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설담집(雪潭集) / 附

ABC_BJ_H0209_T_006

009_0747_b_11L
부록附錄
설담대화상탑지雪潭大和尙塔誌
대사의 휘諱는 자우自優요, 자字는 우재優哉이며, 호號는 설담雪潭이다. 담양潭陽 김씨金氏의 자손으로,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아버지의 휘諱는 원삼元三이며, 어머니는 대방帶方 양씨梁氏이다.
어머니가 대사를 처음 잉태했을 때 꿈에 매우 수려한 외모의 사미승沙彌僧 한 명이 찾아와 묵어가기를 청하였다고 하니, 아마도 이 모두가 출가出家를 위한 훌륭한 인연이었던 것이다. 대사가 어렸을 때 대사의 아우가 먼저 천연두를 앓았는데,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대사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홀연 꿈에 아관峨冠219)을 쓴 대인大人이 찾아와서 자신을 두신痘神(천연두 귀신)이라 칭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특별히 병에 걸리지 않는 아이라는 징표를 왼쪽 팔에 표시해 줄 것이니, 너는 이 이후로 결코 병에 걸릴 일이 없을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깨어나서 팔을 보니, 과연 콩알 크기의 푸른 점 하나가 생겨났는데, 후에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으니, 이 또한 하나의 특별한 징후라 할 수 있다.
어려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아무 곳에도 의지할 데가 없어서, 마침내 옥천玉川의 복천사福泉寺에 들어가 서곡瑞谷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모은暮隱 화상에게 계를 받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재주와 식견이 높고 밝아 무리들 가운데 매우 뛰어났다.

009_0747_b_11L1)

009_0747_b_12L雪潭大和尙塔誌

009_0747_b_13L
大師諱自優字優㦲號雪潭潭陽
009_0747_b_14L金氏子系出金海考諱元三妣帶
009_0747_b_15L方梁氏大師之始孕也夢一秀美沙
009_0747_b_16L來請托宿盖出家之勝因也
009_0747_b_17L師幼時有弟先患痘過旬日師方
009_0747_b_18L候待父忽夢峨冠大人來稱痘神
009_0747_b_19L吾特表汝不病子左臂矣後當永無患
009_0747_b_20L覺視其臂果有一豆子大靑占
009_0747_b_21L竟不染痘亦一異徵也早失怙
009_0747_b_22L仃無依遂投玉川之福泉寺薙髮于
009_0747_b_23L瑞谷長老聞戒于暮隱和尙而仍且
009_0747_b_24L受業焉資禀純粹才識高明卓出

009_0747_c_01L나이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이미 완숙한 풍모를 넉넉히 이루고 있어서 모은 화상이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의발衣鉢을 전수할 만하다 여기고 스스로 축하하였다.
대사가 어느 날 모은 화상에게 말하기를, “예부터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은 한 스승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식견을 넓히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모은 화상이 기꺼이 허락하였다. 그때 호암虎巖 대사가 방장산方丈山에서 때마침 강당을 열자, 나아가 호암 대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곧이어 가야산伽倻山에 따라가서 몇 해를 지내니, 학식이 더욱 높아지고 명성도 더더욱 자자해져서 사람들이 모두 불문佛門을 이끌어 나갈 큰 인물(棟樑)이라 생각하였다.
가야산에서 모은 화상이 입적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상喪을 치르기 위해 반 천 리나 되는 거리를 온 힘을 다해 달려가니, 이미 다비를 치른 후였다. 동문同門들과 여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호암 대사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권하였지만, 대사는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아직 적고, 학문도 아직 미흡합니다. 저 스스로도 또한 급히 서두르길 바라지 않으니, 어찌 미천한 몸으로 외람되게 높은 자리에 앉아 스승님의 자리를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완강히 거부하며 그 자리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때가 병진년(1736) 가을이었다. 그 해 겨울 홀로 남쪽으로 내려가 설봉雪峯 선백禪伯께 참례하고 의심하던 것들을 물어 해결하였다. 몇 해가 지난 후에 대중들이 강백의 자리에 오르기를 더욱 거세게 요청하자, 부득이 물리칠 수 없어 마침내 도갑사道岬寺의 동림東林에 명패를 걸고서 모은 화상을 위하여 향을 불살라 소요逍遙 대사의 정맥을 잇는 제자가 되었으니, 이때가 무오년(1737) 가을이었다. 모은 화상은 화월華月 대사를 잇고, 화월 대사는 제월霽月220) 대사를 이어받고, 제월 대사는 소요 대사를 이었으니, 소요 대사는 청허淸虛221) 대사의 정통을 잇는 제자이다. 고금古今의 총림叢林에서 선교대종주禪敎大宗主라 불리는 사람이 바로 대사의 5대 법조法祖인 것이다.
대사는 삼장三藏의 현묘한 뜻에 정통하여 꿰뚫어 통하지 않음이 없었고, 육경六經 및 『도덕경(道德)』과 『남화경(南華 : 莊子)』 그리고 아래로는 『좌씨전(左)』·사마광(馬)·한유(韓)·소동파(蘇) 등 여러 대가들의 논서와 문집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섭렵하여 식견이 매우 넓었으며, 그 축적된 공력 또한 대단하였다. 멀고 가까운 학승(學侶)들이 앞다투어 달려와서 그 가르침을 받으니, 모두 그저 아무것도 없는 채로 왔다가

