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사열전(東師列傳) / 東師列傳第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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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 제6권(東師列傳 第六)
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
우담강사전雨潭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유정有定이고 호는 우담雨潭이며, 속성은 ▣씨이고 포은 운양布恩雲養의 제자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포은은 순천 선암사仙岩寺 스님이다.
스님은 용암 혜언龍岩慧彦 선사의 선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설월 원민雪月圓旻 스님과는 동문 형제지간이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다가 서울 근교의 산에 이르렀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단월檀越(신도)이 재齋를 올리기 위해 절에 들어왔는데,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다. 그 아이는 나이가 겨우 대여섯 살 정도였지만 스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 어머니에게 고하였으나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가 강하게 청하며 뜻을 굽히지 않으니 어머니는 어쩔 수 없어 허락하였다.
아이는 절에 남아 있으면서 절 일을 하였는데 어찌나 일을 잘하던지 건장한 아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 뒤에 칠불암七佛庵 아장선방亞莊禪房(亞字房)에 있을 적에 홀연히 종환瘇患1)을 앓게 되었는데, 어떤 선객 한 사람이 자청하여 주문을 염송하자 홀연히 병이 나았다.
우담 스님은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지극히 총명하여 한문과 한글은 물론 범어와 경經·논論·선禪·율律에 이르기까지 모든 글을 한 번만 보면 외울 정도였으며, 시詩·부賦·변려문에 이르기까지 모두 능하여 마치 미리 글을 지어 놓기라도 한 것처럼 신속하게 글을 짓곤 하였다.
포은布恩 스님의 선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을 때 마치 10년 동안 하안거를 지낸 비구 같았다. 통도사 불사(通度佛事)에는 사부대중이 경향京鄕 각지에서 구름처럼 모였다. 모든 산중 스님들이 시위侍衛하여 괘불掛佛을 옮기는 이운작법移運作法을 마치고 우담 스님이 단상에 올라가 법을 설하니 마치 바다에 밀려드는 조수 소리처럼 진동하였으며, 병에서 물을 쏟아 내듯이 거침없이 법을 설하니 그때 스님의 법을 듣고 발심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때 용완龍玩이라는 사람은 본디 화사畫士였는데 이 법회에 가서 참예하여 스님의 설법을 듣고는 돌연 마음을 고쳐먹고 그림 그리던 붓을 버리고 강론하는 도량에 들어간 일까지 있었다. 그 당시 스님의 나이는 겨우 20세였다. 그 이후에 통도사 극락암極樂庵에서 강론하는 문을 크게 열자 여러 지방에서 학문을 익히려는 이들이 구름이 내닫듯 물이 흘러가듯 몰려들어 방장실이 꽤나 넓었는데도 오히려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스님은 나이가 많아져 기운이 어느새 떨어지자 강당의 문을 닫고

010_1064_b_02L東師列傳第六

010_1064_b_03L[傳]

010_1064_b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1064_b_05L雨潭講師傳

010_1064_b_06L
師名有定號雨潭姓□氏布恩雲養
010_1064_b_07L弟子楊州人布雲順天仙岩寺人
010_1064_b_08L香於龍岩慧彥禪師之室與雪月圓旻
010_1064_b_09L爲門兄弟遊化諸方至于京山1) [1]
010_1064_b_10L越修齋次入寺率幼子至其子年才
010_1064_b_11L五六以爲僧之意告其母母不許
010_1064_b_12L請不已母不獲已許之在寺行事
010_1064_b_13L異健兒人皆欽服後在七佛亞莊禪房
010_1064_b_14L忽有𤺄患有一禪客自請誦呪因忽
010_1064_b_15L無患早年剃染受具眞諺梵2) [2] 經論
010_1064_b_16L禪律一覽輒記詩賦編儷速如宿搆
010_1064_b_17L拈香受印如十夏比丘通度佛事
010_1064_b_18L衆雲集京鄕渾聚 3) [3] 山侍衛作法移
010_1064_b_19L登壇法說震海潮音如瓶注水
010_1064_b_20L此發心者無數無量時龍琓以畫士
010_1064_b_21L徃叅見聞頓然改心4) [4] 筆而入講
010_1064_b_22L于時師年才二十大開設話門於極
010_1064_b_23L樂庵諸方學者雲奔水至5) [5] 雖寬
010_1064_b_24L物情猶隘年已過高矣氣已衰也

010_1064_c_01L선실禪室을 열었는데 거기에도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팔八 자로 열어젖힌 선관禪關도 오히려 좁기만 했다.
취서산鷲捿山 백련난야白蓮蘭若의 수행 모습은 여산廬山의 백련결사白蓮結社의 모습과 다를 게 없을 정도로 흥왕하였다. “생하고 멸하는 것이 멸하고 나면 적멸이 낙이 된다.(生滅滅已。 寂滅爲樂。)”라고 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병자년(고종 13, 1876) 여름에 조용히 적멸을 보이시니, 나무도 하얗게 변하고 시냇물도 오열하였다.
우담 스님은 율봉栗峯 스님의 3대 법손이고 호암虎岩 스님의 5대 법손이다. 화운 관진華雲寬眞·보봉 이선寶峯利善·응허 보신應虛普信과는 동문 법형제 사이이다.
백파白坡 신 판서申判書(申獻永)가 말하기를, “내가 관동 지방의 어사御史로 있었을 때 특별히 서래각西來閣(유점사에 있던 누각)을 찾아가서 대운 스님과 하룻밤 잔 적이 있는데 이야기를 하다가 끝날 무렵 ‘스님은 나보다 훌륭하다’고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후일을 기약하며 나온 지 3년 뒤에 대운 스님이 적멸을 보였다고 한다.”라고 했다.
이 대운 스님이 바로 우담 스님의 사숙師叔 되는 스님이다. 우담 스님이 누구에게 법을 전해 주었는지, 남긴 책이 몇 질이나 되는지는 아물아물하여 알 수 없으니 어쩌겠는가?
혼허강백전渾虛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상능尙能이고 호는 혼허渾虛이며, 속성은 최崔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현허玄虛에 뜻을 두어 달마산으로 들어가 의지해 살 곳을 찾다가 진학眞學 장로의 회상에서 머리를 깎고 가사장삼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붕명鵬溟 선사의 계단에서 연비燃臂를 하고 계를 들었으며, 응화應化 강백의 강당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계승하였다.
또 ▣▣ 강백의 강석에서 교학을 버리고 선문에 들어갔다. 초의草衣 선백의 법회에서 대승계大乘戒를 받아 보살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다. 가지산 보림사寶林寺 수남암水南庵으로 인암忍庵 선사를 참방하여 사집四集을 배우고, 장춘동長春洞 북미륵암北彌勒庵으로 운거雲居 대사를 참알하고 사교四敎를 공부하였으며,

010_1064_c_01L講堂門開禪室關四衆雲集八字猶
010_1064_c_02L鷲捿之白蓮蘭若與廬山之白蓮結
010_1064_c_03L無異其興也生滅滅已寂滅爲樂
010_1064_c_04L丙子夏泊然示寂樹爲之白澗爲之咽
010_1064_c_05L栗峯之三世虎岩之五世與華雲寬眞
010_1064_c_06L寶峯利善應虛普信同門兄弟白坡
010_1064_c_07L6) [6] 判書曰關東御史時特尋西來閣
010_1064_c_08L與大雲一夜同宿言罷勝己之誣後期
010_1064_c_09L而出後三年示寂云此師師之叔師也
010_1064_c_10L傳法之誰某遺書之幾7) [7] 茫然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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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4_c_12L渾虛講伯傳

010_1064_c_13L
師名尙能號渾虛姓崔氏朗州人
010_1064_c_14L厭腥葷早發玄虛入達摩山窺依止
010_1064_c_15L眞學長老之室圓頂方袍鵬溟禪
010_1064_c_16L師之壇受火聞戒應化講伯之堂
010_1064_c_17L香入室 □講8) [8] 舍敎入禪草衣禪
010_1064_c_18L伯之會受大乘戒登菩薩位訪忍庵禪
010_1064_c_19L師於伽智山水南庵學四集叅雲居大
010_1064_c_20L師於長春洞北彌勒 9) [9] 四敎謁枕溟
010_1064_c_21L「擅」甲本正誤表作「檀」「守」甲本正誤表
010_1064_c_22L作「字」
「詩」甲本正誤表作「諸」「猫」甲本
010_1064_c_23L正誤表作「描」
「文」疑「丈」{編}「中」甲本
010_1064_c_24L正誤表作「申」
「秩」下甲本正誤表有「奈」
010_1064_c_25L「伯」下甲本正誤表有「之」
「開」甲本正誤表
010_1064_c_26L作「聞」

010_1065_a_01L조계산 대승암大乘庵으로 침명枕溟 화상을 찾아가 대교大敎를 공부하고, 소림산 중봉암中峰庵에서 응화應化 법사를 모시고 염송拈頌을 깨우쳤으니, 가히 설산雪山동자가 다시 나찰羅刹에게 법을 들은 것이며,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을 다시 뵌 격이라 할 만하다.
선지식 참방하는 것을 마치고 나니 여러 산문의 학인들이 배우고자 모여들었다. 강당 문을 활짝 열고 학인들을 맞아 가르침을 연 지 수십 년이요, 강사의 자리에서 물러나 지관止觀을 수행한 지도 여러 해가 지났다.
월출산에서 국태민안을 위해 기도를 올렸고, 미황사美黃寺에 곡탑鵠塔 (부도)을 세우기도 했다. 두 그루 어린 계수나무(嫩桂, 제자)에게 돌부鈯斧를 전하고 삼한三韓의 소림少林에서 연대蓮臺를 꿈꾸었다.
스님은 몸집이 풍후豊厚하고 언어는 둔한 듯 고풍스러웠으며, 내외의 재물을 갖추었고 절의 일이나 수행에도 두루 원융하였다. 어디에도 안주하거나 집착함이 없이 아무 곳에서나 일상생활을 하였으며 대둔사와 미황사 등지로 주석처를 옮겨 다니며 얼마나 많은 제자들을 득도시켜 이 의조사義照寺를 지키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스님은 도광道光 병술년(순조 26, 1826)에 태어났으며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 현재 적련정사赤蓮精舍에 머물고 있다.
청연강백전淸淵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월영月影이고 호는 청연淸淵이며, 속성은 ▣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달마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가지산 보림사 수남암水南庵으로 인암忍庵 스님을 찾아가 사집四集을 배웠으며, 두륜산 북미륵암北彌勒庵으로 운거雲居 스님을 참배하고 『능엄경』과 『기신론』을 배웠으며, 응화應化 스님의 강석에 가서 참례하고 『반야경』과 『원각경』을 배웠다. 이어 운거雲居 스님을 참알하고 『화엄경』을 배워 마친 다음 곧 설월雪月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설월 스님은 미봉 보한眉峰甫垾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미봉 스님은 연담蓮潭의 법을 이은 제자이며, 응운 영화應雲永化 스님과는 동문 형제이고, 낭호 승찰朗湖勝察 스님은 법사 설월 스님과 동문 형제이다. 미황사美黃寺 상수암上峀庵에서 강당 문을 열고 푸른 눈을 지닌 청년 학인들을 맞아들여 여래께서 49년 동안 설하신 경을 거듭 강설하였다. 그 뒤에 문을 닫아걸고 학인들의 방문을 거절한 채 백의거사白衣居士가 홀로 조사들의 1,700칙 공안을 참구하듯이 선문의 공안을 참구하였다. 청연 스님은 두륜산과 천개산에 머물기도 했고, 고

010_1065_a_01L和尙於曹溪山大乘庵*開大敎侍應化
010_1065_a_02L法師於少林山中峯庵證拈頌可謂雪
010_1065_a_03L山再*開羅刹善財再見文殊叅訪已矣
010_1065_a_04L諸山會也開門提接者數十年退處
010_1065_a_05L止觀者多春秋奉爲祝於月出山
010_1065_a_06L鵠塔於美黃寺傳鈯斧於二株嫩桂
010_1065_a_07L蓮臺於三韓少林師軀榦豊厚言語鈍
010_1065_a_08L內外財具足事理相圓融以無住
010_1065_a_09L着回向爲日用行履處移缾鉢於大芚
010_1065_a_10L美黃度箇幾多人守斯義照寺道光
010_1065_a_11L丙戌生光緖甲午住赤蓮精舍

010_1065_a_12L

010_1065_a_13L淸淵講伯傳

010_1065_a_14L
師名月影號淸淵姓□氏靈岩人
010_1065_a_15L家於達摩山削髮染衣尋忍庵師於伽
010_1065_a_16L智山水南庵學四集叅雲居師於頭輪
010_1065_a_17L山北彌勒庵受楞嚴起信謁應化師席
010_1065_a_18L受般若圓覺叅雲居師了華嚴乃拈
010_1065_a_19L香於雪月法師雪月眉峰甫垾之子
010_1065_a_20L蓮潭之子與應雲永化門兄弟
010_1065_a_21L湖勝察與法師雪月門兄弟美黃寺
010_1065_a_22L上峀庵開門迎納靑眼學人重說如來
010_1065_a_23L四十九年之說經掩關杜絕白衣居士
010_1065_a_24L獨看祖師千七百則之看話住頭輪山

010_1065_b_01L금도古今島의 백운산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삼도사三島寺의 추정암樞正庵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정해년(고종 24, 1887) 가을에는 범해梵海 스님·혼허渾虛 스님과 함께 나라를 위한 기도 법회에 초대를 받아 증명법사의 자리에 나가기도 하였고, 여섯 달 동안의 추위가 풀리는 기간까지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결제를 하기도 했다.
신묘년(고종 28, 1891) 겨울에는 미황사 방부도원放浮屠園에 설월 스님과 응운 스님 두 스님의 부도를 세우기도 했다. 스님은 지식이 남보다 탁월하였고 원래 남에게 교만하게 대하는 일이 없었으며, 글쓰기를 신속하게 하였지만 글을 다시 고치는 일이 없었으며, 마음이 겸허하고 조용한 모습은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곳에 처하였고, 밖으로 은연隱然한 모습은 마치 봄 동산에 사향노루가 지나가면 풀이 저절로 향기가 나듯 하였다.
법을 전한 제자는 성암性菴과 성일性日 등이 있는데 지금 삼도사 추정암에 머물고 있다.
수성선사전壽星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근헌謹憲이고 호는 수성壽星이며, 속성은 허許씨이고 청해 당인내塘仁內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두륜산으로 들어가서 마음속에 출가할 것을 서원하고 취암鷲岩 스님에게 몸을 던져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 스님을 참알參謁하고 계를 받았고, 경월鏡月 스님을 찾아뵙고 그의 법통을 이었으며, 초의 스님에게 예를 올리고 보살계를 받았다. 철선鐵船 스님의 처소에서는 『통감』·『사기』·『고문진보』를 배웠고, 문암聞庵 스님의 처소에서는 사집四集을 배웠으며, 침명枕溟 스님에게서는 경론經論을 두루 공부했다.
스님은 일천 산과 일만 냇물을 두루 구경한 다음 강당을 개설하여 문을 열고 학인들에게 널리 교학을 강설했다. 선암사 칠전七殿에서 네 번의 하안거를 마치고 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두 번의 하안거를 마쳤으며, 대둔사 만일암挽日庵에서 한 번의 하안거를 마치고 무량회無量會에서 한 번의 하안거를 마쳤다.
신유년(철종 12, 1861) 겨울에 동산東山·나운羅云·서현瑞賢 등 15명 스님에게 단자端字2)를 건네주었다. 을유년(고종 11, 1885) 겨울 12월 26일에 원적圓寂을 보이시자 제자 이운理雲 스님은 스승의 영단 앞에서 법인을 이어받고 호를 용허龍虛라 하였다. 용허 스님의 사법 제자인 종민宗敏 스님은 신묘년(고종 28, 1891)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계사戒師는 동화東化 스님이다.
수성 스님은 연담蓮潭 스님의 4대 법손이고 은암銀岩 스님의 2대 법손이며, 영담 지명影潭智明·혜운 보정惠雲普淨·수암 석훈壽庵碩訓 등과는

010_1065_b_01L天蓋山住於古今之白雲住於三島之
010_1065_b_02L1) [10] 丁亥秋與梵海渾虛應爲祝證
010_1065_b_03L請結六朔寒際於月出山上見性庵
010_1065_b_04L辛卯冬立雪月應雲兩浮屠於美黃之放
010_1065_b_05L浮屠園知識卓越元無施慢製作神
010_1065_b_06L文不加點中退然如水之處衆人
010_1065_b_07L之所惡外隱然若麝過春山草自香
010_1065_b_08L法弟子有性菴性日等今在三島寺
010_1065_b_09L*柩正庵

010_1065_b_10L

010_1065_b_11L壽星禪師傳

010_1065_b_12L
師名謹憲號壽星姓許氏淸海塘仁
010_1065_b_13L內人幼入頭輪山志願出家投鷲岩
010_1065_b_14L2) [11] 染衣叅□□師受戒謁鏡月師嗣
010_1065_b_15L禮草衣師受菩薩戒鐵船師處學通
010_1065_b_16L史古文聞菴師處解四集枕溟師講經
010_1065_b_17L [12] 看千山萬水設開3) [13] 普說4) [14]
010_1065_b_18L殿結四夏松廣三日結二夏大芚挽
010_1065_b_19L結一夏無量會結一夏度端字於
010_1065_b_20L辛酉冬東山羅云瑞賢寺十五人示圓
010_1065_b_21L寂於乙酉冬十二月二十六日理雲
010_1065_b_22L印於影壇號穪龍虛宗敏削髮於辛卯
010_1065_b_23L戒師東化蓮潭之四世銀岩之二世
010_1065_b_24L與影潭智明惠雲普淨壽庵碩訓等

