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운봉선사심성론(雲峰禪師心性論) / 雲峯禪師心性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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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봉선사심성론雲峯禪師心性論
운봉 대지 쓰다1)

이 ‘심성론’을 해석하는 글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주역』의 도를 이끌어 비슷한 것을 거론한 것이고, 두 번째는 『기신론』의 뜻을 가지고 바르게 풀어낸 것이다.
지금은 첫 번째이다.
공자는 “도가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멀리한다.”2)고 말하였다. 이는 우리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똑같다. 그러므로 『유석질의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역易이라는 것은 연기이니, 성각性覺에서 근원한 것이다. 역은 대체로 우리 불교와 서로 표리가 되나, 이 또한 근원으로 돌아가 법에 들어가는 첫 문이므로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역의 도는 태극을 근원으로 하고, 태극은 또 무극을 근본으로 한다. 무극은 맑고 고요하며 텅 비고 밝아 십허十虛(시방의 허공)를 포괄한 것을 말한다. 곧 부처의 법신이 이것이다. 무극을 끝까지 추적하면 신령하고 오묘한 것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을 태극이라고 한다. 태극은 일진一眞을 품고 있으면서 육합六合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한다. 신령하고 오묘한 것이 일어나 일기一氣가 성대해지는 것을 태초太初라고 하고, 기氣가 돌고 도는 것을 태시太始라고 하며, 신령하고 오묘하며 순수하고 참된 것을 태소太素라고 한다. 두 기운이 쪼개져 맑음과 탁함으로 나뉘는 것을 양의兩儀라고 하는데, 기운이 맑아서 올라가는 것을 양陽이라 하고, 기운이 탁하여 내려오는 것을 음陰이라 한다. 즉 부처의 보신報身이 이것이다. 음양이 각각 12개로 나뉘어 24기氣가 되고, 24기가 섞여 오행五行이 그 가운데서 생겨난다. 가령 한 알의 씨앗이 처음에는 한 덩어리여서 나뉘지 않지만 온갖 오묘함이 모두 그 속에 있으니, 이는 곧 법신으로서 태극의 체이다. 그 싹이 날 때면 뿌리는 아래로 얽히고 싹은 위로 자라나니, 이는 곧 보신으로서 양의兩儀의 상象이다. 위아래의 뿌리와 가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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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003_a_02L雲峯禪師心性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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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_0003_a_04L1)雲峯大智述

009_0003_a_05L將釋此論文二引易道擧類
009_0003_a_06L以論義正釋
今初

009_0003_a_07L
夫子云道不遠人人自遠矣正同我
009_0003_a_08L迦文之敎義也故曰易也者緣起
009_0003_a_09L乎性覺之中盖與吾敎相爲表裏
009_0003_a_10L亦還源入法之初門不可不明也夫易
009_0003_a_11L之爲道原於太極而太極又本乎無極
009_0003_a_12L無極者湛寂虛明抱括十虛之謂也
009_0003_a_13L即佛之法身是也極乎無極之中靈妙
009_0003_a_14L將發謂之太極太極者含畜一眞
009_0003_a_15L塞六合之謂也靈妙發矣一氣盛矣
009_0003_a_16L謂之太初氣之轉旋謂之太始靈妙
009_0003_a_17L純眞謂之太素二氣判而淸濁分
009_0003_a_18L之兩儀氣淸而上者謂之陽氣濁而
009_0003_a_19L下者謂之陰即佛之報身是也陰陽
009_0003_a_20L各分二六爲二十四氣四六錯綜
009_0003_a_21L五行生乎其中矣如有一顆種子初若
009_0003_a_22L混沌未分然衆妙揔在裏許即法身
009_0003_a_23L極之體也及其萌動也根盤于下
009_0003_a_24L屮于上即報身兩儀之象也上下根

009_0003_b_01L나뉘어 한 형태를 나타내고, 기맥氣脈이 섞여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생겨나니, 이는 곧 부처의 화신으로서 조화의 작용이다. 이것은 24기氣가 9궁宮3)에서 섞이고 오행이 생성하는 수數이다. 이것을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분명히 체득한다면 복희·문왕·주공·공자 네 성인께서 발휘한 것이 모두 일심에서 나왔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고, 조화생생造化生生의 오묘함이 역시 드러날 것이다. 역易을 배우는 자는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일기一氣가 발하기 전에 빛을 돌려 한 번 보면 곧바로 자기의 태극을 볼 것이고, 자기의 태극을 보면 곧바로 자기의 건곤乾坤을 볼 것이다. 자기의 건곤을 보면 곧바로 자기의 조화를 볼 것이고, 자기의 조화를 보면 천지와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4)
두 번째, 『기신론』의 뜻을 가지고 바르게 풀어내는 글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대의를 전체적으로 서술하여 본문에 앞서 질의한다.
성교性敎에 “일체중생은 모두 공적한 진심을 가지고 있어서, 비롯함이 없는 본래부터 자성이 청정하고 밝고 밝아 어둡지 않으며, 명료하게 항상 알아서 미래가 다하도록 항상 머무르고 불멸하지만, 망상이 그것을 가리고 있어서 스스로 증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이를 가엾게 여기셔서 이 마음이 모든 부처님과 완전히 같다는 것을 열어 보여주셨다.”5)고 하였다.
또 『화엄경』에 “불자들이여, 어느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지만, 다만 망상으로 집착하여 증득하지 못하는구나. 만약 망상을 떠난다면 일체지·자연지·무애지가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6)라고 하였다.
『능엄경』에 “보각진심은 각각 원만하다. 가령 내가 손가락을 짚으면 해인이 밝게 나타난다. 그런데 그대가 잠깐 동안 마음을 일으키면 번뇌가 먼저 일어나니, 이는 위없는 깨달음의 도를 힘써 구하지 않고 소승에 애착하여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기 때문이다.”7)라고 하였다.
규봉 종밀은 “육도 범부와 삼승 현성의 근본은 모두 신령하게 밝고 청정한 일법계의 마음이니, 성각의 보광이

009_0003_b_01L分㨢一狀氣脉錯綜而枝葉花果
009_0003_b_02L生焉即佛之化身造化之用也此以
009_0003_b_03L二十四氣錯綜於九宮而五行生成
009_0003_b_04L之數了如指掌足以見羲文周孔四聖
009_0003_b_05L人之發揮同出一心造化生生之妙而
009_0003_b_06L亦現矣學易者冝善叅詳向一氣未
009_0003_b_07L發已前回光一覽便見自己太極
009_0003_b_08L自己太極則便見自己乾坤見自己乾
009_0003_b_09L則便見自己造化見自己造化
009_0003_b_10L可以與天地叅矣

009_0003_b_11L以論義正釋文二
總叙大義
009_0003_b_12L文前質疑

009_0003_b_13L
性敎云一切衆生皆有空寂眞心
009_0003_b_14L始本來自性淸淨明明不昧了了常
009_0003_b_15L盡未來際常住不滅妄想翳之
009_0003_b_16L自證得故大覺愍之開示此心全同
009_0003_b_17L諸佛又華嚴云佛子無一衆生而不
009_0003_b_18L具有如來智慧但以妄想執着而不
009_0003_b_19L證得若離妄想一切智自然智無碍智
009_0003_b_20L即得現前楞嚴云寶覺眞心各各
009_0003_b_21L圓滿如我按指海印發明汝暫擧心
009_0003_b_22L塵勞先起由不勤求無上覺道愛念小
009_0003_b_23L得小爲足圭山曰六道凡夫三乘
009_0003_b_24L賢聖根本悉是靈明淸淨一法界心

009_0003_c_01L각각 원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이 비록 우열은 있지만, 진체眞體는 사람마다 하나의 이치이며 모두 평등하므로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없다.
『기신론』에 또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이다.”라고 하였다. 현수 법장賢首法藏은 이를 해석하여 법을 다섯 가지로 나누고, 그 처음에 오직 일심이 본원本源이라고 하였다.8) 목우자牧牛子는 “이 마음이 바로 진여·생멸의 두 문과 삼대三大의 근원이다.”9)라고 하였다. 배휴裴休는 “이것이 중생의 본원이기 때문에 심지心地라고 한다.”10)고 하였다. 하택 신회荷澤神會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이고, 저(신회)의 불성입니다.”11)라고 하였다. 규봉 종밀은 또 “이것이 중생이 미혹하고 깨닫는 근원이기 때문에 여래장이라고 한다.”12)고 하였다. 그렇다면 미혹한 범부와 깨달은 성인이 어찌 각각 원만한 심성의 도리가 없겠는가. 고덕古德은 “이 진지견眞知見은 중생과 부처가 똑같이 가지고 있어서 본래 청정하다. 다만 사람들이 허망한 티끌에 오염되고 무명에 덮였기 때문에 스스로 미혹하여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시어 본래 청정함을 증득하게 하고 스스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여 다시는 미혹하여 잃어버리지 않게 하셨다.”13)고 하였다. 또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다.”14)고 하였으니, 어찌 여래만이 이러한 법을 가지고 있겠는가. 부처와 중생은 동일한 법성으로서 마치 인드라망 구슬이 상호섭입相互攝入함에 아무런 차별이 없는 것과 같다. 고봉 원묘高峯原妙는 “이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고, 남녀도 없고, 노소도 없다.”15)고 하였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도 사람 사람마다 각각 본래 원만히 이루고 있음을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부처는 사람 사람마다 본성에 대영각大靈覺을 가지고 있고 본래 생멸이 없어 예나 지금이나 항상 자재하다는 것을 깨달은 자이니, 이 어찌 무량수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산如山은 “근기가 낮은 범부는 진眞이 망妄을 따라 전화하여 오직 진리를 등지기만 하고 순리대로 하지 않는다. 이는 보배구슬을 가지고도 거지 행세하는 꼴이니,16) 이른바 ‘중생이 매일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산經山은 “만약 일상 생활에서 떠나 따로 나아가 구하려 한다면

009_0003_c_01L覺寶光各各圓滿然則人雖優劣
009_0003_c_02L體隨人一理齊平故無增減也論又
009_0003_c_03L所言法者謂衆生心賢首釋曰
009_0003_c_04L有五重初唯一心爲本源牧牛子曰
009_0003_c_05L是心即是眞如生滅二門三大之源
009_0003_c_06L相國云是衆生之本源故曰心地
009_0003_c_07L澤曰諸佛之本源神會之佛性圭山
009_0003_c_08L又曰是衆生迷悟之源故名如來藏
009_0003_c_09L然則迷悟凡聖豈無各各圓滿之心性
009_0003_c_10L道理也古德曰此眞知見生佛等有
009_0003_c_11L本來淸淨唯人以妄塵所染無明所覆
009_0003_c_12L而自迷失故佛與開示便 [1] 得本來淸
009_0003_c_13L淨者而自悟入不復迷失也又曰
009_0003_c_14L人本具則何獨如來有是㢤佛與衆
009_0003_c_15L同一法性如帝網珠互相攝入
009_0003_c_16L有差別高峯云是法平等故無尊卑
009_0003_c_17L無男女無老少此等皆中間漢子
009_0003_c_18L人介介之本來圓成者也是故古人曰
009_0003_c_19L佛者覺 是人人介介之本性有大靈覺
009_0003_c_20L本無生滅亘古今而自在者此豈不是
009_0003_c_21L無量壽佛也如山曰下凡眞隨妄轉
009_0003_c_22L唯背無順持珠作丐所謂衆生日用不
009_0003_c_23L知也經山曰若離日用別有趣向
009_0003_c_24L撰者名編者補入

009_0004_a_01L이것은 파도를 떠나 물을 구하는 것이고, 그릇을 떠나 금을 구하는 것이니,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 멀어질 것이다.”17)라고 하였다. 방로龐老는 “일상의 일은 별다른 것이 없으니, 다만 내가 스스로 짝해서 만나는 것일 뿐이로다. 신통과 묘한 작용은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일 뿐이네.”18)라고 하였다. 육조 혜능은 “한 물건이 항상 움직이는 가운데 있지만, 움직이는 가운데 얻으려 해도 얻을 수 없다.”19)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말이 어찌 그 사람의 오묘한 마음이 아니겠으며, 사람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한 물건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법은 한 물건이고 사람은 중생이니, 사람과 법이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도가 사람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멀리한다.”20)고 하였던 것이다.

또 게송에서 말하였다.

與君同步又同行   그대와 같이 걷고 또 같이 가니
起坐相將歲月長   일어났다 앉을 때 함께하여 세월이 흘러도 늘 그러하네.
渴飮飢飡常對面   목마르면 물 마시고 배고프면 밥 먹으면서 항상 대면하니
不須回首更思量   고개 돌려 다시 사량思量하지 말지어다.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심성의 체는 천 겁의 세월이 지나더라도 낡지 않으며, 만 년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늘 지금과 같다. 바다와 산이 서로 뒤바뀌는 것을 수없이 겪었고, 바람과 구름이 변화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능히 작아져서 인허鄰虛21)에 들어갈 수 있고, 능히 커져서 법계를 널리 포괄할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이 그 안에 있고, 해와 달이 그 속에 있다. 그러므로 “법 중의 왕이며 최고로 수승하여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여래께서 함께 모두 증명하셨다.”22)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 사람마다 각각 원만하다’는 주장의 근거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람마다의 법신은 모으면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이 옳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증득할 때, 무엇 때문에 중생의 법신은 지금도 망상 속에 있는가. 또 만약 실로 하나가 된다면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여래는 한때에 함께 증득하였는가, 각각 따로 증득하였는가. 혀끝에 눈을 갖춘 수승한 지혜로 이 부분에 이르러 자세히 보라.
어떤 사람은 “이 중생심이 저 태극과 일체다.”라고 말하는데, 잘못이다. 어째서인가. “성각性覺은 반드시 밝지만 망妄의 작용으로 명각明覺이 되었다.”23)고 하였기 때문이다. 명각明覺은 업상業相이다. 마치 계란이 혼합되어 있는 것과 같이 하나의 태극이 아직 분화되지 않은 때에

009_0004_a_01L是離波求水離器求金求之兪遠矣
009_0004_a_02L龎老曰日用事無別唯吾自偶諧
009_0004_a_03L通并妙用運水及般柴六祖云一物
009_0004_a_04L常在動用中動用中收不得如上等說
009_0004_a_05L豈非當人妙心人人本有底一物者也
009_0004_a_06L然則法者一物人者衆生人與法不
009_0004_a_07L相離故也故一古人曰道不遠人
009_0004_a_08L自遠矣又頌曰

009_0004_a_09L
與君同步又同行起坐相將歲月長

009_0004_a_10L渴飮飢飡常對面不須回首更思量

009_0004_a_11L
正謂此也然此心性之爲體也曆千刧
009_0004_a_12L而不古亘萬歲而長今1) [3] 海嶽相遷
009_0004_a_13L幾見風雲變態能小而細入鄰虛能大
009_0004_a_14L而廣包法界乾坤在其內日月處其中
009_0004_a_15L故云法中王最高勝恒沙如來同共證
009_0004_a_16L是也此是人人各各圓滿之根源也
009_0004_a_17L有人若曰人人法身摠爲一者然則
009_0004_a_18L諸佛同證時何故衆生法身今在妄想
009_0004_a_19L中也又若實爲一者恒沙如來一時
009_0004_a_20L同證也各各證也舌頭具眼勝智
009_0004_a_21L此子細看有人云此衆生心與彼太
009_0004_a_22L極一體非也性覺必明妄爲明覺
009_0004_a_23L是也明覺者業相也如雞子混合
009_0004_a_24L正同一太極未分之時也天地陰陽

