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 華嚴一乘法界圖

ABC_BJ_H0028_T_001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의상 지음(義湘 撰)
전호련 (역)
총목차總目次
서문(自叙)
반시槃詩
본문 해석(釋文)
1.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함(總釋印意)
2.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함(別解印相)
1) 도인의 모양을 설명함(說印文相)
2) 글자의 모양을 밝힘(明字相)
3) 글의 뜻을 해석함(釋文意)
(1) 자리행自利行
(2) 이타행利他行
(3)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脩行者方便及得利益)
발문跋文

002_0001_a_01L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서문(自叙)
무릇 위대한 성인의 훌륭한 가르침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 근기에 응하고 병에 따라서 하나가 아니다. 미혹한 자는 자취를 고수하여 본체를 잃는 줄 알지 못해서 부지런히 하여도 근본(宗)으로 돌아갈 날이 없다. 그러므로 이치(理)에 의지하고 가르침(敎)에 근거하여 간략히 반시槃詩1)를 지어서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가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시를 읽는 법은 마땅히 가운데 ‘법法’으로부터 시작하여 번다하게 구부러지고 굽어져서(屈曲) ‘불佛’에 이르러 마치니 도인圖印2)의 길을 따라서 읽도록 한다. 【54각 210자이다.】3)4)

반시槃詩5)
法性圓融無二相  법성法性6)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다
無名無相絕一切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證智所知非餘境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7)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不守自性隨緣成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
一即一切多即一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一微塵中含十方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十方을 머금고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
無量遠劫即一念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순간(一念)이고
一念即是無量劫  한순간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다
九世十世互相即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仍不雜亂隔別成  그로 인해 혼잡하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며
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
理事冥然無分別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

能入海印三昧中  능히 해인삼매 가운데 들어가
繁出如意不思議  여의如意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불가사의하다
雨寶益生滿虛空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
衆生隨器得利益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

是故行者還本際  그러므로 수행자는 본래 자리에 돌아와
叵息忘想必不得  망상을 쉬지 않을 수 없고
無緣善巧捉如意  무연無緣의 선교善巧로 여의如意를 잡아서
歸家隨分得資糧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
以陀羅尼無盡寶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  법계의 진실한 보배 궁전을 장엄하여
窮坐實際中道床  마침내 실제의 중도中道 자리에 앉으니
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

002_0001_a_01L

002_0001_a_02L1)華嚴一乘法界圖 [1]

002_0001_a_03L

002_0001_a_04L2)義湘撰

002_0001_a_05L
夫大聖善敎無方應機隨病非一迷者
002_0001_a_06L3)字迹不知失體懃而歸宗 4)5)
002_0001_a_07L依理據敎略制槃詩冀以執名之徒
002_0001_a_08L還歸無名眞源讀詩之法宜從中法爲
002_0001_a_09L6)繁廻屈曲乃至佛爲終隨印道讀
002_0001_a_10L五十四角二
百一十字

002_0001_a_11L
002_0001_a_12L法性圓融無二相諸法不動本來寂
002_0001_a_13L無名無相絕一切證智所知非餘境
002_0001_a_14L眞性甚深極微妙不守自性隨緣成
002_0001_a_15L一中一切多中一一即一切多即一
002_0001_a_16L一微塵中含十方一切塵中亦如是
002_0001_a_17L無量遠劫即一念一念即是無量劫
002_0001_a_18L九世十世互相即仍不雜亂10)隔別成
002_0001_a_19L初發心時便正覺生死涅槃常共和
002_0001_a_20L理事冥然無分別十佛8)普賢大人境
002_0001_a_21L7)入海印三昧中繁出如意不思議
002_0001_a_22L雨寶益生滿虛9)衆生隨器得利益
002_0001_a_23L是故行者還本際叵息忘想必不得
002_0001_a_24L無緣善巧捉如意歸家隨分得資糧
002_0001_a_25L以陀羅尼無盡寶莊嚴法界實寶殿
002_0001_a_26L窮坐實際中道床舊來不動名爲佛

002_0001_b_01L
본문 해석(釋文)
이제 이 글을 해석하고자 함에 두 부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하고, 둘째는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한다.
1. 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함(總釋印意)
묻는다. 어째서 도인에 의거하였는가?
답한다. 석가여래釋迦如來8)의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세 가지 세간9)이 해인삼매海印三昧10)로부터 번다하게 나타난 것임을 표현하려고 한 때문이다. 세 가지 세간이라는 것은 첫째는 기세간器世間11)이고, 둘째는 중생세간이며, 셋째는 지정각세간이다. 지정각이란 부처와 보살이다. 세 가지 세간이 법을 다 포섭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논하지 않는다. 자세한 뜻은 『화엄경』12)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13)
2.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함(別解印相)
둘째 (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하는) 문 가운데 세 부문으로 나눈다. 첫째는 도인(印文)의 모양을 설명하고, 둘째는 글자의 모양을 밝히고, 셋째는 글의 뜻을 해석한다.
1) 도인의 모양을 설명함(說印文相)
첫 번째로 묻는다. 어째서 도인에 오직 한 길(一道)만 있는가?
답한다. 여래의 한 음성(一音)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어째서 번다하게 도는 굴곡이 많이 있는가?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곧 삼승三乘14)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어째서 한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법계法界15)에 응하여 걸맞고, 십세에 상응하여 원융만족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16) 곧 이 뜻은 원교圓敎17)에 해당한다.
어째서 네 면과 네 모서리가 있는가?
사섭법四攝法18)과 사무량심四無量心19)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뜻은 삼승을 의지하여 일승一乘20)을 나타낸 것이다.
도인의 모양은 이와 같다.
2) 글자의 모양을 밝힘(明字相)
두 번째로 묻는다. 어째서 글자 중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답한다.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여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글자 중에 굴곡이 많은가? 삼승의 근기와 욕망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째서 시작과 끝의 두 글자를 한 가운데에 두었는가?
원인과 결과의 두 자리가 법성의 집안에서 진실한 덕용德用21)이며, 성性이 중도22)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글자의 모양은 이와 같다.
묻는다. 위에서 이르기를 “원인과 결과가 같지 않다.”라고 하면서, “한 집의 참된 덕이며 성이 중도에 있다.”라고 하니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그 뜻이 무엇인가?
답한다. 이 뜻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002_0001_b_01L
將欲釋文二門分別一總釋印意
002_0001_b_02L別解印相問何以故依印答欲表釋迦
002_0001_b_03L如來敎網所攝三種世間從海印三昧
002_0001_b_04L11)槃出現顯故所謂三種世間一器世
002_0001_b_05L二衆生世間三智正覺世間智正
002_0001_b_06L覺者佛菩薩也三種世間攝盡法故
002_0001_b_07L論餘者廣義者如華嚴經說

002_0001_b_08L
第二別相門中三門分別一說印文相
002_0001_b_09L二明字相三釋文意

002_0001_b_10L
一問何故印文唯有一道答表如來
002_0001_b_11L一音故所謂一善巧方便何故多有
002_0001_b_12L12)繁廻屈曲以隨衆生機欲不同故
002_0001_b_13L是當三乘敎何故一道無有始終顯示
002_0001_b_14L善巧無方應稱法界十世相應圓融滿
002_0001_b_15L足故卽是義當圓敎何故有四面四角
002_0001_b_16L彰四攝四無量故此義依三乘顯一乘
002_0001_b_17L印相如是

002_0001_b_18L
二問何故字中有始終耶答約脩行
002_0001_b_19L方便顯因果不同故何故字中多屈曲
002_0001_b_20L顯三乘根欲差別不同故何故始終兩
002_0001_b_21L安置當中表因果兩位法性家內眞
002_0001_b_22L實德用性在中道故字相如是

002_0001_b_23L
問上云因果不同一家實德性在中道
002_0001_b_24L未知所由其義云何答此義其實難

002_0001_c_01L비록 그러하나, 천친논주天親論主23)가 육상六相24)의 방편으로써 뜻을 세운 영역(分齊)에 의거하면, 뜻의 도리에 준하여 분한 따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열 구절로써 육상을 변별하면 아래 설한 것과 같다.
지금은 우선 도인의 모양에 근거하여 육상을 밝혀서, 일승과 삼승이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내는 영역을 보인다.
육상이란, 총상總相․별상別相․동상同相․이상異相․성상成相․괴상壞相이다. 총상이란 근본의 인(根本印)이다. 별상이란 나머지 굴곡들이니 별別이 인印을 의지하되 그 인印을 만족케 하기 때문이다. 동상이란 한가지 인(同印)이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굴곡은 다르지만 한가지 인이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늘어나는 모양이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첫 번째, 두 번째 등 굴곡들이 달라서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성상이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인印을 이루기 때문이다. 괴상이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번다하게 도는 굴곡들이 각각 스스로 달라서 본래 짓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연으로 생겨난 법이 육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말하자면 총상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三乘敎에 해당한다. 총상․별상․성상․괴상 등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여 항상 중도에 있듯이, 일승과 삼승도 또한 이와 같다. 주主와 반伴이 서로 도와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비록 중생을 이롭게 하나, 오직 중도에 있어서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냄이 이와 같다. 일승의 별교別敎25)와 삼승의 별교도

002_0001_c_01L雖然依天親論主以六相方便
002_0001_c_02L義分齊准義道理隨分可解若約十
002_0001_c_03L13)弁六相如下說今且約印像
002_0001_c_04L以明六相示一乘三乘主伴相成現法
002_0001_c_05L分齊所謂六相者總相別相同相
002_0001_c_06L異相成相壞相總相者根本印別相
002_0001_c_07L者餘屈曲別依止印滿彼印故同相
002_0001_c_08L14)□印故所謂曲別而同印故異相
002_0001_c_09L者增15)相故所謂第一第二等曲別增安
002_0001_c_10L成相者略說故所謂成印故壞相
002_0001_c_11L者廣說故所謂*繁廻屈曲各各自本
002_0001_c_12L來不作故一切緣生法無不六相成也
002_0001_c_13L所謂總相者義當圓敎別相者義當三
002_0001_c_14L乘敎如總相別相成相壞相等不卽不
002_0001_c_15L不一不異常在中道一乘三乘
002_0001_c_16L復如是主伴相資不卽不離不一不
002_0001_c_17L雖利益衆生而唯在中道主伴相
002_0001_c_18L顯法如是一乘別敎三乘別敎
002_0001_c_19L{底}續藏經第二編八套四册 {甲}新修大藏經
002_0001_c_20L第四十五卷 {乙}正德二年寫大谷大學藏本(甲本
002_0001_c_21L之對校一本)
「義湘撰」無{底}{甲}{乙}ㆍ補入{編}
002_0001_c_22L
「字」疑「守」「末」一作「未」ㆍ作「未」{乙}
002_0001_c_23L
「日」作「曰」{乙}「繁」疑「槃」「入」作「人」
002_0001_c_24L{乙}
「普」作「善」{甲}「空」作「豈」{乙}「隔」
002_0001_c_25L作「障」{乙}
「槃」疑「繁」「繁」疑「槃」次同
002_0001_c_26L
「弁」作「辨」{甲}□疑「入」ㆍ無{甲}{乙}「相
002_0001_c_27L故」作「故相」{乙}

002_0002_a_01L뜻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그대가 문의한 것도 뜻이 또한 이와 같다. 처음의 굴곡은 원인과 같고, 내지 뒤의 굴곡은 결과와 같다. 처음과 뒤가 같지 아니하나 오직 한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과 결과의 뜻은 다르나 오직 스스로 그러함(自如)에 머무른다. 삼승의 방편의 가르침에 의하므로 높고 낮음이 같지 않으나, 일승원교에 의하므로 앞과 뒤가 없다. 까닭을 알 수 있는 것은, 경에서 설하기를, “또 모든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의 광명을 설하여 지혜의 지(智慧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26)라고 한 것과 같다.
논에서 말한다.27)
‘모든 보살(一切菩薩)’이란 신信·행行·지地에 머무르는 자를 말한다.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不可思議諸佛法)’이란 출세간도出世間道의 덕목이다. ‘광명(明)’이란 봄(見)과 지혜(智)와 얻음(得)과 깨달음(證)28)이다. ‘설한다(說)’는 것은 그중에서 분별하는 것이다. ‘들어간다(入)’란 믿고 좋아하며 얻고 깨닫는 것이다. ‘지혜의 지(智慧地)’란 십지十地29)의 지혜를 말하니, 본문 중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이것이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이니, 경에서 “또 모든 보살에게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의 법의 광명을 설하여 지혜의 지地에 들어가게 하려는 까닭이다.”30)라고 한 것과 같다.
이 경(修多羅)31) 중에 근본의 들어감(根本入)에 의하여 아홉 가지의 들어감(九種入)이 있음을 설하고 있다.
첫째는 포섭의 들어감(攝入)이다. 듣는 지혜(聞慧)32) 가운데 모든 선근善根33)을 포섭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선근을 포섭하(게 하려)는 까닭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둘째는 생각하고 헤아림의 들어감(思議入)이다. 생각하는 지혜(思慧)가 모든 도의 덕목(道品) 중에 지혜의 방편이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불법을 잘 분별하여 선택하(게 하려)는 까닭이다.”34)라고 한 것과 같다.
셋째는 법의 모양의 들어감(法相入)이다. 저러저러한 뜻(義) 가운데 한량없이 갖가지로 알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법을 널리 알(게 하려)는 까닭이다.”35)라고 한 것과 같다.
넷째는 교화의 들어감(敎化入)이다. 생각하고 헤아린 것을 따라서, 말(名字)이 갖추어져 법을 잘 설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모든 법을 잘 설하(게 하려)는 까닭이다.”36)라고 한 것과 같다.
다섯째는 깨달음의 들어감(證入)이다. 모든 법에 평등한 지혜가 견도見道37)하는 때에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분별없는 지혜가 청정하여 잡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다.”38)라고 한 것과 같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곧 스스로 불법을 이루는 것이니, 그래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게으르지 않음의 들어감(不放逸入)이다. 수도修道39)하는 때에 모든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기 때문이니,

002_0002_a_01L義可解汝所問疑義亦如是初曲如
002_0002_a_02L乃至後曲如果如初後不同而唯
002_0002_a_03L在當中雖因果義別而唯住自如
002_0002_a_04L三乘方便敎門故高下不同依一乘圓
002_0002_a_05L故無有前後所以得知如經說
002_0002_a_06L一切菩薩不可思議諸佛法明說令入智
002_0002_a_07L慧地故論曰一切菩薩者謂住信行
002_0002_a_08L不可思議諸佛法者是出世間道
002_0002_a_09L明者見智得證說者於中分別
002_0002_a_10L者信樂得證智慧地者謂十地智
002_0002_a_11L本分中說此是根本入如經又一切
002_0002_a_12L菩薩不可思議諸佛法 明說令入智慧
002_0002_a_13L地故此修多羅中說依根本入有九種
002_0002_a_14L一者攝入聞慧中攝一切善根故
002_0002_a_15L經攝一切善根故二者思議入思慧於
002_0002_a_16L一切道品中智方便故如經善分別選
002_0002_a_17L擇一切佛法故三者法相入彼彼義中
002_0002_a_18L無量種種智故如經廣知諸法故四者
002_0002_a_19L敎化入隨所思義名字具足善說法故
002_0002_a_20L如經善說諸法故五者證入於一切法
002_0002_a_21L平等智見道時中善淸淨故如經無分
002_0002_a_22L別智淸淨不離故菩薩敎化衆生卽是
002_0002_a_23L自成佛法是故利他亦1)名自利六者
002_0002_a_24L不放逸入於修道時中遠離一切2)

002_0002_b_01L경에서 “모든 마법魔法이 물들이지 못하(게 하려)는 까닭이다.”40)라고 한 것과 같다.
일곱째는 지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地地轉入)이다.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덕목인 무탐無貪 등의 선근41)이 청정하기 때문이니, 경에서 “세간을 벗어나는 법인 선근을 청정하(게 하려)는 까닭이다.”42)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선근이 있어 세간을 벗어나는 도의 덕목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보살로서 마지막의 들어감(菩薩盡入)이다. 제10지에서 모든 여래의 비밀스러운 지혜에 들어가기 때문이니, 경에서 “불가사의한 경계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43)라고 한 것과 같다.
아홉째는 부처로서 마지막의 들어감(佛盡入)이다. 일체의 지혜에 들어가는 지혜이기 때문이니, 경에서 “내지 일체의 지혜를 (갖춘) 사람의 지혜의 경계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44)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모든 들어감은 지혜의 뜻의 차별을 비교한 것으로 차례로 더욱 뛰어나지만 근본의 들어감은 아니다.
모든 설해진 열 구절에는 모두 여섯 종류의 차별의 모양으로 된 문이 있다. 이것은 언설로 해석한 것이다. 마땅히 사事는 제외됨을 알아야하니, 사事란 오온五蘊(五陰)45), 십팔계十八界46), 십이처十二處47) 등이다.
여섯 종류의 차별의 모양은 총상․별상․동상․이상․성상․괴상이다. 총상은 근본의 들어감이고, 별상은 나머지 아홉(가지 들어감)이니, 개별(別)이 근본(本)에 의지하여 저 근본(本)을 만족시키는 까닭이다. 동상은 들어감이기 때문이고, 이상은 늘어나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성상은 간략히 설하는 까닭이고, 괴상은 널리 설하는 까닭이니,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나머지 모든 열 구절 가운데도 뜻을 따라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48)
논의 글이 이와 같으니, 오직 논주가 근본(宗)을 세운 도리이다. 그러므로 알라. 비록 원인과 결과인 신信·해解·행行·회향廻向·지地·불佛이 각자의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앞과 뒤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이 각각 달라서 스스로 여여함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하나의 여여함과 많은 여여함에서도 여여함의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묻는다. ‘무엇이 부처님의 법을 깊이 믿는 것인가?’ 답한다. ‘일체 모든 법이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바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니, 만약 이와 같다면 부처님의 법을 깊게 믿는다고 한다.’”49)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 뜻이다.
묻는다. ‘육상六相’이란 무슨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인가?
답한다. 연기의 무분별한 도리를 나타내기 위한 까닭이다. 이 육상의 뜻으로써, 비록 한 부의 경전50)이 일곱 장소와

002_0002_b_01L提鄣故如經一切魔法不能染故七者
002_0002_b_02L地地轉入出世間道品無貪等善根淨
002_0002_b_03L如經出世間法善根淸淨故復有善
002_0002_b_04L能爲出世間道品因故八者菩薩盡
002_0002_b_05L於第十地入一切如來秘密智故
002_0002_b_06L如經得不可思議境界故九者佛盡入
002_0002_b_07L於一切智3)入智故如經乃至得一切智
002_0002_b_08L*入智境界故是諸入爲挍量智義差別
002_0002_b_09L次第轉勝非根本入一切所說十句
002_0002_b_10L皆有六種差別相門此言說解釋
002_0002_b_11L應知除事事者謂陰界入等六種差相
002_0002_b_12L謂總相別4)成相壞相總相者是
002_0002_b_13L根本入別相者餘九別依止本滿彼
002_0002_b_14L本故同相者入故異相者增相故
002_0002_b_15L相者略說故壞相者廣說故如世界成
002_0002_b_16L壞故餘一切十句中隨義類知論文
002_0002_b_17L如是唯是論主立宗道理故知雖因果
002_0002_b_18L信解行廻地佛自位不動而無前後
002_0002_b_19L諸法各異住自如故一如多如
002_0002_b_20L如相不可得故是故經云問云何深信
002_0002_b_21L佛法答一切諸法唯佛所知非我境界
002_0002_b_22L若如是者名爲深信佛法是其義也

002_0002_b_23L
問六相者爲顯何義答顯緣起無分別
002_0002_b_24L理故以此六相義故當知雖一部經七

002_0002_c_01L여덟 번의 모임과 품의 종류가 같지 않으나, 오직 「십지품十地品」51)에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까닭이 무엇인가? 이 근본52)이 법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십지품」 중에 비록 십지十地가 같지 않으나 오직 첫째 지地에 있다. 무슨 까닭인가? 한 지地에서 일어나지 않고 널리 일체 모든 지地의 공덕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한 지地 중에도 비록 많은 부분이 같지 않지만 오직 일념一念에 있다. 무슨 까닭인가? 삼세三世와 구세九世가 곧 일념이기 때문이니, 일체가 곧 하나인 까닭이다. 일념처럼 다념多念 또한 이와 같다. 하나가 곧 일체여서, 일념이 곧 다념 등인 것이다. 앞과 반대로 해도 곧 옳다.
이러한 이치로써, 다라니陀羅尼53)법은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어진다.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포섭한다. 만약 모임(會)을 기준으로 설하면, 모임 모임 가운데 일체를 다 포섭한다. 만약 품品을 기준으로 설하면, 품 품이 일체를 다 포섭한다. 내지 문장을 기준으로 하면, 문장 문장과 구절 구절이 일체를 다 포섭한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라니법이 본래 이러하기 때문이니, 아래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다.
3) 글의 뜻을 해석함(釋文意)
셋째, 글의 뜻을 풀이한다. 글에 7언 30구가 있다. 이 중에 크게 나누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54)는 자리행自利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다음 4구55)는 이타행利他行이다. 다음 8구56)는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을 분별한 것이다.
(1) 자리행自利行
처음 문에 두 가지가 있다. 처음 4구57)는 증분證分58)을 나타내고, 둘째 다음 14구59)는 연기분緣起分60)을 드러낸다. 이 중에 처음 2구61)는 연기의 체體를 가리킨다. 둘째 다음 2구62)는 다라니의 이치(理)와 작용(用)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分齊)을 변별한 것이다. 셋째 다음 2구63)는 사법事法64)에 즉卽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밝힌 것이다. 넷째 다음 4구65)는 시간(世時)을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보인 것이다. 다섯째 다음 2구66)

