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 / 翠微大師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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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대사 행장翠微大師行狀
선대사先大師의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취미翠微는 그의 호이다. 성은 성成씨로 창녕이 본관이니, 본조의 명신 성삼문成三問의 방계 후손이다.
만력萬曆 경인년(1590,
일에 경성 반궁頖宮164) 북쪽에서 태어났다. 태몽에 얽힌 이야기와 태어날 때의 상서祥瑞가 없지 않으나 모두 생략한다.
아동기에 놀이를 할 때면 반드시 불사佛事를 행하였고, 그 일이 끝나면 우뚝 앉아서 마치 선정禪定에 든 승려의 모습을 짓곤 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며 속세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부구賦鷗의 나이에 부모를 잃고 형수에 의지하였다. 15세(志學)가 되어서는 재물을 버리고 대범(倜儻)한 기개를 숭상하였다. 어느 날 저녁 잠자리에 들었을 적에 비몽사몽간에 범승梵僧이 급히 부르며 “오는 것이 왜 이렇게 늦는가?”라고 말하였는데, 두 번이나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급히 일어나 앉아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형에게 꿈 이야기를 하며 출가하겠다고 청하니, 형이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다시는 이런 말을 꺼내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아무 말 없이 물러났으나 며칠 동안이나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그리하여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밤에 곧장 성을 넘어서 빠져나왔다.
설악의 덕 높은(耆宿) 경헌敬軒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행자行者가 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 남쪽으로 지리산(頭流)에 이르러 먼저 부휴浮休를 찾아뵙고 계율(尸羅)을 갖추어 시봉하였다(執巾匜). 좌우에서 모실 적에 벽암碧巖 사옹師翁이 소장로小長老로서 제일좌第一座에 거하고 있었다. 하루는 부휴가 스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일좌에게 말하기를 “뒷날 나의 도를 성대하게 할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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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305_a_07L1)翠微大師行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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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大師諱守初字太昏翠微其號
008_0305_a_09L系出昌寧本朝名臣三問之旁裔也
008_0305_a_10L萬曆庚寅六月初三生于京城頖宮之
008_0305_a_11L娠夕之夢誕旦之瑞不無而可略
008_0305_a_12L爲兒嬉戱則必爲佛事已則傲兀
008_0305_a_13L而坐凷然如入定僧見者咸異之曰
008_0305_a_14L非是塵臼中人賦𩿨之歲喪考妣
008_0305_a_15L兄嫂是依及志學唾財賄尙倜儻
008_0305_a_16L夕薦枕形未及交怳然有梵僧疾嘑曰
008_0305_a_17L來何遲如是者再急起坐遲明告兄
008_0305_a_18L以所夢求出家即以手窒口曰勿復
008_0305_a_19L出此語橽矣嘿然而退不樂者數日
008_0305_a_20L才浹旬晨夜便踰城走依雪嶽耆宿敬
008_0305_a_21L落䰂擁毳丙午南抵頭流首謁浮
008_0305_a_22L具尸羅執巾匜侍左右時碧嵓師
008_0305_a_23L以小長老居第一座一日休摩師
008_0305_a_24L會撮而謂第一座曰異日大吾道者

008_0305_b_01L반드시 이 사미沙彌일 것이다. 나는 나이 많고 병이 들었으니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부탁하는 바이니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부휴가 스님의 그릇을 인정하고 중하게 여긴 것이 이와 같았다.
