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초의시고(艸依詩藁) / 艸衣詩藁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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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시고 발문(艸衣詩藁跋)
신해년(1851, 철종2) 엄동설한에 내가 병에 걸려 시름하고 있을 적에, 초의草衣 노사老師가 방문했다고 농리瀧吏가 보고하기에, 얼른 나가 맞이하고서 안으로 영접하니, 노사가 삼화三花처럼 초췌한 나를 걱정하였다. 그러고는 광장설廣長舌로 문장의 유파流派와 어려운 시운詩韻을 유창하게 논하더니, 소매 속에서 시권詩卷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동안 사일思一이 크게 칭찬하는 말을 실컷 들은 터라서, 마침내 촛불을 켜고 그 시를 감상하였더니, 경오警悟하는 말이 많고 분식粉飾하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뜻을 위주로 표현하여 구슬이 소반에 굴러다니는 듯 종횡으로 치달렸으니, 이는 참으로 징률徵栗이나 제고題糕와 같은 일로서, 초화苕花의 아름다움을 독점하고 있었다.
연천淵泉(홍석주洪奭周) 상공相公이 서문을 지으면서, 자양부자紫陽夫子(주희朱熹)의 발문에 나오는 지남志南 상인上人의 행화杏花 양류楊柳의 시구와 우열을 가리려고 하였으니, 얼마나 변재辨才가 대단한지 징험할 수가 있다. 그리고 “영대가 원래 견고한 바탕이요, 지수가 본래 맑은 근원이라.(靈臺元固基, 智水本澄源.)”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보면 일찍이 학사學士 대부大夫와 종유從遊하면서 오도吾道에 뜻을 둔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가령 노사가 창려昌黎(한유韓愈)의 세상에 있었다면, 원혜元惠와 문창文暢 스님과 비교해서 누가 더 나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빈 숲엔 하늘 끝 달이 비쳐 들어오고, 들 물엔 눈 온 뒤 산빛이 밝게 잠겼네.(空林照入天涯月, 野水明涵雪後山.)”라는 구절로 말하면, 실제로 당송唐宋에 출입할 만하니, 자하紫霞(신위申緯)가 소순蔬筍의 기미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평한 것도 진정 과장된 말은 아니다.
또 『동다송東茶頌』 한 편은 상저서桑苧書90)와 서로 위아래를 다툰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침정沈靜 담저澹泞하여 오도洿塗를 피하고 유류悠謬를 벗어나 피안彼岸에 이를 수가 있으니, 어찌 혜휴惠休와 보월寶月의 무리가 감히 견줄 수 있겠는가.
돌아보건대 나는 선화蟬花와 같이 박루樸陋해서 남을 평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하겠지만, 우리가 함께 노닌 감회가 있기에 시권詩卷의 말미에 한마디하게 되었다.
석오石梧 윤치영尹致英은 쓰다.

예로부터 총림叢林에서 세상에 이름이 난 스님들은 대부분 청운의 인사에게 붙은 뒤에야 비로소 이름이 드러났다. 예를 들면 문창文暢이 퇴지退之(한유韓愈)에게 붙고, 비연秘演이 영숙永叔(구양수歐陽修)에게 붙고, 도잠道潛과 총수聰殊가 자첨子瞻(소식蘇軾)에게 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석씨釋氏는 적멸寂滅을 도道로 삼고 은둔을 즐기며 색상色相을 공空으로 여긴다. 그러니 시로 이름을 얻으려고 하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유자儒者의 시는 석씨의 게偈라고 할 것인데, 게를 잘 지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적이 없다.

