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경암집(鏡巖集) / 鏡巖集卷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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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 하권(鏡巖集 卷之下)
서序
법화암 비보 상주청 서法華庵裨補常住廳序
대저 사물의 영허盈虛는 운수이다. 없음으로 인해 쓸모 있음을 두고1) 권도에 나아가 실질을 이루는 것은 군자가 운수의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다. 나는 법화암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이른다.
법화암은 처음에 재물이 풍족하고 예절로써 칭해졌는데 저번에 뜻밖의 재난으로 공사公私의 재물이 탕진되었다. 주실住室 평산자平山子가 한 책을 지니고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법화法華 선사께서 교화를 끼치신 도량이 재난을 겪은 후에 향화香火의 재물이 없어 제가 암자의 납자와 함께 각각 분수에 맞게 재물을 출연하고, 또 일체의 단문檀門에 시주를 청하여 얻은 것을 따라 증식하여 옛 도량을 부흥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놀라 일어나 찬미하여 말하였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나를 일깨우는 자 그대로구나. 근래 총림의 학인들이 막히고 어려운 운수에 처하여 변화하지 못하고 여래의 법계로 하여금 가시밭 폐허가 되게 하니, 대개 선사의 뜻과 예절의 학문에 뜻이 없는 것이다. 그대가 전날의 재난을 거울로 삼아 전전긍긍하여 급박하고 어려울 때에도 감히 선사의 가르치신 은혜를 잊지 않고 복구할 도리를 꾀하니 나를 일깨우는 자 그대로다. 그러나 재물과 이익은 도인의 허물이요, 화를 부르는 근본이라. 우리의 활계活計는 솔을 따서 먹고 굴을 파서 거처하여 메마른 모습으로 세상을 잊어 세상의 비난을 받지 않는 것만 못하다. 사람마다 옷 속에 진귀한 여의주가 항상 있어 궁핍하지 아니하니, 향의 공양을 구하는 자는 오 푼의 진신을 얻고 등불의 공양을 구하는 자는 반야지의 빛을 얻으며 차 공양을 구하는 자는 설산雪山의 제호醍醐와

010_0436_b_02L鏡巖集卷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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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6_b_05L法華庵裨補常住廳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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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物之盈虛數也當無而有用即權
010_0436_b_07L而就實君子處數之變也吾於法華庵
010_0436_b_08L云爾法華庵始以饒財禮節稱曩日橫
010_0436_b_09L公私蕩盡住室平山子袖一册扣
010_0436_b_10L余曰法華先師遺化道場而灾厄之後
010_0436_b_11L無復香火之資某與庵中衲子各隨分
010_0436_b_12L出財又欲鳩乞於一切檀門隨得而息
010_0436_b_13L庶幾興復古道場吾之志也余愕
010_0436_b_14L然興賛曰善哉善哉起余者子也
010_0436_b_15L日叢林之士居丕屯之數不能變化也
010_0436_b_16L使如來法界廢爲荊棘盖無效先1) [5]
010_0436_b_17L志禮節之學耳子以日前灾厄爲殷鑑
010_0436_b_18L而兢兢業業造次顚沛不敢忘先師遺
010_0436_b_19L化之恩謀所以興復之道起余者子也
010_0436_b_20L然財利道人之累招禍之本吾徒活計
010_0436_b_21L莫如摘松而飡穴土而居枯形遺世
010_0436_b_22L世莫我詬人人衣內如意珎寶常存
010_0436_b_23L不乏求香供者得五分眞身求燈供
010_0436_b_24L得般若智光求茶味供者雪山醍

010_0436_c_01L향적香積 세계의 오묘한 반찬이 생각하는 대로 이른다. 이로써 시방의 삼보에 공양하고 이로써 일체의 군생에게 보시하여, 선열禪悅에 배불러 함께 법화삼매法華三昧2)를 증득하는 것이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이니 그대는 힘쓸지어다.”

계정 승려에게 준 서(贈定師序)
내 고향에는 대나무가 많이 나는데 좋은 것은 크기가 서까래만 하여 값으로 구하는 자가 하루에도 천 명, 만 명이 왔다. 후에 대나무가 저절로 없어져 값을 주고 구하는 자가 이르지 않았다. 내가 보리 짚단으로 덮으라고 가르치니, 다음 해에 큰 대나무가 생겨나 값이 전날보다 높았으니 대나무 종자가 없어진 것은 배양을 잘못해서였을 것이다.
계정 상인은 회당晦堂3)의 3세인 역암櫟庵 화상의 문하에서 나왔다. 동방의 교종은 회당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고, 몇 세대를 전하여는 전혀 뛰어난 자가 없었으나 유독 역암 화상만이 이 제자를 두었으니 대개 덕의 종자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대가 널리 배우고 덕을 닦기를 바라노니, 크게 번성한 이후에는 제값으로 구하는 자가 어찌 천 명이며 만 명뿐이겠는가?

사순 승려에게 준 서(贈順師序)
옛날 사마천司馬遷4)은 천하의 명산대천을 유람한 이후에 문장이 호방해졌고, 선재동자는 남쪽으로 쉰다섯의 선지식을 순방한 이후에 행원行願이 모두 갖추어졌다. 뱁새가 붕새에게 큰 것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은 거처하는 곳이 좁기 때문이다. 나는 두류산 한쪽에서 졸렬한 재주를 안고 살아서, 보는 것이 우물 안 세계를 넘지 못하여 얽매이지 않는 훌륭한 재주를 품은 법려法侶들이 그 천리마의 준족을 펼 수 없었다. 이에 신유년 하안거 해제일解制日에 여러 납자들을 놓아주어 돌아가 대방가大方家를 구하게 하였다. 사순 상인이 슬프게 배회하며

010_0436_c_01L香積妙饌隨念而至以此供養十
010_0436_c_02L方三寶以此布施一切羣生飽嚊禪悅
010_0436_c_03L同證法華三眛是余之望於子者子勉
010_0436_c_04L乎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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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6_c_06L贈定師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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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鄕多竹産美者大如椽以價求之者
010_0436_c_08L日千萬臻後竹自亡價求者不至
010_0436_c_09L敎以麥藁覆之明年大竹生價高於前
010_0436_c_10L豈竹種亡培養之失也今戒定上人
010_0436_c_11L出晦堂三世櫟庵和尙之門東方敎宗
010_0436_c_12L至晦堂大盛傳至數世蔑然無傑特者
010_0436_c_13L獨櫟庵和尙有此人盖亦德種之不亡
010_0436_c_14L余勉其愽學修德庶乎大盛之後
010_0436_c_15L以價求之者奚但千萬而已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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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6_c_17L贈順師序

010_0436_c_18L
昔司馬子長遊天下名山大川而後
010_0436_c_19L章豪放善財南詢五十五知識而後
010_0436_c_20L願悉備足以鷦鷯之於鵾鵬不可以語
010_0436_c_21L所居隘也余抱拙於頭流一面所見
010_0436_c_22L不踰井中天矣法侶之或懷不覊者
010_0436_c_23L以展其驥足於是以辛酉解夏日放諸
010_0436_c_24L子歸求大方家有司順上人悵然徘徊
010_0436_c_25L▣疑「師」{編}

010_0437_a_01L차마 떠나지 못하는 듯하여 사마천과 선재동자의 이야기로 떠나기를 권유한다.

금강산을 유람하고 온 급 승려와 문답하고 준 서(贈及師遊金剛問答序)
급이 이별한 지 3년 만에 와서 인사하였다. 내가 묻기를 “어디를 유람하였나?” 하니, 대답하기를 “금강산에서 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금강산의 풍경을 어느 정도 말해 보라.” 하니, 대답하기를 “다 말하자면 머리가 셀 것입니다. 1만 2천 봉이 모두 바위인데 옥설玉雪과 같이 흰빛이고 바위에 새기지 않았는데도 형상이 부처·보살·시왕十王·아라한과 같습니다. 혹은 서 있고 혹은 앉아서 설법하고 참선하며 옥사를 결단하는 듯하여 각각 보이는 것에 따라 골짜기의 이름이 있습니다. 골짜기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나무와 상서로운 풀들이 많고 푸른 연못에 폭포가 드리워 있습니다. 최고봉은 비로봉인데 높이가 8만 4천 장丈으로 푸른 하늘에 솟아 있습니다. 벼랑에 걸고 허공에 가설한 선거禪居가 있는데, 쇠사슬로 통행합니다. 시방의 탐승객들이 수없이 찾아오는데 다만 나무불南無佛 부르는 소리만 대지를 진동하니 진실로 보살이 머무는 곳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안기생安期生5)과 노오盧敖6)가 이 산에 들어와 신선이 되었다 하고, 진시황과 한 무제漢武帝는 천하의 힘을 다 기울여도 이르지 못하여 평대平臺와 오작궁五柞宮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만승의 임금도 가지 못한 곳을 제자가 지팡이 하나로 두루 편력하였으니 화상께서는 저를 가상히 여기소서.”라고 하였다.
내가 빙그레 웃고 말하기를 “가상하다고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너의 유람은 외경外境에 있으니 다시 말해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자, 급이 자리를 피하여 말하였다. “제자는 불망어不妄語의 계율을 지켜 말이 이와 같으니 다시 말할 것은 없습니다. 옛날 사마천은 천하의 책을 읽고 천하의 명산대천에 노닐어 그 힘을 크게 넓힌 후에 펼쳐 입언立言하니 천하가 그 말을 따랐습니다. 제자는 화상의 문하에 5년간 유학하며 읽은 것은 일가一家의 글에 불과하고 노닌 것은 산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나의 발을 분발하고 나의 눈을 쾌히 하여 옛사람의 경지에 가깝고자 하는데 어찌 불가합니까?”

010_0437_a_01L若不忍別故以子長善財之事勸其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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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7_a_03L贈及師遊金剛問答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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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子與別三年來謁余問奚遊曰是行
010_0437_a_05L從金剛來試言金剛景多小曰盡言則
010_0437_a_06L頭白一萬二千皆石白如珂雪石頭
010_0437_a_07L不鐫而像如佛如菩薩十王阿羅漢
010_0437_a_08L立或坐如說法如叅禪斷獄各以所
010_0437_a_09L有洞名入谷多嘉樹瑞草蒼淵垂
010_0437_a_10L其絕頂名毘盧八萬四千丈出霄
010_0437_a_11L懸岸架空而有禪居鐵索通行
010_0437_a_12L方探勝磨肩鏃趾惟稱南無佛聲震
010_0437_a_13L大地信乎菩薩住處按史安期生盧敖
010_0437_a_14L入此山而爲仙秦政漢武駕天下之力
010_0437_a_15L而不能到死於平臺五柞而止夫以萬
010_0437_a_16L乘之君之所不能得者弟子得以一笻
010_0437_a_17L行歷盡幸和尙可我也余莞爾曰
010_0437_a_18L則不難汝遊在境復言可乎及避席曰
010_0437_a_19L弟子持不妄語戒言如是已復則無也
010_0437_a_20L昔司馬子長讀天下之書遊天下之名
010_0437_a_21L山大川大肆其力然后出而爲言
010_0437_a_22L下從之弟子遊和尙之門五年所讀不
010_0437_a_23L過一家之書所遊不過一山之內是以
010_0437_a_24L奮吾足快吾目庶幾古人之域惡乎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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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답 없이 침묵하다 이윽고 급을 부르니, 급이 대답하자 이에 말하기를 “너는 노오·안기생·사마천의 무리가 되어 만족하고자 하느냐? 우리 불가에서는 신선을 노예로 보고 문장을 토저土苴(하찮은 것)로 보니 네가 사모하여 본받고자 하는 것이 과연 이 몇 사람에 있다면 나에게 불가함이 되는지라, 너를 가하다 함이 고루한 일이다. 네가 종래에 말한 것은 모두 망상 집착이라, 모두 외경이니 경계가 없어지면 마음도 없어지고, 이 없어진다는 것도 없어져야 바야흐로 네가 친히 금강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길에 나아가고자 하여도 나아갈 길이 없고 벗어나고자 하여도 물러날 입구가 없으니, 마땅히 알라. 한 가닥의 길이 조도鳥道 밖에 있어 견고한 곳은 바위처럼 견고하고 부드러운 곳은 물처럼 부드럽도다. 고요히 쓸쓸한 것은 나한羅漢인가, 차갑게 우뚝 솟은 것은 명관冥官인가? 아득히 펼쳐져 있는 1만 2천 봉과 수많은 꽃과 풀들이 어찌 내 안중眼中의 사물이 아니겠느냐? 다만 스스로 기뻐할지언정 그대에게 집어 줄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급이 두려운 마음으로 문득 깨달아 이 말을 써서 품속에 두고 송독하기를 청한대, 내가 또 가련히 여겨서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추한 줄 깨닫지 못하였다.

기記
해인사 백련암 중창기海印寺白蓮庵重剏記
해인사 여러 암자 중에 백련암의 경치가 으뜸이다. 만력萬曆 33년 을사년(1605)에 서산西山 대사7)의 문인 소암昭庵 대사가 경향庚向8)에 창건하였고 3년 뒤 무신년(1608)에 송운松雲 대사9)가 기와를 올렸다. 강희康熙 6년 정미년(1667)에 일헌日軒·인수印壽·여찬如贊·쌍휘雙暉 등이 수리하였다. 그 조실祖室과 누각은 해명海明 상인上人과 보광葆光·도봉道峰·월파月坡 등 여러 스님이 서로 이어 공을 세웠다. 금상今上(정조) 을묘년(1795)에 주실主室 무암공武庵公이 청오가靑烏家(풍수가)의 말에 따라 정당靖堂·조실·누각을 합쳐 임좌壬坐10)에 새롭게 하였다.

010_0437_b_01L可也余無對良久召及及應乃曰汝
010_0437_b_02L欲爲盧敖期生司馬之徒而足乎吾家
010_0437_b_03L視神仙如奴隷文章爲土苴汝所慕效
010_0437_b_04L在數子者爲吾之不可可汝固也
010_0437_b_05L汝從來所說妄想執着皆境也境亡
010_0437_b_06L心亡是亡亦亡方可許爾親到金剛來
010_0437_b_07L雖然即此道進身無路離此道退步亦
010_0437_b_08L無門知應一線在鳥道外堅處堅如石
010_0437_b_09L軟處軟如水寂寥寥者是羅漢耶
010_0437_b_10L巍巍者冥官耶彼萬二千峯森森渺
010_0437_b_11L花花草草何莫非吾眼中物也
010_0437_b_12L可自怡悅不堪持贈君及始瞿然頓悟
010_0437_b_13L請書其語誦諸懷中余又愍然故
010_0437_b_14L覺信筆之爲醜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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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7_b_17L海印寺白蓮庵重剏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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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印諸庵白蓮爲㝡境萬曆三十三年
010_0437_b_19L乙巳西山門人昭庵大師肇剏庚向
010_0437_b_20L其後三年戊申松雲大師瓦焉康熙六
010_0437_b_21L年丁未日軒印壽如賛雙暉等咠焉
010_0437_b_22L祖室樓閣則海明上人及葆光道峰月
010_0437_b_23L坡諸德相繼有功今上乙卯武庵公主
010_0437_b_24L以靑烏家言合靖堂祖室樓閣新於

010_0437_c_01L전임 주지 관수寬修가 그 일을 감독하고 정한定閑이 재물을 관장하였으며 태유泰宥와 장활壯活이 사람을 부려 지휘하였다.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끝났는데 탁 트이고 꼼꼼하여 예전에 없던 것이었다.
내가 이르기를, “유상有相의 공덕은 모두 헛된 것인데, 무암武庵이 환지幻智로 환비幻悲를 일으켜 후세를 위하여 환주幻住의 장엄을 지었으니, 이 암자에 거처하는 것은 곧 극락세계에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몸과 마음이 청정한 연꽃과 같이 탐착을 여의고 행실을 활짝 핀 꽃과 같이 닦으며 인과를 포괄하여 통하는 것이 꽃의 열매와 같아, 털끝같이 많은 보찰寶刹과 먼지 같은 많은 법륜에 이르기까지 어디든지 나타내지 아니함이 없게 하여야 마땅히 해인사의 으뜸가는 경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옥천사 탐진당 중수기玉泉寺探眞堂重修記
탐진당의 중수는 건륭乾隆 무인년(1758)에 있었다. 주지 낭헌朗軒이 달원達遠·응청應淸·약률若律과 함께 힘을 바쳐 이루되 덕을 높이고 화려하게 하지 않았다. 일을 마친 지 20년 후에도 기문이 없었다. 그 제자 총정聰定이 경자년(1780) 가을에 나를 따라 강론하는 여가에 상자 속에서 한 종이의 초고를 내어 보여 주면서 말하기를, “옥천사 탐진당 기문입니다. 이 당은 순치順治 모년에 아무개가 창건하였는데, 거주하는 이들이 좁고 누추하며 또 어긋남이 많아 대중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습니다. 전임 총섭捴攝 극정克淨이 다시 넓히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스승께서 주지가 되었을 때 곧 도모하여 극정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당堂의 제도가 크고 완벽하여 미증유의 일이니 아마도 성쇠의 운수가 때를 기다려 그러하는가 봅니다. 감히 한마디 말씀을 청하여 드러내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고 또 훈시하여 말하였다. “너의 스승은 덕을 높이는데 너는 말을 숭상하느냐? 무릇 소상所相의 상想은 모두 허망하도다.11) 당을 지은 것은 본래 이곳에 거처하는 자로 하여금 상을 버리고 진리를 찾게 함이거늘,

010_0437_c_01L壬坐前住持寛修監其役定閑掌其財
010_0437_c_02L泰宥壯活指揮使人春而始秋而訖
010_0437_c_03L軒敞周密前所未有余謂有相功德皆
010_0437_c_04L武庵以幻智起幻悲爲後來作幻
010_0437_c_05L住莊嚴居於是庵者即極樂世界
010_0437_c_06L敎身心離着如淨蓮餙行如敷花
010_0437_c_07L徹因果如花中實以至毛端寶刹
010_0437_c_08L塵法輪無徃而不現然後宜其爲海印
010_0437_c_09L之㝡境也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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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7_c_11L玉泉寺探眞堂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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堂之重修在乾隆戊寅時住持朗軒
010_0437_c_13L與達遠應淸若律奏力而成之軒德而
010_0437_c_14L不華者功訖後三 [9] 十餘年蔑然無記
010_0437_c_15L其足聦定以庚子秋從余講論之暇
010_0437_c_16L則出匣中一紙草示之曰玉泉寺探眞
010_0437_c_17L堂記也是堂於順治某年某之所剏
010_0437_c_18L居者病其狹陋又多枝梧不可以容大
010_0437_c_19L前捴攝克淨欲改恢而未就及師
010_0437_c_20L翁爲住持不日爲謀乃克克淨之志
010_0437_c_21L而堂之制度宏完未曾有也是豈衰盛
010_0437_c_22L之數有待而然者歟敢請一言以揚之
010_0437_c_23L余旣咲又諭曰汝師尙德而汝尙言乎
010_0437_c_24L凡所相想皆虛妄堂之作本欲居此

010_0438_a_01L너는 또 그 공을 생각하니 우활하도다. 그러나 당이 이루어진 지 20년에 네가 아니면 너의 스승의 덕을 드러내지 못했을 것이요, 너의 스승이 있지 않았다면 극정의 공을 마치지 못했을 것이며, 극정이 아니었던들 당이 있지 못하였고 당이 있지 않았다면 진리를 찾는 이도 없어 도를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하니 상相에 나아가되 상이 아닌 것이 당의 제도요, 무위無爲로써 행한 것이 여러 스님의 공덕이로다. 나는 면목面目 없는 사람으로 이 문자 없는 기문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대원암 번와12) 중수기大源庵燔瓦重修記
외外방장산 대원암은 제일가는 강당으로, 출입한 종사宗師는 용암龍巖·설봉雪峯·만리萬里로서 회당晦堂 아래의 조자손祖子孫이다. 열반하고 나서 영정을 받들어 여기에서 향화를 올렸다. 건륭 갑인년(1794)에 설봉의 상족上足 제자 풍계豊溪 대사가 주석하고 탄식하기를, “이 암자는 선사의 도량인데 무너지고 물이 새니 거의 거주할 수 없구나.” 하고 다시 새롭게 할 방도를 생각하였다. 먼저 자기의 재물을 다 출연하여 주실 금봉錦峯으로 하여금 단월檀越(시주)에게 모연募緣하고 휴암休庵과 호징浩澄은 출납을 맡아 기와를 구웠다. 을묘년(1795)에 주실 휴암이 또 정당靖堂을 중수하였는데 금봉은 그대로 화주化主가 되었다. 혜월인慧月印·두암화斗庵華·해암기海庵基·설암감雪巖鑑·정암휘靜庵輝 등이 각각 재물을 모아 힘을 도왔으며, 연홍演洪이 재량하고 상오尙旿가 형세를 살펴 무너진 것은 보수하고 기운 것은 바르게 하며 불편한 것은 철거하여 새롭게 하니, 트이고 완비되어 예전에 없던 바였다.
공사를 마치고 금봉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나와 금봉은 법문의 재종간再從間으로 사양할 수 없어 이르기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왔다.13) 천광天光과 운영雲影이 찬란하게 떠도는 것은 선사의 법계요,

010_0438_a_01L捨相而探眞而汝又想其功迃也
010_0438_a_02L堂成二十年1) [6] 不能顯*女 [7] 師之德
010_0438_a_03L非有*女 [8] 不能卒克淨之功非克淨
010_0438_a_04L堂不有也堂不有則無探眞之人而道
010_0438_a_05L亦以無傳矣然則即相非相堂之制乎
010_0438_a_06L無爲而爲諸師之功德乎余且無面目
010_0438_a_07L倘是沒字記何敢辭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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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38_a_09L大源庵燔瓦重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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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丈外山大源爲第一講堂出入宗師
010_0438_a_11L龍巖雪峯萬里晦堂下祖子孫也
010_0438_a_12L槃奉影幀香火于此乾隆甲寅雪峰
010_0438_a_13L之上足豊溪大師駐錫而歎是庵先師
010_0438_a_14L道場傾頹滲漏殆不可居思所以重
010_0438_a_15L新之道先捨盡己財使住室錦峰
010_0438_a_16L檀緣休庵浩澄掌出納而燔瓦焉
010_0438_a_17L卯休庵住室又重修靖堂錦峰仍爲化
010_0438_a_18L慧月印斗庵華海庵基雪巖鑑靜庵
010_0438_a_19L各鳩財而助力以演洪宰量尙旿
010_0438_a_20L尋勢摧者葺焉欹者正焉不便者撤
010_0438_a_21L去而新焉䟽暢周完舊所未有役訖
010_0438_a_22L錦峰請記于余余與錦峰爲法門再從
010_0438_a_23L辭不得乃曰如是我聞道之大源
010_0438_a_24L乎天天光雲影燦然徘徊者是先師

010_0438_b_01L토각兎角의 서까래와 귀모龜毛의 들보가 나래 펴듯 건립된 것은 여러 스님들의 정성과 법력이로다. 나는 설하건대, 제일 강당은 곧 제일 강당이 아니요 이 이름이 제일 강당이라, 이 당은 본래 성괴成壞가 없거늘 무엇을 보수하며 본래 이름이 없으니 무엇을 기술할 것인가? 그러나 이 당에 거주하는 자는 바로 여래의 제자의 세계와 무량한 인천人天을 안양安養하고 무루無漏의 금강보전에 상주하여 불가설 청정바라밀을 연설하여 드러내 여러 중생을 이롭게 가르치니, 그 공덕은 내가 해묵海墨으로도 기록하지 못하리라. 마침 풍계 노인과 이 일을 증명한다.”라고 하였다.

옥천사 대법당·명부전 단청 중수 및 삼존상·십육나한·시왕 개금분기(玉泉寺大法堂冥府殿重修丹雘及三尊像十六羅漢十王改金粉記)
남녘에는 본디 큰 사찰이 많은데 불전이 화려하고 승려가 성대함은 진양晋陽14)의 옥천사를 칭한다. 금상 원년 정유년(1777)에 대법당과 명부전을 중수하고 삼단三壇 불상의 채색을 더하였다. 2년 무술년(1778)에 두 전각을 단청하고 기와와 벽돌을 모두 바꾸니 쓰인 재물이 수만을 헤아렸다.
주지가 이 일은 글이 없을 수가 없다고 하여 나에게 사실을 기록해 주기를 청했으나, 나는 글재주가 없다고 하여 마다한 지가 2년이 지났다. 굳게 사양할수록 요청하기를 그치지 않자 이에 붓을 잡아 회답하여 말하였다.
“주지는 내가 산을 기록하기를 바라는가? 산은 말이 없으니 나는 허물을 끼치고자 하지 않노라. 절을 기록하기를 바라는가? 전인前人의 기록이 많으니 다시 쓴다면 번거로운 일이다. 전각의 불단과 불상을 기록하기를 바라는가? 무릇 마음과 눈이 있는 자는 모두 우러러보고 사랑할 것이니 또 어찌 나의 말을 기다리랴. 그럼에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있으니, 대저 전각과 불상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나 신기루처럼 변화하여 나온 것이 아니요,

010_0438_b_01L法界歟兔角椽龜毛樑翬然建立者
010_0438_b_02L諸公之誠效法力歟我說第一講堂
010_0438_b_03L非第一講堂是名第一講堂此堂本無
010_0438_b_04L成壞云何修葺本無名字云何記述
010_0438_b_05L雖然居此堂者乃是如來弟子安養世
010_0438_b_06L界與無量人天常住無漏金剛寶殿
010_0438_b_07L揚不可說淸淨波羅密利敎羣生其功
010_0438_b_08L吾以海墨莫記會與豊溪翁證明是
010_0438_b_09L

010_0438_b_10L

010_0438_b_11L玉泉寺大法堂冥府殿重修丹雘及
010_0438_b_12L三尊像十六羅漢十王改金粉記

010_0438_b_13L
南界故多大刹若佛宇惟侈僧寶惟殷
010_0438_b_14L晋陽之玉泉稱焉上之元年丁酉重修
010_0438_b_15L大法堂冥府殿改增三壇像采二年戊
010_0438_b_16L丹雘兩殿瓦甓悉新之用財計萬
010_0438_b_17L住持謂此事不可無言請余記其宲
010_0438_b_18L以無文辭者二年辭愈固而請益不已
010_0438_b_19L乃投筆而復之曰住持使余記其山乎
010_0438_b_20L山則無言吾不欲累也使余記其寺乎
010_0438_b_21L前人之述已多復則屑也使余記其殿
010_0438_b_22L宇壇像乎凡有心目者皆可瞻仰而愛
010_0438_b_23L樂之又何待吾言吾所言者有之
010_0438_b_24L是殿與像也非隕天地聳蜃噓鳥革

010_0438_c_01L전날의 기운 것이 바르게 되고 옛것이 새롭게 되며 바랜 것은 빛이 나서 기원祇園15)의 도량과 유사하고 화장해華藏海16)의 회상會上에 방불케 된 것은 모두 사람의 힘이다. 오늘날 총림에서 당당한 승려로서 욕심을 따르는 자는 많고 공정하고 선한 자는 적은데도 너희 무리는 능히 선을 행하는 즐거움을 알아 공덕에 용맹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진흙 속의 연화가 아니며 그 변화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주지를 위하여 사례하고 위로한다. 이 역사는 두타 연학演學과 전 주지 영심永心·성이晟頤가 단월에게 모연募緣하고 굉원宏遠·활보活寶가 출납을 헤아렸으며, 전 규정糾正 낭헌浪軒, 전 주지 응청應淸·포조抱照가 시종始終을 감독하였고, 규구規矩는 숙란肅蘭·포훈抱訓·거징巨澄이 주관하였다. 회화繪畫는 환현幻玄·임평任平·모심慕心이 맡았고, 흙 바르는 이와 벽돌 쌓는 이 그리고 오고 가며 식량을 공급하는 자가 각각 약간 명이다. 운파雲坡·계봉鷄峰이 증명 법사로서 주관하니 개개의 사람들이 영초靈草와 명주明珠인지라. 모두 마땅히 기록하여야 할 것이다. 이로써 불전을 장엄하게 되니 다행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는 검소하고 사치스럽지 아니하며 간결하고 번거롭지 아니하니, 나는 이 기문에서 주지를 위해 경계하노라. 주지의 이름은 석인碩忍으로 일찍이 은선암隱仙庵에서 나를 좇아 선교禪敎의 큰 뜻을 배웠다.”

대원암기大源庵記
천왕봉 한 줄기가 동북쪽으로 달리다가 동으로 꺾어 꾸불꾸불 기복하다 진주 서쪽 100리에서 멈춘다. 뭇 봉우리가 첩첩이 에워싸고 두 시내가 합친 곳에 예부터 법계法界가 있으니 평원사平原寺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운권雲卷 대사가 큰 난야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대원사이다. ‘대원大源’의 뜻은 진주 서쪽의 시내 중에 이보다 큰 것이 없고 후인이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을 취하였다.

010_0438_c_01L而向之欹者正故者新漫漶者光輝焉
010_0438_c_02L依俙祗园道場彷彿華藏海會者皆人
010_0438_c_03L力也當今叢林堂堂方袍循欲者多
010_0438_c_04L公善者小惟爾有衆乃於官徭凋瘁之
010_0438_c_05L能知爲善之樂勇於功德如是
010_0438_c_06L非所謂淤泥之蓮花而其所化之者
010_0438_c_07L曰賢乎吾爲住持謝問是役也頭陁
010_0438_c_08L演學前住持永心晟頥募檀緣宏遠
010_0438_c_09L活寶料量出納前糾正浪軒前住持
010_0438_c_10L應淸抱照監蕫終始䂓矩則肅蘭抱訓
010_0438_c_11L巨澄主焉繪畫則幻玄任平慕心掌焉
010_0438_c_12L釫者甓者來徃給糧者各略干人
010_0438_c_13L坡鷄峰主證法箇箇靈草明珠悉宜繡
010_0438_c_14L諸榟以之莊嚴佛殿幸也然吾道儉
010_0438_c_15L而無奢簡而不煩吾於是記亦有爲
010_0438_c_16L住持誡者焉住持名碩忍甞從余於隱
010_0438_c_17L仙室中禪敎大旨

010_0438_c_18L

010_0438_c_19L大源庵記

010_0438_c_20L
天王一脚走艮旋東委蛇起伏止晋
010_0438_c_21L西百里羣峰擁疊兩川襟合古有法
010_0438_c_22L界曰平原寺刼換有雲卷大師剏大蘭
010_0438_c_23L是爲大源大源之意盖州西水源
010_0438_c_24L無大於此而後人取道之大源出乎天
010_0438_c_25L「女」通「汝」{編}次同

010_0439_a_01L
전각의 이름은 천광전天光殿이요 누각 이름은 운영루雲影樓로,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여 영남 아래쪽으로는 제일가는 강당이다. 암자 뒤의 석탑은 10층인데 사리 77과가 보관되어 때때로 서광이 빛난다. 탑 왼쪽에는 작은 정사를 건립하여 향화하는 곳으로 삼았는데 범행梵行이 높은 선사가 아니면 거주하지 못한다. 동천東川의 수석은 더욱 빼어나 용추 아래로 몇 리까지는 모두 반석과 물이 굽이치는 곳으로 항상 용이 꿈틀거리며 지나간 자취가 보인다. 돌 옹기는 자연히 이루어져 8, 9곡斛 정도를 담을 수 있고 암자의 스님이 매번 무를 담는데 매우 맛이 있다. 한여름에 때때로 시내에서 목욕하고 바위에 올라앉으면 녹음이 우수수 춤을 추며 청풍이 상쾌하게 불어와 자신도 모르게 속된 생각이 문득 사라져서, 시를 읊조리며 돌아와 스스로 즐긴다. 겸재謙齋 하河 선생17)의 시에 이르기를,

禹稷若知山水趣      우禹·직稷18)이 만약 산수의 흥취를 알았다면
無人陶鑄舜乾坤者     순임금의 태평 시대를 만들지 못했으리라

하였으니 까닭이 있다고 하겠다.
나는 전후로 8년을 여기에 머물렀다. 정미년(1787) 가을 현판의 4운을 따라 다음과 같이 지었다.

