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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7_c_02L동사열전 제2권(東師列傳 第二)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태고왕사전太古王師傳스님의 법명은 보우普愚이고 처음 법명은 보허普虛이며, 호는 태고太古이고 속성은 홍洪씨이며, 홍주洪州(충남 홍성)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개부의 동삼사 상주국 문하시중 판이병부사 홍양공開府儀同三司上柱國門下侍中判吏兵部事洪陽公 연延이고, 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에 추증된 정鄭씨이다.어느 날 어머니가 둥근 달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여 원元나라 성종成宗 대덕大德 5년 신축(고려 충렬왕 27, 1301) 9월 21일에 보우를 낳았다.13세에 회암사의 광지廣智 선사에게 가서 출가하였다. 37세에 크게 깨닫고 46세에 중국 연경燕京을 거쳐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으로 석옥 청공石屋淸珙1) 선사를 찾아갔다. 청공 선사는 보우 스님이 매우 큰 그릇임을 알고 마침내 가사를 주어 믿음을 나타내고 말하였다.“늙은 중이 오늘에야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구나.”다시 연경으로 돌아오니 원나라 천자가 그 말을 듣고 그를 초청하여 영녕사永寧寺에서 개당開堂2)하여 설법하게 하고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침향沈香과 불자拂子를 하사하였다.무자년(충목왕 4, 1348) 봄에 귀국하여 미원현迷源縣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갔다. 임진년(1352)에 현릉玄陵 공민왕恭愍王이 사신을 보내 제자가 될 것을 청하였으며, 병신년(1356)에는 현릉이 직접 가서 대사를 왕사王師로 책봉하였다.임술년(우왕 8년, 1382) 여름에 소설산으로 돌아와 12월 24일에 게송을 설하고 입적하니,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원증圓證’이라는 시호를 추증追贈하고 중흥사重興寺(삼각산에 있던 절) 동쪽 봉우리에 탑을 세우고 -
010_1007_c_02L東1)師列傳第二
010_1007_c_03L[傳]
010_1007_c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1007_c_05L太古王師傳
010_1007_c_06L師名普愚。初名普虛。號太古。姓洪氏。
010_1007_c_07L洪州人也。父開府2)議 [1] 同三司上柱國門
010_1007_c_08L下侍中判吏兵部事洪陽公延。母贈三
010_1007_c_09L韓國大夫人鄭氏。母夢月輪入懷。因而
010_1007_c_10L有娠。元成宗大德五年辛丑九月二十
010_1007_c_11L一日生。十三投檜岩寺廣智禪師。出家。
010_1007_c_12L三十七大悟。四十六遊燕都。至湖州霞
010_1007_c_13L霧山石屋淸珙禪師。師深器之。遂以袈
010_1007_c_14L裟表信曰。老僧今日。展脚而睡矣。回至
010_1007_c_15L燕都。天子聞之。請開堂於永3)明 [2] 寺。賜
010_1007_c_16L金襴袈裟沈香拂子。戊子春。東歸。入迷
010_1007_c_17L源小雪山。4)十二月二十四日。說偈而
010_1007_c_18L逝。 [3] 壬辰。玄陵恭愍王。遺使請益。丙申。
010_1007_c_19L玄陵親臨。封爲王師。壬戌夏。還小雪山。
010_1007_c_20L十二月二十四日。說偈而逝。上甚悼。
010_1007_c_21L贈謚日。圓證。立塔于重興寺之東峯。曰
010_1007_c_22L「師」甲本正誤表作「國」。「議」甲本正誤表
010_1007_c_23L作「儀」。「明」甲本正誤表作「寧」。「十二…
010_1007_c_24L而逝」十一字。甲本正誤表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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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8_a_01L‘보월승공寶月昇空’이라는 탑 이름을 내렸다.석종石鐘을 만들어서 사리를 봉안하게 한 곳이 무릇 세 곳이나 되니, 가은加恩(희양산 鳳巖寺)과 양산陽山(양평군 미지산 舍那寺) 그리고 양근陽根(양평군 미지산 小雪庵)이 그곳이다. 석탑을 만들어 보관한 곳은 미원迷源 소설산小雪山이다.명나라 홍무洪武 5년 임술(1382)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82세이고 법랍法臘은 69년이다. 조정에서는 ‘삼한양조국사 이웅존자三韓兩朝國師利雄尊者’로 추증하였다. 보우는 부처님(能仁)으로부터 57세世 조사가 된다.이색李穡이 임금의 조서를 받들어 비석의 글을 짓고, 권주權鑄3)가 교지를 받들어 비액碑額의 글씨를 썼다.환암국사전幻庵國師傳스님의 법명은 혼수混修이고 자字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庵이고 속성은 조趙씨이며, 광주廣州의 풍양豊陽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7년, 즉 고려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1320)에 출생했다.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나옹懶翁을 초청하여 주맹主盟(시험관)으로 삼고 회암사에서 공부선工夫選 시험을 치렀다. 이때 임금이 시험 광경을 지켜보기 위하여 여러 궁중의 사람들과 양부兩府 문관 및 무관 등 관료들을 거느리고 직접 행차하시어 관람하였다. 강호江湖의 모든 선사와 강사 등 승려들은 급히 금불당金佛堂 안으로 다 모였다.그러자 법좌法座를 배설하고 나옹 대사가 향을 뽑아서 하는 의식을 마친 다음 자리에 올라 질문을 하였다. 시험장에 모인 스님들은 차례대로 나옹 대사 앞에 나아가 대답을 하였으나 모두 모른다고 할 뿐이었다. 혹은 이론은 통했으나 응용 면에서는 막히기도 하고, 혹은 일상적인 데에서 심하게 벗어나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나옹 대사는 한 구절을 물어보고는 곧 물러가게 하곤 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임금은 얼굴빛이 기쁘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환암 혼수幻庵混修 선사가 맨 뒤에 이르렀는데, 나옹 대사가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을 하나하나 물으니 선사가 낱낱이 대답하였다.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25년, 즉 우리 조선 태조 원년 임신(1392)에 열반에 드니, 조선 조정에서는 그에게 ‘보각普覺’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현릉玄陵(공민왕)이 부디 머물러 있어 달라고 간청하였으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다. 공민왕은 그에게 ‘국사 정변지 지웅존자國師正徧智智雄尊者’라는 호를 내려 주었다.문형제門兄弟 33명 중에 출가한 제자는 25명이고 재가在家 제자로는 칠원부원군柒原府院君 윤환尹桓4)·영삼사사領三司事 이인임李仁任5)·판문하判門下 최영崔瑩6)·문하시중門下侍中 -
010_1008_a_01L寶月昇空。作石鍾。藏舍利者。凡三所加
010_1008_a_02L恩陽山楊根。作石塔以藏之者。迷源小
010_1008_a_03L1)雪。 [4] 明洪武五年壬戌。入寂。年八十二。
010_1008_a_04L臘六十九。贈三韓兩朝國師利雄尊者。
010_1008_a_05L能二五十七世。李穡奉詔撰碑。權鑄奉
010_1008_a_06L敎書額。
010_1008_a_07L
010_1008_a_08L幻庵國師傳
010_1008_a_09L師名混修。字無作。號幻庵。姓趙氏。廣
010_1008_a_10L州豊陽人也。元仁宗延祐七年。高麗忠
010_1008_a_11L肅王七年庚申生。麗恭愍王請懶翁。爲
010_1008_a_12L主盟。設工夫選於檜巖寺。上率諸宮兩
010_1008_a_13L府文武百僚。親幸臨觀。禪講諸德。江
010_1008_a_14L湖衲子。急皆集會金佛堂中。排設法座。
010_1008_a_15L師拈香罷。陞座垂問。在會大衆。以次
010_1008_a_16L入對。皆曰未會。或理通而碍於事。或
010_1008_a_17L狂甚而失於言。一句便退。上若有不預
010_1008_a_18L色。然幻庵修禪師。後至。師歷問三句
010_1008_a_19L三2)開。 [5] 一一應對。3)明 [6] 太祖洪武二十五
010_1008_a_20L年。我太祖元年壬申。入寂。贈謚曰。普覺。
010_1008_a_21L玄陵請留。辭歸。賜號曰。國師正徧智智
010_1008_a_22L雄尊者。門兄弟。三十三人內。出家弟子
010_1008_a_23L二十五。在家弟子。柒原府院君尹桓。
010_1008_a_24L領三司事李仁任。判門下崔瑩。門下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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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8_b_01L임견미林堅味7)·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우리 조선의 태조 대왕·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림李琳8)·삼사좌사三司左使 염흥방廉興邦 등 8명이다.원진국사전元禛國師傳국사의 집안은 고려 조정에서 평장사平章事·복야伏射 등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명문가이다. 8대를 연이어 예쁘고 아름답게도 국가교육기관이었던 국학國學에서 학문을 탐구했는데, 독실하고 특이하여 보통 사람들보다 탁월하였다.스님의 형제는 모두 다섯 명인데 경룡景龍·응룡應龍·한룡漢龍·변룡變龍·현룡見龍이다. 이 중 한룡이 출가 전 스님의 이름이다. 공민왕의 조정에서 실시한 을미년(공민왕 4, 1355) 과거 시험에서 경룡과 한룡이 다 같이 갑과甲科에 급제하였고 나머지 세 형제도 나중에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정유년(공민왕 6, 1357)에 세 형제가 높은 점수로 과거에 다 급제하니 임금이 칭송하여 말했다.“조曺씨 댁의 다섯 용龍이 계속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하니 이는 고금에 드문 일이다.”이렇게 칭찬하고는 명하여 쌀과 술과 고기를 하사하게 하고 3일 동안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돌면서 축하 행진을 하게 하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경룡의 벼슬은 우대右臺(우의정)에 이르렀고 응룡의 벼슬은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한룡과 변룡의 벼슬은 참의參議에 이르렀고, 현룡의 관직은 감사監司에 이르렀다.게다가 한룡을 보의장군保義將軍이라고 일컬었는데 여기에서 ‘보의保義’란 곧 명나라의 관직 이름이다. 태종조 영락永樂(明 成宗의 연호) 갑신년(1404), 즉 우리 태종이 즉위한 지 4년째 되는 해에 보의장군효자비保義將軍孝子碑를 세웠다.이 비석은 봉황산鳳凰山 아래 효자동孝子洞에 있다.이보다 앞서 한룡은 『상서尙書(서경)』에 나오는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는 글 여섯 자를 허리띠에 새겨 띠고 다녔다. 고려 조정에서 장령掌令 벼슬을 지냈던 서견徐甄9)과 함께 금천衿川에 은둔하여 살면서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았는데 서견이 시 한 수를 지었다.
千載神都隔渺茫 천년의 신도神都 아득히 막혔구나
忠良濟濟佐明王 충성스러운 신하들 밝은 왕 보좌하더
니統三爲一功安在 삼한을 통일한 공은 어디 있는가?
只恨前朝業不長 고려 왕업 짧은 것이 한스럽구나!
이에 화답한 한룡의 시는 이러하다.
天明人事兩茫茫 천시天時와 인간 일이란 알 수 없는 것
更向那邊拜聖王 다시 저쪽을 향해 거룩한 임금께 절하네
莫道此間眞趣寡 이 사이 진취眞趣 적다고 말하지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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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8_b_01L中林堅味。守門下侍中李成林。我太
010_1008_b_02L祖大王。鐵城府院君李琳。三司左使廉
010_1008_b_03L興邦等八公。
010_1008_b_04L
010_1008_b_05L元禛國師傳
010_1008_b_06L國師世居麗朝平章僕射八世。嬋媛爲
010_1008_b_07L國學篤異。卓乎凡人。五兄弟曰。景龍
010_1008_b_08L應龍漢龍變龍見龍。而漢龍乃國師名
010_1008_b_09L也。恭愍朝乙未試。景龍及漢龍俱摺
010_1008_b_10L甲科。一人第三後乙科。丁酉三兄弟
010_1008_b_11L俱登高科。上稱之曰。曺氏五龍相繼
010_1008_b_12L而登科。此乃古事之所希也。命賜白米
010_1008_b_13L酒肉。遊街三日而罷。及麗亡。入我朝。
010_1008_b_14L景龍官至右台。應龍官至判書。漢龍變
010_1008_b_15L龍官至叅議。見龍官至監司。而以漢
010_1008_b_16L龍。稱保義將軍。則保義。乃上國官名也。
010_1008_b_17L太宗朝永樂甲申。即我太宗即位之四
010_1008_b_18L年也。立保義將軍孝子碑碑在鳳凰山
下孝子洞也。
010_1008_b_19L初漢龍。尙書忠臣不事二君六字。於衣帶
010_1008_b_20L間。與高麗前掌令徐甄。隱於衿川。相與
010_1008_b_21L有詩曰。千載神都隔渺茫。忠良濟濟佐
010_1008_b_22L明王。統三爲一功安在。只恨前朝業不
010_1008_b_23L長。漢龍和詩曰。天4)明 [7] 人事兩茫茫。更
010_1008_b_24L向那邊拜聖王。莫道此間眞趣寡。山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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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8_c_01L山高處處水聲長 산 높은 곳곳에 물소리 끊이지 않네
이들의 시를 본 사헌부 관원(臺官)이 두 사람을 치죄治罪하려고 하자 임금이 말하였다.“백이伯夷 같은 무리들인데 어찌 꼭 치죄한단 말인가?”이와 같이 말하며 만류했다. 한룡이 하루는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만나니 어머니는 그제야 그가 스님이 된 것을 알고 매우 놀라 울면서 말했다.“네가 비록 고려 조정의 충신이기는 하나 지금 네 어미가 아직 살아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부모가 물려준 몸뚱이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냐? 집안이 이제 멸망하였구나. 나는 누구를 의지해 산단 말이냐?”한룡은 꿇어 엎드려 절을 하고 하직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소생은 이미 충성스럽지 못한 신하가 되었고 게다가 불효를 저지른 아들이 되었으니 그 죄가 심합니다. 불충을 하고 또한 불효를 하는 것보다는 불충은 하되 어머니의 뜻만은 받드는 것이 낫겠습니다.”이렇게 말하고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어머니가 슬퍼서 울던 마음을 가시게 하였다. 시비侍婢를 시켜 머리 감을 물 한 대야를 떠오게 하여 머리카락을 끌어당겨 묶으니 그 자리에서 당장 두 자나 자라났다.그날 한룡은 의대衣帶를 정제하고 서울로 올라가 며칠 지낸 뒤에 벼슬이 승지承旨에 이르고 다시 참의參議에 제수되었다. 한룡은 늙은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 한 늙은 스님이 찾아와서 물었다.“세염洗染 스님이 이곳에 산다고 들었는데 지금 어디 계십니까?”세염이란 한룡이 승려가 되면서 고친 이름이다. 참의가 웃으면서 대답했다.“스님은 정말 모르고 계셨습니까? 제가 바로 세염입니다. 그런데 늙으신 모친 때문에 차마 그 마음을 바꾸지 못했답니다. 스님께서는 속히 돌아가십시오. 아마도 제가 장차 다시 뵈올 날이 있을 것입니다.”그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룡은 3년 동안 효행을 다하고, 또 3년이란 세월이 지난 다음 비로소 다시 도망하여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표주박 하나와 허름한 누더기 한 벌만 가지고 길을 바꾸어 호남으로 가서 도갑사道甲寺10)에 기거하였다. 그러다 다시 그곳을 몰래 떠나서 한동안 종적을 감추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
010_1008_c_01L處處水聲長。臺官欲治之。上曰。伯夷之
010_1008_c_02L流。何必治之。一日。歸其母。母始知其
010_1008_c_03L爲僧。大驚而泣曰。汝雖爲前朝之忠臣。
010_1008_c_04L今汝母尙在。忍能削髮。而不念父母之
010_1008_c_05L遺軆耶。家門滅矣。吾誰依焉。跪拜而
010_1008_c_06L謝曰。生爲臣子。已爲不忠之臣。亦爲
010_1008_c_07L不孝之子。其罪其矣。與其不忠而又
010_1008_c_08L爲不孝。孰若不忠而獨能奉母之旨乎。
010_1008_c_09L於是。和顏柔聲。終止其母涕5)汝 [8] 之懷。
010_1008_c_10L命侍婢。取沐髮之水一器而來。引髮而
010_1008_c_11L束。則即地長者。二尺矣。是日。正其衣帶。
010_1008_c_12L赴入京師。過數日。官至承旨。復拜叅
010_1008_c_13L議。以母老。乞由歸里。則有一老僧。來
010_1008_c_14L訪曰。聞有洗染師。在此矣。今安在㢤。
010_1008_c_15L盖洗染。漢龍爲僧變名者也。叅議笑曰。
010_1008_c_16L爾能不知乎。洗染即我。而以老母之故。
010_1008_c_17L不忍變其心也。汝速歸6)之。 [9] 我當有更
010_1008_c_18L見之日矣。其後母喪。三年致孝。又三年。
010_1008_c_19L始復逃入於伽倻山矣。持一瓢曳7)𧝟 [10]
010_1008_c_20L衣。轉向湖南來。接于道甲8)山下。 [11] 又後
010_1008_c_21L「雪」下甲本正誤表有「山」。「開」甲本正誤
010_1008_c_22L表作「關」。「明」下甲本正誤表有「白」。
010_1008_c_23L「明」甲本正誤表作「時」。「汝」甲本正誤表作
010_1008_c_24L「泣」。「之」甲本正誤表作「去」。「𧝟」甲本
010_1008_c_25L正誤表作「弊」。「山下」甲本正誤表作「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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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9_a_01L그 후에 그는 남평南平(전남 나주) 불회사佛會寺에 머물면서 처음으로 사찰 중건의 일을 시작했다. 그의 절구 시 한 수가 있으니 이러하다.
千年王業一朝塵 천년 왕업도 하루아침의 티끌이 되니
白首孤臣淚滿巾 머리 하얀 외로운 신하 눈물만 흐른다
借問首陽何處在 묻노니 수양산은 어느 곳에 있는가?
吐含明月自相親 뜨고 지는 밝은 달을 벗 삼아 살리라
이 시를 보면 한룡이 지난날 벼슬길에 나섰던 것은 정말로 어머니를 위해서 굴복했던 것이고, 지금의 거동은 두 성姓을 섬기지 않으려는 의지가 분명하다. 마음이 선문禪門에서 놀고 현묘한 도에 마음을 붙이니, 아! 슬픈 일이로다. 우리 조선에서 벼슬을 받지 않으려는 마음이 틀림없다.이보다 앞서 세염 스님이 가야산을 떠나 홍류동紅流洞 10여 리 밖으로 나오니 인곡산仁谷山 아무도 없는 곳에 초목만 무성하고 자갈과 돌들이 많아 험난하기가 그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었다. 다시 걸어서 30리쯤 이르니 길에 어떤 짐승 하나가 있는데 산 것도 같고 죽은 것도 같으며, 앉은 듯도 하고 누운 듯도 하였으며, 일어나려고 하나 일어나지 못하고 울려고 하면서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앞으로 다가가서 보니 꼬리의 길이가 아홉 자나 되고 모습은 마치 조주潮州의 악어鰐魚 같았으며, 크기는 흡사 채석강의 고래 등짝만 했다. 머리를 쳐들고 사람을 바라보더니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듯이 크게 입을 벌렸다. 세염이 물었다.“네가 사람을 잡아먹다가 뼈다귀가 목구멍에 걸린 것 아니냐?”호랑이가 비록 대답은 없었으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세염이 다시 물었다.“내가 너를 살려 준다면 나를 해치지 않겠느냐?”호랑이는 또 머리를 수그리고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한 모습을 지었다. 곧 호랑이의 입을 벌리게 하였더니, 길이가 몇 자쯤 되는 사람의 뼈가 호랑이의 목구멍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자잘한 뼈와 커다란 뼈가 헤일 수 없이 많았다. 목에 걸린 뼈를 하나하나 뽑아내니 호랑이는 흰 가슴과 푸른 수염을 흔들어 감사하다는 형용을 대여섯 차례 짓고는 가 버렸다.그런 일이 있은 뒤에 세염은 호남에 있는 이 절(불회사)로 향했다. 불회사에 온 세염 스님은 무너져 내린 절을 중수重修할 계획을 세웠으나 재정의 힘이 군색하기 짝이 없어 무릎을 꿇고 앉아 밤이 지새는 줄도 모르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때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사람을 흔들어 대기에 문밖으로 나가 보니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사람을 잡아 가지고 와서 앞에 내려놓고 가 버렸다. 이에 매우 놀라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처녀였다. 그 처녀는 숨이 넘어갈 것 같아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곧 그 처녀의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내고 -
010_1009_a_01L逃身。不知1)其。 [12] 托跡于南平佛會寺。始
010_1009_a_02L營重建。有詩一絕曰。千年王業一朝塵。
010_1009_a_03L白首孤臣淚滿巾。借問首陽何處在。吐
010_1009_a_04L含明月自相親。盖向日之仕。眞所謂爲
010_1009_a_05L親屈。而今日之擧。不事二姓之志也。
010_1009_a_06L遊心禪門。寄心玄道。嗚呼。其不受我
010_1009_a_07L朝之爵祿也。信矣。初自伽倻2)出 [13] 路。出
010_1009_a_08L紅流洞十餘里外。仁谷山無人之地。草
010_1009_a_09L木之茂。沙石之險。不可以喩。行至三
010_1009_a_10L十里。路有一獸。如生如死。如坐如臥。
010_1009_a_11L欲起不起。欲啼不啼。當前則乃3)長尾 [14]
010_1009_a_12L九尺。形如潮州之鰐魚。大如采石之鯨
010_1009_a_13L背。擧目向人。口如呑4)烟 [15] 之狀。乃問之
010_1009_a_14L曰。汝雖殺人食。而骨鯁於口乎。虎雖無
010_1009_a_15L語。低仰其首。如知其言。又曰。我能生
010_1009_a_16L汝。則不害我耶。又低其首。如泣如5)訢 [16]
010_1009_a_17L乃使列其口咽。則長數尺人骨。掛結於
010_1009_a_18L其中矣。而細骸6)巨 [17] 髓。不可勝數。乃緃
010_1009_a_19L而去之。虎白胷靑鬚揮謝者。五六次而
010_1009_a_20L去。仍向湖南之是寺。方營重建。財力
010_1009_a_21L猶窘。危坐而思。時夜將曉。忽有長颷
010_1009_a_22L動人。出門而視。則有一大虎。捉人而
010_1009_a_23L來。致前而去。乃大驚視之。則乃一處
010_1009_a_24L子也。氣息將絕。呼而不答。乃湯洗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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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9_b_01L정수리를 주물러 주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온도가 알맞은 곳에 옮겨서 뉘어 놓았다.기운을 이끌고 호흡을 일으키는 방법을 쓰고 약 먹이기를 게을리하지 않자 사나흘쯤 지나니 곧 쾌차하였다. 세염이 곧 그녀의 용모를 관찰하고 집안의 내력을 들으니 곧 그녀는 영남 지역에 사는 정승 김공철金公喆의 딸이었다. 한편 놀랍기도 하고 한편 불쌍하기도 하여 한곳에 지내면서도 따로 처소를 만들어서 기거하게 하고 구원의 손길로 보살펴 주면서도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나이를 물어보니 당년 열일곱 살이었다. 세염은 그녀를 어떻게 하면 본가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호랑이에게 물려 여기까지 온 연유를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하였다.“우리 집은 불행하여 저는 아버지를 잃었는데 아버지는 고려 공민왕 때 정승을 지낸 김공철입니다. 저에게는 어머니와 언니, 그리고 101세 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지난 2월 18일 밤에 집 후원 돌담에서 뽕잎을 따던 중에 갑자기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는 정신을 잃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이때는 임진년(태종 12, 1412) 그믐날이었다. 세염은 음식과 의복을 그녀와 나누어 먹고 쓰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누설하지 않았다.세염은 이해 8월 8일 그 처자를 남장으로 변장하게 하고 영남 김 상공의 집을 찾아 나섰다. 하루에 10리, 혹은 20리를 걸어서 높은 고개를 넘고 산등성이를 지나서 더러는 어촌漁村의 주점에서 묵기도 하고 때로는 역정驛亭의 여관에서 기식寄食하기도 하면서 무려 일곱 달이나 걸은 끝에 비로소 김 상공의 집에 이르니 이듬해인 계사년(1413) 2월 17일이었다.그 처자가 살던 마을에 도착하니 김 상공의 집 여자 종이 물을 길어 성급하게 돌아가다가 남장을 한 아이를 보고 김 상공의 딸이 아닌가 의심하여 김 상공의 부인에게 아뢰었다.“밖에 지금 남자 복장을 한 아이가 와 있는데 분명히 우리 집 처자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스님과 같이 왔습니다.”부인이 말하였다.“너는 어째서 이와 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하느냐?”부인은 자기 딸이 이미 호랑이에게 물려 가 죽었다고 알고, 명일明日 소상小祥일에 넋을 불러 원통함을 씻어 주는 재를 거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몸종이 다시 물을 길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부인에게 고하자 부인이 말했다.“그럼 스님과 남자아이가 어디 있느냐?”그러면서 밖으로 나가 보니 과연 몸종의 말과 같이 비록 남자의 복색을 하였으나 틀림없이 잃어버린 자기의 딸과 꼭 같은 모습이었다. 부인은 달려가서 -
010_1009_b_01L涎。摩其頂。處之寒溫適中之所。乃有
010_1009_b_02L引氣生息之道。藥餌不懈。三7)四 [18] 乃差。
010_1009_b_03L8)觀 [19] 容貌。聽其本脉。則乃嶺南相公金
010_1009_b_04L公喆之女也。驚而憐之。雖同處而有別。
010_1009_b_05L有救而無近。問其時年。則乃十七歲也。
010_1009_b_06L洗染思欲致之於其家。問其所以然。答
010_1009_b_07L曰。吾家不幸。吾喪外親。而外親則恭愍
010_1009_b_08L王金相公也。有母有兄。又有百一歲祖
010_1009_b_09L母。而去二月十八日夜。采桑于後院石
010_1009_b_10L墻矣。忽有猛虎。噴突9)去 [20] 來。至于此云。
010_1009_b_11L則壬辰二月晦日也。洗染分食分衣。不
010_1009_b_12L泄於人。是年八月初八日。使處子爲男
010_1009_b_13L子之裝。尋向嶺南金相公之家。一日行
010_1009_b_14L十里。或二十里。踰嶺越岡。或10)投 [21] 於漁
010_1009_b_15L店。或寄食於驛亭。凡七閱月。而訪至
010_1009_b_16L于金相公家。則乃癸巳二月十七日也。
010_1009_b_17L至其外閭。則有婢子汲水忙去。見其男
010_1009_b_18L服之兒。竊疑之。因告于金相夫人曰。
010_1009_b_19L至外男服之兒。的如吾家處子。而與僧
010_1009_b_20L俱至。夫人曰。汝何出此妄言耶。盖夫
010_1009_b_21L人。知其爲虎所死。而以明日小祥。招魂
010_1009_b_22L雪寃之擧。婢子又汲水而出。又告其夫
010_1009_b_23L人。夫人曰。僧與童男安在。乃出見。則
010_1009_b_24L果如婢子之言。雖着男服。而無異於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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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09_c_01L그녀의 손을 잡고 통곡하였다. 잠시 뒤에 저간의 사연을 물었다. 그 딸이 살아남게 된 연유를 소상하게 말하였다. 부인이 물었다.“스님은 어느 절에 살고 계시며 법명은 무엇입니까?”세염 스님이 대답하였다.“소승은 호남 지방에 살고 있는 세염이라 합니다.”그러자 부인이 말하였다.“스님께서 우리 집 딸아이를 살려 주셨으니 스님과 약혼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세염이 두 번 절을 올리고 사양하며 말하였다.“사람이 죽을 지경에 처했을 때 구원하여 살려 주는 것이야 천리로 보아 당연한 일입니다. 게다가 신분의 높고 낮음이 다른데 저와 혼인을 허락하신다면 사람이 지켜야 할 윤리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니 어찌 가당한 일이라 하겠습니까?”부인이 말하였다.“그러시다면 대사의 은혜를 장차 어떻게 갚는단 말입니까?”세염이 대답하였다.“소승은 지금 호남 땅 불회사라는 절에 기거하고 있는데 그 절이 난리를 겪어 무너져 내렸기에 장차 그 절을 고쳐 지으려고 합니다.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그 은혜에 대하여 어찌 보시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부인이 말하였다.“그럼 비단으로 시주를 할까요? 비단으로 보시를 한다면 오히려 멀리 가지고 가시기에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고 돈으로 보시를 한다면 절을 보수하는 데 그리 귀중한 것이 못될 터이니, 그렇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보시를 해야 하겠습니까?”세염이 자그마한 바랑에서 아주 작은 항아리 하나를 꺼내더니 말하였다.“곡식을 이 안에 가득 채워 주십시오.”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그 그릇이 그렇게 작은데 그 안에 쌀 몇 되나 들어가겠습니까?”세염이 대답하였다.“다만 이 그릇에 가득 채워만 주신다면 저는 만족합니다.”그러자 부인은 쌀 한 말을 퍼서 그 그릇에 부었으나 그릇은 오히려 차지 않았다. 다시 쌀 한 말을 퍼내어 그릇에 부었는데도 역시 가득 채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 말, 두 말, 열 말이 들어가고, 다시 한 섬, 두 섬, 열 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그리하여 집 안에 있는 곡식을 다 내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고 -
010_1009_c_01L失之女子。乃握手痛哭。俄問其故。則
010_1009_c_02L乃以所得生之由。詳悉以對。夫人曰。
010_1009_c_03L僧則何居。而名則誰也。染上人曰。小僧
010_1009_c_04L則南湖洗染也。夫人曰。汝能生致吾家
010_1009_c_05L之女子。與君約婚何如。洗染再拜而謝
010_1009_c_06L曰。人至死境。救而生之。天理之常也。
010_1009_c_07L尊11)卑 [22] 有別。許以爲婚。人彜之乖也。何