성년이 되고 나서 각지를 두루 답사하며 숙장宿匠을 찾아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법석에서 창槍을 들지 않는 때가 없었다.165) 그러고는 탄식하기를 “옛날에 덕을 품고 도를 행한 이들은 거의 모두 다른 종교와 학술을 섭렵하여, 유교를 만나면 유교를 논하고 노장老莊을 만나면 노장을 논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을 비난하지 못하게 하여 불성佛聖의 교화를 성대하게 하였으니, 어찌 지금처럼 마음이 꽉 막혀 담벼락을 맞댄 것과 같았겠는가.”라고 하고는, 곧장 경성으로 돌아와 한상翰相의 문에 출입하면서 귀족과 사대부들을 사우師友로 삼아 문헌(墳典)을 토론하고 정화精華를 저작咀嚼하는 일을 날마다 멈추지 않았다. 한번은 어느 암자에 묵고 있을 적에, 유생 네다섯 명이 구오癯烏를 운韻으로 하여 시를 짓기를 청하자 스님이 즉시 읊었는데, 그 말구에 “평생에 남는 물건은 없고, 까만 대지팡이 하나 있을 뿐(平生無長物。唯有竹枝烏。)”이라고 하였으므로 당시에 ‘죽지오 스님(竹枝烏僧)’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그때 벽암이 관동에서 교화를 펼치고 있었는데, 스님이 홀연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일단 승복을 입었으면 조사의 도에 심취하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어찌 줄곧 속전俗典에 눈길을 주어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석장을 들고 곧장 그곳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벽암이 자리에 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법상法牀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나서 좌구坐具를 펴고 예를 표한 뒤에 안부를 물으려 하자, 벽암이 말하기를 “어디에서 임바紝婆166)의 씨 보따리를 메고 왔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이 “집착이 없는 곳에 내려놓고 싶습니다.”라고 하니, 벽암이 “짐을 푼 뒤에 보도록 하자.” 하였다. 스님이 소매를 떨치고 승방(僧寮)으로 돌아가니, 벽암이 부휴의 부탁을 생각해서 빠짐없이 가르침을 베풀며 종횡으로 격발激發하자, 스님이 마음과 뜻으로 조용히 깨달아(冥會) 마치 화살과 칼날이 서로 부딪치는 것만 같았다.167) 벽암이 수레를 남쪽으로 돌리자 스님이 수행하며 돌아와 오래도록 모시고서 마음속의 잡목을 제거하고 빗장을 활짝 열어젖혀 현묘한 도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니, 벽암이 종문의 모범(準的)이라고 인가하였다.
이때 무염훈無染熏 공이 교학으로 명성을 떨치자 세상의 학인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어 경론을 가지고 토론하였으므로 스님이 또 그를 깍듯이 모시면서 더욱 정밀하게 공부하여 경론의 심오한 뜻을 계합하였다. 이로부터 선禪은 돈점頓漸을 겸하고 교敎는 성상性相을 아울렀으며,

008_0305_b_01L必此沙彌吾耄且疾非久於世以付
008_0305_b_02L好自將護其器重如此旣勝冠
008_0305_b_03L踏區宇叩叅宿匠所至法席莫不操
008_0305_b_04L嘗歎曰古之抱德行道者率皆漁獵
008_0305_b_05L他宗異學對儒談儒逢老談老禦其
008_0305_b_06L侮誚俾昌熾佛聖之化豈若今之蓬心
008_0305_b_07L墻面者哉即返京輦出入翰相之門
008_0305_b_08L師友貴游薦紳討論墳典咀嚼菁華
008_0305_b_09L進之無已寓一庵宿有靑衿四五軰
008_0305_b_10L以癯烏爲韻請賦詩師立吟其末句云
008_0305_b_11L平生無長物唯有竹枝烏時稱竹枝烏
008_0305_b_12L僧云會碧嵓轉化關東師忽心語曰
008_0305_b_13L零染之士醉心祖道爲樂何一向寓目
008_0305_b_14L於俗典耶荷楖標徑造而値其陞座
008_0305_b_15L即遶牀三匝展坐具設禮儗問訊嵓曰
