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般若燈論釋卷第二

ABC_IT_K0578_T_002
016_0408_b_01L
반야등론석 제2권
016_0408_b_01L般若燈論釋卷第二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016_0408_b_02L偈本龍樹菩薩釋論分別明菩薩
大唐中印度三藏波羅頗蜜多羅譯


1. 관연품(觀緣品)②
016_0408_b_04L觀緣品之二

다시 그 밖의 승거(僧佉) 사람이 말하였다.
“만약 모든 결과의 공능(功能)이 연(緣) 주에 공하여 연은 결과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 주장은 내가 이루려는 목적을 성립시킨다. 왜냐하면 그대의 말대로 결과의 실체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상주가 되어 그대가 앞서 성립시킨 주장이 스스로 부정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틀렸다. 어떤 경우의 생기도 모두 다 부정하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은 사물 역시 항상 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발생하지 않은 사물은 세제(世諦) 중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08_b_05L復次餘僧佉言若諸果功能緣中空緣不生果如是義者成我所成以故汝謂果體不起是則名常汝先立義則爲自破論者言汝語非也一切時起悉皆遮故不生之物亦不說常何以故不生之物於世諦中不欲有
다시 어떤 승거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비록 뭇 인연이 결과를 일으키지 못하더라도 눈과 색과 공(空)과 명(明) 및 작의(作意)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연이 작용하는 까닭에 식(識)의 발생이 성립 할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발생도 작용도 있을 수 있다. 작용과 발생에 대하여 내가 이제 말하겠다. 제일의제 중에 식은 자체 결과를 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왜냐하면 연(緣)이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솥은 물과 쌀과 장작과 불 등 여러 연이 갖추어져야 밥을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증험으로 나의 주장이 성립한다.”
용수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016_0408_b_12L復有僧佉說如是言雖彼衆緣不能起果由有眼明及作意等緣有作故識得生是故欲令有生有彼作及生我今當說第一義中有彼生識自果之作何以故以有緣故譬如甑鬵集心反水米及薪火等諸緣具已作能成飯以是驗故我立義成論者偈曰

연(緣) 가운데 작용이 없네.
緣中無作者

【釋】나는 제일의제 중에 음식을 익히는 작용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작용이 없기 때문에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 까닭에 그대에게 오류가 있다.
왜냐하면 이루는 내용과 이루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며, 연(緣)에는 결코 식(識)을 일으키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작용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결과가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나중에 작용을 부정하는 것처럼 생기가 없기 때문에 이유명제가 성립할 수 없다. 제일의제에서는 마땅히 이렇게 설해야 한다.
또한 만약 그대가 총괄적으로 작용한다고 집착하여 말하면 그대의 주장과 서로 위배된다. 연(緣)이 존재한다면 세간 지혜의 경계와 식(識)을 일으키는 작용과 저 뭇 연의 실체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016_0408_b_19L釋曰我不欲令第一義中作能熟飯以無作故譬喩不成譬不成故汝則有何以故能成立法無故由成立無故緣中定無生識之作若有若無果皆不如後當遮作者不起故因義不成第一義中應如是說復次若汝執言摠說作者則與義相違彼緣有者智境界生識之作與彼衆緣體不相
불호(佛護)논사가 질문한 중에 또한 어떤 외도가 “혹은 스스로 일어난다거나, 혹은 다른 것으로부터 일어난다는 이러한 말은 무슨 뜻인가? 이런 주장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 눈 등의 여러 연은 안식(眼識)을 일으키는 작용만을 할 뿐이다. 비유하자면 죽 솥 등이 음식 익히는 작용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그 외도는 이 주장을 세워 실체가 일어남을 말하였다.
016_0408_c_06L佛護問中復有外人作是釋言若自若他起者是言何謂此義於我無所用爲雖然眼等諸緣作眼識生甑鬵等作飯熟故而彼外人作是成立言有體起
불호논사는 그 외도를 비판하기 위해 게송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작용은 연 중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 일어났고 아직 일어나지 않고, 지금 일어나는 식(識)에 작용이 있다면 이 역시 옳지 못하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것은 상응하지 않는다. 너희들이 앞에서와 나중에 말할 것은 오직 다만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016_0408_c_10L佛護論師爲遮彼故引偈本云作者緣中無何以故已生未生生時識有作者是亦不然論者言不相應汝等前後二語唯有立義故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이 오류를 나에게 덮어씌우려고 나의 ‘연(緣) 중에 그 작용이 없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작용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가 성립하지 못한다는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지금 작용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작용의 존재를 증험 할 수 있는가? 작용이 존재하여 이 식(識) 등은 스스로의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 작용에 의하기 때문에 밥을 잘 익히는 작용과 같다.”
용수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016_0408_c_13L復有異僧佉言汝將此過安置與我遮我緣中無其作義作不起故譬喩不成者是義不然今有作在云何驗有作生彼識等自果由其作故作能熟飯論者偈曰

