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国仏教全書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金剛三昧經論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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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삼매경론 하권(金剛三昧經論 卷下)

신라국 사문 원효가 서술하다(新羅國 沙門 元曉 述)
5) 「진성공품眞性空品」

진여법은 모든 공덕과 더불어 모든 수행의 덕을 갖추고 본성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 한다. 이와 같이 진성은 모든 명칭(名)과 형상(相)을 단절해 있으므로 진성공眞性空이라 한다. 또한 이 진성은 상을 떠나 있고 성을 떠나 있는데, 상을 떠나 있다는 것은 허망한 상을 떠나 있는 것이고 성을 떠나 있다는 것은 진성을 떠나 있는 것이다. 허망한 상을 떠나 있으므로 허망한 상이 공하고, 진성을 떠나 있으므로 진성도 역시 공하다. 이런 까닭에 진성공이라 한다. 지금 「진성공품」에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을 드러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뜻으로 품명을 내세운다.
개별적으로 일미관행을 설명하는 여섯 부분 가운데 넷째로 허망을 없애고 실제에 들어가는 부분을 마쳤다. 이하는 다섯째로 모든 성행聖行이 진성공에서 나온 것을 설명한다. 이 「진성공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이근자를 위하여 많은 경문(多文)으로 자세하게 설하고, 둘째는 둔근자를 위하여 작은 경문(小文)으로 간략하게 요약한다.

(1) 이근자利根者를 위하여 많은 경문으로 자세하게 설함

첫째, 자세하게 설하는 데 여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삼취정계는 진성으로부터 성취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수행 덕목의 실천(道品行)은 진성으로부터 성립되어 있음을 설명하며,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은 진여도리에 맞게 설해진 것임을 설명하고, 넷째는 보살의 계위는 본각리로부터 나온 것임을 설명하며, 다섯째는 대반야는 (원융하고 무이하여) 모든 인연을 단절해 있음을 설명하고,

001_0650_b_02L金剛三昧經論卷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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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_0650_b_04L新羅國沙門元曉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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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性空品1)第六 [33]

001_0650_b_06L
眞如之法具諸功德與諸行德而作
001_0650_b_07L本性故言眞性如是眞性絕諸名
001_0650_b_08L以之故言眞性空也又此眞性
001_0650_b_09L離相離性離相者離妄相離性者
001_0650_b_10L離眞性離妄相故妄相空也離眞
001_0650_b_11L性故眞性亦空以之故言眞性空也
001_0650_b_12L今此品中顯是二義故依是義
001_0650_b_13L品名也

001_0650_b_14L
爾時舍利弗而白佛言尊者修菩薩
001_0650_b_15L無有名相三戒無儀云何攝受
001_0650_b_16L衆生說願佛慈悲爲我宣說

001_0650_b_17L
別明觀行有六分中第四遣虛入實
001_0650_b_18L分竟此下第五明諸聖行出眞性空
001_0650_b_19L就此品中大分有二一爲利根者
001_0650_b_20L多文廣說二爲鈍根者少文略攝
001_0650_b_21L前廣說中卽有六分一者明三聚戒
001_0650_b_22L從眞性成二者明道品行從眞性立
001_0650_b_23L三者明如來敎當如理說四者明菩
001_0650_b_24L薩位從本利出五者明大般若

001_0650_c_01L여섯째는 대선정은 모든 명칭과 법수를 초월해 있음을 설명한다.

① 삼취정계는 진성으로부터 성취되어 있음을 설명함

첫째의 삼취정계에 대한 경문에 다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하고, 둘째는 간략하게 답변하며, 셋째는 거듭 질문(請)하고, 넷째는 설명해 주며, 다섯째는 이해한다.

가. 질문을 청함

그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 있어 명칭과 형상이 없다면 삼취정계의 위의가 없을 터인데 어떻게 자신이 섭수하고 또 중생에게 설할 수가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써 저희들에게 널리 설해 주십시오.”

이는 첫째로 질문이다.
“보살도를 닦는 데 있어 명칭과 형상이 없다.”는 것은 모든 수행을 통틀어 언급한 것이다.
“삼취정계의 위의가 없다.”는 것은 계행1)을 별도로 말한 것이다. 앞의 「입실제품」에서 말한 “삼취정계에 들어가지만 그에 대한 상이 없습니다.”라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은 곧 삼취정계에 형상(相)이 없고 위의(儀)가 없다면 자신은 어떻게 삼취정계를 섭수하고 또 어떻게 삼취정계를 타인에게 설해 주겠는가 하는 것이다.
사리불(身子)은 이미 처음에 대승에 들어가 초발심하여 수행할 때부터 삼취정계를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삼무루학의 처음 행위 곧 계행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다. 또한 사리불은 법신으로부터 발생하였는데 이제 이 「진성공품」에서 모든 수행법이 법신으로부터 발생한 것임을 설한다. 그러므로 사리불에 의거하여 질문한 것이다.

나. 간략하게 답변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그대는 이제 자세히 듣거라. 그대에게 설해 주겠다.
선남자여, 선법과 불선법은 다 마음으로부터 화생化生한 것이고, 일체의 경계는 뜻(意)과 말(言)에서 분별된 것이다. 일본각一本覺의 도리로 그것을 제지하면 온갖 반연이 단멸된다.
선남자여, 왜냐하면 일본각은 기동하지도 않고 삼용三用2)은 시행되지도 않지만 진여의 도리에 머무르고, 육도의 문이 닫히며, 사연四緣3)이 여법하게 이루어지고(如順), 삼취정계가 갖추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둘째로 간략한 답변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다.

가) 통문通問에 답변함

첫째는 통문通問에 답변한 것이다.
“선법과 불선법은 다 마음으로부터 화생한 것이다.”라는 것은 삼업의 인행因行이 모두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경계는 뜻과 말로 분별된 것이다.”라는 것은 육도의 과경果境은 뜻으로 변화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동란을 제어하지 못함을 말미암은 까닭에 인과를 변작하여 고해에 유전한다. 이런 까닭에 고해를 건너려면 보살도를 닦아서 마음을 일여하게 제어하여 온갖 반연을 단멸해야 한다. 그러므로 보살도의 수행에는 명칭과 형상이 없다.

나) 별문別問에 답변함

“왜냐하면” 이하는 둘째로 별문別問에 답변한 것이다.

001_0650_c_01L諸因緣六者明大禪定超諸名數
001_0650_c_02L初三戒中文有五分一問二答
001_0650_c_03L四說五者領解此卽初問言修
001_0650_c_04L菩薩道無名相者通擧諸行三戒無
001_0650_c_05L儀者別牒戒行如前品言入三聚
001_0650_c_06L不住其相是卽三戒無相無儀
001_0650_c_07L云何自攝受及爲他說耶此舍利弗
001_0650_c_08L旣始入大初發修行以戒爲本
001_0650_c_09L問三學之中初行又此身子從身而
001_0650_c_10L今此品中說諸行法從法身生
001_0650_c_11L故寄身子而發問也

001_0650_c_12L
佛言善男子汝今諦聽爲汝宣說
001_0650_c_13L男子善不善法從心化生一切境界
001_0650_c_14L意言分別制之一處衆緣斷滅何以
001_0650_c_15L善男子一本不起三用無施住於
001_0650_c_16L如理六道門杜四緣如順三戒具足

001_0650_c_17L
此是第二略答於中有二先答通問
001_0650_c_18L善不善法從心化生者三業因行皆
001_0650_c_19L是心作故一切境界意言分別者
001_0650_c_20L道果境無非意變故由心亂動
001_0650_c_21L能制故變作因果流轉苦海是故
001_0650_c_22L欲度苦海修菩薩道制心一如
001_0650_c_23L緣斷滅所以菩薩修無名相何以
001_0650_c_24L「第六」無{甲}

001_0651_a_01L비록 다시 총설했지만 아직 개별적인 수행에 대하여 듣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왜냐하면’ 하고 질문한 것이다.
“일본각은 기동하지도 않고”라는 것은 삼취정계의 근본인 일본각은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기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삼용은 시행되지도 않지만”이라는 것은 이미 본각에 의하여 삼취정계의 작용이 성취되었지만 그 작용에는 위의로 행해지는 형상을 떠나 있다. 행해지는 것이 없고, 일본각을 따라 머물기 때문에 “진여의 도리에 머무른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미 진여의 도리에 머물러 삼유의 인을 없앴으므로 “육도의 문이 닫힌다.”라고 한다.
일여4)의 도리에 사연의 힘이 갖추어져 있고, 일여의 도리에 따라 삼취정계가 갖추어진다. 때문에 “사연四緣이 여법하게 이루어지고 삼취정계가 갖추어지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 거듭 질문을 청함

사리불이 여쭈었다.
“사연四緣이 여법하게 이루어지고 삼취정계가 갖추어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셋째로 거듭 청하는 것이다.

라. 자세하게 설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연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택멸擇滅5)을 작용시키는 힘으로 별해탈계를 취하는 연이니, 섭률의계이다. 둘째는 본각의 이익의 청정한 근본의 힘으로 모든 선법을 집기하는 연이니, 섭선법계이다. 셋째는 본각의 지혜인 대비의 힘을 일으키는 연이니, 섭중생계이다. 넷째는 일본각으로 삼취정계를 두루 꿰뚫어보는 지혜력의 연이니, 진여를 따라 머무는 것이다. 이것이 곧 사연이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사상事相에 집착하지 않지만 공용이 없지 않고, 일본각의 도리를 떠나 있어서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일본각(一事)6)은 육행을 통섭하므로 부처님의 보리이고 살반야의 바다이다.”

이는 넷째로 자세하게 설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답변하여 삼취정계의 인연을 설명하고,7) 둘째는 일본각이 일체수행을 통섭함을 드러낸다.8)

가) 곧장 답변하여 삼취정계의 인연을 설명함

첫째에서 “사연”이라 한 것은 일심의 본각리本覺利 가운데 사대연력을 갖추어서 삼취정계의 연을 짓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멸의지연滅依止緣이고, 둘째는 생의지연生依止緣이며, 셋째는 섭의지연攝依止緣이고, 넷째는 이의지연離依止緣이다.

001_0651_a_01L故下次答別問雖復摠說未聞別
001_0651_a_02L所以更問何以故也一本不起者
001_0651_a_03L三戒之本是一本覺本來寂靜
001_0651_a_04L曰不起三用無施者旣依本覺
001_0651_a_05L三戒用用離威儀施作相故無施作
001_0651_a_06L順住一本故言住於如理旣住
001_0651_a_07L如理消除有因故言六道門杜
001_0651_a_08L一如理具四緣力能順一如卽具
001_0651_a_09L三戒故言四緣如順三戒具足

001_0651_a_10L
舍利弗言云何四緣如順三戒具足

001_0651_a_11L
此是第三重請

001_0651_a_12L
佛言四緣者一謂作擇滅力取緣
001_0651_a_13L律儀戒二謂本利淨根力所集起緣
001_0651_a_14L攝善法戒三謂本慧大悲力緣攝衆生
001_0651_a_15L四謂一覺通智力緣順於如住
001_0651_a_16L謂四緣善男子如是四大緣力不住
001_0651_a_17L事相不無功用離於一處卽不可求
001_0651_a_18L善男子如是一事通攝六行是佛菩
001_0651_a_19L提薩般若海

001_0651_a_20L
此是第四廣說於中有1) [34] 一者
001_0651_a_21L答明戒因緣二者乘顯攝一切行
001_0651_a_22L初中言四緣者謂於一心本覺利中
001_0651_a_23L具四力用作三戒緣一滅依止緣
001_0651_a_24L二生依止緣三攝依止緣四離依止

001_0651_b_01L
멸의지는 본각 중의 자성이 고요한 공덕이 모든 번뇌의 자성과 상위相違한 것으로, 이 연은 섭률의계를 성취한다. 생의지는 본각 가운데 자성이 선한 공덕은 모든 선근의 자성과 서로 조화로운 것으로, 이 연은 섭선법계를 성취한다. 섭의지는 본각 가운데 자성이 대비의 자성을 성취하여 일체의 중생을 저버리지 않는 것으로, 이 연은 섭중생계를 성취한다. 이의지는 본각 가운데 자성이 반야의 자성을 성취하여 일체의 사상事相을 멀리 벗어난 것으로, 이 인연은 삼취정계로 하여금 사상事相을 멀리 벗어나서 진여에 수순하여 머물게 한다.
앞의 세 가지는 개별적인 연이고, 마지막의 한 가지는 총체적인 연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삼취정계를 받을 때 본각의 이익에 수순하여 수지하므로 이 네 가지 연으로 삼취정계를 갖춘다. 대의는 이와 같다.

다음은 경문을 해석한다.
“첫째는 택멸을 작용시키는 힘으로 별해탈계를 취하는 연이다.”라는 것은 본각은 본래 번뇌의 계박을 떠나 있어 전체적으로 택멸해탈을 일으켜 그 힘으로 별해탈계를 능취하는 것이다.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는 경우에 그럴 의도가 없어도 저절로 작용하는 것과 같다. 택멸해탈의 도리도 또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둘째는 본각의 이익의 청정한 근본의 힘으로 모든 선법을 집기하는 연이다.”라는 것은 본각은 본래 자성이 청정한 공덕으로 모든 수행공덕의 근본이 되는데, 바로 그 근본 힘을 말미암아 모든 선법을 일으키는 것이다. 일어난 바 모든 선법의 연, 바로 그 연이 섭선법계를 성취한다.
“셋째는 본각의 지혜인 대비의 힘을 일으키는 연이니, 섭중생계이다.”라는 것은 본각 가운데 속제를 비추는 지혜는 곧 대비로서 항상 중생을 보살피는데, 이 연은 섭중생계를 성취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일본각으로 삼취정계를 두루 꿰뚫어보는 지혜력의 연이니, 진여를 따라 머무는 것이다.”라는 것은

001_0651_b_01L滅依止者謂本覺中性靜功德
001_0651_b_02L與諸煩惱自性相違以是緣成攝律
001_0651_b_03L儀戒生依止者謂本覺中性善功德
001_0651_b_04L與諸善根自性相順以是緣成攝善
001_0651_b_05L法戒攝依止者謂本覺中性成大
001_0651_b_06L悲自性不捨一切衆生以是緣成
001_0651_b_07L攝衆生戒離依止者謂本覺中性
001_0651_b_08L成般若自性捨離一切事相以是因
001_0651_b_09L令三聚戒捨離事相順如而住
001_0651_b_10L前三別緣後一通緣菩薩發心
001_0651_b_11L三戒時順本覺利而受持故以是
001_0651_b_12L四緣具足三戒大意如是次消其
001_0651_b_13L一謂作擇滅力取緣者本覺本
001_0651_b_14L離煩惱繫縛擧體而作擇滅解脫
001_0651_b_15L力能取別解脫戒如似2) [35] 石引取
001_0651_b_16L於針雖無作意而有力用當知此
001_0651_b_17L中道理亦爾二謂本利淨根力所集
001_0651_b_18L起緣者謂本覺本來性淨功德與諸
001_0651_b_19L行德而作根本由此根力起諸善法
001_0651_b_20L爲所集起善法之緣卽此緣成攝善
001_0651_b_21L法戒三謂本慧大悲力緣攝衆生戒
001_0651_b_22L謂本覺中照俗之慧卽是大悲
001_0651_b_23L恒潤衆生以是緣成攝衆生戒
001_0651_b_24L謂一覺通智力緣順於如住者謂本

001_0651_c_01L본각 가운데 모든 자성을 비추는 지혜로서 삼취정계를 모두 진여를 수순하여 머물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사연의 자체는 모든 법계에서 작용하여 만행을 섭수하므로 “큰 인연의 힘”이라 한다. 비록 큰 인연의 힘이 있지만 일미와 마찬가지로 모든 명칭과 형상의 차별적인 작용을 떠나 있기 때문에 “사상에 집착도 없다.”고 한다. 비록 사상事相이 없지만 뛰어난 능력이 있어 출세간의 일체의 수행공덕을 능섭하기 때문에 “공용이 없지는 않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본각은 세속법에서는 그와 같은 뜻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각의 도리를 떠나 있어서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이상은 삼취정계의 연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나) 일본각이 일체수행을 통섭함을 설명함

여기부터는 일본각이 일체수행을 통섭함을 설명한다.9)
처음의 십신十信으로부터 등각等覺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육행의 계위에 포함된 모든 수행은 다 그 일본각에 섭수되어 성취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일본각(一事)은 육행을 통섭한다.”고 한다.
다만 보살의 경우만 이 일본각에 귀일되는 것이 아니라 제불의 원만한 지혜도 마찬가지로 이 일본각의 바다에 귀일되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이고 살반야의 바다이다.”라고 한다.

마. 사리불이 이해함

사리불이 여쭈었다.
“사상事相에 집착도 없고 공용이 없는 것도 아니라면 그 법은 진공으로서10) 상·낙·아·정이고, 인아와 법아를 초월한 대반열반이며, 그 마음은 계박이 없는 대력관大力觀11)일 것입니다.

이는 다섯째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소순所順의 일여가 곧 법신으로서 사덕四德을 구족하고 인상과 법상을 초월한 대열반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는 능순能順의 일여심이 곧 일여를 수순하여 계박을 벗어나 있어 대자재력이 아닌 경우가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② 수행 덕목의 실천은 진성으로부터 성립되어 있음을 설명함

따라서 그 대력관과 대력본각에는 마땅히 삼십칠도품의 법이 갖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삼십칠도품의 법이 갖추어져 있다. 왜냐하면 사념처·사정근·사여의족·오근·오력·칠각분·팔정도 등

001_0651_c_01L覺中照通性智令三聚戒皆順如住
001_0651_c_02L如是四緣體遍法界用攝萬行
001_0651_c_03L言大力雖有大力而同一味離諸
001_0651_c_04L名相差別事用故言不住事相雖無
001_0651_c_05L事相而有勝能能攝出世一切行德
001_0651_c_06L故言不無功用由如是故只是本覺
001_0651_c_07L於俗法中無如是義故言離於一處
001_0651_c_08L卽不可求上來別明三聚戒緣自下
001_0651_c_09L明其通攝萬行始從十信乃至等覺
001_0651_c_10L如是六位所有諸行皆是一覺之所
001_0651_c_11L攝成故言一事通攝六行非但菩薩
001_0651_c_12L歸此本覺諸佛圓智同歸此海
001_0651_c_13L言是佛菩提薩般若海

001_0651_c_14L
舍利弗言不住事相不無功用是法
001_0651_c_15L眞空常樂我淨超於二我大般涅槃
001_0651_c_16L其心不繫是大力觀

001_0651_c_17L
此是第五領解於中有二先領所順
001_0651_c_18L一如卽是法身具足四德超人法
001_0651_c_19L是大涅槃後領能順如心隨如
001_0651_c_20L離繫而無不爲大自在力

001_0651_c_21L
是觀覺中應具三十七道品法佛言
001_0651_c_22L具三十七道品法何以故四念處
001_0651_c_23L四正勤四如意足五根五力七覺 [94]
001_0651_c_24L「二」作「一」{甲}「磁」作「礠」{甲}

001_0652_a_01L여러 가지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뜻은 동일하여 불일불이不一不異하기 때문이다. 다만 명칭과 법수이기에 명名과 자字가 있을 뿐이지 그 법은 얻을 수가 없다. 얻을 수 없는 법으로서 동일한 뜻이므로 문文이 없다. 문文이 없는 형상이어야 진실한 공성이다. 공성의 뜻은 여실하고 여여하다. 여여한 도리이기에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다.
선남자여, 그래서 진여의 도리에 머무는 자는 삼고三苦(壞苦·行苦·苦苦)의 바다를 건너간다.”

이것은 크게 분류한 가운데 둘째로 수행 덕목(道品)의 수행이 진성으로부터 성립되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질문에서 “그 대력관과 대력본각에는”이라 한 것은 수순의 주체인 관과 수순의 객체인 본각이다. 곧 주체와 객체가 평등한 관과 본각 가운데는 마땅히 삼십칠도품의 수행이 갖추어져 있다.

나. 답변

답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인정하고, 둘째는 해석한다.

( 가) 인정)

나) 해석

“왜냐하면” 이하는 둘째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대로 해석하고,12) 둘째는 거듭 드러낸다.13)

(가) 그대로 해석함

첫째에서 “여러 가지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뜻은 동일하다.”고 한 것은 삼십칠도품이라는 명목이 가리키는 뜻은 유일하게 관과 본각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불일불이하다.”는 것은 관과 본각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불이문不異門에 의거하기 때문에 “그 뜻은 동일하다.”고 한다.

(나) 거듭 드러냄

“다만 명칭과 법수이기에” 아래는 둘째로 거듭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르다는 뜻을 없애고, 둘째는 동일하다는 뜻을 드러내며, 셋째는 동일하다는 뜻에는 일체법을 갖추고 있음을 설명하고, 넷째는 동일하다는 뜻에는 모든 허물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 다르다는 뜻을 없앰

첫째에서 “다만 명칭과 법수이기에 명名과 자字가 있을 뿐이지 그 법은 얻을 수가 없다.”고 한 것은 세간에서 닦는 도품의 수행법은 명칭과 법수에 따르기 때문에 37가지가 있지만 보살의 각혜로 추구해 보면 명목이 가리키는 37가지 법은 모두 불가득하기 때문이다.

㉯ 동일하다는 뜻을 드러냄

둘째에서 “얻을 수 없는 법으로서 동일한 뜻이므로 문文이 없다.”고 한 것은 삼십칠품의 개별적인 법을 추구해도 불가득한데 이 경우 그 법은 일미로서 모든 문언文言을 단절해 있기 때문이다.

㉰ 동일하다는 뜻에는 일체법을 갖추고 있음을 설명함

셋째에서 “문文이 없는 형상이어야 진실한 공성이다.”라고 한 것은

001_0652_a_01L八正道等多名一義不一不異以名
001_0652_a_02L數故但名但字法不可得不得之法
001_0652_a_03L一義無文無文之相一本相
作義
[95] 眞實空性
001_0652_a_04L空性之義如實如如如如之理具一
001_0652_a_05L切法善男子住如理者過三苦海

001_0652_a_06L
此是大分第二明道品行從眞性立
001_0652_a_07L於中有二先問後答問中言是觀
001_0652_a_08L覺中者是能順觀所順本覺
001_0652_a_09L所平等觀覺之中應具三十七道品
001_0652_a_10L答中有二先許後釋何以故下
001_0652_a_11L是第二釋於中有二直釋重顯
001_0652_a_12L中言多名一義者三十七品所目之
001_0652_a_13L唯一觀覺無二法故不一不異
001_0652_a_14L觀覺不一而不異故約不異門
001_0652_a_15L故言一義以名數故已下重顯
001_0652_a_16L中有四先遣異義次顯一義三明
001_0652_a_17L一義具一切法四明一義離諸過
001_0652_a_18L初中言以名數故但名但字法不
001_0652_a_19L可得者謂世間修道品行法隨名數
001_0652_a_20L故有三十七菩薩覺慧求所目義
001_0652_a_21L三十七法皆不可得故第二中言
001_0652_a_22L不得之法一義無文者求彼別法不
001_0652_a_23L得之時是法一味絕諸文言故
001_0652_a_24L三中言無文之相眞實空性者

001_0652_b_01L개별적인 법으로서 얻을 수 없는 능관심能觀心은 모든 문언을 떠나 있고 또 모든 차별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공성의 뜻은 여실하고 여여하다.”는 것은 이 능관심이 모든 분별상과 뜻을 떠나 있어 실상의 여여한 도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본각의 여여한 도리에는 곧 수행으로 성취된 도품 등의 법이 갖추어져 있다. 마치 금을 주조하면 상호의 형상이 갖추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이기에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 동일하다는 뜻에는 모든 허물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이미 진여의 도리에 머물러서 모든 공덕을 갖추면, 곧 일체의 잡염과 과실을 떠나 있기 때문에 “선남자여, 그래서 진여의 도리에 머무는 자는 삼고의 바다를 건너간다.”고 한다. 이것은 넷째로 모든 허물을 떠나 있음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대략 삼십칠도품의 뜻을 설명한다. 이 가운데서는 사구로 분별하는데, 첫째는 삼십칠품을 요약하여 열 가지 법으로 삼고, 둘째는 열 가지 법을 요약하여 네 가지 법으로 삼으며, 셋째는 네 가지 법을 요약하여 일의一義로 삼고, 넷째는 일의一義에 삼십칠품이 갖추어져 있음을 설명한다.
첫째의 삼십칠품을 요약하여 열 가지 법으로 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대지도론』에서 “삼십칠품은 열 가지 법을 근본으로 한다. …….”14)고 하였다. 곧 열 가지를 삼십칠품으로 열어놓은 것이니, 그 법체를 논하면 열 가지 법이 있을 뿐임을 알아야 한다.
() 열 가지는 무엇인가?
() 계戒·사思·수受·염念·정定·혜慧·신信·근勤·안安·사捨 등이다.15)
() 열 가지를 열어 삼십칠품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 계戒를 열면 정어·정업·정명의 세 가지이다. 사思의 법수는 하나로 내세우니, 정사유이다. 수受도 역시 하나로 내세우니, 희각분喜覺分이다. 염念을 열면 염근·염력·염각·정념의 네 가지이다. 정定을 열면 여덟 가지가 되니, 사여의족·정근·정력·정각·정정이다. 혜慧의 경우도 역시 여덟 가지가 성립되니, 사념처·혜근·혜력·택법각분·정견이다. 근勤의 경우도 역시 여덟 가지가 성립되니, 사정근·정진근·정진력·정진각분·정정진이다. 신信에는 신근과 신력의 두 가지가 성립된다.

001_0652_b_01L得別法之能觀心絕諸文言離差別
001_0652_b_02L相故空性之義如實如如者此能
001_0652_b_03L觀心離諸相義不異實相如如之理
001_0652_b_04L如是本覺如如之理卽具修成道
001_0652_b_05L品等法猶如鑄金具相好像故言
001_0652_b_06L如如之理具一切法旣住如理
001_0652_b_07L諸功德卽離一切雜染過失故言住
001_0652_b_08L如理者過三苦海此是第四離諸過
001_0652_b_09L患也此中略明道品之義於中卽以
001_0652_b_10L四句分別一攝三十七以爲十法
001_0652_b_11L攝十法以爲四法三攝四法以爲一
001_0652_b_12L四明一義具三十七初攝三十七
001_0652_b_13L以爲十法者智度論云三十七品
001_0652_b_14L十法爲本乃至廣說當知開十立三
001_0652_b_15L十七論其法體唯有十法何等爲
001_0652_b_16L謂戒思受念定與慧信勤安捨
001_0652_b_17L何開十爲三十七開戒爲三正語業
001_0652_b_18L思數立一謂正思惟受亦立一
001_0652_b_19L謂喜覺分開念爲四念根念力念覺
001_0652_b_20L正念開定爲八謂四如意足定根
001_0652_b_21L定力定覺正定慧亦立八謂四念處
001_0652_b_22L慧根慧力擇法覺分及與正見勤亦
001_0652_b_23L立八謂四正勤精進根精進力精進
001_0652_b_24L覺分及正精進信中立二信根信力

001_0652_c_01L안安과 사捨는 각각 하나씩이니, 의각분倚覺分과 사각분捨覺分이다.
총체적으로 말하면 다섯 가지 범례가 있다. 첫째는 여덟 가지로 여는 것에 세 경우가 있으니, 정과 혜와 근의 스물네 가지가 이 세 경우에 포함된다. 둘째는 네 가지로 여는 것에 한 경우가 있으니, 염이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는 염 한 가지에 포함된다. 셋째는 세 가지를 여는 것에 한 경우가 있으니, 계이다. 이 세 가지는 계 한 가지에 포함된다. 넷째는 두 가지를 여는 것에 한 경우가 있으니, 신이다. 신은 신근과 신력을 포함한다. 다섯째는 한 가지를 여는 것에 네 경우가 있으니, 사思·수受·안安·사舍는 각각 사·수·안·사라는 자체의 성품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열 가지 법이 삼십칠품을 포함한다.
둘째의 열 가지 법을 요약하여 네 가지 법으로 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계戒는 색법에 포함되니, 표색업과 무표색업이다. 두 번째 사捨와 수受는 변행遍行의 심소에 포함된다. 세 번째 염念·정定·혜慧는 개별적인 경계인 심소에 포함된다. 네 번째 신信·근勤·안安·사捨의 네 가지는 선善의 심소에 포함된다.
셋째의 네 가지 법을 요약하여 일의一義로 삼는 것은 다음과 같다. 각혜覺慧로 추구해 보면 이와 같은 네 가지 가운데 처음의 한 가지는 색법으로서 방소方所가 있거나 방소가 없거나 모두 무소득이고, 뒤의 세 가지는 심소유로서 시時가 있거나 시時가 없거나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법이 없지는 않지만 유가득의 법이 없어서 평등일미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법은 그대로 곧 일의一義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런 까닭에 “여러 가지 명칭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뜻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넷째의 일의一義에 삼십칠품이 갖추어져 있음을 설명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주체와 객체가 평등일미의 뜻이라는 입장에서 신身·수受·심心·법法이 공적함을 관찰하는 것은 곧 사념처이고, 모든 해태를 떠나는 것은 사정근이며, 산란한 생각이 적멸해지는 것은 사여의족이고, 불신不信 등을 떠나는 것은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이며, 무명 등이 소멸되는 것은 칠각분七覺分이고, 팔사법八邪法을 떠나는 것은 팔정도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잡염雜染을 멀리 떠나서 일의一義에 무량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대력관과 대력본각에는 마땅히 삼십칠도품의 법이 갖추어져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001_0652_c_01L安捨各一謂倚覺分及捨覺分
001_0652_c_02L而言之有其五例一者開八有三
001_0652_c_03L定慧勤彼二十四此三所攝二者
001_0652_c_04L開四有一謂念所以彼四一念所
001_0652_c_05L三者開三有一謂戒所以彼三
001_0652_c_06L一戒所攝四者開二有一謂信
001_0652_c_07L攝彼二五者立一有四思受安捨
001_0652_c_08L各攝自性如是十法攝三十七
001_0652_c_09L攝十法爲四種者第一戒者色法所
001_0652_c_10L謂表無表第二思受遍行心所
001_0652_c_11L所攝第三念定慧別境心所所攝
001_0652_c_12L第四信等四善心所所攝三攝四法
001_0652_c_13L爲一義者覺慧推求如是四法初一
001_0652_c_14L色法有方無方俱無所得後三心
001_0652_c_15L有時無時皆不可得是則雖非
001_0652_c_16L無法而不得有可得之法平等一味
001_0652_c_17L當知四法直是一義以之故言多
001_0652_c_18L名一義四明一義具三十七者能所
001_0652_c_19L平等一味之義觀身等空是四念
001_0652_c_20L離諸懈怠是四正勤散慮寂滅
001_0652_c_21L是如意足離不信等卽是根力
001_0652_c_22L無明等卽七覺分離八邪法卽八
001_0652_c_23L正道如是遠離一切雜染一義具足
001_0652_c_24L無量功德故言是觀覺中應具三十

001_0653_a_01L또한 “여여한 도리이기에 일체의 법을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③ 여래의 가르침은 진여도리에 맞게 설해진 것임을 설명함

이하는 크게 분류한 가운데 셋째로 여래의 가르침은 진여도리에 맞게 설해진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사리불이 여쭈었다.
“일체만법은 모두 언어와 문자입니다. 언어와 문자의 모습은 곧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실한 뜻을 언설로는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래께서는 어찌 설법을 하는 것입니까?”

질문에서 “일체만법”이라 한 것은 세간의 언설로 안립한 법이다. 저 언설의 법은 모두 무소득이므로 오직 언설과 문자일 뿐이지 곧 뜻이 아니다. 그러나 제법의 진실한 뜻은 모든 언설을 단절해 있다. 지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도 만약 언설과 문자라면 진실한 뜻이 없을 것이고, 만약 설법에 진실한 뜻이 있다면 마땅히 언설과 문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질문으로 “어찌 설법을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설법은 그대와 중생들을 위한 것으로서 있다(在)든가 발생한다(生)고 설한다. 그러므로 말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하였다.16) 이런 까닭에 그것을 설하자면, 내가 설한 것은 뜻의 언어이지 문자만의 언어는 아니다. 그러나 중생이 설한 것은 문자만의 언어이지 뜻의 언어가 아니다. 뜻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공무空無일 뿐이다.
공무의 언어는 뜻을 말할 수가 없다. 뜻을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허망한 언어이다. 그러나 진여의 뜻을 가리키는 언어는 실의 경우에도 공하면서 공하지 않고, 공의 경우에도 실이면서 실이 아니므로 공과 실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나 있고, 중간이면서도 중간이 아니므로 중간이 아닌 법은 공과 실과 중간의 세 가지 모습을 떠나 있다. 그래서 처소에 대하여 집착의 견해가 없이(不見) 여여와 똑같이 설법한다.
진여는 유를 없애고 만든 무도 아니고, 무를 설정하여 만든 유도 아니다. 그렇다고 진여는 무를 그대로 남겨두어 만든 무도 아니고 유를 그대로 남겨두어 만든 유도 아니다. 이처럼 진여에는 본래 유와 무가 없으므로 없다(不在)고 설한다.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으므로 진여는 유의 진여도 아니고 무의 진여도 아니라고 여법하게 설한다.”

이는 둘째로 답변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이유이고, 둘째는 문자와 뜻이 서로 다른 점을 드러낸다.

가)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이유

첫째에서 “그대와 중생들을 위한 것으로서 있다(在)든가 발생한다(生)고 설한다.”라고 한 것에서 ‘그대’는 사리불이고, 중생들은 일체의 범부이다.

001_0653_a_01L七道品法又言如如之理具一切法

001_0653_a_02L
舍利佛言一切萬法皆悉文言文言 [96]
001_0653_a_03L之相卽非爲義如實之義不可言說 [97]
001_0653_a_04L今者如來云何說法

001_0653_a_05L
此下大分第三明佛言敎稱如理說
001_0653_a_06L先問後答問中言一切萬法者世間
001_0653_a_07L言說所安立法如言之法皆無所
001_0653_a_08L故唯文言卽非爲義諸法實義
001_0653_a_09L絕諸言說今佛說法若是文言
001_0653_a_10L無實義若有實義應非文言是故
001_0653_a_11L問言云何說法

001_0653_a_12L
佛言我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
001_0653_a_13L說不可說是故說之我所說者義語
001_0653_a_14L非文衆生說者文語非義非義語者
001_0653_a_15L皆悉空無空無之言無言於義不言
001_0653_a_16L義者皆是妄語如義語者實空不空
001_0653_a_17L空實不實離於二相中間不中不中
001_0653_a_18L之法離於三相不見處所如如如說
001_0653_a_19L如無無有無有於無如無有無有無
001_0653_a_20L於有有無不在 [98] 說不在故 [99] 不在於如
001_0653_a_21L如不有如不無如說

001_0653_a_22L
是第二答於中有二先是佛說之由
001_0653_a_23L後顯文義之異初中言以汝衆生在
001_0653_a_24L生說故者汝謂身子衆生卽是一切

001_0653_b_01L무위는 곧 법체에 있다(在)고 설하고, 유위는 곧 법상을 발생한다(生)고 설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있다든가 발생한다든가 하는 설명으로는 진여의 진실한 뜻을 설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여래) 설법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런 까닭에 그것을 설하자면”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곧 부처님께서 언교를 통하여 설한 연유이다.

나) 문자와 뜻이 서로 다른 점

다음은 문자와 뜻이 같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다.17) 먼저 두 문장18)으로 설명하고, 나중에 두 문장19)으로 해석한다.

(가) 두 문장으로 설명함

첫째로 “내가 설한 것은 뜻의 언어이지 문자만의 언어는 아니다.”라는 것은 언어가 여실한 뜻에 합당하므로 공허한 문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중생이 설한 것은 문자만의 언어이지 뜻의 언어가 아니다.”라는 것은 언어가 공허한 문자에 그치므로 여실한 뜻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나) 두 문장으로 해석함

둘째로 해석 중에서는 뒤의 경문을 먼저 해석한다.

㉮ 뒤의 경문을 해석함

“모두 공무일 뿐이다.”라는 것은 그대로 공허한 문자이므로 여실한 뜻이 없다는 것으로, 곧 문자와 언어를 해석한 것이다.
“뜻의 언어가 아니다.”라는 것은 여실한 뜻을 설명하지(詮談)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뜻이 없음을 해석한 것이다.
아래 총결해서 “모두 허망한 언어이다.”라고 한 것은 비록 문자언어라는 형상(想)으로는 어긋나지 않을지라도 여실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치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거나 보고서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 앞의 경문을 해석함

“그러나 여여의 뜻을” 이하는 앞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장 해석하고, 둘째는 거듭 드러낸다.

a. 그대로 해석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문자가 아님을 해석하고, 둘째는 여실한 뜻임을 해석한다.

a) 문자가 아님을 해석함

문자가 아님을 해석한다는 것은 공허한 문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여실한 뜻임을 해석한다는 것은 뜻이 언어에 합치되기 때문이고, 언어가 뜻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첫째의 해석에서 “실의 경우에도 공하면서 공하지 않다.”는 것은 진여의 실상도 또한 공하다는 것이다. 마치 저 위에서 말한20) “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므로 “실의 경우에도 공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실상의 도리가 없지 않으므로 “실의 경우에도 공하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비록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상이 없지도 않기 때문이다.
“공의 경우에도 실이면서 실이 아니다.”라는 것은 진공의 도리는 실이므로 “공의 경우에도 실이다.”라고 하고, 그 진공의 도리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공의 경우에도 실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것은 비록 공이 없지는 않지만 공이 실체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공과 실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나 있고, 중간이면서도 중간이 아니다.”라는 것은

001_0653_b_01L凡夫說於無爲卽在法體說於有
001_0653_b_02L卽生法相如是在生之說不可
001_0653_b_03L說於實義我異彼說是故說之
001_0653_b_04L爲佛說言敎之由次顯文義不同相
001_0653_b_05L先標二章後釋二章標中言義
001_0653_b_06L語非文者語當實義故非直空文故
001_0653_b_07L文語非義者語止空文故不關實義
001_0653_b_08L第二釋中先釋後章言皆悉空
001_0653_b_09L無者直有空文而無實義故是釋文
001_0653_b_10L語也無言於義者無詮談於如實之
001_0653_b_11L義故是釋非義也下摠結言皆是
001_0653_b_12L妄語者雖非違想而違義故猶如
001_0653_b_13L不見言見見言不見等語如義已下
001_0653_b_14L次釋前章於中有二正釋重顯
001_0653_b_15L中亦二先釋非文後釋義語釋非
001_0653_b_16L文者謂非空無非空文故非無義
001_0653_b_17L釋義語者義合語故語如義故
001_0653_b_18L初釋中言實空不空者謂說眞如
001_0653_b_19L實相亦空如前說言空相亦空故
001_0653_b_20L言實空而不亡其實相之理故言不
001_0653_b_21L雖非有實而非無實故空實不實
001_0653_b_22L謂說眞空之理是實故言空實
001_0653_b_23L而不存其眞空之理故言不實雖非
001_0653_b_24L無空而非有空故離於二相中間不

001_0653_c_01L불공이라는 언어는 공상을 떠나 있고 부실이라는 언어는 실상을 떠나 있기 때문에 “공과 실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나 있다.”고 하고, 공과 실의 두 가지 모습 사이에 그 두 가지가 아닌 중간이 실존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간이면서도 중간이 아니다.”라고 한다.
이미 양변을 떠나 있고, 또한 중간에도 떨어지지 않으므로 “공과 실과 중간의 세 가지 모습을 떠나 있다.”고 한다.
마음과 말이 작용하는 도리는 공과 실과 중간의 세 가지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부처님의 언어는 그 세 가지 모습을 떠나 있다. 곧 그 가운데 심로心路와 언로言路를 단절해 있으므로 “처소에 대하여 집착의 견해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언어가 단절된 뜻에 묘하게 계합되어 있는 까닭에 뜻이 없는 문자와는 같지 않다. 이것은 첫째의 문자가 아님을 해석한 것에 해당한다.

b) 여실한 뜻임을 해석함

“여여와 똑같이 설법한다.”는 것은 둘째의 여실한 뜻임을 해석한 것이다. 맨 앞의 ‘여’는 똑같다(契當)는 것이고, 뒤의 ‘여여’는 곧 진여의 뜻과 도리(義理)이다. 곧 앞의 공과 실과 중간의 세 가지 모습을 멀리 떠나 있는 언어를 통하여 여여의 뜻과 도리에 똑같게(契當) 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곧 뜻을 드러내는 언어(義語)로서 범부의 언어가 뜻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b. 거듭 드러냄

“진여는 유를 없애고 만든 무도 아니고” 이하는 둘째로 여여의 뜻을 거듭 드러내는 것이다. 첫째는 문자가 아님을 드러내고, 둘째는 진여의 뜻을 가리키는 언어(義語)임을 드러낸다.

a) 문자가 아님을 드러냄

첫째에서 “진여는 유를 없애고 만든 무도 아니고 무를 설정하여 만든 유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진여의 도리는 비록 유가 아니라고 해서 진여가 본래 유를 없애고 유가 없는 상태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무법 가운데서 유법을 없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여는 본래 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유를 없애고 무에 떨어진다는 것인가. 이런 까닭에 위의 “실의 경우에도 공하면서 공하지 않다.”는 말에 합치된다.
“그렇다고 진여는 무를 그대로 남겨 두어 만든 무도 아니고 유를 그대로 남겨 두어 만든 유도 아니다.”라는 것은 진여의 도리는 비록 무가 아니라고 해서 진여가 본래 무를 남겨 둔 상태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유법 가운데 무법을 남겨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여는 본래 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슨 무를 남겨 두어 유에 떨어진단 말인가. 이런 까닭에 위의 “공의 경우에도 실이면서 실이 아니다.”라는 말에 합치된다.
“이처럼 진여에는 본래 유와 무가 없다.”는 것은 진여에는 무를 남겨두지 않으므로 유가 없고, 진여에는 유를 없애지 않으므로 무가 없다는 것이다.

001_0653_c_01L中者不空之語離於空相不實之
001_0653_c_02L離於實相故言離於二相然空
001_0653_c_03L實二相之間不存非二之中故言中
001_0653_c_04L間不中旣離二邊亦不墮中故言
001_0653_c_05L離於三相心言行處不過三相
001_0653_c_06L此佛語遠離三相卽於其中心言
001_0653_c_07L路絕故言不見處所如是妙契絕言
001_0653_c_08L之義所以不同無義之文此釋非文
001_0653_c_09L如如如說者是釋義語上一如
001_0653_c_10L是契當下二如是義理如前遠離
001_0653_c_11L三相之語契當如如義理而說所以
001_0653_c_12L佛說乃是義語不同凡語之非義也
001_0653_c_13L如無已下第二重顯先顯非文
001_0653_c_14L顯義語初中言如無無有無有於
001_0653_c_15L無者謂眞如理雖非是有而如本
001_0653_c_16L無令無其有謂令無有法於無法中
001_0653_c_17L所以然者如本非有無於何有
001_0653_c_18L墮無耶是故合於實空不空之語也
001_0653_c_19L如無有無有無於有者謂眞如理
001_0653_c_20L雖非是無而如本無令有其無
001_0653_c_21L令有無法於有法中所以然者如本
001_0653_c_22L非無有於何無而墮有耶是故合
001_0653_c_23L於空實不實之語有無不在者如無
001_0653_c_24L有無故有不在如無無有故無不

001_0654_a_01L
유와 무가 이미 없는데 어찌 중간이 있겠는가. 곧 이로써 “공과 실과 중간의 세 가지 모습을 떠나 있다.”는 말에 합치된다.
진여의 뜻이 이미 그와 같이 진여의 뜻을 가리키는 언어(義語)에 합치되는 까닭에 부처님의 말씀은 여실하여 공허한 문자가 아니다. 이와 같이 공허한 문자가 아니라는 해석을 거듭 드러낸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명칭과 언어는 이처럼 도리에 합당하다. 그러므로 후득지後得智로써 이와 같은 명칭을 가지고 진여를 사유하면 곧 진여의 이체理體를 직접 관찰할 수가 있다. 이것은 사구四句21) 가운데 모두 긍정에 해당하는 구구俱句이다.

b) 진여의 뜻을 가리키는 언어임을 드러냄

둘째의 여실한 뜻임을 거듭 해석하는 가운데서 “없다고 설한다.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은 이미 유와 무가 없음을 설한 까닭에 진여의 도리에는 유와 무가 없다는 것이다.
진여에는 유가 없으므로 유의 진여가 아니고, 진여에는 무가 없으므로 무의 진여가 아니다. 곧 유의 진여도 아니고 무의 진여도 아닌 입장에서 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으므로 진여는 유의 진여도 아니고 무의 진여도 아니라고 여법하게 설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앞에서 “여여와 똑같이 설법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진여의 뜻을 말한 해석을 거듭 드러낸다. 크게 분류한 가운데 그 셋째 부분을 마친다.

④ 보살의 계위는 본각리로부터 나온 것임을 설명함

사리불이 여쭈었다.
“일체중생은 일천제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일천제의 마음이 몇 가지 계위에 주해야 여래지와 여래의 실상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천제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이르기까지는 다섯 가지 계위의 머묾이 있다.

이하는 크게 분류한 가운데 넷째로 보살의 계위는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나. 답변

답변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수를 들어 총론적으로 드러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해석하며, 셋째는 총론적으로 설명한다.

가) 법수를 들어 총론적으로 드러냄

이것은 첫째의 다섯 가지 계위를 총론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가지(等)”는 계위를 말한다.
“일천제로부터 시작됩니다.”라는 것은 아직 무상보리심을 내지 못한 그 이전은 모두 천제라 하니, 대승의 결정신決定信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천제에는 대략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대서원을 일으킨 일천제이니, 항상 열반에 들어가지 않는 자이다.

