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현정론(顯正論) / 顯正論

ABC_BJ_H0118_T_001
현정론顯正論
득통 기화得通己和 찬撰
박해당 (역)

007_0217_a_02L
현정론顯正論
총목차總目次
서문
질의응답
1. 출가는 불효이다
2. 출가는 불충이다
3. 육식을 금하는 것과 불살생은 불효이며 예가 아니다
4. 술 마시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5. 재물을 보시하면 보응을 받는다는 주장은 재물을 탕진하게 한다
6.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죽은 뒤에 과보를 받는다는 주장은 망령되다
7. 화장은 예가 아니다
8. 전생·현생·내생이 있다는 주장은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9. 오랑캐에게는 도가 없다
10. 불교는 재앙을 가져온다
11. 승려들은 출가하여 하는 일 없이 놀고먹으니 사회의 해악이다
12. 승려들이 타락해 있다
13. 불경은 유교 경전보다 힘만 들 뿐 효용이 없다
14. 노장사상과 유교, 불교의 우열은 어떠한가
서문
그 자체는 유有나 무無가 아니면서도 유와 무에 통하고, 본래 과거와 현재가 없으면서도 과거와 현재에 통하는 것은 도道이다. 유와 무는 성性1)과 정情2)으로 인하여 생겨나며, 과거와 현재는 태어남과 죽음으로 인하여 생겨난다. 성에는 본래 정이 없지만 성에 미혹됨으로 인하여 정이 생겨난다. 정이 생겨나면 지혜가 가로막히고 생각이 변하여 체體를 달리하니, 온갖 차별적인 모습들이 이로 인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태어남과 죽음이 이로 인하여 시작된다. 정에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있고 선함과 악함이 있다. 깨끗함과 선함은 성인이 나타나는 까닭이고, 더러움과 악함은 범부가 생겨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만약 정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범부와 성인도 일어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보살은 성을 이미 깨달았으나 정은 오히려 다하지 못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각유정覺有情’3)이라 부른다. 보살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나머지 이승二乘4)이겠는가? 삼승三乘5)이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나 하늘 중생6) 등의 다른 부류이겠는가?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이 가득하고 지혜가 미치지 않음이 없으며, 깨끗함이 극에 이르러 정의 속박이 이미 다 없어졌다. 그러므로 정이라는 말은 부처님께는 쓰지 않는다. 오직 부처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정有情7)이라 부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저 삼승이나 오승五乘8)은 모두 정을 다스리기 위한 것이다. 인승人乘9)과 천승天乘10)은 더러운 때를 없애기 위한 것이며, 삼승은 깨끗한 때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더럽거나 깨끗한 때가 다한 뒤에야 비로소 큰 깨달음의 경지에 몸소 나아갈 수 있다. 오계五戒는 사람으로 나게 하는 것이고, 십선十善은 하늘 중생으로 나게 하는 것이다. 사제四諦와 십이인연十二因緣의 가르침은 이승을 이루게 하는 것이며, 육도六度11)는 보살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삼장三藏의 요체를 살펴보건대,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정情을 없애고 성性을 드러내게 하려는 것일 따름이다. 정이 성에서 생겨나는 것은 마치 구름이 먼 허공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다.

007_0217_a_01L

007_0217_a_02L1)顯正論 [1]

007_0217_a_03L

007_0217_a_04L2)得通己和 [2]

007_0217_a_05L
體非有無而通於有無本無古今
007_0217_a_06L通於古今者道也有無因於性情也
007_0217_a_07L古今因於生死也性本無情迷性生情
007_0217_a_08L情生智隔想變體殊3) [3] 所以形也
007_0217_a_09L生死所以始也夫情也有染淨焉
007_0217_a_10L善惡焉4) [4] 與善聖之所以興也染與
007_0217_a_11L凡之所以作也故知情若不生
007_0217_a_12L凡之與聖悉無得而興焉菩薩性雖
007_0217_a_13L已覺而情猶有所未盡故稱之云覺有
007_0217_a_14L情也菩薩尙尒况餘二乘乎三乘尙
007_0217_a_15L况餘人天異類乎佛則覺滿而智無
007_0217_a_16L不周淨極而情累已盡故情之言
007_0217_a_17L可加於佛也唯佛一人之外皆稱有情
007_0217_a_18L以此夫三乘五乘皆所以治其情也
007_0217_a_19L人天乘所以治其染5) [5] 三乘所以治其
007_0217_a_20L淨垢也染淨垢盡然後方親造大覺之
007_0217_a_21L境矣五戒所以生人道也十善所以生
007_0217_a_22L天道也諦緣所以成二乘也六度所以
007_0217_a_23L成菩薩也竊觀三藏指歸只要令人去
007_0217_a_24L情顯性而已情生於性猶雲起於長空

007_0217_b_01L정을 없애고 성을 드러내는 것은 구름을 젖혀 훤하게 맑은 허공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정에는 얇은 것도 있고 두터운 것도 있다. 마치 구름에 옅은 것도 있고 짙은 것도 있는 것과 같다. 구름에 옅고 짙은 차이는 있으나 하늘빛을 가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정에 두텁고 얇은 차이는 있으나 성의 밝음을 막는 것은 같다. 구름이 일어나면 해와 달이 빛을 거두어들여 세상이 어두워지며, 구름이 개면 빛이 세계를 덮어 우주가 탁 트인다. 불교를 이에 비해 보자면 맑은 바람이 뜬구름을 걷어 내는 것과 같다. 보는 바가 분명하기를 바라면서 맑은 바람을 싫어한다면 이는 미혹된 것이다. 나와 남이 모두 맑고 태평하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도道12)를 싫어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만일 사람마다 도에 의거하여 닦게 가르친다면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있고 몸을 닦을 수 있고 집안을 다스릴 수 있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고 천하를 태평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13) 근기根機가 뛰어난 이는 보살도 될 수 있고 성문聲聞도 될 수 있고 연각緣覺도 될 수 있으며, 근기가 낮은 이는 여러 하늘의 중생이 될 수도 있고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진실로 이와 같으면서도 세상이 다스려지지 않는 경우는 없다. 왜 그러한가? 죄의 과보를 싫어한다면 마땅히 여러 악한 행위를 끊을 것이니, 비록 모든 악한 행위를 다 끊어 없애지는 못할지라도 하나의 악한 행위는 충분히 없앨 수 있다. 하나의 악한 행위가 사라지면 하나의 형벌이 그칠 것이며, 하나의 형벌이 집안에서 그치면 만 가지 형벌이 나라에서 그칠 것이다. 복을 받게 되는 인연을 좋아한다면 마땅히 여러 선한 행위를 닦을 것이니, 모든 선한 행위를 다 닦지는 못할지라도 하나의 선한 행위는 충분히 행할 수 있다. 하나의 선한 행위를 행하면 하나의 경사를 얻게 된다. 하나의 경사가 집안에서 일어나면 만 가지 경사가 나라에서 일어날 것이다. 저 오계와 십선은 가르침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수준의 것으로서 본래 근기가 가장 낮은 이를 위하여 시설한 것이다. 그러나 진실로 이를 행하면 스스로 성실하게 되고 남에게 이익을 준다. 하물며 사제, 십이인연이겠는가? 하물며 육도이겠는가?

유교는 오상五常14)으로써 도의 요체를 삼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가 곧 유교에서

007_0217_b_01L去情顯性猶雲開而現大淸也情有薄
007_0217_b_02L者焉有厚者焉猶雲有淡者焉有濃
007_0217_b_03L者焉 [6] 有濃淡之異而掩天光則一也
007_0217_b_04L情有厚薄之殊而礙性明則同也雲起
007_0217_b_05L日月收照而天下暗然也雲開也
007_0217_b_06L光被大千而宇宙廓如也佛敎比之
007_0217_b_07L若淸風之掃浮雲也欲所見之廓如
007_0217_b_08L厭淸風者惑矣欲自他之淸泰而厭吾
007_0217_b_09L道者失矣若敎人人依此而修之
007_0217_b_10L心可得而正矣身可得而修矣6)可以 [7]
007_0217_b_11L齊家可以治國可以平天7)下矣機之
007_0217_b_12L利者可以爲 [8] 菩薩可以爲聲聞可以
007_0217_b_13L8)緣覺機之劣者可以9) [9] 可以
007_0217_b_14L成善人矣苟如是10)而世不治未之有
007_0217_b_15L [10] 厭罪報則應斷諸惡11)惡雖
007_0217_b_16L不斷盡而足以去 [11] 一惡矣12) [12] 一惡則
007_0217_b_17L息一刑13)一刑息於家萬刑息於 [13] 國矣
007_0217_b_18L忻福緣則應修諸善14)諸善雖未盡修
007_0217_b_19L而足以 [14] 一善矣行一善則得一慶
007_0217_b_20L慶興於家萬慶興於國矣夫五戒十善
007_0217_b_21L敎中之最淺者也本爲機之最下者而
007_0217_b_22L設也苟能行之則足以誠於身利於人
007_0217_b_23L况於諦緣乎况於六度乎儒以五
007_0217_b_24L常而爲道樞佛之所謂15) [15] 即儒之

007_0217_c_01L말하는 오상이다. 죽이지 않음은 인仁이다. 훔치지 않음은 의義이다. 음란하지 않음은 예禮이다. 술 마시지 않음은 지智이다. 헛된 말을 하지 않음은 신信이다.15) 그러나 유교가 사람을 가르치는 수단은 덕행德行으로써 하지 않고 행정적인 명령이나 형벌로 한다. 그러므로 “행정적인 명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이를 면하고자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른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움도 있게 되고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16)라고 말한다. 덕으로써 이끌고 예로써 다스리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침묵하되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게 되는 것은 덕행에 달려 있다.”17)라고 말한다. 행정적인 명령으로써 이끌고 형벌로써 다스리면 상과 벌이 있게 되는 것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과 벌은 나라의 크게 중요한 도구이다.”18)라고 말한다. ‘침묵하되 이루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게 되는 것’은 진실로 우리 부처님의 교화이다. 그런데 겸하여 인과因果를 보여 준다. 상벌만 보여 주면 겉으로만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007_0217_c_01L所謂五常也不殺仁也不盜義也
007_0217_c_02L禮也不飮酒智也16) [16] 信也
007_0217_c_03L但儒之所以敎人者不以德行即以政
007_0217_c_04L刑也故云導之以政齊之以刑民免
007_0217_c_05L而無耻導之以德齊之以禮有耻且
007_0217_c_06L夫導之以德齊之以禮非聖人不能
007_0217_c_07L故云默而成之不言而信存乎德行
007_0217_c_08L導之以政齊之以刑則未免有賞罰
007_0217_c_09L故云賞罰國之大柄也夫默而成之
007_0217_c_10L言而信固吾佛之化也而兼以因果示
007_0217_c_11L示之以賞罰則或不17)過面從而已
007_0217_c_12L{底}嘉靖五年全羅道光陽地白雲山招川寺刊本
007_0217_c_13L(東國大學校所藏) {甲}嘉靖十六年全羅道興德
007_0217_c_14L逍遙山緣起寺重刊本(澗松美術博物館所藏
007_0217_c_15L附東吳沙門隱夫顯正論) {乙}嘉靖二十三年黃海
007_0217_c_16L道兎山土鶴鳳山石頭寺刊本(高麗大學校所藏)
007_0217_c_17L{丙}刊年未詳本(國立圖書館所藏) {丁}五臺山上
007_0217_c_18L院寺刊鉛印本「顯」上有「涵虛堂得通和尙」七
007_0217_c_19L字編者除之自「顯正」至「焉雲(中段三行)」甲
007_0217_c_20L本作筆寫
撰者名依涵虛得通和尙行狀補
007_0217_c_21L入{編}
「象」作「像」{乙}「淨」作「五」{乙}
007_0217_c_22L「垢」下有「也」{甲}{乙}「可以」二字筆寫{乙}
007_0217_c_23L「下矣…以爲」九字筆寫{乙}「緣覺…以生」
007_0217_c_24L九字筆寫{乙}
「生」作「成諸」{乙}「而世…也
007_0217_c_25L何」九字筆寫{乙}
「惡雖…以去」九字筆寫{乙}
007_0217_c_26L「去」作「未」{乙}「一刑…息於」九字筆寫{乙}
007_0217_c_27L「諸善…足以」九字筆寫{乙}「正」作「五」{甲}
007_0217_c_28L{乙}{丁}
「妄」字形似「妾」{底}{甲}「過面…因
007_0217_c_29L果」十字筆寫{乙}

007_0218_a_01L인과를 보여 줄 경우 복종하면 곧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 그러함을 볼 수 있다. 왜 그러한가? 만일 상으로써 권하고 벌로써 금한다면, 악행을 그치는 이는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치는 것이고, 선행을 하는 이는 그 상을 이롭게 여겨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교화에 따르는 것은 겉으로만 따르는 것이지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현재의 곤궁하고 영달한 까닭을 알고 싶어 할 때 전생에 뿌린 업業의 씨앗을 보여 주고, 미래의 화와 복을 알고 싶어 할 때 현재의 원인을 보여 준다면, 영달한 이는 과거에 선의 씨앗을 심은 것을 기뻐하면서 더욱 근면해질 것이고, 곤궁한 이는 과거에 닦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스스로 노력할 것이다. 또한 미래에 복 받기를 바라는 이는 부지런히 선을 행할 것이고, 미래에 화 피하기를 바라는 이는 악행을 삼갈 것이다. 이는 복종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만일 복종한다면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는 것이어서 겉으로만 따르는 경우는 결코 없다. 그렇지만 어찌 사람마다 모두 마음으로 복종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에게는 짐짓 상과 벌로써 이끌어 점점 마음으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게 한다. 그러므로 인과를 보여 주는 것 밖에 또한 상과 벌의 가르침이 있다. 이른바 마땅히 거두어들일 만한 이는 거두어들이고, 마땅히 꺾어 굴복시켜야 할 이는 꺾어 굴복시킨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는 유교에 가까우니, 이 때문에 유교와 불교는 모두 없애서는 안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려고 하면서 그 가르침을 임금에게 맡기고 신하에게 맡긴 것은 모두 그 도로써 천하를 이끌어 세상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되고자 하였기 때문이고, 모두 함께 진리를 닦는 길을 밟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속에 남아 있는 이나 출가한 이를 막론하고 오직 사람들이 도의 작용에 어긋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니, 반드시 머리를 깎고 옷을 다르게 입은 연후에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방편에 따라 얽매임을 푸는 것을 임시로 삼매三昧라 부른다.”19)라고 하였으며, 또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부를 정해진 법이 없다.”20)라고 하였다. 부처님의 마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조그맣게 통하겠는가?

007_0218_a_01L示之以因果 [17] 則服乃心服也今於世
007_0218_a_02L1)2) [18] 其然也何則3) [19] [20] 之以賞
007_0218_a_03L禁之以罰則止4)惡者畏其威而止之
007_0218_a_04L爲善 [21] 利其賞而爲之故其從化也
007_0218_a_05L面從而已非心服也若人欲知今之所
007_0218_a_06L以窮達者則示之以宿種欲知後之禍
007_0218_a_07L福者則示之以現因則達者忻前世之
007_0218_a_08L種善而益勤窮者悔前世之不修而自
007_0218_a_09L且邀福於後世者則孜孜於爲善
007_0218_a_10L避禍於後世者則必愼於爲惡也此則
007_0218_a_11L不服則已服則心服而未嘗有面從者
007_0218_a_12L雖然安得使人人皆可以心服也
007_0218_a_13L其未能心服者則姑以賞罰而導之使
007_0218_a_14L駸駸然心悅而誠服也故示之以因果
007_0218_a_15L之外亦有賞罰之訓存焉所謂應攝受
007_0218_a_16L者而攝受之應折服者而折服之是也
007_0218_a_17L此則近於儒也所以儒與釋皆不可廢
007_0218_a_18L佛之將化也以其法付之君付之
007_0218_a_19L盖欲以其道導天下而爲治世之大
007_0218_a_20L而令共蹈乎修眞之路也吾佛之敎
007_0218_a_21L不論在家出家只要令人不違道用而
007_0218_a_22L不必剪其髮異其服然後爲也所以
007_0218_a_23L云隨方解縛假名三昧又云無有定法
007_0218_a_24L名阿耨菩提佛之心如此豈小通哉

007_0218_b_01L그러나 만일 참을 힘이 없는 이라면 티끌 (같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 더럽혀지지 않고, 세속에 있으면서 도를 이루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출가하라고 가르치며 멀리 떠나는 행위를 닦도록 하는 것이다.
질의응답質疑應答
1. 출가는 불효이다
유학자가 말하였다.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고 여자에게는 남편이 있어서 가업을 잇고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하면 효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승려들은 혼인하는 풍속을 끊고 인륜을 없애어 멀리 산속으로 들어가 영원히 후사後嗣를 끊으니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저녁에는 부모님의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 드리며, 부모님의 얼굴색을 살펴서 어긋나지 않게 하며, 나갈 때에는 반드시 부모님께 알리고 들어와서는 반드시 뵈어야 한다. 지금 승려들은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마음대로 출가하고, 한번 출가하면 죽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부모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지 않고 돌아가신 뒤에는 성대하게 장례 지낼 것을 생각하지 않으니 어찌 불효가 아니겠는가?

