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사열전(東師列傳) / 東師列傳第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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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 제2권(東師列傳 第二)
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
태고왕사전太古王師傳
스님의 법명은 보우普愚이고 처음 법명은 보허普虛이며, 호는 태고太古이고 속성은 홍洪씨이며, 홍주洪州(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개부의 동삼사 상주국 문하시중 판이병부사 홍양공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下侍中判吏兵部事洪陽公 연延이고, 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된 정鄭씨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둥근 달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여 원元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5년 신축(고려 충렬왕 27, 1301) 9월 21일에 보우를 낳았다.
13세에 회암사의 광지廣智 선사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37세에 크게 깨닫고 46세에 중국 연경燕京을 거쳐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으로 석옥 청공石屋淸珙1) 선사를 찾아갔다. 청공 선사는 보우 스님이 매우 큰 그릇임을 알고 마침내 가사를 주어 믿음을 나타내고 말하였다.
“늙은 중이 오늘에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구나.”
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니 원나라 천자가 그 말을 듣고 그를 초청하여 영녕사永寧寺에서 개당開堂2)하여 설법하게 하고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침향沈香과 불자拂子를 하사하였다.
무자년(충목왕 4, 1348) 봄에 귀국하여 미원현迷源縣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갔다. 임진년(1352)에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이 사신을 보내 제자가 될 것을 청하였으며, 병신년(1356)에는 현릉이 직접 가서 대사를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
임술년(우왕 8년, 1382) 여름에 소설산으로 돌아와 12월 24일에 게송을 설하고 입적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원증圓證’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고 중흥사重興寺(삼각산에 있던 절)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우고

010_1007_c_02L1)師列傳第二

010_1007_c_03L[傳]

010_1007_c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1007_c_05L太古王師傳

010_1007_c_06L
師名普愚初名普虛號太古姓洪氏
010_1007_c_07L洪州人也父開府2) [1] 同三司上柱國門
010_1007_c_08L下侍中判吏兵部事洪陽公延母贈三
010_1007_c_09L韓國大夫人鄭氏母夢月輪入懷因而
010_1007_c_10L有娠元成宗大德五年辛丑九月二十
010_1007_c_11L一日生十三投檜岩寺廣智禪師出家
010_1007_c_12L三十七大悟四十六遊燕都至湖州霞
010_1007_c_13L霧山石屋淸珙禪師師深器之遂以袈
010_1007_c_14L裟表信曰老僧今日展脚而睡矣回至
010_1007_c_15L燕都天子聞之請開堂於永3) [2]
010_1007_c_16L金襴袈裟沈香拂子戊子春東歸入迷
010_1007_c_17L源小雪山4)十二月二十四日說偈而
010_1007_c_18L [3] 壬辰玄陵恭愍王遺使請益丙申
010_1007_c_19L玄陵親臨封爲王師壬戌夏還小雪山
010_1007_c_20L十二月二十四日說偈而逝上甚悼
010_1007_c_21L贈謚日圓證立塔于重興寺之東峯
010_1007_c_22L「師」甲本正誤表作「國」「議」甲本正誤表
010_1007_c_23L作「儀」
「明」甲本正誤表作「寧」「十二…
010_1007_c_24L而逝」十一字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08_a_01L‘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
석종石鐘을 만들어서 사리를 봉안하게 한 곳이 무릇 세 곳이나 되니, 가은加恩(희양산 鳳巖寺)과 양산陽山(양평군 미지산 舍那寺) 그리고 양근陽根(양평군 미지산 小雪庵)이 그곳이다. 석탑을 만들어 보관한 곳은 미원迷源 소설산小雪山이다.
명나라 홍무洪武 5년 임술(1382)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82세이고 법랍法臘은 69년이다. 조정에서는 ‘삼한양조국사 이웅존자三韓兩朝國師利雄尊者’로 추증하였다. 보우는 부처님(能仁)으로부터 57세世 조사가 된다.
이색李穡이 임금의 조서를 받들어 비석의 글을 짓고, 권주權鑄3)가 교지를 받들어 비액碑額의 글씨를 썼다.
환암국사전幻庵國師傳
스님의 법명은 혼수混修이고 자字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庵이고 속성은 조趙씨이며, 광주廣州의 풍양豊陽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7년, 즉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1320)에 출생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나옹懶翁을 초청하여 주맹主盟(시험관)으로 삼고 회암사에서 공부선工夫選 시험을 치렀다. 이때 임금이 시험 광경을 지켜보기 위하여 여러 궁중의 사람들과 양부兩府 문관 및 무관 등 관료들을 거느리고 직접 행차하시어 관람하였다. 강호江湖의 모든 선사와 강사 등 승려들은 급히 금불당金佛堂 안으로 다 모였다.
그러자 법좌法座를 배설하고 나옹 대사가 향을 뽑아서 하는 의식을 마친 다음 자리에 올라 질문을 하였다. 시험장에 모인 스님들은 차례대로 나옹 대사 앞에 나아가 대답을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고 할 뿐이었다. 혹은 이론은 통했으나 응용 면에서는 막히기도 하고, 혹은 일상적인 데에서 심하게 벗어나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나옹 대사는 한 구절을 물어보고는 곧 물러가게 하곤 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임금은 얼굴빛이 기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환암 혼수幻庵混修 선사가 맨 뒤에 이르렀는데, 나옹 대사가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을 하나하나 물으니 선사가 낱낱이 대답하였다.
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25년, 즉 우리 조선 태조 원년 임신(1392)에 열반에 드니,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현릉玄陵(공민왕)이 부디 머물러 있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다. 공민왕은 그에게 ‘국사 정변지 지웅존자國師正徧智智雄尊者’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
문형제門兄弟 33명 중에 출가한 제자는 25명이고 재가在家 제자로는 칠원부원군柒原府院君 윤환尹桓4)·영삼사사領三司事 이인임李仁任5)·판문하判門下 최영崔瑩6)·문하시중門下侍中

010_1008_a_01L寶月昇空作石鍾藏舍利者凡三所加
010_1008_a_02L恩陽山楊根作石塔以藏之者迷源小
010_1008_a_03L1) [4] 明洪武五年壬戌入寂年八十二
010_1008_a_04L臘六十九贈三韓兩朝國師利雄尊者
010_1008_a_05L能二五十七世李穡奉詔撰碑權鑄奉
010_1008_a_06L敎書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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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8_a_08L幻庵國師傳

010_1008_a_09L
師名混修字無作號幻庵姓趙氏
010_1008_a_10L州豊陽人也元仁宗延祐七年高麗忠
010_1008_a_11L肅王七年庚申生麗恭愍王請懶翁
010_1008_a_12L主盟設工夫選於檜巖寺上率諸宮兩
010_1008_a_13L府文武百僚親幸臨觀禪講諸德
010_1008_a_14L湖衲子急皆集會金佛堂中排設法座
010_1008_a_15L師拈香罷陞座垂問在會大衆以次
010_1008_a_16L入對皆曰未會或理通而碍於事
010_1008_a_17L狂甚而失於言一句便退上若有不預
010_1008_a_18L然幻庵修禪師後至師歷問三句
010_1008_a_19L2) [5] 一一應對3) [6] 太祖洪武二十五
010_1008_a_20L我太祖元年壬申入寂贈謚曰普覺
010_1008_a_21L玄陵請留辭歸賜號曰國師正徧智智
010_1008_a_22L雄尊者門兄弟三十三人內出家弟子
010_1008_a_23L二十五在家弟子柒原府院君尹桓
010_1008_a_24L領三司事李仁任判門下崔瑩門下侍

010_1008_b_01L임견미林堅味7)·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우리 조선의 태조 대왕·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림李琳8)·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廉興邦 등 8명이다.
원진국사전元禛國師傳
국사의 집안은 고려 조정에서 평장사平章事·복야伏射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이다. 8대를 연이어 예쁘고 아름답게도 국가교육기관이었던 국학國學에서 학문을 탐구했는데, 독실하고 특이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탁월하였다.
스님의 형제는 모두 다섯 명인데 경룡景龍·응룡應龍·한룡漢龍·변룡變龍·현룡見龍이다. 이 중 한룡이 출가 전 스님의 이름이다. 공민왕의 조정에서 실시한 을미년(공민왕 4, 1355) 과거 시험에서 경룡과 한룡이 다 같이 갑과甲科에 급제하였고 나머지 세 형제도 나중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정유년(공민왕 6, 1357)에 세 형제가 높은 점수로 과거에 다 급제하니 임금이 칭송하여 말했다.
“조曺씨 댁의 다섯 용龍이 계속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니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
이렇게 칭찬하고는 명하여 쌀과 술과 고기를 하사하게 하고 3일 동안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돌면서 축하 행진을 하게 하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경룡의 벼슬은 우대右臺(우의정)에 이르렀고 응룡의 벼슬은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한룡과 변룡의 벼슬은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현룡의 관직은 감사監司에 이르렀다.
게다가 한룡을 보의장군保義將軍이라고 일컬었는데 여기에서 ‘보의保義’란 곧 명나라의 관직 이름이다. 태종조 영락永樂(明 成宗의 연호) 갑신년(1404), 즉 우리 태종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에 보의장군효자비保義將軍孝子碑를 세웠다.이 비석은 봉황산鳳凰山 아래 효자동孝子洞에 있다.
이보다 앞서 한룡은 『상서尙書(서경)』에 나오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글 여섯 자를 허리띠에 새겨 띠고 다녔다. 고려 조정에서 장령掌令 벼슬을 지냈던 서견徐甄9)과 함께 금천衿川에 은둔하여 살면서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았는데 서견이 시 한 수를 지었다.

千載神都隔渺茫    천년의 신도神都 아득히 막혔구나
忠良濟濟佐明王    충성스러운 신하들 밝은 왕 보좌하더
니統三爲一功安在    삼한을 통일한 공은 어디 있는가?
只恨前朝業不長    고려 왕업 짧은 것이 한스럽구나!

이에 화답한 한룡의 시는 이러하다.

天明人事兩茫茫    천시天時와 인간 일이란 알 수 없는 것
更向那邊拜聖王    다시 저쪽을 향해 거룩한 임금께 절하네
莫道此間眞趣寡    이 사이 진취眞趣 적다고 말하지 마소

010_1008_b_01L中林堅味守門下侍中李成林我太
010_1008_b_02L祖大王鐵城府院君李琳三司左使廉
010_1008_b_03L興邦等八公

010_1008_b_04L

010_1008_b_05L元禛國師傳

010_1008_b_06L
國師世居麗朝平章僕射八世嬋媛爲
010_1008_b_07L國學篤異卓乎凡人五兄弟曰景龍
010_1008_b_08L應龍漢龍變龍見龍而漢龍乃國師名
010_1008_b_09L恭愍朝乙未試景龍及漢龍俱摺
010_1008_b_10L甲科一人第三後乙科丁酉三兄弟
010_1008_b_11L俱登高科上稱之曰曺氏五龍相繼
010_1008_b_12L而登科此乃古事之所希也命賜白米
010_1008_b_13L酒肉遊街三日而罷及麗亡入我朝
010_1008_b_14L景龍官至右台應龍官至判書漢龍變
010_1008_b_15L龍官至叅議見龍官至監司而以漢
010_1008_b_16L稱保義將軍則保義乃上國官名也
010_1008_b_17L太宗朝永樂甲申即我太宗即位之四
010_1008_b_18L年也立保義將軍孝子碑碑在鳳凰山
下孝子洞也

010_1008_b_19L
初漢龍尙書忠臣不事二君六字於衣帶
010_1008_b_20L與高麗前掌令徐甄隱於衿川相與
010_1008_b_21L有詩曰千載神都隔渺茫忠良濟濟佐
010_1008_b_22L明王統三爲一功安在只恨前朝業不
010_1008_b_23L漢龍和詩曰4) [7] 人事兩茫茫
010_1008_b_24L向那邊拜聖王莫道此間眞趣寡山高

010_1008_c_01L山高處處水聲長    산 높은 곳곳에 물소리 끊이지 않네

이들의 시를 본 사헌부 관원(臺官)이 두 사람을 치죄治罪하려고 하자 임금이 말하였다.
“백이伯夷 같은 무리들인데 어찌 꼭 치죄한단 말인가?”
이와 같이 말하며 만류했다. 한룡이 하루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니 어머니는 그제야 그가 스님이 된 것을 알고 매우 놀라 울면서 말했다.
“네가 비록 고려 조정의 충신이기는 하나 지금 네 어미가 아직 살아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부모가 물려준 몸뚱이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냐? 집안이 이제 멸망하였구나.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산단 말이냐?”
한룡은 꿇어 엎드려 절을 하고 하직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소생은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가 되었고 게다가 불효를 저지른 아들이 되었으니 그 죄가 심합니다. 불충을 하고 또한 불효를 하는 것보다는 불충은 하되 어머니의 뜻만은 받드는 것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머니가 슬퍼서 울던 마음을 가시게 하였다. 시비侍婢를 시켜 머리 감을 물 한 대야를 떠오게 하여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묶으니 그 자리에서 당장 두 자나 자라났다.
그날 한룡은 의대衣帶를 정제하고 서울로 올라가 며칠 지낸 뒤에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고 다시 참의參議에 제수되었다. 한룡은 늙은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한 늙은 스님이 찾아와서 물었다.
“세염洗染 스님이 이곳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세염이란 한룡이 승려가 되면서 고친 이름이다. 참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스님은 정말 모르고 계셨습니까? 제가 바로 세염입니다. 그런데 늙으신 모친 때문에 차마 그 마음을 바꾸지 못했답니다. 스님께서는 속히 돌아가십시오. 아마도 제가 장차 다시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룡은 3년 동안 효행을 다하고, 또 3년이란 세월이 지난 다음 비로소 다시 도망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표주박 하나와 허름한 누더기 한 벌만 가지고 길을 바꾸어 호남으로 가서 도갑사道甲寺10)에 기거하였다. 그러다 다시 그곳을 몰래 떠나서 한동안 종적을 감추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010_1008_c_01L處處水聲長臺官欲治之上曰伯夷之
010_1008_c_02L何必治之一日歸其母母始知其
010_1008_c_03L爲僧大驚而泣曰汝雖爲前朝之忠臣
010_1008_c_04L今汝母尙在忍能削髮而不念父母之
010_1008_c_05L遺軆耶家門滅矣吾誰依焉跪拜而
010_1008_c_06L謝曰生爲臣子已爲不忠之臣亦爲
010_1008_c_07L不孝之子其罪其矣與其不忠而又
010_1008_c_08L爲不孝孰若不忠而獨能奉母之旨乎
010_1008_c_09L於是和顏柔聲終止其母涕5) [8] 之懷
010_1008_c_10L命侍婢取沐髮之水一器而來引髮而
010_1008_c_11L則即地長者二尺矣是日正其衣帶
010_1008_c_12L赴入京師過數日官至承旨復拜叅
010_1008_c_13L以母老乞由歸里則有一老僧
010_1008_c_14L訪曰聞有洗染師在此矣今安在㢤
010_1008_c_15L盖洗染漢龍爲僧變名者也叅議笑曰
010_1008_c_16L爾能不知乎洗染即我而以老母之故
010_1008_c_17L不忍變其心也汝速歸6) [9] 我當有更
010_1008_c_18L見之日矣其後母喪三年致孝又三年
010_1008_c_19L始復逃入於伽倻山矣持一瓢曳7)𧝟 [10]
010_1008_c_20L轉向湖南來接于道甲8)山下 [11] 又後
010_1008_c_21L「雪」下甲本正誤表有「山」「開」甲本正誤
010_1008_c_22L表作「關」
「明」下甲本正誤表有「白」
010_1008_c_23L「明」甲本正誤表作「時」
「汝」甲本正誤表作
010_1008_c_24L「泣」
「之」甲本正誤表作「去」「𧝟」甲本
010_1008_c_25L正誤表作「弊」
「山下」甲本正誤表作「寺」

010_1009_a_01L그 후에 그는 남평南平(전남 나주) 불회사佛會寺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사찰 중건의 일을 시작했다. 그의 절구 시 한 수가 있으니 이러하다.

千年王業一朝塵    천년 왕업도 하루아침의 티끌이 되니
白首孤臣淚滿巾    머리 하얀 외로운 신하 눈물만 흐른다
借問首陽何處在    묻노니 수양산은 어느 곳에 있는가?
吐含明月自相親    뜨고 지는 밝은 달을 벗 삼아 살리라

이 시를 보면 한룡이 지난날 벼슬길에 나섰던 것은 정말로 어머니를 위해서 굴복했던 것이고, 지금의 거동은 두 성姓을 섬기지 않으려는 의지가 분명하다. 마음이 선문禪門에서 놀고 현묘한 도에 마음을 붙이니, 아! 슬픈 일이로다. 우리 조선에서 벼슬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틀림없다.
이보다 앞서 세염 스님이 가야산을 떠나 홍류동紅流洞 10여 리 밖으로 나오니 인곡산仁谷山 아무도 없는 곳에 초목만 무성하고 자갈과 돌들이 많아 험난하기가 그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었다. 다시 걸어서 30리쯤 이르니 길에 어떤 짐승 하나가 있는데 산 것도 같고 죽은 것도 같으며, 앉은 듯도 하고 누운 듯도 하였으며, 일어나려고 하나 일어나지 못하고 울려고 하면서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앞으로 다가가서 보니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고 모습은 마치 조주潮州의 악어鰐魚 같았으며, 크기는 흡사 채석강의 고래 등짝만 했다. 머리를 쳐들고 사람을 바라보더니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크게 입을 벌렸다. 세염이 물었다.
“네가 사람을 잡아먹다가 뼈다귀가 목구멍에 걸린 것 아니냐?”
호랑이가 비록 대답은 없었으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세염이 다시 물었다.
“내가 너를 살려 준다면 나를 해치지 않겠느냐?”
호랑이는 또 머리를 수그리고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한 모습을 지었다. 곧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였더니, 길이가 몇 자쯤 되는 사람의 뼈가 호랑이의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자잘한 뼈와 커다란 뼈가 헤일 수 없이 많았다. 목에 걸린 뼈를 하나하나 뽑아내니 호랑이는 흰 가슴과 푸른 수염을 흔들어 감사하다는 형용을 대여섯 차례 짓고는 가 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세염은 호남에 있는 이 절(불회사)로 향했다. 불회사에 온 세염 스님은 무너져 내린 절을 중수重修할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의 힘이 군색하기 짝이 없어 무릎을 꿇고 앉아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사람을 흔들어 대기에 문밖으로 나가 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사람을 잡아 가지고 와서 앞에 내려놓고 가 버렸다. 이에 매우 놀라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처녀였다. 그 처녀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곧 그 처녀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내고

010_1009_a_01L逃身不知1) [12] 托跡于南平佛會寺
010_1009_a_02L營重建有詩一絕曰千年王業一朝塵
010_1009_a_03L白首孤臣淚滿巾借問首陽何處在
010_1009_a_04L含明月自相親盖向日之仕眞所謂爲
010_1009_a_05L親屈而今日之擧不事二姓之志也
010_1009_a_06L遊心禪門寄心玄道嗚呼其不受我
010_1009_a_07L朝之爵祿也信矣初自伽倻2) [13]
010_1009_a_08L紅流洞十餘里外仁谷山無人之地
010_1009_a_09L木之茂沙石之險不可以喩行至三
010_1009_a_10L十里路有一獸如生如死如坐如臥
010_1009_a_11L欲起不起欲啼不啼當前則乃3)長尾 [14]
010_1009_a_12L九尺形如潮州之鰐魚大如采石之鯨
010_1009_a_13L擧目向人口如呑4) [15] 之狀乃問之
010_1009_a_14L汝雖殺人食而骨鯁於口乎虎雖無
010_1009_a_15L低仰其首如知其言又曰我能生
010_1009_a_16L則不害我耶又低其首如泣如5) [16]
010_1009_a_17L乃使列其口咽則長數尺人骨掛結於
010_1009_a_18L其中矣而細骸6) [17] 不可勝數乃緃
010_1009_a_19L而去之虎白胷靑鬚揮謝者五六次而
010_1009_a_20L仍向湖南之是寺方營重建財力
010_1009_a_21L猶窘危坐而思時夜將曉忽有長颷
010_1009_a_22L動人出門而視則有一大虎捉人而
010_1009_a_23L致前而去乃大驚視之則乃一處
010_1009_a_24L子也氣息將絕呼而不答乃湯洗其

010_1009_b_01L정수리를 주물러 주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가 알맞은 곳에 옮겨서 뉘어 놓았다.
기운을 이끌고 호흡을 일으키는 방법을 쓰고 약 먹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자 사나흘쯤 지나니 곧 쾌차하였다. 세염이 곧 그녀의 용모를 관찰하고 집안의 내력을 들으니 곧 그녀는 영남 지역에 사는 정승 김공철金公喆의 딸이었다. 한편 놀랍기도 하고 한편 불쌍하기도 하여 한곳에 지내면서도 따로 처소를 만들어서 기거하게 하고 구원의 손길로 보살펴 주면서도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니 당년 열일곱 살이었다. 세염은 그녀를 어떻게 하면 본가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온 연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 집은 불행하여 저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아버지는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낸 김공철입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101세 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지난 2월 18일 밤에 집 후원 돌담에서 뽕잎을 따던 중에 갑자기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는 정신을 잃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때는 임진년(태종 12, 1412) 그믐날이었다. 세염은 음식과 의복을 그녀와 나누어 먹고 쓰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않았다.
세염은 이해 8월 8일 그 처자를 남장으로 변장하게 하고 영남 김 상공의 집을 찾아 나섰다. 하루에 10리, 혹은 20리를 걸어서 높은 고개를 넘고 산등성이를 지나서 더러는 어촌漁村의 주점에서 묵기도 하고 때로는 역정驛亭의 여관에서 기식寄食하기도 하면서 무려 일곱 달이나 걸은 끝에 비로소 김 상공의 집에 이르니 이듬해인 계사년(1413) 2월 17일이었다.
그 처자가 살던 마을에 도착하니 김 상공의 집 여자 종이 물을 길어 성급하게 돌아가다가 남장을 한 아이를 보고 김 상공의 딸이 아닌가 의심하여 김 상공의 부인에게 아뢰었다.
“밖에 지금 남자 복장을 한 아이가 와 있는데 분명히 우리 집 처자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스님과 같이 왔습니다.”
부인이 말하였다.
“너는 어째서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느냐?”
부인은 자기 딸이 이미 호랑이에게 물려 가 죽었다고 알고, 명일明日 소상小祥일에 넋을 불러 원통함을 씻어 주는 재를 거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몸종이 다시 물을 길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부인에게 고하자 부인이 말했다.
“그럼 스님과 남자아이가 어디 있느냐?”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 보니 과연 몸종의 말과 같이 비록 남자의 복색을 하였으나 틀림없이 잃어버린 자기의 딸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부인은 달려가서

010_1009_b_01L摩其頂處之寒溫適中之所乃有
010_1009_b_02L引氣生息之道藥餌不懈7) [18] 乃差
010_1009_b_03L8) [19] 容貌聽其本脉則乃嶺南相公金
010_1009_b_04L公喆之女也驚而憐之雖同處而有別
010_1009_b_05L有救而無近問其時年則乃十七歲也
010_1009_b_06L洗染思欲致之於其家問其所以然
010_1009_b_07L吾家不幸吾喪外親而外親則恭愍
010_1009_b_08L王金相公也有母有兄又有百一歲祖
010_1009_b_09L而去二月十八日夜采桑于後院石
010_1009_b_10L墻矣忽有猛虎噴突9) [20] 至于此云
010_1009_b_11L則壬辰二月晦日也洗染分食分衣
010_1009_b_12L泄於人是年八月初八日使處子爲男
010_1009_b_13L子之裝尋向嶺南金相公之家一日行
010_1009_b_14L十里或二十里踰嶺越岡10) [21] 於漁
010_1009_b_15L或寄食於驛亭凡七閱月而訪至
010_1009_b_16L于金相公家則乃癸巳二月十七日也
010_1009_b_17L至其外閭則有婢子汲水忙去見其男
010_1009_b_18L服之兒竊疑之因告于金相夫人曰
010_1009_b_19L至外男服之兒的如吾家處子而與僧
010_1009_b_20L俱至夫人曰汝何出此妄言耶盖夫
010_1009_b_21L知其爲虎所死而以明日小祥招魂
010_1009_b_22L雪寃之擧婢子又汲水而出又告其夫
010_1009_b_23L夫人曰僧與童男安在乃出見
010_1009_b_24L果如婢子之言雖着男服而無異於所

010_1009_c_01L그녀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잠시 뒤에 저간의 사연을 물었다. 그 딸이 살아남게 된 연유를 소상하게 말하였다. 부인이 물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살고 계시며 법명은 무엇입니까?”
세염 스님이 대답하였다.
“소승은 호남 지방에 살고 있는 세염이라 합니다.”
그러자 부인이 말하였다.
“스님께서 우리 집 딸아이를 살려 주셨으니 스님과 약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세염이 두 번 절을 올리고 사양하며 말하였다.
“사람이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구원하여 살려 주는 것이야 천리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신분의 높고 낮음이 다른데 저와 혼인을 허락하신다면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가당한 일이라 하겠습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그러시다면 대사의 은혜를 장차 어떻게 갚는단 말입니까?”
세염이 대답하였다.
“소승은 지금 호남 땅 불회사라는 절에 기거하고 있는데 그 절이 난리를 겪어 무너져 내렸기에 장차 그 절을 고쳐 지으려고 합니다.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은혜에 대하여 어찌 보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그럼 비단으로 시주를 할까요? 비단으로 보시를 한다면 오히려 멀리 가지고 가시기에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고 돈으로 보시를 한다면 절을 보수하는 데 그리 귀중한 것이 못될 터이니, 그렇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보시를 해야 하겠습니까?”
세염이 자그마한 바랑에서 아주 작은 항아리 하나를 꺼내더니 말하였다.
“곡식을 이 안에 가득 채워 주십시오.”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그릇이 그렇게 작은데 그 안에 쌀 몇 되나 들어가겠습니까?”
세염이 대답하였다.
“다만 이 그릇에 가득 채워만 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
그러자 부인은 쌀 한 말을 퍼서 그 그릇에 부었으나 그릇은 오히려 차지 않았다. 다시 쌀 한 말을 퍼내어 그릇에 부었는데도 역시 가득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말, 두 말, 열 말이 들어가고, 다시 한 섬, 두 섬, 열 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 안에 있는 곡식을 다 내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고

010_1009_c_01L失之女子乃握手痛哭俄問其故
010_1009_c_02L乃以所得生之由詳悉以對夫人曰
010_1009_c_03L僧則何居而名則誰也染上人曰小僧
010_1009_c_04L則南湖洗染也夫人曰汝能生致吾家
010_1009_c_05L之女子與君約婚何如洗染再拜而謝
010_1009_c_06L人至死境救而生之天理之常也
010_1009_c_07L11) [22] 有別許以爲婚人彜之乖也
010_1009_c_08L可當之夫人曰然則大師之恩將何
010_1009_c_09L圖報乎洗染曰小僧方在湖南佛會寺
010_1009_c_10L而寺經兵燹今將改葺必欲以報恩爲
010_1009_c_11L則豈無捨施之恩乎曰以帛乎
010_1009_c_12L帛則猶難遠致也以錢乎則非足貴也
010_1009_c_13L將何爲之洗染出小鉢囊一小缸請以
010_1009_c_14L粟米捨施夫人笑曰其器小能入幾升
010_1009_c_15L米乎洗染曰只充此器則猶可爲也
010_1009_c_16L於是夫人出一斗米以給猶未能充
010_1009_c_17L出一斗米以補而亦無充溢12) [23] 一斗
010_1009_c_18L二斗至十斗一石二石至於十餘石
010_1009_c_19L「其」下甲本正誤表有「徃」「出」甲本正誤
010_1009_c_20L表作「山」
「長尾」甲本正誤表作「尾長」
010_1009_c_21L「烟」甲本正誤表作「咽」
「訢」甲本正誤表作
010_1009_c_22L「訴」
「巨」作「臣」{甲}「四」下甲本正誤表
010_1009_c_23L有「日」
「觀」下甲本正誤表有「其」「去」
010_1009_c_24L甲本正誤表作「而」
「投」下甲本正誤表有
010_1009_c_25L「宿」
「卑」作「早」{甲}「之」下甲本正誤表
010_1009_c_26L有「氣」

010_1010_a_01L저 주먹만 한 작은 항아리에 이미 천여 섬이나 되는 곡식을 부었건만 끝내 가득 찰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그릇은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데 그릇은 채워지질 않고, 우리 집의 곡식이 그리 적은 것이 아닌데 그 곡식을 다 부어도 그릇이 넘치질 않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세염이 말하였다.
“집 안에 남은 곡식이 없어서 혹 걱정이 되십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비옥한 토지가 문전에 있고 나라에서 내려 주는 녹봉이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그리 걱정은 안 되지만 적은 곡식이 아니며 집 안에 있던 것은 이미 다 드렸습니다.”
세염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자 그 그릇이 갑자기 가득 차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은 겨우 한 말 곡식의 분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곧 마음속으로 그 스님이 신령한 스님임을 알고는 물었다.
“스님의 본가는 어디에 있으며, 무슨 까닭으로 스님이 되셨습니까?”
세염이 대답하였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서 외도外道(여기에서는 佛道)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이렇게 허송세월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저의 성과 이름도 다 잊었습니다.”
부인은 더욱 그 스님의 용모가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 다시 물었다.
“제가 들으니 ‘부처님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복을 받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하더이다.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제가 부처님께 기원할 것이 있습니다.”
세염이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부인이 말하였다.
“우리 집은 일찍이 초상을 당하는 재앙이 있었으니, 이미 정승인 남편을 잃었고 다만 딸 아이 하나만 남았는데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른 아들이 없는지라 집안의 대를 이을 경사스러운 일이 없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정승을 지낸 남편이 지난해 5월 초닷샛날 죽었는데 지금 제가 그분의 아이를 회임한 지 아홉 달째 들어섰습니다. 스님께서는 노자老子와 부처님의 도를 다 지니고 계신 듯하니 제가 아들을 낳아 우리 가문을 보전하고 또 그 아이가 요절하지 않도록 부처님께 기원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바로 제가 소원하는 그것입니다.”
세염이 말하였다.
“유복자는 쉽게 요절하지 않는 법입니다만 부인의 집안에 감추어 둔 물건을 속히 태워 없애야 탈이 없겠습니다.”