009_0004_b_01L천지음양이 태극을 본분本分으로 삼는 것과 똑같다. 한편 우리 불교의 전상轉相과 현상現相 두 상相은 모두 업상業相을 근본으로 삼으니, 세계가 처음 만들어지고 중생이 처음 시작할 적에 여기에서 생겨난다.
위와 같은 두 견해는 모두 성각性覺이 반드시 밝고 난 이후의 일로서 ‘허망한 현상’을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미혹한 것이다. 또 천지음양, 24)기氣, 금목수화토 등 오행이 모두 태극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불교에서의 마음과 경계의 만법은 무극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무극이 불교의 법신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러한 설은 모두 비슷한 부류를 들었을 뿐이니, 유교와 불교의 이치가 같지 않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규봉 종밀이 “원형이정元亨利貞은 하늘의 덕으로 일기一氣에서 시작하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부처의 덕으로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한다.”24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태극은 일기一氣이고, 일심은 법신이다. 곧 유교와 불교가 같지 않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앞에서 ‘허망한 현상’이라고 한 것에 대해 한번 논의해 보겠다. 대성大性은 애초에 칠대七大25)였던 것이 아니며, 온전한 하나의 여래장의 체가 업을 따라 발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는 애초에 육근의 몸이었던 것이 아니며, 기세간器世間이었던 것도 아니다. 모두 업을 따라 발현한 모습이다. ‘성性은 진실로 원융하여 처음부터 생멸이 없지만 업을 따라 발현한다’는 말은 부처님께서 ‘칠대의 성性이 화합이나 불화합의 이치가 아님’을 곧장 보여 주신 것이다. 물은 무엇과 화합하여 얼음이 되며, 얼음은 무엇과 화합하여 물이 되는가. 칠대의 성性은 화합을 원인으로 하지 않고, 업을 따라 발현할 뿐이다. 요즘 경론經論의 대덕들이 많이 있는데, 이 대덕들이 한입으로 똑같이 ‘하나의 법신’을 말한다. 그들이 법신 운운하는 것에 대해 나는 그 허와 실을 모르겠다. 깊이 생각하고 오로지 헤아려 보면, 어찌 의심스러운 점이 없겠는가. 누런 얼굴의 늙은이가 말년에 노망이 들어서 사람들에게 잘못 가르쳐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성교性敎에 “모든 중생은 공적한 진심을 가지고 있다.”26)고 하였는데도

009_0004_b_01L太極爲本分之故也又吾家轉現二相
009_0004_b_02L皆以業相爲本世界起始衆生起
009_0004_b_03L生焉如上兩家二節者皆性覺必明
009_0004_b_04L之後以虛妄之事爲實惑矣又天地陰
009_0004_b_05L二十四氣金木水火土等五行
009_0004_b_06L以太極爲本正如吾家心境萬法以無
009_0004_b_07L極爲本也無極者佛之法身是也
009_0004_b_08L此等說皆擧類而已儒釋之理則不同
009_0004_b_09L也明矣故圭山曰元亨利貞乾之德
009_0004_b_10L始於一氣常樂我淨佛之德也
009_0004_b_11L乎一心正謂此也太極者一氣也
009_0004_b_12L心者法身也儒釋不同於此可知矣
009_0004_b_13L者虛妄之事甞試論之夫大性先非
009_0004_b_14L七大全一如來2) [4] 循業發現而已
009_0004_b_15L然則凡我依正先非根身亦非器界
009_0004_b_16L皆則循業之相性眞圓融初無生滅
009_0004_b_17L循業發現云云者佛直示大性非和不
009_0004_b_18L和之理夫水何和而成氷氷何和而成
009_0004_b_19L七大之性不因和合循業發現
009_0004_b_20L此而已如今盛有經論大德此等大德
009_0004_b_21L一口如出一法身法身云云吾未知其
009_0004_b_22L虛實也沉思聊揣豈無疑也無乃黃
009_0004_b_23L面老子末年老魍而錯指示人而然也
009_0004_b_24L然性敎云一切衆生皆有空寂眞心

009_0004_c_01L모두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이 옳다면 필시 육조 시대27)의 훌륭한 스님들이 잘못 번역하였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일체의 경론에서 모두 ‘각각 원만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법신’의 설이 무슨 경전에 있는지 모르겠다. 일곱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는 있지 않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법신 밖에 다시 ‘모으면 하나가 되는 법신’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논쟁거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 귀신이 하나의 시체를 다투는 것과 같고, 공공의 물건을 취해서 자기의 물건으로 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도적질해서 취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공공의 법신을 취해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으면 하나가 된다’고 한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네가 굳이 ‘몸과 눈의 두 감각에 두 개의 지각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너의 한 몸으로 두 부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28)라고 말씀하셨겠는가. 만약 하나의 몸 가운데 다만 하나의 부처만 있다고 한다면, ‘각각 원만하다’는 설이 어찌 사람을 속이는 것이겠는가.
또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세계의 중생들이 ‘하나의 성(一性)’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옳다면 한 사람의 마음이 나뉘어 여러 중생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이고, 또 모든 사람의 마음이 합하여 한 사람의 마음이 될 것이다. 즉 그대의 마음이 나뉘어 여러 사람의 마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합하여 그대의 마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의 말씀에, 형체를 천억 개로 나누고, 몸을 여러 부처로 나눈다는 설은 있지만, 마음을 나눈다는 설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지혜로운 자는 생각해 보라. 허공의 형체 있는 물건도 둘로 가르기 어려운데, 하물며 마음을 나누고 합하는 일에 있어서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은 “보는 것에 늘어나거나 줄어듦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29)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각각 원만하다’는 뜻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마음과 보는 것에 상相이 없어 합하거나 나누는 데 간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험 삼아 논의해 보겠다. 부처님은 또 “만약 보는 것이 바로 물건이라면 너 역시 내가 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이라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보는 것을 함께하는 것이 나의 봄을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009_0004_c_01L皆謂不然然則必是六朝聖師飜譯誤
009_0004_c_02L何故一切經論皆曰各各圓滿故也
009_0004_c_03L不知一法身之說在何經中也七佛經
009_0004_c_04L未之有也若人云自法身之外
009_0004_c_05L有都爲一法身者應有諍論之勢何也
009_0004_c_06L若二鬼之爭一屍也亦如取公然之物
009_0004_c_07L爲自己之物者也是賊取者也何則
009_0004_c_08L公然之法身爲自私之心故也若曰摠
009_0004_c_09L爲一者何故佛謂阿難曰必汝執言身
009_0004_c_10L眼兩覺應有二知即汝一身應成兩
009_0004_c_11L若一身之中但有一佛則各各圓
009_0004_c_12L滿之說3)欺人㢤又沙界衆生云一
009_0004_c_13L然則一人之心分爲多衆心則可也
009_0004_c_14L又一切人之心合爲一人之心也則汝
009_0004_c_15L心分爲幾人之心也以幾人之心合爲
009_0004_c_16L汝心也聖說但有分形千億之說身分
009_0004_c_17L諸佛之說而未聞心分之說智者思之
009_0004_c_18L虛空有形之物難作兩端何況心有分
009_0004_c_19L而合之之事乎故佛云不應說言見有
009_0004_c_20L叙縮然則各各圓滿之義秋毫不忒矣

009_0004_c_21L
心見無相非干合分更試論之

009_0004_c_22L
故佛又云若見是物則汝亦可見吾
009_0004_c_23L之見物則可見若同見者名爲見吾
009_0004_c_24L「徑」與「經」通{編}「莊」當作「藏」{編}「欺」
009_0004_c_25L作「期」{甲}

009_0005_a_01L내가 보지 않을 때에는 어째서 ‘내가 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는가.”30)라고 말씀하셨다. ‘함께 보는 것’은 물건의 자취에 의지한 것이고, ‘보지 않는 것’은 물건의 몸체를 떠난 것이다. 가령 ‘나와 네가 한 물건을 함께 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내가 보는 것’을 보는 것이니, 다만 자취일 뿐이다. 내가 물건을 떠나 보지 않을 때에 그 물건의 몸체는 어디에 있는가. 이미 볼 수 있는 곳이 없으니, 확실히 물건이 아니다.
또 범부와 성인이 똑같이 가지고 있다는 뜻을 자세히 분석해 보겠다.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중생의 번뇌심에 있는 불성佛性이 흐름을 되돌려 출전出纏(본래의 깨달음 자리로 돌아옴)한다. 즉 이것을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라고 이른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에 미혹하기 때문에 중생이고, 자신의 마음을 깨닫기 때문에 부처이다. 부처가 곧 중생이고, 중생이 곧 부처이지만, 미迷와 오悟를 말미암기 때문에 저것과 이것의 상대가 있는 것이다.”31)라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배우는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여 마음의 안락과 해탈을 얻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하니 미혹하다 하리라. 그러므로 마조 스님이 “마음을 떠나 부처를 구하는 자는 외도이고, 마음에 집착하여 부처가 되려는 자는 마군이다.”32)라고 하였던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이 본래 성불해 있음을 깨닫는다면 구경에 자재하고 여실히 안락할 것이다. 갖가지 오묘한 작용도 밖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니, 본래 스스로 구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수 법장은 소疏에서 “만약 이 진체眞體에 성덕性德이 없다면 여래가 이것을 증득하더라도 덕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性을 증득하고 나서 모든 덕을 원만하게 갖추었으니, 진여가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징험하는 것이다.”33)라고 하였다. 불佛과 법法의 명칭은 비록 하나의 글자이지만, 실로 그 본래 가지고 있는 진체眞體는 중생과 부처가 똑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개가 원만히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 물건을 가지고 본다면 사람마다의 면목이 본래 원만히 이루어져 있는데, 어찌 다른 사람을 빌려 연지를 찍고 흰 분을 바르겠는가.”34)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각각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35)고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원만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중생이 비록 원만히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지만, 중생은 지혜의 눈이 없어서 윤회를 달게 받기 때문에, 만약 세상을 벗어난 금비金鎞36)를 가진 이가 아니라면, 누가 무명의 두터운 막을 벗겨내겠는가.37) 그러니 대자대비의 은혜는

009_0005_a_01L吾不見時何不見吾不見之處同見者
009_0005_a_02L依物之迹也不見者離物之體也
009_0005_a_03L謂吾汝同見一物是見吾之見特迹而
009_0005_a_04L當吾離物不見之時其體何在
009_0005_a_05L無處可見定非是物矣

009_0005_a_06L
又凡聖等有之義細細分之河沙衆
009_0005_a_07L煩惱心中佛性反流出纒則是則
009_0005_a_08L名爲河沙諸佛也故曰迷自心故衆生
009_0005_a_09L悟自心故佛而佛即衆生衆生即佛
009_0005_a_10L迷悟故有彼此也今時學者不悟自心
009_0005_a_11L不得安樂解脫心外覔佛1) [5] 故曰
009_0005_a_12L離心求佛者外道執心爲佛者爲魔
009_0005_a_13L悟此心本來成佛究竟自在如實安樂
009_0005_a_14L種種妙用亦不從外來爲本自具足故
009_0005_a_15L故藏疏云若此眞體無性德者如來
009_0005_a_16L證此不應具德2) [6] 性已萬德圓備
009_0005_a_17L即驗眞如本具也然佛與法之名雖曰
009_0005_a_18L一字其實本有之眞體生佛等有故
009_0005_a_19L箇箇圓成之義明矣故曰以一物觀之
009_0005_a_20L則人人面目本來圓成豈假他人添脂
009_0005_a_21L着粉也故曰人各有不亡者存焉此其
009_0005_a_22L圓滿之證也然衆生雖曰圓成生無
009_0005_a_23L慧目甘受輪轉故若非出世之金鎞
009_0005_a_24L誰刮無明之厚膜也然則大悲之恩

009_0005_b_01L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신명身命을 바치더라도 만분의 일도 갚기 어렵다.
또 옛사람이 ‘반야般若’의 제목 아래에 둥근 원을 그렸다. 반야는 중국말로는 지혜이다. 즉 이 둥근 원은 ‘한 물건(一物)’의 글자 아래에 그린 둥근 원과 같다. ‘한 물건’ 역시 최초의 한 구이고, 가장 청정한 법계이다. 그 실제로는 모두 성각性覺을 가리킨 것이고, 무극을 가리킨 것이다.
앞에서 말한 『주역』의 뜻에 대해서 다시 논의해 보겠다. 앞에서 “역의 도는 태극을 근원으로 하고, 태극은 또 무극을 근본으로 한다. 무극은 맑고 고요하며 텅 비고 밝으며 십허十虛를 포괄한 것을 말한다. 곧 부처의 법신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무극을 끝까지 추적하면 신령하고 오묘한 것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을 태극이라고 한다. 태극은 일진一眞을 함축하면서 육합六合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태극이 곧 ‘성각性覺은 반드시 밝지만 망妄의 작용으로 명각明覺이 된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것이 없겠다. 어째서인가. “역이라는 것은 연기緣起이니, 성각性覺에서 근원한 것이다.”38)라고 한 것은 바로 ‘명각明覺’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칠대七大라는 것은 모두 식識을 원인으로 해서 변하기 때문에 식識으로써 총괄할 수 있다. 식識은 성각性覺에서 발생한 망妄의 작용으로 ‘명각明覺’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마땅히 알라. 세간의 일체 경계는 모두 중생의 무명망심無明妄心에 의지하여 머무를 수 있다.”39)고 하였고, 소疏에서 “만약 무명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다면, 이 식識은 경계에 머무르기를 그치지 않는다.”40)고 하였으니, 태극의 도와 다르지 않음이 분명하다.
이상의 설은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지 지금 새롭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배우는 이들은 잘 살펴보기 바란다. 소疏에서는 또 “윗글 가운데 부처의 보신과 화신의 작용을 설한 것은 중생심을 설명하면서 말한 것이고, 지금 중생의 망법妄法을 설한 것은 불심佛心을 설명하면서 말한 것이니, 진실로 마음의 근원은 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 다 옳다고 할 수 있다.”41)고 하였다. 여기서 중생심은 현식現識이다. 『화엄경』에서 “마음은 부처와 같이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마음과 부처와 중생,

009_0005_b_01L沙身命難報萬一也

009_0005_b_02L
又古人般若題下畫圓相般若此云智
009_0005_b_03L即是圓相與一物下畫圓相一體
009_0005_b_04L一物者亦是最初一句子最淸淨法
009_0005_b_05L界也其實皆指性覺亦指無極也
009_0005_b_06L者易義更甞論之故曰夫易之爲道
009_0005_b_07L原於太極而太極又本乎無極無極者
009_0005_b_08L湛寂虛明抱括十虛之謂也即佛之法
009_0005_b_09L是也又極乎無極之中靈妙將發
009_0005_b_10L謂之太極太極者含畜一眞充塞六
009_0005_b_11L [2] 之謂也然則太極者性覺必明
009_0005_b_12L爲明覺者也無疑矣何也易也者
009_0005_b_13L原乎性覺之中
正謂明覺也如所
009_0005_b_14L謂七大皆因識變故之以識識則
009_0005_b_15L性覺之中妄爲明覺者也故論云
009_0005_b_16L知世間一切境界皆依衆生無明妄心
009_0005_b_17L而得住持疏曰若無明未盡已還此識
009_0005_b_18L住持境界不息也可與太極之道無異
009_0005_b_19L明矣如上等說乃古非今也學者
009_0005_b_20L詳之疏又曰上文中辨佛報化之用
009_0005_b_21L則在於衆生心中今辨衆生妄法則在
009_0005_b_22L於佛心之上良以心源無二故得然也
009_0005_b_23L此中衆生心者現識也華嚴云心如
009_0005_b_24L佛亦尔如佛衆生然心佛及衆生

009_0005_c_01L이 셋은 차별이 없네.”42)라고 하였다.
또 이 유심唯心은 진망팔식眞妄八識에도 통하고, 여래장에도 통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써 원인을 삼고 불각不覺으로써 조건을 삼아서 삼세三細43) 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근원을 미루어보면 진심眞心이다. 계환 법사가 “이미 한 번 여기에 미혹하면, 마음이 허깨비 몸 안에 있다고 생각을 결정해 버리고, 오묘하게 밝은 진심이 천지를 감싸고 있으며 삼라만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조그만 몸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저 끝없이 넓은 바다를 내버려 두고 거품 한 방울만을 가지고서 조수潮水 전체라고 여기고, 바다의 크기라고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가까이 있는 몸에서 취하여 여래장을 드러내었고, 여기서는 다시 멀리 있는 사물에서 취하여 여래장성을 원만히 드러내었다. 이것은 모두 육근의 몸과 기세계器世界에 의거하여 사물과 나는 같은 뿌리이고, 옳고 그름은 한 몸이며, 법마다 원만히 이루어져 있고, 티끌마다 두루하다는 것을 밝게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다. 영명 연수永明延壽는 법계송法界頌에서 말하였다.

