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解脫道論卷第二

ABC_IT_K0968_T_002
028_1016_b_01L해탈도론 제2권
028_1016_b_01L解脫道論卷第二


아라한 우파저사양나라 말로 대광 지음
양 부남삼장 승가바라 한역
이태승 번역
028_1016_b_02L阿羅漢優波底沙梁言大光造
梁扶南三藏僧伽婆羅譯

3. 두타품(頭陀品)
028_1016_b_04L頭陁品第三

【문】그때 정계(淨戒)를 지니며 좌선하는 사람이 마음으로 뛰어나고 착한 공덕을 성취하고자 한다면, 또 두타(頭陀)의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성취하여야 한다. 왜 이 두타의 공덕을 수용하는가?
028_1016_b_05L爾時淨戒坐禪人心欲成就勝善功德又爲欲得頭陁功德當如是成何故受此頭陁功德
【답】좌선인은 그 성(性)이 한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며, 욕심을 줄이기 위해, 만족할 줄 알기 위해, 의심이 없기 위해, 애욕을 없애기 위해, 용맹정진을 증장시키기 위해, 스스로 작게 경영하여 밖에서 보시를 받지 않기 위해, 안주하기 위해, 집착을 끊고 계를 잘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모든 정(定)의 온갖 도구이며, 이것은 최초의 성종(聖種)이며, 이것은 수승한 공덕관(功德觀)이다.
028_1016_b_08L爲坐禪人性不一種爲於少欲爲於知足爲於無爲於滅愛爲欲增長勇猛精進爲自少營不受外施爲於安住爲斷所著守護戒善是諸定衆具是初聖是勝功德觀
무엇을 두타라 하는가.
何者爲頭陁
13법이 있다. 2법은 의상응(衣相應)이니, 곧 분소의(糞掃衣)와 3의(衣)이다. 5법은 걸식상응(乞食相應)이니, 곧 걸식ㆍ차제걸식(次第乞食)ㆍ일좌식(一坐食)ㆍ절량식(節量食)ㆍ시후불식(時後不食)이다. 5법은 좌와상응(坐臥相應)이니 첫째는 무사처좌(無事處坐), 둘째는 수하좌(樹下坐), 셋째는 노지좌(露地坐), 넷째는 총간좌(冢間坐), 다섯째는 우득처(遇得處)이다. 좌(坐)의 하나인 용맹상응(勇猛相應)에 한 종류가 있으니 즉 상좌불와(常坐不臥)이다.
028_1016_b_13L有十三法二法衣相應謂糞掃衣及三衣五法乞食相應謂乞食次第乞食一坐食節量食時後不食五法坐臥相應無事處坐二樹下坐三露地坐四冢閒坐五遇得處坐一勇猛相應有一謂常坐不臥
【문】무엇이 분소의인가?
云何糞掃衣
【답】성(性)은 능히 수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이라 한다. 나머지도 또한 그와 같다.
028_1016_b_19L性能受持是謂爲性餘亦如是
무엇이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거사의 보시를 받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028_1016_b_20L云何受糞掃衣斷居士施
무엇이 3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여분의 옷[長衣]을 소유하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028_1016_b_21L云何受三衣謂斷長
무엇이 걸식인가. 타인의 청(請)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云何乞食謂斷他請
무엇이 차제걸식인가. 소위 건너 뛰어 걸식하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028_1016_b_22L云何次第乞謂斷超越乞
028_1016_c_02L무엇이 일좌식인가. (식사를 끝내고 일어섰으면) 다시 앉지 않는 것이다.
028_1016_c_02L云何一坐食謂不再
무엇이 절량식인가. 탐욕을 끊는 것이다.
云何節量食斷於貪恣
무엇이 시후불식인가. 후에 바라는 것을 끊는 것이다.
028_1016_c_03L云何時後不食謂斷於後望
무엇이 무사처좌인가. 취락에 머무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028_1016_c_04L云何無事處坐斷聚落住
무엇이 수하좌인가. 집에 머무는 행위를 끊는 것이다.
云何樹下坐斷屋舍住
무엇이 노지좌인가. 갖가지 덮인 곳을 끊는 것이다.
028_1016_c_05L云何露地坐斷衆覆處
무엇이 총간좌인가. 다른 좋은 곳을 끊는 것이다.
028_1016_c_06L云何冢閒坐餘勝處
무엇이 우득처좌인가. 좋은 곳을 탐하는 것을 끊는 것이다.
云何遇得坐斷貪樂處
무엇이 상좌불와인가. 침상을 멀리하는 것이다.
028_1016_c_07L云何常坐不臥謂離寢寐
왜 분소위를 수지하는가. 거사의 옷에는 구걸해야 하는 등등의 과실이 있는 것을 보고, 또 납의(納衣)를 수지하는 공덕을 보았다. 나는 이와 같이 봄으로써 거사의 보시를 끊고 그 까닭에 납의를 수지한다.
028_1016_c_08L何故受糞掃衣見居士衣有求乞等過復見受持納衣功德我見如是斷居士施故受納
무엇이 납의를 수지하는 공덕인가. 거사의 옷과 비슷해 수지하여도 허물이 없고, 얻는데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잃어도 근심하지 않고, 마음에 탐심이나 염착이 없고, 도적들도 가져가지 않고, 항상 사용하기에 족하고, 경영하는 것이 적다. 선량한 사람들이 배울 바가 이 행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수승한 선과 상응하여 현법(現法)에서 즐겁게 머물면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하게 하고, 정수(正受)를 얻게 한다. 이것이 납의의 공덕으로 부처님께서 칭찬하는 것이다.
028_1016_c_11L云何受納衣功德以似居士衣受持無闕得不由他失亦不憂心無貪盜賊不取足用常用少所經營人所習是行無疑勝善相應現法樂令人欣慕使得正受是納衣功德佛所稱歎
【문】납의에는 몇 종류가 있고, 누가 수지하며, 어떤 인연으로 잃게 되는가?
028_1016_c_16L納衣有幾何人受持因而失
【답】납의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지키는 주인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 사람이 버리는 것이다.
028_1016_c_17L納衣有二種一無主守護二世人所棄
무덤이나 혹은 쓰레기더미에서 혹은 저자에서 혹은 도로에서 주워 자르고, 염색하고, 잇고, 재봉하고, 완성시켜 수지하는 것, 이것을 주인이 없는 것[無主]이라 한다. 자르거나 뚫고 남은 여분, 혹은 소나 쥐가 갉아먹은 것, 혹은 불에 탄 것, 혹은 사람이 버린 시체를 싸는 옷 및 외도의 옷을 세상 사람이 버리는 것이라 한다.
028_1016_c_18L或於冢閒或於糞掃於市肆或於道路拾翦浣染掩緝裁成就受持此謂無主或翦鑿之餘牛鼠所嚙或火所燒或人所擲施覆尸衣及外道服此謂世人所棄
무엇이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만약 비구가 거사의 보시를 끊는다면 이것을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이라 한다.
028_1016_c_22L云何受糞掃衣若比丘斷居士施是謂受糞掃衣
무엇이 잃는 것인가. 만약 비구가 거사의 보시를 받는다면 이것을 납의를 잃는 것이라 한다.
028_1016_c_24L云何失若比丘受居士施謂失納衣
028_1017_a_02L왜 3의를 수지하는가. 여분의 옷이 있으면 모름지기 정시(淨施)하고 수호하고 수착(受著)해야 하는 이런 등등의 과실이 있음을 알고, 3의의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여분의 옷을 버리고 따라서 3의만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7_a_02L云何受三衣爲有長衣應須淨施守護受著知是等過見三衣功德我從今日棄捨長衣故受三衣
무엇이 3의를 수지하는 공덕인가. 착한 사람이 행할 바이고, 비축한 것을 떠나 오래토록 노닐 수 있고, 해야 할 일이 적고, 몸에 지닌 것만으로 만족할 줄 알고, 허공을 나는 새처럼 돌아보며 연연할 것이 없다. 선량한 사람들이 배울 바가 이 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a_04L何受三衣功德善人所行離畜遊長少於營造約身知足如鳥飛空無所顧戀善人所習是法無疑
【문】무엇을 3의라 하고, 무엇을 수지하는 것이라 하며, 무엇을 잃는 것이라 하는가?
028_1017_a_07L云何名三衣云何爲受云何爲失
【답】소위 승가리ㆍ울다라승ㆍ안다회1) 이것을 3의라 한다.
028_1017_a_08L謂僧伽鬱多羅僧安陁會此謂三衣
무엇이 3의를 수지하는 것인가. 만약 비구가 여분의 옷을 축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3의를 수지하는 것이다. 만약 네 번째 옷을 받으면 이것을 “잃는다[失]”고 한다.
028_1017_a_09L云何受三衣若比丘不畜盈長是受三衣若受四衣是名爲失
왜 걸식을 수지하는가. 만약 타인의 청(請)을 받으면 곧 자신의 업이 방해를 받게 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못하며, 법답지 못한 비구와는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지 못하게 된다. 이런 과실을 알고, 또 걸식의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남의 청을 받는 것을 끊고 걸식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7_a_11L云何受乞食受他請則妨自業不爲悅人不與非法比丘接膝共坐知是過患復見乞食功德我從今日斷受他請受乞食
무엇이 걸식의 공덕인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고 머묾이 자유스럽고, 반찬을 곁들여 올리기를 바라지 않고, 해태를 말끔히 제거하며, 교만을 완전히 없애고, 맛있는 음식을 탐하지 않으며, 중생을 요익하며, 항상 4방에 마음이 걸림이 없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법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a_15L云何乞食功德依心所願進止自不希供膳消除懈怠斷滅憍慢貪嗞味饒益衆生常於四方心無限善人所行是業無疑
【문】청(請)에는 몇 종류가 있으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028_1017_a_18L請有幾種云何爲受云何爲失
【답】청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식청(似食請), 둘째는 취청(就請), 셋째는 과청(過請)이다. 이 세 종류의 청을 제외하면 걸식을 수지하는 것이고, 만약 세 종류의 청을 받으면 이것은 걸식을 잃는 것이다.
028_1017_a_19L請有三種一似食請二就請三過請除此三種請乞食若受三請是失乞食
왜 차제걸식을 수지하는가. 만약 차례대로 간 곳[次第處]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얻었다면 그 집은 거듭 찾아가지 않는다. 만약 그 집을 다시 찾아가면 곧 상식(常食)2)을 받는 것이다. 만약 의심스러운 곳이 있으면 역시 멀리 떠나야 한다. 이러한 과실을 보고, 또 차례대로 걸식하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차례를 따르지 않는 걸식은 버리고 차례를 따르는 걸식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7_a_21L云何受次第乞食若於次第處得多美味則不重往若其重往則受常食若有疑處亦應遠離知是過患復見次第功德我從今日捨非次乞受次第乞
028_1017_b_02L무엇이 차제걸식의 공덕인가.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를 요익하게 하고, 증오와 질투의 악을 없애며, 유압(遊狎)의 허물을 끊고,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을 싫어하며, 말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인가를 멀리하며, 빠른 걸음을 하지 않고, 간간이 나타나는 달처럼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b_02L云何次第乞功德以平等心饒益一切除憎嫉惡斷遊狎過不喜喚召不樂多語遠人宅舍離於疾行如月希現人所瞻仰善人所行是業無疑
【문】무엇을 차제걸(次第乞)이라 하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028_1017_b_06L何名次第乞云何爲受云何爲失
【답】만약 비구가 처음 걸식을 하러 취락에 들어가면 마지막 집으로부터 비로소 차제가 된다. 이것을 차례대로 행하는 걸식이라 한다. 무엇이 잃는 것인가. 옆집을 건너뛰는 것을 잃는 것이라 한다.
028_1017_b_07L若比丘始行乞食入於聚落從最後家以爲初次此謂次第行乞云何爲謂超越鄰比是名爲失
왜 일좌식(一坐食)을 수지하는가. 소위 두 좌처에 자주 앉아 자주 음식을 받고 자주 발우를 씻는 이런 짓과 반대되는 것을 일좌식이라 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과실을 알고, 일좌식의 공덕을 보았다. 따라서 “나는 오늘부터 두 자리에서 먹는 것을 버리고, 한 자리에서만 먹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수지해야만 한다.
028_1017_b_10L云何受一坐食謂於二坐處數坐數受食數洗與此相違名一坐食善人所行是業無疑知如是過見一坐食功德是故應受我從今日捨二坐食受一坐食
무엇이 일좌식의 공덕인가.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부정시(不淨施)를 탐하지도 않고, 모든 병의 고뇌도 없고, 기거하는데 방해도 없고, 자신의 일을 편안하게 즐긴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b_15L云何一坐食功德不多不少貪不淨施無諸病惱起居無妨自事安樂善人所行是業無疑