010_1065_c_01L동문 형제이다.
보제강백전普濟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심여心如이고 호는 보제普濟이며, 거처하던 방의 당호는 포의蒲衣이다. 속성은 마馬씨이고 강진 백도방白道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도광道光 8년 무자(순조 28, 1828)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원년 을해 (고종 12, 1875) 2월 30일 대둔사 상원암上院庵에서 적멸을 보이셨으니, 세속 나이는 48세이고 하랍夏臘은 33년이었다.
어린 시절에 두륜산 가선대부嘉善大夫 희문禧文 화상의 처소로 입산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문암聞庵 강주의 계단에서 계를 받았고 철선鐵船 강백의 문하로 입실하였으며, 초의草衣 선백의 조당에서 보살계를 받았다. 그 뒤 철선·문암·용연龍淵·운거雲居·응화應化·영허靈虛·벽해擘海등 7대 법사를 두루 찾아다니며 학문을 연마했다.
연꽃 향기 나고 매실이 익자 벼슬을 얻고 식록食祿이 생기게 되었다. 강당 문을 열고 삼남三南의 학인들을 맞아들여 경을 강설하고 선법을 설한 지 20여 년이나 흘렀다. 이후 스님은 풍악산·삼각산·태백산·가야산·지리산 등 이름난 산을 두루 유람하였으며, 한양·강릉·경주·공주·전주 등 큰 고을을 다니면서 철선 스님과 초의 스님의 게송을 읊고 열수洌水와 추사秋史의 글씨를 그대로 들고 다니기도 했다.3)
스님은 청정한 데만 머무르지 않고 세속 먼지 속에 스며들었으며, 더럽든 깨끗하든 걸림이 없었고 좋든 나쁘든 구분하지 않았으니, 진실로 격식을 초월한 큰 인물의 마음 쓰는 방법이라고 하겠다.
금강산을 구경하고 와서 돌아다니면서 구경한 내용을 손수 기록한 「금강산유산록金剛山遊山錄」 1편을 보여 주자 박노하朴盧河가 글을 좀 고치고 서문까지 써서 붙이니 완연한 1권의 책이 되었다.
옛날 의상義湘 대사가 「서방가西方歌」를 지었고 도선道詵 국사는 「산수가山水歌」를 지었으며, 나옹懶翁 화상은 「서양가西養歌」를 지었고 청허淸虛 대사는 「회심곡回心曲」을 지었으며,

010_1065_c_01L門兄弟

010_1065_c_02L

010_1065_c_03L普濟講伯傳

010_1065_c_04L
師名心如號普濟室曰蒲衣姓馬氏
010_1065_c_05L康津白道坊人道光八年戊子生
010_1065_c_06L緖元年乙亥二月三十日示寂于大芚
010_1065_c_07L之上院庵世壽四十八夏臘三十三
010_1065_c_08L幼入頭輪山嘉善大夫禧文和尙處剃頭
010_1065_c_09L聞庵講主壇受戒鐵船講伯室入室
010_1065_c_10L衣禪伯堂受菩薩戒叅學於鐵船聞庵
010_1065_c_11L龍淵雲居應化靈虛擘海七大法師
010_1065_c_12L香梅熟封侯食祿5) [15] 接三南學人
010_1065_c_13L講經說禪者二十餘年遊楓岳三角大
010_1065_c_14L白加耶智異之名山履漢陽江陵慶州
010_1065_c_15L公州全州之雄州吟咏鐵船草衣之偈
010_1065_c_16L拖白冽水秋史之字書不泥灰心
010_1065_c_17L和光同塵染淨無碍好惡不分實出
010_1065_c_18L格大人用心之道也自金剛來示其手
010_1065_c_19L記金剛山遊山錄一篇朴盧河筆削序
010_1065_c_20L一册完然昔義湘作西方歌道詵
010_1065_c_21L山水歌懶翁作西養歌淸虛作回心曲
010_1065_c_22L「柩」甲本正誤表作「樞」次同「寺」甲本正
010_1065_c_23L誤表作「師」
「當」甲本正誤表作「堂」「若」
010_1065_c_24L甲本正誤表作「岩」
「開」甲本正誤表作「關」

010_1066_a_01L박자재朴自在는 「유산록遊山錄」과 「만고가萬古歌」를 지었고 임형산任荊山은 「선유가船遊歌」를 지었으며, 김매소金梅巢는 「유산록」을 지었고 영암靈岩 스님법명은 취학就學이다.은 「토굴가土窟歌」를 지었으며, 구계九階 스님은 「유산곡遊山曲」을 지었고 포의蒲衣 스님은 「금강록金剛錄」을 지었는데, 모두가 사물에 빗대어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은 것이지 지니고 있는 재주를 쓰고 싶어 안달이 나서 지은 것이 아니다.
스님의 저서로는 문집 1권이 문인들에게 보관되어 있으며, 제자로는 만공 부정萬空富定과 월파 원준月坡圓俊 등이 있다.
금성선사전錦城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보헌普憲이고 호는 금성錦城이며, 속성은 강姜씨이고 영암 소완도小莞島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을유년(순조 25, 1825)에 태어나 광서光緖 계사년(고종 30, 1893) 7월 1일에 입적入寂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69세이고 승랍은 53년이다.
어릴 때 두륜산으로 들어가 송계당松溪堂에서 책을 읽다가 스스로 스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내어 어버이께 하직 인사를 하고 출가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늘 ‘출가한 아들을 생각하며 스님의 발을 씻어 주었다’는 옛이야기를 되새기며 한탄하면서 북쪽 하늘을 향하여 울기도 하고 혹 스님을 만나면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소년은 견향見香 스님의 회상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고 문암聞庵 스님의 계단에서 계를 받았으며, 뒷날 은사의 방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범해梵海 스님의 강당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대승보살 오십팔계를 받았고, 이어 운거雲居·문암聞庵·응화應化·범해 스님의 강론 자리에서 내서內書와 외서外書를 모두 배웠다.
스님은 서기와 수승首僧의 직책을 역임하였고 주지와 총섭의 직인을 차고 다니기도 했으니, 행정에 숙련된 속된 관리였고 쓰고 지우기를 일삼는 아전 같은 노덕老德이었다. 그러나 금성 스님은 이러한 급류急流에서 용감하게 물러나 학처럼 흰 머리에 푸른 눈을 지니고 선지식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늘에는 바람과 비가 있고 사람에게는 화禍와 복福이 있는 법이다. 사산四山(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의 산)이 시시각각 다가와 핍박하고 오관五官(눈·코·귀·혀·몸의 다섯 감각기관)이 막히며, 사람娑囕은 보이지 않고 알가閼伽는 여유가 있다.4)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두건을 쓰고 따르고 의발을 전해 받은 제자는 꽃을 들고 돌았다. 완함阮咸은 슬퍼하며 뛰면서 통곡하였고 가섭迦葉은 관 밖에 내민 발을 어루만졌다.
금성 스님은 천성이 질박하고 정직하였으며 언어는 자상하고 신중하였다. 또 들어가거나 나가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시종 한결같았다. 남쪽 영주瀛洲(제주도)에 들어가 지방 풍속을 실컷 탐문하고 북쪽으로 설봉산에 이르렀으며, 동쪽으로 금강산을 오르면서

010_1066_a_01L朴自在作遊山錄萬古歌任荊山作船
010_1066_a_02L遊歌金梅巢作遊山錄靈岩名就
作土
010_1066_a_03L窟歌九階作遊山曲蒲衣作金剛錄
010_1066_a_04L託意而記非技1) [16] 而作也文集一卷
010_1066_a_05L在門人弟子有萬空富定月坡圓俊等

010_1066_a_06L

010_1066_a_07L錦城禪2) [17]

010_1066_a_08L
師名普憲號錦城姓姜氏靈岩小莞
010_1066_a_09L島人道光乙酉生光緖癸巳七月初一
010_1066_a_10L日寂世壽六十九僧臈五十三幼入
010_1066_a_11L頭輪山讀書于松溪堂自發爲僧之心
010_1066_a_12L辭親出家其母每發洗足之歎向北而
010_1066_a_13L見僧則泣染衣於見香師室聞戒
010_1066_a_14L於聞庵師壇拈香於恩師室受比丘二
010_1066_a_15L百五十戒及大乘菩薩五十八戒於梵海
010_1066_a_16L師講堂學內外書於雲居聞庵應化梵
010_1066_a_17L海之肆行書記首僧之役佩住持揔攝
010_1066_a_18L之印鍛鍊之俗吏刀筆之老德急流
010_1066_a_19L勇退鶴髮靑眼天有風雨人有禍福
010_1066_a_20L四山來逼五官窒塞娑囕不見閼伽
010_1066_a_21L有餘受戒者麻巾而隨之受封者
010_1066_a_22L花而繞之阮咸踊地 3)葉迦 [18] 撫趺
010_1066_a_23L性質直言語詳愼出入遠近始終恒
010_1066_a_24L南入瀛洲飽采方俗北抵雪峰

010_1066_b_01L풍토風土를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다시 한양에 이르러서 견문見聞을 웅장하게 키웠다. 그에게는 두 그루 어린 계수나무(嫩桂, 제자)가 있고, 스님의 진영 1축이 전한다.
설우대사전雪藕大士傳
스님의 법명은 대운大雲이고 호는 한명漢明이며, 선호禪號는 설우雪藕이다. 속성은 도강道康 김씨이고 아버지는 추광秋光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고, 해남 산일도山一道 산수동山水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10년 경인(순조 30, 1830)에 태어나 동치同治 7년 무진(고종 5, 1868) 봄에 강진의 보리산 수인사修仁寺 청계암淸溪庵에서 적멸을 보이시니, 세속의 나이는 39세이고 승하僧夏는 26년이다.
스님은 13세에 월출산 도갑사道甲寺로 들어가 침송 회성枕松會成 대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침월枕月 대사에게 계를 받았다.
갑자년(고종 1, 1864) 겨울에 진불암眞佛庵 범해梵海 스님의 강당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병인년(1866)에 은사의 조실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스승의 법통을 전해 받았으니, 연담蓮潭 스님의 5대 법손이 되고 월화 덕혜月華德惠 스님의 3대 법손이며, 도암 보언道庵保彥 스님의 2대 법손이 된다.
장흥 보림사寶林寺 송대松坮의 이봉离峯 스님, 남암南庵의 운거雲居 스님, 도갑사 남암의 침월枕月 스님, 대둔사 북암北庵의 운거雲居 스님, 만일암挽日庵과 진불암眞佛庵의 범해梵海 스님을 찾아다니며 학업을 익혔다.
그 후 수인사修仁寺로 자리를 옮겨 살다가 젊은 나이에 적멸을 보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스님의 천성은 온화하고 청아하였으며 행동거지는 한가하고 조용하였다. 그래서 한 번만 만나 보면 도가 있는 사람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응룡선사전應龍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문찬文贊이고 호는 응룡應龍이며, 순천 영취산 흥국사興國寺 출신이다. 스님의 종파를 말하면, 선암사 상월 새봉霜月璽篈의 법을 이은 제자가 응운 증오應雲證悟이고, 응운의 법을 이은 제자가 영취산 침룡 영원枕龍永源이며, 영원의 법을 이은 제자가 바로 응룡 문찬이다.

010_1066_b_01L登金剛風土點心再到漢陽聞見雄
010_1066_b_02L二株嫩桂一軸眞影

010_1066_b_03L

010_1066_b_04L雪藕大士傳

010_1066_b_05L
師名大雲字平沄號漢明禪號雪藕
010_1066_b_06L姓道康金氏父秋光母密陽朴氏
010_1066_b_07L南山一道山水洞人道光十年庚寅生
010_1066_b_08L同治七年戊辰春示寂于康津菩提山
010_1066_b_09L修仁寺淸溪庵世年三十九僧夏二十
010_1066_b_10L師十三入月出山道甲寺祝髮於枕
010_1066_b_11L松會成大師受戒於枕月大師甲子冬
010_1066_b_12L受比丘及菩薩戒於眞佛庵梵海師講堂
010_1066_b_13L丙寅大拈香於恩師主蓮潭之五世
010_1066_b_14L華德惠之三世道庵保彥之二世
010_1066_b_15L學於寶林之松坮离峯師南庵雲居師
010_1066_b_16L道甲之南庵枕4) [19] 大芚之北庵雲居師
010_1066_b_17L挽日眞5) [20] 梵海師移居于修仁早年
010_1066_b_18L示寂惜哉賦性溫雅進止閒靖一見
010_1066_b_19L可知其有道之人也

010_1066_b_20L

010_1066_b_21L應龍禪師傳

010_1066_b_22L
師名文贊號應龍順天靈鷲山興國寺
010_1066_b_23L言其宗派仙岩霜月璽篈子應雲證
010_1066_b_24L應雲子靈鷲山枕龍永源源子應龍

010_1066_c_01L
고려조에 보조 국사普照國師가 이 절(흥국사)을 창건했고 우리 조정(조선)의 정조대왕 때에 응운 스님이 중건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응운 스님은 당시의 문장가요 재사才士였다. 해남 표충사表忠祠를 처음 창건할 때에 조정에서 특별히 총섭의 직책을 주었다. 처음 창건 당시의 범례凡例를 살펴보면 스님이 예조禮曹에 보고하고 감영監營에 보고하여 복호復戶를 특별히 허락하고 보솔保率을 주도록 허락하는 법을 세워 일신一新하였는데, 그때 그 문서의 분량이 쌓여 책 1권을 만들 정도였으니, 이 모두가 응운 스님이 손수 작성한 문건들이다. 사원 불사에 공이 있기로 말하면 영남과 호남을 통틀어 승려들 중에 제일이다.
흥국사 중수의 일을 살펴보면 폐허가 된 것을 일으키고 무너진 곳을 보수한 일과 보조 국사의 구물舊物들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전된 것도 모두 응운 스님과 침룡 스님의 위대한 자취이니, 큰 지략을 지닌 거벽巨擘이었다. 침룡 스님과 응룡 스님의 공로를 추앙하여 감영과 순천도호부에 보고하여 사찰을 우뚝하게 만들고 사찰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을 닦기도 했으니, “네가 네 조상을 기억함으로 인해 이에 네 자손이 번성한다.”고 한 옛말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불일佛日(보조 국사) 스님께서 맨 처음 이 절을 창건하였고 응운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응룡 스님이 잘 지켜내어 잃지 않았으니, 사람은 비록 셋이지만 그 공은 하나이다.
응룡 스님의 사제師弟인 재신在信 스님은 함께 나아가고 함께 물러나며 고락을 함께하였으니 스님의 날개 같은 존재이다.
금파선사전金波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응신應信이고 호는 금파金波이며, 속성은 김해金海 김씨이고, 청해淸海 세포細浦에서 출생한 사람으로서 도광道光 계사년(순조 33, 1833)에 태어났다.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석호石虎 선사의 조실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지허止虛 선덕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은사인 석호 스님의 회상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010_1066_c_01L文贊也普照國師麗朝時創建此寺
010_1066_c_02L我朝正宗大王時應雲師重建此寺
010_1066_c_03L疑也應雲當時文章才6) [21] 一并
010_1066_c_04L海南表忠祠初創建時特贈揔攝之職
010_1066_c_05L初創凡例報禮報營復戶保率特許
010_1066_c_06L特授一新立法其文其籍積成卷軸
010_1066_c_07L皆其手跡有功於院事兩南僧幕之第
010_1066_c_08L一也一并興國寺重修事興廢補弊
010_1066_c_09L普照之舊物至今依舊者亦皆應雲枕
010_1066_c_10L龍之雄蹈俊畧之巨擘也枕龍應龍
010_1066_c_11L追仰先功營告府報寺刹7) [22] 要路安
010_1066_c_12L念祖爾祖寔繁有徒於此可尙
010_1066_c_13L8) [23] 應雲重修應龍守而勿失
010_1066_c_14L雖三功則一也師弟在信同進同退
010_1066_c_15L師之羽翼哉

010_1066_c_16L

010_1066_c_17L金波禪師傳

010_1066_c_18L
師名應信字弼文號金波姓金海金
010_1066_c_19L淸海細浦人道光癸巳生出家於
010_1066_c_20L頭輪山染衣於石虎禪師室受具於止
010_1066_c_21L虛禪德壇拈香於恩師室受比丘戒及
010_1066_c_22L「養」甲本正誤表作「癢」「師」下疑脫「傳」
010_1066_c_23L{編}
「葉迦」甲本正誤表作「迦葉」「月」下甲
010_1066_c_24L本正誤表有「師」
「佛」下甲本正誤表有「之」
010_1066_c_25L「師」甲本正誤表作「士」「巋」下甲本正誤
010_1066_c_26L表有「然」
「荊」疑「剏」{編}

010_1067_a_01L스님은 또 범해 각안의 강당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범해·운곡雲谷·보제普濟·응화應化 스님이 강론하는 자리에서 경론을 공부하였다.
금파 스님은 사찰의 수승 소임을 맡아보았으며 나중에는 총섭의 인수印綬를 차고 사찰 행정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지식이 탁월하였고 행장行藏이 청아하고 신중했다. 일을 함에 있어서 잘못 처리하는 일이 없었고 벗들 중에는 지기知己가 많았다. 공적인 일이나 사사로운 일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였다.
스님이 계를 주어 득도시킨 스님은 약간 명이 있고 양육하여 은혜를 입힌 제자도 두서너 명은 된다. 스님이 법을 이은 연대는 고금古今을 통해 소상昭詳하다.
우리 태조太祖대왕이 대명大明 홍무洪武 29년 임신(1392)에 즉위한 이래 대청大淸 광서光緖 20년 갑오(1894)까지는 503년이다. 우리 세존께서는 주周나라 소왕昭王 33년 임신에 적멸을 보이신 이래 대청 광서 20년 갑오까지 2,842년이다. 그러니 금파 스님은 석가문釋迦文의 74대 법손이고 태고太古 스님의 17대 법손이며, 청허淸虛 대사의 11대 법손이고 연담蓮潭 대사의 5대 법손이다.
스님은 완호玩虎 스님의 증손 법제자이고 석호石虎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며, 인파印波·호월湖月·복암福庵·금성錦城·상운祥雲·응룡應龍·완파玩坡·석담石潭·쌍련雙蓮·동산東山·서룡瑞龍·운담雲潭 스님과는 재종再從간이 된다. 금파 스님은 무위無爲 스님의 완함阮咸5)이고 만파萬波 스님의 무착無着6)이다. 또 스님은 봉언奉彦·봉환奉煥·월현月現·봉화奉和 스님의 화상和尙 아사리阿闍梨7)이다.
월화강사전月華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인학仁學이고 호는 월화月華이며, 속성은 윤尹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달마산達摩山으로 들어가 추담秋潭 스님으로부터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영담靈潭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월화 스님은 남북으로 강당을 찾아다니며 명망 있는 승문에 몸을 던져 머물면서 교학을 배웠고, 선교禪敎의 법석을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수행했다. 삼제三際8)에 있어서 더위와 비와 추위를 피하지 않았으며, 사사四事9)에 있어서 옷·음식·약·방사房舍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인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머물렀다. 초청한 것도 아닌데 홀연히 찾아와서 우리 은사 추담 스님의 법인을 전해 받고,