한번 논해 보겠다. 경經21)과 권權22)은 도를 행하는 큰 요점이다. 경이 아니면 항상된 도리를 지킬 수 없고, 권이 아니면 변화에 응할 수 없다. 경으로써 항상된 도리를 지키고 권으로써 변화에 응한 뒤에야 도가 크게 온전함을 얻을 수 있어 어디에 가든 못 할 일이 없게 된다. 항상된 도리를 지킬 줄 모르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할 방법이 없고, 변화에 응할 줄 모르면 큰일을 이룰 방법이 없다.
사람이란 부모에 의탁하여 생명을 받고 임금의 나라에 깃들여 살아가니, 집에 들어가서는 효성스럽고 집을 나와서는 충성스러운 것은 진실로 신하와 자식 된 자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또 혼인과 제사 또한 인륜의 큰 법도이다. 혼인이 아니면 낳고 낳는 이치가 끊어지고 제사가 아니면 멀리까지 추모하는 법이 없어진다. 그러나 신하와 자식으로서 충과 효를 다하기란 어렵다. 더욱이 혼인하여 종신토록 올바름을 지키며, 제사를 모시면서 마음을 다하여 가지런히 하기란 더욱 어렵다. 충을 다하고 효를 다하여 착실하게 그 직책을 지키고, 올바름을 지키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종신토록 그치지 않은 뒤에야 살아서는 좋은 명성을 잃지 않고 죽어서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경으로써 항상된 도리를 지켜서 얻는 효과이다.

그러나 살아서 좋은 명성을 얻을 뿐 애욕을 끊는 일은 거의 드물며,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날 뿐 윤회를 면하기는 어렵다. 애愛는

007_0218_b_01L然若無忍力者則居塵不染在家成道
007_0218_b_02L難矣所以敎人出家令修遠離行也

007_0218_b_03L
儒之言曰男有室女有家以嗣家業
007_0218_b_04L不絕厥祀可謂孝矣今浮圖氏絶婚
007_0218_b_05L姻去人倫長往山林永絶後嗣豈可
007_0218_b_06L謂孝乎昏定晨省承顏順色出必告
007_0218_b_07L反必面今浮圖氏不告父母自許出
007_0218_b_08L一自出家終身不返生不奉甘旨
007_0218_b_09L死不計厚葬豈非不孝乎

007_0218_b_10L
試嘗論之曰經權爲道之大要也非經
007_0218_b_11L無以守常非權無以應變經以守常
007_0218_b_12L權以應變然後得夫道之大全而無所
007_0218_b_13L徃而不可也不知守常無以正人心
007_0218_b_14L不知應變無以成大事夫人也托父
007_0218_b_15L母而受生寄君國以得存入孝出忠
007_0218_b_16L固臣子之所當爲也又婚姻祭祀亦人
007_0218_b_17L倫之大經也非婚生生之理絕非祀
007_0218_b_18L退遠之法廢然爲臣子而盡忠孝者難
007_0218_b_19L婚姻而終身守正奉祀而盡心5)
007_0218_b_20L齊者又其難 [22] 盡忠盡孝而謹守其
007_0218_b_21L守正致齊而終身不輟然後生不
007_0218_b_22L失善名死得生人道此經以守常之效
007_0218_b_23L然生得善名而已斷愛欲者幾希
007_0218_b_24L死生人道而已免輪廻者難矣愛爲輪

007_0218_c_01L윤회의 근본이며, 욕欲은 생을 받는 인연이다. 사람이 이미 아내와 자식이라는 굴레를 면하지 못하였는데 애욕을 끊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애욕을 아직 끊지 못하였는데 윤회를 면할 수 있겠는가? 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먼저 애욕을 끊어야 하며, 애욕을 끊고자 한다면 먼저 아내와 자식을 떠나야 하고, 아내와 자식을 떠나고자 한다면 반드시 세속을 떠나야 한다. 세속을 떠나지도 않고 아내와 자식을 떠나지도 않으면서 애욕을 끊어 윤회를 면하는 것은, 큰 성인께서 자비를 내려 임시적인 수단으로써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제외하고, 용렬한 범부 속인으로서 가능하겠는가? 이와 같은 이는 무한히 오랜 세월 동안에도 만나기 어려우며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에도 얻기 어렵다. 애욕과 그 대상이란 자석과 쇠가 서로 짝하는 것과 비슷하여 참을 힘이 없는 자가 세속에 머물면 면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본사이신 석존께서는 도솔천에 머무르실 때에는 호명보살護明菩薩이라 불렸고, 왕궁으로 내려와 태어나서는 실달悉達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분이 어찌 참는 힘이 없는 분이겠는가? “빛나는 해가 그 멀리 비추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상계上界23)의 무리가 인연을 없앤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였다.”24)라고 할 만하다.
비록 애욕의 대상들 속에 들어갔더라도 애욕의 대상들에 물들지 않았다. 후세에 모범을 내려 주시고자 금륜왕의 적자의 신분으로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떠나 설산에 들어가서, 목숨을 가벼이 여기고 괴로움을 기꺼이 참아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에 쌓인 번뇌가 다 없어지고 참된 밝음이 환하게 드러나기를 기다린 뒤,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뵙고 하늘에 올라 어머니를 찾아가 법요를 설하여 모두 해탈하게 하였다. 이것이 성인이 권으로써 변화에 응하고, 항상된 도리를 거스름으로써 오히려 도에 합하는 수단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밝은 지혜25)와 여섯 가지 신통력26)을 모두 갖추고 네 가지 지혜27)와 여덟 가지 해탈28)을 원만히 갖추어, 그 덕이 후대의 온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퍼져서, 후대의 온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의 부모를 큰 성인의

007_0218_c_01L廻之本欲爲受生之緣夫人者旣未
007_0218_c_02L免妻子之累愛欲其可斷乎苟未斷於
007_0218_c_03L愛欲則輪回其可免乎欲免輪回
007_0218_c_04L斷愛欲欲斷愛欲先去妻子欲去妻
007_0218_c_05L須出塵寰不出塵寰不去妻子
007_0218_c_06L愛欲免輪回大聖垂慈大權示迹之外
007_0218_c_07L庸人凡俗其可得乎夫如是者億億
007_0218_c_08L世而難遇萬萬人而難得夫愛緣
007_0218_c_09L6) [23] 石與鐵偶相似無忍力者居塵世
007_0218_c_10L而難免如本師釋尊居兜7) [24] 而稱爲
007_0218_c_11L護明菩薩降王宮而名曰悉達此豈無
007_0218_c_12L忍力者哉可謂玄 [1] 曦慚其照遠上界恧
007_0218_c_13L以緣銷 [2] 者也雖渉愛緣應不爲愛緣所
007_0218_c_14L染也將欲爲後世垂範以金輪之嫡子
007_0218_c_15L不告父母而辭入雪山輕生苦節安忍
007_0218_c_16L不動待其情累蕩盡眞明朗發然後
007_0218_c_17L返鄕而覲父登天而訪母爲說法要
007_0218_c_18L皆令度脫此聖人之所以權以應變而
007_0218_c_19L反常合道者也且佛者三明六通而悉
007_0218_c_20L四智八解而圓具其德播天下後世
007_0218_c_21L而使天下後世稱其父母曰大聖人之
007_0218_c_22L「上目…若勸」十字筆寫{乙}「覩」作「睍」
007_0218_c_23L{乙}
「若」作「夫」{乙}「惡者…爲善」十字
007_0218_c_24L寫{乙}
「致齊…其難」六字作來註{甲}「礠」
007_0218_c_25L作「磁」{丁}
「率」作「卒」{乙}{丙}

007_0219_a_01L부모라고 칭송하게 하고, 부처님의 성姓으로 모든 성을 지닌 자들의 성을 삼게 하여29) 출가한 자들로 하여금 모두 석가의 아들이라 하게 하니, 이 어찌 큰 효가 아니겠는가? 공자께서 말하지 않았는가,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여 후세까지 이름을 드날리어 부모를 드러냄이 효의 마지막이다.”30)라고! 그 도로써 후대의 온 세상 사람들까지 이끌어, 후대의 온 세상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듣고 그 교화를 느끼게 하여 근기가 크고 작음에 따라 가르침을 내려 해탈케 하니, 이 어찌 커다란 자비라 하지 않겠는가? 공자께서 말하지 않았는가, “하루만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도 온 세상이 인으로 돌아간다.”31)라고!
2. 출가는 불충이다
묻겠다.32)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마땅히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정성을 기울여 나라를 도와야 한다. 지금 승려들은 천자에게 조회하지 않고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으며, 높이 머물고 멀리 떠나 일이 이루어지고 어그러짐을 앉아서 보기만 하니 어찌 충성스럽다 할 수 있겠는가?

답하겠다.33)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군주가 될 이가 먼저 계율을 받아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난 뒤에 비로소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며, 모든 출가자가 아침저녁으로 향 피우고 등불을 밝혀 군주를 위해 축원하고 나라를 위해 축원하게 하니 충성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군주가 벼슬과 녹봉으로써 선한 행위를 권하고 형벌로써 악한 행위를 금하는 외에, 우리 부처님께서 “선한 행위를 하면 경사를 부르고 악한 행위를 하면 재앙을 부른다.”라는 것을 보이니, 이를 듣는 사람은 자연히 악한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착한 뜻을 낸다. 이렇듯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벼슬과 상으로 권하는 것이나 형벌로써 위압하는 것을 빌리지 않고서도 사람들이 쓸리듯 교화를 좇게 하니 어찌 군주와 나라에 도움 됨이 없겠는가?

3. 육식을 금하는 것과 불살생은 불효이며 예가 아니다
묻겠다. 사람이 (동)물을 먹고, 동물이 사람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은 본디 자연스러운 것이며, 일흔 살이 된 사람은 고기가 아니면 배부를 수 없으므로34) 노인을 봉양하는 이는 이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또 봄 사냥, 여름 사냥, 가을 사냥, 겨울 사냥은 선왕先王35)이 백성을 위하여 해로움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때에 맞추어 법도를 세운 것이니 바꿀 수 없다. 또 희생은 예부터 지금까지 제사를 모시는 예물이므로 더욱

007_0219_a_01L父母以其姓姓一切姓使出家者
007_0219_a_02L稱之曰釋子豈不謂之大孝乎孔不云
007_0219_a_03L立身行道揚名於後世以現父母
007_0219_a_04L孝之終也以其道導天下後世而使
007_0219_a_05L天下後世聞其風感其化隨其機之
007_0219_a_06L大小禀其法而得度豈不謂之大慈
007_0219_a_07L孔不云乎一日克己復禮天下歸
007_0219_a_08L

007_0219_a_09L
曰人生斯世當盡忠於君傾誠輔國
007_0219_a_10L今浮圖氏不朝天子不事王侯高棲
007_0219_a_11L遐擧坐觀成敗豈可謂忠乎

007_0219_a_12L
曰敎中使爲君者先受戒品潔淨身意
007_0219_a_13L然後方登寶位又令凡出家者莫不
007_0219_a_14L朝焚夕點而祝君祝國可不謂之忠乎
007_0219_a_15L且君者爵祿以勸善刑罰以禁惡之外
007_0219_a_16L吾佛示之以爲善招慶爲惡招殃人之
007_0219_a_17L聞者自然收其惡心發其善意吾佛
007_0219_a_18L之敎不假爵賞之勸刑罰之威令人
007_0219_a_19L靡然趨化豈無輔於君國乎

007_0219_a_20L
曰人食物物給人固其自然也而七十
007_0219_a_21L非肉不飽故養老者不可不以此供
007_0219_a_22L又春蒐夏苗秋獮冬狩乃先王之所
007_0219_a_23L以爲民除害順時立法不可易也
007_0219_a_24L犧牲從古于今奉祀之禮物尤不可

007_0219_b_01L없앨 수 없다. 지금 승려들은 부모가 늙어서 먹는 것이 입에 달지 않은데도 고기를 올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선왕의 제도와 희생의 예법을 없애라고 가르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답하겠다. 하늘이 내린 동물을 포악하게 없애는 것은 성인이 더불어 하지 않는 바이다. 하물며 하늘의 도리는 지극히 어지니,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죽여서 자기의 목숨을 기르게 하겠는가? 『서경』에서는 “천지는 만물의 부모이며, 사람은 만물 가운데 영장이다. 진실로 총명한 자가 우두머리가 되고, 우두머리가 백성의 부모가 된다.”36)라고 하였다. 천지가 이미 만물의 부모라면 천지 사이에 태어난 자는 모두 천지의 자식이다. 천지와 만물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으며, 자식 가운데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람과 만물에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비록 어리석고 못났을지라도 사랑하고 가엾이 여겨 오히려 잘 기르지 못할까 걱정하거늘 하물며 해치겠는가? 생명을 죽여서 자기의 목숨을 기르는 것은 같은 식구를 죽여서 자기를 기르는 것이다. 같은 식구를 죽여서 자기를 기르면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자식들끼리 서로 죽이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 아니다. 사람과 만물이 서로 죽이는 것이 어찌 천지의 뜻이겠는가? 사람과 만물이 이미 천지의 기氣를 함께 얻고 또한 천지의 이理를 함께 얻어서 함께 천지 사이에 살고 있다. 이미 하나의 기, 하나의 이를 부여받았는데 어찌 남을 죽여서 자기의 목숨을 기르는 이치가 있겠는가?

예컨대 “천지는 나와 뿌리가 같고 만물은 나와 한 몸이다.”37)라는 말은 불교에서 하는 말이고, “인仁이란 천지와 만물을 자기와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38)라는 말은 유교에서 하는 말이다. 행하는 바가 그 말과 같은 뒤에야 비로소 인의 도를 다할 수 있다.
의서醫書에서는 ‘손발이 마비되는 것을 불인不仁’39)이라 한다. 손발은 한 몸의 작은 부분이다. 비록 작은 부분이라도 병이 들면 기가 통하지 않는다. 인이란 천지 만물과 융합해서 한 몸이 되어 사이가 없음을 말한다. 이 이치를 깊이 체득한 이라면 비록 하찮은 사물이라도 해를 입히는 일이 없어야 인한 사람의 도를 얻었다 할 수 있다. 아주鵝珠비구와 초계草繫비구40)가 그런 사람이다. 이와 같지 않으면 사람과 사물 사이에 기가 끊겨서 온화하지 않게 되고, 이치가 막혀서 통하지 않게 되니 손발이 마비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의서에서 말한 것이 ‘인’을 잘 표현하였다 하겠다
『시경』에서는 “한 번 쏘아 돼지 다섯 마리를 맞힌다.”41) 하고, 『논어』에서는 “낚시는 하여도 그물은 쓰지 않고 화살을 쏘아도 잠든 새는 맞히지 않는다.”42) 하였으며, 『맹자』에서는 “그러므로 군자는 주방을 멀리하며 그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한다.”43)라고 하고, 또 “촘촘한 그물을 못에 들여놓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가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많게 된다.”44)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인을 행하되 아직 그 도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상의 말들은) 어찌하여 ‘(인이란 천지 만물을)

007_0219_b_01L廢也今浮圖親老而食不甘不供之
007_0219_b_02L以肉敎人亦廢先王之制犧牲之禮
007_0219_b_03L豈非過歟

007_0219_b_04L
曰暴殄天物聖人之所不與也况天道
007_0219_b_05L至仁豈令人殺生以養生哉書云惟天
007_0219_b_06L萬物父母惟人萬物之靈亶聦明
007_0219_b_07L作元后元后作民父母天地旣爲萬
007_0219_b_08L物之父母則生乎天地之間者皆天地
007_0219_b_09L之息也天地之於物也猶父母之於子
007_0219_b_10L子有愚智之殊猶人與萬物之有明
007_0219_b_11L昧也父母之於子也雖愚不肖亦愛
007_0219_b_12L而愍之猶恐不得其養焉况其如害乎
007_0219_b_13L殺生養生如殺同息以自養也殺同息
007_0219_b_14L以自養則於父母之心爲如何哉子之
007_0219_b_15L相殺非父母之心也人物之相殘
007_0219_b_16L天地之意乎人與萬物旣同得天地之
007_0219_b_17L又同得天地之理而同生於天地之
007_0219_b_18L旣一氣一理之所賦焉有殺生養生
007_0219_b_19L之理哉如云天地與我同根萬物與我
007_0219_b_20L一體此釋氏之言也仁者以天地萬物
007_0219_b_21L爲一己此儒者之言也爲行一如其言
007_0219_b_22L然後方盡仁之道矣醫書以手足痿痺
007_0219_b_23L爲不仁蓋手足一身之微者也雖微
007_0219_b_24L病焉則氣不通矣仁也者天地萬物

007_0219_c_01L자기와 하나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가? 『중용』에서는 “말은 행위를 돌아보고 행위는 말을 돌아보니 군자가 어찌 근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45)라고 하였는데 이제 어찌 여기에 이르렀는가? 이것이 바로 유교인들이 인의 도는 잘 논하였지만 선을 다하지는 못하는 까닭이다. 이미 적게 죽이기를 바라면서 어찌 반드시 화살을 쏘고, 이미 그 잠자는 것을 불쌍히 여기면서 어찌 잠자지 않는 것을 맞히며, 이미 푸줏간을 멀리하면서 어찌 반드시 고기를 먹고, 이미 작은 것을 해치는 것을 불쌍히 여기면서 어찌 반드시 큰 것을 해치는가?