若人欲識眞空理   진공의 이치를 알고자 한다면,
身內眞如還徧外   몸 안의 진여가 저 바깥까지 두루하다네.
情與無情共一體   정과 무정은 모두 같은 몸이요,
處處皆同眞法界   곳곳이 모두 진법계라네.44)

이것이 칠대七大의 뜻이다.
‘업을 따라 발현함’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정연기淨緣起로서, 진眞에 의거하여 발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염연기染緣起로서, 망妄을 따라 발현한 것이다. ‘망妄을 따라 발현함’에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음이니, 진여본각을 원인으로 하고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삼세三細와 육추六麁45를 생기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 일어남이니, 모든 위位의45) 아뢰야식46)을 원인으로 하고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삼세와 육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연隨緣의 의미는 문자로 나타내기 어렵기 때문에 글 가운데서 전후로 말이 호응되도록 꾸몄을 뿐이다. ‘진眞에 의거하여 발현함’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처음 깨달을 적에 원인이 결과의 바다를 포섭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깨닫고 난 이후 수증修證하는 가운데 결과가 근본 원인을 꿰뚫는 것이다. 진眞에 의거하여 발현함을 설명한 위의 두 구절은 모두 본각이 염染을 따라 정淨에 돌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기신론』에 “여실히 수행하며 방편을 만족하였기 때문에

009_0005_c_01L三無差別又此唯心者通眞妄八識
009_0005_c_02L通如來藏故以心爲因不覺爲緣
009_0005_c_03L生三細等反推其源即眞心矣環師云
009_0005_c_04L旣一迷此則決定以心爲在幻質之內
009_0005_c_05L曾不知妙明眞心範圍天地包呑萬象
009_0005_c_06L乃認之於蕞爾身中何異弃彼無邊刹
009_0005_c_07L認一浮漚以爲全潮之體溟渤之
009_0005_c_08L故前近取諸身現如來藏此復遠
009_0005_c_09L取諸物圓示藏性故皆依根身器界以
009_0005_c_10L使悟物我同根是非一體法法圓成
009_0005_c_11L塵塵周徧法界頌云若人欲識眞空理
009_0005_c_12L身內眞如還徧外情與無情共一體
009_0005_c_13L處皆同眞法界此七大之旨也循業發
009_0005_c_14L現者有二一謂淨緣起依眞發現也
009_0005_c_15L二謂染緣起隨妄發現也隨妄發現者
009_0005_c_16L亦有二種一或就未起以眞如本覺爲
009_0005_c_17L無明爲緣生三細六麁二或約起
009_0005_c_18L以都位棃耶爲因無明爲緣亦有
009_0005_c_19L三細六麁然隨緣之義難名目故
009_0005_c_20L中前後綺互言耳依眞發現者亦二
009_0005_c_21L初悟時因該果海二悟後修證中果徹
009_0005_c_22L因源次上二節皆是本覺隨染還淨之
009_0005_c_23L故論云如實修行滿足方便故
009_0005_c_24L「惑」作「感」{甲}「證」底本作「訂」編者改書
009_0005_c_25L爲「證」以下倣此

009_0006_a_01L화합하는 식의 상相인 아뢰야식을 깨뜨리고, 상속하는 마음의 상相을 멸하여 법신 지혜의 순정淳淨을 드러낸다.”47)고 하였다. 그러므로 현수 법장은 소疏에서 “그때에 나아가 염심染心 중의 업상業相 등 상속상相續相은 멸할 수 있지만, 상속하는 마음의 체는 멸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염染을 따르는 본각의 마음으로 하여금 마침내 근원에 돌아가게 하여 순정淳淨의 원만한 지혜를 이루어 응신應身을 이루니, 이는 시각始覺을 뜻한다. 그러나 이 시각은 별도로 처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본각이 염染을 따라 일어난 것이다. 지금 염染의 조건이 이미 그쳐서 시각이 도리어 본각과 같아졌기 때문에 순정淳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48)라고 하였다.
진여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근본진여根本眞如로서 총상문摠相門이다. 두 번째는 수연진여隨緣眞如로서 별상문別相門이다. 중생심에도 역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진여문의 진심眞心이고, 두 번째는 생멸문의 망심妄心이다. 그러나 두 문은 장애가 없어 모두 일심이다. 그러므로 현수는 『기신론』의 “일심법에 의거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한 것에 대해 “만약 두 문이 각각 다르다면 서로 따를 수 없을 것이고, 만약 오직 일심에만 근본한 것이라면 영향을 주거나 포섭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물음을 던지고서, 스스로 답하기를 “이 두 문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49) 중생도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사람을 말하는 중생이고, 두 번째는 의意와 의식意識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현수 법장은 소疏에서 “모든 식識은 생멸하며 서로 모여 생겨나기 때문에 중생이라고 말한다.”50)고 하였다.
‘아我’의 뜻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거짓 나(假我)’이니, 이것은 색신色身이다. 두 번째는 ‘참 나(眞我)’이니, 이것은 법신이다. 그러므로 『열반경』에서 가섭이 세존에게 “이십오유有51)에 아我가 있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我가 곧 여래장을 뜻하고,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아我의 뜻이다. 이러한 아我의 뜻은 본래부터 항상 한량없는 번뇌에 덮여 있다. 이 때문에 중생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다.”52라고 대답하였다. 경전 가운데 ‘부처님은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는 설이 많이 있다. 『원각경』과 『능엄경』에서만

009_0006_a_01L和合識相滅相續心相顯現法身智淳
009_0006_a_02L故藏䟽云即於其時能滅染心之
009_0006_a_03L中業相等相續之相不滅相續心體
009_0006_a_04L令隨染本覺之心遂即還源成淳淨圓
009_0006_a_05L成於應身始覺義也然此始覺無別
009_0006_a_06L始起即是本覺隨染作也今染緣旣息
009_0006_a_07L始還同本故云淳淨

009_0006_a_08L
眞如亦有二種一本眞如相門
009_0006_a_09L二隨緣眞如此別相門衆生心者
009_0006_a_10L有二種一眞如門眞心也二生滅門妄
009_0006_a_11L心也然二門無碍都是一心故賢首
009_0006_a_12L論云依一心法有二種門若二門
009_0006_a_13L各別不可相從若本唯一心未容影
009_0006_a_14L答云以是二門不相離故衆生者
009_0006_a_15L亦二一人者衆生二意與意識是也
009_0006_a_16L故藏䟽云諸識生滅相集而生故
009_0006_a_17L曰衆生也

009_0006_a_18L
我義亦有二種一假我是色身二眞
009_0006_a_19L是法身也故湼槃經迦葉問
009_0006_a_20L二十五有有我不也佛言我者是
009_0006_a_21L如來藏義一切衆生悉有佛性即是我
009_0006_a_22L如是我義從本已來常爲無量煩
009_0006_a_23L惱所覆是故衆生不能得見經中多有
009_0006_a_24L佛不再迷之說非唯圓覺稜嚴示現佛

009_0006_b_01L‘부처님은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기신론』에서도 “염법染法은 시작은 없지만 끝이 있고, 정법淨法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다.”53고 하였다. 그러므로 ‘미혹하지 않는다’는 뜻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옛말에 “복희·문왕·주공·공자 네 성인이 발휘한 것이 모두 일심에서 나왔다.”54)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쪽 중국의 성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큰 방편력을 가진 보살이 몸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미사역경須彌四域經』에서는 ‘응성보살應聲菩薩은 복희가 되었고, 길상보살吉祥菩薩은 여와女媧가 되었다’고 하였고, 『공적소문경』에서는 ‘가섭迦葉은 그들이 말하는 노자老子이고, 유동儒童은 그들이 말하는 공자孔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법은 천축국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점차 전해져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하다.”55)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라의 우임금은 “요순 때의 사람들은 요순의 마음을 (표준이 되는) 마음으로 삼았었는데, 과인이 임금이 되고 나서 백성들은 각자 자기의 마음을 (표준이 되는) 마음으로 삼으니, 과인은 이를 애통해 하노라.”56)라고 하였고, 옛사람은 “사람 각각에게는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다.”57)고 하였다. 이는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이 같은 것이다. 또 24기氣는 입춘·우수·경칩·춘분·청명·곡우·입하·소만·망종·하지·소서·대서·입추·처서·백로·추분·한로·상강·입동·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이다.58)
두 번째. 「심성론」의 글을 따로 나열하여 모든 의문을 다 해석한다. 글에 세 가지가 있다.
1) 전체를 드러냄으로써 대략 해석한다.
「심성론」에서 ‘심心’이라는 것은, 이른바 신령하게 밝고 청정한 일법계의 마음과 같으며, ‘성性’이라는 것은 성각 보광이 각각 원만하다고 말한 성性과 같다. 그래서 마명은 “법이라는 것은 중생심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중생이라고 말한 것은 여럿도 아니고, 하나만을 말한 것도 아니다. 저것도 바 로 이것이고 이것도 바로 저것이며, 저것도 여래장이고 이것도 여래장이며,

009_0006_b_01L不再迷之義起信論中染法則無始有
009_0006_b_02L淨法則有始無終不迷之義於此
009_0006_b_03L可知矣

009_0006_b_04L
古語曰羲文周孔四聖人之發揮
009_0006_b_05L出一心故曰東夏之所謂聖人者亦皆
009_0006_b_06L大權菩薩之示現故須彌四堿經云
009_0006_b_07L聲菩薩爲伏羲吉祥菩薩爲女媧空寂
009_0006_b_08L所問經云迦葉彼稱老聃儒童彼稱孔
009_0006_b_09L則其法之始於天竺而東漸于此
009_0006_b_10L又夏后曰堯舜之人以堯舜之心
009_0006_b_11L爲心寡人爲君百姓各自以其心爲心
009_0006_b_12L寡人庸 [3] 古人曰人各有不亡者存焉
009_0006_b_13L是則儒釋同風又二十四氣者立春雨
009_0006_b_14L水驚蟄春分淸明糓雨立夏小滿芒種夏
009_0006_b_15L至小暑大暑立秋處暑白露秋分寒露霜
009_0006_b_16L降立冬小雪大雪冬至小寒大1) [7]

009_0006_b_17L2)別列論文群疑盡釋文有三
009_0006_b_18L [8] 3)
約標揔略釋

009_0006_b_19L
論曰心也者如所謂靈
009_0006_b_20L心也性也者性覺寶光各各圓滿之
009_0006_b_21L性也故馬鳴自云所言法者謂衆
009_0006_b_22L生心
此言衆生乃不是多衆非獨
009_0006_b_23L言一介也彼亦是此此亦是彼彼亦
009_0006_b_24L如來藏此亦如來藏彼之所藏者如來

009_0006_c_01L저것이 감추고 있는 것도 여래이고 이것이 감추고 있는 것도 여래이니, 이 여래가 출전出纒하면 성인이고, 이 여래가 재전在纒하면 범부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단지 하나의 미세한 티끌과 같이 일체의 미세한 티끌도 그와 같다.”59)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현수 법장은 “법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오직 일심이니, 화엄일진법계華嚴一眞法界를 증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심에 의해 이문二門을 여는 것이니, 진여문은 돈교頓敎에서 말하는 것이고, 생멸문은 종교終敎에서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생멸문에 의거하여 두 가지의 뜻을 밝히는 것이니, 하나는 각의覺義이고, 다른 하나는 불각의不覺義이다. 네 번째는 불각不覺에 의거하여 삼세三細를 일으키는 것이니, 이것은 대승시교大乘始敎에서 말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현상現相에 의거하여 육추六麁를 내는 것이니, 이것은 소승교小乘敎에서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의 이 다섯 가지의 법은 ‘바로 여러 사람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규봉 종밀은 “근원은 바로 일체 중생의 본각진성本覺眞性이고, 또한 만법의 근원이며, 또한 미오迷悟의 근원이고, 또한 모든 행동과 모든 덕의 근원이다.”60)《글이 번잡하여 다 싣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무착은 “문수는 본래 문수이고, 무착은 본래 무착이다.”라고 하였고, 또 고덕古德은 “사람이 산에 오르는 것처럼 각자 노력하라.”61)고 하였다. 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마셔 물이 차갑고 따뜻한 것을 아는 것과 같다.”62)는 말이 이를 징험하는 것이다. 제방諸方의 여러 사람들이 ‘하나의 성(一性)’이라고 주장하니, 마치 풀 위에 부는 바람과 같고,63) 운봉이 홀로 ‘각각 그 성性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니, 마치 큰 바다에 있는 한 방울 물과 같다. 그런데도 운봉이 이와 같이 큰소리로 주장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판단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 성인들이 직접 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성격이 옛일을 상고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오랜 습성이 되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009_0006_c_01L此之所藏者如來此如來出纒則聖也
009_0006_c_02L此如來在纒則凡也故云只如一微塵
009_0006_c_03L一切微塵亦然
所以賢首曰法有
009_0006_c_04L4) [9] 初唯一心證以華嚴一眞法界
009_0006_c_05L二依一心開二門眞如門則頓敎之
009_0006_c_06L所詮也生滅門則終敎之所詮也三依
009_0006_c_07L生滅門明二義一者覺義二者不覺義
009_0006_c_08L四依不覺生三細乃大乘始敎之所
009_0006_c_09L詮也五依現相生六麁則小乘敎之所
009_0006_c_10L詮也右此五*重之法不是言多人之
009_0006_c_11L心也乃得說一人之心也由是密師云
009_0006_c_12L源者是一切衆生本覺眞性亦是萬法
009_0006_c_13L之源亦是迷悟之源亦是萬行萬德之
009_0006_c_14L文繁不
具載也
無着云文殊自文殊無着自
009_0006_c_15L無着又古德云如人上山各自努力
009_0006_c_16L又云如魚飮水冷煖自知之言驗於此
009_0006_c_17L諸方皆云一性則如草上之風
009_0006_c_18L峯獨說各具其性則如巨壑之一滴也
009_0006_c_19L而啓若此之大口者非胷臆之所判
009_0006_c_20L諸聖之自判性好稽古者亦是宿習難
009_0006_c_21L此下異板{甲}「二別…三義」十三字無有{甲}
009_0006_c_22L「一約標揔略釋 [10] 」上有文如下「雲峯禪師心性
009_0006_c_23L栖岩溪谷科釋門人神秀編錄嵩谷虛舟證正
009_0006_c_24L將釋此論文二一解名題心如鏡之躰性如鏡之
009_0006_c_25L則躰用雖殊其實一也亦可躰相異稱二皆
009_0006_c_26L法身二正述論文三」{甲}
「重」作「種」{甲}次同

009_0007_a_01L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여러 통달한 자들이 함께 증명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2) 문답에 의거하여 별도로 해석한다. 글에 세 가지가 있다.