010_1067_a_01L菩薩戒於梵海覺岸堂受經論於梵海
010_1067_a_02L雲谷普濟應化師之講肆受行首僧之
010_1067_a_03L高佩揔攝之印知識卓越行藏雅
010_1067_a_04L擧無過事朋有知己於公於私
010_1067_a_05L務載勤說戒度人者若干數也養育
010_1067_a_06L被恩者二三人矣嗣法年代古今昭
010_1067_a_07L我太祖大明洪武二十九年壬申
010_1067_a_08L至大淸光緖二十年甲午五百三年
010_1067_a_09L我世尊周昭王三十三年壬申示滅
010_1067_a_10L大淸光緖二十年甲午二千八百四十
010_1067_a_11L二年師釋迦文之七十四世大古之十
010_1067_a_12L七世淸虛之十一世蓮潭之五世
010_1067_a_13L虎之曾石虎之弟子與印波湖月福庵
010_1067_a_14L錦城祥雲應龍玩坡石潭雙蓮東山瑞龍
010_1067_a_15L雲潭爲再從無爲師之1) [24] 萬波師
010_1067_a_16L之無着奉彥奉煥月現奉和等之和尙
010_1067_a_17L阿闍梨

010_1067_a_18L

010_1067_a_19L月華講師傳

010_1067_a_20L
師名仁學號月華姓尹氏靈岩人
010_1067_a_21L投達摩從秋潭師薙染就靈潭師受具
010_1067_a_22L南北講堂望門投止禪敎法席從心
010_1067_a_23L所如三際不避熱雨寒四事不着衣食
010_1067_a_24L藥舍有緣則住不速請也而來受我

010_1067_b_01L우리 조사 벽해擘海 스님의 법석을 물려받았다.
강당 문을 열어 무명無明의 풀숲을 헤치고 불조의 가풍을 우러러 찾아오는 학도들을 맞아들여 가르치는 한편, 결제에 들어가 기용살활機用殺活의 화두를 참구하기도 하였다.
월화 스님은 천성이 청렴강직하고 털끝만한 잘못도 범하는 일이 없었으며 행리行履가 정밀하고 부지런하여 밤이나 낮이나 늘 작용하였다. 벽해擘海 스님과 응화應化 스님이 연 법회의 자리에 참예하였고, 침명枕溟 스님과 우담優曇 스님의 회상을 찾기도 하였으며, 범해梵海 스님과 연주蓮舟 스님의 강당에서 강론을 듣기도 하였고, 두륜산 남미륵암南彌勒庵·북미륵암北彌勒庵·만일암挽日庵·상원암上院庵·진불암眞佛庵·남암南庵에서 낱낱이 하안거 결제를 마쳤으며, 조계산 대승암大乘庵과 보조암普照庵에서도 모두 한 번씩 하안거 결제를 마쳤다.
스님은 가지산 보타補陁에 주석했고 소림少林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노년에는 주로 장춘동長春洞에서 보냈다. 산과 산은 운수행각의 도량이요 곳곳마다 공화空花 불사佛事의 도량이다. 스무 겹 큰 사찰들이 눈앞에 소삼昭森하구나. 72번 오고 가고 하였으니 그 형용形容이 마음속에 뚜렷하네.
스님은 도광道光 16년 병신(헌종 2, 1836)에 태어났으며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2, 1894)에 장춘동 첨성각瞻星閣에 살고 있는데, 나이는 59세이다.
호은강사전湖隱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축함竺函이고 호는 호은湖隱이며, 금강산 장안사長安寺 지장암地藏庵 사람이다.
스님은 본래 서울 부근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금강산으로 들어가 거주했으며 현옹玄顒 선사의 제자이다. 금강산에는 함경도·강원도·경기도·충청도 등 네다섯 도의 학인들이 폭주하여 몰려들었으니,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또한 명산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명산의 물과 돌 따위를 관람하기 위해 내왕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비단 절 이름이 장안長安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산수가 장안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경성京城을 통상 장안이라고 불렀다. 진秦나라 왕이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했는데, 네 관문의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서도西都를 일명 관중이라고 부르고, 일명 장안이라고도 하였다. 장안이라는 지명은 진나라가 천하를 통합하여 천자가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후로 수도를 통상적으로 장안이라고 부른 것이다.

010_1067_b_01L恩師秋潭之印奪我祖師擘海2) [25]
010_1067_b_02L門而迎跋草瞻風之徒結制而究機用
010_1067_b_03L殺活之話性禀廉直無毫里 [26] 之錯
010_1067_b_04L履精勤有晝夜之作叅於擘海應化之
010_1067_b_05L訪於枕溟優曇之會講於梵海蓮舟
010_1067_b_06L之堂頭輪之南北彌勒挽日上院眞佛
010_1067_b_07L南庵一一結夏曺溪之大乘普照皆結
010_1067_b_08L一夏住於伽智住於補陁長於少林
010_1067_b_09L老於長春山山雲水道場處處空花佛
010_1067_b_10L二十重大刹4) [27] 森於目前七十二
010_1067_b_11L徃復形容於心上道光十六年丙申生
010_1067_b_12L光緖二十年甲午居長春洞瞻星閣
010_1067_b_13L五十九

010_1067_b_14L

010_1067_b_15L湖隱講師傳

010_1067_b_16L
師名竺凾號湖隱金剛山長安寺地藏
010_1067_b_17L庵人師本京山人入居金剛山玄顒
010_1067_b_18L禪師弟子也咸江京淸四五道學人
010_1067_b_19L湊並臻非但人也抑亦有名山中故
010_1067_b_20L以貪名山水石來徃不絕非但寺名之
010_1067_b_21L長安也抑亦山水之長安也世人以京
010_1067_b_22L通穪長安秦王都於關中四關之
010_1067_b_23L中故西都一名關中一名長安長安
010_1067_b_24L地名以統合天下天子所居故因名

010_1067_c_01L
이 절(장안사)은 산중의 장안과 같은 곳이다. 그런즉 사람들이 모두 왕성의 장안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산중의 장안인 금강산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당나라의 이위공李衛公이름은 적績이다.이 “내 소원은 고려 오랑캐 나라에 태어나 금강산을 한 번 구경하는 것(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이라는 시를 읊었고, 해남의 은사隱士 매소梅巢 김세신金世臣은 금강산을 유람하고 『유산록遊山錄』 1권을 쓰고 그 책 이름을 ‘일견고一見藁’라고 하였다. 이는 곧 이위공의 ‘금강산을 한 번 구경했으면’ 하는 시에서 빌려다가 붙인 이름이다.
내(각안)가 일찍이 금강산 지장암地藏庵에 들어갔더니, 어떤 삼베 두건을 쓴 선비가 『화엄경』을 펼쳐 놓고 스님과 강론하고 있었다. 또 영원암靈源庵에 올라갔을 때에는 그 삼베 두건을 쓴 선비가 혼자 앉아서 불경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주지에게 물었더니 주지가 말하기를, “그 선비는 영남에서 온 선비인데 여기에 머물면서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봉우리면 봉우리, 돌이면 돌, 절이면 절, 사람이면 사람 모두가 다 별천지였고 인간의 세계가 아니었다. 일찍이 영주瀛州에 들어갔더니 산이면 산, 물이면 물, 집이면 집, 사람이면 사람 모두 다 물결 위의 건곤乾坤이요 우공의 산천이었다.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 본 자는 믿을 것이요, 보지 못한 자는 믿지 않을 것이니 “도가 같아야 바야흐로 알 수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과 벗이 서로를 볼 수 없으니, 사바세계에 거처하면 시방세계가 다 그렇게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과 같다. 소요산 대자암大慈庵에 갔을 때 마침 지나가는 소년 수좌首座가 송낙松落으로 만든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와 함께 구경을 다니게 되었는데, 사찰의 벽 위에 절구 시 한 수가 쓰여 있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逍遙山客逍遙在    소요산 나그네가 소요산에 머무니
日月逍遙水石間    해와 달도 수석水石 사이 소요하네
水石逍遙非水石    수석이 소요하면 수석이 아니니
逍遙剩得一生閒    소요함이 넘치면 일생이 한가하네

내가 이 시의 운을 따다가 시 한 수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天曉逍遙相繼住    원효元曉와 소요逍遙가 이어서 살았으며
靈泉湧出窟岩間    바위 사이에선 신령한 샘물 솟아나네
內外城門神力閇    안팎 성문을 신통의 힘으로 닫으니

010_1067_c_01L京曰長安此寺山中之如長安也然則
010_1067_c_02L人皆願見王城之長安如願見金剛之
010_1067_c_03L長安此也唐之李衛公有願生高麗
010_1067_c_04L一見金剛山之詩而海南隱士
010_1067_c_05L巢金世臣遊金剛山作遊山錄一卷
010_1067_c_06L名曰一見藁即李衛公一見金剛山之
010_1067_c_07L借作也予曾入金剛山地藏庵有一
010_1067_c_08L布巾士人展華嚴經與師講論又上
010_1067_c_09L靈源庵其布巾士人獨坐看經問其
010_1067_c_10L主人曰嶺南士人來住看經念佛云
010_1067_c_11L峯峯石石寺寺人人皆別天地非人
010_1067_c_12L間也曾入瀛州山山水水家家人人
010_1067_c_13L盡是波上乾坤5) [28] 山川對人言之
010_1067_c_14L見者信之不見者不信之同道方知
010_1067_c_15L於此可知也主主伴伴不相見若當娑
010_1067_c_16L婆處十方悉亦然之靈異也入逍遙山
010_1067_c_17L大慈庵有一過去少年首座緇衣松落
010_1067_c_18L同步觀玩壁上有一絕詩曰逍遙山客
010_1067_c_19L逍遙在日月逍遙水石間水石逍遙非
010_1067_c_20L水石逍遙剩得一生閒予次曰 [29]
010_1067_c_21L逍遙相繼住靈泉湧出窟岩間內外城
010_1067_c_22L「玩」甲本正誤表作「阮」「之」下甲本正誤
010_1067_c_23L表有「席」
「里」甲本正誤表作「釐」「胎」甲
010_1067_c_24L本正誤表作「昭」
「空」甲本正誤表作「孔」

010_1068_a_01L大悲會上萬年閒    대비大悲 회상은 만년 동안 한가하네

수좌가 말하기를, “현옹 스님은 저의 은사입니다. 지금은 서울 근교의 산에 있는 지장암에 계시고, 호은湖隱 스님은 저의 사형師兄인데 저는 지금 사형이 있는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였다. 현옹 노장은 아직도 석릉石陵에 머물면서 갑오년(1894) 여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원해강백전圓海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문주文周이고 호는 원해圓海이며, 속성은 음陰씨이고 순천 흥양興陽(고흥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조계산 송광사로 들어가 수산 원만守山圓滿 선사의 처소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입실하여 법통을 계승하니, 묵암 최눌默庵㝡訥의 4대 법손이고 보봉 맹섭寶峯孟涉의 증손 법제자이며, 계봉 기준繼峰琪俊의 손자 법제자이고 수산 원만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두륜산 범해 각안 스님의 강당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대승보살 오십팔계를 받았다.

行如雪山       수행은 마치 설산雪山동자가
再逢羅刹       나찰을 다시 만난 것과 같고
回若善射       회향은 흡사 선재동자가
再見文殊       문수보살을 다시 만난 것 같네
周遊歷盡方外事    두루 돌아다니면서 방외方外의 일을 다 겪었고
曾爲浪子偏憐客    일찍이 방랑자 되어 외롭고 가엾은 나그네 되었네
把茅盖頭開門坐    백발 노장이 되어(把茅蓋頭) 문을 열고 앉았으니
龍蛇混雜凡聖叅    용과 뱀이 섞여 있고 범부 성인 참예하네
及釋戒環釋      계환戒環의 주석서『능엄경』 주석서(楞嚴經䟽)를 다시 풀이하고
重論馬鳴論      마명馬鳴의 논서『기신론』(起信論)를 거듭 논하였네.
住對面念打床爭    면전面前에 마음을 집중하고 책상을 치며 논쟁하고
句對不同思量起    대구對句가 같지 않아 생각을 일으키네『반야경』과 『원각경』(盤若圓覺)
星羅十門破碎了    별처럼 늘어선 열 개의 문을 부수자
月滿三觀滿天明    삼관三觀에 달빛 가득하니 온 하늘이 밝구나『화엄경』(華嚴)
禪門三寶次第說    선문禪門의 세 가지 보배를 차례로 설하매
千二百則無名相    1천2백 칙則 공안, 이름도 모양도 없네『선문염송』(拈頌)
十八國師常住處    열여덟 국사 상주常住하던 곳이요
十六宗師道場續    열여섯 종사宗師가 계속해 나온 도량이네팔도 좌우를 합하여 2×8 하여 16종사이다.(八道左右合二八十六宗)
傳鈯斧入三時     돌부鈯斧를 전하고 삼매에 드니
白首阿師撫躬歎    백수아사白首阿師10)가 몸 만지며 탄식하네적멸을 보임(示寂)11)

원해 스님이 어느 어느 스님에게 수업을 받았고 어느 어느 산중에서 글을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스님의 천성은 건실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며, 어떤 일을 만나면 피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장섰다. 식사 때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먼저 먹고 나면 뒤에 먹었고

010_1068_a_01L門神力閇大悲會上萬年閒首座曰
010_1068_a_02L玄顒我之恩師在京山地藏湖隱
010_1068_a_03L之師兄今行師兄處云玄顒老尙居石
010_1068_a_04L甲午夏

010_1068_a_05L

010_1068_a_06L圓海講伯傳

010_1068_a_07L
師名文周號圓海姓陰氏順天興陽
010_1068_a_08L人也早入曺溪山松廣寺守山圓滿禪
010_1068_a_09L師處染衣入室默庵㝡訥之四世
010_1068_a_10L峯孟涉之曾孫繼峰琪俊之孫守山圓
010_1068_a_11L滿之嗣受比丘二百五十戒及大乘菩
010_1068_a_12L薩五十八戒於頭輪山梵海覺岸師講堂
010_1068_a_13L行如雪山再逢羅刹回若善射再見
010_1068_a_14L文殊周遊歷盡方外事曾爲浪子偏憐
010_1068_a_15L把茅盖頭開門坐龍蛇混雜凡聖叅
010_1068_a_16L1) [30] 釋戒環釋楞嚴
經䟽
重論馬鳴論起信
住對
010_1068_a_17L面念打床爭句對不同思量起2) [31]
圓覺

010_1068_a_18L羅十門破碎了月滿三觀滿天明

010_1068_a_19L門三寶次第說千二百則無名相

010_1068_a_20L八國師常住處十六宗師道場續八道左
右合二
010_1068_a_21L八十
六宗
傳鈯斧入三3) [32] 白首阿師撫躬歎
010_1068_a_22L
某某師處受業何何山中讀書
010_1068_a_23L性健力勤臨事不避役先衆人

010_1068_b_01L공적인 일은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은 뒤로 미루었으며, 말은 적게 하고 지혜가 뛰어났다.
보지 못했던 것을 배울 때에는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조차 잊고 탐구했으며, 참례하지 못했던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눈이나 비를 무릅쓰고 찾아가서 만나곤 했다. 일이 있어 초청하면 사양하지 않고 다 들어 주었으니 금고金鼓를 따라간 행동이 바로 이것이며, 마음에 있어서 찾아가 참례할 적에는 도반들을 물리치고 행장을 꾸렸으니 범해의 처소를 찾아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착한 일을 보고 그것을 본받아 효행으로 옮기는 것은 멀리서 스승을 생각하여 대신 연비燃臂의식을 받들기 위해서이며, 어진 일을 당하여 사양하지 않은 것은 종문의 법통을 이어서 후사를 이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남쪽 지방을 지나갈 때에 사람들이 다 원해 스님을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했으며, 서방세계 갈 때에는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면서 스님께 이별을 고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이와 같이 감동하고 흠모하게 할 수가 있었을까? 채옹蔡邕이 말하기를, “내가 비명碑銘을 많이 썼으나 모두 창피한 마음이 들더니 오직 곽유도郭有道의 비석만은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원해 스님의 전기를 쓰면서 그와 같은 심정이 든다.
경운강백전擎雲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원기元奇이고 호는 경운擎雲이며, 속성은 김金씨이고 본은 김해金海이며 영남 웅천熊川(진해)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조계산 선암사 대승암일명 남암南庵이라고 한다.의 강주이다. 함명涵溟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경붕 익운景鵬益運 스님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다. 어려서는 여러 지방을 유람하다가 자라서는 학덕으로 이름이 높았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그 또한 기쁘지 않을쏜가?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다가 발길 닿는 곳에 머물곤 했다.
글씨 보기를 좋아하여 구미에 당기면 글씨를 쓰곤 했다. 글씨를 그리 잘 쓰는 편은 아니지만, 숙세夙世에 익힌 여경餘慶이었던지 부지런히 노력한 대가로 이룬 것은 아니었다. 이는 스스로 돕는 자를 하늘이 도와서 된 것이지 가르치고 인도하여 잘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강학은 3대에 전하여 솥의 세 발처럼 자처했고 필명筆名은 일신一身만이 홀로 드러났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글씨를 쓰는 것은 형식(名)이고 문장을 익히는 것은 실속(實)이다. 그런데 형식과 실속을 모두 잘하는 이는 드물다’고 하였다.
성묘成廟(성종)가 어필로 글씨를 써서 김규金虬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예부터 문장에 능한 선비는 글씨를 잘 못쓰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문장을 잘하지 못하거늘 너는 글씨도 잘 쓰고 문장도 잘하는구나.

