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般若燈論釋卷第三

ABC_IT_K0578_T_003
016_0414_b_01L
반야등론석 제3권
016_0414_b_01L般若燈論釋卷第三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016_0414_b_02L偈本龍樹菩薩 釋論分別明菩薩
大唐中印度三藏波羅頗蜜多羅譯


2. 관거래품(觀去來品)
016_0414_b_04L觀去來品第二

「관연품(觀緣品)」에서 “일체법은 실체[體]로서 생기(生起)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하였고, 잘못된 주장을 대치(對治)하여 사람들이 믿고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제 다시 오는 것도 아니고[不來] 가는 것도 아닌[不去] 연기(緣起)의 특수한 것을 밝혀 중생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외도들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두 번째로 「관거래품」을 짓는다. 그 뜻은 무엇인가? 세제법(世諦法) 중에서는 언설(言說)이 자재(自在)하여 작용하는 사물에 깊은 애착 탐욕을 일으킨다.
016_0414_b_05L復次初品已說一切法體無起對治令人信解今復次明不來不去緣起差別使物識知遮彼義故第二品起此義云何世閒法中言說自在於所作事深起愛染
이제 그 집착의 화살을 뽑기 위하여 행상(行相)을 부정하니, 외도가 말한 것이 곧 바로 쉽게 논파될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와 같이 내입(內入)은 실체로서 반드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경계(境界)의 차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생기가 없다면 그 경계의 차별적 모습은 언표(言表)될 수 없다. 마치 석녀(石女)의 아이가 온다거나 간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내입(內入)에는 오는 작용[來]과 가는 작용[去]이 존재한다. 조달(調達)과 야야달다(耶若達多)의 경우도 그와 같이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로 인하여 자타(自他)의 모든 법이 일어난다는 주장은 성립한다.”
016_0414_b_10L今欲拔彼執著箭故遮一行相此外施爲卽易可破彼所謂者外人言應有如是內入體起以故彼境界差別可言說故若無此起彼境界差別則不可言說如石女兒不可說彼有來有去若提婆達多耶若達多則不如是由此譬喩自他諸法起義得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가령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선정(禪定) 등을 많이 닦고 익히므로 자성(自性)이 생기(生起)가 성립하고, 혹은 가고 머무는 것에 대하여 세간(世間)이 이해하는 것이 성립한다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성립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마치 선정[定]에 든 자가 지혜의 눈으로 저 보시와 지계 등을 관하는 것처럼 가는 것과 가지 않는 것을 관하는 것도 제일의제에서는 실체로서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경계의 차별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라는 이유 명제[因義]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작용을 부정하듯이 생기 작용도 또한 똑같이 논파된다.
016_0414_b_17L論者言若施戒禪等多修習故自性起成或行及住世閒所解此成已復成過如在定者以慧眼觀彼施戒等行及不行第一義中體不可得彼境界差別可言說因義不成故如遮行起行亦同破
다시 만약 ‘내가 든 이유가 여러 가지로 그대의 이해분별과 같아 동시에 성립한다’고 말하면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이유 명제와 위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제일의제 중에 이른바 가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면, 저 이미 간 작용[己去]과 아직 가지 않은 작용[末去]과 지금 가는 작용[去處], 이 세 가지가 모두 성립해야 할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4_b_22L復次若謂我立因種共汝同解分別俱成者此義不然何以故彼俱成因驗無體如是異執有驗違彼因義故復次若第一義中謂有去者彼已去未去去處三應可得如偈曰

이미 간 작용은 인정할 수 없네.
016_0414_c_05L已去不應受

【釋】이른바 가는 법은 이미 사절(謝絶)되었기 때문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자신과 남을 다 이해시킬 수 있으므로 주장할 필요가 없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4_c_06L釋曰謂去法已謝故此義自他俱解不須成立偈曰

아직 가지 않은 작용도 인정할 수 없네.
016_0414_c_08L未去亦不受

【釋】가는 자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니, 이미 간 자와 같다. 뜻은 다음과 같다. 다시 무엇이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인가? 이른바 이 가는 자에게 아직 발생작용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법은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루는 내용[龍成法]과 이루려는 목적[所成法]이 자재(自在)하게 다 성립할 수 있다. 법체(法體)와 법상(法相)을 가는 자로써 비유를 들어 증험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무슨 뜻인가?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은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 주장은 성립한다. 왜냐하면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의 ‘가는 작용을 하려는 자’와 같다.
016_0414_c_09L釋曰由去者故如已去者義意如此復次云何未去謂彼去者未有起作以彼法未去故能成所成法自在俱得成以法體法相欲去者譬喩驗故此復云何以未去亦不受此義成立何以故以未去故譬如餘欲去者
다시 우루거(優樓去)와 제자가 말하였다.
“무엇을 아직 가지 않음이라 하는가? 조달의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을 가는 작용이라 하는 것처럼 그와 같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가? 혹은 제바달다의 가는 작용을 가지 않는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켜야 하는가?”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무슨 인연 때문에 그와 같은 질문을 하는가?”
016_0414_c_15L次優樓佉弟子言何等未去爲如提婆達多未去爲去如是不受耶爲如提婆達多去作不去令他解耶論者何因緣故作如此問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앞의 분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나의 주장이 성립할 것이다. 또한 뒤의 분별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대의 이유 명제와 위배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시 나는 실체와 별개의 가는 법[去法]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대가 틀리다고 말한다면 그 말은 옳지 못하다. 실체 외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말하자면 자체와 별개로 단어 뜻이 조달의 경계와 화합하여 가는 작용이 존재한다.내 말은 이런 뜻이다. 연(緣)에 따라 전변하므로 제바달다와 화합하는 것처럼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한다.”
016_0414_c_19L外人言若汝意欲受先分別則成我義若汝意欲受後分別則違汝因義是故非先因義不成復次我立實外別有去法言非者是語不然實外有去云何成謂自體外句義和合調達境界去調達我意如是以緣隨轉故如和合調達應如是知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일 세속제 중에 가는 작용이 있어 조달과 화합하는 순간 자체와 별개로 단어 뜻이 존재하고 경계와 화합하여 가는 작용을 깨닫게 된다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려 한다면, 세속제 중에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성립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016_0415_a_03L論者言若世諦中有去和合提婆達多顯自體外有句義和合彼境界故生其去覺令他解於世諦中成已復成過
왜냐하면 어디서든 순간순간마다 시간의 전후로 차별이 있을 때만을 일러 화합(和合)이라 하기 때문이다. 조달이란 말은 단지 그러한 작용이 모여서 이루어져 스스로 이미 실체(實體)가 없는데, 어찌 따로 가는 작용이 있어 그것과 합치되겠는가? 그러한 지혜가 바로 내가 바라는 뜻이다. 그리고 또한 가는 작용의 말뜻이 제바달다와 화합하는 것은, 제일의제에서는 비유가 없으므로 실체로서 성립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저 세제에서도 도리에 위배되는데 어찌 하물며 제일의제 중이겠는가. 이런 잘못들을 그대는 벗어날 수 없다.”
016_0415_a_06L何以故有處邊剎那剎那前後差別名爲和調達名者唯是行聚自旣無體有別去與彼合耶如是慧者我意所復次去名句義與調達合第一義中無譬喩故體不可得如是彼世諦中亦違道理何況第一義諦中耶等過失汝不得離
또한 경량부(經量部)논사가 말하였다.
“생기운동(生起運動)에 의해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의 4대(大)와 4대로 만들어진 것들이 발생한 것을 신취(身聚)라고 이름 한다. 또한 어느 곳에서나 간단없이 전후로 생겨나서 없어지는 것을 가는 작용이라 이름 한다. 만약 별개로 밖에 가는 법이 있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일어난 장소에서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지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불꽃과 같다. 어떤 사람이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해도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제일의제에도 역시 지금 가는 작용은 없다. 그대들이 제일의제에서 그렇게 가는 작용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성립된 것을 세우려는 오류가 된다.”
016_0415_a_13L復次經部師言欲起動生彼風界及四大造名爲身處邊無閒前後起滅說名爲去若謂別有外去法者是義不然何以隨所起處起者卽滅故譬如火焰惑者謂去其實非也第一義中亦無去時汝於第一義中遮彼去者成所成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생기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방편을 말해도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불꽃 따위의 가는 작용에 대하여 미혹한 자나 지혜로운 자가 다 똑같이 미혹하기 때문이다. 그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의 차이를 또한 부정하기 때문이다. 또 세간의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대들의 집착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15_a_20L論者言以遮起故汝說方便義不成何以故焰等去迷智同迷故彼去者去異亦欲遮故又世閒智人於汝所執不歡喜故
또 승거(僧佉)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 법 중에서는 운동성[動塵]이 갑자기 증가하여 결과적으로 전변(轉變)이 뚜렷해진그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을 설명하여 가는 작용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016_0415_a_23L復次僧佉人言如我法中動塵偏增果則轉了彼未去者說爲去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뚜렷해지는 현상 등에 관한 집착은 앞서 이미 비판되었기 때문에 가는 작용의 뜻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만 분별일 뿐이다. 또 가는 작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앞의 과실을 듣고 마음속에 공포와 두려움을 내어 함께 ‘지금 가는 작용에는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잘못은 없다. 이 뜻은 결정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5_b_02L論者言彼執了等先已遮故去義不成此唯分別復次諸說去者聞前過失心生怖畏共立義去時去故無前過失此義決定者偈曰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가는 작용도 또한 받아들이지 않네.
016_0415_b_06L離已去未去,
去時亦不受