(1) 이전二纒의 여래장을 해석함에 두 가지가 있다. ① 전체적으로 질문한다.

묻는다.
무엇이 재전이고, 무엇이 출전인가?

② 나누어 답한다. ㉠ 재전에 대해 답한다.

근본당체에 불각의 뜻이 있다. 비록 본각의 지혜가 밝지만 시각의 비춤이 없기 때문에 법신이 오도五道64)를 윤회하는 것이다.
답한다.
재전은 『화엄경』에서 “불자여, 한 중생도 여래의 지혜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다.”65)고 한 것이다. 이것은 ‘대지혜의 광명’이라는 뜻《본각의 지혜 밝음》이고, ‘법계를 널리 비춘다’는 뜻《본각이 모든 법을 비춤》이며, ‘진실을 인식하는 지혜’라는 뜻《비출 때에 전도됨이 없음》이다. 또 이것은 지혜의 체가 끝이 없어 법계에 두루한 것《체대》이고, 체에서의 모래알같이 많은 공덕과 모래알같이 많은 오묘한 작용《상대》이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은 한 명의 중생이 부처의 지혜를 원만히 다 갖추었음을 비유한 것이고, ‘일체의 미세한 티끌’은 일체 중생이 부처의 지혜를 각각 원만히 다 갖추었음을 비유한 것이다. 자신의 몸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를 볼 수 있는 것이 부처와 다름없다는 것이 이것이며, 또 『화엄경』에서 “일체 중생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 정각을 이루었고, 모두 열반에 들어 있었다.”66)고 설한 것이 이것이다. 이는 사람마다의 자성삼보自性三寶이고, 육도범부들이 미혹한 바의 대승이다. 이상은 일체 중생의 재전법신을 설한 것이다. 《위는 모두 성구문性具門을 가리킨 것이다.》

㉡ 출전에 대해 답한다.

과위에 오른 여래가 갖춘 삼각三覺67)의 원만한 덕을 칭찬하였다. 그렇다면 한 분의 여래가 이와 같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여래가 모두 그러하다.
답한다.
옛사람이 “삼불三佛이 원융하고, 십신十身에 걸림 없다.”68)고 하였으니,

009_0007_a_01L改故欲罷而不能者也惟冀諸達者
009_0007_a_02L同垂證明

009_0007_a_03L約問答別釋文三
二纒如來
009_0007_a_04L藏釋二揔問
009_0007_a_05L
何者是在纒何者是出纒

009_0007_a_06L別答二答在纒
009_0007_a_07L
根本當體有不覺義雖有本覺智明
009_0007_a_08L無始覺照了故法身流轉五道

009_0007_a_09L
在纒者華嚴云佛子無一衆生而
009_0007_a_10L不具有如來智惠者是所謂大智惠光
009_0007_a_11L明義故本覺
智明
徧照法界義故本覺現
照諸法
眞實
009_0007_a_12L識智義故現照之
時無倒
又智體無邊廓周法界
009_0007_a_13L
躰上恒沙功德恒沙妙用者
一微
009_0007_a_14L塵者喩一衆生佛智圓滿具足也一切
009_0007_a_15L微塵者喩一切衆生佛智各各圓滿具
009_0007_a_16L足也 [4] 自於身中得見如來廣大智惠
009_0007_a_17L佛無異者是華嚴又云 [5] 普見一切衆生
009_0007_a_18L皆成正覺皆般湼般者是也此是 [11] 人人
009_0007_a_19L自性三寶亦是六道凡夫所迷之大乘
009_0007_a_20L如上等說一切衆生在纒法身 [6] 上皆指
性具門

009_0007_a_21L答出纒
009_0007_a_22L
果上如來三覺圓萬德稱讃則非唯
009_0007_a_23L一如來如是一切如來 [7] 皆然

009_0007_a_24L
[8] 古人云三佛圓融十身無碍一切

009_0007_b_01L일체는 항상 진여의 불보佛寶에 머물러 있다. 또 『기신론』에서 “저 몸의 체상이신 법성진여의 바다와 무량공덕의 창고”69)라고 하였다. 이른바 “지금 지혜의 부리로 무명의 껍질을 깨뜨리면, 삼신의 부처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현전하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읊었다.
보신과 화신은 진실이 아니니 허망한 인연인 줄 알라 법신은 티 없이 청정하고 끝없는 세상에 계시네.70)
무대 위에서 노는 꼭두각시를 보라
밀고 당기는 것이 모두 숨어 있는 사람의 힘 빌린 것이네.71)
이는 부처님과 보살과 성현들의 출전 여래장이다.《위는 모두 공행문功行門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은 ‘성각보광이 각각 원만하다’는 의미를 설한 것일 뿐이다. 또 알아야 할 어떤 일이 있으면 알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방諸方의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는 ‘하나의 법신설’에 대해 그 뜻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단지 자신의 견해일 뿐, 불언량佛言量(부처님 말씀)에 전혀 없으니, 가소롭다. 불언량도 없을 뿐만 아니라 비량比量(추론)도 없으니, 저들의 주장이 참으로 가엾고 한심스럽도다.

(2) 두 각覺의 뜻에 의거하여 해석한다.

이른바 “미迷와 오悟의 인연을 따라 업을 짓고 고통을 받으면 ‘중생’이라 하고, 도를 닦아 진리를 증득하면 ‘제불諸佛’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각覺과 불각不覺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뜻을 아는 이가 없어 나로 하여금 규봉 종밀을 생각하게 한다.

글에 두 가지가 있다. ① 두 각覺에 대해 정면으로 질문한다. ㉠ 질문한다.

묻는다.
앞에서 각覺과 불각不覺에 대해서 말했는데, 각은 어떤 물건이며, 불각은 어떤 물건인가?

㉡ 답한다.

답한다.각覺이란 마음은 본래 깨끗하고 허망함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불각不覺이란 마음은 본래 깨끗하고 허망함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진여의 즐거움은 본래 있지만 잃어버려서 알지 못하고, 허망한 괴로움은 본래 공하지만 얻어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72)라는 것과 또 “이것은 단지 염정연기의 모습이고, 흐름을 돌이키고 습성을 등지는 문인데도,

009_0007_b_01L常住眞如佛寶又論云彼身體相
009_0007_b_02L性眞如海無量功德藏乃所謂今以智
009_0007_b_03L1) [12] 觜喙破無明殼三身之佛當處現
009_0007_b_04L前者是也故古2) [13]

009_0007_b_05L
報化非眞了妄緣法身淸淨廣無邊

009_0007_b_06L看取棚頭弄傀儡抽牽全借裡頭人

009_0007_b_07L
3) [14] 佛菩薩賢聖之出纒如來藏矣上皆
指功
009_0007_b_08L
如上等說性覺寶光各各圓滿之
009_0007_b_09L意故云爾又有一事可知而不可不知
009_0007_b_10L諸方一法身之說細觀其義但有
009_0007_b_11L自所見一無佛言量4) [15] 非唯一無
009_0007_b_12L佛言量亦無有比量可悲可嘆5) [16]

009_0007_b_13L
約二覺義釋所謂隨迷悟緣造業
009_0007_b_14L受苦遂名衆生修道證眞遂名諸
009_0007_b_15L此是覺不覺樣子無人知此意
009_0007_b_16L令我憶圭山

009_0007_b_17L
文二正問二覺二初問
009_0007_b_18L6)向者 [17] 覺不覺7)云云 [18] 覺知何物不覺
009_0007_b_19L何物

009_0007_b_20L
後答
009_0007_b_21L覺者覺心本淨覺妄本空者也不覺
009_0007_b_22L不覺心本淨妄本空者也所謂眞樂
009_0007_b_23L本有失而不知妄若本空 [9] 得而不覺
009_0007_b_24L又所謂此但染淨 [10] 緣起之相反流背習

009_0007_c_01L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함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모두 『기신론』에서의 ‘근본불각’이나 ‘지말불각’과 같은 것이다.
가령 지금 남북의 법을 주장하는 종사들은 강론할 때에 오직 ‘근본불각’ 넉 자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문자는 전해 주면서도 그 의미는 풀이하지 않으니, 잘못된 것이다. 문자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글의 의미도 알지 못하니, 더욱 가소롭다.
『기신론』에는 스스로 과科를 두어73) ‘근본불각根本不覺’이라고 하였고, 본문에서 ‘진여를 알지 못한다(不知眞如)’고 하였으며, 주註에서 ‘이치대로 요달하지 못한다(不了如理)’고 하였고, 비유에서 ‘바른 방향을 잃은 것과 같다(如迷正方)’고 하였다.74)이 네 구절은 그 가운데 각각 ‘미혹하는 주체(能迷)’와 ‘미혹하게 되는 대상(所迷)’을 다 갖추고 있다. 과科에서의 ‘근본根本’과 본문에서의 ‘진여眞如’와 주註에서의 ‘이치대로(如理)’와 비유에서의 ‘바른 방향(正方)’은 미혹하게 되는 대상의 장애이다. 과科에서의 ‘불각不覺’과 본문에서의 ‘알지 못한다(不知)’와 주에서의 ‘요달하지 못한다(不了)’와 비유에서의 ‘방향을 잃다(迷方)’라는 것은 모두 미혹하는 주체의 장애이다. 그러므로 ‘근본을 불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뜻을 해석함이 과목科目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른바 진여장眞如障·소지장所知障·이장理障·지애智碍 등과 같은 것들이니, 모두 장애되는 대상을 따라 이름을 얻은 것이다.
『원각경』의 ‘이장理障’을 『원각경소』에서 설명하면서 ‘근본무명’75)이라고 말한 것은, 『기신론』에서의 ‘근본불각’과 같다. 어째서인가. ‘근본’은 이理이고, ‘무명’은 장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규봉 종밀은 “무명이라는 말은 ‘저(他) 지혜의 밝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본각의 밝음은 있지만 시각의 밝게 비춤은 없다. 시각은 조건을 따라 처음 드러난 것이고 근본에 상대하였으므로 ‘저(他)’라고 하였다.”고 하였고, 또 “『기신론』에서 불각이라 한 것은, 단지 글이 다른 것일 뿐이다.”76)라고 하였다. 주註에서 “‘불不’이라고 한 글자는 바로 ‘무無’이고, ‘각覺’이라고 한 글자는 바로 ‘명明’이다.”라고 하였다.

009_0007_c_01L之門而不覺妄念本8) [19] 心性本淨9) [20]
009_0007_c_02L是與論中根本不覺枝末不覺一體也
009_0007_c_03L如今南北主法之宗師講論之時唯傳
009_0007_c_04L根本不覺四字10) [21] 之文不釋字音
009_0007_c_05L非唯不釋字音亦未有所*傳之義
009_0007_c_06L又可*咲矣 11) [22] 中自有科云根本不覺
009_0007_c_07L文云不知眞如註云不了如理喩云如
009_0007_c_08L迷正方等四節於中各具能所二迷
009_0007_c_09L中根本文中眞如註中如理12) [23] 中正
009_0007_c_10L方者皆所迷之障13) [24] 科中不覺文中
009_0007_c_11L不知註中不了喩中迷方者皆能迷之
009_0007_c_12L障也故云不覺根本也如所謂釋義不
009_0007_c_13L出科目者也如所謂眞如障所知障理
009_0007_c_14L障智碍等一類 [11] 是從所障得名也
009_0007_c_15L理障中䟽云根本無明與論中根本
009_0007_c_16L不覺一體*也何耶根本理也無明障
009_0007_c_17L故圭山云言無明者無他智明
009_0007_c_18L謂雖有本覺之明而無始覺照了始覺
009_0007_c_19L從緣始現對本故名爲他又云論名不
009_0007_c_20L但文異耳註云不者是無覺即是明
009_0007_c_21L「惠」作「慧」{甲}「人」下有「頌」{甲}「是」作
009_0007_c_22L「皆」{甲}
「咲」作「笑」{甲}次同「矣」作「也」
009_0007_c_23L{甲}
「向者」作「所言」{甲}「云云」作「者」{甲}
009_0007_c_24L「空」作「無」{甲}「皆」上有「此」{甲}「傳」作
009_0007_c_25L「詮」{甲}次同
「諭」作「論」{甲}「喩」作「諭」
009_0007_c_26L{甲}
「也」無有{甲}次同

009_0008_a_01L그러므로 ‘다만 글자가 다를 뿐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근본의 체에 불각의 뜻이 있고, 또 물들게 함(能染)의 뜻과 생겨나게 함(能生)의 뜻이 있다. 물들게 함의 뜻은 육염六染이고, 생겨나게 함의 뜻은 삼세三細와 육추六麁의 두 가지를 생겨나게 함이다. 또 지말불각枝末不覺이 있는데 위의 뜻과 같다. 어째서인가. 『기신론』에 “무명이 일체의 염법染法을 생기게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체의 염법染法이 모두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또 “불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세 가지 상相을 일으키는데, 저 불각과 상응하여 떨어지지 않는다.”77)고 하였다. 그러므로 주에서 “상相은 체體를 떠나지 않고, 말末은 근본을 떠나지 않으므로 무명에 의거하여 망심을 일으키고, 망심에 의거하여 무명을 일으킨다.”78)고 하였다. 망심妄心은 지말枝末로서 미혹하게 되는 대상이고, 무명無明은 불각不覺으로서 미혹하는 주체이다. 위의 두 구절을 고쳐 바꾼 사람은 단지 한두 사람일 뿐이다. 믿지 못하는 자들이 삼대(麻)처럼 많고 좁쌀처럼 많으니, “한 사람이 전한 것은 빈말이지만, 만 사람이 전하면 사실이다.”79)라고 말하는 꼴이다. 이는 마치 “(공양간을 담당한 스님이 아닌) 일반 스님이 음식에 소금을 더하고, 음식에 국을 더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가소롭도다. 두 구절이란, 첫 번째는 각각 원만이고, 두 번째는 근본과 지말의 두 불각不覺을 말한다.