【문】무엇이 일좌식을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변(邊)이 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028_1017_b_17L云何受一坐食云何爲邊云何爲失
【답】변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즉 좌변(坐邊)ㆍ수변(水邊)ㆍ식변(食邊)이다.
028_1017_b_18L邊有三種謂坐邊水邊食邊
무엇이 좌변인가. 먹고 나서도 여전히 앉아있는 것이다. 물을 받아 발우를 씻었다면 다시 먹을 수 없다. 이것을 수변이라 한다. 무엇이 식변인가. 만약 췌식(揣食)3)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고 삼켰다면 다시 먹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식변이라 한다. 만약 두 자리를 거쳤다면 곧 일좌식을 잃는데, 물과 약 등은 제외다. 이는 모든 부처님께서 탄식하는 바로서 이것을 식변이라 한다.
028_1017_b_19L云何坐邊已猶坐受水洗鉢不得更食此謂水云何食邊若於揣食生最後想不更食此謂食邊若經二坐則失一食除水藥等諸佛所嘆此謂食邊
028_1017_c_02L왜 절량식(節量食)을 수지하는가. 만약 먹고 마심에 절도가 없으면 몸이 불고 잠이 많아지며, 항상 탐락을 일으켜 먹는 것이며 싫어하는 바가 없게 된다. 이런 과실을 알고 나서 적당히 먹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결코 멋대로 탐내지 않고 음식을 적당히 먹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7_b_23L云何受節量食若飡飮無度增身睡常生貪樂爲腹無厭知是過已節量功德我從今日斷不貪恣受節量食
무엇이 절량식의 공덕인가. 먹는 양을 조절해 배에 무리가 가지 않고, 많이 먹으면 해이한 마음만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 좋아하지 않으며, 탐욕을 없애고, 병을 소멸하며, 모든 게으름을 끊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c_04L云何節食功德籌量所食不恣於腹多食增羸知而不樂除貪滅病斷諸懈怠善人所行是業無疑
【문】무엇이 절량식을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028_1017_c_06L云何受節量食云何爲失
【답】만약 음식을 받으면 필요한 양보다 많은지 적은지를 스스로 사유해야만 한다. 그렇게 일정한 기준을 정해 여분의 음식을 취하지 않고, 적절한 양을 헤아리는 것을 잘 알아 절제 없음을 끊는 것, 이것을 절량식이라 한다. 만약 그와 같지 않다면 이것이 곧 잃는 것이다.
028_1017_c_07L若受飯食自思惟所須多少以爲常准不取長善知籌量斷無期度謂節量食不如是此則爲失
왜 시후불식(時後不食)을 수지하는가. 바라는 생각을 끊고, 여분의 음식을 떠난다. 이런 과실을 알고, 시후불식의 공덕을 보아 “나는 오늘부터 여분의 음식을 끊고 식사시간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7_c_10L云何受時後不食斷於望想離於長食知是過患見時後不食功德我從今日斷於長食受時後不食
무엇이 시후불식의 공덕인가. 탐락하는 바를 끊고, 그 몸을 절도 있게 보호하며, 숙식(宿食)4)을 떠나고, 구하는 바를 없애며, 다른 사람에게 알려야 할 것이 없고, 마음의 욕심에 따르지도 않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c_13L云何時後不食功德斷所貪節護其身離於宿食息所營求告於他不隨心欲善人所行是業無
【문】시후(時後)에는 몇 종류가 있으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며, 무엇이 잃는 것인가?
時後幾種云何爲受云何爲失
【답】시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소위 불절변(不節邊)과 수지변(受持邊)이다.
028_1017_c_16L時後有二種謂不節邊受持邊
무엇이 불절변인가. 만약 여분의 음식을 받으면 별청(別請)의 죄를 얻게 되므로 다시 먹어서는 안 된다. 무엇이 수지변인가. 이미 스물한 덩이의 음식을 먹었다면 다시 받아서는 안 된다. 시후불식은 곧 여분의 음식을 끊는 것이다. 만약 여분의 음식을 받으면 시후불식을 잃는다.
028_1017_c_17L何不節邊若受長食得別請罪不當更食云何受持邊已食二十一揣食當更受時後不食則斷於長若受長失時後不食
왜 무사처(無事處)5)를 수지하는가. 도성은 시끄럽고 복잡해 식이 5진(塵)과 접촉하고 마음이 즐거움에 물들게 된다. 만약 시끄러운 곳에 머물면 오고 감이 번잡하다. 이런 과실을 알고, 또 무사처의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을 그만두고 무사처에서 지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7_c_21L云何受無事處國中喧雜識觸五塵心生染樂若住鬧處去來紛動知是過患復見無事處功我從今日斷國中住受無事處
028_1018_a_02L무엇이 무사처의 공덕인가. 시끄럽고 복잡한 도성에서 식이 5진과 접촉하고 마음이 즐거움에 물드는 것을 벗어나고, 시끄러운 곳에서 머물 때의 오고 가는 번잡함을 벗어난다. 열 가지 말[語]의 공덕을 보고, 가장 수승하고 사랑스러우며, 천인이 환희하고, 속인과 어울리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고 고요함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며, 고요한 행복 속에서 소리가 적고, 마음으로부터 선(禪)에 들어 좌정하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7_c_24L何無事處功德離於國中喧雜識觸五塵心生染樂若住鬧處去來紛動見十種語功德最勝可愛天人歡喜不樂狎俗樂得寂寂樂少聲從心禪善人所行是業無疑
【문】무엇이 최후의 무사처이고,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028_1018_a_06L云何最後無事處云何爲受云何爲失
【답】나라의 도성을 떠나 교외에 머물고, 변경지역을 피해 중인의 4주(肘) 500궁(弓)6) 이내를 선택하는 것, 이것을 최후의 무사처라 한다. 나라 안에 머무는 것을 제외하는 것, 이것을 무사처라 한다. 만약 나라 안에 머물면 곧 무사처를 잃는 것이다.
028_1018_a_07L離於國拪處郊外避於邊遠取中人四肘五百弓內是最後無事處除國中住此謂無事處若住國中則失無事處
왜 수하좌(樹下坐)를 수지하는가. 지붕이 있는 곳[覆處]을 버리고 축적하거나 수리하거나 욕심으로 받거나 찾아 구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과실이 됨을 알고, 나무아래에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지붕이 있는 곳을 끊고 나무아래에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8_a_10L云何受樹下坐捨於覆處不積畜治貪受求索知是爲過見樹下功德我從今日斷於覆處受樹下住
무엇이 수하좌의 공덕인가. 사랑할만한 행복에 의지하고, 세속과 교류하지 않으며, 작무(作務)를 벗어난 것을 즐거워하고, 하늘과 함께 머물며, 머무는 자리에 대한 질투를 끊고 애착을 벗어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8_a_13L云何樹下功德依樂可愛不交世俗樂離作務與天同止斷住處嫉及離愛著善人所行是業無疑
【문】어떤 나무가 머물 만하고, 어떤 나무를 떠나야 하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능히 잃는 것인가?
028_1018_a_16L何樹可住樹可離云何而受云何而失
【답】정오에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바람이 없을 때 나뭇잎이 떨어지는 곳은 머물만한 곳이다. 다만 썩어서 위태로운 나무ㆍ속이 빈 나무ㆍ귀신이 붙은 나무는 제외한다. 지붕이 있는 모든 곳을 떠나면 이것이 나무아래에 머무는 법을 수지하는 것이다. 만약 지붕이 있는 곳에 가게 되면 곧 나무아래에서 머무는 법을 잃게 된다.
028_1018_a_17L於日中時樹影至處及無風時葉所墮處是所可住除危朽樹空腐樹鬼神樹離諸覆處是受樹下若往覆處則失樹下
왜 노지주(露地住)를 수지하는가. 지붕이 있는 곳이나 나무아래나 물건을 저장하는 곳 등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이런 것의 과실을 알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즐겁지 않은 곳을 끊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8_a_21L云何受露地住不樂覆處及在樹下藏畜物處知是過患見露住功我從今日斷不樂處受露地住
028_1018_b_02L무엇이 노지주의 공덕인가. 즐겁지 않은 곳에 가지 말고 게으름과 졸음을 끊어라. 들판의 사슴처럼 그리워하는 것 없이 마음대로 다녀라.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8_a_23L何露住功德莫往不樂處斷懈怠睡猶如野鹿隨意而行無所追慕人所行是業無疑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지붕이 있는 곳이나 나무아래에 있는 것을 끊는 것이 곧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머무는 법을 수지하는 것이다. 만약 지붕이 있는 곳에 머물거나 나무아래에 있으면 곧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머무는 법을 잃는 것이다.
028_1018_b_03L云何爲受云何爲斷於覆處及在樹下是受露住住覆處及在樹下則失露住
왜 총간주(塚間住)를 수지하는가. 만약 다른 곳에서 지내면 경행을 적게 하며 방일하고, 악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런 과실을 알고, 묘지에서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다른 곳에 머무는 것을 끊고 묘지에서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8_b_05L云何受冢閒住若於餘處少行放逸不起畏知是過患見冢閒功德我從今日斷於餘處受冢閒住
무엇이 총간주를 수지하는 공덕인가. 죽을 때를 생각하게 되고, 부정상(不淨相)을 얻고, 비인(非人)의 존경을 얻고, 방일을 일으키지 않고, 욕망에 물듦을 억제하고, 싫어하는 바가 많아지고, 두려워할만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몸이 공적한 것을 관찰하고, 상견(常見)의 생각을 끊는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8_b_08L云何受冢閒功得死時念得不淨相得非人敬重不起放逸伏於欲染多所厭患不懼可畏觀身空寂斷計常想善人所行是業無疑
【문】총간주의 공덕을 어떻게 수지하며, 어디에 머물러야 하고, 어디를 경행할 수 있으며,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028_1018_b_12L云何受冢閒功德於何可住於何可行何受何失
【답】항상 사람들이 늘 울부짖고 늘 연기와 불이 있는 이와 같은 묘지에 처음으로 머물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먼저 관찰하여 다른 정처(靜處)가 있으면 곧 가서 머물러야 한다.
028_1018_b_13L若恒有人常多哭泣恒有煙火若初欲住如是冢閒當先觀察有餘靜處便可往
만약 비구가 묘지에 머문다면 방이나 편안한 침상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앉아도 안 되고,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머물러도 안 되며, 누웠을 때 열이 없어야 하고, 물고기를 먹지 않고, 유제품을 마시지도 않고, 마쇄(麻粹)7)를 먹지 않으며, 찬과 고기를 건드리지 않고, 집에 머물지도 않으며, 발우를 안치해서도 않는다.
028_1018_b_16L若比丘止於冢閒不當作房及安牀座不從風坐不逆風住臥時不熟無食魚味不飮乳酪不食麻粹不觸肴肉不住屋中不安鉢器
만약 사람이 이미 떠났다면 좌구 및 다른 옷가지를 집어 들고 묘지로 찾아가 그 주처에서 물건을 멀리 던져두듯이 머물다가 날이 밝으면 모든 옷가지를 정리하여 승가람으로 돌아오며, 다른 곳에는 머물지 않는다. 이것을 묘지에 머무는 것이라 한다. 만약 다른 곳에 머무르면 곧 잃는 것이라 한다.
028_1018_b_19L若人已去捉持坐具及餘衣物往到冢閒當其住處如擲物遠明相現時攝諸衣具還僧伽藍除餘處住是謂冢閒若住餘處則名爲失
028_1018_c_02L왜 우득처주(遇得處住)를 수지하는가. 사람이 탐하는 바를 좋아하지 않고, 남을 비키게 하여 괴롭히는 짓을 하지 않는다. 이런 과실을 알고, 주어진 곳에 머무는 공덕을 보고 “나는 오늘부터 주처에 대한 탐욕을 끊고 주어진 주처에서 머무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8_b_23L云何受遇得處住樂人所貪不惱他令避知是過患遇得處功德我從今日斷貪住處受遇得處
무엇이 우득처주의 공덕인가. 만족할 줄 아는 곳을 찾는 것이고, 적정(寂靜)을 탐하는 것이며, 많은 애락을 끊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며, 자비에 머물러 한결같이 거두고 단속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8_c_03L云何遇得處功德覓知足處貪於寂靜斷多愛樂人所敬重住於慈悲一向斂攝善人所行是業無疑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머물 곳에 대한 탐욕을 끊는 것을 주어지는 대로 따르는 것[依遇]이라 한다. 만약 자기가 좋아하는 곳[樂處]으로 찾아가면 곧 잃는 것이라 한다.