【釋】이 말은 무슨 뜻인가? ‘지금 가는 작용’은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가는 작용’이 있다면, 이미 간 것인가, 아직 가지 않은 것인가? 혹은 반은 가고 반은 가지 않은 것인가? 반은 가고 반은 가지 않은 두 경우는 오류이다.
016_0415_b_07L釋曰此義云何彼去時不可得故有去時爲已去耶爲未去耶若半去半未去二俱有過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들은 ‘지금 가는 작용도 또한 받아들이지 않네’라는 그 주장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지금 가는 작용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곳에서 발을 들어 이곳으로 발을 내딛는 모습을 이름 하여 지금 가는 작용이라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5_b_10L外人言汝言去時亦不受者是義不然何以故此應受云何知耶彼處擧足下足相貌名爲去時如偈曰

이미 간 작용도 아직 가지 않은 작용도 없으나,
지금 가는 작용 그곳에는 가는 작용이 있네.
016_0415_b_13L非已去未去,
彼處去時去

【釋】내가 세우려는 주장은 ‘지금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가는 작용’의 뜻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가는 작용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곳에는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와 같이 언설과 음성으로써 실체는 존재한다. 가는 작용과 가는 동작의 의지처는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가는 작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면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다. 그대들이 지금 가는 작용에도 가는 작용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주장 역시 이미 성립하지 못한다. 이미 간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것도 논파될 수 없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5_b_14L釋曰我所欲者去時有故去義得成復次有人言若有去處彼可說有去如是言說音聲有體以作與依止不相離故已去未去者不說遮去此不相應汝說去時不受義旣不成已去未去此亦不破論者偈曰

만약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주장이 성립하는가?
016_0415_b_20L若去時去者,
云何有是義

【釋】그대가 원하는 바와 같이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가는 작용은 이미 간 작용처럼 앞에서 이미 논파했기 때문이다. 또 결정코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고 분별한다면 이미 간 작용 중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인가?아직 가지 않은 작용 중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인가? 이 두 경우와 별개로 지금 가는 작용 중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인가? 앞에서 말한 오류와 같다. 또 제일의제 중에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 해도 증험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5_b_21L釋曰如汝所欲去時去者此義不成何以故以去者故如已去者先已破復次若定分別去時去者爲已去中有去爲未去中有去爲異此二有去處耶如先說過復次第一義中去者驗無體故此義云何偈曰

지금 가는 작용과 가는 작용은 공하므로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15_c_04L去時去空故,
去時去不然

【釋】그대가 말과 말구유를 물을 때, 무엇이 말구유나고 물으면 ‘말이 있는 것’이라고 답하며, 또 무엇이 말이냐고 물으면 ‘말구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지금 가는 작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는 작용이 있는 곳’이라고 답하고, 어디에 가는 작용이 있느냐고 물으면 ‘지금 가는 작용에’라고 답한다면 둘 다 명료하지 못한 대답이다.
016_0415_c_05L釋曰如問馬櫪是誰馬櫪答彼有馬又問誰馬答彼有櫪者如是問何等爲去時答彼處去問何處去答彼去時俱不明了
혹은 시작이 없다고도 한다. 세제에서 이해되는 지금 가는 작용으로 제일의제 중에 가는 작용을 성립시키려 한다면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어떤 가는 행위도 지금 가는 작용에 속하기 때문이다. 의 어디에 다시 가는 작용이 있어서 “저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그대들이 “저 제일의제에 모든 내입처(內入處)가 발생 한다”고 말하거나, “저 경계의 차별적인 언어와 제바달다 등의 인용하여 비유한 것”은 주장 명제와 이유 명제와 비유 명제, 셋 다 성립하지 못한다. 제일의제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016_0415_c_09L或謂無始世諦所解去時於彼第一義中欲成立去是義不然何以故此一去業屬彼去時外何處更別有去而言於彼去時去是故汝說第一義中諸內入起及彼境界差別言說又引提婆達等爲立義譬三皆不成第一義中以無體故
혹은 다음과 같이 “‘가는 행위’는 지금 ‘지금 가는 작용’에 속하지 않는다. 속하지 않기 때문에 ‘가는 작용’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것은 실체로서 있기 때문에 이유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5_c_16L或謂如是去業不屬去時不屬故安置去名彼有體故非因不成者如偈曰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면.
016_0415_c_18L說去時去者

【釋】지금 가는 작용 중에 만약 가는 작용이 함께 있는 것은 당연히 옳지만, 가는 작용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5_c_19L釋曰去時兼去此義應爾而言無去此執有過是故偈曰

지금 가는 작용 중에는 가는 작용은 없네.
016_0415_c_21L去時中無去

【釋】지금 가는 작용 중에 만약 가는 작용이 없다면 곧 지금 가는 작용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없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가는 행위는 지금 가는 작용에 포함되어 지금 가는 작용과 화합한다는 주장도 반드시 그와 같아야 한다. 그대들이 “가는 작용은 없으나 그 밖의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앞에서와 같이 허물을 피하려고 집착하여 가는 작용과 지금 가는 작용이 화합하여 다시 그와 같이 가는 작용이 작용한다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016_0415_c_22L釋曰於去時中若無去者則不可說以爲去時去時無去者世閒不信受是故去業攝屬去時與時和合義必定爾汝言無去有異去者是義不然有過失故若汝欲避如前過咎執言去與去時和合復如是行去者此義不然如偈曰

가는 작용이 지금 가는 작용과 화합한다면
간다는 것은 분별일 뿐이네.
016_0416_a_06L去和合去時,
去者唯分別

【釋】제일의제 중에는 가는 작용과 화합하는 일 따위는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단지 기억하고 분별하는 것일 따름이다. 반드시 그러하다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6_a_07L釋曰第一義中去和合等皆不可得但憶想分別故若定如此得何等過偈曰

지금 가는 작용 중에 가는 작용이 있어서
다시 이것이 가는 작용을 일으킨다면
곧 두 개의 가는 작용을 인정하는 허물에 떨어지니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016_0416_a_10L若去時中去,
復及此行去,
則墮二去過,
此義則不然

【釋】이는 이른바 세제 중에는 이치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6_a_12L釋曰此謂於世諦中義不然故復次偈曰

만약 두 개의 가는 법이 있다면
두 개의 가는 자가 있게 되네.
016_0416_a_14L若有二去法,
則有二去者

【釋】무슨 인연으로 그와 같이 부정하는가? 두 개의 가는 법이 있다면 두 개의 주체가 있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6_a_15L釋曰何因緣故作如此遮若有二法則有二者偈曰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이 있다면
이 뜻은 옳지 못하네.
016_0416_a_17L離去者有去,
是義則不然

【釋】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그것은 당연히 옳지 못하다. 앞의 허물과 같은 것은 마땅히 청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이 또한 무슨 뜻인가? 이와 같이 세제(世諦)의 성품에서는 하나의 가는 작용이 가는 자와 상관(相觀)하여 지금 가는 작용이 성립한다. 제일의제의 경우는 이와는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이 그 경계와 차별과 언어와 비유 등을 증험할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내입처(內入處)가 발생하지 못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작용도 없는 연기(緣起)가 성립된다.
016_0416_a_18L釋曰爲是義故此不應爾如前過咎應淸淨故此復云何如是一去於世諦中觀彼去者去時得成第一義中與此相違如是彼境界差別言說及譬喩等驗無體故內入不起無來無緣起得成
또 성명론자(聲明論者)가 말하였다.
“내가 세운 주장은 앞에서와 같은 잘못이 없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작용만이 있어 자체에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용하는 시기를 일러 가는 작용[去]이라고 하며, 그 작용을 짓는 자를 가는 자[去者]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두 개의 가는 자와 두 개의 가는 법이 있다’고 말해도 이 과오는 합당하지 못하다.”
016_0416_b_01L復次毘伽羅論者言所立義無前過失何以故唯有一行自體去故彼處行時卽名爲去彼行作者名爲去者是故汝言有二去者及二去法此過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제일의제에서는 그 가는 작용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금 가는 작용에는 실체가 없다. 지금 가는 작용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가는 작용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세제 중에는 어디서건 쉴 사이 없이 행취(行聚)가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을 이름 하여 가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가는 작용을 관찰하면 진실로 실체가 없으니 이것과 상응하지 않는다.”
016_0416_b_05L論者言第一義中遮彼去故時則無體時無體故亦不成於世諦中處邊無閒行聚續名爲去者觀察去時實無自體不相應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가는 작용이 반드시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가는 작용은 의지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에 의지할 것이 없다면 가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으니 석녀의 아이의 전도된 작용 따위와 같다. 그러므로 만약 의지할 것이 있다면 그것의 가는 작용은 존재한다. 원인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모든 내입처(內入處)의 생기(生起)와 가는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작용 등도 역시 모두 성립한다.”
용수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016_0416_b_09L復有人言決定有去如是應此義云何彼依止有故若此依止彼則不有如石女兒倒行等事依去者相貌云何謂提婆達多是故若依止有彼去則有以因得成故是諸內入起及去未去等亦皆得成論者偈曰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은 없네.
016_0416_b_15L離去者無去

【釋】그대가 “가는 작용은 가는 자에 의지하며, 이와 같이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는 작용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아직 원인이 없을 때는 가는 작용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과오를 그대는 벗어날 수가 없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는 것과 같다.
016_0416_b_16L釋曰汝言去者爲去依止以此依止有故爲去因者是義不然何以故未說因時去則不成此之過失汝不得離如偈曰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이 있다면
이러한 주장은 옳지 못하네.
016_0416_b_20L離去者有去,
是義則不然