008_0305_b_16L何處得一擔紝婆子來師曰欲放下無
008_0305_b_17L着處嵓曰卸後相見師擺袖歸寮
008_0305_b_18L以休之囑密指顯諭縱橫激發師心冥
008_0305_b_19L意會箭鋒交拄旣象駕南旋師隨御
008_0305_b_20L而歸陪侍積稔芟其枿拔其樁洞啓
008_0305_b_21L關鍵深入淵玄嵓印之曰宗門準的
008_0305_b_22L是時無染熏公以敎場傑魁八表義學
008_0305_b_23L風趍駿奔橫經問難師又禮事之
008_0305_b_24L精練契經奧義自是禪兼頓漸敎會性

008_0305_c_01L경사자집經史子集도 널리 탐구하여 여유작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이 한번 말을 하면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풀이 바람에 쓸리듯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 사제 간에 선기禪機를 주고받는 것을 보면 간혹 뺨을 치고 수염을 뽑는 것 같은 광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치 임제168)와 황벽169)의 관계처럼 대부분 너무나 엉뚱하여 상정常情에 근사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몇 년 동안 대중과 함께 생활하다가 숭정 기사년(1629, 인조 7)에 출세出世의 요청을 받고는 옥천의 영취靈鷲에 개당하니 학도가 몰려들었다. 이때 상국 장유張維 공이 희고 상인希古上人에게 북산에 결사結社할 것을 명하고는, 스님의 도풍을 사모하여 누차 서한을 보내 청하였으나, 스님이 난색을 표하며 굳게 사양하고 응하지 않으니, 상국이 더욱 존중하여 차거硨璖170) 염주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요청을 받고 관북에 가서 오도悟道와 설봉雪峯 등 제산諸山에서 도를 펼쳤다. 도가 높다는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사방의 승려가 모두 모여들어 법석이 성황을 이루면서 영남(嶺外)에 크게 떨쳤으니, 선학禪學이 융성해진 것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 서쪽으로 항해航海하여 남은 의문을 해결할 목적으로 마침내 동지 4인과 모임을 결성하고는 삿갓을 메고 떠났으나, 양덕에 이르렀을 때 마침 오랑캐가 동방을 유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길이 막혔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에 동쪽으로 태백으로 가서 일백一白을 경유하여 이듬해에 남쪽으로 돌아와 벽암을 찾아뵈었는데, 벽암은 그때 막 의려義旅를 파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방장方丈의 옛 거처로 돌아왔다가 뒤이어 계족의 정혜定慧와 백운의 용문龍門에서 교화를 펼쳤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 진주목사晉州牧使 이소한李昭漢 공이 칠불암七佛庵으로 옮길 것을
명을 채웠는데, 대중을 제접提接하고 자기를 다스리면서 조석으로 나태하지 않았다. 강대수姜大遂 공이 이 공의 뒤를 이어 부임하여 누차 선사禪社에 들어와 담론하면서 하루해를 넘기곤 하였는데, 현묘한 대화가 끝없이 이어지며 막힘없이 전개되자 기이하게 여겨 “참으로 승려 중의 기재杞梓171)이다.”라고 평하였다.
임진년(1652, 효종 3)에 장성의 진원珍原에서 지리산으로 석장을 돌렸다.

008_0305_c_01L且經史子集該綜慱究綽有餘裕
008_0305_c_02L師出一言若崩厥角罔不靡然趍下風
008_0305_c_03L至於師資激敭或能批頰捋鬚
008_0305_c_04L非中容下士所能擬議故多以爲大甚
008_0305_c_05L逕莛不近常情若臨濟之於黃蘗焉
008_0305_c_06L沉于衆有年崇禎己巳衆請出世
008_0305_c_07L開堂于玉川之靈鷲學徒臻湊時相國
008_0305_c_08L張公維命希古上人結社於北山
008_0305_c_09L師道風屢以折簡請師重席牢讓不
008_0305_c_10L益重之遺以𤥭璖數珠一串壬申被
008_0305_c_11L請抵關北唱道於悟道雪峰諸山道聲