先僧剏寺避塵寰      선대 스님 암자 창건해 속세 피했는데
余亦明時入此山      나 또한 태평 시대에 이 산에 들어왔네
洞闢天光千歲壯      골짜기에 천광전 열려 천년에 웅장하고
樓高雲影一藤攀      운영루 누각 높아 넝쿨 잡고 오르네
蒼苔古塔探仙骨      푸른 이끼 낀 옛 선탑에 신선의 뼈 찾고
白石淸流洗客顏      흰 바위 맑은 물에 나그네의 얼굴 씻네
出處俱無干我事      나가고 물러남 모두 나의 일이 아니니
念經終日坐窓間      종일토록 창가에 앉아 불경을 염송하네

무주암기無住庵記
암자는 위성渭城19) 남쪽 60리에 있는데 어느 시대의 누가 지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여지승람』에, 무기無己란 스님이 있는데 거의 한산寒山과 습득拾得20)의 무리와 같아 일찍이 무주암無住菴21)에 거주하며 시를 지어 이르기를,

此地本無住        이 땅은 본래 머무름이 없으니
何人建此堂        누가 이 당을 건립하였는가
如今無己者        이제 무기란 스님이
去住本無妨        가고 머무름에 막힘이 없도다

하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22)가 이르기를, 경치가 그윽하고 고요하여 천하에 으뜸가는 선원이라고 하였다. 반야봉般若峰의 한 어깨가 오른쪽으로 돌아 50여 리쯤 가서

010_0439_a_01L殿名曰天光殿樓名曰雲影樓
010_0439_a_02L壯麗爲嶺以下第一講堂庵後石塔十
010_0439_a_03L藏舍利七十七箇徃徃放光瑞
010_0439_a_04L左建小精舍爲香火之所非梵行高
010_0439_a_05L莫居之東川水石尤勝龍湫下數
010_0439_a_06L里間皆盤石水曲處每見龍行蜿蜒
010_0439_a_07L之跡石瓮天成可容八九斛庵僧每
010_0439_a_08L沉菁爲極味盛夏時浴于川登坐石頭
010_0439_a_09L綠陰婆娑淸風吹爽不覺塵慮之頓消
010_0439_a_10L而詠歸自樂謙齋河先生有題云禹稷
010_0439_a_11L若知山水趣無人陶鑄舜乾坤者以焉
010_0439_a_12L余前後住此八年丁未秋次板上四韵
010_0439_a_13L先僧剏寺避塵寰余亦明時入此山
010_0439_a_14L闢天光千歲壯樓高雲影一藤攀蒼苔
010_0439_a_15L古塔探仙骨白石淸流洗客顏出處俱
010_0439_a_16L無干我事念經終日坐窓間

010_0439_a_17L

010_0439_a_18L無住庵記

010_0439_a_19L
庵在渭城南六十里邈不知何代誰人
010_0439_a_20L之剏輿地勝覽有僧無己者殆寒拾之
010_0439_a_21L甞居無住庵有題云此地本無住
010_0439_a_22L何人建此堂如今無己者去住本無妨
010_0439_a_23L高麗普照國師謂境致幽寂甲天下第
010_0439_a_24L一禪居云般若一肩右旋五十餘里

010_0439_b_01L천왕봉과 형제처럼 마주 읍을 하는데, 돌 진지가 하늘에 솟아 있고 진지 틈은 흙 언덕에 소가 누운 형국으로 곤향坤向이며 반야봉의 조봉祖峰(주봉)이 정안正案이 되어 매우 정감이 있다. 청오가靑烏家가 이르기를 송아지가 어미를 돌아보는 형국이라 한다. 부자암父子庵이 전요前曜가 되고 오도령悟道嶺이 후라後羅가 되어 높지도 낮지도 않아 병풍과 장막이 둘러싸고 깃발이 옹호하는 듯하다. 주방 곁 돌 틈에서는 차가운 샘물이 용솟음치는데 깊이는 반 길쯤이다 예전에 전하기를, 천왕봉의 신이 신력으로 뚫었다고 한다. 암자는 작고 화려한 꾸밈이 없으며 복장卜藏과 정당靖堂도 없어서 다만 여덟아홉 개의 선좌禪座만 수용할 수 있으니, 형해形骸를 버리고 초연히 깨달은 자가 아니면 거처할 수 없다.

금대암기金臺庵記
방장산23)의 여러 사찰 중에 유독 금대암을 제일로 칭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이 암자는 창건된 해가 매우 오래되어 제천諸天에 최초로 창건되었기 때문에 제일이라고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경치와 명승이 여러 사찰 중에 으뜸이요, 금니金泥로 마룻대를 발랐기 때문에 제일금대라 한다. 그러나 모두 억측으로 근거가 없다. 『정토경淨土經』 가운데 염불의 공덕이 높은 자는 목숨을 마칠 때 서방의 성인이 금대로 와서 맞이함이 으뜸이요, 은대 등은 그다음이라고 한 것이 이 뜻이다.
산맥의 형세가 덕유산으로부터 100여 리를 뻗어 마뢰임馬瀨壬에 이르러 가채산加采山이 되니, 노승이 부처님께 절하는 형국이다. 반야봉으로부터 천왕봉에 이르기까지는 병요屛曜와 금장錦帳이 되어 눈에 반듯이 마주하는데 골짜기마다 운하가 끼어 오는 것, 가는 것, 우뚝 선 것, 가로 뻗어 가는 것 등이 실비단같이 성글기도 하고 채색 비단처럼 펼쳐지기도 하며, 넓기는 바다 같아서 갑자기 있다가 사라지기도 하여 만 가지 형태로 변화하니 가장 기이한 풍경이다. 암자 뒤에는 응진應眞24)의 석상을 모셨는데 기도하는 자는 반드시 소원을 이룬다. 신라·고려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고승 대덕이 다 거주하였으나 고찰하고 근거할 만한 사적은 없다.

010_0439_b_01L與天王峰長弟相揖石壘出雲霄
010_0439_b_02L隙作土阜臥牛形坤向而般若祖峯爲
010_0439_b_03L正案甚有情靑烏家謂兒犢顧母
010_0439_b_04L子巖爲前曜悟道嶺爲後羅不高不低
010_0439_b_05L如屏帳之圍拱旌旄之護擁然傍厨石
010_0439_b_06L竇湧泉冽深可半丈許古傳天王峯神
010_0439_b_07L神力鑿得庵小而無華餙無卜藏靖堂
010_0439_b_08L只容九八禪座非遺形超悟者莫居
010_0439_b_09L

010_0439_b_10L

010_0439_b_11L金臺庵記

010_0439_b_12L
方丈諸刹金臺獨稱第一或云是
010_0439_b_13L創年邃古爲諸天最初剏故第一
010_0439_b_14L或云境致名勝冠於諸刹而金泥塗屋
010_0439_b_15L故曰第一金臺皆臆做無稽淨土經中
010_0439_b_16L念佛功高者命終時西聖以金臺來接
010_0439_b_17L爲第一銀臺等爲次此意也龍勢從
010_0439_b_18L德裕邐迤百餘里止馬瀨壬作加采
010_0439_b_19L爲老僧拜佛案自般若至天王峰
010_0439_b_20L爲屛曜錦帳平對目中谷谷雲霞
010_0439_b_21L者去者亭立者橫帶者踈如縠敷如
010_0439_b_22L漫如海忽有忽無變幻萬狀最奇
010_0439_b_23L庵後奉應眞石像祈禱者必遂願
010_0439_b_24L自羅麗我代名德高僧皆居之而事蹟

010_0439_c_01L근래에 암자의 스님이 벽을 바르다가 문득 들보 속이 뚫어져서 보니 종이에 쓴 글이 있었다. 바람에 닿자 가루가 되어 날아가서 식별할 수 없었는데 아마 상량문이었을 것이다. 구운 기와에도 오히려 ‘만력萬曆’ 연호의 글자가 기록되어 있으니 그 오래됨을 알 수 있다.

벽송암기碧松庵記
나의 10대 법조이신 벽송碧松 대사25)께서는 벽계碧溪26)의 심인心印을 전해 받고 정덕正德 경진년(1520) 3월에 지리산에 들어가 초가 암자를 엮고 거주하였는데, 후인이 더 넓혀서 대난야가 되었고 인하여 ‘벽송암’27)이라고 불렀다. 함양군에 속해 있다. 대사께서는 지혜의 눈으로 널리 지리에 통하여 수행을 돕는 밝은 터로 이곳보다 나은 곳이 없음을 보시고 드디어 법계를 열었으니, 전후로 마음을 깨친 자를 헤아려 보면 일곱 분이나 된다. 4대 법조이신 회당 화상晦堂和尙께서도 또한 이 암자를 평생의 도량으로 삼아 암자의 수승한 명성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천왕봉의 한 맥이 오른쪽으로 돌아 50여 리를 뻗어 흐름을 거슬러 터를 맺어 동북쪽으로 계좌癸坐에 조산祖山(주산)을 둘러 안고 동남쪽 사좌巳座와 서남쪽 신좌申坐의 여러 봉우리가 둥글고 빼어나며, 주작朱雀28) 안팎의 층상層翔이 평요平拗하고 단정하여 괘방掛牓의 형국29)이다. 순봉唇峰은 앞에서 마주하고 병사屛砂는 뒤를 에워싸며 대판천大坂川과 송대천松臺川은 승룡乘龍이 되고, 금대수襟帶水와 추성뢰楸城瀨는 빗장과 문호가 된다. 종고수鐘鼓水의 용이 못에 놀고 장추長湫가 몇 리를 돌아 흘러 현무수玄武水가 된다. 효귀봉孝鬼峯이 오도산悟道山을 쌍으로 지탱하여 즐겨 그 속을 빛내고, 금대산金臺山은 화표華表가 되어 터에 들어가는 길을 막아 주는 문이 되니 평정하고 화락하고 그윽하다. 토맥土脈이 황토이고 두꺼우며 터의 외부는 다 석각石角과 높은 고개이다.
거주하는 스님의 마음이 자연히 담박하여 탐진貪嗔을 일으키지 않고 도량을 쓸고 닦지 않아도 티끌이 일어나지 않는다. 혹 범행梵行을 훼손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재앙을 만난다. 이 때문에 재물을 경영하는 무리는 가지 않고 표주박 지닌 납승도 저녁에 들어가 아침에 나와 거의 지키지 못하니

010_0439_c_01L無攷準近者庵僧塗壁忽樑腹穿視之
010_0439_c_02L有紙書觸風粉飛不可辨識盖上樑
010_0439_c_03L文也瓦燔猶記萬曆年字其古可知

010_0439_c_04L

010_0439_c_05L碧松庵記

010_0439_c_06L
我十代法祖碧松大師傳碧溪心印
010_0439_c_07L正德庚辰三月入智異山構草庵居之
010_0439_c_08L後人增制爲大蘭若因以碧松名焉
010_0439_c_09L屬咸陽郡大師以慧眼傍通地理
010_0439_c_10L助道明區無過於此遂開法界前後
010_0439_c_11L計悟心者七人四代法祖晦堂和尙
010_0439_c_12L以是庵爲平生道場而庵之勝名益顯
010_0439_c_13L於世天王一脉右旋五十餘里逆流
010_0439_c_14L結局艮入癸坐回包祖山巽巳坤申
010_0439_c_15L峰圓秀朱崔 [10] 內外層翔平拗端正而爲
010_0439_c_16L掛牓案唇峰前拱屏砂後繞大坂川松
010_0439_c_17L臺川爲乘龍襟帶水楸城瀨爲扄戶
010_0439_c_18L皷水龍遊潭長湫數里圍流爲玄武水
010_0439_c_19L孝鬼雙撑悟道山樂曜其衷金臺山爲
010_0439_c_20L華表捍門入基平正雍窈土脉黃阜
010_0439_c_21L基局之外皆石角峻坂居僧心次
010_0439_c_22L然澹泊貪嗔不起道場雖不灑掃
010_0439_c_23L埃不生或梵行虧者必遭災是以營
010_0439_c_24L貲之徒不徃持瓢雲衲暮入朝出

010_0440_a_01L가끔 풀만 깊다는 탄식이 있었다. 벽송·서산·회당 세 조사의 진영을 중당에 모셔 놓고 불초한 내가 전후로 향화를 받든 지 11년이었다.
임자년(1792) 여름 덕유산 은신암隱身庵에서 드디어 기록하다.

칠불암기七佛庵記
반야봉에서 30리 남쪽에 칠불암이 있어 동국 제일의 선원으로 칭해지는데, 옛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이다. 신라 210년 신문왕의 아들 두 사람이 궁모宮母 5인과 이곳에 들어와 성도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59년 후 경덕왕 때 이르러 징사徵士30) 옥보玉寶가 거주하였다. 682년이 지난 홍무 4년(1371)에 중창하여 오늘날의 사찰이 되었다.
신암愼庵의 기문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오대산의 사적을 보니 신문왕자 두 사람은 하나는 효명孝明이요, 하나는 신성神聖이다. 오대산에 가서 문수의 화신化身을 참배하고 나서 효명은 들어가 임금을 계승하고 신성은 스님이 되었다.”라고만 하고 궁모가 득도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신암의 기문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을 수 없다.
김해 김씨 족보에 “수로왕에게는 아들 열 명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세자가 되고 두 사람은 양자로 주어 허씨의 후사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은 속세에 뜻을 끊고 보옥선寶玉仙을 따라 가야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 신선이 되었다.”고 하니 반드시 이들일 것이다. 대개 보옥은 옥보玉寶의 글자가 도치된 것일 뿐이요, 선仙과 불佛은 세인들이 상호 부르는 칭호이다.
가야산에서 운상원으로 들어가 심불心佛을 깨우쳤기 때문에 후인이 사모하여 암자 이름을 ‘칠불’이라고 한 것인데, 승사僧史에서는 이렇듯 잘못 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로법전毘盧法殿에는 청허淸虛 존자가 손수 쓰신 기문이 있다. 동쪽에는 약사 석불藥師石佛이 있어 매우 영험이 있다. 서쪽은 고승당高僧堂인데 온돌을 따라 선상을 놓아 높고 낮은 곳이 고루 따뜻하다.

010_0440_a_01L不能守直徃徃有草深之歎焉奉碧松
010_0440_a_02L西山晦堂三祖眞影于中堂余不肖
010_0440_a_03L後侍香十有一載壬子夏在德裕隱身
010_0440_a_04L遂記

010_0440_a_05L

010_0440_a_06L七佛庵記

010_0440_a_07L
從般若南三十里有七佛庵稱東國第
010_0440_a_08L一禪院舊額雲上院始羅二百十年
010_0440_a_09L有新文王子二人與宮母五人入此成
010_0440_a_10L故改今名後五十九年而至景德
010_0440_a_11L王徵士玉寶居之六百八十二年
010_0440_a_12L即洪武四年重剏爲今刹愼庵記云
010_0440_a_13L余甞見臺山事蹟新文王子二人一曰
010_0440_a_14L孝明一曰神聖詣五臺叅化身文殊
010_0440_a_15L而孝明入承神聖爲僧未有宮母得道
010_0440_a_16L之說愼庵記未容無疑金海金氏譜
010_0440_a_17L首露王有子十人一爲儲君二人錫爲
010_0440_a_18L許氏嗣其餘七人志絕塵寰從寶玉
010_0440_a_19L入伽倻山學道成仙必此也盖寶
010_0440_a_20L玉寶字倒而已仙佛世人之互稱也
010_0440_a_21L自伽倻入雲上院悟心佛故後人慕之
010_0440_a_22L七佛名庵者也而僧史謬傳一至此乎
010_0440_a_23L毘盧法殿淸虛尊者手筆記文在東有
010_0440_a_24L藥師石佛甚靈偉西則高僧堂因突

010_0440_b_01L당제堂制는 묵언 면벽하여 달마의 마음을 참구하는 것이다.
암자 뒤에 오르면 옥보대玉寶臺가 있고 서북쪽 산봉우리에는 부휴浮休 조사의 치아탑齒牙塔이 있다. 그 아래에는 추월 능秋月能 선사의 부도가 있는데, 선사는 벽송의 심인을 이어받아 고행을 부지런히 행하였다. 저녁마다 돌을 짊어지고 길을 다니다 호랑이를 만나 곧 몸을 바치려고 하였는데, 호랑이가 고개를 숙여 마다하고 항상 가까이에서 모셨다. 임종 때 훈계하기를, 남의 재물을 허비하지 말고 다만 산 모양의 돌을 모아 사리를 보관하라고 하였다. 후인이 석종石鐘으로 바꾸려 하자 호랑이가 나와 저지하였다. 오늘날에도 탑을 돌면 참으로 검소하고 사치스럽지 않아 그분을 직접 보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손을 합장하게 된다.
아래쪽으로 10리쯤에 새로 강당을 세우고, 또 10리를 가 쌍계사에 육조탑六祖塔이 옛 전각 위에 있고, 진감眞鑑31)의 비명碑銘은 새 전각의 뜰 가운데에 있다. 동부洞府에는 두 바위가 길 양쪽에 있어 ‘쌍계석문’이라고 새겨져 있으니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32)이 대자大字로 쓴 것이다.

불일암기佛日庵記
불일암은 쌍계사에서 10리쯤에 있다. 살펴보면, 고려 국사 목우자牧牛子의 시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니 아마도 국사의 도량인 듯한데 근거할 사적이 없으니 안타깝다. 외나무다리가 허공에 걸려 있어 바위틈을 부여잡고 작은 방에 들어가면 유연히 속세의 생각이 사라진다. 청학봉과 백학봉이 좌우로 끼고 서 있는데, 모두 바위산으로 매우 기이하다. 옛날 학이 그 위에 살았는데 어떤 사람이 돌을 가지고 장난삼아 던지자 학이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남쪽 왜구가 들이닥쳤으니 학도 또한 진퇴를 아는가 보다. 왼쪽 산기슭에 보조국사의 옛터가 있는데 매우 밝고 편안하다. 조남명曺南溟33) 선생의 「지리산기智異山記」에 향로봉이라 한 것은 지금의 청학봉이고 비로봉이라 한 것은 지금의 백학봉이다.


010_0440_b_01L爲床均溫高低堂制嘿言面壁達摩
010_0440_b_02L心是究登庵後有玉寶臺西北崗有浮
010_0440_b_03L休祖師齒牙塔其下秋月能禪師浮圖
010_0440_b_04L禪師嗣碧松心印精勤苦行每夜負石
010_0440_b_05L行道遇虎便欲捨身虎俛首不肯
010_0440_b_06L侍左右臨終遺誡毋費人財力但聚
010_0440_b_07L山形石藏舍利後人欲改石鐘虎出
010_0440_b_08L沮之至今繞塔純儉無奢如見其人
010_0440_b_09L不覺膝之跪而手之叉矣下界十里
010_0440_b_10L興講堂又十里雙溪寺六祖塔在古殿
010_0440_b_11L眞鑑碑銘新殿庭中洞府兩石挾
010_0440_b_12L鐫曰雙溪石門崔孤雲大字

010_0440_b_13L

010_0440_b_14L佛日庵記

010_0440_b_15L
佛日庵在雙溪寺十許里按高麗國師
010_0440_b_16L牧牛子謚曰佛日普照是豈國師道場
010_0440_b_17L而事蹟無憑可慨已略勺架虛攀崖
010_0440_b_18L進身小室脩然無塵慮靑鶴白鶴
010_0440_b_19L兩峰挾拱左右皆石崗甚奇古者鶴
010_0440_b_20L巢其上有人將石礫打戱鶴不復返
010_0440_b_21L未幾南冠 [11] 仙禽亦知進退者耶左麓
010_0440_b_22L得普照古墟甚明穩南溟曺先生智異
010_0440_b_23L山記香爐峰者今靑鶴峯也毘盧峯
010_0440_b_24L今白鶴峯也

010_0440_c_01L
화장암기華藏庵記
진양晋陽(진주) 금만리金滿里에서 위로 10리를 못 가서 절벽에 인접한 작은 암자가 화장암인데, 나옹懶翁 화상이 일찍이 거처하셨다. 이 암자 뒤의 암혈巖穴에서 쌀이 나와 계속 조석으로 공양하였는데, 나옹 화상이 떠나자 쌀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쌀바위(米巖)’라고 한다. 동남쪽을 가만히 바라보면 산수가 더욱 기이하고 아름답다. 나는 정미년(1787) 중춘에 올라 하루를 묵고 돌아왔다.

화엄사기華嚴寺記
절은 구례 동쪽 10리 반야봉 서남쪽 기슭에 있다. 양무제 대동大同 12년34)이자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창건되었다. 담 안쪽의 법계法界가 73곳이요, 담 밖의 공입원共入院이 93곳이다. 자장慈藏35)ㆍ도선道詵36)ㆍ의상37)ㆍ원효가 이어서 거처하였다. 불상·정탑庭塔·등롱燈籠·노주露柱·석당石幢·석지石池의 수는 절의 역사에 모두 기재되어 있으니 다 기록할 수 없다.
이제 운체雲砌를 보니 옛터가 되었고 화엄의 석판石板도 병화에 부서졌으나 아직 수천 조각이 남았는데 글자 획이 매우 오묘하다. 범궁梵宮은 옛 편액은 없어지고 다만 2층 장륙전丈六殿만 웅장하고 아름답게 서 있다. 벽암碧巖 대사가 문인에게 명하여 장륙전을 중건하였다. 장륙전 위 세존 사리탑 9층에는 철면자鐵面子38)의 기문이 있는데, 내가 읽어 보니 경주 불국사의 사적이 잘못 이 절의 것으로 되었다. 옛 기록이 황당하고 근거가 없어 취하여 기록하지 않았다.39) 우리 인조 임금 때 벽암 존자께서 이곳에서 입적하여 사리와 부도가 절 아래 서쪽 기슭에 있다. 백헌白軒 이 상국李相國40)이 찬한 신도비가 해탈문 밖에 있고 교지敎旨는 삼전三殿에 있다.


010_0440_c_01L華藏庵記

010_0440_c_02L
晋陽金滿里上不十里接壁小庵
010_0440_c_03L華藏懶翁甞居此庵後巖穴出粳米
010_0440_c_04L繼爲朝夕供翁去米亦不出至今猶稱
010_0440_c_05L米巖坐看東南山水尤多奇麗余以
010_0440_c_06L丁未仲春登一宿而歸

010_0440_c_07L

010_0440_c_08L華嚴寺記

010_0440_c_09L
寺在求禮東十里般若西南麓梁武帝
010_0440_c_10L大同十二年新羅眞興王五年始創
010_0440_c_11L內法界七十三所墻外共入院九十三
010_0440_c_12L慈藏道詵義相元曉相繼居之
010_0440_c_13L佛𨈬庭塔燈籠露柱石幢石池之數
010_0440_c_14L載寺史不可盡記今看雲砌呀然古
010_0440_c_15L華嚴石板碎於兵燹而尙殘數千
010_0440_c_16L字畫甚妙梵宮則今無舊額唯二
010_0440_c_17L層丈六殿瞻仰壯麗碧巖大師命門
010_0440_c_18L人重建丈六殿殿上世尊舍利塔九層
010_0440_c_19L有鐵面子記余讀之乃慶州佛國寺事
010_0440_c_20L誤作此寺古記荒唐無準故不取
010_0440_c_21L我仁廟時碧巖尊者入寂於此
010_0440_c_22L利浮屠在寺下西麓白軒李相國所撰
010_0440_c_23L神道碑在解脫門外敎旨在三殿

010_0441_a_01L
오산기鰲山記
구례 서남쪽에 천 길 봉우리가 우뚝 솟아 위에는 사성암四聖庵이 있다. 전후좌우가 모두 수십 길이나 되는 석벽으로 도선의 굴이 암자 뒤에 있어 진각眞覺과 무의자無衣子가 모두 여기에서 선정을 닦았다. 항상 오경이면 게송을 외는 소리가 10여 리까지 들려 때를 잃지 않았으니, 듣는 자가 새벽을 알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월남비月南碑에 이르기를, “또 「화엄사기華嚴寺記」에 원효·의상·도선이 모두 거주했다.”고 하였으니, 진각까지 합하여 사성이라 암자를 부르게 된 것이다. 송대松臺에 서서 사방을 바라보면 평야와 성읍, 여염집들이 몰려 있고 밤이 되면 마을의 등불 빛이 맑은 하늘에 별빛이 흩어지는 듯하다. 잔잔한 시내가 그 아래를 돌아 흐른다.

조계산 송광사기曺溪山松廣寺記
대흥사에서 송광사에 이르러 절 오른쪽 산에 있는 사적비를 읽었다. 신라의 스님 혜린慧隣이 처음으로 작은 암자를 세웠는데 폐허가 되고, 고려 명종 승안承安 2년(1197)에 이르러 보조국사께서 출세出世하시어 큰 사찰을 세웠으니 법전과 요사채가 100여 곳으로 9년 만에 일을 마쳤다. 옛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라고 하였으나 명종이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고, 나라 안의 가람을 반으로 나누어 모두 이 절에 소속시켰다. 오늘날 송광사라고 이르는 것은 대개 옛 산 이름을 취한 것이다.
병란 후에 옛 기물이 얼마 남지 않아 이제는 보조국사의 사리와 원불願佛, 임금이 하사한 법복, 동기銅器 능견난사能見難思41)만이 향로전에 있다. 또 비단에 쓰인 긴 폭의 묵적墨跡이 있었는데, 손에 닿는 즉시 부서져 날아가고 다만 ‘대정大定 4년’(1164)이라는 글자만 알아볼 수 있다.
수각水閣 밖에는 한 그루 죽은 박달나무가 앙상하게 서 있는데 곧 국사께서 손수 심은 것으로 함께 열반에 든 것이다. 500여 년의 풍상을 거치고도 높게 솟아 무너지지 않았다.

010_0441_a_01L鰲山記

010_0441_a_02L
求禮西南突峰千仭上有四聖庵
010_0441_a_03L後左右皆石壁十數丈道侁 [12] 窟在庵後
010_0441_a_04L眞覺無衣子甞習定於此每五更唱偈
010_0441_a_05L聲聞十許里略不失時聞者以爲候晨
010_0441_a_06L月南碑云又華嚴寺記元曉義相道侁 [13]
010_0441_a_07L皆居云云并眞覺則四聖之名庵以也
010_0441_a_08L立松臺四望平野城邑閭閻人家
010_0441_a_09L地入夜村燈如星撒晴空潺水江環帶
010_0441_a_10L其下

010_0441_a_11L

010_0441_a_12L曺溪山松廣寺記

010_0441_a_13L
自大興至松廣寺寺之右崗讀寺蹟碑
010_0441_a_14L新羅僧慧隣肇創小庵庵墟而至高麗
010_0441_a_15L明宗承安二年普照國師出世而建大
010_0441_a_16L法殿僧寮百有餘所九載訖功
010_0441_a_17L號松廣山吉祥寺明宗改爲曺溪山修
010_0441_a_18L禪社中分一國伽藍盡隷此寺今云松
010_0441_a_19L盖取古之山名也兵燹後古物無
010_0441_a_20L今見普照舍利若願佛若御賜法
010_0441_a_21L若銅器能見難思在香爐殿又綾
010_0441_a_22L書長幅墨跡觸手飛碎惟大定 [14] 四年字
010_0441_a_23L可記水閣外一條死檀骨立即國師手
010_0441_a_24L而同歸涅槃者也歷風霜半千年數

010_0441_b_01L천자암天子庵에도 또한 국사께서 손수 심은 살아 있는 향나무가 있는데 크기가 몇 아름이나 되고 가지가 모두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한 사람이 약간만 건드려도 손에 정감이 있고 수십 인이 함께 흔들어도 마찬가지이다. 전해지기로는 국사께서 중국으로부터 지팡이를 가져와 거꾸로 심은 것이라고 하지만 거의 근거가 없다. 대개 이 번성한 나무와 메말라 죽은 나무는 영산 학수靈山鶴樹42)에 견줄 수 있겠다.
진여문眞如門 안쪽 위에 있는 7전殿을 ‘설법전’이라고 하는데, 동쪽 방장은 당시에 보조국사가 학인을 지도하며 안선했던 곳이다. 이 때문에 절의 대중이 중시하여 국사가 계신 듯이 사모한다. 삼일암三日庵은 현재 선객이 많이 배출되는 곳으로 제도와 규율은 칠불암과 백중을 이루는데 용맹정진은 더 낫다. 백설당白雪堂과 차안당遮眼堂은 동쪽 방장의 좌우가 되고 상하의 청운사靑雲社는 나한전의 좌우가 되어 모두 청정한 납승이 거처한다.
16조사의 영전影殿 편액은 자음당慈蔭堂인데 보조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진각眞覺·청진淸眞·진명眞明·자진慈眞·원감圓鑑·자정慈靜·자각慈覺·담당湛堂·혜감慧鑑·자조慈照·혜각慧覺·각원覺圓·정혜淨慧·각진覺眞·고봉高峰 등 15조사가 소목昭穆(위패의 차례)에 따라 배향되어 나옹43)ㆍ무학44)과 합쳐 18주지가 된다.
임경당臨鏡堂·능허각凌虛閣·수석정水石亭 등은 단지 풍류가 빼어날 뿐으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선암사기仙巖寺記
선암사는 대각국사大覺國師45)의 도량으로, 도선의 비보기裨補記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빼어난 사찰로 송광사와 이름이 나란히 알려져 있다. 예전에는 선객의 거처로 일곱 전각이 있었는데, 이제는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향로암香爐庵은 위로 10리쯤에 있어 경치가 으뜸인데 침굉 조사枕肱祖師가 이 산에서 교화를 펼친 후로

010_0441_b_01L而危竿不墜天子庵亦有國師手植生
010_0441_b_02L大連數抱枝幹皆下垂一人微觸
010_0441_b_03L應手有情數十人同撼亦不過如是
010_0441_b_04L相傳國師自中國杖來倒植殆乎無稽
010_0441_b_05L而盖此榮枯兩隻豈靈山鶴樹之比者
010_0441_b_06L眞如門內號上七殿曰說法殿
010_0441_b_07L方丈普照當年揮塵安禪之所故寺
010_0441_b_08L人重之如在之慕而三日庵現爲禪
010_0441_b_09L冀北制律與七佛可伯仲而絕炊
010_0441_b_10L遺形過之曰白雪遮眼二堂爲東方丈
010_0441_b_11L左右而曰靑雲上下社爲羅漢殿左
010_0441_b_12L皆以淨淸衲僧居之十六祖師影殿
010_0441_b_13L額曰慈蔭堂以普照爲主壁而眞覺
010_0441_b_14L淸眞眞明慈眞圓鑑慈靜慈覺湛堂慧鑑
010_0441_b_15L慈照慧覺覺圓淨慧覺眞高峰十五祖師
010_0441_b_16L配享昭穆並懶翁無學爲十八住持
010_0441_b_17L至如臨鏡堂凌虛閣水石亭特風流之
010_0441_b_18L不與此錄云爾

010_0441_b_19L

010_0441_b_20L仙巖寺記

010_0441_b_21L
仙巖即大覺國師道場道詵裨補記中
010_0441_b_22L一數今爲勝刹與松廣齊名古有禪
010_0441_b_23L居七殿今火墟而香爐庵在上界十
010_0441_b_24L里爲最境枕肱祖師開化於此山

010_0441_c_01L선교禪敎의 대덕大德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지령地靈이 수승해서이리라.

덕유산 심진동기德裕山尋眞洞記
골짜기를 ‘심진尋眞’이라 불렀으니 경계가 참된 것인가, 사람이 참된 것인가? 국초에 무학 조사가 이곳에 은거하여 지금도 정상에 은신암이 있다. 은신암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몇 리 되지 않는 곳에 태조암太祖庵의 옛터가 있고 또 아래로 6, 7리쯤에 용추폭포龍湫瀑布가 있다. 여기서부터 시내와 바위에 연포대練鋪臺·탄금대彈琴臺·설옥담屑玉潭·분옥뢰噴玉瀨·채호암採好巖·풍류암風流巖 등이 있어 모두 경치가 아름답다. 동중洞中의 제천諸天46)으로 도솔암兠率庵·백련암白蓮庵·청류암聽流庵·부도암扶屠庵 등은 은신암과 형제가 되어 모두 장수사長水寺에 속해 있어 참선하고 강론하는 학인이 많이 거주한다. 장수사는 용추 아래 경원庚原(서쪽 들)에 있는데 청오배靑烏輩(풍수가들)는 용추의 물 깊이로 절의 흥폐를 점치니, 장수라는 이름은 이 때문에 나온 듯하다.

오대산 서대 중건기五臺山西臺重建記
『화엄경』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에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곳이라 하였다. 내가 일찍이 들어가 알현하기를 원했는데 육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 오대산 사적기를 읽어 보니, 신라 태화太和47) 연간에 신성神聖·효명孝明 두 태자가 오대산을 순례하다가 보살의 진신을 보았다고 하고 우리 세조 임금이 행차하여 문수동자를 보았다고도 한다. 후에 월성위月城尉 김 공48)이 서대를 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은 것은 모두 옛 기록과 같다.
금상 경신년(1800)에 서인瑞仁 스님이 서대의 중수를 마치고 큰 불사를 일으켜 천리 먼 길 나를 맞이하였으나 내가 병으로 가지 못하였다. 또 서대의 중건기를 청하여

010_0441_c_01L後禪敎大德多出豈地靈之勝者歟

010_0441_c_02L

010_0441_c_03L德裕山尋眞洞記

010_0441_c_04L
洞以尋眞名境之眞乎人之眞乎
010_0441_c_05L初無學祖師隱居于此而今絕頂有隱
010_0441_c_06L身庵自隱身東望不數里有太祖庵
010_0441_c_07L古墟又下六七里則龍湫瀑布從是
010_0441_c_08L川石有練鋪臺彈琴臺屑玉潭噴玉瀨
010_0441_c_09L採好巖風流巖皆佳境洞中諸天
010_0441_c_10L兠率庵白蓮庵聽流庵扶屠庵長弟於
010_0441_c_11L隱身而並屬長水寺禪講之士多居
010_0441_c_12L長水寺在龍湫下庚原靑烏輩以湫
010_0441_c_13L之淺深之時卜寺之興衰抑長水之
010_0441_c_14L以此故歟

010_0441_c_15L

010_0441_c_16L五臺山西臺重建記

010_0441_c_17L
華嚴經菩薩住處品五臺山眞文殊住
010_0441_c_18L余甞入願謁肉眼無所見就讀臺
010_0441_c_19L山事蹟記始羅太和年中神聖孝明二
010_0441_c_20L太子巡禮五臺見菩薩眞身我世庙
010_0441_c_21L幸駕見童子文殊後月城尉金公
010_0441_c_22L西臺爲祝釐願堂併如古錄上之庚申
010_0441_c_23L有衲子瑞仁重修西臺訖作大佛事
010_0441_c_24L千里邀余余老不能徃又請西臺重建

010_0442_a_01L내가 글솜씨가 없다고 사양하였다. 얼마 후에 서인을 부르니 서인이 응하자 내가 말하기를, “서대의 중건을 이미 마쳤으니 잘 보호하라.” 하니 서인이 예배하였다. 내가 지팡이로 치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느 곳에서 서대를 보느냐?” 하니 서인이 말없이 소매를 떨치고 떠났다.