【釋】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은 성립하지 못한다. 그와 같은 말뜻은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6_b_21L釋曰若離去者去則不成如此句義先已分別是故偈曰

만약 거기에 가는 작용이 없다면
어디에 가는 자가 있겠는가?
016_0416_b_23L若其無彼去,
何處有去者

【釋】그 가는 자의 원인을 증험해 볼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디에’라는 말은 가는 자를 불신한다는 말뜻을 성립시킨다. 앞에서 이임 자세히 설명하였다. 가는 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의지하는 원인이 성립하지 않는 과오가 있으며, 또 그 주장과 서로 위배되는 과오가 있기 때문이다.
016_0416_c_01L釋曰彼去者因驗無體故此意如是何處聲者謂不信去者語義得成已廣說去者無體故如是依止因不成過及與彼義相違過故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가는 작용을 증험할 수 있기 때문에 앞에서 말하는 과오는 없다. 그대는 잘 들어야 한다. 나는 ‘그와 같이 가는 작용은 반드시 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화합하면 그것은 곧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화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시할 수 없으니, 마치 토끼의 뿔이 없는데 뿔이 있다고 지시하여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가는 작용과 화합하는 것이 있어 ‘조달(調達)이 간다’고 지시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니,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세운 주장은 성립된다.”
016_0416_c_05L復有人言去有驗故無前執咎汝應諦聽我決定立有如是去此義云何此若有合彼則可指示故此若無合彼則不可指示如兔無角不可指示言有角也今有去與合可指示言彼調達去去有故我立義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만약 결정코 ‘제바달다가 가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간다고 지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제일의제 중에 가는 자가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6_c_11L論者言汝若定謂有調達去可指示者爲欲令於第一義中有去者耶無去者耶如偈曰

그 가는 자는 가지 않네.
016_0416_c_13L彼去者不去

【釋】이러한 주장을 안립 하고자 방편으로 말하겠다. 이른바 제일의제 중에는 그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머무는 자와 같다. 그러므로 가는 자는 가지 않는다고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지금 아직 가지 않은 자에게 가는 작용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편이 있기 때문에 나는 논파할 수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가는 작용과 화합하여 세 제 중에 ‘가는 자가 간다’고 말한 주장이 이미 성립하지 않았는데, 지금 어째서 ‘아직 가지 않은 자가 간다’고 말하는가? 게송에서 말할 것과 같다.”
016_0416_c_14L釋曰今當安立此義以方便說所謂第一義中彼去者不去何以故以作有故譬如住者是故應知去者不去復有人言我今成立未去者去以此方便不能破我論者言如與去合世諦中說去者去義已不成今云何言未去者去如偈曰

아직 가지 않은 자도 가지 않네.
016_0416_c_21L未去者不去

【釋】그 아직 가지 않은 자에게는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그 주장의 의미도 이와 같다. 다시 만약 아직 가지 않은 자라면 또한 가는 작용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경우라도 가는 작용이 있다면,어떻게 아직 가지 않은 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자기모순이다. 또 방편으로 말하면 제일의제 중에는 아직 가지 않은 자를 가는 작용이라 이름붙일 수 없다. 왜냐하면 가는 작용은 공(空)하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사람이 가는 것과 같다. 앞에서 부정한 말들은 마땅히 유식학파[自部]의 여러 논사와 식강(食糠) 등의 외도들에게 그와 같이 설명하였던 것이다.
016_0416_c_22L釋曰彼未去者以無去故義意如此復次若未去者云何是去若或時去云何名未去者此自相違復次方便說者第一義中彼未去者不名爲去何以故以去空故如彼異者前來遮應爲自部諸師及食糠外道等作如是說
또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아직 가지 않은 자를 가지 않는다고 이름 한다’고 말한 것처럼 그대의 주장은 내가 세운 주장과 같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무엇을 아직 가지 않은 자라고 하는가?”
외도가 말하였다.
“아직 가는 작용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은 자라하고, 만약 가는 작용이 이미 뚜렷하면 가는 자라고 말한다.”
016_0417_a_06L復次僧佉人言如汝所說彼未去者名爲不去汝立此義成我所成論者言云何名未去者外人言去未了故名未去者若去已了名爲去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뚜렷해진다’는 말에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니,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또 그대가 앞에서 ‘가는 작용을 아직 하지 않은 것을 아직 가지 않은 자’라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그 가는 자에 아직 가는 작용이 없는 순간에도 먼저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대의 주장은 이와 같다. 또 그대가 ‘머무는 작용 등을 아직 가지 않은 자라고 하므로 가는 자에게 실체가 없다’고 말하며, 그와 같은 뜻으로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대 스스로가 주장을 세우고 도리어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직 가지 않은 작용에는 가는 자의 실체가 성립 될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417_a_10L論者言汝所說了有過失故先已遮復次若汝言先未作去名未去者是義不然何以故汝自破故彼去者先未去時去有自體汝義如復次汝謂住等爲未去者故去者無體如是意欲者是義不然何以故汝自立義還自破故謂未作去聲彼去者體不可得故
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차별성[異門]이 있기 때문에 가는 자라고 하며,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은 자라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성립된다면 위와 같은 과오는 없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가는 자와 아직 가지 않은 자와 에 다른 자가 있어서 가는 작용과 화합한다고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016_0417_a_17L復有人言有異門名爲去者有異門故名未去者此義成無如上過論者言汝謂去者未去者外別有異者與彼去合是義不然何以故如偈曰

가는 자와 아직 가지 않은 자와는 다른
제3의 가는 자는 없네.
016_0417_a_21L異去及未去,
無第三去者

【釋】이것은 무슨 뜻을 의미하는가? 이른바 가는 자와 아직 가지 않은 자를 떠나 제3의 가면서 아직 가지 않은 자란 없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어렵다. 또한 가는 자와 아직 가지 않은 자는 앞에서 이미 논파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차별성[異門]이 있기 때문에 가는 자라고 하고, 차별성이 있기 때문에 아직 가지 않은 자라 이름한다”고 말한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가는 자에게 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 작용은 보편적이지 않아 그대가 세운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못한다. 가는 자에게 작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도 옳지 않다.
016_0417_a_22L釋曰此明何義謂離去者及未去者無彼第三此是去者未去者故有如此人難令他解復次去未去者先已破故汝言有異門故名爲去者有異門故名未去者此義不成若謂去者有作故此作不遍汝立因義不成彼無作故者是義不然
왜냐하면 그대는 가는 자는 가는 작용과 화합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는 작용을 나는 부정한다. 비유하면 공능(功能)과 작용처럼 작용이란 말은 무상(無常)하다. 작용이 비록 보편적이지 않더라도 작용이기 때문에 무상하다. 그래서 이유 명제는 성립한다. 이와 같이 가는 자가 가는 동작과 화합한다는 것을 내가 이미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직 가지 않은 자의 뜻을 세우려는 자가 있다면 또한 아직 가지 않은 자의 이유로써 답해야 한다. 만약 “가는 자가 있다면 가는 자와 머무는 자가 없다고 한다면 그 주장에는 비유할 실체가 없다. 따라서 이루려는 목적[所成法]의 일부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016_0417_b_06L何以故汝言去者與去作合如是去作是我所遮譬如功用作聲是其無常作雖不遍而作故無常因義得成如是去者與去作合我遮此故非因不成若有成立未去義者亦應以此未去因答謂有去者無去者住者住者立義譬喩無體以所成之法一分不具者義不然
왜냐하면 성립시키려는 목적의 일부분은 피차간에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니, 내가 머무는 자를 인용하여 비유할 경우 결국 어떤 허물이 있게 되는가? 그와 같이 어떤 사람을 설명하는 가는 자라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가는 작용과 화합하여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것은 지시할 수 있다”고 이것을 이유로 들지만, 이유 명제는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비유할 실체가 없다. 이루려는 목적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이유 명제가 틀리기 때문이다.
016_0417_b_14L何以故所成分者彼此俱解我引住者爲譬喩故竟有何咎如是一人說爲去者此義不然如先說因有去合故彼可指示以此爲因者義不成亦譬喩無體以所成之法具違於因義故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에서는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을 눈으로 복, 이미 보고 나서 말을 한다. 비록 듣는 것 등이 있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이런 까닭에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016_0417_b_19L外人言世閒眼見彼去者去見已起說雖有聞等不勝眼以是義故非因等不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와 같이 보는 것은 세제 중의 지혜이며 그것을 진실이라 보지만, 제일의에서 이치대로 진리를 관찰하면 무엇을 본다고 하는가? 만약 세제에서 본 것을 제일의제로 삼는다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7_b_21L論者言彼如是見世諦中慧以此爲第一義中如理諦觀何等名見以世諦所見爲第一義者彼不可信此云何知如偈曰

만약 가는 자가 간다고 한다면,
그 주장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016_0417_c_02L若謂去者去,
此義云何成

【釋】그 가는 자의 가는 작용에는 가는 작용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용감하고 건장한 장군이라 말하고는 전쟁에 임하여 바람을 마주 대하고 도망가는 것과 같다. 이러한 용맹이 성립한다면 그대의 주장도 곧 성립한다. 그러나 왜 성립되지 않는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7_c_03L釋曰彼去者去去義不成譬如有人自言勇健將臨戰陣望風退走此勇若成汝義則立云何不成如偈曰

