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초의시고(艸依詩藁) / 艸衣大宗師塔碑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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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대종사 탑비명艸衣大宗師塔碑銘
초의草衣 순공恂公이 시적示寂한 뒤에 그 문도門徒인 선기善機와 범운梵雲 등이 실내에 상像을 봉안奉安한 뒤에 나에게 찬문贊文을 청하기에 내가 기꺼이 응하였다. 또 비석을 세우면서 나에게 명銘을 요청하였는데, 처음에는 내가 내전內典을 익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으나, 성상星霜이 열 번 바뀌도록 계속해서 더욱 간절히 청했으므로, 순공에 대해서 보고 들은 내용을 가지고 글을 짓게 되었다.
종풍宗風이 세상에 떨쳐지지 않은 것이 오래되었다. 요즈음에는 제방諸方의 총림叢林 중에 이름이 전해지는 자가 거의 없으니, 그 잘못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는가. 그것은 선교禪敎의 논의가 갈등을 빚고 돈점頓漸의 논변이 혼란스러워서 서로 계합契合하는 것이 적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순공이 남방에서 분발하여 널리 탐구하고 홀로 조예를 닦으면서, 일진一眞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중론衆論의 장점을 취집하였다. 그리하여 남방의 학자들이 너도나도 따르고 있으니, 어찌 위대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스님의 법명法名은 의순意恂이요 자字는 중부中孚이니, 무안務安 장씨張氏의 아들이다. 모친이 임신했을 적에 꿈속에서 큰 별이 가슴 안으로 들어왔다. 병오년(1786, 정조10) 4월 5일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병인년(1866, 고종3) 8월 2일에 이 세상을 떠났다. 비성沸星이 나올 때에 태어난 부처의 상서祥瑞84)와 겨우 며칠의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5세 때에 강가로 놀러 나갔다가 거센 물결 속에 잘못 떨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옆에 끼고서 빠져나오게 하였다. 약관弱冠에 월출산月出山을 지나가던 중에 빼어난 그 풍치가 좋아서 자기도 모르게 한가롭게 슬슬 걷다가 혼자서 정상까지 올라가 보름달이 바다에서 나오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는 마치 고로杲老(대혜 종고大慧宗杲)가 훈풍薰風을 맞아 가슴속의 응어리가 사라진 것과 같은 경험이었다. 이로부터 어떤 상황에 처하든 걸리는 것이 없었으니,

010_0869_b_06L1)艸衣大宗師塔碑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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艸衣恂公旣示寂其徒善機梵雲等
010_0869_b_08L妥其像于室而求賛於余即樂應之
010_0869_b_09L又治珉而求銘于余始以不習內典
010_0869_b_10L十易霜而求益堅乃以所見聞於恂公
010_0869_b_11L爲之言曰宗風之不振於世久矣
010_0869_b_12L近時諸方叢林中幾無聞者厥咎安在
010_0869_b_13L由禪講之論岐而頓漸之辨混投機少
010_0869_b_14L而然也恂公奮于南服博究孤詣用能
010_0869_b_15L溯一眞之源集衆論之粹而南方學
010_0869_b_16L翕然從之豈不偉哉按師法名意
010_0869_b_17L字中孚務安張氏子方其身也
010_0869_b_18L夢大星投懷以丙午四月五日來丙寅
010_0869_b_19L八月二日逝輒與佛瑞2) [15] 星出時
010_0869_b_20L差數日其亦異矣五歲時出遊江渚
010_0869_b_21L誤墮於悍流中若有挾而出者弱冠過
010_0869_b_22L月出山愛其奇秀不覺縱步獨躋其
010_0869_b_23L望見滿月出海怳若杲老之遇薰風
010_0869_b_24L去却碍膺之物自是以往所遇無所忤

