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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289_c_13L취미고 서문(翠微稿序)내가 일찍이 동악東岳4)의 시 가운데 “희안이 예전에 수초의 이름을 언급했는데, 지금 각성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네. 이와 같은 시승을 어찌 쉽게 얻으리오. 가을날에 나의 정회 금치 못하게 하는구나.(希安曾說守初名。方丈今從覺性行。如爾詩僧那易得。使余秋日不勝情。)”라는 구절을 좋아하며 문득 입으로 외우다가 마음속으로 평하기를, ‘이 노인이 시에 노련해서 시를 허여許與하는 경우가 드문데, 유독 이 스님에 대해서만은 시승詩僧으로 지목하였으니, 이 스님과 더불어 시를 논해 볼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그 사람을 한번 볼 수 있거나, 아니면 그 시라도 한번 볼 수 있기를 소원하였는데, 모두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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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289_c_14L2)翠微稿序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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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289_c_16L余甞愛東岳詩中。希安曾說守初名。方
008_0289_c_17L丈今從覺性行。如爾詩僧那易得。使余
008_0289_c_18L秋日不勝情之句。輒口誦而心評曰。此
008_0289_c_19L老老於詩。於詩小許可。以獨以詩僧
008_0289_c_20L目此師。則此師可與言詩已矣。願得一
008_0289_c_21L見其人。又願一見其詩。而兩不可得。
008_0289_c_22L{底}丁未(顯宗八年)壺谷病未序記本(서울大學
008_0289_c_23L校所藏。卷末附無用集)。自「翠微稿序…駸駸
008_0289_c_24L(次頁上段七行)」 底本缺落。編者依壺谷集卷
008_0289_c_25L一(서울 大學校所藏)而補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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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290_a_01L금년에 내가 마침 서주西州에서 잠깐 노닐 적에, 원인圓印이라는 승려가 나를 따라 노닐었는데, 그는 바로 수초守初 스님의 문도였다. 어느 날 그가 세 편의 초고草稿를 꺼내어 나에게 산정刪定해 달라고 매우 간절히 부탁하면서, 첫머리를 장식할 한마디 말을 아울러 청하였다. 내가 그에게 물었더니 바로 스님의 작품이라는 것이었고, 또 스님의 부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비로소 숙원을 풀게 되었다는 기쁜 마음에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원고를 펼쳐 보다가 다 읽기도 전에 또 동악 노인이 이 시를 안 것이 기쁘기도 하였는데, 이는 대개 시의 음音이 속되지 않고 맑을뿐더러, 시의 율律 또한 일부러 안배함이 없이 자연히 들어맞아서, 소순蔬荀의 습기習氣를 완전히 벗어나5) 휴잠休潛6)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변려체騈儷體의 글들로 말하더라도, 거의 모두가 오묘한 뜻을 제시하며 선善의 근본을 투철하게 밝힌 것으로서, 원래 불교의 뛰어난 말(上乘語)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이를 비유하자면 현포玄圃에 쌓인 옥7)과 같아서 사랑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취사선택을 하여 겨우 열에 두세 개 정도만 수록해 놓았다. 이렇게 한 것은 필시 지극히 정밀한 경지의 작품만 전하려는 의도도 있고, 뒷날 판각板刻하는 부담을 줄이려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하겠으나, 이것이 과연 스님의 뜻에 맞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렇게 서문을 써서 그에게 돌려주었다.정미년(1667, 현종 8) 늦여름에 호곡병부壺谷病夫8)는 신성新城의 납량헌納凉軒에서 쓰다. -
008_0290_a_01L今年余適薄游。西州有釋圓印者。從余
008_0290_a_02L遊。印即師之徒也。一日袖三編草藁。
008_0290_a_03L屬余删定甚勤。仍請余一語。弁諸首。
008_0290_a_04L問之則師之作。而師之請也。余旣以始
008_0290_a_05L償宿願爲喜。受而不辭。閱之未終編。
008_0290_a_06L又喜岳老之知詩也。盖其爲詩。音淸而
008_0290_a_07L不俚。律恊而不俳。絶去蔬筍之氣。駸
008_0290_a_08L駸 [1] 乎休潜之流。至若駢儷書䟽。率皆捷
008_0290_a_09L提竗旨。明透善根。自是空門上乘語。
008_0290_a_10L譬諸玄圃積玉。無非可愛。而旣取又舍。
008_0290_a_11L僅錄十之二三者。必欲務歸至精之域
008_0290_a_12L而。且省它日剞劂之工。不知果當師意
008_0290_a_13L否。遂題此以歸之。
008_0290_a_14L旹丁未季炎。壺谷病夫書于新城之
008_0290_a_15L納凉軒。
- 4)동악東岳 : 이안눌李安訥의 호이다. 여기에 인용된 시는 『東岳集』 권23 〈用希安上人韻。 贈別守初上人入智異山〉이라는 칠언율시 중 앞부분이다.
- 5)소순蔬荀의 습기習氣를 완전히 벗어나 : 그의 시가 승려의 티를 말끔히 벗어 버렸다는 말이다. 소순蔬筍은 채소와 죽순이라는 뜻으로, 승려처럼 채식을 하는 방외인方外人을 가리킨다.
- 6)휴잠休潛 : 혜휴惠休와 도잠陶潛의 병칭이다. 혜휴는 남조 송나라 때 시승으로 세종이 명하여 환속하게 하였는데, 본성은 탕湯씨이고 지위는 양주 종사揚州從事에 이르렀으며, 시는 포조鮑照에 필적한다는 평을 얻었다. 도잠은 동진 말기에서 남조 송나라 초기에 활동한 시인으로, 육조六朝 최고의 시인이라 불린다. 호는 오류선생五柳先生, 자는 연명淵明이며, 사부辭賦 「歸去來辭」 외에 「五柳先生傳」ㆍ「桃花源記」 등의 산문 작품이 있다.
- 7)현포玄圃에 쌓인 옥 : 뛰어나게 아름다운 문장을 비유하는 말이다. 현포는 곤륜산崑崙山 정상의 선계仙界에 있는데, 그곳에는 미옥美玉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晉書』 「陸機傳」에 “그의 글이 마치 현포에 쌓인 옥과 같아서 밤에도 빛나지 않는 것이 없다.(機文猶玄圃之積玉。 無非夜光焉。 )”라는 말이 나온다.
- 8)호곡병부壺谷病夫 : 남용익南龍翼의 호이다. 이 서문은 『壺谷集』 권15에 「翠微稿序」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 1){底}丁未(顯宗八年)壺谷病未序記本(서울大學校所藏。卷末附無用集)。
- 2)自「翠微稿序…駸駸(次頁上段七行)」 底本缺落。編者依壺谷集卷一(서울 大學校所藏)而補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