_b_07L所取相故非法身所離與第一相相
001_0616_b_08L如經言不離故1) [8] 一一功德
001_0616_b_09L脫能取執故非法身所脫與第二相
001_0616_b_10L相應如經不脫故三者此一一德
001_0616_b_11L遍三世際縱無前後際斷與第三相
001_0616_b_12L相應故言不斷四者此一一德等
001_0616_b_13L虛空界橫無彼此處異與第四相相
001_0616_b_14L應故言不異五者一一功德皆離
001_0616_b_15L諸邊非思量境絕言語路與第五
001_0616_b_16L相相應如經言不思議故諸功德法
001_0616_b_17L有此五義與體無別融通一味
001_0616_b_18L是道理名爲相應非如王數別體
001_0616_b_19L相應今此中言不離不脫智不思議
001_0616_b_20L法者諸功德中略擧覺義五相應
001_0616_b_21L中略說三義此是第一能攝藏也
001_0616_b_22L三種藏義略述如之言二門者
001_0616_b_23L夫人經言空如來藏者若離若脫若
001_0616_b_24L異一切煩惱藏不空如來藏者不離

001_0616_c_01L
생각해 보면 번뇌의 제법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그것은 부실한 경계를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허虛’라고 하고, 자체가 산란함을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망妄’이라 한다. 망이므로 진眞이 없고, 허이므로 실實이 없다. 진과 실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고, 여래를 덮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한다. 곧 이와 같은 공의 뜻이야말로 진실을 은부隱覆(감추어 덮음)한 것이다.
모든 번뇌의 경계는 부실한 모습으로서 법신으로부터 떠나 있기 때문에 “떠나 존재한다.”고 하였다. 모든 번뇌의 자체는 망집에 얽혀서 법신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벗어나 존재한다.”고 하였다. “다르게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앞의 허망한 차별과 분별이 법신의 평등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법신으로부터 떠나 존재하고 벗어나 존재하며 다르게 존재하는 이 세 가지 뜻으로 법신과 불상응하므로 진실이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곧 공의 뜻이다.
“불공”이란 일체의 공덕이 자체와 상응하는데 그 자체는 망이 아니므로 진이고, 그 경계는 허가 아니므로 실임을 말한 것이다. 진실을 말미암은 것이므로 불공이라 하고, 여래를 은부하고 있으므로 여래장이라 한다. “법신으로부터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달라진 적도 없는 부사의한 법입니다.”라는 구절은 불공의 뜻을 말한 것이다. 이것의 의미는 세 종류의 여래장의 문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공여래장의 자체는 앞의 세 가지118) 가운데 첫째의 법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공의 뜻은 그것의 둘째에 해당한다. 저 세 가지 여래장 가운데 은부의 뜻은 그 셋째인 은부여래장에 그대로 합치되어 있다.119) 그러므로 은부여래장 앞에 있는 능섭여래장과 소섭여래장의 두 가지 뜻에 대해서는 별도로 드러낸다.
지금 이 능섭여래장문과 소섭여래장문은 진실을 은부하고 있다는 것이 공의 뜻임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부와 소부의 두 가지 뜻으로 구별한다. 또한 『부증불감경』과 『승만경』은 각각 별도로 여래장문의 뜻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두 가지 경우와 세 가지 경우로 다르게 해석하였다. 그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다시 본문을 해석하겠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은 생멸하는 여지慮知의 상이다. 이치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여래장이니,

001_0616_c_01L不脫不異不思議佛法案云諸煩惱
001_0616_c_02L法皆是虛妄由境不實故虛由體散
001_0616_c_03L亂故妄妄故無眞虛故無實無眞
001_0616_c_04L實故說名爲空能覆如來名如來
001_0616_c_05L卽是空議隱覆眞也諸煩惱境
001_0616_c_06L不實之相法身所離故曰若離
001_0616_c_07L煩惱體妄執之縛法身所脫故言若
001_0616_c_08L言若異者卽前虛妄差別分別
001_0616_c_09L乖於法身平等性故以此三義不相
001_0616_c_10L應故是無眞實卽是空義也言不
001_0616_c_11L空者一切功德與體相應體非妄
001_0616_c_12L故眞境非虛故實由眞實故說名
001_0616_c_13L不空如來被覆名如來藏不離不
001_0616_c_14L脫等句是釋不空之義義如三種藏
001_0616_c_15L門已說然此中不空如來藏體卽前
001_0616_c_16L三中第一之法此中空義是彼第二
001_0616_c_17L而彼三種如來藏中隱覆之義合在
001_0616_c_18L第三故前二中別顯能攝所攝二義
001_0616_c_19L今此二種如來藏門欲顯空義隱覆
001_0616_c_20L眞實故別能覆所覆二義又此二經
001_0616_c_21L互顯別義所以二三兩門異釋且止
001_0616_c_22L乘論還釋本文

001_0616_c_23L
佛言如來藏者生滅慮知相隱理不顯
001_0616_c_24L

001_0617_a_01L그 자성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생멸하는 여지慮知의 상이다.”라는 것은 곧 공여래장空如來藏이다. 다만 이 경문에서는 감추는 주체(能隱)의 뜻을 드러낼 뿐 그것을 여래장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치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는 것이 여래장이다.”라는 것은 불공여래장不空如來藏이니, 감춰지는 대상(所隱)의 뜻에 의하여 여래장이라 한 것이다.
“그 자성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 여래장의 자성은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바뀌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무상론』에서는 여래장의 자성(性)에 다섯 가지 뜻이 있음을 설명한다.120)
첫째는 종류種類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병과 옷 등 일체의 색법이 사대의 종류를 떠나지 않고 모두 사대로서 자성을 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은 여래장이라는 일계를 벗어나지 않고 모두 동일계로서 종류를 삼기 때문이다. 『섭대승론』에서는 이를 체류體類의 뜻이라 하였고,121) 『불성론』에서는 자성自性의 뜻이라 하였다.122) 이들은 말은 다르지만 뜻은 다르지 않다.
둘째는 인因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나무에 있는 불의 자성과 같아서 불이 일어나는 인이 되므로 자성이라 말한다. 이와 같이 성인의 모든 무루법도 이것이 인이 되어 이루어진다. 『섭대승론』과 『불성론』에서도 똑같이 인의 뜻이라 하였다.
셋째는 생生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진금을 단련하여 장엄구를 만들어 낼 경우 장엄구가 생성되는 것은 진금을 자성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 여래장계도 또한 그와 같이 과지果地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을 생성(能生)한다. 그 법신의 생성은 여래장계를 자성으로 삼는다. 『섭대승론』에서도 또한 생生의 뜻이라 하였고, 『불성론』에서는 지득至得의 뜻이라 하여 인因의 뜻과는 구별하였다. 인因은 과지 이전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생已生의 입장에서 지득의 뜻이라 한 것이다.
넷째는 불개不改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마치 금강보배의 성질이 1겁 동안 머물러도 증가도 없고 감소도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래장계도 삼세에 평등하게 머물러 세간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출세간에서도 끝이 없다. 『섭대승론』과 『불성론』에서는 진실眞實의 뜻이라 말하였는데,

001_0617_a_01L是如來藏性寂不動

001_0617_a_02L
生滅慮知相者卽是空如來藏但此
001_0617_a_03L文中顯能隱義而不名此爲如來藏
001_0617_a_04L言隱理不顯是如來藏者是不空如
001_0617_a_05L來藏約所隱義名如來藏言性寂
001_0617_a_06L不動者顯此藏性雖隱不改此性
001_0617_a_07L有五義如無相論說一種類義是
001_0617_a_08L性義如甁衣等一切色法不離四大
001_0617_a_09L種類皆以四大爲性如是衆生不出
001_0617_a_10L一界皆用一界爲種類故攝大乘論
001_0617_a_11L名體類義佛性論中名自性義
001_0617_a_12L有左右意無異也二者因義是性
001_0617_a_13L如木中有火性與火作因故名
001_0617_a_14L爲性如是聖人諸無漏法以此爲因
001_0617_a_15L而得成故彼二論中同名因義也
001_0617_a_16L三者生義是性義如鍊眞金生莊嚴
001_0617_a_17L莊嚴具生以金爲性此界亦爾
001_0617_a_18L能生果地五分法身法身之生此界
001_0617_a_19L爲性攝大乘中亦名生義佛性論
001_0617_a_20L名至得義爲別因義是在果前
001_0617_a_21L就已生名至得義四者不改義
001_0617_a_22L是性義猶如金剛寶性一劫等住
001_0617_a_23L無增無減如是此界三世等住
001_0617_a_24L間不壞出世不盡彼二論中名眞實

001_0617_b_01L진실의 뜻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
다섯째는 밀장密藏의 뜻으로 자성의 뜻을 삼는다. 누런 돌에 들어 있는 진금의 성질과 같다. 누런 쇳돌을 부수지 않으면 이익을 얻을 수 없지만 수순하여 연마하면 보배로 활용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여래장의 자성은 은장隱藏의 뜻이다. 여래장의 자성도 또한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그 얽혀 있는 것을 부수지 않으면 외外가 되고 염染이 되지만 얽혀 있는 것을 부수어 상응하면 내內가 되고 정淨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장의 자성이 밀장의 뜻인 줄 알아야 한다. 이를 『불성론』에서는 비밀秘密의 뜻이라 하였고, 『섭대승론』에서는 장藏의 뜻이라 하였다. 뜻은 같지만 말만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지금 이 경문에서 말한 “자성”에도 이 다섯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라는 것은 마지막 넷째와 다섯째의 두 가지 뜻을 요약하여 드러낸 것이다. ‘고요함’은 비밀秘密의 뜻이고, ‘움직이지 않음’은 불개不改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일각一覺의 뜻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설법하는 부분을 마친다.

b. 총론을 인하여 각론을 발생시켜 모든 의난을 없앰

이하 부분에 여섯 가지 문답123)이 있는데, 총론을 인하여 각론을 발생시키는(因論生論) 방법으로 모든 의심을 해결한다.

a) 감추는 주체인 여지慮知의 상을 설명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생멸하는 여지의 상이란 무엇입니까?”

이 대목은 첫째 문답124)으로, 감추는 주체(能隱)인 여지慮知의 상을 설명한다.

(a) 답변함

이 답변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답변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설명한다.

ⓐ 간략한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여래장의 도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만약 옳고 그름이 있으면 온갖 망념이 발생한다. 그 천만 가지 사려분별이 곧 생멸의 모습이다.

첫째의 간략한 답변에는 두 구절이 있다.
첫째는 미혹의 대상(所迷)을 언급한다. 미혹의 대상인 도리에는 마음의 작용이 미치지 못하므로 “여래장의 도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고 말한다. ‘옳다(可)’는 것은 시是이고, ‘그르다(不)’는 것은 비非이다. 도리(理)는 사구四句125)와 단절되어 모든 시비를 떠나 있어서 분별심의 작용이 미치는 대상이 아니다.
둘째는 미혹하게 만드는 주체(能迷)를 드러낸다.

001_0617_b_01L眞實義者是不壞義所以言異而
001_0617_b_02L意同也五者密藏義是性義如黃
001_0617_b_03L石中有眞金性若不破鑛無所利益
001_0617_b_04L隨順鍊治卽有寶用是故彼性是
001_0617_b_05L隱藏義如來藏性當知亦爾不破
001_0617_b_06L其纏爲外爲染破纒相應成內成
001_0617_b_07L故知此性是密藏義佛性論中
001_0617_b_08L名秘密義攝大乘論名爲藏義義同
001_0617_b_09L言異灼然可見今此文中所言性
001_0617_b_10L含此五義寂不動者略顯後二
001_0617_b_11L寂是密藏義不動是不改義故上來
001_0617_b_12L正廣一覺義竟

001_0617_b_13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生滅
001_0617_b_14L慮知相

001_0617_b_15L
自此已下有六問答因論生論
001_0617_b_16L諸疑難此一問答明其能隱慮知之
001_0617_b_17L

001_0617_b_18L
佛言菩薩理無可不若有可不卽生
001_0617_b_19L諸念千思萬慮是生滅相

001_0617_b_20L
此答中有二重先略答後廣演
001_0617_b_21L中二句先擧所迷所迷之理心行
001_0617_b_22L處滅故言理無可不可者是也
001_0617_b_23L者非也理絕四句離諸是非非分
001_0617_b_24L別心之所行處也次顯能迷若有可

001_0617_c_01L“만약 옳고 그름이 있으면 온갖 망념이 발생한다.”는 것은 무명 때문에 평등함을 깨치지 못하면 곧 옳고 그름의 분별심이 발생한다. 이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염심126)이 함께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 천만 가지 사려분별이 곧 생멸의 모습이다.”라는 것은 여섯 가지 염심에 거침(麤)과 미세함(細)이 있어 모두 평등함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는 생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생멸상을 분별하면 대략 두 가지가 있다.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거침(麤)인데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미세함(細)인데 마음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거침 가운데 거침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침 가운데 미세함 및 미세함 가운데 거침은 보살의 경계이며, 미세함 가운데 미세함은 곧 부처의 경계이다. 이 두 가지 생멸은 무명의 훈습에 의거하여 존재하니, 이른바 인因에 의거하고 연緣에 의거하는 것이다. 인에 의거한다는 것은 불각不覺의 뜻이고, 연에 의거한다는 것은 허망하게 일으킨 경계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약 인이 소멸하면 연도 소멸한다. 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이 소멸하고, 연이 소멸하기 때문에 상응심이 소멸한다.127)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중생심에 상응하는 거침”이란 세 가지 상응염相應染이고, “중생심에 불상응하는 미세함”이란 세 가지 불상응염이다. “거침 가운데 거침”은 집상응염執相應染과 부단상응염不斷相應染으로 모두 6식에 해당하므로 범부의 경계이다. “거침 가운데 미세함”은 분별지상응염分別智相應染으로 제7식에 해당한다. “미세함 가운데 거침”은 현색불상응염現色不相應染과 능견심불상응염能見心不相應染이다. “미세함 가운데 미세함”은 근본업불상응염根本業不相應染이다. 이 세 가지128)는 모두 제8식의 경지에 해당한다. 이 가운데 세 가지 미세한 생멸(細生滅)은 무명의 바람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 “인이 소멸하기 때문에 불상응심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세 가지 거친 생멸(麤生滅)은 경계의 바람으로 움직여지기 때문에

001_0617_c_01L不卽生諸念者以有無明不覺平
001_0617_c_02L卽有分別可不之心由是具起六
001_0617_c_03L種染心故千思萬慮是生滅相者
001_0617_c_04L六種染心雖有麁細皆違平等
001_0617_c_05L生滅相故如起信論云復次分別生
001_0617_c_06L滅相者略有二種云何爲二一者
001_0617_c_07L與心相應故二者細與心不相
001_0617_c_08L應故又麁中之麁凡夫境界麁中
001_0617_c_09L之細細中之麁菩薩境界細中之
001_0617_c_10L是佛境界此二種生滅依於無
001_0617_c_11L明熏習而有所謂依因依緣依因者
001_0617_c_12L不覺義故依緣者妄作境界義故
001_0617_c_13L若因滅卽緣滅因滅故不相應心滅
001_0617_c_14L緣滅故相應心滅案云此中麁與心
001_0617_c_15L相應者謂三種相應染細與心不相
001_0617_c_16L應者三種不相應染麁中之麁者
001_0617_c_17L謂執相應染不斷相應染皆在六識
001_0617_c_18L凡夫境界也麁中之細者謂分
001_0617_c_19L別智相應染在第七識細中之麁者
001_0617_c_20L謂現色不相應染能見心不相應染
001_0617_c_21L細中之細者謂根本業不相應染
001_0617_c_22L三皆在第八識位此中三種細生滅
001_0617_c_23L無明風所動故言因滅故不相
001_0617_c_24L應心滅於中三種麁生滅者境界風

001_0618_a_01L“연이 소멸하기 때문에 상응심이 소멸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저 『기신론소』129)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지금 경문에서 말한 “그 천 가지 사려분별”이란 모든 불상응염심의 미세한 분별을 총섭한 것이다. “그 만 가지 사려분별”이란 모든 상응염심의 거친 분별을 총섭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망념이 움직인 모습이다. 따라서 “곧 생멸의 모습이다.”라고 한 것이다.