008_0305_c_12L遐布四來玄侶坌然畢萃法席蔚然
008_0305_c_13L大振嶺外禪學之盛自此始居無何
008_0305_c_14L欲航游海西諮決餘疑遂結同志四人
008_0305_c_15L擔簦而邁至陽德時値逮夷東躪
008_0305_c_16L梗不得達丁丑東之太白經一白明年
008_0305_c_17L南還省碧嵓嵓方罷義旅歸方丈舊
008_0305_c_18L尋闡化於雞足之㝎慧白雲之龍門
008_0305_c_19L癸未晉牧李公昭漢請移七佛衆盈三
008_0305_c_20L接人治己昒昕匪懈姜公大遂
008_0305_c_21L涖玆邦累入社談論必移日玄言舋
008_0305_c_22L注瀉無竭莞然奇之曰眞僧中杞
008_0305_c_23L梓也壬辰自長之珍原回錫智異
008_0305_c_24L此上底本有「附錄」二字編者除之

008_0306_a_01L그때 마침 이지온李之蘊 공이 용성龍城의 수재守宰로 나왔다가 주곽州郭에서 영입하여 며칠 동안 머물렀는데, 이 공이 자못 고상한 의론을 음미하고서 말하기를 “선학禪學의 고명함을 스님에게서 보았다.” 하고는 항상 자字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병신년(1656, 효종 7)에 보개寶蓋에서 반룡盤龍으로 갔다. 내한內翰 신최申最 공이 관북의 좌막佐幕으로 나가면서 덕원을 지나다가 우졸郵卒을 보내 글을 전하기를 “유순由旬의 거리밖에 안 되는 지역에서 우러러 뵙지 못하다니 제자의 인연이 기박하기만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스님을 존경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기해년(1659, 효종 10) 초겨울에 벽암이 늙고 병들었으므로 돌아가 시봉하면서 화엄 법회를 개설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벽암이 순적順寂하였다. 이로부터 정해진 거소가 없이 혹은 남쪽 혹은 북쪽에 있으면서 오로지 교조敎詔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학자들을 유도할 적에는 반드시 진실된 자애의 마음으로 선도하면서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격려하며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경히 복종하였다.
스님의 조예造詣는 고금을 뛰어넘어 의지하는 바가 전혀 없이 산을 치달리고 바다를 막아 하나의 맛으로 융회融會하였다. 그리고 학자들의 수주守株와 각주刻舟172)의 병통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는데, 의원의 문에는 환자가 많은 것처럼 의심과 질문이 벌 떼처럼 일어나더라도 마치 물이 흐르듯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다. 이를 비유하자면 큰 물고기(鯤鯨)와 작은 쥐(蝘鼠)가 함께 하해河海의 물을 마시더라도 각각 자기의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았으며, 텅 비어서 왔다가 꽉 채워서 돌아가곤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조계曹溪의 도량에 거한
년이었다. 사원의 사대전四大殿에 초상이 없자 공장工匠에게 초상을 빚도록
구軀를 봉안하였으며,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어디에 주찰駐札하든 그렇게 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조각으로 빚은 숫자가 수천에 이르렀다. 혹자가 이에 대해서 “어째서 유위有爲의 일을 하는가. 반드시 무위無爲로 해야 한다.”라고 힐난하면, 스님은 답하기를 “그대는 한쪽 발로만 걸어 다니는 것을 보았는가. 부처의 부처 된 소이는 복혜福慧 두 가지를 아울러 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족존兩足尊이라고 칭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지키는 것이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은 것이 대개 이와 같았다.