028_1018_c_05L云何爲受云何爲失斷貪所止是謂依若往樂處則名爲失
왜 상좌불와(常坐不臥)를 수지하는가. 머무는 곳에서의 졸음과 게으름 같은 이런 과실을 알고, 늘 좌선하는 공덕을 보아 “나는 오늘부터 혼몽하게 누워서 자는 것을 끊고 늘 좌선하며 눕지 않는 법을 수지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028_1018_c_07L云何受常坐不臥於所住處睡眠懈怠知是過患見常坐功德我從今日斷於惛臥常坐不臥
무엇이 상좌의 공덕인가. 게으름을 일으키는 곳을 끊고, 몸을 위하는 시샘을 제거하며, 오염된 것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즐거움을 벗어나고, 잠의 구속이 적어지며, 항상 적정이 풍부하고, 수승한 선(禪)의 수행을 감내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행할 바가 이 업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028_1018_c_10L云何常坐功德斷生怠處除爲身嫉離染觸樂少於纏睡常多寂靜堪修禪勝善人所行是業無疑
무엇이 수지하는 것이고, 무엇이 잃는 것인가. (수지하는 것은) 드러누워 자는 것을 끊는 것을 말한다. 만약 누워 잔다면 잃는 것이라 한다.
028_1018_c_12L云何爲受云何爲失謂斷睡臥若寢名失
무엇이 분소의를 떠나는 것인가. 거사가 보시하는 추마(芻麻)ㆍ고패(古貝)ㆍ교사야(憍奢耶)ㆍ흠바라(欽婆羅)8) 등의 옷을 방편으로 받았다면, 납의를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028_1018_c_14L云何離糞掃衣於居士施衣芻麻古貝憍奢耶欽婆羅等以方便受不失納衣
무엇이 3의를 떠나는 것인가. 여분의 옷을 축적한 지 10일이 지나거나 월망의(月望衣)가 있거나 공덕의(功德衣)가 있거나, 또 장의가 있더라도 와구ㆍ부구(敷具)ㆍ부창의(覆瘡衣)ㆍ수건ㆍ우욕의(雨浴衣)를 기우기 위한 것이라면, 수지(受持)하지 않고 정시(淨施)하지 않았더라도 만약 방편으로 그랬다면 3의를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028_1018_c_16L云何三衣若畜長衣已過十日有月望衣有功德衣又有長爲護臥具敷具覆瘡衣手巾雨浴不受持不淨施若以方便不失三
무엇이 걸식의 방편인가. 만약 승차식(僧次食)ㆍ상주식(常住食)ㆍ행주식(行籌食)ㆍ15일식ㆍ포살식(布薩食)ㆍ중식(衆食)ㆍ사식(寺食)을 방편으로 받았다면 걸식을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이런 과실을 본다면 또한 마땅히 버리고 떠나야 한다.
028_1018_c_20L云何乞食方便若僧次食及常住食行籌食十五日食布薩食衆食寺食以方便受不失乞食若見此過亦應捨離
028_1019_a_02L무엇이 차제걸식의 방편인가. 코끼리나 말 등이 문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보거나 수치스러워해야 할 비천한 곳을 보거나 이와 같은 등등의 여러 곳을 만약 본다면 마땅히 피해야 한다. 또 전다라를 보거나 발우를 뒤집어야 하는 학가(學家)9)이거나 화상(和上)이나 아사리(阿闍梨)를 따라 걸식하거나 여행 중인 비구일 경우, 이와 같은 등등의 여러 경우에는 방편으로 지나쳤더라도 차제걸식을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028_1018_c_23L云何次第乞食方便見象馬等當門而鬪可羞鄙處諸如是等若見宜避又見旃陁羅覆鉢學家隨和上闍梨客行比丘諸如是等方便而越不失次第
무엇이 일좌식의 방편인가. 만약 정해진 식사 시간에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뱀 등을 보거나, 비가 오거나, 화상이나 아사리나 객비구가 찾아왔기에 방편으로 일어났다가 그 뒤에 다시 식사를 했다면 일좌식을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028_1019_a_04L云何一坐食方便若正食見象馬牛蛇和上闍梨客比丘方便而起起已更食不失一坐
절량식이나 시후불식에는 방편이 없다.
028_1019_a_06L節量食及時後食無方便
무엇이 무사처(無事處) 방편인가. 혹 수계나 참회를 위해, 법을 묻거나 포살(布薩)이나 자자(自恣)를 위해, 자신의 병이나 타인의 병을 돌보기 위해, 경의 의심스러운 곳을 묻기 위해, 이와 같은 인연으로 방편으로 마을에 머물렀다면 무사처를 수지하는 법을 잃은 것이 아니다.
028_1019_a_07L云何無事處方便或爲受戒懺罪問法布薩自恣自病看疾問經疑處如是等緣方便住聚落不失無事處
무엇이 수하좌(樹下坐)의 방편인가. 만약 비를 만났다면 그때는 마땅히 지붕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 개인 뒤 다시 돌아와도 수하좌를 수지하는 법을 잃는 것이 아니다. 노지주ㆍ총간주ㆍ우득처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런 방편으로 다른 주처에 머물 수 있다.
028_1019_a_10L云何樹下方便若遇雨時宜入覆處明相旣現還而不失樹下露住冢間遇得此等方便亦復如是餘住處可住
상좌불와에는 방편이 없다. 또 일설에는 관비(灌鼻)10)할 때에는 방편을 쓸 수 있으므로 상좌불와를 수지하는 법을 잃는 것이 아니라 한다.
028_1019_a_13L常坐不臥無方便復有一說若灌鼻時得作方便不失常坐
이 13두타로 다시 8법을 이루니, 아비담에서 설하는 8두타와 같다. 이 시후불식은 절량식ㆍ일좌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수지하는 바가 한 종류를 이룬다. 이 무사처좌는 수하좌ㆍ노지좌ㆍ총간주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무사처에서 방사를 짓고, 작무를 즐겨하고, 축적하는 것이 많고, 그 주처를 애착하는 것은 마음으로 즐길 바가 아니다. 이와 같이 생각하여 나무아래나 무덤이나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청정하게 머문다. 따라서 여덟 가지가 된다.
028_1019_a_15L以此十三頭陁更成八法如毘曇中說八頭陁是時後不食攝節量一坐其所受持成一種類是無事處攝樹下露坐冢間何故於無事若營造房舍樂爲作務多所聚蓄愛著住處非心所樂作如是意於樹下冢間露地淨住是故成八
8두타는 다시 3법을 이룬다. 첫째는 무사처, 둘째는 분소의, 셋째는 행걸식이다. 만약 이 세 가지가 청정하다면 두타는 원만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난타에게 “네가 무사처를 성취하고, 분소의를 받고, 시후식을 하지 않으며 목숨을 유지하는 데 뜻을 둘 뿐 욕심내는 바를 보지 않는 것을 언제쯤이나 보게 될까”라고 말씀하셨다.
028_1019_a_21L於八頭陁復成三法一無事處二糞掃衣行乞食若三淸淨頭陁成滿故佛爲難陁說何時見汝成無事處受糞掃不時後食趣養身命無見所欲
028_1019_b_02L【문】누가 두타분(頭陀分)의 이름을 지었는가? 두타에는 몇 종류의 법이 있는가? 무엇이 두타행을 닦는 세 종류의 수행자인가? 몇 가지 두타에 정해진 기간이 있는가? 두타라고 설할 올바른 두타가 있는가?
028_1019_b_02L誰名頭陁分頭陁有幾種法云何三行人脩頭陁行幾頭陁有時節有是頭陁說頭陁
【답】13두타가 있으니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이고,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이다. 이것을 두타분이라 한다. 이것을 선(善)이나 불선(不善)이나 무기(無記)라고 설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선량하지 못한 사람[不善人]은 악욕(惡欲)과 동일한 까닭에, 악욕을 없애지 않고 함께 비법(非法)을 일으켜 이익을 탐한다. 이런 까닭에 선하지 못한 두타이다.
028_1019_b_05L有十三頭陁是佛所佛所制戒此謂頭陁分此不應說不善無記何以故不善人與惡欲同故不除惡欲共起非法貪樂利養是故不善
몇 가지 종류의 법이 있는가. 소위 2두타법이 있으니, 탐하지 않고[不貪], 어리석지 않은 것[不癡]이다. 부처님께서 “만약 분소의를 입는 비구가 소욕지족(少欲知足)을 의지해 고요함을 즐기며 의심이 없고, 해탈을 의지한다면 이것을 소위 분소의를 수지하는 것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나머지 모든 두타 또한 이와 같이 탐하지 않고, 어리석지 않는 것이다.
028_1019_b_09L頭陁幾種法者謂有二頭陁法不貪不癡如佛所說若糞掃衣比丘依少欲知足樂靜無疑依於解是謂受糞掃衣諸餘頭陁亦復如是不貪不癡
이 탐하지 않음으로써 이 13처에서 능히 탐욕을 제거하고, 이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13처에서 능히 무명을 제거한다. 또 이 탐하지 않음으로써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고 이와 비슷한 것에 의심이 없어 욕심에 물든 속임수를 제거하며, 이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이와 비슷한 몸을 야위게 하는 속임수를 제거한다. 이것이 2두타법이고, 이것은 탐하지 않는 것,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028_1019_b_13L以此不貪於此十三處能除貪欲以此不癡於十三處能除無明復次以此不貪佛之所許能生厭患相似無疑除欲染欺誑以此不相似除身羸欺誑此二頭陁法不貪不癡
무엇이 두타행을 닦는 세 종류의 수행자인가. 소위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수행자는 두타행을 닦지만 노여움이 많은 수행자는 닦을 수 없다. 무엇 때문인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수행자는 두타를 수행할 수 있다. 곧 탐욕스러운 사람이 사랑[愛]에 대해 불방일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방일하지 않는다면 곧 탐욕을 조복할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의심이 없이 두타에 의해 불방일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방일하지 않는다면 곧 능히 어리석음을 조복할 수 있다.
028_1019_b_18L云何三行人脩頭陁行貪癡行人是脩頭陁行嗔恚行人不能脩行何以故貪癡行人而能脩行頭陁如貪人至愛成不放逸若不放逸則能伏貪如癡無疑依頭陁受成不放逸若不放逸則能伏癡
028_1019_c_02L왜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은 두타를 수행할 수 있는데 노여움이 많은 사람은 고통을 받고 다시 그 악을 이루는가. 이는 담병(痰病)을 앓는 자가 열탕을 복용하면 그 병이 점점 더하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노여움이 많은 사람은 수행해서는 안 된다. 또 노여움이 많은 사람은 무사처에 머물고 나무아래에서 지내야 한다. 왜 무사처에 머물러야 하는가. 세간의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028_1019_b_23L何故貪癡人脩行頭陁瞋人受苦更成其惡如痰病者若服熱湯轉增其疾是故瞋人不當脩行復說瞋人應住無事處及在樹下何故住無事處以無世閒苦故
몇 가지 두타에 정해진 기간이 있는가. 세 가지 두타는 8개월을 시한으로 하나니, 소위 수하주ㆍ노지주ㆍ총간주이다. 안거하는 시기에는 지붕이 있는 곳에서 지내도록 부처님께서 허락하셨다.
028_1019_c_05L幾頭陁有時節三頭陁八月時樹下住露地住冢閒住是安居時聽覆處
【문】무엇이 두타라고 설하는 올바른 두타인가?
云何是頭陁說頭陁
【답】또한 두타라고 설하는 두타가 있고, 두타라고 설하지 않는 두타가 있고, 두타가 있다고 설하지만 두타가 아닌 것이 있고, 두타가 아니고 두타라고 설하지도 않는 것이 있다.
028_1019_c_07L有頭陁說頭陁有頭陁不說頭陁頭陁說有頭陁有非頭陁不說頭
두타라고 설하는 두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한 것을 말한다. 두타라고 설하지 않는 두타가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두타가 있다고 설하지만 두타가 아닌 것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인 및 범부가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한 것을 말한다. 두타가 아니고 두타라고 설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학인 및 범부가 두타법의 수지를 성취하지 않은 것이다.
028_1019_c_10L云何有頭陁說頭陁謂阿羅漢成就頭陁受云何有頭陁不說頭陁謂阿羅漢不成就頭陁受云何有非頭陁說頭陁謂學人及凡夫成就頭陁受云何非頭陁不說頭陁謂學人凡夫不成就頭陁受
【문】두타는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는가?
問頭陁何相何味何起
【답】소욕(少欲)을 상으로 삼고, 지족을 맛으로 삼고, 의심 없음을 일어남으로 삼는다. 또 집착할 대상이 없음을 상으로 삼고, 과실이 없음을 맛으로 삼고, 물러서지 않음을 일어남으로 삼는다.
028_1019_c_15L欲爲相知足爲味無疑爲起復次無所著爲相無過爲味不退爲起
무엇이 초ㆍ중ㆍ후인가. 소위 받음[受]이 초이며, 수행이 중이며, 환희가 후이다.
028_1019_c_17L云何初中後謂受爲初修行爲中歡喜爲後