010_1068_b_01L後高年先公後私小言多智學所不
010_1068_b_02L忘寢食而求見禮所不叅冒雨雪
010_1068_b_03L而當叅有事召請則不辭免而聽許
010_1068_b_04L隨金鼓之行是也有心徃叅則退伴侶
010_1068_b_05L而治行尋梵海之居是也見善移孝
010_1068_b_06L遙思師而代受火當仁不讓宗嗣師而
010_1068_b_07L預繼後過去南方人皆願欲師一見
010_1068_b_08L徃生西土人皆泣欲師一別何令人之
010_1068_b_09L感慕如此哉蔡▼(艹/邕)曰吾爲碑銘多矣
010_1068_b_10L皆有慚色惟郭有道碑無慚色耳
010_1068_b_11L海傳近理乎

010_1068_b_12L

010_1068_b_13L擎雲講伯傳

010_1068_b_14L
師名元奇號擎雲俗姓金氏本金海
010_1068_b_15L嶺南熊川人也曺溪山仙岩寺大乘庵
010_1068_b_16L一称
南庵
講主也涵溟之孫景鵬益運之嗣
010_1068_b_17L幼而遊方長而高名學而時習之
010_1068_b_18L亦悅乎從心所如湊州則居觀筆所
010_1068_b_19L着味則書夙世餘慶非勤力之所
010_1068_b_20L自天祐之非敎導之所能講傳三
010_1068_b_21L世鼎居筆名一身獨露人之言曰
010_1068_b_22L寫名也文章實也名實并持者小也
010_1068_b_23L成廟御筆書紙賜金虬曰自古能4) [33]
010_1068_b_24L士不能書能書之人不能文爾能文又

010_1068_c_01L너의 문장을 보면 네 아버지의 문체를 닮았고 네 글씨를 보면 네 아비 동료의 글씨체와 흡사하니 부모에 대한 효심을 옮겨 나라에 충성을 다하라.”라고 하였다. 이때 김규의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옛날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였다면 자우子羽 같은 인물자우는 담대멸명澹臺滅明을 잃을 뻔했다.”라고 했다. 말하자면 문장과 글씨 두 가지 다 갖춘 사람은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스님은 둘 다 잘하였으니, ‘으뜸이며 기이한 인물(元奇)’이라는 법명을 가진 것은 미리 예언하여 붙여진 이름처럼 자연스럽다.
정해년(고종 24, 1887) 봄에 서울에 사는 거사 안기선安箕仙이 찾아와서 같이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지내는 재齋에서 경전을 서사書寫하였는데 원기 스님이 최고의 명필로 인정받았고 그 나머지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뒤처졌다.”라고 하였다. 안安은 나를 위해 글씨 1편을 써 주었는데 글씨를 참 잘 썼다. 원기 스님은 문장과 글씨 둘 다 잘하는 스님이다.
응운강백전應雲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성능性能이고 호는 응운應雲이며, 장성 백양산 정토사淨土寺(백양사) 강원의 학인이다. 한양 용주漢陽龍珠 스님의 처소에 입실하여 법통을 이으니, 양악羊岳의 4대 법손이고 덕운德雲의 법손이며 보경寶鏡과는 동문 법형제가 된다.
스님은 영구산靈龜山·조계산·지리산의 강원 강주들을 찾아다니면서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도 공부하는 데 몰입하였다. 강론의 향기를 맡고 산 기운에 취하며, 산봉우리를 감상하고 흰 구름을 읊으면서 정토사로 돌아왔다. 정토사에 돌아와 지혜의 향을 피우고 강당에 앉아서 경전을 가지고 의문 가는 부분을 묻기 위해 오고가는 학인들을 맞아 강론을 펼쳤다. 사방에 걸림이 없고 바람을 관찰하는 무리들도 물이 바다로 돌아가고 구름이 모여들듯 밀려들었다.
강당에서는 해조음海潮音으로 떠들썩했고 부엌은 정갈한 음식이 풍성하였으며, 행자는 돌을 지고 디딜방아 밟아 대고 소공小空은 땔나무를 해 오며 물을 길었다. 한 번 선다파仙茶婆를 부르니 사실四實이 구족하고 세 번 옴唵·아啊·훔▼(口+件)을 송誦하니 삼륜三輪이 성취된다. 사교四敎가 드러나고 일승一乘이 원만하게 밝아졌다.
문자에 깊이 들어가 다시 공적空寂을 이야기하고

010_1068_c_01L能筆見爾文放爾父見爾書放爾父之
010_1068_c_02L同僚其移孝于忠時年十三也
010_1068_c_03L以貌取人失之子羽5) [34] 臺滅
明字
文筆
010_1068_c_04L俱備者其稀也師能得之元奇自然
010_1068_c_05L之讖名也丁亥春京居士人安箕仙
010_1068_c_06L來同宿言國齋書經元奇爲首筆
010_1068_c_07L募聚人皆殿爲我書一篇善書
010_1068_c_08L師乃文筆6) [35]

010_1068_c_09L

010_1068_c_10L應雲講伯傳

010_1068_c_11L
師名性能號應雲長城白羊山淨土寺
010_1068_c_12L講學人入室於漢陽堂龍珠師處羊岳
010_1068_c_13L之四世德運之孫與寶鏡同門兄弟
010_1068_c_14L遊於靈龜山曺溪山智異山講諸主處
010_1068_c_15L沒受內外經典臭講香醉山氣玩巒
010_1068_c_16L唱白雲而歸 ▼(蓻/火)香慧而坐帶經問疑之
010_1068_c_17L來之去之通方觀風之徒水歸雲
010_1068_c_18L堂聒潮音厨豊淨食行者負石踏
010_1068_c_19L小空覔7) [36] 擔泉一呼仙茶婆四實
010_1068_c_20L具足三誦唵啊𠲟三輪成就四敎弄
010_1068_c_21L一乘圓明深入文字還談空寂
010_1068_c_22L「及」作「反」{甲}「盤」甲本正誤表作「般」
010_1068_c_23L「時」甲本正誤表作「昧」「文」下甲本正誤
010_1068_c_24L表有「之」
「澹」甲本正誤表曰當細書甲本
010_1068_c_25L正誤表曰兼下缺
「大」甲本正誤表作「火」

010_1069_a_01L정신을 가다듬어 네거리(康莊, 사통팔달의 큰 길)를 두루 돌아다녔다. 일천 마을 일만 가호家戶를 찾아다니며 청동靑銅과 백미白米를 모아 보경寶鏡 스님은 입암笠岩을 중건했고 덕송德松 스님은 약사전을 세웠다. 금해錦海 스님은 선방을 새로 열어 참선과 교학을 함께 운행하였고, 응운應雲 스님은 운문암雲門庵을 중흥시켜 강론과 독송을 아울러 정립하였다.
신선은 양羊을 타고 오르내리고 산은 허공을 능멸하며 푸르렀다 희었다 한다. 각진覺眞 국사는 뒤에서 먼지를 밟으면서 강림하였고 백파白坡 율사는 앞서 간 발꿈치를 이어서 찬양하였다.
백양산에 구름 걷히매 하늘가 산봉우리 고수高壽를 드리고 한강 물 거울처럼 열리매 파도 밑 어룡魚龍이 여주驪珠를 바친다. 용상龍象 대덕 끊이지 않고 문장文章들도 맑은 이름 떨쳤다. 인걸人傑은 간간이 나타나서 절의 풍속 길이 이어진다. 맑은 연못(鏡潭)에는 연꽃이 피어나고 소나무 아래 암자(松庵)엔 군자가 쉰다. 꽃 핀 연못(華潭)엔 산 그림자 비추고 비단 같은 바다(錦海)엔 신선이 떠가네. 이것은 모두 용운 스님의 동서東西에 사는 벗들이고 학문하는 바다의 옛 친구들이다. 인근 사람들과 일을 같이 하니 제각각 말할 수 없다. 뭉뚱그려 한꺼번에 보라.
구연강백전九淵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법선法宣이고 호는 구연九淵이며, 승주昇州(순천)의 옛 길상사吉祥寺(송광사) 강주이다. 속성은 박朴씨이고 순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용운龍雲(1813∼1888) 선백의 법통을 이었으니, 응해 성홍應海晟弘과 한운 한오漢雲漢悟와는 법형제가 되며, 법해 봉주法海琫注는 법문의 조카이다.
일찍이 지혜를 갖추었으며 어릴 적에 이미 세속의 전적을 모두 읽었다. 머리를 깎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스승을 찾아 강론을 들었다. 스님이 찾은 산문은 지리산·조계산·백양산이고 배알한 사람은 침공枕公·백공白公·경사慶師·응사應師였으며, 벗은 삼남三南의 눈 푸른 학인들로 미래의 종장宗長들이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서 동쪽에 갔다 서쪽에 갔다 하다가 백발노인이 되어서 향을 사르고 임금의 축수를 기원하니, 무명의 숲을 헤치고 불조의 가풍을 우러러 찾아오는 스님들이 곡절曲折을 묻지 않고 찾아왔으며, 일대사를 깨닫고 귀숙歸宿할 곳을 찾은 사람들이 도연徒然히 신을 신고 가버린다. 그리하여 홀방笏房은 오히려 좁아터지고

010_1069_a_01L擻精神周遊康莊過千村萬家募靑
010_1069_a_02L銅白米寶鏡重笠岩德松建藥師
010_1069_a_03L海新開禪房禪敎雙運應雲重興雲門
010_1069_a_04L講誦並立仙騎羊而陞降山凌虛而靑
010_1069_a_05L覺眞國1) [37] 後塵而降臨白坡律師
010_1069_a_06L繼前武而贊揚雲收羊山天邊峯2) [38]
010_1069_a_07L獻高壽鏡開漢水波底魚龍呈驪珠
010_1069_a_08L龍象蹴踏文章淸振人傑3) [39] 寺風
010_1069_a_09L長吹鏡潭蓮花開4) [40] 君子休華潭映
010_1069_a_10L山照錦海仙舟泛此皆應雲之東西得
010_1069_a_11L黌海古友隣近同事不可各說
010_1069_a_12L5) [41] 同一覽

010_1069_a_13L

010_1069_a_14L九淵講伯傳

010_1069_a_15L
師名法宣號九淵昇州古吉祥寺講主
010_1069_a_16L俗姓朴氏順天人也嗣法於龍雲
010_1069_a_17L禪伯應海晟弘漢雲漢悟爲法兄弟
010_1069_a_18L法海琫注爲法門之阿咸夙具智慧
010_1069_a_19L幼閱世典削髮改衣尋師臭講山則
010_1069_a_20L智異曺溪龜山羊山人則枕公白公慶
010_1069_a_21L師應師友則三南靑眼未來宗長
010_1069_a_22L心所如之東之西把茅盖頭拈香祝
010_1069_a_23L跋草瞻風之師不問曲折而至
010_1069_a_24L事歸宿之人徒然納履而去笏房猶

010_1069_b_01L쇠문지방도 저절로 닳을 지경이었다. 초옥草屋에 물러나 시홀방장十笏方丈12)에서 졸고 있다.
벽련선사전碧蓮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인성仁性이고 호는 벽련碧蓮이며, 순천 조계산 송광사의 대사이다. 속성은 장張씨이고 순천군 월등면 주동珠洞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스님은 지봉 지안智峯之安 선사의 계단에서 법인을 받았다. 지봉은 성월 서유聖月瑞薷의 법을 이은 제자이니 벽련 스님은 응암應庵의 5대 법손이다.
스님이 사는 절은 십팔공十八公13)이 배출된다고 하는 옛 가람이요, 16종사가 계셨던 큰 도량이다. 법인은 바다에 그림자 드리우고(影海) 가을은 단풍 드는 바위에 미친다(楓岩). 침묵으로 대응하여 말이 없으니 삼한의 옛 산천에 사자후獅子吼를 떨치며, 향기 어린 백벽白碧이 동방의 크고 작은 사람과 신들에게 장광설長廣舌을 편다. 성월聖月은 더욱 밝으며 지봉智鋒은 빼어남을 다툰다. 벽련碧蓮에 이르러 실상實相의 묘법妙法을 머금었고 인과의 큰 법을 선설한다. 법제자도 있고 법손도 있으니, 그 이름 금명錦溟이로다. 학업의 땅에 그 이름 알려졌고 명성이 강당에 퍼지니, 스님은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 있다.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갔구나.”라고 말할 만하다.
나(범해)는 금명 스님의 노스님(벽련 선사)을 보지는 못했지만, 금명 스님의 훌륭한 됨됨이는 보았도다.
법해강백전法海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봉주琫注이고 호는 법해法海이며, 옛 송광산 수선사修禪社의 강사이다. 속성은 김씨이고 낙천洛川 고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한운 한오漢雲漢悟 선사의 처소에서 은혜를 받아 은사로 모셨고 뒷날 법인까지 전해 받았다. 법해 스님은 한운 스님의 이름난 제자 중에 한 사람이다.
이름 있는 종사宗師들을 찾아다니며 참례하고 내서內書(불경)는 물론 외서外書까지도 두루 배웠다. 이름난 산이면 반드시 찾아갔고 훌륭한 인물이면 기어이 방문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 동방의 산과 물을 보고 마시지 않은 곳이 없고 총림의 석덕碩德치고 훈습薰習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스님의 성품은 본래 영걸英傑하고 호탕하였으며, 게다가 밝고 깨끗함마저 지니고 있었으며,

010_1069_b_01L鐵閾自甐退隱草屋坐睡十笏

010_1069_b_02L

010_1069_b_03L碧蓮禪師傳

010_1069_b_04L
師名仁性號碧蓮順天曺溪山松廣寺
010_1069_b_05L大師也姓張氏順天郡月登面珠洞人
010_1069_b_06L受法印於智峰之安禪師之壇智峯
010_1069_b_07L聖月瑞薷之弟子應庵之五世寺乃
010_1069_b_08L十八公之古伽藍十六宗之大道場
010_1069_b_09L印影海秋及楓岩默應無言振獅子
010_1069_b_10L吼於韓之古園山川白碧有香覆廣長
010_1069_b_11L舌於東之大小人神聖月尤明智鋒爭
010_1069_b_12L至於碧蓮含實相之6) [42] 宣因果
010_1069_b_13L7) [43] 大典有子8)有孫 [44] 曰錦溟9) [45]
010_1069_b_14L在學地聲聞講堂師可謂展脚而睡
010_1069_b_15L吾道東矣哉吾不見師祖吾見錦溟之
010_1069_b_16L爲人可人哉

010_1069_b_17L

010_1069_b_18L法海講伯傳

010_1069_b_19L
師名琫注號法海古松廣山修禪社講
010_1069_b_20L俗姓金氏洛川人也受恩受印於
010_1069_b_21L漢雲漢悟禪師處漢雲師之高弟遊叅
010_1069_b_22L有名宗師講學內外書籍山之名必至
010_1069_b_23L人之眞必訪東方山水無不見飮
010_1069_b_24L林碩德無不熏矣性本傑浩曠盪之餘

010_1069_c_01L다시 웅호雄豪하고 투철한 기개까지 충만하였다. 기운은 산 형세처럼 솟아났고 말은 흐르는 물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연꽃에 향기 어리고 매실이 익자 스승의 강석과 법인을 물려받아 사자좌에 올라 사자후를 토해 내니 귀머거리 말을 듣고 봉사가 눈을 뜨듯 듣는 이에게 새로움을 열어 주었다. 강당 문을 열고 학인들을 영접하니 날마다 쉴 겨를이 없었으며, 자리에 올라 질문에 응해 답하니 그 곁엔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달을 대하여 시를 읊고 문장에는 수정을 가하는 일이 없었다.
남쪽으로 두륜산을 유람하다가 만일암挽日庵 삼보단三寶壇 앞에서 보살계를 받고, 북쪽으로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보조암普照庵 세 가닥 서까래 아래14)에서 깨달음의 언덕(覺岸)을 보았다. 그 후에 교학을 버리고 선방에 들어가 명패名牌를 걸고 공空의 실상을 증명하기 위하여 온갖 인연을 모두 쓸어버리고 오직 ‘하나의 참된 것’만 취했다.
나이가 높아지고 승랍이 길어지니 육신은 마른 나무 같고 마음은 꺼진 재와 같았다.
청담선사전淸潭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이현理玄이고 호는 청담淸潭이며, 속성은 원元씨이고 남평南平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운흥사雲興寺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곳저곳 마음 내키는 대로 찾아다니며 명패를 걸었다 거두곤 하였다. 두륜산에 가서 문암聞庵·용연龍淵·운기雲起 스님에게 학문을 익혔고, 이어 달마산의 응화應化·영허靈虛 스님과 조계산의 침명枕溟·청공靑空 스님들로부터 각각 가르침을 받았다.
스님은 깃발을 세우고 향을 사르고 스승으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다.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기 위하여 선암사로 옮겨 늙어 죽을 때까지의 계획을 정하였다. 책궤와 의발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일곱 근 장삼(七斤衫)15)과 여섯 수 옷(六銖衣)16)만 가지고 산수를 두루 유람하면서 선교禪敎의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은 마치 기러기 털이 순풍順風에 날리듯 거리낌이 없었으니, 이러한 선사의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며 그 형세를 막을 수 없었다.
스님은 말을 어둔한 것처럼 조심성 있게 하였고 성품은 느릿느릿 신중하게 하였다. 재를 올리는 자리를 만나면 옛 법을 설하고 시 읊는 자리에 가면 맑은 시로 화답하였으며 글씨를 쓰는 자리에 가면 전서篆書와 예서隷書를 쓰곤 했다. 붓글씨는 초의草衣에게서 익혔고 설법은 환월喚月 스님으로부터 배웠으며 율律은 선곡禪谷 스님에게 익혔다.

