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함허당득통화상어록(涵虛堂得通和尙語錄) / 涵虛堂得通和尙行狀

ABC_BJ_H0119_T_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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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허당 득통 화상의 행장
문인門人 야부野夫가 적음
스님의 이름은 기화己和이고 호는 득통得通이다. 예전에는 이름은 수이守伊이고, 호는 무준無準이었다.

007_0250_b_22L7)涵虛堂得通和尙行狀 [138]

007_0250_b_23L門人8) [139] 夫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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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諱己和號得通舊名守伊號無準

007_0250_c_01L사는 집은 함허당涵虛堂이다. 속성은 유씨劉氏이고, 중원中原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청聽인데, 벼슬이 전객시사典客寺事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방씨가 자식이 없어서 자비대성慈悲大聖(관세음보살)께 찬송하며 기도하다가 밤중에 문득 대성大聖이 몸소 뱃속에 아이를 넣어 주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홍무洪武 9년 병진년(1376년, 고려 우왕 2) 11월 17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어린아이로 뛰어놀 때부터 몸가짐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어려서 반궁泮宮(성균관)에 들어가서는 날마다 천여 글자를 외웠고, 조금 자라서는 “하나로 꿰뚫었다.”라고 하자, “그렇습니다.”라고 말한 뜻3)을 깊이 통달하였다. 경전의 뜻을 밝히고 학문을 강론하여 그 아름다운 이름을 떨치고, 글을 지으면 이치가 그윽하고 은미하였다. 여러 가지 하는 말마다 금이나 옥이 울리듯 아름다우니 비단에 꽃을 수놓았다는 말로도 표현하기 부족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으로 임금님을 모시면서 큰 명을 받들어 드날리면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윤택하게 하며 인륜을 바로잡아서 틀림없이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에 부끄러울 것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1396년, 태조 5) 성균관에 같이 있던 동무 유생의 죽음을 보고서 세상이 덧없음을 알았고, 몸뚱이가 허깨비처럼 헛됨을 꿰뚫어 보았다. 두 가지 나고 죽는 일에서 벗어나기를 서원하고 일승一乘의 열반을 구하겠다는 뜻을 세우고서 도를 넓혀 네 가지 은혜에 보답하고 덕을 길러서 삼계에 보탬이 되고자 곧바로 출가하려 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그 뜻이 굳지 않아 이리저리 고심하면서 하루도 산수에 마음을 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손에는 『주역』4)을 쥔 채 갈림길에서 머뭇거렸다. 그러다 외로이 홀로 다니는 한 스님을 만나서 가족, 친지에 대한 사랑을 끊었다. 천천히 그 스님의 뒤를 쫓아가서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에 이르자, 그 스님과

007_0250_c_01L所居室曰涵虛堂俗姓劉氏中原人也
007_0250_c_02L考諱聽官至典客寺事母方氏方因
007_0250_c_03L無子頌禱慈悲大聖夜夢忽見大聖
007_0250_c_04L手提孩童納其懷因而有娠以洪武
007_0250_c_05L九年丙辰十一月十有七日生焉爲兒
007_0250_c_06L嬉戱凡所動靜異於常流幼入泮宮
007_0250_c_07L日記千餘言少長深達一貫之唯
007_0250_c_08L經講學擅其嘉聲制述文詞理致幽
007_0250_c_09L百爾出言鏗鏘婉麗錦上添花
007_0250_c_10L足爲喩人之言曰將北面而對揚休命
007_0250_c_11L則致君澤民經緯人倫必無愧於周召
007_0250_c_12L年至二十有一見同舘友生之亡
007_0250_c_13L知世無常觀身虛幻誓出二種生死
007_0250_c_14L志求一乘涅槃弘道以報四恩育德以
007_0250_c_15L資三有即求出家未凝其志皇皇反
007_0250_c_16L無日不心乎山水間手携韋經
007_0250_c_17L趄歧路邂逅一釋栖栖獨行割愛親
007_0250_c_18L徐行杖後到冠岳山義湘菴其僧
007_0250_c_19L「心」作「著」{乙}「嗔」作「眞」{乙}「潵」作
007_0250_c_20L「澘」{乙}
「與權…錄畢」五十一字無有{甲}{乙}
007_0250_c_21L
此下乙本有附錄(權相老輯)「金剛經序」「法
007_0250_c_22L華經後跋」「出家詩(三篇)」其中「金剛經序」
007_0250_c_23L「出家詩」已出於「金剛經五家解說誼(本書第七
007_0250_c_24L册一○∼一四頁)」及「顯正論(本書第七册二二
007_0250_c_25L○頁上段十九行)」故編者除之
此法華經後
007_0250_c_26L編者依乙本補入
此行狀底本在刊記後
007_0250_c_27L編者移置於此
「埜」作「野」{乙}