부처님께서는 큰 계율(大戒)에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맨 앞에 두셨으며, 또한 『자심인연불식육경慈心因緣不食肉經』에서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고기를 먹는 이는 자비를 행하는 것이 가득 차지 못하므로 항상 목숨이 짧고 병이 많은 몸을 받으며, 어지럽게 나고 죽는 윤회에 빠져 부처가 되지 못할 것이다.”46)라고 하였다. 또한 불교의 가르침 가운데 항상 물 거르는 주머니(漉囊)47)를 가지고 다니게 하는 까닭은 미물의 목숨이라도 해칠까 두려워해서이다. 옛날에 두 비구가 같이 부처님을 뵙고자 하여 광야를 지나가다가 목이 말랐는데, 벌레가 들어 있는 물을 만났다. 한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을 뵐 수만 있으면 되니 마신들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물을 마셨다. 다른 사람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산목숨 죽이는 것을 경계하셨는데, 만일 부처님의 계율을 부순다면 부처님을 뵌들

007_0219_c_01L爲一體而無所間然之謂也深體此理
007_0219_c_02L則雖微物未嘗有所加害也可謂
007_0219_c_03L得仁人之道矣如鵝珠草繫蓋其人矣
007_0219_c_04L不如是則人與物氣▼(亻+㐱) [3] 而不旼理礙而
007_0219_c_05L不通如手足之痱也醫書所云可謂善
007_0219_c_06L狀其仁矣詩云一發五豝論語云釣而
007_0219_c_07L1) [25] 弋不射宿孟子云君子遠庖厨
007_0219_c_08L聞其聲不忍食其肉又云數罟不
007_0219_c_09L入汚池魚鼈不可勝食此皆爲仁而未
007_0219_c_10L盡其道也何不2) [26] 於一己之言乎
007_0219_c_11L庸云言顧行行顧言君子胡不慥慥尒
007_0219_c_12L今何至此乎此儒者之所以善論爲仁
007_0219_c_13L之道而未盡善也旣要殺少何必發矢
007_0219_c_14L旣憐其宿何射不宿旣遠庖厨何必
007_0219_c_15L食肉小旣傷殘何須害大佛於大戒
007_0219_c_16L以不殺居先又慈心因緣不食肉經云
007_0219_c_17L如佛所說食肉者此人行慈不滿足
007_0219_c_18L受短命多病身迷沒生死不成佛又敎
007_0219_c_19L中所以敎持3) [27] 囊者恐傷微命也
007_0219_c_20L有二比丘同欲見佛行於曠野渴遇
007_0219_c_21L蟲水一人云但得見佛飮之何罪
007_0219_c_22L一人云佛戒殺生若破佛戒見佛
007_0219_c_23L「綱」作「網」{丁}「喫」作「契」{甲}{丁}「摝」
007_0219_c_24L作「漉」{丁}

007_0220_a_01L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고는 목마름을 참고 마시지 않았는데, 죽어서 천상에 올라가 먼저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의 찬탄을 받았다.48) 이는 어진 사람의 참된 말, 실다운 행위로서 ‘자기와 하나로 한다’는 말과 ‘근신한다’는 가르침에 은근히 들어맞는다.

내가 출가하기 전에 해월海月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나에게서 『논어』를 배웠다.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는 것은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힘들어하였다.”라는 구절의 주석에서 “인仁이란 천지 만물을 자기와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라는 말에 이르러 책을 치워 놓고 나에게 물었다.
“맹자는 인한 사람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닭ㆍ돼지ㆍ개ㆍ새끼돼지는 만물인가?”
“그렇다.”
“ ‘인이란 천지 만물을 자기와 하나로 여기는 것이다.’라는 이 말은 참으로 이치에 맞는 말이다. 맹자가 진실로 인한 사람이고 닭ㆍ돼지ㆍ개ㆍ새끼돼지가 만물이라면, 어찌하여 ‘닭ㆍ돼지ㆍ개ㆍ새끼돼지를 기르며 (번식시킬) 알맞은 때를 놓치지 아니하면 나이 일흔 된 이도 고기를 먹을 수 있다.’49)고 말하는 것인가?”
나는 이에 말이 궁해져서 답하지 못하였다. 여러 경전을 살펴보았으나 산목숨을 죽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이론은 없었고, 선배 유학자들에게 널리 물어보았으나 시원하게 의심을 풀어 주는 이도 없어서, 늘 이 의심을 품은 채 오래도록 풀지 못하였다. 병자년 무렵에 삼각산에 놀러 갔다가 승가사僧伽寺에 이르러 한 늙은 선사와 밤에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하던 차에 선사가 말하기를 “불교에는 열 가지 중요한 계율이 있는데 맨 처음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이에 얼음이 풀리듯 마음으로 받아들여 스스로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인한 사람의 행위이며 인의 도를 깊이 체득한 이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유교와 불교의 사이를 다시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에 시를 지었다.

素聞經史程朱毁  본디 유교 경전과 역사서, 정주학程朱學50)에서 비판하는 것을 듣고
未識浮圖是與非  불교가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한 채
反復潜思年已遠  반복하여 가만히 생각하기 이미 오래되었는데
始知眞實却歸依  이제 비로소 진실을 알고 귀의하네

(나무에) 둥지를 짓고 사는 것들은 바람이 불 것을 알고, (땅에) 구멍을 파고 사는 것들은 비가 올 줄을 안다. 거미는 거미줄 치는 솜씨가 있으며, 쇠똥구리는 쇠똥을 동그랗게 굴리는 능력이 있다. 사물이 모두 이와 같아서 함께 영명함을 받았으니,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에 이르기까지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바야흐로 쓱쓱 칼을 놀리매

007_0220_a_01L何益忍渴不飮死生天上先見於佛
007_0220_a_02L得佛讃嘆此乃仁人之眞語實行而冥
007_0220_a_03L相契於一己之言慥慥之訓也余未出
007_0220_a_04L有釋曰海月者讀論語於予1) [28]
007_0220_a_05L施濟衆堯舜其猶病諸註云仁者
007_0220_a_06L天地萬物爲一己之言置卷而問予曰
007_0220_a_07L孟子仁者乎曰然雞豚狗彘萬物乎
007_0220_a_08L曰然曰仁者以天地萬物爲一己此眞
007_0220_a_09L稱理之談也孟子苟爲仁者而雞豚狗
007_0220_a_10L又爲萬物則何以云雞豚狗彘之畜
007_0220_a_11L無失其時七十者可以食肉乎予於是
007_0220_a_12L辭窮而未能答考諸經傳而無有殺生
007_0220_a_13L稱理之論2) [29] 問先知而無有釋然決
007_0220_a_14L疑之者常藴此疑久未能決越丙子
007_0220_a_15L許游三角山到僧伽寺與一老禪夜話
007_0220_a_16L話次禪云佛有十重大戒一不殺生
007_0220_a_17L予於是釋然心服而自謂此眞仁人之
007_0220_a_18L行也而深體乎仁道之語也從此不疑
007_0220_a_19L於儒釋之3) [30] 而遂有詩云4) [31] 聞經史
007_0220_a_20L程朱毁5) [32] 識浮圖是與非反復潜思年
007_0220_a_21L已遠始知眞實却歸依夫巢知風穴知
007_0220_a_22L蜘蛛有布網之巧蜣蜋有轉圜之能
007_0220_a_23L物皆如是同禀靈明至於好生惡殺之
007_0220_a_24L亦何嘗異於人哉方其砉然奏刀

007_0220_b_01L두려워하며, 죽으러 갈 때 흘깃흘깃 바라보고 소리 내어 우는 것이 어찌 원한을 품은 마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마는 사람이 스스로 모를 뿐이다. 이 때문에 사람과 사물이 서로 업을 지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서로 되갚으며 쉼이 없으니, 어찌 어진 이로서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맛을 즐기는 것과 저들의 고통을 비교해 보면 괴로움과 즐거움이 뚜렷하며 가벼움과 무거움을 헤아릴 수 있다. 행위에 대한 과보라는 가르침이 망령된 것이라면 그 하는 대로 내버려 둘 것이지만, 만일 망령되지 않다면 미래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봄 사냥, 여름 사냥, 가을 사냥, 겨울 사냥이 비록 선왕이 정한 법제라 하여도, 지금 큰 산속이나 섬 가운데는 사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어서 사람과 사물이 각자 그 삶을 이루고 각자 그 자리를 편안히 여기며 타고난 목숨을 잘 마친다. 이로써 보자면 백성들이 왜 꼭 사냥으로 그 삶을 이루어야 하겠는가? 옛사람이 “빙 둘러싸지 말고 무리를 덮치지 말라.”51) 한 것은 죽이는 것이 옳지 않음을 알지만 일이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부득이한 일은 혹 맞더라도 반드시 이치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이미 이치에 맞지 않는다면 어찌 절대적인 법도일 수 있겠는가? 『주역』에서 말하기를 “옛날 사람은 총명하고 지혜롭고 빼어나게 씩씩하였으나 죽이지 않았다.”52)라고 하였다. 네 계절의 사냥이란 성인이 이에 의탁하여 빼어나게 씩씩함을 보이고 외적의 침입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죽이는 것을 본래의 의도로 삼았겠는가? 이것은 천하의 임시적인 수단일 따름이다. 이로써 보자면 사냥이란 형수가 빠졌을 때 손으로 건지는 것과 같은 것53)이니, 형수가 빠졌을 때 손으로 건지는 것은 잠시의 응용이지 어찌 사람의 항상되는 법도가 될 수 있겠는가?
제사에 바치는 희생에 대해 말하자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고기를 달게 여겼다면 죽고 난 다음에 그가 좋아하던 것으로 제사 지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는 끓는 물에 얼음을 더하는 것54)과 같아서 죄가 반드시 더해질 것이다. 옛날 양을 잡아서 그 아버지를 제사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007_0220_b_01L愬然就死之時盻盻然視唶唶然鳴
007_0220_b_02L豈非含怨結恨之情狀也而人自昧耳
007_0220_b_03L所以人與物相作而不覺相償而無休
007_0220_b_04L安有仁人見其如是而忍爲之哉以我
007_0220_b_05L之嗜味較彼之忍痛苦樂皎然而輕
007_0220_b_06L重可忖報應之說如其妄也則一任
007_0220_b_07L其作如其不妄來苦難當可不愼歟
007_0220_b_08L夫春蒐夏苗秋獮冬狩雖先王之法制
007_0220_b_09L今有大山之中海島之間畋所不及之
007_0220_b_10L人與物各遂其生各安其所而善終
007_0220_b_11L天年者以此觀之則夫民也何必因
007_0220_b_12L其獵而遂其生也古人敎以不合圍不
007_0220_b_13L掩群此知其殺之不可而事出乎不得
007_0220_b_14L已也大抵不得已底事或中而不必合
007_0220_b_15L理也旣不合理何以爲大經乎易云
007_0220_b_16L古之聦明睿智神武而不殺夫蓋四時
007_0220_b_17L之畋聖人托此示之以神武預防其外
007_0220_b_18L寇尒豈以殺爲心哉此乃爲天下者之
007_0220_b_19L大權者尒以此觀之則夫畋也正同
007_0220_b_20L嫂溺援之以手之義嫂溺手援暫時
007_0220_b_21L之用尒何以爲人6) [33] 之常法也至於
007_0220_b_22L犧牲則人居平日以肉爲甘旨則其
007_0220_b_23L死也以其所嗜祭之宜也然潑水添
007_0220_b_24L罪必加矣昔人有殺羊祭先其先

007_0220_c_01L꿈에 나타나 못 하게 하였다. 이는 그 징험이다. 이로 보건대 희생이 비록 성대한 예라고 할지라도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4. 술 마시지 않는 것은 예가 아니다
묻겠다. 술은 즐거움을 함께하는 약이다. 혈맥을 조화롭게 하여 풍랭風冷55)을 없앤다. 또 제사에서는 뿌려서 강신케 하니 없을 수 없다. 지금 승려들은 계율을 정해 금지하여 팔지도 못하게 하고 마시지도 못하게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답하겠다. 술은 정신을 어지럽히고 덕을 어그러뜨리는 근본이며, 더욱이 도에 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율전律典에서는 그 허물을 가리켜 36가지라 하였다. 유교 경전에서도 또한 그 잘못을 분명히 밝혀 말하기를 “안으로는 그 마음을 어둡게 하고 밖으로는 위의를 잃게 한다.”56)라고 하였다. 이 말은 술의 허물이 심하다는 것을 잘 밝혀 주고 있다. 안으로 마음을 어둡게 하므로 스스로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고, 밖으로 위의를 잃게 하므로 교화하는 도리를 방해한다. 자신과 남에게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재앙과 화를 불러들여 끝이 없다. 이 때문에 의적儀狄은 이를 바쳤다가 우임금에게서 멀어지게 되었고,57) 아라한은 이를 마셨다가 부처님께 꾸중을 들었다.58) 우임금이 의적을 멀리한 까닭과 부처님께서 아라한을 꾸짖으신 까닭이, 술의 해로움이 사람을 음란하고 황폐하고 미혹되고 어지럽게 하며 몸을 망치고 도를 어그러뜨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자리를 잃는 데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임이 어찌 아니겠는가?
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천지와 귀신을 섬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며칠 동안 재계齋戒한 뒤에 하루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있다. 재계란 냄새나는 것과 술을 먹지 않고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깨끗이 하는 것이다. 정성이 오롯하지 않아 깨끗함이 지극하지 않으면 귀신이 즐기지 않는다. 불교의 재계는 정성을 다하기로 한다면 오래도록 정성을 다하여

007_0220_c_01L托夢而禁之此其驗也迹此觀之
007_0220_c_02L犧牲雖曰盛禮亦廢之可也

007_0220_c_03L
曰酒所以合歡之藥也調和血脈以却
007_0220_c_04L風冷又於祭祀7) [34] 令降神不可無也
007_0220_c_05L今浮圖設戒以禁不酤不飮豈非過歟
007_0220_c_06L曰酒爲亂神敗德之本而尤害於道也
007_0220_c_07L故律中指其過曰三十有六8) [35] 傳亦明
007_0220_c_08L其失云內昏其心志外喪其威儀
007_0220_c_09L言善明爲過之甚也內昏其心志故
007_0220_c_10L妨其自修也外喪其威儀故妨其化道
007_0220_c_11L非惟無益於自他亦乃招殃禍於無
007_0220_c_12L窮也由是儀狄獻之而致踈於禹羅漢
007_0220_c_13L飮之而見呵於佛夫禹之所以踈儀狄
007_0220_c_14L佛之所以責羅漢者豈非以酒之爲害
007_0220_c_15L當使人婬荒迷亂至於滅身敗道亡國
007_0220_c_16L失位者乎禮將有事於天地鬼神必先
007_0220_c_17L數日齋然後行一日祭齋者不茹薰
007_0220_c_18L專誠而致潔也以誠不專潔不至
007_0220_c_19L則神不享矣佛之9) [36] 戒也誠則長誠
007_0220_c_20L「搏」作「愽」{甲}ㆍ作「博」{丁}「博」作「愽」{甲}
007_0220_c_21L{乙}{丙}{丁}
「問」作「間」{甲}{丙}{丁}ㆍ疑間字之失劃
007_0220_c_22L{編}
「素」涵虛語錄之乙本卷末收載「出家詩」
007_0220_c_23L作「但」{編}
「未」涵虛諸錄之乙本卷末收載「出
007_0220_c_24L家詩」作「不」{編}
「問」作「間」{甲}{乙}{丙}{丁}ㆍ間字
007_0220_c_25L之失劃
「洒」作「酒」{乙}{丁}「儒」作「侕」{甲}
007_0220_c_26L「齋」作「齊」{甲}次同

007_0221_a_01L잡스럽지 않은 것이요, 깨끗이 하기로 한다면 평생토록 하여 더럽혀지지 않는 것이다. 이를 며칠 동안의 재계와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보다도 더 멀다. 이미 재계가 이와 같음을 알았으니 어찌 반드시 며칠 동안만이겠는가? 며칠 외에 제사를 지내지 않을 때도 풀어져 느슨해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유교가 불교와 차이가 있는 것이다.

