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 解深密經疏卷第一

ABC_BJ_H0003_T_001

001_0123_b_01L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
해심밀경소 권1(解深密經疏卷第一)

서명사 사문 원측 찬술하다(西明寺沙門 圓測撰)
백진순 (역)
해심밀경소 제1 서품(解深密經疏 序品第一)
이제 경을 해석하려고 네 문으로 분별하였다. 첫째는 교를 일으킨 뜻과 경의 제목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경의 종宗과 체體를 설명한 것이며, 셋째는 (교의) 근거와 대상을 나타낸 것이고, 넷째는 경문을 따라가며 해석한 것이다.
제1장 교를 일으킨 뜻과 경의 제목
첫째, 교를 일으킨 뜻과 경의 제목을 밝히겠다.

생각건대, 진성眞性은 매우 심오하니 모든 형상을 넘어서면서도 형상으로 드러나고, 원음圓音은 비밀스러우니 무수한 말로 펼쳐지면서도 말한 것이 없다. 이것이 바로 말에 나아가면서도 말이 사라짐이고 형상이 아니면서도 형상으로 드러남이다.
이치는 고요하면서도 말해질 수 있고, 말에 나아가면서도 말이 사라졌으며1) 언교言敎는 널리 펼쳐지면서도 설한 것이 없다.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유마는 장실丈室2)에서 불이不二에 대해 침묵하였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정토의 궁전3)에서 삼성三性에 대해 설명하셨다.
따라서 자씨보살4)은 진眞·속俗을 말하면서 모두 보존하고, 용맹대사5)는 공空·유有를 말하면서 둘 다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보존함은 버림과 어긋나지 않으니 유식唯識의 뜻이 더욱 밝게 드러나고, 버림은 보존함과 어긋나지 않으니 무상無相의 뜻이 항상 성립된다. 공이기도 하고 유이기도 하니 이제二諦의 종지를 잘 이루어 주고, 유도 아니고 공도 아니니 중도中道의 이치에 딱 들어맞는다. 그러므로 미혹에 빠진 자는 공을 설하면서도 유에 집착하지만 깨달아 아는 자는 유를 말하면서도 공에 통달했음을 알 수 있다. 불법의 깊은 근원이 어찌 이와 같지 않겠는가! 다만 인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고 이치를 깨닫는 길이 한 가지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법왕은 삼법륜三法輪6)을 설하셨다. 처음에는 성문승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자를 위해 바라나국의 시록림7)에서 처음으로 생사·열반의 인과에 대해 설하셨으니, 이것이 첫 번째 사제四諦 법륜이다. 다음에는 보살승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자를 위해

001_0123_b_01L[解深密經疏]

001_0123_b_02L1)解深密經疏卷第一 [1]

001_0123_b_03L

001_0123_b_04L西明寺沙門圓測撰

001_0123_b_05L解深密經序品第一

001_0123_b_06L
將欲釋經四門分別一敎興題目
001_0123_b_07L辨經宗體三顯所依爲四依文正
001_0123_b_08L

001_0123_b_09L第一敎興及題目者
竊以眞性甚深
001_0123_b_10L超衆象而爲象圓音秘密布群言而
001_0123_b_11L不言斯乃卽言而言亡非象而象著
001_0123_b_12L理雖寂而可談卽言而言亡 [1] 2) [2]
001_0123_b_13L弘而無說3) [3] [2] 嘿不二於丈室可談
001_0123_b_14L辨三性於淨宮是故慈氏菩薩
001_0123_b_15L眞俗而並存龍猛大士談空有而雙
001_0123_b_16L然則存不違遣唯識之義彌彰
001_0123_b_17L不違存無相之旨恒立亦空亦有
001_0123_b_18L成二諦之宗非有非空契會中道之
001_0123_b_19L故知迷謬者說空而執有悟解者
001_0123_b_20L辨有而達空佛法甚源豈不斯矣
001_0123_b_21L以接引多方入理非一是故法王說
001_0123_b_22L三法輪初爲發起聲聞乘者波羅柰
001_0123_b_23L國施鹿林中創開生死涅槃因果
001_0123_b_24L卽第一四諦法輪次爲發趣菩薩乘

001_0123_c_01L취봉산8) 등 열여섯 번의 법회에서 온갖 반야에 대해 설하셨으니, 이것이 두 번째 무상無相 법륜이다. 마지막에는 일체승에 발심하여 나아가는 자를 위해 연화장 등의 정토와 예토에서 『해심밀경』 등을 설하셨으니, 이것이 세 번째 요의대승了義大乘이다.
이상이 바로 여래께서 가르침을 일으키신 뜻이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이라는 제명은 이 경전 전체에 해당하는 이름이고, ‘서품제일序品第一’이란 품 내의 개별적 제목이다.
‘해解’는 해석이고, ‘심深’은 매우 심오함이며, ‘밀密’은 비밀을 뜻한다. 이 경은 경境·행行·과果의 세 가지가 비할 바 없이 뛰어남(三無等)을 밝히는 것을 종지로 삼으니,9) 이와 같이 매우 심오한 의미를 해석하므로 ‘해심밀’이라 하였다.
‘경’이란 범음으로는 소달람素怛纜(ⓢ sūtra)이고, 여기 말로 경이라 한다. 세속의 전적에 의하면 경은 ‘상常’을 말하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교의 의미가 항상 일정하기에 상이라고 부른다. 어떤 경우는 ‘실(綖)’이라 번역하는데, 『사분율』에서는 (경이란 비유하면) ‘실로 꽃들을 꿰어 결코 흩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10)고 하였다. 대당의 삼장 법사 현장은 ‘계경契經’이라 번역하는데, 이는 계합契合하는 것, 즉 도리에 들어맞고 유정의 근기에도 맞는 것을 말한다. 경에는 또한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는 꿰어 놓음이고 둘째는 거두어 지님이다. 즉 설해야 할 의미를 꿰고 있고 교화해야 할 유정을 거두어 지닌다는,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계경이라 한다.
(해심밀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 ‘해·경’이라는 두 글자는 능전의 교(能詮敎)이고, ‘심밀’이라는 말은 소전의 이치(所詮理)를 나타낸 것이니,11) 능전과 소전을 따라서 경의 제목을 세운 것이다. 이것은 곧 ‘심밀의 해경(深密之解經)’이므로 육합석六合釋 중 의주석依主釋에 해당한다.12)
‘서품제일序品第一’에서, ‘서’란 이유(由序)이니 바른 교설을 일으킨 이유이고,

001_0123_c_01L鷲峯山等十六會中說諸般若
001_0123_c_02L卽第二無相法輪後爲發趣一切乘
001_0123_c_03L蓮華藏等淨穢土中說深密等
001_0123_c_04L卽第三了義大乘是卽如來敎興之
001_0123_c_05L意也

001_0123_c_06L
題云解深密經者一部總名序品第
001_0123_c_07L一者品內別目解謂解釋深卽甚
001_0123_c_08L密者秘密此經宗明境行及果三
001_0123_c_09L種無等解釋如是甚深之義名解深
001_0123_c_10L經者梵音名素恒纜此云經也
001_0123_c_11L若依俗典經者常也經古歷今
001_0123_c_12L義恒定目之爲常或翻爲綎四分
001_0123_c_13L律云綎貫華定不失落大唐三藏
001_0123_c_14L爲契經謂契合契當道理合有情
001_0123_c_15L經亦二義一者貫穿二者攝持
001_0123_c_16L貫穿所應說義攝持所化有情具斯
001_0123_c_17L二義故名契經辨得名者解經兩
001_0123_c_18L是能詮敎深密之言顯所詮理
001_0123_c_19L從能所詮以立經目此卽深密之解
001_0123_c_20L經也故六釋中是依主釋序品第
001_0123_c_21L一者序謂由序起正說之由致
001_0123_c_22L「底」續藏經第一編三十四套四~五冊ㆍ三十
001_0123_c_23L五套八~九冊
「言」一作「敎」「故」上疑
001_0123_c_24L脫「無說」

001_0124_a_01L‘품’이란 품류品類 또는 품별品別의 뜻이다. ‘이미 들었다는 것’ 등13)을 나타낼 때, 내용의 종류가 서로 따르면 내용을 모아 각기 구별시켜 품이라고 한다. 이 한 책 안에 여덟 개의 품이 있고 이 품이 첫 번째이므로 ‘제일’이라 한다. 따라서 ‘해심밀경서품제일’이라 한 것이다.
제2장 경의 종체를 설명함
‘종체宗體’라고 한 것에서, ‘체’란 능전能詮14)의 교체敎體15)를 총괄해서 밝힌 것이고, ‘종’이란 모든 교법의 소전所詮16)을 따로따로 나타낸 것이다.
1. 능전의 교체를 총괄해서 밝힘
그런데 모든 성스런 가르침에 대해, 대당의 삼장 법사는 다섯 가지 문으로 교체를 나타내었다.

1) 섭망귀진문攝妄歸眞門
첫 번째는 허망한 것을 거두어 진실한 것에 돌아가는 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성교의 명·구·문과 음성은 진여를 교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마경』 등에서 “일체중생은 모두 진여고 모든 법들도 진여다.”17)라고 하였다.18)

2) 섭상귀식문攝相歸識門
두 번째는 상相을 거두어 식識에 귀속시키는 문이다. 이에 대략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삼분설로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니,19) 자체분을 ‘식’이라 하고 견분과 상분을 통괄하여 ‘상’이라 한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變이란 식체가 전변하여 마치 이분二分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견분과 상분은 모두 자체분에 의지해 일어나기 때문이다.”20) 또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소변識所變21)의 상은 수많은 종류이지만 능변식能變識22)의 종류를 나누면 오직 세 가지뿐이다.”23) 이 해석에 의하면 상相이란 상상相狀(식에 나타난 표상)을 말하니, 견분과 상분이 모두 자체분인 식의 상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분설로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니,24) 견분을 ‘식’이라 하고 상분을 ‘상’이라 한다.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혹은 다시 내식이 전변하여 마치 외경처럼 나타나는 것이다.”25)라고 하였다. 이 해석에 의하면, 상분을 ‘상’이라 하는데 상분은 견분을 떠나지 않으므로 ‘오직 식이다(唯識)’라고 하였다. 총괄적으로 그 뜻을 설하면, 명·구·문 및 음성은 식의 상이기 때문에 식이라는 것이다.26)

3) 이가종실문以假從實門
세 번째는 가립을 실재에 귀속시키는 문이다. 예를 들어 『유가사지론』 등에서 ‘명·구·문은 가립된 것이고 음성은 바로 실재하는 것이므로 음성을 떠나서 그 밖에 별도의 명·구·문은 없다’고 한 것과 같다.27)
  또는 위에서 말한 세 가지 문은 각기 두 개의 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문의 두 문은 다음과 같다.

001_0124_a_01L謂品類或品別義顯已聞等義類
001_0124_a_02L相從攝義各別目之爲品於一部
001_0124_a_03L有其八品此品最初故名第一
001_0124_a_04L故言解深密經序品第一

001_0124_a_05L言宗體者
體卽總明能詮敎體宗言
001_0124_a_06L別顯諸敎所詮
[總明能詮敎體]
然諸聖敎大唐三藏
001_0124_a_07L五門出體
一攝妄歸眞門
謂諸聖敎
001_0124_a_08L名句文身及以音聲用如爲體
001_0124_a_09L維摩等云一切衆生皆如也一切諸
001_0124_a_10L法亦如也
二攝相歸識門
略有二義
001_0124_a_11L一三分明義自體名識見相二分通
001_0124_a_12L名爲相故成唯識第一卷云變謂識
001_0124_a_13L體轉似二分見相俱依自體起故
001_0124_a_14L第二云識所變相雖無量種而能
001_0124_a_15L變識類別唯三若依此釋相謂相
001_0124_a_16L見相皆是自體分識之相狀故
001_0124_a_17L二分明義見分名識相分爲相
001_0124_a_18L成唯識云或復內識轉似外境若依
001_0124_a_19L此釋相分名相相不離見說名唯
001_0124_a_20L總說意云名句文身及以音聲
001_0124_a_21L之相故名爲識也

001_0124_a_22L三以假從實門
如瑜伽等名等是假
001_0124_a_23L聲卽是實故離聲外無別名等又解
001_0124_a_24L此上三門各開二門初二門者

001_0124_b_01L첫째는 허망한 것을 거두어 진실에로 돌아가는 문(攝妄歸眞門)이니, 교체는 오직 진실한 것이지 허망한 것은 아니다. 둘째는 진실과 허망을 차별시킨 문(眞妄差別門)이니, 교체는 허망한 것이지 진실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명·구·문·음성의 네 가지 법은 진여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의 두 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상을 거두어 식으로 귀속시키는 문(攝相歸識門)이니, 교체는 오직 식일 뿐 상이 아니다. 둘째는 식과 상을 차별시킨 문(識相差別門)이니, 우선 이 지역의 학설에 의하면 명·구·문·음성의 네 가지 법은 상일 뿐 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명·구·문·음성은 모두 상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의 두 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가립된 것을 실재하는 것에 귀속시킨 문(以假從實門)이니, 교체는 오직 실재이지 가립된 것은 아니다. 둘째는 가립된 것과 실재하는 것을 차별시킨 문(假實差別門)이니, 교체는 가립과 실재에 통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구·문은 가립된 것이고 음성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삼법정체문三法定體門
네 번째는 세 가지 법으로 교체를 결정하는 문이다. 세 가지 법이란 바로 오온·십이처·십팔계라는 삼과법문三科法門을 말하니, 따라서 『잡집론』에서는 (이 삼과를) ‘삼법품三法品’이라 하였다.
살바다종의 평가정의評家正義28)에 의하면, 음성을 교체로 삼기 때문에 교체는 삼과 중에서는 색온·성처·성계에 속한다.
경부종은 가립된 음성과 실재의 음성을 둘 다 교체로 삼으니, 교체는 오온문에서는 색온에 속하고 처문·계문에서는 성처·법처와 성계·법계에 속한다.29)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법수문法數門에서 자세히 분별하겠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음성과 명 등의 네 가지 법을 자성으로 삼는 것이니, 교체는 오온에서는 색온·행온에 속하고 처문·계문에서는 성처·법처와 성계·법계에 속한다. 왜냐하면 명 등의 세 가지 법은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30)

5) 법수출체문法數出體門
다섯 번째는 법수로 교체를 나타내는 것이니, 네 문으로 분별하겠다. 첫째는 법수로 교체를 나타낸 것이고, 둘째는 본질과 영상의 있고 없음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말소리가 취집하고 현현하기 위해 거치는 마음의 차별적 (단계를) 나타낸 것이고, 넷째는 여래의 설법이 일음一音인지 또는 이음異音인지를 밝힌 것이다.

(1) 법수로 교체를 나타냄
법수로 교체를 나타낸다고 했는데, 우선 사교邪敎에 대해 밝히겠다.

● 외도
수론외도들은 성제聲諦31)를 교체로 삼고, 승론종은 성덕聲德32)을 (교법의) 자성으로 삼는다. 순세외도들은 지·수·화·풍 사대를 교체로 삼는데, 모든 것의 자성은 모두 사대이기 때문이다.33) 성론의 논사들은 말(聲)을 교체로 삼으니,34) 『베다(明論)』의 말은 영원하여 일정한 척도가 되어 모든 법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35)


001_0124_b_01L攝妄歸眞門唯眞非妄二眞妄差別
001_0124_b_02L是妄非眞名等四法非眞如故
001_0124_b_03L二門者一攝相歸識門唯識非相
001_0124_b_04L識相差別門且依此土名等四法
001_0124_b_05L相非識名等皆是相分攝故後二門
001_0124_b_06L一以假從實門唯實非假二假
001_0124_b_07L實差別門通假及實名等是假
001_0124_b_08L卽實故
第四三法定體門
三法卽是
001_0124_b_09L蘊處及界三科法門故雜集論名三
001_0124_b_10L法品薩婆多宗評家正義用聲爲體
001_0124_b_11L三科中色蘊聲處聲界所攝
001_0124_b_12L經部宗假實二聲以爲敎體五蘊門
001_0124_b_13L色蘊所攝處界門中聲處法處
001_0124_b_14L聲界法界法數門中當廣分別
001_0124_b_15L依大乘聲及名等四法爲性於五蘊
001_0124_b_16L色行二蘊處界門中聲處法處聲
001_0124_b_17L界法界名等三法意識境故
第五
001_0124_b_18L法數出體
四門分別一法數出體
001_0124_b_19L本影有無三聚集顯現歷心差別
001_0124_b_20L辨音一異

001_0124_b_21L
言法數出體者且辨邪敎數論外道
001_0124_b_22L聲諦爲體依勝論宗聲德爲性
001_0124_b_23L世外道四大爲體一切皆用大爲性
001_0124_b_24L聲論諸師用聲爲體明論聲常

001_0124_c_01L
● 소승의 살바다종
이제 불교 내의 종파에 의하면 여러 교설들이 같지 않다.
살바다종에는 모두 75법이 있는데, 그 뜻은 일반적인 해석과 같다. 그런데 저 교체에 대해 『잡심론』과 『구사론』과 『대비바사론』에 모두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법온法蘊(설법)이란 색온을 자성으로 삼으니, 그것은 음성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설법은 행온을 자성으로 삼으니, 그것은 명·구·문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 따라서 이 지역 스님들의 해석도 같지 않으니, 이에 세 가지 학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성의 가르침을 (교체로 보는 것을) 정의正義로 삼으니, 여래의 음성은 선善이지만 명·구·문들은 무기無記이기 때문이다.36) 따라서 『잡심론』에서는 “경·율·아비담(논)을 세속의 정법이라 하고 삼십칠도품37)을 제일의라고 한다.”38)고 하였고, 장행의 해석에서 “세속의 정법이란 언설의 정법이다.”39)라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구·문을 정의로 삼으니, 이 명·구·문에 의해 말하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40) 따라서 『발지론』에서는 ‘십이부경41)의 자성은 무엇인가’라고 하고서, 답하길 ‘명·구·문들이 차례대로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하였다.42)……이하 생략……≻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성과 명·구·문을 전부 교체로 삼으니, 앞에서 말했던 두 가지 의미 때문이다.≻
지금의 신역 『구사론』 제1권에서는 두 가지 해석을 함께 진술하는데, 교체는 음성이라고 설하거나 혹은 명·구·문이라고 설하기도 하면서 (그에 대해) 따로 판별한 것이 없다.
『순정리론』 제3권에서도 두 논사의 설을 서술하는데, 이것도 『구사론』과 동일한 것이다. 아울러 문답도 쓰여 있는데,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語)은 교敎의 다른 이름이니 교가 바로 말임을 인정하지만, 명名과 교는 체가 다른데 교가 어째서 명이겠는가? 그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반드시 명이 있어야만 이를 교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은 바로 명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의미를 여실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이라 하는데, 명이 의미를 나타내므로 교가 바로 명이다. 이로 인해 부처님 가르침은 결정코 명을 교체로 삼는다. 명을 먼저 쓴 것은 그것이 구句와 문文을 포괄하기 때문이다.43)44)
『현종론』 제3권도 『순정리론』과 동일하다.
삼장(현장)의 풀이에 따르면,

001_0124_c_01L能爲定量詮諸法故今依內宗
001_0124_c_02L說不同薩波多宗總有七十五法
001_0124_c_03L如常釋然彼敎體雜心俱舍及毗婆
001_0124_c_04L皆有二說一云如來法蘊色蘊爲
001_0124_c_05L以是聲故一云行蘊名句字故
001_0124_c_06L由斯義故此地諸師解不同有其三
001_0124_c_07L一云音敎以爲正義以聲是善
001_0124_c_08L句文身是無記故故雜心云經律阿
001_0124_c_09L毗曇是名俗正法三十七道品
001_0124_c_10L說第一義長行釋云俗正法者
001_0124_c_11L說正法一云名等以爲正義以能詮
001_0124_c_12L表所說義故故發智論云十二部經
001_0124_c_13L以何爲性名身句身文身次第住
001_0124_c_14L乃至廣說一云通用音聲名等爲體
001_0124_c_15L由前所說二種義故今依新翻俱舍
001_0124_c_16L第一具申兩釋謂說音聲或說名
001_0124_c_17L而無別判正理第三叙兩師說
001_0124_c_18L亦同俱舍兼有問答故彼論云
001_0124_c_19L敎異名敎容是語名敎別體敎何
001_0124_c_20L是名彼作是釋要由有名乃說爲敎
001_0124_c_21L是故似 [3] 敎體卽是名所以者何詮義
001_0124_c_22L如實故名佛敎名能詮義故敎是
001_0124_c_23L由是佛敎定名爲體擧名爲首
001_0124_c_24L攝句文顯宗第三同順正理三藏

001_0125_a_01L서방의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고 전해진다. 『구사론』과 『순정리론』에는 모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각기 귀착되는 바가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중생(物)들을 기쁘게 하는 데는 음성이 뛰어나고, 법을 나타내는 데는 명·구·문이 뛰어나기 때문이다.45) 따라서 대응되는 경우가 같지 않고 각기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를 때, 두 가지 설이 모두 정의다.
이제 여러 논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문장을 따라 판별해 보겠다.『순정리론』의 의도는 명·구·문을 교체로 보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논에서는 “그러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정코 명을 교체로 삼는다.”46)고 결론짓는다. 이에 준해 보면, 『구사론』도 『순정리론』과 같다. 그것을 논파하지 않은 것은 의미상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후대의 논사가 스스로 결론을 내린 것이지, 『순정리론』의 논사가 우열을 판정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대비바사론』의 평가정의에 의하면, 음성을 (교체로 보는 것을) 정의로 삼는다. 따라서 『대비바사론』 제12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佛敎)은 어떤 것을 체로 삼는가? 그것은 어업語業인가, 명·구·문인가?
  ‘어업을 체로 한다’고 말해야 한다.
  이렇다면 그 뒤에 설해진 『발지론』의 문답과 어떻게 회통시키겠는가?47) 예를 들면 “부처님 가르침이란 어떤 법을 가리키는가? 답하자면, 명·구·문들이 차례로 행렬行列하고 차례로 안포安布되고 차례로 연합連合한 것이다.48)”라고 설하였다.
  그 뒤의 『발지론』 본문은 부처님 가르침의 작용을 나타낸 것이지, 부처님 가르침 자체를 나타내려 했던 것은 아니다. 즉 차례로 행렬하고 안포하고 연합한 명·구·문들이란 부처님 가르침의 작용을 말한다.
어떤 이는 말하길, ‘부처님 가르침은 명·구·문을 체로 삼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발지론』의 본문에서 설한 것과는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는가? 예를 들면 “부처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답하자면, 부처님의 언어語言·창사唱詞·평론評論·어음語音·어로語路·어업語業·어표語表를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전전인展轉因49)에 의거하므로 이렇게 설한 것이다. 마치 대대로 자손들이 연속해서 생겨나는 법이듯, 말이 명을 일으키고 명이 의미를 나타낼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설하는 자들은 어업을 교체로 여기니, (부처님 가르침이란) 부처님 마음속으로 말하려 한 것을 다른 이가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50)

자세한 것은 저 『대비바사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

001_0125_a_01L解云西方諸師傳作此釋俱舍正
001_0125_a_02L皆有兩說各有所歸所以者何
001_0125_a_03L令物歎喜音聲爲勝若約詮法
001_0125_a_04L等卽勝故知所對不同各有准據
001_0125_a_05L斯兩說皆是正義今詳諸論隨文
001_0125_a_06L相判正理論意名等爲正故彼結
001_0125_a_07L是故佛敎定名爲體准此俱舍
001_0125_a_08L同正理以彼不破義不違故或可後
001_0125_a_09L師自結所立非正理師刊定勝劣
001_0125_a_10L依婆沙評家正義音聲爲正故大
001_0125_a_11L婆沙第一百二十六云如是佛敎
001_0125_a_12L以何爲體爲是語業爲是名等
001_0125_a_13L應作是說語業爲體若爾次後所
001_0125_a_14L當云何通如說佛敎名何法
001_0125_a_15L謂名身句身文身次第行列次第安
001_0125_a_16L次第連合後文爲顯佛敎作用
001_0125_a_17L不欲開示佛敎自體謂次第行列安
001_0125_a_18L布連合名句文身是佛敎用有說
001_0125_a_19L敎名等爲體若爾此文所說當云
001_0125_a_20L何通如說佛敎云何謂佛語言
001_0125_a_21L詞評論語音語路語業語表是謂
001_0125_a_22L佛敎依展轉因故作是說如世
001_0125_a_23L子孫展轉生法謂語起名名能顯義
001_0125_a_24L如是說者語業爲體佛意所說他所

001_0125_b_01L
  어찌 『순정리론』이 『대비바사론』 등에 의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평가정의를 따르지 않는가?
  중현51)은 이치가 우수하면 더 나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52) 이치를 별도로 내서 명·구·문을 정의로 삼은 것이다.
  저 종파에서 음성을 교체로 삼는 경우는 법수문에서는 오직 음성 한 개의 법만을 교체로 삼는 것이고, 명·구·문을 교체로 삼는 경우는 곧 명·구·문의 세 가지 법을 교체로 삼는 것이다. 합해서 말하면 네 개의 법을 교체로 삼는 것이니, 즉 음성과 명·구·문이다. 그런데 평가정의는 음성이라는 한 개의 법을 교체로 삼는다.

● 경부종
경부종에 의하면, 음성을 교체로 삼는다. 따라서 『순정리론』 제14권에서는 경부종을 논파하면서 “그대들은 ‘명·구·문이란 곧 음성을 체로 삼는 것’이라 건립해서는 안 된다.53)54)고 하였다. 무성無性55)의 『섭대승론석』 제1권도 이러하니, 그 논에서는 ‘모든 계경의 문구들이 말(語)을 자성으로 삼는다는 주장도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56)
그런데 저 경부종에는 세 논사의 설이 있다.57)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체는 십이처 중에 성처聲處를 자성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음성을 떠나서 별도로 명·구·문은 없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처法處에 (속하면서) 상속하는 가짜 소리(假聲)58)를 자성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의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통틀어 가짜 소리와 실재 소리의 두 가지를 모두 체로 삼는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 때문이다.≻

  어째서 경부종에는 이러한 세 가지 설이 있게 되었는가?
 () 대당 삼장의 풀이에 따르면, 경經을 판단의 척도(量)로 삼아 모든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들을 다 경량부라고 하기 때문에 경부종에 이 세 가지 설이 있게 된 것이다. 그 종에서는 법수에 대한 설들이 다르다. 한편에서는 심心을 떠나 별도의 심소법은 없다고 한다. 그 설에 의하면 열아홉 가지 법이 있다. 즉 색色 중에 열네 개가 있으니, 오근五根과 오경五境 그리고 지·수·화·풍의 사대종을 말한다. 심은 오직 하나뿐이니, (심을 떠난 별도의) 심소법은 없기 때문이다. 불상응법不相應法은 오직 한 가지가 있을 뿐이니, 모든 무작無作59)을 말한다. 무위법에는 세 개가 있으니, 허공과 택멸擇滅과 비택멸非擇滅이다.60) 이와 같이 열아홉 가지 법이 있는데 이 중에 단지 성처聲處만을 교체로 삼으니, 상속하는 가짜 소리는

001_0125_b_01L聞故具說如彼豈不正理依婆沙
001_0125_b_02L如何不依評家正義答曰衆賢理
001_0125_b_03L長爲勝故別生理名等爲正解云
001_0125_b_04L彼宗聲爲體者法數門中唯用音聲
001_0125_b_05L一法爲體名等爲體者卽用名等三
001_0125_b_06L法爲體若合說者合用四法爲體
001_0125_b_07L聲名等評家正義用聲一法爲體
001_0125_b_08L經部宗以聲爲體故順正理第十四
001_0125_b_09L破經部云汝不應說 [4] 名句文身卽
001_0125_b_10L聲爲體無性攝論第一亦爾彼云
001_0125_b_11L契經句語爲自性且不應理然依彼
001_0125_b_12L有三師說一云十二處中聲處
001_0125_b_13L爲性離聲無別名句字故一云法處
001_0125_b_14L相續假聲以爲自性唯是意識所緣
001_0125_b_15L性故一云通用假實二聲爲體前二
001_0125_b_16L義故如何經部宗有此三說三藏解
001_0125_b_17L以經爲量釋諸義者皆名經部
001_0125_b_18L故經部宗有此三說彼宗法數諸說
001_0125_b_19L不同一云離心無別心法若依彼說
001_0125_b_20L有十九法謂色中有十四謂五根五
001_0125_b_21L境及四大種心唯是一無心法故
001_0125_b_22L相應法唯有一數謂諸無作無爲有
001_0125_b_23L謂虛空擇滅非擇滅如是有十九
001_0125_b_24L種法於中但用聲處爲體相續假聲

001_0125_c_01L별도의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밖의 두 가지 설은 ‘일체법’의 의미를 논하면서 자세히 분별할 것이다.

● 대승의 용맹종
이제 대승에 의하면 두 가지 설이 다르다.
첫째, 용맹종(중관학파)은 정확하게 판정해 놓은 문장은 없지만, 법수法數의 개수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모든 법상法相에 대해 설명한 것에 준해 볼 때 대개 살바다종과 동일하여 총 761법이 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살바다종에서는 75법을 밝혔고,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는 700개의 불상응법을 세웠다. 따라서 (75법에서) 14불상응법을 빼고 700불상응법을 더해서 761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다시 그 밖의 다른 논들도 조사해 보라.
이에 따르면, 열한 개의 색법 중에 음성을 교체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대지도론』 제3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신통을 얻은 아라한은 부처님이 법을 설하실 때 비록 그 자리에 있지 않더라도 천안天眼으로 부처님을 보고 천이天耳로 법을 듣는다. 그러나 신통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라면 보거나 듣지 못할 것이다.” 이에 준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성聲61)을 체로 삼는 것이다.

● 대승의 미륵종
둘째, 미륵종에는 총 100법이 있다. 예를 들면 『백법명문론百法明門論』과 같다. 그런데 교체를 나타내는 데 있어 여러 교설들이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오직 ‘음성’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유마경』 등에서는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설법하시나 중생들은 부류마다 각각 이해한다.”62)고 하였다. 또 『무량의경』에서는 “일음으로 널리 뭇 소리에 응하신다.”63)고 하였다. 또 『대계경大界經』64)에서는 여래께서는 한 마디의 설법 중에서 한량없는 경전을 설하신다고 하였다. 또 이 『해심밀경』 제5권에서는 “여래의 언음言音에는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계경契經이고, 둘째는 조복調伏(律)이며, 셋째는 본모本母(論)다.”65)라고 하였다. 『상속해탈경』과 『심밀해탈경』 두 경에서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의 말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수다라脩多羅(經)의 말이고, 둘째는 비니毗尼(律)의 말이며, 셋째 마덕늑가摩德勒伽(論)의 말이다.≻66) 『현양성교론』 등에서는 성인의 가르침을 성량聲量67)이라고 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다만 명·구·문을 교체로 삼는다. 예를 들어 『인왕경』에서는

001_0125_c_01L無別體故自餘諸說一切法義中
001_0125_c_02L具分別今依大乘兩說不同一龍
001_0125_c_03L猛宗無文正判法數多少准智度
001_0125_c_04L明諸法相大分同於薩婆多宗
001_0125_c_05L有七百六十一法何以得知者薩婆
001_0125_c_06L多宗明七十五法十住毗婆沙
001_0125_c_07L有七百不相應法故知除十四不相
001_0125_c_08L加七百不相應法故有七百六十
001_0125_c_09L一法更勘
餘論
由斯卽用十一色中音聲爲
001_0125_c_10L故智度論三十三云六通阿羅漢
001_0125_c_11L佛說法時雖不在座以天眼見佛
001_0125_c_12L耳聞法若神通力所不及處不得見
001_0125_c_13L准此佛敎用名 [5] 爲體二彌勒宗
001_0125_c_14L總有百法如百法論然出敎體
001_0125_c_15L敎不同有處唯聲如維摩經等
001_0125_c_16L以一音演說法衆生隨類各得解
001_0125_c_17L無量義經云能以一音普應衆聲
001_0125_c_18L大界經云如來一語說法中演說無
001_0125_c_19L量契經海又此經第五云如來言音
001_0125_c_20L略有三種一者契經二者調伏
001_0125_c_21L者本母相續深密二經皆云佛語有
001_0125_c_22L一脩多羅語二毗尼語三摩德
001_0125_c_23L勒伽語顯揚等論卽說聖敎名爲聲
001_0125_c_24L有處但用名等爲體如仁王經

001_0126_a_01L‘이 경의 명·구·문은 수많은 부처님의 설법’이라 하였다.68) 또 이 『해심밀경』 제4권에서는 “첫째는 한량없는 설법과 한량없는 법구 문자들, 그리고 점점 더 지혜롭게 분별하는 다라니의 자재함에 대한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변론의 자재함에 대한 어리석음이다.”69)라고 하였다.70)
  ‘한량없는 설법’이란 의무애의 경계이고, ‘한량없는 법구 문자’란 법무애의 경계이며, ‘점점 더 지혜롭게 분별하는 다라니의 자재함’이란 사무애의 경계이고, ‘변론의 자재함’이란 변설무애의 경계이다.71) 그러므로 (이 『해심밀경』의)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명·구·문을 교체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2권에서는 ‘명·구·문이 음성과 다르지 않다면 법무애와 사무애의 경계는 구별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72) 이에 준해 볼 때, 명·구·문을 교의 자성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음성과 명·구·문을 합해서 교체라고 설한다. 예를 들면 『인왕경』에서는 ‘십이부경의 여여함이란 바로 명·구·문·음성’이라고 하였다.73) 또 『유마경』 제3권에서는 ‘음성과 언어와 문자로써 불사佛事를 짓기도 하고, 이와 같이 내지는 모든 부처님의 위의와 동작과 하시는 모든 것이 불사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74) 『무구칭경無垢稱經』도 『유마경』과 동일하다. 또 『십지경론』 제1권에서는 “설하는 자도 이 두 가지 사事로써 설하고 듣는 자도 이 두 가지 사로써 듣는다.”75)고 했는데,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십지경론』에서 말한) ‘이 두 가지 사’란 음성과 명·구·문을 말한다.
어떤 곳에서는 문文과 의義를 합해서 교체라고 설한다.76)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8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하자면 계경의 체는 대략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문이고 둘째는 의다. 문이란 소의所依이고 의는 능의能依이니, 이와 같은 두 종류를 ‘알아야 할 모든 경계’라고 총칭하였다.”77)

● 대당 삼장(현장)의 해석
이와 같이 여러 교에서 다르게 말하는 이유에 대해 삼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실제로는 모두 명 등의 (네 가지 법을) 교체로 삼지만, 모든 성교의 말씀들은 각기 하나의 의미에 의거한 것이므로 서로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가假를 실實에 따르게 하여 말할 때는 음성을 교체로 삼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음성을 떠나 별도의 명·구·문은 없기 때문이다.78)

001_0126_a_01L此經名句百千佛說又此經第四
001_0126_a_02L一者於無量說法無量法句文字
001_0126_a_03L後後慧辨陀羅尼自在愚癡二者
001_0126_a_04L才自在愚癡解云無量說法者義無
001_0126_a_05L礙境無量法句文字者法無礙境
001_0126_a_06L後慧辨者辭無礙境辨才自在者
001_0126_a_07L說無礙境故知聖敎名等爲體故成
001_0126_a_08L唯識第二卷云若名句文不異聲者
001_0126_a_09L法辭無礙境應無別准知名等以爲
001_0126_a_10L自性有處合說聲及名等如仁王經
001_0126_a_11L十二部經如名句文聲又維摩經
001_0126_a_12L第三卷云有以音聲語言文字而作
001_0126_a_13L佛事如是乃至諸佛威儀進止諸所
001_0126_a_14L施爲無非佛事無垢稱經亦同維摩
001_0126_a_15L又十地論第一卷云說者以此二事
001_0126_a_16L聞者以此二事聞具如彼說
001_0126_a_17L言二事者謂聲及名等有處文義
001_0126_a_18L合說爲體如瑜伽論八十一云 [6]
001_0126_a_19L經體略有二種一文二義文是所
001_0126_a_20L義是能依如是二種總名一切
001_0126_a_21L所知境界所以如是諸敎異者三藏
001_0126_a_22L解云據實皆用名等爲體而諸聖敎
001_0126_a_23L各據一義故不相違所以者何
001_0126_a_24L假從實用聲爲體離聲無別名句等

001_0126_b_01L체體를 용用에 따르게 하여 말할 때는 명·구·문을 교체로 삼는다고 한다.79) 왜냐하면 능전의 제법들은 자성自性과 차별差別 두 가지의 의지처이기 때문이다.80) 가와 실이 서로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합해서 교체라고 설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라도 빠뜨리면 말(說)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81) 이해가 생기는 것은 결국 반드시 문文과 의義에 의한 것이므로 (문의를 교체로 삼기도 한다.82) ) 그러므로 모든 설은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2) 본질本質과 영상影像의 유무
두 번째는 본질과 영상의 있고 없음이다.83) 이에 두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는 본질과 영상의 있고 없음이고, 둘째는 설법의 차별이다.

① 본질과 영상의 유무
본질과 영상의 있고 없음을 밝히겠다.
여래의 성스런 가르침은 네 가지 법을 교체로 삼으니, 즉 음성·명·구·문이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은 여래께서 스스로 설하신 것을 본질이라 하고, 그것이 듣는 자의 식에 전변된 것을 영상이라 한다.84) 이와 같은 본질과 영상의 있고 없음의 차별에 대해 총괄하면 여러 종에서 네 가지 구로 말한다.
첫째, 본질은 있지만 영상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여러 설들이 다른데, 우선 여러 부파들에는 세 가지 교설이 있다. 첫째, 살바다종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음성은 오직 유루有漏이고, 또한 명·구·문은 결정코 오직 무기無記라고 설한다. 자세히 분별하면 『대비바사론』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 대중부大衆部·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雞胤部 등에서는 모두 다음과 같이 설한다. 모든 불세존은 다 세간을 벗어나 있으므로 유루의 법이 없고, 모든 여래의 말씀은 모두 법륜을 굴리신 것이며, 부처님은 일음一音으로 일체법을 설하신다.85) 셋째, 다문부多聞部의 설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고苦·공空·무상無常·무아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다섯 가지 음성은 출세간의 말씀이니, 그것은 성스런 도를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음성은 모두 세간의 말이다.86)
이와 같은 부파에서 다 같이 설하길, 교체는 ‘오직 본질일 뿐 영상은 아니다’라고 한다. 왜냐하면 저 종들은 아직 유식唯識의 뜻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이다.87)
둘째, 영상은 있고 본질은 없다는 것이다. ‘나가서나’는 여기 말로 용군龍軍이라 하니, 구역 『삼신론三身論』의 논주를 말한다.88) 그는 불과佛果에는 오직 진여와 진여지眞如智만 있고 색·성 같은 거친 상의 공덕은 없다고 한다.

001_0126_b_01L以體從用名等爲體能詮諸法
001_0126_b_02L自性差別二所依故假實相藉合說
001_0126_b_03L爲體隨闕一種說不成故生解究
001_0126_b_04L必由文義是故諸說互不相違

001_0126_b_05L
第二本影有無有其二義一本影有
001_0126_b_06L二說法差別本影有無者如來
001_0126_b_07L聖敎四法爲體所謂音聲名句文身
001_0126_b_08L如是四法如來自說名爲本質
001_0126_b_09L者識變名之爲影如是本影有無差
001_0126_b_10L總約諸宗有其四句一有本無
001_0126_b_11L諸說不同且依諸部有其三說
001_0126_b_12L一薩婆多宗一切佛聲唯是有漏
001_0126_b_13L說名等定唯無記若廣分別如婆沙
001_0126_b_14L二大衆部一說部說出世部
001_0126_b_15L胤部等皆作是說諸佛世尊皆是
001_0126_b_16L出世無有漏法諸如來語皆轉法
001_0126_b_17L佛以一音說一切法三多聞部說
001_0126_b_18L佛五種音是出世間所謂苦空無常
001_0126_b_19L無我涅槃寂靜引聖道故所餘諸聲
001_0126_b_20L皆是世間如是等部皆作是說
001_0126_b_21L本非影彼宗不明唯識義故二有影
001_0126_b_22L無木者 [7] 那伽犀那此云龍軍卽是
001_0126_b_23L舊翻三身論主彼說佛果唯有眞如
001_0126_b_24L及眞如智無色聲等麤相功德

001_0126_c_01L견혜89) 논사와 금강군90)도 모두 이렇게 해석한다. 견혜 논사는 바로 구역 『보성론寶性論』의 논주이며 오인도91)의 북쪽 사람이다.
셋째, 본질과 영상이 모두 있다는 것이다. 월장92) 보살호월護月이라고도 한다.및 친광93) 등은 다 같이 ‘모든 여래는 세 가지 몸(三身)과 색·성 등의 공덕을 갖춘다’고 한다. 『금광명경』에서는 “여래께서는 세 종류 법륜을 굴리셨으니, 즉 전轉·조照·지持94)의 법륜이다.”95)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전적 근거는 한둘이 아니다. 혹은 듣는 자의 식이 전변하여 마치 저 본질의 음성과 유사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본질과 영상이 둘 다 있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본질과 영상이 모두 없다는 것이다. 청변96) 보살은 승의제勝義諦에 의거하여 일체법의 본성이 모두 공하다고 주장하였다. 혹은 호법護法97)도 승의제에 의거해서 이와 같이 설했다고 할 수도 있다. 여래의 성교에는 본질과 영상이 둘 다 없으니, 승의제에는 언어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네 구의 차별이 있다 해도, 대당 삼장 법사와 호법종에서는 두 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 실제의 정교正敎에 의거해서 말하자면, 본질은 있지만 영상은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본질의 음성이야말로 여래가 설한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교를 겸하여 다 말한다면, 본질과 영상에 모두 통한다. 왜냐하면 (본질의 교체든 영상의 교체든) 모두 여래의 말의 힘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98)

● 불설不說에 대한 해석99)
  만약 정교正敎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라면, 『능가경』 등의 다음과 같은 말과 어떻게 회통시켜 해석할 수 있는가?100) 즉 4권 『능가경』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어느 날 밤 최정각을 얻고 나서부터 어느 날 밤 반열반에 들기까지 그 중간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 과거에도 설하지 않았고 미래에도 설하지 않을 것이니, 설하지 않음(不說)이 바로 부처님의 설(佛說)이다.”101) 또 『대반야경』 제567권에서는 “중생은 각각 ‘부처님께서 유독 나를 위해 설법하신다’고 하지만 부처님은 본래 설함도 없고 보여줌도 없다.”102)고 하였고, 또 제571권에서는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103)고 하였다.
  ‘설하지 않았다’고 한 데는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진여는 언설 등의 갖가지 모습을 떠났다’는 점에서 설하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001_0126_c_01L慧論師及金剛軍皆同此釋堅慧論
001_0126_c_02L卽是舊翻寶性論主五印度北也
001_0126_c_03L三本影俱有者月藏菩薩亦名
護月
及親
001_0126_c_04L光等皆作是說一切如來具有三身
001_0126_c_05L色聲等德金光明云如來能轉三種
001_0126_c_06L法輪謂轉照持如是等敎誠證非
001_0126_c_07L或能聞者識變似彼故知俱有本
001_0126_c_08L質影像四本影俱無者淸辨菩薩
001_0126_c_09L勝義諦立一切法其性皆空或可護
001_0126_c_10L就勝義諦作如是說如來聖敎
001_0126_c_11L影俱無勝義諦中無言等故雖有
001_0126_c_12L如是四句差別大唐三藏及護法宗
001_0126_c_13L有其二義一就實正敎唯本非影
001_0126_c_14L卽如來正所說故二兼正俱說通於
001_0126_c_15L本影皆由如來說力起故若正
001_0126_c_16L敎佛自說者楞伽等說如何會釋
001_0126_c_17L卷楞伽第三卷云我從某夜得最正
001_0126_c_18L乃至某夜入般涅槃於其中間
001_0126_c_19L說一字亦不已說當說不說是佛說
001_0126_c_20L又大般若第五百六十七云衆生各
001_0126_c_21L各謂佛獨爲說法而佛本來無說無
001_0126_c_22L又五百七十一云諸佛菩薩
001_0126_c_23L始至終不說一字解云不說有其三
001_0126_c_24L一依眞如離言說等種種相故

001_0127_a_01L따라서 4권 『능가경』 제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째서 설하지 않음을 부처님의 설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대혜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두 가지 법으로 인해 이와 같이 설하였으니, 두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스스로 증득한 법(自得法)과 본래 머무는 법(本住法)으로 인한 것이다.104)105) 또 10권 『능가경』 제5권에서는 “첫째는 자신이 내면에서 증득한 법에 의지하고, 둘째는 본래 머무는 법에 의지한다.”106)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경의 의도는 하나의 진여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내면에서 스스로 증득한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이 계시든 부처님이 안 계시든 성性과 상相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여는 언설을 떠나 있기 때문에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4권 『능가경』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의미를 거듭 펼치기 위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我某夜成道      나는 어느 날 밤 도를 이루고
至某夜涅槃      어느 날 밤 열반에 들기까지
於此二中間      이 두 중간의 시기에
我都無所說      나는 전혀 설한 것이 없도다
緣自得法住      자득한 법과 본래 머무는 법으로 인해
故我作是說      나는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彼佛及與我      저 부처님과 나는
悉無有差別      아무 차별 없도다107)

10권 『능가경』 제5권도 앞의 게송과 거의 똑같다.다섯 번째 구만 ‘내면에서 스스로 증득한 것과 법성’이라 하였다.108)또 『인왕경』에서는 “들음도 없고 설함도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으니, 법이 법성과 하나이고 들음도 설함도 법성과 하나여서, 일체법이 모두 여여하도다.”109)라고 하였다.
또 천친 보살의 『반야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에서)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법을 설하신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설한 것’110)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如佛法亦然      불법이 또한 그러하듯
所說二差別      설해진 두 가지 차별은
不離於法界      법계를 떠나지 않으니
說法無自相      설법에는 자상이 없도다111)

『반야론』에서 이것을 직접 해석하면서, ‘두 가지 차별’이란 설해진 법法과 의義라고 하였다.112)
  이 논의 뜻은, 화신 여래는 진여를 떠나서 그 밖에 따로 자상自相이 없으니,

001_0127_a_01L言不說是故四卷楞伽第三卷云
001_0127_a_02L因說言不說是佛說佛告大慧我因
001_0127_a_03L二法故作如是說云何二法謂緣
001_0127_a_04L自得法及本住法又十卷楞伽第五
001_0127_a_05L卷云一者依自身內證法二者依木
001_0127_a_06L住法廣說如彼解云經意於一眞如
001_0127_a_07L有其二義一內自所證二有佛無佛
001_0127_a_08L性相常住如是眞如離言說故
001_0127_a_09L爲不說故彼四卷頌云爾時世尊
001_0127_a_10L重宣此義而說偈言

001_0127_a_11L
我某夜成道至某夜涅槃

001_0127_a_12L於此二中間我都無所說

001_0127_a_13L緣自得法住故我作是說

001_0127_a_14L彼佛及與我悉無有差別

001_0127_a_15L
十卷第五大同前頌第五句云內
身證法性
又仁
001_0127_a_16L王經云無聰無說如虗空法同法性
001_0127_a_17L聽同說同一切法皆如也又天親菩
001_0127_a_18L薩波若論云若人言如來 [8] 說法則爲
001_0127_a_19L謗佛不能解我所說法 [9] 此義云何
001_0127_a_20L偈曰

001_0127_a_21L
如佛法亦然所說二差別

001_0127_a_22L不離於法界說法無自相

001_0127_a_23L
論自釋云二差別者所說法及義
001_0127_a_24L論意化身如來離眞如外無別自

001_0127_b_01L마치 부처님이 진여 외에 따로 자상이 없는 것처럼 설해진 교법과 설해진 의미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둘째, ‘모든 부처님들이 설했던 것과 다름이 없다’는 점에서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반야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경에서 ‘수보리여, 여래에게는 설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유독 여래만 설하고 다른 부처님은 설하지 않은 법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113)
셋째, 문자에 떨어진 법을 (설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4권 『능가경』 제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는 문자에 떨어진 법을 설하지 않으셨으니, 문자의 유·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에 떨어지지 않는 법은 제외된다.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문자에 떨어진 법을 설하셨다’고 말한다면 이는 그릇된 말이니, 법은 문자를 떠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러 부처님들과 보살들은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고 한 글자도 답하지 않았다.……이하 생략……”114) 또 저 『능가경』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혜여, 만약 일체법을 설하지 않는다면 교법은 무너질 것이다. 교법이 무너지면 모든 부처님·보살·연각·성문도 없을 것이다. 모두가 없다면 누가 누구를 위해 설하겠는가?”115) 10권 『능가경』 제6권도 이 설법과 거의 같으니,116) 번거롭게 서술하지 않겠다.
위의 경문에 의하면, 비록 문자에 떨어지는 법을 설할 수는 없지만 문자에 떨어지지 않는 삼장의 성스런 가르침을 펼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유마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을 설하는 자는 설함도 없고 보여줌도 없으며, 법을 듣는 자는 들음도 없고 얻음도 없다. 비유하면 환술사가 환인幻人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과 같다. 마땅히 이러한 뜻을 세워서 법을 설해야 한다.”117)

● 불설佛說에 대한 해석118)
  정교를 겸하여 다 말하는 경우 교체가 본질과 영상에 통한다고 한다면, 무성 보살의 『섭대승론석』의 설과 어떻게 회통시켜 해석하겠는가?119) 그 글에서는 다만 ‘듣는 자의 식識에 취집하여 현현한 것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였다.120)
  호법은 그 논의 주장을 정량定量으로 삼은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논란이 되지 않는다.
  또는 호법이 무성과 동일하게 설한 것일 수 있다. 저 무성의 뜻은 삼신과 색·성 등의 공덕이 있어서

001_0127_b_01L如佛離眞如外無別自相所說敎
001_0127_b_02L法及所說義亦復如是二約諸佛所
001_0127_b_03L說無異故言不說故波若論云
001_0127_b_04L經言須菩提如來無所說法故
001_0127_b_05L義云何無有一法唯獨如來說餘佛
001_0127_b_06L不說故三約墮文字法故言不說
001_0127_b_07L故四卷楞伽第四云如來不說墮文
001_0127_b_08L字法文字有無不可得故除不墮文
001_0127_b_09L若有人言如來說墮文字法者
001_0127_b_10L則妄說法離文字故是故諸佛及諸
001_0127_b_11L菩薩不說一字不答一字乃至廣說
001_0127_b_12L又彼復云大慧若不說一切法者
001_0127_b_13L法則壞敎法壞者則無諸佛菩薩緣
001_0127_b_14L覺聲聞若無者誰說爲誰十卷第六
001_0127_b_15L大同此說故不繁述准上經文
001_0127_b_16L不能說墮文字法而能宣說不墮文
001_0127_b_17L字三藏聖敎故維摩云夫說法者
001_0127_b_18L說無示其聽法者無聞無得譬如幻
001_0127_b_19L爲幻人說法當建是意而爲說法
001_0127_b_20L又問兼正俱說通本影者如何會釋
001_0127_b_21L無性菩薩攝大乘論彼文但用聞者
001_0127_b_22L識上聚集顯現以爲自性解云護法
001_0127_b_23L不依彼論以爲定量故不成難又解
001_0127_b_24L護法同無性說彼無性意許有三身

001_0127_c_01L여래도 법을 설한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논에서 수용신과 변화신은 ‘바로 후득지의 차별’이라고 하였다.121)

  그렇다면 어째서 듣는 자의 식에 취집·현현한 것을 교체로 삼는다고 하면서, 보는 자의 식에 현현한 색신色身을 화신으로 삼는다고 하지는 않았는가?
  영략影略하여 서로를 드러낸 것이니,122) 실제로는 여래의 몸(身)과 교敎에는 모두 본질과 영상이 있다.123) 따라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삼신과 색·성 등의 공덕’이라는 말에서) ‘등’이 영략을 뜻한다면, 어째서 보는 자의 식에 나타난 상相을 두 가지 몸(二身)으로 삼는다고 하지 않는가?
  반드시 통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 이는 논란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는 교라는 것은 이해를 내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상相이 직접 이해를 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몸은 불체佛體에서 나오는 것이니, 이로 인해 우선 부처님의 색·심 등을 설한 것이다.

  듣는 자의 식에 의해 전변된 영상의 교체는 유루인가 무루인가?
  대당 삼장은 서방에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루심에 의해 전변된 것은 결정코 오직 무루이다. 유루심에 의해 전변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지만 굳이 말하면 유루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루심에 의해 전변된 경계이기 때문이다. 법계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무루라고 한다.≻ 무성의 『섭대승론석』의 종지는 이 해석에 많이 의지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루심에 의해 전변된 것은 반드시 유루이고, 무루심에 의해 전변된 상은 결정코 오직 무루이다.≻
비록 두 가지 교설이 있지만, 대당 삼장과 호법 보살의 뜻은 후설에 있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견분과 상분은 유루·무루의 성질에 있어서 반드시 동일하지만, 선·악·무기의 삼성에 있어서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삼성의 인연이 뒤섞여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124)

  유루식이 정교正敎를 전변해 내는 경우 정교가 유루가 된다면, 무루식이 사교邪敎를 전변해 낼 경우 사교는 무루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125)
  인정해도 과실이 없다. 왜냐하면 무루식이 전변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에 삿됨과 바름의 차이가 있는데도 둘 다 유루·무루에 통한다면,

001_0127_c_01L色聲等德亦能說法故彼論云
001_0127_c_02L用變化卽是後得智之差別若爾
001_0127_c_03L如何聞者識上聚集顯現以爲敎體
001_0127_c_04L而不說言見者識上所現色身以爲
001_0127_c_05L化身解云影略互顯據實身敎皆
001_0127_c_06L有本影故不相違等是影略
001_0127_c_07L何不說見者識相以爲二身解云
001_0127_c_08L必須通不離難故又解敎爲生解
001_0127_c_09L者識相親能生解身出佛體由斯
001_0127_c_10L且說佛色心等聞者識上所變敎
001_0127_c_11L爲是有漏爲無漏耶大唐三藏
001_0127_c_12L釋云西方兩釋一云無漏心變
001_0127_c_13L唯無漏有漏心變自有二義橫剋
001_0127_c_14L而言名爲有漏以有漏心所變境故
001_0127_c_15L若從法界所流義邊名爲無漏無性
001_0127_c_16L論宗多依此釋一云有漏心所變者
001_0127_c_17L定是有漏若無漏心所變相者定唯
001_0127_c_18L無漏雖有兩說大唐三藏護法菩
001_0127_c_19L意存後說故成唯識論第十卷云
001_0127_c_20L見相二分有漏無漏定是同性
001_0127_c_21L等三性不必同性三性因緣雜引
001_0127_c_22L生故有漏變正敎正敎成有漏
001_0127_c_23L漏變邪敎邪敎應無漏解云許亦無
001_0127_c_24L無漏變故敎有邪正殊皆通

001_0128_a_01L혹은 사람에게 범부와 성인의 차이가 있어도 둘 다 성聖·비성非聖에 통한다고 할 수 있는가.
  인정해도 과실이 없다. 왜냐하면 전변하는 마음(能變心)은 두 종류에 통하기 때문이다.

② 설법의 차별
설법의 차별이라 했는데,126) 이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삼신三身에 의거한 것이고, 둘째는 여러 불토들(諸土)에 의거한 것이다.

가. 삼신에 의거한 설명
삼신三身에 의거해서 (차별을 설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어떤 몸에 의지하여 설법하시는가?
  살바다종에서는 부처님은 두 종류라고 한다. 첫째는 생신불生身佛이니, 즉 부모가 낳아 준 유루의 몸을 말한다. 둘째는 법신불法身佛이니, 즉 오분법신五分法身127)을 말한다. 생신은 설법하지만 법신은 그렇지 않으니, 관觀에 든 지위에서는 설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부종에 의하면, 부처님의 몸은 또한 두 종류이고 둘 다 설할 수 있다. 그 종에서는 무루의 몸도 음성을 발하여 성스런 가르침을 설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부처님은 삼신을 갖추고 있는데, 삼신이 설하는지 설하지 않는지에 대해 네 구가 있다.
첫째, 하나는 설하지만 둘은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수용신受用身128)은 법락法樂을 받기 위해 스스로 설하기 때문이다. 법신은 설하지 않으니, 법신에는 언설이 없기 때문이다. 화신化身도 설하지 않으니, 진실로 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화신은 설하지만 나머지 둘은 설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법신에는 언설이 없고, 수용신은 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타수용신他受用身이 근기에 맞춰 법을 설한다 해도 이는 실제로 화신이 하는 것이다.
둘째, 둘은 설법하고 하나는 설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법신과 수용신은 설하니, 법신은 안으로 성스런 행위의 경계를 증득했기 때문이고, 수용신은 법락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혹은 수용신과 변화신變化身은 모두 설법할 수 있지만, 법신은 설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법신에는 언설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삼신이 모두 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10권 『능가경』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신이 설법한다는 것은 안으로 성스런 행위의 경계를 증득하였기 때문이고, 보신불이 설법한다는 것은 일체법의 자상自相(특수상)과 동상同相(보편상)을 설하기 때문이며, 화신불이 설법한다는 것은 육도六度(육바라밀) 등을 설하기 때문이다.……이하 생략……”129) 4권 『능가경』 제1권에서 설한 것도 앞의 설과 거의 동일하다.
넷째, 삼신이 모두 다 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001_0128_a_01L漏無漏或可人有凡聖異皆通聖非
001_0128_a_02L解云許亦無失以能變心通二種
001_0128_a_03L言說法差別者自有二種一約
001_0128_a_04L三身者 [10] 1)二依諸知 [11] 約三身 [4] [12] 依何
001_0128_a_05L身而能說法薩婆多宗佛有二種
001_0128_a_06L一者生身佛謂父母所生有漏身
001_0128_a_07L法身佛謂五分法身生身說法
001_0128_a_08L非法身入觀位中不說法故依經部
001_0128_a_09L亦有二身皆能說法彼宗無漏
001_0128_a_10L能發音聲說聖敎也今依大乘具有
001_0128_a_11L三身說與不說有其四句一一說
001_0128_a_12L二不說謂受用身爲受法樂能自
001_0128_a_13L說故非法身者無言說故亦非化
001_0128_a_14L非眞說故或可化身非餘二身
001_0128_a_15L言說故無所爲故雖他受用對機說
001_0128_a_16L而實是化二二說一不說謂佛
001_0128_a_17L法身及受用身內證聖行境界故
001_0128_a_18L用法樂故或可受用變化皆能說法
001_0128_a_19L而非法身無言說故三三皆說法
001_0128_a_20L十卷楞伽第二卷說法身說法者
001_0128_a_21L證聖行境界故報佛說法者說一切
001_0128_a_22L法自相同相故化佛說法者說六度
001_0128_a_23L乃至廣說四 卷楞伽第一卷說
001_0128_a_24L同前說四三皆不說所以者何

001_0128_b_01L진여법신에는 언설이 없기 때문이고, 자수용신은 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며, 변화신 등은 진실로 설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지경론』은 우선 ‘설하신다’는 의미에서 대략 세 가지 설을 서술한다. 따라서 『불지경론』 제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용토·변화토의 두 불토 중에 지금 이 정토는 어느 불토에 속하고 이 경을 설하신 부처님은 어떤 몸인가? 어떤 이는 ‘변화토에서 변화신이 설법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는 ‘수용토에서 수용신이 설법한다’고 주장한다.”130)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진실한 의미를 말하자면, 석가모니께서 이 경을 설하실 때, 십지 이전의 대중들은 변화신이 이 예토에 계시면서 그들을 위해 설법한다고 보고, 십지 이상의 대중들은 수용신이 부처님의 정토에 계시면서 그들을 위해 설법한다고 본다. 들은 것은 같아도 본 것이 각기 다른 것이다.”131) 자세한 설명은 그 논과 같다.
진실한 의미에서는 삼신 가운데 수용신·변화신 두 몸은 설법하고 법신은 설법하지 않는 것이다.

나. 불토에 의거한 설명
불토佛土에 의거해서 (차별을 설하면 다음과 같다.)
『능가경』에 의하면 열 가지 설법이 있으니, 첫째는 언어로 설법하는 것이고 나아가 열 번째는 몸을 움직여 설법하는 것이다. 따라서 10권 『능가경』 제4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혜가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언어로 설함이 있으면 마땅히 갖가지 법이 있을 것이고, 갖가지 법이 없다면 마땅히 언어로 설함도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법은 없어도 언어가 있는 경우도 있으니, 가령 토끼 뿔과 같은 것이다. 대혜여, 토끼 뿔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그것은 단지 말로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문제 삼았던 것은 이런 의미로써 이미 논파하였다.
대혜여, 모든 불토에서 언어로만 설법하는 것은 아니다.132) 왜냐하면 어떤 불국토에서는 직접 보면서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입으로 말하지도 않는 것을 설법이라고 한다.4권 『능가경』에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법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단지 시현하는 모습(示相)을 설법이라 한다.혹은 동작하는 모습인 경우도 있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단지 눈썹을 움직이는 모습(動眉相)을 설법이라 한다.4권 『능가경』에서는 ‘혹은 눈썹을 치켜뜬다’고 하였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단지 눈을 움직이는 모습(動眼相)을 설법이라 한다.4권 『능가경』에서는 ‘혹은 눈동자를 움직인다’고 하였다.

001_0128_b_01L如法身無言說故自受用身無所爲
001_0128_b_02L變化身等非眞說故然佛地論
001_0128_b_03L依說義略叙三說故佛地論第一卷
001_0128_b_04L受用變化二佛土中今此淨土
001_0128_b_05L土所攝說此經佛爲是何身有義
001_0128_b_06L化土化身說法有說受用土受用身
001_0128_b_07L說法廣說如彼如實義者釋迦牟
001_0128_b_08L說此經時地前大衆見變化身
001_0128_b_09L居此穢土爲其說法地上大衆
001_0128_b_10L受用身居佛淨土爲其說法所聞
001_0128_b_11L雖同所見各別具說如彼准如實
001_0128_b_12L於三身中二身說法而非法身
001_0128_b_13L依土差別者依楞伽經有十種說法
001_0128_b_14L一語言說法乃至第十動身說法
001_0128_b_15L十卷經四卷云大慧復言世尊有語
001_0128_b_16L言說應有諸法若無諸法應無言說
001_0128_b_17L佛告大慧亦有無法而有言說如兔
001_0128_b_18L角等大慧兔角非有非無而有言說
001_0128_b_19L故汝所難此義已破大慧非一切佛
001_0128_b_20L土言語說法何以故有佛國土直親 [13]
001_0128_b_21L不瞬口無言說名爲說法四卷楞伽云
瞻視顯法

001_0128_b_22L有佛國土 [14] 示相名爲說法四卷楞伽
或有作相

001_0128_b_23L有佛國土但動眉相名爲說法四卷楞
伽或有
001_0128_b_24L
有佛國土唯動眼相名爲說 [15] 四卷楞
或有

001_0128_c_01L
어떤 불국토에서는 웃음을 설법이라고 한다.4권 『능가경』도 똑같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하품(欠) 소리를 설법이라 한다.4권 『능가경』도 똑같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기침 소리를 설법이라 한다.4권 『능가경』에서는 혹은 경해磬咳(기침)라고 하였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염念하는 것을 설법이라 한다.4권 『능가경』에서는 ‘혹은 찰토刹土를 염한다’고 하였다.
어떤 불국토에서는 몸을 움직이는 것을 설법이라 한다.4권 『능가경』에서는 ‘혹은 몸을 흔든다’고 하였다.133)

또 『유마경』 제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때는 (부처님의) 광명으로 불사를 짓고, 어떤 때는 보살이나 부처가 화현한 사람으로, 어떤 때는 보리수로, 어떤 때는 의복과 침구로, 어떤 때는 음식으로, 어떤 때는 정원과 누각으로, 어떤 때는 삼십이상과 팔십수호134)로, 어떤 때는 부처님의 몸으로, 어떤 때는 허공으로, 어떤 때는 꿈의 비유 등으로, 어떤 때는 음성과 언어와 문자로 불사佛事를 짓는다. 어떤 불토에서는 적막하여 언어가 없고 설함도 없으며 보여줌도 없고 앎도 없으며 지음도 없고 함도 없이 불사를 짓는다. 이와 같이 아난아, 모든 부처님은 그의 위의 및 행동거지와 행하시는 모든 일마다 불사가 아닌 것이 없다.≻135) 자세히 분별하면 『무구칭경』 제5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 총괄적 결론
이와 같이 교설들이 다른 까닭은, 대승종에 의거해 설법에 대해 일반적으로 논하자면 대략 네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언어로 설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지경론』에서 수용신·변화신의 두 불신은 설법하지만 법신은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136) 둘째는 이해를 내게 하는 설법의 경우는 법신에도 통하니, 이는 10권 『능가경』 제2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137) 셋째는 불토의 차별에 따라 열 가지 설법으로 구분하는 것이니, 이는 10권 『능가경』 제4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138) 넷째는 여러 부처님의 행동거지와 하시는 모든 일이 곧 무량한 설법을 이룬다는 것이니, 예를 들면 『유마경』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139)
(이 네 가지 의미들은) 각기 근거하는 바가 있으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불사佛事란 이로움을 드러내 주는 일이니, 오직 설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과 같은 설법들에는 모두 명名·구句·문文이 있는가, 아니면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
  일정하지 않다. 법신의 설법과 허공 등도 이해를 생기게 하기 때문에 설법이라고 하지만 명·구·문은 없다.

001_0128_c_01L
有佛土 [16] 名爲說法四卷
亦同
有佛國
001_0128_c_02L欠名爲說法四卷
亦同
有佛國土 [17]
001_0128_c_03L爲說法四卷云
或磬咳
有佛國土念名爲說法
001_0128_c_04L四卷經云
或念刹土
有佛國土 [18] 身名爲說法

001_0128_c_05L
動搖
又維摩經第三卷云有以光明
001_0128_c_06L而作佛事或以菩薩或佛化人
001_0128_c_07L菩提樹或以衣服臥具或以飯食
001_0128_c_08L以園林臺觀或以三十二相八十隨
001_0128_c_09L或以佛身或以虗空或夢喩等
001_0128_c_10L或以音聲語言文字而作佛事或有
001_0128_c_11L佛土寂漠無言無說無示無識無作
001_0128_c_12L無爲而作佛事如是阿難諸佛威
001_0128_c_13L儀進止諸所施爲無非佛事若廣
001_0128_c_14L分別如無垢稱第五卷說所以如是
001_0128_c_15L諸敎異者依大乘宗汎論說法
001_0128_c_16L有四義一語言說如佛地論二身
001_0128_c_17L說法而非法身二生解說法亦通
001_0128_c_18L法身如楞伽經三依土差別十種
001_0128_c_19L說法如楞伽經四諸佛進止諸所施
001_0128_c_20L乃成無量如維摩等各有所據
001_0128_c_21L故不相違或可佛事顯利益事非唯
001_0128_c_22L說法上諸說 [19] 皆有名等爲不定耶
001_0128_c_23L解云不定法身說法及虗空等能生
001_0128_c_24L「二依諸知約三身」 一本作傍書

001_0129_a_01L왜냐하면 모든 무위법은 분위分位의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 (『유마경』에서) “설함도 없고 보여줌도 없으며……”라고 한 것은, 적막하고 말 없는 마음 상에서 명·구·문을 가립한 것이니, 이치상으로 과실이 없다. 왜냐하면 유위의 마음 등에는 분위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3) 음성이 취집·현현하기 위해 거치는 마음의 차별
셋째, 음성이 취집聚集하고 현현顯現하기 위해 거치는 마음들의 차별에 대해 밝히겠다.

● 무성無性의 해석
『섭대승론석』에서 무성無性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하나로 꿰서 엮어 놓은 것이기에 경經이라 한다. 이 가운데 팔시八時에 맞춰서 듣는 자의 식에 직설直說과 비직설非直說이 취집하여 현현한 것을 교체의 자성으로 삼는다.140)141)
  ‘팔시八時’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팔시란 팔전성八轉聲142)이라고 한다. 이는 (범어 단어의) 일곱 가지 격에다 호격을 더한 것이니, 예를 들면 ‘오, 뿌루샤(補盧沙 ⓢ puruṣa)여!’143)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팔전성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분별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는 이 여덟 가지 격 중에서 경우에 따라 어느 한 가지 격을 사용하기 때문에 ‘팔시에 맞춘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명론聲明論144)에 의하면, 밤과 낮에 각기 사시四時가 있으므로 합하면 팔시가 있다. 여래께서 법을 설하실 때 팔시 가운데 어느 한 시에 맞춰 설하시기 때문에 ‘팔시에 맞춘다’고 하였다.
‘직설直說과 비직설非直說’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자성自性을 드러내므로 직설이라 하고 차별差別을 드러내므로 비직설이라 한다.145) 한편에서는 장행을 직설이라 하고 게송을 비직설이라 한다. 한편에서는 십이부경 중에 계경이 직설이고 그 나머지 11부경은 비직설이라 한다.
이 논의 의도를 말하자면, 팔시에 맞춰서 듣는 이의 식識에 십이부경의 명·자·구 등이 취집하여 현현한 것이 교체라는 것이다.

● 오심五心에 대한 해석
  어떤 것을 듣는 자의 식심識心이라 하고, 어떤 방식으로 말소리가 식에 취집하여 현현하는 것인가?
  『유가사지론』에서는 우선 여섯 가지 식(오식과 제6의식)에 의거하여 오심五心146)을 분별하였다. 따라서 그 논의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이 발생함에 따라 세 가지 마음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 순서대로 말하면

001_0129_a_01L解故名爲說法而無名等諸無爲
001_0129_a_02L無分位故若其無說無示等者
001_0129_a_03L嘿心上假立名等於理無失有爲
001_0129_a_04L心等有分位故

001_0129_a_05L
三聚集顯現歷心差別者如攝大乘
001_0129_a_06L無性釋云貫穿縫綴故名爲經此中
001_0129_a_07L卽是隨墮八時聞者識上直非直說
001_0129_a_08L聚集顯現以爲體性解云八時有其
001_0129_a_09L二釋一云八時卽八轉聲謂於七轉
001_0129_a_10L加呼召聲如言係補盧沙此八轉聲
001_0129_a_11L後當分別謂佛說法於八轉中
001_0129_a_12L用一聲故云隨墮八時一云依聲明
001_0129_a_13L晝夜各有四時合有八時如來
001_0129_a_14L說法於八時中隨墮一時故云隨
001_0129_a_15L墮八時直非直說有其三釋一云
001_0129_a_16L自性故名爲直說詮差別故名非直
001_0129_a_17L一云長行名爲直說偈頌爲非直
001_0129_a_18L一云十二部中契經爲直說餘十
001_0129_a_19L一部爲非直說此中意說隨墮八時
001_0129_a_20L聞者識上十二部經名字句等聚集
001_0129_a_21L顯現以爲敎體何等名爲聞者識
001_0129_a_22L如何說爲聚集顯現解云依瑜伽
001_0129_a_23L且約六識分別五心故彼第一卷
001_0129_a_24L復次由眼識生三心可得如其次

001_0129_b_01L솔이심率爾心·심구심尋求心·결정심決定心이다. 처음의 솔이심은 안식이고, 두 번째 심구심은 의식에서 일어나며, 결정심이 일어난 후에야 염정심染淨心이 있게 된다. 이 이후에 등류等流의 안식이 있고 선善·불선不善의 성질이 일어난다. 그것은 안식 자체의 분별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 의식이 다른 경계에 주의를 돌리지 않고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하면 안식과 의식이 선하거나 오염된 채로 상속하면서 일어나는 것이다. 안식이 발생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식·비식·설식·)신식도 이와 같이 발생함을 알아야 한다.”147)
  다섯 가지 마음 중에 첫 번째 솔이심과 다섯 번째 등류심은 여섯 가지 식에 모두 통하며, 첫 번째 다음의 세 가지는 오직 의식意識에만 있다. 또한 앞의 세 가지는 무기無記이고, 뒤의 두 가지는 선과 악에 통한다. 또한 솔이오식率爾五識 뒤에는 반드시 심구심이 있고, 심구심 뒤에는 산심散心이 되기도 하고 불산심不散心이 되기도 하는데, 산심이 되면 곧이어 다시 솔이오식이 일어나고 불산심이 되면 바로 세 번째 결정심이 일어나서 등류심에 이르게 된다.
의식의 솔이심도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는 오식과 동시에 일어나는 솔이의식率爾意識이고, 둘째는 독두의식獨頭意識148)의 솔이타심率爾墮心이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의식이 저절로 일어나 산란된 상태에서 경험하지 않은 경계를 대상으로 삼을 때는 욕欲 등이 발생하지 않는데, 이때의 의식을 솔이타심이라 하고, 오직 과거의 경계를 대상으로 한다.149) 오식에 이어 즉각적으로 생겨난 의식은 심구하기도 하고 결정하기도 하는데, 이는 오직 현재의 경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해야 한다.150) 이런 경우, 곧 그 경계를 대상으로 하여 ‘생기했다’고 한다.”151)
(이 『유가사지론』의 문장에 대해) 해석가들은 네 가지로 설명한다.
한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식이 저절로 일어나되 앞의 세 가지 마음의 차례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산란’이라 한다. (어떤 것에 집중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는 상태에서 경험하지 않은 경계를 대상으로 할 때는 오변행五遍行152)심소는 있지만 오별경五別境153)심소는 없다. 이때의 의식을 솔이타심이라 하니, 오직 과거에 일찍이 인식한 적이 있었던 경계를 인식하는 것이다.154) 만약 오식에 이어 즉각적으로 발생한 의식을 말한다면, 심구심이거나 결정심인데, (이 의식은) 전오식과 같은 종류인 현재의 경계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심구심과 결정심은 바로 저 오식과 같은 종류의 경계를 대상으로 삼아 발생한 것이다.155)

001_0129_b_01L謂卒 [20] [21] 尋求 [22] 決定心初是眼識
001_0129_b_02L在章識決定心後方有染淨此後乃
001_0129_b_03L至等流眼識善不善轉而彼不由自
001_0129_b_04L分別力乃至此意不趣餘境經爾所
001_0129_b_05L眼意二識或善或染相續而轉
001_0129_b_06L如眼識生乃至身識亦 [23] 解云五中
001_0129_b_07L初後通六次三唯意又前三是無記
001_0129_b_08L後二通善惡又卒爾五識後必有尋
001_0129_b_09L求心尋求心後或散不散散卽復起
001_0129_b_10L卒爾五識不散卽起第三決定乃至
001_0129_b_11L等流又意識卒 [24] 自有二種一五識
001_0129_b_12L同時卒爾意識二獨頭意識卒爾墮
001_0129_b_13L故瑜伽論第三卷云又意識任運
001_0129_b_14L散亂緣不串習境時無欲等生爾時
001_0129_b_15L意識名卒爾墮心唯緣過去境五識
001_0129_b_16L無間所生意識或尋求或決定唯應
001_0129_b_17L說緣現在境若此卽緣彼境生釋家
001_0129_b_18L四說一云意識任運不依前三心次
001_0129_b_19L故名散亂汎爾漫緣不串習境時
001_0129_b_20L有五遍行無別境五爾時意識名卒
001_0129_b_21L爾墮心唯能緣過去曾所緣境若說
001_0129_b_22L五識無間所生意識或尋求心或決
001_0129_b_23L定心唯應說緣前五識種類現在境
001_0129_b_24L若此尋求決定二心卽緣彼五識種

001_0129_c_01L
나머지 세 논사의 설명은 「오심장」의 설명과 같다.

● 오심五心에 의거해서 ‘음성(聲)의 취집’에 대해 설명함
여기서는 우선 앞의 다섯 가지 마음에 의거해 취집聚集에 대해 설명하겠다.
취집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행은 무상하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법이 있으니, 생겨나면 반드시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저 고요함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이것은 바로 계경에서 비량比量156)으로 상견常見에 집착하는 자를 논파한 것이다. ‘제행은 무상하다’는 것은 주장(宗)이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법이 있다’는 것은 동법유同法喩이니, 등燈의 불빛 등을 (실례로) 든 것이다. ‘생겨나면 반드시 없어지기 때문’이란 이유(因)다. 이런 도리로 인해, 저 고요한 열반을 수승한 즐거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157)
우선 (‘제행무상’이라는) 첫 구에 의거해서 ‘취집’에 대해 설명하겠다.
이 구에는 네 가지 음성(聲)과 네 가지 음소(字)와 네 가지 이름(名)과 하나의 문장(句) 및 소전所詮의 의미가 갖추어져 있다.158)
이 문제에 대해 인도 여러 논사들은 우선 세 가지로 해석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諸’라는 자를 말할 때, 솔이이식率爾耳識과 동시의식同時意識과 심구심에는 오직 음성의 상(聲相)만이 존재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오구의식五俱意識159)은 현량現量160)이므로 이름(名) 등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61) 심구심의 경우도 오식과 동등한 소연 경계를 심구하기 때문에 아직 이름 등을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 세 가지 식에 의해 전변되어 나타난 음성에도 모두 이름 등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마치 (그 이름 등의) ‘생상生相’162) 등과 같아서, (이 세 가지 식이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취집’이라 하지 않는다.163)결정심 이후에 세 가지의 상이 있게 되는데, 즉 음성(聲)과 이름(名)과 음소(字)이다. ‘행行’이라는 자를 말할 때에도 솔이이식·동시의식·심구심은 단지 ‘행’이라는 음성만을 파악하는데, 이는 앞에 준해서 알 수 있다. 결정심 등이 또한 아홉 가지 상을 획득하는 경우도164) 앞에 준해서 알 수 있다. ‘상常’이라는 자를 말할 때 솔이심 등은 ‘상’이라는 음성을 파악한다. 결정심 이후에는 열네 가지 상을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네 가지 음성과 네 가지 음소와 네 가지 이름과 하나의 문장 및 (그에 의해) 언표된 (하나의) 의미다. 이에 따르면 최소한 십육심을 거쳐야만 (취집이) 갖추어지니, 즉 (제·행·무·상이라는) 네 개의 자字마다

001_0129_c_01L類境生餘三師說如五心章此中
001_0129_c_02L依前五種心以明聚集言聚集者
001_0129_c_03L契經說諸行無常有起盡法生必滅
001_0129_c_04L彼寂爲樂解云此卽契經比量
001_0129_c_05L執常者諸行無常宗有起盡法者
001_0129_c_06L同法喩擧燈光等生必滅故者是因
001_0129_c_07L由是道理彼寂涅槃以爲勝樂
001_0129_c_08L約初句以辨聚集於中具有四聲四
001_0129_c_09L四名一句及所詮義於此義中西
001_0129_c_10L方諸師且作三釋有云說諸字時
001_0129_c_11L [25] 爾耳識同時意識及尋水心
001_0129_c_12L有聲相所以者何五俱意識是現
001_0129_c_13L量故不緣名等若尋求心尋五識
001_0129_c_14L等所緣境故不緣名等雖此三識所
001_0129_c_15L變聲上皆有名等如生等相而不緣
001_0129_c_16L不說聚集決定心後有三種相
001_0129_c_17L聲名字至說行時卒爾耳識同時
001_0129_c_18L意識及尋求心唯得行聲准前可
001_0129_c_19L1) [5] 決定心等亦得九種淮前可知
001_0129_c_20L說常字時卒爾心等得常聲決定心
001_0129_c_21L得十四種謂四聲四字四名一句
001_0129_c_22L及所詮義由此極少經十六心
001_0129_c_23L得具足謂從四字皆有四心謂卒
001_0129_c_24L「知」下一有文脫三字傍書

001_0130_a_01L각기 모두 솔이이식·동시의식·심구심·결정심의 네 가지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산란되지 않으면 (이 네 마음에 이어) 염정심을 일으키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솔이이식과 동시의식은 이름 등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두 가지 마음은) 현량이기 때문이다. 심구심 이후는 더 이상 현량이 아니다. 이에 따를 때 또한 음성·이름·음소 등을 얻을 수 있다. 네 개의 심구심이 그 차례대로 셋·여섯·아홉·열네 개를 얻을 수 있으니, 앞의 논의에 준하여 알 수 있다.165)
이 해석에 의거하면, 열두 가지 마음을 거쳐야 문장의 의미를 갖출 수 있다.166) 결정심 등이 몇 개를 얻느냐는 것은 이치에 따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식과 동시에 일어난 의식(耳識同時意識)도 이름 등을 인식한다. 그렇지 않다면, 심구의 의식이 어떤 이름에 대해 심구하겠는가? 이런 도리에 따를 때, ‘제諸’라는 자를 말할 때 솔이이식은 ‘제’라는 음성만을 파악하고, 동시의식은 음성과 이름 등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주장과 관련해서 두 가지 해석이 구별된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 개의 솔이심은 각각 오직 (음성·이름·음소) 세 가지만을 파악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상’이라는 음성을 말할 때는 ‘제·행·무’의 음성과 이름·음소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식과 동시에 일어난 솔이타심은 모두 현량이기 때문이다.167) 만약 인식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 당연히 산심散心의 현량으로 과거 대상을 인식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제·행·무’라는 음성과 이름·음소의 상相은) 심구심이 일어나야 원만해질 수 있으니, 심구심 등이 몇 개를 얻는가는 두 번째 설명과 같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식과 동시에 일어난 의식은 현량이 아니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과거의 이름(名) 등을 인식할 수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마음에 (음성과 이름·음소가) 갖추어져 취집한다.≻

  만약 앞에서 설한 것처럼 오구의식五俱意識이 결정코 현량이라면, 어떻게 또한 이름 등을 인식한다고 할 수 있는가?
  현량도 그럴 수 있으니, 이름 등의 자상自相을 인식한다. 그런데 『인명정리문론』에서 (현량은) 이름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168) ‘의미(義)’와 연관되기 때문이다.169) 간혹 단지 등류이식等流耳識에 의해 인발됨으로써 (이름의 의미가) 현현하는 경우가 있으니,

001_0130_a_01L爾耳識同時意識尋求決定若不散
001_0130_a_02L起染淨心如理應思有義 [26]
001_0130_a_03L耳識同時意識不緣名等義如前
001_0130_a_04L是現量故尋求已去卽非現量
001_0130_a_05L由斯亦得聲名字等四尋求心如其
001_0130_a_06L次第得三六九及以十四准前應知
001_0130_a_07L若依此釋經十二心方得具足
001_0130_a_08L定心等所得多少如理應知有義
001_0130_a_09L耳識同時意識亦緣名等若不爾者
001_0130_a_10L尋求意識尋何等名由斯道理
001_0130_a_11L諸字時 [27] 爾耳識唯得諸聲同時
001_0130_a_12L意識得聲名等於此義中分成兩
001_0130_a_13L一云四卒爾心各唯得三所以
001_0130_a_14L者何說常聲時不緣諸等聲及名字
001_0130_a_15L五識同時卒爾墮心皆現量故若許
001_0130_a_16L緣者應有散心現量緣過去故其尋
001_0130_a_17L求心方得圓滿尋求等心所得多
001_0130_a_18L如第二說一云五識同時意識
001_0130_a_19L非現量故得緣過去名等若依此釋
001_0130_a_20L卽以心中具足聚集若如前說
001_0130_a_21L俱意識定是現量如何亦說緣名等
001_0130_a_22L解云現量亦然名等自相而因明
001_0130_a_23L理門說不緣名義相繫故或有但由
001_0130_a_24L等流耳識所1) [6] 發故而顯現者

001_0130_b_01L반드시 솔이이식率爾耳識에 의해 유발되고 나서야 비로소 취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상으로 우선 아직 전의轉依하지 못한 지위에서 솔이심 등의 취집·현현에 대해 설명하였다. 전의한 지위에서는 일념 중에 (오심이) 다 갖추어져서 현현하니, 이치에 맞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심에 대해 자세하게 해석하자면, 구체적인 것은 앞의 「오심장」과 같다.

(4) 일음一音인지 이음異音인지를 판별함
넷째, 일음인지 이음인지를 판별하는 문이다.

  여래의 설법은 일음一音인가 아닌가?170)
  여러 설이 다르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171)에 의하면 20부파가 있었는데,172) (그들의 학설은 크게) 두 가지 해석으로 나뉜다.

● 소승의 부파불교의 학설
첫 번째로 대중부大衆部·일설부一說部·설출세부說出世部·계윤부雞胤部는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여래의 말씀은 모두 전법륜이며, 부처님은 일음으로 일체법을 설하신다.≻173)진제의 『부집이론기部執異論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언음言音은 본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모두 법륜이다. 둘째는 위덕威德으로 나타낸 것으로, 이는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법륜과 상관이 없다. 가령 아난에게 ‘어디에서 왔느냐’라는 등의 질문을 하시거나, 가령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앞뒤에서 다 부처님의 얼굴이 보이는 상태에서 그를 마주하고 설법하시는 경우와 같다. 이것은 또한 부처님의 위덕으로 드러낸 것이다. 운운≻
둘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경부經部 등은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말씀이 모두 전법륜인 것은 아니고, 부처님이 일음으로 모든 법을 설하시는 것도 아니다.……이하 생략……≻174)
『대비바사론』 제79권에도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부집이론部執異論』175)과 동일하다.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성어聖語176)로 사성제를 설하여 교화 대상들을 모두 이해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 그렇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이해시킨다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둘 다 오류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해시킬 수 있다면, 비나야毘奈耶(ⓢ vinaya : 律)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과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는가? ≺세존이 언젠가 사천왕四天王을 위해 먼저 성어로 사성제를 설했는데, 사천왕 중에 두 명은 이해했고 두 명은 이해하지 못했다. 세존은 그 둘을 불쌍히 여겨 이익을 주려고 다시 남인도 변방의 속어로 사성제를 설했는데, 두 명의 천왕 중에서 한 명은 이해했고 한 명은 이해하지 못했다. 세존은 그를 불쌍히 여겨 이익을 주려고 다시 한 종류 멸려차177)어로 사성제를 설했다. 이때 사천왕이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178)

001_0130_b_01L必要待卒 [28] 爾耳識之所*列生方能聚
001_0130_b_02L上來且說未轉依位卒爾心等聚集
001_0130_b_03L顯現若轉位於一念中具足顯現
001_0130_b_04L理應思廣釋五心具如前章

001_0130_b_05L
四辨音一異門如來說法爲一音
001_0130_b_06L諸說不同若依異部宗輪論
001_0130_b_07L二十部分成兩釋一大衆部一說
001_0130_b_08L說出世部雞胤部皆作此說
001_0130_b_09L如來語皆轉法輪佛以一音說一切
001_0130_b_10L眞諦記云如來言音自有二種一從口出
是法輪二威德所顯不從口出不關法輪
001_0130_b_11L問阿難從何處來等如佛說法時前後悉見
佛面對其說法此亦佛威德所顯云云

001_0130_b_12L一切有部及經部等皆作此說
001_0130_b_13L如來語皆轉法輪非佛一音能說一
001_0130_b_14L切法乃至廣說大毗婆沙第七十九
001_0130_b_15L亦有兩說同部執論彼云佛以
001_0130_b_16L聖語說四聖諦能令所化皆得解不
001_0130_b_17L設爾何失二俱有過所以者何
001_0130_b_18L言能者毗奈耶說如何會釋世尊
001_0130_b_19L有時爲四天王先以聖語說四聖
001_0130_b_20L四天王中二能領解二不領解
001_0130_b_21L世尊憐愍饒益彼故以南印度邊國
001_0130_b_22L俗語說四聖諦二天王中一能領解
001_0130_b_23L一不領解世尊憐愍饒益彼故復以
001_0130_b_24L一種篾戾2) [7] [29] 說四聖諦時四天

001_0130_c_01L
이해시킬 수 없다면, 가타伽他(ⓢ gāthā : 풍송·게송)에서 설한 것과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겠는가? 예를 들면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佛以一音演說法    부처님은 일음으로 설법하시나
衆生隨類各得解    중생은 부류마다 제각기 알아듣고서
皆謂世尊同其語    모두가 세존께서 내가 쓰는 말로
獨爲我說種種義    오직 나만 위해 온갖 뜻을 설하신다 하네

일음一音이란 범음梵音179)이다.180)……중간 생략……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성어로 사성제를 설하여 모두 다 이해시킬 수 있지만, 사천왕의 의요意樂181)에 차이가 있어서 그 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부처님은 다르게 설한다.……중간 생략……다시 세존은 모든 언어를 다 잘 이해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오직 성어의 설법만 잘하시지 모든 언어에 반드시 자재한 것은 아니다’라고 의심을 내는 수가 있는데, 그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부처님은 갖가지 언음으로 설법한 것이다. 다시 어떤 교화 대상자는 부처님의 변형되지 않는 언어(不變形言)에 의지하고, 혹은 (어떤 교화 대상자는) 변형된 언어(變形言)에 의지한다.……중간 생략……그러므로 세존은 세 가지 언어를 설한 것이다.≻182)
두 번째의 설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은 일음으로 사성제를 설하지만 모든 이들이 다 이해할 수 있도록 하지는 못한다. 세존이 자재한 신통력을 갖고 있다 해도 경계를 뒤바꿀 수는 없으니, 이는 마치 귀가 여러 색깔을 보게끔 한다거나 눈이 소리를 듣게끔 할 수 없는 따위와 같다.≻183)

  그렇다면 앞의 게송과는 어떻게 회통시키겠는가?
  반드시 회통시킬 필요는 없다. (가타는) 삼장三藏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찬탄하는 여러 게송의 말들은 실제보다 과장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184)들이 세존을 찬탄하면서 “마음은 항상 선정 속에 있고,……중간 생략……”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여래의 언음은 모든 음성의 경계에 두루 미치기에 말하고 싶은 대로 모두 그것을 말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이 지나支那(ⓢ Cīna)국의 말을 하실 때면 지나 중화中華에서 태어난 자보다 뛰어나다.……중간 생략……185)
또 부처님의 말은 날렵하고 재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001_0130_c_01L皆得領解若不能者伽他所說
001_0130_c_02L當云何通如有頌言

001_0130_c_03L
佛以一音演說法衆生隨類各得解

001_0130_c_04L皆謂世尊同其語獨爲我說種種義

001_0130_c_05L
一音者謂梵音乃至廣說有二說
001_0130_c_06L一有作是說佛以聖語說四聖諦
001_0130_c_07L能領解而四天王意樂有異爲滿
001_0130_c_08L彼意故佛異說乃至廣說復次
001_0130_c_09L尊欲顯於諸言音皆能善解故作是
001_0130_c_10L謂有生疑佛唯能作聖語說法
001_0130_c_11L [30] 言音未必自在爲決彼疑佛以
001_0130_c_12L種種言音說法復次有所化者依佛
001_0130_c_13L不變形言或依變形言乃至廣說
001_0130_c_14L故世尊說三種語二云佛以一音
001_0130_c_15L四聖諦不令一切皆能領解世尊雖
001_0130_c_16L有自在神力而於境界不能改越
001_0130_c_17L不能令耳見諸色眼聞聲等若爾
001_0130_c_18L前頌當云何通不必須通非三藏
001_0130_c_19L諸讃佛頌言多過實如分別論
001_0130_c_20L讃說世尊心常在定乃至廣說
001_0130_c_21L如來言音遍諸聲境隨所欲言
001_0130_c_22L能作之謂佛若作支 [31] 那國語勝在支
001_0130_c_23L那中華生者具說如彼復次佛語輕
001_0130_c_24L「列」疑「引」次同「羊」疑「車」

001_0131_a_01L비록 여러 가지 언어라도 일시에 할 수 있다. 즉 지나어를 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책가磔迦(ⓢ Śaka)국어를 하고, 내지는 다시 박갈라博喝羅(ⓢ Bokkara)어를 한다. (부처님은 말을) 빠르게 바꾸기 때문에 모두 ‘일시에 말한다’고 하니, 마치 선화륜旋火輪186)을 바퀴가 아닌데도 바퀴라고 생각하는 경우와 같다. 이전의 게송도 이에 의거하기 때문에 또한 위배되지 않는다. 또 여래의 언음은 여러 종류가 있더라도 똑같이 유익하기 때문에 일음이라 한다.187)
  『대비바사론』에는 본래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여래는 일음으로 이해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부집이론』에서 말한 대중부 등의 주장에 해당한다. 일음이란 범음梵音을 말한다. 그런데 여래가 세 가지 언어로 두루 설했던 것에는 세 가지 의도가 있다.188) 첫째로 그들의 의요를 만족시켜 주고, 둘째로 그들의 의심을 끊어 주며, 셋째로 교화 대상에 따라 주는 자가 변형되지 않은 언어에 의지하거나 반대로 변형된 언어에 의지하여 (교화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일음으로 모두 이해시킬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부집이론』에서 말한 설일체유부 등의 주장에 해당한다. 그런데 가타에서 ‘이해시킬 수 있다’고 설한 것과 반드시 회통시킬 필요는 없다. 가타는 삼장이 아니기 때문이고, 가타의 말은 사실보다 과장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분별론자들이 ‘세존의 마음은 항상 선정 속에 있다’고 하는 등과 같다.
(요컨대) 세 가지 의미로 일음一音의 뜻을 회통시킬 수 있다. 첫째, 처하신 곳마다 (그곳의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제일이므로 일음이라 한다. 둘째, (여러 언어를) 아주 빠르게 말해서 마치 하나의 언어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일음이라 한다. 셋째, 이익이 똑같기 때문에 일음이라 한다.

● 일음에 관한 대승의 학설
이제 대승에 의하면, 부처님은 일음으로 설한다. 따라서 『무량의경』에서는 “일음으로 널리 뭇 소리에 응하신다.”189)고 하였고, 또 『대부사의경』에서는 “여래는 한 마디 설법하시는 중에 무한한 경전들을 연설하신다.”190)고 하였으며, 『무구칭경』에서는 “부처님은 일음으로 설법하시지만 유정들은 부류마다 제각기 알아듣는다.”191)고 하였다.
또 『불지경론』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는) 성소작지成所作智192)로 중생들의 의요의 차별에 따라 화어化語193)의 업을 나타내어 갖가지 뜻을 설하고 모든 의혹을 끊어 버린다. 즉 일음을 발하여 일체의 의미를 나타내면

001_0131_a_01L利速疾迴轉雖種種語而謂一時
001_0131_a_02L佛若作支那語已無間復作礫 [32] 迦國
001_0131_a_03L乃至復作博 [33] 羅語以速轉故
001_0131_a_04L謂一時旋火輪非輪輪相 [34] 前頌依此
001_0131_a_05L故亦無違復次如來言音雖有多種
001_0131_a_06L而同有益故說一音解云婆沙自有
001_0131_a_07L二說一云一音能令得解此當部執
001_0131_a_08L大衆部等言一音者謂梵音也
001_0131_a_09L三遍說有三種意一滿彼意故
001_0131_a_10L斷彼疑故三隨所化者依不變形言
001_0131_a_11L反變形言一云不得一音皆令得解
001_0131_a_12L此當部執說一切有部等計而伽陀
001_0131_a_13L說能令解者不必須通非三藏故
001_0131_a_14L過實故如分別論者云世尊心常在
001_0131_a_15L定等復以三義會一音義一隨處
001_0131_a_16L第一故名爲一二速疾似一故名
001_0131_a_17L爲一三利益同故名爲一今依大
001_0131_a_18L一音能說故無量義經云能以一
001_0131_a_19L普應衆聲又大不思議經云
001_0131_a_20L來說法一語中演說無邊契經海
001_0131_a_21L垢稱云佛以一音演說法有情隨類
001_0131_a_22L各得解又佛地論第六卷云成所作
001_0131_a_23L隨諸衆生意樂差別現化語業
001_0131_a_24L種種義斷諸疑惑謂發一音表一

001_0131_b_01L반드시 모든 유정들은 부류마다 이익을 얻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계경에서 ‘부처님이 일음으로 제법을 설하면 중생들은 부류마다 제각기 알아듣는다’고 했는데, 어떤 이는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기뻐하며 어떤 이는 세간을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고 어떤 이는 다시 의혹을 끊기도 한다. 이것은 여래의 본원本願으로 이끌어 낸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발성된 화어이니, 일음으로 일체의 온갖 의심을 끊을 수 있는 것이다.”194)
이와 같은 말들은 다 갖추어 진술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 일음이란 바로 하나의 범음梵音이다. 따라서 『무량의경』에서는 “머리 숙여 범음성梵音聲에 귀의합니다.”195)라고 하였다. 또 『대지도론』 제86권에서는 “(여래는) 중생에게 설법하시기 위해 모든 중생들의 언어와 음성을 이해하시고 범음성으로 설법하신다.”196)고 하였다.