002_0002_c_01L處八會及品類不同而唯在地品
002_0002_c_02L以者何是根本攝法盡故地品中雖十
002_0002_c_03L地不同而唯在初地何以故不起一
002_0002_c_04L普攝一切諸地功德故一地中雖多
002_0002_c_05L分不同而唯在一5)何以故三世九
002_0002_c_06L世卽一念故一切卽一故如一念
002_0002_c_07L念亦如是一卽一切一念卽多念等
002_0002_c_08L6)反前卽是以此理故陀羅尼法主伴
002_0002_c_09L相成隨擧一法盡攝一切若約會說
002_0002_c_10L會會中盡攝一切若約品說品品盡攝
002_0002_c_11L一切乃至若約文說文文句句盡攝一
002_0002_c_12L何以故若無此彼不成故陀羅尼
002_0002_c_13L法法如是故如下說

002_0002_c_14L
三釋文意文有七言三十句此中大分
002_0002_c_15L有三初十八句約自利行次四句利他
002_0002_c_16L次八句辨脩行者方便及得利益

002_0002_c_17L
就初門中有二初四句現示證分二次
002_0002_c_18L十四句顯緣起分此中初二句指緣起
002_0002_c_19L二次二句約陀羅尼理用以辨攝法
002_0002_c_20L分齊三次二句卽7)事攝法分齊四次
002_0002_c_21L四句約世時示攝法分齊五次二句約
002_0002_c_22L「名」作「得」{乙}「菩提」疑「煩惱」{甲}
002_0002_c_23L「入」作「人」次同
「相」下疑脫「同相異相」
002_0002_c_24L
「念」無{乙}「反」作「變」{乙}「事」下疑脫
002_0002_c_25L「顯」

002_0003_a_01L계위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 다음 2구67)는 위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이다. 비롯 여섯 부문이 같지 않으나, 오직 연기다라니법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에 말한 ‘연기의 체體’는 곧 일승一乘의 다라니법陀羅尼法이다. 하나가 곧 일체一切이고, 일체가 곧 하나인, 장애 없는 법계의 법이다. 이제 우선 하나의 문에 의하여 연기의 뜻을 드러내겠다.68)
“연기란 위대한 성인聖人이 중생을 섭수하여 이치에 계합契合하고 사事69)를 버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범부는 사事를 보면 곧 이치에 미혹하나, 성인은 이치를 얻어서 이미 사事가 없는 까닭이다. 이제 참된 이치를 들어서 미혹한 중생(情)을 깨닫게 하여,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사事가 곧 없으며 사事가 곧 이치에 들어맞음을 알게 하려는 까닭에 이 가르침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서 말하기를70), ‘자상自相71)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과보의 상(報相)이니, 명색名色72)이 아뢰야식阿梨耶識73)과 함께 생기는 것이다. 경에서 「삼계三界74)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 이른바 명색名色이 함께 생긴다.」75)라고 한 까닭이다. ‘명색名色이 함께 생긴다.’는 것은 명색名色이 저 (아뢰야식과)과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둘째는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이니, 이 명색名色이 저 (아뢰야식)을 여의지 않고, 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함께 생기기 때문이다. 경에서, 「여의지 않는다.」76)라고 한 까닭이다.
셋째는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이니, 육입六入77)에서부터 유有78)에 이르는 것이다.79) 경에서, 「이 명색名色이 자라서는 육입六入의 무더기를 이루고 내지80)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 늙음, 아픔,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번뇌(生老病死憂悲苦惱)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키우지만, 이 중에는 나와 나의 것(我所)81)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82)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같다.」83)라고 한 것이다. 이 중에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다.」는 것은 이 둘이 공空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다.」는 것은 자체가 무아無我84)이기 때문이다. 「풀과 나무」는 중생의 수가 아님을 보인 때문이다.’85)라고 하였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12인연因緣86) 등은 곧 바탕(體)의 자성이 공空하여 저 아뢰야식을 의지하여 생겨난다. 아뢰야식은 미세하고, 자체가 무아無我이며, 12인연을 낳는다. 12인연도 다 무아無我이니, 따라서 연緣으로 생겨난 것들은 별다른 법이 있지 않다. 부처님도 연기를 관하는 문(緣起觀門)을 들어서 모든 법이

002_0003_a_01L位以彰攝法分齊六次二句總論上意
002_0003_a_02L雖六門不同而唯顯緣起陀羅尼法
002_0003_a_03L言緣起體者卽是一乘陀羅尼法一卽
002_0003_a_04L一切一切卽一無障礙法法界也
002_0003_a_05L且約一門顯緣起義所謂緣起者大聖
002_0003_a_06L攝生欲令契理捨事凡夫見事卽迷於
002_0003_a_07L聖人得理旣無於事故今擧實理
002_0003_a_08L以會迷情令諸有情知事卽無事卽會
002_0003_a_09L故興此敎故地論言自相者有三
002_0003_a_10L一者報相名色共阿梨耶識生
002_0003_a_11L經於三界地復有牙生所謂名色共生
002_0003_a_12L名色共生者名色共彼生故二者
002_0003_a_13L彼因相是名色不離彼依彼共生故
002_0003_a_14L如經不離故三者彼果次第相從六入
002_0003_a_15L乃至於有如經此名色增長已成六入
002_0003_a_16L乃至有因緣故有生老病死憂悲苦
002_0003_a_17L如是衆生生長苦聚是中離我我
002_0003_a_18L無知無覺如草木也此中離我我
002_0003_a_19L所者此二示現空無知無覺者自體
002_0003_a_20L無我故草木者示非衆生數故當知
002_0003_a_21L十二因緣等卽體自性空依彼阿梨耶
002_0003_a_22L生梨耶微細自體無我生十二因
002_0003_a_23L十二因緣示皆無我故緣生等
002_0003_a_24L1)有別法佛擧緣起觀門以會諸法

002_0003_b_01L다 무분별이며 곧 참된 성품을 이룸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지경론』에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第一義諦87)에 들어간다.’88)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뜻은 삼승三乘에 있으며, 또한 일승一乘에도 통한다. 왜냐하면 일승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89)
만약 별교일승別敎一乘을 기준으로 하면, “간략히 열 가지 문을 설한다. 말하자면 인연은 나뉘어 차례가 있는 까닭이며, 한 마음에 포섭되는 까닭이며, 자상과 업으로 이루기 때문이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세 길(三道)90)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와 미래를 관하기 때문이며, 세 고통(三苦)91)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며,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이며,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기 때문이며,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이기 때문이다.92) 이와 같은 12인연은 일승一乘의 뜻에 포섭된다”.93)
무슨 이유로 열 번을 헤아려 설하는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묻는다. 열 번의 인연은 앞과 뒤에 해당하는가, 동시(一時)에 해당하는가?
답한다. 곧 앞과 뒤이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없기도 하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문이 같지 않기 때문에 곧 앞과 뒤이고, 육상六相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곧 앞과 뒤가 없다. 그 뜻은 무엇인가? 열 번이 비록 다르지만 한가지로 무아無我를 이루기 때문이다.
“『영락경瓔珞經』94)의 열 번의 인연95)은 삼승三乘의 뜻에 포섭된다. 왜냐하면, 가르침에 따라서 차별되어 같지 않기 때문이다.”96)
자세히는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다.97) 십이인연의 설과 같이, 연緣으로 생겨난 다른 모든 법도 예에 준하여 알 수 있다.
둘째, ‘다라니법陀羅尼法’은 아래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셋째, ‘사事에 즉하여 법을 포섭한다.’라는 것은 인다라니(因陀)98)와 미세다라니(微細陀)99)를 나타내기 때문이니, 자세한 뜻은 경에서와 같다.
넷째, 말한 바 ‘구세九世’라는 것은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세이다. 삼세三世가 상즉相卽하고 상입相入하여100) 그 일념一念을 이룬다. 총과 별을 합하여 이름 붙인 까닭에 ‘십세十世’101)이다. ‘일념’은 현상으로서의 순간(事念)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다섯째, ‘지위를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육상六相의 방편으로써 뜻에 따라서 풀어 나가면 곧 이해할 수 있다. 육상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다.

002_0003_b_01L切無分別卽成實性故地論言隨順
002_0003_b_02L觀世諦卽入第一義諦是其事也
002_0003_b_03L義在三乘亦通一乘何以故一乘所
002_0003_b_04L2)目故若約別敎一乘略說十門所謂
002_0003_b_05L因緣3)有分次第故一心所攝故自業
002_0003_b_06L成故不相捨離故三道不斷故觀前
002_0003_b_07L後際故三苦集故因緣生故因緣生
002_0003_b_08L滅縛故隨順有盡觀故如是十二因緣
002_0003_b_09L一乘義攝何故十番數說4)顯無量
002_0003_b_10L問十番因緣爲當前後爲當一時
002_0003_b_11L5)答卽前後卽無前後何以得知
002_0003_b_12L不同故卽前後六相成故6)卽前後
002_0003_b_13L義云何十番雖別而同成無我故瓔
002_0003_b_14L珞經十番因緣三乘義攝何以故唯敎
002_0003_b_15L差別不同廣如地論說如十二因緣說
002_0003_b_16L餘緣生諸法准例可解二陀羅尼法者
002_0003_b_17L如下說三卽事攝法者顯因陀及微細
002_0003_b_18L7)陀故廣義如經四所謂九世者過去
002_0003_b_19L過去過去現在 8)過去未來現在過去
002_0003_b_20L現在現在現在未來未來過去未來
002_0003_b_21L現在未來未來9)三世相卽及與相
002_0003_b_22L成其一念總別合名故十世一念
002_0003_b_23L約事念說也五約位者以六相方
002_0003_b_24L便隨義消息卽可解也六相者如上

002_0003_c_01L묻는다. ‘연기’라는 한마디 말 중에 모든 법이 둘이 아님이 곧 드러나 있는데 왜 많은 문이 필요한가?
답한다. 바탕(體)을 알면 곧 그러하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음욕(婬)과 분노(怒)와 어리석음(癡)의 성품이 곧 보리菩提이다.”102)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에서 어리석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부처께서 일곱 가지 괴로움에 대한 진리(七種苦諦)103) 이외에 따로 보리菩提가 있어, 세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설하신 대로 수행하여야만 (피안彼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을 위하여 많은 문의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묻는다. 만약 그렇다면 법문이 수없을 것인데 왜 오직 여섯 문의 설명뿐인가?
답한다. 여섯 문으로 설명한 것도 모든 법을 예에 준하여 마땅히 알 수 있기 때문에 간략히 이와 같이 설하였으니, 실은 말 그대로이다.
여섯째, “그윽하여 분별이 없다(冥然無分別).”라는 것은 연기의 법이 으레 이러하기 때문이니, 위에 준하여 생각할 수 있다.
(2) 이타행利他行
둘째 이타행 중에 나아가,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왜냐하면, 큰 바다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니, 천제天帝와 아수라가 싸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이 마치 도장으로 글자를 찍은 것과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밑바닥이 없으므로 끝까지 청정하고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하여 ‘해인’이라고 한 것이다.
‘번다하다(繁)’란 치성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타낸다(出)’는 것은 솟아나오는 것이 다함없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002_0003_c_01L問緣起一言中諸法無二卽顯了
002_0003_c_02L10)何須多門答體解卽是不須遠求
002_0003_c_03L是故經言11)惱癡性卽是菩提如是
002_0003_c_04L等迷極遠是故佛敎七種苦諦以外
002_0003_c_05L有菩提三無數劫如說修行乃可得
002_0003_c_06L爲迷12)之者須多門說問若如是者
002_0003_c_07L法門無數何故唯六門說耶答以六門
002_0003_c_08L說諸法准例應可解故略如是說
002_0003_c_09L實如言13)▼(穴/具)然無分別者緣起法法
002_0003_c_10L如是故准上可思

002_0003_c_11L
二就利他行中印者約喩得名何者
002_0003_c_12L是大海極深明淨徹底天帝共阿脩羅
002_0003_c_13L鬪諍時一切兵衆一切兵具於中14)
002_0003_c_14L現了了分明如印顯文字故名海印
002_0003_c_15L15)入三昧亦復如是窮證法性無有
002_0003_c_16L源底以究竟淸淨湛然明白三種世
002_0003_c_17L間於中顯現名曰海印繁者熾盛義故
002_0003_c_18L出者涌出無盡故如意者從喩得名
002_0003_c_19L「有」一作「分」ㆍ作「立」{乙}「目」作「因」{乙}
002_0003_c_20L
「有」作「自」{乙}「顯」作「離」次同{乙}「答」
002_0003_c_21L作「是」{乙}
「卽」下疑脫「無」「陀」更勘
002_0003_c_22L
「過去…未來」十六字作 「未來現在現在現在
002_0003_c_23L未來未來過去」{乙}
「世」疑「也」「乎」疑
002_0003_c_24L「耳」
「惱」疑「怒」「之者」作「者之」{乙}
002_0003_c_25L
「▼(穴/具)」作「冥」{甲}「離」疑「顯」「入」作「人」
002_0003_c_26L{乙}

002_0004_a_01L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연을 따라 끝이 없다.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 또한 이와 같아서, 한 소리(一音)로 펼친 것이 중생계를 따라 악을 없애고 선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데, 어디든 필요한 곳에 따라서 여의롭지 않음이 없는 까닭에 ‘여의’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3)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脩行者方便及得利益)
셋째, 수행의 방편을 기준으로 하면, 이 중에 둘이 있다. 첫째는 수행의 방편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이익 얻음을 분별한 것이다.
첫째 문에서 ‘행자行者’란 일승의 보법普法104)을 보고 들은 이후 아직 보법을 원만히 증득하기 이전까지를 말한다. 이것은 별교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다. 만약 방편일승方便一乘105)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오승五乘106)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왜냐하면, 일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一乘所流)이고, 일승을 목표로 하는 것(一乘所目)이고, 일승의 방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면 오승을 모두 포섭하니, 일승의 수행자도 또한 가능하다.
‘흘러나오는 것(所流)’과 ‘목표로 하는 것(所目)’은 연기의 도리를 기준으로 한 말이고, ‘방편方便’은 지혜를 기준으로 한 말이다. 무슨 까닭인가? 나아가 머무르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고, 마음을 돌이키지 않은 것을 방편이라 이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성자의 뜻을 기준으로 설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훌륭한 방편으로 중생을 가까이 이끌어 맞아들이기 때문이니, 오승의 설과 같다. 사람(人)과 법法, 원인(因)과 결과(果), 앎(解)과 수행(行), 이치(理)와 현상(事), 가르침(敎)과 뜻(義) 등의 일체 모든 법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묻는다. 이른바 오승五乘 등의 법은 설하는 가르침(能詮敎法)인가, 설해지는 뜻(所詮義)인가?
답한다. 설하고 설해지는 일체 모든 법은 다 말(言) 가운데 있다. 그 뜻이 무엇인가? 설해지는 법은 말의 모양(言相)이 모두 끊어졌으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큰 자비와 본래 서원의 힘으로 인한 까닭에, 모든 부처님 집의 법이 으레 이러한 까닭에 말로 된 가르침을 베풀어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러한 뜻 때문에 가르침의 그물에 포섭되는 일체 모든 법이 다 말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이 단지 이름(名字)이 있을 뿐이다.”107)라고 한 것이 곧 그 뜻이다.

002_0004_a_01L意寶王無心而雨寶益生隨緣無窮
002_0004_a_02L迦如來善巧方便亦復如是一音所暢
002_0004_a_03L應衆生界滅惡生善利益衆生隨何
002_0004_a_04L用處無不如意故名如意

002_0004_a_05L
三約修行方便者此中有二一明修行
002_0004_a_06L方便二辨得利益初門行者謂見聞
002_0004_a_07L一乘普法已去未滿證普法已還是此
002_0004_a_08L約別敎一乘說也若約方便一乘說
002_0004_a_09L乘總是入一乘攝何以故以一乘所流
002_0004_a_10L一乘所目一乘方便故若約此義總攝
002_0004_a_11L五乘一乘修行者亦得所流所目者
002_0004_a_12L緣起道理語方便者約智語何以故
002_0004_a_13L進趣不住名曰方便不廻心者不名
002_0004_a_14L方便故亦可約聖者意說何以故
002_0004_a_15L善方便引接衆生故如五乘說人法因
002_0004_a_16L1)解理事敎義等一切諸法准例如
002_0004_a_17L

002_0004_a_18L
問所謂五乘等法爲是能詮敎法耶
002_0004_a_19L是所詮義耶答能詮所詮一切諸法
002_0004_a_20L在言中其義如所詮之法相皆絕
002_0004_a_21L佛世尊以大慈悲本願力故諸佛家法
002_0004_a_22L法如是故施設言敎爲衆生說以是
002_0004_a_23L義故敎網所攝一切諸法皆悉在言是
002_0004_a_24L故經言一切諸法但有名字卽其義也

002_0004_b_01L묻는다. 증분證分의 법은 말의 모양(言相)이 미치지 않고, 언교言敎의 법108)은 현상(事) 가운데 있다면, 증분과 교분敎分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되는 허물이 있다.
답한다. 만약 정情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항상 두 변에 있게 된다. 만약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은 예부터 중도이고, 하나로서 무분별이다. 알 수 있는 까닭은 변계遍計는 모양(相)이 없고 의타依他는 생겨남이 없으며 진실은 성품이 없어서 세 가지의 자성109)이 항상 중도에 있으니, 세 법 이외에 다시 증분과 교분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하나로서 무분별이니,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이 이치를 얻은 까닭에 이름의 모양(名相)이 미치지 않으나, 중생을 위하여 설하기 때문에 말이 현상(事) 중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의 게偈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여래께서 부처님의 법을 연설하실 것이 없지만 그 교화에 응하는 바를 따라서 법을 설하신다.”110)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그러므로 성자聖者가 변계遍計를 따르는 까닭에 세 가지 자성(三性)을 세워서 우선 궁핍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점점 이후에 세 가지 자성이 없음(三無性)111)을 나타내 꿈꾸는 사람을 깨우니, 이것이 곧 성자의 큰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묻는다. 『섭대승론攝大乘論』112)에서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범부의 경계, ‘의타기依他起’와 ‘진실眞實’을 성자聖者의 지혜의 경계라고 하였는데113), 무엇 때문에 성자가 변계를 따르는 것인가?
답한다. 변계소집의 모든 법은 잘못 거꾸로 되었기(顚倒) 때문에 있다. 그러므로 논論에서 “범부의 경계”114)라고 말한 것이다. 결국 공空인 까닭에 상대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논에서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은 공에 대한 지혜가 성자의 경계가 아니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자비의 방편으로 눈병을 따르는 까닭에 허공의 꽃(空華)을 말한 것이니 어떤 비방이나 논란이 있겠는가?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의타기상依他起相은 인연을 따라 생겨난 것으로 자성이 없어서 두 변의 잘못을 여의었으니 무아無我와 같다.
원성실성圓成實性은 평등한 법성法性으로서, 이것과 저것을 원융하여 분별할 수 없으니 예부터 한맛이다. 이 뜻 때문에 분별이 미치지 못하니, 그러므로 논에서 “성자의 지혜의 경계”라고 한 것이다. 다른 의미는 이와 같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002_0004_b_01L
問證分之法言相不及言敎之2)法在
002_0004_b_02L於事中者證敎兩法常在二邊過爲
002_0004_b_03L答若約情說證敎兩法常在二邊
002_0004_b_04L3)理證敎兩法舊來中道一無分別
002_0004_b_05L所以得知遍計無相依他無生眞實無
002_0004_b_06L三種自性常在中道三法以外
002_0004_b_07L無證敎是故當知一無分別是故至
002_0004_b_08L人得此理故名相不及爲生說故
002_0004_b_09L在事中故經偈云一切諸如來無有
002_0004_b_10L說佛法隨其所應化而爲演說法
002_0004_b_11L其義也是故聖者隨遍計故建立三性
002_0004_b_12L且安窮心漸漸已後現三無性覺悟夢
002_0004_b_13L此卽聖者大善巧也

002_0004_b_14L
問如攝論云遍計所執凡夫境界
002_0004_b_15L他眞實聖智境界何故聖者隨遍計耶
002_0004_b_16L答遍計諸法顚倒故有是故論云
002_0004_b_17L夫境界畢竟空故無所可對是故論
002_0004_b_18L中非聖境界非謂智空非聖境界是故
002_0004_b_19L聖者慈悲方便隨眼病故言說空華
002_0004_b_20L有何妨難 4)竟在於此依他起相從因
002_0004_b_21L緣生無有自性離二邊過與無我同
002_0004_b_22L圓成實性平等法圓融彼此不可分
002_0004_b_23L舊來一味以此義故分別不及
002_0004_b_24L故論言聖智境界別意如是若約實說

002_0004_c_01L세 가지 자성은 모두 범부의 경계이다. 왜냐하면, 중생(情)을 따라서 현상(事)을 설하여 세 가지를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 가지 자성은 곧 성자의 지혜의 경계이다. 왜냐하면, 지혜를 따라서 이치를 드러내어, 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三性)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三無性)을 세우지 않고115), 또한 어떤 곳에서는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우는 것이다.116)
무슨 까닭인가? 중생을 따라서 세운 것은 이해의 문(解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따로 세운 것이고, 지혜를 따라서 이치를 드러낸 것은 수행의 문(行門)을 기준으로 한 까닭에 세 가지 자성(三性)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둘117) 이외에 진실이 없는데, 하물며 세 가지 자성 이외에 세 가지 자성 없음이 따로 있겠는가? 알 수 있는 까닭은 모양 없는 평등한 지혜가 앞에 나타나 끝내 상대할 만한 법이 없으며, 오직 중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르침이 세워지는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묻는다. 위에서 말한 증분의 법과 연기분의 법은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한다. 차별되기도 하고 차별되지 않기도 하다. 그 뜻은 무엇인가? 증분의 법은 참 모양(實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에 오직 깨달은 이만이 알 수 있고, 연기분의 법은 중생을 위해 설하여 연緣과 상응한다. 그러므로 완전히 차별된다.118) 연기의 법은 뭇 연緣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어서 근본(本)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차별되지 않는다.
묻는다. 만약 이와 같다면, 자신이 깨달은 것으로써 중생을 위하여 설하는 것은 지말(末)과 다르지 않다. 보통은 차별인가?
답한다. 그 뜻도 가능하다. 만약 깨달은 것이 말(言)에 있다고 하면, 지말(末)과 다르지 않다. 말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 근본과 다르지 않으므로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하고,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002_0004_c_01L三種自性皆是凡夫境界何以故
002_0004_c_02L5)性說事安6)7)種自性卽聖智境界
002_0004_c_03L何以故隨智顯理非安立故是故經
002_0004_c_04L中亦有處三性以外不立三無性亦有
002_0004_c_05L處三性以外別立三無性所以者何
002_0004_c_06L隨情安立約解門故別立三無性
002_0004_c_07L智顯理約行門故 8)三以外不立三無
002_0004_c_08L尙二9)以外無有眞實何況三性以
002_0004_c_09L外別有三無性所以得知無相等智現
002_0004_c_10L畢竟無法可對唯在中道故是故
002_0004_c_11L須解敎立所由