5. 재물을 보시하면 보응을 받는다는 주장은 재물을 탕진하게 한다
묻겠다. 재물은 사람이 의지해서 사는 것이니 마땅히 절도 있게 쓰고 저축하여 낭비하지 않으며, 자손에게 물려주어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하고, 후손이 궁핍하여 헐벗지 않게 해야 한다. 지금 승려들은 네 가지 백성59)의 밖으로 달아나 임금의 일을 자기의 일로 삼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거늘, 다시 보시의 보응으로써 사람들을 꾀어 사람들이 지닌 것을 모두 다 써서 부처님을 받들게 하여 끝내 배고프고 춥고 곤궁하고 헐벗은 처지에 이르게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닌가?

답하겠다. 재물이란 탐욕을 키워서 화를 당하게 하는 물건이고, 보시는 마음을 맑게 하여 복이 오게 하는 방도이다. 유교 경전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재물이 모이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들이 모인다.”60)라고! 부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시를 행하도록 권한 까닭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탐욕을 부수어 없애고 마음을 깨끗이 하게 하고자 한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가 항상 부족하게 하라고 비구들에게 훈계하였는데, 세 가지가 부족하다는 것은 옷과 음식과 잠이 모두 부족한 것이다. 이미 이로써 그 무리를 훈계하였으니 어찌 다른 사람에게서 옷이나 음식을 얻기 위하여 보시를 권하였겠는가? 만일 옷이나 음식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찌 오늘에까지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인과응보의 가르침을 살펴보자면, 이것이 어찌 유독 우리 불교에만 있는 것이겠는가? 『주역』에서도 말하기를 “선함을 쌓은 집안에는 경사가 있고, 악함을 쌓은 집안에는 재앙이 있다.”61)라고 하였으며, 『서경』의 「홍범洪範」 편에서도 “사람이 지극한 도에 합하면 하늘이 다섯 가지 복62)으로 이에 감응하고, 어긋나면 여섯 가지 흉한 일63)로 이에 감응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보응이 아닌가? 몸이 있을 때에는 그 보응이 이미 이와 같고, 죽고 나서는 몸은 비록 사라져도 정신은 존재하니 선하고 악한 행위에 대한 보응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부처님께서 말하기를 “설령 아득하게

007_0221_a_01L而無雜潔則終身而不汙若以數日比
007_0221_a_02L天地何遠旣知*齋之爲是何必數
007_0221_a_03L日而已哉數日之外無祭之時其可
007_0221_a_04L放緩乎1)儒之所以與佛有間者也

007_0221_a_05L>
曰珍財人之所賴以生當用之有節
007_0221_a_06L畜而不費以遺夫子孫令不墜其宗祀
007_0221_a_07L不見其窮露今浮圖逃於四民之外
007_0221_a_08L不事王事亦已足矣更誇人以布施報
007_0221_a_09L令人盡持奉佛而終至於飢寒窮露
007_0221_a_10L豈非過歟

007_0221_a_11L
曰珍財長貪取禍之具也布施淸心
007_0221_a_12L致福之方也*儒 [37] 傳豈不云乎財聚則
007_0221_a_13L民散財散則民聚佛之所以勸人行施
007_0221_a_14L非爲自利而然也只要令人破除
007_0221_a_15L慳貪以淨心田而已佛誡比丘三常
007_0221_a_16L不足三不足者衣食睡眠皆不足也
007_0221_a_17L旣以此誡其徒也豈爲衣食於人而勸
007_0221_a_18L之以施乎若以衣食爲心則佛之敎
007_0221_a_19L豈到今日至於報應之說則豈獨吾敎
007_0221_a_20L易云積善有餘慶積惡有餘殃
007_0221_a_21L如洪範人合乎皇極則天應之以五福
007_0221_a_22L違則應之以六2) [38] 此非報應歟形存
007_0221_a_23L而其應已然及其死也形雖謝而神存
007_0221_a_24L善惡之應豈不然乎佛之言曰假饒

007_0221_b_01L오랜 세월을 지나도 지은 업은 사라지지 않으며 인연이 만날 때에 자기가 다시 과보를 받는다.”라고 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을 속이는 말이겠는가?

6.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며 죽은 뒤에 과보를 받는다는 주장은 망령되다
묻겠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음으로 질質을 받고 양으로 기氣를 받으니 음과 양이 짝하여 혼백64)이 되고 형체를 이룬다. 죽을 때에는 혼은 올라가고 백은 내려가서 다 없어진다. 사람에게 지각이 있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마음이란 혼백이 합친 것으로 한 몸의 주인이다. 죽으면 기와 더불어 다 흩어져서, 어둑한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형체와 혼신이 없으니, 다시 누가 복을 받고 재앙을 받겠는가? 지금 승려들은 천당으로 기쁘게 하고 지옥으로 두렵게 하여 사람들을 현혹한다. 하늘은 푸르고 푸른 것으로 있는 것이라고는 해와 달과 별들뿐이며, 땅은 흙과 돌로서 싣고 있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만물일 뿐이다. 그런데도 없어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남아서 천당과 지옥을 경험한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망령되지 않겠는가?

답하겠다. 음양陰陽은 진실로 사람이 의지하여 태어나는 것이다. 음양이 합하여 태어나고 음양이 흩어지면 죽게 된다. 하지만 본디 있는 진명眞明의 경우는 몸을 따라 생겨나지도 않고 몸을 따라 사라지지도 않는다. 비록 천 번 변화하고 만 번 바뀔지라도 그대로 변화하지 않고 홀로 존재한다.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견실심堅實心65)과 육단심肉團心66)이다. 육단심은 혼백으로서 기가 정미精微한 것이고, 견실심은 진명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말하는 마음이란 진명을 말하는 것이지 육단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란 몸의 주인이며, 몸이란 마음의 심부름꾼이다. 선하고 악한 행위 등은 임금인 마음이 명령하여 신하인 몸이 지은 것이다. 보응에 관해 말하자면 살았을 때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받으며, 죽어서는 신하인 몸이 이미 사라졌으므로 임금인 마음 혼자 받는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상제上帝의 좌우에 있네.”67)라고 하였는데, 오르락내리락하는 이가 어찌 하늘에 있는 영혼이 아니겠는가?

옛날에

007_0221_b_01L百千劫所作業不亡因緣會遇時
007_0221_b_02L報還自受豈欺人哉

007_0221_b_03L
曰人之生也陰以禀其質陽以禀其氣
007_0221_b_04L一陰一陽配爲魂魄而成形及其死也
007_0221_b_05L魂昇魄降而就盡夫人之所以有知覺
007_0221_b_06L以其心也心也者魂魄之合而一身
007_0221_b_07L之主也其死也與氣俱散而更無有形
007_0221_b_08L神尙留於㝠漠之中誰更受福受殃
007_0221_b_09L浮圖忻之以天堂怖之以地獄令人致
007_0221_b_10L天是蒼蒼而所有者日月星辰而已
007_0221_b_11L地是土石而所載者人與萬物而已
007_0221_b_12L之不亡者存而感天堂地獄者豈非妄
007_0221_b_13L

007_0221_b_14L
曰陰陽固人之所賴以生者也陰陽合
007_0221_b_15L而受生陰陽散而就死若固有之眞明
007_0221_b_16L則不隨形生不隨形謝雖千變萬化
007_0221_b_17L湛然獨存也3) [39] 心有二曰堅實心
007_0221_b_18L肉團心肉團心者魂魄之精也堅實心
007_0221_b_19L眞明之謂也今所謂心者眞明也
007_0221_b_20L非肉團也夫心者身之主也形者
007_0221_b_21L之使也善惡等事心君命之形臣作之
007_0221_b_22L至於報應生則君臣等受死則形臣已
007_0221_b_23L而心君獨受詩云文王陟降在帝左
007_0221_b_24L陟降之者豈非在天之靈乎昔有秀

007_0221_c_01L왕회지王淮之라는 수재秀才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불법을 믿지 않았는데 하루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옛적에 육체와 혼신은 모두 없어진다고 나 스스로 말했는데, ‘육체는 사라져도 혼신은 남아 있다’는 불교의 말이 진실로 거짓이 아님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68)
또 송나라 사람 이원李源은 원택圓澤이라는 승려와 사귀며 ‘세세생생 서로 버리지 말자’고 약속하였다. 하루는 함께 노닐다가 물을 긷고 있는 어떤 부인을 원택이 보고는, “저 부인의 성은 왕씨인데 나는 그의 아들이 될 것이다. 12년 뒤에 항주杭州 천축사天竺寺 밖에서 반드시 그대를 만나 서로 사귄 의리를 밝히겠다.”라고 하였다. 그날 저녁에 정말로 원택이 죽었다.
12년이 지난 뒤 이원이 약속대로 그곳에 갔다가 갈홍천葛洪川 가에서 어떤 목동이 쇠뿔을 두드리며 이렇게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三生石上舊精魂  삼생석三生石 위에 옛 정혼精魂
賞月吟風不要論  달구경에 시 읊던 일 논할 것 없네
慚愧情人遠相訪  부끄럽게도 정든 이 멀리서 찾아 주니
此身雖異性長存  이 몸 달라져도 본성만은 오래도록 남아 있네

서로 만나서는 “이 공李公은 참으로 믿을 만한 선비입니다.”라고 말하고 또 이렇게 노래하였다.

身前身後事茫茫  이 몸 받기 전과 받은 뒤의 일 아득하여
欲話因緣恐斷膓  그 인연 말하려니 애가 끊길까 두렵네
吳越山川尋已徧  오월吳越의 산천은 이미 두루 보았으니
却回煙棹上瞿塘  안개 젖은 뱃머리 돌려 구당瞿塘으로 올라갈까69)

또한 양호羊祜는 이李씨의 아들이었고,70) 왕씨의 아들은 채蔡씨의 손자가 된 일까지도 있었다. 내가 일찍이 이 전기를 읽고 양씨와 이씨를 위하여 송을 지었다.

羊李只一人  양씨와 이씨 한 사람일 뿐이니
往復非異環  오고 가도 달라져 돌아옴이 아니네
誰知七歲子  누가 알았으리오, 일곱 살 난 아들
滅已五年還  죽은 지 5년 만에 다시 돌아올 줄을

또 왕씨와 채씨를 위하여 송을 지었다.

昔日王家子  옛적 왕씨 집안 아들
今爲蔡氏孫  오늘 채씨 집안 손자 되었네
不因一點墨  한 점의 먹 자국 아니었으면
同異議紛紜  같다 다르다 논의가 분분했으리

이러한 여러 가지 사례를 잘 살펴본다면 영명靈明71)이 몸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러니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정신이 모두 없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찌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천당과 지옥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는 실재로서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업에 따라 받는 것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꿈속에서 주공周公72)을 다시 뵙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73)라고 하였다.

007_0221_c_01L才曰王淮之4) [40] 不信佛法一日死
007_0221_c_02L而復蘇曰向者自謂形神俱滅今始知
007_0221_c_03L佛之所謂形謝而神存信不誣矣又宋
007_0221_c_04L人李源與僧圓澤交相約世世無相棄
007_0221_c_05L一日同遊澤見夫人之汲者曰此婦姓
007_0221_c_06L王氏吾當爲其子十二年後杭州天竺
007_0221_c_07L寺外須公相見以明交義至暮澤果死
007_0221_c_08L源果十二年赴其約聞葛洪川畔有牧
007_0221_c_09L童扣牛角而歌曰三生石上舊精魂
007_0221_c_10L月吟風不要論慚愧情人遠相訪此身
007_0221_c_11L雖異性長存及相見曰李公眞信士也
007_0221_c_12L而又歌曰身前身後事茫茫欲話因緣
007_0221_c_13L恐斷膓吳越山川尋已徧却回煙棹上
007_0221_c_14L瞿塘至如羊3) [41] 爲李氏之子王子爲
007_0221_c_15L蔡氏之孫余曾觀此傳爲羊李頌云
007_0221_c_16L李只一人往復非異環誰知七歲子
007_0221_c_17L已五年還爲王蔡頌云昔日王家子
007_0221_c_18L爲蔡氏孫不因一點墨同異議紛紜
007_0221_c_19L此數事則足知靈明之不隨形變也
007_0221_c_20L之人死而形神俱滅豈非昧乎至於天
007_0221_c_21L則非是實然固有乃人之業感自然
007_0221_c_22L如是也孔子嘗曰吾不復夢見周公久
007_0221_c_23L「儒」作「侕」甲次同「殛」作「▼(扌+亟)」{甲}{乙}{丙}ㆍ作
007_0221_c_24L「極」{丁}
「天」作「夫」{甲}{乙}{丁}「小」作「少」
007_0221_c_25L{甲}{丁}
「姑」作「祜」{丁}

007_0222_a_01L대개 꿈이라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 돌아다니는 것이지 몸이 시키는 것이 아니다. 공자께서 꿈에 주공을 만나 뵐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주공의 도를 마음에 두고 오로지 이를 행하였기 때문에 그 정신이 저절로 서로 감응하여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도 또한 그러하다. 날마다 선하고 악한 일을 오로지 행한다면, 선한 사람은 꿈에 영화를 누릴 것이고 악한 사람은 꿈에 욕됨을 당할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선한 사람은 부지런히 의로움만을 좇고, 악한 사람은 탐욕스럽게 오직 이익만을 구한다. 선한 사람은 오직 의로움만을 좇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마땅함에 들어맞고, 악한 사람은 오직 이익만을 구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마땅함에 어긋난다. 선한 사람은 일마다 마땅함에 들어맞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반드시 그를 선하게 여긴다. 악한 사람은 하는 일마다 마땅함에 어긋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악하게 여긴다. 선한 사람은 사람들이 그를 선하게 여기므로 저절로 윗사람에게까지 알려져 벼슬과 녹봉을 더하게 된다. 악한 사람은 사람들이 그를 악하게 여기므로 저절로 윗사람에게까지 알려져 형벌을 더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매우 기뻐하며 그 영화가 이르게 하려 하고, 악한 사람은 놀라며 그 재앙을 피하고자 꾀하게 된다. 선하고 악한 습성과 기뻐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정신에 쌓여 있으므로 꿈에서도 또한 영화를 누리고 욕됨을 당한다. 그 정신이 가서 오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내생來生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사람이 천당을 받고 악한 사람이 지옥을 받는 까닭이다.
천당과 지옥이 설령 없다고 해도 이에 대하여 들은 사람들은 천당을 좋아하여 선한 일로 나아가고, 지옥을 싫어하여 악한 일을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천당과 지옥의 가르침이 백성들을 교화하는 이익이 그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다. 과연 그것이 있다면 선한 사람은 반드시 천당으로 올라가고 악한 사람은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백성들이 이를 듣게 한다면 선한 사람은 스스로 힘써서 당연히 천궁天宮74)을 누릴 것이고, 악한 사람은 스스로 그쳐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면할 것이다. 그러니 왜 꼭 천당과 지옥의 가르침을 배척하여 망령되다 할 것인가?

7. 화장은 예가 아니다
묻겠다. 죽은 이를 보내는 일은 사람 사는 세상의 큰일이다. 그러므로

007_0222_a_01L蓋夢者人之神游非形之使然也
007_0222_a_02L夫子之所以夢與周公見者蓋平日心
007_0222_a_03L存周公之道專而行之故其精神自然
007_0222_a_04L相感而然也人亦如是日於善惡爲之
007_0222_a_05L旣專則善者夢見其榮惡者夢見其辱
007_0222_a_06L所以然者善者亹亹然惟義是從惡者
007_0222_a_07L恈恈然惟利是求善者惟義是從故
007_0222_a_08L事而適宜惡者惟利是求故事事而違
007_0222_a_09L善者事事而適宜故人必善之
007_0222_a_10L者事事而違義故人必惡之善者人善
007_0222_a_11L之故自達於上而加之以爵祿惡者
007_0222_a_12L人惡之故自達於上而加之以刑罰
007_0222_a_13L由是善者與與忻致其榮惡者錯愕謀
007_0222_a_14L避其殃善惡之習忻厭之情蘊在情
007_0222_a_15L神故其於夢也亦見榮見辱其神往
007_0222_a_16L而不返則便是來生此善者之所以感
007_0222_a_17L天堂惡者之所以感地獄者也天堂地
007_0222_a_18L設使無者人之聞者慕天堂而趨
007_0222_a_19L厭地獄而沮惡則天獄之說之於化
007_0222_a_20L利莫大焉果其有者善者必昇天
007_0222_a_21L惡者必陷地獄故使之聞之則善
007_0222_a_22L者自勉而當享天宮惡者自止而免入
007_0222_a_23L地獄何必斥於天獄之說而以爲妄耶

007_0222_a_24L
曰夫送死人間世之大事者也故丁父

007_0222_b_01L부모의 상을 당한 이는 이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성인이 성대하게 장사 지내고 오래도록 기리라는 가르침을 내린 것은 이 일이 중대함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성대하게 장사 지내게 하는 까닭은, 나무의 뿌리가 깊으면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열매가 많으며, 뿌리가 얕으면 가지와 잎이 꺾여서 열매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부모는 열매에게 나무와 같고, 부모에게 자식은 나무에게 열매와 같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전하는 것은 마치 나무가 열매에게 전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상을 당한 이는 모름지기 땅을 잘 골라 알맞은 곳을 얻고, 구덩이를 깊게 파서 두껍게 묻고, 숲을 무성하게 하여 물을 모아 두어, 음기가 깊어 기가 쌓이고 땅이 두꺼워 물이 스미지 않게 하여, 자손이 많아져서 제사가 끊이지 않게 해야 한다.
지금 승려들은 이러한 이치를 돌아보지 않고 망령되이 화장하는 법도를 세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후손이 없어 대를 끊게 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바야흐로 화장을 할 때, 자식 된 마음으로 그것을 차마 볼 수 있겠는가? 이로써 사람들을 미혹시키니 허물이 하늘까지 가득 찼다.