다솔사 팔상전 중건기多率寺八相殿重建記
다솔사는 내가 유람한 적이 없다. 절에는 거우巨宇라는 두타가 있어 무술년(1778) 가을에 은선암으로 나를 방문하여 그 빼어난 경치가 우리 동국의 제천諸天 중에 으뜸이라고 자랑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서 말해 보라고 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절은 곤성昆城 북쪽 10리쯤 방장산 동쪽 기슭에 있다. 양梁나라 천감天監49) 계미년(503)에 지영智英 사문이 창건하여 당·원·명나라를 거쳐 우리 숙종 임금 병신년(1716)에 이르기까지 1,213년간을 자장·의상·도선·보제普濟·영일靈日 등의 여러 선덕先德이 서로 이어 여섯 번을 새롭게 하고 더욱 성대하여 오늘날 큰 사찰이 되었다.
사적비명寺蹟碑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 임금 임진년(1772)에 절이 화재로 타서 삼전三殿과 삼당三堂이 잿더미가 되었다. 당시 거주하던 호익好益과 진안震眼 등 여러 스님들이 서로 힘을 내고 재물을 모아 차츰 경영하여 회복하였으나 팔상전만 복구하지 못하였다. 금상 원년 정유년(1777)에 전 주지 민탄敏坦이 개연히 복구하고자 스스로 통상統相(통제사)을 알현하고 목재를 크게 모았다. 모두 말하기를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하여, 절의 살림을 다 털어 창주暢周를 요량料量(도목수)으로 삼아 공사를 맡겨 일을 계획하여 오래지 않아 일을 마쳤다. 들보를 건 것이 셋이요, 기둥이 여덟 개라. 섬돌과 주춧돌이 넓게 놓이고 용마루가 나는 듯 솟아 주밀하고 크고 아름다워 더할 것이 없다. 또 여러 요사채 중에 백련당이 많이 무너졌으므로 수리하였다. 전태展泰와 인우仁祐가 기와를 빚어 덮고 태홍太洪과 찬화贊和가 큰 누각까지 아울러 단청하였다.

010_0442_a_01L余辭以無文有頃召仁仁應諾
010_0442_a_02L曰西臺已建訖善加保護仁禮拜
010_0442_a_03L杖子便打曰汝什麽處見西臺仁無語
010_0442_a_04L拂袖而去

010_0442_a_05L

010_0442_a_06L多率寺八相殿重建記

010_0442_a_07L
多率寺余未甞遊也寺有頭陀曰巨宇
010_0442_a_08L歲戊戌之秋訪余于隱仙誇言其勝
010_0442_a_09L甲吾東諸天余聞之欣然試招則曰
010_0442_a_10L寺在昆城北十許里方丈之東麓梁天
010_0442_a_11L監癸未智英沙門剏之歷唐元皇明
010_0442_a_12L至我肅庙丙申千一百九 [15] 年之間有慈
010_0442_a_13L藏義湘道詵普濟靈日諸先德相繼
010_0442_a_14L六新而愈盛今爲大刹寺蹟碑銘
010_0442_a_15L英庙之壬辰寺災於火三殿三堂灰墟
010_0442_a_16L時居者好益震眼諸公相出力鳩財
010_0442_a_17L稍稍營復而惟八相一殿未焉今上之
010_0442_a_18L元年丁酉前住持敏坦慨然欲究之
010_0442_a_19L謁統相大獲材松衆曰時不可失
010_0442_a_20L罄寺藏以暢周爲料量敦匠籌事
010_0442_a_21L日告功爲架者三爲楹者八砌礎磅
010_0442_a_22L甍角翬飛周完宏麗蔑有加矣
010_0442_a_23L衆寮中白蓮堂多頹因咠之以展泰
010_0442_a_24L仁祐陶瓦而覆之太洪賛和幷大樓

010_0442_b_01L오래된 탱화 한 축이 다행히 불에 타지 않아 봉안하였다.
1,200년 동안 앞사람이 다하지 못한 것을 이제 다 아름답게 갖추어 찬란하게 빛나 이제는 제일가는 수승한 가람이 되었다. 내가 손을 모으고 말하였다. “이렇듯 오늘날의 세상에 우리 불도佛徒가 떨치지 못해 총림 사이가 다만 부역에만 들볶일 뿐이니, 명산의 거찰이 어찌 공왕불空王佛의 세계가 되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 궁벽진 바닷가에 옛 절이 성대하기가 이와 같도다.
경에 이르기를,

刼火燒海底        겁화가 해저까지 불태우고
風皷山相擊        바람에 산이 서로 부딪혀도
我此土安穩        이 땅은 편안하고 온전하여
天人常充滿        천인이 항상 충만하리라50)

하니 이곳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나는 훗날 강론을 마치고 두타를 따라 유유자적하며 여년을 마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두타가 일어나서 팔상전 중건 사적기를 지어 달라고 청하기에 서로 나눈 대화를 써서 주었다.

소양자51)기搔癢子記
내가 송암松庵에 있을 때 아이 오悟가 소양자를 만들어 바쳤다. 길이는 다섯 손가락 반이요, 둘레는 한 치이다. 반듯이 깎아 몸체를 만들고 머리는 굽혀 손이 되었다. 나는 늙어 기혈이 쇠퇴하여 매번 가려우면 이것으로 긁어 시아侍兒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앉을 때 등뼈를 숙이고자 하면 이것으로 지탱하고, 수마가 밀려오면 이것으로 물리친다. 걸을 때는 지팡이가 되고 걸식할 때는 개를 막으며, 경의 이치를 강론할 때에도 동서를 가리키며 상벌을 행하니 하루라도 이 물건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내 몸의 가려움을 사물의 힘을 빌려 긁으니 사물이 어찌 공을 말하겠는가마는 내가 스스로 잊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사람을 보면 작은 은혜를 베풀면 곧 덕을 베푼다는 낯빛이 있고, 친압하면 곧 태만하여 일을 싫어하고, 억지로 시키면 벗어나 도망가니

010_0442_b_01L而丹雘之古幀一軸幸不隨烈熖
010_0442_b_02L奉安之千二百年來前人之所未盡者
010_0442_b_03L今則盡備盡善燦然華矣於今之時
010_0442_b_04L當爲第一等勝妙伽藍余叉手曰有是
010_0442_b_05L今之世吾徒不能振叢林間但見
010_0442_b_06L賦役膏煎名山巨刹幾何不爲空王佛
010_0442_b_07L世界而此一僻海古寺其盛乃如此
010_0442_b_08L經云刼火燒海底風皷山相擊我此土
010_0442_b_09L安穩天人常充滿豈此之謂歟吾他
010_0442_b_10L日報了講債願從頭陀優遊於以終餘
010_0442_b_11L頭陀因起請余爲八相殿重建事蹟
010_0442_b_12L乃以其相叙話者書歸之

010_0442_b_13L

010_0442_b_14L搔癢子記

010_0442_b_15L
余在松庵時兒悟作搔癢子進長五指
010_0442_b_16L有半圍一寸削正爲身頭曲爲爪
010_0442_b_17L老而衰血每風痒作用是搔快不借
010_0442_b_18L侍兒而坐時脊骨欲俯則以此支之
010_0442_b_19L睡魔欲來則以此揮之行步爲杖
010_0442_b_20L食禦犬以至講論經理持東畫西
010_0442_b_21L罰行賞莫不以此爲用不可一日無此
010_0442_b_22L物也痒在吾身而搔借於物物何嘗
010_0442_b_23L言功余自不能忘也觀夫今人之有小
010_0442_b_24L則便有德色親狎則便有怠慢

010_0442_c_01L이는 정욕으로 질곡되어 인도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찌 이 무정물이 도리어 쉽게 쓰임이 되는 것만 하겠느냐? 옛사람이 목상좌木上座(지팡이)라고 부른 것이 참으로 까닭 있는 일이다.

영원암 설회 사적기靈源庵設會事蹟記
암자는 강희康熙 임인년(1722)에 불에 타 사적을 고찰할 수 없다. 혹은 전하기를 옛 조사 영원靈源이 거처하여 영원암이라 부른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암자가 만수동萬水洞 가장 깊은 근원에 있어서 영원이라 한다고 한다. 만력萬曆52) 연간에 부용芙蓉·청허淸虛·청매淸梅 세 조사가 서로 이어서 주석하고 득도하여 영원이라는 이름이 더욱 세상에 드러났다. 방장실에 ‘삼영전三影殿’이라는 편액이 있는 것이 이 때문이다.
강희 4년 을사(1665)에 비구 계탄戒坦이 재물을 내어 중건하니, 경치가 그윽하고 상쾌하여 선교의 인재의 산실이 된 지 오래되었다. 건륭乾隆53) 임진(1772)에 이르러 백화白花·문곡文谷·환암喚庵 세 장로가 납자 약간 명과 함께 여기에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니, 의범儀範으로 동진의 혜원과 신라의 징徵 화상의 고사54)를 본받아 서방에 뜻을 두고 함께 왕생할 것을 약속하였다. 수년 후에 백화는 조계산에서 입적하고 문곡은 덕유산에서 입적하였는데 환암만 홀로 이곳에 10년을 머물다가 열반에 들었다. 그다음 주실 운파 우공雲波宇公, 우운 밀공友雲密公과 당시의 납자 성한性罕이 모임의 일(會事)을 맡고 찬명贊明이 진행을 맡았으며, 보민普旻이 본원의 주지를 겸하여 외무를 맡았다. 모두 모임을 맺은 인연에 기록할 만하고 또한 말법末法 중에 희유한 일이라 할 만하다.
나는 사형 설월공雪月公과 모임에 동참했기 때문에 일찍이 왕래하면서 뵙고 살펴본 것이 자주 있었다. 모임의 사람이 나에게 영원암 사적기를 부탁하니, 나는 본디 글을 업으로 하지 않고 암자의 옛 사적도 또한 실록을 볼 수가 없어

010_0442_c_01L役强使之則脫而逃由其情欲之窒
010_0442_c_02L而人道亡矣曷若此無情物之却爲易
010_0442_c_03L用也古人喚作木上佐者良有以哉

010_0442_c_04L

010_0442_c_05L靈源庵設會事蹟記

010_0442_c_06L
庵於康熙壬寅火事蹟無孜或傳古祖
010_0442_c_07L師靈源居之故曰靈源庵或云庵在萬
010_0442_c_08L水洞最深源處故曰靈源萬曆間芙蓉
010_0442_c_09L淸虛淸梅三祖師相繼駐錫得道而靈
010_0442_c_10L源之名益顯于今方丈有三影殿額者
010_0442_c_11L以此康熙四年乙巳此丘戒坦化財
010_0442_c_12L重搆以境致幽爽爲禪敎冀北者久矣
010_0442_c_13L逮乾隆壬辰有白花文谷喚庵三長老
010_0442_c_14L從衲子若干此設萬日會儀範效東晋
010_0442_c_15L惠遠公及新羅徵和尙古事刻意西方
010_0442_c_16L同時徃生是約越數年白花化於曺溪
010_0442_c_17L文谷化於德裕獨喚庵住此十年入涅
010_0442_c_18L其次住室雲波宇公友雲密公
010_0442_c_19L時衲子性罕掌會事賛明掌用舒
010_0442_c_20L旻兼本院住持掌外務並可記於結會
010_0442_c_21L因緣而末法中亦希有云者余以師兄
010_0442_c_22L雪月公同叅會中之故嘗徃來省謁數
010_0442_c_23L會中人屬余作靈源庵事蹟記余素
010_0442_c_24L非業文而庵之古蹟且未見實錄

010_0443_a_01L근래에 보고 들은 것만으로 다음과 같이 쓴다.
“이와 같이 나는 보았다. 신령한 근원이 담적湛寂하여 고금에 뻗어 있다. 가만히 진찰에 머무니 메마른 무리가 모두 소생한다. 이 문에 드는 자는 당장에 편안히 기를 것이니 어찌 반드시 서방에 왕생하며, 이 당에 드는 이는 곧 여래를 볼 것이니 어찌 다른 부처를 염원할 것인가? 한없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 것과 이어지는 공적과 허물이 모두 영원의 빛과 그림자요, 환화幻化와 묵은 자취는 모두 영원 가운데의 사람과는 상관함이 없도다. 이 때문에 이르기를, 모든 상相은 상이 아니니 색으로 보고 소리로 구하면 모두 삿된 행동이다. 내가 여기에서 혀가 막히니 어찌 감히 지필紙筆을 잡겠는가? 다만 세제世諦와 인사人事로 말하자면 불초한 나는 다행히 교종으로는 부용의 9세를 이었고, 선종으로는 청허의 7대를 이어 선사의 남긴 발자취를 감탄하여 말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가 알랴, 큰 불꽃 가운데에 자취마다 녹아 사라지고 황금 연화대 위에 개개마다 이름을 드러냈음을. 이에 기문을 쓴다.”

꿈에 풍탁을 듣고 기록하다(夢聽風鐸記)
내가 일찍이 솔창에서 얼핏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어떤 물건이 쟁쟁 소리를 내며 허공중에 있으니 천악天樂으로 여겨 한참을 듣고 기뻐하다 깨었는데 바로 풍탁의 요설饒舌(혀)이었다. 서까래 끝에 걸려서 몸체는 놋이고 형체는 둥글고 비었으며 그 소리는 맑고 부서진다. 십자 모양의 혀가 동풍이 불면 동쪽을 치고 서풍이 불면 서쪽을 치며, 사방팔면에 불면 회전하며 치다가 바람이 잠잠해질 때면 고요히 소리가 없으니,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며 고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람도 아니고 풍탁도 아니며 다른 사물도 아니다. 이 말도 오히려 잠꼬대요, 꿈속의 이야기라. 드디어 꿈결에 이를 기록한다.


010_0443_a_01L以近所見聞者書之曰如是我觀
010_0443_a_02L源湛寂亘古長今潜住塵刹枯類咸
010_0443_a_03L入此門者當下安養何必徃生西
010_0443_a_04L入此堂者即見如來何須別念他
010_0443_a_05L悠悠成毁綴綴功過盡是靈源之
010_0443_a_06L光影幻化陳跡捴不干他靈源中人也
010_0443_a_07L故云諸相非相色見聲求皆邪行
010_0443_a_08L於此吃了舌頭詎敢操觚而但以世諦
010_0443_a_09L人事則幸不肖於敎承芙蓉之九世
010_0443_a_10L於禪累淸虛之七代感歎先師遺躅
010_0443_a_11L不能無語已也誰知大烘熖裡跡跡消
010_0443_a_12L金蓮臺上箇箇標名是爲記

010_0443_a_13L

010_0443_a_14L夢聽風鐸記

010_0443_a_15L
余嘗假寐於松窓前夢中有物錚錚
010_0443_a_16L在虛空中以爲天樂聞之良久欣然
010_0443_a_17L而覺乃風鐸饒舌其懸桷頭其軆鍮
010_0443_a_18L其形圓而空其韵淸而碎十字爲
010_0443_a_19L東風來東頭打西風來西頭打
010_0443_a_20L方八面風旋頭打有時風息寂無聲
010_0443_a_21L動者什麽物靜者什麽物不是風
010_0443_a_22L不是鐸不是物也此猶是寐語夢中說
010_0443_a_23L遂夢記于此

010_0443_b_01L
목탁기木鐸記
염불하는 사람은 대부분 목탁으로 운韵을 돕는다. 처음에는 각角에서 궁宮 소리로, 중간에는 흩어져 치徵와 우羽 소리가 되었다가 상商 소리로 맑게 끝난다. 하늘에 울려 퍼져 고뇌에 빠진 이들을 일깨우고 수마를 쫓으며 근진을 탈피하여 본성으로 돌아가게 하니 큰 공이 있다.
나는 바위 옆의 느티나무를 취하여 주먹 크기로 깎아 다듬고, 입은 크게 하고 배를 뚫었으며 귀를 뚫고 손잡이를 깎았다. 방망이를 들어 한 번 치니 그 소리가 제천諸天에 울려 퍼져 참으로 법기였다.
내가 생각하기를, 이 목탁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나무에 소리가 없다가 조각한 후에 소리가 있게 되니, 우리들도 명성이 없는 자는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부가 없어서 그릇이 되지 못한 것이니 남이 알아주지 않은들 어찌 원망하겠는가? 그러나 학인이 명성을 구한다면 이미 그릇된 공부인지라. 배는 비지 않고 귀는 열리지 않았으니 맑은 소리를 어찌 낼 것인가? 나는 이 목탁과 사우師友가 되어 한 번 칠 때마다 경각하고 다섯 가지 덕을 갖추어 음란한 소리를 없게 한 후에야 염불의 법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논어』에 이르기를 “하늘이 장차 선생님으로 목탁을 삼으리라.”55) 하였으니, 어찌 중요하지 아니한가?

지리산기智異山記
지리산은 일명 방장산이요, 또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반야봉이 대방·운성·구례 세 경계 사이에 있고, 천왕봉은 함양·회계·진주·하동·곤양의 다섯 경계 사이에 있다. 높고 넓어 하늘까지 솟아 있어 나라의 남악이 된다. 리離56)의 본체가 명정明正하여 산 이름이 ‘지리’요, 봉우리는 반야라 칭한다.
반야봉 앞에는 불묘佛廟가 있는데 돌무더기가 지극히 장엄하고 영이靈異하니, 국도國都의 복을 지키는 듯하다. 천왕봉은 불묘의 경계를 수호하는 신이 되는 것이다.

010_0443_b_01L木鐸記

010_0443_b_02L
念佛者多以木鐸爲助韵始角而宮
010_0443_b_03L中散而徵羽終商而淸徹雲霄驚沉
010_0443_b_04L走睡魔翳脫返性大有功焉余取
010_0443_b_05L槐木在石上者削硏如拳大鉅口鑿腹
010_0443_b_06L竅其耳而彫其柄擧槌一擊聲振諸天
010_0443_b_07L聞者皆悅眞法器也余謂此鐸未成
010_0443_b_08L全木無韵彫然后有聲焉我輩未有聲
010_0443_b_09L名者盖無彫學之功而不可爲器也
010_0443_b_10L人不知我也何怨哉然學者欲求聲名
010_0443_b_11L則已爲枉彫腹不空而耳不通淸徹之
010_0443_b_12L又可得乎吾與此鐸爲師爲友
010_0443_b_13L擊一警備五德而無鄭衛然后可以爲
010_0443_b_14L念佛法器也傳曰天將以夫子爲木鐸
010_0443_b_15L豈不重歟重歟

010_0443_b_16L

010_0443_b_17L智異山記

010_0443_b_18L
智異山一名方丈山亦名頭流山般若
010_0443_b_19L峰在帶方雲城求禮三界間天王峰在
010_0443_b_20L咸陽會稽晋州河東昆陽五界上穹隆
010_0443_b_21L磅磗揷亘霄漢是爲國之南嶽也
010_0443_b_22L體明正故山名智異峯稱般若而般
010_0443_b_23L若峯前有佛庙石磊極壯靈異盖爲
010_0443_b_24L國都鎭福而天王峯爲佛庙護界神也

010_0443_c_01L방장이라는 명칭은 선경仙經에 나오니 고찰할 수 있다. 두류라고 이르는 것은 자세하지가 않다. 혹자는 말하기를 백두산 맥이 흘러 이곳에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고 한다.
토산물로는 약초와 채소·닥나무·옻나무·감·밤 등이고 동남쪽은 대나무가 많다. 천왕봉의 신은 성모聖母라고 칭하는데, 세속에서는 마야부인을 일컫기도 하고 혹은 고려 태조의 왕비라고도 하며 혹은 강남국의 공주라고도 하지만 모두 근거가 없으니 취할 수 없다. 『화엄경』 「신중품神衆品」에서 주산신主山神 다녀온多女媼을 후토后土(토지신) 성모라 이르는 것과 같다.
일월대에 오르면 동쪽으로 일본이 보이고 서쪽으로 탐라를 가리키며 남쪽으로 대양에 임하고 북쪽은 신주神州(중국)로 이어지는데, 안력眼力이 미치지 못한다. 대에 앉으면 일월의 출몰을 볼 수 있다. 바위 면은 모두 대신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산을 두른 승원은 예전에는 8만 아홉 곳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칠불七佛·무주無住·금대金臺·벽송碧松·대원암大源庵 등이 으뜸이다.

거듭 기록하는 쌍계사 사적기(重錄雙溪寺寺蹟記)
절의 옛 자취에 대해서는 세 개의 서술이 있다. 첫째는 석도잠釋道岑57)의 기문이고, 두 개는 무명씨의 것이다. 도잠의 기문은 다만 당우의 숫자만 상세하게 기록하고 연기年紀는 달지 않았다. 두 무명씨는 다행히 연기는 다 기록하였지만 기재한 사적이 산만하다. 법계法界를 말하면 천축과 중화를 두루 망라했고, 연대를 고찰하면 멀리 불법이 처음 흥기할 때까지 미쳐 모두 쌍계사의 사적에 대해서는 과過·불급不及의 잘못이 있다. 이 때문에 다시 기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세 사람이 서술한 기문을 살펴보니, 모두 절이 창건된 것이 어느 시대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옛날부터 전해지기를 신라 경순왕敬順王 때 창건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오수동梧樹洞과 왕지동王旨洞 사이에 절터가 있는데 대사지大寺旨가 이것이다. 오층탑이 여전히 전야田野 가운데 있어서 살펴볼 수가 있다. 두 시내가 합쳐지기 때문에 쌍계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옛날 용사龍蛇의 변란58)이 있을 때 절이 불에 타서 사적이 아득하게 되어 위음왕威音王59) 이전의 역사가 되었다.

010_0443_c_01L方丈之名出仙經可考其云頭流未詳
010_0443_c_02L或曰白頭山脉流終於此故名土産多
010_0443_c_03L藥草名菜楮漆杮栗東南多竹天王
010_0443_c_04L峰神稱聖母諺說謂摩耶夫人或謂
010_0443_c_05L麗太祖王妃或謂江南國公主皆無稽
010_0443_c_06L不可取也華嚴神衆品主山神多女媼
010_0443_c_07L如云后土聖母之類也登日月臺東望
010_0443_c_08L日島西指耽羅南臨洋海北控神州
010_0443_c_09L眼力不可及坐臺觀日月出沒石面皆
010_0443_c_10L大臣題名環山僧院古有八萬九所
010_0443_c_11L今以七佛無住金臺碧松大源爲最

010_0443_c_12L

010_0443_c_13L重錄雙溪寺寺蹟記

010_0443_c_14L
寺之古蹟有三述焉一曰釋道岑之記
010_0443_c_15L二則無名氏也岑記但詳載堂宇架數
010_0443_c_16L而不係年記無名二氏幸悉年記而載
010_0443_c_17L蹟汎漫言法界則周羅竺華孜年代則
010_0443_c_18L緬及佛法始興時皆於雙溪寺蹟有過
010_0443_c_19L不及之失故不免重錄焉按三氏述記
010_0443_c_20L皆云寺之肇建不知何代古來相傳
010_0443_c_21L新羅敬順王時所剏今梧樹王旨兩洞
010_0443_c_22L有寺墟大寺旨者是也五層塔猶存
010_0443_c_23L田野中可攷以兩川合流故名雙溪云
010_0443_c_24L徃在龍蛇之變寺燬而事蹟邈然爲威

010_0444_a_01L천계天啓 을축년(1625)에 이르러 지청智淸과 묘담妙湛이 지금 사찰의 현당玄堂을 짓고 쌍계라는 옛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숭정崇禎 경진년(1640)에 성연性衍이 승당을 건립하고, 순치順治 갑신년(1644)에 계준戒俊과 의순義淳이 법전을 건립하고 경림鏡琳이 단청하여 삼존 금상과 불화·불탱을 봉안하였다. 의순은 또 법보인 『화엄경』과 『법화경』을 인쇄하여 궤에 보관하였다. 병술년(1646)에 설매雪梅 대사가 지협智冾과 함께 정루正樓를 세웠다. 강희康熙 신해년(1671)에 절이 불에 타서 갑인년(1674)에 성연이 도정道淨·석규碩圭와 함께 현당과 승당을 중건하였다. 병진년(1676)에 계환戒還·도잠道岑·대균大均이 법전을 재건하고 또 천준天俊과 청운淸雲 등이 절의 뒤쪽 꼭대기에 은선隱仙 강당을 지었다. 무진년(1688)에 태수가 절에 이르러 만세루를 세우라 명하여 나의 법조法祖이신 한암寒巖 대사께서 지찬指贊 등과 함께 일을 감독하여 마쳤으니 이것이 중흥의 사적이다.
건륭 계사년(1773)에 이르러 절이 쇠퇴하여 암자로 되고 지곡사智谷寺에 소속되었다. 갑인년(1794)에 해가 가물어 스님들이 보존하지 못하게 되자, 지곡사 스님이 정루를 팔아 관가의 부역에 충당하였다. 내가 장계를 올려 보존해 주기를 청하자 곧 관명이 내려 철거되지 않았다. 이제는 법전·정루·현당·향로전만 남아 있고 상주물常住物도 다 사라져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며 땔감 채취와 방목으로 산이 헐벗어 법계가 될 수 없으니 천계 연간에 처음 지어진 뒤로 오늘날과 같이 쇠퇴한 때가 없었다. 그러나 운수가 극에 달하면 변화하는 법이니 또한 흥성할 운이 이를 것인가, 아니면 하늘이 장차 이 절을 예전처럼 복구하지 않고 빈터로 둘 것인가? 정루의 인연으로 보건대 처음 세운 것도 관가의 명이요, 이제 보존된 것도 관가의 명이니 어찌 외호外護의 성대한 은택이 오늘날이라고 해서 옛날만 못할 것인가? 그러나 승려 모습에 이리의 마음으로 스스로 그 도를 멸하는 자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도다.


010_0444_a_01L音王刼前史矣至天啓乙丑有衲智淸
010_0444_a_02L妙湛營今寺玄堂因其雙溪舊名
010_0444_a_03L禎庚辰性衍建僧堂順治甲申戒俊
010_0444_a_04L義淳建法殿鏡琳丹堊而造三尊金
010_0444_a_05L像及畫幀奉安焉義淳又印法寶華嚴
010_0444_a_06L法華櫃藏焉丙戌雪梅大師與智冾
010_0444_a_07L建正樓康熙辛亥寺火而甲寅性演與
010_0444_a_08L道淨碩圭重營玄僧兩堂丙辰戒還道
010_0444_a_09L岑大均再建法殿又天俊淸雲等
010_0444_a_10L隱仙講堂於寺之後巓戊辰官車到寺
010_0444_a_11L命建萬歲樓實余法祖寒巖大師與指
010_0444_a_12L賛等蕫役卒功是爲中興事蹟也訖於
010_0444_a_13L乾隆癸巳寺敗爲庵屬於智谷寺
010_0444_a_14L寅歲旱僧不能保智寺僧賣正樓
010_0444_a_15L補官役余狀乞保護即有官令勿毁
010_0444_a_16L今存惟法殿正樓玄堂香爐殿其常住
010_0444_a_17L佛物蕩空無遺樵牧童山不可爲法
010_0444_a_18L盖自天啓始成未有如今日衰敗之
010_0444_a_19L極矣數極則變抑有興運之將至乎
010_0444_a_20L天將以此寺不可復古而空虛已乎
010_0444_a_21L正樓因緣觀之始建也官命今存也亦
010_0444_a_22L官命豈外護殷澤今不如古而其於
010_0444_a_23L僧貌狼心自滅其道者則吾末如之
010_0444_a_24L何也耳

010_0444_b_01L
두류산 회화기頭流山會話記
계해년(1803) 가을 8월 나는 표충사表忠寺에서 향사享祀한 후 암자로 돌아오는 길에 군후郡侯(본 군의 수령)와 옥천玉泉 사군使君(군수)이 천왕제일봉에 올랐다가 길을 돌아 입실하여 만나려 한다는 것을 들었다. 조금 후에 사미가 갑자기 옥천 사군이 왔다고 보고하여 급히 나가 맞이하였다.
사군이 말하기를 “스님에 대하여 들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보고 나니 한 고목이요 석나한石羅漢이로다.” 하였다. 솔잎차와 산과일을 드리자, 사군이 음미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담백하구나. 마른 스님의 활계에 딱 어울리는구나.”라고 하며 시를 주었다.

癯骨枯形木石如      수척하고 마른 모습 목석과 같은데
此山居住幾年餘      이 산에 거주한 지 얼마나 되었나
長伴白雲無一事      항상 흰 구름 벗 삼아 한가하여
一盃松水一床書      한 잔의 솔차와 책상 위의 서적뿐

내가 화답하였다.

心機寂寞死灰如      마음 적막하여 죽은 재와 같은데
佛戒吟哦況復餘      계율에는 시도 금하니 다른 것이랴
禪道本來無一物      선도는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笑他猶有滿床書      우습다, 여전히 상 위엔 책 가득하네

사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 그대의 군후와 실상사實相寺에서 함께 묵기로 하였는데 올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한 단지 솔차를 지니고 수레 뒤를 따라 벽송정碧松亭에서 군후를 기다렸다. 소나기가 내려 촌가에 피했는데 군후의 행차가 이미 지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해도 저물어 횃불을 잡고 실상사의 부도암浮屠庵으로 들어갔더니, 두 사군이 동석하여 한창 즐거워하고 있었다. 군리郡吏가 보고하기를 “치하治下의 산인山人 아무개가 뵈려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곧 부르기에 들어가서 자리를 나란히 하였다. 사군이 말하기를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만나는데 한 마른 스님이 자리에 함께하니 매우 기이하다.”라고 하였다. 내가 솔잎차와 산과일을 드리면서 말하기를 “기름진 밥상 위에 이것도 또한 기특한 맛이니 만일 담론을 허락하시면 유불이 섞여 일가가 되어 세 가지 기특함(一家三奇)을 다 이룰 것입니다.” 하니, 두 군자가 껄껄 웃었다. 내가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삼기三奇를 긍정하느냐 긍정하지 않느냐는 대가의 가풍에 일임하지만, 산승의 경우는 다시 한 우스갯말을 두고자 합니다.” 하였다.

010_0444_b_01L頭流山會話記

010_0444_b_02L
癸亥秋八月余以表忠享祀後還庵中
010_0444_b_03L聞郡侯與玉川使君登天王第一峰
010_0444_b_04L欲路左侯謁入室少頃沙彌忽報玉川
010_0444_b_05L使君至顚倒出迎使君曰聞此僧久
010_0444_b_06L及見一枯査石羅漢也進松茶山
010_0444_b_07L使君味之曰好澹哉冾稱枯僧活
010_0444_b_08L贈詩曰癯骨枯形木石如此山居
010_0444_b_09L住幾年餘長伴白雲無一事一盃松水
010_0444_b_10L一床書余和之曰心機寂寞死灰如
010_0444_b_11L佛戒吟哦況復餘禪道本來無一物
010_0444_b_12L他猶有滿床書使君謂余曰今夜與爾
010_0444_b_13L侯會宿實相寺可復相從否余曰如敎
010_0444_b_14L乃以一壺松茶隨轝後待郡侯於碧松
010_0444_b_15L驟雨至避村舍聞侯行已過去
010_0444_b_16L且暮矣執一炬入實相之浮屠庵
010_0444_b_17L使君方同席極歡郡吏通刺曰治下山
010_0444_b_18L人某現謁來即召入連坐曰吾兩人
010_0444_b_19L相會添得一枯僧在座堪爲奇畫
010_0444_b_20L乃進松水山果曰膏粱盤上此亦奇味
010_0444_b_21L倘許談論儒釋混同一家三奇畢遂也
010_0444_b_22L二君子呵呵大笑余跽言日肯三奇
010_0444_b_23L不肯三奇一任大家家風若是山僧

010_0444_c_01L두 군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우스우면 곧 웃는 것이요, 선문禪門의 뜻과는 무관하다.” 하고, 곧 종이를 몇 장 이어서 수창하니 밤이 깊어 갔다. 나는 승가의 금기로 먹지 못하니, 굶주림이 심하여 시를 화답하지 못하고 물러나 자기를 청하였다. 밤늦게 군리가 옥사를 보고하고, 또 구름이 사방에 자욱하여 멀리 조망하지 못하리라 여겨서 각각 돌아갈 계획을 정하고 나니, 마음이 슬퍼져 안정되지 않았다. 군후가 먼저 이별의 운을 노래하였다.