4. 분별정품(分別定品)
028_1019_c_19L分別定品第四

【문】그때 청정히 계율을 지키며 좌선하는 사람이 이미 두타법을 수지해 실천한다면 수승하고 훌륭한 경지[勝善處]를 성취하기 위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가?
028_1019_c_20L爾時淨戒坐禪人已行頭陁受就勝善處當何所作
【답】정(定)을 일으켜야 한다.
令定起
028_1020_a_02L【문】정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處)로 삼는가? 어떤 사람이 받는가? 선(禪)ㆍ해탈ㆍ정ㆍ정수(正受)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볼 수 있고, 이것으로 정을 일으키는 정의 원인은 몇 가지인가? 정을 장애하는 것에는 몇 가지 법이 있는가? 정의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정의 공덕은 몇 가지인가? 정에 필요한 여러 도구는 몇 가지인가? 정은 몇 종류인가? 어떻게 정을 일으키는가?
028_1019_c_22L何相何味何起何處何人受禪脫定正受何差別幾定因可見以此起定障定有幾法幾定功德定幾衆幾種定云何起定
【답】정이란 청정한 마음을 지니고 한결같이 정진하여 적정의 공덕 등과 더불어 올바로 참되게 머물러 산란함이 없는 것, 이것을 정이라 한다. 또 번뇌의 맹렬한 바람이 마음을 흔드는 일이 없는 것이 전각 안 등불의 빛과 불꽃이 움직이지 않음과 같은 것이다. 아비담에서 “마음이 올바로 머물러 반연하는 바 없고, 또한 어지럽게 움직이지 않으며, 적정하고 집착하는 바 없으며, 정근(定根)ㆍ정력(定力)을 올바로 하는 것, 이것을 정이라 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028_1020_a_03L定者有淸淨一向精進與寂靜功德等正眞住不亂此謂定復次煩惱猛風無傾心如殿裏燈光焰不動如阿毘曇說若心正住無所攀緣亦不動亂寂靜無正定定根定力此謂爲定
무엇이 상이고, 무엇이 맛이고, 무엇이 일어남이고, 무엇이 처인가. 마음이 머무는 것이 상이며, 원한을 굴복시키는 것이 맛이며, 적정한 것이 일어남이며, 번뇌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해탈을 얻는 것을 처라 한다.
028_1020_a_08L云何相何何起何處心住是相伏怨是味靜是起於染不著心得解脫是名爲
어떤 사람이 정을 받아들이는가. 소위 손으로 저울을 잡듯이 심수(心數) 등을 받아들여 일정하게 유지하고 방편정(方便定)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며, 발우 속의 기름처럼 심(心)과 심수(心數)를 일정하게 하는 것이다. 네 마리 말이 고르게 힘을 써 마차를 끌듯이 염(念)과 정진(精進)을 일정하게 행하는 것을 정이라 하고, 화살을 만드는 장인이 온 마음을 기울여 곧게 펴는 것처럼 사유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을 정이라 한다. 원한을 없애기 때문이니, 약이 독을 해소시키는 것과 같다. 비담에서 말했듯이 거두어 포섭하는 것이 정의 뜻이고, 이를 따르는 것이 정의 뜻이며, 이를 만족하는 것이 정의 뜻이다.
028_1020_a_11L何人受定謂受心數等方便定等如手執稱令心心數等如鉢中油與精進等行爲定猶如四馬齊力牽思惟等爲定如彼箭師注心調直以除怨故如藥消毒如毘曇說斂攝是定義從是定義滿是定義
선(禪)이란 4선이니, 소위 초선(初禪) 등이다. 해탈이란 소위 8해탈이니, 안[內]으로 색상(色想)을 가지며 밖[外]으로 색을 관하는 것 등이다. 정이란 3정이니, 소위 유각유관(有覺有觀) 등이다. 정수(定受)란 소위 9차제의 정수이다.
028_1020_a_16L禪者四禪謂初禪等解脫者謂八解脫有色想外觀色等定者三定謂有覺有觀等正受者謂九次第正受
왜 선을 하는가. 사물을 사유하기 때문이고, 원한을 사유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기쁘고 즐겁기 때문이고, 장애를 벗어나 해탈하기 때문이며, 평등하게 하기 때문이고, 방편으로 정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며, 자재를 얻기 때문이고, 1의(義)로써 정수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기꺼이 정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해탈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028_1020_a_19L云何爲禪思惟事故思惟怨故心喜樂故離障解脫故令平等故方便發定故得自在故不以一義住正受故樂起定解脫正受者
몇 가지 공덕이 정을 일으키는가. 네 가지 공덕을 보면 정을 일으킬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 공덕인가. 현재 법의 즐거움을 보고 그 즐거움에 머무는 것, 관(觀)으로써 사물을 즐기는 것, 신통을 현재에 증득하는 것, 유(有)가 구족하는 것이다.
028_1020_a_23L幾功德令定得起四功德令定得起云何爲四現見法樂樂住以觀樂事神通現證有具足
028_1020_b_02L무엇이 현재 법의 즐거움을 보고 그 즐거움에 머무는 것인가. 소위 사람이 정을 얻으면 무루를 일으킬 수 있고 마음에 희열이 생겨나 세간을 벗어난 즐거움을 누리며, 법의 즐거움을 현재에서 보고 그 즐거움에 머문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이런 저런 몸에서 고요함으로부터 기쁨이 생겨 청량(淸凉)을 얻게 하며, 점차 원만하게 하여 구족하게 성취한다” 등으로 설하셨다. 또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나는 예전 니건(尼乾)11)이었을 때, 7일 낮ㆍ밤을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입은 말하지 않고 침묵하면서 단정히 앉아 한결같이 즐거움을 누렸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것이 소위 성법(聖法)에서 현재 법의 즐거움을 보고 그 즐거움에 머문다는 것이다.
028_1020_b_02L何者現見法樂樂住謂人得定能生無漏心起悅味受出世樂現見法樂樂住是故世尊說彼此身從靜生喜使得淸涼令漸圓滿具足成就等佛告比丘我先作尼乾七日七夜身不動搖口不言說默然端住一向受樂是謂於聖法現見法樂樂住
관으로써 사물을 즐기는 것이란, 소위 좌선인이 마음으로 정을 얻어 개(蓋)와 전(纏)12)이 없고, 유연히 조절하여 능히 수지하며, 음(陰)ㆍ입(入)ㆍ계(界)13) 등을 관하고 보아 자성이 안락해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모든 비구에게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일체는 마음을 의지처로 삼아 여실히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28_1020_b_09L以觀樂事者謂坐禪人得心定事無有蓋纏調柔堪受持觀見陰入界等自性安是故世尊敎諸比丘應當脩行是一切以心依如實知
신통을 현재에 증득하는 것이란 이미 정을 얻은 사람이 그에 의해 5통을 증득하는 것이니, 소위 여의(如意)ㆍ천이(天耳)ㆍ타심(他心)ㆍ숙명(宿命)ㆍ천안(天限)이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 “이미 마음에 정을 얻었다면 뜻하는 바에 따라 전변한다. 이와 같이 일체를 뜻대로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028_1020_b_13L神通現證者已得定人依證五通謂如意天耳宿命天眼是故世尊說已得心定隨宜轉變如是一切令得如意
유(有)가 구족하는 것이란 이미 정을 얻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무학(無學)에 이르지 못했더라도 끝내 물러나지 않으며, 정으로 인해 과보를 얻어 색유(色有)나 무색유(無色有)가 구족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초선을 조금만 닦아도 범천의 권속이 된다. 이와 같은 종류 일체는 그와 같은 일체를 생기게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 네 가지 공덕은 그 정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하나하나를 마땅히 일으켜야 한다.
028_1020_b_16L有具足者已得定人未到無學終令不退由定得報得色無色有具足如佛所少修初禪得梵天眷屬如是種類一切生彼如是一切此四功德能生彼定一一當起
정을 장애하는 것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소위 8법인 욕욕(欲欲)ㆍ진에(嗔恚)ㆍ해태(懈怠)ㆍ수면(睡眠)ㆍ조희(調戱)ㆍ의혹(疑惑)ㆍ무명(無明)ㆍ무희락(無喜樂)이며, 일체의 악법이 장애가 되는 법이다.
028_1020_b_21L障定有幾者謂八法欲欲嗔恚懈怠睡眠調戲疑惑無明無喜樂一切惡法是障法
028_1020_c_02L정의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는가. 소위 원인이 되는 8법이 있다. 벗어나는 것[出離], 화내지 않는 것[不嗔], 밝음을 생각하는 것[明相],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일체의 선법, 마음을 환희케 하는 것, 능히 법지(法智)를 일으키는 것, 이것이 정의 원인이다.
028_1020_b_23L幾定因者謂有八法是因出離不嗔明相不亂一切善法令心歡喜能生法智是爲定因
정에 자량이 되는 것은 몇 가지인가. 소위 일곱 가지가 있으니, 곧 계, 여러 살림살이에 만족할 줄 아는 것, 6근의 문[根門]을 덮고 가리는 것, 적절한 양을 마시고 먹는 것, 초야ㆍ중야ㆍ후야에 잠들지 않는 것, 항상 지혜를 염두에 두는 것, 머무는 곳이 고요한 것이다.
028_1020_c_03L幾定資者謂有七種戒衆具知覆蔽根門節量飮食初中後夜而不睡眠常念智慧住處靜寂
정에 몇 종류가 있는가. 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세간정(世間定)이고, 둘째는 출세간정(出世間定)이다. 성과(聖果)를 얻는 것을 출세간정이라 하고, 나머지를 세간정이라 한다. 그 세간정은 루(漏)가 있고, 결(결)이 있고, 박(縛)있으며, 이것은 류(流)이고, 이것은 액(厄)이고, 이것은 개(蓋)이고, 이것은 계도(戒盜)ㆍ견도(見盜)이고, 이것은 취(取)이고, 이것은 번뇌이다. 이것을 세간정이라 한다. 그리고 이것과 서로 반대되는 것을 출세간정이라 한다.
028_1020_c_05L定有幾種者定有二種一世閒定二出世閒聖果所得謂出世定餘名世定世閒定是有漏有結有縛是流是厄是蓋是戒盜見盜是取是煩惱此謂世閒定與此相違名出世定
또 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사정(邪定)과 정정(正定)이다. 무엇이 사정인가. 착하지 않은 것을 일심으로 하는 것, 이것을 사정이라 한다. 만약 착한 것을 일심으로 한다면 이것은 정정이다. 사정은 마땅히 끊어야 하고, 정정은 마땅히 닦아야 한다.
028_1020_c_10L復次定有二種邪定正定云何邪定不善一是謂邪定若善一心是謂正定定當斷正定應修
또 정에 두 종류가 있으니, 외정(外定)과 안정(安定)이다. 이런 저런 선정의 초입 부분을 외정이라 하고, 성제무간(性除無間)을 안정이라 한다.