007_0251_a_01L각보覺寶라는 늙은 스님이 한마음으로 머리를 깎아 주었다.
이듬해 정축년(1397년, 태조 6) 조춘早春(음력 1월)에 회암사檜岩寺에 이르러 왕사王師 무학無學 묘엄 존자妙嚴尊者에게 처음 참상參上하고 몸소 법의 요체를 들었다. 이에 본래의 스승과 이별하고 물러 나와 여러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치열하고 부지런하게 닦았다. 또 갑신년(1404년, 태종 4) 중춘仲春(음력 2월)에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서 방 하나에 홀로 머물며 보고 듣는 것을 끊었는데, 움직이거나 멈추거나 밥 먹거나 쉴 때에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졸음을 쫓고자 깊은 밤에 천천히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읊기를, “가다가다 문득 고개 돌려 보니 산등성이가 구름 속에 서 있네.”라고 하였다. 또 하루는 변소에 들어갔다 나와서 씻는 물통을 내려놓으며 말하기를,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이 참될 뿐이고, 나머지 다른 것들은 참되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 말들이 어찌 그저 한 말이겠는가?
병술년(1406년, 태종 6) 여름에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로 갔는데, 이해부터 기축년(1409년, 태종 9)까지 4년 동안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하는 자리를 세 번 열었다. 경인년(1410년, 태종 10) 여름에 천마산天磨山 관음굴觀音窟에 이르러 깨달음의 나무에서 이는 현묘한 바람을 크게 떨쳐 두루 인연 있는 이들이 모두 교화되게 하였다. 신묘년(1411년, 태종 11) 중추仲秋(음력 8월)에 불희사佛禧寺에 이르러 3년 동안 결제結制하면서 건물을 중수하고 여러 시주자들을 모아 조사의 가풍을 널리 드날렸다.
갑오년(1414년, 태종 14) 봄 3월에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로 가서 작은 방 하나를 골라 ‘함허당涵虛堂’이라고 이름 붙이고, 3년 동안 조금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도를 닦았다. 또 정유년(1417년, 태종 17)부터 무술년(1418년, 태종 18) 사이 한 번의 겨울과 두 번의 여름에 이 절에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를 강의하는 자리를 세 번 열었다.
그 뒤로는 한 곳에 오래 머물며 닦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다녔는데, 산천의 언덕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사람 모여 사는 세상에 거리낌 없이 다니기도 하였다. 나서거나 물러나거나 어찌 조금이라도 일정한 장소에 국한되었을 것이며, 굳이 청하면 또한 머무르니, 모두들 “우리 선지식과 마음껏 함께하네.”라고 하였다.
말과 행위가 호수나 바다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마다 신망이 무거웠다. 이에 다른 사람의 요청으로, 경자년(1420년, 세종 2) 가을에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 향과 제수를 정성껏 갖추어 오대산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靈鑑菴으로 가서 나옹 선사의 진영에 제수를 올렸다.