010_1069_c_01L更充雄豪透徹之氣氣踴山勢言出川
010_1069_c_02L蓮香梅熟傳斧封印據猊震吼
010_1069_c_03L聾若盲開門迎接日不暇給登座酹
010_1069_c_04L傍若無人對月唱和文不加點
010_1069_c_05L遊頭輪受菩薩位於挽日三寶壇前
010_1069_c_06L歸吉祥見覺岸形於普照三條椽下
010_1069_c_07L敎入禪房掛牌證空都掃萬緣惟取
010_1069_c_08L一眞年高臘長形枯心灰

010_1069_c_09L

010_1069_c_10L淸潭禪師傳

010_1069_c_11L
師名理玄號淸潭姓元氏南平人
010_1069_c_12L雲興寺薙髮染衣從心所如掛牌收
010_1069_c_13L學於頭輪山之聞庵龍淵雲起達摩
010_1069_c_14L山之應化靈虛曺溪山之枕溟靑空
010_1069_c_15L幢拈香捨舊從新移立於仙岩定終
010_1069_c_16L老之計傳櫝托衣七斤彩 [46] 六銖衣
010_1069_c_17L覽山水徧叅禪敎飄飄然若鴻毛遇
010_1069_c_18L順風志不可奪勢不可遏口訥訥
010_1069_c_19L遲遲逢齋說古法遇吟和淸韻見斫
010_1069_c_20L書篆隷筆師草衣說紹喚月律依禪
010_1069_c_21L「師」下甲本正誤表有「躡」「立」甲本正誤
010_1069_c_22L表作「岳」
「問」甲本正誤表作「間」「松」下
010_1069_c_23L甲本正誤表有「庵」
「電」甲本正誤表作「雷」
010_1069_c_24L「好」疑「妙」{編}「之」疑衍字{編}「有孫」作
010_1069_c_25L「孫有」{甲}
「曰」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70_a_01L
연대蓮坮에 머물기도 하였고 운흥사雲興寺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대둔사에 살기도 했고 선암사로 옮기기도 하였다. 마치 대붕大鵬이 거처를 옮겨 날아가고 기러기가 북쪽으로 돌아가며 제비가 찾아오는 것처럼 천성이 한곳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음풍영월吟風咏月을 좋아하였다. 호연浩然하여 생각도 없고 근심하는 것도 없는 듯하였다.
예암선사전禮庵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광준廣俊이고 호는 예암禮庵이며, 속성은 최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 두륜산으로 들어가 포운浦雲 스님의 회상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만휴萬休 스님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은사의 문하에서 법인을 전해 받았으며, 범해梵海 스님에게서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범해 스님·응화應化 스님·보제普濟 스님·운곡雲谷 스님의 처소를 찾아다니며 경학을 공부하였다. 수승의 소임을 맡아보았고 총섭의 직첩을 받았으며, 자헌대부의 교지를 받기도 하였다.
스님은 전신이 장대長大하고 외재外財가 넉넉하였으며, 사찰 안의 일을 꾸려나감에 있어서도 남에게 원한을 사는 일이 없었다. 몸은 육중하고 말은 신중하였으며, 대인大人의 행리行履가 보이는 인물이었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는 신용이 있었고 모든 일에 대하여 신중하게 하고 경솔하게 처리하는 일이 없었으며, 선조들을 받들 때에는 예절 바르게 하였다.
예암 스님은 연담 스님의 4대 법손이고 은암銀岩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재민在敏·재윤在允·재호在浩 등 15명이 있고, 법인을 전해 받은 제자는 육파六波·기운奇雲 등 23명이 있다.
스님은 도광道光 14년 갑오(순조 34, 1834)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 (고종 31, 1894)에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61세였다. 대둔사 명적암明寂庵 명조전明祖殿에 머물러 계셨다.
운담선사전雲潭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희영喜永이고 호는 운담雲潭이다. 백하 근학白荷謹學 선사의 선실에 들어가 입실 제자가 되었다. 백하 스님은 망해 지일望海知一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망해 스님은 정암 즉원晶岩卽圓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운담 스님은 하담 찬홍荷潭贊弘 스님과 동문 형제지간이다. 하담 스님의 속성은

010_1070_a_01L住蓮坮住雲興居大芚移仙岩
010_1070_a_02L若鵬之1) [47] 鴈之歸燕之來性不常住
010_1070_a_03L好吟風咏月浩然若無思無慮然也

010_1070_a_04L

010_1070_a_05L禮庵禪師傳

010_1070_a_06L
師名廣俊號禮庵姓崔氏靈岩人
010_1070_a_07L入頭輪山染衣於浦雲師室受具於萬
010_1070_a_08L休師壇受法印於恩師席受大乘菩薩
010_1070_a_09L戒於梵海師重遊學於梵海師應化師
010_1070_a_10L普濟師雲谷師處行首僧之役贈揔攝
010_1070_a_11L之帖贈資憲大夫敎旨全身長大
010_1070_a_12L財有餘用舍之間無寃於人軆重語
010_1070_a_13L有大人之行履處與人交而有信
010_1070_a_14L凡於事有重不輕奉先有禮蓮潭之
010_1070_a_15L四世銀岩之孫受戒者在敏在允在
010_1070_a_16L浩等十五人受法印者六波奇雲等二
010_1070_a_17L三人道光十四年甲午生光緖二十年
010_1070_a_18L甲午寂年六十一居大芚寺之明寂明
010_1070_a_19L祖殿

010_1070_a_20L

010_1070_a_21L雲潭禪師傳

010_1070_a_22L
師名喜永號雲潭入室於白荷謹學禪
010_1070_a_23L師室白荷望海知一之嗣望海晶岩
010_1070_a_24L即圓之嗣與荷潭贊弘同門兄弟

010_1070_b_01L추秋씨이고, 그의 제자 서봉瑞峯 스님의 속성도 추씨이다. 지금은 청해淸海 관음암觀音庵에 살고 있는데 그 전에는 정수사淨水寺에 살았다.
세월이 흘러 말법 시대가 되어 절은 피폐해지고 승려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아 절에는 절의 가풍이 없어졌고 승려에겐 승려가 해야 할 일이 사라졌다. 좋지 않은 일들만 계속해서 일어나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스님은 이 어려운 일들을 잘 감당해 나갔다.
동쪽이 무너지고 서쪽 벽만 남아 있는 상태였으나 이 일을 처리해야 할 자리에 앉아서 일처리를 하느라 온종일 겨를이 없었다. 성품이 본래 순박하고 마음과 입이 무겁고 신중하였다. 스님은 한편으로는 일을 좋게 처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한편으로는 선대 스님들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애를 썼다. 사람이 죽으면 산문도 절도 황폐화되고 마니 인재가 죽고 난 뒤에 어려움을 알 만하다.
계를 받고 법을 전한 사람을 다 논할 수 없지만, 제자 중에 으뜸인 찬일贊一 스님이 뒤를 이어 업적을 쌓아 나갔다.
자신의 일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사찰의 일과 조사의 사당에 예를 올리는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옛 법도에 맞게 하였으며, 이리저리 버티어서 겨우 지탱해 가면서도 법도를 잃지 않았다. 바람으로 빗을 삼아 머리를 빗고 빗물로 머리를 감으면서 가서 구원하고, 와서 보수하였다. 원통함을 말하는 자가 많았지만 다 듣지 않고, 주선하기도 하고 끊어버리기도 하였다. 다른 이들이 맨발로 뛰어도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용월선사전龍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경언敬彦이고 호는 용월龍月이며, 나주 덕룡산 쌍계사雙溪寺 사람이다.
재능과 지식이 남음이 있어 기예를 배우기 위해 따르는 이가 많았다. 스님은 어려서는 내외의 전적을 두루 배우고 장성해서는 크고 작은 기술을 다 익혀 성취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니, 이른바 재능과 기술을 모두 겸하여 갖추었다고 하겠다. 스님의 재주 중에는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 선비들의 옷을 지음에 있어서 크고 작은 사람에 따라 재단하여 옷을 만들면 맞지 않는 법이 없었으며, 법의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품品이나 조條, 크고 작고 길고 짧음에 있어서 소밀踈密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무리를 지어 그 재능을 배우려고 귀를 기울이고 신을 고쳐 신으면서 따르는 이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스님은 나무를 다루는 목공 일에도 조예가 깊었다. 스님은 기와집을 지음에 있어서 높낮이와 길이와 너비 등을 재어 짓고 싶은 집을 지었다. 완성되고 나서 살펴보면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것같이 아름답고 훌륭하였다. 멀리서 보면 사자가 걸음을 옮겨 놓는 것 같았고, 가까이서 보면 봉황의 머리와 원앙의 무늬처럼 아름다웠고 하늘을 가리고 땅을 누르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스님의 건축법과 목공 일을 배우려고 도구를 메고 자를 끌면서

010_1070_b_01L姓秋氏弟子瑞峯姓秋氏今居淸
010_1070_b_02L海觀音庵 [48] 居淨水寺世降俗末
010_1070_b_03L敗僧殘寺無寺風僧無僧事弊邊疊
010_1070_b_04L站時難耐師能當之東破西2) [49]
010_1070_b_05L坐防行處日不暇給性元淳朴心口
010_1070_b_06L默重一以善處之力一以誕報廟之德
010_1070_b_07L人之云亡寺山殄瘁人亡則難可知矣
010_1070_b_08L受戒傳法之人卒不可論而元弟子贊
010_1070_b_09L一繼績自己事不可暇而寺事廟禮
010_1070_b_10L一準古道左枝右梧不失䂓貌櫛風沐
010_1070_b_11L去救來補稱寃者多而不聽周旋
010_1070_b_12L折旋而補合之人非脫足及者也

010_1070_b_13L

010_1070_b_14L龍月禪師傳

010_1070_b_15L
師名敬彥號龍月羅州德龍山雙溪寺
010_1070_b_16L才知有餘隨從斅藝者衆矣幼學
010_1070_b_17L內外典籍長習大小巧工無不成就
010_1070_b_18L可謂兼并才工也最能針線之工儒服
010_1070_b_19L法制隨大小裁作無不允叶諦當佛
010_1070_b_20L衣品條大小長短無不踈密適中儕
010_1070_b_21L受業者傾耳納履而從者數不可
010_1070_b_22L又能掄木之匠瓦家制度高低長
010_1070_b_23L從心所欲翬飛鳥革遠見而獅子
010_1070_b_24L移步近見而鳳頭鴦畦蔽天壓地

010_1070_c_01L따르는 자들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스님은 얼마 뒤에 장흥 보림사寶林寺로 옮겨 주석했는데, 재능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저 도림사道林寺의 백련白蓮 스님법명은 영해影海이다., 송광사松廣寺의 백순白淳 스님, 선암사仙岩寺의 상문尙文 스님, 보림사寶林寺의 대윤大允 스님법명은 도안到岸이다., 대둔사大芚寺의 책오策悟 스님 등은 다 예전 장석匠石(장인)의 부류들이다.
관음암觀音庵의 혜원蕙元 스님호는 송파松坡, 보림사의 교화敎化 스님호는 도월道月, 송광사의 취선就善 스님호는 운파雲坡, 불호사佛護寺의 ▣▣17) 스님호는 신월信月, 대둔사의 교율敎律 스님호는 남파南坡 등은 모두 다 옛적 아난阿難과 같은 벗18)들이다.
미황사美黃寺의 진일眞一 스님호는 창월蒼月, 대둔사의 보한普閒 스님, 만덕사萬德寺의 보인普印 스님, 보림사의 행준幸俊 스님은 모두 다 옛날 계환戒環 같은 무리19)들이다.
용월 스님에게는 이러한 세 가지의 재주가 있었으니, 어찌 한 세대에 큰 이름을 떨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학三學계·정·혜를 말한다.이 전해질지 전해지지 못할지는 이로 인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응강백전圓應講伯傳
스님의 이름은 계정戒定이고 호는 원응圓應이며, 속성은 이李씨이고 해남 녹산방鹿山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려서 장춘동長春洞에 들어가 동화東化 스님에게서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영호 율간靈湖栗間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보제普濟 강백講伯에게서 보살계를 받고 동화 은사恩師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기 짝이 없었고 자라서는 지해知解가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었다. 글에 임하면 눈이 지나치기만 해도 줄줄 외웠고 그림을 모사하는데 종이만 바뀌었지 그림은 똑같았다.
보제普濟·범해梵海·연주蓮舟·응화應化·월화月華 등 5대 강사에게 참학하였고, 성호誠浩·보정寶鼎·찬의贊儀·원기元奇·화일化一·기운奇雲·세영世英 등 일곱 분의 고명한 벗과 우애가 깊었다.
영남과 호남을 전전하면서 경전을 강론하였고 시를 지어 산야山野를 찬미하기도 하였다. 비록 남복南服20)에 있으나 북관北關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 스님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만을 품지 않으니 이 또한 참다운 불제자가 아니겠는가? 예부터 지금까지 소은小隱을 귀히 여겼다.

010_1070_c_01L器曳尺而隨者其儷不3) [50] 尋移寶林
010_1070_c_02L以才鳴於世彼道林之白蓮
松廣之
010_1070_c_03L白淳仙岩之尙文寶林之大允

010_1070_c_04L芚之策悟皆古匠石之類觀音之蕙元
010_1070_c_05L
寶林之敎化
松廣之就善
佛護
010_1070_c_06L之□□
大芚之敎律
皆古阿難之
010_1070_c_07L美黃之眞一
大芚之普閒萬德之
010_1070_c_08L普印寶林之幸俊皆古戒環之等也
010_1070_c_09L此三才豈不大名於一世哉三學定慧

010_1070_c_10L之傳不傳因此可覺也哉

010_1070_c_11L

010_1070_c_12L圓應講伯傳

010_1070_c_13L
師名戒定號圓應姓許氏海南鹿山
010_1070_c_14L坊人幼入長春洞染衣於東化師
010_1070_c_15L具於靈湖栗間禪師受菩薩戒於普濟
010_1070_c_16L講伯拈香於東化恩師幼而頴悟絕倫
010_1070_c_17L長而知解超等臨文過目成誦摹畫移
010_1070_c_18L紙同本叅於普濟梵海蓮舟應化月華
010_1070_c_19L五大講師友於誠浩寶鼎贊儀元奇化
010_1070_c_20L一奇雲世英七處高朋經轉嶺湖詩贊
010_1070_c_21L山野雖在南服不愧北關以人不知
010_1070_c_22L而不慍不亦佛子乎自古及今小隱
010_1070_c_23L「▼(彳+歩)」甲本正誤表作「徙」「壁」作「避」{甲}
010_1070_c_24L「意」甲本正誤表作「億」

010_1071_a_01L
옛날 장구령張九齡21)은 주애珠涯22)에서 태어났고 소동파蘇東坡는 미주眉州에서 태어났으며, 강홍엽康弘曄은 제주에서 태어났고 장보고張保皐는 청해에서 태어났으며, 유미암柳眉岩(柳希春)과 윤고산尹孤山(尹善道)은 해남에서 태어났다. 난초가 재앙을 만나면 혜초蕙草가 탄식하고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가 기뻐한다.
옛날 사람들은 뒷세상의 사람들을 위해서 문자의 사이에 온 정성을 다 기울였건만 뒷세상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도 못하고 힘쓰지도 않으니, 먼저 깨달은 사람이 후세 사람들을 깨우치는 도리에 부합하지 못한다.
우리 동국의 일로 살펴보면, 원효 대사의 『화엄경소』·『금강삼매경소』·『발심문』, 의상 대사의 『화엄약소華嚴略䟽』·『산수기山水記』·『법성게』, 도선국사의 『음양지리서』, 대각 국사의 『화엄』, 보조 국사의 『결사문』·『계초심학인문』, 진각 국사의 『염송』30편·『강요綱要』1권, 진정 국사의 『선문보장록』3권·『선문강요禪門綱要』1권, 부암浮菴 스님의 『석가여래행적송』2권, 함허涵虛 스님의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2본, 구곡龜谷 스님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10권, 야운野雲 스님의 『자경문自警文』, 청허 대사의 『선문귀감禪門龜鑑』·『선교석』·『운수단가사雲水壇歌辭』·『삼가일지三家一指』, 송파松坡 스님의 『해의解疑』, 허백虛白 스님의 『승가예의문僧家禮義文』, 회암 스님의 『화엄소과기華嚴䟽科記』, 연담 스님의 『화엄유망기華嚴遺忘記』5권·『현담사기玄談私記』2권·『사집수기四集手記』각 1권·『기신사족起信蛇足』1권·『금강하목金剛鰕目』1권·『원각사기圓覺私記』1권·『염송착병拈頌着柄』2권, 나암懶庵 스님의 『증관문證觀文』1권, 묵암黙庵 스님의 『화엄품목華嚴品目』1권·『회요會要』1권, 백파白坡 스님의 『작법귀감作法龜鑑』2권·『선문수경禪門手鏡』1권·『사교사기四敎私記』, 양악羊岳 스님의 『고문진보사기古文眞寶私記』1권, 구연九淵 스님의 『통감요해通鑑要解』2권, 초의 스님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1권, 우담優曇 스님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1권, 설두雪竇 스님의 『해정록楷正錄』1권, 범해梵海 스님의 『삼경과유교평三經科遺敎評』1권·『치문필담緇門筆談』1권

010_1071_a_01L爲貴昔張九齡生珠涯蘇東坡生眉州
010_1071_a_02L康弘曄生濟州張保皐生淸梅柳眉岩
010_1071_a_03L尹孤山生海南蘭灾而蕙歎之松茂而
010_1071_a_04L栢悅之古之人爲後人拳拳懇懇於
010_1071_a_05L文字之間後人不覺不務甚非所以先
010_1071_a_06L覺覺後覺之道也以我東見之則元曉
010_1071_a_07L華嚴䟽三昧䟽發心文義湘華嚴略䟽
010_1071_a_08L山水記法性偈道詵陰陽地理書大覺
010_1071_a_09L華嚴普照結社文初心文眞覺拈頌三十

010_1071_a_10L綱要
眞靜寶藏錄
禪門綱要

010_1071_a_11L釋迦行蹟
涵虛金剛說1) [51]

010_1071_a_12L拈頌說話
野雲自警文淸虛禪門
010_1071_a_13L龜鑑禪敎釋雲水壇三家一指松坡
010_1071_a_14L虛白僧家禮晦庵華嚴䟽科記蓮潭
010_1071_a_15L華嚴遺忘記
玄談私記
四集手記
010_1071_a_16L各一
起信2)▼(虫+(枕-木)) [52]
金剛鰕目
圓覺私
010_1071_a_17L
諸經要會
拈頌着3) [53]
懶庵
010_1071_a_18L觀文
默庵華嚴品目
會要
白坡
010_1071_a_19L龜鑑
禪文手鏡
四敎私記羊岳
010_1071_a_20L文私記
九淵通鑑要解
草衣四辯
010_1071_a_21L漫語
優曇禪門證正錄
雪竇楷正
010_1071_a_22L
梵海三經科遺敎評
緇門筆談

010_1071_b_01L이 모든 저술은 강의를 하는 사람들의 안목이니 그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사서삼경은 주자朱子의 집주集註로 안목을 삼고 훈해訓解로 지남指南을 삼고 있으니, 유교와 불교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스님은 화악 문신華岳文信 스님의 8대 법손이고 명진 재엄明眞再嚴 스님의 5대 법손이며, 용파 영훤龍坡永烜 스님의 3대 법손이다. 함풍咸豊 6년 병진(1856)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1894)에 세속 나이 39세로 심적암深寂庵 강당에 있다.
호연선사전浩然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유우有愚이고 호는 호연浩然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청해 장자리長者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달마산에 들어가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두륜산으로 옮겨 가서 금담 새권錦潭璽卷 스님해남 용정龍井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의 계단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니, 화악華岳(文信) 스님해남 화산華山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의 4대 법손이고, 진봉珍峰(深祐) 스님해남 이도방二道坊 진산리珍山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의 2대 법손이며, 금담 양옥金潭養玉 스님용정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과는 동문 형제가 된다.
금담 스님에게 두 명의 제자가 있었으니, 하나는 설암說庵 스님법명은 여홍汝弘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삼담 의연三潭義演 스님이다. 호연 스님에게는 법제자 청하 미윤靑霞美允이 있으니 속성은 주朱씨이고 영암 옥천방玉泉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미윤 스님이 계를 전한 제자는 응허 성안應虛聖眼 등 15명이 있고, 수은受恩 상족上足으로 경윤慶允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최씨이고 영암 신풍新豊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주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경윤 스님에게는 상족 민오敏悟 스님이 있었는데 수인사修仁寺 주지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계를 전해 준 제자 상운 응혜祥雲應慧 스님은 조정에서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았으며 도총섭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종관 스님도 조정으로부터 자헌대부의 품계를 받았다.
호연 스님의 진영 1축이 있는데 선대 조사인 화악당華岳堂의 영각影閣에 배향되었다. 스님은 문장도 잘했고 덕망도 있었으며, 세 가지 썩지 않는 것문文·공功·덕德을 말함을 겸하여 지니셨고 불사佛事·법사法事·승사僧事로 일컬어지는 세 가지 보배불·법·승에 대한 일을 모두 통달하였다.
스님은 타고난 천성의 바탕이 남의 말을 잘 따라 주었으므로 남들과 교제를 하면 신의가 있었고, 골상骨相이 풍후豊厚하여 일반 사람들보다 출중하였으며,