010_1009_c_08L可當之。夫人曰。然則大師之恩。將何
010_1009_c_09L圖報乎。洗染曰。小僧方在湖南佛會寺。
010_1009_c_10L而寺經兵燹。今將改葺。必欲以報恩爲
010_1009_c_11L語。則豈無捨施之恩乎。曰以帛乎。以
010_1009_c_12L帛則猶難遠致也。以錢乎則非足貴也。
010_1009_c_13L將何爲之。洗染出小鉢囊一小缸。請以
010_1009_c_14L粟米捨施。夫人笑曰。其器小。能入幾升
010_1009_c_15L米乎。洗染曰。只充此器。則猶可爲也。
010_1009_c_16L於是夫人。出一斗米以給。猶未能充。又
010_1009_c_17L出一斗米以補。而亦無充溢12)之。 [23] 一斗
010_1009_c_18L二斗至十斗。一石二石至於十餘石。傾
010_1009_c_19L「其」下甲本正誤表有「徃」。「出」甲本正誤
010_1009_c_20L表作「山」。「長尾」甲本正誤表作「尾長」。
010_1009_c_21L「烟」甲本正誤表作「咽」。「訢」甲本正誤表作
010_1009_c_22L「訴」。「巨」作「臣」{甲}。「四」下甲本正誤表
010_1009_c_23L有「日」。「觀」下甲本正誤表有「其」。「去」
010_1009_c_24L甲本正誤表作「而」。「投」下甲本正誤表有
010_1009_c_25L「宿」。「卑」作「早」{甲}。「之」下甲本正誤表
010_1009_c_26L有「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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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0_a_01L저 주먹만 한 작은 항아리에 이미 천여 섬이나 되는 곡식을 부었건만 끝내 가득 찰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부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그 그릇은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데 그릇은 채워지질 않고, 우리 집의 곡식이 그리 적은 것이 아닌데 그 곡식을 다 부어도 그릇이 넘치질 않으니, 참으로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세염이 말하였다.“집 안에 남은 곡식이 없어서 혹 걱정이 되십니까?”부인이 말하였다.“비옥한 토지가 문전에 있고 나라에서 내려 주는 녹봉이 뒤를 받쳐 주고 있으니 그리 걱정은 안 되지만 적은 곡식이 아니며 집 안에 있던 것은 이미 다 드렸습니다.”세염이 말하였다.“그렇다면 이것만으로 만족합니다.”그러자 그 그릇이 갑자기 가득 차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깨에 메고 있는 것은 겨우 한 말 곡식의 분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부인은 곧 마음속으로 그 스님이 신령한 스님임을 알고는 물었다.“스님의 본가는 어디에 있으며, 무슨 까닭으로 스님이 되셨습니까?”세염이 대답하였다.“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서 외도外道(여기에서는 佛道)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이렇게 허송세월을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저의 성과 이름도 다 잊었습니다.”부인은 더욱 그 스님의 용모가 범상하지 않음을 알고 다시 물었다.“제가 들으니 ‘부처님은 사람을 오래 살게 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복을 받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수도 있다’고 하더이다.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제가 부처님께 기원할 것이 있습니다.”세염이 물었다.“무슨 일입니까?”부인이 말하였다.“우리 집은 일찍이 초상을 당하는 재앙이 있었으니, 이미 정승인 남편을 잃었고 다만 딸 아이 하나만 남았는데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다른 아들이 없는지라 집안의 대를 이을 경사스러운 일이 없으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정승을 지낸 남편이 지난해 5월 초닷샛날 죽었는데 지금 제가 그분의 아이를 회임한 지 아홉 달째 들어섰습니다. 스님께서는 노자老子와 부처님의 도를 다 지니고 계신 듯하니 제가 아들을 낳아 우리 가문을 보전하고 또 그 아이가 요절하지 않도록 부처님께 기원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바로 제가 소원하는 그것입니다.”세염이 말하였다.“유복자는 쉽게 요절하지 않는 법입니다만 부인의 집안에 감추어 둔 물건을 속히 태워 없애야 탈이 없겠습니다.” -
010_1010_a_01L家所有。只自如是。如拳小缸。千餘石
010_1010_a_02L粟米。終無盈滿之色。1)似 [24] 盈而不盈。夫
010_1010_a_03L人笑曰。其器不爲大矣。而器不從充滿。
010_1010_a_04L其2)谷 [25] 不小矣。而*谷不爲盈溢。無乃恠
010_1010_a_05L底事乎。洗染曰。家無所餘3)之。 [26] 而或有
010_1010_a_06L憂愁之態乎。夫人曰。沃土在前。榮祿
010_1010_a_07L在後 *谷非不多。而方在家中者。已盡
010_1010_a_08L矣。洗染曰。然則此亦足矣。於是。其器
010_1010_a_09L卒然充滿。掛諸4)肩 [27] 肩。則不過一斗*谷。
010_1010_a_10L夫人乃心知其爲神僧。問曰。君之本家
010_1010_a_11L安在。何故爲僧。洗染曰。幼而失所怙。
010_1010_a_12L罔知攸措。因入於外道。削髮以爲虛送
010_1010_a_13L歲月者。已久。故不知父母所居之宅。亦
010_1010_a_14L忘姓名云。夫人尤知其容貌之不凡。問
010_1010_a_15L曰。吾聞佛者。能壽人能福人。亦能禍人
010_1010_a_16L云。此語不欺。則吾有所祝也。洗染曰。
010_1010_a_17L何事也。夫人曰。吾家早經喪禍。已喪
010_1010_a_18L相公大爺。而只有一女子。幾死而復生。
010_1010_a_19L無他子可嗣之慶。此將奈何。相公大爺
010_1010_a_20L訣於5)今 [28] 年五月初五日。而今吾胞胎者。
010_1010_a_21L九月矣。君有老佛之道。則能盟之佛。
010_1010_a_22L使得令子。而保吾家門。且使生子而不
010_1010_a_23L夭乎。吾所願者。此也。洗染曰。遺腹之
010_1010_a_24L兒 6)卒 [29] 不夭死。而令夫人之家。有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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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0_b_01L부인이 말하였다.“무엇을 감추어 두었다는 말씀이십니까?”세염이 말하였다.“만약 저를 속이시고 끝내 버리지 않으시면 상공相公의 집안은 결국 가문이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그러자 부인은 곧 무당과 함께 땅속에 묻어 두었던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을 꺼내 스님에게 보여 주었다. 대개 나무로 만든 인형은 아이를 가진 부인이 훌륭한 아이를 낳기 위하여 규중 깊숙이 으슥한 곳에 감추어 두는 것으로서 영남 지방의 풍속에 흔히 있어 왔던 일이다. 부인이 말하였다.“어떻게 이것을 제가 감추어 두었는지 아셨습니까?”세염이 대답하였다.“집 안에 이런 것이 있으면 복을 받지 못하고 재앙만 일어나며, 도리어 아들을 생산하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다시 피해만 입게 될 것입니다. 옛날 공자께서도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아마도 후손이 없게 될 것이다(始作俑者。 其無後乎。)’라고 말씀하셨으니 속히 불에 태워 없애십시오.”그러고는 하녀를 시켜 불을 붙여 태우게 하니, 부인은 더욱 그 스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神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염이 바랑 속에서 약 열 첩을 꺼내 부인에게 주면서 말하였다.“아이를 낳으려 할 무렵에 이 약 서너 첩을 쓰면 훌륭한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랄 것입니다.”그렇게 말하고는 떠나가 버렸다.불회동 마을 아래 도착한 세염 스님은 가지고 온 곡식을 좁은 길에 내려놓았다.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시주를 구걸하지 않아도 절을 짓는 비용으로 충분한 양이었다. 그러므로 이 절을 세우는 일은 사람이 한 게 아니라 하늘이 한 것이요, 스님이 한 일이 아니라 신神이 한 일임을 알 수 있다.얼마의 세월이 지나 김 정승 댁 부인이 야밤에 규방 문 앞을 쓸고 나서 잠깐 잠이 들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 모습이 흡사 세염 스님과 같았다. 다가와서 부인에게 말하였다.“내일 틀림없이 큰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대의 집안에 복이 내릴 것입니다.”부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였으나 노인이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그날 새벽에 곧 아들을 낳았으며, 또 그날 밤에 어젯밤 꿈에서 보았던 그 노인이 다시 와서 부인에게 말하였다.“이 아이는 틀림없이 높은 벼슬에 오를 것이니 아이의 이름을 상귀相貴라 짓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마십시오.”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부인은 세염 스님이 신통력을 부려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믿고는 아이의 이름을 상귀라고 지었다. 그 아이는 열다섯 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스무 살 때에는 호남 순찰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세염 스님을 찾아갔으나, 피하고 죽어도 만나 주지 않았으니 -
010_1010_b_01L焉。速爲投火。夫人曰。何所藏乎。洗染
010_1010_b_02L曰。若欺而不去。則相公之宅。家門滅
010_1010_b_03L矣。夫人乃出其與巫覡所埋木俑人。以
010_1010_b_04L示。盖木俑人。胞胎之婦人。置之於閨
010_1010_b_05L中幽僻處。以求令子之志。而嶺俗之所
010_1010_b_06L有者也。夫人曰。何其知有此物也。洗
010_1010_b_07L染曰。家有此物。則非福爲禍。反不得
010_1010_b_08L子。而又害之。孔子之所謂始作俑者。
010_1010_b_09L其無後乎者。速投火中。即令小婢。引
010_1010_b_10L火焚之。夫人。尤知其非人而神也。洗染
010_1010_b_11L出藥十貼。以給夫人曰。解胎之日。服此
010_1010_b_12L三四7)帖。 [30] 則可使生兒無病。而能得令
010_1010_b_13L子云。而去。及至佛會洞下粟米之狹路。
010_1010_b_14L不求於人。足於創寺之需矣。乃知是寺
010_1010_b_15L之建。非人而天也。非僧而神也。金相
010_1010_b_16L公夫人。夜掃閨門。小焉將枕矣。夢有
010_1010_b_17L一老人。形如洗染。降謂夫人曰。明日。
010_1010_b_18L必有大慶。可以施福於君家矣。夫人欲
010_1010_b_19L與之語。而不復見。覺則乃夢也。是日
010_1010_b_20L曉。乃得生子。又是日夜。夢老人又來。
010_1010_b_21L而告于夫人曰。是兒。必爲貴卿。名以相
010_1010_b_22L貴二字。勿泄於人。又不見。乃知洗染
010_1010_b_23L神助之所以也。因名曰。相貴。十五歲科。
010_1010_b_24L二十爲湖南巡察使。而訪洗染。諱死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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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0_c_01L세염의 의지가 혼탁하지 않음을 알 수 있겠다.그는 경영하는 일이 있어서 구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 얻고 동서에서 재물이 모여들었으니 사람들은 세염의 신통력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을 몰랐다. 돌탑 하나를 세웠는데 탑 윗부분에 이런 시가 있다.
天日向山封 하늘의 해가 봉산封山11)을 향하니
湖南第一峰 호남에서 제일가는 봉우리로고
復如知者在 만일 다시 아는 이가 있다면
不敢毁斯墉 감히 이 담벼락을 헐지 못하리라
그때 호남 순찰사가 행차하여 금성錦城(나주)에 이르렀다. 그런데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앞에 버티고 서서 길을 비켜 주지 않았다. 종자從者들이 달려들어 그 스님을 꾸짖으며 그를 조사해 보았더니 조용한曺漢龍이라는 명패를 차고 있었다. 순찰사가 그에게 물었다.“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그 스님이 대답하였다.“그것은 제 이름이 아니고 저는 곧 원진元稹이라는 승려입니다.원진은 그가 뒤에 불렀던 호이다. 그런데 순찰사께선 금천衿川의 일을 듣지 못하셨소?”순찰사가 매우 놀라 서울 조정에 보고하고 서울로 모시고 올라가서 임금을 배알하도록 주선했다. 임금이 스님에게 말했다.“그대는 어찌하여 중이라고 말했는가?”원진 스님이 정색하며 말하였다.“저는 노자와 부처님의 도를 닦는 사람입니다.”임금이 원진 스님에게 명하여 시 한 수를 지으라 하였다. 그러자 원진 스님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읊었다.
謫下人間八十秋 인간 세계에 귀양 온 지 어언 80년
無情白髮已盈頭 무정한 백발만 머리에 가득하네
乾坤有限家何在 천지도 한계 있는데 내 집은 어디인고?
日月生輝世更休 해와 달이 찬란하게 빛나니 세상이 아름답네
東出嶺邊皆觸感 동쪽 고갯마루 벗어나면 모든 감회 새롭고
南歸湖上足消愁 남쪽 호남으로 돌아가면 근심이 사라지네
君王莫道爲僧苦 임금님, 스님 생활 고달프다 말하지 마소
不肖孤臣髮不留 못난 이 중은 머리 기를 생각 없소이다
임금은 그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곡식과 비단을 하사하고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도 돈과 재물을 희사하니, 그로 인하여 불회사는 큰 어려움 없이 새로 창건되었다.그 뒤 세조대왕이 국사로 추증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는 영평永平지금의 남평南平이다. 효자동孝子洞에서 태어났는데 고려조의 정승 정통禎統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사용하던 발우와 신었던 신발이 절에 전해져 내려온다. -
010_1010_c_01L見。其志之不混矣。其在所營。有求必得。
010_1010_c_02L東西鳩財。人不知其神造之理。首立一
010_1010_c_03L石塔。上有詩曰。天日向山封。湖南第
010_1010_c_04L一峰。復如知者在。不敢毁斯墉。時湖
010_1010_c_05L南巡察使行到錦城。道遇一僧。當前
010_1010_c_06L不避。從者呵之。詰其所佩曺漢龍也。
010_1010_c_07L巡使曰。汝何至此。答曰。此果非吾名。
010_1010_c_08L乃元稹僧也。元稹其爲後號也。 [4] 巡使不
010_1010_c_09L聞衿川之事乎。巡使大驚。問于京師。
010_1010_c_10L驛送赴京。上曰。汝胡名僧也。元稹正色
010_1010_c_11L曰。吾乃老佛道也。上命賦詩。元稹應
010_1010_c_12L聲曰。謫下人間八十秋。無情白髮已盈
010_1010_c_13L頭。乾坤有限家何在。日月生輝世更休。
010_1010_c_14L東出嶺邊皆觸感。南歸湖上足消愁。君
010_1010_c_15L王莫道爲僧苦。不肖孤臣髮不留。上嘉
010_1010_c_16L尙其意。賜以粟帛。洛中土大夫。多賻
010_1010_c_17L錢財。仍成佛會寺。世祖大王。贈國師
010_1010_c_18L下敎旨。永平今之
南平孝子洞生。麗朝相國
010_1010_c_19L禎統之第三子。鉢鞋留傳寺中
010_1010_c_20L「似」甲本正誤表作「以」。「谷」甲本正誤表
010_1010_c_21L作「糓」次同。「之」下甲本正誤表有「糓」。
010_1010_c_22L「肩」甲本正誤表曰衍字。「今」甲本正誤表作
010_1010_c_23L「前」。「卒」甲本正誤表作「率」。「帖」甲本
010_1010_c_24L正誤表作「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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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1_a_01L함허선사전涵虛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수이守伊이고 호는 무준無準이다. 훗날 오대산 영감암靈感庵에서 잠을 잤는데 그날 밤 꿈에 한 신승神僧이 이렇게 말하였다.“그대의 법명은 기화己和이고 호는 득통得通이니라.”그런 까닭에 그 말을 따라 법명과 호를 바꾸었다. 그의 헌호軒號는 함허涵虛이고 충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이보다 앞서 상주 사불산에 있으면서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金剛經五家解說誼)』라는 책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임종하려고 할 무렵에 그의 제자 홍예洪預 등을 명하여 한 책은 불에 태우고 한 책은 땅에 묻으라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그 책을 묻은 자리에서 홀연히 상서로운 기운이 일어나기에 홍예가 그 사실을 광묘光廟, 즉 세조世祖의 조정에 보고하였다.그리하여 그 책을 상국上國(明)에 참고해 보라고 보냈는데, 그때가 명나라 대종代宗 경태景泰(1450~1456) 연간의 일이다. 승상丞相 김수온金守溫12) 등을 시켜서 이 경에 주注(說誼)를 곧바로 붙이게 하였다.대명大明 태종太宗 영락永樂 12년 을미(1415) 여름에 직접 「금강경설의서金剛經說誼序」를 썼는데 그것이 세간에 유포되어 있다. 문인門人 홍예 등 10여 명과 무학 대사 문인의 행장行狀이 있다.구곡왕사전龜谷王師傳스님의 법명은 각운覺雲이고 호는 구곡龜谷이다. 혹은 소은小隱이라 하기도 했다.윤소종尹紹宗13)이 임금에게 간하여 찬영粲英 스님을 내치도록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잠적하여 은둔 생활을 하고 나타나지 않았다.찬영 스님은 태고太古(普愚)의 법제자이고 환암幻庵(混修)의 문제門弟이다. 호는 원응圓應이고 별호는 고저왕사古樗王師라고 불렀다.현릉玄陵(고려 공민왕)은 직접 「달마절로도강도達摩折蘆渡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서 하사하고, 또 ‘구곡각운龜谷覺雲’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주었으며, 아울러 스물네 자로 된 법호14)를 내려 주었다. 스님은 『선문염송집설화禪門拈頌集說話』 열 권을 지어 간행하여 세상에 유포하였다. 스님은 호남 용성龍城(남원)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환암 혼수幻庵混修의 법을 이었다. 목은 이색이 지은 찬문贊文이 행장처럼 자세하다.벽계대사전碧溪大師傳 -
010_1011_a_01L涵虛禪師傳
010_1011_a_02L師名守伊。號無準。後宿于五臺山靈感
010_1011_a_03L庵。夢一神僧曰。子名己和。號得通。故
010_1011_a_04L依其言。而改名號。軒號涵虛。忠州人
010_1011_a_05L也。初在尙州四佛山。著金剛經說誼書
010_1011_a_06L二本。臨終。命弟子洪預等。一本燒之。
010_1011_a_07L一本埋之。未久。其埋處。忽生瑞氣。洪
010_1011_a_08L預以聞光廟。即世祖朝也。以其本。送上
010_1011_a_09L國。明代宗景泰也。叅考而來。使丞相金
010_1011_a_10L守溫等。直注於本經。大明太宗永樂十
010_1011_a_11L二年乙未夏。自述金剛經說誼序。行于
010_1011_a_12L世。門人洪預等十餘人。無學門人。有狀。
010_1011_a_13L
010_1011_a_14L龜谷王師傳
010_1011_a_15L師名覺雲。號龜谷。或曰小隱。尹紹宗。
010_1011_a_16L諫斥粲英。故避隱不市。粲英。即太古之。
010_1011_a_17L子。幻庵之弟。號圓應。別號古樗王師
010_1011_a_18L云。玄陵。達摩折蘆渡江圖。普賢六1)平 [31]
010_1011_a_19L白象圖賜之。又手書龜谷覺雲四字。兼
010_1011_a_20L賜二十二字號。作禪門拈頌集說話十
010_1011_a_21L卷。刊行于世。湖南龍城人也。幻庵修
010_1011_a_22L之嗣。李牧隱作贊。具如狀。
010_1011_a_23L
010_1011_a_24L碧溪大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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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1_b_01L스님의 법명은 정심正心이고 호는 벽계碧溪이며 금산金山(경북 금릉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조선 태종 때 극심한 불교 탄압을 당하자 머리를 기르고 처자식을 양육하면서 황악산黃岳山(김천시)으로 들어가 물한리物罕里에서 숨어 살았다. 뒷날 선법禪法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 전하고, 교학敎學은 정련 법준淨蓮法俊에게 전하였으니, 그로 인해 조선 시대 선禪과 교敎의 두 법맥이 끊어지지 않고 번성해 뻗어 나갈 수 있었다. 덧없는 일이로구나. 시대의 운명이여!정열수丁冽水(정약용)는 이렇게 말하였다.“내가 산에서 내려온 이후로 벽계 정심 대사를 위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15)을 짓지 않고 ‘남쪽 바다로 옮겨가는 붕새’를 추념追念하게 되었다.”문인으로는 벽송 지엄·묘각 수미妙覺守眉·정련 법준 등이 있는데 그의 행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벽송선사전碧松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지엄智嚴이고, 호는 야로埜老이며, 그가 살고 있던 집의 호, 즉 당호堂號는 벽송碧松이라 하였다. 속성은 송宋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복생福生이며 부안에서 출생한 사람이다.그의 어머니는 왕王씨였는데 꿈에 인도 스님(梵僧)이 예를 올리고 하룻밤 자고 갔는데 그로 인해서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천순天順(明 英宗의 연호) 8년 갑신(세조 10, 1464) 3월 15일에 낳았다. 골상骨相이 특이하고 수려하였으며, 영웅적인 기질로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글공부와 칼 쓰기를 좋아하고 특히 장감將鑑(兵書)에 능통했다.홍치弘治(明 孝宗의 연호) 4년 신해(성종 22, 1491) 4월에 야인野人(여진족)이 북방을 침범하여 그곳을 지키고 있던 진장鎭將을 죽이자, 성종대왕은 허종許琮16)에게 명을 내려 군대 2만을 거느리고 가서 야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스님도 칼을 들고 허종을 따라 참전하여 채찍을 들어 한번 휘둘러 큰 공을 세웠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뒤 탄식하며 말하였다.“이 세상에 대장부로 태어나서 마음자리(心地) 하나 지키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리며 몸을 수고롭게 해서야 되겠는가?”그러고는 계룡산 상초암上草庵에 들어가 조징祖澄 대사에게 참례한 뒤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니 그때의 나이 28세였다. 그로부터 그는 뜻이 높고 행동이 엄격하였으며 선정을 즐겨 수행하는 것이 마치 수나라 낭장郎將이었던 지엄智儼에 비길 만하였다. 스님은 제일 먼저 연희衍熙 교사敎師를 찾아가서 원돈교圓頓敎17)의 이치에 대하여 묻고 그 다음에는 정심正心 선사를 찾아가서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비밀한 뜻(西來密旨)’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고 현묘한 이치를 모두 떨치게 되었다. -
010_1011_b_01L師名正心。號碧溪。金山人也。當太宗
010_1011_b_02L沙汰之時。長髮畜妻子。入於黃岳山。
010_1011_b_03L居於物罕里。禪傳于碧溪 [5] 2)正 [32] 嚴。敎傳
010_1011_b_04L于淨蓮法俊。禪敎二派。不絶而蕃衍。
010_1011_b_05L無常㢤。時運也。丁冽水曰。我下山後。
010_1011_b_06L爲碧溪正心。莫作北山之移。追念南溟
010_1011_b_07L之徙乎。門人。碧松智嚴。妙覺守眉。淨
010_1011_b_08L蓮法俊等。具如行狀。
010_1011_b_09L
010_1011_b_10L碧松禪師傳
010_1011_b_11L師名智嚴。號埜老。所居堂曰碧松。姓
010_1011_b_12L宋氏。父曰福生。扶安人也。母曰王氏。
010_1011_b_13L夢一梵僧。設禮寄宿。因以有娠。天順
010_1011_b_14L八年甲申三月十五日生。骨相奇秀。雄
010_1011_b_15L武過人。幼好書劒。尤善將鑑。弘治四
010_1011_b_16L年辛亥四月。野人冦朔方。殺鎭將。成
010_1011_b_17L宗大王命許琮。帥師二萬討之。師亦
010_1011_b_18L仗劒從之。擧鞭一揮。大豎功焉。旣罷
010_1011_b_19L征。喟然曰。大丈夫生斯世也。不守心地。
010_1011_b_20L役役馳勞耶。即拂衣。入鷄龍山上草庵。
010_1011_b_21L叅祖澄大師。剃染。時年二十八矣。自爾。
010_1011_b_22L志行卓厲。樂修禪定。若隋郞將智嚴之
010_1011_b_23L儔焉。先訪衍熙敎師。問圓頓敎義。次
010_1011_b_24L尋正心禪師。擊西來密旨。俱振玄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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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1_c_01L정덕正德(明 武宗의 연호) 무진년(중종 3, 1508) 가을에 금강산 묘길상암妙吉祥庵으로 들어가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읽다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狗子無佛性話)’에 이르러 의심을 품고 정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깜깜한 무명無明을 깨뜨려 없앴다.또 『고봉어록高峰語錄』을 읽다가 ‘양재타방颺在他方’18)이라는 어구에 이르러 앞에서 가지고 있었던 견해를 단번에 떨쳐 버렸다. 그런 까닭으로 벽송 선사께서 평생토록 발휘한 것은 바로 고봉高峰19) 선사와 대혜大慧20) 선사의 종풍宗風이라 하겠다.대혜 화상은 6대 조사인 혜능慧能의 17대 적손嫡孫이고, 고봉 화상은 임제臨濟 선사의 18대 적손이다. 아! 스님은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500년 전 종파의 적통嫡統을 비밀리에 이은 사람이다. 마치 유가儒家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무리들이 1천 년 뒤에 태어나서 공자와 맹자의 학맥을 계승한 경우와 같다. 유가든지 불가든지 도를 전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하겠다.신미년(1511) 봄에 용문산으로 들어가서 두 차례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계유년(1513) 봄에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 번의 하안거를 마쳤다. 그러고는 다시 백운산과 능가산 등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이 천지 사이를 자유롭게 소요逍遙하던 한가로운 도인이었다.경진년(1520) 3월 지리산에 들어가서 작은 암자에 머물면서 그때부터 몸에 옷 두 벌 이상 가지지 않고 매일 두 끼니 이상 먹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교제를 하지 않으니 그를 거만하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옛 사람(莊子)이 이르기를,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세계를 알겠는가?”라고 한 말은 바로 이러한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하루는 시자를 불러 차를 달여 오게 하여 그 차를 마신 뒤에 문을 닫고 단정하게 앉아 한참 동안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다. 제자들이 창문을 열고 보니 스님은 이미 열반에 드신 뒤였다. 그때가 11월 초하루 진시辰時였다. 입적하신 뒤에도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고 사지를 펴고 굽히는 것도 산 사람과 같이 부드러웠다.다비茶毘를 하던 날 밤에는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에 뻗쳤고, 재齋를 올리는 새벽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하늘에 가득 서렸다. 정골頂骨 한 조각에 사리가 알알이 붙어 있었는데 그 밝기가 진주와 같았다.그의 제자 숭인崇仁·설은雪訔·원오圓悟·일진一眞의 무리가 이 사리를 수습하여 석종石鐘을 만들어 비명을 새기고 의신義神(지리산 의신동) 남쪽 산기슭에 봉안하였다. 그가 읊은 가송歌頌 약간 편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
010_1011_c_01L正德戊辰秋。入金剛山妙吉祥。看大慧
010_1011_c_02L語錄。疑着狗子無佛性話。不多日時。
010_1011_c_03L打破柒桶。又看高峰語錄。至颺在他方
010_1011_c_04L之語。頓落前解。是故。師之平生所發揮
010_1011_c_05L者。乃高峰大慧之風也。大慧和尙。六
010_1011_c_06L祖十七代嫡孫也。高峰和尙。臨濟十八
010_1011_c_07L代嫡孫。吁。師以海外之人。密嗣五百
010_1011_c_08L年前宗派。猶程朱輩生乎千載之下。
010_1011_c_09L遠承孔孟爲緖也。儒也釋也。傳道則一
010_1011_c_10L也。辛未春。入龍門山。結二夏。癸酉春。
010_1011_c_11L入五臺山。結一夏。白雲楞伽。居無定
010_1011_c_12L止。逍遙然天地間。一閒道人也。庚辰
010_1011_c_13L三月。入智異山。棲身草庵。身無再衣。
010_1011_c_14L日不再食。不修人事。多以倨慢譏。古
010_1011_c_15L人云。非魚安知魚。此之謂也。一日。喚
010_1011_c_16L侍者。點茶來。啜茶訖。閉門端坐。良久
010_1011_c_17L默然。開窓視之。則已入寂。乃十一月
010_1011_c_18L初一日辰時也。顏色不變。屈伸如生。
010_1011_c_19L茶毘之夜。祥光洞天。薦齋之晨。瑞雲
010_1011_c_20L盤空。頂骨一片。舍利3)▼(粘/(㓒-(冫+七)))▼(粘/(㓒-(冫+七))) [33] 瑩若眞珠
010_1011_c_21L弟子崇仁雪訔圓悟一眞之徒。鐫石鍾
010_1011_c_22L以安于義神之南麓。所詠歌頌若干篇。
010_1011_c_23L「平」甲本正誤表作「乎」ㆍ當作「牙」{編}。「正」
010_1011_c_24L甲本正誤表作「智」。「▼(粘/(㓒-(冫+七)))▼(粘/(㓒-(冫+七)))」甲本正誤表作
010_1011_c_25L「▼(秥/(㓒-(冫+七)))▼(秥/(㓒-(冫+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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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2_a_01L스님의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법랍은 44년이다. 보는 이는 소홀히 여기지 말라. 휴정休靜의 찬문贊文은 이러하다.