연을 여의고 또한 작용이 없네.
離緣亦無作

【釋】연이 없기 때문에, 또한 연과 더불어 화합하지 못하는 작용이 홀로 있을 수도 없다. 잎에서 ‘연 중에 작용이 있다’고 차례로 그 오류를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다시 청변 논사가 이 게송을 해석하여 말하였다.
“식(識) 자체가 발생하면 이것이 곧 작용이다.”
016_0408_c_18L釋曰緣無故亦不與緣合而獨有者無也如先緣中有作次第說其過復有論師釋此偈言識自體生是作也
어떤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게송에서 ‘연 가운데 작용이 없고, 연을 여의고 또한 작용이 없네’라고 말하였는데, 만약 식을 일으키는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식이 없기 때문에 작용 또한 없기 때문이다.만약 개별적인 작용 없이 다만 연(緣)만이 작용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만약 연 자체는 없지만 작용 자체는 있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불호논사가 말하였다.
“그것 또한 연이 없이 작용이 존재하는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016_0408_c_22L論者言如前偈說緣中無有離緣亦無作若言有彼生識作者是義不然何以故如識無故彼作亦若言無其別作但緣是作者是亦不然若言緣無自體作有自體者護論師言彼亦無緣有作過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연 없이 작용이 존재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연 없이 저절로 작용이 있다는 뜻은 없기 때문이다.”
불호논사가 말하였다.
“세제 중에 무엇을 작용이라 하는가? 자타(自他)의 뭇 연이 서로 원을 기다리기 때문에 작용이 있으며, 무간찰나(無間刹那)에 결과의 실체를 일으키는 것과 같음을 이름하여 ‘작용’이라 한다. 저 미래에 법체의 생기 작용으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으며,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연 가운데 작용이 있다’고 집착한 것과는 같지 않으며, 이 말에는 허물이 없다.”
016_0409_a_04L論者若謂無緣得有作者是義不然以故若無彼緣自然有作無此義故佛護言於世諦中云何有作自他衆緣相因待故有作如無閒剎那能起果體是名爲作如彼未來欲起法體由作得生於世諦中非無有作不同汝執緣中有作是語無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지금 인연의 비유를 설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오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해석은 성립하지 못한다.”
다시 경량부논사가 말하였다.
“그밖에 법의 생기가 있다. 만약 안식(眼識) 등과 같다. 왜냐하면 작용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종자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인연이 화합하여 싹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대답 때문에 그대가 앞서 증험한 것이 파괴된다.”
016_0409_a_11L論者言今不說因緣譬喩但有立義與他過者此釋不成復次經部師言有異法起如眼識等何以故由有作故譬如種地水火風因緣和合得有芽出此答故汝先驗破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의 게송에 ‘연 중에 작용이 없다’는 이 주장의 뜻은 무엇인가? 제일의제에서는 생기가 부정되기 때문에 이 작용은 실체가 없다. 종자 등의 연이 화합하여 작용한다는 것은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대의 ‘연 중에 반드시 작용이 있다’고 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앞에서 대답한 것으로는 나를 논파할 수 없다.”
016_0409_a_16L論者言如先偈說緣中無有作此義云何第一義中遮彼起故彼作無體種子等緣和合有作者此不應爾汝言緣中定有作是義不成譬喩無故汝先答者能破我
다시 어떤 외인(外人)이 말하였다.
“곡식 등과 같은 것은 진실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세제에서는 그와 같이 세제에 수순하게 하려는 바를 이루는 것처럼 제일의제에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비유의 성립으로 인하여세우고자 하는 주장이 성립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들이 이처럼 작용이 있다는 주장을 잘 안립하여 ‘곡식처럼 세제 중에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016_0409_a_21L復次有外人言如稻穀等眞實是有何以故由作有故於世諦中欲令如是隨順世諦如其所欲第一義中亦復如是譬如兔角由譬成故所欲義立論者言汝等如是安立作如稻穀等於世諦中言有作者義不然何以故如偈曰

작용이 있거나 작용이 없거나 간에
모든 연의 작용은 성립할 수 없네.
016_0409_b_04L若有若無作,
諸緣作不成

세제 중에 토끼의 뿔이 없는 까닭에 제일의제에서도 존재[有]가 성립할 수 없으며, 작용 또한 그러하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비유에 의거해 하고자 하는 주장을 세운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이 두 오류가 다시 그대에게 있을 것이다.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토끼의 뿔이 실체가 없다면 그 실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마치 비가라론(毘伽羅論) 제 6문(門)에서 ‘개별적으로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푸른 우발라꽃과 색이 다른 것과 같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16_0409_b_05L釋曰於世諦中兔角無故第一義中有亦不成作亦如是以無體故汝言由譬成故所欲義立者飜此二過還在於汝復次僧佉人言兔角無體是其體云何知耶如毘伽羅論第六門中作如是說有別異故譬如靑優鉢羅華與色爲異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잘 말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꽃과 색깔 등 두 실체가 개별적으로 다른 것이라 해도 제일의에서는 이 모두가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내가 색 등에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대를 이해시킬 수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그대가 색 등에 실체가 없다고 주장해도 나를 이해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서로 똑같은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라면, 이제 그대에게 대답하겠다. 똑같은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016_0409_b_12L論者言汝說不善何以故華色等二體別異者第一義中此皆不成無譬喩故若汝意謂如我立色等有體故不能令汝解如是汝立色等無體亦不能令我解以彼此同過故今當答汝無同過義
왜냐하면 생기법에 실체가 있다는 것을 이와 같이 이미 부정하였는데, 하물며 불기(不起)의 실체가 있다고 하는데 부정하지 않겠는가? 실체의 유무로 그대는 다른 상[異相]을 보이려고 의도하지만, 나는 그대를 비판하여 ‘실체의 유무(有無)를 말하면 두 치우침에 떨어진다’고 말하겠다. 나는 그대가 유무에 집착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두 치우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뜻은 무엇인가? 그대는 실체의 유무를 세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받아들이게 하려 하지만, 증험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대의 집착은 도리에 어긋나며, 나의 주장은 성립한다.그대가 ‘서로 똑같은 오류가 있다’고 한 것은 또한 잘못된 것이다.
016_0409_b_17L何以起法有體如是已遮況不起者欲令有體而當不遮有體無體是汝意欲顯示異相我今遮汝作如此解體無體墮在二邊我不同汝執有無不墮二邊此義云何汝立有體無體令他信受驗無體故非我所欲故汝執無道理故我立義成汝言同過者此復非也
다시 생기를 주장한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한다. 결과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 연(緣)들은 작용이 없는 것인가, 있는 것인가? 만약 모든 연에 작용이 없다면 결과를 일으킬 수 없는데, 어떻게 작용 없이 결과가 일어난다고 이름하는가? 공능(功能)은 연 중에 공(空)하기 때문에 작용이 없다고 한다. 만약 공능이 공하다면 저 연이 결과를 일으킬 수 없으니, 비유하면 보리의 종자에 쌀의 싹이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 작용이 있다면, 작용이 있다는 증험은 연 중에 없기 때문이다. 결과의 생기에 의해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결과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그 작용이 없다. 이 증험에 의하여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09_c_02L復次或有諸說起者應如是問果先未起彼諸緣等爲無作耶爲有作耶若諸緣無作不能起果者云何名無作起果功能緣中空故說名無作功能空者則非彼緣能起彼果譬如麥種無稻穀芽此不應爾若有作者驗此作有緣中無故由果起故說彼有作果未起時彼無所作由此驗故義不成
다시 경량부논사가 말하였다.
“그 결과가 일어날 때 모든 연에 작용이 존재한다. 이 연에 의해 서로 섭수되고 증익되어 결과를 일으키므로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대답의 증험이 또한 성립한다.”
016_0409_c_11L復次經部師言彼果起時諸緣有作以是緣故互相隨攝資益果起非因不成答驗亦立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 경량부 논사는 제일의제 중에 곡식 등의 연이 화합하고 모이어 결과를 일으키기 이전에 이 곡식 등을 어째서 비연(非緣)이라 말하지 않는가? 이런 일은 없다. 이와 같이 연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다른 이에게 수학(受學)하지 못한 사람을 어찌하여 무지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09_c_14L論者言汝經部師令第一義中穀等諸緣和合聚集果得起耶若定爾者是諸因緣乃至未能起果自此已前此稻穀等云何不名爲非緣耶無有此事如是緣故如乃至未從他受學云何不名無智人耶此義不成
【문】 만약 그와 같다면 결과가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모든 연은 비연(非緣)이다. 내 의견도 이와 같으므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016_0409_c_20L問曰若如是者果先未起則諸緣非緣我欲如此是故無
【답】 그대는 오류가 아주 심하다. 왜냐하면 그대의 뜻은 다만 결과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순간에 모든 연은 비연이라고 이해했을 뿐이며, 결과가 바로 일어날 때 연 또한 비연임을 알지 못한다. 이 주장으로 인하여 싹이 돋아날 때저 곡식 등은 비연(非緣)의 자성(自性)인가? 제일의제에서는 같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곡식 등과 같이 전 찰나에 만약 자신으로 부터나, 다른 것으로부터, 또는 자타(自他)로부터 동시에 일어나는 실체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내가 이루려는 것을 성립시킨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 두 법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말할 수 없지만 반드시 연(緣)을 기다린 후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면, 또한 앞과 똑같이 논파된다. 말하지만 ‘어떻게 싹 등이 돋아나는가, 내지 전 찰나에……’이다.”
016_0409_c_22L答曰汝甚有過何以故汝意唯解果先未起諸緣非緣而不知彼果正起時緣亦非緣爲此義故云何芽起彼稻穀等非緣自性以第一義中若一若異不可說故如彼穀等先剎那時若有說言非自非他非俱起體此是成我所成何以故因果二法不可說一異故雖不可說要待彼緣方能生果如是說者竝同前破謂云何芽起乃至先剎那時
다시 생기가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내입(內入) 등의 연은 내입을 일으킬 수 있다. 왜냐하면 연(緣)이기 때문이니, 곡식 등의 싹과 같다. 만약 일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비연(非緣)이니, 비유하자면 토끼의 뿔과 같다.”
016_0410_a_08L復次說有起者言第一義中彼入等緣能起內入何以故以緣故如穀等芽若不能起彼則非緣譬如兔角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제일의제 중에 저 연(緣)이 있다고 한다면 결과 속에 그 연은 있는가, 없는가? 혹은 유무(有無) 모두 있는가? 모두 그렇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0_a_11L論者言如汝所第一義中彼緣有者此緣於果爲無爲有無俱皆不應爾如偈曰