● 일음에 있어서 본질·영상의 문제
  이 여래의 일음으로 설해진 것은 본질인가, 영상인가? 본질이라면 무성의 『섭대승론석』과 어떻게 회통시키겠는가?197) 영상이라면, 듣는 자에 따라 여러 종류일 텐데 어째서 ‘일一’이라고 하는가?
  호법종 등은 진실한 정교正敎에서는 오직 본질만 있고 영상은 있지 않지만, 정교를 아울러 다 설하는 경우는 본질과 영상에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일’이라 한 것은 동일한 범음을 가리킨다.
  ‘소리’라는 점에서 따르는 것(본질)과 어긋나는 것(영상)을 분별하여 동일한 범음이라고 한다면,198) 혹은 ‘색깔’이라는 점에서 파랑·노랑을 분별하면 파랑·노랑은 동일한 색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인정해도 과실이 없다. 예를 들면 『잡집론』에서 ‘가말라병迦末羅病으로 눈이 손상되면 청색을 보고 황색이라 여긴다’고 한 것처럼,199) 이것도 이와 같아서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인해 하나의 색 등을 각기 달리 보는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 제6권에서는 ‘(여래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화신化身을 일으키는 경우에 또한 중생들로 하여금 하나의 본질을 달리 보게 함으로써 이로움과 즐거움을 주는 일을 이루신다’고 하였다.200)

  신통력의 자재함을 얻어서 동일한 본질을 달리 보이게 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 신통력의 자재함을 얻어서 상이한 본질을 동일하게 보이게 할 수도 있는가?
  대승에서는 사구四句가 모두 성립한다.
첫째, 동일한 본질이 다르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001_0131_b_01L切義定諸有情隨類獲益如契經言
001_0131_b_02L1) [8] [35] 音演說諸法衆生隨類各得開
001_0131_b_03L或有怖畏或有歡喜或生厭離
001_0131_b_04L或復斷疑此是如來本願所2) [9] [36] 不思
001_0131_b_05L議力所發化語一音能斷一切衆疑
001_0131_b_06L如是等說不可具述然一音者
001_0131_b_07L一梵音故無量義經云稽首歸依梵
001_0131_b_08L音聲又智度論八十六云欲爲衆生
001_0131_b_09L法說 [37] 解一切衆生語言音聲以梵音
001_0131_b_10L而爲說法此如來一音所說
001_0131_b_11L是本質爲影像耶若本質者無性
001_0131_b_12L攝論如何會釋若影像者隨能聞
001_0131_b_13L卽成多種如何言一解云護法
001_0131_b_14L等宗就實正敎唯木非影兼正俱
001_0131_b_15L通本及影而言一者同一梵音
001_0131_b_16L難約聲辨順違同一聲或可約色
001_0131_b_17L辨靑黃靑黃應成一解云許亦無失
001_0131_b_18L如雜集說迦末羅病損壤眼根
001_0131_b_19L靑爲黃此亦如是由佛神力於一
001_0131_b_20L色等各各異見故佛地論第六卷云
001_0131_b_21L成所作智若作化身亦令衆生一質
001_0131_b_22L異見利樂事成神力得自在
001_0131_b_23L質得異見或可神力得自在異質
001_0131_b_24L得同見解云大乘四句皆成一同質

001_0131_c_01L예를 들면 하나의 화신이 중생 각각에게 다르게 보이는 경우다.
둘째, 상이한 본질이 똑같이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의 화신을 여러 부처님들이 함께 변화해 내는 경우이니, 실제로 (부처님 몸은) 여럿이지만 (중생에게는)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성유식론』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수용신他受用身과 변화신變化身은 여래가 교화하는 중생들에 따라 공共·불공不共의 차이가 있다. 교화되는 중생이 공동(共)의 (여러 불신과 불토에 의지하는) 경우,201) 동일한 장소와 동일한 시간에 여러 부처님들이 각기 변화해서 몸과 국토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것들은 형상이 서로 비슷해서 서로 장애하지 않으니, 서로 간에 뒤섞인 상태에서 증상연增上緣이 되어 줌으로써 교화되는 중생 자신의 식으로 하여금 변현하게 한다.202) (이때 그 중생은) 어떤 한 불토에 한 불신이 계시는데 신통을 나타내어 법을 설해서 이익을 준다고 말한다. (교화되는 중생이) 특정한(不共) (불신과 불토에 의지하는) 경우, 그것은 오직 한 부처님이 변화해 낸 것이다. 모든 중생의 부류들은 시작 없는 때부터 종성種姓에 자연히 서로 속박되는데, 어떤 경우는 여러 중생들이 한 부처님에 속하고 어떤 경우는 한 중생이 여러 부처님에 속하기도 한다. 따라서 교화되는 중생이 (여러 불신과 불토에) 공동으로 의지하는 경우와 공동으로 의지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 부처님께서 오랫동안 세간에 머물면서 각기 수고롭게 일하시는 것은 실로 무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분의 부처님이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203)
셋째, 동일한 본질이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다.
넷째, 상이한 본질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상은 여러 종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니, 그 의미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색깔의 측면에서 파랑과 노랑을 분별하는 경우 파랑과 노랑이 하나라고 할 수 있다면, 마음의 측면에서 분별할 때는 팔식八識들도 당연히 하나라고 할 수 있는가?
  색깔과 소리는 거친 물질(麤法)이므로 동일한 본질을 다르게 볼 수도 있지만, 심법은 미세하여 알기 어려우므로 하나라고 해서는 안 된다.

● 일음을 여래의 삼밀三密 중의 하나로 설명함
또 일음 등은 바로 여래의 삼밀三密204) 가운데 신밀身密과 어밀語密이다.
예를 들면 『대지도론』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법륜을 굴리실 때 응지應持205)보살이 타방에서 와서 불신佛身을 헤아리려 했는데, 위로는 허공의 수많은 불국토를 지나 화상세계華上世界에 이르러서도 불신이 이전과 다름없이 보였으므로 게송을 설하여 찬탄하였다.”206)
또 『밀적경密迹經』207)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131_c_01L異見如一化身衆生各各所見不同
001_0131_c_02L二異質同見如一化身諸佛共變
001_0131_c_03L實衆多而見爲一故成唯識論第十
001_0131_c_04L卷云他受用身及變化身 [38] 隨諸如
001_0131_c_05L來所化有情有共不共所化共者
001_0131_c_06L處同時諸佛各變爲身爲土形狀相
001_0131_c_07L不相障礙展轉相雜爲增上緣
001_0131_c_08L [39] 所化生自識變現謂於一土有一
001_0131_c_09L佛身爲現神通說法饒益於不共者
001_0131_c_10L唯一佛變諸有情類無始時來
001_0131_c_11L姓法爾更相繫屬或多屬一或一
001_0131_c_12L屬多故所化生有共不共不爾
001_0131_c_13L佛久住世間各事劬勞實得 [40] 無益
001_0131_c_14L佛能益一切生故三同質同見四異
001_0131_c_15L質異見諸宗共許義顯可知
001_0131_c_16L色辨靑黃靑黃得成 [41] 可約心辨八識
001_0131_c_17L應成一解云色聲是麤法同質得異
001_0131_c_18L心法細難知不應說爲一又一
001_0131_c_19L音等卽是如來三密之中身語密也
001_0131_c_20L言身密者如智度論第一卷云佛初
001_0131_c_21L轉法輪時應持 [42] 菩薩從他方來
001_0131_c_22L量佛身上過虗空無量佛土至華上
001_0131_c_23L世界見佛身如故說偈讃歎又密
001_0131_c_24L「一」上疑脫「以」「列」疑「引」

001_0132_a_01L
부처님께는 삼밀이 있으니, 신밀·어밀·의밀이다. 그러나 모든 천天·인人들이 이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어떤 한 모임의 중생은 때로는 불신을 황금색이나 백은색 그리고 여러 보배가 섞인 색으로 보고, 혹은 불신을 1장 6척으로 보며, 혹은 1리·10리·백천만억 리 나아가 끝없고 한량없는 허공 가운데 두루 있는 것으로 보니, 이러한 것들을 ‘신밀’이라 한다.
어밀이란 어떤 사람은 부처님 음성이 1리 밖에서도 들리고, 어떤 사람은 10리·백천만억 리 나아가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허공에서 두루 들리며, 어떤 한 모임의 사람은 혹은 보시를 설하는 것을 듣고, 혹은 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설하는 것을 들으니, 이와 같이 십이부十二部·팔만법취八萬法聚에 이르기까지 각자 마음에 따라 듣는 것을 ‘어밀’이라 한다.208)

이때 목련존자가 마음에서 부처님 음성이 가까이서만 들리는지 멀리까지 들리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서 곧장 신족력神足力209)으로 서방의 광명번光明幡이라는 세계까지 갔는데, 여기로부터 96항하사 세계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서) 스스로 부처님의 음성을 들어 보니 가까이서 듣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곳 부처님의 신장은 40리里이고 보살들의 신장은 20리이며 음식 담는 발우의 높이는 1리였다. 그곳 부처님께서 대중들과 함께 막 공양을 하려는데 대목건련이 발우 가장자리를 걸어 다니니까 그 불토 대중들이 괴이하게 여겨 세존에게 물었다. “사람 모양을 한 이 조그만 것은 어디서부터 왔기에 사문의 옷을 입고 발우 가장자리를 걸어 다닙니까?”……중간 생략……그곳의 부처님께서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항하사겁이 지나도록 부처님 음성을 심구해 보아도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목련존자가 돌아와 석가모니 부처님 앞에서 잘못을 참회하였다.210)

의밀이란 여래께서 성도에서 멸도에 이르는 날까지 그 중간에 여래에게는 의심이 없었고 마음을 돌리는 일도 없었으며 사행思行 등도 없었음을 말한다.211)
자세한 설명은 그 경과 『대지도론』 제9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상에서 설한 내용은 모두 여래의 부사의를 설한 것이니,

001_0132_a_01L迹經云佛有三密身密語密意密
001_0132_a_02L切諸天人皆不解不知有一會衆生
001_0132_a_03L或見佛身黃金色白銀色諸雜寶色
001_0132_a_04L或見佛身一丈六尺或見一里十里
001_0132_a_05L百千萬億乃至無邊無量遍虗空中
001_0132_a_06L如是等名爲身密言語密者有人聞
001_0132_a_07L佛聲一里有聞十里百千萬億無數
001_0132_a_08L無量遍虗空中有一會人或聞說布
001_0132_a_09L或聞說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
001_0132_a_10L如是乃至十二部八萬法聚各各隨
001_0132_a_11L心所聞是名語密是時目連心念
001_0132_a_12L欲知佛聲近遠卽以神足力往至西
001_0132_a_13L方光明幢 [43] 世界去此九十六恒河沙
001_0132_a_14L世界自聞佛聲如近無異其佛身
001_0132_a_15L長四十里菩薩身長二十里所食鉢
001_0132_a_16L其高一里其佛與大衆方食
001_0132_a_17L目犍連行鉢際上彼土大衆恠問世
001_0132_a_18L此人頭虫從何處來被沙門服
001_0132_a_19L行鉢際上乃至彼佛告目連曰汝過
001_0132_a_20L恒河沙劫尋佛音聲終不可得
001_0132_a_21L連還來佛前悔過言意密者如來成
001_0132_a_22L至滅度日於其中間如來無疑
001_0132_a_23L不迴轉心無思行等廣說如彼及智
001_0132_a_24L度論第九如上所說皆是如來不思

001_0132_b_01L이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하면 마음이 미쳐 어지러워질 것이다. 이는 『대반야경』 제567권과 『현양성교론』 제17권의 설명과 같다.212)
2. 제교의 소전의 종지를 따로 나타냄
소전所詮의 종지에는 대략 네 종류가 있다.
첫째, 허망을 보존하고 진실을 감추는 종(存妄隱眞宗)이다. 예를 들면 살바다(설일체유부) 등에서 비록 사제를 설하지만 진여를 안립하지 않는 경우와 같다.
둘째,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보존하는 종(遣妄存眞宗)이다. 예를 들면 경부 논사들이 여러 허망한 법을 버리고 법성으로서의 공을 보존하는 경우와 같다.
셋째, 진실과 허망을 함께 버리는 종(眞妄俱遣宗)이다. 예를 들어 청변淸辨 등이 모든 유위·무위를 함께 버리는 경우와 같다.
넷째, 진실과 허망을 함께 보존하는 종(眞妄俱存宗)이다. 예를 들어 호법護法 등이 이제와 삼성 등의 뜻을 보존하는 경우와 같다.
이와 같은 의미에 대해 그 본문에 가서 설명할 것이다.
또는 모든 종지들은 대략 세 종류라고 해도 된다. 첫째는 (경전이 설해진) 때(時)에 의거해 종지를 분별한 것이다. 둘째는 (경전의) 부部마다 따로 종지를 나타낸 것이다. 셋째는 (중생의) 병病에 따라 종지를 구별한 것이다.
먼저 (경전이 설해진) 때에 의거해 종지를 분별하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제의 법륜이다. 예를 들면 사아급마四阿笈摩에는 비록 여러 부가 있지만 사성제를 종지로 삼는 경우와 같다.범음 ‘아급마(ⓢ āgama)’를 여기 말로 번역하면 ‘전傳’이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85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남인도에 이르시어 오아급마五阿笈摩를 세우셨고 제자들이 계속 전승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기 때문에 ‘급마’라고 한다. (오아급마란) 사아급마 이외에 별도로 세워진 백 부部의 아급마경(아함경)을 말한다. 사아급마는 첫째는 잡아급마이고, 둘째는 중아급마이며, 셋째는 장아급마이고, 넷째는 증일아급마다.” 자세한 것은 『유가사지론』 제85권의 해석과 같다.213)둘째는 무상無相의 대승이다. 예를 들어 여러 『반야경』에서 소집성所執性을 버리고 ‘무상’을 종으로 삼은 경우와 같다. 셋째는 요의了義의 대승이다. 예를 들어 이 『해심밀경』 등에서 삼성三性 등을 소전의 종지로 삼은 경우와 같다.
이상의 세 종류 법륜에 대해 제2권에 가서 자세히 분별하겠다.

  모든 반야경의 종지는 ‘무상’을 밝히는 것이고 이 경은 ‘요의’를 (밝히는 것인데,) 그 깊고 얕음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청변은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해심밀경』 등은 유소득有所得을 나타내므로 얕은 것이고 깊지 않지만, 모든 부의 『반야경』은 무소득無所得을 드러내므로 가장 심오한 것이다.≻ 호법 등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두 시기에 설해진 무상의 이치는 이치상으로는 얕고 깊음이 없다. 그런데 『해심밀경』을 요의라고 설한 것은, 삼성의 뜻에 의거해서 여러 경전들을 판정해 보면 유무有無의 도리214)를 분명하게 드러내서(顯了) 설했기 때문에 요의라고 한 것이지, 무상의 이치에 얕고 깊음이 있기 때문에 요의라고 한 것은 아니다.≻

001_0132_b_01L若思議者心則狂亂如大般若五
001_0132_b_02L百六十七顯揚十七說
所詮宗者

001_0132_b_03L有四種一存妄隱眞宗如薩婆多等
001_0132_b_04L雖說四諦不立眞如二遣妄存眞宗
001_0132_b_05L如經部師遣諸妄法存法性空
001_0132_b_06L眞妄俱遣宗如淸辨等雙遣一切有
001_0132_b_07L爲無爲四眞妄俱存宗如護法等
001_0132_b_08L立二諦三性等義如是等義至文當
001_0132_b_09L或可諸宗略有三種一約時辨宗
001_0132_b_10L二部別顯宗三隨病別宗約時辨宗
001_0132_b_11L有其三種一四諦法輪如四阿笈摩
001_0132_b_12L雖有諸部四諦爲宗梵音阿笈摩此翻云
故瑜伽論八十五
001_0132_b_13L佛及南印度立五阿笈摩弟子展轉傳來于今
故名笈摩謂四阿笈摩外別立百部阿笈摩經
001_0132_b_14L阿笈摩者一雜二中三長
四增壹廣如瑜伽八十五釋
二無相大乘
001_0132_b_15L如諸般若遣所執性無相爲宗
001_0132_b_16L了義大乘如此經等用三性等
001_0132_b_17L所詮宗三種法輪至第二卷當廣
001_0132_b_18L分別諸般若宗明無相此經了義
001_0132_b_19L淺深何異淸辨解云深密等經
001_0132_b_20L有所得淺而非深諸部般若顯無所
001_0132_b_21L爲最甚深護法等說二時所說無
001_0132_b_22L相之理理無淺深而說深密爲了義
001_0132_b_23L約三性義決判諸經 [44] 道理
001_0132_b_24L了說故名爲了義非無相中有淺深

001_0132_c_01L
  모든 부의 『반야경』이 제2시時에 해당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의미는 제2권 『경기經記』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는 경전의 각 부部마다 따로 종지를 나타낸 것이다.
시時에 의거하면 세 종류이지만, 하나하나 시마다 모두 여러 부들이 있고 하나하나 부마다 소전의 종지도 각기 달라진다.215)
『법화경』 등은 일승一乘을 종지로 삼고, 『무구칭경』 등은 불가사의해탈不可思議解脫을 종지로 삼으며, 『열반경』 등은 불성佛性을 종지로 삼고, 『화엄경』 등은 ‘42현성들의 관행觀行’을 종지로 삼는다.
이 『해심밀경』 한 부는 세 가지 무등無等(비할 바 없이 뛰어남)을 소전의 종지로 삼는다. 첫째는 경무등境無等이니, 즉 이제二諦 및 삼성三性 등을 말한다. 이제는 삼승에 공통된 경계고, 삼성 등의 이치는 오직 보살의 경계다. 둘째는 행무등行無等이니, 이른바 지관止觀 및 십바라밀 등이다. 지관은 삼승에 공통된 수행이고, 십바라밀은 오직 보살의 수행문이다. 셋째는 과무등果無等이니, 즉 지智·단斷 그리고 삼신三身의 과보를 말한다. 지와 단은 곧 보리와 열반이고 이는 삼승에 공통되는 것이며, 삼신은 오직 보살만 증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部들의 소전의 종지는 각기 다르므로 전부 기술할 수가 없다.
셋째는 (중생의) 병에 따라 종지를 구별한 것이다.
각 부마다 따로 하나의 의미를 드러내지만, 모든 유정들은 오온·십이처 등의 8만 4천 가지 법문에 미혹하기 때문에 모든 부에서는 그 설해지는 대상에 따라 오온·십팔계·십이처 등을 소전의 종지로 삼는다.

● 총괄적 결론
이제 이 한 부의 (『해심밀경』은), 네 종류의 종지 가운데서는 ‘진실과 허망을 함께 보존하는 종’에 해당한다. (세 종류의 종지 가운데) 시를 기준으로 종지를 판별하면, ‘요의’를 종지로 삼은 것이다. 부에 따라 종지를 구별하면, ‘세 종류 무등’을 소전의 종지로 삼은 것이다. 병에 따라 종지를 구별하면, ‘이제와 삼성’ 등을 소전의 종지로 삼은 것이다.

001_0132_c_01L故說了義也如何得知諸部般若
001_0132_c_02L爲第二時解云此義如第二卷經記
001_0132_c_03L中說二部別顯宗者約時雖三
001_0132_c_04L一一時皆有多部隨一一部所詮各
001_0132_c_05L如法華等一乘爲宗無垢稱等
001_0132_c_06L不可思議解脫爲宗涅槃經等佛性
001_0132_c_07L爲宗華嚴經等四十二賢聖觀行爲
001_0132_c_08L此經一部三種無等爲所詮宗
001_0132_c_09L一境無等卽是二諦及三性等二諦
001_0132_c_10L卽是三乘通境三性等理唯菩薩境
001_0132_c_11L二行無等所謂止觀及十度等止觀
001_0132_c_12L卽是三乘通行1) [10] 十度唯是菩薩行
001_0132_c_13L三果無等卽是智斷及三身果
001_0132_c_14L斷卽是菩提涅槃此通三乘三身
001_0132_c_15L唯是菩薩所得如是等部所詮各別
001_0132_c_16L不可具述三隨病別宗者雖隨部別
001_0132_c_17L各詮一義而諸有情迷蘊處等八萬
001_0132_c_18L四千法門故諸部中隨其所說
001_0132_c_19L界處等爲所詮宗今此一部四種宗
001_0132_c_20L眞妄俱存宗約時辨宗了義爲宗
001_0132_c_21L隨部別宗三種無等爲所詮宗
001_0132_c_22L病別宗卽用二諦及三性等爲所詮
001_0132_c_23L

001_0132_c_24L「行」疑剩

001_0133_a_01L
제3장 교의 근거와 대상을 나타냄
세 번째는 교의 근거(所依)와 대상(所爲)을 나타내는 것이다.216) 이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교의 근거를 나타낸 것이고, 둘째는 교의 대상을 나타낸 것이다.
1. 교의 근거를 나타냄
교의 근거를 말하자면, 성인의 가르침이 많기는 해도 전체적으로는 이장·삼장217)과 십이부경218)을 벗어나지 않는다. 십이부경은 이 책의 제3권에 가서 자세히 분별할 것이고, 이장·삼장은 제5권에 가서 해석할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별장別章』219)과 같으니, 번거롭게 서술하지 않겠다.

● 중국 법사들의 다섯 가지 교판
그런데 이 여래의 일대성교一代聖敎에 대해 이 나라 논사들의 의취意趣가 같지 않다.
어떤 이는 일교一敎라고 하니, 이른바 일음一音이다. 그 의미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220)
어떤 이는 이교二敎라고 하니, 이른바 점교漸敎·돈교頓敎다. 돈교는 『화엄경』을 가리키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점교다. 점교에서는 『열반경』을 요의라고 하며, 나머지는 모두 불요의라고 한다.혜탄 법사221) 등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는 삼교三敎를 설하니, 이른바 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다.222) 광통光統 법사 등이 이와 같이 설한다. 혜광 법사는 국통國統이었기 때문에 그를 광통이라 불렀다.
어떤 이는 사교四敎라고 한다. 첫째는 삼장교다.소승의 (경·율·론) 삼장 둘째는 통교이니, 『반야경』 등을 말한다. 셋째는 별교이니, 『열반경』 등을 말한다. 넷째는 원교이니, 『화엄경』 등을 말한다.
어떤 이는 오시교五時敎·칠계교七階敎를 설한다.무도산武都山 은사隱士였던 유규劉虬22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엄경』 등의 가르침은 돈교이고, 점교에는 오시가 있는데 혹은 칠계로 나눈다. ‘오시’란 다음과 같다. 첫째, 부처님이 처음 성도하시어 제위와 파리224)를 위해 오계五戒·십선十善을 설하셨으니, 이는 인천교人天敎의 법문이다. 둘째, 부처님이 성도하신 뒤 12년 동안 삼승의 차별적 교를 설하였으니, 차례대로 사제·연기·육도행을 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 공의 이치를 설하지 않았다. 셋째, 부처님이 성도하신 지 30년이 될 때까지 공종空宗인 『반야경』·『유마경』·『사익경』을 설하였다. 그러나 아직 일승一乘을 설하여 삼승을 타파하고 일승으로 돌아가게 하지는 않았다. 넷째, 성도하신 지 30년 뒤 8년 동안 『법화경』을 설하여 일승의 뜻을 밝힘으로써 삼승을 타파하고 일승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불성佛性을 설하지 않았고 불상佛常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이는 불요의교不了義敎다. 다섯째, 부처님이 멸도하시기 전 하루 동안 『열반경』을 설하여 ‘모두 불성을 갖고 있으며 법신이 항상 머문다’고 하였으니, 이는 요의교了義敎다. ‘칠계’란 제2시에서 삼승교를 나눈 것이다. 혜원 법사는 그것을 논파하면서, ‘설해진 연·월들에 대해 모두 정확한 문장은 없다’고 하였다.≻

● 서방 논사들의 다섯 가지 교판
이제 서방 여러 논사들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어떤 이는 일교一敎를 설하니, 이른바 ‘일음’이다. 예를 들면 구마라집 등의 설이다.
어떤 이는 이교二敎를 설하니, 이른바 반교半敎·만교滿敎225)다. 예를 들면 담무참曇無懺의 설이다.
어떤 이는 삼교三敎를 설한다. 예를 들면 대당 삼장이

001_0133_a_01L第三顯所依爲
自有二種一顯敎所
001_0133_a_02L二顯敎所爲
言所依者
聖殺雖
001_0133_a_03L總相不出二藏三藏十二部經
001_0133_a_04L二部經至第三卷當廣分別二藏
001_0133_a_05L三藏至第五卷自當解釋具如別
001_0133_a_06L故不繁述然此一代如來聖敎
001_0133_a_07L國諸師意趣不同有說一敎所謂
001_0133_a_08L一音義如上說或說二敎所謂漸
001_0133_a_09L頓卽華嚴餘皆是漸漸中涅槃
001_0133_a_10L以爲了義餘皆不了誕法師等
作如是說
或說三
001_0133_a_11L所謂通敎別敎圓敎光統法師等作如
是說慧光法師
001_0133_a_12L是國統故
名光統也
或說四敎一三藏敎小乘
三藏

001_0133_a_13L者通敎謂波若等三者別敎謂涅
001_0133_a_14L槃等四者圓敎謂華嚴等或說五
001_0133_a_15L時敎及七階敎武都山隱十劉虬云華嚴等
以爲頓敎漸中五時或開
001_0133_a_16L七階言五時者一佛初成道爲提謂波利說五
戒十善即是人天敎門佛成道已十二年中
001_0133_a_17L三乘差別敎如次應知四諦緣起及六度行未說
空理三佛成道己三十年中說空宗般若維摩思
001_0133_a_18L未說一乘破三皈一四成道已三十年後
八年中說法華經辨一乘義破三皈一未說佛性
001_0133_a_19L未明佛常是不了敎五佛將滅度一日一夜說涅
槃經悉有佛性法身常住是了義敎言七階者
001_0133_a_20L第二時中開三乘敎遠法師
破云所說年月皆無正文也

001_0133_a_21L
今述西方諸師所立有說一敎所謂
001_0133_a_22L一音如羅什等或說二敎所謂半
001_0133_a_23L滿如曇無懺或說三敎如大唐三

001_0133_b_01L『해심밀경』 등에 의거해 사제四諦·무상無相·요의了義의 교를 설한 것과 같다. 이는 앞에서 이미 설했던 것과 같다.226)
그런데 일음과 반교·만교 등을 설한 것은 각기 일리가 있으므로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 이른바 『화엄경』과 『능가경』은 모두 세 번째 요의교에 속한다. 그런데 ‘삼시三時에 설해진 교’라고 한 것은, (그 경에서 설한) 이치(義)의 얕거나 깊음, 자세하거나 간략한 이치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지, 연도·월일의 전후를 기준으로 삼시를 설한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사교四敎를 설한다. 이른바 사제, 무상, 예를 들면 『능가경』 등에서 법상法相을 설한 것, 예를 들면 『화엄경』 등에서 관행觀行을 설한 것이다. 진제 삼장이 이와 같이 설했다.227)
어떤 이는 오교를 설한다. 첫째는 사제이고, 둘째는 무상이며, 셋째는 관행이다. 넷째는 안락安樂이니, 예를 들면 『열반경』에서는 ‘상락常樂’의 열반의 과를 설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수호守護이니, 예를 들어 『금광명경』 등에서는 여러 신왕神王이 국토를 수호하는 일을 설하기 때문이다. 바파婆頗 삼장228)이 이와 같이 설한다.

● 총괄적 결론
이제 이 『해심밀경』 한 부는 이장 중에서는 보살장에 속하고, 삼장교 중에서는 달마장達摩藏(논)에 속하며, 십이부경 중에서는 논의경論議經229)에 속한다. 삼시교 중에서는 요의교에 속하고, 사교 중에서는 법상과 관행에 속하며, 오교문 중에서는 관행문에 속한다.
2. 교의 대상을 나타냄
교의 대상(所爲)이란 본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든 교의 대상들을 총체해서 밝힌 것이고, 둘째는 이 (『해심밀경』의) 교를 받아들이는 대상을 따로 밝힌 것이다.

1) 모든 교의 설법 대상을 총괄해서 밝힘
모든 교의 대상으로는 다섯 가지 종성이 갖추어져 있으니, 즉 삼승과 부정성不定性과 무성無性을 말한다.
따라서 『보살선계경』 제3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을 조복시키는 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성문종성이 있으면 성문의 도를 얻는다. 둘째, 연각종성이 있으면 연각의 도를 얻는다. 셋째, 불종성이 있으면 불도를 얻는다. 넷째, 인人·천天의 종성이 있으면 인·천의 즐거움을 얻는다.”230)
『보살지지경』 제3권의 내용도 『보살선계경』과 같으니, 그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에 대해 대략 네 가지로 설한다.

001_0133_b_01L依深密等所說四諦無相了義
001_0133_b_02L上已說而說一音及半滿等各據一
001_0133_b_03L互不相違所說華嚴及楞伽等
001_0133_b_04L第三了義所攝而言三時所說敎者
001_0133_b_05L約義淺深廣略義說非約年歲日月
001_0133_b_06L前後說三時也或說四敎所謂四諦
001_0133_b_07L無相或說法相如楞伽等或說觀
001_0133_b_08L如華嚴等眞諦三藏作如是說
001_0133_b_09L或說五敎一者四諦二者無相
001_0133_b_10L者觀行四者安樂如涅槃經以說
001_0133_b_11L常樂涅槃果故五者守護如金光明
001_0133_b_12L說諸神王護國事故婆頗三藏
001_0133_b_13L如是說今此一部二藏之中菩薩
001_0133_b_14L藏攝三藏敎內達摩藏收十二部
001_0133_b_15L論議經攝三時敎中了義敎收
001_0133_b_16L四敎之內法相觀行五敎門中
001_0133_b_17L行門也
言所爲者
自有二種一者
001_0133_b_18L總明諸敎所爲二者別明此敎所被

001_0133_b_19L[總明諸敎所爲]
諸敎所爲具有五性所謂三乘不定
001_0133_b_20L無性故善戒經第二 [45] 卷云衆生調伏
001_0133_b_21L有其四種一者有聲聞性得聲聞道
001_0133_b_22L二者有緣覺性得緣覺道三者有佛
001_0133_b_23L得佛道四者有人天性得人天
001_0133_b_24L樂地持第二 [46] 亦同善戒經彼云

001_0133_c_01L성문종성을 가진 이는 성문승으로써 성숙시키고, 연각종성을 가진 이는 연각승으로써 성숙시키며, 불종성이 있는 이는 무상승無上乘으로써 성숙시키고, 무종성인 자는 선취善趣를 통해 성숙시킨다. 이와 같은 네 종류 사람들을 모든 불보살은 이 네 가지 일로써 성숙시키는 것이다.”231)
『유가사지론』 제37권에서도 『보살지지경』과 같이 설한다.232)
  부정종성은 삼승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승마다 안에 보살종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위의 경론들에서 그 두 종성에 대해) 따로 말하지 않았다. 또 이 경문에 준해 보면, 삼법륜 외에도 따로 인천교人天敎의 문이 있어야 하지만, 수승한 것에 의거해서 설했기 때문에 우선 삼시의 법륜을 설한 것이다. 혹은 인천교는 ‘고苦·집集의 교’에 포함된다고 볼 수도 있다.233)

2) 『해심밀경』의 가르침을 받는 근기를 따로 밝힘
이 경의 가르침을 받는 근기에 대해 따로 밝히면 다음과 같다.
다섯 종성 중에서 다만 보살과 부정성을 위해 이 계경을 설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의 『해심밀경』의 경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타나식은 매우 깊고 미세하며, 일체종자식은 마치 폭류와 같다. 나는 어리석은 범부에게 이를 설하지 않으니, 그들이 분별하여 ‘나’라고 집착할까 봐 염려해서다.”234)
  또는 『해심밀경』은 무종성을 제외하고 통틀어 네 종류 종성을 위해 설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다음 경문에서 ‘발심해서 일체승에 나아가고자 하는 자를 위해 세 번째 요의대승을 설했다’고 하였다.235)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반야부는 다만 보살을 위해 여러 공空의 의미를 설한 것이고, 이 『해심밀경』은 모든 법의 유무有無의 도리를 밝히는 것을 종지로 삼는다.236) 따라서 삼승의 사람들이 모두 뛰어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혹은 이 경은 공통적으로 다섯 가지 종성을 위해 설했다고 볼 수도 있으니, 통틀어 인·천과 일체승에게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성五性의 의미를 설명하는 가운데서 다시 분별할 것이다.
제4장 경문 해석
네 번째는 경문에 의거해 바로 해석하는 것이니, 이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의 같고 다른 점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경문을 갈라서 해석한 것이다.
1. 광본과 약본의 같고 다름을 밝힘
광본과 약본의 같고 다름을 밝히겠다.
이 경에는 본래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광본이니, 십만 송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001_0133_c_01L成就 [47] 略說四種有聲聞性以聲
001_0133_c_02L聞乘而成就之有緣覺性以緣覺乘
001_0133_c_03L而成就之有佛種性以無上乘而成
001_0133_c_04L就之無種性者則以善趣而成熟之
001_0133_c_05L如是四人諸佛菩薩以此四事而成
001_0133_c_06L熟之瑜伽三十七亦同地持解云
001_0133_c_07L定不離三乘乘乘之內菩薩性攝
001_0133_c_08L不別說又准此文三法輪外理應
001_0133_c_09L別有人天敎門就勝說故且說三時
001_0133_c_10L法輪或可攝在苦集敎中
別明此敎
001_0133_c_11L所被機者
於五種性但爲菩薩及不
001_0133_c_12L定性說此契經故下經云阿陀邪識
001_0133_c_13L甚深細一切種子如暴流我於凡愚
001_0133_c_14L不開演恐彼分別執爲我又解
001_0133_c_15L經通爲四性唯除無性故下經云
001_0133_c_16L欲發趣一切乘者故說第三了義大
001_0133_c_17L所以者何諸部波若但爲菩薩
001_0133_c_18L說諸空義此經宗明一切諸法有無
001_0133_c_19L道理故三乘者皆得勝利或可此
001_0133_c_20L經通爲五性通說人天一切乘故
001_0133_c_21L性義中當更分別

001_0133_c_22L第四依文正釋
自有二種一廣略同
001_0133_c_23L二判文解釋
廣略同異者
此經
001_0133_c_24L一部自有二種一者廣本有十萬

001_0134_a_01L둘째는 약본이니, 천오백 송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약본 『해심밀경』으로서 범본은 오직 한 종류인데, 역자에 따라 달라져서 네 종류가 된 것이다.

● 약본의 네 종류 이역본
첫째, 송宋대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중인도 승려예전에는 ‘천축’이라고 하였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ṇabhadra : 394~468)송에서는 ‘공덕현功德賢’이라고 불렀다.가 윤주潤州 강령현江寧縣 동안사東安寺에서 한 본으로 번역해 냈는데, 이를 『상속해탈경相續解脫經』이라 하고 단 1권으로 되어 있다. 혹은 2권으로 된 경우도 있으니, 모두 17장(紙)이다. 이는 한 권 안에 두 개의 제목이 있는 것이니, 앞부분 10장 반은 『상속해탈지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 1권이라 하고, 뒷부분 6장 반은 『상속해탈여래소작수순처요의경相續解脫如來所作隨順處了義經』이라 한다. 비록 품의 제목은 없지만 차례대로 현장 역 『해심밀경』의 마지막 두 품에 해당한다.237)
둘째, 후위後魏 연창延昌 2년(513)에 북인도 승려 보리유지菩提留支(ⓢ Bodhiruci)위나라에서는 ‘도희道希’라고 하였다.가 낙양의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한 본을 번역해 냈는데, 이를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이라 한다. 그것은 5권이고, 11품이 있으며, 67장으로 되어 있다.첫째는 「서품」, 둘째는 「성자선문보살문품」, 셋째는 「성자담무갈보살문품」, 넷째는 「성자선청정혜보살문품」, 다섯째는 「혜명수보리문품」, 여섯째는 「성자광혜보살문품」, 일곱째는 「성자공덕림보살문품」, 여덟째는 「성자성취제일의보살문품」, 아홉째는 「성자미륵보살문품」, 열째는 「성자관세자재보살문품」, 열한째는 「성자문수사리법왕자보살문품」이다.
셋째, 진조陳朝의 보정保定 연간(561~565)에 서인도 우선니국優禪尼國 삼장 법사인 구나라타拘那羅陀(ⓢ Kulanātha, 499~569)진나라에서는 ‘친의親依’라고 하거나, 혹은 ‘진제眞諦(ⓢ Paramārtha)’라고 한다. 이 삼장 법사는 중국에 와서 주周·양梁·진陳의 세 왕조를 거쳤다.238)가 서경의 고성 안에 있는 사천왕사四天王寺에서 다시 한 본으로 번역해 냈는데, 이는 『해절경解節經』이라 한다. 단 1권으로 되어 있고, 4품이 있으며, 지면은 9장 반이다. 이는 현장 역 『해심밀경』의 처음 두 품에 해당하는데, ‘서품’의 명칭은 없고 「승의제상품」을 네 개 품으로 만든 것이다.첫째는 「불가언무이품」, 둘째는 「과각관경품」, 셋째는 「과일이품」, 넷째는 「일미품」이다. 진제의 번역 목록에 의하면,

001_0134_a_01L二者略本千五百頌然此略經
001_0134_a_02L梵本唯一隨譯者異乃成四部一者
001_0134_a_03L宋時元嘉年中中印度僧舊云
天竺
求那
001_0134_a_04L跋陀羅宋云
德賢
在於潤州江寧縣東安
001_0134_a_05L翻出一本名相續解脫唯有一
001_0134_a_06L或兩卷成總十七紙於一卷內
001_0134_a_07L有二題目初十紙半名相續解脫
001_0134_a_08L地波羅蜜了義經一卷後有六紙半
001_0134_a_09L名相續解脫如來所作隨順處了義經
001_0134_a_10L雖無品目如其次第當解深密最後
001_0134_a_11L二品二者後魏延昌二年北印度僧
001_0134_a_12L菩提留支魏云
道希
在於洛陽嵩1) [11] 山少
001_0134_a_13L林寺翻出一本名深密解脫經
001_0134_a_14L其五卷品有十一六十七紙一序品
二聖者
001_0134_a_15L善問喜薩問品三聖者曇無竭菩薩問品四聖者
善淸淨慧菩薩問品五慧命須菩提問品六聖者
001_0134_a_16L廣慧菩薩問品七聖者功德林菩薩問品八聖者
成就第一義菩薩問品九聖者彌勒菩薩問品
001_0134_a_17L聖者觀世自在菩薩問品十一聖
者文殊師利法王子菩薩問品也
三者陳朝
001_0134_a_18L保定年中西印度內優禪那國 [48] 三藏
001_0134_a_19L法師拘那羅 [49] 陳云親依或名眞諦此三
藏入漢國歷三朝謂周梁陳

001_0134_a_20L於西京故城內四天王寺更翻一本
001_0134_a_21L名解節經唯有一卷有其四品
001_0134_a_22L九張半當解深密初之二品無序品
001_0134_a_23L開勝義諦以爲四品一不可言無二品
二過覺觀境品
001_0134_a_24L三過一異品
四一味品也
若依眞諦翻譯目錄云

001_0134_b_01L진나라 때 천가天嘉 2년(561)에 건조사建造寺에서 『해절경』 1권을 번역하고 『의소義疏』 4권을 지었다고 한다.
넷째, 대당大唐 정관貞觀 21년(647) 삼장 법사 현장玄奘(602?~ 664)이 서경의 홍복사弘福寺에서 다시 한 본으로 번역해 냈는데, 이는 『해심밀경解深密經』이라고 한다. 모두 5권이 있고 8품으로 나누었으며 68장이다.첫째는 「서품」, 둘째는 「승의제상품」, 셋째는 「심의식상품」, 넷째는 「일체법상품」, 다섯째는 「무자성상품」, 여섯째는 「분별유가품」, 일곱째는 「지바라밀다품」, 여덟째는 「여래성소작사품」이다.

● 네 종류 이역본의 차이
그런데 이 네 판본에 차이가 있으니, 이에 대략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제명에서 차이가 있고, 둘째는 문文·의義의 완전한 구비에서 차이가 있다.

◉ 제명의 차이
제명의 차이를 말하면, 네 본이 모두 다르다. 첫 번째는 『상속해탈경』이라 하고, 두 번째는 『심밀해탈경』이라 하며, 세 번째는 『해절경』이라 하고, 네 번째는 『해심밀경』이라 한다.
‘해심밀解深密’은 범음으로는 열모절나산지涅謨折那▼(冉+刂)地(ⓢ nirmocanasaṃdhi)이다. ‘열모절나(ⓢ nirmocana)’는 여기 말로는 ‘해解’라고 번역하며, ‘산지(ⓢ saṃdhi)’는 ‘심밀深密’이라 번역한다. 그 이름의 뜻을 해석하면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239)
‘해절解節’이라 한 것은, 『진제기眞諦記』24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는 해석解釋이고 ‘절’은 견결堅結이다. ‘견’이란 견고한 것이고 ‘결’은 동여매는 것이니, 즉 나무의 마디나 사람의 뼈마디와 같이 견고하게 맺히고 얽힌 것을 말한다. 이 경에서 밝힌 매우 깊고 은밀한 의미는 통달하기 어렵고 해석하기 어려우므로 범부나 신행新行 보살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의미’를 ‘견결’이라 하고, 이 경에서 그것을 풀어 주므로 ‘해절’이라 한 것이다. ‘해절’의 의미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가령 법신 등과 같이 깊고 은밀한 의미는 통달하기 어려우므로 ‘의미의 마디(義節)’라고 하는데, 이 경에서 그것을 풀어 주기 때문에 해절이라 한다. 둘째, 무명無明·습기習氣·심혹心惑은 범부나 이승이 깨뜨릴 수 없는 것이므로 이러한 미혹을 견결이라 하는데, 진실을 반연함에 따라 이 미혹을 없앨 수 있으므로 ‘진실’을 해절이라 한다. 셋째, 지혜로써 이 진실을 반연하므로

001_0134_b_01L時天嘉二年於建造寺譯解節經一
001_0134_b_02L卷義疏四卷四者大唐貞觀二十一
001_0134_b_03L三藏法師玄奘在於西京弘福寺
001_0134_b_04L更翻一本名解深密總有五卷
001_0134_b_05L品爲八六十八紙一序品二勝義諦相品
三心意識相品四一切
001_0134_b_06L法相品五無自性相品六分別瑜伽品
七地波羅蜜多品八如來成所作事品
然此
001_0134_b_07L四本有同異者略有二義一題名
001_0134_b_08L有異二文義圓足言名異者四木
001_0134_b_09L不同一相續解脫二深密解脫
001_0134_b_10L者解節四解深密解深密者若依
001_0134_b_11L梵音涅謨折那▼(冉+(利-禾)地言涅謨折那
001_0134_b_12L翻名解▼(冉+(利-禾)地翻爲深密釋其名義
001_0134_b_13L如前已2)言解節者如眞諦記
001_0134_b_14L卽解釋節謂堅結堅是堅固結縛
001_0134_b_15L3)楯如木節及人骨節並有堅固拘結
001_0134_b_16L纒縛此經所明甚深密義難可通達
001_0134_b_17L難可解釋故非凡夫新行菩薩所能
001_0134_b_18L解了故說此義名爲堅結此經能
001_0134_b_19L故名解節解節之義凡有五種
001_0134_b_20L一深密義如法身等難可通達
001_0134_b_21L爲義節此經能釋故名解節二者
001_0134_b_22L無明習氣心惑凡夫二乘所不能破
001_0134_b_23L故說此惑名爲堅結由緣眞實能滅
001_0134_b_24L此惑故說眞實名爲解節三者智慧

001_0134_c_01L또한 이 ‘지혜’를 해절이라 하니, 경계를 따라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241) 넷째, 이 경의 ‘문구’를 해절이라 하니, 현현되는 것을 따라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242) 다섯째, 모든 삼승의 가르침 중에서 미세하여 요의를 파악하기 어려운 모든 것들을 이 경에 모아 놓았는데, 이 경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풀어 주기 때문에 이 경을 해절이라고 한 것이다.≻ 자세히 분별하면 『진제기』와 같다.
이른바 ‘상속해탈’과 ‘심밀해탈’에 대해서는 설명한 곳을 찾을 수 없다. (범어의 어원적) 정의에 준하여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열모절나’에는 두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해석’의 뜻이다. 이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는 ‘해탈’의 뜻이다. 따라서 두 판본의 경에서 모두 ‘해탈’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산지’에는 세 가지 뜻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심밀’의 뜻이고, 둘째는 ‘견결’의 뜻이니, 이는 앞에서 이미 해석한 것과 같다. 셋째는 ‘상속’의 뜻이다. 그러므로 두 개의 경 중에 하나는 ‘상속해탈’이라 하였고, 또 하나는 ‘심밀해탈’이라고 한 것이다. 이상의 두 해석은 진제의 해석에 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상속’이란 소지장所知障243)을 말한다. 견고하게 맺혀 상속하는 것에서는 해탈하기 어려운데, 지금 한 부의 경에서 매우 깊은 뜻을 해석하여 번뇌의 상속에서 곧 해탈할 수 있으므로 ‘상속해탈경’이라 한 것이다. 이는 『진제기』에서 두 번째 ‘번뇌해절’의 뜻에 해당한다.
‘심밀해탈’이란 지혜의 힘으로 깊고 비밀스런 이치를 반연하여 번뇌에서 해탈하므로 심밀해탈이라 한 것이다. 이는 『진제기』의 세 번째 ‘지혜해절’에 해당한다.
이러한 해석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사실 번역가들의 오류다.

◉ 문·의의 구비에서의 차이
문·의의 완전한 구비라고 한 것은, 예를 들면 『해심밀경』처럼 8품을 갖추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해심밀경』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은 『해절경』에는 단지 맨 앞의 2품만 있고 뒤의 6품은 빠져 있고, 『상속해탈경』은 맨 뒤의 2품에 해당하고 앞의 6품이 빠져 있으며,

001_0134_c_01L緣此眞實亦說此智名爲解節從境
001_0134_c_02L得名也四者此經文句名爲解節
001_0134_c_03L所顯得名五者一切三乘敎中所有
001_0134_c_04L微細難可了義聚在此經分明解釋
001_0134_c_05L故說此經名爲解節若具分別如眞
001_0134_c_06L諦記所言相續解脫深密解脫未見
001_0134_c_07L說處准義釋者涅謨折▼(冉+(利-禾)含有二
001_0134_c_08L一者解釋義如上已說二者解
001_0134_c_09L脫義故二本經皆云解脫言▼(冉+(利-禾)地者
001_0134_c_10L含有三義一者深密義二者堅結義
001_0134_c_11L如上已釋三者相續義是故二經
001_0134_c_12L名相續解脫二名深密解脫此上二
001_0134_c_13L准眞諦而可了知言相續者
001_0134_c_14L所知障堅結相續難可解脫今一
001_0134_c_15L部釋甚深義便能解脫煩惱相續
001_0134_c_16L名相續解脫經卽當眞諦記中第二
001_0134_c_17L煩惱解節義言深密解脫者由智慧
001_0134_c_18L緣深密理解脫煩惱故言深密
001_0134_c_19L解脫卽當第三智慧解節也雖有此
001_0134_c_20L據實卽是譯家謬也言文義圓
001_0134_c_21L足者如解深密具有八品而差別
001_0134_c_22L解節唯有最初二品闕無後六
001_0134_c_23L續解脫當後二品闕無前六深密
001_0134_c_24L「高」疑剩「前」疑「說」「楯」疑「猶」

001_0135_a_01L『심밀해탈경』은 11품이 있는데 승의제품을 네 개 품으로 나눈 것이다. 이에 따르면 (『심밀해탈경』은) 이 『해심밀경』과 더불어 문·의를 완전하게 구비한 것이다. 그런데 『해심밀경』은 설한 모든 곳마다 문·의가 분명하고 문장마다 대조해서 해석하였다. 따라서 이제 이 대당 현장 역 『해심밀경』 한 본을 해석하는 것이다.
2. 경문을 갈라서 해석함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하는 경문을 갈라서 해석한 것이다.

● 삼분과경三分科經
그런데 이 경문의 구분에 대해 세 가지 해석이 있다.244)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전에는 오직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교기인연분敎起因緣分’이니, 이는 처음의 서품에 해당한다. 둘째는 ‘성교정설분聖敎正說分’이니, 이는 뒤의 7품을 말한다. 비록 뒤의 경전 끝 부분에 ‘의교봉행분依敎奉行分’이 있긴 하지만, 이는 그 마지막 품 안의 봉행분이지 한 부 전체의 봉행분은 아니다.245)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부에 모두 세 부분이 있다. 처음 1품은 ‘교기인연분’이고, 다음에 7품이 있는데 이는 ‘성교정설분’이며, 마지막 제5권 끝 부분의 “이때 만수실리曼殊室利” 이하부터는 ‘의교봉행분’이다. 이 봉행은 여러 품에 흩어져 있지만, (그 끝부분을 전체의 봉행분으로 보아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전에는 다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교기인연분’이니, 이는 서분에 해당한다. 둘째는 ‘무등경계분無等境界分’이니, 이는 다음의 4품에 해당한다. 셋째는 ‘무등행분無等行分’이니, 이는 그 다음의 2품에 해당한다. 넷째는 ‘무등과분無等果分’이니, 이는 마지막 1품에 해당한다.246) 다섯째는 ‘의교봉행분’이니, 이는 경전 끝부분에서 “기뻐하며 봉행하였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비록 이상의 세 해석이 있지만, 우선 처음의 설에 의거하겠다. 한 부의 (경전 전체에) 공통되는 봉행분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는 세 해석 중에 두 번째 것을 정설로 여길 수도 있다. 이것은 모든 경론이 세 부분을 갖춘다는 뜻과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구설의 서序·정正·유통流通에 해당한다.247) ‘서’는 유서由序이니, 즉 정설을 일으키게 된 유래(由致)를 말한다. ‘정’은 바른 종지(正宗)이니, 소전所詮의 종의宗義를 말한다.248) ‘통’은 유통流通이니, 후세에 뛰어난 이익을 유통시키는 것이다.

지금 ‘교기인연’ 등이라 했는데, 박가범薄伽梵249)은 경전을 설한 본래 주인이므로 ‘인因’이라 하고,

001_0135_a_01L解脫有十一品於勝義諦開爲四
001_0135_a_02L由斯與此文義圓足然解深密
001_0135_a_03L所說處文義明淨至文對釋故今
001_0135_a_04L釋此大唐一本

001_0135_a_05L[判文解釋]
如是我聞

001_0135_a_06L
釋曰自下判文解釋然判此經
001_0135_a_07L其三釋一云此經唯有二分一敎起
001_0135_a_08L因緣卽初序品二聖敎正說謂後
001_0135_a_09L七品雖後經末依敎奉行品中奉行
001_0135_a_10L非一部也一云一部總有三分初一
001_0135_a_11L名敎起因緣分次有七品名聖敎
001_0135_a_12L正說分後第五卷末爾時曼殊室利
001_0135_a_13L依敎奉行分然此奉行散在諸
001_0135_a_14L於理無違一云此經有其五分
001_0135_a_15L敎起因緣卽是序分二無等境界分
001_0135_a_16L謂次四品三無等行分謂次二品
001_0135_a_17L無等果分謂後一品五依敎奉行分
001_0135_a_18L謂卽經末歡喜奉行雖有三釋且依
001_0135_a_19L初說無有一部通奉行故又解
001_0135_a_20L中第二爲正具足三分義不違故
001_0135_a_21L當舊說序正流通序謂由序起正說
001_0135_a_22L之由致正卽正宗所詮之宗義
001_0135_a_23L謂流通通後世之勝利今言敎起因
001_0135_a_24L緣等者以薄伽梵說經本主名之爲

001_0135_b_01L‘이미 들었다’는 것 등을 나타내는 것은 정설에 해당하지는 않으므로 ‘연緣’이라 한다. 따라서 서분을 인연분이라 이름한다. 소전의 법문을 바로 나타낸 품류이기 때문에 일곱 개의 품을 성교소설분이라 이름한다. 당시 대중들이 가르침을 듣고 나서 기뻐하며 믿고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는 것을 봉행분이라 이름한다.

● 증신분과 발기분
인연분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는 증신분證信分250)이고 둘째는 발기분發起分251)이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은 대략 세 가지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는 이름이 다르다. 이른바 증신서證信序와 발기서發起序는 통서通序와 별서別序라고도 한다. ‘나는 들었다’는 것 등을 말해 줌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믿음을 내게 하므로 ‘증신’이라 하니, 이것은 모든 경전들에서 동일하므로 ‘통서’라고 한다. ‘빛을 놓는’ 방식 등으로 바른 종지(正宗)를 일으키는 것을 ‘발기’라고 하니, 이것은 경전(部)마다 각기 다르므로 ‘별서’라고 한다.
둘째는 때가 다르다. 여래께서 (‘빛을 놓는’ 방식으로 종지를) 일으키는 것을 경전의 전서前序라고 하고 아난阿難이 청하는 것을 경전의 후서後序라고 한다. 그 두 가지 서분을 설한 때가 다르기 때문이다.
셋째는 사람이 다르다. 여래의 서序는 모든 경전들에서 여래가 일으키신 것이고, 아난의 서는 아난의 청으로 인해 이 서를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문과 『불지경론』 등에는 증신서만 있고 발기서는 없다. 증신서 안에서 의미상 발기서를 설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증신분을 밝힌 곳에는 세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는 (경전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사事의 개수(多少)를 판별한 것이고,252) 둘째는 서분을 설한 의도를 설명한 것이며, 셋째는 사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1) 사事의 개수를 판별함
사의 개수를 설명하면 본래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진제 삼장의 『반야기般若記』에서는 칠사七事를 열어 보인다.253)
첫째, ‘여시如是’라고 한 것은 들었던 법문의 한 부部의 문리文理는 결정코 믿을 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둘째, ‘아我’라고 한 것은 들은 사람, 즉 아난阿難254)을 나타낸 것이다. 셋째, ‘문聞’이라 한 것은 (여래의) 언음의 종지를 친히 받들었음을 나타낸 것이다. 넷째, ‘일시一時’라고 한 것은 들었던 법문이 때와 근기에 잘 맞았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섯째, ‘불세존佛世尊’이란 설하신 스승을 나타낸 것이다.

001_0135_b_01L顯已聞等非正說故名之爲緣
001_0135_b_02L說序分名因緣分正顯所詮法門品
001_0135_b_03L故說七品名聖敎所說分時衆
001_0135_b_04L聞敎歡喜信受名奉行分就因緣分
001_0135_b_05L有其二義一證信分二發1) [12] 然比
001_0135_b_06L二分有差別者略有三義一者名別
001_0135_b_07L所謂證信及發超序亦名通序及名
001_0135_b_08L別序說我聞等令物生信名爲證
001_0135_b_09L諸經皆同名爲通序以放光等
001_0135_b_10L發起正宗名爲發起隨部各別
001_0135_b_11L爲別序二者時別如來發起名經
001_0135_b_12L前序阿難所請名經後序說彼二
001_0135_b_13L序時分別故三者人別一如來序
001_0135_b_14L諸經中如來發起二阿難序由阿
001_0135_b_15L難請說此序故今此經文及佛地等
001_0135_b_16L唯有證信而無發起於證信中
001_0135_b_17L說發起理亦無違就證信中有其
001_0135_b_18L三義一辨事多少二說序之意
001_0135_b_19L隨事別釋
辨事多少者
自有三說
001_0135_b_20L者眞諦般若記中開爲七事一如是
001_0135_b_21L標所聞法一部文理決定可信
001_0135_b_22L二言我者出能聞人卽是阿難
001_0135_b_23L言聞者親承音旨四一時者顯所
001_0135_b_24L聞法善合時機五佛世尊出能說師

001_0135_c_01L여섯째, ‘주처住處’란 설법하신 어떤 장소를 나타낸 것이다. 일곱째, ‘대비구들(大比丘)’이란 (아난) 혼자서만 들은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칠사는 네 가지 뜻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처음의 ‘여시’는 아난이 들었던 법임을 밝히는 것이고, ‘아문’은 들은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음의 둘은 들었던 법을 증명하는 것이고, 뒤의 둘은 들은 사람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진제의 『칠사기七事記』255)의 해석과 같다.
두 번째, 용맹龍猛(용수)의 『대지도론』에 의하면 서분에서는 육의六義를 열어 보이니, 첫째는 믿음(信)이고, 둘째는 들음(聞)이며, 셋째는 때(時)이고, 넷째는 주인(主)이며, 다섯째는 장소(處)이고, 여섯째는 대중(衆)이다.256) 세친 보살의 『등론燈論』257)의 설명에서도 또한 육의가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 논의 게송에서는 “앞의 셋은 제자들을 밝힌 것이고 뒤의 셋은 스승의 설임을 증명한 것이니, 모든 경전에 나오는 그 사들은 모두 이와 같다.”고 하였다.
세 번째, 친광의 『불지경론』에 의하면 다섯 가지로 포괄할 수 있다.258) 첫째는 ‘(아난이) 이미 들었음’을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고, 둘째는 경을 설한 때를 나타낸 것이며, 셋째는 경을 설한 주인을 나타낸 것이고, 넷째는 경을 설한 장소를 나타낸 것이며, 다섯째는 청중을 나타낸 것이다.

2) 서분을 설한 의도
서분을 설한 의도를 밝히겠다.

  무슨 이유로 모든 경전의 첫머리에서 모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등의 사事를 설하는가?
 () 진제 삼장의 『칠사기七事記』에 의하면 ‘세 가지 의심을 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미세율微細律259)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아난阿難이 높은 자리(高座)에 올라 법장法藏을 낼 때에는 몸은 마치 부처님처럼 온갖 상호相好를 갖추었다가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면 다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중들이 이런 상서로운 모습을 보고 세 가지 의심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 의심은 ‘위대한 스승인 석가가 자비 때문에 열반에서 일어나 다시 깊은 법문을 설하시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심은 ‘다른 세존들께서 타방에서 오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의심은 ‘아난 비구는 부처님 아우니까 그 형을 대신할 수 있으므로 몸을 부처님으로 바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세 가지 의심을 버리게 하려고, 따라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등의 일곱 가지 일을 설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직접 부처님에게 들은 것이지 부처님이 자비로 열반에서 일어나신 것이 아니고, 다른 부처님들이 타방에서 오신 것도 아니며,

001_0135_c_01L六住處者顯說有處七大比丘
001_0135_c_02L非獨聞然此七事總唯四意初如
001_0135_c_03L是者明所聞法次我聞者辨能聞
001_0135_c_04L次二證所聞法後二證能聞人
001_0135_c_05L如眞諦七事記釋二依龍猛大智度
001_0135_c_06L於序分中開爲六義一信二聞
001_0135_c_07L三時四主五處六衆世親菩薩燈
001_0135_c_08L論中說亦有六義故彼偈云前三
001_0135_c_09L明弟子2) [13] 證師說一切修多羅
001_0135_c_10L其事皆如是三依親光佛地論中
001_0135_c_11L多五種一總顯已聞二說經時
001_0135_c_12L者說主四顯說處五顯聽衆
說序
001_0135_c_13L意者
何因緣一切經首皆說如是
001_0135_c_14L我聞等事眞諦三藏七事記云斷三
001_0135_c_15L疑故彼云又微細律明其阿難當登
001_0135_c_16L高座出法藏時身卽如佛具諸相好
001_0135_c_17L若下高座還復本形衆見此瑞
001_0135_c_18L三種疑一疑大師釋迦以慈悲故
001_0135_c_19L涅槃起更宣深法二疑諸餘世尊
001_0135_c_20L他方來三疑阿難比丘旣是佛弟
001_0135_c_21L代其兄轉身成佛今欲遣三疑故云
001_0135_c_22L如是我聞等七事明乃是我親從佛
001_0135_c_23L非關慈悲從涅槃起亦非餘佛他
001_0135_c_24L「起」下疑脫「分」「二」疑「三」

001_0136_a_01L아난이 이미 몸을 부처님으로 바꾸어서 스스로 경을 설한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대지도론』에서는 “경을 설했던 때와 지역과 사람에 대해 말하여 중생들의 마음에 믿음이 생기도록 하기 위해서”260)라고 하였다. 또 『대지도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구시나가라국 사라수 사이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누워 막 열반에 들려 하는데, 이때 아난이 (부처님에 대한) 친속親屬의 애정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욕망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근심의 바다에 빠져 스스로 벗어나질 못했다.
이때 장로 아누루두阿㝹樓豆261)가 아난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부처님의 법장을 수호하는 자인데 보통 사람처럼 스스로 근심의 바다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모든 유위법들은 다 무상한데, 그대는 어찌 시름에 빠져 있습니까? 또 불세존은 손수 그대에게 법을 부촉하셨습니다. 그대가 지금 시름하고 번민하면 전수받은 일을 잃게 됩니다. 그대는 부처님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부처님이 반열반하신 후에 우리들은 어떻게 수행하고 누가 스승이 되어야 하는지, 악구惡口 차익車匿262)과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할지,『장아함경』 제4권에서는 ‘천노闡弩 비구와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라고 하였다.모든 불경의 첫머리에 어떤 말을 써야 할지에 대해.”
아난이 곧 이 말을 부처님에게 물어보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일러 주셨다. “사념처263)를 행하고, 계율과 경전을 스승으로 삼으며, 차익 비구는 범법梵法264)대로 다스려야 하느니라.”265)
『장아함경』 제4권과 『증일아함경』 제36권에서 모두 ‘범법대로 다스리라’고 한 것은 ‘그 사람과 함께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그 경들에서 설한 것과 같다.
불경의 첫머리를 모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등으로 시작하라는 말씀은 『집법경集法經』과 『열반경후분』에 의거한 것이다.266) 대체로 『대지도론』과 동일하므로 번거로울까 봐 서술하지 않겠다.
『대비경大悲經』에서는 (장로 아누루두가 아니라) 우바리憂波離267)가 아난에게 시켜 청문하도록 했다고 한다. 경론의 설들이 같지 않은 까닭은 두 사람이 다 아난에게 시킨 것이지만 각기 하나의 의미에 의거해 썼기 때문이니,268)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3) 오사五事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함
다시 경문에 의지하여 사事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하겠다.269)

(1) 총현이문總顯已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것은 진제의 칠사 중에서 들었던 법문(所聞), 들은 자(能聞), 말씀하신 종지를 직접 받았다는 것(親承音旨) 등의 세 가지 사에 해당한다.

001_0136_a_01L方來又非我已轉身成佛自說經也
001_0136_a_02L智度論云說時方人欲令衆生心生
001_0136_a_03L信故又智度第二卷云佛涅槃時
001_0136_a_04L俱夷那竭國薩羅樹間北首而臥
001_0136_a_05L入涅槃爾時阿難親 [50] 愛未除未離
001_0136_a_06L欲故 [51] 憂悔 [52] 不能自出爾時長老
001_0136_a_07L阿㝹樓豆 [53] 語阿難言汝是守護佛法
001_0136_a_08L藏者 [54] 不應如凡人自沒憂悔 [55] 諸有爲
001_0136_a_09L皆是無常汝何愁憂又佛世尊
001_0136_a_10L手付汝法汝今愁悶失所受事汝當
001_0136_a_11L問佛佛涅 [56] 槃後 [57] 何修行 [58] 誰當作師
001_0136_a_12L惡口車匿云何共住長阿含經第四卷云
闡弩比丘云何共住

001_0136_a_13L佛諸 [59] 經首 [60] 作何等語阿難卽以此語
001_0136_a_14L問佛佛告阿難行四念處戒經爲師
001_0136_a_15L車匿比丘如梵法治長阿含經第四
001_0136_a_16L增一阿含第三十六皆云梵法治者
001_0136_a_17L卽是不共語也廣說如彼諸佛經
001_0136_a_18L1) [14] 皆稱如是我聞等語依集法
001_0136_a_19L經及涅槃後分大同智論恐繁不述
001_0136_a_20L大悲經說憂波離敎阿難請問所以
001_0136_a_21L經論說不同者二人共敎各據一
001_0136_a_22L互不相違

001_0136_a_23L[隨五事別釋]
復義經文隨事別釋言如是我聞者
001_0136_a_24L卽七事中所聞能聞親承音旨三種

001_0136_b_01L용맹·세친의 육의六義 중에서는 신信·문聞이라는 두 가지 사에 해당한다. (친광의 『불지경론』의) 오사五事 중에서는 첫 번째 (총현이문에) 해당한다. 비록 세 가지 설이 있지만, 우선 『불지경론』에 의거하겠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것을 해석하자면 세 가지 내용이 있다. 첫째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문구를 총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문구를 개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그 문구를 합해서 설한 뜻을 진술하는 것이다.

① ‘여시아문’에 대한 총괄적 해석
(첫째, ‘여시아문’을) 총체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문수사리와 아난 등이 다 ‘이와 같이 설하신 매우 깊은 가르침 등을 내가 예전에 일찍이 들은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금강선론』에서는 세 종류 아난 중에 대승의 아난이 대승의 가르침을 전했다고 하였다.270)

② ‘여시아문’에 대한 개별적 해석
(둘째, ‘여시아문’의) 개별적 해석에서는 먼저 ‘여시’를 설명하고, 나중에 ‘아문’을 해석하겠다.

가. ‘여시’를 설명함
● 중국 스님들의 해석
‘이와 같이(如是)’에 대해 여러 교설들이 서로 다르다.
이 나라의 여러 스님들은 대략 여덟 가지로 해석하는데, 의미는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같다. 여덟 가지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믿고 따름(信順)에 의거해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는 믿고 따름을 표현하는 말이다. 믿으면 말해진 이치를 따르게 되고, 따르면 스승과 제자의 도가 이루어진다. 경문에는 덜거나 보탠 것(豊約)271)이 없는데 이를 믿지 않으면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라고 건립한 것이다. 이것은 『주유마힐경』에 있는 승조 법사의 해석이다.272)
둘째는 문文과 의義에 의거해 해석한 것이다. 경문을 ‘여如’라고 하고 이치를 ‘시是’라고 한 것이다. 경문은 교묘히 나타내는(巧詮) 것이므로 ‘여’라고 하였고, 이치는 거짓 없는(無非) 것이므로 ‘시’라고 한 것이다.273) 지자智者 선사가 『유마기』에서 이렇게 해석하였다.274)
셋째는 진제와 속제에 의거해 해석한 것이다. 진제가 속제와 어긋나지 않는 것을 ‘여’라고 하고, 속제가 진제에 따르는 것을 ‘시’라고 한다. 이것은 전해 내려오는 해석이다.
넷째는 제자에 의거해 해석한 것이다. 아난이 말한 것은 부처님의 말씀과 똑같기 때문에 ‘여’라고 하고, ‘비슷하다’는 뜻의 ‘여’를 배제하기 위해 ‘시’라고 한 것이다.275)
다섯째는 오직 부처님에 의거해 해석한 것이다. 아난이 일러 준 부처님의 설법은 과거의 부처님들이 설한 것과 같아서(如) 다르지 않으므로 ‘여’라고 하고, 모든 부처님의 교설처럼 바른 것이지(是正) 그릇된 것이 아니므로 다시 ‘시’라고 한 것이다.276)
이상의 두 해석은 원遠 법사의 설명이다.277)
여섯째는 부처님과 제자에 의거해 해석한 것이다. ‘여시’는 감응感應의 표시이다. ‘여’라는 단어는 부처님이 중생 근기에 따라 준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고, ‘시’라는 단어는 중생들이 그릇됨이 없다는 뜻에서 쓴 것이다. 중생은 그릇됨이 없으므로 ‘감’하게 되고, 여래는 근기에 따라 주므로 ‘응應’하게 된다. 경을 전하는 자는 언어적 가르침을 (중생과 여래가) 감응한 경험에서 암송해 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如是)’라고 하였다. 『주법화경注法華經』에 이런 해석이 있다.278)
일곱째 광택 법사279)에 의하면, ‘여시’라는 말은 장차 들었던 법문을 전하기에 앞서 한 부의 경을 가리킨 것이다. ‘이와 같은(如是)’ 한 부의 경은 내가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니, 곧 ‘내가 들었다(我聞)’고 한 것이다.280)
여덟째 양 무제에 의하면, ‘여시’라는 것은 ‘이와 같은 말(如斯之言)은 바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是佛所說)’이라는 뜻에서 ‘여시’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설들을 자세하게 기술할 수는 없다.

● 서방 논사들의 해석
서방 논사들의 경우는 세 가지 설이 서로 다르다.
첫 번째, 보리유지는 『금강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281)
세간의 설명에 의거하면 (‘여시’의 뜻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발심한 것이 이와 같고(發心如是), 둘째는 다른 이를 교화함이 이와 같으며(敎他如是), 셋째는 비유하면 이와 같고(譬喩如是), 넷째는 결정적으로 이와 같다(決定如是)는 것이다. 발심한 것이 이와 같다는 것은 스스로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이 보리심을 발하여 모든 선행 등을 닦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이를 교화함이 이와 같다는 것은

001_0136_b_01L事也於六義中信聞二事五中第
001_0136_b_02L總顯已聞雖有三說且依佛地
001_0136_b_03L如是我聞釋有三義一總釋如是我
001_0136_b_04L二別釋如是我聞三者申其合說
001_0136_b_05L之意言總釋者謂傳佛敎曼殊室
001_0136_b_06L利及阿難等皆作此言如是所說甚
001_0136_b_07L深等我昔會聞金剛仙論云三種阿難中
大乘阿離傳大乘敎也

001_0136_b_08L
言別釋者先辨如是後釋我聞
001_0136_b_09L如是者諸說不同此地諸師略有八釋
如常說言八釋者
001_0136_b_10L約信順釋言如是者信順之辭也夫信則所言
之理順順則師資之道成經無豐約非信不傳
001_0136_b_11L故建言如是注維摩中肇法師釋也二約文義
以文爲如以理爲是文巧 [61] 詮爲如理以無非
001_0136_b_12L爲是智者禪師維摩記中有此釋也三約眞俗
眞不違俗名之爲如俗順於眞稱之爲是
001_0136_b_13L傳釋也四約弟子釋阿難所說如於佛語故名
爲如爲欲簡去相似之如故稱是五唯約佛釋
001_0136_b_14L阿難道 [62] 佛所說之法如過去佛所說不異 [63] 故名爲
如諸佛說是正非邪故復言是此上二釋
001_0136_b_15L法師說六約佛及弟子釋言如是者感應之瑞也
如以順機受名是以無非立稱衆生以無非爲惑
001_0136_b_16L如來以順機爲應傳經者以名敎出於感應
言如是注法華經有此釋也七光宅師云言如是
001_0136_b_17L將傳所聞前題擧一部也如是一部經我親
從佛聞卽爲我聞八梁武帝云言如是者如斯
001_0136_b_18L之言是佛所說故言如
2) [15] [64] 不可具述也
西方諸師三說
001_0136_b_19L不同一菩提留支金剛仙論云若依
001_0136_b_20L世辨乃有多途略而言之凡有四
001_0136_b_21L一者發心如是二者敎他三者
001_0136_b_22L譬喩四者決定發心如是者自念
001_0136_b_23L我當如是發菩提心修善行 [65] 敎他如

001_0136_c_01L앞에 있는 사람을 가르치면서 ‘그대는 마땅히 이와 같이 보리심을 발하여 선한 행을 닦아야 한다’는 말 등을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이와 같다는 것은 ‘이 사람은 위덕이 치성한 것이 마치 태양의 광명과 같고, 지혜가 깊고 넓은 것이 마치 큰 바다와 같으며, 용모가 단정한 것이 마치 보름달과 같고,……중간 생략……’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와 같다는 것은 ‘내가 이와 같이 보고 들었으니 이는 결정적으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지금 ‘여시’라고 한 것은 다만 네 번째 결정여시의 뜻을 취한 것이다. 즉 수보리가 스스로 말하길, ‘나는 직접 부처님에게서 이치와 교리를 설하시는 것을 들었고,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과 같아서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으며 착오도 없고 오류도 없으며 결정코 이와 같아서 전해진 것에 과실이 없다’고 한 것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이다.282) 이 말의 의취는 친광親光의 설과 대체로 같다.283)
(두 번째,) 장이 삼장長耳三藏284)의 해석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佛)에 의거한 해석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설한 것은 차이가 없기 때문에 ‘여’라고 하고, 동일하게 설하셨기 때문에 ‘시’라고 하였다. 둘째는 법法에 의거한 해석이다. 제법의 진실한 모습이므로 ‘여’라고 하고, 진실 그대로(如如) 설하였으므로 ‘시’라고 하였다. 셋째는 승가(僧)에 의거한 해석이다. 아난이 전한 바가 부처님의 교설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여’라고 하고, 허물과 잘못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시’라고 하였다.
(세 번째,) 진제 삼장의 해석에서 ‘여시’는 ‘결정’의 뜻이니, 이에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경문(文)이고, 둘째는 이치(理)다. 경문은 능전能詮 이고, 이치는 소전所詮이다.285) 자세한 것은 그의 설명과 같다. 총괄적으로 그 뜻을 해석하면, 아난이 전한 경문과 이치는 결정코 부처님께서 설한 바와 동일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 여러 논서들에 나온 세 가지 해석
여러 논의 설명에도 세 종류가 있다.
첫 번째, 『대지도론』 제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의 의미는 바로 믿음(信)이다. 불법의 큰 바다에 믿음으로 들어갈 수 있고 지혜로 건널 수 있으니, 믿고 따르는 자는 ‘이 일이 이와 같다’고 하지만 믿지 않는 자는 ‘이 일이 이와 같지 않다’고 한다.≻286) 자세한 것은 그 논의 설명과 같다.

001_0136_c_01L是者敎前人言汝當如是發菩提心
001_0136_c_02L修善 [66] 行等也譬喩如是者是人 [67] 威德
001_0136_c_03L熾盛如日光明智慧深廣猶如大
001_0136_c_04L面貌端正猶如滿月乃至廣說
001_0136_c_05L決定如是者我如是見聞等是名決
001_0136_c_06L定如是今言如是者但取第四決定
001_0136_c_07L如是明須菩提 [68] [69] 從佛聞所說理敎
001_0136_c_08L我之所說 [70] 不多不少不錯不謬決定
001_0136_c_09L如是無所傳之失故曰如是解云意趣
大同親光

001_0136_c_10L長耳三藏釋有三義一者就佛三世
001_0136_c_11L諸佛所說無異故名爲如以同說故
001_0136_c_12L稱之爲是二者約法諸法實相故名
001_0136_c_13L爲如如如而說故稱爲是三者約
001_0136_c_14L阿難所傳不異佛說故名爲如
001_0136_c_15L離過非稱之曰是三眞諦三藏釋
001_0136_c_16L是者決定義有其二種一文二理
001_0136_c_17L文是能詮理卽所詮廣說如彼
001_0136_c_18L釋意云阿難所傳文理決定如佛
001_0136_c_19L所說故曰如是諸論所說亦有三
001_0136_c_20L一依智度論第一卷云如是義者
001_0136_c_21L卽是信也佛法大海中信爲能入
001_0136_c_22L爲能度其信順者是事如是其不
001_0136_c_23L信者此事不如是廣說如彼二依
001_0136_c_24L「者」疑剩「第」上疑脫「如是」

001_0137_a_01L
두 번째, 『공덕시반야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말은 이 경이 세존께서 깨달음을 이루고서 연설하신 것이지 아난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287)
세 번째, 『불지경론』에 의하면 네 가지 의미가 있는데,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라는 총괄적 말은 네 가지 의미에서 다르게 해석된다. 첫째는 비유에 의거한 해석이다. 즉 지금 말하려 하는 이와 같은 문구는 내가 예전에 들었던 것과 같다는 말이다.이것은 옛날의 것을 현재의 것에 비유한 것이다.둘째는 가르침(敎誨)에 의거한 해석이다. 즉 당시 대중에게 ‘이와 같이 내가 예전에 들었던 대로 들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말이다. 셋째는 문답에 의거한 해석이다. ‘그대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예전에 들었던 것입니까’라는 물음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넷째는 허가許可에 의거한 해석이다. 즉 결집할 당시 보살 대중들이 모두 함께 청하면서 ‘그대가 들었던 대로 이와 같이(如是) 말해 주셔야 합니다’라고 하므로, 전법 보살이 곧장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許) ‘내가 들었던 대로 이와 같이 이제 설할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 네 가지 의미에 대해 세 논사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어떤 이는 네 가지 의미 중에 오직 네 번째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라 한다. 어떤 이는 이 중에 오직 뒤의 두 가지 의미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라 한다. 어떤 이는 네 가지 의미 중에 네 가지 의미 전부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라고 한다.≻288)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 『불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나. ‘아문’을 해석함
‘나는 들었다(我聞)’에 대해 개별적으로 해석하겠다.
전법 보살과 아난 등은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에서 ‘나’를 가립하고, 귀에서 식이 일어나 설법을 들었기 때문에 ‘나는 들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란 오온이니 세속제의 가명이다. ‘들었다’는 것은 귀에서 식이 일어나 알아듣는 것이다. (아와 문을) 따로 말하지 않고 총괄해서 말하였기 때문에 ‘나는 들었다’고 한 것이다.”289)

● ‘아’의 의미
  불법 중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는데, 어째서 여러 경전에서 모두 ‘나는 들었다’라고 하는가?
  이 의미에 대해 여러 교설이 서로 다르다.
용맹종에서는 사실단四悉檀에 의거해 ‘나는 들었다’에 대해 해석한다.범음 ‘실단悉檀(ⓢ siddhānta)’에 대해 여러 교설이 서로 다르다. 한편에서는 번역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이 ‘실단’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은 번역해야 한다고 한다. 어떤 경우는 ‘종宗’·‘성成’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묵墨’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인印’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정定’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성취구경成就究竟’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번역이 다르므로 일정한 기준을 찾기 어렵다. 남악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단은 ‘대열반大涅槃’이라는 말처럼 인도 범어와 한자어를 함께 표기한 것이니, ‘실’은 수나라 음이고 ‘단’은 인도 범어다. ‘실’은 ‘두루(遍)’라는 말이고 ‘단’은 ‘베푼다(施)’로 번역되니, 부처님께서 네 가지 법으로 중생에게 두루 베풀기 때문에 실단이라 한다.≻ 지자 선사가 『유마기』에서 이상과 같이 설하였다.290) 4권 『능가경』에 의하면 그것은 세 종류가 있다. 따라서 제2권의 경문 주석에서 “실단이란 뜻을 번역하면,

001_0137_a_01L功德施波若論云如是我聞者顯示
001_0137_a_02L [71] 是世尊現覺而演非自所作三依
001_0137_a_03L佛地論有其四義故第一云如是
001_0137_a_04L總言依四義轉一依譬喩謂當所說
001_0137_a_05L如是文句如我昔聞此卽以
昔喩今
二依敎
001_0137_a_06L謂告時衆如是當聽我昔所聞
001_0137_a_07L依問答謂有問言汝當所說昔定
001_0137_a_08L聞耶故此答言如是我聞四依許可
001_0137_a_09L謂結集時諸菩薩衆咸共請言
001_0137_a_10L汝所聞當如是說傳法菩薩 [72]
001_0137_a_11L如是當說如我所聞於此四義
001_0137_a_12L三師釋一云四中唯依第四一云
001_0137_a_13L中唯依後二一云四中總依四義而
001_0137_a_14L具說如彼別釋我聞者傳法菩薩
001_0137_a_15L及阿難等五蘊身上假立爲我
001_0137_a_16L根發識聽聞所說故言我聞故佛
001_0137_a_17L地論云我謂諸蘊世俗假者聞謂耳
001_0137_a_18L根發識聽受廢別就總故說我聞
001_0137_a_19L佛法中無人無我如何諸經皆說我
001_0137_a_20L解云此義諸說不同依龍猛宗
001_0137_a_21L四悉檀以釋我聞梵音悉檀諸說不同
不翻含多義故或說
001_0137_a_22L翻之或翻宗或咸翻爲墨或翻爲印或翻爲定
或翻或 [73] 就究竟如是異翻難可定准南岳禪師云
001_0137_a_23L如大涅槃胡漢並稱也悉是隋音檀是胡語
之言遍檀翻名施佛以四法遍施衆生故名悉
001_0137_a_24L檀也智者師維摩記中作如是說若依四卷楞
伽經有其四 [74] 種故第二卷注經釋云悉檀者 [75]

001_0137_b_01L혹은 종宗을 말하거나 혹은 성成(성취)을 말하거나 혹은 묵黙을 말한다.”291)라고 해석하였다.
사실단의 의미는 예를 들어 『대지도론』 제1권의 설명과 같다.292)
첫째는 세계실단世界悉檀이다. 이는 예를 들면 ‘오온으로 사람(人)이 이루어진다’거나 ‘이와 같이 나(我)는 들었다’고 하는 경우, (사람 또는 ‘나’란) 세계실단에서는 있는 것이지만 제일의실단에서는 없는 것이다.293)
둘째는 각각위인실단各各爲人悉檀이다. 이는 사람들의 마음(心行)을 살펴 가면서 설법해 주는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 들으려 하는 경우도 있고 듣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으니, 단견斷見을 가진 이에게는 생生의 상속을 설해 주고, 상견常見을 가진 이에게는 ‘사람(人)’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해 주는 것이다.294)
셋째는 대치실단對治悉檀이다. 예를 들면 부정관不淨觀은 탐욕을 대치하지만 성냄을 대치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295)
넷째는 제일의실단第一義悉檀이다. 즉 제법의 실상은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이고 마음의 작용이 소멸된 것이니, 게송으로 설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진실하고, 모든 것은 진실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진실하면서 또한 진실하지 않기도 하고, 모든 것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이라 한다.”296)이 게송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중론』의 제3권의 설과 같다.297)
또 그 『대지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한 세계의 언어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그릇된 것이고, 둘째는 교만한 것이며, 셋째는 명자名字다. 세 번째 의미에서 ‘나’라고 한 것이다.298)299) 이것은 『유가사지론』에서 말한 ‘가설의 아(假說我)’에 해당한다.300)

  『중론』에서는 실상에 대해 물으면서 ‘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대지도론』에서는 무아라고 하는가?
  이는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세계실단에서는 ‘아’를 말하지만, 제일의실단에서는 무아라고 설한다. 각각위인실단에서는 간혹 아와 무아라는 두 가지 집착을 둘 다 버리게 하려고 또한 ‘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라고 설할 수도 있다. 따라서 『중론』에서는 “여러 부처님께서 때로 아를 설하기도 하고 무아를 설하기도 하지만, 제법의 실상에서는 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니다.”301)라고 하였다. 오직 아집我執만 대치하는 경우에는 곧 무아를 실상實相이라고 설하였고, 두 가지 집착을 모두 버리게 하는 경우에는 ‘아도 아니고 무아도 아닌 것’을 실상이라고 설하였다. 이는 각기 일리가 있는 말이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열반경』에 의하면 진아眞我를 실상이라고 설하였으니,

001_0137_b_01L或言宗或言
或言理 [76]
四悉檀義如智度論第一
001_0137_b_02L卷說一世界悉檀如蘊成人如是
001_0137_b_03L我聞世界故有第一義故無二各
001_0137_b_04L各爲人悉檀觀人心行而爲說法
001_0137_b_05L一事中或聽不聽爲斷見故說有
001_0137_b_06L續生爲常見故說無有人三對治
001_0137_b_07L悉檀如不淨觀於貪對治於瞋則無
001_0137_b_08L四第一義悉檀謂諸法實相言語道
001_0137_b_09L心行處滅卽說偈言

001_0137_b_10L
一切實一切非實及一切實亦非實

001_0137_b_11L一切非實非非實是名諸法之實相

001_0137_b_12L
廣釋此偈
中論第三
又彼論云復次世界語言
001_0137_b_13L有三一邪二慢三者名字依第三
001_0137_b_14L名之爲我卽當瑜伽假說我也
001_0137_b_15L豈不中論實相問中非我非無我
001_0137_b_16L何智度論中說爲無我答不相違
001_0137_b_17L界悉檀卽說爲我第一義中說爲
001_0137_b_18L無我各各爲人或我無我雙遣二
001_0137_b_19L亦得說言非我非非 [77] 無我故中論
001_0137_b_20L諸佛或說我或說於無我諸法
001_0137_b_21L實相中非我非無我若偏對我
001_0137_b_22L說無我以爲實相若雙遣執非我
001_0137_b_23L非無我以爲實相各據一義故不
001_0137_b_24L相違若依涅槃卽說眞我以爲實

001_0137_c_01L이치에 맞게 알아야 할 것이다.
미륵종에 의하면 네 가지 의미에서 오온을 ‘아’라고 가설한 것이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6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가범께서 말씀하셨다. ‘필추들이여,……네 가지 이유에서……아我가 있다고 가설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세상 사람들이 언설을 쉽게 (알아듣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세상 사람을 따라 주고 싶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결코 아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생겨나는 모든 두려움을 제거해 주고자 했기 때문이고, 넷째는 자타自他의 득실得失을 말해 주어 결정적인 신해信解의 마음을 일으키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302)
『현양성교론』 제9권과 『대법론』 제13권의 내용도 『유가사지론』과 같다.303)

● ‘문’의 의미
‘들었다(聞)’고 한 것에 대해 여러 설명들이 서로 다르다.
살바다종에서는 귀가 듣는 것이지 식이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304) 법구法救 논사는 식이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예를 들면 『대비바사론』 제13권의 설과 같다.305)
경부종에서는 식이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예를 들면 『성실론』 제6권의 설과 같다.306) 비유논사들은 귀와 식이 화합하여 듣는다고 하니, 예를 들면 『대비바사론』 제13권의 설과 같다.307)
이제 대승의 용수 보살에 의하면 본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천안天眼으로 색을 본다’고 하는데, 이에 준해서 귀가 소리를 듣는 것임을 알 수 있다.308) 둘째는 화합하여 듣는다고 하니, 예를 들면 『대지도론』 제1권 등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두 가지 설이 있지만 ‘화합하여 듣는다’는 것이 바른 견해다. ‘들음(聞)’에 대해 정의를 내려 해석하는 부분에서 ‘화합하여 듣는다’는 것에 대해 설하기 때문이다.309)
미륵종에 의하면 본래 세 가지 설명이 있다.
한편에서는 귀가 듣는 것이지 식이 듣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면 『집론』 및 『잡집론』 제1권에서 ‘이계耳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소리를 듣는 것이다’310)라고 하였다. 또 『유가사지론』 제3권에서 “자주 여기에 소리가 닿을 때마다 들을 수 있기 때문에 귀라고 한다.”311)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식이 듣는 것이지 귀가 듣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석』 제1권에서는 “들음이란 ‘청문聽聞’을 말하니, 곧 이근이 이식을 발생시켜 언어적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312)라고 하였고, 또 『불지경론』 제1권에서는 “들음이란 이근이 이식을 일으켜서 알아듣는 것이다.”313)라고 하였다. 혹은 이 두 논서에서 ‘귀로 듣는 것이지 식이 듣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에서는 화합하여 듣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잡집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137_c_01L如理應知依彌勒宗四義故於
001_0137_c_02L諸蘊中假說爲我故瑜伽論第六卷
001_0137_c_03L薄伽梵說苾蒭當知由四因故
001_0137_c_04L假說 [78] 有情 [79] 一爲 [80] 世間言說易故 [81]
001_0137_c_05L隨順諸世間故三爲 [82] 斷除決 [83] 定無我
001_0137_c_06L諸怖畏故四爲宣說自他得失 [84] 令其 [85]
001_0137_c_07L決定信解心故顯揚第九對法十三
001_0137_c_08L同瑜伽說言聞者諸說不同薩婆
001_0137_c_09L多宗耳聞非識法救論師識聞非
001_0137_c_10L如大毗婆沙第十三等依經部宗
001_0137_c_11L識聞非耳如成實第六譬喩論師
001_0137_c_12L合能聞如婆沙十三今依大乘
001_0137_c_13L樹菩薩自有兩釋一者天眼見色
001_0137_c_14L知耳聞二者和合能聞如智度論第
001_0137_c_15L一卷等雖有兩說和合爲正正釋
001_0137_c_16L聞中說和合故依彌勒宗自有三
001_0137_c_17L一云耳聞非識如集論雜集第一
001_0137_c_18L卷云耳界何相謂能聞聲又瑜伽
001_0137_c_19L論第三卷云數數於此聲至能聞
001_0137_c_20L名爲耳一云識聞非耳如瑜伽釋論
001_0137_c_21L第一卷云聞謂聽聞卽是耳根發生
001_0137_c_22L耳識聞言敎故又佛地論第一卷云
001_0137_c_23L聞謂耳根發識聽受或可二論耳聞
001_0137_c_24L非識一云和合能聞如雜集論第二

001_0138_a_01L 눈이 색을 보는 것인가, 식 등이 보는 것인가? 눈이 색을 보는 것이 아니고 또한 식 등이 보는 것도 아니니, 모든 법에는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눈과 식이) 화합함으로 인해 ‘본다’고 가립한 것이다.”314) 귀 등도 이와 같으니, 자세한 설명은 그 논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논에서 다르게 말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소리를 듣게 되는 가장 뛰어난 소의所依를 나타내기 위해서 『유가사지론』 등에서 귀가 듣는다고 설한다.315) ‘분별’이라는 뜻에 의거해서 『불지경론』 등에서 식이 듣는다고 설한다.316) 제법에 진실한 작용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대지도론』과 『잡집론』에서는 화합하여 듣는다고 한다. 이것들은 각기 일리가 있는 말이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제법에) 진실한 작용이 없다면 귀로 듣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고, 진실한 작용이 있다면 지智가 반연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여기에 문답을 만들어야 한다.

● 유식의 도리에서 본 ‘문聞’의 의미
유식의 도리를 통해 ‘들음’에 대해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 『불지경론』 제1권에서 설한 것처럼 두 논사의 주장이 있다. 따라서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317) ≺(‘들었다’는 것은) 여래의 자비와 본원本願318)이라는 증상연增上緣319)의 힘으로 듣는 이의 식에 문의文義의 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문의는 비록 직접적으로 듣는 이 자신의 선근의 힘에 의지해 생겨나는 것이지만, (여래의 증상연이라는) 강력한 연을 들어 ‘부처님이 설한다(佛說)’고 하고, 귀의 힘으로 듣는 이의 자기 마음에 전변하여 나타나므로 ‘나는 들었다(我聞)’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320) ≺듣는 이의 선근과 본원이라는 증상연의 힘으로 인해 여래의 식에 문의의 상이 생겨난다. 이 문의의 상은 부처님의 이타의 선근에 의해 일어난 것이므로 ‘부처님이 설하셨다’고 한다. 듣는 이의 식심識心은 (여래의 문의를 그대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식심에) 마치 그 문의와 유사한 상이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나는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321)
  『불지경론』의 두 논사의 설명에서, 처음은 나가서나의 설이니 그는 불과佛果에 색과 소리 등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 논사의 주장에서는 불과에 색과 소리 등이 갖추어질 수 있음을 인정한다. 대당 삼장과 호법 보살은 모두 뒤의 설을 수용한다. 이상은 이전의 ‘본질과 영상의 유무’에서 설한 것과 같다.322)

  아난은 여래께서 성도하신 날 태어나서 2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시자가 된 자이므로 그 전에 설한 경들은 모두 직접 들은 것이 아닌데

001_0138_a_01L卷云爲眼見色爲識等耶
001_0138_a_02L眼見色示非識等以一切法無作用
001_0138_a_03L由有和合假立爲見耳等亦爾
001_0138_a_04L廣說如彼所以如是諸論異者爲顯
001_0138_a_05L聞聲最勝所依故瑜伽等說耳爲聞
001_0138_a_06L就分別義故佛地等說識爲聞爲顯
001_0138_a_07L諸法無實作用故智度論及雜集論
001_0138_a_08L和合爲聞各據一義互不相違
實作
001_0138_a_09L不許耳聞 [86] 實作用
智不應緣此中應作問答
唯識道理以辨
001_0138_a_10L聞者如佛地論第一卷說有二師義
001_0138_a_11L故彼論云有義如來慈悲本願增上
001_0138_a_12L緣力聞者識上文義相生此文義相
001_0138_a_13L雖親依自善根力起而就强緣名爲
001_0138_a_14L佛說由耳根力自心變現故名我聞
001_0138_a_15L有義聞者善根本願增上緣力如來
001_0138_a_16L識上文義相生此文義相是佛利他
001_0138_a_17L善根所起名爲佛說聞者識心
001_0138_a_18L不取得然似彼 [87] 分明顯現故名我聞
001_0138_a_19L解云佛地二師所說初卽那伽犀那
001_0138_a_20L不許佛果有色聲等第二師義許佛
001_0138_a_21L果中具色聲等大唐三藏法護 [88] 菩薩
001_0138_a_22L皆用後說如前本影有無中說問曰
001_0138_a_23L阿難如來成道日生經二十年
001_0138_a_24L爲侍者前所說經皆非親聞如何

001_0138_b_01L어째서 모든 경전마다 모두 ‘나는 들었다’라고 하는가?
 () 보리유지의 『금강선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전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 모두 세 차례 법장을 결집結集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왕사성의 인다라굴에서 500명의 비구들이 법장을 결집하였는데, 사리불 등 여러 아라한 비구들이 각자 ‘어떤 이름의 경을 이와 같이 나는 들었고, 부처님이 어느 곳에서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중에 나쁜 국왕이 불법을 무너뜨렸고 그 후에 다시 700명의 비구들이 재차 법장을 결집하게 되었는데, 모두 ‘어떤 이름의 경을 나는 아무개 비구로부터 들었다’고 말하였고 ‘나는 부처님에게 들었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 재결집은 모두 소승 사람들이 법장을 결집한 것이다.
또 여래께서는 철위산 바깥, 즉 그 외의 세계에는 닿지 않는 두 세계의 중간에 계시는데, 수많은 부처님들이 함께 그곳에 모여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을 다 설하셨다. 대승의 법장을 결집하기 위해 다시 대중을 불러 모았는데, 80억 나유타323)의 나한들과 무량무변의 항하사 같은 불가사의의 보살대중들이 모두 그곳에 모였다. 이 당시 보살과 성문들은 모두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여래께서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의 경을 설하셨다’고 하였다.324)
진제 삼장은 『칠사기』에서 직접 들었으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고 하고, 전해 들었으면 ‘나는 이와 같은 것을 들었다(我聞如是)’고 한다고 하였다. 또 『부집이론기部執異論記』에서는 직접 들었으면 ‘나는 들었다(我聞)’고 하고 전해 들었으면 ‘들려진 것(所聞)’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설명들은 『보은경』의 설과는 어긋난다. 『보은경』에 의하면, (‘아난이 들었다’는 것을)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아난이 다른 이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둘째, 부처님께서 세속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시어 알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셋째, 부처님께서 거듭해서 (아난에게) 설해 주셨다는 것이다.325) 따라서 그 경의 제6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부처님이 20년 동안 설법하신 것을 아난은 듣지 못했는데 어떻게 ‘나는 들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러 천신이 아난에게 말해 주었다고 하고, 또는 여러 비구들에게 들었다고도 하며,

001_0138_b_01L諸經皆說我聞菩提留支金剛仙論
001_0138_b_02L昔如來滅後凡有三時結集法藏
001_0138_b_03L初在王舍城因陀羅窟中五百比丘
001_0138_b_04L結集法藏舍利弗等諸阿羅漢比丘
001_0138_b_05L各自稱言某甲經如是我聞佛在
001_0138_b_06L某處說後時爲惡國王壞滅佛法
001_0138_b_07L此以後復有七百比丘重結集法藏
001_0138_b_08L皆云某甲經我從某甲比丘邊聞
001_0138_b_09L云我從佛聞此之再集並是小乘之
001_0138_b_10L結集法藏又復如來在鐵圍山外
001_0138_b_11L不至餘世界二界中間無量諸佛
001_0138_b_12L集於彼說佛話經訖欲結集大乘法
001_0138_b_13L復召集徒衆羅漢有八十億那
001_0138_b_14L由他菩薩衆有無量無邊恒河沙不
001_0138_b_15L可思議皆集於彼當於爾時菩薩
001_0138_b_16L聲聞皆云如是我聞如來在某處
001_0138_b_17L說某甲經眞諦三藏七事記云親聞
001_0138_b_18L曰如是我聞傳聞曰我聞如是又部
001_0138_b_19L執記云親聞曰我聞傳曰所聞
001_0138_b_20L如是等說違報恩經說也若依報
001_0138_b_21L恩經釋有三義一者傳聞二者知
001_0138_b_22L佛世俗心 [89] 三者佛重爲說故第六云
001_0138_b_23L佛二十年中說法阿難不聞何得言
001_0138_b_24L我聞 [90] 天語阿難又云從諸比丘

001_0138_c_01L또는 부처님이 세속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아난에게 알도록 했다고도 한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아난이 부처님께 청원하기를,……‘부처님의 20년 동안의 설법을 나를 위해 다 설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부처님은 선교방편으로 하나의 법문과 하나의 구절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말씀하시기도 하고 한량없는 법문들이 한 구의 의미를 갖게 하실 수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그 단서를 대충 보여주면 아난은 남김없이 알아들었다고 한다. 그는 빠르고 예리하고 강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326)
  또 『금강화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난비구가 법성각성자재왕삼매法性覺性自在王三昧를 얻어 이 삼매의 힘으로 이전에 설한 경을 모두 기억할 수 있으므로 직접 들은 것과 다름이 없다. 마치 숙명통327)이 열려 과거의 일을 훤히 보면서 분명히 아는 것처럼, 또한 마치 가전연 존자가 원지願智328)의 힘을 얻어 부처님이 설하신 경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아난도 그랬던 것이다.≻329)

  아난은 성문승인데 어떻게 대승경전을 기억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대승집법경』에서 설한 대로라면 세 종류 아난이 있다. 첫째 아난타阿難陀는 성문법을 기억하였고, 둘째 아난현阿難賢은 연각법을 기억하였으며, 셋째 아난해阿難海는 대승법을 기억하였다. 『금강선론』에서도 『집법경』과 똑같이 말한다. 진제 삼장의 『금강반야소』에서는 『사왕참회경』을 인용하여 세 종류 아난을 말하면서 세 명 중에서 세 번째 아난이 이 경을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③ ‘여시아문’을 합해서 설한 뜻을 서술함
세 번째, (‘여시아문’을) 합해서 진술한 의도를 말하겠다.
예를 들어 『불지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여시아문’이라고 설한 의도는 (부처님의 말씀을) 늘리거나 줄임으로써 차이가 생기는 과실을 피하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법을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것이 아니라고 함으로써, 들었던 이가 감당할 능력이 있고 들었던 모든 것이 늘리거나 줄임으로써 차이가 생기는 과실에서 다 벗어나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330)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

(2) 교를 일으킨 시분

  한때


001_0138_c_01L邊聞又云佛入世俗心令阿難知
001_0138_c_02L阿難從佛請願佛二十年中說 [91]
001_0138_c_03L盡爲我說佛善巧 [92] 於一法一句中
001_0138_c_04L無量法能以無量法爲一句義佛粗
001_0138_c_05L示其端 [93] 阿難盡已得知速利强持力
001_0138_c_06L又解金剛華經說阿難比丘
001_0138_c_07L法性覺 [94] 自在王三昧以三昧力故
001_0138_c_08L所說經皆能憶持與親聞無異
001_0138_c_09L宿命通見過去事無不明了亦如迦
001_0138_c_10L旃延得願智力故佛所說經皆能憶
001_0138_c_11L阿難亦爾阿難旣是聲聞如何
001_0138_c_12L能持大乘經典如大乘集法經中
001_0138_c_13L有三種阿難一者阿難陀持聲聞
001_0138_c_14L二者阿難賢持緣覺法三者阿
001_0138_c_15L難海持摩訶衍法金剛仙論亦同集
001_0138_c_16L眞諦三藏金剛波若疏引闍王懺
001_0138_c_17L悔經說三種阿難三種之中第三阿
001_0138_c_18L持此經也故不相違第三申其
001_0138_c_19L合說意者如佛地論云應知說此如
001_0138_c_20L是我聞意避增減異分過失謂如是
001_0138_c_21L我從佛聞非他展轉顯示聞者有
001_0138_c_22L所堪能諸有所聞皆離增減異分過
001_0138_c_23L具說如彼

001_0138_c_24L
一時

001_0139_a_01L
  다섯 가지 사事에서 두 번째 ‘가르침을 일으킨 시분’에 해당한다.331)이 ‘한때(一時)’라고 한 것에 대해이 땅의 여러 논사들에게 네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일시一時’란) 여래가 일대에 설법하는 데 걸린 50년의 시기다. 둘째, 이 경 한 부를 설한 때이다. 셋째, 중생의 근기가 성숙한 때이다. 넷째, 설한 이와 듣는 이가 모두 함께 만난 때라는 것이니,332) 이는 길장 법사의 『법화소』에서 설한 것과 같다.서방 논사들의 세 가지 설이 서로 다르다.