028_1020_c_13L復次定有二種安定彼彼定初分此謂外定性除無此謂安定
또 정에 세 종류가 있으니, 유각유관정(有覺有觀定)ㆍ무각소관정(無覺少觀定)ㆍ무각무관정(無覺無觀定)이다. 무엇이 유각유관인가. 소위 초선이 유각유관이고, 2선이 무각소관, 나머지 선이 무각무관이다.
028_1020_c_15L復次定有三種有覺有觀定無覺少觀定無覺無觀定云何有覺有觀謂初禪有覺有觀二禪無覺少觀餘禪無覺無觀
또 정에 세 종류가 있으니, 소위 기쁨과 함께 생기는 정[共喜生定]ㆍ즐거움과 함께 생기는 정[共樂生定]ㆍ평정과 함께 생기는 정[共捨生定]이다. 초선ㆍ2선을 기쁨과 함께 생기는 것이라 하고, 3선을 즐거움과 함께 생기는 것이라 하며, 4선을 평정과 함께 생기는 것이라 한다.
028_1020_c_18L復次定有三種謂共喜生定共樂生定共捨生定初禪二禪謂共喜生三禪謂共樂生四禪謂共捨生
또 정에 세 종류가 있으니, 선정(善定)ㆍ보정(報定)ㆍ사정(事定)이다. 무엇이 선정인가. 성도(聖道)의 학인 및 범부가 색정(色定)ㆍ무색정(無色定)을 닦는 것, 이것을 선정이라 한다. 성과(聖果)의 학인 및 범부가 색계ㆍ무색계에 태어나는 것, 이것을 보정이라 한다. 무학(無學)의 사람이 색정ㆍ무색정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을 사정이라 한다.
028_1020_c_21L復次定有三種善定報定事定云何善定聖道學人及凡夫修色無色定是謂善定聖果學人凡夫生色無色界是謂報定學人受色無色定是謂事定
028_1021_a_02L또 정에 네 종류가 있으니, 욕정(欲定)ㆍ색정(色定)ㆍ무색정(無色定)ㆍ무소수정(無所受定)이다. 소위 이런 저런 이들이 행하는 정수행(正受行)을 욕정이라 하고, 4선을 색정이라 하며, 4무색정 및 선업의 과보를 무색정이라 하고, 4도과(道果)를 무소수정이라 한다.
028_1021_a_02L復次定有四種欲定色定無色定無所受定謂彼彼行正受行是謂欲定四禪是謂色定四無色定及善業報此謂無色定四道果謂無所受定
또 정에 네 종류의 수행이 있으니, 소위 고통스럽게 수행하고 지혜가 둔한 경우[苦修行鈍智]ㆍ고통스럽게 수행하고 지혜가 예리한 경우[苦修行利智]ㆍ즐겁게 수행하고 지혜가 둔한 경우[樂修行利智]ㆍ즐겁게 수행하고 지혜가 예리한 경우[樂修行鈍智]이다.
028_1021_a_06L又定有四種修行謂苦修行鈍智苦修行利智樂脩行利智樂修行鈍智
이 네 사람의 첫째는 번뇌가 치밀한 자[密煩惱], 둘째는 번뇌가 엉성한 자[疎煩惱], 셋째는 근기가 예리한 자[利根], 넷째는 근기가 둔한 자[鈍根]이다. 번뇌가 치밀한 사람이 근기가 둔할 경우에는 고통스럽게 수행하여 둔한 지혜로 정을 얻는다. 번뇌가 치밀한 사람이 근기가 예리할 경우에는 고통스럽게 수행하여 예리한 지혜로 정을 얻는다. 번뇌가 엉성한 사람이 근기가 둔할 경우에는 즐겁게 수행하여 둔한 지혜로 정을 얻는다. 번뇌가 엉성한 사람이 근기가 예리할 경우에는 즐겁게 수행하여 예리한 지혜로 정을 얻는다.
028_1021_a_08L此四人一者密煩惱二者疏煩惱三者利根四者鈍根於密煩惱人鈍根苦脩行鈍智得定密煩惱利根苦脩行利智得定疏煩惱人鈍根樂脩行鈍智得定疏煩惱利根樂修行利智得定
여기서 번뇌가 치밀한 사람은 이미 번뇌가 치밀하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번뇌를 절복시킨다. 이런 까닭에 고통스럽게 수행한다. 근기가 둔한 사람은 근기가 둔한 까닭에 오랫동안 선행(禪行)을 쌓아 둔한 지혜로 깨닫는다. 이런 까닭에 둔한 지혜라 한다. 이런 방편으로 일체를 분별해야 한다.
028_1021_a_13L於是密煩惱人已密煩惱故苦折伏煩惱故苦脩行鈍根人以鈍根故久積禪行覺鈍智是故名鈍智以此方便切應分別
또 정에 네 종류가 있으니, 소위 소정소사(小定小事)ㆍ소정무량사(小定無量事)ㆍ무량정소사(無量定小事)ㆍ무량정무량사(無量定無量事)이다.
028_1021_a_17L復次定有四種謂小定小小定無量事無量定小事無量定無量事
무엇이 소정소사인가. 정은 마음이 얻는 바를 따르지 않고 정은 소정진(小精進)인 것을 소정소사라 한다. 무엇이 소정무량사인가. 정은 마음이 얻는 바를 따르지 않고 그 일은 대정진(大精進)인 것을 소정무량사라 한다. 무엇이 무량정소사인가. 정은 마음이 얻는 바를 따르고 그 일이 소정진인 것을 무량정소사라 한다. 무엇이 무량정무량사인가, 정은 이미 마음이 얻은 바를 따르고 그 일도 대정진인 것을 무량정무량사라 한다.
028_1021_a_19L云何小定小事定不隨心所得定小精進此謂小定小事云何小定無量事定不隨心所得彼事大精進此謂小定無量事云何無量定小定隨心所得彼事小精進此謂無量定小事云何無量定無量事定已隨心所得彼事大精進此謂無量定無量事
028_1021_b_02L또 정에 네 종류가 있으니, 욕정(欲定)ㆍ정진정(精進定)ㆍ심정(心定)ㆍ혜정(慧定)이다. 욕정이란 욕망을 의지해 닦아 얻는 것을 욕정이라 한다. 정진을 의지해 얻는 것을 정진정이라 하고, 마음을 의지해 닦아 얻는 것을 심정이라 하고, 지혜를 의지해 닦아 얻는 것을 혜정이라 한다.
028_1021_b_03L復次定有四種欲定精進定慧定欲定者依欲脩得謂爲欲定精進得謂精進定依心修得謂爲心依慧修得謂爲慧定
또 정에 네 종류가 있다. 어떤 정은 부처님이 얻는 것이고 성문이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은 성문이 얻는 것이고 부처님이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정은 부처님이 얻는 것이기도 하고 성문이 얻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정은 부처님이 얻는 것도 아니고 성문이 얻는 것도 아니다. 대비정(大悲定)ㆍ쌍변정(雙變定)은 부처님이 얻는 것이고 성문이 얻는 것이 아니다. 학과정(學果定)은 성문이 얻는 것이고 부처님이 얻는 것은 아니다. 9차제정(次第定)ㆍ무학과정(無學果定)은 부처님도 얻고 성문도 얻는 것이다. 무상정(無想定)은 부처님이 얻는 것도 아니고 성문이 얻는 것도 아니다.
028_1021_b_06L復次定有四有定是佛所得非聲聞所得有定聲聞所得非佛所得有定是佛所得及聲聞所得有定非佛所得非聲聞所大悲定雙變定是佛所得非聲聞所學果定是聲聞所得非佛所得次第定無學果定佛所得及聲聞得無想定非佛所得非聲聞得
또 정에 네 종류가 있다. 어떤 정은 생기게 하고 소멸하게 하지는 않으며, 어떤 정은 소멸하게 하고 생기게 하지는 않으며, 어떤 정은 생기게 하고 또 소멸하게 하며, 어떤 정은 생기게 하지도 않고 소멸하게 하지도 않는다.
028_1021_b_13L復次定有四種有定爲起不爲滅有定爲滅不爲起有定爲起爲滅有定不爲起亦不爲滅
【문】무엇이 생기게 하고 소멸하게 하지는 않는 것인가?
云何爲起不爲滅
【답】욕계의 선한 정[善定]과 선하지 못한 정[不善定], 이것을 생기게 하고 소멸하게 하지는 않는 것이라 한다. 네 가지 성도의 정[四聖道定], 이것은 소멸하게 하고 생기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학인 및 범부의 색(色)과 무색(無色)의 선한 정은 생기게 하고 또 소멸하게 하는 것이다. 일체 과위의 정[果定] 및 사정(事定)은 생기게 하지도 않고 소멸하게 하지도 않는 것이다.
028_1021_b_16L界善不善定此謂爲起不爲滅四聖道定是爲滅不爲起學及凡夫色無色善定爲起亦爲滅一切果定及事非爲起非爲滅
또 정에 네 종류가 있으니, 초선ㆍ2선ㆍ3선ㆍ4선이다. 5개(蓋)를 떠나 각(覺)ㆍ관(觀)ㆍ희(喜)ㆍ락(樂)ㆍ일심(一心)을 성취하는 것을 초선이라 하고, 각과 관을 떠나 나머지 세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2선이라 하며), 희를 떠나 나머지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3선이라 하고, 낙을 떠나 사(捨)와 일심으로 제4선을 성취한다.
028_1021_b_20L復次定有四種二禪三禪四禪離於五蓋成就覺一心此謂初禪離於覺觀成就三枝離喜成就二枝離樂捨一心成就第四禪
028_1021_c_02L또 정에 다섯 종류가 있으니, 초선ㆍ2선ㆍ3선ㆍ4선ㆍ5선이다. 5선이란 각ㆍ관ㆍ희ㆍ락ㆍ일심의 다섯 가지를 하는 것이다. 5개를 떠나 이 다섯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초선이라 한다. 각을 떠나 나머지 네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2선이라 하고, 희를 떠나 나머지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을 3선이라 한다. 낙을 떠나 2분(分)을 성취하는 것을 제4선이라 하니, 소위 사와 일심이다.
028_1021_b_24L復次定有五種謂初禪二禪三禪四禪五禪五禪者爲五枝一心離五蓋成就五枝謂初禪離覺成就四枝是謂二禪成就二枝是謂三禪離樂成就二謂第四禪所謂捨一心
【문】왜 4선 및 5선을 설하는가?
028_1021_c_06L何故說四禪及五禪
【답】2인의 과보에 의하는 까닭이다. 제2선에 두 종류가 있으니, 소위 무각무관(無覺無觀)과 무각소관(無覺少觀)이다.
028_1021_c_07L由二人報故第二禪二種謂無覺無觀無覺少觀
【문】어떤 좌고통스럽게가 초선으로부터 자재하게 제2선을 일으키는가?
028_1021_c_08L是誰坐禪人令初禪自在起第二禪
【답】거친 각과 관[麤覺觀]에서 생각을 포섭해[攝念] 사유하고, 또 각과 관의 과실을 알아 각과 관이 없는 제2선을 일으키게 하면, 이것이 그 4선을 닦는 차제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초선을 자재하게 하고는 현재에서 제2선을 일으켜 거친 각에서 생각을 포섭해 사유하고 오로지 각의 과실만 알아 무각소관(無覺少觀)을 보고 제2선을 일으키니, 이것이 5선을 받는 차제이다. 이런 까닭에 5선을 설한다.
028_1021_c_09L麤覺觀攝念思惟復知覺過患令起無覺觀第二禪是其修四禪次第有一人已令初禪自在現起第二禪於麤覺攝念思惟唯知覺過患見無覺少觀起第二禪是其受五禪次第是故說於五禪
또 다섯 종류의 정이 있다. 소위 5분(分)의 정수(正受)이니, 희만(喜滿)ㆍ낙만(樂滿)ㆍ심만(心滿)ㆍ광만(光滿)ㆍ관상(觀想)이다. 여기서 초선과 2선은 희만이고, 3선은 낙만이고, 타심지에서 이것을 심만이라 하고, 천안통에서 이것을 광만이라 하고, 이런 저런 정으로부터 관지(觀智)를 일으키는 것을 관상이라 한다.
028_1021_c_15L復五種定謂五分正喜滿樂滿心滿光滿觀想於是初禪二禪喜滿於是三禪樂滿於他心智是名心滿於天眼通是名光滿彼彼定起觀智是名觀想
또 정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소위 5지(智)의 정정(正定)이다. 이것은 현재도 즐겁고 미래에도 즐거운 과보가 있으며, 신지(身智)를 의지해 일어난다. 이 정은 성인이 행하는 것이고, 번뇌가 없는 것이다. 이 정은 지혜로운 사람이 닦는 것이다. 이 정은 적적하고 쾌락하며 의(猗)로 얻는 것으로서 무이(無二)를 성취해 생사를 제압하지 않는다. 이 정은 적적하고 최고로 즐거우며 의(猗)가 일성(一性)을 이루어 얻는 것으로서 태어나고 죽는 아(我)를 제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정은 생각[念]으로 들어가고 생각으로 일어나며, 신지(身智)를 의지해 일어난다.
028_1021_c_19L復次定有五種謂五智正定此現在樂亦未來樂依身智起此定是聖所行無煩惱此定慧人脩習此定寂寂快樂猗所得成就無二不伏生死此定寂寂最猗成一性所得非伏生死我此定念入念起依身智起
028_1022_a_02L또 이미 행처를 분별하였고, 이미 수행사(修行事) 및 하ㆍ중ㆍ상을 분별하였다. 이와 같이 정에는 많은 종류가 있지만 일체의 모든 정이 다 4정에 들어감을 알 수 있다.
028_1022_a_02L復次已分別行處已分別修行事及下中上以如是定有多種可知一切諸定皆入四定