009_0747_c_01L流軰上年未二旬已綽有老成風
009_0747_c_02L隱甚器重之以衣鉢之傳有人爲自
009_0747_c_03L大師一日告和尙曰自古賢哲
009_0747_c_04L師非一願游諸方以廣見聞和尙
009_0747_c_05L乃肎許焉時虎巖大師方開堂於方
009_0747_c_06L丈之山遂進叅講席仍又隨徃伽倻
009_0747_c_07L閱數夏學識益進聲望益蔚人皆
009_0747_c_08L以佛宇棟樑擬之在伽倻聞暮隱歸
009_0747_c_09L遂半千里匍匐奔喪旣闍維
009_0747_c_10L門諸人力勸繼席師辭曰吾年尙
009_0747_c_11L吾學未充自期亦不草草何可
009_0747_c_12L濫竽忝厥師門因牢拒不就時丙
009_0747_c_13L辰秋也是年冬獨南行叅雪峯禪
009_0747_c_14L咨決疑網越數載衆請主席益
009_0747_c_15L不獲已遂掛牌道岬之東林
009_0747_c_16L暮隱拈香續逍遙正脉是戊午秋也
009_0747_c_17L盖暮隱嗣華月華月嗣霽月霽月嗣
009_0747_c_18L逍遙逍遙爲淸虛嫡傳古今叢林
009_0747_c_19L爲禪敎大宗主寔大師五世法祖也
009_0747_c_20L師於三藏玄詮無不精通貫洽而至
009_0747_c_21L若六經及道德南華下逮左馬韓蘇諸
009_0747_c_22L大家子集亦皆餘力旁通所見博矣
009_0747_c_23L所畜富矣遠近學侶奔走下風
009_0747_c_24L「附」字底本在松陰祭文之上編者移置於此

009_0748_a_01L꽉 차게 실리를 얻어서 돌아갔다(虛徃實歸). 또 당대의 어진 사대부들도 대사를 한 번 만나 보면, 그 뜻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합하여서 향산香山 거사가 여만如滿 선사와 사귄 것과 같았고,222) 소동파가 불인佛印223) 대사와 계합한 것과 같았으나, 이와 비교하면 또한 틈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호남과 영남의 이름난 산과 훌륭한 사찰을 두루 유람하며 교화를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년에 복천사의 연대암(蓮臺)인 옛 거처에 돌아와 주석하였는데, 그곳은 바로 대사가 처음 수행을 시작한 곳이었으니, 말년에 돌아가 생을 마칠 장소로 미리 준비해 둔 거처였다.
계학戒學을 어기고 게을리 하는 자들에게 항상 겸손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끔 하였고, 사람들과 담론을 펼칠 때는 항상 겸손하였지만, 그 겸손함에 스스로 만족하여 안주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엔 항상 정성과 진실함을 다하였고, 일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 또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더욱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내어 매번 베풀어 주는 것이 있었으니, 모두 하늘에서 타고난 선량한 마음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난 것이었다. 이미 이렇듯 선량한 마음을 타고난 데다가 부처님의 자비로움으로 중생들을 널리 구제하는 가르침에 힘입게 되어 그러한 것이었다.
경인년(1770) 정월 29일 정미丁未일에 가벼운 질환에 갑자기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로는 62년이요, 법랍法臘은 47년이었다. 대사의 법을 이은 사람은 20여 명이었는데, 수제자인 나암 승제懶菴勝濟가 그 지역에서 명성을 드날렸다. 그 다음으로 한 지방의 으뜸이 되어 후학들을 이끌고 가르칠 스승이 될 만한 사람들도 4, 5명 이상이었으니, 또한 훌륭한 인물들이 넘쳐났다고 할 만하다. 다비를 거행하는 날 저녁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비치니, 대중들이 모두 우러러 쳐다보고 합장하였다. 대사가 지은 시와 글 약간 편을 상자에 보관하여 뒤에 간행하여서 세상에 널리 알려질 날을 기다리고 있다.
문인들이 서로 의논하여 암자 앞 기슭에 탑을 세워 그 덕을 기리고 공경을 표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나암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와 탑에 넣을 지문誌文을 써 주길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행장의 글을 근거로 하여 대략 조금 보태고 정리하여서 후대의 승사僧史를 집필하는 자가 고인의 덕을 살피고 믿게 하기 위해 남기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敎先眼目     교敎를 먼저 살피고
禪叅玄要     선禪으로 현요玄要를 참구하여
求者雖夥     구하는 자는 비록 많지만