002_0004_c_12L
問如上所言證分之法及緣起分法
002_0004_c_13L何差別答別不別其義云何證分之
002_0004_c_14L法約實相說唯證10)所故緣起分法爲
002_0004_c_15L從衆緣生無有自性 11)與本不異是故
002_0004_c_16L不別

002_0004_c_17L
問若如是者以自所證爲衆生說
002_0004_c_18L末不異尋常差別耶答得其義若爲
002_0004_c_19L所證在言與末不異言說在證與本
002_0004_c_20L不異與本不異故用而常寂說而不說
002_0004_c_21L「解」下一有「行」「法」下有「言敎之法」{乙}
002_0004_c_22L
「理」下入「說」見「竟」疑「意」「性」疑
002_0004_c_23L「情」
「立」下疑脫「故」「種」下疑脫「無」
002_0004_c_24L
「三」下疑脫「性」「以外」作「外以」{乙}
002_0004_c_25L「所」下疑脫「知」
「與本」作「本與」{乙}

002_0005_a_01L지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므로 말하지 않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말하면서도 말하지 않으므로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는 것이 곧 말하지 않는 것이므로 말하는 것을 얻을 수 없고, 말하지 않는 것이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므로 말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둘 모두 없을 수 없으므로 둘이 모두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 뜻 때문에 말함과 말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으며,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모든 차별의 상대하는 법문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따라서 경에 이르기를, “유위와 무위의 일체 모든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성품과 모양이 항상 머물러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119)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또한 바르게 말한 법 중에는 말(言說) 이외에 다시 다른 뜻이 없으니, 말로써 뜻을 삼는다. 바른 뜻의 법 중에는 바른 뜻 이외에 다시 다른 말이 없으니 뜻으로써 말을 삼는다. 뜻으로써 말을 삼으므로 말은 뜻 아님이 없고, 말로써 뜻을 삼으므로 뜻은 말 아님이 없다. 뜻이 말 아님이 없으므로 뜻은 곧 뜻이 아니고, 말이 뜻 아님이 없으므로 말은 곧 말이 아니다. 말이 곧 말이 아니고, 뜻이 곧 뜻이 아니므로 둘 모두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 중도(中道)에 있으니, 중도는 말과 말 아닌 것에 통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의 참모양(實相)은 말에 있지 않으니,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말의 법은 참된 성품(眞性)에 있지 않으니 근기(機)의 이익에 있기 때문이다. 근기의 이익에 있으므로 이름에는 참된 성품이 없고, 이름의 성품을 여의었으므로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이 없다. 이름을 붙이지만 이름이 없으므로 이름으로써 참됨(實)을 구하지만 참됨을 구할 수 없다. 이름에 참된 성품이 없으므로 이름을 붙이지만 무아無我와 같아서 이름의 성품은 얻을 수 없다. 이 뜻 때문에 둘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오직 증득한 자만이 알고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모든 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나의 경계가 아니다.”120)라고 한 것이다.
묻는다. 앞과 뒤의 두 뜻이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앞의 뜻은 근본과 지말이

002_0005_a_01L與末不異故寂而常用不說而說不說
002_0005_a_02L而說故不說卽非不說說而不說故
002_0005_a_03L卽非說說卽非說故說卽不可得不說
002_0005_a_04L卽非不說故不說卽不可得二俱不可
002_0005_a_05L得故二俱不相妨以是義故說與不
002_0005_a_06L等無差別生與不生等無差別
002_0005_a_07L與不動等無差別一切差別相對法門
002_0005_a_08L准例如是故經云有爲無爲一切諸法
002_0005_a_09L有佛無佛性相常住無有變異是其義
002_0005_a_10L亦可正說法中言說以外更無別
002_0005_a_11L以言爲義正義法中正義以外
002_0005_a_12L無別言以義爲言以義爲言故言無
002_0005_a_13L非義以言爲義故義無非言義無非
002_0005_a_14L言故義卽非義言無非義故言卽不
002_0005_a_15L言卽非義故二俱不可得是故一
002_0005_a_16L切法本來在中道中道者通言非言
002_0005_a_17L何以故諸法實相不在言中離名性故
002_0005_a_18L言說法不在眞性在機益故名無眞性
002_0005_a_19L離名性故名而無名名而無名故以名
002_0005_a_20L求實實不可得名無眞性故名而無
002_0005_a_21L1)我同故名性不可得以此義故二俱
002_0005_a_22L不可得唯證所知非餘境界是故經
002_0005_a_23L一切諸法唯佛所知非我境界

002_0005_a_24L
問前後兩義何別答前義2)可別以本末

002_0005_b_01L상즉하고 상융相融하므로써 중도의 뜻을 드러내고, 뒤의 뜻은 이름(名)과 뜻(義)이 서로 객客이 됨으로써 무아의 뜻을 드러낸다. 드러나는 도리는 다르지 않으나 설명하는 방편이 다르다. 이는 곧 근본과 지말이 서로 돕고 이름과 뜻이 서로 객이 되어서, 중생을 깨우쳐 인도하여 자체의 이름 없는 참된 근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니, 교화함과 교화됨의 핵심(宗要)이 여기에 있다.
묻는다. 이 뜻은 돈교頓敎121)의 근본(宗)에 해당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서 설하는가?
답한다. 위에서 설한 것처럼 설함(說)과 설하지 않음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모두 참된 덕이므로 비방하고 힐난할 것이 없으며, 또 분별을 막기 위하여 삼승의 설에 따른 것이니, 대개 지혜로운 이의 수승하고 오묘한 능력이다. 위와 같은 증분과 연기분의 뜻은 논122) 중의 큰 뜻(義大)과 큰 가르침(敎大)123)에 해당한다.
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한다. 이치에 따라서 머무르지 않음을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잡는다(捉)’라고 이름한다. ‘여의如意’는 앞과 같다.124) ‘집으로 돌아간다(歸家)’란 본성을 증득한 까닭이다. ‘집(家)’은 무슨 뜻인가? 그늘지게 덮는다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성의 참된 공空은 깨달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고 이름하고, 큰 자비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으로써 중생을 그늘지게 덮어 주는 것을 이름하여 ‘집(舍)’이라고 한다. 이 뜻은 삼승에 있으나 일승이라야 비로소 구경이 된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법계다라니의 집과 인드라다라니의 집과 미세(다라니)의 집 등이다. 이것이 성자가 의지하여 머무르는 곳이므로 이름하여 ‘집(家)’이라고 한다. ‘분수를 따른다(隨分)’란 원만하지 않은 뜻이기 때문이다. ‘자량資糧’이란 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125)이기 때문이다. 아래 경의 「이세간품」 가운데 2천 가지의 답126) 등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둘째, 이익 얻음을 밝힌다. ‘다라니陀羅尼’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지니기(總持)’ 때문이다. 아래의 열 개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127)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 ‘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두 변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涅槃128)

002_0005_b_01L相卽3)相卽相融顯中道 4)後義以名義
002_0005_b_02L互爲5)客顯無我義所顯道理不6)
002_0005_b_03L詮方便別此卽本末相資名義7)8)
002_0005_b_04L開噵衆生令致9)自無名眞源能化所
002_0005_b_05L化宗要在此問此義義

002_0005_b_06L
當頓敎宗何故此間說答如上說
002_0005_b_07L與不說等無差別何以故總是實德故
002_0005_b_08L無有妨難且護分別故順三乘說
002_0005_b_09L是智者勝妙能也如上證分及緣起分
002_0005_b_10L當論中義大敎大也背反分別
002_0005_b_11L無分別名曰無緣順理不住故名善
002_0005_b_12L10)如說11)終行得聖者意故名爲捉
002_0005_b_13L如意如前歸家者證本性故家者何
002_0005_b_14L12)陰覆義住處義故所謂法性眞空
002_0005_b_15L覺者所住故名爲宅大悲善巧蔭覆衆
002_0005_b_16L名曰爲舍此義在三乘一乘方究
002_0005_b_17L何以故應法界故所謂法界陀羅
002_0005_b_18L尼家及因陀羅家微細家等此是聖
002_0005_b_19L者所依住故名曰爲家隨分者未滿
002_0005_b_20L義故資粮者助菩提分故如下經離
002_0005_b_21L世間品中二千答等是也二明得益
002_0005_b_22L陀羅尼者總持故如下數十錢法中說
002_0005_b_23L實際者窮法性故中道者融二邊故
002_0005_b_24L坐床者攝一切故安在法界十種涅槃

002_0005_c_01L광대한 보배 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배’란 귀하기 때문이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이다. ‘열 가지 열반’은 아래 경의 「이세간품」에서 설한 것과 같다.129)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란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곧 열 부처님(十佛)130)이니 『화엄경』과 같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 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화불化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131)
무슨 까닭으로 열 개의 수로 설하는가? 많은 부처님을 드러내기 위한 까닭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묻는다. 얽매여 있는 중생(有情)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
답한다.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이름하지 않는다. 번뇌를 끊어 버리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쳐야, 이로부터 이후로 이름하여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한다.
묻는다.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답한다.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과 같이,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132)
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 이같이 끊으므로 아직 끊기 이전에는 ‘끊었다’고 이름하지 않으며, 지금 끊은 이후로 ‘예부터 끊었다(舊來斷)’고 이름한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002_0005_c_01L廣大寶牀攝一切故名曰坐床寶者
002_0005_c_02L可貴故床者卽攝攝義故十種涅槃者
002_0005_c_03L如下經離世間品說舊來不動者舊來
002_0005_c_04L佛義故所謂十佛如華嚴經一無著佛
002_0005_c_05L安住世間成正覺故二願佛出生故
002_0005_c_06L三業報佛信故四持佛隨順故五化
002_0005_c_07L13)永度故六法界佛無處不至故
002_0005_c_08L心佛安住故八三昧佛11)量無著故
002_0005_c_09L九性佛決定故十如意佛普覆故
002_0005_c_10L故十數說欲顯多佛故此義諸法之眞
002_0005_c_11L究竟之玄宗甚深難解宣可深思

002_0005_c_12L
問具縛有情15)永斷16)菩薩未成福智
002_0005_c_13L何義故舊來成佛也答*菩薩未斷
002_0005_c_14L名成佛 *菩薩斷盡福智成竟自此已
002_0005_c_15L名爲舊來成佛

002_0005_c_16L
問斷惑云何答如地論說非初非中
002_0005_c_17L前中後取故云何斷如虗空如是
002_0005_c_18L斷故未斷已還不名爲斷現斷已去
002_0005_c_19L名爲舊來斷也猶如覺夢睡悟不同
002_0005_c_20L「我同故」疑剩「可別」疑剩「相即」疑剩
002_0005_c_21L
「後義」作「義後」{乙}「客」一作「容」「理」
002_0005_c_22L一作「異」
「互」作「乎」{乙}「客」一作「容」
002_0005_c_23L
「自」下一有「還」「巧」無{乙}「終」作「修」
002_0005_c_24L{乙}
「陰」疑「蔭」{編}「永」一作「求」「量」
002_0005_c_25L一作「礙」
「永」疑「未」「菩薩」疑「煩惱」
002_0005_c_26L次同

002_0006_a_01L이룸(成)과 이루지 않음, 끊음과 끊지 않음 등을 세우지만,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참 모양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133)라고 한 것이 그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같은 등의 경문經文은 이치에 즉함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고 현상(事)에 즉하여 설한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만약 삼승의 방편 가르침의 부문을 기준으로 하면 합당히 이 뜻이 있으나, 만약 일승의 참다운 가르침의 부문을 의거하면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한다. 이치와 현상이 그윽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으며, 바탕(體)과 작용(用)이 원융하여 항상 중도에 있으니, 자기의 일 이외에 어디에서 이치를 얻겠는가?
묻는다. 삼승의 가르침 가운데 또한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면서도 항상 고요함이 있는데, 이와 같은 뜻을 무슨 까닭에 이치에 즉한 문에 치우치고 현상에 즉하지 않아서 자재롭지 않다고 위에서 말하였는가?
답한다. 이치와 현상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다. 현상과 현상의 상즉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분별하는 병을 다스리고자 현상을 모아서 이치에 들어가는 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만약 별교일승에 의하면, 이치와 이치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치와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 또한 가능하다. 무슨 까닭인가? 중中과 즉卽134)이 같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이치의 인다라니因陀羅尼135)와 현상의 인다라니 등의 법문을 구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普賢菩薩136)의 법계의 집 가운데 이 같은 등의 장애 없는 법계의 법문이 있어서 매우 자재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거스름(逆)’과 ‘따름(順)’, ‘주主’와 ‘반伴’의 서로 이루는 등의 법문은 예에 준하여 서로 포섭하면 뜻에 따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연기의 참 모양(實相)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깨달아야만 한다. 말하자면 일전一錢에서부터 십전十錢까지이다. 열(十)을 말한 까닭은 한량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하나 가운데

002_0006_a_01L建立成不成斷不斷等其實道理諸法
002_0006_a_02L實相不增不減本來不動是故經言
002_0006_a_03L*菩薩法中不見一法減淸淨法中
002_0006_a_04L見一法增是其事也有人說言如是
002_0006_a_05L等經文約卽理說非卽事說若約三
002_0006_a_06L乘方便敎門合有此義若依一乘如實
002_0006_a_07L敎門不盡其理理事▼(穴/具)然一無分別
002_0006_a_08L體用圓融常在中道自事以外何處
002_0006_a_09L得理

002_0006_a_10L
問三乘敎中亦有寂而常用用而常
002_0006_a_11L如是等義何故上言偏卽理門
002_0006_a_12L卽事中不自在也答理事相卽故
002_0006_a_13L如是義非謂事事相卽何以故三乘
002_0006_a_14L敎中欲治分別病會事入理爲宗故
002_0006_a_15L若依別敎一乘理理相卽亦得事事相
002_0006_a_16L亦得理事相卽亦得各各不相卽
002_0006_a_17L亦得相卽何以故中卽不同故亦有
002_0006_a_18L具足理因陀羅尼及事因陀羅尼等法
002_0006_a_19L門故十佛普賢法界宅中有如是等無
002_0006_a_20L鄣礙法界法門極自在故其餘逆順主
002_0006_a_21L1)半相成等法門准例相攝隨義消息
002_0006_a_22L若欲觀緣起實相陀羅尼法者先應覺
002_0006_a_23L數十錢法所謂一錢乃至十錢所以說
002_0006_a_24L十者欲顯無量故此中有二一者

002_0006_b_01L열이고, 열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는 하나가 곧 열이고, 열이 곧 하나이다.
첫째 문 가운데 둘이 있으니, 하나는 위를 향하여 오고(向上來), 둘은 아래를 향하여 간다(向下去). 위를 향하여 온다고 말한 가운데 열 가지 문이 있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니, 곧 근본 수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열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문 또한 이와 같으니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아래를 향하여 간다고 말한 가운데 또한 열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 가운데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는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는 곧 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이같이 변화가 생기는 것을 견주어 맞추어 보면, 낱낱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져 있음을 안다. 근본과 지말의 두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나머지 여덟 동전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묻는다. 이미 하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하나 가운데 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답한다. 대연기의 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곧 이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모양이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 하나란 자성自性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하나이며, 내지 열이란 자성으로서의 열이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열이다. 일체의 연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한 법도 일정한 모양으로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자재自在하지 않다. 자재하지 않다란 생겨나나 생겨나지 않음으로서의 생겨남이다. 생겨나지 않음으로서의 생겨남이란 곧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다.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란 곧 중도中道의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곧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통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말하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하다고 설하며,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설하며, 또한 곧 중도의 뜻이라고 한다.”137)라는 것이 곧 그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무분별의 뜻이다. 무분별의 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연을 따라 다함이 없으며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하나 가운데

002_0006_b_01L卽十十中一二者一卽十十卽一
002_0006_b_02L門中有二一者向上來二者向下去
002_0006_b_03L言向上來中有十門不同一者一
002_0006_b_04L以故緣成故卽是本數乃至十者一
002_0006_b_05L中十何以故若無一十卽不成仍十
002_0006_b_06L非一故餘門亦如是2)例可知言向
002_0006_b_07L下去中亦有十門一者十何以故
002_0006_b_08L成故乃至十者十中一何以故若無
002_0006_b_09L一卽不成仍一非十故餘亦如是
002_0006_b_10L生變如是勘當卽知一一錢中具足
002_0006_b_11L十門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餘八錢
002_0006_b_12L准例可解

002_0006_b_13L
問現言一者何得一中名爲十也
002_0006_b_14L大緣起陀羅尼法若無一一切卽不成
002_0006_b_15L定知如是其相如所言一者非自性一
002_0006_b_16L緣成故一乃至十者非自性十緣成
002_0006_b_17L故十一切緣生法無有一法定相有性
002_0006_b_18L無自性故卽不自在者卽生不生生
002_0006_b_19L生生者卽是不住義不住義者卽是
002_0006_b_20L中道 3)道義者卽通生不生故龍樹云
002_0006_b_21L4)因緣所生法我說卽是空亦說爲5)
002_0006_b_22L假名 6)亦是中道義卽其義也中道義
002_0006_b_23L是無分別義無分別法不守自性故
002_0006_b_24L隨緣無盡亦是不住是故當智一中

002_0006_c_01L열과, 열 가운데 하나는 서로 용납하여 걸림 없으나 상즉(相是)은 아니다. 이제 하나의 문 가운데 열 문을 갖추므로 하나의 문 가운데 다함없는 뜻이 있음을 밝게 안다. 하나의 문에서처럼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묻는다. 하나의 문 가운데 열을 포섭하여 다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답한다.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다함을 구하면(須) 곧 다하고, 다하지 않음을 구하면 곧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하나의 현상(一事)으로써 하나의 많음을 분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고, 다른 현상(異事)으로써 하나의 많음을 분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현상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다. 하나의 현상인 까닭에 곧 하나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 이것에 준하면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현상 또한 준하여 같다.
묻는다. ‘구한다(須)’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구한다’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뜻이다. 무슨 까닭인가? 인연법은 하나로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고 다른 모든 현상(事)의 부문 가운데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연기의 오묘한 이치는 마땅히 이같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을 마친다.
두 번째 문은 이 가운데 두 가지 문이 있다. 하나는 위를 향하여 가고(向上去), 둘은 아래를 향하여 온다(向下來). 첫 문 가운데 열 가지 문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가 곧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둘째 문 가운데 또한 열 가지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이 곧 하나이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예에 준한다. 이 뜻으로 인한 까닭에 마땅히 알라. 하나하나의 동전 가운데 열 가지 문을 갖추었다.

