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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570_b_01L발문최상승(最乘)은 후학들이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반드시 이 법의 증험을 고찰한 후에야 사람들이 이를 믿을 것이다.『법화경』이 동방에 들어와 번역된 후 여러 주석가들의 장소章疏가 많으나, 지자 대사智者大師의 해석만이 세상에서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전해지면서 간혹 본래의 진실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 오묘한 뜻을 완전히 통달하지 못한 채 강연함으로써 근원은 하나인 묘법이 여러 가지 설로 나뉘게 되었다.일찍이 이 경을 읽은 자라고 하면 반드시 『법화삼매참조선강의法華三昧懺助宣講義』와 더불어 무릇 『영험전』을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현묘한 종지玄旨를 바로 탐구하고 묘한 감응(妙應)을 깊이 구할 수 있으니, 단연코 이 두 권에 (그 뜻이) 들어 있다.묘혜妙慧1)가 삼가 재원을 마련하여 이 두 책을 간행하고 만의사萬義寺2)에 안치하니, 길이 전하여 사라지지 않게 할 따름이다.절은 지원至元 연간(고려 충숙왕대 1264〜1294)까지 정고貞古와 현묵玄黙이 서로 대를 이어 주석하다가 우리 할아버지 충숙공의 백부이신 진구珎丘 대선사 혼기混其3)에게 전해졌다. 혼기는 또한 삼장법사 의선義旋4)에게 전하고, 의선 이후 세 번 전하여 나(묘혜)에게 이르렀으니, 요컨대 모두 우리 종단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 절은 본래 혼기 스님께서 일찍이 법화도량으로 개설하였던 곳이므로 여기에서 영험전의 법을 선양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임금님의 만수무강(一人之壽)과 온 나라 백성들의 안녕, 그리고 돌아가신 부친 조덕유趙德裕 영가가 정토에 왕생하며, 보시를 베푼 신도들이 각각 좋은 과보를 얻으며,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다 함께 법의 교화를 입기 바라나이다.조선 효종 3년(순치 9년, 1652) 2월 전라남도 보성군 오봉산 개흥사 중간重刊.5)주상 전하께서 만수를 누리시길 받들어 위하며, 대시주 산화잡山花帀, 대시주 ▣▣▣, 시주 하복잡河卜帀, 시주 자훈慈訓 비구, 시주 ▣▣▣의 (후원으로) 선화善和 비구와 성임性稔 비구가 간행하고, 극능克能 비구가 책임을 맡다. -
006_0570_b_01L[跋文]4)最乘之法。 [213] 非後學所能辯。必考是法之
006_0570_b_02L驗然後。而人信之。自法華東譯以後。諸
006_0570_b_03L家章䟽盖多。而智者解釋。獨行於世。然
006_0570_b_04L流傳或失本眞。講演未達其奧。一源之妙。
006_0570_b_05L5) [214] 於萬派。嘗謂讀是經者。要看講儀與
006_0570_b_06L夫靈驗傳。以其直探玄旨。深求妙應。斷
006_0570_b_07L在二書也。妙慧謹捨貲財。刊此二書。安
006_0570_b_08L寘于萬義寺。以壽不朽耳。寺6)在 [215] 至7)元 [216] 間。
006_0570_b_09L貞古玄默。相繼主席。卒傳於余王8)父 [217] 忠
006_0570_b_10L肅公之伯父。珎丘大禪師混其。其又傳於
006_0570_b_11L三藏法師義旋。旋後三傳。而至于余。要
006_0570_b_12L皆不出乎吾宗爾。寺本混其。嘗設法華道
006_0570_b_13L場故。冝於此宣揚此法用匄。9)一人之壽。
006_0570_b_14L萬姓之安。兼及先父趙德裕。往生淨域。
006_0570_b_15L助施檀越。各證善果。法界含靈。同沾法
006_0570_b_16L化云。 [218]
006_0570_b_17L10)順治九年壬辰二月日。全南道寶城郡。
006_0570_b_18L五峯山開興寺重刊。 [219]
006_0570_b_19L奉爲主上三展下壽萬歲。大施主山花帀。
006_0570_b_20L大施主▣▣▣。施主河卜帀。施主慈訓
006_0570_b_21L比丘。施主▣▣▣。此刊善和比丘。性稔
006_0570_b_22L比丘。斡善克能比丘。
006_0570_b_23L「壁」作「壁鑿」{乙}。「輕」作「輙」{乙}。「下」
006_0570_b_24L下有「終」{乙}。此跋文甲本無有。「」作「岐」
006_0570_b_25L{乙}。「在」作「生」{乙}。「元」作「亢」{乙}。「父」作
006_0570_b_26L「主」{乙}。「一人…化云」三十六字無有{乙}。甲
006_0570_b_27L本刊記如下「大靑山中菴開板。化主云熙。皇明嘉
006_0570_b_28L靖十三年甲午六月日全羅道高敞文殊寺重鋟」。
- 1)묘혜妙慧 : 조덕유趙德裕의 아들로 이 발문을 썼고, 의선 이후 세 번째 만의사 주지를 역임한 인물이다.
- 2)만의사萬義寺 : 수원의 동쪽에 있던 절로 예부터 국가의 복리를 기원하던 비보사찰이었으나, 그동안 황폐되었던 것을 고려 충선왕~충숙왕 1년(皇慶 연간 1312~1313)에 천태종의 승려 혼기混其가 새로 중건하였다. 그 후 의선義璇이 절을 맡았고, 다시 나라에서 묘련사妙蓮寺 문인에게 귀속시켜 전하게 하였다.
- 3)혼기混其 : 충선왕 때(1308~1313) 대선사로 천태종의 진구사珍丘寺 주지로 있다가 수원 만의사를 중창하였다.
- 4)의선義旋 : 충선왕 때 공신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의 아들로 일찍 출가하여 원혜圓慧의 법을 받았다. 원나라 황실로부터 삼장법사三藏法師라는 칭호를 받았고, 고려 왕실로부터 현오 대사玄吾大師에 봉해져 영원사瑩源寺 주지를 겸하였다. 충숙왕에게 묘련사 중창을 건의 완성하여 만의사를 부속 사찰로 하였다.
- 5)갑본(고창 문수사본)의 간기刊記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대청산大靑山 중암中菴이 개판하였고, 화주 운희云熙가 중종 29년(嘉靖 13년, 1534년 갑오) 6월 전라도 고창高敞 문수사文殊寺에서 중판(重鋟)하였다.”
- 1)「壁」作「壁鑿」{乙}。
- 2)「輕」作「輙」{乙}。
- 3)「下」下有「終」{乙}。
- 4)此跋文甲本無有。
- 5)「」作「岐」{乙}。
- 6)「在」作「生」{乙}。
- 7)「元」作「亢」{乙}。
- 8)「父」作「主」{乙}。
- 9)「一人…化云」三十六字無有{乙}。
- 10)甲本刊記如下「大靑山中菴開板。化主云熙。皇明嘉靖十三年甲午六月日全羅道高敞文殊寺重鋟」。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오지연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