009_0748_a_01L得虛徃實歸而當世之賢士大夫
009_0748_a_02L見而氣味相投有似香山之於如滿
009_0748_a_03L坡之於佛印之契者亦間有焉湖嶺
009_0748_a_04L之名山勝刹無不徧游行化而晩年
009_0748_a_05L還住福泉之蓮臺舊棲盖以其最初發
009_0748_a_06L迹之地而擬作末後歸盡之所也常以
009_0748_a_07L慢傲戒學者謙恭勗徒衆與人談論
009_0748_a_08L常謙謙有不自足意遇人一以誠信
009_0748_a_09L不設畦㽩而於貧窮寒乞尤加矜恤
009_0748_a_10L每有所施與其根於天賦之良心者
009_0748_a_11L如是而尤有資於佛氏慈悲普濟之敎
009_0748_a_12L而然也庚寅正月廿九日丁未以微
009_0748_a_13L奄然示寂世壽六旬有二法臘
009_0748_a_14L四十七嗣法者二十餘人上足懶
009_0748_a_15L菴勝濟方馳聲譽於域中其次能領
009_0748_a_16L袖于一方爲後學師範者不下四五
009_0748_a_17L亦可謂濟濟丕盛矣闍維之夕
009_0748_a_18L光耀天衆皆瞻仰而和南所著詩若
009_0748_a_19L文如干篇藏于篋衍以俟他日剞劂
009_0748_a_20L行世門人等相與竪塔于菴之前麓
009_0748_a_21L以爲表德寓敬之所懶菴書來以誌
009_0748_a_22L文爲請甚恳遂依狀文略加排▼(莫/糸) 以
009_0748_a_23L遺後之修僧史者考德從信焉銘曰

009_0748_a_24L敎先眼目禪叅玄要求者雖夥

009_0748_b_01L得之實少     얻는 자는 매우 적도다.
猗歟雪潭     아, 설담雪潭이시여
生此末裔     이 말세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眞詮實悟     참된 가르침과 진실한 깨달음
兩造獨詣     양쪽 모두 나아가 홀로 이르셨네.
智炬燭夜     지혜의 횃불로 어둔 밤을 밝히고
慧筏過海     깨달음의 뗏목으로 바다를 건넜으니
淸虛法孫     청허淸虛 선사의 법손法孫이요
逍遙正派     소요逍遙 선사의 정맥正脈이로다.
把茅盖頭     띠풀로 지붕 얹은
一代宗師     한 시대의 종사宗師로서
疾起良劑     병든 곳에 좋은 약을 주었고
寒曝朝䂀     추운 곳에 아침 햇살을 비췄네.
上有所受     윗대에서 받은 것을
下得其傳     후세에 그대로 전하되
超然返眞     초연히 참된 곳으로 돌아가
捨彼蹄筌     그 방편(蹄筌)을 버리셨도다.
樹此浮屠     이 부도浮屠를 세움에
役夫爭先     일꾼들이 앞다투어 찾아오니
庶幾㫌德     부디 베푼 공덕을 드러냄이
於千百年     천백 년에 이르리라.

숭정崇禎 5년 경인庚寅(1770년) 9월 일에 동강桐岡 병포病逋 삼가 쓰다.
송음의 제문(松陰祭文)
경인년(1770) 정월(孟春)에 설담 대사께서 강천사剛泉寺 연대암蓮臺菴에서 입적하시니, 승제勝濟 대사 등 그 문도들이 3백 리가 넘는 거리를 맨발로 달려가서 나(松陰 : 金福鉉)에게 찾아왔다. 그러나 당시에 백성들에게 어렵고 슬픈 일이 거듭 발생하여서 다른 일을 돌보지 못한 채 한 해를 넘겼다. 그러다가 신묘년(1771) 중동中冬(음력 11월)에 비로소 남쪽으로 내려가 부도 자리를 구하여서 21일 정사丁巳일에 다과를 간소하게 올리고 글로써 곡哭을 대신한다.