ⓑ 자세하게 설명함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멸의 모습에 상대하여 도리의 만족을 드러내고, 둘째는 도리의 만족에 상대하여 염의 과실을 설명하며, 셋째는 도리에 수순하여 염을 소멸하고 기동을 제거하여 적연에 나아가는 공리功利를 변별한다.

보살이여, 본각의 자성을 관찰해 보면 그 도리가 애초부터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천만 가지 사려분별은 도리를 증가시키지 못하고 한낱 동란動亂에 불과하여 본래의 심왕을 상실할 뿐이다.

ㄱ. 생멸의 모습에 상대하여 도리(理)의 만족을 드러냄

그 첫째에서 “보살이여”라는 말은 해탈보살을 부르는 표현이다.
“본각의 자성을 관찰해 본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본각 여래장의 자성을 관찰해 본다는 것이다.
“그 도리(理)가 애초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관찰된 본각 여래장의 도리에 무량한 자성의 공덕이 구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진여 자체상은 본래부터 그 자성에 일체의 공덕이 만족되어 있다. 소위 진여 자체에 대지혜의 광명이라는 뜻이 있고, 법계를 널리 비춘다는 뜻이 있으며, 제대로 알아차린다는 뜻이 있고, 자성청정심의 뜻이 있으며, 상·낙·아·정의 뜻이 있고, 청량·불변·자재하다는 뜻이 있다. 이와 같이 항사를 능가하고, 떠난 적도 없으며, 단절된 적도 없고, 변이한 적도 없는 부사의한 불법을 구비 내지 구족하고 나아가서 부족한 뜻이 없으므로 여래장이라 하고, 또한 여래법신이라 한다.130)

지금 이 경문의 “그 도리가 애초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통틀어 드러낸 것이다. 첫째 경문의 뜻을 마친다.131)


001_0618_a_01L所動故言緣滅故相應心滅於中委
001_0618_a_02L如彼論疏中說也今此經言千
001_0618_a_03L思者摠攝一切不相應染細分別故
001_0618_a_04L萬慮者摠攝一切相應染心麁分別
001_0618_a_05L此二皆是動念之相以之故言是
001_0618_a_06L生滅相也

001_0618_a_07L
菩薩觀本性相理自滿足千思萬慮
001_0618_a_08L不益道理徒爲動亂失本心王

001_0618_a_09L
此下廣演於中有三一者對生滅
001_0618_a_10L顯理滿足二者對理滿足明染
001_0618_a_11L闕失辨順理滅染去動趣寂之利
001_0618_a_12L初中言菩薩者是呼解脫菩薩之辭
001_0618_a_13L觀本性相者佛觀本覺如來藏性故
001_0618_a_14L理自滿足者所觀本覺如來藏理
001_0618_a_15L足無量性功德故如起信論云復次
001_0618_a_16L眞如自體相者從本已來性自滿足
001_0618_a_17L一切功德所謂自體有大智慧光明
001_0618_a_18L義故遍照法界義故眞實識知義故
001_0618_a_19L自性淸淨心義故常樂我淨義故
001_0618_a_20L凉不變自在義故具足如是過於恒
001_0618_a_21L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乃至
001_0618_a_22L滿足無有所少義故名爲如來藏
001_0618_a_23L名如來法身故今此經言理自滿足
001_0618_a_24L摠顯如是功德滿足也初段文竟

001_0618_b_01L
ㄴ. 도리의 만족에 상대하여 염의 과실을 설명함

둘째는 생멸하는 망념의 과실에 대하여 설명한다.132) 여기서는 이익이 없고 손해가 있음을 통틀어 설명하고 있다. 이 뜻에 대하여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해석한다.

위에서는 진여에 대하여 그 자체가 평등하여 일체의 모습을 떠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자체에 이와 같은 갖가지 공덕이 있다고 다시 설하는가?
비록 그와 같은 공덕의 뜻이 실제로 있다고 해도 무차별상으로 동등한 일미이고 유일한 진여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무분별하여 분별상을 떠나 있는 까닭에 무이無二이다.

그러면 또 무슨 뜻에서 차별상을 설하는가?
업식에 의하여 생멸상이 발생하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보여 주고 있는가?
일체법은 본래 유심唯心으로 실로 망념(相念)이 없다. 그러나 망심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망념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 때문에 무명이라 한다. 그리고 심성이 일어나지 않는 그것이 곧 대지혜의 광명이라는 뜻이다. 만약 심성에서 유견有見이 일어나면 곧 불견不見의 상도 있겠지만, 심성에서 유견이 떠나 있으면 곧 법계를 널리 비춘다는 뜻이다. 만약 마음이 기동하면 제대로 알 수도 없으며, 자성이 없고 상도 없고 낙도 없으며 아도 없고 정도 없으며, 내지 (열뇌로 붕괴되어 자재하지 못하고) 항사를 능가하는 망염妄染의 뜻이 구비된다. 이런 뜻에 상대하여 심성이 기동하지 않으면 곧 항사를 능가하는 공덕상의 뜻이 있음을 시현한다. 이에 만약 마음이 기동하여 목전의 법에서 망념인 줄을 보게 된다면 부족하지만 이와 같이 청정법의 무량한 공덕은 곧 일심이기 때문에 그 망념이 없어져 만족하게 되는데, 그것을 법신여래장이라 한다.133)

여기 경문에서 “한낱 동란에 불과하다.”고 한 것은 마음이 기동한다면 제대로 알 수 없고, 자성이 없으며, 상·낙·아·정도 없기 때문에 ‘동動’이라 하였고, 심성에서 유견이 일어나면 곧 불견의 상 등도 있기 때문에 ‘난亂’이라 하였다.
“본래의 심왕을 상실할 뿐이다.”라는 것에서 무량한 공덕이 곧 일심인데,

001_0618_b_01L明生滅動念之過於中摠明無益有
001_0618_b_02L如彼論中廣釋此義云問曰
001_0618_b_03L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云何
001_0618_b_04L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答曰雖實
001_0618_b_05L有此諸功德義而無差別之相等同
001_0618_b_06L一味唯一眞如此義云何以無分別
001_0618_b_07L離分別相是故無二復以何義得說
001_0618_b_08L差別以依業識生滅相示此云何示
001_0618_b_09L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相念
001_0618_b_10L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
001_0618_b_11L無明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
001_0618_b_12L若心起見卽有不見之相心性
001_0618_b_13L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若心有動
001_0618_b_14L非眞識知無有自性非常非樂非我
001_0618_b_15L非淨乃至具足過恒沙等妄染之義
001_0618_b_16L對此義故心性無動卽有過恆沙等
001_0618_b_17L諸淨功德相義示現若心有起更見
001_0618_b_18L前法可念者卽有所少如是淨法無
001_0618_b_19L量功德卽是一心更無所念是故
001_0618_b_20L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今此經言
001_0618_b_21L徒爲動亂者以心有動非眞識知
001_0618_b_22L無有自性非常樂我淨等故言動也
001_0618_b_23L以心起見卽有不見之相等故言亂
001_0618_b_24L失本心王者無量功德卽是一

001_0618_c_01L일심이 주主가 되므로 ‘심왕’이라 하였고, 생멸과 동란으로 이 심왕을 떠나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므로 ‘상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ㄷ. 도리에 수순하여 염을 소멸하고 기동을 제거하여 적연에 나아가는 공리를 변별함

이하는 셋째로 도리에 수순하여 염染을 소멸하고 기동을 제거하여 적연의 경지에 나아가는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드러내고, 둘째는 거듭 성취한다.

ㄱ) 곧장 드러냄

그러나 만약 사려분별이 없으면 곧 생멸이 없어져 여실하여 기동이 없으며, 제식이 안적安寂하고 번뇌(流注)가 발생하지 않아 오법五法이 청정해진다. 이것을 대승이라 말한다.

이 경문은 기동을 제거하여 적연의 경지에 나아가는 것을 곧장 드러내는 부분이다.
“만약 사려분별이 없으면”은 처음 초지로부터 불지에 이르기까지 일심의 평등법계를 점차 수순하여 영원히 일체의 사려분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생멸이 없어진다.”는 것은 앞서 사려분별로 말미암아 생멸상이 있었지만 이제 사려분별이 없어져 영원히 분별하지 않아 두 종류의 생멸134)을 완전히 떠났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이미 도리에 수순하여 기동하지 않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다시는 기동하지 않기 때문에 “여실하여 기동이 없다.”고 하였다.
두 종류의 생멸이 완전히 그치면 여덟 가지 식의 움직임은 모두 적정으로 돌아가고, 여섯 가지 염의 번뇌가 영원히 소멸되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제식이 안적하고 번뇌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번뇌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법계가 원만하게 드러나고, 제식이 안적하므로 사지四智가 원만하게 성취되기 때문에 “오법이 청정해진다.”고 하였다.
실어 나르는(運載) 공덕에 있어서 이것을 능가함이 없으므로 “이것을 대승이라 말한다.”라는 말로 총결하였다.
기동을 제거하여 적연의 경지에 나아감을 곧장 설명하는 부분을 마친다.

ㄴ) 거듭 성취함

보살이여, 오법이 청정해진 경지에 들어가면 마음에 곧 망념이 없어진다. 망념이 없어지면 여래의 자각성지自覺聖智의 경지에 들어간다. 자각성지의 경지에 들어가면 일체법이 본래 불생임을 잘 알게 된다. 본래 불생임을 알면 곧 망상이 없어진다.”

이것은 거듭해서 성취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에 삼구가 있다.
첫째 “오법이 청정해진 경지에 들어가면 마음에 곧 망념이 없어진다.”고 한 것은

001_0618_c_01L一心爲主故名心王生滅動亂
001_0618_c_02L違此心王不得還歸故言失也

001_0618_c_03L
若無思慮卽無生滅如實不起諸識
001_0618_c_04L安寂流注不生得五法淨是謂大乘

001_0618_c_05L
此下第三順理滅染去動就寂於中
001_0618_c_06L有二正顯重成此卽正顯去動就
001_0618_c_07L若無思慮者始從初地乃至佛
001_0618_c_08L漸順一心平等法界永無一切思
001_0618_c_09L慮分別故卽無生滅者由前思慮
001_0618_c_10L有生滅相今無思慮永無分別
001_0618_c_11L種生滅究竟離故從此已去順理
001_0618_c_12L不動窮未來際不復還動故言如
001_0618_c_13L實不起二種生滅究竟息時八種識
001_0618_c_14L皆得歸靜六染流注永滅不起
001_0618_c_15L故言諸識安寂流注不生流注不生
001_0618_c_16L法界圓顯諸識安寂故四智滿
001_0618_c_17L故言得五法淨運載之功莫過
001_0618_c_18L於此故摠結言是謂大乘正明去
001_0618_c_19L動就寂文竟

001_0618_c_20L
菩薩入五法淨心卽無妄若無有妄
001_0618_c_21L卽入如來自覺聖智之地入智地者
001_0618_c_22L知一切從本不生知本不生卽無妄
001_0618_c_23L

001_0618_c_24L
此是重顯卽有三句初言入五法

001_0619_a_01L일심의 근원(心源)으로 돌아갈 때 망념의 불각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망념이 없어지면 여래의 자각성지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불각이 다하는 때에 곧 시각始覺의 원만한 지혜(圓智)의 경지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곧 불각에 상대하여 시각의 충만을 드러낸 것이다.
셋째 “자각성지의 경지에 들어가면 일체법이 본래 불생임을 잘 알 수 있다. 본래 불생임을 알면 곧 망상이 없어진다.”고 한 것은 시각이 충만할 때 사상四相(生·住·異·滅)으로 기동되는 망념의 불각이 본래 불생임을 알게 되는 것이니, 망상이 본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래서 『기신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마음의 발기에 대하여 처음의 모습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처음의 모습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무념을 말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일체중생을 깨달았다고 하지 않으니, 본래부터 생각생각 상속되어 일찍이 망념을 떠난 적이 없기 때문에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말한다. 만약 무념을 터득하면 곧 마음의 생상·주상·이상·멸상을 알게 되니, 무념과 동등하기 때문이다. 실로 시각과 다름이 없으니 사상四相이 동시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으로 일어남이 없고, 본래 평등하므로 본각과 똑같다.135)

생각해 보면, 『기신론』에서 “만약 무념을 터득하면 곧 마음의 생상·주상·이상·멸상을 알게 된다.”는 말은 『금강삼매경』의 “일체법이 …… 알게 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또 『기신론』에서 “실로 시각과 다름이 없다.”는 말은 곧 『금강삼매경』의 “본래 불생임을 잘 알게 된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또 『기신론』에서 “사상이 동시에 있어서 각각 독립적으로 일어남이 없고, 본래 평등하므로 본각과 똑같다.”는 말은 곧 『금강삼매경』의 “본래 불생임을 알면 곧 망상이 없어진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꿈에서 강을 건너는 비유136)는 이와 관련하여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

b) 망상을 그칠 필요가 없음을 설명

이하는 둘째 문답137)으로 망상을 그칠(止息)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는 것이다.0)

(a) 망상이 없으면 그칠 필요가 없음을 질문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그렇다면 망상이 없는 자는 굳이 망상을 그칠 필요도 없겠습니다.”

묻는 내용은

001_0619_a_01L淨心卽無妄者歸心源時卽無妄念
001_0619_a_02L之不覺故第二言若無有妄卽入如
001_0619_a_03L來自覺聖智之地者不覺盡時卽入
001_0619_a_04L始覺圓智之地故是對不覺顯始覺
001_0619_a_05L滿也第三入智地者善知一切從本
001_0619_a_06L不生知本不生卽無妄想者始覺滿
001_0619_a_07L時能知不覺四相動念本來不生
001_0619_a_08L卽知本來無妄想故是顯始覺不異
001_0619_a_09L本覺也如起信論云一切衆生
001_0619_a_10L名爲覺以從本來念念相續未曾
001_0619_a_11L離念故說無始無明若得無念者
001_0619_a_12L卽知心相生住異滅以無念等故
001_0619_a_13L實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
001_0619_a_14L皆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
001_0619_a_15L此中言若得無念卽知心相生住
001_0619_a_16L異滅者卽顯經中善知一切也而實
001_0619_a_17L無有始覺之異者卽顯經中善知從
001_0619_a_18L本不生也以四相俱時而有皆無自
001_0619_a_19L本來平等同一覺故者卽顯經
001_0619_a_20L中知本不生卽無妄想也夢中渡
001_0619_a_21L河之喩此中應廣說也

001_0619_a_22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無妄想者
001_0619_a_23L應無止息

001_0619_a_24L
此下第二問答明無止息問意言

001_0619_b_01L“본래 망상이 없으면 곧 그칠 대상(所止)도 없다. 그칠 대상이 없으므로 또한 그치는 주체(能止)도 없다. 그치는 주체가 없으므로 마땅히 시각도 없어야 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질문한 것이다.