010_0869_c_01L어쩌면 숙세宿世의 기습氣習이 작용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벽봉碧峯 성공聖公에게서 옷을 검게 물들여 사미沙彌가 되었고, 완호玩虎 우공禹公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구比丘가 되었다. 초의草衣는 염화拈花의 호號이다.
불교의 가르침을 익히는 여가에 범자梵字도 학습하며 거로呿盧의 뜻을 통했고, 또 신상神象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 도자道子85)의 방에 들어갈 정도가 되었다.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 승지承旨를 따라 유서儒書를 수업하고 시도詩道를 살폈으며, 그 뒤에 교리敎理에 정통하는 동시에 선禪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유람의 길에 올라 풍악楓岳에 들어가서 비로봉毗盧峯에 올랐으며, 영嶺의 동서쪽 산해山海의 승경勝景을 모두 답사하고 돌아와 경도京都의 제산諸山을 편력하였다.
해거도위海居都尉(홍현주洪顯周)와 자하紫霞(신위申緯)․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 양 시랑侍郞이 찾아와 어울려 노닐고 함께 창수唱酬하면서 모두 동림東林의 원공遠公86)이요 서악西岳의 관휴貫休87)로 지목하자 명성이 일시에 널리 퍼졌다. 그러나 스님은 자취를 거두고 빛을 숨긴 채 두륜산頭崙山 정상에 나아가 등라藤蘿의 그늘 속에 작은 암자 하나를 엮은 뒤에 일지一枝라고 편액扁額을 내걸고는, 사십여 년 동안 지관止觀하며 홀로 거하였다.
어떤 이가 스님에게 묻기를 “그대는 선禪을 전공하는가?”라고 하니, 스님이 대답하기를 “기틀이 예리하지 않으면 선을 전공하든 교敎를 전공하든 차이가 없다. 내가 어찌 수고스럽게 그런 일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교를 전공하는 자도 꼭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고, 선을 전공하는 자도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백파白坡 선공璇公(긍선亘璇)이 백양산白羊山에 은거하여 나이 80여 세가 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십육 세 때부터 선禪에 투신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뒤로 물러서는 마음을 낸 적이 없다.”라고 하고는, 임제臨濟의 삼현三玄의 요구要句88)를 기용機用으로 나누어 붙이면서 깨달음의 단계를 제시하였다. 이에 스님이 백파의 잘못을 반박하는 글을 지어 나에게 부쳐 보여 주기에, 내가 또 스님의 잘못을 지적하니, 스님이 웃고 받아들이면서 말하기를 “모두 잘못되어도 무방하다. 잘못된 곳이 바로 깨달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체격이 장대하고 골상骨相이 기이하여 옛 존자尊者의 상象을 닮았으며,

010_0869_c_01L殆其有宿氣而然歟緇其衣於碧峯
010_0869_c_02L聖公受信具於玩虎禹公草衣其拈花
010_0869_c_03L之號也演敎之餘兼習梵字而通呿
010_0869_c_04L盧之旨又善神象而入道子之室
010_0869_c_05L茶山承旨受儒書觀詩道而後精通
010_0869_c_06L敎理恢拓禪境始有雲遊之奧入楓
010_0869_c_07L登毗廬盡閱嶺東西山海之勝
010_0869_c_08L而歷京都諸山海居都尉與紫霞秋史
010_0869_c_09L兩侍郞命駕從遊與共唱酧皆以東
010_0869_c_10L林遠公西岳貫休目之聲名噪於一時
010_0869_c_11L師乃歛跡弢光就頭崙山頂藤蘿陰中
010_0869_c_12L結一小庵扁曰一枝獨處止觀四十年
010_0869_c_13L或有問者曰子其專於禪者乎
010_0869_c_14L曰機苟不利則專於禪與專於敎
010_0869_c_15L以異也吾何苦爲此哉其意盖以專敎
010_0869_c_16L未必無失而專禪者亦未爲得也
010_0869_c_17L白坡璇公隱白羊山年八十餘自云
010_0869_c_18L從十六歲投禪未嘗一念退轉每演臨
010_0869_c_19L濟玄要句分貼機用以爲悟徹師因
010_0869_c_20L辨坡誤處以寄示余余又辨師誤處
010_0869_c_21L師笑受之云不妨俱誤誤處即是悟處
010_0869_c_22L師軀幹豊碩梵相奇古類古尊者
010_0869_c_23L此碑銘底本在於跋文之後編者移置於此
010_0869_c_24L「沸」疑「彿」{編}