震旦之皮 진단震旦(조선)의 피부에
天竺之骨 천축天竺(인도)의 뼈로구나
華月夷風 중국의 달이요 조선의 바람이며
如動生髮 머리칼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네
昏衢一燭 어두운 거리를 밝힌 한 촛불이여
法海孤舟 법의 바다에 외로운 배였다네
嗚呼不民 아! 스님의 위대한 모습
萬歲千秋 천년만년 사라지지 않으리
가정嘉靖(明 世宗의 연호) 39년(명종 15, 1560) 여름에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법손法孫 휴정이 스님의 행장을 지었다.부용조사전芙蓉祖師傳선사先師는 영남 진주 삼천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법명은 영관靈觀이고 호는 은암선자隱庵禪子이다. 또 달리 연선도인蓮船道人이라 부르기도 했다. 몸은 비록 이 세간에 머물렀지만 생각은 늘 서방西方(극락정토)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거주하는 방을 부용당芙蓉堂이라 불렀다.가세家世가 대대로 미천하였으므로 넉넉하긴 했지만 예절이 바르지는 못했다. 성화成化(明 憲宗의 연호) 을사년(조선 성종 16, 1485) 7월 7일에 태어났다. 스님의 나이 겨우 여덟 살에 낚시를 하러 가는 아버지에게 끌려 고기 망태를 지고 뒤따라 다녔는데 스님은 망태 안에 살아 있는 고기는 모두 다 놓아 주었다. 아버지가 크게 성을 내며 매질을 하자 스님은 절을 하며 울면서 말했다.“사람이나 물고기나 목숨을 부여받은 것은 똑같고 고통을 참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용서하여 주십시오.”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이내 노여움을 풀었다.그의 집 가까운 곳에 신비한 용이 산다는 굴이 있었다. 그 굴에서는 마치 수증기와 같은 것이 난간 밖에 가득 어려 있고 음악 소리가 들려 나왔다. 동네 노인들로부터 전해 오는 말을 들으니 “그 소리는 굴속에 칩거하고 있는 용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영관 스님이 지팡이로 평상을 치면 그 음악 소리가 갑자기 멈추곤 했다. 어느 때인가 용이 수면 위로 솟아올라 비늘 갈기가 햇빛에 찬란하게 번쩍였는데 아무도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데 스님이 머리를 들고 할喝을 한번 하자, 용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아이라고 일컬었다.하루는 어떤 기이한 스님이 찾아와서 그의 아버지에게 말하였다.“이 아이는 곧 출세간의 보배요 연화烟火(세속)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러니 부디 출가시키시기 바랍니다.”그렇게 말하고 조금 있다가 스님은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영관 스님은 죽마竹馬의 나이(어린 나이)일 때부터 돌을 세워 부처님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모래를 올려 공양이라 하기도 하며, 혹은 소나무를 비스듬하게 눕혀 암자라 하기도 하면서 눈을 감고 꿇어앉아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곤 했다. 세상의 구속을 싫어하고 공문空門을 매우 그리워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만 갔다. -
010_1012_a_01L刊1)于行 [34] 世。師壽七十一 「▼(艹/(月+曷)四十四 2)幻
010_1012_a_02L性3)非。 [35] [36] 覽者毋忽。賛曰。震旦之皮。天竺
010_1012_a_03L之骨。華月夷風。如動生髮。昏衢一燭。
010_1012_a_04L法海孤舟。嗚呼不4)民。 [37] 萬歲千秋。嘉靖
010_1012_a_05L三十九年夏。頭流山法孫。休靜撰行5)裝。 [38]
010_1012_a_06L
010_1012_a_07L芙蓉祖師傳
010_1012_a_08L先師。嶺南晋州三千浦人也。名靈觀。號
010_1012_a_09L隱庵禪子。一曰蓮船道人。身雖寄世。
010_1012_a_10L想在西方。故以芙蓉堂稱之。家世犯賤。
010_1012_a_11L富而無禮。成化乙巳七月初七日生。年
010_1012_a_12L才八歲。父携而釣魚。使負魚籃。擇其
010_1012_a_13L生命者。而盡放之。父大怒撻之。師拜
010_1012_a_14L而泣曰。6)而 [39] 人與物。受命則同。忍痛則
010_1012_a_15L一也。伏望垂恕。父聞而弛怒。家近神
010_1012_a_16L龍之窟。雲蒸檻外。樂出虛堂。父老相
010_1012_a_17L傳曰。此蟄龍之管絃也。師杖擊床
010_1012_a_18L則樂聲忽止。有時。龍出水面。鱗鬛輝日。
010_1012_a_19L人不敢近。師擧頭一7)唱。 [40] 則龍形忽沒。
010_1012_a_20L以是里人。稱奇童。有異僧。來謂父曰。
010_1012_a_21L此童。乃出世之寶。非烟火之物。請出家。
010_1012_a_22L俄而僧忽不見。師竹馬之年。或立石爲
010_1012_a_23L佛。或獻沙爲供。或偃松爲庵。合眼危
010_1012_a_24L坐。不知日之西也。日厭世8)綱。 [41] 深想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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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2_b_01L스님의 나이 13세가 되던 정사년(연산군 3, 1497) 가을에 밤은 깊어 인적이 고요한데 몸이 빠져 나와 집 문을 나서니, 흡사 어떤 사람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과 같았다. 알지도 못한 사이에 10여 리쯤 걸어가서 사천沙川을 건넜을 때에야 스님은 집에서 기르던 개가 뒤따라 온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 개를 돌아보면서 타일러 말했다.“돌아가서 존당尊堂21)을 잘 보호하고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말아라. 나는 이제 영원히 운수인雲水人(스님)이 되어 맹세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너는 속히 돌아가서 잘 지내라.”그러자 개가 머리를 수그리고 스님의 말을 다 듣고는 마치 이별이 아쉽기라도 하다는 태도를 지으며 몇 차례 울부짖고는 돌아갔다. 그리하여 스님은 외로운 그림자를 펄럭이면서 강을 건너 고향이 있는 쪽을 바라보니 넘어가려고 하는 달이 마침 서쪽 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동이 트려고 할 무렵에 곧바로 덕이산德異山(덕유산)으로 들어가 고행하는 선자禪子를 찾아 가르침을 받은 지 3년 만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17세 되던 해인 신유년(연산군 7, 1501)에 처음으로 신총信總 법사를 참알參謁하고 교학의 강령綱領을 탐구하였고, 다시 위봉威鳳 대사에게 예를 올리고, 선禪의 요체에 들어가 골몰하였다.그 후 스님은 구천동九泉洞으로 들어가서 손수 띳집을 짓고 어느새 아홉 해 봄가을을 지내며 정진하였다. 장좌불와長坐不臥하였으니 어찌 옆구리를 땅에 대어 편안하게 잠을 자는 자리가 있겠으며, 지팡이 짚고 산 밖을 나선 적이 없으니 어찌 술집인들 들어간 적이 있겠는가?교리를 논강할 때에는 양양洋洋하여 마치 만 이랑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고, 선의 뜻에 대해 말할 때에는 높고 높아 흡사 천 길 낭떠러지 같았다.기사년(중종 4, 1509)에 멀리 용문산으로 들어가 조우祖愚 대사를 찾아뵙고 선에 대해 토론을 하고 여가에 『노자老子』와 『장자莊子』까지 모두 섭렵하였다.갑술년(중종 9, 1514)에 또 청평산으로 가서 학매學梅 선자禪子를 찾아 선의 미묘한 부분에 대하여 문답을 하였으나 법에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기묘년(중종 14, 1519)에 금강산 대존암大尊庵에 이르러 율시 한 수를 읊어 그 절의 문에 붓을 들어 크게 써 붙였다.
空費悠悠憶少林 공연히 소림少林을 생각하다가 시간만 낭비하니
因循衰鬂到如今 우물쭈물 하다가 구레나룻 하얀 지경에 이르렀네
毘耶昔日無聲臭 비야毘耶22)의 저 옛날 소리는 냄새도 없고
摩竭當年絶響 마갈摩竭23) 당년의 소리도 끊어졌구나
似杭能防分別意 말뚝처럼 앉았으니 분별하는 마음 막아지고
如痴必禦是非心 바보처럼 지내니 시비할 마음 일지 않네
故將妄計飛仙外 부질없는 생각을 선외仙外에 날려 보내고
終日忘機對碧岑 온종일 세상 일 잊고 푸른 산만 대하노라
그러고는 붓과 벼루를 불사르고 입을 닫은 채 묵묵하게 앉아서 9년 동안 정진하였다. 만약 유람하는 객이 문전에 이르면 이 시를 가리킬 따름이었다. -
010_1012_b_01L門。年至十三。丁巳之秋。夜深人靜。抽
010_1012_b_02L身出門。似有人引去。不覺。行十餘里。
010_1012_b_03L及渡沙川。則師所養一狗子。已追之矣。
010_1012_b_04L顧謂狗子曰。善護尊堂。勿追我也。我今
010_1012_b_05L永作雲水人。矢不歸也。汝速還。珍重。
010_1012_b_06L狗子低頭。聽其語。似有惜別之態。發
010_1012_b_07L啾唧數聲而去。於是。翩翩隻影。隔江回
010_1012_b_08L望。則落月正在西峰也。黎明。直入德異
010_1012_b_09L山。尋苦行禪子。投三年。學其法而落
010_1012_b_10L髮焉。十七辛酉。初叅信聦法師。探敎
010_1012_b_11L綱。又禮威鳳大師。入禪樞。因入九泉
010_1012_b_12L洞。手結茅庵。已度九春秋。長坐不臥。
010_1012_b_13L詎脇安眠之席。笻無出山。寧過酒肆之
010_1012_b_14L門。論敎義則洋洋焉波瀾萬頃。轉禪旨
010_1012_b_15L則嶷嶷然崖岸千尋。己巳。遠入龍門山。
010_1012_b_16L訪祖愚大師。討禪餘暇。涉盡莊老。甲
010_1012_b_17L戌。又向淸平山。投學梅禪子。扣擊禪微。
010_1012_b_18L法無異味。己卯。到金剛山大尊庵。吟一
010_1012_b_19L律。拔筆大書其門曰。空費悠悠憶少林。
010_1012_b_20L因循衰鬂到如今。毘耶昔日無聲臭。摩
010_1012_b_21L竭當年絕9)響。 [42] 似10)杭 [43] 能防分別意。如痴
010_1012_b_22L必禦是非心。故將妄計飛仙外。終日忘
010_1012_b_23L機對碧岑。於是。燒筆硯。杜默而坐。經
010_1012_b_24L九年。若遊客到門。則指此詩而已。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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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2_c_01L경인년(중종 14, 1519) 가을에 홀연히 반성하고 부모님의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곧 남쪽을 향해 갔다. 점점 고향의 성을 향해 가다가 본가가 있는 산이 가까워지자 석양이 되었다. 강 마을에 슬픈 모습으로 서 있는데 홀연히 한 노인이 소를 끌고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스님이 절을 하고 물었다.“여기가 진주입니까?”노인이 괴이하게 여겨 되물었다.“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묻는 것입니까?”스님이 대답하였다.“진주는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저의 부모님께서 살아 계시는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지금 그렇게 물어본 것입니다.”노인이 말하였다.“그대 아버지의 성명은 무엇이며, 또한 그대의 어릴 적 이름은 무엇인가?”스님이 대답하였다.“제 아버님의 성함은 원연袁演이라 하옵고, 저의 어릴 때 이름은 구언九彦이라 합니다.”노인이 갑자기 쇠고삐를 놓고 스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오늘 부자父子가 만난 것이 분명하구나. 네 이름은 내 아들이고 내 이름은 네 아비가 분명하다. 네가 나를 버리고 도망한 지 어느덧 30여 년이나 되었구나.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근심과 시름 속에 세월을 보내 왔는데 오늘 홀연히 스스로 찾아왔으니 내 소원을 마침내 풀어 주었구나.”부자지간임을 확인한 뒤에 각각 슬픔과 기쁨을 견딜 길 없어 한바탕 목 놓아 통곡하였다. 한동안 울고 나서 조금 있다가 아버지가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였다.“네 어머니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네 주인은 7년 전에 아내를 잃었으며 다만 너의 집과 밭만 남아 있을 뿐이다.”스님이 말하였다.“원씨袁氏(누이동생)는 어디 있습니까?”아버지가 말하였다.“네 누이동생은 네가 집을 떠난 날 저녁부터 문을 꼭 닫고 누워 버렸고 우리 집 개도 해만 쳐다보고 앉아 있더니 7일째 되던 날 누이도 개도 다 죽어 덕산德山 서쪽 산기슭에 묻어 주었다.”스님은 그 말을 듣고 덧없음을 뼈아프게 느끼고 더 한층 눈물을 흘렸다. 날이 저물 무렵이 되자 옛집에 이르러 보니 옛날 같이 뛰놀던 소녀와 소년들은 모두 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들과 평상 위에 둘러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노라 닭이 새벽을 알리는 줄도 몰랐다. 이튿날 아침에 아버지는 스님의 손을 잡고 늙은 주인을 찾아뵈었다. -
010_1012_c_01L寅秋。忽然反省。思報罔極之恩。爰發南
010_1012_c_02L行。漸向本城。漸近家山。夕陽江村。悵
010_1012_c_03L然而立。忽見一老翁。牽牛而出。師拜
010_1012_c_04L而問曰。此晋州耶。翁恠而問曰。何故
010_1012_c_05L問之。師曰。此我所生之地也。不知我父
010_1012_c_06L母存沒。故當欲問之。翁曰。汝父姓名誰
010_1012_c_07L耶。汝之兒名。亦誰耶。師曰。我父姓名
010_1012_c_08L袁演。我之兒名九彥也。翁忽放牛執手
010_1012_c_09L曰。今日。父子的矣。汝名我子。我名汝
010_1012_c_10L父。汝捨我逃走。三十餘年。求索不得。
010_1012_c_11L憂愁年邁。今忽自來。甚適我願。定父
010_1012_c_12L子後。各不堪悲欣。一場痛哭。翁良久
010_1012_c_13L拭淚曰。汝母。十年前棄世。汝主。七年前
010_1012_c_14L喪室。惟汝之田宅。猶在爾。師曰。袁氏安
010_1012_c_15L在。翁曰。汝妹。從汝出家之夕。閉門而臥。
010_1012_c_16L汝狗子。亦視日而坐。至七日。袁與狗俱
010_1012_c_17L死。葬於德山之西麓爾。師聞之。痛念
010_1012_c_18L無常。尤爲落淚。及黃昏到家。則昔之
010_1012_c_19L群童。盡作翁婆也。亦與之連床夜語。
010_1012_c_20L不覺鷄之已曉矣。明朝。父携。覲於老主。
010_1012_c_21L「于行」甲本正誤表作「行于」。「幻性非」甲
010_1012_c_22L本正誤表曰衍字。「非」下疑脫「幻」{編}。
010_1012_c_23L「民」甲本正誤表作「泯」。「裝」甲本正誤表作
010_1012_c_24L「狀」次同。「而」甲本正誤表曰衍字。「唱」
010_1012_c_25L甲本正誤表作「喝」。「綱」甲本正誤表作
010_1012_c_26L「綱」。「響」下甲本正誤表有「音」。「杭」
010_1012_c_27L甲本正誤表作「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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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3_a_01L주인이 깜짝 놀라 말하였다.“이 사람이 정말로 구언이란 말인가?”그렇게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주인은 방석을 내어주며 앉으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머뭇거리며 사양하고 뒤로 물러나 말하였다.“소천小賤이 주인과 어버이를 배반하였으니 그 죄를 하늘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집과 토지를 모두 바쳐서 이 몸값을 치르고 출가하여 도를 닦아서 그 은혜를 보답할까 합니다.”주인이 말하였다.“출가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그 은혜를 갚는단 말이냐?”스님이 고사古事를 들어 대답하였다.“출가한 사람은 세간에서 숨어서 그 뜻을 구하고 세속의 모습을 변화하여 그 도를 통달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모습을 바꾸어서 스님이 되면 세속 사람들의 법도와 예의를 따르지 않고, 세상을 숨어 살면 당연히 고상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이러한 이들은 삼승三乘24)의 이치를 깨닫고 사람과 하늘에게 열어 보이며, 오족五族을 건지고 육친六親을 구원하기를 마치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안으로 천륜의 소중함을 무너뜨린다 해도 그 효도를 어기는 것이 아니요, 아무리 밖으로 주인 섬기는 공경을 다하지 못하더라도 그 공경을 잃는 것이 아닙니다.”주인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스님의 말을 다 듣고 그 말을 가상하게 여겨 일어서서 스님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말하였다.“사문이란 세상을 벗어난 사람들이니, 마땅히 세상의 예절을 생략해야 할 것이다.”그러고는 베개를 나란히 하여 하룻밤 자고 나서 머물러 살기를 간청하였다. 스님은 주인의 간곡한 청을 기어이 따르지 않고, 이튿날 땅 문서를 주인에게 바쳐 밭과 집을 다 주고 두 번 절하고 물러나왔다. 그러고는 늙은 아버지에게 이별을 고하고 두류산(지리산)으로 향하였다. 그리하여 지엄 벽송智嚴碧松 스님의 문을 두드렸다.“영관靈觀이 먼 곳에서 스님의 법풍法風을 흠모하여 이렇게 찾아왔으니 부디 거두어 받아 주시기 바라나이다.”지엄 대사가 말하였다.“영靈도 감히 올 수 없거늘 관觀이 어디로부터 왔단 말이냐?”스님이 가까이 다가가서 합장하고 말하였다.“청하옵나니 대사께서 살펴보시옵소서.”지엄 대사가 웃으며 말하였다.“다듬어 볼 만하구나.”그러고는 이튿날 지엄 대사는 대사를 위하여 마음에 가득 끼인 안개를 걷어 내고 끓는 바다 같은 욕망을 말끔하게 씻어 주니, 스님의 20년 묵은 의심이 마치 커다란 골짜기에 층층이 쌓였던 얼음이 녹아내리듯 풀리는 것이었다. 스님은 곧 지엄에게 이마를 땅에 대어 예를 올리고 잇달아 찬탄하며 말하였다.“참으로 저의 스승이십니다.”모신 지 3년 되던 해에 지엄 대사가 세상을 떠났다. 아! 저 스승이 경영하던 것을 그 제자가 계승하여 경영하는구나. 이 주석柱石이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이런 동량棟梁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스님은 평생에 성품이 온화하고 청아하여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함이 끊어졌으므로 생각이 한결같이 평등하여 심지어는 한 수저의 밥이라도 배고픈 사람을 보면 나누어 주곤 하였으니, 아마도 전생부터 -
010_1013_a_01L主驚曰。此九彥耶。不覺澘然。俄而主
010_1013_a_02L進席許坐。師逡巡辭退曰。小賊背主背
010_1013_a_03L親。罪不容天。今欲盡納田宅以1)贖 [44] 身
010_1013_a_04L出家。修道以報也。主曰。出家何能報恩
010_1013_a_05L耶。師引古答曰。出家者。遁世以求其
010_1013_a_06L志。變俗以達其道。變俗則不與世典同
010_1013_a_07L禮。遁世則宜高尙其跡。達三乘。開人
010_1013_a_08L天。拯五族。拔六親。猶如反掌也。是故。
010_1013_a_09L雖內乖天屬之重。而不違其孝。雖外闕
010_1013_a_10L奉主之恭。而不失其敬也。主儒者也。
010_1013_a_11L聞而嘉之。起立。携手而上堦曰。沙門。物
010_1013_a_12L外人也。宜删世禮矣。因連枕一宿而請
010_1013_a_13L留之。師强不從。明日。呈文券。納田宅。
010_1013_a_14L再拜而退。又告別老父。即向頭流山。
010_1013_a_15L扣智嚴大師碧松之門曰。靈觀。自遠趨
010_1013_a_16L風。願一攝受。嚴曰。靈且不敢。觀從何
010_1013_a_17L來。師近前叉手曰。請師鑑。嚴笑曰。堪
010_1013_a_18L爲雕琢。翌日。嚴爲師碎蕩心霧。陶㵼
010_1013_a_19L2)沸海。 [45] 師之二十年宿疑。忽如層冰之
010_1013_a_20L泮巨壑也。即頂禮連聲歎曰。此眞吾師
010_1013_a_21L也。執侍三年。嚴亦厭世。吁。厥師經之。
010_1013_a_22L厥資營之。非斯柱石。孰此棟樑哉。師
010_1013_a_23L平生叶性溫雅。情絕愛憎。念專平等。
010_1013_a_24L至於一匙之飯。見人則分之。其夙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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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3_b_01L자비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게다가 또 문장은 진실되고 올바르며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명석하였다.무릇 학문을 배우러 온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칠요七曜25)·구장九章26)·천문天文·의술醫術 그 어느 것 하나도 달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중용』을 품안에 안고 『장자』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의문난 점들을 풀어 주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그런 까닭에 그의 문전에 늘 넘쳤던 영걸한 유생儒生들은 죽을 때까지 계속 배우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마당 안에 가득 찼던 법속法俗(승속)들은 모두들 떠나갈 것인가, 더 머물러 있을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그러므로 호남과 영남 일대에 벼슬 없는 선비들로서 삼교三敎(儒·佛·仙)를 통달한 사람들은 바로 스님의 법풍法風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이는 이른바 “전단향나무를 옮겨 심으니 다른 나무들도 향내가 난다.(栴檀移植。 異物同熏。)”고 한 말과 같은 경우라 하겠다.스님은 한번 벽송의 문을 밟은 뒤로 혹은 황룡산에 살기도 하고 혹은 팔공산(전북 장수)에 살기도 하였으며, 혹은 대승동大乘洞에 살기도 하였고 혹은 의신동義神洞에 살기도 하였으며, 혹은 연곡동燕谷洞에 머물면서 알지 못하는 사이에 41년 세월을 꿈결처럼 흘려보낸 뒤 융경隆慶(明 穆宗의 연호) 신미년(선조 4, 1571) 4월 14일에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87세였고 법랍은 72년이었다.시자 법융法融과 영응靈應, 대선大選 정원淨源과 신옹信翁, 선덕禪德 진기眞機와 도의道義 등 무리들이 스님의 영골을 거두어 연곡동 서쪽 산기슭에 부도를 세웠다. 스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高踞覺地 깨달음의 자리에 높이 걸터앉아
先引三車 먼저 세 가지 수레로 인도하셨네
張羅八海 여덟 바다에 그물을 쳐서
撈摝群魚 많은 고기를 건져 올리셨네
金鎚擊碎 쇠방망이로 호랑이 굴과
虎穴魔宮 마귀의 궁전을 때려 부쉈네
人亡世寂 사람이 가니 세상이 적막하고
月落天空 달이 넘어가니 하늘이 텅 비었구나
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정축년(선조 10, 1577) 가을에 문인 풍악산인楓嶽山人 휴정休靜이 스님의 행장을 지었다. 문인은 12명이다.경성대덕전敬聖大德傳스님의 법명은 일선一禪이고 호는 경성敬聖이다. 또는 휴옹休翁이라 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선화자禪和子라고도 부른다. 속성은 장張씨이고 울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윤한胤韓이고, 어머니는 박씨이다.박씨 부인이 하루는 한가하게 잠을 자다가 해맑은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깨어난 뒤 임신하였고, 홍치弘治(明 孝宗의 연호) 원년 무신(성종 19, 1488) 12월 13일에 스님을 낳았다. 아이는 목욕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
010_1013_b_01L3)慈 [46] 之種。亦可見矣。兼又文章允正。義
010_1013_b_02L理明析。凡敎學者。亹亹不倦。凡七曜
010_1013_b_03L九章。天文醫術。莫不通焉。至於懷中
010_1013_b_04L庸挾莊子者。亦莫不決疑焉。是故。溢門
010_1013_b_05L英儒。俱懷生別之恨。盈庭法俗。共鯁
010_1013_b_06L去留之心。是故。湖嶺兩南。以白衣通
010_1013_b_07L三敎者。乃師之風也。可謂4)枬移 [47] 植。異
010_1013_b_08L物同熏也。師自從一踏碧松之門。或居
010_1013_b_09L黃龍山。或居八公山。或住大乘洞。或
010_1013_b_10L住義神洞。或住燕谷洞。不覺。夢過四十
010_1013_b_11L一年。至隆慶辛未四月十四日八寂焉。
010_1013_b_12L世壽八十七。法臘七十二。侍者法融靈
010_1013_b_13L應大選淨源信翁禪德眞機道義輩。
010_1013_b_14L收靈骨。豎浮屠于燕谷之西麓也。賛曰。
010_1013_b_15L高踞覺地。先引三車。張羅八海。撈摝
010_1013_b_16L群魚。金鎚擊碎。虎穴魔宮。人亡世寂。
010_1013_b_17L月落天空。萬曆丁丑秋。門人楓岳休靜。
010_1013_b_18L撰行5)裝。門人十二人。
010_1013_b_19L
010_1013_b_20L敬聖大德傳
010_1013_b_21L師名一禪。號敬聖。又休翁。一曰禪和
010_1013_b_22L子。姓張氏。蔚山人也。父曰胤韓。母曰
010_1013_b_23L朴氏。一日假寐。夢呑明珠。覺而有娠
010_1013_b_24L弘治元年戊申十二月十三日。生焉 6)雖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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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3_c_01L피부가 깨끗하였고 몸에서는 향내가 났다.나이 겨우 7∼8세에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늘 속가의 부엌에서 고기를 삶고 물고기를 굽는 것을 보면 그때마다 반드시 놀라고 불쌍하게 여기곤 했다. 그의 집 남쪽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이웃 아이들이 다투어 따곤 하였으나 스님은 자기 몫까지 다 내놓아 다른 아이에게 나누어 주고 빈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때로는 모래를 쌓아 탑을 만들기도 하였고 혹은 돌을 포개 자리를 만들어 앉기도 하였으며, 많은 아이들이 흡연翕然히 부처님처럼 존중하곤 했다. 비단 타고난 바탕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과거 세상에서부터 훈습해 온 결과라는 것을 증험할 만하였다.어려서 양친을 다 여의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세상이 덧없는 것임을 깨닫고 마음에 늘 청허淸虛함을 그리워하였다. 스님의 나이 열세 살 때 단석산斷石山으로 들어가 해산海山 법사에게 몸을 던져 3년 동안 법사를 시봉하다가 열여섯 살 때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스물네 살 때 서쪽으로 묘향산에 들어가 문수암文殊庵에 앉아서 발우 하나와 누더기 옷 한 벌만으로 오로지 고행을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마음을 바로잡는 일을 죽을 때까지 실천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얼마 뒤에 문득 여러 지방을 유람할 마음을 내어 남쪽으로 두류산(지리산)에 들어가 지엄智嚴 대사를 찾아가 예를 올렸다. 지엄 대사가 그를 한번 보고 큰 그릇이라 여겨 게송 하나를 주었다.