● 보리유지菩提留支의 해석
첫째는 보리유지의 해석이다.
“한때(一時)”라는 것은 여러 가지 뜻이 있으니, 한 순간의 시時가 있고, 하루의 시가 있으며, 백 년의 시가 있고, 일체의 시가 있으며, 봄·여름·가을·겨울의 시가 있을 수 있다. 지금 ‘일시’라고 한 것은 이런 종류의 시간이 아니라 바로 여래가 이 경을 설하신 때를 가리킨다. ‘한때’라고만 하고 몇 년, 몇 월, 며칠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므로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대화엄경』 「정안품」 등에서는 ‘여래가 성도한 날 설하였다’고 하였고, 그 경의 「십지품」에서는 ‘14일째 되는 날 설하셨다’고 하였다. 『십만송반야경』에는 ‘여래가 성도한 지 5년 지난 해’라는 문장이 있지만 나머지 일곱 부의 『반야경』에는 다만 ‘한때’라고 하였으니,333) 모두 몇 년에 설하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지는 그 논334)에서는 “전하는 말에 따르면 여래의 일생 중 성도한 때부터 열반에 이를 때까지 항상 『마하반야경』·『화엄경』·『대집경』을 설하시면서 일찍이 끊긴 적이 없었다.”335)고 하였다. 이에 준해 보면 서방의 논사들도 또한 모든 경전이 설해진 때를 확정해서 설하지는 못했다.

● 장이 삼장長耳三藏의 해석
둘째는 장이 삼장의 해석이다.
‘시時’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반음시半音時이니, 인연을 상대하되 두루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원음시圓音時이니, 인연을 상대하면서 곧 두루 미치는 것이다. 처음 성도하신 때부터 마지막 쌍림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두 가지 음音을 병행해서 반교半敎(소승)와 만교滿敎(대승)를 함께 설하셨다. 작은 것(小分)을 보는 자에게는 ‘반음시’가 되고 완전한 것(滿分)을 보는 자에게는 ‘원음시’가 된다.
또는 시에 다시 세 가지가 있다고 해석한다.336) 첫째는 분단유전시分段流轉時이고, 둘째는 부사의변역시不思議變易時이며, 셋째는 가명시설시假名施設時이다. 앞의 두 가지는 두 종류 생사의 시이다.337) 가명의 시는 범음의 ‘겁파劫波’338)를 말하니, 이에 다시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가라시迦羅時이고, 둘째는 삼마야시三摩耶時이며, 셋째는 세간에 두루 노니시던 시(世流布時)이다.339)
‘가라의 시’는 여기 말로 ‘별상시別相時’라고 번역된다.

001_0139_a_01L
釋曰五中第二敎起時分然此一時
001_0139_a_02L此地諸師有說四種一者如來一代說法有五十
年時二者說一部時三者衆機熟時四者說聽
001_0139_a_03L共相會遇時
藏法師法華疏說
西方諸師三說不同
001_0139_a_04L一菩提留支言 一時者有其多種
001_0139_a_05L一念時有日時有百年時有一切
001_0139_a_06L有春秋冬夏時今言一時者
001_0139_a_07L此等時正是如來說此經時雖言一
001_0139_a_08L不云某年月日故不知何時
001_0139_a_09L大華嚴淨眼品等如來成道日說
001_0139_a_10L十地品第二七日說如十萬偈般若
001_0139_a_11L如來成道五年經有成文餘七部般
001_0139_a_12L但云一時皆不知何年說乃至
001_0139_a_13L彼云相傳說云如來一代成道乃至
001_0139_a_14L涅槃恒說般 [95] 若華嚴大集未曾斷絕
001_0139_a_15L解云准此西方三藏
亦不能定說諸經時也
二長耳三藏云
001_0139_a_16L有兩種一半音時對緣不遍二圓
001_0139_a_17L音時對緣卽普從初得道終訖雙
001_0139_a_18L二音並行半滿俱說見小分者
001_0139_a_19L爲半音時見滿分者爲圓音時
001_0139_a_20L時復有三一分段流轉時二不
001_0139_a_21L思議變易時三假名施設時前二卽
001_0139_a_22L是二種生死時假名時者梵音劫波
001_0139_a_23L自有三意一迦羅時二三摩耶時
001_0139_a_24L世流布時迦羅時者此翻別相時

001_0139_b_01L가령 계율을 제정하는 것을 대계를 받았을 때(大戒時)는 듣고 소계를 받았을 때(小戒時)는 듣지 못하며, 출가했을 때(出家時)에는 듣고 재가일 때(在家時)는 듣지 못하며, 국왕은 듣고 나머지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 것이다.340)
‘삼마야의 시’는 여기 말로 ‘사견을 깨뜨리는 때’라고 번역되는데, 오부五部의 아함阿含과 구분九分의 달마達磨341)는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가 들을 수 있는 것이다.‘구분’이란 가령 진제 삼장의 『부집론기』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래의 바른 가르침은 곧 경과 율과 아비담(論)이다. 경은 5아함이니, 『장아함경』·『증일아함경』·『중아함경』·『잡아함경』과 100부를 말한다.342) 율은 3부에 불과하니, 첫째는 250계율(비구계)이고, 둘째는 잡송률雜誦律이며, 셋째는 비구니율比丘尼律이다. 논에는 아홉 가지 분分이 있으니, 첫째 분은 계율에 대해 따로 설하고, 둘째 분은 세간에 대해 따로 설하며, 셋째 분은 인연에 대해 따로 설하고, 넷째 분은 법계에 대해 따로 설하며, 다섯째 분은 동수득同隨得343)에 대해 따로 설하고, 여섯째 분은 명·미·구344)를 따로 설하며, 일곱째 분은 집정集定에 대해 따로 설하고, 여덟째 분은 집업集業에 대해 따로 설하며, 아홉째 분은 모든 음陰에 대해 따로 설한다. 하나의 분마다 6천 게송이 있고, 6에 9를 곱하면 54이니, 모두 5만 4천 게송이 된다.
위의 두 가지 시時는 『대지도론』의 설과 거의 같다.345)
‘세간에 두루 노니시던 시’란 예를 들면 ‘한때 부처님께서 갠지스 강가에 계셨다’라고 하든지 ‘한때 신노림申怒林346)에 계셨다’라고 하는 경우와 같다.
지금 ‘한때’라고 한 것은 우선 뒤의 두 가지 시에 의한 것이다.

● 진제 삼장의 해석
셋째, 진제 삼장의 『칠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때(一時)’에는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신 때이고, 둘째는 정법을 설하신 때이며, 셋째는 정법을 듣는 때이고, 넷째는 정법을 수지하는 때이며, 다섯째는 정법을 생각하는 때이고, 여섯째는 정법을 닦는 때이며, 일곱째는 선의 씨앗을 심는 때이고,보리심을 말한다.여덟째는 선근을 성취하는 때이며,중국347)에서 태어나서 사념처를 닦는 것을 말한다.아홉째는 선근으로 해탈하는 때이고,법을 듣고 법을 말하며 법을 지니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닦아 익히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 연으로 해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선근으로 해탈하는 때’라고 한다.열째는 평등한 사捨348)의 마음일 때이다.마음이 많이 물러나는 것을 하심下心이라 하니, 법을 들어도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 마음이 동요하는 것을 고심高心이라 하니, 법을 들어도 깨달아 들어가지 못한다. 정법을 버리는 마음이 되면 이것은 무명의 불평등한 마음이니, 법을 들어도 또한 들어가지 못한다. 혼침을 벗어나고 들뜸을 억눌러서 마음을 조절하여 중도를 얻고 나서 사捨의 평등함을 염지念知할 때 정법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평등한 사의 마음일 때’라고 하였다. 이 열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일시’라고 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칠사기』에서 설한 것과 같다.

● 여러 논의 세 가지 해석
지금 여러 논에 의하면 세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공덕시반야론』에서는 “‘한때’란 이 경을 설한 때이니, 다른 때에도 다시 한량없는 경을 설하기 때문이다.”349)라고 하였다.
두 번째, 용맹종에 의하면 ‘시’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라시迦羅時라고 하니, 가립과 실재에 통하고 불교의 내외에서 두루 쓰이는 시이다.350)

001_0139_b_01L [96] 戒律大戒時聞小戒時不聞
001_0139_b_02L家時聞在家不聞國王得聞餘人
001_0139_b_03L不聞三摩耶時此翻破1) [16] 見時
001_0139_b_04L五部阿含九分達磨不簡黑白
001_0139_b_05L切得聞言九分者如眞諦師部執論記第一卷
如來正敎卽是經律阿毗曇經卽
001_0139_b_06L五阿含謂長增一中雜百部也律不過三部一二
2) [17] 五十戒律二雜誦律三比丘尼律阿毗曇
001_0139_b_07L有九分一分別說戒二分別說世間三分別說
因緣四分別說界五分別說同隨得六分別說
001_0139_b_08L名味句七分別集定八分別說集業九分別說諸
一分有六千偈六九五十四合五萬四千偈也

001_0139_b_09L上二種時大同智度論說世流布者
001_0139_b_10L如說一時佛在恒河岸一時在申怒
001_0139_b_11L今言一時且依後二三眞諦三
001_0139_b_12L藏七事記云一時有十義一佛出世
001_0139_b_13L二說正法時三聽正法時四持
001_0139_b_14L正法時五思正法時六修正法時
001_0139_b_15L下善種時謂菩
提心
八成就善根時謂生中國
修四念處

001_0139_b_16L九解脫善根時謂聽法說法持法靜心
以此五緣得入解脫故名
001_0139_b_17L解脫善
根時
十平等捨心時若心多退名爲下
聽法不入若心
001_0139_b_18L動踊名爲高心聽法不入若作棄捨正法心
是無明不平等心聽亦不入若能拔沉抑浮調
001_0139_b_19L停得中念知捨平等得入正法故云平等捨
心時具此十義故云一時也廣說如彼

001_0139_b_20L依諸論有其三說一功德施波若論
001_0139_b_21L一時者說此經時餘時復說無
001_0139_b_22L量經故二依龍猛宗時有二種
001_0139_b_23L名迦羅時通假及實內外通用

001_0139_c_01L둘째는 삼마야시三摩耶時라고 하니, 다만 가립이고 실재는 아니다. 내종內宗에서 ‘일시’라고 하는 경우는 이 삼마야시에 의거해 말한 것이다.
따라서 『대지도론』 제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천축에서 말하는 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라의 시이고 둘째는 삼마야의 시이다.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가라의 시분은 말씀하지 않고 단지 삼마야의 시만 설하시는가?이것은 곧 외인이 용수종에게 물은 것이다. ‘가라’라고 말해도 역시 의심했을 것이다.용수가 간략히 대답한 것이다. 가령 가라의 시를 말했다 해도 이러한 비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가라의 시를 말했어야 하니, ‘가라’라는 두 글자가 더욱 말하기 쉽기 때문이다. 삼마야의 시는 말하지 않아야 하니, ‘삼마야’란 세 글자는 훨씬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이것은 외인이 용수에게 비난한 것이니, ‘어찌 쉬운 것을 말하지 않고 어려운 쪽으로 말하는가?’라고 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삿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 삼마야의 시를 말하고 가라의 시를 말하지 않았다.≻351)
자세한 것은 『대지도론』의 설과 같다.용수가 자세히 풀이하였다. 가라의 시를 설하면, 시에 집착하는 외도는 곧장 ‘시는 제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세존도 시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인정했다’고 했을 것이다.
세 번째, 친광의 『불지경론』에 의하면 시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설하고 듣는 것이 완성되었을 때를 총칭하여 ‘일시’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때’란 설하고 듣는 때이니, 이것은 찰나마다 끊임없이 상속하다가 들음과 설함이 완전히 끝난 것을 총칭해서 ‘한때’라고 한 것이다.이것은 바로 1회의 설법을 총칭한 것이니, 설하고 듣는 것이 완전히 끝난 것을 ‘한때’라고 한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자字·명名· 구句 등을 듣는 시간과 설하는 시간이 다른데 어떻게 ‘한때’라고 하겠는가?이것은 반문하며 풀이한 것이다. 만약 그 설하고 듣는 것이 완전히 끝나는 것에 의거해서 ‘한때’라고 설한 것이 아니라면, 처음에 자를 설하고 다음에 명을 설하고 마지막에 구를 설하고 나아가 게偈·장章·품品·부部 등을 설하는 시간과 듣는 시간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한때’라고 말하겠는가?352)
둘째, (설법자는) 한 순간에 지니고 설할 수 있으며 (청자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한때’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하는 자는 다라니를 얻어 한 자字에서 한 순간에 모든 법문을 지니고 설할 수 있으며 지상地上보살은 다라니를 얻기 때문에 한 순간에 모든 법문을 지니고 설할 수 있다.혹은 듣는 자도 청정한 귀를 얻어 한 순간에 한 자를 들을 때 나머지 모든 법문에 대해서도 모두 장애 없이

001_0139_c_01L三摩耶時唯假非實內宗一時依此
001_0139_c_02L而說故智度論第一卷云天竺說
001_0139_c_03L有其二種一名迦羅二三摩耶
001_0139_c_04L佛何不言迦羅時分而但說三摩耶
001_0139_c_05L此即外人
問龍樹宗
[97] 迦羅俱亦有疑龍樹略

001_0139_c_06L言迦羅還有此
故不應答
問曰此中應說迦羅
001_0139_c_07L彼二字轉易說故而不應說三摩耶
001_0139_c_08L以波三字重語難故此外人難龍樹
不就輕而就重耶

001_0139_c_09L答曰今此除邪見故說三摩耶不言
001_0139_c_10L迦羅具說如彼龍樹廣釋若說迦羅執時
外道便作此言時能生請
001_0139_c_11L世尊許時
是實有故
三依親光時有3) [18]
001_0139_c_12L說聽究竟總名一時故佛地論云
001_0139_c_13L一時者謂說聽時此就刹那相續無
001_0139_c_14L聽說究竟總名一時此卽總說一會說
說聽究竟
001_0139_c_15L名一
若不爾者字名句等聽說時異
001_0139_c_16L云何言一此卽反解若不就其說聽究竟名一
時者如初說字次名後句乃至偈章
001_0139_c_17L品部等說聽時
皆異云何言一
二者一刹那頃能持能
001_0139_c_18L能領能受故言一時故彼論云
001_0139_c_19L能說者得陀羅尼於一字中一刹那
001_0139_c_20L能持能說一切法門解云地上菩薩
得陀羅尼故
001_0139_c_21L刹耶頃能持說
一切法門也
或能聽者得淨耳根
001_0139_c_22L刹那頃聞一字時於餘一切皆無
001_0139_c_23L「耶」疑「邪」{編}「二」疑「百」「四」疑
001_0139_c_24L「三」

001_0140_a_01L다 이해하여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한때’라고 한다. 지상보살은 다라니를 얻어 일시에 이해할 수 있으므로 ‘한때’라고 한 것이다.353)
셋째, 서로 만나는 것을 일시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혹은 서로 만나는 데 시간적 차이가 없으므로 일시라고 하니, 설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만나는 때가 동일한 시라는 뜻이다.해 (중생이) 성인에게 감응하고 (성인이) 중생에 나아가서 서로 만나는 것을 ‘일시’라고 한다. 혹은 넷이 될 수도 있으니, 듣는 때와 설하는 때를 (나누면 각각) 이시二時가 되기 때문이다.354)

● 수와 시간의 본질
  일一과 시時의 체는 어떤 것인가?
  일은 수數이고 시는 시분時分이니, 이에 대해 여러 학설이 같지 않다.살바다종과 경부의 논사에 의하면, 그것은 유위의 오온을 자성으로 삼고,355) 십이처·십팔계의 문에서는 또한 유위를 자성으로 삼는다. 살바다종은 색色에 의거해서 동이同異에 대해 설명하면서 색 이외에 (별도로) 동이가 있다고 한다.356) 혹은 색에 의거해서 수량에 대해 설명하였으니 또한 (‘수’도) 별도의 체가 있을 것이다.357)
이제 대승에 따르면 본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용맹종에서는 수나 시 등은 모두 실체가 없다고 하니, 온·처·계의 삼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지도론』 제1권에서는 “수나 시 등의 법은 진실로 없는 것이니, 음·입·지358)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359)라고 하였다. 『대지도론』에서 다시 “시時·방方·이離·합合·일一·이異·장長·단短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평범한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그것이 실재한다고 집착한다.”360)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둘째, 미륵종에 따르면 수와 시는 유위법 상의 (차별적) 분위分位에서 가립한 것이다.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법에 속한 수와 시를 말한다. 오온문에서는 행온에 속하고 처문·계문에서는 법계와 법처에 속하니, 이는 의식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불지경론』에서는 ‘혹은 이것은 마음 상에 (나타난 차별적) 분위의 영상影像이고 불상응행법’이라고 했는데, 이는 유식의 도리에 따라 설한 것이다.361)

  어째서 두 종파는 (시와 수의) 있고 없음에 대해 다르게 설하는가?
  용맹종은 외도들이 말하는 실수實數·실시實時 등을 논파하기 위해 실체성이 없다고 한 것이고, 미륵종에서는 대승의 법상法相의 도리를 나타내고자 하여 별도로 그것을 가립한 것이다.362) 따라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혹은 오백 불상응행법에 속한다고 해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십주비바사론』에서는

001_0140_a_01L障礙悉能領受故名一時解云地上菩
得陀羅尼
001_0140_a_02L一時能領
名一時也
三者共相會遇名爲一時
001_0140_a_03L彼論云或相會遇時分無別故名一
001_0140_a_04L卽是說聽共相會遇同一時義解云
感聖
001_0140_a_05L赴機更相會遇名一時也
可爲四開聽說時爲二時故
一及時
001_0140_a_06L體是何一是數時卽時分諸說
001_0140_a_07L不同薩婆多宗及經部師卽用有爲
001_0140_a_08L五蘊爲性處界門中亦用有爲爲性
001_0140_a_09L難薩婆多宗約色辨同異色外有同
或可約色辨數量亦應有別體
今依大
001_0140_a_10L自有兩釋一龍猛宗數及時等
001_0140_a_11L皆無有體非蘊處界三科所攝故
001_0140_a_12L度論第一卷云數時等法實無陰入
001_0140_a_13L持所不攝故彼論復云謂有時方離
001_0140_a_14L合一異長短名字凡人心著謂量實
001_0140_a_15L廣說如彼依彌勒宗數時卽是
001_0140_a_16L有爲法上分位假立卽二十四不相
001_0140_a_17L應中數及時也五蘊門中1) [19] [98] 所攝
001_0140_a_18L處界門中法界法處意識境故依佛
001_0140_a_19L地論或是心上分位影像是不相應
001_0140_a_20L此約唯識道理說何故二宗有無
001_0140_a_21L不同龍猛宗爲破外道實數時等
001_0140_a_22L故無體性依彌勒宗爲顯大乘法相
001_0140_a_23L道理故別立之故不相違或可五
001_0140_a_24L百不相應攝於理無違十住毗婆沙

001_0140_b_01L칠백 불상응행법을 세웠는데, 비록 이런 이치는 있지만 글로 된 것을 보지 못하였다.

  가령 이하의 ‘처處’ 등은 따로 ‘뛰어난 곳’을 가리켰던 것처럼 (‘시’도) 해가 처음 떴을 때 내지는 한밤중에 이 계경을 설했다고 따로 나타내지 않고, (어째서) 이 경에서 다만 ‘한때’라고 한 것인가?
  이는 『불지경론』에서 “낮밤의 시간은 여러 장소에서 일정하지 않으므로 따로 설하지 않았다.”363)고 한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남섬부주가 정오일 때는 서방(서우화주)은 해 뜰 무렵이고, 북방(북구로주)은 한밤중이며, 동방(동승신주)은 해 질 무렵인 것과 같다.

(3) 교의 주인을 따로 나타냄

  박가범薄伽梵께서

  다섯 가지 사 가운데 세 번째인 설법의 주인을 따로 나타내었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불법을 설하는 자는 다섯 종류다. 따라서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을 설하는 이는 다섯 종류다. 첫째는 부처님 스스로 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제자들이 설하는 것이며, 셋째는 선인仙人364)이 설하는 것이고, 넷째는 모든 천신(天)이 설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화인化人365)이 설하는 것이다.”366) 지금은 나머지 넷은 제외하므로 ‘박가범’이라 표기한 것이다.

  이 경은 처음에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일체법에 둘이 없다’는 뜻에 대해 설하는데, 어째서 다만 박가범께서 설한다고 하는가?367)
  이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보살이 설한 것은 적고 부처님이 설한 것이 많으니)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뛰어난 설법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보살들의 설법도)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화엄경』 등과 같다.

● 불佛과 바가바婆伽婆의 표기가 다른 이유
그런데 모든 경의 첫머리에 표기한 이름은 같지 않으니, 이에 네 종류가 있다. 어떤 경은 첫머리에 오직 ‘불佛’이라는 이름을 써 놓는데, 예를 들면 『열반경』 등과 같다. 어떤 경은 첫머리에 오직 ‘바가바婆伽婆’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대품반야경』 등과 같다. 어떤 경은 첫머리에 두 가지 이름을 다 표기하는데, 예를 들면 『무상의경』368)과 같다.불바가바반야경369) 혹은 어떤 경문에는 두 가지 이름이 모두 없는데, 예를 들면 『상속해탈경』과 『다심경多心經』370) 등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책들이 다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불·바가바를 모두 표기하지 않은 경우) 『상속해탈경』은 한 부의 마지막 두 품에 해당하므로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고, 『다심반야경』은 『대반야경』에서 결집한 보살들이 별도로 기록하여 유행시킨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이름을 표기하지 않았다.
(불·바가바를 표기한) 그 밖의 세 경우에 대해, 서방의 여러 논사들은 본래 세 가지로 설한다.

001_0140_b_01L立七百不相應雖有此理未見成文
001_0140_b_02L不別顯日初出時乃至中夜說此
001_0140_b_03L契經如下處等別指勝處而此經中
001_0140_b_04L但言一時如佛地論晝夜時分
001_0140_b_05L方不定不可別說解云如南贍部洲日午
西方日出北方夜半
001_0140_b_06L東方
日沒

001_0140_b_07L
薄伽梵

001_0140_b_08L
釋曰五中第三別顯敎主依智度論
001_0140_b_09L說佛法人有其五種故第二卷云
001_0140_b_10L法有五一佛自說二弟子說三仙
001_0140_b_11L人說四諸天說五化人說今簡餘
001_0140_b_12L標薄伽梵此經初解甚深義密
001_0140_b_13L意菩薩說一切法無二之義如何但
001_0140_b_14L言薄伽梵說有三義一以少從多
001_0140_b_15L二就勝說故三佛加被故如華嚴
經等

001_0140_b_16L諸經首標名不同乃有四種自有經
001_0140_b_17L唯置佛名如涅槃等自有經初
001_0140_b_18L婆伽婆如大品等自有經初雙標
001_0140_b_19L兩號如無上依佛婆伽婆
般若經
或有經文
001_0140_b_20L種俱無如相續解脫及多心經等
001_0140_b_21L以如是諸本異者相續解脫卽一部
001_0140_b_22L中最後二品故不標名多心般若
001_0140_b_23L大般若應是結集菩薩別錄流行
001_0140_b_24L亦不標名餘之三句西方諸師

001_0140_c_01L
첫 번째, 진제 삼장의 『칠사기』에 따르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진실론眞實論』에 의하면, ‘불佛’이라는 이름은 열 가지 의미를 갖추고 있으므로 모든 경의 첫머리에 열 가지 명호 중에서 단지 ‘불’이라는 명호를 써 놓은 것이다.371) 따라서 『칠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사에게 열 가지 명호가 있는데, 경에서는 왜 나머지 아홉 가지는 열거하지 않고 유독 ‘불’이라고 하는가? 해석하면 열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깨달음은 천고天鼓372)보다 뛰어나고, 둘째 타인으로 인해 깨달은 것이 아니며, 셋째 두 가지 무지해탈을 장애하는 무지, 일체지를 장애하는 무지를 떠났고, 넷째 이미 수면睡眠을 떠났으며, 다섯째 비유하면 연꽃 같고, 여섯째 자성이 오염되지 않았으며, 일곱째 세 가지 의미를 구족하였고,세 가지 의미란 다음과 같다. 첫째 가명의 부처님은 육신통을 지니고, 둘째 적멸의 부처님은 미혹이 생하지 않으며, 셋째 진실한 부처님은 바로 진여다.여덟째 세 가지 덕을 갖추었으며,법신덕·반야덕·해탈덕의 삼덕三德이다.373)아홉째 삼보三寶의 성질을 갖추었고, 열째 스스로 알고 남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불’의 뜻에 대한 설명은) 모두 네 장(紙)이 있는데, 너무 많을까 봐서 진술하지 않겠다. 진제 자신이 ‘이 열 가지 의미는 『진실론』에 나온다’고 하였다.
둘째 진제는 스스로 (불·박가범이라는 명호를 쓴) 도리를 진술하면서, 모든 경의 첫머리에 두 가지 명호를 다 표기한 것에 대해 네 구로 분별하였다. 따라서 『칠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佛·바가바婆伽婆’에 대해 네 구로 나타낼 수 있다. 첫째는 불이기는 해도 바가바라고 할 수 없는 자이니, 곧 성문과 이승이다. 그들은 사성제를 관하여 무여열반을 증득한 자로서, 그 자신의 지위에서는 ‘불’이라는 명호를 얻었어도 공덕행을 닦지 않았으므로 ‘바가바’는 아니다. 둘째는 바가바이기는 해도 불은 아닌 자이니, 곧 보살이다. 그는 공덕행을 충족했으므로 ‘바가바’라고 하지만, 수행의 지위(因位)에 있으면서 지혜가 아직 원만하지 않으므로 ‘불’이라고 하지 않는다. 셋째는 불도 아니고 바가바도 아닌 자이니, 즉 범부다. 그는 지혜를 닦지 않았으므로 ‘불’이라 하지 않으며, 공덕행도 닦지 않았으므로 ‘바가바’라고도 하지 않는다. 넷째는 불이기도 하고 바가바이기도 한 자이니, 곧 불세존이다. 지혜가 원만하기 때문에 ‘불’이라 하고, 공덕행을 구족했으므로 ‘바가바’라고도 한다.≻
바가바에 대해 자세히 해석하면 서너 장이 되지만 번거로울까 봐 진술하지 않는다.

001_0140_c_01L有三說一眞諦三藏七事記中有其
001_0140_c_02L二意一依眞實論佛具十義故諸
001_0140_c_03L經初十種號中單置佛號故七事記
001_0140_c_04L大師十號經中何故不2) [20] 餘九
001_0140_c_05L而獨稱佛解有十義一覺勝天鼓
001_0140_c_06L二不由他悟三離二無知解脫障無知
切智障無知

001_0140_c_07L四已過睡眠五譬如蓮華六自性無
001_0140_c_08L七具足三義三義者一假名佛即六神
二寂滅佛惑不生故
001_0140_c_09L三眞實佛
即是眞如
八具於三德法身般若
解說三德
九具三
001_0140_c_10L寶性十自知令知他總有四紙
001_0140_c_11L多不述眞諦自云此十種義出眞
001_0140_c_12L實論也二者眞諦自申道理四句分
001_0140_c_13L一切經首雙標兩號故七事中云
001_0140_c_14L佛婆伽婆有其四句一是佛非婆伽
001_0140_c_15L卽聲聞二乘觀四諦證無餘涅
001_0140_c_16L在其自位中得名爲佛不修功德
001_0140_c_17L非婆伽婆二是婆伽婆非佛卽是
001_0140_c_18L菩薩功德行滿名婆伽婆旣在因位
001_0140_c_19L智慧未滿不得名佛三非拂非婆伽
001_0140_c_20L是凡夫其不修智慧不名爲佛
001_0140_c_21L不修功德非婆伽婆四亦佛亦婆伽
001_0140_c_22L卽是佛世尊智慧圓滿故名爲
001_0140_c_23L功德具足婆伽婆廣釋婆伽婆有三
四帋恐繁不述

001_0140_c_24L「蘊」上疑脫「行」「別」疑「列」

001_0141_a_01L
나아가 그 『칠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이라고만 하면 그것은 이승의 사람에게도 남용될 우려가 있고, ‘바가바’라고만 하면 그것은 대보살 및 전륜왕에게도 남용될 수 있으므로, (불과 바가바를) 합해서 설했으니 ‘여래’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상의경』과 『금강반야경』에서는 모두 이처럼 ‘불·바가바’라고 한 것이다.≻ 『부집이론기』에서도 『칠사기』와 똑같이 설한다.
두 번째, 보리유지의 『금강선론』37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방의 정본正本에 의하면 모든 경의 첫머리에 모두 ‘바가바’로 되어 있지만, 이 지역에서는 모든 경의 (첫 머리에) 혹은 ‘불’이라 하고, 혹은 ‘바가바’라고 하며, 혹은 둘 다 들어 ‘불·박가범’이라 하기도 한 것은 역자의 의도를 따른 것이다.≻375)
세 번째, 친광 보살의 『불지경론』의 뜻도 『금강선론』과 같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佛은 열 가지 공덕을 갖춘 명호인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법을 전하는 자들에게 모든 경의 첫머리에 이와 같이 박가범이라는 명호만을 써 놓도록 하셨는가? 이 하나의 명호는 세상에서 모두 존중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에 모든 외도들도 본종의 스승(本師)을 박가범이라 부른다. 또 이 하나의 명호는 모든 공덕을 포함하지만 나머지 명호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경의 첫머리에 이 명호를 써 놓은 것이다.”376)
『대지도론』의 뜻도 『불지경론』과 같으므로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바가바에게는 진정 이 하나의 명호만 있는가 아니면 다른 명호도 있는가? 부처님의 공덕은 한량없으니 명호도 한량없다. 이 이름은 그 대중성을 취한 것이니,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377)

● ‘바가바(박가범)’의 어원적 의미
또 ‘바가바’라는 것은 『열반경』에 따르면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악을 깨뜨린다(破惡)’는 뜻이고, 둘째는 여섯 가지 공덕을 갖춘다는 뜻인데, 합하면 일곱 가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열반경』 제18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가바’라고 한 것에서, ‘바가’란 깨뜨림을 말하고 ‘바’는 번뇌를 말하니, 번뇌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바가바라고 이름한 것이다.이것은 ‘악을 깨뜨리는 것’에 해당하니, 네 가지 마魔 중에서 오직 번뇌마煩惱魔를 깨뜨리는 것이다.378)또 모든 선법을 성취해 냈기 때문에, 또 제법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때문에, 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위대한 공덕을 지녔기 때문에, 또 시방 세계에 크게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001_0141_a_01L乃至彼云若但言佛恐濫二乘
001_0141_a_02L單婆伽婆濫於大菩薩及轉輪王
001_0141_a_03L知合說卽是如來是故無上依經
001_0141_a_04L金剛波若皆作此言佛婆伽婆也
001_0141_a_05L執論記亦同七事也二菩提留支金
001_0141_a_06L剛仙論依西方 [99] 正本一切經首
001_0141_a_07L云婆伽婆此方諸經 [100] 或佛或婆伽
001_0141_a_08L或復雙擧佛薄伽梵者隨譯者意
001_0141_a_09L三親光菩薩佛地論意同金剛仙
001_0141_a_10L佛地云佛具十種功德名號何故如
001_0141_a_11L來敎傳法者一切經首皆置如是薄
001_0141_a_12L伽梵名謂此一名世咸尊重故諸外
001_0141_a_13L皆稱本師名薄伽梵又此一名
001_0141_a_14L攝諸德餘名不爾是故經首皆置此
001_0141_a_15L大智度論意同佛地故第二云
001_0141_a_16L婆伽婆正有此 [101] 更有餘名
001_0141_a_17L功德無量名號亦無量此名耳 [102]
001_0141_a_18L大者以人多識故又婆伽婆依涅
001_0141_a_19L槃經釋有二意一者破惡二具六
001_0141_a_20L合有七義故第十1) [21] [103] 婆伽婆
001_0141_a_21L婆伽名破婆名煩惱能破煩惱
001_0141_a_22L [104] 婆伽婆此即破惡四魔之
唯破煩惱魔也
又能成就諸
001_0141_a_23L善法故又能善解諸法義故有大功
001_0141_a_24L德無能勝故有大名聞遍十方故

001_0141_b_01L또 여러 가지로 큰 은혜를 베풀기 때문에, 또 무량한 아승지겁 동안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이것은 여섯 가지 덕이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바가바는)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가’는 ‘덕’을 뜻하고 ‘바’는 ‘있음’을 뜻하니, 이는 덕이 있는 것을 말한다. 또 ‘바가’는 ‘분별’을 뜻하고 ‘바’는 ‘교묘한 작용’을 뜻하니, 총상總相이든 별상別相이든 법을 잘 분별하기 때문이다. 또 ‘바가’는 ‘명성’을 뜻하고 ‘바’는 ‘있음’을 뜻하니, 즉 명성을 가지고 있는 자를 말한다. 또 ‘바가’는 ‘깨뜨림’을 뜻하고 ‘바’는 ‘능함’을 뜻하니, 즉 삼독三毒을 깨뜨릴 수 있는 자를 바가바라고 한다. 이승의 사람도 (삼독을) 끊기는 하지만 습기가 남아 있으므로 ‘바가바’라고 하지 않는다.≻379) 또 『유가사지론』 제38권에서는 “모든 큰 세력을 가진 마구니들을 깨뜨릴 수 있고 많은 공덕을 갖추었으므로 박가범이라 한다.”380)고 하였다. 또 제80권에서는 “오묘한 보리좌에 편안히 앉아 일체의 마군의 대세력을 마음대로 무너뜨려 없앨 수 있으므로 박가범이라 한다.”381)고 하였다.382)
『불지경론』에 의하면 ‘박가범’이라는 이름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여섯 가지 덕을 갖춘다는 뜻이고, 둘째는 네 가지 마를 깨뜨린다는 뜻이다.
(첫째,) 여섯 가지 덕을 갖춘다고 했는데, ‘박가범’이라는 말(聲)은 여섯 가지 의미에 따라 달라진다. 첫째는 자재自在의 뜻이니, 영원히 모든 번뇌에 묶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치성熾盛의 뜻이니, 뜨거운 지혜의 불로 태워지고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단엄端嚴의 뜻이니, 대사大士가 갖는 오묘한 서른두 가지 상相들로 장식되었기 때문이다. 넷째는 명칭名稱의 뜻이니, 모든 뛰어난 공덕의 원만함을 모르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길상吉祥의 뜻이니, 모든 세상 사람들이 직접 가까이 공양하며 다 함께 칭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존귀尊貴의 뜻이니, 모든 덕을 갖추고서 항상 방편을 일으켜서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재와 치성과 단엄, 명칭과 길상과 존귀, 이러한 여섯 가지 차별적 의미에서, 박가범이라 총칭했음을 알라.’383)
(둘째,) 네 가지 마를 깨뜨린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번뇌마煩惱魔란, 128가지의 근본번뇌 및 수번뇌를 번뇌마라고 한다. 유루의 오온을 온마蘊魔라고 한다. 유루의 오온이 모두 무상無常한 모습을 사마死魔라고 한다. 여섯 번째의 타화자재천자他化自在天子를 천마天魔라고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번뇌는 모든 선법을 잃게 하기 때문에 ‘마’라고 하고, 이 네 가지 마를 떠나기 때문에 ‘박가범’이라 한다.384)
네 가지 마를 깨뜨린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나중에 분별하겠다.385)

● 서방 삼장들의 의취
이제 서방 삼장들의 뜻을 상세히 살펴보겠다.
담무참 등은

001_0141_b_01L又能種種大惠施故又於無量阿僧
001_0141_b_02L祇劫吐女根故比卽六德依智度論有其
四義故第二云頗加名德
001_0141_b_03L婆名爲有此名有德又頗伽名分別婆名巧用
總相別相巧分別法故又頗伽名聲婆名爲有
001_0141_b_04L有名聲又頗伽名破婆名能也能破三毒名頗
伽婆二乘雖斷而有習氣是故不名頗伽婆也
001_0141_b_05L又瑜伽論三十八云能破諸魔大力軍衆具多功
名薄伽梵又八十云云 [105] 然安坐妙菩提座
001_0141_b_06L運摧滅一切覽軍
大勢力故薄伽梵
依佛地論薄伽梵名
001_0141_b_07L含有二義一具六德二能破四魔
001_0141_b_08L六德者薄伽梵聲依六義轉一自
001_0141_b_09L在義永不繫爲 [106] 諸煩惱故二熾盛義
001_0141_b_10L炎熱 [107] 智火所燒練故三端嚴義妙三
001_0141_b_11L十二大士相等所莊餝 [108] 四名稱義
001_0141_b_12L一切殊勝功德圓滿無不知故五吉
001_0141_b_13L祥義一切世間親近供養咸稱讃故
001_0141_b_14L六尊貴義具一切德常起 [109] 利益安樂
001_0141_b_15L一切有情無懈癈故如有頌言
001_0141_b_16L自在熾盛與端嚴名稱吉祥及尊貴
001_0141_b_17L如是六種義差別應知總名爲薄伽
001_0141_b_18L破四魔者一煩惱魔百二十八根本
001_0141_b_19L煩惱及隨煩惱2) [22] 惱魔有漏五
001_0141_b_20L名爲蘊魔有漏五蘊諸無常相
001_0141_b_21L爲死魔第六他化自在天子名爲天
001_0141_b_22L如是四種能損諸善故名爲魔
001_0141_b_23L離西魔故名薄伽梵破四魔義
001_0141_b_24L當分別今詳西方諸三藏意曇無讖

001_0141_c_01L『진실론』에 의거해 단지 ‘불’이라는 이름만 써 놓았다. 진제 삼장은 『진실론』 및 사구四句의 뜻에 의거해서 두 명호를 함께 표기했다. 대당 삼장과 보리유지는 각기 한 가지 논에 의거해서 ‘박가범’이라고 해 놓았다.
비록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우선 ‘박가범薄伽梵’이라 되어 있는 논에 의거해서 설하였기 때문에 지파가라 삼장은 ‘서방의 판본들에 다 박가범이라 하였다’고 한 것이니, 서로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 대당 삼장의 판본들 중에 ‘바가바婆伽婆’ 등으로 되어 있는데, (범어 단어가) 칠전성七轉聲386)을 갖추기 때문에 (‘바가바’ 등의) 여러 종류가 있는 것이다. 제8전성(呼格)에 의하면 이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곧 지파가라 삼장은 신도神都(낙양)에서 번역한 것에는 모두 ‘박가범’이라고 해 놓았고, 서경西京에서 번역한 것에는 모두 ‘불’이라고 하였다.

(4) 경을 설한 장소
  가장 수승하게 빛나는 일곱 가지 보배로 장엄되고387)
  다섯 가지 사事 중에서 네 번째인 ‘경을 설하신 장소’에 해당한다.
이 부분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처음은 여래가 머무는 곳의 장엄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세존이 지닌 총체적 공덕과 개별적 공덕을 해석한 것이다.

① 여래가 머무는 곳의 장엄을 설명함
머무는 곳을 밝힌 부분에는 두 가지 내용이 있다. 처음은 머무는 곳의 차이를 밝힌 것이고, 나중은 경을 (설하신 여래가) 머무는 곳의 차별에 대해 바로 해석한 것이다.

가. 머무는 곳의 차이를 설명함
머무는 곳의 차이를 설하면 다음과 같다.
『해절경』에 의하면 화신化身여래가 예토穢土에서 설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경에서는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불바가바께서 왕사성의 기사굴산에 머무시면서”388)라고 하였다. 『심밀해탈경』에 의하면 수용신이 정토淨土에서 설하는 것이니,389) 이는 『해심밀경』과 동일하다.
  진제 삼장은 『해절경』을 번역하면서 승의제勝義諦의 상相을 분명하게 밝히려 했기 때문에, 18품에서 다만 중간의 네 품만 번역하고 나머지 14품은 생략하고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은 (서분·정종분·유통분의) 세 부분을 다 갖추기 위해 「불이품不二品」 안에 통서문通序文390)을 두었고

001_0141_c_01L依眞實論但置佛名眞諦三藏
001_0141_c_02L依眞實論及四句義雙標兩號大唐
001_0141_c_03L三藏及菩提3) [23] 各依一論置薄
001_0141_c_04L伽梵雖有諸說且依薄伽梵有論說
001_0141_c_05L故地婆訶羅三藏說云西方諸本
001_0141_c_06L云薄伽梵而不相違大唐三藏諸本
001_0141_c_07L有婆伽婆等者具七轉聲故有
001_0141_c_08L種種依第八轉此亦未可卽是地
001_0141_c_09L婆訶羅三藏神都翻者皆安薄伽梵
001_0141_c_10L西京所翻皆云佛也

001_0141_c_11L
住最勝光曜七寶莊嚴

001_0141_c_12L
釋曰五中第四說經處所於中有二
001_0141_c_13L初明如來住處莊嚴後釋世尊總別
001_0141_c_14L功德就住處中有其二義初明住
001_0141_c_15L處同異後正釋經住處差別言同異
001_0141_c_16L依解節經化身如來在穢土說
001_0141_c_17L彼經云如是我聞一時佛婆伽婆住
001_0141_c_18L王舍城耆闍堀山中若依深密經
001_0141_c_19L受用身在淨土說同解深密解云
001_0141_c_20L諦翻解節經意欲礭明勝義諦相
001_0141_c_21L十八品內但翻中間四品略而不翻
001_0141_c_22L餘十四品爲成此經具足三分故
001_0141_c_23L「八」或作「六」「頌」疑「煩」{編}「流」異
001_0141_c_24L作「留」

001_0142_a_01L「일미품一味品」 끝에 마지막 유통분을 두었다.391) 그러므로 『진제기』 제1권에서 ‘경의 처음에 통서문을 설하지 않은 것은 번역가가 생략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품品의 제목을 써 두지 않았기 때문에 ‘생략했다’고 한 것이지, 서품의 문장이 없어서 ‘생략했다’고 한 것은 아니다.392)
그런데 『진제기』와 『해절경』은 서로 어긋난다. 『해절경』은 “왕사성의 기사굴”이라 하는데, 『진제기』 제1권에서는 “비사리국 귀왕법당에서 진상보살眞常菩薩을 위해 『해절경』 등을 설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대지도론』 제3권에서는 ‘왕사성은 마갈타국에 있다’고 했지만,393) ‘기사굴산이 비야리국(비사리국)에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경과 어긋남을 알 수 있다.

● 『불지경』의 세 가지 학설
『불지경론』에 의거해서 『불지경』을 해석하면 세 가지 설이 있다. 따라서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큰 궁전에 머물면서 이 경을 설하시는데, 수용토와 변화토의 두 불토 중에 지금 이 정토는 어느 불토에 속하고, 이 경을 설하는 부처님은 어떤 몸을 하고 있는가?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394) ≺이 불토는 변화토에 속하고, 이 경을 설하는 부처님은 변화신이다. 성문대중 등이 이 불토에 머물면서 여래를 직접 마주하고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서 기뻐하며 믿고 받아들여 봉행하였기 때문이다. (이 정토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나타낸 것이므로 삼계를 벗어난 청정한 식을 상相으로 삼는다. 수승한 법을 설하여 지전地前의 유정의 무리를 교화해서 그들로 하여금 저 인因을 즐거이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잠시 청정한 불토와 수승한 화신을 변화해 내고 신력神力으로 대중에게 가피를 내려서 그것을 잠깐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문대중 등은 모두 보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395) ≺이 불토는 수용토에 속하고, 이 경을 설하는 부처님은 수용신이다. 이 정토의 크기는 끝이 없고, (여기에 있는) 길·수레·문 등이 모두 진실한 공덕(實德)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불토의 한결같은 정묘와 한결같은 안락과 한결같은 무죄와

001_0142_a_01L二品內安通序文一味品末安後流
001_0142_a_02L故眞諦記第一卷云經初不說通
001_0142_a_03L序文者譯家略故解云不安品目
001_0142_a_04L說爲略非無序文名之爲略然眞諦
001_0142_a_05L與經相違經王舍城耆闍崛
001_0142_a_06L諦記第一云毗舍離國鬼王法堂
001_0142_a_07L眞尙 [110] 菩薩說解節經等又智度論第
001_0142_a_08L三卷云王舍城在摩揭陀國不云山
001_0142_a_09L在毗耶離國1) [24] 違經也依佛地
001_0142_a_10L釋佛地經自有三說故第一云
001_0142_a_11L佛住如是大宮殿中說此契經受用
001_0142_a_12L變化二佛土中今此淨土何士所攝
001_0142_a_13L說此經佛爲是何身有義此土變化
001_0142_a_14L土攝說此經佛是變化身聲聞等
001_0142_a_15L住此土中現對如來聞說此經
001_0142_a_16L歡喜信受而奉行故佛心所現故
001_0142_a_17L三界淨識爲相爲說勝法化此地
001_0142_a_18L前諸有情類令其欣樂修行彼因故
001_0142_a_19L暫化作淸淨佛土殊勝化身神力加
001_0142_a_20L令暫得見 [111] 爾者聲聞等衆
001_0142_a_21L俱不見有義此土受用土攝說此經
001_0142_a_22L是受用身此淨土量無邊際故
001_0142_a_23L乘門等是實德故受用如是淸淨佛
001_0142_a_24L一向淨妙一向安樂一向無罪

001_0142_b_01L한결같은 자재를 수용하면서 다른 곳에서 설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심밀경』에서 “삼지三地 이상이라야 여기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해심밀경』에는 이런 문장이 없으니, 이는 광본廣本일 것이다. 혹은 역자의 착오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문장은 『유가사지론』 제79권에 나온다.396)이 경을 설한 부처님은 뒤에서 설할 21종의 진실한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다른 경을 설할 때에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공덕을 나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정토와 이와 같은 오묘한 몸을 잠시 변화해 내어 대중에게 가피를 내려서 보게 한 것이라면, 응당 다른 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분명히 드러내어 설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수용토와 수용신이다. 성문대중 등은 부처님께서 변화해 낸 것이거나 혹은 여러 보살들이 현재 이런 몸을 지어낸 것이니, 이는 불토와 설법의 모임을 장엄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이는 지상地上보살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인데, 어째서 이 화불化佛의 국토에서 이 경을 결집하고 유포시키는 것인가?
법을 전하는 보살이 일체지자一切智者와 그가 거처하는 곳이 모든 세간의 법을 넘어서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로써 교화되는 중생들을 기쁘게 하여, 그들이 미래에 이와 같은 청정한 불토에 태어나서 이와 같은 부처님을 보고 이와 같은 법을 듣고 저 인因을 닦기를 발원하게 하고, 광대하고 수승한 이해력을 가진 유정과 여러 보살의 수승한 기쁨을 내게 하고, 그들의 증상된 의요意樂397)와 승해勝解398)의 경계가 견고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 경을 결집하고 유포한 것이다.
또 이 법은 뛰어난 것이므로 이 수용토에서 들음이 마땅하니, 장소가 뛰어나지 않거나 화신의 모습은 거친 것이므로 그것을 설할 수 없다. 따라서 수용신이 수용토에 거하면서 초지 이상의 여러 보살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법을 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결집하여 유포하도록 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단지 ‘그곳에서 설해진 법’만 말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장소와 설한 자를 말하지 않으면, 이 법이 어느 장소에서 누가 설했는지 알지 못해서 모든 이가 의심을 낼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둘 다 설해야 한다.
여실한 의미(如實義)는 다음과 같다.399) ≺석가모니가 이 경을 설할 때 지전地前 대중은

001_0142_b_01L向自在餘處說故解深密說三地
001_0142_b_02L已上乃得生故解云此經無比文也應是廣
或可譯家錯也此文卽是
001_0142_b_03L瑜伽第七
十九
說此經佛具後所說二十一種
001_0142_b_04L實功德故說餘經時不列如是佛功
001_0142_b_05L德故若暫化作如是淨土如是妙身
001_0142_b_06L加衆令見應如餘經分明顯說然不
001_0142_b_07L說故是受用土及受用身聲聞等衆
001_0142_b_08L是佛化作或諸菩薩現作此身莊嚴
001_0142_b_09L佛土說法會故若爾此是地上菩薩
001_0142_b_10L所應見聞何故於此化佛土中結集
001_0142_b_11L流布傳法菩薩爲欲示現一切智者
001_0142_b_12L及所居處超過一切世間法故如是
001_0142_b_13L示現欲令所化生欣樂故爲令發願
001_0142_b_14L當生如是淸淨佛土見如是佛聞如
001_0142_b_15L是法修彼因故爲生廣大勝解2) [25]
001_0142_b_16L有情及諸菩薩 [112] 歡喜故欲令增上意
001_0142_b_17L樂勝解界堅牢故結集流布又是法
001_0142_b_18L於此宜聞然處非勝化身相麤
001_0142_b_19L不可宣說故受用身居受用土
001_0142_b_20L初地上諸菩薩說令傳法者結集流
001_0142_b_21L若爾何故不但說彼所說法耶
001_0142_b_22L不說處及能說者不知此法何處誰
001_0142_b_23L一切生疑故須具說如實義者
001_0142_b_24L釋迦牟尼說此經時地前大衆

001_0142_c_01L변화신이 이 예토에 계시면서 그를 위해 설법한다고 보고, 지상地上 대중은 수용신이 부처님 정토에 계시면서 그를 위해 설법한다고 본다. 들은 것은 같으면서도 본 것이 각기 다르고, 모두 기뻐하며 믿고 받아들여 봉행하면서도 이해에는 얕고 깊음이 있고 행하는 것도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법을 전하는 자는 중생들이 뛰어난 것을 듣고서 희원悕願하면서 부지런히 저 인因을 닦아 미래에 정토에 태어나 부처님의 공덕을 증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뛰어난 사람의 소견에 의거해서 결집하여 “박가범이 가장 뛰어난……에 머무시며”라고 하고, 나아가서는 여래의 공덕을 자세히 설한 것이다.≻400)
지금 이 경을 해석하면 (『불지경론』의 세 번째 해석인) ‘여실한 의미’와 동일하니, 의미상으로 또한 과실이 없다.
여러 책들에서 머무는 곳의 동이同異에 대해 이상과 같이 해석한다.

나. 머무는 곳의 차별을 바로 해석함
● 머묾(住)의 의미
이제 ‘머무는 곳(住處)’의 의미를 바로 해석하겠다.
『대지도론』 제3권에서는 세 가지 의미로 ‘머묾(住)’에 대해 해석한다. 첫째는 위의에 머물고, 둘째는 성인이 머무는 곳에 머물며, 셋째는 부처님이 머무시는 곳에 머물기 때문에, ‘머문다’고 한다. 따라서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째서 반야바라밀에 대해 곧장 설하지 않고, 머무는 곳을 먼저 설하는가?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설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서다.시간은 경을 설한 시간이고, 장소는 법을 설한 장소이며, 사람은 성문·보살 등의 청중이다.
 () 어떤 것을 일컬어 ‘머문다’고 하는가?
 () 네 가지 신체적 위의인 좌·와·행·주를 머문다고 한다. 다시 세 가지 머무름이 있다. 첫째는 천주天住이니, 육욕천이 머무는 법이다. 둘째는 범주梵住이니, 색계천·무색계천이 머무는 법이다. 셋째는 성주聖住이니, 부처님·독각·아라한이 머무는 법이다. 이 세 가지 머묾 중에 부처님은 성주에 머무신다.
또 보시·지계·선심의 세 가지 일을 천주라고 하고, 사무량심四無量心401)을 범주라고 하며, 공空·무상無相·무작無作의 삼삼매三三昧402)를 성주라고 한다. 이 세 가지 머묾 중에 부처님은 성주에 머무신다.
다시 네 가지 머묾이 있다. 첫째는 천주이고, 둘째는 범주이고, 셋째는 성주이고, 넷째는 불주佛住다. 세 가지 머묾은 이전과 같다.

001_0142_c_01L變化身居此穢土爲其說法地上
001_0142_c_02L大衆見受用身居佛淨土爲其說
001_0142_c_03L所聞雖同所見各別雖俱歡喜
001_0142_c_04L信受奉行解有淺深所行各異
001_0142_c_05L傳法者爲令衆生聞勝怖願勤修彼
001_0142_c_06L當生淨土證佛功德故就勝者
001_0142_c_07L所見結集言薄伽梵住最勝等乃至
001_0142_c_08L廣說如來功德今釋此經同如實義
001_0142_c_09L義亦無失諸本同異已如上釋
001_0142_c_10L正釋住處之義依智度論第三三義
001_0142_c_11L釋住一住威儀二住聖住三住佛
001_0142_c_12L故名爲住故彼論云問曰何不
001_0142_c_13L直說般若波羅蜜而說住處耶答曰
001_0142_c_14L說時方人令人生信故時謂說經時方謂
說法處人謂聽衆
001_0142_c_15L聲聞菩
薩等
云何 [113] 四重身儀坐臥行住
001_0142_c_16L故名爲住復有三住一者天住
001_0142_c_17L六欲天住法二者梵住謂色無色天
001_0142_c_18L住法三者聖住謂佛獨覺及阿羅漢
001_0142_c_19L住法於三住中佛住聖住復次施
001_0142_c_20L戒善心三事名爲天住四無量心
001_0142_c_21L爲梵住空無相無作三三昧名爲聖
001_0142_c_22L於三住中佛住聖住復有四住
001_0142_c_23L一天二梵三聖四佛三住如前佛住
001_0142_c_24L「如」疑「知」「有」疑剩

001_0143_a_01L불주란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403) 등 모든 부처님들의 무량한 삼매, 십력十力404)·사무외四無畏405)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406) 일체지一切智 등의 갖가지 모든 지혜, 8만 4천 법장法藏으로 사람을 제도하는 법문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의 갖가지 공덕들이 부처님의 머무는 곳이다. 부처님이 이 안에 머무시므로 불주라고 한다.407)
『법화론』에서 ‘법의 뛰어남을 나타내려고 부처님은 뛰어난 장소에 머문다’고 하였고,408) 『승사유론』도 『법화론』과 동일하다.409)
『보적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어째서 처음에 머무는 장소를 밝히는가? 부처님께서 이 장소에 머무는 것은 그 장소를 공경하며 존중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복을 중시하는 중생은 이 장소를 공경하기 때문에 선근을 증장시키게 된다. 그래서 먼저 머무는 장소를 밝힌 것이다.”410)
『공덕시보살반야론』에서도 『보적론』과 동일하게 설한다.
진제 삼장은 여덟 가지 뜻으로 머묾에 대해 해석하였다.
첫째는 경계주境界住다.열여섯 대국에서 사사공양四事供養411)을 하던 모든 곳들을 말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노니시던 곳이므로 ‘경계주’라고 하였다.
둘째는 의지주依止住다.모든 승가람을 말하니, 기사굴산이나 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412) 등은 의지하는 곳이다.
셋째는 위의주威儀住다.이는 행·주·좌·와의 네 가지 위의를 말한다.
넷째는 미사수명주未捨壽命住다.현재 대반열반에 들지 않고, 계·정 등의 오분법신五分法身413) 중에 머무는 것이다.
다섯째는 범주梵住다.이는 사무량심을 말하니, 부처님은 대비심에 머물기 때문에 범주라고 한다.
여섯째는 천주天住다.이는 사선을 말하니, 즉 초선·이선·삼선·사선이다. 제4선이 가장 뛰어나므로 부처님은 여기에 머무신다.
일곱째는 성주聖住다.이는 해탈을 말하니, 해탈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심정無心定에 들어가 잠깐 동안 고를 소멸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공정空定에 들어가 모든 견見을 소멸시키는 것이며, 셋째는 무원정無願定에 들어가 탐애를 소멸시키는 것이고, 넷째는 무상정無相定에 들어가 사방四謗414)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부처님은 무상정에 머무시니, 마음의 미혹이 다 사라진 것이다.
여덟째는 불주佛住다.부처님은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고 처소가 없는 법에 머물면서도, 여기에 있는 여덟 가지 처處를 다 갖추고 있으므로 불주라고 한다. 삼신으로 설명하면, 앞의 세 가지 주住는 화신이 머무는 것이고, 다음의 세 가지 주는 응신이 머무는 것이며, 마지막 두 가지 주는 법신이 머무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 신은 머무는 주인(能住)이고, 뒤의 법신은 머무는 곳(所住)이다. 경에서는 여덟 가지 머묾을 많이 드는데, 앞의 두 가지 중에 경계주는 일반 신도(白衣)를 교화하던 곳이고, 의지주는 출가인을 교화하던 곳이다. 이는 곧 총괄적 장소·개별적 장소의 두 가지를 든 것이다.

● 주처의 열여덟 가지 원만
이 경을 (설한 주인이) ‘주처住處’에 대해 해석한 곳에 가면 열아홉 구句가 있으니, 이는 저 정토의 열여덟 가지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열여덟 가지 원만함이 나오므로 곧 열여덟 단락이 된다.
‘열여덟 가지’라는 것은 예를 들면 『불지경론』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여래가 머무시는 곳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즉 부처님의 정토를 말한다.

001_0143_a_01L首楞嚴等諸佛無量三昧十力四無
001_0143_a_02L畏十八不共法一切智等種種諸慧
001_0143_a_03L及八萬四千法藏度人法門如是等
001_0143_a_04L種種諸佛功德是佛所住處佛於中
001_0143_a_05L故名佛住法華論云顯法勝故
001_0143_a_06L佛住勝處勝思惟論同法華論
001_0143_a_07L積論云問曰何故初明住處佛住
001_0143_a_08L此處者欲令敬重彼處故重福衆生
001_0143_a_09L敬此處故增長善根是故先明住處
001_0143_a_10L功德施菩薩波若論中同寶積論
001_0143_a_11L諦三藏八義釋住一境界住謂一切十
六大國四
001_0143_a_12L事供養之處是佛所
遊履故云境界住
二依止住是一切僧伽
耆闍崛
001_0143_a_13L山迦闌陀竹林
是所依止
三威儀住謂行住坐
臥四威儀
四未
001_0143_a_14L捨壽命住謂現在未般涅槃住戒
定等五分法身中也
五者梵
001_0143_a_15L謂四無量心佛在大
悲心中故名梵住也
六者天住謂四禪
卽初禪
001_0143_a_16L二禪三禪四禪第四
禪最勝佛住此中
七者聖住 謂是解脫
脫有四一入
001_0143_a_17L無心定暫滅苦二入空定滅諸見三入無願定滅
貪愛四入無相定減四謗佛住無相定中心惑都
001_0143_a_18L
八佛住佛住無生無滅無處所法中而具足
在此八處故名佛住三身而辨
001_0143_a_19L三住即是化身住次三是應身後二是法身
二身是能住後法身是所住也經中多擧八住
001_0143_a_20L境界化白衣依止化
出家人即擧總別二處
就釋此經住處之
001_0143_a_21L有十九句顯彼淨土十八圓滿
001_0143_a_22L八圓滿卽十八段言十八者如佛
001_0143_a_23L地論第一卷云論曰此顯如來住處

001_0143_b_01L이와 같은 정토는 다시 열여덟 가지 원만한 사事들로 인해 원만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현색顯色415)의 원만, 형색形色416)의 원만, 분량分量의 원만, 방소方所의 원만, 인因의 원만, 과果의 원만, 주인(主)의 원만, 보익輔翼의 원만, 권속眷屬의 원만, 주지住持의 원만, 사업事業의 원만, 섭익攝益의 원만, 무외無畏의 원만, 주처住處의 원만, 길(路)의 원만, 수레(乘)의 원만, 문門의 원만, 의지依持의 원만을 말한다. 열아홉 구는 차례대로 이와 같은 열여덟 가지 원만을 나타낸 것이니, 이처럼 원만하게 장엄된 궁전을 ‘부처님의 정토’라고 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큰 궁전에 계시면서 이 계경을 설하셨다.”417)
그런데 여러 논들 중에 세친과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10권과 양조梁朝 『섭대승론석』 제15권418)과 『불지경론』 등‘등’이라 한 것은 『대업론大業論』419) 등을 언급한 것이다.에서는 모두 경에 나오는 열여덟 가지 원만함에 대해 해석하는데, 경문을 따라가며 대조해서 해석하고 있다.420)

가) 현색顯色의 원만
첫 번째 원만을 밝힌 곳에 두 개의 구句가 있다. 경에서는 최초로 ‘현색顯色421)의 일곱 가지 보배로 장엄되었다’고 하였고, 나중에 ‘빛을 놓아 가없는 세계를 비춘다’고 하였다. 여기서 ‘구句’라는 것은, 의미가 완전히 드러난 것을 ‘구’라고 한 것이지 글자 수를 가지고 ‘구’라고 한 것은 아니다. 나머지 열여덟 구도 이에 준해 알아야 한다.

(가) 현색의 칠보로 장엄되었음을 나타냄
그런데 경의 첫 구에 대해 친광은 두 가지로 해석하니, 『불지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궁전은 가장 뛰어난 빛을 내는 일곱 가지 보배로 장엄되었다.여기서 ‘빛을 내는’이라는 말은 일곱 가지 보배에 연결되는 말이다.또는 대궁전은 일곱 가지 보배로 장엄되었기에 가장 뛰어난 빛이 난다.여기서 ‘빛이 난다’는 말은 궁전과 연결되는 말이다.422) 무성의 『섭대승론석』에서도 『불지경론』과 똑같이 말한다.423) 세친은 해석하지 않았으니,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보배’라는 것은, 예를 들면 『칭찬정토경』에서는 “첫째는 금金이고, 둘째는 은銀이며, 셋째는 폐유리吠瑠璃(ⓢ vaiḑūrya)이고, 넷째는 파지가頗胝迦(ⓢ sphaṭika)이며, 다섯째는 적진주赤眞珠이고, 여섯째는 아습마게랍바阿濕摩揭拉婆(ⓢ aśma-garbha)이며, 일곱째는 모파락게랍바牟婆落揭拉婆(ⓢ musāra-galva)이다.”424)라고 하였다. 『대지도론』도 그 경과 같으니,

001_0143_b_01L圓滿謂佛淨土如是淨土復由十八
001_0143_b_02L圓滿事故說名圓滿謂顯色圓滿
001_0143_b_03L色圓滿分量圓滿方所圓滿因圓
001_0143_b_04L滿果圓滿主圓滿輔翼圓滿眷屬
001_0143_b_05L圓滿住持圓滿事業圓滿攝益圓
001_0143_b_06L滿無畏圓滿住處圓滿路圓滿
001_0143_b_07L圓滿門圓滿依持圓滿由十九句
001_0143_b_08L如其次第顯示如是十八圓滿卽此
001_0143_b_09L圓滿所嚴宮殿名佛淨土佛住如是
001_0143_b_10L大宮殿中說此契經然諸論中
001_0143_b_11L親無性攝大乘釋第十梁朝攝論第
001_0143_b_12L十五佛地論等等取大
業論等
皆釋經中十
001_0143_b_13L八圓滿至文對釋初圓滿中有二句
001_0143_b_14L經初明顯色七寶莊嚴後辨放光照
001_0143_b_15L無邊界此中句者顯義滿足之爲句
001_0143_b_16L非要數字方名句也餘十八句准此
001_0143_b_17L應知然初經句親光兩釋故佛地論
001_0143_b_18L謂大宮殿用最勝光曜七寶莊嚴
001_0143_b_19L此釋光曜
於七寶也
或大宮殿七寶莊嚴故
001_0143_b_20L勝光曜此釋光曜
屬於宮殿
無性釋論亦同佛地
001_0143_b_21L世親不釋易可知故言七寶者
001_0143_b_22L稱讃淨土經云一金二銀三吠瑠
001_0143_b_23L四頗胝迦五赤眞珠六阿濕摩
001_0143_b_24L揭拉婆七牟婆 [114] 洛揭拉婆依智度論

001_0143_c_01L그 논의 제10권에서는 ‘금·은·비유리毗瑠璃·파리頗梨·차거車渠·마노馬瑙·적진주赤眞珠’라고 하였다.425)
  금과 은이라는 두 보배는 이 땅에도 있기 때문에 이 이름으로 번역했다. 진제 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사라가弗師羅伽’는 여기서는 황색 보배라고 하니, 금에 해당한다. ‘전타라건다旃陀羅乾多’는 여기서는 흰색 보배라고 하니, 은에 해당한다.≻
폐유리吠瑠璃는 정확한 범음이고, 비유리毗瑠璃는 범음이 와전된 것이다. 혹은 ‘유리’라고 하는데, 이는 ‘폐’라는 음을 생략한 것이다. 혹은 이 나라에는 진짜 유리는 없고 유리와 비슷한 것이 있기 때문에, 또한 (이 ‘유리’도 음역이 아니라) 번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진제의 『양론기梁論記』42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리는 청색 보배이니 태워도 부서지지 않는다. 오직 어떤 귀신이나 신통력이 있는 자라면 깨뜨려서 그릇을 만들 수 있다. 혹은 이것은 금시조金翅鳥427)의 알이라 볼 수도 있다.≻
파지가頗胝迦는 여기서는 황록색 보배라고 한다. 『불지경론』에서는 ‘갈계달락가보羯鷄怛諾迦寶’라고 하였고, 『대지도론』에서는 “천년 지난 얼음이 변하여 파리주頗梨珠가 된다.”428)고 하였다.
적진주赤眞珠는 『불지경론』에서는 “붉은 벌레에서 나온 것을 적진주라고 하거나, 또는 구슬 자체가 붉어서 적진주라고 한다.”429)고 하였고, 진제는 ‘값을 매길 수 없는 보주’라고 해석하였다.
아습마게랍바阿濕摩揭拉婆는 구역에서는 ‘마노馬瑙’라고 했다. 진제는 이것을 ‘적색 보배’라고 해석하였고, 무성은 『섭대승론석』에서 ‘이것은 제청帝靑과 대청大靑 따위의 보배’라고 하였다.430)
  ‘제청’이란 제석천의 청색 보배이고, ‘대청’이란 제석천의 아주 뛰어난 청색 보배다.
모파락게랍바牟婆洛揭拉婆는 구역에서는 ‘차거車’라고 했고, 진제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감색 보배’이다.
또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인보人寶·천보天寶·보살보菩薩寶이다. 인보는 힘이 약하고 오직 청정한 빛깔만 있다. 이것은 독을 제거하고 귀신을 제거하며 어둠을 제거하기도 하고, 또한 기갈·추위·더위 따위의 갖가지 고통을 제거한다. 천보는 크고도 뛰어나다.

001_0143_c_01L亦同彼經故第十云金銀毗瑠璃
001_0143_c_02L車渠馬瑙赤眞珠解云金銀二寶
001_0143_c_03L此土有故翻爲此名眞諦釋云弗師
001_0143_c_04L羅伽此云黃色寶卽是金也旃陀
001_0143_c_05L羅乾多此云白色寶卽是銀也
001_0143_c_06L瑠璃者是正梵音毗瑠璃者梵音
001_0143_c_07L訛也或云瑠璃者略吠音也或可
001_0143_c_08L此土無眞瑠璃有似瑠璃故亦翻也
001_0143_c_09L眞諦梁論記云瑠璃是靑色寶燒不
001_0143_c_10L可壞唯有鬼神有神力者能破爲器
001_0143_c_11L或可是其金翹鳥卵頗胝迦者此云
001_0143_c_12L黃綠色寶佛地論云羯鷄怛諾迦寶
001_0143_c_13L智度論云過千歲冰化爲頗梨珠
001_0143_c_14L眞珠者佛地論云赤虫所出名赤
001_0143_c_15L眞珠或珠體赤名赤眞珠眞諦釋
001_0143_c_16L卽無價寶珠也阿濕摩揭拉婆者
001_0143_c_17L舊云馬瑙眞諦釋云是赤色寶
001_0143_c_18L性攝論云是帝靑大靑等寶解云
001_0143_c_19L帝靑是帝釋靑色寶大靑是帝釋勝
001_0143_c_20L靑色寶牟婆洛揭拉婆者舊云車▼((王+巨)/木)
001_0143_c_21L眞諦釋云是紺色寶又智度論云
001_0143_c_22L有三種謂人寶天寶菩薩寶人寶
001_0143_c_23L力少唯有淸淨光色除毒除鬼除闇
001_0143_c_24L亦除飢渴寒熱等 [115] 天寶亦大亦勝

001_0144_a_01L이것은 항상 천신의 몸에 따라다니며 명령할 수도 있고 함께 말할 수도 있으며, 가벼워서 무겁지 않다. 보살보는 천보보다 뛰어나며 인보와 천보의 일을 아울러 할 수 있다. 또 일체의 중생들로 하여금 여기서 죽고 저기서 나게 되는 인연의 본말에 대해 알도록 할 수 있다.……또 (보살보는) 갖가지 법음法音을 내게 할 수 있다.……이하 생략……”431)
또 그 논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모든 진귀한 보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금은 산이나 돌이나 모래나 붉은 동에서 나오고, 진주는 물고기의 배 속이나 대나무 속이나 뱀의 뇌에서 나오며, 용주는 용의 뇌에서 나오고, 산호는 바닷속 석수石樹432)에서 나오며, 옥패玉貝433)는 충갑虫甲에서 나오고, 은은 불태운 광석(燒石)에서 생긴다. 나머지 유리와 파리 등은 모두 산의 굴속에서 나온다. 여의주如意珠는 부처님의 사리에서 나오는데, 법이 다 사라질 때쯤이면 모든 사리들이 다 여의주로 변하니, 비유하면 천년이 지난 얼음이 파리주로 변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보배들은 사람에게 있는 영원한 보배로서, 부처님이 장엄하신 모든 국토에서 이것들이 가장 뛰어나며, 천신들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것들은 (부처님의) 위대한 공덕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434)
『대업론』에서는 ‘칠보는 모두 돌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35)

(나) 빛을 놓아 무변계를 비춤을 밝힘

  큰 광명을 놓아 모든 가없는 세계를 널리 비추며,

  (현색원만을 설한 두 구 중에서) 두 번째 구인 ‘빛을 놓아 널리 비춤’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타수용토에서는 (그 대궁전의) 체가 두루 미치지는 않지만 빛으로 널리 비추고, 자수용토에서는 (그 대궁전의) 체가 두루 미치기 때문에 빛도 널리 비춘다.≻436) 세친은 ‘전에 말한 칠보들이 빛을 널리 비추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437) 무성의 『섭대승론석』도 앞의 두 가지 해석을 갖추고 있다.

나) 형색形色의 원만

  한량없는 방소의 오묘한 장식들이 사이마다 펼쳐 있고,

  이것은 두 번째로 형색形色438)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방소方所”란 가령 화려한 천정(綺井) 같은 것들을 말하고, “오묘한 장식들”이란 가령 꽃무늬 같은 것들을 말한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001_0144_a_01L常隨逐天身可使令 [116] 輕而不
001_0144_a_02L菩薩寶勝於天寶能兼有人天寶
001_0144_a_03L又能令 [117] 衆生知死此生彼因緣本
001_0144_a_04L又復能出種種法音乃至廣說
001_0144_a_05L彼復云問曰是諸珍寶從何處出
001_0144_a_06L金出山石沙赤銅中眞珠出魚腹
001_0144_a_07L竹中蛇腦中龍珠出龍腦中珊蝴
001_0144_a_08L出海中石樹 [118] 貝生 [119] 虫甲 [120] 銀生燒石
001_0144_a_09L餘瑠璃頗梨等皆出山窟中如意珠
001_0144_a_10L出自佛舍利若法沒盡時諸舍利皆
001_0144_a_11L變爲如意珠譬如過千歲冰化爲頗
001_0144_a_12L梨珠如是等諸寶是人中常寶 [121]
001_0144_a_13L莊嚴一切國土是最殊勝諸天所不
001_0144_a_14L能得何以故從大功德所生故
001_0144_a_15L業論云七寶皆是石所攝也

001_0144_a_16L
放大光明普照一切無邊世界

001_0144_a_17L
釋曰明第二句放光普照親光釋云
001_0144_a_18L他受用土體雖不遍以光普照自受
001_0144_a_19L用土以體遍故光亦普照世親釋
001_0144_a_20L謂前七寶於光普照無性釋論
001_0144_a_21L上二釋

001_0144_a_22L
無量方所妙餝間列

001_0144_a_23L
釋曰此顯第二形色圓滿言方所者
001_0144_a_24L如綺井等言妙餝者如華文等

001_0144_b_01L“대궁전에는 한량없는 방소에 오묘한 장식이 사이마다 펼쳐 있다.여기서 ‘한량없는’은 ‘방소’를 수식하는 말이다.또는 대궁전에는 한량없는 오묘한 장식들이 사이마다 펼쳐져 있다.여기서는 ‘한량없는’은 ‘오묘한 장식’을 수식하는 말이다.한량없다는 것은 수가 한량없다는 말이거나 또는 처소가 한량없다는 말이다.”439)
  여기서 ‘수가 한량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한량없는 오묘한 장식’에 대해 거듭 해석한 것이고, ‘처소가 한량없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한량없는 방소’에 대해 거듭 해석한 것이다. 세친과 무성도 친광과 똑같이 해석한다.

(가) 스무 가지 색을 기준으로 현색과 형색을 분별함
이상으로 이미 현색·형색 두 가지 색에 대해 해석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색에는 차별이 있으니, 『구사론』 등에 의거해 두 문으로 분별하겠다. 첫째는 스무 가지 색을 기준으로 현색과 형색을 분별하는 것이고, 둘째는 현색과 형색을 서로 대응시켜 네 구로 분별하는 것이다.
스무 가지 색으로 현색과 형색을 분별하겠다.
예를 들면 『구사론』 제1권에서는 게송으로 “색은 두 가지거나 스무 가지다.”라고 하였고, 장행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색은 ‘두 가지’라고 했는데, 첫째는 현색이고 둘째는 형색이다. 현색은 네 가지니, 즉 청·황·적·백이다. 나머지 현색은 이 네 가지 색의 차별이다. ‘나머지’란 빛(光)·그림자(影)·밝음(明)·어둠(闇)·연기(烟)·구름(雲)·먼지(塵)·안개(霧)이니,440) 모두 청(·황·적·백의) 차별적 색들이다. 햇빛을 ‘빛’이라 하고, 나머지 빛은 ‘밝음’이라 한다. 어떤 이는 빛은 황색에 속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적색이라 하며, 어떤 이는 황적색이라 한다. 지금 해석하면 그렇지 않다. 빛과 밝음이라는 두 가지 색은 모두 네 가지 색에 통한다. 그림자와 어둠은 청색이고, 연기·구름·먼지·안개는 모두 네 가지 색에 통한다. 또는 안개는 청백색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형색은 여덟 가지이니, 장長·단短·방方·원圓·고高·하下·정正·부정不正이다.441) 다시 ‘스무 가지 색’이라 한 것은, 청·황·적·백·빛·그림자·밝음·어둠·구름·연기·먼지·안개·장·단·방·원·고·하·정·부정이다. 어떤 다른 논사는 ‘공일현색空一顯色’442)이 스물한 번째 색이라고 한다.”443) 구체적인 설명은 그 논과 같다.

(나) 형색과 현색을 네 구로 분별함
(현색과 형색을 서로 대응시켜) 네 구로 분별하겠다.
예를 들면 저 『구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어떤 색처에는 현색은 있어도 형색은 없으니, 청·황·적·백·빛·그림자·밝음·어둠을 말한다.444) 어떤 색처에는 형색은 있어도 현색은 없으니, 장長 등의 일부인 신표업身表業의 자성을 말한다.445) 어떤 색처에는 현색도 있고 형색도 있으니, 그 나머지 색을 말한다.”446)
그런데 이 네 구에 대해 여러 설들이 같지 않다.
첫 번째, 진제 삼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144_b_01L光釋云謂大宮殿妙餝間列無量
001_0144_b_02L方所此釋無量
屬於方所
或大宮殿無量妙餝
001_0144_b_03L所間列此釋無量
屬於妙餝
言無量者或數無量
001_0144_b_04L或處無量解云此中數無量者重釋
001_0144_b_05L前云無量妙餝處無量者重釋前云
001_0144_b_06L無量方所世親無性亦同親光上來
001_0144_b_07L已釋顯形二色然此二色有差別者
001_0144_b_08L依俱舍等二門分別一約二十色
001_0144_b_09L別顯形二顯形相對四句分別二十
001_0144_b_10L色辨顯形者如俱舍論初卷頌云
001_0144_b_11L二或二十長行釋云言色二者
001_0144_b_12L二形顯色有四靑黃赤白餘顯
001_0144_b_13L是此四色差別解云餘者光影明闇烟雲塵
皆是靑等之差別也日光
001_0144_b_14L名光餘光名明有云光者黃色所攝有云
有云黃赤今解不爾光明二種皆通四色
001_0144_b_15L闇是靑烟雲塵霧皆通四
或可霧是靑白所攝
形色有八
001_0144_b_16L長短方圓高下正不正復說二十者
001_0144_b_17L謂靑 [122] 赤白光影明闇雲烟塵霧長短方
001_0144_b_18L高下正不正有餘師說空一顯色
001_0144_b_19L第二十一釋諸色相具說如彼
001_0144_b_20L四句者如彼論說或有色處有顯
001_0144_b_21L無形謂靑黃赤白光影明闇或有色
001_0144_b_22L有形無顯謂長等一分身表業性
001_0144_b_23L或有色處有顯有形謂所餘色
001_0144_b_24L此四句諸說不同一眞諦三藏云

001_0144_c_01L첫째는 현색이지만 형색은 아닌 것이니, 예를 들면 수미산의 사방 공중의 청색 등과 같은 현색이다.
둘째는 형색이지만 현색은 아닌 것이니, 예를 들면 신표색身表色(신표업) 같은 것이다. 셋째는 현색이기도 하고 형색이기도 한 것이니, 예를 들면 비유에 나온 청색·황색 등과 같은 것이다. 넷째는 현색도 아니고 형색도 아닌 것이니, 예를 들면 무표색無表色447) 같은 것이다.
두 번째, 대당 삼장은 ‘지智를 생기게 한다’는 뜻에 의거해서 네 구로 분별하였다. (첫째) 만일 흰색을 담가서 청색으로 염색하는 경우, 형태는 바뀌지 않으므로 오직 현색에 대한 지(顯智)는 생기지만 형색에 대한 지(形智)는 생기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현색이지만 형색은 아닌 것’이라 했다. (둘째) 그것을 자르기는 해도 염색하지 않는 경우, 다만 형색에 대한 지는 있어도 현색에 대한 지는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을 ‘형색이지만 현색은 아닌 것’이라 했다. (셋째) 그것을 염색하여 자르는 경우, 형색과 현색에 대한 지가 생긴다. 이는 『순정리론』에서 말한 경우와 같다. “저 멀리 검은 깃발을 보면서, ‘이것은 까마귀이지 깃발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깃발이지 까마귀가 아니다’라고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을 현색이기도 하고 형색이기도 한 것이라 한다.”448) (넷째) 현색도 아니고 형색도 아닌 것은 예를 들면 공계색空界色449) 등이다.
그런데 네 번째 구에 대해 여러 학설이 같지 않다. 『대비바사론』에 의하면, 본래 두 학설이 있다. 한편에서는 공계색이 네 번째 구가 된다고 하고,450) 한편에서는 현색도 아니고 형색도 아닌 것은 없다고 한다.451) 『순정리론』에 의하면, 성·향·미·촉과 무표색이 네 번째 구가 된다.452) 『식신족론』에서는 오근五根과 사진四塵과 무표색이 네 번째 구가 된다.453)
또 『구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다른 논사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빛(光)·밝음(明)이라는 색에만 현색은 있고 형색이 없으니, 현재 세간에서 보면 청색 등이 있는 곳에는 ‘장長’ 등의 형색이 있기 때문이다.454)이것은 살바다종의 두 번째 논사의 설이다.455)

  살바다종에서는 현색과 형색은 별개의 체라고 하는데, 어째서 ‘현색이기도 하고 형색이기도 하다’고 하는가?
  『구사론』에는 이에 대한 문답이 있으니,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떻게 하나의 실체(一事 : 극미)에 현색과 형색이 함께 있을 수 있는가?경부 논사 등이 살바다종에게 물은 것이다.이 실체에서 둘 다 알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001_0144_c_01L顯而非形如須彌山四方空中 靑等
001_0144_c_02L顯色二形而非顯謂身表色三亦
001_0144_c_03L顯亦形如譬等中 靑黃等色四非顯
001_0144_c_04L非形如無表色1)二形而非顯謂身表
001_0144_c_05L [26] 二大唐三藏約生智義以辨四
001_0144_c_06L如一込白染靑色時而形不改
001_0144_c_07L生顯智形智不生如是名爲顯而非
001_0144_c_08L若其截割而不染者但有形智
001_0144_c_09L智不生如是名爲形而非顯若其染
001_0144_c_10L形顯智生如正理說遙見黑幡
001_0144_c_11L作如是言是烏非幡幡非烏等
001_0144_c_12L是名爲亦顯亦形非顯非形者如空
001_0144_c_13L界色等然第四句諸說不同依毗
001_0144_c_14L婆沙自有兩說一云空界色爲第
001_0144_c_15L四句一云非顯非形者無也若依
001_0144_c_16L正理聲香味觸及無表色爲第四
001_0144_c_17L識身足論五根四塵及無表色
001_0144_c_18L爲第四句又俱舍云有餘師說
001_0144_c_19L光明色有顯無形現見世間靑等色
001_0144_c_20L有長等故此是薩婆多
第二師說
薩婆多顯
001_0144_c_21L形別體如何說云亦顯亦形解云
001_0144_c_22L俱舍有此問答故彼論云如何一事
001_0144_c_23L具有顯形經部師等問
薩婆多宗
由於此中俱可
001_0144_c_24L「二形…表色」八字疑剩

001_0145_a_01L‘이 실체에 (현색과 형색이) 있다’는 것은 (그 둘에 대한) 지智가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 (하나의 실체에 그 두 가지) 경계(境)가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은 아니다.”456) 살바다 논사의 대답은, 하나의 처소에서 새롭게 지가 생긴다는 뜻에 의거해서 형색과 현색이 있다고 한 것이지, 하나의 체에 두 가지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457) 대당 삼장도 이에 의거해서 설한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색법의) 종류와 개수가 여러 논들마다 다르다.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24색이 있으니, 따라서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간략히 설하면 세 가지이니, 현색과 형색과 표색表色458)이다. 현색이란 청·황·적·백·빛·그림자·밝음·어둠·구름·연기·먼지·안개 및 공일현색空一顯色을 말한다. 형색이란 장·단·방·원·추·세·정·부정·고·하 등의 색을 말한다. 표색이란 잡기(取), 버리기(捨), 굽히기(屈), 펴기(申), 가기(行), 머물기(住), 앉기(坐), 눕기(臥), 이와 같은 색들을 말한다.”459)
  스물네 가지 색이 있지만, 네 구로 분별하면 오직 세 구만 있다. 첫째는 현색이지만 형색은 아닌 것이니, 이는 열세 가지가 있다. 둘째는 형색이지만 현색은 아닌 것이니, 이는 열 가지가 있다. 셋째는 현색도 아니고 형색도 아닌 것이니, 표색을 말한다.
『현양성교론』에도 스물네 가지 색이 나오니, 따라서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색이나 형색이나 표색이란 어떤 것인가? 청·황·적·백 등의 이와 같은 현색들, 장·단·방·원·추·세·고·하·정·부정, 연기·구름·먼지·안개·빛·그림자·밝음·어둠, 공일현색, 저 영상影像의 색을 말한다.”460)
  『현양성교론』의 말은 차이가 있지만 의미는 『유가사지론』과 동일하다. 따라서 그 논에서 언급된 ‘이와 같은(如是等)’이란 말은 뒤에서 언급한 ‘구름·연기’ 등의 문구까지를 취한 것이다.461) ‘영상의 색’이란 표색을 말한다.
『잡집론』에 의하면 스물다섯 가지 색이 있으니, 스물네 가지에 형색逈色462)을 더한 것이다. 나머지는 『유가사지론』과 동일하다. 그런데 네 구의 차별을 분별하지 않았지만, 『유가사지론』과 동일하다 해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463)

다) 분량分量의 원만

  그 둘레가 끝이 없어 그 분량을 헤아리기 어려우며,


001_0145_a_01L知故此中有者是有智藏 [123] 非有境義
001_0145_a_02L薩婆多師答於一處所約新生智故
001_0145_a_03L名爲形顯非於一體有二境義大唐
001_0145_a_04L三藏依此而說今依大乘種數多
001_0145_a_05L諸論不同若依瑜伽二十四色
001_0145_a_06L故第一云略說有三謂顯色形色
001_0145_a_07L表色顯色者謂靑黃赤白光影明闇
001_0145_a_08L雲烟塵霧及空一顯色形色者
001_0145_a_09L長短方圓麤細正不正高下 [124] 表色者
001_0145_a_10L謂取捨屈申行住坐臥如是等色
001_0145_a_11L雖二十四色四句分別唯有三
001_0145_a_12L一顯而非形有十三二形而形
001_0145_a_13L有十種三非顯非形謂表色
001_0145_a_14L顯揚論亦二十四故初卷云若顯色
001_0145_a_15L若形色若表色云何靑黃赤白如是
001_0145_a_16L等顯長短方圓麤細高下正及不正
001_0145_a_17L烟雲塵霧光影明闇若空一顯色 [125]
001_0145_a_18L影像之色解云顯揚言雖有異意同
001_0145_a_19L瑜伽故彼所說如是等言等取後說
001_0145_a_20L雲烟等句影像之色卽是表色依雜
001_0145_a_21L集論二十五色更加1) [27] [126] 餘同瑜
001_0145_a_22L而不分別四句差別同瑜伽論
001_0145_a_23L於理無違

001_0145_a_24L
周圓無際其量難測

001_0145_b_01L
  이것은 세 번째로 분량分量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친광 보살은, 먼저 세 가지 의미에서 그것의 ‘측량하기 어려움’을 해석하였고, 나중에는 두 가지 국토에 의거해 ‘측량하기 어려움’을 분별하였다.

(가) 세 가지 의미로 측량하기 어려움을 해석함
‘세 가지 의미’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다. 한편에서는 그 분량의 둘레가 끝이 없어서 측량하기 어렵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그 분량이 끝이 없어서 그 둘레를 측량하기 어렵다고 한다. 세 번째에 해당하는 하나의 의미는 ‘시방十方’ 등에 의거해서 측량하기 어려움을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궁전은 그 분량의 둘레가 끝이 없어서 헤아리기 어렵다. 혹은 대궁전은 그 분량이 끝이 없어서 그 둘레를 헤아리기 어렵다. 또 동방東方 등의 분제分齊가 없기 때문에 길고 짧은 따위의 상相을 측량하기 어렵다.”464)

(나) 국토에 의거해 측량하기 어려움을 해석함
나중에는 두 가지 국토에 의거해서 ‘측량하기 어려움’을 해석했는데, 이에 세 논사의 해석이 있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래의 수용신의 국토는 교화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서 나타난 것이니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해서 그 분량이 일정하지 않다. 비록 광대하게 현현한다 해도 역시 한계가 있는데, 지전地前 보살의 지智 등에 의거해서 ‘끝이 없어 그 분량을 측량하기 어렵다’고 설한 것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래의 수용신의 국토는 삼무수겁 동안 닦았던 무한한 선근에 의해 일으켜진 것으로 법계에 두루 편재한다. 지상地上보살과 모든 여래들도 그 분량의 한계를 측량하기 어려우니, 그것은 가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시작 없는 때와 같다.≻
진실한 의미에서는 다음과 같다. ≺수용신의 국토는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수용이다. 말하자면 모든 여래가 무수겁 동안 닦았던 무한한 선근에 의해 일으켜진 것으로 법계에 두루 편재하고, 여래가 스스로 대법락大法樂을 수용하기 위한 것이다.465) 이것은 처음 깨달음(佛)을 얻었을 때부터 미래가 다하도록 상속하면서 변함이 없다. 가령 모든 공덕이 있는 모든 대보살이라도 또한 그것을 볼 수는 없고 단지 (그에 대해) 들을 수만 있다. 이와 같은 정토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제불은 보기는 해도 또한 그 분량의 한계를 측량할 수 없다. 둘째는 타수용이다. 말하자면 모든 여래가 모든 지상보살들로 하여금 대법락을 수용하고

001_0145_b_01L
釋曰此顯第三分量圓滿親光菩薩
001_0145_b_02L先以三義釋其難測後約二土分別
001_0145_b_03L難測言三義者一云其量周圓無際
001_0145_b_04L難測一云其量無際周圓難測第三
001_0145_b_05L一義約十方等以釋難測故佛地云
001_0145_b_06L謂大宮殿其量周圓無際難測或大
001_0145_b_07L宮殿其量無際周圓離測又東方等
001_0145_b_08L分齊無故長短等相難可測故 [127] 後約
001_0145_b_09L二土釋難測者有三師釋故佛地云
001_0145_b_10L有義如來受用身土隨所化生所宜
001_0145_b_11L而現或大或小其量無定 [128] 現廣
001_0145_b_12L亦有邊際然就地前菩薩智等
001_0145_b_13L言無際其量難測有義如來受用身
001_0145_b_14L三無數劫所修無邊善根所感
001_0145_b_15L遍法界地上菩薩及諸如來亦不
001_0145_b_16L能測其量邊際以無邊故如無始時
001_0145_b_17L如實義者受用身土略有二種
001_0145_b_18L自受用謂諸如來三無數劫所修無
001_0145_b_19L邊善根所感周遍法界爲自受用大
001_0145_b_20L法樂故從初得佛盡未來際相續
001_0145_b_21L無變如諸功德諸大菩薩亦不能見
001_0145_b_22L但可得聞如是淨士以無量故諸佛
001_0145_b_23L雖見亦不能測其量邊際二他受用
001_0145_b_24L謂諸如來爲令地上諸菩薩衆受大法

001_0145_c_01L더 나아가 뛰어난 행을 닦도록 하기 위해서 근기에 맞춰서 나타낸 것이다.466) 혹은 수승하기도 하고 혹은 하열하기도 하며 혹은 크기도 하고 혹은 작기도 하여, 바뀌고 변하여 일정하지 않으니, 마치 변화토와 같다. 이와 같은 정토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지상보살과 모든 여래는 다 그 분량을 측량할 수 있지만, 단 지전보살에 의거해서 ‘측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두 종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 둘레가 끝이 없어 그 분량을 측량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467)
무성은 『불지경론』의 세 가지 의미 중에서 처음의 두 가지 부차적 설명(復次)과 동일하게 설한다. 세친은 그것을 해석하지 않았으니,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라) 방소方所의 원만

  삼계의 소행所行468)의 처소를 넘어서 있고,

  이것은 네 번째로 ‘방소方所의 원만’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대궁전의 처소와 구역들은 삼계의 소행의 처소(三界所行之處)를 넘어서 있다. 이는 가령 삼계의 자기 지地에 대한 모든 애착을 자기 소유라고 집착하고, (그로 인해) 소연박所緣縛·상응박相應縛469) 두 가지 속박이 따라서 늘어나며, (그로 인해) 그것의 이숙과 및 증상과를 내는 경우와는 같지 않다. 이와 같은 정토는 삼계의 애착에 의해 집수執受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로 인해) 두 가지 속박을 떠났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그 속박들의 이숙과나 증상과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열반 등과 마찬가지로 삼계의 이숙과지異熟果地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470)
십팔계에 의거해서 ‘갖춤(具)과 갖추지 않음(不具)’에 대해 문답으로 분별하기도 하는데,471) 자세한 것은 『불지경론』과 「정토장淨土章」과 같다.「정토장」과 「삼신장」을 살펴보니, 십팔계에 의거해 ‘갖춤과 갖추지 않음’에 대해 문답으로 분별하였다.

마) 인因의 원만

  뛰어난 출세간의 선근에 의해 생기한 것이며,

  이것은 다섯 번째로 인因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 대궁전은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소득지라는 선근을 원인(因)으로 하여 생기할 수 있으니, 이는 원인 없는(無因) 것도 아니고 대자재천大自在天472) 등을 원인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473) 정토는 삼계를 넘어서 있지만 출세간의 무분별지·후소득지와 세간의 정법淨法을 이숙인異熟因으로 삼는데,

001_0145_c_01L樂進修勝行隨宜而現或勝或劣
001_0145_c_02L或大或小改轉不定如變化土如是
001_0145_c_03L淨土以有邊故地上菩薩及諸如來
001_0145_c_04L皆測其量但就地前言不能測
001_0145_c_05L是二種差別故言周圓無際其量難
001_0145_c_06L無性卽同佛地三中初二復次
001_0145_c_07L親不釋義可知故

001_0145_c_08L
超過三界所行之處

001_0145_c_09L
釋曰此明第四方所圓滿親光釋云
001_0145_c_10L謂大宮殿處所方域超過三界所行
001_0145_c_11L之處非如三界自地諸愛執爲已 [129]
001_0145_c_12L所緣相應二縛隨增是彼異熟及增
001_0145_c_13L上果如是淨土非三界受 [130] 所執愛 [131]
001_0145_c_14L離二縛故非彼異熟增上果故如涅
001_0145_c_15L槃等超過三界異熟果地約十八界
001_0145_c_16L問答分別具 [132] 不具等廣如佛地及淨
001_0145_c_17L土章勘淨土章及三身章
十八界問答分別有不

001_0145_c_18L
勝出世間善根所起

001_0145_c_19L
釋云此明第五因圓滿也親光釋云
001_0145_c_20L謂大宮殿用出世間無分別智後所
001_0145_c_21L得智善根爲因而得生起非是無因
001_0145_c_22L非大自在天等爲因云何淨土超過
001_0145_c_23L三界而用出世無分別智後所得世
001_0145_c_24L「廻」疑「逈」

001_0146_a_01L(그것들이) 그 정토에 대해 이숙인이 된다고 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 그런데 그 밖의 다른 인으로 인해 그것이 생겨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법지인품苦法智忍品이 세제일법世第一法을 인으로 하는 경우처럼,474) 이것은 본래의 무분별지와 후소득지의 무루 선근 종자를 삼무수겁 동안 닦고 넓힌 것을 이 정토가 변현되는 생인生因475)으로 삼은 것이다.
무분별지를 ‘출세간’이라 하고 후득지는 앞의 것보다 나으므로 ‘뛰어나다’고 하니, 즉 ‘뛰어난 출세간의 무루 선근’을 이 정토의 생인으로 삼은 것이다. 혹은 모든 성문·독각의 성도를 출세간이라 하고, 여래의 선근은 그것보다 나으므로 ‘뛰어나다’고 하니, 즉 이 부처님의 정토는 여래의 식識 중의 무루 선근을 원인으로 하여 생긴 것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단지 (출세간의 무루 선근을) 증상연增上緣으로 삼아 생기는 것이니, (정토의 대궁전 등은) 외법外法이기 때문이다.≻476)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또한 (출세간의 무루 선근을) 인연因緣으로 삼아 생기는 것이니, (그것이 정토를) 직접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연이 없어야 할 것이니, 외법들끼리 서로 대망시키면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외법들은 모두 내법의 훈습을 인으로 삼는 것이다.≻477)
 () 그렇다면 외법은 이미 (여러 사람들이) 공유共有하는 것인데, 어떻게 유정의 각기 다른 종자들이 함께(共) 인연이 되어 화합하여 하나의 결과(외법)를 낼 수 있는가?478)
 () 좁은 마음으로 위대한 법을 헤아리지 말라. 외물外物이 어찌 극미 화합으로 이루어졌고 실제로 체성이 있는 다수의 인因(극미들의 적집)이 함께 (결과를) 불러낸 것이겠는가? 이것은 다만 유정의 상이한 식들이 각기 전변해 낸 것이지만 동일한 처소가 서로 유사해서 서로 장애하지 않는 것이니, 마치 여러 등불들이 빛을 내거나 여러 사람이 꿈꾸는 것과 같다.479) 인의 종류가 동일하고 과의 모습도 유사해서 처소에 차별이 없으므로 ‘함께(共)’라고 가립했어도, 실제로는 각기 다르다. 모든 부처님의 정토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각기 다른 (부처님의) 식들이 전변한 것인데, 모두 온 법계에 두루 하여 동일한 처소가 서로 유사하므로 ‘함께(共)’라고 한 것이다.480)

바) 과果의 원만

  가장 자재하고 깨끗한 식識을 모습으로 삼고,

  이것은 여섯 번째로 과果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001_0146_a_01L間淨法爲異熟因不說與彼爲異熟
001_0146_a_02L然爲餘因彼得生起如苦法智忍
001_0146_a_03L世第一法爲因此用本來無分別
001_0146_a_04L智後得無漏善根種子三無數劫
001_0146_a_05L令增廣爲此淨土變現生因無分別
001_0146_a_06L名出世間後得過前說名爲勝
001_0146_a_07L勝出世無漏善根爲此生因或諸聲
001_0146_a_08L聞獨覺聖道名出世間如來善根
001_0146_a_09L彼名勝此佛淨土如來識中無漏善
001_0146_a_10L爲因而生有義但是增上緣生
001_0146_a_11L外法故有義亦是因緣而生親能生
001_0146_a_12L若不爾者應無因緣外法相望
001_0146_a_13L非因緣故一切外法皆用內法熏習
001_0146_a_14L爲因若爾外法旣是共有云何有情
001_0146_a_15L各別種子共爲因緣合生一果
001_0146_a_16L以小心1) [28] 測量大法外物豈是極微
001_0146_a_17L合成實有體性多因共感但是有
001_0146_a_18L情異識各變同處相似不相障礙
001_0146_a_19L衆燈明如多所夢因類是同果相
001_0146_a_20L相似處所無別假名爲共實各有
001_0146_a_21L諸佛淨土亦復如是各別識變
001_0146_a_22L皆遍法界同處相似說名爲共

001_0146_a_23L
最極自在淨識爲相

001_0146_a_24L
釋曰此顯第六果圓滿也親元釋云

001_0146_b_01L“대궁전은 가장 자재한 부처님의 무루심을 체상體相으로 삼는다. 오직 (무루의 청정한) 식識만 있으므로 식과 분리되어 외부에 따로 보배 등이 있는 것이 아니니, 즉 부처님의 청정한 마음이 이와 같이 변현하여 마치 여러 보배 등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이 식은 바로 여래의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청정한 식으로서, 옛날에 닦았던 자리自利의 무루정토종자無漏淨土種子라는 인연의 힘으로 인해 모든 때에 두루 모든 곳에서 작의할 필요도 없이 마음대로 여러 보배로 장엄된 수용불토를 변현해 낸다. (이 수용토는) 자수용신의 의지처가 된다. (또 이 식은 옛날에 닦았던) 이타利他의 무루정토종자인 인연의 힘으로 인해 각기 다른 지상地上보살들의 적절한 근기에 맞춰 정토를 변현해 내니, 혹은 작고 혹은 크며 혹은 열등하고 혹은 뛰어나다. (이 정토들은) 타수용신의 의지처가 된다. 말하자면 초지보살의 적절한 근기에 맞춰 작은 것을 나타내거나 열등한 것을 나타내고, 이와 같이 계속해서 나아가서 십지에 이르면 가장 크고 수승한 것을 나타내니, 각각의 지마다 처음·중간·마지막 등도 또한 이와 같다.”481)
세친과 무성에게는 별도의 해석이 없다.