001_0654_a_01L二旣不在何得有中卽合離於
001_0654_a_02L三相之語如義旣爾合於義語
001_0654_a_03L故佛語實非空文如是重顯非文釋
001_0654_a_04L佛說名言如是當理故後得智
001_0654_a_05L帶如是名思惟眞如卽得親觀眞如
001_0654_a_06L理軆故1) [36] 之中俱句也第二重
001_0654_a_07L顯義語中言說不在故不在於如者
001_0654_a_08L佛語旣說有無不在故不在有無於
001_0654_a_09L眞如理有不在者不有如故無不
001_0654_a_10L在者不無如故則當不有如不無如
001_0654_a_11L而說故言如不有如不無如說是故
001_0654_a_12L前言如如如說如是重顯義語之釋
001_0654_a_13L六分之中第三分竟

001_0654_a_14L
舍利弗言一切衆生從一闡提闡提
001_0654_a_15L之心住何等位得至如來如來實相
001_0654_a_16L佛言從闡提心乃至如來如來實相
001_0654_a_17L住五等位

001_0654_a_18L
此下大分第四明菩薩位從本利出
001_0654_a_19L於中有二先問次答答中有三
001_0654_a_20L者擧數摠標二者別解三者摠明
001_0654_a_21L此卽摠標五等位者等之言階
001_0654_a_22L闡提心者未發無上菩提心前皆名
001_0654_a_23L闡提以無大乘決定信故然一闡提
001_0654_a_24L略有二種一者發大願一闡提謂常

001_0654_b_01L둘째는 대신大信이 없는 일천제이니, 여기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별일천제別一闡提이니, 대사견을 일으켜 선근이 단절된 자이다. 둘째는 통일천제通一闡提이니, 아직 대승심을 일으키지 못하여 대신이 없는 자 내지 이승의 사과四果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일천제의 계위에 속한다. 지금 이 경문에서는 여기 최후의 경우(통일천제)에 의거한 까닭에 “일천제의 마음에서 시작하여 여래와 여래의 실상에 이르기까지는 다섯 가지 계위의 주가 있다.”고 하였으니, 아직 십신에 들어가지 못한 자는 모두 일천제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먼저 다섯 가지 계위의 분제에 대하여 설명한다.
첫째의 신위信位는 십신행十信行에 해당한다. 비록 불퇴의 경지는 아니지만 대승심을 일으킨 것이다. 이것을 『본업경』에서는 신상보살信想菩薩이라 한다.22)
둘째의 사위思位는 삼십심三十心(十住心·十行心·十廻向心)에 해당한다. 곧 제법이 유식의 도리임을 사량하지만 아직은 완전하게 무분별수행을 진증眞證한 것은 아니다.
셋째의 수위修位는 십지행十地行에 해당한다. 무분별수행을 진증眞證하여 십장十障23)의 대치를 터득하는 것이다.
넷째의 행위行位는 등각행等覺行에 해당한다. 인행은 이미 원만하지만 과지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다섯째의 사위捨位(佛地)는 묘각행妙覺行에 해당한다. 적멸에도 집착하지 않고 대비로 널리 교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다섯 가지 계위를 건립하는 까닭은 퇴위退位와 불퇴위不退位의 차별, 증위證位와 부증위不證位의 차별, 등위等位와 미등위未等位의 차별, 인위因位의 만위滿位에 대한 차별, 과위果位의 원만圓滿에 대한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차제에 따라 다섯 가지 계위를 내세운 것이다.24)
총론적으로 드러낸 대의는 이와 같다. 다음으로 해당하는 경문을 해석한다.

나) 개별적으로 해석함

이하는 둘째로 개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가) 신위信位

첫째는 신위이다. 이 몸속에 있는 진여종자가 망심에 가려 있지만 그 망심을 벗어나면 청정심이 분명해짐을 믿고, 모든 경계가 의意·언言의 분별임을 아는 것이다.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아는 것이다.


001_0654_b_01L不入涅槃者故二者無大信一闡提
001_0654_b_02L此亦有二一者別一闡提謂起大邪
001_0654_b_03L見斷善根者故二者通一闡提謂未
001_0654_b_04L發大心無大信者乃至二乘四果
001_0654_b_05L入此闡提位今此文中約此最後故
001_0654_b_06L言從一闡提心乃至如來有五等位
001_0654_b_07L未入十信者皆名闡提故此中先明
001_0654_b_08L五位分齊第一信位在十信行
001_0654_b_09L未不退發大心故本業經名信相 [100]
001_0654_b_10L菩薩第二思位在三十心思量諸
001_0654_b_11L唯識道理齊未眞證無分別修故
001_0654_b_12L第三修位者在十地行得眞證修
001_0654_b_13L對治十障故第四行位者在等覺行
001_0654_b_14L因行已滿未至果地故第五捨位者
001_0654_b_15L在妙覺地不取寂滅大悲普化故
001_0654_b_16L所以建立五等位者謂顯退不退位
001_0654_b_17L差別故證不證位差別故等未等位
001_0654_b_18L差別故因滿位差別故果圓位差別
001_0654_b_19L如其次第立五等位也大章如
001_0654_b_20L次釋其文

001_0654_b_21L
一者信位信此身中眞如種子爲妄
001_0654_b_22L所翳捨離妄心淨心淸白知諸境界
001_0654_b_23L意言分別

001_0654_b_24L
此下第二別釋初中有二先信後解

001_0654_c_01L
㉮ 믿음

먼저 믿음을 설명한다. 믿음에는 세 가지의 불성이 있다.
“이 몸속에 진여종자가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성에 주하는 불성(住自性佛性)을 믿는 것이다. 진여는 바로 제일의공의 종자로서 아뇩보리 가운데 도종자道種子이다. 곧 자성청정심은 본래 법이연法爾然하기 때문에 ‘진여’라 하고, 삼신의 과와 더불어 정인正因이 되므로 ‘종자’라 말하며, 아직 발심하지 못한 주이므로 ‘자성에 주한다’고 하는데 아직 모든 장애를 벗어나지 못하여 망심에 가려 있다.
“그 망심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드러난 불성(引出佛性)을 믿는 것이다. 십신으로부터 등각에 이르기까지 점차 불신과 무지 등의 장애를 벗어남에 따라 거칠고 망령된 분별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청정심이 분명해짐을 믿는다.”는 것은 곧 도달한 불성(至得佛性)을 믿는 것이다. 깨침에 도달한 후에는 일체의 번뇌를 떠나 있어서 자성청정심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다. 앞에 있는 믿음(信)이라는 글자는 두 구절25)까지 이어진다.

㉯ 아는 것

“모든 경계가 의·언의 분별임을 아는 것이다.”라는 것은 이미 세 가지 불성을 믿고 또한 이미 그것이 유식의 도리임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취하는 일체의 경계도 오직 의언분별이 만드는 것으로, 만약 분별을 떠나면 일체경계의 존재가 없음(無所有)을 아는 것이다.

(나) 사위思位를 설명함

둘째는 사위思位이다. 사량한다는 것은 모든 경계가 오직 의意·언言의 분별인데 그 의·언으로 분별되어 의·언에 따라 드러나고 보이는 경계는 나의 근본식이 아님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식은 법法도 아니고 뜻(義)도 아니며 소취所取도 아니고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

이는 사위思位에도 또한 두 구절이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첫째는 무상無相의 심사관尋思觀26)을 설명하고, 둘째는 무생無生의 여실지如實智를 드러낸다.

㉮ 무상의 심사관尋思觀을 설명함

첫째에서 “관찰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사량하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오직 의·언의 분별이다.”라는 것은 소취의 외부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001_0654_c_01L初明信者所謂信有三種佛性信此
001_0654_c_02L身中眞如種子者信住自性佛性
001_0654_c_03L如正是第一義空種子卽是阿耨菩
001_0654_c_04L提中道種子自性淨心本來法然
001_0654_c_05L故名眞如與三身果而作正因
001_0654_c_06L名種子未發心住名住自性未出
001_0654_c_07L諸障爲妄所翳也言捨離妄心者
001_0654_c_08L是信引出佛性從十信位乃至等覺
001_0654_c_09L漸出不信無知等障隨捨麁妄分別
001_0654_c_10L心故言淨心淸白者是信至得佛性
001_0654_c_11L謂至道後離一切垢自性淨心
001_0654_c_12L現淸白故上句信字貫下二句故
001_0654_c_13L知諸境界意言分別者旣信三種佛
001_0654_c_14L亦知唯識道理故知心所取一切
001_0654_c_15L境界唯是意言分別所作若離分別
001_0654_c_16L無所有故

001_0654_c_17L
二者思位思者觀諸境界唯是意言
001_0654_c_18L意言分別隨意顯現所見境界非我
001_0654_c_19L本識知此本識非法非義非所取非
001_0654_c_20L能取

001_0654_c_21L
此明思位亦有二句先明無相尋思
001_0654_c_22L後顯無生如實智初言觀者
001_0654_c_23L量觀察唯是意言者所取外境
001_0654_c_24L「句」上有「四」{甲}

001_0655_a_01L
“의·언에 따라 드러난다.”는 것은 외부경계의 상분相分은 견분見分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근본식이 아니다.”라는 것은 근본식을 떠나서 이미 외부에 보이는 경계라면 그것은 벌써 나의 근본식은 아니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말한 근본식은 제6식으로 삼유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저 제바보살提婆菩薩이 설한 게송에서는 “의식은 삼유 생사의 근본이고 모든 경계는 의식의 원인이네. 경계는 실유가 아님을 본다면 온갖 경계가 저절로 소멸되네.”27)라고 말한다.
이상은 무상의 심사관尋思觀과 여실지如實智를 함께 드러낸 것이다. 이하부터는 무생의 도리를 설명한다.

㉯ 무생의 심사관과 여실지如實智를 함께 드러냄

둘째에서 “그 근본식은 법法도 아니고 뜻(義)도 아니다.”라는 것은 능전能詮의 법도 아니고 소전所詮의 뜻도 아니라는 것이니, 명名과 의義가 서로 대응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취도 아니고 능취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라는 것은 소취의 경계가 이미 없으므로 능취의 식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능취의 뜻은 반드시 소취를 상대해야 하는데 이미 상대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생의 심사관尋思觀과 여실지如實智를 함께 드러낸 것이다.
처음의 십해28)로부터 이후 세제일법에 이르기까지 이 심사관과 여실지관을 닦는 가운데 또한 수혜관찰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사찰思察과 분별分別을 떠나 있지 못한 경지다. 그러므로 사위라고 통명한다.

(다) 수위修位를 설명함

셋째는 수위修位이다. 수행은 항상 일으키는 것(常起)이다. 그래서 처음에 일으키는 것(能起)과 일으켜지는 것(所起)의 수행은 동시이다. 먼저 가행지加行智29)로 이끌어 모든 장애(障難)를 배제하고 번뇌(蓋纏)를 벗어난다.30)

이는 수위를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또한 두 구절이 있다. 첫째는 수행의 경계(相)를 설명하고, 둘째는 수행의 인因을 드러낸다.

㉮ 수행의 경계(相)를 설명함

수행의 경계(相)는 정체지正體智31)이다.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는 것으로 출과 입이 따로 없으므로 항상 일으키는 것(常起)이라 한다.
“처음에 일으키는 것”은 지止를 능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止가 관觀을 능기하므로 다음에 “일으켜지는 것”이라고 하니, 지에 의하여 일어난 관觀이라는 것이다. 지와 관은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동시라고 한다. 경계(相)를 그치고 진여를 관찰하는 것은 반드시 동시이기 때문이다.
이는 첫째의 수행의 경계(相)를 설명한 것이다.

㉯ 수행의 인因을 드러냄

둘째로 수행의 인因을 드러낸다.

001_0655_a_01L所有故隨意顯現者似外相分
001_0655_a_02L離見故非我本識者離識已外
001_0655_a_03L見境界旣非我識故無所有此中
001_0655_a_04L言本識者謂第六識三有本故
001_0655_a_05L提婆菩薩所說頌言意識三有本
001_0655_a_06L塵是其因若見塵非有有種自然滅
001_0655_a_07L上來通顯無相尋思及如實智自下
001_0655_a_08L明其無生道理知此本識非法非義
001_0655_a_09L非能詮法非所詮義知名與義
001_0655_a_10L互爲客故非所取非能取者所取塵
001_0655_a_11L旣無能取不成故能取之義必待
001_0655_a_12L所取旣無所待卽無能待故此是
001_0655_a_13L通顯無生尋思及如實智始從十解
001_0655_a_14L已上乃至世第一法修此尋思如實
001_0655_a_15L智觀於中亦有修慧觀察而皆未
001_0655_a_16L離思察分別所以通名爲思位也

001_0655_a_17L
三者修位修者常起能起起修同時
001_0655_a_18L先以智導排諸障難出離蓋纒

001_0655_a_19L
此明修位亦有二句先明修相
001_0655_a_20L顯修因言修相者謂正體智止觀
001_0655_a_21L雙運更無出入故言常起言能起
001_0655_a_22L謂止能起能起觀故次言起者
001_0655_a_23L謂所起觀止觀不離故曰同時
001_0655_a_24L相觀如必同時故是明修相次顯

001_0655_b_01L지와 관을 함께 닦는 까닭은 먼저 가행을 말미암아 모든 장애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먼저 가행지로 이끈다.”는 것은 가행지加行智인 의意와 언言의 분별은 명칭과 언어를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먼저 가행지로 이끈다.”고 한다. 제7지 이전의 일체 계위에서는 다 가행으로 먼저 장애를 없애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를 배제한다.”는 것은 추중번뇌를 없애는 것이고, “번뇌를 벗어난다.”는 것은 현행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라) 행위行位를 설명함

넷째는 행위行位이다. 여기의 행行이란 십지행의 모든 경지를 떠나 있는 것으로, 마음에 취함과 버림이 없어서 지극히 청정하고 근기가 예리하다. 그래서 부동심의 진여이고, 결정적인 실성이며, 대반열반으로서 자성이 공적하고 광대하다.

이는 등각위이다. 여기에도 또한 두 구절이 있다. 첫째는 계위의 모습을 설명하고, 둘째는 계위의 수행을 드러낸다.

㉮ 계위의 모습을 설명함

첫째에서 “모든 유위적인 수행의 경지를 떠나 있다.”고 한 것은 수행이 십지를 초월했다는 것이다.
“마음에 취함과 버림이 없다.”는 것은 이해가 부처님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위를 등각행이라 한다.
이어서 총결하면서 “지극히 청정하고 근기가 예리하다.”고 한 것은 본각심은 인행이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계위의 수행을 드러냄

다음은 계위의 수행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부동심의 진여이고, 결정적인 실성이다.”라는 것은 이 계위에서 금강삼매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대반열반으로서 자성이 공적하고 광대하다.”는 것은 적멸의 무위로서 일상一相이고 무상無相이기 때문이다. 『본업경』에서는 “금강삼매에 들어가면 일상이고 무상이며 적멸의 무위가 되므로 무구지라 말한다.”32)고 하였다.

(마) 사위捨位를 설명함

다섯째는 사위捨位이다. 사捨는 자성의 공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정지正智는 자재하게 변역하는 것(流易)이고 대비는 진여상인데, 그 교화하는 모습(相)은 진여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삼먁삼보리에도 마음을 비워 증득조차 없다. 마음에 끝이 없어 처하는 곳을 볼 수 없는데, 이것이야말로 여래지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불지를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도 두 구절이 있다.

㉮ 사捨의 뜻을 설명함

먼저 사捨의 뜻을 설명한다.

001_0655_b_01L其因所以得此雙運修者由先加行
001_0655_b_02L排諸障故言智導者謂加行智
001_0655_b_03L言分別不離名言故名智導七地
001_0655_b_04L已還一切地中皆有加行在先伏
001_0655_b_05L障故排諸障難者損伏麁重故
001_0655_b_06L離盖纒者不起現纒故

001_0655_b_07L
四者行位行者離諸行地心無取捨
001_0655_b_08L極淨根利不動心如決定實性大般
001_0655_b_09L涅槃唯性空大

001_0655_b_10L
是等覺位亦有二句先明位狀
001_0655_b_11L顯其行初中言離諸行地者行過十
001_0655_b_12L地故心無取捨者解與佛同故
001_0655_b_13L說此位名等覺行次摠結言極淨
001_0655_b_14L根利者謂本覺心顯成滿因故
001_0655_b_15L明行中言不動心如決定實性者
001_0655_b_16L此位得入金剛三昧故大般涅槃唯
001_0655_b_17L性空大者寂滅無爲一相無相故
001_0655_b_18L如本業經言入金剛三昧一相無相
001_0655_b_19L寂滅無爲名無垢地故

001_0655_b_20L
五者捨位捨者不住性空正智流易
001_0655_b_21L大悲如相相不住如三藐三菩提
001_0655_b_22L心不證心無邊際不見處所是至如
001_0655_b_23L

001_0655_b_24L
此明佛地亦有二句先明捨義

001_0655_c_01L곧 세 가지 뜻으로 사捨의 모습을 드러낸다.
“자성의 공적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정지는 자재하게 변역하는 것”은 열반의 회신멸지灰身滅智에도 집착이 없지만 정지正智는 불멸하므로 여량지如量智가 지속적으로 유출되어 중생의 근기를 따라 변역하면서 불사를 짓기 때문이다.
“대비는 진여상인데 그 교화의 모습은 진여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연대비無緣大悲는 인과 법의 차별상에 집착이 없으므로 ‘진여상’이라 하고, 항상 육도를 오가면서 일찍이 쉰 적이 없으므로 ‘그 교화의 모습은 진여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삼먁”은 바르다(正)는 것이고, ‘삼’은 평등하다(等)는 것이며, ‘보리’는 깨침(覺)이다. 통틀어 말하면 정등각正等覺이니, 원만한 무상보리이다. 그 가운데서도 마음이 비어 증득했다는 것에도 집착이 없다.
이 세 가지 뜻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열반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사捨이고, 뒤의 한 가지는 보리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사捨이다.

㉯ 계위의 모습을 설명함

다음으로 계위의 모습을 설명한다.
“마음에 끝이 없다.”는 것은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면 심체가 주변周遍하여 시방에 두루하므로 변邊이 없고, 삼세에 두루하므로 제際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삼세에 두루하지만 고금의 차이가 없고, 비록 시방에 두루하지만 피와 차의 처소가 없다. 이런 까닭에 “처하는 곳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극과極果(佛地)는 다른 경지와 똑같지 않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여래지에 이른 것이다.”라고 한다.
이상으로 다섯 가지 계위에 대하여 개별적인 설명을 마친다.

다) 총론적으로 설명함

이하는 셋째로 총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곧바로 본각의 도리를 따라야 함을 설명하고, 둘째는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낸다.

(가) 곧바로 본각의 도리를 따라야 함을 설명함

선남자여, 다섯 가지 계위는 일본각으로서 본각의 이익을 통해 들어간다. 그러므로 만약 중생을 교화하려면 그 본각의 도리를 따라야 한다.”

이는 첫째이다. 다섯 가지 계위의 모든 수행은 본각을 떠나 있지 않아서 모두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성취되지 않음이 없다. 수행이 성취되는 경우는 이전 단계에서 이후 단계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들어간다.”고 한다. “들어간다.”는 것은 자리이고, “교화한다.”는 것은 이타이다. 이와 같은 자리행과 이타행은 모두 본각의 도리에서 비롯된다.


001_0655_c_01L以三義顯其捨相不住性空正智流
001_0655_c_02L易者不住涅槃灰身滅智智不滅
001_0655_c_03L量智續流隨根變易作佛事故
001_0655_c_04L大悲如相相不住如者無緣大悲
001_0655_c_05L取人法差別之相故曰如相恒涉六
001_0655_c_06L未曾停息故言相不住如三藐
001_0655_c_07L曰正三者云等菩提言覺摠而言
001_0655_c_08L謂正等覺卽是圓滿無上菩提
001_0655_c_09L於中無住虛心不證此三義中
001_0655_c_10L二不住涅槃故捨後一不取菩提
001_0655_c_11L故捨次明位狀心無邊際者歸一
001_0655_c_12L心源心軆周遍遍十方故無邊
001_0655_c_13L三世故無際雖周三世而無古今
001_0655_c_14L之殊雖遍十方而無此彼之處以之
001_0655_c_15L故言不見處所如是極果不與他
001_0655_c_16L唯乘如者之所來至以之故言
001_0655_c_17L是至如來上來別明五等位竟

001_0655_c_18L
善男子五位一覺從本利入若化衆
001_0655_c_19L從其本處

001_0655_c_20L
此下第二 [101] 摠明於中有二一者直明
001_0655_c_21L從本二者往復重顯此是初門
001_0655_c_22L位諸行不離本覺莫不皆從本利而
001_0655_c_23L成行之時從前入後故名爲入
001_0655_c_24L入者自利化者利他如是二行

001_0656_a_01L
(나)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냄

사리불이 여쭈었다.
“그 본각의 도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본각의 도리란 없다. 본각의 도리가 없는 공제에서 실제에 들어가 보리를 일으켜야 불도(聖道)를 원만하게 성취한다. 선남자여, 왜냐하면 그것은 마치 손으로 저 허공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은 것이 없지만 잡지 못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둘째로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내는 것이다.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고, 둘째는 비유이다.

(㉮ 질문)

㉯ 답변

a. 법

첫째의 법에는 네 구절이 있다. 앞의 두 구절은 본각의 도리(處)에 처소(處)가 없음을 설명하고, 뒤의 두 구절은 인과因果의 인因으로부터 과果가 성취됨을 드러낸다.
“왜냐하면”은 의심을 일으킨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인데, 그 이유는 “만약 본각의 도리가 없다면 마땅히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만약 들어갈 수 있다면 본각의 도리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b. 비유

이와 같은 의심을 없애려는 까닭에 비유를 인용하여 해석한다.
“마치 손으로 저 허공을 잡는 것과 같다.”라는 것에서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들어가는 주체의 수행을 비유한 것이고, ‘허공’은 들어가게 되는 대상인 본각을 비유한 것이다.
“잡은 것이 없다.”는 것은 허공은 움켜잡을 수 있는 형체가 없는 것이고, “잡지 못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움켜잡은 손안에 허공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본각의 이익도 또한 그와 같다. 곧 본래 본각의 도리라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잡은 것도 없고, 본각의 도리가 본래 없다는 그것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잡지 못한 것도 없다.

⑤ 대반야는 원융하고 무이하여 모든 인연을 단절해 있음을 설명함

이것은 다섯째로 대반야는 원융하고 무이함을 설명하는 것이다.33)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리불(身子)이 우러러 묻고, 둘째는 여래께서 설명해 준다.


001_0656_a_01L從本處也

001_0656_a_02L
舍利弗言云何從其本處佛言本來
001_0656_a_03L無本處於無處空際入實發菩提
001_0656_a_04L滿成聖道何以故善男子如手執彼
001_0656_a_05L不得非不得

001_0656_a_06L
此是重顯答中有二先法後喩
001_0656_a_07L中四句1) [37] 明本處無處後二
001_0656_a_08L顯從成因果何以故者擧疑發
001_0656_a_09L何者若本無處應無得入若得
001_0656_a_10L入者非無本處爲遣是疑故引喩
001_0656_a_11L手執彼空者手執喩能入之行
001_0656_a_12L虛空喩所入之本不得者虛空無
001_0656_a_13L形可握故非不得者握內不無虛空
001_0656_a_14L本利亦爾本來無本處性故不
001_0656_a_15L可得無本之本不無故非不可得
001_0656_a_16L

001_0656_a_17L
舍利弗言如尊 [102] 所說在事之先取以
001_0656_a_18L本利是念寂滅寂滅是如摠持諸德
001_0656_a_19L該羅萬法圓融不二不可思議當知
001_0656_a_20L是法卽是摩訶般若波羅2) [38] 是大神
001_0656_a_21L是大明呪是無上明一本無
明字
[103] 是無
001_0656_a_22L等等呪

001_0656_a_23L
此下第五明大般若圓融無二
001_0656_a_24L中有二一者身子仰諮二者如來

001_0656_b_01L
가. 사리불이 우러러 물음

사리불이 여쭈었다.
“존자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화하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는 생각도 적멸하고, 적멸도 곧 여여합니다. 그래서 모든 공덕을 두루 지니고 모든 법을 빠짐없이 담고 있어서 원융하고 불이하여 불가사의합니다. 그런 법이야말로 곧 마하반야바라밀로서 대신주이고 대명주이며 무상명주이고 무등등주34)인 줄을 반드시 알 것입니다.”

첫째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본각의 이익이 원융한 줄을 이해하고, 둘째는 그 본각의 이익이 곧 반야바라밀임을 드러낸다.

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본각의 이익이 원융한 줄을 이해함

“교화하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합니다.”라는 것은 사리불이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것이다. 무릇 설법하여 교화하려 할 때는 매번 먼저 그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한다.35)

나) 본각의 이익이 곧 반야바라밀임을 드러냄

그러나 생사의 생각36)은 본래 적멸하고, 그와 같은 적멸은 곧 진여의 도리이며, 진여의 도리 가운데는 본각과 시각의 모든 공덕이 총섭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생사의 모든 법까지도 빠짐없이 담고 있어서 원융하고 불이이다. 이런 까닭에 심심하고 불가사의하다. 그 가운데 비록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을지라도 그 자체는 곧 본각과 시각이 평등하고 무이하다. 그러므로 “그런 법이야말로 곧 마하반야바라밀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이 반야는 ‘본각일심의 근원에 도달하고 본래자성에 사무치는 것(窮源盡性)’이므로, 바라밀 곧 완성이다.
바라밀을 분별하면 두 가지 바라밀(倒)이 있다. 등각위에서는 만행의 피안에 도달하는 바라밀이고, 묘각위에서는 만덕의 피안에 도달하는 바라밀이다.
등각위에도 다시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대신통력大神通力으로 삼마三魔(五陰魔·煩惱魔·天魔)의 원한을 다스리는 것이니, 경문의 “대신주”가 그것이다. 둘째는 대명조大明照로 사안四眼37)의 경계를 두루 관찰하는 것이니, 경문의 “대명주”가 그것이다.
묘각위에도 또한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사지四智38)를 갖추고 오안五眼39)이 원만하여 법계를 모두 비추어 더 이상 없는 것이니, 경문의 “무상명주”가 그것이다. 둘째는 삼신三身으로 드러낸 무상보리는 더 이상 같은 것(與等)이 없어 제불과 차별이 없으니, 경문의 “무등등주”가 그것이다.
주咒는 기원하는(禱) 것이다. 저 세간의 신주神咒에는 대위력이 있어서 주력을 외워 신에게 기원하면 모든 복을 다 초래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모든 재앙을 다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이 마하반야바라밀도 또한 그와 같아서 앞의 사덕四德(等覺位의 두 가지 덕과 妙覺位의 두 가지 덕)을 갖추고 대신통력이 있어서 안으로는 곧 모든 덕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밖으로는 모든 근심을 떠나 있지 않음이 없다.

001_0656_b_01L述成初中亦二先領佛說本利圓融
001_0656_b_02L後顯卽是大般若度言在事之先取
001_0656_b_03L以本利者是領佛言凡欲發言作佛
001_0656_b_04L事時每先取其本覺之利是生死念
001_0656_b_05L本來寂滅如是寂滅卽是如理
001_0656_b_06L中摠攝本始諸德亦乃該羅生死萬
001_0656_b_07L圓融不二是故甚深不可思議
001_0656_b_08L此中雖具無量功德其體唯是本
001_0656_b_09L覺始覺平等無二故言卽是摩訶般
001_0656_b_10L如是般若窮源盡性故言波羅
001_0656_b_11L [39] 別而言之有二種到在等覺位
001_0656_b_12L到萬行之彼岸故在妙覺時到萬德
001_0656_b_13L之彼岸故在等覺位略有二到
001_0656_b_14L者有大神力降伏三魔之怨如經是
001_0656_b_15L大神呪故二者有大明照遍察四眼
001_0656_b_16L之境如經是大明呪故妙覺位中
001_0656_b_17L亦有二到一者四智具足五眼圓滿
001_0656_b_18L照窮法界更無可加如經是無上明
001_0656_b_19L呪故二者三身所顯無上菩提
001_0656_b_20L無與等諸佛無差如經是無等等呪
001_0656_b_21L呪者禱也如世神呪有大威力
001_0656_b_22L誦呪禱神福無不招禍無不却
001_0656_b_23L此摩訶般若波羅蜜亦復如是具前
001_0656_b_24L四德有大神力內卽無德不備

001_0656_c_01L그러므로 만약 지성심으로 이 명구를 외우고 우러러 기원하면 모든 불·보살·신인이 추구하는 소원을 따라 모두 해결해 준다. 이런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주咒라 한다. 저 도리천의 제석천왕이 이 명구를 외워서 아수라의 군대를 물리친 것과 같다. 여기에서도 그와 상응되는 점을 설한 것이다.

나. 여래께서 설명해 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40) 진여는 공성이다. 자성이 공한 지혜의 불은 모든 번뇌를 태우고 소멸시켜 평등한 가운데서도 가장 평등한데 이것이 등각의 삼지이다. 그리고 묘각의 삼신은 구식 가운데서 훤칠하고 명정하여 아무런 그림자가 없다.

이하는 둘째로 여래께서 설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인 서술이고, 둘째는 개별적인 서술이며, 셋째는 총체적인 서술로 결론을 맺는 것이다.

가) 총체적인 서술

첫째로 총체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그래, 그렇다.”이다.

나) 개별적인 서술

둘째로 개별적으로 서술하는 것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라밀의 인이 원만하다는 뜻을 서술하고, 둘째는 바라밀의 과가 원만하다는 뜻을 서술한다.

(가) 바라밀의 인이 원만하다는 뜻을 서술함

첫째에서는 곧 등각의 삼지를 드러내니, 등각의 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백겁위이고, 둘째는 천겁위이며, 셋째는 만겁위이다.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여, 마니영락이라는 글자는 등각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명칭은 금강혜보살이니, 정적정頂寂定에 주하면서 대원력으로 백겁의 수명 동안 머물면서 천 가지 삼매를 닦아 이미 금강삼매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일체법성과 이제와 일제와 일합상과 동일하다. 다시 천겁의 수명 동안 머물면서 부처님의 위의를 익혀서 내지 부처님 수행의 도리에 들어가 부처님 도량에 앉아서 삼마三魔를 초월한다. 다시 만겁의 수명 동안 머물면서 화현으로 성불하여 내지 옛적의 모든 부처님과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항상 중도를 실천한다. 이에 대락의 무위로서 생멸의 유위와 다르다.41)
지금 이 경문에서 “진여는 공성이다.”라고 한 것은 곧 첫째의 백겁위로서 일합상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001_0656_c_01L卽無患不離若至誠心誦此名句
001_0656_c_02L仰禱諸佛菩薩神人隨所求願無不
001_0656_c_03L成辦由是義故說名爲呪如天帝
001_0656_c_04L誦此名句却修羅軍之事此中
001_0656_c_05L應說

001_0656_c_06L
佛言如是如是眞如空性性空智火
001_0656_c_07L燒滅諸結平等平等等覺三地妙覺
001_0656_c_08L三身於九識中皎然明淨無有諸影

001_0656_c_09L
此下如來述成於中有三先摠述
001_0656_c_10L次別述後卽摠成摠述成者如是
001_0656_c_11L如是故別中亦二先述到因滿義
001_0656_c_12L後述到果圓義初中卽顯等覺三地
001_0656_c_13L何等名爲等覺三地一者百劫位
001_0656_c_14L者千劫位三者萬劫位如本業經言
001_0656_c_15L佛子摩尼瓔珞字者等覺性中一人
001_0656_c_16L其名金剛慧菩薩住頂寂定以大願
001_0656_c_17L住壽百劫修千三昧已入金剛
001_0656_c_18L三昧同一切法性二諦一諦一合
001_0656_c_19L復住壽千劫學佛威儀乃至入
001_0656_c_20L佛行處坐佛道場超度三魔復住
001_0656_c_21L壽萬劫化現成佛乃至現同古昔諸
001_0656_c_22L常行中道大樂無爲而生滅爲異
001_0656_c_23L今此文言眞如空性者卽是第
001_0656_c_24L「二」作「一」{甲}「蜜」作「密」次同{甲}

001_0657_a_01L일체 유무의 제법과 동일하다는 것은 곧 이제법을 일제와 동일하게 융합했는데 그 일제는 곧 일합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진여는 공성이다.”라고 하였다.
“자성이 공한 지혜의 불은 모든 번뇌를 태우고 소멸시킨다.”는 것은 곧 둘째의 천겁위로서 삼마三魔를 초월하는 것이다.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것은 번뇌마를 소멸하는 것이니, 번뇌를 소멸한 까닭에 오음마五陰魔에 계박되지 않는다. 이처럼 번뇌마와 오음마를 소멸한 까닭에 천마가 스스로 굴복한다. 이에 단지 불가사의한 변역사마變易死魔(煩惱障)만 남아 있을 뿐이다.
“평등한 가운데서도 가장 평등하다.”는 것은 곧 셋째의 만겁위로서 항상 중도를 실천하여 양변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평등한 가운데’라 하고, 항상 실천을 드러내기 때문에 거듭하여 ‘가장 평등하다.’고 한다.
“이것이 등각의 삼지이다.”라는 것은 앞의 백겁위·천겁위·만겁위의 삼지를 총합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백겁위와 천겁위는 ‘대신주’를 서술한 것이고, 만겁위는 ‘대명주’를 서술한 것이다.

(나) 바라밀의 과가 원만하다는 뜻을 서술함

“묘각” 이하는 원만한 과果에 도달한 것을 설명한다.
“삼신”은 첫째는 법신이고, 둘째는 응신이며, 셋째는 화신이다.
일체제불의 삼신은 깨침이 동일하므로 이에 “무등등주”라 서술한다.
“구식 가운데서 훤칠하고 명정하여 모든 그림자가 없다.”는 것은 곧 “무상명주”의 구절을 서술한 것이다. 앞의 등각위에서는 아직 생멸이 남아 있어서 마음의 근원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8식에 해당하지만, 지금 묘각에 도달해서는 영원히 생멸을 떠나 있어 본각인 일심의 근원을 궁구하기 때문에 제9식의 명정한 경지에 들어간다. 또한 앞의 인위에서는 반연攀緣을 따르는 뜻이 있는 까닭에 마음에 영상의 모습이 나타나지만, 지금은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 저 마음의 본질을 체득한 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그림자와 같은 일체의 모습이 없다. 이런 까닭에 “모든 그림자가 없다.”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여, 수정의 영락은 안팎으로 명철하다. 이처럼 묘각은 항상 담연하고 명정하므로 일체지지라 말한다. 또한 항상 중도에 있으면서 일체법에서 사마四魔를 초월하고,

001_0657_a_01L一同一合相謂同一切有無諸法
001_0657_a_02L二諦法同融一諦一諦卽是一合相
001_0657_a_03L如是名爲眞如空性也性空智火
001_0657_a_04L燒滅諸結者卽是第二超度三魔
001_0657_a_05L諸結者滅煩惱魔滅煩惱故陰魔不
001_0657_a_06L滅二魔故天魔自伏但有不思
001_0657_a_07L議變易死魔耳平等平等者卽是第
001_0657_a_08L三常行中道不墮二邊故曰平等
001_0657_a_09L爲顯常行故重言平等等覺三地者
001_0657_a_10L摠前三地此中前二述大神呪
001_0657_a_11L第三地述大明呪也妙覺已下
001_0657_a_12L到圓果言三身者一名法身二者
001_0657_a_13L應身三者化身一切諸佛三身道
001_0657_a_14L是述無等等呪句也於九識中
001_0657_a_15L皎然明淨無有諸影者是述無上明
001_0657_a_16L呪之句前等覺位猶有生滅未盡
001_0657_a_17L心源故在八識今到妙覺永離生
001_0657_a_18L窮歸本覺一心之源故入第九識
001_0657_a_19L中明淨又前因位有仰緣義所以
001_0657_a_20L其心影像相現今歸心源體彼本
001_0657_a_21L由是諸影一切相盡以之故
001_0657_a_22L言無有諸影如本業經言佛子
001_0657_a_23L精瓔珞內外明徹妙覺常住湛然
001_0657_a_24L明淨名一切智地常處中道一切

001_0657_b_01L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어서 일체상이 없으며, 대각을 온전히 이해하고, 몸소 몸과 마음을 변화시켜 법성신과 응화법신으로서 항상 인연 있는 중생을 교화한다.42)

생각해 보면 『본업경』에서 내세운 이신二身은 첫째는 법성신이고, 둘째는 응화법신이다. 이것은 그 밖의 응신과 법신을 합하여 응화법신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 이 『금강삼매경』에서 응화법신을 전개하여 응신과 화신으로 간주하였으므로 삼신이라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신과 이신은 평등하고 평등하다. 이상은 도피안의 뜻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다) 총체적인 서술로 결론을 맺음

선남자여, 진성법은 인도 아니고 연도 아니니 지혜가 저절로 작용하기 때문이고, 진성법은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니니, 작용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며, 진성법은 유의 뜻도 아니고 무의 뜻도 아니니 공상空相도 역시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여, 그러므로 만약 중생을 교화하여 저 중생으로 하여금 이 진성의 뜻에 관찰하여 들어가도록 한다면 진성의 뜻에 들어간 자는 곧 여래를 볼 것이다.”

이는 원융하고 불이임을 총체적인 서술로 결론을 맺는 것이다. 위에서는 얕은 곳으로부터 깊은 곳에 들어가는 문에 의거하여 인의 원만과 과의 원만에 차별이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만약 일법의 불이문에 의거하면 곧 인과 과가 다르지 않고 마음과 경계에 차별이 없다.
인과 과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인도 아니다.”라고 하고, 마음과 경계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연도 아니다.”라고 한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과·마음·경계는 오직 원만한 지혜가 저절로 작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저절로 작용하는데, 어찌 인이 있고 연이 있겠는가. 또한 그 지혜의 작용이 등각위에 있으면 조적혜照寂慧라 말하는데, 그것은 생멸의 움직이는 모습을 아직 떠나 있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묘각위에 이르면 적조혜寂照慧라 말하는데, 그것은 이미 제9식의 구경정究竟靜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지금 그것을 불이문에 의거하여 보면 먼저 움직임의 상태였다가 나중에 고요의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요와 움직임의 작용은 그 작용하는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뜻에 의거해서 자성이 공하므로 무無이고 그 결과 움직임과 고요도 무無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진성법은 유의 뜻도 아니고 무의 뜻도 아니다.”라고 한다. 유有가 아니라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001_0657_b_01L法上越過四魔非有非無一切相
001_0657_b_02L頓解大覺窮化體神二身常住
001_0657_b_03L爲化有緣案云彼經立二身者
001_0657_b_04L法性身二應化法身合餘二身
001_0657_b_05L一身故今此經中開此爲二故說
001_0657_b_06L三身三之與二平等平等上來別
001_0657_b_07L述到彼岸義

001_0657_b_08L
善男子是法非因非緣智自用故
001_0657_b_09L動非靜用性空故義非有無義非有無一本
作非有非無
[104]
001_0657_b_10L空相空故善男子若化衆生令彼衆
001_0657_b_11L觀入是義入是義者是見如來

001_0657_b_12L
此是摠成圓融不二上約從淺入深
001_0657_b_13L之門以顯因滿果圓差別若就一法
001_0657_b_14L不二之門卽因果不二心境無別
001_0657_b_15L因果不二故言非因心境無別
001_0657_b_16L曰非緣所以然者如前所說因果
001_0657_b_17L心境者唯一圓智之自用故旣唯自
001_0657_b_18L何因何緣也又此智用在等覺
001_0657_b_19L名照寂慧未離生滅之動相故
001_0657_b_20L至妙覺位名寂照慧已歸第九識
001_0657_b_21L究竟靜故然今就其不二之門非先
001_0657_b_22L有動非後有寂寂動之用用性空
001_0657_b_23L若就此義性空是無無動靜故
001_0657_b_24L是亦不然故言非有非無非有可爾

001_0657_c_01L무無가 아니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상도 역시 공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원융하고 불이임을 서술하여 결론 맺는다.
“그러므로 만약 중생을 교화하여” 이하는 진성의 뜻에 들어갈 것을 권유한 것이다.

⑥ 대선정은 모든 명칭과 법수를 초월해 있음을 설명함

사리불이 여쭈었다.
“여래의 뜻43)을 관찰해 보면 모든 번뇌에 머물러 있지 않고, 반드시 사선四禪44)을 떠나 있으며, 유정처를 초월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일체법의 명칭과 법수와 네 단계의 선정(四禪)45)까지도 또한 그렇다.46) 만약 여래를 보자면 여래의 마음은 자재하고, 항상 멸진정처에 있으며, 나감(出)도 없고 또한 들어감(入)도 없는데 그것은 내·외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는 크게 분류한 가운데 여섯째로 대선정은 모든 명칭과 법수를 초월해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첫째에서 “모든 번뇌”라고 한 것은 삼유三有에 왕환往還하고 유전流轉하느라고 휴식이 없기 때문이다.
“유정처”는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니, 삼유의 정상頂上이기 때문이다.

나. 답변

둘째의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자세하게 설명한다.

가) 간략하게 설명함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선은 명칭과 법수를 떠나 있지 못함을 설명하고, 둘째는 출세간선은 그 명칭과 법수를 초월해 있음을 드러낸다.

(가) 세간선은 명칭과 법수를 떠나 있지 못함을 설명함

“만약 여래를 보자면”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여래의 관찰경지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래의 마음은 자재하다.”는 것은 여래의 마음은 모든 계박을 떠나 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나) 출세간선은 그 명칭과 법수를 초월해 있음을 드러냄

“항상 멸진정처에 있다.”는 것은 심心과 심수법心數法이 생기하지 않는 것이다.
“나감도 없고 또한 들어감도 없다.”는 것은 마음의 본체는 진여도리로서 기동과 소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감도 없고 들어감도 없는 경지를 터득하는 까닭은 내심과 외경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경문을 설명하는 것을 마친다.

나) 자세하게 설명함

선남자여, 저 모든 선관은 다 본래 분별상의 공정(想空定)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진여는 그와 같은 분별상의 공정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로써 여실하게 관찰하지만 관찰하는 진여의 상도 없고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이야말로 곧 진여의 뜻이다. 그러나 저 분별상의 선정(想禪定)은 곧 동動이지 선禪은 아니다. 왜냐하면 선의 자성은 모든 동動을 떠나 있어서

001_0657_c_01L云何非無者空相亦空故如是述成
001_0657_c_02L圓融不二若化已下勸入是義

001_0657_c_03L
舍利弗言如來義觀不住諸流應離
001_0657_c_04L四禪而超有頂佛言如是何以故
001_0657_c_05L切法名數四禪亦如是若見如來者
001_0657_c_06L如來心自在常在滅盡處不出亦不入
001_0657_c_07L內外平等故

001_0657_c_08L
此下大分第六明大禪定超諸名數
001_0657_c_09L於中有二先問後答問中言諸流者
001_0657_c_10L所謂三有往還流轉無休息故
001_0657_c_11L頂者謂非想處三有頂故答中有
001_0657_c_12L摠許別成別中亦二略明廣釋
001_0657_c_13L略中二句先明世間禪不離名數
001_0657_c_14L後顯出世禪超彼名數若見如來者
001_0657_c_15L如前所說入如來觀故如來心自在
001_0657_c_16L觀如來心離諸縛故常在滅盡處者
001_0657_c_17L心心數法不生起故不出亦不入者
001_0657_c_18L心體如理無起滅故所以能得不出
001_0657_c_19L入者內心外境平等觀故略明文
001_0657_c_20L

001_0657_c_21L
善男子如彼諸禪觀皆爲故想定一本
作皆
001_0657_c_22L爲想
空定
[105] 是如非復彼何以故以如觀如實
001_0657_c_23L不見觀如相諸相 [106] 寂滅寂滅卽如義
001_0657_c_24L如彼想禪定是動非是禪何以故

001_0658_a_01L염染도 아니고 소염所染도 아니며 법法도 아니고 영影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을 떠나 있는 것이야말로 본의本義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47)
선남자여, 이와 같은 선정을 진여선이라 한다.”

이는 둘째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형상에 대하여 형상을 떠나 있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움직임(動)에 대하여 움직임을 떠나 있음을 드러내며, 셋째는 진여의 뜻을 결론짓고, 넷째는 진여의 명칭을 결론짓는다.

(가) 형상에 대하여 형상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첫째에서는 먼저 모든 선이 형상에 집착함을 언급한다.
“저 모든 선관”은 세간의 팔선이다.
“본래 분별상의 공정일 뿐이다.”라는 것은 옛적의 집착을 떠나지 못하여 무시이래로 망상으로 모든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진여가 형상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이 진여는 그와 같은 분별상의 공정이 아니다.”라는 것은 여래가 관찰한 경지에 들어가 누체와 객체가 평등하므로 진여라 하기 때문이다.
“진여로써 여실하게 관찰한다.”는 것은 평등지平等智로써 여실하게 통달하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진여의 상이 없다.”는 것은 능관의 지智와 소관의 진여에 대한 차별상을 보지 않는 평등일미이다.
이미 능과 소를 잊어 견분과 상분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적멸하여 변이가 없으므로 “적멸이야말로 곧 진여의 뜻이다.”라고 말한다.

(나) 움직임(動)에 대하여 움직임을 떠나 있음을 드러냄

“그러나 저 분별상의 선정은” 이하는 움직임(動)에 대하여 움직임을 떠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먼저 그 움직임을 언급한 것은, 세간선은 형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일으키므로 동념動念인데, 동념은 적정이 아니어서 진여선眞如禪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하는 진선眞禪이 모든 움직이는 모습을 떠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염染도 아니다.”라는 것은 오염시키는 주체가 아니라는 것이니, 동념動念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염所染도 아니다.”라는 것은 움직임(動)에 의해 오염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니, 본래적정하기 때문이다.
“법도 아니다.”라는 것은 연緣의 주체인 심법이 없는 것이다.
“영도 아니다.”라는 것은 드러나는 영상이 없는 것이다. 이런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모든 움직임을 떠나 있다.