010_1010_a_01L家所有只自如是如拳小缸千餘石
010_1010_a_02L粟米終無盈滿之色1) [24] 盈而不盈
010_1010_a_03L人笑曰其器不爲大矣而器不從充滿
010_1010_a_04L2) [25] 不小矣而*谷不爲盈溢無乃恠
010_1010_a_05L底事乎洗染曰家無所餘3) [26] 而或有
010_1010_a_06L憂愁之態乎夫人曰沃土在前榮祿
010_1010_a_07L在後 *谷非不多而方在家中者已盡
010_1010_a_08L洗染曰然則此亦足矣於是其器
010_1010_a_09L卒然充滿掛諸4) [27] 則不過一斗*谷
010_1010_a_10L夫人乃心知其爲神僧問曰君之本家
010_1010_a_11L安在何故爲僧洗染曰幼而失所怙
010_1010_a_12L罔知攸措因入於外道削髮以爲虛送
010_1010_a_13L歲月者已久故不知父母所居之宅
010_1010_a_14L忘姓名云夫人尤知其容貌之不凡
010_1010_a_15L吾聞佛者能壽人能福人亦能禍人
010_1010_a_16L此語不欺則吾有所祝也洗染曰
010_1010_a_17L何事也夫人曰吾家早經喪禍已喪
010_1010_a_18L相公大爺而只有一女子幾死而復生
010_1010_a_19L無他子可嗣之慶此將奈何相公大爺
010_1010_a_20L訣於5) [28] 年五月初五日而今吾胞胎者
010_1010_a_21L九月矣君有老佛之道則能盟之佛
010_1010_a_22L使得令子而保吾家門且使生子而不
010_1010_a_23L夭乎吾所願者此也洗染曰遺腹之
010_1010_a_24L6) [29] 不夭死而令夫人之家有所藏

010_1010_b_01L
부인이 말하였다.
“무엇을 감추어 두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세염이 말하였다.
“만약 저를 속이시고 끝내 버리지 않으시면 상공相公의 집안은 결국 가문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자 부인은 곧 무당과 함께 땅속에 묻어 두었던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을 꺼내 스님에게 보여 주었다. 대개 나무로 만든 인형은 아이를 가진 부인이 훌륭한 아이를 낳기 위하여 규중 깊숙이 으슥한 곳에 감추어 두는 것으로서 영남 지방의 풍속에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부인이 말하였다.
“어떻게 이것을 제가 감추어 두었는지 아셨습니까?”
세염이 대답하였다.
“집 안에 이런 것이 있으면 복을 받지 못하고 재앙만 일어나며, 도리어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 피해만 입게 될 것입니다. 옛날 공자께서도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아마도 후손이 없게 될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라고 말씀하셨으니 속히 불에 태워 없애십시오.”
그러고는 하녀를 시켜 불을 붙여 태우게 하니, 부인은 더욱 그 스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염이 바랑 속에서 약 열 첩을 꺼내 부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아이를 낳으려 할 무렵에 이 약 서너 첩을 쓰면 훌륭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떠나가 버렸다.
불회동 마을 아래 도착한 세염 스님은 가지고 온 곡식을 좁은 길에 내려놓았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시주를 구걸하지 않아도 절을 짓는 비용으로 충분한 양이었다. 그러므로 이 절을 세우는 일은 사람이 한 게 아니라 하늘이 한 것이요, 스님이 한 일이 아니라 신神이 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 김 정승 댁 부인이 야밤에 규방 문 앞을 쓸고 나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흡사 세염 스님과 같았다. 다가와서 부인에게 말하였다.
“내일 틀림없이 큰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대의 집안에 복이 내릴 것입니다.”
부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노인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그날 새벽에 곧 아들을 낳았으며, 또 그날 밤에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그 노인이 다시 와서 부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니 아이의 이름을 상귀相貴라 짓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부인은 세염 스님이 신통력을 부려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고는 아이의 이름을 상귀라고 지었다. 그 아이는 열다섯 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스무 살 때에는 호남 순찰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세염 스님을 찾아갔으나, 피하고 죽어도 만나 주지 않았으니

010_1010_b_01L速爲投火夫人曰何所藏乎洗染
010_1010_b_02L若欺而不去則相公之宅家門滅
010_1010_b_03L夫人乃出其與巫覡所埋木俑人
010_1010_b_04L盖木俑人胞胎之婦人置之於閨
010_1010_b_05L中幽僻處以求令子之志而嶺俗之所
010_1010_b_06L有者也夫人曰何其知有此物也
010_1010_b_07L染曰家有此物則非福爲禍反不得
010_1010_b_08L而又害之孔子之所謂始作俑者
010_1010_b_09L其無後乎者速投火中即令小婢
010_1010_b_10L火焚之夫人尤知其非人而神也洗染
010_1010_b_11L出藥十貼以給夫人曰解胎之日服此
010_1010_b_12L三四7) [30] 則可使生兒無病而能得令
010_1010_b_13L子云而去及至佛會洞下粟米之狹路
010_1010_b_14L不求於人足於創寺之需矣乃知是寺
010_1010_b_15L之建非人而天也非僧而神也金相
010_1010_b_16L公夫人夜掃閨門小焉將枕矣夢有
010_1010_b_17L一老人形如洗染降謂夫人曰明日
010_1010_b_18L必有大慶可以施福於君家矣夫人欲
010_1010_b_19L與之語而不復見覺則乃夢也是日
010_1010_b_20L乃得生子又是日夜夢老人又來
010_1010_b_21L而告于夫人曰是兒必爲貴卿名以相
010_1010_b_22L貴二字勿泄於人又不見乃知洗染
010_1010_b_23L神助之所以也因名曰相貴十五歲科
010_1010_b_24L二十爲湖南巡察使而訪洗染諱死不

010_1010_c_01L세염의 의지가 혼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다.
그는 경영하는 일이 있어서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 얻고 동서에서 재물이 모여들었으니 사람들은 세염의 신통력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몰랐다. 돌탑 하나를 세웠는데 탑 윗부분에 이런 시가 있다.

天日向山封      하늘의 해가 봉산封山11)을 향하니
湖南第一峰      호남에서 제일가는 봉우리로고
復如知者在      만일 다시 아는 이가 있다면
不敢毁斯墉      감히 이 담벼락을 헐지 못하리라

그때 호남 순찰사가 행차하여 금성錦城(나주)에 이르렀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앞에 버티고 서서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종자從者들이 달려들어 그 스님을 꾸짖으며 그를 조사해 보았더니 조용한曺漢龍이라는 명패를 차고 있었다. 순찰사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그 스님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제 이름이 아니고 저는 곧 원진元稹이라는 승려입니다.원진은 그가 뒤에 불렀던 호이다. 그런데 순찰사께선 금천衿川의 일을 듣지 못하셨소?”
순찰사가 매우 놀라 서울 조정에 보고하고 서울로 모시고 올라가서 임금을 배알하도록 주선했다. 임금이 스님에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중이라고 말했는가?”
원진 스님이 정색하며 말하였다.
“저는 노자와 부처님의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
임금이 원진 스님에게 명하여 시 한 수를 지으라 하였다. 그러자 원진 스님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었다.

謫下人間八十秋    인간 세계에 귀양 온 지 어언 80년
無情白髮已盈頭    무정한 백발만 머리에 가득하네
乾坤有限家何在    천지도 한계 있는데 내 집은 어디인고?
日月生輝世更休    해와 달이 찬란하게 빛나니 세상이 아름답네
東出嶺邊皆觸感    동쪽 고갯마루 벗어나면 모든 감회 새롭고
南歸湖上足消愁    남쪽 호남으로 돌아가면 근심이 사라지네
君王莫道爲僧苦    임금님, 스님 생활 고달프다 말하지 마소
不肖孤臣髮不留    못난 이 중은 머리 기를 생각 없소이다

임금은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도 돈과 재물을 희사하니, 그로 인하여 불회사는 큰 어려움 없이 새로 창건되었다.
그 뒤 세조대왕이 국사로 추증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는 영평永平지금의 남평南平이다. 효자동孝子洞에서 태어났는데 고려조의 정승 정통禎統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사용하던 발우와 신었던 신발이 절에 전해져 내려온다.

010_1010_c_01L其志之不混矣其在所營有求必得
010_1010_c_02L東西鳩財人不知其神造之理首立一
010_1010_c_03L石塔上有詩曰天日向山封湖南第
010_1010_c_04L一峰復如知者在不敢毁斯墉時湖
010_1010_c_05L南巡察使行到錦城道遇一僧當前
010_1010_c_06L不避從者呵之詰其所佩曺漢龍也
010_1010_c_07L巡使曰汝何至此答曰此果非吾名
010_1010_c_08L乃元稹僧也元稹其爲後號也 [4] 巡使不
010_1010_c_09L聞衿川之事乎巡使大驚問于京師
010_1010_c_10L驛送赴京上曰汝胡名僧也元稹正色
010_1010_c_11L吾乃老佛道也上命賦詩元稹應
010_1010_c_12L聲曰謫下人間八十秋無情白髮已盈
010_1010_c_13L乾坤有限家何在日月生輝世更休
010_1010_c_14L東出嶺邊皆觸感南歸湖上足消愁
010_1010_c_15L王莫道爲僧苦不肖孤臣髮不留上嘉
010_1010_c_16L尙其意賜以粟帛洛中土大夫多賻
010_1010_c_17L錢財仍成佛會寺世祖大王贈國師

010_1010_c_18L下敎旨永平今之
南平
孝子洞生麗朝相國
010_1010_c_19L禎統之第三子鉢鞋留傳寺中
010_1010_c_20L「似」甲本正誤表作「以」「谷」甲本正誤表
010_1010_c_21L作「糓」次同
「之」下甲本正誤表有「糓」
010_1010_c_22L「肩」甲本正誤表曰衍字
「今」甲本正誤表作
010_1010_c_23L「前」
「卒」甲本正誤表作「率」「帖」甲本
010_1010_c_24L正誤表作「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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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선사전涵虛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수이守伊이고 호는 무준無準이다. 훗날 오대산 영감암靈感庵에서 잠을 잤는데 그날 밤 꿈에 한 신승神僧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의 법명은 기화己和이고 호는 득통得通이니라.”
그런 까닭에 그 말을 따라 법명과 호를 바꾸었다. 그의 헌호軒號는 함허涵虛이고 충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이보다 앞서 상주 사불산에 있으면서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金剛經五家解說誼)』라는 책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임종하려고 할 무렵에 그의 제자 홍예洪預 등을 명하여 한 책은 불에 태우고 한 책은 땅에 묻으라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그 책을 묻은 자리에서 홀연히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기에 홍예가 그 사실을 광묘光廟, 즉 세조世祖의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그 책을 상국上國(明)에 참고해 보라고 보냈는데, 그때가 명나라 대종代宗 경태景泰(1450~1456) 연간의 일이다. 승상丞相 김수온金守溫12) 등을 시켜서 이 경에 주注(說誼)를 곧바로 붙이게 하였다.
대명大明 태종太宗 영락永樂 12년 을미(1415) 여름에 직접 「금강경설의서金剛經說誼序」를 썼는데 그것이 세간에 유포되어 있다. 문인門人 홍예 등 10여 명과 무학 대사 문인의 행장行狀이 있다.
구곡왕사전龜谷王師傳
스님의 법명은 각운覺雲이고 호는 구곡龜谷이다. 혹은 소은小隱이라 하기도 했다.
윤소종尹紹宗13)이 임금에게 간하여 찬영粲英 스님을 내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잠적하여 은둔 생활을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찬영 스님은 태고太古(普愚)의 법제자이고 환암幻庵(混修)의 문제門弟이다. 호는 원응圓應이고 별호는 고저왕사古樗王師라고 불렀다.
현릉玄陵(고려 공민왕)은 직접 「달마절로도강도達摩折蘆渡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서 하사하고, 또 ‘구곡각운龜谷覺雲’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주었으며, 아울러 스물네 자로 된 법호14)를 내려 주었다. 스님은 『선문염송집설화禪門拈頌集說話』 열 권을 지어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스님은 호남 용성龍城(남원)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환암 혼수幻庵混修의 법을 이었다. 목은 이색이 지은 찬문贊文이 행장처럼 자세하다.
벽계대사전碧溪大師傳

010_1011_a_01L涵虛禪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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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名守伊號無準後宿于五臺山靈感
010_1011_a_03L夢一神僧曰子名己和號得通
010_1011_a_04L依其言而改名號軒號涵虛忠州人
010_1011_a_05L初在尙州四佛山著金剛經說誼書
010_1011_a_06L二本臨終命弟子洪預等一本燒之
010_1011_a_07L一本埋之未久其埋處忽生瑞氣
010_1011_a_08L預以聞光廟即世祖朝也以其本送上
010_1011_a_09L明代宗景泰也叅考而來使丞相金
010_1011_a_10L守溫等直注於本經大明太宗永樂十
010_1011_a_11L二年乙未夏自述金剛經說誼序行于
010_1011_a_12L門人洪預等十餘人無學門人有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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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1_a_14L龜谷王師傳

010_1011_a_15L
師名覺雲號龜谷或曰小隱尹紹宗
010_1011_a_16L諫斥粲英故避隱不市粲英即太古之
010_1011_a_17L幻庵之弟號圓應別號古樗王師
010_1011_a_18L玄陵達摩折蘆渡江圖普賢六1) [31]
010_1011_a_19L白象圖賜之又手書龜谷覺雲四字
010_1011_a_20L賜二十二字號作禪門拈頌集說話十
010_1011_a_21L刊行于世湖南龍城人也幻庵修
010_1011_a_22L之嗣李牧隱作贊具如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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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1_a_24L碧溪大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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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법명은 정심正心이고 호는 벽계碧溪이며 금산金山(경북 금릉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조선 태종 때 극심한 불교 탄압을 당하자 머리를 기르고 처자식을 양육하면서 황악산黃岳山(김천시)으로 들어가 물한리物罕里에서 숨어 살았다. 뒷날 선법禪法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 전하고, 교학敎學은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 전하였으니, 그로 인해 조선 시대 선禪과 교敎의 두 법맥이 끊어지지 않고 번성해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덧없는 일이로구나. 시대의 운명이여!
정열수丁冽水(정약용)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산에서 내려온 이후로 벽계 정심 대사를 위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15)을 짓지 않고 ‘남쪽 바다로 옮겨가는 붕새’를 추념追念하게 되었다.”
문인으로는 벽송 지엄·묘각 수미妙覺守眉·정련 법준 등이 있는데 그의 행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벽송선사전碧松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지엄智嚴이고, 호는 야로埜老이며, 그가 살고 있던 집의 호, 즉 당호堂號는 벽송碧松이라 하였다. 속성은 송宋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복생福生이며 부안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는 왕王씨였는데 꿈에 인도 스님(梵僧)이 예를 올리고 하룻밤 자고 갔는데 그로 인해서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순天順(明 英宗의 연호) 8년 갑신(세조 10, 1464) 3월 15일에 낳았다. 골상骨相이 특이하고 수려하였으며, 영웅적인 기질로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공부와 칼 쓰기를 좋아하고 특히 장감將鑑(兵書)에 능통했다.
홍치弘治(明 孝宗의 연호) 4년 신해(성종 22, 1491) 4월에 야인野人(여진족)이 북방을 침범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던 진장鎭將을 죽이자, 성종대왕은 허종許琮16)에게 명을 내려 군대 2만을 거느리고 가서 야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스님도 칼을 들고 허종을 따라 참전하여 채찍을 들어 한번 휘둘러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뒤 탄식하며 말하였다.
“이 세상에 대장부로 태어나서 마음자리(心地) 하나 지키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리며 몸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고는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에 들어가 조징祖澄 대사에게 참례한 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니 그때의 나이 28세였다. 그로부터 그는 뜻이 높고 행동이 엄격하였으며 선정을 즐겨 수행하는 것이 마치 수나라 낭장郎將이었던 지엄智儼에 비길 만하였다. 스님은 제일 먼저 연희衍熙 교사敎師를 찾아가서 원돈교圓頓敎17)의 이치에 대하여 묻고 그 다음에는 정심正心 선사를 찾아가서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비밀한 뜻(西來密旨)’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현묘한 이치를 모두 떨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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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名正心號碧溪金山人也當太宗
010_1011_b_02L沙汰之時長髮畜妻子入於黃岳山
010_1011_b_03L居於物罕里禪傳于碧溪 [5] 2) [32] 敎傳
010_1011_b_04L于淨蓮法俊禪敎二派不絶而蕃衍
010_1011_b_05L無常㢤時運也丁冽水曰我下山後
010_1011_b_06L爲碧溪正心莫作北山之移追念南溟
010_1011_b_07L之徙乎門人碧松智嚴妙覺守眉
010_1011_b_08L蓮法俊等具如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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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1_b_10L碧松禪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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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名智嚴號埜老所居堂曰碧松
010_1011_b_12L宋氏父曰福生扶安人也母曰王氏
010_1011_b_13L夢一梵僧設禮寄宿因以有娠天順
010_1011_b_14L八年甲申三月十五日生骨相奇秀
010_1011_b_15L武過人幼好書劒尤善將鑑弘治四
010_1011_b_16L年辛亥四月野人冦朔方殺鎭將
010_1011_b_17L宗大王命許琮帥師二萬討之師亦
010_1011_b_18L仗劒從之擧鞭一揮大豎功焉旣罷
010_1011_b_19L喟然曰大丈夫生斯世也不守心地
010_1011_b_20L役役馳勞耶即拂衣入鷄龍山上草庵
010_1011_b_21L叅祖澄大師剃染時年二十八矣自爾
010_1011_b_22L志行卓厲樂修禪定若隋郞將智嚴之
010_1011_b_23L儔焉先訪衍熙敎師問圓頓敎義
010_1011_b_24L尋正心禪師擊西來密旨俱振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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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正德(明 武宗의 연호) 무진년(중종 3, 1508) 가을에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으로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읽다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狗子無佛性話)’에 이르러 의심을 품고 정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깜깜한 무명無明을 깨뜨려 없앴다.
또 『고봉어록高峰語錄』을 읽다가 ‘양재타방颺在他方’18)이라는 어구에 이르러 앞에서 가지고 있었던 견해를 단번에 떨쳐 버렸다. 그런 까닭으로 벽송 선사께서 평생토록 발휘한 것은 바로 고봉高峰19) 선사와 대혜大慧20) 선사의 종풍宗風이라 하겠다.
대혜 화상은 6대 조사인 혜능慧能의 17대 적손嫡孫이고, 고봉 화상은 임제臨濟 선사의 18대 적손이다. 아! 스님은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500년 전 종파의 적통嫡統을 비밀리에 이은 사람이다. 마치 유가儒家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무리들이 1천 년 뒤에 태어나서 공자와 맹자의 학맥을 계승한 경우와 같다. 유가든지 불가든지 도를 전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
신미년(1511) 봄에 용문산으로 들어가서 두 차례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계유년(1513) 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 번의 하안거를 마쳤다. 그러고는 다시 백운산과 능가산 등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이 천지 사이를 자유롭게 소요逍遙하던 한가로운 도인이었다.
경진년(1520) 3월 지리산에 들어가서 작은 암자에 머물면서 그때부터 몸에 옷 두 벌 이상 가지지 않고 매일 두 끼니 이상 먹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않으니 그를 거만하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옛 사람(莊子)이 이르기를,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세계를 알겠는가?”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하루는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 오게 하여 그 차를 마신 뒤에 문을 닫고 단정하게 앉아 한참 동안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다. 제자들이 창문을 열고 보니 스님은 이미 열반에 드신 뒤였다. 그때가 11월 초하루 진시辰時였다. 입적하신 뒤에도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고 사지를 펴고 굽히는 것도 산 사람과 같이 부드러웠다.
다비茶毘를 하던 날 밤에는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에 뻗쳤고, 재齋를 올리는 새벽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 서렸다. 정골頂骨 한 조각에 사리가 알알이 붙어 있었는데 그 밝기가 진주와 같았다.
그의 제자 숭인崇仁·설은雪訔·원오圓悟·일진一眞의 무리가 이 사리를 수습하여 석종石鐘을 만들어 비명을 새기고 의신義神(지리산 의신동) 남쪽 산기슭에 봉안하였다. 그가 읊은 가송歌頌 약간 편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010_1011_c_01L正德戊辰秋入金剛山妙吉祥看大慧
010_1011_c_02L語錄疑着狗子無佛性話不多日時
010_1011_c_03L打破柒桶又看高峰語錄至颺在他方
010_1011_c_04L之語頓落前解是故師之平生所發揮
010_1011_c_05L乃高峰大慧之風也大慧和尙
010_1011_c_06L祖十七代嫡孫也高峰和尙臨濟十八
010_1011_c_07L代嫡孫師以海外之人密嗣五百
010_1011_c_08L年前宗派猶程朱輩生乎千載之下
010_1011_c_09L遠承孔孟爲緖也儒也釋也傳道則一
010_1011_c_10L辛未春入龍門山結二夏癸酉春
010_1011_c_11L入五臺山結一夏白雲楞伽居無定
010_1011_c_12L逍遙然天地間一閒道人也庚辰
010_1011_c_13L三月入智異山棲身草庵身無再衣
010_1011_c_14L日不再食不修人事多以倨慢譏
010_1011_c_15L人云非魚安知魚此之謂也一日
010_1011_c_16L侍者點茶來啜茶訖閉門端坐良久
010_1011_c_17L默然開窓視之則已入寂乃十一月
010_1011_c_18L初一日辰時也顏色不變屈伸如生
010_1011_c_19L茶毘之夜祥光洞天薦齋之晨瑞雲
010_1011_c_20L盤空頂骨一片舍利3)▼(粘/(㓒-(冫+七)))▼(粘/(㓒-(冫+七))) [33] 瑩若眞珠
010_1011_c_21L弟子崇仁雪訔圓悟一眞之徒鐫石鍾
010_1011_c_22L以安于義神之南麓所詠歌頌若干篇
010_1011_c_23L「平」甲本正誤表作「乎」ㆍ當作「牙」{編}「正」
010_1011_c_24L甲本正誤表作「智」
「▼(粘/(㓒-(冫+七)))▼(粘/(㓒-(冫+七)))」甲本正誤表作
010_1011_c_25L「▼(秥/(㓒-(冫+七)))▼(秥/(㓒-(冫+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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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법랍은 44년이다. 보는 이는 소홀히 여기지 말라. 휴정休靜의 찬문贊文은 이러하다.

震旦之皮       진단震旦(조선)의 피부에
天竺之骨       천축天竺(인도)의 뼈로구나
華月夷風       중국의 달이요 조선의 바람이며
如動生髮       머리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네
昏衢一燭       어두운 거리를 밝힌 한 촛불이여
法海孤舟       법의 바다에 외로운 배였다네
嗚呼不民       아! 스님의 위대한 모습
萬歲千秋       천년만년 사라지지 않으리

가정嘉靖(明 世宗의 연호) 39년(명종 15, 1560) 여름에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법손法孫 휴정이 스님의 행장을 지었다.
부용조사전芙蓉祖師傳
선사先師는 영남 진주 삼천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법명은 영관靈觀이고 호는 은암선자隱庵禪子이다. 또 달리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 부르기도 했다. 몸은 비록 이 세간에 머물렀지만 생각은 늘 서방西方(극락정토)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거주하는 방을 부용당芙蓉堂이라 불렀다.
가세家世가 대대로 미천하였으므로 넉넉하긴 했지만 예절이 바르지는 못했다. 성화成化(明 憲宗의 연호) 을사년(조선 성종 16, 1485) 7월 7일에 태어났다. 스님의 나이 겨우 여덟 살에 낚시를 하러 가는 아버지에게 끌려 고기 망태를 지고 뒤따라 다녔는데 스님은 망태 안에 살아 있는 고기는 모두 다 놓아 주었다. 아버지가 크게 성을 내며 매질을 하자 스님은 절을 하며 울면서 말했다.
“사람이나 물고기나 목숨을 부여받은 것은 똑같고 고통을 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이내 노여움을 풀었다.
그의 집 가까운 곳에 신비한 용이 산다는 굴이 있었다. 그 굴에서는 마치 수증기와 같은 것이 난간 밖에 가득 어려 있고 음악 소리가 들려 나왔다. 동네 노인들로부터 전해 오는 말을 들으니 “그 소리는 굴속에 칩거하고 있는 용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영관 스님이 지팡이로 평상을 치면 그 음악 소리가 갑자기 멈추곤 했다. 어느 때인가 용이 수면 위로 솟아올라 비늘 갈기가 햇빛에 찬란하게 번쩍였는데 아무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스님이 머리를 들고 할喝을 한번 하자, 용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아이라고 일컬었다.
하루는 어떤 기이한 스님이 찾아와서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곧 출세간의 보배요 연화烟火(세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출가시키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조금 있다가 스님은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영관 스님은 죽마竹馬의 나이(어린 나이)일 때부터 돌을 세워 부처님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모래를 올려 공양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소나무를 비스듬하게 눕혀 암자라 하기도 하면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곤 했다. 세상의 구속을 싫어하고 공문空門을 매우 그리워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만 갔다.