萬疊靑山萬疊雲      첩첩한 청산에 구름도 자욱한데
悠悠湖嶺共瞻雲      아득히 영호남에서 함께 구름 보네
今朝別意知多少      오늘 아침 이별의 정이 얼마인가
萬疊靑山萬疊雲      첩첩 청산에 자욱한 구름 같도다

옥천 사군이 화답하였다.

出峀還同彭澤雲      산봉우리에서 팽택彭澤의 구름60) 이는데
一樽長憶江東雲      한잔 술로 항상 강동江東의 구름61) 생각하리
今朝聚散還如許      오늘 아침 또 이렇게 만났다 헤어지니
笑指天王峰上雲      웃으며 천왕봉 위의 구름 가리키네

내가 끝에 덧붙였다.

山雲隨客我隨雲      산 구름은 길손 따르고 나는 구름 따라
一席靑雲復白雲      한자리에 청운과 백운이 어울렸네
送客出門成悵望      문밖에 손님 송별하고 마음 슬프니
始知人事不如雲      비로소 사람 일 백운보다 못함 알았네

그때 견성암見性庵 주실主室 스님이 산과일을 가지고 왔다. 이에 앞서 옥천 사군이 견성암을 방문했는데 스님이 없어서 벽에 시를 써 놓았다.

聞道高僧禮佛去      듣자니 고승은 예불하러 떠나고
獨留經册關山門      닫힌 산문에 홀로 불경만 남아 있네
偶閱楞嚴林日暮      우연히 『능엄경』 읽다 숲의 해가 져
却忘前路遠靈源云     도리어 앞길 먼 영원암 잊었네

군후가 그 시를 차운하였다.

見性庵僧應笑我      견성암 스님 나를 웃으리니
行人怊悵出山門      나그네 슬프게 산문을 나서네
請看一道山中水      한 줄기 산중의 시내를 보라
畢竟尋源定到源      흐름 찾아가면 근원에 이르리라

내가 화답하였다.

歷歷靑山行五馬      뚜렷한 청산에 오마五馬62)가 행차하니
雙雙胡笛出雲門      쌍쌍이 호적 소리 운문에 퍼지네
知應萬水朝東外      아는가, 동으로 흘러드는 시내 밖에
泛出桃花別有源      복사꽃 떠내려오는 별천지 있음을

옥천 사군이 운을 내었다.

入山三日踏千山      산에 든 지 사흘 만에 천산을 답파했으나
未進天王百尺竿      천왕봉 백척간두에는 오르지 못했네
恨無二客曺兪輩      조曺·유兪와 같은 두 손님 없어서
萬疊雲烟一笑還      한번 웃고 첩첩한 구름 속에서 돌아왔네

대개 점필재佔畢齋63) 선생이 위성渭城의 태수로 계실 때 천왕봉에 올랐는데 조·유 두 손님을 데리고 갔다.

010_0444_c_01L更請別置一笑句二君子曰吾笑直笑
010_0444_c_02L非關禪旨事即聯數牋一酬一唱
010_0444_c_03L將深矣余爲僧弊不食餒甚不能和
010_0444_c_04L請退宿後夜郡吏報獄事且雲霾
010_0444_c_05L四塞度不能遠眺各定歸計怏怏然
010_0444_c_06L莫定心懷郡侯先唱別韵曰萬疊靑山
010_0444_c_07L萬疊雲悠悠湖嶺共瞻雲今朝別意知
010_0444_c_08L多少萬疊靑山萬疊雲玉川使君和之
010_0444_c_09L出峀還同彭澤雲一樽長憶江東雲
010_0444_c_10L今朝聚散還如許笑指天王峰上雲
010_0444_c_11L添尾曰山雲隨客我隨雲一席靑雲復
010_0444_c_12L白雲送客出門成悵望始知人事不如
010_0444_c_13L時見性主室師荷山果而至先是
010_0444_c_14L玉川使君訪見性庵師不在題庵壁
010_0444_c_15L聞道高僧禮佛去獨留經册關山門
010_0444_c_16L偶閱楞嚴林日暮却忘前路遠靈源云
010_0444_c_17L郡侯次其韵曰見性庵僧應笑我行人
010_0444_c_18L怊悵出山門請看一道山中水畢竟尋
010_0444_c_19L源定到源余和之曰歷歷靑山行五馬
010_0444_c_20L雙雙胡笛出雲門知應萬水朝東外
010_0444_c_21L出桃花別有源玉川使君出韵曰入山
010_0444_c_22L三日踏千山未進天王百尺竿恨無二
010_0444_c_23L客曺兪輩萬疊雲烟一笑還盖佔畢齋
010_0444_c_24L先生以渭城太守登天王峰押曺兪

010_0445_a_01L조는 조신曺伸64)이요, 유는 유호인兪好仁65)이다. 사군이 자신을 점필재에 견주고 군후는 조·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희롱한 것이다.

군후가 화답하였다.

今世誰堪伴入山      오늘 세상 누가 함께 산에 들 만한가
空敎山日上三竿      괜히 산의 해만 높이 떠올랐구나
樽前獨閱金公記      술 단지 앞에서 김 공의 기문 읽어 보니
此日金公悵獨還      오늘 김 공만 홀로 슬피 돌아가게 되었네

내가 끝에 붙이기를,

仙遊曲曲畫圖山      굽이굽이 그림 같은 산 신선이 노닐어
第一高峯隔一竿      제일 봉우리만 한 칸을 미치지 못했네
但可登登誰不到      다만 오르고 오르면 못 오를리 없으니
未登其頂未言還      정상 오르기 전 돌아간다 말하지 마소

군후가 운을 내어 이르기를,

此地相逢意若何      이곳에서 서로 만난 뜻 어떠한고
何須辛苦歷藤蘿      어찌 꼭 괴로이 넝쿨을 헤쳐 가리
禪庵半夜懸燈意      깊은 밤 선방에 등불 켜는 마음은
滄海高山較孰多      창해와 고산 중 무엇이 더한고

내가 화답하였다.

籠雲千峀奈愁何      천산에 구름 자욱하니 시름 어찌할꼬
況有前程亂薜蘿      게다가 앞길에 넝쿨조차 어지럽네
入室細論仁智道      선실에서 인지仁智의 도리 세밀히 논하니
天王勝賞未應多      천왕봉 수승한 감상도 이보단 못하리

군후가 또 옥천 사군이 나에게 준 시를 차운하였다.

靈山眞面問何如      묻노라 영산의 참모습이 어떠한고
昨夜輕風細雨餘      지난밤 미풍에 가는 비도 개었네
世間魔障君知否      세간의 마장을 그대는 아는가
此事須叅鏡老書      경암 늙은이의 글을 참구할지니

내가 화답하였다.

從僧石榻講眞如      스님 따라 석탑에서 진여를 강론하니
秋日松窓山雨餘      가을날 솔창에 산비도 맑게 개었네
君子自居仁壽地      군자는 스스로 인수의 터에 거처하니
長生不識有丹書      불로장생의 단서丹書66)도 아랑곳없어라

군후가 말하기를 “오늘의 시구는 모두 이별의 근심에서 나와 즐겁지 아니하니, 차라리 떨쳐 버리고 옛정을 말하면 어찌 이 모임이 아름답고 수승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이에 운을 내었다.

嬾梅踈雨碧闌干      여린 매화 푸른 난간에 가는 비 내리는데
長憶丹中翠袖寒      붉은빛 속에 차가운 푸른 소매 그리네
忽見使君如夢       문득 꿈결인 듯 사군을 만나니
題詩寄與玉娘看      시 지어 부쳐 옥랑에게 보게 하네

나를 돌아보고 화답하라고 하니 내가 감히 하지 못하고, “부처님이 비구에게 경계하기를 구업口業이 청정하지 못하면 마땅히 무간지옥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군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옛날에 태전太顚 스님은 홍련과 함께 거처하여 며칠을 기쁘게 지내면서 혐의하는 안색이 없었는데, 이제 경암 스님은 옥랑玉娘을 보지 않고도 더럽혀질까 저어하니 또한 좁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사람마다 각각 뜻이 있으니 어찌 자취를 같이 하겠는가?” 하고

010_0445_a_01L二客而行曺曺公伸兪兪公好仁也
010_0445_a_02L使君自況以佔畢而戱郡侯不及曺兪
010_0445_a_03L郡侯和之曰今世誰堪伴入山
010_0445_a_04L敎山日上三竿樽前獨閱金公記此日
010_0445_a_05L金公悵獨還余尾之曰仙遊曲曲畫圖
010_0445_a_06L第一高峯隔一竿但可登登誰不到
010_0445_a_07L未登其頂未言還郡侯出韵曰此地
010_0445_a_08L相逢意若何何須辛苦歷藤蘿禪庵半
010_0445_a_09L夜懸燈意滄海高山較孰多余和之曰
010_0445_a_10L籠雲千峀奈愁何況有前程亂薜蘿
010_0445_a_11L室細論仁智道天王勝賞未應多郡侯
010_0445_a_12L又次玉川使君贈余韵曰靈山眞面問
010_0445_a_13L何如昨夜輕風細雨餘世間魔障君知
010_0445_a_14L此事須叅鏡老書余和之曰從僧石
010_0445_a_15L榻講眞如秋日松窓山雨餘君子自居
010_0445_a_16L仁壽地長生不識有丹書郡侯曰
010_0445_a_17L日詩句皆出離愁不樂不如擺脫道舊
010_0445_a_18L豈非此會之佳勝歟乃出韵曰嬾梅踈
010_0445_a_19L雨碧闌干長憶丹中翠袖寒忽見使君
010_0445_a_20L如夢寐題詩寄與玉娘看顧謂余和之
010_0445_a_21L余不敢曰佛戒比丘口業不淨當入
010_0445_a_22L無間地獄郡侯笑之曰昔太顚與紅蓮
010_0445_a_23L同處幾日怡然無嫌色鏡巖不見玉娘
010_0445_a_24L而若將凂焉不亦少乎余曰人各有志

010_0445_b_01L이에 억지로 화답하였다.

觀空觀色揔無干      공을 보고 색을 보는 것 모두 간여하지 않고
高臥雲端碧樹寒      높이 구름 끝에 누우니 푸른 나무가 차갑네
聯韵偏憐工部語      운을 이음에 두공부杜工部의 시어詩語67) 사랑스러우니
老年花似霧中看      노년에 꽃을 안개 속에 보는 듯하다네

옥천 사군이 차운하였다.

佳人翠袖淚闌干      미인의 푸른 소매 눈물이 아롱져
尙想分醪慰薄寒      술잔 주어 추위 녹인 일 생각하네
一幅情詩同活畫      한 폭의 정다운 시가 살아 있는 그림인 듯
强敎泥絮霧花看      늙은 몸으로 애써 안개 속 꽃을 보네

수창酬唱하는 사이 날은 이미 정오가 되었다. 군후가 또 고시를 지었다.

君莫恨不上天王峰     그대 천왕봉 오르지 못함 한하지 말게
天王萬丈只在吾心胷    만 길 천왕봉은 다만 내 가슴에 있는 것
日出日入東西海      동해에 해가 떠서 서해로 지면
衆景滅沒迷千重      뭇 경치 사라져 첩첩산중 흐릿해지니
大千世界渾如此      대천세계가 모두 이와 같다고
鏡師爲我言從容      경암 스님 나를 위해 조용히 말해 주네
一笑出山日已晩      한번 웃고 산 나서니 해는 이미 저물고
天王峰上雲溶溶      천왕봉 위 구름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네

내가 화답하였다.

我昔登天王第一峰     내 예전에 천왕제일봉에 올랐더니
茫茫千界開心胷      망망한 대천세계 가슴에 펼쳐졌네
吳楚江南列碁局      오초吳楚가 강남으로 바둑판처럼 펼쳐지고
黃河碧海環重重      황하와 벽해가 겹겹이 둘렀네
邦國賴之萬世固      나라가 의지하여 만세토록 견고하니
擧頭四岳無慚容      사악四岳68)을 바라보아 부끄러운 모습 없네
使君努力且前行      사군은 노력하여 앞길을 가서
大觀須到山逈逈水溶溶   산이 멀고 물이 용솟음침을 보시길

이윽고 온 산에 구름이 걷히고 천기가 맑았다. 두 군자가 서로 말하기를 “이와 같이 맑게 개었고 우리들의 기회도 다시 오지 않을 것이요, 또 이졸吏卒이 산 정상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가서 모임을 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드디어 수레를 재촉하여 마침내 곧바로 제일봉으로 향하였다. 옥천 사군이 드디어 군후의 시를 차운하였다.

君不見方丈山上山上峰   그대 보지 못하였나, 방장산 상봉에 오른 것을
一上此峰         이 봉우리에 한번 오르면
使人萬里眼八荒胷     만 리를 보고 팔황八荒을 흉중에 담는다
天不覺高         하늘 높은 것도 느끼지 못하고
只覺大覆之有餘      다만 천지의 넉넉함만 느끼네
山重重海重重       산 첩첩하고 바다 아득한데
余乃一身渺然而高視兮   나는 작은 몸으로 아득히 바라보나니
孰非吾人腔子裡所包容   무엇인들 가슴에 포용하지 못하리
今日與君轟飮日月臺    오늘 그대 함께 일월대에서 크게 마시니
世人但見此峰之上雲溶溶  세상 사람은 산 위에 피는 구름만 보리라

내가 고별하며 말하였다.

010_0445_b_01L何必同轍而行者乃强和曰觀空觀色
010_0445_b_02L揔無干高臥雲端碧樹寒聯韵偏憐工
010_0445_b_03L部語老年花似霧中看玉川使君次曰
010_0445_b_04L佳人翠袖淚闌干尙想分醪慰薄寒
010_0445_b_05L幅情詩同活畫强敎泥絮霧花看酬唱
010_0445_b_06L之間日已午矣郡候又發古詩曰
010_0445_b_07L莫恨不上天王峰天王萬丈只在吾心
010_0445_b_08L日出日入東西海衆景滅沒迷千重
010_0445_b_09L大千世界渾如此鏡師爲我言從容
010_0445_b_10L笑出山日已晩天王峰上雲溶溶余和
010_0445_b_11L之曰我昔登天王第一峰茫茫千界開
010_0445_b_12L心胷吳楚江南列碁局黃河碧海環重
010_0445_b_13L邦國賴之萬世固擧頭四岳無慚容
010_0445_b_14L使君努力且前行大觀須到山逈逈水
010_0445_b_15L溶溶已而雲收四山天朗氣淸二君
010_0445_b_16L子相謂曰淸霽如此吾人期會不可
010_0445_b_17L再得且吏卒已待山頂不可無身
010_0445_b_18L罷之遂促轝卒直向第一峰玉川使
010_0445_b_19L君遂次郡侯韵曰君不見方丈山上山
010_0445_b_20L上峰一上此峰使人萬里眼八荒胷
010_0445_b_21L天不覺高只覺大覆之有餘山重重海
010_0445_b_22L重重余乃一身渺然而高視兮孰非吾
010_0445_b_23L人腔子裡所包容今日與君轟飮日月
010_0445_b_24L世人但見此峰之上雲溶溶余告

010_0445_c_01L“산길이 위험하니 무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높은 곳에서 조화의 기운을 찾고 망망한 곳에서 다시 미묘한 이치를 찾으소서. 이미 오르고 오르는 공을 두었으니 마땅히 실지의 터를 밟아 돌이켜 중니仲尼가 태산에 올라69) 본 것을 생각한다면 어찌 헛되겠는가?” 두 군자가 가마에 올라 슬피 말하기를, “스님이 늙어 붙잡아 함께 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우나, 이 말씀을 주시니 참으로 가슴에 새길 벗이로다.”라고 하였다.
가마가 나는 듯 달려 잠깐 사이에 아득한 구름 사이로 들어갔다. 나는 아직 아침 공양 전이었는데, 동행한 스님이 절의 주지에게 물어보려고 하자 무례한 부도암의 광승狂僧이 돌을 들어 우리를 향해 치면서 말하기를, “선교禪敎의 도총섭이 본분의 계율은 지키지 않고 관가의 수령만을 따라다니니 어찌 공양받을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 송연하여 동행 승을 만류하여 말하기를, “감히 저와 다투지 말라. 비록 광인의 말이나 취할 만하니 내가 삼가 피하면 될 뿐이다.”라고 하였다.
지팡이를 짚고 통천을 나서니 성이 김씨인 사람이 최후의 단월이 되기를 원하여 나와 동행한 네 사람이 가서 공양을 마쳤다. 김씨가 말하기를, “들으니 실상사의 스님이 문전의 높은 손님을 위하여 공양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승가의 풍기를 규찰하고 바로잡는 직책을 맡고 계시면서 왜 무례한 죄를 묻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숨기며 말하기를, “저가 어찌 감히 그러겠는가? 내가 스스로 먹기가 싫어 그만두게 한 것이다. 일찍이 『한서漢書』를 읽으니 형제가 서로 소송한 일이 있어 태수가 문을 닫고 허물을 생각했다고 하니, 설사 제가 광언狂言을 했다 할지라도 잘못은 교화하는 자에게 있으니 어찌 어리석은 자를 질책할 필요가 있으랴.”라고 하였다. 김씨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시대에는 인의仁義도 베푸는 바가 없고 자비도 소용이 없으니, 스님의 말씀과 같다면 승가의 기풍을 바로잡을 수 없단 말입니까?” 하였다. 날이 어두워 방장실에 돌아와 천왕봉을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없었다.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하여 말하였다. “유쾌하도다. 옛날 점필재 선생이 산에 올라 다섯 밤을 묵고도 해를 보지 못하여 성모사聖母祠에 들어가 날이 개기를 기도한 문장이 사람을 한 번 웃게 하였는데, 이제 두 군자는 한 번에 곧 올랐고 또 이와 같이 맑게 개었으니 때의 행운과 불행이리라.

010_0445_c_01L別曰山逕危險伏祝珎重崔嵬處
010_0445_c_02L探蘊和造茫處更探微竗旣有登登之
010_0445_c_03L宜踐實實之地翻思聖人登岱之觀
010_0445_c_04L豈徒然哉二君子轝上悵然曰恨僧老
010_0445_c_05L不能押去此足贐言諒爲銘友
010_0445_c_06L行如飛須臾入杳雲間余未朝齋
010_0445_c_07L行僧欲問寺主無禮浮屠庵狂髠擧石
010_0445_c_08L向打曰禪敎都捴攝不守本分戒
010_0445_c_09L逐官長行此何足供饋余聞之悚然
010_0445_c_10L止同行僧曰毋敢爭彼雖狂言則可擇
010_0445_c_11L吾謹避耳扶笻出通川有金姓人
010_0445_c_12L爲最後檀越余與同行四人就食訖
010_0445_c_13L曰聞實相僧門前尊客不爲設供
010_0445_c_14L在糾正僧風何不問無禮之罪耶余諱
010_0445_c_15L之曰彼何敢然吾自厭食而止之
010_0445_c_16L讀漢史有兄弟相訟太守閉閤思過
010_0445_c_17L設有彼狂過在敎化者何足責愚
010_0445_c_18L笑曰當此之世仁義無所施矣慈悲
010_0445_c_19L無所用矣若如尊師之言僧風不可糾
010_0445_c_20L正已乎日黑歸方丈望見天王峰
010_0445_c_21L無一雲心自欣賀曰快矣哉昔佔畢
010_0445_c_22L先生登山五宿不得日入聖母祠祈晴
010_0445_c_23L之文令人一笑今二君子一擧而便
010_0445_c_24L淸霽又如此豈時之幸不幸者歟

010_0446_a_01L다만 군후의 시 가운데, ‘세간의 마장을 그대는 아는가? 경암 늙은이의 글 참구할지니.’라고 한 구절은 내일 아침의 일이요, 오늘 저녁은 꼭 아닐 것이다. 만약 내일 새벽하늘이 다시 맑게 트여 멀리까지 크게 보여 막힘이 없다면 참으로 행운일 것이다.”
다음 날 탐색하고 온 스님이 와서 말하였다. “어젯밤 백모사百母祠에서 묵고 아침에 제일봉에 올랐습니다. 얼음과 눈이 산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춥고 떨어서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구름이 마침 걷혀 겨우 사방을 보는데 막힘은 없었습니다. 정오에 가마를 돌려 마천교馬川橋 위에서 영호남의 길로 서로 이별하였습니다.” 내가 듣고 망연자실하여 홀로 난간에 기대어 구름을 바라보며 세 번 한숨을 쉬었다. 좌우가 그 까닭을 묻자 내가 말하였다. “옛사람은 이별할 때 호계虎溪를 지나 셋이 웃었는데,70) 이제 두 사군을 위하여 멀리서 이별하며 각각 한 번 웃으니 이 때문에 세 번 탄식하는 것이다.” 여러 듣는 자가 모두 웃었다. 내가 꾸짖어 말하였다. “너희들이 웃기야 웃지만, 어찌 나의 웃는 뜻을 알겠느냐?”
이제 전말을 갖추어 써서 ‘두류산 회화기’라고 제목 하여 두 사군 안하案下에 공경히 바치고 한 번 웃는다.

잡저雜著
논한자설論韓子說
혹자가 한문공韓文公(한유韓愈)의 「원도原道」를 읽고, “이단의 도를 막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흐르지 않고, 이단의 도를 그치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다.(不塞不流。 不止不行。)”라고 한 부분에 이르러서 책을 덮고 길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참되다, 말씀이여. 불로佛老의 도를 막지 않으면 성인의 도가 흐르지 아니하고, 불로의 도를 그치지 아니하면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비유컨대 수화水火가 서로 부딪히는 것과 같아서 그 형세가 함께 온전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옛날 요임금이 치수治水할 때 곤鯀을 시키니 막혀서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우禹를 시키니 물이 흘러서 공적을 이루게 되었다. 만일 한문공이 수많은 근원과 물결을 알아서 각각 흐르는 이치를 따라 행동하였더라면

010_0446_a_01L但郡侯詩中世間魔障君知否此意須
010_0446_a_02L叅鏡老書明朝之事薄暮未必倘復
010_0446_a_03L曉天朗廓大觀無阻則幸之又幸也
010_0446_a_04L翌日探報僧來言昨夜宿百母祠朝登
010_0446_a_05L第一峰氷雪滿山人皆寒戰不可宿
010_0446_a_06L但雲氣適歛僅得四望無遮日午
010_0446_a_07L還轝馬川橋上相別湖嶺之路余聞則
010_0446_a_08L惘然若自失獨倚欄頭望雲而噓者三
010_0446_a_09L左右問其故余曰故人爲別過溪三笑
010_0446_a_10L今爲二使君遙別各一笑故三噓耳
010_0446_a_11L衆聞者皆笑余叱曰爾輩笑剩笑
010_0446_a_12L知吾笑意乃備書顚末命題頭流山
010_0446_a_13L會話記拜獻二使君案下一笑

010_0446_a_14L鏡巖集記終

010_0446_a_15L

010_0446_a_16L雜著

010_0446_a_17L論韓子說

010_0446_a_18L
或讀韓文公原道至不塞不流不止不
010_0446_a_19L掩卷長歎曰誠哉言乎佛老之道
010_0446_a_20L不塞聖人之道不流佛老之道不止
010_0446_a_21L聖人之道不行比如水火相投其勢不
010_0446_a_22L俱全也余曰不然昔堯之治水也使
010_0446_a_23L鯀則塞而不績使禹則流而告功若使
010_0446_a_24L韓公能知千源萬派各流其理而行之

010_0446_b_01L당시에 좌천되는 어려움71)도 없었을 것이요, 후세에도 옷을 남겨 주었다는 비난72)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노여움을 띠고 말하였다. “한유는 불로를 배척하고 맹자는 양묵楊墨73)을 물리쳐 성인의 도에 크게 공을 세웠는데, 너는 스님으로서 어찌 감히 선현을 비판하는가?” 내가 모습을 낮추어 사죄하여 말하였다. “죄를 용서하라. 죄를 용서하고 나의 말을 잘 들을지어다. 저 두 현인의 설이 높기는 높지만 마침내 성인이 ‘이단을 전공해서는 안 된다.(不攻異端)’는 한마디 말씀으로 그 뜻이 원만하고 말씀이 박절하지 않은 것과는 같지 못하다. 아, 비록 맹자·한유 등 제자諸子의 학설이 없더라도 어찌 성인의 도에 손상이 있겠는가? 한번 논해 본다면, 맹자는 성인의 호연지기는 얻었으나 전체를 갖추는 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혹 변론을 좋아하고74) 매이지 않는 기풍으로 흘렀고, 한문공은 다만 문장의 찌꺼기로 비슷하게 도를 말하였을 뿐이니 그 발언이 많은 흠을 면하지 못한다. 예컨대 장적張籍75)에게 답한 글에서 ‘자기의 뛰어난 도는 공자·맹자·양웅楊雄76)이 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 양웅이라고 말하면 옳지만 공자라고 말하면 그릇된 것이다. 공자·맹자·양웅을 한 계통으로 삼아서 분별하여 밝히지 않았으니 그 또한 ‘선택하되 정밀하지 못한 것’이다.
또 말하기를 ‘공자는 천하를 도우려고 주유하였지만, 오히려 식량이 끊기고 분주하였으니 그 궁함이 또한 심하였다. 다행히 그 무리들이 서로 지켜서 마침내 천하에 공자의 도를 세웠으니, 예전에 만일 홀로 말하고 홀로 썼다면 그 보존함을 기약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니, 아, 한 공의 말과 같다면 성인은 가난하면서 빈궁한 것이니 어찌 부유한 사람과 영달한 사람, 그리고 붕당을 지어서 공과 함께 노니는 자만 같겠는가? 대저 성인은 천리天理를 말씀으로 삼으니, 천리가 없어지지 않으면 성인의 말씀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어찌 일찍이 홀로 말했다고 하여 지킬 무리들이 없겠는가? 성인이 세상에 있는 것은 해와 달이 하늘에 있는 것과 같아서, 깨끗하고 더럽고 높고 낮은 것을 가리지 않고 비추지만 뒤집힌 그릇 아래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이 때문에 오직 의를 지켜 나가나니,

010_0446_b_01L當年無貶官之厄後世無留衣之譏也
010_0446_b_02L或者色怒曰韓子之闢佛老孟子之黜
010_0446_b_03L楊墨大有功於聖人之道汝僧安敢譏
010_0446_b_04L議先賢乎余低容而謝曰恕罪恕罪
010_0446_b_05L諦聽吾言彼二賢之說高則高矣
010_0446_b_06L不若聖人不攻異端一句都說盡其渾
010_0446_b_07L遠之旨不迫之辭雖無孟韓諸子之說
010_0446_b_08L何損於聖人之道哉盖甞論孟氏得聖
010_0446_b_09L人浩然之氣而未及具體故或失於好
010_0446_b_10L辯不覊之風也韓公特文辭糟粕彷彿
010_0446_b_11L言道而已其發也不免百孔千瘡
010_0446_b_12L答張籍書已勝之道乃孔子孟軻楊雄
010_0446_b_13L之所傳也其云楊雄可孔子則未也
010_0446_b_14L孔子孟子楊雄爲一統無卞白其亦擇
010_0446_b_15L焉而不精也歟又曰孔子輔相周天下
010_0446_b_16L猶且絕粮奔走其窮亦甚賴其徒相與
010_0446_b_17L守之卒有立於天下向使獨言而獨書
010_0446_b_18L其存可冀乎如韓公言聖人而貧
010_0446_b_19L而窮也寧不若富人達人朋黨之人之
010_0446_b_20L爲公之可與遊者乎夫聖人以天理爲
010_0446_b_21L天理不亡聖人之言亦不滅矣
010_0446_b_22L甞獨言而不存徒黨之可守乎聖人在
010_0446_b_23L世也如日月之在天淨穢高下不擇流
010_0446_b_24L然其覆盆之下則不及焉是以惟義

010_0446_c_01L비록 회계사나 가축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라 할지라도 비루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또한 제齊·노魯·송宋·위衛나라의 임금이 그 도를 쓰지 않자 이내 떠났으니 어찌 일찍이 분주하게 구차히 벼슬을 구했겠는가? 한문공의 경우는 재상에게 두 번 세 번 편지를 올려 그치지를 않았다. 공자는 광匡 땅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진陳·채蔡나라 사이에서 굶주려 자로子路가 화를 내고 자공子貢이 원망하였으나 유독 안자顔子만 편안히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가 너무 커서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니 용납되지 못한다고 해서 무슨 병통이 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이것이 70 제자가 미치지 못한 것이다.
군자가 도를 즐기고 어려움에 안주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한문공이 궁귀窮鬼77)를 보내고 맞이하며 백방으로 계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 주셨으니 환퇴桓魋78) 따위가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 하시니, 성인의 도는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어서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뚫으면 더욱 견고하여 아성亞聖(안연顔淵)의 덕으로도 엿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숙손叔孫79)이 감히 훼손할 수 있었겠는가? 한문공이 도리어 슬퍼하여 부축하여 높이려고 했으니 어찌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겠는가? 대저 성인은 말씀하지 않을지언정 말하면 반드시 이치에 맞는다. 이 때문에 『춘추春秋』를 짓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그 처벌을 피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는 성인의 말씀이요, 한문공이 말한 것이 아니다. 한문공이 문장을 지음에 반드시 공자를 칭하고 왕개보王介甫와 말할 때에도 반드시 요순堯舜을 칭하였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맹간孟簡에게 준 편지에 이르기를, ‘태전太顚이란 스님이 있어 매우 총명하고 도리를 알아 산으로부터 고을 외곽으로 초치하여 함께 이야기해 보니 실로 형해形骸를 벗어나고 이치가 뛰어난 자라.’고 하니, 한유가 말하는 도리는 유가의 도리인가 불가의 도리인가? 태전은 불자佛者이니 자신의 도에 총명하다고 한들 한문공이 무엇을 취했는가? 만약 형해를 벗어나고 인륜을 무시하면 공공적적空空寂寂의 도가 명교名敎(유교)와 크게 위배되니, 한문공은 이것을 사모하여 기뻐하였는가? 『전등록傳燈錄』을 살펴보니 한문공이 태전의 고풍高風을 듣고 홍련紅蓮을 시켜 파계시키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했다. 태전의 시에 이르기를,

十年不下祝融峯      십 년 동안 축융봉에서 내려가지 않고

010_0446_c_01L所在雖季史檝吏不以爲鄙及乎
010_0446_c_02L魯宋衛之君不用其道乃去之何甞
010_0446_c_03L奔走苟求如韓公上宰相書至再至三
010_0446_c_04L而不知止也孔子之厄於匡餓於陳蔡
010_0446_c_05L子由怒子貢怨獨顏子晏如曰不容
010_0446_c_06L何病此其七十子之不可及也君子之
010_0446_c_07L樂道安窮如此非如韓公送窮延窮之
010_0446_c_08L多端計較也子曰天生德於予桓魋其
010_0446_c_09L於予何聖人之道無可不可仰之彌
010_0446_c_10L鑽之彌堅以亞聖之德不能倪也
010_0446_c_11L豈以叔孫之所敢毁者而韓公悲之
010_0446_c_12L扶而揚之豈亦杞人之憂天乎夫人不
010_0446_c_13L言必有中故春秋作而亂臣賊子
010_0446_c_14L不能逃其誅此聖人之言而非韓公之
010_0446_c_15L所能言者也韓公爲文言必稱孔子
010_0446_c_16L與王介甫言必稱堯舜可一笑也
010_0446_c_17L孟簡書則曰有僧太顚頗聦明識道理
010_0446_c_18L自山召致州郭與之語實能外形骸
010_0446_c_19L理自勝抑未知道理者儒之道耶
010_0446_c_20L之道耶顚佛者雖然聦明於其道
010_0446_c_21L奚取焉若實外形滅倫空空寂寂之道
010_0446_c_22L與名敎大違之殷公慕此而悅之耶
010_0446_c_23L傳燈錄韓公聞太顚高風使紅蓮徃欲
010_0446_c_24L毁之不得顚詩云十年不下祝融峯

010_0447_a_01L觀色觀空色即空      색과 공을 보니 색이 곧 공이로다
如何一滴曺溪水      어찌하여 한 줄기 조계의 맑은 물을
肯落紅蓮一葉中      홍련의 한 잎사귀에 떨어뜨리랴

라고 하자, 공이 드디어 몸소 정사精舍에 찾아가니 태전이 선상禪床에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공이 노여워하자 시자侍者 삼평三平이 선상을 세 번 두드렸는데, 공이 이에 깨우치고 태전에게 일러 말하기를 스님의 풍격이 고준高峻하여 시자를 통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니, 이것이 사실 기록이다. 그가 이르기를, 고을 외곽으로 불렀다고 하니 이는 또한 그의 풍채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훗날에 불교를 배격한 것은 화복禍福의 설이다. 그러나 공이 일찍이 유수재劉秀才에게 답한 편지에서, ‘옛날부터 사관은 사람의 화가 있지 않으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이 있다.’고 하여 성인의 『춘추』도 또한 재앙을 받을 경우에 나란히 놓았으니, 만약 화복의 설이 사특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공이 어찌 저와 같이 두려워했겠는가? 그 또한 ‘말을 하되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고서 이단을 그치고 막는다면 실로 어려울 것이요, 이와 같이 하고 성인의 도를 유행하게 한다면 또한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말하기를, 당나라 성리性理의 학문은 한문공의 문장의 도와 유사한 학설로 말미암아 정도로 돌아가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여의 대사의 변괴설에 대하여 논함(論如意大師卞恠說)
송나라 석개石介80)는 자가 수도守道인데 일찍이 괴기怪記를 지어 불교를 비난했다. 원나라 여의如意 대사가 황제를 받들어 변론하고 또 말하기를, “석개의 문학과 의론은 소명 태자昭明太子81)ㆍ손작孫綽82)ㆍ우세남虞世南83)ㆍ위징魏徵84)ㆍ소식蘇軾에게 멀리 미치지 못한다. 저 여러 군자들은 모두 불교를 믿었는데 석개가 유독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였다.
석개가 불교를 괴이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저 석개는 중국 사람으로 유학의 무리이니, 중국에서 보고 듣는 것이 아니고 유가 경서에 말해지지 않는 것을 어찌 괴이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옛날에 소왕素王(공자)이 정鄭나라로 갈 때 정나라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서 상갓집 개와 같다고 여겼다. 공자는 천하에 성인으로 받들어지는데 정나라 사람만 괴이하게 여기니 무엇 때문인가?