(b) 없앨 것이 없다고 답변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망상은 본래 불생이므로 멈출(息) 망상이 없다. 본심에 망심이 없는 줄 알면 그칠(止) 망심도 없다. 그래서 분별(分)도 없고 차별(別)도 없으면 현식現識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칠(止) 망상의 발생이 없으므로, 곧 그칠 것(止)도 없고 또한 그치지 않음(無止)도 없다. 왜냐하면 그칠 것이 없다는 것마저도 그쳐야 하기 때문이다.”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칠 것이 없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칠 것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긍정한 까닭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부정한 까닭은 시각이 본각과 똑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 긍정하는 가운데 멈춤(息)과 그침(止)은 무엇이 다른가?
() 망심이 기동起動하면 멈추어야 하고, 망심이 치산馳散하면 없애야 한다. 그러나 본래 기동도 없고 치산도 없으므로 멈춤도 없고 없앰도 없다.
“분별이 없다.”는 것은 견해에 분별상이 없는 것이고, “차별이 없다.”는 것은 형상에 분별견이 없는 것이다. 이미 형상과 견해에 분별과 차별이 없으면 현재식도 본래 발생하지 않고 과거식도 발생하지 않으며 미래식도 본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모두 아는 일이다. 다만 현재에 의거하여 본래 발생하지 않음을 설명했을 뿐이다. 이미 그쳐야 할(所止) 불각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것은 곧 그치는 주체(能止)로서의 시각과 다름이 없다. 이것은 시각과 본각이 다르지 않다는(不異門) 것에 의하여 이처럼 긍정한 것이다.138)
“또한 그치지 않음도 없다.”는 것은 본각과 다르지 않은 시각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칠 것이 없다는 것마저도 그쳐야 한다.”는 것은 (망상의) 발생이 없다는 망심을 그치는(能止)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망상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해서 망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그 마음마저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곧 망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그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쳐야 할 것이 없다는 것마저도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치는 주체(能止)로서의 시각始覺이 없지 않으므로 이처럼 답변한 것이다.139)


001_0619_b_01L本無妄想卽無所止所止無故
001_0619_b_02L止亦無無能止故應無始覺如是
001_0619_b_03L難也

001_0619_b_04L
佛言菩薩妄本不生無妄可息知心
001_0619_b_05L無心無心可止無分無別現識不生
001_0619_b_06L無生可止是卽無止亦非無止何以
001_0619_b_07L止無止故

001_0619_b_08L
答意有二先許無止後遮無止
001_0619_b_09L始覺不異本覺故遮者始覺非
001_0619_b_10L唯是本覺故許中息與止何異者
001_0619_b_11L起動故可息心馳散故可止而本無
001_0619_b_12L起無馳故無可息可止耳無分者
001_0619_b_13L無相分於見故無別者無見別於相
001_0619_b_14L相見旣無分別現識本來不生
001_0619_b_15L去來不生愚智共知故約現在明本
001_0619_b_16L不生旣無所止不覺之生卽無能止
001_0619_b_17L始覺之異依不異門如是許也
001_0619_b_18L非無止者非無不異之始覺故止無
001_0619_b_19L止故者能止無生之妄心故雖生不
001_0619_b_20L可得而非徒無生故非徒無生故
001_0619_b_21L不無所止所以非無能止之覺如是
001_0619_b_22L答也

001_0619_b_23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若止無止
001_0619_b_24L止卽是生何謂無生

001_0619_c_01L
c) 무생관을 드러냄

이하는 셋째 문답140)으로 무생관을 드러내는 것이다.0)

(a) 무생에 대하여 질문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만약 그칠 것이 없다(無止)는 것마저도 그쳐야(止) 한다면 그친다는 바로 그것이 생깁니다. 그러면 무생無生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질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약 없애는(能止) 시각이 있으면 곧 없애는 관이 생긴다. 비록 불각이 기동함은 사라졌을지라도 도리어 시각의 생김이 남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어찌 무생관을 증득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b) 무생에 대하여 답변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그친다는 것은 생김이지만 그치고 난 후에는 그치는 것도 없다. 또한 그치는 것이 없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집착이 없다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이 생기겠는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렇다는(與) 긍정이고, 둘째는 그렇지 않다는(奪) 부정이다.
그렇다는 것은 생기는 것을 긍정하는 것인데, 방편관方便觀의 입장으로 보면 그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세제일법世第一法141)의 경우에는 비록 식의 생김을 그쳤을지라도 그 식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식을 그친 마음(能止心)에 그쳤다는 집착이 발생된다면 식을 그친 바로 그때를 당해서는 곧 그쳤다는 사실이 생긴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이런 까닭에 “그친다는 것은 생김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찰나(一念)가 지나면 곧 그쳤다는 사실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쳤다는 사실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집착심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치고 난 후에는 그치는 것도 없다.”고 하였다. 이 경우 일체의 분별을 멀리 떠난 까닭에 그치는 것이 없다는 그 무無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스스로 집착이 없다는 그 마음(無住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처럼 능能과 소所가 영원히 단절되어 절대평등한데, 이때에 무엇이 생기겠는가.
이와 같이 답하였다.

d) 증익견增益見과 손감견損減見을 물리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능·소의 발생이 없는 마음(無生心)은 무엇을 취하고 버리며, 어떤 법의 상에 머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능소의 발생이 없는 마음은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능소가 없는 마음(不心)에 머물고 능소가 없는 법(不法)에 머문다.”

이는 넷째 문답142)으로 증익견增益見과 손감견損減見을 물리친 것이다.
배우는 많은 이들이 “관觀에 들어간 마음은 형상 없는 도리를 취하고 모든 형상 있는 현상을 버린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와 같은 증익견을 물리치려는 까닭에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고 하였다.
혹은 “관에 들어간 때에는 머무는 법도 전혀 없고 또한 머무는 마음도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필경무畢竟無와 다르지 않다.

001_0619_c_01L
此下第三問答顯無生觀難意云
001_0619_c_02L若有能止之覺則生能止之觀雖遣
001_0619_c_03L不覺之起還存始覺之生何謂能證
001_0619_c_04L無生觀耶

001_0619_c_05L
佛言菩薩當止是生止已無止亦不
001_0619_c_06L住於無止亦不住於無住云何是生

001_0619_c_07L
答意有二先與後奪與者許生
001_0619_c_08L方便觀能止心生故且如世第一法
001_0619_c_09L之時雖止識生不取於識而能止
001_0619_c_10L取無而生當此止時卽許是生
001_0619_c_11L以之故言當止是生過此一念
001_0619_c_12L不取無不取無故取心不生以之
001_0619_c_13L故言止已無止此時遠離一切分別
001_0619_c_14L不住於無止之無亦不取其自無
001_0619_c_15L住心能所永絕平等平等云何是
001_0619_c_16L時可得是生如是答也

001_0619_c_17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無生之心
001_0619_c_18L有何取捨住何法相佛言無生之心
001_0619_c_19L不取不捨住於不心住於不法

001_0619_c_20L
此是第四問答遣增減見謂諸學者
001_0619_c_21L猶作是念入觀之心取無相理
001_0619_c_22L諸相事爲遣此增益見故言不取不
001_0619_c_23L或作是念入觀之時都無所住
001_0619_c_24L亦無能住心如是不異於畢竟無

001_0620_a_01L바로 이와 같은 손감견을 없애기 위해 “능소가 없는 마음에 머물고 능소가 없는 법에 머문다.”고 하였다. 비록 머묾이 있는 것도 아니고 머묾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머묾이 없는 것이 아니므로 ‘머문다.(住)’고 말할 수 있다.

e) 거듭 의심하는 마음을 물리침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무엇이 능·소가 없는 마음에 머물고 능·소가 없는 법에 머문다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능·소의 마음을 발생하지 않는 그것이 능·소가 없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고, 능·소의 법을 발생하지 않는 그것이 능·소가 없는 법에 머무는 것이다.

이하 부분은 다섯째 문답143)으로 거듭 의심하는 마음을 물리친 대목이다.
의심하는 마음은 다음과 같다. “이미 머문다고 말하였으면 마땅히 마음이라고 하거나 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마음이나 법이 아니라면 마땅히 머물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매우 심오하니 어떻게 믿고 이해해야 하겠는가.” 이와 같이 의심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이 답변한 뜻은 다음과 같다.
“증득하는 관심觀心도 없고 증득된 이법理法도 없다. 그러므로 ‘능·소의 마음을 발생하지 않고 능·소의 법을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발생한다(生)는 것은 존재한다(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항상 마음과 법이 존재한 적도 없고, 간혹 실념 때문에 존재한 적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능·소가 없는 마음에 머무는 것이고, 그것이 능·소가 없는 법에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머문다(住)는 것은 항상한다(恒)는 것이다. 항상 퇴실하지 않기 때문에 머문다고 하였다. 머문다는 뜻은 이와 같다. 그래서 능·소가 없는 마음을 널리 수순하니 어찌 마음과 법 사이에 어긋남이 있겠는가.”
이와 같이 곧장 답변하셨다. 이하는 곧 이것을 거듭 드러낸 대목이다.

(a) 거듭 답변을 드러냄

이하는 위의 질문에 대하여 두 번 거듭하여 드러낸 대목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형상을 멀리 떠나 삼세에 두루함을 드러내고, 둘째는 법계를 수순하여 육바라밀을 구비한 수행을 드러낸다.

ⓐ 모든 형상을 멀리 떠나 삼세에 두루함을 드러냄

선남자여, 마음과 법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의지함이 없고, 유루의 여러 수행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변이하는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저 허공에는 움직임(動)도 없고 머묾(住)도 없어서 일어남(起)도 없고 일으킴(作)도 없으며 저것(彼)도 없고 이것(此)도 없다. 아공의 심안을 터득하고 법공의 몸을 터득하면 오음과 육입이 모두 공적하다.

첫째에 세 구절이 있으니, 첫째 구절은 법法이고, 둘째 구절은 비유(喩)이며, 셋째 구절은 합合이다.
“마음과 법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위에서 자세하게 답변한 것을 이어받은 구절이다.
“곧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001_0620_a_01L爲除此損減見故言住於不心
001_0620_a_02L於不法雖非有住而非無住非無
001_0620_a_03L住故得言住也

001_0620_a_04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云何住於
001_0620_a_05L不心住於不法佛言不生於心是住
001_0620_a_06L不心不生於法是住不法

001_0620_a_07L
此下第五問答重遣疑情疑情之言
001_0620_a_08L旣言住者卽應是心是法若不心法
001_0620_a_09L卽應言是不住此言甚深云何信解
001_0620_a_10L如是疑也佛答意言不存能證觀心
001_0620_a_11L不存所證理法故言不生於心不生
001_0620_a_12L於法生猶存也旣恒不存心法
001_0620_a_13L或失念而存故言是住不心是住不
001_0620_a_14L住猶恒也恒不退失故名爲住
001_0620_a_15L住義如是彌順不心何容相違於其
001_0620_a_16L間哉如是正答下卽重顯

001_0620_a_17L
善男子不生心法卽無依止不住諸行
001_0620_a_18L心常空寂無有異相 [15] 譬彼虛空無有
001_0620_a_19L動住無起無作無彼無此得空心眼 [16]
001_0620_a_20L得法空身一本
作心
[17] 五陰六入悉皆空寂

001_0620_a_21L
此下第二重顯於中有二先顯遠離
001_0620_a_22L諸相周遍三世後顯隨順法界具
001_0620_a_23L修六度初中三句謂法喩合不生
001_0620_a_24L心法者牒前正答句卽無依止者

001_0620_b_01L공간적으로 능의와 소의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유루의 여러 수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과거와 미래와 현재로 구별되어 나타난 수행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의 구별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공적하고, 능의와 소의가 없으므로 변이하는 모습이 없다.
“비유하면 저 허공에는 ……” 이하는 세 구절 가운데 둘째로서 비유를 인용한 것이다.
“움직임(動)도 없고 머묾(住)도 없다.”는 것은 저 세간의 허공이 무위법으로 상주하여 이전에 소멸했다가 나중에 생겨난다든가 하는 변동이 없다는 것으로 유루의 여러 수행에 집착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고, 또한 능의와 소의의 머묾이 없다는 것으로 곧 의지함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
“일어남(起)도 없고 일으킴(作)도 없다.”는 것은 곧 마음이 항상 공적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저것(彼)도 없고 이것(此)도 없다.”는 것은 변이하는 모습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을 언급하여 불생관不生觀을 비유한 것이다.
셋째 구절인 합合 부분에서 “아공의 심안을 터득한다.”는 것은 관찰하는 마음이 발생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관찰하지 못할 바가 없음을 터득한다는 것이다.
“법공의 몸을 터득한다.”는 것은 관찰되는 법이 발생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평등한 법신을 터득한다는 것이다.
“오음이 모두 공적하다.”는 것은 아공의 심안을 터득함으로써 시간적으로 삼세에 통달하여 오음이 공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허공에는 일어남(起)도 없고 일으킴(作)도 없다.”는 것에 합치된다.
“육입이 모두 공적하다.”는 것은 법공의 몸을 터득함으로써 공간적으로 내외에 두루하여 육입이 공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허공에는 저것도 없고 이것도 없다.”는 것에 합치된다.

ⓑ 법계를 수순하여 육바라밀을 구비한 수행을 드러냄

선남자여, 공적한 법을 닦는 자는 삼계三界에 의지하지 않고, 계상戒相144)에 머물지 않으며, 청정하여 욕념이 없고, 섭수함도 없고 방탕함도 없으며, 성품은 금강과 같아 삼보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적심이 부동한 경지에서 육바라밀을 구비한다.”

이것은 둘째의 육바라밀을 구비한 수행을 드러낸다.145)
“공적한 법을 닦는 자”란 위의 공적한 마음을 거듭 제기한 것이다. 이하는 모든 육바라밀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삼계三界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보시바라밀을 갖추고, “계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지계바라밀을 갖추며, “청정하여 욕념이 없기” 때문에 인욕바라밀을 갖추고, “섭수함도 없고 방탕함도 없기” 때문에 정진바라밀을 갖추며, “성품은 금강과 같기” 때문에 선정바라밀을 갖추고, “삼보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갖춘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관심觀心으로

001_0620_b_01L橫無能依所依之異不住諸行者
001_0620_b_02L無曾當今現之行無曾當故心常空
001_0620_b_03L無能所故無有異相譬彼已下
001_0620_b_04L第二引喩無有動住者如世虛空
001_0620_b_05L無爲常住無有前滅後生之動喩於
001_0620_b_06L不住諸行亦無能依所依之住比於
001_0620_b_07L卽無依止無起無作卽同心常空寂
001_0620_b_08L無彼無此不異無有異相故擧虛空
001_0620_b_09L喩不生觀也合中言得空心眼者
001_0620_b_10L不生能觀心得無所不觀故得法空
001_0620_b_11L身者由不生所觀法得平等法身故
001_0620_b_12L五陰皆空者以得空心眼達於三世
001_0620_b_13L五陰空故合前虛空無起作也六入
001_0620_b_14L悉空者以得法空身遍於內外六
001_0620_b_15L入空故合前虛空無彼此也

001_0620_b_16L
善男子脩空法者不依三界不住戒
001_0620_b_17L淸淨無念無攝無放性等金剛
001_0620_b_18L壞三寶空心不動具六波羅蜜

001_0620_b_19L
是第二顯具修六度修空法者者
001_0620_b_20L前空寂之心下別顯具六度不依三
001_0620_b_21L故具施度不住戒相故具戒度
001_0620_b_22L淸淨無念故具忍度無攝無放
001_0620_b_23L具精進性等金剛故具禪定不壞
001_0620_b_24L三寶故具般若何以故唯一觀心

001_0620_c_01L수행의 궤칙을 두루 비추어보고 모든 쟁론을 단절한 까닭에 ‘삼보’를 갖추게 되고 삼보의 뜻이 성취된 까닭에 “저버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의 공적한 마음으로 별도의 동작이 없으면서 육바라밀을 갖추었기 때문에 “공적심이 부동한 경지에서 육바라밀을 구비한다.”고 하였다.

f) 출세간의 육바라밀의 뜻을 거듭 드러냄

이하 부분은 여섯째 문답146)으로 출세간의 육바라밀의 뜻을 거듭 드러낸 대목이다. 질문자는 의심을 해결하기 위하여 세간의 육바라밀의 사상事相을 언급함으로써 출세간의 마음에도 육바라밀이 갖추어져 있는가를 의심한다.
이에 대한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고, 둘째는 자세하게 해석한 것이다.