반드시 있지도 반드시 없지도 않으니,
모든 연의 뜻은 마땅히 그래야 하네.
016_0410_a_13L非定有定無,
諸緣義應爾

【釋】연(緣)이 있지 않다는 그와 같은 집착이 옳지 않다는 뜻을 지금 드러내 보이려 한 것이다. 게송에 “연이 있지 않다”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인가? 있지 않다는 것은 마치 허공 꽃과 같다. 무엇이 저 바람[摩婁多]의 연이 되는가? 그러므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한 사물도 없는 것은 허공 꽃이 되는가? 토끼 뿔의 연(緣)이 되는가? 비연(非緣)이라면 그 해석은 무슨 뜻인가? 곡식 등의 연은 제일의제에서는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허공의 꽃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허공에는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싹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곡식 등의 연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 허공 꽃과 같다.
016_0410_a_14L釋曰此緣非有如其所執不應爾者今當顯示此義偈言緣非有者是何等耶此非有者如空華等何等是摩婁多緣故可知如是彼無一物虛空花爲兔角緣耶此釋非有緣者是何語義此驗稻穀等緣第一義中非自性有何以故果非有故如空花非有虛空無體如是芽等非有稻穀等諸緣非有故如虛空花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저 법이 있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 생기가 있어야 법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먼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016_0410_a_23L或有人言我不欲令彼有法起意欲令彼可起法起先無體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연이 있지 않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저 항아리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실체의 모습은 없다. 이미 자체가 없는데, 다시 어떻게 저 항아리와 옷과 곡식 등의 연이 되는가? 생기하게 하는 법을 일으키려 하지만 이와 같이 연은 하나도 없다. 이 주장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제일의제에서는 곡식 등은 싹 등의 연이 아니라고 증험한다.
016_0410_b_02L論者言汝謂緣非有者是何等耶如彼甁等先未起時則無體相旣無自體更有何等爲彼甁稻穀等緣欲令可起法起是則無一緣應知此義以第一義中驗稻穀等非芽等緣
왜냐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까닭에 그 실체가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항아리와 같다. 다시 법이 만약 먼저 있다면 연도 또한 쓸모없다. 왜냐하면 자체(自體)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제 중에 곡식 등도 또한 싹 등의 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발생과 작용은 상관(相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이미 발생한 싹 및 의 병과 옷 등과 같다. 이 증험에 의하여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10_b_07L何以故由先未起無其體故譬如甁等復次法若已緣亦無用何以故有自體故如是於世諦中彼稻穀等亦非芽等緣以故以生作不觀故如彼已生芽者及餘甁衣等以是驗故因義不成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진실로 사물의 실체가 있다. 연이 쌓여서 요작(了作)한다. 어떤 때는 연 중에 저 미세한 결과[細果]가 있다가 나중에 연을 기다려 미세한 것이 거친 것이 된다. 그때가 ‘이미 존재한다면 연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016_0410_b_12L佉人言實有物體藉緣了作或時緣中先有細果後時待緣令細爲麤言已有緣何用者此語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 요지작용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먼저 미세한 것이 있다가 나중에 거칠게 된 것’이 만약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앞에서 말한 오류처럼 그대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016_0410_b_15L論者言彼了作者先已遮故復次先細後麤若有非有如前說過汝語非也
다시 경량부논사가 말하였다.
“이치상으로는 실로 모든 연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유무(有無)를 말한 것은 뜻이 그렇지 않다. 이 또한 무슨 뜻인가? 아른바 제일의제 중에 결과가 일어나 현전(現前)에 연(緣)들이 화합하고 서로 섭수하여 자체를 얻을 수 있으니, 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결과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데 일어남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다고 할 수 없는데 아직 생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이 인연으로 앞에서와 같은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016_0410_b_17L復次經部師言理實諸緣非有非無言有無者義不應爾此復云何謂第一義果起現前諸緣和合互相資攝能得自體以有緣故爾時彼果不得言以其起故不得言有以未現起故我欲如此以是因緣無如前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또한 스스로 분별한 것일 뿐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 연의 뜻은 마땅히 그러하다.있는 것도 있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두 말할 수 없다. 비유하면 에 사물과 같으니, 무릇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 두 가지 모두 연이 아니다. 논자의 뜻은 그러하다. 다시 여기서 있는 경우와 있지 않은 경우를 다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며, 있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물은 사물이 없는 것이다. 이른바 안식(眼識)과 싹들의 연(緣), 즉 눈 등과 종자들 등은 실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결과의 유무(有無)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의 사물과 같다. 경량부[修多羅] 사람은 오류를 피할 수 없다. 또한 존재 등의 자성은 실체가 공하니, 세제 중에 발생의 뜻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016_0410_b_23L論者此亦自分別耳非有非無緣義應有及非有二種無故皆不可說如餘物若有不有二俱非緣論者意復次此中但是有及非有俱不可何以故有非有故非非有故如是物者此是無物謂眼識或芽彼緣卽眼等諸種子等不可說實何以故彼等果有及非有不可說故譬如餘修多羅人不能避過復次有等自性體空於世諦中生義成故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는 니건자(尼犍子) 사람이 말하였다.
“결과는 또한 있거나 혹은 없으니, 연(緣)이기 때문이다. 나의 뜻은 그런 것이다. 이 때문에 앞에서 말한 오류가 없다.”