답하겠다. 사람에게는 몸이 있고 정신이 있다. 몸은 비유하자면 집과 같고 정신은 비유하자면 주인과 같다. 몸이 사라지면 정신이 떠나가는 것은 마치 집이 무너지면 주인이 머물지 못하는 것과 같다.
집이란 흙과 나무로 만들어 온갖 지저분한 것들로 꾸민 것이지만, 사람이 이를 자기 것이라 여겨 그 속에 빠져서 그 누추함을 알지 못한다. 비록 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더라도 깨끗이 잊을 수가 없어서 멀리 떠나지를 못한다.
몸이란 물과 흙으로 형체를 이루고 불과 바람으로 바탕을 이루어, 그 안에는 온갖 더러운 것을 싸고 있어 깨끗하지 못한 것이 흘러나오지만, 사람이 이를 보호하는 것이 금이나 옥보다 더 심하다. 그러니 어찌 일찍이 싫어하여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겠는가? 죽음에 이르매 불과 바람이 먼저 사라졌으나 흙과 물은 아직 남아 있다. 이 흙과 물은 전에 사랑하고 보호하던 것이기 때문에 갑자기 잊고 떠나가는 데 걸림이 없을 수가 없다. 이에 지혜로운 이가 그 흙과 물을 불태우고 정신이 가서 태어날 길을 가리키니,

007_0222_b_01L母之喪者不可不以爲重也聖人垂厚
007_0222_b_02L葬追遠之訓所以示其重也所以令
007_0222_b_03L厚葬者如木根深則枝葉扶踈而實多
007_0222_b_04L根淺則枝葉夭閼而無實夫父母之於
007_0222_b_05L子也如木之於實也子之於父母
007_0222_b_06L實之於木也故云父之傳於子猶木之
007_0222_b_07L傳於實也由是遇其喪者要須擇其地
007_0222_b_08L得其宜深其穴厚其葬茂其林貯其水
007_0222_b_09L令陰深而畜氣土厚而不澆致令子孫
007_0222_b_10L繁衍而厥祀綿綿今浮圖不顧此理
007_0222_b_11L而妄設火化之法令人無後而絶嗣
007_0222_b_12L非過也況方其火化之際人子之心
007_0222_b_13L其可忍視乎以是惑人1) [42] 漫天

007_0222_b_14L
曰夫人者有形焉有神焉形比則如
007_0222_b_15L神比則如主形謝而其神往焉
007_0222_b_16L屋倒而主不得住焉夫屋也成以土木
007_0222_b_17L嚴以雜穢人以爲己有貪湎其中而不
007_0222_b_18L2) [43] 陋也雖見其倒未能頓忘而不
007_0222_b_19L能遠去也夫身也水土以搆其形
007_0222_b_20L風以持其質中含雜穢不淨流溢
007_0222_b_21L之護之甚於金玉何嘗有厭離之情也
007_0222_b_22L及其死也火風先去而地水猶存
007_0222_b_23L爲地水前所愛護故不能頓忘而隨往
007_0222_b_24L無碍也智者焚其地水而指其往生之

007_0222_c_01L그 정신이 다시 머무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교갈膠葛75)과 같이 맑게 올라간다.
이 때문에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몸소 화로를 들었으며, 사천왕이 관을 들고 아라한이 땔감을 주워 화장을 하여 아버지의 혼신이 맑게 올라가서 하늘에 태어날 수 있게 하였다.76) 황벽 희운黃蘗希運77)이 어머니를 제도할 때에는 마음에 품은 뜻을 부처님께 아뢰고 강을 사이에 두고 횃불을 던지자 그의 어머니가 불꽃 속에서 남자의 몸으로 변화하여 크고 밝은 빛을 타고 하늘 궁전으로 올라가니, 양쪽 강가에서 모두 보고 기이하다 여겼으며, 강 이름이 복천福川이었는데 관청에서 ‘복천’을 ‘대의도大義渡’라 바꾸었다.
이로 보자면 화장하는 장례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러운 곳을 떠나 깨끗한 곳으로 나아가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하여 높이 올라가게 하니, 죽은 이를 좋은 곳으로 보내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서 대대로 이어 가야 할 큰 법도이다.

만일 화장이 차마 못 할 일이라면 이제 땅에 구덩이를 파서 묻는 것은 차마 할 만한 일인가? 지금 큰 산허리와 큰 들판에는 옛날 무덤이 많이 있는데, 모두 농사짓는 이들이 경작하는 땅이 되어 머리와 몸의 뼈들이 별처럼 흩어져 햇볕에 쪼이고 바람을 맞아도 돌보아 지키는 사람 하나 없다. 처음 무덤을 만들 때는 돌을 세우고 소나무를 심어서 그 땅을 꾸며 자손이 번성하고 그 제사가 면면히 끊이지 않기를 도모하지 않음이 없었을 터인데, 이제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다만 생전에 오온五蘊이 다 공空함을 알고 육근六根이 깨끗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이는 비록 몸은 세상에 깃들여 있어도 정신은 늘 세상 밖에 머물러 맑기가 허공과 같고 깨끗하기가 물과 같아 오히려 몸을 허깨비 같은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죽음에 이르러서는 마치 종기를 째고 때를 없애듯이, 거꾸로 묶인 것을 풀고 차꼬를 벗어나듯이, 새가 새장을 벗어나듯이, 말이 마구간을 나오듯이 멀리멀리 느긋하게 마음대로 노닐어 가고 머무는 데 아무런 걸림이 없다. 그에게 어찌 흙과 물을 돌아보아 걸리는 마음이 있겠는가!

007_0222_c_01L其神更無稽滯之情即同膠葛而淸
007_0222_c_02L昇也由是吾佛世尊丁父之喪躬自
007_0222_c_03L執爐四天擧棺羅漢採薪而闍維
007_0222_c_04L其父之神淸昇而生天黃蘗運公之度
007_0222_c_05L母也陳懷白佛隔江擲炬其母於火
007_0222_c_06L焰中化爲男子身乘大光明上昇天
007_0222_c_07L兩岸皆見咸以爲奇江名福川
007_0222_c_08L司改福川爲大義渡以是觀之則火化
007_0222_c_09L之法令人去穢而就淨神淸而遐擧
007_0222_c_10L堪爲薦往之助道垂世之3) [44] 若以
007_0222_c_11L火化爲不忍方其穴土而埋之其可忍
007_0222_c_12L今有大山之麓大野之原多有古
007_0222_c_13L盡爲農者之所耕頭骨星散日煑
007_0222_c_14L風飄無人顧護其初莫不立石栽松
007_0222_c_15L以嚴其地以圖子孫之繁衍厥祀之綿
007_0222_c_16L綿今何至此乎但生前五蘊皆空
007_0222_c_17L根淸淨一念無生者則雖寓形宇內
007_0222_c_18L而常1) [45] 神於物表故澄澄合空湛湛
007_0222_c_19L如水猶以有身爲幻也由是及其化也
007_0222_c_20L如決5)𤴯 [46] 去垢如解懸脫枷如鳥出籠
007_0222_c_21L如馬出閑洋洋乎于于乎逍遙自適也
007_0222_c_22L去留無碍也其於地水安有稽滯之情
007_0222_c_23L「犯」作「𤜱」{乙}{丙}「也」作「其」{丁}「洪」
007_0222_c_24L作「法」{乙}
「棲」作「捿」{甲}「𤴯」作「疣」{丁}

007_0223_a_01L이런 사람의 경우에는 물에 가라앉혀도 좋고, 노천에 던져 놓아도 좋으며, 돌을 파서 담아 놓거나 흙을 파서 묻는 것부터 들불에 타거나 벌레와 개미들에게 먹히는 데 이르기까지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달마는 웅이산熊耳山에 장사 지냈고, 육조는 온몸을 세상에 남겼으며, 보화普化는 요령을 흔들며 하늘로 올라갔고, 청량淸凉은 숲속의 짐승에게 먹이라고 명하였다. 이는 모두 통달한 사람들이 세상을 버린 높은 행적이며 자신을 잊은 뛰어난 자취이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몸을 잊어 자아에 대한 집착이 없는 데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반드시 불로 태워 없앤 뒤에야 비로소 정신이 맑게 올라가 막힘이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이 타향에서 객사하자 그 유골을 거두어 화장하였는데, 그 후손은 세상에 덕망이 높고 임금의 신망이 쏠렸으며 자손은 매우 많고 제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러니 화장을 하면 이익이 후손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계산이 너무 심한 것이니, 근거 없는 말로 명구의 과보(冥龜之報)78)를 잘못 부르지 말라.

8. 전생·현생·내생이 있다는 주장은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묻겠다. 사람의 태어남과 죽음은 곧 사람의 처음과 끝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다만 태어나고 죽음만을 말하였을 뿐 그 앞뒤를 말한 적이 없다. 지금 승려들은 그 앞뒤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함께 말하여 삼세三世라 부르는데, 태어나기 전과 죽은 뒤는 귀와 눈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누가 그것을 몸소 보았겠는가? 이로써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 어찌 황탄한 것이 아니겠는가?

답하겠다.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은 마치 낮과 밤이 번갈아 바뀌는 것과 같다. 이미 번갈아 바뀌는 일이 있으니 저절로 앞과 뒤가 이루어진다. 낮은 지난밤을 앞으로 삼고 올 밤을 뒤로 삼으며, 밤은 지난 낮을 앞으로 삼고 올 낮을 뒤로 삼아, 그 낮 밤과 함께 저절로 세 때를 이룬다. 낮과 밤이 이미 이러하니 세월도 그러하다. 세월이 이미 그러하니 나고 죽는 것 또한 그러하다. 과거는 시작이 없으며 미래는 다함이 없다는 것을 또한 이로써 알 수 있다. 『주역』에서는 “지난 것을 밝히고 오는 것을 살피면 얻고 잃는 과보를 알 수 있다.”79)라고 하였다. 가고 온다는 말이

007_0223_a_01L此人分上沈之可也露之可也
007_0223_a_02L石而藏之穴土而坑之以至爲野火之
007_0223_a_03L所燒蟲蟻之所食無所施而不可也
007_0223_a_04L故達1) [47] 葬於熊耳六祖全身留世
007_0223_a_05L化搖鈴騰去淸凉命2) [48] 林獸此皆達
007_0223_a_06L人遺世之高蹤忘我之勝迹者也自餘
007_0223_a_07L則未能忘形無我故3) [49] 經火化然後其
007_0223_a_08L神淸昇而無滯也有人客死他鄕收其
007_0223_a_09L骨而火之而其後德望高於世4) [50]
007_0223_a_10L歸於己子孫振振而厥祀綿綿謂之火
007_0223_a_11L化而利不及後者私憂過計之甚也
007_0223_a_12L以無稽之談枉招冥龜之報

007_0223_a_13L
曰人之生死即人之始終也故孔子只
007_0223_a_14L言生死而未嘗言其前後也今浮圖言
007_0223_a_15L其前後而并其死生之間謂之三世
007_0223_a_16L生前死後非耳目之所接孰親視之乎
007_0223_a_17L以之惑人豈非誕也

007_0223_a_18L
曰人之生死猶晝夜之代謝旣有代謝
007_0223_a_19L則自成前後晝則以去夜爲前來夜爲
007_0223_a_20L夜則以去日爲前來日爲後并其
007_0223_a_21L晝夜自成三際書夜旣尒歲月亦然
007_0223_a_22L歲月旣尒生死亦然已往之無始
007_0223_a_23L來之無窮亦由是而可知也易云彰往
007_0223_a_24L察來5)6) [51] [52] 之報往來之言豈非

007_0223_b_01L어찌 이른바 앞과 뒤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삼세의 가르침이 허황하다고 하는 것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9. 오랑캐에게는 도가 없다
묻겠다. 세상에서 따를 만한 것은 오제五帝와 삼왕三王80)의 도뿐이다. 그러므로 공자 같은 성인이 조술祖述하고 뭇 현인들이 서로 전하며, 여러 문헌에 실어 여러 나라가 모두 따른다. 이 도는 중국에서만 구할 수 있고 오랑캐에게는 구할 수 없다. 부처는 서쪽 오랑캐 사람이다. 그러니 어찌 그 도를 중국에 유행시키겠는가? 한나라 명제가 서역에서 그 가르침을 구한 것81)은 어리석은 짓이지 현명한 일이 아니다.

답하겠다. 도가 있는 곳이 곧 사람들이 돌아가는 바이다. 오제와 삼왕이 이미 도가 있는 곳이므로 사람들이 돌아가는 바가 되어 중국에서 왕이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인도에서 일어나 법륜왕法輪王82)이 되었으니 또한 이와 같다.

중국에서 인도를 가리켜 서쪽이라 하는 것은 인도에서 중국을 가리켜 동쪽이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세계의 한가운데를 정한다면 마땅히 정오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곳일 터인데, 인도가 바로 그러하다. 부처님께서 그곳에 태어남을 보인 것은 어찌 그곳이 세계의 한가운데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른바 동쪽 서쪽의 방위는 모두 각자의 풍속에 따라 서로 부르는 것이지 그 절대적인 중심을 정하여 동쪽과 서쪽을 정한 것이 아니다.
구태여 부처님께서 오랑캐 출신이기 때문에 그 도를 따르지 않겠다고 한다면, 순임금은 동쪽 오랑캐 지역에서 태어났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 지역에서 태어났는데 이들을 오랑캐라고 하여 그 도를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태어난 곳은 현상적인 자취이고 행하는 바는 도이다. 다만 그 도가 따를 만한가 따를 만하지 않은가를 살필 뿐이지, 그 태어난 곳이라고 하는 현상적 자취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는가, 도가 있는 곳이 곧 사람들이 돌아가는 곳이라고!

『춘추』에서는 서徐나라가 거莒나라를 치자 오랑캐라고 하였고, 적인狄人이 제인齊人과 형邢 땅에서 맹약하자 중국이라고 하였다. 서나라가 중국에 있으면서도 오랑캐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의롭지 않았기 때문이고, 적인이

007_0223_b_01L所謂前後乎以三世之說爲誕者未之
007_0223_b_02L思也

007_0223_b_03L
曰天下之可遵者五帝三王之道而已
007_0223_b_04L故孔聖祖述而羣賢相傳載諸方策而
007_0223_b_05L列國皆遵此道可求之於中國不可求
007_0223_b_06L之於夷狄也佛西夷之人也豈以其道
007_0223_b_07L流行於中國也漢明帝求其法於西域
007_0223_b_08L昧也非明也

007_0223_b_09L
曰道之所存是人之所歸也五帝三王
007_0223_b_10L旣道之所存故爲人之所歸而王於華
007_0223_b_11L夏也佛之興天竺而爲法輪王亦復如
007_0223_b_12L華夏之指天竺爲西猶天竺之指華
007_0223_b_13L夏爲東也若取天下之大中則當午無
007_0223_b_14L影爲中天竺乃尒佛之所以示生於彼
007_0223_b_15L豈非以其天下之大中也所謂東西
007_0223_b_16L蓋彼此時俗之相稱尒非占其中而
007_0223_b_17L定其東西也苟以佛爲夷而不遵其道
007_0223_b_18L則舜生於東夷文王生於西夷可夷其
007_0223_b_19L人而不遵其道乎所出迹也所行道也
007_0223_b_20L但觀其道之可遵不可遵也不可拘其
007_0223_b_21L所出之迹也前不云乎道之所存是人
007_0223_b_22L之所歸也春秋以徐伐莒而夷狄之
007_0223_b_23L人與齊人盟于7) [53] 而中國之夫徐以
007_0223_b_24L中國而受夷狄之名以其不義也狄人

007_0223_c_01L중국이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릇 포폄할 때에는 다만 사람의 현명하고 어리석음, 일의 옳고 그름만을 살펴야지 어찌 그 태어난 곳으로써 그 사람을 논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자취를 구하지 않고 행한 도를 구한다면 다만 오계와 십선의 도만으로도 오제삼왕의 도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데 하물며 사제, 십이인연, 육도 등의 가르침이겠는가? 만일 오제삼왕으로 하여금 이 가르침을 만나게 하였다면 반드시 손 모으고 무릎 꿇어 듣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명제가 불교의 가르침을 구한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10. 불교는 재앙을 가져온다
묻겠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뒤로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기근이 자주 이르러 백성들은 있을 곳을 잃어버리는 일이 많고 전염병이 날로 심해지니 그 해로움이 또한 크지 않은가?

