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역산집(櫟山集) / 〔附錄〕

ABC_BJ_H0256_T_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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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비명碑銘
헌종憲宗 기유년(1849) 봄에 나의 선대부先大夫 문정공文貞公1)이 대종백大宗伯(예조판서)으로 명을 받들어 북릉北陵을 봉심奉審하였는데,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서 쉬면서 역산櫟山 스님을 만나 보니, 용모가 고박古朴하였고, 언론이 활달하였다. 게다가 서로 동갑인 것을 기뻐하며 두터운 친분을 맺었다. 이때 내가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있었는데, 선대부가 연공사年貢使로 의주에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면 선대부가 손수 편지를 써서 답하였으니, 내가 선대부의 곁에서 모시며 스님이 훌륭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14년 뒤에 내가 함경도 관찰사로 고개를 넘을 적에 공무가 바빠 설봉산雪峰山에 들르지 못했고, 갑자년(1864, 고종 1)에 특별히 제수하는 명을 받아서 역말을 보내 부르심이 매우 엄하고 급하니, 산문山門을 두 번 지나치면서도 스님을 뵐 겨를이 없었다.2) 또 10년 뒤에 물러나 향산鄕山에 머물고 있을 적에 봉선사奉先寺에 갔었는데, 용암 전우庸庵典愚 스님이 그 스승인 역산 스님의 탑명塔銘을 나에게 부탁했다. 내가 말하기를, “역산 스님은 우리 선대부의 공문空門의 벗인데, 어찌 지어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스님의 법명은 선영善影, 자字는 무외無畏, 호號는 영허映虛이고, 역산은 그의 초호初號이다.

010_0965_a_09L〔附錄〕

010_0965_a_10L

010_0965_a_11L碑銘

010_0965_a_12L
憲宗己酉春我先大夫文貞公以大宗
010_0965_a_13L伯承命奉審北陵憇安邊之釋王寺
010_0965_a_14L遇櫟山師見形貌古朴言論曠達
010_0965_a_15L喜其爲同庚托契其厚時小子守灣
010_0965_a_16L先大夫以年貢使留灣師專指 [29] 馳凾
010_0965_a_17L先大夫手書以答小子侍左右知師之
010_0965_a_18L後十四年余伯關北踰嶺公事促
010_0965_a_19L不得歷雪山甲子猥承非常之命馹召
010_0965_a_20L嚴急再過山門無暇尋眞又十年退
010_0965_a_21L居鄕山遊奉先寺庸庵釋典愚以其
010_0965_a_22L師櫟山塔銘屬余余曰櫟山吾先大
010_0965_a_23L夫之空門交也安得無一言贈乎師法
010_0965_a_24L名善影字無畏號映虛櫟山其初號

010_0965_b_01L속성은 안동安東 임씨林氏이고, 부친은 득원得元이다. 어머니 한양漢陽 조씨趙氏가 부처님이 현몽하는 신이한 꿈을 꾸고 스님을 서울의 운관현雲觀峴에서 낳으니, 정묘 임자년(1792, 정조 16) 3월 23일이었다. 나이 12세에 용운 승행龍雲勝行 스님을 따라 출가하여 양주楊洲 학림암鶴林庵에서 머리를 깎고, 성암 덕함聖巖德函 대사에게 구족계具足戒와 법을 받고, 화악 지탁華嶽知濯 대사에게 참선을 배웠다. 21세에 인봉 덕준仁峯德俊의 법맥을 이었으니,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바로 청허淸虛3) 스님의 문파로 환성喚惺이 그 5대조이다. 이상이 스님의 내력이다.
스님은 젊은 시절에는 남쪽 지방에 있다가 만년에 석왕사 내원內院에 들어왔다. 그 학문은 팔만대장경을 종지宗旨로 삼고 정법안장正法眼藏에 서서 단전單傳되는 법통을 이어받으니, 여러 갈래의 사문沙門들이 그를 높여 조계종사曹溪宗師라고도 하고, 화엄강백華嚴講伯이라고도 하였다. 내가 탑비塔碑에 있어서는 평소에 명銘을 잘 지어 주지 않는데, 영허 스님은 선대부와 교분이 있는데도 지난 시절 내가 함주咸州에 있었을 적에 나를 찾아오지 않았으니, 이에 그 사람됨이 명銘에 부합함을 알 수 있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一枝宗法海之東           한 줄기 종법이 우리 해동에 전해지니
雲在靑天水在中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그 속에 있어라.
石虎抱兒眠正熟           돌 호랑이는 아이를 안은 채 깊이 잠들었는데
松風瑟瑟萬緣空           솔바람 소슬하니 온갖 인연 공일래.