병오년(1666, 현종 7)에 구월의 원정元淨에서 법석을 베풀었다. 이듬해(1667년)에 황강의 심원深源에서 석장을 쉬었다. 절도사 성익成杙 공과 별승別乘 윤우갑尹遇甲 공이 모두 스님의 불도에 귀의하였다. 얼마 뒤에 스님이 병에 걸리자 절도사가 자주

008_0306_a_01L李公之蘊出守龍城迎入州郭留數日
008_0306_a_02L頗味高論曰禪學高明於師見矣
008_0306_a_03L字而不名丙申自寶盖之盤龍內翰申
008_0306_a_04L公最出佐關北幕行過德源遣郵卒
008_0306_a_05L致書曰由旬之地未獲瞻仰弟子緣
008_0306_a_06L其欽重又若是己亥初冬以嵓老且
008_0306_a_07L歸侍華嚴開春正月嵓順寂繇是
008_0306_a_08L居無㝎所或南或北專以敎詔爲己任
008_0306_a_09L誘迪學者必以眞慈善導不爲表▼(示+暴)
008_0306_a_10L激滯磨昏少無忤色人皆敬服師之
008_0306_a_11L所詣超今古絶依倚駈山塞海融會
008_0306_a_12L爲一味深砭學者守株刻舟之病
008_0306_a_13L門多疾疑難鋒出辨決如流譬如鯤
008_0306_a_14L鯨蝘鼠共飮河海不過滿腹而已
008_0306_a_15L而徃實而歸憧憧不絶坐曹溪道場
008_0306_a_16L前後一紀寺有四大殿𨷂肖像命工揑
008_0306_a_17L而塑之四殿實六𨈬從而繪畫者如之
008_0306_a_18L凡諸駐札繪若塑其數幾千或難之
008_0306_a_19L何以有爲爲必無爲爲荅曰爾見獨足
008_0306_a_20L而行者乎佛之爲佛以福慧雙行而已
008_0306_a_21L故稱兩足尊其所守不偏大致類是
008_0306_a_22L午施絳紗于九月之元淨越明年憇錫
008_0306_a_23L于黃岡之深源節度使成公杙別乘尹
008_0306_a_24L公遇甲皆馥師之道俄有疾節度數

008_0306_b_01L사자使者를 시켜 문안하며 약을 보내었다. 그해 가을 7월에 묘향산으로 자리를 옮기니, 그곳으로 몰려간 바닷가의 대중이 수백여 인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스님이 『선문염송禪門拈頌』을 열람하다가 정엄 수수淨嚴守遂 선사의 “봄날에 위와 아래의 경치 모두 아리따운데, 비 지나간 숲속에 울리는 두견이 소리(承春高下盡嬋姸。雨過喬林呌杜鵑。)”라는 게송을 접하고는, 마치 한 잔의 강기탕降氣湯을 마신 것처럼 가슴속이 시원해졌으므로, 책을 덮고서 말하기를 “모든 언어 문자는 모두 술 찌꺼기일 뿐이니, 어찌 다른 맛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사자좌에 앉아 총채를 휘두르며 선지禪旨를 펼치는 그 문풍이 초준峭峻하였으므로,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면서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면서 경하하는 자까지 있었다. 하지만 식견이 얕은 자들은 그 규모를 알지 못한 채 탄식을 하며 물러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듬해(1668년) 봄 정월에 대중에게 고하기를 “이 하나의 보신報身을 버려서 돌아갈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영북으로 행장行裝을
월 갑신에 중주 오봉五峯의 삼장三藏으로 거처를 옮겼다. 여름철 4월 기사에 가벼운 질병 증상을 보이자, 부백府伯 홍석구洪錫龜 공이 자주 병문안을 하며 약을 보냈는데, 스님이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운명인데 약을 써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6월 을유에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종고鍾鼓를 쳐서 대중과 결별하며 말하기를 “아침에 걷기 시작해서 저녁이 되면 쉬는 법이다. 항상 걸어 다니기만 하고 쉬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으니, 내가 이제 휴식을 취하려 한다. 그대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을 의지하고, 밖을 향해 쓸데없이 치달리지 말라. 노승은 태어나서 79년이