가는 자에겐 가는 작용이 없으므로
성립 못한다는 주장 또한 그러하네.
016_0417_c_06L去者無去故
不成義如是

【釋】가는 작용에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은 내가 앞에서 이미 말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켰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이해시켰는가? 위의 게송에서 “이미 간 자는 가는 작용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한 가는 작용의 발생도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다. “이미 간 작용은 가는 작용을 할 수 없다”는 이 주장 명제로 다른 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
016_0417_c_07L釋曰如去無體我先已說令他解故何處令解如上偈言已去者不去故及彼去起亦先已遮已去不去者是立義令他得解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는가? 위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만약 가는 자가 간다고 말한다면, 이 뜻은 어떻게 성립되는가?”등으로 앞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에서는 가는 작용도 없고 가는 자도 없다. 가는 작용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은 망상으로서 가는 자를 안치하여 가는 작용이라 이름 붙인 것일 뿐이다. 쟁론자(爭論者)들의 이와 같은 주장 명제는 다음과 같은 과오를 범하게 된다. 어떤 과오인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7_c_11L云何令解如上偈若謂去者去此義云何成等如先分別如是第一義中無去無去者去不實故但彼妄置去者名去彼諍論者如是立義得此過失云何過失偈曰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이미 공한데
어찌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이 있겠는가?
016_0417_c_16L去者去旣空,
何有去者去

【釋】만약 가는 작용이 성립되어 가는 자가 저 가는 작용과 화합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앞에서와 같은 과오를 피하려고 제일의제에서는 하나의 가는 작용이 가는 자와 화합하는 순간 그것을 이름 하여 가는 작용이라 한다고 주장하면, 이와 같은 집착은 곧 두 개의 가는 작용이 있다는 오류에 빠진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7_c_17L釋曰若謂去成去者與彼去合是義不然何以故若汝欲避如前過失一義中成立一去與去者合彼名爲此執則墮二去過中如偈曰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화합한다면
두 개의 가는 작용이 있는 오류에 떨어지네.
016_0417_c_21L去者與去合,
則墮二去咎

어째서 그러한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7_c_22L云何如此偈曰

첫째는 가는 작용으로써 가는 자를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을 말하는 것이네.
016_0417_c_23L一去了去者,
二謂去者去

【釋】이러한 주장 때문에 다른 과오가 생긴다. “두개의 가는 작용이 있는 오류에 빠진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8_a_01L釋曰以是義故別有過失謂墮二去此復云何偈曰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이 있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네.
016_0418_a_03L離去者有去,
是義則不然

【釋】의지하는 대상이 없다면 의지하는 주체도 없다. 의미는 다음과 같다. 가는 작용이 없는, 가는 자가 반드시 있다고 하기 때문이며, 또 두 개의 가는 작용과 두 개의 가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치로는 마땅히 가는 작용이 존재하는 것을 가는 자라 이름 해야 할 것이다. 또 가는 작용과 가는 자가 하나임을 주장하므로 세제에서는 성립하지만, 제일의제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제일의제 중에는 비유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은 증험이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_0418_a_04L釋曰所依若無能依不有義意如此必欲無去有去者故及有二去二去者故理應有去名爲去者又欲去與去者一故世諦成立非第一義以第一義中譬喩無體如彼所說驗不成
외도가 말하였다.
“반드시 가는 작용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 시작한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간에 사물이 없다면 처음에 일어남이 없을 것이다. 마치 허공 꽃과 같다. 그러나 세간에는 만물이 있어 그곳에서 전리(轉離)하는 것을 시작이라고 이름하며, 행상(行相)이라 한다. 그러므로 ‘가는 작용’이 있다.”
016_0418_a_10L外人言定有去何以故彼初發足有故若世閒無物則無初起如虛空由世閒有物彼處轉離卽名初發說爲行相是故有去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닭을 염색하여 나중에 색이 달라진다 해도 닭의 실체가 동일한 것과 같다. 그대의 주장도 또한 이와 같다. 말은 비록 앞의 주장과 다르지만 뜻은 다른 차이가 없다. 앞서 물은 것처럼 지금 다시 그대에게 묻겠다. 이미 작용한 것을 시작이라 하는가? 아직 작용하지 않은 것을 시작이라 하는가? 지금 작용하는 것을 시작이라 하는가? 세 가지 모두 옳지 않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8_a_13L論者言譬如染後色雖異鷄體是一汝亦如此雖異前義更無別如先所問今還問爲已行名初發爲未行名初發行時名初發耶三皆不然如偈曰

이미 간 작용에는 시작이 없으며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시작은 없네
지금 가는 작용에도 시작은 없으니
어디에 장차 시작이 있겠는가?
016_0418_a_17L已去中無發,
未去亦無發,
去時中無發,
何處當有發

【釋】“이미 간 작용에 시작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가는 작용이 거기에 이미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역시 시작은 없다”은 것은, 말하자면 아직 작용하지 않은 것에는 가는 작용이 없으므로 가는 작용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 가는 작용에도 시작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이미 간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것 등에 다 가는 작용의 뜻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지금 가는 작용에 가는 작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이 세 종류의 가는 작용에 다 시작이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 “어디에 장차 시작이 있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016_0418_a_19L釋曰已去中無發者謂去作用於彼已謝故未去亦無發者謂未行無去去則不然去時中無發者謂已去未去等皆無去義云何可說去時有去如是三種俱無初發是故偈言何處當有發
이 뜻으로 인하여 그대의 이유는 성립되지 않으며, 주장도 역시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그와 같이 이미 간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는 작용에 시작이 성립하지 못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믿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말의 뜻은 그와 같다. 무엇을 증험하는가? 이른바 이미 간 작용에는 시작이 없다. 가는 자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가는 자가 가는 작용을 이미 한 것처럼, 아직 가지 않은 자도 역시 시작은 없다. 아직 가지 않는 자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가려는 자에게는 아직 가는 작용이 없는 것과 같다. 지금 가는 작용에도 시작은 없다. 이와 같이 시작에는 실체가 없이 이유 명제도 성립되지 않는다. 스스로 이유를 말하더라도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016_0418_b_02L以是義故汝因不成立義亦如是已去未去去時初發不成人信解語義如此云何驗耶所謂已去無初發以去者故譬如去者去已未去亦無發以未去故譬如欲去者未去去時中無發以去者故譬如已去未去者如是初發無體因義不成自謂爲因有過失故
외도가 말하였다.
“나에게 다른 주장이 있다. 말하자면 그 가는 작용은 언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편으로 가는 작용에는 자체(自體)가 존재한다. 그것은 자상(自相)과 차별 때문이며, 문장을 만드는 단어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만약 없다면 그 자상과 특수성과 문장을 일으키는 단어의 원인이 곧 있을 수 없다. 마치 장님의 눈과 안식(眼識)은 끝까지 화합하지 않으므로 맹인이 이미 보았고, 현재 보고, 또 장차 볼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016_0418_b_09L外人言我有異所謂有彼去言說故以此方便去有自體自位別故又和合句義起別語言因故此若無者彼自位差別和合句義起別語因則不得有如生盲眼識畢竟無和合故不可說言彼生盲者已見現見及以當見
지금 가는 법과 자상(自相) 등과 문장을 만드는 단어의 원인이 있기 때문에 가는 작용이 멈춘 것을 이미 간 작용이라 하고, 행법(行法)이 바로 일어나는 것을 지금 가는 작용이라 하며, 가는 동작이 아직 시작하지 않은 것을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이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주장은 이유 명제에 ‘힘[力]’이 있기 때문에 가는 법은 공하지 않으며, 하고자 하는 주장이 성립하여 앞의 과실은 없다.”
016_0418_b_15L今有去法及自位等和合句義起別語因得說言彼行止息名爲已去行法正起名爲去時行作未發名爲未去故我說因有力故去法不空所欲義無前過失
청변 논사는 말하였다.
“만약 가는 법이 있다면 지금 가는 작용과 이미 간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말해야 하며, 이 주장도 그렇다. 그러나 그 가는 작용에는 실체가 없음을 앞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했다. 그래도 그대가 또다시 집착하므로 이제 다시 논파하려는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8_b_20L論者言若有去法可說去時已去未去是義應爾彼去無體先已廣說汝復執有今當更破如偈曰

아직 시작이 없다면 지금 가는 작용도 없고
또한 이미 간 작용도 없네.
최초의 가는 작용에 가는 행위가 공(空)한데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어느 곳에서 발생하겠는가?
016_0418_b_22L未發無去時,
亦復無已去,
彼初起去空,
未去何處發

【釋】앞의 가는 작용과 화합하지 않으면, 가는 작용은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의 뜻도 다음과 같다. 앞에서 가는 작용은 공하다고 말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시켰으며, 외도가 세운 주장을 논파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어디에서 발생하는가?”란 가는 작용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분별은 생기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무엇인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8_c_01L釋曰前無去合彼去不起故偈意如先說去空令他得解驗破外人所立義故復次未去何處發者此明去無故如是第一義中分別不起此義云何偈曰

이미 간 작용과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은 없고,
또한 지금 가는 작용도 없네.
가는 법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허망되이 분별하는가?
016_0418_c_06L無已去未去,
亦無彼去時
於無去法中,
何故妄分別

【釋】허망되이 분별한다는 것은 마치 눈이 흐린 사람이 허공 중에서 혹은 털ㆍ머리카락ㆍ모기ㆍ하루살이ㆍ파리 등을 보는 것과 같다. 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8_c_08L釋曰妄分別者如瞖目人於虛空中或見毛髮蚊蚋蠅等皆無體故如偈曰

이와 같이 모든 순간은
맨 처음 시작[初發]도 볼 수 없는데
가는 작용 등이 있다고 말하면
과실이 너무 심하네.
016_0418_c_10L如是一切時,
未曾見初發,
而言有去等,
過失則甚多