010_0447_a_01L觀色觀空色即空如何一滴曺溪水
010_0447_a_02L落紅蓮一葉中公遂躬造其廬顚則坐
010_0447_a_03L禪床不起公怒色侍者三平扣床三
010_0447_a_04L公於此有省謂顚曰師風高峻
010_0447_a_05L者邊得入此其實錄也其云召致州郭
010_0447_a_06L抑減他風采者歟末後排之者禍福之
010_0447_a_07L說也然公甞答劉秀才書古來史氏之
010_0447_a_08L不有人禍必有天殃以聖人春秋之作
010_0447_a_09L亦列在殃禍之比若信禍福之爲邪說
010_0447_a_10L則公何畏懼如彼哉其亦語焉而不詳
010_0447_a_11L如此而止塞止塞難矣如此而流行
010_0447_a_12L流行難矣余故曰唐世性理之學由韓
010_0447_a_13L公文辭彷彿之說而不能返乎正也

010_0447_a_14L

010_0447_a_15L論如意大師卞恠說

010_0447_a_16L
宋石介字守道甞作恠記詆佛而元
010_0447_a_17L朝如意大師奉詔卞且曰石介之文學
010_0447_a_18L名論不及於昭明孫綽虞世南魏徴蘇
010_0447_a_19L軾者遠矣彼諸君子悉皆信佛石介
010_0447_a_20L獨以爲恠何耶余曰石介之恠佛固也
010_0447_a_21L夫介中國之人儒門之徒非中國之見
010_0447_a_22L聞者非儒書之所言者安得不恠也
010_0447_a_23L昔素王之之鄭也鄭人恠之若喪家之
010_0447_a_24L夫子聖於天下而見恠於鄭人何

010_0447_b_01L공자는 정나라 사람이 아니니 정나라 사람이 공자를 괴이하게 여기는 것 또한 마땅하다. 그러나 정나라 사람은 공자를 괴이하게 여기지만, 공자는 정나라 사람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이제 석개가 불교를 괴이하게 여기지만, 우리가 어찌 저를 괴이하게 여겨 변론할 것인가? 나무 그루터기가 괴이한 것이 아니지만 보는 것이 괴이한 자는 두려워 달아나고, 그림자가 괴이한 것이 아니지만 마음이 괴이한 자는 병에 걸린다. 환퇴桓魋가 나무를 베었지만85) 나무야 어찌 괴이할 것이며, 이사李斯86)가 경전을 불살랐지만 경전이 어찌 괴이한 것이겠는가? 만 가지 모습의 사물이 천도天道를 얻은 것은 한 가지이니, 이 때문에 천리를 아는 자는 만 가지 모습을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니 어찌 한 가지 이치 가운데에 저것을 고집하고 이것을 괴이하게 여기며, 이것을 고집하여 저것을 괴이하게 여기겠는가? 그러하니 석개가 불교를 비난한 것이나 소명·손작·우세남·소식 등의 여러 군자가 불교를 높인 것이나 불교에는 손익이 없는 것이다. 부처는 허공을 본체로 삼아 비난과 칭찬을 바람 소리로 보며, 중생을 한 자식처럼 자비롭게 대하니 어찌 피아를 나누어 괴이하게 여기고 혐의하겠는가? 이 때문에 성불하는 것은 부처를 비방하는 인연으로 시작되고 석가모니의 가족 중에도 제바달다提婆達多87)가 있었으니, 석개가 부처를 비방한 것이 후생에 성불할 한 가지 인연이 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
저 여의 대사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괴이함을 변론할 때는 또한 마땅히 시비선악이 일어나기 전의 혼돈渾沌의 통일된 이치로서 고하여 반드시 변론함이 없게 해야 하거늘, 어찌 물을 불에 던져서 불이 물을 괴이하게 여기게 하고, 창을 방패에 던져서 방패가 창을 괴이하게 여기게 하는가? 이 때문에 인주人主가 백가百家의 근원을 통일하여 함께 무쟁삼매無諍三昧를 증득한 연후에야 여러 괴이함을 변론하지 않아도 절로 그칠 것이다.

화복이 없다는 윤씨의 설에 대하여 논함(論尹氏無禍福說)
내가 일찍이 옛날 윤씨의 말을 살펴보니, “양 무제梁武帝가 복이 없다고 한 것으로 위 무제魏武帝88)가 화가 없음을 미루어 아나니, 부처는 어찌 위 무제에게는 영험하고 양 무제에게는 영험하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한다. “양 무제가 굶어 죽은 것과 위나라 무제가 갑자기 죽은 것은 모두 천명이다.

010_0447_b_01L夫子非鄭人鄭人之恠夫子亦宜也
010_0447_b_02L鄭人恠夫子夫子不恠鄭人今石生恠
010_0447_b_03L吾何恠彼而卞也兀木非恠見恠
010_0447_b_04L者怖走兮影非恠心恠者嬰疾桓魋
010_0447_b_05L伐樹樹何甞恠也李斯焚經經何甞
010_0447_b_06L恠也萬形之物得於天則一故知天
010_0447_b_07L不恠萬形何於一理中執彼而恠
010_0447_b_08L執此而恠彼然石介之詆佛昭明
010_0447_b_09L孫綽虞世南蘇軾諸君子之崇佛未有
010_0447_b_10L損益於佛佛以虛空爲體毁譽視風聲
010_0447_b_11L慈悲衆生猶如一子何甞彼恠而我嫌
010_0447_b_12L是以成佛始於謗佛之緣瞿曇種
010_0447_b_13L亦有提婆達多安知石生之詆佛
010_0447_b_14L不爲他生成佛之一緣也彼如意之奉
010_0447_b_15L詔卞怪則亦宜以指馬未起前混元一
010_0447_b_16L統之道告之而必也使無卞也何乃
010_0447_b_17L以水投火火不怪水以矛投楯楯不
010_0447_b_18L怪矛耶故人主統一百家之源同證無
010_0447_b_19L諍三昧然後庶羣恠之不卞而自止也

010_0447_b_20L

010_0447_b_21L論尹氏無禍福說

010_0447_b_22L
甞閱古尹氏之言以梁武之無福例知
010_0447_b_23L魏武之無禍佛何靈於魏武而不靈於
010_0447_b_24L梁武乎余曰梁武之餓死魏武之暴亡

010_0447_c_01L성인도 천명은 어찌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안회顏回가 죽을 때에 공자가 구하지 못한 것이다. 두 무제 사이에 부처가 어찌 사사로움을 펼치겠는가? 또 37명의 임금이 봉선제封禪祭89)를 올려 하늘을 섬겼으나 장수한 자를 듣지 못했고 무을武乙은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쏘아서 하늘을 쏜다고 하여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하늘을 섬겨 복이 없는 것을 하늘을 쏘아 화가 없는 것의 예라고 할 수 있는가? 도척盜跖은 제명대로 살다 죽고 안회는 요절하였으니, 군자가 복이 없는 것은 배울 것이 없거니와 소인들이 화가 없는 것은 징계할 만하지 않은가? 아, 윤씨의 ‘화복이 없다’는 의론은, 한갓 부처를 비방하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말이 모순에 빠진 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무학 대사의 사적을 논한 설(論無學事蹟說)
무학의 사적은 승사僧史에도 없고 세속에서 전하는 것도 믿을 수 없다. 마땅히 비문을 사실로 여겨야 한다. 변계량卞季良90)이 무학의 비문을 편찬하였는데, 세속의 본관과 성명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릇되게 전해 내려오는 것이 더욱 많았다.
산인山人 제수禔修가 「은신암 사적기隱身庵事蹟記」에서 말하기를, “무학의 성은 염廉이요 이름은 시생始生이다. 어머니는 노비로 옛 삼기현三岐縣 사람이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실록은 보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길에서 들은 것으로 기록한 것이다. 지열志悅 스님이 얻은 「무학비기無學秘記」에는 “성은 성成이고 이름은 사겸士謙이다. 고려 시대 경양위敬讓尉 익재益齋의 서자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또 한 기록을 보니 “무학의 성은 박이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추증된 휘諱 치인致仁의 아들이다. 삼가현三嘉縣 부도사浮屠寺에 무학의 탑이 있다. 고을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로는 성이 문文씨인 집안의 비첩婢妾의 아들이라고 한다. 근래에 문씨 성의 후손이 무학의 탑 앞에 있는 상석을 훼손하고 자신의 할아버지의 묘를 넓히려고 하다가, 몇 리를 걸어가더니 대낮에 우레와 천둥이 쳐서 돌을 옮기는 자가 두려워서 도망갔고 그 집안은 저절로 망하였다.

010_0447_c_01L皆命也聖人無如命何故顏回之死也
010_0447_c_02L夫子莫之救彼二武之間佛何私焉
010_0447_c_03L三十七代之君封禪事天而未聞長生
010_0447_c_04L武乙革囊射天而暴雷震死亦可以事
010_0447_c_05L天之無福例於射天而無禍耶盜跖壽
010_0447_c_06L顏淵夭卒君子無福不足學也
010_0447_c_07L人無禍不足懲乎尹氏無福無禍
010_0447_c_08L之論徒欲毁佛而不知其言之自墮
010_0447_c_09L

010_0447_c_10L

010_0447_c_11L論無學事蹟說

010_0447_c_12L
無學事蹟未有僧史諺傳不可信也
010_0447_c_13L當以碑文爲實而卞公季良撰無學碑
010_0447_c_14L其俗本姓名則不錄故謬襲滋多有山
010_0447_c_15L人禔修修隱身事蹟記曰無學姓廉
010_0447_c_16L名始生母業婢三岐古縣人又曰未見
010_0447_c_17L實錄但以塗聽爲記僧志悅所得無學
010_0447_c_18L秘記則姓成名士謙麗朝敬讓尉益
010_0447_c_19L齋庶子余又見一錄無學姓朴贈輔
010_0447_c_20L國崇祿大夫兵曺判書諱致仁之子
010_0447_c_21L嘉浮屠寺有無學塔縣人諺傳文姓
010_0447_c_22L家婢妾子近者文姓裔孫毁無學塔前
010_0447_c_23L床石欲侈其祖墳行至數里白日雷
010_0447_c_24L霆震作運石者懼而逃其家自亡

010_0448_a_01L지금도 돌이 길가에 있다.”라고 하였다.
부도사의 스님이 말하기를, “부도사의 옛 이름은 사나사舍那寺인데 무학의 부도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한다.
곁에 있는 영암사靈巖寺·보암사寶巖寺·몽계사夢鷄寺 등이 모두 무학의 도량인데 비문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무학의 스승은 나옹懶翁 스님이요, 나옹의 스승은 지공指空이다. 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91)이 지공·나옹 두 조사의 비문을 편찬하였는데, 그 아명과 속성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대개 속세의 연원은 도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략한 것이다. 저 문씨 성의 사람은 길거리의 말에 오도되어 선현을 비방하고 욕되게 하여 하늘의 벌을 받았으니 무엇이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오효자전吳孝子傳
오효자는 이름이 두삼斗參이고 자는 사원士元으로 덕계德溪 선생의 방손이다. 경신년 2월 8일에 회계會稽 금석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윤성閏成으로 어려서 재행才行이 있다고 일컬어졌으며, 소춘암蘇春庵에게 수업을 받았다. 춘암이 매우 그릇으로 여겨 조카 수중洙中과 함께 절차탁마하게 하였으며, 유성화柳聖化와 윤동교尹東郊도 자주 자제를 보내 경서의 이치를 강론하게 하였다. 나이 24세에 춘암을 따라 하동의 화개동으로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효자는 갓난아기여서 어머니 김씨가 방곡方谷의 외가에 데리고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거창의 고제리高梯里에 이사 가서 살았다. 효자가 차츰 자라자 어머니를 봉양하는 여러 예절이 지극한 정성 아닌 것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취학하지 못했으나 어머니를 섬기는 여가에 역대 성현의 글을 들어 스스로 대의를 통달하여 이로써 사림들의 칭찬을 받은 지가 오래되었다.
무술년 여름에 어머니가 반년 동안 이질을 앓아 여러 가지 처방을 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손님이 어디선가 와서 스스로 의원이라 칭하고 진찰하면서 말하기를,

010_0448_a_01L今石在路傍浮屠僧云浮屠寺舊名舍
010_0448_a_02L那寺有無學浮屠故改今名傍有靈
010_0448_a_03L巖寺寶巖寺夢鷄寺皆無學道場亦碑
010_0448_a_04L文所不錄無學之師曰懶翁懶翁之師
010_0448_a_05L指空牧隱李文靖公撰指空懶翁二祖
010_0448_a_06L師碑文未甞錄其幼名俗姓盖世蹄淵
010_0448_a_07L源之事特道人餘事故略之也如彼
010_0448_a_08L文姓者誤以塗諺毁辱先賢獲罪於
010_0448_a_09L何足怪也

010_0448_a_10L

010_0448_a_11L吳孝子傳

010_0448_a_12L
吳孝子者名斗參字士元德溪先生
010_0448_a_13L之傍孫也庚申二月初八日生於會稽
010_0448_a_14L琴石里父閏成小稱才行受業於蘇
010_0448_a_15L春庵春庵甚器之以姪洙中與之琢
010_0448_a_16L而柳侯聖化尹侯東郊屢遣子弟
010_0448_a_17L講論經理年二十四隨春庵於河東之
010_0448_a_18L花開洞以病死孝子在襁褓母金氏
010_0448_a_19L携歸於方谷外家已而移居居昌高梯
010_0448_a_20L孝子稍長奉母諸節無不至誠
010_0448_a_21L貧雖未就學事親之暇聽歷聖賢書
010_0448_a_22L自通大義以是爲士林推詡者久矣
010_0448_a_23L戊戌之夏母患痢半年百方無驗
010_0448_a_24L夕有客無何而至自稱醫者診之曰

010_0448_b_01L“원기가 이미 쇠퇴하여 허열虛熱이 한창 심하니, 살리고자 한다면 마땅히 강의 물고기를 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때는 늦겨울이라 시내가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어 효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을 흘리며 집 앞의 작은 시내로 나가서 돌을 들어 얼음을 깨니, 두 마리 장어長魚와 둘레가 한 자 되는 큰 자라가 빙글빙글 돌며 뛰쳐나왔다. 효자가 매우 기뻐 가지고 돌아가니 의원은 이미 떠나갔다. 드디어 국과 회를 만들어서 올리니 병이 나을 수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칭찬하며 말하기를, “빙어氷魚의 일92)은 옛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오늘날에도 보게 되었구나. 하물며 저 강호의 물고기가 어찌 이 작은 시내까지 이르렀을까?”라고 하였다. 마을의 노인 박중기朴重耆가 관가에 알리고자 하였으나 효자가 애써 만류하여 이에 그쳤다.
기해년 가을 7월에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여 음식을 먹지 못하니 효자가 눈물을 흘리며 드시고 싶은 것을 물었다. 어머니가 병 때문에 계절과 향토의 생산물을 알지 못하고 말씀하시기를, “어렸을 때 순채를 즐겨 먹었는데 지금은 병들어서 맛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구나.”라고 하니 효자가 듣고 울부짖으며 가슴을 쳤다. 집 뒤에 산죽山竹 몇 무더기가 있었는데 효자가 그 앞으로 가서 한참을 울부짖다 보니 팔뚝만 한 죽순이 세 개가 나 있었다. 곧바로 데쳐서 드리니 어머니가 맛을 보고 말씀하시를, “맛있기는 맛이 있으나 운명이 다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하고 돌아가시니 효자가 통곡하다가 기절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한창 천연두를 근심하여 곡하는 소리를 꺼렸기 때문에 밖에 빈소를 차리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시며 곡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9월에 천연두의 환난이 차츰 안정되자 비로소 집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사를 지내니 이웃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효자가 어머니께서 임종 때 죽순의 맛을 찾은 것을 생각하고, 이제 서리 내리는 가을철도 지났는데 어떻게 죽순을 마련하여 제수로 쓸 것인가 하고 집 뒤 산죽 떨기 앞에 이르러 보니 큰 죽순 10여 개가 나 있어서 꺾어서 품고 돌아왔다. 모인 손님들이 보고 크게 놀라 말하기를, “이것은 어찌 된 물건인가? 이것은 향토 산도 아니고 게다가 제 계절도 아닌데 어찌하여 얻게 되었는가? 하늘을 감동시킨 효성을 덮을 수 없도다.”라고 하였다. 면임面任이 곧 죽순을 싸서 봉하여 관가에 알리니 관가에서도 가상히 여기고 쌀 한 섬을 보내 주었다.

010_0448_b_01L眞元已敗虛熱方極欲爲生道當求
010_0448_b_02L江膳時則季冬溪間雪凍孝子罔知
010_0448_b_03L攸爲雨淚而出家前小溪擧石破凍
010_0448_b_04L二尾長魚周尺大鱉盤回而跳出
010_0448_b_05L子喜甚擔而歸醫已去矣遂羹贈以
010_0448_b_06L得痊隣人老少無不嗑舌曰氷魚
010_0448_b_07L之事古聞而今見况彼江湖之物
010_0448_b_08L以至此小溪耶鄕老朴重耆欲報于官
010_0448_b_09L孝子力止乃已己亥秋七月母病再
010_0448_b_10L發廢食孝子泣問所思味母病故
010_0448_b_11L知節序不知土産而曰小時喜食笋菜
010_0448_b_12L今病中不知有味否也孝子聞之呌叩
010_0448_b_13L家後有山竹數叢孝子徃其前號泣良
010_0448_b_14L久視爲笋生臂大者三即茹進母
010_0448_b_15L之曰味則味也其奈命限何因以奄
010_0448_b_16L孝子哭痛殞絕隣人方痘患忌哭聲
010_0448_b_17L乃奉殯于外晝夜侍側哭不絕聲
010_0448_b_18L月痘患稍定始家殯而祭之隣里皆會
010_0448_b_19L孝子思母臨終索笋味今更霜秋
010_0448_b_20L得笋用於祭需耶至家後山竹叢前
010_0448_b_21L大笋生者十餘折而抱歸會客見
010_0448_b_22L大驚曰是何物耶此非土産又况
010_0448_b_23L非節何由而得此感天之孝不可掩
010_0448_b_24L面任即封笋報官官則嘉歎送米

010_0448_c_01L
사림의 변덕화卞德和·박사돈朴思敦·성호을成虎乙·문봉지文鳳至·유성춘柳成春 등 30여 명이 함께 당영棠營(해남) 관아에 호소하자 당영의 제사題辭에 이르기를, “한 고을의 유림의 소장을 조정에 알리는 것은 일이 중요한지라 다시 널리 살펴봐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에 이웃 읍의 유림들까지 통서通書를 발하여 조정에 알리고자 하였다. 효자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자식으로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은 떳떳한 일이요, 행실을 꾸며서 명예를 구하는 것은 이익을 추구하는 일이다. 옛날 모의毛義93)가 어버이가 계실 때는 추천서를 받들고 기뻐하였으나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조정에서 불러도 가지 않았다. 이제 여러 현인들이 나를 가련히 여겨 설사 임금의 큰 상이 있을지라도 어버이가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엇에 쓰겠는가?” 하였다. 여러 선비들이 어길 수 없어 더욱더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10월 16일에 산의 터를 점지하려고 하니 꿈에서 백의 노인이 삼봉산三峯山 정상 상여암喪轝巖 아래에 데리고 가서 표지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곳에 장사 지내라.”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가서 보니 표지가 그대로 있었다. 마침내 묘혈을 한 자 남짓 파니 홀笏과 같은 세워진 돌이 있었다. 또 몇 자를 파니 황금색의 자라 같은 큰 두꺼비가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이 기이한 묘혈인데 효성에 감응하여 얻었다고 여겼다.
효자가 묘혈의 흙으로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전후좌우가 모두 큰 산이어서 큰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효자의 집은 하인이 없으니 식량을 이을 수 없어서 봄에는 산나물을 먹고 가을에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이웃 사람들이 혹 양식을 보내 주어 연명하게 하였다. 효자의 종숙부從叔父 징澄이 일찍이 그 움막을 갔는데 큰 호랑이가 움막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매우 두려워하였다. 효자가 천천히 이르기를, “산중에 사람이 없어서 호랑이와 표범을 벗 삼으니 숙부님께서 괴이하게 여기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시묘를 마치고 나자 사지가 습기를 맞아 가누지를 못하였다. 사림들이 가련히 여겨 약으로 치료해 주니 겨우 집 안 뜰을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처자를 이끌고 위성渭城 남리南里로 돌아가 종숙부 징에게 의지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평소에 그의 효성을 듣고 초가 한 칸을 지어서 살게 하였다.
갑인년 정월 어느 날 밤에 효자가 처자와 함께 죽으니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였다. 고을 북쪽 언덕에 합장하였다.

010_0448_c_01L一石士林卞德和朴思敦成虎乙文鳳
010_0448_c_02L至柳成春等三十餘人齊訴棠營營題
010_0448_c_03L曰一邑儒訴狀聞軆重更待廣採事
010_0448_c_04L是隣邑儒士發通書將爲上聞孝子
010_0448_c_05L止之曰人子奉養父母常也餙行而求
010_0448_c_06L名者利也昔毛義親在則奉檄而喜
010_0448_c_07L親歿徴辟不至今諸賢憐我設使寵賞
010_0448_c_08L至親已歿矣焉用之哉諸士不能違
010_0448_c_09L益加敬重十月旣望將占山夢白衣
010_0448_c_10L老人携至三峯山絕頂喪轝巖下
010_0448_c_11L標曰葬于此覺而徃視標亦宛在
010_0448_c_12L穿壙尺餘有立石如笏又穿數尺
010_0448_c_13L蟾色黃如黿者伏焉人以爲異穴孝感
010_0448_c_14L故得之孝子因穴土爲廬而侍墓三年
010_0448_c_15L前後左右皆泰山大木叅天人烟夐絕
010_0448_c_16L孝子家無僮僕無以繼粮春食山蔬
010_0448_c_17L秋食木實隣人或送粮延命孝子之從
010_0448_c_18L叔澄嘗造其廬見大虎守廬惧甚
010_0448_c_19L子徐謂曰山中無人虎豹與友叔無
010_0448_c_20L恠焉居廬旣罷四肢中濕不收士林
010_0448_c_21L憐之藥救堇得戶庭行步携妻子
010_0448_c_22L渭城南里從叔澄依焉洞人素聞其孝
010_0448_c_23L共搆一間茅屋而居之甲寅正月某日
010_0448_c_24L孝子與妻子同歿人莫知所以

010_0449_a_01L지금까지 나무하는 아이들과 목동들이 그를 위해 벌목을 금하고, 길을 가며 아는 자들은 가리키며 ‘오효자의 무덤’이라고 하였다.
백련자白蓮子가 말한다. “항상 들으니 악은 재앙을 받고 선은 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효도는 백 가지 행실 중에 제일이요, 만 가지 선 중에 으뜸인데, 오효자와 같은 자는 살아서는 그와 같이 가난하고 병들었으며 죽어서도 또한 정려旌閭의 표창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 선한 자에게 복을 준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잠시 스스로 해석해 보니, 하늘은 만인을 냄에 각각 그 직분을 주었으니, 만일 효자가 명성과 영달을 모두 얻게 되었다면 반드시 돈으로 효를 사게 되었을 것이니 그 효를 어찌 일컬을 만했겠는가? 그렇다면 효자는 다만 효도만 행하고 그 직분은 명예와 영달에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한가?”

박열부전朴烈婦傳
열부는 성은 박이요, 안의현安義縣 아전의 딸이다. 조모가 꿈에 한 정사精舍에 이르렀는데 두 명의 동자가 나와 맞이하여 기쁘게 이야기를 나누고 곧 뒤를 따라 집에 이르렀다. 한 동자는 사직 인사를 하고 함양 길로 떠나고 한 동자는 며느리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임신하여 열부를 낳았는데 자질이 곱고 아름다우며 말과 행실이 저절로 내칙에 맞았다.
나이 19세에 함양 임씨林氏의 집안에서 청혼을 받았는데 나이가 또한 열아홉으로 뛰어난 동자로 칭송되었다. 혼인날 병에 걸려 겨우 혼례를 지내고 밖에서 자고는 신랑이 말을 타고 돌아간 뒤 일어나지 못하였다. 부고가 이르자 열부의 부모가 분상하지 못하게 하였다. 열부가 옳지 못하다고 하며 말하기를, “혼례를 이미 치렀으니 부부입니다. 여자는 반드시 지아비를 따라야 하니 지아비의 상례에 가지 않는다면 내가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말하니 부모가 뜻을 빼앗지 못하였다.
열부가 상례喪禮를 3년 동안 행하면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자 사람들이 혹 예가 지나치다고 하여 만류하였다. 열부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상에 자식이 어찌하며 지아비의 상에 아내가 어찌합니까? 낭군이 죽고 자식이 없으니

010_0449_a_01L葬於洞之北邙至今樵竪牧兒爲之禁
010_0449_a_02L道路識者指點吳孝子塚云

010_0449_a_03L
白蓮子曰常聞惡報以殃善報以慶
010_0449_a_04L孝爲百行之先萬善之長而若吳孝
010_0449_a_05L子者生而如其貧病死又不得旌閭
010_0449_a_06L其善慶報福果安在哉俄自解之曰
010_0449_a_07L天生萬人各有其職若使孝子者
010_0449_a_08L顯榮皆可求得必以錢買孝孝焉足
010_0449_a_09L稱乎然則孝子但孝行其職不干夫
010_0449_a_10L顯榮耶抑不然也耶

010_0449_a_11L

010_0449_a_12L朴烈婦傳

010_0449_a_13L
烈婦姓朴安義縣吏人之女祖母夢至
010_0449_a_14L一精舍有兩靑童出迎歡與語即隨
010_0449_a_15L後至家一童辭去咸陽路一童入子婦
010_0449_a_16L因有娠而生烈婦姿質妍美言動
010_0449_a_17L自合內則年十九受聘於咸陽林姓家
010_0449_a_18L即年亦十九以奇童稱延客之日即有
010_0449_a_19L僅成禮外宿郞駄歸仍不起訃至
010_0449_a_20L婦之父母不欲令奔喪婦不可曰
010_0449_a_21L已成禮則夫婦矣女必從夫夫喪不
010_0449_a_22L我安歸哉父母不能奪婦執喪制
010_0449_a_23L三年哀毁不堪人或以過禮止之
010_0449_a_24L曰父喪子何如也夫喪妻何如也郞君

010_0449_b_01L상제喪制를 제가 겸해야 하니 어찌 예를 따지십니까?”라고 하였다.
그때의 태수가 그녀의 현명함을 듣고 아들의 첩으로 삼고자 하였다. 열부가 그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박명하고 모진 삶으로 삼년상 전에는 의리상 다른 사람에게 허락할 수 없었는데, 이제 지금 관가의 협박을 받게 되니 자결하여 욕되지 아니한 것만 못합니다.” 하고는 칼을 빼서 가슴을 찌르니, 아버지가 칼을 빼앗고 태수에게 울면서 하소연하였다. 태수가 놀라 두려워서 그쳤다. 그 아버지를 가상히 여기고 격려하며 말하기를, “너는 너의 딸을 잘 보살피도록 하라. 지난날 협박한 명령은 나의 허물이다.”라고 하였다.
열부가 지아비의 두 번째 기일에 미리 재단해 놓은 지아비의 옷 몇 벌을 제문祭文을 지어 태우고, 또 유서를 써서 지아비의 무덤 곁에 묻혀서 부부의 몸이 함께 묻히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곧 독약을 마시고 쓰러져 주위 사람들이 약을 먹이려고 하니 열부가 입을 다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어찌 약으로 해독하여 살겠는가?” 하였다. 얼마 동안 중얼중얼 아미타불을 염송하며 일어나서 말하기를, “죽는 것이 좋으니 원컨대 저승으로 돌아가 우리 낭군님을 모시고 함께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지극히 영화로우리라.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이 있으면 나의 발원을 저버리지 마소서.” 하고 말을 마치자 운명을 다하였다. 그때가 건륭 58년 계축년 7월 18일이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은 자들이 슬퍼하고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열의烈義가 있는 부인이었다. 열부가 태어난 해는 지아비와 같았고 배우자라는 이름은 있었으나 각각 동남동녀로 죽었다. 의론하는 자가 이르기를 선부仙府에서 내려온 신선이라고 하였다. 조모가 두 어린 동자를 꿈꾼 것은 두 읍에서 나뉘어 태어날 징조였다. 열부는 비구니 봉성奉性과 교분이 있었으니, 열부가 죽자 봉성이 말한 것이다.
백련자가 말한다. “『왕생경往生經』에 ‘충신·효자·열녀는 모두 극락세계에서 태어난다’고 하였으니 불교에도 어찌 삼강의 뜻이 없겠는가. 또 말하기를 ‘충신·효자·열녀로 염불할 줄 아는 자는 상품上品의 연화대蓮花臺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세상의 도가 떨어진 이래로 충신·효자·열녀를 진실로 쉽게 얻을 수 없고,

010_0449_b_01L死而未有子喪制妾身當兼之何責乎
010_0449_b_02L禮也時太守聞其賢欲爲子娶副
010_0449_b_03L謂其父曰薄命殘生三喪之前義不
010_0449_b_04L可許人今爲官威䝱迫莫如自決爲不
010_0449_b_05L即引刀揕胷父奪刀而泣訴官
010_0449_b_06L亦悚然止之嘉勉其父曰汝善護汝女
010_0449_b_07L徃日䝱令官之過也烈婦以夫再朞日
010_0449_b_08L預裁夫衣各件作祭文而焚之又爲遺
010_0449_b_09L願埋夫塚傍庶幾骸骨同歸之意
010_0449_b_10L即飮毒藥殞倒左右欲以藥灌之婦噤
010_0449_b_11L口不納曰豈可藥解而生也俄頃喃喃
010_0449_b_12L念阿彌陁佛作勢而言死好死好願歸
010_0449_b_13L泉下陪我郞君同生極樂榮之至矣
010_0449_b_14L佛若有靈勿負我願說訖而盡時則
010_0449_b_15L乾隆五十八年癸丑七月十八日也
010_0449_b_16L近聞者莫不色歎眞烈義之婦也
010_0449_b_17L婦生年與夫同雖有配偶之名各以童
010_0449_b_18L男童女而死議者謂仙府降跡之人也
010_0449_b_19L其祖母之夢兩靑童分生二邑徵矣
010_0449_b_20L婦與比丘尼奉性有素烈婦死奉性云

010_0449_b_21L
白蓮子曰徃生經中忠臣孝子烈女
010_0449_b_22L皆生極樂世界佛敎中何嘗不有三
010_0449_b_23L綱之義乎又曰忠臣孝子烈女而能
010_0449_b_24L知念佛者生於上品蓮胎世降已來

010_0449_c_01L충신·효자·열녀로 염불하는 자는 더욱 드물다. 박열부는 규중의 신선의 자질로 염불하는 법을 누구에게 들었관대 최후의 마지막 순간에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극락에서 태어나기를 원했으니, 전생에 좋은 인연을 심지 않았다면 그럴 수 있겠는가? 일찍이 들으니 문수와 보현보살이 종류를 따라 형체를 나타내는데 동진童眞의 몸을 많이 나타낸다고 하니, 아마도 열부 또한 보살의 화신이 나타난 것으로 연화대 상품에 반드시 태어날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우선 이같이 기록한다.”