년을 보내었으니, 나이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요 법랍이 높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서운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괴로워하지 말고 후하게 장례를 치르거나 탑을 세우지도 말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명銘을 청하자 세 손가락을 굽혀서 보여 주었다. 또 누가 임종게를 청하자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항상 제방諸方이 하는 일을 비웃었는데, 더군다나 나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겠는가. 부디 동요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지니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정해일丁亥日 오시午時가 될 무렵에 시승侍僧을 불러 “오늘은 재齋를 빨리 지내도록 하라.” 하고는, 재가 파하자 장유長幼가 방장실에 둘러앉아서 각자

008_0306_b_01L以价問遺之以藥厥秋七月遷席玅
008_0306_b_02L海衆駢趍至數百餘指先是閱禪
008_0306_b_03L門拈頌至淨嚴遂禪師偈曰承春高下
008_0306_b_04L盡嬋妍雨過喬林呌杜鵑如服一杯降
008_0306_b_05L氣湯胸次灑然乃掩卷曰凡諸語言
008_0306_b_06L文字盡爲糟粕豈有餘味也至是據
008_0306_b_07L猊座談柄一揮顓暢禪旨門風峭峻
008_0306_b_08L一席皆瞪目聳聽曰曾未之有至有涕
008_0306_b_09L洟而慶法者持蠡之徒莫能闚其涯涘
008_0306_b_10L望洋而退者盖夥次年春王正月告衆
008_0306_b_11L捨此一報身必有所將歸嶺北理
008_0306_b_12L杖屨二月甲申移入仲州五峰之三藏
008_0306_b_13L夏四月己巳示微恙府伯洪公錫龜
008_0306_b_14L數問之與成藥師却之曰死生有數
008_0306_b_15L安用藥爲六月乙酉靧浴更衣鳴楗
008_0306_b_16L訣衆曰從朝而行及暮而息未有
008_0306_b_17L長行而不息者吾將息矣汝等各信自
008_0306_b_18L勿外邊浪走老僧生七十有九
008_0306_b_19L六十有五年非不耆臘非不高何所
008_0306_b_20L慊焉毋懊惱毋厚葬毋封塔求諸銘
008_0306_b_21L屈三指示之有索辭世偈者師曰吾常
008_0306_b_22L笑諸方所爲况自爲之耶幸勿聒撓㝎
008_0306_b_23L後三日丁亥日至禺中喚侍僧曰
008_0306_b_24L今日早齋齋罷幼艾環擁丈室令各籲

008_0306_c_01L무량수불을 열 번씩 부르게 한 뒤에 결가부좌를 하고 서쪽을 향하여 손을 모으고 앉아서 입적하였다.
그로부터 7일이 지난 계사일癸巳日에 사원의 동쪽 산기슭에서 다비를 행할 적에 여섯 고을에서 승속僧俗이 모두 모여 참석하였다. 그때 정문頂門의 뼈 하나가 불길 밖으로 튀어나왔으므로, 문인 각흘覺屹 등이 수습하여 설봉산 벽송대碧松臺로 돌아가 주송呪誦을 하며 간절히 구한 지
과顆를 얻었으니, 이때가 바로 이듬해인 3월 초칠일이었다. 사리탑을 세워 봉안한 곳이 모두 세 곳이니, 중주의 오봉과 학성鶴城의 설봉과 승평昇平의 조계가 그곳이다. 돌아가신 때부터 탑을 세울 때까지의 상서로운 징조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당초에 교리校理 조중려趙重呂 공이 벼슬길에 오르기 이전부터 뛰어난 명성으로 한 세상을 울렸는데, 스님과 방외의 교분을 맺었다. 당세의 명공名公 괴사魁士로서 참된 가르침(眞乘)을 사모하는 자는 스님과 친하게 지내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동악東嶽 이안눌李安訥 공과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상국 김육金堉 공과 시랑侍郞 임유후任有後 공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스님은 선연禪宴의 여가에 또 게구揭句를 잘 지어서 지금 가시歌詩 1권이 있다. 문제자門弟子 중에 스님의 가죽과 골수를 얻어서 다른 사람의 사범師範이 된 자가 32인인데, 그중 설봉의 해란海蘭과 천관의 민기敏機와 오봉의 철조喆照와 반룡의 광륵廣泐과 구월의 천눌天訥이 첫손에 꼽힌다. 또 암혈에 숨어서 홀로 선善을 닦는 자도 있고, 신명身命을 바쳐서 불법을 위호衞護하는 자도 있는데, 이들도 70여 인에 달한다. 전인前人의 빛을 이어받아 후인의 몽매함을 일깨우며 임제의 종풍을
년에 이르니, 이는 실제로 부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았다.
성총性聰은 일찍이 선사先師의 문하에서 수업하면서 법시法施의 홍은鴻恩을 가장 많이 받았다. 그런데 대들보가 홀연히 부러지고 덕음德音이 영원히 막히면서 하루아침에 갑자기 천고千古의 비통함을 맛보게 되었으니 그 마음을 어떻게 형언할 수가 없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고 들어서 훤히 드러난 사실을 간추려 삼가 행장을 짓는 바이다.