성상聖上(高宗) 10년(1873)4) 가을에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원임규장각직제학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비명을 짓노라.
행장行狀
대저 해와 달이 떠올랐는데도 횃불을 끄지 않고 있다면, 빛을 밝힘에 있어 또한 어려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논밭에 물을 계속 댄다면, 논밭을 적심에 있어 또한 수고로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5) 선사先師께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그 아름다운 자취에 대하여 행장을 쓴다면, 이치로 볼 때 또한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6)

010_0965_b_01L俗姓安東林氏父曰得元母漢陽
010_0965_b_02L趙氏有夢佛之異生師於王城之雲觀
010_0965_b_03L正廟壬子三月二十三日也年十二
010_0965_b_04L從龍雲勝行禪者祝髮于楊州鶴林庵
010_0965_b_05L受戒法于聖巖德凾大師叅禪于華嶽
010_0965_b_06L知濯大師二十一建幢于仁峯德俊之
010_0965_b_07L溯其淵源乃淸虛派而喚惺爲五世
010_0965_b_08L此師之來歷也師早年由南土
010_0965_b_09L入釋王寺內院其學宗八萬諸經立於
010_0965_b_10L正法眼藏得單傳之統諸路沙門
010_0965_b_11L爲曹溪宗師華嚴講伯余於塔碑
010_0965_b_12L靳爲銘而暎虛世交也粵在咸州不以
010_0965_b_13L名相聞於此可知其爲人而合於銘也
010_0965_b_14L偈曰

010_0965_b_15L一枝宗法海之東雲在靑天水在中

010_0965_b_16L石虎抱兒眠正熟松風瑟瑟萬緣空

010_0965_b_17L聖上十年秋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
010_0965_b_18L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月城李裕
010_0965_b_19L元撰

010_0965_b_20L

010_0965_b_21L行狀

010_0965_b_22L
夫日月出矣爝火不息其於光也
010_0965_b_23L亦難乎時雨降矣而猶浸灌其於澤
010_0965_b_24L不亦勞乎先師去矣余狀休跡