016_0410_c_10L復有俱說尼犍子言彼果者亦有非有以緣故我意欲爾是故無前所說過失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모든 니건자 사람들이 있다는 말과 없다는 말은 방편으로 함께 말하는 것은 안온한 것이 아니어서 주장 명제가 성립하지 못한다. 그와 같이 이미 모든 연을 총체적으로 파하였으니, 이제 개별적으로 논파하겠다. 여기서는 인연을 총체적으로 관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연을 능히 발생시키면 그것을 이름하여 원인이라 한다.
016_0410_c_12L論者彼諸尼犍子等有無二語方便俱說者此非安隱處立義不成如是已說摠破諸緣今當別破此中摠觀因緣故若能生異緣彼名爲因
이와 같이 화합하여 자재로이 발생하는 법의 생기는 하나도 발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생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같이 세제 중에 이유 명제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제일의제에서는 원인은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마땅히 말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의 뜻이 이 원인이 사물에 존재하거나 사물이 존재하지 않거나 혹은 사물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은 경우에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0_c_16L如是和合自在所生法起非一能生故又遮彼起故我欲如此於世諦中建立因第一義中因非因故應如是說汝意謂此因有物若不有物及有無物能起果者此義不然偈曰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니며
있으면서 없는 법의 생기는 없네.
016_0410_c_21L非有非非有,
非有無法起

【釋】제일의제 중에 법의 모습은 그와 같다. 원인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러므로 저 원인이 없으며, 이처럼 그것은 일어날 수 없다.있기 때문이고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자타(自他)를 이미 모두 논파(論破)했기 때문이다. 만약 있다고 하거나 없다고 하면 모두 두 가지 오류가 있다. 이 까닭으로 원인의 실체는 성립할 수 없다. 만일 법의 생기가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존재 등의 모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 원인으로 인해 결과가 있고 원인 역시 이와 같이 결과가 일어나야 성립되기 때문이다.
016_0410_c_22L釋曰第一義中法相如是云何說言因能起耶故彼非因如是彼不能起有故無故猶如自他先已驗破若有無俱則有二過是故因體不成若謂所生法起應說因故者此亦不然有等相不起故於世諦中由因有果因亦如是果起因成故
다시 유식학파[自部人] 사람이 말하였다.
“원인이 있어야 저 내입 등을 능히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연기의 뜻이며, 그것을 여래께서 설하셨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것은 변이(變異)가 불가능하다. 비유하면 적멸열반(寂滅涅槃)과 같다. 능히 원인을 일으키는 것이 곧 인연의 뜻이다.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의 소연(所緣)이 곧 연연(緣緣)의 뜻이다. 저 차례로 멸하는 심법과 심소법은 아라한의 마지막 마음에서 제거된다. 이것이 차제연의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해 인연 등이 존재하여 연의 차제가 된다. 그대가 없다고 한다면 이 이유 면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주장을 세운 것이 논파되기 때문이다.”
016_0411_a_06L復次自部人有因能起彼內入等此緣起義是如來說如如來說不可變異譬如寂滅涅槃此能起因是因緣義心心數法所緣是緣緣義彼次第滅心心數除阿羅漢最後心是次第緣義此法有彼法得起是增上緣義由佛說故有因緣等爲緣自體汝言無者此因不成立義破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세운 주장은 세제에서 성립한다. 그와 같은 비유에는 오류가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 옳지 않다. 어째서 그대는 이 원인을 세우려 하는가? 세제 가운데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인가? 제일의제 주에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인가? 만약 세제 중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면, 그대의 주장은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016_0411_a_14L論者言汝所立於世諦中可得如是以譬喩過故所說不然云何汝等立此因義爲世諦中佛如是說爲第一義中佛如是若世諦中如是說者汝義自壞
만약 제일의제 중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면, 저 제일의제에서는 ‘있는 것’으로써도, ‘있지 않은 것’으로써도, ‘있으면서 없는 것’으로써도 법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저 있는 것과 있지 않다는 것 또는 있으면서 있지 않다는 것은 자성의 과(果)와 연(緣)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원인이 일어날 수 없다. 만약 그와 같다면 어찌하여 저 원인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의 원인은 성립할 수 없다.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016_0411_a_18L第一義中如是說者彼第一義中非有非不有非有無法起故彼有非有亦有非有自性果緣不可得故因不能起若其如是云何定言彼因能起以是義故汝因不成以相違故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부정하는 방편을 받아들여 『중론』 속에 법의 성품이 없음을 밝힌다.법의 성품이 없다는 것은 두 가지 다 부정하기 때문이다. 두 가지란 이른바 명착(名著)과 소명착(所名著)이다. 소명착이란 앞에서 이미 논파한 것과 같으며, 명착이란 이제 앞으로 부정해 나가겠다. 만약 총체적으로 뜻을 설한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있으면서도 없는 것도 아니다. 세간의 사람들은 모두 원인이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해도 그 원인이 만약 있거나 있지 않거나 있으면서 있지 않은 것의 모든 자성의 결과를 일으킨다는 것은 다 옳지 못하다. 원인이라는 말을 전변하므로 저 원인의 체성을 알 뿐이다. 이와 같이 원인에 의하기 때문에 상응하지 않는다.”
016_0411_a_23L復有人言受遮方便此『中論』中明法無性法無性者二俱遮故二謂名著及所名著所名著者如前已破其名著者今當次遮若摠說義非有非不有非非有非非不有等世人盡欲因能起果彼因若有非有有非有俱自性果生皆不應爾因語轉故識彼因體因如是因故不相應
혹은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모든 실체는 일어난다. 왜냐하면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앞에서 논파한 것처럼 저 원인이 성립하지 않는다.”
016_0411_b_08L或有人言第一義中有諸體起何以故有因故者先說破彼因不成
다시 다른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서 없는 것 모두는 자체가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원인의 상(相)이 아니므로 원인이 성립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해석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다시 이제 저 연연(緣緣)의 뜻을 관찰해 가겠다. 이처럼 연연과 같으나 또한 저 억상분별(憶想分別)과는 같지 않다.”
게송에서 말할 것과 같다.
016_0411_b_10L復次有異論師言若有若非有若有無俱自體不起故非是因相因義不成如是釋者是義不然復次今當觀察彼緣緣義如其緣緣亦不如彼憶想分別如偈曰