연적전硯滴傳
글방에 손님이 있으니 스스로 천일天一선생이라고 불렀다. 작은 몸체와 네모진 몸에 입 가는 대로 문장을 지으면 샘이 용솟음치는 듯했다. 그 흐름을 받아 용문龍門94)에 오른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도홍陶泓(벼루)·모영毛穎(붓)·진현陳玄(먹)·운손雲孫(종이)과 정신적인 교유를 맺었다. 시인과 묵객이 높이고 제휴하기에 바쁘고 기화奇貨라고 여겨서 일언일자一言一字라도 반드시 그 입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취하여 썼다.
어느 날 빈 재각에서 천일선생이 안궤에 기대어 조용히 있었는데 도홍 등이 나아가 말하기를, “천일선생은 내 말을 들으라. 우리들이 처음 선생을 사랑하여 도가 방원方圓에 들어맞고, 마음은 맑은 물을 간직하여 토하고 받아들여 사물을 이롭게 하니 군자의 풍모가 있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서로 교유하여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데 선생은 어찌하여 세속의 소자小子들과 더불어 경솔하게 마음을 쏟아 내며 날마다 고인古人의 조박糟粕과 강산의 바람과 이슬만을 일삼고 그칠 줄을 모르느냐? 이제 나는 배가 뚫어지고 모영은 머리가 벗어졌으며, 진현은 머리까지 닳고 운손은 색이 바래고 보풀이 일어나서 다만 많은 선비들의 부림을 받고 있으나

010_0449_c_01L忠臣孝子烈女固不易也以忠臣孝
010_0449_c_02L子烈女而能念佛者尤爲希有
010_0449_c_03L朴烈婦以閨中仙質念佛之法
010_0449_c_04L從而聽而乃於最後刹那之際喃喃
010_0449_c_05L念阿彌陁佛願生極樂非宿種而然
010_0449_c_06L者乎嘗聞文殊普賢隨類分形
010_0449_c_07L現童眞身意者烈婦亦菩薩化現之
010_0449_c_08L而蓮臺上品必見其生處姑爲
010_0449_c_09L

010_0449_c_10L

010_0449_c_11L硯滴傳

010_0449_c_12L
文房有客焉自號天一先生短體方腹
010_0449_c_13L信口爲文辭如瀉泉人或承其涓餘
010_0449_c_14L而登龍門者不可數與陶泓毛頴陳玄
010_0449_c_15L雲孫定爲神交騷人墨客推携不暇
010_0449_c_16L以爲奇貨而雖一言一字必待其口出
010_0449_c_17L而取用焉一夕空齋天一嘗隱几杳然
010_0449_c_18L陶泓等進曰天一先生聽吾言吾等
010_0449_c_19L始愛先生道合方圓心藏淸水吐納
010_0449_c_20L利物以爲有君子之風故相從而不知
010_0449_c_21L去也先生何乃與流俗小子輕瀉肝膽
010_0449_c_22L日事古人糟粕江山風露而不知已
010_0449_c_23L今陶泓腹穿毛頴頭秃陳玄踵磨
010_0449_c_24L至頂雲孫色悴毛竪適足爲多士之役

010_0450_a_01L선생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는 원하니, 선생은 밖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고 안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서 그 사람이 아니거든 전하지 않는다면95) 도를 온전히 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이에 천일선생이 송연히 용모를 고치고 사과하여 말하기를, “지극하도다, 네 분 벗의 말이여. 옛날에 한창려韓昌黎(한유)가 문사 짓기를 좋아하여 「사설師說」을 지어 당세의 스승이 되어 천하 사람들이 휩쓸려 따라서 성리학은 다시 정도正道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어찌 또 맹자가 말한 큰 환난이 아니겠는가? 예전에 내가 다만 붓과 벼루에 남은 물방울로써 사람들과 사우師友 관계를 맺었으니 진실로 부끄러울 뿐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자호自號를 고쳐 ‘연적’이라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다시는 접하지 않았다.

조제축竈祭祝
조군竈君(부뚜막신)은 목숨을 맡는지라 생사가 말미암습니다. 암자의 스님이 새해를 맞이하여 병이 깊어지는 근심이 있어 치료하고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어 이에 기도합니다.
적이 생각건대 병승病僧 아무개는 운수 행각하는 이요, 경행經行하는 학인으로 800리 멀리 스승을 참배하니, 나이는 25세입니다. 한 발우의 살림으로 속세의 바람이 마음의 바다에 영원히 그쳤고, 육시六時96)에 예불하고 염송하여 지혜의 빛이 항상 자성의 하늘을 비추었습니다. 어찌 깊은 병이 침범하여 갑자기 10여 일 고통을 겪게 될 줄 알았겠습니까? 한기와 열이 오고 가니 귀신의 장난인지 하늘의 뜻인지 알기 어렵고, 죽과 물조차 먹고 마시지 못하니 목숨을 보존하고 회생할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니 모승某僧의 삼생의 보채報債와 백겁의 죄인罪因이 일시에 불꽃 가운데 소멸하고, 탕약과 음식을 먹은 후에 오장육부가 조화롭게 되어지이다. 권도權道로 분노의 위엄을 베풀어 마귀의 요사함을 제거하여 주시고, 우러러 관세음보살의 약단지를 빌려 감로수를 부어 주기를 바라옵니다. 삼계를 옹호하는 무리가 모두 경복의 상서로움을 맞게 하시고, 온 절의 예불하고 수행하는 스님들에게 다시 전염되는 근심이 없게 하소서. 간절한 뜻으로 황공하게 삼가 글을 올립니다.


010_0450_a_01L於先生何有哉吾願先生勿多於
010_0450_a_02L勿小於內非其人勿傳則道可全
010_0450_a_03L於是天一子悚然改謝曰至矣
010_0450_a_04L友之言昔韓昌黎喜爲文辭作師說
010_0450_a_05L爲師當世而天下靡然隨之性學不復
010_0450_a_06L豈亦孟子所謂大患者非耶日余特
010_0450_a_07L以筆硯餘滴師友於人者良愧耳
010_0450_a_08L改自號日硯滴不復與世相接焉

010_0450_a_09L

010_0450_a_10L竈祭祝

010_0450_a_11L
竈君司命死生由之庵僧迎新疾病
010_0450_a_12L憂矣用醫劑而莫及乃祈禱之伏以
010_0450_a_13L病僧某雲遊之人經行之士叅師八
010_0450_a_14L百餘里生年二十五春一鉢生涯
010_0450_a_15L風永息心海六時禮念慧月長照性天
010_0450_a_16L豈謂二竪之侵遽作旬日之痛寒熱進
010_0450_a_17L退鬼崇天行之難明粥飮廢除保命
010_0450_a_18L回生之何望伏乞某僧三生報債
010_0450_a_19L刼罪因一時消滅於烘焰之中六腑調
010_0450_a_20L和於湯食之除權施忿怒之威柄掃除
010_0450_a_21L魔妖仰借觀音之藥壺傾斟甘露
010_0450_a_22L界擁護之衆咸作慶福之祥一堂焚修
010_0450_a_23L之僧更無傳染之患不勝恳意主臣
010_0450_a_24L謹疏

010_0450_b_01L
화봉 화상 위답록 후華峯和尙位畓錄后
무술년(1778) 가을 9월 11일에 우리 화봉華峯 화상께서 장차 입적하려 하실 때 수전 여덟 두락의 땅을 거두어, 거주하신 안심암安心庵의 스님으로 하여금 화상의 열반일에 제사 지내는 계책으로 삼았다. 이윽고 문인 봉악鳳岳 태공泰公이 그 일을 길게 전하고자 책에 쓰고 아울러 기일에 임하여 제사하는 절차를 기록하였다. 또 행초行草로 된 한 장의 글을 써서 나로 하여금 그 뒤에 서술하게 하였다. 나와 화상은 법문의 숙질간이 되어 여러 해를 친히 모셨으니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가 없다.
삼가 살피건대, 화상의 법휘法諱는 성일性一이고 호는 화봉인데 또한 반월伴月이라고도 한다. 속성은 정씨鄭氏요, 본관은 부여로서 집안 대대로 청렴하고 밝게 빛났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산에 들어가 명준明俊 장로를 만나서 삭발하였다. 서교西敎(불교)를 널리 배워 마침내 용암龍巖의 의발을 전수받았으니, 용암은 곧 회당晦堂의 뛰어난 제자이다. 회당은 우리나라의 종법을 중흥시킨 이로서 당시의 제자들이 모두 뛰어나지 아니한 자가 없었다. 교문敎文의 뜻이 어려운 곳에 이르면 스님께서 홀로 날카롭게 헤치고 풀어 주셨다. 말년에는 구학口學97)이 수고롭기만 한 것을 알고 강의를 그만두고 참선에 전념하셨으니, 그 경지를 비록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셨으나 일찍이 영명永明 스님의 ≺산거山居≻ 율시 50여 편에 화답하였으니 법을 아는 자가 소중히 여겼다. 내가 일찍이 묻기를 “도에 드는 과정과 절차는 무엇을 우선해야 합니까?” 하자, 스님이 높은 목소리로 일갈하셨다. 또 묻기를 “산악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는 어떠합니까?” 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요히 무기無記에 빠지게 되니 귀가鬼家의 활계이다.”라고 하셨다. 또 묻기를 “어떤 것이 고요한 가운데 비추는 경지입니까?” 하니,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어지럽게 달리지 말지어다.”라고 하셨다. 오호라, 나의 어리석음이여. 스스로 깨달아 들지 못하니 간절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매번 이와 같으셨다.
무술년 가을에 내가 덕유산으로부터 와서 알현하였는데, 화상께서 손을 잡고 이르시기를 “내가 어젯밤 앉아서 관세음보살을 염원하며 죽을 때를 알고자 하였다. 꿈에 큰 개가 발뒤꿈치를 물어서 깨어났으니 죽어서 돌아갈 때가 되었는가 보다.” 하시고

010_0450_b_01L華峯和尙位畓錄后

010_0450_b_02L
戊戌秋九月十有一日我華峰和尙
010_0450_b_03L示寂錄水田八斗地令所㞐安心庵
010_0450_b_04L以爲和尙涅槃日祀事之計旣焉門人
010_0450_b_05L鳳岳泰公欲壽其事書之卷並錄忌
010_0450_b_06L辰位啣之節又爲行草一紙敎余叙其
010_0450_b_07L余於和尙爲法門叔侄親奉瓶巾
010_0450_b_08L亦多年所義不敢辭謹按和尙法諱
010_0450_b_09L性一號華峰亦曰伴月俗姓鄭氏
010_0450_b_10L扶餘家世淸顯云幼失怙恃入山遇
010_0450_b_11L明俊長老剃髮愽學西敎遂傳龍巖衣
010_0450_b_12L龍巖即晦堂之高足也晦堂爲東國
010_0450_b_13L重興宗法一時大衆莫不快鷹俊鶻
010_0450_b_14L而至於文義盤根處師獨擅游刃之名
010_0450_b_15L末年知口學爲勞屏講專禪其所造詣
010_0450_b_16L雖不自言而甞和永明山居律五十餘
010_0450_b_17L識法者重之余甞問入道程節
010_0450_b_18L何爲先師高聲一喝又問不動如嶽時
010_0450_b_19L如何師曰凝然無記鬼家活計又問
010_0450_b_20L如何是寂中照師曰且莫亂走嗚呼
010_0450_b_21L余之懵也自不能悟入而其老婆諄諄
010_0450_b_22L則每如是戊戌秋余自德裕來謁和尙
010_0450_b_23L執手而謂曰吾昨夜坐間念觀世音
010_0450_b_24L欲知謝報之期夢大犬嚙跟而覺葉落

010_0450_c_01L얼마 후에 병을 보이시고 편안히 앉아서 떠나시니, 몸의 빛은 금산金山과 같았다. 수는 77세였다. 오호라, 기이하도다.
태공이 몸소 상제喪制를 행하여 안심동安心洞의 경원庚原(서쪽 들)에 탑을 봉안하였다. 퇴운退雲과 묘한妙閑이 선을 전수받았다. 혹자가 묻기를 “화상의 평생 공부가 이와 같이 불우함은 어찌 된 것인가? 죽은 후의 일에 마음을 구구하게 썼으니 속세의 사람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니, 내가 말하기를 “아, 우리 세존께서는 허공을 체성으로 삼고 유상有相을 허망하다 하시었다.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실 때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남겨 불상과 탑을 일으켜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고 불사를 일으키게 하셨으니 어찌 명리를 공경하여 그러했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계품」에 일일이 이르기를 효순孝順의 마음을 발한다 하였으니, 화상이 여기에 구구히 마음을 둔 것도 그 또한 훗날의 사람들이 효순한 마음으로 돌아가 그치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심암은 회계현 서쪽 20리에 있으니 오늘날에는 지곡사智谷寺98)에 소속되어 있다.

소疏
정사년 6월 일 원자 탄일의 불공소옥천사에서 축원함(丁巳六月日元子誕日佛供疏玉泉寺爲祝)
대각세존大覺世尊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비원으로 꽃비 내리는 하늘에서 강림하시니 사문沙門인 신은 임금을 축복하는 정성이 번개가 둘러싼 날99)보다 간절하여, 이에 조그만 글솜씨로 우러러 성수의 만년을 축원합니다.
저희 제자들은 야학野鶴의 한가한 마음과 미물 같은 천한 자취로 사민四民(사농공상士農工商)의 밖에 처하여, 다행히 어람御覽하시는 종이를 갖추어 바치고 삼보三寶(불법승佛法僧)의 가운데 욕되게 있어 공경히 내교內敎의 향화를 받듭니다. 목어와 범패로 사흘을 창화하니 승속의 보고 듣는 자가 만인이라,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태평의 상징이 있으니 정성이 지극하면 소리와 메아리처럼 응합니다.
바라오니, 성상 전하께서는 옥체가 강녕하사 만세토록 늙지 않고 항상 새로우시며,

010_0450_c_01L歸根此其時歟俄而示微疾晏然坐
010_0450_c_02L身色如金山壽七十七嗚呼異哉
010_0450_c_03L泰公躬執喪制奉塔于安心洞之庚原
010_0450_c_04L退雲妙閑傳其禪或問和尙平生工夫
010_0450_c_05L果如是不偶區區身後殆乎世諦
010_0450_c_06L人斯余曰吁我佛世尊以虛空爲軆
010_0450_c_07L有相爲虛妄雙樹之間遺敎弟子
010_0450_c_08L起塑塔聽人天供養而作佛事豈有
010_0450_c_09L名利恭敬而然也故菩薩戒品一一皆
010_0450_c_10L發孝順心和尙之所以區區於此
010_0450_c_11L其亦庶幾後之人歸之於孝順之心而
010_0450_c_12L止矣安心庵在會稽縣西二十里今屬
010_0450_c_13L智谷寺

010_0450_c_14L

010_0450_c_15L

010_0450_c_16L丁巳六月日元子誕日佛供疏玉泉寺
爲祝

010_0450_c_17L
大覺尊度生悲願顒臨於花雨之天
010_0450_c_18L門臣祝君心誠切懇於電繞之日爰憑
010_0450_c_19L一毫之微善仰延萬歲之聖齡伏念弟
010_0450_c_20L子等野鶴閑情糞虫賤跡居四民之
010_0450_c_21L幸備御覽之剡藤忝三寶之中
010_0450_c_22L奉內敎之香火魚梵和昌於三晝緇白
010_0450_c_23L觀聽者萬人天理無私太平有象
010_0450_c_24L誠之極聲響之從伏願聖上殿下

010_0451_a_01L심기가 맑고 상쾌하여 짧은 시간에 물약勿藥의 효험100)이 빠르며, 성자신손이 천년을 이어 반석처럼 편안하고 임금님의 교화와 빛이 온 나라 끝까지 영원히 번창하기를 축원합니다.
왕비 전하는 수명이 멀리 만세에 짝하시고 덕은 우러러 귀의하는 억조창생에게 덮이소서.
동궁 저하는 만백성의 환호 속에 억만년을 오늘처럼 장존長存하시고 삼시의 경찬慶讚 속에 임금님의 밝은 조정에 길이 임하여지이다.
대왕대비 전하는 동방의 성후聖后요, 내궐內闕의 어버이시라 당년에 태양을 도와 조선이 이에 극락국이 되었으며 영원히 소해小海(세자)를 옹호하여 옥전玉殿에 길이 마니摩尼의 주렴이 드리워지이다.
혜경궁惠慶宮 저하는 경복慶福 육순을 누리신 후에 다시 몇천의 육순을 누리소서.
가순궁嘉順宮 저하는 인수仁壽를 백세 누리신 후에 다시 몇십의 백세를 더하소서.
다시 바라오니, 선왕·선왕비·열성列聖의 영가께서는 구품의 연화대에 부처님을 뵙고 득도하시고, 시방세계에 삼연三緣101)을 따라 강생하시기를 제자들은 간곡히 기도합니다.

을미년 6월 불공소(乙未六月佛供疏)
밝은 성품이 허공의 달과 같이 법신을 나타내시니 사생四生이 슬피 우러르며 나아가고, 성스러운 원자元子는 하늘이 내린 영명한 자질로 만백성이 받들어 환호합니다. 오성五星102)이 해동에 모이고 세성歲星103)이 동북쪽에 열 번 도니, 이에 가지加持104)의 과科를 의지하여 더욱 무도舞蹈의 정성을 바칩니다. 이에 어전에서 차와 향을 주시니 팔부八部의 신령105)이 옹호하고 용장龍藏의 보축寶軸을 삼시에 목어와 범패로 펼치니 감응이 어찌 더디겠습니까? 신묘한 공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적이 생각하니, 세법이 불법이요 인심이 성인의 마음인지라. 일찍이 인아가 어찌 있으리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부처님의 법도가 아님이 없으니

010_0451_a_01L體康寧不老長新於萬歲萬萬歲膈氣
010_0451_a_02L淸快勿藥速效於片時更片時聖子神
010_0451_a_03L累千歲而盤泰堯風舜日極八域
010_0451_a_04L而永昌王妃殿下壽配萬歲之遐長
010_0451_a_05L德被兆民之歸仰東宮邸下萬姓歡呼
010_0451_a_06L億千歲長存今日三時慶讃九五期
010_0451_a_07L永臨明朝大王大妃殿下東方之聖后
010_0451_a_08L內闕之神堯扶太陽於當年朝鮮乃爲
010_0451_a_09L極樂之國擁小海於遐刼玉殿長垂摩
010_0451_a_10L尼之簾惠慶宮邸下慶福六旬之後
010_0451_a_11L更享幾千六旬嘉順宮邸下仁壽百歲
010_0451_a_12L之餘又加幾十百歲復伏願先王先王
010_0451_a_13L妃列聖仙駕九品蓮坮見諸聖而得道
010_0451_a_14L十方世界任三緣而降生弟子等
010_0451_a_15L任懇禱激切之至

010_0451_a_16L

010_0451_a_17L乙未六月佛供疏

010_0451_a_18L
皎性空月現法身赴四生之悲仰聖元
010_0451_a_19L子天縱英質戴兆民而歡呼星五聚於
010_0451_a_20L海東歲十周於震北是仗加持之科
010_0451_a_21L倍伸蹈舞之誠茲者御賚茶香八部神
010_0451_a_22L祗之護擁龍藏寶軸三時魚梵之唱宣
010_0451_a_23L感應奚遲神功叵測窃惟世法即佛法
010_0451_a_24L人心惟聖心曾我何有兮不識不知

010_0451_b_01L이를 따르고 본받습니다.
바라오니, 주상 전하께서는 성체가 만년을 길이 강녕하시고 지극한 덕이 천세에 두루하여 북궐에 삼대三坮의 춤106)을 바치고 남풍에 오현금107)을 연주하소서.
왕비 전하는 은혜가 동국을 덮고 수명이 남산과 나란하며, 세자를 잘 인도하시고 만민이 우러러 받들어지이다.
원자궁元子宮 저하는 복해福海가 만 리 멀리 왕양하고, 수산壽山이 천추에 높이 솟아 구름을 보면 풍우가 순조하고 해를 보면 강과 바다가 맑고 편안하여지이다.
대비 전하는 성수聖壽가 억만의 시간보다 더하시고 인덕이 삼천세계에 전해져서, 천조天竈(하늘의 부엌)에서는 무우산無憂散(근심 없는 약)을 두루 전하고 선파仙婆(신선 할미)는 항상 불로의 영단을 바쳐지이다.
혜경궁 저하는 만년을 장수하시어 항상 오늘같이 늙지 아니하고, 백복을 장엄하여 영원히 태화太和하여, 서왕모西王母(곤륜산의 여신)가 공양의 정성을 다하고 마야부인이 방외의 교유를 맺어지이다.
가순궁 저하는 백년의 수에 다시 다함이 없는 수를 더하시고, 많은 자손의 문에 계속 빛나는 군자를 탄생시켜 저 우임금의 도를 열어 우리 원자를 보호하소서.
다시 원컨대 문무백관이 임금님께 받은 직책을 따라 행하고, 농공의 만백성이 모두 왕의 공을 받들어 불일佛日이 영원히 어두운 길에 비치고 선풍禪風이 밝은 세상에 펼쳐지기를 바랍니다.

기미년 9월 대전 탄신일 불공소(己未九月大殿誕日佛供疏)
부처님의 공덕은 헤아리기 어렵고 임금님의 은혜는 망극합니다. 일편단심으로 오체를 던져 귀의하니 삼단三壇의 스님이 시방에서 와 모입니다. 때는 성절聖節 만세의 48년 맑은 가을 9월 22일로 향연이 삼천세계에 두루 퍼지고, 자비의 비가 백억의 공신空身에 내립니다.

010_0451_b_01L莫非爾極兮乃順乃則伏願主上殿下
010_0451_b_02L聖體長寧於萬年萬萬年至德周翕於
010_0451_b_03L千世千千世北闕獻三坮之舞南風奏
010_0451_b_04L五絃之琴王妃殿下恩庇東國壽齊
010_0451_b_05L南山啓生地底之雷環供星中之月
010_0451_b_06L元子宮邸下福海汪洋萬里之外
010_0451_b_07L有萬里壽山高屹千秋之上又加千
010_0451_b_08L望之雲兮雨順風調就之日兮
010_0451_b_09L淸海晏大妃殿下聖壽長於億萬刼波
010_0451_b_10L仁德傳於三千世界天竈偏煎無憂之
010_0451_b_11L仙婆常獻不老之丹惠慶宮邸下
010_0451_b_12L壽考萬歲而恒今無老莊嚴百福而永
010_0451_b_13L後太和王母盡厨中之誠摩耶結方外
010_0451_b_14L之誼嘉順宮邸下百年之壽更加無
010_0451_b_15L盡仁年千子之門連生有斐君子
010_0451_b_16L彼禹道護我元良然後願文武百僚
010_0451_b_17L率奏堯職農工萬姓咸戴舜功佛日
010_0451_b_18L永曜昏衢禪風庶振明世

010_0451_b_19L

010_0451_b_20L己未九月大殿誕日佛供疏

010_0451_b_21L
佛德難思君恩罔極一片丹心投歸
010_0451_b_22L五體三壇白足來集十方時維聖節
010_0451_b_23L萬歲之四十八年淸秋九月之二十二日
010_0451_b_24L香烟布遍三千世界慈雨降臨百億空

010_0451_c_01L큰 종을 울리니 이에 소리와 메아리의 감응이 있고 지혜의 빛은 작위作爲가 없으니 어찌 여탈與奪의 사사로움이 있겠습니까?
바라오니, 주상 전하께서는 옥체가 길이 강녕하시고 성수가 한없으시며, 복성이 동방에 모여 먼 나라가 도성에 조공하고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와 서맥瑞麥이 전야에서 익어지이다.
왕비 전하께서는 수가 만년에 짝하고 덕이 사방을 덮으며, 세자를 보호하여 해악의 신령이 오직 왕명에 귀의하게 하며, 내칙內則(궁중의 법도)을 거듭 밝혀 여염의 백성이 모두 바른 규범을 알게 하여지이다.
원자궁 저하는 탄생 10세에 천추千秋를 축수하오니, 널리 어진 덕이 알려져 중생의 스승이 되고 태평 시대에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 노래하게108)하소서.
대비 전하께서는 성덕이 천년에 전해지고 인수仁壽를 만년을 누리시어, 생령의 위에 모두 세상을 제도하는 인군이라 칭송하고 불법 가운데에 영원히 대권보살大權菩薩이 되소서.
혜경궁 저하께서는 우리의 성모聖母이시라. 저 선인宣仁 태후109)보다 나으시니 일생을 마음 닦아 길이 한없는 복을 누리시고, 삼시에 올리는 음식이 모두 불로不老의 단약丹藥이 되어지이다.
가순궁 저하는 인仁이 태사太姒110)보다 낫고 덕은 강원姜嫄111)에 짝하시니, 우리의 세자를 낳으시어 진실로 방국의 근본을 세우시고 백성의 부모 되었는지라 송죽松竹의 푸른 기운을 축원하여 바칩니다.
다시 바라오니, 선왕·선왕비·열성 선가列聖仙駕께서는 삼십삼천에 차례로 왕 노릇 하시고 신명이 백천만겁 나라를 도우소서.
다시 원하오니, 종실의 제궁은 모두 수복壽福을 증장增長하고 문무백관은 다 충성을 바치기를 바랍니다.

경신년 2월 2일 책봉 때의 불공 경찬소(庚申二月初二日册封佛供慶讃疏)
성스러운 원자께서 탄생한 지 11년에 저궁儲宮(세자)으로 책봉되시니 우리의 국조國祚가 만억년을 이어 갈 반석의 터를 굳게 세웠습니다. 이에 향화의 수승한 복을 의지하여 견마犬馬의 작은 정성을 바칩니다. 생각건대 제자들은

010_0451_c_01L洪鐘任扣爰有聲響之報慧鑑無
010_0451_c_02L何曾與奪之私伏願主上殿下
010_0451_c_03L體長寧聖壽無盡福星東聚重譯貢
010_0451_c_04L於畿城薰風南來瑞麥登於田野
010_0451_c_05L妃殿下壽配萬歲德被四方保護東
010_0451_c_06L海岳神祗惟歸王命申明內則
010_0451_c_07L閻下賤咸知正閨元子宮邸下誕生
010_0451_c_08L十歲祝壽千秋普聞仁德衆生之師
010_0451_c_09L太平謳歌吾君之子大妃殿下聖德千
010_0451_c_10L仁壽萬年爲生靈上咸稱濟世仁
010_0451_c_11L於佛法中永爲大權菩薩惠慶宮
010_0451_c_12L邸下是我聖母邁彼宣仁一生修心
010_0451_c_13L長享無疆之福三時尙食皆爲不老之
010_0451_c_14L嘉順宮邸下仁逾太姒德匹姜嫄
010_0451_c_15L誕我嗣君固樹邦國之大本爲民父母
010_0451_c_16L祝獻松竹之長春復伏願先王先王妃
010_0451_c_17L列聖仙駕三十三天次第分王百千
010_0451_c_18L萬刼神明佑國然後願宗室諸宮
010_0451_c_19L增壽福文武百僚盡輸忠良

010_0451_c_20L

010_0451_c_21L庚申二月初二日册封佛供慶讃疏

010_0451_c_22L
聖元子誕生之一十一歲册封儲宮
010_0451_c_23L國祚綿歷於萬億萬年樹固盤石爰仗
010_0451_c_24L香火之勝福用陳狗馬之微誠伏念弟

010_0452_a_01L태평 시대를 만나 재법齋法에 엄숙히 나아갑니다. 향과 등을 나열하니 엄연히 천상의 삼광三光(일·월·성)과 같고, 차와 음식을 아울러 진설하니 인간의 오미五味를 다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정성으로만 감응하는 것이니 일에 임하여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축원하오니, 주상 전하께서는 성수 만년을 누리시고 옥체가 항상 강녕하여 늙지 않으시고, 나라가 영원히 태평 시대를 즐기기를 바랍니다. 이에 극락세계의 무량복수불께 화남和南(경례敬禮)합니다.
축원하오니, 왕비 전하는 수가 만년을 누리시어 덕은 태음太陰의 주군보다 뛰어나고 은혜는 창생을 덮는 어머니가 되소서. 이에 유리세계 약사여래불께 화남합니다.
축원하오니, 세자 저하께서는 천추를 누리시어 백억세계 성신聖身과 80종의 호상好相으로 춘궁에 책명되니 천추가 오늘 같고 장차 우리나라로 하여금 만세에 후천세계를 열게 하소서. 이에 영산 학수靈山鶴樹의 상주불멸 능인能仁여래불께 화남합니다.
축원하오니, 대비 전하는 만세의 수를 누리시어 저성儲聖(세자)을 극락국으로 인도하시고, 백성들을 초췌하고 병든 곳에서 구제하시며, 호불護佛의 힘은 마야부인보다 더하고 다스림의 공은 선인 태후도 미치지 못하게 하소서. 이에 보문普門을 나타내 보이시고 원력願力이 넓고 깊은 관세음자재보살마하살께 화남합니다.
축원하오니, 혜경궁 저하는 만년의 수를 누리시어 덕은 삼조에 흡족하여 의를 좋아하는 사람마다 충군애국하고 은혜는 팔방을 덮어 선을 향하는 집집마다 염불 염승케 하소서. 이에 삼매를 억념하고 부처님을 도와 중생을 제도하시는 대위세大威勢보살마하살께 화남합니다.
축원하오니, 가순궁 저하는 천추의 수를 누리시고 때에 벼에 아홉 이삭의 상서가 있어 계속 수많은 자손이 번성하고, 오래 백복의 인연을 심어 억조의 백성이 모두 받들어지이다. 이에 동자들을 구하여 죄를 없애고 장수하게 하는 무진의보살마하살께 화남합니다.
축원을 마치고 삼보에 예를 올려 만세의 세존께 회향하고,

010_0452_a_01L子等遭遇聖明肅詣齋法香燈互列
010_0452_a_02L儼若天上之三光茶饌交陳備盡人間
010_0452_a_03L之五味顧乃惟誠所格庶幾即事而眞
010_0452_a_04L伏祝主上殿下聖壽萬歲玉體長寧不
010_0452_a_05L國界永樂太平是故和南極樂世界
010_0452_a_06L無量福壽佛伏祝王妃殿下壽齊年
010_0452_a_07L邁太陰之君恩庇蒼生之母是故和南
010_0452_a_08L琉璃世界藥師如來佛伏祝世子邸下
010_0452_a_09L壽千秋百億界聖身八十種好相
010_0452_a_10L命春宮千秋今日將使東國萬世後
010_0452_a_11L是故和南靈山鶴樹常住不滅能仁
010_0452_a_12L如來佛伏祝聖大妃殿下壽萬歲導得
010_0452_a_13L儲聖於極樂之國濟活羣氓於凋瘵之
010_0452_a_14L護佛之力摩耶不如化理之功
010_0452_a_15L仁莫及是故和南普門示現願力弘深
010_0452_a_16L觀世音自在菩薩摩訶薩伏祝惠慶宮
010_0452_a_17L邸下壽齊年德冾三朝好義人人忠
010_0452_a_18L君愛國恩被八域嚮善家家念佛念僧
010_0452_a_19L是故和南憶念三昧助佛度生大威勢菩
010_0452_a_20L薩摩訶薩伏祝嘉順宮邸下壽千秋
010_0452_a_21L禾九秀之瑞連生千子而萬孫久樹百
010_0452_a_22L福之因咸戴兆民又億姓是故和南
010_0452_a_23L救諸童子滅罪長壽無盡意菩薩摩訶薩
010_0452_a_24L祝願已三寶禮回向于萬歲尊更有

010_0452_b_01L다시 신묘다라니를 두어 삼가 반야바라밀을 염송합니다.

관음 불공 축을사년(1785) 3월에 칠불산 아래에 도적들을 잡는 관리가 말씀하기를, “승려도 또한 백성이니 마땅히 힘을 합쳐 도적을 잡아야 한다. 너희들은 어찌 부처님의 힘을 빌려 국사를 돕지 아니하느냐?”고 하기에, 곧 대답하고 24일부터 시작하여 약 7일 기한으로 공경히 기도하였다.(觀音佛供祝乙巳三月七佛山下。 妖賊誅捕官敎曰。 僧亦民也。 當同心捕賊。 汝等何不祈佛力。 以助國事。 即唯唯。 自二十四日爲始。 虔禱約七日爲限。)
모년 모월 모일에 제자 아무개 등은 삼가 임금의 명을 받든 관리의 가르침을 받들어, 재계목욕하고 정성으로 향과 연등과 차를 갖추어 감히 대성령大聖靈이신 중생의 고난을 구하시는 관세음보살님께 아룁니다.
적이 생각건대, 온 천하가 임금님의 땅이 아님이 없어 부처님께 기도하여 세상을 돕는 것은 우리 중들에게 있습니다. 태평 시대 하늘의 태양이 비추는 때에 문성文成과 난대欒大112)의 무리가 감히 불법不法을 저지르고 개나 쥐 같은 좀도둑 떼가 불순한 마음을 낼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이제 임금님이 급히 체포하라 명하시어 사신이 오셨으나, 산에 오르고 숲에 숨어들어 아득히 실정을 알지 못한지라 노심초사하여 직분을 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하물며 의심난 자를 신문하고 유사한 자를 체포하니, 무고한 백성이 혹은 고문과 형벌을 받아 날을 지체하고 일하는 많은 장정들이 수고로움을 이기지 못하니 가장 슬픈 일입니다. 부득이 구제할진댄 간흉과 도적을 속히 체포하여 양민을 보호하고, 죄지은 자를 처벌하여 나라와 시대에 복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불도가 태평 시대의 다스림에 보탬이 있게 하고 왕신王臣이 불법을 외호할 수 있도록 간절히 비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겠습니다. 화남.