010_0870_a_01L노년에도 건강한 것이 소년과 같았다. 봉은사奉恩寺에서 대교大敎를 간행하는 불사佛事를 개최할 적에 스님을 초청하여 증사證師로 삼았으며, 달마산達摩山에서 무량無量의 법회法會를 열 적에도 스님을 모셔 선석禪席을 주도하게 하였는데, 스님은 모두 잠깐 응하고는 곧바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일지암一枝庵에서 시화示化하였으니, 현세現世의 나이는 81세요, 법랍法臘은 약간 세이다.
과거에 내가 호남湖南에서 주사舟師를 다스릴 적에 스님이 방문을 하자, 내가 아니면 초치招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혹자가 말했는데, 어쩌면 그럴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에 듣건대, 추사秋史를 영주瀛洲로 위문하면서 거센 풍랑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하기에 마음속으로 매우 대단하게 여겼는데, 나중에 내가 은혜로운 처벌을 받고 녹원鹿苑의 바다에 거하고 있을 적에 스님이 또 재차 찾아와 주었다. 그러니 내가 스님의 명銘을 짓는 것을 사양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初祖西來         달마가 중국에 와서,
建第一義         제일의第一義를 세울 적에,
廓然無聖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 했는데,
是亦文字         이것 역시 문자로세.
弗即弗離         즉即도 이離도 아닌 것을,
始名不二         불이不二라 이름하나니,
槩云掃除         소제를 말하는 것은,
殆非祖意         조사의 뜻이 아니로세.
惟師眼中         우리 스님의 눈 속에는,
有八萬藏         팔만 장경이 들어 있어,
是一字字         글자 하나하나마다,
皆放圓光         모두 원광을 발한다네.
千七百則         일천 칠백 공안과,
四十二章         사십이대장경을,
約而觀之         요약해서 살펴보면,
無短無長         장단을 말할 수 없어라.
處世非染         세간에 어찌 물들 것이며,
出世非淨         출세간이 깨끗하게 할까.
惟有情人         오직 정인이 있으면,
能見其性         성품을 능히 보인다네.
鯨濤眩轉         풍랑 거센 바닷길을,
履之如鏡         명경 밟듯 하였나니,
何以無畏         어찌 두렵지 않으리오만,
一於動靜         동정에 전일하였네.
頭崙之頂         두륜산 꼭대기에,
借棲一枝         가지 하나 빌려 깃들고,
太白老胡         태백의 노호에게,
復借之衣         또 옷을 빌렸다네.
文佛慧命         석가불의 혜명이,
僅如懸絲         겨우 실낱같음에,
宗風再振         종풍을 다시 진작시켜,
廣被諸機         널리 기틀을 바로잡았다네.
禪無可入         선학에만 몰입하지 않고,
講無可捨         교학도 버리지 않았네.
從容而至         조용히 이르렀나니,
何事呵罵         어찌 가매89)를 일삼으랴.
一喝而聾         일할一喝에 귀먹어,
頑禪打坐         묵묵히 앉아 수행하는,
是草衣人         이분이 초의요,
普濟尊者         보제존자로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겸병조판서兼兵曺判書