007_0251_a_01L與一老山人名覺寶者同心薙髮越明
007_0251_a_02L年丁丑早春到檜岩寺初叅王師無學
007_0251_a_03L妙嚴尊者親聞法要於是辭退本師
007_0251_a_04L游曆諸山戰戰勤修又甲申仲春
007_0251_a_05L到檜岩獨居一室杜絕視聽動靜食
007_0251_a_06L無少滅裂因調睡魔永夜經行次
007_0251_a_07L不覺口自詠曰行行忽廻首山骨立雲
007_0251_a_08L又一日入厠還出放下洗桶云
007_0251_a_09L此一事實餘二則非眞此言豈徒然哉
007_0251_a_10L丙戌夏歸于功德山大乘寺是年爲始
007_0251_a_11L至於己丑四歲之間三設般若講席
007_0251_a_12L庚寅夏到天磨山觀音1) [140] [56] 大振覺樹玄
007_0251_a_13L普使有緣皆化辛卯仲秋到佛禧
007_0251_a_14L結制三年重新院宇集諸2)丹樾 [141] [57]
007_0251_a_15L弘揚祖風甲午春三月到慈母山烟峰
007_0251_a_16L占一小室名涵虛堂勤修三載
007_0251_a_17L無少息又自丁酉至戊戌一冬兩夏
007_0251_a_18L五家講席三設是寺自是以後不約
007_0251_a_19L繫境長修而乃任心自運逍遙乎山川
007_0251_a_20L之阿放曠乎人間之世或出或處
007_0251_a_21L有局於方隅固請固留咸謂私我知識
007_0251_a_22L話行湖海望重人心故因人請庚子
007_0251_a_23L秋季入于江陵五臺山誠偹香羞
007_0251_a_24L養五臺諸聖詣靈鑑菴薦羞懶翁眞影

007_0251_b_01L그 암자에서 이틀을 묵었는데 밤에 꿈속에서 어떤 신이한 스님이 가만히 스님에게 말하기를, “그대의 이름은 기화己和, 호는 득통得通이다.”라고 하니, 스님이 손 모아 절하고 공손하게 받고서 곧바로 꿈에서 깨어났는데, 온몸의 기운이 맑고 상쾌한 것이 몹시 맑은 하늘 위에 오른 듯하였다.
다음날 월정사月精寺로 내려와 지팡이도 내려놓고 신발도 벗어 놓고 방 하나에 편히 머물면서 평생토록 도의 태를 길러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이 드러나면 묶어 못 나오게 할 수가 없는 것처럼, 이때 벌써 스님의 도와 덕이 환히 드러나서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퍼져 있었다.
우리 임금님(세종)께서는 멀리는 복희씨伏羲氏와 헌원씨軒轅氏를 잇고, 가까이는 한漢나라의 문제文帝나 경제景帝와 같이 하여5) 다섯 가지 인륜을 공경하며 펼치고 홍범구주弘範九疇의 가르침을 거듭 이으니, 그 은택이 마름이나 갈대까지 두루 적시고, 그 다스림이 벌레나 물고기까지 미쳐서 덕은 이전의 삼왕三王을 능가하고, 명성은 옛적의 오제五帝보다 높았는데, 다시 삼보에 마음을 두고 복전福田을 생각하였다. 이에 스님의 풍모를 듣고 그 아름다운 이름을 어여삐 여겼으며, 신축년(1421년, 세종 3) 가을 초엽에 명하여 어찰御刹 대자사大慈寺에 머물게 하고, 세상 떠난 어머니 대비 전하를 천도하기 위해 영산승석靈山勝席을 크게 여니, 종실의 여러 왕과 부마와 여러 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명에 따라 향을 받들어 직접 참석하였다.
이들이 스님에게 설법하기를 청하자 스님이 강하게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법좌에 높이 올라 법의 요체를 열어 보이기 시작하니, 그 목소리는 맑고도 밝고, 이치는 현묘하고도 깊은데, 저절로 운율을 이루어 마치 바람이 불자 물결이 이는 듯하니, 멀고 가까이서 보고 듣는 이들이 기뻐하며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성대하게 많이 모인 양종兩宗과 오교五敎의 여러 산의 승려들은 모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이때부터 그대로 4년을 머무르다가 갑진년(1424년, 세종 6) 가을에 글을 올리고 물러나서 길상산吉祥山·공덕산功德山·운악산雲岳山 등의 여러 산을 돌아다니며 인연에 따라 날을 보내다가, 문득 삼학三學을 크게 넓히고 일승一乘을 크게 떨쳐 칠중七衆6) 모두가 여래의 바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 참된 가르침을 다시 되돌리고 말법 시대의 운세를 떠받쳐 바로 세워야겠다고 생각하여 신해년(1431년, 세종 13) 가을에 영남 지방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鳳巖寺로 가서 무너진 건물을 중수하였다. 중수가 다 끝나고 나서 스님이 숙명을 꿰뚫어 보는 묘하고 깨끗한 지혜로 당시의 상황을 조용히 살펴보니, 때는 바야흐로 말법의 시대로서 성인의 시대에서 더욱 멀어져 근기와 가르침이 무너지니