010_0965_c_01L모기가 태허太虛를 두드리고 반딧불이가 수미산須彌山을 불태운다는 말이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법조法祖의 아름다운 자취를 감히 전하지 않을 수 없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대사의 법휘法諱는 선영善影, 도호道號는 영허映虛, 또 다른 호는 역산櫟山, 자字는 무외無畏이다. 속성은 안동 임씨林氏이고, 아버지는 득원得元이다. 어머니 한양 조씨趙氏가 꿈에 부처님을 보고 임신을 해서 서울의 운관현雲觀峴에서 대사를 낳으니, 때는 건륭乾隆 임자년(1792, 정조 16) 3월 23일이었다. 어린 나이에 입학入學하여 경사經史에 두루 통하니, 세상 사람들이 하늘이 낳은 뛰어난 자질이라고 칭찬하였다.
나이 12세에 홀연 허깨비 같은 속세의 삶이 쏜살같이 흘러감을 깨닫고는 돌보고 사랑해 주신 부모님과의 인연을 끊고서 수락산 학림암鶴林庵의 용운 승행龍雲勝行 선사의 법좌法座로 출가하였고, 성암 덕함聖巖德函 선사의 계단戒壇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화악 지탁華嶽知濯 대사의 문하에서 선禪을 전수받았다. 그리고서 다시 제방을 참방參訪하면서7) 8만의 용장龍藏8)을 깊이 연구하고 천백 공안公案9)을 참구하였으며, 일우一雨의 적심과 오교五敎의 차이를 궁구하여10) 곧바로 토끼와 물고기를 잡고는 통발과 그물은 잊어버렸다.11)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와 호랑이의 입 안에 들어 있는 먹이를 죄다 손아귀에 넣듯 깨달음을 얻게 되자, 안목을 갖춘 선각先覺들도 감히 그 예봉銳鋒을 범접하지 못하였고, 모두 후배의 뛰어난 두각에 놀랐다. 조봉朝鳳의 대가大家12)들이 자기 문하로 대사를 낚아채려고 했던 이들이 많았으나, 대사는, 황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가 용이 되어 구름을 탄 것과 같이 제가諸家의 그물에 낚이지 않고 북명北溟에서 배회하였다.13) 그리하여 운문雲門14) 선사가 마침내 설봉雪峯15) 선사의 법을 이었던 것처럼, 임제臨濟의 적손嫡孫인 청허淸虛의 정전正傳과 인봉 덕준仁峯德俊 화상의 무딘 도끼16)를 얻으니, 이때 대사의 나이 21세였다.
그 연원淵源으로 말하자면, 석가부처님의 73세요, 임제종臨濟宗의 35세요, 청허의 10세이며, 환성喚醒의 6세이다. 청허 대사가 위엄을 사막에 떨쳐 영토를 개척하여 공적을 세운 것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기록할 것이 없겠으나,17) 불조佛祖의 비전秘傳에 훤히 밝아 불경佛經에 통해 분석하고 논한 것은 미천彌天,18) 청량淸凉19)과 같았고,

010_0965_c_01L於理也不亦愚乎蚊敲太虛螢燒須
010_0965_c_02L此之謂歟雖然法祖美蹟不敢不
010_0965_c_03L故曰大師法諱善影道號暎虛
010_0965_c_04L號櫟山字無畏俗姓安東林氏父曰
010_0965_c_05L得元母漢陽趙氏夢佛而娠生師於
010_0965_c_06L京城雲觀峴時乾隆壬子三月二十三
010_0965_c_07L日也早歲入學 [30] 通經史天生奇品
010_0965_c_08L爲世所穪也年至十二忽覺幻世之奔
010_0965_c_09L驥過𨻶割父母之眷愛於水落山鶴林
010_0965_c_10L庵龍雲勝行禪師法座出家聖巖德凾
010_0965_c_11L禪師戒壇受具華嶽知濯大師門下受
010_0965_c_12L復行詣百城涵泳於八萬龍藏之中
010_0965_c_13L逍遙乎千百公案之上究一雨之所霑
010_0965_c_14L窮五敎之殊致直得兎魚俱忘筌罤
010_0965_c_15L龍頷之珠虎口之食盡握掌中具眼
010_0965_c_16L先覺莫敢嬰其鋒咸驚後角朝鳳大
010_0965_c_17L要漁者多也如得雲之金鱗不入
010_0965_c_18L乎諸家之網羅回翔北溟倣雲門之竟
010_0965_c_19L嗣雪峯得臨濟嫡孫淸虛正傳仁峯德
010_0965_c_20L俊和尙之鈯斧子時年二十一也其淵
010_0965_c_21L源則釋迦佛七十三世臨濟宗三十五
010_0965_c_22L淸虛之十世喚醒之六世也淸虛
010_0965_c_23L之振威沙漠闢地立功不可煩錄
010_0965_c_24L明佛祖秘典通經析論如彌天淸凉