010_0870_a_01L旣耋艾而輕健如少年當奉恩寺
010_0870_a_02L有大敎刊布之役邀師爲證師達摩山
010_0870_a_03L建無量之會奉師主禪席皆暫膺即還
010_0870_a_04L示化於一枝菴中現世之年八十有一
010_0870_a_05L法臘爲若干歲嚮余治舟師於湖南也
010_0870_a_06L師過焉或謂非余莫能致倘其然乎
010_0870_a_07L繼聞唁秋史於瀛洲風濤甚險而弗懾
010_0870_a_08L心甚偉之後余承恩譴居鹿苑海中
010_0870_a_09L師又再至焉余於銘師也不宜辭銘曰

010_0870_a_10L初祖西來建第一義廓然無聖

010_0870_a_11L是亦文字弗即弗離始名不二

010_0870_a_12L槩云掃除殆非祖意惟師眼中

010_0870_a_13L有八萬藏是一字字皆放圓光

010_0870_a_14L千七百則四十二章約而觀之

010_0870_a_15L無短無長處世非染出世非淨

010_0870_a_16L惟有情人能見其性鯨濤眩轉

010_0870_a_17L履之如鏡何以無畏一於動靜

010_0870_a_18L頭崙之頂借棲一枝太白老胡

010_0870_a_19L復借之衣文佛慧命僅如懸絲

010_0870_a_20L宗風再振廣被諸機禪無可入

010_0870_a_21L講無可捨從容而至何事呵罵

010_0870_a_22L一喝而聾頑禪打坐是草衣人普濟
010_0870_a_23L尊者

010_0870_a_24L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兵曺

010_0870_b_01L판삼군부의금부사判三軍府義禁府事 신헌申櫶은 짓다.


010_0870_b_01L判書判三軍府義禁府事申櫶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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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84)비성沸星이 나올~부처의 상서祥瑞 : 『長阿含經』 권4에 “어느 때에 부처가 태어나고, 어느 때에 부처가 성도하고, 어느 때에 부처가 멸도했는가. 비성이 나올 때에 태어나고, 비성이 나올 때에 출가하고, 비성이 나올 때에 성도하고, 비성이 나올 때에 멸도했다.(何等時佛生, 何等時成道, 何等時滅度. 沸星出時生, 沸星出出家, 沸星出成道, 沸星出滅度.)”라는 말이 나온다.
  2. 85)도자道子 : 당대唐代의 유명한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의 자字이다. 그는 특히 산수山水와 불상佛像에 독보적인 경지를 보여 주었다.
  3. 86)동림東林의 원공遠公 : 각주88) 참조.
  4. 87)서악西岳의 관휴貫休 : 각주236) 참조.
  5. 88)삼현三玄의 요구要句 : 임제종臨濟宗의 창시자인 임제 의현臨濟義玄이 학인을 지도하면서 사용하던 방법인데, 이에 대해서는 해설이 분분하나 전통적인 해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구, “임제 내가 제시한 삼요의 인을 찍으면 붉은 도장 자국이 비좁기만 한데, 어떻게 생각할 사이도 없이 주인과 객의 신분이 분별되고 만다.(三要印開朱點窄, 未容擬議主賓分.)” 제2구,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어찌 교학敎學을 닦는 무착의 질문을 수용하겠는가마는, 방편이라 하더라도 어찌 뛰어난 근기를 저버리기야 하겠느냐.(妙解豈容無着問, 漚和爭負截流機.)” 제3구, “무대 위의 꼭두각시 춤을 보아라. 앉고 서고 하는 것이 숨은 사람의 짓이니라.(看取棚頭弄傀儡, 抽牽元是裏頭人.)” 『臨濟語錄』, 『人天眼目』 권1.
  6. 89)가매呵罵 :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매도한다는 뜻의 가불매조呵佛罵祖의 준말이다. 원래는 일체의 얽매임에서 해방되어 옛 성현의 구속까지도 받지 않고 초월한다는 의미로 쓰인 선종禪宗의 용어인데, 뒤에는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부정적인 뜻으로 전용轉用하게 되었다.
  1. 1)此碑銘。底本在於跋文之後。編者移置於此。
  2. 2)「沸」疑「彿」{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