風颼颼月皎皎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달은 밝으며
雲冪冪水潺潺 구름은 가득 끼고 물은 잔잔하구나
欲識言箇事 저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하면
須叅祖師開師 모쪼록 조사의 관문을 참예하라
스님은 곧 활구活句27)에 마음을 머물러 두고 즐기면서 근심을 잊었다. 동쪽으로 금강산 시왕동十王洞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미 자나 깨나 항상 여일如一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하루는 죽비竹篦로 갑자기 선상禪床을 탁 치면서 말하였다.“조주趙州28) 늙은이의 칼날이 드러났으니, 꿈을 외치는 가운데 꿈을 말하는구나. 잘못이 적지 않구나.”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는 입으로 읊는 것이면 반드시 경절문徑截門의 언구言句이고 -
010_1013_c_01L洗浴。膚軆香潔。歲才七八。不喜薰羶。
010_1013_c_02L每見家厨。烹煇毛鱗。則必駭然悲惻。宅
010_1013_c_03L南有果園。鄰童7)竟 [49] 之。師乃捨己所得。
010_1013_c_04L盡以施之。空手返焉。或聚沙爲塔。或
010_1013_c_05L8)壘 [50] 石爲座。群童翕然尊重爲佛。非特
010_1013_c_06L生質之美。可驗夙世之熏 9)□ [51] 失雙親。
010_1013_c_07L泣血三年。觀世無常。意玩淸虛。年至
010_1013_c_08L十三。入斷石山。投海山法師。服勞三
010_1013_c_09L載。十六薙髮。二十四西入妙香山。坐
010_1013_c_10L文殊庵。一10)飄 [52] 一衲。專習苦行。正心佛
010_1013_c_11L理。以命自期。頃之。忽興遊方之志。南
010_1013_c_12L入頭流山。叅智嚴大師。嚴一見。深器
010_1013_c_13L之。示一偈曰。風颼颼月皎皎。雲冪冪
010_1013_c_14L水潺潺。欲識11)言 [53] 箇事。須叅祖師12)開 [54]
010_1013_c_15L師。即留心活句。樂而忘憂。東入金剛山
010_1013_c_16L十王洞。工夫已到。寤宣恒一。以竹篦
010_1013_c_17L忽擊禪床曰。趙州老露刃劒。唱夢中說
010_1013_c_18L夢。漏13)逕 [55] 不少。自此詠於口者。必徑截
010_1013_c_19L「贖」作「續」{甲}。「沸海」甲本正誤表曰衍
010_1013_c_20L字ㆍ疑「佛海」{編}。「慈」下甲本正誤表有「悲」。
010_1013_c_21L「枬移」甲本正誤表作「栴檀移」。「裝」甲本
010_1013_c_22L正誤表作「狀」。「雖」甲本正誤表作「誰不」。
010_1013_c_23L「竟」疑「竸」{編}。「壘」甲本正誤表作「累」。
010_1013_c_24L□甲本正誤表作「早」。「飄」甲本正誤表作
010_1013_c_25L「瓢」。「言」甲本正誤表作「這」。「開」甲本
010_1013_c_26L正誤表作「關」。「逕」甲本正誤表作「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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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4_a_01L마음에 참구參究하는 것도 반드시 경절문의 언구였다. 얼마쯤 지난 뒤 표훈사表訓寺 승당僧堂에 들어가 한 해 여름 안거를 마치고, 상원암上院庵에 들어가 두 해 안거를 마쳤다.가정嘉靖(明 世宗의 연호) 병신년(중종 31, 1536)에 중종대왕이 승군僧軍을 이용하여 신천新川을 방어하고 있을 때였다. 스님이 능가산으로 가다가 도중에 그곳 역장役場에 들러 표연히 홀로 기거하고 있었는데, 도청都廳의 높은 벼슬아치가 그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던지 스님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풍채가 범상하지 않은 데 반하여 반 달 동안이나 만류하여 머물게 하였다.그때 경성京城의 사대부나 백성들도 스님의 덕음德音을 듣고는 다투어 시주를 하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그 소문은 떠들썩하게 퍼져 나갔다. 이 일로 인하여 대간臺諫들이 세상을 현혹한다고 논죄論罪하여 의금부에 구금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리하여 법에 의거하여 국문하였지만 스님은 자연스럽고 태연한 모습이었으며, 말이 정직하고 이치에 통하는 식견으로 천변만화의 논리를 보였다. 그러자 의금부에서는 법에 의해 국문하며 스님의 조리 있는 말을 듣고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임금께 아뢰어 방면하였다. 스님은 곧바로 멀리 서산西山(묘향산)으로 들어가 9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갑진년(중종 39, 1544) 봄에 다시 묘향산으로 들어가 보현사普賢寺 관음전에 머물렀다. 주머니 속에 감추어 둔 송곳이 밖으로 드러나듯, 과일이 익어 향기로운 냄새가 발생하듯 공부가 경지에 도달했다.온 나라에 석덕碩德과 고사高士들이 팔표八表(팔방)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어 이른바 해동海東의 절상회折床會29)라고 할 만하였다. 이에 문인 의웅義雄의 무리에게 명하여 특별히 집 한 채를 짓게 하고 그 당호堂號를 경성당敬聖堂이라 붙이게 하였다. 그 집은 난간·창문·방문 등이 웅장하게 층을 이루었고, 옥빛과 금빛이 찬란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때 스님은 향로에 향을 사르고 날마다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다.스님은 증득하기 어려운 지혜를 증득함이 이미 이와 같았으며, 불충不忠의 구덩이에 떨어지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았으니, 가히 스님 가운데 직설稷契30)이라 이를 만하다.융경隆慶(明 穆宗의 연호) 무진년(선조 1, 1568) 2월 30일 경성 스님은 문도들에게 말하였다.“이 세계는 이루어지고 머물고 무너지고 비어지는 현상이 있고, 생각은 생겨나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현상이 있으며, 몸뚱이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현상이 있는 법이다. 무릇 시작이 있으면 틀림없이 끝이 있는 법, 그것이 바로 덧없는 몸뚱이인 것이다. 오늘 늙은 중이 덧없는 이치를 보여 주고자 하니 여러 어진 제자들은 모름지기 바른 생각을 지녀 그리워하거나 애달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또한 세속에서 이롭지 못한 일을 장황하게 벌이는 일을 따르지 말라. -
010_1014_a_01L門言句。叅於心者。亦必徑截門言句也。
010_1014_a_02L俄入表訓寺僧堂。結一夏。入上院庵。
010_1014_a_03L結二夏。至嘉靖丙申。中宗大王。用僧
010_1014_a_04L軍。防新川。師適楞伽山。路由役場。飄
010_1014_a_05L然獨居。都廳大官。見而異之。招而與
010_1014_a_06L之語。風彩非凡。挽留半月。於是。京城
010_1014_a_07L士庶。亦聞師之德音。爭趍捨施日益。
010_1014_a_08L紛紜聲振。臺論以惑世。拘於禁府。依
010_1014_a_09L法鞠之。師從容自若。言直理通。變化
010_1014_a_10L千萬。禁府。依法鞠1)聞 [56] 而嘉之。奏以赦。
010_1014_a_11L之。師即遠入西山。泯迹九年。甲辰春。還
010_1014_a_12L入妙香山。捿普賢寺觀音殿。囊錐益露。
010_1014_a_13L果熟香飄。碩德高士。八2)袁 [57] 雲趍。可謂
010_1014_a_14L海東折床會也。爰命門人義雄之輩。特
010_1014_a_15L起一堂。以敬聖安名焉。軒窓戶門。㭗
010_1014_a_16L爾層搆。玉光金色。燎然奪目。於是。師
010_1014_a_17L執香爐。日祝聖壽萬歲也。則其能證難
010_1014_a_18L證之智。旣如此。其不墮不忠之坑。又
010_1014_a_19L如此。可謂僧中之稷契也。隆慶戊辰二
010_1014_a_20L月三十日。謂門徒曰。界有成住壞空。
010_1014_a_21L念有生住異滅。身有生老病死。凡有始
010_1014_a_22L者。必有終。此無常之軆也。今日老僧。
010_1014_a_23L欲示無常。諸仁者。須攝正念。3)忽 [58] 懷眷
010_1014_a_24L戀。亦莫隨俗爲譸。張不益事也。吾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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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4_b_01L나는 부사의不思議한 산마루를 향하여 마지막으로 불사佛事 하나를 할 것이니, 나의 시체를 갈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드러내어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말을 마치고 곧 붓을 들어 게송 한 수를 쓰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年逾八十似空花 나이 팔십을 넘은 것이 허공의 꽃과 같고
徃事悠悠亦眼花 아득하게 지난 일은 그 또한 눈꽃과 같네
脚未跨門還本國 문지방도 채 넘지 않았는데 본국에 돌아가니
故園桃李已開花 옛 동산에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스님은 곧 붓을 놓고 단정하게 앉아서 담담하게 열반에 들었다. 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사방에서 밀려들었고 햇빛은 참담하였다. 열반에 드신 지 7일째 되던 날 문인들이 스승의 유언을 따라 색신色身(시신)을 받들어 상여에 싣고 부사의의 고개로 갔다. 세속 사람과 스님들 수천 명이 가는 길을 메우고 차를 달여 올렸으며, 통곡하여 울부짖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뒤덮었다.사유闍維31)를 하던 날 밤에 신비한 광명이 하늘에 사무치니 백 리 밖에서도 그 광경을 보고는 그쪽을 바라보며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날이 바로 4월 18일 해시亥時(밤 9시~11시)였다. 그의 문인 태사太師·의변義卞·선등禪燈·일정一精·성준性峻의 무리가 사리 5과顆를 거두어 석종石鍾을 세우고 그 안에 봉안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81세이고 법랍은 65년이었다.스님은 평소에 글을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을 힘쓰지 않았으나 임종게를 지을 때에는 붓에 먹물을 적셔 자재하게 글씨를 써 내려갔는데 사기辭氣가 쾌활하였으니, 스님의 평생 자취를 숨기고 산 지혜를 여기에서 대략 볼 수 있다.그러한즉 비록 온 나라가 지나支那(중국)에 얽매여 있었으나 늘 극락세계에 가 있었으며, 후학들을 가르칠 때에는 자상하고 빈틈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선조들의 틀에 구애받지도 않았다.아! 슬프다. 부처님의 바다에 더러운 찌꺼기가 오늘날처럼 심한 적도 없지만, 스님의 크게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의 그물이 아니었다면, 그 누가 사람과 하늘의 고기를 건져 올려 열반의 언덕에 올려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말법 세상에 부처님의 동량棟梁이 되기에 적절하신 분이시며 법에 있어서는 기린의 뿔과 같은 존재라 하겠다.융경隆慶 무진년(선조 1, 1568) 겨울에 묘향산에서 휴정이 스님의 행장과 찬문贊文을 지으니 그 찬문은 이러하다.
師初來也 스님이 처음 올 때에는
一顆明珠 하나의 밝은 구슬이더니
師今去也 스님이 지금 가실 때에는
五箇神珠 다섯 개의 신비한 구슬일세
入火不變 불속에 들어가도 변하지 않고
入水不渝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네
常寂常照 늘 고요하며 늘 비추어 주니
劫石須臾 겁석劫石32)도 잠깐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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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4_b_01L向不思議之嶺。作佛事。須露屍骸。飼
010_1014_b_02L于鳥獸可也。言已。即拔筆書偈曰。年
010_1014_b_03L逾八十似空花。徃事悠悠亦眼花。脚未
010_1014_b_04L跨門還本國。故園桃李已開花。即放筆
010_1014_b_05L端坐。泊然而逝。于時。祥雲四合。日色
010_1014_b_06L慘然。及至七日。門人遵命。奉色身。轝
010_1014_b_07L於不思議之嶺。緇白數千人。塞路點茶。
010_1014_b_08L號慕悲惋之聲。動咽山谷。闍維之夜。
010_1014_b_09L神光洞天。百里之外。有見之者。望拜
010_1014_b_10L焉。乃四月十八日亥時也。門人太師義
010_1014_b_11L卞禪燈一精性峻之輩。收舍利五箇。建
010_1014_b_12L石鍾安之。師壽八十一。臘六十五。師
010_1014_b_13L居常。不治翰墨。至於臨終之偈。濡筆走
010_1014_b_14L草。辭氣快活。其平生匿迹之智。槩可
010_1014_b_15L見矣。然則雖繆▼((執-丸)+攵/心)於支那。而常玩愒於
010_1014_b_16L蓮邦。有覼縷於後學。而無䖃閼4)塞 [59]
也야사苴
010_1014_b_17L於先祖也。嗚呼。佛海穢滓無甚今日。
010_1014_b_18L微師大悲之5)綱。 [60] 則孰摝人天之魚。置
010_1014_b_19L於涅槃之岸哉。末世宜乎佛之棟樑。而
010_1014_b_20L法之獜角者歟。隆慶戊辰冬。妙香山休
010_1014_b_21L靜撰行*裝 [61] 及贊。贊曰。師初來也。一顆
010_1014_b_22L明珠。師今去也。五箇神珠。入火不變。
010_1014_b_23L入水不渝。常寂常照。劫石須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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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4_c_01L청허존자전淸虛尊者傳선사先師의 법명은 휴정休靜이고 호는 청허淸虛이며, 또는 서산西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는 현응玄應이고 부친의 시조는 본래는 완산完山 최씨이고, 모친의 시조는 본래는 한남漢南 김씨이다.태종太宗조에 이르러 친가와 외가의 현고조께서 각각 용호방龍虎榜33)에 올라 창화昌化34)로 이사를 가서 살았으므로 부모가 모두 창화를 고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 뒤 현윤縣尹으로 있던 외할아버지 김우金禹가 연산군 때 죄를 지어 안릉安陵(평안도 안주군)에 귀양 가서 살게 되자 스님의 부모도 외할아버지의 가문과 연관이 된다 하여 집안 식구 모두가 관리舘吏35)가 되었다. 8년이 지난 뒤에 외할아버지의 죄가 다시 논의되어 특별히 은혜를 입어 사면되어 본래의 직책에 복직이 허용되었으나 마침내 관서關西의 백성으로 살고 말았으니 운명이 아니겠는가?아버지의 이름은 세창世昌이고 나이 30세에 어떤 사람의 천거로 기성箕城 영전影殿의 작은 관직을 맡게 되었다. 관청의 사람이 와서 같이 떠날 것을 간청하면서 부임할 날짜를 말해 주자 스님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하였다.“정든 땅 노을과 달 그리고 한 병의 막걸리에 처자식을 거느리고 사는 즐거움이면 그 또한 족하지 않겠는가?”그러고는 곧 허리띠를 풀고 남쪽으로 머리를 향해 누워서 길게 휘파람을 몇 차례 불자 관청 사람은 곧 물러갔다. 세창은 향읍鄕邑에서 의문이 나는 것을 가지고 와서 물으면 의문을 풀어 주고 송사를 벌이려는 자가 있으면 만류하여 그만두게 하였으므로 향관鄕官으로 일을 한 13년 동안 그 고을 주민들로부터 ‘덕 있는 노인(德老)’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정덕正德(明 武宗의 연호) 기묘년(중종 14, 1519) 여름에 모친 김씨가 신기神氣가 고르지 못하였는데, 하루는 작은 창가에서 한가롭게 잠시 잠이 들었다. 이때 어떤 노파가 와서 예를 올리며 말하였다.“아무 근심도 하지 말고 아무 염려도 하지 마시오. 한 장부 사내아이를 잉태할 것이기 때문에 이 늙은 할미가 와서 축하를 드리는 것입니다.”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예를 올리고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놀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참 이상도 하여라. 우리 부부는 동갑똑같이 갑오생甲午生이었다.으로 나이 50이 가까운데 어찌 오늘 꾼 꿈과 같은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김씨 부인은 의아하기도 하고 한편 민망하고 두려웠다.이듬해경진(1520) 3월 김씨는 과연 아이를 낳았다. -
010_1014_c_01L淸虛尊者傳
010_1014_c_02L先師名休靜。號淸虛。又曰西山。字玄
010_1014_c_03L應。父之始祖。本完山崔氏。母之始祖。
010_1014_c_04L本漢南金氏。及太宗朝。內外玄高祖。
010_1014_c_05L各得龍虎榜。移居昌化。故父母。俱以昌
010_1014_c_06L化爲故鄕也。至外祖金縣尹禹。得罪於
010_1014_c_07L燕山。謫居于安陵。父母。連外祖家口。
010_1014_c_08L沒爲舘吏。過八年。論得特蒙恩赦。許
010_1014_c_09L通本職。然遂爲關西氓命也。父世昌。
010_1014_c_10L年登三十。有人擧。爲箕城影殿之微官。
010_1014_c_11L官人。來而請行。卜日以告。父笑曰。舊
010_1014_c_12L山烟月。一壼白酒。妻子歡心。不亦足
010_1014_c_13L矣。即解帶南首而臥。長嘯數聲。官人
010_1014_c_14L即退。凡鄕邑有疑者則决。有訟者則止。
010_1014_c_15L故遂任鄕官者。十三年。而邑人猶號
010_1014_c_16L曰德老。正德己卯夏。母金氏。神氣不
010_1014_c_17L調。一日。小窓邊假寐。有一老婆來。禮
010_1014_c_18L曰。勿憂勿慮。胚胎一丈夫男子爾。故爲
010_1014_c_19L娿㜷來賀之。又設禮而去。母忽驚悟曰。
010_1014_c_20L異哉。夫婦一甲同甲
午生。 年近五十。豈有今
010_1014_c_21L事乎。致疑閔惧。明年庚
辰三月。果生。父
010_1014_c_22L「聞」疑「問」{編}。「袁」甲本正誤表作「表」。
010_1014_c_23L「忽」甲本正誤表作「勿」。「塞」作「寒」{甲}。
010_1014_c_24L「綱」甲本正誤表作「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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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5_a_01L스님의 부모는 서로 희롱하며 말하였다.“늙은 조개에서 손바닥 안에 진주를 생산하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이로다.”아이가 3세 되던 해 임오년(1522) 4월 8일에 아버지가 술에 취해 누각 위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어떤 한 노인이 와서 아버지에게 말하였다.“아기 스님을 뵈러 왔습니다.”그러고는 노인이 두 손으로 어린 아기를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는데 그 소리가 마치 범어梵語와 같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주문을 외워 마친 뒤에 아기를 내려놓고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이 아이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고 잘 기르기 바랍니다.”아버지가 운학의 의미를 묻자 노인이 대답하였다.“이 아이는 일생 동안 행지行止가 정녕 구름과 학鶴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그 말을 마치고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이 사라졌다. 그런 까닭으로 부모는 그때부터 아이를 부를 때에 ‘아기 스님’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운학雲鶴’이라 부르기도 했다.아이는 어릴 적부터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소꿉장난을 하면서도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혹은 기왓장을 가져다가 절을 짓는 등 늘 하는 짓이 무릇 이와 같았다.그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가 갑자기 먼저 세상을 떠나시고, 그 이듬해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니 백 년의 생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 셈이다. 그때 그 고을의 원님(邑倅)으로 있던 이李 공사증思曾이 그 소식을 듣고 겨울에 그를 불러 눈 덮인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운자韻字를 부를 터이니 한 구 지어 보겠느냐?”소년이 대답하였다.“제가 감히…….”원님이 사斜 자 운을 불렀다. 소년이 운자 부르는 소리를 듣자 즉석에서 답하였다.“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저물어 가니”다음에 다시 화花 자 운을 불렀다. 소년이 또 글을 지었다.“천 리 강산을 덮은 눈 마치 꽃과 같구나.”그러자 원님이 소년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너는 나의 아들이니라.”이때 소년의 나이는 열 살이었다. 원님은 소년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올라가 반궁泮宮(성균관)에 나아가도록 주선해 소년의 이름을 여러 유생儒生들의 끝부분에 기록하게 해 주었는데, 그때 소년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하루는 어느 늙은 학사學士가 소년 휴정을 보고 말하였다.“나를 알아보겠느냐? 너의 고향이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너의 선군先君은 나와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멀리할 수 없구나.”그러고는 소년을 인도하여 흥인문興仁門(동대문) 밖으로 나가서 오래된 버드나무가 서 있는 사천沙川 언덕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저곳이 바로 네 선군이 살았던 옛 집터이다.”늙은 학사는 두어 간 서당을 짓고 자제들 대여섯 명을 모아 모두에게 훈계하여 말했다.“너희들이 서로 형제가 되기를 언약하고 여기에서 공부를 하되 방일放逸한 행동을 하지 말라.” -
010_1015_a_01L母有時相戱曰。老蚌1)脫 [62] 出掌中之珠。
010_1015_a_02L亦天也。及三歲。壬午四月初八日。父醉
010_1015_a_03L臥于樓中。夢有一老翁。來謂父曰。委
010_1015_a_04L訪小沙門爾。翁遂以兩手。擧小子而呪
010_1015_a_05L數聲。聲若梵語。不能通曉焉。呪畢。放
010_1015_a_06L下摩頂曰。以雲鶴安名。珎重。父問雲
010_1015_a_07L鶴之意。翁曰。此兒一生行止。政同雲鶴
010_1015_a_08L故也。言訖。莫知所之。是故父母。時喚
010_1015_a_09L小子曰。小沙門。或喚雲鶴。小與群童
010_1015_a_10L遊戱。或聚沙成塔。或將瓦立寺。常用
010_1015_a_11L行事。凡類此也。年才九歲。母忽先敗。
010_1015_a_12L又過一春。父亦繼逝。百年生計。一朝
010_1015_a_13L瓦裂。邑倅李公思
曾聞之。冬月招之。指
010_1015_a_14L松雪曰。可作呼韻一句乎。曰不敢。倅
010_1015_a_15L呼斜字。應聲曰。香凝高閣日初斜。呼
010_1015_a_16L花字。曰。千里江山雪若花。倅執手撫背
010_1015_a_17L曰。吾兒也。時年十歲矣。倅携徃京師。
010_1015_a_18L就泮宮。名錄于諸儒之尾也。時年十二
010_1015_a_19L歲矣。一日。一老學士見曰。能識我乎。
010_1015_a_20L汝之故鄕。去此不遠。汝之先君。與我
010_1015_a_21L有素。不可外汝也。引去于興仁門外。
010_1015_a_22L指沙川古柳之岸曰。此汝先君之舊墟
010_1015_a_23L也。學士起數間書堂。聚子弟五六輩。
010_1015_a_24L俱誡曰。汝等約爲兄弟。可學於此。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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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5_b_01L그러고는 3년이 될 때까지 스승을 초빙하여 공부를 가르치게 하였다. 소년 운학은 한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더욱 분발하였으니 그때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때마침 공부를 가르치던 스승이 호남 지방에 내려가 있었는데 같이 공부하던 학생 여러 명과 함께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그 스승은 호남으로 내려간 지 몇 달 안 되어 갑자기 예측하지 못한 우환(不天之憂, 喪親)을 만나 이미 서울로 돌아간 뒤였다. 소년들은 머리를 맞대고 답답해하다가 동학同學 중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스승을 찾아 천 리를 왔는데 일은 비록 어긋났지만 이러한 명승지에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느니보다는 남녘의 산천이나 두루 구경을 하는 것이 좋겠다.”그리하여 소년들은 두류산頭流山·화엄동華嚴洞·연곡동燕谷洞·칠불암七佛庵·의신동義神洞·청학동靑鶴洞의 크고 작은 사찰을 찾아다니며 자고 걷고 하면서 반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노숙老宿(덕이 높은 스님)숭인崇仁 대사이 청허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였다.“그대를 보니 기골이 맑고 빼어나다. 결정코 보통 사람은 아니니라. 마음을 돌이켜 심공급제心空及第만 한다면 영원히 세간의 명리名利는 끊게 될 것이다. 서생書生들이 하는 업이란 아무리 종일토록 수고롭게 노력해도 백 년의 소득은 다만 하나의 헛된 이름일 따름이다. 실로 애석한 일이로다.”청허가 말하였다.“어떤 것을 심공급제라고 말하는 것입니까?”숭인 노숙이 눈을 깜박이며 말하였다.“알겠는가?”청허가 대답하였다.“모르겠습니다.”노숙이 말하였다.“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니라.”그러더니 『전등록』·『선문염송』·『화엄경』·『원각경』·『능엄경』·『법화경』·『유마경』·『반야경』 등 수십 가지 경론經論을 내어 보이며 말하였다.“이 책들을 부지런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점점 그 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이 일을 계기로 하여 그 후 영관靈觀 대사에게 부촉하게 된다. 영관 대사는 운학을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 그에게 3년 동안 수업하였는데 일찍이 열심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문답하였는데 한결같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았다.그때 함께 떠났던 동학 여러 명은 각각 서울로 돌아가고 스님만 홀로 선방에 머물면서 여러 경전을 탐구하였다. 경전을 읽고 탐구하면 할수록 명상名相에 더욱 얽매이고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스님의 마음은 더욱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그는 문자를 떠나서 오묘한 이치가 있음을 터득하고 마침내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忽聞杜宇啼窓外 창 밖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니
滿眼春山盡故鄕 눈 안에 가득한 봄 산이 모두 고향이로구나
하루는 또 이런 시를 지어 읊었다.
汲水歸來忽回首 물 길어 돌아가다 언뜻 머리 돌려 보니
靑山無數白雲中 흰 구름 사이로 무수한 청산이 솟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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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5_b_01L放逸也。以至三年。擇師而學焉。一擧
010_1015_b_02L而不中。尤爲發憤。時年十五歲矣。適
010_1015_b_03L受業師。按轡于湖南。與同學數輩。追
010_1015_b_04L徃之。則師下車數月。忽遭不天之憂。
010_1015_b_05L已還京師。聚頭悶欝之中。同學言曰。
010_1015_b_06L尋師千里。事雖遠矣。到此勝地。空手
010_1015_b_07L而還。不如遊玩南服山川也。向頭流山。
010_1015_b_08L花嚴燕谷七佛義神靑鶴大小精藍。且
010_1015_b_09L宿且行。以至半年矣。一日。有一老宿崇
仁。
010_1015_b_10L尋余曰。觀子。氣骨淸秀。定非凡流。可
010_1015_b_11L回心於心空及第。永斷乎世間名利也。
010_1015_b_12L書生之業。雖終日役役。百年所得。只
010_1015_b_13L一虛名而已。實爲可惜。余云。何謂心空
010_1015_b_14L及第也。老宿瞬目曰。會麽。曰不會。宿
010_1015_b_15L曰。難言也。出示傳燈拈頌華嚴圓覺楞
010_1015_b_16L嚴法華維摩般若等數十本經論曰。覽
010_1015_b_17L之思之。漸可入門也。因囑靈觀大師。
010_1015_b_18L師一見奇之。受業三年。未甞不勤。凡
010_1015_b_19L吐納問辨。一如抓痒也。於是。同學數輩。
010_1015_b_20L各還京師。師獨留禪房。坐探群經。益
010_1015_b_21L縛名相。未得入解脫地。益增2)盃盃。 [63] 一
010_1015_b_22L夜忽得離文字之妙。遂吟曰。忽聞杜宇
010_1015_b_23L啼窓外。滿眼春山盡故鄕。一日又吟曰。
010_1015_b_24L汲水歸來忽回首。靑山無數白雲中。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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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5_c_01L이튿날 아침 손에 은도銀刀를 들어 직접 푸른 머리칼을 자르면서 말하였다.“차라리 어리석은 바보로 평생을 살지언정 맹세코 문자나 독송하는 사내는 되지 않을 것이다.”그러고는 일선一禪 대사를 수계사授戒師로 삼고, 석희釋熙 법사와 육공六空 장로, 각원覺圓 상좌를 증계사證戒師로 삼고, 영관靈觀 대사를 전법사傳法師로 삼고, 숭인崇仁 장로를 양육사養育師로 하여 스님이 되는 의식을 올렸다.스님이 된 휴정은 도솔산으로 가서 학묵學默 대사를 찾아뵈니 학묵 선사는 그를 쓰다듬어 주면서 인가해 주었다. 다시 두류산 삼철굴三鐵窟에 들어가 세 여름을 지내고, 대승암大乘庵에 들어가 두 여름을 지냈으며, 의신암義神庵·원통암圓通庵·원적암圓寂庵·은신암隱神庵 등 여러 암자에서 수삼 년 가을을 보냈다.하루는 용성龍城지금의 남원이다. 역성촌歷星村별원에서 낮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두 개의 게송을 읊었다.서천 제3조인 상나화수商那和修36)가 제4조인 우바국다優婆毱多37) 존자에게 물었다. “네 나이 몇 살인고?” 대답하였다. “제 나이 열일곱입니다.” 스승이 다시 물었다. “네 몸뚱이가 열일곱 개인가, 네 성품이 열일곱 개인가?” 제자가 대답하였다. “스승님의 머리가 하얗게 되었는데, 머리카락이 하얀 것입니까, 마음이 하얀 것입니까?” 스승이 대답하였다. “나는 다만 머리카락이 하얄 뿐 마음이 하얀 것은 아니니라.” 우바국다가 말했다. “저도 몸이 열일곱이지 성품은 열일곱이 아닙니다.” 상나화수가 곧 법의 그릇임을 알았다.
髮白非心白 머리칼은 하얘도 마음은 하얗지 않은 거라고
古人會漏洩 옛 사람(상나화수)이 일찍이 누설漏泄하셨지
今聽一聲鷄 오늘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
丈夫能事畢 대장부가 해야 할 일을 이미 마쳤네
또 읊었다.
忽得自家底 홀연히 제집을 찾고 보니
頭頭只此爾 온갖 것이 다 이것뿐이어라
萬千金寶藏 만 마디 천 마디 부처님 말씀 적은 경전도
元是一空紙 원래는 모두 다 텅 비어 있던 종이였다네
그러고는 곧바로 산으로 돌아갔다.병오년(명종 8, 1553) 가을에 갑자기 사방을 두루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생겨 표주박 하나와 누더기 한 벌로 오대산에 들어가 반년을 지내고, 다시 풍악산에 들어가 미륵봉彌勒峰을 찾아 구연동九淵洞에서 한 여름을 보냈으며, 향로봉에서 한 여름을 보냈고, 성불암成佛庵·영은암靈隱庵·영대암靈臺庵 등의 암자에서 각각 한 여름씩을 보냈으며, 함일각含日閣에서 한 해 가을을 머물렀는데 그때의 나이가 서른세 살이었다.그때 성조聖朝께서 (연산군 때에 폐지되었던) 양종兩宗(선종과 교종)을 다시 복원시켰는데, 마지못해 외인外人의 간청을 따라 1년 동안 대선大選38)이라는 직책을 역임하고, 주지 직책을 맡은 지 두 해, 전법傳法이라는 이름을 얻은 지 세 달, 교판敎判(敎宗判事)의 직책에 세 달, -
010_1015_c_01L朝手執銀刀。自斷靑髮曰。寧爲一生痴
010_1015_c_02L獃漢。誓不作文字 3)法 [64] 也。以一禪大師。
010_1015_c_03L爲授戒師。以釋熈法師六空長老覺
010_1015_c_04L圓上座。爲證戒師。以靈觀大師。爲傳法
010_1015_c_05L師。以崇仁長老。爲養育師也。徃兠率山。
010_1015_c_06L叅學默大師。撫而印之。入頭流山三鐵
010_1015_c_07L窟。過三夏。入大乘。過二夏。義神圓通
010_1015_c_08L圓寂隱神諸庵。過數三秋。一日。訪友于
010_1015_c_09L龍城今之
南原歷星村벨
윈 聞午奚聲。吟二偈
010_1015_c_10L曰三祖和修問四祖毱多曰。汝年幾耶。答曰我年十
七。師曰汝身十七。性十七耶。答師髮之白。爲髮
010_1015_c_11L白耶。心白耶。4)心白耶。 [65] 師曰我但髮白。非心是耳。
毱多曰。我身十七。非性十七也。和修知是法器。
010_1015_c_12L髮白非心是。古人會漏洩。今聽一聲鷄。
010_1015_c_13L丈夫能事畢。又曰。忽得自家底。頭頭只
010_1015_c_14L此爾。萬千金寶藏。元是一空紙。即還
010_1015_c_15L山焉。丙午秋。忽生遊方之志。一瓢一衲。
010_1015_c_16L入五臺山半年居。入楓岳山。尋彌勒峰。
010_1015_c_17L留九淵洞一夏。香爐峯一夏。成佛靈隱
010_1015_c_18L靈臺諸庵。各結一夏。住含日閣一秋。
010_1015_c_19L時年三十秋也。於是。聖祖復兩宗。强從
010_1015_c_20L外人之請。得大選名者一夏。得住持者
010_1015_c_21L二夏。得傳法名者三朔。得敎判名者三
010_1015_c_22L「脫」疑「晩」{編}。「盃盃」甲本正誤表作「欝
010_1015_c_23L欝」。「法」甲本正誤表作「漢」。「心白耶」甲
010_1015_c_24L本正誤表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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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6_a_01L선판禪判(禪宗判事)의 직책에 3년을 있었으니, 그때 휴정의 나이 서른일곱 살이었다.그러다가 갑자기 처음 발심했던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관직을 내려놓고(解綬)39) 하나의 청려장靑藜杖만 짚고 금강산 천석泉石 사이로 들어가 반년 동안 지내다가 두류산 내은적암內隱寂庵으로 들어가 3년을 지냈다. 그러고는 다시 황령암黃嶺庵·능인암能仁庵·칠불암七佛庵 등 여러 암자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3년을 지내고는 태백산·오대산·풍악산 등 다시 이 세 산을 답산하고 묘향산으로 가서 보현사普賢寺 관음전과 내원암內院庵·영운암靈雲庵·백운암白雲庵·심경암心鏡庵·금선암金仙庵·법왕암法王庵 등을 돌아다니며 마치 기러기 털이 날리듯 정처 없이 바람과 구름 같은 생활을 하였다. 그가 지은 〈삼몽사三夢詞〉는 이러하다.