010_0966_a_01L몽둥이질을 하고 불자拂子를 세운 것은 덕산德山,20) 임제와 같았다. 그러므로 우리 동방의 선종과 교종에서 문파를 논하는 자들은 모두 청허를 중흥지조中興之祖로 삼는다. 청허에서 3세를 전하여 환성이 있었는데, 편양鞭羊, 풍담楓潭, 월담月潭이 청허 이후의 3세요, 그 다음이 환성이니, 환성은 바로 청허 문하의 주금강周金剛21)이다. 아래로 함월涵月과 완월翫月, 뇌묵雷默, 인봉仁峯이 나왔다.
대사에 이르러서는 가는 곳마다 법의 그물을 펼쳐 인천人天의 중생들을 제도하였다. 끝없이 넓은 교종敎宗과 높고도 험한 선문禪門의 가르침을 서 있으면서도 별로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으면서도 무엇을 강론하는 것도 아닌데, 큰 지혜를 갖춘 상근기의 사람들은 빈 마음으로 왔다가 가득 채워서 돌아갔으며,22) 그 아래 부류의 사람들은 비록 법우法雨에 젖어도 그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찾기 어려워 끝부분만을 보고는 물러갔다. 이 때문에 경론經論을 연구하는 학인들은 대사를 십지경왕十地經王이라고 일컬었고, 참선하는 본색납자本色衲子들은 영허종풍暎虛宗風이라고 추숭하였다. 어찌 우리나라뿐이겠는가. 응당 장차 온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서 함께 대사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 것이다.
만년에는 오랫동안 석왕사釋王寺 내원암內院庵에 주석하셨는데, 이곳이 바로 양월 화상兩月和尙23)이 머물렀던 옛터이기 때문이었다. 관북關北에 좌정해 있으면서 그 명성이 먼 지방에까지 퍼졌으니, 당시에 불도佛道를 닦는 이들의 사표師表였다. 이 때문에 화악華嶽 사옹師翁이 이르기를, “그대의 드넓은 교학敎學과 법문法門의 지견知見은 금모金毛의 사자獅子24)가 포효하는 것과 같고, 진실로 대방大方을 밟은 백우白牛25)이다.”라고 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에는 비록 연로하여 날로 쇠약해지는 때라 하여도 낮에 눕지 않았고, 매우 소란스럽고 바쁜 중에도 일과日課를 폐하지 않았다. 고요한 때에 관조觀照를 하거나 염불을 하였고, 다른 사람을 자애롭게 대하였으며, 늘 보시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깨끗한 인품은 눈과 같았고, 행동하는 절조는 소나무와 같았다. 체구는 크고 얼굴은 보름달 같고 눈은 새벽별과 같고 목소리는 큰 종과 같았으니, 불법의 종주宗主일 뿐만 아니라 속가俗家에 있었어도 장상將相의 지위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방백方伯의 자리에 부임하거나 주목州牧의 임소에 부임해 온 조사朝士가 있으면, 모두 산문山門을 방문하여 한번 대사의 도안道顔을 보고 공경의 예를 올리지 않음이 없었으니, 어찌 성내지 않아도 두려워하고 말하지 않아도 교화가 되는 경우26)가 아니겠는가.