사) 주인(主)의 원만

  여래께서 다스리는 곳이며,

  이것은 일곱 번째로 주인(主)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대궁전은 불세존들이 주인이지 다른 이는 아니니, 수승하기 때문에 오직 세존에게만 속하는 것이다. 혹은 오직 세존만이 주지하고 섭수하시는 것이고, 다른 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자수용토에서는 두루 온 법계를 하나하나 (부처님들) 각자 변현해 내어 각자가 주인이 되면서도 서로를 장애하지 않는다. 타수용토는 여러 부처님들이 변현해 내지만 일합상一合相과 또한 일상신一相身으로 섭수하여 주인이 되면서도 서로를 장애하지 않는다.482)483)
세친과 무성에게는 별도의 다른 해석이 없다.

아) 보익輔翼의 원만

  대보살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001_0146_b_01L謂大宮殿最極自在佛無漏心以爲
001_0146_b_02L體相唯有識故非離識外別有寶等
001_0146_b_03L卽佛淨心如是變現似衆寶等
001_0146_b_04L卽如來大圓鏡智相應淨識由昔所
001_0146_b_05L修自利無漏淨土種子因緣力故
001_0146_b_06L一切時遍一切處不待作意任運
001_0146_b_07L變現衆寶莊嚴受用佛土與自受用
001_0146_b_08L作所2) [29] [133] 依止處利他無漏淨土
001_0146_b_09L種子因緣力故 [134] 地上菩薩隨 [135] 宜變
001_0146_b_10L現淨土或小或大或劣或勝 [136]
001_0146_b_11L受用身作所3) [30] [137] 止處謂隨初地菩
001_0146_b_12L薩所宜現小現劣如是展轉乃至
001_0146_b_13L十地最大最勝於地地中初中後等
001_0146_b_14L亦復如是世親無性更無別釋

001_0146_b_15L
如來所都

001_0146_b_16L
釋曰此明第七主圓滿也親光釋云
001_0146_b_17L謂大宮殿諸佛世尊爲主非餘以殊
001_0146_b_18L勝故唯屬世尊或唯世尊住持攝受
001_0146_b_19L非餘不 [138] 自受用土雖遍法界一一
001_0146_b_20L自變各自爲主不相障礙他受用土
001_0146_b_21L雖諸佛變然 一合相亦一相身攝受
001_0146_b_22L [139] 爲主不相障礙世親無性無別
001_0146_b_23L異釋

001_0146_b_24L
諸大菩薩衆所雲集

001_0146_c_01L
  이것은 여덟 번째로 보익輔翼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대궁전에는 항상 한량없는 대보살승들이 다 같이 운집해 있는데, 부처님을 뵙고자 여기에 온 모든 자들을 ‘보익’이라 한다. 이미 무수한 대보살승들이 항상 와서 보좌해 주기 때문에 능히 거스르고 해칠 만한 원적怨賊이 없다. 모든 성문 등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없다. 말하자면 초지 이상의 보살중들은 비록 제불의 자리自利의 수용정토에는 모이지 못하지만, 제불이 이타利他의 수용정토에는 모일 수 있다. 제불이 자비로써 자기 식識 상에서 보살의 알맞은 근기에 따라 거칠거나 미묘한 국토를 현현해 내면, 보살은 자신의 선근과 원력에 따라 자신의 식에 부처님에 의해 생겨난 정토와 유사한 모습을 변현해 낸다. 비록 각자의 마음은 각기 다르게 변현해 내지만, 동일한 곳의 형상처럼 서로 유사하므로, ‘한 국토에서 그 안에 함께 모였다’고 말하는 것이다.”484) 이와 같은 지상보살의 정토는 유루인가, 무루인가? 이와 같은 의미들은 구체적으로는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세친과 무성도 다시 다르게 해석한 것은 없다.

자) 권속眷屬의 원만

  한량없는 천·용·약차·건달박·아소락·게로다·긴날락·마호락가와 같은 인비인人非人485) 등이 항상 보좌하며 따르고 있으며,

  이것은 아홉 번째로 권속眷屬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 팔부대중
◉ 천天(ⓢ deva)
『대지도론』 제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가호천假號天이니, 전륜왕486) 등을 말한다.‘등’이란 모든 소왕들까지 똑같이 취한다는 것이다.둘째는 생천生天이니, (욕계육천 처음인) 사천왕천에서부터 (무색계천의 마지막인) 유정천까지를 말한다.487) 셋째는 정천淨天이니, 불·법신보살·벽지불·아라한을 말한다.”488)
『대지도론』 제7권에서도 대개 이와 동일하게 설하고,489) 또 제2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명천名天이니, 예를 들어 지금의 국왕을 천자라고 하는 경우와 같다. 둘째는 생천生天이니,

001_0146_c_01L
釋曰此辨第八輔翼圓滿親光釋云
001_0146_c_02L謂大宮殿常有無量大菩薩僧共所
001_0146_c_03L雲集諸來朝者名爲輔翼旣有無
001_0146_c_04L數大菩薩僧常來輔翼故無怨敵能
001_0146_c_05L爲違害諸聲聞等無如是事謂初
001_0146_c_06L地上諸菩薩衆雖不能集諸佛自利
001_0146_c_07L受用淨土而能集會諸佛利他受用
001_0146_c_08L淨土諸佛慈悲於自識上隨菩薩
001_0146_c_09L現麤妙土菩薩隨自善根願力
001_0146_c_10L於自識上似佛所生淨土相現雖是
001_0146_c_11L自心各別變現而同一處現 [140] 相相似
001_0146_c_12L謂爲一土共集其中如是地上菩薩
001_0146_c_13L淨土爲是有漏爲是無漏如是等義
001_0146_c_14L具如章 [141] 世親無性更無異釋

001_0146_c_15L
無量天藥叉健達縳阿素洛揭路茶
001_0146_c_16L捺洛摩呼洛伽人非人等常所翼從

001_0146_c_17L
釋曰此卽第九眷屬圓滿依智度論
001_0146_c_18L第五卷說天有三種一假號天
001_0146_c_19L輪王等等卽等取
諸小王也
二者生天謂從四天
001_0146_c_20L王天乃至有頂天三者淨天謂佛
001_0146_c_21L法身菩薩辟支佛阿羅漢智度論第
001_0146_c_22L大同此說又第二十二天有四種
001_0146_c_23L一者名天如今國王名爲天子二者
001_0146_c_24L「測」疑剩「作」疑剩「作」疑「依」

001_0147_a_01L즉 사천왕에서부터 비비상천非非想天490)까지를 말한다. 셋째는 정천淨天이니, 즉 사람 가운데 태어난 모든 성인을 말한다. 넷째는 생정천生淨天이니, 즉 삼계의 천에서 태어난 모든 성인을 말한다.≻491)
  세 종류 천과 네 종류 천 중에서 명천·생천 두 가지 천은 ‘천’이라 한다. 따라서 『법화경』에서는 “나의 이 땅은 안은하니 천신과 사람이 늘 충만하도다.”492)라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무색계의 모든 천이 와서 모임에 참여했기 때문에 또한 그들을 천의 무리라고 하였고, 『사리불문경』에 의하면, 천을 수호하는 모든 신들을 천이라고 한 것이다.

◉ 용龍(ⓢ nāga)
‘용’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천룡天龍이니, 하늘 궁전을 지탱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자이다. 둘째는 인룡人龍이니,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다스리는 자이다. 셋째는 지룡地龍이니, 땅과 바다를 지탱하는 자이다. 넷째는 왕룡王龍이니, 왕의 보배 창고를 지키는 자이다.

◉ 약차藥叉(ⓢ yakṣa)
“약차”란 구역에서는 야차夜叉라고 하고, 진제 삼장은 경첩귀輕捷鬼라고 번역하였다. 대당 삼장은 포악暴惡이라 번역하거나, 용건勇健 또는 가외可畏라고 한다. 그 종류는 세 가지다. 첫째는 땅에 있는 자이고, 둘째는 허공에 있는 자이며, 셋째는 천에 있으면서 천의 심부름을 하는 자이다.

◉ 건달박健達縛(ⓢ gandharva)
“건달박”이란 구역에서는 건달바乾闥婆라고 하니, 여기 말로 번역하면 심향행尋香行이다. 서방 사람들은 음악을 연주하며 유희하는 자를 건달박이라 부르는데,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음식 향기를 찾아 음악을 연주하며 구걸하는 자를 심향행이라 한다. 지금 이 귀신은 항상 음악을 연주하여 모든 향기를 먹기 때문에 건달박이라 한다.
『대지도론』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천의 광대들로서 항상 천신들을 따라다니며, 그 마음이 유연하고 복덕은 천신들보다 적으며 십보산에 산다.≻493)

◉ 아소락阿素洛(ⓢ asura)
“아소락”이란 구역에서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니, 여기 말로 ‘비천非天’이다. 그의 행실은 대개 아첨하거나 속이는 것이고 천신다운 진실한 행이 없기 때문에 ‘비천’이라 하니, 예를 들어 사람이 악행을 저지르면 ‘사람도 아니다(非人)’라고 하는 경우와 같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4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모든 비천은 천취天趣에 속함을 알아야 한다.

001_0147_a_01L生天從四天王乃至非非想天
001_0147_a_02L者淨天謂人中生諸聖人是四者生
001_0147_a_03L淨天三界天中生諸聖人是解云
001_0147_a_04L種四種天中名生二天名爲天也
001_0147_a_05L法華云我此土安隱天人常充滿
001_0147_a_06L業經云無色諸天來入會故亦名天
001_0147_a_07L依舍利弗問經護天諸神名爲天
001_0147_a_08L龍有四種一者天龍持天宮殿
001_0147_a_09L令不墮落二者在 [142] 人龍興雲致雨
001_0147_a_10L者地龍持地及海四者王龍守王
001_0147_a_11L寶藏言藥叉者舊云夜叉眞諦翻
001_0147_a_12L爲輕捷鬼也大唐三藏翻爲暴惡
001_0147_a_13L名勇健亦名可畏其類有三一者
001_0147_a_14L在地二者 [143] 三者在天爲天給使
001_0147_a_15L健達縛者舊云乾闥婆此翻名尋香
001_0147_a_16L西方人呼發樂戲兒名健達縛
001_0147_a_17L事生業尋食香氣作樂乞求名尋香
001_0147_a_18L今此神鬼常能作樂食諸香氣
001_0147_a_19L名健達縛智度論第十云是天妓 [144]
001_0147_a_20L常隨諸天其心柔輭福少諸天
001_0147_a_21L十寶山間阿素洛者舊云阿脩羅
001_0147_a_22L云非天行多諂詐無天實行名曰
001_0147_a_23L非天如人惡行名曰非人故瑜伽論
001_0147_a_24L第四卷云又諸非天當知天趣所攝

001_0147_b_01L그런데 마음속(意志)에 속이려는 생각을 많이 품고 아첨을 많이 하기 때문에, 가령 모든 천신들이 정법의 근기를 갖고 있는 경우와는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때는 경전에서 이것을 별개의 취라고 설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천의 부류이다. 모든 천신들의 법을 받아들여 행하지 않기 때문에 ‘비천’이라고 설한 것이다.”494)
혹은 ‘의신疑神’이라 한다. 『대지도론』 제3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수라신은 천에 속하는데 즐거움을 받는 것이 천신들보다 적으며, 위의·공덕의 변화는 마음대로 지어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심하면서 ‘이것이 수라인가 수라가 아닌가’라고 말한다.≻495) 혹은 ‘신대身大’라고 한다. 『대지도론』에서는 “수라는 진秦의 말로 대大이다.”496)라고 하였고, 대해 중에 서면 무릎이 빠지지 않고 도리천을 아래로 굽어본다고 하였다.497) 또는 ‘부단정不端正’이라 한다. (아수라 중에서) 오직 사지舍脂498)라는 여자만 단정端正하고 아버지와 형제와 권속들은 모두 추하기 때문이다. 또는 남자는 추하고 여자는 단정하기 때문에 ‘부단정’이라 한다. 또는 ‘무주無酒’라고 한다. 사천하의 꽃을 채취하여 바다에서 술을 빚어도 술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무주라고 한다.
『유가사지론』·『대지도론』에 의하면 아수라는 ‘천’에 속하고, 『비담론』의 설에 따르면 아수라는 ‘귀’에 속한다. 『정법념처경』에 의하면 ‘귀’인 것도 있고 ‘축생’인 것도 있고,499) 『육도가타경』에 의하면 천·귀·축생의 세 종류에 속한다.500)
그런데 아수라는 오지五地의 차별이 있으니, 가령 『지경地經』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501)
첫째, 지상의 중상산衆相山에 있는 세력이 가장 하열한 것이다. 둘째, 수미산須彌山 북쪽 큰 바다 아래로 2만 1천 유순由旬502) 되는 곳에 수라왕이 있으니 이름은 ‘라후羅睺’라고 한다. 셋째, 라후 아래로 2만 1천 유순을 지나면 수라왕이 있으니, 이름은 ‘용건勇健’이라고 한다. 넷째, 용건 아래로 다시 2만 1천 유순을 지나면 수라왕이 있으니, 이름은 ‘화만華鬘’이라고 한다. (다섯째,) 화만 아래로 다시 2만 1천 유순을 지나면 수라왕이 있으니, 이름은 ‘비마질다毗摩質多’라고 한다. 비마의 어머니가 본래 ‘천’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를 ‘천’이라 부른 것이다.
겁이 처음 이루어질 때

001_0147_b_01L然由意志多懷詐幻諂誑多故不如
001_0147_b_02L諸天爲淨法器由此因緣有時經
001_0147_b_03L說爲別趣實是天類由不受行諸
001_0147_b_04L天法故說爲非天或云疑神故智
001_0147_b_05L度論第三十云阿脩羅神是天受樂
001_0147_b_06L小減諸天威德變化隨意所作是故
001_0147_b_07L人疑言是脩羅非脩羅或云身大
001_0147_b_08L度論云修羅秦言大也大海中立
001_0147_b_09L沒於▼(月+來)向下觀忉利天又云不端正
001_0147_b_10L唯女舍脂端正父兄眷屬皆醜又云
001_0147_b_11L男醜女端正故云不端正又云無酒
001_0147_b_12L採四天下華於海釀酒不成故言無
001_0147_b_13L依瑜伽智度修羅天攝毗曇論
001_0147_b_14L修羅鬼攝依正法念經有鬼有
001_0147_b_15L依伽他經有天鬼畜三種所攝
001_0147_b_16L阿修羅有五地別如地經說一在
001_0147_b_17L地上衆相山中勢力最下二在須彌
001_0147_b_18L山北大海之下二萬一千由旬有修
001_0147_b_19L羅王名曰羅睺三羅睺下過二萬一
001_0147_b_20L千由旬有修羅王名曰勇健於勇健
001_0147_b_21L復過二萬一千由旬有修羅王
001_0147_b_22L曰華鬘於華鬘下復過二萬一千由
001_0147_b_23L有修羅王名毗摩質多毗摩之
001_0147_b_24L本從天生故名天劫初成時

001_0147_c_01L여러 천녀들이 바다에 와서 목욕하다 물이 그 몸에 닿자 곧 정기精氣를 잃어버려 물속에 떠다니다가 하나의 육란肉卵이 되었는데, 8천 년이 지나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999개의 머리가 달렸고, 머리마다 천 개의 눈이 있었으며, 999개의 입이 있었고, 입마다 네 개의 어금니가 있었으며, 어금니에서 불이 뿜어 나오면 마치 천둥벼락이 치는 것과 같았고, 스물네 개의 손과 999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 여자가 나중에 바닷물에서 헤엄치며 놀다가 물의 정기가 몸에 들어와 하나의 육란을 낳았는데 8천 년이 지나서 ‘비마질다’가 탄생하였다. 아홉 개의 머리가 있었는데 머리마다 천 개의 눈이 있었고, 입으로는 불을 뿜었으며, 999개의 손이 있었고, 다리는 오직 여덟 개였으며, 그 모습은 수미산보다 네 배나 컸고, 오로지 진흙과 연뿌리만 먹고 살았으며, 자주 천신과 다투었다.
이상은 『정법념처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

◉ 게로다揭路茶(ⓢ garuḍa)
“게로다”란 구역에서는 ‘가루라迦樓羅’라고 하는데, 금시조金翅鳥라고 하고 지금은 묘시조妙翅鳥라고 한다. 새의 날개가 갖가지 보배 빛깔로 장엄되어 있으니, 단지 금빛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화엄경』에서는 “법신의 금시조는 사여의四如意(四神足)를 발로 삼고, 자비의 밝고 맑은 눈으로 일체지 나무에 머물며, 보살의 금시조는 생사의 큰 바다에서 천·인의 용을 붙잡아 열반의 언덕에 안치한다.”503)고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불퇴삼매금시不退三昧金翅의 법문’이다. 이에 준해 알 수 있으니, 정토의 팔부대중은 모두 변화로 지어낸 것이다.
『해룡왕경』에서는 대신봉황大身鳳凰이라 번역하였다.조사해 보라.504)
또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양 날개의 거리가 336만 리이고 염부제에 한쪽 다리를 담글 수 있으며 목 밑에 여의주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의’라고 한다. 또 이것은 새들의 신으로서 그 중에 황금빛 날개를 가진 새가 있어 오로지 용들을 잡아먹는데, 이에 사생四生의 차별이 있다고 한다. 화생化生인 자는 네 가지 생의 용들을 잡아먹고,

001_0147_c_01L諸天女來海中洗浴水觸其身
001_0147_c_02L失精氣流在水中成一肉卵逕八
001_0147_c_03L千歲乃生一女有九百九十九頭
001_0147_c_04L有千眼有九百九十九口口有四牙
001_0147_c_05L牙上出火猶如礔▼(石+歷)二十四手
001_0147_c_06L百九十九脚此女後時在海浮戲
001_0147_c_07L精入身生一肉卵逕八千歲生毗
001_0147_c_08L摩質多有九頭頭有千眼口中出
001_0147_c_09L有九百九十手脚唯有八其形
001_0147_c_10L四倍大於須彌純食淤泥及與禍 [145]
001_0147_c_11L多與天諍如正法念經說揭路茶者
001_0147_c_12L舊云迦樓羅名爲金翅鳥今云妙翅
001_0147_c_13L鳥翅種種寶色莊嚴不唯金故
001_0147_c_14L嚴經云法身金翅鳥四如意爲足
001_0147_c_15L悲明淨眼住一切智樹菩薩金翅鳥
001_0147_c_16L生死大海中1) [31] [146] 2) [32] [147] 安置涅槃
001_0147_c_17L此是不退三昧金翅之法門准此
001_0147_c_18L應知淨土八部皆是化也海龍王經
001_0147_c_19L翻爲大身鳳凰勘又經云兩翅相去
001_0147_c_20L三百三十六萬里閻存提止容一足
001_0147_c_21L頸下有如意珠故名如意又云是其
001_0147_c_22L烏神於中有其金翅之鳥純食諸龍
001_0147_c_23L有四生別其化生者食四生龍
001_0147_c_24L「持」疑「搏」「天」下疑脫「人」

001_0148_a_01L태생胎生인 자는 화생의 용을 제외하고 세 가지 생의 용을 잡아먹으며, 난생卵生인 자는 화생과 태생을 제외하고 두 가지 생의 용을 잡아먹고, 습생濕生인 자는 오직 습생의 용만을 잡아먹는다.
이 사천하에는 화생한 가루라왕이 하나 있으니, 이름은 ‘정음’이고 수명은 8천 세이다. 날마다 별도로 새로 한 마리 큰 용왕과 500마리 작은 용을 잡아먹는데, 사천하를 돌다가 다 돌면 다시 처음부터 차례대로 그것들을 잡아먹는다. 목숨이 끝나려 할 때는 모든 용들이 독을 토해 내어 다시는 먹지 못하고 기아의 불에 태워져서 날개를 치솟은 채 곧바로 아래로 떨어져서 풍륜제風輪際505)에 이르렀다가 바람에 휩쓸려 다시 위로 올라온다. (이처럼) 일곱 번을 가고 오길 되풀이하다가 머물 만한 곳이 없어지면 마침내 금강륜산 정상에 이르러 목숨을 마치게 된다.
(이 가루라는) 많은 용들을 먹었으므로 몸속의 독기가 마침내 맹렬한 불을 내게 되니, 난타 용왕과 발난타 용왕이 보산寶山이 탈까 두려워서 마침내 큰비를 내리는데 그 빗방울이 마치 바퀴의 축과 같다. 그 불을 끄고 나면 몸통의 살이 점차로 흩어지고 오직 심장만 남는데, 그 크기는 사람 장딴지만 하고 아주 맑은 유리와 같다. 전륜왕은 그것을 얻어 보배구슬로 삼고 제석천은 그것을 얻어 상투에 다는 구슬로 삼는다.506)

◉ 긴날락緊捺洛(ⓢ kiṃnara)
“긴날락”이란 여기 말로 가신歌神이라 한다. 노래를 잘 불러서 건달바와 함께 천신들을 섬기면서 천신이 필요로 할 때마다 곧장 서로 오고 간다.
또는 ‘의신疑神’이라 한다. 몸뚱이는 축생인데 형상은 사람과 비슷하여 얼굴이 단정하고 정수리에 뿔이 나 있다. 사람들이 보면 ‘사람인지 귀신인지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다’고 의심하기 때문에 의신이라 한다. 이는 천의 악신樂神이다.

◉ 막호락가莫呼洛伽(ⓢ mahoraga)
“막호락가”라고 한 것에서 ‘막호’는 여기 말로 ‘대大’이고 ‘락’은 ‘배(腹)’이며 ‘가伽’는 ‘가다(行)’를 뜻한다. 이는 이무기 신(蟒神)으로서 또한 지룡地龍이라고도 한다. 발 없이 배로 다니는 신이니, 곧 세간의 조신厝神이다. 사람들에게 술과 고기를 받으면 모두 이무기의 배 속으로 들어간다. 또 용인지 뱀인지 구별하기 어렵지만, 이것은 용과 혼동되므로 그 측면을 지칭한 것이다.

001_0148_a_01L胎生者食三生龍除其化生其卵
001_0148_a_02L生者食二生龍除化除胎其濕生
001_0148_a_03L唯食其濕此四天下有一化生
001_0148_a_04L迦樓羅王名曰正音壽八千歲
001_0148_a_05L別新食一大龍王五百小龍遶四天
001_0148_a_06L周而復始次第食之命欲終時
001_0148_a_07L諸龍吐毒不復能食飢火所燒
001_0148_a_08L翅直下至風輪際爲風所吹而復
001_0148_a_09L上來往返七迴無處停足遂至金
001_0148_a_10L剛輪山頂上命終以食諸龍身肉毒
001_0148_a_11L遂發猛火其難陀龍王及跋難陀
001_0148_a_12L恐燒寶山遂降大雨渧如車輪 [148]
001_0148_a_13L滅其火身肉消散唯有心在大如
001_0148_a_14L [149] 純淸瑠璃輪王得之用爲珠
001_0148_a_15L帝釋得之爲髻中珠緊捺洛者
001_0148_a_16L此云歌神能唱歌詠乾闥婆同事諸
001_0148_a_17L天須之時更互來去又云疑神
001_0148_a_18L體是畜生形狀似人面貌端正
001_0148_a_19L有一角人見生疑不知爲人爲鬼畜
001_0148_a_20L故名疑神此是天之樂神莫呼洛
001_0148_a_21L伽者莫呼此云大洛名爲腹伽名
001_0148_a_22L爲行此是蟒神亦云地龍無足腹行
001_0148_a_23L卽世間厝神受人酒1) [33] [150] 悉入蟒
001_0148_a_24L又龍蛇難辨以濫於龍故偏指也

001_0148_b_01L세친의 『섭대승론석』에서는 “앞에서 이미 용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다시 막호락가라고 언급한 것은 큰 이무기를 포함시킨 것이다.”507)라고 하였다.

◉ 인비인人非人
“인비인 등”이라 한 것에는 팔부八部의 귀신들이 있는데, 모두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와서 법을 듣기 때문에 ‘인비인’이라 한 것이다. 따라서 『사리불문경』에서는 “팔부의 귀신을 모두 인비인이라 한다.”508)고 하였다.
또 ‘인’은 모든 사람을 다 포괄하고, ‘비인’이란 모든 인비인을 모두 포괄한다고 한다. 또 인비인이라 한 것은 ‘이것이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라고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 팔부대중으로 태어난 인연
『사리불문경』에서는 팔부의 인연에 대해 설하는데, 거기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팔부의 귀신은 어떤 인연으로 악도惡道에 태어났는데도 항상 정법正法을 듣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종류의 업 때문이다. 첫째는 악업을 지어 악도에 태어난 것이고, 둘째는 선업을 지어 쾌락을 많이 받는 것이다. 이러한 여덟 부류는 모두 ‘인비인’이다.
천신天神은 전생의 몸일 때 수레 등으로 삼보三寶와 부모와 뛰어난 현인들을 공양하였으나 오히려 아끼고 아첨하며 질투하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이 몸을 받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보광정승천신普光淨勝天神 등과 같다.
허공의 용신龍神은 전생에 덕의 근본을 닦아 세우고 널리 보시를 행하였지만 정념正念에 의지하지 않고 성질이 급해 성을 잘 냈기 때문에 이 몸을 받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마니광용왕摩尼光龍王 등과 같다.
야차신夜叉神은 전생에 큰 보시를 잘하였거나, 혹은 먼저 손해를 준 다음에 이익을 주었으니, 공덕이 (손해보다) 더 많은지 적은지에 따라서 이 몸을 받게 된 것이다.
건달바乾闥婆는 전생에 또한 조금 성내는 일이 있었지만 항상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푸른 연꽃으로 자기를 장엄하고 온갖 기악을 연주했고 지금 이 신神이 되어 항상 여러 천신을 위해 온갖 기악을 연주해 주기 때문에 악신樂神이라 불린다.
아수라阿脩羅는 의지가 강하지만 좋은 벗이 짓는 청정한 복을 따르지 않고, 홀리고 속이는 사람을 잘 따르면서 여러 가지 삿된 복을 짓거나 삿된 스승에 의지하여 보시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001_0148_b_01L世親攝論云前已擧龍今復擧莫呼
001_0148_b_02L洛伽爲攝大蟒人非人等者有八部
001_0148_b_03L鬼神悉非人作人形來聽法故曰人
001_0148_b_04L非人故舍利弗問經云非八 [151] 部鬼神
001_0148_b_05L皆曰人非人也又云人者總攝一切
001_0148_b_06L非人者總攝一切人非人又云
001_0148_b_07L非人者疑云爲是人爲非人也依舍
001_0148_b_08L利弗問經說八部因彼云舍利弗白
001_0148_b_09L佛言世尊八部鬼神以何因綠
001_0148_b_10L於惡道常聞正法佛言以二種業
001_0148_b_11L一以惡業生於惡道二以善業多受
001_0148_b_12L快樂此八部皆曰人非人 [152] [153] 先身以
001_0148_b_13L車轝等供養三寶父母賢勝之人
001_0148_b_14L懷慳儉 [154] 誑嫉故受此身如晋光淨勝
001_0148_b_15L天神等 [155] 先世修建德本廣行布
001_0148_b_16L不依正念急性好瞋故受此身
001_0148_b_17L如摩尼光龍王等夜叉神者先世好
001_0148_b_18L大布施或先損害然後 [156] 饒盆隨功勝
001_0148_b_19L故受此身乾闥婆者先生亦少
001_0148_b_20L有瞋恚常好布施以靑蓮華自嚴
001_0148_b_21L衆妓 [157] 今爲此神常爲諸天奏諸
001_0148_b_22L [158] 因名樂神阿脩羅者志强
001_0148_b_23L隨善友所作淨福好逐幻僞之人
001_0148_b_24L諸邪福依傍邪師甚好布施又樂

001_0148_c_01L또한 다른 사람들이 다투는 일을 즐겨 보았기 때문에 이 몸을 받은 것이다.
가루라신迦樓羅神은 전생에 크게 버리고 베푸는 행을 닦았지만 항상 거만한 마음이 있어서 중생을 업신여기므로 이 몸을 받은 것이다.
긴나라緊那羅는 옛날에 다른 사람에게 보리심을 내라고 권하기를 좋아하였지만 그 자신의 뜻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여러 삿된 행을 좇았기 때문에 이 몸을 받게 된 것이다.
마후라신摩睺羅神도 보시하고 법을 보호하였지만 성을 잘 내는 성질이었으므로 이 몸을 받게 된 것이다.”509)

● 팔부대중이 정토淨土에 머무는 이유
또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째서 정토는 삼계소행의 처소(三界所行之處)를 넘어서 있는데도 천天 등을 권속으로 삼는 일이 있는가? 천 등은 모두 삼계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청정한 식이 (팔부대중들을) 이와 같이 섭수하고 변현해 내어 정토를 장엄한 것이다. 따라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는 교화할 유정을 성숙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변화의 종류를 나타내 보인다. 예를 들어 겁비나왕劫比拏王을 조복시키고자 한량없는 전륜왕의 무리와 그를 에워싼 권속을 나타냈던 경우와 같다.510) 어떤 경우는 여러 보살들이 한량없는 천·용 등의 몸을 변화로 지어내어 정토에 머물면서 부처님께 공양하게 하고, 어떤 경우는 자기가 몸을 천·용 등으로 변화해서 여래를 도우면서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정토에 팔부가 있다 해도) 과실이 없다.”511)
양梁의 『섭대승론석』제15권에서는 “정토에는 실로 이와 같은 천·용 등의 대중들은 없지만, 정토를 텅 비지 않게 하려고 부처님께서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무리를 변화로 지어내신 것”512)이라고 하였다.

차) 주지住持의 원만

  광대한 법미法味의 희락에 의해 유지되고,

  이것은 열 번째로 주지住持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513)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 정토에서는 대승의 법미의 희락에 의해 유지되고, 식食(음식)514)은 능히 머물도록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맡아서 유지시킨다(任持)’는 뜻이다.이상은 친광이 그 ‘식’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다.
 () 이미 정토가 삼계소행의 처소를 넘어서 있다고 했는데, 어째서 음식(食)이 있을 수 있는가? 또 무루법은 음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음식은 세 가지 존재(三有 : 삼계)의 중생들을 기를 수 있지만

001_0148_c_01L觀他鬪訟故受此身迦樓羅神者
001_0148_c_02L世修大捨施常有高心以陵 [159] 於物
001_0148_c_03L受此身緊那羅者昔好勸人發菩
001_0148_c_04L提心未正其志逐諸邪師 [160] 故受此
001_0148_c_05L摩睺羅神者亦布施護法性好
001_0148_c_06L瞋恚故受此身又佛地論云云何
001_0148_c_07L淨土超過三界所行之處而有天等
001_0148_c_08L以爲眷屬天等皆是三界攝故淨識
001_0148_c_09L如是攝受變現爲嚴淨土故不相違
001_0148_c_10L或爲成熟所化有情示現如是變化
001_0148_c_11L種類如爲調伏劫比拏王現化無量
001_0148_c_12L轉輪王衆眷屬圍繞或諸菩薩化作
001_0148_c_13L無量天龍等身住淨土中以供養佛
001_0148_c_14L或自化身爲天龍等翼從如來
001_0148_c_15L無有過梁攝論云第十
於淨土中
001_0148_c_16L無如此天龍等衆欲令不空故佛化
001_0148_c_17L作如此雜類

001_0148_c_18L
廣大法味喜樂所持

001_0148_c_19L
釋曰此明第十2) [34] 持圓滿親光釋
001_0148_c_20L謂於此中大乘法味喜樂所持
001_0148_c_21L能令住是任持義此上親
光釋義
已說淨土
001_0148_c_22L超過三界所行之處云何有食 [161]
001_0148_c_23L漏法不應名食食能長養三有衆生
001_0148_c_24L「害」疑「宍」 「住」異作「任」

001_0149_a_01L이 정토는 존재가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이는 외인의 물음이니, 그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삼계를 넘어서 있는데 어째서 음식이 있는지를 물은 것이다. 둘째는 무루법은 음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는 삼계의 존재가 끊어졌으므로 음식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맡아서 유지시키는 인(任持因)’에 해당하므로 음식이라 해도 된다.논주의 간략한 대답이다. 무루이긴 해도 유지시켜 주므로 음식이라 해도 된다.예를 들면 그대들의 종宗에서 색계 등에 태어나 무루의 선정에 들어간다고 하는 경우도 ‘음식(食)’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는 경부종에게 다음과 같이 반론한 것이다. ‘그대들의 종에서는 색계 등에 태어나 무루의 선정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비록 무루이지만 또한 음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과거의 음식을 음식이라고 해서는 안 되니, 과거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살바다종에서 과거의 음식을 음식으로 여기는 것을 논파한 것이고, 또한 소승에서 다 같이 무루의 음식을 인정하는 것을 논파한 것이다.이것도 역시 그러해야 하니, 유지시키는 원인이므로 음식이라고 한 것이다.이는 바로 논주가 자종自宗의 뜻을 세운 것이다.예를 들어 유루법은 비록 무루를 장애하지만 유루를 유지시키는 것이라면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무루도 이와 같아서 비록 유루를 끊었더라도 무루를 유지시키는 것이라면 어찌 음식이 아니겠는가?이는 논주가 음식(食)의 의미를 정립한 것이다.
이 정토에서 여러 부처님과 보살은 후득의 무루지로 대승의 법미法味를 설하거나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큰 희락을 내고, 또 정체지正體智515)로 진여의 맛(眞如味)을 느끼고 큰 희락을 내니, (이 희락이) 몸을 잘 유지시켜서 단절되지 않게 하면서 선법善法을 기를 수 있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하는 것이다.이는 대승의 정의를 진술한 것이다.516)
세친과 무성에게는 별다른 해석이 없다.
또 『법화경』에서는 “그 국토의 중생은 항상 두 가지 음식으로 유지되니, 첫째는 법희식法喜食517)이고, 둘째는 선열식禪悅食518)이다.”519)라고 하였고, 그 경의 게송에서는 “법희식과 선열식 이외에 다시 다른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다.”520)고 하였다.

카) 사업事業의 원만

  중생의 모든 이익(義利)들을 실제로 지어 주며,

  이것은 열한 번째로 사업事業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정토에서 (여래가) 스스로 모든 유정들의 모든 의리義利를 실제로 지어 주거나, 혹은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스스로 모든 의리를 짓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이익을 ‘의義’라고 하고 미래의 이익을 ‘이利’라고 하며, 세간적인 것을 ‘의’라고 하고 출세간적인 것을 ‘이’라고 하며, 악을 떠나는 것을 ‘의’라고 하고 선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이’라고 하며, 복덕을 ‘의’라고 하고

001_0149_a_01L此斷有故應不名食此外人問有其三意
一問超過三界云何
001_0149_a_02L有食二無漏法不應名食
三斷三有故應不名食
是任持因故亦
001_0149_a_03L名食論主略答雖是無漏
而任持故亦名爲食
如汝宗中
001_0149_a_04L色界等入無漏定亦應名食此反
001_0149_a_05L經部汝宗生色界等入無漏定
001_0149_a_06L是無漏亦應名食 [162] 非過去食應名爲
001_0149_a_07L過去無故此破薩婆多用過去食爲食
抑破小乘合許無漏食此亦
001_0149_a_08L應爾是任持因故說爲
[163] 此即論主立自宗義
如有漏法雖鄣無
001_0149_a_09L然持有漏得名爲食無漏亦爾
001_0149_a_10L雖斷有漏然持無漏云何非食論主成
立食義

001_0149_a_11L此淨土中諸佛菩薩後得無漏能說
001_0149_a_12L能受大乘法味生大歡 [164] 又正體智 [165]
001_0149_a_13L眞如味生大喜樂能任持身令不斷
001_0149_a_14L長養善法故名爲食此申大
乘正義
世親
001_0149_a_15L無性更無別釋又法華云其國衆
001_0149_a_16L常以二食一者法喜食二者禪
001_0149_a_17L悅食卽彼偈云法喜禪悅食更無
001_0149_a_18L餘食想

001_0149_a_19L
現作衆生一切義利

001_0149_a_20L
釋曰此第十一事業圓滿親光釋云
001_0149_a_21L謂於此中自能現作一切有情一切
001_0149_a_22L義利或令一切有情自作一切義利
001_0149_a_23L現益名義當益名利世間名義出世
001_0149_a_24L名利離惡名義攝善名利福德名義

001_0149_b_01L지혜를 ‘이’라고 하니, 이와 같이 구별된다. (여래는) 고요한 선정에 있으면서도 전생에 닦은 가행加行의 원력願力으로 인해 자유자재로 모든 유정들에게 모든 의義·이利를 지어 줄 수 있는 것이다.”521)
세친과 무성에게는 별다른 해석이 없다.

타) 섭익攝益의 원만

  모든 번뇌와 전구를 없애고,

  이것은 열두 번째로 섭익攝益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불지경론』에서는 번뇌와 전구纏垢라는 두 가지 차별에 대해 세 번의 설명(復次)으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그 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번뇌를 전구라고 한다. 번뇌와 전구의 차별이란 이름만 다를 뿐이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8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뇌의 차별이란 전·구 등을 말한다. 자주 일어나 현행하므로 ‘전’이라 하고, 자성이 오염되었으므로 ‘구’라고 한다.≻522)
또 번뇌란 128가지 근본번뇌를 말한다.욕계의 사제四諦에는 각각 열 가지가 있고, 색계·무색계의 사제에는 진瞋을 제외한 아홉 가지가 있으므로, 모두 112가지가 있다. 욕계의 수도에 여섯 가지 사使(번뇌)가 있으니, 즉 탐貪·진瞋·만慢·무명無明·신견身見·변견邊見을 말하고, 색계·무색계의 수도에 진瞋을 제외하고 각기 다섯 가지 사가 있다. (욕계·색계·무색계의 번뇌를) 합하면 128가지가 있다. 이는 『현양성교론』 제1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전纏이란 무참無慚·무괴無愧 등이다.‘등’이라 한 것은 여덟 가지 전에서 (나머지) 혼침惛沉·도거掉擧·악작惡作·질투嫉妬·간인慳恡·수면睡眠523)을 함께 취한 것이다. 이는 『유가사지론』 제8권과 『잡집론』 제7권의 설명과 같다.구垢는 첨諂·광誑·교憍 등이다.‘등’이라 한 것은 여섯 가지 구에서 (나머지) 해害·한恨·뇌惱의 세 가지를 함께 취한 것이다.
또 소지장이나 여러 수면隨眠들을 번뇌라고 하고, 그것이 현기現起한 것을 ‘전구’라고 한다. (이 전구에서) 근본혹을 ‘전’이라 하고 수혹을 ‘구’라고 한다. 이와 같은 번뇌와 전구를 멀리 떠나 있는 것을 ‘섭익攝益’이라 한다.524)
그런데 (‘모든 번뇌와 전구를 없애고’라는) 이 경문은 세 개의 책에 모두 다르게 되어 있다. 『섭대승론』에서 열거한 경문에는 ‘재횡灾橫’은 나오지만 ‘전구’는 나오지 않으니, 그 논에서 “모든 번뇌와 재횡을 없앤다.”525)고 하였다. 지금 이 『해심밀경』에서는 ‘전구’는 나오지만 ‘재횡’은 나오지 않는다. 『불지경』의 경문에서는 번뇌·재횡·전구를 모두 설하니, 따라서 그 경에서 “모든 번뇌와 재횡과 전구를 소멸시켰다.”526)고 하였다. 재횡의 뜻을 해석하면 『불지경론』 및 『섭대승론』과 같다.527)

파) 무외無畏의 원만

  온갖 마를 멀리 떠났으며,


001_0149_b_01L智慧名利如是等別雖在寂定
001_0149_b_02L先所修加行願行 [166] 任運能作一切有
001_0149_b_03L情一切義利世親無性更無異釋

001_0149_b_04L
蠲除一切煩惱纒垢

001_0149_b_05L
釋曰此第十二攝益圓滿依佛地論
001_0149_b_06L煩惱纒垢二種差別三復次釋故彼
001_0149_b_07L論云卽諸煩惱名爲纒垢解云煩惱纒
垢差別異名
001_0149_b_08L如瑜伽第八卷云煩惱差別者謂纒垢等
數起現行故名爲纒自性染汚故名爲垢
又煩
001_0149_b_09L惱者 [167] 百二八根本煩惱欲界四諦各有
色無色界
001_0149_b_10L四諦除瞋各九合有一百一十二欲界修道有六
使謂食瞋慢無明身見邊見色無色界修道各五
001_0149_b_11L除瞋合有一百二十
如顯揚第一說
纒者卽是無慚愧等
001_0149_b_12L等者於八纒中等取惛沉掉擧惡作
嫉妬慳恡 [168] 如瑜伽第八雜集第七
垢者
001_0149_b_13L是諂誑憍等等者於六垢中
等取害恨惱三
又所知障
001_0149_b_14L或諸隨眠名爲煩惱卽彼現起說名
001_0149_b_15L纒垢本惑名纒隨惑名垢如是遠
001_0149_b_16L離煩惱纒垢名爲攝益然此經文
001_0149_b_17L本不同攝大乘論所列經文雖有灾
001_0149_b_18L而無纒垢故坡論云蠲除一切
001_0149_b_19L煩惱灾橫今依此經雖有纒垢
001_0149_b_20L無灾橫佛地經文具說煩惱灾橫纒
001_0149_b_21L故彼經云滅諸煩惱灾橫纒垢
001_0149_b_22L灾橫義如佛地論及攝大乘

001_0149_b_23L
遠離衆魔

001_0149_c_01L
  이것은 열세 번째로 무외無畏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온갖 마”라고 한 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번뇌마·온마·사마·천마를 말한다.528) 예를 들면 친광은 “이와 같은 네 가지 마는 모두 모든 선법을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마’라고 한다.”529)고 하였다.
그런데 이 네 가지 마를 떠나는 일에도 차별이 있다.
살바다종과 대승에서 말하는 교화의 모습(化相)에 의하면,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불도를 이루었을 때 무간도·해탈도로 번뇌마를 깨뜨렸고, 무여의열반계에 들 때 온마를 깨뜨렸으며, 3개월간의 수명을 연장하실 때530) 사마를 깨뜨렸고, 자정慈定531)에 들었을 때 천마를 깨뜨렸다고 한다.
대승의 이치에 의거해 진실을 설한다면, 가령 『불지론』에서 말한 것처럼 초지 이상에서 거친 네 가지 마를 떠나게 되고,532) 불과에서 마침내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의미상으로 분별하자면, 십신十信 이상의 모든 지위에서 점차로 마를 멀리 떠난다는 것이니, 이치에 맞게 생각해야 한다.

하) 주처住處의 원만

  장엄된 모든 곳보다 뛰어난 여래 장엄의 의지처이고,

  이것은 열네 번째로 주처住處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 정토에서는 부처님이 머무는 곳이 모든 보살들이나 그 밖의 사람들의 장엄된 거주처보다 훨씬 뛰어나니, 오직 여래만이 오묘한 장식으로 장엄된 곳을 거주처로 삼는다. 장엄된 모든 거주처들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주처가 원만하다고 하는 것이다.”533)
세친과 무성에게는 다시 별다른 해석은 없다.

거) 길(路)의 원만

  대념과 대혜와 대행을534) 다니는 길로 삼으며,

  이것은 열다섯 번째로 길(路)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정토에서는 대념과 대혜와 대행을 가는 길로 삼고 걸어 다니는 곳으로 삼기 때문에 ‘다니는 길(遊路)’이라 했으니, 이는 ‘도道’의 다른 이름이다.
문소성혜聞所成慧535)를 대념이라 하니, 교법을 듣고 나서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 뜻에 전도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001_0149_c_01L
釋曰顯第十三無畏圓滿言衆魔者
001_0149_c_02L如前所說煩惱蘊死及與天魔如親
001_0149_c_03L光說如是四種皆能損害諸善法故
001_0149_c_04L說名馬魔然離四魔有差別者
001_0149_c_05L薩婆多及大乘化相菩提樹下成佛
001_0149_c_06L道時無間解脫破煩惱魔入無餘
001_0149_c_07L依涅槃界時能破蘊魔留三月命
001_0149_c_08L破死魔入慈定時能破天魔若依
001_0149_c_09L大乘理實說者如佛地論初地以上
001_0149_c_10L離麤四魔於佛果中究竟永離
001_0149_c_11L義分別十信已上於諸地中漸次遠
001_0149_c_12L如理應思

001_0149_c_13L
過諸莊嚴如來莊嚴之所依處

001_0149_c_14L
釋曰辨第十四住處圓滿親光釋云
001_0149_c_15L謂於此中佛所住處勝過一切菩薩
001_0149_c_16L及餘莊嚴住處唯是如來妙飾莊嚴
001_0149_c_17L爲所住處由勝一切莊嚴住處是故
001_0149_c_18L說名住處圓滿世親無性更無異釋

001_0149_c_19L
大念慧行以爲遊路

001_0149_c_20L
釋曰顯第十五路圓滿也親光釋云
001_0149_c_21L謂於此中大念大慧及以大行
001_0149_c_22L所行路所遊履故名爲遊路是道異
001_0149_c_23L聞所成慧名爲大念聞已記1) [35] [169]
001_0149_c_24L「恃」疑「持」

001_0150_a_01L사소성혜思所成慧536)를 대혜라고 하니, 이치에 맞게 깊이 생각하여 (그 의미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소성혜修所成慧537)를 대행이라 하니, 닦아 익힌 힘으로 인해 진리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크다(大)’고 한 것은, 염(·혜·행) 등이 대승의 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고, 저 (대승의 법에서 나온) 과果이기 때문이며, 저 (대승의 법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 가지 묘한 지혜의 길을 밟아서 정토를 왕래하기 때문에 그것을 ‘다니는 길’이라고 했다.
이것은 보살이 세 가지 묘한 지혜가 원인이 되어 정토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다니는 길’이라 했다고 설한 것이다.팔지 이상의 보살은 항상 선정의 지위에 들어 있는데 어떤 지혜를 문혜라고 하겠는가? 이 대승에 준해 보면, 선정의 지위에 있다 해도 의미상 문혜라고 설한 것이니, 이치상 과실이 없다.
모든 여래의 경우, 대념이란 무분별지이니, 진여의 이치에 안주하는 것만을 염하기 때문이다. 대혜란 후소득지이니, 모든 법의 진眞·속俗의 모습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지혜는 모두 정토를 만들어 내는 데 증상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둘 다 ‘행’이라 하고, 이 두 가지 지혜를 통해서 정토에 태어나기 때문에 ‘다니는 길’이라 하였다.
혹은 대념의 행은 자리행이니, 안으로 거두어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의 행은 이타행이니, 밖으로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서대로 모두 여래의 두 가지 정토에 나게 하므로 ‘다니는 길’이라 하였다.자세한 것은 『불지경론』의 설과 같다.538)
무성과 세친에게는 다시 별다른 해석은 없다.

너) 수레(乘)의 원만

  위대한 지止와 오묘한 관觀을 탈것으로 삼고,

  이것은 열여섯 번째로 수레(乘)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지止는 삼마지三摩地(ⓢ samādhi)이고 관觀은 반라야般羅若(ⓢ prajña)이다. ‘대大’의 뜻은 이전과 같다. 이 두 가지가 똑같이 실어 나르기 때문에 ‘탈것’이라고 했다. 이 지와 관을 타고 그 적절한 근기에 맞게 앞서 말한 길(대념·대혜·대행)을 다니는데, 그 길이 총체적 지위에 해당한다면 지위 중의 지·관을 별도로 ‘탈것(所乘)’이라고 이름한 것이다.총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았으니, 생각해 보라.539)
세친의 해석에서는 “지와 관을 타고서 노닐며 나아가기 때문이다.”540)라고 하였고, 무성의 해석에서는 “지와 관을 타고서 세 가지 지혜의 길에 노닐면서 가야 할 동산으로 나아가니, 성문·독각·보살들이 타고 있는 지와 관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001_0150_a_01L無倒義故思所成慧名爲大慧
001_0150_a_02L理審思得決定故修所成慧名爲大
001_0150_a_03L由修習力趣眞理故大者念等
001_0150_a_04L緣大乘法而生起故是彼果故彼所
001_0150_a_05L攝故履三妙慧淨土往還故名遊
001_0150_a_06L此說菩薩因三妙慧得入淨土
001_0150_a_07L名遊路八地己上常入定位即用何慧名爲聞
准此大乘設入定位義說聞慧
001_0150_a_08L理無
若諸如來大念卽是無分別智
001_0150_a_09L由念安住眞如理故大慧卽是後所
001_0150_a_10L得智分別諸法眞俗相故此二皆有
001_0150_a_11L造作淨士增上業用故俱名行由此
001_0150_a_12L二智通生淨土故名遊路或大念行
001_0150_a_13L是自利行內攝記故大慧行者是利
001_0150_a_14L他行外分別故如其次第通生如
001_0150_a_15L來二種淨土故名遊路具如佛
地論說
無性
001_0150_a_16L世親更無異釋

001_0150_a_17L
大止妙觀以爲所乘

001_0150_a_18L
釋曰是第十六乘圓滿也親光釋云
001_0150_a_19L止謂三摩地觀謂般羅若大義如前
001_0150_a_20L此二等運故名所乘乘此止觀
001_0150_a_21L其所應行前道 [170] [171] 應住 [172] 住中止觀
001_0150_a_22L名所乘總別不
顯思
世親釋云乘止及觀
001_0150_a_23L而遊趣故無性釋云以乘止觀
001_0150_a_24L三慧路往所趣國 [173] 勝諸聲聞獨覺菩

001_0150_b_01L‘위대하다’고 한다.”541)고 하였다.

더) 문門의 원만

  위대한 공해탈·무상해탈·무원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으며,

  이것은 열일곱 번째로 문門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대궁전은 세 가지 해탈문을 들어가는 입구로 삼는다. 해탈이란 출리열반出離涅槃에 해당한다. 즉 위대한 공(·무상·무원) 등을 해탈문이라고 이름하니, 이 문을 따라서 정토에 들어가는 것이다.
변계소집으로 생겨난 법의 무아無我를 ‘공’이라 하고, 이 공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542)를 공空해탈문이라고 이름한다.
상相은 열 가지이니, 첫째는 색이고, 둘째는 성이며, 셋째는 향이고, 넷째는 미이며, 다섯째는 촉이고, 여섯째는 남자이며, 일곱째는 여자이고, 여덟째는 태어남이며, 아홉째는 늙음이고, 열째는 죽음이다. 이 열반에는 이와 같은 상들이 없기 때문에 ‘무상’이라 하고, 이 무상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543)를 무상無相해탈문이라 이름한다.
‘원願’이란 바라며 구하는 것이니, 삼계의 고통을 관하여 더 이상 바라며 구하는 것이 없으므로 ‘무원’이라 하고, 이 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544)를 무원無願해탈문이라 이름한다.
이 공(·무상·무원) 등의 세 가지 해탈문을 따라 정토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문’이라 한다. ‘위대하다(大)’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 정토에도 사업·길·수레·문 등이 있어야 하니, 유정들이 (정토의) 진실한 공덕을 기쁘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공·무상·무원의) ‘행’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545)『불지경론』에서 말한 것처럼, 이 문구를 해석하면서 당연히 세 가지 해탈문을 설명하는 장章이 있어야 한다.

러) 의지依持의 원만

  무량한 공덕들로 장엄되고 대보배(大寶) 화왕華王들로 건립된 대궁전에 머물고 계셨다.

  이것은 열여덟 번째로 의지依持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
『불지경론』에서는 “마치 땅 등이 풍륜 등에 의지하거나 또는 세간의 궁전이 땅에 의지하듯, 이와 같이 정토는 무량한 공덕들로 장엄되고 대보배 홍련화들로 건립된 것이다.”546)라고 하였고, 그 다음에는 세 가지 의미로 ‘대大’와 ‘왕王’을 해석하였다.

첫째, 홍련화라는 대보배로 이루어졌고,

001_0150_b_01L薩所乘止觀故名爲大

001_0150_b_02L
大空無相無願解脫爲所入門

001_0150_b_03L
釋曰是第十七門圓滿也親光釋云
001_0150_b_04L謂大宮殿三解脫門爲所入處解脫
001_0150_b_05L卽是出離涅槃卽大空等名解脫門
001_0150_b_06L依從是門而入淨土遍計所執生法
001_0150_b_07L無我說名爲空緣此三摩地名空
001_0150_b_08L解脫門相謂十相一色二聲三香
001_0150_b_09L四味五觸六男七女八生九老
001_0150_b_10L十死卽此涅槃無此等相故名無
001_0150_b_11L緣此三摩地名無相解脫門
001_0150_b_12L謂願求觀三界苦無所願求故名
001_0150_b_13L無願緣此三摩地名無願解脫門
001_0150_b_14L此空等三解脫門得入淨土故名爲
001_0150_b_15L大如前說此淨土中亦應有事
001_0150_b_16L路乘門等爲令有情欣樂實德故就
001_0150_b_17L行說如論說須釋此中
應辨三解脫門章

001_0150_b_18L
無量功德衆所莊嚴大寶華王衆所建立
001_0150_b_19L大宮殿中

001_0150_b_20L
釋曰明第十八依持圓滿佛地論云
001_0150_b_21L謂如地等依風輪等或如世間宮殿
001_0150_b_22L依地如是淨土無量功德衆所莊嚴
001_0150_b_23L大寶紅蓮華王衆所建立下以三義
001_0150_b_24L釋大及王一者謂紅蓮華大寶所成

001_0150_c_01L이와 같이 대보배는 무량한 공덕과 온갖 선들에 의해 일으켜진 것으로서 온갖 보배들 중에서 뛰어나므로 ‘대’라고 하였고, ‘대’를 해석하였다.이 보배 홍련은 여러 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므로 ‘화왕’이라 하였다.‘왕’을 해석하였다.
둘째, 혹은 이 보배 홍련은 여러 보살들의 선근에 의해 일으켜진 홍련화들과 비교해 보면 더 뛰어나므로 ‘대’라고 하였고, ‘대’를 해석하였다. 부처님은 법왕이고 이 꽃은 부처님의 가장 수승한 선근에 의해 일으켜진 것이므로 ‘화왕’이라 하였다. ‘왕’을 해석하였다.
셋째, 또 이 보배 꽃은 얻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대보배’라고 하였고, ‘대’를 해석하였다. 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화왕’이라 하였다. ‘왕’을 해석하였다. 이 꽃은 하나가 아니거나 혹은 꽃잎이 많기 때문에 ‘들(衆)’이라고 한 것이다.547)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다음의 한 구는 ‘의지의 원만’을 나타낸 것이다. 마치 대지 등이 풍륜에 의지해 머무는 것처럼, 이 부처님의 정토는 무엇에 의지하겠는가? 무량한 공덕들로 장엄되고 대홍련화들로 건립된 것이다.548)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홍련화는 여러 꽃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대보배 화왕’이라고 하였다. 혹은 여래를 대왕이라 하고, 이 홍련화는 부처님의 의지처이기 때문에 ‘왕’을 따라서 이름 붙인 것이다. ‘건립되었다’는 것은 부처님의 정토가 이 화왕에 의지해서 오랫동안 상속하면서 단절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구는 의지의 원만함을 밝힌 것이다.”549)

② 부처님의 총체적 공덕과 개별적 공덕을 해석함

  이 박가범550)께서는 가장 청정한 깨달음으로,

  이상으로 주처의 장엄에 대해 해석하였고, 이하부터는 두 번째로 부처님의 총체적 공덕과 개별적 공덕에 대해 해석하겠다.
어째서 여기에서는 먼저 주처를 말하고 나중에 공덕을 말하는가? 친광은 해석하길, “세존께서 청정한 불토에 의지해 이와 같은 공덕을 갖추고서 이 경을 설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551)라고 하였다. 공덕을 해석하면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총체적 공덕을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개별적 공덕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공덕을 설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001_0150_c_01L如是大寶無量功德衆善所起於衆
001_0150_c_02L寶中勝故名大
此寶紅蓮於諸
001_0150_c_03L華中最爲殊勝故名華王
二者
001_0150_c_04L此寶華望諸菩薩善根所起紅蓮華
001_0150_c_05L勝故名大
佛是法王是佛最
001_0150_c_06L勝善根所起故名華王
三者又此
001_0150_c_07L寶華極難得故名爲大
寶華中
001_0150_c_08L最勝故名華王
此華非一或華
001_0150_c_09L葉多故名爲衆世親釋云次有一
001_0150_c_10L顯依持圓滿如大地等依風輪住
001_0150_c_11L此佛淨土何所依持無量功德衆所
001_0150_c_12L莊嚴大紅蓮華之所建立無性釋云
001_0150_c_13L此紅蓮華於諸華中最爲殊勝是故
001_0150_c_14L說名大寶華王或卽如來說名大王
001_0150_c_15L此紅蓮華是佛依處從王爲名
001_0150_c_16L所建立者謂佛淨土依此華王
001_0150_c_17L時相續無有間絕此句顯示依持圓
001_0150_c_18L滿

001_0150_c_19L
是薄伽梵最淸淨覺

001_0150_c_20L
釋曰上來已釋住處莊嚴自下第二
001_0150_c_21L釋總別德如何此中先處後德親光
001_0150_c_22L釋云爲顯世尊依淨佛土具如是德
001_0150_c_23L說此經故就釋德中復分爲二
001_0150_c_24L釋總德二釋別德說此二德有何

001_0151_a_01L
『불지경론』에 의하면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모든 부처님들은 그 밖의 다른 큰 스승(大師)들과는 다름을 나타내기 위해 세존의 공덕이 수승함을 설한 것이다. 둘째,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청정한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해 여래의 공덕이 원만함을 현시한 것이다.”552)
무성의 『섭대승론석』에서는 “박가범은 모든 성문·독각·보살들과는 달리 깨달음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553)라고 하였다.

가. 부처님의 총체적 공덕
“박가범께서는”이라 한 것은 덕 있는 사람을 나타낸 것이고, “가장 청정한 깨달음으로”라고 한 것은 뛰어난 공덕을 바로 밝힌 것이다.
『불지경론』에 의거해서 해석하면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모든 유위·무위의 깨달아야 할 경계에 대해 깨달음을 바로 개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깨달아야 할 경계에 대해 정묘淨妙하고 원만圓滿한 깨달음을 바로 개시하기 때문이다. 셋째, 모든 여소유성과 진소유성554)에 대해 깨달음을 바로 개시하기 때문이다.”555)
  (『불지경론』의) 세 가지 해석에는 차이가 있다. 첫째는 법수에 의거해 청정한 깨달음을 해석한 것이니, 유위와 무위가 모든 법을 다 포섭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두 가지 지혜에 의거해서 청정한 깨달음을 해석한 것이니, ‘정묘와 원만’이 모든 지혜를 다 포괄하기 때문이다. ‘정묘’란 속제를 대상으로 하는 지를 말하고, ‘원만’이란 진제를 대상으로 하는 지를 말한다.셋째는 진제·속제에 의거해 청정한 깨달음을 해석한 것이니, 이제에 의해 모든 경계를 다 포괄하기 때문이다. 뒤의 경문에서는 ‘진소유성이란 오수온五數蘊(오온) 등과 같은 것이고, 여소유성이란 칠진여七眞如556) 이다’라고 했는데, 이 진소유성과 여소유성은 가령 제3권의 『경기經記』에서 설한 것과 같다.557)

나. 부처님의 개별적 공덕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고,

  이하는 두 번째로 개별적 공덕들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이 공덕을 해석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공덕이 몇 종류인지에 대해 신역과 구역의 같고 다름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여러 논에 의거하여 경문을 바로 해석한 것이다.

가) 공덕의 개수에 대한 신역·구역의 차이를 밝힘
(첫째, 공덕의 개수에 대한) 문구의 같고 다름은 다음과 같다.
진제 삼장이 번역한 양梁 『섭대승론』 판본에는 (부처님의 개별적 공덕에 대해) 오직 스무 구만 있고, ‘미래제가 다하도록(窮未來際)’이라는 경문의 한 구가 빠져 있다.558) 무착(『섭대승론』 저자)은 스무 가지 공덕의 이름만 들었는데, (세친의) 『석론』에서 처음에는 “스무 가지 도리로 인해 여래의 지혜가 가장 청정하다는 것이 성취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001_0151_a_01L義耶依佛地論有其二義一顯諸
001_0151_a_02L佛異餘大師故說世尊功德殊勝
001_0151_a_03L爲其餘生淨信故顯示如來功德圓
001_0151_a_04L滿無性論云顯薄伽梵異諸聲聞獨
001_0151_a_05L覺菩薩覺最勝故薄伽梵者顯有德
001_0151_a_06L最淸淨覺者正明勝德依佛地論
001_0151_a_07L釋有三義一於一切有爲無爲所應
001_0151_a_08L覺境正開覺故二於一切所應覺境
001_0151_a_09L淨妙圓滿正開覺故三於一切如所
001_0151_a_10L有性盡所有性正開1) [36] [174] 解云三釋
001_0151_a_11L有差別者一約法數以釋淨覺有爲
001_0151_a_12L無爲攝法盡故二約二慧以釋淨覺
001_0151_a_13L淨妙圓滿攝慧盡故淨妙者緣俗智
圓滿者緣眞智
三就
001_0151_a_14L眞俗以釋淨覺以依二諦攝境盡故
001_0151_a_15L下經云盡諸 [175] 有性如五數蘊等如所
001_0151_a_16L有性七眞如等此盡所有性如所有
001_0151_a_17L如第三卷經記中說

001_0151_a_18L
不二現行

001_0151_a_19L
釋曰自下第二釋諸別德然釋此德
001_0151_a_20L有其二義一明種數多少新舊同異
001_0151_a_21L二依諸論正釋經文文同異者眞諦
001_0151_a_22L三藏梁攝大乘論本唯有二十句
001_0151_a_23L經一句窮未來際無著但二十德名
001_0151_a_24L釋論初云由二十道理成就如來智

001_0151_b_01L나아가 뒤에서는 ‘첫 번째 구는 근본이고 나머지 스물한 구는 그것을 성취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559) (진제의) 구역본에는 두 가지 과실이 있다. 첫째, 경의 한 구인 “미래가 다하도록(窮未來際)”이 빠진 것이다. 둘째, 어떤 경우는 ‘스무 가지 도리’라고 해석하는데 이는 뒤에서 ‘스물한 구’라고 설한 것과 위배된다. 이로 인해 여러 논사들의 잘못된 해석이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 『진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개별적 공덕에는 오직 스무 가지 구가 있고, 결구結句까지 통틀어 취하면 스물한 가지 구가 된다.≻ 개별적 공덕에 대한 상常과 굉訇560) 두 논사의 견해도 진제와 같다. 숭崇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논에 스무 가지 구句만 있는데 ‘일一’ 자를 말한 것은 이 ‘일’ 자가 잘못 들어갔거나 혹은 한 가지 공덕을 빠뜨린 것일 수 있다.≻ 도묵道黙 법사는 ‘총체적 공덕과 개별적 공덕을 합하면 스물한 가지가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오류들은 다 기술할 수 없다.
지금 당본唐本 『섭대승론』 등에서는 경의 스물한 가지 공덕을 자세하게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의 당본 경론經論이 바른 것이다.561)

나) 여러 논서에 의거해 경문을 바로 해석함
둘째, 여러 논에 의거하여 경을 바로 해석하겠다. 이 개별적 공덕을 해석하면, 여러 논들이 서로 다르다.
첫째, 『섭대승론』에서는 먼저 경의 스물한 가지 공덕을 들고 나중에 도리에 의거해 공덕의 이름을 세우긴 했지만, 해석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섭대승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아야 할 대상(所知)에 대해 한결같이 장애 없이 굴리는 공덕, 유와 무의 두 가지 모습이 없는 진여의 가장 수승하고 청정함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공덕, 무공용無功用의 불사佛事에 쉬지 않고 머무는 공덕, 법신 안에서 소의所依와 의요意樂와 작업作業의 차별 없는 공덕, 모든 장애의 대치를 닦는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세간에 태어나서 세간법에 구애받지 않는 공덕, 정법을 안립하는 공덕, 수기하는 공덕, 모든 세계에 수용신과 변화신을 나타내 보이는 공덕, 의심을 끊는 공덕,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미래의 법에 대해 묘한 지혜를 내는 공덕, 그 (중생들의) 승해에 맞게 시현하는 공덕, 한량없는 소의로 유정을 조복시키고 가행하는 공덕, 평등법신에 의해 바라밀다를 완성시키는 공덕, 그 (중생들의) 승해를 따라 차별적 불토를 나타내 보이는 공덕, 세 종류 불신의 처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 생사가 다하도록 항상 모든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공덕, 다함없는 공덕 등이다.562)

001_0151_b_01L慧最淸淨故乃至後云第一句爲本
001_0151_b_02L餘二十一句爲能成就解云舊本有二種
一脫經一句窮
001_0151_b_03L未來際二或成釋云釋云2) [37] 二十道理便違後說二十
一句由斯諸師謬釋非一眞諦記云別德唯有
001_0151_b_04L二十句通取結句合成二十一句別德常▼(冖/言)二師
亦同眞諦嵩法師云論中有二十句而言一者
001_0151_b_05L [176] 此一字或可脫失一種功德道默法師
別合說成二十一如是等謬不可具述

001_0151_b_06L依唐本攝大乘等具釋經中二十一
001_0151_b_07L故今唐本經論爲正二依諸論正
001_0151_b_08L釋經者釋此別德諸論不同一攝
001_0151_b_09L大乘論先擧經中二十一德後依道
001_0151_b_10L理立功德名而不解釋故本論云
001_0151_b_11L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於有無無
001_0151_b_12L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無功
001_0151_b_13L用佛事不休息住功德於法身中所
001_0151_b_14L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修一切障
001_0151_b_15L對治 [177] 降伏一切外道功德生在世間
001_0151_b_16L不爲世法所礙功德安立正法功德
001_0151_b_17L授記功德於一切世界現示受用變
001_0151_b_18L化身功德斷疑功德令人 [178] 種種行功
001_0151_b_19L當來法生妙智功德如其勝解示
001_0151_b_20L現功德無量所依調伏有情加行功
001_0151_b_21L平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
001_0151_b_22L其勝解示現差別佛土功德三種佛
001_0151_b_23L身方處無分限功德窮生死際常現
001_0151_b_24L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無盡功德

001_0151_c_01L
둘째, 세친은 경론의 스물한 가지 공덕을 간략하게 해석하였다.길이는 한 장 반
셋째, 무성은 경론의 스물한 가지 공덕을 자세히 해석하고 세 장 반 나중에 공덕이 생기하는 순서를 밝혔다.한 장 반
넷째, 친광의 『불지경론』에는 두 번의 부차적 설명(復次)이 있다.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이름을 안립하여 경의 구들을 해석하고두 장 반 나중에는 무착이 세운 공덕의 이름에 의거하여 경의 구들을 해석하였다.563)그것에 네 장이 있다.
이제 여러 논에 의거하여 경문을 바로 해석하겠다.564)
본문 해석에 본래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세친 등은 하나하나 따로 해석하여 (개별적 공덕을) 스물한 가지로 만들었다. 둘째, 친광은 맨 뒤의 두 가지를 합해서 해석하여 (개별적 공덕을) 스무 가지로 나누었다.565) 비록 두 가지 설이 있으나 우선 앞의 설에 의거하겠다.

(가) 첫 번째 공덕
이것은 첫 번째 공덕인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음’을 해석한 것이다.
무성의 『섭대승론석』에서는 전체를 두 가지로 나눈다. 처음의 네 가지는 자리自利의 덕을 밝힌 것이고, 뒤의 열일곱 가지는 이타利他의 덕을 나타낸 것이다. 자리의 덕에서 다시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지덕智德566)을 밝히고, 둘째는 단덕斷德567)을 나타내며, 셋째는 은덕恩德568)을 설명하고, 넷째는 교화 작용의 평등함을 해석한 것이다. 문장에 배당시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는 곧 알아야 할 대상에 대해 한결같이 장애 없이 굴리는 공덕이니, 가령 성문·독각의 지혜에 장애가 있기도 하고 장애가 없기도 한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569) 예를 들어 천안天眼은 삼천계三千界 안에서는 장애가 없지만 그 바깥에 대해서는 장애가 있는 것과 같으니, 나머지는 모두 이에 준해 알 수 있다.
무성의 『섭대승론석』에는 두 번의 부차적 설명이 있다.570) 처음은 세친과 같고 나중의 부차적 설명에서는 “혹은 두 곳에서의 현행이 여기에는 있지 않다.”571)고 하였다.‘두 곳’에 대해 본래 두 가지 설명이 있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의 것은 통달한 자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다. 지금 말하는 ‘두 곳’이란 통달하지 못한 자에 의거해서 (설한 것이니, 그들은) 안팎의 처소에 대해 모두 장애가 현행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일이 없으므로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혹은 ‘두 곳’이란 가령 『불지경론』에서 설한 것처럼 생사와 열반을 일컬어 ‘두 곳’이라 했을 수도 있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것은 세존의 한결같이 장애 없는 수승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이생異生은 생사에 머물며 집착하고 이승의 성자는 열반에 머물며 집착하지만, 세존에게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572) 『불지경론』의 뒤의 해석의 문장은 세친의 『섭대승론석』과 동일하다.
이와 같은 여러 해석들은 총괄하면 세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장애가 있거나 장애가 없거나 하는 것이 두 가지 현행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안과 밖의 두 곳에 대한 무지無智가

001_0151_c_01L二者世親略釋經論二十一德帳一
紙半

001_0151_c_02L三者無性廣釋經論二十一德三紙

001_0151_c_03L明功德生起次第一紙
四者親光佛地
001_0151_c_04L論中有二復次初自立名釋經諸
001_0151_c_05L兩紙
後依無著所立德名以釋經
001_0151_c_06L有其
四紙
今依諸論正釋經文就釋文
001_0151_c_07L自有兩說一世親等一一別釋
001_0151_c_08L二十一二者親光合釋後二分爲二
001_0151_c_09L雖有兩說且依前說此釋第一
001_0151_c_10L不二現行依無性論總分爲二初有四種
自利德後十七種顯利他德自利
001_0151_c_11L德中復分爲四一明智德二顯斷德
三辨恩德四釋化用平等配文可知
世親釋
001_0151_c_12L卽是於所知一向無障轉功德
001_0151_c_13L如聲聞獨覺智亦有障亦無障故解云
且如
001_0151_c_14L天眼三千界內無障
外即有障餘皆准此
依無性論有二復
001_0151_c_15L初同世親後復次云或二處現
001_0151_c_16L此中無有二處自有兩說一云前約得通
者說今二處約未得通於內外
001_0151_c_17L皆有障行佛無此故不二現行或可
二處如佛地論生死涅槃以爲二處也
親光
001_0151_c_18L釋云顯示世尊一向無障殊勝功德
001_0151_c_19L謂諸異生住著生死二乘聖者住著
001_0151_c_20L涅槃如是二障世尊無故佛地後
001_0151_c_21L釋文同世親如是諸釋總有三說
001_0151_c_22L一有障無障爲二現行二內外二處
001_0151_c_23L「覺」下疑脫「故」「釋云」疑剩{編}

001_0152_a_01L두 가지 현행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생사와 열반에 즐겨 집착하는 것이 두 가지 현행이라는 것이다.

(나) 두 번째 공덕

  모습 없는 법에 나아가며,

  두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청정한 진여를 ‘모습 없는 법(無相法)’이라 하고, ‘나아간다’는 것은 ‘취입趣入하는 것’이니, 이는 유와 무의 두 가지 상이 없는 진여의 최승最勝과 청정淸淨을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 공덕이다. 말하자면 이 진여는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니, 제법의 자성 없음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상이 없는 것도 아니니, 자상自相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 없는 진여의 최승과 청정을 능히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에 (‘모습 없는 법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573)
  진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최승이고, 둘째는 청정이다. 증지證智로 가장 수승하고 청정한 두 종류 경계(境義)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가게 한다. 따라서 “최승을 능히 깨달아 들어가고 청정을 능히 깨달아 들어간다.”574)고 하였다.
무성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처음의 것은 세친과 같고, 뒤의 부차적 설명에서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을 ‘모습 없음’이라 하니 “생사·열반의 상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575)라고 하였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세존의 교화(調化) 방편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모습 없는 법’이란 바로 열반을 말한다. 부처님은 삼승의 유정을 잘 알아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맞추어 교화 방편으로 여실하게 설하여 그들이 모습 없는 법에 나아가 증득하게 하기 때문이다.”576) 친광의 뒤의 해석도 세친과 동일하다.
이와 같이 여러 논에는 총괄하면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진여를 ‘모습 없음’이라 하니, 유와 무라는 두 가지 상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주열반을 ‘모습 없음’이라 하니, 생사와 열반의 상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삼승의 열반을 ‘모습 없음’이라 하니, 색色 등의 열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577)

(다) 세 번째 공덕

  부처님이 머무시는 곳에 머무시고,


001_0152_a_01L無智爲二現行三樂著生死涅槃爲
001_0152_a_02L二現行

001_0152_a_03L
趣無相法

001_0152_a_04L
釋曰顯第二德世親釋云謂淸淨
001_0152_a_05L眞如名無相法趣謂趣入卽是於
001_0152_a_06L有無無二相眞如最勝淸淨能入功德
001_0152_a_07L謂此眞如非是有相諸法無性以
001_0152_a_08L爲相故亦非無相自相有故於此
001_0152_a_09L無相眞如最勝淸淨能入故解云
001_0152_a_10L如有其二義一者最勝二者淸淨
001_0152_a_11L智能入最勝淸淨二種境義亦令他
001_0152_a_12L是故說最勝能入淸淨能入無性
001_0152_a_13L兩釋初同世親後復次云無住涅
001_0152_a_14L槃名爲無相不住生死涅槃相故
001_0152_a_15L光釋云顯示世尊調化方便殊勝功
001_0152_a_16L謂無相法卽是涅槃佛善知了
001_0152_a_17L三乘有情隨彼堪能調化方便如實
001_0152_a_18L爲說令彼趣證無相法故親光後釋
001_0152_a_19L亦同世親如是諸論總有三釋
001_0152_a_20L者眞如名爲無相遠離有無二種相
001_0152_a_21L二無住涅槃名爲無相不住生
001_0152_a_22L死涅槃相故三者三乘涅槃名爲無
001_0152_a_23L以無色等十種相故

001_0152_a_24L
住於佛住

001_0152_b_01L
  세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부처님이 머무시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이니, 즉 무공용無功用의 불사佛事에 쉬지 않고 머무는 공덕이다. 말하자면 이 머무는 곳에서 항상 쉬지 않고 불사를 짓는다는 것이다.”578)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무주열반無住涅槃을 말하고, ‘무공용’이란 공용에 의지하지 않고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는 것이다. 따라서 『섭대승론석』 제1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께서 머물지 않음을 머묾으로 삼는다는 것은 생사와 열반에 머물지 않음을 머묾으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주열반에 안주하는 것이다.……‘여러 일에 공용이 없다는 것’은 공용에 의하지 않고 모든 일을 짓는 것이니, 마치 세간의 말니末尼579)나 하늘 음악580)과 같다.”581)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그 경우에 맞게 항상 성주聖住·천주天住·범주梵住582)에 바로 안주하기 때문에 불주佛住라고 한다. (이 불주는) 가령 성문이 반드시 공용을 지어야 하는 경우와 같지 않고,……외도가 머무는 곳이 있다 해도 수승하지 않은 경우와도 같지 않다. 천주는 네 종류 정려이고, 범주란 비悲(·자慈·희喜·사捨) 등의 사무량심이며, 성주란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해탈문583)을) 말한다.”584) 또 무성은 “공空·대비大悲에 잘 안주하기 때문에 불주라고 한다.”585)고 하였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교화되는 대상을 관하는 세존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니, 대비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육시六時586) 세간을 관하기 때문이다.”587) 친광의 뒤의 해석은 무성의 앞의 해석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논에는 모두 네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무주열반에 머문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주·천주·범주에 머문다는 것이며, 셋째 공·대비에 머문다는 것이고, 넷째는 대비에 머문다는 것이다.

(라) 네 번째 공덕

  모든 부처님들의 평등성에 이르셨으며,

  네 번째 공덕을 밝힌 것이다.
세친은 “이는 법신法身 중의 소의所依와 의요意樂와 작업作業의 차별 없는 공덕을 말한 것이다.”588)라고 해석하였고, 다시 별다른 해석은 없다.양梁의 『섭대승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의는 법신이고, 의요는 응신이며, 작업은 화신이다. 이와 같은 삼신은 모든 시방 삼세의 여래에게 평등하여 다름이 없으니, (모든 여래는 이와 같은 평등에) 이미 모두 이르렀다.”589)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소의에 차별이 없다는 것은

001_0152_b_01L
釋曰顯第三德世親釋云謂住佛
001_0152_b_02L所住無所住處卽是無功用佛事不
001_0152_b_03L休息住功德謂此住中常作佛事
001_0152_b_04L有休息解云無所住處者謂無住涅
001_0152_b_05L無功用者謂不由功用作利有情
001_0152_b_06L故攝大乘第十卷云佛無住爲住
001_0152_b_07L生死涅槃無住爲住此卽安住無
001_0152_b_08L住涅槃諸事無功用者不由功用
001_0152_b_09L一切事猶如世間末尼天樂無性釋
001_0152_b_10L [179] 所應恒正安住聖天梵住故名
001_0152_b_11L佛住 [180] 非如聲聞要作功用非如外道
001_0152_b_12L [181] [182] 非勝天住卽是四種靜慮梵住
001_0152_b_13L卽是悲等無量聖住卽是空無相等
001_0152_b_14L又無性云於空大悲善安住故名爲
001_0152_b_15L佛住親光釋云顯示世尊觀所調化
001_0152_b_16L殊勝功德謂住大悲晝夜六時觀世
001_0152_b_17L間故親光後釋同無性前釋如是
001_0152_b_18L諸論總有四釋一住無住涅槃二住
001_0152_b_19L聖天梵住三住空大悲四住大悲

001_0152_b_20L
逮得一切佛平等性

001_0152_b_21L
釋曰明第四德世親釋云卽是於法
001_0152_b_22L身中所依意樂作業無差別功德
001_0152_b_23L無別釋梁攝論云所依卽法身意樂 [183] 即應身
業即化身如是三身一切十方三世如
001_0152_b_24L平等無異
皆已至得
無性釋云所依無差別者

001_0152_c_01L모든 여래가 모두 청정한 지혜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의요에 차별이 없다는 것은 모든 여래가 모든 유정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려는 뛰어난 의요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작업에 차별이 없다는 것은 모든 여래가 모두 수용신과 변화신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기 때문이다. 이는 성문 등이 오직 (청정한 지혜라는) 소의만 갖고 있는 경우와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590)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세존께서 모든 부처님들의 유사한 사업을 얻은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니,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의 유사한 사업의 평등성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591)
  제불이 수용신·변화신을 나타내어 유정들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 평등하고 유사하다는 것이다. 친광의 뒤의 해석도 또한 무성의 해석과 같다.
이와 같이 여러 논은 통틀어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제불의 삼신三身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불의 정지淨智·대비大悲와 수용신·변화신의 이신二身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제불이 수용신과 변화신의 유사한 사업을 시현함에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마) 다섯 번째 공덕

  장애 없는 곳에 도달하셨다.

  다섯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모든 장애를 대치하는 도를 닦은 공덕이니, 말하자면 어느 때나 항상 각혜覺慧를 닦아 모든 장애를 대치하기 때문이다.”592)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미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대치하는 성도를 닦아 익혀서 일체종지一切種智593)의 결정적 자재함을 얻고,이는 공덕을 해석한 것이다.이미 모든 습기를 영원히 떠난 ‘의지처(所依趣處)’에 도달한 것이다.이는 ‘장애 없는 곳에 도달했음’을 해석한 것이다. ‘의지처’란 바로 열반이다.594)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세존이 대치의 대상을 영원히 끊어 버린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세존은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에서 해탈하는 지혜를 이미 증득했기 때문이고 또 이미 모든 장애를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595) 친광의 뒤의 해석은 무성의 『섭대승론석』과 동일하다.
전체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이상의 여러 논에서 말한 대로, 두 가지 장애를 대치하는 지혜를 닦아 모든 장애를 끊고서 장애 없는 열반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001_0152_c_01L一切皆依淸淨智故意樂無差別者
001_0152_c_02L一切皆有利益安樂一切有情勝意樂
001_0152_c_03L作業無差別者一切皆作受用變
001_0152_c_04L化利他事故非如聲聞等唯有所依
001_0152_c_05L親光釋云顯示世尊得一切佛相
001_0152_c_06L似事業殊 [184] 功德謂證諸佛相似事業
001_0152_c_07L平等性故解云諸佛能現受用變化
001_0152_c_08L利有情事平等相似親光後釋
001_0152_c_09L同無性如是諸論總有三釋一者
001_0152_c_10L諸佛三身無別二者諸佛淨智大悲
001_0152_c_11L受用變化二身無別三者諸佛示現
001_0152_c_12L受用變化相似事業無別

001_0152_c_13L
到無障處

001_0152_c_14L
釋曰顯第五德世親釋云卽是修
001_0152_c_15L一切障對治功德謂一切時常脩覺
001_0152_c_16L對治一切障故無性釋云謂已串
001_0152_c_17L習一切煩惱及所知障對治聖道
001_0152_c_18L切種智定自在性此釋
功德
已到永離一切
001_0152_c_19L習氣所依趣處此釋到無障處
依趣處即是涅般
親光釋
001_0152_c_20L顯示世尊永斷所治殊勝功德
001_0152_c_21L已證得解脫一切煩惱所知二障 [185]
001_0152_c_22L [186] 永斷一切障親光後釋同無性論
001_0152_c_23L總釋意云如上諸論脩二障智
001_0152_c_24L一切障能到涅槃無障之處

001_0153_a_01L
(바) 여섯 번째 공덕

  정법을 퇴전시킬 수 없고,

  여섯 번째 공덕을 밝힌 것이다.
세친은 『섭대승론석』에서 “이는 곧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이다.”596)라고 하고, 다시 별다른 해석은 없다.(이 정법은) 모든 외도들이 퇴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교·증의 두 법(敎證二法)597)은 모두 남들이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이보다 뛰어난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교·증의 두 법은 외도가 퇴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598) 또 무성은 ‘모든 마魔 등이 퇴전시킬 수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599)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이는 외도를 항복시키는 세존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정법正法은 모든 외도들이 퇴전시킬 수 없으니, 저 외도들을 항복시키고 나서 정도正道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600) 친광의 뒤의 해석은 무성의 앞의 해석과 동일하다.601)
이와 같이 여러 논에는 모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정법을) 외도가 퇴전시킬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마魔 등이 퇴전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 일곱 번째 공덕

  소행所行602)에 장애가 없으며,

  일곱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세간에 태어났지만 세간의 법에 장애 받지 않는 공덕을 말한다. 말하자면 (세존은) 세간에서 태어나서 세간 사람들이 행하는 처소에서 행하시지만, (행하시는 일이) 이익(利) 등과 같은 세간의 여덟 가지 법에 의해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603)여덟 가지 법이란 이익(利)·손해(衰)·훼방(毁)·명예(譽)·칭찬(稱)·기롱(譏)·고통(苦)·즐거움(樂)이다.604) 자세한 설명은 무성의 앞의 해석과 같으며,605) 또한 세친의 해석과도 같다.
또 무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정들의 이익과 안락이라는 지어야 할 모든 사업에 있어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구애받음이 없기 때문에 ‘소행에 장애가 없다’고 한 것이다.”606)
친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군의 원수를 항복시키는 세존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소행’이란 색 등의 경계를 말하니, 이러한 소행 경계는 마음을 어지럽히고 선을 장애하기 때문에 ‘마군의 원수’라고 한다. 모든 불세존은 마음을 잘 안정시키니 지극히 즐거운 마음의 경계도 그를 어지럽힐 수 없고, 모든 공덕들이 지극히 잘 성취되었으니 어떤 악한 경계도 그것을 장애할 수 없다. (세존은) 모든 경계를 굴복시킬 수 있으므로

001_0153_a_01L
不可轉法

001_0153_a_02L
釋曰辨第六德世親論云卽是降
001_0153_a_03L伏外道功德更無別釋非諸外道
所能退轉
無性
001_0153_a_04L釋云謂敎證二法皆不爲他所能動
001_0153_a_05L無有餘法勝過此故敎證二法
非外道轉
又無
001_0153_a_06L性云謂諸魔等不能退轉親光釋
001_0153_a_07L顯示世尊降伏外道殊勝功德
001_0153_a_08L佛正法一切外道不能退轉降伏彼
001_0153_a_09L顯正道故親光後釋同無性前
001_0153_a_10L如是諸論總有二釋一者外道
001_0153_a_11L不能退轉二者魔等不能退轉

001_0153_a_12L
所行無礙

001_0153_a_13L
釋曰顯第七德世親釋云卽是生
001_0153_a_14L在世間不爲世法所礙功德謂雖在 [187]
001_0153_a_15L世間行於世間所行之處不爲利等
001_0153_a_16L世間八法所染汗故言八法者謂利衰毁譽
稱譏苦樂廣如無性前
001_0153_a_17L
同世親
又無性云於諸所化 [188] 有情利
001_0153_a_18L益安樂事中無有高下能爲抱礙
001_0153_a_19L所行無礙親光釋云顯示世尊降伏
001_0153_a_20L魔怨殊勝功德謂所行者卽色等境
001_0153_a_21L此所行境擾亂心故障礙善故
001_0153_a_22L名魔怨諸佛世尊心善安定極悅
001_0153_a_23L意境亦不能亂所有功德極善成滿
001_0153_a_24L一切惡境不能爲礙以能摧伏一切

001_0153_b_01L어떤 소행 (경계들도) 구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행에 장애가 없다’고 설한 것이다.”607) 친광의 뒤의 해석은 세친의 설명과 동일하다.608)
이상과 같은 여러 논에는 모두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소행’이란,) 첫째는 여덟 가지 바람(八風 : 앞에서 말한 여덟 가지 법)이거나, 둘째는 신분의 높고 낮음이거나, 셋째는 마魔의 경계인데, (이것들이) 모두 장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 여덟 번째 공덕

  그 안립된 것은 불가사의하며,

  여덟 번째 공덕을 밝힌 것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곧 정법을 안립安立609)하는 공덕이다. 계경 등의 정법은 한량없고 불가사의하여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래가 안립한 법은610) 불가사의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11) 교법은 부처님이 (설하신 것에) 대해서 ‘안립된 것(所安立)’이라고 이름하니, 어리석은 범부에게 이해되는 것은 ‘불가사의’라고 하지 않는다. 양의 『섭대승론석』에서는 “십이부의 교법은 (불가사의하여 범부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여래가 안립한)612) 이 법은 결국에는 갓난아이까지도 통달할 수 있다.”613)고 하였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계경 등의 십이분교를 ‘안립된 것’이라 한 것은, 이러저러한 자상自相(사물의 특수상)과 공상共相(사물의 보편상)을 안립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안립된 것은 어리석은 범부가 알아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간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614)해 십이분교 중에 부처님이 (설하신 것에) 대해서 ‘안립된 것’이라 이름하니, 이 교법은 자상과 공상을 안립한 것이기 때문에 안립이라 이름한 것이다.
친광은 두 가지로 해석하는데, 처음 것은 세친과 같고,615) 두 번째 부차적 설명은 무성과 거의 같다.616)

(자) 아홉 번째 공덕

  삼세의 평등한 법성에 노니시며,

  아홉 번째 공덕을 밝힌 것이다.
세친의 『섭대승론석』에서는 “이는 수기授記617)하시는 공덕이다.”618)라고 하였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삼세의 평등한 법성法性에 두루 노니시는 것을 말한다. 삼세의 평등한 법성 안에서 과거에 일찍이 일어난 적이 있거나 미래에 장차 일어날 일들에 대해 마치 현재의 일처럼 능히 이해함에 따라 수기해 주기 때문이다.”619)
  무성에게는 본래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이는 처음의 해석이니, 삼세 모든 법의 평등한 진여를 능히 알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를 마치 현재처럼 증지證知하는 것을 말한다. 혹은 삼세를

001_0153_b_01L境界一切所行不能拘礙是故說名
001_0153_b_02L所行無礙親光後釋同世親說
001_0153_b_03L上諸論總有三釋一者八風二者
001_0153_b_04L高下三者魔境皆不能礙

001_0153_b_05L
其所安立不可思議

001_0153_b_06L
釋曰明第八德世親釋云卽是安
001_0153_b_07L立正法功德由契經等正法無量不
001_0153_b_08L可思議非凡夫所能知如來安立 [189]
001_0153_b_09L可思議非諸愚夫所能解故解云敎法
對佛名所安
001_0153_b_10L愚所解非名不可思議梁攝論云
二部敎 [190] 此法竟乃至嬰兒等亦能通達
無性
001_0153_b_11L釋云謂契經等十二分敎名所安
001_0153_b_12L安立彼彼自相共相故如是安立
001_0153_b_13L非諸愚夫覺所行故出世間故不可
001_0153_b_14L思議解云十二分敎對佛名所安立
此敎法安立自相共相故名爲安立

001_0153_b_15L光兩釋初同世親第二復次大同
001_0153_b_16L無性

001_0153_b_17L
遊於三世平等法性

001_0153_b_18L
釋曰辨第九德世親論云卽是授
001_0153_b_19L記功德無性釋云謂於三世平等法
001_0153_b_20L性能遍遊涉以於三世平等性中
001_0153_b_21L隨解了過去未來曾當轉事皆如現
001_0153_b_22L而授記故解云無性自有兩釋
001_0153_b_23L則初釋謂能了知三世諸法平等眞
001_0153_b_24L如故證知過未猶如現在或卽三

001_0153_c_01L‘법성’이라 이름하고, (그것의) 증득에 차별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이름한 것이다. 무성의 나중 해석에서는 “삼세의 제불이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은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다.”620)라고 하였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삼세의 일을 기별記別하는 세존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니, 말하자면 (마치 현재의 일처럼) 삼세의 일을 수기하는 데 아무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621) 뒤의 부차적 설명에서는 “삼세에 유전하는 구의句義(말의 의미)에 대해……모두 마치 현재인 것처럼 전도 없이 분별하므로 평등이라고 이름한다.”622)고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논에는 모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삼세가 곧 수기되는 경계라는 것이고, 둘째는 삼세는 삼세의 부처님을 말한다는 것이다.

(차) 열 번째 공덕

  그 몸은 모든 세계에 유포되고,

  열 번째 공덕을 밝힌 것이다.
세친은 해석하길 “이는 모든 세계에 수용신과 변화신을 나타내 보이는 공덕이다.”623)라고 하였고, 무성도 같은 의미로 해석하였다.624)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도사천궁으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화신을 두루 모든 세계의 대륙에 나타내면서 동시에 모태에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625) 친광의 뒤의 해석은 세친과 의미가 동일하다.626)
이와 같이 여러 논에는 모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두 종류 몸(수용신과 변화신)에 의거한 (해석이고,) 둘째는 화신의 상을 말한 것이다.

(카) 열한 번째 공덕

  모든 법을 아는 지혜로 의심과 막힘이 없으시며,

  열한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세친은 ‘이는 의심을 끊는 공덕이다’라고 해석하였다.627)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모든 경계에 대해 잘 결정하기 때문에, 모든 법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면서 남의 의심을 해결해 줄 수는 없기 때문에, 결정을 떠나서는 의심을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628)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모든 의심을 끊는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즉 모든 법에 대해 모든 의혹을 없앨 수 있는 결정지決定智를 얻었기 때문이다.”629) 『불지경론』의 뒤의 해석도 무성과 동일하다.630)
이와 같은 여러 해석은 모두 ‘의심을 끊었다’고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001_0153_c_01L名爲法性證無差別故名平等
001_0153_c_02L性後釋三世諸佛利有情事皆相似
001_0153_c_03L親光釋云顯示世尊記別三世殊
001_0153_c_04L勝功德謂記三世皆無礙故後復次
001_0153_c_05L謂於三世流轉句義皆如現在
001_0153_c_06L別無倒故名平等如是諸論總有
001_0153_c_07L二釋一云三世卽所記境二云三世
001_0153_c_08L謂三世佛

001_0153_c_09L
其身流布一切世界

001_0153_c_10L
釋曰明第十德世親釋云卽是於
001_0153_c_11L一切世界示現受用變化身功德
001_0153_c_12L性意同親光釋云顯示世尊現從覩
001_0153_c_13L史天宮來下殊勝功德謂現化身
001_0153_c_14L於一切世界洲渚同時流下入母胎
001_0153_c_15L親光後釋意同世親如是諸論
001_0153_c_16L總有兩釋一約二身二謂化相

001_0153_c_17L
於一切法智無疑滯

001_0153_c_18L
釋曰顯第十一德世親釋云卽是
001_0153_c_19L斷疑功德無性釋云於一切境
001_0153_c_20L決定故非於諸法自不決 [191] 他疑非離
001_0153_c_21L決定能斷疑故親光釋云顆示世尊
001_0153_c_22L斷一切疑殊勝功德謂於諸法以得
001_0153_c_23L能除一切疑惑決定智故佛地後釋
001_0153_c_24L亦同無性如是諸釋皆同斷疑

001_0154_a_01L
(타) 열두 번째 공덕

  모든 행에서 대각을 성취하시고,

  열두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이는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이다.”631)라고 해석하였고, 무성도 동일하다.632)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모든 승乘의 교화되는 유정들에게 그 근기에 맞춰 자기 몸을 나타내시는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유정들의 근성과 행위의 차별을 두루 잘 아시고 그 근기에 맞춰 자기 몸을 나타내신다.”633)
친광의 나중 해석의 뜻은 세친과 동일하다.634)
이상의 여러 해석은 모두 ‘행에 들어감(入行)’이라 보는 점에서 동일하다.

(파) 열세 번째 공덕

  모든 법을 아시는 지혜로 의혹이 없으며

  열세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미래법에 대해 묘한 지혜를 내시는 공덕이니, 말하자면 미래에 이와 같은 법이 생길 것을 아시는 여래의 묘한 지혜이다.”635)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성스런 성문이 ‘이 사람에게는 조그만 선근도 전혀 없어서 포기해야 할 자이다’라고 말하더라도 불박가범은 그에게 훗날에 선법이 생길 것임을 아시니, 그가 다른 생에서 심은 아주 작은 선근 종자가 따라다니는 것을 현증現證하여 아시기 때문이다.”636)
  예를 들면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것이 어떤 경인지 조사해 보라.
부처님께서 한때 기원림637)에 계셨다. 어떤 한 걸인이 비구의 처소에 와서 불도에 입문하길 청하였다. 성문들은 숙주지宿住智638)로 그가 팔만겁 이래로 한 순간도 선근을 닦으려 한 적이 없음을 관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나중에 그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를 질책하여 물으시자, 비구들은 그렇게 한 이유를 자세히 알려드렸다. 그 후에 세존이 그를 위해 법의 요체를 설해 주시자 그는 초과初果(예류과)를 증득하였다. 비구들이 그 이유를 청하여 물으니, 부처님은 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다.
이 사람은 전생에 정광불定光佛639)이 계실 때 나무꾼이었다. 그는 성문 앞에 이르러 사람들이 비질하고 꾸미고 길을 닦으면서 세존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001_0154_a_01L
於一切行成就大覺

001_0154_a_02L
釋曰第十二德世親釋云卽是令
001_0154_a_03L入種種行功德無性亦同親光釋云
001_0154_a_04L顯示世尊於一切乘所化有情能隨所
001_0154_a_05L示現自身殊勝功德謂遍了知一
001_0154_a_06L切有情性行差別如其所應現自身
001_0154_a_07L親光後釋意同世親如上諸釋
001_0154_a_08L皆同入行

001_0154_a_09L
於諸法智無有疑惑

001_0154_a_10L
釋曰第十三德世親釋云卽是當
001_0154_a_11L來法生妙智功德謂知當來如是法
001_0154_a_12L生如來妙智無性釋云謂聖聲聞言
001_0154_a_13L此全無少分善根而棄捨者佛薄伽
001_0154_a_14L [192] 彼後時善法當生現證知彼餘
001_0154_a_15L生徵少善根種子所隨逐故解云
001_0154_a_16L經中說勘是
何經
佛於一時在祇洹林
001_0154_a_17L一乞人至比丘所請求入道諸聲
001_0154_a_18L聞等以宿住智觀八萬劫來未有
001_0154_a_19L一念趣向善根故皆不度佛後責問
001_0154_a_20L不度所由諸比丘等具報所爲
001_0154_a_21L後世尊爲說法要得證初果諸比丘
001_0154_a_22L請問所由佛爲說云此人先世
001_0154_a_23L定光佛時作取柴人至城門首
001_0154_a_24L諸人等掃餝治道以待世尊此取柴

001_0154_b_01L이 나무꾼이 사람들에게 ‘무엇 때문에 길을 닦는가’라고 물으니까, 사람들은 ‘정광여래가 오늘 입성하시기 때문에 도로를 닦는다’고 대답하였다. 이 나무꾼은 부처님 이름을 듣고 나서 몸의 털이 다 곤두서고 슬프게 울면서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려 자신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세존을 기다리고 싶었으나 입고 먹을 것에 얽매여 끝내 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길에서 한 마리 호랑이를 만났는데, 그를 두 발로 덮쳐 잡아먹어 버렸다. 그는 호랑이 입속에 들어가기 전에 본래 부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다만 ‘성문 앞 사람들……’ 하다가 결국 호랑이 밥이 되었다.
이 사람은 오직 이 한 생각 부처님을 염한(念佛) 선근이 있었으니, 정광불로부터 두 번째 아승기겁을 지났을 때 이 염불의 선근을 일으키고 그 후로 세 번째 아승기겁에다 90여 겁을 지나 이 일념의 선근이 비로소 무르익었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 선근 종자에 의지해 그를 위해 설법해 주셨고, 그는 초과를 증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미세한 종자는 이승인은 알 수 없고 부처님이라야 통달할 수 있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모든 법에 대해 묘하게 잘 통달하신 지혜로 그 근기에 맞게 항상 바른 가르침을 펴시는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법에 대해 의혹을 품고 있는 자들은 그 적합한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펼칠 만한 능력이 없고, 오직 불세존만이 모든 법을 통찰하는 지혜로 잘 결정하여 그 근기에 따라 쉬지 않고 전도 없는 가르침을 펴실 수 있기 때문이다.”640) 친광의 나중 해석은 그 뜻이 무성과 동일하다.
이상의 여러 논들에 모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미래의 법에 대해 (아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모든 법에 통달했다는 것이다.