② 두 각覺을 통해서 걸림 없음을 해석한다. ㉠ 질문한다.

또 묻는다.
경과 논에 ‘걸림 없음’의 설이 많은데, 몇 가지의 ‘걸림 없음’을 말하고 있는가?

㉡ 답한다.

답한다.
『기신론』에 “진여의 법을 여실히 알지 못한다.”80)고 한 것은 근본불각으로서 이른바 동쪽에 미혹한 것이고,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 그 망념이 있게 되었다.”81)고 한 것은 지말불각으로서 서쪽으로 여기는 것이다.
서쪽 밖에 동쪽이 없고 동쪽 밖에 서쪽이 없다는 것은, 비유 가운데 ‘동서가 걸림 없음’을 말한다.
진여 밖에 생멸이 없고 생멸 밖에 진여가 없다는 것은, 법 가운데 ‘진眞과 망妄이 걸림 없음’을 말한다.
서천西天(오늘날의 인도)이 이곳의 땅이고 이 땅이 서천이라는 것은 ‘장소가 걸림 없음’을 말한다.
매화 가지에 핀 한 송이 꽃으로

009_0008_a_01L故云但文異耳根本當體有不覺義
009_0008_a_02L復有能染義能生義能染義者六染
009_0008_a_03L能生義者生三細生六麁之二生者也
009_0008_a_04L又有枝末不覺亦如上義何者論云
009_0008_a_05L當知無明能生一切染法以一切染法
009_0008_a_06L皆是不覺相故又云依不覺故生三種
009_0008_a_07L與彼不覺相應不離故註云相不
009_0008_a_08L離體故末不離本故依無明起妄心
009_0008_a_09L依妄心起無明故妄心者枝末所迷也
009_0008_a_10L無明者不覺能迷也如上兩節改易者
009_0008_a_11L但有一二人1)而已 [25] 不信者如麻似粟
009_0008_a_12L所謂一人傳虛萬人傳實者2) [26]
009_0008_a_13L僧鹽加飯羹加飯之言無殊可*咲矣 [12]
009_0008_a_14L兩節者一各各圓滿二根本枝末二不
009_0008_a_15L覺*也

009_0008_a_16L因二覺釋無碍二初問
009_0008_a_17L
又問經論多有無碍之說幾種無碍耶

009_0008_a_18L後答
009_0008_a_19L
論中不如實知眞如法者根本不覺
009_0008_a_20L所謂迷東不覺心起而有3) [27] 念者
009_0008_a_21L末不覺爲西也西外無東東外無西
009_0008_a_22L此喩中東西無碍眞如外無生滅
009_0008_a_23L生滅外無眞如者此法中眞妄無碍西
009_0008_a_24L天此土此土西天者此處無碍梅枝

009_0008_b_01L천하가 봄임을 충분히 알고, 오동나무 한 가지로 천하가 가을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시간이 걸림 없음’을 말한다. 이른바 “도솔천을 떠나지 않은 채 왕궁에 강림하였고, 어머니의 태를 벗어나지 않고 중생제도를 마쳤다.”82)는 것과 같다.
또 거울은 마음과 같고 형상은 경계와 같으니, 형상 밖에 거울이 없고 거울 밖에 형상이 없다는 것은, 비유 가운데 ‘거울과 형상이 걸림 없음’을 말한다.
경계 밖에 마음이 없고 마음 밖에 경계가 없다는 것은, 법 가운데 ‘마음과 경계가 걸림 없음’을 말한다.
‘이理와 사事가 걸림 없음’은, 『법화경』에 “이 법이 법위法位에 머물러 있어서 세간의 모습에 항상 머무른다.”83)고 한 것이다. ‘이 법’이라고 한 것은, 『능엄경』에서 말한 오음·육입·십이처·십팔계·이십오유·산하의 기세간이니, 원래는 여래장성如來藏性이다. 과科에서 ‘망妄을 요달하면 진眞이다’라고 한 것은 칠대七大의 만법이 애초부터 물과 불이었던 것이 아니며, 묘법 아닌 것이 없고 실상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누가 홀로 없겠는가. 왜냐하면 각각 원만하기 때문이다. ‘법위法位에 머문다’는 것은, 일체법은 이 마음을 떠난 밖에 따로 체성이 없음을 밝힌 것이니, 거울에 그림자를 드러낸다는 것과 같다. 가령 거울에 비친 그림자는 칼날로 상처 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그림자는) 같은 거울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습이 항상 머무른다’는 것은, 일체의 세간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드러나 있어 나가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으며, 잃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아 항상 일심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법이 바로 진실성이기 때문이다.
또 한 터럭이 거대한 바다의 물을 삼키고 겨자씨가 수미산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이 걸림 없음’을 말한다. 성품 하늘에 있는 깨달음의 달빛이 삼라만상을 비추면 넓거나 좁거나 크거나 작거나 어느 것 하나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다.
또 빗속에서 좋은 달을 본다는 것은, ‘밝고 어두움이 걸림 없음’을 말한다.
불 속에서 맑은 냇물을 긷는다는 것은, ‘뜨겁고 찬 것이 걸림 없음’을 말한다.
똑바로 서서 머리를 땅으로 떨어뜨리고

009_0008_b_01L片白足知天下春梧桐一葉可知天
009_0008_b_02L下秋者此時無碍所謂未離兜率
009_0008_b_03L降王宮未出母胎度生已畢一*也
009_0008_b_04L又鏡如心也像如境也像外無鏡
009_0008_b_05L外無像者此喩中鏡像無碍境外無心
009_0008_b_06L心外無境者此法中心境無碍理事無
009_0008_b_07L碍者法華云是法住法位世間相常
009_0008_b_08L住者是也

009_0008_b_09L
是法者 4) [28] 5) [29] 五陰六入十二
009_0008_b_10L十八界二十五有山河器界
009_0008_b_11L是藏6) [30] 科中了妄即7) [31] 則七大萬
009_0008_b_12L先非水火無非妙法无非實相
009_0008_b_13L何人獨无乎以各各圓滿故也住法
009_0008_b_14L位者明一切法離此心外无別體
009_0008_b_15L猶如鏡中能現影也如鏡中影
009_0008_b_16L非刃所傷以同鏡故也

009_0008_b_17L
世間相常住者一切世間境界
009_0008_b_18L於中現不出不入不失不壞常住
009_0008_b_19L一心以一切法即眞實性故也

009_0008_b_20L
又毛呑巨海水芥子納須彌者此大
009_0008_b_21L小无碍 [13] 性天覺月光被萬像洪纎
009_0008_b_22L巨細无一不容其光焉

009_0008_b_23L
又云雨中看好月者此明暗无碍火裏
009_0008_b_24L汲淸泉者此冷煖无碍直立頭垂地

009_0008_c_01L가로 누워 다리로 하늘을 가리킨다는 것은, ‘가로와 세로가 걸림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설은 모두 구별하지 않는 도리에 서 있는 것이다. 남쪽을 말하고 북쪽을 말하는 것은 정情에서 나온 것이다. 이치로는 본래 동서가 없다.
묻는다.
색신 가운데 법신이 있는가, 법신 가운데 색신이 있는가?
답한다.
진신眞身과 화신化身은 걸림이 없어 저것과 이것이 상대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신론』에 “저 몸의 체상이신 법성진여의 바다와 무량공덕의 창고”84)라고 하였고, 현수 법장은 이를 해석하여 “저 용대用大는 체상體相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용用을 모아 체體에 돌아간다.”85)고 하였다. 이는 진신과 화신은 걸림이 없어 저것과 이것이 상대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금강경』의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에서 부처님이 티끌 세계에 의거하여 같음과 다름의 의심을 깨뜨리는 내용이 있다.86) 규봉 종밀이 이를 해석하기를 “법신과 화신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의심을 끊었다.”87)고 하였다. 역시 진신과 화신은 걸림이 없어 저것과 이것이 상대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또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려 수행자의 본각이 장애를 벗어날 적에 보신과 화신을 받아 다른 이의 외연外緣이 되면, 일체의 부처님과 차별이 없고 신구新舊가 없게 되며, 시각이 본각과 같아져 시작도 끝도 없게 되니, 역시 시간이 걸림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하나의 집착도 없으면 이것과 저것의 두 가지 나뉨이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자의 보신과 화신이지 여러 부처님의 보신과 화신이 아님이 분명하고 분명하다.》

(3) 대승을 들어 자세히 해석하는 데에 두 가지가 있다. ① 대승을 바로 거론한다. ㉠ 따져 묻는다.

무엇이 대승이고, 무엇이 기신起信인가?

㉡ 해석한다.

현수 법장은 제목을 해석하여 “마하연(중국말로 대승이다.)은

009_0008_c_01L8) [32] 脚指天者此縱橫无碍然則如
009_0008_c_02L上等說皆是位不別之道理也言南
009_0008_c_03L言北也由情理中本无東9)西 [33] 色身
009_0008_c_04L中在法身法身中在色身耶眞化无
009_0008_c_05L彼此不相在故論云彼身體相
009_0008_c_06L性眞如海无量功德藏賢首釋云
009_0008_c_07L彼用大依體相起會用歸體此眞化
009_0008_c_08L無碍彼此不相在也

009_0008_c_09L
又一合理相分佛約塵界破一異疑
009_0008_c_10L圭山10)釋云 [34] 斷法身化身一異疑亦眞
009_0008_c_11L化无碍彼此不相在又破和合識
009_0008_c_12L人本覺出障11) [35] 受報化身爲他外
009_0008_c_13L與一切佛无差別无新舊始覺同
009_0008_c_14L无始无終亦是時无碍故云爾无私
一着
009_0008_c_15L彼此无兩畔也然是行人
報化非諸佛報化灼然灼然

009_0008_c_16L擧大乘詳釋二正擧大乘二
009_0008_c_17L
009_0008_c_18L
云何大乘云何起信

009_0008_c_19L
009_0008_c_20L
賢首釋題云麽訶衍此云大乘謂約
009_0008_c_21L「而已」作「耳」{甲}「如」作「與」{甲}「共」
009_0008_c_22L作「其」{甲}
「楞」作「稜」{甲}「云」無有{甲}
009_0008_c_23L「性」下有「云」{甲}「眞」下有「云」{甲}「眠」
009_0008_c_24L作「面」{甲}
「西」下有「也」{甲}「釋云」作「科
009_0008_c_25L云」{甲}
「之」無有{甲}

009_0009_a_01L심진여문心眞如門에 의거하여 이理가 반드시 있음을 믿고, 심생멸문心生滅門에 의거하여 업의 결과가 없지 않음을 믿고, 삼대三大에 의거해서 삼보가 무너지지 않음을 믿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자성의 삼신불을 어느 누가 홀로 믿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각각 원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제목에 인人·법法·유喩의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대大에 체·상·용의 뜻이 있으니, 이것은 바로 법이다. 두 번째는 승乘에 삼승의 사람과 실어 나른다는 뜻이 있다. 두 뜻을 모두 포함한 것이 세 번째 뜻이다.
답한다.
대승大乘은 깨달음의 대상인 본각이 이것이고, 기신起信은 깨달음의 주체인 시각이 이것이니, 시각과 본각의 두 각을 합해서 제목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현수 법장은 “대승은 믿음의 대상 경계이다.”88)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이른바 “일체중생이 모두 본각진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것이고, “준동함령蠢動含靈도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것이며, “일심은 여래장이면서 또한 재전법신在纏法身”이라는 것이 이것이고,89) 이른바 “신령하게 밝고 청정한 일법계심一法界心이므로 성각보광이 각각 원만하다.”90)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믿음의 대상인 대승이다.
현수 법장은 “기신起信은 믿는 주체로서의 마음이다.”91)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이른바 각覺이 이것이고, 삼승 현성의 근본이 이것이며, 도표92)에 있는 각돈오覺頓悟의 각이 이것이고, 삼승 현성이 깨끗함에 돌아올 때 마음이 본래 깨끗하고 망妄이 본래 공함을 각지覺知한다고 할 때의 각이 이것이며, 『기신론』의 시각위始覺位에 있는 인과因果의 두 각이 이것이다. 이것들은 삼승三乘 현성賢聖의 시각이다.
시각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삼승 현성의 시각으로, 이는 곧 점오漸悟이다. 두 번째는 상근기 범부의 시각으로, 이는 곧 돈오頓悟이다. 자신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無漏의 지성智性을 본래 구족하여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고, 끝내 다르지 않음을 돈오하는 것이다. 이른바 “큰 신심을 일으킨 범부가 믿음의 인자因子에서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과 계합하여

009_0009_a_01L心眞如門信理決定約心生滅門
009_0009_a_02L業果不1) [36] 約三大中信三寶不壞
009_0009_a_03L然則自性三身佛何人獨不信耶
009_0009_a_04L云各各圓滿也又題有人法喩三義
009_0009_a_05L一者大有體相用義此是法也二者
009_0009_a_06L乘有三乘人及運載之義二義俱含
009_0009_a_07L此之三義故云爾

009_0009_a_08L
大乘者所悟之本覺是起信者能悟
009_0009_a_09L之始覺是始本二覺合之爲題故賢
009_0009_a_10L首云大乘者所信之2) [37] 所謂一切衆
009_0009_a_11L生皆有本覺眞心者是蠢動含靈皆
009_0009_a_12L有佛性者是一心者如來藏亦是在纒
009_0009_a_13L法身者是所謂靈明淸淨一法界心
009_0009_a_14L覺寶光各各圓滿者是此等皆所信之
009_0009_a_15L大乘也起信者能信之3) [38] 所謂覺是
009_0009_a_16L三乘賢聖之本者是圖中覺頓悟之覺
009_0009_a_17L三乘賢聖還淨之時心本淨妄本空
009_0009_a_18L覺知之覺是論始覺位中因果二覺是
009_0009_a_19L此等三乘賢聖之始覺也始覺有二
009_0009_a_20L三乘賢聖之始覺4) [39] 漸悟二者
009_0009_a_21L上根凡夫之始覺此*是頓悟也頓悟
009_0009_a_22L自心本來淸淨元无煩惱无漏智性
009_0009_a_23L本來具足此心即佛畢竟无異也所謂
009_0009_a_24L大心凡夫信因中契諸佛果德分毫不

009_0009_b_01L털끝만큼의 어긋남도 없어야 비로소 믿음을 이룬다.”는 것이고, “스승을 통해 분발하여 홀연히 진아眞我를 깨달아 부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 이것이다. 이것들은 상근기 범부의 시각이다. 돈과 점은 비록 다르지만 시각은 하나이다. 돈오돈수는 해解와 증證의 두 뜻이 있는데, 이치로 말해 본다면 돈오는 해오解悟이다. 깨달음을 통해 모두 없애는 것이 돈수頓修로서, 이른바 “단박에 깨달아 단박에 그친다.(頓了頓息)”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구문性具門의 이지理智가 현전한 것이고, 공행功行을 단박에 다 마쳤다는 것은 아니다. 현상(事)은 갑자기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차례를 따르는 것이니, 이것이 점수이다. 모두 제거하는 것은 돈수 후에 증오하는 것으로, 이른바 “단박에 깨달아 단박에 다했다.(頓覺頓盡)”는 것이다. 이것은 공행문功行門의 사지事智가 현전하여 “단박에 닦아서 일을 이룬다.(頓修判事)”는 것이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박에 닦아서 일을 이룬다.(頓修判事)”에 또 느리고 빠름의 두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돈문頓門의 근기가 수승한 자로서, 이들은 돈수 이후에 증오證悟한다. 그러나 수修와 오悟가 동시에 있고, 오悟가 해解와 증證에 통한다. 이것이 하나의 짝이니, 규봉 종밀이 “모두 금생今生에 의거해서 논한 것이다.”93)라고 말한 것이다. 《금생은 일생一生이다.》 가령 선재동자가 깨달은(悟) 후에 점차 남쪽으로 가서 다시 문수보살을 뵙고 법을 들어 돈증頓證할 때에, 문수보살의 말을 듣자마자 아승기겁의 법문을 성취하여 대지광명을 일념에 구족하여 삼천대천세계에 계신 수없이 많은 모든 선지식을 다 보고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증득한 것과 같다. 두 번째는 돈문頓門의 근기가 낮은 자이다. 이것은 다른 하나의 짝이니, 규봉 종밀이 “멀리 숙세를 미루어보면 점漸만 있고 돈頓은 없다.”94)고 말한 것이 이것이다. 《숙세는 다생多生이다.》 비록 돈법頓法을 들어 믿고 이해하여 수행하지만, 장애가 짙고 습기가 두터워 보는 것이 낮고 마음이 뜨기 때문에 아직 단박에 이루지 못하고 계속 윤회하여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돈법을 듣자마자 깨달음을 일으켰다. 그러므로 “지금 돈오하는 것은 여러 생을 통해 점차 훈습을 마치고 나서 발현하는 것이다.”95)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돈오함’은 우두 법융牛頭法融(594~657) 선사 등이 주장한 것이고, ‘점차 훈습함’은 점수이고, ‘발현함’은 돈수이다.》 그러나 ‘단박에 닦아서 일을 이룸(頓修判事)’에 근기가 느리고 빠른 차이는 있지만 행하는 것은 같다.
묻는다.