010_0966_a_01L拈搥竪拂如德山臨濟故我東方禪敎
010_0966_a_02L說派者咸以爲中興之祖三傳而有喚
010_0966_a_03L曰鞭羊也楓潭也月潭也次是喚
010_0966_a_04L喚醒即淸虛門之周金剛也下出涵
010_0966_a_05L出翫月出雷默出仁峯至於大師
010_0966_a_06L隨處羅網撈摝人天敎海浩瀚禪門
010_0966_a_07L高險立不敎坐不議大智上機處而
010_0966_a_08L實而歸自下之流雖潤法雨難得
010_0966_a_09L其門望涯而退故經論學者穪之十
010_0966_a_10L地經王本色衲子推之暎虛宗風奚假
010_0966_a_11L東國應將引天下而與之從晩年
010_0966_a_12L住于釋王寺內院庵乃兩月和尙之古
010_0966_a_13L基故也坐鎭關北聲播遠方當年烹
010_0966_a_14L鍊佛祖之䥓鎚故華嶽師翁曰君之學
010_0966_a_15L海波瀾法門知見哮吼金毛之獅子
010_0966_a_16L允蹈大方之白牛也其平居也雖年老
010_0966_a_17L日朽之時晝則不臥千擾萬忙之中
010_0966_a_18L常課不廢乘寂觀照或念聖號見人
010_0966_a_19L慈愛常喜捨施潔器若雪措節如松
010_0966_a_20L體貌宏偉面如滿月眼若曙星聲如
010_0966_a_21L巨鍾不啻佛法宗主雖在家不失將
010_0966_a_22L相之位也時有朝士或赴方伯之職
010_0966_a_23L或奔州牧之任咸訪山門一見道顏
010_0966_a_24L無不恭肅之禮豈非不怒而威不言而

010_0966_b_01L참으로 대성大聖이 인간 세상에 잠시 내려온 것이다.
교화를 거두고 본원으로 돌아감은 옛 성인의 변치 않는 법칙이기에 광서光緖 경진년(1880, 고종 17) 5월 7일에 병세를 보이더니 입적하였다. 구름이 시름에 잠긴 듯하고, 태양도 참담한 빛을 띠었으며, 산이 울고 물이 오열하고 승속僧俗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달려와 눈물 흘리지 않음이 없었다. 다비를 하고 설봉산 동쪽 고개에 사리탑을 세웠다. 춘추 89세요, 법랍法臘 78세였다. 대사에게서 법을 얻은 사부대중은 천여 명 이상이었다. 아아! 대사가 떠나감이여. 불법의 동량棟樑이 꺾였으니 우리들이 의지할 곳을 잃은 것이로다.
대사는 말세에서만 출중한 분일 뿐 아니라, 불세佛世에 있었다 해도 구담금선瞿曇金仙이 응당 자리의 보배27)로 대우했을 것이다. 그 출중한 재주와 훌륭한 기국, 성대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세상 사람들의 입과 귀에 오르내리니 굳이 많이 기록할 것이 없고, 고시 중에 “길 가는 사람들의 입이 비석이네.(路上行人口是碑)”라는 한 구절을 길게 읊조릴 뿐이다.
숭정崇禎 기원후 다섯 번째 정해년(1887, 고종 24) 국추菊秋(9월)에 문인 계암戒庵 문하門下 가허 영응駕虛靈應이 손을 씻고 삼가 행장을 쓰노라.
영찬影賛
廣顙豊頤              넓은 뺨 풍성한 턱
秀眉鴻耳              수려한 눈썹 큰 귀로
獨坐雪峯頂上            설봉산 정상에 홀로 앉았고
全提佛祖正令            불조의 정령을 전제28)하셨네
大斷海內舌頭            해내의 혀를 크게 끊으니
世穪暎虛長老            세상 사람들 영허 장로라 일컬었지
今這一幅紙面            지금 이 한 폭의 진영이
依俙七分相似            그 모습과 방불하누나
近前子細看             가까이 다가서서 자세히 보니
有口無言說             입은 있으되 말씀이 없구려
身捿不動定             몸은 부동의 선정에 깃들었고
耳聞無響聲             귀는 울림 없는 소리를 듣네
只是日徃月來            아무리 세월 흘러도
惟有本來面目            본래의 면목은 남아 있으리

불초손不肖孫 가허 영응駕虛靈應이 삼가 영찬을 쓰노라.