(하) 열네 번째 공덕

  무릇 나타내신 몸들을 분별할 수 없고

  열네 번째 공덕이다.
세친의 『섭대승론석』에서는 “이것은 그의 승해勝解641)에 맞게 나타내 보이시는 공덕이다.”642)라고 하였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유정의 갖가지 승해에 따라 금색의 몸 등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니, 이 몸을 나타내면서도 분별이 없는 것이 마치 마니구슬이나 퉁소 등과 같다.”643)분별이 없으면서도 몸을 나타내는 것을 ‘분별할 수 없다’고 한 것이거나,

001_0154_b_01L問諸人云治道何爲諸人答言
001_0154_b_02L定光如來今日入城故修道路
001_0154_b_03L取柴人聞佛名已身毛皆竪悲泣
001_0154_b_04L雨淚不能自勝欲待世尊衣食所
001_0154_b_05L遂往入山路逢一虎摟而食之
001_0154_b_06L未入口時忘本佛名但云城門首人
001_0154_b_07L遂爲虎食此人唯有此一念念佛善
001_0154_b_08L從定光佛是第二僧祇時起此念
001_0154_b_09L後經第三僧祇及九十餘劫此一
001_0154_b_10L念善根方熟故佛依此善種爲其說
001_0154_b_11L得證初果如此細種二乘不知
001_0154_b_12L佛能達也親光釋云顯示世尊妙善
001_0154_b_13L了達一切法智能隨所應1) [38] [193] 正敎誨
001_0154_b_14L殊勝功德謂於諸法懷疑惑者無有
001_0154_b_15L堪能隨應敎誨唯佛世尊證見諸法
001_0154_b_16L智善決定能隨所應無倒敎誨
001_0154_b_17L休廢故親光後釋意同無性如上
001_0154_b_18L諸論總有兩釋一於當來二通諸
001_0154_b_19L

001_0154_b_20L
凡所現身不可分別

001_0154_b_21L
釋曰第十四德世親論云卽是如
001_0154_b_22L其勝解示現功德無性釋云謂隨有
001_0154_b_23L情種種勝解現金色等雖現此身
001_0154_b_24L無分別如末尼珠及簫笛等雖無分別
而能現身

001_0154_c_01L혹은 나타내신 몸은 분별 없이 일으켜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일 수도 있다.
무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교화되는 유정의 그릇된 행과 바른 행, 그릇되기도 바르기도 한 행 가운데서 그에 응해 나타내신 모습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644)유정들 가운데서 삿된 행과 바른 행 등을 나타내시는 것에 대해 분별할 수 없으니, 이는 ‘삿된 행과 바른 행’ 등에 대해 분별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오염 없는 자기 몸을 바르게 섭수하시는 세존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 몸은 허망한 분별로 일으켜진 것이 아니니, 번뇌·업·생의 잡염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몸은 잡염된 분별에 의해 일으켜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645)무릇 나타내신 몸은 허망분별로 인해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고 한다. 혹은 나타내신 몸은 허망분별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일 수도 있다.
친광의 뒤의 해석은 무성과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그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세존에게는 마치 마니구슬처럼 분별이 없다 해도, 모든 여래의 증상력增上力과 또한 자신의 승해력勝解力으로 인해, 여래의 몸이 마치 금색 등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여래에게는 분별이 없고 차이의 분별도 없다. 자세한 것은 그 경에서 설한 것과 같다.”646)‘분별이 없다’는 것은 자성의 분별(自性分別)이 없다는 것이고, ‘차이의 분별도 없다’는 것은647) 차별의 분별(差別分別)이 없다는 것이다.648)
또 친광은 “혹은 그것과 동일한 종류인지를 분별할 수 없다.”649)고 하였다. 해 이것은 무성이 ‘사행邪行 등을 나타내시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고 한 것과 동일하다.650) 혹은 육도의 몸을 나타내시는 것이 그 육도와 어떤 차별적 상이 있는지를 분별할 수 없는 것을 일컬어 ‘분별할 수 없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양梁의 『섭대승론석』에서는 “화신의 수량과 형상과 시절과 처소를 시현하시는 것을 다 분별할 수 없다.”651)고 하였다.
이상의 모든 해설을 총괄하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나타내신 몸들은 분별에 의하지 않고 자유로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유정들 가운데서 삿된 행 등을 나타내시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고 한다.

(거) 열다섯 번째 공덕

  모든 보살들이 구하는 바로 그 지혜로,

  열다섯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한량없는 소의(無量所依)로 유정을 조복시키는 가행의 공덕이다.

001_0154_c_01L名不可分別或可所現之身
無分別起故餘人不可分別
無性復云
001_0154_c_02L卽於所化有情邪正及俱行中所應
001_0154_c_03L現相不可分別於有情中現邪正等行不可
分別是邪正等行名不可
001_0154_c_04L分別
親光釋云顯示世尊能正攝受
001_0154_c_05L無染自身殊勝功德謂諸佛身非是
001_0154_c_06L虗妄分別所起無煩惱業生雜染故
001_0154_c_07L [194] 來身非是雜染分別起故不可分
001_0154_c_08L凡所現身不由虗妄分別起故名不可分別
可所現身非虗分別起故餘人不可分別也

001_0154_c_09L親光後釋大同無性故彼論云
001_0154_c_10L佛世尊雖無分別如末尼珠由諸
001_0154_c_11L如來增上力故亦由自身勝解力故
001_0154_c_12L見如來身如金色 [195] 然諸如來無有分
001_0154_c_13L無異分別具說如彼無有分別者
自性分別無者
001_0154_c_14L無自性 [196] 異分別
無差別分別
又親光云或同彼類
001_0154_c_15L可分別解云此同無性現邪等行不可知故
可分別或可現六道身不可分別與其
001_0154_c_16L六道有差別相
名不可分別
依粱論云示現化身數
001_0154_c_17L量相貌時節處所並不可分別如上
001_0154_c_18L諸說總有四 [197] 一云凡所現身
001_0154_c_19L由分別任運起故名不可分別一云
001_0154_c_20L於有情中現邪等行不可知故名不
001_0154_c_21L可分別

001_0154_c_22L
一切菩薩正所求智

001_0154_c_23L
釋曰第十五德世親云卽是無量
001_0154_c_24L「怛」疑「恒」

001_0155_a_01L말하자면 (이 지혜는) 한량없는 보살들의 소의로서, 유정들을 조복시키는 일을 지을 수 있다. 이것은 제불들이 자타의 평등함을 얻고 나서 다시 이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 아니니, 오직 제불만 이와 같이 뛰어난 조복의 일을 이미 일으킬 수가 있다.”652)그 뜻을 총체적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조복지調伏智가 바로 ‘한량없는 보살들의 소의’다. 보살이 가행을 통해 점차로 증득하는 것은 부처님이 구하는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가장 뛰어난 조복을 이미 증득하셨기 때문이다. 나머지 해석은 차별되는데, 다음에 인용한 것과 같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말하자면 (보살들은) 한량없는 보살들의 소의에 의해 유정들을 조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가행을 일으키는데, 부처님의 증상력增上力으로 법의 청문이 선행되고 나서 묘한 지혜를 획득한다. 이류보살異類菩薩653)들은 (부처님이) 거두고 부촉해 주면 전전展轉하여 상속하면서 간단없이 일어나서, 이로 인해 모든 보살들이 구해야 할 지혜를 증득하게 된다.”654)이 해석에서는 먼저 공덕을 해석하고 나중에 경의 문구를 해석하였다. ‘한량없는 보살들의 소의’란 앞에서 (세친이 말한) ‘한량없는 소의’를 해석한 것이니, 한량없는 소의란 곧 불지佛智다. 어떤 이는 이것을 ‘보살의 무분별지’라고 설한다. (보살들은) 유정들의 집착하는 마음을 조복시키고자 가행지加行智를 일으켜서 불지佛智를 구하는 것이다. 혹은 보살지菩薩智를 구한다고 할 수도 있다. 두 가지 해석이 있지만, ‘불지를 구한다’는 설이 더 뛰어나다. 다음은 경의 문구를 해석하였다. 부처님의 증상력으로 어떤 보살은 법의 청문이 선행되고 나서 초지初地의 무분별묘지無分別妙智를 획득한다. 혹은 부처님의 일체묘지一切妙智를 획득한다고 할 수도 있다. 비유하면 하나의 등불이 전해져서 천 개의 등불을 태우는 것과 같다. 지전地前의 이류보살 및 부정성不定性의 성문·독각은 부처님 자신이 거두셨다가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그 밖의 다른 부처님들과 대보살들, 모든 선인에게 부촉하시어 전전하면서 문·사·수의 지혜를 얻도록 하니, 이로 인해 모든 보살 등이 모두 구하는 바인 불과佛果의 지혜를 증득한다. 세친의 『반야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잘 호념655)한다(善護念)’는 것은 근기가 무르익은 보살에 의거해 설한 것이고, ‘잘 부촉한다(善咐囑)’는 것은 근기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보살에 의거해 설한 것이다.”656)
무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종성의 성문·보살을 이끌어 들이고 맡아 지키기 위해서 대승을 찬탄하는 것이니, 이 일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에 ‘모든 보살들이 구하는 (바로) 그 지혜’라고 설하였다.”657) 부정의 성문 등을 이끌어 들여서 진취시키기 위해, 부정의 보살을 맡아 지켜서 물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승의 지혜를 설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방의 불국토에는 일승법만 있으니, 부처님의 방편의 설을 제외하면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네.”658)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부처의 종자(佛種)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방편을 성취하신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보살들은 부처 종성이 단절되지 않게 하려고 부지런히 가행을 닦지만, 성문 등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불지佛智는 오직 보살들만이 바로 구해야 할 것이다.”659)이에 준해 보면, 불지가 추구의 대상이지 보살지는 추구의 대상이 아니다.

001_0155_a_01L所依調伏有情加行功德謂無量菩
001_0155_a_02L薩所依能作調伏諸有情事此非諸
001_0155_a_03L佛已得自他平等更求此智唯有諸
001_0155_a_04L已作如是勝調伏事總釋意云佛調伏
即是無量菩薩
001_0155_a_05L所依由菩薩加行漸次證得非佛所求
佛已證最勝調伏故餘釋差別如後所引

001_0155_a_06L性釋云謂由無量菩薩所依爲欲調
001_0155_a_07L伏諸有情故發起加行佛增上力
001_0155_a_08L法爲先獲得妙智異類菩薩攝受
001_0155_a_09L付屬展轉相續無間而轉由此
001_0155_a_10L得一切菩薩等所求智於此釋中先釋功
後釋經句無量
001_0155_a_11L菩薩所依者釋上無量所依無量所依即佛智也
有說即是菩薩無分別智爲欲調伏諸有情執取
001_0155_a_12L心故發起加行智求佛智也或可求菩薩智
有二釋求佛智爲勝下釋經句佛增上力有菩
001_0155_a_13L薩聞法爲先獲得初地無分別妙智或可獲得佛
一切妙智譬如一燈傳燃千燈地前異類菩薩
001_0155_a_14L不定性聲聞獨覺佛自攝受佛涅槃時付屬餘佛
及大菩薩一切善人展轉令聞思修智由此證得
001_0155_a_15L一切菩薩等皆所求佛果智也世親波若論善護
念者依根熟菩薩說善付屬者依根未熟菩薩說

001_0155_a_16L無性復云列攝 [198] 任持不定種性聲聞
001_0155_a_17L菩薩故讃大乘爲顯此事故次說
001_0155_a_18L言一切菩薩等所求智解云爲列 [199] 不定聲
聞等令進趣故
001_0155_a_19L持不定菩薩令不退故說大乘智故法華云
方佛土中唯有一乘法無二亦無三除佛方便說

001_0155_a_20L親光釋云顯示世尊成就佛種不斷
001_0155_a_21L方便殊勝功德謂諸菩薩爲令佛種
001_0155_a_22L無斷絕故勤修加行非聲聞等是故
001_0155_a_23L佛智唯諸菩薩正所應求准此佛智以爲
所求非菩薩

001_0155_b_01L친광의 뒤의 해석은 또한 무성과 같다.660)
이상의 여러 설에는 모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이타의 공덕이고, 둘째는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니 곧 자리의 공덕이다.

(너) 열여섯 번째 공덕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의 뛰어난 바라밀을 얻으셨고,

  열여섯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성취한 공덕이다. 말하자면 둘 없는 법신을 ‘평등한 법신’이라 하니, 곧 이와 같은 둘 없는 법신에서 선하고 청정한 바라밀다를 얻은 것이다.”661) 양梁 『섭대승론석』에 의하면, 원만한 법신 및 사덕四德662)의 바라밀을 공덕의 체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양梁 『섭대승론석』에서는 여래의 법신을 ‘머묾(住)’이라 하고 사덕의 궁극을 ‘바라밀’이라 하였다.663)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둘이 없으므로 ‘평등’이라 하니,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에 의거하여 과위果位를 성취했기 때문이다.”664) 제불의 법신에는 둘이 없으므로 평등이라 한다.무성은 다시 ‘과위의 육도六度(육바라밀)는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한다’고 하였다.665)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세존의 자성신분自性身分(법신)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신에 차별된 모습이 없는 것을 ‘둘 없음’이라 한다.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이란 법신에 해당하니, 진여를 체로 삼는다. ‘차별된 모습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둘로 보는 분별이 전혀 현행하지 않는 것이다. 저 (진여를) 반연하는 선정 안에 항상 머물기 때문에 ‘머묾’이라 하고, 곧 ‘둘 없는 머묾’을 ‘뛰어난 바라밀(彼岸)’이라 하며, 부처님이 이미 궁극에까지 도달한 것을 ‘얻었다’고 한다.”666) 친광의 이 해석을 갈라 보면, 세 가지 설이 다르다. 한편에서는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이란 말은) 능히 머무는 선정(能住定)을 들어 머무는 바의 경계(所住境)인 평등한 법신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667) 한편에서는 비록 머무는 바의 경계를 들었지만 의도는 능히 머무는 선정을 취한 것이라 한다.668) 한편에서는 머무는 바의 경계와 능히 머무는 선정을 함께 취하여 공덕의 이름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669)
또 친광은 “불지佛地의 둘 없는 법신에서는 모든 보시 등의 바라밀다가 평등하고 원만하다.”670)고 하였다. 법신은 하나이기 때문에 ‘둘이 없다’고 하고, 육바라밀이 모두 원만하므로 ‘평등’이라 한다.
이상의 여러 논에는 모두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의 해석은 ‘법신이 하나이므로 둘이 없다’는 것이고, 하나의 해석은 ‘법신에는 갖가지 차이(二)가 없기 때문에 둘이 없다’는 것이다.


001_0155_b_01L智爲所
求也
親光後釋亦同無性如上諸
001_0155_b_02L總有兩釋一者利他德二者佛
001_0155_b_03L種不斷卽自利德

001_0155_b_04L
得佛無二住勝彼岸

001_0155_b_05L
釋曰第十六德世親釋云卽是平
001_0155_b_06L等法身波羅蜜多成滿功德謂無二
001_0155_b_07L法身名平等法身卽於如是無二法
001_0155_b_08L得善淸淨波羅蜜多解云准梁論
圓滿法身及四德
001_0155_b_09L波羅蜜爲功德體故梁論云如來法身
名住四德究竟名波羅蜜具說如彼
無性
001_0155_b_10L釋云謂無二故名爲平等依平等法
001_0155_b_11L身波羅蜜多果位成滿故解云諸彿法身
無二故名平等

001_0155_b_12L無性復云果位六度無增減故名爲
001_0155_b_13L平等具說如彼親光釋云顯示世
001_0155_b_14L尊自性身分殊勝功德謂佛法身無
001_0155_b_15L差別相 [200] 1) [39] [201] 佛無二住卽是法身
001_0155_b_16L眞如爲體無差別相於一切二相分
001_0155_b_17L皆不現行 [202] 勝定常住其中故名
001_0155_b_18L爲住卽無二住名勝彼岸佛已窮到
001_0155_b_19L說名爲得解云判此親光三說不同一云擧能
住定顯所住境平等法身一云雖擧
001_0155_b_20L所住意取住定一云
取所住能住以立德名
又親光云謂於佛
001_0155_b_21L地無二法身一切施等波羅蜜多平等
001_0155_b_22L圓滿解云法身一故名爲無
六度皆滿故名平等
如上諸論
001_0155_b_23L有兩釋一云法身一故名爲無二
001_0155_b_24L於法身中無種種二故名爲無二

001_0155_c_01L
(더) 열일곱 번째 공덕

  서로 뒤섞이지 않는 여래의 해탈의 궁극적 묘지로,

  열일곱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뒤섞임 없는 여래의 지智 중에서 궁극적 승해勝解를 말하니, 이 경문에서 승해를 해탈이라고 하였다.671) 이는 그 승해에 따라서 차별적 불국토를 나타내시는 공덕에 해당한다.”672) 세친의 『섭대승론석』에서 말한 뜻은 무성의 해석에 의거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뒤섞이지 않는”이라 한 것은 여래의 승해에 의해 나타난 불국토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음을 말한다. “여래의 해탈”이라 한 것은, 즉 불국토를 나타내는 여래의 승해를 말하고, 나타낸 것들에 대해 모두 잘 아시기 때문에 “궁극적 묘지”라고 한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중생을 관하는 승해의 차별에 따라 금이나 은 등으로 된 갖가지 불국토를 서로 뒤섞임 없이 나타내시는 것을 말한다. 세존의 승해가 현재 일어날 때 중생들이 좋아하는 것에 맞춰 모두 다 현현시키면서 (나타낸 것들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 없다.”673) 무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생들은) ‘모든 부처님께서 평등함을 얻었다’는 말을 들으면 곧 ‘모든 것이 동일한 성질일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런 의심을 막기 위하여 그 다음의 (경문에서) ‘서로 뒤섞이지 않는 여래의 해탈의 궁극적 묘지’라고 설한 것이다.”674)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세존의 수용신분受用身分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공덕의 이름을 세운 것이다.말하자면 수용신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으니, 모든 여래가 수용하는 신체는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자수용신675)이 서로 뒤섞이지 않음에 대해 해석하였다.여래의 묘지로 모든 중생을 해탈하게 하므로 ‘여래의 해탈의 묘지’라고 하고, 부처님은 이 묘지에서 이미 궁극적인 것을 얻었으므로 이처럼 ‘여래의 묘지는 서로 뒤섞임이 없다’고 설한 것이다.이는 묘지가 서로 뒤섞이지 않음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청정한 불국토에서 수용신을 나타내면서 또한 서로 뒤섞임이 없고,이는 타수용신676)이 서로 뒤섞이지 않음에 대해 해석하였다.큰 집회에서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 여러 보살들과 더불어 법락을 수용하면서 또한 서로 뒤섞임이 없으며, 법락을 수용하면서 서로 뒤섞임이 없음에 대해 해석하였다.여래는 이 묘지로 나타내시는 몸에 있어서 또한 궁극에 도달하였다.‘구경究竟’에 대해 거듭 해석하였다.677)
친광의 나중 해석은 무성의 처음 해석과 동일하다.이상의 다섯 가지 해석은 문장이 분명하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001_0155_c_01L
不相間雜如來解脫妙智究竟

001_0155_c_02L
第十七德世親釋云謂於無雜如來
001_0155_c_03L智中勝解究竟此中勝解名爲解
001_0155_c_04L卽是隨其勝解示現差別佛土 [203]
001_0155_c_05L解云世親論意依無性釋而可了知言不相
間雜者如來勝解所現佛土不相間雜言如
001_0155_c_06L來解脫者即是如來現土勝解
所現中無不了知故名妙智究竟
無性釋云
001_0155_c_07L謂觀衆生勝解差別現金銀等種種
001_0155_c_08L佛土不相間雜世尊勝解現在前時
001_0155_c_09L隨衆所樂悉皆顯現無不了知
001_0155_c_10L性復云聞一切佛得平等言卽謂一
001_0155_c_11L切應同一性爲遮此疑故次說言 [204]
001_0155_c_12L來解脫妙智究竟親光釋云顯示世
001_0155_c_13L尊受用身分殊勝功德立功
德名
謂受用身
001_0155_c_14L不相間雜一切如來受用身體各各
001_0155_c_15L別故釋自受用身
不相間雜
如來妙智能令一切
001_0155_c_16L衆生解脫故名如來解脫妙智佛於
001_0155_c_17L此智已得究竟如是卽說如來妙智
001_0155_c_18L不相間雜此釋妙智
不相間雜
於淨佛土現受
001_0155_c_19L用身亦不相雜此釋他受用
身不相間雜
大集會中
001_0155_c_20L現種種身與諸菩薩受用法樂亦不
001_0155_c_21L相雜釋受用法樂
不相間雜
如來於此智所現身
001_0155_c_22L亦到究竟重釋
究竟
親光後解同無性初
001_0155_c_23L上來五釋
文顯可知

001_0155_c_24L「二」上疑脫「無」

001_0156_a_01L
(러) 열여덟 번째 공덕

  중간도 가장자리도 없는 불지佛地의 평등을 증득하시고,

  열여덟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세 종류 부처님 몸의 장소(方處)에 한계가 없는 공덕을 말한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법신은 어느 정도의 장소를 차지한다고 한계 지을 수 없고, 수용신·변화신도 또한 어느 정도 되는 세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678)문장이 분명하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양梁 『섭대승론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여래의 세 종류 몸 가운데 법신은 처소에 의거해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고, 응신應身·화신化身의 두 몸도 그러하여 단지 이 세계에만 있고 저 세계에는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법신을 벗어나서는 그 밖에 하나의 법도 있지 않고, 응신·화신의 두 몸을 벗어나서는 중생계란 있지 않다.”679)
무성은 두 가지로 해석하는데, 처음과 그 다음 해석에는 다시 네 종류가 있고 의미는 세친과 동일하다. 따라서 그 『섭대승론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치 세계에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것처럼, 불지佛地도 이와 같아서 공덕의 처소(方處)에 한계가 없다. 혹은 다시 세계의 처소는 끝이 없는데 모든 부처님의 삼신三身이 그 안에서 세계의 크기에 딱 맞아 평등하게 두루 가득 차 있으니, 법신 등은 곧 이와 같은 모든 세계 안에 머무는 것이지 그 밖의 처소에 머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법신 등은 불지에 평등하게 두루 가득 차 있으면서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어서 한계가 없다. 이 법신 등은 두루 모든 곳에 나타나서 모든 중생들을 위해 요익을 현재 지어 주지만, 자성自性에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것은 아니다.”680)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다’는 말에 대해 네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유법喩法에 의거해 ‘중간과 가장자리가 없음’을 해석한 것이다.681) 둘째 “혹은 다시 세계의” 이하는 소의所依·능의能依에 의거해서 ‘중간과 가장자리가 없음’을 해석한 것이다.682) 셋째 “혹은 법신 등은” 이하는 오직 불지에 의거해서 ‘중간과 가장자리가 없고 한계가 없음’을 해석한 것이다. 넷째 “이 법신 등은” 이하는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몸을 나타내는 데는 한계가 없지만 자성에 있어서 중간과 가장자리가 없는 몸은 아님을 밝힌 것이다.
무성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그 모습은 어떤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다음에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불지佛地의 평등함을 증득하시고’라고 설하였다.”683) ‘서로 뒤섞이지 않기(不相間雜)’684)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非一)’라고 하고, 앞으로 올라가 보면 ‘부처님의 둘 없음을 얻었기(得佛無二)’685) 때문에 ‘다르지도 않다(非異)’고 하니, 이와 같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모습’은 어떤 것이라 알아야 하는가?686) 이 공덕에 대해 먼저 묻고 나중에 답하였다. 앞으로 올라가 보면,

001_0156_a_01L
證無中邊佛地平等

001_0156_a_02L
釋曰第十八德世親釋云卽是三
001_0156_a_03L種佛身方處無分限功德謂佛法身
001_0156_a_04L不可分限爾所方處受用變化亦不
001_0156_a_05L可說爾所世界文顯
可知
梁論釋云如來
001_0156_a_06L三種身中法身約處所不可度量
001_0156_a_07L化兩身互 [205] 不可言但此世界有彼
001_0156_a_08L世界無無有一法出法身外無有衆
001_0156_a_09L生界出應化兩身外無性兩釋初次
001_0156_a_10L中復有四種意同世親故彼論云
001_0156_a_11L世界無中無邊佛地亦爾功德方處
001_0156_a_12L無有分限或復世界方處無邊諸佛
001_0156_a_13L三身卽於其中稱世界量平等遍滿
001_0156_a_14L以法身等卽住如是諸世界中非餘
001_0156_a_15L處故或法身等於佛地中平等遍
001_0156_a_16L滿無中無邊無有分限此法身等
001_0156_a_17L遍一切處爲諸衆生現化 [206] 饒益
001_0156_a_18L非自性無中無邊解云無中無邊有其四種
一約喩法釋無中邊二或
001_0156_a_19L復世界下約所依能依釋無中邊三或法身等下
唯約佛地釋無中邊無有分限四此法身等下
001_0156_a_20L爲衆生故現身無分限
然非自性無中邊身也
無性復云非一非
001_0156_a_21L其相云何爲答此問故次說言
001_0156_a_22L證無中邊佛地平等不相間雜故云
001_0156_a_23L非一乘前得佛無二故云非異
001_0156_a_24L是非一異相云何1) [40] [207] 解云於此德中
問後答乘前知爲

001_0156_b_01L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그 다음에 “중간도 가장자리도 없는 불지의 평등을 증득하시고”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하나가 아니라 해도 각각 두루 미치고(遍周), 둘이 없는 것이라면 또한 두루 가득 차기(遍滿) 때문에 중간도 가장자리도 없다는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진여의 모습을 증득하신 세존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말하자면 진여의 모습에는 중간도 가장자리도 없으니, 모든 유위·무위에서의 중간과 가장자리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고, 처소에서의 중간과 가장자리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여는 곧 불지佛地의 평등한 법성을 말하니, 이 불지의 평등성을 증득하셨기 때문에 모든 유위·무위 등을 두루 아시면서도 그 안에서 오염되지 않는 것이다.”687) “모든 유위·무위에서의 중간과 가장자리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가령 유위에 대해 ‘결정코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상변常邊688)이고 ‘결정코 없다’고 집착하는 것은 단변斷邊689)이며,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중도中道다. 중도의 의미는 극단(邊)에 상대해서 성립하니, 극단성(邊性)을 본래 떠났다면 중간이란 어디의 중간이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평등을 증득하여 중간과 극단을 모두 떠나셨으니, 유위도 이미 이러하고 무위도 그러하여 (모두 떠나신다.) 세속을 따라 방토方土와 처소에 대해 말한다면 중간도 있고 가장자리도 있으니, 가령 중국이 가운데이고 나머지 나라들은 변방인 것과 같다. 부처님은 평등을 증득하여 방토가 없으므로 방토의 중간과 가장자리의 모습을 멀리 떠나셨다. 혹은 유위·무위를 두 가지 극단으로 보고,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닌 것을 중도라고 볼 수도 있다. 극단이 이미 있지 않으므로 중도란 어디의 중도이겠는가? 방소方所의 중간과 가장자리도 이에 준해서 해석해야 한다.
친광의 나중 해석은 세친의 설명과 동일하다.

(머) 열아홉 번째 공덕

  법계를 지극하게 하며,

  열아홉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말하자면 청정한 법계를 지극하게 하는 것을 일컬어 ‘법계를 지극하게 한다’고 하니, 곧 생사의 때가 다하도록 언제나 모든 유정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나타내 주는 공덕이다.”690)무성의 해석에 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말하자면 이 법계는 가장 청정하기 때문에 등류等流의 계경 등의 교법을 일으켜서 이 법계를 지극하게 하고,691) 미래의 모든 유정들에게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이익과 안락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692) 가장 청정한 법계에서 정지正智693)(근본지)가 흘러나오고, 정지로 인해 후지後智694)(후득지)가 흘러나오며, 후득지로 인해 대비大悲가 흘러나오고, 대비로 인해 계경 등의 십이부경이 흘러나와서, 이로 인해 법계에 상주하기 때문에 항상 미래에까지 이익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과果의 모습을 증득한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니, 즉 청정한 법계를 끝까지 지극히 하심을 말한다. 이와 같은 법계는 수도修道의 과이다.”695) 친광의 나중 해석은 무성과 동일하다.


001_0156_b_01L答此問故次說言證無中邊佛地平等雖復非一
各各遍周若是無二亦是遍滿故無中邊

001_0156_b_02L親光云顯示世尊證眞如相殊勝功
001_0156_b_03L謂眞如相無有中邊遠離一切有
001_0156_b_04L爲無爲中邊相故遠離方處中邊相
001_0156_b_05L如是眞如卽是佛地平等法性
001_0156_b_06L此佛地平等性故遍知一切有爲無
001_0156_b_07L爲等於中不染解云遠離一切有爲無爲
中邊相故者如於有爲執爲
001_0156_b_08L定有是常邊執爲定無是斷邊非有非無是中
中道之義待邊故立邊性自離中何所中
001_0156_b_09L佛證平等中邊俱離有爲旣爾無爲亦然若隨
俗說方土處所有中有邊如中國爲中餘國名邊
001_0156_b_10L佛證平等無方土故遠離方土中邊相也或可
有爲無爲爲二邊非有爲非無爲爲中邊旣非有
001_0156_b_11L中何所中方所
中邊准此應釋
親光後釋同世親說

001_0156_b_12L
極於法界

001_0156_b_13L
釋曰第十九德世親釋云謂極淸
001_0156_b_14L淨法界是名極於法界卽是窮生
001_0156_b_15L死際常現利益安樂一切有情功德
001_0156_b_16L准無性
可知
無性釋云謂此法界最淸淨
001_0156_b_17L能起等流契經等法極此法界
001_0156_b_18L當來世一切有情如其所應常能現
001_0156_b_19L作利益安樂解云最淸淨法界流出正智
正智故流出後智由後智故
001_0156_b_20L出大悲由大悲故流出契經等十二部
此法界常住故常於當來世能現利益
親光
001_0156_b_21L釋云顯示世尊證得果相殊勝功德
001_0156_b_22L謂得窮極淸淨法界如是法界 [208]
001_0156_b_23L親光後釋同於無性

001_0156_c_01L
(버) 스무 번째 공덕

  허공성을 다하도록,

  스무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다함없는 공덕이니, 말하자면 부처님의 지혜는 마치 허공처럼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696)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마치 저 허공이 한계도 없고 끝도 없으며 다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변하여 달라짐도 없이 모든 때에 질애質礙가 있는 모든 사물들을 현전시키고 수용하는 것처럼, 법신法身도 이러하여 항상 모든 유정들의 이익과 안락을 현전시켜 지어 주는 것을 그 모습으로 삼는다. 모든 세계를 다하여 중생들에게 두루 이익과 안락을 주는 일을 지어 내면서 그치는 적이 없다.”697)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서) 스물한 번째 공덕

  미래제가 다하도록 (끝이 없다.)

  스물한 번째 공덕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구경究竟의 공덕 등이다. (‘구경의 공덕 등’이라는 말에서) ‘등’이라 한 것은 ‘이 불지는 궁극에는 미래제가 다하도록 끊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 한다.”698)
무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구경의 공덕 등’이라는 말에서) ‘등’이란 구경의 공덕들을 똑같이 다룬다는 말이다.……말하자면 이 공덕은 미래제가 다하도록 항상 끊임이 없고, 미래의 끝이 없는 때(無際之際)가 다하도록 부처님의 공덕도 영원히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니, 교화되는 유정이 영원히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699)
친광에 의하면 뒤의 두 가지는 합해서 해석되는데,700)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음의 두 가지 뛰어난 공덕은 세존의 공덕이 ‘다함없음(無盡)’을 나타낸 것이다. ‘허공성을 다하고 미래가 다하도록 (끝이 없다)’고 한 것은 세존의 자리·이타의 두 가지 공덕이 다함없는 수승한 공덕임을 나타낸 것이다. 마치 허공이 성겁과 괴겁을 거치도록 본성은 항상 다함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모든 진실한 공덕도 이와 같아서 항상 끊임도 다함도 없다. 마치 미래에 다하는 때가 없는 것처럼, 세존의 이타의 공덕도 이와 같아서

001_0156_c_01L
盡虗空性

001_0156_c_02L
釋曰第二十德世親釋云卽是無
001_0156_c_03L盡功德謂佛智無盡如虗空故
001_0156_c_04L性釋云如彼虗空無邊無際無盡
001_0156_c_05L無減無生無滅無有變易於一切
001_0156_c_06L現前容受一切質礙法界 [209] 亦爾
001_0156_c_07L現前作一切有情利樂爲相盡一切
001_0156_c_08L遍作衆生諸饒益事無有休息
001_0156_c_09L說如彼

001_0156_c_10L
窮未來際

001_0156_c_11L
釋曰第二十一德世親釋云卽是
001_0156_c_12L究竟功德等言等此佛智究竟窮未
001_0156_c_13L來際無有間斷是故名爲最淸淨覺
001_0156_c_14L無性釋云等者等取究竟功德謂此
001_0156_c_15L功德窮未來際常無間斷窮於未
001_0156_c_16L來無際之際顯佛功德永無窮盡
001_0156_c_17L化有情永無盡故若依親光後二合
001_0156_c_18L故佛地云次後二種殊勝功德
001_0156_c_19L示世尊功德無盡盡虛空性窮未來
001_0156_c_20L際者顯示世尊自利利他二德無盡 [210]
001_0156_c_21L謂如虛空經成壞劫性常無盡
001_0156_c_22L來一切眞實功德亦復如是常無斷
001_0156_c_23L如未來際無有盡期利他功德
001_0156_c_24L「應」下疑有脫文

001_0157_a_01L미래가 다하도록 항상 모든 유정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일들을 짓기 때문이다.”701)
친광은 뒤이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는 세존의 ‘다함없는’ 구경의 수승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마치 허공이 늘 다함이 없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의 법계에서 일어난 공덕도 이와 같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고, 마치 미래에 다하는 때가 없는 것처럼 모든 중생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가행을 그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702) 친광의 두 가지 해석은 차이가 있다. 앞의 해석에서는 공덕의 이름을 세우면서 모두 ‘다함없음’이라 하였다. 뒤의 부차적 해석은 세친 등과 동일하고, 아울러 문답도 있다.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이상에서 해석한 여래의 공덕은 여러 논에 자세히 쓰여 있는데, 여러 강설자들은 자기 뜻(情)에 따라 자세하거나 간략하게 말한다. 하나를 선택한다면 세친의 해석이나 혹은 친광의 첫 번째 설을 취할 것이고,703) 두 개를 선택한다면 두 학자의 설을 모두 취하겠다.

(5) 가르침을 받는 근기

  한량없는 대성문중과 함께하니,

  이하는 다섯 번째로 가르침을 받는 근기를 밝힌 것이다.육성취 가운데 여섯 번째인 중성취衆成就에 해당한다.이 중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에 성문을 밝히고 나중에 보살을 밝혔으니, 말하자면 성문중과 보살중의 두 대중이다.
그런데 이 두 대중에 대해 네 문으로 분별하고 나서, 그 후에 경문을 해석하겠다.

① 네 문으로 성문중과 보살중을 분별함
네 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대중들 중에 소승과 대승의) 있고 없음을 판별하고, 둘째는 (등장 순서의) 전후에 대해 해석하며, 셋째는 (어떤 대중이) 방편(權)이고 진실(實)인지를 밝히고, 넷째는 그 외의 대중들의 있고 없음을 나타내겠다.

가. 소승과 대승의 유무에 대해 설명함
(대중들 중에 소승과 대승의) 있고 없음에 대해 분별하면, 이에 네 구가 있다. (첫째,) 본래 어떤 경문에는 오직 소승만 있고 대승은 없으니, 예를 들면 『금강반야경』이나 『아함경』 등이다. 둘째, 오직 대승만 있고 소승은 없으니, 예를 들면 『화엄경』과 『이취경理趣經』 등이다. 셋째, 대승과 소승이 함께 나열되는 것이니, 예를 들면 『법화경』과 『유마경』 등이다. 넷째, 대승과 소승이 모두 없는 것이니, 예를 들면 『금광명경』과 『승만경』 등이다.

  네 구가 있다면, 『대지도론』과 어떻게 회통시켜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 논에서는 ‘성문장에서는 오직 성문만 열거하고 보살장에서는 성문중과 보살중을 함께 열거한다’고 하였다.704)
 () 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한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은 『대지도론』과 같지만

001_0157_a_01L亦復如是窮未來際常作一切有情
001_0157_a_02L利益安樂事故親光後釋云顯示世
001_0157_a_03L尊無盡究竟殊勝功德謂如虛空
001_0157_a_04L無窮盡諸佛法界所起功德亦復如
001_0157_a_05L無窮盡故如未來際無有盡期
001_0157_a_06L樂一切有情加行無休息故解云親光
兩釋有差別
001_0157_a_07L前釋立功德名皆是無盡後復
次釋同世親等兼有問答具說如彼
上來所
001_0157_a_08L釋如來功德具申諸論諸講說者
001_0157_a_09L情廣略若用一者取世親釋或親
001_0157_a_10L光初說若用二者合取兩家

001_0157_a_11L
與無量大聲聞衆俱

001_0157_a_12L
釋曰自下第五敎機六中第六
衆成就
於中有
001_0157_a_13L初明聲聞後明菩薩謂卽聲聞
001_0157_a_14L菩薩二衆然此二衆四門分別
001_0157_a_15L方釋文言四門者一辨有無二釋
001_0157_a_16L前後三明權實四顯餘衆有無
001_0157_a_17L有無者有其四句自有經文唯小
001_0157_a_18L非大如金剛波若及阿含等二唯大
001_0157_a_19L非小如華嚴經及理趣等三大小俱
001_0157_a_20L如法華維摩等四大小俱無
001_0157_a_21L金光明及勝鬘等若有四句如何
001_0157_a_22L會釋大智度論彼云聲聞藏中
001_0157_a_23L列聲聞菩薩藏中具列聲聞及菩薩
001_0157_a_24L此有二說一云據實如智度論

001_0157_b_01L네 구가 (있게 된 것은) 경을 결집한 사람들의 의요意樂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은 네 구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 『대지도론』에서는 이장二藏(성문장·보살장)에 우열의 차이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 두 구만 갖추어 설한 것이다. 예로부터 서로 전하길, (성문중과 보살중이) 실제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기 때문이고, 혹은 (대중을) 자세히 말하거나 간략히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진제 삼장은 『금광명기金光明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은 세 가지 의미에서 ‘함께 들었다’고는 할 수 없다. 첫 번째 (의미는) 기사굴산의 대중은 단지 정설의 뒷부분을 들었지만 정설의 앞부분에서 밝힌 인과에 대해 듣지 못했고, 왕사성의 대중은 앞부분의 인과에 대해 들었지만 뒷부분의 인연의 작용 등에 관한 일은 듣지 못했으니, 당시 대중들도 어떤 것은 들었고 어떤 것은 듣지 못했으므로 ‘함께 들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는 (상·낙·아·정이라는) 사덕四德의 과果를 설하신 분은 사불四佛705)이고 삼신三身의 인因을 밝히신 분은 석가이니, 단지 들었던 당시의 대중이 같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법의 주인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함께 들었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번째 의미는 참회의 (게송을) 들은 것은 신상보살로서 홀로 자신이 꿈속에서 감응했던 것이므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706) 이러한 세 가지 의미 때문에 ‘함께 들었다’고 해 놓지 않은 것이다.

나. 등장 순서의 전후에 대해 설명함
(등장 순서의) 전후를 분별하면, 이것은 일정하지 않다. 본래 어떤 경문에는 대승이 먼저 나오고 소승은 나중에 나오니, 예를 들면 『오탁경』이다. 본래 어떤 경문에는 소승이 먼저 나오고 대승이 나중에 나오니, 예를 들면 이 『해심밀경』 등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불지경론』과 『대지도론』에서는 모두 성문들을 먼저 설했는가?
  예를 들면 『대지도론』 제4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불법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비밀秘密이고 둘째는 현시顯示다. 현시문에서는 성문을 먼저 말하니, 그들은 번뇌를 남김없이 멸했기 때문이다. 비밀문에서는 보살을 먼저 말하니, 그들은 무생인을 얻어서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다.≻707)
  그러므로 두 경은 각기 하나의 의미에 근거한 것이므로 서로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성문을 먼저 설한 것은, 『불지경론』에 의하면 여덟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논의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대승에 대해 의혹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그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다.그들은 대승의 가르침은 부처님 설이 아니라고 의심하므로, (성문과 보살이 함께) 부처님을 직접 대면하여 들었으므로 이것도 부처님 설이라고 믿게 한 것이다.
둘째, 종성이 일정하지 않은 자를 대승으로 이끌어 들여 그들이 확고한 믿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다.종성이 일정하지 않은 자는 소승의 과를 취하려 하므로, 부처님에 가까이 보내어 대승의 과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셋째, 이미 청정한 모든 대성문들이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거나 자만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다.……중간 생략……말하자면 가까이서 세존이 친히 가르치고 교화해 주셨기 때문에 스스로 교만을 버린다.708) 구경문이다.
넷째, 성문들은 항상 부처님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고 있으므로

001_0157_b_01L四句結集經者意樂異故一云
001_0157_b_02L實具有四句而智度論爲顯二藏勝
001_0157_b_03L劣異故具說二句舊來相傳實有
001_0157_b_04L無故或廣略故眞諦三藏金光明記云
經三義不立同聞一耆闍
001_0157_b_05L之衆唯聞正說後分不聞正說前分所明因果
王舍之衆聞前分因果不聞後分緣用等事
001_0157_b_06L衆有聞不聞所以不立同聞二義者說四德之
是四佛明三身之因是釋迦非上聽時衆不同
001_0157_b_07L亦是法主有異故不安同聞三義者聞懺悔是信
獨自夢感不得與多同聞爲此三義不安同聞

001_0157_b_08L辨前後者此即不定自有經文
001_0157_b_09L大後小如五濁經自有經文先小
001_0157_b_10L後大卽此經等若爾如何佛地
001_0157_b_11L及智度論皆說聲聞爲先解公
001_0157_b_12L智度論第四卷說佛法二種一者秘
001_0157_b_13L二者顯示顯示門中1) [41] 聲聞
001_0157_b_14L以其煩惱滅無餘故秘密門中先說
001_0157_b_15L菩薩得無生忍斷煩惱故解云
001_0157_b_16L故兩經各據一義互不相違然說聲
001_0157_b_17L聞以爲先者依佛地論有其八故
001_0157_b_18L二云一爲於大乘生疑惑者除彼疑
001_0157_b_19L疑大乘敎非是佛說親對佛聞
001_0157_b_20L是佛說 [211] 二爲列 [212] 不定種性令生定信
001_0157_b_21L不定性者欲取小果故遣近佛
001_0157_b_22L令取大果 [213] 三爲已淸淨諸大聲聞
001_0157_b_23L於自身尊貴慢故乃至廣說謂近世尊
親授化故
001_0157_b_24L自捨高慢
究竟門也
四又諸聲聞常隨佛故菩薩

001_0157_c_01L항상 부처님을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다. 성문은 항상 따라다니므로 먼저 열거한 것이다.
다섯째, 외형이 부처님과 동일하기 때문이다.머리를 깎고 염색한 옷을 입은 것이 외형상으로 부처님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보살의 외형은 일정하지 않으므로 나중에 설한 것이다.
여섯째, 내부의 권속이었기 때문이다.출가하여 부처님 가까이 있는 이들을 내부의 권속이라 한다.
일곱째, 보살들이 공경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다.……중간 생략……부처님을 직접 모셨기 때문에 보살들이 그들을 공경하는 것이니, 예를 들어 왕을 모시는 자를 다른 이들이 공경하는 것과 같다.
여덟째, 이처럼 성문의 공덕을 찬탄함으로 말미암아 또한 그 밖의 다른 사람들도 성문중들에게 깨끗한 믿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다.보살이 성문을 공경하는 뜻을 전석轉釋한 것이니,709) 보살이 오히려 (성문을) 공경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대중들은 어떻겠는가?710)

『대지도론』에는 (등장 순서의 전후에 대해) 두 가지 설명이 나오는데, 그 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위로부터 세어 말하면 보살이 먼저여야 하고, 아래로부터 세어 말하면 우바이가 먼저인데, 어째서 성문의 사중四衆을 먼저 설하고 보살을 나중에 설하는가?711) 보살은 지혜가 많아서 부처님 다음에 설해야 하지만, 그들이 미혹을 아직 다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아라한보다) 나중에 설한다. 아라한들은 지혜는 적으나 미혹을 이미 다 없앴기 때문에 먼저 설한다. 다시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화현하여 오도五道에 들어가 그 오욕五欲의 경계를 수용하면서 중생을 인도하는데, 만약 아라한보다 위에 있다고 하면 모든 천신과 세상 사람들이 의구심을 낼 것이므로 나중에 설한 것이다.≻712) 자세히 설하면 그 논과 같다.

다. 방편(權)과 진실(實)을 밝힘
(어떤 대중이) 방편이고 진실인지를 말하겠다.
이 한 부의 『해심밀경』은 앞에서 말했듯 진실한 의미에서는 두 곳에서 설해진 것이니, 첫째는 정토이고 둘째는 예토이다.
이제 이 『해심밀경』의 경우를 해석해 보자면, 정토淨土에서는 보살은 진실(實)이지만 이승은 방편(權)이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79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유정들이 정토에 태어나지 못하는가? 범부와 이승과 지전 보살이다.≻713) 그러므로 이승(성문·연각)은 변화로 지어낸 것이지 진실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토穢土에서는, 이승은 진실이지만 보살은 방편이니, 변역신變易身714)을 받은 자는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칠지 이하로는

001_0157_c_01L化物不常隨佛聲聞常隨故先列之 [214]
001_0157_c_02L五形同佛故剃髮染衣形同佛故
薩不定是故後說
六內
001_0157_c_03L眷屬故出家近佛名
內眷屬也
七又令菩薩生恭
001_0157_c_04L敬故乃至廣說親侍佛故菩薩恭敬
如侍王者餘人敬也

001_0157_c_05L者由是讃嘆聲聞功德亦令其餘
001_0157_c_06L聲聞衆生淨信故轉釋菩薩敬聲聞
001_0157_c_07L菩薩尙敬況復餘衆 [215] 依智度論
001_0157_c_08L有二復次彼云問曰若從上數
001_0157_c_09L先菩薩若從下數先優婆夷何以
001_0157_c_10L先說聲聞四衆後說菩薩答曰
001_0157_c_11L薩智慧雖多應次佛說以惑未盡
001_0157_c_12L以後說諸阿羅漢智慧雖少而惑已
001_0157_c_13L是故先說復次菩薩以方便力
001_0157_c_14L現入五道受其五欲引導衆生
001_0157_c_15L在阿羅漢上諸天世人當生疑恠
001_0157_c_16L故後說度說如彼言權實者此經
001_0157_c_17L一部如前所說如實義者二處所
001_0157_c_18L一者淨土二者穢士今釋此經
001_0157_c_19L若淨土中菩薩爲實二乘是權
001_0157_c_20L瑜伽論七十九云何等有情不生
001_0157_c_21L淨土異生二乘地前菩薩故知二
001_0157_c_22L乘是化非實若穢土中二乘爲實
001_0157_c_23L薩是權受變易不可見故七地以來
001_0157_c_24L「聞」疑「說」

001_0158_a_01L분단신分段身715)을 받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실재의 몸이 있다 해도 의미상 또한 과실이 없다. 따라서 『대지도론』에서는 ‘칠지 이하로는 아직 충신虫身716)인 육신을 버리지 못한다’고 하였다.717)

라. 그 밖의 대중들의 유무
그 밖의 대중들의 있고 없음에 대해 말하겠다.
예토에 의지하는 경우, 실재의 용 등이 있다. 따라서 『불지경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임에는 또한 그 밖의 다른 무리들도 있으나, 법을 결집한 사람들이 간략히 두 대중만 설한 것은 그들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경의 후반부에서 말한 것처럼, 세간의 천·인·아소락 등의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이 설하신 것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며 믿고 받아들여 봉행하였다.”718)
정토에 있는 경우, 변화로 지어 낸 용 등이 있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화로 지어 낸 것이라 해도 과실이 없으니, 설법의 모임을 장엄하기 위해 혹은 부처님이 변화로 (용 등을) 지어 내고 혹은 보살이 변화로 지어 낸다.”719)
세친과 무성의 『섭대승론석』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해석한다.

② 경문 해석
경문 해석한 곳에서 문장을 두 가지로 구별하였다. 처음은 성문을 밝힌 것이고, 나중은 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가. 성문중을 밝힘
성문중을 밝힌 곳에서는 문장을 셋으로 구별하였다. 처음은 수數를 표시하여 (대중의) 종류를 분별한 것이고, 다음의 “그들 모두가” 이하는 모든 공덕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며, 마지막의 “이미 잘” 이하는 ‘이미 봉행했음’을 나타낸 것이다.

가) 수數로 종류를 구분함
이것은 첫 번째로 수를 표시하여 종류를 분별한 것이다. 말하자면 두 종류 대중 가운데 보살들과 구별시키기 위해 ‘성문’이라 하였다.
(“한량없는 대성문들과 함께하니(與無量大聲聞衆俱)”라는) 문장에는 다섯 구절이 있다. 첫째는 “……와 함께하니(與俱)”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둘째는 “한량없는(無量)”에 대해 풀이한 것이다. 셋째는 그 “대大”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 넷째는 “성문聲聞”에 대해 밝힌 것이다. 다섯째는 “중衆”에 대해 나타낸 것이다.
“……와 함께하니(與俱)”라고 한 것은 부처님이 대중을 상대해서 몸으로 그 대중들과 어울리고 있는 것을 가리켜 ‘여與’라고 한 것이다. 또 ‘여’는 ‘공共’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품반야경』에서는 “마하승과 함께한다(共摩訶僧).”720)고 하였다. 『대지도론』에서는 “한곳에서 한때에 한마음으로 하나의 계戒와 하나의 견해와 하나의 도道로 하나의 해탈을 이룬다면 ‘함께한다(共)’고 한다.”721)고 하였다. 이 『해심밀경』에서 ‘여’라고 한 것은 그 경론들에서 ‘공’이라고 한 것에 해당한다.
“한량없는”이라 한 것에 대해 친광은 “그 수가 매우 많고 계산하기 어려우므로 한량없다고 한다.”722)고 하였다.
“대大”라고 한 것은 『대지도론』에 의거해 해석하면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큼(大)’이고, 둘째는 ‘많음(多)’이며,

001_0158_a_01L容受分段故有實身義亦無失
001_0158_a_02L智度論云七地已來未捨虫身肉身
001_0158_a_03L言餘衆有無者若依穢土有實龍等
001_0158_a_04L故佛地論第二卷云於此會中亦有
001_0158_a_05L餘衆結集法者略說二衆以其勝
001_0158_a_06L如經後言世間天人阿素洛等一
001_0158_a_07L切大衆聞佛所說皆大歡喜信受
001_0158_a_08L奉行若在淨土有化龍等故佛地
001_0158_a_09L論云化亦無過爲欲莊嚴說法會故
001_0158_a_10L或佛化作或菩薩化作世親無性大
001_0158_a_11L乘論亦同此釋就釋文中文別有二
001_0158_a_12L初明聲聞後顯菩薩就聲聞衆
001_0158_a_13L別有三初標數辨類次一切下廣釋
001_0158_a_14L諸德後已善下顯已奉行此卽第一
001_0158_a_15L標數辨類謂二衆中簡異菩薩故言
001_0158_a_16L聲聞文有五節一辨與俱二解無
001_0158_a_17L三釋其大四明聲聞五顯衆也
001_0158_a_18L言與俱者約佛對衆以身兼彼
001_0158_a_19L之爲與又與是共故大品云共摩訶
001_0158_a_20L智度論云一處一時一心一戒
001_0158_a_21L見一道一解脫是名爲共此經與者
001_0158_a_22L卽彼共也言無量者親光釋云
001_0158_a_23L數甚多難可算計故名無量所言
001_0158_a_24L大者依智度論釋有三義一大

001_0158_b_01L셋째는 ‘뛰어남(勝)’이다. 무리 중에서 최상이기 때문에, 모든 장애를 끊었기 때문에, 왕 등이 공경하기 때문에 ‘크다’고 한다.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많다’고 한다. 96종류 외도723)의 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뛰어나다’고 한다.724)
『불지경론』에 의거해 해석하면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예리한 근기의 바라밀다종성을 지닌 성문이고, 둘째로 무학과에 머물며, 셋째로 진실한 의미에서는 부정종성이지만 대승에로 회심한 자이기 때문에 ‘대’라고 한 것이다. 넷째로 무리가 많기 때문에 ‘대’라고 하니, 지금 ‘대중’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725)
진제 삼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대’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수數의 대이니, 가령 ‘대군大軍’이라 하는 경우처럼 수가 많기 때문에 ‘대’라고 한 것이다. 둘째는 양量의 대이니, 가령 ‘대산大山’이라 하는 경우처럼, 수가 많아 ‘대’라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형량形量이 높고 넓기 때문에 ‘대’라고 한 것이다. 셋째는 수승殊勝의 대이니, 가령 ‘대왕大王’이라 하는 경우처럼, 수가 많거나 형량이 높고 넓은 것과는 상관없이 다만 덕이 수승하기 때문에 ‘대’라고 한 것이다. 성문도 이러하니, 수가 하나가 아니므로 수량의 대이고, 회심하여 불과를 구하며 극히 높고 위없는 보리를 닦으므로 수승의 대이며, 광대하고 끝이 없어 측량할 수 없으므로 양의 대이다.
“성문聲聞”이라 한 것은, 『성실론』에서는 “법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에 성문이라 한다.”726)고 하였다. 친광은 “부처님의 언음言音을 듣고서 성도에 들었기 때문에 성문이라 한다.”727)고 해석하였다. 또 『유가사지론』 제82권에서는 “다른 이에게서 정법의 언음을 듣고서 또 다른 이로 하여금 정법의 음성을 듣도록 하기 때문에 성문이라 한다.”728)고 하였다. 『십지경』에서는 “다른 이에게 말(聲)을 듣고 통달하기 때문에, 말을 듣고 마음으로 이해하여 (들은 대로 행하기 때문에) 성문승이 된다.”729)고 하였다. 그 경문의 뜻을 해석하면, 『십지경론』 제4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730)성문에 대해 자세히 해석하면, 예를 들어 『대집경』 제17권, 『대반야경』 제510권, 『십주비바사론』 제1권·제11권, 『성실론』 제5권, 『유가사지론석』에서 설한 것과 같다.
“중衆”이라 한 것은 범음으로 ‘승가僧伽(ⓢ saṃgha)’이고 여기 말로 ‘화합중和合衆’이라 한다. 말하자면 이理·사事 두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중’이라 한다.731) 자세한 것은 『대지도론』 제3권에서 말한 것과 같다.732)

나) 성문의 공덕을 자세히 해석함

  그들 모두가 잘 따르고,

  이하는 두 번째로 (성문의) 모든 공덕들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이에 열세 가지 공덕이 있다.

(가) 마음으로 잘 따르는 공덕
이것은 첫 번째로 ‘마음으로 잘 따르는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불지경론』에는 그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이 있는데,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 모두가 잘 따른다’는 것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001_0158_b_01L三勝衆中上故諸障斷故王等
001_0158_b_02L敬故名爲大也數甚多故名之爲
001_0158_b_03L勝九十六外道論故名爲勝也
001_0158_b_04L佛地論釋有四義一者利根波羅蜜
001_0158_b_05L多種性聲聞二者無學果故三如實
001_0158_b_06L不定種性迴心向大故名爲大
001_0158_b_07L者衆多故名爲大如今大衆眞諦釋云
大有三義
001_0158_b_08L一者數大如言大軍以數多故名爲大也二者
量大如言大山不以數多名之爲大但以形量
001_0158_b_09L高廣故名大也三者勝大如言大王非關數多及
以形量高廣但由德勝故名爲大聲聞亦爾
001_0158_b_10L非一故即是數大迴求佛果修菩提高極無
即是勝大廣大無底不可測量即是量大

001_0158_b_11L聲聞者成實論云聞法得悟故曰
001_0158_b_12L聲聞親光釋云聞佛言音而入聖
001_0158_b_13L故曰聲聞又瑜伽論八十二云
001_0158_b_14L他聽聞正法言音又能令他聞正法
001_0158_b_15L故曰聲聞十地經云從他聞聲
001_0158_b_16L而通達故聞聲意解成聲聞乘
001_0158_b_17L彼經意如十地論第四廣釋聲聞如大集
經十七大般若第
001_0158_b_18L五百一十十住婆沙第一第
十一成實第五瑜伽釋論
所言衆者
001_0158_b_19L音僧伽此云和合衆謂理事二和
001_0158_b_20L名衆也廣如智度論第三卷說

001_0158_b_21L
一切調順

001_0158_b_22L
釋曰自下第二廣釋諸德有十三德
001_0158_b_23L此卽第一心善調順德依佛地論
001_0158_b_24L其三釋故第二云一切調順者有義

001_0158_c_01L≺유학이 견소단의 112가지 분별추중번뇌733)를 떠나서 거칠지 않은 것이 마치 좋은 말(良馬)과 같으므로 ‘잘 따른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무학이 견소단·수소단의 128가지 번뇌734)를 떠나서 억세지 않은 것이 마치 순금(眞金)과 같으므로 ‘잘 따른다’고 한 것이다.≻ 진실한 의미에서 말하면, 이들 모두 보리로 회향한 종성으로서 그들 모두가 큰 깨달음(大果)에 발심하여 나아갈 수 있으니, 부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치 총명하고 지혜로운 코끼리 같기 때문에 ‘잘 따른다’고 한 것이다.”735)
『대지도론』 제3권에서는 세 가지 부차적 설명(復次)에 의해 ‘마음으로 잘 따른다’는 것을 해석하였다. ≺첫 번째, 마음에 맞거나 거스르는 세 가지 경우에 의거해 ‘잘 따름’을 해석한 것이다. 첫째로 공경하든 욕하든 마음이 똑같아서 달라짐이 없고, 둘째로 보배든 기왓돌이든 차이 없이 보며, 셋째로 칼로 몸을 베든 전단향을 몸에 발라 주든 또한 마음이 똑같아서 달라짐이 없는 것이다. 두 번째, 날카롭거나 무딘 근본번뇌(利鈍根本煩惱)736)를 이미 끊었다는 데 의거해서 ‘잘 따름’을 해석한 것이다. 세 번째, 탐낼 것을 탐내지 않고 성낼 것을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어야 할 데서 어리석지 않으면서 육정六情(六根)을 수호한다는 데 의거해서 ‘잘 따름’을 해석하는 것이다.≻737)

(나) 불종佛種을 잇는 공덕

  모두 불자이며,

  이것은 두 번째로 ‘부처님 종자(佛種)를 이어받아 융성시키는 공덕’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 불자에는 본래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오직 성문聲聞에 의거해 불자를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 『해심밀경』과 『불지경론』 등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힘으로 인해 저 성스런 도가 생겨나므로 불자라고 하니, 가령 ‘모두가 세존의 입(口)에서 나온 정법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어떤 주장에 따르면, 모두가 대성문으로 나아가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 끊어지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불자라고 이름한다.”738)
둘째, 오직 보살에 의거해 불자를 해석한 것이다. 예를 들면 양梁 『섭대승론석』 제8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에는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로 무상승無上乘을 바라고 즐기는 마음이 종자가 되고, 둘째로 반야는 어머니가 되며, 셋째로 선정은 모태가 되고, 넷째로 대비는 유모가 되며, 다섯째로 모든 부처님은 아버지가 된다.”739)
(이에 대해) 진제 삼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001_0158_c_01L有學離見所斷一百一十二種分別麤
001_0158_c_02L重煩惱不▼(忄+龍)悷故猶如良馬名爲調
001_0158_c_03L有義無學離見修斷一百二十八
001_0158_c_04L種煩惱不剛强故猶如眞金名爲調
001_0158_c_05L如實義者皆是迴向菩提種性
001_0158_c_06L切堪能發趣大果隨佛意轉如聰慧
001_0158_c_07L [216] 故名調順依智度論第三卷中
001_0158_c_08L三復次釋心調順一約三種順違
001_0158_c_09L釋調順一恭敬罵詈心等無異二珍
001_0158_c_10L寶瓦石視之無異三持刀斫身栴檀
001_0158_c_11L塗身亦等無異二約利鈍根本煩惱
001_0158_c_12L已斷以釋調順三約應貪不貪應瞋
001_0158_c_13L不瞋應癡不癡守護六情以釋調順

001_0158_c_14L
皆是佛子

001_0158_c_15L
釋曰第二紹隆佛種德然此佛子
001_0158_c_16L有三義一唯約聲聞以釋佛子如卽
001_0158_c_17L此經佛地經等親光釋云由佛敎力
001_0158_c_18L彼聖道生故名佛子如說皆從世尊
001_0158_c_19L口生正法生故有義皆量趣大聲聞
001_0158_c_20L能紹佛種令不斷絕故名佛子
001_0158_c_21L唯約菩薩以釋佛子如梁攝論第八
001_0158_c_22L卷云佛子有五義一願樂無上乘爲
001_0158_c_23L種子二以般若爲母三以定爲胎
001_0158_c_24L以大悲爲乳母五以諸佛爲父眞諦

001_0159_a_01L≺중생의 몸을 이루려면 반드시 다섯 가지 사항을 갖추어야 하니, 첫째는 아버지이고, 둘째는 종자이며, 셋째는 어머니이고, 넷째는 태반이며, 다섯째는 유모다. 아버지는 자식을 내는 근본이기 때문에 먼저 아버지를 밝혔다. 아버지의 유체遺體를 자기 몸의 종자로 삼기 때문에 둘째로 종자를 밝혔다. 종자가 있어도 어머니가 회임하지 않으면 몸을 이룰 수 없으므로 셋째로 어머니를 밝혔다. 어머니가 회임하더라도 태반이 없으면 또한 몸을 이룰 수 없으니, 태는 몸을 안치하는 곳이므로 넷째로 태반을 밝혔다. 출생 이후에 유모가 먹여서 키워 주지 않으면 몸을 이룰 수 없으므로 다섯째로 유모를 밝혔다. 불자佛子도 이러하여 다섯 가지 수승한 인연이 있어야 한다. 첫째로 아버지가 수승하니, 모든 불세존을 그의 아버지로 삼기 때문이다. 둘째로 종자가 수승하니, 보리심을 종자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로 생모가 수승하니, 반야를 생모를 삼기 때문이다. 넷째로 태장이 수승하니, ‘복과 지혜가 머무는 곳(福智住持)’을 태장으로 삼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유모가 수승하니, 대비大悲의 길러 줌을 유모로 삼기 때문이다.≻
셋째, 보살·성문에 의거해 불자를 해석한 것이다. 예를 들면 『대지도론』 제7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니, 모두 (부처님) 입에서 나온 정법에서 태어난다. 말하자면 수다원에서 아라한까지의 (네 종류 성문과聲聞果와) 그리고 정위正位에 든 보살740)을 말한다. 벽지불은 비록 불법에 인연을 심었지만 부처님이 안 계실 때 스스로 도를 증득한 자이므로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는 인연이 멀기 때문이다.”741)『유가사지론』 제84권, 『불성론』 제2권, 『대승장엄경론』 제1권, 『섭대승론』 제6권, 『십주비바사론』 제13권, 『대지도론』 제41권에서 모두 불자에 대해 해석하는데, 번거로울까 봐 서술하지 않겠다.

(다) 심해탈과 혜해탈의 공덕

  마음이 잘 해탈하였고 지혜가 잘 해탈하였으며,

  세 번째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의 공덕’이다.
예를 들면 계경에서 ‘이미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을 얻었고, 이미 무명을 떠났기 때문에 지혜가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모든 논사들의 경문 해석도 서로 달라진다.
분별론자分別論者742)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159_a_01L釋云成衆生身必具五事一父
001_0159_a_02L種子三母四胎處五乳母父是出
001_0159_a_03L子之根本故先明父父之遺體以爲
001_0159_a_04L身種子故第二明種子雖有種子
001_0159_a_05L無母懷伍 [217] 不得成身故第三明母
001_0159_a_06L雖懷之若無胎裏亦不成身胎是
001_0159_a_07L安身之處故第四明胎處出生以後
001_0159_a_08L若無乳母飮養卽不成身故第五明
001_0159_a_09L乳母佛子亦爾有五緣勝一者父
001_0159_a_10L諸佛世尊爲其父故二種子勝
001_0159_a_11L菩提心爲種子故三生母勝以其波
001_0159_a_12L若爲生母故四胎藏勝以福智住持
001_0159_a_13L爲胎藏故五乳母勝以大悲長養爲
001_0159_a_14L乳母故三通約菩薩聲聞以釋佛子
001_0159_a_15L如智度論七十二云佛子有五皆從
001_0159_a_16L口生法生謂須陀洹乃至阿羅漢
001_0159_a_17L入正位菩薩辟支佛雖佛法中種因
001_0159_a_18L無佛時自能得道不得言從佛口
001_0159_a_19L因緣遠故瑜伽第八十四佛性論第二
嚴論第一攝論第六十住婆沙
001_0159_a_20L第十三智度論第四十
皆釋佛子恐繁不述

001_0159_a_21L
心善解脫慧善解脫

001_0159_a_22L
釋曰第三心慧解脫德如契經說
001_0159_a_23L離貪得故心解脫 [218] 離無明故慧得
001_0159_a_24L解脫是故諸師釋經不同分別論者

001_0159_b_01L심성은 본래 깨끗하지만 객진번뇌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진실한 본성에 의거해 ‘마음이 해탈을 얻었고 지혜가 잘 해탈하였다’고 한 것이다.
살바다종에 의하면 ‘마음이 잘 해탈하였다’는 것은, 마음이 탐욕을 떠났을 때 마음과 상응하는 승해勝解로써 탐욕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이 승해에 대해 ‘마음이 잘 해탈하였다’고 한 것이다. ‘지혜가 잘 해탈하였다’는 것은, 혜慧가 무명을 떠났을 때 혜와 상응하는 승해로써 무명에서 해탈하였기 때문에 이 승해에 대해 ‘지혜가 잘 해탈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는 무위열반의 해탈을 말한 것은 아니다.743) 자세하게 분별하면, 『대비바사론』 제27권과 28권과 72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불지경론』에서 설한 것처럼 삼계의 탐욕을 떠나 마음이 해탈을 얻는 것이다. 경에서 설한 것처럼 이미 탐욕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이 해탈을 얻고, 경에서 설한 것처럼 무명을 떠났기 때문에 지혜가 해탈을 얻는다.744)
  『불지경론』의 의미는, 마음과 지혜로 인해 탐욕·무명을 떠남으로써 획득되는 무위를 증득하는데 (이 무위가) 해탈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치에 어긋나지 않으니, 그 논에서 (심해탈과 혜해탈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지도론』 제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모든 번뇌(結使)는 애愛에 속하거나 견見에 속하니,745) 애에 속하는 번뇌는 마음을 덮고 견에 속하는 번뇌는 혜를 덮는다. 이와 같은 애를 떠나기 때문에 애에 속하는 번뇌들도 떠나 심해탈을 얻고, 무명을 떠나기 때문에 견에 속하는 번뇌들도 떠나 혜해탈을 얻는다.”746)
또 『열반경』 제25권에서는, 탐진치의 마음을 영원히 끊어 없앤 것을 ‘마음이 잘 해탈하였다’고 하고, 모든 법에 대해 장애 없이 아는 것을 ‘지혜가 잘 해탈하였다’고 한다.747)
『대지도론』 제3권에서는 (‘잘 해탈하였다(善解脫)’라는 문구에서) ‘선善’ 자를 ‘호好’ 자로 바꾸었다. 호해탈好解脫에는 본래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욕망을 떠난 외도를 배제한 것이다. 그들은 한 곳과 한 도에서 마음이 해탈을 얻지만 모든 것에서 얻지는 못하므로 ‘호해탈’이라 하지 않는다.

001_0159_b_01L作如是說心性本淨客塵煩惱所染
001_0159_b_02L汗故說不淸淨據實本性心得解
001_0159_b_03L慧善解脫若依薩婆多宗心善解
001_0159_b_04L脫者心離貪時與心相應勝解
001_0159_b_05L脫貪故卽說勝解名心善解脫
001_0159_b_06L善解脫者慧離無明時與慧相應勝
001_0159_b_07L解脫無明故卽說勝解名爲慧
001_0159_b_08L善解脫非謂無爲涅槃解脫若廣分
001_0159_b_09L如大毗婆沙第二十七二十八
001_0159_b_10L七十二說今依大乘如佛地論離三
001_0159_b_11L界貪心得解脫如契經說已離貪
001_0159_b_12L心得解脫如契經說離於無明 [219]
001_0159_b_13L得解脫解云佛地論意由心惠 [220]
001_0159_b_14L證得離貪無明所得無爲爲解脫體
001_0159_b_15L於理無違論不簡故若依智度論第
001_0159_b_16L三卷云復次諸結使屬愛屬見屬愛
001_0159_b_17L煩惱覆心屬見煩惱覆慧如是愛離
001_0159_b_18L屬愛結使亦離得心解脫無明
001_0159_b_19L離故屬見結使亦離得慧解脫又涅
001_0159_b_20L槃經二十五云貪瞋癡心永斷滅故
001_0159_b_21L心善解脫於一切法知無障礙
001_0159_b_22L善解脫若依智論第三改善名好
001_0159_b_23L好解脫自有三義一簡異外道離欲
001_0159_b_24L一處一道心得解脫非於一切

001_0159_c_01L둘째는 불교 내에서 유학위에 있는 사람을 배제한 것이다. 그들은 해탈을 얻었지만 남은 번뇌가 있으므로 ‘호해탈’이라 하지 않는다. 셋째는 무학 가운데서 퇴법아라한退法阿羅漢748)을 배제한 것이다. 그들은 시해탈時解脫749)을 얻긴 했지만 호해탈은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날카로운 근기의 아라한에 의거해서 호해탈을 설한 것이다.750)

(라) 계가 아주 청정한 공덕

  계가 아주 청정하고,

  네 번째는 ‘계가 아주 청정한 공덕’이다.
친광 보살은 이것을 세 가지 의미에서 해석하였다. 첫째는 여섯 가지에 의거해서 계가 아주 청정함을 해석한 것이다. 둘째는 무루에 의거해서 계가 아주 청정함을 해석한 것이다. 셋째는 대승에 의거해서 계가 아주 청정함을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계경에서 설한 것처럼 여섯 가지를 갖추고 있는 것을 ‘계가 아주 청정하다’고 한다.
첫째는 깨끗한 계율에 머무는 것이다.수지한 학처學處(계율)751)에 대해 (신·구·의) 세 가지 업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별해탈율의752)를 스스로 잘 지키는 것이다.일곱 가지 최상의 율의를 잘 지키는 것을 말한다.
셋째는 궤칙軌則이 갖추어진 것이다.말하자면 다니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는 등의 위의威儀에서 혹은 의복을 입거나 대소변을 보는 등의 하는 일(所作)에서 혹은 경을 외거나 좌선하는 등의 선품의 가행에서 궤칙이 성취되어, 세간을 따르면서 세간을 벗어나지 않고 비내야(▼(亻+聿))를 따르면서 비내야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소행所行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다.다섯 장소는 비구니가 다닐 곳이 아니니, 이른바 노래하는 집, 기생집, 술집, 왕가, 전다라집753) 등 이러한 다섯 집과 여래가 금지하신 모든 곳이다. 이런 곳을 제외하고 나머지 장소를 때에 맞게 다닌다면, 이와 같은 것을 ‘소행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한다.
다섯째는 미세한 죄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다.작은 학처學處(계율)를 따르고, 나아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인연을 만나도 끝내 고의로 계를 범하지 않는다.……이하 생략……따라서 『유마경』에서 “내지는 작은 죄에 대해서도 오히려 큰 두려움을 갖는다.”754)고 하였다.
여섯째는 학처를 수학하는 것이다.오직 스스로 수학하기를 서원하면서, ‘나는 모든 학처를 다 배울 것입니다’라고 한다.……이하 생략……자세히 분별하면 『유가사지론』 제22권이나 『현양론』 제7권과 같다.755)
둘째, 무루에 의거해 계가 아주 청정함을 해석하면, 혹은 모두 무루의 계를 얻었기 때문에 ‘아주 청정하다’고 한다.
셋째, 진실한 의미에서는 무학위에 머물면서 대승에 회향한 자는 자신의 계가 청정한데도 보살계를 닦기 때문에 ‘아주 청정하다’고 한다.

(마) 법락을 구하는 공덕

  법락을 추구하며,

  이것은 다섯 번째로 ‘법락을 구하는 공덕’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세 가지로 해석하였다.

001_0159_c_01L故不名好二簡內道中學人雖得解
001_0159_c_02L有殘結使故非好解脫三簡無學
001_0159_c_03L中退法阿羅漢得時解脫非好解脫
001_0159_c_04L是故唯約利根阿羅漢說好解脫

001_0159_c_05L
戒善淸淨

001_0159_c_06L
釋曰第四戒善淸淨德親光菩薩
001_0159_c_07L有三義一約六支釋戒善淨二約無
001_0159_c_08L釋戒善淨三約大乘釋戒善淨
001_0159_c_09L佛地論云如契經說具足六支
001_0159_c_10L戒善淨一住淨尸羅所受學處
三業無犯
二善自
001_0159_c_11L防守別解律儀謂能守護
七最律儀
三軌則具足
001_0159_c_12L謂於威儀行住坐臥或於所作謂著衣服便利等
或於善品加行誦經坐禪等成就軌則隨順世
001_0159_c_13L不越世間隨順毗
奈耶不越毗奈耶也
四者所行皆悉具足
001_0159_c_14L謂五處非 [221] 非比丘所行所謂唱家淫女家酤酒
旃陀羅如是五家及諸如來所制之處除此所
001_0159_c_15L依時行者
是名爲所行具足
五於微細罪見大怖
001_0159_c_16L隨小學處乃至若有命難因緣終不故犯
乃至廣說故維摩云乃至小罪猶懷大懼

001_0159_c_17L六受學學處唯自誓受我當盡學一切學處
至廣說若廣分別如瑜伽論第
001_0159_c_18L二十二
揚第七也
二約無漏釋戒善者或復皆
001_0159_c_19L得無漏戒故名善淸淨三如實義
001_0159_c_20L無學位迴向大乘自分戒淨修菩
001_0159_c_21L薩戒故名善淨

001_0159_c_22L
趣求法樂

001_0159_c_23L
釋曰第五求法樂德親光三釋

001_0160_a_01L≺첫째, 정법을 구할 때 큰 보리의 즐거움을 구하되 나머지 다른 즐거움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법을 구할 때 다른 이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그의 과오를 나무라는 마음이 없고 나쁜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셋째, 진실한 의미에서는 이 큰 성문은 오로지 법락을 구할 뿐 명성과 이익과 공경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756)

(바) 많이 듣고 기억하여 쌓인 공덕

  많이 듣고, 들은 것을 기억하여, 그 들은 것이 쌓였으며,

  여섯 번째는 ‘듣고 기억하여 쌓인 공덕’이다.
이와 같이 (듣고 기억하여 쌓인) 세 가지 혜는 오직 문혜에 의거해서 초위·중위·후위의 뛰어난 점을 차별시켜 세 가지로 설한 것이다.
예를 들어 친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량한 경전의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부분을 모두 듣고서 수지할 수 있으므로 ‘많이 듣는다(多聞)’고 한다. 들었던 대로 의미를 다 기억하면서 잊지 않도록 하므로 ‘들은 것을 기억한다(聞持)’고 한다. 문장(文)과 의미(義)에 대해 자주 익혀서 그것이 견고하게 머물도록 하기 때문에 ‘그 들은 것이 쌓였다’고 한다.”757)

(사) 삼업이 지혜에 따르는 공덕

  생각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며, 행해야 할 것을 잘 행하였다.

  일곱 번째는 ‘삼업이 지혜에 수순하는 공덕’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세간의 어리석은 범부는 생각해야 할 것을 잘못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못 말하며 행해야 할 것을 잘못 행하지만, 세간을 떠난 성자는 그런 법을 벗어나 있으므로 그와는 상반된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며 행해야 할 것을 잘 행하니, 삼업이 청정하여 지혜에 수순하여 행한다고 한 것이다.”758)
또 『유가사지론』 제70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범부는) 생각해야 할 것을 잘못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못 말하며 행해야 할 것을 잘못 행하니, 현행한 모든 신업·어업·의업이 모두 청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혜로운 모든 이는 여실하게 알므로 모든 것이 그와는 상반된다.)”759)
또 『유가사지론』 제2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것이 총명한 지혜를 성취한 자의 모습인가? 업을 짓는 모습을 보고 어리석은 범부임을 분명하게 알고 업을 짓는 모습을 보고 총명한 지혜를 지닌 자임을 분명하게 안다. 그런 일은 어떠한 것인가?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생각해야 할 것을 잘못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못 말하며 행해야 할 것을 잘못 행한다. 그러나 모든 총명한 지혜를 지닌 자는 생각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여

001_0160_a_01L求正法時求大菩提樂不求餘樂
001_0160_a_02L或求法時爲令他樂無求過意
001_0160_a_03L惡威儀三如實義此大聲聞專求
001_0160_a_04L法樂不求名聞利養恭敬

001_0160_a_05L
多聞聞持其聞積集

001_0160_a_06L
釋曰第六聞持積集德如是三慧
001_0160_a_07L約聞慧初中後位勝差別說三種
001_0160_a_08L親光說無量經典初中後分皆能
001_0160_a_09L聽受故名 [222] 隨所聞義皆能憶持
001_0160_a_10L令不忘失故名聞持數習文義
001_0160_a_11L其堅住是故說名其聞積集

001_0160_a_12L
善思所思善說所說善作所作

001_0160_a_13L
釋曰第七三業隨智德親光釋云
001_0160_a_14L間愚夫惡思所思惡說所說惡作
001_0160_a_15L所作出世聖者超過彼法與彼相
001_0160_a_16L是故說名善思所思善說所說善
001_0160_a_17L作所作三業淸淨隨智慧行又瑜
001_0160_a_18L伽論第七十云惡思所思惡說所說
001_0160_a_19L惡作所作凡所現行身語意業
001_0160_a_20L不淸淨又瑜伽論二十五云云何成
001_0160_a_21L就聰慧者相謂由作業相表知愚夫
001_0160_a_22L由作業相表知聰慧其事云何
001_0160_a_23L諸愚夫惡思所思惡說所說惡作
001_0160_a_24L所作諸聰慧者善思所思善說所

001_0160_b_01L행해야 할 것을 잘 행하니, 이것을 ‘총명한 지혜를 성취한 자의 모습’이라 한다.”760)

(아) 여러 지혜들의 차별적 공덕

  빠르게 아는 지혜(捷慧), 막힘없이 아는 지혜(速慧), 예리한 지혜(利慧), 생사를 벗어나는 지혜(出慧), 뛰어나게 판단하는 지혜(勝決擇慧), 큰 지혜(大慧), 넓은 지혜(廣慧), 견줄 바 없는 지혜(無等慧) 등의 지혜 보배(慧寶)를 성취하고,

  여덟 번째는 ‘여러 지혜들의 차별적 공덕’이다.
이 지혜에 대한 해석에서 여러 설들이 서로 다르다.
한편에서는 이 경에서 모두 여덟 가지 지혜를 밝혔다고 한다. (여덟 가지 지혜의) 이름은 이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뒷부분에서 “지혜 보배를 성취하고(慧寶成就)”라고 한 것은, 앞의 여덟 가지 지혜를 포괄해서 ‘지혜 보배’라고 한 것이지 별개의 지혜를 세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가사지론』에서 다만 ‘혜보慧寶’라고 하고 ‘보혜寶慧’라고 하지 않는다.761)
한편에서는 아홉 가지 지혜를 밝혔다고 한다. 따라서 『대품반야경』과 『대지도론』에서는 (마지막의 ‘혜보성취’에서 혜보를) 모두 ‘보혜’라고 하였다.762) 따라서 이는 별개의 지혜임을 알 수 있다.
한편에서는 이 경에서 보배 같은 열 가지 지혜에 의거한다고 하니, 즉 (아홉 가지 지혜에) ‘매우 깊고 묘한 지혜(甚深妙慧)’를 더한 것이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책에는 다시 ‘매우 깊고 묘한 지혜’를 설하니, 말하자면 다른 이가 그 끝을 궁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763)
이제 우선 아홉 가지라는 설에 의거해 여러 지혜들에 대해 설명하겠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교법과 비내야(律)에 대해 그 의미를 빠르게 알므로 첩혜捷慧라고 하고, 곧 이에 대해 그 의미를 많이 깨달아 들어가므로 속혜速慧라고 하니, 많이 행하는 것을 ‘빠르다(速)’고 하기 때문이다. 미세한 의미를 깨달아 들어가는 것은 이혜利慧라고 한다. 생사를 벗어날 수 있는 묘한 지혜를 얻었으므로 출혜出慧라고 한다. 이 지혜가 열반의 요인了因764)이 되기 때문에 승결택혜勝決擇慧라고 한다. (이 지혜는) 수승하게 결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승한 결택’ (그 자체가) 곧 열반이고, 이 지혜는 저 열반의 요인이 되기 때문에 그에 의거해 이름을 세운 것이다.이상은 출혜를 해석하였다.765)문답으로 결택하는 것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대혜大慧’라고 한다. 깊고 넓고 원만하게 잘 통달하므로 ‘광혜廣慧’라고 한다.……연약한 근기 등을 가진 모든 성문들에 비해 이 지혜가 뛰어나기 때문에 ‘무등혜無等慧’라고 한다. 이 지혜가 ‘최상의 의미’를 불러낼 수 있으므로 ‘혜보慧寶’라고 하고, 모든 성문들이 이 혜보를 갖추었기 때문에

001_0160_b_01L善作所作是名成就聰慧者相

001_0160_b_02L
捷慧速慧利慧出慧勝決擇慧大慧
001_0160_b_03L廣慧及無等慧慧寶成就

001_0160_b_04L
釋曰第八諸慧差別德釋此諸慧
001_0160_b_05L說不同一云此經總明八慧名字如
001_0160_b_06L後云慧寶成就者攝上八慧
001_0160_b_07L爲慧寶非別立慧故瑜伽論但言
001_0160_b_08L慧寶不言寶慧一云九慧故大品
001_0160_b_09L經及智度論皆名寶慧故知別慧
001_0160_b_10L此經據寶十慧謂加甚深妙慧
001_0160_b_11L佛地云有本復說甚深妙慧謂他
001_0160_b_12L不能究其底故今且依九以辨諸慧
001_0160_b_13L故親光云於佛所說法毗奈耶速入
001_0160_b_14L其義故名捷慧卽於此中多入其
001_0160_b_15L故名速慧能多行者說名速慧 [223]
001_0160_b_16L入徽細義故名利慧得能出離
001_0160_b_17L生死妙慧故名出慧此慧能爲涅槃
001_0160_b_18L了因是故說名勝決擇慧1)勝決擇
001_0160_b_19L名勝決擇 [42] [224] 卽是涅槃此慧能爲彼
001_0160_b_20L了因故依彼立名已上釋
出慧
問答決擇
001_0160_b_21L無窮盡故名爲大慧深廣圓滿善通
001_0160_b_22L達故名爲廣慧於耎 [225] 根等諸聲聞衆
001_0160_b_23L此慧勝故名無等慧此慧能招最上
001_0160_b_24L義故名爲慧寶是諸聲聞具此慧

001_0160_c_01L‘혜보를 성취하였다’고 하였다. ‘최상의 의미’란 바로 열반이다.766)
『유가사지론』에 의하면 저 『불지경론』과 조금 다르니, 그 논의 제83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빠르게 알기 때문에 첩혜라고 이름하고, 지혜에 막힘이 없기 때문에 속혜라고 이름하며, 진기소유盡其所有와 여기소유如其所有767)를 잘 알기 때문에 이혜라고 이름한다. (생사에서) 벗어나서 떠나는(出離) 법과 세간의 욕망을 떠나는(離欲) 법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출혜라고 이름하고, 출세간의 모든 욕망을 떠나는 법들을 잘 알기 때문에 승결택혜라고 이름한다.……이 지혜를 오랫동안 익혔기 때문에 대혜라고 이름하고, 이 지혜의 무량무변한 인식의 경계(所行境)에 나아가서 광혜라고 이름한다. 그 밖의 모든 지혜는 그와 동등하게 비교될 수 없기 때문에 무등혜라고 이름하니, 모든 근根 중에서도 혜慧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마치 마니구슬이 전륜왕의 비유리보를 나타내어 그 빛이 청정해지도록 하는 것과 같이, 그와 상응하기 때문에 ‘혜보를 다 성취하였다’고 한 것이다.”768)
『대품반야경』과 『대반야경』에 의하면 열한 가지 지혜가 있는데, 이는 『대지도론』 제83권에서 차례로 자세히 해석한 것과 같다. 번거로울까 봐 서술하지 않는다.

(자) 삼명을 갖춘 공덕

  삼명三明769)을 갖추었으며,

  아홉 번째는 ‘삼명을 갖추는 공덕’이다. 계경에서 설하는 것처럼 세 종류 명明(지혜)이 있으니, 첫째는 숙주수념지증통명宿住隨念智證通明770)이고, 둘째는 사생지증통명死生智證通明771)이며, 셋째는 누진지증통명漏盡智證通明772)이다.
그런데 이 삼명은 살바다종의 『구사론』의 뜻에 따라 네 문으로 분별해 볼 수 있다.773)
첫째는 삼명의 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혜慧를 자성으로 하니, 차례대로 육신통 가운데서 다섯 번째인 숙주통宿住通(숙명통)과 두 번째인 천안통天眼通774)과 여섯 번째인 누진통漏盡通 등 세 가지 신통을 자성으로 한다.
둘째는 삼명을 세운 뜻이다. 이것들이 차례대로 과거(前際)·미래(後際)·현재(中際)의 세 가지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001_0160_c_01L是故說名慧寶成就解云最上義
即是涅槃

001_0160_c_02L依瑜伽與彼少異八十三云速疾
001_0160_c_03L了知故名捷慧無滯 [226] 礙故名爲速慧
001_0160_c_04L能善了知盡其所有如 [227] 所有故名爲
001_0160_c_05L利慧於出離法世間離欲善了知故
001_0160_c_06L名爲出慧 [228] 間諸離欲法能了知故
001_0160_c_07L名勝決擇慧謂卽此慧長時串習
001_0160_c_08L名大慧謂卽此慧無量無邊所行境
001_0160_c_09L名爲廣慧其餘諸慧無與等故
001_0160_c_10L無等慧於諸根中慧最勝故如末
001_0160_c_11L尼珠顯發輪王毗瑠璃寶令光淨故
001_0160_c_12L與波相應 [229] 慧寶皆得成就依大品
001_0160_c_13L經及大般若有十一慧如智度論第
001_0160_c_14L八十三次第廣釋恐繁不述

001_0160_c_15L
具足三明

001_0160_c_16L
釋曰第九具足三明德如契經說
001_0160_c_17L三種明一宿住隨念智證通明二者
001_0160_c_18L死生智證通明三者漏盡智證通明
001_0160_c_19L然此三明薩婆多宗俱舍論意
001_0160_c_20L門分別第一出體用慧爲性如其
001_0160_c_21L次第六通之中第五宿住第二天眼
001_0160_c_22L第六漏盡三通爲性第二立三之意
001_0160_c_23L如次對治前後中際三種愚故第三
001_0160_c_24L「勝決…決擇」入字疑剩

001_0161_a_01L
셋째는 진실과 가립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누진지명은 가립과 진실에 통하니, 이는 무루의 지혜까지 통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둘은 가립하여 설한 것이니, 둘은 오직 유루의 지혜이기 때문이다.유루지와 무루지를 모두 누진지라고 하니, 둘 다 번뇌가 다한 몸에서 생기기 때문이다. 진실을 무루라고 하고 가립을 유루라고 하니, 수승하거나 하열한 모습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진실과 가립을 설했다.
넷째는 유학·무학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이 삼명은) 오직 무학에게만 있으니, 유학에게는 어둠이 있기 때문이다.
또 『대비바사론』 제10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육신통 중에 어째서 세 가지만 ‘명明’이라 하는가?…… 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775)은 마치 공교처工巧處776)를 전변해 내는 경우와 같고, 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777)은 오직 소리만을 파악할 수 있으며, 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778)은 오직 (타인의 마음의) 자상만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신통은) 뛰어난 작용이 없기 때문에 ‘명’이라 안립하지 않는다. 뒤의 세 가지 신통은 모두 뛰어난 작용이 있으므로 ‘명’이라 안립한다. ‘뛰어난 작용’이란, (뒤의 세 가지 신통이) 모두 생사를 싫어하여 버리는 일에 수순할 수 있고, 모두 수승한 공덕을 이끌어 낼 수 있으며, 모두 궁극의 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말한다. 어째서 뒤의 세 가지는 모두 뛰어난 작용이 있는가? 네 번째 숙주수념지증통으로 과거의 일을 보고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깊이 내고, 다섯 번째 생사지증통으로 미래의 일을 보고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깊이 내며, 여섯 번째 누진지증통으로 이미 싫어하여 떠났으므로 열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779) 자세한 것은 그 논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날카로운 근기를 가진 무학이 얻은 세 가지 신통은 오염되거나 오염되지 않은 삼제三際(과거·현재·미래)의 어리석음을 제거하기 때문에,780) ‘삼명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명明은 혜慧를 자성으로 하니 혜는 어둠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명’이라 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명은) 무치無癡의 선근을 자성으로 하니, 이것이 무명無明을 뒤집기 때문이다.≻”781)
  대승에서는 삼명이 모두 무루에 통한다고 하는데,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후득지를 무루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 『유가사지론』 제69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신통 중에서, “앞의 세 가지 신통은 신통이긴 하지만 명明은 아니다. 뒤의 세 가지 신통은 신통이기도 하고 명이기도 하니, 이것들은 삼세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다.”782)
『대지도론』 제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001_0161_a_01L眞假分別漏盡智明通假及眞
001_0161_a_02L無漏故餘二假說唯有漏故有漏無漏
智皆名漏
001_0161_a_03L俱在漏盡身中生故眞名無漏
假名有漏勝劣相形故說眞假
第四學無
001_0161_a_04L學分別唯在無學學有闇故又大
001_0161_a_05L婆沙一百二卷云六通中何故
001_0161_a_06L但說三種爲明神境智證通
001_0161_a_07L工巧處轉天耳智證通唯能取聲
001_0161_a_08L心智證通唯取自相無勝用故
001_0161_a_09L立爲明後之三通皆有勝用故立
001_0161_a_10L爲明勝用者謂皆能隨順厭捨生死
001_0161_a_11L皆能引發殊勝功德皆能趣向殊勝 [230]
001_0161_a_12L涅槃云何後三皆有勝用
001_0161_a_13L四宿住隨念智證通見前際事深生
001_0161_a_14L厭離第五生死智證通見後際事
001_0161_a_15L生厭離第六漏盡智證通旣厭離已
001_0161_a_16L欣樂涅槃廣說如彼今依大乘
001_0161_a_17L光釋云無學利根所得三通除染不
001_0161_a_18L染三際愚故說有三明有義明者
001_0161_a_19L以慧爲性慧能除闇故說爲明
001_0161_a_20L無癡善根爲性翻無明故 [231]
001_0161_a_21L乘皆通無漏於理無違許後得智是
001_0161_a_22L無漏故又瑜伽論六十九云六通中
001_0161_a_23L前三通是通非明後三通亦通亦明
001_0161_a_24L以能對治三世愚故依智度論第二

001_0161_b_01L“숙명통·천안통·누진통을 삼명이라 한다. 신통과 명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단지 지난 생의 일(宿命事)만 아는 것을 숙명통이라 하고, 과거의 인연과 행업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 단지 이 생에서 죽고 저 생에서 나는 일만 아는 것을 천안통이라 하고, 행行의 인연을 알아서 때의 만남을 놓치지 않는 것을 명이라 한다. 다만 번뇌를 다 없앤 것을 알 뿐 다시 태어날지 태어나지 않을지 알지 못하는 것을 누진통이라 하고, 번뇌가 다하고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아는 것을 명이라 한다. 이 삼명은 위대한 아라한과 위대한 벽지불이 얻는 것이다.”783)
삼명을 자세하게 해석하자면, 『법집경』 제3권, 『잡아함경』 제43권, 『중아함경』 제51권, 『비담론』 제6권, 『구사론』 제27권, 『순정리론』 제76권, 『대비바사론』 제81권과 제102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차) 현법락주의 공덕

  모든 현법락주784)를 얻는 데 이르렀고,

  열 번째는 현법락주의 공덕이다.
그런데 이 ‘낙주樂主’라는 것은, 살바다종의 『대비바사론』 제8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세존께서는 어째서 사정려만을 낙주라고 설하셨는가?…… 오직 정려만 두 가지 즐거움을 갖추기 때문에 낙주라고 하니, 첫째는 낙수樂受785)의 즐거움이고, 둘째는 경안輕安786)의 즐거움이다. 앞의 세 가지 정려는 모두 두 가지 즐거움을 갖춘다. 제4정려에는 수受의 즐거움은 없지만 경안의 즐거움이 있는데, (이 경안의) 세력이 광대하여 이전의 두 가지 즐거움보다 뛰어나다. 근분정近分定787)과 무색정無色定788)에는 경안의 즐거움은 있어도 광대하지 않기 때문에 낙주라고 하지 않는다.……다시 근본정려가 현전해 있을 때, 대종大種을 장양하여 (그것이) 온 몸에 생겨나서, 몸을 희열에 가득 차게 하기 때문에 낙주라고 한다. 근분정 등이 현전해 있을 때도 대종을 장양하지만 오직 마음 쪽에서만 생겨나서 지극히 희열에 가득 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낙주라고 하지 않는다.”789)
자세한 것은 저 『대비바사론』에 나온 아홉 번의 부차적 설명(復次), 그리고 『순정리론』 제79권,

001_0161_b_01L卷云宿命天眼漏盡名爲三明問曰
001_0161_b_02L神通與明有何等異答曰直知過
001_0161_b_03L去宿命事是名通知過去因緣行業
001_0161_b_04L是名明直知死此生彼是名天眼通
001_0161_b_05L知行因緣際會不失是名明直知盡
001_0161_b_06L結使不知更生不生是漏盡通
001_0161_b_07L知漏盡更不復生是名明是三明
001_0161_b_08L阿羅漢大辟支佛所得廣釋三明
001_0161_b_09L法集經第三雜阿舍四十三中阿含
001_0161_b_10L五十一毗曇第六俱舍二十七順正
001_0161_b_11L理七十六婆沙八十一及一百二

001_0161_b_12L
逮得一切 [232] 現法樂住

001_0161_b_13L
釋曰第十現法樂住德然此樂住
001_0161_b_14L薩婆多宗大婆沙論八十一云
001_0161_b_15L尊何故說四靜慮是樂住耶唯靜
001_0161_b_16L慮中具二種樂故名樂住一樂受
001_0161_b_17L二輕安樂前三靜慮皆具二樂
001_0161_b_18L四靜慮 [233] 受樂而輕安樂勢用廣大
001_0161_b_19L勝前二樂近分無色雖有輕安
001_0161_b_20L不廣大故不名樂復次根本靜慮
001_0161_b_21L在前時長養大種遍身中生 [234] 充悅
001_0161_b_22L故名樂住近分定等現在前時長養
001_0161_b_23L大種唯心邊生非極充悅故非樂住
001_0161_b_24L廣如彼論有九復次及順正理七十

001_0161_c_01L『구사론』 제28권, 『비담론』 제8권, 『성실론』 제20권, 『현양성교론』 제19권에서 설한 것과 같다.
친광은 해석하길, “물러나지 않는 수승한 정려를 증득했기 때문에 (현법락주를 얻는다.)”790)고 하였다.
또 『유가사지론』 제11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이 모든 정려의 이름은 차이가 있다. 혹은 ‘증상심增上心’이라 이름하니, 말하자면 (모든 정려에서는) 마음의 청정하고 증상된 힘으로 인해 바르게 심려審慮하기 때문이다. 혹은 ‘낙주樂住’라고 이름하니, 말하자면 이 안에서 지극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정려에 의지해서 희喜의 즐거움, 안安의 즐거움, 사捨의 즐거움, 신심身心의 즐거움을 영수領受791)하기 때문이다. 또 선정을 얻은 자는 모든 정려에 자주 들고 나오면서 현법안락주(현법락주)를 영수하기 때문이다. 이 선정 가운데서 현법락주를 현전시켜서 영수하고, 이 선정으로부터 일어나서 ‘나는 이미 이와 같은 낙주를 영수하였다’고 말한다. 무색정에는 이와 같은 수受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낙주라고 하지 않는다.”792) 자세한 것은 저 『유가사지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

(카) 뛰어나고 깨끗한 복전이 되어 주는 공덕

  크고 깨끗한 복전이며,

  열한 번째는 ‘뛰어나고 깨끗한 복전이 되는 공덕’이다.
『성실론』 제2권 「복전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어떤 이유에서 이 모든 현성들을 복전이라 하는가? 그들은 탐貪·에恚 등의 모든 번뇌를 다 끊었기 때문에 복전이라 한다. 마치 ‘돌피나 쭉정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좋은 곡식의 모를 해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욕심이 없는 사람에게 보시하면 과보를 획득할 때 이익이 크다. 따라서 그들을 복전이라 이름한다.”793) 자세한 설명은 그 논과 같다.
친광의 해석에서는 “그들은 영원히 번뇌를 떠나서 마치 세간의 좋은 밭과 마찬가지로 빠르게 광대한 열매를 생장시키기 때문이다.”794)라고 하였다.