010_1071_b_01L此皆講人眼目豈可忽哉四書三經
010_1071_b_02L以集註爲眼目以訓解爲指南儒釋豈
010_1071_b_03L異耶華岳文信八世明眞再嚴五世
010_1071_b_04L龍坡永烜三世咸豊六年丙辰生光緖
010_1071_b_05L二十年甲午年三十九在深寂庵講堂

010_1071_b_06L

010_1071_b_07L浩然禪師傳

010_1071_b_08L
師名有愚號浩然姓金氏淸海長者
010_1071_b_09L里人投達摩山染衣移入萬德山居生
010_1071_b_10L移入頭輪山拈香於錦潭璽卷海南龍
井人

010_1071_b_11L華岳海南華
山人
文信四世珎峯海南二道坊
珍山里人

010_1071_b_12L深祐二世與金潭龍井
里人
養玉4) [54] 門兄弟
010_1071_b_13L金潭有二弟子一曰說庵
二曰三潭
010_1071_b_14L義演師有弟子靑霞美允姓朱氏
010_1071_b_15L岩玉泉坊人有傳戒弟子應虛聖眼
010_1071_b_16L等十五人受恩上足有慶允姓崔氏
010_1071_b_17L靈岩新豊人5) [55] 有上足敏悟
010_1071_b_18L行修仁6) [56] 有傳戒弟子祥雲應慧
010_1071_b_19L贈資憲大夫行都揔攝職宗寬贈資憲
010_1071_b_20L大夫有眞影一軸先祖師華岳堂影閣
010_1071_b_21L配享有文有德三不朽兼存7)文劫 [57]

010_1071_b_22L事法事僧事三寶並達佛法
天質隨順
010_1071_b_23L與人交而信骨相豊厚出衆超等

010_1071_c_01L말은 어눌한 듯 신중하였고 기개는 호연浩然하였으니 진실로 옛사람의 기상이라고 할 만하다.
팔굉선백전八紘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관홍寬弘이고 호는 팔굉八紘이다.
가지산으로 입산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학업을 성취하였다. 고독한 단신單身으로 그림자와 몸뚱이가 서로 위로하면서 두륜산으로 들어가 갈포葛布로 만든 옷을 입고 솔잎을 따 먹으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후에 풍암豊庵 선사의 파계 계보派系系譜를 이었으니, 보운 석일寶雲碩一 스님과 남파 교율南坡敎律 스님은 스님의 동문 형제로서 우애가 날로 깊어 갔다. 이들은 모두 철선鐵船 스님의 법손이고 연파蓮坡 조사의 4대 법손이다.
스님은 성품과 행실이 엄숙하고 평등하였으며 언어는 과묵하고 신중하였다. 게다가 재능과 솜씨를 두루 갖추었고 문학도 남들보다 뛰어났다. 재를 올리거나 법회를 할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구차하게 굴지 않았다. 불경을 강론하고 불서를 풀이할 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이 풀어서 전해 주었으며, 바느질 솜씨가 좋아 스님이 지은 가사는 가치를 따지지 않았다. 또한 조화造花를 잘 만들었으나 공임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스님은 말을 빨리 하거나 얼굴빛을 붉히는 일이 없었다. 물건의 값을 깎는 일도 없었으며, 어른이라고 해서 어린아이들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었고 자신은 이익을 취하고 남을 손해 보게 하는 일이 없었다. 세속의 이익을 경영한 적이 없었고 권속을 많이 늘리려고 애쓰는 일도 없었다. 장점과 단점,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없었고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을 출입出入하지 않았고 의식衣食을 걱정하지 않았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걱정하지 않았다.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고 초대하지 않으면 가지 않았으며, 혼자 있어도 걱정하지 않았고 많은 대중들과 함께 있어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인정仁定 스님이 환속하였어도임진년에 떠나갔다. 우려하지 않았고 화적떼가 자주 침범했으나국사암國士庵에 거주할 때의 일이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10년 동안 동언문東彦文쌍계사에 살았으니 한 번도 게으른 적이 없었고 천 리 길 평안도平安道를 다녀올 때도 한 번도 신음 소리(殿屎)를전미殿屎란 신음 소리이다. 낸 적이 없었다.
나이가 높아지고 승랍이 길다 하여

010_1071_c_01L訥訥然氣浩浩然眞古人氣像也哉

010_1071_c_02L

010_1071_c_03L八紘禪伯傳

010_1071_c_04L
師名寬弘號八紘投於伽智山薙髮
010_1071_c_05L8) [58] 遊方學成孤獨單身形影相吊
010_1071_c_06L移入頭輪山衣葛食松繼豊庵禪師
010_1071_c_07L派系譜系與寶雲碩一南坡敎律同門
010_1071_c_08L兄弟友愛日深乃鐵船禪師之孫
010_1071_c_09L坡祖師之四世性行肅均言事默重
010_1071_c_10L才工周具文學超等齋儀法事精硏
010_1071_c_11L不苟經講書訓解傳無疑9) [59]
010_1071_c_12L論價10) [60] 善造花不計手11) [61] 無疾言
010_1071_c_13L12) [62] 無物折閱無以長凌少無利自
010_1071_c_14L損他無世利經營無多貪眷屬無長短
010_1071_c_15L是非不遠近出入不憂衣食不憂雨雪
010_1071_c_16L不問不言不請不徃獨在不患稠中
010_1071_c_17L不苦仁定下俗壬辰
年去
不爲慮火賊數侵
010_1071_c_18L居國
士庵
不爲恐十年居東彥文雙溪
不爲懈
010_1071_c_19L千里行平安道不爲殿屎
年高臘
010_1071_c_20L「敎」甲本正誤表曰衍字「▼(虫+(枕-木))」甲本正誤表
010_1071_c_21L作「蛇」次同
「栖」甲本正誤表作「柄」
010_1071_c_22L「洞」甲本正誤表作「同」
「住」作「徃」{甲}
010_1071_c_23L「住」甲本正誤表作「任」
「文劫」甲本正誤表
010_1071_c_24L作「言功」
「戎」甲本正誤表作「戒」「線」上
010_1071_c_25L甲本正誤表有「針」
「直」作「眞」{甲}「切」甲
010_1071_c_26L本正誤表作「功」
「劇」甲本正誤表作「遽」

010_1072_a_01L객지에 나가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온종일 한 끼니만 먹고 수행하여도 사지를 놀리지 않았다. 바랑에 한 되 한 홉의 쌀이 없어도 근심하지 않았고 가난하고 늙어서 따르는 이가 없어도 외로워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홀로 세상을 초월한 삶이 남전 보원南泉普願 스님의 큰 인물다운 삶을 연상케 하였다.
정수사淨水寺와 선암사仙岩寺에서 하안거를 마쳤고 쌍계사에 오래 머물렀으며 칠불암에서도 오랫동안 있었다. 금년, 즉 갑오년(1894)에 지리산 아자방(亞房) 선실에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갔는데 세속 나이로 71세이다.
성담강백전聖潭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의전儀典이고 호는 성담聖譚이며, 중고中古에 통도사通度寺에서 이름을 떨쳤던 큰 강백이다. 청담 준일淸潭俊一 스님의 법통을 이은 법제자이고, 도암 우신度庵宇伸 스님의 손제자이며 연파 덕장烟波德藏 스님의 증손 법제자이다. 응암 희유凝庵禧有 스님의 5대 법손이고 설송 연초雪松演初 스님의 6대 법손이며, 환성喚惺 스님의 5대 법손이다.
어릴 때에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두루 다 배웠고 성장해서는 영남과 호남 지역의 강당을 찾아다니며 선교의 깊은 뜻을 공부하였다. 스님은 명성을 총림에 떨쳤으며, 비단 총림에만 명성을 떨쳤던 게 아니라 유림의 사대부들까지 한번 만나 보기를 소원할 정도였다.
권일미權一味와 김추사金秋史는 편지를 보내 스님을 초대하기도 하였으며, 편지를 보내 찬미하기도 하였다. 백파白坡·초의草衣·제산霽山 스님 등과 더불어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스님의 기연어구機緣語句는 비명과 탑명에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다시 군말을 할 필요가 없다.
스님은 수명이 수승한 덕에 미치지 못하였던지 일찍이 세상을 버렸으니, 선문에서는 자신을 비추어 볼 거울을 잃어버렸고 학자들은 눈을 잃어버렸다. 불가佛家의 기둥과 대들보가 부러지고 사림士林의 도로道路가 막혔으며, 새와 짐승은 주인을 잃었고 계곡의 물은 부질없이 흘러만 갔다. 거듭 스님에 대한 찬미하는 글을 쓰노니 다음과 같다.

來兮有緣       인연 있어 왔다가
去兮有果       결과 맺고 떠나가셨네
去來定限       오고 감은 정해진 기한이 있고
早晩不躱       이르고 늦음은 피할 수 없네
跡遺三韓       발자취 삼한의 땅에 남기고
灰飛七火       육신은 재가 되어 흩어졌네
世情交感       세간의 정 만감이 교차하여
鮫珠連墮       상어 구슬 같은 눈물 연달아 떨어진다
言語似聞       스님의 말소리 들려오는 듯하고
形影如坐       스님의 모습 앉아 있는 것 같네
設奠燒香並立待    제물 올리고 향 사르고 나란히 서서 기다리니
上乘超悟都不可    상승上乘보살 뛰어난 깨달음 도저히 미칠 수 없네
潭潭聖潭雨潭來去一何早 담담潭潭성담聖譚과 우담雨潭이 한결같이 일찍 가버리니
換骨改面誰知那    뼈 바꾸고 얼굴 바꾸면 그 누가 알겠는가?누가 성담이고 누가 우담인지 어찌 알겠는가?(誰知何聖何雨)

010_1072_a_01L不厭作客一食日中1) [63] 遊四肢
010_1072_a_02L囊無2) [64] 不憂賓老無隨從不爲孤
010_1072_a_03L獨超物外南泉普願之大人行履處
010_1072_a_04L結夏於淨水結夏於仙岩久居雙
010_1072_a_05L長在七佛今甲午夏結夏於智異
010_1072_a_06L山亞房禪室年七十一

010_1072_a_07L

010_1072_a_08L聖潭講伯傳

010_1072_a_09L
師名儀典號聖潭通度寺之中古大講
010_1072_a_10L伯也淸潭俊一之嗣度庵宇伸之孫
010_1072_a_11L烟波德藏之曾凝庵禧有之五世雪松
010_1072_a_12L演初之六世喚惺之七世幼學內外典
010_1072_a_13L長叅嶺湖講場名振叢林非但名振叢
010_1072_a_14L儒林士夫願一見之權一味金秋
010_1072_a_15L折簡召之寄書賛之與白坡草衣
010_1072_a_16L霽山并驅一時機緣語3) [65] 具載碑塔
010_1072_a_17L更不贅說壽不勝德早棄世間禪門
010_1072_a_18L失鑑學者失眼佛家之棟梁折士林
010_1072_a_19L之道路塞鳥獸無主溪谷空流從而
010_1072_a_20L重贊曰來兮有緣去兮有果去來定
010_1072_a_21L早晩不躱4) [66] 遺三韓灰飛七火
010_1072_a_22L情交感鮫珠連墮言語似聞形影如
010_1072_a_23L設奠燒香並立待上乘超悟都不
010_1072_a_24L潭潭聖潭
雨潭
來去一何早換骨改面誰

010_1072_b_01L
청악선백전淸岳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만하晩霞이고 호는 청악淸岳이며, 경산京山(서울 부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고향을 떠나 멀리 강진 보리산 수인사修仁寺에 우거하였다.
화월化月 선사의 처소에서 법인을 이어받았으니, 혜암惠庵·청봉淸峯과는 동문 형제지간이다. 스님은 타고난 성품이 호매豪邁하고 세세한 일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사람을 만나면 기쁜 마음으로 접대하였다. 호연浩然한 기상을 지녔으며 작고 옹졸한 마음이 없어서 스님이나 속인을 막론하고 멀리 살든 가까이 살든 모두 한번 만나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날마다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나 대접하는 데 있어서 늘 변함이 없었다.
스님은 또 돌아가신 부모의 혼령을 위하여 천도재를 지내는 데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다 기울였으며, 참기 어려워하거나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법사의 상을 당해서는 장례와 제례에 있어서 정성을 다하고 효심을 다하여 시작과 끝이 한결같다는 이야기로 칭찬하는 말들이 자자했다.
스님은 석문암石門庵을 다시 짓고 염불당念佛堂을 개설하니 절에 들어와 이를 수용受用하는 사람들의 온갖 구차하고 어려운 일이 모두 해소되었다. 이어서 절 안의 공전公殿과 방사房舍를 다시 건립하기 위해서 무한한 노력을 다 기울였다. 동서 양쪽의 재각齋閣은 아직 작업을 다 마치지 못한 상태이다.
보수공사를 낙성한 이후에 자신이 단월에게 받은 사재私財까지 다 사용하였으니 무엇을 성취하지 못할 것인가? 그 소원하는 것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부처님과 신장들에게 달려 있는 만큼 틀림없이 중생들이 감동하고 모든 부처님이 호응해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더디고 빠름을 어떻게 가볍게 말할 수 있겠는가?
스님은 다른 사람들과 사귐에 있어서 신용이 있었으므로 상대방이 만약 신용이 없을 경우에는 다시는 그와 상대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지모智謀가 있고 판단력과 수단도 좋고 마음도 잘 쓰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한강물을 마시는 사람은 성품이 맑고 예리하며, 낙동강 물을 마시는 자는 성품이 탁하나 곧다.”라고 하더니 청악 스님에게서 징험할 수 있었다. 스님의 그늘에서 혜택을 받은 제자들은 수없이 많고, 제도를 받은 제자도 일마다 특이한 일면을 갖고 있다.
스님은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 현재 강진의 보리산에 주석하고 있다.

010_1072_b_01L知那誰知何
聖何雨

010_1072_b_02L

010_1072_b_03L淸岳禪伯傳

010_1072_b_04L
師名晩霞號淸岳京山人㝢居於康
010_1072_b_05L津菩提山修仁寺受法印於化月禪師
010_1072_b_06L與惠庵淸峯爲同門伯仲5) [67] 賦性
010_1072_b_07L豪邁不拘細務見人欣待有浩然之
010_1072_b_08L無小拙之心無論緇素遠者近者
010_1072_b_09L願一見之人之來徃日無其數接之
010_1072_b_10L如常爲父母亡靈薦度之齋盡心竭
010_1072_b_11L不見難6) [68] 當之氣哭法師喪葬祭
010_1072_b_12L盡誠盡孝稱贊始終恒一之說
010_1072_b_13L作石門庵設念佛堂凡所受用無諸
010_1072_b_14L苟艱重建寺中公殿房舍無限喫勞
010_1072_b_15L東西兩齋尙未畢役繕工落成以後
010_1072_b_16L以己檀越所需何不成就其所願也
010_1072_b_17L有效無效關在佛神7) [69] 有衆生感
010_1072_b_18L佛應之日遲速何輕言㦲與人交而有
010_1072_b_19L彼若不信更不從事可謂有謀有
010_1072_b_20L斷之善手善心也人之言曰食漢水者
010_1072_b_21L性淸銳之食洛水者性濁直之於師
010_1072_b_22L可驗也受其蔭者多多有之受其度
010_1072_b_23L事事異之光緖甲午住菩提山

010_1072_c_01L
응암선사전應庵禪師傳
법명은 학성學性이고 호는 응암應庵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해남 두륜산으로 들어가 자행 책활慈行策活 스님의 처소에서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서주 의첨犀舟懿沾 스님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은사인 자행 스님의 선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며, 범해 각안梵海覺岸 스님의 강당講堂에서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받았다.
스님은 타고난 성품이 견고하여 승가僧家의 사무를 법도대로 따랐다. 스승을 받들어 모심에 있어서는 숙수菽水23)의 예를 극진히 하였으며, 부리는 아랫사람에게는 오유吾幼24)의 어진 마음으로 대하였다. 하기 어렵고 하기 괴로운 일들을 도맡아서 하였으며, 강수綱首와 동장洞長의 소임까지 행하였다.
주지의 직인을 차고 유나의 직책을 역임하면서 공적인 일이나 사적인 일을 합당하게 처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선대 조사들의 제사를 받들 때에는 정성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였고 공적인 재물이든 사적인 물건이든 털끝만 한 부분까지 소상하게 살펴서 분명하게 처리하였으니, 이른바 “재산상에 있어서 분명하게 하면 그것이 바로 대장부이다.”라는 옛말에 부합한다 하겠다.
맹자가 이르기를, “나는 자기 자신이 비뚤어진 사람으로서 남을 바로잡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을 욕되게 해서 천하를 바로잡는 일이겠는가.(吾未聞枉己而正人者也。 況辱己而正天下者乎。)”라고 하였으며, 「백이전伯夷傳」에 이르기를, “몸가짐이 법도에 맞지 않고 오로지 꺼리고 기피하는 일만 하고도 종신토록 편안하고 즐겁고 부함을 누리면서 누대에 끊어지지 않는다. 혹은 땅을 골라 딛고 때를 만난 연후에 말을 하고 지름길을 가지 않으며 공정하지 않으면 발분하지 않았으나 재앙을 만난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매우 미혹됨이 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도광道光 10년 경인(순조 30, 1830)에 태어나 광서 12년 병술(고종 23, 1886) 3월 15일에 두륜산 청신암淸神庵에서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57세이고 승하僧夏는 40년이었다.
청호강백전靑湖講伯傳