(a) 간략하게 나타냄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육바라밀은 모두 유상有相인데 유상법으로 세간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내가 설한 육바라밀은 무상無相이고 무위無爲이다.

이 대목은 첫째의 간략하게 나타낸 것이다.
“무상이다.”라고 한 것은 보시하는 자·보시 받는 자·보시물의 세 가지 모습(三輪相)을 떠났기 때문이다.
“무위이다.”라고 한 것은 생상·주상·멸상의 세 가지 유위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내가 이전에 설한 일심이 육바라밀을 구비하고 있다.”는 것은 낱낱이 모두 무상·무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육바라밀도 세간을 벗어난 것으로 세간의 유상·유위와는 같지 않다.

(b) 자세하게 해석함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별적으로 해석하고, 둘째는 총체적으로 설명한다.

ⓐ 개별적으로 해석함

어째서인가? 이욕離欲의 경지에 잘 들어가서 마음이 항상 청정하며, 실다운 말(實語)로 방편을 삼아 본각의 이익으로 사람을 이롭게 하니, 이것이 곧 보시바라밀이다.

“어째서인가?”는 (앞의) 질문으로 인해 “이미 여섯 가지나 있는데 무슨 까닭에 무상이라 말하는가.”라는 물음을 일으킨 것이다.
전의轉依147)된 진여를 “이욕離欲”이라 하니, 삼유三有의 욕망을 떠남으로 인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관심의 자체를 이해한 까닭에 “잘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 출·입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이라 하였고, 삼륜三輪148)에 대한 번뇌를 떠난 까닭에 “청정하다.”고 하니, 곧 위에서 말한 “삼계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001_0620_c_01L遍照可軌絕諸諍論故備三寶
001_0620_c_02L寶義成故言不壞唯一空心無別
001_0620_c_03L動作而具六度故言空心不動具
001_0620_c_04L六波羅密

001_0620_c_05L
解脫菩薩而白佛言尊者六波羅密
001_0620_c_06L皆是有相有相之法能出世耶
001_0620_c_07L善男子我所說六波羅密者無相
001_0620_c_08L無爲

001_0620_c_09L
此下第六問答重顯出世六度之義
001_0620_c_10L問者乘疑而爲決之故擧世間六度
001_0620_c_11L事相以疑出世心中具六答中有二
001_0620_c_12L一者略標二者廣釋此卽略標
001_0620_c_13L無相者離施受等三輪相故言無爲
001_0620_c_14L離生住等三有爲故我前所說一
001_0620_c_15L心具六者一一皆是無相無爲故此
001_0620_c_16L六度是出世間不同世間有相有爲

001_0620_c_17L
何以故善入 [18] 離欲心常淸淨實語方
001_0620_c_18L便本利利人是檀波羅密

001_0620_c_19L
此下廣釋於中有二先別釋後摠
001_0620_c_20L何以故者因問發起旣有六數
001_0620_c_21L何故無相也轉依眞如名爲離欲
001_0620_c_22L離三有欲之所顯故觀心軆解故言
001_0620_c_23L善入更無出入故曰心常離三輪
001_0620_c_24L故曰淸淨卽是上言不依三界

001_0621_a_01L
도리에 맞게 설하므로 “실다운 말”이라 하고, 교묘하게 잘 인도하므로 “방편”이라 한다. 이것은 무공용無功用149)으로 중생을 상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 마치 천고天鼓150)와 같기 때문에 방편이라 하였다.
일체중생은 오직 하나의 본각을 통하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일각에 함께 돌아가도록 하므로 “본각의 이익으로 사람을 이롭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출세간의 보시바라밀이다.

지념至念이 견고하여 마음은 항상 머묾이 없고, 청정하여 염오되지 않아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계바라밀이다.

중생을 마치 외아들처럼 불쌍히 여기고 호념하기 때문에 “지념至念이 견고하다.”고 하였다.
항상 세간에 있으면서 열반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마음은 항상 머묾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승의 허물151)을 방지한 것이다.
관찰하는 마음이 명철하여 모든 번뇌에 뒤섞이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여 염오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두루 윤회의 육도를 건너고 그것이 모두 공적한 줄을 통달하므로 “삼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범부의 허물을 없앤 것이다.
이것은 범부와 성인의 계상戒相에 집착함이 없음을 설명한 것으로, 곧 위에서 말한 “계상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출세간의 지계바라밀이다.

공을 닦아 결사結使(번뇌)를 단제하여 제유諸有152)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을 적정하게 하여 몸과 마음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인욕바라밀이다.

앞의 두 구절은 공의 도리에 안착하여 번뇌를 벗어나는 것이고, 뒤의 두 구절은 삼업을 적정하게 하여 몸과 마음의 집착을 없애는 것이다. 이는 모두 무생법인無生法忍의 뜻으로, 곧 위에서 말한 “청정하여 욕념이 없다.”는 것에 해당한다.

명칭(名)과 법수(數)를 멀리 떠나 공견과 유견을 단제하여 오음의 공에 깊이 들어간다. 이것이 곧 정진바라밀이다.

앞의 두 구절153)은 거칢(麤)과 정밀함(精)을 떠났다는 뜻이다.
“공에 들어간다.”는 것은 정진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곧 위에서 말한 “섭수함도 없고 방기함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출세간의 정진바라밀이다.


001_0621_a_01L如理而說故言實語巧便引導
001_0621_a_02L曰方便雖無功用應機發語猶如
001_0621_a_03L天鼓此之謂也一切衆生唯一本
001_0621_a_04L令諸衆生同歸一覺以之故言
001_0621_a_05L本利利人是名出世檀波羅密

001_0621_a_06L
[19] 念堅固心常無住淸淨無染不着
001_0621_a_07L三界是尸波羅密

001_0621_a_08L
愍念衆生如視一子故曰至念堅固
001_0621_a_09L恒在世間不住涅槃故曰心常無住
001_0621_a_10L是防二乘之非觀心明徹不雜諸漏
001_0621_a_11L故言淸淨無染遍涉六道達皆空寂
001_0621_a_12L故言不着三界是止凡夫之惡是明
001_0621_a_13L不住凡聖戒相卽是上言不住戒相
001_0621_a_14L是名出世尸波羅密

001_0621_a_15L
修空斷結不依諸有寂靜三業不住
001_0621_a_16L身心是羼提波羅密

001_0621_a_17L
上二句者安空理離有結下二句
001_0621_a_18L靜三業泯身心皆是無生法忍
001_0621_a_19L之義卽是上言淸淨無念

001_0621_a_20L
遠離名數斷空有見深入陰空是毗
001_0621_a_21L梨耶波羅密

001_0621_a_22L
上二句者離麁精義入空者是進
001_0621_a_23L卽是上言無攝無放此是出世精
001_0621_a_24L進度也

001_0621_b_01L
공적을 완전하게 떠나 모든 공에 집착하지 않지만, 마음이 무無의 경지에 처하여 대공大空에 머문다. 이것이 곧 선정바라밀이다.

“공적을 완전하게 떠났다.”는 것은 응화신으로 생을 받아 삼유에 편재하기 때문이고, “모든 공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오음의 공에 빠져 있지 않고 항상 시방세계를 교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생을 교화하는 선정을 설명한 것이다.
“마음이 무의 경지에 처하여”는 비록 몸은 삼유에 노닐더라도 마음은 항상 이무理無의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이무란 삼유의 집착을 단절한 공의 도리를 말한다.
“대공에 머문다.”는 것은 비록 항상 시방세계를 교화할지라도 마음은 대공大空154)에 있다는 것이다. 대공이란 시방의 전체 모습(大相)이 공한 것이다. 이것은 불법을 성취한 선정을 드러낸 것이다. 몸에는 비록 일어남(起)과 일으킴(作)이 있지만 마음은 적연부동하니, 곧 위에서 말한 “성품은 금강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공에는 대략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인공과 법공의 이공을 대공이라 하니, 『잡아함경雜阿含經』 가운데 대공경大空經의 설명과 같다.155) 또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도 같은 설명을 한다.156)
둘째는 반야바라밀이 공한 것을 대공이라 하니, 『열반경涅槃經』의 설명과 같다.157) 또 『능가경楞伽經』에서도 같은 설명을 한다.158)
셋째는 기세계器世界가 공한 것을 대공이라 하니, 『해심밀경解深密經』의 설명과 같다.159) 또 『중변론中邊論』에서도 같은 설명을 한다.160)
넷째는 아리야식이 공한 것을 대공이라 하니, 『십지론十地論』의 설명과 같다.161)
다섯째는 시방의 모습이 공한 것을 대공이라 하니,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설명과 같다.162)
이 『금강삼매경』의 경문은 이 가운데 다섯 번째의 경우에 해당하니,163) 편의에 따라 이렇게 설한 것일 뿐이다.

마음에 마음이라는 분별상이 없어서 허공에도 집착하지 않고 모든 유루의 수행도 발생시키지 않으며 적멸도 증득하지 않는다. 또 마음에 출·입이 없어서 자성은 항상 평등하고 제법은 실제로서 모두 결정성이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단계(諸地)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이다.


001_0621_b_01L
[20] 離空寂不住諸空心處無在大空
001_0621_b_02L一本云心處無
不住大空
[21] 是禪波羅密

001_0621_b_03L
具離空寂者應化受生遍三有故
001_0621_b_04L不住諸空者不滯五空恒化十方故
001_0621_b_05L此明敎化衆生禪也心處無者雖身
001_0621_b_06L涉於三有心常處於理無理無者
001_0621_b_07L理絕三有之相也在大空者雖恒化
001_0621_b_08L於十方而心在於大空大空者
001_0621_b_09L方大相之空也此顯成就佛法禪也
001_0621_b_10L身雖起作心寂不動卽是上言性等
001_0621_b_11L金剛然大空義略有五種一者
001_0621_b_12L法二空名爲大空如雜阿含大空經
001_0621_b_13L瑜伽論中亦同是說二者般若
001_0621_b_14L波羅密空名爲大空如大涅槃經說
001_0621_b_15L楞伽經中亦同是說三者器世界
001_0621_b_16L名爲大空如解深密經說中邊
001_0621_b_17L論中亦同是說四者阿梨耶識空
001_0621_b_18L名爲大空如十地論說五者十方
001_0621_b_19L相空名爲大空如智度論說今此
001_0621_b_20L經文在於第五且隨意便作是說
001_0621_b_21L

001_0621_b_22L
心無心相不取虛空諸行不生不證
001_0621_b_23L寂滅心無出入性常平等諸法實際
001_0621_b_24L皆決定性不依諸地不住智慧是般

001_0621_c_01L
“마음에 마음이라는 분별상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내심에 관심의 모습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고, “허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텅 빈 마음의 공성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증도證道의 지혜이다.
“모든 유루의 수행도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일체행이 본래 발생이 아님을 통달하는 것이고, “적멸도 증득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생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밖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도敎道의 지혜이다.
“마음에 출·입이 없어서 자성은 항상 평등하다.”는 것은 위의 증도와 교도가 항상 서로 떠나지 않아 작용하지만 항상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항상 작용하므로 출·입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용과 고요가 항상 병행하여 일변에 빠지지 않으므로 자성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다.
“제법은 실제로서 모두 결정성이다.”라는 것은 증도가 상적常寂한 모습을 연설한 것인데, 그 모습이 진제와 동일하고 법성과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든 수행의 단계(諸地)에 의지하지 않고 지혜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교도가 항상 작용하는 유래를 연설한 것인데, 십중十重의 법계에도 의지하지 않고 적조寂照의 지혜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곧 깨우쳐 두루 비추어보는 것(覺照)과 수행의 궤칙(可軌)과 모든 쟁론의 단절(絶諍)이라는 뜻이 갖추어져 있다. 이것은 곧 위에서 말한 “삼보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출세간의 반야바라밀이다.
이상으로 육바라밀을 개별적으로 해석한 글을 마친다.

ⓑ 총체적으로 설명함

이하는 둘째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164)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육바라밀이 해탈과 동일함을 설명하고, 둘째는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낸다.

ㄱ. 육바라밀이 해탈과 동일함을 설명함

선남자여, 이 육바라밀은 모두 본각의 이익을 획득하여 결정성에 들어가 초연히 세간을 벗어나는 걸림 없는 해탈이다.

첫째 가운데서 “모두 본각의 이익을 획득하여 결정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육바라밀을 처음 닦을 때 모두 본각과 동일해져서, 본각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익이 환히 드러나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래장에 들어가니, 그 자성은 본래 적정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어서 개전改轉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육바라밀은 본각의 이익을 얻기 때문에 망념으로 유전하는 모습을 멀리 떠났으므로

001_0621_c_01L若波羅密

001_0621_c_02L
心無心相者不存自內觀心相故
001_0621_c_03L取虛空者不取心虛之空性故此是
001_0621_c_04L證道慧也諸行不生者達一切行本
001_0621_c_05L來不生故不證寂滅者不着無生
001_0621_c_06L恒外化故此是敎道慧也心無出入
001_0621_c_07L性常平等者前之二道恒不相離
001_0621_c_08L動而常寂寂而恒動故無出入
001_0621_c_09L寂恒並不滯一邊故性常平等
001_0621_c_10L法實際皆決定性者演證道之常寂
001_0621_c_11L之相相同眞際等法性故不依諸
001_0621_c_12L地不住智慧者演敎道之恒動之由
001_0621_c_13L不依着於十重法界不住滯於寂照
001_0621_c_14L慧故此中卽具覺照可軌絕諍之
001_0621_c_15L卽是上言不壞三寶是名出世般
001_0621_c_16L若波羅密也上來別釋六度文竟

001_0621_c_17L
善男子是六波羅密者皆獲本利
001_0621_c_18L決定性超然出世無礙解脫

001_0621_c_19L
此下第二摠明於中有二先明六度
001_0621_c_20L同一解脫後顯解脫卽是涅槃初中
001_0621_c_21L言皆獲本利入決定性者六度始修
001_0621_c_22L皆同本覺本覺顯成本利行故
001_0621_c_23L如來藏性本寂靜無始無終無改轉
001_0621_c_24L如是六度得本利故遠離妄念

001_0622_a_01L“초연히 세간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법성에 들어가므로 법계에 주변하여 분별상이 없고(無相) 조작의 유위가 없으며(無爲) 얽매임이 없고(無縛) 벗어남이 없다(無脫). 그러므로 “걸림 없는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ㄴ.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냄

선남자여, 이와 같이 해탈법의 모습은 모두 상相도 없고 행行도 없으며, 또한 벗어남(解)도 없고 벗어나지 못함(不解)도 없으므로 해탈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해탈의 모습은 무상無相이고 무행無行이며 무동無動하고 무란無亂하여 적정한 열반이지만 또한 열반의 모습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둘째 해탈이 곧 열반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해탈을 설명하고, 둘째는 해탈이 그대로 열반임을 밝힌다.
첫째 가운데 “모두 분별상도 없고 유위행도 없다.”는 것은 육바라밀의 수행이 모두 본각과 동일한 것을 말한다. 곧 본각의 모습은 형상(相)을 떠나 있고 성질(性)을 떠나 있으므로 분별상(相)이 없다고 하였고, 육바라밀의 수행은 닦음(修)을 떠나 있고 나아감(行)을 떠나 있으므로 유위행(行)이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분별상과 유위행이 모두 단절되어 있으므로 “모두 분별상도 없고 유위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법의 모습이 이미 이와 같은데 어찌 결박을 떠난 벗어남(解)이 있고 어찌 벗어나지 못한(不解) 결박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또한 벗어남(解)도 없고 벗어나지 못함(不解)도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이란 ‘무슨 까닭에 육바라밀의 수행에 대하여 분별상이 없고 유위행이 없다고 말하는가.’라는 뜻이다.
이 뜻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육바라밀은 곧 해탈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열반이기도 하다. 이런 까닭에 “상도 없고 행도 없다.”고 하였다. “해탈의 모습은 무상이고 무행이다.”라는 것은 앞의 해탈을 이어받은 것이고, “무동하고 무란하여 적정한 열반이다.”라는 것은 해탈이 곧 열반임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해 온 육바라밀의 수행이 모두 기동도 없고 또 산란도 없어 곧 본래 적정한 열반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열반인데 어찌 분별상(相)과 유위행(行)이 있겠는가. 요동(動)과 산란(亂)의 모습을 떠나 있으므로 적정이라 한다. 또한 적정한 자성도 떠나 있으므로 “또한 열반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가운데 육바라밀과 해탈과 열반은