【釋】비유하면 나라연(那羅延)이 창으로 저 갈주올갈차(竭株嗢羯遮) 아수라왕을 쫓는 것처럼 그것도 이와 같이 가는 작용 등의 과실이 항상 그대를 따른다.
016_0418_c_12L釋曰譬如那羅延䂎逐彼竭株嗢羯遮阿修羅王彼亦如是去等過失常隨逐汝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가는 법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곳곳이 서로 다르고 상대(相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밝음과 어둠 같다. 이와 같이 머무는 것과 서로 다르게 가는 작용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는 작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016_0418_c_15L復次有人言第一義中去法是有何以故以相違故謂處處相違相待可得譬如明暗如是與住相違有去可得而言無去者是義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주장을 세운다면 이 역시 마땅히 물어야 할 것이다. 그대의 의도는 누가 머문다는 것인가? 지금 가는 자인가? 아직 가지 않은 자인가? 만약 지금 가는 자가 머문다면 주장은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8_c_18L者言立此義者是亦應問汝意爲欲令誰住耶爲是去者爲未去者若去者住義不應然如偈曰

가는 자는 머무는 작용을 못하네.
016_0418_c_21L去者則不住

【釋】이것은 말하자면 제일의제 중에 “가는 자가 머문다”는 주장은 증험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가는 자는 동작을 하기 때문이다.비유하면 제바달다가 막 작용하여 아직 멈추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아직 가지 않은 자가 머문다고 말하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8_c_22L釋曰此謂第一義中立去者住驗不可得何以故以去者動作故譬如調達正行未息若謂未去者住是亦不如偈曰

아직 가지 않는 자는 머무는 작용을 못하네.
016_0419_a_03L未去者不住

【釋】아직 가지 않은 자는 가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 가는 작용이 끊어졌기 때문에 이를 머무는 작용이라 말한다면,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가는 작용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악견(惡見)을 가지고 삿되게 집착하여 자재로이 이와 같이 주장하기를 다른 머묾을 얻고자 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9_a_04L釋曰彼未去者以無去故於世諦中彼去息故名之爲住此義不成以去無體故復次惡見所持邪執自在作如是說欲得異住如偈曰

지금 가는 자와 아직 가지 않은 자와는 달리
누가 제3의 머무는 자인가?
016_0419_a_08L異去未去者,
誰爲第三住

【釋】머무는 자가 하나도 없는 이것을 머무는 작용이라 말한다. 이 주장은 성립한다. 게송의 뜻도 그러하다. 다시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9_a_09L釋曰無一住者說之爲住此義可得偈意如是復次偈曰

가는 자를 머문다고 한다면
이 주장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공하기 때문에
가는 자의 머무는 작용은 성립할 수 없네.
016_0419_a_11L去者若當住,
此義云何成
去者去空故,
去住不可得

【釋】가는 작용과 머무는 작용은 서로 다르다. 한 순간에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송의 뜻도 그와 같다. 저 가는 작용이 공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다. 가는 자와 머무는 작용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비유하면 도공처럼 세 때[時] 동안 작업을 쉴 사이 없이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는 자가 다시 가는 작용을 하지 않더라도 또한 가는 자라고 이름 할 수 있다. 이 주장이 성립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다.”
016_0419_a_13L釋曰去住相違於一時中不得竝故偈意如此彼去空者令人得解以去者住無體可示故外人言譬如窯師於三時中能作不失故如是去者雖復不去亦名去者此義成故無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가법(假法)을 받아들이지만 앞에서 세운 것은 제일의제에서 이제 다 상실된다. 이러한 뜻으로 인하여 앞에서 세운 이유와 비유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다른 도리(道理)를 통해 과실을 드러낸다. 그대가 머무는 작용을 세운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장차 가려는 자가 이미 간 작용을 하여 정지한 것이 머무는 작용인가? 가는 자가 아직 가지 않은 것, 혹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정지한 것을 머무는 작용이라 하는가? 세 가지 모두 옳지 않다.왜냐하면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016_0419_a_18L者言汝受假法先所成立第一義者今竝失壞由如此義前所出因及譬喩者有過失故復次有別道理顯彼過失汝立此住其義云何爲當去者已去止息名爲住耶爲彼去者未去若去時息名爲住耶三皆不然何以偈曰

지금 가는 작용에는 머무는 작용이 없네.
016_0419_b_02L去時則無住

만약 가는 작용과 가는 자가 화합하는 이것을 머무는 작용이라 이름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외도가 말하였다.
“나는 앞에서 이미 간 작용을 머무는 작용이라 말하였다. 그 주장은 성립할 수 있으니, 증험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수보살이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19_b_03L釋曰若去與去者合名此爲住義則不然外人言我先所說已去名住義得成可信驗故論者偈曰

이미 간 작용은 없기 때문이네.
016_0419_b_06L無彼已去故

【釋】이미 간 작용이 머문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미 간 자는 이미 가는 작용이 정지했기 때문에 머무는 작용을 말하여도 제거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의도가 이른바 아직 가지 않은 작용을 이름하여 머무는 작용이라 하는 것이라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정지한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아직 가지 않은 자를 또한 머무는 작용이라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못하며, 증험에도 실체가 없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밝음과 어둠 등은 제일의제 중에 성립하지 못한다.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또 그대가 세운 주장과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016_0419_b_07L釋曰已去住者是義不然何以故已去者去已謝故言其住者無所除若汝意謂彼未去時名之爲住亦不然何以故未去而息義不然故以是因緣彼未去者亦不名住如是因義不成驗亦無體此義云何彼明暗等第一義中不可成立以相違故亦乖汝立義故
또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머무는 작용에 대해 세운 주장과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시작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실체가 생기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그것에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9_b_15L復有人言我立住義以相違故有初發故又彼可除體有起故是義不然彼有過失如偈曰

가는 것의 생기 작용과 정지 작용
그 오류는 가는 작용과 같네.
016_0419_b_17L去起作及息,
其過同去說

【釋】마치 가는 자의 가는 작용처럼, 아직 가지 않은 자의 가는 작용이나 그 둘과 다른 가는 작용에 관한 주장은 다 옳지 못하다. 이와 같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가는 작용과 가는 작용의 시작도 또한 옳지 못하다. 이와 같이 과거ㆍ미래ㆍ현재의 가는 작용 및 가는 작용의 정지 작용 모두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현재ㆍ미래의 머무는 자와 그 둘과 다른 머무는 작용을 하는 것은 다 옳지 못하다. 머무는 작용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머무는 작용과 머무는 작용의 시작도 있을 수 없다.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의 머무는 작용과 미래의 머무는 작용과 현재의 머무는 작용과 머무는 작용의 정지에 관한 주장은 다 성립하지 못한다.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016_0419_b_18L釋曰如去者去未去者去異彼二去義皆不然及已去未去去時去初發是亦不然如是已去未去去時及彼去息皆不成故如是住者未住者及異彼二住皆不然住不然故已住未住住時及住初發亦不可得初發無故已住未住住時住息義皆不成如上廣說
문장이 번쇄하므로 지금 간략하게 나타내 보이겠다. 이 뜻은 무엇인가? 저 머무는 자는 머무는 작용을 못한다. 왜냐하면 가는 작용은 공하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의 머무는 작용과 같다. 머무는 작용이 아직 없어지지 않는 자와 영원히 이미 머물고 있는 자에게는 시작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머무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이미 오래 전부터 머무는 자와 같다. 또한 이미 머무는 자는 머무는 작용을 없앨 수 없다. 왜냐하면 가는 작용에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머무는 작용이 아직 없어지지 않은 자와 같다. 마치 과거의 머무는 작용에 세 구절이 현시(顯示)되는 것과 같다. 미래ㆍ현재의 머무는 작용도 그와 같이 앞의 방편으로 논파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작용의 뜻은 성립하지 못하니,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016_0419_c_03L以文煩故今略顯示此義云何彼住者不住何以故以去空故如彼已住住未謝者久已住者無住初發何以故彼已住故譬如已久住又已住者無住可除何以故去無體故譬如住未謝者如已住中三句顯示未住住時亦復如是以前方便應當驗破如是住義不成有過失故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가 가는 작용과 가는 자가 없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세간의 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세간 사람들은 다 ‘제바달다가 간다 거나, 혹은 야야달다가 간다’고 말한다. 그대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세간과 서로 위배된다. 마치 세간이 다 ‘저것은 달이요’, ‘이것은 달이다’라고 하는 경우 어떤 사람이 ‘이것은 토끼고 달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대도 그와 같다.”
016_0419_c_10L外人言汝言無去及無去者是義不何以故破壞世法故世人咸謂提婆達多去或耶若達多去汝言不與世相違如世皆知彼月是月有人云是兔非月汝亦如是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이 이유를 세웠는데 그 뜻은 무엇인가? 세간이 이해하는 것과 서로 다른가? 자신의 논(論)에서 이해하는 것과 서로 위배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오류가 있는가? 만약 세간이 이해하는 것과 서로 위배된다면,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저 가는 작용과 가는 자는 제일의제 중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간이 이해하는 것에 가는 작용과 가는 자가 있음을 세간에서 나는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논의 이해와 서로 위배된다면 곧 이해한 것이 논파된다는 그러한 뜻인가?
016_0419_c_15L論者言汝立此因復有何義爲與世閒所解相違爲與自論所解相違若爾有何若世閒所解相違者因義不成以故彼去去者第一義中不可得故如是世閒所解有去去者於世諦中我不遮故若言與自論所解相違者卽所解破如是意耶
그대가 이 말을 한다면 주장의 이치를 이해할 수 없다.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용인한 것을 논파하여 이러한 과실을 얻게 된다’는 이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논에서 이하는 것에 나 또한 집착하지 않는다.제일의제 중에는 가는 작용과 가는 자, 그 둘의 자체는 다 용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과 같다. 다시 가령 제일의제 중에 가는 작용과 가는 자 이 둘이 반드시 존재한다면, 어떤 경우는 동일성을, 어떤 경우는 차별성을 구하면 성립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한다면 이 경우는 다 옳지 못하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19_c_22L汝作此說不解義理應如是說汝所受破得此過失是義不然何以故自論所解我亦不以第一義中去及去者此二自體皆不受故如先已遮復次若第一義去及去者此二定有或一或異應可得如是觀察二俱不然如偈曰