5. 멱선지식품(覓善知識品)
028_1022_a_04L覓善知識品第五

【문】그때 어떻게 정을 일으키는가?
028_1022_a_05L爾時何以起定
【답】만약 처음 좌선하는 사람이 선정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마땅히 훌륭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처음 좌선하는 사람이 선정을 일으켜 최승의 정을 얻으려고 할 때 만약 선지식을 떠나면 부주분(不住分)을 이루게 된다.
028_1022_a_06L若初坐禪人欲生禪定當覓勝善知識何以故初坐禪欲生禪定得最勝定若離善知識成不住分
경에서 “유운(有雲)비구는 퇴분을 이룬다”고 설한 바와 같고, 또 사람이 홀로 먼 나라에 가는 것과 같으며, 반려자나 안내자 없이 뜻에 따라 자의로 행하는 것은 코끼리에 멍에가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좌선하는 사람이 닦아야 할 행에 있어 그로 하여금 섭수케 하고, 과실을 없애는 것을 보이고, 선법(善法)을 얻게 하는 선지식의 설법과 가르침을 얻어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정근하고 고행한다면 최승의 정을 얻을 것이다.
028_1022_a_09L如經中說有雲比丘成於退分如人獨遊遠國無侶開示隨意自行如象無鉤若坐禪人所脩之行得善知識說法敎誡令其攝受示除過患使得善法從敎修行精勤苦行得最勝定
이는 많은 대중에게 존경받는 부유한 상단의 우두머리와 같고, 선량한 친구와 같고, 친부모와 같다. 선지식은 코끼리가 멍에에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마부처럼 마음대로 가고 서게 하기 때문이며, 키를 잡는 선장처럼 좋은 길을 얻게 하고, 병을 치료하는 의사처럼 쓰라린 아픔을 없애며, 모든 종자를 윤택하고 이롭게 하는 하늘의 비와 같고,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와 같고, 자식을 가르치는 아버지와 같고, 어려움이 없는 친지와 같고, 유익한 친구와 같고, 가르치고 타이르는 선생과 같나니, 모든 선법은 이를 의지해 원만히 성취된다.
028_1022_a_14L如富商主衆所敬貴如親善人如親父母善知識者如象所繫令不動故如御車人使隨去住故人執拖爲得善道如醫治病爲消苦猶如天雨潤益諸種如母養兒父敎子如親無難如友饒益如師敎一切善法依是成滿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난다에게 “모든 범행은 소위 선지식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마땅히 훌륭하고 선량한 사람을 찾아 좋은 친구로 삼아야 한다.
028_1022_a_20L是故世尊敎於難陁一切梵行所謂善知識是故當覓勝善之人爲善朋友
028_1022_b_02L어떤 사람이 훌륭한 선지식인가. 소위 성취한 바가 있어 수다라(修多羅 : 經)ㆍ비담(毘曇 : 論)ㆍ비니(毘尼 : 律)를 분명하게 요해하는 자이니, 이런 자들을 얻어야 할 바를 성취해 갖가지 업을 분명히 요해한 자라 한다. 훌륭한 신통을 얻은 자, 4제를 보게 된 자, 이 두 종류의 사람은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니, 이들이 마땅히 찾아보아야 할 자들이다. 만약 이 두 종류의 공덕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7분(分)으로써 선지식을 성취하나니, 이들 역시 마땅히 찾아보아야 한다.
028_1022_a_22L云何是勝善知識謂有所成就明了脩多羅毘曇是謂所得成就明了業種得善神得見四諦此二種人功德成就所當覓若不得二種功德成就人七分成就善知識是亦當覓
무엇이 7분인가. 경애(敬愛)할 만함ㆍ중시할 만함ㆍ귀히 여길 만함ㆍ설법에 능함ㆍ인욕ㆍ심오한 말을 설함ㆍ비처(非處)에 안주하지 않음이다.
028_1022_b_04L云何七可敬愛可重可貴能說忍辱說深不安非處
무엇이 경애할 만함인가. 두 가지 행에 의지하는 자는 훌륭하게 설법하고, 함께 머무는 것을 즐기며, 마음으로 이해하기를 어려워하지 않나니, 이것을 경애할 만함이라 한다.
028_1022_b_06L云何可敬愛依二種行善說共住樂心解不難是謂可敬
중시할 만함이란 계행이 적정하고, 생각[念]을 지키는 것을 성취하며, 탐욕을 부리거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다. 이를 중시할 만함이라 한다.
028_1022_b_08L可重者戒行寂靜守念成就不貪欲多語是謂可重
귀히 여길 만함이란 문혜(聞慧)의 공덕을 성취하고 좌선을 중시할 줄 아는 것이다. 이를 귀히 여길 만함이라 한다.
028_1022_b_09L可貴者聞慧功德成就知坐禪可重是爲可貴
설법에 능함이란 자신이 하는 말이 사랑스럽고, 중시할 만하고, 귀히 여길 만하고, 과보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유하면 상대를 이롭게 하기 때문에,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다듬거나 조복시킬 수 없는 자마저 거두어 끝내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를 설법에 능함이라 한다.
028_1022_b_10L能說者我言可愛可重可貴有果如是思惟益彼故尊重法故於非可作制伏攝受終不棄捨是謂能說
인욕이란 능히 체(滯)ㆍ기어(綺語)ㆍ총어(總語)의 상이 없게 하는 것이니, 현성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욕이라 한다.
028_1022_b_13L忍辱者能令無滯綺語摠語相如賢聖故是謂忍辱
심오한 말이란 업으로 삼은 것[業處]을 통달하는 것이니, 분별(分別)ㆍ상(想)ㆍ염(念)ㆍ작의(作意)ㆍ안착(安著)은 모두 상(相)에 대한 집착을 말미암은 것이다. 법다운 것과 법답지 못한 것을 잘 설하여 번뇌로 취착한 상을 능히 멸진케 하는 이것을 심오한 말을 설하는 것이라 한다.
028_1022_b_14L深語者通達業處若分別想念作意安著皆由執相善說如法不如法煩惱取相能令滅盡是說深語
비처에 안주하지 않음이란 성족(姓族)의 거주지에서 사람들을 모아 암송하고 저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면 이는 올바른 주처가 아니므로 피해야 옳다는 것이다. 만약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을 다니며 안온을 얻게 한다면 이런 주처에는 머물러도 된다. 이것을 비처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 7분을 성취한 그런 선지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028_1022_b_17L不安非處者若於姓族住處業聚誦著非住可避若於堪事處行令得安隱是住可住此謂不安非處以此七分成就是善知識可覓
【문】찾아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云何應覓
【답】만약 공덕을 성취해 중시할 만한 어떤 주처에 어떤 선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그를 찾아가야 한다. 만약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다른 주처의 동학(同學)이 안다면 마땅히 찾아가 직접 만나보아야 한다.
028_1022_b_21L若知某甲住處是功德成就可重若有禪師應當往彼若自不知餘處同學知應往親覲
028_1022_c_02L시절이 법다운데도 자신의 뜻을 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공경히 기거의 안부를 자주 묻고 소행을 여쭈며 “어느 국토 어느 주처에 안주하는 대중이 있는가, 정좌(靜坐)하는 스님이 있는가, 이런 선사가 있는가, 그 행은 어떠한가, 어떤 공덕으로 모두에게 존중받는가”라고 마땅히 이와 같이 물어야 한다. 그러면 동학은 “어느 나라, 어느 주처, 어느 대중의 선좌, 어느 선사가 대중들에게 사랑받고 존중 받는다”라고 답해야 한다.
028_1022_b_24L已知時節如法未說其意恭敬勞問起居諮訪所行何處國土何處住止有衆安住有僧靜坐有是禪師其行若爲以何功德一切所貴應作如是問同學應答某國某住某衆禪某禪師衆所愛重
이를 듣고 나서는 깊이 생각해 따라 기뻐하며, 마땅히 그곳으로 찾아가 직접 뵙고 그 행을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의복을 가지런히 하고 화상의 처소에 이르러 이렇게 자신의 의요(意樂)를 말씀드려야 한다.
“화상이여, 허락하소서. 저는 저곳으로 찾아가 선사를 직접 뵐 것입니다.”
028_1022_c_06L得聞是已深思隨喜當往彼處親覲受行應整衣服到和上所自說意樂和上聽我我當往彼親覲禪師