001_0622_a_01L流轉之相故曰超然出世入法性故
001_0622_a_02L周遍法界無相無爲無縛無脫
001_0622_a_03L曰無礙解脫

001_0622_a_04L
善男子如是解脫法相皆無相行
001_0622_a_05L無解不解是名解脫何以故解脫之
001_0622_a_06L無相無行無動無亂寂靜涅槃
001_0622_a_07L不取涅槃相

001_0622_a_08L
是第二明解脫卽是涅槃於中有二
001_0622_a_09L先明解脫後卽涅槃初中言皆無
001_0622_a_10L相行者六度之行皆同本覺本覺
001_0622_a_11L之相離相離性故曰無相六度之
001_0622_a_12L行離修離行故曰無行行相俱絕
001_0622_a_13L故言皆無相行解脫法相旣其如是
001_0622_a_14L何有離縛之解何有不解之縛故言
001_0622_a_15L亦無解不解何以故者何故六度之
001_0622_a_16L行而言無相行耶答此意言如是
001_0622_a_17L六度非但卽是解脫亦乃卽是涅槃
001_0622_a_18L是故說言無相行也解脫之相無相
001_0622_a_19L無行者牒前解脫無動無亂寂靜涅
001_0622_a_20L槃者明卽涅槃欲明如前所說六
001_0622_a_21L度之行皆無起動亦無散亂卽是
001_0622_a_22L本來寂靜涅槃旣卽是涅槃何有相
001_0622_a_23L行耶離動亂相故曰寂靜亦離寂
001_0622_a_24L靜性故亦不取涅槃相也此中六度

001_0622_b_01L처음 초지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불지에 이르기까지 모두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말한 열반이란 네 가지 종류(本來自性淸淨涅槃·有餘依涅槃·無餘依涅槃·無住處涅槃) 가운데 곧 ‘본래자성청정열반’이다. 바로 이것은 불가사의해탈로서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까닭에 “걸림이 없는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해탈의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쌍도雙道(無間道와 解脫道) 가운데 해탈이고, 둘째는 원이삼점圓伊三點(法身·般若·解脫) 가운데 해탈이며, 셋째는 오분법신(戒身·定身·慧身·解脫身·解脫知見身) 가운데 해탈이고, 넷째는 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165) 가운데 해탈이다. 이 여러 가지 가운데 어떤 것에 해당하는가?
이것은 삼사三事166) 가운데 해탈을 가리킨다. 해탈이 곧 그대로 열반이기 때문이다. 육바라밀의 수행과 삼사의 덕을 드러내고자 할 경우에 그것을 사실적으로 말하면 초지에서 이미 터득되지만 이에 묘각위妙覺位에 이르러 구경원만해진다. 저 경전에서 “만약 어떤 보살이 대열반에 머물면 대의大義를 건립한다. …….”167)고 자세하게 설한 것과 같다.

② 중송重頌

해탈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서 마음에 큰 기쁨을 느끼고 미증유한 경지를 증득하였다. 이에 그 뜻을 펼치고자 게송을 읊었다.

大覺滿足尊    대각을 원만구족한 세존께서는
爲衆敷演法    중생 위해 법 널리 연설하시네
皆說於一乘    모두 다 일승법만을 설명하시고
無有二乘道    그 밖에 이승의 도 전혀 없다네
一味無相利    분별없는 일미본각의 이익들은
猶如大虛空    비유하면 마치 큰 허공과 같아
無有不容受    일체를 수용하지 못할 것 없네
隨其性各異    자기의 성품 각각 다름을 따라
皆得於本處    모두가 본래자리를 얻게 한다네

이하는 둘째의 중송重頌이다.168) 그 가운데 먼저 경가經家의 서발序發이 있다. 본격적으로 읊은 것에는 일곱 행의 게송이 있다.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여섯 행의 게송은 별송別頌이고, 뒤의 하나는 총송摠頌이다.

가. 여섯 행의 별송別頌

별송 가운데도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두 게송과 한 구절로서 앞에서 간략히 표방한 것(略標)169)을 읊었고, 둘째는 세 게송과 세 구절로서 뒤의 자세하게 해석한 것을 읊었다.

가) 간략히 표방한 것을 읊음

약표 중에서 “제불의 지혜의 경지는 진실한 법의 상에 들어간 것으로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방편과 신통은 모두 분별상이 없는 이익이다.”라고 말한 것을 지금 여기 중송 부분에서는 처음의 한 게송170)으로 읊었다.
또한 “일각一覺과 요의了義는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001_0622_b_01L解脫涅槃始從初地乃至佛地
001_0622_b_02L涅槃者四種之中卽是本來淸淨涅
001_0622_b_03L正是不可思議解脫依其自在無
001_0622_b_04L障礙義是故說名無礙解脫解脫
001_0622_b_05L之義乃有衆多有雙道中解脫
001_0622_b_06L三點中解脫五分法身之中解脫
001_0622_b_07L種解脫門中解脫是諸門內爲在何
001_0622_b_08L是三事中解脫解脫卽是涅
001_0622_b_09L槃故欲顯六度之行三事之德
001_0622_b_10L實而言初地已得乃至妙覺位
001_0622_b_11L竟圓滿如經中說若有菩薩住大
001_0622_b_12L涅槃能建大義乃至廣說故

001_0622_b_13L
解脫菩薩聞是語已心大欣懌得未
001_0622_b_14L曾有欲宣義意而說偈言

001_0622_b_15L
大覺滿足尊爲衆敷演法皆說於一乘
001_0622_b_16L無有二乘道一味無相利猶如大 [22] 虛空
001_0622_b_17L無有不容受隨其性各異皆得於本處

001_0622_b_18L
此下第二重頌於中在先經家序發
001_0622_b_19L正頌之中有七行頌於中有二
001_0622_b_20L六別頌後一摠頌初中亦二一者
001_0622_b_21L二頌一句頌前略標二者三頌三句
001_0622_b_22L頌後廣釋略標中言諸佛智地入
001_0622_b_23L實法相決定性故方便神通皆無相
001_0622_b_24L今此頌中初一頌頌又言一覺

001_0622_c_01L(그래서 이승의 지견으로 들어갈 바가 아니다. 오직 불·보살만이 그 경계를 알아) 제도할 수 있는 중생에게는 모두 일미법을 설하였다.”고 말한 것을 지금 여기 중송 부분에서는 세 가지 뜻으로 읊었다. 앞의 “분별없는 일미본각의 이익들은”의 한 구절은 설법의 내용(法說)을 읊었고, 다음의 “비유하면 마치 큰 허공과 같아 일체를 수용하지 못할 것 없네.”의 두 구절은 비유를 인용하여(引喩) 읊었으며, 마지막의 “자기의 성품 각각 다름을 따라 모두가 본래자리를 터득한다네.”의 두 구절은 비유와 합하여(合喩) 읊었다.

나) 자세하게 해석한 것을 읊음

이하는 자세하게 해석한 경문을 읊은 것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위의 다섯 구절171)은 널리 무상관無相觀을 읊은 것이고, 뒤의 두 게송 반172)은 자세하게 일각의 뜻을 읊은 것이다.

(가) 널리 무상관을 읊음


如彼離心我    이처럼 아와 법을 떠난 까닭은
一法之所成    일법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네
諸有同異行    제유에 같고 다른 수행 있지만
皆獲於本利    모두 다 본각의 이익 획득하여
滅絶二相見    유무견과 유무상을 멸절시키네173)

첫째의 널리 무상관을 읊은 내용에는 본격적이고 자세한 것(正廣)과 거듭 드러낸 것(重顯)이 있다.

㉮ 본격적이고 자세하게 읊음(正廣)

이제 처음의 두 구174)는 본격적이고 자세한 경문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여기 본격적이고 자세한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방편관方便觀에 대한 것이고, 둘째는 정관正觀을 설명한 것이다.
지금 위의 게송은 정관에 해당하는 경문을 읊은 것이다. 경문의 말에는 “일체중생에게 망아妄我가 있거나 망심妄心이 있으면 어떤 법으로 중생을 일깨워 그 결박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합니까.” 내지 “자세하게 능과 소를 멀리 떠나도록 한다.”는 대목이 있는데,175) 지금 이 2구는 바로 이 경문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일법으로”란 유변과 무변을 떠난 일실중도관一實中道觀이다. 이로써 망심과 망아에 대한 집착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 거듭 드러내어 읊음(重顯)

거듭 드러낸 경문에는 네 가지 문답이 있다. 지금 이 2구176)는 네 가지 문답 가운데 제1과 제2의 문답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제유에 같고 다른 수행 있지만”이란 제1의 문답 가운데 “일체의 심心과 상相에 본래 근본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경문은 곧 같은 수행(同行)으로 총상관摠相觀이다.
제2의 문답에서는 “자아(我)가 있다고 보는 자에게는 십이인연을 관찰토록 하라.”고 하고, 또한 “만약 자아가 있다고 보는 자에게는 유견有見을 없애 주고, 만약 자아가 없다고 보는 자에게는 무견無見을 없애 줘야 한다. 그래서 만약 마음이 발생한다고 집착하는 경우에는 소멸된다는 자성(滅性)으로 없애 주고, 만약 마음이 소멸한다고 집착하는 경우에는 발생한다는 자성(生性)으로 없애 줘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문은 곧 다른 수행(異行)으로 별상관別相觀이다.
여기에서 같은 수행(同行)과 다른 수행(異行)은 그 소입所入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모두 다 본각의 이익 획득하여”라고 하였다.

001_0622_c_01L了義難解難入乃至可度衆生皆說
001_0622_c_02L一味今此頌中以三義頌謂前一
001_0622_c_03L句是法說頌次二句引喩頌後二
001_0622_c_04L句合喩頌

001_0622_c_05L
如彼離心我一法之所成諸有同異行
001_0622_c_06L皆獲於本利皆一本
作悉
滅絕二相見

001_0622_c_07L
此下頌廣釋文於中有二先五句
001_0622_c_08L廣無相觀後二頌半頌廣一覺義
001_0622_c_09L廣無相中正廣重顯今初二句
001_0622_c_10L正廣文前正廣中亦有二分先方
001_0622_c_11L便觀後明正觀今此頌中頌正觀
001_0622_c_12L彼言令彼衆生皆離心我乃至
001_0622_c_13L廣說遠離能所今此二句正頌此文
001_0622_c_14L言一法者離有無邊一中道觀
001_0622_c_15L此能離心我執故重顯文中有四問
001_0622_c_16L今此二句頌前二番問答所言
001_0622_c_17L諸有同異行者彼初番答中言一切
001_0622_c_18L心相本來無本如是等文卽是同
001_0622_c_19L行摠相觀故第二番答中言若有我
001_0622_c_20L者令觀十二因緣又言若有我者
001_0622_c_21L令滅有見若無我者令滅無見
001_0622_c_22L心生者令滅滅性若心滅者令滅
001_0622_c_23L生性如是等文卽是異行別相觀故
001_0622_c_24L此同異行所入無異故言皆獲於本

001_0623_a_01L
이것은 제2의 문답 끝 부분에서 “없애 주는(滅) 것이야말로 곧 견성으로 실제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또한 이 게송에서 “유무견과 유무상을 멸절시키네.”라고 말한 것은 네 가지 문답 가운데 제3과 제4의 문답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곧 저 제3의 문답 가운데서 말한 “법이 생겨난다고 보는 경우에는 무無라는 견해로 없애 주고, 법이 소멸한다고 보는 경우에는 유有라는 견해로 없애 줘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 여기에서는 “유견과 무견을 소멸시키네.”라고 바로 게송으로 말한 것이다.
제4의 문답 가운데 “생·멸이 모두 소멸되면 본생이 되고 불생이 되어 마음이 항상 공적하다. 공적한 무주의 경지야말로”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 여기에서는 “유상과 무상을 단절시키네.”라고 바로 게송으로 읊은 것이다.

(나) 자세하게 일각의 뜻을 읊음

이하 두 게송 반은 널리 일각一覺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널리 일각에 대해 읊은 부분은 본격적이고 자세한 것(正廣)과 거듭 드러낸 것(重顯)이 있다.

(㉮ 본격적이고 자세하게 읊음)

㉯ 거듭 드러내어 읊음

그러나 지금 여기 부분은 거듭 드러낸 것에 대해서만 읊었다. 거듭 드러낸 경문의 산문 부분에 여섯 가지 문답이 있다.177)
여기 경문의 두 게송 반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위의 한 게송은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제6의 답변에 대한 것이고, 이하의 한 게송 반은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제5의 답변에 대한 것이다. 이전의 네 가지 문답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읊지 않았다.

a. 제6의 답변에 대한 것


寂靜之涅槃    요동 없고 요란 없는 적정열반
亦不住取證    또 깨침의 터득에도 집착 없네
入於決定處    결정 도리에 들어 있기 때문에
無相無有行    상도 없고 또한 행조차도 없네

제6의 답변 가운데서는 “결정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출세에 초연하는 것이고 걸림이 없는 해탈이다. …… 해탈의 모습은 분별상이 없고(無相) 유위행이 없으며(無行) 요동이 없고(無動) 요란이 없으며(無亂) 적정한 열반이지만 또한 열반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는데 지금 여기 한 게송에서는 차제를 바꾸어 읊은 것이다.178)

b. 제5의 답변에 대한 것


空心寂滅地    텅 빈 마음의 적멸한 경지에는
寂滅心無生    적멸한 그 마음도 발생이 없네
同彼金剛性    저 금강의 성품과 아주 똑같아
不壞於三寶    불법승 세 보배 저버리지 않고
具六波羅蜜    여섯 가지 바라밀 두루 갖추어
度諸一切生    일체중생을 죄다 제도해 준다네

이것은 제5의 답변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경문에서 “마음과 법에 능·소가 발생하지 않으면 곧 의지함이 없고, 모든 유위행에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항상 공적하여 변이하는 모습이 없다. …… 자성은 금강과 같고, 삼보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공적심의 부동경지에서 육바라밀을 구비한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지금 여기 게송에서는 답변하는 내용을 순차적으로 읊은 것이다.