한화록문답閑話錄問答
칠불암에서 상당하여 당승이 묵언하는 연유를 물은 데 대하여 대답하다(七佛上堂答堂僧嘿言來由)
어느 날 밤 재를 마치자 선승들이 손을 모아 나를 강사로 맞았다. 그들이 묻기를 “제가 다행히 여기에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당제堂制에 묵언하라 하니 감히 유래를 묻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과문하여 알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지당知堂(당의 주지) 스님이 벽의 글을 가리키며 나에게 눈짓하였는데 ‘100번 싸워서 100번 이기는 것이 한 번 참는 것만 못하고,

010_0452_b_01L神妙陀羅尼謹念般若波羅密

010_0452_b_02L

010_0452_b_03L觀音佛供祝乙巳三月七佛山下妖賊誅
捕官敎曰僧亦民也當同心
010_0452_b_04L捕賊汝等何不祈佛力以助國事即唯
自二十四日爲始虔禱約七日爲限

010_0452_b_05L
年月干支弟子某等謹奉奉命官敎
010_0452_b_06L沐虔誠具香燈茶味敢告于大聖靈
010_0452_b_07L感救苦難觀世音菩薩伏以普天率土
010_0452_b_08L莫非王國祈佛佑世惟在我僧豈謂
010_0452_b_09L堯舜之時天日之下文成欒大之徒
010_0452_b_10L敢行非法鼠窃狗偸之類乃能生心
010_0452_b_11L今有聖命急捕使臣方臨登崗入藪
010_0452_b_12L杳莫知情焦思疲骨恐不效職況復
010_0452_b_13L問疑執似元元無辜或被拷刑淹日
010_0452_b_14L遲時役役多丁不勝勞撓最是慈悲
010_0452_b_15L拯濟之不得已焉莫如㐫奸贓賊之速
010_0452_b_16L捉宜也存良誅罪福國祐時旣僧道
010_0452_b_17L之有益治平庶王臣之外護佛法是爲
010_0452_b_18L懇激不勝和南

010_0452_b_19L

010_0452_b_20L閑話錄問答

010_0452_b_21L七佛上堂答堂僧嘿言來由

010_0452_b_22L
一夕齋罷禪衆叉手致余師講者
010_0452_b_23L役于此堂制嘿舌敢問來由余辭以
010_0452_b_24L寡聞不識知堂指壁書目余有曰

010_0452_c_01L만 마디 말이 만 번 마땅하더라도 한 번 침묵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는 구절이 있었다. 곁에 한 스님이 빙그레 웃었으나 나는 대꾸하지 아니하고 방장으로 돌아갔다. 그 스님이 후에 가만히 들어와 말하기를 “아까 지당이 벽의 글을 가리켰는데 화상께서 불응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몰랐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웃으며 말하기를, “스님께서 모른다고 한 것은 그 뜻을 취하지 않는 것이니, 만약 참아야 할 경계가 있고 침묵해야 할 말이 있다면 바로 도전할 시절이요, 말도 없고 경계도 없다면 이승二乘(성문·연각)의 단견斷見을 면치 못하니 스님께서 취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필경에 스님이 침묵하신 뜻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알지 못할 뿐이다. 옛날에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불법의 으뜸가는 진리(聖諦弟一義)를 묻자 달마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확연廓然하여 성제가 없다.’고 하셨다. 무제가 말하기를 ‘짐과 마주한 이는 누구인가?’ 하니, 달마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지 못하노라.’ 하시고 그 후로 9년을 면벽하며 말씀이 없으셨으니 이것이 곧 당제의 유래이다. 달마는 성조聖祖이신데도 오히려 알지 못한다 하셨으니 하물며 나는 식견이 범상하고 본 것이 적으니 어찌 감히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나의 알지 못함은 어리석음이요 달마의 알지 못함은 지혜이니, 지혜와 어리석음은 서로 다르나 알지 못함은 한가지라, 나는 또한 침묵할 뿐이다. 옛사람의 말에 ‘만약 침묵이요 오래되었다고 말하면, 자리에 앉아 헤아리며 소굴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니, 그대는 어떻게 달마의 뜻을 이해하는가?” 하였다. 스님이 곧 문답을 그쳤다.

벽송사에서 정토에 답한 설(碧松社答淨土說)
승려가 물었다. “서방정토가 사실입니까?”
답했다. “『아미타경』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것이다.”
물었다. “육조가 이르기를, ‘서방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디로 갈꼬?’라는 말씀을 왜 하셨습니까?”
답했다. “불제자가 삼보를 비방하면 시방세계에 참회가 통하지 않아 오직 지옥을 가게 된다.”
승려가 말했다. “그대의 말씀은 불제자를 서방 사람이라 하고, 삼보를 비방하는 것을 죄를 짓는다고 하시니 육조의 뜻입니까?”
답했다. “네가 어찌 꿈에선들 육조를 보겠느냐? 불조佛祖의 방편은 사람을 위하여 속박을 풀어 주는 것으로,

010_0452_c_01L戰百勝不如一忍萬言萬當不如一
010_0452_c_02L傍有一僧哂余亦不應歸方丈
010_0452_c_03L後從容入言向者知堂之壁書和尙不
010_0452_c_04L作麽意曰不識耳僧笑曰師之不
010_0452_c_05L識不取矣若道有境可忍有言可默
010_0452_c_06L政是挑戰之時節無言無境未免二乘
010_0452_c_07L灰斷宜乎師之不取畢竟師嘿在什麽
010_0452_c_08L曰不識而已昔梁武帝問聖諦第
010_0452_c_09L一義祖曰廓然無聖帝曰對朕者誰
010_0452_c_10L曰不識而後九年面壁無語此即堂制
010_0452_c_11L來由達摩以聖祖而猶日不識況余凡
010_0452_c_12L識寡見烏敢有說然余之不識愚也
010_0452_c_13L達摩不識聖也聖愚雖殊不識一也
010_0452_c_14L吾且嘿已矣古人云若言是嘿是良久
010_0452_c_15L據坐商量成窠臼子如何會得達摩意
010_0452_c_16L僧便休

010_0452_c_17L

010_0452_c_18L碧松社答淨土說

010_0452_c_19L
僧問西方淨土是事信否曰阿彌陀經
010_0452_c_20L世尊說也問只如六祖謂西方人造罪
010_0452_c_21L何徃爲什麽道曰釋子諦三寶十方
010_0452_c_22L世界不通懺悔惟地獄是徃僧曰子
010_0452_c_23L之言以釋子爲西方人謗三寶爲造罪
010_0452_c_24L豈六祖意耶曰汝何處夢見六祖佛祖

010_0453_a_01L아뇩보리阿耨菩提113)라 이름 부를 정해진 법이 없다. 육조가 일찍이 서방에 묶인 자를 풀어 주었는데 너는 또 서방이 없다 함에 매이니, 서방에 묶인 자는 오히려 부처님 전에 태어날 수 있지만 서방이 없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천제闡提114)이니 염라대왕의 귀졸鬼卒이 어찌 너를 놓아줄 것인가?”
승려가 물었다. “서방 십만억 국토라 함은 어찌 중생의 열 가지 악업을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열 가지 악업이 청정하면 극락이 현전할 것이니 하필 염불을 해야 합니까?”
답했다. “부처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생각할 것인가?”
승려가 말했다. “내가 본래 무념無念이라 다만 주리면 먹고 피곤하면 자는 것으로 충분하니, 억지로 염불하려고 한다면 이는 부처에 속박되는 것일 뿐입니다.”
답했다. “높기는 높으나 장물 도적이 노출되었도다. 너는 다만 먹고 자는 것만 생각하고 염불하지 못하니 어찌 호오好惡의 정이 아니며, 그 이른바 무념이라는 것도 다만 선한 생각이 없다는 것일 뿐이니, 분명히 너를 헤아려 보건대 어찌 다만 열 가지 악업일 뿐이겠는가?”
승려가 물었다. “『아미타경』은 오교115) 중에 어느 가르침에 해당됩니까?”
답했다. “지욱智旭116)의 소疏에 이르기를 원돈圓頓 중의 원돈교圓頓敎에 해당한다.”
승려가 놀라 말했다. “그릇되도다. 여래의 법 중에 원돈의 경전은 『화엄경』인데, 이 경전이 만일 원돈 중의 원돈의 가르침이라면 도리어 『화엄경』보다 낫습니까? 시험 삼아 논하건대 경 중에 한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하신 말씀이 어찌 그 종지가 아니며, 사바세계를 싫어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이 어찌 그 취지가 아니겠습니까? 그 인을 말하면 부처의 명호名號를 간직하여 지니고 과를 말하면 업을 청정하게 하여 부처를 본다는 것이니, 이는 마음의 번뇌를 거두어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닦는 인과경에 불과한지라 원돈의 끝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답했다. “그대의 말도 또한 한 가지 의리이니 어찌 여래의 일우법一雨法117) 가운데 모두 기연機緣을 따라 깨달음에 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잘 들을지어다. 여래의 법 중에 원돈의 경전은 화엄만 한 것이 없다. 종지로 삼는 것은 일진법계一眞法界요,

010_0453_a_01L方便爲人解縛無有定法名阿耨菩
010_0453_a_02L六祖甞解縛於西者汝又縛於無西
010_0453_a_03L縛於西者猶可生於佛前縛於無西
010_0453_a_04L闡提也閻羅鬼卒豈肯放汝乎

010_0453_a_05L
僧問西方十萬億國土豈不云衆生十
010_0453_a_06L惡業耶十惡業淨則極樂現前何必念
010_0453_a_07L佛爲曰佛若不念念者阿誰僧曰我
010_0453_a_08L本無念只知飢食困眠且足强欲念佛
010_0453_a_09L是佛縛耳曰高則高矣贓賊露也
010_0453_a_10L只能念食念眠不能念佛則豈不是好
010_0453_a_11L惡之情而其所謂無念者特無善念而
010_0453_a_12L分明數爾奚但十惡哉

010_0453_a_13L
僧問阿彌陀經五敎中何敎所攝曰智
010_0453_a_14L旭疏云圓頓中之圓頓敎僧愕曰謬哉
010_0453_a_15L謬哉如來法中圓頓之經乃華嚴是
010_0453_a_16L是經果若圓頓中之圓頓則反復勝
010_0453_a_17L於華嚴者乎甞試言之經中一心不亂
010_0453_a_18L豈非其宗耶厭娑婆生極樂豈非其
010_0453_a_19L趣耶言其因則豈非執持名號而言其
010_0453_a_20L果則豈非業淨見佛耶是不過攝心勞
010_0453_a_21L修欣厭因果之經圓頓裨末不顯曰君
010_0453_a_22L言亦自一義是豈如來一雨法中各自
010_0453_a_23L隨機悟入者非耶子諦聽如來法中
010_0453_a_24L圓頓之經莫如華嚴其所宗必一眞法

010_0453_b_01L일진법계란 곧 이 한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다. 이 한 진심 위에 또한 일심일진一心一眞의 사량도 없어야 바야흐로 진실불란眞實不亂의 경지에 믿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저 이르기를 ‘성해性海의 일미一味가 일진법계요, 일미도 또한 없어야 비로소 어지럽지 않다고 이르는 것이다.’라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말하건대 비록 화엄보다 낫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물었다. “일진법계라는 말은 본래 갖고 있는 심성을 곧바로 가리키는 것이요, 일심불란이라는 말은 바로 수행의 방편인데 어찌하여 한 가지 뜻으로 귀결합니까?”
답했다. “이 마음의 불변을 일一이라 하고 불망不妄을 진眞이라고 하나니, 불망불변이 바로 불란不亂인 것이다. 만약 동이同異의 지견을 짓는다면 여전히 육십이견118)의 근본이 되는지라 어지럽게 되지 않겠는가?”
승려가 물었다. “일심불란의 깊이를 헤아리는 것이 해롭지 않으니 예불과 염불로 부처를 구하는 것은 어찌 대혜 종고大慧宗杲119)가 이른바 ‘어리석은 이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답했다. “나는 차라리 대혜의 어리석은 이가 될지언정 너를 좇아 사특한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취사가 없는 곳에 망령되게 취사를 보며, 우열이 없는 곳에 망령되게 우열을 잡는다면 어리석은가 어리석지 않은가? 반드시 그대의 말과 같다면 대세원통大勢圓通의 문도 열성列聖의 기연에 있지 않고 『보현원왕경普賢願往經』도 요의了義라고 이를 수가 없다. 아, 업이 청정하면 부처를 볼 수 있다는 말이 어찌 사지事智가 현전함이 아니겠느냐? 원만한 공덕을 성취하면 열 소리를 써서 한 소리에 이르고, 그 지속의 한계를 말한다면 불과 하루에서 7일에 이르러, 이 과보를 버리면 곧 연화보좌에 앉아 내가 곧 미타彌陀요, 미타가 곧 나인지라 원돈 중에 원돈이라 한 것이 어찌 옳지 아니하랴.”
승려가 앞으로 나와 물었다. “저는 『화엄경』이 성품에 합당한 극진한 말씀이라고 여겨 항상 읽습니다. 이제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차라리 화엄을 버리고 『미타경』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까?”

010_0453_b_01L界也一眞法界者即此一心不亂
010_0453_b_02L此一眞心上亦無一心一眞之量方能
010_0453_b_03L信入眞實不亂之地如云性海一味
010_0453_b_04L眞法界一味相沉始名不亂也由此
010_0453_b_05L言之雖有過於華嚴亦可也問一眞法
010_0453_b_06L界之言直指本有心性一心不亂之言
010_0453_b_07L乃是修行方便豈可會同一義也曰此
010_0453_b_08L心之不變謂之一也不妄謂之眞也
010_0453_b_09L不妄不變政是不亂也若作同異知見
010_0453_b_10L依舊六十二見之本其欲不亂得乎
010_0453_b_11L曰一心不亂且不妨深淺商量至於禮
010_0453_b_12L念求佛豈大慧所謂愚人所爲耶曰吾
010_0453_b_13L寧作大慧愚人不願從若爲邪人
010_0453_b_14L於無取捨中妄見取捨無優劣中
010_0453_b_15L執優劣愚耶非愚耶必如君言大勢
010_0453_b_16L圓通之門不在於列聖機緣普賢願王
010_0453_b_17L之經不可謂了義已乎業淨見佛
010_0453_b_18L豈非事智現前而克就圓功則只消十
010_0453_b_19L至於一聲言其遲限則不過一日
010_0453_b_20L至於七日捨此一報便坐寶蓮我即
010_0453_b_21L彌陀彌陀即我其曰圓頓中之圓頓
010_0453_b_22L不亦宜哉

010_0453_b_23L
僧進問曰某甲自以華嚴稱性極談故
010_0453_b_24L常讀之今聞師言寧欲棄華嚴而讀

010_0453_c_01L
답했다. “괴롭도다, 사람의 마음이 열리지 않음이여. 그대가 화엄을 성에 합당한 경전이라 하니 다만 경전을 읽어 자성을 본다면 자성이 아미타요 경도 아미타라, 아미타 중에 화엄이 있고 화엄 중에 아미타가 있나니 어찌 애증을 내어 취사하는가?”
승려가 물었다. “8만 4천 방편은 한 알의 쌀과 같고, 염불의 방편은 도창都倉(나라의 큰 창고)의 곡식과 같다고 하니 이 뜻이 어떠합니까?”
답했다. “일체의 방편은 염불의 방편이요, 불佛은 총상總相120)이라, 염불의 방편은 도창의 곡식과 같은 것이다.”
승려가 말했다. “그렇다면 염불하는 사람은 만행萬行을 하지 않습니까?”
답했다. “만약 쌓인 곡식이 없다면 어찌 도창이라 부르겠느냐? 한 구절 아미타는 시是도 비非도 아니요, 계戒바라밀은 선정과 산란도 아니며 선禪바라밀은 깨달음과 미혹도 아니요, 혜慧바라밀은 가고 옴이 없어 절로 정토이다. 이와 같이 십도十道의 만행과 인과의 덕용이 무량무변아승기이기 때문에 아미타라고 부르는 것이니, 어찌 ‘염불하는 사람은 만행을 하지 않는다.’ 하는고?”
승려가 말했다. “그대가 논한 것은 자성미타입니다. 만일 서방미타의 명호만을 집지執持하는 자는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답했다. “네가 허공을 나누려고 한들 되겠느냐?”
승려가 물었다. “십념十念으로 왕생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 경전에 삼대아승기겁三大阿僧祇劫 동안 만행을 낱낱이 닦아야 바야흐로 보리를 증득한다고 하였는데, 염불하는 사람은 십념으로 왕생하여 문득 보리에 불퇴전한다고 하니, 인지의 수행은 이와 같이 작은데 과보를 얻는 것은 이와 같이 크니, 크게 이치에 맞지 않아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원컨대 해설하여 주소서.”
답했다. “이치상 실로 왕생하는 것은 다만 일념을 쓸 뿐이니 조사께서 이르기를, ‘한 생각 잊을 때에 분명히 또렷하여 아미타가 다른 곳에 있지 않도다.’라고 하였다. 십념이라고 이른 것은 곧 십세十世이니 현전 일념 위에

010_0453_c_01L彌陀經則可乎曰苦哉人情之不通也
010_0453_c_02L子謂華嚴稱性之經但讀得經見得性
010_0453_c_03L性是阿彌陀經亦阿彌陀阿彌陁中有
010_0453_c_04L華嚴華嚴中有阿彌陀何生憎愛取捨
010_0453_c_05L僧問八萬四千方便如一粒粟念佛方
010_0453_c_06L便如都倉之粟是意云何曰一切方
010_0453_c_07L便皆念佛之方便佛爲捴相故念佛
010_0453_c_08L方便如都倉之粟也僧曰然則念佛之
010_0453_c_09L不爲萬行乎曰若無積粟何名都
010_0453_c_10L一句阿彌中非是非非戒波羅蜜
010_0453_c_11L非定非亂禪波羅蜜非悟非迷慧波
010_0453_c_12L羅蜜無去無來自淨土也如是十度
010_0453_c_13L萬行因果德用無量無邊阿僧秖
010_0453_c_14L名阿彌陀何曰念佛之人不爲萬行也
010_0453_c_15L僧曰子之所論乃自性彌陁也如西方
010_0453_c_16L彌陁上執持名號者安能如是曰汝
010_0453_c_17L隔截虛空作麽

010_0453_c_18L
僧問十念徃生是意云何諸經中三大
010_0453_c_19L阿僧秖歷修萬行方證菩提念佛之
010_0453_c_20L十念徃生便不退菩提因修如其
010_0453_c_21L獲果如其大大甚逕庭不近人情
010_0453_c_22L願爲解說也曰理實徃生只消一念
010_0453_c_23L故祖師云一念忘時明了了彌陁不在
010_0453_c_24L別家鄕言十念者即十世也現前一

010_0454_a_01L이미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 삼세가 되고, 삼세가 각각 삼세를 갖추어 십세가 된다. 이와 같이 다함이 없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삼대아승기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십세와 삼기겁이 현전 일념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이르기를 ‘일념에 널리 무량겁을 보니 가고 옴도 없고 머무름도 없도다.’라고 하며, 또 이르기를 ‘구세, 십세가 상즉相卽하니 잡란치 아니하여 분별되도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념이 십념이요, 십념은 무량념無量念이니 뜻을 얻는 자는 잠깐 사이에 정각을 이루고, 오묘한 이치에 이르지 못한 자는 삼기겁을 낱낱이 수행하여야 비로소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니 십념왕생은 돈점의 근기를 포괄하여 거두고 간곡한 사실四實의 말이라, 다만 긍정하는 마음을 둘지언정 어찌 의심하고 꺼려하느냐?”
물었다. “염불문 가운데 오념五念121)을 그치고 오장五障122)을 통하며 오탁五濁123)을 맑게 하고, 신身·구口·의意의 삼업을 경계하며 동정動靜·어묵語默·오매寤寐를 전일하게 하여야 무심진여문無心眞如門에 든다고 하니, 과정과 절차가 번거롭고 세세하여 첩경을 얻어 문득 들지 못하니 수시垂示하여 주소서.”
답했다. “네가 첩경을 얻어 문득 들고자 하는 생각이 오장이요, 오탁이다. 너의 신·구·의의 업을 경계하고 너의 동정 등을 전일하게 하여 너의 뭇생각이 일어나지 않을 때에 이를 무심염불이라 부른다. 무심삼매로부터 극락의 정안正眼을 활짝 여는 것을 진여염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 구절 아미타는 일찍이 허다한 과정과 절차가 있지 아니하니 처음도 아미타요 끝도 아미타라, 추호의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일행진여삼매一行眞如三昧이다. 그대가 첩경으로 문득 들고자 한다면, 다만 아미타를 생각하고 부질없는 사량과 계교를 짓지 않는다면 거의 속이지 않으리라.”

삼교의 동이를 논하다(論三敎同異)

010_0454_a_01L念上已起未起是爲三世三世各具
010_0454_a_02L三世是爲十世如是無盡不可說故
010_0454_a_03L亦即三大阿僧祗刼也然此十世三祗
010_0454_a_04L不離現前一念故曰一念普觀無量刼
010_0454_a_05L無去無來亦無住又曰九世十世互相
010_0454_a_06L因不雜亂隔別成故一念即十念
010_0454_a_07L十念即無量念得意者彈指成正覺
010_0454_a_08L未至妙者歷修三祗大刼方證菩提
010_0454_a_09L然則十念徃生該收頓漸之機丁寧四
010_0454_a_10L實之語但辦肯心何苦疑難

010_0454_a_11L
問念佛門中停五念通五障淸五濁
010_0454_a_12L戒身口意一動靜語默窹寐然後入於
010_0454_a_13L無心眞如門程節煩𤨏未得捷徑頓入
010_0454_a_14L幸爲垂示曰汝欲捷徑頓入之念是障
010_0454_a_15L是濁故戒汝身口意一汝動靜等待汝
010_0454_a_16L衆念不能起時是名無心念佛從無
010_0454_a_17L心三昧中豁開極樂正眼是名眞如念
010_0454_a_18L佛也然一句阿彌陁未嘗有許多程節
010_0454_a_19L始也阿彌陁終也阿彌陁不容絲毫
010_0454_a_20L異念是乃一行眞如三昧也子欲捷徑
010_0454_a_21L頓入但念阿彌陁莫作閑思計較
010_0454_a_22L不相欺也

010_0454_a_23L

010_0454_a_24L論三敎同異

010_0454_b_01L
백련자가 일찍이 말하였다. “도는 하나인데 불·노·유로 나뉘었으니 노자도 부처요, 공자도 부처임을 알겠도다. 이 때문에 불교 가운데 인승人乘과 천승天乘이 있는데, 인승은 유교와 같고 천승은 도교와 같으니 회삼귀일會三歸一(삼교를 하나로 귀결시킴)의 요체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순되어 서로 부딪힘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 불도는 무쟁삼매無諍三昧로서 제일 바라밀을 삼으니 삼가 시속의 선비와 함께 감히 성인의 가르침을 의론하지 말지어다.”
혹자가 물었다. “삼교가 있어 온 이래로 공자도 성인이라 하고 부처와 노자도 성인이라 하니 누가 까마귀의 자웅을 알겠는가?”
내가 답했다. “나는 까마귀가 아니니 그대가 다만 십분 까마귀가 되어야 자웅을 알 수 있으리라.”
물었다. “삼교의 큰 뜻은 무엇을 으뜸으로 삼느냐?”
답했다. “불도는 마음을 밝히고 노자의 도는 기를 전일하게 하고, 유가의 도는 마음과 기 두 가지를 이해하고 소식消息하는 것이다.”
물었다. “불가는 마음을 오로지하고 노자의 도는 기를 오로지 하는데, 유가의 도는 두 가지를 보존하니 누가 온전하고 누가 치우친 것이냐?”
답했다. “하늘은 양이 주이지만 음이 없지 않고, 땅은 음이 주이지만 양이 없지 않으며, 사람은 음양을 받아 어긋나지 아니하니, 누가 치우치고 누가 온전한 것이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
혹자가 웃으며 말했다. “노불老佛의 도는 선유先儒가 자세히 배척하였다. 물과 불같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데, 너희 중들은 항상 견강부회하고 부화뇌동하려고 하니 이 때문에 허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답했다. “유가는 공자를 높여 사람이 있어 온 이래로 공자만 한 이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공자는 말하기를 ‘노자는 용과 같도다. 용은 깊은 연못에 자신을 잘 보존한다.’고 하니, 깊은 연못에 잘 보존한다고 함은 불가사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말하기를 ‘서방에 성인이 있는데 그 이름이 부처이다.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으며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따르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124)고 하니, 이는 공자의 말씀이다. 공자의 말씀이 이와 같은데 여러 유자들이 불로를 비난하니 과연 자신들이 공자보다 낫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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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蓮子嘗曰道一而佛而老而儒矣
010_0454_b_02L佛者老亦佛也儒亦佛也故佛敎中
010_0454_b_03L有人天乘人乘同於儒敎天乘同於老
010_0454_b_04L未至於會要則不免矛盾相格
010_0454_b_05L徒以無諍三昧爲第一波羅密謹毋以
010_0454_b_06L時士而敢議聖人之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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或問自有三敎來孔子聖也佛老聖也
010_0454_b_08L誰知烏之䳄雄曰吾非烏非烏云子但
010_0454_b_09L做烏得十分雌雄自可知也問三敎大
010_0454_b_10L以何爲極則曰佛道明心老道專
010_0454_b_11L儒道心氣二途理會消息之問佛
010_0454_b_12L專心老專氣儒則兩存孰全孰褊
010_0454_b_13L天才主陽未嘗無陰地才主陰未嘗
010_0454_b_14L無陽人才禀二儀而不悖未知孰褊孰
010_0454_b_15L何取何捨或者笑曰老佛之道
010_0454_b_16L儒闢之詳矣如水火之不相容也汝僧
010_0454_b_17L每欲附會雷同此所以不知其過也
010_0454_b_18L儒道宗於夫子自生民以來未有如夫
010_0454_b_19L子者然而曰老子其猶龍乎龍者
010_0454_b_20L于淵善于淵則不可思議之人也
010_0454_b_21L曰西方有大聖人其名曰佛不怒而威
010_0454_b_22L不令而行無得而稱焉此孔夫子之言
010_0454_b_23L夫子言之如是諸儒之詆佛老
010_0454_b_24L有賢於夫子者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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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 장실이 법어를 구한 데 대하여 답하다(賽瑞雲丈室求語)
여래께서 49년간 설법하실 때에 항상 먼저 서운瑞雲을 나타내시니 무심無心의 자애로운 비로 중생을 널리 적신다는 뜻이다. 이에 향운香雲·개운蓋雲·화운花雲·당운幢雲·무량불가설운망無量不可說雲網이 있어 무량불가설 제불을 공양하고 무량불가설 중생을 이롭게 제도하여 무등등 아뇩보리無等等阿耨菩提를 성취하니 상서로운 그 구름을 뉘라서 칭송할 수 있으리. 그렇지만 구름은 제불을 공양한다고 하지 않고 중생을 이롭게 제도한다고 말하지 않으니, 서운의 공덕은 더욱 미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법문의 아우 금봉錦峰에게 제자가 있어 법호가 서운이니, 무심으로 널리 적신다는 뜻이다. 영산회상 당시에 인천人天의 백만억 대중이 함께 서운 가운데에 있었는데 무엇이 상서이며 무엇이 구름인지 알지 못하였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여 세존께서 수고롭게 광장설廣長舌로 동설서설東說西說하고 횡설수설橫說竪說하셨으니 모두 서운의 빛과 그림자이다. 서운의 사람도 전혀 교섭이 없거늘 하물며 나의 거칠고 망령된 말을 어찌 서운이 구하는고? 서운은 심적암深寂庵 강실講室에 거주하다 물러나서 오로지 선지禪旨만을 구하고 있으니, 반드시 스스로 긍정하고 스스로 깨칠 날이 있으리라.