010_1012_a_01L1)于行 [34] 師壽七十一 「▼(艹/(月+曷)四十四 2)
010_1012_a_02L3) [35] [36] 覽者毋忽賛曰震旦之皮天竺
010_1012_a_03L之骨華月夷風如動生髮昏衢一燭
010_1012_a_04L法海孤舟嗚呼不4) [37] 萬歲千秋嘉靖
010_1012_a_05L三十九年夏頭流山法孫休靜撰行5) [38]

010_1012_a_06L

010_1012_a_07L芙蓉祖師傳

010_1012_a_08L
先師嶺南晋州三千浦人也名靈觀
010_1012_a_09L隱庵禪子一曰蓮船道人身雖寄世
010_1012_a_10L想在西方故以芙蓉堂稱之家世犯賤
010_1012_a_11L富而無禮成化乙巳七月初七日生
010_1012_a_12L才八歲父携而釣魚使負魚籃擇其
010_1012_a_13L生命者而盡放之父大怒撻之師拜
010_1012_a_14L而泣曰6) [39] 人與物受命則同忍痛則
010_1012_a_15L一也伏望垂恕父聞而弛怒家近神
010_1012_a_16L龍之窟雲蒸檻外樂出虛堂父老相
010_1012_a_17L傳曰此蟄龍之管絃也師杖擊床
010_1012_a_18L則樂聲忽止有時龍出水面鱗鬛輝日
010_1012_a_19L人不敢近師擧頭一7) [40] 則龍形忽沒
010_1012_a_20L以是里人稱奇童有異僧來謂父曰
010_1012_a_21L此童乃出世之寶非烟火之物請出家
010_1012_a_22L俄而僧忽不見師竹馬之年或立石爲
010_1012_a_23L或獻沙爲供或偃松爲庵合眼危
010_1012_a_24L不知日之西也日厭世8) [41] 深想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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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나이 13세가 되던 정사년(연산군 3, 1497) 가을에 밤은 깊어 인적이 고요한데 몸이 빠져 나와 집 문을 나서니, 흡사 어떤 사람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과 같았다. 알지도 못한 사이에 10여 리쯤 걸어가서 사천沙川을 건넜을 때에야 스님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뒤따라 온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돌아보면서 타일러 말했다.
“돌아가서 존당尊堂21)을 잘 보호하고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말아라. 나는 이제 영원히 운수인雲水人(스님)이 되어 맹세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속히 돌아가서 잘 지내라.”
그러자 개가 머리를 수그리고 스님의 말을 다 듣고는 마치 이별이 아쉽기라도 하다는 태도를 지으며 몇 차례 울부짖고는 돌아갔다. 그리하여 스님은 외로운 그림자를 펄럭이면서 강을 건너 고향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넘어가려고 하는 달이 마침 서쪽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동이 트려고 할 무렵에 곧바로 덕이산德異山(덕유산)으로 들어가 고행하는 선자禪子를 찾아 가르침을 받은 지 3년 만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17세 되던 해인 신유년(연산군 7, 1501)에 처음으로 신총信總 법사를 참알參謁하고 교학의 강령綱領을 탐구하였고, 다시 위봉威鳳 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선禪의 요체에 들어가 골몰하였다.
그 후 스님은 구천동九泉洞으로 들어가서 손수 띳집을 짓고 어느새 아홉 해 봄가을을 지내며 정진하였다. 장좌불와長坐不臥하였으니 어찌 옆구리를 땅에 대어 편안하게 잠을 자는 자리가 있겠으며, 지팡이 짚고 산 밖을 나선 적이 없으니 어찌 술집인들 들어간 적이 있겠는가?
교리를 논강할 때에는 양양洋洋하여 마치 만 이랑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고, 선의 뜻에 대해 말할 때에는 높고 높아 흡사 천 길 낭떠러지 같았다.
기사년(중종 4, 1509)에 멀리 용문산으로 들어가 조우祖愚 대사를 찾아뵙고 선에 대해 토론을 하고 여가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까지 모두 섭렵하였다.
갑술년(중종 9, 1514)에 또 청평산으로 가서 학매學梅 선자禪子를 찾아 선의 미묘한 부분에 대하여 문답을 하였으나 법에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기묘년(중종 14, 1519)에 금강산 대존암大尊庵에 이르러 율시 한 수를 읊어 그 절의 문에 붓을 들어 크게 써 붙였다.

空費悠悠憶少林    공연히 소림少林을 생각하다가 시간만 낭비하니
因循衰鬂到如今    우물쭈물 하다가 구레나룻 하얀 지경에 이르렀네
毘耶昔日無聲臭    비야毘耶22)의 저 옛날 소리는 냄새도 없고
摩竭當年絶響     마갈摩竭23) 당년의 소리도 끊어졌구나
似杭能防分別意    말뚝처럼 앉았으니 분별하는 마음 막아지고
如痴必禦是非心    바보처럼 지내니 시비할 마음 일지 않네
故將妄計飛仙外    부질없는 생각을 선외仙外에 날려 보내고
終日忘機對碧岑    온종일 세상 일 잊고 푸른 산만 대하노라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불사르고 입을 닫은 채 묵묵하게 앉아서 9년 동안 정진하였다. 만약 유람하는 객이 문전에 이르면 이 시를 가리킬 따름이었다.

010_1012_b_01L年至十三丁巳之秋夜深人靜
010_1012_b_02L身出門似有人引去不覺行十餘里
010_1012_b_03L及渡沙川則師所養一狗子已追之矣
010_1012_b_04L顧謂狗子曰善護尊堂勿追我也我今
010_1012_b_05L永作雲水人矢不歸也汝速還珍重
010_1012_b_06L狗子低頭聽其語似有惜別之態
010_1012_b_07L啾唧數聲而去於是翩翩隻影隔江回
010_1012_b_08L則落月正在西峰也黎明直入德異
010_1012_b_09L尋苦行禪子投三年學其法而落
010_1012_b_10L髮焉十七辛酉初叅信聦法師探敎
010_1012_b_11L又禮威鳳大師入禪樞因入九泉
010_1012_b_12L手結茅庵已度九春秋長坐不臥
010_1012_b_13L詎脇安眠之席笻無出山寧過酒肆之
010_1012_b_14L論敎義則洋洋焉波瀾萬頃轉禪旨
010_1012_b_15L則嶷嶷然崖岸千尋己巳遠入龍門山
010_1012_b_16L訪祖愚大師討禪餘暇涉盡莊老
010_1012_b_17L又向淸平山投學梅禪子扣擊禪微
010_1012_b_18L法無異味己卯到金剛山大尊庵吟一
010_1012_b_19L拔筆大書其門曰空費悠悠憶少林
010_1012_b_20L因循衰鬂到如今毘耶昔日無聲臭
010_1012_b_21L竭當年絕9) [42] 10) [43] 能防分別意如痴
010_1012_b_22L必禦是非心故將妄計飛仙外終日忘
010_1012_b_23L機對碧岑於是燒筆硯杜默而坐
010_1012_b_24L九年若遊客到門則指此詩而已

010_1012_c_01L
경인년(중종 14, 1519) 가을에 홀연히 반성하고 부모님의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곧 남쪽을 향해 갔다. 점점 고향의 성을 향해 가다가 본가가 있는 산이 가까워지자 석양이 되었다. 강 마을에 슬픈 모습으로 서 있는데 홀연히 한 노인이 소를 끌고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다.
“여기가 진주입니까?”
노인이 괴이하게 여겨 되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묻는 것입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진주는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저의 부모님께서 살아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
노인이 말하였다.
“그대 아버지의 성명은 무엇이며, 또한 그대의 어릴 적 이름은 무엇인가?”
스님이 대답하였다.
“제 아버님의 성함은 원연袁演이라 하옵고, 저의 어릴 때 이름은 구언九彦이라 합니다.”
노인이 갑자기 쇠고삐를 놓고 스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오늘 부자父子가 만난 것이 분명하구나. 네 이름은 내 아들이고 내 이름은 네 아비가 분명하다. 네가 나를 버리고 도망한 지 어느덧 30여 년이나 되었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근심과 시름 속에 세월을 보내 왔는데 오늘 홀연히 스스로 찾아왔으니 내 소원을 마침내 풀어 주었구나.”
부자지간임을 확인한 뒤에 각각 슬픔과 기쁨을 견딜 길 없어 한바탕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한동안 울고 나서 조금 있다가 아버지가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였다.
“네 어머니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네 주인은 7년 전에 아내를 잃었으며 다만 너의 집과 밭만 남아 있을 뿐이다.”
스님이 말하였다.
“원씨袁氏(누이동생)는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가 말하였다.
“네 누이동생은 네가 집을 떠난 날 저녁부터 문을 꼭 닫고 누워 버렸고 우리 집 개도 해만 쳐다보고 앉아 있더니 7일째 되던 날 누이도 개도 다 죽어 덕산德山 서쪽 산기슭에 묻어 주었다.”
스님은 그 말을 듣고 덧없음을 뼈아프게 느끼고 더 한층 눈물을 흘렸다. 날이 저물 무렵이 되자 옛집에 이르러 보니 옛날 같이 뛰놀던 소녀와 소년들은 모두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들과 평상 위에 둘러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노라 닭이 새벽을 알리는 줄도 몰랐다. 이튿날 아침에 아버지는 스님의 손을 잡고 늙은 주인을 찾아뵈었다.

010_1012_c_01L寅秋忽然反省思報罔極之恩爰發南
010_1012_c_02L漸向本城漸近家山夕陽江村
010_1012_c_03L然而立忽見一老翁牽牛而出師拜
010_1012_c_04L而問曰此晋州耶翁恠而問曰何故
010_1012_c_05L問之師曰此我所生之地也不知我父
010_1012_c_06L母存沒故當欲問之翁曰汝父姓名誰
010_1012_c_07L汝之兒名亦誰耶師曰我父姓名
010_1012_c_08L袁演我之兒名九彥也翁忽放牛執手
010_1012_c_09L今日父子的矣汝名我子我名汝
010_1012_c_10L汝捨我逃走三十餘年求索不得
010_1012_c_11L憂愁年邁今忽自來甚適我願定父
010_1012_c_12L子後各不堪悲欣一場痛哭翁良久
010_1012_c_13L拭淚曰汝母十年前棄世汝主七年前
010_1012_c_14L喪室惟汝之田宅猶在爾師曰袁氏安
010_1012_c_15L翁曰汝妹從汝出家之夕閉門而臥
010_1012_c_16L汝狗子亦視日而坐至七日袁與狗俱
010_1012_c_17L葬於德山之西麓爾師聞之痛念
010_1012_c_18L無常尤爲落淚及黃昏到家則昔之
010_1012_c_19L群童盡作翁婆也亦與之連床夜語
010_1012_c_20L不覺鷄之已曉矣明朝父携覲於老主
010_1012_c_21L「于行」甲本正誤表作「行于」「幻性非」甲
010_1012_c_22L本正誤表曰衍字
「非」下疑脫「幻」{編}
010_1012_c_23L「民」甲本正誤表作「泯」
「裝」甲本正誤表作
010_1012_c_24L「狀」次同
「而」甲本正誤表曰衍字「唱」
010_1012_c_25L甲本正誤表作「喝」
「綱」甲本正誤表作
010_1012_c_26L「綱」
「響」下甲本正誤表有「音」「杭」
010_1012_c_27L甲本正誤表作「杌」

010_1013_a_01L주인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
“이 사람이 정말로 구언이란 말인가?”
그렇게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주인은 방석을 내어주며 앉으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머뭇거리며 사양하고 뒤로 물러나 말하였다.
“소천小賤이 주인과 어버이를 배반하였으니 그 죄를 하늘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집과 토지를 모두 바쳐서 이 몸값을 치르고 출가하여 도를 닦아서 그 은혜를 보답할까 합니다.”
주인이 말하였다.
“출가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 은혜를 갚는단 말이냐?”
스님이 고사古事를 들어 대답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세간에서 숨어서 그 뜻을 구하고 세속의 모습을 변화하여 그 도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모습을 바꾸어서 스님이 되면 세속 사람들의 법도와 예의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숨어 살면 당연히 고상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러한 이들은 삼승三乘24)의 이치를 깨닫고 사람과 하늘에게 열어 보이며, 오족五族을 건지고 육친六親을 구원하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안으로 천륜의 소중함을 무너뜨린다 해도 그 효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요, 아무리 밖으로 주인 섬기는 공경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그 공경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스님의 말을 다 듣고 그 말을 가상하게 여겨 일어서서 스님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말하였다.
“사문이란 세상을 벗어난 사람들이니, 마땅히 세상의 예절을 생략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는 베개를 나란히 하여 하룻밤 자고 나서 머물러 살기를 간청하였다. 스님은 주인의 간곡한 청을 기어이 따르지 않고, 이튿날 땅 문서를 주인에게 바쳐 밭과 집을 다 주고 두 번 절하고 물러나왔다. 그러고는 늙은 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하고 두류산(지리산)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지엄 벽송智嚴碧松 스님의 문을 두드렸다.
“영관靈觀이 먼 곳에서 스님의 법풍法風을 흠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부디 거두어 받아 주시기 바라나이다.”
지엄 대사가 말하였다.
“영靈도 감히 올 수 없거늘 관觀이 어디로부터 왔단 말이냐?”
스님이 가까이 다가가서 합장하고 말하였다.
“청하옵나니 대사께서 살펴보시옵소서.”
지엄 대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다듬어 볼 만하구나.”
그러고는 이튿날 지엄 대사는 대사를 위하여 마음에 가득 끼인 안개를 걷어 내고 끓는 바다 같은 욕망을 말끔하게 씻어 주니, 스님의 20년 묵은 의심이 마치 커다란 골짜기에 층층이 쌓였던 얼음이 녹아내리듯 풀리는 것이었다. 스님은 곧 지엄에게 이마를 땅에 대어 예를 올리고 잇달아 찬탄하며 말하였다.
“참으로 저의 스승이십니다.”
모신 지 3년 되던 해에 지엄 대사가 세상을 떠났다. 아! 저 스승이 경영하던 것을 그 제자가 계승하여 경영하는구나. 이 주석柱石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이런 동량棟梁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스님은 평생에 성품이 온화하고 청아하여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함이 끊어졌으므로 생각이 한결같이 평등하여 심지어는 한 수저의 밥이라도 배고픈 사람을 보면 나누어 주곤 하였으니, 아마도 전생부터

010_1013_a_01L主驚曰此九彥耶不覺澘然俄而主
010_1013_a_02L進席許坐師逡巡辭退曰小賊背主背
010_1013_a_03L罪不容天今欲盡納田宅以1) [44]
010_1013_a_04L出家修道以報也主曰出家何能報恩
010_1013_a_05L師引古答曰出家者遁世以求其
010_1013_a_06L變俗以達其道變俗則不與世典同
010_1013_a_07L遁世則宜高尙其跡達三乘開人
010_1013_a_08L拯五族拔六親猶如反掌也是故
010_1013_a_09L雖內乖天屬之重而不違其孝雖外闕
010_1013_a_10L奉主之恭而不失其敬也主儒者也
010_1013_a_11L聞而嘉之起立携手而上堦曰沙門
010_1013_a_12L外人也宜删世禮矣因連枕一宿而請
010_1013_a_13L留之師强不從明日呈文券納田宅
010_1013_a_14L再拜而退又告別老父即向頭流山
010_1013_a_15L扣智嚴大師碧松之門曰靈觀自遠趨
010_1013_a_16L願一攝受嚴曰靈且不敢觀從何
010_1013_a_17L師近前叉手曰請師鑑嚴笑曰
010_1013_a_18L爲雕琢翌日嚴爲師碎蕩心霧陶㵼
010_1013_a_19L2)沸海 [45] 師之二十年宿疑忽如層冰之
010_1013_a_20L泮巨壑也即頂禮連聲歎曰此眞吾師
010_1013_a_21L執侍三年嚴亦厭世厥師經之
010_1013_a_22L厥資營之非斯柱石孰此棟樑哉
010_1013_a_23L平生叶性溫雅情絕愛憎念專平等
010_1013_a_24L至於一匙之飯見人則分之其夙植

010_1013_b_01L자비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게다가 또 문장은 진실되고 올바르며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명석하였다.
무릇 학문을 배우러 온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칠요七曜25)·구장九章26)·천문天文·의술醫術 그 어느 것 하나도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중용』을 품안에 안고 『장자』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의문난 점들을 풀어 주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그의 문전에 늘 넘쳤던 영걸한 유생儒生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마당 안에 가득 찼던 법속法俗(승속)들은 모두들 떠나갈 것인가, 더 머물러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남과 영남 일대에 벼슬 없는 선비들로서 삼교三敎(儒·佛·仙)를 통달한 사람들은 바로 스님의 법풍法風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이는 이른바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내가 난다.(栴檀移植。 異物同熏。)”고 한 말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
스님은 한번 벽송의 문을 밟은 뒤로 혹은 황룡산에 살기도 하고 혹은 팔공산(전북 장수)에 살기도 하였으며, 혹은 대승동大乘洞에 살기도 하였고 혹은 의신동義神洞에 살기도 하였으며, 혹은 연곡동燕谷洞에 머물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41년 세월을 꿈결처럼 흘려보낸 뒤 융경隆慶(明 穆宗의 연호) 신미년(선조 4, 1571) 4월 14일에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87세였고 법랍은 72년이었다.
시자 법융法融과 영응靈應, 대선大選 정원淨源과 신옹信翁, 선덕禪德 진기眞機와 도의道義 등 무리들이 스님의 영골을 거두어 연곡동 서쪽 산기슭에 부도를 세웠다. 스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高踞覺地       깨달음의 자리에 높이 걸터앉아
先引三車       먼저 세 가지 수레로 인도하셨네
張羅八海       여덟 바다에 그물을 쳐서
撈摝群魚       많은 고기를 건져 올리셨네
金鎚擊碎       쇠방망이로 호랑이 굴과
虎穴魔宮       마귀의 궁전을 때려 부쉈네
人亡世寂       사람이 가니 세상이 적막하고
月落天空       달이 넘어가니 하늘이 텅 비었구나

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정축년(선조 10, 1577) 가을에 문인 풍악산인楓嶽山人 휴정休靜이 스님의 행장을 지었다. 문인은 12명이다.
경성대덕전敬聖大德傳
스님의 법명은 일선一禪이고 호는 경성敬聖이다. 또는 휴옹休翁이라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선화자禪和子라고도 부른다. 속성은 장張씨이고 울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윤한胤韓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다.
박씨 부인이 하루는 한가하게 잠을 자다가 해맑은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깨어난 뒤 임신하였고, 홍치弘治(明 孝宗의 연호) 원년 무신(성종 19, 1488) 12월 13일에 스님을 낳았다. 아이는 목욕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010_1013_b_01L3) [46] 之種亦可見矣兼又文章允正
010_1013_b_02L理明析凡敎學者亹亹不倦凡七曜
010_1013_b_03L九章天文醫術莫不通焉至於懷中
010_1013_b_04L庸挾莊子者亦莫不決疑焉是故溢門
010_1013_b_05L英儒俱懷生別之恨盈庭法俗共鯁
010_1013_b_06L去留之心是故湖嶺兩南以白衣通
010_1013_b_07L三敎者乃師之風也可謂4)枬移 [47]
010_1013_b_08L物同熏也師自從一踏碧松之門或居
010_1013_b_09L黃龍山或居八公山或住大乘洞
010_1013_b_10L住義神洞或住燕谷洞不覺夢過四十
010_1013_b_11L一年至隆慶辛未四月十四日八寂焉
010_1013_b_12L世壽八十七法臘七十二侍者法融靈
010_1013_b_13L應大選淨源信翁禪德眞機道義輩
010_1013_b_14L收靈骨豎浮屠于燕谷之西麓也賛曰
010_1013_b_15L高踞覺地先引三車張羅八海撈摝
010_1013_b_16L群魚金鎚擊碎虎穴魔宮人亡世寂
010_1013_b_17L月落天空萬曆丁丑秋門人楓岳休靜
010_1013_b_18L撰行5)門人十二人

010_1013_b_19L

010_1013_b_20L敬聖大德傳

010_1013_b_21L
師名一禪號敬聖又休翁一曰禪和
010_1013_b_22L姓張氏蔚山人也父曰胤韓母曰
010_1013_b_23L朴氏一日假寐夢呑明珠覺而有娠
010_1013_b_24L弘治元年戊申十二月十三日生焉 6) [48]

010_1013_c_01L피부가 깨끗하였고 몸에서는 향내가 났다.
나이 겨우 7∼8세에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늘 속가의 부엌에서 고기를 삶고 물고기를 굽는 것을 보면 그때마다 반드시 놀라고 불쌍하게 여기곤 했다. 그의 집 남쪽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다투어 따곤 하였으나 스님은 자기 몫까지 다 내놓아 다른 아이에게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때로는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기도 하였고 혹은 돌을 포개 자리를 만들어 앉기도 하였으며, 많은 아이들이 흡연翕然히 부처님처럼 존중하곤 했다. 비단 타고난 바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과거 세상에서부터 훈습해 온 결과라는 것을 증험할 만하였다.
어려서 양친을 다 여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세상이 덧없는 것임을 깨닫고 마음에 늘 청허淸虛함을 그리워하였다. 스님의 나이 열세 살 때 단석산斷石山으로 들어가 해산海山 법사에게 몸을 던져 3년 동안 법사를 시봉하다가 열여섯 살 때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스물네 살 때 서쪽으로 묘향산에 들어가 문수암文殊庵에 앉아서 발우 하나와 누더기 옷 한 벌만으로 오로지 고행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죽을 때까지 실천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얼마 뒤에 문득 여러 지방을 유람할 마음을 내어 남쪽으로 두류산(지리산)에 들어가 지엄智嚴 대사를 찾아가 예를 올렸다. 지엄 대사가 그를 한번 보고 큰 그릇이라 여겨 게송 하나를 주었다.

風颼颼月皎皎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달은 밝으며
雲冪冪水潺潺     구름은 가득 끼고 물은 잔잔하구나
欲識言箇事      저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하면
須叅祖師開師     모쪼록 조사의 관문을 참예하라

스님은 곧 활구活句27)에 마음을 머물러 두고 즐기면서 근심을 잊었다. 동쪽으로 금강산 시왕동十王洞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미 자나 깨나 항상 여일如一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루는 죽비竹篦로 갑자기 선상禪床을 탁 치면서 말하였다.
“조주趙州28) 늙은이의 칼날이 드러났으니, 꿈을 외치는 가운데 꿈을 말하는구나. 잘못이 적지 않구나.”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는 입으로 읊는 것이면 반드시 경절문徑截門의 언구言句이고

010_1013_c_01L洗浴膚軆香潔歲才七八不喜薰羶
010_1013_c_02L每見家厨烹煇毛鱗則必駭然悲惻
010_1013_c_03L南有果園鄰童7) [49] 師乃捨己所得
010_1013_c_04L盡以施之空手返焉或聚沙爲塔
010_1013_c_05L8) [50] 石爲座群童翕然尊重爲佛非特
010_1013_c_06L生質之美可驗夙世之熏 9) [51] 失雙親
010_1013_c_07L泣血三年觀世無常意玩淸虛年至
010_1013_c_08L十三入斷石山投海山法師服勞三
010_1013_c_09L十六薙髮二十四西入妙香山
010_1013_c_10L文殊庵10) [52] 一衲專習苦行正心佛
010_1013_c_11L以命自期頃之忽興遊方之志
010_1013_c_12L入頭流山叅智嚴大師嚴一見深器
010_1013_c_13L示一偈曰風颼颼月皎皎雲冪冪
010_1013_c_14L水潺潺欲識11) [53] 箇事須叅祖師12) [54]
010_1013_c_15L即留心活句樂而忘憂東入金剛山
010_1013_c_16L十王洞工夫已到寤宣恒一以竹篦
010_1013_c_17L忽擊禪床曰趙州老露刃劒唱夢中說
010_1013_c_18L13) [55] 不少自此詠於口者必徑截
010_1013_c_19L「贖」作「續」{甲}「沸海」甲本正誤表曰衍
010_1013_c_20L字ㆍ疑「佛海」{編}
「慈」下甲本正誤表有「悲」
010_1013_c_21L「枬移」甲本正誤表作「栴檀移」「裝」甲本
010_1013_c_22L正誤表作「狀」
「雖」甲本正誤表作「誰不」
010_1013_c_23L「竟」疑「竸」{編}「壘」甲本正誤表作「累」
010_1013_c_24L□甲本正誤表作「早」「飄」甲本正誤表作
010_1013_c_25L「瓢」
「言」甲本正誤表作「這」「開」甲本
010_1013_c_26L正誤表作「關」
「逕」甲本正誤表作「逗」

010_1014_a_01L마음에 참구參究하는 것도 반드시 경절문의 언구였다. 얼마쯤 지난 뒤 표훈사表訓寺 승당僧堂에 들어가 한 해 여름 안거를 마치고,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가 두 해 안거를 마쳤다.
가정嘉靖(明 世宗의 연호) 병신년(중종 31, 1536)에 중종대왕이 승군僧軍을 이용하여 신천新川을 방어하고 있을 때였다. 스님이 능가산으로 가다가 도중에 그곳 역장役場에 들러 표연히 홀로 기거하고 있었는데, 도청都廳의 높은 벼슬아치가 그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던지 스님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풍채가 범상하지 않은 데 반하여 반 달 동안이나 만류하여 머물게 하였다.
그때 경성京城의 사대부나 백성들도 스님의 덕음德音을 듣고는 다투어 시주를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그 소문은 떠들썩하게 퍼져 나갔다. 이 일로 인하여 대간臺諫들이 세상을 현혹한다고 논죄論罪하여 의금부에 구금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리하여 법에 의거하여 국문하였지만 스님은 자연스럽고 태연한 모습이었으며, 말이 정직하고 이치에 통하는 식견으로 천변만화의 논리를 보였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법에 의해 국문하며 스님의 조리 있는 말을 듣고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임금께 아뢰어 방면하였다. 스님은 곧바로 멀리 서산西山(묘향산)으로 들어가 9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갑진년(중종 39, 1544) 봄에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보현사普賢寺 관음전에 머물렀다.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송곳이 밖으로 드러나듯, 과일이 익어 향기로운 냄새가 발생하듯 공부가 경지에 도달했다.
온 나라에 석덕碩德과 고사高士들이 팔표八表(팔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이른바 해동海東의 절상회折床會29)라고 할 만하였다. 이에 문인 의웅義雄의 무리에게 명하여 특별히 집 한 채를 짓게 하고 그 당호堂號를 경성당敬聖堂이라 붙이게 하였다. 그 집은 난간·창문·방문 등이 웅장하게 층을 이루었고, 옥빛과 금빛이 찬란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때 스님은 향로에 향을 사르고 날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
스님은 증득하기 어려운 지혜를 증득함이 이미 이와 같았으며, 불충不忠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가히 스님 가운데 직설稷契30)이라 이를 만하다.
융경隆慶(明 穆宗의 연호) 무진년(선조 1, 1568) 2월 30일 경성 스님은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이 세계는 이루어지고 머물고 무너지고 비어지는 현상이 있고, 생각은 생겨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현상이 있으며, 몸뚱이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현상이 있는 법이다. 무릇 시작이 있으면 틀림없이 끝이 있는 법, 그것이 바로 덧없는 몸뚱이인 것이다. 오늘 늙은 중이 덧없는 이치를 보여 주고자 하니 여러 어진 제자들은 모름지기 바른 생각을 지녀 그리워하거나 애달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또한 세속에서 이롭지 못한 일을 장황하게 벌이는 일을 따르지 말라.