가는 법이 곧 가는 자라면
이러한 주장은 곧 옳지 못하네.
가는 법이 가는 자와 다르다면
이 주장도 또한 옳지 못하네.
016_0420_a_05L去法卽去者,
如是則不然
去法異去者,
是義亦不然

이러한 두 부류의 주장은 어째서 옳지 못한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20_a_07L此二種義云何不然偈曰

만약 저 가는 법이
곧 가는 자가 된다고 말한다면
작업을 하는 자와 작업은
곧 일체(一體)가 되는 오류가 있네.
016_0420_a_08L若謂彼去法,
卽是於去者,
作者及作業,
則爲一體過

【釋】이와 같은 말 뜻은 전도된 잘못이 있다. “소리가 항상 한 것 이라면 병도 또한 항상하다. 그것은 작용이기 때문이다”라는 이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만약 병이 작용한다면 상주(常住)라 이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뜻으로 인하여 “서리는 무상하다. 그것은 작용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병과 같이”라는 이러한 말은 신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 가는
작용과 가는 자, 이 둘은 하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작업을 하는 자와 작업이기 때문이다. 마치 베는 자와 베는 대상처럼 이 둘의 현현(顯現)도 다르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는 작용과 가는 자는 서로 다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의 사물과 같다.
016_0420_a_10L釋曰如是語義顚倒過咎如聲是常甁亦是常以其作故此義不成何以若甁是作則不名常以是義故是無常以其作故譬如彼甁此言可如是第一義中去及去者此二不何以故以作者作業故如能斫此二顯現亦不得異何以故以去去者更互俱空故譬如餘物
어떤 사람이 힐난하여 말하였다.
“만약 가는 작용과 가는 자가 서로 다 공하다면 공에는 차별상이 없고 실체가 성립할 수 없다. 그대가 베는 자와 베는 대상을 인용하여 비유를 든 것은 이 주장이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20_a_18L或有難若去及去者更互俱空空無異相體不可得汝引能斫所斫爲譬喩者此義不成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잘못 말하였다. 단지 일체(一體)라는 것을 부정하였을 뿐이다. 이 두 상(相)의 차별은 세간에서 모두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베는 자와 베는 작용이 서로 다 공하다는 이 주장은 성립한다. 마치 깨닫는 주체와 깨닫는 대상 두 가지가 서로 공한 것과 같다. 세제 중에 두 상(相)은 다르기 때문에끌어다 비유로 인용하였다. 비유는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만약 베는 주체와 베는 대상이 제일의제의 경우에서는 두 실체가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양(量)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베는 대상 자체와 같다. 그것이 일체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베는 대상 자체의 다르지 않음은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016_0420_a_21L論者言汝不善說唯遮一彼二相差別世閒悉解如是能斫所斫更互俱空此義成立如能覺覺二更互空於世諦中二相異故爲譬喩非喩不成若謂能斫所斫一義中二體無異何以故以其量故譬如所斫自體彼立一者是義不然何以故所斫自體不異者不成故
어째서 성립하지 못하는가? 제일의제 중에는 동일성과 차별성의 두 극단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제 중에는 주체와 대상이 각각 다르면서도 일체라고 한다면 세간의 이해를 파괴한다. 다시 그대의 뜻이 ‘우리들은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이 일체라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차별성을 용인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다. 앞에서 이미 말하는 것과 같다. 제일의제에서 나는 동일성과 차별성의 두 극단을 모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차별성을 용인하는 오류가 없다.”
016_0420_b_05L故不成以第一義中一異二邊不取受故於世諦中能所各異而言一者破世閒解復次若汝意謂我遮去者及去不一故而受異邊者是亦不然如先已說第一義中一異二邊我皆不取故無受異過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세운 주장은 앞의 오류가 없다. 말하자면 무시이래로 명언희론(名言戱論)의 훈습종자(薰習種子)를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반드시 인연으로써 각각 결과를 일으킨다. 허망분별의 자재력 때문에 이 집착이 있고, 가는 작용과 가는 자에 반드시 차별성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0_b_11L復有人言如我立無前過失謂無始已來名言戲論熏習種子以爲因故決定因緣各各果起虛妄分別自在力故此執欲令去及去者決定有異爲遮彼故如偈曰

만약 저 가는 법이
반드시 가는 자와 다르다고 말한다면.
016_0420_b_15L若謂彼去法,
定異於去者

【釋】세간의 분별에는 부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여실하게 관찰하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무엇이 옳지 못한가?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0_b_16L釋曰世俗分別無有遮者如實觀察義則不然云何不然如偈曰

가는 작용을 떠나서 가는 자가 존재하고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이 존재하네.
016_0420_b_18L離去有去者,
離去者有去

【釋】가는 작용과 가는 자는 어떻게 서로를 떠나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차별성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병과 옷 등과 같이 차별성을 말하는 자도 가는 작용을 떠나서 가는 자가 있고 가는 자를 떠나서 가는 작용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의지하는 주체와 의지하는 대상이 상관(相觀)하여 존재하기 때문이다. 방편이라 해도 제일의제 중에는 가는 작용과 가는 자의 차별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적인 언어가 일어나는 데는 대대(待對)가 존재하기 때문이다.마치 가는 작용의 자체와 같다. 이와 같이 제일의제 중에는 가는 자를 떠나 의 따로 가는 법이 존재한다고 분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차별적인 언어가 일어나는 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가는 자의 자체와 같다.
016_0420_b_19L釋曰此二云何相離而有以其異故如甁衣等彼說異者亦不欲令離去有去者離去者有去以能依所依相觀有故方便說者第一義中不欲令彼去及去者有差別故以差別語起有待對故如去自體如是第一義中不欲分別離去者外別有去法何以以差別語起有待對故譬如去者自體
외도가 말하였다.
“이부(異部)로 회전해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지 못하여 그대는 오류를 얻게 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저 이부에는 실체가 없어 회전의 뜻이 성립한다.”
외도가 말하였다.
“세간에는 스스로 의지하는 주체와 의지하는 대상이 존재한다. 아직 반드시 화합하지 않고도 그대가 대대(待對)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이유 명제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증험의 일부는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016_0420_c_05L外人言異部迴轉不令他解得此過論者言彼異部無體迴轉義外人言世閒自有能依所依未必和合汝言有待對者此因義不成以故於所驗中一分不遍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저 여러 사물에는 이런저런 것이 존재한다. 상관(相觀)하여 다르기 때문에 대대(待對)에는 오류가 없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증험을 말한다면 결국 차별성을 주장하게 된다. 차별성은 앞서 부정하였기 때문에 차별성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부(異部)에는 실체가 없고 또한 두 치우친 견해도 없으며 세간이 이해하는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무엇을 파괴하는가? 지금 이 논에서 진실을 관찰하여 의지하는 주체와 의지하는 대상이 상응하고 화합한다고 말한다면 무루(無漏)의 지혜로 관찰한 경계가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0_c_09L論者言彼諸物等亦有此彼相觀異故待對無過非因不成汝說驗者終是立異異先遮故不異得成異部無體亦非二邊世閒所解亦不破壞云何不破今此論中眞實觀察能依所依相應和合者非無漏慧所觀境界如先所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우리들은 가는 작요, 그밖에 가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지시할 수 있기 때문에 비유하면 ‘제바달다의 말’ 등과 같이 의지하는 주체와 의지하는 대상의 두 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016_0420_c_16L復次或有人言我異於去有彼去可指示故譬如提婆達多及彼馬能依所依二相異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잘못 말하였다. 가는 자의 자체의 뜻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바달다와 말 등이 다르기 때문이라면 그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제일의제 중에는 비유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삿된 지혜를 가지고 여러 원인의 차별상 따위를 분별해도 또한 이 주장으로써 대답해야 할 것이다.”
016_0420_c_18L論者言汝不善說去者自體義不成故提婆達多馬等異故此義不成以第一義中譬喩無體故若有邪慧分別諸因差別等相亦以此義答
다시 비세사(鞞世師) 사람이 말하였다.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이른바 가는 자라는 말은 이 자체 외에 가는 작용이라는 단어의 뜻이 있어마치 제바달다처럼 상응하고 화합한다. 아는 경계에 대하여 전변(轉變)과 부전변(不轉變)하기 때문이니, 푸른색 옷이라는 말처럼 그 외 것이 곧 부분은 아니다. 만약 이와 같지 않다면 저 ‘가는 자’란 말은 마땅히 전변과 부전변의 차별성이 없어야 할 것이다. 비유하면 대유(大有)와 같다.”
016_0420_c_22L復次鞞世師言明智人作如是解謂去者之聲此自體外有去句義相應和合如提婆達多爲所知境界轉不轉故如言靑衣餘則非分若不如是彼去者聲應無轉不轉異譬如大有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차별성을 주장함으로써 증험을 세운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가는 작용과 가는 자 이 둘이 화합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에 증험도 성립하지 못한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른바 여러 가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자체 이외에 단어 뜻과 화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둘 혹은 셋 내지 무량한 제바달다 등이다. 전변과 부전변을 증험함으로써 이유가 부정인[非一向]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016_0421_a_04L論者言汝立此異以爲驗者是義不然何以故所依能依相應無體去與去者此二和合先已遮故驗亦不成云何知耶謂多同名人彼自體外句義不合謂若二若三乃至無量調達等也以此驗知轉不轉聲因非一向故
외도가 말하였다.
“간별(簡別)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록 같은 이름이라도 이 흑장(黑長)의 제바달다에는 가는 작용이란 말이 여기서 전변하고 그밖에는 전변하지 않는다. 이 뜻으로 인하여 나의 이류 명제는 성립한다. 부정인이 아니다.”
016_0421_a_10L外人言有簡別故雖同一名而彼黑長調達者去聲於此轉餘則不轉以是義故我因得成非非一向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처럼 흑장(黑長)의 제바달다는 제일의제 중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유 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마치 푸른 색 옷의 비유와 같다. 또한 경계는 제일의제 중에 다 성립하지 못한다. 만약 존재한다고 말하면 ‘가는 작용은 가는 자와 다르다는 차별을 깨닫기 때문이다’라고 그와 같이 증험을 세운다면, 앞의 이유와 비유처럼 논파된다.
016_0421_a_13L論者言如汝所言黑長調達第一義中以無體故因義不如靑衣喩及境界者第一義中皆不可得若有說言去異去者覺差別如此立驗者同前因喩破
다시 만약 그대가 내가 동일성을 부정하여 차별성을 주장하거나 차별성을 부정하여 동일성을 주장해도 끝내 차별성을 다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이 성립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동일성과 차별성을 다 부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 증험의 힘으로 두 치우친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논파된다. 이 경계의 깨달음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날 수 있는가? 지혜로운 사람이 이미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내가 가는 자와 가는 작용의 다르지 않음을 부정한다는 주장 명제를 분별하여 비차별성을 받아들인다면 나에게는 오류가 없다.
016_0421_a_17L復次若汝謂我立一遮異立異遮一終不離異故遮異不成者是義不然何以故一異俱遮先已說故以此驗力破著二彼境界覺何因得起智人已解我無過是故汝言我遮去者與去不立義分別受不異者我無此過
다시 그대가 만약 세심하게 관찰하여 내가 위에서‘비유하면 가는 자의 자체와 같다’고 말한 것에 집착하여 비차별성이기 때문에 주장이 성립하지 못하고, 비유할 실체가 없으므로 나에게 과실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는 자의 실체 외에 다시 차별적인 법은 없다. 가는 자의 실체는 성립 못한다. 실체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비유에 오류가 없다. 이와 같이 비세사 사람과 여러 식강(食糠) 외도 등은 자신의 오류를 은폐시켜 바른 이치를 허물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증험은 다 성립하지 못한다.”
016_0421_a_23L次汝若細心觀察取我上言譬如去者自體不異故立義不成以譬喩無與我過失者是說不然何以故者體外更無異法無異法故去者體以體成故譬喩無過如是鞞世師諸食糠等覆藏己過欲壞正理先所說驗皆不成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앞에서 가는 작용을 부정한 것을 지금 버리고 이에 다시 그 밖의 것을 논의하여 ‘같거나 다른 경우에도 가는 작용과 가는 자 둘 다 성립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 아니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1_b_07L復有人云汝先遮今則棄捨乃更論餘若一若異及去者二皆不成此非善說者不然如偈曰