바가바(婆伽婆)께서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무연(無緣)의 법이네.
이 법의 실체[體]가 이와 같은데
어느 곳에 연연(緣緣)이 있겠는가?
016_0411_b_14L婆伽婆所說,
眞實無緣法,
此法體如是,
何處有緣緣

【釋】저 안식(眼識) 등을 연리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연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실체는 단지 마음의 허망분별일 뿐이며, 제일의제에서는 저 법의 생기를 부정한다. 저것이 일어나려는 순간도 역시 능연(能緣)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색법과 같다. 이런 뜻으로 인하여 연연은 실체가 없다. 단지 세제에서 눈 등을 건립한다. 자상(自相)을 지닌 것을 법이라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식과 같은 것은 빛으로 인한 다음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연연(緣緣)이라 하니, 재물과 주인이 똑같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면 능연의 법이란 없다.
016_0411_b_16L釋曰彼眼識等不名爲緣何以故緣緣故但是自心虛妄分別第一義中遮彼法起彼欲起時亦非能緣以故由欲起故譬如色法以是義故緣緣無體但於世諦建立眼等因相持故名之爲法如識因光然後得起故名緣緣不如財與主俱若爾者能緣法
제일의제에서는 능연(能緣)의 식(識)은 성립하지 못한다.분별한 바와 같이 능연이 없는 소연(所緣) 또한 없다. 소연이 없기 때문에 그 뜻은 이와 같다. 비유하면 오역죄를 지은 사람은 끝내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하여 이유가 성립할 수 없다. 연의 뜻과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사람이 “만약 색음(色陰)에 섭수된다면 색은 소연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그 주장과 상응한다.
016_0411_c_01L第一義中能緣識不成如所分別能緣無故所緣亦無以所緣無物故其義如是譬如造五逆者終不見諦是故彼因不成亦與緣義相違復有異人言若色陰所攝色不能緣者是義相應
여러 부파의 논사도 또한 이렇게 말하였다.
“무엇이 무소연법(無所緣法)인가? 이른바 색(色)과 열반을 말한다. 심법과 심소법이 무소연이라면 그대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된다. 무엇이 유소연법(有所緣法)인가? 이른바 심법과 심소법을 말한다.”
016_0411_c_06L諸部論師亦作是說何等無所緣法謂色及涅槃若汝意謂心心數法無所緣者汝先所欲則爲自破何等有所緣法謂心及心數
청변이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옳지 못하다. 내가 든 비유는 이제 거듭 명백해진다.”
외도 사람이 말하였다.
“심법과 심소법에는 반드시 소연이 있다. 조색(造色)과 같은 것 아님은 비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소취(所取)는 소연(所緣)이 된다.”
016_0411_c_10L論者言汝語不善我所立喩今更明顯外人言心心數法定有所緣如造色者無譬喩故復次所取者爲所緣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와 같이 심법과 심소법에 소취가 있다고 분별하는 것은 나중에 다시 논파 할 것이다. 비유하자면 제일의제의 도리를 설하신 것처럼 나는 식(識)에 능연(能緣)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다시 용맹보살마하살이여,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색은 소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법에는 소연이 없으며, 조금이라도 법(法)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것을 만약 취할 수 있다면 이것은 곧 소연(所緣)이다.
016_0411_c_13L論者言如彼分別心心數法有所取者後當更破如第一義道理所我不欲令識有能緣如佛說復次勇猛菩薩摩訶薩應如是行色非所何以故一切法無所緣無有少法可取故彼若是可取此則是所緣
이처럼 용맹보살이여, 모든 법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색을 볼 수 없고 또한 식을 알 수 없으며 또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색에서 식에 이르기까지 알지 않고 보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라 한다’고 설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소연(所緣)을 관하는 것을 마친다.’ 다시 그대가 차제연(次第緣)을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잘 살펴보겠다. 그 모습은 어떠한가? 제일의제 중에서 저 모든 종(種) 및일체 법은 모두 일어나는 것이 없다고 부정한다. 이는 연(緣)이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1_c_18L是勇猛非色行色乃至非識行識一切法不行故非色見亦非識見乃至非識知亦非可見若色至識非知非見是名般若波羅蜜觀所緣竟復次如汝分別次第緣者此應諦觀其相云何第一義中彼一切種及一切法皆遮無起以是緣故如偈曰