(다) 진여의 뜻을 결론지음

“모든 분별을 떠나 있는 것이야말로 본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셋째로 진여의 뜻을 결론짓는 것이다. 곧 분별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형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의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진여는 움직임의 뜻을 떠나 있음을 결론지은 것이다.


001_0658_a_01L性離諸動非染非所染非法非影
001_0658_a_02L諸分別本義 [107] 義故善男子如是觀
001_0658_a_03L乃名爲禪

001_0658_a_04L
此是第二廣釋於中有四一者對
001_0658_a_05L相以明離相二者對動以顯離動
001_0658_a_06L三者結義四者結名初中先擧諸禪
001_0658_a_07L取相諸禪觀者世間八禪言故想
001_0658_a_08L不離古執無始妄想取諸相故
001_0658_a_09L下顯離相是如非復彼者入如來觀
001_0658_a_10L能所平等名爲如故以如觀如實者
001_0658_a_11L平等之智達如實故不見觀如相者
001_0658_a_12L不見能觀之智所觀之如差別之相
001_0658_a_13L平等一味故旣忘能所見相不起
001_0658_a_14L故言諸相已寂滅寂滅無異故卽是
001_0658_a_15L如義也如彼已下對動顯離動先擧
001_0658_a_16L其動謂世間禪取相心起卽是動
001_0658_a_17L動念非靜故非眞禪也下顯眞
001_0658_a_18L離諸動相言非染者謂非能染
001_0658_a_19L非動念故非所染者非動所染
001_0658_a_20L來靜故言非法者非能緣心法故
001_0658_a_21L非影者非所現影像故由是義故
001_0658_a_22L諸動也離諸分別本義義故者第三
001_0658_a_23L結義離分別者結離相義由離分
001_0658_a_24L別不取相故本義義者結離動義

001_0658_b_01L
(라) 진여의 명칭을 결론지음

“이와 같은 선정을 진여선이라 한다.”는 것은 넷째로 진여의 명칭을 결론짓는 것이다. 형상을 떠나 있고 움직임을 떠나 있으므로 선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선은 정려靜慮48)를 가리킨다. 저 세간정을 선이라 하는 것은 곧 임시적으로 그렇게 부를 뿐이지 진여선眞如禪은 아니다.
이 「진성공품」을 크게 나누면 두 부분이다. 그 가운데 첫째로 이근자를 위하여 많은 경문으로 자세하게 설하는 여섯 부분에 대해서는 이상으로 마친다.49)

(2) 둔근자鈍根者를 위하여 작은 경문으로 간략하게 요약함

이하는 둘째로 둔근자를 위하여 작은 경문(少文)으로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이다.50) 그러나 이근과 둔근 및 자세한 설명과 간략한 설명에도 두 가지 문이 있다. 만약 탐구하고 이해하는 측면으로 논하자면 이근자에게는 간략하게 설하고 둔근자에게는 자세하게 설하니, 이근자는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기 때문이고 둔근자는 열 가지를 들어야 비로소 열 가지를 알기 때문이다. 만약 언설로 이해하는 측면으로 든다면 이근자에게는 자세하게 설하고 둔근자에게는 간략하게 설하니, 이근자는 많이 들으면 들은 만큼 많이 이해하지만 둔근자는 적은 부분을 외워서 총괄적으로 수지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문의 뜻은 후자에 의거한 것이다.
경문에는 다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하고, 둘째는 답변하며, 셋째는 청하고, 넷째는 설명해 주며, 다섯째는 대중이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는다.

① 질문

사리불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께서는 항상 진여실상으로 중생을 교화하십니다. 이와 같은 실상의 뜻은 여러 경문에 자세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근중생은 가히 닦을 수 있겠지만 둔근중생은 그런 생각을 하는(措意)51) 것이 어렵습니다. 저 둔근중생을 그 실상의 도리에 들도록 하려면 어떤 방편이 필요합니까?”

이는 첫째에 해당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서 설명한 것을 이해하고, 둘째는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한다(措)”는 것은 남겨둔다(存)의 뜻이다. 곧 많은 경문과 넓은 뜻에 대하여 둔근자는 재능이 모자라므로 거기에 대한 생각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②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둔근자에게 하나의 사구게를 수지하도록 하면 곧 실제에 들어간다. 왜냐하면 일체의 불법이 하나의 게송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둘째 답변이다. 여래께서는 변재가 무애하고 자재하기 때문에 한 게송을 설하여 모든 불법을 섭수한다. 불법의 요체는 바로 이 사구게에 들어 있다.

001_0658_b_01L由本來靜不起動故如是觀定乃名
001_0658_b_02L爲禪者第四結名離相離動乃得
001_0658_b_03L禪名禪是靜慮之稱故彼世間定
001_0658_b_04L名爲禪者是假號禪非眞禪故
001_0658_b_05L一品內有二分中爲利根者多文
001_0658_b_06L廣說六分之文竟在於前

001_0658_b_07L
舍利弗言不可思議如來常以如實
001_0658_b_08L而化衆生如是實義多文廣義利根
001_0658_b_09L衆生乃可修之鈍根衆生難以措意
001_0658_b_10L云何方便令彼鈍根得入是諦

001_0658_b_11L
此下第二爲鈍根者少文略攝然利
001_0658_b_12L鈍廣略有二種門若論探解利略
001_0658_b_13L鈍廣利者聞一以知十故鈍者聞
001_0658_b_14L十方解十故若齊言解利廣鈍略
001_0658_b_15L利者多聞而多解故鈍者誦少而
001_0658_b_16L摠持故今此文意約此後門文中
001_0658_b_17L有五一問二答三請四說五者大
001_0658_b_18L衆聞說得益此卽初文於中有二
001_0658_b_19L領前說後問所疑 [40] 者存意多文
001_0658_b_20L廣義鈍根狹才難以存意

001_0658_b_21L
佛言令彼鈍根受持一四句偈卽入
001_0658_b_22L實諦一切佛法攝在一一本
作四
[108] 偈中

001_0658_b_23L
此是第二答如來辯才無㝵自在
001_0658_b_24L說一偈攝諸佛法佛法之要在此

001_0658_c_01L그래서 둔근자에게 한 게송을 송지하여 항상 사유하도록 하면 이에 널리 일체의 불법을 알게 된다. 이것을 여래의 선교방편이라 말한다.

③ 청함

사리불이 여쭈었다.
“그 하나의 사구게란 무엇입니까? 바라건대 저희에게 그것을 설해 주십시오.”

이것은 셋째로 청하는 대목이다.

④ 설명함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因緣所生義    인연으로 발생한다는 말의 뜻은
是義滅非生    소멸이란 뜻이지 발생은 아니다
滅諸生滅義    일체의 생멸이 소멸한다는 뜻은
是義生非滅    발생이란 뜻이지 소멸은 아니다

이는 넷째로 설명하는 것이다. 이 사구게의 뜻에는 개별적인 것과 총체적인 것이 있다. 개별적인 것은 곧 두 가지 문52)의 뜻을 설명하고, 총체적인 것은 일심법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일심과 이문 속에 일체의 불법이 포섭되지 않음이 없다.

가. 개별적으로 두 가지 문의 뜻을 설명함

이 게송의 뜻은 어떤가.
앞의 두 구절은 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아 평등의 뜻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두 구절은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아 차별문을 드러낸 것이다. 전체적으로 말하면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하나를 고수하는 것도 아니다. 둘이 아님을 말미암은 까닭에 곧 일심이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들어 둘로 삼는다. 이와 같은 경우를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 한다. 게송의 대의는 이와 같다.

나. 총체적으로 일심법을 드러냄

다음으로 경문을 해석한다.
“인연으로 발생한다는 말의 뜻은”이란 일체 세속제의 모든 법을 언급한 것이다.
“소멸이란 뜻이지”는 세속제를 융합하여 진제로 삼는 것이니, 발생한다는 말의 뜻도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다.
“발생은 아니다.”라는 것은 그 발생의 뜻이 곧 소멸인 연유를 드러낸 것이다. 그 발생의 뜻은 곧 발생이 아님을 말미암은 까닭에 그 발생을 추구해도 곧 성취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발생의 뜻은 곧 적멸이다.
“일체의 생멸이 소멸한다는 뜻은”이란 진제의 적멸법을 언급한 것이다.
“발생이란 뜻이지”는 진제를 융합하여 세속제로 삼은 것이니, 적멸법은 연으로부터 생기하기 때문이다.
“소멸은 아니다.”라는 것은

001_0658_c_01L四句令鈍根者誦持一偈常念思
001_0658_c_02L乃至遍知一切佛法是名如來善
001_0658_c_03L巧方便

001_0658_c_04L
舍利弗言云何一四句偈願爲說之

001_0658_c_05L
是第三請

001_0658_c_06L
於是尊者而說偈言

001_0658_c_07L
因緣所生義是義滅非生滅諸生滅義
001_0658_c_08L是義生非滅

001_0658_c_09L
是第四說此四句義有別有摠
001_0658_c_10L則明二門義摠卽顯一心法如是一
001_0658_c_11L心二門之內一切佛法無所不攝
001_0658_c_12L是義云何前之二句融俗爲眞
001_0658_c_13L平等義下之二句融眞爲俗顯差
001_0658_c_14L別門摠而言之眞俗無二而不守
001_0658_c_15L由無二故卽是一心不守一故
001_0658_c_16L擧體爲二如是名爲一心二門大意
001_0658_c_17L如是次釋其文因緣所生義者
001_0658_c_18L擧一切世諦諸法是義滅者融俗爲
001_0658_c_19L謂所生義本來寂滅故言非生
001_0658_c_20L顯其生義是滅之由由其生義
001_0658_c_21L卽非生故求其生義卽不成故
001_0658_c_22L故生義卽寂滅也滅諸生滅義者
001_0658_c_23L擧眞諦寂滅之法是義生者融眞爲
001_0658_c_24L謂寂滅法從緣生起故言非滅

001_0659_a_01L그 적멸이 곧 발생의 연유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 적멸은 적멸이 아님을 말미암은 까닭에 적멸의 뜻을 추구해도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적멸은 연으로부터 발생한다. 적멸의 뜻이 곧 발생이라는 것은 불생의 생이다. 그리고 발생의 뜻이 곧 적멸이라는 것은 불멸의 멸이다. 그것을 합하여 말하면 발생이 곧 적멸이지만 적멸을 고수하지 않고, 적멸이 곧 발생이지만 발생에 집착하지 않는다. 발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고 기동과 적멸이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을 일심법이라 한다.
비록 실제로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수하지 않으므로 전체가 연을 따라 발생하고 기동하며 전체가 연을 따라 적멸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발생이 곧 적멸이고 적멸이 곧 발생이며,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으며, 똑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이것이야말로 소위 한 게송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인 뜻이고 또 총체적인 뜻이다.

⑤ 대중이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음

그때 대중이 이 게송을 듣고서 모두 크게 환희하고, 다 적멸과 발생의 뜻을 터득하였다. 그 적멸과 발생의 반야는 자성이 공적한 지혜의 바다이다.

이는 다섯째로 설법을 듣고 이익을 얻는 것이다. 즉 총체적인 도리와 개별적인 도리로 이해한 것을 드러낸다.
“적멸”이라 한 것은 제1구와 제2구에서 발생의 뜻이 곧 소멸임을 증득한 것이고, 다음으로 “발생”이라 한 것은 제3구와 제4구에서 적멸의 뜻이 곧 발생임을 증득한 것이다. 이것은 발생과 소멸의 두 가지 뜻을 터득한 것을 설명한 것이다. “그 적멸과 발생의 반야”라는 것은 적멸과 발생의 두 가지 뜻을 이해한 것을 드러낸 것이니, 이는 개별적인 문에 의해 이익을 얻는 것이다.
“자성이 공적한 지혜의 바다이다.”라는 것은, 총체적으로 관찰하면 적멸이든 발생이든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자성이 공적한 지혜는 깊고 넓어 끝이 없다. 이와 같은 경우를 “자성이 공적한 지혜의 바다”라고 한다. 이는 총체적인 문에 의해 이익을 얻는 것이다.

6) 「여래장품如來藏品」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닌 일실一實의 법은 제불이 돌아가는 곳이니, 이를 여래장이라 한다.

001_0659_a_01L顯其寂滅是生之由由其寂滅
001_0659_a_02L非寂滅故求寂滅義不可得故是故
001_0659_a_03L寂滅從緣生也寂滅是生者不生
001_0659_a_04L之生也生義是滅者不滅之滅也
001_0659_a_05L不滅之滅故滅卽爲生也不生之生
001_0659_a_06L生卽寂滅也合而言之生卽寂
001_0659_a_07L而不守滅滅卽爲生而不住生
001_0659_a_08L生滅不二動寂無別如是名爲一心
001_0659_a_09L之法雖實不二而不守一擧體隨
001_0659_a_10L緣生動擧體隨緣寂滅由是道理
001_0659_a_11L生是寂滅寂滅是生無障無㝵
001_0659_a_12L一不異是謂一偈摠別之義

001_0659_a_13L
爾時大衆聞說是偈僉大歡喜皆得
001_0659_a_14L滅生滅生般若性空智海 [109]

001_0659_a_15L
此是第五聞說得益卽顯得解摠別
001_0659_a_16L道理所言滅者得上二句生義滅故
001_0659_a_17L次言生者得下二句滅義生故是明
001_0659_a_18L得二義滅生般若者是顯得二解
001_0659_a_19L是依別門而得利也性空智海者
001_0659_a_20L而觀之若滅若生不守自性自性
001_0659_a_21L空智深廣無邊如是名爲性空智海
001_0659_a_22L是依摠門而得益也

001_0659_a_23L
如來藏品1)第七 [41]

001_0659_a_24L
眞俗無二一實之法諸佛所歸

001_0659_b_01L지금 이 「여래장품」에서는 무량한 법문과 일체의 수행이 여래장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음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들어가는 대상에 의하여 「여래장품」이라는 명칭을 내세운다.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에 여섯 부분이 있는데, 일체행이 진성공에서 나온 것을 드러낸 것은 앞의 부분에서 마쳤다. 이하는 그 여섯째로서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 있음을 설명한다.53)
경문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제법과 제행은 똑같이 같은 도리에 들어감을 설명하고, 둘째는 수행에 들어가고 지혜에 들어가는 인과 과의 차별을 설명한다.

(1) 제법과 제행은 똑같이 같은 도리에 들어감을 설명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법이 일실의一實義에 들어 있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제행이 일불도一佛道에 들어 있음을 설명한다.

① 제법이 일실의一實義에 들어 있음을 설명함

첫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며, 셋째는 이해이고, 넷째는 서술이다.

가. 질문

질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에서 설한 것을 이해하고, 둘째는 의심나는 것을 질문한다.

가) 앞에서 설한 것을 이해함

그때 범행장자가 본각제로부터 일어나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드렸다.
“존자이시여, 발생한다는 뜻은 적멸이 아니고 적멸한다는 뜻도 발생이 아닙니다.

001_0659_b_01L如來藏今此品中明無量法及一
001_0659_b_02L切行莫不歸入如來藏中故就所入
001_0659_b_03L以立名也

001_0659_b_04L
爾時梵行長者從本際起而白佛言
001_0659_b_05L尊者生義不滅滅義不生如是如義
001_0659_b_06L卽佛菩提菩提之性卽無分別無分
001_0659_b_07L別智分別無窮無窮之相唯分別滅
001_0659_b_08L如是義相不可思議不思議中乃無
001_0659_b_09L分別

001_0659_b_10L
別明觀行有六分中顯一切行
001_0659_b_11L眞性空竟在於前此下第六明無量
001_0659_b_12L入如來藏就文有二一明諸法
001_0659_b_13L諸行同入一處二顯入行入智因果
001_0659_b_14L差別初中亦二先明諸法入一實
001_0659_b_15L後明諸行入一佛道初中有四
001_0659_b_16L一問二答三領四述問中有二先領
001_0659_b_17L前說後問所疑此中問者名梵行
001_0659_b_18L是人形雖俗儀心住一味以是
001_0659_b_19L一味攝一切味雖涉諸味之穢塵俗
001_0659_b_20L不失一味之梵淨行此中顯如是義
001_0659_b_21L所以令其發問從本際起者聞佛所
001_0659_b_22L卽入本際今欲發問從彼而起
001_0659_b_23L生義不滅者是領下半是義生非滅
001_0659_b_24L滅義不生者是領上半是義滅

001_0659_c_01L이와 같은 진여의 뜻은 곧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그 보리의 자성은 곧 무분별입니다. 무분별의 지혜는 분별이 무궁할지라도 그 무궁한 분별상은 오직 분별의 소멸일 뿐입니다. 이와 같이 보리의 뜻과 모습(相)은 불가사의합니다. 불가사의한 가운데는 분별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질문자의 이름은 범행이다. 이 사람은 겉모습은 세속의 위의를 하고 있지만 마음은 일미에 머물러 그 일미로써 일체미를 섭수한다. 비록 제미諸味의 잡다한 것(穢塵俗)을 경험했지만 일미의 청정범행은 잃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뜻54)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범행장자로 하여금 질문토록 한다.
“본각제로부터 일어난다.”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곧 본각제에 들어갔는데 지금 질문을 하려고 그 본각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발생한다는 뜻은 적멸이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게송 가운데 제4구의 “발생이란 뜻이지 소멸은 아니다.”를 이해한 것이고, “적멸하다는 뜻은 발생은 아니다.”라는 것은 위의 게송 가운데 제2구의 “소멸이란 뜻이지 발생은 아니다.”를 이해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진여의 뜻”이란 한 게송에서 적멸도 없고 발생도 없다는 것이 둘이 아니라는 뜻을 총체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적멸과 발생이 둘이 아닌 뜻은 제불께서 깨친 바 도道이므로 “곧 부처님의 보리입니다.”라고 하고, 깨침은 그 무이無二를 수순하여 분分도 없고 별別도 없으므로 “곧 무분별입니다.”라고 한다.
그 분별하는 바가 없음을 말미암아 이에 무분별도 없으므로 “무분별의 지혜는 분별이 무궁할지라도”라고 한다.
이에 분별상이 무궁한 것은 단지 모든 분별의 소멸을 말미암은 것뿐이므로 “그 무궁한 분별상은 오직 분별의 소멸일 뿐입니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보리의 뜻과 모습은 언설을 떠나 있고 사려분별을 단절해 있으므로 “불가사의합니다.”라고 한다. 불가사의한 경지는 마음과 언설이 단절되어 있으므로 곧 무분별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앞에서 설한 게송의 뜻을 이해한 것이다.

나) 의심나는 것을 질문함

존자이시여, 일체의 법수는 무량하고 무변합니다. 그러나 무변한 제법의 실상은 일실의의 자성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직 일실의의 자성에 머무는 그 수행은 무엇입니까?”

이는 의심나는 것을 곧장 질문한 대목이다. 소승의 가르침에는 팔만 가지의 온蘊이 있는데 일온의 분량은 천에 해당한다. 그러나 지금 대승의 가르침은 팔만 가지에 그치지 않기 때문에 “법수는 무량하고 무변합니다.”라고 한다. 무변한 교법이 설명하고 있는 뜻(義)과 상相은 다른 갈래가 없이 오직 일실의一實義일 뿐이다. 교법이 무수히 많지만 오직 일실의의 자성일 뿐이라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그것55)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불가사의하다.56) 내가 설한 모든 법은 미혹한 자를 위한 것으로 방편도方便道이지만, 일체의 법상은 일실의의 지혜일 뿐이다. 왜냐하면 비유하자면 한 도시가 사대문을 열어놓으면 그 사대문 안이 그대로 다 한 도시57)로 귀일되어 성의 주민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는 것과 같다. 갖가지 법미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


001_0659_c_01L非生故如是如義者摠領一偈
001_0659_c_02L滅不生無二義故如是無二義諸佛
001_0659_c_03L所覺道故言卽佛菩提覺順無二
001_0659_c_04L不分不別故言卽無分別由其無所
001_0659_c_05L分別乃能無不分別故言無分別智
001_0659_c_06L分別無窮所以分別無窮者只由滅
001_0659_c_07L諸分別故言無窮之相唯分別滅
001_0659_c_08L如是義相離言絕慮故不思議
001_0659_c_09L思議中心言絕故乃無分別如是
001_0659_c_10L領前所說偈義

001_0659_c_11L
尊者一切法數無量無邊無邊法相
001_0659_c_12L一實義性唯住一性其事云何

001_0659_c_13L
此是正問所疑小乘敎有八萬法蘊
001_0659_c_14L一蘊之量十百之數今大乘敎
001_0659_c_15L唯八萬故言法數無量無邊無邊敎
001_0659_c_16L所詮義相更無異趣唯一實義
001_0659_c_17L敎法衆多唯住一性甚難可解
001_0659_c_18L事云何

001_0659_c_19L
佛言長者不可思議我說諸法爲迷
001_0659_c_20L者故方便道 [110] 一切法相一實義
001_0659_c_21L何以故譬如一市開四大門是四
001_0659_c_22L門中皆歸一市如彼衆庶隨意所入
001_0659_c_23L種種法味亦復如是

001_0659_c_24L「第七」無{甲}

001_0660_a_01L
이는 둘째 답변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고, 둘째는 비유이며, 셋째는 합이다.

가) 법

첫째의 법에서 “내가 설한 모든 법”이라 한 것은 삼승교 및 일승교이다.
“미혹한 자를 위한 것이다.”라는 것은 일미에 통달하지 못한 자를 위해 설한 것이다.
“방편도이다.”라는 것은 모두 일미에 들어가는 방편이다. 정관正觀에 들어갈 경우에는 언설의 가르침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의 법상은 일실의의 지혜일 뿐이다.”라는 것은 모든 교법을 인유하여 들어간 법상은 오직 일실의로서 정관지正觀智일 뿐이다.

나) 비유

비유 가운데서 말한 “한 도시”는 일실의를 비유한다.
“사대문을 열어놓는다.”는 것은 네 종류의 가르침이니, 삼승교 및 일승교이다.
“그 사대문 안이 그대로 다 한 도시로 귀일된다.”는 것은 네 종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자는 모두 일실의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성의 주민들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은 근기가 깊고 얕음에 따라 각각의 가르침에 따라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의 도시를 가지고 일실의를 비유한 까닭은 모든 백성이 들어가는 곳이고, 모든 중생이 돌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 합

합에서 “갖가지 법”이라 한 것은 사대문을 합한 것이고, “미味”는 몇 가지 갈래의 맛(味)이 한 도시로 합해지는 것이다.

다. 이해시킴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일체법이 그와 같다면 저도 일미에 머물러 반드시 일체의 제미諸味를 섭수하겠습니다.”

이는 셋째로 이해시키는 것이다.
“제미를 섭수하겠습니다.”라는 것은 모든 교법의 맛이 일실의로 돌아감을 섭수하겠다는 것이다.

라. 서술함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렇다. 왜냐하면 일미실의는 그 맛이 하나의 대해와 같아서 일체의 모든 강물이 흘러들지 않음이 없다.
장자여, 일체의 법미는 마치 모든 강물이 명칭과 법수는 다를지라도 그 물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만약 대해에 머물면 곧 모든 강물을 포괄하는 것처럼 일미에 머물면 곧 제미를 섭수한다.”


001_0660_a_01L
是第二答於中有三謂法喩合
001_0660_a_02L法說言我說諸法者謂三乘敎及一
001_0660_a_03L乘敎爲迷者故者爲未達一味者說
001_0660_a_04L方便道故者皆入一味之方便故
001_0660_a_05L入正觀時不須言敎故一切法相一
001_0660_a_06L實義智者因諸敎法所入之相唯一
001_0660_a_07L實義正觀智故喩中言一市者喩一
001_0660_a_08L實義開四門者喩四種敎謂三乘
001_0660_a_09L敎及一乘敎是四門中皆歸一市者
001_0660_a_10L依四敎者皆歸一實故如彼衆庶
001_0660_a_11L隨意所入者隨根淺深隨入一敎故
001_0660_a_12L所以一市喩一實者爲是百姓之所
001_0660_a_13L入故爲諸衆生之所歸故合中言種
001_0660_a_14L種法者合於四門次言味者謂所
001_0660_a_15L趣味合於一市

001_0660_a_16L
梵行長者言法若如是我住一味
001_0660_a_17L攝一切諸味

001_0660_a_18L
此是第三領解攝諸味者攝諸敎味
001_0660_a_19L歸一實故

001_0660_a_20L
佛言如是如是何以故一味實義
001_0660_a_21L一本無
味字
如一大海 [111] 一切衆流無有不入
001_0660_a_22L長者一切法味猶彼衆流名數雖殊
001_0660_a_23L其水不異若住大海卽括衆流住於
001_0660_a_24L一味卽攝諸味

001_0660_b_01L
이는 넷째로 서술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서술한다.

( 가) 총체적으로 서술함)

나) 개별적으로 서술함

개별적으로 서술하는 것에도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이다. 둘째는 비유이다. 셋째는 합이다.

((가) 법)

((나) 비유)

(다) 합

합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저 모든 강물에 대한 합이니, 먼저 법으로 합하고, 나중에 비유로 이어받는다. 둘째는 모든 강물을 포괄한다는 것에 대한 합이니, 먼저 그 비유를 들고, 나중에 법으로 합한다.

② 제행이 일불도一佛道에 들어 있음을 설명함

이하는 둘째로 일체행이 일불도一佛道에 들어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제법은 일미인데 삼승의 깨침에서는 어째서 그 지혜마다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이는 지혜의 차이를 물은 것이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여, 비유하면 저 강江·하河·회淮·해海의 물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깊고 얕은 차이가 있는데, 명칭과 글이 다른 것과 같다. 물이 강江에 있으면 강수江水라 말하고, 물이 회淮에 있으면 회수淮水라 말하며, 물이 하河에 있으면 하수河水라 말하고, 그 모두가 바다(海)에 있으면 오직 해수海水라고 말할 뿐이다.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두가 진여에 있으므로 오직 불도라고 말할 뿐이다.

이는 둘째 답변이니, 비유가 있고, 합合이 있다.

가) 비유

처음의 강·하·회는 삼승의 수행을 비유한 것이고, 마지막의 바다(海)는 불도를 비유한다.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삼승인의 마음은 넓고 좁음이 있어 같지 않은 것을 비유한 것이고, “깊고 얕은 차이가 있다.”는 것은 삼승인의 지혜에 우등과 열등의 차이가 있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지혜의 뜻에 따라서 그 명칭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 모두가 바다에 있으면 오직 해수라고 말할 뿐이다.”라는 것은 그 삼승이 다함께 십지의 법공진여에 들어가면 오직 불도라는 명칭만 남아 있고, 삼승의 명칭은 없어지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삼승의 차별적인 수행은 모두 십지 이전의 방편도에 해당하지만 끝내 진여의 정관에 들어가지 못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삼승도 끝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는 경우는 없다. 마치 모든 교법이 똑같이 일미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나) 합

비유를 합한 언설은 경문에 나타나 있으니, 알 수 있을 것이다.

(2) 수행에 들어가고 지혜에 들어가는 인과 과의 차별을 설명함

이하는 크게 분류한58) 가운데 둘째로서 수행에 들어가고 지혜에 들어가는 인과 과의 차별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행의 차별에 들어가는 것이고, 둘째는 지혜의 차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셋째는 인의 작용(事用)에 들어가는 것이고, 넷째는 과의 상주법常住法에 들어가는 것이다.


001_0660_b_01L
此是第四述成於中有二摠述別成
001_0660_b_02L別中有三謂法喩合合中有二
001_0660_b_03L合彼衆流先以法合後卽牒喩
001_0660_b_04L二者合括衆流先擧其喩後以法
001_0660_b_05L

001_0660_b_06L
梵行長者言諸法一味云何三乘道
001_0660_b_07L其智有異

001_0660_b_08L
此下第二明一切行入一佛道
001_0660_b_09L問後答此是問異

001_0660_b_10L
佛言長者譬如江河淮海大小異故
001_0660_b_11L深淺殊故名文別故水在江中名爲
001_0660_b_12L江水水在淮中名爲淮水水在河中
001_0660_b_13L名爲河水俱在海中唯名海水法亦
001_0660_b_14L如是俱在眞如唯名佛道

001_0660_b_15L
是第二答有喩有合初中江河淮者
001_0660_b_16L喩三乘行海喩佛道大小異者
001_0660_b_17L三乘心寬狹不同深淺殊者喩三
001_0660_b_18L乘智優劣有異隨前二義其名各
001_0660_b_19L俱在海中唯名海水者喩其三
001_0660_b_20L同入十地法空眞如唯名佛道
001_0660_b_21L沒三乘名當知三乘差別行者皆在
001_0660_b_22L地前方便道中莫不終入眞如正觀
001_0660_b_23L所以三乘終無別歸如諸敎法同入
001_0660_b_24L一味合喩之言在文可見

001_0660_c_01L
① 수행의 차별에 들어감

장자여, 일불도에 머무르면 곧 세 가지 수행에 통달한다.”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세 가지 수행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수행의 갈래를 따르는 수행(隨事取行)이고, 둘째는 유식을 따르는 수행(隨識取行)이며, 셋째는 진여를 따르는 수행(隨如取行)이다.

첫째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론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일불도에 머문다.”는 것은 초지 이상에 오른 것을 불도에 머문다고 한다. 삼종지三種智59)를 갖추어 세 가지 수행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질문이고, 셋째는 답변이다.

(가. 총론적으로 표방함)

(나. 질문)

다. 답변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별적으로 설명하고, 둘째는 총체적으로 해석한다.

가) 개별적으로 설명함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데서 “수행의 갈래를 따르는 수행”이라 한 것은 사성제와 십이연기에 의하여 인과 과를 따라서 삼십칠도품을 취하는 것이다.
“유식을 따르는 수행”60)은 중생은 오직 일심의 조작일 뿐으로 유식의 도리를 따라서 사섭수행을 취하는 것이다.
“진여를 따르는 수행”은 일체법이 모두 다 평등하므로 평등한 진여를 따라서 육바라밀행을 취하는 것이다. 수행을 섭수하여 마음에 모으기 때문에 취한다고 하는 것이지, 주체와 객체를 분별하여 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 총체적으로 해석함

장자여, 이와 같은 세 가지 수행은 모든 수행문을 섭수하므로 일체의 법문이 여기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 이러한 수행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空相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들어간 자에 대하여 가히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여래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들어감이야말로 들어간 바가 없는 곳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61)

이는 세 가지 수행을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수행의 갈래를 따르는 수행은 소승문과 공통되고, 유식을 따르는 수행은 오직 대승문이니, 이 두 가지는 차별문이다. 셋째로 진여를 따르는 수행은 평등문이니, 이 도리를 말미암아 모든 수행문을 총섭한다. 또한 삼십칠도품의 수행은 생사에 머물지 않는 문이고, 사섭법의 수행은 열반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001_0660_c_01L
長者住一佛道卽達三行梵行長者
001_0660_c_02L云何三行佛言一隨事取行二隨
001_0660_c_03L識取行三隨如取行

001_0660_c_04L
此下大分第二入行入智因果差別
001_0660_c_05L於中有四一者入行差別二者入智
001_0660_c_06L差別三者入因事用四者入果常住
001_0660_c_07L初中有三一者摠標住一佛道者
001_0660_c_08L初地已上名住佛道具三種智
001_0660_c_09L三行故二者問三者答答中有二
001_0660_c_10L別明摠釋別明中言隨事取行者
001_0660_c_11L謂依四諦十二緣起隨因果事取道
001_0660_c_12L品行故隨識取行者謂諸衆生
001_0660_c_13L一心作隨唯識理取四攝行故
001_0660_c_14L如取行者謂一切法悉皆平等
001_0660_c_15L平等如取六度行故攝行屬心
001_0660_c_16L名爲取非謂能所分別之取

001_0660_c_17L
長者如是三行摠攝衆門一切法門
001_0660_c_18L無不此入入是行者不生空相如是
001_0660_c_19L入者可謂入如來 入如來入入
001_0660_c_20L不入一本云入如來
藏者入不入故
[112]

001_0660_c_21L
此是摠釋三行隨事行者共小乘門
001_0660_c_22L隨識行者獨大乘門此二是差別
001_0660_c_23L第三是平等門由是道理摠攝
001_0660_c_24L衆門又道品行不住生死門其四

001_0661_a_01L진여에 따르는 육바라밀의 수행은 평등하여 대립이 없는 문이므로 “일체의 법문이 여기에 들어가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이 수행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진여에 따르는 수행이면서도 항상 수행의 갈래(事)를 따르고 유식에 따르는 수행이기 때문에 공상에 집착하지 않고 적멸에 머문다.
“가히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말한다.”는 것은 비록 수행의 갈래와 유식에 따르면서도 항상 진여를 따라서 평등수행을 취하므로 가히 여래장해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 들어감이야말로 들어간 바가 없는 곳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그 들어간 마음은 들어간 바가 없는 곳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곧 수행의 주체와 터득된 객체가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들어간 바가 없다(不入)고 한다. 비록 다름(別異)은 없을지라도 또한 같지도 않기(一) 때문에 관심에 의거하여 짐짓 들어간 마음(入心)이라 한다. 이처럼 들어간 마음이 들어가 있다는 분별상(相)이 없으므로 여래장에 들어감이야말로 들어간 바가 없는 곳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② 지혜의 차별에 들어감

이하는 둘째로 지혜의 차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가. 질문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새싹이 과실을 맺는 것과 같습니다. 들어간 바가 없는 것은 본각이 뿌리이고 이익은 힘인데, 이익의 힘이 성취되면 본각이 터득되기 때문입니다.62) 그렇다면 본각의 실제가 터득되면 그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질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설명을 이해하고, 둘째는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마치 새싹이 과실을 맺는 것과 같습니다.”라는 것은 마치 곡식의 새싹이 나서 이삭이 패고 열매를 맺는 경우에 들어가는 주체도 없고 들어간 대상도 없는 것처럼, 곧 여래장에 들어가는 것도 그와 같은 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새싹은 본각과 그 이익을 비유하고, 열매는 터득된 본각을 비유한 것이다. 그처럼 곧 여래장에 들어갈 경우에도 평등하여 들어간 곳이 없다.

나.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지혜는 무궁하다. 그러나 간략하게 말하면 그 지혜에는 네 가지가 있다.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정지定智인데 소위 진여를 따르는 것이다. 둘째는 부정지不定智인데 소위 방편으로 깨뜨리는 것이다. 셋째는 열반지涅槃智인데 소위 전각삼매電覺三昧63)처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넷째는 구경지究竟智인데 소위 실제에 들어가 깨침을 구족하는 것이다.

001_0661_a_01L攝行不住涅槃門隨如度行平等
001_0661_a_02L無二門故一切法門無不此入
001_0661_a_03L是行者不生空相者雖隨如行而恒
001_0661_a_04L隨事隨識行故不取空相而住寂滅
001_0661_a_05L可謂入如來者雖隨事識而恒
001_0661_a_06L隨如取平等行故可謂能入如來藏
001_0661_a_07L海也入入不入者入其入心於不
001_0661_a_08L入故能入所入平等無別故曰不
001_0661_a_09L雖無別異而亦非一故約觀心
001_0661_a_10L假名入心如是入心不存入相故
001_0661_a_11L入其入於不入也

001_0661_a_12L
梵行長者言不可思議入如來藏
001_0661_a_13L苗成實無有入處本根利力利成得
001_0661_a_14L得本實際其智幾何

001_0661_a_15L
此下第二入智差別先問後答問中
001_0661_a_16L有二先領前說後問所疑如苗成
001_0661_a_17L實者如似穀苗成穗實時無能入
001_0661_a_18L無所入處入如來藏當知亦爾
001_0661_a_19L苗喩本利實喩得本入時平等
001_0661_a_20L所入處故

001_0661_a_21L
佛言其智無窮略而言之其智有四
001_0661_a_22L何者爲四一者定智所謂隨如二者
001_0661_a_23L不定智所謂方便摧破 [113] 三者涅槃智
001_0661_a_24L所謂除電覺一本作慧
除電覺
[114] 四者究竟智所謂

001_0661_b_01L
장자여, 이와 같은 네 가지 훌륭한 작용은 과거의 제불이 설한 바로서 큰 교량이고 큰 나루터이다. 그러므로 만약 중생을 교화하려면 마땅히 이 지혜를 활용해야 한다.

이것은 둘째 답변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론적으로 표방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해석하며, 셋째는 총체적으로 설명한다.

가) 총론적으로 표방함

첫째의 총론적으로 표방한 것 가운데서 “그 지혜는 무궁하다.”라고 한 것은 통달한 바가 끝이 없기 때문에 그 지혜 또한 무궁하다는 것이다. 다만 뜻으로 분류하고 상대하여 총체적으로 그리고 간략하게 설하자면 네 가지가 있을 따름이다.

나) 개별적으로 해석함

둘째의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데서 “정지”라고 한 것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서 오직 정관正觀일 뿐이지 방편을 활용하지 않기 때문에 정지라 한다.
말나식의 아집과 아소집을 대치하고 평등함을 따라 관찰하기 때문에 “진여를 따르는 것이다.”라고 한다.
“부정지”는 묘관찰지妙觀察智로서 제6식에서 방편으로 나아가 터득하기(進取) 때문에 부정이라 한다. 방편도의 경우에는 명칭과 수행의 갈래(事) 등 형상의 깨뜨림을 추구하기 때문에 최파라 한다. 이 부정지는 실로 방편 및 정관에 통하지만 다만 정지와 구별하려는 까닭에 간략하게 방편만을 언급할 따름이다.
“열반지”는 성소작지成所作智로서 팔상八相을 드러내어 불사를 행하는데, 최후의 모습을 언급하여 열반지라 하였다.
전5식前五識을 소멸하고 열반지를 터득한다. 이런 뜻에서 “전각삼매처럼 번뇌를 제거한다.”고 한다. 전각電覺이란, 오식이 잠깐만에 일어났다가 잠깐만에 소멸하는 것이 마치 번갯불과 같기 때문이다.
구경지는 대원경지大圓鏡智로서 오직 구경위에서만 이 구경지를 터득하기 때문에 일체의 경계를 궁구하지 못함이 없다. 그래서 일실의에 들어가므로 “실제에 들어간다.”고 하고, 어떤 경계든지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없으므로 “깨침을 구족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다) 총체적으로 설명함

셋째의 총체적으로 설명한 데서 “네 가지 훌륭한 작용”이라 한 것은 작용이 두루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제불이 설한 바이다.”라는 것은 제불의 깨침이 똑같다는 것이다.
“큰 교량이다.”라는 것은 곧 네 가지 지혜로써 삼승의 수행자들을 싣고 일승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001_0661_b_01L入實具足道 [115] 長者如是四大事用
001_0661_b_02L去諸佛所說是大橋梁是大津濟
001_0661_b_03L化衆生應用是智

001_0661_b_04L
是第二答於中有三所謂摠標
001_0661_b_05L摠明摠標中言其智無窮者
001_0661_b_06L達無邊故其智亦無窮但以義類相
001_0661_b_07L摠略而說有四而已別顯中言
001_0661_b_08L定智者平等性智唯在正觀不作
001_0661_b_09L方便故名定智對治末那我我所
001_0661_b_10L隨觀平等故曰隨如不定智者
001_0661_b_11L妙觀察智在第六識方便進取
001_0661_b_12L名不定方便道時推求摧破名事等
001_0661_b_13L故曰摧破此智實通方便正觀
001_0661_b_14L但爲別定智故略擧方便耳涅槃智
001_0661_b_15L成所作智能現八相而作佛事
001_0661_b_16L擧最後相名涅槃智除滅五識
001_0661_b_17L得此智以是義故名除電覺電覺
001_0661_b_18L謂五識乍起乍滅如電光故
001_0661_b_19L竟智者大圓鏡智唯究竟位得此智
001_0661_b_20L於一切境無不窮故入一實義
001_0661_b_21L故名入實無境不現名具足道
001_0661_b_22L明中言四大事用者用無不周故
001_0661_b_23L諸佛所說者諸佛道同故大橋梁者
001_0661_b_24L以是四智載三乘人令到一乘之彼

001_0661_c_01L
“큰 나루터이다.”라는 것은 이 네 가지 지혜를 활용하여 육도를 두루 다니면서 출세간도를 보여 주어 갈애의 물을 건네 주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중생을 교화하려면 마땅히 이 지혜를 활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③ 인의 작용에 들어감

이하는 셋째로 인의 작용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문(長行)이고, 둘째는 중송重頌이다.

가. 산문(長行)

첫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둘째는 거듭 드러내며, 셋째는 이해를 시킨다.

가) 간략하게 설명함

장자여, 이 훌륭한 지혜의 작용을 활용하는 것에 또 세 가지 대사大事가 있다. 첫째는 세 가지 삼매가 안과 밖으로 서로 부정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대大·의義·과科에서 깨침을 따라서 선을 선택하고 악을 소멸하는 것이다. 셋째는 진여의 지혜와 선정64)에서 자비로써 이익을 갖추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대사로 보리를 성취한다. 만약 이 세 가지 대사를 실행하지 못하면 곧 저 사지四智의 바다에 흘러들지 못하므로 모든 대마大魔들에게 그 빈틈을 보이고 만다.
장자여, 그대들 대중은 성불에 이르기까지 꼭 항상 수습하여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첫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론적으로 표방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해석하며, 셋째는 결론적으로 설명하고, 넷째는 끝으로 권장한다.

(가) 총론적으로 표방함

첫째의 총론적으로 표방한 것에서 “이 훌륭한 지혜의 작용을 활용한다.”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사지四智의 훌륭한 지혜를 언급한 것이다. 그 계위는 초지 이상으로부터 불과에 이른다.
“또 세 가지 대사가 있다.”는 것은 사지를 성취하는 것에 세 가지 대사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지전의 네 가지 계위65)에 있는 수행이다.
이 “세 가지 대사”란 첫째는 정定이고, 둘째는 혜慧이며, 셋째는 정과 혜를 함께 수행하여 대비를 자체로 삼는 것이다.

(나) 개별적으로 해석함

(둘째의 개별적인 해석 가운데서) 첫째의 정은 곧 세 가지 삼매이다. 세 가지 삼매에 대해서는 여러 문파에서 이설이 분분하다. 혹 공·무상·무원이라고도 하고, 혹 무작·무상·공공이라고도 하며, 혹 공·무작·무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므로 모두 무방하다. 세 가지 삼매를 혹 세 가지 해탈이라고도 하는데, 이 경우는 무루에만 통한다. 그러나 세 가지 삼매라고 할 경우는 유루와 무루에 다 통한다.

001_0661_c_01L岸故大津濟者用此四智遍涉六
001_0661_c_02L示出世道度愛河故是故化者
001_0661_c_03L應用是智也

001_0661_c_04L
長者用是大用復有三大事一者於
001_0661_c_05L三三昧內外不相奪二者於大義科
001_0661_c_06L隨道擇滅三者於如慧定 [116] 以悲俱利
001_0661_c_07L如是三事成就菩提不行是事卽不
001_0661_c_08L能流入彼四智海爲諸大魔所得其便
001_0661_c_09L長者汝等大衆乃至成佛常當修習
001_0661_c_10L勿令暫失

001_0661_c_11L
此下第三入因事用於中有二長行
001_0661_c_12L重頌初中有三略明重顯三者領
001_0661_c_13L初中有四一者摠標二者別解
001_0661_c_14L三者合明四者結勸摠標中言用
001_0661_c_15L是大用者擧前所說四智大用位在
001_0661_c_16L地上乃至佛果復有三事者能成
001_0661_c_17L四智之事有三此在地前四位中
001_0661_c_18L此三事者初定次慧第三定慧俱行
001_0661_c_19L大悲爲體初言定者卽三三昧
001_0661_c_20L有多門左右異說或言空無相
001_0661_c_21L或言無作無相空空或言空
001_0661_c_22L無作無相1) [42] 安立皆無障碍
001_0661_c_23L或名三解脫唯在無漏故或名三三
001_0661_c_24L「意」作「宜」{甲}

001_0662_a_01L세 가지 해탈과 세 가지 삼매가 차별된 뜻은 이하의 경문에서 설명된다.
“안과 밖으로 서로 부정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은 내식과 외경은 함께 발현하여 모든 선근을 거스르고 따르면서 서로 부정했지만, 이제 모든 것이 공적한 줄을 통달하여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의·과에서 깨침을 따라서 선을 선택하고 악을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사대(大)와 삼과법문(義)에 대하여 도리에 따라 간택하여 모든 (사대의 거친 번뇌와 음·입·계의 미세한 번뇌의) 집착을 깨뜨림으로써 근본식 내에 있는 무시이래의 희론종자를 없애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 삼매는 그 현행하는 번뇌(纏)를 없애는 것이고, 여기의 간택하는 지혜는 희론종자를 물리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사지가 성취될 경우에 희론종자를 없애고 팔식을 전변시킬 수가 있다.
“진여의 지혜와 선정에서 자비로써 이익을 갖추어 주는 것이다.”라는 것은 앞의 지혜와 선정은 모두 진여의 도리를 따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설하여 ‘진여의 지혜와 선정’이라 하고, 거기에서 또한 대비행을 닦아서 자리와 이타에 상응하므로 ‘이익을 갖추어 주는 것이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만약 대비를 떠나서 그대로 선정과 지혜만 닦으면 이승의 경지에 떨어져 보살도에 장애가 되고, 설령 대비만 일으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지 않으면 범부의 고통에 떨어져 보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 결론적으로 설명함

그러므로 세 가지 대사를 닦아야 이승과 범부를 멀리 떠나고, 보살도를 닦아야 무상정각을 성취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세 가지 대사로 보리를 성취한다.”고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대사를 모두 수행하지 않으면 곧 생사에 머물고 열반에 집착하여 사지의 대해에 흘러들지 못하므로 사마四魔에게 그 빈틈을 보이고 만다. 이는 셋째로서 결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66)

(라) 끝으로 권장함

이하는 넷째 끝으로 권장하는 것이다.67)

나) 거듭 드러냄

이것은 둘째로 거듭 드러내는 것이니, 두 가지 문답68)으로 두 가지 문을 드러낸다.