그러면 화상은 허락하며 이렇게 답해야 한다.
“훌륭하구나. 나 또한 기쁘니, 이는 선량한 사람이 해야 할 바이다. 이것을 ‘선량한 사람이 함께 머무는 것은 선량한 사람이 행할 바이다’라고 하니, 이는 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다. 보거나 듣기만 해도 큰 이익을 얻는데 하물며 함께 머무는 것이랴. 그러니 너는 그곳으로 가야 하리라. 너는 그곳에 가서는 삼가 방일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 선량한 사람에게서 부지런히 수학할만하다면, 만약 한 때나 모든 시간 등에 믿고 공경하며 정성을 다할만하다면, 마땅히 잘 말하고, 몸과 입을 수호하고, 잘 이해하고, 수행하여야 하고, 마땅히 성취하여야 한다. 일체를 스승께 의지해야지 경솔한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갓 결혼한 여자가 시부모를 섬기듯이 마땅히 부끄러움을 일으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028_1022_c_09L和上應聽答善哉亦隨喜是善人所作此謂善人共住善人所行是隨法修行若見聞者大利益何況共住汝當往彼汝已往愼莫放逸若是善人可勤修學於一時及一切時等加信誠當善語守護身口曉解脩行得成就一切依師莫生輕易如初嫁小女性事舅姑應生慚愧聽受敎誡
만약 제자에게 의복과 탕약이 없는 것을 보았다면 그곳으로 떠날 때에 여법하게 마련해주면서 법을 설해 가르치고, 나아가 전송할 때도 걷고 앉는 자리에서 선법(善法)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 좌선인은 의복을 가지런히 하고서 공경히 주위를 돌고 스승의 발아래 예배하여야 한다.
028_1022_c_17L若見弟子無衣服湯藥若往彼時如法料理說法敎誡及至將送行坐以善法彼坐禪人齊整衣服恭敬圍繞禮師足下
(그런 다음) 수행처소나 길 도중이나 동산 밖에 물이 있는 곳이 있으면 그곳 한 자리로 가서 의발(衣鉢)ㆍ혁사(革屣)ㆍ조관(澡罐)ㆍ선구(禪具)를 한 곳에 높이 올려놓고 물이 닿지 않게 하라. 목욕할 때에는 소리를 내지 말고, 목욕을 끝냈으면 의복을 가지런히 하고서 울다라승(鬱多羅僧)을 입고, 의발과 선구를 오른쪽 어깨 위에 놓고, 승가리를 말아 쥐거나 혹은 어깨 위에 놓는다.
028_1022_c_21L於行所半路園外諸有水地往彼一處衣鉢革屣澡罐禪具高置一處不使近水當浴不聲若浴竟已齊整衣服著鬱多羅僧衣鉢禪具置右肩上卷僧伽梨若置肩上
028_1023_a_02L절에 들어가면 일산을 거두고 탑 주위를 돌아야 하며, 비구를 보면 마땅히 그에게 가서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곳에 좌선하는 분이 계십니까, 분소의를 수지하는 분이 계십니까, 걸식하는 분이 계십니까, 율사가 계십니까, 계시다면 어디에 머무십니까, 어디로 가야 이를 수 있습니까, 계시다면 마땅히 찾아갈 것입니다. 만약 이런 분이 없다면 율사는 계십니까? 저는 그래도 찾아갈 것입니다. 또 율사마저 없다면 어느 분이 상좌이십니까? 저는 그래도 찾아갈 것입니다.”
028_1023_a_02L入寺舍低蓋繞塔若見比丘當往諮此處有坐禪人不有糞掃衣人不有乞食人不有律師不有者於何處從何可至有者當往若無此人律師者我亦當往又無律師誰爲上我亦當往
만약 상좌나 대승(大僧)이 의발을 받아주려 하면 주어서는 안 된다. 만약 다른 어린 사람이라면 마땅히 주어야 한다. 만약 의발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한 곳에 내려놓아라. 만약 상좌를 보면 마땅히 발에 예배하고 한쪽에 머물러야 한다.
028_1023_a_08L若上座大僧爲取衣鉢勿與若餘小者應與若無人取下置一處若見上座應當禮足於一面住
그러면 그곳에 예전부터 머물던 비구는 자리와 물 및 씻는 곳을 여법하게 공급하고, 그가 쉴 자리를 펴주고, 그의 의발을 안치하고, 대소변 보는 곳을 일러준다. (그러면 찾아간 자는) 그곳 승가의 규율에 대해 묻고 해가 질 무렵에 절 안을 두루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다 율사를 보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의심나는 죄나 범해서는 안 되는 죄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만약 아비담사(阿毘曇師)를 보면 마땅히 지혜를 닦아야 하고, 음(陰)ㆍ입(入)ㆍ계(界)의 업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만약 두타를 수지하는 사람을 보면 지혜에 상응하여 마땅히 두타의 공덕에 대해 물어야 한다. 만약 그곳에 머문다면 매일매일 찾아가 곳곳에서 물어야 한다. 만약 그곳을 떠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와구를 잘 접어 대승(大僧)의 발에 예배하며 떠난다고 알려야 한다. 이것이 비구가 나그네가 되었을 때의 법용(法用)이다.
028_1023_a_10L舊住比丘以坐以水及澡洗處如法供延其消息安其衣鉢示其便處訪問僧制日將入時周行寺內若見律師共語諮問所疑之罪及不犯罪若見阿毘曇師爲應修慧當問陰入界業若見頭陁人爲相應慧當問頭陁功若住於彼日日應往處處諮問欲行當屛牒臥具禮大僧足白云行去此是比丘爲客法用
그 좌선인에게서는 마땅히 머물며 가까이해야 하고, 선사가 만일 찾아왔다면 그가 비록 나이가 적더라도 대신 의발을 받아들어야 한다. 선사의 법이 행할만한 것이건 행할만한 것이 아니건 곧바로 가거나 떠나게 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예전에 했던 것이라도 마땅히 수행하여야 한다. 만약 사람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좌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예전에 어떤 법을 행하였는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028_1023_a_19L於彼坐禪人住親近禪師若至雖小亦代取衣鉢禪師之法可行不可行不應卽行令是先所作應當修行若欲敎人先取覺學坐禪人先已行法
028_1023_b_02L(선사를 찾아갔을 때에는) 주처를 살펴보고 의발을 안치하고는 잠시 쉬다가 적절한 시기를 알아 선사를 직접 뵙고, 공경히 예배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앉아야 한다. 만약 선사가 원하는 바를 물으면 그에 따라 좋아하는 바를 말씀드려야 하고, 묻지 않으면 말씀드려서는 안 된다. 그러고 난 뒤에 양치질 세수 등을 하고는 의지할 것을 청하고 행할 업을 닦아야 한다.
028_1023_a_23L看視住處安置衣鉢少時消息知識時節親覲禪師恭敬禮拜少時靜默當坐若禪師問所欲當隨說所樂若不問者則不應說從此已後楊枝澡洗等當請依止脩所行業
걸식할 때가 되면 아사리[스승]에게 찾아가 물어 여법하게 행하여야 한다. 식사 때가 되면 아사리의 발을 씻어드리고, 자리에 편안히 앉혀드리고, 발우를 드리고, 자신의 발우의 음식에 대하여 그 취한 바의 많고 적음을 아사리에게 여쭤야 하고, 자신의 발우의 음식을 덜어 제자에게 주어야 한다. 이와 같이 거두고, 이와 같이 어렵지 않다.
028_1023_b_05L若乞時至往問闍梨如法當作食時若至爲闍梨洗足及安坐處授鉢於其自鉢食應問闍梨所取多少安置自鉢減與弟子如是攝如是不難
그때 먹고 나서는 아사리의 발우를 가져다 씻고, 편안한 곳에서 때를 알아 직접 뵙고, 공경히 예배하고, 잠시 침묵하다가 앉아야 한다. 만약 아사리가 물으면 그에 따라 좋아하는 바를 말씀드리고, 묻지 않으면 아사리에게 예배하고 “제가 본래 원했던 바를 말씀드리도록 허락하소서. 만약 허락하신다면 제 뜻대로 여쭙겠습니다”라고 청해야 한다.
028_1023_b_09L爾時食已取闍梨鉢洗訖安處知時親覲恭敬禮拜少時靜默當坐若闍梨問隨說所樂若不問禮拜闍梨請聽我說本來所欲若蒙聽許隨意問
아사리가 만약 허락하면 모든 것을 말씀드려야 한다. 만약 물어보지 않는다면 아사리에게 예배하고 적절한 시기를 엿보아 “제가 찾아온 인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컨대 아사리시여, 저의 말을 들어주소서”라고 말한다. 만약 아사리가 허락하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면 아사리는 “훌륭하구나”라고 말하고, 법에 따라 가르치고, 마땅히 거두어야 한다. 때문에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설하셨다.
028_1023_b_13L闍梨若聽一切當說不問禮阿闍梨覓時節當說我來因願闍梨聽我所說若阿闍梨聽切其所樂當說闍梨言善哉如法敎應當攝受是故世尊說偈