007_0251_b_01L信宿其菴夜夢有一神僧從容謂師曰
007_0251_b_02L卿名己和厥號得通師拜手祇受
007_0251_b_03L然夢覺身氣淸爽若登大淸翼日
007_0251_b_04L月精寺放杖脫鞋宴處一室以終平
007_0251_b_05L長養道胎飢飡渴飮消遣日月
007_0251_b_06L是囊錐已露括難禁止道德昭3) [142]
007_0251_b_07L於遐邇惟我聖上遠紹羲軒近同文
007_0251_b_08L敬敷五敎重述九疇恩霑荇葦
007_0251_b_09L洽虫魚德盖前王聲高徃帝而復存
007_0251_b_10L心三寶留意福田是以聞師道風
007_0251_b_11L其令聞辛丑秋初命住大慈御刹
007_0251_b_12L薦先妣大妃殿下大設靈山勝席宗室
007_0251_b_13L諸王駙馬諸君承命奉香濟濟親臨
007_0251_b_14L請師說法師强謝不已高升法座
007_0251_b_15L開法要其聲淸亮理致玄奧自然成
007_0251_b_16L風行水文遠近見聞無不悅服
007_0251_b_17L宗五敎諸山衲子蒼蒼濟濟悉皆罔
007_0251_b_18L自尒仍閱四載甲辰秋上書辭退
007_0251_b_19L游吉祥功德雲岳諸山隨緣度日忽思
007_0251_b_20L張皇三學大闡一乘普令七衆咸到
007_0251_b_21L如來正覺之域挽回眞風扶樹末運
007_0251_b_22L於辛亥秋皈于嶺南曦陽山鳳4)▼(山+石) [143]
007_0251_b_23L重葺頹落修營已畢師更以妙淨宿知
007_0251_b_24L靜觀時態時方末葉去聖愈遠機敎

007_0251_c_01L법을 넓힐 수가 없었다. 이에 전날 기약했던 것을 거두어들이니, 평소 품었던 세 가지 일을 다 마치지 못하였다.
선덕宣德 8년 계축년(1433년, 세종 15) 3월 25일에 짐짓 작은 병세에 의탁하여 몸과 마음이 편치 못하였으며, 4월 1일 신시申時 초각에 이르자 똑바로 가만히 앉아서 말하였다.

湛然空寂          고요하게 텅 비어
本無一物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
靈光赫赫          신령한 빛 밝게 빛나
洞澈十方          온 누리를 꿰뚫어 비추네.
更無身心          나고 죽음을 받을
受彼生死          몸과 마음 다시 없으니
去來徃復          오고 가는 데
也無罣礙          얽매임도 걸림도 없네.

臨行擧目          가면서 눈 들어 보니
十方碧落          온 누리 푸르디푸른데
無中有路          없는 것 가운데 길이 있으니
西方極樂          서방극락이네.