009_0009_b_01L方成信也所謂因師激發忽悟眞
009_0009_b_02L與佛无殊者是此等5) [40] 根凡夫始
009_0009_b_03L覺也頓漸雖異始覺則一也頓悟頓
009_0009_b_04L修者亦有解證二義理則頓悟者
009_0009_b_05L悟也乘悟並消者頓修如所謂頓了
009_0009_b_06L頓息者也然此性具門理智現前
009_0009_b_07L功行頓畢也事非頓除因次弟者
009_0009_b_08L修也盡者頓修後證悟如所謂頓覺
009_0009_b_09L頓盡者此功行門事智現前頓修判
009_0009_b_10L无疑矣頓修判事又有遲速二義
009_0009_b_11L一者頓門根勝者頓修後證悟然修
009_0009_b_12L悟一時悟通解證此一對圭山所謂
009_0009_b_13L皆約今生論者也今生者
一生也
如善財童子
009_0009_b_14L悟後漸次南行再見文殊聞法頓證時
009_0009_b_15L言下成就阿僧祗法門具足大智光明
009_0009_b_16L於一念中悉見三千大千世界微塵數
009_0009_b_17L諸善知6) [41] 乃至得不忘念智者7) [42]
009_0009_b_18L頓門根劣者此一對圭山所謂8) [43]
009_0009_b_19L推宿世唯漸无頓者是也宿世者
多生也
雖聞
009_0009_b_20L頓法信解修行然障濃習重觀劣心浮
009_0009_b_21L故未能頓成展轉流來至於今生聞卽
009_0009_b_22L發悟故云今見頓者已是多生漸熏而
009_0009_b_23L發現者也今見頓者是牛頭融禪師之9) [44]
漸熏者漸修發現者頓修也

009_0009_b_24L頓脩判事機之遲速有異所爲一也

009_0009_c_01L『도서』에서 ‘닦아서 번뇌를 끊음’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질문이 없는데, 답이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답한다.
이 가운데 두 가지 어긋남이 있다. 첫 번째, 글에 숨어 있는 질문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망을 쫓아 미세한 것부터 일어나는 미십중迷十重에 ‘제일중第一重이 본각本覺이고 제이중第二重이 불각不覺’이라는 구절이 있다. 또 닦아서 번뇌를 끊는 오십중悟十重에 ‘돈오頓悟’가 있는데, 제일중의 돈오본각에서 ‘미십중 가운데에 있는 제일중의 본각을 깨닫고 제이중의 불각을 뒤집는다’고 하였으니, 오십중悟十重에서 깨달음의 대상인 본각이 제일중이 되고, 깨달음의 주체인 시각이 제이중이 되는 것이다.96)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으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에 대답하기를 “앞에서는 불각이기 때문에 본각과 어그러져서 진망眞妄이 서로 어긋났으므로, 이를 열면 두 개의 중重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깨달았기 때문에 부합하고, 부합하며 서로 순하여 별도의 시오始悟가 없으므로 합해서 하나의 중重이 되었다.”97)고 하였다. 그러나 열면 두 개의 중重이 되니 어긋나지 않는다. 《두 개의 중重이란 첫째는 본각이고, 둘째는 시각이다.》 가령 『기신론』에서 각의覺義에 비록 시각과 본각의 두 각이 있지만, 합하면 하나의 시각이 되고 열면 두 개의 중重이 되는 것과 같다.
두 번째, 만약 역순의 차례에 의거한다면 후십중後十重의 제일중第一重이 전십중前十重을 모두 뒤집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치적으로 돈오문에서 본체를 곧장 인식하여 전십중의 근본미혹을 뒤집어야 하므로 전십중의 제일중과 제이중을 대비시켜 볼 때,98) 어긋남이 없다. 왜냐하면 깨달은 이후의 수행과 증득에 다시 십중十重이 있는데, 여기에 뒤로부터 역순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돈오의 일중一重은 뒤로부터 역순을 밟지 않은 것이 분명하고 분명하다.
묻는다.
돈오할 때에 끝없는 법문을 일시에 단박 증득하고, 끝없는 번뇌를 일시에 단박 끊어버린다면 무엇 때문에 “불각을 뒤집는다.”라고만 말하고, “번뇌를 끊는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한다.
문장에 영략影略99)되어 있기 때문에 숨어서 드러나지 않았다.

009_0009_c_01L都序修斷中无問而有答何耶此中
009_0009_c_02L有二叅差一者伏難云前生起中
009_0009_c_03L第一本覺第二不覺二節又此修斷中
009_0009_c_04L亦有頓悟一中悟前第一本覺翻前第
009_0009_c_05L二不覺則此中所悟本覺爲第一重
009_0009_c_06L悟始覺爲第二重云云可也何故不然
009_0009_c_07L故答云前以不覺乖於本覺眞妄
009_0009_c_08L相違故開爲兩重今以悟則冥符冥符
009_0009_c_09L相順无別始悟故合之爲一然開爲兩
009_0009_c_10L則不叅差也兩重者一本
二始覺也
如論中覺義
009_0009_c_11L雖有始本二覺合之爲一始覺然開爲
009_0009_c_12L兩重故二者若據逆順之次此一合
009_0009_c_13L翻前十今以頓悟門中理須直認本體
009_0009_c_14L翻前本迷故對前一二无叅差10) [45]
009_0009_c_15L悟後修證還有十重11) [46] 從後逆次
009_0009_c_16L故也然則頓悟一重不涉從後逆次
009_0009_c_17L灼然灼然

009_0009_c_18L
頓悟時无邊法門一時頓證无邊
009_0009_c_19L煩惱一時頓斷也何故但云翻不覺
009_0009_c_20L而不云斷煩惱也文影略故隱而不
009_0009_c_21L「忘」作「亡」{甲}「境」下有「則」{甲}「心」下
009_0009_c_22L有「則」{甲}
「是」無有{甲}次同「上」上有「皆」
009_0009_c_23L{甲}
「識」作「試」{甲}「也」上有「是」{甲}
009_0009_c_24L「远」作「遠」{甲}
「類」下有「也」{甲}「矣」作
009_0009_c_25L「者」{甲}
「中」下有「有」{甲}

009_0010_a_01L예를 들면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멸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과 같다.

② 다른 질문들을 계속해서 거론한다. ㉠ 묻는다.

묻는다.
어떤 사람이 “번뇌무명은 범부의 색신에 속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은가?
답한다.
만약 옳다면 색신이 무너질 때 번뇌무명도 멸해야 할 것이다. 만약 번뇌무명이 멸한다면, 수염본각이 번뇌의 흐름을 되돌려 출전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묻는다.
어떤 사람이 “사람마다의 색신이 당연히 부처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옳은가?
답한다.
지도志道 선사가 아직 육조 스님을 만나지 않았을 때와 같으니, 가소롭다. 어째서인가. 홍주洪州가 “지수화풍 사대의 골육으로 탐·진·치를 알지 못한다. 일체의 동작이 모두 불성이다.”100)라고 하였고, 또 고덕이 “반야는 중국말로 지혜이다. 허공은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고, 사대 역시 법을 설할 줄도 들을 줄도 모르나니, 지금 눈앞에 분명하고 분명하게 뚜렷이 밝아서 형체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수 있다네.”101)라고 하였다. 이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사람마다의 사대 색신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고, 번뇌심 속에 있는 불성이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열반의 즐거움을 좋아하여 번뇌의 흐름을 되돌려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묻는다.
또 어떤 사람이 “모든 부처님의 보신과 화신이 범부의 색신 가운데에서 수염본각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이 옳은가?
답한다.
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마치 외도가 “중생이 죽어 명계冥界에 돌아가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면서 명계로부터 지각을 일으켜 다시 중생이 된다.”고 주장하는 논리와 같다. 《마치 기름이 밀가루에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것과 같다.》102)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 “부처는 다시 미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였겠는가. 이 말은 또 무슨 뜻이겠는가.
묻는다.
어떤 사람이 끝없는 허공을 ‘모으면 하나의 법신이 된다’는 비유로 구름이 없는 곳을 출전법신이라 하고,

009_0010_a_01L如應云无明滅故行滅行滅故識滅
009_0010_a_02L云云

009_0010_a_03L躡擧他問二初問
009_0010_a_04L
有云煩惱无明於凡夫色身中屬
009_0010_a_05L

009_0010_a_06L
1) [47] 若然則色身壞時應滅煩惱无明
009_0010_a_07L若滅煩惱无明則隨染本覺返流出纒
009_0010_a_08L无疑2) [48] 有人云人3) [49] 色身應當
009_0010_a_09L作佛是否

009_0010_a_10L
答曰志道禪師如未遇六祖之時是可
009_0010_a_11L4) [50] 5) [51] 洪州云四大骨肉都不解
009_0010_a_12L貪嗔癡一切所作並是佛性又故德云
009_0010_a_13L般若此云智惠6) [52] 空不解說法聽法
009_0010_a_14L四大不解說法聽法至今目前歷歷孤
009_0010_a_15L勿形段者能說法聽法此言向甚麽
009_0010_a_16L處着人人四大色身不能作佛也
009_0010_a_17L惱心中佛性乃能厭求返流出纒矣
009_0010_a_18L7) [53] 一人云諸佛報化凡夫色身中
009_0010_a_19L作隨染本覺是否8) [54] 是何言也如外
009_0010_a_20L道立衆生終盡還歸於冥名爲湼槃
009_0010_a_21L從冥起覺更作衆生此亦如是如油入糆
永不可出

009_0010_a_22L然則何故佛云佛不再迷9) [55] 又向
009_0010_a_23L何處着又有一人以無邊虛空
009_0010_a_24L爲一法身喩故无雲處以爲出纒法

009_0010_b_01L구름이 있는 곳을 재전법신이라 말하니, 이 말이 옳은가?
답한다.
한 곳의 허공에 구름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만 리에 구름 한 점 없는 만 리의 하늘이어야 이것이 출전법신의 모습이다. 위와 같은 물음은 모두 ‘대유大有를 주장하고 있는 경전’103) 의 설이고, 일곱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는 있지 않다. 또 옛사람이 “사람마다의 면목이 본래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을 빌려 연지를 찍고 흰 분을 바르겠는가.”104)라고 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법신과 한 덩어리이면서도 꿈에서조차 부처님 법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법사들의 해독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가엾도다. 운봉은 평소에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부처님 법의 사람들로 대우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가. 저들은 부처님 법의 근원을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책에 있는 글자만 가지고 글에 따라 이해하고 있다. 이래서야 어떻게 (부처님 법을) 알 수 있겠는가. 이러한 법사들은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고 하고, 물고기의 눈을 명주明珠라고 우기는 것과 같으니, 재앙이 후대의 사람들에까지 미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간업無間業을 초래하지 않으려면 여래의 바른 법륜을 비방하지 말라.105) 이와 같은 사람들은 법문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문자의 속뜻도 알지 못한다.
3) 문답을 전체적으로 결론짓는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허공처럼 두루 가득 차서《‘법신은 청정하고 끝없이 넓다’고 말하는 것 등이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일체의 법에 대해서 성性이 된다. 그렇다면 《성품 하늘에 있는 깨달음의 달빛이 삼라만상을 비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신도 바다의 물거품 하나에 불과하니, 더군다나 천백억 화신이겠는가. 중생의 법신은 하나의 자그마한 병 속에 있는 허공처럼 한 사람에 대해서 성性이 된다. 그렇다면 그 한정됨을 알 수 있으니, 허공이 비록 끝이 없다고 하지만 병甁으로 한정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겠다. 운봉은 이 무슨 부처의 화신인가. 미타불의 화신인가. 석가불의 화신인가. 저 부처님은 지옥을 바꾸어 연화세계로 만드는데, 내가 연화세계를 만드는가. 그 상용相用을 논해 본다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009_0010_b_01L10) [56] 雲處以爲在纒法身 [14]
009_0010_b_02L非唯一處虛空無雲萬里无雲萬里天
009_0010_b_03L此是出纒法身㨾子如上等問俱是大
009_0010_b_04L有經中說七佛經中未之有也
009_0010_b_05L11)又古人云人人面目本來圓成豈假
009_0010_b_06L他人添脂着粉也
今時或有人等
009_0010_b_07L塊之法身未夢見佛法如是法師毒害
009_0010_b_08L瞎卻人眼不是小事可歎可悲雲峰
009_0010_b_09L尋常見此等輩不把佛法中人見待
009_0010_b_10L彼旣不識佛法源流只管將册子上
009_0010_b_11L隨語生解遮箇作麽生識得如上
009_0010_b_12L法師磨磚作鏡認魚目作明珠可謂
009_0010_b_13L殃及後裔者也欲得不招無間業莫謗
009_0010_b_14L如來正法輪如是人等非唯不識法門
009_0010_b_15L又不識文字語勢也 [57]