不相爲謀     서로 일을 도모하지 못하면
曰道不同     도가 같지 않다고 하는데
同歸于心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各依其宗     각기 그 종지에 의지하네.
誰能寂滅     누가 능히 적멸하여
竟是感通     끝내 감통하여서
肝膽之照     간과 쓸개가 서로 비추듯 하며
形骸以外     형체를 초월하겠는가.
浮雲靡住     뜬구름과 같이 안주하지 못하고
恒沙弗改     영원토록 벗어나지 못하네.
朗嶽星臨     산에서 밝은 별빛 바라보니
蓮臺烟歇     연화대에 연기가 뜸해지네.
刹那浩劫     찰나와 영원 사이에
獨此齒髮     다만 이 치아와 머리칼뿐이네.
載哭載笑     울다가 웃다가
徃事冥冥     지난 일들이 아득하기만 한데
古德微哂     옛 덕이 높은 이들은 빙그레 웃겠지만
今我殢情     지금 나는 먹먹한 마음뿐이네.
千里寒雪     천 리의 찬 눈발에
一炷淸香     한 가닥 맑은 향같이
尙有不昧     오히려 어둡지 아니하고
昭昭靈靈     밝고 밝아 영묘하네.


009_0748_b_01L得之實少猗歟雪潭生此末裔

009_0748_b_02L眞詮實悟兩造獨詣智炬燭夜

009_0748_b_03L慧筏過海淸虛法孫逍遙正派

009_0748_b_04L把茅盖頭一代宗師疾起良劑

009_0748_b_05L寒曝朝䂀上有所受下得其傳

009_0748_b_06L超然返眞捨彼蹄筌樹此浮屠

009_0748_b_07L役夫爭先庶幾㫌德於千百年

009_0748_b_08L
旹崇禎後庚寅九月日桐岡病
009_0748_b_09L逋謹誌

009_0748_b_10L

009_0748_b_11L1)松陰祭文

009_0748_b_12L
維庚寅孟春雪潭大師示寂于剛泉
009_0748_b_13L寺之蓮臺菴其徒勝濟等專走白足
009_0748_b_14L越三百里赴于松陰鮮民屬有荐慽
009_0748_b_15L不遑外事越明年辛卯中冬始南
009_0748_b_16L來尋浮圖用廿一日丁巳畧薦茶果
009_0748_b_17L文以代哭不相爲謀曰道不同同歸
009_0748_b_18L于心各依其宗誰能寂滅竟是感
009_0748_b_19L肝膽之照形骸以外浮雲靡住
009_0748_b_20L恒沙弗改朗嶽星臨蓮臺烟歇
009_0748_b_21L那浩刼獨此齒髮載哭載笑徃事
009_0748_b_22L冥冥古德微哂今我殢情千里寒
009_0748_b_23L一炷淸香尙有不昧昭昭靈靈

009_0748_b_24L
雪潭集終

009_0748_b_25L「松」上有「附」編者除之
  1. 219)아관峨冠 : 예전에 높은 벼슬을 지내는 관리가 쓰던 관을 말한다.
  2. 220)제월霽月 : 조선시대 승려(1542~1632)로서, 속성은 조曺이고, 호는 제월霽月이다. 휴정休靜 서산 대사 밑에서 수도하였고, 임진왜란 때 휴정의 승병 좌영장左營將으로 활약하였다. 저서에 『霽月堂集』이 있다.
  3. 221)청허淸虛 : 휴정 서산休靜西山(1520~1604) 대사를 말한다. 조선 중기의 고승이며, 승장僧將이다.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여신汝信이고, 아명은 운학雲鶴이며, 자는 현응玄應이다. 청허淸虛와 서산西山은 호이다. 별호는 백화 도인白華道人 또는 풍악 산인楓岳山人, 두류 산인頭流山人, 묘향 산인妙香山人, 조계 퇴은曹溪退隱이고, 휴정은 법명이다. 임진왜란 당시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함께 승병僧兵을 일으켜서 크게 전공을 세웠다.
  4. 222)향산香山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를 말하고, 여만如滿은 당나라 때 고승을 말한다. 둘은 서로 매우 가까이 교유하다가 향화사香火社를 결성하여 불법佛法을 탐닉하였다.
  5. 223)불인佛印 : 송나라 때 승려로서, 법명은 요원了元(1032~1098)이다. 선사는 40년 동안을 칩거하며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선사가 여산에 있을 때 황주에 귀양 온 소동파와 가까이 지내며 교유하였다.
  1. 1)「附」字。底本在松陰祭文之上。編者移置於此。
  2. 1)「松」上有「附」編者除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