답하겠다. 요임금ㆍ순임금ㆍ우임금ㆍ탕임금은 세상의 큰 성인이지만 오히려 홍수와 가뭄의 재앙을 면하지 못하였고, 걸임금ㆍ주임금ㆍ유임금ㆍ여임금은 세상의 주인이면서도 독부獨夫83)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주나라가 쇠약해지니 지배자와 백성들이 이미 무너져 내리고, 진秦나라가 일어나자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공자 같은 큰 성인도 식량이 떨어지는 처지를 면하지 못하였고, 안회顔回 같은 아성도 일찍 죽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원헌原憲 같은 큰 현인도 집안이 가난한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 또한 불교 때문에 그런 것인가?
부처님께서 인도에서 태어나신 때는 바로 주나라 소왕昭王 때이며,84) 한나라 명제 때에 이르러 그 가르침이 동쪽 땅으로 흘러들어 왔으니 삼대85) 이전에는 부처님께서 아직 태어나지 않으셨고, 공자와 안회의 시대에는 부처님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때는 마땅히 재앙도 없고 기근도 없어야 하거늘, 요임금 때에는 어찌하여 9년의 홍수가 있었고 탕임금 때에는 어찌하여 7년의 가뭄이 있었으며, 공자와 안회는 어찌하여 궁핍하였고, 원헌은 어찌하여 가난하였는가?

당 태종이

007_0223_c_01L受中國之稱以其有義也凡於襃貶之
007_0223_c_02L但觀人之明昧事之當否豈以其所
007_0223_c_03L而議其人乎如不求其迹而求其
007_0223_c_04L所行之道則但五戒十善之道可無愧
007_0223_c_05L於五帝三王之道矣況諦緣六度等法
007_0223_c_06L若使五帝三王遇之則必合掌跪膝
007_0223_c_07L而聽受矣明帝之求不其宜乎

007_0223_c_08L
曰自佛法入中國以來世漸澆漓飢饉
007_0223_c_09L荐臻民多失所爲癘日甚其爲害也
007_0223_c_10L不亦大哉

007_0223_c_11L
曰堯舜禹湯以天下之大聖而尙未免
007_0223_c_12L水旱之災8) [54] 紂幽9) [55] 以天下之人主
007_0223_c_13L而未免爲獨夫周衰而人民已匱秦作
007_0223_c_14L而天下大亂以孔子之大聖而未免於
007_0223_c_15L絕粮顏回之亞聖而未免於夭折
007_0223_c_16L憲之大賢而未免於家貧此亦以佛而
007_0223_c_17L然歟佛興天竺正當周昭至漢明帝
007_0223_c_18L法流東土三代以前佛未之作孔顏
007_0223_c_19L之時名亦未聞彼時當無災孽亦無
007_0223_c_20L飢饉堯何有九年之水湯何有七年之
007_0223_c_21L孔顏何窮而原憲何貧乎唐太宗與
007_0223_c_22L「磨」作「摩」{丁}「飴」作「貽」{丁}「須」底
007_0223_c_23L本多用「湏」今改爲本字「須」前後倣此不更加註
007_0223_c_24L{編}
「寵」作「竉」{甲}「失得」作「得失」{甲}{丁}
007_0223_c_25L「得」作「失」{丙}「邢」作「那」{乙}「桀」作
007_0223_c_26L「傑」{丁}
「癘」作「厲」{丁}

007_0224_a_01L위징魏徵, 이순풍李淳風 등과 마음을 합치고 덕을 함께하여 중국을 통일하니 수많은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온 나라에서 와서 경하하였다. 신라의 진덕왕이 스스로 ≺태평가≻를 짓고 비단에 글을 짜 넣어 바쳤는데 그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唐開洪業  위대한 당나라 큰 업적을 여니
巍巍皇猷昌  높고도 높은 위대한 계책 빛나네
止戈戎威定  전쟁을 그치고 굳센 위엄으로 평정하고
修文契百王  문을 닦아 백왕과 계합하네
深仁諧日月  깊은 인仁은 해와 달과 함께하며
撫羣邁虞唐  무리를 어루만짐이 요순보다 뛰어나네

이렇게 하여 다음과 같은 구절에 이른다.

維岳降宰輔  산악이 재보를 내리니
惟帝任忠良  제왕께서 참되고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니
五三成一德  오제와 삼왕의 덕이 하나가 되어
昭我唐家皇  우리 당나라 황실을 밝게 비추네

또 신라의 태종 김춘추는 김유신과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하여 삼한을 통일하여 사직에 큰 공을 세웠는데, 그때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 값이 싸니베 한 필의 값이 벼 30석이었다. 백성들이 걱정 없이 즐거워하며 모두 태평성대라고 불렀다. 만일 불교가 태평스럽지 못하게 만든다고 한다면 이때는 불교가 성행하던 시대인데 어찌하여 그 태평스러움이 이처럼 지극한 데까지 이르렀는가?
조주 종심趙州從諗 선사는 700갑자에 걸쳐 살았고, 오대 개법사開法師는 300여 년을 살았다. 만일 불교가 사람들을 요절케 한다면 저들은 모두 불자인데 어찌하여 그 목숨이 그토록 오래 사는 데까지 이르렀는가?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어떤 왕조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럽고, 오래 존속되고 짧게 끝나고, 괴롭고 즐겁게 되는 것은 크게 보아 시절의 운세가 성하고 쇠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며, 또한 중생의 업이 불러오는 바이다. 세상이 태평하지 못해서 백성들이 그 삶을 편안히 누리지 못한다 해서 그 허물을 불교로 돌린다는 것은 생각지 못한 것이다.

11. 승려들은 출가하여 하는 일 없이 놀고먹으니 사회의 해악이다
묻겠다. 너희 승려들은 편안하게 노는 백성이 되어 누에도 치지 않고 밭도 갈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얻어 입고 먹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에 따른 괴로움을 입고 자주 궁핍한 지경에 이르게 되니, 그 폐해가 또한 크지 않은가?

답하겠다. 승려의 임무는 법을 널리 펴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법을 널리 펴서 지혜의 명맥이 끊이지 않게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선해지도록 하는 것이 승려의 임무이다. 진실로 이와 같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받드는 이가 되어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다.

007_0224_a_01L1)𥡂 [56] 徵李淳風等協心同德混一天下
007_0224_a_02L兆民咸熈率土來賀新羅眞德王
007_0224_a_03L製大平歌織錦爲文而獻之其略曰
007_0224_a_04L大唐開洪業巍巍皇猷昌止戈戎威定
007_0224_a_05L修文契百王深仁諧日月撫羣邁虞唐
007_0224_a_06L以至云維岳降宰輔惟帝任忠良五三
007_0224_a_07L成一德昭我唐家皇又新羅太宗春秋
007_0224_a_08L與金庾信同心勠力一統三韓
007_0224_a_09L大功於社稷彼時年豊穀賤一疋布價
三十2) [57]

007_0224_a_10L民樂無憂皆謂之聖代若是佛法使
007_0224_a_11L不昇平此當佛法盛行之時也何其昇
007_0224_a_12L至於如是之極乎趙州稔 [58] 禪師
007_0224_a_13L經七百甲子五臺開法師生存三百餘
007_0224_a_14L若是佛法令人夭折彼旣佛子
007_0224_a_15L其命也至於如是之壽乎古今治亂脩
007_0224_a_16L短苦樂大關時運之盛衰亦是衆生之
007_0224_a_17L業感以世不昇平民不聊生歸咎於
007_0224_a_18L佛法亦未之思也

007_0224_a_19L
曰尒浮圖輩逸爲遊民不蠶不耕
007_0224_a_20L衣食於人故民被其惱屢至於窮
007_0224_a_21L爲廢也不亦大哉

007_0224_a_22L
曰僧之任在弘法利生弘法而令慧命
007_0224_a_23L不斷利生而使人人自善是僧之務也
007_0224_a_24L苟能如是則可無愧於爲人之所奉矣

007_0224_b_01L진실로 그럴 수 없다면 이는 그 사람의 죄이지 어찌 불교의 허물이겠는가? 맹자가 말하기를 “여기에 어떤 사람이 집 안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집 밖에서는 공손하며, 선왕의 도를 지켜 후대의 배우는 이를 기다리는데도 그대에게서 밥을 얻어먹을 수 없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목수나 수레 만드는 사람은 높이면서도 인과 의를 행하는 이는 가벼이 여기는가?”86)라고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도를 지켜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으로부터 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사람의 가난함과 부유함은 각자 본디 정해진 바가 있으니, 전생에 선의 씨앗을 심어 놓은 이는 비록 날마다 재물을 쓴다고 하여도 넉넉하고, 전생에 선의 씨앗을 심어 놓지 않은 이는 비록 날마다 모은다고 하여도 모자란다.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고도 예배하지 않고, 승려를 보고는 꾸짖고 욕하며, 평생토록 한 푼의 돈도 보시하지 않았는데도 옷은 그 몸을 가리지 못하고 먹을 것은 그 입을 채우지 못하는데, 이 또한 승려들로 인하여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12. 승려들이 타락해 있다
묻겠다. 맑고 깨끗하게 욕망을 줄이고 진리를 위해 몸을 버리며 많이 듣고 잘 기억하여 뒤에 오는 이들을 맞아 이끄는 것이 본디 불자들이 할 일이다. 지금 승려들은 그 할 일을 닦지 않고 오히려 스승의 가르침을 더럽히며, 사람들이 그 도를 물어보면 마치 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하면서 여래를 팔아 목숨이나 기르려고 하니, 그 거처를 인가로 만들고 그 사람을 일반 사람으로 만들어서 사민四民의 수를 채워 임금과 나라를 돕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답하겠다. 기린87)이나 난새,88) 봉황89)은 그 수가 무리를 이룰 만큼 많지 않고, 한 자나 되는 옥이나 한 마디나 되는 구슬은 (매우 드물어서) 시장에서 구할 수가 없다. 공자의 문하에 있던 3천 명 가운데 밝은 이로 일컬어지는 이는 다만 열 사람일 뿐이고,90) 여래의 바다처럼 큰 모임에서도 으뜸으로 일컬어지는 이는 또한 열 사람을 지나지 않을 뿐이다.91) 하물며 지금은 성인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때로서 (중생들의) 근기가 뛰어나지 못하니 어찌 사람마다 가섭과 같이 깨끗한 행위를 하고, 아난과 같이 많이 듣게 할 수 있겠는가? 공자와 안연顔淵 이후 천여 년 동안에 안연이나 민자건閔子騫과 같은 이가 있다는 말을 또한 들어 보지 못하였다.
무릇 승려가 승려인 것은 다섯 가지 덕92)을 갖추고 여섯 가지 화합93)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그 이름에 들어맞게 된다. 그러나 이름과 내용이 들어맞는 것으로 보면

007_0224_b_01L苟不能然是其人之罪也豈佛之過歟
007_0224_b_02L孟子曰於此有人焉入則孝出則悌
007_0224_b_03L守先王之道以待後之學者不得食於
007_0224_b_04L子何尊梓匠輪輿而輕爲仁義者哉
007_0224_b_05L此豈非以守道利人而可衣食於人乎
007_0224_b_06L夫人之貧富各自有素分宿有善種者
007_0224_b_07L則雖日費而有餘宿無善種者則雖日
007_0224_b_08L聚而不足世有人焉見佛不禮見僧
007_0224_b_09L呵毁終身而不施一錢衣不蔽形
007_0224_b_10L不充口此亦因僧而致然歟

007_0224_b_11L
曰淸淨寡欲爲法亡軀多聞强記
007_0224_b_12L引後來固釋子之行也今浮圖輩
007_0224_b_13L修其行反汚師法人問其道如立面
007_0224_b_14L裨販如來資養身命廬其居人其
007_0224_b_15L以充乎四民之數而令轉弼乎
007_0224_b_16L國可也

007_0224_b_17L
曰騏驎鸞鳳族不成羣3) [59] 寸珠
007_0224_b_18L不可求孔門三千稱哲人者十人而
007_0224_b_19L如來海會稱第一者亦不過十人
007_0224_b_20L而已况今去聖愈遠根機微劣安得
007_0224_b_21L使人人如迦葉之淨行阿難之多聞乎
007_0224_b_22L孔顏之後千載之下如顏淵閔子4) [60]
007_0224_b_23L亦未之聞也夫僧之爲僧具五德
007_0224_b_24L偹六和然後方稱其名也然名實相符

007_0224_c_01L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다. 숲에는 재목감이 안 되는 나무가 있고, 들에는 여물지 못하는 벼가 있다. 비록 법대로 받들어 행하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도 심하게 나무라서는 안 된다. 다만 그 형체와 복식94)으로 말미암아 점점 훈습하여 성품을 이루어 그 도를 잃지 않게 해야 할 것이지, 어찌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그 법을 폐할 수 있겠는가?

13. 불경은 유교 경전보다 힘만 들 뿐 효용이 없다
묻겠다. 그 책을 살펴보면 허무하고 세상과 동떨어진 것에 힘쓰고 적멸함을 숭상하니 배우는 공은 『소학』보다 배나 들지만 쓸 데가 없고, 고고하기로는 『대학』보다 더하지만 실속이 없으니 스스로 닦고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가 될 수 없다.

답하겠다. 책이란 도를 싣는 도구이며 널리 교화하는 수단이다. 그 책을 보면 그 도가 따를 만한 것인가 따를 만하지 못한 것인가를 알 수 있으며, 그 예법이 흠모할 만한가 흠모할 만하지 않은가를 알 수 있다. 그 도가 따를 만하고 그 예법이 흠모할 만하다면 어찌 내가 익힌 바가 아니라고 해서 버릴 수 있겠는가?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상에는 두 가지 도가 없고 성인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없다는 것을!95) 성인이란 비록 천 리를 떨어져 있고 만세나 되는 세월을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마음이 일찍이 다른 적이 없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멋대로 생각하지 않고, 꼭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고, 고집부리지 않고, 나만 내세우지도 않는다.”96)라고 하였고, 『주역』에서 또한 말하기를 “그 등을 고요히 지키므로 자기(我)가 없으며, 그 마당을 지나가도 다른 사람이 없다. 자기가 없고 다른 사람이 없으니 어떤 허물이 있을까?”97)라고 하였으며, 석가모니께서 말하기를 “나도 없고 남도 없으므로 모든 선한 행위를 닦으면 곧 깨달음을 얻는다.”98)라고 하였으니, 성인은 세상을 달리하지만 그 마음을 같이한다고 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이른바 ‘허황하고 적멸하다’라는 말은 삼장 십이부경十二部經99) 가운데 어떤 경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인가?
큰 계율에서는 “효순함이 지극한 도의 가르침이니,

007_0224_c_01L蓋難其人5) [61] 林有不材之木田有
007_0224_c_02L不實之禾縱有不能如法奉行者不可
007_0224_c_03L疾之甚也但令因其形服漸薰成性
007_0224_c_04L不失其道而已豈得因其失而廢其法
007_0224_c_05L6) [62]

007_0224_c_06L
曰考其爲書務於虛遠崇於寂滅
007_0224_c_07L功倍於小學而無用其高過於大學而
007_0224_c_08L無實不可以爲修己治人之方也矣

007_0224_c_09L
曰書者載道之具也弘化之方也
007_0224_c_10L其書則知其道之可遵不可遵知其禮
007_0224_c_11L之可慕不可慕也其道可遵其禮可慕
007_0224_c_12L則豈以非吾所習而可棄之也君不聞
007_0224_c_13L天下無二道聖人無兩心夫聖人
007_0224_c_14L雖千里之隔萬世之遠其心未甞
007_0224_c_15L有異也孔夫子之言曰毋意毋必毋固
007_0224_c_16L毋我7)易又 [63] 云艮其背無我也行其庭
007_0224_c_17L無人也無我無人何垢之有釋迦老
007_0224_c_18L之言曰無我無人修一切善法即得
007_0224_c_19L菩提此聖人之所以異世而同其心也
007_0224_c_20L所謂虛遠寂滅之言三藏十二部中
007_0224_c_21L何典而言歟大戒云孝順至道之法
007_0224_c_22L「𥡂」作「魏」{甲}{乙}{丙}{丁}「碩」作「石」{甲}
007_0224_c_23L「璧」作「壁」{甲}
「褰」作「蹇」{丁}「矣」無有
007_0224_c_24L{丁}
「也」作「乎」{丁}「易又」作「又易」{甲}