001_0623_a_01L如前末言滅是見性卽入實際
001_0623_a_02L又此頌言滅絕二相見者頌後
001_0623_a_03L二番問答彼第三答中言見法生時
001_0623_a_04L令滅無見見法滅時令滅有見
001_0623_a_05L正頌此故言滅二見也第四答言
001_0623_a_06L生滅俱滅本生不生心常空寂空
001_0623_a_07L寂無住今正頌此故言絕二相也

001_0623_a_08L
寂靜之涅槃亦不住取證入於決定處
001_0623_a_09L無相無有行

001_0623_a_10L
此下二頌半頌廣一覺廣一覺中
001_0623_a_11L正廣重顯1) [9] 此頌中唯頌重顯
001_0623_a_12L顯文中有六問答此中有二前之
001_0623_a_13L一頌頌第六答次一頌半頌第五
001_0623_a_14L前四問答略而不頌第六答中
001_0623_a_15L入決定性超然出世無礙解脫
001_0623_a_16L解脫之相無相無行無動無亂寂
001_0623_a_17L靜涅槃亦不取涅槃相今此頌中
001_0623_a_18L逆次頌也

001_0623_a_19L
空心寂滅地寂滅心無生同彼金剛性
001_0623_a_20L不壞於三寶具六波羅密度諸一切生

001_0623_a_21L
此是頌第五答彼文言不生心法
001_0623_a_22L卽無依止不住諸行心常空寂無
001_0623_a_23L有異相乃至性等金剛不壞三寶
001_0623_a_24L空心不動具六波羅密今此頌中

001_0623_b_01L
나. 하나의 총송摠頌


超然出三界    초연히 삼계를 벗어남은
皆不以小乘    다 소승에 의하지 않으니
一味之法印    일미의 법으로 인증하고
一乘之所成    일승으로 이룬 것이라네

이 한 게송은 「무상법품」의 대의를 총체적으로 읊은 것이다.
경문의 대의를 풀이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3) 대중이 이익을 얻은 부분(得益分)

그때 대중은 「무상법품」에 대한 설법을 듣고 마음이 크게 기뻤다. 그리고 심상心相(法見)과 아상我相(我見)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공의 무분별상(無相)의 경지에 들어갔다. 이에 마음이 텅 비고 탁 트여 모두 결정성을 터득하였고, 번뇌(結使)를 단제하여 유루혹(漏惑)을 탕진하였다.

「무상법품」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179) 이 가운데 앞의 두 대문大文, 즉 삼매에서 나오는 부분(出定分)과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起說分)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마쳤다. 여기 대문은 셋째로서 당시의 대중이 이익을 얻은 부분(得益分)이다.
“심상心相과 아상我相에 대한 집착을 떠났다.”는 것은 아공과 법공의 진여를 증득한 것이다.
“번뇌를 단제하고 유루혹을 탕진하였다.”는 것은 견혹見惑과 수혹修惑을 단제한 것이다. 이것은 초지에 들어가면 견도에서 곧바로 견혹을 단제하고, 아울러 수혹도 단제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뜻은 『미륵소문론』의 설명과 같다.180) 보다 자세한 것은 『이장장二障章』에 있다.181)

『금강삼매경론』 상권


001_0623_b_01L順次頌也

001_0623_b_02L
超然出三界皆不以小乘一味之法印
001_0623_b_03L一乘之所成

001_0623_b_04L
此一頌者摠頌前來一品大意消文
001_0623_b_05L大意已如前說

001_0623_b_06L
爾時大衆聞說是義心大欣懌得離
001_0623_b_07L心我入空無相恢廓曠蕩皆得決定
001_0623_b_08L斷結盡漏

001_0623_b_09L
一品之內有三分中前之二分
001_0623_b_10L在於前此是大文第三時衆得益
001_0623_b_11L得離心我者證二空眞如故斷結盡
001_0623_b_12L漏者斷見修二惑故欲顯得入初地
001_0623_b_13L見道正斷見惑兼斷修惑義如彌
001_0623_b_14L勒所問論說於中委悉在二障章也