생기하지도 않고 모든 법이 소멸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네.
소멸된 법은 연이 아닌데
어떻게 차제연(次第緣)인가?
016_0412_a_02L不起諸法滅,
是義則不然,
滅法則非緣,
及何等次第

【釋】이 뜻은 무엇인가? 생기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두 번째 머리처럼 소멸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제일의제 중에 차제연은 이것과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 주장은 성립할 수 없으니,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차례대로 말하여 만약 그대가 이 차례로 소멸하는 심법과 심소법이 차제연이 된다고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실체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마치 영원히 소멸된 식(識)처럼, 또 색법처럼 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장차 생기하려는 심법과 심소법에는 저 사물이 소멸하는데 어떻게 연이 되겠는가? 이 연이 아니기 때문이며, 저 소멸법과 생기법은 섭수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412_a_04L釋曰此義云何以無起故如第二頭不可言滅是故第一義中次第緣者此不相應如是彼義不成以相違故順彼說者若汝欲得此次第滅心心數法爲次第緣者是義不然何以故體滅故如久滅識亦如色法以非緣故此將欲起心心數法彼物滅故何者爲緣以非此緣故以彼滅者及欲起法不能隨攝故
그 뜻은 이렇다. 차제연이 아닌 것은 또한 총체적인 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이처럼 마음은 생기한다. 결정된 인연이 각각 자재하게 일어나고자 하는 실체에 장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며, 연이 소멸하려는 순간에 요익을 짓기 때문이다. 에 과거 찰나와 무간(無間)이므로 차제연이 성립한다. 이런 까닭에 오류가 없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색법이 아닌 것은 머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6식(識)이 차례로 소멸하는 것을 이름하여 의(意)라 한다. 이와 같이 소멸하는 의를 차제연이라 말한다면 오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412_a_13L此意如是非次第緣亦非摠緣故或有如是心起所有決定因緣各各自在與欲起體處故欲滅時作饒益故彼餘過去剎那以無間故次第緣成是故無過者此義不然以非色法無住處故六識次第滅此名爲意如是滅意爲次第緣者免過故
만약 그대의 의도가 소멸하는 것이 차제연이 되는 것이라면, 그대가 세우려고 하는 그 연(緣)은 말로만 있는 것이다. 그대가 말하는 동시에 차제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소멸하는 법이 바로 연이 아닌데 다시 어찌 증상연이 있겠는가?”라는 것에 대해 달리 해석하여 말하기를 “‘및’이라는 말은 ‘및 아직 생기하지 않은 결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했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소멸하거나 아직 생기하지 않은 종자와 싹 등은 두 가지 모두 실체가 없어 모두 무인(無因)이 된다. 종자 및 싹의 소멸과 일어남 등 두 가지는 이 오류에 떨어진다.
016_0412_a_20L若汝意謂彼欲滅者爲次第汝立此緣但有是語何以故以其同時非次第緣故復次滅法則非緣及何等次第者有異釋云此及聲者及未起果應如是知其義云何彼滅未起種子芽等二皆無體俱是無種子及芽滅起等二墮此過中
청변이 말하였다.
“그것은 이러한 주장을 성립시킨다. 이른바 소멸하는 원인이 소멸하여 실체가 없고 머묾이 없이 현재의 생기 작용을 일으킨다면, 소멸과 생기 등 두 가지는 인이 없는 이러한 오류를 얻게 된다고 분별한다면, 이러한 말은 옳지 않다.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이루는 목적[所成]과 이루는 내용[能成]의 말뜻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슨 과실을 얻겠는가? 지금 증험하겠다. 소멸은 연(緣)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인이 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아직 소멸하지 않은 심법과 심소법과 같다. 무인(無因)에서 생기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말은 저것과 상응하지 않는다.
016_0412_b_03L者言彼立此義所謂滅者因滅無體及無住當起作起分別以無因故起等二得如是過此說不然以無過所成能成語義顯了以顚倒故何過失今當立驗彼滅非緣何以故以因有故譬如未滅心心數聚又無因起以因有故說此二語彼不相應
그 뜻은 무엇인가? 먼저 말한 것은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으며, 나중의 말은 자신의 주장과 서로 위배된다. 모든 법의 일어남을 부정했기 때문에 이 게송 역시 부정한다. 차제연이기 때문에 저것은 두 가지 오류를 갖게 된다. 이른바 원인 주장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오류와 자신의 주장과 서로 위배된다는 오류이다. 이와 같이 차제연을 분별하였다. 다시 증상연이란 그 모습이 어떠한가? 이 법이 있을 때 저 법의 일어나는 것을 증상연이라 한다. 그대의 주장은 이렇다. 그러나 지금 제일의제 중에 연법(緣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려 한다. 마치 모든 법은 환(幻)과 같이 자체가 본디 공하여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인 것과 같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2_b_10L是義云何先語者因義不成後語者自義相違以一切法起者遮故此偈亦遮次第緣故彼得二過謂因義不成過自義相違過如是分別次第緣復次增上緣者其相云何若有此彼法得起故名增上緣汝義如是今第一義中緣法不起令他解了法如幻自體本空不可得故如偈曰

모든 법은 자체(自體)가 없으니,
자상(自相)이 있지 않기 때문이네.
016_0412_b_18L諸法無自體,
自相非有故

【釋】이 뜻으로 인하여 우리 대승에서는 제일의제서만 모든 법의 생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세제에서도 원인에서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 또한 성립할 수 없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2_b_19L釋曰以是義故自大乘中非獨第一義諦諸法無起於世諦中因有果起亦不可得偈曰