007_0225_a_01L효는 계라고도 하고 제지라고도 한다.”100)라고 하였다. 그러니 한결같이 허무하고 동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원각경』에서는 “마음의 꽃이 빛을 뿜어 온 누리 모든 나라를 다 비춘다.”라고 하였으니, 한결같이 적멸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참되고 거짓됨을 징험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그 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 책을 살펴보지도 않고 망령되이 배척한다면 반드시 통달한 이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온 세상의 문장을 다 보기 전에는 고금을 바로 할 수 없다.”101)는 것을!
공자는 말하기를 “효는 하늘의 법도이고 땅의 올바름이며 백성들이 할 일이다.”102)라고 하였으니 어찌 지극한 도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감응하여 온 세상의 일에 통한다.”103)라고 하였으니 어찌 밝게 비춤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유교에서 말하는 ‘밝은 덕’은 불교에서 말하는 ‘묘하고 깨끗하며 밝은 마음’이고, (유교에서 말하는)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으나 감응하여 이에 통한다.”104)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고요하면서도 비춘다’는 것이다. (유교에서 말하는) “자기에게 선함이 있은 뒤에야 다른 사람에게 선하게 될 것을 요구할 수 있고, 자기에게 악함이 없은 뒤에야 다른 사람의 악함을 바로잡을 수 있다.”105)라고 하는 것이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악을 끊고 선을 닦아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어찌 다르겠는가? 말하고 있는 이치가 이미 같은데 가르침의 자취가 어찌 다르겠는가?
자기만이 전적으로 옳다 하고 남을 무시하며, 이것을 옳다 하고 저것은 틀리다 하는 것은 사람의 보통 마음이다. 그러나 이치에 잘 통달한 이는 마땅한 것만을 따를 뿐이니 어찌 남과 나, 저것과 이것으로써 옳고 그르다 하는 이겠는가?
사람들로 하여금 벼슬이나 상으로 권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쓸리듯 좇아 교화되게 하는 것은 삼교106) 가운데 불교만이 그럴 수 있는데, 이는 우리 부처님 큰 성인의 큰 자비가 감응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순임금은 물어보기를 좋아하였고, 가까운 데에 있는 말을 살펴 악을 감추고 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으며,107) 우임금은 뛰어난 말을 들으면 절을 하였다.108) 만일 순임금이나 우임금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교화를 만나게 하였다면 어찌 아름답게 여겨 돌아가 의지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니 스스로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도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한 생각지 못한 것이다.

14. 노장사상과 유교, 불교의 우열은 어떠한가
묻겠다. 노장과 유교, 불교의 같음과 다름, 뛰어남과 뒤떨어짐은 어떠한가?


007_0225_a_01L孝名爲戒亦名制止一向謂之虛遠
007_0225_a_02L可乎圓覺云心花發明照十方刹
007_0225_a_03L向謂之寂滅可乎若欲驗其眞僞必先
007_0225_a_04L審其書也不審其書而妄排之則必爲
007_0225_a_05L達者之所嗤矣君不聞乎未盡天下文
007_0225_a_06L不得1) [64] 黃古今孔之言曰夫孝
007_0225_a_07L天之經也地之義也民之行也豈非
007_0225_a_08L至道之謂乎感而遂通天下之故豈非
007_0225_a_09L明照之謂乎儒之所謂明德即佛之所
007_0225_a_10L謂妙精明心也所謂寂然不動感而遂
007_0225_a_11L即佛之所謂寂照者也所謂有善於
007_0225_a_12L己然後可以責人之善無惡於己然後
007_0225_a_13L可以正人之惡者與吾敎所謂斷惡修
007_0225_a_14L饒益有情者何以異乎所言之理旣
007_0225_a_15L而所敎之迹何以異乎專己略人
007_0225_a_16L是此非彼人之常情也通人達士
007_0225_a_17L義是從豈以人我彼此而是非者乎使
007_0225_a_18L人不待爵賞之勸而靡然從化者三敎
007_0225_a_19L之中佛敎能然也蓋以吾2)3) [65] 聖大 [66]
007_0225_a_20L慈之所感也舜好問而好察邇言4)
007_0225_a_21L惡而揚善禹拜 [67] 昌言若使舜禹遇佛
007_0225_a_22L之化則豈不歸美乎而以爲不可爲修
007_0225_a_23L己治人之方者亦未之思也

007_0225_a_24L
曰老與儒釋同異優劣如何

007_0225_b_01L답하겠다. 노자는 말하기를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고, 함이 있어도 하는 바가 없다.”109)라고 하였고, 부처님께서는 말하기를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추고,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하다.”110)라고 하였으며, 공자께서는 말하기를 “저 역易이라는 것은 생각함이 없고 함이 없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으나 감응하여 이에 통한다.”111)라고 하였다. 고요한 것이 감응이 없은 적이 없으므로 이는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춤’이다. 감응하는 것이 고요하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이는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함’이다.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곧 ‘고요하면서도 항상 감응한다’는 것이고, ‘함이 있어도 하는 바가 없다’는 것은 곧 ‘감응하면서도 항상 고요하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보자면 삼가三家에서 말하는 바가 은밀히 서로 들어맞아 마치 한 입에서 나온 듯하다.
실천의 높음과 낮음, 효용을 일으킴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서는 마음의 때를 씻어 내고 지혜의 눈을 맑게 한 뒤에 불교의 경전들과 유교와 도가의 여러 서적들을 다 읽어 보고, 일상생활 속에서 나거나 죽고, 화나 복을 받는 때에 잘 살펴보면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저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니, 내가 어찌 강변하여 그대를 놀라게 하겠는가?

『현정론』 끝

가정 5년 병술년(1526) 7월 일 전라도 광양 땅 백운산 초천사에서 판각하다.
간선산인幹善山人112)은 자홍, 대시주는 양화일 부부, 화주는 성청이다.

007_0225_b_01L
曰老之言曰無爲而無不爲當有爲而
007_0225_b_02L無爲釋之言曰寂而常照照而常寂
007_0225_b_03L孔之言曰夫易無思也無爲也寂然不
007_0225_b_04L感而遂通夫寂然者未嘗無感
007_0225_b_05L寂而常照也感通者未甞不寂即照
007_0225_b_06L而常寂也無爲而無不爲即寂而常感
007_0225_b_07L有爲而無所爲即感而常寂也
007_0225_b_08L此則三家所言㝠相符契而如出一口
007_0225_b_09L若履踐之高低發用之同異則洗
007_0225_b_10L盡心垢廓淸慧目然後看盡大藏儒道
007_0225_b_11L諸書叅於日用之間生死禍福之際
007_0225_b_12L則不待言而自點頭矣吾何强辨以駭
007_0225_b_13L君聽

007_0225_b_14L
顯正論

007_0225_b_15L
007_0225_b_16L
5)嘉靖五年丙戌七月全羅道光陽地

007_0225_b_17L白雲山招川寺開板

007_0225_b_18L幹善山人子弘

007_0225_b_19L大施主梁花日兩主

007_0225_b_20L化主性淸 [68]

007_0225_b_21L「雌」作「䧳」{乙}{丙}ㆍ作「紫」{丁}「佛大聖大」
007_0225_b_22L四字作筆寫{乙}
「大」上有「之」{乙}「隱惡…
007_0225_b_23L禹拜」七字作筆寫{乙}
甲本刊記如下「嘉靖十
007_0225_b_24L六年丁酉全羅道興德地逍遙山緣起寺
007_0225_b_25L重刊陳萬壽書法師印泉奇岩眞應智行
007_0225_b_26L法師聖恩六行靈輝澄照靈祐學初

007_0225_c_01L

007_0225_c_01L草允羲暉祖心曇華慧安惠恩義浩
007_0225_c_02L法淳戒行䝺瓊心會信眉八還性崇
007_0225_c_03L玉冏了圓慧浩森谷秀文戒受惠仁
007_0225_c_04L一翁禪祖玉禪鄭叔孫」