002_0006_c_01L十中一相容無礙仍不相是現一
002_0006_c_02L門中具足十門故明中智一門中有無
002_0006_c_03L盡義如一門餘亦如是

002_0006_c_04L
問一門中攝十盡不答盡不盡所以
002_0006_c_05L者何須盡卽盡須不盡卽不盡故
002_0006_c_06L義云何以一事辨一多故卽盡以異事
002_0006_c_07L辨一多故卽不盡 7)文一事中一多義不
002_0006_c_08L相是卽是多一事故卽多是一四句
002_0006_c_09L護過失非8)離德准之可解異事亦9)
002_0006_c_10L

002_0006_c_11L
問須何義答須者緣成義何以故因緣
002_0006_c_12L法一不差故別別諸事門中准例如是
002_0006_c_13L緣起妙理應如是可知故第一門訖
002_0006_c_14L第二門此中二門一者向上去10)
002_0006_c_15L者向下來初門中十門不同一者一
002_0006_c_16L何以故緣成故乃至十者一卽十
002_0006_c_17L以故若無一十卽不成故緣成故
002_0006_c_18L二門中亦有十門一者十何以故
002_0006_c_19L成故乃至十者十卽一若無十一卽
002_0006_c_20L不成故餘者准例以此義故當知一
002_0006_c_21L一錢中具足十門

002_0006_c_22L「半」疑「伴」{編}「例」下有「事」{乙}「道」上
002_0006_c_23L疑脫「中」
「因緣」作「緣因」{乙}「是」疑剩
002_0006_c_24L
「亦」作「復」{乙}「文」疑「又」「離」疑「顯」
002_0006_c_25L
「准」作「唯」{乙}「之」一無

002_0007_a_01L묻는다. 위와 같은 많은 문이 일시에 함께 원만한가, 앞과 뒤가 같지 않은가?
답한다. 곧 원만하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같지 않기도 하다.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가? 원만함을 구하면 곧 원만하고, 앞과 뒤를 구하면 곧 앞과 뒤이다. 무슨 까닭인가? 법성의 집 안에 덕용德用이 자재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니, 연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모두 이와 같을 수 있다.
묻는다. 위에서 설한 것과 같은 오고 감의 뜻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
답한다. 자신의 위치를 움직이고 않고서 항상 오고 간다. 무슨 까닭인가? ‘오고 감(來去)’이란 연緣을 따르는 뜻으로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
묻는다. 인연과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
답한다.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말한 바 다르다는 뜻은, 인연이란 속제俗諦를 따라서 뜻이 다르다. 곧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자성이 없는 뜻을 드러내니, 바로 속제의 바탕(體)이다. 연기란 성품을 따라 분별이 없다. 곧 상즉相卽하고 상융相融하여 평등의 뜻을 드러내니,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의 바탕(體)을 따른다. 속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제일의제를 따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138)라고 한 것이 곧 그것이다. 다른 뜻은 이와 같다. 같은 뜻은 앞의 용수龍樹의 해석139)과 같다. 하나하나의 동전에 나아가 동시에 갖추어짐(同時具足) 등의 열 가지 문(十門)140)으로써 돌려 보면 그것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열 가지 문은 아래에 설하는 것과 같다.141)
동전 가운데 첫 번째 내지 열 번째가 같지 않으나 상즉하고 상입하여 걸림 없이 서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因)과 결과(果), 이치(理)와 현상(事), 사람(人)과 법法, 앎(解)과 행(行), 가르침(敎)과 뜻(義), 주主와 반伴 등의 여러 많은 문이 다르나 한 문을 설함에 따라 일체를 다 포섭한다. 나머지 뜻도 이를 준한다. 위에서의 동전을 세는 법이란 우선 변계遍計인 현상(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가리킴에 의지하여 생겨남을 나타내어 보일 수는 있지만 일체 모든 법은

002_0007_a_01L
問如上多門一時俱圓耶前後不同耶
002_0007_a_02L答卽圓卽前後不同何故如是須圓卽
002_0007_a_03L須前後卽前後何以故法性家內
002_0007_a_04L德用自在無鄣礙故由緣成故皆得
002_0007_a_05L如是

002_0007_a_06L
1)問如上所說來去義其相云何答自
002_0007_a_07L位不動而恒來去何以故來去者隨
002_0007_a_08L緣義卽是2)因緣義不動者向本義
002_0007_a_09L是緣起義

002_0007_a_10L
問因緣與緣起何別答亦別亦同
002_0007_a_11L謂別義者因緣者隨3)隨俗義別卽是
002_0007_a_12L因緣相望顯無自性義正俗諦體也
002_0007_a_13L緣起者隨性無分別卽是相卽相融
002_0007_a_14L平等義正隨第一義體也俗諦無自性
002_0007_a_15L順第一義是故經云隨順觀世諦
002_0007_a_16L卽入第一義諦4)其也別義如是
002_0007_a_17L義如前龍樹釋就一一錢中於同時具
002_0007_a_18L足等5)一門以廻轉者准之可解十門
002_0007_a_19L如上說如錢中第一乃至第十不同
002_0007_a_20L而相卽相入無礙相雖因果理事人法
002_0007_a_21L解行敎義主伴等衆多門別而隨說一
002_0007_a_22L盡攝一切餘義准6)上來數錢法
002_0007_a_23L且依遍計事錢顯示依他因緣緣起
002_0007_a_24L錢也亦可依指示顯生一切諸法終不

002_0007_b_01L끝내 얻을 수 없다.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의 법에 미혹하면 법을 나타내어 머무름이 전혀 다르다.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發心한 보살의 일념一念)공덕이 다할 수 없다.”142)란 첫째 동전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143)란 둘째 동전 이후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처음 발심한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144)란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수행의 바탕(體)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묻는다.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믿음의 지地의 보살이니, 곧 제자의 지위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란 부처님의 지地이니, 곧 대사大師의 지위이다.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지위도 전혀 다르다. 무엇 때문에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함께 두는가?
답한다. 삼승의 방편법과 원교일승의 법은 법의 작용과 머무름이 각각 달라서 섞어 쓸 수 없다. 그 뜻이 어떠한가? 삼승의 법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해와 달(年月)이 같지 않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고, 믿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다. 원교일승의 법이란 머리와 다리가 모두 하나이고,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해와 달이 모두 같다. 무슨 까닭인가? 연으로 이루어짐을 말미암은 까닭이고,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묻는다. 하나(一)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하나란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
또 묻는다. 같다(同)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같다란 같이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별이 없고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곳이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함께 한다.
묻는다. 같은 곳(同處)과 머리를 함께한다(並頭)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같은 곳과 머리를 함께한다란 서로 알지 못하는 뜻이다. 무슨 까닭인가?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묻는다. 분별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
답한다. 분별이 없다란 연緣으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곧 처음과 끝 등이 둘로 다름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일체 연緣으로

002_0007_b_01L可得執遍計物迷緣起法顯法逗留全
002_0007_b_02L經云初發心菩薩一念7)功德不可
002_0007_b_03L盡者如第一錢何以故約一門顯無
002_0007_b_04L盡故何況無量無邊諸地功德者如第
002_0007_b_05L二錢已去何以故約異門說故初發
002_0007_b_06L心時便成正覺者如一錢卽十故何以
002_0007_b_07L約行體說故

002_0007_b_08L
問初發心菩薩者信地菩薩卽是弟
002_0007_b_09L子位成正覺者佛地卽是大師位
002_0007_b_10L下不同位地8)今一別何以故同處並
002_0007_b_11L頭脚耶答三乘方便法與圓敎一乘法
002_0007_b_12L法用逗留各別不得雜用 9)其其義云
002_0007_b_13L三乘法頭脚各別 10)何耶兒子年月
002_0007_b_14L不同何故如是約相說故生信心故
002_0007_b_15L11)圓敎一乘法者頭脚總一阿耶兒子
002_0007_b_16L年月皆同12)何以故由緣成故約道
002_0007_b_17L理說故

002_0007_b_18L
問一者何義答一者一無分別義又問
002_0007_b_19L同者何義答同者同不住義無分別不
002_0007_b_20L住故始終同處師弟子並頭

002_0007_b_21L
問同處並13)頭者何義答同處並頭者
002_0007_b_22L不相知義何以故無分別故又問
002_0007_b_23L分別者何義答無分別者緣生義
002_0007_b_24L是始終等是無二別何故如是一切緣

002_0007_c_01L생겨나는 법은 짓는 자도 없으며, 이루는 자도 없으며, 아는 자도 없다. 고요함과 작용함이 한 모양이고 높고 낮음이 한맛이니,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법이 으레 예부터 이와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이 생겨남도 없으며 없어짐도 없으나 인연으로 있음을 관한다.”145)라고 한 이와 같은 등의 문장이 곧 그 뜻이다.
묻는다.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같은 곳에 머리를 함께 두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한다.) 아래의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할 때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146)라고 하고, 또한 『십지경론』에서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육상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147)라고 해석한 것과 같기 때문에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육상’은 위와 같으니, 이 말은 법성의 집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중요한 문이고, 다라니의 광(藏)을 여는 좋은 열쇠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밝힌 것은 오직 일승다라니의 대연기법을 드러내 보인 것이며, 또한 일승의 걸림 없음을 논하여 큰 바탕(大體)을 분별한 것이니, 삼승의 영역(分際)은 아니다.
묻는다. 초교初敎 이후는 일체 모든 법이 곧 공空하고 곧 여여(如)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다고 위에서 말했는가?
답한다. 이 뜻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 원만하지 않은 까닭에 (그) 아래로부터 말한 것이다.
묻는다. 삼승 자체 이외에 따로 원교일승의 영역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답한다.)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세계의 많은 중생(群生)들의 무리에 성문聲聞의 길을 구하고자 하는 자 적고, 연각緣覺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으며,

002_0007_c_01L生法無有作者無有成者無有知者
002_0007_c_02L寂用一相高下一味猶如虗空諸法
002_0007_c_03L法爾舊來如是是故經云觀一切法
002_0007_c_04L無生無滅因緣而有如是等文14)卽其
002_0007_c_05L義也

002_0007_c_06L
問所以得知信位菩薩乃至佛同處並
002_0007_c_07L如下經云初發心時便成正覺
002_0007_c_08L如地論釋信地菩薩乃至佛六相成故
002_0007_c_09L明知有如是義六相如上此語欲入法
002_0007_c_10L性家要門開陀羅尼藏15)▼(茂*(了/皿))▼(是+我)故
002_0007_c_11L來所明者16)顯示一乘陀羅尼大緣起
002_0007_c_12L亦可論一乘無礙辨大體非三乘
002_0007_c_13L分齊

002_0007_c_14L
問初敎已去一切諸法卽空卽如
002_0007_c_15L無分別何故上言頭脚各別耶答非無
002_0007_c_16L此義未滿故從下爲言

002_0007_c_17L
問所以得知自三乘以外別有圓敎一
002_0007_c_18L乘分齊如下經言一切世界群生類
002_0007_c_19L尠有欲求聲聞道求緣覺者轉復少
002_0007_c_20L「問」作「門」{乙}「因」作「同」{乙}「隨」一
002_0007_c_21L作「相」
「其」下疑脫「義」「一」作「十」{乙}
002_0007_c_22L
「之」作「云」{乙}「功」作「切」{乙}「今一」
002_0007_c_23L一作「亦」
「其」疑剩「何耶」疑「阿爺」
002_0007_c_24Lㆍ作「阿耶」{甲}
「圓」作「因」{乙}「總」疑剩
002_0007_c_25L
「頭者」作「者頭」{乙}「卽」無{乙}「▼(茂*(了/皿))▼(是+我)」疑
002_0007_c_26L「藏匙」{乙}
「顯」作「頭」{乙}

002_0008_a_01L대승을 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대승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우니,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매우 어렵다.”148)라고 하고, “만약 중생이 하열下劣하여 그 마음이 싫어하는 자에게는 성문도聲聞道로써 보여 주어 뭇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다시 어떤 중생이 모든 근기가 조금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좋아하면 위하여 벽지불을 설한다. 만약 어떤 이가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큰 자비심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饒益) 한다면 위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설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이 있어서 결정코 큰일을 좋아하면 위하여 부처님 몸을 보여서 다함없는 부처님의 법을 설한다.”149)고 한 것과 같다. 성스러운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다.
묻는다. 일승과 삼승의 영역이 다른 뜻을 무엇으로 인하여 알 수 있는가?
답한다. 우선 열 가지 문에 의거하면 곧 알 수 있다.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同時具足相應門)이다. 그 가운데 열 가지 모양이 있으니, 말하자면 사람(人)과 법法, 이치(理)와 현상(事), 가르침(敎)과 뜻(義), 앎(解)과 행行, 원인(因)과 결과(果)의 이들 열 가지 문이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
둘째, 인다라 그물의 경계인 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이 가운데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비유를 따라서 다를 뿐이다. 나머지도 이에 준할 수 있다.
셋째,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袐密隱顯俱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연緣을 따라 다를 뿐이다.
넷째, 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모양을 따라 다를 뿐이다.
다섯째, 십세十世가 법을 사이해서 달리 이루는 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때(世)를 따라 다를 뿐이다.
여섯째, 모든 장藏에 순수(純)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 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현상(事)을 따라 다를 뿐이다.
일곱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문(一多相容不同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이치를 따라 다를 뿐이다.
여덟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작용(用)을 따라 다를 뿐이며, 또한 성품을 의지한 것이기도 하다.
아홉째, 마음을 따라 회전하여 잘 이루는 문(隨心廻轉善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마음(心)을 따라 다를 뿐이다.
열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託事顯法生解門)이다. 이

002_0008_a_01L大乘者甚希有求大乘者猶爲易能信
002_0008_a_02L是法甚爲難若衆生下劣其心厭沒者
002_0008_a_03L示以聲聞道令出於衆苦若復有衆生
002_0008_a_04L諸根小明利樂於因緣法爲說辟支佛
002_0008_a_05L若有根明利1)大慈悲心 2)余益於衆
002_0008_a_06L爲說菩薩道若有無上心決定樂
002_0008_a_07L大事爲示於佛身說無盡佛法聖言
002_0008_a_08L3)常明珠不須驚恠

002_0008_a_09L
問一乘三乘分齊別義因何得知
002_0008_a_10L且依十門卽知也一同時具足相應門
002_0008_a_11L於中有十相謂人法理事敎義解行因
002_0008_a_12L此等十門相應無有前後二因陀
002_0008_a_13L羅網境界門此中具前十門俱義從喩
002_0008_a_14L異耳餘可准之三秘密隱顯俱成門
002_0008_a_15L此亦具前十門俱義從緣異耳四微細
002_0008_a_16L相容安立門此亦具前十門俱義從緣
002_0008_a_17L相異耳五十世隔法異成門此亦具前
002_0008_a_18L十門俱義 4)從世異耳六諸藏純雜具
002_0008_a_19L德門此亦具前十門俱義從事異耳
002_0008_a_20L七一多相容不同門此亦具前十門俱
002_0008_a_21L從理異耳八諸法相卽自在門
002_0008_a_22L亦具前十門俱義從用異耳亦可依性
002_0008_a_23L九隨心廻轉善成門此亦具前十門俱
002_0008_a_24L從心異耳十託事顯法生解門

002_0008_b_01L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지혜(智)를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이에 준할 수 있다.
위의 열 가지 현묘한 문은 아울러 다 다르다. 만약 가르침과 뜻의 영역이 이것과 상응한다면 곧 일승원교와 돈교(頓敎)에 포섭된다. 만약 모든 가르침과 뜻의 영역(分)이 이것과 상응하나 충분히 갖추지 못한다면 곧 삼승의 점교(漸敎)150)이다.151) 이와 같이 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문이 구족하여 원만한 것은 『화엄경』의 설과 같다.
나머지 넓은 뜻은 경經152)과 논論과 소疏와 초抄153)와 공목孔目154)과 문답問答155) 등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발문跋文
일승법계도의 시詩와 하나의 도인圖印을 합한 것은 『화엄경』과 『십지경론』에 의거하여 원교의 핵심(宗要)을 나타낸 것이다. 총장總章 원년元年156) 7월 15일에 기록하다.

묻는다. 무엇 때문에 지은 사람(集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
답한다.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
또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해와 달(年月)의 이름이 있는가?
답한다. 일체 모든 법은 연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려는 까닭이다.
또 묻는다. 연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답한다. 전도顚倒된 마음 가운데로부터 온다. 잘못 거꾸로 된 마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온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 여여如如로부터 온다. 여여는 어느 곳에 있는가? 여여는 스스로의 법성法性에 있다. 법성은 무엇으로 모양을 삼는가? 분별이 없음을 모양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는 보통 중도에 있으니 무분별 아님이 없다. 이 뜻인 까닭에 글 첫머리의 시詩에서,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157) 내지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158)라고 하였으니, 뜻이 여기에 있다. 시詩에 의지한 까닭은 헛됨(虛)에 즉하여 참됨(實)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서원한다. 일승의 보법普法의 이름과 뜻을 보고 듣고 닦아 모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중생에게 돌려 보시하니, 두루 거듭 닦아서 온 중생계가 일시에 성불하여지이다.
『일승법계도』의 글(章)
『일승법계도』 끝

002_0008_b_01L亦具5)前俱義從智異耳餘可准之
002_0008_b_02L6)玄門並皆別異若敎義分齊與此
002_0008_b_03L相應者卽是一乘圓敎及頓敎攝
002_0008_b_04L諸敎義分與此相應而不具足者
002_0008_b_05L是三乘漸敎如是知也如是十門具足
002_0008_b_06L圓者如華嚴經說餘廣義者如經論
002_0008_b_07L疏抄孔目問答等分別也一乘法界圖
002_0008_b_08L合詩一印依華嚴經及十地論表圓敎
002_0008_b_09L宗要總章元年七月十五日記

002_0008_b_10L
問何故不7)看集者名字答表緣生諸法
002_0008_b_11L無有主者故又問何故在年月名答示
002_0008_b_12L一切諸法依緣生故又問緣從何處來
002_0008_b_13L答從顚倒心中來顚倒心從何處來
002_0008_b_14L無始無明來無始無明從何處來從如
002_0008_b_15L如來如如在何處如如在自法性
002_0008_b_16L性以何爲相以無分別爲相是故一切
002_0008_b_17L尋常在中道無非無分別以此義故
002_0008_b_18L文首詩法性圓融無二相乃至舊來不
002_0008_b_19L動名爲佛意在於此所以依詩卽虗顯
002_0008_b_20L8)故誓願見聞修集一乘普法名字
002_0008_b_21L及義以斯善根廻施一切衆生9)
002_0008_b_22L修盡衆生界一時成佛法界圖章

002_0008_b_23L
一乘法界圖終

002_0008_c_01L
화엄종 향조대사香鳥大師는 말엽의 뛰어난 분으로서 제목을 해석하였고 두법사頭法師가 집필하였다.
건력建曆 2년(1212) 3월 3일에 고산高山에서 법승사法勝寺의 동본同本으로서 한 번 교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현혈팔우賢穴八吁