(가) 첫째 문답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세 가지 삼매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삼매는 공삼매·무작삼매·무상삼매이다. 이것이 세 가지 삼매이다.”


001_0662_a_01L亦通有漏故於中別義下文當
001_0662_a_02L而言內外不相奪者內識外境
001_0662_a_03L共相現發取違順相奪諸善根
001_0662_a_04L達皆空不令奪故於大義科隨道
001_0662_a_05L擇滅者謂於四大及三法門隨理簡
001_0662_a_06L摧破諸相伏滅本識戱論種子
001_0662_a_07L前三三昧伏其現纒此簡擇慧
001_0662_a_08L伏種子由是遂成四智之時能拔種
001_0662_a_09L得轉八識故於如慧定以悲俱利
001_0662_a_10L前慧及定皆順如理是故說名
001_0662_a_11L於如慧定於中亦修大悲相應自利
001_0662_a_12L利他故言俱利所以然者若離大
001_0662_a_13L直修定慧墮二乘地障菩薩道
001_0662_a_14L設唯起悲不修定慧墮凡夫患
001_0662_a_15L菩薩道故修三事遠離二邊修菩
001_0662_a_16L薩道成無上覺故言如是三事
001_0662_a_17L就菩提若不俱行此三事者卽住生
001_0662_a_18L及着涅槃不能流入四智大海
001_0662_a_19L卽爲四魔所得便也此是合明下卽
001_0662_a_20L勸修爲第四門也

001_0662_a_21L
梵行長者言云何三三昧佛言三三
001_0662_a_22L昧者所謂空三昧無作三昧無相三
001_0662_a_23L [117] 如是三昧

001_0662_a_24L
此是第二重顯有二問答顯前二門

001_0662_b_01L
이는 첫째 세 가지 삼매문을 드러낸 것이다. 이 세 가지 삼매의 차별에 각각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용·상이고, 둘째는 심·인·과이며, 셋째는 식·견·상이다.
첫째의 체·용·상이란, 무릇 일체법은 이 세 가지 삼매를 벗어나지 않는다. 법체가 공하므로 공삼매를 내세우고, 작용이 없으므로 무작삼매를 내세우며, 형상(相狀)이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내세운다.
둘째의 심·인·과란, 인과 과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의 작용에서 발흥한다. 마음의 작용이 공하므로 공삼매를 내세우고, 모든 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작삼매를 내세우며, 모든 과를 얻을 수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내세운다.
셋째의 식·견·상이란, 모든 식의 자체가 공하므로 공삼매를 내세우고, 견분을 없애므로 무작삼매를 내세우며, 상분을 없애므로 무상삼매를 내세운다.
이 셋째의 문은 위에서 “안과 밖으로 서로 부정되지 않는다.”69)는 경문에 따른 것이다.0)

(나) 둘째 문답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대·의·과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는 사대이고, 의는 음·계·입 등이며, 과는 근본식이다. 이것이 대·의·과이다.”

이는 둘째의 문답을 드러낸 것이다.
사대를 개별적으로 내세운 까닭은 처음에 수행할 경우 먼저 성근 경계(麤境)를 간택해야 함을 드러낸다. 즉 제법 가운데서 색법이 가장 성글다. 곧 안으로는 사지와 몸체 등이 있고, 밖으로는 산과 물 등이 있다. 이러한 법은 사대를 떠나 있지 않음을 관찰하고, 사대는 모두 불가득임을 관찰하여, 방소가 있거나 방소가 없거나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간택한 뒤 다음으로 미세한 의義를 관찰하니, ‘음·계·입’을 말한다. 이는 각각 간략한 것·자세한 것·중간적인 것이다. 간략하게 섭수하여 관찰하면 오온이고, 자세하게 관찰하면 십팔계이며,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의 중간으로 관찰하면 십이입이다. 이것이 일체가 불가득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말한 “등이며”는 나머지 법문인 십이지연기 등이다. 이와 같이 간택하여 관찰하는 힘 때문에

001_0662_b_01L此顯初門是三差別略有三義
001_0662_b_02L體用相故二心因果故三識見相故
001_0662_b_03L體用相者凡一切法莫過此三
001_0662_b_04L體空故立空三昧無作用故無作
001_0662_b_05L三昧無相狀故無相三昧心因果
001_0662_b_06L因果所起興於心行心行空故
001_0662_b_07L立空三昧諸因無所有故立無作三
001_0662_b_08L諸果不可得故立無相三昧
001_0662_b_09L見相者諸識自體空故立空三昧
001_0662_b_10L遣見分故立無作三昧遣相分故
001_0662_b_11L立無相三昧是第三門順前內外不
001_0662_b_12L相奪文

001_0662_b_13L
梵行長者言云何於大義科佛言
001_0662_b_14L謂四大義謂陰界入等科謂本識
001_0662_b_15L [118] 於大義科

001_0662_b_16L
是顯第二門所以四大而別立者
001_0662_b_17L顯初修先擇麁境謂諸法中色法
001_0662_b_18L最麁內支體等外山河等觀是等
001_0662_b_19L不離四大觀是四大皆不可得
001_0662_b_20L有方無方俱不成故如是簡擇已
001_0662_b_21L次觀微細義謂陰界入略廣中故
001_0662_b_22L略攝觀五廣觀十八略廣中間
001_0662_b_23L十二入觀察一切皆不可得次言等
001_0662_b_24L謂餘法門十二支等如是簡擇觀

001_0662_c_01L곧 근본식 내에 있는 무시이래의 희론종자 및 명언종자를 물리칠 수가 있다. 처음에는 물리치다가 점차 단멸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앞에서 “깨침을 따라 택멸하는 것이다.”70)라고 하였다.

다) 이해를 시킴

범행장자가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그와 같이 지혜로운 행위(智事)71)는 자리이인自利利人으로서 삼계를 초월하고,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보살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제법의 모습(法相)은 곧 생멸법으로서 분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분별을 떠나면 그 법이야말로 마땅히 불멸일 것입니다.”

이는 셋째로 이해를 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관행을 이해시키고, 둘째는 경계를 이해시킨다.

(가) 관행을 이해시킴

“그와 같이 지혜로운 행위”는 정·혜·대비의 세 가지는 사지四智를 성취하는 행위의 작용이다.
“자리이인”이란, 정·혜는 자리自利이고, 대비는 이인利人이다.
“삼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앞의 두 가지 곧 정·혜는 범부와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셋째 곧 대비는 이승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에 저 범부와 이승을 떠나서 보살도에 들어간다.

(나) 경계를 이해시킴

“그와 같은” 이하는 경계를 이해시키는 것이다. 즉 첫째 선정(定)의 경계는 제식과 견분과 상분이고, 둘째 지혜(智)의 경계는 대·의·과의 법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제법의 상은 모두 생멸법이다. 왜냐하면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아 마음의 바다(心海)를 기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고요한 문이므로 그 분별을 떠나면 마음의 바다를 기동시킬 인이 없는데 무엇을 말미암아 생멸이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그 법이야말로 마땅히 불멸일 것입니다.”라고 한다.

나. 중송重頌

이하는 둘째로 게송으로 거듭 찬송하는 것이다.72)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간략하게 선설하고, 둘째는 장자가 자세하게 찬송하여 연설한다.0)

가) 간략하게 선설함

그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펼치려고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法從分別生    제법은 분별에서 발생하지만
還從分別滅    다시 분별로부터 소멸된다네
滅諸分別法    제분별을 소멸하는 법이라면
是法非生滅    그것은 생멸법칙이 아니라네


001_0662_c_01L察力故卽能損伏本識之內無始戱
001_0662_c_02L論名言種子始時損伏乃至斷滅
001_0662_c_03L所以前言隨道擇滅

001_0662_c_04L
梵行長者言不可思議如是智事
001_0662_c_05L利利人過三界地不住涅槃入菩薩
001_0662_c_06L如是法相是生滅法以分別故
001_0662_c_07L離分別法應不滅

001_0662_c_08L
此是第三領解於中有二先領觀行
001_0662_c_09L後解境界如是智事者如是三種
001_0662_c_10L能成四智之事用故自利利人者
001_0662_c_11L二自利第三利人故過三界地者
001_0662_c_12L前二定慧異凡夫故不住涅槃者
001_0662_c_13L第三大悲異二乘故離彼二邊
001_0662_c_14L菩薩道也如是已下解彼境界
001_0662_c_15L初定境諸識見相次智境界大義
001_0662_c_16L科法如是法相皆生滅法所以然
001_0662_c_17L由妄分別動心海故本來靜門
001_0662_c_18L若離分別無其所因何由生滅
001_0662_c_19L之故言法應不滅

001_0662_c_20L
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

001_0662_c_21L
法從分別生還從分別滅滅諸分別法
001_0662_c_22L是法非生滅

001_0662_c_23L
此下第二以偈重頌於中有二
001_0662_c_24L者如來略宣二者長者廣演今此頌

001_0663_a_01L
지금 이 게송에서 “법”이라 한 것은 일심법이다. 만약 허망하게 분별하면 마음이 기동하듯이 생멸의 일체 제상이 다 분별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만약 본각의 본래 고요한 문에 나아가면 모든 분별을 떠나 있는 까닭에 그 법은 생멸이 아니다. 즉 본래부터 모든 분별이 소멸되어 생멸의 인이 없으므로 생멸이 없다.
만약 생멸이 모두 분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유가론』의 설이 어찌 통용되겠는가. 「사소성지품思所成地品」에서는 “다른 것을 소멸시키는 작용이 없다. 자기를 소멸시키는 작용이 없다.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가, 또한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소멸하는가?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발생이 다하면 자연히 소멸한다.”73)고 말한다. 이와 같이 서로 어긋나는데 어찌 화회和會가 되겠는가.
이제 이것을 해석하자면, 인연의 도리는 『유가론』의 설과 같고, 유식의 도리는 『금강삼매경』의 설과 같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나름대로 도리가 있다.

나) 자세하게 찬송하여 연설함

이하는 범행장자가 자세하게 찬송한 것으로 여덟 개의 게송이 있다. 그 여덟 게송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로 제1·제2의 두 게송은 앞의 뜻을 곧장 연설하고, 둘째로 제3·제4의 두 게송은 모든 잘못된 견해를 타파하며, 셋째로 제5의 한 게송은 바르게 취했음을 서술하고, 넷째로 제6·제7의 두 게송은 바르게 설한 자에게 예를 드리며, 다섯째로 제8의 한 게송은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설해 달라고 청한다.

(가) 곧장 연설함

그때 범행장자가 이 게송의 설법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며 그 뜻을 펼치려고 게송을 설하여 여쭈었다.

諸法本寂滅    제법은 본래부터 다 적멸한데
寂滅亦無生    그 적멸 또한 생긴 것 아니네
是諸生滅法    곧 생겨나고 소멸하는 일체법
是法非無生    그 일체법은 무생이 아니라네

彼卽不共此    생멸법이 적멸법과 다른 것은
爲有斷常故    단견 상견이 있기 때문이라네
此卽離於二    일심법은 단과 상을 떠났지만
亦不在一住    또한 어디에도 머묾이 없다네

이것은 첫째로서 앞의 게송을 곧장 연설한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001_0663_a_01L中所言法者謂一心法若妄分別
001_0663_a_02L動心海故若生若滅一切諸相
001_0663_a_03L不皆從分別所作若就本覺本來靜
001_0663_a_04L離諸分別故是法非生滅謂從
001_0663_a_05L本來滅諸分別無生滅因故非生滅
001_0663_a_06L若使生之與滅皆從分別之所作者
001_0663_a_07L瑜伽所說云何而通如彼思所成地
001_0663_a_08L中云無滅他用無自滅用如衆
001_0663_a_09L緣有故生亦衆緣有故滅耶
001_0663_a_10L緣有故生生已自然滅如是相違
001_0663_a_11L云何和會解云因緣道理如彼論
001_0663_a_12L唯識道理如此經說所以二說
001_0663_a_13L皆有道理

001_0663_a_14L
爾時梵行長者聞說是偈心大欣懌
001_0663_a_15L欲宣其義而說偈言

001_0663_a_16L
諸法本寂滅寂滅亦無生是諸生滅法
001_0663_a_17L是法非無生

001_0663_a_18L
彼卽不共此爲有斷常故此卽離於二
001_0663_a_19L亦不在一住

001_0663_a_20L
此下長者廣頌有八行偈卽爲五
001_0663_a_21L一者二頌正演前義二者二頌
001_0663_a_22L破諸邪解三者一頌1) [43] 正取
001_0663_a_23L者二頌禮正說者五者一頌請說
001_0663_a_24L未聞此卽第一正演前偈於中有三

001_0663_b_01L첫째의 제1구와 제2구는 저 앞의 게송 가운데 제3구와 제4구를 연설한 것이다. 둘째의 제3구와 제4구는 저 앞의 게송 가운데 제1구와 제2구를 연설한 것이다. 셋째의 한 게송은 적멸과 생멸의 두 가지 뜻을 총체적으로 연설한 것이다.
첫째에서 “제법은 본래부터 다 적멸한데”라고 한 것은 음·계·입 등의 법은 본래 적멸하기 때문이다. “그 적멸 또한 생긴 것 아니네.”는 비단 제법은 본래 적멸할 뿐만 아니라 적멸하다는 도리도 또한 무생이기 때문이다.
제2의 게송 중 제3구의 “곧 생겨나고 소멸하는 일체법”은 음·계·입 등의 세속법이다.
제4구의 “그 일체법은 무생이 아니라네.”는 분별로 기동하여 생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제와 속제가 동일하지 않은 문에 나아가 동動과 정靜이 잡란하지 않은 뜻을 드러낸 것이다.
제3의 게송 중 “생멸법이 적멸법과 다른 것은”이란 저 적멸법과 무생법이 이 생멸법과는 함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견 상견이 있기 때문이라네.”는 만약 저 적멸법과 무생법이 이 생멸법과 함께한다면 이 생멸법은 단변斷邊이 있는데 저 적멸법과 무생법의 상적常寂은 상변常邊이 있는 꼴이 되어 이승의 경우처럼 중도에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한 제1의 게송의 뜻은 단변과 상변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심법은 단과 상을 떠났지만”이라 한다. 그러나 동動과 정靜이 없지 않기 때문에 “또한 어디에도 머묾이 없네.”라고 한다. 어느 곳에도 없다는 것은 일실의 자성과 일심의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고, 양변을 떠나 있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동動하고 정靜하여 두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불가사의한 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나) 잘못된 견해를 타파함


若說法有一    제법을 하나뿐이라 설한다면
是相如毛輪    그 한 법의 상은 모륜과 같네74)
如燄水迷倒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처럼
爲諸虛妄故    모두 허망한 착각일 뿐이라네

若見於法無    만약 제법을 무라고 간주하면
是法同於空    법을 허공처럼 보는 것이므로
如盲無日倒    맹인이 해가 없다고 하듯이
說法如龜毛    법을 거북 터럭 같다고 설하네

이는 둘째로 잘못된 견해(邪解)를 타파하는 것이다. 잘못된 견해는 비록 많지만 크게 잘못된 것에 두 가지가 있다. 곧 심심한 교법에 의하여 말씀한 그대로만 가지고 뜻을 취하여(如言取義) 스스로 그것을 구경으로 간주하는 것은 교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001_0663_b_01L一者二句演彼下半二者二句
001_0663_b_02L彼上半三者一頌摠演二義初言
001_0663_b_03L諸法本寂滅者謂陰界等法本來寂
001_0663_b_04L滅故寂滅亦無生者非但諸法本來
001_0663_b_05L寂滅寂滅之理亦無生故第二中
001_0663_b_06L言是諸生滅法者謂陰界等世俗法
001_0663_b_07L是法非無生者從分別動有生
001_0663_b_08L起故是就眞俗非一之門以顯動靜
001_0663_b_09L不雜亂義第三中言彼卽不共此者
001_0663_b_10L謂彼寂滅無生之法不與此生滅法
001_0663_b_11L共並故爲有斷常故者若彼與此共
001_0663_b_12L並有者此法生滅卽有斷邊彼法
001_0663_b_13L常寂卽有常邊同二乘過乖中道
001_0663_b_14L然佛所說一偈之義不墮斷常故
001_0663_b_15L此卽離於二不無動靜故亦不在一
001_0663_b_16L不在一住者不守一實一心性故
001_0663_b_17L離於二者擧體動靜非二法故
001_0663_b_18L知是事不可思議

001_0663_b_19L
若說法有一是相如毛輪2) [44] 水迷
001_0663_b_20L爲諸虛妄故

001_0663_b_21L
若見於法無是法同於空如盲無日 [119]
001_0663_b_22L說法如龜毛

001_0663_b_23L
此是第二破諸邪解邪解雖多大邪
001_0663_b_24L有二依甚深敎如言取義自謂究

001_0663_c_01L
첫째는 동과 정이 둘이 아니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곧 둘이 아니라는 그 하나를 일실과 일심이라고 말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이제의 도리를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과 유의 이문二門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두 가지 법만 있고 일실은 없다고 계탁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무이의 중도를 비방하고 부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잘못된 견해는 약을 복용하다가 병을 얻은 꼴이므로 치유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이제 그 허물을 드러내는데, 여기 두 게송에서 차례로 그것을 드러낸다.
처음에 말한 “제법을 하나뿐이라 설한다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실이 있다고 계탁하여75) 마치 자기가 계탁한 대로 일법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한 법의 상은 모륜과 같네.”는 그가 간주한 일실법의 모습이 마치 눈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모륜과 같은 것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처럼”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 말하면서 달려가 추구하는 것과 같아서 미혹하게 전도될 뿐이다. 일심이란 것이 있다고 계탁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모두 허망한 착각일 뿐이라네.”는 목마른 사슴이 물로 간주하고, 눈병 걸린 사람이 모륜으로 간주하며, 학사學士가 일심이라고 계탁하는 이와 같은 모든 계탁은 허망한 것이다.
다음으로 없다는 견해76)를 타파한다.
“만약 제법을 무라고 간주하면”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만 있고 일심법은 없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법을 허공처럼 보는 것이므로”는 그들이 일심은 공허한 도리와 같고 공허한 도리 이외에 본래 일실이란 없다고 계탁하는 것이다.
“맹인이 해가 없다고 하듯이”는 맹인으로 태어난 빈궁한 걸인이 본래 햇살을 본 적이 없으므로 눈 있는 자가 해가 있다고 설해 주어도 그 맹인은 없다고 하면서 해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전도일 뿐이다. 그들이 계탁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 그들은 본래 공과 유에 대해서만 배웠기 때문에 무이중도無二中道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무이중도를 설해 주는 사람이 있어도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를 중도에 비유한 까닭은

001_0663_c_01L難可化故一者聞佛所說動靜
001_0663_c_02L無二便謂是一一實一心由是誹
001_0663_c_03L撥二諦道理二者聞佛所說空有二
001_0663_c_04L計有二法而無一實由此誹撥
001_0663_c_05L無二中道是二邪解服藥成病
001_0663_c_06L難可治今顯彼過此二頌中次第
001_0663_c_07L顯之初言若說法有一者謂如前說
001_0663_c_08L計有一實如自所計說有一法故
001_0663_c_09L是相如毛輪者謂彼所計一實法相
001_0663_c_10L如目曀者所見毛輪故如燄水迷倒
001_0663_c_11L謂如渴鹿見燄謂水馳走而求
001_0663_c_12L直是迷倒計有一心亦如是故
001_0663_c_13L諸虛妄故者渴鹿見水曀者見輪
001_0663_c_14L學士計一如是諸計齊虛妄故
001_0663_c_15L破無見若見於法無者謂如前說
001_0663_c_16L計有二諦無一心法故是法同於空
001_0663_c_17L彼計一心同於空理空理之外
001_0663_c_18L本無一實故如盲無日倒者謂如
001_0663_c_19L生盲貧窮乞兒本未曾見日輪光明
001_0663_c_20L其有目者爲說有日盲者謂無
001_0663_c_21L信有日直是顚倒彼計亦爾由彼
001_0663_c_22L本來唯學空有而未曾聞無二中道
001_0663_c_23L雖有說者不信受故所以日輪
001_0663_c_24L「己」作「已」{甲}「燄」作「焰」次同{甲}

001_0664_a_01L해는 원만하고 대광명이 있어서 오직 맹인을 제외하고는 보지 못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의 경우도 또한 그렇다. 두루 원만하고 무결한 본각과 시각의 대광명을 비추어 믿지 않는 사람을 제외하고 그 속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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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거북 터럭 같다고 설하네.”는 저들 보지 못하는 이들은 일심법이 단지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 것이어서 마치 거북이 터럭과 같다고 설하니, 맹인이 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 바르게 취했음을 서술함


我今聞佛說    제가 지금에 불법을 듣고 나서
知法非二見    제법은 양변이 아님을 알았고
亦不依中住    중도에도 의지하지 않게 되니
故從無住取    무주를 통해 터득한 것이라네

이는 셋째로 바르게 취했음을 서술하는 것이다.
“제법은 양변이 아님을 알았고”는 중도법은 유와 무의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 곧 위의 둘째에서 해가 없다고 전도된 경우를 떠나 있는 것이다.
“중도에도 의지하지 않게 되니”는 비록 양변을 떠나 있지만 중도일실中道一實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곧 위의 첫째에서 모륜과 물의 경우처럼77) 허망한 것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저 양변78)의 과실을 떠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무주의 설법(詮)으로부터 설해진(所詮) 무주의 취지를 이해한다. 그러므로 “무주를 통해 터득한 것이네.”라고 한다.

(라) 설법한 자에게 예를 드림


如來所說法    여래께서 설해 주신 가르침은
悉從於無住    모두 무주를 통해서 나온다네
我從無住處    이에 저희도 무주의 도리에서
是處禮如來    그 맘으로 여래께 예배합니다

敬禮如來相    여래가 구비한 진리의 상호가
等空不動智    허공 같아 불변함에 예배하고
不著無處所    처소가 없음에도 집착이 없는
敬禮無住身    머묾 없는 법신에 예배합니다

이는 넷째로 설법자에게 예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의 한 게송은 설하는 사람에게 예배하고, 둘째의 제1구와 제2구는 설하는 사람의 지혜에 예배하며, 셋째의 제3구와 제4구는 설하는 사람의 몸에 예배한다.

㉮ 설하는 사람에게 예배함

첫째에서 “여래께서 설해 주신 가르침은 모두 무주를 통해서 나온다네.”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교법이 무주無住임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저희도 무주의 도리에서 그 맘으로 여래께 예배합니다.”라는 것은

001_0664_a_01L於中道者日輪圓滿有大光明唯除
001_0664_a_02L盲者無不見故一心亦爾周圓無
001_0664_a_03L有本始覺大光明照除不信者
001_0664_a_04L無不入故說法如龜毛者彼無見者
001_0664_a_05L說一心法但名無體猶如龜毛
001_0664_a_06L異盲人謂無日輪也

001_0664_a_07L
我今聞佛說知法非二見亦不依中住
001_0664_a_08L故從無住取

001_0664_a_09L
此是第三自申正取知法非二見者
001_0664_a_10L知中道法非有無解之所見故卽離
001_0664_a_11L第二無日之倒亦不依中住者雖離
001_0664_a_12L二邊不存中道一實而住卽離第一
001_0664_a_13L輪水之妄如是離彼二邊過失故
001_0664_a_14L佛敎無住之詮領解所詮無住之旨
001_0664_a_15L故言故從無住取也

001_0664_a_16L
如來所說法悉從於無住我從無住處
001_0664_a_17L是處禮如來

001_0664_a_18L
敬禮如來相等空不動智不着無處所
001_0664_a_19L敬禮無住身

001_0664_a_20L
此是第四禮能說者於中有三一者
001_0664_a_21L一頌禮能說者二者二句禮能說
001_0664_a_22L三者二句禮能說身初中言如
001_0664_a_23L來所說法悉從於無住者謂佛敎法
001_0664_a_24L順從無住故我從無住處是處禮如

001_0664_b_01L가르침에 의하여 무주의 도리를 따른 여래야말로 가장 존중해야 할 분임을 널리 알게 되었으므로 여기에서 설법자에게 예배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무주’라고 한 것은 이제二諦에도 집착하지 않고 중도中道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중도에 있지 않지만 양변을 떠나 있다. 이와 같은 것을 무주의 도리라 한다.

㉯ 설하는 사람의 지혜에 예배함

둘째에서 “여래가 구비한 진리의 상호가”라고 한 것은 상호로써 여래의 모습을 삼은 것이 아니라 부동지로써 여래의 모습을 삼은 것이다.
“허공 같아”는 여래의 지혜가 한량이 없고 끝이 없어 허공계처럼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다.
“불변함에”는 일체의 끝이 없는 삼세에 널리 통달한 것인데, 삼세는 흘러가지만 지혜의 작용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 설하는 사람의 몸에 예배함

셋째에서 “집착이 없는”이라 한 것은 법신이 양변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처소가 없음에도”는 중간에도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머묾 없는 법신에 예배합니다.”라고 한다.

(마) 아직 듣지 못한 것을 설해 달라고 청함


我於一切處    저희들은 일체 온갖 처소에서
常見諸如來    항상 모든 여래를 친견합니다
唯願諸如來    이제 바라건대 오직 여래께선
爲我說常法    저희에게 상법을 설해 주소서”

이것은 다섯째로 아직 듣지 못한 것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다. 여기서 제1구와 제2구는 자신이 항상 친견함을 서술하고, 제3구와 제4구는 상법常法을 설해 줄 것을 청한다.
자신이 서술한 뜻은 다음과 같다. “제가 모든 변견을 떠나서 무주의 지혜를 터득한 까닭에 낱낱의 미진 속에서 항상 시방의 한량이 없는 제불을 친견합니다. 시방세계의 모든 미진 속에서 한량이 없는 제불을 친견하지 못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일체 온갖 처소에서 항상 모든 여래를 친견합니다.”라고 한다. 『화엄경』에서 “하나의 미진 속에서 빠짐없이 한량이 없는 부처님을 친견한다. 하나의 미진 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미진 속에서도 또한 그렇다.”79)고 하였다.
이와 같은 위신력으로 영원한 법(常法)을 들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바라건대 상법을 설해 주심을 듣고자 한다는 것이다.

④ 과의 상주법常住法에 들어감

이하는 넷째로 과果의 상주법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여래의 설법이고, 둘째는 장자의 연설이며, 그 셋째는 대중이 획득한 이익이다.

가. 여래의 설법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설법을 허락하고, 둘째는 본격적인 설법이다.

가) 설법을 허락함

그때 여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선남자여, 그대들은 잘 듣거라.

001_0664_b_01L來者依敎得從於無住處彌知如來
001_0664_b_02L最可尊重故於是處禮能說者此中
001_0664_b_03L言無住者不住二諦亦不在中
001_0664_b_04L不在中而離二邊如是名爲無住處
001_0664_b_05L第二中言如來相者不以相好爲
001_0664_b_06L如來相以不動智爲如來相言等空
001_0664_b_07L謂如來智無量無邊等虛空界
001_0664_b_08L無所不遍故言不動者遍達一切無
001_0664_b_09L邊三世世有遷流智用不移故
001_0664_b_10L三中言不着者法身離二邊故無處
001_0664_b_11L所者中間無所住故故言敬禮無住
001_0664_b_12L身也

001_0664_b_13L
我於一切處常見諸如來唯願諸如來
001_0664_b_14L爲我說常法

001_0664_b_15L
此是第五問所未聞於中上半自申
001_0664_b_16L常對下之二句請說常法自申意
001_0664_b_17L我離諸邊得無住智故能一一
001_0664_b_18L微塵之中常見十方無量諸佛十方
001_0664_b_19L世界諸微塵中無處不見無量諸佛
001_0664_b_20L故言一切處常見諸如來如華嚴經
001_0664_b_21L於一微塵中普見無量佛如一微
001_0664_b_22L塵中一切塵亦然故有如是力
001_0664_b_23L聞常法所以願聞說常法也

001_0664_b_24L
爾時如來而作是言諸善男子汝等

001_0664_c_01L그대들을 위하여 영원한 법(常法)을 설하겠다.

이는 설법을 허락한 것이다.

나) 본격적인 설법

선남자여, 상법은 상법이 아니다.80) 그래서 언설도 없고 문자도 없으며, 진리도 없고 해탈도 없다. 없는 것도 없고 경계도 없지만 모든 허망과 단멸의 변견을 떠나 있다. 이 상법은 무상도 없지만 모든 상견과 단견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본다면 분별식이 그대로 상법이 된다. 이에 그 식이 항상 적멸하고 그 적멸도 또한 적멸하다.

이하는 둘째로 본격적인 설법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원한 증과(常果)를 설명하고, 둘째는 영원한 인행(常因)을 설명한다.

(가) 영원한 증과(常果)를 설명함

첫째에 두 구절이 있으니, 법의 영원함(法常)과 부처의 영원함(佛常)이다.

㉮ 법의 영원함

첫째에서 “상법은 상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사표로 삼은 법신의 자체는 생멸상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라 하고, 상주의 자성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언설도 없고 문자도 없다.”는 것은 설명하는 주체의 명칭과 언어가 없는 것이다.
“진리도 없고 해탈도 없다.”는 것은 설명되는 객체의 일실의一實義를 초월한 것이다.
“없는 것도 없고 경계도 없지만 모든 허망과 단멸의 변견을 떠나 있다.”는 것은 필경무畢竟無도 없고 또한 만유의 경계도 없는데, 만유의 경계가 없으므로 망집의 경계를 떠나 있고, 무無가 없으므로 단견의 경계를 떠나 있다. ‘변견’은 경계의 다른 명칭이다.
“이 상법은 무상도 없지만 모든 상견과 단견을 떠나 있다.”는 것은 무상이 없으므로 모든 단견이 없고, 또한 이것은 상법이므로 모든 상견을 떠나 있다. 곧 상견에 집착된 것은 상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상은 법의 영원함을 설명한 것이다.

㉯ 부처의 영원함

다음은 부처의 영원함을 드러낸다.
“분명하게 본다면 분별식이 그대로 상법이 된다.”는 것은 저 영원한 법을 구경에 분명하게 본다면 분명하게 보는 순간 제식이 상常이 된다. 왜냐하면 깨치기 이전에는 무명을 따라 본정심本靜心이 기동했지만, 깨친 이후는 분명하게 봄을 따라 본정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식이 항상 적멸하다.”는 것은

001_0664_c_01L諦聽爲汝衆等說於常法

001_0664_c_02L
此下第四入果常法於中有三一如
001_0664_c_03L來說二長者演其第三者大衆得
001_0664_c_04L初中有二許說正說此卽許說

001_0664_c_05L
善男子常法非常法非說亦非字
001_0664_c_06L諦非解脫非無非境界離諸妄斷際
001_0664_c_07L是法非無常離諸常斷見了見識爲常
001_0664_c_08L是識常寂滅寂滅亦寂滅

001_0664_c_09L
此下第二正說於中有二先說常果
001_0664_c_10L後示常因初中二句法常佛常
001_0664_c_11L中言常法非常法者謂佛所師法身
001_0664_c_12L之體離生滅相故曰常法離常住
001_0664_c_13L故非常法非說亦非字者絕能詮
001_0664_c_14L名言故非諦非解脫者超所詮實義
001_0664_c_15L非無非境界離諸妄斷際者
001_0664_c_16L畢竟無亦非有境非有境故離妄
001_0664_c_17L執境而非無故離斷見境際者
001_0664_c_18L界之異名也是法非無常離諸常斷
001_0664_c_19L見者非無常故離諸斷見而是法
001_0664_c_20L離諸常見常見所取非是法故
001_0664_c_21L已明法常次顯佛常了見識爲常者
001_0664_c_22L於彼常法究竟了見了見之時
001_0664_c_23L識爲常所以然者前隨無明動本
001_0664_c_24L靜心今隨了見歸本靜故是識常

001_0665_a_01L제식은 본래 생도 없고 멸도 없다. 곧 생멸이 없으므로 제식의 자성이 항상 적멸하다.
지금 분명하게 보는 순간, 이와 같은 적멸의 제식까지 영원히 적멸하므로 “그 적멸도 또한 적멸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저 적멸한 제식은 곧 무상법인데 그 무상법을 소멸시켜야 이에 상법이 터득되기 때문이다.
이하 「총지품」에서 이 뜻을 이어서 드러낸다. 또한 이 본래 적멸한 자성은 상의 자성(常性)을 고수하지 않으므로 “또한 적멸하다.”고 한다.

(나) 영원한 인행(常因)을 보여 줌

이하는 둘째로 그 영원한 인행(常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별적인 설명이고, 둘째는 총체적인 결론이다.

㉮ 개별적인 설명

개별적인 설명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진증관眞證觀이고, 둘째는 방편관方便觀이다.

a. 진증관眞證觀

선남자여, 제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는 마음을 적멸케 하지 않으니, 마음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을 터득한 자는 마음으로 항상 진증관을 행한다.

첫째에서 “제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라고 한 것은 초지 이상에서 일체법이 본래 적멸한 줄을 아는 것이다. 이미 기동이 없는 줄 알기 때문에 마음을 적멸케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적멸케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지所知의 적멸을 드러낸 것이다.
“적멸을 터득한 자는 마음으로 항상 진증관을 행한다.”는 것은 곧 증득의 주체인 마음이 상주하면서 증득의 대상이 되는 도리를 따라 생멸상을 떠나서 항상 진조관眞照觀(眞證觀)을 잃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b. 방편관方便觀

모든 명칭과 색상은 오직 어리석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81)임을 알아야 한다. 이는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써 제법을 분별한 것이지 그 밖의 다른 것이 명칭과 색상을 출현시킨 것이 아니다. 제법이 이와 같은 줄 알면 문자 및 언어에 휩쓸리지 않고, 마음마다 진실한 의미에 계합하여 아我를 분별하지 않는다.

이는 둘째로 방편관을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식의 심尋과 사思를 설명하고, 둘째는 여실지如實智를 드러낸다.

a) 유식의 심尋과 사思를 설명함

첫째의 “그 밖의 다른 것이 명칭과 색상을 출현시킨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에서 명칭은 사온四蘊(受蘊·想蘊·行蘊·識蘊)이고, 색상은 색온色蘊이다. 모든 불상응법不相應法은 가립된 것으로 이 명칭과 색상을 떠나서 다시는 별도의 체가 없다.

001_0665_a_01L寂滅者諸識本來無生無滅無生滅
001_0665_a_02L性常寂滅今了見時永滅如是
001_0665_a_03L寂滅之識故言寂滅亦寂滅也所以
001_0665_a_04L然者彼寂滅識是無常法所以滅彼
001_0665_a_05L乃得常故至下摠持品是義當顯
001_0665_a_06L又此本來寂滅之性不守常性故言
001_0665_a_07L亦寂滅

001_0665_a_08L
善男子知法寂滅者不寂滅心心常
001_0665_a_09L寂滅得寂滅者心常眞觀

001_0665_a_10L
此下第二示其常因於中有二別明
001_0665_a_11L摠結別中亦二先眞證觀後方便
001_0665_a_12L初中言知法寂滅者者初地已上
001_0665_a_13L知一切法本來寂滅故旣知無起
001_0665_a_14L不滅心不滅心者常寂滅故是顯
001_0665_a_15L所知之寂滅也得寂滅者心常眞觀
001_0665_a_16L是明能證之心常住隨所證理
001_0665_a_17L離生滅相而恆不失眞照觀故

001_0665_a_18L
知諸名色唯是癡心癡心分別分別
001_0665_a_19L諸法更無異事出於名色知法如是
001_0665_a_20L不隨文語 [120] 心心於義不分別我

001_0665_a_21L
是第二明其方便觀於中有二先明
001_0665_a_22L唯識尋思後顯其如實智初中言更
001_0665_a_23L無異事出於名色者名謂四蘊
001_0665_a_24L是色蘊諸不相應皆假建立離此

001_0665_b_01L그러므로 모든 유위의 현상은 다 명칭과 색상에 섭수된다. 이와 같이 제법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서 경계가 없고 경계를 떠나서 마음이 없다. 이것을 유식의 심尋과 사思라 한다.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心如工畫師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畫種種五陰    온갖 오음을 그려 내네
一切世間中    일체의 세계 가운데에
無法而不造    만들어 내지 못함 없네

如心佛亦爾    마음처럼 부처도 그렇고
如佛衆生然    불처럼 중생도 그러하며
心佛及衆生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是三無差別    이 셋은 차별이 없다네82)
故已明尋思    이상은 심과 사를 설명한 것이다.

b) 유식의 여실지如實智를 드러냄

다음으로 여실지를 드러낸다.
“제법이 이와 같은 줄 알면 문자 및 언어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은 명名의 심·사에 의해 이끌려 나온 여실지이다.
“마음마다 진실한 의미에 계합한다.”는 것은 뜻(義)의 심·사에 의해 이끌려 나온 여실지이기 때문이다. 인아와 법아에는 모두 여실지의 뜻이 없기 때문에 그 속에서 아를 분별하지 않는다.

㉯ 총체적인 결론

그래서 아我가 가명인 줄 알면 곧 적멸을 터득한다. 만약 적멸을 터득하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한다.”

이는 둘째로 앞의 두 가지에 대해 총체적으로 결론83)지은 것이다. 앞의 방편관을 결론지어 진증관을 터득하고, 또한 앞의 진증관을 결론지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과를 터득한다.

나. 장자의 연설

이하는 둘째84)로 장자가 연설하는 것이다. 여덟 게송에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의 두 게송 반은 부처님 교법의 뜻을 판별하고, 둘째의 다섯 게송은 양변의 집착을 타파하며, 셋째의 마지막 두 구도 또한 무이관無二觀에 대한 것이다.


001_0665_b_01L名色更無別體故諸有爲之事皆爲
001_0665_b_02L名色所攝如是諸法唯心所作
001_0665_b_03L心無境離境無心如是名爲唯識尋
001_0665_b_04L如華嚴經言心如工畵師畵種
001_0665_b_05L種五陰一切世間中無法而不造
001_0665_b_06L如心佛亦爾如佛衆生然心佛及衆
001_0665_b_07L是三無差別故已明尋思次顯
001_0665_b_08L如實智知法如是不隨文語者是名
001_0665_b_09L尋思所引如實智故心心於義不分
001_0665_b_10L別我者是義尋思所引如實智故
001_0665_b_11L人法二我皆無有義所以於中不
001_0665_b_12L分別故

001_0665_b_13L
知我假名卽得寂滅若得寂滅卽得
001_0665_b_14L阿耨多羅三藐三菩提

001_0665_b_15L
此是第二摠結前二結前方便而
001_0665_b_16L得眞觀又結眞觀得菩提果

001_0665_b_17L
爾時長者梵行聞說是語而說偈言

001_0665_b_18L
名相分別事及法名爲三眞如正妙智
001_0665_b_19L及彼成於五我今知是法斷常之所繫
001_0665_b_20L入於生滅道是斷非是常如來說空法
001_0665_b_21L遠離於斷常

001_0665_b_22L
此下第二長者演說於中八頌
001_0665_b_23L有三意初二頌半判佛敎意次有
001_0665_b_24L五頌破二邊執最後二句亦無二

001_0665_c_01L
가) 부처님 교법의 뜻을 판별함

그때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서 게송을 설하여 여쭈었다.

名相分別事    명칭과 색상 및 분별망상의
及法名爲三    이런 법들을 셋이라 말하고
眞如正妙智    진여 및 정묘지까지 합하면
及彼成於五    그것은 모두 다섯이 된다네85)

我今知是法    제가 지금 이해하는 법이란
斷常之所繫    단견과 상견에 얽매여 있고
入於生滅道    생멸의 가르침에 들어 있어
是斷非是常    단멸일 뿐이지 상법 아닌데

如來說空法    여래가 설한 공의 가르침은
遠離於斷常    단상견을 멀리 떠나 있다네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앞의 두 게송은 양변의 가르침에 떨어지는 것을 설명하고, 둘째로 두 구는 양변의 가르침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가) 양변의 가르침에 떨어지는 것을 설명함

첫째에서 “명칭과 색상”이라 한 것은 명名·구句·자字이다. 구는 명으로 성취된 것이고, 자는 명이 의지하는 것이니, 모두 명을 나타낼 수 있으므로, 이를 합하여 ‘명칭과 색상’이라 한다.
“분별망상(分別事)”은 유루의 심과 심법의 행위이다.
“이런 법들을”은 앞의 명칭과 색상의 두 가지를 제외한 모든 법상이다. 곧 명名·구句의 소전과 분별의 소연으로서, 십색처十色處 및 법처法處 중의 색불상응 등 모든 법상을 가리킨다.
명칭과 색상과 분별망상의 세 가지 법은 같은 부류로서 잡염상雜染相임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별도로 “셋이라 말한다.”고 설한다.
“진여”는 정지正智의 경계이다.
“정묘지”는 근본지와 후득지의 이지二智이다.
“그것은 모두”라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를 가리킨다. 그래서 여기 두 가지와 앞의 세 가지를 합하면 다섯 가지가 된다. 이것은 삼승교문의 법상을 언급한 것이다.
“제가 지금 이해하는 법이란 단견과 상견에 얽매여 있고”는 저 삼승교문에서 설한 바 다섯 가지가 단견과 상견의 집착에서 떠나 있지 못함을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 네 가지 법(명칭·색상·분별망상·진여) 가운데 앞의 세 가지 법은 생멸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단견에 집착하는 경계를 떠나 있지 못하고, 또 한 가지 진여법은 상주하는 자성으로서 상견에 집착하는 경계를 떠나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멸의 가르침에 들어 있어 단멸일 뿐이지 상법 아니다.”라는 것은 앞의 세 가지 및 정묘지正妙智의 법은 모두 사상四相을 지니고 있어 생멸도生滅道에 포함되는 것으로 곧 단견의 입장이므로 상견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점을 별도로 설명한 것이다. 곧 진여는 상유도常有道에 포함되는 것으로 곧 상견의 입장이므로 단견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나) 양변의 가르침을 떠나 있음을 드러냄

“여래가 설한 공의 가르침은 단상견을 멀리 떠나 있다네.”는 일승교에서 설하는 삼공법은 단견과 상견의 과실을 멀리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저 앞에서 설한 “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고, 공공도 또한 공한 것이며, 소공도 또한 공한 것을 말한다.”86)와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삼공은 진과 속을 부정하지도 않고,

001_0665_c_01L初中有二前二頌明墮二邊敎
001_0665_c_02L後二句顯離二邊敎初中言名相者
001_0665_c_03L謂名句字句是名所成字是名所資
001_0665_c_04L皆能表名合爲名相也分別事者
001_0665_c_05L謂諸有漏心心法事言及法者謂除
001_0665_c_06L前二所有法相名句所詮分別所緣
001_0665_c_07L謂十色處及法處中色不相應等諸
001_0665_c_08L法相也是三一類明雜染相所以
001_0665_c_09L別說名爲三也言眞如者謂正智
001_0665_c_10L正妙智者本後二智言及彼者
001_0665_c_11L及彼前三此二及彼三合成於五事
001_0665_c_12L是擧三乘敎門法相我今知是法斷
001_0665_c_13L常之所繫者明彼敎門所說五事
001_0665_c_14L離斷常二見所着所以然者彼四種
001_0665_c_15L帶生滅相不離斷見所着之境
001_0665_c_16L其眞如法是常住性不離常見所取
001_0665_c_17L之境故入於生滅道是斷非是常者
001_0665_c_18L別明前三及正智法皆帶四相
001_0665_c_19L生滅道直是斷邊異於常邊卽顯
001_0665_c_20L眞如入常有道直是常邊異斷邊
001_0665_c_21L如來說空法遠離於斷常者
001_0665_c_22L一乘敎說三空法遠離斷常二邊過
001_0665_c_23L所以然者如前所說空相亦空
001_0665_c_24L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三空

001_0666_a_01L진과 속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비록 동動과 정靜을 떠나 있으면서 그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단견의 입장과 상변을 멀리 떠나 있다.

나) 양변의 집착을 타파함

이하는 둘째로 양변의 집착을 타파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의 네 게송은 유견의 입장의 집착을 타파하고, 둘째의 한 게송은 공견의 입장의 집착을 부정한다.

(가) 유견의 입장의 집착을 타파함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앞의 두 게송 반은 그 유집을 타파하고, 뒤의 한 게송 반은 저 진공을 보여 준다.