이것이 있을 때 저 법이 일어난다는
그 주장은 옳지 않네.
016_0412_b_22L此有彼法起,
是義則不然

【釋】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는 저 원인의 과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다시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로써 잘 안치하여 세간의 깊은 법을 분신하는 사람들을 교화하고 안은하게 하셨기 때문에 열반적정 등의 모든 수승한 공덕을 여러 가지로 칭송하여 드날리신 것은 세간의 법 때문이며, 제일의제 때문은 아니다. 제일의제 중에 그 열반 등은 자체가 공하기 때문에 비유할 체(體)가 없어 원인이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_0412_b_23L釋曰以是義故彼因過失汝不得離復次佛婆伽婆無分別智善巧安置教化世閒不信深法者爲安慰故種稱揚涅槃寂滅等諸勝功德世諦法故非第一義以第一義中彼涅槃等自體空故譬喩無體因不成故
혹은 세제 중에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고도 한다. 비유하면 열반 적멸하기 때문이라 말하는 사람처럼 이것은 앞에서처럼 비유에 과실이 있다. 무상 등의 허물을 설하는 것은 유위법을 헐뜯어 즐거워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하고 저들을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에 열반 적멸의 공덕을 설한다. 세제를 섭수하기 때문에 저 체가 있다고 설하지만, 제일의제 가운데 저들은 실제 체가 없으므로 그대가 끝내 하고자 하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연을 이미 부정하였다.
016_0412_c_06L或有欲令於世諦中諸法有體譬如涅槃寂滅故者此等如先譬喩過失說無常等諸過患者毀呰有爲法令樂著故誘引彼故爲說涅槃寂滅功德世諦攝故說彼有體第一義中彼實無體汝意所欲義不成故如是諸緣遮已
다시 어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연은 능히 눈 등의 내입(內入)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싹을 띄우는 연(緣)인 벼 등과 같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결과는 일어날 수 없다. 비유하면 거북이 털로 옷을 만들 수 없는 것과 같다.”
016_0412_c_13L復有外人言第一義中有緣能起眼等內入何以故彼果得起故如穀等芽若是無者果不得起譬如龜毛不可爲衣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연이 있다’고 하면 낱낱의 연 중에 결과의 자체가 있다는 것인가? 화합한 모든 연에 결과의 자체가 있다는 것인가? 개개의 연에도 없고 또한 화합한 연에도 없다는 것인가? 마땅히 이와 같이 물어야 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부정하였다. 결과가 만약 있다면 연이 다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없다는 것도 또한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결과가 만약 없다면, 연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2_c_16L論者言汝謂有者一一緣中有果自體爲和合諸緣有果自體爲一一中無和合亦無應如是外人言汝何故作此問論者言是有者如前已遮果若是有緣復何若是無者亦先已遮果若是無復何用如偈曰

개개의 연에도 화합한 연 중에도
다 결과가 있지 않네.
이와 같이 비연(非緣)인데
어떻게 결과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016_0412_c_22L非一一和合,
諸緣中有果
如是則非緣,
云何果得起

【釋】제일의제 중에 이러이러한 결과 등이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연 중에 없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이러하다. 진흙 중에 연유가 있지 않아 연유가 생길 수 없는 것처럼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벼 등에 그 싹 등의 실체가 없어 이와 같이 발생할 수 없다면 세제분 중에 범부의 지혜와 똑같은 견해를 행하기 때문에 제일의제 중에 그 눈 등의 내입이 발생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3_a_01L釋曰第一義中如是如是果等不起諸緣中無故此義如是如泥中無酪不可生酪以非因故若稻等中無其芽體如是得生於世諦分中凡夫智慧同行見故欲令第一義中有彼眼等內入生者此義不然如偈曰

만약 결과가 연 가운데 없는데도
그 결과가 연에 따라 일어난다면
연이 아닌 것에도 또한 없는데
어찌 결과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016_0413_a_07L若果緣中無,
彼果從緣起
非緣中亦無,
云何果不起

【釋】이와 같이 설하는 것은 과실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연이 아닌 중에 결과가 없는 것처럼 모든 연에도 또한 없다. 비유하면 소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무상한 것과 같다. 항아리도 작용하지만 무상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앞에서 이미 말한 것과 같다. 소리는 무상하다. 왜냐하면 작용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항아리와 같다.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이 방편으로서 제일의제 중에 싹 등이 공하나, 벼로부터 발생한다면 저 싹 등의 의미는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결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연유와 같다. 이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오류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413_a_09L釋曰彼如是說過失起故如非緣中無果諸緣中亦無譬如彼聲作故無有何所以甁是作故而非無常先已說聲是無常何以故由作故如甁此義應知若以此方便第一義中芽等現空而從穀等生彼芽等義不應爾何以故以果故譬如酪是故非以不免先所說過故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내입이 있어 나는 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이 전변하기 때문이니, 마치 진흙이 항아리가 되는 것과 같다.”
용수 논사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3_a_17L復有人言一義中有彼內入我如是受緣轉異如泥爲甁論者偈曰

연은 결과의 자성(自性)에 미친다.
016_0413_a_19L緣及果自性

【釋】이것은 이른바 저 연으로부터 전이(轉移)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3_a_20L釋曰此謂彼緣轉異故偈曰

모든 연은 자체(自體)가 없기 때문이네.
016_0413_a_21L諸緣無自體

【釋】이것은 이른바 연에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게송의 주장은 이와 같다. 비유하면 생우유[生酥]가 변하여 바라문의 마음이 되는 것처럼 연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3_a_22L釋曰此謂緣無自性偈義如是譬如生酥轉爲婆羅門心彼緣自體不可得故如先已說偈曰