002_0008_c_01L
華嚴宗香10)鳥大師末葉非人釋題頭法師之
002_0008_c_02L執筆也

002_0008_c_03L
建曆二年三月三日子始許於高山以法勝寺
002_0008_c_04L同本一校賢穴八吁

002_0008_c_05L「大」作「文」{乙}「余」疑「樂」「常」一作
002_0008_c_06L「掌」
「從」作「位」{乙}「前」下疑脫「二」
002_0008_c_07L
「玄門」作「門玄」{乙}「看」一作「著」「實」
002_0008_c_08L作「寶」{乙}
「重」疑「熏」「鳥」作象」{甲}
  1. 1)반시槃詩 : ‘반시’는 ‘일승법계도 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이라고도 하니(『叢髓錄』 高45, p.141a2;韓6, p.768a3), 흰 종이 위에 붉은 줄로 된 ‘법계도인法界圖印’과 검은 글씨로 된 7언 30구 210자의 ≺法性偈≻를 합한 것이다. 『一乘法界圖』의 전체 구성은 ≺槃詩≻와 이 ≺槃詩≻를 해석한 『法界圖記』로 이루어져 있으며, 『法界圖記』는 저술의 목적과 시를 읽는 방법을 밝히는 「자서自叙」와 ≺槃詩≻의 해석인 석문釋文, 그리고 「발문跋文」으로 이루어진다.
  2. 2)도인圖印 :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의미한다. 각주 1) 참조.
  3. 3)이와 같이 독시법에 의해 시를 따라 읽으면 7언 30구 210자가 된다.(法性圓融無二相~舊來不動名爲佛)
  4. 4)이를 포함한 『一乘法界圖 合詩一印 五十四角二百一十字』가 총수록본의 제목이다.
  5. 5)≺槃詩≻ 아래의 ≺法性偈≻ 30구와 그 번역문은 역자가 ≺槃詩≻중 시詩인 ≺法性偈≻를 다시 소개한 것이다.
  6. 6)법성法性 : ⓢ dharmatā. ‘(모든) 법의 본성’, 즉 깨달음의 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초기불교에서는 삼법인, 연기법 등으로 표현되었고, 대승불교에 들어와서는 ‘공空’으로도 말해졌다. 용수龍樹 『大智度論』(高14, pp.825c1-826a14;大25, p.297b22-c24). 이처럼 법성에 대한 설명은 ‘모든 법의 본성’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따라서 학파나 종파별로 입장이 달라진다. 화엄에 있어서 법성은 특히 중요시되는데, 법성이 다만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 그 자체’로까지 표현된다. 80권 『大方廣佛華嚴經』(高8, p.518b13;大10 p.81c15). 의상은 이 ‘부처님 그 자체’로서의 ‘법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법성성기法性性起’, 즉 ‘부처님 그 자체의 출현’으로 발전시킨다. 의상계 화엄에서는 ‘모든 법이 원융함’을 ‘법성’이라고 한다.
  7. 7)진성眞性 : ‘(모든 법의) 참된 성품’이다. 『華嚴經』에도 여러 곳에서 설해지고 있으나 법성과 진성을 대비하여 설하는 경향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의상은 이 글에서 ‘진성’을 연기분, ‘법성’을 증분으로 구별하여 진성을 통해서 법성法性에 이르게 하고 있다. 이하 ≺法性偈≻에서 보이는 주요 용어에 대해서는 뒤의 ≺法性偈≻를 해석하는 해당 부분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8. 8)석가여래釋迦如來 : ‘석가’는 ‘석가모니釋迦牟尼’, 즉 ⓢ Śākyamuni의 음역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성자’라는 뜻이며, 약 2500여 년 전 인도에서 불교를 일으킨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를 가리킨다. 또 ‘여래’는 부처님의 열 가지 호칭 중 하나로서 ⓢ tathāgata의 번역어이다. 이 산스크리트어는 ‘tathā-āgata’, 즉 ‘여실하게 오신 분(如來)’과 함께 tathā-gata, 즉 ‘여실하게 가신 분(如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석가여래’는 역사상 실존 인물의 존칭이기도 하지만, 화엄에서는 그 뜻과 동시에 법신法身 비로자나불, 보신報身 노사나불, 화신化身 석가모니불이 원융한 ‘삼불원융三佛圓融’으로서의 ‘석가여래’이다. 60권 『華嚴經』(高8, p.27c5-9;大9, p.419a10-15) 등. 지엄智儼(602~668)은 일승에 의하면, 화신인 석가모니부처님과 법신인 비로자나부처님 등이 모두 열 부처님(十佛)의 화용化用이라고 설하고 있다. 지엄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大45, p.587c7-9).
  9. 9)세 가지 세간 : 삼종세간三種世間은 모든 존재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본 것으로, 『華嚴經』(高8, p.53c25;大9 p.444b5-6 등)을 비롯하여 여러 경에 나타난다. 그 세 가지가 무엇인지는 경론에 따라 다르나 화엄 교학에서는 ‘기세간器世間(bhajanaloka)’, ‘중생세간衆生世間(sattvaloka)’,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samyaksaṃbuddhaloka)으로 설하고 있다. 지엄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高47, p.9b6-8;大35 p.22c23-25) 등. 의상은 각각 이 세 가지 세간을 상징하는 흰 종이와 검은 글자, 붉은 줄로 이루어진 ≺槃詩≻를 통해 세 가지 세간이 원융함을 나타내고 있다.
  10. 10)해인삼매海印三昧 : ⓢ sāgaramudrāsamādhi 또는 sāgarasamṛddhisamādhi). 고요한 바다에 모든 사물이 다 비춰지듯이, 이 삼매에 법계의 모든 존재가 드러남을 비유한다. 60권『華嚴經』 중 「賢首品」(高8, p.42c19;大9 p.434c6) 등을 비롯한 여러 품에 나타나는데( 이 삼매는 『華嚴經』의 총정總定으로서 『華嚴經』 전체가 이 ‘해인삼매’ 속에서 설해진 것으로 말해진다. 법장法藏 『華嚴一乘敎義分齊章』(大45, p.482b18-25) 등. 의상은 이 삼매에 들어가면 법성을 완전히 증득하여 삼종세간이 모두 그 삼매 중에 나타난다고 해석하고 있다. 『一乘法界圖』(韓2, p.3c15).
  11. 11)기세간器世間 : ⓢ bhājanaloka. 모든 부처와 중생(正報)이 의지해 있는 국토세계(依報)를 의미한다. 의상에게 있어서 기세간은 다른 세간과 마찬가지로 자성自性으로 독립해 있는 세계가 아니라 해인삼매로부터 나타나 융삼세간 속에서 서로 연기되어 있는 세간을 의미한다. ≺槃詩≻에서 기세간은 하얀 종이(白紙)로 상징되며 그 자체는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다고 후대 의상계 화엄에서는 주석하고 있다. 『叢髓錄』(高45 p.164b8;大45 p.730b18).
  12. 12)『화엄경』 : 『大方廣佛華嚴經』의 줄임말로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Buddhabhadra, 359~429)가 418년부터 420년에 걸쳐 번역한 60권본(7처 8회 34품)을 가리킨다. 한역 화엄대경華嚴大經으로는 불타발타라 역과 더불어 실차난타實叉難陀(Śikṣānanda, 652~710)가 695년부터 699년에 걸쳐 역출한 80권본(7처 9회 39품)이 있다. Jinamitra가 9세기 말에 번역한 티베트 역(Saṅs-rgyas phal-po-che shes-bya-ba śin-tu rgyas-pa chen-poḥi mdo, 45품) 또한 남아 있다. 의상의 『一乘法界圖』는 60권 『華嚴經』의 핵심 교의를 간략히 간추린 것이다.
  13. 13)『華嚴經』에는 해인삼매의 세력으로 인해 일체를 다 나타내 남김이 없다는 「賢首菩薩品」의 게송 등 이 구절과 맥을 같이하는 설이 여러 군데 보인다. 법장法藏(643~712)은 이러한 게송 등을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인 『華嚴經』이 삼라만상森羅萬象, 즉 세 가지 세간을 모두 포섭하며, 바로 해인삼매 중에 나타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華嚴經探玄記』(高47, pp.469c26-470a3;大35 p.119c11-15).
  14. 14)삼승三乘 : ‘삼三’은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을 의미하며, ‘승乘’은 부처님의 교법, 수행, 수행자의 모임 등을 의미하며, 여기에서는 부처님의 교법을 가리킨다. 의상은 삼승 이외에 따로 일승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각(삼승)을 통해 원만한 도인(일승)이 이루어지듯이 ‘삼승’으로써 ‘일승’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한다. 균여의 『一乘法界圖圓通記』에 인용된, 의상의 강의를 지통智通(655~?)이 기록한 『智通記』(韓4, p.4b24-11)에서는 일승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면 삼승이 곧 일승이며, 삼승을 기준으로 하면 삼승과 일승이 차별을 이룬다고 밝히고 있다.
  15. 15)법계法界 : ⓢ dharmadhātu. 화엄 교학에서 ‘우주만유의 영역’을 의미하며, ‘일심一心’을 그 체體로 한다. 60권 『華嚴經』(高8, p.3c25 p.19a23(韓4 p.4b24-11)大9 p.397b23 p.410b25) 등. 중국 화엄 교학은 이 법계를 나누어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4종 법계연기설을 펼친다. 의상이 이 글에서 나타내고 있는 법계는 법계연기에서의 법계만이 아니라 여래 출현으로서의 여래성기를 모두 포함하는 일승법계이다. 따라서 의상의 법계는 증분법성과 진성연기분을 모두 포함하는 법계이며, 공간과 시간은 모두 이 법계 내에 포섭된다.
  16. 16)균여均如(923~973)는 이 구절을 풀이하면서, 일반적인 법계의 의미와 더불어 여기의 법계는 공간적 측면(橫盡法界)으로, 뒤의 십세는 시간적 측면(竪窮劫海)으로 해석한 후 선교방편이 이 둘에 모두 원융만족하다고 설한다. 균여 『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4a5-7).
  17. 17)원교圓敎 : 부족함이 없는 ‘원만한 가르침’을 뜻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어느 종파의 교판敎判이냐에 따라 구체적인 경론은 다르더라도 자기의 소의경론을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 ‘원교’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지엄은 화엄을 일승원교라고 칭하였으며, 의상 또한 화엄의 가르침을 별교일승원교別敎一乘圓敎에 해당시키면서, 이를 한 길로 이루어졌으며, 시작과 끝이 없는 원만한 ‘도인圖印’으로 상징하고 있다.
  18. 18)사섭법四攝法 : ⓢ catvāri saṃgarahavastūni. 보살이 중생을 섭수하여 불도佛道로 나아가 깨닫게 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이다. 이것은 『阿含經』 이래 전해져 내려온 전통적인 선행善行으로서, 『華嚴經』에서도 또한 설해지고 있으며, 특히 「十地品」에서는 초지인 ‘환희지歡喜地’부터 제4지인 ‘염혜지焰慧地’에 머무르는 보살의 대표적 수행법이다.
  19. 19)사무량심四無量心 : ⓢ catvāry apramāṇāni. 모든 불보살佛菩薩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갖추는 네 가지 마음으로, 자무량慈無量, 비무량悲無量, 희무량喜無量, 사무량捨無量이다. 『華嚴經』에서는 ‘사무량심’을 모든 불보살이 나타내는 무량한 공덕 중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60권 『華嚴經』(高8, p.43b25;大9 p.435b2) 등.
  20. 20)일승一乘 : ⓢ ekayāna. ‘오직 하나의 수레’란 뜻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하나라는 의미이다. 화엄 교학에서는 이 일승을 삼승과 일승이 융회해서 같다는 상대적 견지의 동교일승同敎一乘과 삼승과 다르다는 의미, 즉 삼승을 초월한다는 절대적 견지의 별교일승別敎一乘으로 구별하여, 화엄 교학을 별교일승에 해당시킨다. 의상은 『一乘法界圖』에서 도인圖印의 4면 4각 내지 54각이 바로 일승을 상징하는 하나의 줄, 즉 도인이며, 이 굴곡들을 떠나서 따로 도인을 구할 수 없음을 설하여 삼승의 가르침을 배제하고 따로 일승의 수행법이 있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21. 21)덕용德用 : 원인에 즉하여 결과가 바로 있는, 원인 외에 따로 결과가 있지 않은 인과의 ‘당체當體’로서의 ‘용用’이므로 ‘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의상은 인과의 ‘덕용’인 ‘덕용자재문德用自在門’을 상즉에 해당시키고, 반면 상입은 인과의 도리인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에 배대시키고 있다. 『一乘法界圖』(韓2, p.8a20-22).
  22. 22)중도中道 : ⓢ madhyamāpratipad. ‘두 극단을 여읜 길’을 의미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는 욕망과 즐거움에만 집착하는 한 극단과 극도의 고행苦行에만 몰입하는 다른 한 극단을 모두 여읠 때 ‘중도’가 있으며 이것이 곧 ‘팔정도八正道’라고 설하고 있다. 『中阿含經』(高18, p.267a17-b10;大1 pp.777c25-778a10) 등. ‘중도’는 이후 생겨난 모든 불교 경론에서 설하는 실천 수행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 왔으며, 각 학파마다 ‘중도’의 의미에 대해서 고락중도苦樂中道, 유무중도有無中道, 허실중도虛實中道, 팔부중도八不中道 등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一乘法界圖』의 중도에 대해 균여는 『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4b9-c22)에서 원인과 결과(因果)․일승과 삼승(一乘三乘)․바른 뜻과 바른 교설(正義正說)․이와 사(理事)․하나와 많음(一多)․일체법에 대한 일곱 가지의 중도설로 정리한다.
  23. 23)천친논주天親論主 :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十地經論』의 저자인 ‘세친世親(Vasubandhu)’을 가리킨다. 4, 5세기경(320~400, 또는 400~480)의 인도 논사이다. 『十地經論』은 세친이 『十地經』을 주석한 것으로 현재 산스크리트어본은 전해지지 않고 티베트어역본과 한역본漢譯本만이 남아 있다. 한역본은 보리유지菩提流支(Bodhiruci, ?-527)와 늑나마제勒那摩提(Ratnamati, 5-6세기경) 등이 번역한 12권본으로, 이 논이 중국에 번역되자 이를 바탕으로 ‘지론종地論宗’이 성립되었다. 이후 이 논에서 논의되는 심식설에 대해 지론종 내부에 대립이 생기는데, 이 가운데 늑나마제는 정식설淨識說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혜광慧光(468~537)에 의하여 남도파로 형성되었고, 보리유지는 망식설妄識說을 주장하였으며 도총道寵에 의하여 북도파로 계승되었다. 이중 지론종 남도파는 뒷날 화엄종으로 전개된다. 의상은 『一乘法界圖』「발문跋文」(韓2, p.8b7-9)에서 『十地經論』 등에 의거하여 이 『一乘法界圖』를 저술했다고 밝히고 있다.
  24. 24)육상六相 : 총상總相(sāṅga), 별상別相(pāṅga), 동상同相(alakṣaṇa), 이상異相(ilakṣaṇa), 성상成相(ivarta), 괴상壞相(aṃvarta)으로, 화엄 교학에서는 이 육상이 원융하다는 ‘육상원융’이 십현연기와 함께 법계연기를 드러내는 주요한 방편으로 사용된다. ‘육상설’의 경증은 『華嚴經』과 그 지분경인 『十地經』 유의 경전이지만, 경에는 단지 명목만이 나타난다. 세친은 『十地經論』(高15, pp.3a22-3c13;大26, pp.124c3-125a6)에서 육상의 의미를 자세하게 밝히고, 경에서 설해진 모든 열 구절에 이 육상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도 음陰, 계界, 입入의 사事는 제외시키고 있다. 이후 지론종地論宗의 정영사淨影寺 혜원慧遠(523~592)은 세친의 육상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사상事相을 따르면 육상에서 사事는 제외되지만, 체의 뜻(體義)을 따르면 모든 사법에 육상의 문門을 갖춘다고 설하여 육상의 범주를 모든 법으로 확장시킨다. 혜원 『大乘義章』(大44, p.524a1-b16). 이후 화엄종의 지엄은 세친의 육상설을 혜원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 지엄 『搜玄記』(高47, p.48a15-22;大35, p.66b9-19). 의상은 『一乘法界圖』에서 도인圖印의 비유를 통해 육상의 뜻을 설명하는데, 세친과 혜원, 지엄의 설에 의거하고 있으나, 이 육상설을 무분별 부주不住의 중도의中道義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一乘法界圖』(韓2, p.7c9-10).
  25. 25)별교別敎 :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중국 화엄종에서는 일승을 ‘별교’와 ‘동교’로 나누고, 삼승과 함께 하는 가르침인 ‘동교일승’에 대비하여, 화엄을 삼승과는 다른 최상의 가르침인 ‘별교일승’에 해당시키고 있다. 의상은 여기에서 ‘별교’라는 용어를 일승만이 아니라 삼승에도 사용하고 있다.
  26. 26)세친의 『十地經論』(高15, p.3a8-9;大26, p.124b19-20)에서 『十地經』 원문 중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이 경문은 『十地經』의 설주인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보살대승광명삼매菩薩大乘光明三昧에 들자, 시방세계에서 같은 이름의 금강장불金剛藏佛이 나타나 그 입정入定을 칭찬하시는 부분이다. 60권 『華嚴經』(高8, p.162c23-25;大9 p.542b21-22). 60권 『華嚴經』에서는 삼매의 이름이 보살대지혜광명삼매菩薩大智慧光明三昧로 되어 있다.
  27. 27)이하의 인용문은 세친이 『十地經論』(高15, p.3a8-14;大26, p.124b19-24)에서 위의 경문을 포함하여 금강장불이 금강장보살의 입정入定을 칭찬하시는 열 가지 내용을 주석한 내용이다. 세친 『十地經論』(高15, p.3b1-c13;大26 pp.124c5-125a6). 세친은 이 열 가지 내용을 근본입根本入과 구입九入으로 나눈 뒤, 근본입과 구입의 총별원융總別圓融을 통하여 육상이 원융함을 설명하고 있다.
  28. 28)봄(見)과 지혜(智)와 얻음(得)과 깨달음(證) : 지엄은 ‘봄(見)’을 관觀하는 깨침(解)의 처음으로, ‘지혜(智)’를 관觀하는 깨침(解)의 끝으로, ‘얻음(得)’을 행하는 깨침(解)의 처음으로, ‘깨달음(證)’을 행하는 깨침(解)의 끝으로 풀이하여, ‘광명’이 관행觀行을 모두 두루 하는 것으로 설하고 있다. 지엄 『搜玄記』(高47, p.34a06;大35 p.50b8), “又見智得證者 前二觀解 後二行解 見始智終 得始證終也”
  29. 29)십지十地 : ⓢ daśabhūmi. ‘열 가지의 지위(地位)’로서 여기의 ‘지地’는 ‘지혜(智)’를 뜻한다. 경론에 따라 십지의 명목이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여기 『十地經』의 십지는 일승보살도의 ‘십지’를 가리킨다. ‘십지’의 구체적인 명목을 『十地經』(高15, p.6a19-22;大26 p.126c5-7)을 기준으로 살펴보면, ① 환희지歡喜地(pramuditābhūmi) ② 이구지離垢地(vimalābhūmi) ③ 명지明地(prabhākarībhūmi) ④ 염지焰地(arciṣmatībhūmi) ⑤ 난승지難勝地(sudurjayābhūmi) ⑥ 현전지現前地(abhimukhībhūmi) ⑦ 원행지遠行地(dūraṃgamābhūmi) ⑧ 부동지不動地(acalābhūmi) ⑨ 선혜지善慧地(sādhumatībhūmi) ⑩ 법운지法雲地(dharmameghābhūmi)이다. 60권 『華嚴經』(高8, p.163b10-12;大9 pp.542c27-543a1)의 명목은 『十地經』과 동일하다. 의상은 이 『一乘法界圖』(韓2, p.2b24-c13)에서 『華嚴經』 전체가 ‘십지’에 모두 포섭되며, 나아가 이 십지는 단지 일념에 있다고 한다.
  30. 30)세친 『十地經論』(高15, p.3b1-c13;大26, pp.124c5-125a6). 60권 『화엄경』(高8, p.162c23-25;大9 p.542b21-22).
  31. 31)이 경(修多羅) : 『十地經』을 가리킨다. 이 『十地經』과 60권․80권 『華嚴經』에서의 십입설十入說을 비교․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十入『十地經論』 내 『十地經』60권 『華嚴經』80권 『華嚴經』
    根本入令入智慧地故入智慧地故令入智地故
    攝入攝一切善根故攝一切善根故攝一切善根故
    思議入善分別選擇一切佛法故善分別一切佛法故善(1)揀擇一切佛法故
    法相入廣知諸法故廣法智故廣知諸法故
    敎化入善決定說諸法故決定說諸法故善能說法故
    證入無分別智清淨不雜故無分別智善分別故無分別智清淨故
    不放逸入一切魔法不能染故一切世間法不能染故一切世法不染故
    地地轉入出世間法善根清淨故出世間善根清淨故出世善根清淨故
    菩薩盡入得不可思議智境界故得不可思議智力故得不思議智境界故
    佛盡入得一切智人智境界故得一切智人智境界故得一切智人智境界故
    출전高15, p.3a8-14;
    大26, p.124b19-24
    高8, pp.162c24-163a4;
    大9, p.542b22-26
    高8, pp.162c24-163a4;
    大9, p.542b22-26
  32. 32)듣는 지혜(聞慧) : ⓢ śrutamayī prajñā. ‘들어서 이루어진 지혜(聞所成慧)’를 가리킨다. 이 지혜는 ‘생각하여 이루어진 지혜(思所成慧)’와 ‘닦아서 이루어진 지혜(修所成慧)’와 함께 ‘세 지혜(三慧)’를 이룬다. 세친은 『十地經論』(高15, p.11b12-23;大26, p.130b17-18)에서 ‘듣는 지혜’를 물은 씹지 않아도 바로 마실 수 있는 것에 비유하여 들으면 바로 받아 지니는 지혜로, ‘생각하는 지혜’를 음식을 씹어 먹어서 몸에 도움을 주는 것에 비유하여 들은 법을 곱씹어서 증장하는 지혜로, ‘닦는 지혜’를 꿀이 벌들이 좋아하는 의지처가 되는 것에 비유하여 ‘듣는 지혜’와 ‘생각하는 지혜’의 과보가 의지하는 곳으로 풀이하고 있다.
  33. 33)선근善根 : ⓢ kuśalamūla.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키는 근본으로,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의 세 선근이 대표적이다. 이 선근의 반대가 곧 불선근不善根으로서, 세 선근의 반대를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佛說長阿含經』(高17, p.881b14-17;大1, p.50a7-10) 등. 『華嚴經』에서는 선근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는데 의상계 화엄에서는 불가사의한 일체법 가운데에는 본래 삼독이 없으므로,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세 선근이 항상 있지만 다만 중생이 그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여 현전하지 못할 뿐이라고 풀이한다. 『叢髓錄』(高45, p.179b17-21).
  34. 34)60권 『華嚴經』(高8, p.162c25;大9, p.542b22-23)에는 “모든 불법을 잘 분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善分別一切佛法故)”로 되어 있다.
  35. 35)60권 『華嚴經』(高8, p.162c25-26;大9 p.542b23)에는 “법의 지혜를 넓히(게 하려)는 까닭이다.(廣法智故)”로 되어 있다.
  36. 36)60권 『華嚴經』(高8, p.163a2;大9 p.542b23)에는 “모든 법을 결정하여 설하(게 하려)는 까닭이다.(決定說諸法故)”로 되어 있다.
  37. 37)견도見道 : ⓢ darśanamārga. 처음으로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사제四諦를 현관現觀하고 그 이치를 비추어 수행하는 지위이다. 세 가지 길, 견도見道․수도修道(bhāvanāmārga)․무학도無學道(aśaikṣamārga) 중의 하나로서 이는 부파불교에서 수행의 계위를 크게 셋으로 나눈 것에서 유래한다. 앞의 견도와 수도는 학도學道(śaikṣamārga), 즉 배움의 단계로서 성불의 인因이고, 뒤의 무학도는 배울 것이 없는 단계로서 곧 수행의 과果이다. 세친 『阿毘達磨俱舍論(高27, pp.569c20-570a2;大29, p.82c9-13) 등. 『十地經論』에서는 견도와 수도 등의 부파불교에서 비롯된 수행의 계위를 화엄의 일승수행을 나타내는 일승보살도로서 수용하고 있다.
  38. 38)60권 『華嚴經』(高8, p.163a2;大9, p.542b23-24)에는 “분별없는 지혜로 잘 분별하(게 하려)는 까닭이다.(無分別智善分別故)”로 되어 있다.
  39. 39)수도修道 : ⓢ bhāvanāmārga. 견도見道한 후에 다시 구체적인 사상事相에 대처하여 되풀이해서 수습하는 단계로서 세 가지 길 중의 하나이며, 견도와 함께 학도學道를 이룬다. 세친 『俱舍論』(高27, pp.569c20-570a2;大29, p.82c9-13) 등.
  40. 40)60권 『華嚴經』(高8, p.163a2-3;大9, p.542b24)에는 “일체 세간법이 물들일 수 없(게 하려)는 까닭이다.(一切世間法不能染故)”로 되어 있다.
  41. 41)무탐無貪 등의 선근 : 세 선근, 즉 무탐無貪․무진無瞋․무치無癡를 말한다. ‘선근’에 대해서는 각주 33) 참조.
  42. 42)60권 『華嚴經』(高8, p.163a3;大9, p.542b24-25)에는 “세간을 벗어나는 선근을 청정하(게 하려)는 까닭이다.(出世間善根淸淨故)”로 되어 있다.
  43. 43)60권 『華嚴經』(高8, p.163a3-4;大9 p.542b25)에는 “불가사의한 지혜의 힘을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得不可思議智力故)”로 되어 있다.
  44. 44)60권 『華嚴經』(高8, p.163a4;大9, p.542b25-26;高8. p.634a6, 大10, p.179a20)에는 ‘내지乃至’가 없이 “得一切智人智境界故”로 되어 있다.
  45. 45)오온五蘊(五陰) : ⓢ pañcaskandha. 유위법의 구성 요소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으로, 색色(rūpa), 수受(vedanā), 상想(saṃjña), 행行(saṃskāra), 식識(vijñāna)이다. 『佛說長阿含經』(高17, p.883b8-11;大1, p.51b6-9) 등. ‘음陰’은 ⓢ skandha의 구역舊譯으로 신역新譯은 ‘온蘊’이며, 집합․쌓임이라는 뜻이다. 『華嚴經』(高8, p.74b20-21;大9, p.465c26-29)에서는 오온은 실체가 없지만 마음이 화가처럼 갖가지로 오온을 지어낸다고 하여 오온을 통해 유심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46. 46)십팔계十八界 : ⓢ aṣṭādaśadhātavaḥ. 열여덟 종류, 또는 종족이라는 뜻으로, 일체 모든 존재를 18가지 구성 요소로 나누어 본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인식 작용을 일컫는 6식識과 인식 작용이 의지하는 감각 기관으로서의 6근根, 그리고 인식 대상으로서의 6경境을 합하여 일컫는 것이다. 세친 『俱舍論』(高27, p.458b23-c7;大29, p.5a4-10) 등 초기 아함 경전에서부터 모든 법의 분류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中阿含經』(高18, p.188b7-12;大1, p.723b16-20) 등. 『華嚴經』(高8, p.137a12-13;大9, p.520b17-18) 등에서는 일체 모든 법을 의미하는 18계가 공하여 얻을 수 없음을 알아 보리를 얻는다고 설한다.
  47. 47)십이처十二處 : ⓢ dvādaśāyatanāni. 열두 가지의 장소․문門이라는 뜻으로 일체 모든 존재를 열두 가지 구성 요소로 나누어 본 것이다. 열두 가지는 감각 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의 ‘육근六根’과 감각 대상인 색色․소리․냄새․맛․닿음(觸)․법法의 ‘육경六境’이다. 『雜阿含經』(高18, pp.833c20-834a3;大2, p.91a27-b2) 등. 이 때 ‘육근’은 ‘내육입內六入’, ‘육경’은 ‘외육입外六入’이라고 한다. ‘입入’이란 거두어들인다는 뜻으로 육근과 육경이 서로 거두어들여 육식六識을 내므로 ‘입入’이라고 한다. 세친 『俱舍論』(高27, p472a3, p.521c5-6;大29, p.14b4, p.48b27-b28).
  48. 48)세친의 『十地經論』(高15, pp.3b1-c13;大26, pp.124c5-125a6)을 인용한 부분이다.
  49. 49)『叢髓錄』(高45, p.184b9;大45, p.742a22)에서는 이 구절을 『勝鬘經』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勝鬘經(高6, p.1369b5-7;大12, p.222c23-25),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모든 깊은 법을 스스로 깨닫지 못해서 세존을 우러르고 생각하기를, 나의 경계가 아니고 오직 부처님만이 아실 바라고 하니, 이를 이름하여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를 우러르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若善男子善女人 於諸深法不自了知 仰惟世尊 非我境界 唯佛所知 是名善男子善女人仰惟如來)”
  50. 50)한 부의 경전 : 7처處, 8회會, 34품品으로 이루어진 60권 『華嚴經』을 가리킨다.
  51. 51)십지품十地品 : 60권 『華嚴經』의 제22번째 품에 해당한다. 지상에서 부처님의 자내증自內證 경계를 나타낸 첫 회와 신信의 공덕을 설한 2회에 이어 천상天上에서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과 함께 일승보살도의 실천행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십지품」에 해당하는 『十地經』은 화엄부 경전들이 『華嚴經』으로 집대성되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따로 유통되었으며, 그 성립 시기는 대략 1, 2세기경으로 추정된다. 『十地經』(Daśabhūmikasūtra)은 현재 『華嚴經』 중 「入法界品」과 더불어 산스크리트어본이 남아 있다. 한역漢譯의 경우 『華嚴經』과 별도로 수차례 역출되었는데, 현존본으로는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漸備一切智德經』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十住經』과 시라달마尸羅達磨가 번역한 『佛說十地經』이 있으며, 『十地經』의 주석서인 세친의 『十地經論』에도 『十地經』의 전문이 실려 있다. 또한 섭도진聶道眞에 의해 『十住經』이란 이름으로 번역되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52. 52)이 근본 : 「十地品」을 가리킨다.
  53. 53)다라니陀羅尼 : ⓢ dhāraṇī’의 음역. ‘모두 지녀 놓치지 않음(總持)’을 의미한다. 『華嚴經』에서도 여러 번 설해지며, 그중 「十地品」 제9지 보살이 얻는 10종 다라니와 「離世間品」에서 설해지는 10종 다라니가 대표적이다. 60권 『華嚴經』(高8, p.189a9, p.257c12;大9, p.569a28, p.634c2) 그 세부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 부처님의 법을 듣고 지녀 잊지 않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의상 또한 다라니를 듣고 지녀 잊지 않는 구체적 행위를 뜻하는 ‘총지總持’라고 해석하면서도, 동시에 일승의 다라니법이 바로 연기의 체體, 즉 진성眞性임을 밝히고 있다. 『一乘法界圖』(韓2, p.3a3).
  54. 54)처음 18구 : ≺法性偈≻ 30구 중 제1구부터 제18구까지이다.
  55. 55)다음 4구 : ≺法性偈≻ 30구 중 제19구부터 제22구까지이다.
  56. 56)다음 8구 : ≺法性偈≻ 30구 중 제23구부터 마지막 30구까지이다. 이 가운데 앞 4구는 수행자의 방편에, 뒤 4구는 수행자의 이익 얻음에 해당한다.
  57. 57)처음 4구 : ≺法性偈≻의 최초 4구로서,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法性圓融無二相)’에서부터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證智所知非餘境)’까지이다.
  58. 58)증분證分 : 깨달음의 영역, 경지를 가리키며, 법성法性의 경계이다. 의상은 ≺法性偈≻ 30구를 해석하는 부분에서는 이 증분 부분을 풀이하지 않음으로써 증분이 말로 설명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단 뒤에서는 다른 부분과 연관하여 증분의 경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59. 59)둘째 다음 14구 : ≺法性偈≻ 중 제5구부터 제18구까지이다.
  60. 60)연기분緣起分 : 연緣을 따라서 이루어진 영역으로서, 진성眞性의 경계이다. 이 연기분은 중생을 위해 연과 상응하여 설한 것으로 ‘교분敎分’이라고도 한다. 의상은 증분과 연기분의 관계에 대해, 증분은 참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였고 연기분은 중생을 위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다르지만, 또한 연기분은 자성이 없으므로 증분과 다르지 않기도 하다고 한다. 『一乘法界圖』(韓2, p.4c12-16).
  61. 61)처음 2구 : 연기분 14구 가운데 처음 2구로서, ≺法性偈≻ 중 제5구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眞性甚深極微妙)’와 제6구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을 따라 이룬다(不守自性隨緣成)’의 2구이다.
  62. 62)다음 2구 : ≺法性偈≻ 중 제7구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이며(一中一切多中一)’와 제8구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의 2구이다.
  63. 63)다음 2구 : ≺法性偈≻ 중 제9구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시방十方을 머금고(一微塵中含十方)’와 제10구 ‘모든 티끌 중에도 또한 이와 같다(一切塵中亦如是)’의 2구이다.
  64. 64)사법事法 : 여기에서 일체를 ‘이理’와 ‘사事’의 측면으로 나눌 때 법계의 일체현상으로서의 ‘사事’가 아니다. 균여는 이 ‘사事’를 공간적 점유성을 지닌, ‘티끌’과 ‘시방十方’과 같은 ‘사事’로서 해석하고 있다. 균여 『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8a13).
  65. 65)다음 4구 : ≺法性偈≻ 중 제11구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순간(一念)이고(無量遠劫卽一念)’에서부터 제14구 ‘그로 인해 혼잡하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仍不雜亂隔別成)’까지의 4구이다.
  66. 66)다음 2구 : ≺法性偈≻ 중 제15구 ‘처음 발심한 때가 곧 정각이며(初發心時便正覺)’와 제16구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生死涅槃常共和)’의 2구이다.
  67. 67)다음 2구 : ≺法性偈≻ 중 제17구 ‘이理와 사事가 그윽하여 분별이 없으니(理事冥然無分別)’와 제18구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위대한 성인의 경계이다(十佛普賢大人境)’의 2구이다.
  68. 68)이하 인용문, ‘연기란’에서부터 ‘일승을 목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까지는 지엄이 『孔目章』(大45, p.563c9-29)에서 서술한 것이다.
  69. 69)‘이理’와 ‘사事’에서, ‘사事’는 우주만유의 차별된 현상을, ‘이理’는 그 차별된 현상의 본체本體 내지는 평등하고 차별 없는 이치를 의미한다. 화엄 교학에서는 연기된 차별된 현상으로서의 ‘사’와 평등한 진여, 이치로서의 ‘이’의 개별 의미와 더불어 그 둘의 관계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다. 이 둘의 관계를 통해 4종 법계연기설을 확립하는데, 그 가운데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에서는 모든 사事의 체성體性이 이理로서 같기 때문에 ‘이’와 ‘사’의 걸림 없는 관계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卽一의 경계가 가능한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의상은 더 나아가 ‘이’와 ‘이’가 걸림 없이 상즉하는 ‘이이상즉理理相卽’의 경계 또한 드러내고 있다.
  70. 70)이 『十地經論』 인용문은 지엄이 『孔目章』 내에서 세친의 『十地經論』을 인용한 부분이다. 『十地經論』(高15, p.28c6-19;大26, p.142b12-23). 여기 인용된 『十地經論』내에서 또 인용된 경문은 『十地經論』이 소의로 한 『十地經』의 구절이다. 『十地經』의 이 부분은 ‘십지十地’ 중 초지初地 ‘환희지歡喜地’에서, 보살이 성취하는 ‘모든 지를 청정하게 하는 열 가지의 법(十種淨諸地法)’ 중 두 번째 ‘자비慈悲’를 설하는 중에 나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설명이다. 이 내용의 경문 전체는 다음과 같다. 『十地經論』(高15, p.28b18-c3;大26, p.142b2-9), “삼계三界의 땅에 다시 싹이 생기니, 이른바 명색名色이 함께 생겨 여의지 않는다. 이 명색이 자라서는 육입六入의 무더기를 이룬다. 육입을 이루고 나서는 안과 밖이 상대하여 촉觸을 발생시킨다. 촉의 인연 때문에 수受를 발생시킨다. 깊이 수受를 좋아하는 까닭에 갈애渴愛를 발생시킨다. 갈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를 발생시킨다. 취가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뒤의 유有를 일으킨다. 유有의 인연인 까닭에 태어남, 늙음, 죽음, 근심, 슬픔, 고통, 번뇌가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은 고통의 무더기를 키우지만, 이 중에는 모두 공이며, 나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으니, 풀과 나무와 돌벽과 같으며, 또한 메아리와 같다. 그러나 모든 중생이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고뇌를 받는다.(於三界地 復有芽生 所謂名色共生不離 此名色增長已成六入聚 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增長故復起後有 有因緣故有生老死憂悲苦惱 如是衆生生長苦聚 是中皆空離我我所 無知無覺 如草木石壁 又亦如響 然諸衆生不知不覺而受苦惱)” 세친은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이 『十地經』의 경문을 자상自相․동상同相․전도상顚倒相의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자상은 ‘무명’에서 ‘유有’까지, 동상은 유의 인연으로 인한 태어남, 늙음, 죽음 등이며, 전도상은 이와 같은 고통의 무더기가 모두 공이고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지만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十地經論』(高15, p.28c4-6;大26, p.142b10-12).
  71. 71)자상自相 : ⓢ svabhāva. 다른 것과 차별되는 자기만의 특성을 가리킨다. 세친은 여기에서 연기의 자상을 ‘과보의 상(報相)’, ‘저것으로 인한 상(彼因相)’,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한편 세친은 『俱舍論』에서 자상을 ‘공상共相(ⓢ sāmānyabhāva)’, 즉 동상에 대립되는 개념으로, 다른 법과 함께하지 않는 자기만의 특성이라고 하고, ‘공상’은 다른 법과 함께하는 공통된 특성이라고 설한다. 세친 『俱舍論』(高27, p.621a12;大29, p.118c21 등).
  72. 72)명색名色 : ⓢ nāmarūpa). ‘명名’은 모든 유위법의 정신적(心的)인 측면을, ‘색色’은 물질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명색은 오온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으며, ‘12연기’ 중 네 번째 항목이다. 세친 『俱舍論』(高27, p.521b20-c5;大29, p.48b20-b27) 등.
  73. 73)아뢰야식阿梨耶識 : ⓢ ālayavijñāna. ‘저장의 식(藏識)’이란 뜻으로,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 인간의 마음을 여덟 가지로 분석한 가운데 하나이다. ‘아뢰야식’은 세 가지의 의미,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는 일체중생의 모든 물든 법이 현행現行한 결과가 이 식에 저장되고(果相), 둘째는 이 식이 일체중생의 모든 물든 법에 저장되어 뒷날 현행의 원인으로 작용하며(因相), 셋째는 모든 중생이 이 식을 자기 자신으로 삼는 것(自相, 我愛執藏)이다. 무착 『攝大乘論』(高16, p.1054a20;大31, p.114a6), 『成唯識論』(高17, pp.519c17-a9;大31, pp.7c20-8a4).
  74. 74)삼계三界 : ⓢ trayo dhātavaḥ. 중생이 윤회하는 세 종류의 세계로서, 욕망이 지배하는 ‘욕계欲界’, 물질적 세계이지만 욕망이 배제된 ‘색계色界’, 물질적 세계도 아닌 ‘무색계無色界’를 가리킨다. 『中阿含經』(高18, p.188b21;大1, p.723b28), 세친 『俱舍論』(高27, p.511b22;大29, p.41b22) 등. 십지十地 중 제6현전지現前地에서는 이 ‘삼계’를 단지 마음(心)이 지은 것일 뿐이라고 설한다. 세친 『十地經論』(高15, p.68a22-23;大26, p.169a15), 60권 『華嚴經』(高8, p.178c24;大9, p.558c10). 화엄종에서는 이 마음을 여래장자성청정심如來藏自性淸淨心 또는 여래성기구덕심如來性起具德心의 진심眞心으로 이해하여 유심唯心 사상을 펼쳐 나간다. 지엄 『搜玄記』(高47, p.45b27-c3;大35, p.63b17-21) 등.
  75. 75)세친 『十地經論』(高15, p.28b18-19;大26, p.142b2).
  76. 76)세친 『十地經論』(高15, p.28b19;大26, p.142b3).
  77. 77)육입六入 : ⓢ ṣaḍāyatana. 눈․귀․코․혀․몸․뜻의 ‘육근六根’을 의미하며, 신역新譯에서는 ‘육처六處’라고 번역한다. ‘12연기’ 중 다섯 번째 항목으로서, 감각 대상인 ‘육경六境’과 함께 ‘십이입十二入’을 이룬다. 각주 47) 참조. 세친은 12연기에서 육입은 눈 등의 육근이 생긴 후 이 감각 기관과 식識과 대상이 화합하기 전까지를 일컫는다고 설한다. 『俱舍論』(高27, p472a3, p.521c5-6;大29, p.14b4, p.48b27-b28).
  78. 78)유有 : ⓢ bhava. 12연기 중 열번째 항목으로서, 세친의 『俱舍論』(高27, p.521c11-12;大29, p.48c3-4)에 의하면, 미래의 존재(當有)인 ‘생生’을 이끄는 업을 쌓는 것이다.
  79. 79)육입六入에서부터 유有에 이르는 것이다 : 12연기 중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의 여섯 지支를 가리킨다.
  80. 80)‘내지乃至’로 생략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세친 『十地經論』(大26, p.142b18-20), “육입을 이루고 나서는 안과 밖이 상대하여 촉觸을 발생시킨다. 촉의 인연 때문에 수受를 발생시킨다. 깊히 수受를 좋아하는 까닭에 갈애渴愛를 발생시킨다. 갈애가 증장하는 까닭에 취取를 발생시킨다. 취가 증장하는 까닭에 다시 뒤의 유有를 일으킨다.(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增長故復起後有)” 각주 70) 참조.
  81. 81)나와 나의 것(我所) : ‘나(我, ātman)’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나의 것(我所, mamakāra)’은 자기 자신 이외의 사물에 집착하여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華嚴經』에서는 ‘나의 것’이 바로 사성제 중의 ‘고제苦諦’이고, ‘나의 것’이 없는 것이 ‘멸제滅諦’라고 하며, ‘나의 것’을 번뇌라고 설한다. 60권 『華嚴經』(高8, p.31a13, p.31b12-13;大9, p.421c15-16, p.422a10-11).
  82. 82)‘지知’와 ‘각覺’은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으나, 현존 범본 및 이역본들의 해당 구절과 비교해 볼 때, 문맥상으로 일반적인 인식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Ryūkō Kondō ed. Daśabhūmīśvaro nāma mahāyānasūtraṃ p.24L6-7; Dr P.L. Vaidya ed. Daśabhūmikasūtra Buddhist Sanskrit Texts No.7 p.11L30-31;『佛說十地經』(高37, p.550b7-9;大10, pp.539c28-540a1), 『十地經論』(高15, p.28c1;大26, p.142b7-8.).
  83. 83)세친 『十地經論』(高15, p.28b19-c2;大26, p.142b3-8).
  84. 84)무아無我 : ⓢ anātman.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자아自我는 없다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이고 특징적인 사상 중 하나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할 당시, 인도 종래의 종교인 브라만교의 아트만설(ātman說)에 반대하여 주창된 것으로, ‘제법무아諸法無我(nirātmānaḥ sarvadharmāḥ)’로 설해진다. 『雜阿含經』(高18, p.799b2-7;大2, p.66c18-23) 등에서는 제법무아를 설한 후 그 이유를 모든 법이 자아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연緣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친은 『十地經論』에서 중생이 키운 고통의 무더기 또한 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무아라고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85. 85)인연의 자상自相에 대해서 세 가지로 설하고 있는 이 인용문은 지엄이 『孔目章』에서 인용한 세친의 『十地經論』 부분을 의상이 재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의상의 『一乘法界圖』에서 인용한 『孔目章』의 『十地經論』과 ② 지엄의 『孔目章』에서 인용한 『十地經論』과 ③ 세친의 『十地經論』이 서로 약간씩 다르다. 구체적으로 『十地經論』과 『孔目章』에는 인연의 자상을 세 가지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저것의 과보가 차례를 이루는 상(彼果次第相)’의 경증經證에서 “이 중에는 나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지知도 없고 각覺도 없다.”는 구절이 없으나, 의상은 이 구절을 『十地經』 원문에서 다시 인용(도표 ①의 *부분)하여 뒤의 이 구절에 대한 해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아래 도표의 ①에 있는 **부분도 ③의 **부분과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②에는 생략되어 있다.
    ① 『일승법계도』에서 인용한
    『공목장』 중 『십지경론』
    ② 『공목장』에서 인용한
    『십지경론』
    ③ 『십지경론』