主人夢說客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客夢說主人 손님도 주인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今說二夢客 지금 꿈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
亦是夢中人 둘 다 역시 꿈속의 사람이로구나
향로봉에 올라 지은 시는 이러하다.
萬國都城如蟻垤 온 나라 도성들 마치 개미집 같고
千家憂傑若▣鷄 일천 집 호걸들도 흡사 하루살이 같구나
一窓明月淸虛枕 창가 밝은 달 베고 맑고 텅 빈 속에 누웠으니
無限松風韵不齊 솔바람 끝없는데 그 소리 고르지 않네
이로부터 빛을 감추고 채색을 갈무리한 채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으나 도를 물으러 찾아오는 이가 날로 늘어만 갔다. 기축년 옥사獄事에 요망한 승려 무업無業이 대사가 향로봉에서 지은 시를 인용하여 무고誣告한 까닭에 체포되어 의금부에 잡혀갔으나 의금부에서 문초하는 답변이 분명하고 조리가 있었다. 선묘宣廟(선조)는 휴정이 억울하게 무고 당함을 알고 즉시 방면하게 하고, 그의 시고詩稿를 구해 읽어 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자신이 직접 그린 그림 묵죽墨竹 한 폭과 시 한 수를 곁들여 휴정 상인上人에게 하사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葉自毫端出 댓잎은 붓끝에서 나왔고
根非地面生 뿌리는 땅에서 나온 것 아니라네
月來難見影 달이 떠올라도 그림자 볼 수 없고
風動未聞聲 바람 불어 흔들어도 소리 들리지 않네
휴정은 이에 그 은혜를 감사하며 시 한 수를 지어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瀟湘一相枝竹 소상강의 한 가지 대나무가
聖主筆頭生 임금님 붓끝에서 나왔구나
山僧香爇處 산승이 향불을 사르는 곳에서
葉葉帶秋聲 잎새마다 가을바람에 서걱거리네
선조는 또 직접 시를 지어 휴정에게 하사하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東海有金剛 동쪽 바닷가 금강산이 있으니
䧺賢幾種胎 거기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나왔던가?
高名山斗仰 태산과 북두北斗처럼 높은 명성
今世是如來 지금 세상의 여래로구나
휴정은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시에 답하는 시를 지어 올리니, 그 시는 이러하다.
寂照非千世 고요히 비추어 세상일 간섭 않거니
虛靈豈入胎 허령虛靈이 어찌 세속의 태胎에 들겠는가?
金剛山下石 금강산 아래의 돌들은
大小自如來 크건 작건 다 여래인 것을
선조 대왕이 후한 상과 재물을 내려 산으로 돌아가는 휴정을 위로해 보냈다. -
010_1016_a_01L朔。得禪判名者三年。時年三十七歲矣。
010_1016_a_02L忽返初心。解綬。以一枝靑藜。入金剛
010_1016_a_03L山泉石間。過半年。向頭流山內隱寂。
010_1016_a_04L過三年。因1)曆 [66] 黃嶺能仁七佛諸庵。過
010_1016_a_05L三年。向太白五臺楓岳。更踏三山。向
010_1016_a_06L妙香山普賢寺觀音殿。內院靈雲白雲
010_1016_a_07L心鏡金仙法王。飄若鴻毛。風雲之不
010_1016_a_08L定也。作三夢詞曰。主人夢說客。客夢
010_1016_a_09L說主人。今說二夢客。亦是夢中人。登
010_1016_a_10L香爐峯作詩曰。萬國都城如蟻垤。千家
010_1016_a_11L2)憂 [67] 傑若3)□ [68] 鷄。一窓明月淸虛枕。無限
010_1016_a_12L松風韵不齊。自此。韜光鏟彩。不出山門。
010_1016_a_13L問道者。日益衆。以此作辭。己丑之獄。
010_1016_a_14L妖僧無業。誣引師詩。被逮禁府。供辭
010_1016_a_15L明剴。宣廟知其寃。立釋之。徵詩稿。覽
010_1016_a_16L之嘉歎。御畵墨竹幛子。題賜休靜上
010_1016_a_17L人曰。葉自毫端出。根非地面生。月來
010_1016_a_18L難見影。風動未聞聲。休靜謝恩曰。瀟
010_1016_a_19L湘一4)相 [69] 枝竹。聖主筆頭生。山僧香爇
010_1016_a_20L處。葉葉帶秋聲。又御製。賜休靜曰。東
010_1016_a_21L海有金剛。䧺賢幾種胎。高名山斗仰。
010_1016_a_22L今世是如來 5)禦 [70] 製謝恩曰。寂照非6)千 [71]
010_1016_a_23L世。虛靈豈入胎。金剛山下石。大小自
010_1016_a_24L如來。宣廟賞賚甚厚。慰遣還山。壬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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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6_b_01L임진년(선조 25, 1592)에 임금이 탄 수레(大駕)가 서쪽으로 용만龍灣에 행차하자 대사는 칼을 뽑아 분연히 일어나 알현하니 선조가 말하였다.“세상이 혼란하니 네가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수 있느냐?”대사가 눈물을 흘리며 절을 하고 온 나라에 명을 내렸다.“온 나라의 모든 승려들 중에 늙고 병이 들어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이들은 각자 머물고 있는 절에서 향을 사르고 기도를 올려 불보살님의 가피를 구하도록 하고, 그 나머지 승려들은 내가 직접 통솔할 터이니 모두들 군문 앞에 이르러 충성스런 백성들을 본받도록 하라.”선조는 이를 의롭게 여겨 휴정을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하였다. 대사는 여러 상족上足(제자)들에게 명을 내려 의병을 모아 규합하게 하였다. 그러자 유정惟政은 관동關東에서 기병起兵하고, 처영處英은 호남에서 기병해 권율權慄의 군대와 합병合兵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을 방어했다. 휴정 대사는 직접 문도 1,500명을 거느리고 천병天兵(명나라의 원병)을 따라 진군하여 평양을 탈환하였다.천조天朝(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그리고 삼협통병三協統兵40) 이하 여러 장수들은 문첩文帖을 다투어 보내 전공을 치하하였다. 어떤 이는 “나라를 위하여 적을 무찌르는 그 충성이 해를 꿰뚫었으니 경앙敬仰하여 존경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시를 지어 대사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無意圖功利 공리功利에 아무 관심이 없어
全心學道仙 도 닦는 일에만 전념하더니
今聞王事急 나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는
揔攝下山巓 총섭摠攝 되어 산문을 내려왔네
적이 물러가자 대사는 임금에게 아뢰었다.“신의 나이 80이라 근력이 쇠진하였으니, 청컨대 군사의 일을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부탁하고, 신은 총섭인摠攝印을 반납하고 묘향산 예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선조는 그 뜻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늙음을 안타깝게 여겨 그에게 ‘국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대사는 이윽고 묘향산으로 돌아와 또다시 유유자적한 한가로운 한 도인이 되었다.갑진년(선조 37, 1604) 정월 23일 원적암에서 조용히 열반을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휴정은 견여肩輿41)를 타고 눈 속을 뚫고서 가까운 산내의 여러 암자들을 골고루 찾아다니면서 부처님께 참배하고 설법을 한 뒤에 방장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목욕재계하고 위의를 갖춘 다음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고 붓을 가져오게 하여 자신의 영정에 시 한 수를 써 넣었다.
八十年前渠是我 80년 전에는 저것이 나였더니
八十年後我是渠 80년 뒤에는 내가 저것이로구나
그러고는 유정과 처영 두 문인에게 보낼 편지를 써서 마친 다음 -
010_1016_b_01L大駕。西幸龍灣。師即仗劒起。謁宣廟曰。
010_1016_b_02L世亂如此爾。可弘濟耶。師泣而拜。命
010_1016_b_03L曰。國內緇徒之老病。不任行伍者。臣令
010_1016_b_04L在地焚修。以祈神助。其餘臣統率。悉
010_1016_b_05L赴軍前。以效忠赤。宣廟義之。命爲八
010_1016_b_06L道十六宗都揔攝。師分命諸上足。𠛩聚
010_1016_b_07L義徒。於是惟政。起7)開 [72] 東。處英起湖南。
010_1016_b_08L與權公慄合兵。8)鑾 [73] 賊于幸州。師自率
010_1016_b_09L門徒千五百人。隨天兵。進克平壤。天
010_1016_b_10L朝經畧宋應昌。提督李如松。及三協統
010_1016_b_11L兵以下諸將。送帖嘉奘。有爲國討賊
010_1016_b_12L忠誠貫日不勝敬仰之語。又題詩贈之
010_1016_b_13L曰。無意圖功利。全心學道仙。今聞王
010_1016_b_14L事急。揔攝下山巓。賊退。師啓曰。臣年
010_1016_b_15L垂八十。筋力盡矣。請以軍事。屬於弟
010_1016_b_16L子惟政及處英。臣願納揔攝印。還香山
010_1016_b_17L舊棲。宣廟嘉其志。悶其老。贈號國一
010_1016_b_18L都大禪師禪敎都揔攝扶宗樹敎普濟登
010_1016_b_19L階尊者。師旣歸妙香。攸然一閒道人也。
010_1016_b_20L甲辰正月二十三日。將示寂于圓寂庵。
010_1016_b_21L是日肩輿衝雪。9)編 [74] 訪近山諸庵。拜佛
010_1016_b_22L說法。還方丈。頮盥具威儀。焚香佛前。
010_1016_b_23L取筆自題畵像曰。八十年前渠是我。八
010_1016_b_24L十年後我是渠。又寄書訣惟政處英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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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6_c_01L가부좌를 한 채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85세였고 선랍禪臘은 67년이었다. 기이한 향내가 방안에 가득하더니 삼칠일(21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사라졌다.제자 원준圓俊과 인영印英 등이 사유闍維를 마치고 난 뒤에 영골靈骨 한 조각과 사리 두 매를 받들어 보현사普賢寺와 안심사安心寺 두 곳에 부도를 세워 봉안하였다. 또 한 조각은 제자 유정과 자체自體42) 등이 봉래산蓬萊山으로 받들고 가서 거기에서 신비한 구슬(神珠, 사리) 몇 매를 얻어 유점사楡岾寺 북쪽 산언덕 폄석窆石에 봉안하였다.그의 제자는 1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후학을 양성한 일방종주一方宗主 (대종사)만도 네다섯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성대하다고 말할 만하다.그의 저술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선교석禪敎釋』·『운수단가사雲水壇歌辭』·『삼가일지三家一指』 각 1권과 『청허당집淸虛堂集』 8권하나는 묘향산에서 개간開刊한 상·중·하 3권이고, 하나는 동리산에서 개간한 상·하 2권본이며, 하나는 삭녕 용복사龍腹寺에서 개간한 7권본인데 숭정崇禎(明 毅宗의 연호) 3년 경오(인조 3, 1630) 정월에 개간한 것이다.이 있으며, 「회심곡回心曲」 1편이 세상에 유행한다.문인 언기彦機·의경儀冏·쌍흘雙屹 등이 상국相國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43)에게 비명碑銘을 받아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을 세웠다.숭정崇禎 4년 신미(인조 9, 1631) 봄에 문인 태능太能·원철圓徹·해안海眼 등이 상국인 계곡谿谷 장유張維44)에게 비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여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세웠으며, 숭정 5년 임신(인조 10, 1632) 가을에 『금자보장록金字寶藏錄』 1권을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보관하였으니, 그것은 대사가 임종할 때 유언의 말을 따른 것이다.또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의승대장義僧大將 황금가사黃錦袈裟 1벌, 홍금가사紅錦袈裟 1벌, 백금장삼白金長衫 1벌, 벽옥碧玉으로 만든 발우 3좌座, 당혜唐鞋 2쌍, -
010_1016_c_01L門人訖。趺坐就化。世壽八十五。禪臘
010_1016_c_02L六十七。異香滿室。三七日後始歇。弟子
010_1016_c_03L圓俊印英等闍維。奉靈骨一片。舍利二
010_1016_c_04L枚。樹浮屠於普賢安心寺。又一片。弟
010_1016_c_05L子惟政自體等。奉來蓬山。得神珠數枚。
010_1016_c_06L窆石于楡岾之北崗。弟子千餘人。其能
010_1016_c_07L領袖後學。爲一方宗10)二十一 [75] 者。不下
010_1016_c_08L四五人。可謂盛矣。所著禪家龜鑑禪敎
010_1016_c_09L釋雲水壇三家一指各一卷。淸虛堂集
010_1016_c_10L八卷一妙香山開刊上中下三卷。一桐裡山開刊上
下二卷。一朔寧龍腹寺開刊七卷。崇禎三年
010_1016_c_11L庚午
正月 回心曲一篇。行于世。門人彥機儀
010_1016_c_12L冏雙仡11)等。 [76] 碑銘於月沙李相國廷
龜 立
010_1016_c_13L之金剛山白華庵。崇禎四年辛未春。門
010_1016_c_14L人太能圓徹海眼等。乞碑銘於谿谷張
010_1016_c_15L相國維。立於頭輪山大芚寺。崇禎五年
010_1016_c_16L壬申秋。金字寶藏錄一卷。臨終遺言辭
010_1016_c_17L也。藏於海南頭輪山大芚寺。義僧大將
010_1016_c_18L黃錦12)乫 [77] 裟一領。紅錦袈裟一領。白金
010_1016_c_19L長衫一領。碧玉鉢三座。唐鞋二雙。烏
010_1016_c_20L「曆」作「歷」{甲}。「憂」甲本正誤表作「豪」。
010_1016_c_21L□甲本正誤表作「醯」。「相」甲本正誤表曰衍
010_1016_c_22L字。「禦」甲本正誤表作「御」。「千」甲本正誤
010_1016_c_23L表作「干」。「開」甲本正誤表作「關」。「鑾」
010_1016_c_24L甲本正誤表作「鏖」。「編」疑「徧」{編}。「二十
010_1016_c_25L一」甲本正誤表作「主」。「等」下甲本正誤表有
010_1016_c_26L「得」。「乫」甲本正誤表作「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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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7_a_01L검은 거문고(烏瑟)와 염주 3건件, 옥사자玉獅子 연적硯滴 1좌, 중덕대선中德大禪인 승과에 합격하였다는 합격증 홍패紅牌 1장, 낙산사洛山寺 주지 임명장인 차첩差帖 1장, 유점사 주지 차첩 1장 등 휴정의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이것은 제자 영잠靈岑 대사가 휴정 대사가 입적한 뒤에 3년 동안 복服을 입고 난 뒤에 짊어지고 와서 보관한 것이다. 대사께서 입적한 뒤 185년이 지난 건륭乾隆(淸 高宗의 연호) 무신년, 우리나라 정조대왕 12년(1788)에 대둔사 스님인 계홍戒洪과 천묵天默이 임금께 글을 올려 탄원하였다.이에 임금이 대둔사에 사당을 건립하라 명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으며, 사명당四溟堂과 뇌묵당雷默堂을 좌우에 철향腏享하게 하였다.기유년(1789) 4월에 조정에서 제문祭文을 내리고 예조정랑禮曹正郞 정기환鄭基煥을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니, 그 제문은 이러했다.
若昔壬辰 저 옛날 임진년
倭寇有警 왜구가 침략하자
空門忠義 공문空門의 충의忠義는
曰惟休靜 오직 휴정뿐이었네
髮剃身緇 머리 깎고 가사 걸친 몸으로
不墜彜秉 인륜을 떨어뜨리지 않았구나
慧劒西赴 지혜의 칼 들고 서쪽으로 달려가니
義徒從影 의로운 승려 그림자처럼 따랐네
協助天兵 천병天兵을 협조하여
狂塵遂靖 왜구의 난리를 잠재웠네
還陪鸞駕 어가를 호위하고 서울로 돌아왔으니
勳業愈炳 그의 공훈 더더욱 빛이 났네
聖朝褒嘉 거룩한 조정에서 그 공을 기려
寶墨暉映 임금 어필 찬란하게 빛나네
如何表忠 어찌하여 표충사에
先以惟政 먼저 유정惟政을 앞세웠는가?
新祠翼然 그가 머물던 옛 절에
住錫故境 사당을 새로 지어
樹風奘功 법풍을 세우고 공을 권장하도록
特允群請 많은 사람 간청하니 임금이 윤허함일세
宣額降香 편액을 하사하고 제물을 내리니
便蕃寵命 임금님의 각별한 배려로세
聳我南陬 외딴 남녘 사람 어깨가 으쓱하니
雖釋可敬 아무리 승려지만 존경스럽네홍문관 수찬修撰 송익효宋翼孝가 지은 제문임.(弘文舘修撰宋翼孝撰)
늘 사용하는 제문은 이러하다.
定慧俱到 선정과 지혜에 모두 이르고
忠義並隆 충성과 의리 모두 드높구나
大德授旨 덕 높은 스님의 명을 받아
二徒承風 두 제자가 법풍을 받들었네
獲醜孔阜 수많은 왜적을 사로잡으니
王用記功 임금은 그 공을 기록하셨네
鼎彜旣銘 솥과 제기에 글을 새기게 하고
爼豆斯崇 제사 또한 풍성하게 지내네
春物敷榮 봄 되어 사물이 윤택해지니
悵慕愈緬 사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네
嘉薦普淖 아름답고 향기로운 음식으로
式宣寵典 임금님의 은전 베풀어 제 올리네
삼가 홍제존자弘濟尊者 사명당 선사와 우세존자佑世尊者 뇌묵당 선사를 좌우에 모시고 음식을 올려 배향配享합니다.승지承旨 정약용丁若鏞45)이 지음.홍문관 제학提學 서유린徐有鄰이 「표충기적비명表忠紀蹟碑銘」을 지었다.갑인(정조 18, 1794)에 임금이 지은 「서산대사화상당명西山大師畫像堂銘」 2벌을 하나는 두륜산 표충사에 내려보내고, 다른 하나는 묘향산 수충사酬忠祠로 내려보냈다. -
010_1017_a_01L瑟念珠三件。玉獅子硯滴一座。中德大
010_1017_a_02L禪。紅牌一張。洛山寺1)若帖一張。楡岾。
010_1017_a_03L寺差帖一張。此弟子。靈岑大師。三年服
010_1017_a_04L除後。負來留藏。師入寂後。一百八十
010_1017_a_05L五年。乾隆戊申。我正宗大王十二年。
010_1017_a_06L寺僧戒洪天默。抱狀籲天。爰命立祠。
010_1017_a_07L賜額表忠。泗溟雷默。左右腏享。己酉
010_1017_a_08L四月。妥靈賜祭。遣禮曺正郞鄭基煥。致
010_1017_a_09L祭。祭文曰。若昔壬辰。倭寇有警。空門
010_1017_a_10L忠義。曰惟休靜。髮剃身緇。不墜彜秉
010_1017_a_11L慧劒西赴。義徒從影。協助天兵。狂塵
010_1017_a_12L遂靖。還陪鸞駕。勳業愈炳。聖朝褒嘉。
010_1017_a_13L寶墨暉映。如何表忠。先以惟政。新祠
010_1017_a_14L翼然。住錫故境。樹風奘功。特允群請。
010_1017_a_15L宣額降香。便蕃寵命。聳我南陬。雖釋
010_1017_a_16L可敬弘文舘修撰
宋翼孝撰。常用祭文曰。定慧俱到。
010_1017_a_17L忠義並隆。大德授旨。二徒承風。獲醜
010_1017_a_18L孔阜。王用記功。鼎彜旣銘。爼豆斯崇。
010_1017_a_19L春物敷榮。悵慕愈緬。嘉薦普淖。式宣
010_1017_a_20L寵典。謹以弘濟尊者泗溟堂禪師。佑世
010_1017_a_21L尊者雷默堂禪師。配食于左右承旨丁
若鏞撰>。弘
010_1017_a_22L文舘提學徐有鄰。作表忠紀蹟碑銘。七
010_1017_a_23L年 [6] 甲寅。御製西山大師畫像堂銘二本。
010_1017_a_24L一降于輪山表忠祠。一降于香山酬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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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7_b_01L그것은 그 당시 묘향산의 스님들이 대둔사의 소식을 듣고 와서 허락해 주기를 간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휴정의 송덕비頌德碑 비문을 지을 때 서공徐公(徐有隣)이 곁에서 도와준 공이 있기 때문이다.5결結의 복호復戶46)가 있었고, 보솔保率47) 30명을 주어 제향을 올리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동치同治(淸 穆宗의 연호) 10년 신미(고종 8, 1871)에 복호와 보솔을 모두 환수하였다. 그리하여 본사本寺(대둔사)에서 자체적으로 제향을 봉행하게 되었다. 자체에서 지낼 때 사용하는 제문은 구계九階(覺岸) 상인上人이 지은 것이다.대둔사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이 손수 쓴 『연화경蓮華經』 1권과 일본의 관백關白이 바친 황금 병풍 1좌가 있다.사명존자전泗溟尊者傳존자尊者의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호는 사명泗溟이다. 또는 송운松雲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성은 풍천豊川 임任씨이다. 형조판서 수성守城의 아들이고 장악원掌樂院 정正 효곤孝昆의 증손이며, 밀양 삼강동三綱洞48)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열다섯 살에 어머니를 잃고 열여섯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후에 산에 들어가 도를 닦고 일찍이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 거주하였다.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임진년(선조 25, 1592)에 금강산 유점사에 기거하다가 영취산靈鷲山 재약사載藥寺에 이르러 삼강동三綱洞의 손판서孫判書·노승지盧承旨·박효자朴孝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또 전란을 맞아 전국에서 조중봉趙重峰·고제봉高霽峰·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정기룡鄭起龍·고언겸高彥謙·송운松雲·의엄義嚴·처영處英·영규靈圭·해안海眼 등이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해안은 충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는 금성錦城에서 일으켰으며, 유정은 관동關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갑오년(선조 27, 1594) 4월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의 진영에 들어갔는데 왜적의 무리들이 몇 리에 걸쳐 줄지어 서 있고, 창과 칼이 서로 잇닿아 있었다. 그런데도 송운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가등청정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등청정이 물었다.“귀국貴國에 보물이 있습니까?”송운이 대답하였다.“우리나라에는 보물이 없습니다. 오직 장군의 머리를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다.”청정이 말하였다.“무슨 말입니까?”송운이 대답하였다.“우리나라에서는 그대의 머리에 금 1천 근과 식읍食邑 1만 호의 현상금을 걸어 놓고 있으니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청정이 큰소리로 웃었다. -
010_1017_b_01L祠。時香山僧。大芚消息來。乞許之故
010_1017_b_02L也。蓮潭有一撰頌德碑。徐公有傍助之
010_1017_b_03L功故也。復戶五結。保率三十人。享事矣。
010_1017_b_04L同治十年辛未。復戶保率還收。自本寺
010_1017_b_05L私享。私享祭文。九階上人撰 2)有家 [78] 蓮
010_1017_b_06L華經一卷。安平大君瑢手筆也。黃金屛
010_1017_b_07L一座。倭物關白所獻者。
010_1017_b_08L
010_1017_b_09L泗溟尊者傳
010_1017_b_10L尊者。名惟政。號泗溟。又3)稻 [79] 松雲。姓豊
010_1017_b_11L川任氏。贈刑曹判書守城之子。掌樂正
010_1017_b_12L孝昆之曾孫也。密陽三綱洞人也。十五
010_1017_b_13L喪母。十六喪父。入山修道。甞居五臺
010_1017_b_14L山月精寺。萬曆壬辰。居金剛山楡岾寺。
010_1017_b_15L至靈鷲山4)在 [80] 藥寺。三綱洞。與孫判書盧
010_1017_b_16L承旨朴孝子。同起義。又趙重峰高
010_1017_b_17L霽峰郭再祐金德齡鄭起龍高彥謙松雲
010_1017_b_18L義嚴處英靈圭海眼。同起義。海眼起忠
010_1017_b_19L州。靈圭起錦城。惟政起關東。甲午四
010_1017_b_20L月。入淸正陣。賊衆列立。數里鎗劒如
010_1017_b_21L束。松雲小無怖色。從容談笑。淸正曰。
010_1017_b_22L貴國有寶乎。答曰。我國無寶。惟以將
010_1017_b_23L5)軍 [81] 爲寶。淸正曰。何謂也。答曰。購儞頭。
010_1017_b_24L金千斤邑萬戶。非寶而何。淸正大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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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7_c_01L그해 7월에 다시 청정의 진영에 들어갔으며, 12월에는 청정의 진영에 들어가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논의되던) 다섯 가지 조약에 대하여 적의 형편을 살피고 돌아오기도 했다. 저 다섯 가지 일이란 첫째 천자天子와 결혼을 할 것, 둘째 조선을 떼어 일본에 소속시킬 것, 셋째 전과 같이 교린交隣할 것, 넷째 왕자 한 사람을 일본에 보내 영구히 머물게 할 것, 다섯째 조선의 대신大臣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이것이 다섯 가지 사안이었다.을미년(선조 28, 1595)에 사명은 상소문을 올리고 의병을 해산한 다음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갔다.갑진년(선조 37, 1604)에 일본의 관백關白 원가강源家康(德川家康)이 우리나라에 수신사修信使를 보낼 것을 요청해 왔다. 임금이 유정에게 교지를 내려 말하였다.“그대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라.”3월 4일에 길을 떠나 왜국의 도성으로 들어가 화친을 맺고 을사년(선조 38, 1605) 4월에 돌아왔다. 7월 13일에 서울로 돌아오니 임금이 크게 포상하고 특별히 한 급의 품계를 높여 주었다. 유정은 다시 가야산으로 돌아갔으며, 정미년(선조 40, 1607) 가을에 치악산으로 돌아갔다가 무신년(선조 41, 1608)에 선묘宣廟(선조)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달려가 절하고 통곡하였다. 병이 들어 가야산으로 들어갔다.유정은 명나라 세종世宗 가정嘉靖 22년, 우리나라 인종仁宗 원년 갑진(1544)에 태어나 신종神宗 만력萬曆 38년, 우리나라 광해군 2년 경술(1610)에 세상을 떠났으니, 세속 나이는 67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시호는 종봉鍾峰이고 홍제존자弘濟尊者의 칭호를 내렸으며, 그의 행장은 영남의 ‘표충사비表忠祠碑’에 갖추어져 있다.유정이 입적한 후 8년 무오(광해군 10, 1618)에 문인들의 호소에 의하여 임금이 특별히 출생지인 밀양 재약사載藥寺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내렸으며, 그의 스승 서산 대사도 그곳에 함께 배향하게 하였다.그 후 137년이 지나서 그의 5세손 남붕南鵬이 표충사가 퇴락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
010_1017_c_01L七月。再入淸正陣中。十二月。三入淸正
010_1017_c_02L陣中。探情。以五事來6)云。 [82] 五事者。一與
010_1017_c_03L天子結婚。二割朝鮮屬日本。三如前交
010_1017_c_04L隣。四王子一人。入送日本永住。五朝
010_1017_c_05L鮮大臣。入質日本。此五件事也。乙未。
010_1017_c_06L上疏罷兵。入伽倻山海印寺。甲辰。日本
010_1017_c_07L關伯源家康。請信使于我國。上下敎曰。
010_1017_c_08L爾其通和而來。三月初四日。啓程。入倭
010_1017_c_09L都結和。乙巳四月。7)向 [83] 來。七月十三日。
010_1017_c_10L還京。上大加褒賞。特賜一品。還入伽
010_1017_c_11L倻山。丁未秋。還雉樂 [7] 山。戊申。聞宣廟諱
010_1017_c_12L音。奔入拜哭。因病入伽倻山。明世宗
010_1017_c_13L嘉靖二十二年。我仁宗元年甲辰生。神
010_1017_c_14L宗萬曆三十八年。我光海二年庚戌卒。
010_1017_c_15L壽六十七。臘五十一。謚曰鍾峰。賜弘
010_1017_c_16L濟尊者。行8)裝 [84] 具於嶺南表祠碑。入寂
010_1017_c_17L後。八年戊午。因門人之呼訴。特命立祠
010_1017_c_18L於9)在 [85] 藥寺。賜額曰表忠。以西山配享
010_1017_c_19L焉。後百三十七年。五世孫南鵬。愍其
010_1017_c_20L「若」甲本正誤表作「差」。「有家」甲本正誤
010_1017_c_21L表曰衍字。「稻」甲本正誤表作「稱」。「在」
010_1017_c_22L甲本正誤表作「載」。「軍」下甲本正誤表有
010_1017_c_23L「頭」。「云」甲本正誤表作「去」。「向」甲本正
010_1017_c_24L誤表作「回」。「裝」甲本正誤表作「狀」。「在」
010_1017_c_25L甲本正誤表作「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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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8_a_01L재물을 모아 중건하고 여러 군자들에게 간청하여 『시문집詩文集』 1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을 만들었다. 이 책은 청천靑泉신유한申維翰이 기술한 것으로서 2권으로 되어 있으며, 간행되어 세상에 유포되어 있다.금강산 백화암白華菴에 수충각酬忠閣을 세우고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 세 화상과 그 왼쪽에는 서산 대사의 영정을, 오른쪽에는 사명 대사의 영정 등 다섯 분의 영정을 안팎 상인방(楣)에 봉안하였다. 각판刻板의 기록에 휴정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이조판서 병조판서 사자국일도총섭 대각등계자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兼吏曹判書兵曹判書賜紫國一都總攝大覺登階者’라 하였고, 유정은 ‘절충장군 행용호분위상호군折衝將軍行龍虎賁衛上護軍’이라 하였으며, 아무개는 ‘영의정 이조판서 양국대장자領議政吏曹判書兩國大將者’라고 하였고, 아무개는 ‘대선교등계 승의병대장군 겸동지이조판서 의금부사 통제군사명大禪敎登階僧義兵大將軍兼同知吏曹判書義禁府事統諸軍司命’이라 하였으며, 아무개는 종봉당鍾峰堂이란 시호가 추증되어 묘향산 수충사에 배향되어 있다. 연담蓮潭 대사가 찬문贊文을 지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削髮逃塵世 머리를 깎은 것은 티끌세상 피하기 위함이요
十年雲林 10년 동안 운림雲林 속에서
結猿鶴之盟 원숭이와 학을 친구 하기로 맹세했네
存髥表丈夫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를 나타냄이니
一朝談笑 하루 아침에 이야기를 나누며
解龍蛇之厄 임진·계사의 난리를 해결하였네
子貢之辯歟 자공子貢 같은 언변을 지녔고
秉忠之迹歟 자취는 유병충劉秉忠과 같았어라
能使柒齒 능히 저 오랑캐들로 하여금
慕義而讋伏 의리를 흠모하여 복종하게 하였으니
迄今二百年來 지금 2백 년에 이르도록
炎徼息警 전쟁이 그치고 편안하게 지낸다네
噫嘻休哉 아!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로다
是誰之力也 이것이 그 누구의 힘이란 말인가?