010_0870_b_03L艸衣詩藁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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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金豕積寒余屬疾端憂瀧吏報涉艸
010_0870_b_05L衣老師刹扉乃躧履捉坐憂余蕉萃如三
010_0870_b_06L以廣長舌論流別竸病就傾海袖攏
010_0870_b_07L行卷以示余嘗飫聞思一侈頰牙遂燃燭
010_0870_b_08L吟賞其詩多警悟絕粉臙崇意布格
010_0870_b_09L盤走丸橫斜超縱眞徵栗題糕苕花獨
010_0870_b_10L淵泉相公弁其首以紫陽夫子所跋
010_0870_b_11L南上人杏花楊柳句爲甲乙足驗其大
010_0870_b_12L辨才且有靈臺元固基智水本澄源之句
010_0870_b_13L嘗從學士大夫遊其有意於吾道審矣使
010_0870_b_14L在昌黎之世未知元惠文暢孰爲紫標黃
010_0870_b_15L如空林照入天涯月野水明涵雪後山
010_0870_b_16L之句果出入唐宋紫霞所謂盡脫蔬筍氣
010_0870_b_17L信非讕語又東茶頌一篇與桑苧書
010_0870_b_18L相上下况其沈靜澹泞避洿塗謝悠謬
010_0870_b_19L能到彼岸者豈惠寶軰所敢肩哉顧余蟬
010_0870_b_20L花樸陋不足爲月朝語而以從余遊處爲
010_0870_b_21L用托卷尾云石梧尹致英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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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古叢林之聞於世者多附靑雲之士名
010_0870_b_24L始著如文暢之於退之秘演之於永叔
010_0870_b_25L道潛聰殊之於子瞻是爾然釋氏以寂滅
010_0870_b_26L爲道樂隱瀹而空色相况以詩名乎
010_0870_b_27L儒之詩釋之偈也偈之善者未始不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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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草衣 장로長老 의순意恂은 바로 근세에 게를 잘 지은 사람이다. 그가 지은 일지암一枝庵의 두 편의 시를 내가 보았더니, 모두 청원淸遠하고 유담幽澹하였으며, 찌꺼기는 도태하고 정수만 걸러 낸 것이었다. 연천淵泉(홍석주洪奭周)이 분식粉飾을 완전히 없앴다고 평하고, 자하紫霞(신위申緯)가 소순蔬筍의 기미를 떨어 버렸다고 평한 것은 실로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이름이 사람들 사이에 크게 알려지자, 또 모두 함께 어울려 창수唱酬하였으니, 이는 하나의 한韓, 하나의 구歐, 하나의 소蘇만으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세상에 이름이 나려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는 또 장로 자신이 그들에게 붙으려 해서가 아니고, 한․구․소가 창暢․연演․잠潛․수殊를 만난 것을 즐거워하며 스스로 그 이름을 조장한 것이니, 장로에게야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 중에는 계율戒律에 구애를 받은 나머지 더러 비난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번 시험 삼아 읽어 보면 장로가 언제 기려綺麗하고 음야淫冶한 시를 지어서 혜휴惠休나 보월寶月의 무리처럼 재자才子에게 영합하려고 한 적이 있기나 하였던가.
장로는 오로지 진제眞諦와 정각正覺을 근본하고 제가諸家의 시를 섭렵한 뒤에 게偈를 지은 것이니, 그의 이름에 흠을 낼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겠다. 내가 그의 시를 알고 그의 사람됨을 안 뒤에, 부도자浮屠子가 그의 자취를 문제 삼는 것에 대해 분개한 나머지, 서문序文 중의 장구章句를 대략 주워 모으고 나의 군더더기 말을 보태어서 간행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을해년 모월 모일에 백파거사白坡居士 영천靈川 신헌구申獻求는 초의草衣 고제高弟 월여月如의 선실禪室에서 쓰다.

대개 시는 천취天趣에 근본해서 언사言詞로 발로되는 것이다. 일지암一枝庵 화상和尙은 평생 불경佛經을 강론하고 선기禪機를 펼치는 여가에 더러 유석儒釋과 어울려 이따금 창수唱酬하였는데 그 기운이 속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를 엮어서 시로 지으면 문조文藻가 빛나고 음운音韻이 맑아서 애연藹然히 성률聲律에 들어맞았으니, 당송唐宋의 격조格調에 출입한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명성이 당세에 떠들썩하였으니, 이는 또한 깨달음을 통해서 정情으로 발산된 것이라고 하겠다.
빛나는 이 명성을 차마 숨길 수가 없기에, 법손法孫인 상운祥雲과 응혜應惠가 법제法弟인 쌍수雙修․일한一閒과 더불어 특별히 아회雅懷를 발하여 공인工人에게 인행印行하게 하였는데, 나도 이 역사役事에 끼어 도우면서 장하고 기쁘게 여겨지기에, 승연勝緣의 자취를 이렇게 기록해서 보여 주게 되었다.
병오년 4월 하순 어느 날에 원응圓應 계정戒定은 삼가 쓰다.

010_0870_c_01L於世草衣長老意恂即近世之善偈者
010_0870_c_02L余觀其所爲一枝盦二𢎥詩皆淸遠幽澹
010_0870_c_03L淘涬煉精淵泉之絕去粉澤紫霞之擺落
010_0870_c_04L蔬筍良非過詡名碩聞人又皆從與唱
010_0870_c_05L不惟一韓一歐一蘇而止雖欲無聞
010_0870_c_06L於世得乎盖亦非長老之所自附爲韓敺
010_0870_c_07L蘇者樂得暢演潛殊自助其名於長老
010_0870_c_08L何有哉而緇衲局束於戒律猶或非之
010_0870_c_09L亦試讀之曷嘗爲綺麗淫冶以求合於才
010_0870_c_10L如惠休寶月之倫乎職由眞諦正覺
010_0870_c_11L歷涉諸家之詩以爲之偈宜其名聞之不
010_0870_c_12L余旣覺其詩知其人又憤浮屠子之
010_0870_c_13L其跡略掇弁序中章句贅說而足之
010_0870_c_14L以竢剞劂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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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旃蒙大淵獻之霷白坡居士靈川申
010_0870_c_16L獻求書于艸衣高弟月如禪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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盖詩本於天趣而發於言詞也一枝盦和
010_0870_c_19L生平演經竪拂之餘或與儒釋有時
010_0870_c_20L唱酧含吐不俗聯而爲詩文藻彬鬱
010_0870_c_21L韻淸揚藹然自合於聲律可謂出入唐宋
010_0870_c_22L之調格名噪當世則亦由悟天而發於情
010_0870_c_23L者也盛名之下不忍弢光故法孫祥雲
010_0870_c_24L應惠與法弟雙修一閒特發雅懷倩工
010_0870_c_25L印緝定亦叅助役壯而悅之記示勝緣
010_0870_c_26L之迹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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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午四月下浣之一日圓應戒定謹書
  1. 90)상저서桑苧書 : 당唐나라 육우陸羽가 지은 다경茶經을 가리킨다. 상저는 육우의 별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