007_0225_c_05L乙本刊記如下「每邑个張元龍金允孫兩主
007_0225_c_06L長守兩主戒玄▣▣ 學▣ 學玲惠还木手玄
007_0225_c_07L飯頭信熙化士慧聦正眼嘉靖卄三年甲辰
007_0225_c_08L正月黃海道兎山土鶴鳳山石頭寺開板」
  1. 1)성性 : 존재의 본래적인 성질로서 부처님의 완전한 성품을 말한다.
  2. 2)정情 : 중생들의 마음 작용으로서,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와 세상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는 기능을 한다.
  3. 3)각유정覺有情 : ‘깨달은 중생’이라는 뜻으로 보살을 말한다. 보살은 성문이나 연각을 뛰어넘는 깨달음을 이미 이루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4. 4)이승二乘 : 소승과 대승, 또는 대승불교에서 소승으로 지칭한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을 말한다.
  5. 5)삼승三乘 : 성문승과 연각승에 대승인 보살승을 더한 것을 말한다.
  6. 6)하늘 중생 : 원문의 ‘天’에는 ‘공간으로서의 하늘’과 ‘하늘에 사는 존재’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여기에서는 공간은 ‘하늘’로, 그곳에 사는 존재는 ‘하늘 중생’으로 구별하여 번역한다.
  7. 7)유정有情 : ‘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서, 진리에 대해 알지 못하여 헛된 마음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중생을 가리킨다.
  8. 8)오승五乘 : 성문승ㆍ연각승ㆍ보살승의 삼승에다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가르침인 인승人乘, 하늘 중생으로 태어나게 하는 가르침인 천승天乘을 더한 것을 말한다. 인승과 천승을 합한 인천승을 삼승에 더하여 사승四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런데 ‘승’의 의미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해탈에 이르는 가르침’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여전히 윤회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나 하늘 중생으로 태어나게 하는 가르침을 ‘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래의 의미에 맞지 않다.
  9. 9)인승人乘 :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는 가르침. 원래 오계五戒ㆍ십선十善을 중품으로 닦으면 인승, 상품으로 닦으면 천승이라 하는데 여기에서는 오계만을 들고 있다.
  10. 10)천승天乘 : 하늘 중생으로 태어나게 하는 가르침으로서 여기에서는 십선을 말한다.
  11. 11)육도六度 :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수행하는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반야의 여섯 가지 바라밀을 말한다.
  12. 12)우리의 도道 : 불교를 말한다.
  13. 13)만일 사람마다~있을 것이다 : 이는 유교 경전인 『大學』에서 제시하는 유교의 지향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유교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14. 14)오상五常 :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영원한 덕목으로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ㆍ신信을 말한다.
  15. 15)오계와 오상이 같다는 주장은 격의불교格義佛敎적인 것으로, 중국 불교 초기에 불교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중국의 전통 사상인 도가나 유교의 주요 사상에 적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460년 무렵에 북위의 담정曇靖이 위작한 『提謂波利經』에서부터 시작되어 지의智顗를 비롯한 불교 승려들과 안지추顔之推 같은 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오계와 오상을 짝짓는 방식은 여기에서와 달리 죽이지 않음은 인仁, 훔치지 않음은 지智, 음란하지 않음은 의義, 술 마시지 않음은 예禮, 헛된 말을 하지 않음은 신信과 같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16. 16)『論語』 「爲政」 .
  17. 17)『周易』 「繫辭 上」 .
  18. 18)본래 상벌을 가장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내세운 학파는 유가가 아니라 법가이다. 그러나 덕치의 이념을 내세운 유교 통치 아래에서도 상벌은 가장 중요한 통치의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송나라 태종 원년에 왕우칭王禹偁이 태종에게 올린 「端拱箴」 에는 “상과 벌은 나라의 큰 도구이고, 기뻐하고 화냄은 사람의 일상적 감정이다.(賞罰者。國之大柄。喜怒者。人之常情。)”라고 하였다.
  19. 19)『六祖壇經』 「頓漸」 .
  20. 20)『金剛經』 「無得無說分」 .
  21. 21)경經 : 절대적으로 올바른 법도를 말한다.
  22. 22)권權 : 경에 따를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취하는 임시적인 수단을 말한다. 『孟子』 「離婁 上」 에는 “남자와 여자가 직접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으면 손으로 직접 건져야 하는데, 이것이 권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23. 23)상계上界 : 상계는 부처님이나 신선이 사는 곳을 가리키지만, 여기에서는 아직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 하늘 중생들이 사는 천계(색계, 무색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24. 24)빛나는 해가~보고 부끄러워하였다 : 이 구절은 『禪宗永嘉集』 「三乘漸次第七」 에서 따온 것으로, 행정行靖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지혜의 비춤이 높고 멀어서 역량이 밝은 해를 넘어서고, 삼유三有의 인연을 없애니 공功이 상계上界를 넘어선다. 이해와 행위가 이와 같으면 다시 더할 것이 없다. 부끄럽고 부끄럽다.”
  25. 25)세 가지 밝은 지혜(三明) : 깨달은 이가 갖추고 있는 밝은 지혜로서 ① 자신과 남이 전생에 어떻게 존재하였는지를 아는 것, ② 자신과 남이 태어나고 죽고 과보를 받는 모습을 꿰뚫어 보는 것, ③ 자신에게 번뇌가 다하였음을 아는 것을 말한다.
  26. 26)여섯 가지 신통력(六通) : 깨달은 이가 갖추는 신통한 능력으로서 앞의 세 가지 밝은 지혜에다 ① 보통 귀로 들을 수 없는 것을 듣는 능력, ②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 ③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거나 어디에나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능력을 더한 것이다.
  27. 27)네 가지 지혜(四智) : 깨달은 이가 갖추는 지혜로서 ① 깨끗한 거울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 ② 모든 중생과 부처님께서 본래 하나의 불성으로서 차별이 없음을 아는 지혜, ③ 세상의 모든 존재를 관찰하여 정통하고 중생들의 근기를 잘 살펴 알아 그에 맞는 가르침으로써 제도하는 지혜, ④ 몸과 말과 마음으로써 여러 가지 변화를 나타내어 범부와 성문, 연각, 보살들이 깨달음을 얻고 즐거움을 얻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28. 28)여덟 가지 해탈(八解) : 해탈에 들어가는 여덟 가지 마음 작용으로서 ① 대상의 부정적인 측면을 관찰하여 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② 대상의 부정적인 측면을 관찰하여 탐하지 않는 마음을 더욱 굳게 하는 것, ③ 대상의 깨끗한 모습을 관찰하여 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④ 허공이 가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⑤ 의식이 가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⑥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⑦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닌 경지에 이르는 것, ⑧ 감각 작용, 표상 작용 등이 일어나지 않아 무심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이 여덟 가지를 통하여 해탈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다.
  29. 29)부처님의 성姓으로~삼게 하여 : 모든 불교 승려들은 ‘석釋’을 성으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도에는 없던 관습으로 중국에서 동진 때의 고승 도안道安이 주창하여 시행되었다. 그러나 출가가 모든 혈연적 관계를 끊고 세속을 떠난다는 의미임을 생각하면 출가자가 다시 성을 갖는다는 것은 출가의 의미에 맞지 않는다. 또한 ‘석’은 붓다의 종족을 지칭하는 ‘석가’에서 나온 것이므로 굳이 붓다의 성을 성으로 삼고자 한다면 붓다의 성인 ‘고타마’를 음사한 ‘구담’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30. 30)『孝經』 「開宗明義章 第一」 .
  31. 31)『論語』 「顏淵」 .
  32. 32)묻겠다 : 원문은 ‘曰’이지만 문맥에 따라 이렇게 번역하였다. 뒤도 모두 같다.
  33. 33)답하겠다 : 원문은 ‘曰’이지만 문맥에 따라 이렇게 번역하였다. 뒤도 모두 같다.
  34. 34)『四書集註』의 『孟子』 「盡心 上」 .
  35. 35)선왕先王 : 요임금ㆍ순임금ㆍ우임금ㆍ탕임금 같은 유교의 성인 군주를 가리킨다.
  36. 36)『書經』 「周書」 ‘泰誓 上’.
  37. 37)『肇論』 「涅槃無名論」 ‘妙存’.
  38. 38)『四書集註』의 『論語』 「雍也」 . “子貢曰。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何如。可謂仁乎。子曰。何事於仁。必也聖乎。堯舜。其猶病諸。”에 대한 주석에 “어진 사람은 천지 만물을 자기와 한 몸으로 삼으니, 자기가 아닌 것이 없다.(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莫非己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39. 39)『四書集註』의 『論語』 「雍也」 .
  40. 40)아주비구는 구슬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구슬을 삼킨 거위의 목숨을 해치지 않으려 거위가 삼켰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초계비구는 여러 비구들이 광야에서 도적을 만나 약탈을 당하고 초목에 묶였는데도 초목이 상할까 두려워 묶인 그대로 고통을 감내하였다는 것으로서, 징관澄觀의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 권59에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41. 41)『詩經』 「國風」 ‘召南’.
  42. 42)『論語』 「述而」 .
  43. 43)『孟子』 「梁惠王 上」 .
  44. 44)『孟子』 「梁惠王 上」 .
  45. 45)『中庸』 제13장.
  46. 46)『一切智光明仙人慈心因緣不食肉經』에는 게송으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산문으로 풀었다.
  47. 47)물 거르는 주머니(漉囊) : 녹낭漉囊은 물속의 미세한 생물을 걸러 내는 주머니로서, 비구가 지니고 다녀야 하는 여섯 가지 물건 가운데 하나이다.
  48. 48)『法句譬喩經』 「護戒品」 .
  49. 49)『孟子』 「 梁惠王 上」 .
  50. 50)정주학程朱學 : 정이程頥와 주희朱熹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말한다.
  51. 51)『禮記』 「王制」에 “천자는 빙 둘러싸지 않고 제후는 무리를 덮치지 않는다.(天子不合圍。諸侯不掩群。)”라는 구절이 있다.
  52. 52)『周易』 「繫辭 上」 .
  53. 53)형수가 빠졌을~같은 것 : 권權을 말한다.
  54. 54)끓는 물에~더하는 것 : 원문 ‘潑水添冰’은 ‘끓는 물에 얼음을 더한다.’와 ‘물을 튕겨 얼음에 더한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55. 55)풍랭風冷 : 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56. 56)『書經』에 술을 경계한 「酒誥」 편이 있지만 이 문장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 문장은 원나라 때 유인劉因이 편찬한 『四書集義精要』 권19에 『論語』 「雍也」의 “唯酒無量不及亂”에 대한 호씨湖氏의 주석으로 인용되어 있다.
  57. 57)『戰國策』 「魏策」 .
  58. 58)『四分律』 권16.
  59. 59)네 가지 백성(四民)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백성을 말한다.
  60. 60)『大學』 전10장傳十章.
  61. 61)『周易』 곤괘困卦.
  62. 62)다섯 가지 복(五福) : 오래 살고, 부유하고, 건강하고, 좋은 덕이 있고, 명대로 살다 편안하게 죽는 다섯 가지 복을 말한다.
  63. 63)여섯 가지 흉한 일(六殛) : 오래 살지 못하고, 병에 시달리고, 걱정이 많고, 가난하고, 악하고, 약한 여섯 가지 불길한 일을 말한다.
  64. 64)혼백魂魄 : ‘혼’은 양기 가운데 정미한 것이고, ‘백’은 음기 가운데 정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날아 올라가 흩어지고, 백은 땅에 떨어져 흩어진다고 한다.
  65. 65)견실심堅實心 : 사심四心 가운데 하나. 견고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곧 중생이 본래부터 가지는 참된 마음을 뜻한다. 사심은 육단심肉團心ㆍ연려심緣廬心ㆍ집기심集起心ㆍ견실심이다.
  66. 66)육단심肉團心 : 사심 가운데 하나로, 육체에서 기인하여 우러나는 마음을 뜻한다.
  67. 67)『詩經』 「大雅」 .
  68. 68)『法苑珠林』 권96 「十惡」 .
  69. 69)이 이야기는 송나라 때 소식蘇軾이 지은 『僧圓澤傳』에 실려 있는데 세세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70. 70)『佛祖統紀』ㆍ『佛祖歷代通載』ㆍ『鐔津文集』 등에 나온다.
  71. 71)영명靈明 : 신령스럽게 밝은 존재로서 앞에서 언급한 진명과 견실심을 말한다.
  72. 72)주공周公 :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서 무왕이 죽은 뒤 어린 성왕을 잘 보필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아버지인 문왕, 형인 무왕과 더불어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73. 73)『論語』 「述而」 .
  74. 74)천궁天宮 : 천당과 같다.
  75. 75)교갈膠葛 : 도교에서 말하는 상청上淸의 기를 가리킨다.
  76. 76)『佛說淨飯王般涅槃經』.
  77. 77)황벽 희운黃蘗希運(?~850) : 복건성 복주福州 출신으로 시호는 단제斷際이다. 일찍이 황벽산에서 출가하였으며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다.
  78. 78)명구의 과보(冥龜之報) :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명구가 눈먼 거북이고,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눈먼 거북이 망망대해에서 이리저리 떠다니는 판자의 조그마한 구멍에 자기 목을 집어넣는 것처럼 어려운 일(盲龜遇木)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고려해 볼 때, 자칫 사람으로 태어나지도 못하는 과보를 초래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닌가 한다.
  79. 79)이는 『周易』 「繫辭 下」 에 나오는 내용을 줄인 것이다.
  80. 80)오제五帝와 삼왕三王 : 중국의 전설적인 성인 군주들이다. 오제는 왕조 이전의 다섯 임금인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요堯ㆍ순舜을 이르는데 소호 대신 황제黃帝를 넣기도 한다. 삼왕은 하 왕조를 열었다고 하는 우禹, 은 왕조를 연 탕湯, 주 왕조를 연 문왕과 무왕을 가리킨다. 문왕과 무왕은 두 사람이지만 아버지인 문왕이 닦아 놓은 바탕 위에서 아들 무왕이 주 왕조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에 둘을 합하여 하나로 칭한다.
  81. 81)한나라 명제가~구한 것 : 불교의 중국 전래와 관련된 여러 설화 가운데 후한의 명제明帝(재위 58~75)가 금빛으로 빛나는 신비한 사람이 하늘을 날아 궁중 뜰에 내려오는 꿈을 꾼 뒤 그 가르침을 찾아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어 불교를 처음 받아들였다는 설화가 있는데 이를 말한다.
  82. 82)법륜왕法輪王 : 법륜은 진리의 수레바퀴라는 뜻으로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뜻한다. 따라서 전륜왕이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 왕이라는 뜻이다.
  83. 83)독부獨夫 : 『孟子』에 나오는 말로, 임금이 아니라 한 명의 사내일 뿐이라는 뜻이다.
  84. 84)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붓다의 출생 연도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었는데, 중국 수나라 때 비장방費長房이 편찬한 『歷代三寶紀』에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비장방은 노나라 장공莊公 7년 여름 4월 신묘일 밤에 항성이 보이지 않고 한밤중에 별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주나라의 19번째 임금인 장왕莊王 10년(B.C. 687)을 붓다가 태어난 해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까지 제기된 여러 가지 다른 주장들을 다음과 같이 함께 소개하고 있다. 첫째, 『法顯傳』에 의거하면 은나라 무을武乙 26년 갑오년(B.C. 1167)이다. 둘째, 사문 법상法上이 고구려에서 물어 온 것에 답한 것에 의하면 주나라 다섯 번째 임금인 소왕昭王 24년 갑인년(B.C. 1027)이다. 셋째, 『像正記』에 의거하면 주나라 평왕平王 48년 무오년(B.C. 723)이다. 넷째, 후주의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구마라집의 연기年紀와 석주명石柱銘에 따라 추산한 것에 따르면 주나라 18번째 임금인 환왕桓王 5년 을축년(B.C. 716)이다. 다섯째, 조백림趙伯林이 여산에서 홍도 율사弘度律師를 만나 얻은 『衆聖點記』에 의거하여 추산하면 주나라 정왕貞王 2년 갑술년(B.C. 467)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 가운데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대체로 주나라 소왕 때인 B.C. 1027년에 태어났다는 설을 받아들였는데 기화 또한 이를 따르고 있다.
  85. 85)삼대三代 : 성왕이 세운 왕조인 하ㆍ은ㆍ주 세 왕조를 말한다.
  86. 86)『孟子』 「滕文公 下」 .
  87. 87)기린騏驎 : 중국인들이 상서롭게 여긴 상상 속의 동물로서 성인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나타난다고 한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이리의 이마, 말의 발굽을 가지고, 머리에 살로 된 뿔이 하나 돋아 있으며, 털은 다섯 가지 색깔로 되어 있고 배의 털은 누렇다고 한다.
  88. 88)난새(鸞) :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모양은 닭과 비슷한데 붉은빛에 다섯 빛깔이 섞여 있고, 그 소리는 오음五音과 같다고 한다.
  89. 89)봉황(鳳) :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새. 봉은 수컷, 황은 암컷을 가리킨다.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를 하고 있으며, 몸과 날개는 다섯 가지 빛깔로 빛난다고 한다. 오동나무에 깃들여 살고 대나무 열매를 먹으며 예천이라는 샘의 물을 마신다고 한다. 성스러운 천자가 나타나면 이 새가 나타나는데 뭇 짐승이 따라서 모인다고 한다.
  90. 90)공자의 문하에~사람일 뿐이고 : 『論語』 「先進」 편에 나오는 열 명의 제자를 가리킨다. 덕행의 안연과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의 재아와 자공, 정사政事의 염유와 계로, 문학의 자유와 자하를 말한다.
  91. 91)여래의 바다처럼~않을 뿐이다 : 부처님의 십대제자를 가리킨다. 지혜제일 사리불, 신통제일 목건련, 두타제일 마하가섭, 천안天眼제일 아나율, 다문多聞제일 아난다, 지계持戒제일 우파리, 설법제일 부루나, 해공解空제일 수보리, 논의論議제일 가전연, 밀행제일 라훌라를 말한다.
  92. 92)다섯 가지 덕(五德) : 비구가 가져야 할 다섯 가지 덕. 마구니를 두렵게 하고, 빌어먹고, 계율을 더럽히지 않고, 부당한 방법으로 먹고살지 않고, 악한 행위를 부수는 것을 말한다.
  93. 93)여섯 가지 화합(六和) : 보살이 중생과 더불어 같은 계를 지니고, 같은 견해를 지니고, 같은 행위를 닦고, 몸으로 자비를 베풀고, 말로 자비를 베풀고,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화합하고 공경하는 것을 말한다.
  94. 94)형체와 복식(形服) : 머리 깎고 승복을 입은 것을 말한다.
  95. 95)『筍子』 「解蔽」 .
  96. 96)『論語』 「子罕」 .
  97. 97)『周易』 간괘艮卦. 원문은 “艮。艮其背。不獲其身。行其庭。不見其人。無咎。”이다.
  98. 98)『起信論疏筆削記』 권17.
  99. 99)십이부경十二部經 : 불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용과 형식에 따라 열둘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100. 100)『梵網經盧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 권10.
  101. 101)『南明泉和尙頌證道歌事實』 권1.
  102. 102)『孝經』 「三才章」 .
  103. 103)『周易』 「繫辭 上」 .
  104. 104)『周易』 「繫辭 上」 .
  105. 105)『大學章句』 전9의 주석에 나온다.
  106. 106)삼교三敎 : 불교, 유교, 도교를 말한다.
  107. 107)『中庸』 제6장.
  108. 108)『書經』 「虞書」 ‘大禹謨’.
  109. 109)『道德經』 제37장.
  110. 110)『仁王般若經疏』ㆍ『大方廣佛華嚴經疏』 등.
  111. 111)『周易』 「繫辭 上」 .
  112. 112)간선산인幹善山人 : 판각 사업을 주관한 이를 가리킨다.
  1. 1){底}嘉靖五年全羅道光陽地白雲山招川寺刊本(東國大學校所藏) {甲}嘉靖十六年全羅道興德縣。逍遙山緣起寺重刊本(澗松美術博物館所藏附東吳沙門隱夫顯正論) {乙}嘉靖二十三年黃海道兎山土鶴鳳山石頭寺刊本(高麗大學校所藏) {丙}刊年未詳本(國立圖書館所藏) {丁}五臺山上院寺刊鉛印本。「顯」上有「涵虛堂得通和尙」七字編者除之。自「顯正」至「焉雲(中段三行)」甲本作筆寫。
  2. 2)撰者名。依涵虛得通和尙行狀補入{編}。
  3. 3)「象」作「像」{乙}。
  4. 4)「淨」作「五」{乙}。
  5. 5)「垢」下有「也」{甲}{乙}。
  6. 6)「可以」二字筆寫{乙}。
  7. 7)「下矣…以爲」九字筆寫{乙}。
  8. 8)「緣覺…以生」 九字筆寫{乙}。
  9. 9)「生」作「成諸」{乙}。
  10. 10)「而世…也。何」九字筆寫{乙}。
  11. 11)「惡雖…以去」九字筆寫{乙}。
  12. 12)「去」作「未」{乙}。
  13. 13)「一刑…息於」九字筆寫{乙}。
  14. 14)「諸善…足以」九字筆寫{乙}。
  15. 15)「正」作「五」{甲}{乙}{丁}。
  16. 16)「妄」字形似「妾」{底}{甲}。
  17. 17)「過面…因果」十字筆寫{乙}。
  18. 1)「上目…若勸」十字筆寫{乙}。
  19. 2)「覩」作「睍」{乙}。
  20. 3)「若」作「夫」{乙}。
  21. 4)「惡者…爲善」十字。筆寫{乙}。
  22. 5)「致齊…其難」六字。作來註{甲}。
  23. 6)「礠」作「磁」{丁}。
  24. 7)「率」作「卒」{乙}{丙}。
  25. 1)「綱」作「網」{丁}。
  26. 2)「喫」作「契」{甲}{丁}。
  27. 3)「摝」作「漉」{丁}。
  28. 1)「搏」作「愽」{甲}ㆍ作「博」{丁}。
  29. 2)「博」作「愽」{甲}{乙}{丙}{丁}。
  30. 3)「問」作「間」{甲}{丙}{丁}ㆍ疑間字之失劃{編}。
  31. 4)「素」涵虛語錄之乙本卷末收載「出家詩」作「但」{編}。
  32. 5)「未」涵虛諸錄之乙本卷末收載「出家詩」作「不」{編}。
  33. 6)「問」作「間」{甲}{乙}{丙}{丁}ㆍ間字之失劃。
  34. 7)「洒」作「酒」{乙}{丁}。
  35. 8)「儒」作「侕」{甲}。
  36. 9)「齋」作「齊」{甲}次同。
  37. 1)「儒」作「侕」甲次同。
  38. 2)「殛」作「▼(扌+亟)」{甲}{乙}{丙}ㆍ作「極」{丁}。
  39. 3)「天」作「夫」{甲}{乙}{丁}。
  40. 4)「小」作「少」{甲}{丁}。
  41. 5)「姑」作「祜」{丁}。
  42. 1)「犯」作「𤜱」{乙}{丙}。
  43. 2)「也」作「其」{丁}。
  44. 3)「洪」作「法」{乙}。
  45. 4)「棲」作「捿」{甲}。
  46. 5)「𤴯」作「疣」{丁}。
  47. 1)「磨」作「摩」{丁}。
  48. 2)「飴」作「貽」{丁}。
  49. 3)「須」底本多用「湏」今改爲本字「須」前後倣此不更加註{編}。
  50. 4)「寵」作「竉」{甲}。
  51. 5)「失得」作「得失」{甲}{丁}。
  52. 6)「得」作「失」{丙}。
  53. 7)「邢」作「那」{乙}。
  54. 8)「桀」作「傑」{丁}。
  55. 9)「癘」作「厲」{丁}。
  56. 1)「𥡂」作「魏」{甲}{乙}{丙}{丁}。
  57. 2)「碩」作「石」{甲}。
  58. 3)「璧」作「壁」{甲}。
  59. 4)「褰」作「蹇」{丁}。
  60. 5)「矣」無有{丁}。
  61. 6)「也」作「乎」{丁}。
  62. 7)「易又」作「又易」{甲}。
  63. 1)「雌」作「䧳」{乙}{丙}ㆍ作「紫」{丁}。
  64. 2)「佛大聖大」四字。作筆寫{乙}。
  65. 3)「大」上有「之」{乙}。
  66. 4)「隱惡…禹拜」七字。作筆寫{乙}。
  67. 5)甲本刊記如下「嘉靖十六年丁酉。月。日。全羅道興德地逍遙山緣起寺重刊。陳萬壽書。法師印泉。奇岩。眞應。智行。祖根。法師聖恩。六行。靈輝。澄照。靈祐。學初。明
  68. 5)月。草允。羲暉。祖心。曇華。慧安。惠恩。義浩。希禪。法淳。戒行。䝺瓊。心會。信眉。八還。性崇。水雲。玉冏。了圓。慧浩。森谷。秀文。戒受。惠仁。信全。一翁。禪祖。玉禪。鄭叔孫」。
    乙本刊記如下「每邑个。張元龍。金允孫兩主。尹長守兩主。戒玄。▣▣ 學▣ 學玲。惠还。木手玄牛。飯頭信熙。化士慧聦。正眼。嘉靖卄三年甲辰正月。日。黃海道兎山土鶴鳳山石頭寺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