이것이 바로 마지막으로 떠나며 한 말이었다. 말소리가 끝나자 곧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5일 동안 절에 모셔 두었는데 얼굴빛이 평상시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똑같았다.
다비가 끝난 뒤에 이와 뼈를 주워 모아 향수로 씻자 뼈에 붙은 사리가 눈부시게 빛났다. 이때 기이한 향기가 골짜기에 가득하여 길 가는 이들이 모두 향내를 맡았는데, 손 모아 머리 숙여 절하면서 공경하여 믿지 않는 이가 없었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몸소 임금님께 아뢰고, 여러 제자들에게 명하여 네 곳에 부도를 세우게 하자, 날이 가기도 전에 칠중七衆이 자식처럼 모여들어 석실石室을 짓고 안치하였으며, 훌륭한 법회를 열어 예를 마쳤다. 이때 귀의하여 따르며 도를 배우고 계를 받은 이들이, 구름이 모이고 바퀴통에 바큇살이 모이듯 몰려들어 예전보다 더 많았는데, 굳은살이 박이도록 손가락을 꼽아 세어도 그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른바 “한량없는 목숨을 보여 있을 것은 있게 하고, 나고 죽는 모습을 보여 변화할 것은 변화하게 한다.”7)라는 것이 이것이다.
스님의 향년은 58세이고, 법랍은 38세이다. 스님이 평소에 지은 경론의 주석과 시詩와 부賦와 문장들은 진실로 많지 않다 할 수 없지만, 여러 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다 찾지는 못하였다. 그저 직접 쓴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과 『반야오가설의般若五家說誼』 1권, 『현정론顯正論』 1권,

007_0251_c_01L陵夷法不可弘還收前日之所期
007_0251_c_02L遂素懷之三事宣德八年癸丑三月二
007_0251_c_03L十五日故託微恙身心不豫至四月
007_0251_c_04L一日申時初刻卓然靜坐曰湛然空寂
007_0251_c_05L本無一物靈光赫赫洞澈十方更無
007_0251_c_06L身心受彼生死去來徃復也無罣礙
007_0251_c_07L少選又曰臨行擧目十方碧落無中
007_0251_c_08L有路西方極樂此乃㝡後永訣也
007_0251_c_09L聲才盡蕭然而逝留寺五日顏色如常
007_0251_c_10L曾無少異茶毗已訖拾取齒骨香水
007_0251_c_11L洗之5)▼(粘/叅-厽) [144] 骸設利羅赫然光潤當是時
007_0251_c_12L異香滿洞行者皆聞拜手低頭
007_0251_c_13L不敬信者矣孝寧大君閣下6) [145]
007_0251_c_14L命諸徒弟樹浮屠於四處不日之間
007_0251_c_15L七衆子來造石室以安厝設嘉會以展
007_0251_c_16L人之皈附受道佩戒者雲屯輻輳
007_0251_c_17L尤於前日掘指成胝不可勝數所謂
007_0251_c_18L現壽量以存存示生滅而化化者矣
007_0251_c_19L壽五十八法臘三十八先師平生所著
007_0251_c_20L經論註䟽詩賦篇章固不爲不多矣
007_0251_c_21L散在諸處未能盡求但以手書圓覺䟽
007_0251_c_22L三卷般若五家說誼一卷顯正論一卷
007_0251_c_23L「崛」作「窟」{乙}「丹樾」作「檀越」{乙}「着」
007_0251_c_24L作「著」{乙}
「▼(山+石)」作「巖」{乙}「▼(粘/叅-厽)」作「粘」{乙}
007_0251_c_25L
「啔」作「啓」{乙}

007_0252_a_01L『반야참문般若懺文』 2질, 『윤관綸貫』 1권, 「소참에서 혼령에게 내린 말(對靈小叅下語)」 등을 교정하고 여러 본을 써서 원찰願刹에 남겨 두어 뒷사람들에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선사의 덕행은 이미 참으로 위대하여 변변치 못한 글과 거친 말로는 제대로 기술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억지로 이를 적어 뒷시대에 남기는 것은 효를 높이기 때문이니, 이는 효자·효손들의 지극한 정성이다. 하물며 직책이 붓을 잡는 일이니 어찌 감히 완강하게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어쩔 수 없이 거칠게나마 시말을 적어 오래도록 전하여 없어지지 않게 하고자 할 뿐이다.
행적을 적는 말은 이미 다 하였지만, 대사를 경모하는 마음은 다 서술하기가 어려우므로 시 한 수를 붙여서 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法乳恩深天廣大       법의 젖 먹여 주신 깊은 은혜 하늘처럼 넓고 큰데
哀㦲無力報先師       슬프구나, 스승님께 보답할 힘이 없네.
毛錐記德眞兒戱       붓으로 덕을 적는 일은 참으로 아이들 장난일 뿐이니
萬世人人口是碑       영원토록 사람마다 그 입이 바로 비석이 되리.