㉮ 그 유집을 타파함

첫째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의 한 게송 반은 인연집을 타파하고, 둘째의 한 게송은 그 밖의 삼연三緣을 타파한다.

a. 인연집을 타파함


因緣無不生    인연은 본무로 불생이 되니
不生故不滅    불생인 까닭에 불멸이 되네87)

因緣執爲有    인연을 곧 유라고 집착하면
如採空中華    허공 꽃을 따려는 행위이고
猶取石女子    아이 낳으려는 석녀와 같아
畢竟不可得    필경에 결코 가능하지 않네

첫째에서 “인연은 본무로 불생이 되니”라고 한 것은 근본식 중의 일체종자가 이숙식에 즉해 있거나 떠나 있는 것이 모두 불가득이라는 것이다. 즉해 있다면 이숙과 같을 것이고, 떠나 있다면 토끼의 뿔과 같을 것이다. 즉해 있지도 않고 떠나 있지도 않고 또 존재하지도 않아서 마치 물병이나 집처럼 단지 명칭만 있을 뿐이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지만 삼승의 언교에 의거한 학자는 인연종자가 실유實有한 것이라고 굳게 집착한다. 곧 어리석은 자가 허공의 꽃을 따려는 것과 다르지 않고, 또 석녀가 아이를 낳으려는 것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연의 경우도 영원히 불가득하다. 여기에서 허공의 꽃은 오염된 종자를 비유한 것인데 그것을 따서 없애려 하기 때문이고, 석녀의 아이는 청정한 종자를 비유한 것인데 그것을 낳아서 기르려 하기 때문이다.

b. 그 밖의 삼연三緣을 타파함


離諸因緣取    인연으로 생을 취하지 말고
亦不從他滅    거기서 소멸 취함도 안 되며
及於己義大    자기와 의와 사대까지 없어
依如故得實    진여에 의지해 실제를 얻네88)

이는 둘째로 그 밖의 세 가지 인연(三緣)을 타파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종자의 인연을 떠났지만 그 밖의 세 가지 인연을 취하고 그로부터 발생한다고 계탁하면 그와 같은 집착은 결코 도리에 맞지 않다. 그래서 경문에서 또한 “거기서 소멸을 취해도 안 되네.”라고 한다. 여기에서 ‘거기서’라고 한 것은

001_0666_a_01L壞眞俗不存眞俗雖離動靜不住
001_0666_a_02L中間所以遠離斷常邊也

001_0666_a_03L
因緣無不生不生故不滅因緣執爲有
001_0666_a_04L如採空中華猶取 [121] 石女子畢竟不可得

001_0666_a_05L
此下第二破二邊執於中有二一者
001_0666_a_06L四頌破有邊執二者一頌奪空邊
001_0666_a_07L初中有二前二頌半破其有執
001_0666_a_08L後一頌半示彼眞空初中亦二
001_0666_a_09L一頌半破因緣執次有一頌破餘
001_0666_a_10L三緣初中言因緣無不生者謂本
001_0666_a_11L識中一切種子與異熟識若卽若
001_0666_a_12L皆不可得卽如異熟離猶兎角
001_0666_a_13L不卽不離亦無所有如甁舍等
001_0666_a_14L有名故由是道理無生無滅而依
001_0666_a_15L三乘言敎學者定執實有因緣種子
001_0666_a_16L不異愚者欲採空華亦如欲取石女
001_0666_a_17L之子同彼因緣永不可得此中空
001_0666_a_18L喩於染種爲採滅故石女兒者
001_0666_a_19L喩於淨種爲取養故

001_0666_a_20L
離諸因緣取亦不從他滅及於1)己義
001_0666_a_21L依如故得實

001_0666_a_22L
此是破餘三緣若有離諸種子因緣
001_0666_a_23L取餘三緣計從彼生作如是執
001_0666_a_24L不應理如經亦不從他滅故此言

001_0666_b_01L증상연과 소연연이다. 마치 안식의 발생은 안근이 색경을 반연함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안근과 색경은 안식과 동시이지만 식의 자성은 아니므로 ‘거기서’라고 한다. 그러나 등무간연은 비록 식과 동류일지라도 자체가 이미 소멸한 까닭에 ‘소멸’이라 한다. ‘거기서(증상연과 소연연)’와 ‘소멸’은 모두 자성이 없다. 이런 까닭에 식의 발생도 또한 세 가지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
다음에 말한 “자기와 의와 사대까지 없어”는 다시 어떤 사람이 “오온·십팔계·십이입 등의 법은 미래세까지도 각각 자기의 자체가 있으므로 아직은 발현해 있지 않지만 이 자기의 자체로부터 언제든지 그 현재에 발생한다.”고 하는데, 이 계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기와 의와 사대까지 없어”라고 한다.
제2구의 “(거기서 소멸 취함도) 안 되며(不從)”라는 말은 제3구에까지 걸리는 말이다.89) 여기에서 “의義”라고 한 것은 오음과 십팔계와 십이입이고, “사대(大)”는 지·수·화·풍의 사대이니, 앞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법을 본유本有의 자체라고 계탁하는 까닭에 “자기와 의와 사대”라 하였다.
“진여에 의지해 실제를 얻네.”는 범행장자 자신이 제유諸有에 대한 집착을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은 진여의 도리에 의거하여 타파한 것이므로 실제의 뜻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 저 진공을 보여 줌


是故眞如法    이와 같은 까닭에 진여법은
常自在如如    늘 자재하고 또 여여하므로
一切諸萬法    일체 모든 삼라만상의 법도
不如識所化    모든 분별식의 변화 아니네90)

離識法卽空    식을 떠나면 제법이 공이니
故從空處說    공의 도리를 따라 설한다네

이는 둘째로 저 진공의 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까닭에”는 앞에서 말한 제유諸有에 대한 집착은 모두 허망하므로 그것을 타파하는 자는 실제를 터득하기 때문이다. 진여는 부동하므로 허망한 법은 성취되지 못한다.
“모든 분별식의 변화”는 모든 분별식으로 계탁된 바이다. 분별식으로 계탁된 모습은 도리가 없고 단지 분별의 생각에 따라 있는 것이므로 ‘변화’라고 한다. 곧 제법이 진여가 아니고 모든 분별식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분별식을 떠나 있는 제법은 공하여 무소유하다. 이런 까닭에 나(범행장자)는 공의 도리에서 진여를 설한다.


001_0666_b_01L他者謂增上緣及所緣緣如眼識
001_0666_b_02L依眼緣色如是眼色與識俱時
001_0666_b_03L而非識性故名爲他等無間緣
001_0666_b_04L是識類而體已滅故名爲滅若他
001_0666_b_05L若滅皆無自性是故識生亦不從
001_0666_b_06L次言及於己義大者復有計言蘊
001_0666_b_07L界等法未來世中各有己體而未
001_0666_b_08L生現從此己體而生現在爲遮此
001_0666_b_09L故言亦不從及於己義大上句不
001_0666_b_10L從之言貫於此下句故此言義者
001_0666_b_11L謂陰界入大者四大如前說故
001_0666_b_12L此等法本有自軆以之故言己義
001_0666_b_13L大也依如故得實者謂我能破諸有
001_0666_b_14L執者依如理破故得實義

001_0666_b_15L
是故眞如法常自在如如一切諸萬法
001_0666_b_16L不如識所化不惑
作非
離識法卽空故從空
001_0666_b_17L處說

001_0666_b_18L
此是第二示眞空法言是故者
001_0666_b_19L前執有皆是虛妄其能破者得實
001_0666_b_20L之故眞如不動妄法不成也識所化
001_0666_b_21L謂識所計彼所計相理無所有
001_0666_b_22L直從情有故名所化諸法非如識
001_0666_b_23L所化故離識之法空無所有是故
001_0666_b_24L我從空處說如

001_0666_c_01L
(나) 이승이 공견에 집착함을 부정함


滅諸生滅法    모든 생멸의 법을 소멸시켜
而住於涅槃    열반의 경지에 머문다 해도
大悲之所奪    대비로써 열반 마음 버리고
涅槃滅不住    열반을 멸하여 머물지 않네

위에 나온 경문은 범부가 있음에 집착함을 타파한 것이다. 지금 이 게송도 또한 이승이 공에 집착하는 것을 부정한 것이다. 즉 이승인은 모든 몸과 지혜 등 생멸법을 소멸시켜 열반에 들어가 거기에서 팔만 겁을 머물거나 만겁을 머물지만, 제불의 동체대비를 말미암아 그 열반을 버리고 다시 대비의 마음을 일으킨다. 대비심을 일으킬 때 열반이 곧 소멸된다. 마치 대상大商의 주인이 그 화성化城을 없애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그 열반에 다시 머물지 않는다. 이승인들이 무심할 경우91)에는 아직 생멸법을 제대로 타파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불은 그 열반까지도 버리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것을 인유하여 이승인들이 아직 실제에 들어가지 못한 생각을 방지해 주었다.
이상은 유와 무의 양변을 타파한 것이다.

다) 무이관無二觀을 보여 줌


轉所取能取    소취와 능취를 전변해야 곧
入於如來藏    여래장에 들어갈 수 있다네”

이는 셋째로 무이관無二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미 범부와 성인의 양변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였으므로, 지금 저 범부와 성인의 두 대중을 전변시켜 주체와 대상이 평등한 무이관에 들도록 한 것이다.
이상의 여덟 게송은 범행장자가 연설한 것이다.

다. 대중이 터득한 이익

그때 대중이 설법한 그 뜻을 듣고 모두 정명正命을 터득하고 여래와 여래장해에 들어갔다.92)

이는 셋째로 대중이 터득한 이익이다.
“정명을 터득하였다.”는 것은 유변과 무변을 떠나서 중도의 올바른 혜명을 터득한 것이다.
“여래에 들어갔다.”는 것은 여래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여래장해에 들어갔다.”는 것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간 것이다.

2. 총체적으로 모든 의심을 해결함(「총지품」)

여기 「총지품」에서는 앞의 모든 품의 의문점을 해결하고 요의를 총지하여 잊지 않도록 하였다.

001_0666_c_01L
滅諸生滅法而住於涅槃大悲之所奪
001_0666_c_02L涅槃滅不住

001_0666_c_03L
上文已破凡夫執有此頌亦奪二
001_0666_c_04L乘住空謂二乘人滅諸身智生滅之
001_0666_c_05L入於涅槃於中八萬劫住乃至
001_0666_c_06L十千劫住而由諸佛同軆大悲奪彼
001_0666_c_07L涅槃令還起心起心之時涅槃卽
001_0666_c_08L如大商主滅其化城是故於中
001_0666_c_09L不復住也彼無心時不得正破
001_0666_c_10L顯諸佛奪彼涅槃因是遮彼未入者
001_0666_c_11L上來已破有無二邊

001_0666_c_12L
轉所取能取入於如來藏

001_0666_c_13L
此是第三示無二觀已破凡聖二邊
001_0666_c_14L之執故今轉彼凡聖二衆令入能所
001_0666_c_15L平等之觀上來八頌長者演也

001_0666_c_16L
爾時大衆聞說是義皆得正命入於
001_0666_c_17L如來如來藏海

001_0666_c_18L
此是第三大衆得益得正命者離有
001_0666_c_19L無邊而得中道正慧命故入如來者
001_0666_c_20L已入如來智之分故入如來藏海者
001_0666_c_21L入於本覺深廣義故

001_0666_c_22L摠持品2)第八 [45]

001_0666_c_23L
此中決前諸品中疑摠持要義而不
001_0666_c_24L「己」作「已」次同{甲}「第八」無{甲}

001_0667_a_01L그러므로 행하는 것을 따라 ‘총지’라 한다. 또한 지장보살이 이미 문의다라니文義陀羅尼를 터득한 까닭에 모든 품에 들어 있는 경문의 뜻을 총지하고, 대중이 일으킨 의심의 내용을 기억해서 차례대로 질문하여 모든 의심을 잘 해결하였다. 그러므로 묻는 주체의 입장에서 ‘총지’라 한다.93)
「정설분」을 크게 분류하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미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은 이전 품까지 마쳤다. 이하는 둘째로 총체적으로 모든 의심을 해결한 것이다. 경문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청하고, 둘째는 허락하며, 셋째는 해결해 주고, 넷째는 이해시킨다.

1) 청함, 2) 허락
그때 지장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을 하고 한 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부처님께 사뢰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제가 대중을 관찰해 보니 그 마음에 의심하는 것이 있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래께서는 그 의심을 없애 주려 하시니, 제가 대중을 위하여 의심나는 바를 여쭙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써 불쌍하게 여기어 질문을 허락해 주십시오.”94)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여, 그대가 이와 같이 중생을 제도하니, 그것은 곧 대비로서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대는 마땅히 자세히 질문하라. 그대를 위해 설법을 해 주겠다.”

이는 질문과 답변으로서 곧 청함과 허락이다.
여기에서 청하는 자는 지장보살이다. 이 사람은 이미 동체대비同軆大悲를 터득하여 일체중생의 선근을 생장시키니, 마치 대지가 모든 초목을 발생시켜 주는 것과 같다. 또 다라니가 지니고 있는 모든 공덕으로 일체중생에게 끝없이 베풀어 준다. 마치 큰 보배창고(大寶藏)의 진보珍寶가 끝없는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뜻을 말미암아 지장이라 한다. 지금 이 「총지품」에서는 모든 의혹을 해결하고, 모든 신해를 발생하며, 모든 것을 결단하는 보배를 나타내어 법을 추구하는 대중에게 베풀어 준다. 이처럼 뜻이 지장이라는 명칭95)에 합당하므로 청문請問할 수 있다.

3) 해결해 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제법이 어째서 인연으로 발생한 것(緣生)이 아닙니까?”

001_0667_a_01L忘失故從所爲名曰摠持又地藏
001_0667_a_02L菩薩已得文義陁羅尼故摠持諸品
001_0667_a_03L所有文義及憶大衆起疑之處次第
001_0667_a_04L發問善決諸疑故從能問名曰摠
001_0667_a_05L

001_0667_a_06L
爾時地藏菩薩從衆中起至于佛前
001_0667_a_07L合掌胡跪而白佛言尊者我觀大衆
001_0667_a_08L心有疑事猶未得決今者如來欲爲
001_0667_a_09L除疑我今爲衆隨疑所問願佛慈悲
001_0667_a_10L垂哀聽許佛言菩薩摩訶薩汝能如是
001_0667_a_11L救度衆生是大悲愍不可思議汝當
001_0667_a_12L廣問爲汝宣說

001_0667_a_13L
正說之內大分有二別明觀行
001_0667_a_14L在於前此下第二摠決諸疑就文
001_0667_a_15L有四初請次許三決四領此問
001_0667_a_16L與答是請及許此能請者名地藏
001_0667_a_17L是人已得同軆大悲生長一切衆
001_0667_a_18L生善根猶如大地生諸草木以陁羅
001_0667_a_19L持諸功德惠施一切而無窮盡
001_0667_a_20L如大寶藏珍寶無盡由是二義
001_0667_a_21L爲地藏今此品中決諸疑惑生諸
001_0667_a_22L信解出諸決斷之寶以施求法之衆
001_0667_a_23L義當其名故能請問

001_0667_a_24L
地藏菩薩言一切諸法云何不緣生

001_0667_b_01L
그때 여래께서 이 뜻을 설법해 주려고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若法緣所生    “만약 일체법이 인연의 소생이라면
離緣可無法    연을 떠나서는 일체법이 없으리라
云何法性無    본래부터 일체법의 자성이 없는데
而緣可生法    연으로부터 발생할 법인들 있으랴”

이하는 셋째로 모든 의심을 곧장 해결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여섯 가지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해결해 주고, 둘째는 한 가지 품96)의 세 가지 의심을 순차로 없애 준다.

(1) 앞의 여섯 가지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해결해 줌

첫째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개별적으로 해결해 주고, 둘째는 총체적으로 결정해 준다.

① 개별적으로 해결해 줌

첫째의 개별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은 여섯 가지 의심을 개별적으로 해결해 주는데, 곧 나중 것부터 앞의 것을 향하여 점차 거꾸로 해결해 준다. 그러므로 지금 이 문답은 「여래장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해 준다.

가. 「여래장품」에서 일으킨 의심을 해결해 줌

「여래장품」에서 “인연은 본무로 불생이 되니 불생인 까닭에 불멸이 되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주체의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여 “그 과보인들 어찌 인연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의심한다. 그러므로 그 의심에 대하여 인연으로 발생한 것(緣生)을 질문한다. 이에 여래께서 한 게송으로 그 의심을 곧장 해결해 준다. 제1구와 제2구는 본래의 집착을 결정해 준 것이다. 제3구와 제4구는 그렇게 인연이 발생한 것을 타파해 준다. 이 뜻을 제대로 나타내면 “인연은 제법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이 본래 없는 법을 기대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은 비량比量을 말미암아 저 의심을 해결해 준 것이다.

나. 「진성공품」에서 일으킨 의심을 해결해 줌

이하는 둘째로 「진성공품」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진성공품」에서 “내 설법은 그대와 중생들을 위한 것으로서 있다(在)든가 발생한다(生)고 설한다. 그러므로 불가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설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만약 저 경문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설법한 경우가 있으므로 그 설법은 부처님의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 설법을 무생이라 말하는가.”라고 의심한다. 그러므로 이 의심을 없애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다.

001_0667_b_01L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

001_0667_b_02L
若法緣所生離緣可無法云何法性無
001_0667_b_03L而緣可生法

001_0667_b_04L
此下第三正決諸疑於中有二
001_0667_b_05L六品六疑却次而決二者一品
001_0667_b_06L三疑順次而遣初中亦1) [46] 一者別
001_0667_b_07L二者摠定初別決中別決六疑
001_0667_b_08L從後向前漸却而決今此問答
001_0667_b_09L如來藏品中起疑彼言因緣無不生
001_0667_b_10L不生故不滅於中執有能生因緣
001_0667_b_11L疑其果何不緣生故乘彼疑以問緣
001_0667_b_12L如來一頌正決是疑於中上半
001_0667_b_13L定彼本執下半乘彼破其緣生
001_0667_b_14L意正立緣不生法望無法故如望兎
001_0667_b_15L由是比量彼疑決矣

001_0667_b_16L
爾時地藏菩薩言法若無生云何說
001_0667_b_17L法從心生於是尊者而說偈言

001_0667_b_18L
是心所生法是法能所取如醉眼空華
001_0667_b_19L是法然非彼

001_0667_b_20L
此下第二決眞性空品中起疑
001_0667_b_21L言我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
001_0667_b_22L是故說之依此疑云若依彼文
001_0667_b_23L有說法其所說法從佛心生云何
001_0667_b_24L而言法無生耶爲遣此疑卽有二重

001_0667_c_01L첫째는 그대로 없애고, 둘째는 거듭 해결한다. 지금 이 문답은 첫째의 그대로 없애는 것이다.

가) 그대로 없애 줌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제법이 만약 무생이라면 어떻게 설법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 설법은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 아닙니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是心所生法    “마음으로부터 법이 발생된 것이라면
是法能所取    그 법은 능과 소에 집착한 것이라네
如醉眼空華    술에 취한 눈에 보이는 공화와 같다
是法然非彼    그러나 지금 이 법은 그와 다르다네”

“마음으로부터 법이 발생된 것이라면 그 법은 능과 소에 집착한 것이라네.”는 지금 그대(지장보살)가 계탁하고 있는 제법은 곧 망심으로서 능취와 소취이다. 그러므로 저 술에 취한 사람의 눈에 보이는 허공의 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법은 그와 다르다네.”는 그대가 계탁하여 마음이 발생시킨 제법은 저 공화의 법과 또한 같지만, 저기에서 여래가 설한 제법은 그대가 계탁하여 발생시킨 제법과는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뜻은 “그대가 계탁한 제법은 공하여 무소유한데, 그것은 마치 공화처럼 소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여래가 설한 제법은 언설을 떠나고 사려를 단절한 것이므로 소취와 능취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 거듭 해결해 줌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제법이 만약 그와 같다면 제법은 곧 상대가 없으니 곧 제법은 마땅히 저절로 성취된 것이 됩니다.”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法本無有無    “제법은 본래 유와 무가 없는데
自他亦復爾    자상과 타상도 또한 그와 같아97)
不始亦不終    시작도 없고 또한 끝도 없으며
成敗卽不住    형성과 소멸에도 또 집착 없네”

이것은 둘째로 거듭 해결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하고, 둘째는 해결해 준다.
여기에서 질문한 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부처님께서 설한 언교의 제법은 소취가 아니므로 공화가 필경무인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면 그 제법은 곧 마땅히 저절로 성취된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저 진여와 같다.”
이런 질문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 이 게송을 설한 것이니,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설한 제법은 명언名言을 단절해 있기 때문에 본래 유무·자타·시종도 없고, 형성되었다든가 소멸되었다든가 하는 것에도 집착이 없다. 그런데 어찌 자연적으로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저 인因에 상위과相違過98)가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말하자면 “제법은 형성되었다든가 소멸되었다든가 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상대(待)가 없기 때문이다. 저 소취가 없어 진여와 같다.”는 것이다.

001_0667_c_01L一者直遣二者重決此卽直遣
001_0667_c_02L是心所生法是法能所取者今汝所
001_0667_c_03L計心所生法直是妄心能取所取
001_0667_c_04L醉酒眼所見空華是法然非彼者
001_0667_c_05L汝所計心所生法如彼空華是法亦
001_0667_c_06L非彼所說法同汝所計生此意
001_0667_c_07L正明汝所計法空無所有是所取
001_0667_c_08L猶如空華我所說法離言絕慮
001_0667_c_09L所取能取皆不可言

001_0667_c_10L
爾時地藏菩薩言法若如是法卽無
001_0667_c_11L無待之法法應自成於是尊者
001_0667_c_12L說偈言

001_0667_c_13L
法本無有無自他亦復爾不始亦不終
001_0667_c_14L成敗卽不住

001_0667_c_15L
此是第二重決於中有二先難後決
001_0667_c_16L是難意云若佛所說言敎之法非所
001_0667_c_17L取故不如空華畢竟無者是卽此法
001_0667_c_18L應自然成以無待故猶如眞如
001_0667_c_19L決此難故說是偈是偈意言我所
001_0667_c_20L說法絕名言故本無有無自他始
001_0667_c_21L若成若敗卽不得住云何得言
001_0667_c_22L自然成耶是顯彼因有相違過謂法
001_0667_c_23L無成敗以無待故如無所取又如
001_0667_c_24L「二」作「一」{甲}

001_0668_a_01L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저 지장보살의 질문은 성립되지 못한다. 질문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벌써 의심은 해결된 것이다.

다. 「입실제품」에서 일으킨 의심을 해결해 줌

이하는 셋째로 「입실제품」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입실제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 중생심과 중생상의 경우에도 그 상이 또한 여래이듯이 중생의 마음도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은 실로 여래와 다른 경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그 도리로 보면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본래청정한 마음이 그대로 진여의 도리이고, 본래청정한 자성이 그대로 열반이다. 그런데 만약 열반이 공무空無하다면 그것은 마땅히 사무邪無로서 진여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없애 주기 위하여 제법을 모두 진여라 설한다.
경문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인정이며, 셋째는 이해시켜 주고, 넷째는 서술한다.

가) 질문, 나) 인정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모든 법상은 곧 본래 열반입니다. 열반과 공상도 또한 그와 같으므로 그런 법99)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법은 마땅히 진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런 제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 제법은 진여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질문한 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공의 뜻으로 보자면 일체 모든 법상은 곧 본래청정한 열반이다. 또 열반과 그 공상이 서로 어우러지면 그것은 곧 열반과 공의 차별이 없는 일미법이다. 이러한 제법이야말로 마땅히 진여일 것이다.”
곧 저 위에서 집착한 것을 반론하려는 까닭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둘째로 답변에서는 질문한 바와 같음을 인정한 것이다.

다) 이해시켜 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제법의 진여상은 함께하는 것(共)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도 아니며 의취意取도 아니고 업취業取도 아닌 것으로 곧 모두 공적합니다. 공적한 일심법은 모두 갖추어 취할 수가 없고 또한 마땅히 적멸입니다.”

이것은 셋째로 이해시키는 것으로 감추어져 있는 의심(詰難)을 없애는 것이다.
앞의 설명을 듣고 다음과 같은 의심(詰難)을 일으킨다. “본래 열반이라면 이미 유일한 진여일 것이다.

001_0668_a_01L眞如由是道理彼難不成難不成
001_0668_a_02L所疑決矣

001_0668_a_03L
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相卽本
001_0668_a_04L涅槃涅槃及空相亦如是無是等法
001_0668_a_05L是法應如佛言無如是法是法是如

001_0668_a_06L
此下第三決入實際品中起疑彼言
001_0668_a_07L大力菩薩言衆生心相相亦如來
001_0668_a_08L衆生之心應無別境佛言如是衆生
001_0668_a_09L之心實無別境何以故心本淨故
001_0668_a_10L理無穢故有依是文作是念言
001_0668_a_11L淨之心正是如理本來淸淨自性
001_0668_a_12L涅槃若使涅槃亦空無者應是邪
001_0668_a_13L不爲如理爲遣是疑故說皆如
001_0668_a_14L就文有四先問次許三領四述
001_0668_a_15L初問意言若以空義一切諸法相
001_0668_a_16L卽是本來淸淨涅槃復融涅槃及其
001_0668_a_17L空相卽無涅槃及空差別是一味法
001_0668_a_18L是法應如反彼所執故作是問
001_0668_a_19L二答中許如所問

001_0668_a_20L
地藏菩薩言不可思議如是如相
001_0668_a_21L共不共意取業取卽皆空寂空寂心
001_0668_a_22L俱不俱一本
作可
[122] 亦應寂滅

001_0668_a_23L
此是第三領解爲遣伏難有聞前說
001_0668_a_24L作是難言本來涅槃旣是一如

001_0668_b_01L그런데도 만약 열반과 그 공상이 호융한다면 그것은 제2의 진여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 진여는 함께하는 것(共)인가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인가. 만약 함께하는 것(共)이라면 곧 진여의 도리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두 가지가 병립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이라면 곧 공적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한 진여일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의심을 없애려는 까닭에 “함께하는 것(共)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도 아니다.”라고 한다. ‘함께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두 가지 진여는 없기 때문이다.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둘 모두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곧 없앤 것은 비록 둘일지라도 없앤 도리는 둘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심한(詰難) 바는 모두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의취도 없고 업취도 없어 모두 공적합니다.”라는 것은 곧 둘 모두를 없앴지만, 없어진 도리는 둘이 아님을 드러낸다. ‘의취’는 열반이니, 적멸심을 인연하여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업취’는 생사이니, 모든 번뇌의 업으로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의취와 업취가 모두 공적하다. 공적하므로 둘이 없다.
“공적한 일심법은 모두 갖추어 취할 수가 없고 또한 마땅히 적멸입니다.”라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일심법은 또한 일심으로 고수할 것이 없다. 곧 생사와 열반이 공적하여 둘이 없는데, 둘이 없는 도리야말로 곧 일심법이다. 이 일심법에도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만약 두 가지 문을 갖추어 취하는 것이라면 곧 일심을 터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둘은 일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만약 두 가지 문을 버리고 갖추어 취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일심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無)은 일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무이無二의 일심법은 모두 갖추어 취할 수가 없고 또한 마땅히 적멸이다.

라) 서술함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一切空寂法    “일체의 공적한 법
是法寂不空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네
彼心不空時    중생의 심이 불공임을 알아야
是得心不有    일심법이 유 아님을 터득하네”100)

이는 넷째로 여래께서 서술한 것이다.
“일체의 공적한 법”은 생사와 열반의 일체가 공적한 법이다.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네.”는 둘이 없는 일심법은 아무것도 없는 공무空無의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공무空無의 법은 아니지만 유법有法도 아니다.

001_0668_b_01L融涅槃及其空相是第二如如是二
001_0668_b_02L爲共不共若言共者卽非如理
001_0668_b_03L有二並故若不共者卽不更空
001_0668_b_04L一如故爲遣是難故言非共不共
001_0668_b_05L非共者無二如故非不共者有雙
001_0668_b_06L遣故所遣雖雙遣處無二故彼所
001_0668_b_07L皆不應理意取業取卽皆空寂者
001_0668_b_08L是顯雙遣遣處無二言意取者
001_0668_b_09L謂涅槃緣寂滅心之所取故言業取
001_0668_b_10L卽是生死諸煩惱業之所取故
001_0668_b_11L此二皆空空寂無二空寂心法
001_0668_b_12L不俱取亦應寂滅者明一心法
001_0668_b_13L不守一生死涅槃空寂無二無二
001_0668_b_14L之處是一心法依一心法有二種
001_0668_b_15L然俱取二門卽不得心二非一
001_0668_b_16L若廢二門不俱而取亦不得心
001_0668_b_17L無非心故由是義故無二心法
001_0668_b_18L不俱取亦應寂滅

001_0668_b_19L
於是尊者而說偈言

001_0668_b_20L
一切空寂法是法寂不空彼心不空時
001_0668_b_21L是得心不有

001_0668_b_22L
此是第四如來述成一切空寂法者
001_0668_b_23L生死涅槃一切空寂之法是法寂不
001_0668_b_24L空者無二之心法非都無法故

001_0668_c_01L
이런 까닭에 일심법이 공하지 않은 줄 이해할 때에 곧 일심법이 유법有法이 아님을 안다. 그러므로 앞에서 “모두 갖추어 취할 수가 없고 또한 마땅히 적멸입니다.”라고 설한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라. 「본각리품」에서 일으킨 의심을 해결해 줌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이 일심법은 삼제三諦도 아니어서 곧 색제와 공제와 심제101)도 또한 적멸합니다. 삼제법이 본래 적멸할 경우 일심법은 마땅히 적멸할 것입니다.”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法本無自性    “삼제법에는 본래부터 자성이 없어
由彼之所生    저것을 말미암아 이것이 발생하네
不於如是處    진여의 도리는 그러하지 않으므로
而有彼如是    본각처에는 진여의 도리가 있다네”

이것은 넷째로 「본각리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본각리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주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경계가 공적하고, 일체의 몸이 공적하며, 일체의 식이 공적하니 본각도 또한 공적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의 본각은 훼손되지도 않고 괴멸되지도 않는 결정성으로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며 공이라 말할 수도 없고 불공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일심도 또한 존재하지(有) 않기 때문에 적멸하다면, 무슨 까닭에 앞에서는 일본각은 불괴不壞이므로 저 색과 심이 공한 것과는 같지 않다고 말했는가.”
지금 이런 의심에 대하여 위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이 일심법은 삼제도 아니다.”라는 것은 곧 앞의 게송에서 설한 것처럼 이 일심법에는 색도 없고 심도 없으며 공도 없으므로 삼제가 없다. 그러나 삼제문에도 간략하게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색제·심제·제일의제이다. 둘째는 유제·무제·중도제일의제이다. 셋째는 이 「총지품」 중 뒤에서 말한 것102)과 같다.
지금 여기에서 질문한 뜻은 첫째의 삼제문 곧 색제·심제·제일의제에 의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곧 색제와 공제와 심제도 또한 적멸합니다.’라는 것은 이 일심법은 이미 삼제법에 섭수되지 않기 때문에 색상이 본래 공하고 심상도 또한 적멸하다. 이 색법과 심법이 본래 적멸할 경우에는 곧 일심법도 마땅히 적멸할 것이므로 곧 앞의 게송에서는

001_0668_c_01L非無法而不是有是故解心不空之
001_0668_c_02L是時得知心之不有所以前說
001_0668_c_03L俱不俱取皆應寂滅者不違道理也

001_0668_c_04L
爾時地藏菩薩言是法非三諦色空
001_0668_c_05L心亦滅是法本滅時是法應是滅
001_0668_c_06L是尊者而說偈言

001_0668_c_07L
法本無自性由彼之所生不於如是處
001_0668_c_08L而有彼如是

001_0668_c_09L
此是第四決本覺利品中起疑彼言
001_0668_c_10L無住菩薩言一切境空一切身空
001_0668_c_11L一切識空覺亦應空佛言可一覺者
001_0668_c_12L不毁不壞決定性非空非不空
001_0668_c_13L空不空依此述文於彼生疑云
001_0668_c_14L是一心亦不是有故寂滅者何故
001_0668_c_15L前說一覺不壞故不同彼色心之空
001_0668_c_16L今乘是疑故作是問是法非三諦者
001_0668_c_17L卽前頌說是一心法非色心空
001_0668_c_18L非三諦然三諦門略有三種一者
001_0668_c_19L色諦心諦第一義諦二者有諦無諦
001_0668_c_20L中道第一義諦三者如此品中後
001_0668_c_21L文所說今此問意且依初門色空
001_0668_c_22L心亦滅者是法旣非三諦攝故
001_0668_c_23L相本空心亦寂滅是色心法
001_0668_c_24L寂滅時是一心法應同寂滅卽前

001_0669_a_01L‘일심법이 유 아님을 터득하네.’라고 말했다. 그런즉 앞에서 말한 공空과 같지 않을 것이므로 단지 헛소리(虛談)일 뿐이다.”
곧 이와 같이 의심한 것이다. 그러나 게송에서는 이에 대하여 그 의심과 같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삼제법에는 본래부터 자성이 없어”는 색법과 심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저것을 말미암아 이것이 발생하네.”는 저 본각심을 말미암아 발생된 것이다. 이처럼 발생된 색과 심은 곧 차별상이지만 저 본각심은 본래부터 상相을 떠나 있고 성性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차별이 있는 곳에는 저 상相을 떠나 있는 일본각이란 없다. 이런 까닭에 그 색과 심의 차별상이 공적해질 경우에는 본래 상相을 떠나 있는 일본각의 경우처럼 동일하게 차별상을 없앤 경우와 같지는 않다.103) 이러 도리를 말미암아 앞의 설명104)은 빈 말이 아니다.

마. 「무생행품」에서 일으킨 의심을 해결해 줌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제법이 무생이고 무멸인데, 어째서 하나가 아닙니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法住處無在    “제법은 주도 없고 또 주처도 없으며
相數空故無    법상 및 법수도 공하기 때문에 없네
名說二與法    명칭법 및 언설법의 두 가지는 모두
是卽能所取    능과 소로 집착한 것이기 때문이네”

이는 다섯째로 「무생행품」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무생행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이 기동해도 발생이 없고, 연이 사라져도 소멸이 없으며, …… 그래서 처하는 곳이 없어서 머무는 것을 볼 수가 없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성은 일一도 아니고 이異도 아니다.

이 경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의심하여 말한다. “색법과 심법 등은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어서 곧 평등하고 결정적인 일실의자성一實義自性입니다. 이것은 곧 횡적으로는 색법과 심법이 차이가 없고, 종적으로는 발생과 소멸의 차별이 없습니다. 이처럼 차이가 없고 차별이 없으니 마땅히 일미일 것입니다. 다르지 않다는 것은 옳지만 어째서 하나가 아닙니까?”
게송에서는 이에 대하여 일심법의 뜻이 아님을 드러내었다.
“제법은 주도 없고 또 주처도 없으며”라는 것은 제법의 주와 소주처가 모두 없기 때문이다.
“법상 및 법수도 공하기 때문에 없다.”는 것은 색법·심법 등의 법상과 같다·다르다는 법수가 모두 공하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법상과 법수가 없으니, 어찌 하나(一)가 있겠는가.

001_0669_a_01L偈言心不有故是卽前說不同空者
001_0669_a_02L徒爲虛談如是疑也頌中對此明其
001_0669_a_03L不同法本無自性者色心之法本無
001_0669_a_04L自性1) [47] 彼之所生者由彼本覺
001_0669_a_05L之心所生所生色心是差別相
001_0669_a_06L本覺心離相離性不於如是差別之
001_0669_a_07L而有如彼離相一覺是故空此色
001_0669_a_08L心差別相時不得同遣離相一覺
001_0669_a_09L是道理前非虛說

001_0669_a_10L
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無生無
001_0669_a_11L云何不一於是尊者而說偈言

001_0669_a_12L
法住處無在相數空故無名說二與法
001_0669_a_13L是卽能所取

001_0669_a_14L
此是第五決無生行品中起疑彼言
001_0669_a_15L緣起非生緣謝非滅在無有處
001_0669_a_16L見所住決定性故是決定性不一
001_0669_a_17L不異有依彼文而起疑云色心等
001_0669_a_18L無生無滅卽是平等決定實性
001_0669_a_19L是卽橫無色心之差縱無生滅之別
001_0669_a_20L無差無別應是一味不異可爾
001_0669_a_21L何不一頌中對比顯不一義法住處
001_0669_a_22L無在者諸法之住及所住處皆無
001_0669_a_23L所有故相數空故無者色心等相
001_0669_a_24L異等數悉空故無也相數旣無

001_0669_b_01L또 색법의 상이 없으므로 심법의 상도 없어서 이미 다름(異)이 없으니, 어찌 하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명칭과 언설의 두 가지 및 설한 법이 있는 것은 곧 능취의 허망한 마음에서 취해진 것일 뿐이지 여실의 뜻에 같음과 다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명칭법 및 언설법”에서 명칭법은 설명하는 주체의 작용으로서 의식意識이 취한 바이고, 언설법은 어성語聲으로서 이식耳識이 이해한 바이다. 그런데 만약 명칭법과 언설법을 동일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곧 두 가지의 입장이 있다는 경우이다.105) 그러므로 명칭법과 언설법 가운데는 설명되는 객체의 법 곧 진여가 있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법수의 경우도 또한 허망한 마음에서 취해진 것일 뿐이므로 저 일실의 뜻이 아니다. 그러니 이와 같은 법수에 어찌 일미법이 존재하겠는가.

바. 「무상법품」에서 일으킨 의심을 해결해 줌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일체의 모든 법상은 양 언덕에도 집착하지 않고, 또한 중간의 흐름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심과 식의 경우도 또한 그와 같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경계가 심식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입니까. 만약 심식이 경계의 발생을 일으키고 그 심식도 또한 경계로부터 발생된 것이라면, 어째서 본래적인 무생의 심식에 능생과 소생이 있겠습니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所生能生二    “소생과 능생의 이 두 가지
是二能所緣    그 둘은 능연 및 소연이네
俱本名自無    본래 무자성이라 말하는데
取有空華幻    공화와 환상에 집착한다네

識生於未時    심식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境不是時生    경계도 발생되기 이전이고
於境生未時    경계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是時識亦滅    심식도 또한 적멸상태라네

彼卽本俱無    심식 및 경계 본래 없으니
亦不有無有    유도 없고 또 무유도 없네
無生識亦無    무생의 심식조차 없다는데
云何境從有    무엇으로부터 경계 나오랴”

이는 여섯째로 「무상법품」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무상법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자이시여, 여래장의 생멸하는 여지慮知의 상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장의 도리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만약 옳고 그름이 있으면 온갖 망념이 발생한다. 그 천만 가지 사려분별이 곧 생멸의 모습이다.”

이제 위의 뒷부분의 말106)에 의거하여 다시 「무상법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심을 갖는다. “만약 심식이 옳고 그른 경계를 발생시키고 경계상도 또한 모든 망념의 심식을 발생시킨다면 그 심식은 유생이고 유멸일 터인데, 어째서 양 언덕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001_0669_b_01L得有一又無色故卽無心相旣非異
001_0669_b_02L如何是一而有名說之二及有
001_0669_b_03L所說法者是卽能取妄心所取非如
001_0669_b_04L實義有一二等言名說者名是詮
001_0669_b_05L意識所取說是語聲耳識所了
001_0669_b_06L若言是一卽有此二於中亦有所詮
001_0669_b_07L之法如是等數妄心所取非彼實
001_0669_b_08L有如是數云何於中存一味耶

001_0669_b_09L
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相不住
001_0669_b_10L於二岸亦不住中流心識亦如是
001_0669_b_11L何諸境界從識之所生若識能有生
001_0669_b_12L是識亦從生云何無生識能生有所生
001_0669_b_13L於是尊者而說偈言

001_0669_b_14L
所生能生二是二能所緣俱本名一本
作各
[123]
001_0669_b_15L自無取有空華幻識生於未時境不
001_0669_b_16L是時生於境生未時是時識亦滅彼卽
001_0669_b_17L本俱無亦不有無有無生識亦無云何
001_0669_b_18L境從有

001_0669_b_19L
此是第六決無相法品中起疑彼言
001_0669_b_20L云何生滅慮知相佛言理無可不
001_0669_b_21L有可不卽生諸念千思萬慮是生
001_0669_b_22L滅相今依後說還疑彼文若識能生
001_0669_b_23L可不之境境相還生諸念之識卽是
001_0669_b_24L心識有生有滅云何而言不住二岸

001_0669_c_01L만약 모든 심식이 무생이고 무멸이라면, 어째서 모든 심식이 모든 경계를 발생시키는 것인가.”
이런 의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양 언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생과 무멸이다. 중간의 흐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같지(一) 않기 때문이다. 심식이 이미 그처럼 무생이고 무멸인데, 어째서 옳고 그른 경계가 심식으로부터 발생되겠는가. 만약 심식이 경계를 발생시킨다면 그 심식도 또한 경계로부터 발생된 것인데, 어떻게 본래무생의 심식에 능생이 있고 소생이 있는 것인가.”
이와 같은 의심을 없애기 위하여 세 게송을 설한다.
세 게송의 경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로 위의 한 게송은 그 도리를 보여 주고, 둘째로 뒤의 두 게송은 상相을 발생시키는 집착을 타파한다.

가) 도리를 보여 줌

첫째에서 “그 둘은 능연 및 소연이네.”라고 한 것은 그대(지장보살)가 계탁하는 심식은 발생의 주체이고 경계는 발생된 경계로서 곧 허망하게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을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능생과 소생은 무릇 무자성이라 말한다. 만약 집착하여 그것을 유有라고 간주한다면 마치 공화 및 환상을 취하여 실유라고 간주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무생이고 무멸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 상相을 발생시키는 집착을 타파함

둘째에서 “심식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경계도 발생되기 이전이고”는 발생하는 주체의 심식이 아직 발생하기 이전에는 발생되는 객체인 경계도 아직 발생되지 않음을 설명한 것이다.
“경계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심식도 또한 적멸상태라네.”는 능생의 경계가 아직 발생하기 이전에는 그 경우 소생의 심식도 또한 적멸의 상태임을 설명한 것이다.
“적寂”은 적멸이니, 본래부터 없는 것(本來無)이다.
“심식 및 경계 본래 없으니 유도 없고 또 무유도 없네.”는 다음과 같다. 곧 저 심식과 경계의 두 가지 발생하는 주체는 본래부터 모두 없다. 그러므로 이미 발생하는 주체가 없어서 또한 소생을 있도록 하지 못하므로 ‘유도 없고’라 하고, 발생되는 객체를 있도록 하지 못하므로 뒤에 발생하는 것이 없으므로 ‘무유도 없네.’라고 한다.
“무생의 심식조차 없다는데”라는 것은 이미 무생의 뜻인데 어찌 심식이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곧 심식이 없으므로 경계가 그로부터 존재할(有) 수가 없다.

001_0669_c_01L若諸心識無生無滅云何諸識
001_0669_c_02L生境界乘如是疑發如是問不住
001_0669_c_03L二岸者無生無滅故不住中流者
001_0669_c_04L而不是一故心識旣爾無生無滅
001_0669_c_05L云何可不境界從識之所生耶若識
001_0669_c_06L能生境識亦從境生云何無生識
001_0669_c_07L能生有所生爲遣此疑故說三頌
001_0669_c_08L三頌之文卽判爲二初之一頌
001_0669_c_09L其道理後之二頌破相生執初中
001_0669_c_10L言是二能所緣者謂汝所計識是
001_0669_c_11L能生境是所生直是妄取能緣所緣
001_0669_c_12L俱是本來但名無自若取爲有
001_0669_c_13L取空華及取幻象以爲實有是故不
001_0669_c_14L異無生無滅破中言識生於未時境
001_0669_c_15L不是時生者明識能生未有之時
001_0669_c_16L生境界于時不生也於境生未時
001_0669_c_17L是時識亦滅者明境能生未有之時
001_0669_c_18L其所生識于時亦滅滅者寂滅
001_0669_c_19L本來無也彼卽本俱無亦不有無有
001_0669_c_20L彼二能生本來俱無旣無能生
001_0669_c_21L亦不令有故曰不有不令有故
001_0669_c_22L時無生故言無有也無生識亦無者
001_0669_c_23L旣無生義何得有識識無有故
001_0669_c_24L「所」無{甲}

001_0670_a_01L여기에는 곧 두 가지 비량比量이 들어 있다. 첫째는 다음과 같다. “심식은 발생하지 않는다. 능생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불에 타버린 종자와 같다.” 둘째는 다음과 같다. “경계는 발기되지 않는다. 온 곳(所從)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거북이 터럭에서 나온 것과 같다.”
이상은 여섯 품의 의심을 개별적으로 해결해 준 것이다.

② 설법한 것을 총체적으로 결정해 줌

이하는 둘째로 설법한 것을 총체적으로 결정해 주는 것이다. 곧 여섯 가지 의문의 해결은 병이 아니라 약임을 총결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병이 아님을 결정하고, 둘째는 그것이 약임을 결정한다.

가. 병이 아님을 결정함

첫째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살펴서 묻는 것이고, 둘째는 결정해서 인정해 주는 것이다.

가) 살펴서 물음

그때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제법의 실상은 그와 같이 안과 밖이 모두 공하고, 경계와 지혜의 두 덩어리는 본래 적멸합니다. 그처럼 여래께서 설하신 실상과 진공의 여시지법107)은 곧 적집된 것이 아닙니다.”

질문에서 “제법의 실상은 그와 같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여섯 품의 제법실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한 것이다.
“안과 밖”이라고 한 것에서 심식은 안(內)이고 경계는 밖(外)이다.
“두 덩어리”라고 한 것은 경계와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곧 적집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한 것은 생·사·잡·염의 근심이 적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악취공이 근심을 적집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 결정해서 인정해 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진여의 실제법에는 색상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소집도 없고 능집도 없으며, 의義(五陰·十八界·十二入)도 없고 대大(地·水·火·風)도 없다. 진여의 실제법은 일본각의 과분법이고 심심한 공덕취이다.”108)

이는 여래께서 결정해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색상도 없다.”고 한 것은 유에 집착하는 병을 발생시키지 않는 것이다.
“집착도 없다.”는 또한 잘못 공에 집착하는 근심을 떠나 있는 것이다.
“소집도 없다.”는 고제苦諦가 공한 것이다.
“능집도 없다.”는 집제集諦가 공한 것이다.
“의義도 없다.”는 오음·십팔계·십이입의 차별의 뜻이 없는 것이다.
“대大도 없다.”는 지·수·화·풍의 만드는 주체의 상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일본각의 과분법이다.”는 일본각으로서 모든 수행과 모든 공덕을 발생시키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분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잡염의 과분이니,

001_0670_a_01L不從有此中卽有二種比量一識不
001_0670_a_02L無能生故如望燋種二境不起
001_0670_a_03L無所從故如從龜毛上來六分
001_0670_a_04L決疑竟

001_0670_a_05L
爾時地藏菩薩言法相如是內外俱
001_0670_a_06L境智二衆本來寂滅如來所說
001_0670_a_07L相眞空如是之法卽非集也

001_0670_a_08L
此下第二摠定所說摠定六決
001_0670_a_09L病是藥於中有二先定非病後定
001_0670_a_10L是藥初中亦二審問定許問中言
001_0670_a_11L法相如是者摠領前說六分法相
001_0670_a_12L內外者識內境外故言二衆者
001_0670_a_13L智衆多故言非集者非集生死雜染
001_0670_a_14L患故非如惡取空還集諸患故

001_0670_a_15L
佛言如是如實之法無色無住非所
001_0670_a_16L非能集非義非大一本
作文
[124] 一本科一本
作利
[125]
001_0670_a_17L深功德聚

001_0670_a_18L
此是如來定許言無色者不生着有
001_0670_a_19L之病故無住者亦離惡取空患故
001_0670_a_20L非所集者苦諦空故非能集者
001_0670_a_21L諦空故非義者離陰界等差別義故
001_0670_a_22L非大者離地水等能造相故一本科
001_0670_a_23L法者是一本覺以是爲根能生諸
001_0670_a_24L及諸功德故然科有二種一者

001_0670_b_01L모든 근본의 심식으로서 그 뜻은 위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둘째는 순정의 과분이니, 일본각으로서 이 경문에서 설한 바와 같다.
저 모든 근본의 심식 가운데는 일체의 잡염종자를 적집해 놓았다. 그러나 이 일본각 가운데는 오직 심심한 자성의 공덕취만 있을 뿐, 제법상을 떠나 있고 자성을 떠나 있으므로 “심심하다.”고 한다. 그리고 항하의 모래 수보다 많으므로 “취聚”라고 한다.