(타) 위의가 고요한 공덕

  위의가 고요하여 원만하지 않음이 없고,

  열두 번째는 ‘위의가 고요한 공덕’이다.
친광은 “정지正知에 머물기 때문에 (위의가 고요하다.)”795)라고 해석하였다. 『유가사지론』 제71권에서는 “위의가 고요하다는 것은

001_0161_c_01L俱舍二十八毗曇第八成實二
001_0161_c_02L顯揚十九親光釋云證得不退
001_0161_c_03L勝靜慮故又瑜伽論第十一云復次
001_0161_c_04L是諸靜慮名差別者或名增上心
001_0161_c_05L由心情淨增上力正審慮故或名樂
001_0161_c_06L謂於此中受極樂故所以者何
001_0161_c_07L [235] 靜慮領受喜樂安樂捨樂身心樂故
001_0161_c_08L又得定者於諸靜慮數數入出
001_0161_c_09L受現法安樂住故由此定中現前領
001_0161_c_10L受現法樂住從是起已作如是言
001_0161_c_11L已領受如是樂住於無色定無如是
001_0161_c_12L是故不說彼爲樂住廣說如彼

001_0161_c_13L
大淨福田

001_0161_c_14L
釋曰第十一勝淨福田德成實論第
001_0161_c_15L二卷福田品云問曰以何等故
001_0161_c_16L諸賢聖名爲福田答曰斷貪慧等諸
001_0161_c_17L煩惱盡故名福田如說稊稗不去
001_0161_c_18L害善糓苗是故施無欲人獲報利大
001_0161_c_19L故名福田廣說如彼親光釋云
001_0161_c_20L離煩惱如世良田速能生長廣大果
001_0161_c_21L

001_0161_c_22L
威儀寂靜無不圓滿

001_0161_c_23L
釋曰第十二威儀寂靜德親光釋云
001_0161_c_24L正知住故瑜伽七十一云威儀寂靜

001_0162_a_01L모든 근들이 고요해서 조급히 굴지 않고 거만하지도 않으며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도 말하는 것이 있다.”796)고 하였다. 이것을 ‘위의가 고요하다’고 하고, 위의에 흠이 없기 때문에 ‘원만하다’고 하였다.

(파) 인욕과 온화함의 공덕

  큰 인욕과 온화함을 모자람 없이 성취하였으니,

  열세 번째는 ‘인욕과 온화함의 공덕’이다.
친광은 해석하길, “고통을 감내하므로 함께 살기에 좋기 때문이다.”797)라고 하였다.
『유가사지론』 제9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욕’이란 타인에 대한 원한을 끝내 되갚지 않는 것이고, ‘온화함’이란 마음에 분노가 없고 타인을 괴롭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798) 자세한 것은 『유가사지론』 제25권의 해석과 같다.

다) 이미 봉행하였음을 밝힘

  여래의 성스런 가르침을 이미 잘 봉행하였다.

  세 번째는 ‘이미 봉행하였음’을 나타낸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모든 지어야 할 일들이 이미 원만해졌기 때문에……이 모든 성문들은 무학의 지위에 올라 모두 생사를 벗어났다. 따라서 여래의 성스런 가르침을 잘 봉행하는 것이다.”799)

나. 보살중을 나타냄

  또 한량없는 보살마하살중이 갖가지 불국토로부터 이 모임에 와 있으니,

  이하는 두 번째로 ‘보살중’을 해석한 것이다.
이 중에 세 가지가 있다. 처음에는 수를 표시하여 (대중의) 부류를 분별하였다. 다음의 “모두가 대승에 머물고” 이하는 (보살들의) 모든 공덕을 찬탄한 것이다. 마지막 “그 이름은” 이하는 뛰어난 자부터 이름을 나열한 것이다.

가) 수로 종류를 구분함
이것은 첫 번째로 수를 표시하여 (대중의) 부류를 분별한 것이다. 말하자면 두 대중 가운데서 성문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으므로 이제는 보살중의 부류에 대해 따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에 또 세 구절이 있다. 첫째는 ‘무량’에 대해 해석한 것이고, 둘째는 ‘보살’ 등에 대해 해석한 것이며, 셋째는 ‘온 곳’을 설명한 것이다.
“한량없는”이라 한 것은 수가 한량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보살들의 수에)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이란 범음을 다 갖추어 말하면 ‘보리살타마하살타菩提薩埵摩訶薩埵(ⓢ bodhisattva-mahāsattva)’라고 해야 하는데, 간략히 하기 위해 다만 ‘보살’이라 한 것이다. ‘보리(ⓢ bodhi)’는 ‘각覺’이다.

001_0162_a_01L謂諸根寂靜無有躁擾亦不高
001_0162_a_02L支節不動而有所說是名威儀
001_0162_a_03L寂靜威儀無缺故名圓滿

001_0162_a_04L
大忍柔和成就無減

001_0162_a_05L
釋曰第十三忍辱柔和德親先釋云
001_0162_a_06L於苦堪耐易共住故瑜伽九十二云
001_0162_a_07L言忍辱者謂於他怨終無返報
001_0162_a_08L柔和者謂心無憤 [236] 不惱他故廣如
001_0162_a_09L瑜伽二十五釋

001_0162_a_10L
已善奉行如來聖敎

001_0162_a_11L
釋曰第十 [237] 三顯已奉行親光釋云
001_0162_a_12L有所作已圓滿故是諸聲聞位登無
001_0162_a_13L皆出生死故善奉行如來聖敎

001_0162_a_14L
復有無量菩薩摩訶薩衆從種種佛土
001_0162_a_15L而來集會

001_0162_a_16L
釋曰自下第二釋菩薩衆於中有三
001_0162_a_17L初標數辨類次皆住大乘下讃諸功
001_0162_a_18L後其名下就勝列名此卽第一
001_0162_a_19L標數辨類謂二衆中已釋聲聞
001_0162_a_20L今別釋菩薩衆類又有三節一釋無
001_0162_a_21L二菩薩等三辨來處言無量者
001_0162_a_22L顯數無量無分限故所言菩薩摩訶
001_0162_a_23L薩者若具梵音應作是言菩提薩
001_0162_a_24L埵摩訶薩埵爲存略故但言菩薩

001_0162_b_01L‘살타(ⓢ sattva)’는 이 지역에서 ‘유정有情’이라 번역되는데, 정진精進을 뜻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친광은 『불지경론』에서 (보살마하살을)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하였다. 따라서 그 논의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살마하살이라 한 것은 모든 살타薩埵들이 보리를 구하기 때문이니, 이것은 삼승에 공통되므로 대승을 구별시켜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하살’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800) 또 보리(깨달음)와 살타(유정)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니, 자리와 이타의 큰 원을 갖추고서 ‘대보리’를 구하고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801) 또 살타는 ‘용맹’을 뜻하는데, 용맹정진하며 대보리를 구하기 때문에 보살이라 하니, 이것은 모든 지위에 공통되고 지금은 지상地上의 모든 대보살을 취하기 때문에 다시 ‘마하살’이라는 말을 붙였다.802)803)
무성 보살은 (『불지경론』에서 말한) 뒤의 두 가지 의미에 의거하기 때문에 『섭대승론석』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살이란 보리·살타를 소연 경계로 삼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804) 이는 경계를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니, 마치 부정관不淨觀 등과 같다.805) 혹은 그의 마음이 보리를 구하는 데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기 때문에 (그를) 보살이라 이름한다.806)807)
또 친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중에 보살에게는 세 가지 대사大事가 있으므로 마하살(위대한 존재)이라 한다. 첫째는 수가 큼이니, (보살들의 수가) 무량함 등을 말한다. 둘째는 덕이 큼이니, 대승에 머무는 것 등을 말한다. 셋째는 업이 큼이니, 재난과 횡액 등을 그치게 하는 것이다.”≻808)
『십지경론』에 의하면 또한 세 가지 의미가 있으니, 따라서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가지 위대함이 있기 때문에 마하살이라 한다. 첫째는 원이 크고, 둘째는 행이 크며, 셋째는 중생에게 이익을 줌이 크다.”809)
보살마하살의 의미를 자세하게 분별하면, 예를 들어 『대반야경』 제37권과 제71권과 제411권과 제486~487권과 제538권과 제556권, 『대품경』 제6권, 『대지도론』 제45권과 제34~35권과 같다.
“갖가지 불국토로부터 이 모임에 와 있으니”라고 한 것은 세 번째로 그들이 온 장소를 밝힌 것이다. 교법을 듣기 위해 시방 세계로부터 온 것이다.

  어찌 자씨(彌勒)보살이 이 방토에 머무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타방에서 왔다고만 하는가?

001_0162_b_01L提名覺薩埵此土翻爲有情或精進
001_0162_b_02L由斯親光佛地論中釋有三義
001_0162_b_03L第二云所言菩薩摩訶薩者謂諸菩
001_0162_b_04L [238] 求菩提故此通三乘爲簡取大
001_0162_b_05L故須復說摩訶薩言又緣菩提薩埵
001_0162_b_06L爲境故名菩薩具足自利利他大願
001_0162_b_07L求大菩提利有情故又薩埵者是勇
001_0162_b_08L猛義精進勇猛求大菩提故名菩薩
001_0162_b_09L此通諸位今取地上諸大菩薩是故
001_0162_b_10L復說摩訶薩言無性菩薩依後二義
001_0162_b_11L故攝大乘論第一卷云言菩薩者
001_0162_b_12L提薩埵爲所緣境故名菩薩從境得
001_0162_b_13L如不淨觀等或卽彼心爲求菩提
001_0162_b_14L有志有能故名菩薩又親光云
001_0162_b_15L中菩薩有三大事名摩訶薩一者
001_0162_b_16L數大謂無量等二者德大住大乘
001_0162_b_17L三者業大息災橫等依十地論
001_0162_b_18L亦有三義故第一云有三大故
001_0162_b_19L摩訶薩一者願大二者行大三者
001_0162_b_20L利益衆生大若廣分別菩薩摩詞薩義如大
般若第三十七第七十一第四百
001_0162_b_21L一十一第四百八十六七及第五百三十八五百五
十六大品經第六智度論第四五第三十四五也

001_0162_b_22L從種種佛土而來集會者此卽第三
001_0162_b_23L顯其來處爲聽法故從十方來
001_0162_b_24L豈不慈氏住在此方如何但言從他

001_0162_c_01L
  『불지경론』에서 말한 것처럼, 나태와 교만한 마음으로 이 모임에 와서 교법을 듣고자 하지 않는 경우를 대치하기 위해 우선 ‘타방에서 왔다’고 설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810)보살이 타방에서 온 뜻을 자세하게 분별하면 『해절경소』 제1권, 『보적론』 제1권, 『대지도론』 제10권과 같다.

나) 보살들의 공덕을 찬탄함

  모두가 대승에 머물고,

  이하는 두 번째로 (보살들의) 모든 공덕을 찬탄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경문을 판석하면서 친광 보살은 네 번 부차적으로(復次) 해석하였다. 첫 번째는 십대十大에 의거해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두 번째는 십지十地에 의거해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세 번째는 십바라밀(十度)에 의거해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네 번째는 십원十願에 의거해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가) 십대十大에 의거해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함
이것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열 구의 경문은 곧 열 개의 단락이 된다.

㉮ 정진의 위대함
이것은 첫 번째로 정진의 위대함(精進大)을 해석한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정진의 힘으로 대승에 안주하면서, 유정들을 구제하여 생사의 세계를 떠나서 스스로 발심하여 무상의 보리에 나아가도록 한다.”811) 대승이란 곧 중생을 교화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을 대승이라 한다. 어떤 이는 ‘법성진여를 대승으로 삼는다’고 한다. 지금은 해석하기를, 『금강반야경』에서 말한 ‘광대한 마음’ 등812)을 ‘대승에 머문다’고 한다.

㉯ 그 인의 위대함

  대승법을 밟아 가며

  두 번째는 그들의 인의 위대함(因大)을 찬탄한 것이다.
친광의 해석에서는 “십지 등을 문聞·사思·수修 등을 통해 점차로 밟아 간다.”813)고 하였다. “십지 등”이라 한 것은 (십지뿐만 아니라) 등각·묘각까지 똑같이 취한 것이다. 이것이 곧 대승이며, 또한 보살이 밟아 가는 곳이기도 하다. “문·사·수 등”이란 (문혜·사혜·수혜라는) 세간의 삼혜三慧를 말하며, “등”이란 (유루의 삼혜뿐만 아니라) 무루의 수혜까지 똑같이 취한 것이다. 이것은 삼혜가 십지의 경지에서 차례로 일어나서 불지佛地를 생기게 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따라서 ‘인이 위대하다’고 한다. 또 ‘대승’이란 모두 법성진여이니, 십지 보살은 삼혜와 그에 상응하는 법을 통해 점차로 진여의 경계를 깨달아서 불과佛果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인이 위대하다’고 한다.

㉰ 소연의 위대함

  모든 중생들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하고,

  세 번째는 소연의 위대함(所緣大)을 해석한 것이다.
친광의 해석에서는 “곧 모든 유정들에 대해 자타의 평등함을 얻었으니, 큰 자비 등의 평등한 방편 때문이다.”814)라고 하였다. 이 공덕은 자비 등을 체로 삼고 모든 유정들을 소연 경계로 삼기 때문에 ‘소연이 위대하다’고 한다. 이전의 공덕이 지혜를 체로 삼기 때문에

001_0162_c_01L方來如佛地論爲欲對治懈怠憍
001_0162_c_02L慢不來集會求聞法故且說他方
001_0162_c_03L說如彼若廣分別菩薩他方來意如解節經
疏第一寶積論第一智度論第十也

001_0162_c_04L
皆住大乘

001_0162_c_05L
釋曰自下第二讃諸功德然判此經
001_0162_c_06L親光菩薩四復次釋一約十大釋十
001_0162_c_07L句經二依十地釋十句經三約十度
001_0162_c_08L釋十句經四約十願釋十句經
001_0162_c_09L卽初也十句經文卽爲十段此卽
001_0162_c_10L第一釋精進大親光釋云由精進力
001_0162_c_11L安住大乘拔濟有1) [43] [239] 令離生死
001_0162_c_12L自發趣無上菩提解云大乘者即用化生
及求菩提爲大乘也
001_0162_c_13L法性眞如以爲大乘今解金剛
般若中廣大心等以爲住大乘

001_0162_c_14L
遊大乘法

001_0162_c_15L
釋曰第二讃其因大親光釋云
001_0162_c_16L十地中 [240] 以聞思修等漸次而遊解云
十地
001_0162_c_17L等者等取等覺妙覺此卽大乘亦是所遊之處
聞思修等者世間三慧等言等取無漏修慧此明
001_0162_c_18L三慧於十地境次第而起能生佛地故名因大
又解大乘皆法性眞如十地菩薩以三慧及相
001_0162_c_19L應法漸次了知眞如之境
能生佛果故名因大也

001_0162_c_20L
於諸衆生其心平等

001_0162_c_21L
釋曰第三釋所緣大親光釋云
001_0162_c_22L於一切有情得自他平等以大慈等
001_0162_c_23L平等方便故解云此德慈等爲體一切有情
爲所緣境名所緣大前德以智
001_0162_c_24L「有」疑「情」

001_0163_a_01L진여를 경계로 삼는다면, 이 공덕은 자비 등을 체로 삼기 때문에 유정을 경계로 삼는다. 이는 『반야론』에서 ‘한 몸으로 여기는 대비(同體大悲) 때문에 평등한 방편이라 한다’고 한 것에 해당한다.

㉱ 시간의 위대함

  모든 ‘분별分別’ 및 ‘분별 아닌 것(不分別)’에 대한 갖가지 분별을 떠났으며,

  네 번째는 시간의 위대함(時大)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모든 시간을 마치 한 순간처럼 평등하게 굴리는 것이다. 겁劫을 ‘분별’이라 한다. (보살은) 일체의 겁과 비겁非劫에 대한 분별을 끊었기 때문에, 겁과 비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오랫동안 수행하면서도 싫증내지 않을 수 있다.”815)
  범음으로 겁랍파劫臈波(ⓢ kalpa)816)라는 것은 여기 말로 ‘분별分別’이라 번역한다. 유위의 법은 시겁時劫에 포섭되고 (시겁의) 부분부분마다 차별되므로 ‘분별’이라 이름하고, 무위의 법은 시겁에 포섭되지 않고 시겁의 부분부분마다 차별됨이 없으므로 ‘분별 아닌 것(不分別)’이라 이름한다. 이 두 가지(분별과 분별 아닌 것)는 소연경계이다. “갖가지 분별”이란 바로 분별하는 마음이니, 앞의 ‘분별과 분별 아닌 것’이라는 경계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갖가지 분별’이라 하였다.817)
여기서의 의미를 설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이것은 시겁이다, 이는 시겁이 아니다’라는 분별이 있으면, 시겁이 길다고 보고 수행에 싫증을 느낀다. 그러나 모든 보살 등은 모든 겁과 비겁에 대한 분별을 끊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겁과 비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오랫동안 수행하면서도 싫증을 내지 않고, 나아가 삼무수겁三無數劫818)에 이르는 모든 장구한 시간을 마치 한 순간인 것처럼 평등하게 굴린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자지 않을 때는 낮과 밤을 분별하여 ‘밤이 길다’고 하지만 자고 있을 때는 밤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긴 밤을 지나고도 밤이 긴 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무수겁을 거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따라서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6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량한 겁을 거쳐서야 불과佛果를 이루니, 시간이 이미 장구한데 어째서 ‘빠르다’고 하는가? 이 주장은 맞지 않다. 시겁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오직 분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꿈속에서 몇 해가 지났다 하지만, 깨어 보면 잠깐 동안이네.

001_0163_a_01L體故眞如爲境此以慈等爲體性故有情爲
此即波若論中同體大悲故名平等方便也

001_0163_a_02L
離諸分別及不分別種種分別

001_0163_a_03L
釋曰第四明時大也親光釋云
001_0163_a_04L於一切時猶如一念平等而轉
001_0163_a_05L名分別以於一切劫與非劫分別斷
001_0163_a_06L以不分別劫與非劫故能長時修
001_0163_a_07L行無厭 [241] 梵音名劫﨟波此翻
001_0163_a_08L爲分別有爲之法時劫所攝分分
001_0163_a_09L差別爲分別無爲之法非時劫攝
001_0163_a_10L無有時劫分分差別名不分別此二
001_0163_a_11L是所緣境種種分別者是能分別心
001_0163_a_12L緣前分別不分別境故云種種分別
001_0163_a_13L此中意說若有分別此是時劫
001_0163_a_14L非時劫見時劫長修行有厭諸菩
001_0163_a_15L薩等以於一切劫與非劫分別何 [242]
001_0163_a_16L以不分別劫與非劫故能長時修行
001_0163_a_17L無厭乃至三無數劫一切長時
001_0163_a_18L如一念平等而轉如人不睡分別日
001_0163_a_19L卽謂夜長若睡眠時不分別夜
001_0163_a_20L故雖經長夜不覺夜長經無數劫
001_0163_a_21L復如是是故無性攝大乘釋第六卷
001_0163_a_22L經無量劫乃成佛果時旣長久
001_0163_a_23L云何言疾此義不然時劫長遠唯分
001_0163_a_24L別故如有頌言處夢謂經年 [243]

001_0163_b_01L따라서 시간이 무량하다 해도 한 찰나에 거두어진다네.≻ 또 부처님의 정진은 지극히 치열하기 때문에 많은 겁을 거치면서도 잠깐 동안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잠깐 동안 닦고도 게으른 마음에 오래되었다 의심하지만, 부처님은 무량한 겁 용맹정진하시고도 잠깐이라 하시네.≻”819) 이것도 이와 같으니, 따라서 이처럼 ‘모든 시간들을 마치 한 순간처럼 (평등하게 굴린다)’고 말한 것이다.

㉲ 무염의 위대함

  일체의 온갖 마군의 원수들을 굴복시키고,

  다섯 번째는 무염의 위대함(無染大)을 나타낸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모든 마군의 원수를 꺾어 버린 것을 말하니, 일체의 섭수되는 것들을 버리기 때문에 마군의 원수들을 꺾어 버릴 수 있다.”820) 섭수한 다섯 가지 묘한 욕망의 경계를 버리기 때문에 번뇌마의 원수를 굴복시킬 수 있다. 혹은 이것이 근본이 되어 사마四魔821)를 온전히 떠난다고 할 수도 있다.
또 친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령 (경에서) 설하듯, 보살들이 모든 섭수하는 사事들에 대해 (그것들이) 견실하지 않음을 알아서 마음으로 탐내거나 구하지 않으면 곧 모든 마군의 원수들을 굴복시킬 수 있다.”822) 친광은 경전을 인용하여 이를 증명하였다. 예를 들면 『반주삼매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법은 견고하지 않고 항상 생각 속에 성립하는 것이니, 공을 이해하고 통찰한 이는 일체 상념想念이 없다.”823) 마군을 굴복시키는 이치가 여기에서 지극하게 드러난다.
『열반경』에서는 여덟 가지 마를 세우는데, 유위의 네 가지 전도에다 다시 무위의 네 가지 전도를 더하여 ‘마’라고 통칭한 것이다.824) 이는 소승종에서는 과실이 되지 않고, 혹은 대승에서는 번뇌마에 속하기도 한다. 따라서 여러 교에서 생략하고 설하지 않았다.
네 종류 마를 자세히 해석하면, 앞의 열여덟 가지 원만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825)

㉳ 작의의 위대함

  일체의 성문·독각이 갖는 모든 작의作意826)를 멀리 떠났으며,

  여섯 번째는 작의의 위대함(作意大)을 밝힌 것이다.
친광은 ‘이승의 분별작의를 멀리 떠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827) 세친과 무성의 『섭대승론석』 제6권에서도 친광과 같이 말한다.
양梁 『섭대승론석』 제7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성문·독각의 사유를 버리고 떠나기 때문이다.……() ‘이승의 사유’란 고제苦諦의 무상無常 등 생사의 과실을 자주 관하거나 열반적정의 공덕을 자주 관하는 것을 말한다.828)

001_0163_b_01L須臾頃故雖時 [244] 無量攝在一刹那
001_0163_b_02L佛精進極熾然故雖經多時 [245] 而謂少
001_0163_b_03L如有頌言愚修雖少時怠心疑
001_0163_b_04L已久佛於無量劫勇猛 [246] 謂須臾
001_0163_b_05L亦如是故作此言於一切時猶如
001_0163_b_06L一念

001_0163_b_07L
摧伏一切衆魔怨歒

001_0163_b_08L
釋曰第五顯無染大親光釋云
001_0163_b_09L諸摧 [247] 魔怨以捨一切所攝受故1) [44] [248]
001_0163_b_10L魔怨解云以捨攝受五妙欲境故能摧伏
煩惱魔怨或可由斯爲本具離四魔

001_0163_b_11L親光云如說菩薩若於一切所攝受
001_0163_b_12L [249] 不堅實心不貪求卽能摧伏
001_0163_b_13L一切魔怨解云親光引經證成如般舟經云 [250]
法不堅固常立在於念以解見空者
001_0163_b_14L一切無於 [251] 摧魔
之義理極於此
依涅槃經立八種魔
001_0163_b_15L謂有爲四倒上更加無爲四倒通名
001_0163_b_16L爲魔小乘宗中不成過失或大乘
001_0163_b_17L煩惱魔攝故諸敎中略而不說
001_0163_b_18L廣釋四魔如前十八圓滿中說

001_0163_b_19L
遠離一切聲聞獨覺所有作意

001_0163_b_20L
釋曰第六辨作意大親光釋云
001_0163_b_21L離二乘分別作意世親無性攝論第
001_0163_b_22L六亦同親光梁攝論第七卷云捨離
001_0163_b_23L聲聞獨覺思惟故二乘思惟謂數觀
001_0163_b_24L苦無常等生死過去 [252] 及數觀涅槃寂

001_0163_c_01L이러한 관은 다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뿐 중생에게 이익 주는 일을 저버린 것이다.”829)

㉴ 주지의 위대함

  광대한 법미의 희락에 의해 유지되고,

  일곱 번째는 주지의 위대함(住持大)830)이다.
친광의 해석에서는 “대승의 법미에 대한 희락을 음식으로 삼는다.”831)고 하였다.
양의 『섭대승론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승의 십이부경을 광대한 법(大法)이라 하고 진여·해탈 등을 맛(味)이라 한다. 이 법미를 반연하면서 모든 희락을 내고, (이 즐거움이) 보살의 오분법신五分法身832)을 자라게 한다. 이 구절은 ‘주지’의 원만함과 청정함을 바로 밝힌 것이다.”833)
또 『법화경』에서는 “법희식法喜食과 선열식禪悅食 이외에 다시 다른 음식에 대한 생각이 없다.”834)고 하였다.

㉵ 청정의 위대함

  다섯 가지 두려움을 넘어섰으며,

  여덟 번째는 청정의 위대함(淸淨大)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다섯 가지 두려움(五怖畏)을 넘어선다는 것은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두려움을 벗어난 것을 말하니, 범계犯戒 등이나 모든 악취惡趣의 두려움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두려움이란 첫째는 (전부 보시해 버리면) 먹고 살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고, 둘째는 악명에 대한 두려움이며, 셋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고, 넷째는 악도에 떨어지는 두려움이며, 다섯째는 대중을 무서워하는 두려움이다.835)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두려움은 청정의요지淸淨意樂地836)를 증득할 때 모두 멀리 떠나게 된다.”837)
다섯 가지 두려움을 자세하게 해석하면, 『불지론』 제2권, 『선계경』 제8권, 『십주비바사론』 제2권, 『불성론』 제3권, 『십지론』 제2권, 『대비바사론』 제75권, 『순정리론』 제49권 등과 같다.

㉶ 증득의 위대함

  한결같이 불퇴전지에 들어갔고,

  아홉 번째는 증득의 위대함(證得大)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한결같이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갔다는 것은 곧 일체지기별지一切智記別地838)를 얻었을 때는 한결같이 물러나지 않게 됨을 말한다. 이전의 칠지에서는 여전히 가행의 공용功用(의식적인 노력)을 굴리는 일이 있고 아직 불퇴전의 무공용無功用의 도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 나머지 (팔지 이상의) 모든 지에서는

001_0163_c_01L靜功德此觀但愛自身捨利益衆生
001_0163_c_02L

001_0163_c_03L
廣大法味喜樂所持

001_0163_c_04L
釋曰第七住持大親光釋云卽用
001_0163_c_05L大乘法味喜樂爲食梁攝論云大乘
001_0163_c_06L十二部經名爲大法眞如解脫等爲
001_0163_c_07L2) [45] [253] 此法味生諸喜樂長養菩薩
001_0163_c_08L五分法身此句正明住持圓淨又法
001_0163_c_09L華云法喜禪悅食更無餘食想

001_0163_c_10L
超五怖畏

001_0163_c_11L
釋曰第八淸淨大親光釋云謂超
001_0163_c_12L五怖畏卽三業淸淨出諸怖畏
001_0163_c_13L犯戒等諸惡趣等怖畏因故五怖畏
001_0163_c_14L一不活畏二惡3) [46] [254] 三死畏
001_0163_c_15L惡趣畏五怯衆畏如是五畏證得
001_0163_c_16L淸淨意樂地時皆已遠離廣釋五怖畏
如佛地論第
001_0163_c_17L善戒經第八十住婆沙第二佛性論第三
地論第4) [47] [255] 婆沙七十五順正理四十九等也

001_0163_c_18L
一向趣入不退轉地

001_0163_c_19L
釋曰第九證得大親光釋云一向
001_0163_c_20L趣入不退轉地卽得一切智記別 [256]
001_0163_c_21L一向不退前七地中猶有加行功用
001_0163_c_22L運轉未得不退無功用道其餘諸地
001_0163_c_23L「能」下疑脫「摧」「經」疑「以」「誦」疑
001_0163_c_24L「名」
「口」疑「二」

001_0164_a_01L가행의 공용이 없는 도를 얻어서 굴리어 한결같이 불퇴전지에 들어간다.”839)
지금 호법종에 의하면, 삼지三智의 문에서 가행지加行智는 한결같이 유루이고,840) 팔지 이상부터는 일체 현행하지 않는다. 또 팔지 이상은 모든 번뇌가 다 현행하지 않으므로 불퇴지라고 한다. 나중에 분별하겠다.
또 『장엄경론』 제10권에서는 불퇴보살의 품류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아직 성숙되지 않은 불퇴이니, 신행지信行地를 말한다.841) 둘째는 이미 성숙된 불퇴이니, 초지에서 칠지까지를 말한다. 셋째는 지극히 성숙된 불퇴이니, 팔지 이상을 말한다.842)
『반주삼매경』과 『보리자량론』과 『불지경론』 제6권에서도 모두 팔지 이상을 불퇴지라고 설하는데, 번거로울까 봐 서술하지 않는다.

㉷ 업의 위대함

  모든 중생의 모든 재앙을 그치게 하는 지위를 현전해 낸다.

  이것은 열 번째로 그들의 업의 위대함(業大)을 해석한 것이다.
친광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모든 보살들은 능히 모든 유정들이 안팎의 고뇌로 핍박받는 것을 그치게 해 주는 지위를 현전해 낸다. 이 지위에는 대비大悲·대자大慈가 있으니, 이 두 종류로 인해 능히 모든 내부의 질병 따위 고통이나 외부의 가난 등의 번뇌에 의해 핍박받는 것을 그치게 할 수 있다. 이 두 종류는 유정들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많이 지어 주기 때문에, 이것을 획득한 자를 일컬어 ‘업이 위대하다’고 한다.”843) 『불지경론』에서는 ‘재앙은 미혹에 의해 일으켜진 업이고 또 그에 의해 얻어진 결과’라고 하였다.844)
양조梁朝 『섭대승론석』에서는 “삼계의 고제를 ‘모든 재앙’이라 한다.”845)고 하였다.
이상으로 아홉 종류 공덕의 (위대함) 및 업의 위대함에 의거해서 경의 열 구句를 다 해석했다.

(나) 십지에 의거해서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함
두 번째 부차적 설명은 십지十地의 행을 기준으로 해서 경의 열 구句에 배당시킨 것이다.846) 따라서 친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모두가 대승에 머물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초지初地에 머물면서 온 누리에 가득 찬 참된 법계를 증득할 때 처음으로 진실한 대승법을 증득하기 때문에 ‘대승에 머문다’고 한 것이다.
“대승법에서 노닐며”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2지에서는 보살의 삼취계三聚戒847)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대승의 행법이 곧 삼취계다.
“모든 중생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하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3지에서는

001_0164_a_01L [257] 無加行功用運轉一向趣入不退
001_0164_a_02L轉地今護法宗三智門中加行智一向有漏
地已上一切不行又八地已上一切煩惱
001_0164_a_03L皆不現行名不
退地後當分別
又莊嚴論第十卷云
001_0164_a_04L退菩薩品類有三一未成不退謂信
001_0164_a_05L行地二已成不退謂初地至七地
001_0164_a_06L極成不退謂八地已上般舟三昧經
001_0164_a_07L菩提資粮論佛地第六皆說八地已
001_0164_a_08L名不退地恐繁不述

001_0164_a_09L
息一切衆生一切災橫地而現在前

001_0164_a_10L
釋曰此卽第十釋其業大親光釋云
001_0164_a_11L謂諸菩薩能息一切有情內外苦惱
001_0164_a_12L逼迫地位現前此地中有大悲大慈
001_0164_a_13L由此二種能息一切內病等苦外貪 [258]
001_0164_a_14L等惱之所逼迫此二多作有情利樂
001_0164_a_15L故得此者名爲業大佛地論云
001_0164_a_16L橫卽道 [259] 惑所發業及所得果梁朝論
001_0164_a_17L三界苦諦名一切災橫上來
001_0164_a_18L約九德及業釋經十句訖第二復次
001_0164_a_19L約十地行故配經十句故親光云
001_0164_a_20L皆住大乘者謂住初地證得遍滿
001_0164_a_21L眞法界時初得眞實大乘法故名住
001_0164_a_22L大乘遊大乘法者謂第二地修行
001_0164_a_23L菩薩三聚戒故大乘行法卽三聚戒
001_0164_a_24L於諸衆生其心平等者謂第三地得

001_0164_b_01L모든 뛰어난 선정을 얻어 사무량심(자·비·희·사)을 발하여 모든 유정들에게 평등하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과 (분별 아닌 것에 대한 갖가지 분별을) 떠났으며”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4지에서 삼십칠보리분법848)을 얻어 ‘모든 분별과 분별 아닌 것’에 대한 갖가지 분별을 떠나기 때문이다. ‘모든 분별’이란 견도에서 끊어지는 분별기아견分別起我見849)으로서 이는 초지에서 이미 떠났고, ‘분별 아닌 것’이란 수도에서 끊어지는 구생기아견俱生起我見850)으로서 이는 이 제4지에서 떠난다.851) 곧 이 두 가지와 상응하는 모든 법을 ‘갖가지 분별’이라 하니, 행해行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이 아견들을) 이전의 지위와 이후의 지위에서 떠나기는 해도, 다 없어진 곳에서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제4정려에서 고·낙을 떠난다고 말하거나,852) 제3과(불환과)에서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떠난다고 하는 것과 같다.853)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제4지에서 제7식 중의 구생번뇌를 모두 멀리 떠난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에서는 제6식 중의 구생아견을 모두 멀리 떠나는 것이지 제7식의 (구생번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칠지까지도 오히려 미세한 번뇌가 현행하기 때문이다. 만약 제7식이 없다면, 오염의 소의(染依)가 없어질 것이고, 오식과 유사하지 않을 것이다.854) 제7식의 미세한 혹을 이미 멀리 떠났다면, 5지·6지·7지의 여섯 가지 식의 거친 혹도 마땅히 현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유가사지론』과 『해심밀경』의 설과 모순된다. 또 예를 들어 이승의 금강유정金剛喩定855)에서 제7식의 미혹과 육식 중의 가장 미세한 번뇌들이 일시에 모두 끊어지는데, 어째서 여기서는 먼저 제7식의 미세한 번뇌를 떠나고 나서 나중에 육식의 거친 번뇌를 떠난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제4지에서 무아지無我智를 얻어서 의식 중의 구생아견을 없애는 것이지, 아직 제7식의 미세한 번뇌 및 육식 중의 나머지 수도소단修道所斷의 혹惑(번뇌)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이상은 ‘영구히 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숨겨진 비난(伏難)에 대해 설한 것이다.856) 그것은 제10지인 금강심일 때라야 수도소단의 종자를 단박에 없애기 때문이다.

“일체의 온갖 마군의 원수들을 굴복시키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5지에서 사성제가 모두 평등함을 관하여, 생사와 열반의 차별에 집착하는 마군의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001_0164_b_01L諸勝定發四無量平等利樂諸有情
001_0164_b_02L離諸分別等者謂第四地得三十
001_0164_b_03L七菩提分法離諸分別及不分別種
001_0164_b_04L種分別諸分別者卽見所斷分別我
001_0164_b_05L初地已離不分別者卽修所斷俱
001_0164_b_06L生我見此地中離卽此二種相應諸
001_0164_b_07L名種種分別行解異故雖前後離
001_0164_b_08L盡處總說如第四定說離苦根 [260] 如第
001_0164_b_09L三果離下分結有義此地第七識中
001_0164_b_10L俱生煩惱一切遠離有義此地
001_0164_b_11L六識中俱生我見一切遠離非第七
001_0164_b_12L以七地來猶有徵細煩惱現行
001_0164_b_13L無第七應無染依應不似五第七
001_0164_b_14L細惑若已遠離五六七地六識麤
001_0164_b_15L應不現行卽違瑜伽解深密說
001_0164_b_16L如二乘金剛喩定第七識或俱 [261] 六識
001_0164_b_17L中最細煩惱一時俱斷云何此中先
001_0164_b_18L離第七微細煩惱後離六識麤煩惱
001_0164_b_19L是故四地得無我智滅意識中俱
001_0164_b_20L生我見未離第七微細煩惱及六識
001_0164_b_21L中餘修斷惑此說伏難非是永滅其
001_0164_b_22L第十地金剛心時方頓滅修斷種故
001_0164_b_23L摧伏一切衆魔怨歒者謂第五地
001_0164_b_24L四聖諦皆平等性摧伏執取生死涅

001_0164_c_01L
“일체의 성문·연각들이 갖는 모든 작의(所有作意)857)를 멀리 떠났으며”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6지에서 십이지의 염染·정淨 연기가 모두 평등함(平等性)을 관하여 잡염을 싫어하고 청정을 좋아하는 이승二乘의 계념분별繫念分別858)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광대한 법미의 희락에 의해 유지되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7지에서 무상無相의 이치를 증득하고 공의 지혜(空智) 안에서 유의 수승한 행(有勝行)을 일으켜서 대법락을 수용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두려움을 넘어섰으며”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8지에서 다섯 가지 두려움의 원인을 떠났으므로 ‘다섯 가지 두려움을 넘어섰다’고 한 것이다. 다섯 가지 두려움의 과보는 초지에서 이미 떠난다.
“한결같이 불퇴전지에 들어갔고”라는 것은, 말하자면 제9지에서는 결정코 제10지에 들어가게 되니, 보살대중의 수행이 원만해진 불퇴전의 지위다.
“모든 중생들의 (모든 재앙을) 그치게 해 주는 (지위를 현전해 낸다.)”는 것은, 말하자면 제10지에서 위대한 법신을 얻어 큰 자비의 구름을 일으키고 큰 법의 비를 내려서 모든 중생들이 고뇌로 핍박받는 일을 그치게 해 주는 것이다.859)

(다) 십바라밀·십원에 의거해 열 구의 경문을 해석함
세 번째는 십바라밀(十度)을, 네 번째는 십원十願을, 경의 열 구에 배당시키는 것이다. 마땅히 십바라밀과 십원에 배당시켜 해석해야 하니, 예를 들면 제4권 『경기經記』의 해석과 같다.860)

다) 뛰어난 보살부터 이름을 나열함

  그 이름은 해심심의밀의보살마하살, 여리청문보살마하살, 법용보살마하살, 선청정혜보살마하살, 광혜보살마하살, 덕본보살마하살, 승의생보살마하살, 관자재보살마하살, 자씨보살마하살, 만수실리보살마하살 등이니, (이들이) 상수가 되었다.

  세 번째는 뛰어난 자부터 이름을 나열한 것이다.
간략히 세 가지 내용을 설명하겠다. 첫째는 이름을 해석하고, 둘째는 열 명을 설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며, 셋째는 문답으로 ‘일생보처’에 대해 분별하겠다.

(가) 이름의 해석
이름을 해석한다는 것은 본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공통되는 이름이고, 둘째는 개별적 이름이다.

001_0164_c_01L槃差別魔怨遠離一切聲聞獨覺所
001_0164_c_02L有作意 [262] 謂第六地觀十二支染淨
001_0164_c_03L緣起皆平等性遠離二乘厭患雜染
001_0164_c_04L欣樂淸淨繫念分別廣大法味喜樂
001_0164_c_05L所持者謂第七地證無相理於空
001_0164_c_06L [263] 有勝行受大法樂1) [48] [264] 五怖畏因
001_0164_c_07L名超五怖五怖畏果初地已離
001_0164_c_08L向趣入不退轉位者謂第九地
001_0164_c_09L定趣入第十菩薩衆行圓滿不退轉位
001_0164_c_10L息諸衆生等者謂第十地得大法身
001_0164_c_11L起大悲雲雨大法雨息除一切衆生
001_0164_c_12L苦惱所逼迫事第三十度第四十願
001_0164_c_13L配經十句如應配釋十度十願
001_0164_c_14L第四卷經記中釋

001_0164_c_15L
其名曰解甚深義密意菩薩摩訶薩
001_0164_c_16L理請問菩薩摩訶薩法誦菩薩摩訶薩
001_0164_c_17L善淸淨慧菩薩摩訶薩廣慧菩薩摩訶
001_0164_c_18L德本菩薩摩訶薩勝義王 [265] 菩薩摩訶
001_0164_c_19L觀自在菩薩摩訶薩慈氏菩薩摩訶
001_0164_c_20L曼殊室利菩薩摩訶薩等而爲上首

001_0164_c_21L
釋曰第三就勝列名略辨三義
001_0164_c_22L釋名字二說十所由三問答分別一
001_0164_c_23L生補處言釋名者自有二義一通
001_0164_c_24L「超」上疑脫「超五怖畏者謂第八地」八字

001_0165_a_01L
공통되는 이름이라 한 것은,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46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모든 보살에게는 공덕에 따라 붙인 가명假名이 열여섯 종류가 있다. 이른바 ‘보리살타’와 ‘마하살타’라고 이름하고 나아가서 열여섯 번째로 ‘법사’라고 이름한다.≻861) 『현양성교론』 제8권에서도 『유가사지론』과 똑같이 설한다.
『대승장엄경론』 제12권에 나온 이름은 조금 다르지만 뜻은 거의 동일하다.862) 또 『대승장엄경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열여섯 가지 이름은 모두 의미에 따라 세운 것이니, 모든 보살들은 모두 이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이 이름을 들으면, 마땅히 이는 보살임을 알아야 한다.”863)
  지금 ‘보살마하살’이라 한 것은 공통된 이름 가운데 (보리살타·마하살타라는) 처음의 두 호칭에 해당하니, 의미는 이전에 해석한 것과 같다.864)(『유가사지론』에 나온) 열여섯 종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보리살타菩提薩埵라고 하고, 두 번째 마하살타摩詞薩埵라고 하며, 세 번째 성취각혜成就覺慧라고 하고, 네 번째 최상조명最上照明이라 하며, 다섯 번째 최승진자最勝眞子 또는 최승지자最勝之子라고 하고, 여섯 번째 최승주지最勝住持 또는 최승소의最勝所依라고 하며, 일곱 번째 보능항복普能降伏 또는 최승소사最勝所使라고 하고, 여덟 번째 최승맹아最勝萌芽라고 하며, 아홉 번째 용건勇健 또는 맹건猛健이라 하고, 열 번째 최승성最勝聖 또는 상궤범사上軌範師라고 하며, 열한 번째 상주商主라고 하고, 열두 번째 구대명칭具大名稱이라 하며, 열세 번째 연민憐愍 또는 성취자비成就慈悲라고 하고, 열네 번째 대복大福이라 하며, 열다섯 번째 자재自在 또는 부자재富自在라고 하고, 열여섯 번째 법사法師라고 한다.
개별적 이름은 뒤에서 자세히 해석한 것과 같다.865)
(“만수실리보살마하살 등이니”라고 했는데,) ‘등’이란 그 밖의 한량없는 보살들을 똑같이 취한 것이다.
“상수가 되었다.”는 것은 열 명의 보살이 이 무리 중에 가장 제일이므로 ‘상수’라고 하였다. 따라서 『불지경론』에서는 “묘생보살이 이 무리 중에 가장 제일이므로 상수라고 한다.”866)고 하였다.

(나) 열 명의 이름을 설하게 된 이유
열 명을 설한 의도를 말하면,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보살은 최초로 심오한 의미를 해석하였고, 다음 세 보살은 각기 승의제의 한 가지 상相을 물었으며, 뒤의 여섯 보살은 각기 한 품의 차별적 의미를 물었기 때문에, 따라서 오직 열 명만 열거하였다.
  또 간략하게 하기 위해 다만 열 명을 설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면 『불지경론』 제2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경에서는 생략했기 때문에 오직 하나의 이름만을 나열하였고, 그 밖의 여러 모임들에서는 그 수만 열거한 경우도 있는데,

001_0165_a_01L二別言通名者如瑜伽論四十六云
001_0165_a_02L一切菩薩隨德假名有十六種所謂
001_0165_a_03L名爲菩提薩埵摩訶薩埵乃至十六
001_0165_a_04L名爲法師顯揚第八亦同瑜伽莊嚴
001_0165_a_05L十二卷名雖少異意況大同又莊
001_0165_a_06L嚴云此十六名皆依義立一切菩薩
001_0165_a_07L總有此名若人聞有此名應知卽是
001_0165_a_08L菩薩解云今言菩薩摩訶薩者
001_0165_a_09L通名中初二號也釋義如前十六名者
一名菩提
001_0165_a_10L薩埵二名摩詞薩埵三名成就覺慧四名最上
照明五名最勝眞子亦名最勝之子六名最勝
001_0165_a_11L住持亦者最勝所依七名善能降伏亦名最勝
所使八名最勝萌芽九名勇健亦名猛健十名
001_0165_a_12L最勝聖亦名上軌範師十一名商主十二名具
大名稱十三名憐愍亦名成就慈悲十四名大
001_0165_a_13L十五名自在亦名
富自在十六名法師
言別名者如後廣
001_0165_a_14L等者等取其餘無量諸菩薩也
001_0165_a_15L爲上首者謂十菩薩於此衆中最第
001_0165_a_16L一故名爲上首故佛地云妙生菩
001_0165_a_17L於此衆中最第一故名爲上首
001_0165_a_18L十意者有其三義第一菩薩初解
001_0165_a_19L釋甚深義故次三菩薩各問勝義一
001_0165_a_20L種相故後六菩薩各問一品差別義
001_0165_a_21L故唯列十又解爲存略故但說
001_0165_a_22L十也如佛地論第二卷云此經略故
001_0165_a_23L唯列一名所餘衆會但擧其數

001_0165_b_01L법을 결집한 자들의 의도는 생략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867)
또 『대지도론』 제7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보살들은 매우 많은데 어째서 유독 스물두 종류 보살 이름만을 설합니까? 보살은 한량없어서 다 말할 수가 없으니, 모두 다 말한다면 문자로 기재하기 어렵다. 다시 보살은 두 종류에 지나지 않으니, 이른바 재가·출가와 차방·타방이다. 재가는 발다파라颰陀婆羅(ⓢ Bhadra -pāla) 등을 말하고 출가는 묘덕妙德 등을 말하며, 차방은 자씨慈氏 등을 말하고 타방은 관음觀音 등을 말한다. 이 두 가지를 말했다면, 모든 보살을 다 포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868)

(다) 문답으로 일생보처에 대해 설명함
  『해절경』에서는 미륵·관음·문수사리를 모두 일생보처보살이라 했는데, 일생보처와 최후신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869)
  살바다종에서는 미륵彌勒 등과 같은 도사다천覩史多天(도솔천)의 몸을 ‘일생보처’라고 하고, 사람 가운데 태어나 성불한 몸을 최후신이라 한다. 따라서 『구사론』 제11권에서는 도사다천에 머무는 일생소계一生所繫(일생보처)보살과 최후신보살은 결코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870) 『순정리론』 제31권도 『구사론』과 동일하다. 이치상으로 도사다천에서 한량없는 생을 거쳐야 하는데 어째서 다만 일생이라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자재함을 얻었기 때문에 오직 ‘일생’이라 했다면, 어떻게 『대비바사론』 등과 회통시켜 해석하겠는가? 이 의미는 난해하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제 대승에 의하면 여러 교설들이 서로 다르다.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오직 천신天身을 일생보처라고 설한다. 예를 들면 『대반야경』 제7권에서는 ‘일생소계의 도사천의 보살’이라 하였다.871)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오직 천신을 최후신이라 설한다. 예를 들면 『불지경론』 제5권에서 “도사다천의 후신後身보살이 이 가운데서 교화한다.”872)고 하였다.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천신을 일생보처 및 최후생最後生(최후신)이라 한다. 예를 들면 『보리자량론』 제1권에서 ‘일생소계보살은 도솔타천兜率陀天(도솔천)에 들어가고

001_0165_b_01L集法者意在略故又智度論第七卷
001_0165_b_02L問曰菩薩甚多何以獨說二十
001_0165_b_03L二種菩薩名字答曰菩薩無量
001_0165_b_04L不可盡若都說者文字難載復次
001_0165_b_05L菩薩不過二種所謂在家出家
001_0165_b_06L他方在家謂颰陀 [266] 羅等出家謂
001_0165_b_07L妙德等此方謂慈氏等他方謂觀音
001_0165_b_08L若說此二當知一切都已攝盡
001_0165_b_09L解節經云彌勒觀音文殊師利皆是
001_0165_b_10L一生補處菩薩一生補處與最後身
001_0165_b_11L有何差別薩婆多宗如彌勒等
001_0165_b_12L覩史多天身名爲一生生人中成佛
001_0165_b_13L身者名最後身故俱舍論第十一云
001_0165_b_14L覩史多天一生所繫菩薩及最後身
001_0165_b_15L必無中夭順正理論第三十一亦同
001_0165_b_16L俱舍理應覩史經無量生如何但說名一生
若言菩薩得自在故唯一生者如何會
001_0165_b_17L釋大婆沙等
義難更須思
今依大乘諸敎不同
001_0165_b_18L自有聖敎唯說天身名爲一生如大
001_0165_b_19L般若第七卷云一生所繫覩史天菩
001_0165_b_20L自有聖敎唯說天身名最後
001_0165_b_21L佛地論第五卷云覩史多天後身菩
001_0165_b_22L於中敎化自有聖敎唯說天身
001_0165_b_23L名爲一生及最後生如菩提資粮論
001_0165_b_24L第一卷云一生所繫菩薩入兜率陀

001_0165_c_01L최후생보살은 도솔타천에 머문다’고 하였다.873)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오직 인신人身을 일생보처라고 한다. 예를 들면 『해절경』 등에서는 관음과 문수를 일생보처라고 하였다.874)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오직 인신을 최후생이라 한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48권에서 ‘최후생이란 이 생에서 등각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실현할 수 있는 모든 보살들이다’라고 하였으니,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875)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오직 인신을 일생보처 및 최후생이라 설한다. 예를 들면 『대지도론』 제40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생보처를 간혹 상相으로 알아보는 경우가 있으니, 예를 들어 아사타阿私陀(ⓢ Asita) 선인은 그 몸의 상을 보고 이번 생에 성불할 것임을 알았고,876) 산야珊若 바라문은 우유죽(乳糜)을 먹는 것을 보고 그가 오늘 성불할 것임을 알았다.877) 말후신末後身보살은 방편의 힘으로 악업의 과보를 받고 마魔의 괴롭힘 등이 있음을 나타낸다.≻878)
어떤 성스런 가르침에서는 천신을 ‘일생보처’라고 설하고 인신을 ‘최후유最後有(최후신)’라고 한다. 예를 들면 『유가사지론』 제46권과 『현양성교론』 제8권이니, 그 논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생소계란 이번 생에 곧바로 이어서 다음 생에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할 자이고, 최후유란 이번 생에 머물면서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자이다.≻879) 이는 대개 살바다의 학설과 동일하다.
그런데 천天 등을 ‘일생一生’이라고 한 것에 대해 예로부터 서로 전해 오길 본래 세 가지 해석이 있다. 한편에서는 천신天身을 일생이라 설하니, 사람의 생(人生)은 최후신에 속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인신人身을 일생이라 설하니, 사람의 생을 다시 받아야 비로소 성불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인신과 천신을 합해서 일생이라 하니, 예를 들어 일곱 생의 예류과 등을 설할 때 (천상과 인간의) 두 생을 합해서 일생이라 설하기 때문이다.880)

  천신을 일생이라 설한 것이라면, 이것은 『대지도론』의 학설과 어떻게 회통시켜 해석할 수 있겠는가? 『대지도론』 제38권에서는 ‘삼생 보살은 오직 도솔천에 난다’고 하였다.881)

001_0165_c_01L最後生菩薩住兜率陀自有聖敎
001_0165_c_02L說人身名爲一生如解節經等觀音
001_0165_c_03L文殊名一生補處自有聖敎唯說人
001_0165_c_04L名最後生如瑜伽四十八云最後
001_0165_c_05L生者諸菩薩於此生中能現等覺阿
001_0165_c_06L耨多羅三藐三菩提具說如彼自有
001_0165_c_07L聖敎唯說人身名爲一生及最後生
001_0165_c_08L如智度論第四十云一生補處者
001_0165_c_09L以相知如阿私陀仙人觀其身相
001_0165_c_10L今世成佛 [267] [268] 乳糜知今日成佛
001_0165_c_11L後身菩薩以方便力受惡業報
001_0165_c_12L有魔惱等自有聖敎說天名一生
001_0165_c_13L人名後有如瑜伽論第四十云 [269] 顯揚
001_0165_c_14L第八彼云一生所繫者此生無間
001_0165_c_15L當證無上正等菩提最後有者謂卽
001_0165_c_16L住此生能證無上正等菩提大同薩
001_0165_c_17L婆多然說天等名一生者古來相傳
001_0165_c_18L自有三釋一云卽說天身名爲一生
001_0165_c_19L人生卽是後身攝故一云說人身名
001_0165_c_20L爲一生更受人生方成佛故一云
001_0165_c_21L天合說名爲一生如說七生預流果
001_0165_c_22L合說二生爲一生故若說天
001_0165_c_23L身名一生者智度論說如何會釋
001_0165_c_24L智度論三十八云三生菩薩唯生兜

001_0166_a_01L
  실제로는 삼생이니, 인생과 천생과 최후생을 말한다. 그런데 천신을 삼생이라 설한 것은, 삼생 중의 한 생(천생)의 수를 일부러 삼생이라 설한 것이다. 인신은 이미 받았고, 최후신은 성불한 것이기 때문에, 인생과 최후생은 삼생이라 설하지 않은 것이다.

  자씨보살은 보처補處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나머지 보살들을 보처라고 부르겠는가?
  예를 들어 『대지도론』 제7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미륵보살을 제외하고 그 밖의 보살들은 비록 차방에서 부처님 자리(佛處)를 보좌해 주는(贊補) 것은 아니지만, 시방의 국토에서 모두 부처님 자리를 보좌해 주기 때문에 보처라고 부른다.≻882)

  자씨보살은 이치상으로는 여러 생을 거칠 텐데 어째서 천의 일생만 말하는가?
  실제로는 여러 생이지만 다 같은 천생이기 때문에 일생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대지도론』의 학설과 위배된다. 그 논의 제4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의 천은 수명이 짧으니, 부처님이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을 때 수명을 이미 마쳤기 때문이다. 상지의 천은 수명이 기니, 부처님이 멸도하신 후에야 목숨을 비로소 마치기 때문이다. 도솔천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니, 부처님이 세상에 나셨을 때 마침 서로 만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처보살은 항상 그 (도솔천) 안에서 태어난다.≻883) 『대비바사론』 제178권도 『대지도론』과 동일하다.생각해 보라.

  일생보처란 어떤 몸에 의거해서 설한 것인가? 실제로 현행한 몸(實行)에 의한 것인가, 변화로 지어낸 상(化相)에 의한 것인가?
  삼신 중에서 법신은 ‘보처’의 의미가 없으니, (법신에는) 최초와 최후의 뜻이 없기 때문이다. 수용신의 경우는 본래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자수용신은 비록 반열반처般涅槃處에 들어간다는 의미는 없지만, 최초의 성불을 도와준다는 의미는 있다. 따라서 『유가사지론』 제46권에서는 구경究竟보살은 본래 두 종류가 있다고 하였으니, 첫째는 일생소계이고 둘째는 최후신에 머무는 자다.884) 이에 준해 보면 실제로 현행한 몸이라 해도 이치상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에 근거해서 논하자면, 돈오頓悟보살은 제10지에서 변역생사變易生死를 하니,

001_0166_a_01L解云據實三生謂人生天生最
001_0166_a_02L後生而說天身名三生者三中一數
001_0166_a_03L故說三生人身已受故後身成佛故
001_0166_a_04L是故不說人生後生名三生也
001_0166_a_05L氏菩薩可言補處如何餘者稱補處
001_0166_a_06L如智度論第七釋云除彌勒
001_0166_a_07L餘菩薩衆雖非此方賛補佛處
001_0166_a_08L十方國皆補佛處故稱補處
001_0166_a_09L氏菩薩理應多生如何說言天一生
001_0166_a_10L據實多生同是天故名爲一
001_0166_a_11L若爾便違智度論說故第四
001_0166_a_12L下天壽短佛未出時命已終故
001_0166_a_13L上天壽長佛滅度後命始終故
001_0166_a_14L率天不長不短佛出世時正相會故
001_0166_a_15L補處菩薩常生其中大婆沙論百七
001_0166_a_16L亦同智論一生者依何身說
001_0166_a_17L爲約實行爲化相耶三身中法
001_0166_a_18L無有補處之義無初後故若受
001_0166_a_19L用身自有二種一自受用雖無入
001_0166_a_20L般涅槃處之義而有賛補初成佛義
001_0166_a_21L故瑜伽論四上六云究竟菩薩
001_0166_a_22L有二種一者一生所繫二者住最後
001_0166_a_23L准此實行於理無違所以者何
001_0166_a_24L據實爲論頓悟菩薩第十地中

001_0166_b_01L비록 분단신分段身이 전후로 이숙하면서 ‘어떤 것이 다하면 다른 것이 생기는(別盡別生)’ 일은 없지만, 두 가지 장애(번뇌장과 소지장)의 종자로 인해 변역신變易身의 전후로 이숙하면서 어떤 것이 다하면 다른 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로 인해 또한 이미 등각에 들어간 자와 아직 등각에 들어가지 못한 자의 차별적 의미가 있고, 따라서 두 종류로 구분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을 설하자면, 변역생사는 두 가지 장애의 종자의 힘으로 인해 자주 생하고 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유식론』에서는 “전의 이숙異熟이 이미 다하면 다시 그 밖의 이숙이 생겨난다.”885)고 하였다.886) 이는 이승二乘에서 ‘번뇌장이 없기 때문에 전의 이숙이 다하면 후의 이숙이 생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수명을 연장하여 변역생사를 받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구체적으로 설하면 그 논과 같다.
둘째, 타수용신과 변화신은 모두 일생보처의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치 아미타불에 대해 부모가 있는 자로서 열반에 든다는 의미가 있고,887) 이로 인해 관음이 부처님 자리를 보좌하는 것을 일컬어 일생보처보살이라 하는 것과 같다.888) 그런데 저 아미타불은 본래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지상보살을 위해 나타낸 것이니, 이는 타수용신이다.889) 둘째는 지전의 이생異生(범부)과 이승을 위해 나타낸 것이니, 이는 변화신에 속한다.890)

  그렇다면, 점오漸悟보살이 마땅히 오직 일생보처일 것이니, 어떤 것이 다하면 다른 것이 생겨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891)
  이는 마치 관세음보살을 일생보처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치상 위배되지 않으니, 최후신을 일생보처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001_0166_b_01L易生死雖無分別 [270] 前後異熟別盡別
001_0166_b_02L由二障種而有變易前後異熟別
001_0166_b_03L盡別生由斯亦有已入等覺未入等
001_0166_b_04L覺差別義故分爲二種此中意說
001_0166_b_05L易生死由二障種子力故數數生滅
001_0166_b_06L故成唯識云前異熟旣盡復生餘異
001_0166_b_07L不同二乘無煩惱障故不許前異
001_0166_b_08L熟盡1) [49] 異熟生但言延命令受變易
001_0166_b_09L具說如彼二他受用身及變化身
001_0166_b_10L有一生補處之義如彌陀佛說有父
001_0166_b_11L母入涅槃義由斯觀音賛補佛處
001_0166_b_12L爲一生補處菩薩然彼彌陀自有二
001_0166_b_13L一爲地上菩薩所現是他受用
001_0166_b_14L爲地前異生二乘變化身攝若爾
001_0166_b_15L漸悟應唯一生無別盡別生故解云
001_0166_b_16L如觀世音菩薩說爲一生於理無違
001_0166_b_17L卽最後身爲一生故