정통正統 5년 경신년(1440년, 세종 22) 7월 일에 문인 문수文秀가 씀.

판은 희양산 봉암사에 남겨 둠.
모연한 문인 :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해수海修, 도연道然, 윤오允悟, 원징元澄.
도운 이 : 전前 교관敎官 전여필全汝弼, 안주安州 최씨崔氏 정정正貞, 전前 영춘永春 최경손崔敬孫, 전前 주부注簿 이지보李地保, 우씨禹氏, 전前 호군護軍 이인보李人保, 전前 호군護軍 유굉劉宏, 유양한劉陽漢, 김발金拔, 오돈五敦, 최덕崔德, 신계信戒, 성가이性加伊.
각수 : 정심正心, 신공信空, 돈수頓修.

007_0252_a_01L般若懺文二帙綸貫一卷對靈小叅下
007_0252_a_02L語等校正之書之數本留鎭願刹
007_0252_a_03L之於後然先師德行固已偉矣實非
007_0252_a_04L弱辭草語所能稱述然余强爲記之
007_0252_a_05L垂於後世者所以崇孝故也是孝子孝
007_0252_a_06L孫之至誠也又況職在秉筆何敢固讓
007_0252_a_07L肆不獲已粗記始末以傳不杇云爾
007_0252_a_08L記行之言雖已窮而慕師之意實難
007_0252_a_09L盡叙故係之以詩一首露之以情悰
007_0252_a_10L法乳恩深天廣大哀㦲無力報先師
007_0252_a_11L錐記德眞兒戱萬世人人口是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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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統五年庚申七月門人文秀書
007_0252_a_14L留板曦陽山鳳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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募緣門人學眉達明智生海修道然
007_0252_a_16L允悟元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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助揚前敎官全汝弼安州崔氏正貞
007_0252_a_18L永春崔敬孫前注簿李地保禹氏前護
007_0252_a_19L軍李人保前護軍劉宏劉陽漢金拔
007_0252_a_20L崔德信戒性加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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刻手正心信空頓修
  1. 3)“그렇습니다.”라고 말한 뜻 : 공자의 가르침을 말한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증자가 말하였다. ‘알겠습니다.’(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2. 4)『주역』 : 원문의 ‘韋經’을 ‘가죽 끈으로 묶은 경전’으로 보고, 공자가 『주역』을 공부하느라 책을 묶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고사와 기화의 저술 속에 『주역』이 자주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주역』으로 보았다.
  3. 5)한漢나라의 문제文帝나~같이 하여 :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두 임금이 대를 이어 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이를 ‘문제와 경제의 통치(文景之治)’라고 부른다.
  4. 6)칠중七衆 :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사미沙彌, 사미니沙彌尼, 식차마나式叉摩那인데, 출가자와 재가자를 모두 포괄한 전체 불교인을 가리킨다.
  5. 7)한량없는 목숨을~변화하게 한다 : 계환戒環의 『법화경요해法華經了解』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나오는 말로, 여래가 한량없는 목숨을 보이기도 하고, 세상을 떠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면서 자재롭게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1. 1)「心」作「著」{乙}。
  2. 2)「嗔」作「眞」{乙}。
  3. 3)「潵」作「澘」{乙}。
  4. 4)「與權…錄畢」五十一字無有{甲}{乙}。
  5. 5)此下乙本有附錄(權相老輯)「金剛經序」「法華經後跋」「出家詩(三篇)」其中「金剛經序」「出家詩」已出於「金剛經五家解說誼(本書第七册一○∼一四頁)」及「顯正論(本書第七册二二○頁上段十九行)」故編者除之。
  6. 6)此法華經後跋。編者依乙本補入。
  7. 7)此行狀。底本在刊記後編者移置於此。
  8. 8)「埜」作「野」{乙}。
  9. 1)「崛」作「窟」{乙}。
  10. 2)「丹樾」作「檀越」{乙}。
  11. 3)「着」作「著」{乙}。
  12. 4)「▼(山+石)」作「巖」{乙}。
  13. 5)「▼(粘/叅-厽)」作「粘」{乙}。
  14. 6)「啔」作「啓」{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