010_1014_a_01L門言句叅於心者亦必徑截門言句也
010_1014_a_02L俄入表訓寺僧堂結一夏入上院庵
010_1014_a_03L結二夏至嘉靖丙申中宗大王用僧
010_1014_a_04L防新川師適楞伽山路由役場
010_1014_a_05L然獨居都廳大官見而異之招而與
010_1014_a_06L之語風彩非凡挽留半月於是京城
010_1014_a_07L士庶亦聞師之德音爭趍捨施日益
010_1014_a_08L紛紜聲振臺論以惑世拘於禁府
010_1014_a_09L法鞠之師從容自若言直理通變化
010_1014_a_10L千萬禁府依法鞠1) [56] 而嘉之奏以赦
010_1014_a_11L師即遠入西山泯迹九年甲辰春
010_1014_a_12L入妙香山捿普賢寺觀音殿囊錐益露
010_1014_a_13L果熟香飄碩德高士2) [57] 雲趍可謂
010_1014_a_14L海東折床會也爰命門人義雄之輩
010_1014_a_15L起一堂以敬聖安名焉軒窓戶門
010_1014_a_16L爾層搆玉光金色燎然奪目於是
010_1014_a_17L執香爐日祝聖壽萬歲也則其能證難
010_1014_a_18L證之智旣如此其不墮不忠之坑
010_1014_a_19L如此可謂僧中之稷契也隆慶戊辰二
010_1014_a_20L月三十日謂門徒曰界有成住壞空
010_1014_a_21L念有生住異滅身有生老病死凡有始
010_1014_a_22L必有終此無常之軆也今日老僧
010_1014_a_23L欲示無常諸仁者須攝正念3) [58] 懷眷
010_1014_a_24L亦莫隨俗爲譸張不益事也吾欲

010_1014_b_01L나는 부사의不思議한 산마루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불사佛事 하나를 할 것이니, 나의 시체를 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드러내어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을 마치고 곧 붓을 들어 게송 한 수를 쓰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年逾八十似空花    나이 팔십을 넘은 것이 허공의 꽃과 같고
徃事悠悠亦眼花    아득하게 지난 일은 그 또한 눈꽃과 같네
脚未跨門還本國    문지방도 채 넘지 않았는데 본국에 돌아가니
故園桃李已開花    옛 동산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스님은 곧 붓을 놓고 단정하게 앉아서 담담하게 열반에 들었다. 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사방에서 밀려들었고 햇빛은 참담하였다. 열반에 드신 지 7일째 되던 날 문인들이 스승의 유언을 따라 색신色身(시신)을 받들어 상여에 싣고 부사의의 고개로 갔다. 세속 사람과 스님들 수천 명이 가는 길을 메우고 차를 달여 올렸으며, 통곡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뒤덮었다.
사유闍維31)를 하던 날 밤에 신비한 광명이 하늘에 사무치니 백 리 밖에서도 그 광경을 보고는 그쪽을 바라보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4월 18일 해시亥時(밤 9시~11시)였다. 그의 문인 태사太師·의변義卞·선등禪燈·일정一精·성준性峻의 무리가 사리 5과顆를 거두어 석종石鍾을 세우고 그 안에 봉안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81세이고 법랍은 65년이었다.
스님은 평소에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을 힘쓰지 않았으나 임종게를 지을 때에는 붓에 먹물을 적셔 자재하게 글씨를 써 내려갔는데 사기辭氣가 쾌활하였으니, 스님의 평생 자취를 숨기고 산 지혜를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다.
그러한즉 비록 온 나라가 지나支那(중국)에 얽매여 있었으나 늘 극락세계에 가 있었으며, 후학들을 가르칠 때에는 자상하고 빈틈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선조들의 틀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아! 슬프다. 부처님의 바다에 더러운 찌꺼기가 오늘날처럼 심한 적도 없지만, 스님의 크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의 그물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사람과 하늘의 고기를 건져 올려 열반의 언덕에 올려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말법 세상에 부처님의 동량棟梁이 되기에 적절하신 분이시며 법에 있어서는 기린의 뿔과 같은 존재라 하겠다.
융경隆慶 무진년(선조 1, 1568) 겨울에 묘향산에서 휴정이 스님의 행장과 찬문贊文을 지으니 그 찬문은 이러하다.

師初來也       스님이 처음 올 때에는
一顆明珠       하나의 밝은 구슬이더니
師今去也       스님이 지금 가실 때에는
五箇神珠       다섯 개의 신비한 구슬일세
入火不變       불속에 들어가도 변하지 않고
入水不渝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네
常寂常照       늘 고요하며 늘 비추어 주니
劫石須臾       겁석劫石32)도 잠깐이었네


010_1014_b_01L向不思議之嶺作佛事須露屍骸
010_1014_b_02L于鳥獸可也言已即拔筆書偈曰
010_1014_b_03L逾八十似空花徃事悠悠亦眼花脚未
010_1014_b_04L跨門還本國故園桃李已開花即放筆
010_1014_b_05L端坐泊然而逝于時祥雲四合日色
010_1014_b_06L慘然及至七日門人遵命奉色身
010_1014_b_07L於不思議之嶺緇白數千人塞路點茶
010_1014_b_08L號慕悲惋之聲動咽山谷闍維之夜
010_1014_b_09L神光洞天百里之外有見之者望拜
010_1014_b_10L乃四月十八日亥時也門人太師義
010_1014_b_11L卞禪燈一精性峻之輩收舍利五箇
010_1014_b_12L石鍾安之師壽八十一臘六十五
010_1014_b_13L居常不治翰墨至於臨終之偈濡筆走
010_1014_b_14L辭氣快活其平生匿迹之智槩可
010_1014_b_15L見矣然則雖繆▼((執-丸)+攵/心)於支那而常玩愒於
010_1014_b_16L蓮邦有覼縷於後學而無䖃4) [59]
也야사

010_1014_b_17L於先祖也嗚呼佛海穢滓無甚今日
010_1014_b_18L微師大悲之5) [60] 則孰摝人天之魚
010_1014_b_19L於涅槃之岸哉末世宜乎佛之棟樑
010_1014_b_20L法之獜角者歟隆慶戊辰冬妙香山休
010_1014_b_21L靜撰行*裝 [61] 及贊贊曰師初來也一顆
010_1014_b_22L明珠師今去也五箇神珠入火不變
010_1014_b_23L入水不渝常寂常照劫石須臾

010_1014_c_01L
청허존자전淸虛尊者傳
선사先師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호는 청허淸虛이며, 또는 서산西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는 현응玄應이고 부친의 시조는 본래는 완산完山 최씨이고, 모친의 시조는 본래는 한남漢南 김씨이다.
태종太宗조에 이르러 친가와 외가의 현고조께서 각각 용호방龍虎榜33)에 올라 창화昌化34)로 이사를 가서 살았으므로 부모가 모두 창화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 뒤 현윤縣尹으로 있던 외할아버지 김우金禹가 연산군 때 죄를 지어 안릉安陵(평안도 안주군)에 귀양 가서 살게 되자 스님의 부모도 외할아버지의 가문과 연관이 된다 하여 집안 식구 모두가 관리舘吏35)가 되었다. 8년이 지난 뒤에 외할아버지의 죄가 다시 논의되어 특별히 은혜를 입어 사면되어 본래의 직책에 복직이 허용되었으나 마침내 관서關西의 백성으로 살고 말았으니 운명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은 세창世昌이고 나이 30세에 어떤 사람의 천거로 기성箕城 영전影殿의 작은 관직을 맡게 되었다. 관청의 사람이 와서 같이 떠날 것을 간청하면서 부임할 날짜를 말해 주자 스님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하였다.
“정든 땅 노을과 달 그리고 한 병의 막걸리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즐거움이면 그 또한 족하지 않겠는가?”
그러고는 곧 허리띠를 풀고 남쪽으로 머리를 향해 누워서 길게 휘파람을 몇 차례 불자 관청 사람은 곧 물러갔다. 세창은 향읍鄕邑에서 의문이 나는 것을 가지고 와서 물으면 의문을 풀어 주고 송사를 벌이려는 자가 있으면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으므로 향관鄕官으로 일을 한 13년 동안 그 고을 주민들로부터 ‘덕 있는 노인(德老)’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정덕正德(明 武宗의 연호) 기묘년(중종 14, 1519) 여름에 모친 김씨가 신기神氣가 고르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작은 창가에서 한가롭게 잠시 잠이 들었다. 이때 어떤 노파가 와서 예를 올리며 말하였다.
“아무 근심도 하지 말고 아무 염려도 하지 마시오. 한 장부 사내아이를 잉태할 것이기 때문에 이 늙은 할미가 와서 축하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예를 올리고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
“참 이상도 하여라. 우리 부부는 동갑똑같이 갑오생甲午生이었다.으로 나이 50이 가까운데 어찌 오늘 꾼 꿈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김씨 부인은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 민망하고 두려웠다.
이듬해경진(1520) 3월 김씨는 과연 아이를 낳았다.

010_1014_c_01L淸虛尊者傳

010_1014_c_02L
先師名休靜號淸虛又曰西山字玄
010_1014_c_03L父之始祖本完山崔氏母之始祖
010_1014_c_04L本漢南金氏及太宗朝內外玄高祖
010_1014_c_05L各得龍虎榜移居昌化故父母俱以昌
010_1014_c_06L化爲故鄕也至外祖金縣尹禹得罪於
010_1014_c_07L燕山謫居于安陵父母連外祖家口
010_1014_c_08L沒爲舘吏過八年論得特蒙恩赦
010_1014_c_09L通本職然遂爲關西氓命也父世昌
010_1014_c_10L年登三十有人擧爲箕城影殿之微官
010_1014_c_11L官人來而請行卜日以告父笑曰
010_1014_c_12L山烟月一壼白酒妻子歡心不亦足
010_1014_c_13L即解帶南首而臥長嘯數聲官人
010_1014_c_14L即退凡鄕邑有疑者則决有訟者則止
010_1014_c_15L故遂任鄕官者十三年而邑人猶號
010_1014_c_16L曰德老正德己卯夏母金氏神氣不
010_1014_c_17L調一日小窓邊假寐有一老婆來
010_1014_c_18L勿憂勿慮胚胎一丈夫男子爾故爲
010_1014_c_19L娿㜷來賀之又設禮而去母忽驚悟曰
010_1014_c_20L異哉夫婦一甲同甲
午生
年近五十豈有今
010_1014_c_21L事乎致疑閔惧明年
三月果生
010_1014_c_22L「聞」疑「問」{編}「袁」甲本正誤表作「表」
010_1014_c_23L「忽」甲本正誤表作「勿」「塞」作「寒」{甲}
010_1014_c_24L「綱」甲本正誤表作「綱」

010_1015_a_01L스님의 부모는 서로 희롱하며 말하였다.
“늙은 조개에서 손바닥 안에 진주를 생산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로다.”
아이가 3세 되던 해 임오년(1522) 4월 8일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누각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어떤 한 노인이 와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러고는 노인이 두 손으로 어린 아기를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는데 그 소리가 마치 범어梵語와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주문을 외워 마친 뒤에 아기를 내려놓고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고 잘 기르기 바랍니다.”
아버지가 운학의 의미를 묻자 노인이 대답하였다.
“이 아이는 일생 동안 행지行止가 정녕 구름과 학鶴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마치고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이 사라졌다. 그런 까닭으로 부모는 그때부터 아이를 부를 때에 ‘아기 스님’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운학雲鶴’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이는 어릴 적부터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소꿉장난을 하면서도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혹은 기왓장을 가져다가 절을 짓는 등 늘 하는 짓이 무릇 이와 같았다.
그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그 이듬해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 백 년의 생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 셈이다. 그때 그 고을의 원님(邑倅)으로 있던 이李 공사증思曾이 그 소식을 듣고 겨울에 그를 불러 눈 덮인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운자韻字를 부를 터이니 한 구 지어 보겠느냐?”
소년이 대답하였다.
“제가 감히…….”
원님이 사斜 자 운을 불렀다. 소년이 운자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석에서 답하였다.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저물어 가니”
다음에 다시 화花 자 운을 불렀다. 소년이 또 글을 지었다.
“천 리 강산을 덮은 눈 마치 꽃과 같구나.”
그러자 원님이 소년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너는 나의 아들이니라.”
이때 소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원님은 소년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가 반궁泮宮(성균관)에 나아가도록 주선해 소년의 이름을 여러 유생儒生들의 끝부분에 기록하게 해 주었는데, 그때 소년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하루는 어느 늙은 학사學士가 소년 휴정을 보고 말하였다.
“나를 알아보겠느냐? 너의 고향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너의 선군先君은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멀리할 수 없구나.”
그러고는 소년을 인도하여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밖으로 나가서 오래된 버드나무가 서 있는 사천沙川 언덕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저곳이 바로 네 선군이 살았던 옛 집터이다.”
늙은 학사는 두어 간 서당을 짓고 자제들 대여섯 명을 모아 모두에게 훈계하여 말했다.
“너희들이 서로 형제가 되기를 언약하고 여기에서 공부를 하되 방일放逸한 행동을 하지 말라.”

010_1015_a_01L母有時相戱曰老蚌1) [62] 出掌中之珠
010_1015_a_02L亦天也及三歲壬午四月初八日父醉
010_1015_a_03L臥于樓中夢有一老翁來謂父曰
010_1015_a_04L訪小沙門爾翁遂以兩手擧小子而呪
010_1015_a_05L數聲聲若梵語不能通曉焉呪畢
010_1015_a_06L下摩頂曰以雲鶴安名珎重父問雲
010_1015_a_07L鶴之意翁曰此兒一生行止政同雲鶴
010_1015_a_08L故也言訖莫知所之是故父母時喚
010_1015_a_09L小子曰小沙門或喚雲鶴小與群童
010_1015_a_10L遊戱或聚沙成塔或將瓦立寺常用
010_1015_a_11L行事凡類此也年才九歲母忽先敗
010_1015_a_12L又過一春父亦繼逝百年生計一朝
010_1015_a_13L瓦裂邑倅李公
聞之冬月招之
010_1015_a_14L松雪曰可作呼韻一句乎曰不敢
010_1015_a_15L呼斜字應聲曰香凝高閣日初斜
010_1015_a_16L花字千里江山雪若花倅執手撫背
010_1015_a_17L吾兒也時年十歲矣倅携徃京師
010_1015_a_18L就泮宮名錄于諸儒之尾也時年十二
010_1015_a_19L歲矣一日一老學士見曰能識我乎
010_1015_a_20L汝之故鄕去此不遠汝之先君與我
010_1015_a_21L有素不可外汝也引去于興仁門外
010_1015_a_22L指沙川古柳之岸曰此汝先君之舊墟
010_1015_a_23L學士起數間書堂聚子弟五六輩
010_1015_a_24L俱誡曰汝等約爲兄弟可學於此

010_1015_b_01L
그러고는 3년이 될 때까지 스승을 초빙하여 공부를 가르치게 하였다. 소년 운학은 한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더욱 분발하였으니 그때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때마침 공부를 가르치던 스승이 호남 지방에 내려가 있었는데 같이 공부하던 학생 여러 명과 함께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그 스승은 호남으로 내려간 지 몇 달 안 되어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우환(不天之憂, 喪親)을 만나 이미 서울로 돌아간 뒤였다. 소년들은 머리를 맞대고 답답해하다가 동학同學 중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을 찾아 천 리를 왔는데 일은 비록 어긋났지만 이러한 명승지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느니보다는 남녘의 산천이나 두루 구경을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소년들은 두류산頭流山·화엄동華嚴洞·연곡동燕谷洞·칠불암七佛庵·의신동義神洞·청학동靑鶴洞의 크고 작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자고 걷고 하면서 반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노숙老宿(덕이 높은 스님)숭인崇仁 대사이 청허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를 보니 기골이 맑고 빼어나다. 결정코 보통 사람은 아니니라. 마음을 돌이켜 심공급제心空及第만 한다면 영원히 세간의 명리名利는 끊게 될 것이다. 서생書生들이 하는 업이란 아무리 종일토록 수고롭게 노력해도 백 년의 소득은 다만 하나의 헛된 이름일 따름이다. 실로 애석한 일이로다.”
청허가 말하였다.
“어떤 것을 심공급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숭인 노숙이 눈을 깜박이며 말하였다.
“알겠는가?”
청허가 대답하였다.
“모르겠습니다.”
노숙이 말하였다.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니라.”
그러더니 『전등록』·『선문염송』·『화엄경』·『원각경』·『능엄경』·『법화경』·『유마경』·『반야경』 등 수십 가지 경론經論을 내어 보이며 말하였다.
“이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점점 그 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후 영관靈觀 대사에게 부촉하게 된다. 영관 대사는 운학을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에게 3년 동안 수업하였는데 일찍이 열심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문답하였는데 한결같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았다.
그때 함께 떠났던 동학 여러 명은 각각 서울로 돌아가고 스님만 홀로 선방에 머물면서 여러 경전을 탐구하였다. 경전을 읽고 탐구하면 할수록 명상名相에 더욱 얽매이고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스님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그는 문자를 떠나서 오묘한 이치가 있음을 터득하고 마침내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忽聞杜宇啼窓外    창 밖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니
滿眼春山盡故鄕    눈 안에 가득한 봄 산이 모두 고향이로구나

하루는 또 이런 시를 지어 읊었다.

汲水歸來忽回首    물 길어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靑山無數白雲中    흰 구름 사이로 무수한 청산이 솟아 있네


010_1015_b_01L放逸也以至三年擇師而學焉一擧
010_1015_b_02L而不中尤爲發憤時年十五歲矣
010_1015_b_03L受業師按轡于湖南與同學數輩
010_1015_b_04L徃之則師下車數月忽遭不天之憂
010_1015_b_05L已還京師聚頭悶欝之中同學言曰
010_1015_b_06L尋師千里事雖遠矣到此勝地空手
010_1015_b_07L而還不如遊玩南服山川也向頭流山
010_1015_b_08L花嚴燕谷七佛義神靑鶴大小精藍
010_1015_b_09L宿且行以至半年矣一日有一老宿

010_1015_b_10L尋余曰觀子氣骨淸秀定非凡流
010_1015_b_11L回心於心空及第永斷乎世間名利也
010_1015_b_12L書生之業雖終日役役百年所得
010_1015_b_13L一虛名而已實爲可惜余云何謂心空
010_1015_b_14L及第也老宿瞬目曰會麽曰不會宿
010_1015_b_15L難言也出示傳燈拈頌華嚴圓覺楞
010_1015_b_16L嚴法華維摩般若等數十本經論曰
010_1015_b_17L之思之漸可入門也因囑靈觀大師
010_1015_b_18L師一見奇之受業三年未甞不勤
010_1015_b_19L吐納問辨一如抓痒也於是同學數輩
010_1015_b_20L各還京師師獨留禪房坐探群經
010_1015_b_21L縛名相未得入解脫地益增2)盃盃 [63]
010_1015_b_22L夜忽得離文字之妙遂吟曰忽聞杜宇
010_1015_b_23L啼窓外滿眼春山盡故鄕一日又吟曰
010_1015_b_24L汲水歸來忽回首靑山無數白雲中

010_1015_c_01L
이튿날 아침 손에 은도銀刀를 들어 직접 푸른 머리칼을 자르면서 말하였다.
“차라리 어리석은 바보로 평생을 살지언정 맹세코 문자나 독송하는 사내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는 일선一禪 대사를 수계사授戒師로 삼고, 석희釋熙 법사와 육공六空 장로, 각원覺圓 상좌를 증계사證戒師로 삼고, 영관靈觀 대사를 전법사傳法師로 삼고, 숭인崇仁 장로를 양육사養育師로 하여 스님이 되는 의식을 올렸다.
스님이 된 휴정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默 대사를 찾아뵈니 학묵 선사는 그를 쓰다듬어 주면서 인가해 주었다. 다시 두류산 삼철굴三鐵窟에 들어가 세 여름을 지내고, 대승암大乘庵에 들어가 두 여름을 지냈으며, 의신암義神庵·원통암圓通庵·원적암圓寂庵·은신암隱神庵 등 여러 암자에서 수삼 년 가을을 보냈다.
하루는 용성龍城지금의 남원이다. 역성촌歷星村별원에서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두 개의 게송을 읊었다.서천 제3조인 상나화수商那和修36)가 제4조인 우바국다優婆毱多37) 존자에게 물었다. “네 나이 몇 살인고?” 대답하였다. “제 나이 열일곱입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다. “네 몸뚱이가 열일곱 개인가, 네 성품이 열일곱 개인가?” 제자가 대답하였다. “스승님의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머리카락이 하얀 것입니까, 마음이 하얀 것입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머리카락이 하얄 뿐 마음이 하얀 것은 아니니라.” 우바국다가 말했다. “저도 몸이 열일곱이지 성품은 열일곱이 아닙니다.” 상나화수가 곧 법의 그릇임을 알았다.

髮白非心白      머리칼은 하얘도 마음은 하얗지 않은 거라고
古人會漏洩      옛 사람(상나화수)이 일찍이 누설漏泄하셨지
今聽一聲鷄      오늘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丈夫能事畢      대장부가 해야 할 일을 이미 마쳤네

또 읊었다.

忽得自家底      홀연히 제집을 찾고 보니
頭頭只此爾      온갖 것이 다 이것뿐이어라
萬千金寶藏      만 마디 천 마디 부처님 말씀 적은 경전도
元是一空紙      원래는 모두 다 텅 비어 있던 종이였다네

그러고는 곧바로 산으로 돌아갔다.
병오년(명종 8, 1553) 가을에 갑자기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겨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한 벌로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을 지내고, 다시 풍악산에 들어가 미륵봉彌勒峰을 찾아 구연동九淵洞에서 한 여름을 보냈으며, 향로봉에서 한 여름을 보냈고, 성불암成佛庵·영은암靈隱庵·영대암靈臺庵 등의 암자에서 각각 한 여름씩을 보냈으며, 함일각含日閣에서 한 해 가을을 머물렀는데 그때의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다.
그때 성조聖朝께서 (연산군 때에 폐지되었던) 양종兩宗(선종과 교종)을 다시 복원시켰는데, 마지못해 외인外人의 간청을 따라 1년 동안 대선大選38)이라는 직책을 역임하고, 주지 직책을 맡은 지 두 해, 전법傳法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세 달, 교판敎判(敎宗判事)의 직책에 세 달,

010_1015_c_01L朝手執銀刀自斷靑髮曰寧爲一生痴
010_1015_c_02L獃漢誓不作文字 3) [64] 以一禪大師
010_1015_c_03L爲授戒師以釋熈法師六空長老覺
010_1015_c_04L圓上座爲證戒師以靈觀大師爲傳法
010_1015_c_05L以崇仁長老爲養育師也徃兠率山
010_1015_c_06L叅學默大師撫而印之入頭流山三鐵
010_1015_c_07L過三夏入大乘過二夏義神圓通
010_1015_c_08L圓寂隱神諸庵過數三秋一日訪友于
010_1015_c_09L龍城今之
南原
歷星村
聞午奚聲吟二偈
010_1015_c_10L三祖和修問四祖毱多曰汝年幾耶答曰我年十
師曰汝身十七性十七耶答師髮之白爲髮
010_1015_c_11L白耶心白耶4)心白耶 [65] 師曰我但髮白非心是耳
毱多曰我身十七非性十七也和修知是法器

010_1015_c_12L髮白非心是古人會漏洩今聽一聲鷄
010_1015_c_13L丈夫能事畢又曰忽得自家底頭頭只
010_1015_c_14L此爾萬千金寶藏元是一空紙即還
010_1015_c_15L山焉丙午秋忽生遊方之志一瓢一衲
010_1015_c_16L入五臺山半年居入楓岳山尋彌勒峰
010_1015_c_17L留九淵洞一夏香爐峯一夏成佛靈隱
010_1015_c_18L靈臺諸庵各結一夏住含日閣一秋
010_1015_c_19L時年三十秋也於是聖祖復兩宗强從
010_1015_c_20L外人之請得大選名者一夏得住持者
010_1015_c_21L二夏得傳法名者三朔得敎判名者三
010_1015_c_22L「脫」疑「晩」{編}「盃盃」甲本正誤表作「欝
010_1015_c_23L欝」
「法」甲本正誤表作「漢」「心白耶」甲
010_1015_c_24L本正誤表曰衍字

010_1016_a_01L선판禪判(禪宗判事)의 직책에 3년을 있었으니, 그때 휴정의 나이 서른일곱 살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처음 발심했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관직을 내려놓고(解綬)39) 하나의 청려장靑藜杖만 짚고 금강산 천석泉石 사이로 들어가 반년 동안 지내다가 두류산 내은적암內隱寂庵으로 들어가 3년을 지냈다. 그러고는 다시 황령암黃嶺庵·능인암能仁庵·칠불암七佛庵 등 여러 암자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3년을 지내고는 태백산·오대산·풍악산 등 다시 이 세 산을 답산하고 묘향산으로 가서 보현사普賢寺 관음전과 내원암內院庵·영운암靈雲庵·백운암白雲庵·심경암心鏡庵·금선암金仙庵·법왕암法王庵 등을 돌아다니며 마치 기러기 털이 날리듯 정처 없이 바람과 구름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가 지은 〈삼몽사三夢詞〉는 이러하다.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손님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今說二夢客      지금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亦是夢中人      둘 다 역시 꿈속의 사람이로구나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는 이러하다.