나. 그것이 약임을 결정해 줌

이하는 둘째로 그것이 좋은 약임을 결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살이 살펴서 질문하는 것이다.

가) 보살이 살펴서 질문함

질문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심심한 공덕취를 이해하고, 둘째는 공덕취의 이해를 통하여 깊이 이관에 들어감을 드러내며, 셋째는 양약의 뛰어난 덕을 살펴서 묻는다.

(가) 앞의 심심한 공덕취를 이해함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무리입니다. 제7식과 오식은 발생하지 않고, 제8식과 제6식은 적멸하며, 제9식은 공적하여 그 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도 공적하여 없고, 무도 공적하여 없습니다. 곧 존자의 말씀처럼 법法과 의義가 모두 공적합니다. 공적한 경지에 들어가 행한 바가 없으나 제업을 잃지 않고, 아견과 아소견 및 능신견과 소신견이 없어서 안팎의 번뇌가 모두 적정합니다. 그러므로 원願도 또한 작용하지 않는데,109) 이것이 곧 이관理觀으로서 혜와 정의 진여입니다. 존자의 영원한 설법이야말로 진실로 진여의 공적한 법으로서 곧 양약입니다.”

첫째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총론적으로 표방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드러내며, 셋째는 다시 총결한다.

㉮ 총론적으로 표방함

“불가사의한 무리입니다.”라는 것은 법상을 떠나 있고 자성을 떠나 있는 공덕을 총론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 개별적으로 드러냄

개별적으로 드러낸 것에서 먼저 법상을 떠나 있음을 설명하고, 나중에 자성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a. 법상을 떠나 있음을 설명함

처음에 “제7식과 전5식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두 가지 지말식支末識이 공적함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항상 작용하는 식 가운데서는 제7식이 지말식이고, 항상 작용하지 않는 식 가운데서는 전5식이 지말식이기 때문이다.
“제8식과 제6식은 적멸하다.”라는 것은 두 가지 근본식根本識이 적멸함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항상 작용하는 식 가운데서는 제8식이 근본식이고, 항상 작용하지 않는 식 가운데서는 제6식이 근본식이다.

b. 자성을 떠나 있음을 드러냄

다음으로 자성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제9식은 공적하여 그 상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제9식의 법상 또한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001_0670_b_01L雜染之科謂諸本識義如上說
001_0670_b_02L者純淨之科謂一本覺如此文說
001_0670_b_03L彼本識中積集一切雜染種子此本
001_0670_b_04L覺中唯有甚深性功德聚離相離性
001_0670_b_05L故名爲深過恒沙數故名爲聚

001_0670_b_06L
地藏菩薩言不可思議不思議聚
001_0670_b_07L五不生八六寂滅九相空無有空無
001_0670_b_08L無空無有如尊所說法義皆空
001_0670_b_09L入空無行不失諸業無我我所能所
001_0670_b_10L身見內外結使悉皆寂靜 [126]
001_0670_b_11L如是理觀慧定眞如尊者常說 [127]
001_0670_b_12L如空法卽良藥也

001_0670_b_13L
此下第二1) [48] 定是藥於中亦二
001_0670_b_14L菩薩審問問中有三一者領前深
001_0670_b_15L功德聚二者乘顯深入理觀三者
001_0670_b_16L審問良藥勝德初中亦三摠標
001_0670_b_17L後還摠結不思議聚者摠標離
001_0670_b_18L相離性功德別顯之中先明離相
001_0670_b_19L後顯離性初中言七五不生者
001_0670_b_20L明二種末識之空恒行識中第七是
001_0670_b_21L不恒行中五識爲末故八六寂
001_0670_b_22L滅者合明二種本識之寂恒行識中
001_0670_b_23L第八是本不恒行中第六爲本故
001_0670_b_24L次顯離性九相空無者第九識相

001_0670_c_01L
“유도 공적하여 없다.”는 것은 법상을 떠나 있음을 거듭 성취한 것으로, 제8식에서는 유상의 법상도 공적하여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무도 공적하여 없습니다.”라는 것은 자성을 떠나 있음을 거듭 성취한 것으로, 제9식에서는 무상의 자성도 공적하여 무소유이기 때문이다.
일심은 이와 같이 법상을 떠나 있고 자성을 떠나 있어 곧 무량한 공덕의 무리이므로 그것을 “불가사의한 무리이다.”라고 한다.

㉰ 법상을 떠나 있고 자성을 떠나 있음을 다시 총결함

“곧 존자의 말씀처럼 법法과 의義가 모두 공적합니다.”라는 것은 셋째로 법상을 떠나 있고 자성을 떠나 있음을 다시 총결한 것이다.

(나) 가르침이 깊이 이관理觀에 들어 있음을 설명함

둘째로 이관을 설명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개별적인 설명과 총결이다.

㉮ 개별적인 설명

개별적인 설명에는 곧 삼구가 있다.

a. 공삼매

“공적한 경지에 들어가 행한 바가 없으나 제업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공삼매이다. 즉 이관으로 공적에 들어가면 행위의 주체와 행위의 객체가 없고, 주체와 객체가 없지만 육바라밀 등의 행업을 잃지 않는 것이다.

b. 무상삼매

다음으로 무상삼매를 설명한다.
“아견과 아소견 및 능신견과 소신견이 없다.”는 것은 곧 견분見分에 속하는 모든 번뇌상을 떠나 있는 것으로, 아견과 아소견의 상 및 능신견과 소신견의 상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안팎의 번뇌가 모두 적정하다.”는 것은 곧 애愛에 속하는 모든 번뇌상을 떠나 있는 것으로, 안의 모든 번뇌(結)와 밖의 모든 번뇌(使) 등 삼계의 번뇌의 제상이 공적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무상삼매라 말한다.

c. 무원삼매

“원願도 또한 작용하지 않습니다.”라는 것은 곧 무원삼매를 설명한 것이다. 삼계의 제법이 모두 적정하므로 그것을 원願하는 마음도 자연스레 영원히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을 무원삼매라 말한다.

㉯ 총체적으로 결론 맺음

“이것이 곧 이관理觀으로서 혜慧와 정定의 진여입니다.”라는 것은 곧 총체적으로 결론 맺는 구절이다. 앞의 삼삼매三三昧(空三昧·無相三昧·無願三昧)가 모두 곧 이관으로 지止와 관觀에 치우침이 없고 주체와 객체에 둘이 없기 때문이다.

(다) 양약의 뛰어난 덕을 살펴서 질문함

“존자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공적한 제법이야말로 곧 양약일 것입니다.”라는 것은 보살이 살펴서 묻는 가운데 셋째로 양약의 뛰어난 덕을 살펴서 물은 것이다. 곧 이와 같이 공적한 제법은 모든 공덕을 갖추고 모든 번뇌를 다스린다.

001_0670_c_01L亦不守性故有空無有者重成離相
001_0670_c_02L八識有相之法空無所有故無空無
001_0670_c_03L有者重成離性九識無相之性
001_0670_c_04L無所有故一心如是離相離性
001_0670_c_05L是無量功德之聚如是名爲不思議
001_0670_c_06L如尊所說法義皆空者第三摠
001_0670_c_07L結離相離性也次明理觀於中有二
001_0670_c_08L別明摠結別明之中卽有三句
001_0670_c_09L空無行不失諸業者是空三昧謂理
001_0670_c_10L觀入空而無能所之行雖無能所
001_0670_c_11L失六度等業故次明無相三昧無我
001_0670_c_12L我所能所身見者是離屬見諸煩
001_0670_c_13L惱相離我我所相能見所見相故
001_0670_c_14L內外結使悉皆寂靜者是離屬愛
001_0670_c_15L諸結使相內門諸結外門諸使
001_0670_c_16L界煩惱諸相空故如是名爲無相三
001_0670_c_17L故願亦息者是明無願三昧
001_0670_c_18L三界法皆寂靜故願求之心自然
001_0670_c_19L永息如是名爲無願三昧也如是理
001_0670_c_20L觀慧定眞如者是摠結句如前三種
001_0670_c_21L皆是理觀止觀無偏能所無二故
001_0670_c_22L尊者常說寔如空法卽良藥也者
001_0670_c_23L第三審問如是空法具諸功德
001_0670_c_24L「審」作「番」{甲}

001_0671_a_01L이런 까닭에 마땅히 양약이 된다.

나) 결정하여 인정해 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공적하기 때문이다. 공적한 자성이 무생이므로 마음이 항상 무생이고, 공적한 자성이 무멸이므로 마음이 항상 무멸이며, 공적한 자성이 무주이므로 마음이 또한 항상 무주이다. 이처럼 공적한 자성이 무위이므로 마음이 또한 항상 무위이다. 공적한 자성은 나감과 들어감이 없고, 모든 얻음과 잃음을 떠나 있는데, 십팔계·오음·십이입의 경우도 모두 또한 그렇다.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
보살이여, 나 여래는 모든 공을 설하여 제유諸有를 타파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래께서 결정해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총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가) 총론적으로 인정함

“공적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양약이 되는 까닭은 단지 공적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는 곧 병이 된다.

(나) 개별적으로 인정함

“공적한 자성” 이하는 개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적이라는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유전의 결과라는 근심(果患)을 떠났음을 설명하고, 둘째는 공적이라는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집착의 인행이라는 질병(因病)을 다스림을 드러낸다.

㉮ 유전의 결과라는 근심(果患)을 떠났음을 설명함

첫째에서 “공적한 자성이 무생이므로 마음이 항상 무생이다.”라고 한 것은 공적의 경지에 들어간 마음은 공적과 같아 무생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적의 무멸을 따르므로 마음은 항상 무멸이다. 생과 멸은 곧 무상無常의 뜻이므로 생과 멸을 뒤집어서 상常이라 말한다.
“공적한 자성이 무주이므로 마음이 또한 항상 무주이다.”라는 것은 비단 처음과 끝이라는 분별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간에 집착하는 집착상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유위상(三相 : 生·住·滅)을 떠나 있음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처럼 공적한 자성이 무위이므로 마음이 또한 항상 무위이다.”라는 것은 저 세 가지 유위상을 떠나 있음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공적이라는 약을 복용하여 무상無常의 질병을 떠났음을 설명한 것이다.

㉯ 집착의 인행이라는 질병(因病)을 다스림을 드러냄

둘째로 집착의 질병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나감 들어감이 없다.”라는 것은 출관과 입관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얻음과 잃음을 떠나 있다.”는 것은 또한 새로운 것을 얻고 옛 것을 잃는 분별상을 떠나 있다는 것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는 것도 또한 그와 마찬가지이다.”라는 것은 관찰하는 주체의 마음도 또한 공적의 도리와 같아서 나감과 들어감과 얻음과 잃음의 분별상에 집착이 없고, 십팔계·오음·십이입 법에도 집착이 없어서 곧 공적이라는 약을 복용하여 집착을 떠났음을 설명한 것이다.


001_0671_a_01L諸結使是故應卽爲良藥耶

001_0671_a_02L
佛言如是何以故
[128] 空性無生
001_0671_a_03L心常無生空性無滅心常無滅空性
001_0671_a_04L無住心亦無住空性無爲心亦無爲
001_0671_a_05L空無出入離諸得失陰界入 [129] 皆悉
001_0671_a_06L亦無心如不著亦復如是菩薩我說
001_0671_a_07L諸空 [130] 破諸有故

001_0671_a_08L
此是如來定許於中有三一者摠
001_0671_a_09L言空故者所以爲良藥者只由空
001_0671_a_10L有卽生病故空性已下第二別
001_0671_a_11L於中有二先明服空藥故離流
001_0671_a_12L轉之果患後顯服空藥故治取着之
001_0671_a_13L因病初中言空性無生心常無生者
001_0671_a_14L入空之心同空無生故又隨無滅
001_0671_a_15L心常無滅生滅正是無常之義故
001_0671_a_16L彼二名爲常也心亦無住者非但無
001_0671_a_17L初後相亦無中間住相此是別明離
001_0671_a_18L三相也心亦無爲者摠顯離彼三有
001_0671_a_19L爲相是明服空離無常病次明亦離
001_0671_a_20L取着之病無出入者無有出觀入觀
001_0671_a_21L之異離得失者亦離得新失古之相
001_0671_a_22L心如不着亦如是者能觀之心亦如
001_0671_a_23L空理不取出入得失之相不着陰界
001_0671_a_24L入等之法是明服空離取着病也

001_0671_b_01L
(다) 다시 총결함

“모든 공을 설하여 제유諸有를 타파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셋째로 다시 총결한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면 공적의 도리에는 두 가지가 없다.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공五空(無生·無滅·無住·無爲·無出入得失)이나 삼공三空(空三昧·無相三昧·無願三昧) 등의 여러 공을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유有의 병에 집착하는 것을 타파하기 위한 것이다. 병이 많기 때문에 공적의 도리도 또한 많이 설한다. 또한 공적의 도리에는 실제로 공도 없고 불공도 없지만 단지 유有를 타파하기 위하여 부득불 공적이라 말한 것이지, 공적이라는 말 때문에 공적의 자성을 설정한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뜻111)으로 여러 가지 공(諸空)의 가르침을 총결한다.
여섯 가지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해결하였으니, 곧 개별적으로 해결한 것과 총체적으로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이상으로 마친다.

(2) 「여래장품」 한 품의 세 가지 의심을 순차로 없애 줌

이하는 둘째로 한 가지 품의 세 가지 의심을 순차적으로 없애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즉 「여래장품」의 한 품에서 다시 세 가지 의심을 일으키는데, 이를 차례대로 없애기 때문이다.

① 첫째 의심을 없애 줌

가. 질문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유는 실제가 아니라 마치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줄 알고, 실제는 공무가 아니라 불의 자성(火性王)이 발생한 것과 같은 줄 안다면, 이와 같이 관찰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것입니까.”

첫째의 의심은 다음과 같다. 「여래장품」에서 저 범행장자가 게송으로 “제법을 하나뿐이라 설한다면 (그 한 법의 상은 모륜과 같네)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처럼 (모두 허망한 착각일 뿐이라네).”라고 말했고, 또 “만약 제법을 무라고 간주하면 (법을 허공처럼 보는 것이므로) 맹인이 해가 없다고 하듯이 (법을 거북 터럭 같다고 설하네).”라고 말했다. 이 게송의 설에 의해 어떤 사람에게 “장자는 세속인으로서 이렇게 판단하여 말했다. 그것은 망견妄見인가 진지眞智인가.”라는 의심이 생긴다. 이처럼 의심하여 믿고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그 의심을 없애 주기 위하여 위의 내용을 언급하여 질문한 것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비유는 앞에서 이미 설한 바와 같다.
“실제는 공무가 아니다.”라는 것은 일실의一實義의 자성이 없지 않은 줄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 의심에서 일실의의 자성이 없다고 계탁하는 것은 마치 맹인이 전도되어 해가 없다고 한 것과 같다. 이로써 범행장자는 일실의의 자성이 공무가 아닌 줄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실제는 공무가 아니라 불의 자성이 발생한 것과 같은 줄 안다.”는 것은 나무의 속에 불의 자성이 있는 것과 같다. 곧 쪼개서 찾아보아도 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실제로 나무 속에 불의 자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무를 뚫고 비벼서 찾아보면 반드시 불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001_0671_b_01L說諸空破諸有故者第三結定
001_0671_b_02L實而言空理無二而說五三等諸空
001_0671_b_03L爲破諸人着有病故隨病衆多
001_0671_b_04L說空亦爾又復理實非空不空但爲
001_0671_b_05L破有强說爲空非空言下存空性也
001_0671_b_06L以是二意結諸空敎

001_0671_b_07L
地藏菩薩言尊者知有非實如陽燄
001_0671_b_08L知實非無如火性王一本
作生
[131] 如是觀者
001_0671_b_09L是人智耶

001_0671_b_10L
六品六疑却次而決別決摠定
001_0671_b_11L在於前此下第二一品三疑順次
001_0671_b_12L而遣於中有三謂如來藏一品之中
001_0671_b_13L復起三疑次第遣故第一疑者
001_0671_b_14L彼梵行長者頌言若說法有一如燄
001_0671_b_15L水迷倒又言若見於法無如盲無日
001_0671_b_16L有依彼說而生疑云長者俗人
001_0671_b_17L如是判說爲妄見耶爲眞智耶
001_0671_b_18L如是疑不肯信受爲遣彼疑擧彼
001_0671_b_19L事問燄水之喩如前已說知實非
001_0671_b_20L無者能知一實義性非無彼說計無
001_0671_b_21L實者如盲無日倒故是知長者
001_0671_b_22L實非無非無之義如火性王謂如
001_0671_b_23L木中有火大性分析求之不得火
001_0671_b_24L而實不無木中火性鑽而求之

001_0671_c_01L일심의 경우도 그와 같다. 제상諸相을 분석해도 마음의 자성은 획득할 수 없지만 실제로 제법 가운데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를 닦아 마음을 추구하면 일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의 자성은 그 모습이 감추어져 있지만 세력이 커서 마치 국왕과 같기 때문에 왕이라 한다.
여기서는 “범행장자는 이와 같이 양변을 떠나 관찰하는데, 이 사람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인가?”를 묻고 있다.

나. 여래가 의심을 결단해 줌

이하는 여래께서 의심을 결단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대로 결단해 주고, 둘째는 해석하여 결단해 준다.

가) 그대로 결단해 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제대로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일심의 적멸을 관찰하여 상相과 불상不相을 똑같이 공적의 입장에서 취하고, 그로써 공적을 닦기 때문에 부처님을 친견하여 간과한 적이 없으며, 또 부처님을 친견하기 때문에 삼류를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지혜롭다는 것을 결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하는 그의 지혜를 해석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해석이고, 둘째는 자세한 해석이다.

(가) 간략한 해석

첫째에서 “일심의 적멸을 관찰한다.”고 한 것은 일심법이 적멸하다는 뜻을 관찰하는 것이다.
“상과 불상을 똑같이 공적의 입장에서 취한다.”는 것은 유상의 세속과 무상의 진제가 다같이 존재하지 않은 줄을 관찰한 까닭에 그것을 합하여 하나로 삼은 것이다.
이와 같이 공적을 닦아서 제대로 불심을 따르기 때문에 항상 부처님 몸을 친견하여 일찍이 간과했던 적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친견하여 간과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항상 부처님을 친견함으로써 더욱더 공관이 증진되고, 공관이 증진되어 제유諸有를 거스른다. 그러므로 “삼류를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삼류는 삼계의 번뇌를 모두 섭수한 것이니, 욕류欲流·유류有流·무명류無明流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류112)의 뜻은 일반적인 설명과 같다.

(나) 자세한 해석

대승에서 삼해탈도三解脫道(三三昧)는 일심의 자체로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적하고, 공적하므로 무상이며, 무상이므로 무작이고, 무작이므로 무구이며, 무구이므로 무원이다. 이와 같은 행업이야말로 청정심이다. 그래서 마음이 청정하므로 그대로 보신불을 친견하고, 보신불을 친견하기 때문에 마땅히 정토에 왕생한다.

001_0671_c_01L火必現故一心亦爾分析諸相
001_0671_c_02L得心性而實不無諸法中心修道求
001_0671_c_03L一心顯故如是火性相隱勢大
001_0671_c_04L如似國主故名王也長者如是離
001_0671_c_05L二邊觀是人智耶如是問也

001_0671_c_06L
佛言如是何以故是人眞觀觀一寂
001_0671_c_07L相與不相等以空取 [132] 以修空故
001_0671_c_08L失見佛以見佛故不順三流

001_0671_c_09L
此下如來決疑於中有二直決釋決
001_0671_c_10L言如是者決是人智何以故下
001_0671_c_11L其是智於中有二略釋廣演初中
001_0671_c_12L言觀一寂滅者觀一心法寂滅義故
001_0671_c_13L相與不相等以空取者觀有相俗
001_0671_c_14L無相眞等不存故融爲一故如是
001_0671_c_15L修空正順佛心故常見佛身未會
001_0671_c_16L失時故言不失見佛以常見佛
001_0671_c_17L增空觀空觀增進違逆諸有故言
001_0671_c_18L不順三流三流具攝三界煩惱
001_0671_c_19L欲流有流及無明流是謂三流
001_0671_c_20L如常說

001_0671_c_21L
於大乘中三解脫道一體無性以其
001_0671_c_22L無性故空空故無相無相故無作
001_0671_c_23L作故無求無求故無願 [133] 是業 [134] 故淨心 [135]
001_0671_c_24L以心淨故見佛 [136] 以見佛故當生淨土

001_0672_a_01L
보살이여, 이와 같은 심심한 법에서 삼화三化113)를 부지런히 닦아서 혜慧와 정定이 원만하게 성취되면114) 곧 삼계를 초월한다.”

이는 둘째로 자세하게 연설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을 설명하고, 둘째는 삼화를 근수하는 뛰어난 이익을 드러낸다.

㉮ 삼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을 설명함

첫째에서 “일심의 자체로서 자성이 없다.”라고 한 것은 저 소승의 삼해탈문은 개별적인 자체로서 자성이 있음에 상대하여 대승보살의 관행은 일심의 자체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곧 마음을 관찰하여 자성이 없음을 증득할 경우, 그 뜻에 따라 짐짓 삼해탈을 내세웠을 뿐이다. 즉 자체의 자성을 잊었다는 뜻에 의하여 공해탈을 내세우고, 자체에 즉한 분별상(相)을 잊었다는 뜻에 의하여 무상해탈을 내세우며, 자체에 즉한 작용(用)을 잊었다는 뜻에 의하여 무작해탈을 내세우니 이는 달리 무원해탈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오직 일심의 무분별관이야말로 일체법 자체의 자성(體性)과 분별상(相)과 작용(用)을 없애지 않은 바도 없고, 융합하지 않은 바도 없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삼해탈문을 건립한다.
“이와 같은 행업이야말로 청정심이다.”라는 것은 일체의 자체·분별상·작용(體·相·用)을 잊은 까닭에 관행을 나타내어 속제에 물들어 가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모든 염착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다. 염착심을 떠나 있으므로 보신불을 친견하고, 보신불을 친견하므로 정토에 왕생한다. 이것이 곧 삼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이다.

㉯ 삼화를 근수하는 뛰어난 이익을 드러냄

“이와 같은 심심한 법에서 삼화를 부지런히 닦는다.”는 것은 공적한 제법에서 삼공을 부지런히 닦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공상에 대하여 공적한 것이 제일화의 부지런히 닦음이고, 공공에 대하여 공적한 것이 제이화의 부지런히 닦음이며, 소공에 대하여 공적한 것이 제삼화의 부지런히 닦음이다. 그 뜻은 앞의 설명과 같으므로 별도로 논하지 않는다. 삼화를 부지런히 닦으면 곧 일심에 통달한다. 일심에 통달하므로 혜慧와 정定이 원만하게 성취된다. 원만하게 성취된 그 경지가 되면 삼계를 초월한 것이다. 이것이 곧 삼화를 부지런히 닦는 것으로서 그 뛰어난 이익이다.

② 둘째의 의심을 없애 줌

가. 질문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여래께서 설하신 무생무멸無生無滅은 곧 무상입니다.

001_0672_a_01L菩薩於是深法三化勤修慧定圓成
001_0672_a_02L卽超三界

001_0672_a_03L
此是第二廣演於中有二先明三解
001_0672_a_04L脫道勝利後顯三化勤修勝利初中
001_0672_a_05L言一軆無性者對彼小乘三解脫門
001_0672_a_06L別軆有性故顯大乘菩薩觀行一軆
001_0672_a_07L觀心證無性時隨義假說立三解脫
001_0672_a_08L約其忘軆性義立空解脫忘卽軆相
001_0672_a_09L義門立無相解脫忘卽軆用義門
001_0672_a_10L立無作解脫亦名無願解脫爲顯唯
001_0672_a_11L一無分別觀於一切法軆性相用
001_0672_a_12L所不遣無所不融是故建立三解脫
001_0672_a_13L以是業故淨心者以忘一切軆
001_0672_a_14L相用故能淨出觀涉俗之心離諸染
001_0672_a_15L離染著心能見報佛見報佛故
001_0672_a_16L得生淨土是爲三解脫道勝利也
001_0672_a_17L是深法三化勤修者謂於空法勤修
001_0672_a_18L三空何者空相亦空是一化修
001_0672_a_19L空亦空是二化修所空亦空是三
001_0672_a_20L化修義如前說故不別論三化勤
001_0672_a_21L卽達一心達一心故慧定圓成
001_0672_a_22L圓成之地卽超三界是爲三化勤修
001_0672_a_23L勝利也

001_0672_a_24L
地藏菩薩言如來所說無生無滅

001_0672_b_01L이 생멸을 소멸하여 생멸이 소멸하면 상常이 되는데, 상常이기 때문에 단절이 없습니다. 이 단절이 없는 제법은 삼계의 모든 동법과 부동법을 떠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위법에서 그 불구덩이를 벗어나려면 어떤 법에 의거하여 스스로 책려해야만 그 적멸문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하는 저 「여래장품」의 둘째의 의심을 없애는 것이다. 「여래장품」에서 “분명하게 본다면 식識이 그대로 상常이 된다. 이에 그 식이 항상 적멸하고 그 적멸도 또한 적멸하다.”라고 하였다.
이 경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심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상주하는 적멸법은 비록 기뻐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심오한 도리(希夷)이다. 그런데 중생심은 거칠고 소견이 좁으며 다스리기 어려운데 어떻게 중생심을 다스려서 저 적멸법에 나아갈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의심 때문에 지장보살이 이와 같이 질문한 것이다. 질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果가 요원함을 들고, 둘째는 인因에 들어감을 묻는다.

가) 과果가 요원함을 물음

첫째에서 “무생무멸은 곧 무상입니다.”라고 한 것은 곧 「여래장품」에서 “그 식이 항상 적멸하다.”고 말한 것을 이해한 것이다. 본래 적멸하기 때문에 곧 무생무멸이다. 그러나 본래 상주하는 것이 아니므로(非常) 곧 무상이다.
“이 생멸을 소멸하여 생멸이 소멸하면 상常이 되는데”라는 것은 곧 「여래장품」에서 “그 적멸도 또한 적멸하다.”고 하고, 또 “분명하게 본다면 식識이 그대로 상常이 된다.”고 한 것을 이해한 것이다.

나) 인因에 들어감을 물음

“유위법” 이하는 둘째로 그 적멸문에 들어가는 방편에 대하여 곧장 물은 것이다. 비록 위에서 방편과 정관에 대하여 설했지만 간략하게 설했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시 자세하게 설해 주기를 청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삼대사三大事에 대하여 그 마음을 책려하고, 삼대제三大諦에 대하여 그 행위에 들어가야 한다.”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삼대사에 대하여 그 마음을 책려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삼제에 대하여 일행一行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사란, 첫째는 인이고, 둘째는 과이며, 셋째는 본식이다. 이러한 삼사는 본래부터 공무하여 자기의 진아가 아니다. 그런데 어찌 그것에 애염愛染을 내겠는가.

001_0672_b_01L是無常滅是生滅生滅滅已寂滅爲
001_0672_b_02L常故不斷是不斷法離諸三界
001_0672_b_03L不動法於有爲法如避火坑依何等
001_0672_b_04L而自呵 [137] 入彼一門

001_0672_b_05L
此下遣其如來藏品之第二疑彼言
001_0672_b_06L了見識爲常是識常寂滅寂滅亦寂
001_0672_b_07L有依彼文而生疑云如是常住之
001_0672_b_08L寂滅法雖可欣樂而是希夷衆生
001_0672_b_09L之心麁淺難調如何調心得趣彼
001_0672_b_10L乘如是疑作如是問問中有二
001_0672_b_11L初擧果遠後問入因初中言無生
001_0672_b_12L無滅卽是無常者卽領前言是識
001_0672_b_13L常寂滅本來寂滅故是無生無滅
001_0672_b_14L而本非常故是無常也滅是生滅
001_0672_b_15L生滅滅已寂滅爲常者卽領前言
001_0672_b_16L寂滅亦寂滅又言了見識爲常於有
001_0672_b_17L爲法已下第二正問趣入彼門方便
001_0672_b_18L前雖有說方便正觀而略說故更請
001_0672_b_19L廣說

001_0672_b_20L
佛言菩薩於三大事呵責其心於三
001_0672_b_21L大諦而入其行地藏菩薩言云何三
001_0672_b_22L而責其心云何三諦而入一行
001_0672_b_23L三事 [138] 一謂因二謂果三謂識
001_0672_b_24L如是三事從本空無非我眞我云何

001_0672_c_01L삼사는 번뇌에 계박되고 고해에 표류함을 관찰하여 그것으로써 항상 스스로 책려해야 한다.
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보리도이니, 평등제平等諦로서 동등하지 않음이 없다. 둘째는 대각이니, 정지로 터득한 진리(正智得諦)로서 사지邪智로 진리를 터득한 것이 아니다. 셋째는 지혜와 선정이니, 무이행無異行으로 들어가는 진리이지 잡행雜行으로 진리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이 삼제로써 불도를 닦으면 그 사람은 그 법에서 정각을 터득하지 못함이 없고, 정각正覺의 지혜를 터득하여 대극大極의 자비를 유출시켜 자기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여 불보리를 성취한다.”

이 경문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하고,115) 둘째는 답변하고, 셋째는 청하고, 넷째는 설명한다.

(나. 답변)

(다. 청함)

라. 설명함

넷째의 설명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책려하고 멀리하게 해 주는 방편을 설명하고, 둘째는 들어가야 할 방편을 보여 준다.

가) 책려하고 멀리하게 해 주는 방편을 설명함

첫째에서 “인이다.”라고 한 것은 오계와 십선의 인이다.
“과이다.”라는 것은 인간과 천상의 부귀와 안락의 과이다.
“본식이다.”라는 것은 인과 과를 능지하는 것으로 근본식이다. 중생은 근본식을 자내아自內我로 간주하지만 근본식의 자성은 공적하므로 아我가 아니다. 무아의 도리만이 곧 진아이다. 그러므로 아가 아닌 것에 대하여 마땅히 애염愛染해서는 안 된다.
“삼사는 번뇌에 계박되고 고해에 표류함을 관찰한다.”는 것은 네 가지 계박을 말미암아 이정理定(無漏定)의 마음을 장애하여 삼사로 하여금 고해에 표류하도록 하는 것이다. 네 가지 계박은 다음과 같다. 『대법론』의 「제품諦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박에 네 가지가 있으니, 탐욕신계貪欲身繫·진에신계瞋恚身繫·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이다. 이것은 선정의 의성신意性身116)을 장애하기 때문에 계박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로 말미암아 선정심의 자성신을 장애하기 때문에 계박이라 한 것이지 색신을 장애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네 가지 마음이 산란하게 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001_0672_c_01L於是而生愛染觀是三事爲繫所飃
001_0672_c_02L一本
作縛
[139] 飄流苦海以如是事常自呵責
001_0672_c_03L三諦 [140] 一謂菩提之道是平等諦
001_0672_c_04L不等 [141] 二謂大覺正智得諦非邪智得
001_0672_c_05L三謂慧定無異行入諦非雜 [142] 行入諦
001_0672_c_06L以是三諦而修佛道是人於是法
001_0672_c_07L不得正覺得正覺智流大極慈 1) [49]
001_0672_c_08L俱利成佛菩提

001_0672_c_09L
是文有四初問次答三請四說
001_0672_c_10L說中有二先說呵厭方便後示趣入
001_0672_c_11L方便初中言因者五戒十善之因
001_0672_c_12L果者人天富樂之果識者能持因
001_0672_c_13L果卽是本識衆生計此爲自內我
001_0672_c_14L而是性空故非是我無我之理
001_0672_c_15L便眞我故於非我不應愛染觀是
001_0672_c_16L三事爲繫所飃者謂由四繫障理
001_0672_c_17L定心令是三事飃流苦海故何等
001_0672_c_18L名爲四繫如對法論諦品中云繫有
001_0672_c_19L四種謂貪欲身繫瞋恚身繫戒禁
001_0672_c_20L取身繫此實執取身繫以能障礙定
001_0672_c_21L意性身故名爲繫所以者何由此
001_0672_c_22L能障定心自性之身故名爲繫非障
001_0672_c_23L色身何以故能爲四種心亂因故
001_0672_c_24L「己」作「已」{甲}

001_0673_a_01L즉 재물 등의 탐애를 말미암아 인이 되어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다툼에 있어 바르지 못한 행이 인이 되어 마음을 산란하게 하며, 난행의 계금취견戒禁取見에 대한 고뇌가 인이 되어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올바른 도리로 경계를 추구하지 못하는 것이 인이 되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이다. 저것117)은 각기 다른 견해에 의지하는 까닭에 알아야 할 경계에 대하여 올바른 도리가 아니라 갖가지로 함부로 헤아리고 그것에 허망하게 집착한다. 즉 오직 이것만이 옳고 다른 것은 모두 어리석고 허망한 것으로 간주하는데 그것을 말미암아 인이 되어 마음을 산란하게 움직인다. 그러면 무엇을 산란하게 움직이는가. 선정심의 여실지견을 산란하게 움직인다.118)

“그것으로써 항상 스스로 책려해야 한다.”는 것은 산란하게 하는 네 가지 계박을 책려하고, 표류하는 삼사를 멀리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책려하고 멀리하게 해 주는 방편을 설명하였다.

나) 들어가야 할 방편을 보여 줌

들어가야 할 방편을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삼제에 대하여 그 도리를 살피는 것이다.

(가) 보리도

“첫째는 보리도이니, 평등제로서 동등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부처님께서 깨친 자성청정한 보리는 크게 통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에 ‘도’라 하고, 일체의 유정이 모두 도의 자성을 구비하여 그 구경도에 돌아가지 못함이 없기 때문에 ‘평등제로서 동등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곧 이승에서 진제와 속제에 별취別趣하는 것을 대치한 것이다.

(나) 대각

“둘째는 대각이니, 정지로 터득한 진리(正智得諦)로서 사지邪智로 진리를 터득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일체지인 대각의 과보는 오직 평등제119)만 증득한 정지로 터득한 것이지 명제冥諦(數論의 주장)와 대유大有(勝論의 주장) 등의 경계를 반연하는 사지邪智로 터득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곧 모든 외도의 집착을 대치한 것이다.

(다) 지혜와 선정

“셋째는 지혜와 선정이니, 무이행無異行으로 들어가는 진리이지 잡행雜行으로 진리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정지를 터득하여 평등제에 들어갈 경우, 지혜와 선정이 원융하여 다른 수행의 모습이 없어야 바야흐로 평등제에 바르게 들어가는 것이다. 곧 이것은 세간의 분별심에서 심왕과 심수의 자체를 달리하거나 선정과 지혜를 다른 수행으로 간주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 잡행으로는 올바른 인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001_0673_a_01L謂由貪愛財物等爲因令心散亂
001_0673_a_02L鬪諍事不正行爲因令心散亂於難
001_0673_a_03L1)戒禁苦惱爲因令心散亂不如
001_0673_a_04L正理推求境界爲因令心散亂
001_0673_a_05L彼依止各別見故於所知境不如正
001_0673_a_06L種種推度妄生執着謂唯此眞
001_0673_a_07L餘並愚妄由此爲因令心散動
001_0673_a_08L何散動謂於定心如實智見故
001_0673_a_09L如是事常自呵責者呵責能飄四繫
001_0673_a_10L2)厭所流三事故已說呵厭方便
001_0673_a_11L云何趣入方便所謂審諦於三諦故
001_0673_a_12L一謂菩提之道是平等諦非不等諦
001_0673_a_13L謂佛所證性淨菩提無不通泰
001_0673_a_14L故名爲道一切有情皆同此性
001_0673_a_15L一不歸是究竟道故言平等非不
001_0673_a_16L平等是卽對治二乘別趣也二謂大
001_0673_a_17L正智得諦非邪智得諦者謂一切
001_0673_a_18L智大覺之果唯證平等正智所得
001_0673_a_19L緣冥諦大有等境邪智所得是卽對
001_0673_a_20L治諸外道執也三謂慧定無異行入
001_0673_a_21L非雜行入諦者謂得正智入平等
001_0673_a_22L慧定圓融無別行相方是眞入
001_0673_a_23L於平等諦非如世間分別之心王數
001_0673_a_24L別體定慧異行如是雜行非眞入

001_0673_b_01L그러므로 이것은 곧 세간의 관행에서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증득했다고 간주하는 증상만자를 대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통틀어 진리(諦)라고 말한 것은 진리를 살피는 관행이 관찰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세 가지 각기 다른 집착(異執)을 널리 대치해야만 이에 하나의 불도를 정수正修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삼제로써 불도를 닦는다.”고 한다.
다음은 수도하여 터득한 과를 드러낸 것이다.
“그 사람은 그 법에서 정각을 터득하지 못함이 없다.”는 것은 곧 자리自利의 지혜와 공덕의 과를 드러낸 것이다. 이 삼제로써 불도를 닦으면 정각의 과를 얻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정각의 지혜를 터득하여 대극의 자비를 유출시킨다.”는 것은 이타利他의 은혜와 공덕의 과를 드러낸 것이다. 널리 대극의 무연자비를 널리 유출시켜 법계를 두루 이롭게 하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와 남을 모두 이롭게 하여 불보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앞의 자리와 이타의 두 가지를 총결한 것이다. 곧 자리와 이타가 원만해져 등정각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③ 셋째의 의심을 없애 줌

이하는 저 「여래장품」의 셋째의 의심을 없애는 것이다. 저 「여래장품」의 게송 말미에서 “소취와 능취를 전변해야 곧 여래장에 들어갈 수 있다네.”라고 하였다. 이 설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심을 일으킨다. “이 가운데 보리도는 평등제로서 곧 여래장이다. 이것은 인과 연의 힘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 능취와 소취를 전변시키는 인을 통하여 여래장법에 들어간다는 것인가.”
이러한 의심 때문에 지장보살이 위와 같은 질문을 한 것이다.

가. 질문

지장보살이 여쭈었다.
“존자이시여, 그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곧 인과 연이 없습니다. 만약 연법이 없다면 인법이 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부동법으로 여래장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곧 인과 연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평등제이기 때문에 인법과 연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또 평등제이기 때문에 다른 연법이 없다. 이처럼 다른 연법이 없기 때문에 인법이 발기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저 기동이 없는 법에 대하여 인연을 작용시켜 여래장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인가.

001_0673_b_01L是卽對治世間觀行未證謂證
001_0673_b_02L上慢者如是三種通名諦者審諦之
001_0673_b_03L所觀境故遍治如是三種異執
001_0673_b_04L乃能正修於一佛道故言以是三諦
001_0673_b_05L而修佛道次顯修道所得之果是人
001_0673_b_06L於是法無不得正覺者是顯自利智
001_0673_b_07L德之果於是三法而修佛道無有
001_0673_b_08L不獲正覺果故得正覺智流大極慈
001_0673_b_09L是顯利他恩德之果普流大極無
001_0673_b_10L緣之慈遍周法界無不利故己他俱
001_0673_b_11L成佛菩提者摠結前二二利圓
001_0673_b_12L滿成等覺故

001_0673_b_13L
地藏菩薩言尊者如是之法卽無因
001_0673_b_14L若無緣法因卽不起云何不動法
001_0673_b_15L一本有
得字
[143] 如來

001_0673_b_16L
此下遣彼如來藏品第三之疑如彼
001_0673_b_17L品頌末言轉所取能取入於如來藏
001_0673_b_18L有依此說而疑彼云此中菩提之道
001_0673_b_19L平等之諦卽是如來藏不待因緣力
001_0673_b_20L云何彼轉能所之因而能得入如來
001_0673_b_21L藏法有作是疑故乘彼問卽無因
001_0673_b_22L緣者由平等故不從因緣又平等
001_0673_b_23L卽無餘緣餘緣無故因不能起
001_0673_b_24L云何於彼無起動法而用因緣

001_0673_c_01L만약 인법의 힘을 작용하여 여래장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인과 연의 힘에 의지하는 것이므로 부동법은 아닐 것이다.

나. 의심한 것을 여래가 곧장 결단해 줌

이하는 의심한 것을 여래께서 곧장 결단해 주는 것이니, 그 평등하고 부동하여 여래장에 들어가는 뜻을 펼친다. 전체 여덟 게송에는 두 부분이 있다. 앞의 세 게송은 간략한 설명이고, 뒤의 다섯 게송은 자세한 설법이다.

가) 간략한 설명

그때 여래께서 그 뜻을 널리 펼치려고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셨다.

一切諸法相    “일체 모든 법의 진실한 그 모습은
性空無不動    자성이 공무하여 움직임이 없다네
是法於是時    그 법은 현재 여기 있다 할지라도
不於是時起    현재 여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네

法無有異時    그 법은 과거 및 미래가 없으므로
不於異時起    과거 및 미래에 일어나는 바 없네
法無動不動    그 제법은 동 및 부동이 없으므로
性空故寂滅    자성이 공적한 까닭에 적멸하다네

性空寂滅時    자성이 공적하여 적멸할 경우지만
是法是時現    그 법은 현재 여기에 드러나 있네
離相故寂住    형상 떠나므로 공적에 주할지라도
寂住故不緣    공적에 주한 탓에 연 따르지 않네

첫째에 두 가지가 있다. 앞의 두 게송은 부동의 뜻을 설명하고, 뒤의 한 게송은 여래장에 들어가는 뜻을 드러낸다.

(가) 부동의 뜻을 설명함

첫째에 세 가지가 있으니, 표방(標)과 해석(釋)과 결론지음(結)이다.

㉮ 표방

제1구와 제2구는 부동의 뜻을 표방한 것이다.

㉯ 해석

다음의 제3구부터 제6구까지는 부동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그 법은 현재 여기 있다 할지라도 현재 여기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네.”에서 ‘현재 여기에 있다 할지라도’는 ‘이 세상’을 가리킨다. ‘이 세상’은 곧 ‘현재’이다. ‘현재’의 시간은 영원히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떠나서 그 중간 곧 현재는 없다. 마치 빛과 그림자를 떠나서 중간의 도리가 없는 것과 같다. 때문에 현재라 해도 일어나는 바가 없다.
“그 법은 과거 및 미래가 없으므로 과거 및 미래에 일어나는 바 없네.”에서 ‘과거 및 미래가(異時)’는 소위 과거와 미래이다. 미래는 아직 유有가 아니므로 무기無起의 뜻이고, 과거는 이미 없으므로 또한 무기無起의 뜻이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제법은 기동이 없다.

㉰ 결론지음

이미 생기生起하는 동動도 없고, 또한 항주恒住하는 부동도 없다. 그러므로 “그 제법은 동 및 부동이 없으므로 자성이 공적한 까닭에 적멸하다네.”라고 한다.

001_0673_c_01L入如來若用因力之所入者卽待因
001_0673_c_02L非不動故

001_0673_c_03L
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

001_0673_c_04L
一切諸法相性空無不動是法於是時
001_0673_c_05L不於是時起法無有異時不於異時起
001_0673_c_06L法無動不動性空故寂滅性空寂滅時
001_0673_c_07L是法是時現離相故寂住寂住故不緣

001_0673_c_08L
此下如來正決所疑宣其平等不動
001_0673_c_09L而有得入之義八行頌中卽有二分
001_0673_c_10L前三略說後五廣宣略中有二
001_0673_c_11L3) [50] 明不動之義後一頌顯得入
001_0673_c_12L之義初中有三謂標釋結謂初二
001_0673_c_13L標不動義次有四句釋不動義
001_0673_c_14L是法於是時不於是時起者是時者
001_0673_c_15L謂此世此世者是現在現在之時
001_0673_c_16L永無暫住細除已未卽無中間
001_0673_c_17L除光陰無中間處故於是時不得
001_0673_c_18L有起法無有異時不於異時起者
001_0673_c_19L異時者所謂過未未來未有故無
001_0673_c_20L起義過去已無亦無起義由是道
001_0673_c_21L法無起動旣無生起之動亦無
001_0673_c_22L恒住不動故言法無動不動性空故
001_0673_c_23L「戒」作「▼(戈/天)」{甲}「厭」作「猒」次同{甲}「三」
001_0673_c_24L作「二」{甲}

001_0674_a_01L곧 이 제7구와 제8구의 두 구는 부동의 뜻을 결론지은 것이다.

(나) 여래장에 들어가는 뜻을 설명함

다음의 한 게송은 여래장에 들어가는 뜻을 설명한다.
“자성이 공적하여 적멸할 경우지만”은 자성이 공적함을 요견하여 자성이 적멸한 때 부동한 법이 현현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마음에 현현하므로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상반의 이 두 구절은 여래장에 들어간 뜻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제법이 일체상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제상을 떠나 있으므로 적정하게 머물고, 적정하게 머물기 때문에 항상 반연을 따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비록 여래장에 들어가 있을지라도 반연을 떠나 있다는 뜻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반의 두 구절은 반연의 뜻을 떠나 있음을 드러낸다.