001_0623_b_15L
金剛三昧經論卷上

001_0623_b_16L

001_0623_c_01L
  1. 1)삼공三空 : 법상종法相宗에서 삼성三性이 모두 무자성공無自性空임을 말하는 변계소집성공遍計所執性空·의타기성공依他起性空·원성실성공圓成實性空이다. 이하에서 설명하는 공상공空相空(平等空)·공공공空空空(差別空)·소공공所空空(中道空) 참조.
  2. 2)중中 : 중도中道로서 ‘도리에 적중的中하다’라는 뜻으로 상황에 대한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적절한 입장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삼공三空이 단순히 공간적·시간적인 의미의 중中이 아님을 말한다. 이하에서 “그러므로 중도에 들어가는 것은 곧 삼공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所以入中卽入三空)”라고 하였다.
  3. 3)핵심(環中) : 중심·핵심·꼭지점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달리 천도天道·천리天理·지도至道·지리至理라고도 하며 근원에 통하는 것이다. 방외方外는 이와는 반대 개념이다.
  4. 4)오법五法 : 상相·명名·분별分別·정지正智·여여如如의 다섯 가지 법을 가리킨다.
  5. 5)육행六行 :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등각等覺 등 수행의 여섯 계위를 가리킨다.
  6. 6)여섯 품 : 「序品」과 「總持品」을 제외한 「無相法品」, 「無生行品」, 「本覺利品」, 「入實際品」, 「眞性空品」, 「如來藏品」의 여섯 품을 가리킨다.
  7. 7)구식九識 :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阿賴耶識·암마라식唵摩羅識 등 아홉 가지 식을 가리킨다.
  8. 8)사지四智 : 성소작지成所作智·묘관찰지妙觀察智·평등성지平等性智·대원경지大圓鏡智 등 네 가지 지智를 가리킨다.
  9. 9)삼신三身 : 대원경지로 성취되는 법신法身, 평등성지로 성취되는 보신報身,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로 성취되는 화신化身을 가리킨다.
  10. 10)일실一實 : 여기서 일실一實은 유일진실唯一眞實로서의 중도관中道觀을 말한다.
  11. 11)일행一行 : 유일무이행唯一無異行으로서 곧 보리행菩提行을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23b~c).
  12. 12)일미一味 : 금강삼매의 종의宗義로서 일체의 분별 집착을 벗어난 가르침을 가리킨다.
  13. 13)삼계三戒 : 섭률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섭중생계攝衆生戒의 삼취정계三聚淨戒를 가리킨다.
  14. 14)삼대제三大諦 : 보리도菩提道에 해당하는 평등제平等諦, 대각大覺에 해당하는 정지득제正智得諦, 혜정慧定에 해당하는 무이행입제無異行入諦를 가리킨다.
  15. 15)삼해탈三解脫 : 삼삼매三三昧로서 공삼매空三昧·무상삼매無相三昧·무원삼매無願三昧를 가리킨다.
  16. 16)삼지三地 : 본 경문의 「眞性空品」 가운데 등각의 경지에서 드러나는 지위를 말한다. 첫째는 백겁위의 항포지行布地, 둘째는 천겁위의 등각지等覺地, 셋째는 만겁위의 건혜지乾慧地이다.
  17. 17)묘각의 삼신 : 묘각의 경지에서 자재하게 드러나는 법신과 보신과 화신을 가리킨다.
  18. 18)삼공취三空聚 : 삼삼매로서三三昧로서 삼해탈과 마찬가지로 공삼매空三昧·무상삼매無相三昧·무원삼매無願三昧를 가리킨다.
  19. 19)삼유심三有心 : 욕유심欲有心·색유심色有心·무색유심無色有心을 가리킨다.
  20. 20)사정근四正勤 : ⓢ catvāri-samyak-prahāņāni. 사정단四正斷·사정승四正勝·사의단四意端·사의단四意斷이라고도 한다. 삼십칠조도품에서 사념처四念處의 다음에 닦는 네 가지 수행법이다. 곧 이미 생긴 악은 없애고(斷斷),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은 미리 방지하며(律儀斷),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증장하고(修斷),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은 발생하도록 하는 것(修護斷)이다.
  21. 21)사신족四神足 : 사여의족四如意足이라고도 하는데, 욕여의족欲如意足·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심여의족心如意足·사유여의족思惟如意足을 가리킨다.
  22. 22)사대연四大緣의 힘 : 첫째는 택멸을 작용시키는 힘으로 별해탈계를 취하는 연인데, 말하자면 섭률의계攝律儀戒이다.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청정한 근본의 힘으로 모든 선법을 집기하는 연인데, 말하자면 섭선법계攝善法戒이다. 셋째는 본각의 지혜인 대비의 힘을 일으키는 연인데, 말하자면 섭중생계攝衆生戒이다. 넷째는 일본각一本覺으로 삼취정계를 두루 꿰뚫어보는 지혜력의 연인데, 말하자면 진여를 따라 머무는 것이다.
  23. 23)사선四禪 : 색계에서 터득하는 초선初禪·제이선第二禪·제삼선第三禪·제사선第四禪을 가리킨다.
  24. 24)사방四謗 : 유有·무無·역유역무亦有亦無·비유비무非有非無의 사구四句로서 온갖 분별을 상징한다.
  25. 25)사홍지四弘地 : 사홍서원四弘誓願의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을 가리킨다.
  26. 26)오음五陰 : 색음色陰·수음受陰·상음想陰·행음行陰·식음識陰을 가리킨다.
  27. 27)오십악五十惡 :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 수음受陰에 여덟 가지, 상음想陰에 여덟 가지, 행음行陰에 아홉 가지, 색음色陰에 열일곱 가지의 악惡이 갖추어져 있다.
  28. 28)오근五根 : 보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법으로서 신근信根·진근進根·염근念根·정근定根·혜근慧根을 가리킨다.
  29. 29)오력五力 : 신력信力·진력進力·염력念力·정력定力·혜력慧力 등 불법의 실천 덕목을 말한다.
  30. 30)오공해五空海 : 삼유三有가 공한 것, 육도六道의 모습이 공한 것, 법상法相이 공한 것, 명상名相이 공한 것, 심식心識의 뜻이 공한 것을 말한다.
  31. 31)오등위五等位 : 십신十信의 신위信位,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사위思位, 십지十地의 수위修位, 등각위等覺位의 행위行位, 묘각위妙覺位의 사위捨位를 말한다.
  32. 32)오정법五淨法 : 생멸하는 여지慮知의 상을 벗어나 있는 여래장의 속성으로 곧 여래장의 마음에는 사려분별이 없고, 생멸이 없으며, 여실하여 기동起動이 없고, 모든 식이 안적安寂하며, 번뇌가 발생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33. 33)오도의 중생(五道生) : 천상·인간·축생·아귀·지옥의 미혹한 중생세계를 가리킨다.
  34. 34)육도六度 : 대승불교의 보살이 실천하는 여섯 가지 바라밀波羅蜜로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가리킨다.
  35. 35)육입六入 : 육처六處라고도 한다.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의 육근六根을 육내입六內入, 색경色境·성경聲境·향경香境·미경味境·촉경觸境·법경法境의 육경六境을 육외입六外入이라 한다.
  36. 36)칠각분七覺分 : 칠각지七覺支·칠등각지七等覺支·칠각의七覺意라고도 한다. 택법각지澤法覺支·정진각지精進覺支·희각지喜覺支·제각지除覺支·사각지捨覺支·정각지定覺支·염각지念覺支를 가리킨다.
  37. 37)칠의과七義科 : 칠七은 사대四大와 삼의三義의 일곱 가지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의義는 대大와 의義를 합한 말로서 지대地大·수대水大·화대火大·풍대風大의 사대와 오음五陰·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의 삼의를 가리킨다. 과科는 근본식根本識을 가리킨다.
  38. 38)팔식八識 :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 전오식前五識, 제6의 의식意識, 제7의 말나식末那識, 제8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가리킨다.
  39. 39)구식九識 : 섭론종攝論宗의 진제眞諦 계통에서 주장한 것으로 앞의 팔식八識까지를 모두 망식妄識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다시 제9의 암마라식唵摩羅識, 곧 무구정식無垢淨識을 설정한 것을 가리킨다.
  40. 40)『摩訶般若波羅蜜經』 권5(T8, 251b).
  41. 41)『大智度論』 권47(T25, 399b).
  42. 42)『摩訶般若波羅蜜經』 권5(T8, 251b)에서 발췌하여 인용하였다.
  43. 43)『大智度論』 권47(T25, 400b).
  44. 44)『金剛三昧本性淸淨不增不減經』(T15, 697a~699b).
  45. 45)육종석六種釋 : 육합석六合釋·육석六釋이라고도 한다. 범어에서 복합사複合辭를 해석하는 방식으로서 의주석依住釋·상위석相違釋·지업석持業釋·대수석帶數釋·인근석隣近釋·유재석有財釋 등 여섯 가지를 가리킨다.
  46. 46)심일경성心一境性 : ⓢ cittaikāgratā의 번역어로서 선정禪定을 일컫는 말이다.
  47. 47)『瑜伽師地論』 권11(T30, 329b).
  48. 48)심사尋伺 : 심尋은 심구尋究(ⓢvitakka)이고, 사伺는 사찰伺察(ⓢvicara)로서 번뇌를 가리킨다. 구역舊譯에서는 각각 각覺과 관觀으로 번역되어 거친 번뇌와 미세한 번뇌를 의미한다.
  49. 49)빠른 언변 : 보통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보살의 다양한 변재 가운데 하나로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막힘없이 설명하는 능력을 말한다.
  50. 50)『合部金光明經』 권3(T16, p375a).
  51. 51)여섯 가지 심소心所 : 변행遍行·별행別境·선善·번뇌煩惱·수번뇌隨煩惱·부정不定 등 심소의 여섯 가지를 말한다.
  52. 52)별경別境의 다섯 가지 심소 : 욕欲·승해勝解·염念·정定·혜慧를 말한다.
  53. 53)반주삼매般舟三昧 : ⓢpratyutpanna-samādhi. 『般舟三昧經』에 나오는 삼매로서 상행삼매常行三昧·반주정般舟定·제불현전삼매諸佛現前三昧·불립삼매佛立三昧·상행도정常行道定·불립정佛立定이라고도 한다.
  54. 54)심주心住 : 내주內住·등주等住·안주安住·근주近住·조순調順·적정寂靜·최극적정最極寂靜·전주일취專住一趣·등지等持 등 아홉 가지가 있다.
  55. 55)네 가지 혜행慧行 : 정사택正思擇·최극사택最極思擇·주변심사周徧尋思·주변사찰周徧伺察을 가리킨다.
  56. 56)삼매를 뜻하는 여덟 가지 용어의 범주를 넓은 것으로부터 좁은 것으로 그 순서를 정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삼마지三摩地(等持)와 정定이다. 둘째는 심일경성心一境性(一心)과 삼매三昧(正思)이다. 셋째는 삼마희다三摩呬多(等引)와 태연나駄演那(靜慮)이다. 넷째는 삼마발제三摩鉢提(等至)와 사마타奢摩他(止)이다.
  57. 57)「序品」 : 이하 제1장 서분까지 포함하는 부분이다.
  58. 58)여섯 개의 품 : 「無相法品」, 「無生行品」, 「本覺利品」, 「入實際品」, 「眞性空品」, 「如來藏品」의 여섯 개 품을 말한다.
  59. 59)『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51c)에서는 원효의 설명과는 달리 “그때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후 부분부터 유통분으로 간주하였다.
  60. 60)통서通序는 모든 경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서로서 신信·문聞·시時·주主·처處·중衆의 육사六事를 갖춘 것이고, 별서別序는 각 경전마다 개별적으로 있는 것이다.
  61. 61)육사六事 : 육성취六成就라고도 한다. 신성취信成就·문성취聞成就·시성취時成就·주성취主成就·처성취處成就·중성취衆成就를 말한다.
  62. 62)대사大師 : 여기서는 부처님에 대한 존칭인 대도사大導師의 뜻으로 쓰였다.
  63. 63)성문중은 부처님으로부터 육성법문을 친히 들은 대중으로서 “왕사대성의 기사굴산에 대비구 일만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은 모두 아라한도를 터득하였다. 그들의 이름은 사리불·대목건련·수보리 등 아라한의 무리였다.”는 부분이고, 보살중은 “보살마하살 이천 명과 함께 계셨다. 그들의 이름은 해탈보살·심왕보살·무주보살 등의 무리였다.”는 부분이며, 장자중은 “장자 팔만 명과 함께 계셨다. 이름은 범행장자·대범행장자·수제장자 등의 무리였다.”는 부분이고, 잡류중은 “천룡·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인비인 등 육십만억이 있었다.”는 부분에 각각 해당된다.
  64. 64)『妙法蓮華經』 권1(T9, 2b).
  65. 65)『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상(T26, 2c).
  66. 66)『妙法蓮華經憂波提舍』의 저자 천친天親은 「方便品」 이전까지를 서품으로 간주하였다. 『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상(T26, 4b).
  67. 67)『金剛三昧經』을 설하기 이전에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이행이라는 명칭의 경전을 설했다는 것이다.
  68. 68)두 경전 : 일미·진실·무상·무생·결정·실제·본각·이행 등의 경과 『金剛三昧經』을 가리킨다.
  69. 69)이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 경전을 듣고 내지 하나의 사구게만이라도 받아 지닌다면 그 사람은 곧 부처님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 방편으로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일체중생의 대선지식이 될 것이다.”
  70. 70)간략하게 설하는 경 : 『金剛三昧經』을 가리킨다.
  71. 71)합장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은 ‘合掌胡跪’로서 합장을 하고 오른쪽 무릎만 땅에 대고 허리를 펴서 공경을 표하는 행위이다.
  72. 72)『金剛三昧經註解』 권1(X35, 221a)에서는 “아가타 비구가 설한 여덟 게송에는 두 부분이 있는데, 위의 세 게송은 대중을 상대하여 칭양한 것이고, 이하의 다섯 게송은 대중을 상대하여 널리 질문할 것을 권장한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X35, 265a~b)에서는 이상 세 게송에 대하여 대승을 칭송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하 다섯 게송에 대해서는 대중을 상대하여 널리 질문한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청하는 것, 설법으로 이익을 베풀어 주는 것을 설명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73. 73)둘째 : 여덟 게송 가운데 앞의 일곱 게송은 설하신 경에 대해 읊은 게송이고, 나머지 한 게송은 삼매에 들어간 것에 대해 읊은 게송인데, 이 가운데 후자를 가리킨다.
  74. 74)앞의 두 구는 일미법을 통하여 선정에 들어간 것으로 일반적인 방식임에 반하여 뒤의 두 구는 선정에 들어간 후에 일미법을 성취한 것으로 앞의 일반적인 방식과 다름을 가리킨다.
  75. 75)여섯 가지 수행(六行) : 십신행·십주행·십행행·십회향행·십지행·등각지행의 여섯 가지 수행을 가리킨다.
  76. 76)「無相法品」과 「無生行品」을 가리킨다.
  77. 77)무상관無相觀 : 무분별상관無分別相觀이라고도 한다. 분별상이 없는 관찰로서 평등관平等觀에 통한다.
  78. 78)앞서 언급한 여섯 부분이란, 첫째 「無相法品」의 무상, 둘째 「無生行品」의 무생, 셋째 「本覺利品」의 본각, 넷째 「入實際品」의 실제, 다섯째 「眞性空品」의 진성, 여섯째 「如來藏品」의 여래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뒤에 언급한 여섯 문은 첫째 「無相法品」의 법, 둘째 「無生行品」 행, 셋째 「本覺利品」의 이, 넷째 「入實際品」의 입, 다섯째 「眞性空品」의 공, 여섯째 「如來藏品」의 여래장을 가리킨다.
  79. 79)“제불의 지혜의 경지는 실제의 법과 실제의 상에 들어간 것으로 결정성이다.”라는 경문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에서는 “제불의 자각성지지自覺聖智地의 경계로서 오직 부처와 부처끼리만 철저하게 깨친 것이지 다른 사람이 엿볼 수가 없으니, 곧 진실지혜이다.”라고 말한다.
  80. 80)팔상八相 : 불보살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려고 일생 동안에 나타내 보이는 여덟 가지 모습을 가리킨다. 여래의 팔상은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첫째는 강도솔상降兜率相·탁태상託胎相·출생상出生相·출가상出家相·항마상降魔相·성도상成道相·전법륜상轉法輪相·입열반상入涅槃相이다. 둘째는 강도솔상降兜率相·입태상入胎相·주태상住胎相·출태상出胎相·출가상出家相·성도상成道相·전법륜상轉法輪相·입열반상入涅槃相이다. 셋째는 수태상受胎相·강생상降生相·처궁상處宮相·출가상出家相·성불상成佛相·항마상降魔相·설법상說法相·열반상涅槃相이다. 넷째는 재천상在天相·처태상處胎相·초생상初生相·출가상出家相·좌도량상坐道場相·성도상成道相·전법륜상轉法輪相·입열반상入涅槃相이다. 다섯째는 생천상生天相·처도솔천상處兜率天相·하천탁태상下天託胎相·출태상出胎相·출가상出家相·항마상降魔相·전법륜상轉法輪相·입열반상入涅槃相이다. 여섯째는 주태상住胎相·영해상嬰孩相·애욕상愛欲相·요고행상樂苦行相·항마상降魔相·성도상成道相·전법륜상轉法輪相·입멸상入滅相이다.
  81. 81)삼륜三輪 : 삼륜청정三輪淸淨으로, 보시하는 자·보시물·보시를 받는 자에 모두 집착이 없는 것을 가리킨다.
  82. 82)『入楞伽經』 권1(T16, 519a).
  83. 83)『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하(T26, 6a).
  84. 84)오탁악세 : 불법의 존속을 정법시대正法時代·상법시대像法時代·말법시대末法時代의 삼시三時로 나눈 가운데서 수명탁壽命濁·중생탁衆生濁·번뇌탁煩惱濁·견탁見濁·겁탁劫濁 등 다섯 가지 번뇌의 모습이 나타나는 말법시대를 가리킨다.
  85. 85)『妙法蓮華經』 권1(T9, 7a).
  86. 86)『妙法蓮華經憂波提舍』 권하(T26, 7ab).
  87. 87)첫째의 1구 : “중생을 교화하려면”을 가리킨다.
  88. 88)넷째의 1구 : “그래야 그 교화가 훌륭하다.”를 가리킨다.
  89. 89)둘째와 셋째의 2구 : “교화한다는 분별상이 없어야 하고” 및 “교화하지 않았다는 분별상도 없어야 한다.”를 가리킨다.
  90. 90)『佛性論』 권2(T31, 794ab) 참조.
  91. 91)『大乘起信論』(T32, 576b).
  92. 92)『十地經論』 권2(T26, 132b). “자성은 항상 적멸하여 멸함도 생함도 없다네. 자체가 본래 공하므로 불이이고 또 부진이네.(自性常寂滅。 不滅亦不生。 自體本來空。 有不二不盡。)”
  93. 93)무상관無相觀에 대한 두 가지 설명 가운데 첫째의 직접적으로 관행의 모습을 설하는 대목을 마친 것이다.
  94. 94)『大乘起信論』(T32, 575b~576a)에서 발췌한 것이다.
  95. 95)『入楞伽經』 권1(T16, 519a)에 의거하여 이 대목과 관련된 내용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적멸이란 일심을 말하고, 일심이란 여래장을 말한다. 자내신自內身의 지혜경계에 들어가서 무생법인의 삼매를 터득하는 것이다.(寂滅者名爲一心。 一心者名爲如來藏。 入自內身智慧境界。 得無生法忍三昧。)”
  96. 96)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보살이여, 일체의 망심妄心과 일체의 망상妄相은 본래 근본이 없고 본래 근본의 처소가 없어서 공적하고 무생하다. 이에 심을 무생케 하면 곧 공적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공적한 심지야말로 곧 심공心空을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97. 97)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선남자여, 무상無相한 심에는 망심도 없고 망아도 없다. 일체의 법상도 또한 이와 같다.”
  98. 98)구유근俱有根 : 구유의俱有依·구유소의俱有所依·증상연의增上緣依라고도 한다. 심과 심소와 동시에 존재하면서 그 소의처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구유근에는 오색근五色根·제6식·제7식·제8식의 네 가지가 있다.
  99. 99)원효 자신의 저술인 『二障義』를 가리킨다.
  100. 100)자아가 있다(有我)고 보는 경우는 범부에 해당하고, 자아가 없다(無我)고 보는 경우는 이승二乘에 해당한다.
  101. 101)십이지인연을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過去現在未來
    無明名色六處老死
    二因五果三因二果
    과거와 현재의 一重因果현재와 미래의 一重因果
    三世兩重因果
  102. 102)『大般若波羅蜜多經』 권348(T6, 787b). “선현이여, 반드시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마하살이 보리좌에 앉아서 십이인연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면 허공처럼 끝이 없기 때문이다.(善現當知。 諸菩薩摩訶薩。 處菩提座。 如實觀察十二緣起。 猶如虛空不可盡故。)”
  103. 103)본래부터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 자아가 없다(無)는 상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04. 104)법집으로 인하여 마음이 발생한다는 견해와 마음이 소멸한다는 견해를 대치한다.