萬國都城如蟻垤    온 나라 도성들 마치 개미집 같고
千家憂傑若▣鷄    일천 집 호걸들도 흡사 하루살이 같구나
一窓明月淸虛枕    창가 밝은 달 베고 맑고 텅 빈 속에 누웠으니
無限松風韵不齊    솔바람 끝없는데 그 소리 고르지 않네

이로부터 빛을 감추고 채색을 갈무리한 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으나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가 날로 늘어만 갔다. 기축년 옥사獄事에 요망한 승려 무업無業이 대사가 향로봉에서 지은 시를 인용하여 무고誣告한 까닭에 체포되어 의금부에 잡혀갔으나 의금부에서 문초하는 답변이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다. 선묘宣廟(선조)는 휴정이 억울하게 무고 당함을 알고 즉시 방면하게 하고, 그의 시고詩稿를 구해 읽어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묵죽墨竹 한 폭과 시 한 수를 곁들여 휴정 상인上人에게 하사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葉自毫端出      댓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뿌리는 땅에서 나온 것 아니라네
月來難見影      달이 떠올라도 그림자 볼 수 없고
風動未聞聲      바람 불어 흔들어도 소리 들리지 않네

휴정은 이에 그 은혜를 감사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瀟湘一相枝竹     소상강의 한 가지 대나무가
聖主筆頭生      임금님 붓끝에서 나왔구나
山僧香爇處      산승이 향불을 사르는 곳에서
葉葉帶秋聲      잎새마다 가을바람에 서걱거리네

선조는 또 직접 시를 지어 휴정에게 하사하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東海有金剛      동쪽 바닷가 금강산이 있으니
䧺賢幾種胎      거기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나왔던가?
高名山斗仰      태산과 북두北斗처럼 높은 명성
今世是如來      지금 세상의 여래로구나

휴정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시에 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寂照非千世      고요히 비추어 세상일 간섭 않거니
虛靈豈入胎      허령虛靈이 어찌 세속의 태胎에 들겠는가?
金剛山下石      금강산 아래의 돌들은
大小自如來      크건 작건 다 여래인 것을

선조 대왕이 후한 상과 재물을 내려 산으로 돌아가는 휴정을 위로해 보냈다.

010_1016_a_01L得禪判名者三年時年三十七歲矣
010_1016_a_02L忽返初心解綬以一枝靑藜入金剛
010_1016_a_03L山泉石間過半年向頭流山內隱寂
010_1016_a_04L過三年1) [66] 黃嶺能仁七佛諸庵
010_1016_a_05L三年向太白五臺楓岳更踏三山
010_1016_a_06L妙香山普賢寺觀音殿內院靈雲白雲
010_1016_a_07L心鏡金仙法王飄若鴻毛風雲之不
010_1016_a_08L定也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
010_1016_a_09L說主人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
010_1016_a_10L香爐峯作詩曰萬國都城如蟻垤千家
010_1016_a_11L2) [67] 傑若3) [68] 一窓明月淸虛枕無限
010_1016_a_12L松風韵不齊自此韜光鏟彩不出山門
010_1016_a_13L問道者日益衆以此作辭己丑之獄
010_1016_a_14L妖僧無業誣引師詩被逮禁府供辭
010_1016_a_15L明剴宣廟知其寃立釋之徵詩稿
010_1016_a_16L之嘉歎御畵墨竹幛子題賜休靜上
010_1016_a_17L人曰葉自毫端出根非地面生月來
010_1016_a_18L難見影風動未聞聲休靜謝恩曰
010_1016_a_19L湘一4) [69] 枝竹聖主筆頭生山僧香爇
010_1016_a_20L葉葉帶秋聲又御製賜休靜曰
010_1016_a_21L海有金剛䧺賢幾種胎高名山斗仰
010_1016_a_22L今世是如來 5) [70] 製謝恩曰寂照非6) [71]
010_1016_a_23L虛靈豈入胎金剛山下石大小自
010_1016_a_24L如來宣廟賞賚甚厚慰遣還山壬辰

010_1016_b_01L
임진년(선조 25, 1592)에 임금이 탄 수레(大駕)가 서쪽으로 용만龍灣에 행차하자 대사는 칼을 뽑아 분연히 일어나 알현하니 선조가 말하였다.
“세상이 혼란하니 네가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수 있느냐?”
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온 나라에 명을 내렸다.
“온 나라의 모든 승려들 중에 늙고 병이 들어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를 올려 불보살님의 가피를 구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내가 직접 통솔할 터이니 모두들 군문 앞에 이르러 충성스런 백성들을 본받도록 하라.”
선조는 이를 의롭게 여겨 휴정을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여러 상족上足(제자)들에게 명을 내려 의병을 모아 규합하게 하였다. 그러자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고,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기병해 권율權慄의 군대와 합병合兵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을 방어했다. 휴정 대사는 직접 문도 1,500명을 거느리고 천병天兵(명나라의 원병)을 따라 진군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
천조天朝(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그리고 삼협통병三協統兵40) 이하 여러 장수들은 문첩文帖을 다투어 보내 전공을 치하하였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는 그 충성이 해를 꿰뚫었으니 경앙敬仰하여 존경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시를 지어 대사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無意圖功利      공리功利에 아무 관심이 없어
全心學道仙      도 닦는 일에만 전념하더니
今聞王事急      나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揔攝下山巓      총섭摠攝 되어 산문을 내려왔네

적이 물러가자 대사는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의 나이 80이라 근력이 쇠진하였으니, 청컨대 군사의 일을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부탁하고, 신은 총섭인摠攝印을 반납하고 묘향산 예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선조는 그 뜻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그에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는 이윽고 묘향산으로 돌아와 또다시 유유자적한 한가로운 한 도인이 되었다.
갑진년(선조 37, 1604) 정월 23일 원적암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휴정은 견여肩輿41)를 타고 눈 속을 뚫고서 가까운 산내의 여러 암자들을 골고루 찾아다니면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설법을 한 뒤에 방장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목욕재계하고 위의를 갖춘 다음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영정에 시 한 수를 써 넣었다.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그러고는 유정과 처영 두 문인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마친 다음

010_1016_b_01L大駕西幸龍灣師即仗劒起謁宣廟曰
010_1016_b_02L世亂如此爾可弘濟耶師泣而拜
010_1016_b_03L國內緇徒之老病不任行伍者臣令
010_1016_b_04L在地焚修以祈神助其餘臣統率
010_1016_b_05L赴軍前以效忠赤宣廟義之命爲八
010_1016_b_06L道十六宗都揔攝師分命諸上足𠛩聚
010_1016_b_07L義徒於是惟政7) [72] 處英起湖南
010_1016_b_08L與權公慄合兵8) [73] 賊于幸州師自率
010_1016_b_09L門徒千五百人隨天兵進克平壤
010_1016_b_10L朝經畧宋應昌提督李如松及三協統
010_1016_b_11L兵以下諸將送帖嘉奘有爲國討賊
010_1016_b_12L忠誠貫日不勝敬仰之語又題詩贈之
010_1016_b_13L無意圖功利全心學道仙今聞王
010_1016_b_14L事急揔攝下山巓賊退師啓曰臣年
010_1016_b_15L垂八十筋力盡矣請以軍事屬於弟
010_1016_b_16L子惟政及處英臣願納揔攝印還香山
010_1016_b_17L舊棲宣廟嘉其志悶其老贈號國一
010_1016_b_18L都大禪師禪敎都揔攝扶宗樹敎普濟登
010_1016_b_19L階尊者師旣歸妙香攸然一閒道人也
010_1016_b_20L甲辰正月二十三日將示寂于圓寂庵
010_1016_b_21L是日肩輿衝雪9) [74] 訪近山諸庵拜佛
010_1016_b_22L說法還方丈頮盥具威儀焚香佛前
010_1016_b_23L取筆自題畵像曰八十年前渠是我
010_1016_b_24L十年後我是渠又寄書訣惟政處英二

010_1016_c_01L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85세였고 선랍禪臘은 67년이었다. 기이한 향내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삼칠일(21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라졌다.
제자 원준圓俊과 인영印英 등이 사유闍維를 마치고 난 뒤에 영골靈骨 한 조각과 사리 두 매를 받들어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 두 곳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 또 한 조각은 제자 유정과 자체自體42) 등이 봉래산蓬萊山으로 받들고 가서 거기에서 신비한 구슬(神珠, 사리) 몇 매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산언덕 폄석窆石에 봉안하였다.
그의 제자는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학을 양성한 일방종주一方宗主 (대종사)만도 네다섯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성대하다고 말할 만하다.
그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가사雲水壇歌辭』·『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하나는 묘향산에서 개간開刊한 상·중·하 3권이고, 하나는 동리산에서 개간한 상·하 2권본이며, 하나는 삭녕 용복사龍腹寺에서 개간한 7권본인데 숭정崇禎(明 毅宗의 연호) 3년 경오(인조 3, 1630) 정월에 개간한 것이다.이 있으며, 「회심곡回心曲」 1편이 세상에 유행한다.
문인 언기彦機·의경儀冏·쌍흘雙屹 등이 상국相國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43)에게 비명碑銘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을 세웠다.
숭정崇禎 4년 신미(인조 9, 1631) 봄에 문인 태능太能·원철圓徹·해안海眼 등이 상국인 계곡谿谷 장유張維44)에게 비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세웠으며, 숭정 5년 임신(인조 10, 1632) 가을에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였으니, 그것은 대사가 임종할 때 유언의 말을 따른 것이다.
또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의승대장義僧大將 황금가사黃錦袈裟 1벌, 홍금가사紅錦袈裟 1벌, 백금장삼白金長衫 1벌, 벽옥碧玉으로 만든 발우 3좌座, 당혜唐鞋 2쌍,

010_1016_c_01L門人訖趺坐就化世壽八十五禪臘
010_1016_c_02L六十七異香滿室三七日後始歇弟子
010_1016_c_03L圓俊印英等闍維奉靈骨一片舍利二
010_1016_c_04L樹浮屠於普賢安心寺又一片
010_1016_c_05L子惟政自體等奉來蓬山得神珠數枚
010_1016_c_06L窆石于楡岾之北崗弟子千餘人其能
010_1016_c_07L領袖後學爲一方宗10)二十一 [75] 不下
010_1016_c_08L四五人可謂盛矣所著禪家龜鑑禪敎
010_1016_c_09L釋雲水壇三家一指各一卷淸虛堂集
010_1016_c_10L八卷一妙香山開刊上中下三卷一桐裡山開刊上
下二卷一朔寧龍腹寺開刊七卷崇禎三年
010_1016_c_11L庚午
正月
回心曲一篇行于世門人彥機儀
010_1016_c_12L冏雙仡11) [76] 碑銘於月沙李相國

010_1016_c_13L之金剛山白華庵崇禎四年辛未春
010_1016_c_14L人太能圓徹海眼等乞碑銘於谿谷張
010_1016_c_15L相國立於頭輪山大芚寺崇禎五年
010_1016_c_16L壬申秋金字寶藏錄一卷臨終遺言辭
010_1016_c_17L藏於海南頭輪山大芚寺義僧大將
010_1016_c_18L黃錦12) [77] 裟一領紅錦袈裟一領白金
010_1016_c_19L長衫一領碧玉鉢三座唐鞋二雙
010_1016_c_20L「曆」作「歷」{甲}「憂」甲本正誤表作「豪」
010_1016_c_21L□甲本正誤表作「醯」
「相」甲本正誤表曰衍
010_1016_c_22L
「禦」甲本正誤表作「御」「千」甲本正誤
010_1016_c_23L表作「干」
「開」甲本正誤表作「關」「鑾」
010_1016_c_24L甲本正誤表作「鏖」
「編」疑「徧」{編}「二十
010_1016_c_25L一」甲本正誤表作「主」
「等」下甲本正誤表有
010_1016_c_26L「得」
「乫」甲本正誤表作「袈」

010_1017_a_01L검은 거문고(烏瑟)와 염주 3건件, 옥사자玉獅子 연적硯滴 1좌, 중덕대선中德大禪인 승과에 합격하였다는 합격증 홍패紅牌 1장, 낙산사洛山寺 주지 임명장인 차첩差帖 1장, 유점사 주지 차첩 1장 등 휴정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것은 제자 영잠靈岑 대사가 휴정 대사가 입적한 뒤에 3년 동안 복服을 입고 난 뒤에 짊어지고 와서 보관한 것이다. 대사께서 입적한 뒤 185년이 지난 건륭乾隆(淸 高宗의 연호) 무신년, 우리나라 정조대왕 12년(1788)에 대둔사 스님인 계홍戒洪과 천묵天默이 임금께 글을 올려 탄원하였다.
이에 임금이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하라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사명당四溟堂과 뇌묵당雷默堂을 좌우에 철향腏享하게 하였다.
기유년(1789) 4월에 조정에서 제문祭文을 내리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정기환鄭基煥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니, 그 제문은 이러했다.

若昔壬辰       저 옛날 임진년
倭寇有警       왜구가 침략하자
空門忠義       공문空門의 충의忠義는
曰惟休靜       오직 휴정뿐이었네
髮剃身緇       머리 깎고 가사 걸친 몸으로
不墜彜秉       인륜을 떨어뜨리지 않았구나
慧劒西赴       지혜의 칼 들고 서쪽으로 달려가니
義徒從影       의로운 승려 그림자처럼 따랐네
協助天兵       천병天兵을 협조하여
狂塵遂靖       왜구의 난리를 잠재웠네
還陪鸞駕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왔으니
勳業愈炳       그의 공훈 더더욱 빛이 났네
聖朝褒嘉       거룩한 조정에서 그 공을 기려
寶墨暉映       임금 어필 찬란하게 빛나네
如何表忠       어찌하여 표충사에
先以惟政       먼저 유정惟政을 앞세웠는가?
新祠翼然       그가 머물던 옛 절에
住錫故境       사당을 새로 지어
樹風奘功       법풍을 세우고 공을 권장하도록
特允群請       많은 사람 간청하니 임금이 윤허함일세
宣額降香       편액을 하사하고 제물을 내리니
便蕃寵命       임금님의 각별한 배려로세
聳我南陬       외딴 남녘 사람 어깨가 으쓱하니
雖釋可敬       아무리 승려지만 존경스럽네홍문관 수찬修撰 송익효宋翼孝가 지은 제문임.(弘文舘修撰宋翼孝撰)

늘 사용하는 제문은 이러하다.

定慧俱到       선정과 지혜에 모두 이르고
忠義並隆       충성과 의리 모두 드높구나
大德授旨       덕 높은 스님의 명을 받아
二徒承風       두 제자가 법풍을 받들었네
獲醜孔阜       수많은 왜적을 사로잡으니
王用記功       임금은 그 공을 기록하셨네
鼎彜旣銘       솥과 제기에 글을 새기게 하고
爼豆斯崇       제사 또한 풍성하게 지내네
春物敷榮       봄 되어 사물이 윤택해지니
悵慕愈緬       사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네
嘉薦普淖       아름답고 향기로운 음식으로
式宣寵典       임금님의 은전 베풀어 제 올리네

삼가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당 선사와 우세존자佑世尊者 뇌묵당 선사를 좌우에 모시고 음식을 올려 배향配享합니다.승지承旨 정약용丁若鏞45)이 지음.
홍문관 제학提學 서유린徐有鄰이 「표충기적비명表忠紀蹟碑銘」을 지었다.
갑인(정조 18, 1794)에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2벌을 하나는 두륜산 표충사에 내려보내고, 다른 하나는 묘향산 수충사酬忠祠로 내려보냈다.

010_1017_a_01L瑟念珠三件玉獅子硯滴一座中德大
010_1017_a_02L紅牌一張洛山寺1)若帖一張楡岾
010_1017_a_03L寺差帖一張此弟子靈岑大師三年服
010_1017_a_04L除後負來留藏師入寂後一百八十
010_1017_a_05L五年乾隆戊申我正宗大王十二年
010_1017_a_06L寺僧戒洪天默抱狀籲天爰命立祠
010_1017_a_07L賜額表忠泗溟雷默左右腏享己酉
010_1017_a_08L四月妥靈賜祭遣禮曺正郞鄭基煥
010_1017_a_09L祭文曰若昔壬辰倭寇有警空門
010_1017_a_10L忠義曰惟休靜髮剃身緇不墜彜秉
010_1017_a_11L慧劒西赴義徒從影協助天兵狂塵
010_1017_a_12L遂靖還陪鸞駕勳業愈炳聖朝褒嘉
010_1017_a_13L寶墨暉映如何表忠先以惟政新祠
010_1017_a_14L翼然住錫故境樹風奘功特允群請
010_1017_a_15L宣額降香便蕃寵命聳我南陬雖釋
010_1017_a_16L可敬弘文舘修撰
宋翼孝撰
常用祭文曰定慧俱到
010_1017_a_17L忠義並隆大德授旨二徒承風獲醜
010_1017_a_18L孔阜王用記功鼎彜旣銘爼豆斯崇
010_1017_a_19L春物敷榮悵慕愈緬嘉薦普淖式宣
010_1017_a_20L寵典謹以弘濟尊者泗溟堂禪師佑世
010_1017_a_21L尊者雷默堂禪師配食于左右承旨丁
若鏞撰
>
010_1017_a_22L文舘提學徐有鄰作表忠紀蹟碑銘
010_1017_a_23L [6] 甲寅御製西山大師畫像堂銘二本
010_1017_a_24L一降于輪山表忠祠一降于香山酬忠

010_1017_b_01L그것은 그 당시 묘향산의 스님들이 대둔사의 소식을 듣고 와서 허락해 주기를 간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휴정의 송덕비頌德碑 비문을 지을 때 서공徐公(徐有隣)이 곁에서 도와준 공이 있기 때문이다.
5결結의 복호復戶46)가 있었고, 보솔保率47) 30명을 주어 제향을 올리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
동치同治(淸 穆宗의 연호) 10년 신미(고종 8, 1871)에 복호와 보솔을 모두 환수하였다. 그리하여 본사本寺(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을 봉행하게 되었다. 자체에서 지낼 때 사용하는 제문은 구계九階(覺岸) 상인上人이 지은 것이다.
대둔사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 손수 쓴 『연화경蓮華經』 1권과 일본의 관백關白이 바친 황금 병풍 1좌가 있다.
사명존자전泗溟尊者傳
존자尊者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호는 사명泗溟이다. 또는 송운松雲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성은 풍천豊川 임任씨이다. 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이고 장악원掌樂院 정正 효곤孝昆의 증손이며, 밀양 삼강동三綱洞48)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후에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일찍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거주하였다.
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임진년(선조 25, 1592)에 금강산 유점사에 기거하다가 영취산靈鷲山 재약사載藥寺에 이르러 삼강동三綱洞의 손판서孫判書·노승지盧承旨·박효자朴孝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또 전란을 맞아 전국에서 조중봉趙重峰·고제봉高霽峰·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정기룡鄭起龍·고언겸高彥謙·송운松雲·의엄義嚴·처영處英·영규靈圭·해안海眼 등이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해안은 충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는 금성錦城에서 일으켰으며, 유정은 관동關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갑오년(선조 27, 1594) 4월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영에 들어갔는데 왜적의 무리들이 몇 리에 걸쳐 줄지어 서 있고, 창과 칼이 서로 잇닿아 있었다. 그런데도 송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가등청정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등청정이 물었다.
“귀국貴國에 보물이 있습니까?”
송운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보물이 없습니다. 오직 장군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다.”
청정이 말하였다.
“무슨 말입니까?”
송운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대의 머리에 금 1천 근과 식읍食邑 1만 호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있으니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청정이 큰소리로 웃었다.

010_1017_b_01L時香山僧大芚消息來乞許之故
010_1017_b_02L蓮潭有一撰頌德碑徐公有傍助之
010_1017_b_03L功故也復戶五結保率三十人享事矣
010_1017_b_04L同治十年辛未復戶保率還收自本寺
010_1017_b_05L私享私享祭文九階上人撰 2)有家 [78]
010_1017_b_06L華經一卷安平大君瑢手筆也黃金屛
010_1017_b_07L一座倭物關白所獻者

010_1017_b_08L

010_1017_b_09L泗溟尊者傳

010_1017_b_10L
尊者名惟政號泗溟3) [79] 松雲姓豊
010_1017_b_11L川任氏贈刑曹判書守城之子掌樂正
010_1017_b_12L孝昆之曾孫也密陽三綱洞人也十五
010_1017_b_13L喪母十六喪父入山修道甞居五臺
010_1017_b_14L山月精寺萬曆壬辰居金剛山楡岾寺
010_1017_b_15L至靈鷲山4) [80] 藥寺三綱洞與孫判書盧
010_1017_b_16L承旨朴孝子同起義又趙重峰高
010_1017_b_17L霽峰郭再祐金德齡鄭起龍高彥謙松雲
010_1017_b_18L義嚴處英靈圭海眼同起義海眼起忠
010_1017_b_19L靈圭起錦城惟政起關東甲午四
010_1017_b_20L入淸正陣賊衆列立數里鎗劒如
010_1017_b_21L松雲小無怖色從容談笑淸正曰
010_1017_b_22L貴國有寶乎答曰我國無寶惟以將
010_1017_b_23L5) [81] 爲寶淸正曰何謂也答曰購儞頭
010_1017_b_24L金千斤邑萬戶非寶而何淸正大笑

010_1017_c_01L
그해 7월에 다시 청정의 진영에 들어갔으며, 12월에는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논의되던) 다섯 가지 조약에 대하여 적의 형편을 살피고 돌아오기도 했다. 저 다섯 가지 일이란 첫째 천자天子와 결혼을 할 것, 둘째 조선을 떼어 일본에 소속시킬 것, 셋째 전과 같이 교린交隣할 것, 넷째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 영구히 머물게 할 것, 다섯째 조선의 대신大臣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이것이 다섯 가지 사안이었다.
을미년(선조 28, 1595)에 사명은 상소문을 올리고 의병을 해산한 다음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
갑진년(선조 37, 1604)에 일본의 관백關白 원가강源家康(德川家康)이 우리나라에 수신사修信使를 보낼 것을 요청해 왔다. 임금이 유정에게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
“그대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라.”
3월 4일에 길을 떠나 왜국의 도성으로 들어가 화친을 맺고 을사년(선조 38, 1605) 4월에 돌아왔다. 7월 13일에 서울로 돌아오니 임금이 크게 포상하고 특별히 한 급의 품계를 높여 주었다. 유정은 다시 가야산으로 돌아갔으며, 정미년(선조 40, 1607) 가을에 치악산으로 돌아갔다가 무신년(선조 41, 1608)에 선묘宣廟(선조)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 절하고 통곡하였다. 병이 들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유정은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22년, 우리나라 인종仁宗 원년 갑진(1544)에 태어나 신종神宗 만력萬曆 38년, 우리나라 광해군 2년 경술(1610)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속 나이는 67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
시호는 종봉鍾峰이고 홍제존자弘濟尊者의 칭호를 내렸으며, 그의 행장은 영남의 ‘표충사비表忠祠碑’에 갖추어져 있다.
유정이 입적한 후 8년 무오(광해군 10, 1618)에 문인들의 호소에 의하여 임금이 특별히 출생지인 밀양 재약사載藥寺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그의 스승 서산 대사도 그곳에 함께 배향하게 하였다.
그 후 137년이 지나서 그의 5세손 남붕南鵬이 표충사가 퇴락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010_1017_c_01L七月再入淸正陣中十二月三入淸正
010_1017_c_02L陣中探情以五事來6) [82] 五事者一與
010_1017_c_03L天子結婚二割朝鮮屬日本三如前交
010_1017_c_04L四王子一人入送日本永住五朝
010_1017_c_05L鮮大臣入質日本此五件事也乙未
010_1017_c_06L上疏罷兵入伽倻山海印寺甲辰日本
010_1017_c_07L關伯源家康請信使于我國上下敎曰
010_1017_c_08L爾其通和而來三月初四日啓程入倭
010_1017_c_09L都結和乙巳四月7) [83] 七月十三日
010_1017_c_10L還京上大加褒賞特賜一品還入伽
010_1017_c_11L倻山丁未秋還雉樂 [7] 戊申聞宣廟諱
010_1017_c_12L奔入拜哭因病入伽倻山明世宗
010_1017_c_13L嘉靖二十二年我仁宗元年甲辰生
010_1017_c_14L宗萬曆三十八年我光海二年庚戌卒
010_1017_c_15L壽六十七臘五十一謚曰鍾峰賜弘
010_1017_c_16L濟尊者8) [84] 具於嶺南表祠碑入寂
010_1017_c_17L八年戊午因門人之呼訴特命立祠
010_1017_c_18L9) [85] 藥寺賜額曰表忠以西山配享
010_1017_c_19L後百三十七年五世孫南鵬愍其
010_1017_c_20L「若」甲本正誤表作「差」「有家」甲本正誤
010_1017_c_21L表曰衍字
「稻」甲本正誤表作「稱」「在」
010_1017_c_22L甲本正誤表作「載」
「軍」下甲本正誤表有
010_1017_c_23L「頭」
「云」甲本正誤表作「去」「向」甲本正
010_1017_c_24L誤表作「回」
「裝」甲本正誤表作「狀」「在」
010_1017_c_25L甲本正誤表作「載」

010_1018_a_01L재물을 모아 중건하고 여러 군자들에게 간청하여 『시문집詩文集』 1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청천靑泉신유한申維翰이 기술한 것으로서 2권으로 되어 있으며,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되어 있다.
금강산 백화암白華菴에 수충각酬忠閣을 세우고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세 화상과 그 왼쪽에는 서산 대사의 영정을, 오른쪽에는 사명 대사의 영정 등 다섯 분의 영정을 안팎 상인방(楣)에 봉안하였다. 각판刻板의 기록에 휴정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이조판서 병조판서 사자국일도총섭 대각등계자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兼吏曹判書兵曹判書賜紫國一都總攝大覺登階者’라 하였고, 유정은 ‘절충장군 행용호분위상호군折衝將軍行龍虎賁衛上護軍’이라 하였으며, 아무개는 ‘영의정 이조판서 양국대장자領議政吏曹判書兩國大將者’라고 하였고, 아무개는 ‘대선교등계 승의병대장군 겸동지이조판서 의금부사 통제군사명大禪敎登階僧義兵大將軍兼同知吏曹判書義禁府事統諸軍司命’이라 하였으며, 아무개는 종봉당鍾峰堂이란 시호가 추증되어 묘향산 수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연담蓮潭 대사가 찬문贊文을 지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削髮逃塵世      머리를 깎은 것은 티끌세상 피하기 위함이요
十年雲林       10년 동안 운림雲林 속에서
結猿鶴之盟      원숭이와 학을 친구 하기로 맹세했네
存髥表丈夫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나타냄이니
一朝談笑       하루 아침에 이야기를 나누며
解龍蛇之厄      임진·계사의 난리를 해결하였네
子貢之辯歟      자공子貢 같은 언변을 지녔고
秉忠之迹歟      자취는 유병충劉秉忠과 같았어라
能使柒齒       능히 저 오랑캐들로 하여금
慕義而讋伏      의리를 흠모하여 복종하게 하였으니
迄今二百年來     지금 2백 년에 이르도록
炎徼息警       전쟁이 그치고 편안하게 지낸다네
噫嘻休哉       아!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로다
是誰之力也      이것이 그 누구의 힘이란 말인가?
宜乎朝家崇祠宇    당연하네. 조정에서 사당을 지어 숭배하고
澗水沼毛甞又禴    제물을 차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일이여!