경암집 끝


010_0454_c_01L賽瑞雲丈室求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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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來於七七年間說法之時常先放瑞
010_0454_c_03L以其無心子雨普滋羣品也於是
010_0454_c_04L有香雲盖雲花雲幢雲無量不可說雲網
010_0454_c_05L供養無量不可說諸佛利濟無量不可
010_0454_c_06L說衆生成無等等阿耨菩提瑞乎其雲
010_0454_c_07L孰得以稱焉雖然雲未嘗言我爲供養
010_0454_c_08L諸佛雲未嘗言我爲利濟衆生此其瑞
010_0454_c_09L雲之德尤不可及也吾法門弟錦峰
010_0454_c_10L有弟子號曰瑞雲所以無心普滋之意
010_0454_c_11L靈山當日人天百萬億衆同在瑞
010_0454_c_12L雲中不知何者是瑞何者是雲有目
010_0454_c_13L如盲有耳如聾勞他世尊廣長舌相
010_0454_c_14L東說西說橫說竪說皆瑞雲之光影
010_0454_c_15L若瑞雲中人了沒交涉况余麁妄
010_0454_c_16L之語何爲瑞雲之所求哉瑞雲住深寂
010_0454_c_17L講室已而退㞐專求禪旨必有自肯
010_0454_c_18L自得者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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鏡巖集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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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없음으로 인해~있음을 두고 : 『老子』 11장에 이르기를,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들면 빈 공간이 있어야 방의 쓰임이 있다.(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라고 하였다.
  2. 2)법화삼매法華三昧 : 죄업을 참회하는 수법修法. 먼저 육시六時 오회五悔라 하여 아침·낮·해 질 녘·초저녁·밤중·새벽의 여섯 때로 참회·권청勸請·수희隨喜·회향·발원의 다섯 가지 참회를 닦는다. 이 삼매의 방법에는 신개차身開遮·구설묵口說默·의지관意止觀의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니고 앉는 두 가지를 개開하고, 머물고 눕는 두 가지를 차遮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대승경전을 외우고 다른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유상행有相行과 무상행無相行인데, 유상행은 『法華經』 「勸發品」에 의해 평상의 산란심으로 『法華經』을 외우며, 선삼매禪三昧에 들지 않고, 앉으나 서나 다니거나 일심으로 법화의 문자를 외우며, 밤낮 6시에 육근六根으로 지은 죄업을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무상행은 『法華經』 「安樂行品」에 의해 깊고 묘한 선정禪定에 들어가 육정근六情根을 관하여 실상삼제實相三諦의 정공正空에 달達하는 삼매인데, 글을 따라 관하는 것은 보현보살이 타는 육아백상六牙白象을 관하는 것을 말한다.
  3. 3)회당晦堂 : 회암 정혜晦庵定慧(1685~1741)의 당호. 화엄학에 정통한 교학의 대가로, 김천 불영산 청암사靑巖寺에 주석할 때 그의 문하로 300여 명의 학인이 운집하였다. 저서로 『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가 전한다.
  4. 4)사마천司馬遷 : 전한前漢 때 역사가로 『史記』의 저자이다. 무제武帝의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史記』를 집필하여 기원전 91년에 완성하였다.
  5. 5)안기생安期生 : 중국 고대의 신선 이름.
  6. 6)노오盧敖 : 중국 고대의 신선 이름.
  7. 7)서산西山 대사 : 조선 중기 고승인 휴정休靜(1520~1604)의 별호. 속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완산, 이름은 여신汝信이며,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서산 등이다. 백화도인白華道人·풍악산인楓岳山人 또는 묘향산에 오래 살아 서산 대사라는 별호로도 불렸다. 휴정은 법명이며 제63대 조사이다. 임진왜란 때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함께 승병을 일으켜 큰 전공을 세웠다.
  8. 8)경향庚向 : 갑좌경향甲坐庚向. 집터에서 갑방甲方을 등지고 경방庚方을 바라보는 방향, 즉 동쪽을 등지고 서쪽을 향하여 앉은 자리이다.
  9. 9)송운松雲 대사 : 조선 중기 고승인 유정惟政(1544~1610). 속성은 임씨任氏, 본관은 풍천, 이름은 응규應奎이며,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 당호는 사명당泗溟堂,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임진왜란 때 스승인 서산 대사와 함께 승병을 이끌어 큰 공을 세웠다. 법명인 유정보다 당호인 사명당으로 더 유명하다.
  10. 10)임좌壬坐 : 임좌병향壬坐丙向.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방향, 즉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말한다.
  11. 11)무릇 소상所相의~모두 허망하도다 : 『金剛經』에 이르기를, “모든 만물의 형상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하였다.
  12. 12)번와燔瓦 : 기와를 구움.
  13. 13)도의 큰~하늘에서 나왔다 : 중국 전한前漢 때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의 말이다. 『董仲舒百二十三篇』.
  14. 14)진양晋陽 : 오늘날의 경상남도 진주를 말한다.
  15. 15)기원祇園 : 기원정사祇園精舍(祇洹精舍)라고도 한다. 인도 중부 사위성舍衛城 남쪽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지은 절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설법하고 수도할 수 있도록 수달 장자須達長者가 기증하였다. 7층의 가람으로 웅장하고 화려하였는데, 당나라 현장玄奘이 그곳을 순례하던 당시에는 황폐하였다고 전한다.
  16. 16)화장해華藏海 : 화엄연화장華嚴蓮華藏의 세계로 불교 화엄 사상의 핵심이다. 현상계와 본체,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하여 끝없이 전개하는 약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17. 17)겸재謙齋 하河 선생 : 조선 중기 학자인 하홍도河弘度(1593~1666)를 말한다.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중원重遠이며, 겸재는 호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정성껏 치렀으며, 옛 성현을 기약하여 스스로 몸가짐을 엄숙히 하였다.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였고, 인조반정 후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18. 18)우禹·직稷 : 중국 고대 태평 시대를 열었던 순임금의 명신들이다.
  19. 19)위성渭城 : 장안 교외의 함양咸陽. 위수渭水에 임해 있기 때문에 위성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경상도 함양을 가리킨다.
  20. 20)한산寒山과 습득拾得 : 한산은 당나라 때 사람으로, 항상 천태 시풍현始豊縣 한암寒巖의 깊은 굴속에 있었으므로 한산이라 한다. 늘 국청사에 와서 습득과 함께 대중이 먹고 남은 밥을 얻어서 대통에 넣어 가지고 둘이 서로 어울려 한산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미친 듯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의 말은 불도佛道의 이치에 맞았고, 또 시를 잘하였다. 어느 날 태주 자사台州刺史 여구윤閭丘胤이 한암에 찾아가 옷과 약 등을 주었더니, 한산은 큰 소리로 “도적놈아, 이 도적놈아, 물러가라.” 하면서 굴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뒤로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한산·습득·풍간豊干을 삼성三聖이라 부르며, 또 한산을 문수보살의 재현이라 한다.
  21. 21)무주암無住菴 :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1 경상도 함양군 「佛宇」조에서는 무주암이 지리산에 있다고 하였다. “『補閑集』에 ‘승려 무기無己가 스스로 대혼자大昏子라 호하고 이 산에 숨었다. 장삼 하나로 30년 동안을 지냈고, 매년 겨울과 여름이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허리를 새끼 띠로 감아 묶고서 봄가을이면 배를 두드리며 산을 유람하는데, 하루에 서너 말 밥을 먹었다. 한곳에 앉으면 반드시 열흘이 넘었고, 일어나 걸으면서 게偈를 지어 크게 읊었다. 산중에 70여 개 암자가 있는데, 한 암자에서 한 끼씩 먹으면서 게 한 수씩을 남겼다.’고 한다.”
  22. 22)보조국사普照國師 : 지눌知訥(1158~1210). 속성은 정씨鄭氏, 호는 목우자牧牛子.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했다. 제자 수우守愚를 보내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를 중창하게 했다. 1200년(신종 3) 정혜결사를 거조사에서 길상사로 옮기고 이후 11년간 그곳에 머무르며 결사 운동에 정진했다. 1205년(희종 1)에 길상사가 준공되자 왕은 이름을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게 하고 가사를 하사했다. 이곳이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이다.
  23. 23)방장산方丈山 : 전라북도 정읍시와 고창군, 전라남도 장성군의 경계에 솟아 있다. 내장산의 서쪽 줄기를 따라 뻗친 능선 중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이다.
  24. 24)응진應眞 : 부처의 명을 받들어 세간에 영주永住하면서 정법正法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는다는 16인의 아라한을 말한다. 아라한은 ⓢ arhat의 음역으로, 세간의 대공양大供養을 받을 만한 성자라는 뜻이다.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막론하고 불교 최고의 과위果位를 얻은 자를 말하는데, 줄여서 나한羅漢이라 하고, 의역해서 응진이라고 한다. 불경이 한역漢譯된 이래로 대개 선종禪宗 사찰에서 신선의 모습으로 그 상을 조성하였으며, 이 십육나한에 달마다라 존자達磨多羅尊者와 포대 화상布袋和尙 혹은 강룡降龍·복호伏虎 두 존자를 합쳐서 십팔나한의 상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25. 25)벽송碧松 대사 : 조선 전기 승려인 벽송 지엄碧松智儼.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나 20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변방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으나 관직을 버리고 벽계 정심碧溪淨心 대사를 찾아 57세에 지리산에 입산하였다. 벽송의 법은 부용 영관芙蓉靈觀 선사에게 이어지고 그 법이 다시 청허 휴정, 즉 서산 대사에게 이어졌다.
  26. 26)벽계碧溪 : 조선 전기 승려인 벽계 정심碧溪正心(淨心). 금산 사람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구곡 각운龜谷覺雲에게서 법을 이었다. 조선 전기 불교가 억압당하자 황악산에 들어가 고자동 물한리에 살았다. 선禪은 벽송 지엄碧松智儼에게 전하고 교敎는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 전했다.
  27. 27)벽송암碧松庵 :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지리산 북쪽 칠선계곡 부근에 위치한 절이다.
  28. 28)주작朱雀 : 남쪽의 지세를 말한다.
  29. 29)괘방掛牓의 형국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아치가 많이 배출될 수 있는 지세를 말한다.
  30. 30)징사徵士 :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선비.
  31. 31)진감眞鑑 : 신라 후기 고승인 혜소慧昭(774~850)의 시호. 속성은 최씨, 전주 금마金馬 사람.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불법을 구하려는 뜻이 간절하였다. 804년 배를 타고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신감神鑑에게 출가하니, 얼굴이 검다 하여 흑두타黑頭陀라 불렸다. 810년 숭산 소림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앞서 당나라에 가 있던 도의道義를 만나 함께 다니다가, 도의는 먼저 귀국하고 스님은 종남산에서 3년 동안 지관을 닦은 뒤에 길거리에서 짚신을 삼아 3년 동안 오가는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830년 귀국하여 상주 노악산의 장백사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가서 화개곡의 삼법 화상三法和尙 난야蘭若의 옛터에 절을 지었다. 838년 민애왕이 즉위하여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혜소라 호하고, 다시 서울로 오도록 하였으나 가지 않았다. 뒤에 남령南嶺에 절을 지어 옥천사라 하고, 육조六祖의 영당影堂을 세웠다. 문성왕 12년(850)에 나이 77세, 법랍 41세로 입적하였으며, 헌강왕이 ‘진감眞鑑’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를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여 탑을 세웠다. 정강왕 때 옥천사를 쌍계사라 고치고, 최치원崔致遠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세운 국보 제47호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가 지금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에 전한다.
  32. 32)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 :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문장가. 자는 고운·해운海雲.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격문檄文을 써서 이름을 높였다. 저서에 『桂苑筆耕』, 『四六集』 등이 있다.
  33. 33)조남명曺南溟 : 조선 중기 학자인 조식曺植(1501~1572). 자는 건중楗仲(健中)이며, 남명南冥은 호이다.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저서에 『南冥集』, 『南冥學記』, 『破閑雜記』가 있고, 『海東歌謠』와 『靑丘永言』에 시조 3수가 전한다.
  34. 34)대동大同 12년 : 대동 10년이다.
  35. 35)자장慈藏 : 신라 시대 고승. 속성은 김씨金氏,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신라의 진골 소판무림蘇判茂林의 아들이다. 636년(선덕여왕 5) 왕명으로 승실僧實 등 제자 10명과 당唐나라로 가서 청량산淸凉山에서 문수보살 앞에 기도하고 가사袈裟와 사리舍利를 받았다. 그 뒤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에서 도를 닦고 화엄종華嚴宗의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 『大藏經』 1부와 불구佛具 등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분황사芬皇寺에 머무르면서 궁중에서 『大乘論』을, 황룡사皇龍寺에서 『菩薩戒本』을 강론하자 나라에서 대국통大國統을 삼아 승려들의 일체 규범을 맡게 하였다. 646년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여 계율종戒律宗을 펴는 한편 그곳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고 가사와 사리를 모시어 대중을 교화하고, 여러 곳에 사탑을 세웠다. 『華嚴經』을 강론하여 화엄 교법을 천명하였다.
  36. 36)도선道詵(827~898) : 통일신라 말기의 승려.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그의 음양지리설과 풍수상지법風水相地法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道詵秘記』 등이 있다.
  37. 37)의상義相(625~702) : 통일신라 시대 경상남도 양산 지역에서 활동하며 화엄종을 개창한 승려. 속성은 김씨이며,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서 계림부鷄林府 사람이다. 저서로 『華嚴一乘法界圖』 등이 있다.
  38. 38)철면자鐵面子 : 조선 중기 승려인 중관 해안中觀海眼(1567~?)의 별호. 전라남도 무안 출신.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신동이라 불렸다. 처음에 처영處英을 은사로 하여 득도하였으나 뒤에 휴정休靜의 문하에서 참학參學하여 심인心印을 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영남 지방에서 의승을 일으켰고, 전공을 세워 총섭摠攝이 되었다. 전란 후 지리산 화엄사에 있으면서 대화엄종주大華嚴宗主로서 법화法化를 폈다. 저서로는 『中觀大師遺稿』 1책, 『竹迷記』 1책, 『華嚴寺事蹟』 1책, 『金山寺事蹟』 1책 등이 있다.
  39. 39)옛 기록이~기록하지 않았다 : 철면자가 쓴 화엄사·금산사 사적기와 대흥사 사적기인 『竹迷記』는 그 내용이 동일하다. 이 때문에 경암은 불국사 사적인 「佛國寺古今創記」가 잘못 전해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옳은 지적이다.
  40. 40)백헌白軒 이 상국李相國 : 조선 중기 문신인 이경석李景奭(1595~1671)을 말한다. 백헌은 호. 청나라의 침략으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삼전도 비문을 작성한 일로 송시열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게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념과 정책은 숙종 대의 소론으로 연결된다.
  41. 41)능견난사能見難思 : 29점의 바리때 이름이다. 송광사 제6대 국사인 원감 국사 충지沖止(1226~1292)가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제작 기법이 특이하여 어느 순서로 포개어도 크기가 오묘하게 딱 들어맞는다고 한다. 조선 숙종이 장인匠人에게 그와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명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자 ‘보고도 못 만든다.’라는 의미로 왕이 친히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42. 42)영산 학수靈山鶴樹 : 인도 중부 구시나가라성 밖의 발제하跋提河 언덕에 있던 사라수림沙羅樹林의 별칭이다. 석존이 입멸하신 보상寶床의 네 귀에 4쌍雙 8본本의 사라수가 있었는데, 한 나무는 무성하고 한 나무는 말랐으므로 4영榮 4고苦라 하며, 또 그 잎이 말라 죽어서 흰 학鶴과 같은 색이 되었으므로 학림鶴林 또는 학수鶴樹라고 한다.
  43. 43)나옹懶翁 : 혜근惠勤(1320~1376). 태고 보우太古普愚와 함께 고려 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懶翁集』에 수록되어 있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다. 그 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로 가서 처림處林의 법을 받았다.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의 주지가 되었다.
  44. 44)무학無學 : 자초自超(1327~1405). 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왕사이다. 18세에 출가하여 1353년(공민왕 2) 원元에 가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1363)과 고려 승려 나옹懶翁(1320~1376)의 가르침을 받고, 1356년에 귀국하여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다가 태조가 즉위하자 왕사에 임명되었다.
  45. 45)대각국사大覺國師 : 의천義天(1055~1101).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이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출가하여 47세로 입적할 때까지 구법과 수행, 학문과 강학으로 일생을 보냈던 대표적 고승이자 학자이다.
  46. 46)제천諸天 : 원래는 하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암자를 가리킨다.
  47. 47)태화太和 : 신라 진덕여왕의 연호. 647~650년.
  48. 48)월성위月城尉 김 공金公 : 김한신金漢藎(1720~1758).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보幼輔. 키가 크고 인물이 준수했으며 재주가 총명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1732년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에게 장가들어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49. 49)천감天監 : 양 무제의 연호. 502~519년.
  50. 50)겁화가 해저까지~항상 충만하리라 : 『六祖大師法寶壇經』 「機緣品」 제7에 나오는 육조의 게송.
  51. 51)소양자搔癢子 : 등긁이로 오늘날의 효자손 같은 것이다. 양화자痒和子라고도 한다.
  52. 52)만력萬曆 : 명나라 신종의 연호. 1573~1619년.
  53. 53)건륭乾隆 : 청나라 고종의 연호. 1736~1795년.
  54. 54)동진의 혜원과~화상의 고사 : 염불 수행을 말한다. 혜원慧遠(334~416)은 동진東晉의 여산廬山에 주석했던 고승이다. 402년 혜원은 123인과 함께 여산 산중의 반야대般若臺에 있던 아미타불상 앞에서 염불 실천의 서원誓願을 세우고 염불행을 수행하였다. 신라의 발징發徵 화상은 758년(경덕왕 17) 건봉사乾鳳寺에 미타만일회彌陀萬日會를 설치하고, 지성으로 염불 수행하여 원성왕 12년 같이 정진하던 도반道伴 31명과 함께 허공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만일염불회의 효시이기도 하다.
  55. 55)하늘이 장차~목탁을 삼으리라 : 원문은 “天將以夫子爲木鐸。”이다. 목탁은 나라에서 백성들에게 정책을 알릴 때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친다. 하늘이 공자를 목탁으로 삼아 백성들을 가르치리라는 뜻이다.
  56. 56)리離 : 남쪽을 상징하며, 밝은 지혜를 나타낸다.
  57. 57)석도잠釋道岑 : 금강산 유점사의 주지이다. 『淸溪集』 「金剛山紀行錄」.
  58. 58)용사龍蛇의 변란 : 임진년(1592)과 계사년(1593년)의 난리를 말한다.
  59. 59)위음왕威音王 : 위음왕불(ⓢ Bhīṣmagarjitasvara-rāja). 『法華經』 「常不經菩薩品」에 나오며, 공겁空劫 때 맨 처음 성불한 부처님이다. ‘한없이 오랜 옛적’, 또는 ‘맨 처음’이라는 뜻으로도 쓰고, 종문宗門에서는 본분향상本分向上 실제이지實際理地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본문은 병화兵火로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흔적이 소멸되었음을 말한다.
  60. 60)팽택彭澤의 구름 : 팽택현彭澤縣 현령을 지낸 도연명陶淵明의 〈歸去來辭〉에 “구름은 무심히 산골짝에서 나오고, 새는 날기에 지쳐서 돌아올 줄 아누나.(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라는 구절이 있다.
  61. 61)강동江東의 구름 : 두보杜甫가 이태백李太白을 보내는 시에 “위수의 북쪽에 봄날의 나무요, 강동의 해 저물 때의 구름이라.(渭北春天樹。 江東日暮雲。)”라는 구절이 있다. 친구 간의 석별의 정을 말한다.
  62. 62)오마五馬 : 한漢나라 때 태수가 수레에 다섯 마리의 말을 매었기 때문에 태수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63. 63)점필재佔畢齋 : 조선 전기 성리학자·문신인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호. 자는 계온季昷. 세조 5년(1459)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판서·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경술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그의 「弔義帝文」은 뒷날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저서에 『佔畢齋集』, 『靑丘風雅』 등이 있다.
  64. 64)조신曺伸 : 조선 성종 때의 문인. 자는 숙분叔奮, 호는 적암適庵. 문장과 어학에 능하여 사역원 정司譯院正으로 발탁되었고, 『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다. 저서에 『適庵詩集』, 『謏聞瑣錄』 등이 있다.
  65. 65)유호인兪好仁(1445~1494) :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자는 극기克己, 호는 임계林溪. 성종 5년(147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東國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문장·서예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혔다.
  66. 66)단서丹書 : 중국 고대의 황제皇帝와 전욱顓頊의 불로장생의 도道가 기재되어 있다는 글.
  67. 67)두공부杜工部의 시어詩語 : 두보杜甫의 시
  68. 68)사악四岳 : 고대 중국에서, 사방의 네 큰 산인 동쪽의 태산泰山, 서쪽의 화산華山, 남쪽의 형산荊山, 북쪽의 항산恒山을 총칭하는 말.
  69. 69)중니仲尼가 태산에 올라 : 『孟子』에서 “공자께서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기시고,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여기셨다.(孔子。 登東山而小魯。 登太山而小天下。)”라고 하였다.
  70. 70)옛사람은 이별할~셋이 웃었는데 :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의 고승인 혜원惠遠과 교유했던 것을 말한다. 혜원이 객을 전송할 때에 사찰 밖의 호계虎溪를 건너는 일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할 적에는 마음이 서로 계합契合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71. 71)당시에 좌천되는 어려움 : 한유韓愈가 「論佛骨表」를 올려 불교를 비난하다 황제의 진노를 사서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된 일을 말한다.
  72. 72)후세에도 옷을~주었다는 비난 : 한유가 조주潮州에서 태전太顚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고 떠날 때 옷을 남겨 존경을 표한 일을 말한다.
  73. 73)양묵楊墨 : 주周나라 말기의 학자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말한다. 양주는 극단의 이기설利己說을 주장하였고 묵적은 극단의 겸애설兼愛說을 주장했는데, 이들은 모두 맹자孟子에게 이단異端으로 배척 받았다.
  74. 74)변론을 좋아하고 : 맹자 당시에 외부인이 그렇게 칭하였다고 『孟子』 「滕文公章句 下」에 나온다.
  75. 75)장적張籍(767~830) : 당나라의 시인으로, 자는 문창文昌이며 강소성 소주蘇州 사람이다. 한유가 추천하여 장안 진사長安進士에 급제하였다. 국자사업國子司業 등을 지냈고, 시에 능하여 악부시로 이름이 났다. 현전하는 시 418수 중 70~80수가 악부시이며 그 외의 시도 대부분 민간의 고통을 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서에 『張司業集』이 전한다.
  76. 76)양웅楊雄(B.C. 53~A.D. 18) : 전한前漢의 학자이자 문인으로, 자는 자운子雲이다. 성제成帝 때 궁정 문인이 되어 지은 〈甘泉賦〉, 〈河東賦〉 등 화려하면서도 성제의 사치를 풍자하는 문장을 남겼고, 후에 왕망王莽 정권을 찬미하는 글을 써 후대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에 『法言』, 『太玄經』이 있다.
  77. 77)궁귀窮鬼 : 가난을 몰고 오는 귀신. 한유의 「送窮文」에서, 자기를 괴롭히는 다섯 궁귀를 내쫓으려다가 궁귀들의 변론을 듣고서 다시 맞이하였다.
  78. 78)환퇴桓魋 : 송나라의 대신인 사마환퇴司馬桓魋를 말한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공자를 해치고자 공자가 강론하고 있던 자리의 나무를 베었다.
  79. 79)숙손叔孫 : 노나라의 권신인 숙손무숙叔孫武叔을 말한다. 공자가 죽은 후에 공자를 비방하였다.
  80. 80)석개石介 : 송나라 때의 유학자. 자는 수도守道. 과거에 급제하여 태자중윤太子中允에 임명되었으나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물러났다. 문장의 폐단과 불교, 노장 사상의 폐해를 우려하여 『怪說中國論』을 써서 이를 비판하였다.
  81. 81)소명 태자昭明太子(501~531) : 남북조시대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황태자. 성은 소蕭, 이름은 통統, 자는 덕시德施. 소명은 시호이다. 불교를 숭상하고 문학을 좋아하여 『正序』 , 『英華集』 등의 저서를 남겼다.
  82. 82)손작孫綽 : 남북조시대의 문인.
  83. 83)우세남虞世南 : 당나라의 서예가·문인. 자는 백시伯施. 당 태종에게 중용되어 덕행·충직·박학·문사文詞·서한書翰의 오절五絶로 칭송받았으며, 특히 해서楷書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저서로 『北堂書鈔』가 있다.
  84. 84)위징魏徵 : 당나라 초기의 공신·학자. 자는 현성玄成. 태종을 모시고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어 태평성대를 이루니 이 시대를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한다.
  85. 85)환퇴桓魋가 나무를 베었지만 : 주 78 참조.
  86. 86)이사李斯(?~B.C. 208) : 진晉나라의 정치가. 법가 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병합하였다. 시황제의 승상丞相으로서 군현제 실시, 문자·도량형의 통일 등 제국의 확립에 공헌하였다. 시황제가 죽은 뒤 2세 황제를 옹립하고 권력을 잡았으나 조고趙高의 참소로 실각하여 처형되었다.
  87. 87)제바달다提婆達多 : 석존釋尊의 사촌 아우로, 성질이 포학하고 욕심이 많아서, 석존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고까지 하는 등 못된 행동을 많이 자행하였다고 한다.
  88. 88)위 무제魏武帝 :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시조인 조조曹操(155~220)를 말한다. ‘황건黃巾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내고, 동탁이 죽은 뒤 헌제를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화북華北 평정 후 손권孫權·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싸워 대패하여 그 세력이 강남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뛰어난 문학가이기도 하여 이른바 건안 문학建安文學의 흥륭興隆에 기여하였다.
  89. 89)봉선제封禪祭 : 중국의 황제가 자신의 공적을 하늘과 땅에 알리고 복을 구하는 제사. 태산에서 거행하였다.
  90. 90)변계량卞季良(1369~1430) :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정치가.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고려 말에 전교典校·주부注簿 등의 벼슬을 지냈고, 조선 시대에는 예조 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저서에 문집 『春亭集』 등이 있다.
  91. 91)목은牧隱 이문정공李文靖公 : 이색李穡(1328~1396). 1380년(우왕 6) 문과에 급제 후 벼슬에 나아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뒤에는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후에 유학을 강조하는 상소를 했다가 이것이 빌미가 되어 현재의 경상남도 의금도依金島에 유폐되었다. 다시 전라남도 여수 낙포로 이배移配되어 스스로를 고산孤山이라 하고, 여기에서 생을 마쳤다.
  92. 92)빙어氷魚의 일 : 서진西晉 사람 왕상王祥이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그의 계모 주씨朱氏가 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 하므로 왕상이 옷을 벗고 얼음 위에 누워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니, 얼음이 갑자기 갈라지면서 산 잉어가 뛰어나왔다는 고사를 말한다.
  93. 93)모의毛義 : 후한後漢의 효자. 여강廬江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고 어머니가 연로하였는데, 수령으로 삼는다는 격서가 오자 매우 기뻐하며 벼슬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 그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자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벼슬길에 나아간 것이 어머니를 위해서였음을 알았다고 한다. 『後漢書』 권39 「劉平等列傳」.
  94. 94)용문龍門 : 황하 상류의 용문이라는 곳에 삼단 폭포가 있는데, 해마다 봄에 잉어가 삼단 폭포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되어 승천한다고 한다.
  95. 95)그 사람이~전하지 않는다면 : 『周易』 「繫辭」에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도가 공으로 행해지지 않는다.(苟非其人。 道不虛行。)”라는 말이 있다.
  96. 96)육시六時 : 하루를 여섯으로 나눈 염불 독경의 시간. 곧 신조晨朝·일중日中·일몰日沒·초야初夜·중야中夜·후야後夜를 말한다.
  97. 97)구학口學 : ‘구이지학口耳之學’의 준말로, 보고 듣는 것만을 중시하는 얕은 학문.
  98. 98)지곡사智谷寺 : 경상남도 산청의 웅석봉(지리산 줄기)에 있는 사찰.
  99. 99)번개가 둘러싼 날(電繞之日) : 황제黃帝의 모친 부보附寶가 기祁 땅 들판에 나갔다가, 번개 불빛이 북두추성北斗樞星 주위를 감싼 것을 보고 잉태하여 황제를 낳았다는 ‘전요추광電繞樞光’의 고사를 말한다. 『史記』 「五帝本紀」.
  100. 100)물약勿藥의 효험 : 『周易』에 “약을 쓰지 않아도 낫는 기쁨이 있다.(勿藥有喜)”라는 말이 있다.
  101. 101)삼연三緣 : 염불하는 이가 얻는 세 가지 인연. 중생이 마음을 일으켜 늘 염불하고, 부처님을 예배하고 생각하면 부처님은 이를 보고 듣고 알아서 부처님과 중생의 신身·구口·의意에서 서로 통한다는 친연親緣, 부처님은 항상 곁에서 모시고 보기를 원하는 이의 앞에 몸을 나타낸다는 근연近緣, 평생 동안 염불을 하면 끝없는 옛적부터 지은 죄업을 없애 주고 죽을 때 성중聖衆과 함께 와서 맞아 간다는 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102. 102)오성五星 :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 이 다섯 별이 모이면 태평 시대가 열린다고 한다.
  103. 103)세성歲星 : 목성. 목성이 머무르는 나라는 복이 넘치므로 복성福星이라고도 한다.
  104. 104)가지加持 : ‘가加’는 가피加被, ‘지持’는 섭지攝持의 뜻으로, ① 부처님의 큰 자비가 중생에게 베풀어지고, 중생의 신심信心이 부처님의 마음에 감명되어 서로 어울림, ② 부처님의 삼밀三密의 연緣에 의해 중생의 삼업三業을 밝히는 것, ③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어 병·재난·부정·불길 등을 없애기 위해 수행하는 기도법 등을 말한다.
  105. 105)팔부八部의 신령 : 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신장神將. 용신팔부龍神八部라고도 한다. 천·용·야차·아수라·가루라·건달바·긴나라·마후라가를 이르며, 이 가운데 천과 용이 으뜸이므로 특히 천룡팔부라 한다.
  106. 106)삼대三坮의 춤 : 태평성대를 바란다는 말이다. 태계泰階는 삼태성三台星의 별로, 상태上台, 중태中台, 하태下台가 각각 두 개씩 여섯 개인데, 그것들이 제자리에 고르게 있으면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편안해져 천하가 태평을 누린다고 한다.
  107. 107)남풍南風에 오현금五絃琴 : 옛날에 순임금이 남풍이 불어오자 오현금을 연주하며 백성들이 잘 살기를 축원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108. 108)우리 임금의 아들이라 노래하게 : 우임금이 죽자 우임금의 아들과 대신인 익益이 천자의 자리를 서로 사양하여 피하였다. 이때 백성들이 모두 우임금의 아들인 계啓에게로 가서 우리 임금님의 아들이라 칭송하여 천자로 받들었다.
  109. 109)선인宣仁 태후 : 북송 6대 황제 신종의 어머니.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재위 1085~1100)이 즉위하자 선인 태후가 수렴청정하여 사마광司馬光(1019~1086) 등의 구법당 세력을 등용해 신법을 차례로 폐지하였다. 그 뒤 1093년 선인 태후가 죽고 철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신법이 다시 실시되기도 하였지만,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이 격화되어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10. 110)태사太姒 : 주나라의 성왕聖王인 문왕文王의 어머니.
  111. 111)강원姜嫄 :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어머니.
  112. 112)문성文成과 난대欒大 : 한나라 때의 방사方士로서 황제를 현혹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113. 113)아뇩보리阿耨菩提 : 아뇩다라삼먁삼보리(ⓢ znuttara-samyak-saṃbodhi)의 준말. 아뇩삼보리·아뇩보제라고도 한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등으로 번역하며, 불과佛果의 지혜를 말한다. 아뇩다라는 무상無上을 뜻하고, 삼먁삼보리는 정변지正遍智 또는 정등정각이라 번역하는데 앞의 것은 구역舊譯이고 뒤의 것은 신역新譯이다. 신역을 줄여서 정각正覺이라 하는데, 범부가 깨닫지 못한 데 대하여 미계迷界를 여의고 각지覺知가 원만하여 일체의 진상을 모두 아는 부처님의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114. 114)천제闡提(ⓢ icchantika) : 일천저가一闡底柯·일천제가一闡提伽·일전가一顚迦를 줄여서 이르는 말. 단선근斷善根·신불구족信不具足이라 번역하여 성불할 성품이 없는 이를 뜻한다.
  115. 115)오교五敎 :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5종으로 분류한 것. 당나라 정관貞觀 때 중국에 온 파파밀다라의 설을 들자면, 사제교四諦敎(『아함경』)·무상교無相敎(『반야경』)·관행교觀行敎(『화엄경』)·안락교安樂敎(『열반경』)·수호교守護敎(『대집경』)로 구분한다.
  116. 116)지욱智旭(1599~1655) : 명나라의 천태종 승려. 호는 팔불도인八不道人, 자는 우익藕益. 처음 이름은 제명際明이고, 자는 진자振子, 속성은 종鍾씨로, 오현吳縣 목독木瀆 사람이다. 처음에 유교를 배우고 「闢佛論」 수십 편을 지어 불교를 크게 비판하다가 『地藏菩薩本願經』과 『首楞嚴經』 등을 보고 발심하여 1621년 감산 덕청憨山德淸의 문인 설령雪嶺에게 출가하였다. 운서사에서 『唯識論』의 강설을 듣고, 『首楞嚴經』의 종지와 모순됨을 의심하고 좌선을 공부하여 불법에 두 길이 없음을 알았다. 당시 계율이 쇠락해 가는 것을 한탄하고, 율을 일으키려는 뜻을 세우고 먼저 『梵網經』을 주해하기 위해 천태학을 연구하였으며, 구화·온릉·장주 등지로 다니면서 천태종을 선양하며 여러 경·논을 주석하다가 영력 9년 5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楞嚴經玄義』, 『梵網經合註』, 『閱藏知津』 등 30여 부가 있다.
  117. 117)일우법一雨法 : 하늘의 비가 만물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적셔 주듯이 부처님의 법도 중생을 인도한다는 뜻이다.
  118. 118)육십이견六十二見 : 외도의 여러 주장을 분류하여 62종으로 한 것. ① 본겁본견本劫本見·말겁말견末劫末見에 대한 여러 가지 말을 62종으로 나눈 것. 곧 본겁은 과거시, 본견은 과거에서 상견常見을 일으킨 것이며, 말겁은 미래, 말견은 미래세에서 단견斷見을 일으킨 것인데, 본겁본견의 설을 18로, 말겁말견의 설은 44종으로 하여 62견으로 분류한 것. ② 과거·현재·미래의 삼세三世에 각각 오온五蘊이 있어, 공하여 15가 되고, 낱낱이 4구句의 이견異見이 있어 합하여 60견見이 되고, 근본인 단斷·상常 2견을 더한 것. ③ 오온. 삼세의 곱하는 것은 ②와 같고, 4구의 방식을 달리하여 이 4구로써 삼세의 오온에 일관하여 62견으로 한 것.
  119. 119)대혜 종고大慧宗杲(1089~1163) : 12세기 중국 승려. 자는 담해曇海, 호는 묘희妙喜·운문雲門, 시호는 보각선사普覺禪師. 원오 극근圜悟克勤의 법사法嗣로서 사대부들에게서도 숭앙과 존경을 받았다. 제자로는 사대부인 장구성張九成 등이 있었는데, 제자로 인해 정쟁政爭에 휘말려 형산衡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正法眼藏』을 저술하였다. 그 후 효종제孝宗帝의 귀의歸依를 받았으며, 대혜 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받게 되었다. 간화선看話禪의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20. 120)총상總相 : ① 화엄종 육상六相의 하나. 만유 제법이 저마다 다른 일체 만유를 포함한 것. ② 일체유위법에는 총상과 별상이 있음. 무상無常·무아無我와 같이 일체에 통하는 것을 총상이라 하고, 땅의 굳은 것, 물의 젖는 것과 같은 것은 별상이라 한다.
  121. 121)오념五念 :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행업行業을 5문門으로 나눈 것. 곧 예배문禮拜門·찬탄문讚歎門·작원문作願門·관찰문觀察門·회향문廻向門을 말한다. 오념문五念門이라고도 한다.
  122. 122)오장五障 : (1) 여자가 가진 다섯 가지 장애. ① 범천왕梵天王이 되지 못함. ② 제석帝釋이 되지 못함. ③ 마왕魔王이 되지 못함. ④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지 못함. ⑤ 부처가 되지 못함. (2) 보살이 수도를 하는 데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장애. 곧 악도장惡道障·빈궁장貧窮障·여신장女身障·형잔장形殘障·희망장喜忘障. (3) 선근善根에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장애. 곧 기欺·태怠·진瞋·한恨·원怨. 오애五礙라고도 한다.
  123. 123)오탁五濁(ⓢ pāñca-kaṣāya) : 세상의 다섯 가지 더러움. 오재五滓·오혼五渾이라고도 한다. ① 겁탁劫濁-감겁減劫 중에 사람의 수명이 줄어 30세에 기근, 20세에 질병, 10세에 전쟁이 일어나는 등의 재액. ② 견탁見濁-말법末法 시대에 이르러 사악한 사상과 견해가 무성하게 일어나 더러움이 넘쳐흐름. ③ 번뇌탁煩惱濁-사람의 마음이 번뇌에 가득하여 흐려짐. 혹탁惑濁. ④ 중생탁衆生濁-사람이 악한 행위만을 행하여 인륜 도덕을 돌아보지 않고, 나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유정탁有情濁. ⑤ 명탁命濁-인간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는 것. 수탁壽濁.
  124. 124)서방에 성인이~수가 없다 : 『列子』 제4 「仲尼」에 나오는 말이다. 다만 ‘그 이름이 부처이다.’라는 표현은 없다. 공자는 “서쪽 지방에 성인이 있었습니다.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러워지지 않았고,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신망信望이 있고, 교화敎化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하며, 넓고 넓어 백성들이 무어라고 이름 짓지 못했습니다.(西方之人。 有聖者焉。 不治而不亂。 不言而自信。 不化而自行。 蕩蕩乎民无能名焉。 )”라고 하였다.
  1. 1)▣疑「師」{編}。
  2. 1)「女」通「汝」{編}次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