010_0966_b_01L化耶實大聖權來也收化歸源古聖
010_0966_b_02L恒規故於光緖庚辰五月七日示疾
010_0966_b_03L人寂雲愁日慘山鳴水咽道俗雲奔
010_0966_b_04L莫不涕泣茶毘樹塔雪峯東巓春秋八
010_0966_b_05L十有九憂臈七十有八其得法四衆
010_0966_b_06L不下於千有餘矣大師之去兮
010_0966_b_07L法之棟樑折矣我曹之依怙喪矣大師
010_0966_b_08L不惟末葉之挺特雖在佛世瞿曇金
010_0966_b_09L應以席上之珍遇也其雄才茂器
010_0966_b_10L德休行飛騰乎世人口耳之上不必多
010_0966_b_11L長吟古詩路上行人口是碑一句
010_0966_b_12L而已也

010_0966_b_13L
崇禎紀元後五丁亥菊秋門人戒庵門
010_0966_b_14L下駕虛靈應盥手謹識

010_0966_b_15L

010_0966_b_16L影賛

010_0966_b_17L
廣顙豊頣秀眉鴻耳獨坐雪峯頂上
010_0966_b_18L全提佛祖正令大斷海內舌頭世穪暎
010_0966_b_19L虛長老今這一幅紙面依俙七分相似
010_0966_b_20L近前子細看有口無言說身捿不動定
010_0966_b_21L耳聞無響聲只是日徃月來惟有本來
010_0966_b_22L面目