나) 자세한 설법


是諸緣起法    곧 인연을 통하여 일어난 모든 법
是法緣不生    제법의 인연은 발생하지 않는다네
因緣生滅無    인과 연은 생과 멸로 본래 없으니
生滅性空寂    생하고 멸하는 자성은 공적하다네
緣性能所緣    연의 자성 그리고 능연 및 소연은
是緣本緣起    본래 반연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네
故法起非緣    이 때문에 법의 생기도 연 아니고
緣無起亦爾    반연이 생기하지 않음도 그렇다네
因緣所生法    인연을 말미암아 발생하는 제법은
是法是因緣    그 모든 법은 곧 비록 인연이지만
因緣生滅相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습
彼卽無生滅    그 모습의 자성은 생과 멸이 없네

이하는 둘째로 자세하게 설법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앞의 세 게송은 부동의 뜻을 자세하게 널리 설법하고, 둘째는 뒤의 두 게송은 여래장에 들어가는 뜻을 설한다.

(가) 부동의 뜻을 널리 설법함

첫째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앞의 두 게송은 근본을 추구해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부동을 드러내고, 뒤의 한 게송은 지말을 좇아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부동을 드러낸다.

㉮ 근본을 추구해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부동을 드러냄

첫째에 세 가지가 있으니, 표방(標)과 해석(釋)과 결론지음(結)이다.

a. 표방

처음에 “곧 인연을 통하여 일어난 모든 법, 제법의 인연은 발생하지 않는다네.”라고 한 것은 모든 과법은 그 반연이 불생임을 표방한 것이다.

b. 해석

그 다음의 네 구는 불생의 뜻을 해석하는 것이다.
“인과 연은 생과 멸로 본래 없으니”라는 것은 모든 인연은 생멸로서 머물지 않기 때문에 과의 공능을 발생시키지 못함을 설명한 것이다.
“생하고 멸하는 자성은 공적하다네.”는 머물지 않으므로 생멸도 없고, 자성이 공적하므로 또한 과果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연의 자성 그리고 능연 및 소연은”이란 인연으로서의 종자種子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자성이라 말하고, 증상연으로서의 뿌리(根)는 경계를 상대하므로 인연의 주체라 말하며,

001_0674_a_01L寂滅是二句者結不動義次有一
001_0674_a_02L頌明得入義性空寂滅時者了見
001_0674_a_03L性空寂滅之時不動之法是時顯現
001_0674_a_04L顯現於心故言得入如是上半
001_0674_a_05L得入義然此顯法離一切相離諸
001_0674_a_06L相故寂靜而住住寂靜故恒不從
001_0674_a_07L是故雖有入不廢離緣義如是
001_0674_a_08L下半顯離緣義也

001_0674_a_09L
是諸緣起法是法緣不生因緣生滅無
001_0674_a_10L生滅性空寂緣性能所緣是緣本緣起
001_0674_a_11L故法起非緣緣無起亦爾因緣所生法
001_0674_a_12L是法是因緣因緣生滅相彼卽無生滅

001_0674_a_13L
此下第二廣宣於中有二是前三頌
001_0674_a_14L廣不動義其後二頌宣得入義
001_0674_a_15L中亦二謂前二頌推本無得以顯
001_0674_a_16L不動後之一頌逐末無得以顯不
001_0674_a_17L初中有三謂標釋結初言是諸
001_0674_a_18L緣起法是法緣不生者標諸果法
001_0674_a_19L其緣不生次有四句釋不生義
001_0674_a_20L緣生滅無者明諸因緣生滅不住
001_0674_a_21L無生果之功能也生滅性空寂者
001_0674_a_22L不住故卽無生滅性空寂故亦不
001_0674_a_23L生果緣性能所緣者因緣種子
001_0674_a_24L伏名性增上緣根能對境界故名

001_0674_b_01L대상인 경계는 뿌리의 대상이므로 소연이라 말한다. 차제연次第緣120)은 제법의 연멸에 해당하므로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121)
이와 같이 종자의 자성과 연 및 그 인연의 주체와 대상은 모두 본래 반연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반연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곧 그 근본이 된다. 그 밖의 모든 연은 또한 앞의 설명과 같이 생멸의 자성이 공적하므로 발생의 작용이란 없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122)을 말미암아 반연은 곧 무생의 뜻이 된다.

c. 결론지음

“이 때문에 법의 생기도 연 아니고”는 과법의 발기는 반연으로 발생한 바가 아님을 결론지은 것이고, “반연이 생기하지 않음도 그렇다네.”는 반연의 무기無起도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을 결론지은 것이다.

㉯ 지말을 좇아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부동을 드러냄

다음의 한 게송은 지말을 좇아도 터득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부동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연을 말미암아 발생하는 제법은 그 모든 법은 곧 비록 인연이지만”은 모든 과법도 또한 인연이 됨을 설명한 것이다. 과법은 뒤에 발생하는 제법에 대하여 그 반연이 되기 때문이다. 곧 모든 과법은 이미 그 인연이 되어 있음은 앞에서 설명한 “생하고 멸하는 자성은 공적하다네.”라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인연으로 발생하고 소멸하는 모습, 그 모습은 곧 생과 멸이 되네.”라고 한다.
위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대목123)에서는 그대로 과果의 공적함에 대해서만 드러냈다. 그러나 지금 자세하게 널리 설법하는 대목124)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인연의 설법에 대하여 제법의 인과가 부동不動한즉 그것이 곧 평등보리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이 법 이외에 별도로 보리를 추구하지 않음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이 게송의 대의이다.”
이에 승조 법사는 “도가 어찌 멀리 있겠는가. 부딪치는 것이 모두 진리이다. 성스러움이 어찌 멀리 있겠는가. 그것을 체득하면 곧 신통이다.”125)라고 하였다.

(나) 여래장에 들어간 뜻을 펼쳐서 설함


彼如眞實相    진여제법의 진실한 본래의 모습은
本不於出沒    본래부터 나타나고 숨음도 없다네
諸法於是時    그런데도 제법은 지금의 경우에도
自生於出沒    스스로 발생해 나타나고 숨는다네
是故極淨本    이러한 까닭에 극정본각의 자성은
本不因衆力    애초부터 중력에 의지함이 없다네
卽於後得處    그럼에도 이후에 터득한 도리에서
得得於本得    본래각의 도리를 또다시 터득하네”126)

이 두 게송은 여래장에 들어가는 뜻을 펼쳐서 설하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한 게송은 모든 기동에 대하여 진여의 부동을 드러낸다. 둘째로 두 구절은

001_0674_b_01L能緣所緣境界根所對故名爲所
001_0674_b_02L次第緣法滅故不論如是種子
001_0674_b_03L性緣幷其能所二緣皆是本緣之
001_0674_b_04L所起故故言是緣本緣起是卽其
001_0674_b_05L諸緣亦同前說生滅性空故無
001_0674_b_06L生用由是三義緣無生義故法起
001_0674_b_07L非緣者結果法起非緣所生緣無
001_0674_b_08L起亦爾者結緣無起亦同其果
001_0674_b_09L有一頌遂末無得以顯不動因緣
001_0674_b_10L所生法是法是因緣者明諸果法
001_0674_b_11L亦爲因緣望後生法而作緣故
001_0674_b_12L諸果法旣爲因緣卽同前說生滅
001_0674_b_13L性空故言因緣生滅相彼卽爲生滅 [144]
001_0674_b_14L前略說時直顯果空故今廣時就
001_0674_b_15L因緣說欲顯諸法因果不動卽是
001_0674_b_16L平等菩提之道非此法外別求菩提
001_0674_b_17L是謂此偈之大意也如肇法師言
001_0674_b_18L遠乎哉觸事而眞聖遠乎哉軆之
001_0674_b_19L卽神矣

001_0674_b_20L
彼知眞實相本不於出沒諸法於是時
001_0674_b_21L自生於出沒是故極淨本本不因衆力
001_0674_b_22L卽於後得處得得 [145] 於本得

001_0674_b_23L
此二頌是宣得入義於中有三
001_0674_b_24L者一頌對諸有動顯如不動二者

001_0674_c_01L부동은 본래 뭇 반연에 상대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셋째로 두 구절은 반연과 제법을 떠나 여래장에 들어간 뜻을 설명한다.
“그럼에도 이후에 터득한 도리에서”는 도를 닦은 이후의 경지이다. 앞의 간략하게 설명한 것에서 ‘적멸할 그 경우’라고 한 것이 바로 여기에서 ‘그럼에도 이후에 터득한 도리에서’라고 한 것에 해당한다. 이미 적멸한 경지인데 어찌 처소(處)와 시제(時)가 있겠는가. 단지 처소와 시제를 떠나 있는 까닭에 그 처소와 시제에 의거했을 뿐이다.
“본각의 도리를 또다시 터득하네.”는 시각始覺이 완성된 까닭에 ‘터득하네.’라고 하니, 이는 터득하는 주체이다. 시각이 완성되면 다시 본각과 동일하기 때문에 ‘본각의 도리’라고 한다.
이상으로 「여래장품」의 셋째의 의심을 없앤 부분을 마친다.

4) 지장보살이 이해시킴
그때 지장보살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마음이 탁 트였고, 당시의 대중들도 의심하는 자가 없어지자, 대중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게송을 설하여 여쭈었다.

我知衆心疑    “저는 대중의 마음에 있는 의심을 알아
所以殷固問    그 때문에 은근하고 또 간곡히 여쭈니
如來大慈善    여래께선 곧 대자 및 대비의 선심으로
分別無有餘    의심을 분별하시어 남김없이 해 주셨네127)

是諸二衆等    이에 모든 소승 및 대승의 귀의자들을128)
皆悉得明了    모두 남김없이 분명하게 요해하였다네
我今於了處    이제 저도 제가 깨친 경지에 입각하여
普化諸衆生    널리 삼계의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여129)

如佛之大悲    마치 부처님의 대자 및 대비 마음으로
不捨於本願    과거 세상의 본래 서원 저버리지 않네
故於一子地    이에 곧 마치 외아들 돌보는 마음으로
而住於煩惱    중생의 번뇌 속에 들어가 머물겠나이다”130)

이것은 넷째로 지장보살이 이해시킨 것이다.131) 이 세 게송에 두 부분이 있다. 앞의 한 게송 반은 앞에서 의심을 해결해 준 이익을 결론 맺은 것이다. 뒤의 한 게송 반은 훗날에 널리 제도할 보살행을 펼친 것이다.
“마치 외아들 돌보는 마음으로”는 초지 이상에서 이미 일체중생이 평등함을 증득하였기에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간주하는 것이다. 이것을 청정한 증상增上·의락意樂이라 한다. 곧 비유에 의하여 보살의 마음을 나타내어 ‘마치 외아들 돌보는 마음으로’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번뇌 속에 들어가 머물겠나이다.”는 보살이 비록 제법이 평등한 경지를 터득했지만 방편력으로 번뇌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일체의 번뇌煩惱와 수면隨眠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간다면 본원本願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저 『유가론』의 삼마희다를 결택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674_c_01L二句明不動本不待衆緣三者二
001_0674_c_02L明離緣法有得入義後得處者
001_0674_c_03L謂道後處前略說中言寂滅時卽是
001_0674_c_04L此言後得之處旣是寂滅何有處時
001_0674_c_05L但離時處故寄之時處耳得得於本
001_0674_c_06L得者始覺究竟故名爲得是能得
001_0674_c_07L始覺究竟還同本覺以之故言
001_0674_c_08L得於本得上來第三決疑分竟

001_0674_c_09L
爾時地藏菩薩聞佛所說心地快然
001_0674_c_10L時諸衆等無有疑者知衆心已而說
001_0674_c_11L偈言

001_0674_c_12L
我知衆心疑所以殷固問如來大慈善
001_0674_c_13L分別無有餘是諸二衆等皆悉得明了
001_0674_c_14L我今於了處普化諸衆生如佛 [146] 之大悲
001_0674_c_15L不捨於本願故於一子地而住於煩惱

001_0674_c_16L
此是第四領解此三頌中卽有二分
001_0674_c_17L前一頌半結前決疑之利後一頌半
001_0674_c_18L申後普化之行一子地者初地已上
001_0674_c_19L已證一切衆生平等視諸衆生如視
001_0674_c_20L一子是名淸淨增上意樂寄喩表心
001_0674_c_21L名一子地而住於煩惱者菩薩雖
001_0674_c_22L得諸法平等而以方便力不捨煩惱
001_0674_c_23L若捨一切煩惱隨眠便入涅槃違本
001_0674_c_24L願故如瑜伽論三摩呬多決擇中

001_0675_a_01L
멸진등지滅盡等至는 마땅히 무루라 해야 한다. 곧 그것은 번뇌와 더불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번뇌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반연하는 바가 없다. 때문에 모든 번뇌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은 출세간의 일체의 이생異生(중생)으로서는 할 수 없는 수행이다. 오직 원행지遠行地(제7지) 이상에 들어간 보살을 제외된다. 왜냐하면 원행지 이상의 보살은 비록 출세간법을 일으켜 이 자리에 현전시킬지라도 선교방편을 말미암은 까닭에 번뇌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132)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저 소승의 아라한처럼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므로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이지, 전혀 번뇌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번뇌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번뇌 속에 들어가 머물겠나이다.”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열반에 들어가지 않고 널리 시방세계를 제도하기 때문이다.
이 『금강삼매경』에는 세 부분133)이 있는데, 그 둘째인 정설분은 이상으로 마친다.

제3장 유통분
1. 보살을 찬탄하여 유통시킴
그때 여래께서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134)
“이 보살들135)은 불가사의하다. 항상 대비로써 중생의 고뇌를 없애 준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중생이 이 『금강삼매경』의 설법을 지니고 이 보살의 명호를 지니면 곧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지 않고 일체의 장난障難이 모두 다 소멸된다. 그리고 만약 어떤 중생이 다른 잡념이 없이 오로지 이 『금강삼매경』을 염송하여 여법하게 수습하면 그때 보살이 항상 화신으로 그를 위하여 설법해 주고, 그 사람을 옹호하여 끝내 잠시도 저버리지 않으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터득하게 해 준다.

이하는 셋째로 유통분이다. 여기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살을 찬탄하여 유통시키고, 둘째는 대중에게 권장하여 유통시키며, 셋째는 경전의 제명을 내세워 유통시키고, 넷째는 수지하여 유통시키며, 다섯째는 참회시켜 유통시키고, 여섯째는 봉행하여 유통시킨다.

이는 첫째로 보살을 찬탄하여 유통시키는 것이다.

001_0675_a_01L滅盡等至當言無漏由與煩惱
001_0675_a_02L不相應故非相應故無所緣故
001_0675_a_03L諸煩惱之所生故是出世1) [51] 一切
001_0675_a_04L異生不能行故唯除已入遠地菩薩
001_0675_a_05L菩薩雖能起出世法令現在前
001_0675_a_06L由方便善巧力故不捨煩惱案云
001_0675_a_07L此中言不捨者非究竟捨如羅漢等
001_0675_a_08L故曰不捨非全不捨故言不捨
001_0675_a_09L中委悉如二障章說由不捨故
001_0675_a_10L住煩惱由是不入涅槃普化十方界
001_0675_a_11L此一卷經有三分中第二正說
001_0675_a_12L竟在於前也

001_0675_a_13L[流通分]
讚人流通
爾時如來而告衆言是菩薩者不可
001_0675_a_14L思議恒以大悲一本
作慈
[147] 拔衆生苦若有衆
001_0675_a_15L持是經法持是菩薩名 [148] 卽不墮於
001_0675_a_16L惡趣一切障難皆悉除滅若有衆生 [149]
001_0675_a_17L一本衆生下
持此經者四字
無餘雜念專念是經
001_0675_a_18L法修習爾時菩薩常作化身而爲說法
001_0675_a_19L擁護是人終不暫捨令是人等速得
001_0675_a_20L阿耨多羅三藐三菩提

001_0675_a_21L
此下第三名流通分於中有六
001_0675_a_22L者讃人流通二者勸衆流通三者立
001_0675_a_23L名流通四者受持流通五者懺悔流
001_0675_a_24L六者奉行流通
此卽第一讃人流

001_0675_b_01L이 경전을 유통시킬 수 있는 보살의 네 가지 뛰어난 공덕을 찬탄한다. 첫째는 대비로써 일체를 제도하는 공덕이고, 둘째는 이 경전을 수지하는 자에게 개별적인 이익을 주는 공덕이며, 셋째는 화신으로 설법하는 공덕이고, 넷째는 최후의 과보를 터득하게 하는 공덕이다.

2. 대중에게 권장하여 유통시킴
그대 보살들이 만약 중생을 제도하려면 모두 이와 같은 대승의 결정요의決定了義를 수습해야 한다.”

이는 둘째로 대중에게 권장하여 유통시키는 것이다.
“결정요의”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더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낸다.

3. 경전의 제명을 내세워 유통시킴
이하는 셋째로 경전의 명칭을 내세워 유통시키는 것이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1) 질문
그때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께서 해 주신 설법은 대승의 복취이고, 번뇌를 결정적으로 단제해 주며, 무생과 본각의 이익으로서 불가사의합니다. 부처님의 이와 같은 설법에 대하여 어떤 경전이라 제목을 붙여야 하고, 이 경전을 수지하면 어떤 복덕을 터득합니까. 바라건대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써 저희들에게 설해 주십시오.”136)

질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해이고, 둘째는 질문이다.

(1) 이해

이해 중에서는 이 경전의 네 가지 뛰어난 공능을 드러낸다.
첫째의 뛰어난 공능은 수지하는 자로 하여금 무량한 복덕을 터득하게 한다. 경문의 “대승의 복취”가 그것이다.
둘째의 뛰어난 공능은 수지하는 자로 하여금 모든 번뇌를 영원히 단제토록 한다. 경문의 “번뇌를 결정적으로 단제해 준다.”가 그것이다.
셋째는 설명되는 종지가 곧 본각의 이익이다. 경문의 “무생과 본각의 이익”이 그것이다.
넷째는 능전能詮의 교체가 곧 사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문의 “불가사의합니다.”가 그것이다.

(2) 질문

둘째 질문에서는 두 가지를 질문하였다. 첫째는 경전의 제목을 질문하였으니, 경전의 요체를 알기 위해서이다. 둘째는 경전을 수지하는 복덕을 질문하였으니, 복덕을 추구하여 경전을 수지하기 위해서이다.

2) 답변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경전의 제목은 불가사의하다. 과거의 제불이 호념한 바이고, 여래의 일체지혜바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001_0675_b_01L讃能流通是經菩薩四種勝德
001_0675_b_02L一者大悲普化一切功德二者
001_0675_b_03L益持是經者功德三者化身說法功
001_0675_b_04L四者令得極果功德

001_0675_b_05L[勸衆流通]
汝等菩薩若化衆生皆令修習如是大
001_0675_b_06L決定了義

001_0675_b_07L
此是第二勸衆流通決定了義者
001_0675_b_08L顯最深最極不可以加矣

001_0675_b_09L
爾時阿難從座而起前白佛言如來
001_0675_b_10L所說大乘福聚決定斷結無生覺利
001_0675_b_11L不可思議如是之法名爲何經受持
001_0675_b_12L是經得幾所福願佛慈悲爲我宣說

001_0675_b_13L[立名流通]
此下第三立名流通先問後答
001_0675_b_14L中亦二先領後問領中卽顯是經
001_0675_b_15L四種勝能一能令持者得無量福
001_0675_b_16L如經大乘福聚故二能令持者永斷
001_0675_b_17L諸結如經決定斷結故三者所詮
001_0675_b_18L之旨是本覺利如經無生覺利故
001_0675_b_19L四者能詮之敎難可思量如經不
001_0675_b_20L可思議故次問中問二事先問經
001_0675_b_21L爲知經要故後問持福求福持
001_0675_b_22L經故

001_0675_b_23L
佛言善男子是經名者不可思議
001_0675_b_24L去諸佛之所護念能入如來一切智海

001_0675_c_01L그러므로 만약 어떤 중생이 이 경전을 수지하면 곧 일체경전에 대하여 더 이상 희구할 바가 없다. 왜냐하면 이 경전의 설법은 온갖 오미의 법을 총지하고, 제경의 요체를 섭수하며, 제경의 법에서 제법의 종지를 이어주기 때문이다.137) 이에 이 경전의 제목을 『섭대승경』이라 말하고, 또 『금강삼매』라 말하며, 또 『무량의종』이라 말한다.138)

이하는 답변으로서 두 가지가 있으니, 차례대로 두 가지 질문에 답변하기 때문이다.

(1) 첫 번째 질문에 답변함

첫 번째의 답변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먼저 제목의 뜻을 찬탄하고, 둘째는 뒤에 그대로 제목을 내세운다.

① 제목의 뜻을 찬탄함

첫째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제목을 총체적으로 찬탄하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뜻을 드러낸다.

(가. 총체적으로 제목을 찬탄함)

나. 개별적으로 뜻을 드러냄

“여래의 일체지혜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하는 개별적으로 뜻을 드러낸 것이니, 곧 세 가지 뜻을 드러낸다.

가) 금강삼매라는 제명의 뜻을 드러냄

“여래의 일체지해에 들어가는 것이다. …… 더 이상 희구할 바가 없다.”는 것은 금강삼매라는 제명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곧 어떤 법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어떤 도리도 궁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이로 말미암아 여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게 하고 이것을 능가하는 것으로 더 이상 희망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 섭대승경이라는 제명의 뜻을 드러냄

“이 경전의 설법은 온갖 오미의 법을 총지하고, 제경의 요체를 섭수한다.”는 것은 섭대승경이라는 제명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 무량의종이라는 제명의 뜻을 드러냄

“제경의 법에서 제법의 종지를 이어주기 때문이다.”라는 것은 무량의종이라는 제명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② 그대로 제명의 뜻을 내세움

이 두 가지 제목의 뜻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전자(섭대승경)는 온갖 경전의 뜻을 널리 섭수함을 설명하고, 후자(무량의종)는 온갖 경전의 종지의 궁극임을 드러낸다.
다음으로 세 가지 제목을 내세우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위 경문의 두 부문에서 이미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2) 두 번째 질문에 답변함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하면 곧 백·천의 제불을 수지한다는 말이 된다. 이와 같은 공덕을 비유하면 마치 허공에 끝이 없어 불가사의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 여래가 촉루하는 것도 오직 이 경전뿐이다.”139)

이는 두 번째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네 가지 뛰어난 덕을 드러낸다.

001_0675_c_01L若有衆生持是經者卽於一切經中
001_0675_c_02L無所希求 [150] 是經典法摠持衆法攝諸
001_0675_c_03L經要是諸經法法之繫宗是經名者
001_0675_c_04L名攝大乘經又名金剛三昧又名無量
001_0675_c_05L義宗

001_0675_c_06L
此下答中有二如其次第答二問故
001_0675_c_07L初中亦二先讃名義後正立名
001_0675_c_08L中亦二先摠歎名後別顯義能入
001_0675_c_09L已下是別顯義卽顯三義能入如
001_0675_c_10L來智海乃至無所希求者是顯金剛
001_0675_c_11L三昧之名之義無法不壞無理不窮
001_0675_c_12L由是令入如來智海過是更無所希
001_0675_c_13L望故是經典法摠持衆法攝諸經
001_0675_c_14L要者是顯攝大乘經之名之義是諸
001_0675_c_15L經法法之繫宗者是顯無量義宗之
001_0675_c_16L名之義是二名義有何差別者
001_0675_c_17L明廣攝衆經之義後顯衆經所宗之
001_0675_c_18L次立三名於中委悉者文前二
001_0675_c_19L門中已廣說也

001_0675_c_20L
若有人受持是經典者卽名受持百千
001_0675_c_21L諸佛如是功德譬如虛空無有邊際
001_0675_c_22L不可思議我所囑累唯是經典

001_0675_c_23L
此是答第二問於中卽顯四種勝德
001_0675_c_24L「間」作「聞」{甲}

001_0676_a_01L
첫째는 부처를 수지하는 뛰어난 덕이다. 곧 이 경전은 제불의 마음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경문의 “백천의 제불을 수지한다.”가 그것이다.
둘째는 광대하게 뛰어난 덕이다. 경문의 “허공에 끝이 없다.”가 그것이다.
셋째는 심심하게 뛰어난 덕이다. 경문의 “불가사의한 것과 같다.”가 그것이다.
넷째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덕이다. 경문의 “오직 이 경전뿐이다.”가 그것이다.

4. 수지하여 유통시킴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마음으로 봉행해야 하고,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이 경전을 수지하면 그 사람은 마음에 득과 실이 없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으며, 희론을 마주해서도 항상 고요한 마음을 누리고, 취락에 들어가서도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으며, 속가에 있더라도 삼유에 집착이 없다.

이하는 넷째로 수지하여 유통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대로 수지함을 설명하고, 둘째는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낸다.

1) 그대로 수지함을 설명함
첫째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답변이다.

(1) 질문

질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먼저 경전을 수지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질문한다. 둘째는 뒤에 경전을 수지하는 사람의 복리에 대하여 질문한다.

(2) 답변

답변의 대목에서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차례로 답변한다.

① 다섯 가지 마음의 작용을 설명함

첫째의 답변에서는 다섯 가지 마음의 작용을 설명한다.
첫째로 “마음에 득과 실이 없다.”는 것은 타인의 장단점을 보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 “항상 범행을 닦는다.”는 것은 안으로 집착을 떠난 청정행을 닦는 것이다.
셋째로 “항상 고요한 마음을 누린다.”는 것은 동動에 있으면서도 부동不動한 것이다.
넷째로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다.”는 것은 산란한 곳에 들어가서도 산란하지 않은 것이다.
다섯째는 “삼유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오염된 곳에 거주해서도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

② 다섯 가지 복리를 터득함

그 사람에게는 현세에 다섯 가지 복리가 있다. 첫째는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둘째는 몸이 횡사하거나 요사하지 않는다. 셋째는 사론邪論에 대해서도 변별하여 답변을 한다. 넷째는 즐거이 중생을 제도한다. 다섯째는 성도에 들어간다.140) 이와 같은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한다.


001_0676_a_01L一者持佛勝德是經能攝諸佛心故
001_0676_a_02L如經受持百千諸佛故二者廣大勝
001_0676_a_03L如經無有邊際故三者甚深勝
001_0676_a_04L如經不可思議故四者無比勝
001_0676_a_05L如經唯是經典故

001_0676_a_06L[受持流通]
阿難言云何心行云何人者受持是
001_0676_a_07L佛言善男子受持是經者是人
001_0676_a_08L心無得失常修梵行若於戱論常樂
001_0676_a_09L [151] 入於聚落心常在定若處居家
001_0676_a_10L不着三有

001_0676_a_11L
此下第四受持流通於中有二
001_0676_a_12L者正明受持二者往復重顯初中亦
001_0676_a_13L先問後答問中有二先問受持
001_0676_a_14L經者心行後問受持經者福利答中
001_0676_a_15L次第答此二問初中卽明五種心行
001_0676_a_16L一心無得失者不觀他人之長短故
001_0676_a_17L二常修梵行者內修離相之淨行故
001_0676_a_18L三常樂靜心者在動不動故四心常
001_0676_a_19L在定者入散不散故五不著三有者
001_0676_a_20L居染不染故

001_0676_a_21L
是人現世有五種福一者衆所尊敬
001_0676_a_22L二者身不橫夭三者辯答邪論四者樂
001_0676_a_23L度衆生五者能入聖道如是人者
001_0676_a_24L持是經

001_0676_b_01L
이는 둘째의 질문에 답변한 것이니, 앞의 다섯 가지 행위를 따라 이 다섯 가지 복리를 터득한다.
“대중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대중의 장단점을 보지 않음을 말미암은 것이다.
“몸이 횡사하거나 요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분별상을 떠난 행위의 닦음을 말미암은 것이다.
“사론에 대해서도 변별하여 답변을 한다.”는 것은 적정한 마음을 누리기 때문이다.
“즐거이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산란에 들어가 있어도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이다.
“성도에 들어간다.”는 것은 삼유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2)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냄
이하는 둘째로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복전의 자체를 설명하고, 둘째는 복덕을 발생시키는 공능을 드러낸다.

(1) 복전의 자체를 설명함

아난이 여쭈었다.
“그와 같은 사람도 중생을 제도하고 공양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사람은 중생을 위하여 대복전이 되고, 항상 대지혜를 실천하는 데 있어 방편과 진실을 함께 연출한다. 이에 사의승四依僧141)으로서 모든 공양 및 머리·눈·골수·뇌까지도 다 받을 수 있는데 하물며 옷과 음식을 공양받지 못하겠는가.
선남자여, 그와 같은 사람은 그대들의 선지식이고, 그대들의 교량인데, 하물며 범부가 공양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그 첫째에 해당한다.
“사의승”이란, 제일의는 번뇌의 자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십지 이전의 계위에 속하고, 나머지 제2의·제3의·제4의 등은 지상의 계위에 속한다. 『열반경』에서 자세하게 설한 것과 같다.142)

(2) 복덕을 발생시키는 공능을 드러냄

아난이 여쭈었다.
“그 사람이 이 경전을 수지할 경우에 그 사람에게 공양하면 어떤 복덕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성에 금과 은을 가득 채워서 그것을 가지고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사구게 하나를 수지한다면 그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

이는 둘째로 경전을 수지하는 사람은 많은 복덕을 발생시키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곧 성에 금과 은을 가득 채워서

001_0676_b_01L
此是答第二問隨前五行得此五福
001_0676_b_02L衆所尊敬者由其不觀衆之長短故
001_0676_b_03L身不橫夭者由其常修離相行故
001_0676_b_04L答邪論者樂靜心故樂度衆生者
001_0676_b_05L入散常定故能入聖道者不着三有
001_0676_b_06L

001_0676_b_07L
阿難言如彼人者度諸衆生得受供
001_0676_b_08L一本供下
有養字
[152] 佛言如是人者能爲衆生
001_0676_b_09L作大福田常行大智權實俱演是四
001_0676_b_10L依僧於諸供養乃至頭目髓腦亦皆
001_0676_b_11L得受何況衣食而不得受善男子
001_0676_b_12L是人者是汝知識是汝橋梁何況凡
001_0676_b_13L而不供養

001_0676_b_14L
此下往復重顯於中有二先明福田
001_0676_b_15L之軆後顯生福之能此卽初也
001_0676_b_16L依僧者第一依是具煩惱性位在
001_0676_b_17L地前其餘三依位在地上如涅槃
001_0676_b_18L經之所廣說

001_0676_b_19L
阿難言於彼人所 [153] 受持是經供養是
001_0676_b_20L得幾所福佛言若復有人持以滿
001_0676_b_21L城金銀而以布施不如於是人所
001_0676_b_22L持是經一四句偈供養是人一本無供養
是人四字
001_0676_b_23L不可思
議四字
[154]

001_0676_b_24L
此是第二明持經者能生多福以滿

001_0676_c_01L이 경전을 수지하지 못한 사람에게 보시하여 획득한 복덕이 사구게 하나를 수지하는 사람에게 한 끼 및 한 벌의 옷만을 가지고 공양하여 획득한 복덕만 못하기 때문이다.

5. 참회시켜 유통시킴
이하는 다섯째로 참회시켜 유통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참회의 공덕을 찬탄하고, 둘째는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낸다.

1) 참회의 공덕을 찬탄함
선남자여, 모든 중생에게 이 경전을 수지하게 하는 자는 마음이 항상 선정에 들어 있어 본래심을 잃지 않는다. 설령 본래심을 잃었으면 곧 마땅히 참회해야 한다. 참회하는 법이야말로 곧 청량하기 때문이다.”

첫째에서 “청량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서, 수행에 장애(不善)가 되는 원인인 침탁沈濁을 소멸한 것을 ‘청淸’이라 하고, 생사윤회의 과보인 열뇌熱惱를 떠나는 것을 ‘량凉’이라 한다.

2)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냄
아난이 여쭈었다.
“이전의 죄업을 참회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거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마치 어두운 방에 밝은 등불이 비취면 어둠이 곧 소멸되는 것과 같다. 선남자여, 그러므로 이전에 지은 모든 죄업을 참회한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과거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하는 둘째로 왕복하면서 거듭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곧 두 번의 문답이 있다. 첫째 문답은 그 참회하는 도리를 드러내고, 둘째 문답은 그 참회하는 수행법을 드러낸다.

(1) 참회하는 도리를 드러냄

여기에서 질문한 뜻은 다음과 같다. “이전의 죄업에 대한 참회를 참회라 말한다면 이전의 죄업은 과거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인가. 만약 이전의 죄업이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에 들어 있는 것이라 한다면 어떻게 있지도 않은 죄업을 참회한다는 것인가.”
답변에서 “그렇다.”고 한 것은 그처럼 이전의 죄업이 과거에 들어 있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은 죄업에 대하여 참회할 수는 없음을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전에 지은 죄업은 근본식의 종자에 훈습되어 항상 현재까지도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과거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지금 참회하여 그 죄업을 다스리는 경우는 그 죄업의 종자를 현재에 흐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001_0676_c_01L城金銀施不持經者所得之福不如
001_0676_c_02L一餐一衣供養持此一四句偈之所
001_0676_c_03L得福故

001_0676_c_04L
善男子令諸衆生持是經者心常在
001_0676_c_05L不失本心若失本心卽當 [155] 懺悔
001_0676_c_06L悔之法是爲淸凉

001_0676_c_07L[懺悔流通]
此下第五懺悔流通於中有二
001_0676_c_08L讃懺悔功德二者往復重顯初中言
001_0676_c_09L淸凉者滅不善因沈濁故淸離生死
001_0676_c_10L果熱惱故凉

001_0676_c_11L
阿難言懺悔先罪不入於過去也
001_0676_c_12L如是猶如暗室若遇明燈暗卽滅
001_0676_c_13L善男子無說悔先所有諸罪而以
001_0676_c_14L爲說入於過去

001_0676_c_15L
此下第二往復重顯於中卽有二番
001_0676_c_16L問答初番顯其懺悔道理後番顯其
001_0676_c_17L懺悔行法此中問意言懺悔先罪
001_0676_c_18L名懺悔者先罪不入於過去耶若先
001_0676_c_19L非今故入過去者云何於無罪
001_0676_c_20L有懺悔那答中言知是者如是先
001_0676_c_21L不入過去故不於無而有懺悔
001_0676_c_22L所以然者先所作罪熏於本識
001_0676_c_23L子恒流在於現在由是道理未入
001_0676_c_24L過去且今懺悔能治生時令彼罪

001_0677_a_01L마치 등불이 발생할 경우, 방의 어둠이 바야흐로 소멸되는 것처럼 죄업의 종자가 지금 현재까지는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야 바야흐로 과거에 들어가도록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전에 지은 죄업을 참회한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과거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죄업은 참회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으로 하여금 이전에 지니고 있던 죄업을 없었던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에 있었던 죄업으로 하여금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다. 곧 현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참회의 행위를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은 번뇌를 단제하는 뜻과는 다르다.
저 경우143)는 생멸의 도리에 의한 것이므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하여금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 경우144)는 상속의 도리에 나아가서 이전에 있던 죄업을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단제하는 경우는 종자를 영원히 단제하는 것이지만, 이전의 죄업을 참회하는 것은 종자가 증강하는 작용을 억제하여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 의하여 과거에 들어간다고 설한 것이다.

(2) 참회하는 수행법을 드러냄

아난이 여쭈었다.
“참회한다는 것은 어떤 수행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전의 가르침에 의하여 진실관행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단 진실관행에 들어가는 경우에 모든 죄업이 다 소멸되고, 모든 악도를 떠나며, 마땅히 정토에 출생하여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145)

이는 둘째로 참회하는 수행법을 드러내는 것이다. 답변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참회하는 수행법을 설명하고, 둘째는 뛰어난 이익을 보여 준다.146)

① 참회하는 수행법을 설명함

첫째에서 “이 경전의 가르침에 의하여 진실관행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금강삼매의 교지에 의한 제법상의 타파를 ‘진실관행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지전地前의 진관眞觀147)과 비슷하다.
“일단 진실관행에 들어가는 경우에 모든 죄업이 다 소멸된다.”는 것은 일체의 죄업장은 망상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지금 제법상을 타파하여 진실관행에 들어가서 대번에 일체의 망상경계를 타파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장이 일시에 다 소멸되는 것이다.

② 뛰어난 이익을 보여 줌

그 다음은 뛰어난 이익을 보여 주는 대목인데, 여기에 두 구절이 있다.
“모든 악도를 떠나며 마땅히 정토에 출생한다.”는 것은 화보華報148)를 설명한다.

001_0677_a_01L不流現在如燈生時室暗方滅
001_0677_a_02L罪種不至於今現故是時方說令入
001_0677_a_03L過去而無說悔先所有罪者先所有
001_0677_a_04L非悔所及不能令彼非先有故
001_0677_a_05L但其先有令不至現不至現者由悔
001_0677_a_06L所爲此與斷結之義異者彼約生滅
001_0677_a_07L道故令未生者不至現在此就相
001_0677_a_08L續道故令先有者不至現在又斷結
001_0677_a_09L永斷種子悔先罪者損伏種子
001_0677_a_10L增强之用不至現在故約此義
001_0677_a_11L入過去也

001_0677_a_12L
阿難言云何名爲懺悔佛言依此經
001_0677_a_13L入眞實觀一入觀時諸罪悉滅
001_0677_a_14L諸惡趣當生淨土速成阿耨多羅三藐
001_0677_a_15L三菩提

001_0677_a_16L
此是第二懺悔行法答中有二先明
001_0677_a_17L行法後示勝利初中言依此經敎
001_0677_a_18L入眞實觀者謂依金剛三昧敎旨
001_0677_a_19L諸法相名入眞實此是地前相似眞
001_0677_a_20L一入觀時諸罪悉滅者一切罪
001_0677_a_21L從妄想生今破諸相入眞實觀
001_0677_a_22L頓破一切妄想境界所以諸罪一時
001_0677_a_23L悉滅次顯勝利卽有二句離諸惡
001_0677_a_24L當生淨土者是明華報速成阿

001_0677_b_01L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한다.”는 것은 과보果報를 보여 준다.

6. 봉행하여 유통시킴
부처님께서 이 경전의 설법을 마쳤다.
그때 아난 및 모든 보살과 사부대중이 모두 크게 환희하고, 마음에 결정지혜를 터득하여,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고 환희하며 받들고 실천하였다.149)

이것은 여섯째로 봉행하여 유통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네 구절이 있다.
“모두 크게 환희하였다.”는 설법을 듣고 환희한 것이다.
“마음에 결정지혜를 터득하였다.”는 모든 의혹을 떠난 것이다.
“부처님의 발에 정례하였다.”는 법을 존중하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다.
“환희하며 봉행하였다.”는 봉행하는 경우에 더욱더 환희롭다는 것이다.

甚深且微金剛敎  매우 심오하고 미묘한 금강의 가르침
今承仰信略記述  지금 받들어 우러러 믿고 약술합니다
願此善根遍法界  원컨대 이 선근공덕 법계에 두루하여
普利一切無遺缺  널리 일체중생이 모두 이롭게 되소서150)

『금강삼매경론』 하권을 마치다


001_0677_b_01L耨多羅三藐三菩提者是示果報

001_0677_b_02L[奉行流通]
佛說是經已爾時阿難及諸菩薩
001_0677_b_03L部大 [156] 皆大歡喜心得決定頂禮佛
001_0677_b_04L歡喜奉行

001_0677_b_05L
此是第六奉行流通於中四句皆大
001_0677_b_06L歡喜者聞法歡喜故心得決定者
001_0677_b_07L離諸疑惑故頂禮佛足者重法敬人
001_0677_b_08L歡喜奉行者行時轉喜故
001_0677_b_09L甚深且微金剛敎今承仰信略記述
001_0677_b_10L願此善根遍法界普利一切無遣缺