010_1072_c_01L應庵禪師傳

010_1072_c_02L
師名學性號應庵姓金氏靈岩人
010_1072_c_03L入海南頭輪山染衣於慈行策活師處
010_1072_c_04L受具於遲舟懿沾師壇拈香於受恩師
010_1072_c_05L受大乘菩薩戒行於梵海覺岸師堂
010_1072_c_06L賦性堅固一準僧事奉師盡菽水之禮
010_1072_c_07L御下用吾幼之仁歷盡難行苦行之役
010_1072_c_08L擧行綱首洞長之任佩住持印行維那
010_1072_c_09L公政私事無不允叶奉先行祀
010_1072_c_10L誠盡力公私物情察毫8)折里 [70] 所謂財
010_1072_c_11L上分明大丈夫者也孟子曰吾未聞枉
010_1072_c_12L己而正人者也況辱己而正天下者乎
010_1072_c_13L伯夷傳曰操行不軌專犯忌諱而終
010_1072_c_14L身逸欲樂富厚累世不絕擇地而蹈時
010_1072_c_15L然後出行言不由經非但公正不發
010_1072_c_16L而遇禍灾者不可勝數余甚9) [71]
010_1072_c_17L道光十年庚寅生光緖十二年丙戌三
010_1072_c_18L月十五日示寂于淸神庵世壽五十七
010_1072_c_19L僧夏四十

010_1072_c_20L

010_1072_c_21L靑湖講伯傳

010_1072_c_22L「下」甲本正誤表作「不」「外」甲本正誤表
010_1072_c_23L作「升」
「白」甲本正誤表作「句」「跡」作
010_1072_c_24L「路」{甲}
「行」疑衍字{編}「忍」下甲本正誤
010_1072_c_25L表有「難」
「必」作「心」{甲}「折里」甲本正
010_1072_c_26L誤表作「析釐」
「或」甲本正誤表作「惑」

010_1073_a_01L
법명은 화일華日이고 호는 청호靑湖이다. 장흥 가지산으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벽파碧波 장로의 회상에서 은사이자 법사의 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재능과 지혜로 이름이 났으며 성취할 사람의 원인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가의 서적을 읽어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성리性理를 알았고, 불교경전을 강론하면서 삼장三藏과 오교五敎의 깊고 옅음에 통달하였다.
그릇도 이미 가득 찼고 지식도 또한 있게 되자, 스님은 스승의 강석을 물려받아 설법을 하니 시주하는 이들이 있어 재물도 넉넉해졌다. 그러니 연담 노장님이 말씀했던, “돌아가신 스승님의 강탑講榻에 다시 와서 앉은 이는 20년 전 시자 스님이더라.(先師講榻重來坐。 二十年前侍者僧。)”라고 한 것이 참말임을 알겠다.
복전의福田衣(가사)를 입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였으니 추사 늙은이가 말한,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여 조사의 법인 전했다고 말하지 말라. 부처님은 아무 탈 없이 석란산에 계신다네.(莫把示趺傳祖印。 金身無恙錫蘭山。)”라고 한 것이 정도가 지나친 말임을 알겠다.
두륜산에 뿌리를 내리고 보림사에서 꽃을 피우고 조계산에서 결실을 맺었으니, 여래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三處傳心)과 같은 것이요, 대둔사에 거처하였고 보림사에서도 거주하였으며 선암사에서도 거주하였으니,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하여 자식을 가르쳤던 것과 비슷하다.
설화說話의 문을 열고 오랜 세월 강설을 하였고 간화看話의 문을 열고 명패를 걸어놓고 좌선에 들었으니,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끝내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거늘 무엇을 다시 설한단 말인가.(終不說一字。 何爲更說耶。)”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요,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을 했으며 땅은 또 무슨 말을 했더냐?(吾欲無言。 天何言㢤。 地何言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대공大空과 소공小空이 앞뒤에서 시위侍衛하고, 한 사미는 차를 달여 올리고 한 사미는 밥을 지어 올리니, “네 조상을 걱정하게 하지 않아 그 자손이 번창하는구나.(無念爾祖。 寔繁有徒。)”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법을 전해 받아서 그 법을 다시 전해 주었으니, 태고太古 스님이 말하기를,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겠구나.(展脚而睡。)”라고 한 말과 일행一行 스님이, “내 도가 동쪽으로 갔다.(吾道東矣。)”라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완전히 보림사로 옮기고 완전하게 선암사로 옮겼으며, 온전하게 보림사에 있었고 온전하게 대둔사에 있었으니, 마치 “화엄찰종華嚴刹種이 온전하게 저기에 있고 온전하게 여기에 있으며, 사바세계에서는 주인과 주인이 서로 보지 못하고 나그네와 나그네가 서로 보지 못하는 것이니 시방세계가 다 또한 그러하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일을 마친 한가한 사람이요 천하에 태평한 수좌首座이며, 한바탕 춘몽春夢을 꾼 상인上人이로다. 한 조각 묻고 대답한 곳에 도가 같음을 비로소 알겠다.
스님의 종맥宗脈을 살펴보면, 호암虎岩 스님의 6대 법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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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名華日號靑湖出家於長興伽智山
010_1073_a_02L結恩師法師於碧波長老祖室有才智
010_1073_a_03L之名得成人之因學讀儒書知三綱
010_1073_a_04L五常之性理講論佛經達三藏五敎之
010_1073_a_05L㴱淺器已滿矣識且有矣奪先師席
010_1073_a_06L施有餘財蓮老所謂先師講榻重來坐
010_1073_a_07L二十年前侍者僧之眞談也着福田衣
010_1073_a_08L說金口文秋翁所謂莫把示趺傳祖印
010_1073_a_09L金身無𧏮錫蘭山之過量也頭輪托根
010_1073_a_10L寶林開花曺溪結宲如來三處傳心如
010_1073_a_11L居於大芚居於寶林居於仙岩
010_1073_a_12L母三遷之敎如也開說話門長年講說
010_1073_a_13L入看話門掛牌而坐如來曰終不說
010_1073_a_14L一字何爲更說耶是也孔子曰吾欲
010_1073_a_15L無言天何言㢤地何言㢤是也大空
010_1073_a_16L小空侍衛前後一沙彌奉茶一沙彌
010_1073_a_17L炊飯無念爾祖寔繁有徒是也受法
010_1073_a_18L傳法太古1) [72] 脚而睡一行吾道東矣
010_1073_a_19L是也全移於寶林全移於仙岩而全
010_1073_a_20L在於寶林全在於大芚若華嚴刹種
010_1073_a_21L全在彼全在此當娑婆處主主不相
010_1073_a_22L伴伴不相見十方悉示然是也
010_1073_a_23L是了事閒人天下太平首座一場春夢
010_1073_a_24L上人一段問答處同道方知宗脉虎

010_1073_b_01L설파雪坡 스님의 5대 법손이며, 낭송 유화朗松有華 스님의 4대 법손이요 해암 청윤海岩淸閏 스님의 3대 법손이다. 연서蓮捿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벽파碧波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지금 갑오년(1894) 여름에 대각 국사 의천義天 스님이 머무셨던 큰 도량에 머물고 있다.
청봉선백전淸峯禪伯傳
법명은 세영世英이고 호는 청봉淸峯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해남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천게千偈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설허 지연雪虛智演 선백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화월 숙홍化月淑葒 선사의 강당에서 법인을 받고 법통을 이었으니, 화악華岳 스님의 8대 법손이고 연파蓮坡 스님의 4대 법손이며, 서주 의첨犀舟懿沾 스님의 손제자이고 청악淸岳 스님·혜암蕙庵 스님과는 동문 형제지간이다.
대둔사 설허雪虛 스님·보제普濟 스님·연주蓮舟 스님·범해梵海 스님, 미황사美黃寺 응화應化 스님, 정토사淨土寺 경담鏡潭 스님·한양漢陽 스님, 보림사寶林寺 이봉离峯 스님, 구암사龜岩寺 설두雪竇 스님, 선암사仙岩寺 함명涵溟 스님에게서 경학經學을 배웠다.
연꽃에 이미 향기 어리고 매실이 장차 익으려 하자 선후禪侯에 봉해진 뒤 주실籌室에 들어가 법통을 이어받았다.
스님은 혹은 백양산에서 하안거 결제를 하기도 하였고 혹은 계룡산에서 하안거 결제를 하기도 하였으며, 몽성산夢聖山에서 여름 안거 결제를 하였고 조계산에서 하안거 결제를 하였다. 가지산에 살았고 보리산에서도 살았으며 만덕산에서도 살았다. 스님은 성품이 사리에 밝고 기질이 뛰어나 산악이 우뚝 솟은 듯하였다.
한강의 흐름과 낙동강의 물결에서 호호탕탕浩浩蕩蕩함과 영대靈坮의 미만청정瀰滿淸淨함을 배웠고, 금강산과 묘향산에서 외외락락嵬嵬落落한 경치를 구경하고 나니 염불 소리(梵響) 푸른 하늘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스님의 몸은 영웅의 모습에 취했고 말은 웅변을 토했다.
신묘년(1891) 가을에 무량회無量會의 옛 전통을 복구하였고, 계사년(1893) 봄에는 용허龍虛 스님의 신병新柄을 전해 받았다. 삼전三殿을 수리하였으니 기도하는 법당이고, 사분四分을 시설하였으니 염불하는 선실禪室이다. 백양산 신선 경계에서 기도를 하는데 결계結界25)를 하였고

010_1073_b_01L岩六世雪坡五世朗松有華四世
010_1073_b_02L岩淸閏三世蓮捿孫碧波弟子今甲
010_1073_b_03L2) [73] 仙岩大覺國師義天僧統大道場

010_1073_b_04L

010_1073_b_05L淸峯禪伯傳

010_1073_b_06L
師名世英號淸峯姓朴氏靈岩人
010_1073_b_07L家於海南頭輪山薙染於千偈禪師之
010_1073_b_08L受具於雪虗智演禪伯之壇受禪
010_1073_b_09L3) [74] 印於化月淑葒禪師4)堂之 [75] 華岳之
010_1073_b_10L八世蓮坡之四世犀舟懿沾之孫
010_1073_b_11L淸岳蕙庵同門兄弟受經學於大芚之
010_1073_b_12L雪虛師普濟師蓮舟師梵海師美黃之
010_1073_b_13L應化師淨土之鏡潭師漢陽師寶林之
010_1073_b_14L离峯師龜岩之雪竇師仙岩之涵溟師
010_1073_b_15L蓮已香矣梅將熟也封禪侯入籌室
010_1073_b_16L或結夏於白羊山或結夏於鷄龍山
010_1073_b_17L夏於夢聖山結夏於曺溪山住於伽智
010_1073_b_18L住於菩提山住於萬德山性理氣
010_1073_b_19L山岳倒卓學漢流洛波之浩浩蕩蕩
010_1073_b_20L5) [76] 坮瀰滿淸淨玩金剛妙香之嵬嵬
010_1073_b_21L落落梵響嘹喨碧霄身醉英儀口吐
010_1073_b_22L雄辯辛卯秋復無量會之舊轍癸巳春
010_1073_b_23L傳龍虛師之新柄修三殿爲祝爲法堂
010_1073_b_24L設四分念佛之禪室結界爲祝於白羊

010_1073_c_01L승달산僧達山 목우암牧牛庵 낙성식의 초청에 응하기도 하였다.
산문 밖에서는 동학東學이 난리를 일으키고 서양 천주교들은 사회를 혼란하게 하므로 스님은 축성각祝聖閣에서 나라의 안녕을 위해 특별히 기도를 올려 백성(普率)26)의 예를 다하기도 하였으며, 숲속에 사는 스님들을 더욱 빛나게 하기도 했다.
스님은 함풍咸豊 5년 을묘(철종 6, 1855)에 태어났으니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1, 1894) 현재 세속 나이 40세이다. 대둔사 적련암赤蓮庵에 기거하면서 무량회를 주관하고 있으며,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상선相善·상복相福·선혜善慧 등 열 명이다.
취운강백전翠雲講伯傳
법명은 혜오慧悟이고 호는 취운翠雲이며, 속성은 백白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해남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응허應虛 선사의 회상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복암福庵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범해 각안梵海覺岸 선사의 강당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대승보살 오십팔계를 받았으며, 법유法乳로 길러 준 은사 응허 스님의 법탑法榻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니, 화악 문신華岳文信 선사의 11대 법손이요 연파 혜장蓮坡惠藏 스님의 7대 법손이며, 철선 혜즙鐵船惠楫 스님의 5대 법손이고 호은 경은虎隱敬恩 스님의 손제자이다.
스님은 어릴 때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두루 다 배웠으며, 장성해서는 불교의 교리행과敎理行果27)를 달통하였다. 대둔사의 연주蓮舟 스님과 범해梵海 스님, 미황사美黃寺의 혼허渾虛 스님과 월화月華 스님, 송광사松廣寺의 구연九淵 스님과 원해圓海 스님, 선암사仙岩寺의 경운擎雲 스님 등 여덟 분 고승들의 자리를 참방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선암사와 송광사 두 절을 소요하며 노닐기도 하였다.
여러 지방을 유람하는 것을 비로소 마치고 스승의 법석을 물려받아 강당 문을 여니, 스승과 부모와 벗이 미흡하다는 탄식(三常不足之歎)은 없었고 사방에서 벗들이 수없이 찾아오는 즐거움을 누렸다.
또한 스님은 글씨도 잘 써서 마치 용이나 이무기가 꿈틀대는 것처럼 쇠못이 번쩍거리듯이 필력筆力이 힘차 보였다. 구당瞿塘28)이 드넓은 것처럼 농판隴阪이 구불구불한 것처럼 스님의

010_1073_c_01L之物外應請落成於僧達之牧牛東學
010_1073_c_02L惹端西笑渾動更加別祝於祝聖閣
010_1073_c_03L普率之禮益彰於林下之髠㢤咸豊五
010_1073_c_04L年乙卯生光緖二十年甲午年四十
010_1073_c_05L居大芚之赤蓮庵無量會受戒者相善
010_1073_c_06L相福善慧寺十人

010_1073_c_07L

010_1073_c_08L翠雲講伯傳

010_1073_c_09L
師名慧悟號翠雲姓白氏靈岩人
010_1073_c_10L家於頭輪山薙染於應虛禪師室受具
010_1073_c_11L於福庵禪師壇受比丘二百五十戒及
010_1073_c_12L大乘菩薩五十八戒於梵海覺岸禪師堂
010_1073_c_13L拈香受法於法乳之恩師榻華岳文信
010_1073_c_14L禪師十一世蓮坡惠藏七世鐵船惠楫
010_1073_c_15L五世虎隱敬恩孫幼學內外典長通
010_1073_c_16L敎理行果叅大芚之蓮舟梵海美黃之
010_1073_c_17L渾虛月華松廣之九淵圓海仙岩之擎
010_1073_c_18L雲等八高座逍遙遊於仙松兩寺遊方
010_1073_c_19L方罷奪席開堂無三常不足之歎
010_1073_c_20L四友餘饒之樂龍*▼(虫+(枕-木)) [77] 蠢蠢鐵釘磷磷
010_1073_c_21L筆力之勍也瞿塘之浩汗隴阪之逶迤
010_1073_c_22L「傳」甲本正誤表作「展」「夏」下甲本正誤
010_1073_c_23L表有「在」
「受」甲本正誤表曰衍字「堂
010_1073_c_24L之」甲本正誤表作「之堂」
「王」甲本正誤表
010_1073_c_25L曰衍字

010_1074_a_01L문장에서는 웅장함이 느껴진다. 시운詩韻을 부르며 주는 잔은 사양하지 않았고 설법을 하는 법상도 사양하지 않았으니 종사宗師 중에 대종사요, 강사 중에 큰 강사이다.
입을 열었다 하면 부처님께서 49년 동한 설법하신 말씀이 흘러나오고 눈을 부릅뜨면 8만 4천 마구니가 순식간에 항복을 하였다. 절 일을 보는 데 있어서는서기書記·수승首僧·결감結監의 직무 우활迃濶하거나 기승을 부리지 않았고 문자로 명성이 드높아도강학講學과 음영吟詠 등을 말함 재주를 부리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았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여 몸이 활동하는 장소로 삼았고 성인의 경전과 현인의 전법으로 마음을 거울처럼 맑혔다. 소은小隱하는 것으로 몸을 마칠 움막으로 여겼으며, 부처님의 말씀으로 입을 다무는 경계로 삼았다.
스님이 되었다 하여 세속을 버려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하였고, 속인이라 하여 스님을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다. “그가 행하는 바를 보고 그가 종사하는 일을 관찰하며, 그가 즐기는 것을 살피면 사람이 어찌 숨기리오.”29)라고 한 말이 있다.
스님은 동치同治 5년 병인(고종 3, 1866) 12월 6일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1, 1894) 현재 29세 나이로 대둔사 적련암赤蓮庵 강당에 있다.
자운선사전慈雲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천우天祐이고 호는 자운慈雲이며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월출산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계를 받았으며, 인허仁虛 선사에게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
자운 스님은 힘이 세고 기상이 호탕하며 모든 사무를 봄에 있어서 스스로 손수 나서서 하고 공적인 물건이든 개인 물건이든 함부로 쓰는 일이 없었다. 존귀한 손님이든 지위가 낮은 손님이든 찾아오면 기쁘게 영접하고 멀고 가까운 곳을 출입할 때에는 기한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아침에 죽을 먹고 낮에는 재법齋法을 지켰으며, 오직 정밀하고 한결같이 하였고 대중들이 모인 곳에서 행사를 할 때에는 원로나 젊은 사람이나 음식을 달리하지 못하게 하였다. 어떤 일에 임해서는 자기 마음에 거슬 리는 일이 있더라도 노여워하거나 독기를 품는 일이 없었으며, 나이가 높고 승랍이 오래되었다 하여 손발을 쉬게 하지도 않았다. 노장들을 보면 공경을 다하고 어린아이를 보면 자식처럼 진실하게 대하였으며, 거친 음식이라 할지라도 걱정하지 않았고 해진 옷이라 하더라도 창피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선대 조상의 묘를 쓴 곳에 누가 몰래 묘를 쓴 것을 파내게 하고 끝내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게 하였으니,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해하는 지극한 효심이라 하겠다.