010_0966_b_23L
不肖孫駕虛靈應敬賛

010_0966_b_24L
1)櫟山集卷之下終
  1. 1)선대부先大夫 문정공文貞公 : 이계조李啓朝(1793~1856)이다.
  2. 2)갑자년에 특별히~겨를이 없었다 : 갑자년(1864, 고종 1) 6월에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 중이던 이유원李裕元을 좌의정左議政으로 임명하였는데, 임소任所가 멀어 바로 부임하지 못하자 재삼 역말을 보내 불렀는데, 7월에야 사은謝恩한 일이 있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특별히 제수하는 명이란 종이품인 함경도 관찰사로 있던 이유원을 정일품인 좌의정에 임명한 일을 가리킨다.
  3. 3)청허淸虛 : 하권의 주 177 참조.
  4. 4)영허 선사의 생몰년과 비교할 때 20년(1883)의 오류가 있는 듯하다.
  5. 5)해와 달이~것이 아니겠는가 : 『장자』 「소요유」에서 요堯가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사양하며 한 말로, 해와 달과 단비처럼 훌륭한 인물인 허유가 세상에 나왔는데, 횃불과도 같고 인위적으로 물을 대 주는 것과 같은 자신이 천하를 계속 차지하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뜻에서 한 말이다.
  6. 6)선사先師께서 돌아가셨는데~짓이 아니겠는가 : 앞에서 요가 허유에 대해 자신을 낮추었던 것과 같은 비유로, 한참 모자란 자신이 선사의 행장을 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이다.
  7. 7)제방을 참방參訪하면서 : 상권의 주 174 참조.
  8. 8)용장龍藏 : 불경佛經의 별칭이다. 불경의 고사에 의하면, 인도의 고승 용수龍樹가 일찍이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화엄경華嚴經』을 싸 가지고 왔다는 데서 온 말이다.
  9. 9)천백 공안公案 : 천칠백 공안을 말하는 듯하다.
  10. 10)일우一雨의 적심과~차이를 궁구하여 : 일우는 일승법一乘法과 같은 뜻으로 근본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비와 같아서 땅을 똑같이 적셔 주지만, 빗물을 받는 초목의 근성에 따라 그 윤택함을 받는 정도는 다양하게 나뉜다는 비유이다. 오교五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섯 단계로 구분한 것이다. 오교에 대한 구분 명칭은 나누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는 선영 대사가 부처님의 근본법과 방편에 대해 두루 궁구하였다는 뜻이다.
  11. 11)곧바로 토끼와~그물은 잊어버렸다 : 『장자』 「외물外物」에서 “통발이란 것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인데,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고, 그물은 토끼를 잡는 도구인데, 토끼를 잡고 나면 그물을 잊는다.(荃者所以在魚。得魚而忘荃。蹄者所以在兔。得兔而忘蹄。)”라고 한 데서 온 말로, 불교에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고 나면 배는 버리는 것이지, 도구인 배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비유와 같은 것이다.
  12. 12)조봉朝鳳의 대가大家 : 조봉은 뛰어난 현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로, 『시경詩經』 「권아卷阿」에서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산에서 우는도다. 오동나무가 자라니, 저 조양에서 자라는도다.(鳳凰鳴矣。于彼高岡。梧桐生矣。于彼朝陽。)”라고 한 데서 온 표현이다. 조봉의 대가란 전후 문맥을 따져 볼 때, 선영 대사의 뛰어난 근기를 보고 자신의 문하로 들이고 싶어 했던 당시 고승들을 표현한 말로 보인다.
  13. 13)북명北溟에서 배회하였다 : 북명은 북쪽의 바다라는 뜻으로, 『장자』 「소요유」에서 “북명에 큰 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은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되면 붕鵬이 된다. 붕은 등의 길이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붕새는 태풍이 불면 비로소 남명南溟으로 날아갈 수가 있는데, 남명으로 날아갈 적에는 바닷물을 쳐 3천 리나 튀게 하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를 날아오르며, 여섯 달 동안을 난 다음에야 쉰다.”라고 하였다.
  14. 14)운문雲門 : 당송오대唐宋五代의 승려인 문언文偃(?~949)의 법호이다.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이다. 후한後漢의 음제陰帝로부터 광진 선사匡眞禪師라는 호를 받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는데, 저서로 『광록廣錄』, 『어록語錄』 등이 있다.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크게 성하여 운문종을 이루었다.
  15. 15)설봉雪峯 : 당나라 때의 승려인 의존義存(822~908)의 법호이다. 천주泉州 남안南安 사람으로, 속성은 증씨曾氏이다. 12세에 경현 율사慶玄律師를 뵙고 출가하여 17세에 낙발落髮하고, 부용산芙蓉山 항조 대사恒照大師를 참알했다. 나중에 무릉 덕산武陵德山에 이르러 선감宣鑑을 참알하고 법계法系를 이었다. 희종僖宗이 진각 대사眞覺大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법사法嗣 가운데 운문종雲門宗의 개조開祖가 된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가장 유명하다.