문인으로는 송월松月 등 50여 명이 있다.
진묵조사전震默祖師傳
조사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호는 진묵震默이며, 만경현萬頃縣(전북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佛居村(대진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는 조의調意씨이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풀과 나무가 3년 동안 시들었으므로 불거촌 사람들이 다 말하였다.
“세상에 드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
태어나서부터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내 나는 고기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010_1018_a_01L傾圮鳩財重建請於諸君子爲詩文
010_1018_a_02L一卷并奮忠䋒難錄一卷此申靑泉

010_1018_a_03L所記合二卷行世金剛山白華菴建酬
010_1018_a_04L忠閣指空懶翁無學三和尙左西山右
010_1018_a_05L泗溟五幀掛內外楣刻板曰休靜
010_1018_a_06L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兼吏曹判書
010_1018_a_07L兵曹判書賜紫國一都總攝大覺登階者
010_1018_a_08L惟政爲折衝將軍行龍虎賁衛上護軍
010_1018_a_09L爲領議政吏曹判書兩國大將者某爲
010_1018_a_10L大禪敎登階僧義兵大將軍兼同知吏曹
010_1018_a_11L判書義禁府事鸞諸軍司命某贈謚鍾
010_1018_a_12L峰堂配妙香山酬忠祠蓮潭作賛曰
010_1018_a_13L削髮逃塵世十年雲林結猿鶴之盟
010_1018_a_14L存髥表丈夫一朝談笑解龍蛇之厄
010_1018_a_15L子貢之辯歟秉忠之迹歟能使柒齒
010_1018_a_16L慕義而讋伏迄今二百年來炎徼息警
010_1018_a_17L噫嘻休哉是誰之力也宜乎朝家崇祠
010_1018_a_18L澗水沼毛甞又禴門人松月等五十
010_1018_a_19L餘人

010_1018_a_20L

010_1018_a_21L震默祖師傳

010_1018_a_22L
祖師名一玉號震默萬頃佛居村人也
010_1018_a_23L母調意氏生時佛居草木三年萎枯
010_1018_a_24L人咸曰間氣而生也生而不喜葷腥

010_1018_b_01L성품이 슬기롭고 마음이 자비로웠기 때문에 모두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거촌의 산부처이다.”
그의 나이 7세 되던 해 전주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栖寺에 귀의하여 처음으로 불경(內典)을 읽었다. 읽을 때는 마치 칼날이 뿔을 만나 해체해 나가듯이 한번 눈이 스쳐 가기만 하여도 줄줄 외우곤 하여 아무도 그의 스승이 되어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사미沙彌로만 생각하였다.
한번은 그 절의 주지가 그에게 향을 사르고 신중神衆께 예배를 드리라고 시켰더니, 오래지 않아 그 주지의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 일제히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모두 작은 신神들인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그분에게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는 일을 하지 말게 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대중들은 부처님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 것이라고 모두들 떠들썩했다.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봉곡鳳谷 김 선생金先生(金東準)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사계沙溪(金長生) 선생의 고제高弟였다. 진묵 대사는 그와 서로 왕래하면서 사상적 핵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방외方外의 사귐을 가졌으니 이 둘은 다 한 시대의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대사는 봉곡 선생에게서 『강목綱目』을 빌렸다. 선생은 하인을 시켜 그것을 지고 대사를 따라가게 하였다. 대사는 책을 한 권 뽑아서 다 읽으면 길에 던져 버리곤 하였고, 하인은 따라가며 그 책을 주워 담았다. 30리쯤 되는 거리의 절 가까이 다가가자, 70권 책 한 벌을 다 읽었다고 한다.
다른 날 봉곡 선생이 진묵 대사에게 물었다.
“책을 빌려 가지고 가서 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묵이 대답하였다.
“고기를 잡고 난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이랍니다.”
선생이 시험 삼아 책을 뽑아 내용을 물어보았더니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하루는 선생이 여자 종을 시켜 음식을 싸서 진묵 스님에게 보냈는데 여종이 봉서사로 가는 도중에 스님이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종이 심부름 온 연유를 말하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 아이를 갖고 싶으냐?”
여종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스님은 그녀의 박복함을 탄식하면서 영기靈氣가 헛되이 새 버릴까 두려워 멀리 허공 밖에서 막아 버렸다. 여종이 돌아와 선생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다. 봉곡 선생과 대사는 서로 내왕하는 빈도가 잦았으니 마음으로 묵묵히 맺어진 교분이 이와 같았다.
대사가 사미 시절에 창원 마산 포구를 지나가다가 어떤 여자 아이가 사미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으나 형편상 서로 같이 살 수 없음을 알고는 그 때문에 마침내 죽어서 다시 남자로 태어났다. 그 사내아이는 전주 대원사大元寺49)에서 진묵 대사를 만나 그를 모시는 동자가 되었는데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하였다. 대사는 그를 총애하여 그와 함께 이락삼매離樂三昧50) 속에서 유희遊戱하였다. 경전51)에 세속적 즐거움을 여읜 삼매(離樂三昧)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누가 티끌세상에서 홀로 빛나는 진여眞如의 실상을 알겠는가?

010_1018_b_01L性慧心慈又曰佛居生佛也年七歲
010_1018_b_02L歸全州西方山鳳栖寺始讀內典若刃
010_1018_b_03L迎觽解過目成誦不可師授故衆不
010_1018_b_04L而小沙彌視之住持者命燒香禮
010_1018_b_05L神衆久之住持夢神衆齊謝曰吾儕
010_1018_b_06L小神安敢受佛禮乎願勿復燒香
010_1018_b_07L晨夕自便也於是衆噪而爲佛再世也
010_1018_b_08L鳳栖寺之五里許有若鳳谷金先生
010_1018_b_09L溪先生之高弟也相與徃來爭席爭竈
010_1018_b_10L爲方外之交皆一時魁偉之人也先生
010_1018_b_11L借與綱目使一奚隨之師於路信手披
010_1018_b_12L閱而了一𢎥輙拋之奚從而拾之
010_1018_b_13L及寺盡覽一部他日先生謂師曰借書
010_1018_b_14L而拋之何也曰得魚忘筌先生抽卷試
010_1018_b_15L無一字錯焉一日先生使女奴
010_1018_b_16L路見師望空而立奴致命師曰
010_1018_b_17L欲有孕乎奴不應則師歎其福薄
010_1018_b_18L恐靈氣之妄泄遠屛空外歸語於先生
010_1018_b_19L其過從之頻數情誼之默契類多如此
010_1018_b_20L師沙彌時過昌原馬1) [86] 有童女
010_1018_b_21L愛而勢不得相從故遂死而爲男子
010_1018_b_22L師於全州之大元寺而爲侍童名曰奇
010_1018_b_23L2) [87] 師愛之與之遊戱於離樂三昧之
010_1018_b_24L經有離樂三昧誰能認眞於居塵獨

010_1018_c_01L그런 까닭에 지혜의 눈이 없는 숱한 스님들이 진묵 스님에게 기춘이를 위하여 국수를 말아 달라고 간청하자 대사가 허락하고 여러 대중들로 하여금 한자리에 둘러앉아 발우를 펴 놓게 하였다. 그러고는 시자를 시켜 각각의 발우 안 물속으로 바늘 하나씩을 던져 넣게 하였다. 그러자 대사의 발우에 담긴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하여 발우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대사는 태연자약하게 그것을 먹었다. 그러나 다른 스님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바늘 하나씩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대사는 일출암日出庵에 살았고 그의 어머니는 전주 왜막촌倭幕村에 살고 계셨는데, 여름만 되면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였으므로 대사가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모두 다른 지방으로 쫓아 버리게 하였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는 모기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아주 사라졌다고 한다.
대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 북면北面 유앙산維仰山52)에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그 묘소에 벌초를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 그 사람의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곤 하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남보다 뒤질세라 앞다투어 묘소를 돌보곤 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그 묘소는 늘 깨끗하고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대사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술을 거르고 있었는데, 술 향기가 퍼져 코로 들어왔다. 대사는 그곳을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다.
“스님이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
스님이 대답했다.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
대사는 잠자코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물었다.
“그대가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
방금 전처럼 대답하자 대사는 무료하게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또 가서 방금 전과 같이 물었다. 그러나 끝내 ‘술을 거른다’고 대답하였다. 대사는 마침내 실망하고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철퇴로 술 거르던 스님을 내려쳤다.
대사가 일찍이 변산부안군 월명암月明庵에 살고 계셨다. 시자의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속가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미리 대사의 공양을 준비해 탁자 위에 놓아두고 아뢰었다.
“공양을 여기 차려 두었습니다. 공양 때가 되거든 챙겨 잡수십시오.”
그때 대사는 방장실에서 창문을 열고 앉아서 문지방에 손을 얹고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
시자가 속가에서 묵고 암자로 돌아와 보니, 대사는 어제 그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대사는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에 손이 찍히어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도 손을 거둘 줄도 모르고 태연히 경전만 읽고 있었고, 탁자 위의 공양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문안 인사를 올리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왜 제사에 참례도 않고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아마도 대사는 수능엄삼매(首楞三昧)에 들어서

010_1018_c_01L耀之際所以無眼衆僧尙乞師爲奇春
010_1018_c_02L洗麵師許命衆僧同坐展鉢令侍者
010_1018_c_03L各投一針於鉢水中師鉢之針變爲細
010_1018_c_04L飣飣滿鉢喫之自若諸僧之鉢
010_1018_c_05L舊是一針而已師居日出庵母居倭幕
010_1018_c_06L以蚊爲苦師屬山靈敺蚊於他方
010_1018_c_07L永無蚊子之苦母沒歸葬於萬頃北面
010_1018_c_08L維仰山有掃除酻侑者輒得農利
010_1018_c_09L遠近村人爭先恐後至今數百年
010_1018_c_10L域宛在香火不絕師尙喜飮然糓茶
010_1018_c_11L則飮酒云則不飮有僧漉酒酒香入
010_1018_c_12L徃問曰汝漉甚麽曰漉酒師默然
010_1018_c_13L退又徃問曰汝漉什麽答之如前
010_1018_c_14L聊而返又徃問之答以下酒遂斷望
010_1018_c_15L而返俄有金剛力士以鐵棒打漉酒僧
010_1018_c_16L師棲於邊山
月明庵侍者有忌故徃
010_1018_c_17L俗家先判齋供置卓上而啓之曰
010_1018_c_18L養在此時至自齋時師在方丈內
010_1018_c_19L窓而坐以手加闑而閱楞嚴經侍者
010_1018_c_20L宿家而來坐如昨日風戶噬指而血
010_1018_c_21L忘却收手閱經自若卓供如舊侍者
010_1018_c_22L問侯師曰汝不叅祀而徑來耶盖入首
010_1018_c_23L「上」甲本正誤表作「山」「童」甲本正誤表
010_1018_c_24L作「春」

010_1019_a_01L밤이 이미 지난 줄을 모르셨던 모양이다.
매일 밤마다 언제나 등불 빛이 멀리 동쪽에서 비치곤 하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았더니 그것은 청량산 목부암木鳧庵전주에 있었다.에 있는 불등佛燈의 불빛이었다. 대사는 곧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목부암의 이름을 원등암遠燈庵으로 고쳤다. 십육나한이 늘 대사를 시봉하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그 등불 빛을 멀리 월명암까지 비추었던 것이다.
전주부全州府에 어떤 아전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부터 대사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관가의 재물 수백 냥을 사사로이 써서 빚을 지고는 도망을 가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러 대사를 찾아왔다. 대사가 말하였다.
“관가의 재물을 빚지고 도망가는 것이 어찌 사내가 할 일이겠는가? 그러지 말고 집에 돌아가 쌀 몇 말을 가지고 여기로 오너라. 저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틀림없이 좋은 도리가 있을 것이다.”
그 아전이 돌아가 대사가 시킨 대로 쌀을 가지고 왔다. 대사는 시자에게 밥을 지어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도록 시키고는 이내 그 관리에게 물었다.
“관청에 혹 빈자리가 있느냐?”
아전이 대답하였다.
“감옥의 형리刑吏 자리가 잠시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봉급이 매우 박하고, 또 일거리도 없는 자리입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일거리가 없는 자리라 하지 말고, 어서 빨리 가서 그 자리에 자청하도록 하라. 30일을 넘기지는 마라.”
그 아전이 떠난 뒤에 대사는 주장자를 들고 나한당羅漢堂에 들어가 나한들의 머리를 차례로 세 번씩 때리고 말하였다.
“저 아전 아무개의 일을 잘 도와주어라.”
이튿날 밤에 그 아전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 꾸짖었다.
“그대는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와서 말할 것이지, 어쩌자고 괜히 우리 스승님께 아뢰어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 그대를 봐서는 일을 봐주지 않았으면 딱 좋겠지만, 스승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번만은 너의 일을 보아 줄 것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그 아전은 뭔가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자청해서 옥리가 되었다. 그러자 옥송獄訟이 계속 일어나서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였으므로, 30일 안에 그 빚졌던 재물을 다 갚고는 그 자리를 남에게 물려주었다.
얼마 안 되어 새로 온 아전은 뇌물을 먹은 죄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대사가 일찍이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미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요수천樂水川 가에 함께 이르러 그 사미가 말하였다.
“소승이 먼저 건너서 물이 얕은지 깊은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미는 발을 벗고는 동동걸음으로 물을 건너갔다. 대사도 그를 따라 옷도 벗지 않고 건너려다가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사미는 얼른 와서 대사를 부축해 내었다. 대사는 비로소 나한의 놀림을 받은 줄 알고 게송 한 수를 읊었다.

寄汝靈山十六愚    영산靈山의 어리석은 너희 16인에게 부친다
樂村齋飯幾時休    요수촌樂水村의 잿밥 먹기를 몇 때나 그치려나
神道妙用雖難及    그 신통과 묘용妙用은 비록 미치기 어렵지만
大道應問老比丘    대도大道는 이 늙은 비구에게 물어야 하리라

한번은 대사가 길을 가다가

010_1019_a_01L楞三昧不知夜之已經也每夜自東燈
010_1019_a_02L光來照尋得乃淸凉山木鳧庵全州

010_1019_a_03L燈也師遂移錫改爲遠燈庵十六羅
010_1019_a_04L常與師侍奉燈光之遠照於1) [88]
010_1019_a_05L府有一吏素與師善欠逋數百
010_1019_a_06L將欲逃之來辭於師師曰負逋逃走
010_1019_a_07L男兒事但歸家判數斗米却來供養
010_1019_a_08L羅漢有好道理吏去依敎而來供養
010_1019_a_09L羅漢謂吏曰府有闕窠麽獄刑吏
010_1019_a_10L而甚薄無聊師曰勿謂無聊亟徃自
010_1019_a_11L請爲之而幸無過三十日吏去師入
010_1019_a_12L羅漢堂以杖次第打羅漢頭曰某吏事
010_1019_a_13L善助之羅漢現夢於吏曰儞有所求
010_1019_a_14L就我言之何以枉扣於師傅致我苦耶
010_1019_a_15L以汝則不顧師命不可不遵故視汝事
010_1019_a_16L而後無如此吏知有助請爲獄吏
010_1019_a_17L已獄訟繁興囚徒盈2) [89] 三十日內
010_1019_a_18L了所3) [90] 讓任他吏未幾新吏拘於徵
010_1019_a_19L賂之罪師獨行途中遇一沙彌同至
010_1019_a_20L樂水川邊啓曰小僧先渡測其淺深
010_1019_a_21L遂輕輕而涉師將厲之身淹水中
010_1019_a_22L徑來扶出始知羅漢見戱一偈記之
010_1019_a_23L寄汝靈山十六愚樂村齋飯幾時休
010_1019_a_24L4) [91] 妙用雖難及大道應5) [92] 老比丘

010_1019_b_01L천렵을 하는 여러 소년들이 시냇가에서 생선국을 끊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사는 끓는 솥을 내려다보면서 탄식하였다.
“이 좋은 고기들이 죄 없이 확탕鑊湯의 고통을 받고 있구나.”
그러자 한 소년이 장난삼아 물었다.
“스님도 이 생선국이 드시고 싶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나도 즐겨 먹지.”
소년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이 한 사라沙鑼를 몽땅 다 드릴 터이니 스님 마음대로 실컷 드십시오.”
대사는 구리쇠 사라를 들고 입 속으로 몽땅 쏟아 부어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버렸다. 그러자 소년들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계법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스님이라 하겠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물고기를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 물고기들을 다 살려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바로 옷을 벗고 물을 등지고 앉아 설사를 하였다. 그러자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항문에서 쏟아져 나와 수면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놀았다. 대사는 그 물고기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잘난 물고기들아, 지금부터는 저 강이나 바다 멀리 나가서 놀고 부디 확탕의 고통을 받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여라.”
그러자 그 소년들은 탄복하고 모두 그물을 걷어가지고 돌아갔다.
언젠가 대사가 시자를 불러 말하였다.
“이 소금을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가져가거라.”
시자가 여쭈었다.
“가져다가 누구에게 줄까요?”
대사는 말하였다.
“그곳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라.”
시자는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사냥꾼 몇 사람이 막 노루 고기를 저며 놓고는, 소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먹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시자가 소금을 그들 앞에 내려놓자 그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틀림없이 저 옥玉 노장님이 우리가 배를 곯고 있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보내 주신 것이리라. 사람을 살리시는 부처님이 골짝 골짝마다 계신다고 하더니,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구나.”
어느 날 대사가 물을 찾았다. 시자가 더운 뜨물을 갖다 드리자 대사는 그것을 받아 두어 모금 입에 머금어 동쪽을 향해 뿜어냈다.
뒤에 들으니 그때에 합천 해인사에 화재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온 절이 다 탈 지경이 되었을 때에 갑자기 한 줄기 소나기가 서쪽에서 몰려와 쏟아부으며 그 불을 껐다고 한다. 그 빗방울은 희뿌옇고 끈적끈적하였으며 어디에 묻으면 얼룩이 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인사에 화재가 있었던 날이 바로 대사가 뜨물을 뿜은 날이라고 한다.
대사가 일찍이 상운암上雲庵에 머물고 계셨다. 그 제자(神足)들이 양식을 구하러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남짓 만에 암자로 돌아왔더니, 대사의 얼굴에는 거미가 줄을 쳤고 무릎 밑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제자들이 먼지를 쓸고 거미줄을 걷은 다음에 다녀왔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대사가 일찍이 대원사大元寺전주에 있음.에 계실 때였다. 대사는 늘 공양 때마다 오직 밀기울만을 물에 타서 먹곤 하였다. 대중 스님들은 밀기울이 너무 빡빡하다고 싫어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그 밀기울을 더럽게까지 여겼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어떤 스님이 밥 발우를 가지고 허공에서 내려와 대사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대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010_1019_b_01L師値6)泉少年川獵烹鮮于溪邊師俯
010_1019_b_02L視沸鼎曰好箇魚子無辜而受鑊湯之
010_1019_b_03L一少年曰師欲沾魚羹麽師曰
010_1019_b_04L7) [93] 年曰這一沙鐤盡喫師擡銅沙
010_1019_b_05L灌口頓8) [94] 9) [95] 佛戒殺生豈僧
010_1019_b_06L師曰殺則非我活之在我解衣背
010_1019_b_07L水瀉之無數銀鱗從後門出活躍水
010_1019_b_08L師曰好個魚子遠游江海勿再罹
010_1019_b_09L鑊湯之苦衆人解綱而去師喚侍者
010_1019_b_10L送鹽于寺南婦谷中侍者曰送與阿誰
010_1019_b_11L曰去當自知侍者持鹽下谷獵士數人
010_1019_b_12L方膾獐肉思鹽不飮而坐致鹽于前
010_1019_b_13L皆喜此必玉老憐我之飢活人之佛
010_1019_b_14L谷谷有之者正謂此也師索水侍者
010_1019_b_15L進溫泔水接之含數口向東方噀之
010_1019_b_16L後聞陜川海印寺失火將至沒燒一陣
010_1019_b_17L驟雨10)西 [96] 而至注滅之其雨滴白濁
010_1019_b_18L粘物成瘢其寺失火之日乃師噴水之
010_1019_b_19L時也師住上雲菴神足輩以乞粮遠出
010_1019_b_20L月餘乃返師面上蛛綱膝間塵堆
010_1019_b_21L之掃塵掇絲通名拜謁師曰儞還一何
010_1019_b_22L速耶師住大元寺全州
每齋惟以11) [97]
010_1019_b_23L水而食諸僧厭薄之又穢汚其麩
010_1019_b_24L有一僧持飯盂自空而來進於師

010_1019_c_01L
“밥만 보내면 될 것을 하필 직접 이렇게 왔는가?”
그 스님이 말하였다.
“소승은 현재 대둔사大芚寺해남에 있음.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막 밥을 먹으려 하는데 발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밥그릇을 꽉 붙들었는데, 무슨 신력神力 같은 것에 끌려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대사가 비로소 그 공양을 청한 까닭을 말하였다. 그 스님은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올릴 것을 자청하였다. 그 스님이 대사에게 절을 한 다음 하직하고 길을 나서자 삽시간에 본래의 절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밥 발우가 계속 오고 가고 하였다.
그때 대사는 대중 스님에게 말하였다.
“너희 절은 장차 7대 동안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더니 과연 대원사는 지금까지 가난하다고 한다.
천계天啓(明 熹宗의 연호) 임술년(광해군 14, 1622)에 완부完府(완주군)의 송광사松廣寺53)와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54)에서 동시에 불상(塑像)을 조성하려고 하여 양쪽에서 한꺼번에 대사를 증명법사(證師)로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어느 쪽에도 가지 않고 각각 물건 하나씩을 주면서 증명단證明壇에 두어 운관運觀을 표表하는 데에 쓰게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훈계하였다.
“그저 이렇게만 하면 두 절의 존상尊像은 반드시 다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뒤로도 부디 경솔하게 개금改金을 하지 말라.”
또 경계하며 말하였다.
“더구나 무량사의 화주 스님은 점안點眼을 하기 전에는 절대 산문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하여라.”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보내 증명단에 세워 두게 하였는데 밤낮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고, 무량사에는 염주를 보내 증명석證明席에 올려 두게 하였는데 염주가 항상 딸깍딸깍 저절로 돌아갔다.
홍산鴻山 사람 가운데 3천 금金을 내어 삼존불의 불상을 조성하는 비용을 혼자서 다 감당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와서 참례하겠다고 말만 하면서 기한이 다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화주 스님은 그를 기다리면서 저도 모르게 산문 밖에까지 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갑사甲士55)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대사는 일찍이 이런 게송을 읊었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이며 산은 베개라네
月燭雲屛海作樽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며 바다는 술통일세

010_1019_c_01L送飯則可何必親來僧言小衲見住
010_1019_c_02L大芚
方食飯盂自動恠而執之
010_1019_c_03L神力推引到此師方說請齋之由
010_1019_c_04L大異之請願朝夕供養拜辭而出
010_1019_c_05L霎時還其寺自是飯徃盂來者四年
010_1019_c_06L師語諸僧曰汝寺當遭七世之厄果至
010_1019_c_07L今貧窶云天啓壬戌完府松廣鴻山
010_1019_c_08L無量同時塑像並請證師皆不徃
010_1019_c_09L授一物置證壇12)▼(木+(旌-方)) [98] 運觀之用曰必
010_1019_c_10L當善成後勿率爾改塗且戒曰量寺
010_1019_c_11L化僧點眼前愼勿出13) [99] 門外松寺送
010_1019_c_12L柱杖卓證壇日夜孤立不倚量寺送
010_1019_c_13L數珠安證席珠常呱呱自轉矣鴻山
010_1019_c_14L以三千金獨當三尊之塑費者常言
010_1019_c_15L來叅而過期不來化僧因其14) [100]
010_1019_c_16L覺出於門外忽被甲士打之而死
010_1019_c_17L吟卽曰天衾地席山爲枕月燭雲屛海
010_1019_c_18L「日」甲本正誤表作「月」「陛」甲本正誤表
010_1019_c_19L作「狴」
「連」疑「逋」{編}「道」甲本正誤表
010_1019_c_20L作「通」
「問」甲本正誤表作「詢」「泉」甲本
010_1019_c_21L正誤表作「衆」
「小」甲本正誤表作「少」
010_1019_c_22L「呼」甲本正誤表作「吸」
「人」下甲本正誤表
010_1019_c_23L有「曰」
「西」上甲本正誤表有「自」「麥」甲
010_1019_c_24L本正誤表作「麩」
「▼(木+(旌-方))」甲本正誤表作「旌」
010_1019_c_25L「沙」甲本正誤表作「寺」
「侯」甲本正誤表作
010_1019_c_26L「候」

010_1020_a_01L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해 벌떡 일어나 춤을 추노라면
却嫌長袖掛崑崙    기다란 소매에 곤륜산崑崙山56)이 걸려 귀찮다네

어느 날 대사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지팡이를 끌고 산문을 나갔다. 시냇가를 따라 거닐다가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 서서 손으로 물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하였다.
“저것이 바로 석가부처님이니라.”
시자가 말하였다.
“저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단지 가짜 스님만 알 뿐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
그러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나는 이제 떠나련다. 그대들은 무엇이든 물어보라.”
제자들이 물었다.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누가 종승宗乘을 이어받습니까?”
대사는 대답하였다.
“종승이 어디에 있다는 거냐?”
제자들은 재삼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하는 수 없어 대답하였다.
“명리승名利僧이지만 우선은 정靜 장로에게 부촉한다.”
그러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나시니, 세속 나이 72세였고 법랍은 52년이었다. 그때가 바로 계유년(인조 11, 1633) 10월 28일이었다.
봉서사鳳棲寺에 스님의 영정을 모신 영상각影像閣이 있고, 또 어록을 새긴 판목板木이 있다. 초의 의순草衣意恂과 제산 운고霽山雲▼(自/本) 스님이 교정하여 간행하였다.
편양종사전鞭羊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언기彦機이고 호는 편양鞭羊이며, 속성은 장張씨이고 죽주竹州(경기도 안성군 죽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9년 신사(선조 14, 1581) 7월에 태어났다. 어려서 현빈玄賔(서산 대사의 제자 印英)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장년이 되어 서산 대사께 귀의하여 그의 심법心法을 모두 전수받았다. 남쪽으로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선노禪老들을 참배하고 그들의 학문으로 자신을 채웠다. 항상 풍악산楓嶽山에 머물렀고, 혹은 묘향산에 주석하기도 하면서 법을 강하고 선을 증득하였다.
갑오년(효종 5, 1654)57) 5월 10일에 적멸을 보이시니, 세속 나이는 74세이고 법랍은 53년이었다.
편양의 문도로는 풍담楓潭의 계열이 가장 번창했으며, 법을 이은 제자 (拈香)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이 있는데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58)이 지은 것이다.