만약 연의 자체가 없다면
무엇이 변하여 결과를 이루는가?
016_0413_b_02L若緣無自體,
云何轉成果

【釋】이것은 제일의제 중에 연(緣)이 전변하여 그 결과의 실체가 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게송의 뜻은 그와 같다. 비유하면 제바달다 동자의 범행(梵行)이라면 어떻게 야야달다가 그의 아리가 되는가? 또한 요술쟁이가 진흙 덩어리를 만들면 그 자체가 공하지만 능히 항아리 등이 발생하는 것과 같다. 저 전변과 같은 것은 세제에서 일체지자는 모두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연(非緣)이 전변하여 결과가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비유할 실체가 없다. 이루는 목적과 이루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앞에서처럼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한다. 서로 위배되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016_0413_b_03L釋曰此明第一義中緣不轉變爲彼果體偈義如是譬如提婆達多童子梵行云何耶若達多爲彼兒耶又如幻主化作泥團彼自體空能生甁等如彼轉變於世諦中一切智者皆不能信是故非緣轉變爲果如是譬喩無體所成能成法無故如先因義不亦相違過故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연의 자체가 전변하여 결과가 되지 않는다면 연의 실체가 없는 것이지만, 결과를 잃는 것은 아니다. 결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세우려는 주장처럼 제일의제 중에 모든 내입 등이 있다. 왜냐하면 결과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싹 등과 같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3_b_11L外人言若緣自體不轉爲果者緣體可無而果者不失彼不遮果自體故如我立義第一義中有諸內入何以故以果故譬如芽論者偈曰

연이 없는 것에는 결과가 있지 않네.
016_0413_b_15L非無緣有果

【釋】연 없이 전변하여 결과가 있다는 것은 세제에서도 또한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저 제일의제에서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외도가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연의 실체가 공하지만, 비연(非緣) 자체는 공하지 않다. 그러므로 이 비연은 내가 하고자 하는 바이다. 이런 까닭에 비연의 주장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016_0413_b_16L釋曰無緣轉變而有果者於世諦中亦不能信何況於彼第一義中而可信耶此義不成外人言若第一義中緣體空者然彼非緣自體不空而此非緣是我所欲是故非緣義成
청변이 말하였다.
“단지 연의 실체를 부정한다면 곧 비연은 없다. 어찌 비연으로써 그대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는가? 다시 개합(開合)하여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3_b_21L論者但遮緣體則無非緣豈以非緣令汝解耶復次開合偈曰

어찌 연(緣)과 비연(非緣)이 있겠는가?
016_0413_b_23L何有緣非緣

【釋】모든 연(緣)과 비연(非緣) 자체는 있지 않다. 게송의 뜻은 이러하다. 또한 내가 이미 먼저 있음과 있지 않음을 부정하였다. 모두 결과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뜻으로 인하여 결과는 자체가 없다. 결과에 이미 실체가 없다면 연은 곧 비연이다. 어디서 그 연의 실체가 성립한단 말인가? 이러한 말의 뜻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지각과 소리가 서로 원인이 되어 일어날 뿐이다. 결과에 자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연의 실체가 공하기 때문이다.
016_0413_c_01L釋曰諸緣非緣自體不有偈義如是復次我已先遮有及非有皆無果起以是義故果無自體果旣無體緣則非緣何處有彼緣體可得如是語義本無所有但彼心聲相因起說果無自性緣體空故
또한 앞에서 이미 외도가 설한 네 가지 연이란, 이른바 인연ㆍ연연ㆍ차제연ㆍ증상연 등의 자체와 차별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부정하여 무기(無起)의 뜻을 세웠다. 이런 까닭에 이 품에서 모든 연을 관하여 무기의 뜻을 세운 것이다. 모든 대승경(大乘經) 중에 설하는 것과 같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3_c_07L復次從上已來外人所說四種緣起所謂因緣緣緣次第增上等自體差別遮彼所立明無起是故此品觀諸緣起無起義成諸大乘經中說偈曰

만약 모든 연, 그것에 생기가 없다면,
생기 자체는 성립할 수 없네.
만약 연이 자재하여 저 공을 말하면
공을 이해하는 것을 불방일(不放逸)이라 하네.
016_0413_c_11L若諸緣起彼無起,
彼起自體不可得,
若緣自在說彼空,
解空名爲不放逸

만약 사람이 한 사물도 생기하는 것이 없음을 안다면
또다시 한 사물도 소멸하는 것이 없음을 아네.
그것은 있지 않기 때문에 또한 없는 것도 아닌,
그 세간이 모두 공적함을 보네.
016_0413_c_13L若人知無一物起,
亦復知無一物滅,
彼非有故亦非無,
見彼世閒悉空寂

본래 적정하여 모든 생기가 없고,
자성은 이처럼 이미 열반이네.
능히 의호(依怙)를 위하여 법륜을 굴리시고,
모든 법이 공함을 설하시어 그것을 열어 보이셨네.
016_0413_c_15L本來寂靜無諸起,
自性如是已涅槃,
能爲依怙轉法輪,
說諸法空開示彼

있음도 없음도 일어나지 않고 둘 동시에 또한 없으니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무기처(無起處)
세간의 인연은 모두 이와 같으니
단지 범부가 망령되이 분별할 뿐이네.
항상 무기(無起)인 법이 여래(如來)이니
그 일체법은 선서(善逝)와 같네.
016_0413_c_17L有無不起俱亦非,
非有非無無起處,
世閒因緣悉如是,
但彼凡夫妄分別
常無起法是如來,
彼一切法如善逝

또 『반야바라밀경』 가운데 “문수사리여,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법이 일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음을 여래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다. 또한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에서 “그곳에서 일체 애욕이 다 소멸하여 없으므로 이것을 생기함이 없는 것이라 한다. 그것이 만일 생기함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보리(菩提)이다.세간이 전도되어 허망되이 집착을 일으킨다. 제일의제 중에 부처님은 출세간도 아니시고 또한 열반도 아니니, 본래부터 생기와 소멸이 없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다. 또한 『범천왕소문경』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3_c_20L復次如『般若波羅蜜經』中說文殊師如是應知彼一切法不起不滅爲如來又如『梵王問經』中說彼處一切愛滅盡故彼名無起彼若無起卽菩提世閒顚倒虛妄起著第一義佛不出世亦不涅槃從本已來無起滅故又如『梵王問經』偈曰

이미 그 모든 음(陰)의
생기가 없고 또한 소멸도 없음을 이해한다면
비록 세간에서 살지라도
세간의 법에 오염되지 않네.
016_0414_a_04L已解彼諸陰,
無起亦無滅,
雖行彼世閒,
世法不能染

이와 같이 여러 경전에서 자세히 설해지고 있다.
016_0414_a_06L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釋觀緣品竟
般若燈論釋卷第二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