  16. 16)무딘 도끼 : 법통을 전하였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 청원淸源이 석두石頭로 하여금 남악 회양南嶽懷讓 선사에게 서신을 전하게 하면서, “돌아오는 날엔 그대에게 무딘 도끼(鈯斧子) 하나를 주어서 이 산에 살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석두가 회양 선사의 처소로 갔는데, 서신은 전하지 않고 대뜸 묻기를, “성인들도 흠모하지 않고 자기의 영식靈識도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가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회양은, “그대의 물음이 너무 도도하다. 어찌 좀 낮춰서 묻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석두가 “차라리 영원토록 지옥에 빠져 있을지언정 성인들의 해탈을 구하지는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회양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니, 석두는 돌아갔다. 돌아온 석두에게 청원이 서신을 전달했느냐고 묻자, 석두는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서 주겠다고 했던 무딘 도끼를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청원은 한쪽 발을 내밀었고, 석두는 절을 하고 남악산에 들어가 살았다. 『오등회원五燈會元』 제5.
  17. 17)위엄을 사막에~것이 없겠으나 : 위엄을 사막에 떨치고 영토를 개척한다는 것은 보통 중국에서 멀리 북쪽 사막까지 오랑캐를 정벌하고 공을 세운 사람에 대해 쓰는 표현으로, 여기서는 청허 대사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위엄이 왜적들에까지 떨쳐졌음을 비유한 말이다. 즉 그러한 공적은 이미 세상에 두루 알려져 있으므로 번거롭게 여기서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18. 18)미천彌天 : 진晉나라 때 고승高僧 도안道安(312~385)의 별명으로, 그는 초기 중국 불교의 기초를 닦은 대표적 학승學僧이다. 자세한 내용은 하권의 주 17 참조.
  19. 19)청량淸凉 : 오대五代의 승려인 문익文益(885~958)을 가리킨다. 남당南唐의 군주 서경徐璟이 예경禮敬하여 금릉金陵으로 맞이하자 보은원報恩院에 머물렀는데, 스승의 예로 섬기면서 정혜 대사淨慧大師란 호를 내렸다. 그 후 스님을 따라 수계受戒하고 청량가람淸涼伽藍을 세웠다. 고려와 일본 등지에서 건너온 학자들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학승이었다.
  20. 20)덕산德山(782~865) : 당나라의 선승禪僧으로 엄격한 수행으로 유명했고, 불교 부흥기에 선풍을 떨친 사람이다. 속성은 주周, 자는 선감宣鑑, 시호는 견성 대사見性大師이다. 처음에 율律과 유식唯識을 배웠고, 특히 『금강경』에 정통하여 그 강설을 잘하여 ‘주금강周金剛’이라 불리었다. 제자를 가르칠 때 방편으로 몽둥이를 잘 썼으므로 ‘임제臨濟의 할喝’, ‘덕산의 몽둥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의 밑에서 설봉 의존雪峰義存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21. 21)주금강周金剛 : 덕산을 가리킨다. 환성 지안喚醒志安 역시 화엄학의 강설로 이름이 있었으므로 주금강에 비유한 것인 듯하다.
  22. 22)서 있으면서도~채워서 돌아갔으며 : 왕태王駘란 사람이 다리가 하나 잘렸는데도 제자의 수가 중니仲尼와 더불어 노나라 인구를 반으로 가를 정도로 많았다. 이에 대하여 상계常季가 중니에게 물은 말 중에 “그는 서 있으면서도 별로 가르치지 않고, 앉아 있으면서도 무엇을 강론하는 것도 아닌데 빈 마음으로 찾아왔던 자가 가득 찬 마음으로 돌아갑니다.(立不敎坐不議。虛而往。實而歸。)”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덕충부德充符」.
  23. 23)양월 화상兩月和尙 : 이상에서 거론한 완월과 함월을 가리킨다.
  24. 24)금모金毛의 사자獅子 : 임제臨濟 스님이 제자들을 가르칠 적에 할喝을 썼는데, 그 할의 네 가지 작용 중 하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즉 땅에 웅크린 금빛 털의 사자처럼 소기小機와 소견小見을 깨뜨려 줌을 뜻하는 말이다.
  25. 25)대방大方을 밟은 백우白牛 : 대방은 대도大道를 말한다. 백우는 노지백우露地白牛로, 노지는 문밖의 빈 땅으로 평안하여 일이 없는 장소를 비유하고, 백우는 의향이 청정한 소이다. 『법화경法華經』 「비유품譬喩品」에서 “백우로써 일승의 교법을 비유하고, 이어서 털끝만큼도 번뇌와 오염이 없는 청정한 경지를 가리켜 노지백우라고 하였다.(以白牛譬喩一乘敎法。從而指無絲毫煩惱汚染之淸淨境地爲露地白牛。)”라고 하였다.
  26. 26)성내지 않아도~되는 경우 : ‘성내지 않아도 두려워한다(不怒而威)’라는 것은 『예기禮記』 「악기樂記」에서 예악禮樂의 효용을 설명하면서 나온 말이고, ‘말하지 않아도 교화가 된다(不言而化)’라는 것은 『근사록近思錄』 14권 「관성현觀聖賢」에서 공자의 제자인 안회顔回의 기상을 형용하면서 나온 말이다.
  27. 27)자리의 보배 : 뛰어난 인물을 가리킨다. 『예기』 「유행儒行」에서 “선비는 훌륭한 도학을 갖추고서 임금의 초빙招聘을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8. 28)전제全堤 : 불법의 진리를 온전히 제시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