    自相者有三種. 一者報相, 名色共阿梨耶識生. 如經, “於三界地, 復有牙生, 所謂名色共生”故. 名色共生者, 名色共彼生故.
    二者彼因相, 是名色不離彼, 依彼共生故. 如經, “不離”故.
    三者彼果次第相, 從六入乃至於有. 如經, “此名色增長已成六入聚, 乃至



    有因緣故, 有生老病死憂悲苦惱. 如是衆生, 生長苦聚.
    是中離我我所, 無知無覺, 如草木也.*”
    此中離我我所者, 此二示現空. 無知無覺者, 自體無我故.
    草木者, 示非衆生數故.**

    自相者有三種. 一者報相, 名色共阿梨耶識生. 如經, “於三界地, 復有芽生, 所謂名色共生”故. 名色共生者, 名色共彼生故.
    二者彼因相, 是名色不離彼,依彼共生故. 如經, “不離”故.
    三者彼果次第相, 從六入乃至於有. 如經, “此名色增長已成六入聚, 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 增長故復起後有.
    有因緣故, 有生老病死憂悲苦惱. 如是眾生, 生長苦聚.

    是中離我我所者, 此二示現空. 無知無覺者, 自體無我故.


    自相者有三種. 一者報相, 名色共阿黎耶識生. 如經, “於三界地, 復有芽生, 所謂名色共生”故. 名色共生者, 名色共彼生故.
    二者彼因相, 是名色不離彼,依彼共生故. 如經, “不離”故.
    三者彼果次第相, 從六入乃至於有. 如經, “此名色增長已成六入聚, 成六入已, 內外相對生觸. 觸因緣故生受. 深樂受故生渴愛. 渴愛增長故生取. 取增長故復起後有.
    有因緣故, 有生老死憂悲苦惱. 如是眾生. 生長苦聚故.”