가는 자와 가는 작용 둘은
동일성과 차별성을 성립시키네.
016_0421_b_10L去者及去二,
爲一異故成

【釋】가는 자와 가는 작용은 같은가, 다른가? 그 둘은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領受]할 수 있는가? 만약 방편으로 동일성이나 차별성을 말하는 것은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016_0421_b_11L釋曰去者去二爲一爲異有彼二故可領受耶若方便說或一或異者偈曰

저 둘이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가는 작용이 있는가?
016_0421_b_14L彼二無有成,
云何當有去

【釋】저 가는 작용을 이미 부정하여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으로 인하여 동일성 등의 분별을 그와 같이 부정하였다. 세제 중에 저 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대의 의도가 제일의제 중에 동일성과 차별성이 가는 자와 가는 작용에 성립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와 같은 주장은 없다. 동일성과 차별성에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집착하여 존재한다고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려는 것은 옳지 못한다.
016_0421_b_15L釋曰彼去已遮非欲捨故由如此義一等分別亦如是遮於世諦中彼二有故應知如汝意謂第一義中若一若異去者去成無如此義一異體無而執爲有令人解者是義不然
총명하지만 거만한 어떤 사람이 “그대가 ‘제일의제 중에는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이 없다. 동작하기 때문이니 그 밖의 사물과 같다. 이와 같이 머무는 자에게는 머무는 작용이 없다. 동작하기 때문이니, 마치 저 제바달다의 가는 작용이 아직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이 앞의 두 증험은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가?동작을 하기 때문이라면 외계(外界)의 동작자(動作者)가 종작과 비동작을 하는 것인가? 장차 몸의 동작자가 동작과 비동작을 하는 것인가? 외계의 작용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비유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차별성으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016_0421_b_20L或有聰明慢人作如是說汝言第一義中無去者去以作動故如彼餘物如是住者無住以作動故如彼調達去未謝者此前二驗爲何所顯作動作者爲當外動作者此作不作耶爲當身動作者此作不作耶若言外作不作則譬喩不成以彼異作作故
만약 몸의 동작자가 동작과 비동작을 한다면 그대의 주장과 서로 위배된다. 말을 하는 자가 말을 하기 때문이며, 베는 자가 베기 때문이다. 저 가는 작용 역시 그러하다. 몸이 이미 동작하였는데 무엇을 비동작이라 하는가? 이와 같이 실수로 말한 증험은 이 주장을 성립시키지 못한다.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016_0421_c_04L若言身作不作者則與義相違以語者語斫者斫故彼去亦然身旣動作名不作如是先所說驗此義不成過失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저 다른 가는 작용을 짓지 못한다. 이 뜻으로 인하여 저 머무는 자 등의 비유는 성립한다. 그대가 말한 오류와 같은 것이 지금 다시 그대에게 있다. 비유가 이미 성립하였고 또한 주장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위배되지도 않는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1_c_08L論者言彼異作者不作去作以是義故彼作者等譬喩得成如所說過今還在汝譬喩旣成亦不違義云何不違如偈曰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저 가는 작용은 곧 가지 않네.
016_0421_c_11L因去了去者,
彼去則不去

【釋】“저 가는 작용은 가지 않네”란 말하자면 제일의제 중에 저 가는 작용을 짓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별성이 없기 때문이니, 마치 가는 작용의 자체와 같다. 이는 말하자면 차별성이 없다는 말은 자신의 증험을 부정하기 때문이며, 세간에서 이해하는 바를 모두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016_0421_c_12L釋曰彼去不去者謂第一義中不作彼去何以故以無異故如去自體謂說無異者自驗破故亦破世閒所共解故何以故如偈曰

마치 사람이
마을 등으로 가는 작용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네.
016_0421_c_16L如見有是人,
往村等去故

【釋】저 인체(人體) 밖에 따로 마을 등이 존재한다고 세간 사항은 모두 이해한다.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저 가는 작용은 곧 가지 않네”란 무슨 뜻인가? 이로 인하여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016_0421_c_17L釋曰彼人體外別有村等世閒悉解復次因去了去者彼去則不去此義云何爲此故如偈曰