010_1020_a_01L作樽大醉居然仍起舞却嫌長袖掛崑
010_1020_a_02L一日沐浴淨髮更衣曳杖出門沿
010_1020_a_03L溪而行植杖臨流而立以手指水中己
010_1020_a_04L而示侍者曰這箇是釋迦1) [101] 子也
010_1020_a_05L侍者曰是和尙影師曰汝但知和尙假
010_1020_a_06L不識釋迦眞遂入室而坐召弟子曰
010_1020_a_07L吾將逝矣恣汝所問弟子曰和尙百
010_1020_a_08L歲後宗乘嗣誰師曰何宗乘之有再乞
010_1020_a_09L垂示師不得已而曰名利僧也且屬
010_1020_a_10L靜老長遂怡然順寂世壽七十二
010_1020_a_11L臘五十二癸酉十月二十八日鳳棲寺
010_1020_a_12L有影像閣又有語錄板草衣意恂霽
010_1020_a_13L山雲𦤎校正刊行

010_1020_a_14L

010_1020_a_15L鞭羊宗師傳

010_1020_a_16L
師名彥機號鞭羊姓張氏竹州人
010_1020_a_17L曆九年辛巳七月生幼從玄賔受具
010_1020_a_18L壯歸西山盡傳心法南遊徧叅諸禪老
010_1020_a_19L以充其學常住楓岳或住妙香講法
010_1020_a_20L證禪甲午五月十日示寂世壽七十四
010_1020_a_21L法臘五十三鞭羊之門楓潭最昌
010_1020_a_22L香者凡三十餘人金剛山白華庵有碑
010_1020_a_23L白洲李明漢撰

010_1020_b_01L
소요종사전逍遙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태능太能이고 호는 소요逍遙이며, 속성은 오吳씨이고 담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가정嘉靖(明 世宗의 연호) 41년 임술(조선 명종 17, 1562) 9월에 태어났다.
진眞 스님에 의지하여 백양사白羊寺에서 머리를 깎고, 황벽黃檗에게서 불법의 오묘한 의미를 터득했으며, 억조億兆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졌다.
남쪽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휴浮休에게서 대장경을 배웠으며, 서산 대사를 다시 찾아가 본래의 근원은 청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축년(인조 27, 1649) 11월 21일에 열반에 드니, 그의 세속 나이는 88세이고 선랍禪臘은 73년이었다.
그에게서 선종禪宗을 전수받은 제자는 침굉 현변枕肱懸辯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제자는 해운 경열海運敬悅이며, 염향拈香하여 법을 이은 제자만도 30여 명이나 된다. 그의 탑비塔碑는 연대蓮臺(지금의 김제 금산)에 있는데 그 비명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59)이 지었고, 부도는 보개산 심원사㴱源寺와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있다.
풍담종사전楓潭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의심義諶이고 호는 풍담楓潭이며, 속성은 유柳씨이고 통진通津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어머니 정씨가 일찍이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을 하였으며, 만력萬曆 20년 임진(선조 25, 1592)에 아이를 낳았다.
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성순性淳 대사에게서 머리를 깎았고, 원철圓徹 스님을 참알參謁하고 계戒를 받았으며, 편양鞭羊 대사를 알현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편양 대사는 바로 청허淸虛 대사의 법을 이었다.
대둔사에서 큰 법회가 열렸는데, 그 법회에 모인 대중들이 무려 250명이나 되었다.
강희康熙 4년 을사(현종 6, 1665)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서 세상을 떠나려 할 무렵에 게송 한 편을 읊었다.

奇恠這靈物      신기하여라. 이 영물靈物이
臨終尤快話      임종에 더욱 상쾌하다니
死生無變容      나고 죽음에 변한 모습 없으니
皎皎秋天月      가을 하늘에 달만 밝게 비추네

그러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니, 세속의 나이는 75세이고 법랍은 58년이다. 돌아가시던 날 안색이 평소와 같았다. 그의 제자들이

010_1020_b_01L逍遙宗師傳

010_1020_b_02L
師名2) [102] )能號逍遙姓吳氏潭陽人
010_1020_b_03L生於嘉靖四十一年壬戌九月依眞師
010_1020_b_04L於白羊祝髮服玄旨於黃檗億兆知名
010_1020_b_05L歷叅南國受大藏於浮休再訪西山
010_1020_b_06L悟本源之淸淨己丑十一月二十一日
010_1020_b_07L示寂行年九旬小二禪臘七袠加三
010_1020_b_08L得其禪宗者曰枕肱懸辯傳其敎宗者
010_1020_b_09L海運敬悅拈香嗣法者凡三十餘
010_1020_b_10L碑在蓮臺白軒李景奭撰浮屠在
010_1020_b_11L寶盖山㴱源寺智異山燕谷寺頭輪山
010_1020_b_12L大芚寺

010_1020_b_13L

010_1020_b_14L楓潭宗師傳

010_1020_b_15L
師法名義諶號曰楓潭俗姓柳氏
010_1020_b_16L津人母曰鄭鄭甞夢含珠而妊生師
010_1020_b_17L於萬曆二十年壬辰十六出家從性淳
010_1020_b_18L師而落髮叅圓徹師而受戒謁鞭羊師
010_1020_b_19L而得法鞭羊即淸虛之法嗣設大會於
010_1020_b_20L大芚衆二百五十人康熈四年乙巳
010_1020_b_21L寂于金剛山正陽寺臨化吟一偈曰
010_1020_b_22L恠這靈物臨終尤快3) [103] 死生無變容
010_1020_b_23L皎皎秋天月怡然而化行年七十五
010_1020_b_24L法臘五十八4) [104] 之日顏色如常弟子

010_1020_c_01L영골靈骨을 받들어 은색銀色 사리 5과顆를 얻어 부도를 건립하고 탑비塔碑를 세웠다.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60)이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세운 비문을 지었고,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백화암에 세운 편양당의 비문을 지었으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백화암에 세운 서산 대사의 비문을 지었다. 이씨 3대가 서산 3대의 비문을 지었으니 좋은 인연의 소중함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
편양의 문인 준기俊機와 도안道安 등이 또 남쪽 지방을 유람하면서 주석하였던 곳에 그윽한 광명을 천발闡發하여 스님의 생애와 업적이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여 대둔사에 탑비와 부도를 세웠다. 비문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김우형金宇亨61)이 지었다. 문인은 47명이다.
해운선사전海運禪師傳
다산茶山62) 옹翁이 말하였다.
“해운海運 선사가 세상을 떠난 지 지금 이미 169년이나 지났다. 그의 성씨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상고해 볼 만한 데가 없다. 다만 연파 혜장蓮坡惠藏(1772~1811)이 일찍이 스님의 문중에서 옛 기록을 본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청련 원철靑蓮圓徹 대사가 대둔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을 적에 소요 태능逍遙太能 또한 대둔사에 왔다. 해운 경열海運敬悅은 이 해에 태능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으며, 67세에 입적하였다.’”
지금 상고해 보니 청련 대사가 법회를 연 해는 곧 만력萬曆 36년 정미(선조 40, 1607)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경열은 만력 8년 경진(선조 13, 1580)에 태어나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서 3년째 되는 병술년(인조 24, 1646)에 입적했다.
그가 태능 대사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을 때는 소요 대사의 나이 46세 때였고, 경열이 입적한 해는 소요 대사의 나이 85세 때였다.

010_1020_c_01L等奉靈骨獲舍利五枚如銀色者
010_1020_c_02L浮屠豎碑靜觀齋李端相作金剛山白
010_1020_c_03L華庵碑白洲李明漢作白華庵鞭羊碑
010_1020_c_04L月沙李廷龜作白華菴西山碑李氏三
010_1020_c_05L代作西山三代碑緣誼之重可想也
010_1020_c_06L門人俊機道安等又於南維住錫之處
010_1020_c_07L闡發幽光 5) [105] 圖不朽立碑浮屠於大
010_1020_c_08L芚寺藝文舘直提學金宇亨撰門人
010_1020_c_09L四十七

010_1020_c_10L

010_1020_c_11L海運禪師傳

010_1020_c_12L
茶山翁曰海運禪師之沒今已百六十
010_1020_c_13L九年矣其姓氏鄕里皆無可考惟蓮
010_1020_c_14L坡惠藏嘗見師門古記曰靑蓮圓徹大
010_1020_c_15L大芚大會之時逍遙太能亦至
010_1020_c_16L海運敬悅以是年受衣鉢於太能
010_1020_c_17L時年二十八至六十七而寂今考靑蓮
010_1020_c_18L大會之年乃萬曆三十六年丁未之冬
010_1020_c_19L然則敬悅6) [106] 萬曆八年庚辰生
010_1020_c_20L禎甲申之越三年丙戌寂其受衣也
010_1020_c_21L遙之年四十六其歸寂也逍遙之年八
010_1020_c_22L「佛」下甲本正誤表有「影」「大」甲本正誤
010_1020_c_23L表作「太」
「話」甲本正誤表作「活」「化」
010_1020_c_24L上甲本正誤表有「火」
「衣」甲本正誤表作
010_1020_c_25L「永」
「而」甲本正誤表作「以」

010_1021_a_01L소요 대사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경열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가짐이 마치 ‘상대의 훌륭한 점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한다(見賢思齊)’63)는 가르침과 같았으니 그의 소소한 기록은 비록 일실되고 없으나 그것이 어찌 슬픈 일이겠는가?
소요 대사의 문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지만, 오직 경열만이 그의 종통宗通을 이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그의 호를 해운海運이라고 한 듯하다. 해운이란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는 의미이고,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 간다는 의미는 유유히 소요逍遙함을 뜻하니 소요 대사의 전법傳法이 곧 해운이 아니겠는가?64) 그런 까닭에 소요 스님이 해운 스님에게 마음을 전하고 법을 전하면서 읊은 게송은 이러했다.

飛星爆竹機鋒峻    우뚝한 기봉機鋒은 흐르는 별이요 폭죽爆竹이며
裂石崩崖氣象高    높은 기상은 돌이 갈라지고 벼랑이 무너지는 듯하네
對人殺活如王劒    사람을 대함에 죽이고 살림은 군왕의 칼 같고
凛凛威風滿五湖    늠름한 위풍威風은 오호五湖에 가득하네

해운에 대하여 또 한 수의 시를 읊으니 이러했다.

金鎚影裡裂虛空    쇠방망이 그림자에 허공이 찢어지니
驚得泥牛過海東    놀란 진흙소가 바다 동쪽 지나가네
珊瑚明月冷相照    산호珊瑚와 밝은 달이 서로 냉랭하게 비추고
古今乾坤一笑中    고금에 천지는 한바탕 웃음 속에 있네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소식이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경열이 시를 지어 읊으면 소요 대사가 반드시 화답하곤 하였다. 그 시는 이러하다.

胷中法海幽難測    가슴속 법의 바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 없고
篇內玄樞遠莫酬    시편詩篇의 현묘한 이치 너무 멀어 갚을 수 없네

또 이렇게 읊기도 했다.

禪綱敎骨誰能敵    선의 강요綱要와 교의 뼈 그 누가 대적하랴
華月夷風孰敢酬    중국의 달, 동이東夷의 바람 아무도 짝할 수 없네

또 이렇게 읊었다.

水泡大地遺塵起    물거품 같은 대지에 유진遺塵이 일어나고
春夢空身妄識興    봄꿈 같은 부질없는 몸에 망식妄識만 이는구나

또 이렇게 읊었다.

威音那畔更那畔    위음불威音佛 저쪽 가시 저쪽 변두리에
滿目烟光入水皆    눈에 가득한 아름다운 광경 물속에 잠겼어라
生死涅槃迷夢隔    생사와 열반이 미몽迷夢에 막혀 있고
劣形殊相病眸乘    잘난 모습 못난 모습 병든 눈의 소치라네

이 시의 전편은 『소요집逍遙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로써 해운의 인물됨을 엿볼 수 있으리라.
해운의 법을 이은 제자들은 취여 삼우醉如三愚이고 삼우의 법을 이은 제자는 화악 문신華岳文信이다. 문신의 법을 이은 제자는 설봉 회정雪峰懷淨이고 회정의 법을 이은 제자는 송파 각훤松坡覺暄이며, 각훤의 법을 이은 제자는 정암 즉원晶巖即圓이고 즉원의 법을 이은 제자는 연파 혜장蓮坡惠藏이다. 아! 종맥宗脈이 이러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大翼南徙       붕새의 큰 날개 남쪽 바다 옮겨 갈 때
水擊三千       파도는 삼천리를 치고 난다
匪運昌遊       해운이 아니면 뉘라서 저리 놀까?
是後是傳       이 뒤로도 그의 법 전해지되
星飛竹爆       흐르는 별, 폭죽처럼 터져서
光燭長天       드넓은 하늘에 광명이 찬란하네
六燃其燈       진리의 등불 여섯 번 켜지더니
遂至晶蓮       마침내 정암과 연파에 이르렀네

010_1021_a_01L十五1) [107] 遙八十八而終則敬悅其先
010_1021_a_02L逝矣其師弟二人相與之際猶如見
010_1021_a_03L其小事雖逸奚傷焉逍遙門徒
010_1021_a_04L百餘人惟敬悅獨得其宗故號之曰
010_1021_a_05L海運者2) [108] 3) [109] 逍遙也
010_1021_a_06L逍遙之傳非即海運乎故其傳心傳法
010_1021_a_07L之偈曰飛星爆竹機鷄峻裂石崩崖氣
010_1021_a_08L象高對人殺活如王劒凛凛威風滿五
010_1021_a_09L又曰金鎚影裡裂虛空驚得泥牛過
010_1021_a_10L海東珊瑚明月冷相照古今乾坤一笑
010_1021_a_11L拈花微笑顧不在是乎敬悅有詩
010_1021_a_12L逍遙必和之其詩曰胷中法海幽難測
010_1021_a_13L篇內玄樞遠莫酬又曰禪綱敎骨誰能
010_1021_a_14L華月夷風孰敢酬又曰水泡大地遺
010_1021_a_15L塵起春夢空身妄識興又曰威音那畔
010_1021_a_16L更那畔滿目烟光4)入水皆 [110] 生死涅槃
010_1021_a_17L迷夢隔劣形殊相病眸5) [111] 其全篇
010_1021_a_18L載逍遙集中斯可以徵海運也海運有
010_1021_a_19L法嗣曰醉如三愚三愚之嗣曰華岳文
010_1021_a_20L信之嗣曰雪峰懷淨淨之嗣曰松坡
010_1021_a_21L覺暄暄之嗣曰晶巖即圓圓之嗣曰
010_1021_a_22L坡惠藏宗在是矣銘曰大翼南徙
010_1021_a_23L水擊三千匪運昌遊是後是傳星飛
010_1021_a_24L竹爆光燭長天六燃其燈遂至晶蓮

010_1021_b_01L苟求眞諦       진실로 진리를 찾고자 하면
視彼梓鐫       문집에 새긴 글을 보아라

문인은 17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 취여醉如가 그 우두머리이다. 정공丁公(정약용)이 추기追記하여 논論하였다.
취여종사전醉如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삼우三愚이고 호는 취여醉如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남 강진군 보암방寶岩坊 구정자九亭子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만덕산 백련사白蓮社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여러 선사들을 두루 참알參謁하고 내전內典(불경)을 널리 섭렵하였다. 해운 경열의 조실에서 향을 뽑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니 경열은 소요 태능의 제자이다.
취여는 얼굴이 붉고 윤기가 흘렀기 때문에 해운이 ‘술에 취한 듯한 사람(醉如子)’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으니, 장난삼아 그랬던 것이다. 그를 살펴보면 그는 담론談論을 잘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했다고 한다.
일찍이 대둔사大芚寺(대흥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의 종지를 연설하였는데 강론을 듣는 이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때 어떤 스님이 밭을 가는 기구를 지고 누각 아래에서 쉬다가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닫고, 지고 있던 농기구를 벗어 던지고 당堂에 올라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며 울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다 말하여 참회하고 미묘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은 그를 쓰다듬으면서 가르쳐 주고 마침내 의발을 전해 주었으니, 이분이 바로 화악 문신華岳文信이다. 옛날 육상산陸象山65)이 아호鵝湖 화상의 강석講席에서 의義와 이利 두 글자에 대하여 강론하자 사방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또 육조六祖 대사 혜능慧能이 본래는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다가 마침내 5조의 의발을 전해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이 일도 충분히 저들의 아름다웠던 일과 비교할 만하다.
취여 대사는 천계天啓 2년 임술(광해군 14, 1622)에 태어나 강희康熙 23년 갑자(숙종 10, 1684) 6월 5일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63세였다. 진영은 둘이 있으니 하나는 백련사에, 하나는 대둔사에 있다.
비명은 이러하다.

世人皆醉師亦如    세상 사람 다 취하니 스님도 취했구나
如而不醉愚不愚    취한 듯 취한 게 아니요 어리석은 듯 어리석지 않네
龍穴淸風猶有餘    용의 굴에 맑은 기풍 여유가 있고
流涕之席稍鵝湖    눈물 흘린 법석法席은 아호 스님 같아라
舂而受鉢行者盧    방아 찧다 발우 받은 이는 노盧 행자인데
醉之旣醒邈雲車    취한 술 깨어나니 구름 수레 아득하네

010_1021_b_01L苟求眞諦視彼梓鐫門人十七人
010_1021_b_02L如居首丁公追記而論之

010_1021_b_03L

010_1021_b_04L醉如宗師傳

010_1021_b_05L
師名三愚號醉如姓鄭氏康津寶岩
010_1021_b_06L坊九亭子人也幼年出家落髮於萬德
010_1021_b_07L山白蓮社歷叅諸師淹過內典拈香
010_1021_b_08L於海運敬悅之室敬悅逍遙太能之親
010_1021_b_09L師也顏如渥丹故海運錫號曰醉如
010_1021_b_10L盖戱之也顧善談論聽者心醉
010_1021_b_11L於大芚之上院樓演說華嚴宗旨聽講
010_1021_b_12L數百人有一僧負田器易樓板下
010_1021_b_13L窃聽一二句立地頓悟捨擔昇堂
010_1021_b_14L下如雨陳其罪悔請受妙詮師撫而
010_1021_b_15L誨之卒傳衣鉢是爲華岳文信昔陸
010_1021_b_16L象山於鵝湖講席講義利二字四座
010_1021_b_17L垂泣六祖慧能本於槽廠下舂米6)
010_1021_b_18L [112] 授五祖衣鉢斯足以匹美也師生於
010_1021_b_19L天啓二年壬戌卒於康熙二十三年甲
010_1021_b_20L壽六十三六月五日示寂有影二
010_1021_b_21L一在白蓮社一在大芚寺銘曰
010_1021_b_22L人皆醉師亦如如而7)不醉 [113] 愚不愚
010_1021_b_23L穴淸風猶有餘流涕之席稍鵝湖舂而
010_1021_b_24L受鉢行者盧醉之旣醒邈雲車璘霦者

010_1021_c_01L璘霦者石華龜跌    옥 무늬 찬란한 돌 거북 받침 화려하고
乞銘者誰孫騎魚    비명을 청한 사람 법손法孫인 기어旗魚라네

탑명塔銘은 도승지都承旨 한치응韓致應66)이 지었고, 문인은 화악華岳 등 10여 명이다.
월저종사전月渚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도안道安이고 호는 월저月渚이며, 속성은 유劉씨이고 기도箕都(평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보인輔仁이고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스님은 숭정崇禎 11년 무인(인조 16, 1638)에 태어났으며, 강희康熙 54년 숙종 을미(숙종 41, 1715)에 세상을 마쳤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78세이고 승랍僧臘은 69년이다.
월저는 처음에는 천신天信 장로로부터 계를 받고 풍담楓潭 대사를 참알參謁하여 서산 대사의 비밀한 전법傳法을 모두 터득했다.
갑진년(현종 5, 1664)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를 강구講究하니 세상에서는 그를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늘 종풍宗風을 거양擧揚할 때마다 자리 아래 모여드는 청중이 항상 수백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법석法席의 성대함이 근세에는 없는 것이었다.
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하여 불문과 세속에 유포하였다.
기축옥사己丑獄死67) 때 사람들의 무고誣告를 당해 옥에 갇혔으나 임금이 본래부터 월저 대사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은 터라 특별히 명을 내려 풀어 주게 하였다. 그로부터 더욱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더욱 성대하게 알려져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월저 대사의 문하에 몰려드는 자들이 마치 목마른 사람이 강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배불리 마시고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세상을 떠나던(歸眞) 날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을 밝혀 백 리 바깥까지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 다비를 하고 나서 사리 3과를 얻어 보현사普賢寺 서쪽 산기슭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또 2과는 기성箕城(평양)과 해남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해남의 석법명釋法明은 월저 대사의 고족高足인데, 빈양濱陽(한양)으로 나를 찾아와

010_1021_c_01L石華龜8) [114] 乞銘者誰孫騎魚塔銘
010_1021_c_02L承旨韓致應撰門人華岳等十人

010_1021_c_03L

010_1021_c_04L月渚宗師傳

010_1021_c_05L
師名道安號月渚姓劉氏箕都人也
010_1021_c_06L父輔仁母金氏崇禎十一年戊寅生
010_1021_c_07L康熙五十四年肅庙乙未終世壽七十
010_1021_c_08L僧臘六十九初從天信長老受戒
010_1021_c_09L叅楓潭盡得西山密傳甲辰入妙香山
010_1021_c_10L講究華嚴大義世稱華嚴宗主每擧
010_1021_c_11L9) [115] 宗風座下聽衆常不下數百人
010_1021_c_12L席之盛近世所未有也刊大乘諸經
010_1021_c_13L印布道俗己丑之獄爲人所誣上素
010_1021_c_14L聞其名特命釋之自是益自韜晦
010_1021_c_15L其名殷殷動一國望門而趨者如渴赴
010_1021_c_16L莫不滿腹而歸歸眞之夕祥光燭
010_1021_c_17L百里之外無不見者茶毘得舍利
010_1021_c_18L三顆塔于普賢之西麓又分藏於箕城
010_1021_c_19L海南海南釋法明師之高足也訪余
010_1021_c_20L「遙」甲本正誤表作「逍」「從」甲本正誤表
010_1021_c_21L作「徙」
「徒」甲本正誤表作「徙」「入水
010_1021_c_22L皆」甲本正誤表曰衍字
「乘」甲本正誤表作
010_1021_c_23L「來」
「六十」甲本正誤表作「卒」「不醉」
010_1021_c_24L甲本正誤表作「醉不」
「跌」甲本正誤表作
010_1021_c_25L「趺」
「揭」甲本正誤表作「揚」

010_1022_a_01L대사의 비명을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월저 대사의 전법傳法 제자인 추붕秋鵬이 일찍이 나에게 자기 스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은 경을 해석할 때 세세한 구절과 항목에 구애받지 않고 그 대지大旨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으며, 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여 크건 작건 빠뜨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이렇게 말했으니 이것이 월저 대사를 대사답게 하는 까닭이라 하겠다.
대사의 비문은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68)가 지었다. 일찍이 대둔사에서 연 큰 법회의 『강회록講會錄』에 실려 있는 그의 문인만도 39명이나 되었다. 대사의 비석은 대둔사에 있다.
신해·보정합전信海普淨合傳
신해信海와 보정普淨은 중국 용검산聳劒山 옥천사玉泉寺의 스님들이다. 그 절에는 운장雲長 관우關羽의 목상木像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신해와 보정 두 스님이 이를 수호하고 있었다. 또 수복守僕 홍洪씨도 있었는데 관운장 생존 시에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의 후손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장군 형개邢介와 도독都督 진린陳璘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했다. 이때 신종神宗 황제의 꿈에 운장이 나타나 원군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조선을 구하겠다고 자청하자 신종이 이를 허락하고 나서 깨어보니 꿈이었다.
신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칙령勅令을 내려 옥천사의 관운장상을 싣고 함께 가도록 했다. 신해와 보정 그리고 종 한 명이 뒤따라 운장의 목상을 같이 모시고 따라갔다. 이들은 고금도古今島 앞바다에 이르러 왜군을 만나 크게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는 틀림없이 관공關公의 힘이었을 것이다. 목상 관운장을 모시고 함께 온 세 사람이 육지에 내려 사당을 세우고 그 목상을 봉안하여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고는 예전 옥천사에서 했던 대로 수직守直하게 하였다.
명나라에서 온 장군들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군하여 북쪽으로 왕성王城을 향해 나아가면서 난리를 평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은 난리를 겪은 뒤라서 국왕의 교화가 멀리까지 미칠 수 없는 시기였으므로 공을 세운 사람들과 열사烈士들이 은전恩奠을 입지 못하고 있었다.
홍씨는 관운장의 사당에 남아 그 곁에서 사당을 지켰고 보정은 정수淨水69)로 들어갔으며, 신해는 만흥산萬興山으로 떠나갔다. 만흥산 기슭에 특별히 한 암자를 짓고 편액을 ‘서전西殿’이라 붙였다. 서전이라고 한 것은

010_1022_a_01L濵陽求爲師銘師之傳法弟子秋鵬
010_1022_a_02L嘗爲余言師於解經不拘細節1)𤦹 [116]
010_1022_a_03L而善括其大旨其於諸子百家兼包並
010_1022_a_04L巨細不遺斯所以爲師也弘文
010_1022_a_05L舘大提學李德壽撰曾於大芚寺大會
010_1022_a_06L載在講會錄門人三十九人碑在大芚
010_1022_a_07L

010_1022_a_08L

010_1022_a_09L信海普淨合傳

010_1022_a_10L
信海普淨者上國聳劒山玉泉寺僧也
010_1022_a_11L其寺有木像關雲長二師守護
010_1022_a_12L有守僕洪氏雲長生時家臣之後孫也
010_1022_a_13L壬辰倭亂宣廟使使求救於上上使
010_1022_a_14L將軍邢介都督陳璘等率軍救之
010_1022_a_15L神宗皇帝夢雲長自請同徃救之
010_1022_a_16L上許之覺而勅諸將載與俱救二師
010_1022_a_17L一僕亦陪行隨之到古今島前洋
010_1022_a_18L倭師大戰勝之此必關公之力也
010_1022_a_19L公及偕來三人下陸建祠奉安以避風
010_1022_a_20L以古玉泉例守直西來諸將水陸
010_1022_a_21L並進北向王城平亂班師時喪亂之
010_1022_a_22L王化不能遠及功臣烈士未蒙恩
010_1022_a_23L洪氏守在祠側 [117] 入淨水海入萬
010_1022_a_24L萬興山麓別搆一庵扁曰西殿西

010_1022_b_01L서쪽에서 왔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천문과 지리는 물론 인사人事와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술법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상좌 세 사람이 있었는데, 첫째 명간明侃은 본사에 있었고, 둘째 재정再靜은 나주 쌍계사雙磎寺로 들어갔으며, 셋째 정휘靜輝는 진도 쌍계사로 들어갔다.
신해 대사의 먼 법손 중에 지환智還이라는 스님이 있었으니 그의 호는 용악龍岳이며 승려 중에 걸출한 인물이었다. 만흥산의 법풍이 쇠퇴하자 만덕산으로 옮겨 갔으며, 다시 만덕산의 법풍이 쇠미해지자 대둔사로 이주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9세였는데 가을 달처럼 해맑은 기상이 있었다.
보정 스님의 후예로는 의준義俊 스님이 있었는데 강진군 칠량면 봉황리에 사는 김씨의 아들이었다. 호를 봉성鳳城이라고 한 이 스님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운장의 사당에 제전祭奠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에 분개하여 한탄한 나머지 현감 이면행李冕倖 공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노력하였다. 문하에 차윤국車潤國이란 동자가 있었다. 그는 마치 옛날 궐당闕黨 동자처럼 일찍이 벼슬에 올라 운장의 제향을 함께 추진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내외內外에 명을 내리니 스승보다 나았다.
한번 임금의 윤허(龍墀)를 얻고 나니 삼정승들이 구름처럼 따라주어 편액扁額과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완벽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천추千秋를 내려오도록 제향이 받들어지고 있다. 의준은 스스로 일을 총괄하는 총섭摠攝이 되어 힘을 다해 사당을 보호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만년에 속가로 귀환하여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
아! 슬픈 일이로다. 두 스님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나라에서 죽은 몇 가지 일과 두 곳 사찰의 일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두 스님의 강생降生(탄생)과 유성踰城(출가) 등 그 두 부분의 사실에 대해서는 경계가 너무 멀어 듣지 못하니, 모쪼록 저승에 가서 서로 만나면 알아보아야 하겠다.
송파대사전松坡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각민覺敏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며, 속성은 노盧씨이고 충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서徐씨인데, 어느 날 달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아이를 잉태하여 만력萬曆 24년 병신(선조 29, 1593) 3월 3일에 스님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용모와 행동이 단아하였고 용모가 빛나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하루는 여러 아이들을 따라 길거리에서 놀고 있었는데,