001_0166_b_18L
解深密經疏卷第一

001_0166_b_19L「復」疑「後」

001_0166_c_01L
  1. 1)말에 나아가면서도 말이 사라졌으며 : 이 문장에 해당하는 원문은 ‘卽言而言亡’인데, 이 다섯 글자는 아마도 연문衍文인 듯하다. 바로 앞에 나왔던 “이것이 바로 말에 나아가면서도 말이 사라짐이고(斯乃卽言而言亡)”라는 문구와 중복될 뿐만 아니라, 이것을 빼야 뒤에 나오는 “설한 것이 없기 때문에……, 말해질 수 있기 때문에……”라는 문장과 오히려 대구가 잘 이루어진다.
  2. 2)장실丈室 : 이는 사방이 한 장丈으로 된 방을 뜻하는데 방장方丈·방장실方丈室이라 한다. 여기서는 특히 『維摩經』이 설해진 장소를 가리킨다. 인도의 승방은 대개 사방을 한 장으로 만드는데, 유마維摩의 선실禪室도 이에 의거해서 만들어졌다. 유마는 이 장실에서 온갖 위의를 나타내었는데, 특히 ‘불이不二’의 법문은 말로 표현될 수 없기에 그것을 침묵으로 나타내 보였다.
  3. 3)정토의 궁전(淨宮) : 『解深密經』이 설해진 장소를 가리킨다. 이역본인 『解節經』에는 ‘왕사성’에서 설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경과 『深密解脫經』에서는 ‘정토의 대궁전’에서 설했다고 한다. 이 경에서 세존은 삼성三性과 삼무성三無性의 이치에 대해 마치 논서를 연상시킬 만큼 매우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4. 4)자씨보살慈氏菩薩(ⓢ Maitreya) : 여기서는 유식학의 시조이자 무착의 스승으로서 유식의 교리를 창시하여 무착에게 전수했다고 전해지는 미륵을 가리킨다. 『婆藪槃豆傳』에 의하면, 무착이 도솔천兜率天에 올라가 미륵에게 대승의 공관空觀에 대해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미륵을 무착의 스승이라 한다. 『瑜伽師地論』·『大乘莊嚴經論頌』 등의 저술이 있다.
  5. 5)용맹대사龍猛大士(ⓢ Nāgārjuna) : 인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를 창시한 용수龍樹를 말한다. 불멸후 6~7세기경 남인도 출신의 사람이다. 젊어서는 향락에 빠져 왕궁에 출입하며 궁녀들과 내통하다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나중에 대승에 귀의하여 깊은 뜻에 잘 통달하여 대승의 법문을 널리 선양하였다. 모든 대승불교가 그로부터 발흥했으므로 8종의 조사로도 불린다. 저서에는 『大智度論』, 『十住毘婆沙論』, 『中論』 등이 있다.
  6. 6)삼법륜三法輪 : 진제와 현장이 세운 교판敎判의 이름을 가리킨다. 여래의 삼시三時 설법을 전轉·조照·지持의 세 가지 법륜으로 구분한 것이다. 전법륜이란 세존께서 처음 녹야원에서 설한 소승의 사제의 교법이며 초전법륜이라고도 한다. 삼시교 중에서 유교有敎에 속한다. 조법륜은 대승을 위해 ‘제법개공’ 등을 설한 『般若經』의 교법이다. 공空으로써 유有를 조파照破했으므로 조법륜이라고 한다. 삼시교 중에서 공교空敎에 속한다. 지법륜은 두 번째 시時에서 집착되는 공을 깨트리고자 세존께서 다시 삼성三性 및 진여불공眞如不空 등의 오묘한 이치를 설한 것이다. 삼승의 사람들에게 모두 수지하도록 하였으므로 지법륜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삼시교 중에 중도교에 해당한다.
  7. 7)시록림施鹿林 : 녹야원鹿野苑(ⓢ Mṛgadāva)을 가리키며, 세존이 성도 후 처음으로 법륜을 굴린 장소다.
  8. 8)취봉산鷲峯山 : 영취산靈鷲山이라고도 하며,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여래가 『法華經』 등의 대승경전을 설하셨다고 한다.
  9. 9)유식학 경론에서 설한 유식의 경境(ⓢ viṣaya)과 행行(ⓢ pratipatti)과 과果(ⓢ phala)가 그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뛰어남을 가리켜서 경·행·과의 삼무등三無等이라고 한다.
  10. 10)『四分律』 권1(T22, 569c7) 참조.
  11. 11)무엇을 지시하거나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교설) 자체를 능전能詮이라 한다면, 그 언어에 의해 나타나는 의미(대상)나 이치 등을 소전所詮이라 한다. 본문에서 “해·경은 능전의 교”라고 한 것은, 경이란 교를 모아 놓은 것이고 그 교의 본질은 일차적으로 ‘언어’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 “심밀은 소전의 이치”라고 한 것은, 그 언교言敎에 의해 궁극적으로 언표된 의미는 깊고 비밀스런 유식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12. 12)범어문법에서 두 개 이상의 명사로 이루어진 합성어를 해석하는 여섯 가지 방법을 육합석六合釋이라 하는데, 이 중에 의주석依主釋이란 넓은 의미에서는 앞 단어에 의해 뒤 단어가 제한되는 관계에 있는 모든 복합어를 가리킨다. 특히 원측의 주석에서는 두 단어의 관계가 ‘A之B’의 관계로 분석되면 모두 의주석으로 간주하였고, 이와 비교해서 ‘A卽B’의 관계로 분석되면 지업석持業釋으로 간주하였다. 이처럼 ‘A之B’의 관계로 분석되는 복합어에서 앞의 수식어가 반드시 ‘-의’라는 소유격으로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해심밀경解深密經’의 범음 Saṃdhinirmocanasūtra를 의주석으로 간주하면, ‘심밀深密(ⓢ saṃdhi)의 해경解經(ⓢ nirmocanasūtra)’으로 분석되는데, 이 경우 ‘심밀’은 ‘깊고 비밀스런 것’을 뜻하고 ‘해경’이란 그 심밀을 해석해 주는 경이므로 ‘깊고 비밀스런 것을 해석해 준 경전’으로 번역된다. 또 산사山寺는 ‘산의 절(山之寺)’로 분석되는데, 이 경우 앞 단어는 처격으로서 ‘산에 있는 절’을 뜻한다.
  13. 13)‘이미 들었다(已聞)’ 등이란 경전의 서분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등의 육성취六成就의 문구로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이 육성취에 대해서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경문을 해석하면서 다시 자세히 언급된다.
  14. 14)능전能詮 : 유식학자들은 음성 언어에서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한다. 첫째는 특정한 음운적 패턴을 지닌 말 자체인데, 이를 능전能詮이라 한다. 둘째는 그러한 말소리에 의해 현현되는 의미나 이치인데, 이를 소전所詮이라 한다.
  15. 15)교체敎體 : 『解深密經疏』 서두의 종체에 관한 논의에서는 교체론敎體論이 주를 이룬다. 교체론에서는 성전聖典의 언어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룬다. 불교의 모든 경론들을 통칭해서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이라 할 때, 그것은 당시의 지방어(마가다어)로 설해졌으므로 무상無常한 ‘말(言)’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진리 그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따라서 교의 본질(敎體)은 ‘부처님의 입에서 발성된 음성(聲)·명名·구句·문文과 같은 언어’라고 보는 입장에서부터 ‘부처님이 깨달았던 궁극적 진리’라는 입장까지 매우 다양하다. 이런 이유에서 이하의 소승·대승의 교체론에서는 음성·명·구·문, 식識 또는 진여 등 다양한 교체가 등장한다.
  16. 16)소전所詮 : 위의 각주 14 참조.
  17. 17)『維摩詰所說經』 권1(T14, 542b12).
  18. 18)첫 번째 ‘섭망귀진문攝妄歸眞門’에 의하면, 부처님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음성·명·구·문으로 되어 있지만 그 언어도 궁극적으로는 진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교법의 본질은 진여라고 한다.
  19. 19)이하는 삼분설三分說에 의거해서 유식의 교체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삼분설’은 인도 유식학자 진나陳那의 학설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심·심소가 작용할 때마다 삼분, 즉 견분見分·상분相分·자증분自證分을 갖춘다. 이 삼분은 식전변에서 나타나는 식의 삼중 구조로서, 상분은 인식되는 대상이고 견분은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이며 자증분이란 그 이분의 근거가 되는 식 자체분自體分을 뜻한다.
  20. 20)『成唯識論』 권1(T31, 1a29). 이 문장은 호법護法과 안혜安慧의 학설을 서술한 것인데, 이는 모두 진나陳那의 삼분설三分說을 바탕으로 한다. 즉 식이 전변한다는 것은 식체가 마치 이분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이를 식의 삼분 구조로 나타내면, 자증분에 의거해 견분·상분이 나타나는 것이다. 규기, 『成唯識論述記』(T43, 127ab) 참조.
  21. 21)식소변識所變 : 뒤의 능변식能變識의 대칭어로서, 그 능변식에 의해 전변되어 현현된 표상들을 ‘식소변’이라 하였다.
  22. 22)능변식能變識 : 앞의 식소변識所變의 대칭어로서, 이 세계의 모든 법들이 식의 표상이라면 그 표상을 전변해 내는 식을 ‘능변식’이라 하였다.
  23. 23)『成唯識論』 권2(T31, 7b26). ‘능변식의 종류를 나누면 오직 세 가지뿐이다’라고 했는데, 그 세 가지 식은 이숙식異熟識(제8아뢰야식), 사량식思量識(제7말나식), 요별경식了別境識(제6의식과 전前오식)을 말한다.
  24. 24)이하는 난타難陀 등의 이분설二分說을 서술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상분은 견분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유식唯識’이라 한다. 이 상분의 체는 식 안에 있고 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난타 등은 이와 같은 이분만을 인정하고 그 외에 제3분이나 제4분 등을 말하지 않는다. 규기, 『成唯識論述記』(T43, 128ab) 참조.
  25. 25)『成唯識論』 권1(T31, 1b2).
  26. 26)두 번째 ‘섭상귀식문攝相歸識門’은 유식종의 입장을 설한 것이다. ‘유식唯識’의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의 교법은 일차적으로는 음성·명·구·문을 말하고, 이것들은 결국 식의 전변 상에 나타난 차별적 상들이므로 교법의 본질은 식이다.
  27. 27)세 번째 ‘이가종실문以假從實門’에서는 교의 본질을 언어 자체로 보는데, 언어는 음성과 그에 덧붙은 특정한 음운굴곡에 의거해 가립된 이름(名)·문장(句)·음소(文)로 구분된다. 유식종에서 음성 자체는 실법實法이지만 명·구·문은 가법假法이라 보기 때문에, 실재의 말(음성)이 교체라고 보는 것이다.
  28. 28)평가정의評家正義 : 비바사 4대 논사를 가리킨다. 가습미라국 가니색가迦膩色迦왕 통치 시절에 오백아라한이 결집하여 『發智論』을 평석하여 『大毘婆沙論』을 편찬하였는데, 그들 중에 법구法救(ⓢ Dharmatrāta)·묘음妙音(ⓢ Ghoṣa)·세우世友(ⓢ Vasumitra)·각천覺天(ⓢ Buddhadeva) 등 4대 논사를 예로부터 사평가 또는 평가정의라고 한다.
  29. 29)‘실재의 음성’이란 입에서 발성된 말소리(聲)이고, ‘가립된 음성’이란 그 말소리의 특정한 음운굴곡에 의거해서 가립한 명名·구句·문文을 말한다. 교敎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부처님의 ‘음성’, 즉 ‘말소리’이고, 그 말소리가 의미 있는 말로 이해되는 것은 그 소리에 덧붙은 특정한 음운굴곡 때문이다. 따라서 ‘말소리(實)와 명·구·문(假)’을 모두 교체로 간주하는데, 말소리는 물리적 소리이므로 색온·성처·성계에 속하고, 명·구·문은 가립법이므로 법처·법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30. 30)이것은 교체가 행온·법처·법계에 포함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말에서, ‘아’라는 소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의 다양한 음색과 톤 그리고 장단의 차이에 따라 다르지만 의식에서는 그것을 모두 ‘아’라고 알아듣는다. 이 음성적 패턴에 의거해 명·구·문을 가립하는데, 최소의 음운 단위인 음소가 문文이고, 그 음소가 모여 하나의 단어(名)를 이루며, 둘 이상의 단어가 모여 구절(句)을 이룬다. 이러한 명·구·문은 의식에 의해 파악되는 대상이므로 삼과 중에서는 행온·법처·법계에 속한다.
  31. 31)성제聲諦 : 수론數論(ⓢ Sāṃkhya)의 이십오제二十五諦 중에 오유五唯(聲, 觸, 色, 味, 香), 즉 다섯 가지 물리적 경계 중의 하나인 성聲을 가리킨다. 이 학파에 의하면, 물질을 관조하는 순수 정신인 뿌루샤(ⓢ puruṣa)와 근본 물질인 쁘라끄리띠(ⓢ prakṛti), 그리고 이 쁘라끄리띠가 뿌루샤의 관조를 받아 전변이 시작되어 23제가 생겨난다. 즉 쁘라끄리띠→붓디(ⓢ buddhi : 覺)→아함까라(ⓢ ahamkara : 我執)→11개의 감각 기관과 오유五唯와 오대五大 등이 발생한다.
  32. 32)성덕聲德 : 승론勝論(ⓢ Vaiśeṣika)에서 말하는 스물네 가지 속성(德) 중 하나인 성聲을 가리킨다. 이 학파는 세계를 다음과 같은 육구의六句義로 설명한다. 실체(實), 속성(德), 운동(業), 보편(同), 특수(異), 내속(和合)이 그것이다. 여기에 무無(ⓢ abhāva)를 추가해서 7구의라고도 한다. 이 중에서 속성은 색色, 향香, 미味, 촉觸, 수數, 양量, 별체別體, 합合, 이離, 피체彼體, 차체此體, 각覺, 낙樂, 고苦, 욕欲, 진瞋, 근용勤勇, 중체重體, 액체液體, 윤潤, 행行, 법法, 비법非法, 성聲 등의 스물네 가지로 구분된다.
  33. 33)순세외도順世外道(ⓢ Lokāyata)는 지地·수水·화火·풍風의 사대 원소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몸과 감각 기관과 감각의 대상들은 이 네 요소의 상이한 결합에 의한 것으로 본다. 이 학파에 의하면, ‘교’는 말이고 이 말소리는 결국 지·수·화·풍의 사대 원소로 이루어졌으므로 ‘교체는 사대다’라고 주장한다.
  34. 34)여기서 성聲이란 ‘말’, 즉 언어를 가리킨다. 성론聲論이란 이 우주에 영원한 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외도들로서, 특히 베다의 언어를 숭배하는 정통 바라문 문법학자들을 가리킨다.
  35. 35)바라문 전통에서는 『베다』의 ‘말’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므로 본래부터 영원불변한 것이고, 모든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적 기능을 하며, 절대로 거짓일 수 없는 진리의 척도로 간주된다.
  36. 36)음성은 어업語業과 관련되므로 선·불선의 범주에 해당하지만, 물리적 음성의 특정한 음운적 패턴에 의거해 시설된 명·구·문은 심도 색도 아닌 불상응법이고 선도 불선도 아닌 무기다. 그런데 여래의 설법을 ‘말하는 행위’로 간주하면, 그 말은 무루의 선에 해당한다. 따라서 교의 본질(敎體)도 ‘선’과 연관되는 음성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말이다.
  37. 37)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 : 열반에 이르기 위해 닦는 일곱 가지 수행법을 말한다. 즉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분七覺分, 팔정도八正道 등이다.
  38. 38)『雜阿毘曇心論』 권10(T28, 957b22).
  39. 39)『雜阿毘曇心論』 권10(T28, 957b24) 참조.
  40. 40)불교 언어관에서는, ‘말’은 청각적 소리(聲)와 거기에 덧붙은 특정한 음운적 패턴에 의거해 가립된 언어인 명名·구句·문文으로 구분된다. 무릇 말이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가 우리 의식에서 하나의 이름으로 인식되고 동시에 어떤 관념이 떠오를 때, 그 소리는 ‘의미 있는 말’로 인식된다. 그런 의미를 현현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 명·구·문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은 제법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데 있다. 따라서 명·구·문이 교의 본질이라 주장한다.
  41. 41)십이부경十二部經 :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경문의 성질과 형식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으로, 계경契經, 중송重誦, 수기受記, 불송게不誦偈, 자설自說, 연기緣起, 비유譬喩, 본사本事, 본생本生, 방광方廣, 미증유未曾有, 논의論議 등이 있다. 십이부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제3장 각주 3(p.144) 참조.
  42. 42)『發智論』 권12(T26, 981b6) 참조.
  43. 43)명·구·문에서 말을 이루는 최소의 음운적 단위는 음소(文)이지만 음소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나타내지 못한다. 의미 있는 말의 기본 단위는 이름, 즉 단어이다. 이 이름을 쪼개면 음소가 되고 조합하면 문구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름이 문구와 음소를 포함한다고 한 것이다.
  44. 44)『順正理論』 권3(T29, 346c13).
  45. 45)설법을 듣는 중생의 마음에서 기쁨과 감동을 일으키는 데는 설법자의 음성의 영향력이 크다. 이런 정감적인 차원에서는 음성의 역할이 뛰어나므로 음성을 교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언어적 기호와 그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 명·구·문이 제법의 의미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 전달 차원에서는 명·구·문을 교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46. 46)『順正理論』 권3(T29, 346c17).
  47. 47)『大毘婆沙論』은 『發智論』을 해석한 책인데, 여기서 ‘그 뒤에 설해진 것(次後所說)’이란 『大毘婆沙論』의 이 문장 다음에 곧이어 나오는 『發智論』의 본문을 가리킨다.
  48. 48)이것은 『發智論』에 나오는 하나의 견해로서, 불교라는 것은 결국 단어나 문구들이 의미 있는 방식으로 차례로 나열되고 조합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49. 49)전전인展轉因 : A가 B를 초래하고 다시 B가 C를 초래하는 경우에서처럼 연속적 인과관계에서 앞의 것이 뒤의 것에 대해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50. 50)이상의 문답은 모두 『大毘婆沙論』 권126(T27, 659a23) 이하에서 인용된 것이다.
  51. 51)중현衆賢(ⓢ Saṃghabhadra) : 북인도 가습미라국 사람으로 살바다종의 논사이다. 살바다부에서 『大毘婆沙論』을 배웠는데, 세친 보살이 『俱舍論』을 짓자 이것을 12년간 연구한 뒤에 『順正理論』을 지어 반박하였다.
  52. 52)본문의 ‘이장위승理長爲勝’이란 종파에 상관없이 도리가 수승한 것을 취하여 논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세친이 『大毘婆沙論』에 의거해서 『俱舍論』을 지을 때 유부종의 학설에만 의지하지 않고 이치가 옳은 것은 경부의 학설이라도 취하여 쓴 것과 같은 경우이다.
  53. 53)설일체유부는 실재의 음성뿐만 아니라 그와 별도로 명·구·문이 실재한다고 주장했다. 위의 인용문은 유부의 입장에서 음성·명·구·문이 독립적 실재임을 논하면서 경부의 주장을 반박한 것인데, 이 문장을 통해서 역으로 경부의 입장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경부종에서는 ‘명·구·문의 체가 바로 음성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경부종에서는 음성이 실재이고 명·구·문은 그 위에 가립된 것일 뿐 별도의 실재성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
  54. 54)『順正理論』 권14(T29, 414c28).
  55. 55)무성無性(ⓢ Asvabhāva) : 인도 유식 논사이다. 『攝大乘論釋』 10권을 지었는데, 인도의 대승의 모든 논석論釋들을 총괄해서 쓴 책이다.
  56. 56)원측에 의하면, 이 인용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경부종이므로, 이에 의거해서 역으로 경부종의 입장을 추측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경부종에서는 교체는 ‘말(語)’, 즉 음성적 언어라고 보았다. 『攝大乘論釋』 권1(T31, 380b13) 참조.
  57. 57)경부의 교체론도 음성과 명·구·문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말씀은 물리적 소리에 대한 청각적 식별만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고, 의식의 차원에서 그 소리 상의 음운굴곡인 명·구·문이 인식될 때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경부도 음성뿐만 아니라 명·구·문도 모두 교체와 연관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들은 말소리는 성처聲處 소속의 실유의 다르마지만 명·구·문은 법처法處 소속의 가립물로 간주했기 때문에, 이 교체를 실유하는 성처 또는 법처 중에 어디에 소속시키는가에서 견해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58. 58)‘법처에 속하면서 상속하는 가짜 소리’란 ‘명·구·문’을 가리킨다.
  59. 59)무작無作 : 무표색無表色을 말한다. 몸짓·말과 같은 표업을 일으킨 다음에 그 업의 과보를 받을 만한 원인을 동시에 훈발하는데, 이것은 다른 이에게 표시할 수 없는 비감각적 색이다.
  60. 60)이 세 가지를 삼무위三無爲라고 하며,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무위법을 가리킨다. 허공은 전혀 질애가 없는 빈 공간을 가리킨다. 택멸擇滅은 열반의 다른 이름으로서, 지혜의 간택의 힘, 즉 정확한 판단력으로 멸제滅諦인 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또 제법이 미래로부터 현재로 진행할 때 ‘생연生緣’이 결여됨으로써 장차 영원히 미래의 상태에 머물면서 절대로 생겨나지 않는 것을 불생법이라 하는데, 이것은 간택의 힘이 아니라 연緣의 결여로 인해 나타난 것이므로 ‘비택멸非擇滅’이라 한다.
  61. 61)원문은 ‘用名爲體’라고 되어 있는데, 전후 문맥상 ‘名’을 ‘聲’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앞에서 언급했듯 용맹종에서는 음성을 교체로 간주하며, 이 인용문은 그런 주장의 근거로 제시된 것이다. 따라서 ‘이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음성을 교체로 삼는다’라는 결론이 나와야 한다.
  62. 62)『維摩詰所說經』 권1(T14, 538a2).
  63. 63)『無量義經』 권1(T9, 386c6).
  64. 64)『大界經』이 어떤 경인지 현재 확인할 수 없다.
  65. 65)『解深密經』 권5(T16, 708c12). 계경契經(ⓢ sūtrānta-piṭaka)은 부처님의 교설들을 모아 놓은 경이고, 조복調伏(ⓢ vinaya-piṭaka)은 부처님이 제정한 교단의 생활 규칙에 관련된 규율들을 모아 놓은 율장律藏이며, 본모本母(ⓢ mātṛkā)는 부처님이 스스로 법상을 문답·결택한 것과 제자나 여러 보살들이 경전의 뜻을 해석하여 변론해 놓은 것을 모아 놓은 논장論藏을 말한다.
  66. 66)『深密解脫經』(T16, 685b9)과 『相續解脫經』(T16, 718b21) 참조.
  67. 67)성량聲量 : 성교량聖敎量 혹은 성언량聖言量의 다른 말이다. 성인의 교설은 진실하고 오류가 없음을 깊이 믿고서, 이것을 논의의 진위 판단의 척도(量)로 삼는다.
  68. 68)『仁王經』 권1(T8, 826a24)에는 “대왕이여, 이 경전의 명名·미味·구句는 백불·천불·백천만의 부처님이 설해 주시는 명·미·구입니다.”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명미구’는 ‘명구문’의 구역으로, ‘미味’와 ‘문文’은 모두 음소를 가리킨다.
  69. 69)『解深密經』 권4(T16, 704b24).
  70. 70)이 인용문은 「지바라밀다품」에서 보살의 십지十地 중 제9지에 존재하는 두 가지 어리석음과 추중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원측에 의하면, ‘한량없는 설법과 한량없는 법구 문자들’이라는 표현에서 ‘설법’은 소전의 의미에 해당하고 ‘법구 문자’는 능전의 교법에 해당한다. 부처님 말씀의 본질은 주로 능전의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것이고, 『解深密經』은 그 능전을 ‘법구 문자’로 보았으므로 ‘명·구·문’을 교체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71. 71)원측은 앞의 『解深密經』의 인용문을 사무애변四無礙辯에 배당시켜 해석하였는데, 사무애변은 다음과 같다. ① 법무애法無礙는 온갖 교법에 통달한 것이다. ② 의무애義無礙는 온갖 교법의 요의要義를 아는 것이다. ③ 사무애辭無礙는 여러 가지 각종 지방의 방언들을 잘 알아 통달하는 것이다. ④ 변설무애辨說無礙는 온갖 교법을 알아 중생의 근기마다 듣기 좋아하는 것을 자재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72. 72)명·구·문은 음성에 덧붙은 음운적 차별에 의거해서 가립된 법이다. 이것은 실재의 음성을 떠나서 별도의 실체성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음성과 동일한 것도 아니다. 음성이 청각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면, 명·구·문은 의식에 의해 파악된다. 특히 명·구·문은 그 말의 의미를 현현시키는 언어적 기능을 한다. 만약 음성과 명·구·문이 동일한 것이라면, 명·구·문으로 이루어진 교법을 잘 이해하는 것(법무애)과 각 지역의 각종 언어들을 잘 알아듣는 것(사무애)은 서로 구분되지 않을 것이다. 『成唯識論』 권2(T31, 6b) 참조.
  73. 73)『仁王經』 권4(T8, 829b9)에는 “法輪者。 法本如。 重誦如。 受記如。 不誦偈如。 無問而自說如。 戒經如。 譬喻如。 法界如。 本事如。 方廣如。 未曾有如。 論議如。 是名味句音聲果文字記句一切如。 若取文字者。 不行空也。”라는 문구가 나온다.
  74. 74)『維摩詰所說經』 「菩薩行品」 참조.
  75. 75)『十地經論』 권1(T26, 129a20).
  76. 76)지금까지 교체는 주로 능전의 차원에서 다루어졌지만, 이 경우는 의미를 전달하는 능전의 언어(文)와 그에 의해 드러나는 소전의 의미(義)를 합해서 ‘문의’를 교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모든 말소리가 단순한 청각적 소리가 아니라 하나의 ‘말’로서 이해되는 것은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적 기호 자체와 의미의 결합 관계에 의거해 모든 언어적 소통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의 본질도 그러한 문과 의의 결합이라고 간주한다.
  77. 77)『瑜伽師地論』 권81(T30, 750a1) 참조.
  78. 78)무엇이 가립(假)이고 실재(實)인가 하는 차원에서 부처님의 언어를 분석하면, 실재의 말소리(音聲)와 가립의 명名·구句·문文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실재의 다르마를 강조하는 경우 말소리(음성)가 교체라고 주장할 수 있다.
  79. 79)붓다의 언어를 체體·용用의 관점에서 볼 때는 물리적인 말소리 자체와 거기에 덧붙어 있는 소리의 음운굴곡의 특수한 작용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의사소통이 본질적으로 서로 말의 ‘의미’를 주고받는 것이라고 할 때, 말소리 차원에서는 어떤 의미가 파악된다기보다는 명·구·문을 의식적으로 파악하는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드러나므로 후자를 교체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80. 80)『成唯識論』 권2(T31, 6b5)에서는 “명名은 자성自性을 드러내고 구句는 차별差別을 드러낸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이것은 파랗다’라는 단순한 지각 판단에서, ‘이것’은 아직 분별이 가해지기 이전의 그 법 자체(自性)를 가리키고, ‘파랗다’는 ‘이것’을 한정함으로써 다른 것과 차별시키는(差別)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자성과 차별은 결국 음소(文)·이름(名)·구절(句), 즉 능전의 언어에 의해 드러나기 때문에 “능전의 제법은 자성과 차별의 의지처”라고 한 것이다.
  81. 81)어떤 말소리에 특정한 음성학적 유형(명·구·문)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말’로 이해되지 않고, 또한 명·구·문도 반드시 실사實事인 말소리(음성)에 의지하고 있다. 이처럼 소리와 명·구·문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강조하면 음성·명·구·문을 모두 교체로 볼 수도 있다.
  82. 82)앞의 세 가지 교체론은 능전의 언어(文)인 음성·명·구·문에 국한된 논의라면, 이것은 능전의 언어와 소전의 의미(義)의 관계에서 그 둘을 모두 교체로 보는 견해다. 말하자면 모든 언어가 언어로 간주되는 것은 언제나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이기 때문이므로 문과 의를 합해서 교체로 보는 것이다.
  83. 83)이전의 교체론에서는 음성과 명·구·문 중에 어느 것이 교의 본질인가 하는 문제가 핵심이었다. 그런데 이하부터는 ‘불교佛敎’라는 것이 설법자가 직접 설한 음성(본질)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청자의 식識에 나타난 언어적 표상(영상)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의 핵심을 이룬다. 심과 심소가 대상을 인식할 때 그 대상을 마음속에 현현시켜 이것을 직접적 인식 대상으로 삼아 인식하게 되는데, 이 직접적 인식 대상을 친소연親所緣 혹은 ‘영상影像’이라 한다. 이에 대해 이 영상의 실질적 근거가 되는 사事 자체를 ‘본질本質’이라고 한다. 이 본질은 영상의 체가 되어 주지만 우리의 식에 직접 파악되지 않는 간접적 인식 대상이므로 소소연疎所緣이라 한다.
  84. 84)여기서 원측이 말하는 본질의 설법이란 듣는 자의 식에 어떤 언어적 심상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여래가 ‘직접 설한 말’을 뜻하며, 구체적으로는 ‘여래의 음성’을 가리킨다. 반면에 영상이란 청자에게 들려진 것, 다시 말하면 듣는 자의 식에 의해 나타난 언어적 표상을 가리킨다.
  85. 85)이상의 내용은 『異部宗輪論』 권1(T49, 15b25) 참조.
  86. 86)『異部宗輪論』 권1(T49, 16a12) 참조.
  87. 87)유식학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실재의 소리(본질)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식에 의해 어느 정도 변형되어 나타난 언어적 표상(영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상의 문제는 초기 불교에서는 아직 다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체도 오직 본질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88. 88)용군龍軍이라는 이름을 지닌 승려는 두 명 있다. 그 중 한 명이 여기서 말하는 삼신론주三身論主이고 대승의 논사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다른 한 명은 나선那先(ⓢ Nāgasena) 비구로서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인도 승려이다. 그와 희랍의 미란다彌蘭陀(ⓟ Milinda)왕과의 대화를 담은 『那先比丘經』이 유명하다.
  89. 89)견혜堅慧(ⓢ Sthiramati) : 서력 4~5세기경 중인도 나란타사의 학승으로서 덕혜德慧와 더불어 유명하다. 저서로 『大乘法界無差別論』 1권, 『究竟一乘寶性論』 5권(T31)이 있다.
  90. 90)금강군金剛軍 : 인도 사람으로 사적이 분명치 않다. 『華嚴經傳記』 권1에 의거하면, 이 사람은 일찍이 세친이 지은 『十地經論』을 주석하였다고 한다.
  91. 91)오인도五印度 : 고대에 인도의 전역을 동·서·남·북·중의 다섯 구역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92. 92)월장月藏(ⓢ Candra-gupta) : 호월護月이라고도 한다. 중인도 나란타사의 사문으로 호법 논사와 동시대 사람이다.
  93. 93)친광親光(ⓢ Bandhu-prabha) : 중인도 마갈타국 나란타사의 학자로 대승불교 유가행파의 논사다. 대략 6세기 중엽에 생존하였고, 호법의 문인으로 전해진다. 저술에 『佛地經論』이 있다.
  94. 94)전轉·조照·지持의 삼법륜에 대해서는 제1장 각주 6(p.61) 참조.
  95. 95)『合部金光明經』 권2(T16, 368b10).
  96. 96)청변淸辨(ⓢ Bhāvaviveka) : 6세기경 남인도 스님이다. 호법 보살이 마갈타국에서 아뢰야 연기론을 주창한 데 대항하여, 용수와 제바가 주장하던 일체개공의 학설을 선양하는 데 힘쓴 사람이다. 저서로는 『大乘掌珍論』 2권, 『般若燈論』 15권이 있다.
  97. 97)호법護法(ⓢ Dharmapāla) : 유식의 10대 논사 중의 한 명으로 6세기경 사람이다. 저술에 『大乘廣百論釋論』, 『成唯識寶生論』, 『觀所緣論釋』 등이 있다.
  98. 98)부처님이 실제로 정식으로 설하신 교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본질로서의 부처님 음성만이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교체다. 그러나 교라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모든 언어적 표상들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그 영상은 결국 본질의 힘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므로 영상의 교체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99. 99)이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의 본질(體)’에 대해 논해 왔는데, 이하의 문답들을 통해서 특히 여러 불교 경론에서 나오는 ‘불설佛說’ 혹은 ‘불설不說’이라는 모순된 진술과 관련해서 어떤 의미에서 ‘부처님은 설하시고, 설하지 않는가’에 대해 철학적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부처님은 설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100. 100)이것은 ‘부처님은 설하신다(佛說)’고 하는 호법종의 첫 번째 종지에 대한 반문인데, 이에 대해 답하면서 ‘부처님은 설하지 않았다(不說)’고 한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원측은 이를 통해 상반된 두 종지를 회통시키려 한다.
  101. 101)4권 『楞伽經』 권3(T16, 498c17).
  102. 102)『大般若經』 권567(T5, 928a30).
  103. 103)『大般若經』 권571(T5, 948a8).
  104. 104)이 경에는 이 인용문에 바로 이어서 자득법自得法과 본주법本住法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저 여래가 증득한 것을 내가 증득해도 진리의 세계에서는 전혀 늘거나 줄어듦이 없으니, 자득법의 경계는 궁극적으로 언설과 망상을 떠난 것이기 때문이다. 또 진리의 세계(法界)는 여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간에 이 세계에 본래 머무는 것(本住法)이다. 이런 이유에서 부처님의 언설을 통해 진리의 세계에 특별히 만들어진 것도 추가된 것도 없다. 따라서 아무것도 ‘설하지 않았다’고 한다. 『楞伽經』 권3(T16, 498c24) 참조
  105. 105)4권 『楞伽經』 권3(T16, 498c20).
  106. 106)10권 『楞伽經』 권5(T16, 541c5).
  107. 107)4권 『楞伽經』 권3(T16, 499a6).
  108. 108)10권 『楞伽經』 권5(T16, 541c25)에는 다섯 번째 구가 ‘內身證法性’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내신증’은 자득법을 뜻하고, ‘법성’은 본주법을 뜻한다.
  109. 109)『仁王經』 권1(T8, 826b13).
  110. 110)이것은 경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내가 설한 것’이란 부처님 자신이 설한 것을 가리킨다.
  111. 111)『金剛般若波羅蜜經論』 권3(T25, 793a25).
  112. 112)『金剛般若波羅密經論』 권3(T25, 793b3) 참조.
  113. 113)『金剛般若波羅密經論』 권2(T25, 787a12).
  114. 114)4권 『楞伽經』 권4(T16, 506c2).
  115. 115)4권 『楞伽經』 권4(T16, 506c7).
  116. 116)10권 『楞伽經』 권6(T16, 551b16) 참조.
  117. 117)『維摩詰所說經』 권상 「弟子品」(T14, 540a18).
  118. 118)이하의 문답은 ‘부처님이 설하신다’고 할 때, 설함과 들음의 본질에 대해 유식학적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119. 119)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대당 현장 법사와 호법종에서 수용한 두 가지 해석 가운데 두 번째 것에 대한 반문이다. 그 종에서는 부처님이 실제로 정식으로 설한 정교正敎의 차원에서는 본질의 음성만이 교체이지만, 정교를 겸해서 다 말하는 경우에는 교체는 본질과 영상에 모두 통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본질이든 영상이든 모두 여래의 말의 힘(如來說力)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견해가 다음의 무성의 주장과 어긋난다는 것인데, 그 주장에 의하면, 교체란 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영상을 가리킨다.
  120. 120)이것은 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T31, 380b8)에 나오는 “聞者識上直非直說。 聚集顯現。 以爲體性。”이라는 문구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이 문구가 ‘영상의 교체’를 인정한 대표적 견해이므로 이것을 호법종의 두 번째 견해와 회통시키기 위해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는 많은 철학적 쟁점들이 내포되었기 때문에 다음의 ‘⑶ 음성이 취집·현현하기 위해 거치는 마음의 차별’(p.109)에서 다시 자세하게 다룬다.
  121. 121)무성無性의 『攝大乘論釋』 권1(T31, 381c21) 참조.
  122. 122)영략호현影略互顯이란 간략하게 설명하는 방법을 말한다. 서로 관계되는 두 가지 사실에서 각각 한 측면씩 말로 표현하고 다른 한 측면은 생략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미루어 알게 하는 설명법이다. 예를 들면 자부慈父·비모悲母라고 하는 경우, 아버지에게 비悲가 없다거나 어머니에게 자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각각 하나씩을 들고 하나를 생략하여 전자에서 생략된 것을 후자에서 거론하는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123. 123)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음성·명·구·문(영상의 교)이 있고 그 영상의 근거가 되는 여래의 음성(본질의 교)이 있듯이, 보는 자의 식에 나타난 색깔·모양(영상의 몸)이 있고 그 영상의 근거가 되는 여래의 몸(본질의 몸)이 있다는 말이다.
  124. 124)이 부분은 『成唯識論』의 다음과 같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무루식에서 변현된 것들은 능변식과 동일하게 다 같이 선이고 무루이다.……유루식에서 변현된 것들은 능변식과 동일하게 모두 유루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전히 유루의 인연(종자)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고, 또 이것은 고제·집제에 속하지 멸제·도제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선(·악·무기의) 식의 상분은 반드시 (견분과) 모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마치 허공 등을 인식하는 마음은 삼성에 통하지만 허공 자체는 무기인 것처럼〕 삼성의 인연이 뒤섞여서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無漏識上所變現者。 同能變識俱善無漏。 純善無漏因緣所生……有漏識上所變現者。 同能變識。 皆是有漏。 純從有漏因緣所生。 是苦集攝。 非滅道故。 善等識相。 不必皆同。 三性因緣雜引生故。)” 『成唯識論』 권10(T31, 58c28) 참조.
  125. 125)번뇌 있는(有漏) 마음에 현현된 ‘정교正敎에 대한 언어적 표상’이 그 마음과 마찬가지로 유루라고 한다면, 마찬가지 논리로 ‘사교邪敎’의 경우도 성자의 번뇌 없는(無漏) 마음에 현현된다면 그것을 무루라고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126. 126)지금까지 본질과 영상의 문제를 통해, 이른바 ‘불교佛敎’란 부처님이 실제로 설한 음성(본질)이지만, 또한 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영상이기도 하다는 것에 대해 논했다. 원측은 이를 근거로 해서 다시 부처님 몸과 음성의 불가사의한 능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설법 방식에 대해 논하는데, 이 논의는 여래의 신비한 일음一音으로 종결된다.
  127. 127)오분법신五分法身(ⓢ asamasama-pañca-skandha) : 대승·소승의 무학위無學位의 성자, 즉 부처님과 아라한에게 갖추어진 5종의 공덕을 말한다. 계신戒身·정신定身·혜신慧身·해탈신解脫身·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을 말한다. 앞의 3공덕은 무학의 몸에는 계·정·혜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또 해탈신이란 이승인二乘人이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자재한 몸을 가리키는데, 이에 유위해탈과 무위해탈의 2종이 있다. 해탈지견신이란 부처님이 스스로 일체번뇌에서 벗어난 자유자재한 몸인 줄을 아는 것이다.
  128. 128)수용신受用身 : 삼신三身의 하나로서, 이것은 다시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뉜다. 자수용신이란 다른 보살이 보고 들을 수 없는 불신으로서 자신이 얻은 법락法樂을 홀로 자기만이 즐기는 몸이다. 타수용신이란 십지의 초지 이상의 보살이 볼 수 있고 자기가 받는 법락을 다른 보살에게도 주는 불신이다. 이를 법신·보신·응신에 배당시키면 자수용신은 보신이고 타수용신은 응신이며, 혹은 두 수용신을 모두 보신이라고 하는 등 여러 학설이 있다.
  129. 129)『入楞伽經』 권2(T16, 525b29).
  130. 130)이상의 두 설에 관한 내용은 『佛地經論』 권1(T26, 292c4) 참조.
  131. 131)『佛地經論』 권1(T26, 293a3).
  132. 132)이것은 첫 번째 언어로 설법하는 경우에 해당하고, 이하의 아홉 가지는 언어로 설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133. 133)『入楞伽經』 권4(T16, 534b19) 참조.
  134. 134)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수호八十隨好는 불보살의 몸에 구족되어 있는 수승한 용모·형상을 뜻한다. 그 중에서 그 특징이 현저해서 알아보기 쉬운 것을 삼십이상이라 하고, 미세하고 은밀해서 알아보기 어려운 것은 팔십수호라고 하며, 이 둘을 합해서 상호相好라고 한다. 이 상호를 갖춘 이가 세속에 있으면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님이 된다고 한다.
  135. 135)이상은 『維摩詰所說經』 권3(T14, 553c16) 이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36. 136)‘가. 삼신에 의거한 설명’에서 『佛地經論』의 세 가지 설에 대한 해석(p.104) 참조.
  137. 137)‘가. 삼신에 의거한 설명’에서 대승의 세 번째 견해(p.103) 참조.
  138. 138)‘나. 불토에 의거한 설명’에서 『楞伽經』의 10종 설법(p.105) 참조.
  139. 139)‘나. 불토에 의거한 설명’에서 『維摩經』 내용(p.107) 참조.
  140. 140)이 문장은 무성無性 논사가 『攝大乘論』을 해석하면서 본문 서두에 나오는 ‘阿毘達磨大乘經’이라는 문구에서 마지막의 ‘經’ 자를 풀이한 것이다. ‘경’이란 ‘붓다의 말’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무성은 이러한 ‘경’의 본질은 바로 ‘듣는 자의 식에 언어적 심상들이 모여 하나의 의미 있는 말로 현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이 무성의 『攝大乘論釋』의 문구는 원측圓測이나 규기窺基와 같은 중국 법상학자들이 유식의 교체론을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된다.
  141. 141)무성無性의 『攝大乘論釋』 권1(T31, 380b8).
  142. 142)팔전성八轉聲 : 범어에서 단어의 여덟 가지 격변화를 가리킨다. 이것을 ‘사람’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체격體格은 주격으로 ‘사람은’이고, ② 업격業格은 목적격으로서 ‘사람을’이며, ③ 구격具格은 ‘사람에 의해’이고, ④ 위격爲格은 ‘사람을 위해’이며, ⑤ 종격從格은 ‘사람으로부터’이고, ⑥ 속격屬格은 ‘사람의’이며, ⑦ 어격於格은 ‘사람에 대해’이고, ⑧ 호격呼格은 ‘사람이여’이다.
  143. 143)‘係補盧沙’는 뿌루샤의 제8호격으로 여겨진다. 제8격은 醯補盧沙 또는 稧補盧沙로도 표기된다. 범어 puruṣa의 제8호격은 puruṣa인데 係나 醯라는 접두어가 붙은 것은 호격 앞에 붙이는 특수 감탄사 ‘오!(ⓢ he)’ 때문이다. 참고로 규기의 『成唯識論掌中樞要』 권상(T43, 613c29)에 나온 뿌루샤의 8격변화는 다음과 같다. “一補盧沙(夾夫體)。 二補盧衫。 三補盧崽拏。 四補盧沙耶。 五補盧沙。 六補盧殺婆。 七補盧鎩。 第八迦呼聲云。 醯補盧沙。
  144. 144)성명론聲明論(ⓢ śabda-vidyā) : 인도의 다섯 가지 학문(五明) 중의 하나다. 문자와 음운, 어법에 관한 학문이다. 성명은 ‘언어(śabda)’에 관해 연구하는 일종의 문법학 또는 언어철학을 가리킨다.
  145. 145)‘자성自性’이란 예를 들어 색色이 질애를 자성으로 삼는 것처럼 제법 자체의 상(自相)을 뜻한다. ‘차별差別’이란 예를 들어 ‘색이 파랗다’거나 ‘색이 무상하다’고 하는 경우처럼 그 법에서의 차별적 상을 뜻한다. 위 해석에 따르면 직설은 그와 같은 제법의 자성을 가리키고, 비직설은 그 법의 차별적 상들을 가리킨다.
  146. 146)오심五心 : 어떤 대상을 명료하게 이해하는 마음의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알아차릴 때, 맨 먼저 돌연히 특정한 대상에로 향하는 한 찰나 마음, 즉 솔이심率爾心이 생긴다. 이어서 즉각적으로(無間) 의식意識 차원에서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자 욕망(欲)하는 심구심尋求心이 발동한다. 만약 우리 마음이 산란되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의식이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개념적 단정을 통해 이해하는 단계, 즉 결정심決定心이 생긴다. 이러한 단정이 있은 후, 그것이 친근하거나 싫게 느껴짐에 따라 그에 대한 선악의 마음을 일으키면, 그것이 염정심染淨心이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후의 의식뿐만 아니라 오식五識이 선하거나 악한 성질로 이어지면, 그 여러 찰나의 마음을 총괄해서 등류심等流心이라 한다. 이 오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瑜伽師地論』 권1(T30, 280a22), 규기의 『大乘法苑義林章』 권1(T45, 255c) 참조.
  147. 147)『瑜伽師地論』 권1(T30, 280a22).
  148. 148)독두의식獨頭意識 : 오식五識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단독으로 일어난 의식을 말한다.
  149. 149)이것은 오식과 함께 일어나지 않고 단독으로 일어난 의식意識의 솔이심率爾心, 즉 독두의식獨頭意識의 솔이타심率爾墮心을 말한다.
  150. 150)이것은 오식과 일어난 솔이의식率爾意識을 말한다.
  151. 151)『瑜伽師地論』 권3(T30, 291b17).
  152. 152)오변행五遍行 : 모든 심·심소에 상응하여 모든 때 모든 곳에서 두루 일어나는 다섯 가지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① 촉觸(ⓢ sparśa) :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때 그곳의 대상(境)과 감각 기관(根) 그리고 식識의 알아차림이라는 세 가지 조건의 접촉(觸) 속에서 주어진다. ② 작의作意(ⓢ manaskāra) : 마음을 그 대상에로 초점을 맞추게 하는 ‘주의 작용(作意)’이다. ③ 수受(ⓢ vedanā) : 특정 대상을 인식할 때 수반되는 ‘정적인 느낌(受)’을 말한다. ④ 상想(ⓢ saṃjñā) : 대상에 대한 인식이 하나의 ‘앎’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은 무엇이다’라는 판단과 결부되어야 한다. 그러한 직접적이고 순간적인 판단에는 하나의 이름을 떠올리는 개념적·언어적 상기(想) 작용이 있다. ⑤ 사思(ⓢ cetanā) : 이와 같은 촉·작의·수·상에 의해 성립된 앎은 언제라도 행동 혹은 실천과 연결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을 조작하여 당장 행동으로 드러나게끔 하는 인식적 요소가 바로 사思이다.
  153. 153)오별경五別境 : 특정한 개별적 대상을 인식할 때 발생하는 다섯 가지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그 다섯 가지는, 즉 욕欲(ⓢ chanda)·승해勝解(ⓢ adhimokṣa)·염念(ⓢ smṛti)·정定(ⓢ samādhi)·혜慧(ⓢ prajñā)이다. 이 중에서 정·혜는 동일한 경계에서 작용하지만, 다만 욕·승해·염 등은 서로 다른 경계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많은 경우를 따라서 ‘별경’이라 한 것이다. 『百法問答鈔』 권1에 의하면, 마음이 좋아하는 경계를 인식할 때는 욕심소에 의해, 결정의 대상을 인식할 때는 승해심소에 의해, 관하는 경계를 인식할 때는 정과 혜의 두 심소에 의해, 일찍이 경험한 적이 있던 경계를 인식할 때는 염심소에 의해 경계가 인식되는 것이다. 그것이 각기 다른 경계를 인식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별경심소라고 하였다.
  154. 154)이것은 의식의 두 종류 솔이심率爾心 중에서 독두의식의 솔이타심을 설명한 것이다.
  155. 155)이것은 의식의 두 종류 솔이심率爾心 중에서 오식五識과 동시에 일어난 솔이의식率爾意識을 설명한 것이다.
  156. 156)비량比量(ⓢ anumāna-pramāṇa) : 인명논리의 용어로서, 추리 또는 추론을 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因)을 근거로 하여 새로운 사실을 추리하여 증명함으로써 바른 지혜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157. 157)이 경의 구절을 종·인·유라는 삼지작법 논증 구조로 분석한 것은 『瑜伽師地論』 권82(T30, 75b4, 10)에 의거한 것인데, 이 논증 자체는 ‘취집·현현’이라는 주제와 직접적 연관은 없다. 여기서는 다만 이 ‘제행무상’을 음성으로 표현했을 때 그 무상한 말소리가 어떻게 듣는 자의 식에서 인식되는가를 해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58. 158)중국어는 표의문자이므로 한 음소(字)가 한 단어(名)인 경우가 있지만, 범어는 표음문자이므로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편의상 한역 문장인 ‘제·행·무·상’을 예로 든 것이다. 우선 제·행·무·상에 해당하는 실재의 음성(聲)이 네 개 있고, 그에 대응해서 의식에서 파악되는 특정한 음운적 단위, 즉 음소(字)가 네 개 있다. 한문에서는 이 네 자가 각기 한 단어가 되므로 단어(名)도 네 개다. 그리고 이 단어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구句, 즉 ‘제행은 무상하다’라는 능전能詮의 문장이 하나이고, 그에 대응해서 이 문장으로 나타내려 했던 소전所詮의 의미가 하나다.
  159. 159)오구의식五俱意識 : 오식五識과 동시에 생기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160. 160)현량現量(ⓢ pratyakṣa-pramāṇa) : 언어적 분별이 배제된 상태에서 그 경계를 직접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섯 가지 감관으로 외계의 현상을 직접 지각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감관지感官知(ⓢ indriya-jñāna) 이외에도, 전찰나의 감각적 자극에 곧바로 대상의 현전을 마음에 느끼는 ‘의지각意知覺(ⓢ mano-vijñāna)’, 모든 심과 심소에 직감적으로 따르는 ‘자증지自證知(ⓢ ātma-saṃvedana)’, 그리고 요가행자가 관을 계속하여 최고도에 달하면 생기는 ‘요가적 직관(ⓢ yogi-jñāna)’ 등이 모두 ‘현량’에 속한다.
  161. 161)실재의 물리적 음성을 파악하는 것은 현량의 이식耳識이고, 그 음성의 특정한 음운적 패턴, 즉 명名·구句·자(文)를 인식하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오구의식은 현량이기 때문에 이 차원에서 명 등이 파악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162. 162)생상生相 : 유위법의 사상四相의 하나로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위법이 미래에서 현재로 유입되게 하는 원인이다. 이 생상은 별도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의 힘에 의해 유위법이 생겨날 때 ‘본래 없다가 지금 있게 되는 것’을 가립하여 ‘생상’이라 한 것이다.
  163. 163)세 가지 마음에 의해 언어의 청각적 음성이 인식되고 거기에도 명·자 등의 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만 명·자 등의 ‘생상生相’과 같은 것으로서 의식적으로 명료하게 파악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마음의 단계에서는 하나의 언어적 상이 ‘취집’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164. 164)이것은 ‘무無’라는 자를 발음할 때를 말한다. ‘제’와 ‘행’과 ‘무’는 결정심 단계에서 각기 음성·이름·음소의 세 가지 상이 있는데, ‘무’를 인식하는 결정심의 단계에는 모두 아홉 가지 상이 있다는 것이다.
  165. 165)‘제’와 ‘행’과 ‘무’의 심구심이 각각 성聲·명名·자字를 파악하고, 네 번째 ‘상’의 심구심에서 다시 성·명·자가 파악되는데, 이 마지막 심구심에서는 문장의 의미가 드러나므로 문장(文)과 의미(義)를 파악한 마음이 있게 된다. 따라서 모두 열네 마음이 취집한다.
  166. 166)이 학설에 의하면, 심구심 단계에서 언어가 파악된다. 제·행·무·상에 각기 솔이이식·동시의식·심구심이 있기 때문에 열두 가지 마음이 갖춰질 때 언어적 심상이 취집하는 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한다.
  167. 167)현량(직접 지각)은 현재의 경계만을 인식하는 것이다. ‘상’을 인식하고 있을 때는 이미 사라진 ‘제·행·무’라는 음성은 과거의 경계이므로 직접 들을 수 없다.
  168. 168)이것은 『因明正理門論』에서 “이 게송에서 ‘현량은 분별을 배제한 것이다’라고 한 것은 색 등의 경계에 대한 지가 있는데 그것이 일체의 종種·유類와 명언을 멀리 떠난 것을 말한다.(此中現量除分別者。 謂若有智於色等境。 遠離一切種類名言。)”라고 한 문구를 가리킨다. 『因明正理門論』 권1(T31, 3b15) 참조.
  169. 169)이 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因明正理門論』에서는 이름의 의미가 완전히 알려졌을 때에 ‘이름을 인식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현량은 이름을 인식하지 않는다고 했다는 말인 듯하다.
  170. 170)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여래의 일음一音이다. 이 일음 사상의 단초는 초기 부파불교에서부터 나타난다. 초기 부파불교에서는 주로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각국의 여러 언어들을 사용하시는지 아니면 하나의 성어聖語만을 사용하시는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전자를 강조하는 경우는 부처님의 다재다능한 언어 구사 능력을 강조하고, 후자를 강조하는 경우는 일음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하시는 부처님의 신비한 능력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후자의 입장이 더욱 발전해서 후기 대승불교에서는 영원한 우주적 ‘원음圓音’에 대한 사유가 등장하며, 이것은 원측의 교체론에서 대표적으로 잘 나타난다.
  171. 171)『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 : 세우世友가 짓고 당唐의 현장玄奘이 번역한 책이다. ‘이부異部’란 각기 다른 부파들을 가리키며, ‘종륜宗輪’이란 각 부파의 종지가 각기 다른 것이 마치 바퀴의 굴림이 일정하지 않은 것과 같음을 가리킨다. 소승불교의 작품으로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교의를 기초로 해서 소승불교의 20부파가 발생하는 과정과 그 교의의 같고 다름을 서술하였다. 부파불교사를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간주된다. 이 책의 동본 이역으로서 『十八部論』·『部執異論』 등이 있다. 또 그 주석서로는 규기窺基의 『異部宗輪論述記』가 있다.
  172. 172)『異部宗輪論』에 따르면, 20부의 발생 계보는 다음과 같다. 불멸후 2세기경에 ① 대중부大衆部에서 여러 부파가 흘러나오는데, ② 일설부一說部, ③ 출세부出世部, ④ 계윤부雞胤部, ⑤ 다문부多聞部, ⑥ 설가부說假部이다. 다음에 불멸후 2세기 말에 대천大天이라는 외도비구가 귀의해서 제다산에 머물렀는데 대중부 스님들이 여기에 많이 거주했다. 그런데 대천의 오사五事를 둘러싸고 이견이 생겨 다시 세 부파로 나뉘었는데, ⑦ 제다산부制多山部, ⑧ 서산주부西山住部, ⑨ 북산주부北山住部다. 이상의 부파를 근본 대중부와 합치면 9부다. 근본 두 부파가 분열된 이후, 상좌부上座部는 히말라야산 일대에 이르러 있었는데, 약간의 다툼으로 인해 불멸후 3세기경에 분열되기 시작한다. 먼저 ⑩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원래 상좌부로서 설산에 거주했던 ⑪ 설산부雪山部가 갈라진다. 또 설일체유부에서 ⑫ 독자부犢子部가 갈라져 나온다. 또 독자부는 ⑬ 법상부法上部와 ⑭ 현주부賢冑部와 ⑮ 정량부正量部와 ⑯ 밀림산주부密林山住部로 갈라진다. 그와 동시에 설일체유부에서 다시 ⑰ 화지부化地部가 나오고, 이 화지부에서 ⑱ 법장부法藏部가 갈라져 나온다. 불멸후 3세기 말에 설일체유부에서 다시 ⑲ 음광부飮光部가 나오고, 불멸후 4세기 초에 설일체유부에서 다시 ⑳ 경량부經量部가 갈라져 나온다. 이상으로 상좌부의 11부와 대중부의 9부를 합하면 모두 20개의 부파가 된다. 『異部宗輪論』 권1(T49, 15) 참조.
  173. 173)『異部宗輪論』 권1(T49, 15b28) 참조.
  174. 174)『異部宗輪論』 권1(T49, 16c6) 참조.
  175. 175)『部執異論』은 『異部宗輪論』의 이역본이다.
  176. 176)성어聖語(ⓢ āryabhāsa) : 고인도의 언어인 중인도(中天竺)의 정음正音을 가리키거나, 혹은 부처님 자신이 사용하던 언어를 가리킨다.
  177. 177)멸려차蔑戾車(ⓢ mleccha) : 변지邊地·변이무소지자邊夷無所知者·비천卑賤 등으로 의역한다. 변방지역의 비천한 종족, 또는 그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178. 178)이 비나야의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은 평상시에는 마갈타국의 속어를 주로 사용하여 교화하셨지만, 때로는 성어와 남인도 변방의 속어와 멸려차어 등을 번갈아 사용하시면서 사제의 이치를 설하여 사천왕을 교화하셨다. 따라서 질문자는 세존께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셨으므로 ‘일음으로 설법하신다’는 주장과 모순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179. 179)범음梵音(ⓢ braḥma-svara) : 범음성梵音聲, 즉 불·보살이 내는 청정하고 오묘한 음성을 가리킨다. 부처님의 삼십이상 중에 범음상梵音相이 있는데, 『大智度論』 권4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청정한 범음은 큰 소리가 온 곳에 두루 퍼지는 것이 마치 천고天鼓가 울리는 것과 같다. 이는 부처님이 인위因位에 있는 무량한 시간 동안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진실하고 아름다운 말만 하며 선한 말을 가르치고 정법을 훼방하지 않았던 결과로서 받은 오묘한 상이다. 이 소리를 듣는 자들은 그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고 선한 마음을 내며 모두 미혹을 끊고 의심을 소멸시킬 수 있다고 한다.
  180. 180)이상의 질문은 『大毘婆沙論』 권79(T27, 410a5) 이하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181. 181)의요意樂(ⓢ aseya) :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려 하는 의향을 뜻한다.
  182. 182)첫 번째 해석은 『大毘婆沙論』 권79(T27, 410a27) 참조.
  183. 183)두 번째 해석은 『大毘婆沙論』 권79(T27, 410b21) 참조.
  184. 184)분별론자分別論者(ⓢ Vibhajya-vādin) : 분별설부分別說部라고도 한다. 이치를 다하지 못한 설에 대해 반드시 분별해서 논구하기 때문에 분별론자라고 부른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의 정체에 대한 이설異說이 있다. 인도불교사가들은 이들이 상좌부上座部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데, 대개 남방에서 전해지는 상좌부의 학설은 정종正宗이 아니므로 그것을 상좌부의 별전別傳이라고 간주해서 항상 ‘분별설分別說’이라는 이름으로 구별한다. 그러나 중국 법상학자들은 그들을 근본 대중부大衆部에서 갈라져 나온 한 부파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현장이 번역한 무성無性의 『攝大乘論釋』에서는 상좌부上座部가 아뢰야식을 유분식有分識의 하나로 여겼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것들은 분별설부도 또한 설한다.”고 하였고, 규기의 『成唯識論述記』 권4(T43, 354a25)에서는 “분별론자는 예전에는 분별설부라고 하였고, 요즈음은 설가부說假部라고 한다. 이들은 ‘유분식의 체는 영원하며 단절되지 않는다’고 설한다.”고 하였다. 이 설가부는 『異部宗輪論』 권1(T49, 15a29)에 따르면, 근본 대중부에서 갈라져 나온 여덟 가지 부파 중의 하나다.
  185. 185)‘구체적인 설명은 그 논과 같다(具說如彼)’는 문구는 통상적으로 전후로 많은 내용을 생략하거나, 혹은 이하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할 때 사용되는 문구다. 그런데 이 경우는 하나의 문장을 제외하고 『大毘婆沙論』의 전후 문장이 이어지므로 ‘구설여피’를 “……중간 생략……”으로 처리하였다. 중간에 생략된 문구는 “부처님의 말소리는 모든 음성의 경계에 두루 미치기 때문에 그 가타에서 이와 같이 설했던 것이다.(以佛言音遍諸聲境故。 彼伽他作如是說。)”이다.
  186. 186)선화륜旋火輪 : 이는 불통을 빨리 돌릴 때 그것이 마치 불로 된 둥근 바퀴처럼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 화륜火輪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선화륜의 비유는 현상 세계가 가상假相임을 비유할 때 자주 쓰인다.
  187. 187)이상의 문답은 모두 『大毘婆沙論』 권79(T27, 410a5) 이하의 내용을 문답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188. 188)이것은 앞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 즉 ‘부처님은 성어로 모든 이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첫 번째 견해를 가리킨다. 즉 여래가 사천왕을 모두 교화하기 위해, 성어와 남인도 변국의 속어와 멸려차어 등의 세 종류 언어를 사용하여 사제의 이치를 이해시킨 것을 말한다.
  189. 189)『無量義經』 「說法品」(T9, 386c6) 참조.
  190. 190)『大不思議經』은 『화엄경』을 가리킨다. 불타발다라 역 『大方廣佛華嚴經』 「盧舍那佛品」(T9, 405c20)의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如來所說一語中。 演出無邊契經海。
  191. 191)현장 역 『說無垢稱經』 「序品」(T14, 558c19)에 나오는 게송의 문구다.
  192. 192)성소작지成所作智 : 불과佛果에 이르면 얻게 되는 네 가지 지혜 중의 하나다. 유루의 전오식과 그에 상응하는 품들을 전사轉捨하고 나서 얻는 지혜다. 십지 이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신身·구口·의意의 삼업으로 여러 가지 변화하는 일을 보여주는 지혜를 말한다.
  193. 193)화어化語 :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나타내는 세 가지 화사化事, 즉 화신化身·화경化境·화어化語 중의 하나다. 위의 『佛地經論』 인용문에서처럼 ‘일음으로 설법하여 모든 중생들을 이해시키는’ 등 신비한 언어적 행위를 변화해 내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194. 194)『佛地經論』 권6(T26, 320a2).
  195. 195)『無量義經』 권1 「德行品」(T9, 385b11)의 게송에 나오는 구절.
  196. 196)『大智度論』 권86(T25, 663a6).
  197. 197)이것은 무성이 “듣는 자의 식 상에 직설과 비직설이 취집해서 현현한 것이 교체의 본질이다.”〔『攝大乘論釋』 권1(T31, 380b9)〕라고 했던 것을 가리킨다. 무성에 의하면, 교의 본질은 부처님의 입에서 직접 발성된 음성(本質)이 아니라, 듣는 자의 식에 현현한 언어적 심상(影像)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본질과 영상 중에서 무성은 영상을 교체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본질인 음성을 교체로 보는 경우, 이런 무성의 입장과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198. 198)소리(聲)라는 점에서 볼 때 부처님의 음성(본질)은 일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중생의 식에 나타난 영상은 모두 다르므로 일음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따르는 것’이란 본질의 음성을 가리키고, ‘어긋나는 것’이란 중생의 식에 나타난 영상을 말한다.
  199. 199)『雜集論』 권2(T31, 703b6) 참조. 이 논에서 위의 인용문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진술된 것이다. 즉 가말라병의 비유는 ‘근根에 의거해 식의 명칭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그에 따르면, 식의 명칭을 부여할 때 가령 안식이라 하고 색식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식의 발생은 대상보다는 감각기관에 더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200. 200)『佛地經論』 권2(T26, 320a8) 참조. 여래가 화어化語를 일으킬 때면 여래의 일음에 대해 모든 중생들이 제각기 다른 소리로 알아듣는 것처럼, 화신化身을 일으킬 때면 여래의 일신一身에 대해 모든 중생들이 제각기 다른 모양·색깔을 가진 몸으로 본다는 말이다.
  201. 201)이 경우 여러 부처님들이 각기 자신들의 불신과 불토를 변화해 낸 것이므로 실제로는 여러 개의 불신과 불토가 있는 것이지만, 교화되는 중생의 입장에서는 마치 하나의 불토에 한 부처님이 계신 것처럼 보인다.
  202. 202)서로 유사한 부처님들의 형상들이 뒤섞여 겹쳐서 마치 단일한 형상인 것처럼 나타나는데, 이 형상이 중생들의 식에 나타난 영상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因緣)’은 아니지만 그 영상을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는 ‘간접적 조건’, 즉 증상연增上緣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203. 203)『成唯識論』 권10(T31, 58c19~27).
  204. 204)삼밀三密 : 밀교密敎에서 말하는 신身·구口·의意 삼업을 말한다. 밀교에서는 불·중생의 두 방면에서 두 가지로 해석한다. ① 부처님 삼업의 활동은 매우 미묘하여, 범부로서는 알 수 없는 경계이므로 ‘밀密’이라 한다. 밀교에서는 우주의 본체인 육대六大를 인격화한 것이 대일법신여래大日法身如來이므로, 그 신밀身密은 우주의 전체적 활동이며, 어밀語密은 우주 간의 온갖 언어·음성의 활동이며, 의밀意密은 우주 간의 온갖 정신 활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삼밀은 각각 서로 섭입攝入하니, 찰나의 신밀도 그 자체에 어밀·의밀을 갖추고, 잠깐의 의밀에도 그 순간에 신밀·어밀을 갖추며, 한 구의 어밀에도 신밀·의밀을 갖추었다고 한다. ② 부처님과 중생은 그 체體에서 일체불이一體不二이므로 중생도 부처님같이 미묘한 삼업의 활동이 있지만, 오직 수련한 사람만이 아는 세계이고, 범부로서는 알 수 없는 작용이므로 ‘밀’이라 한다.
  205. 205)응지應持 : 응지는 『密迹經』에 나오는 보살의 이름으로서, 응지보살은 불신佛身의 정도를 헤아리기 위해 타방에서 온 보살이다.
  206. 206)『大智度論』 권1(T25, 58c18~20).
  207. 207)『密迹經』(T11)은 『大寶積經』(T11) 중 8권~14권에 이르는 「密迹金剛力士會」 7권을 일컫는다. 이 경의 내용은 먼저 보살과 여래의 신밀·어밀·의밀에 대해 설명하고, 나중에는 부처님이 입멸한 후 500년 동안 이 경을 호지하는 것에 대해 비밀주秘密主가 청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08. 208)이상의 신밀과 어밀에 관한 내용은 『大寶積經』 권10(T11, 53b14) 이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209. 209)신족력神足力 : 육신통력六神通力 가운데 하나이다. 부사의하게 경계를 변하여 나타내기도 하고 마음대로 날아다니기도 하는 신통을 말한다.
  210. 210)목건련의 일화는 『大寶積經』 권10(T11, 56c10)의 이야기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이 일화는 먼저 목건련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음성이 멀리서도 들리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은 목건련의 의심을 알아차리시고, 신통력을 발휘하여 목건련을 저 멀리 서방의 광명당 세계에 이르게 하였다. 목건련은 서방세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음성을 들어 보았지만, 그 음성은 여전히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목건련은 광명당 세계의 부처님과 대중을 만나 부처님의 어밀에 대한 의심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에 소개된 내용이다. 결국 목건련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다시 서방세계로부터 돌아와서 부처님의 ‘어밀’에 대해 의심했던 자신의 마음을 석가모니 부처님께 참회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종결된다.
  211. 211)이상의 의밀意密, 즉 심밀心密에 대해서는 『大寶積經』 권11(T11, 59c10) 참조.
  212. 212)『大般若經』 권567(T5, 930a18)과 『顯揚聖敎論』 권17(T31, 564a4) 참조.
  213. 213)『瑜伽師地論』 권85(T30, 772c)에는 사아급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나오지만 오아급마에 대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214. 214)원문에는 ‘有道理’라고 되어 있지만, 전후 문맥상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변淸辨의 해석에 대해서 호법護法이 반박한 것인데, 이 경이 ‘유의 도리만 밝혔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고 ‘유무의 도리를 밝혔다’고 해야 한다. 또 뒤에서 이 교의 대상을 논한 곳에서도 “이 경은 일체 제법의 유무의 도리를 밝히는 것을 종지로 삼는다.(此經宗明一切諸法有無道理。)”고 하였다. 참고로 『續華嚴略疏刊定記』 권1(X3, 579c13)에는 위의 원측 소와 동일한 문구가 나오는데, 거기에서는 “約三性義。 決判諸經。 有無道理。 顯了說故。 名爲了義。”라고 하였다.
  215. 215)이전에는 삼시三時에 의거해 종지의 차이를 분별했다면, 지금은 각각의 시 안에서 설해진 여러 부部의 경전들에서 각 경의 내용의 차이에 따라 종지의 차이를 밝힌 것이다.
  216. 216)교의 근거(所依)를 밝힌다는 것은 『解深密經』의 내용이 어떤 장藏에 속하고 교판敎判에서 어떤 교에 해당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고, 교의 대상(所爲)을 밝힌다는 것은 이 경전의 가르침이 어떤 근기를 위해 설해졌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217. 217)이장二藏·삼장三藏 : 이장은 성문장과 보살장을 뜻하며, 전자는 협소·천박·열등한 소승의 교, 후자는 광대·심묘·원만한 대승의 교라고 정의된다. 혜원慧遠과 길장吉藏 등은 이에 의거해 교판을 세웠다. 삼장이란 소달람장素怛纜藏(경)과 달마장達摩藏(논)과 비내야毗奈耶(율)를 말한다.
  218. 218)십이부경十二部經 : 이 십이부경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형식과 내용에 따라 열두 가지로 나눈 것으로, 즉 계경契經·응송應誦·기별記別·풍송諷誦·자설自說·인연因緣·비유譬喩·본사本事·본생本生·방광方廣·희법希法·논의論議 등을 말한다. ① 계경은 산문체의 경전이다. ② 응송은 산문체의 경문 뒤에 그 내용을 운문으로 노래한 것이다. ③ 기별은 문답의 해석 혹은 제자의 다음 세상에 날 곳을 예언한 것이다. ④ 풍송은 4언·5언·7언의 운문이다. ⑤ 자설은 남이 묻지 않는데 부처님이 스스로 말씀한 경을 말한다. ⑥ 인연은 경 중에서 부처님을 만나 설법을 듣게 된 인연을 말한 것이다. ⑦ 비유는 비유를 통해 은밀한 교리를 밝힌 것이다. ⑧ 본사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지난 세상 인연을 말한 것이다. ⑨ 본생은 부처님 자신의 지난 세상에 행하던 보살행을 말한 것이다. ⑩ 방광은 광대한 진리를 말한 것이다. ⑪ 희법은 부처님이 여러 신통력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 것이다. ⑫ 논의는 교법의 의리를 문답으로 논의한 경문을 말한다.
  219. 219)『별장別章』 :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원측의 저술 중에 『別章』 3권이 있었다고 한다. 『新編諸宗敎藏總錄』 권3(T55, 1175c11)의 기록에 따르면 이 책은 『成唯識論』의 주석서였던 것 같다.
  220. 220)부처님은 오직 일음一音으로 설법하였으나 중생이 각자 근기와 성품의 차이에 따라 달리 알아듣는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원측에 의하면, 초기 부파불교 가운데 대중부大衆部·일설부一說部 등이 이 설을 채용하였고, 대승 학파들은 공통적으로 일음의 설법을 수용한다. 이에 관한 설명은 ‘제2장-1.-5)-(4) 일음인지 이음인지를 판별함’(pp. 128~130) 참조.
  221. 221)혜탄慧誕 : 당초唐初의 승려다. 담연曇延에게 배웠으며 『涅槃經』과 『攝大乘論』을 연찬하였다.
  222. 222)이것은 후위後魏의 광통光統이 세운 교판으로서 광통삼교光統三敎라고 한다. 이 삼교를 위의 본문에서 원측은 광통의 교판을 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의 체계로 구분하였는데, 이에 대해 『화엄오교장』 등에서는 삼교를 점교漸敎·돈교頓敎·원교圓敎로 구분하였다. 이는 법상학자와 화엄학자 간의 견해 차이에 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 삼교의 사전적 정의로는 점·돈·원이 더 잘 알려져 있다. ① 점교는 미숙자를 위해 먼저 무상無常을 설하고 다음에 상常을 설하거나, 먼저 공空을 설하고 다음에 불공不空을 설한다. ② 돈교는 이미 성숙된 자를 위해 하나의 법문에 상·무상과 공·불공을 한꺼번에 설한 것을 말한다. ③ 원교는 상달자上達者를 위해 가령 『華嚴經』 등에서 궁극적 깨달음의 원융무애한 법문을 설한 것을 말한다.
  223. 223)유규劉虬 : 생존 연대는 437~495이다. 남제南齊·남양南陽 열양涅陽(河南鎭平縣南) 사람이다. 건무建武(494~497) 초년初年에 거듭 명을 받고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집에서 불교를 공부하여 경장經藏에 널리 통달하고 선법禪法에도 밝았다고 한다. 그가 지은 『注法華經』은 상실되었고, 단지 지의智顗의 『法華經文句』 및 길장吉藏의 『法華玄論』, 『法華義疏』 등의 책에 실린 해서該書의 인문引文만 있다. 또 『大乘義章』 권1 및 『三論遊意義』 중에는 유규가 창립했다고 하는 ‘오시칠계설五時七階說’이 실려 있다.
  224. 224)제위와 파리 : 두 상인의 이름이다. 전자는 제리부사帝梨富娑, 후자는 발리가跋梨迦라고 음역한다. 세존은 그들에게 처음으로 인간에 나고 천상에 나게 되는 가르침을 설하고, 또 머리카락과 손톱을 주어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225. 225)반교半敎·만교滿敎 : 교판의 방법으로 담무참·혜원·보리유지·지의·규기·담연 등이 반半·만滿 두 글자의 본래 의미에 의거하여 교상판석의 독특한 해석으로 사용하였다. 각 논사들마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소승과 대승의 두 가지 교를 나타낸다. 이 이교의 설은 담무참이 『涅槃經』에 의거하여 성문장聲聞藏은 반자교半字敎에 속하고 보살장菩薩藏은 만자교滿字敎에 속한다고 본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226. 226)이는 삼시三時에 의거해 종지를 구분하는 곳에서 설명한 것을 가리킨다. 그에 의하면, 제1시의 『阿含經』에서 사제법륜을 설하고, 제2시의 『般若經』에서 무상대승을 설하며, 제3시의 『解深密經』 등에서 요의대승을 설했다.
  227. 227)원측 소에서는 진제眞諦가 사교四敎를 세웠다고 했는데, 즉 ① 『阿含經』의 사제, ② 『般若經』의 무상, ③ 『楞伽經』 등의 법상 즉 제법연기의 모습을 분별한 것, ④ 『華嚴經』 등의 관행 즉 법계에 증입하는 관행을 설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華嚴經探玄記』 권1에서는 사교는 수隋의 급다岌多 삼장이 세운 것이라 하고, 진제의 교판은 돈頓·점漸의 이교라고 한다.
  228. 228)바파婆頗 삼장 : 당대唐代 바파밀다라波頗蜜多羅(ⓢ Prabhākaramitra) 삼장을 가리키며, 그의 오시교五時敎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① 사제교 : 『阿含經』에서 진공과 열반의 이치를 깨닫는 내용을 설한 것을 말한다. ② 무상교 : 『般若經』에서 법공의 이치를 깨닫는 내용을 설한 것을 말한다. ③ 관행교 : 『華嚴經』 등에서 각종 관심행법을 설하여 수인계과修因契果의 이치를 설한 것을 말한다. ④ 안락교 : 『涅槃經』 등에서 상·낙·아·정의 사덕과 상주적멸의 이치를 설하여 중생들이 대안락을 얻게 하는 것을 말한다. ⑤ 수호교 : 『大集經』 등에서 정법을 수호하여 중생에게 호지하여 잃지 않게 한다는 내용을 설한 것을 말한다.
  229. 229)논의경論議經 : 십이부경 중에서 특히 교법의 의리를 문답으로 논의한 경문을 논의論議라고 한다.
  230. 230)『菩薩善戒經』 권3(T30, 974a19).
  231. 231)『菩薩地持經』 권3(T30, 900a16).
  232. 232)『瑜伽師地論』 권37(T30, 496c) 참조.
  233. 233)인천교가 삼시교 중에서 제1시에 설해진 사제의 가르침 안에 포함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34. 234)『解深密經』 권1(T16, 692c22).
  235. 235)『解深密經』 권2(T16, 697b4) 참조.
  236. 236)이 경에서 유무有無의 도리를 밝혔다는 것은, 증익과 손감의 집착을 떠나서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음’을 밝혔다는 것이다. 이것을 삼성설에 의거해서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 『解深密經』인데, 그에 따르면 변계소집은 범부의 정情 속에서만 있고 이치상으로는 무無이며, 반면에 의타기와 원성실은 유有이다.
  237. 237)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역 『相續解脫地波羅蜜了義經』은 현장 역본의 제7품인 「地波羅蜜多品」에 해당하고, 『相續解脫如來所作隨順處了義經』은 현장 역본의 제8품인 「如來成所作事品」에 해당한다.
  238. 238)주周는 북조(557~581)이고, 양梁은 남조(502~557)이며, 진陳은 남조(557~589)이다.
  239. 239)이전의 ‘제1장. 교를 일으킨 뜻과 경의 제목’ 중에서 경의 제목을 풀이한 부분(p.63~64) 참조.
  240. 240)앞에서 진제 역 『解節經』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解節經』 주석서인 ‘의소義疏’를 지었다고 했는데(p.156), 『眞諦記』는 아마도 그 주석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다.
  241. 241)지혜로 진실을 반연한다는 의미에서 지혜를 일컬어 ‘마디를 풀어 주는 것(解節)’이라 했다면, 지혜와 그 경계(진실)의 관계에서 ‘해절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242. 242)경의 문구를 일컬어 ‘마디를 풀어 주는 것(解節)’이라 했다면, 어떤 의미를 능히 현현시키는(能顯) 문구와 그에 의해 현현되는(所顯) 의미(대상)의 관계에서 ‘해절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243. 243)탐·진·치 등의 번뇌는 알아야 할(所知) 진상을 그대로 알지 못하게 장애하므로 이 번뇌들을 소지장所知障이라 한다. 진지眞智가 발현하는 것을 장애한다는 점에서 지장智障이라고도 한다.
  244. 244)이하에서 다루는 문제는 삼분과경三分科經에 대한 것이다. 삼분과경이란 경론의 내용을 일반적으로 서분序分·정종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을 말한다. 첫째 서분은 서설序說 혹은 교기인연분敎起因緣分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한 경전의 교설이 생겨난 유래 등을 설한다. 둘째 정종분은 정종설正宗說 혹은 성교정설분聖敎正說分이라 하는데, 여기서는 한 경전의 종지를 진술하고, 성교에서 설한 법문을 바로 나타낸다. 셋째 유통분은 유통설流通說 혹은 의교봉행분依敎奉行分이라 하며, 여기서는 본 경전을 수지受持하고 봉행奉行하는 이익을 서술하고, 다시 대중들에게 널리 유전시켜 오랫동안 유통되도록 하여 말세의 중생들이 이 교에 의지해 봉행하게끔 한다.
  245. 245)이 『解深密經』에는 「無自性相品」·「分別瑜伽品」·「地波羅蜜多品」·「如來成所作事品」 등의 끝 부분에 각기 독자적 ‘依敎奉行分’이 달려 있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있는 봉행분이 이 『解深密經』 전체의 봉행분은 아니라고 하였다.
  246. 246)이것은 『解深密經』의 내용을 경境·행行·과果로 삼분하는 경우다. 이 경전에서 설해진 경계와 수행과 결과들은 다른 것과 비유될 수 있거나 이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에 ‘무등無等’이라 하였다.
  247. 247)서분·정종분·유통분의 삼분으로 나누는 것은 동진東晋의 도안道安에서 시작되어 유송劉宋 이래의 경전 해석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도안이 저술한 『人本欲生經註』에서는 아직 이와 같은 구분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혹은 전설상의 오류일 수 있다. 당조唐朝 현장이 번역한 『佛地經論』에는 교기인연분·성교정설분·의교봉행분 등의 구분이 나오는데, 이것이 경전을 세 부분으로 나누는 전형이 되었다.
  248. 248)소전의 종의(所詮宗義) : 이 경전의 언어(能詮)에 의해 언표되는 종지·이치(所詮)를 말한다.
  249. 249)박가범薄伽梵(ⓢ bhagavat) :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이자 제불의 통호通號의 하나다. 의역하면 유덕有德·능파能破·세존世尊·존귀尊貴라고 한다. 즉 덕이 있어서 세상에서 존중받는 자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유덕한 신神이나 성자聖者의 경칭으로 사용되었다. 불교에서도 부처님의 존칭이 되었는데, 붓다가 덕을 지니고 잘 분별하며 대중의 존경을 받고 번뇌를 잘 깨뜨리는 등 여러 공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50. 250)증신분證信分 : 증신서證信序 또는 통서通序라고도 한다. 모든 경전들의 서두에서 이 경의 신빙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여섯 가지 사실을 기록하는데, 이를 육성취六成就라고 한다. 이를 분명하게 밝혀 줌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듣고 있는 법문이 확실하여 오류가 없는 것이라고 알게 하고 이로 인해 믿음을 일으키게 한다. 또 이것은 모든 경전의 서분에서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므로 통서라고 부른다.
  251. 251)발기분發起分 : 발기서發起序 또는 별서別序라고 한다. 어떤 경전이 일으켜진 유래를 상서로운 일들과 관련하여 기록한 부분을 말한다. 이런 상서로운 일들은 다만 그 경전에서만 발기한 것이므로 별서라고 한다. 가령 『法華經』에서는 ‘이때 세존은 사방으로 대중에게 둘러싸여(爾時世尊爲四衆圍繞)’ 등의 경문 다음부터, 입정入定·우화雨華·동지動地·방광放光 등의 상서로운 일들을 서술한다.
  252. 252)여기서 ‘사事’란 경전의 증신서에서 경전의 신빙성을 증명하는 여섯 가지(혹은 다섯 가지) 사를 가리킨다. 이것을 육성취六成就라고 한다. ① ‘如是’는 신信성취라고 하며, 곧 아난의 믿음을 가리킨다. ② ‘我聞’은 문聞성취라고 하며, 아난 자신이 직접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음을 뜻한다. ③ ‘一時’는 시時성취라고 하며, 곧 법을 설한 시간을 가리킨다. ④ ‘佛’은 주主성취이니 곧 설법의 주인을 가리킨다. ⑤ ‘在~處’는 처處성취이니, 설법하신 장소를 가리킨다. ⑥ ‘與衆~’은 중衆성취인데, 곧 설법을 듣는 대중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사를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경전의 내용이 믿을 만한 것임을 증명한다.
  253. 253)현재로서는 진제의 『般若記』를 확인해 볼 수 없으나, 내용상 칠사는 육성취六成就에서 ‘아문我聞’을 ‘我’와 ‘聞’으로 나눈 것이다.
  254. 254)아난阿難(ⓢ Ānanda) : 부처님의 사촌 동생으로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출가한 후에 20년간 부처님을 항상 수행했고, 기억력이 좋아서 부처님이 설법하신 것을 대부분 잘 암송해 내었기 때문에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고 불린다. 부처님 생전에는 아직 깨치지 못하여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 슬프게 통곡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가섭의 가르침을 받고 발분하여 깨달았다고 한다.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법을 맡겼기 때문에 부법장의 제2조로 간주된다. 그는 첫 번째와 그 다음의 경전 결집에서 경문을 암송해 내는 자로 선택되었으므로 그 공적이 지극히 막대한 사람이다.
  255. 255)『七事記』가 별도의 책인지 혹은 『般若記』의 내용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없다.
  256. 256)『大智度論』 권2(T25, 62c17) 참조.
  257. 257)양분良賁의 『仁王經疏』(T33, 436a26) 등에도 ‘세친의 『燈論』’이 『般若燈論』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세친의 논 중에는 이러한 제명을 가진 것은 없다.
  258. 258)『佛地經論』 권1(T26, 291c3) 참조. 중국 법상종에서는 흔히 이 논에 의거해 통서通序를 다섯으로 나누어서, ① 총현이문總顯已聞, ② 설교시說敎時, ③ 설교주說敎主, ④ 소화처所化處, ⑤ 소피기所被機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 중에서 ‘총현이문’은 육성취 중에서 ‘如是’와 ‘我聞’을 합한 것이다.
  259. 259)‘미세율’에 대해 『四分律飾宗義記』 권10(X42, 291b19)에는 다음과 같은 주석이 달려 있다. “미세율이란 건도 중에서 미세한 죄를 판별해 놓은 것이다. 스님들이 잘 알지 못한다.(微細律者。 卽犍度中。 辨微細罪也。 諸師未曉。)” 여기서 건도犍度는 범어 skandha의 음역이다. 이는 특히 수계受戒·포살布薩·안거安居 등 승단 내의 의식 작법, 일상생활의 규정 조문과 함께 경에서 분류·정리해 놓은 것을 가리킨다.
  260. 260)『大智度論』 권3(T25, 75c15).
  261. 261)아누루두阿㝹樓豆(ⓢ Aniruddha) : 아나율阿那律·아니로두阿泥盧豆 등으로 음사하며, 무멸無滅·여의如意·무장無障 등으로 의역한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고대 인도의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의 석씨釋氏로서 부처님의 종제從弟이다. 『起世經』 권10·『五分律』 권15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곡반왕斛飯王의 아들이라고 하고, 『佛本行集經』 권11·『大智度論』 권3 등의 기록에 따르면 감로반왕甘露飯王의 아들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성도한 후 귀향했을 때, 아누루두와 아난阿難·난타難陀·우바리優波離 등이 그 당시에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262. 262)악구惡口 차익車匿(ⓢ Chandaka) : 싯달타 태자가 성을 넘어 고행의 길을 떠날 때 흰 말을 끌던 마부를 가리킨다. 차익은 천노闡弩·천다闡陀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뒤에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되었으나, 말버릇이 나빠 ‘악구惡口 차익’이라 불렸다. 부처님이 입멸하실 때 아난에게 이 차익을 묵빈법黙擯法으로 대치하라고 분부하셨는데, 차익은 나중에 과를 증득하였다.
  263. 263)사념처四念處 : 소승의 수행자가 삼현위三賢位에서 오정심관五停心觀 이후에 닦는 관으로, 신身·수受·심心·법法의 염처다. 신념처는 자기 육신이 부정하다고 관하는 것이고, 수념처는 재물이나 음행 등을 낙樂이라 보는 것은 실로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라 고苦라고 관하는 것이다. 심념처는 우리 마음은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늘 변화하는 무상한 것이라고 관하는 것이고, 법념처는 이전의 셋 이외의 모든 것들이 실로 ‘무아’이고 실체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264. 264)범법梵法 : 범단梵壇(ⓢ brahma-daṇḍa) 혹은 묵빈黙擯이라고도 한다. 즉 계를 범한 비구·비구니의 죄를 대치하는 법으로서, 계를 범한 자와는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265. 265)이상은 『大智度論』 권2(T25, 66b22) 참조.
  266. 266)『集法經』은 현재 확인할 수 없고, 『大般涅槃經後分』(T12, 901c8)에 위와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267. 267)우바리憂波離(ⓢ Upāli) :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으로, 인도 가비라위국 사람이다. 수드라 계급 출신으로 궁정의 이발사가 되었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6년째에 왕자 발제跋提, 아나율阿那律, 아난阿難 등의 일곱 사람이 출가할 때 우바리도 따라 함께 출가했다. 우바리는 계율에 정통했으므로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는 명예를 얻었다. 후에 제1차 결집 때 율부律部를 암송해 냈다.
  268. 268)앞의 『大智度論』 권2에서는 장로 아누루두가 아난에게 부처님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물어보라고 시켰다고 했으나, 이 『大悲經』에는 우바리가 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원측에 의하면, 두 사람이 모두 아난에게 청문하게 했던 것은 사실인데, 각 경론에서 각기 한 내용에 의거해 진술한 것일 뿐이므로 이치상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는 것이다.
  269. 269)‘사事에 따라 개별적으로 해석하겠다’는 이 문장부터 서품의 경문에 대한 해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원측은 이 서품의 경문을 친광親光의 오사五事에 의거해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해석하는데,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그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한다.
  270. 270)『金剛仙論』 권1(T25, 800c26)에는 ‘세 종류 아난이 대승大乘·중승中乘·소승小乘의 세 종류 법장을 전승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또 원측은 ‘●문聞의 의미’를 해석한 곳에서 “문 아난은 성문인데 어떻게 대승 경전을 기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이 세 종류 아난에 대해 다시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大乘集法經』 등에서 말한 세 종류 아난이란 아난타阿難陀와 아난현阿難賢과 아난해阿難海이다. 그 중에서 첫 번째 아난타는 성문법을 기억하였고, 두 번째 아난현은 연각법을 기억하였으며, 세 번째 아난해는 대승법을 기억하였다.
  271. 271)풍약豊約 : 넉넉하여 남아도는 일과 줄여 아끼는 일, 풍부함과 절약함 등을 뜻한다.
  272. 272)이것은 승조僧肇(383~414)가 『維摩經』에 나온 ‘여시如是’라는 경문을 해석한 것이다. 『注維摩詰經』(T38, 328a12) 참조.
  273. 273)이 학설에서는 ‘여시如是’라는 문구를 능전能詮의 문文과 소전所詮의 의義의 관계에서 설명하고 있다. 경전의 본문에 나온 모든 문장들은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의리義理를 ‘있는 그대로(如)’ 잘 나타낸 것이므로 ‘여如’라고 하였고, 그 문장에 의해 나타내려 했던 의미·이치는 ‘거짓(非) 없는’ 바른 것이므로 ‘시是’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능전과 소전의 관계에 의거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같을 여如’와 ‘바를 시是’라는 한문의 의미를 교묘하게 살려서 해석한 것이다.
  274. 274)이는 담연湛然(711~782)이 저술한 『維摩經略疏』에 나오는 지의智顗(538~597)의 학설을 소개한 것이다. 『維摩經略疏』 권1(T38, 568b20) 참조.
  275. 275)『維摩義記』 권1(T38, 423c27) 참조.
  276. 276)『維摩義記』 권1(T38, 424a17) 참조.
  277. 277)앞의 넷째 해석과 다섯째 해석은 『維摩義記』에 나온다. 이 주석서는 수대隋代의 혜원慧遠(523~592)이 편찬한 것이다.
  278. 278)이 문장은 『法華經』 주석서들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注法華經』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注法華經』은 중국 스님의 저술인 것은 분명한데 누구의 저술을 가리키는지 확인할 수 없다.
  279. 279)광택 법사光宅法師 : 남조南朝의 승려로서 법호는 법운法雲(467~529)이다. 일찍이 광택사光宅寺에 주지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광택이라고 칭하였다. 이 스님은 『法華經』에 대한 설법을 잘하였고, 『法華經義記』를 찬술하였다.
  280. 280)위의 문장은 『法華義疏』 권1(T34, 454b11)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광택의 학설은 『法華經義記』 권1(T33, 576c26)에 자세히 나와 있다.
  281. 281)『金剛仙論』의 저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위와 같은 원측의 해석에 의거해서 보리유지가 이 논을 지었다는 학설도 제기된다.
  282. 282)이상은 『金剛仙論』 권1(T25, 800c9) 참조.
  283. 283)다음에 나오는 ‘여러 논서들에 나온 세 가지 해석’에 대한 설명 참조.
  284. 284)장이 삼장長耳三藏 : 우영遇榮의 『仁王護國般若經疏法衡抄』 권3(X26, 444c18)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장이 삼장’이란 수隋의 개황開皇 초기(580년경)의 사람으로, 범어로는 ‘나련제리야사那連提梨耶舍’수나라 말로는 ‘존칭尊稱’이라 한다.라고 한다. 그는 북인도의 오장국烏萇國 사람인데, 생김새가 기이해서 정수리에 육계肉髻가 있고 귀가 길고 높이 치솟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장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285. 285)경문이란 이치를 드러내기 위한 언어적 수단이므로 능전能詮이라 하고, 이치는 그 경문에 의해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대상이므로 소전所詮이라 하였다.
  286. 286)『大智度論』 권1(T25, 63a2) 참조.
  287. 287)『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 권1(T25, 887a24) 참조. 이 논은 공덕시보살功德施菩薩이 짓고 당唐 지파가라地婆訶羅 등이 번역한 『金剛般若經』 주석서로서, 『破取著不壞假名論』 또는 『功德施論』이라고도 부른다.
  288. 288)이상은 『佛地經論』 권1(T26, 291c16) 이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289. 289)『佛地經論』 권1(T26, 291c24).
  290. 290)천태 지의天台智顗, 『維摩經玄疏』 권1(T38, 520b17) 참조.
  291. 291)구나발타라 역 『楞伽阿跋多羅寶經』 권2(T16, 493a9)에는 ‘실단’이라는 경문 아래 “悉檀者。 譯義。 或言宗。 或言成。 或言默。”이라는 각주가 달려 있는데, 여기에는 ‘理’가 ‘黙’으로 되어 있다. 『楞伽經纂』 권2(X17, 297b15)에도 동일한 문구가 나오고, 여기에는 ‘黙’이 ‘理’로 되어 있다. 전자에 의거해서 번역하였다.
  292. 292)이하의 사실단에 대한 설명은 『大智度論』 권1(T25, 59b19) 참조.
  293. 293)‘나’라든가 ‘사람’이라는 말은 세계실단의 차원에서 설한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의 일상적 대화에서는 이러한 말을 사용해서 의사소통을 하므로, 세존도 설법할 때 중생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이러한 세간적 관행을 따라 준다. 그러나 제법의 실상을 설하는 제일의실단 차원에서는 ‘나’라는 것은 없다.
  294. 294)단견斷見을 가진 자에게는 생生의 상속을 설해 주고 상견常見을 가진 자에게는 ‘사람’이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해 주는 경우처럼 사람들의 성향이나 심리 상태를 살펴 가면서 그가 받아들일 수 있게끔 법을 설하는 것을 각각위인실단이라 한다.
  295. 295)예를 들어 탐욕을 대치시키기 위해 부정관不淨觀을 설해 주는데 이것이 ‘진에瞋恚’의 번뇌를 대치시키지는 못한다. 이처럼 특정 번뇌를 대치시키려는 의도에서 설하는 것을 대치실단이라 한다.
  296. 296)『中論』 권3(T30, 24a5).
  297. 297)『中論』 권3(T30, 25a14) 참조.
  298. 298)여기서 말하는 세간의 삼종언어는 사견邪見·만慢·명자名字 등 세 종류를 근본으로 하는 언어를 말한다. 이 중에서 범부는 세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하고, 견도의 학인은 사견을 제거하였으므로 만과 명자의 2종 언어를 사용한다. 이에 비해 성인들은 사견과 자만을 벗어났으므로 앞의 2종 언어를 벗어난다. 다만 실법實法과 어긋나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따라 주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일컬어 ‘명자라는 한 종류 언어만 사용한다’고 하였다.
  299. 299)이상은 『大智度論』 권1(T25, 64a27)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300. 300)성인은 제법의 실상이 언어로 전달될 수 없으며 언어와 맞지 않음을 알지만, 언어가 지닌 능전能詮으로서의 기능(名字 : 언어문자)을 적절히 구사하면 그것이 훌륭한 방편이 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중생 교화에서 언어문자를 사용하면서도 삿된 견해(邪見)나 자만(慢)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지금 경문에서 ‘여시아문’이라고 할 때의 ‘아’도 그와 같은 교화의 방편으로서 가설한 언어라는 말이다.
  301. 301)『中論』 권3(T30, 24a1).
  302. 302)『瑜伽師地論』 권6(T30, 307b24).
  303. 303)『顯揚聖敎論』 권9 「攝淨義品」(T31, 525a6), 『雜集論』 권13(T31, 753a3) 참조.
  304. 304)이러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주장을 근견설根見說이라 한다. 유부에 따르면, ‘본다’라는 인식은 눈과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의 주체는 눈(眼根)이다. 이와는 달리, ‘색을 본다’거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감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식에 의해 명료하게 요별了別되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 작용의 주체는 식識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를 식견설識見說이라 한다.
  305. 305)『大毘婆沙論』 권13(T27, 61c7)에는 한 눈으로 보는가 혹은 두 눈으로 보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네 가지 견해가 진술되어 있다. ① 안식眼識이 색을 본다는 법구法救(ⓢ Dharmatrāta)의 식견설識見說, ② 안식과 상응하는 심리작용으로서 이해·간택의 작용을 하는 혜慧가 색을 본다는 묘음妙音(ⓢ Ghoṣa)의 상응혜견설相應慧見說, ③ 안근과 안식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비유자譬喩者(ⓢ Dārṣṭāntika)의 화합견설和合見說, ④ 두 개의 눈은 서로 떨어져 있어 동시에 작용하지 않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색을 보는 것이라는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의 일안견설一眼見說 등이다.
  306. 306)『成實論』 권6(T32, 267b6) 참조.
  307. 307)앞의 주에서 언급한 『大毘婆沙論』의 네 가지 견해 중에 ‘화합견설和合見說’에 해당한다.
  308. 308)『大智度論』 권1(T25, 59b28)에는 “我以淸淨天眼 見諸衆生” 등의 표현이 있다.
  309. 309)『大智度論』 권1(T25, 64b19) 참조.
  310. 310)『雜集論』에는 이와 일치하는 문장은 없다. 이것은 안계眼界의 모습에 대해 설명한 뒤 나머지 근들도 이와 같다고 말한 내용에 의거해 원측이 재구성한 문장이다. “問。 眼界何相。 答。 謂眼曾現見色。 及此種子積集異熟阿賴耶識。 是眼界相……如眼界相。 耳鼻舌身意界相亦爾。” 『雜集論』 권1(T31, 695c17) 참조.
  311. 311)『瑜伽師地論』 권3(T30, 294a1).
  312. 312)『瑜伽師地論釋』 권1(T30, 887b12).
  313. 313)『佛地經論』 권1(T26, 291c25).
  314. 314)『雜集論』 권2(T31, 703b12).
  315. 315)청각적 인식이 일어나는 데 토대가 되는 감각기관(所依根)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귀가 듣는다’고 설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316. 316)청각적 인식도 하나의 분별 작용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식이 듣는다’라고 설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317. 317)첫 번째 논사는 나가서나那伽犀那다. 유식학자들의 관점에서는, 부처님이 설하고(說) 중생들이 듣는다(聞)는 것은 본질적으로 설법자의 식과 청자의 식 간에 언어적 심상을 주고받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듣는 자의 식에 나타난 문의文義’와 ‘여래의 식에 나타난 문의’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이 설하셨다’는 것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여래의 본원의 힘에 의해 여래의 식에 어떤 언어적 표상들이 떠오르는 것을 가리키고, ‘나는 들었다’는 것은 그 여래의 언어적 표상이 다시 청자의 식에 현현하는 것을 말한다.
  318. 318)본원本願(ⓢ pūrva-praṇidhāna) : 모든 부처님이 지난 세상에 성불하려는 뜻을 내었던 인위因位에서 세운 여러 가지 서원을 말한다. 이 본원에는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이 있다. 총원은 부처님네의 공통된 본원으로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이고, 별원은 부처님마다 제각기 다른 서원으로 곧 아미타불의 사십팔원이나 약사여래의 십이원 등이 있다.
  319. 319)증상연增上緣 : 사연四緣의 하나로서, 어떤 결과가 산출되도록 도와주는 모든 간접적 조건들을 가리킨다.
  320. 320)두 번째 논사는 호법護法이다. 설법자와 청자 간에 오고 간 그 ‘말’의 본질은 식과 식 간에 언어적 심상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런데 듣는 자의 마음(識心)에서는 여래의 ‘진실한 문의(實文義)’가 본래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와 유사한 언어적 표상(似文義)’이 나타날 뿐이다. 따라서 듣는 자의 식에 저 여래의 문의와 유사한 문의가 나타난 것을 가리켜 ‘나는 들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321. 321)이상은 『佛地經論』 권1(T26, 291c26) 참조.
  322. 322)이 세 가지 학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2장-1.-5)-(2) 본질本質과 영상影像의 유무’(pp.88~92) 참조.
  323. 323)나유타那由他(ⓢ nayuta) : 인도에서 아주 많은 수를 표시하는 수량 혹은 시간의 단위. 수천만 혹은 천억, 만억이라고도 한다.
  324. 324)『金剛仙論』 권1(T25, 801a3). 이 『金剛仙論』의 후반부 문장에는 대승법장大乘法藏의 결집結集에 관한 또 하나의 해석이 제시되어 있다. 말하자면 여래가 철위산 바깥의 두 세계 중간에서 시방의 부처님들과 함께 경을 설하셨고, 한량없는 아라한 및 보살대중들을 불러 모아 대승의 법장을 결집하였다. 이에 따르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할 때 그 무수한 보살·성문들이 모두 ‘나’라고 자칭한 것이다.
  325. 325)이 부분의 문장이 너무 축약되어 있어서 해석의 어려움이 있지만, 여기서 해명하려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성도하신 지 20년이 지난 후에 태어난 아난이 부처님 설법을 직접 듣지도 않았는데, 어떤 이유에서 ‘나(아난)는 들었다’고 하고 또 어떻게 아난이 그 설법의 내용을 알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위의 문장은 이에 대해 세 가지로 대답한 것이다. 이 세 가지 견해는 원측의 『仁王經疏』(T33, 363b17)에도 나오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답한다. 『報恩經』에 의거해 해석하면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아난이 다른 천天들 및 비구들에게서 전해 들은 것이다. 둘째, 부처님이 세속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아난으로 하여금 이전에 설했던 경을 알도록 한 것이다. 셋째, 이전에 설했던 경을 부처님이 거듭 설해 준 것이다.(答依報恩經。 釋有三義。 一者。 阿難從他諸天。 及諸比丘邊傳聞。 二者。 佛入世俗心。 令阿難知前所說經。 三者。 前所說經。 佛重爲說。)”
  326. 326)『大方便佛報恩經』 권6(T3, 155c19) 참조.
  327. 327)숙명통宿命通 : 육통六通의 하나로서, 전생의 모든 일에 대해 잘 아는 신통력을 말한다. 신통력의 크기에 따라 1세世, 2세, 또는 천만세를 아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328. 328)원지願智(ⓢ praṇidhi-jñāna) :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지혜로서, 부동不動의 아라한 이상이라야 일으킬 수 있다.
  329. 329)『金剛華經』의 인용문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것 같다.
  330. 330)『佛地經論』 권1(T26, 292a3).
  331. 331)원측은 친광의 『佛地經論』에 나오는 오사五事(信·時·主·處·衆)에 의거해서 인연분을 해석하였다. ‘한때’는 그 가운데 두 번째인 ‘교를 설한 시기’에 해당한다.
  332. 332)설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함께 만난 것, 다시 말하면 중생이 성인에게 감응하고 성인이 중생에게 나아가서 서로 함께 만난 것을 ‘일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333. 333)『般若經』은 모두 여덟 종류가 있는데 이것을 팔부반야八部般若라고 한다. 위 경문에서 『十萬頌般若經』이라 한 것은 600부 『大般若經』을 가리킨다. 나머지 7부는 소품小品반야, 방광放光반야, 광찬光讚반야, 도행道行반야, 금강金剛반야, 문수문文殊問반야, 천왕문天王門반야를 가리킨다.
  334. 334)‘그 논’이란 이하의 인용문 내용을 보면 『金剛仙論』을 가리킨다. 이전에 이미 언급했듯이, 이 논의 저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원측은 이 논의 저자를 보리유지로 간주하였다.
  335. 335)『金剛仙論』 권1(T25, 801b5).
  336. 336)원측소에서 ‘解云’ 혹은 ‘又解’로 시작되는 내용은 모두 원측의 해석이므로 ‘해’로 처리했지만, 이 문장은 ‘又解’로 되어 있지만 원측의 해석이 아니라 장이 삼장의 해석에 해당하기 때문에 ‘해’로 표기하지 않았다.
  337. 337)여기서 말하는 ‘두 종류 생사’란 분단생사分段生死와 변역생사變易生死이다. 분단생사란 유루의 선악업이 인因이 되고 번뇌장이 연緣이 되어 삼계 내에서 거친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 과보는 수명의 장단이나 육체의 대소 등에 일정한 제한을 받는 것이므로 ‘분단신分段身’이라고 하고, 이런 몸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라고 한다. 변역생사란 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 등이 비록 분단생사의 윤회는 하지 않으나 다만 무루의 분별업이 인이 되고 소지장이 연이 되어 삼계 밖에서 뛰어나고 미묘한 과보신, 즉 의생신意生身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 몸은 자비와 원력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수명이나 육체를 모두 자유롭게 변화시키거나 뒤바꿀 수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변역신이라 하고, 이런 몸을 받는 것을 변역생사라고 한다.
  338. 338)겁파劫波(ⓢ kalpa) : 겁劫. 분별시분分別時分·분별시절分別時節·장시長時·대시大時·시時 등으로 의역한다. 원래 고대 인도 바라문교에서 극대시의 시간 단위를 가리키던 말로서, 불교에서도 계산할 수 없는 장대한 시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설에는 일겁은 인간의 43억 2천만 년에 해당하며 겁의 끝에는 겁화劫火가 출현하여 모든 것을 태워 버리고 다시 세계가 창조된다고 한다.
  339. 339)이하에서는 세 종류 가명의 시를 설명하는데, 여기서 인도 불교도들의 ‘시간관’을 엿볼 수 있다. 본래 가라迦羅(ⓢ kāla)와 삼마야三摩耶(ⓢ samaya)는 둘 다 시時로 번역되는데, 전자가 ‘실재의 시간(實時)’을 뜻하는 반면 후자는 ‘가립된 시간(假時)’을 뜻한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시간을 나타낼 때 흔히 삼마야를 사용한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다만 생멸하는 유위법들의 변화에 의거해 가립된 개념이다. 불교 내에서는 어떤 실제 사건들의 종류에 따라 ‘시’의 이름도 각기 다르게 쓴다. ‘가라의 시’란 가령 ‘비시식非時食’이라고 하는 경우다. 이때 쓰인 ‘가라(時)’는 앞서 말했듯 불교 이외의 인도 제 학파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가라’와 혼동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율律 등에서 불교도에게 말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별상시別相時라고 한다. 다음, 삼마야는 “한때 부처님께서……에 계시면서(一時佛在)”라고 하는 경우다. 이때 쓰인 ‘삼마야(時)’라는 표현은 특히 부처님이 사견을 깨뜨리기 위해 온갖 진리를 설파하실 때를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므로 파사견시破邪見時라고도 한다. 또 ‘세간에 두루 노니시던 시’란 특히 부처님이 이곳저곳을 유행하시던 때를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된다.
  340. 340)‘가라’는 외도들도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므로 불교 내에서는 ‘시간’을 뜻하는 용어로는 주로 ‘삼마야’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가라’라는 말은 주로 부처님이 율律의 제정과 관련해서 설법하실 때에 국한해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비시식非時食’처럼 율 내에서 ‘시’가 사용되는 경우는 범어로 모두 ‘가라’에 해당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계율의 제정에 대해서 불교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때에는 가령 비구계·비구니계(大戒)를 수지하거나 출가한 자 그리고 국왕은 그것을 들을 수 있지만 재가자의 계(小戒)를 수지하거나 출가하지 않은 자 그리고 왕이 아닌 그 밖의 사람들은 듣지 못한다고 하였다.
  341. 341)달마達磨 :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를 뜻하며, 대법對法·무비법無比法·논論 등으로 의역한다. 이 논과 경經·율律을 합해서 삼장三藏이라 한다.
  342. 342)원측에 따르면, 5아함이란 『雜阿含經』, 『中阿含經』, 『長阿含經』, 『增壹阿含經』 이외에 별도로 건립한 100부部의 『阿含經』을 가리킨다. 『解深密經疏』 권1(X21, 178a6) 참조.
  343. 343)동수득同隨得이란 선악의 업이 일어나면 훈습의 힘으로 인해 본식 중에 저장되어 있다가 과보를 불러내는 것을 가리킨다. 유식학파에서는 이것을 종자라고 했는데, 이와 유사한 것을 소승 부파 중에서 특히 살바다종은 ‘동수득’이라 했고, 정량부는 ‘무실無失’이라고 했다. 『顯識論』 권1(T31, 880c24) 참조.
  344. 344)명名·미味·구句 : 명·구·문의 구역이다. 미味는 문文의 구역으로, 모두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음운적 최소 단위, 즉 음소를 가리키고, 명은 음소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름(단어)이며, 구는 둘 이상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문구를 가리킨다.
  345. 345)『大智度論』 권1(T25, 65b5) 참조.
  346. 346)신노림申怒林(ⓢ Yaṣṭi-vana) : 신노파림申怒波林·신슬지림申瑟知林 등으로 표기하며, 신서림申恕林으로 된 곳도 있다. 즉 고대 인도의 마갈타국 왕서성 밖에 위치한 숲을 가리킨다.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에서 교화하실 때에 여기서 거주하셨는데, 빔비사라왕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여기로 와서 부처님의 교화를 받았다고 한다.
  347. 347)중국中國 : 여기서 말한 중국은 천축天竺(인도)을 가리킨다. 그런데 천축을 동·서·남·북·중으로 구분하였을 때, 이 중에서 오직 부처님의 법이 전해진 중천축中天竺(중인도)만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고, 오천축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있다. 둔륜의 『瑜伽論記』 권6(T42, 426a24) 참조.
  348. 348)사捨 : 열한 가지 선심소 중의 하나로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고 들뜨지도 않으면서 평등정직平等正直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오온 중에서는 행온行蘊에 속하므로 행사行捨라고도 한다.
  349. 349)『破取著不壞假名論』 권1(T25, 887a25).
  350. 350)‘가라’는 불교와 외도들이 모두 통용하는 단어로서 본래 ‘실재의 시간’을 뜻한다. 그런데 불교도들은 실재의 시간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이 단어는 ‘별상시’에 국한시켜 사용한다. 앞의 각주 103, 104 참조.
  351. 351)이상은 『大智度論』 권1(T25, 65a5) 참조.
  352. 352)『佛地經論』 권1(T26, 292a11).
  353. 353)『佛地經論』 권1(T26, 292a13).
  354. 354)『佛地經論』 권1(T26, 292a16).
  355. 355)『俱舍論』 권18(T29, 98a19)에 따르면, 산算은 말로 소리 내어 세는 것이고 수數는 마음속으로 셈하는 것을 가리킨다. ‘산’은 어업語業(색온에 해당) 및 그것을 능히 일으키는(能發) 심·심소법들(나머지 4온에 해당)을 체로 삼으므로 총괄해서 오온五蘊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고, ‘수’는 의사업意思業 및 그 의사업과 동시이면서 그것을 능히 일으키는 심·심소법들을 체로 삼으므로 색온을 제외한 나머지 4온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한다. 또 ‘시時(ⓢ kāla)’에 대해 불교 내에서는 일반적으로 가립假立이라고 보는데, 가령 『俱舍論』 권1(T29, 2a13)에서는 “이러한 유위법은 또한 세로世路(ⓢ adhvan)라고도 하니, 이미 작용하였고(已行 : 과거), 지금 바로 작용하고 있고(正行 : 현재), 장차 작용할 것이기(當行 : 미래)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시간(世)이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유위제법의 변화 상태에 의거해서 가립된 개념이기 때문에 유위법은 ‘시간의 길(世路)’, 즉 ‘시간이 설정되는 근거’라고 한다. 위의 『기』에서 ‘수’뿐만 아니라 ‘시’도 유위의 오온을 자성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시간의 근거인 유위법을 기준으로 한 말이다.
  356. 356)오온五蘊·십이처十二處·십팔계十八界 등에는 ‘동이同異’가 있기 때문에 자기 부류에 대해서는 유사성을 인식하고 동시에 다른 부류와의 차별성을 인식하게 한다. 이 ‘동이’라는 개념은 본래 승론勝論학파에서 쓰던 것이고, 불교 내에서는 이것을 ‘동분同分’이라 한다. 예를 들면 ‘색色’이나 ‘성聲’, ‘소(牛性)’나 ‘말(馬性)’ 같은 것이다. 경량부나 대승에서는 이것은 실물들의 유사성 등에 가립된 개념이라고 보지만, 유부 학자들은 그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것은 실물 자체 이외에도 그러한 동분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俱舍論』 권5(T29, 24a7) 참조.
  357. 357)색법에 의거해서 동이同異를 분별하면서 색법 이외에 ‘동이’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동일한 논리로 색법에 의거해서 수를 분별하므로 수에 대한 관념을 일으키는 ‘수’라는 것이 따로 존재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358. 358)음陰·입入·지持 : 오음과 십이입과 십팔지를 뜻하며, 각기 오온과 십이처와 십팔계의 이역이다.
  359. 359)『大智度論』 권1(T25, 64c12).
  360. 360)『大智度論』 권1(T25, 65c16).
  361. 361)‘유식무경唯識無境’의 관점에서 보면, 경계는 모두 식에 현현한 영상影像이고 마찬가지로 시와 수도 하나의 영상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시와 수는 마음에 현현한 대상들의 차별적 상태에 대해 다시 수 또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일으킨 것인데, 이 수와 시를 오위백법에서는 불상응행법에 소속시켰다. 『佛地經論』 권1(T26, 292a19) 참조.
  362. 362)가령 승론외도勝論外道들은 ‘시時(ⓢ kāla)’ 등이 실재한다고 보는 데 반해, 유부有部 등을 비롯한 불교도들은 그것을 가립된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불교 경전에서는 범어 ‘깔라’ 대신에 시간을 나타낼 때는 삼마야三摩耶(ⓢ samaya)라는 표현을 쓴다. ‘수數’도 마찬가지로 실재의 법이라기보다는 실재의 법에 의거해서 가립된 것이다. 용수는 ‘시’와 ‘수’가 실재성이 없는 것임을 강조한 반면에, 미륵종은 법상을 설명하기 위해 시와 수를 가립해서 유식의 백법百法 중에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에 포함시켰다.
  363. 363)『佛地經論』 권1(T26, 292a21).
  364. 364)선인仙人(ⓢ Ṛsi) : 선인僊人, 신선神仙, 대선大仙, 선성仙聖 등으로 번역한다. 『佛母大孔雀明王經』에 의하면, 이런 선인들은 계율을 지키면서 언제나 고행을 하고 위덕을 갖추고 있는데, 때로는 산하에 머물기도 하고 때로는 산림 속에 거주하면서 과일과 물을 먹고 살며 신통력을 부린다고 한다. 부처님도 이런 선인 중의 최고이므로 대선大仙이라고 부른다.
  365. 365)화인化人 :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중생 각자의 근기에 맞춰 모양을 변화시켜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화인 자체는 감각되지 않으며 교화의 일을 끝내면 곧 없어진다.
  366. 366)『大智度論』 권2(T25, 66b).
  367. 367)『解深密經』 「勝義諦相品」의 첫 부분은 여리청문如理請聞보살과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보살과의 문답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여리청문보살이 ‘일체법무이一切法無二’의 의미에 대해 묻고, 해심심의밀의보살이 그에 대답해 준다. 따라서 이 경은 반드시 세존만이 설법한 것이 아니고 보살도 설법한 것이 아니냐고 묻고 있다.
  368. 368)진제 역 『無上依經』 권1(T16, 468a10)의 첫머리에는 “如是我聞。 一時佛婆伽婆。”라고 되어 있다.
  369. 369)‘불바가바반야경’이라는 문구의 의미가 불분명하다. 이 문구는 ‘어떤 경은 첫머리에 두 가지 이름을 다 표기한다’는 앞 문장에 대한 보완 설명이다. 만약 이 문구를 경전의 이름으로 간주할 경우, 이런 이름을 가진 경은 현존하지 않는다. 만약 ‘불바가바’라는 네 자는 두 가지 이름을 함께 표기하는 경우를 예시한 것이고, 뒤의 ‘반야경’이라는 세 자는 그에 해당하는 경전을 든 것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해석도 맞지 않다. 『金剛般若波羅蜜經』의 경우를 제외하고, 반야부의 경에서 불佛과 바가바婆伽婆(혹은 薄伽梵) 두 가지를 병기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곱 글자를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370. 370)『다심경多心經』 : 현장 역 『般若波羅蜜多心經』을 가리키는 듯하다.
  371. 371)불佛(ⓢ Buddha)이라는 이름 이외에 부처님을 가리키는 열 가지 이름은 다음과 같다. 여래如來(ⓢ Tathāgata), 응공應供(ⓢ Arhat), 정변지正遍知(ⓢ Samyak-saṃbuddha), 명행족明行足(ⓢ Vidyā-caraṇa-saṃpanna), 선서善逝(ⓢ Sugata), 세간해世間解(ⓢ Loka-vid), 무상사無上士(ⓢ Anuttara), 조어장부調御丈夫(ⓢ Purusa-damya-sārathi), 천인사天人師(ⓢ Śāstā-deva-manusyāṇāṃ), 세존世尊(ⓢ Bhagavat).
  372. 372)천고天鼓 : 도리천의 선법당善法堂에 있는 큰 북으로,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묘한 음을 낸다고 한다. 이 북소리는 주인도 없고 일으킨 이도 없고 일어남도 멸함도 없이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므로 부처님의 설법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373. 373)삼덕에서 법신덕法身德이란 부처님이 미혹된 세계를 벗어나 얻는 상주불변하는 깨달음의 본체를 말하고, 반야덕般若德이란 만유의 실상을 아는 진실한 지혜를 가리키며, 해탈덕解脫德이란 그 지혜에 의해 참다운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한다.
  374. 374)『金剛仙論』은 보리유지가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서방의 정본에 의하면’이라는 문구들을 보면, 이 논 자체가 역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원측은 보리유지를 이 논의 역자가 아니라 저자로 간주하였다.
  375. 375)이상은 『金剛仙論』 권1(T25, 801b16) 참조.
  376. 376)『佛地經論』 권1(T26, 292b9).
  377. 377)『大智度論』 권2(T25, 71b14).
  378. 378)이 네 가지 마란 번뇌마煩惱魔·온마蘊魔·사마死魔·천마天魔이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온갖 마를 멀리 떠나고(遠離衆魔)”라는 경문을 해석하면서 다시 자세히 언급한다.