먼저 가는 법은 존재하지 않아
가는 자의 가는 작용은 없네.
016_0421_c_20L先無有去法,
故無去者去

【釋】마치 머무는 자의 자체가 가는 작용의 원인이 되어 가는 작용을 하는 것과 같으니, 가는 자는 없기 때문이다. 비록 가는 자가 없더라도 세제 중에 의욕(意欲)이 원인이 되고 이어 공용(功用)이 발생하여 풍계(風界)가 자재(自在)하여 어디서건 쉴 사이 없이모든 행취(行聚)가 생기고 시간을 달리하여 찰나찰나 앞뒤의 상(相)이 다르다. 이들이 생기하므로 ‘가는 가’라 이름 한다.
016_0421_c_21L釋曰如住者自體得爲去因而作於無此去者故雖無去者而世諦中意欲爲因次生功用風界自在處邊無閒諸行聚起時節差別剎那剎那前後相異此等起故名爲去者
세제에서는 실체로서 이와 같이 작업하는 자가 작업하는 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마치 사람이 마을 등으로 가는 작용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네”라고 말하였다. 자체는 자체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여러 자부(自部)의 무리들은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저 가는 작용은 곧 가지 않네”라는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016_0422_a_03L於世諦中實不欲令如是作者爲作者因是故偈言如見有是人往村等去故非以自體爲自體因如是諸自部輩因去了去者彼去則不去此義應知
다시 승거 사람이 말하였다.
“지(地) 등의 취집(聚集)에 의해 달리 신종(身種)이라 이름하고, 저 미진이 증장하는 것을 가는 작용[去]이라 한다. 이와 같이 가는 작용의 결과는 취인(聚因)에 의지한다. 가는 작용이 사람과 화합한 것을 가는 자라 하는데, 이 집착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아직 가지 않은 순간에는 가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직 가지 않은 순간을 ‘가는 자’라 한다면, 이와 같이 머무는 자도 역시 마땅히 가는 작용이라 이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약 저 이미 간 자가 가는 작용의 원인이 된다면 이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앞의 게송에 ‘마치 사람이 마을 등으로 가는 작용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네’라고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저 가는 작용은 가는 것을 만들 수 없다.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016_0422_a_07L復次僧佉人言由地等聚集別名身彼塵增長故稱爲去如是去果依止聚因去和合人名爲去者此執不何以故彼未去時無去者故若未去時名爲去者如是住者亦應名去而實不然若謂彼已去者爲彼去因是亦不然何以故如先偈言如見有是人往彼村等故此義云何如是彼去不能作去應如此知
외도가 말하기를 “발생 작용이 있기 때문에 싹이 발생한다. 마치 지혜로운 사람이 스스로 지혜를 발생시키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그 집착은 옳지 못하다. 다만 허망 된 분별일 뿐이다. 싹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발생은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발생 작용을 말한다면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이와 같이 가는 자의 자체가 가고, 말하는 자의 자체가 말하고, 베는 자의 베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다 옳지 못하다.
016_0422_a_16L有外人言生作故說爲芽生猶如智人自生智此執不然但妄分別以芽未生時生無所作而言生作此義不然如是去者自體去說者自言說斫者自斫此皆不然
왜냐하면 자체가 스스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 의욕(意慾)의 원인이 되어 이어 공용(功用)이 일어나고 작용 등의 원인의 처(處)에서 그 언어와 음성의 행취(行聚)가 발생하는 것을 ‘말하는 자’라 이름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언어의 자체가 존재한다고 집착한다면 이는 곧 옳지 못하다.이와 같은 말에 앞서 말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는 이와 같은 주장은 없다.
016_0422_a_21L何以故自體自作義不然故由彼意欲爲因次起功用處作等因生彼字句音聲行聚名爲語者而執有別語言自體者此則不然是語先名爲語者無如此義
다시 비세사 사람이 말하였다.
“앞에서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저 가는 작용은 곧 가지 않네’라고 말한 것처럼 그대는 비록 이미 논파하였으나, 그대의 주장은 또한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저 가는 자 이외에 따로 가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나는 앞에서 말한 오류가 없다. ‘따로’란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실체를 깨닫는 것과 업을 깨닫는 것이다. 이 둘은 같지 않다. 경계가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소와 물소의 두 뿔이 서로 다른 것과 같다. 만약 다르지 않다면 이 둘의 경계는 차별이 없으니, 비유하면 소뿔의 자체와 같이 논자가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저 가는 작용은 곧 가지 않는다’고 설한 그 오류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지금 그대가 주장한 그 차별성을 부정한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2_b_02L復次鞞世師言如先所說因去知去者彼去則不去汝雖已破義又不然何以故彼去者外別有去法以是義故無前過失別義云何謂實覺業覺此二不境界別故譬如牛與水牛二覺相若不異者彼二境界則無差別如牛覺自體論者言因去了去者去則不去此過如前說今遮彼異偈曰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다른 가는 작용으로도 또한 가지 못하 것과 같다.
016_0422_b_11L因去了去者,
異去亦不去

【釋】저 차별성을 주장하여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려 하는 것은 증험할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2_b_12L釋曰彼立異者令他得解驗無體故如偈曰

이 사물과 저 사물의
차별성이 성립하지 못하네.
016_0422_b_14L此物與彼物有異者不成

【釋】제일의제 중에 법성(法性)은 그와 같기 때문에 나의 비유는 성립할 수 있다. 다시 “가는 작용으로 인하여 가는 자를 요별하니 다른 가는 작용으로도 또 한 가지 못한다”는 그 뜻은 무엇인가?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422_b_15L釋曰第一義中法性如是故我譬喩得成復次因去了去者異去亦不去此義云何偈曰

가는 자는 하나인데
가는 작용이 둘이란 것은 옳지 못하네.
016_0422_b_18L去者是一故,
去有二不然

【釋】어째서 옳지 못한가? 증험을 세우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제일의제 중에는 가는 자의 실체 이외에 다른 가는 작용의 감은 없다. 왜냐하면 두 법이 화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머무는 자와 같다.
016_0422_b_19L釋曰何故不然立驗知故以第一義去者體外無異去去何以故以不合二去故譬如住者
다시 식강 외도가 말하였다.
“내가 주장한 바와 같이 오직 하나의 가는 작용만이 있다. 가는 작용과 가는 주체가 화합한 것을 ‘가는 자’라고 이름한다. 이 차별성 때문에 능히 가는 작용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저 가는 작용을 행동하기 때문이다.마치 어떤 사람이 ‘조달이 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또한 저 등(燈)과 불[火]이 화합하여 원인이 되는 것을 이름하여 등불이라 한다. 그대가 앞에서처럼 ‘가는 자는 하나인데 가는 작용이 둘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네’라고 말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016_0422_b_22L復次食糠者言如我立義唯有一去去與者合名爲去者由此異故能爲去因以作彼去如有人言彼調達去又如彼燈與明爲因名曰燈明如汝先說去者一去二不然義不應爾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는 잘못 말하였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일의제에서 모든 원인의 힘 등의 가는 작용과 미래의 발생은 이미 다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가는 자는 가는 작용의 화합 원인이 되지 못한다. 소리를 내는 것은 깨달음의 다른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업(業)과 같다. 이 증험으로 인하여 그대의 가는 작용과 가는 자의 화합이란 말은 허망 된 말뿐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직 가는 작용과 화합하지 않은 순간에는 ‘가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머무는 자와 같다. 그러므로 저 가는 자와 화합한다는 그 주장은 옳지 못하다. 다시 이치대로 잘 관찰하면 가는 작용과 가는 자는 성립할 수 없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2_c_04L論者言汝非善說如前所說諸因力等第一義中去及未起皆已遮故復次去者不爲去和合因以起聲覺別因故譬如彼以此驗知汝言去與去者和合妄說耳何以故若人未與去和合時非去者譬如住者而言與彼去者和是義不然復次如理諦觀去及去者不可得故如偈曰

실체로서 있거나 실체로서 있지 않거나,
또한 실체이면서 실체가 아닌 것으로서 있는
그와 같이 세 가지 가는 자에게는
각각 세 가지 가는 작용이 필요 없네.
016_0422_c_12L有實無有實,
亦有實無實,
如是三去者,
各不用三去

【釋】실체로서 있다는 것은 이른바 가는 작용과 화합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가는 작용이라 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경우에는 세 가지 가는 작용이 쓸모없다. 말하자면 실체로서 가는 자는 가지 못하고, 비실체로서 가는 자도 가지 못하며, 또한 실체이면서 비실체인 가는 자도 가지 못한다. 동작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혹은 비실체로서 가는 자에게도 또한 세 가지 가는 작용은 없다. 가는 작용은 공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머무는 자와 같다.
016_0422_c_14L釋曰有實去者謂與去和合故名爲有去此義云何若有實去者不用三謂有實去不去無實去不去亦俱去不去以作動故譬如餘物若無實去者亦無三去以去空故譬如住者
저 실체이면서 비실체인 가는 작용과 가는 자는 앞의 증험처럼 논파된다. 가는 자가 논파된 듯이 가는 법도 그러하다. 주장 명제와 이유 명제와 비유 명제가 방편임을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한다. 도리(道理)와 경[阿含]에 의해 관찰해 보면 모든 순간에 세 가지 가는 작용이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422_c_19L彼俱去去者同前驗破如破去者法亦然立義出因引譬方便應如此由依道理阿含二種觀察於一切時三去不成故如偈曰

그러므로 가는 작용에는 자성이 없으며
가는 자 역시 그러하네
가는 시간 및 모든 법
일체는 무소유(無所有)이네.
016_0422_c_23L是故去無性,
去者亦復然,
去時及諸法,
一切無所有

【釋】앞에서 증험을 세워 가는 작용과 가는 자를 논파했듯이 그밖에 작용법[作法] 또한 열거하여 부정해야 한다. 이 품에서는 가는 작용이 무자성임을 밝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닌 특수한 연기의 뜻이 그리하여 성립할 수 있음을 이해시키려고 하였다.
016_0423_a_02L釋曰如先立驗破去去者諸餘作法亦應例遮此品中明去無自性者令信解無來無去別緣起義是故得
마치 『무진혜경(無盡慧經)』에서 “가는 작용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것을 성스런 거래(去來)라고 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또한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婆羅蜜多經)』에서 “선남자여, 여래는 오는 곳도 없고 또한 가는 곳도 없어 여래라고 이름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또한 『무언설경(無言說經)』에서 “가고 오는 것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법은 허공과 같다”고 설하는 것같이, 또한 『반야바라밀다경(般若婆羅蜜多經)』에서 “저 미진(微塵) 등은 또한 오는 곳도 없고 가는 곳도 없다. 저 가는 작용과 오는 작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하는 것처럼, 또한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에게 “선남자여, 색법(色法)의 가는 작용과 오는 작용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또한 그와 같다. 5음(陰)의 거래를 볼 수 없으며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이름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경전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다. 「관거래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423_a_06L如『無盡慧經』中說無去無來者爲聖去來又如『金剛般若經』說善男如來者無所從來亦無所去故名如來又如『無言說經』曰來去無有實諸法如虛空又如『般若波羅蜜經』說彼微塵等亦無所從來亦無所去彼去來不可見故又如佛告極勇猛菩薩言善男子色法去來不可見故受想行識亦復如是五陰去來不可見者是名般若波羅蜜如是等諸修多羅此中應廣說
釋「觀去來品」竟
般若燈論釋卷第三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