010_1022_b_01L殿者表西來之意也天文地理人事
010_1022_b_02L鬼神凡諸術數無不通達有上佐三
010_1022_b_03L一曰明侃在本寺二曰再靜入羅
010_1022_b_04L州雙溪三曰靜輝入珍島雙溪海之
010_1022_b_05L雲仍有智還者號龍岳僧之傑出者
010_1022_b_06L萬興之衰也移住於萬德萬德之
010_1022_b_07L衰也移住於大芚時年五十九有秋
010_1022_b_08L月氣像普淨之後裔有義俊者康津
010_1022_b_09L七良鳳凰里金氏子也號稱鳳城亦非
010_1022_b_10L凡者也慨然歎雲長之無恤奠與縣監
010_1022_b_11L李公冕倖同心協力門下有童子車潤
010_1022_b_12L國者速成若闕黨之類同事上京
010_1022_b_13L命內外藍茜沮色一禀龍墀三台雲
010_1022_b_14L賜額節目萬分申嚴不日成建
010_1022_b_15L秋行香自爲揔攝有力有護不幸晩
010_1022_b_16L歸俗云亡嗚呼二師越海就木之
010_1022_b_17L數事兩寺事顯且載降生踰城之兩端
010_1022_b_18L絕域無聞會須有九原相逢知

010_1022_b_19L

010_1022_b_20L松坡大師傳

010_1022_b_21L
師名覺敏號松坡姓盧氏忠州人也
010_1022_b_22L母徐氏夢月入懷有娠以萬曆二十四
010_1022_b_23L丙申三月三日生容止端雅眉宇烱
010_1022_b_24L見者奇之一日隨群兒戱於街上

010_1022_c_01L충청도 안찰사按察使가 그를 보고 사랑스러운 생각이 들어 수레에 태워 가지고 함께 돌아와 영내營內에 머물게 하였다. 인하여 그 아이를 서울로 데리고 가서 수년 동안 같이 지냈다. 그 아이는 어느 날 노모를 뵙기 위하여 하직인사를 하고 본가로 돌아왔다.
집에 이르러 집 안을 살펴보니 방이라곤 마치 허공에 달려 있는 듯하였고, 어디에 가서 공부를 할 만한 데도 없었다.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드렸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선비(士)·농부(農)·기술자(工)·상인(賈)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서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허락하자 소년은 곧바로 치악산 각림사覺林寺로 들어가 송운松雲(泗溟)의 큰 법제法弟인 한계寒溪 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가야산으로 들어가 『치문緇門』과 『선요禪要』 등의 기초적인 교학을 배우고, 소요逍遙 대사의 문하에서 하안거를 하였으며, 비슬산琵瑟山 호구虎丘 대사에게 경전을 배웠다.
또 벽암 호연碧岩浩然 대사에게서 의문이 나는 대목을 물어 배우고 다시 무주 구천동으로 임성任性 대사를 찾아뵙고 7년 동안 머물면서 유·불·선 삼교의 깊은 이치를 강구하여 이를 약간 권의 책으로 만들고, 그 책의 이름을 『해의解疑』라 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계미년(인조 21, 1643) 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송월당松月堂 대사를 배알하고 학업을 마쳤다. 이로 말미암아 도는 더욱 높아졌고 명성 또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송파 대사는 아예 도에 대한 스승이라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더욱더 삼교에 정진하였으므로 당시의 종장宗匠들이 그에게 찾아와 묻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로부터 10여 년간 때로는 소백산에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용문사龍門寺와 해인사海印寺 등을 찾기도 하였다.
을묘년(숙종 1, 1675)에 조용하게 저 세상으로 선화仙化하였다. 스님은 임성 대사의 법제자이고 정관靜觀 대사의 법손이며, 청허淸虛 대사의 증손이다. 문인으로는 동운東雲과 반운伴雲 등 10여 명이 있다.
비문은 이월사李月沙의 아들인 현주玄洲의 아들 동리東里 이름은 은상殷相이 지었고, 김우형金宇亨이 글씨를 썼으며, 김만중金萬重70)이 전액篆額을 썼다. 이월사 선생은 청허당의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010_1022_c_01L忠淸按察使見而愛念載與俱歸
010_1022_c_02L置營中仍與入京者數年爲見老母
010_1022_c_03L辭歸至家見室如懸碧出無所徃受業
010_1022_c_04L乃垂涕而請於母曰人生斯世不爲士
010_1022_c_05L農工賈則寧入山而修道爲出世人
010_1022_c_06L母泣而許之乃入雉2) [118] 山覺林寺
010_1022_c_07L祝髮於松雲大法弟寒溪大師又入伽
010_1022_c_08L倻山受緇禪等書結夏於逍遙大師之
010_1022_c_09L受經於琵瑟山虎丘大師又質3)
010_1022_c_10L [119] 碧岩浩然大師又謁任性大師于九
010_1022_c_11L4) [120] 千洞留七年講究三敎奧旨錄成
010_1022_c_12L如干名曰解疑而傳于世癸未春
010_1022_c_13L松月堂于金剛山而卒業焉由是道彌
010_1022_c_14L高而名益彰未甞以師道自處尤精於
010_1022_c_15L三敎一時宗匠莫不就正焉自此
010_1022_c_16L餘年間或至小白或至龍門海印等處
010_1022_c_17L乙卯泊然而化師任性之子靜觀之孫
010_1022_c_18L淸虛之曾孫也門人東雲伴雲等十餘
010_1022_c_19L李月沙之子玄洲之子東里名
010_1022_c_20L殷相作金宇亨書金萬重額李月沙
010_1022_c_21L作淸虛碑

010_1022_c_22L「𤦹」甲本正誤表作「▼(瑣-小+巛)」「樂」甲本正誤表
010_1022_c_23L作「岳」
「於疑」甲本正誤表作「疑於」
010_1022_c_24L「泉」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23_a_01L
  1. 1)석옥 청공石屋淸珙 : 속성은 온溫이고, 자는 석옥石屋이다. 1272~1352. 소주蘇州 상숙常熟 사람으로 임제종臨濟宗의 급암 종신及庵宗信의 법을 이었다.
  2. 2)개당開堂 : 새로 주지가 된 스님이 절에 가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의식.
  3. 3)권주權鑄 : 고려 말의 관인이자 서예가이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쪽으로 몽진할 때, 왕을 호종하여 신축호종 2등 공신에 봉해졌다. 전공판서·지신사·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서예에 능하여 ‘신륵사대장각기비’와 ‘태고사원증국사탑비’ 등의 비문이 전한다.
  4. 4)윤환尹桓 : 고려 시대 재상. 충혜왕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섬기고, 재상을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고향 칠원에 있을 때 큰 기근을 만나자,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5. 5)이인임李仁任 : 고려 시대 문신. 공민왕 때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의 동녕부를 정벌, 광평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공민왕 사후 우왕을 추대했다. 정권을 잡고 친원親元 정책을 취하여 친명파를 추방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6. 6)최영崔瑩 : 고려 시대 명장.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 제주 호목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7. 7)임견미林堅味 : 고려 시대 무신.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했고 원나라 동녕부 토벌, 제주 목호의 난, 왜구 침입 때 출전했다.
  8. 8)이림李琳 : 고려 시대 무신. 덕적·자연의 두 섬과 울주·연산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였다.
  9. 9)서견徐甄 : 고려 시대 문신. 조준·정도전을 탄핵하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장류杖流되고 조선 개국 후 풀려나 은거했다. 고려의 망국을 읊은 시조가 전해진다.
  10. 10)도갑사道甲寺 :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에 있는 절.
  11. 11)봉산封山 :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조성하기 위하여 벌채를 금지하는 산. 조선 전기에는 금산禁山이라는 명목으로 소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는 임금이나 왕비의 능침陵寢 등지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국가의 부세수취가 달라지면서 국가의 목재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보호하는 수종樹種과 금지 범위, 관리 책임자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봉산으로 이름하였다. 금산과 달리 봉산에는 소나무를 보호하는 봉산과 관곽에 쓰이는 황장목을 보호하는 황장봉산黃腸封山, 신주에 쓰이는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그리고 배에 못으로 쓰이는 참나무를 보호하는 진목봉산眞木封山 등이 있었다.
  12. 12)김수온金守溫 :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1410~1481.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에서 『치평요람』을 편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명황계감』을 국역하는 등 국어 발전에 힘썼다. 불경의 국역과 간행에도 공이 컸다. 문집에 『식우집』이 있다.
  13. 13)윤소종尹紹宗 : 고려 말·조선 초기 문신.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동문 밖에 나가 「곽광전」을 바쳐서,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王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병조전서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다.
  14. 14)스물네 자로 된 법호 :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崇信眞乘勤修至道都大禪師’를 말한다.
  15. 15)「북산이문北山移文」 : 남북조시대의 공치규孔稚圭(447~501)가 지은 글이다. 당시 주옹周顒이 강소성江蘇省 강녕부康寧府 소재의 종산鍾山(일명 북산)에서 은거하다가 남제南齊 조정에서 출사하여 회계군의 해염海鹽 현령을 지냈다. 해염 현령의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가는 길에 주옹은 종산에 들르려고 하였다. 공치규는 주옹이 은자의 생활을 버리고 조정에 출사하는 행위를 미워했기에 관청의 통문 형식, 즉 이문移文의 표현을 빌려 주옹이 두 번 다시 종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16. 16)허종許琮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문무에 모두 뛰어나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함길도 경차관·북정도원수 등을 지내며 국경의 경비를 튼튼히 하였다. 의학에도 밝아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鄕藥集成方』을 언해하였다.
  17. 17)원돈교圓頓敎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를 아울러 이르는 말. 천태종에서 화엄華嚴의 교법이라고 하는 화법사교化法四敎 가운데 하나인 원교와 화의사교化儀四敎 가운데 하나인 돈교이다.
  18. 18)양재타방颺在他方 : 자신의 자리를 다른 세계에 던져 버린다는 뜻이다.
  19. 19)고봉高峯 : 속성은 서徐씨이고 법명은 원묘原妙이다. 1238~1295.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 15세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하였으며,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41세(1279) 때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峰에 들어가, 죽음에 대비하여 사관寺關을 짓고 은거하며 16년 동안을 문턱을 넘지 않고 지내다가 원종元宗 원년 대중에게 설법하고 나서 그 자리에 앉은 채 잠들듯이 적멸에 들었다. 그동안 많은 학도를 가르쳤는데, 승속을 불문하고 계戒를 받은 사람만도 수만 명이 넘었다. 현재 한국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를 지어 참선하는 자의 길잡이가 되게 했다.
  20. 20)대혜大慧 : 자는 담해曇海, 호는 묘희妙喜·운문雲門, 시호諡號는 보각 선사普覺禪師이다. 선주宣州 출생. 환오 극근圜悟克勤의 법사法嗣이다. 제자로는 사대부인 장구성張九成 등이 있었는데, 제자로 인하여 정쟁政爭에 휘말려 형산衡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正法眼藏』(道元이 지은 것과는 다름)을 저술하였다. 그 후 송나라 효종제孝宗帝의 귀의歸依를 받았으며, 대혜 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받게 되었다. 간화선의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21. 21)존당尊堂 : 원래는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존칭인데 여기에서는 아마도 자신의 부모를 일컫는 말인 듯하다.
  22. 22)비야毘耶 : 비야리毘耶離 또는 비사리毘舍離라고도 한다. 중인도에 있던 작은 나라로 부처님께서 자주 그 나라에 다니며 교화하였다고 한다.
  23. 23)마갈摩竭 : 중인도에 있었던 왕국인 마갈타摩竭陀를 말한다. 부처님이 성도한 니련선하泥連禪河가 있으며, 불멸佛滅 후 제1결집이 있었던 곳이다.
  24. 24)삼승三乘 :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인데, 즉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에 대한 세 가지 교법을 말한다.
  25. 25)칠요七曜 : 해와 달, 그리고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 오성五星을 일컫는다. 즉 고대 역법曆法을 말한다.
  26. 26)구장九章 : 한漢나라 장창張蒼이 지은 『九章算術』에서 나온 말로 고대의 산술算術을 말한다.
  27. 27)활구活句 : 의미가 있고 의로意路가 통하는 말을 사구死句, 의로가 통하지 않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활구라 한다.
  28. 28)조주趙州 : 이름은 종심從諗. 778~897. 산동성山東省 조주부趙州府에서 출생.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 보원南泉普願 선사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 비로소 조주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120세로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아 있고, 그의 교화가 크게 떨쳐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 일컬었다.
  29. 29)절상회折床會 : 『五燈會元』에 당나라 여회如會(744~823) 선사가 법풍이 크게 떨쳐서 배우려고 모여드는 이가 너무 많아 법당 마루가 부러질 정도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이다.
  30. 30)직설稷契 : 중국 고대 요堯와 순舜의 어진 신하인 후직后稷과 설契로서 지혜와 덕을 겸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31. 31)사유闍維 : 다비茶毘와 같은 말. 죽은 이를 화장하는 일을 말한다.
  32. 32)겁석劫石 : 불교에서 보통 연월일로써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겁劫이라 한다. 겁석이란 둘레가 40리나 되는 돌을 하늘 사람이 무게 3수銖밖에 안 되는 옷으로 3년마다 한 번 스쳐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33. 33)용호방龍虎榜 : 조선 시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게시하던 게시판.
  34. 34)창화昌化 : 경기도 양주군의 옛 이름. 또는 충북 충주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양주가 아닌가 생각된다.
  35. 35)관리舘吏 : 관사의 잡부로서 역사驛舍에 상주하며 일을 하는 일꾼.
  36. 36)상나화수商那和修 : 인도의 제3조. 상낙가박사商諾迦縛娑·사나바사舍那婆斯라고도 음역. 중인도 왕사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뒤에 아난阿難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 아난이 열반한 뒤 전법에 전력하였다. 제자 우바국다優婆麴多에게 법을 전하였다.
  37. 37)우바국다優婆毱多 : 불법을 전해 받은 제4조이며, 아육왕阿育王의 스승.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우바국다 존자가 그 교리를 받들어 설법할 때 마왕魔王이 석가모니의 몸으로 화化하여 이를 방해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물리쳐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38. 38)대선大選 :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에게 주었던 최하위의 법계이다.
  39. 39)조선 시대 관직에 임명될 때 임금에게서 받는 신분이나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관인官印을 몸에 차기 위한 끈을 인수印綬라고 한다. 이 끈을 푼다는 말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의미이다.
  40. 40)삼협통병三協統兵 : 명나라의 군직軍職. 제독提督 밑의 좌협·우협·중협 세 장군 중 하나이다.
  41. 41)견여肩輿 : 좁은 길을 지날 때 두 사람이 메고 다니는 가마.
  42. 42)자체自體 : 자휴自休라는 기록도 있다.
  43. 43)이정구李廷龜 : 조선 시대의 문신. 1564~1635.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에 『월사집』·『서연강의書筵講義』·『대학강의大學講義』 등이 있다.
  44. 44)장유張維 : 조선 중기 문신. 문장이 뛰어나 조선 중기의 사대가에 속한다.
  45. 45)정약용丁若鏞 : 조선 후기 학자·문신. 1762~1836. 주요 저서는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이 있다.
  46. 46)복호復戶 : 호세戶稅를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47. 47)보솔保率 : 군인이 거느리는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의 합칭. 보인은 군인에게 딸린 경제적 보조자. 솔정은 군인이 거느리고 부리는 사람.
  48. 48)삼강동三綱洞 : 사명이 태어난 곳은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古羅里이다. 혹은 괴나리, 괴나루(槐津)라고도 부른다. 삼강동은 아마도 이곳의 옛 이름인 듯하다. 이곳에 사명의 선산先山과 생가 터가 있다.
  49. 49)대원사大元寺 : 김제 모악산 기슭에 있던 절.
  50. 50)이락삼매離樂三昧 : 『悲華經』에 이르기를, “여러 가지 삼매 가운데 이락삼매라는 것이 있는데, 이 삼매에 들면 세속적인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51. 51)경전이란 『비화경』을 말한 것이다.
  52. 52)진묵 스님의 어머니 묘소는 지금의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388번지 조앙산祖仰山에 있다.
  53. 53)송광사松廣寺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절.
  54. 54)무량사無量寺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萬壽山에 있는 절.
  55. 55)갑사甲士 : 조선 시대 각 고을에서 서울에 올라와 숙박하며 지키던 군사를 말한다.
  56. 56)곤륜산崑崙山 : 중국의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성한 산. 중국의 서쪽에 있으며 황하黃河의 발원지라고 한다.
  57. 57)다른 기록들에는 한결같이 편양의 열반 연도를 갑신년(인조 22, 1644)이라고 하였다.
  58. 58)이명한李明漢 : 조선 인조 때의 문신. 1595~1646.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작성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다. 성리학에 밝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백주집』이 있다.
  59. 59)이경석李景奭 : 조선 중기의 문신.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60. 60)이단상李端相 : 대간臺諫과 부제학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1628~1669.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주요 저서에 『大學集覽』과 『四禮備要』 등이 있다.
  61. 61)김우형金宇亨 : 조선 후기의 문신. 1616~1694. 효종 때 벼슬길에 올라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글씨에 능하였고, 특히 예서에 뛰어나 숙종 때 보책寶冊을 자주 썼다.
  62. 62)다산茶山 :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1762~1836.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주요 저서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이 있다.
  63. 63)이 말은 『논어』 「里仁」 편에 나오는 말이다. 즉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기를 돌아보라’고 하였다.(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64. 64)소요 태능逍遙太能과 해운 경열海運敬悅이란 당호와 법명으로 볼 때 이 두 스님은 장자莊子의 도교 사상을 수용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소요逍遙’라는 말과 ‘해운海運’이라는 단어는 모두 장자가 지은 『南華經』 「逍遙遊」 편에 나오는 말이다.
  65. 65)육상산陸象山 : 육구연陸九淵. 남송의 사상가이다. 1139~1192.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 시諡는 문안文安이다. 무주撫州 금계현金谿縣 사람으로 형인 구소九韶(자는 子美), 구령九齡(자는 子壽, 復齋先生)과 함께 학문으로 이름을 남겼다.
  66. 66)한치응韓致應 : 조선 후기의 문신. 1760~1824. 대사성과 대사간, 병조판서 등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67. 67)기축옥사己丑獄死 : 조선 선조宣祖 22년(기축, 1589)에 동인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일어난 옥사.
  68. 68)이덕수李德壽 : 조선 후기의 문신. 1673~1744. 자는 인로仁老. 호는 서당西堂·벽계蘗溪. 문장이 출중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으며 성품이 근후하여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女四書』를 언해하였고 『국조오례의』의 수정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저서에 『西堂集』 등이 있다.
  69. 69)정수淨水 : 우리나라에 정수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찰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절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 있는 절이 유명하다. 여기에서 정수란 아마 강진의 정수사(옛 이름은 雙磎寺)를 말하는 듯하다.
  70. 70)김만중金萬重 : 조선 시대의 문신이며 소설가. 1637~1692.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그리고 『서포만필』 등의 작품이 있다.
  1. 1)「師」甲本正誤表作「國」。
  2. 2)「議」甲本正誤表作「儀」。
  3. 3)「明」甲本正誤表作「寧」。
  4. 4)「十二…而逝」十一字。甲本正誤表曰衍字。
  5. 1)「雪」下甲本正誤表有「山」。
  6. 2)「開」甲本正誤表作「關」。
  7. 3)「明」下甲本正誤表有「白」。
  8. 4)「明」甲本正誤表作「時」。
  9. 5)「汝」甲本正誤表作「泣」。
  10. 6)「之」甲本正誤表作「去」。
  11. 7)「𧝟」甲本正誤表作「弊」。
  12. 8)「山下」甲本正誤表作「寺」。
  13. 1)「其」下甲本正誤表有「徃」。
  14. 2)「出」甲本正誤表作「山」。
  15. 3)「長尾」甲本正誤表作「尾長」。
  16. 4)「烟」甲本正誤表作「咽」。
  17. 5)「訢」甲本正誤表作「訴」。
  18. 6)「巨」作「臣」{甲}。
  19. 7)「四」下甲本正誤表有「日」。
  20. 8)「觀」下甲本正誤表有「其」。
  21. 9)「去」甲本正誤表作「而」。
  22. 10)「投」下甲本正誤表有「宿」。
  23. 11)「卑」作「早」{甲}。
  24. 12)「之」下甲本正誤表有「氣」。
  25. 1)「似」甲本正誤表作「以」。
  26. 2)「谷」甲本正誤表作「糓」次同。
  27. 3)「之」下甲本正誤表有「糓」。
  28. 4)「肩」甲本正誤表曰衍字。
  29. 5)「今」甲本正誤表作「前」。
  30. 6)「卒」甲本正誤表作「率」。
  31. 7)「帖」甲本正誤表作「貼」。
  32. 1)「平」甲本正誤表作「乎」ㆍ當作「牙」{編}。
  33. 2)「正」甲本正誤表作「智」。
  34. 3)「▼(粘/(㓒-(冫+七)))▼(粘/(㓒-(冫+七)))」甲本正誤表作「▼(秥/(㓒-(冫+七)))▼(秥/(㓒-(冫+七)))」。
  35. 1)「于行」甲本正誤表作「行于」。
  36. 2)「幻性非」甲本正誤表曰衍字。
  37. 3)「非」下疑脫「幻」{編}。
  38. 4)「民」甲本正誤表作「泯」。
  39. 5)「裝」甲本正誤表作「狀」次同。
  40. 6)「而」甲本正誤表曰衍字。
  41. 7)「唱」甲本正誤表作「喝」。
  42. 8)「綱」甲本正誤表作「綱」。
  43. 9)「響」下甲本正誤表有「音」。
  44. 10)「杭」甲本正誤表作「杌」。
  45. 1)「贖」作「續」{甲}。
  46. 2)「沸海」甲本正誤表曰衍字ㆍ疑「佛海」{編}。
  47. 3)「慈」下甲本正誤表有「悲」。
  48. 4)「枬移」甲本正誤表作「栴檀移」。
  49. 5)「裝」甲本正誤表作「狀」。
  50. 6)「雖」甲本正誤表作「誰不」。
  51. 7)「竟」疑「竸」{編}。
  52. 8)「壘」甲本正誤表作「累」。
  53. 9)□甲本正誤表作「早」。
  54. 10)「飄」甲本正誤表作「瓢」。
  55. 11)「言」甲本正誤表作「這」。
  56. 12)「開」甲本正誤表作「關」。
  57. 13)「逕」甲本正誤表作「逗」。
  58. 1)「聞」疑「問」{編}。
  59. 2)「袁」甲本正誤表作「表」。
  60. 3)「忽」甲本正誤表作「勿」。
  61. 4)「塞」作「寒」{甲}。
  62. 5)「綱」甲本正誤表作「綱」。
  63. 1)「脫」疑「晩」{編}。
  64. 2)「盃盃」甲本正誤表作「欝欝」。
  65. 3)「法」甲本正誤表作「漢」。
  66. 4)「心白耶」甲本正誤表曰衍字。
  67. 1)「曆」作「歷」{甲}。
  68. 2)「憂」甲本正誤表作「豪」。
  69. 3)□甲本正誤表作「醯」。
  70. 4)「相」甲本正誤表曰衍字。
  71. 5)「禦」甲本正誤表作「御」。
  72. 6)「千」甲本正誤表作「干」。
  73. 7)「開」甲本正誤表作「關」。
  74. 8)「鑾」甲本正誤表作「鏖」。
  75. 9)「編」疑「徧」{編}。
  76. 10)「二十一」甲本正誤表作「主」。
  77. 11)「等」下甲本正誤表有「得」。
  78. 12)「乫」甲本正誤表作「袈」。
  79. 1)「若」甲本正誤表作「差」。
  80. 2)「有家」甲本正誤表曰衍字。
  81. 3)「稻」甲本正誤表作「稱」。
  82. 4)「在」甲本正誤表作「載」。
  83. 5)「軍」下甲本正誤表有「頭」。
  84. 6)「云」甲本正誤表作「去」。
  85. 7)「向」甲本正誤表作「回」。
  86. 8)「裝」甲本正誤表作「狀」。
  87. 9)「在」甲本正誤表作「載」。
  88. 1)「上」甲本正誤表作「山」。
  89. 2)「童」甲本正誤表作「春」。
  90. 1)「日」甲本正誤表作「月」。
  91. 2)「陛」甲本正誤表作「狴」。
  92. 3)「連」疑「逋」{編}。
  93. 4)「道」甲本正誤表作「通」。
  94. 5)「問」甲本正誤表作「詢」。
  95. 6)「泉」甲本正誤表作「衆」。
  96. 7)「小」甲本正誤表作「少」。
  97. 8)「呼」甲本正誤表作「吸」。
  98. 9)「人」下甲本正誤表有「曰」。
  99. 10)「西」上甲本正誤表有「自」。
  100. 11)「麥」甲本正誤表作「麩」。
  101. 12)「▼(木+(旌-方))」甲本正誤表作「旌」。
  102. 13)「沙」甲本正誤表作「寺」。
  103. 14)「侯」甲本正誤表作「候」。
  104. 1)「佛」下甲本正誤表有「影」。
  105. 2)「大」甲本正誤表作「太」。
  106. 3)「話」甲本正誤表作「活」。
  107. 4)「化」上甲本正誤表有「火」。
  108. 5)「衣」甲本正誤表作「永」。
  109. 6)「而」甲本正誤表作「以」。
  110. 1)「遙」甲本正誤表作「逍」。
  111. 2)「從」甲本正誤表作「徙」。
  112. 3)「徒」甲本正誤表作「徙」。
  113. 4)「入水皆」甲本正誤表曰衍字。
  114. 5)「乘」甲本正誤表作「來」。
  115. 6)「六十」甲本正誤表作「卒」。
  116. 7)「不醉」甲本正誤表作「醉不」。
  117. 8)「跌」甲本正誤表作「趺」。
  118. 9)「揭」甲本正誤表作「揚」。
  119. 1)「𤦹」甲本正誤表作「▼(瑣-小+巛)」。
  120. 2)「樂」甲本正誤表作「岳」。
  121. 3)「於疑」甲本正誤表作「疑於」。
  122. 4)「泉」甲本正誤表曰衍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