宜乎朝家崇祠宇 당연하네. 조정에서 사당을 지어 숭배하고
澗水沼毛甞又禴 제물을 차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일이여!
문인으로는 송월松月 등 50여 명이 있다.진묵조사전震默祖師傳조사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호는 진묵震默이며, 만경현萬頃縣(전북 김제군 만경면) 불거촌佛居村(대진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는 조의調意씨이다.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풀과 나무가 3년 동안 시들었으므로 불거촌 사람들이 다 말하였다.“세상에 드문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다.”태어나서부터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내 나는 고기 따위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
010_1018_a_01L傾圮。鳩財重建。請於諸君子。爲詩文
010_1018_a_02L一卷。并奮忠䋒難錄一卷。此申靑泉維
翰
010_1018_a_03L所記合二卷。行世。金剛山白華菴。建酬
010_1018_a_04L忠閣。指空懶翁無學三和尙。左西山右
010_1018_a_05L泗溟五幀。掛內外楣。刻板曰。休靜。
010_1018_a_06L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兼吏曹判書
010_1018_a_07L兵曹判書賜紫國一都總攝大覺登階者。
010_1018_a_08L惟政爲。折衝將軍行龍虎賁衛上護軍。某
010_1018_a_09L爲領議政吏曹判書兩國大將者。某爲
010_1018_a_10L大禪敎登階僧義兵大將軍兼同知吏曹
010_1018_a_11L判書義禁府事鸞諸軍司命。某贈謚鍾
010_1018_a_12L峰堂。配妙香山酬忠祠。蓮潭作賛曰。
010_1018_a_13L削髮逃塵世。十年雲林。結猿鶴之盟。
010_1018_a_14L存髥表丈夫。一朝談笑。解龍蛇之厄。
010_1018_a_15L子貢之辯歟。秉忠之迹歟。能使柒齒。
010_1018_a_16L慕義而讋伏。迄今二百年來。炎徼息警。
010_1018_a_17L噫嘻休哉。是誰之力也。宜乎朝家崇祠
010_1018_a_18L宇。澗水沼毛甞又禴。門人松月等五十
010_1018_a_19L餘人。
010_1018_a_20L
010_1018_a_21L震默祖師傳
010_1018_a_22L祖師。名一玉。號震默。萬頃佛居村人也。
010_1018_a_23L母調意氏。生時。佛居草木。三年萎枯。
010_1018_a_24L人咸曰。間氣而生也。生而不喜葷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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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8_b_01L성품이 슬기롭고 마음이 자비로웠기 때문에 모두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불거촌의 산부처이다.”그의 나이 7세 되던 해 전주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栖寺에 귀의하여 처음으로 불경(內典)을 읽었다. 읽을 때는 마치 칼날이 뿔을 만나 해체해 나가듯이 한번 눈이 스쳐 가기만 하여도 줄줄 외우곤 하여 아무도 그의 스승이 되어 가르쳐 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사미沙彌로만 생각하였다.한번은 그 절의 주지가 그에게 향을 사르고 신중神衆께 예배를 드리라고 시켰더니, 오래지 않아 그 주지의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 일제히 사양하면서 말하였다.“우리는 모두 작은 신神들인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그분에게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는 일을 하지 말게 하여 저희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편안한 마음을 가지게 해 주십시오.”그리하여 대중들은 부처님이 세상에 다시 나오신 것이라고 모두들 떠들썩했다.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봉곡鳳谷 김 선생金先生(金東準)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사계沙溪(金長生) 선생의 고제高弟였다. 진묵 대사는 그와 서로 왕래하면서 사상적 핵심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방외方外의 사귐을 가졌으니 이 둘은 다 한 시대의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이었다.어느 날 대사는 봉곡 선생에게서 『강목綱目』을 빌렸다. 선생은 하인을 시켜 그것을 지고 대사를 따라가게 하였다. 대사는 책을 한 권 뽑아서 다 읽으면 길에 던져 버리곤 하였고, 하인은 따라가며 그 책을 주워 담았다. 30리쯤 되는 거리의 절 가까이 다가가자, 70권 책 한 벌을 다 읽었다고 한다.다른 날 봉곡 선생이 진묵 대사에게 물었다.“책을 빌려 가지고 가서 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진묵이 대답하였다.“고기를 잡고 난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이랍니다.”선생이 시험 삼아 책을 뽑아 내용을 물어보았더니 한 글자도 틀림이 없었다. 하루는 선생이 여자 종을 시켜 음식을 싸서 진묵 스님에게 보냈는데 여종이 봉서사로 가는 도중에 스님이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종이 심부름 온 연유를 말하자 대사가 말하였다.“너 아이를 갖고 싶으냐?”여종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스님은 그녀의 박복함을 탄식하면서 영기靈氣가 헛되이 새 버릴까 두려워 멀리 허공 밖에서 막아 버렸다. 여종이 돌아와 선생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다. 봉곡 선생과 대사는 서로 내왕하는 빈도가 잦았으니 마음으로 묵묵히 맺어진 교분이 이와 같았다.대사가 사미 시절에 창원 마산 포구를 지나가다가 어떤 여자 아이가 사미를 보고 사랑하게 되었으나 형편상 서로 같이 살 수 없음을 알고는 그 때문에 마침내 죽어서 다시 남자로 태어났다. 그 사내아이는 전주 대원사大元寺49)에서 진묵 대사를 만나 그를 모시는 동자가 되었는데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하였다. 대사는 그를 총애하여 그와 함께 이락삼매離樂三昧50) 속에서 유희遊戱하였다. 경전51)에 세속적 즐거움을 여읜 삼매(離樂三昧)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누가 티끌세상에서 홀로 빛나는 진여眞如의 실상을 알겠는가? -
010_1018_b_01L性慧心慈。又曰。佛居生佛也。年七歲。
010_1018_b_02L歸全州西方山鳳栖寺。始讀內典。若刃
010_1018_b_03L迎觽解。過目成誦。不可師授。故衆不
010_1018_b_04L知。而小沙彌視之。住持者。命燒香禮
010_1018_b_05L神衆。久之。住持夢。神衆齊謝曰。吾儕
010_1018_b_06L小神。安敢受佛禮乎。願勿復燒香。得
010_1018_b_07L晨夕自便也。於是。衆噪而爲佛再世也。
010_1018_b_08L鳳栖寺之五里許。有若鳳谷金先生。沙
010_1018_b_09L溪先生之高弟也。相與徃來。爭席爭竈。
010_1018_b_10L爲方外之交。皆一時魁偉之人也。先生
010_1018_b_11L借與綱目。使一奚隨之。師於路信手披
010_1018_b_12L閱而了一𢎥。輙拋之。奚從而拾之。比
010_1018_b_13L及寺。盡覽一部。他日先生。謂師曰。借書
010_1018_b_14L而拋之何也。曰得魚忘筌。先生抽卷試
010_1018_b_15L之。無一字錯焉。一日先生。使女奴。餽
010_1018_b_16L饌。路見師望空而立。奴致命。師曰。汝
010_1018_b_17L欲有孕乎。奴不應。則師歎其福薄。而
010_1018_b_18L恐靈氣之妄泄。遠屛空外。歸語於先生。
010_1018_b_19L其過從之頻數。情誼之默契。類多如此。
010_1018_b_20L師沙彌時。過昌原馬1)上 [86] 浦。有童女。見
010_1018_b_21L愛而勢不得相從。故遂死而爲男子。會
010_1018_b_22L師於全州之大元寺。而爲侍童。名曰奇
010_1018_b_23L2)童。 [87] 師愛之。與之遊戱於離樂三昧之
010_1018_b_24L中。經有離樂三昧。誰能認眞於居塵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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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8_c_01L그런 까닭에 지혜의 눈이 없는 숱한 스님들이 진묵 스님에게 기춘이를 위하여 국수를 말아 달라고 간청하자 대사가 허락하고 여러 대중들로 하여금 한자리에 둘러앉아 발우를 펴 놓게 하였다. 그러고는 시자를 시켜 각각의 발우 안 물속으로 바늘 하나씩을 던져 넣게 하였다. 그러자 대사의 발우에 담긴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하여 발우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대사는 태연자약하게 그것을 먹었다. 그러나 다른 스님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바늘 하나씩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대사는 일출암日出庵에 살았고 그의 어머니는 전주 왜막촌倭幕村에 살고 계셨는데, 여름만 되면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였으므로 대사가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모두 다른 지방으로 쫓아 버리게 하였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는 모기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아주 사라졌다고 한다.대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 북면北面 유앙산維仰山52)에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그 묘소에 벌초를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 그 사람의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곤 하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남보다 뒤질세라 앞다투어 묘소를 돌보곤 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그 묘소는 늘 깨끗하고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대사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술을 거르고 있었는데, 술 향기가 퍼져 코로 들어왔다. 대사는 그곳을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다.“스님이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스님이 대답했다.“술을 거르고 있습니다.”대사는 잠자코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물었다.“그대가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방금 전처럼 대답하자 대사는 무료하게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또 가서 방금 전과 같이 물었다. 그러나 끝내 ‘술을 거른다’고 대답하였다. 대사는 마침내 실망하고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철퇴로 술 거르던 스님을 내려쳤다.대사가 일찍이 변산부안군 월명암月明庵에 살고 계셨다. 시자의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속가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미리 대사의 공양을 준비해 탁자 위에 놓아두고 아뢰었다.“공양을 여기 차려 두었습니다. 공양 때가 되거든 챙겨 잡수십시오.”그때 대사는 방장실에서 창문을 열고 앉아서 문지방에 손을 얹고 『능엄경』을 보고 있었다.시자가 속가에서 묵고 암자로 돌아와 보니, 대사는 어제 그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대사는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에 손이 찍히어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도 손을 거둘 줄도 모르고 태연히 경전만 읽고 있었고, 탁자 위의 공양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문안 인사를 올리자 대사가 말하였다.“너는 왜 제사에 참례도 않고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아마도 대사는 수능엄삼매(首楞三昧)에 들어서 -
010_1018_c_01L耀之際。所以無眼衆僧。尙乞師爲奇春
010_1018_c_02L洗麵。師許。命衆僧。同坐展鉢。令侍者。
010_1018_c_03L各投一針於鉢水中。師鉢之針。變爲細
010_1018_c_04L麵。飣飣滿鉢。喫之自若。諸僧之鉢。依
010_1018_c_05L舊是一針而已。師居日出庵。母居倭幕
010_1018_c_06L村。以蚊爲苦。師屬山靈。敺蚊於他方。
010_1018_c_07L永無蚊子之苦。母沒。歸葬於萬頃北面
010_1018_c_08L維仰山。有掃除酻侑者。輒得農利。故
010_1018_c_09L遠近村人。爭先恐後。至今數百年。封
010_1018_c_10L域宛在。香火不絕。師尙喜飮。然糓茶
010_1018_c_11L則飮。酒云則不飮。有僧漉酒。酒香入
010_1018_c_12L鼻。徃問曰。汝漉甚麽。曰漉酒。師默然
010_1018_c_13L退。又徃問曰。汝漉什麽。答之如前。無
010_1018_c_14L聊而返。又徃問之。答以下酒。遂斷望
010_1018_c_15L而返。俄有金剛力士。以鐵棒。打漉酒僧。
010_1018_c_16L師棲於邊山扶
安月明庵。侍者有忌。故徃
010_1018_c_17L俗家。先判齋供。置卓上而啓之曰。供
010_1018_c_18L養在此。時至自齋。時師在方丈內。推
010_1018_c_19L窓而坐。以手加闑。而閱楞嚴經。侍者
010_1018_c_20L宿家而來。坐如昨日。風戶噬指而血。
010_1018_c_21L忘却收手。閱經自若。卓供如舊。侍者
010_1018_c_22L問侯。師曰。汝不叅祀而徑來耶。盖入首
010_1018_c_23L「上」甲本正誤表作「山」。「童」甲本正誤表
010_1018_c_24L作「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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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9_a_01L밤이 이미 지난 줄을 모르셨던 모양이다.매일 밤마다 언제나 등불 빛이 멀리 동쪽에서 비치곤 하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았더니 그것은 청량산 목부암木鳧庵전주에 있었다.에 있는 불등佛燈의 불빛이었다. 대사는 곧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목부암의 이름을 원등암遠燈庵으로 고쳤다. 십육나한이 늘 대사를 시봉하려고 하고 있었으므로 그 등불 빛을 멀리 월명암까지 비추었던 것이다.전주부全州府에 어떤 아전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부터 대사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관가의 재물 수백 냥을 사사로이 써서 빚을 지고는 도망을 가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러 대사를 찾아왔다. 대사가 말하였다.“관가의 재물을 빚지고 도망가는 것이 어찌 사내가 할 일이겠는가? 그러지 말고 집에 돌아가 쌀 몇 말을 가지고 여기로 오너라. 저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틀림없이 좋은 도리가 있을 것이다.”그 아전이 돌아가 대사가 시킨 대로 쌀을 가지고 왔다. 대사는 시자에게 밥을 지어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도록 시키고는 이내 그 관리에게 물었다.“관청에 혹 빈자리가 있느냐?”아전이 대답하였다.“감옥의 형리刑吏 자리가 잠시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봉급이 매우 박하고, 또 일거리도 없는 자리입니다.”대사가 말하였다.“일거리가 없는 자리라 하지 말고, 어서 빨리 가서 그 자리에 자청하도록 하라. 30일을 넘기지는 마라.”그 아전이 떠난 뒤에 대사는 주장자를 들고 나한당羅漢堂에 들어가 나한들의 머리를 차례로 세 번씩 때리고 말하였다.“저 아전 아무개의 일을 잘 도와주어라.”이튿날 밤에 그 아전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 꾸짖었다.“그대는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와서 말할 것이지, 어쩌자고 괜히 우리 스승님께 아뢰어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 그대를 봐서는 일을 봐주지 않았으면 딱 좋겠지만, 스승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번만은 너의 일을 보아 줄 것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그 아전은 뭔가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자청해서 옥리가 되었다. 그러자 옥송獄訟이 계속 일어나서 죄수가 감옥에 가득하였으므로, 30일 안에 그 빚졌던 재물을 다 갚고는 그 자리를 남에게 물려주었다.얼마 안 되어 새로 온 아전은 뇌물을 먹은 죄로 구속되었다고 한다.대사가 일찍이 혼자 길을 가다가 한 사미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요수천樂水川 가에 함께 이르러 그 사미가 말하였다.“소승이 먼저 건너서 물이 얕은지 깊은지 알아보겠습니다.”사미는 발을 벗고는 동동걸음으로 물을 건너갔다. 대사도 그를 따라 옷도 벗지 않고 건너려다가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사미는 얼른 와서 대사를 부축해 내었다. 대사는 비로소 나한의 놀림을 받은 줄 알고 게송 한 수를 읊었다.
寄汝靈山十六愚 영산靈山의 어리석은 너희 16인에게 부친다
樂村齋飯幾時休 요수촌樂水村의 잿밥 먹기를 몇 때나 그치려나
神道妙用雖難及 그 신통과 묘용妙用은 비록 미치기 어렵지만
大道應問老比丘 대도大道는 이 늙은 비구에게 물어야 하리라
한번은 대사가 길을 가다가 -
010_1019_a_01L楞三昧。不知夜之已經也。每夜。自東燈
010_1019_a_02L光來照。尋得。乃淸凉山木鳧庵全州
地佛
010_1019_a_03L燈也。師遂移錫。改爲遠燈庵。十六羅
010_1019_a_04L漢。常與師侍奉。燈光之遠照於1)日 [88] 明
010_1019_a_05L者。府有一吏。素與師善。欠逋數百。而
010_1019_a_06L將欲逃之。來辭於師。師曰。負逋逃走。豈
010_1019_a_07L男兒事。但歸家。判數斗米。却來。供養
010_1019_a_08L羅漢。有好道理。吏去。依敎而來。供養
010_1019_a_09L羅漢。謂吏曰。府有闕窠麽。曰。獄刑吏
010_1019_a_10L闕。而甚薄無聊。師曰。勿謂無聊。亟徃自
010_1019_a_11L請爲之。而幸無過三十日。吏去。師入
010_1019_a_12L羅漢堂。以杖。次第打羅漢頭曰。某吏事
010_1019_a_13L善助之。羅漢現夢於吏曰。儞有所求。
010_1019_a_14L就我言之。何以枉扣於師傅。致我苦耶。
010_1019_a_15L以汝則不顧。師命不可不遵。故視汝事
010_1019_a_16L而後無如此。吏知有助。請爲獄吏。旣
010_1019_a_17L已獄訟繁興。囚徒盈2)陛。 [89] 三十日內。刷
010_1019_a_18L了所3)連。 [90] 讓任他吏。未幾新吏。拘於徵
010_1019_a_19L賂之罪。師獨行途中。遇一沙彌。同至
010_1019_a_20L樂水川邊。啓曰。小僧先渡。測其淺深。
010_1019_a_21L遂輕輕而涉。師將厲之。身淹水中。沙
010_1019_a_22L彌。徑來扶出。始知羅漢見戱。一偈記之
010_1019_a_23L曰。寄汝靈山十六愚。樂村齋飯幾時休。
010_1019_a_24L神4)道 [91] 妙用雖難及。大道應5)問 [92] 老比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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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9_b_01L천렵을 하는 여러 소년들이 시냇가에서 생선국을 끊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사는 끓는 솥을 내려다보면서 탄식하였다.“이 좋은 고기들이 죄 없이 확탕鑊湯의 고통을 받고 있구나.”그러자 한 소년이 장난삼아 물었다.“스님도 이 생선국이 드시고 싶습니까?”대사가 말하였다.“나도 즐겨 먹지.”소년들이 말하였다.“그러면 이 한 사라沙鑼를 몽땅 다 드릴 터이니 스님 마음대로 실컷 드십시오.”대사는 구리쇠 사라를 들고 입 속으로 몽땅 쏟아 부어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 버렸다. 그러자 소년들이 말하였다.“부처님의 계법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스님이라 하겠습니까?”대사가 말하였다.“물고기를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 물고기들을 다 살려 주려고 하는 것이다.”그러고는 바로 옷을 벗고 물을 등지고 앉아 설사를 하였다. 그러자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항문에서 쏟아져 나와 수면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놀았다. 대사는 그 물고기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이 잘난 물고기들아, 지금부터는 저 강이나 바다 멀리 나가서 놀고 부디 확탕의 고통을 받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여라.”그러자 그 소년들은 탄복하고 모두 그물을 걷어가지고 돌아갔다.언젠가 대사가 시자를 불러 말하였다.“이 소금을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가져가거라.”시자가 여쭈었다.“가져다가 누구에게 줄까요?”대사는 말하였다.“그곳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라.”시자는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내려갔다.그곳에는 사냥꾼 몇 사람이 막 노루 고기를 저며 놓고는, 소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먹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시자가 소금을 그들 앞에 내려놓자 그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말하였다.“이것은 틀림없이 저 옥玉 노장님이 우리가 배를 곯고 있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보내 주신 것이리라. 사람을 살리시는 부처님이 골짝 골짝마다 계신다고 하더니,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구나.”어느 날 대사가 물을 찾았다. 시자가 더운 뜨물을 갖다 드리자 대사는 그것을 받아 두어 모금 입에 머금어 동쪽을 향해 뿜어냈다.뒤에 들으니 그때에 합천 해인사에 화재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온 절이 다 탈 지경이 되었을 때에 갑자기 한 줄기 소나기가 서쪽에서 몰려와 쏟아부으며 그 불을 껐다고 한다. 그 빗방울은 희뿌옇고 끈적끈적하였으며 어디에 묻으면 얼룩이 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인사에 화재가 있었던 날이 바로 대사가 뜨물을 뿜은 날이라고 한다.대사가 일찍이 상운암上雲庵에 머물고 계셨다. 그 제자(神足)들이 양식을 구하러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남짓 만에 암자로 돌아왔더니, 대사의 얼굴에는 거미가 줄을 쳤고 무릎 밑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제자들이 먼지를 쓸고 거미줄을 걷은 다음에 다녀왔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대사가 말하였다.“너희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대사가 일찍이 대원사大元寺전주에 있음.에 계실 때였다. 대사는 늘 공양 때마다 오직 밀기울만을 물에 타서 먹곤 하였다. 대중 스님들은 밀기울이 너무 빡빡하다고 싫어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그 밀기울을 더럽게까지 여겼다.그런데 조금 있다가 어떤 스님이 밥 발우를 가지고 허공에서 내려와 대사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대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
010_1019_b_01L師値6)泉少年川獵。烹鮮于溪邊。師俯
010_1019_b_02L視沸鼎曰。好箇魚子。無辜而受鑊湯之
010_1019_b_03L苦。一少年曰。師欲沾魚羹麽。師曰。善
010_1019_b_04L喫。7)小 [93] 年曰。這一沙鐤盡喫。師擡銅沙
010_1019_b_05L鑼。灌口頓8)呼。 [94] 衆9)人。 [95] 佛戒殺生。豈僧
010_1019_b_06L耶。師曰。殺則非我。活之在我。解衣背
010_1019_b_07L水瀉之。無數銀鱗。從後門出。活躍水
010_1019_b_08L面。師曰。好個魚子。遠游江海。勿再罹
010_1019_b_09L鑊湯之苦。衆人解綱而去。師喚侍者。
010_1019_b_10L送鹽于寺南婦谷中。侍者曰。送與阿誰。
010_1019_b_11L曰去當自知。侍者持鹽下谷。獵士數人。
010_1019_b_12L方膾獐肉。思鹽。不飮而坐。致鹽于前。
010_1019_b_13L皆喜。此必玉老。憐我之飢。活人之佛。
010_1019_b_14L谷谷有之者。正謂此也。師索水。侍者
010_1019_b_15L進溫泔水。接之。含數口。向東方噀之。
010_1019_b_16L後聞陜川海印寺失火。將至沒燒。一陣
010_1019_b_17L驟雨。10)西 [96] 而至。注滅之。其雨滴白濁。
010_1019_b_18L粘物成瘢。其寺失火之日。乃師噴水之
010_1019_b_19L時也。師住上雲菴。神足輩。以乞粮遠出。
010_1019_b_20L月餘乃返。師面上蛛綱。膝間塵堆。爲
010_1019_b_21L之掃塵掇絲。通名拜謁。師曰。儞還一何
010_1019_b_22L速耶。師住大元寺全州
地 每齋。惟以11)麥 [97] 和
010_1019_b_23L水而食。諸僧厭薄之。又穢汚其麩。俄
010_1019_b_24L有一僧。持飯盂。自空而來。進於師。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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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9_c_01L“밥만 보내면 될 것을 하필 직접 이렇게 왔는가?”그 스님이 말하였다.“소승은 현재 대둔사大芚寺해남에 있음.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막 밥을 먹으려 하는데 발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밥그릇을 꽉 붙들었는데, 무슨 신력神力 같은 것에 끌려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대사가 비로소 그 공양을 청한 까닭을 말하였다. 그 스님은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올릴 것을 자청하였다. 그 스님이 대사에게 절을 한 다음 하직하고 길을 나서자 삽시간에 본래의 절로 돌아갔다.그로부터 4년 동안 밥 발우가 계속 오고 가고 하였다.그때 대사는 대중 스님에게 말하였다.“너희 절은 장차 7대 동안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다.”그러더니 과연 대원사는 지금까지 가난하다고 한다.천계天啓(明 熹宗의 연호) 임술년(광해군 14, 1622)에 완부完府(완주군)의 송광사松廣寺53)와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54)에서 동시에 불상(塑像)을 조성하려고 하여 양쪽에서 한꺼번에 대사를 증명법사(證師)로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어느 쪽에도 가지 않고 각각 물건 하나씩을 주면서 증명단證明壇에 두어 운관運觀을 표表하는 데에 쓰게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훈계하였다.“그저 이렇게만 하면 두 절의 존상尊像은 반드시 다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뒤로도 부디 경솔하게 개금改金을 하지 말라.”또 경계하며 말하였다.“더구나 무량사의 화주 스님은 점안點眼을 하기 전에는 절대 산문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하여라.”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보내 증명단에 세워 두게 하였는데 밤낮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고, 무량사에는 염주를 보내 증명석證明席에 올려 두게 하였는데 염주가 항상 딸깍딸깍 저절로 돌아갔다.홍산鴻山 사람 가운데 3천 금金을 내어 삼존불의 불상을 조성하는 비용을 혼자서 다 감당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와서 참례하겠다고 말만 하면서 기한이 다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화주 스님은 그를 기다리면서 저도 모르게 산문 밖에까지 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갑사甲士55)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대사는 일찍이 이런 게송을 읊었다.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이며 산은 베개라네
月燭雲屛海作樽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며 바다는 술통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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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19_c_01L曰。送飯則可。何必親來。僧言小衲。見住
010_1019_c_02L大芚海
南 方食。飯盂自動。恠而執之。爲
010_1019_c_03L神力推引。到此。師方說請齋之由。僧
010_1019_c_04L大異之。請願朝夕供養。拜辭而出。不
010_1019_c_05L霎時。還其寺。自是。飯徃盂來者。四年。
010_1019_c_06L師語諸僧曰。汝寺。當遭七世之厄。果至
010_1019_c_07L今貧窶云。天啓壬戌。完府松廣。鴻山
010_1019_c_08L無量。同時塑像。並請證師。皆不徃。各
010_1019_c_09L授一物。置證壇。以12)▼(木+(旌-方)) [98] 運觀之用。曰必
010_1019_c_10L當善成。後勿率爾改塗。且戒曰。量寺
010_1019_c_11L化僧。點眼前。愼勿出13)沙 [99] 門外。松寺送
010_1019_c_12L柱杖。卓證壇。日夜孤立不倚。量寺送
010_1019_c_13L數珠。安證席。珠常呱呱自轉矣。鴻山
010_1019_c_14L以三千金。獨當三尊之塑費者。常言
010_1019_c_15L來叅而過期不來。化僧。因其14)侯 [100] 望。不
010_1019_c_16L覺出於門外。忽被甲士打之而死。師
010_1019_c_17L吟卽曰。天衾地席山爲枕。月燭雲屛海
010_1019_c_18L「日」甲本正誤表作「月」。「陛」甲本正誤表
010_1019_c_19L作「狴」。「連」疑「逋」{編}。「道」甲本正誤表
010_1019_c_20L作「通」。「問」甲本正誤表作「詢」。「泉」甲本
010_1019_c_21L正誤表作「衆」。「小」甲本正誤表作「少」。
010_1019_c_22L「呼」甲本正誤表作「吸」。「人」下甲本正誤表
010_1019_c_23L有「曰」。「西」上甲本正誤表有「自」。「麥」甲
010_1019_c_24L本正誤表作「麩」。「▼(木+(旌-方))」甲本正誤表作「旌」。
010_1019_c_25L「沙」甲本正誤表作「寺」。「侯」甲本正誤表作
010_1019_c_26L「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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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0_a_01L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해 벌떡 일어나 춤을 추노라면
却嫌長袖掛崑崙 기다란 소매에 곤륜산崑崙山56)이 걸려 귀찮다네
어느 날 대사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지팡이를 끌고 산문을 나갔다. 시냇가를 따라 거닐다가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 서서 손으로 물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하였다.“저것이 바로 석가부처님이니라.”시자가 말하였다.“저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대사가 말하였다.“너는 단지 가짜 스님만 알 뿐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그러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나는 이제 떠나련다. 그대들은 무엇이든 물어보라.”제자들이 물었다.“화상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누가 종승宗乘을 이어받습니까?”대사는 대답하였다.“종승이 어디에 있다는 거냐?”제자들은 재삼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하는 수 없어 대답하였다.“명리승名利僧이지만 우선은 정靜 장로에게 부촉한다.”그러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나시니, 세속 나이 72세였고 법랍은 52년이었다. 그때가 바로 계유년(인조 11, 1633) 10월 28일이었다.봉서사鳳棲寺에 스님의 영정을 모신 영상각影像閣이 있고, 또 어록을 새긴 판목板木이 있다. 초의 의순草衣意恂과 제산 운고霽山雲▼(自/本) 스님이 교정하여 간행하였다.편양종사전鞭羊宗師傳스님의 법명은 언기彦機이고 호는 편양鞭羊이며, 속성은 장張씨이고 죽주竹州(경기도 안성군 죽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만력萬曆(明 神宗의 연호) 9년 신사(선조 14, 1581) 7월에 태어났다. 어려서 현빈玄賔(서산 대사의 제자 印英)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장년이 되어 서산 대사께 귀의하여 그의 심법心法을 모두 전수받았다. 남쪽으로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러 선노禪老들을 참배하고 그들의 학문으로 자신을 채웠다. 항상 풍악산楓嶽山에 머물렀고, 혹은 묘향산에 주석하기도 하면서 법을 강하고 선을 증득하였다.갑오년(효종 5, 1654)57) 5월 10일에 적멸을 보이시니, 세속 나이는 74세이고 법랍은 53년이었다.편양의 문도로는 풍담楓潭의 계열이 가장 번창했으며, 법을 이은 제자 (拈香)도 30여 명이나 되었다.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비석이 있는데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58)이 지은 것이다. -
010_1020_a_01L作樽。大醉居然仍起舞。却嫌長袖掛崑
010_1020_a_02L崙。一日沐浴。淨髮更衣。曳杖出門。沿
010_1020_a_03L溪而行。植杖臨流而立。以手指水中己
010_1020_a_04L影。而示侍者曰。這箇是釋迦1)佛 [101] 子也。
010_1020_a_05L侍者曰。是和尙影。師曰。汝但知和尙假。
010_1020_a_06L不識釋迦眞。遂入室而坐。召弟子曰。
010_1020_a_07L吾將逝矣。恣汝所問。弟子曰。和尙百
010_1020_a_08L歲後。宗乘嗣誰。師曰。何宗乘之有。再乞
010_1020_a_09L垂示。師不得已而曰。名利僧也。且屬
010_1020_a_10L靜老長。遂怡然順寂。世壽七十二。法
010_1020_a_11L臘五十二。癸酉十月二十八日。鳳棲寺。
010_1020_a_12L有影像閣。又有語錄板。草衣意恂霽
010_1020_a_13L山雲𦤎。校正刊行。
010_1020_a_14L
010_1020_a_15L鞭羊宗師傳
010_1020_a_16L師名彥機。號鞭羊。姓張氏。竹州人。萬
010_1020_a_17L曆九年辛巳七月生。幼從玄賔。受具。
010_1020_a_18L壯歸西山。盡傳心法。南遊徧叅諸禪老。
010_1020_a_19L以充其學。常住楓岳。或住妙香。講法
010_1020_a_20L證禪。甲午五月十日。示寂。世壽七十四。
010_1020_a_21L法臘五十三。鞭羊之門。楓潭最昌。拈
010_1020_a_22L香者。凡三十餘人。金剛山白華庵有碑。
010_1020_a_23L白洲李明漢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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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0_b_01L소요종사전逍遙宗師傳스님의 법명은 태능太能이고 호는 소요逍遙이며, 속성은 오吳씨이고 담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가정嘉靖(明 世宗의 연호) 41년 임술(조선 명종 17, 1562) 9월에 태어났다.진眞 스님에 의지하여 백양사白羊寺에서 머리를 깎고, 황벽黃檗에게서 불법의 오묘한 의미를 터득했으며, 억조億兆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졌다.남쪽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휴浮休에게서 대장경을 배웠으며, 서산 대사를 다시 찾아가 본래의 근원은 청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기축년(인조 27, 1649) 11월 21일에 열반에 드니, 그의 세속 나이는 88세이고 선랍禪臘은 73년이었다.그에게서 선종禪宗을 전수받은 제자는 침굉 현변枕肱懸辯이고, 교종敎宗을 전수받은 제자는 해운 경열海運敬悅이며, 염향拈香하여 법을 이은 제자만도 30여 명이나 된다. 그의 탑비塔碑는 연대蓮臺(지금의 김제 금산)에 있는데 그 비명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59)이 지었고, 부도는 보개산 심원사㴱源寺와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두륜산 대둔사大芚寺에 있다.풍담종사전楓潭宗師傳스님의 법명은 의심義諶이고 호는 풍담楓潭이며, 속성은 유柳씨이고 통진通津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정鄭씨이다.어머니 정씨가 일찍이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을 하였으며, 만력萬曆 20년 임진(선조 25, 1592)에 아이를 낳았다.스님은 16세에 출가하여 성순性淳 대사에게서 머리를 깎았고, 원철圓徹 스님을 참알參謁하고 계戒를 받았으며, 편양鞭羊 대사를 알현하고 그의 법을 이었다. 편양 대사는 바로 청허淸虛 대사의 법을 이었다.대둔사에서 큰 법회가 열렸는데, 그 법회에 모인 대중들이 무려 250명이나 되었다.강희康熙 4년 을사(현종 6, 1665)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서 세상을 떠나려 할 무렵에 게송 한 편을 읊었다.