    是中離我我所者, 此二示現空. 無知無覺者, 自體無我故.
    彼無知無覺, 示非眾生數動不動事. 如經, “如草木石壁, 又亦如響故.**”
    韓2 p.3a17-20大45 p.563c12-22高15 p.28c6-21
    大26 p.142b12-24
    참고로 이 부분에 해당하는 『十地經』 원문은 각주 70) 참조.
  86. 86)12인연因緣 : ⓢ dvādaśāṅgapratītyasamutpāda. 유정有情의 생사윤회를 열두 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으로, ‘12연기緣起’라고도 한다. 이 12연기에 대해서는 각 경론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佛說長阿含經』(高17, pp.896c6-897a7;大1, p.60b8-29)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열두 단계는 ① 미혹함의 근본인 무명無明(avidyā), ② 무명으로부터 다음의 의식 작용을 일으키는 업인 행行(saṃskāra), ③ 의식 작용인 식識(vijñāna), ④ 마음과 물질을 가리키는 명색名色(nāmarūpa), ⑤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의 오관五官과 의근意根의 육처六處(ṣaḍ-āyatana), ⑥ 육근이 대상과 만나는 촉觸(sparśa), ⑦ 육근과 대상의 접촉을 통해 받아들이는 감각인 수受(vedanā), ⑧ 고통을 피하고 즐거움을 구하는 애愛(tṛṣṇā), ⑨ 자기가 욕구하는 것을 취하는 취取(upādāna), ⑩ 다음 세상의 결과를 불러올 업인 유有(bhava), ⑪ 이생에서 몸을 받아 태어나는 생生(jāti), ⑫ 늙어서 죽는 노사老死(jarāmaraṇa)이다. 『華嚴經』(高8, p.274a16;大9 p.648b8-9 등)에서는 생사의 경계가 바로 깨달음의 경계라는 구절 등을 통해 12연기 자체가 바로 해탈문임을 밝히고 있다.
  87. 87)‘세제世諦(saṃvṛtisatya)’와 ‘제일의제第一義諦(paramārthasatya)’는 일체 모든 법을 둘로 구분하여 보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세제’는 세간의 법, ‘제일의제’는 세간의 법을 뛰어넘는 최고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華嚴經』에서는 모든 세간법이 언어에 이치에 따른 것임을 ‘세제’로, 하지만 모든 세간법이 자성이 없으며 언어의 경계가 끊긴 것임을 ‘제일의제’로 설하면서 동시에 보살은 이러한 이제二諦를 여실히 앎으로써 이제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60권 『華嚴經』(高8, p.56c22-25, p.199c5-6;大9, p.447a9-12, p.580a11-13).
  88. 88)지엄이 『孔目章』에서 세친의 『十地經論』(高15, p.68b2;大26, p.169a17)을 인용한 부분이다. 『十地經論』의 이 구절은 『十地經』 중 제6현전지의 “삼계三界가 허망하여 단지 한 마음이 지은 것이다.”의 경문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華嚴經』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60권 『華嚴經』(高8, p.178c24-25;大9, p.558c9-10).
  89. 89)위의 ‘연기란’부터 여기 “일승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까지가 의상이 지엄의 『孔目章』(大45, p.563c9-29)을 인용한 부분이다.
  90. 90)세 길(三道) : 중생이 생사윤회하는 인과를 밝힌 것으로, 허망한 마음을 뜻하는 ‘번뇌도煩惱道’, 번뇌로 인해 생기는 몸과 입과 마음의 업인 ‘업도業道’, 번뇌와 업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통인 ‘고도苦道’를 의미한다. 12연기지에서는 ‘무명’과 ‘애愛’와 ‘취取’는 ‘번뇌도’이고, ‘행行’과 ‘유有’는 ‘업도’이며, 나머지는 ‘고도’이다. 60권 『華嚴經』(高8, p.179b3-6;大9, p.559a9-12).
  91. 91)세 고통(三苦) :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이다. 『佛說長阿含經』(高17, p.882a7-8;大1, p.50b12). 세친은 『俱舍論』(高27, p.614b23-c21;大29, p.114b5-23)에서 이를 즐겁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는 ‘고고苦苦’와 즐거운 것이 없어지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괴고壞苦’, 모든 유위법이 즐거운 것이든 즐겁지 않은 것이든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오는 ‘행고行苦’로 설명한다. 60권 『華嚴經』(高8, p.179b9-12;大9, p.559a15-19)에서는 이것을 ‘12연기’에 대응시켜, ‘무명’부터 ‘육입’까지는 ‘행고’로, ‘촉觸’과 ‘수受’는 ‘고고’로, 나머지는 ‘괴고’로 설하고 있다.
  92. 92)이상을 열 가지로 12인연을 관하는 것(十重十二因緣觀)이라고 한다. 각 경론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세친 『十地經論』(高15, p.70b15-19;大26, p.170c4-8), 60권 『華嚴經』(高8, p.179b17-b20;大9, p.559a24-27). 이 가운데 열 번째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隨順有盡觀)’은 60권 『華嚴經』에 ‘없음과 다함의 관(無所有盡觀)’으로 되어 있다. 이 차이에 대해 법장은 연緣을 기준으로 하면 없음(無所有)을 관하는 것이고, 모습(相)을 기준으로 하면 있음(有)에 수순하여 관하는 것이지만 『十地經論』의 있음에 수순하여 관하는 것은 생겨남이 없음(無生)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경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회통시키고 있다. 『華嚴經探玄記』(高47, p.687b25-c4;大35, p.352a29-b9).
  93. 93)이 인용문은 지엄의 『孔目章』 「緣生章」(大45, p.568b3-7)에서 「十地品」 중 제6지 현전지現前地의 보살이 10중重으로 12인연을 관하는 구절에 대해 설명한 부분을 의상이 인용한 것이다.
  94. 94)영락경瓔珞經 : 『菩薩瓔珞本業經』의 줄임말이다. 현존본은 요진姚秦의 축불념竺佛念이 요진 건원建元 12년에서 14년(376~378) 간에 번역한 것으로 2권본이다. 8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보살의 본업本業인 십신심十信心, 십주심十住心, 십행심十行心, 십회향심十廻向心, 십지심十地心, 입법계심入法界心) 적멸심寂滅心의 52계위와 대승의 삼취정계三聚淨戒 등에 대해 설하고 있다. ‘영락본업’이라는 화엄 관계 용어의 경명經名과 42위를 포함하는 보살계위, 제7품 「大衆受學品」에서 『華嚴經』의 설법처와 내용을 싣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華嚴經』과 상당히 깊은 관계를 갖고 있으며, 또한 『梵網經』과 함께 동아시아 불교의 대승 계율에 있어서 중요 경전으로 여겨져 왔다.
  95. 95)열 번의 인연 : 『菩薩瓔珞本業經』 「賢聖學觀品」(高14, p.381a21-b5;大24, p.1015a22-28)에서 ‘열 가지 관觀하는 마음으로 관觀하는 법(十觀心所觀法)’ 중 여섯 번째 ‘법의 연기緣起에 통달하는 지혜(達有法緣起智)’를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瓔珞經』의 열 번의 인연관因緣觀은 다음과 같다. ① 아견我見의 십이인연(我見十二緣), ② 마음으로 삼는 십이인연(心爲十二緣), ③ 무명無明의 십이인연(無明十二緣), ④ 서로 연유하는 십이인연(相緣由十二緣), ⑤ 도와 이루는 십이인연(助成十二緣), ⑥ 세 가지 업의 십이인연(三業十二緣), ⑦ 삼세三世의 십이인연(三世十二緣), ⑧ 세 가지 고통의 십이인연(三苦十二緣), ⑨ 성품이 공한 십이인연(性空十二緣), ⑩ 얽매여 생겨 나는 십이인연(縛生十二緣).
  96. 96)이 구절은 지엄의 『孔目章』(大45, p.568b7-8)에서 인용된 것으로 각주 93)의 해당 본문 바로 다음 부분이다.
  97. 97)세친의 『十地經論』(高15, pp.70b15-71c4;大26, pp.170c4-171b15)에서 『十地經』의 제6현전지 중 열 가지의 인연관因緣觀에 대해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인연이 나뉘어 차례가 있음(因緣分次第)은 12인연은 앞의 것을 인연으로 하여 차례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짓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지어지는 것도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② 한마음에 포섭됨(一心所攝)은 삼계三界는 모두 한마음이 지은 것이며, 여래께서 설하신 12인연 또한 모두 한마음에 의한 것임을 관하는 것이다. ③ 자상과 업으로 이룸(自業成)은 12인연의 각 지支에 두 가지 지음이 있으니, 예를 들어 무명의 경우 연 가운데 어리석음이 무명의 자상自相이고, 행行을 이루는 원인이 되는 것이 무명의 업임을 관하는 것이다. ④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不相捨離)은 12인연 중 앞의 지支가 뒤의 지를 일으키지만, 뒤가 없으면 앞도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⑤ 세 길(三道)이 끊어지지 않음(三道不斷)은 12인연을 번뇌도煩惱道․업도業道․고도苦道로 나누어, 이 세 길은 자성이 없으나 생멸을 계속하여 끊어짐이 없으니, 두 대나무가 서로 기대어 서 있는 것과 같음을 관하는 것이다. ⑥ 과거와 미래를 관함(觀先後際)은 12인연 중 무명과 행은 과거세이며, 식識부터 수受까지는 현재세이고, 애愛부터 노사老死까지는 미래세로서 이 삼세가 끊임 없이 계속 이어지나, 무명이 멸하면 삼세의 상속이 멸함을 관하는 것이다. ⑦ 세 고통(三苦)이 모인 것임(三苦集)은 12인연이 모두 고고苦苦․괴고壞苦․행고行苦의 세 고통에 속하여 모두 고통이지만, 만약 무명이 멸하면, 이 세 고통의 상속이 끊어짐을 관하는 것이다. ⑧ 인연으로 생김(因緣生)은 12인연 모든 지支가 자신의 인因에 의해 생겨나므로 남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앞의 지의 연으로부터 생겨나므로 자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관하는 것이다. ⑨ 인연의 생함과 멸함에 묶여 있음(因緣生滅縛)은 12인연이 모두 짓는 이도 없고 생겨날 때 머무르지도 않아서 자신에 의해서도, 남에 의해서도 생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수순하여 서로 생과 멸에 묶여 있음을 관하는 것이다. ⑩ 있음과 다함을 따르는 관觀(隨順有盡觀)은 12인연 중 앞의 지支를 연하여 뒤의 지가 있음을 관하는 것은 있음을 따르는 관이고, 앞의 지가 멸함에 뒤의 지가 멸함을 관하는 것은 다함을 따르는 관이다.
  98. 98)인다라니(因陀) : ‘인드라망의 다라니’로서, 지엄의 십현문 중 ‘인다라망경계문’을 가리킨다. 지엄 『搜玄記』(高47, p.2b21-22;大35, p.15b6-7).
  99. 99)미세다라니(微細陀) : 지엄의 십현문 중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을 가리킨다. 『搜玄記』(高47, p.2b21-22;大35, p.15b6-7), 華嚴五十要問答』(大45, p.520b26-c9). 『叢髓錄』(大45, p.208a13-18)에서는 ‘인다라니’가 상즉을, ‘미세다라니’는 상입을 표현하여 함께 일승법계의 중중무진重重無盡을 드러낸다고 설하고 있다.
  100. 100)상즉相卽하고 상입相入하여 : ‘상즉’은 법계의 수많은 연기된 존재(事)들의 체성體性이 모두 무자성無自性, 공空이어서 같음을 의미하고 ‘상입’은 법계의 모든 연기된 존재가 무자성, 공이어서 서로서로 받아들이고 용납함을 일컫는다. 이 상즉과 상입은 화엄 교학에 있어서 법계연기를 나타내는 주요한 용어이며, 상즉은 연기의 체體, 상입은 연기의 용用의 측면에서 설명된다. 그 경증經證은 『華嚴經』(高8, p.55c7;大9, p.446a5), “하나가 곧 많음이고, 많음이 곧 하나임을 안다.”라는 구절과 같은 책(高8, p.23c11;大9, p.414, p.b21), “한 국토로 시방을 가득 채우고, 시방의 국토가 한 국토에 들어가 남음이 없다.”라는 구절 등이다. 의상은 『一乘法界圖』(韓2, p.2c19)에서 상즉과 상입이 각각 연기실상다라니법緣起實相陀羅尼法의 이치(理)와 작용(用)을 나타낸다고 하며, 구체적으로 수십전법數十錢法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101. 101)십세十世 : 구세九世에 일념을 합한 것이다. 60권 『華嚴經』 「離世間品」(高8, p.257b4-b11;大9, p.634a25-b5)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살이 열 가지로 삼세三世를 설한다고 밝히고 있다. 열 가지는 “과거세에 과거세를 설하고, 과거세에 미래세를 설하고, 과거세에 현재세를 설하고, 미래세에 과거세를 설하고, 미래세에 현재세를 설하고, 미래세에 다함 없음을 설하고, 현재세에 미래세를 설하고, 현재세에 과거세를 설하고, 현재세에 평등을 설하고, 현재세에 삼세가 곧 일념임을 설한다.”이다. 지엄과 의상은 이 구세와 십세가 상즉상입하나 또한 각각 따로 이루어짐을 꿈의 비유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叢髓錄』(高45, p.156b6-b16).
  102. 102)이와 같은 내용은 여러 경전에 보이며, 그 한 예로는 다음과 같다. 『維摩詰所說經』(大14, p.548a16-18), “부처님께서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성품이 곧 해탈이라고 설하셨다.(佛說婬怒癡性即是解脫.)”
  103. 103)일곱 가지~대한 진리(七種苦諦) : ‘일곱 가지의 삶과 죽음(七種生死)’이라고 『叢髓錄』(高45, p.199b8)에서 해석하고 있다. 즉 삼계三界의 중생이 자신의 과보에 따라 받는 분단생사分段生死 세 가지와 보살의 원력願力에 의한 방편, 인연, 유유有有, 무유無有의 변역생사變易生死 네 가지를 가리킨다.
  104. 104)보법普法 : ‘널리 두루하여 원만하지 않음이 없는 법’으로 『華嚴經』(高8, p.346b21-c3;大9, p.713c20-26 등) 여러 곳에서 널리 설해지고 있으며, 화엄교 전체를 보법으로 말하고 있다. 지엄은 보법을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의 체體라고 하면서, 별교일승別敎一乘 즉 화엄종이라고 설한다. 『華嚴五十要問答』(大45, pp.532b10-534c10). 의상 또한 이 구절에서 일승보법을 별교일승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다. 원효는 그의 교판에서 일승만교의 화엄을 보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표원表員 『華嚴經文義要決問答』(韓2, p.385b10-16).
  105. 105)방편일승方便一乘 : 앞에 나온 별교일승과 대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일승을 방편과 진실로 나누면 방편일승은 동교일승으로 생각된다.
  106. 106)오승五乘 : 삼승三乘과 소승小乘, 인천승人天乘을 말한다. 『叢髓錄』(高45, p.203a1) 등. 여기의 ‘삼승’은 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이다. 지엄 『孔目章』(大45, p.537b13-19) 등.
  107. 107)이 내용과 상응하는 구절은 여러 경전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중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大般若波羅蜜多經』(高1, pp.28b18-29a21; 大5, pp.17c17-18a29), “연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법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從緣所生諸法 但有名)”; 60권본 『華嚴經』(高8, p.259b16;大9, p.636a15), “일체의 법은 문자이다.(一切法文字)”
  108. 108)언교言敎의 법 : ‘언어문자로 시설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으로서 곧 교분敎分 또는 연기분緣起分에 해당한다.
  109. 109)세 가지의 자성 : 일체 존재의 성품 또는 모양(性相)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parikalpitasvabhāva), 의타기성依他起性(paratantrasvabhāva), 원성실성圓成實性(pariniṣpannasvabhāva)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구역舊譯은 각각 분별성상分別性相, 의타성상依他性相, 진실성상眞實性相이다. 변계소집성의 ‘변계’란 주변 계탁의 의미로서 범부가 집착하여 나타난 경계이다. 즉, 실유가 아닌 외계 대상을 실체가 있다고 오인하는 것을 말한다. 의타기성은 타 인연에 의하여 일어나는 가유假有의 법이다. 원성실성은 진여를 의미하니, 모든 곳에 두루하고 삼세에 걸쳐 항상 머무르는 일체 제법의 진실한 체성이다. 『攝大乘論』(高16, pp.1292c5-1293a2;大31, pp.137c27-138a15)에서는 의타기상을 아뢰야식이 종자가 되어 망령되이 분별하여 섭수한 모든 식으로, 변계소집상을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식만이 존재하여 대상 비슷하게 현현하는 것으로, 원성실상을 의타기상 가운데 대상 비슷한 모습이 완전히 없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엄과 의상은 지론종과 섭론종의 교섭을 통해 이 삼성설을 받아들여 화엄 교리 형성에 활용하고, 이어서 법장은 이를 ‘삼성동이설三性同異說’로 체계화하기에 이른다. 법장은 그의 삼성동이설에서 진여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이 구족하고, 의타는 사유似有이나 무성無性이며, 소집은 정유情有이나 이무理無여서 삼성 각각에 있어 근본과 지말이 하나도 아니나 다르지도 아니함을 설하고 있다. 법장 『華嚴一乘敎義分齊章』(大45, pp.499a11-501c28).
  110. 110)60권 『華嚴經』(高8, p.74c12;大9, p.466a27-28).
  111. 111)세 가지 자성이 없음(三無性) : 세 가지 자성(三性)에 대해 ‘공空’의 의미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첫째 변계소집성은 ‘상무성相無性(lakṣaṇaniḥsvabhāvatā)’이니, 모든 법은 범부가 집착하여 있다고 생각하는 가상假相이므로 모든 법에 고유의 상相이 있지 않아 상相에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의타기성은 ‘생무성生無性(utpattiniḥsvabhāvatā)’이니, 연기의 제법이 모두 뭇 연에 의해 생긴 것이어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생生에는 자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셋째 원성실성은 ‘승의무성勝義無性(paramārthaniḥsvabhāvatā)’이니, 연기된 모든 법이 무자성이므로 이것을 승의勝義로서 무자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解深密經』「無自性相品」(高10, pp.716c14-722b15;大16, pp.693c15-697c6).
  112. 112)섭대승론攝大乘論 : ‘대승大乘의 요의了義를 포괄하는 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논사 무착無着(Asaṅga, 4, 5세기경)이 대승의 수승한 점을 열 가지로 나누어 유식 사상에 근거하여 저술한 논서이다. 이 논서는 현재 산스크리트어본은 전해지지 않고, 티베트어역 1종과 한역漢譯 3종, 즉 불타선다佛陀扇多(Buddhaśānta) 역(2권본), 진제眞諦(Paramārtha, 499~569) 역(3권본), 현장玄奘(602?~664) 역(3권본)이 남아 있다. 이 논서에 대한 주석서로는 인도의 경우 세친과 무성無性(Asvabhāva)의 주석이 대표적이며, 동아시아에서도 수많은 주석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 진제가 『攝大乘論』을 번역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섭론종이 성립된다. 섭론종은 지론종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초기 화엄종의 교리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113. 113)『攝大乘論』에 이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으나, 『攝大乘論』(高16, p.1063c16-23;大31, p.120b20-26)에서 변계소집성은 없는 것이고, 의타기성과 진실성은 있는 것이라고 설한다. 이에 대한 세친의 주석인 『攝大乘論釋』(高16, p.1157a13-b7;大31, p.195b19-6)에서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경계이고 진실성은 성인聖人의 경계라고 해석한다. 무착과 세친의 『攝大乘論』 관련 저술에서 전체 맥락에서 의타기성이 성인 경계라고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이 여러 곳 나타난다.
  114. 114)세친 『攝大乘論釋』(高16, p.1157a13-b7;大31, p.195b19-6).
  115. 115)『解深密經』 「一切法相品」(高10, pp.715c3-716c13;大16, p.693a5-c14).
  116. 116)『解深密經』 「無自性相品」(高10, pp.716c14-722b15;大16, pp.693c15-697c6).
  117. 117)‘둘’은 세 가지 자성 중에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을 의미한다. 『叢髓錄』(大45, p.205b14-16).
  118. 118)증분과 연기분이 차별되는 이유를 밝히는 부분이다.
  119. 119)60권 『華嚴經』「十地品」(高8, p.184c3-4;大9, p.564c11-12)에는 “일체법의 성품과 일체법의 모양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항상 머물러 달라지지 않는다.(一切法性 一切法相 有佛無佛 常住不異)”라고 설하는 구절이 있다. 『十地經』(高15, p.85b17-18;大26, p.180c12-13)에서는 “이 일체법 중의 법성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법계에 항상 머무른다.(此一切法中法性 有佛無佛 法界常住)”라고 설하고 있다.
  120. 120)『勝鬘經』(高6, p.1369b5-7;大12, p.222c23-25). 각주 49) 참조.
  121. 121)돈교頓敎 : 점차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언어와 사유분별을 떠나 단박에 깨닫는 가르침 또는 그것을 종지로 하는 교파敎派를 의미한다. 이에 반해 점교漸敎는 낮은 경지에서 차례로 순서를 따라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가르침이나 교파를 가리킨다. 돈교와 점교에 구체적으로 어떤 경론이나 가르침을 해당시킬지에 대해서는 각 종파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 화엄종의 지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점교, 돈교, 원교圓敎로 나눈 후, 『華嚴經』을 돈교와 원교에 해당시켰다. 『搜玄記』(高47, pp.1a20-c25;大35, pp.13c16-14c3), 『孔目章』(大45, pp.558c16-559a24). 법장은 『華嚴經』을 원교에만 배대시킨다. 『華嚴經探玄記』(高47, p.466a13-28;大35, p.115c4-20). 의상은 『一乘法界圖』(韓2, p.8b2-5)에서 지엄의 『搜玄記』를 인용하여, 십현문十玄門에 완전히 상응하는 가르침을 원교 또는 돈교에 해당한다고 설한다.
  122. 122)지엄 『孔目章』(大45, p.562b5-c1).
  123. 123)큰 뜻(義大)과 큰 가르침(敎大) : ‘큰 뜻’은 증분을 가리키며, ‘큰 가르침’은 교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뜻(義)’은 증득하는 법의 뜻이기 때문이고, ‘가르침(敎)’은 지목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또 ‘큼(大)’은 증교證敎의 덕이 작지 않음을 나타낸다. 이 ‘큰 뜻’과 ‘큰 가르침’은 일승에 속하며 삼승에도 통하지만, 소승에는 단지 가르침만을 설하고, 또한 그 덕이 크지 않기 때문에 통하지 않는다. 일승원교에서는 ‘보고 들음(見聞)’은 ‘큰 가르침’에, ‘보현의 증득(普賢證)’은 ‘큰 뜻’에 배대된다. 지엄 『孔目章』(大45, p.562b5-c1).
  124. 124)‘앞’은 앞의 이타행 가운데 해석한 부분을 가리킨다. 『一乘法界圖』(韓2, pp.3c18-4a4).