001_0677_b_11L
金剛三昧經論卷下終
  1. 1)계행 : 삼무루학三無漏學 가운데 계무루학戒無漏學을 가리킨다.
  2. 2)삼용三用 : 원효는 삼취정계의 작용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1a)에서는 공空·가假·중中이라 하고,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05bc)에서는 삼해탈三解脫의 작용이라 한다.
  3. 3)사연四緣 : 작택멸력취연作擇滅力取緣·본리정근력소집기연本利淨根力所集起緣·대혜대비력연本慧大悲力緣·일각통지력연一覺通智力緣을 가리킨다.
  4. 4)일여 : 일본각의 진여를 가리킨다.
  5. 5)택멸擇滅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06a)에서는 간택단멸揀擇斷滅의 뜻으로 해석한다. 또한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1b)에서는 “여기에서의 택擇은 택선擇善으로서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한다든가 또는 반드시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든가 하는 것으로 악의 소멸을 말한다.(故擇謂擇善。 如是應作。 如是不應作等滅惡。 )”고 말한다.
  6. 6)일본각(一事)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06b)에서는 여래의 칠상주과七常住果로서 보리菩提·열반涅槃·진여眞如·불성佛性·암마라식菴摩羅識·공여래장空如來藏·대원경지大圓鏡智를 언급하면서 그것에 명칭은 일곱 가지가 있지만 그 체體는 본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7. 7)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사연이란 다음과 같다. … 이것이 곧 사연이다.”
  8. 8)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사대연력은 사상에 집착도 없고 무공용도 아니며 일본각의 도리를 떠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남자여, 이와 같이 일본각은 육행을 통섭하므로 부처님의 보리이고 살반야의 바다이다.”
  9. 9)일본각이 일체수행을 섭수함을 싸잡아서 드러낸다는 것이다.
  10. 10)사상事相에 집착도~법은 진공으로서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06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에 집착이 없다고 말한 것은 유위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공용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은 무위법에 집착이 없는 것이다. 그 법이야말로 곧 진성공이다.(言若不住事相。 則不著於有爲。 不無功用。 則不著於無爲。 是法即爲眞性空矣。)” 그러나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1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상에 집착이 없다.’는 것은 유위법에 집착이 없는 것이고, ‘무공용도 아니다.’라는 것은 유위법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유위법에 집착이 없는 것은 곧 진제이고 유위법에 걸림이 없는 것은 곧 속제이다. 진제와 속제가 둘이 아니므로 진공의 법성은 체가 원융하게 더불어 운용된다.(不住事相者。 不著有爲也。 不無功用者。 不礙有爲也。 不著有爲即眞諦。 不礙有爲即俗諦。 眞俗不二。 以眞空法性。 爲體圓融並運。)”
  11. 11)대력관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1b~c)에 의하면, 상락아정의 사덕四德이 성취되어 이아二我를 초월하고 대안락심을 증득하는데 그 안락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12. 12)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 불일불이不一不異하기 때문이다.”
  13. 13)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다만 명칭과 법수이기에 …… 삼고의 바다를 건너간다.”
  14. 14)『大智度論』 권19(T25, 198b).
  15. 15)『大智度論』에서 제시하는 열 가지는 신信·계戒·사유思惟·정진精進·염念·정定·혜慧·제除·희喜·사捨인데, 원효는 희喜를 수受로, 정진精進을 근勤으로, 제除는 안安으로 간주하고 있다.
  16. 16)내 설법은~불구하고 설하였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07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하자면 내가 이전에 설한 것은 그대와 일체중생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모두 중생의 입장에서 설한 것이었기 때문에 부득불 방편으로써 그 말할 수 없는 뜻을 설하였다.(言我向所說法者。 以汝與一切衆生。 皆在衆生之中。 而以爲說。 故不得不以方便權巧。 說此不可說之義。)”
  17. 17)문자와 뜻이~모습을 드러낸다 : 문자와 뜻을 활용함에 있어 여래의 경우와 중생들의 경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18. 18)먼저 두 문장 : “내가 설한 바는 뜻의 언어이지 문자만의 언어는 아니다.” 및 “그러나 중생이 설한 바는 문자만의 언어이지 뜻의 언어가 아니다.”라는 것을 가리킨다.
  19. 19)두 문장 : “뜻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공무일 뿐이다.” 및 “공무의 언어는 뜻을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20. 20)저 위에서 말한 : 「入實際品」 가운데 삼공三空을 설명하는 대목을 가리킨다.
  21. 21)사구四句 : 긍정의 입장인 유구有句, 부정의 입장인 무구無句, 모두 긍정의 입장인 역유역무亦有亦無(俱句), 모두 부정의 입장인 비유비무非有非無(非俱句)를 말한다.
  22. 22)『菩薩瓔珞本業經』(T24, 1021b).
  23. 23)보살이 십지十地에서 점차 단제하는 십중장十重障을 가리킨다. 첫째는 이생성장異生性障, 둘째는 사행장邪行障, 셋째는 암둔장闇鈍障, 넷째는 미세번뇌현행장微細煩惱現行障, 다섯째는 어하승반열반장於下乘般涅槃障, 여섯째는 조상현행장粗相現行障, 일곱째는 세상현행장細相現行障, 여덟째는 무상중작가행장無相中作加行障, 아홉째는 이타중불욕행장利他中不欲行障, 열째는 어제법중미득자재장於諸法中未得自在障이다.
  24. 24)『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2a~b)에서는 오위五位를 각각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에 배대하고 있어서 원효의 견해와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25. 25)두 구절 : “이 몸속에 있는 진여종자가 망심에 가려 있다.”는 구절과 “그 망심을 벗어나면 청정심이 분명해진다.”는 구절을 가리킨다.
  26. 26)심사관尋思觀 : 사심사관四尋思觀을 가리킨다. 사심사관은 혹 사종구四種求라고도 하는데, 사여실관四如實觀(四如實智)과 더불어 가행위加行位에서 수행한다. 사심사관은 명심사관名尋思觀·의심사관義尋思觀·자성가립심사관自性假立尋思觀·차별가립심사관差別假立尋思觀이다.
  27. 27)『大乘廣百論釋論』 권8(T30, 236a~b)의 내용 요약.
  28. 28)십해 : 사위思位가 십주·십행·십회향에 해당하므로 그 첫째인 십주를 가리킨다.
  29. 29)가행지加行智 : 여실지如實智 곧 정체지正體智와 여량지如量智 곧 후득지後得智의 예비 수행에 해당한다.
  30. 30)모든 장애(障難)를~번뇌(蓋纏)를 벗어난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08b)에서는 장障의 경우 기欺·태怠·진嗔·한恨·원怨의 5종, 개葢의 경우 탐욕貪欲·진에嗔恚·수睡·면眠·의疑의 5종, 전纏의 경우 분에전忿恚纏·부전覆纏·수전睡纏·면전眠纏·종일희희전縱逸嬉戲纏·조동도거전躁動掉舉纏·무참無慚·무괴無愧·간慳·투嫉 등 10종을 말한다.
  31. 31)정체지正體智 : 여리지如理智와 여량지如量智를 이지二智라 한다. 이 가운데 여리지는 불보살의 진제眞諦인 이실지理實智로서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無分別智·정체지正體智·진지眞智·실지實智라고도 하고, 여량지는 불보살의 속제俗諦인 사량지事量智로서 후득지後得智·유분별지有分別智·속지俗智·편지徧智라고도 한다.
  32. 32)『菩薩瓔珞本業經』 권하(T24, 1018b), “위의가 일체법에 동일하게 나아가고 머무는데, 이것은 백천 가지 삼매에 머무는 것이다. 곧 부처님의 행위로서 금강삼매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일상이고 무상이며 적멸의 무위가 되기 때문에 무구지라 말한다.(威儀進止一切法同。 住是百千三昧中。 如是佛行。 故入金剛三昧。 一相無相寂滅無爲。 故名無垢地。)”
  33. 33)다섯째로 대반야는 모든 인연을 단절해 있음을 설명하는 것에 해당한다.
  34. 34)대신주이고 대명주이며 무상명주이고 무등등주 : 반야바라밀법을 찬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2c~243a)에서는 “마하반야를 이해하는 자는 일념에 일체의 장애를 초월하는데 그것이 곧 대신주이고, 일체의 무명장애를 타파하는데 그것이 곧 대명주이며, 진성의 공리는 오직 부처님만이 증득하는데 그것이 곧 무상주이고, 세간과 출세간에 비견할 것이 없는 그것이 곧 무등등주이다.”라고 말한다.
  35. 35)무릇 설법하여~취해야 한다 : 설법을 통하여 교화하려면 우선 교화가 된 결과(果地)를 일러 주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因行)에 대하여 설해 주는 것을 말한다.
  36. 36)생사의 생각 : 본각의 이익을 먼저 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37. 37)사안四眼 :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眼·법안法眼을 가리킨다.
  38. 38)사지四智 : 성소작지成所作智·평등성지平等性智·묘관찰지妙觀察智·대원경지大圓鏡智를 가리킨다.
  39. 39)오안五眼 : 육안肉眼·천안天眼·혜안慧安·법안法眼·불안佛眼을 가리킨다.
  40. 40)그래, 그렇다 : 『金剛三昧經註解』 권3(X35, 243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이 두 번이나 그렇다(如是)고 말하여 증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교화하기 이전에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고, 둘째는 만덕을 총지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佛以二如是證者。 一以印其得在念先。 一以印其能摠持萬德。)”
  41. 41)『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2c~1013a)에 의하여 생략된 내용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불자여, 마니영락보살의 글자는 등각성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 명칭은 금강혜당보살인데 정적정에 주하면서 대원력으로 백겁의 수명 동안 머물면서 천 가지 삼매를 닦아 이미 금강삼매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일체법성과 이제와 일제와 일합상과 동일하다. 다시 천겁의 수명 동안 머물면서 부처님의 위의를 익혀서 코끼리왕으로서 사자가 노니는 걸음을 관찰한다. 다시 부처님께서 무량하고 불가사의한 신통으로 교화하신 법을 닦는다. 이런 까닭에 일체의 불법이 모두 현전한다. 부처님 수행의 도리에 들어가 부처님 도량에 앉아서 삼마三魔를 초월한다. 다시 만겁의 수명 동안 머물면서 화현으로 성불하여 대적정에 들어가서 등각과 제불과 이제와 계외界外(계내교界內敎에 상대하는 계외교界外敎)와 비유와 비무와 무심과 무색과 인과와 이습二習(성문습聲聞習과 보살습菩薩習으로 소승의 가르침과 대승의 가르침)이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옛적의 부처님(古佛)과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그에 상응하는 명칭이 따로 있어 모든 색과 심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고, 옛적의 모든 부처님(古昔諸佛)과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항상 중도를 실천한다. 이에 대락의 무위로서 생멸의 유위와 다르고, 실제로 부처가 아니지만 부처의 신통력을 드러내면서 항상 본각의 경계에 머문다.(佛子。 摩尼寶瓔珞。 菩薩字者。 等覺性中一人。 其名金剛慧幢菩薩。 住頂寂定。 以大願力住壽百劫。 修千三昧已入金剛三昧。 同一切法性二諦一諦一合相。 復住壽千劫學佛威儀。 象王視觀師子遊步。 復修佛無量不可思議神通化導之法。 是故一切佛法皆現在前。 入佛行處坐佛道場超度三魔。 復住壽萬劫化現成佛。 入大寂定等覺諸佛二諦界外。 非有非無無心無色因果二習無有遺餘。 現同古佛但有應名。 現諸色心敎化衆生。 現同古昔諸佛常行中道。 大樂無爲而生滅爲異。 而實非佛現佛神通常住本境。)”
  42. 42)『菩薩瓔珞本業經』 권상(T24, 1013a).
  43. 43)여래의 뜻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10a~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여래란 일심一心·진여眞如·자성自性에서 온 것이다. 또 경전에서는 ‘여래는 곧 법이다.’라고 말한다. 『기신론起信論』에서는 ‘말한 바 법은 곧 중생심이다.’라고 말하고, 또 ‘여如는 부동한 법신의 본각이고, 래來는 보신·화신의 묘각이다.’라고 말한다.(夫如來者。 即一心眞如自性中來。 又經云。 如來。 即是法也。 起信論又云。 所言法者。 即衆生心。 又云。 如者。 即不動法身之本覺。 來。 即報化二身之玅覺也。)”
  44. 44)사선四禪 : 초선初禪의 이생희락離生喜樂, 제2선의 정생희락正生喜樂, 제3선의 이희묘락離喜妙樂, 제4선의 사념청정捨念淸淨을 가리킨다.
  45. 45)네 단계의 선정 : 여기에서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무색계의 사정四定을 가리킨다.
  46. 46)그렇다 : 세간의 명칭과 법수와 사선四禪과 팔정八定을 초월해 있는 최상승선最上乘禪임을 말한다.
  47. 47)“본의本義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에서 ‘본의本義’는 『金剛三昧經通宗記』 권9(X35, 310c)에 의하면 ‘본성여의本性如義’이다. 그래서 곧 해석하자면 “본각의 자성은 진여의 뜻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48. 48)정려靜慮 : 신역新譯의 용어이고, 구역舊譯에서는 사유수思惟修라 하였다.
  49. 49)이 「眞性空品」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이근자를 위하여 많은 경문으로 자세하게 설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둔근자를 위하여 작은 경문으로 간략하게 요약하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첫째로 자세하게 설하는 가운데에 곧 여섯 부분이 있음을 가리킨다.
  50. 50)「眞性空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이는 그 중 둘째 둔근자를 위하여 작은 경문으로 간략하게 요약하는 부분이다.
  51. 51)그런 생각을 하는(措意) : 조의措意는 조치어의措置於意로서 “그러한 생각을 가지도록 조치하다.”라는 말이다. 곧 중생들로 하여금 수행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도록 조치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52. 52)방편方便과 실상實相, 적멸迹門과 본문本門,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유교有敎와 공교空敎, 진여眞如와 생멸生滅, 소승小乘과 대승大乘 등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방식이다.
  53. 53)이 「如來藏品」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44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에서 해탈보살의 「무상법품」과 심왕보살의 「무생행품」과 무주보살의 「본각리품」과 대력보살의 「입실제품」에서 질문한 것은 중도의 뜻을 드러낸 것이었고, 다음으로 그것을 이어서 사리불의 「진성공품」에서 질문한 것은 진공의 뜻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제 여기에서 범행장자가 「여래장품」에서 질문한 것은 속제와 묘유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前來解脫等菩薩問者。 顯中道義。 次繼之以舍利弗問者。 顯眞空義。 此中長者問者。 顯俗諦妙有義。)”
  54. 54)이와 같은 뜻 : 범행梵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55. 55)그것 : 오직 일실의一實義의 자성에 해당하는 교법 곧 수행을 가리킨다.
  56. 56)불가사의하다 : 장자의 말처럼 진여법의 도리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57. 57)도시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3a)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도시는 성시城市를 가리킨다. 따라서 도시가 그대로 성과 같은 의미이다.
  58. 58)크게 분류한 : 『金剛三昧經論』의 일곱 품 가운데 제6의 「如來藏品」을 가리킨다.
  59. 59)삼종지三種智 : 수사취행隨事取行·수식취행隨識取行·수여취행隨如取行을 가리킨다.
  60. 60)유식을 따르는 수행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3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은 전7식前七識을 말미암아 모든 현행을 일으켜서 여래장마저도 굴려서 식장識藏으로 삼는다. 그러나 보살은 금강심金剛心 가운데 머물러 무분별지를 터득하여 일체의 미세한 식識의 모습을 분별하여 소멸시키고 삼계의 만법이 유심이고 유식임을 알아서 곧 세간의 일체식심이 모두 각성覺性을 수순하여 연에 상응하면서 중생을 만나고 곳곳에서 종지를 해명하기 때문에 유식을 따르는 수행이라 말한다.(衆生由前七識。 起諸現行。 轉如來藏而爲識藏。 故有顛倒妄想。 菩薩住金剛心中。 得無分別智。 分別一切微細識相令滅。 知三界萬法。 唯心唯識。 則世間一切識心。 皆隨順覺性。 應緣遇物。 處處明宗。 此隨識取行也。)”
  61. 61)이 대목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45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갖가지 수행의 갈래를 따르는 수행은 진여가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변현하는 것으로 곧 속제의 환유幻有라는 뜻이고(假), 유식을 따르는 수행은 진여가 자성을 잃지 않는 것으로 인연을 따라 변현하지 않는다는 뜻이며(空), 진여를 따르는 수행은 곧 진·속의 불이중도로서 부사의하다는 뜻이다(中). 모든 세간과 출세간은 이 공·가·중의 세 가지 묘문을 벗어나지 않고 섭수되어 남음이 없다. 이 삼문에 들어가면 공상空想을 내지 않고, 불공상不空想도 내지 않으며, 또한 공空·불공상不空想도 내지 않는다. 삼제가 원융하기 때문에 입入이 곧 비입非入이고 비입非入이 곧 입入으로서 부정(遮)·긍정(照)이 자재한데 그것이 곧 여래장의 뜻이다. 경문의 경구는 간략하지만 자세하게 말하면 곧 공여래장, 불공여래장, 공불공여래장이 있다.(隨事取行者。 眞如不守自性。 隨緣變現。 即俗諦幻有義。 隨識取行者。 眞如不壞自性。 隨緣不變義。 隨如取行者。 即眞俗不二中道。 不思議義。 所有世出世間。 不出此空假中三種妙門。 攝盡無餘。 入此三門。 不生空想。 不生不空想。 亦不生空不空想。 三諦圓融。 入即非入。 非入即入。 遮照自在。 是如來藏義。 文經句略。 具言則有空如來藏。 不空如來藏。 空不空如來藏。)”
  62. 62)본각이 뿌리이고~터득되기 때문입니다 : 이에 대한 원문은 ‘本根利力。 利成得本’이다. 이것은 곧 본각은 시각의 이익을 근본으로 삼고, 시각의 이익이 성취되어 본각을 터득한다는 뜻이다. 이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4a~b)에서는 “본각은 반드시 시각의 이익으로 힘을 삼아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만약 시각의 이익이 성취되면 그 이후에 중생이 자각의 본성을 터득합니다.(必得始覺之利爲力。 若始覺之利已成。 而後乃得衆生自覺之本性矣。)”라고 해석한다.
  63. 63)전각삼매電覺三昧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4bc)에서는 이와 달리 찰나제삼매刹那際三昧, 전광삼매電光三昧, 금강삼매金剛三昧로서 열반근본지涅槃根本智라고 말한다.
  64. 64)진여의 지혜와 선정 : 진여에 바탕을 둔 지혜와 진여에 바탕을 둔 선정이라는 뜻이다.
  65. 65)지전의 네 가지 계위 : 십신·십주·십행·십회향의 네 계위를 가리킨다.
  66. 66)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만약 이 세 가지 대사를 실행하지 못하면 곧 저 사지의 바다에 흘러들지 못하므로 모든 대마들에게 그 빈틈을 보이고 만다.”
  67. 67)이에 해당하는 경문은 다음과 같다. “장자여, 그대들 대중은 성불에 이르기까지 꼭 항상 수습하여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68. 68)두 가지 문답 : 첫째의 문답은 삼삼매문三三昧門이고, 둘째의 문답은 대문大門·의문義門·과문科門이다.
  69. 69)안과 밖으로~부정되지 않는다 :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대사大事” 가운데 첫째를 가리킨다.
  70. 0)
  71. 70)깨침을 따라 택멸하는 것이다 : “세 가지 대사大事” 가운데 둘째를 가리킨다.
  72. 71)지혜로운 행위 :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지혜 곧 정지定智·부정지不定智·열반지涅槃智·구경지究竟智를 가리킨다.
  73. 72)게송으로 거듭 찬송한 대목 : 셋째 인의 행위가 작용하는 두 부분 가운데 둘째인 중송重頌 부분에 해당한다.
  74. 0)
  75. 73)『瑜伽師地論』 권16(T30, 364bc)에 의하여 이 대목에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여섯째는 다른 것을 소멸시키는 작용이 없다. 말하자면 제법은 다른 것을 소멸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일곱째는 자기를 소멸시키는 작용이 없다. 말하자면 또한 자기를 소멸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문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가, 또한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소멸하는가? 답 갖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데, 발생이 다하면 자연히 소멸한다.(六無滅他用。 謂法不能滅他。 七無自滅用。 謂亦不能自滅。 問如衆緣有故生。 亦衆緣有故滅耶。 答衆緣有故生。 生已自然滅。)”
  76. 74)모륜毛輪과 같네 :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헛것으로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77. 75)일실이 있다고 계탁하여 : 유견有見 내지 상견常見에 빠진 것을 가리킨 것으로 위의 첫째에 해당한다.
  78. 76)없다는 견해 : 무견無見 내지 단견斷見에 빠진 것을 가리킨 것으로 위의 둘째에 해당한다.
  79. 77)모륜과 물의 경우처럼 : 눈병에 걸린 사람이 모륜을 보는 경우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간주한 경우를 가리킨다.
  80. 78)저 양변 : 첫째에서 동과 정이 무이하다는 말에 일실과 일심으로만 간주하는 것과, 둘째에서 공과 유의 이문에 대한 말을 듣고 일실은 없다고 계탁하는 것을 가리킨다.
  81. 79)『大方廣佛華嚴經』 권33(T9, 609a).
  82. 80)상법은 상법이 아니다 : 진제의 상법은 속제의 상법이 아님을 가리킨다.
  83. 81)명칭과 색상은~일어난 것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7a)에서는 “치심癡心은 곧 망상妄想이고, 명색名色은 곧 명상名相이다.”라고 말한다.
  84. 82)『大方廣佛華嚴經』 권10(T9, 465c).
  85. 83)결론 : 앞의 진증관과 방편관의 두 가지에 대한 총체적인 결론임을 가리킨다.
  86. 84)둘째 : 중송重頌의 두 부분 가운데 첫째는 여래께서 간략하게 널리 설법한 것이고, 둘째는 장자가 자세하게 연설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둘째인 장자의 연설이 이에 해당한다.
  87. 85)모두 다섯이 된다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71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오법의 명칭을 드러낸 것이다. 곧 명名과 상相과 망상妄想과 여여如如와 정지正智의 오법이다. 말한 바 분별사分別事는 제7식으로서 곧 망상을 가리킨다. 법法은 곧 명과 상과 망상의 법이다. 그리고 진여眞如와 정묘지正玅智는 곧 여여如如와 정지正智이다.(此顯五法名。 即名相妄想如如正智五法也。 所云分別事。 指第七識。 即妄想。 法即名相妄想之法。 眞如正玅智即如如正智。)”
  88. 86)공상도 또한~것을 말한다 : 앞의 「入實際品」에서 대력보살이 질문한 삼공三空 부분을 가리킨다. “대력보살이 여쭈었다. ‘그러면 삼공이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삼공이란 공상도 또한 공한 것이고, 공공도 또한 공한 것이며, 소공도 또한 공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은 공상·공공·소공의 삼공에 집착이 없어서 진실하지 않음이 없다. 그래서 글과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또 불가사의하다.’”
  89. 87)인연은 본무로~불멸이 되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7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연은 본무로서 불생이다. 그 불생을 인유하는 까닭에 또한 불멸이다.(然因緣本無而不生。 然因不生。 故亦不滅。)”
  90. 88)이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8上)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여실如實의 뜻을 설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반드시 모든 인연으로부터 생상을 취하는 것을 떠나야 하고, 또한 인연으로부터 그 멸상을 취해서도 안 되며, 또한 기己와 의義와 대大를 취해서도 안 된다. 기己는 본식本識을 가리키고, 의義는 음陰·계界·입入을 가리키며, 대大는 사대四大를 가리키는데, 저 앞에서 말한 대大·의義·과科가 바로 그것이다.(此明如實之義 言當離諸因緣而取生相。 亦不從因緣取其滅相。 亦不取於己義大。 己謂本識。 義是陰界入。 大是四大。 即前大義科。)”
  91. 89)제2구의 “안~걸리는 말이다 : “거기서 소멸 취함도 안 되며 자기와 의와 사대까지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따라서 취해서도 안 된다(不從)는 말은 제2구와 제3구에 모두 통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92. 90)이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8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게송은 여여한 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또한 그 분별식의 변화를 간별한 것이다. 이미 진여에 의거하여 실實을 터득하였다. 그러므로 진여법은 항상 자재하고 여여하여 변역이 없다. 그러나 만약 일체만법에 대해서 보자면 그것은 모두 제7식이 제8식의 상분과 견분을 집착하여 색色과 심心 등의 제법을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여가 아니라 분별사식分別事識의 변화라고 하는 것일 뿐이다.(此明如如之法。 又揀其識化。 言既依如而得實。 是故眞如之法。 常自在於如如而無變易矣。 若乃一切萬法。 此皆第七執第八相分見分。 而生色心諸法也。 故云非是如。 乃識所化耳。)”
  93. 91)무심할 경우 : 생멸법을 소멸하여 회신멸지灰身滅智한 경우를 가리킨다.
  94. 92)그때 대중이~여래장해에 들어갔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0(X35, 318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설법의 뜻을 듣고 얻은 이익을 결론지은 것이다. 교학에서 말하는 비구의 걸식은 정명식正命食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4종의 사명식邪命食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체법을 받았다면 그것은 곧 사명邪命이라 말한다. 그러나 만약 일체법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정명正命이다. 위의 게송에서 설한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모두 정명식을 얻었다고 말한다. 여기 대목에서는 자성의 체體와 용用을 설명하고 있다. 곧 여래지에 들어가서 제불의 구경지究竟智와 원만하고 청정한 법신을 터득하는 것이 바로 여래장해如來藏海이다.(此結聞義咸益。 教中謂比丘乞食。 謂之正命食。 以破四種邪命食故。 今此以受於一切法。 即名邪命。 若不受一切法爲正命。 如前偈中所說。 即是此義。 故云皆得正命。 於此明自性體用。 即是入於如來。 得諸佛究竟智。 圓滿清淨法身。 是爲如來藏海也。)”
  95. 93)‘총지’라 한다 : 「總持品」의 의미에 대하여 말한 대목이다. 첫째는 앞의 전체 경문에 대하여 의심을 해결하고 요의要義를 총지하고, 둘째는 문의다라니文義陀羅尼를 통하여 모든 의심을 해결한다. 이 「總持品」의 대의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18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만각분滿覺分으로서 각覺과 행行이 원만圓滿하여 갖가지 법을 총지한 것을 말하는데, 이 『금강삼매경』의 기둥이다. 또한 이 경전은 저 「무상법품」에서는 제6지를 설명하였고, 「무생행품」에서는 제7지를 설명하였으며, 「본각리품」에서는 제8지를 설명하였고, 「입실제품」에서는 제9지를 설명하였으며, 「진성공품」에서는 제10지를 설명하였고, 「여래장품」에서는 등각지를 설명하였으며, 이 「총지품」에서는 지장보살이 대중을 상대하여 분명하게 묘각의 과만果滿을 드러냈다. 그러나 묘각은 원래 앞의 여섯 가지의 품을 떠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제불의 시각이라 말하는데, 이것은 곧 중생의 본각이다. 그래서 본각은 원인이고 시각은 결과이다.(此爲滿覺分。 謂覺行圓滿。 而能摠持衆法。 爲一經之樞紐也。 且夫此經。 如無相法。 發明第六地。 無生行。 發明第七地。 本覺利。 發明第八地。 入實際。 發明第九地。 眞性空。 發明第十地。 如來藏。 發明等覺地。 至此品。 地藏菩薩當機。 分明顯玅覺果滿。 然玅覺原不離前六品法。 所以云諸佛始覺。 即是衆生本覺。 本覺爲因。 始覺爲果。)”
  96. 94)그때 지장보살이~허락해 주십시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19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지장보살이 대중의 의심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 부처님께 허락을 구하는 대목이다. 청법하는 모습은 해탈보살의 경우와 같은데, 이것은 무릇 처음과 마지막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을 설명한 것이다. 대중 가운데서 일어난 것은 특이한 것이 없음을 설명하고, 부처님 앞에 다다른 것은 묘각의 경우에 행行이 두루하고 과果가 충만하여 불도에 그대로 도달한 것을 표시하며, 마음에 의문을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은 등각의 경우에 묘각에 도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본래부터 후세 중생을 위하여 의심을 없애 주려고 하는데 지장보살도 또한 중생을 위하여 의문을 해결해 주려고 부처님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此菩薩爲衆決疑。 求佛聽許也。 其請法之儀。 同於解脫菩薩者。 葢明初後不移之意。 從衆中起。 以明無有特異也。 至於佛前。 表玅覺。 行周果滿。 直達於佛道也。 心疑未決。 等覺未至於玅。 故猶有疑耳。 然佛本欲。 爲後世除疑。 菩薩亦是爲衆生決問。 願佛之聽許也。 )”
  97. 95)지장이라는 명칭 :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47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지能持하는 것은 지地와 같고, 소지所持하는 것은 장藏과 같은 까닭에 지장보살이라는 명칭으로 「총지품」을 드러낸다. 또한 능能을 벗어나고 소所를 단절하는 것은 마치 지地가 담고 있는 만물과 같고, 만유를 함육含育하는 것은 마치 지地가 만물을 감추고 있는 것과 같다.(能持如地。 所持如藏。 故地藏菩薩表之也。 又離能絕所。 如地之持物。 含育萬有。 如地能藏也。)”
  98. 96)한 가지 품 : 「如來藏品」을 가리킨다.
  99. 97)자상과 타상도~그와 같아 :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48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진법은 과거에는 시작이 없었고 미래에는 끝이 없다. 이미 시·종이 없는데 성·패인들 어찌 있겠는가. 대저 진여의 법성은 허공의 비유를 취해야만 지극히 합당하다.(自他亦復爾。 此之眞法過去無始。 未來無終。 既無終始。 成敗何有。 夫眞如法性。 取譬虗空。 極爲恰當。)”
  100. 98)상위과相違過 : 주장하려는 내용의 인因과 종宗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만다. 이런 모순에 법자상상위인法自相相違因·법차별상위인法差別相違因·유법자상상위인有法自相相違因·유법차별상위인有法差別相違因의 네 가지가 있는데 상위과는 법자상상위인에 해당한다. 가령 종宗·인因·유喩의 삼지작법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지장보살의 주장 : 부처님께서 설한 제법은 저절로 성취된 것이다(宗). 상대(待)가 없기 때문이다(因). 소취所取가 없는 진여와 같다(喩). 부처님의 주장 : 제법은 형성과 소멸이 없다(宗). 상대(待)가 없기 때문이다(因). 소취所取가 없는 진여와 같다(喩). 여기에서 지장보살의 주장은 상대(待)가 없는 제법과 저절로 성취된 제법이 동일시되는 오류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상대(待)가 없는 제법은 아예 형성과 소멸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장보살의 경우 종과 인 사이에 논리적인 모순이 드러난다.
  101. 99)그런 법 : 상대(待)가 없이 저절로 형성되고 소멸된다는 앞의 내용을 가리킨다.
  102. 100)중생의 심이~아님을 터득하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20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그들 모든 중생이 자심自心이 불공인 줄 안다면 곧 그들 자심이 본래 불유不有임을 터득한다.(若彼諸衆生。 知自心之不空。 是即得於自心之本不有也。)”
  103. 101)색제와 공제와 심제 :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48b)에서는 “색제는 속제이고, 공제는 진제이며, 심제는 중도제이다.(色是俗諦。 空是眞諦。 心是中道諦。)”라고 말한다.
  104. 102)「총지품」 중~말한 것 : 삼대제三大諦로서 평등제平等諦·정지득제正智得諦·무이행입제無異行入諦이다.
  105. 103)그 색과~같지는 않다 : 저것을 말미암아 발생되는 경우처럼 차별상을 없애고 터득하는 적멸의 경지가 본래부터 차별상이 없는 일본각의 적멸의 경지와 다르다는 것을 가리킨다.
  106. 104)앞의 설명 : “일체의 제법은 모두 공적한데 제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네. 중생의 심이 불공임을 알아야 일심법이 유 아님을 터득하네.”라는 앞의 게송을 가리킨다.
  107. 105)만약 명칭법과~있다는 경우이다 : 여기에서 명칭법과 언설법을 같다고 말하는 경우는 명칭법이 곧 언설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명칭법과 언설법이 공통적으로 진여의 일실의一實義를 드러내는 설명하는 주체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108. 106)뒷부분의 말 : 「總持品」 가운데 위의 지장보살이 여쭙는 대목을 가리킨다.
  109. 107)여시지법 :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깨침에 계합하고 도리에 어긋남이 없는 진여법을 가리킨다.
  110. 108)이 경문에 대하여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49a)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여의 실제에는 일진一塵도 성립하지 못한다. 그런데 어찌 색상인들 있겠는가. 색상도 오히려 없는데 어찌 방소方所가 있고 방처方處에 주하겠는가. 이미 색상과 방소가 없은즉 주체와 객체의 적집 등 일체가 없다. 문 어찌 일체가 없다고 하는가? 답 소승교 가운데는 문文도 있고 의義도 있기 때문에 다툼이 많다. 그러나 대승의 제일의공에는 의도 없고 문도 없다. 오직 무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근본식에서는 끝내 저 털끝만큼의 명名·상相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에 세간의 적집은 없지만 출세간의 공덕의 적취는 남아 있다.(眞如實際之中。 不立一塵。 豈干色相。 色尚無有。 何有方所。 可住方處。 既無則。 能所積集。 一切泯絕。 何以泯絕耶。 小乘教中。 有文有義。 故多諍訟。 大乘第一義空。 非義非文。 惟有無生。 本識終不容他毫末。 名相。 無世間積集。 有出世間功德積聚也。)” 또한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21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비집非集으로 성취된 것임을 해석한 것으로 진여의 실제법을 말한 것이다. 본래 청정한 까닭에 색상이 없고, 처소에 집착이 없는 까닭에 집착이 없다. 소집所集이 아닌 것은 외경이 공한 까닭이고, 능집能集이 아닌 것은 심식이 공한 까닭이며, 의義가 아닌 것은 설명으로 드러낼 수 없는 까닭이고, 문文이 아닌 것은 언설로 미치지 못한 까닭이다. 이에 그 일본각의 대大·의義·과科의 법에 즉하게 되어 진실로 출세간마저 초월하여 깊은 공덕취功德聚가 된다. 본과本科의 두 글자는 앞의 「여래장품」에서 말한 대·의·과이다. 그것은 무릇 본식本識으로써 과목을 삼아서 대·의·과를 통섭하기 때문이다.(此釋成非集。 言眞如實際之法。 本來清淨故無色。 不著處所故無住。 非所集。 外境空故。 非能集。 心識空故。 非義。 不可詮表故。 非文。 言說不及故。 即此一本科法。 眞乃超出世間。 爲淵深功德之聚矣。 本科二字。 即前如來藏品中大義科。 葢以本識爲科目。 而統攝大義等法也。)”
  111. 109)원願도 또한 작용하지 않는데 : 이 대목을 삼삼매와 결부시키면 “공적한 경지에 들어가 행한 바가 없으나 제업을 잃지 않고”는 공삼매空三昧이고, “아와 아소 및 능과 소의 신견身見이 없어서 안팎의 번뇌가 모두 적정합니다.”는 무상삼매無相三昧이며, “원願도 또한 작용하지 않습니다.”는 무원삼매無願三昧이다.
  112. 110)공적의 도리에는~가지가 없다 : 위에서 공적의 자성에 대하여 첫째는 공적이라는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유전의 증과라는 근심을 떠났다는 것과 둘째는 공적이라는 약을 복용하기 때문에 집착의 인행이라는 질병을 다스림을 드러낸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방편이라는 것이다.
  113. 111)두 가지 뜻 : 유有를 타파하기 위하여 공적을 시설한 것과 공적의 도리에는 공과 불공이라는 것도 없다는 것의 두 가지를 가리킨다.
  114. 112)삼류 :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50a)에서는 소승의 삼류로 해석하고,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22b)에서는 육계류와 색계류와 무색계류로 해석한다.
  115. 113)삼화三化 : 공상空相·공공空空·소공所空의 삼공三空을 닦는 것을 가리킨다.
  116. 114)혜慧와 정定이 원만하게 성취되면 :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50a) 및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1(X35, 322c)에서는 모두 혜慧는 반야이고, 정定은 해탈이며, 원만한 성취는 법신이라 말한다.
  117. 115)해당 경문에는 ‘질문’이 없고 곧장 부처님의 답변으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바로 앞에 나온 지장보살의 질문으로 생각된다.
  118. 116)의성신意性身 : 보살의 화생신으로 의성신意成身·의성색신意成色身·의생신意生身이라고도 한다.
  119. 117)저것 : 곧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네 가지를 가리킨다.
  120. 118)『大乘阿毘達磨雜集論』 권7(T31, 724c).
  121. 119)평등제 : 속제와 진제의 분별제가 아님을 가리킨다.
  122. 120)차제연次第緣 : 구역에서 사연四緣은 인연因緣·차제연·연연緣緣·증상연增上緣을 말하고, 신역에서는 인연·등무간연等無間緣·소연연所緣緣·증상연을 말한다. 여기에서 차제연은 심心과 심소법心所法이 차제로 무간상속無間相續하는 발생과 소멸을 말한다. 마치 십이지연기의 경우와 같이 차제로 생기하고 소멸하는 관계이다.
  123. 121)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 여기에서는 불생不生의 측면에 대하여 설명하는 대목이므로 차제연의 연멸緣滅의 측면만 언급한 것이다.
  124. 122)세 가지 뜻 : 종자가 공적하고, 본래의 연이 공적하며, 능연과 소연이 공적하다는 세 가지를 가리킨다.
  125. 123)여덟 게송 가운데 평등하고 부동하여 여래장에 들어간 뜻을 간략하게 설명한 대목에 해당하는 제1·제2·제3의 게송을 가리킨다.
  126. 124)여덟 게송 가운데 평등하고 부동하여 여래장에 들어간 뜻을 자세하게 설명한 대목에 해당하는 제4의 게송부터 제8의 게송에 이르는 다섯 게송 부분을 가리킨다.
  127. 125)『肇論』(T45, 153a).
  128. 126)『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5a)에서는 마지막 게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말은 본각과 시각이 불이不二임을 말한 것이다. ‘시고是故’라는 두 글자는 이상 설법한 뜻을 총결한 것으로서 이 『금강삼매경』의 종지를 섭수하여 총섭한 것이다. ‘극정본極淨本’의 세 글자는 한 글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구처럼 읽어야 한다. 극은 지극이고, 정은 명정이며, 본은 본각이다. 이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형용한 것으로서 언설로는 다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지극하고 이처럼 명정하여 이것이야말로 소위 본각에 즉한 것이다. 그러나 등각과 묘각으로써 관찰해 보면 자성의 본체가 홀로 드러난 것으로서 본래 갖가지 법의 인연력으로 성취된 것이므로 곧 등각에서 최후로 터득하는 금강심지의 도리이다. 그 소득은 자성에서 터득한 것이므로 곧 본각의 터득이다.(此言本始不二。 是故二字。 摠結如上法義。 以攝一經之旨。 極淨本三字。 當一字作一句讀。 極者至極。 淨者明淨。 本者本覺。 乃滿口形容。 言說難盡之意。 言以是之故。 此至極。 此明淨。 此即所謂本覺。 然以覺玅觀察。 性體獨露。 本不因衆法緣起之力而成。 即於等覺最後所得金剛心地之處。 得其所得於自性本覺之得也。)”
  129. 127)제1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5b)에서는 법륜을 굴려 줄 것을 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30. 128)제2 게송의 제1구 원문인 ‘是諸二衆等’ 가운데 ‘이중二衆’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5b)에서는 소승과 대승으로 설명한다. “이 게송은 설법의 이익을 흘려서 교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의 「진성공품」에서는 대와 소의 이중으로 나누었는데, 말하자면 대승과 소승이다. 이제 이 이중二衆이 모두 명료해져서 함께 대승에 들어간다.(此明法利流化。 然前眞性空品。 分大小二衆。 謂大乘小乘也。 今此皆得明了。 而同入於大乘矣。)”
  131. 129)제2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5b)에서는 설법의 이익을 흘려서 교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32. 130)제3 게송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5b)에서는 중생을 이롭게 해 주는 큰 서원이라고 설명한다.
  133. 131)「總持品」 전체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그 넷째로서 이해시키는 부분에 해당한다.
  134. 132)『瑜伽師地論』 권62(T30, 646b), “滅盡等至當言無漏。 由與煩惱不相應故。 非相應故。 無所緣故。 非諸煩惱之所生故。 是出世間一切異生不能行故。 唯除已入遠地菩薩。 菩薩雖能起出世法令現在前。 然由方便善巧力故不捨煩惱。”에 의거하여 누락된 내용을 보충하여 해석하였다.
  135. 133)본 『金剛三昧經』의 서분과 정설분과 유통분을 가리킨다.
  136. 134)원효의 『金剛三昧經論』 및 적진의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5b)에서는 이 대목부터 유통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원징의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51c)에서는 이하의 경문 “그때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이후부터 유통분으로 간주하였다.
  137. 135)「無相法品」의 해탈보살, 「無生行品」의 심왕보살, 「本覺利品」의 무주보살, 「入實際品」의 대력보살, 「眞性空品」의 사리불, 「如來藏品」의 범행장자, 「總持品」의 지장보살 등을 가리킨다.
  138. 136)원징은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51c)에서는 이하부터 유통분으로 간주한다.
  139. 137)이 경전의 설법은~이어주기 때문이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6a~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전의 교법은 비록 일미이지만 오미의 교법을 총지하고 있어서 삼백여 회에 걸친 제경의 강요를 섭수한다. 무릇 맥락이 상속되는 것을 계繫라 말하고, 유파流派에서 소출된 것을 종宗이라 말한다. 그래서 무릇 이 경전이야말로 제경의 교법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모두가 이 금강삼매경법에 계속繫屬되어 있고 이 금강삼매경법 가운데서 유출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저 『반야경』에서 널리 행하는 육바라밀도 바로 이 『금강삼매경』의 「무상법품」 속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가 있다. 또 『금강경』에서는 ‘일체의 제불과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모두 이 『금강경』에서 나왔다.’고 말하는데, 하물며 『금강삼매경』의 교법은 십지를 곧장 초월하고 바로 등각과 묘각에 이르는 것이겠는가.(又言。 是經典法。 雖是一味。 摠持五味之法。 雖是一經。 能攝三百餘會諸經之綱要也。 夫脉絡相屬謂之繫。 流派所出而爲宗。 然凡是諸經之法。 須知皆是此法之繫屬。 而於此法中流出者也。 如般若廣行六度。 祇得此中無相法品中事。 且經云。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皆從此經出。 而況是經之法。 頓超十地。 直至等玅二覺者也。)”
  140. 138)이 경전의~『무량의종』이라 말한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6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제명을 말한 것인데 세 가지가 있다. 무릇 ‘섭대승’이란 법法의 측면에서 내세운 제칭으로 곧 반야의 뜻이다. 따라서 진여와 실제로써 그 체를 삼는다. ‘금강삼매’란 용用의 측면에서 내세운 제명으로 법과 비유를 취하여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견고한 것을 꺾고 미혹을 타파하는 것으로 곧 해탈의 뜻이다. 따라서 마음을 해명하는 것과 자성을 보는 것으로 그 용을 삼는다. ‘무량의종’이란 체體의 측면에서 내세운 제명으로 일체법을 능섭한 것이다. 따라서 갖가지 뜻의 종지가 되는 것으로 곧 법신의 뜻이다. 그 법신은 일체의 뜻을 갖추어 섭수하고 일체의 법을 출생한다. 만약 중생이 여래의 법신을 증득한다면 곧 시각과 본각이 불이不二임을 해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경전은 시각과 본각으로 종지를 삼는다. 지금 이 세 가지 제명을 내세움으로써 삼덕의 비장祕藏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음을 해명하여 열반의 안내로 삼는 것이다.(此約名有三。 夫攝大乘者。 從法上立名。 即般若義。 而以眞如實際。 爲其體也。 金剛三昧者。 從用上立名。 取法喻並彰。 能摧堅破惑。 即解脫義。 而以明心見性。 爲其用也。 無量義宗者。 從體上立名。 能攝一切法。 而爲衆義所宗。 即法身義。 然法身。 能具攝一切義。 能出生一切法。 若衆生證如來法身。 即明始本二覺之不二。 故此經。 以始本二覺爲宗。 今立此三名。 以明圓備三德祕藏。 而爲涅槃之前導也。)”
  141. 139)나 여래가~이 경전뿐이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6b)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특별히 촉루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사事로써 부탁하는 것을 촉囑이라 말하고, 사상事相에 연관된 것을 누累라 말한다. 무릇 부처님이 촉루한 뜻을 말하자면, 나 여래가 설법한 일체의 법장은 오직 이 『금강삼매경』을 최고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무릇 여래가 설법한 일체의 경법은 모두 이 금강삼매의 교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此特申囑累。 以事託付曰囑。 事相緣坐曰累。 夫佛囑累之意。 謂我之所說一切法藏。 唯此經爲最耳。 葢如來說一切經法。 皆爲欲顯此金剛三昧之法也。)”
  142. 140)첫째는 대중으로부터~성도에 들어간다. :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6b)에서는 첫째와 둘째의 두 가지는 자수용삼매이고, 셋째와 넷째의 두 가지는 타수용삼매인데, 이들 네 가지는 보살의 인행因行이고, 마지막의 다섯째는 보살의 과덕果德이라고 설명한다.
  143. 141)사의승四依僧 : 법사의法四依·행사의行四依·인사의人四依·설사의說四依·신토사의身土四依의 5종 가운데 본 경문의 경우는 인사의人四依에 해당한다. 이것은 여래의 사자使者가 말세에 경전의 유통을 위하여 인간계와 천상계에서 의지하는 4종의 사람을 말한다. 첫째는 번뇌의 자성을 갖추고 있는 사람으로서 곧 삼현三賢과 사선근四善根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둘째는 수다원須陀洹 곧 예류과預流果와 사다함斯陀含 곧 일래과一來果의 사람이 이에 해당하며, 셋째는 아나함阿那含 곧 불환과不還果의 사람이 이에 해당하고, 넷째는 아라한阿羅漢의 사람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내증內證은 대승보살이지만 짐짓 겉으로 성문의 모습을 드러내어 전법하고 교화하는 것이다. 원효는 『涅槃經宗要』(T38, 251b)에서 불성을 성인위聖人位와 범부위凡夫位로 구분하고, 성인위에 의하여 5종으로 분별한다. 곧 제1위는 전5지, 제2위는 제6·7·8지, 제3위는 제9지, 제4위는 제10지, 제5위는 여래지에 배대한다.
  144. 142)『大般涅槃經』 권6(T12, 637a~643b). 한편 『金剛三昧經註解』 권4(X35, 252b) 및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7a)에서는 이 사의승四依僧을 대승의 사의四依로만 해석하여 첫째는 법法에 의지하고 인人에 의지하지 않는 것, 둘째는 의義에 의지하고 어語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지혜(智)에 의지하고 분별식(識)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145. 143)저 경우 : 번뇌를 단제한다는 뜻을 가리킨다.
  146. 144)이 경우 : 참회의 행위를 통하여 이전의 죄업을 현재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147. 145)이 대목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8c)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대목은 관행이 들어간 공능을 설명한 것이다. 말하자면 일단 앞에서 설한 것에 의하자면 공·무상·무작의 삼매를 닦아서 진여와 실제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곧 실상의 무생참회이다.(此明入觀之功。 言一依如前所說。 修空無相無作。 而觀於眞如實際。 此即實相無生懺。)”
  148. 146)참회를 통하여 터득하게 되는 뛰어난 이익을 보여 준다.
  149. 147)진관眞觀 : 오관五觀의 하나이다. 첫째, 진관眞觀은 진제의 도리를 관찰하여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단제하는 공관空觀이다. 둘째, 청정관淸淨觀은 이미 견혹과 사혹이 단제된 청정한 몸으로 진사혹塵沙惑을 단제하는 가관假觀이다. 셋째, 광대지혜관廣大智慧觀은 무명혹無明惑을 단제하고 광대한 지혜를 터득하는 중관中觀이다. 넷째, 비관悲觀은 이상의 삼관으로 중생을 관찰하여 중생의 고뇌를 없애 주는 것이다. 다섯째, 자관慈觀은 이상의 삼관으로 중생을 관찰하여 중생에게 안락을 주는 것이다.
  150. 148)화보華報 : 과보를 받기 이전에 받는 과보를 가리킨다.
  151. 149)이 대목에 대하여 『金剛三昧經通宗記』 권12(X35, 329a~b)에서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이것은 법문이 원만하게 성취된 것을 결론지은 대목이다. 이로써 법회대중이 모두 다 들은 교법을 가지고 전지傳持했음을 설명한다. 대저 ‘환희’는 초지의 명칭이다. 말하자면 처음으로 성性·지智를 발명하고 이공을 다 증득하며 자·타를 이롭게 하고 대희大喜를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서는 특별히 두 가지의 환희를 설명한다. 첫째는 마음에 결정신을 터득한 것인데, 더 이상 의심이 없어서 불퇴전지에 머물기 때문이다. 둘째는 신명을 바쳐서 받들고 실천하는 것인데, 법으로써 더욱더 이롭게 하여 자신이 원요願樂한 것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사리불이 ‘온 곳으로 다시 또 돌아가 구족한 연후에 나오려 하네.’(『金剛三昧經』 「入實際品」의 게송 참조)라든가, 아난이 능엄회상에서 또한 ‘제가 비록 깨치지는 못했지만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합니다.’(『首楞嚴經』 권6. T19, 131c)라고 말했던 것 등은 모두 환희하고 받들어 실천하는 비원을 발생한 것이다. 무릇 이제 우리들은 대승을 수행하고자 하는 자들로서 반드시 무상승심無上勝心을 내야 한다. 저 『不退轉法輪經』 권4(T9, 246b~c)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때 세 선남자가 보살승을 추구하고자 하여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 설법에 대하여 믿음을 내고 이해를 내되 의혹은 내지 않습니다. 마치 여래와 같이 말입니다. 그때 제1의 선남자가 말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쭙되 제가 곧 여래라면 이 말씀은 곧 정설正說일 것입니다. 제2의 선남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쭙되 제가 곧 세존이라면 이 말씀은 곧 정설일 것입니다. 제3의 선남자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사람이 여쭙되 제가 곧 불이라면 이 말씀은 곧 정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은 이 설법에 대하여 의혹을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此結法圓成。 以明在會。 咸皆秉教傳持也。 夫歡喜本是初地之名。 謂初明性智。 具證二空。 能益自他。 生大喜故。 今此特申二種喜。 一者。 心得決定。 無有餘疑。 住於不退轉故。 二者。 拜命奉行。 以法轉利。 而自生願樂故如。 舍利弗。 來所還復來。 具足然後出。 而阿難在首楞嚴會上。 亦云我雖未度。 願度末劫一切衆生。 此皆發歡喜奉行之悲願也。 但今我輩。 欲修行大乘者。 必當發無上勝心。 如不退轉法輪經云。 時有三善男子。 求菩薩乘者。 白言。 世尊。 我等於此法。 能信能解。 不生疑惑。 猶如如來。 爾時第一善男子言。 世尊。 若作是說。 我是如來。 此言便是正說。 第二善男子言。 世尊。 若作是說。 我是世尊。 此言便是正說。 第三善男子言。 世尊。 若作是說。 我是佛。 此言便是正說。 所以者何。 我等於此法。 不生疑惑故。)”
  152. 150)이 게송은 귀결게歸結偈에 해당한다.
  1. 1)「第六」無{甲}。
  2. 1)「二」作「一」{甲}。
  3. 2)「磁」作「礠」{甲}。
  4. 1)「句」上有「四」{甲}。
  5. 1)「二」作「一」{甲}。
  6. 2)「蜜」作「密」次同{甲}。
  7. 1)「第七」無{甲}。
  8. 1)「意」作「宜」{甲}。
  9. 1)「己」作「已」{甲}。
  10. 2)「燄」作「焰」次同{甲}。
  11. 1)「己」作「已」次同{甲}。
  12. 2)「第八」無{甲}。
  13. 1)「二」作「一」{甲}。
  14. 1)「所」無{甲}。
  15. 1)「審」作「番」{甲}。
  16. 1)「己」作「已」{甲}。
  17. 1)「戒」作「▼(戈/天)」{甲}。
  18. 2)「厭」作「猒」次同{甲}。
  19. 3)「三」作「二」{甲}。
  20. 1)「間」作「聞」{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