奇恠這靈物 신기하여라. 이 영물靈物이
臨終尤快話 임종에 더욱 상쾌하다니
死生無變容 나고 죽음에 변한 모습 없으니
皎皎秋天月 가을 하늘에 달만 밝게 비추네
그러고는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니, 세속의 나이는 75세이고 법랍은 58년이다. 돌아가시던 날 안색이 평소와 같았다. 그의 제자들이 -
010_1020_b_01L逍遙宗師傳
010_1020_b_02L師名2)大 [102] )能。號逍遙。姓吳氏。潭陽人。
010_1020_b_03L生於嘉靖四十一年壬戌九月。依眞師
010_1020_b_04L於白羊祝髮。服玄旨於黃檗。億兆知名。
010_1020_b_05L歷叅南國。受大藏於浮休。再訪西山。
010_1020_b_06L悟本源之淸淨。己丑十一月二十一日。
010_1020_b_07L示寂。行年九旬小二。禪臘七袠加三。
010_1020_b_08L得其禪宗者曰。枕肱懸辯。傳其敎宗者
010_1020_b_09L曰。海運敬悅。拈香嗣法者。凡三十餘
010_1020_b_10L人。碑在蓮臺。白軒李景奭撰。浮屠在
010_1020_b_11L寶盖山㴱源寺。智異山燕谷寺。頭輪山
010_1020_b_12L大芚寺。
010_1020_b_13L
010_1020_b_14L楓潭宗師傳
010_1020_b_15L師法名義諶。號曰楓潭。俗姓柳氏。通
010_1020_b_16L津人。母曰鄭。鄭甞夢含珠而妊。生師
010_1020_b_17L於萬曆二十年壬辰。十六出家。從性淳
010_1020_b_18L師而落髮。叅圓徹師而受戒。謁鞭羊師
010_1020_b_19L而得法。鞭羊。即淸虛之法嗣。設大會於
010_1020_b_20L大芚。衆二百五十人。康熈四年乙巳。示
010_1020_b_21L寂于金剛山正陽寺。臨化。吟一偈曰。奇
010_1020_b_22L恠這靈物。臨終尤快3)話。 [103] 死生無變容。
010_1020_b_23L皎皎秋天月。怡然而化。行年七十五。
010_1020_b_24L法臘五十八。4)化 [104] 之日。顏色如常。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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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0_c_01L영골靈骨을 받들어 은색銀色 사리 5과顆를 얻어 부도를 건립하고 탑비塔碑를 세웠다.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60)이 금강산 백화암白華庵에 세운 비문을 지었고,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백화암에 세운 편양당의 비문을 지었으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백화암에 세운 서산 대사의 비문을 지었다. 이씨 3대가 서산 3대의 비문을 지었으니 좋은 인연의 소중함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편양의 문인 준기俊機와 도안道安 등이 또 남쪽 지방을 유람하면서 주석하였던 곳에 그윽한 광명을 천발闡發하여 스님의 생애와 업적이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여 대둔사에 탑비와 부도를 세웠다. 비문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김우형金宇亨61)이 지었다. 문인은 47명이다.해운선사전海運禪師傳다산茶山62) 옹翁이 말하였다.“해운海運 선사가 세상을 떠난 지 지금 이미 169년이나 지났다. 그의 성씨와 고향 마을에 대해서는 그 어디에서도 상고해 볼 만한 데가 없다. 다만 연파 혜장蓮坡惠藏(1772~1811)이 일찍이 스님의 문중에서 옛 기록을 본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청련 원철靑蓮圓徹 대사가 대둔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을 적에 소요 태능逍遙太能 또한 대둔사에 왔다. 해운 경열海運敬悅은 이 해에 태능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으며, 67세에 입적하였다.’”지금 상고해 보니 청련 대사가 법회를 연 해는 곧 만력萬曆 36년 정미(선조 40, 1607)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경열은 만력 8년 경진(선조 13, 1580)에 태어나 숭정崇禎 갑신년(1644)에서 3년째 되는 병술년(인조 24, 1646)에 입적했다.그가 태능 대사에게서 의발을 전해 받았을 때는 소요 대사의 나이 46세 때였고, 경열이 입적한 해는 소요 대사의 나이 85세 때였다. -
010_1020_c_01L等奉靈骨。獲舍利五枚。如銀色者。建
010_1020_c_02L浮屠豎碑。靜觀齋李端相作金剛山白
010_1020_c_03L華庵碑。白洲李明漢作白華庵鞭羊碑。
010_1020_c_04L月沙李廷龜作白華菴西山碑。李氏三
010_1020_c_05L代作西山三代碑。緣誼之重。可想也。
010_1020_c_06L門人俊機道安等。又於南維住錫之處。
010_1020_c_07L闡發幽光 5)衣 [105] 圖不朽。立碑浮屠。於大
010_1020_c_08L芚寺。碑。藝文舘直提學金宇亨撰。門人
010_1020_c_09L四十七。
010_1020_c_10L
010_1020_c_11L海運禪師傳
010_1020_c_12L茶山翁曰。海運禪師之沒。今已百六十
010_1020_c_13L九年矣。其姓氏鄕里。皆無可考。惟蓮
010_1020_c_14L坡惠藏。嘗見師門古記曰。靑蓮圓徹大
010_1020_c_15L師。大芚大會之時。逍遙太能亦至。芚
010_1020_c_16L寺。海運敬悅。以是年。受衣鉢於太能。
010_1020_c_17L時年二十八。至六十七而寂。今考靑蓮
010_1020_c_18L大會之年。乃萬曆三十六年丁未之冬
010_1020_c_19L也。然則敬悅。6)而 [106] 萬曆八年庚辰生。崇
010_1020_c_20L禎甲申之越三年丙戌寂。其受衣也。逍
010_1020_c_21L遙之年四十六。其歸寂也。逍遙之年八
010_1020_c_22L「佛」下甲本正誤表有「影」。「大」甲本正誤
010_1020_c_23L表作「太」。「話」甲本正誤表作「活」。「化」
010_1020_c_24L上甲本正誤表有「火」。「衣」甲本正誤表作
010_1020_c_25L「永」。「而」甲本正誤表作「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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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1_a_01L소요 대사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경열이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이 서로 관계를 가짐이 마치 ‘상대의 훌륭한 점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한다(見賢思齊)’63)는 가르침과 같았으니 그의 소소한 기록은 비록 일실되고 없으나 그것이 어찌 슬픈 일이겠는가?소요 대사의 문도들이 수백 명이나 되지만, 오직 경열만이 그의 종통宗通을 이었으니 그런 까닭으로 그의 호를 해운海運이라고 한 듯하다. 해운이란 붕鵬새가 남쪽 바다로 옮겨 간다는 의미이고, 붕새가 남쪽으로 옮겨 간다는 의미는 유유히 소요逍遙함을 뜻하니 소요 대사의 전법傳法이 곧 해운이 아니겠는가?64) 그런 까닭에 소요 스님이 해운 스님에게 마음을 전하고 법을 전하면서 읊은 게송은 이러했다.
飛星爆竹機鋒峻 우뚝한 기봉機鋒은 흐르는 별이요 폭죽爆竹이며
裂石崩崖氣象高 높은 기상은 돌이 갈라지고 벼랑이 무너지는 듯하네
對人殺活如王劒 사람을 대함에 죽이고 살림은 군왕의 칼 같고
凛凛威風滿五湖 늠름한 위풍威風은 오호五湖에 가득하네
해운에 대하여 또 한 수의 시를 읊으니 이러했다.
金鎚影裡裂虛空 쇠방망이 그림자에 허공이 찢어지니
驚得泥牛過海東 놀란 진흙소가 바다 동쪽 지나가네
珊瑚明月冷相照 산호珊瑚와 밝은 달이 서로 냉랭하게 비추고
古今乾坤一笑中 고금에 천지는 한바탕 웃음 속에 있네
염화미소拈花微笑의 소식이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경열이 시를 지어 읊으면 소요 대사가 반드시 화답하곤 하였다. 그 시는 이러하다.
胷中法海幽難測 가슴속 법의 바다 너무 깊어 헤아릴 길 없고
篇內玄樞遠莫酬 시편詩篇의 현묘한 이치 너무 멀어 갚을 수 없네
또 이렇게 읊기도 했다.
禪綱敎骨誰能敵 선의 강요綱要와 교의 뼈 그 누가 대적하랴
華月夷風孰敢酬 중국의 달, 동이東夷의 바람 아무도 짝할 수 없네
또 이렇게 읊었다.
水泡大地遺塵起 물거품 같은 대지에 유진遺塵이 일어나고
春夢空身妄識興 봄꿈 같은 부질없는 몸에 망식妄識만 이는구나
또 이렇게 읊었다.
威音那畔更那畔 위음불威音佛 저쪽 가시 저쪽 변두리에
滿目烟光入水皆 눈에 가득한 아름다운 광경 물속에 잠겼어라
生死涅槃迷夢隔 생사와 열반이 미몽迷夢에 막혀 있고
劣形殊相病眸乘 잘난 모습 못난 모습 병든 눈의 소치라네
이 시의 전편은 『소요집逍遙集』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시로써 해운의 인물됨을 엿볼 수 있으리라.해운의 법을 이은 제자들은 취여 삼우醉如三愚이고 삼우의 법을 이은 제자는 화악 문신華岳文信이다. 문신의 법을 이은 제자는 설봉 회정雪峰懷淨이고 회정의 법을 이은 제자는 송파 각훤松坡覺暄이며, 각훤의 법을 이은 제자는 정암 즉원晶巖即圓이고 즉원의 법을 이은 제자는 연파 혜장蓮坡惠藏이다. 아! 종맥宗脈이 이러하다.명銘은 다음과 같다.
大翼南徙 붕새의 큰 날개 남쪽 바다 옮겨 갈 때
水擊三千 파도는 삼천리를 치고 난다
匪運昌遊 해운이 아니면 뉘라서 저리 놀까?
是後是傳 이 뒤로도 그의 법 전해지되
星飛竹爆 흐르는 별, 폭죽처럼 터져서
光燭長天 드넓은 하늘에 광명이 찬란하네
六燃其燈 진리의 등불 여섯 번 켜지더니
遂至晶蓮 마침내 정암과 연파에 이르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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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1_a_01L十五。1)遙 [107] 遙八十八而終。則敬悅其先
010_1021_a_02L逝矣。其師弟二人。相與之際。猶如見
010_1021_a_03L賢。其小事雖逸。奚傷焉。逍遙門徒。數
010_1021_a_04L百餘人。惟敬悅。獨得其宗。故號之曰。海
010_1021_a_05L運。海運者。鵬2)從 [108] 也。鵬3)徒 [109] 者。逍遙也。
010_1021_a_06L逍遙之傳。非即海運乎。故其傳心傳法
010_1021_a_07L之偈曰。飛星爆竹機鷄峻。裂石崩崖氣
010_1021_a_08L象高。對人殺活如王劒。凛凛威風滿五
010_1021_a_09L湖。又曰。金鎚影裡裂虛空。驚得泥牛過
010_1021_a_10L海東。珊瑚明月冷相照。古今乾坤一笑。
010_1021_a_11L中。拈花微笑。顧不在是乎。敬悅有詩。
010_1021_a_12L逍遙必和之。其詩曰。胷中法海幽難測。
010_1021_a_13L篇內玄樞遠莫酬。又曰。禪綱敎骨誰能
010_1021_a_14L敵。華月夷風孰敢酬。又曰。水泡大地遺
010_1021_a_15L塵起。春夢空身妄識興。又曰。威音那畔
010_1021_a_16L更那畔。滿目烟光4)入水皆。 [110] 生死涅槃
010_1021_a_17L迷夢隔。劣形殊相病眸5)乘。 [111] 其全篇。皆
010_1021_a_18L載逍遙集中。斯可以徵海運也。海運有
010_1021_a_19L法嗣曰。醉如三愚。三愚之嗣曰。華岳文
010_1021_a_20L信。信之嗣曰。雪峰懷淨。淨之嗣曰。松坡
010_1021_a_21L覺暄。暄之嗣曰。晶巖即圓。圓之嗣曰。蓮
010_1021_a_22L坡惠藏。噫。宗在是矣。銘曰。大翼南徙。
010_1021_a_23L水擊三千。匪運昌遊。是後是傳。星飛
010_1021_a_24L竹爆。光燭長天。六燃其燈。遂至晶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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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1_b_01L苟求眞諦 진실로 진리를 찾고자 하면
視彼梓鐫 문집에 새긴 글을 보아라
문인은 17명이나 되었는데, 그중에 취여醉如가 그 우두머리이다. 정공丁公(정약용)이 추기追記하여 논論하였다.취여종사전醉如宗師傳스님의 법명은 삼우三愚이고 호는 취여醉如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남 강진군 보암방寶岩坊 구정자九亭子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만덕산 백련사白蓮社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여러 선사들을 두루 참알參謁하고 내전內典(불경)을 널리 섭렵하였다. 해운 경열의 조실에서 향을 뽑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니 경열은 소요 태능의 제자이다.취여는 얼굴이 붉고 윤기가 흘렀기 때문에 해운이 ‘술에 취한 듯한 사람(醉如子)’이라는 호를 붙여 주었으니, 장난삼아 그랬던 것이다. 그를 살펴보면 그는 담론談論을 잘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심취하게 했다고 한다.일찍이 대둔사大芚寺(대흥사) 상원루上院樓에서 화엄의 종지를 연설하였는데 강론을 듣는 이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때 어떤 스님이 밭을 가는 기구를 지고 누각 아래에서 쉬다가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닫고, 지고 있던 농기구를 벗어 던지고 당堂에 올라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며 울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다 말하여 참회하고 미묘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은 그를 쓰다듬으면서 가르쳐 주고 마침내 의발을 전해 주었으니, 이분이 바로 화악 문신華岳文信이다. 옛날 육상산陸象山65)이 아호鵝湖 화상의 강석講席에서 의義와 이利 두 글자에 대하여 강론하자 사방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또 육조六祖 대사 혜능慧能이 본래는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다가 마침내 5조의 의발을 전해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이 일도 충분히 저들의 아름다웠던 일과 비교할 만하다.취여 대사는 천계天啓 2년 임술(광해군 14, 1622)에 태어나 강희康熙 23년 갑자(숙종 10, 1684) 6월 5일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63세였다. 진영은 둘이 있으니 하나는 백련사에, 하나는 대둔사에 있다.비명은 이러하다.
世人皆醉師亦如 세상 사람 다 취하니 스님도 취했구나
如而不醉愚不愚 취한 듯 취한 게 아니요 어리석은 듯 어리석지 않네
龍穴淸風猶有餘 용의 굴에 맑은 기풍 여유가 있고
流涕之席稍鵝湖 눈물 흘린 법석法席은 아호 스님 같아라
舂而受鉢行者盧 방아 찧다 발우 받은 이는 노盧 행자인데
醉之旣醒邈雲車 취한 술 깨어나니 구름 수레 아득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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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1_b_01L苟求眞諦。視彼梓鐫。門人十七人。醉
010_1021_b_02L如居首。丁公追記而論之。
010_1021_b_03L
010_1021_b_04L醉如宗師傳
010_1021_b_05L師名三愚。號醉如。姓鄭氏。康津寶岩
010_1021_b_06L坊九亭子人也。幼年出家。落髮於萬德
010_1021_b_07L山白蓮社。歷叅諸師。淹過內典。拈香
010_1021_b_08L於海運敬悅之室。敬悅。逍遙太能之親
010_1021_b_09L徒。師也。顏如渥丹。故海運錫號曰。醉如
010_1021_b_10L子。盖戱之也。顧善談論。聽者心醉。甞
010_1021_b_11L於大芚之上院樓。演說華嚴宗旨。聽講
010_1021_b_12L者。數百人。有一僧。負田器。易樓板下。
010_1021_b_13L窃聽一二句。立地頓悟。捨擔昇堂。泣
010_1021_b_14L下如雨。陳其罪悔。請受妙詮。師撫而
010_1021_b_15L誨之。卒傳衣鉢。是爲華岳文信。昔陸
010_1021_b_16L象山。於鵝湖講席。講義利二字。四座
010_1021_b_17L垂泣。六祖慧能。本於槽廠下舂米。6)六
010_1021_b_18L十 [112] 授五祖衣鉢。斯足以匹美也。師生於
010_1021_b_19L天啓二年壬戌。卒於康熙二十三年甲
010_1021_b_20L子。壽六十三。六月五日。示寂。有影二
010_1021_b_21L本。一在白蓮社。一在大芚寺。銘曰。世
010_1021_b_22L人皆醉師亦如。如而7)不醉 [113] 愚不愚。龍
010_1021_b_23L穴淸風猶有餘。流涕之席稍鵝湖。舂而
010_1021_b_24L受鉢行者盧。醉之旣醒邈雲車。璘霦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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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1_c_01L璘霦者石華龜跌 옥 무늬 찬란한 돌 거북 받침 화려하고
乞銘者誰孫騎魚 비명을 청한 사람 법손法孫인 기어旗魚라네
탑명塔銘은 도승지都承旨 한치응韓致應66)이 지었고, 문인은 화악華岳 등 10여 명이다.월저종사전月渚宗師傳스님의 법명은 도안道安이고 호는 월저月渚이며, 속성은 유劉씨이고 기도箕都(평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보인輔仁이고 어머니는 김金씨이다.스님은 숭정崇禎 11년 무인(인조 16, 1638)에 태어났으며, 강희康熙 54년 숙종 을미(숙종 41, 1715)에 세상을 마쳤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78세이고 승랍僧臘은 69년이다.월저는 처음에는 천신天信 장로로부터 계를 받고 풍담楓潭 대사를 참알參謁하여 서산 대사의 비밀한 전법傳法을 모두 터득했다.갑진년(현종 5, 1664)에 묘향산으로 들어가 『화엄경』의 대의를 강구講究하니 세상에서는 그를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렀다. 늘 종풍宗風을 거양擧揚할 때마다 자리 아래 모여드는 청중이 항상 수백 명을 밑돌지 않았으니, 법석法席의 성대함이 근세에는 없는 것이었다.대승의 여러 경전들을 간행하여 불문과 세속에 유포하였다.기축옥사己丑獄死67) 때 사람들의 무고誣告를 당해 옥에 갇혔으나 임금이 본래부터 월저 대사의 명성을 소문으로 들은 터라 특별히 명을 내려 풀어 주게 하였다. 그로부터 더욱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하였으나 그의 명성은 더욱 성대하게 알려져서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그리하여 월저 대사의 문하에 몰려드는 자들이 마치 목마른 사람이 강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아 배불리 마시고 돌아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세상을 떠나던(歸眞) 날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을 밝혀 백 리 바깥까지 그 광경을 보지 못한 이가 없었다. 다비를 하고 나서 사리 3과를 얻어 보현사普賢寺 서쪽 산기슭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또 2과는 기성箕城(평양)과 해남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해남의 석법명釋法明은 월저 대사의 고족高足인데, 빈양濱陽(한양)으로 나를 찾아와 -
010_1021_c_01L石華龜8)跌。 [114] 乞銘者誰孫騎魚。塔銘。都
010_1021_c_02L承旨韓致應撰。門人華岳等十人。
010_1021_c_03L
010_1021_c_04L月渚宗師傳
010_1021_c_05L師名道安。號月渚。姓劉氏。箕都人也。
010_1021_c_06L父輔仁。母金氏。崇禎十一年戊寅生。
010_1021_c_07L康熙五十四年。肅庙乙未終。世壽七十
010_1021_c_08L八。僧臘六十九。初從天信長老。受戒
010_1021_c_09L叅楓潭。盡得西山密傳。甲辰。入妙香山。
010_1021_c_10L講究華嚴大義。世稱華嚴宗主。每擧
010_1021_c_11L9)揭 [115] 宗風。座下聽衆。常不下數百人。法
010_1021_c_12L席之盛。近世所未有也。刊大乘諸經。
010_1021_c_13L印布道俗。己丑之獄。爲人所誣。上素
010_1021_c_14L聞其名。特命釋之。自是。益自韜晦。然
010_1021_c_15L其名殷殷動一國。望門而趨者。如渴赴
010_1021_c_16L河。莫不滿腹而歸。歸眞之夕。祥光燭
010_1021_c_17L天。百里之外。無不見者。茶毘。得舍利
010_1021_c_18L三顆。塔于普賢之西麓。又分藏於箕城
010_1021_c_19L海南。海南釋法明。師之高足也。訪余
010_1021_c_20L「遙」甲本正誤表作「逍」。「從」甲本正誤表
010_1021_c_21L作「徙」。「徒」甲本正誤表作「徙」。「入水
010_1021_c_22L皆」甲本正誤表曰衍字。「乘」甲本正誤表作
010_1021_c_23L「來」。「六十」甲本正誤表作「卒」。「不醉」
010_1021_c_24L甲本正誤表作「醉不」。「跌」甲本正誤表作
010_1021_c_25L「趺」。「揭」甲本正誤表作「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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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2_a_01L대사의 비명을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월저 대사의 전법傳法 제자인 추붕秋鵬이 일찍이 나에게 자기 스승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스승님은 경을 해석할 때 세세한 구절과 항목에 구애받지 않고 그 대지大旨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으며, 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여 크건 작건 빠뜨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이렇게 말했으니 이것이 월저 대사를 대사답게 하는 까닭이라 하겠다.대사의 비문은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68)가 지었다. 일찍이 대둔사에서 연 큰 법회의 『강회록講會錄』에 실려 있는 그의 문인만도 39명이나 되었다. 대사의 비석은 대둔사에 있다.신해·보정합전信海普淨合傳신해信海와 보정普淨은 중국 용검산聳劒山 옥천사玉泉寺의 스님들이다. 그 절에는 운장雲長 관우關羽의 목상木像을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신해와 보정 두 스님이 이를 수호하고 있었다. 또 수복守僕 홍洪씨도 있었는데 관운장 생존 시에 가신家臣이었던 사람의 후손이다.그런데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자 명나라에서는 장군 형개邢介와 도독都督 진린陳璘 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했다. 이때 신종神宗 황제의 꿈에 운장이 나타나 원군과 함께 조선으로 가서 조선을 구하겠다고 자청하자 신종이 이를 허락하고 나서 깨어보니 꿈이었다.신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칙령勅令을 내려 옥천사의 관운장상을 싣고 함께 가도록 했다. 신해와 보정 그리고 종 한 명이 뒤따라 운장의 목상을 같이 모시고 따라갔다. 이들은 고금도古今島 앞바다에 이르러 왜군을 만나 크게 싸워 대승을 거두었으니, 이는 틀림없이 관공關公의 힘이었을 것이다. 목상 관운장을 모시고 함께 온 세 사람이 육지에 내려 사당을 세우고 그 목상을 봉안하여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고는 예전 옥천사에서 했던 대로 수직守直하게 하였다.명나라에서 온 장군들은 바다와 육지로 함께 진군하여 북쪽으로 왕성王城을 향해 나아가면서 난리를 평정하고 군사를 이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무렵은 난리를 겪은 뒤라서 국왕의 교화가 멀리까지 미칠 수 없는 시기였으므로 공을 세운 사람들과 열사烈士들이 은전恩奠을 입지 못하고 있었다.홍씨는 관운장의 사당에 남아 그 곁에서 사당을 지켰고 보정은 정수淨水69)로 들어갔으며, 신해는 만흥산萬興山으로 떠나갔다. 만흥산 기슭에 특별히 한 암자를 짓고 편액을 ‘서전西殿’이라 붙였다. 서전이라고 한 것은 -
010_1022_a_01L濵陽。求爲師銘。師之傳法弟子秋鵬
010_1022_a_02L嘗爲余言。師於解經。不拘細節1)𤦹 [116] 目。
010_1022_a_03L而善括其大旨。其於諸子百家。兼包並
010_1022_a_04L貫。巨細不遺。斯所以爲師也。碑。弘文
010_1022_a_05L舘大提學李德壽撰。曾於大芚寺大會。
010_1022_a_06L載在講會錄。門人三十九人。碑在大芚
010_1022_a_07L寺。
010_1022_a_08L
010_1022_a_09L信海普淨合傳
010_1022_a_10L信海普淨者。上國聳劒山玉泉寺僧也。
010_1022_a_11L其寺有木像關雲長羽廟。二師守護。又
010_1022_a_12L有守僕洪氏。雲長生時。家臣之後孫也。
010_1022_a_13L壬辰倭亂。宣廟使使。求救於上。上使
010_1022_a_14L將軍邢介。都督陳璘等。率軍救之。是
010_1022_a_15L時。神宗皇帝夢雲長。自請同徃救之。
010_1022_a_16L上許之。覺而勅諸將。載與俱救。二師
010_1022_a_17L一僕。亦陪行隨之。到古今島前洋。逢
010_1022_a_18L倭師。大戰勝之。此必關公之力也。關
010_1022_a_19L公及偕來三人。下陸。建祠奉安。以避風
010_1022_a_20L雨。以古玉泉例守直。西來諸將。水陸
010_1022_a_21L並進。北向王城。平亂班師。時喪亂之
010_1022_a_22L後。王化不能遠及。功臣烈士。未蒙恩
010_1022_a_23L奠。洪氏守在祠側。靜 [117] 入淨水。海入萬
010_1022_a_24L興。萬興山麓。別搆一庵。扁曰西殿。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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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2_b_01L서쪽에서 왔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그는 천문과 지리는 물론 인사人事와 귀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술법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에게는 상좌 세 사람이 있었는데, 첫째 명간明侃은 본사에 있었고, 둘째 재정再靜은 나주 쌍계사雙磎寺로 들어갔으며, 셋째 정휘靜輝는 진도 쌍계사로 들어갔다.신해 대사의 먼 법손 중에 지환智還이라는 스님이 있었으니 그의 호는 용악龍岳이며 승려 중에 걸출한 인물이었다. 만흥산의 법풍이 쇠퇴하자 만덕산으로 옮겨 갔으며, 다시 만덕산의 법풍이 쇠미해지자 대둔사로 이주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9세였는데 가을 달처럼 해맑은 기상이 있었다.보정 스님의 후예로는 의준義俊 스님이 있었는데 강진군 칠량면 봉황리에 사는 김씨의 아들이었다. 호를 봉성鳳城이라고 한 이 스님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운장의 사당에 제전祭奠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에 분개하여 한탄한 나머지 현감 이면행李冕倖 공과 함께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노력하였다. 문하에 차윤국車潤國이란 동자가 있었다. 그는 마치 옛날 궐당闕黨 동자처럼 일찍이 벼슬에 올라 운장의 제향을 함께 추진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서 내외內外에 명을 내리니 스승보다 나았다.한번 임금의 윤허(龍墀)를 얻고 나니 삼정승들이 구름처럼 따라주어 편액扁額과 제향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완벽하고 엄숙하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사당을 건립하여 지금까지 천추千秋를 내려오도록 제향이 받들어지고 있다. 의준은 스스로 일을 총괄하는 총섭摠攝이 되어 힘을 다해 사당을 보호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만년에 속가로 귀환하여 생애를 마쳤다고 한다.아! 슬픈 일이로다. 두 스님이 바다를 건너와서 우리나라에서 죽은 몇 가지 일과 두 곳 사찰의 일이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두 스님의 강생降生(탄생)과 유성踰城(출가) 등 그 두 부분의 사실에 대해서는 경계가 너무 멀어 듣지 못하니, 모쪼록 저승에 가서 서로 만나면 알아보아야 하겠다.송파대사전松坡大師傳스님의 법명은 각민覺敏이고 호는 송파松坡이며, 속성은 노盧씨이고 충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서徐씨인데, 어느 날 달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나서 아이를 잉태하여 만력萬曆 24년 병신(선조 29, 1593) 3월 3일에 스님을 낳았다.어려서부터 용모와 행동이 단아하였고 용모가 빛나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하루는 여러 아이들을 따라 길거리에서 놀고 있었는데, -
010_1022_b_01L殿者。表西來之意也。天文地理。人事
010_1022_b_02L鬼神。凡諸術數。無不通達。有上佐三
010_1022_b_03L人。一曰明侃。在本寺。二曰再靜。入羅
010_1022_b_04L州雙溪。三曰靜輝。入珍島雙溪。海之
010_1022_b_05L雲仍。有智還者。號龍岳。僧之傑出者
010_1022_b_06L也。萬興之衰也。移住於萬德。萬德之
010_1022_b_07L衰也。移住於大芚。時年五十九。有秋
010_1022_b_08L月氣像。普淨之後裔。有義俊者。康津
010_1022_b_09L七良鳳凰里金氏子也。號稱鳳城。亦非
010_1022_b_10L凡者也。慨然歎雲長之無恤奠。與縣監
010_1022_b_11L李公冕倖。同心協力。門下。有童子車潤
010_1022_b_12L國者。速成若闕黨之類。同事上京。將
010_1022_b_13L命內外。藍茜沮色。一禀龍墀。三台雲
010_1022_b_14L從。賜額節目。萬分申嚴。不日成建。千
010_1022_b_15L秋行香。自爲揔攝。有力有護。不幸晩
010_1022_b_16L節。歸俗云亡。嗚呼。二師。越海就木之
010_1022_b_17L數事。兩寺事顯。且載降生踰城之兩端。
010_1022_b_18L絕域無聞。會須有九原相逢知。
010_1022_b_19L
010_1022_b_20L松坡大師傳
010_1022_b_21L師名覺敏。號松坡。姓盧氏。忠州人也。
010_1022_b_22L母徐氏夢月入懷。有娠。以萬曆二十四
010_1022_b_23L年。丙申三月三日生。容止端雅。眉宇烱
010_1022_b_24L然。見者奇之。一日隨群兒。戱於街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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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2_c_01L충청도 안찰사按察使가 그를 보고 사랑스러운 생각이 들어 수레에 태워 가지고 함께 돌아와 영내營內에 머물게 하였다. 인하여 그 아이를 서울로 데리고 가서 수년 동안 같이 지냈다. 그 아이는 어느 날 노모를 뵙기 위하여 하직인사를 하고 본가로 돌아왔다.집에 이르러 집 안을 살펴보니 방이라곤 마치 허공에 달려 있는 듯하였고, 어디에 가서 공부를 할 만한 데도 없었다. 그리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드렸다.“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선비(士)·농부(農)·기술자(工)·상인(賈)이 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산에 들어가 도를 닦아서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허락하자 소년은 곧바로 치악산 각림사覺林寺로 들어가 송운松雲(泗溟)의 큰 법제法弟인 한계寒溪 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러고는 다시 가야산으로 들어가 『치문緇門』과 『선요禪要』 등의 기초적인 교학을 배우고, 소요逍遙 대사의 문하에서 하안거를 하였으며, 비슬산琵瑟山 호구虎丘 대사에게 경전을 배웠다.또 벽암 호연碧岩浩然 대사에게서 의문이 나는 대목을 물어 배우고 다시 무주 구천동으로 임성任性 대사를 찾아뵙고 7년 동안 머물면서 유·불·선 삼교의 깊은 이치를 강구하여 이를 약간 권의 책으로 만들고, 그 책의 이름을 『해의解疑』라 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계미년(인조 21, 1643) 봄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송월당松月堂 대사를 배알하고 학업을 마쳤다. 이로 말미암아 도는 더욱 높아졌고 명성 또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송파 대사는 아예 도에 대한 스승이라 자처하지도 않았으며, 더욱더 삼교에 정진하였으므로 당시의 종장宗匠들이 그에게 찾아와 묻지 않는 이가 없었다.이로부터 10여 년간 때로는 소백산에 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용문사龍門寺와 해인사海印寺 등을 찾기도 하였다.을묘년(숙종 1, 1675)에 조용하게 저 세상으로 선화仙化하였다. 스님은 임성 대사의 법제자이고 정관靜觀 대사의 법손이며, 청허淸虛 대사의 증손이다. 문인으로는 동운東雲과 반운伴雲 등 10여 명이 있다.비문은 이월사李月沙의 아들인 현주玄洲의 아들 동리東里 이름은 은상殷相이 지었고, 김우형金宇亨이 글씨를 썼으며, 김만중金萬重70)이 전액篆額을 썼다. 이월사 선생은 청허당의 비명을 짓기도 하였다. -
010_1022_c_01L忠淸按察使。見而愛念。載與俱歸。留
010_1022_c_02L置營中。仍與入京者數年。爲見老母。
010_1022_c_03L辭歸至家。見室如懸碧。出無所徃受業。
010_1022_c_04L乃垂涕而請於母曰。人生斯世。不爲士
010_1022_c_05L農工賈。則寧入山而修道。爲出世人。可
010_1022_c_06L乎。母泣而許之。乃入雉2)樂 [118] 山覺林寺。
010_1022_c_07L祝髮於松雲大法弟寒溪大師。又入伽
010_1022_c_08L倻山。受緇禪等書。結夏於逍遙大師之
010_1022_c_09L門。受經於琵瑟山虎丘大師。又質3)於
010_1022_c_10L疑 [119] 碧岩浩然大師。又謁任性大師于九
010_1022_c_11L4)泉 [120] 千洞。留七年。講究三敎奧旨。錄成
010_1022_c_12L如干。名曰解疑。而傳于世。癸未春。謁
010_1022_c_13L松月堂于金剛山。而卒業焉。由是。道彌
010_1022_c_14L高而名益彰。未甞以師道自處。尤精於
010_1022_c_15L三敎。一時宗匠。莫不就正焉。自此。十
010_1022_c_16L餘年間。或至小白。或至龍門海印等處。
010_1022_c_17L乙卯。泊然而化。師任性之子。靜觀之孫。
010_1022_c_18L淸虛之曾孫也。門人。東雲伴雲等十餘
010_1022_c_19L人。碑。李月沙之子。玄洲之子。東里名
010_1022_c_20L殷相作。金宇亨書。金萬重額。李月沙
010_1022_c_21L作淸虛碑。
010_1022_c_22L「𤦹」甲本正誤表作「▼(瑣-小+巛)」。「樂」甲本正誤表
010_1022_c_23L作「岳」。「於疑」甲本正誤表作「疑於」。
010_1022_c_24L「泉」甲本正誤表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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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3_a_01L
- 1)석옥 청공石屋淸珙 : 속성은 온溫이고, 자는 석옥石屋이다. 1272~1352. 소주蘇州 상숙常熟 사람으로 임제종臨濟宗의 급암 종신及庵宗信의 법을 이었다.