『취미대사시집』 끝

008_0306_c_01L無量壽佛盡十聲結趺向西合爪而坐
008_0306_c_02L經七日癸巳遂闍維於寺之東麓
008_0306_c_03L六郡緇素畢集頂門一骨爆出香薪之
008_0306_c_04L門人覺屹等奉歸雪峰山碧松臺
008_0306_c_05L誦呪懇求三七日獲舍利兩粒即明年
008_0306_c_06L三月初七日也起方墳度安者凡三所
008_0306_c_07L仲州之五峯鶴城之雪峯昇平之曹溪
008_0306_c_08L自易簀比樹塔之日瑞徵非一
008_0306_c_09L可殫記初校理趙公重呂自未釋褐
008_0306_c_10L聲振一世與師結方外交當世名公魁
008_0306_c_11L士之慕眞乘者鮮不與善唯東嶽李公
008_0306_c_12L安訥澤堂李公植相國金公堉侍郞
008_0306_c_13L任公有後最相厚禪宴之隟又善偈句
008_0306_c_14L有歌詩一卷門弟子各得皮髓爲人師
008_0306_c_15L範者三十有二人雪峯海蘭天冠敏
008_0306_c_16L五峯喆照盤龍廣泐九月天訥爲之首
008_0306_c_17L或藏嵓穴而獨善或委𨈬命以衛護者
008_0306_c_18L逮七十有奇胚胎前光彜範來蒙大闡
008_0306_c_19L臨㴉宗風垂四十載果如休所誌性聦
008_0306_c_20L早游先師之門最承法施澒 [5] 樑木忽
008_0306_c_21L德音永閟一旦奄成千古悲不勝懷
008_0306_c_22L摭其世人所共聞見之章章者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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翠微大師集
  1. 164)반궁頖宮 : 성균관成均館의 별칭.
  2. 165)창槍을 들지~때가 없었다 : 스승을 능가하는 면모를 보였다는 말이다. 주 158 참조.
  3. 166)임바紝婆 : ⓢ nimba의 음역으로, 인도의 교목 이름이다. 씨앗과 뿌리, 가지가 모두 쓴맛을 내기 때문에 중생의 고통과 죄업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당나라 한산寒山의 시에 “이 썩은 나무배를 타고서 저 임바의 씨를 딴다.(乘玆朽木船。 采彼紝婆子。 )”라는 표현이 나온다.
  4. 167)화살과 칼날이~것만 같았다 : 불교에서 말하는 최상승 근기의 소유자들이 만나서 불꽃 튀는 선기禪機로 서로의 경지를 시험하며 대결하는 것을 말한다. 『景德傳燈錄』 서문에 “근기와 인연이 맞아떨어져 서로 격돌함에 마치 화살과 칼날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는 것만 같다.(機緣交激。 若拄於箭鋒。 )”라는 말이 나온다.
  5. 168)임제臨濟 : 당나라 때 진주鎭州 임제원臨濟院에 머물렀던 혜조慧照 선사 의현義玄.
  6. 169)황벽黃檗 : 홍주 황벽산에서 출가하여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어받았다.
  7. 170)차거硨璖 : 칠보의 하나로서 백산호나 조개껍데기로 만들며 자거라고도 한다.
  8. 171)기재杞梓 : 멀구슬나무와 가래나무로, 대표적인 좋은 목재이다. 일반적으로 유용한 인재를 상징한다.
  9. 172)수주守株와 각주刻舟 : 사람이 미련해서 구습舊習만을 고수하며 변통할 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을 적에 토끼 한 마리가 달아나다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서 목이 부러져 죽자, 이때부터 일손을 놓고는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며 토끼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으나 토끼는 끝내 다시 오지 않았다는 수주대토守株待兔의 고사가 『韓非子』 「五蠹」에 나온다. 또 배를 타고 가다가 칼을 물속에 떨어뜨린 사람이 칼이 떨어진 뱃전에 표시해 두고는 배가 정박한 뒤에 칼을 찾으려 했다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고사가 『呂氏春秋』 「察今」에 나온다.
  1. 1)此上底本有「附錄」二字。編者除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