  125. 125)보리를 돕는 덕목(助菩提分) : ⓢ bodhyaṅga. 깨달음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을 의미하며, ‘조도법助道法’, ‘조도품助道品’, ‘도품道品’, ‘각지覺支’ 등으로 표현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사념주四念住,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를 합한 37보리분이 대표적이다. 『華嚴經』(高8, pp.174a18-b19;大9, pp.553c21-554a18)에서는 제4지 보살의 구체적인 수행 내용으로 설해지고 있으며, 또 보살이 십바라밀을 구족하면 사섭법四攝法, 삼십칠품三十七品, 삼해탈문三解脫門 등의 일체 보리분을 순간순간 구족한다고 설하고 있다. 『華嚴經』(高8, p.181b25-c4;大9, p.561c7-9). 지엄은 이 보리분에 대해서 소승에서는 간략히 37가지를 들고 삼승에서도 같이 37가지를 세우지만 뜻이 다르며, 일승의 보리분은 『華嚴經』 「離世間品」의 2천 가지 문답이라고 해석한다. 『華嚴五十要問答』(大45, p.523b13-21). 의상 또한 이를 이용하여 자량資糧은 곧 보리분이고 이것은 「離世間品」의 2천 가지 문답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126. 126)「이세간품」 가운데~가지의 답 : 『華嚴經』 「離世間品」 가운데 보광명전 부처님 처소에서 보현보살이 불화엄삼매佛華嚴三昧에 들었다가 일어나 보혜보살普慧菩薩의 200가지 질문을 받고 한 물음에 10가지씩 모두 2,000가지로 대답한 것을 일컫는다. 『華嚴經』 「離世間品」은 화엄 수행 계위로 볼 때 묘각에 해당하는 곳으로, 『華嚴經』의 전체 보살도를 묘각의 입장에서 통틀어 문답을 통해 펼치고 있다.
  127. 127)열 개~세는 법(數十錢法) : 수십전법數十錢法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으로 화엄법계를 나타내기 위해 화엄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비유이다. 이 비유의 경증으로서는 『華嚴經』 「夜摩天宮菩薩說偈品」(高8, p.74a10;大9, p.465a22-23)에서 정진림보살이 읊은 ‘비유하면 열을 헤아리는 법과 같아서 하나를 더해 무량에 이르니 모두 다 본수이나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라는 게송 등과 「光明覺品」(高8, p.32b5;大9, p.423a1-2, 高8, p.34a24-25;大9, p.425a13-14, 高8, p.33c19;大9, p.424c9-10)과 「十住品」(高8, p.55c7-8;大9, p.446a5) 등도 함께 거론된다. 지엄은 이 경설에 주목하여 「光明覺品」 가운데 문수보살이 읊는 게송을 『搜玄記』(高47, p.13a24-b1;大35, p.27b2-7)에서 풀이하면서 ‘수십법數十法’을 교설하고 있다. 이 설을 바탕으로 의상은 연기실상다라니법을 관하기 위해서는 ‘수십전법’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하면서 화엄의 법계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동전 세는 비유를 확립시키고 있다. 균여가 『釋華嚴敎分記圓通鈔』(韓4, p.448c14-20)와 『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25a10-18)에서 원효의 『華嚴宗要』와 『普法記』의 설을 인용하여 수십전법의 설을 지엄이 처음 시작했다고 하지만, 수십법의 설이 아닌 수십전법의 비유를 확립시킨 것은 의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28. 128)열반涅槃 : ⓢ nirvāṇa의 음역音譯. ‘적멸寂滅’, ‘멸도滅度’, ‘무생無生’ 등으로 의역意譯하기도 한다.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하며, 모든 번뇌의 불이 소멸되어 소진된 상태,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상태를 비유한다. 초기불교의 최종 목표로서 ‘열반적정涅槃寂靜(śantaṃ nirvāṇam)’으로 표현된다. 『雜阿含經』(高18, p.799b2-7;大2, p.66c18-23 등) 『華嚴經』에서는 ‘생사’와 ‘열반’이 모두 허깨비(幻)와 같아 얻을 수 없지만, 보살은 수승한 공덕에 의해 열반에 머무르면서 생사를 여의지 않고, 또한 생사의 세계에서 열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다고 설한다. 60권 『華嚴經』(高8, p.73c19, p.274a13-17, p.275b12-19;大9, p.464c23-24, p.648b5-9, p.649b17-25).
  129. 129)‘열 가지 열반’은 『華嚴經』「離世間品」(高8, p.299a18-b9;大9, p.669a26-b12)의 “여래如來․응공應供․등정각等正覺이 불사佛事를 끝까지 마치시고 열 가지 뜻이 있어서 대반열반大般涅槃을 나타내 보이신다.”라는 구절의 내용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일체의 행이 모두 무상無常함을 밝히려는 뜻, ② 일체의 유위법이 편안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③ 대반열반이 가장 안온함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밝히려는 뜻, ④ 대반열반이 일체 모든 두려움을 멀리 여의었음을 밝히려는 뜻, ⑤ 모든 천인天人이 색신色身에 탐착하기 때문에 색신이 무상하고 마멸법임을 밝혀 청정한 법신에 항상 머무르기를 구하게 하려는 뜻, ⑥ 무상無常의 힘은 강해서 되돌릴 수 없음을 밝히려는 뜻, ⑦ 유위법은 좋아하는 대로 행해지지 않으며 자재롭지 못함을 밝히려는 뜻, ⑧ 삼계의 법이 모두 질그릇과 같아 견고하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⑨ 대반열반이 최고의 진실이며 무너지지 않음을 밝히려는 뜻, ⑩ 대반열반이 생사生死를 멀리 여의어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음을 밝히려는 뜻이다. 이 열 가지 열반설은 이후 화엄가들에게 매우 중요시되었는데, 지엄은 『孔目章』(大45, p.581b20-c1)에서 열반을 소승의 열반, 삼승의 열반, 일승의 열반으로 나눈 뒤 『華嚴經』 「離世間品」의 열 가지 열반이 일승 중 별교의 열반이라고 해석한다.
  130. 130)열 부처님(十佛) : 『華嚴經』의 여러 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 명칭이나 성격은 동일하지 않다. 60권 『華嚴經』(高8, p.292a21, p.185b15;大9, p.663b18, p.565b16 등). 지엄은 이를 종합하여 「離世間品」을 근거로 하는 ‘행경行境’과 「十地品」 제8지에 바탕한 ‘해경解境’의 ‘이종십불설二種十佛說’을 주장하였다. 『孔目章』(大45, p.559c29). 의상은 이 가운데 행경십불을 강조하면서도 융삼세간불을 상징하는 ≺槃詩≻를 통해서 해경십불 또한 드러내고 있다.
  131. 131)의상의 더욱 자세한 설명이 『叢髓錄』(高45, pp.214a12-215a13)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무착불無着佛’에 대해, 오늘 나의 오척되는 몸을 이름하여 세간이라 하고, 이 몸이 허공 법계에 두루하여 이르지 못함이 없는 까닭에 바른 깨달음(正覺)이라고 한다. 세간에 안주하므로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정각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므로 무착불이라 한다. ② ‘원불願佛’에 대해, 140원․10회향원․초지원 및 성기원 등이 다 원불이다. 이 부처님은 머무름 없음(無住)을 몸으로 삼기 때문에 어느 한 물건도 부처님의 몸이 아닌 것이 없으니,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포섭하여 법계에 두루 칭합함을 이름하여 원불이라 한다. ③ ‘업보불業報佛’에 대해, 22위의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않으며 원만히 밝게 비춘다. 만약 모든 수행하는 사람이 이와 같이 믿을 수 있으면 곧 ‘믿는다’라고 이른다. 만약 실제 도리를 들어서 말하면 위로는 묘각妙覺에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의 일이니, 이로써 만약 어떤 사람이 이 일을 공경하고 믿으면 업보불이라 이를 만하다. ④ ‘지불持佛’에 대해, 법계의 삼라 모든 법이 비록 다함이 없더라도 만약 해인으로 도장 찍듯 정한다면 곧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이다. 저것은 나를 지니고, 나는 저것을 지니는 까닭에 수순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로써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 세계를 지니니, 이를 이름하여 지불이라고 한다. ⑤ ‘화불化佛’ 또는 ‘열반불涅槃佛’에 대해, 삶과 죽음과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하여 보는 까닭에 영원히 건너갔다고 이른다. 이른바 삶과 죽음이 시끄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열반이 적정한 것이 아니니 이 뜻이다. ⑥ ‘법계불法界佛’에 대해, 하나의 티끌법계, 소나무법계, 밤나무법계 내지 시방삼세의 허공법계가 모두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여가 과거에 없어지지 않으며 미래에 생겨나지 않으며 현재에 움직이지 않는다. 여래 또한 그러하여 과거에 없어짐이 없고, 미래에 생겨남이 없으며, 현재에 움직임이 없다. 형체도 없고 모양도 없어 허공계와 같으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백천만겁 동안 이미 설했고 지금도 설하고 앞으로도 설하겠지만 끝내 다할 수 없으니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법계불이라고 일컫는다. ⑦ ‘심불心佛’에 대해, 마음을 쉬면 곧 부처님이고 마음을 일으키면 곧 부처님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흐린 물을 깨끗하게 할 줄 모르니, 물이 맑으면 그림자가 밝고 물이 흐리면 그림자가 어두운 것과 같다. 마음의 법 또한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원만히 밝고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된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히 머무르면 곧 법계의 모든 법이 나의 오척되는 몸에 나타난다. ⑧ ‘삼매불三昧佛’에 대해, 해인삼매의 법이 의거하는 것마다 기준으로 삼는 것마다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집착 없는 삼매불이라고 일컫는다. ⑨ ‘성불性佛’에 대해, 법성에 둘이 있다. 이른바 큰 성품(大性)과 작은 성품(小性)이다. 무엇인가? 만약 한 법이 일어나면 삼세에 안도 없고 밖도 없기 때문에 큰 성품이라고 한다. 한 법의 지위가 일체에 두루 한 가운데 바야흐로 이루어지는 것을 작은 성품이라고 한다. 이른바 한 기둥이 법계의 경계를 다하니 단지 이 기둥을 이름하여 큰 성품이라고 한다. 이 하나의 기둥 가운데 서까래와 들보와 기와 등의 모든 지위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하여 작은 성품이라고 한다. ⑩ ‘여의불如意佛’에 대해, 마치 대용왕에게 대보왕大寶王이 있으니,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 가지 곡식과 아홉 가지 곡식, 천 가지, 만 가지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이 보배왕의 덕인 것과 같다. 여의불의 은혜 또한 이와 같다.
  132. 132)이 구절은 『十地經』 가운데 금강장보살이 각 지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하기 전에 앞으로 설할 도道의 수승함을 찬탄하는 내용 가운데, 『十地經論』(高15, p.15b16-b17;大26, p.133b11-b12), “(성스러운 도는) 모든 갈래를 멀리 여의었으며 열반의 모습과 같아 처음도 중간․나중도 아니니 말로 설할 바가 아니다.”라는 게송을 세친이 주석한 부분에서 취한 것이다. 『十地經論』(高15, p.15a4-b17;大26, p.133a8-b12). 지엄은 이 게송이 해탈의 자체 무애를 설한 것으로서, 지혜가 일어난 후 번뇌가 멸하거나(初), 지혜의 일어남과 번뇌의 멸함이 동시이거나(中), 번뇌가 멸한 후 지혜가 일어나는 것(後) 모두 아니고 앞과 중간과 뒤가 연하여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한다. 『搜玄記』(高47, p.36c1-6;大35, p.53b9-14). 또한 『叢髓錄』(高45, p.163a15-b9)에 인용된 『道身章』에서는 이를 해석하여 삼세 중에 끊을 것이 없지만(非初非中後), 깨닫고 나서는 삼세의 장애가 없다(前中後取故)고 설한다.
  133. 133)『十地經』 제3발광지發光地의 “보살이 모든 법이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인연으로 있다고 본다.”(『十地經論』 高15, p.52b5-6;大26, p.158b21-22)라는 구절을 세친은 『十地經論』에서 주석하여, “청정한 법 가운데 늘어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번뇌 망상 가운데 줄어드는 것을 보지 않으며 인연이 모여 생겨난다.”라고 하고 있다. 이 경문의 『華嚴經』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60권 『華嚴經』(高8, p.173a11-12;大9, p.552b13).
  134. 134)중中과 즉卽 : ‘중’은 ‘중문中門’으로서 ‘상입相入’을, ‘즉’은 ‘즉문卽門’으로서 ‘상즉相卽’을 의미한다. 자세한 내용은 각주 100) 참조.
  135. 135)인다라니因陀羅尼 : ‘인드라다라니’를 의미한다.
  136. 136)보현보살普賢菩薩 : ⓢ Samantabhadra. 문수보살文殊菩薩(Mañjuśri)과 함께 『華嚴經』의 양대 보살로서, ‘대행大行’으로 상징되니, 『華嚴經』의 보살도를 대표해서 ‘보현행’이라고도 한다. 『華嚴經』의 전체 구성과 관련하여, 여래의 과해果海를 보이는 보현경전계, 중생을 발심하게 하는 신信을 설하는 문수경전계, 그리고 일승보살도를 나타내는 십지경전계를 여래 출현의 입장에서 체계적으로 조직, 구성한 것이 『華嚴經』이라고 해석할 만큼 보현보살은 『華嚴經』의 사상을 나타내는 주요한 방편으로 표현되고 있다. 의상 또한 『華嚴經』에서의 보현보살의 중요성에 주목하여,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대표하는 대인大人으로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을 들고 있다.
  137. 137)용수龍樹의 『中論』 「觀四諦品」(高16, p392b14;大30, p.33b11-12)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뭇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 나는 곧 무無라고 설한다. 또한 가명假名이 되고 또한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即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공이면서 가假이기도 한 모든 인연법이 바로 중도라는 이 게송은 공가중空假中의 삼제게三諦偈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삼론학과 천태 교학 등에서 인연법의 중도의를 밝히는 데 있어서 크게 중요시되었다.
  138. 138)각주 88) 참조.
  139. 139)앞의 동전을 세는 법 중 중문中門을 설하는 가운데 용수의 『中論』 게송을 인용하여 중도中道의 뜻을 풀이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一乘法界圖』(韓2, p.6b20-22).
  140. 140)열 가지 문(十門) : ‘십현문十玄門’을 가리키며 ‘십현연기十玄緣起’라고도 한다. 화엄 교학에서 상즉․상입의 사사무애事事無礙 법계연기를 10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지엄 『搜玄記』(高47, p.2b16-c9;大45, p.15a29-b24) 등. 여기에서 ‘십十’은 원만 구족의 만수滿數이고, ‘현玄’은 이것을 통해 『華嚴經』의 현묘한 바다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문門’은 사사무애법문을 가리킨다. 또 ‘십현연기’에서의 ‘연기’는 일체 제법과 마찬가지로 이 열 가지 문 또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 연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엄의 십현문은 육상설과 함께 화엄종에서 법계연기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지엄 이후 의상, 법장, 징관, 종밀 등 거의 모든 화엄가들도 이 십현문설을 중요시하였다.
  141. 141)뒤의 십현문을 구체적으로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一乘法界圖』(韓2, p.8a10-b7).
  142. 142)60권 『華嚴經』 「初發心菩薩功德品」의 전체 내용을 취한 것으로 보이며, 「賢首菩薩品」(高8, p.40c23;大9, pp.432c29-433a3)에 있는 구절도 이에 대해 설하고 있다. “보살이 생사生死에서 최초로 발심할 때에 한결같이 보리를 구함에 견고하여 움직이지 않으니 그 한순간의 공덕은 깊고 넓어 가없으니 여래께서 분별하여 설하셔도 겁을 마치도록 오히려 다하지 않네.(菩薩於生死, 最初發心時, 一向求菩提, 堅固不可動. 彼一念功德, 深廣無邊際, 如來分別說, 窮劫猶不盡.)”
  143. 143)60권 『華嚴經』 「賢首菩薩品」(高8, p.40c25;大9, p.433a4-5)에 있는 다음 구절이 참조된다. “어찌 하물며 한량없고 무수한 가없는 겁에 모든 바라밀을 갖추어 닦은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何況於無量, 無數無邊劫, 具足修諸度, 諸地功德行.)”
  144. 144)60권 『華嚴經』 「梵行品」(高8, p.60a16;大9, p.449c14).
  145. 145)세친 『十地經論』(高15, p.52b5-6;大26, p.158b21-22).
  146. 146)60권 『華嚴經』 「梵行品」(高8, p.60a16;大9, p.449c14).
  147. 147)이 구절은 세친世親의 『十地經論』(高15, p.3a-c;大26, pp.124c-125a)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148. 148)60권 『華嚴經』 「賢首菩薩品」(高8, p.51a14-16;大9, p.441a14-16).
  149. 149)60권 『華嚴經』「十地品」(高8, p.187b12-15;大9, p.567c13-20).
  150. 150)‘점교漸敎’는 낮은 경지에서 차례로 순서를 따라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가르침이나 교파를 가리킨다. 각주 121) 참조.
  151. 151)‘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一同時具足相應門)’에서 ‘곧 삼승의 점교漸敎이다(卽是三乘漸敎)’까지는 지엄의 『搜玄記』 중 ‘다섯 번째, 글을 따라 해석함(隨文解釋)’에서 ‘설명된 뜻을 기준으로 하여 그 분제를 밝힘(約所詮義明其分齊)’의 십현문 구절과 유사하다. 『搜玄記』(高47, p.2b11-c8;大35, p.15a22-b24) 양자 간의 상이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搜玄記』『一乘法界圖』
    십현문이 갖추는 문 또는 상相一敎義具足 二理事具足 三解行具足 四因果具足 五人法具足 六分齊境位具足 七師弟法智具足 八主伴依正具足 九逆順體用自在具足 十隨生根欲示現具足人法理事敎義解行因果
    여섯째 문에서다만 뜻이 문*을 따라 다를 뿐이다.(但義從門異耳)다만 뜻이 현상(事)을 따라 다를 뿐이다.(但義從事異耳)
    * ‘문門’은 고려대장경본을 따른 것이다. 고려대장경본을 저본으로 한 대정신수대장경본에는 ‘世’로 되어 있으나 다섯째의 ‘世’를 잘못 반복한 것으로 보인다.
  152. 152)의상은 『一乘法界圖』에서 60권 『華嚴經』과 『十地經論』의 『十地經』, 『勝鬘經』, 『解深密經』, 『菩薩瓔珞本業經』 등을 인용하고 있다.
  153. 153)의상이 『一乘法界圖』에서 인용하고 있는 논․소․초로는 『中論』, 『攝大乘論』, 『攝大乘論釋』, 『十地經論』, 『孔目章』, 『搜玄記』 등이 있다.
  154. 154)공목孔目 : 『華嚴經內章門等雜孔目章』(4권, 大45, p.536-589)이다. 지엄이 62세 이후 만년에 저술한 것이다. 『孔目章』은 60권 『華嚴經』에 대해 144장으로 나누어 주제별로 소승과 삼승에 대비하여 무진일승無盡一乘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155. 155)문답問答 : 지엄의 『華嚴五十要問答』(2권, 大45, p.519-536)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화엄교의 중요한 이치를 53가지 문답 형식을 통해서 소승․삼승과 일승화엄의 교설을 비교하고 화엄이 구경일승임을 설명하고 있다. 지엄의 58세 이후 저술로 보이며 『孔目章』에서 이 『華嚴五十要問答』을 인용하고 있다.
  156. 156)총장總章 원년元年 : 총장은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이며, 원년은 서기 668년이다.
  157. 157)『一乘法界圖』(韓2, p.1a).
  158. 158)『一乘法界圖』(韓2 p.1a).
  1. 1){底}續藏經。第二編八套四册 {甲}新修大藏經第四十五卷 {乙}正德二年寫大谷大學藏本(甲本之對校一本)。
  2. 2)「義湘撰」無{底}{甲}{乙}ㆍ補入{編}。
  3. 3)「字」疑「守」。
  4. 4)「末」一作「未」ㆍ作「未」{乙}。
  5. 5)「日」作「曰」{乙}。
  6. 6)「繁」疑「槃」。
  7. 7)「入」作「人」{乙}。
  8. 8)「普」作「善」{甲}。
  9. 9)「空」作「豈」{乙}。
  10. 10)「隔」作「障」{乙}。
  11. 11)「槃」疑「繁」。
  12. 12)「繁」疑「槃」次同。
  13. 13)「弁」作「辨」{甲}。
  14. 14)□疑「入」ㆍ無{甲}{乙}。
  15. 15)「相故」作「故相」{乙}。
  16. 1)「名」作「得」{乙}。
  17. 2)「菩提」疑「煩惱」{甲}。
  18. 3)「入」作「人」次同。
  19. 4)「相」下疑脫「同相異相」。
  20. 5)「念」無{乙}。
  21. 6)「反」作「變」{乙}。
  22. 7)「事」下疑脫「顯」。
  23. 1)「有」一作「分」ㆍ作「立」{乙}。
  24. 2)「目」作「因」{乙}。
  25. 3)「有」作「自」{乙}。
  26. 4)「顯」作「離」次同{乙}。
  27. 5)「答」作「是」{乙}。
  28. 6)「卽」下疑脫「無」。
  29. 7)「陀」更勘。
  30. 8)「過去…未來」十六字作 「未來現在現在現在未來未來過去」{乙}。
  31. 9)「世」疑「也」。
  32. 10)「乎」疑「耳」。
  33. 11)「惱」疑「怒」。
  34. 12)「之者」作「者之」{乙}。
  35. 13)「▼(穴/具)」作「冥」{甲}。
  36. 14)「離」疑「顯」。
  37. 15)「入」作「人」{乙}。
  38. 1)「解」下一有「行」。
  39. 2)「法」下有「言敎之法」{乙}。
  40. 3)「理」下入「說」見。
  41. 4)「竟」疑「意」。
  42. 5)「性」疑「情」。
  43. 6)「立」下疑脫「故」。
  44. 7)「種」下疑脫「無」。
  45. 8)「三」下疑脫「性」。
  46. 9)「以外」作「外以」{乙}。
  47. 10)「所」下疑脫「知」。
  48. 11)「與本」作「本與」{乙}。
  49. 1)「我同故」疑剩。
  50. 2)「可別」疑剩。
  51. 3)「相即」疑剩。
  52. 4)「後義」作「義後」{乙}。
  53. 5)「客」一作「容」。
  54. 6)「理」一作「異」。
  55. 7)「互」作「乎」{乙}。
  56. 8)「客」一作「容」。
  57. 9)「自」下一有「還」。
  58. 10)「巧」無{乙}。
  59. 11)「終」作「修」{乙}。
  60. 12)「陰」疑「蔭」{編}。
  61. 13)「永」一作「求」。
  62. 14)「量」一作「礙」。
  63. 15)「永」疑「未」。
  64. 16)「菩薩」疑「煩惱」次同。
  65. 1)「半」疑「伴」{編}。
  66. 2)「例」下有「事」{乙}。
  67. 3)「道」上疑脫「中」。
  68. 4)「因緣」作「緣因」{乙}。
  69. 5)「是」疑剩。
  70. 6)「亦」作「復」{乙}。
  71. 7)「文」疑「又」。
  72. 8)「離」疑「顯」。
  73. 9)「准」作「唯」{乙}。
  74. 10)「之」一無。
  75. 1)「問」作「門」{乙}。
  76. 2)「因」作「同」{乙}。
  77. 3)「隨」一作「相」。
  78. 4)「其」下疑脫「義」。
  79. 5)「一」作「十」{乙}。
  80. 6)「之」作「云」{乙}。
  81. 7)「功」作「切」{乙}。
  82. 8)「今一」一作「亦」。
  83. 9)「其」疑剩。
  84. 10)「何耶」疑「阿爺」ㆍ作「阿耶」{甲}。
  85. 11)「圓」作「因」{乙}。
  86. 12)「總」疑剩。
  87. 13)「頭者」作「者頭」{乙}。
  88. 14)「卽」無{乙}。
  89. 15)「▼(茂*(了/皿))▼(是+我)」疑「藏匙」{乙}。
  90. 16)「顯」作「頭」{乙}。
  91. 1)「大」作「文」{乙}。
  92. 2)「余」疑「樂」。
  93. 3)「常」一作「掌」。
  94. 4)「從」作「位」{乙}。
  95. 5)「前」下疑脫「二」。
  96. 6)「玄門」作「門玄」{乙}。
  97. 7)「看」一作「著」。
  98. 8)「實」作「寶」{乙}。
  99. 9)「重」疑「熏」。
  100. 10)「鳥」作象」{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