  379. 379)이상은 『大智度論』 권2(T25, 70b15) 이하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380. 380)『瑜伽師地論』 권38(T30, 499c9).
  381. 381)『瑜伽師地論』 권80(T30, 765b6).
  382. 382)『大般涅槃經』 권18(T12, 469c18).
  383. 383)이상 박가범의 여섯 가지 공덕에 대한 설명은 『佛地經論』 권1(T26, 292a24) 참조.
  384. 384)이상 ‘네 가지 마를 깨뜨리는 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佛地經論』 권1(T26, 295b) 참조.
  385. 385)박가범이 네 가지 마를 깨뜨린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후에 “온갖 마를 멀리 떠나고(遠離衆魔)”라는 경문의 해석에서 다시 자세하게 논의한다.
  386. 386)칠전성七轉聲 : ‘칠례구七例句’라고도 하며, 범어의 8격변화(八轉聲)에서 호격呼格을 제외한 나머지를 가리킨다. 남성 단어·여성 단어는 각기 대개 일곱 가지 격에 의해 지목되므로 ‘칠전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제8격(호격)을 제외시킨 것은 앞에 ‘오!(醯, ⓢ he)’라는 접두사가 붙는 것 말고는 별다른 어형 변화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成唯識論了義燈』 권1(T43, 674a23) 참조.
  387. 387)“住最勝光耀七寶莊嚴……大宮殿中”이라는 경문에서 ‘住’는 동사로서 맨 마지막에 해석되어야 하므로 여기서는 번역하지 않았다.
  388. 388)『解節經』 권1(T16, 711b29).
  389. 389)『深密解脫經』 권1 「序品」(T16, 665b) 참조.
  390. 390)통서문通序文 : 그 경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여러 경에도 공통되는 부분으로, 특히 육성취六成就를 기록한 부분을 가리킨다.
  391. 391)진제 역 『解節經』은 「不可言無二品」, 「過覺觀境品」, 「過一異品」, 「一味品」 등의 네 가지 품만 있다. 이것은 『解深密經』의 「勝義諦相品」을 네 품으로 나눈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不可言無二品」 서두에 서분序分의 문장을 삽입하고, 네 번째 「一味品」 말미에 유통분流通分의 문장을 삽입하였기 때문에 형식적으로는 서분·정종분·유통분의 삼분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392. 392)바로 앞의 『眞諦記』 제1권에서 “경의 처음에 통서문을 설하지 않은 것은 번역가가 생략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생략했다’는 것은 단지 ‘서품’이라는 이름을 생략했다는 말이다. 즉 『解節經』에는 ‘서품’이라는 품명은 없지만 그에 해당하는 문장이 「不可言無二品」 앞부분에 들어가 있다.
  393. 393)『大智度論』 권3(T25, 76a8)에서 왕사성에 대한 논의는 마갈타국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394. 394)이것은 『佛地經論』에 나오는 첫 번째 견해다. 그에 따르면, 성문대중들이 부처님의 정법을 들었다는 것은 예토에서 행해진 설법임을 뜻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변화신으로 변화토에서 설법하였다고 하였다.
  395. 395)이것은 『佛地經論』에 나오는 두 번째 견해다. 그에 따르면, 부처님의 선정의 힘으로 현현해 낸 정토淨土에서 설한 법은 십지十地 이상의 보살이라야 들을 수 있다. 부처님의 변현해 낸 정토와 그곳에 있는 몸은 십지 이상의 보살들에 의해 수용되고 있으므로 수용토에서 수용신이 설한 것이다. 다만 성문대중은 불보살들이 정토를 장엄하기 위해 화작해 낸 것에 불과하다.
  396. 396)『瑜伽師地論』 권79(T30, 736c27) 참조.
  397. 397)의요意樂(ⓢ aseya) : 어떤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려 하는 의향·의욕을 뜻한다.
  398. 398)승해勝解(ⓢ adhimokṣa) : 대상 경계에 대해 확정해서 판단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399. 399)이것은 『佛地經論』에 나오는 세 번째 견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십지 이전의 대중들은 예토에서 변화신이 설법하는 것으로 보고, 십지 이상의 대중들은 정토에서 수용신이 설법하는 것으로 본다.
  400. 400)『佛地經論』 권1(T26, 292c4).
  401. 401)사무량심四無量心 : 자慈·비悲·희喜·사捨의 네 종류 마음을 본질로 하는 등지等至를 말한다. 『俱舍論』 권29(T29, 150c2)에 따르면, ‘자’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는 고통을 뽑아 주는 것이며, ‘희’는 기쁘게 위로해 주는 것이고, ‘사’는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대승의 『顯揚聖敎論』 권4(T31, 497a1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자무량이란 고통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중생에게 즐길거리를 베풀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비무량이란 고통스러워하는 중생에게 고통거리를 뽑아 주려고 하는 것이다. 희무량이란 즐거워하는 중생을 위해 그의 즐거움을 따라서 기뻐해 주는 것이다. 사무량이란 사심捨心이 갖추어져 의요意樂가 오염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402. 402)삼삼매三三昧 :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無作)을 관하는 세 종류 등지等至를 말한다. 이것을 사제의 십육행상十六行相에 배대시켜 설명하면, 고제의 4행상 중에 ‘공空과 무아無我’를 관하는 것은 공문空門에 해당하고, 멸제의 네 가지 행상(滅, 靜, 妙, 離)을 관하는 것은 무상문無相門에 속하며, 그 밖에 고제의 2행상(非常, 苦)과 집성제의 4행상(因, 集, 生, 緣)과 도제의 4행상(道, 如, 行, 出) 등 열 가지 행상을 관하는 것은 모두 무원문無願門에 해당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 머무는 곳의 차별을 바로 해석함(正釋住處差別)’ 이하의 ‘더) 문門의 원만’(pp.293~294)에서 다시 자세한 해석이 나온다.
  403. 403)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 : 보살이 닦는 선정의 하나로서, 이 선정에 들면 장군이 군대를 이끌어 적을 무찔러 항복받는 것처럼 번뇌의 마군을 파멸시킨다고 한다.
  404. 404)십력十力 : 오직 여래에게 국한시켜 해석할 때, 십력은 실상을 증득하는 여래의 지智가 갖는 능력을 가리킨다. 또 이것은 부처님의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중 열 가지에 해당하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도리인지 도리가 아닌지 아는 힘(處非處智力), ② 업의 이숙에 대해 아는 힘(業異熟智力), ③ 정려와 해탈과 등지等持와 등지等至의 깊고 얕음에 대해 두루 아는 힘(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④ 모든 근의 우열을 아는 힘(根上下智力), ⑤ 중생들의 갖가지 승해를 아는 힘(種種勝解智力), ⑥ 갖가지 중생계를 아는 힘(種種界智力), ⑦ 모든 취에서 행이 도달하는 곳을 두루 아는 힘(遍趣行智力), ⑧ 과거세의 갖가지 일을 아는 힘(宿住隨念智力), ⑨ 나는 곳과 죽는 곳을 아는 힘(死生智力), ⑩ 모든 번뇌가 다하여 여실하게 아는 힘(漏盡智力) 등이다.
  405. 405)사무외四無畏 : 불보살이 설법할 때 갖추는 ‘네 가지 두려움 없는 자신감’을 말한다. 첫째는 제법현등각무외諸法現等覺無畏이니, 즉 제법에 대해 모두 깨달아 알아 정견에 머물면서 굽히지 않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일체누진지무외一切漏盡智無畏이니, 즉 모든 번뇌를 끊어 없앴기 때문에 외도의 비난에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장법불허결정수기무외障法不虛決定授記無畏이니, 즉 장애법을 열어서 수행하되 어떤 비난에 부딪혀도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위증일체구족출도여성무외爲證一切具足出道如性無畏이니, 즉 출리出離의 도道를 설하면서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406. 406)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 불보살들만이 구족하고 있고 다른 범부와 이승에게는 없는 특수한 공덕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 대소승의 여러 경론에 이설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십력十力·사무소외四無所畏·삼념주三念住와 부처님의 대비大悲를 합해서 ‘십팔불공법’이라 한다.
  407. 407)이상은 『大智度論』 권3(T25, 75c13)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408. 408)원측 소에서 『法華論』이라 한 것은 세친의 『妙法蓮華經憂波提舍』(T26)를 가리킨다. 이 논의 권1(T26, 1b9)에는 “如王舍城。 勝於一切諸餘城舍。 耆闍崛山。 勝餘諸山。 顯此法門最勝義故。 如經婆伽婆住王舍城耆闍崛山中故……。”라는 문구가 나온다.
  409. 409)『勝思惟梵天所問經論』 권1(T26, 337ab) 참조.
  410. 410)『大寶績經論』 권1(T26, 204c6).
  411. 411)사사공양四事供養 : 부처님과 스님 등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네 가지 것을 공급하는 일을 말한다. 네 가지 사물이란 의복·음식·와구臥具·의약醫藥 혹은 의복·음식·탕약湯藥·방사房舍 등을 가리키기도 한다.
  412. 412)가란타죽림迦蘭陀竹林(ⓢ Veṇuvana-kalandakanivāsa) : 중인도 마갈타국 왕사성의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이 죽림은 가란타 장자의 소유로 왕사성에서 가장 훌륭한 곳이었는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승원僧園으로 바꾸었다는 설도 있고, 마갈타국의 빔비사라왕이 시주한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바로 죽림정사竹林精舍를 말한다.
  413. 413)오분법신五分法身 : 대소승의 무학의 지위, 즉 부처나 아라한이 자기 몸에 구비한 다섯 가지 공덕을 말하거나, 대승불교에서는 특히 부처님 자체에 갖추어진 다섯 가지 공덕으로, 다음과 같다. ① 계신戒身은 신구의 삼업이 모든 죄나 잘못을 멀리 떠나 있는 여래의 계의 법신을 말한다. ② 정신定身은 여래의 참된 마음이 적정하고 자성이 부동하여 모든 망념을 멀리 떠나 있는 것을 말한다. ③ 혜신慧身은 여래의 참된 마음의 본바탕이 밝고 자성이 어둡지 않아서 법성을 관하여 통달하고 있는 것, 곧 근본지를 말한다. ④ 해탈신解脫身은 여래는 자기의 본바탕에 얽매임이 없어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한다. ⑤ 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은 자기의 본바탕이 본래 물듦이 없고 이미 실제로 해탈해 있는 것을 말한다.
  414. 414)사방四謗 : 진여의 이치를 알지 못한 채 네 가지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① 증익방增益謗은 진여가 결정코 실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② 손감방損減謗은 진여가 결정코 없다고만 주장하는 것이다. ③ 상위방相違謗은 진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서 모순된 주장에 집착하는 것이다. ④ 희론방戱論謗은 진여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무의미한 말장난을 하는 것이다.
  415. 415)뒤에 나오는 ‘가) 현색顯色의 원만’에서 각주 421 참조.
  416. 416)뒤에 나오는 ‘나) 형색形色의 원만’에서 각주 0438 참조.
  417. 417)『佛地經論』 권1(T26, 292b25).
  418. 418)세친과 무성은 모두 『攝大乘論』의 주석서를 썼는데, 중국에서 다른 번역가에 의해 여러 차례 번역되었다. ‘세친·무성의 『攝大乘論釋』’이란 각각 당나라 현장이 번역한 세친의 『攝大乘論釋』 10권과 무성의 『攝大乘論釋』 10권을 가리키고, ‘梁 『攝論』’이란 양나라 때 진제가 번역한 세친의 『攝大乘論釋』 15권을 가리킨다.
  419. 419)『大業論』이란 급다笈多 등이 번역한 세친의 『攝大乘論釋論』을 가리킨다.
  420. 420)이하에서는 여러 논들에 나온 ‘열여덟 가지 원만’에 대한 해석에 의거해서 『解深密經』에 나온 열여덟 가지 원만을 따로따로 해석한다.
  421. 421)현색顯色(ⓢ varṇa-rūpa) : 초기 유부철학에서는 눈으로 파악되는 경계를 색깔과 형태로 구분했을 때, 전자를 현색이라 하고 후자를 형색形色이라 불렀다. 현색에는 청, 황, 적, 백, 구름, 연기, 티끌, 안개, 그림자, 햇빛, (햇빛 이외의) 밝음, 어두움의 열두 가지가 있다. 이 가운데 청·황·적·백의 4종은 본색이며, 나머지 8종은 이 4색의 차별로 나타난 색이다.
  422. 422)『佛地經論』 권1(T26, 293a11).
  423. 423)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0(T31, 445c29) 참조.
  424. 424)『稱讚淨土佛攝受經』 권1(T12, 349a2).
  425. 425)『大智度論』 권10(T25, 134a1) 참조.
  426. 426)진제의 『양론기梁論記』 : 진제가 번역하고 주석한 양梁 『攝大乘論釋』의 주석서를 가리키는 듯하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427. 427)금시조金翅鳥(ⓢ suparṇa, suparṇin) : 묘시조妙翅鳥·항영조項癭鳥라고도 하며, 불교 내에서는 팔부대중의 하나인 가루라迦樓羅(ⓢ garuḍa)와 동일시되는 새다. 이 새는 수미산 속에 사는데, 깃털이 금색이고 양 날개의 넓이가 336만 리나 되며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428. 428)『大智度論』 권10(T25, 134a22) 참조.
  429. 429)『佛地經論』 권1(T26, 293a14).
  430. 430)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0(T31, 446a1).
  431. 431)『大智度論』 권10(T25, 134a5).
  432. 432)석수石樹 : 산호수珊瑚樹를 말한다. 『翻譯名義集』 권3(T54, 1105c6)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진大秦 서남西南의 장해漲海 가운데 7~8백 리는 되는 곳에 산호주珊瑚洲가 있다. 그 주 밑바닥에 반석盤石이 있고 산호가 그 위에서 생겨난다. 사람들이 철망으로 그것을 채취한다. 『任昉述異記』에서 말하길, 산호수珊瑚樹는 벽색碧色이고 해저에서 생겨난다. 한 그루에 열 개의 가지가 있고 가지 사이에 잎사귀는 없다. 큰 것은 높이가 5~6척尺이고, 작은 것은 1척 남짓이다.”
  433. 433)옥패玉貝 : 원문은 ‘생패生貝’로 되어 있는데, 보석의 이름으로서 ‘생패’가 쓰인 용례는 드물다. 가령 『大智度論』 권10(T25, 134a5)과 『舍利弗阿毘曇論』 권11(T28, 600a22) 등에는 유사한 문맥에서 모두 ‘옥패’라는 이름이 나온다. 또 『三彌勒經疏』 권1(T38, 314a21)에는 ‘眞珠出虫甲中’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옥패’란 아마도 ‘진주’와 비슷한 보석을 가리키는 듯하다.
  434. 434)『大智度論』 권10(T25, 134a17).
  435. 435)급다笈多 외 공역, 세친世親의 『攝大乘論釋論』 권10(T31, 318a26) 참조.
  436. 436)『佛地經論』 권1(T26, 293a17) 참조.
  437. 437)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0(T31, 377a6) 참조.
  438. 438)형색形色(ⓢ saṃsthānarūpa) : 눈으로 파악되는 형태나 모양을 가리키며, 물질의 모양을 만들어 내는 극미를 가리킨다. 이 형색에는 장長, 단短, 방方, 원圓, 고高, 하下, 정正, 부정不正 등의 여덟 종류가 있다.
  439. 439)『佛地經論』 권1(T26, 293a21) 참조.
  440. 440)유부에 의하면, 빛(光)·그림자(影)·밝음(明)·어둠(闇)·연기(烟)·구름(雲)·먼지(塵)·안개(霧) 등은 모두 ‘현색’, 즉 눈에 의해 파악되는 색깔의 종류들이다. 이 중에서 ‘빛’은 태양의 불꽃에서 나오는 ‘햇빛’을 가리키는 것이고, ‘밝음’이란 그밖의 달·별·화약·보주寶珠·번개 등 번쩍임(焰)에서 나오는 밝음을 가리킨다. 빛의 밝음을 가로막아서 생기는 것으로서 그 가운데서도 다른 색들을 볼 수 있는 경우는 ‘그림자’라고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어둠’이라 한다. 이상은 『俱舍論』 권1(T29, 2c1) 참조.
  441. 441)장長·단短·방方·원圓·고高·하下·정正·부정不正 등은 모두 사물의 모양을 이루는 극미들을 가리킨다. 가령 어떤 물체의 모양이 ‘길게’ 보인다면, 이는 ‘장’의 극미가 적집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정正이란 모양이 평평한 것이고, ‘부정’이란 모양이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것을 말한다.
  442. 442)공일현색空一顯色 : 먼 상공을 바라볼 때 보이는 순수한 빛깔을 말한다. 이에 대해 『俱舍論記』 권1(T41, 16c28)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묘고산妙高山의 사변四邊의 공중에서 보이는 각기 하나의 현색顯色을 ‘공일현색’이라 한다. 따라서 『順正理論』 제34권에서는 ‘공일현색이란 공중의 소미로蘇迷盧산에서 나타나는 순색純色을 말한다’고 하였다.”
  443. 443)『俱舍論』 권1(T29, 2b24).
  444. 444)청·황·적·백·빛·그림자·밝음·어둠 등은 단지 순수하게 색깔로서 인식되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형태를 통해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물질(色) 중에서 오직 현색이지 형색은 아닌 것에 해당한다.
  445. 445)여기서 ‘장長 등의 일부인 신표업身表業의 자성’이라고 한 것은 오직 ‘형색’만을 본질로 하는 색色의 예를 든 것이다. 이 문구는 설일체유부에서 행해진 신표업에 관한 독특한 견해를 살펴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 유부에 의하면, 신표업의 본질은 신체적 형태(身形)다. 예를 들어 손발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경우처럼, 신체적 행위의 본질은 신체상의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특정한 형태는 장·단·방·원 등과 같은 형색의 극미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표업의 자성은 형색이라고 한다.
  446. 446)『俱舍論』 권1(T29, 2c4).
  447. 447)무표색無表色 : 소승의 설일체유부에 의하면, 무표색은 신업과 구업으로 인해 내 몸 안에서 무형의 색법이 일어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밖으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에 ‘무표’라고 하고, 또 몸 안의 지·수·화·풍 등의 사대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비록 색이라고는 해도 다른 색법들처럼 보여질 수 있는 성질이나 물리적 장애 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유부에서는 이 무표색은 모두 4대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실색實色이라고 간주하고, 11종의 색에 포함시킨다. 경량부와 대승의 유식종에서는 그것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강력한 사思의 심소가 유발한 선악의 표업에 의해 훈성熏成된 종자 상에서 가립한 것이라고 한다.
  448. 448)『順正理論』 권34(T29, 538c5).
  449. 449)공계색空界色 : 『俱舍論』 권1(T29, 6c9)에 따르면, 문이나 창 또는 입이나 코 등과 같은 모든 내외의 규극竅隙, 즉 구멍이나 틈을 일컬어 ‘공계空界’라고 한다. 이러한 공계는 오직 명암으로만 파악되기 때문에 명암을 본질로 하는 현색의 일종이라고 한다.
  450. 450)『大毘婆沙論』 권122(T27, 635a7)에서 어떤 경우는 다음과 같이 네 구로 분별한다. “현색은 알려지지만 형색은 알려지지 않는 것(顯可了非形)이란 청·황·적·백, 그림자·빛·밝음·어둠을 말한다. 형색은 알려지지만 현색은 알려지지 않는 것(形可了非顯)이란 신표색을 말한다. 현색과 형색이 둘 다 알려지는 것(顯形俱可了)이란 그 밖의 현색이나 형색이 둘 다 알려지는 색이다. 현색도 형색도 둘 다 알려지지 않는 것(顯形俱不可了)이란 공계색空界色을 말한다.”
  451. 451)『大毘婆沙論』 권13(T27, 64a11)에서 어떤 경우는 다음과 같이 네 구로 분별한다. “이와 같은 색들 중에 어떤 것은 현색이 있어서 알려지는 것이지 형색이 있어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니, 청·황·적·백, 그림자·빛·밝음·어둠, 공일현색空一顯色을 말한다. 어떤 것은 형색이 있어서 알려지는 것이지 현색이 있어서 알려지는 것은 아니니, 신표업身表業을 말한다. 어떤 것은 현색과 형색이 있어서 알려지는 것이니, 그 밖의 열두 종류 색을 말한다. 현색도 형색도 아니기 때문에 알려지는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452. 452)『順正理論』 권34(T29, 538c7) 참조.
  453. 453)『識身足論』 권11(T26, 583a14)에서는 다음과 같은 네 구로 분별한다. “현색은 있고 형색은 없는 것(有顯無形)이란 청·황·적·백, 그림자·빛·밝음·어둠, 공일현색空一顯色을 말한다.……형색은 있고 현색은 없는 것(有形無顯)이란 신표업을 말한다. 현색도 있고 형색도 있는 것(有顯有形)이란 현색도 있고 형색도 있는 모든 색을 말한다. 현색도 없고 형색도 없는 것(無顯無形)이란 현색도 없고 형색도 없는 모든 색을 말한다.” 여기서 네 번째 구에 해당하는 ‘현색도 없고 형색도 없는 모든 색’이란, 가령 색법들 중에서 성聲·향香·미味·촉觸처럼 안식의 경계를 제외한 나머지 네 경계들(四塵), 또 직접 지각되지는 않지만 작용을 통해서 그 존재가 알려지는 다섯 가지 감각 기관들(五根), 그리고 무표색 등을 말한다.
  454. 454)오직 빛(光)·밝음(明)만 현색은 있어도 형색은 없는 경우에 해당하고, 그 밖의 청·황·적·백·그림자·어둠 등에는 현색뿐만 아니라 형색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455. 455)『俱舍論』 권1(T29, 2c7).
  456. 456)『俱舍論』 권1(T29, 2c8).
  457. 457)살바다종의 논사들에 의하면, ‘현색과 형색이 둘 다 있다’고 한 것은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인식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지, 그 두 가지가 하나의 극미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그 둘은 동시에 알려지기 때문에, 안처소섭색眼處所攝色은 그 둘을 본질로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현색만이 실재할 뿐 형색은 그 현색들의 화합물에 나타난 가상의 모양에 의거해 가립된 개념일 뿐이라고 한다. 『俱舍論』 권1(T29, 2c9), 같은 책 권13(T29, 68b1) 참조.
  458. 458)표색表色 : 눈으로 파악되는 경계를 색깔과 형태로 구분했을 때, 순수하게 색깔로만 인식되는 색법을 현색顯色이라 하고, 모양으로만 인식되는 색법을 형색形色이라 한다. 그런데 ‘굽히거나 펴거나’ 하는 등 신체적 동작, 즉 신업身業 상에 나타난 모양(형색)들은 앞의 것과 구별되는 별도의 색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표색’이라 가립한다.
  459. 459)『瑜伽師地論』 권1(T30, 279b4).
  460. 460)『顯揚聖敎論』 권1(T31, 483c14) 참조.
  461. 461)『顯揚聖敎論』의 인용문에서 먼저 네 가지 현색들, 즉 “청·황·적·백”을 언급하고, 그 다음에 형색의 종류를 거론하고 나서, 다시 나머지 여덟 가지 현색들, 즉 “연기·구름·먼지·안개·빛·그림자·밝음·어둠”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현색들”이라는 말은 나중에 열거된 여덟 가지 현색들도 함께 다룬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462. 462)형색逈色 : 이에 대해 중국 주석가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허공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와 다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허공처럼 전혀 감지할 만한 물리적 질애를 갖지 않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雜集論』 권1(T31, 696a28)에는 “형색이란 질애나 감촉을 떠난 공간으로 파악되는 것이다.(逈色者。 謂離餘礙觸方所可得。)”라고 하였다.
  463. 463)『雜集論』에 나온 25종의 색법 중에서 형색을 제외하고 나머지 24종류 색법을 네 개의 구로 정리해 보면, 앞의 『瑜伽師地論』과 마찬가지로 오직 세 개의 구만 있다. 말하자면 현색이지만 형색은 아닌 것은 13종류이고, 형색이지만 현색은 아닌 것은 10종류이며, 현색도 아니고 형색도 아닌 것은 표색이다.
  464. 464)『佛地經論』 권1(T26, 293b4).
  465. 465)수용신受用身은 삼신三身의 하나로서 이것은 다시 자수용신自受用身과 타수용신他受用身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자수용신은 부처님 자신이 법락을 홀로 향수하는 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자수용신에 의해 수용되는 자수용의 국토 또한 부처님 스스로 수용하는 국토이므로 대보살이라 해도 볼 수가 없다.
  466. 466)부처님이 수용하고 있는 법락을 다른 보살에게 보여주었을 때 이처럼 보살들에게 보인 몸을 타수용신他受用身이라고 한다. 이 타수용신은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들에게만 보인다고 하는데, 타수용신이 수용하는 국토 또한 십지 이상의 불보살들의 근기에 맞춰 다양하게 나타난다.
  467. 467)『佛地經論』 권1(T26, 293b6).
  468. 468)‘소행所行’의 범어는 gocara이다. go는 ‘소’, cara는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본래 소가 걸어 다니는 목초지牧草地를 뜻한다. 인식론적으로는 감각기관이나 지智에 의해 인식되는 ‘영역’ 혹은 ‘범위’를 뜻한다.
  469. 469)소연박所緣縛·상응박相應縛 : 소연박이란 심식이 인식의 대상(所緣) 때문에 그 작용이 제약되어 속박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안식은 색만 인식하고 그 외의 성·향 등을 대경으로 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한다. 상응박이란 마음이 그와 상응해서 일어나는 견혹見惑이나 수혹修惑에 속박되는 것을 말한다.
  470. 470)『佛地經論』 권1(T26, 293b22).
  471. 471)『佛地經論』 권1(T26, 293c2) 참조.
  472. 472)대자재천大自在天(ⓢ Maheśvara) : 이 천天은 원래 바라문교의 주신인 시바(ⓢ Śiva)인데 이 천을 신봉하는 자들을 대자재천외도大自在天外道라고 한다. 이 외도들은 일인론一因論을 주장하는데, 말하자면 이 천이 일체만물의 주재자로서 이 대자재천이라는 유일한 인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어 나온다고 한다.
  473. 473)유식학적 관점에서는 일체법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기하는 것(依他起)’인데, 일체법의 발생과 관련해서 가장 대립되는 외도들의 견해가 바로 ‘원인 없이(無因) 생긴다’는 설, 그리고 ‘대자재천大自在天과 같은 가장 수승한 원인(勝因)에서 생긴다’는 설이다.
  474. 474)고법지인苦法智忍은 팔인八忍의 하나로서 욕계의 고제苦諦의 이치를 관하여 고법지苦法智를 얻기 바로 전 순간에 일어나는 인가결정忍可決定의 마음인데, 이것은 견도십육심見道十六心의 첫 번째 찰나에 해당한다. 이 고법지인은 견도 직전의 단계인 세제일법世第一法의 수행에 의거해서 일어난 것이다. 세제일법이란 사선근四善根의 하나로서, 세간적인 유루법 중에서는 가장 수승한 것을 말한다. 이 세제일법의 마지막 한 찰나를 거쳐 곧장 견도위見道位에 들어간다. 그런데 세제일법은 세간에 속하고 견도부터는 출세간에 속하기 때문에, 위의 인용문에서 ‘그 밖의 다른 인으로부터 생겨나는’ 사례로 제시된 것이다.
  475. 475)생인生因 : 이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으나, 여기서는 근과近果와 정과正果의 인을 말한다. 근과란 가까운 직접 원인(近因)에 의해 산출된 과보를 말하고, 정과는 도를 닦아서 깨달은 것을 말한다.
  476. 476)이 논사에 의하면, 성인의 뛰어난 출세간의 무루 선근은 정토의 대궁전 같은 외계의 법에 대해서는 증상연增上緣의 역할을 할 뿐이다. 증상연이란 사연四緣의 하나로서 다른 것이 생겨나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무루 선근은 내적인 공덕이고 정토는 외적인 사물이기 때문에, 이 둘 간에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발생시키는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로 도와주는 간접적 관계만 성립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식과는 별도로 외경의 실재를 인정하는 논사의 주장이다.
  477. 477)이것은 유식논사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외계 사물들 간에는 어떤 것이 다른 것에 대해 직접적 인연이 되는 경우는 없고, 식識 안에 있는 훈습된 내적인 종자種子야말로 모든 유위법의 직접적 원인(因緣)이며, 이는 사연 중에서는 인연因緣에 해당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토의 대궁전은 여래의 선정 속에서 현현한 것인데, 이와 같은 수승한 경계는 여래의 출세간의 무루 선근을 직접적 원인으로 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478. 478)‘유식唯識’이라는 교의敎義에 따르면 아뢰야식은 업業의 담지자이기 때문에 중생들은 각자가 지은 업의 총체적 과보(總報)들 중의 하나로서 자기의 기세간器世間을 전변해 내어 수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세간은 유정들이 각각 전변해 내는 것이기는 해도 이전에 지었던 공업共業에서 비롯된 공상종자共相種子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가령 유정 각자가 변현해 낸 기세간에도 유사성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외계의 기세간器世間은 자타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정 각자의 식에 내재된 공상종자가 공동으로 화합해서 하나의 직접적 원인(因緣)으로 작용하고 그 결과로서 서로 공유하는 기세간이 산출되었다는 말인가?≻
  479. 479)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의 요지는 중생들이 각자 전변해 낸 기세간들은 서로 유사하기는 해도 실제로는 각기 개별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자타의 식識이 각기 변현해 낸 국토가 마치 ‘동일한 처소(同處)’처럼 여겨지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식학자들은 등불과 꿈의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마치 하나의 작은 방에 많은 등불이 있고 하나하나의 등불이 각기 온 방을 두루 비추면서 마치 하나의 불빛처럼 보인다거나, 혹은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동일한 꿈을 꾸는 경우와 같다.
  480. 480)『佛地經論』 권1(T26, 294a5).
  481. 481)『佛地經論』 권1(T26, 294a27).
  482. 482)자수용토가 부처님들 각각 자신들만이 향유하는 세계라면, 타수용토는 보살들에게도 보이는 것이다. 이 타수용토는 실제로 여러 부처님들이 변현해 낸 것인데, 보살들이 보기에는 마치 하나의 불토에 한 분의 부처님이 계신 것처럼 나타난다. 그것은 부처님들이 변현해 낸 국토와 몸들이 서로 장애하지 않고 하나의 화합상(一合相)과 한 모습의 불신(一相身)을 이루기 때문이다. 즉 여러 부처님들이 이러한 일합상과 일상신을 섭수하면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곳이 타수용토이다.
  483. 483)『佛地經論』 권1(T26, 294b12).
  484. 484)『佛地經論』 권1(T26, 294b18).
  485. 485)인비인人非人 : 팔부대중은 사람이 아니지만 어떤 때 사람 모양을 하고 나타나기 때문에 인비인이라 한다. 뒤에 나오는 원측圓測의 ‘인비인’에 관한 설명 참조.
  486. 486)전륜왕轉輪王 : 수미사주의 세계를 통솔하는 대왕으로, 몸에 삼십이상을 갖추고 즉위할 때는 하늘로부터 윤보輪寶를 받는데, 이 윤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하게 하므로 전륜왕이라 한다.
  487. 487)사천왕천四天王天은 욕계육천欲界六天의 첫 번째인 사왕천의 주인으로 수미사주를 수호하는 신이다. 유정천有頂天은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의 다른 이름으로 무색계의 맨 꼭대기에 있는 천을 말하며, ‘유정’이란 모든 ‘有의 頂’을 뜻한다.
  488. 488)『大智度論』 권5(T25, 98a19).
  489. 489)『大智度論』 권7(T25, 112b28) 참조.
  490. 490)비비상천非非想天 :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이라고도 한다. 무색계의 제4천이며, 삼계의 맨 위에 있으므로 유정천有頂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에 나는 이는 하지下地와 같은 거친 생각이 없으므로 비유상非有想이지만 그렇다고 세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므로 비무상非無想이라 한다.
  491. 491)이상은 『大智度論』 권22(T25, 227c22) 참조.
  492. 492)『妙法蓮華經』 권5(T10, 43c7).
  493. 493)『大智度論』 권10(T25, 135a28) 참조.
  494. 494)『瑜伽師地論』 권4(T30, 297c22).
  495. 495)『大智度論』 권30(T25, 280a11) 참조.
  496. 496)『大智度論』 권30(T25, 280a13).
  497. 497)『大智度論』 권31(T25, 290b9) 참조.
  498. 498)사지舍脂(ⓢ Śaci) : 여자 아수라의 이름으로, 그 용모가 아름다워 제석천의 사랑을 받아 비주妃主가 된 자라고 한다. 『法華義記』 권1(T33, 582a7) 참조.
  499. 499)『正法念處經』 권18(T17, 107a13) 참조.
  500. 500)『六道伽陀經』 권1(T17, 452c1)의 게송 참조.
  501. 501)여기서 말하는 『地經』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아수라의 다섯 종류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正法念處經』에 나온다. 다음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상地上에 있는 한 종류와 지하대해地下大海의 네 지에 있는 네 종류를 합해서 다섯 지의 아수라가 있다.
  502. 502)유순由旬(ⓢ yojana) : 인도에서 거리를 세는 단위로서, 40리 혹은 30리에 해당한다. 또는 대유순은 80리, 중유순은 60리, 소유순은 40리라고도 한다.
  503. 503)60권 『華嚴經』 권43(T9, 670c11).
  504. 504)『海龍王經』(T15)에는 ‘봉황신鳳凰神’이라는 표현은 있지만 ‘대신봉황’이라는 표현은 찾을 수 없다.
  505. 505)풍륜제風輪際 : 이 세계를 붙들어 받치고 있는 세 가지 윤輪 중에서 맨 밑에 있는 것을 풍륜風輪이라 한다. 넓이는 한량없고, 두께는 16억 유순由旬이다. 이 풍륜의 밑은 허공인데 이것을 공륜空輪이라 하니, 합하면 모두 사륜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풍륜제’란 풍륜의 최하부를 말하며, 전하여 한 세계의 가장 밑바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506. 506)이상은 『觀佛三昧海經』 권1(T15, 646b2) 참조.
  507. 507)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0(T31, 377a15).
  508. 508)『舍利弗問經』 권1(T24, 901c9).
  509. 509)이상은 『舍利弗問經』 권1(T24, 901c5) 참조.
  510. 510)겁비나왕劫比拏王은 고대 인도의 국왕이다. 『玄應音義』 권23에 의거하면, 겁비나왕은 남교살라국南憍薩羅國의 왕으로서 불타와 인연이 매우 깊었다. 부처님은 이 왕을 조복시키기 위해 한량없는 전륜왕을 변현해 내었다고 한다.
  511. 511)『佛地經論』 권1(T26, 294c25).
  512. 512)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5(T31, 263b25).
  513. 513)『解深密經疏』와 『佛地經論』 등에서는 ‘주지住持의 원만’이라 하였고, 『攝大乘論釋』 등에서는 ‘임지任持의 원만’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정토를 지탱시켜 주는 자양분, 즉 법미의 희락을 가리킨다.
  514. 514)식食(ⓢ āhāra) : 견인牽引, 장양長養, 지속持續을 뜻하는 말이다. 중생의 육신 혹은 성자의 법신을 견인하고 장양하여 존재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삼계 중에서 육신肉身을 기를 수 있는 음식을 세간식世間食이라 하고, 지혜(즉 法身)를 기를 수 있는 음식을 출세간식出世間食이라고 한다. 이것을 전체적으로 분류하면 9종류가 있다. ⑴ 세간식은 네 가지다. ① 단식段食은 향香·미味·촉觸 등의 색법으로 된 음식으로서, 여러 근을 이익 되게 한다. ② 촉식觸食은 마음이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취할 때 주·객이 접촉하여 생기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 촉에 의해 감각·의지 등을 기를 수 있고 혹은 육체에 이익을 주기 때문에 이를 식이라 한다. ③ 사식思食이란 의지(思) 작용을 말하는데, 이 의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이것이 생존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으므로 식이라 한다. ④ 식식識食은 신명身命을 존속시킬 수 있는 심식 그 자체를 말하는데, 이것이 신명을 유지시키므로 식이라 한다. 이 중에서 촉식·사식·식식은 삼계에 통하지만, 단식은 단지 욕계에 제한된다. ⑵ 출세간식은 다섯 가지로서 경론에 따라 명칭이 다르지만, 수행자들의 식食을 가리킨다. ① 선열식禪悅食이란 선법禪法의 즐거움이 심신心神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다. ② 법희식法喜食이란 법을 듣고 환희하면, 이것이 선근善根과 혜명慧命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③ 원식願食이란 서원을 발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번뇌를 끊으며 보리를 증득하려는 것이니, 발원으로 인해 자신을 유지시켜 항상 만행을 닦으므로 식이라 한다. ④ 염식念食은 항상 자신이 얻은 출세간의 선법善法을 기억하여 마음에 선정의 뜻을 간직하고 잘 생각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⑤ 해탈식解脫食은 출세간의 성도를 닦아 번뇌의 계박을 끊어 생사의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다.
  515. 515)정체지正體智 : 근본지根本智를 말하며, 두 가지 공空에 의해 드러나는 진여眞如의 이치를 곧장 깨달아 혹장惑障을 끊어 버린 지혜를 말한다.
  516. 516)『佛地經論』 권1(T26, 295a25).
  517. 517)법희식法喜食 : 앞의 각주 514 참조.
  518. 518)선열식禪悅食 : 앞의 각주 514 참조.
  519. 519)『妙法蓮華經』 권4(T9, 27c28).
  520. 520)『妙法蓮華經』 권4(T9, 28b18).
  521. 521)『佛地經論』 권1(T26, 295a18).
  522. 522)『瑜伽師地論』에서 열거한 번뇌의 다른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결結, 박縛, 수면隨眠, 수번뇌隨煩惱, 전纏, 폭류暴流, 액軛, 취取, 계繫, 개蓋, 주올株杌, 구垢, 상해常害, 전箭, 소유所有, 근根, 악행惡行, 누漏, 궤匱, 소燒, 뇌惱, 유쟁有諍, 화火, 치연熾然, 조림稠林, 구애拘礙.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瑜伽師地論』 권8(T30, 314b20) 참조.
  523. 523)여덟 개의 전纏 중에 무참과 무괴를 제외한 그 나머지 여섯 개 번뇌가 나와야 하는데 다섯 가지만 나열되었다. 여기에 ‘수면睡眠’을 추가해야 한다. 『瑜伽師地論』 권8(T30, 314c16) 참조.
  524. 524)이상은 『佛地經論』 권1(T26, 292b20) 참조.
  525. 525)현장 역 『攝大乘論本』 권3(T31, 151a19).
  526. 526)『佛地經論』 권1(T26, 295a24) 참조.
  527. 527)재횡災橫에 대해서도 세 가지 해석이 있다. ① 번뇌와 전구가 동일하다고 보는 이들은 그것들이 재횡의 원인이라 한다. ② 재횡은 번뇌·전구에서 발생한 업 및 얻어진 결과이다. ③ 소지장 등을 재횡이라고 한다. 『佛地經論』 권1(T26, 295a26) 참조.
  528. 528)앞에서 설법의 주인인 ‘박가범薄伽梵’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네 가지 마를 깨뜨리므로 박가범이라 한다’는 문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네 가지 마란 번뇌마煩惱魔·온마蘊魔·사마死魔·천마天魔를 말한다. 먼저 ① 번뇌마란 욕마欲魔라고도 한다. 즉 몸 가운데 108 등의 번뇌가 중생의 심신心神을 어지럽혀서 지혜의 수명을 빼앗아서 결국 보리를 이루지 못하게 만든다. ② 온마란 음마陰魔 또는 오음마五陰魔·오온마五蘊魔·오중마五衆魔·신마身魔라고도 한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등의 오온이 적취해서 생사生死의 고과苦果를 이루며, 이 생사법이 지혜의 수명을 빼앗을 수 있으므로 ‘마’라고 한다. ③ 사마란 중생들의 사대四大가 분산되거나, 요절하여 죽거나 하는 것은 수행인들로 하여금 법法을 잇고 지혜를 이끌어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④ 천마란 타화자재천자마他化自在天子魔라고 한다. 이것은 육욕천六欲天의 가장 높은 여섯 번째 천에 머무는 마왕 및 그 권속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사람들의 뛰어난 선善을 방해하고 현성賢聖의 법을 미워하여 갖가지 근심과 혼란을 일으켜서 출세出世의 선근善根을 이루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마는 전세의 업으로 인해 이 과보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천자업마天子業魔라고도 한다.
  529. 529)『佛地經論』 권1(T25, 295b15).
  530. 530)‘3개월 동안 수명을 연장했다’는 것은 유다수행留多壽行 혹은 유다명행留多命行을 가리킨다. 이것은 부처님이나 아라한 등이 선정의 힘으로 자기 수명을 일정 기간 연장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에 관해서는 『大毘婆沙論』 권126(T27, 656a17) 참조.
  531. 531)자정慈定(ⓢ maitrī-samātti) : 모든 중생에 대해 자비의 염念에 머무는 선정을 말한다. 이는 사무량심四無量心 가운데 자慈를 닦는 정이다.
  532. 532)『佛地經論』 권1(T26, 295b17) 참조.
  533. 533)『佛地經論』 권1(T26, 295b20).
  534. 534)다음의 『佛地經論』의 해석에 따르면 ‘大念慧行’이라는 경문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 해석에 따르면, 이 경문은 ‘대념과 대혜와 대행’으로 번역되며, 이는 보살의 문혜·사혜·수혜와 연관된다. 두 번째 해석에 따르면, 이 경문은 ‘대념과 대혜의 행’으로 번역되며, 이는 여래의 자리와 이타의 두 가지 행과 연관된다.
  535. 535)문소성혜聞所成慧(ⓢ śrutamayi-prajñā) : 들음에 의해 생겨난 지혜를 뜻한다. ‘문’이란 다른 이가 설하는 설법을 듣는 것으로 지혜의 인因이고, ‘혜’는 많이 들음으로써 생긴 지혜로서 청문의 과果라고 할 수 있다. 문혜는 특히 자신이 깊이 사유하거나 직접 체득해서 얻어진 지혜가 아니라 다만 남이 설하는 ‘말’을 많이 들어서 얻어진 지혜이다. 따라서 문혜의 차원에서는 다만 ‘말’을 대상으로 하는 지혜가 있을 뿐이며 아직 그 ‘의미’까지 깊이 이해하는 지혜는 없다.
  536. 536)사소성혜思所成慧(ⓢ cintāmayi-prajñā) : 교법의 의미를 자기 스스로 깊이 사유함으로써 얻은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들었던 말의 의미(이치)를 스스로 사유하되 어떤 때에는 말에 의지해서 의미를 이끌어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의미에 의지해 말을 이끌어 내기도 하는데, 아직 완전히 말을 버리고 의미만을 관하는 단계는 아니다.
  537. 537)수소성혜修所成慧(ⓢ bhāvanāmayi-prajñā) : 이치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나서 그것을 실제로 닦고 익혀서 몸으로 체득함으로써 얻어진 지혜를 말한다. 이 지혜는 말을 버리고 오로지 의미(이치)라는 경계만을 대상으로 하여 관함으로써 얻어진 지혜이다.
  538. 538)『佛地經論』 권1(T26, 295b24).
  539. 539)『佛地經論』 권1(T26, 295c11).
  540. 540)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0(T31, 377a26).
  541. 541)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0(T31, 446b10).
  542. 542)공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 : 이것을 공삼매空三昧(ⓢ śūnyatā-samādhi)라고 한다. 이는 고제의 공空·무아無我라는 두 가지 행상과 상응하는 삼매이다.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겼으므로 아我·아소我所의 둘이 모두 공하다고 관하는 것이다.
  543. 543)무상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 : 이것을 무상삼매無相三昧(ⓢ animitta-samādhi)라고 한다. 이는 멸제滅諦의 멸滅·정靜·묘妙·리離의 네 가지 행상과 상응하는 삼매이다. 열반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상과 남男·여女의 상과 세 가지 유위상의 십상을 떠나 있기 때문에 ‘무상’이라 한다.
  544. 544)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삼매 : 이것을 무원삼매無願三昧(ⓢ praṇihita-samādhi)라고 한다. 이는 고제苦諦·집제集諦·도제道諦의 열 가지 행상과 상응하는 삼매를 말한다. 열 가지 행상은 고제의 고苦·비상非常과 집제의 인因·집集·생生·연緣과 도제의 도道·여如·행行·출出이다. 가령 고제를 관해서 고·무상의 행상을 일으키고 집제를 관해서 인 따위의 행상을 일으키는데, 이 행상들은 싫어할 만한 것들이다. 또 도제는 배나 뗏목과 같은 수단이므로 언젠가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와 같은 삼제三諦의 행상을 반연하는 선정에서는 일체의 법에 대해 원하거나 구함이 없기 때문에 그 선정을 ‘무원’이라 한다.
  545. 545)『佛地經論』 권1(T26, 295c16).
  546. 546)『佛地經論』 권1(T26, 295c29).
  547. 547)『佛地經論』 권1(T26, 296a2).
  548. 548)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0(T31, 377a28).
  549. 549)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0(T31, 446b19).
  550. 550)박가범薄伽梵(ⓢ Bhagavat) :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 중의 하나로서, 흔히 세존世尊으로 의역한다. 온갖 공덕을 갖추고 있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뜻한다. 부처님을 가리키는 열 가지 명호는 여래如來, 응공應供, 정변지正遍知,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세존世尊이다.
  551. 551)『佛地經論』 권2(T26, 298b5).
  552. 552)『佛地經論』 권2(T26, 296b3).
  553. 553)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22).
  554. 554)여소유성如所有性과 진소유성盡所有性 : 『解深密經』 「分別瑜伽品」에서는 요가수행자들이 관해야 할 대상의 하나로서 ‘사물의 궁극성(事邊際性)’을 말한다. 이 사변제성이 바로 진소유성과 여소유성이다. 진소유성이란 가령 오온·십이처·십팔계 등처럼 ‘모든 사물들의 전체’를 포괄하는 것을 말하고, 여소유성이란 가령 ‘진여’처럼 모든 존재의 내적 본질을 뜻하거나 혹은 모든 존재에 관철되는 도리道理 같은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요가행자는 이와 같은 ‘사물들의 전체성’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계속 추구해 가거나, 또는 ‘진여’와 같은 사물의 내적 본질에 대해 깊이 사색함으로써 사물의 궁극성에 도달할 수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뒤의 「分別瑜伽品」 참조.
  555. 555)『佛地經論』 권2(T26, 296b6).
  556. 556)칠진여七眞如 : 이 『解深密經』에서는 특히 여소유성을 일곱 가지 진여(七眞如)로 나누어 자세히 설명하는데, 이는 대소승의 여러 경론에서 언급된 불교적 진리를 일곱 가지로 압축한 것이다. 첫째 유전流轉진여란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모든 행行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는 초기불교에서부터 한결같이 받아들여진 불교적 진리를 말한다. 둘째 상相진여란 모든 법에 내재한 인人·법法의 무아성無我性이다. 이는 대승의 반야사상에서 확립된 이공二空의 진리를 말한다. 셋째 요별了別진여란 모든 것은 오직 식일 뿐이라는 ‘유식’의 진리다. 이는 『解深密經』과 그것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유가행파에서 새롭게 내세운 진리를 말한다. 다음의 네 가지 안립安立·사행邪行·청정淸淨·정행正行의 진여란 각기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진리를 나타낸다. 이 일곱 가지 진여는 “오염법과 청정법 가운데 내재되어 있는 궁극의 진리”이며, 유가행자가 사물의 전체성과 더불어 반드시 관찰해야 할 궁극적 의미에 해당한다. 이상의 칠진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뒤의 「分別瑜伽品」 참조.
  557. 557)『解深密經』 권3 「分別瑜伽品」에서는 지관止觀의 소연所緣으로서 ‘진소유성’과 ‘여소유성’에 대해 자세히 논하는데, 그 경문에 대한 원측의 해석을 가리켜서 ‘제3권의 『경기經記』’라고 하였다.
  558. 558)진제 역 『攝大乘論』 권중(T31, 121c26) 참조.
  559. 559)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6(T31, 196c28) 참조.
  560. 560)이 글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성씨를 가리키는 ‘굉訇’으로 추정하였다.
  561. 561)현장 역 『攝大乘論本』 권중(T31, 141c6), 세친의 『攝大乘論釋』(T31, 347b5) 참조.
  562. 562)현장 역 『攝大乘論本』 권중(T31, 141c7).
  563. 563)『佛地經論』 권2(T26, 296b3) 참조.
  564. 564)이하에 나오는 부처님의 스물한 가지 개별적 공덕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논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원측은 세친의 『攝大乘論釋』, 무성의 『攝大乘論釋』, 그리고 친광의 『佛地經論』의 내용들을 서로 대조해 가며 해석한다.
  565. 565)친광은 “盡虛空性。 窮未來際。”를 여래의 자리自利·이타利他의 공덕이 한량없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구라고 보았기 때문에, ‘뒤의 두 가지를 합해서 해석하였다’고 한 것이다. 『佛地經論』(T26, 297a16) 참조.
  566. 566)지덕智德 : 불과佛果에 갖추어진 세 가지 공덕 중의 하나로서, 일체의 법을 평등하게 관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567. 567)단덕斷德 : 불과에 갖추어진 세 가지 공덕 중의 하나로서, 일체의 번뇌를 단멸시킨 상태를 말한다.
  568. 568)은덕恩德 : 불과에 갖추어진 세 가지 공덕 중의 하나로서, 중생을 구도하려는 원력으로 중생을 구제해 주는 은혜를 말한다.
  569. 569)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b21).
  570. 570)무성은 『攝大乘論釋』에서 여래의 개별적 공덕들에 대해 두 가지로 해석한다. 다음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무성의 앞의 해석’ 또는 ‘무성의 나중 해석’이라는 문구는 각 논에서 첫 번째 해석과 두 번째 해석을 가리킨다.
  571. 571)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09c16).
  572. 572)『佛地經論』 권2(T26, 296b10).
  573. 573)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b23).
  574. 574)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b28).
  575. 575)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27).
  576. 576)『佛地經論』 권2(T26, 296b14).
  577. 577)『열반경』 권3에서 열반에는 열 가지 상이 없다고 하는데, 그 열 가지는 색상色相·성상聲相·향상香相·미상味相·촉상觸相·생상生相·주상主相·괴상壞相·남상男相·여상女相이다.
  578. 578)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b28).
  579. 579)말니末尼 : 마니 구슬을 가리킨다. 용왕의 뇌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사람이 이 구슬을 가지면 독이 해칠 수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공덕이 있다고 한다. 혹은 제석천왕이 가진 금강저가 아수라와 싸울 때에 부서져서 남섬부주에 떨어진 것이 변하여 이 구슬이 되었다고도 한다. 혹은 지나간 세상의 모든 부처님의 사리가 불법이 멸할 때에 모두 변하여 이 구슬이 되어 중생을 이롭게 한다고 한다.
  580. 580)하늘 음악 : 천고天鼓에서 나오는 음악을 말한다. 이 천고는 천天의 업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묘한 음악이 나와 방일한 대중들을 경각시킨다고 한다. 이 소리는 무주無主·무작無作·무기無起·무멸無滅이지만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에 부처님의 설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581. 581)무성의 『攝大乘論釋』 권10(T31, 443b17).
  582. 582)성주聖住·천주天住·범주梵住 : 세 종류 머묾에 대해서는 ‘경을 설한 장소’를 밝힌 곳에서 ‘①-나. 머무는 곳의 차별을 바로 해석함’(pp.230~232)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583. 583)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해탈문 : 이것을 삼삼매三三昧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경을 설한 장소’를 밝힌 곳에서 ‘①-나.-더) 문門의 원만’에 대한 해석과 역주(pp. 293~295) 참조.
  584. 58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1).
  585. 585)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28).
  586. 586)육시六時 : 인도에서 하루의 밤낮을 여섯 때로 나눈 것을 말한다. 낮 시간은 신조晨朝·일중日中·일몰日沒의 세 시로 나누고, 밤 시간은 초야初夜·중야中夜·후야後夜로 나눈다.
  587. 587)『佛地經論』 권2(T26, 296b17).
  588. 588)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2).
  589. 589)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6(T31, 196a2).
  590. 590)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6).
  591. 591)『佛地經論』 권2(T26, 296b19).
  592. 592)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3).
  593. 593)일체종지一切種智(ⓢ sarvathā-jnāna) : 삼지三智의 하나. 『大智度論』에 따르면, 넓은 의미에서는 일체지一切智는 별 차이가 없다는 설도 있지만, 한편에서는 삼지 중에서 일체지와 상대해서 오직 부처님만이 획득할 수 있는 지이다. 따라서 『大智度論』 권27(T25, 259a19)에서는 “부처님은 제법의 총상總相·별상別相을 완전히 다 아시기 때문에 일체종지라고 한다.……중략……일체지는 성문聲聞·벽지불의 사事이고, 도지道智는 보살들의 사이며, 일체종지는 불사佛事이다.”라고 하였다.
  594. 59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11).
  595. 595)『佛地經論』 권2(T26, 296b21).
  596. 596)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5).
  597. 597)교증이법敎證二法 : 교도敎道·증도證道 혹은 교행敎行·증행證行을 말한다. 언어로 설해 놓은 것이 교인데, 이 교에 기반하여 실천하는 것을 교도 혹은 교행이라 하고, 깨달음의 경계에 계합하는 진리의 실천을 증도 혹은 증행이라 한다.
  598. 598)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14).
  599. 599)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4) 참조.
  600. 600)『佛地經論』 권2(T26, 296b24).
  601. 601)『佛地經論』 권2(T26, 297b15) 참조.
  602. 602)소행所行(ⓢ gocara) : go는 ‘소’, cara는 ‘걸어 다닌다’는 뜻으로 본래는 소가 걸어 다니는 목초지牧草地를 뜻하였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감각기관이나 지智에 의해 인식되는 ‘영역’ 혹은 ‘경계’를 뜻한다. 이하에서는 이 단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는데, 그에 따르면 인식의 경계라는 뜻 이외에도 ‘신분의 고하高下’ 혹은 ‘여덟 종류 바람’ 등을 뜻할 수도 있다.
  603. 603)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5).
  604. 604)이상의 팔법八法은 팔풍八風이라고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들로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에 ‘여덟 가지 바람’이라고 한다.
  605. 605)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15) 참조.
  606. 606)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6).
  607. 607)『佛地經論』 권2(T26, 296b26).
  608. 608)『佛地經論』 권2(T26, 297b17) 참조.
  609. 609)안립安立 : 언어·상相을 시설施設하여 갖가지 사물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을 ‘비안립’이라고 한다. ‘비안립非安立’은 상대적 차별을 초월하는 것으로 언어·상으로 표시되는 것이 아니다.
  610. 610)불가사의하여 범부가~안립한 법은 : 이 문장은 현장이 번역한 세친의 『攝大乘論釋』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다음의 협주에 나온 양梁 『攝大乘論釋』의 인용문에 들어가야 할 문구가 여기에 잘못 기입된 듯하다. 이하의 원문 교감주 참조.
  611. 611)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8).
  612. 612)이 문구는 앞의 세친의 인용문에 잘못 기입되었던 것이고 본래는 양梁 『攝大乘論釋』의 인용문에 들어가야 할 문구이다. 따라서 여기에 옮겨 문구를 추가하였다.
  613. 613)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6(T31, 196a19) 참조.
  614. 61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22).
  615. 615)『佛地經論』 권2(T26, 296c2) 참조.
  616. 616)『佛地經論』 권2(T26, 297b19) 참조.
  617. 617)수기授記(ⓢ vyākaraṇa) : 본래 십이부경十二部經의 하나로서 교설을 분석하거나 문답의 방식으로 교리를 해석하는 것을 말하는데, 전하여 제자가 미래세에 깨달을 일이나 혹은 사후에 태어날 곳을 예언하는 것 등을 가리키게 되었다.
  618. 618)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12).
  619. 619)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26).
  620. 620)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11) 참조.
  621. 621)『佛地經論』 권2(T26, 296c5).
  622. 622)『佛地經論』 권2(T26, 297b23) 참조.
  623. 623)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13).
  624. 62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a28), 같은 책(T31, 411a12) 참조.
  625. 625)『佛地經論』 권2(T26, 296c7).
  626. 626)『佛地經論』 권2(T26, 297b25) 참조.
  627. 627)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14).
  628. 628)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3).
  629. 629)『佛地經論』 권2(T26, 296c10).
  630. 630)『佛地經論』 권2(T26, 297b28) 참조.
  631. 631)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15).
  632. 632)무성의 『攝大乘論釋』(T31, 410b5).
  633. 633)『佛地經論』 권2(T26, 296c12).
  634. 634)『佛地經論』 권2(T26, 297c1) 참조.
  635. 635)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17).
  636. 636)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7).
  637. 637)기원림祇洹林(ⓢ Jetavana) : 중인도 교살라국憍薩羅國 사위성舍衛城의 남쪽에 있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을 말한다. 이 기원림은 제타(祇陀) 태자가 소유했던 숲을 가리킨다.
  638. 638)숙주지宿住智 : 육신통六神通 중의 하나다. 나와 중생들의 지난 과거의 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을 명백하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특히 무학위에서는 한 생 전뿐만 아니라 무한한 과거의 생에서 자기가 태어났던 곳, 성씨, 자기가 먹었던 음식, 자기가 느꼈던 고통과 즐거움, 자기가 했던 말 등을 모두 낱낱이 기억해 낼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지를 무학삼명無學三明 중의 하나로 간주하기도 한다.
  639. 639)정광불定光佛 : 과거세에 출현하여 일찍이 석존에게 성불하리라 수기를 내리신 부처님을 가리킨다.
  640. 640)『佛地經論』 권2(T26, 296c15).
  641. 641)승해勝解 : 대상을 확정해서 판단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642. 642)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b19).
  643. 643)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11).
  644. 64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19).
  645. 645)『佛地經論』 권2(T26, 296c20).
  646. 646)『佛地經論』 권2(T26, 297c8).
  647. 647)원문은 “無者無自性異分別者”라고 되어 있는데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이 협주는 『佛地經論』의 “분별이 없고 차이의 분별도 없다.(無有分別無異分別)”는 문구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협주에서 먼저 ‘분별이 없다(無有分別)’는 문구를 해석했으므로 다음에는 ‘차이의 분별도 없다(無異分別)’는 문구를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無’ 다음의 네 자 ‘者無自性’을 삭제하고 ‘無異分別者’로 수정해야 전후 문맥이 명확해진다. 이에 따르면 ‘분별이 없다’는 것은 자성분별自性分別이 없다는 뜻이고, ‘차이의 분별도 없다’는 것은 차별분별差別分別이 없다는 뜻이다. 자성분별과 차별분별에 대해서는 이하의 주석 참조.
  648. 648)앞의 『佛地經論』에서 “분별이 없고 차이의 분별도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였다. 언어철학적 맥락에서 보면, 하나의 단어(名)에 의해 드러나는 것을 자성이라 하고, 구절(句)에 의해 드러나는 것을 차별이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명제적 판단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가령 ‘사과는 빨갛다’에서 주어(또는 단어)에 의해 지시되는 것을 자성이라 이름한다면, 뒤의 술어에 의해 그 자성의 차별적 의미가 드러나므로 술어 자리에 놓인 것을 ‘차별’이라 이름한다. 여래에게는 이와 같은 언어적 분별이 없기 때문에 ‘분별(자성분별)도 없고 차이의 분별(차별분별)도 없다’고 해석하였다.
  649. 649)『佛地經論』 권2(T26, 297c11).
  650. 650)이 경문에 대해서 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19)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교화되는 유정들의 삿된 행과 바른 행과 삿되기도 바르기도 한 행들 가운데서 (여래가) 응현하시는 상相을 분별할 수 없다. 이런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음에 ‘무릇 나타내신 몸들을 분별할 수가 없다’고 설하였다.(即於所化有情邪正及俱行中。 所應現相不可分別。 爲現此事。 故次說言凡所現身不可分別。)”
  651. 651)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6(T31, 196b18).
  652. 652)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20).
  653. 653)이류보살異類菩薩 : 불과佛果의 지위가 아닌 그 밖의 인위因位에 있는 보살들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특히 지전地前의 보살을 가리킨다.
  654. 65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15).
  655. 655)호념護念 : 불보살이나 천신 등이 불교도를 보호하여 여러 장애와 만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을 말한다.
  656. 656)『金剛般若波羅密經論』 권1(T25, 781b23).
  657. 657)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21).
  658. 658)『妙法蓮華經』 권1 「方便品」(T4, 8a17).
  659. 659)『佛地經論』 권2(T26, 296c23).
  660. 660)『佛地經論』 권2(T26, 297c12) 참조.
  661. 661)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23).
  662. 662)사덕四德 : 여래의 법신에 갖추어진 상常·낙樂·아我·정淨의 네 가지 덕을 말한다.
  663. 663)『解深密經』의 “得佛無二住勝彼岸”이라는 경문은 세친의 『攝大乘論釋』에 나온 “至無二佛住波羅蜜”이라는 경문과 상응하는데, 이 경문에 대해 세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여래법신을 ‘불주佛住’라고 하고, 삼세의 여래들이 이에 머무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둘 없음(無二)’이라 한다. 둘 없기 때문에 평등하고, 사덕의 궁극(四德究竟)이기 때문에 바라밀이라 이름한다.” 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6(T31, 196b28) 참조.
  664. 66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20).
  665. 665)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21) 이하 참조.
  666. 666)『佛地經論』 권2(T26, 296c26).
  667. 667)이 해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佛無二住)’이란 선정에서 머무는 경계를 나타낸 말이다.
  668. 668)이 해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이란 선정 자체를 가리킨 말이다.
  669. 669)이 해석에 따르면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이란 선정과 그 선정의 경계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다.
  670. 670)『佛地經論』 권2(T26, 297c18).
  671. 671)여기서 ‘승해를 해탈이라 한다’고 했는데, 본래 승해勝解(ⓢ adhimokṣa)는 심소법의 하나로서 대상 경계에 대해 확정해서 판단하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그런데 지혜의 판단력에 의해 번뇌를 끊고 해탈을 얻는다고 보는 관점에서는 이 승해를 해탈의 본질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대비바사론』에서는 “모든 법 중에서 오직 두 가지 법이 해탈의 자성이다. 즉 무위법에서는 택멸이 해탈의 자성이고, 유위법에서는 대지법에 속하는 승해가 해탈의 자성이다.”라고 하였으니, 요컨대 택멸은 무위해탈의 자성이고 승해는 유위해탈의 자성이라는 것이다. 『大毘婆沙論』 권101(T27, 524c10) 참조.
  672. 672)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27).
  673. 673)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b25).
  674. 674)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25).
  675. 675)자수용신自受用身 : 다른 보살이 보고 들을 수 없는 불신佛身으로서 부처님 자신이 얻은 법락法樂을 홀로 자기만이 즐기는 몸이다.
  676. 676)타수용신他受用身 : 타수용신이란 초지初地 이상의 보살들이 볼 수 있고 부처님 자신이 받은 법락이 다른 보살에게 보인 불신이다.
  677. 677)『佛地經論』 권2(T26, 297a3).
  678. 678)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7c29).
  679. 679)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6(T31, 196c10).
  680. 680)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1).
  681. 681)『攝大乘論釋』의 인용문 중 “마치 세계에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는 것처럼 불지佛地도 이와 같아서……”라는 문장은 유사한 실례(喩法)를 들어서 ‘무중변無中邊’에 대해 해석한 것이다.
  682. 682)‘무변無邊한 세계의 방처方處’가 의지하는 곳(所依)이라면 모든 부처님의 삼신三身은 ‘의지하는 자(能依)’에 해당한다. 능의인 모든 삼신이 소의인 세계 안에 두루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683. 683)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1a27).
  684. 684)이것은 열일곱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경문의 문구다.
  685. 685)이것은 열여섯 번째 공덕을 나타낸 경문의 문구다.
  686. 686)무성에 따르면, 열여섯 번째 공덕에 해당하는 “부처님의 둘 없는 머묾에서의 뛰어난 바라밀을 얻으셨고(得佛無二住勝彼岸)”라는 경문은 ‘다르지 않음(非異)’을 설한 것이고, 열일곱 번째 공덕에 해당하는 “서로 뒤섞이지 않는 여래의 해탈의 궁극적 묘지로(不相間雜如來解脫妙智究竟)”라는 경문은 ‘하나가 아님(非一)’을 설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그 상相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열여덟 번째 공덕인 ‘하나가 아니다’라고 하는 근거와 ‘다르지도 않다’고 한 근거를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어서 “이와 같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제기될 수 있다.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열여덟 번째로 “중간도 가장자리도 없는 불지佛地의 평등을 증득하시고(證無中邊佛地平等)”라고 설했다. 『攝大乘論釋』 권5(T31, 411a24) 참조.
  687. 687)『佛地經論』 권2(T26, 297a10).
  688. 688)상변常邊 : 극단적인 상견常見을 말한다. 상견이란 단견斷見의 대칭어로서, 세계가 상주불변常住不變한다거나 자아가 불멸한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689. 689)단변斷邊 : 극단적 단견斷見을 말한다. 단견이란 상견常見의 대칭어로서, 세계와 내가 끝내 단멸하여 사라진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690. 690)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8a3).
  691. 691)모든 부처님들의 법계는 영원히 모든 번뇌의 장애가 끊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장 청정한 법계(最清淨法界)’라고 하고, 이 법계로부터 일어난 교법들을 ‘동등하게 흘러나온 것(等流)’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해 이와 같은 법계등류法界等流의 교법을 일으키고, 중생들은 그 정법을 들음으로써 진리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무루종자無漏種子를 훈습시키게 된다. 무성의 『攝大乘論釋』 권3(T31, 394b29) 참조.
  692. 692)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9).
  693. 693)정지正智 : 정체지正體智의 줄임말이다. 근본지根本智·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한다. 직접 법공·아공에 의해 현현된 진여의 이치를 증득하고 혹장을 끊어 버린 지혜로서, 무차별無差別의 세계를 비추는 지智이다.
  694. 694)후지後智 : 후득지後得智의 줄임말이다. 후득차별지後得差別智라고 하며 근본지 이후에 획득된 지혜로서 유위有爲의 사경事境에서 일어나는 지혜로서, 차별差別의 세계를 비추는 지智이다.
  695. 695)『佛地經論』 권2(T26, 297a15).
  696. 696)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8a5).
  697. 697)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14).
  698. 698)세친의 『攝大乘論釋』 권5(T31, 348a6).
  699. 699)무성의 『攝大乘論釋』 권5(T31, 410c18).
  700. 700)‘두 가지를 합해서 해석했다’는 것은 친광이 ‘盡虛空性’과 ‘窮未來際’를 합해서 하나의 공덕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701. 701)『佛地經論』 권2(T26, 297a17).
  702. 702)『佛地經論』 권2(T26, 298a1).
  703. 703)친광은 모든 공덕들을 초初·후後의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했는데 이 중에서 처음의 해석을 바른 해석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704. 704)『大智度論』 권4 「初品中菩薩釋論」(T25, 84c13) 참조.
  705. 705)사불四佛 : 『金光明經』 권1의 설명에 따르면, 사불이란 동서남북의 사방 불국토에 거주하는 네 부처님을 말한다. 첫째는 동방의 묘희국妙喜國에 머무는 아촉불阿閦佛(ⓢ Akṣobhya)이고, 둘째는 남방의 환희국歡喜國에 머무는 보상불寶相佛(ⓢ Ratnaketu)이며, 셋째는 서방의 극락국極樂國에 머무는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āyus)이고, 넷째는 북방의 연화장엄국蓮華莊嚴國에 머무는 미묘성불微妙聲佛(ⓢ Dundubhisvara)이다.
  706. 706)진제가 『金光明記』에서 말한 세 번째 의미는 『合部金光明經』 「懺悔品」에 나오는 ‘신상信相보살의 꿈’과 연관된 일화에서 비롯된다. 그에 따르면, 신상보살이 꿈속에서 신비한 황금북을 보았는데, 어떤 이가 그것을 치자 큰 음성이 울려 퍼지며 참회의 게송을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 신상보살이 꿈에서 깨어 그가 들었던 것을 기억해 내고, 새벽이 되자 왕사성을 나와 부처님이 계신 기사굴산에 가서 그가 본 황금북과 들었던 참회의 게송에 대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경의 「懺悔品」에 나오는 긴 게송은 바로 신상보살 자신이 꿈속에서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合部金光明經』 「懺悔品」 권2(T16, 365b20) 참조.
  707. 707)『大智度論』 권4(T25, 84c19) 참조.
  708. 708)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문들이 직접 세존에게 교화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성문의 자만심을 버리게 하는 일임을 말한다. 예를 들어 『佛地經論』에는 “이미 청정한 모든 대성문들이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거나 자만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다.”라는 문장 뒤에 다시 부연설명하면서, “말하자면 대중들 앞에서 대성문중이 가까이서 세존을 대면한 채 직접 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謂於衆前。 大聲聞衆。 近對世尊。 親受化故。)”라는 문구를 덧붙인다. 『佛地經論』 권2(T26, 298b14) 참조.
  709. 709)이 여덟 번째 해석은 이전의 일곱 번째 해석에 내용적으로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석轉釋한다’고 하였다. 일곱 번째 해석에서는 경의 서두에서 성문중을 보살중보다 먼저 나열한 이유는 ‘보살들이 성문에게 공경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는데, 그에 이어서 여덟 번째 해석에서는 보살이 성문에 대한 공경심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 의도를 해석하였다. 즉 대승의 보살들조차도 오히려 소승의 성문을 공경하기 때문에 그 밖의 대중들이 성문을 공경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710. 710)『佛地經論』 권2(T26, 298b12).
  711. 711)『大智度論』 권4에 의하면, 위로부터 세면 보살,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등의 순서로 나열되고, 아래로부터 세면 우바이, 우바새, 비구니, 비구, 보살 등의 순서로 나열된다. 위의 문장에서 ‘성문의 네 무리’라 한 것은 보살 이외의 네 무리를 가리킨다.
  712. 712)『大智度論』 권4(T25, 84c12) 참조.
  713. 713)이것은 『瑜伽師地論』 권79(T30, 736c28)의 문답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714. 714)변역신變易身 : 아라한·벽지불·대력보살 등이 삼계 밖에서 뛰어나고 미묘한 과보신, 즉 의생신意生身을 받는 것을 말한다. 그 몸은 자비와 원력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에 수명이나 육체를 모두 자유롭게 변화시키거나 뒤바꿀 수 있어서 일정한 제한이 없다.
  715. 715)분단신分段身 : 삼계 내에서 거친 과보의 몸을 받는 것을 말하는데, 그 몸은 수명의 장단이나 육체의 대소 등에 일정한 제한을 받는 것이므로 ‘분단신’이라 한다.
  716. 716)충신虫身 : 분단신分段身, 즉 육신을 가리킨다. 육신에는 벌레가 있기 때문에 충신이라 한다. 『成唯識論演祕』 권6(T43, 950a6) 참조.
  717. 717)『大智度論』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다시 수보리여, 일반인들의 몸에는 8만 마리 벌레들이 그 몸을 침식하고 있지만, 아비발치보살마하살의 몸에는 이런 벌레가 없다.”〔『大智度論』 권97(T25, 571a5) 참조.〕 여기서 아비발치보살이란 불퇴전不退轉보살이다. 아비발치의 지위에 대해 여러 설들이 있는데, 이 『大智度論』에서는 특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여 육신肉身을 버리고 법성신法性身을 얻은 팔지 이상의 보살을 말한다. 따라서 위의 인용문에서 ‘칠지까지는 충신인 육신을 버리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718. 718)『佛地經論』 권2(T26, 298b20).
  719. 719)『佛地經論』 권2(T26, 298c3).
  720. 720)구마라집 역 『摩訶般若波羅蜜經』 권1 「序品」(T8, 17a7) 참조. 이 경에서는 “보살·비구들과 함께……”라는 문구에서 ‘與’ 자 대신에 ‘共’ 자를 쓴다. 따라서 원측은 ‘與’는 ‘共’과 같다고 한 것이다.
  721. 721)『大智度論』 권3(T25, 79b24).
  722. 722)『佛地經論』 권2(T26, 298c13).
  723. 723)96종류 외도 : 부처님의 전후로 인도에서 출현한 외도의 학파들을 가리킨다. 외도의 수에 관해서는 많은 이설이 있으나 96종 외도와 95종 외도의 두 가지 설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 96과 95의 두 숫자가 산정된 근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육사외도六師外道의 여섯 스승에게 각기 15명의 제자가 있어서 모두 96인이 된다. 또 외도의 여섯 스승에게는 각기 16종의 학습해야 할 법法이 있어서 한 법은 자기가 배우고 나머지 15종은 각기 15제자에게 가르친다고 하는데 사도師徒의 논論을 합하면 96종이다. ② 오대외도五大外道인 수론數論·승론勝論·이계離繫·수출獸出·편출遍出에 각기 18부의 갈래가 있어서 본말을 합하면 95종이 된다.
  724. 724)『大智度論』 권3(T25, 79b25).
  725. 725)『佛地經論』 권2(T26, 298c15) 참조.
  726. 726)『成實論』 권3(T32, 258c24).
  727. 727)『佛地經論』 권2(T26, 298c14).
  728. 728)『瑜伽師地論』 권82(T30, 759b14).
  729. 729)『十地經』 권2(T10, 543a16)의 문구는 “從他聞聲。 而解了故。 隨聲聞行故。 成聲聞乘。”이라 되어 있고, 『十地經論』에서 인용된 경문에는 “從他聞聲。 而通達故。 聞聲意解。 成聲聞乘。”으로 되어 있다.
  730. 730)『十地經論』 권4(T26, 148b26) 참조.
  731. 731)이·사 두 가지가 화합한다는 것은 승가를 구성하는 두 가지 조건으로서 이화理和와 사화事和를 말한다. ‘이화’란 다 같이 불교의 교의를 존중하고 따르면서 열반과 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사화’란 여섯 가지가 있다. 계戒의 화합으로 인해 수행이 같고, 견見의 화합으로 인해 이해가 같으며, 신身의 화합으로 인해 머무는 곳이 같고, 이利의 화합으로 인해 균등하게 하며, 구口의 화합으로 인해 언쟁이 없고, 의意의 화합으로 인해 똑같이 기뻐하는 것이다.
  732. 732) 『大智度論』 권3(T25, 80a10) 참조.
  733. 733)견소단의 112가지 분별추중번뇌 : 번뇌의 종류를 나누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를 128가지로 나누는 경우가 있다. 이 128가지는 욕계·색계·무색계에 걸쳐 일어나는 번뇌로서 사제四諦의 이치에 미혹하여 일어난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를 총칭한 것이다. 이 중에서 견도에서 사제의 이치를 관함으로써 끊어지는 분별추중번뇌는 다음과 같다. 먼저 욕계에는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이치에 미혹하여 각기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와 오견五見의 번뇌가 일어나므로 모두 마흔 가지고, 색계에는 고·집·멸·도에 대해 각기 탐·치·만·의와 오견의 번뇌가 있으므로 모두 서른여섯 가지이며, 무색계에는 고·집·멸·도에 대해 탐·치·만·의와 오견의 번뇌가 있으므로 모두 서른여섯 가지다. 이와 같이 견도에서 끊어지는 삼계의 번뇌를 합하면 모두 112가지이다.
  734. 734)견소단·수소단의 128가지 번뇌 : 견소단의 112가지와 수소단의 열여섯 가지를 합하여 128가지 번뇌라고 한다. 견소단의 112가지는 앞의 주석에서 나열한 것과 같고, 수소단의 열여섯 가지는 ‘대치하여 닦는 중에 일어나는 집착’으로서 이것도 욕계·색계·무색계에 걸쳐서 일어난다. 욕계에는 탐貪·진瞋·치癡·만慢·신견身見·변견邊見의 여섯 가지가 있고, 색계에는 탐·치·만·신견·변견의 다섯 가지가 있고, 무색계에는 탐·치·만·신견·변견의 다섯 가지가 있어서, 모두 합하면 열여섯 가지다.
  735. 735)『佛地經論』 권2(T26, 298c19).
  736. 736)날카롭거나 무딘 근본번뇌(利鈍根本煩惱) : 탐貪·진瞋·치癡·만慢·의疑와 오견五見(유신견·변집견·사견·견취견·계금취견)을 열 가지 근본번뇌라고 한다. 이 중에 성질이 맹렬하고 날카로운 뒤의 다섯 가지 견을 오리사五利使라고 하고, 그 성질이 상대적으로 느리고 둔한 앞의 다섯 가지 번뇌를 오둔사五鈍使라고 한다. 여기서 사使는 번뇌와 같은 말이다.
  737. 737)이상은 『大智度論』 권3(T25, 81a29) 참조.
  738. 738)『佛地經論』 권2(T26, 298c25).
  739. 739)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8(T31, 206b17).
  740. 740)정위正位에 든 보살 : 보살의 경우 인人·법法의 무아를 통달한 지위를 ‘정위’라고 한다.
  741. 741)『大智度論』 권72(T25, 564a10).
  742. 742)분별론자分別論者 : 이들의 정체에 대한 이설異說이 있는데, 상좌부上座部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부파로 여겨진다. 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각주 184 참조.
  743. 743)소승의 구사종에서 해탈을 유위해탈有爲解脫과 무위해탈無爲解脫로 구분한다. 유위해탈이란 곧 무학아라한의 정견正見과 상응하는 승해勝解를 가리킨다. 이 승해는 심소법 중에서 십대지법十大地法의 하나이므로 ‘유위해탈’이라 한다.
  744. 744)『佛地經論』 권2(T26, 298c27) 참조.
  745. 745)견번뇌와 애번뇌를 견애번뇌見愛煩惱라고 병칭하기도 한다. 견번뇌란 아견我見·사견邪見 등과 같이 이치(理)에 미혹해서 생기는 모든 번뇌를 가리키고, 애번뇌란 탐욕貪欲·진에瞋恚 등과 같이 사事에 미혹해서 생기는 번뇌를 가리킨다.
  746. 746)『大智度論』 권3(T25, 81a21).
  747. 747)담무참曇無讖 역 『大般涅槃經』 권25(T12, 515b14) 참조.
  748. 748)퇴법아라한退法阿羅漢 : 6종의 아라한 중에서 근기가 가장 둔한 아라한으로서, 질병과 같은 나쁜 인연을 만나면 한 번 얻었던 아라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 자이다.
  749. 749)시해탈時解脫 : 대시해탈待時解脫이라고도 한다. 이는 6종 아라한 중에서 앞의 다섯 부류, 즉 퇴법退法·사법思法·호법護法·안주법安住法·감달법堪達法의 아라한을 가리킨다. 이 부류의 아라한들은 여섯 번째 부동법不動法에 비하면 성품이 둔근이고 뛰어난 인연의 시기를 만나지 못하면 멸진정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대시待時’라고 하고, 그의 마음은 번뇌장에서 벗어났으므로 ‘해탈’이라 한다.
  750. 750)『大智度論』 권3(T25, 80b12) 참조.
  751. 751)학처學處(ⓢ śikṣāpada) : ‘배우는 곳(所學之處)’을 뜻하며 일반적으로 계율戒律을 가리킨다. 즉 비구나 비구니들이 계율을 학습할 때 준수하는 계율의 조목戒條인데, 예를 들면 오계五戒·팔계八戒·십계十戒 등을 말한다.
  752. 752)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 prātimokṣa-saṃvara) : 수계한 작법에 의지하여 오계·십계·구족계具足戒 등을 받아 지녀서, 몸이나 입으로 짓는 모든 악업을 하나하나 따로따로 해탈하도록 하는 계를 말한다. 또는 바라제목차율의波羅提木叉律儀라고도 한다. 이 율의에는 여덟 가지가 있는데, 즉 비구(苾芻)·비구니(苾芻尼)·정학正學·근책勤策·근책녀勤策女·근사近事·근사녀近事女·근주近住의 율의다. 이상의 여덟 가지 율의에서 하루 동안 수지하는 근주남녀近住男女의 팔재계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곱 가지는 모두 형체와 목숨이 끝날 때까지 수지해야 하는 것이다.
  753. 753)전다라旃陀羅(ⓢ caṇdāla) : 인도의 계급제도에서 수다라 계급보다 아래인 최하의 종족으로서 옥졸獄卒·판매販賣·도재屠宰·어렵漁獵 등의 직종에 종사하는 무리다. 마누법전에 실린 바에 따르면, 전다라는 모두 수다라 아버지와 바라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종이라 한다.
  754. 754)『維摩詰所說經』 권2(T14, 549a9).
  755. 755)이상은 『佛地經論』 권2(T26, 299a1) 참조.
  756. 756)『佛地經論』 권2(T26, 299a6) 참조.
  757. 757)『佛地經論』 권2(T26, 299a9).
  758. 758)『佛地經論』 권2(T26, 299a12).
  759. 759)『瑜伽師地論』 권70(T30, 689b17).
  760. 760)『瑜伽師地論』 권25(T30, 422c28).
  761. 761)『瑜伽師地論』 권83 「攝異門分」(T30, 761a29) 참조.
  762. 762)『大智度論』 권83(T25, 641c1)과 현장 역 『大般若經』 권461(T7, 331c28) 참조.
  763. 763)『佛地經論』 권2(T26, 299a22).
  764. 764)요인了因 : ‘생인生因’과 대칭되는 말이다. 마치 곡식의 종자에서 싹이 나오듯 본래 갖추어진 법성의 이치는 모든 선법을 발생시키는 원인이므로 ‘생인’이라 하는 데 대해서, 마치 등불이 사물을 비추듯 지혜로 그 법성의 이치를 비춤으로써 어떤 결과가 명료하게 드러나도록 보조하는 것을 ‘요인’이라 한다. 여기서는 ‘지혜’를 가리키는 말이다.
  765. 765)이 협주의 문구는 이전에 진술된 ‘출혜’에 대한 해석 뒤로 옮겨야 할 듯하다. 혹은 ‘출혜’와 ‘승결택혜’가 넓은 의미에서 모두 ‘생사를 벗어나는 지혜’라는 말일 수도 있다.
  766. 766)『佛地經論』 권2(T26, 299a15).
  767. 767)진기소유盡其所有와 여기소유如其所有 : 진소유성盡所有性과 여소유성如所有性을 뜻하며, 요가수행자가 관해야 할 네 가지 인식 대상 중에서 사변제성事邊際性(ⓢ vastuparīttatā)에 해당한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의 「分別瑜伽品」 참조.
  768. 768)『瑜伽師地論』 권83(T30, 761a18) 참조.
  769. 769)삼명三明 : 무학삼명無學三明, 즉 무학위에 갖추어진 세 가지 지혜(三明)를 가리킨다. 여기서 ‘명明’이란 ‘지혜’를 뜻한다. 무학위에서는 육신통六神通 중에서 특히 숙주지통宿住智通·사생지통死生智通·누진지통漏盡智通을 통해 과거·미래·현재에 대한 모든 일을 밝게 알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지혜를 무학삼명이라고 한다.
  770. 770)숙주수념지증통명宿住隨念智證通明 : 과거세의 모든 일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무학은 지나간 한 생 전뿐만 아니라 무한한 과거의 생에서 자기가 태어났던 곳이나 종種·성姓, 자기가 먹었던 음식, 자기가 느꼈던 고苦·낙樂, 자기가 했던 말 등을 모두 낱낱이 기억해 낼 수 있다고 한다.
  771. 771)사생지증통명死生智證通明 : 미래세의 모든 일을 아는 지혜로서 청정안淸淨眼이라고도 한다. 무학은 모든 중생이 죽을 때와 태어날 때를 알며, 각자가 행한 선업·악업의 차이에 따라 미래생에 어디에서 태어나는지 등에 대해 모두 알 수 있다.
  772. 772)누진지증통명漏盡智證通明 : 현재세의 모든 일에 대해 잘 아는 지혜를 말한다. 무학은 고·집·멸·도의 사제의 인과의 도리를 잘 통달하여 유루의 번뇌를 끊고 무루의 해탈을 얻을 수 있다.
  773. 773)『俱舍論』 권27(T29, 143b23)에서는 삼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논에서 삼명이라 한 것은, 첫째는 숙주지증명宿住智證明이고, 둘째는 사생지증명死生智證明이고, 셋째는 누진지증명漏盡智證明이다. (삼명은 나열된) 차례대로, 무학위에 속하는 제5(숙주지통)·제2(사생지통)·제6(누진지)통을 그 자성으로 한다. 여섯 중에서 세 가지를 유독 ‘지혜’라고 한 것은 그 순서대로 (다음과 같은) 삼제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숙주지통은 과거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고, 사생지통은 미래의 어리석음을 대치하고, 누진지통은 현재의 어리석음을 대치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무학의 지혜라고 한 것은 함께 무학의 몸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774. 774)앞에서 말한 사생지증통명死生智證通明이란 육통 중의 천안통天眼通을 체로 삼는다. 이 천안통으로 어떤 유정이 ‘여기서 죽어서 저기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천안통을 사생지증통이라 이름한다.
  775. 775)신경지증통神境智證通 : 사근본정려四根本靜慮를 닦음으로써 얻어진 신통력이다. 신족통神足通이라고도 한다. 『大毘婆沙論』 권141에 의하면, 이 신통력의 작용은 다음과 같다. ① 운신運身의 신통한 작용이니, 온몸으로 허공을 나는 것이 마치 나는 새와 같다고 한다. ② 승해勝解의 신통한 작용이니,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있는 듯 알므로 이 힘에 의지해 때로는 이 주洲에 머물면서 손으로 해와 달을 어루만지고 때로는 팔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색구경천色究竟天에 이르기도 한다. ③ 마음(意勢)의 신통한 작용이니, 안식眼識이 색정色頂에 이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위로 색구경천에 이르기도 하며, 때로는 무변의 세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776. 776)공교처工巧處 : 네 가지 무기無記의 하나로서, 몸이나 말의 묘기(工巧)에 의거해서 만들어 낸 도화圖畫·가영歌詠 등을 가리킨다.
  777. 777)천이지증통天耳智證通 : 천이天耳를 통해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욕계와 색계의 소리를 인식할 수 있는 신통력을 말한다. 『集異門足論』 권15와 『大智度論』 권5에 따르면, 사근본정려에 의지해서 색계의 사대종으로 이루어진 정색淨色의 귀를 얻으면, 이를 천이라고 한다. 이 천이는 자지自地 및 하지下地의 천성天聲·인성人聲·비인성非人聲과 멀고 가까운 데서 나는 모든 음성을 들을 수 있으므로 천이통이라 한다.
  778. 778)타심지증통他心智證通 : 타심지他心智를 증득하여 여실하게 타인의 심중의 차별적 상태를 아는 신통력을 말한다.
  779. 779)『大毘婆沙論』 권102(T27, 530a18).
  780. 780)여기서 말하는 ‘어리석음(愚)’이란 무지無知와 같은 말이다. 무지란 본래 성도聖道를 가리는 것으로서 오염된 것이지만, 그 성질이 오염되지 않은 것을 불염오무지不染汚無知라고 한다. 『俱舍論』 권1(T29, 1a17)에 따르면, 성문聲聞이나 독각獨覺 등은 “불법佛法과 지극히 먼 시간과 장소 및 모든 종류(義類)의 무한한 차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불염오무지를 끊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예리한 근기의 무학無學은 삼명三明을 획득하여 현재뿐만 아니라 지극히 먼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일 등에 대해 다 밝게 알기 때문에 ‘오염되거나 오염되지 않은 삼제의 어리석음을 제거하였다’고 하였다.
  781. 781)『佛地經論』 권2(T26, 299a28).
  782. 782)『瑜伽師地論』 권69(T30, 681c29).
  783. 783)『大智度論』 권2(T25, 71c14).
  784. 784)현법락주現法樂住 : 무학의 성자들이 선한 정려를 잘 닦고 나서 해탈의 법락에 머무는 것을 말한다. 『俱舍論』 권28(T29, 150a24)에서는 ‘선한 정려(善靜慮)를 닦음으로써 현법락주現法樂住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선한 정려’란 깨끗하고 무루(淨及無漏)인 색계의 사정려를 말한다. 또 이하의 『大毘婆沙論』 인용문에서 말하듯, 색계의 사근본정려만 현법락주라고 하고, 근분정近分定 및 무색정無色定은 해당하지 않는다.
  785. 785)낙수樂受(ⓢ sukha-vedanā) : 수受는 대상 경계를 받아들여(領納) 고락을 느끼는 정신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수’는 희喜·낙樂·사捨의 세 가지로 구분하거나 또는 우憂·희喜·고苦·낙樂·사捨의 다섯 가지로 구분되기도 한다. 삼수 중에서 낙수樂受란 마음에 맞는 경계를 받아들여서 신심의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오수 중에서 낙수란 특히 몸의 쾌락을 느끼는 것을 가리키고, 이에 대해 마음의 쾌락을 느끼는 것을 희수라고 한다.
  786. 786)경안輕安(ⓢ praśrabdhi) : 심소법의 하나다. 곧 몸과 마음이 가볍고 날렵하며 편안해서, 인식 대상에 대해 느긋하고 자연스럽게 만나는 정신 작용이다. 이 정신 작용은 주로 선정 상태에서 일어나서 그것을 수습修習하고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학설에 따르면, 경안에는 신경안身輕安과 심경안心輕安 두 가지가 있다. 마음의 감인堪忍하는 성질이 오식五識과 상응하는 것을 신경안이라 하고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것을 심경안이라 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신경안은 다만 유루의 산위散位에 있으며, 심경안은 유루와 무루의 정위定位와 산위散位에 통한다고 한다.
  787. 787)근분정近分定 : 사정려·사무색정의 예비적 단계를 말한다. 사정려와 사무색정을 ‘근본정根本定’이라 하는 데 대해, 이 근본정에 접근한 단계이므로 ‘근분近分’이라 한다. 이 근분정은 아직 지止·관觀이 균등하지 않은 단계로서 오직 ‘관’만이 수승하여 힘들여 노력해서 일으키기 때문에 희수·낙수와는 상응하지 않는다. 권오민 역, 『구사론』, 동국역경원, 1307쪽 참조.
  788. 788)무색정無色定 : 무색계의 네 종류 선정,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과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과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과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有頂天)을 가리킨다.
  789. 789)『大毘婆沙論』 권81(T27, 419b24) 참조.
  790. 790)『佛地經論』 권2(T26, 299b3).
  791. 791)영수領受 : 대상 경계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서 신체적 느낌(身受)·심리적 느낌(心受)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792. 792)『瑜伽師地論』 권11(T30, 331a5).
  793. 793)『成實論』 권1 「福田品」(T32, 246c20) 참조.
  794. 794)『佛地經論』 권2(T26, 299b4).
  795. 795)『佛地經論』 권2(T26, 299b5).
  796. 796)『瑜伽師地論』 권71(T30, 693c26).
  797. 797)『佛地經論』 권2(T26, 299b6).
  798. 798)『瑜伽師地論』 권92(T30, 825b20).
  799. 799)『佛地經論』 권2(T26, 299b7) 참조.
  800. 800)이것은 첫 번째 해석이다. 이 해석에서는 ‘살타(ⓢ sattva)’는 ‘유정有情’을 뜻하고, ‘보리살타(ⓢ bodhisattva)’란 ‘보리를 구하는 유정들’을 뜻한다. 그런데 ‘보리를 구하는 유정’이란 삼승에 공통되는 말이므로, 대승의 보살만 지칭하려면 반드시 뒤에 ‘마하살(ⓢ mahāsattva : 위대한 유정)’이라는 글자를 붙여야 한다.
  801. 801)이것은 두 번째 해석이다. 이에 따르면, 보리(ⓢ bodhi : 覺)와 살타(ⓢ sattva : 有情)는 모두 누군가에 의해 추구되는 대상(소연 경계)을 가리키고, 그 소연 경계의 이름을 들어서 그것을 추구하는 자를 지칭한 것이다. 따라서 굳이 뒤에 ‘마하살’을 붙이지 않더라도, ‘보리살타’란 ‘깨달음과 유정을 소연으로 삼는 자’, 즉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을 추구하는 대승의 보살을 뜻한다.
  802. 802)이것은 세 번째 해석으로서, ‘보리와 살타’가 모두 누군가에 의해 추구되는 대상(소연의 경계)을 가리키고 그 소연의 이름을 들어서 그것을 추구하는 자를 지칭한다고 보는 점에서는 앞의 해석과 동일하다. 그런데 차이점은 여기서는 ‘살타’를 ‘정진精進’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보리살타’란 ‘깨달음과 정진을 소연으로 삼는 자’를 뜻하는데, 이는 모든 삼승의 수행자들에게 공통되기 때문에 십지 이상의 대승 보살만 지칭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뒤에 ‘마하살’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
  803. 803)『佛地經論』 권2(T26, 300a19).
  804. 804)이것은 앞에 나온 친광의 『佛地經論』의 두 번째 해석과 동일하다.
  805. 805)부정不淨한 것을 소연의 경계로 삼는 관을 일컬어 ‘부정관不淨觀’이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리·살타를 소연의 경계로 삼는 자를 일컬어 ‘보리살타’, 즉 ‘보살’이라고 이름했다는 것이다.
  806. 806)이것은 앞에 나온 친광의 『佛地經論』의 세 번째 해석과 동일하다. ‘보리를 추구하는 데 있어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다’는 것은 이전에 ‘보리를 추구하면서 용맹정진한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807. 807)이상은 『攝大乘論釋』 권1(T31, 380c3) 참조.
  808. 808)『佛地經論』 권2(T26, 300a29) 참조.
  809. 809)『十地經論』 권1(T26, 127b15).
  810. 810)『佛地經論』 권2(T26, 300b2) 참조.
  811. 811)『佛地經論』 권2(T26, 300b12).
  812. 812)이는 『金剛經』에서 말한 네 가지 마음, 즉 광대심廣大心, 제일심第一心, 상심常心, 부전도심不顚倒心 등을 말한다.
  813. 813)『佛地經論』 권2(T26, 300b14).
  814. 814)『佛地經論』 권2(T26, 300b15).
  815. 815)『佛地經論』 권2(T26, 300b18).
  816. 816)겁랍파劫臈波(ⓢ kalpa) : 겁파劫波(劫跛·劫簸) 또는 갈랍파羯臘波 등으로 음역하고, 분별시분分別時分·분별시절分別時節·장시長時·대시大時·시時 등으로 의역한다. 본래 고대 인도 바라문교에서 지극히 큰 시간의 단위였는데, 불교에서 그것을 따라서 계산할 수 없는 장대한 시간으로 간주했다.
  817. 817)경문에서 앞의 “분별과 분별 아닌 것”이 소연所緣의 경계에 해당한다면, 뒤의 “갖가지 분별”은 능연能緣의 마음에 해당한다.
  818. 818)삼무수겁三無數劫 : 삼아승기겁이라고도 한다. 보살이 모든 수행을 충족시켜서 불과佛果를 성취하는 데 걸리는 제1·제2·제3의 아승기겁을 가리킨다.
  819. 819)『攝大乘論釋』 권6(T31, 419a5).
  820. 820)『佛地經論』 권2(T26, 300b20).
  821. 821)사마四魔 : 번뇌마·온마·사마·자재천마를 말한다. 이전의 열여덟 가지 원만 중의 무외의 원만(無畏圓滿)을 설한 곳(p.287)에서 각주 528 참조.
  822. 822)『佛地經論』 권2(T26, 300b21).
  823. 823)이것은 『般舟三昧經』 권3(T13, 906a10)에 나오는 게송이다.
  824. 824)유위有爲의 네 가지 전도(四倒)와 무위無爲의 네 가지 전도로 구분한 것을 말한다. 유위의 네 가지 전도란 범부가 생사유위법에 집착하여 일으킨 네 가지 잘못된 견해다. 첫째는 항상 세간의 무상한 것들을 영원하다고 집착하고, 둘째는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을 즐겁다고 집착하며, 셋째는 아가 없는데 아라고 집착하고, 넷째는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하다고 집착한다. 무위의 네 가지 전도란 성문·연각이 유위의 네 가지 전도를 떠나기는 했지만, 열반에 대해 이것은 아무것도 없는 적멸한 세계라고 집착해서 네 가지 망견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열반의 상·낙·아·정에 대해, 그것은 무상하고, 즐거움이 없으며, 참된 아가 없고, 깨끗하지 않다고 헛되게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825. 825)열여덟 가지 원만 중에 열세 번째인 ‘무외無畏 원만’을 설한 곳(pp.287~288) 참조.
  826. 826)작의作意(ⓢ manaskāra) : 유식종에서는 모든 인식 활동에 항상 따라 일어나는 다섯 가지 변행심소(五遍行心所) 중의 하나로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로 초점을 맞추게 하는 ‘주의작용’을 가리킨다.
  827. 827)『佛地經論』 권2(T26, 300b23) 참조.
  828. 828)성문·연각은 사제四諦의 이치를 관하여 이에 통달하면 견도見道의 성자가 된다. 이 사제의 관에서는 고제·집제·도제·멸제 하의 각기 네 가지 행상씩 관한다. 이 중에서 고제에 대해서 고苦·공空·비아非我·무상無常 등의 네 가지 행상을 관하기 때문에 ‘생사의 과실을 자주 관한다’고 하였고, 멸제에 대해서 멸滅·정靜·묘妙·리離 등의 네 가지 행상을 관하기 때문에 ‘열반적정의 공덕을 자주 관한다’고 하였다.
  829. 829)세친의 『攝大乘論釋』 권7(T31, 201c28).
  830. 830)주지의 위대함(住持大) : 이것은 보살의 청정한 몸을 길러 주고 유지시키는 것의 위대함을 논한 것이다.
  831. 831)『佛地經論』 권2(T26, 300b25).
  832. 832)오분법신五分法身 : 계·정·혜·해탈·해탈지견 등을 말한다.
  833. 833)『攝大乘論釋』 권15(T31, 263b29).
  834. 834)『法華經』 권4 「五百弟子受記品」(T9, 28b18).
  835. 835)이상의 다섯 가지 두려움은 견도 이전의 사람들이 일으키는 두려움이다. 첫 번째 불활외不活畏는 초학자가 비록 보시를 행하면서도 자기 물자가 떨어져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항상 재물을 축적하므로 가진 것을 다 보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 악명외惡名畏는 초학자가 중생을 교화하면서도 술집이나 방탕한 곳에 다니면, 마음이 태연자약할 수 없고 오히려 타인의 비방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사외死畏는 비록 광대한 마음을 일으켜서 재물을 보시하는 일 등을 하지만 다만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몸을 버리지는 못하는 것을 말한다. 네 번째 악도외惡道畏는 불선한 업을 지어 악도에 떨어질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항상 공포에 처해 있는 것을 말한다. 다섯 번째 겁중외怯衆畏는 왕정 같은 곳이나 혹은 교법의 의미를 잘 아는 위덕을 갖춘 대중 앞에 처하여 자기의 언행에 과실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 두려움은 초지初地에 들어갈 때 멀리 떠나게 된다.
  836. 836)청정의요지淸淨意樂地 : 『瑜伽師地論』에서 말하는 정승의요지淨勝意樂地를 가리킨다. 보살이 이 지地를 증득하면 더 이상 계율을 범하거나 그에 어긋나는 일이 없게 된다고 한다. 『瑜伽師地論』 권41(T30, 516a20) 참조.
  837. 837)『佛地經論』 권2(T26, 300b26).
  838. 838)일체지기별지一切智記別地 : 이 사람은 곧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할 것이라고 기별記別(예언)을 받게 되는 지위를 말한다. 이를 불퇴전지라고 하며, 다음에 언급되듯 십지 중에서 제8지 이상을 가리킨다.
  839. 839)『佛地經論』 권2(T26, 300c1).
  840. 840)여기서 말한 삼지三智란 가행지加行智·근본지根本智·후득지後得智를 말하는데, 이 중에서 가행지는 심사尋思의 지혜로서 도道의 인因에 해당하므로 ‘한결같이 유루의 지혜다’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근본지는 정증正證의 지혜로서 도의 체體이고, 후득지는 관에서 나와 작용을 일으키는(出觀起用) 지혜로서 도의 과果에 해당한다.
  841. 841)신행지信行地란 보살의 52계위 중에서 초지初地에 들기 이전, 즉 지전地前을 총칭한 말이다. 그런데 신행지 중에서 특히 십주十住의 일곱 번째를 ‘불퇴주不退住’라고 한다.
  842. 842)이상은 『大乘莊嚴經論』 권10(T31, 641c1) 참조.
  843. 843)『佛地經論』 권2(T26, 300c8).
  844. 844)『佛地經論』 권1(T26, 295a29) 참조.
  845. 845)진제 역, 세친의 『攝大乘論釋』 권15(T31, 263c10) 참조.
  846. 846)이상으로 보살의 공덕을 십대十大에 의거해서 해석하였고, 이하는 십지十地에 의거해서 해석한 것이다. 모두 친광의 『佛地經論』에 의거한 해석이다.
  847. 847)삼취계三聚戒 : 대승보살의 세 종류 계법을 가리킨다. 첫째, 섭율의계攝律儀戒란 모든 악을 없애고 끊는 것인데, 악을 방지하는 모든 율의를 포함한다. 둘째, 섭선법계攝善法戒는 보살이 닦는 계로서, 신·구·의의 선업을 닦거나 육바라밀 등의 선법을 행하는 것이다. 셋째, 섭중생계攝衆生戒는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거두어 이익을 주는 것을 말한다.
  848. 848)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 : ‘보리분’이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원인을 뜻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지혜를 구하는 서른일곱 가지 수행 방법, 즉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 서른일곱 가지 법은 모두 보리(깨달음)에 수순해서 나아가기 때문에 보리분법이라 부르는데, 즉 사념처四念處와 사정근四正勤과 사여의족四如意足과 오근五根과 오력五力과 칠각분七覺分과 팔지성도八支聖道 등을 가리킨다.
  849. 849)분별기아견分別起我見 : 현재의 후천적 외부 조건들(現在外緣)로 인해 일어난 아견我見을 가리킨다. 가령 그릇된 스승(邪師)의 그릇된 가르침(邪敎)에서 ‘불변의 자아’ 등에 대해 듣거나 ‘나’와 ‘남’을 구분하는 세간의 언어적 관행을 실천함으로써 분별기아견이 일어난다. 이 분별기는 끊기도 쉬워서 모두 견도에서 끊어진다. 『成唯識論』 권1(T31, 2a10) 참조.
  850. 850)구생기아견俱生起我見 : 후천적 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개별적 ‘몸(身)’을 갖고 태어남으로써 그 몸과 함께 일어나는 생득적인 아견을 가리킨다. 이 구생기는 끊기가 어려워서 수도에서 끊어진다. 『成唯識論』 권1(T31, 2a10) 참조.
  851. 851)친광의 첫 번째 해석에서는 ‘분별’은 ‘시간(時劫)’을, ‘분별 아닌 것’이란 즉 ‘시간에 속하지 않는 것’을 뜻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해석은 그와는 다른 것으로서, 가령 친광의 『佛地經論』에서 두 번째 부차적 설명과 유사하다.
  852. 852)색계의 네 번째 정려靜慮에는 심尋·사伺·우憂·희喜·고苦·낙樂·입식入息·출식出息 등의 여덟 가지 재환災患이 없다고 한다. 또 여덟 가지 재환의 바람이 선정의 물(定水)을 동요시키지 않기 때문에 이를 부동정不動定이라 한다. 따라서 다른 선정에서도 어느 정도 고락을 떠나기는 하지만 특별히 이 제4선정을 가리켜서 ‘고락을 떠난다’고 한다는 것이다.
  853. 853)성문의 세 번째 과인 불환과不還果(ⓢ anāgāmin)에서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떠난다고 한다. 오하분결이란 삼계 중의 하층 세계(욕계)에 있는 다섯 가지 결혹結惑, 즉 욕탐欲貪·진에瞋恚·유신견有身見·계금취견戒禁取見·의疑 등을 가리킨다. 불환과의 전단계인 예류과와 일래과에서도 욕계의 구품九品의 수혹修惑의 일부가 끊어지기는 하지만, 불환과의 성자는 이미 욕계의 구품의 수혹을 다 끊었기에 다시 욕계에 와서 생을 받지 않게 된다. 따라서 불환과에서 욕계의 오하분결이 끊어졌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854. 854)제7식이 없으면 제6식의 근根 역할을 하는 소의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이는 오식이 언제나 근에 의지해서 일어나는 경우와는 다를 것이라는 말이다.
  855. 855)금강유정金剛喩定 : 소승의 성문이나 대승의 보살이 수행에서 막 완성되려는 단계에서 현현하는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이다. 이 선정에서는 최후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끊어 없애는데, 극히 미세한 번뇌를 끊어 없애고 각자의 최고의 과를 얻는다고 한다.
  856. 856)경문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글의 저변에 깔려 있는 비난을 ‘숨겨진 비난(伏難)’이라 한다. 앞에서처럼 ‘제4지에서 갖가지 분별을 떠난다’고 주장하는 경우, 이에 대해 ‘제4지에서 번뇌를 영구히 떠나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난이 제기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반박과 관련된 내용을 서술했다는 말이다.
  857. 857)여기에 나온 ‘소유작의所有作意’라는 문구는 본래 『佛地經論』에는 ‘계념분별繫念分別’이라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은 『解深密經』 경문의 ‘이승의 소유작의를 떠났다’는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므로 일단 ‘소유작의’를 살려서 번역하였다. 이 ‘작의’란 넓은 의미에서는 분별分別 혹은 사유思惟의 범주에 포함되는데, 『佛地經論』에서 ‘이승의 작의’를 구체적으로 ‘계념분별’이라 표현한 것일 뿐 의미상으로 큰 차이는 없다.
  858. 858)계념분별繫念分別 : ‘계념’이란 현념懸念·현상懸想이라고도 하는데, 즉 하나의 경계만을 염念하면서 그 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소승의 작의作意란 이처럼 고제나 멸제의 특정한 행상行相에 정신을 집중한 상태에서 분별하는 것이므로 ‘계념분별’이라고 하였다.
  859. 859)이상은 『佛地經論』 권2(T26, 300c11) 참조.
  860. 860)제4권 『經記』의 해석이란 원측의 『解深密經疏』 중에서 『解深密經』 권4 「地波羅蜜多品」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861. 861)『瑜伽師地論』 권46(T30, 549a26) 참조.
  862. 862)『大乘莊嚴經論』 권12(T31, 656a17)에서 나열된 보살의 통명은 다음과 같다. 마하살摩訶薩, 유혜자有慧者, 상성취上成就, 항복자降伏子, 항복지降伏持, 능항복能降伏, 항복아降伏牙, 용맹勇猛, 상성上聖, 도사導師, 대명칭大名稱, 위유비爲有悲, 대복덕大福德, 자재행自在行, 정설자正說者.
  863. 863)『大乘莊嚴經論』 권12(T31, 656a25) 참조.
  864. 864)‘보리살타마하살타’에 대해서는 “또 수많은 보살마하살들이 갖가지 불국토로부터 이 모임에 와서”라는 경문의 해석에서 이미 자세히 논한 바 있다. ‘제4장-2.-3)-(5)-②-나. 보살중을 나타냄’(p.396) 참조.
  865. 865)경문에서 나열된 해심심의밀의보살마하살, 여리청문보살마하살 등 열 명의 보살들은 각기 다른 품에 따로 등장하여 세존과 문답하는데, 각 품의 서두에서 그 보살들의 이름에 대해 자세하게 해석하였다.
  866. 866)『佛地經論』 권2(T26, 301a21).
  867. 867)『佛地經論』 권2(T26, 301a23).
  868. 868)이상은 『大智度論』 권7(T25, 111a1) 참조.
  869. 869)일생보처보살과 최후신보살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답을 시설하여 해명하고 있다. 일생보처一生補處(ⓢ eka-jāti-pratibaddha)란, 가령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처럼, 이번 생만 거치면 내생에서는 반드시 세간에서 성불할 수 있는 이를 말한다. 최후신最後身(ⓢ antima-deha)이란 생사하는 몸 중에서 최후의 몸을 뜻하는데, 소승에서는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한 아라한을 가리키고, 대승에서는 불과佛果인 등각等覺을 증득한 보살의 몸을 가리킨다.
  870. 870)『俱舍論』에 따르면 어떤 특별한 유정들은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 그 중에서 도사다천에 머무는 일생소계보살은 무시이래로 많은 생사에 계박되었고 이제 오직 한생만 거치면 성불을 이루는 자를 말한다. 이 보살은 수명이 4천 세로 정해져 있으므로 결코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 또 최후유最後有(최후신)보살은 이 몸에 의지해서 무학無學의 지위를 증득하도록 결정되어 있으므로, 만약 아직 과를 증득하지 못했다면 결코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다. 『俱舍論』 권11(T29, 62a2), 『俱舍論記』 권11(T41, 191c18) 참조.
  871. 871)『大般若經』 권7(T5, 37b26) 참조.
  872. 872)『佛地經論』 권5(T26, 316c5).
  873. 873)『菩提資糧論』 권1(T32, 518a23) 참조.
  874. 874)『解節經』(T16, 711c10) 참조.
  875. 875)『瑜伽師地論』 권48(T30, 563b14) 참조.
  876. 876)석존釋尊이 가비라성 정반왕淨飯王의 장자로 태어났을 때, 관상을 잘 보는 아사타선인阿私陀仙人은 ‘이 왕자가 과거세에 좋은 선근을 심었던 공덕으로 몸에 수승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태어났고 일체의 좋은 일을 성취할 자’임을 알았다. 또 그는 일찍이 예언하길, ‘왕자가 재가에 있으면 반드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고 출가하면 무상보리를 성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877. 877)석존이 고행을 포기한 후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소 치는 여자아이에게 우유죽을 공양받고 나서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이 일화와 관련해서, 『大智度論』 권40(T25, 350a13)에는 “산야 바라문은 우유죽을 보고서 오늘 성불할 자가 마땅히 먹을 것임을 알았다.”고 하였고, 같은 책 권42(T25, 368b19)에는 “산야 바라문은 일체지인一切智人의 상相을 잘 알아보는 자인데, 보살이 우유죽을 드시는 것을 보고서, 오늘 마땅히 성불할 자임을 알았다.”고 하였다.
  878. 878)이상은 『大智度論』 권40(T25, 350a12) 참조.
  879. 879)『瑜伽師地論』 권46(T30, 549a18). 『顯揚聖敎論』 권8(T31, 521a15) 참조.
  880. 880)예류과預流果의 성자는 윤회생사하면서 마지막에 인간계와 천계에서 각기 일곱 번을 왕복한다. 그는 14생 사이에 반드시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결코 여덟 번째 생을 받는 일은 없다고 한다. 따라서 극칠반유極七返有·극칠반極七返이라 한다.
  881. 881)『大智度論』 권38(T25, 341c16)에 나오는 삼생보처三生補處의 보살에 관한 문답 참조.
  882. 882)『大智度論』 권7(T25, 111a19)에 나오는 문답 참조.
  883. 883)이상으로 문답이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질문만 있고 대답은 없다. 여기서 인용된 『大智度論』의 문장은 일생보처보살이 욕계와 색계의 많은 천天들이 있음에도 오직 욕계육천欲界六天 중의 네 번째 도솔천에서만 태어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질문인지 대답인지 명확하지 않다. 『大智度論』 권4(T25, 89c2) 참조.
  884. 884)구경보살 중에서 도솔천에 머물면서 천天에서는 오직 이 한 생生만 다하면 다시 욕계에 태어나 반드시 성불하는 자를 ‘일생소계’라고 하고, 이미 욕계에 태어나서 도道를 이뤘다면 이 몸은 생사의 마지막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최후신’이라 한다. 『瑜伽師地論』 권46(T30, 549a171), 『瑜伽師地論略纂』 권11(T43, 138c22) 참조.
  885. 885)『成唯識論』 권8(T31, 43a11).
  886. 886)이 인용문은 유식삽십송의 제19송으로서, “이전의 이숙異熟”이란 이전 생들(前前生)의 업의 이숙과異熟果를 말하고, “그 밖의 이숙”이란 이후 생들(後後生)의 업의 이숙과를 말한다. 말하자면 그 밖의 생을 불러낼 업종자가 무르익었다면, 이전의 업력으로 받아야 할 이숙의 과보를 다 수용했을 때, 다시 또 다른 생이라는 이숙의 과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원측에 따르면, 몸이 실제로 나고 죽는 분단생사分段生死의 경우뿐만 아니라 변역생사變易生死하는 일생보처의 변역신變易身의 경우도 이장二障의 종자로 인해 이전의 과보가 다하면 또 다른 과보가 생기는 방식으로 윤회하는 것이다.
  887. 887)『無量壽經』에 따르면 오랜 겁劫 이전의 과거에 국왕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했던 ‘법장비구法藏比丘’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처소에서 제불諸佛의 정토淨土에 대해 숙지하고 오랜 겁 수행해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되었는데, 서방의 극락정토極樂淨土를 과보로서 획득하고 거기서 설법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미타불의 전신前身인 법장비구는 본래 부모가 있는 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변화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888. 888)아미타불의 양 옆에서 관음보살觀音菩薩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보좌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흔히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이라 한다.
  889. 889)부처님의 수용신受用身 중에서 타수용신은 도력이 높은 십지 이상의 보살들에게만 보인 몸을 말한다.
  890. 890)부처님의 몸 중에서 도력이 낮은 십지 이전의 이승인이나 범부에게 보인 몸은 변화신에 속한다.
  891. 891)규기窺基의 『阿彌陀經通贊疏』 권1(T37, 330c22)에 따르면, ‘점오漸悟’란 이승과二乘果(無學果)를 이미 증득하고 대승으로 발심한 자로서, 더 받을 생生의 수가 극히 적거나 전혀 없는 자이다. 만약 이미 정생定生(선정으로 태어남)하였다면, 곧 이 한 생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위의 문답에서 이 점오보살이야말로 말 그대로 한 생만 있고 다른 생은 없는 자이므로 ‘일생보처’에 해당하지 않는가라고 물은 것이다.
  1. 1)「底」續藏經。第一編三十四套。四~五冊ㆍ三十五套。八~九冊。
  2. 2)「言」一作「敎」。
  3. 3)「故」上疑脫「無說」。
  4. 1)「二依諸知約三身」 一本作傍書。
  5. 1)「知」下一有文脫。三字傍書。
  6. 1)「列」疑「引」次同。
  7. 2)「羊」疑「車」。
  8. 1)「一」上疑脫「以」。
  9. 2)「列」疑「引」。
  10. 1)「行」疑剩。
  11. 1)「高」疑剩。
  12. 2)「前」疑「說」。
  13. 3)「楯」疑「猶」
  14. 1)「起」下疑脫「分」。
  15. 2)「二」疑「三」。
  16. 1)「者」疑剩。
  17. 2)「第」上疑脫「如是」。
  18. 1)「耶」疑「邪」{編}。
  19. 2)「二」疑「百」。
  20. 3)「四」疑「三」。
  21. 1)「蘊」上疑脫「行」。
  22. 2)「別」疑「列」。
  23. 1)「八」或作「六」。
  24. 2)「頌」疑「煩」{編}。
  25. 3)「流」異作「留」。
  26. 1)「如」疑「知」。
  27. 2)「有」疑剩。
  28. 1)「二形…表色」八字疑剩。
  29. 1)「廻」疑「逈」。
  30. 1)「測」疑剩。
  31. 2)「作」疑剩。
  32. 3)「作」疑「依」。
  33. 1)「持」疑「搏」。
  34. 2)「天」下疑脫「人」。
  35. 1)「害」疑「宍」
  36. 2)「住」異作「任」。
  37. 1)「恃」疑「持」。
  38. 1)「覺」下疑脫「故」。
  39. 2)「釋云」疑剩{編}。
  40. 1)「怛」疑「恒」。
  41. 1)「二」上疑脫「無」。
  42. 1)「應」下疑有脫文。
  43. 1)「聞」疑「說」。
  44. 1)「勝決…決擇」入字疑剩。
  45. 1)「有」疑「情」。
  46. 1)「能」下疑脫「摧」。
  47. 2)「經」疑「以」。
  48. 3)「誦」疑「名」。
  49. 4)「口」疑「二」。
  50. 1)「超」上疑脫「超五怖畏者謂第八地」八字。
  51. 1)「復」疑「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