009_0010_b_16L揔結問答

009_0010_b_17L
諸佛法身如虛空徧滿法身淸淨廣無邊
云云此之謂歟

009_0010_b_18L一切法爲性性天覺月
光被萬象 [15]
無量報身
009_0010_b_19L海一浮漚何況千百億耶衆生法身
009_0010_b_20L如一小瓶空於一人爲性則其12) [58]
009_0010_b_21L知也虛空雖有無邊以瓶爲限矣
009_0010_b_22L知雲峯是何佛化身彌陁佛化身
009_0010_b_23L迦佛化身也彼佛變地獄作蓮花我作
009_0010_b_24L蓮花乎論其相用天地懸隔然則非

009_0010_c_01L그렇다면 모든 부처님의 화신이 아님이 분명하고 분명하다.
또 출전삼신은 종류가 하나가 아니라고 하였다. 비록 “법신은 맑고 고요하여 보고 들음을 초월하고 태허太虛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세 부처는 모두 진실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여기서의 법신은 근기에 상대한 것이지 향상의 법신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 “보신은 두루 밝아 일정한 방향과 처소를 떠나 모래알같이 많은 세계에 두루하다.”라고 말하지만, 법신과 보신은 둘이 아닌 몸이어서 보신이 홀로 있지 않음이 분명하고 분명하다. 그러므로 『기신론』에서 ‘저 신체상’이라고 하였고, 규봉 종밀은 ‘상대相大가 보신報身’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부디 여러 배우는 사람들은 여기에 이르러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보조 지눌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윤회를 벗어나고자 하거든 부처 되기를 구하는 것만 한 것이 없다. 부처 되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는 바로 이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겠는가. 몸을 떠나 있지 않다. 색신은 임시로 가탁한 것이어서 생겨났다 멸했다 하지만, 진심은 허공과 같아 단절되거나 변하지 않는다.…(중략)…아, 지금 사람들이 미혹한 지 오래되었구나. 진심이 진불眞佛인 줄 모르고, 자성이 진법眞法인 줄 모르고, 법을 구하고자 하면서 모든 성인들을 멀리 떠나고, 부처 되기를 구하고자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지 않는구나.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性 밖에 법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정情을 완고하게 고집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설사 티끌같이 많은 겁의 세월 동안…(중략)…갖가지 고행을 하더라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다만 스스로를 수고롭게 할 뿐이다. 다만 자신의 마음을 알면

009_0010_c_01L諸佛化身灼然灼然

009_0010_c_02L
又有出纒三身種類非一也雖曰法
009_0010_c_03L身湛寂絕視聽而包含太虛然三佛揔
009_0010_c_04L不眞云13) [59] 則此中法身對機非向上
009_0010_c_05L法身也昭然又曰報體圓明離方處而
009_0010_c_06L廓周14) [60] 則法 [16] 報不二之身非獨報
009_0010_c_07L灼然灼然故論云彼身體相圭山
009_0010_c_08L15) [61] 相大報身此之謂16) [62]

009_0010_c_09L
17)願諸學者到此子細看古德曰欲免
009_0010_c_10L輪廻莫若求佛若欲求佛佛即是心
009_0010_c_11L心何遠覓不離身中色身是假有生有
009_0010_c_12L眞心如空不斷不變夫今之人
009_0010_c_13L迷來久矣不識眞心是眞佛不識自性
009_0010_c_14L是眞法欲求法而遠離諸聖欲求佛而
009_0010_c_15L不觀己心若言心外有佛性外有法
009_0010_c_16L堅執此情欲求佛道者縱經塵刼
009_0010_c_17L種苦行如蒸砂作飯只益自勞爾
009_0010_c_18L「答」上有「二」{甲}「矣」下有「若然者無有是
009_0010_c_19L處矣」{甲}
「人」下有「四大」{甲}「矣」作「也」
009_0010_c_20L{甲}
「何」上有「然則」{甲}「虛」上有「何名爲
009_0010_c_21L智惠」{甲}
「又」下有「有」{甲}「答」下有「是
009_0010_c_22L何言」{甲}
「言」作「語」{甲}「有」上有「云」
009_0010_c_23L{甲}
「又古人云…語勢也」無有{甲}「恨」當
009_0010_c_24L作「限」{編}
「云」無有{甲}「沙」作「法」{甲}
009_0010_c_25L「曰」作「云」{甲}「焉」作「歟」{甲}甲本此以
009_0010_c_26L上心性論之本文終焉以下編次相異
「願諸
009_0010_c_27L學者…因次第盡(次頁中段二十三行)」無有{甲}

009_0011_a_01L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의妙義를 구하지 않아도 얻게 될 것이다.…(중략)…부디 모든 수도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밖에서 찾지 말라. 심성은 물듦 없어 본래 원만히 성취된 것이니, 다만 허망한 인연을 떠난다면 곧 여여불如如佛이다.
묻는다.
‘만약 불성이 현재 이 몸에 있다고 말한다면, 이미 몸 안에 있어서 범부를 떠나 있지 않은데, 무슨 이유로 나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하는가? 우리를 위해 열어 주고 깨닫게 해 주시오.’
답한다.
‘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가 하루 중에 배고프고 목마른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때로는 성내고 때로는 기뻐하는 것이 결국 무슨 물건이겠는가. 색신은 지·수·화·풍 사대가 모여서 된 것이므로 그 바탕이 완고하여 감정이 없는데, 어떻게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가?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는 것이 그대의 불성임에 틀림없다.…(중략)…그렇다면 불성은 현재 그대의 몸에 있는 것이니, 어찌 밖에서 찾겠는가?…(중략)’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이 바로 부처입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성품을 보는 것이 바로 부처입니다.’
왕이 물었다.
‘스님은 성품을 보았습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저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왕이 물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이것은 무슨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지금 작용하고 있는데도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나에게 있습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왕께서 만일 작용한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작용하지않는다면 그 체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만일 작용할 때라면 몇 군데로 출현합니까?’
존자가 대답하였다.
‘만일 출현할 때라면 여덟 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물었다.
‘그 여덟 군데로 출현하는 것을 나에게 설해 주시오.’
존자가 대답하였다.
‘태 안에 있으면 몸이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고, 발에 있으면 걸어 다닙니다. 두루 나타나면 모든 세상을 다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한 티끌에 있습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고, 모르는 사람은 이것을 정혼精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곧 열리어 깨달았다.
또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바로 부처입니까?’
귀종 화상이 말했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말해 주고 싶지만 그대가 믿지 않을까 염려된다.’

009_0011_a_01L識自心恒沙法門無量妙義不求而
009_0011_a_02L願諸道者切莫外求心性無染
009_0011_a_03L來圓成但離妄緣即如如佛若言
009_0011_a_04L佛性現在此身旣在身中不離凡夫
009_0011_a_05L因何我今不見佛性爲我開悟在汝
009_0011_a_06L身中汝自不見汝於十二時中知飢
009_0011_a_07L知渴知寒知熱或嗔或喜竟是何物
009_0011_a_08L色身四大所集其質頑而無情豈能
009_0011_a_09L見聞覺知能見聞覺知者必是汝佛性
009_0011_a_10L然則佛性現在汝身何假外求故昔
009_0011_a_11L異見王問婆羅提尊者曰何者是佛
009_0011_a_12L尊者曰見性是佛王曰師見性否
009_0011_a_13L我見佛性王曰性在何處性在作用
009_0011_a_14L王曰是何作用我今不見今現作用
009_0011_a_15L王自不見王曰於我有否王若作用
009_0011_a_16L無有不是王若不用體亦難見王曰
009_0011_a_17L若當用時幾處出現若出現時
009_0011_a_18L有其八王曰其八出現當爲我說
009_0011_a_19L者曰在胎曰身處世曰人在眼曰見
009_0011_a_20L在耳曰聞在鼻辨香在舌談論在手
009_0011_a_21L執捉在足運奔徧現俱該沙界收攝在
009_0011_a_22L一微塵識者知是佛性不識者喚作
009_0011_a_23L精魂王聞心即開悟又僧問歸宗和尙
009_0011_a_24L如何是佛宗我今向汝道恐汝不信

009_0011_b_01L그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의 진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귀종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부처다.’
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보임保任해야 합니까?’
귀종 화상이 말했다.
‘한 번 눈병이 생기자 허공 꽃이 어지러이 떨어지네.’
그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위에서 거론한 옛 성인들이 도에 들어간 인연은 명백하고간단하여 힘을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공안公案을 통해 만일 믿고 이해한 것이 있다면, 그대는 옛 성인과 손을 잡고함께 갈 것이다.
묻는다.
‘그대는 견성見性을 말하는데, 만약 진정으로 견성하였다면 이는 바로 성인이니, 마땅히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남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즘 마음 닦는 이들 중에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드러내는 사람이 없는가?’
답한다.
‘그대는 가벼이 미친 말을 하지 말라. 삿되고 바른 것을 가리지 못하면 이 사람은 미혹하고 전도된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퇴굴심을 내어 도리어 삿되고 바른 것을 분간하지 못하는 잘못에 떨어진 사람들은 모두 그대가 의심하는 자들로서, 도를 배우되 선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되 근본과 지말을 가리지 못한다. 이를 사견邪見이라 하고 수학修學이라 하지 않으니, 자신만 잘못되게 할 뿐 아니라 남까지 잘못되게 하는 것이다. 어찌 신중히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무릇 도에 들어감에 많은 문이 있지만 그 요점을 말한다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가 바로 최상근기가 증득해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지만, 만약 과거로 거슬러 가 보면, 이미 여러 생에 걸쳐서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여 점차 훈습해 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법을) 듣자마자 깨달음을 일으켜 일시에 단박 마친 것이다. 실제로써 논한다면 돈오돈수 역시 먼저 깨닫고 뒤에 수행하는 근기이다. 즉 돈頓과 점漸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았던 길이니, 과거의 모든 성인들은 깨닫고 난 뒤에 수행하지 않은 분이 없었으며, 수행을 통해 증득하였던 것이다. 신통변화라는 것은 깨달음에 의지해 수행하여 점차 훈습하면서 드러나는 것이지, 깨달을 때 곧바로 발현하는 것이 아니다.…(중략)…그러므로 이치상으로는 돈오이지만 차례를 통해 다해 마치는 것이다.’”106)