  105. 105)여기에서 말하는 ‘닦음(修)’과 ‘익힘(學)’의 의미에 대해서는 『金剛三昧經通宗記』 권3(X35, 271c) 참조. “수修는 덕업德業을 닦는 것이고, 학學은 도법道法을 익히는 것이다. 상고시대에는 문자로 기록함이 없었다. 그래서 만약 어떤 대업을 성취하고자 할 경우에는 먼저 나무에다 칼로 새겨서 흔적을 내어 그 숫자를 헤아렸는데, 그것을 업業이라 한다. 그리하여 무릇 하나의 공功이 성취되면 곧 하나의 흔적을 닦아서 없앤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모두 수업修業에 대하여 말해 왔다. 이로써 나무의 흔적을 모두 닦아서 없애면 그것이 곧 졸업卒業이다. 수修의 뜻은 바로 이와 같다. 그리고 또한 학學이라는 글자는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에 글을 익힐 때 두 손으로 받들어 지니는데 마치 놀이를 하는 것처럼 효爻와 상象을 매달고 그리는데 이것이 학學의 뜻이다. 또한 그 학이 충만하지 않으면 그것을 유학有學이라 말하고, 더 이상 익힐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그것이 곧 무학無學이다. 또한 진리를 궁구하여 번뇌를 없애는 것을 학이라 말하고, 진리마저 다하고 번뇌가 다하는 것을 무학이라 말한다. 해탈보살이 말한 심무유주心無有住는 곧 공적空寂과 같다. 이미 공적인데 어찌 닦을 것이 있고 어찌 익힐 것이 있겠는가.(修者修於德業。 學者學其道法。 上古之世。 無文字記識。 若欲成一大業。 先於木上。 以刀斫痕計其數。 名之曰業。 凡一功成。 即修去一痕。 故聖人皆言修業。 以木痕修盡。 爲卒業。 其義如此。 又學字。 謂童穉初授書時。 兩手捧持。 如翫卦畫爻象而已。 此學之義也。 又學未滿。 謂之有學。 至無所學地。 爲無學。 又研眞斷惑名爲學。 眞窮惑盡名無學。 解脫謂心無有住。 即同空寂。 既是空寂。 有何所修。 有何所學。)”
  106. 106)일각의 뜻을 펼친 여덟 가지 문답 가운데 둘째에 해당한다.
  107. 107)여래장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은 『勝鬘經』에서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으로 해석한 것이고, 세 가지 해석은 『不增不減經』에서 능섭여래장과 소섭여래장과 은부여래장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108. 108)『不增不減經』(T16, 467bc)에 의거하여 내용을 보충한다. “또한 사리불이여, 내가 위에서 설한 바 중생계에는 또 세 가지 법이 있다. 모두 진실하고 여여하여 서로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다. 세 가지 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여래장은 본제本際(본각의 실제)에 상응하는 자체이고 청정한 법이다. 둘째는 여래장은 본제에 불상응하는 자체이고 번뇌에 얽힌 불청정한 법이다. 셋째는 여래장은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다. 사리불이여, 여래장은 본제에 상응하는 자체이고 청정한 법이라는 이 법은 여실하여 허망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떠난 적도 없어 지혜가 청정하고 진여의 법계이며 부사의한 법으로서 무시이래의 본제에서 유래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곧 이것은 청정한 본제이고 진여에 상응하며 법계의 자체이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 청정·진여·법계에 의거하여 중생에게 불가사의법과 자성청정심을 설해 준다. 사리불이여, 여래장은 본제에 불상응하는 자체 및 번뇌에 얽힌 불청정법이라는 것은 본제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그로부터 떠나 있고 불상응하며 번뇌에 얽힌 불청정법인 줄을 알아야 한다. 오직 여래가 깨친 지혜로만 단제할 수 있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처럼 번뇌에 얽힌 불상응의 부사의한 법계에 의거하여 중생을 위한 까닭에 객진번뇌에 물든 자성청정심의 불가사의법을 설한다. 사리불이여, 여래장은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인 줄 알아야 한다. 곧 여래장은 일체제법의 근본으로서 일체법을 갖추고 일체법을 구비하여 세간법에서 떠나지도 않고 진실한 일체법에서 벗어나지도 않으며 일체법을 주지住持하고 일체법을 섭수한다. 사리불이여, 나는 이처럼 불생하고 불멸하며 영원하고 청량하며 불변한 여래장에 귀의함으로써 불가사의·청정법계를 중생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곧 불생하고 불멸하며 영원하고 청량하며 불변한 여래장에 귀의함을 말한 것으로 불가사의·청정법계 등의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나는 저 중생계의 세 가지 법의 설명에 의거하여 중생이라 말한다. 사리불이여, 이 세 가지 법은 모두 진실여로서 서로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다. 이처럼 진실여로서 서로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는 법에서는 필경에 극악極惡과 불선不善의 두 가지 사견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실한 지혜로 보기 때문이다. 사리불이여, 극악과 불선의 두 가지 사견은 제불여래가 필경에 멀리 떠난 것이고, 제불여래가 가책呵責하는 바이기 때문이다.(復次舍利弗。 如我上說。 衆生界中亦三種法。 皆眞實如不異不差。 何謂三法。 一者如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 二者如來藏本際不相應體及煩惱纏不淸淨法。 三者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有法。 舍利弗。 當知。 如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者。 此法如實不虛妄不離不脫。 智慧淸淨眞如法界不思議法。 無始本際來。 有此淸淨相應法體。 舍利弗。 我依此淸淨眞如法界。 爲衆生故說爲不可思議法自性淸淨心。 舍利弗。 當知。 如來藏本際不相應體。 及煩惱纏不淸淨法者。 此本際來離脫不相應煩惱所纏不淸淨法。 唯有如來菩提智之所能斷。 舍利弗。 我依此煩惱所纏不相應不思議法界。 爲衆生故說爲客塵煩惱所染。 自性淸淨心不可思議法。 舍利弗。 當知。 如來藏未來際平等恒及有法者。 卽是一切諸法根本。 備一切法具一切法。 於世法中不離不脫眞實一切法。 住持一切法攝一切法。 舍利弗。 我依此不生不滅常恒淸涼不變歸依。 不可思議淸淨法界說名衆生。 所以者何。 言衆生者卽是不生不滅常恒淸涼不變歸依。 不可思議淸淨法界等異名。 以是義故。 我依彼法說名衆生。 舍利弗。 此三種法皆眞實如不異不差。 於此眞實如不異不差法中。 畢竟不起極惡不善二種邪見。 何以故。 以如實見故。 所謂減見增見。 舍利弗。 此二邪見諸佛如來畢竟遠離。 諸佛如來之所呵責。)”
  109. 109)『佛性論』 권2(T31, 795c~796a).
  110. 110)천친天親의 『佛性論』에 대하여 진제眞諦가 이와 같이 번역했다는 말이다.
  111. 111)『佛性論』 권4(T31, 812b).
  112. 112)『佛性論』 권2(T31, 796a)에서 “둘째는 상주의 뜻이다. 이 진여의 성은 자성의 성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지득에 이른다. 진여의 체는 변이가 없는 까닭에 상常의 뜻이다.(二者現常住義。 此如性從住自性性來至至得。 如體不變異故是常義。)”라고 하였다.
  113. 113)이상은 앞에서 인용한 『不增不減經』에 대한 해석이다.
  114. 114)원효의 『二障義』(H1, 805a~c ; 811a)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115. 115)『不增不減經』(T16, 467上) 내용 참조. “내가 설한 법신의 뜻은 과거 항사겁 동안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단절된 적도 없고 변이한 적도 없는 부사의한 불법으로 여래의 공덕이고 지혜이다.(如我所說法身義者。 過於恒沙不離不脫不斷不異。 不思議佛法如來功德智慧。)” 기타 『勝鬘經』(T12, 221c) 참조.
  116. 116)위의 『不增不減經』(T16, 467a)에서 말한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단절된 적도 없고, 변이한 적도 없으며, 부사의한 불법에 상응한 것”의 다섯 가지 가운데 ‘떠난 적도 없고, 벗어난 적도 없으며, 부사의한 불법’의 세 가지만 설명했다는 것이다.
  117. 117)『勝鬘經』(T12, 221c).
  118. 118)앞의 세 가지 : 『不增不減經』에서 말한 세 가지 법을 말한다. 첫째는 여래장은 본제에 상응하는 자체이고 청정한 법이고, 둘째는 여래장은 본제에 불상응하는 자체이고 번뇌에 얽힌 불청정한 법이며, 셋째는 여래장은 미래제까지 평등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119. 119)세 종류 여래장 가운데 은부의 뜻은 셋째인 은부여래장에 그대로 합치되어 있어 별도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하 능섭과 소섭에 대하여 『勝鬘經』의 공과 불공을 인용하여 별도로 설명한다.
  120. 120)『現識論』(T31, 881c~882a)에 의하면, ‘그 다섯 가지 뜻’은 자성종류自性種類·인성因性·생生·불괴不壞·비밀장袐密藏이고, 또한 『無相論』은 『三無性論』·『顯識論』·『轉識論』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21. 121)『攝大乘論釋』 권1(T31, 156c)에서는 그 다섯 가지가 체류의體類義·인의因義·생의生義·진실의眞實義·장의藏義이다.
  122. 122)『佛性論』 권2(T31, 796b)에서는 그 다섯 가지가 여래장자성如來藏自性·정법장인正法藏因·법신장지득法身藏至得·출세장진실出世藏眞實·자성청정장비밀自性淸淨藏秘密이다.
  123. 123)일각에 대한 여덟 가지 문답 가운데 그 셋째부터 여덟째까지를 말한다. 그 셋째로부터 생멸 및 여지의 모습에 대한 여섯 가지 문답이 이어진다.
  124. 124)“생멸하는 여지의 상”에 대한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첫째이다. 일각에 대한 여덟 가지 문답으로 보면 그 셋째에 해당한다.
  125. 125)사구四句 : 유구有句·무구無句·역유역무구亦有亦無句·비유비무구非有非無句의 사구를 말한다. 이로써 백비百非에 이르기까지 형성되는 일체의 분별을 의미한다.
  126. 126)여섯 가지 염심 : 집상응염심執相應染心·부단상응염심不斷相應染心·분별지상응염심分別智相應染心·현색불상응염심現色不相應染心·능견심불상응염심能見心不相應染心·근본업불상응염심根本業不相應染心을 가리킨다.
  127. 127)『大乘起信論』(T32, 577c~578a).
  128. 128)세 가지 : 현색불상응염심現色不相應染心·능견심불상응염심能見心不相應染心·근본업불상응염심根本業不相應染心을 가리킨다.
  129. 129)원효가 지은 『大乘起信論疏』를 말한다.
  130. 130)『大乘起信論』(T32, 579a).
  131. 131)생멸의 모습에 상대하여 도리의 만족을 드러낸 경문에 대한 해석을 마친다는 뜻이다.
  132. 132)앞에서 “도리의 만족에 상대하여 염의 궐실闕失을 설명한다.”는 대목을 가리킨다.
  133. 133)『大乘起信論』(T32, 579a~b)에 의하여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問曰。 上說眞如其體平等離一切相。 云何復說體有如是種種功德。 答曰。 雖實有此諸功德義。 而無差別之相。 等同一味唯一眞如。 此義云何。 以無分別離分別相。 是故無二。 復以何義得說差別。 以依業識生滅相示。 此云何示。 以一切法本來唯心實無相【於】念。 而有妄心不覺起念見諸境界故說無明。 心性不起卽是大智慧光明義故。 若心起見卽有不見之相。 心性離見卽是遍照法界義故。 若心有動非眞識知。 無有自性。 非常非樂非我非淨。 乃至。 【熱惱衰變則不自在】。 具足【有】過恒沙等妄染之義。 對此義故。 心性無動卽有過恒沙等諸淨功德相義示現。 若心有起。 更見前法可念者卽有所少。 如是淨法無量功德。 卽是一心更無所念。 是故滿足名爲法身如來之藏。 ”
  134. 134)두 종류의 생멸 : 집상응염심執相應染心·부단상응염심不斷相應染心·분별지상응염심分別智相應染心·현색불상응염심現色不相應染心·능견심불상응염심能見心不相應染心·근본업불상응염심根本業不相應染心의 여섯 가지 염심 가운데 현색불상응염심·능견심불상응염심·근본업불상응염심의 세생멸細生滅과 집상응염심·부단상응염심·분별지상응염심의 추생멸麤生滅을 가리킨다. 또한 『楞伽經』의 내용을 인용한 『金剛三昧經通宗記』 권3(X35, 272b)에서 말하는 다음과 같은 2종의 생주멸生住滅을 참조. “楞伽經云。 諸識有二種生住滅。 謂流注生及相生。 流注住及相住。 流注滅及相滅。”
  135. 135)『大乘起信論』(T32, 576b~c)에 의하여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136. 136)꿈에서 강을 건너는 비유 : 『合部金光明經』 권1(T16, 364c),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침상에 누워 꿈을 꾼 것과 같다. 그는 꿈에 큰 강물이 자신의 몸을 휩쓰는 것을 보고는 손과 발을 움직여 그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온 정신과 힘을 쏟으며 게으르지 않았기에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 보니 강물은커녕 이 언덕과 저 언덕도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생사의 망상이 이미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그 깨달음이 청정해지니, 깨달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법계의 일체 망상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한다.(譬如有人於臥寐中夢見大水流泛其身。 運手動足逆流而上。 以其心力不懈退故。 從於此岸得至彼岸。 夢旣覺已。 不見有水彼此之岸。 生死妄想旣滅盡已。 是覺淸淨不爲無覺。 如是法界一切妄想不復更生。 故說淸淨。)”
  137. 137)둘째 문답 : 생멸하는 여지慮知의 상에 대한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그 둘째에 해당한다.
  138. 0)원문에는 다음에 나오는 “해탈보살이~필요도 없겠습니다.”까지가 이 문장보다 먼저 쓰였으나,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위치를 바꿨다.
  139. 138)이것은 “첫째 그칠 것이 없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에 해당한다.
  140. 139)이것은 “둘째 그칠 것이 없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에 해당한다.
  141. 140)셋째 문답 : 일각의 뜻을 펼친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그 셋째에 해당한다.
  142. 0)원문에는 다음에 나오는 “해탈보살이~무생無生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까지가 이 문장보다 먼저 쓰였으나, 문맥의 흐름에 맞추어 위치를 바꿨다.
  143. 141)세제일법世第一法 : 유식수도唯識修道의 오위五位인 제1 자량위資糧位, 제2 가행위加行位, 제3 통달위通達位, 제4 수습위修習位, 제5 구경위究竟位에서 제2 가행위인 난煖·정頂·인忍·세제일법世第一法 중 넷째를 가리킨다.
  144. 142)넷째 문답 : 일각의 뜻을 펼친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그 넷째에 해당한다.
  145. 143)다섯째 문답 : 일각의 뜻을 펼친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그 다섯째에 해당한다.
  146. 144)계상戒相 : 여기에서는 대승의 무루계無漏戒가 아닌 소승의 유위계有爲戒를 가리킨다.
  147. 145)두 번 거듭하여 드러낸 대목 가운데 그 둘째로서 법계를 수순하여 육바라밀을 구비한 수행을 드러낸다는 부분이다.
  148. 146)여섯째 문답 : 일각의 뜻을 펼친 여섯 가지 문답 가운데 그 여섯째에 해당한다.
  149. 147)전의轉依 : 보리菩提와 열반涅槃의 이과二果를 말한다. 전轉은 전사轉捨·전득轉得의 뜻이고, 의依는 소의所依의 뜻으로 제8식을 가리킨다.
  150. 148)삼륜三輪 :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 받는 사람과 보시물의 세 가지를 가리킨다.
  151. 149)무공용無功用 : 조작이 없고 분별이 없으며 시비가 없고 집착의 상이 없는 수행의 모습이다.
  152. 150)천고天鼓 : 도리천에 있는 북으로서 때와 기회를 알아서 저절로 울림으로써 사람들을 일깨워 준다고 한다.
  153. 151)이승의 허물 : 중생제도보다 자신의 해탈만 추구하는 행위 및 선과 악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154. 152)제유諸有 : 중생세간으로서 욕계유欲界有·색계유色界有·무색계유無色界를 가리킨다.
  155. 153)앞의 두 구절 : “명칭과 법수를 멀리 떠나 공견과 유견을 단제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156. 154)대공大空 : 소승의 편공偏空에 상대되는 말로서 대승구경의 공적을 뜻한다. 공空도 또한 공空하다는 것이 구경의 대공이다. 곧 대승의 열반을 가리킨다.
  157. 155)『雜阿含經』 권12(T2, 84c~85a).
  158. 156)『瑜伽師地論』 권77(T30, 726c).
  159. 157)『大般涅槃經』 권15(T12, 704ab).
  160. 158)『入楞伽經』 권3(T16, 529a).
  161. 159)『解深密經』 권3(T16, 701a).
  162. 160)『中邊分別論』 권상(T31, 452c).
  163. 161)『十地經論』 권8(T26, 172b).
  164. 162)『大智度論』 권31(T25, 288a).
  165. 163)『金剛三昧經通宗記』에서는 원효와는 달리 대공大空의 뜻을 다섯 가지 가운데 셋째의 기세계器世界가 공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4(X35, 278c), “又不住於大空。 謂身所棲托。 即器世界。 十方無量無邊。 皆悉是空。 故曰大空。 ” 참조.
  166. 164)자세하게 해석한 대목 가운데 둘째의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167. 165)십종해탈문十種解脫門 : 『大方廣佛華嚴經』 권31(T9, 600c~601a).
  168. 166)삼사三事 : 원이삼점圓伊三點으로 법신法身(體)·반야般若(宗)·해탈解脫(行)로서 열반이 지니고 있는 세 가지 속성을 가리킨다. 『金剛三昧經通宗記』 권4(X35, 280c)에서 “또한 열반은 자세하게 말하면 마하반열반나인데 번역하면 대멸도이다. 대는 곧 법신의 뜻이고, 멸은 곧 해탈의 뜻이며, 도는 곧 반야의 뜻이다. 그러므로 법신과 반야와 해탈로서 열반 삼덕의 비장을 삼는다.(又涅槃。 具云摩訶般涅拌那。 此此云大滅度。 大者即法身義。 滅者即解脫義。 度者即般若義。 故以法身解脫般若。 爲涅槃三德祕藏)”라고 하였다.
  169. 167)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大般涅槃經』 권4(T12, 388a) 내용 참조.
  170. 168)저 위에서 말한 “이하는 둘째 본격적으로 법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문(長行)이고, 둘째는 중송重頌이다.”에서 그 둘째의 중송에 해당한다.
  171. 169)원효는 「無相法品」의 산문(長行)을 약표略標와 광설廣說의 두 가지로 분류하였는데, 그 가운데 약표를 가리킨다.
  172. 170)처음의 한 게송 : “대각을 원만구족한 세존께서는 …… 그 밖에 이승의 도 전혀 없다네.”의 부분을 가리킨다.
  173. 171)위의 다섯 구절 : 위 경문의 게송, “이처럼 아와 법을 떠난 까닭은 일법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네. 제유에 같고 다른 수행 있지만 모두 다 본각의 이익 획득하여 유무견과 유무상을 멸절시키네.”를 가리킨다.
  174. 172)두 게송 반 : 이하의 경문에 나오는 “요동도 없고 요란 없는 적정열반 또 깨침의 터득에도 집착 없네. 결정 도리에 들어 있기 때문에 상도 없고 또한 행조차도 없네. 텅 빈 마음의 적멸한 경지에는 적멸한 그 마음도 발생이 없네. 저 금강의 성품과 아주 똑같이 불법승 세 보배 저버리지 않고 여섯 가지 바라밀 두루 갖추어 일체중생을 죄다 제도해 준다네.”의 게송을 가리킨다.
  175. 173)유무견과 유무상을 멸절시키네(滅絶二相見) : 게송의 글자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유견과 무견을 소멸시키네.(滅二見)” 및 “유상과 무상을 단절시키네.(絶二相)”를 합한 것이다.
  176. 174)“이처럼 아와 법을 떠난 까닭은 일법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네.”를 가리킨다.
  177. 175)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해탈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존자이시여, 중생의 마음은 그 자성이 본래 공적합니다. 공적한 마음은 그 본체에 형색(色)과 생멸상(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수습해야 본래 공적한 마음을 터득할 수 있습니까? 바라건대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에게 설해 주십시오. …….”이다.
  178. 176)지금 이 2구 : 위 게송의 제3구와 제4구로서 “제유에 같고 다른 수행 있지만, 모두 다 본각의 이익 획득하여”를 가리킨다.
  179. 177)위의 경문에서 “생멸하는 여지慮知의 상이란 무엇입니까?”에 대하여 여섯 가지로 문답한 대목이 이에 해당한다.
  180. 178)위의 제1구와 제2구에 해당하는 “요동 없고 요란 없는 적정열반 또 깨침의 터득에도 집착 없네”라는 것은 제6의 답변 가운데 “해탈의 모습은 분별상이 없고(無相) 유위행이 없으며(無行) 요동이 없고(無動) 요란이 없으며(無亂) 적정한 열반이지만 또한 열반의 모습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뒷부분에 대하여 읊은 것이고, 제3구와 제4구에 해당하는 “결정 도리에 들어 있기 때문에 상도 없고 또한 행조차도 없네.”라는 것은 제6의 답변 가운데 “결정성에 들어가는 것이며 출세에 초연하는 것이고 걸림이 없는 해탈이다.”라는 앞부분에 대하여 읊은 것이다. 이처럼 제6의 답변 가운데 뒷부분과 앞부분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181. 179)이 「無相法品」의 경문을 분과하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선정으로부터 나오는 부분(出定分)이고, 둘째는 설법을 시작하는 부분(起說分)이며, 셋째는 법문을 들은 청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得益分)이다.
  182. 180)『彌勒菩薩所問經論』 권1~권6(T26, 233b~260c) 참조.
  183. 181)『二障義』(H1, 802b~811b) 참조.
  1. 1){底}朝鮮佛敎會本(劉敬鍾校訂本) {甲}高麗大藏經。補遺板庭凾。
  2. 1)「經序品第一」無{甲}。
  3. 2)「如是我聞…六十萬億」百四十一字無{甲}。
  4. 3)經支上每有「經曰」{甲}。
  5. 4)論文上每有「論曰」{甲}。
  6. 1)「無上法品第二」無{甲}。
  7. 1)「平」作「下」{甲}。
  8. 2)「果」作「異」{甲}。
  9. 1)「二」作「一」{甲}。
  10. 1)「今」作「令」{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