적절한 때에 가까이하고
마음에 교만이 없게 하라.
범행은 법을 보호할 수 있으니
나무에 바람이 없는 것과 같네.
028_1023_b_17L以時而親近
令心無憍慢
梵行能護法
譬如樹無風

법을 생각하면서 수행하고
나아가 법의 유희를 스스로 즐기며
법에 머물고, 법을 분별하여
여실한 법을 설해야 하네.
028_1023_b_19L念法而脩行
及法戲自樂
法住法分別
當說如實法

법을 훼손하는 짓을 해서는 안 되니
기어(綺語)ㆍ우(憂)ㆍ희소(戱笑)
진에(瞋恚)ㆍ해태(懈怠)
분(忿)ㆍ한(恨)ㆍ탐(貪)ㆍ만(慢)ㆍ치(癡)가 없게 하라.
028_1023_b_20L毀法不當行
綺語憂戲笑
嗔恚勿懈怠
忿恨貪慢癡

오염된 애욕과 사나운 행동 등을
수행으로 모두 조복해 없애고
의를 지키며 스스로 오만하지 말고
착하고 정성스럽고 진실하게 말할 줄 알라.
028_1023_b_21L愛染很戾等
脩行悉伏除
守義不自高
知善誠實語

정(定)을 위해서는 실로 알고 들어야 하나니
만약 사람이 문득 방일하면
문혜(聞慧)가 증장되지 않네.
028_1023_b_23L爲定實知聞
若人輒放逸
聞慧不增長

만약 사람이 정법을 알면
천인에게 공경을 받고
그 공경심이 신심을 이루나니
다문은 능히 법을 보호하고
좋아하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하네.
028_1023_b_24L若人知正法
天人所恭敬
恭敬成信心
多聞能護法
令得所樂聞
028_1023_c_02L
이와 같은 모든 공덕을
법에 따라 수행할 수 있다면
수승하고 오묘한 이해를 일으킬 수 있어
지혜로운 사람이 되리라.
028_1023_c_02L如是諸功德
隨法能修行
能生勝妙解
成就智慧人

만일 이와 같은 스승이 있다면
마땅히 수행하며 방일하지 말라.
028_1023_c_04L若有如是師
當脩不放逸
解脫道論卷第二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승가리(僧伽利, Saṅhāṭi)는 대중들 앞에 나갈 때 입는 큰옷이고, 울다라승(鬱多羅僧, Uttarāsaṅga:상의)과 안다회(安陀會, Antaravāsaka:하의)는 속옷이다.
  2. 2)특정한 집에서 매일 공양을 받는 것을 상식(常食)이라 한다.
  3. 3)4식(食)의 하나로 밥이나 면 등 형체가 있는 음식물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음식을 손으로 뭉쳐서 먹었기 때문에 단식(摶食)ㆍ단식(團食)이라고도 한다.
  4. 4)보관한 음식을 말한다. 승가에서는 음식을 보관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5. 5)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촌락에서 일정거리 떨어진 한적한 곳을 말한다.
  6. 6)중인(中人)은 보통 성인을 말한다. 4주(肘) 500궁(弓)은 팔꿈치[肘]의 4배 길이인 활[弓]의 500배에 해당하는 거리를 말한다. 도시나 촌락에서 그 정도 거리가 떨어진 것이 가장 가까운 무사처(無事處)이다. 무사처는 그보다 밖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7. 7)“마쇄(麻粹)”가 송(宋)ㆍ원(元)ㆍ명(明)ㆍ궁(宮)본에는 ‘마판(麻柈)’으로 되어 있다.
  8. 8)추마(芻麻, Kṣauma)는 아마의(亞麻衣), 고패(古貝, Kappāsa)는 면의(綿衣), 교사야(嬌奢耶, Koseyya)는 견의(絹衣), 흠바라(欽婆羅, Kambala)는 모의(毛衣)이다.
  9. 9)걸식을 금지하도록 지정한 집을 말한다. 그런 집에서 보시할 경우에는 발우를 뒤집어 거부의사를 밝힌다.
  10. 10)코로 약물을 투여하는 것을 말한다. 앉은 자세에서 약을 투여하면 아래로 흐르므로 누워서 약을 넣는 것을 허용한다.
  11. 11)계박(繫縛)을 이탈한 행자로, 속박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보통은 자이나교도를 지칭한다.
  12. 12)개(蓋)는 번뇌의 이명으로, 심성을 덮어 선법이 생기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 있다. 탐욕(貪慾)ㆍ진애(嗔恚)ㆍ혼면(惛眠)ㆍ도거(悼擧)ㆍ의(疑)를 5개라 한다. 전(纏) 역시 번뇌의 이명으로, 중생을 얽매어 생사의 감옥에 가둔다는 뜻이 있다. 무참(無慙)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ㆍ면(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를 10전이라 한다.
  13. 13)음(陰, Skandha:蘊)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5온(蘊)을, 입(入, Ayatana:處)은 12처(處)를, 계(界, Dhātu)는 18계(界)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