- 2)개당開堂 : 새로 주지가 된 스님이 절에 가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의식.
- 3)권주權鑄 : 고려 말의 관인이자 서예가이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남쪽으로 몽진할 때, 왕을 호종하여 신축호종 2등 공신에 봉해졌다. 전공판서·지신사·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서예에 능하여 ‘신륵사대장각기비’와 ‘태고사원증국사탑비’ 등의 비문이 전한다.
- 4)윤환尹桓 : 고려 시대 재상. 충혜왕부터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섬기고, 재상을 세 번이나 역임하였다. 고향 칠원에 있을 때 큰 기근을 만나자,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 5)이인임李仁任 : 고려 시대 문신. 공민왕 때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의 동녕부를 정벌, 광평부원군에 책봉되었다. 공민왕 사후 우왕을 추대했다. 정권을 잡고 친원親元 정책을 취하여 친명파를 추방하고, 전횡을 일삼았다.
- 6)최영崔瑩 : 고려 시대 명장. 1359년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쳤다. 1361년에도 홍건적이 창궐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를 격퇴하여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후에도 흥왕사의 변, 제주 호목의 난을 진압했으며, 1376년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했다. 1388년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출정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다.
- 7)임견미林堅味 : 고려 시대 무신. 홍건적의 난 때 왕을 호종했고 원나라 동녕부 토벌, 제주 목호의 난, 왜구 침입 때 출전했다.
- 8)이림李琳 : 고려 시대 무신. 덕적·자연의 두 섬과 울주·연산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하였다.
- 9)서견徐甄 : 고려 시대 문신. 조준·정도전을 탄핵하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장류杖流되고 조선 개국 후 풀려나 은거했다. 고려의 망국을 읊은 시조가 전해진다.
- 10)도갑사道甲寺 :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에 있는 절.
- 11)봉산封山 : 나라에 필요한 목재를 조성하기 위하여 벌채를 금지하는 산. 조선 전기에는 금산禁山이라는 명목으로 소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는 임금이나 왕비의 능침陵寢 등지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들어 국가의 부세수취가 달라지면서 국가의 목재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어 보호하는 수종樹種과 금지 범위, 관리 책임자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봉산으로 이름하였다. 금산과 달리 봉산에는 소나무를 보호하는 봉산과 관곽에 쓰이는 황장목을 보호하는 황장봉산黃腸封山, 신주에 쓰이는 밤나무를 보호하기 위한 율목봉산栗木封山, 그리고 배에 못으로 쓰이는 참나무를 보호하는 진목봉산眞木封山 등이 있었다.
- 12)김수온金守溫 : 조선 전기의 학자·문신. 1410~1481.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에서 『치평요람』을 편찬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명황계감』을 국역하는 등 국어 발전에 힘썼다. 불경의 국역과 간행에도 공이 컸다. 문집에 『식우집』이 있다.
- 13)윤소종尹紹宗 : 고려 말·조선 초기 문신.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 동문 밖에 나가 「곽광전」을 바쳐서, 우왕을 폐하고 다른 왕王씨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암시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개국되자 병조전서로서 『고려사』 수찬에 참여하였다.
- 14)스물네 자로 된 법호 :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숭신진승 근수지도 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崇信眞乘勤修至道都大禪師’를 말한다.
- 15)「북산이문北山移文」 : 남북조시대의 공치규孔稚圭(447~501)가 지은 글이다. 당시 주옹周顒이 강소성江蘇省 강녕부康寧府 소재의 종산鍾山(일명 북산)에서 은거하다가 남제南齊 조정에서 출사하여 회계군의 해염海鹽 현령을 지냈다. 해염 현령의 임기를 마치고 도성으로 가는 길에 주옹은 종산에 들르려고 하였다. 공치규는 주옹이 은자의 생활을 버리고 조정에 출사하는 행위를 미워했기에 관청의 통문 형식, 즉 이문移文의 표현을 빌려 주옹이 두 번 다시 종산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
- 16)허종許琮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문무에 모두 뛰어나 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함길도 경차관·북정도원수 등을 지내며 국경의 경비를 튼튼히 하였다. 의학에도 밝아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鄕藥集成方』을 언해하였다.
- 17)원돈교圓頓敎 : 원교圓敎와 돈교頓敎를 아울러 이르는 말. 천태종에서 화엄華嚴의 교법이라고 하는 화법사교化法四敎 가운데 하나인 원교와 화의사교化儀四敎 가운데 하나인 돈교이다.
- 18)양재타방颺在他方 : 자신의 자리를 다른 세계에 던져 버린다는 뜻이다.
- 19)고봉高峯 : 속성은 서徐씨이고 법명은 원묘原妙이다. 1238~1295. 소주蘇州 오강현吳江縣 출생. 15세에 밀인사密印寺로 출가하였으며, 17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41세(1279) 때 천목산天目山 서봉西峰에 들어가, 죽음에 대비하여 사관寺關을 짓고 은거하며 16년 동안을 문턱을 넘지 않고 지내다가 원종元宗 원년 대중에게 설법하고 나서 그 자리에 앉은 채 잠들듯이 적멸에 들었다. 그동안 많은 학도를 가르쳤는데, 승속을 불문하고 계戒를 받은 사람만도 수만 명이 넘었다. 현재 한국 불교의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사용되고 있는 『고봉화상선요高峰和尙禪要』를 지어 참선하는 자의 길잡이가 되게 했다.
- 20)대혜大慧 : 자는 담해曇海, 호는 묘희妙喜·운문雲門, 시호諡號는 보각 선사普覺禪師이다. 선주宣州 출생. 환오 극근圜悟克勤의 법사法嗣이다. 제자로는 사대부인 장구성張九成 등이 있었는데, 제자로 인하여 정쟁政爭에 휘말려 형산衡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正法眼藏』(道元이 지은 것과는 다름)을 저술하였다. 그 후 송나라 효종제孝宗帝의 귀의歸依를 받았으며, 대혜 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받게 되었다. 간화선의 독창적인 전개로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21)존당尊堂 : 원래는 다른 사람의 어머니를 지칭하는 존칭인데 여기에서는 아마도 자신의 부모를 일컫는 말인 듯하다.
- 22)비야毘耶 : 비야리毘耶離 또는 비사리毘舍離라고도 한다. 중인도에 있던 작은 나라로 부처님께서 자주 그 나라에 다니며 교화하였다고 한다.
- 23)마갈摩竭 : 중인도에 있었던 왕국인 마갈타摩竭陀를 말한다. 부처님이 성도한 니련선하泥連禪河가 있으며, 불멸佛滅 후 제1결집이 있었던 곳이다.
- 24)삼승三乘 :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인데, 즉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菩薩에 대한 세 가지 교법을 말한다.
- 25)칠요七曜 : 해와 달, 그리고 금金·목木·수水·화火·토土 오성五星을 일컫는다. 즉 고대 역법曆法을 말한다.
- 26)구장九章 : 한漢나라 장창張蒼이 지은 『九章算術』에서 나온 말로 고대의 산술算術을 말한다.
- 27)활구活句 : 의미가 있고 의로意路가 통하는 말을 사구死句, 의로가 통하지 않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활구라 한다.
- 28)조주趙州 : 이름은 종심從諗. 778~897. 산동성山東省 조주부趙州府에서 출생. 어려서 출가하여 남전 보원南泉普願 선사의 법을 받고 그 문하에서 20년 동안 있었다. 80세까지 각처로 돌아다니다가 비로소 조주의 관음원觀音院에서 학자들을 제접提接하기 40년, 120세로 입적하였다. 어록語錄 3권이 남아 있고, 그의 교화가 크게 떨쳐 ‘조주고불趙州古佛’이라 일컬었다.
- 29)절상회折床會 : 『五燈會元』에 당나라 여회如會(744~823) 선사가 법풍이 크게 떨쳐서 배우려고 모여드는 이가 너무 많아 법당 마루가 부러질 정도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고사에서 인용한 말이다.
- 30)직설稷契 : 중국 고대 요堯와 순舜의 어진 신하인 후직后稷과 설契로서 지혜와 덕을 겸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 31)사유闍維 : 다비茶毘와 같은 말. 죽은 이를 화장하는 일을 말한다.
- 32)겁석劫石 : 불교에서 보통 연월일로써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을 겁劫이라 한다. 겁석이란 둘레가 40리나 되는 돌을 하늘 사람이 무게 3수銖밖에 안 되는 옷으로 3년마다 한 번 스쳐 그 돌이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말한다.
- 33)용호방龍虎榜 : 조선 시대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게시하던 게시판.
- 34)창화昌化 : 경기도 양주군의 옛 이름. 또는 충북 충주의 옛 이름인데 여기서는 양주가 아닌가 생각된다.
- 35)관리舘吏 : 관사의 잡부로서 역사驛舍에 상주하며 일을 하는 일꾼.
- 36)상나화수商那和修 : 인도의 제3조. 상낙가박사商諾迦縛娑·사나바사舍那婆斯라고도 음역. 중인도 왕사성에서 출생하였으며, 뒤에 아난阿難의 제자가 되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 아난이 열반한 뒤 전법에 전력하였다. 제자 우바국다優婆麴多에게 법을 전하였다.
- 37)우바국다優婆毱多 : 불법을 전해 받은 제4조이며, 아육왕阿育王의 스승.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우바국다 존자가 그 교리를 받들어 설법할 때 마왕魔王이 석가모니의 몸으로 화化하여 이를 방해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물리쳐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 38)대선大選 : 승과僧科에 합격한 승려에게 주었던 최하위의 법계이다.
- 39)조선 시대 관직에 임명될 때 임금에게서 받는 신분이나 벼슬의 등급을 나타내는 관인官印을 몸에 차기 위한 끈을 인수印綬라고 한다. 이 끈을 푼다는 말은 관직에서 물러난다는 의미이다.
- 40)삼협통병三協統兵 : 명나라의 군직軍職. 제독提督 밑의 좌협·우협·중협 세 장군 중 하나이다.
- 41)견여肩輿 : 좁은 길을 지날 때 두 사람이 메고 다니는 가마.
- 42)자체自體 : 자휴自休라는 기록도 있다.
- 43)이정구李廷龜 : 조선 시대의 문신. 1564~1635.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서에 『월사집』·『서연강의書筵講義』·『대학강의大學講義』 등이 있다.
- 44)장유張維 : 조선 중기 문신. 문장이 뛰어나 조선 중기의 사대가에 속한다.
- 45)정약용丁若鏞 : 조선 후기 학자·문신. 1762~1836. 주요 저서는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이 있다.
- 46)복호復戶 : 호세戶稅를 면제해 주는 것을 말한다.
- 47)보솔保率 : 군인이 거느리는 보인保人과 솔정率丁의 합칭. 보인은 군인에게 딸린 경제적 보조자. 솔정은 군인이 거느리고 부리는 사람.
- 48)삼강동三綱洞 : 사명이 태어난 곳은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古羅里이다. 혹은 괴나리, 괴나루(槐津)라고도 부른다. 삼강동은 아마도 이곳의 옛 이름인 듯하다. 이곳에 사명의 선산先山과 생가 터가 있다.
- 49)대원사大元寺 : 김제 모악산 기슭에 있던 절.
- 50)이락삼매離樂三昧 : 『悲華經』에 이르기를, “여러 가지 삼매 가운데 이락삼매라는 것이 있는데, 이 삼매에 들면 세속적인 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집착을 벗어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 51)경전이란 『비화경』을 말한 것이다.
- 52)진묵 스님의 어머니 묘소는 지금의 전북 김제군 만경면 화포리 388번지 조앙산祖仰山에 있다.
- 53)송광사松廣寺 :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절.
- 54)무량사無量寺 :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萬壽山에 있는 절.
- 55)갑사甲士 : 조선 시대 각 고을에서 서울에 올라와 숙박하며 지키던 군사를 말한다.
- 56)곤륜산崑崙山 : 중국의 전설 속에 나오는 신성한 산. 중국의 서쪽에 있으며 황하黃河의 발원지라고 한다.
- 57)다른 기록들에는 한결같이 편양의 열반 연도를 갑신년(인조 22, 1644)이라고 하였다.
- 58)이명한李明漢 : 조선 인조 때의 문신. 1595~1646.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로 호종하여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작성하였다. 벼슬은 예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지냈다. 성리학에 밝았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백주집』이 있다.
- 59)이경석李景奭 : 조선 중기의 문신. 청나라의 침략으로 인한 위기에서 국가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송시열 등 명분을 앞세우는 인물들에 의해 삼전도 비문 작성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 60)이단상李端相 : 대간臺諫과 부제학 등을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1628~1669.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주요 저서에 『大學集覽』과 『四禮備要』 등이 있다.
- 61)김우형金宇亨 : 조선 후기의 문신. 1616~1694. 효종 때 벼슬길에 올라 여러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글씨에 능하였고, 특히 예서에 뛰어나 숙종 때 보책寶冊을 자주 썼다.
- 62)다산茶山 : 정약용丁若鏞, 조선 후기 학자 겸 문신. 1762~1836.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고, 한국의 역사·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하였다. 주요 저서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 등이 있다.
- 63)이 말은 『논어』 「里仁」 편에 나오는 말이다. 즉 “공자가 말하기를, ‘어진 이를 보면 그와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기를 돌아보라’고 하였다.(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 64)소요 태능逍遙太能과 해운 경열海運敬悅이란 당호와 법명으로 볼 때 이 두 스님은 장자莊子의 도교 사상을 수용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소요逍遙’라는 말과 ‘해운海運’이라는 단어는 모두 장자가 지은 『南華經』 「逍遙遊」 편에 나오는 말이다.
- 65)육상산陸象山 : 육구연陸九淵. 남송의 사상가이다. 1139~1192. 자는 자정子靜, 호는 상산象山, 시諡는 문안文安이다. 무주撫州 금계현金谿縣 사람으로 형인 구소九韶(자는 子美), 구령九齡(자는 子壽, 復齋先生)과 함께 학문으로 이름을 남겼다.
- 66)한치응韓致應 : 조선 후기의 문신. 1760~1824. 대사성과 대사간, 병조판서 등을 거쳐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 67)기축옥사己丑獄死 : 조선 선조宣祖 22년(기축, 1589)에 동인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일어난 옥사.
- 68)이덕수李德壽 : 조선 후기의 문신. 1673~1744. 자는 인로仁老. 호는 서당西堂·벽계蘗溪. 문장이 출중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관직에 여러 차례 올랐으며 성품이 근후하여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女四書』를 언해하였고 『국조오례의』의 수정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저서에 『西堂集』 등이 있다.
- 69)정수淨水 : 우리나라에 정수라는 이름이 붙여진 고찰은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절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 있는 절이 유명하다. 여기에서 정수란 아마 강진의 정수사(옛 이름은 雙磎寺)를 말하는 듯하다.
- 70)김만중金萬重 : 조선 시대의 문신이며 소설가. 1637~1692.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그리고 『서포만필』 등의 작품이 있다.
- 1)「師」甲本正誤表作「國」。
- 2)「議」甲本正誤表作「儀」。
- 3)「明」甲本正誤表作「寧」。
- 4)「十二…而逝」十一字。甲本正誤表曰衍字。
- 1)「雪」下甲本正誤表有「山」。
- 2)「開」甲本正誤表作「關」。
- 3)「明」下甲本正誤表有「白」。
- 4)「明」甲本正誤表作「時」。
- 5)「汝」甲本正誤表作「泣」。
- 6)「之」甲本正誤表作「去」。
- 7)「𧝟」甲本正誤表作「弊」。
- 8)「山下」甲本正誤表作「寺」。
- 1)「其」下甲本正誤表有「徃」。
- 2)「出」甲本正誤表作「山」。
- 3)「長尾」甲本正誤表作「尾長」。
- 4)「烟」甲本正誤表作「咽」。
- 5)「訢」甲本正誤表作「訴」。
- 6)「巨」作「臣」{甲}。
- 7)「四」下甲本正誤表有「日」。
- 8)「觀」下甲本正誤表有「其」。
- 9)「去」甲本正誤表作「而」。
- 10)「投」下甲本正誤表有「宿」。
- 11)「卑」作「早」{甲}。
- 12)「之」下甲本正誤表有「氣」。
- 1)「似」甲本正誤表作「以」。
- 2)「谷」甲本正誤表作「糓」次同。
- 3)「之」下甲本正誤表有「糓」。
- 4)「肩」甲本正誤表曰衍字。
- 5)「今」甲本正誤表作「前」。
- 6)「卒」甲本正誤表作「率」。
- 7)「帖」甲本正誤表作「貼」。
- 1)「平」甲本正誤表作「乎」ㆍ當作「牙」{編}。
- 2)「正」甲本正誤表作「智」。
- 3)「▼(粘/(㓒-(冫+七)))▼(粘/(㓒-(冫+七)))」甲本正誤表作「▼(秥/(㓒-(冫+七)))▼(秥/(㓒-(冫+七)))」。
- 1)「于行」甲本正誤表作「行于」。
- 2)「幻性非」甲本正誤表曰衍字。
- 3)「非」下疑脫「幻」{編}。
- 4)「民」甲本正誤表作「泯」。
- 5)「裝」甲本正誤表作「狀」次同。
- 6)「而」甲本正誤表曰衍字。
- 7)「唱」甲本正誤表作「喝」。
- 8)「綱」甲本正誤表作「綱」。
- 9)「響」下甲本正誤表有「音」。
- 10)「杭」甲本正誤表作「杌」。
- 1)「贖」作「續」{甲}。
- 2)「沸海」甲本正誤表曰衍字ㆍ疑「佛海」{編}。
- 3)「慈」下甲本正誤表有「悲」。
- 4)「枬移」甲本正誤表作「栴檀移」。
- 5)「裝」甲本正誤表作「狀」。
- 6)「雖」甲本正誤表作「誰不」。
- 7)「竟」疑「竸」{編}。
- 8)「壘」甲本正誤表作「累」。
- 9)□甲本正誤表作「早」。
- 10)「飄」甲本正誤表作「瓢」。
- 11)「言」甲本正誤表作「這」。
- 12)「開」甲本正誤表作「關」。
- 13)「逕」甲本正誤表作「逗」。
- 1)「聞」疑「問」{編}。
- 2)「袁」甲本正誤表作「表」。
- 3)「忽」甲本正誤表作「勿」。
- 4)「塞」作「寒」{甲}。
- 5)「綱」甲本正誤表作「綱」。
- 1)「脫」疑「晩」{編}。
- 2)「盃盃」甲本正誤表作「欝欝」。
- 3)「法」甲本正誤表作「漢」。
- 4)「心白耶」甲本正誤表曰衍字。
- 1)「曆」作「歷」{甲}。
- 2)「憂」甲本正誤表作「豪」。
- 3)□甲本正誤表作「醯」。
- 4)「相」甲本正誤表曰衍字。
- 5)「禦」甲本正誤表作「御」。
- 6)「千」甲本正誤表作「干」。
- 7)「開」甲本正誤表作「關」。
- 8)「鑾」甲本正誤表作「鏖」。
- 9)「編」疑「徧」{編}。
- 10)「二十一」甲本正誤表作「主」。
- 11)「等」下甲本正誤表有「得」。
- 12)「乫」甲本正誤表作「袈」。
- 1)「若」甲本正誤表作「差」。
- 2)「有家」甲本正誤表曰衍字。
- 3)「稻」甲本正誤表作「稱」。
- 4)「在」甲本正誤表作「載」。
- 5)「軍」下甲本正誤表有「頭」。
- 6)「云」甲本正誤表作「去」。
- 7)「向」甲本正誤表作「回」。
- 8)「裝」甲本正誤表作「狀」。
- 9)「在」甲本正誤表作「載」。
- 1)「上」甲本正誤表作「山」。
- 2)「童」甲本正誤表作「春」。
- 1)「日」甲本正誤表作「月」。
- 2)「陛」甲本正誤表作「狴」。
- 3)「連」疑「逋」{編}。
- 4)「道」甲本正誤表作「通」。
- 5)「問」甲本正誤表作「詢」。
- 6)「泉」甲本正誤表作「衆」。
- 7)「小」甲本正誤表作「少」。
- 8)「呼」甲本正誤表作「吸」。
- 9)「人」下甲本正誤表有「曰」。
- 10)「西」上甲本正誤表有「自」。
- 11)「麥」甲本正誤表作「麩」。
- 12)「▼(木+(旌-方))」甲本正誤表作「旌」。
- 13)「沙」甲本正誤表作「寺」。
- 14)「侯」甲本正誤表作「候」。
- 1)「佛」下甲本正誤表有「影」。
- 2)「大」甲本正誤表作「太」。
- 3)「話」甲本正誤表作「活」。
- 4)「化」上甲本正誤表有「火」。
- 5)「衣」甲本正誤表作「永」。
- 6)「而」甲本正誤表作「以」。
- 1)「遙」甲本正誤表作「逍」。
- 2)「從」甲本正誤表作「徙」。
- 3)「徒」甲本正誤表作「徙」。
- 4)「入水皆」甲本正誤表曰衍字。
- 5)「乘」甲本正誤表作「來」。
- 6)「六十」甲本正誤表作「卒」。
- 7)「不醉」甲本正誤表作「醉不」。
- 8)「跌」甲本正誤表作「趺」。
- 9)「揭」甲本正誤表作「揚」。
- 1)「𤦹」甲本正誤表作「▼(瑣-小+巛)」。
- 2)「樂」甲本正誤表作「岳」。
- 3)「於疑」甲本正誤表作「疑於」。
- 4)「泉」甲本正誤表曰衍字。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두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