009_0011_b_01L僧云和尙誠言焉敢不信師云即汝是
009_0011_b_02L僧云如何保任師云一翳在眼空花亂
009_0011_b_03L其僧言下有省上來所擧古聖入道
009_0011_b_04L因緣明白簡易不妨省力因此公案
009_0011_b_05L若有信解處即汝古聖把手共行
009_0011_b_06L言見性若眞見性即是聖人應現神
009_0011_b_07L通變化與人有殊何故今時修心之輩
009_0011_b_08L無有一人發現神通變化耶汝不得
009_0011_b_09L輕發1) [63] 不分邪正是爲迷倒之人
009_0011_b_10L今時學道之人口談眞理心生退屈
009_0011_b_11L墮無分之失者皆汝所疑學道而不知
009_0011_b_12L先後說理而不分本末者是名邪見
009_0011_b_13L不名修學非唯自誤兼亦誤他其可
009_0011_b_14L不愼歟夫入道多門以要言之不出
009_0011_b_15L頓悟漸修兩門耳雖曰頓悟頓修是最
009_0011_b_16L上根機得入也若推過去已是多生
009_0011_b_17L依悟而修漸熏而來至于今生聞即發
009_0011_b_18L一時頓畢以實而論是亦先悟後
009_0011_b_19L修之機也則而此頓漸兩門是千聖軌
009_0011_b_20L轍也則從上諸聖莫不先悟後修
009_0011_b_21L修乃證所言神通變化依悟而修
009_0011_b_22L熏而現非謂悟時即發現也故理即頓
009_0011_b_23L因次第盡 [64]
  1. 1)‘雲峯大智述’이라는 글자는 『한국불교전서』 편자가 보충하여 삽입한 것으로 국립본에는 없다.
  2. 2)『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말하였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을 멀리한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子曰。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라고 한 내용 참조.
  3. 3)9궁宮 : 팔괘八卦의 궁宮인 팔궁八宮에 중앙궁中央宮을 합한 것을 말한다.
  4. 4)『유석질의론 』(H7, 268) 참조.
  5. 5)『선원제전집도서』(T48, 404).
  6. 6)80권 『화엄경』 권51(T10, 272c).
  7. 7)『수능엄경』 권4(T19, 121a). 『선원제전집도서』(T48, 409a).
  8. 8)이 부분에 대한 현수 법장의 해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송나라 장수 자선長水子璿(965~1038)이 편찬한 『기신론소필삭기起信論疏筆削記』에 보인다. 그러므로 운봉 대지가 장수 자선의 글을 보고 법장의 해석이라고 잘못 말한 것 같다.
  9. 9)보조 지눌普照知訥(1158~1210),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H4, 760c).
  10. 10)배휴裴休(791~870), 「원각경소서圓覺經疏序」(X9, 323a).
  11. 11)『육조대사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 권1(T48, 359c).
  12. 12)『선원제전집도서』(T48, 399b).
  13. 13)계환戒環(송나라)의 『법화경요해法華經要解』 권1(X30, 289a) 참조
  14. 14)『법화경요해』 권2(X30, 304a).
  15. 15)고봉 원묘高峯原妙(1238~1295), 『선요禪要』(X70, 705b) 참조.
  16. 16)『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권7 「여래성품如來性品」(T12, 408a)과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黃檗山斷際禪師傳心法要』 권1(T48, 380c) 참조.
  17. 17)『대혜보각선사어록』(T47, 921c).
  18. 18)『대혜보각선사어록』(T47, 896c)과 도원道原(송나라)이 찬술한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T51, 263b)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석두石頭 화상이 방온龐蘊 거사에게 “그대가 나를 만난 뒤에 날마다 하는 일이 무엇인가?(子自見老僧已來。日用事作麼生。)”라고 묻자, 거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일상의 일은 별다른 것이 없으니, 다만 내가 스스로 짝해서 만나는 것일 뿐이로다. 물건 물건은 취하고 버릴 것 아니니, 여기저기서 펴거나 오므리지 말라. 붉은빛 자줏빛을 누가 분별하리오. 언덕과 산더미에 티끌이 없네. 신통과 묘한 작용은 물 긷고 나무하는 일일 뿐이네.(日用事無別。唯吾自偶諧。頭頭非取捨。處處勿張乖。朱紫誰爲號。丘山絶點埃。神通并妙用。運水及般柴。)”
  19. 19)『동산양개선사어록洞山良价禪師語錄』 권1(T47, 523a)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동산 양개洞山良价(807~869)의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운봉이 육조 혜능의 말로 표현한 것은 잘못이다.
  20. 20)『중용中庸』.
  21. 21)인허鄰虛 : 글자대로 해석하면 ‘허공과 이웃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즉 너무 작아서 텅 빈 허공처럼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지극히 작아서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22. 22)영가 진각永嘉眞覺(665~713), 『증도가證道歌』 권1(T48, 396c).
  23. 23)『수능엄경』 권4(T19, 120a).
  24. 24)『원각경소』(T39, 524a).
  25. 25)칠대七大 : 지대地大·수대水大·화대火大·풍대風大·공대空大·견대見大·식대識大를 말하며, 밀교에서는 색심만법色心萬法의 체성體性이라고 한다.
  26. 26)『선원제전집도서』(T48, 404).
  27. 27)육조 시대 : 중국 역사상 지금의 남경에 수도를 두었던 여섯 나라를 말한다. 즉 삼국 시대의 오吳나라와 오호 십육국五胡十六國의 난으로 수도를 옮긴 동진東晉, 그리고 남북조 시대의 송宋·제齊·양梁·진陳이다.
  28. 28)『수능엄경』(T19, 107c).
  29. 29)『수능엄경』(T19, 111c).
  30. 30)『수능엄경』(T19, 111c).
  31. 31)『대혜보각선사어록』(T47, 923b).
  32. 32)『경덕전등록』(T51, 248a).
  33. 33)『대승기신론의기』(T44, 273c).
  34. 34)청허 휴정淸虛休靜(1520~1604), 『선가귀감禪家龜鑑』(H7, 635a).
  35. 35)『심성론』의 부록에 있는 「간병후서揀病後書」(H9, 14a)에서는 풍담 의심楓潭義諶(1592~1665)의 말이라고 하였다.
  36. 36)금비金鎞 : 금으로 만든 저箸로서, 고대 인도에서 안막眼膜을 긁어내는데 사용되던 의료 기구이다. 그런데 밀교에서 관정작법灌頂作法 할 때에 지혜를 가리고 있는 무명을 긁어내는 의식 도구로서 사용하였다.
  37. 37)『선가귀감』(H7, 635a) 참조.
  38. 38)『유석질의론』(H7, 268) 참조.
  39. 39)『기신론』(T32, 577b).
  40. 40)『대승기신론의기』(T44, 266a).
  41. 41)『대승기신론의기』(T44, 281b).
  42. 42)60권 『화엄경』 권10(T9, 465c), 『대승기신론의기』(T44, 281b) 참조.
  43. 43)『기신론』에서는 미망迷妄의 상태를 근본무명인 삼세三細와 지말무명인 육추六麁로 설명한다.
  44. 44)영명 연수永明延壽(904~975), 『종경록宗鏡錄』(T48, 435b) 참조.
  45. 45)삼세三細와 육추六麁 : 삼세는 무명업상無明業相·능견상能見相·경계상境界相이고, 육추는 지상智相·상속상相續相·집취상執取相·계명자상計名字相·기업상起業相·업계고상業繫苦相이다.
  46. 46)아뢰야식 : 유식설에서는 인위因位를 말미암아 과위果位에 이르는 것을 아뢰야식의 세 단계 변화로 설명한다. 즉 ① 아애집장현행위我愛執藏現行位는 범부에서 7지의 보살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② 선악업과위善惡業果位는 8지에서 10지의 보살까지가 여기에 해당한다. ③ 상속집지위相續執持位는 불과佛果가 여기에 해당한다.
  47. 47)『기신론』(T32, 576c).
  48. 48)『대승기신론의기』(T44, 260a).
  49. 49)『대승기신론의기』(T44, 252a) 참조.
  50. 50)『대승기신론의기』(T44, 264b).
  51. 51)이십오유 : 생사윤회의 미혹한 세계를 25가지로 나눈 것이다. 지옥유地獄有, 축생유畜生有, 아귀유餓鬼有, 아수라유阿修羅有, 불파제유弗婆提有, 구야니유瞿耶尼有, 울단월유鬱單越有, 염부제유閻浮提有, 사천처유四天處有, 삼십삼천처유三十三天處有, 염마천유炎摩天有, 도솔천유兜率天有, 화락천유化樂天有, 타화자재천유他化自在天有, 초선유初禪有, 대범천유大梵天有, 이선유二禪有, 삼선유三禪有, 사선유四禪有, 무상유無想有, 정거아나함유淨居阿那含有, 공처유空處有, 식처유識處有, 불용처유不用處有, 비상비비상처유非想非非想處有.
  52. 54)『유석질의론』(H7, 268bc).
  53. 55)『유석질의론』(H7, 262b).
  54. 56)『태평어람太平御覽』 권641(『四部叢刊』 3편 子部)과 『자치통감외기資治通鑑外紀』 권2(『四部叢刊』 1편 史部) 참조.
  55. 57)『심성론』의 부록에 있는 「간병후서揀病後書」(H9, 14a)에서는 풍담 의심楓潭義諶(1592~1665)의 말이라고 하였다.
  56. 58)『유석질의론』(H7, 268b).
  57. 59)80권 『화엄경』 권51(T10, 272c) 참조.
  58. 60)『선원제전집도서』(T48, 399b) 참조.
  59. 61)『고봉원묘선사어록高峰原妙禪師語錄』 권1(X70, 686c).
  60. 62)『육조대사법보단경』 권1(T48, 349b). 『선원제전집도서』 권1(T48, 404b) 참조.
  61. 63)『논어』 「안연장」의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草上之風必偃)”에 근거한 말로서, ‘모르는 사람들은 휩쓸려 따라간다’는 뜻이다.
  62. 64)오도五道 :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
  63. 65)80권 『화엄경』 권51(T10, 272c).
  64. 66)80권 『화엄경』 권52(T10, 275a) 참조.
  65. 67)삼각三覺 : 과위에 오른 부처님이 구족한 세 각覺이니, 첫째는 자각自覺이고, 둘째는 각타覺他이며, 셋째는 각행원만覺行圓滿이다. 아라한은 자각自覺만을 갖추었고, 보살은 자각自覺과 각타覺他를 갖추었지만, 부처님은 세 각覺을 모두 갖추었다.
  66. 68)『화엄경소』 권49(T35, 872a). 이 부분에 대해 청량 징관은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 권79(T36, 615上)에서 “삼불로 십불을 거두니, 삼신을 벗어나지 않는다. 삼신이 이미 원융하고, 십신이 곧 삼신이니, 자체가 걸림 없다.(謂以三佛收十佛。不出三身。三身既融。十身即三。自體無礙。)”고 하였다.
  67. 69)『기신론』(T32, 575b).
  68. 70)『소석금강경과의회요주해銷釋金剛經科儀會要註解』 권3(X24, 685a).
  69. 71)『경덕전등록』 권12(T51, 291a).
  70. 72)『대승기신론의기』(T44, 248b).
  71. 73)저본에는 ‘비유 가운데 스스로 과를 두어(諭中自有科)’라고 되어 있으나, 고려대본에는 ‘논에 스스로 과를 두어(論中自有科)’라고 되어 있다. 의미로 볼 때 고려대본이 옳다고 판단하여 여기서는 고려대본을 따랐다. 그리고 본문에서 ‘논論’이라 한 것은 『기신론』을 의미하므로 “『기신론』에는 스스로 과를 두어”라고 해석하였다.
  72. 74)『대승기신론의기』 권2(T44, 262a) 참조.
  73. 75)『원각경소』(T39, 552b).
  74. 76)『원각경소』(T39, 533a) 참조.
  75. 77)『기신론』(T32, 577a).
  76. 78)『대승기신론의기』(T44, 226b) 참조.
  77. 79)『대혜보각선사어록』 권15(T47, 876c). 『종경록』 권78(T48, 845b). 『경덕전등록』 권18(T51, 352b).
  78. 80)『기신론』(T32, 577a) 참조.
  79. 81)『기신론』(T32, 577a).
  80. 82)『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 권11(T47, 761b).
  81. 83)『법화경』(T9, 9b).
  82. 84)『기신론』(T32, 575b).
  83. 85)『대승기신론의기』(T44, 247c).
  84. 86)『금강반야바라밀경』 권1(T8, 752b)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내어 미세한 티끌로 만든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미세한 티끌의 무리가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그 미세한 티끌의 무리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미세한 티끌의 무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세한 티끌의 무리는 곧 미세한 티끌의 무리가 아니라 그 이름이 미세한 티끌의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삼천대천세계도 그것이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잠시 한번 모인 모습의 일합상으로서, 여래께서 설하신 일합상은 곧 일합상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일합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잠시 한번 모인 모습의 일합상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거늘 다만 범부들이 그것에 집착하는구나.(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以三千大千世界碎爲微塵 於意云何 是微塵衆寧爲多不 甚多 世尊 何以故 若是微塵衆實有者 佛則不說是微塵衆 所以者何 佛說微塵衆 則非微塵衆 是名微塵衆 世尊 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 則非世界 是名世界 何以故 若世界實有者 則是一合相 如來說一合相 則非一合相 是名一合相 須菩提 一合相者 則是不可說 但凡夫之人貪著其事)”
  85. 87)『금강반야경소론찬요金剛般若經疏論纂要』(T33, 168a).
  86. 88)『대승기신론의기』(T44, 245b).
  87. 89)『선원제전집도서』(T48, 401c~402a) 참조.
  88. 90)『선원제전집도서』(T48, 409a).
  89. 91)『대승기신론의기』(T44, 245b).
  90. 92)『선원제전집도서』(T48, 411) 참조.
  91. 93)『선원제전집도서』(T48, 408a).
  92. 94)『선원제전집도서』(T48, 408a).
  93. 95)『선원제전집도서』(T48, 408a).
  94. 96)『선원제전집도서』(T48, 410~411) 참조. 이 부분의 『심성론』 본문(H9, 9c)은 축약되어 있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선원제전집도서』를 참조하여 번역하였음을 밝혀둔다. 이 책에 있는 미십중迷十重과 오십중悟十重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아래와 같다.
    ✽미십중迷十重 : ① 본각本覺, ⑩ 수보受報, ⑨ 조업造業, ⑧ 번뇌煩惱, ⑦ 집아執我, ⑥ 집법執法, ⑤ 경현境現, ④ 견기見起, ③ 염기念起, ② 불각不覺.
    ✽오십중悟十重 : ① 돈오본각頓悟本覺, ② 포고발심怖苦發心, ③ 수오행각망념修五行覺妄念, ④ 개발開發, ⑤ 아공我空, ⑥ 법공法空, ⑦ 색자재色自在, ⑧ 심자재心自在, ⑨ 이념離念, ⑩ 성불成佛.
  95. 97)『선원제전집도서』(T48, 410a).
  96. 98)『선원제전집도서』(T48, 410a).
  97. 99)영략影略 : 의미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글이나 말 속에 그 의미가 숨어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98. 100)『원각경대소석의초圓覺經大疏釋義鈔』 권3(X9, 534b) 참조.
  99. 101)『경덕전등록』(T51, 446~447) 참조.
  100. 102)『대혜보각선사어록』 권26(T47, 922b).
  101. 103)‘대유大有를 주장하고 있는 경전’이란 법에 공동의 존재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로서 인도의 승론학파勝論學派를 가리킨다. 그러나 불교적 견지에서 볼 때는 외도에 해당한다. 구마라집 역 『불설인왕반야바라밀경佛說仁王般若波羅蜜經』(T8, 827a)에 “삼계 이외에 별도로 한 중생계의 창고가 있다는 것은 외도의 대유경의 설이지, 일곱 부처님이 설한 것이 아니다.(三界外別有一衆生界藏者, 外道大有經中說, 非七佛之所說)”라고 하였다.
  102. 104)청허 휴정, 『선가귀감禪家龜鑑』(H7, 635a).
  103. 105)영가 현각永嘉玄覺(665∼713), 『증도가證道歌』 권1(T48, 396b) 참조.
  104. 106)보조 지눌의 『수심결修心訣』(H4, 708b~709b)에 있는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번역문에서 ‘중략’이라고 한 부분은 『수심결』의 내용이 생략된 부분을 역자가 표시한 것이다.
  1. 1)撰者名。編者補入。
  2. 1)「徑」與「經」通{編}。
  3. 2)「莊」當作「藏」{編}。
  4. 3)「欺」作「期」{甲}。
  5. 1)「惑」作「感」{甲}。
  6. 2)「證」底本作「訂」編者改書爲「證」以下倣此。
  7. 1)此下異板{甲}。
  8. 2)「二別…三義」十三字無有{甲}。
  9. 3)「一約標揔略釋고려대본에는 ‘一約標揔略釋’의 앞에 아래와 같이 표기되어 있다. 雲峯禪師心性論。栖岩溪谷科釋。門人神秀編錄。嵩谷虛舟訂正。將釋此論文二。一解名題。 《心如鏡之體。性如鏡之光。則體用雖殊。其實。一也。亦可體相異稱二皆法身。》 二正述論文三。」上有文如下「雲峯禪師心性論。栖岩溪谷科釋。門人神秀編錄。嵩谷虛舟證正將釋此論文二。一解名題心如鏡之躰。性如鏡之光。則躰用雖殊。其實一也。亦可躰相異稱。二皆法身。二正述論文三」{甲}。
  10. 4)「重」作「種」{甲}次同。
  11. 1)「惠」作「慧」{甲}。
  12. 2)「人」下有「頌」{甲}。
  13. 3)「是」作「皆」{甲}。
  14. 4)「咲」作「笑」{甲}次同。
  15. 5)「矣」作「也」{甲}。
  16. 6)「向者」作「所言」{甲}。
  17. 7)「云云」作「者」{甲}。
  18. 8)「空」作「無」{甲}。
  19. 9)「皆」上有「此」{甲}。
  20. 10)「傳」作「詮」{甲}次同。
  21. 11)「諭」作「論」{甲}。
  22. 12)「喩」作「諭」{甲}。
  23. 13)「也」無有{甲}次同。
  24. 1)「而已」作「耳」{甲}。
  25. 2)「如」作「與」{甲}。
  26. 3)「共」作「其」{甲}。
  27. 4)「楞」作「稜」{甲}。
  28. 5)「云」無有{甲}。
  29. 6)「性」下有「云」{甲}。
  30. 7)「眞」下有「云」{甲}。
  31. 8)「眠」作「面」{甲}。
  32. 9)「西」下有「也」{甲}。
  33. 10)「釋云」作「科云」{甲}。
  34. 11)「之」無有{甲}。
  35. 1)「忘」作「亡」{甲}。
  36. 2)「境」下有「則」{甲}。
  37. 3)「心」下有「則」{甲}。
  38. 4)「是」無有{甲}次同。
  39. 5)「上」上有「皆」{甲}。
  40. 6)「識」作「試」{甲}。
  41. 7)「也」上有「是」{甲}。
  42. 8)「远」作「遠」{甲}。
  43. 9)「類」下有「也」{甲}。
  44. 10)「矣」作「者」{甲}。
  45. 11)「中」下有「有」{甲}。
  46. 1)「答」上有「二」{甲}。
  47. 2)「矣」下有「若然者無有是處矣」{甲}。
  48. 3)「人」下有「四大」{甲}。
  49. 4)「矣」作「也」{甲}。
  50. 5)「何」上有「然則」{甲}。
  51. 6)「虛」上有「何名爲智惠」{甲}。
  52. 7)「又」下有「有」{甲}。
  53. 8)「答」下有「是何言」{甲}。
  54. 9)「言」作「語」{甲}。
  55. 10)「有」上有「云」{甲}。
  56. 11)「又古人云…語勢也」無有{甲}。
  57. 12)「恨」當作「限」{編}。
  58. 13)「云」無有{甲}。
  59. 14)「沙」作「法」{甲}。
  60. 15)「曰」作「云」{甲}。
  61. 16)「焉」作「歟」{甲}。甲本。此以上心性論之本文終焉。以下編次相異。
  62. 17)「願諸學者…因次第盡(次頁中段二十三行)」無有{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