010_1074_a_01L作文之雄也呼韻之盃不辭說法之床
010_1074_a_02L不讓宗師之大宗師講肆之大講1) [78]
010_1074_a_03L開口則四十九年之說滿出阿憂弩目
010_1074_a_04L則八萬四千之魔瞬息降伏看於寺事
010_1074_a_05L書記首
僧結監
不以迃濶氣勝名於文字
010_1074_a_06L講學
吟咏
不以役才憍溢樂山樂水爲行身
010_1074_a_07L聖經賢傳爲明心鑑以小隱爲終身
010_1074_a_08L以金人爲緘口箴僧不離俗故
010_1074_a_09L於父母俗不離僧故悌於兄弟視其
010_1074_a_10L所以觀其所由察其所安人焉瘦哉
010_1074_a_11L同治五年丙寅十二月六日生光緖二
010_1074_a_12L十年甲午年二十九在大芚寺赤蓮庵
010_1074_a_13L講堂

010_1074_a_14L

010_1074_a_15L慈雲禪師傳

010_1074_a_16L
師名天祐號慈雲靈岩人也出家於
010_1074_a_17L月出山薙染受戒受法印於仁虛禪師
010_1074_a_18L力健氣浩凡於作務自手爲之公私
010_1074_a_19L什物無所濫用尊卑賓客欣然迎接
010_1074_a_20L遠近出入不失2) [79] 朝粥午齋惟精惟
010_1074_a_21L衆處行事俾無老少異粮臨事逆
010_1074_a_22L不起忿毒年高臘長不休手足
010_1074_a_23L老恭敬見幼子諒糲飯不憂鶉衣不
010_1074_a_24L掘先山之偸葬而終見屈首慷慨之

010_1074_b_01L또한 본사本寺가 장차 패망하려 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얼굴을 가리고 다른 산으로 가버렸으니, 근본을 잊지 않는 의리를 보였다고 하겠다.
장성 하청사下淸寺에 머물면서 낡은 건물을 복구하여 낙성식을 할 때에 불사의 재를 올렸고, 함평 용천사龍泉寺에 머물면서 건물을 중수하여 낙성식을 할 때에 불사의 재를 올렸다. 영광 불갑사佛甲寺 사내 암자인 해불암海佛庵에 머물면서 퇴락한 건물을 중수하여 낙성식을 할 때에 불사의 재를 올렸으며, 무안 법천사法泉寺에 머물면서 낡은 건물을 복구하여 낙성식을 할 때에 불사의 재를 올렸다.
스님은 이렇듯 본사의 퇴락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 하청사·용천사·해불암·법천사 이 네 절에서 그 지혜를 힘써 실천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다.
스님에게는 수은受恩 제자 2명이 있으니, 월응 예순月應禮淳은 속성이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처음에는 종사從師 소임을 보다가 나중에는 은사의 종좌從佐 소임을 보았다. 위의 서너 가지 일들은 모두 은사의 종좌 소임을 맡아볼 때에 한 일이다.
아! 애석하다! 월응 스님이 다른 사람의 법통을 이었다는 것이 흠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제자 관신寬信은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자운 스님의 법통을 이었으니 올바른 처사라 하겠다.
스님은 정축년(순조 17, 1817)에 태어났으니 지금 갑오년(고종 31, 1894) 현재 세속 나이 78세이고, 무안 법천사 목우암牧牛庵에 머물고 있다.
금월선덕전錦月禪德傳
스님의 법명은 ▣▣이고 호는 금월錦月이며, 경북 의성 고운사孤雲寺로 출가하였다.
스님은 사교四敎(『능엄경』·『기신론』·『금강경』·『원각경』)와 『화엄경』을 배우고 『사분율』과 『범망경』을 청문請聞하여 마침내 그 본원을 깨달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을 통달하게 되었다.
스님은 경지가 깊어져(昇堂入室) 개당하여 향을 사르고 법맥을 이으니, 곧 청허淸虛 스님의 11대 법손이다.
연꽃에 향기 나고 매화 열매가 익자 마치 구름이 용을 좇고 호랑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처럼 선지식을 한 번 참알參謁하였고 두 번 참알하였으며, 심지어는 53번 선지식을 참알하였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 병오년까지 세 해째 선지식을 찾아 학문을 익혔다.
스님은 화개동花開洞·홍류동紅流洞·구천동九泉洞·만폭동萬瀑洞·수렴동垂簾洞·백탑동百塔洞·장춘동長春洞·용수동龍藪洞·청류동淸流洞·향린동香麟洞·청학동靑鶴洞 등에서 하안거 결제를 하였고,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만일회萬日會에 참석하여 정진하였으나 1만 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매미가 허물을 벗듯 사라 숲이 하얗게 변화하듯 적멸의 세계로 떠났다.
사유闍維 의식을 거행하던 날 상서로운 기운이 허공에 서리고 영혼을 전송하던 시간에는

010_1074_b_01L孝也不忍見本寺之將亡掩面向他山
010_1074_b_02L不忘之義也住長城下淸復舊而落成
010_1074_b_03L佛事齋住咸平龍泉重修而落成
010_1074_b_04L事齋住靈光佛甲海佛3) [80] 而落成
010_1074_b_05L佛事齋住務安法泉復舊而落成
010_1074_b_06L事齋以本寺不忍見之智移於下淸龍
010_1074_b_07L [81] 泉佛法泉四寺力行其智壯哉
010_1074_b_08L受恩者二人月應禮淳姓金氏靈岩
010_1074_b_09L初從師後師 [82] 從佐上之三四段事
010_1074_b_10L皆師從佐之時事也月應嗣他人欠
010_1074_b_11L寬信靈岩人嗣師宜也師丁丑生
010_1074_b_12L今甲午年七十八在法泉寺牧牛庵

010_1074_b_13L

010_1074_b_14L錦月禪德傳

010_1074_b_15L
師名□□號錦月義城孤雲寺出家
010_1074_b_16L修行師受四敎華嚴請聞四分梵4) [83]
010_1074_b_17L悟心本源達天眞面昇堂入室開堂
010_1074_b_18L拈香乃淸虛之十一世聞香看梅
010_1074_b_19L龍雲虎一叅二叅至於五十三叅
010_1074_b_20L春二春至於丙午三春結夏於花開洞
010_1074_b_21L紅流洞九泉洞萬瀑洞垂簾洞百塔洞長
010_1074_b_22L春洞龍藪洞淸流洞香麟洞靑鶴洞
010_1074_b_23L遲於杆城之乾鳳萬日會未滿萬日
010_1074_b_24L脫鶴化闍維之日瑞氣盤空送鬼之

010_1074_c_01L설리라設利羅30) 57개를 얻었으니, 이는 세간을 벗어난 수행인의 참다운 자취라 하겠다. 이러한 신령한 이적은 예전부터 드문 일이니 흠모하는 마음 더욱 새로워짐을 느낀다. 이것은 1천 부도浮屠의 예언을 위한 것인가? 화상의 신심을 징험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만일회의 염불로 인하여 감응이 나타난 것인가?
염불이란 곧 자기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요 참선은 곧 자기 선禪을 참구하는 것이다. 나를 벗어나 저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나를 벗어나 저 밖에 따로 선정이 없으니, 동방東方이 곧 서방西方이요 건봉乾鳳이 곧 연봉蓮鳳이다.
스님은 동방 세계 건봉사의 화신불化身佛이다. 그 뒤에 몽월 영홍夢月泳泓·동봉 욱일東峯旭日·대인 등전大印燈傳 스님들도 금월 스님과 수행의 발자취가 비슷하였다. 이 네 스님의 발자취를 기록해 글을 통하여 세상에 알린다면 어느 누군들 흠앙欽仰하고 찬양하지 않겠는가?
환명선사전幻暝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경찬敬贊이고 호는 환명幻溟이다.
무장務長(고창) 선운사禪雲寺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서 승랍이 높아지자 스승의 방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런 후에 전국의 명산을 전전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교화하였다. 창평昌平(담양) 막성산莫聖山 용흥사龍興寺에 머물기도 하였는데 그곳은 현종顯宗대왕 때 산신령이 임금님의 꿈에 나타나 기도하는 단壇을 만들고 장래 숙종肅宗대왕의 탄신을 기원한 절이다. 그런 까닭에 그 산 이름을 몽성산夢聖山으로 고치게 하였다. 숙종대왕이 즉위하자 절 이름을 바꾸어 용흥사라고 하였다.
영조대왕은 자기의 생모인 육상궁毓祥宮 최씨의 위패를 그 절에 봉안하고 30결結의 토지와 이 일을 감당할 민호民戶를 내려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게 하였다. 한편 양주楊州 효령원孝寧園 조포사造泡寺를 왕실의 안녕과 홍복을 기원하는 원당願堂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010_1074_c_01L得設利羅五十七箇此是出世之眞
010_1074_c_02L靈異稀古欽慕感新千浮屠之讖
010_1074_c_03L5) [84] 和尙之信歟萬日會之應歟
010_1074_c_04L佛即念我佛叅禪即叅我禪我外無佛
010_1074_c_05L我外無禪東方即西方乾鳳即蓮鳳
010_1074_c_06L東方世界乾鳳之化佛也其後夢月
010_1074_c_07L泳泓東峯旭日大印燈傳跡同一切
010_1074_c_08L此四師之跡通文於告諭於八方6)
010_1074_c_09L [85] 誰不欽仰贊揚也哉

010_1074_c_10L

010_1074_c_11L7) [86] 禪師傳

010_1074_c_12L
師名敬贊號幻*暝出家於務長禪雲
010_1074_c_13L學而時習臈已高多拈香封侯
010_1074_c_14L山行化住札於昌平莫聖山龍興寺
010_1074_c_15L宗大王時山靈現夢於玉枕設祈壇而
010_1074_c_16L爲祝誕肅宗大王改山名曰8)▼(艹/罒/心) [87]
010_1074_c_17L宗大王即位易寺名曰龍興英宗大王
010_1074_c_18L奉安毓祥宮崔賜戶三十結春秋享
010_1074_c_19L楊州孝寧園造泡寺祈福及願9) [88]
010_1074_c_20L「肆」甲本正誤表作「師」「限」上甲本正誤
010_1074_c_21L表有「期」
「佛」甲本正誤表作「修」「綱」甲
010_1074_c_22L本正誤表作「綱」
「微」甲本正誤表作「徵」
010_1074_c_23L「窟幕」甲本作「窟募」而正誤表曰衍字
「暝」
010_1074_c_24L甲本正誤表作「溟」次同
「▼(艹/罒/心)」甲本正誤表作
010_1074_c_25L「夢」
「當」甲本正誤表作「堂」

010_1075_a_01L이와 같이 왕실에서조차 존경하고 숭배하던 절인데, 법 제도가 어떠하였기에 절이 망하고 승려들도 다 사라지고 얼마 남지 않았으며 좋지 않은 일들이 층층으로 발생하는지 모르겠다.
환명 스님이 용흥사 수호총섭守護摠攝을 맡아볼 때에 이러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겨 영읍營邑에 호소하여 폐단을 다 쓸어 없애고 제향의 소임을 다하지 않고 민호를 숨긴 이들을 탄핵하여 임금의 어머니 위패를 모신 거룩한 곳에 예를 다시 올릴 수 있게 되었고 사찰과 산문은 근심이 없게 되었다. 스님은 이와 같이 위엄과 덕을 병행하여 일처리를 하였으므로 스님이나 속인 모두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인연 있는 시주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용흥사에 선불장選佛場31)을 시설하고 환명 스님을 입승立繩32)으로 초청하여 정진하니, 도량이 엄정嚴淨해지고 산문도 숙연하고 조용해졌다. 어느 누가 그 권력이 위대하고 웅대함을 흠앙하지 않겠는가?
회광강백전晦光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유선有璿이고 호는 회광晦光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뒤에 간성으로 옮겨가 살았다.
어릴 적에 ‘부처님께서 성을 넘어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수행하여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는 고사를 듣고 어버이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문에 들어가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설악산 신흥가람神興伽藍의 설허雪墟 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뒷날 구족계를 받은 뒤에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모두 배웠으니, 목서木樨의 향기를 맡았는가? 매화 열매 익은 것을 보았네. 네거리 술집에서 술에 흠뻑 취하여 집에 돌아오니 더 이상 갈 길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되자 스님은 마침내 보운寶雲법명은 긍엽亘葉 선사의 선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종맥을 살펴보면 환성 지안喚醒志安에서 함월 해원涵月海源, 함월에서 영파 성규影波聖奎, 영파에서 낙허 치관樂虛致寬, 낙허에서 성원 의찰性圓宜察, 성원에서 경암 신묵鏡庵信默, 경암에서 진암 정우眞庵定旴, 진암에서 보운 긍엽, 보운에서 회광 유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회광 스님은 환성 스님의 8대 법손이고 청허 스님의 12대 법손이며, 연파蓮坡 스님과 일봉日峯 스님과는 동문 형제지간이다.
회광 스님이 강당을 개설하고 설법을 시작하니 양서兩西와 삼남三南 지역의 학인들이 무명의 숲을 헤치고 불조의 가풍을 우러러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일 년 사시四時 내내 귀에 입을 가까이하고 얼굴을 맞대고 가르쳐(提耳面命) 보내느라 쉴 겨를이 없었다. 스님의 명성은 드높을 대로 높아져서 피할 길이 없었다.
스님은 오대산과 건봉사乾鳳寺에 머물기도 하였고, 금강산과 삼각산에도 머물렀으며, 양산 통도사通度寺에서 하안거를 결제하고 성덕산에서 동안거를 결제하였다. 백양사白羊寺에 머물러 있다가 구곡九曲으로 들어가 수행을 하기도 했다. 스님이 하룻밤 자고 한번 지나가면 마치 봄 동산에 사향노루가 지나가면 풀이 절로 향기로운 것 같다는 말처럼 되었으며, 한 마디 말을 어떤 사람에게 주면 흡사 밝은 달빛이 선정에 든 스님을 오래도록 비추는 것과 같았다.

010_1075_a_01L其所尊崇法制何如而寺敗僧殘𡚁
010_1075_a_02L攰層生任守護揔攝告訴營邑𡚁
010_1075_a_03L攰掃除隱戶彈劾聖地有禮寺山無
010_1075_a_04L威德并行僧俗俱安募諸嚫緣
010_1075_a_05L設選佛場請師立繩道場嚴淨山門
010_1075_a_06L肅靖誰不欣仰其權力之偉雄哉

010_1075_a_07L

010_1075_a_08L晦光講伯傳

010_1075_a_09L
師名有璿號晦光姓李氏襄陽人
010_1075_a_10L居杆城幼耳踰城出家斷髮見星之古
010_1075_a_11L辭親入山覓師剃染於雪岳山神興
010_1075_a_12L伽藍雪墟禪師受具遊歷四方學習
010_1075_a_13L內外典聞木樨香乎看梅子熟矣滿
010_1075_a_14L醉於衢樽歸家破問程拈香於寶雲

010_1075_a_15L禪師之室宗脉則喚惺志安涵月海源
010_1075_a_16L影波聖奎樂虛致寬性圓宜察 [16] 信默
010_1075_a_17L庵定旴寶雲亘葉晦光有璿凡喚惺之
010_1075_a_18L八世淸虛之十二世蓮波日峯同門
010_1075_a_19L兄弟開堂普說兩西三南學人1) [89]
010_1075_a_20L瞻風而至一年四時提耳面命而送
010_1075_a_21L聲已高矣名難逃也住五坮乾鳳
010_1075_a_22L金剛三角結夏於通度結冬於聖德
010_1075_a_23L卓錫白羊結納九曲一宿過去若麝
010_1075_a_24L過春山草自香一言與人如月明長照

010_1075_b_01L
정신을 가다듬은 지 오래되지 않아 조규刁圭를 사용하니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왕성해지는 법인가? 좋은 일에 마장이 많은 법인가? 옛날 의상義湘 대사가 당나라에 들어가다가 요동 땅에서 어떤 사람의 무고를 당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고, 나옹懶翁 선사가 오대산에 머물 때에 홍건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재앙을 면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스님에게도 왜인倭人의 복색을 한 이들이 성안에 가득하고 오랑캐들이 마을을 메워 숫양이 뿔을 울타리에 박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듯이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유성裕性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客)는 겨울에 한창 추울 적에 성덕산에서 동안거 결제를 마친 뒤 벗과 나 네 명이 도반이 되어 영주瀛洲(제주)로 들어가 여름을 보내기로 뜻을 세워 발원하였는데 병病이라는 큰 산이 길을 막아 경영하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태완泰玩 스님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내 나이 지금 열다섯 살인데 2년 동안 나그네로 떠돌아다니다가 보니 돌아가서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마음이 밤낮으로 간절해져서 곧바로 영남으로 돌아갔다.”
축념竺念 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승려의 바랑이 바닥이 드러나고 시절 운수마저 막힌 데다 해마다 농사마저 심한 가뭄이 들어 쥐구멍에 머리만 내민 쥐가 나가지 못하고 눈치만 보듯이, 이리가 앞으로 가려 하면 턱살이 밟히고 뒤로 가려 하면 꼬리가 밟히는 것처럼(跋前疐後)33)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운명만 기다릴 뿐이다.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처지가 되자 회광 스님은 게송 한 수를 지어 보여 주었다. 그 게송에 ‘저 옛날 의상 대사와 나옹 대사의 사적事蹟과 꼭 같고 원효 대사가 돌아온 발자취와 고금의 행적이 다르지 않으니, 어느 곳엔들 무릎 하나 용납할 만한 토굴이 없을 것이며 어느 산인들 하루 한 끼니 먹을 솔잎이 없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도 역시 한 장의 선게禪偈를 지어 주고, 받고 하는 한편 이 무렵의 기연機緣을 기록하여 빛을 감추어도(晦光) 저절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흔적을 표하고자 이와 같이 한다.”
스님은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 현재 세속의 나이 33세로 강원도 간성 건봉사에 머물고 있다.
원본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소장되어 있다.
소화昭和 16년(1941) 7월 등사謄寫하다.

010_1075_b_01L定中僧抖擻非久刁圭是用道高魔盛
010_1075_b_02L好事多魔歟義湘入唐誣囚遼東
010_1075_b_03L懶翁居臺僅免紅賊倭服滿城𢎥人
010_1075_b_04L塞鄕2) [90] 羊觸藩進退3) [91] 裕性曰
010_1075_b_05L客冬結寒際於聖德山四友作伴入瀛
010_1075_b_06L過夏次立志發願病山遮路所營未
010_1075_b_07L泰玩曰年今十五作客兩歲敀寧
010_1075_b_08L一心日夜殊切旋歸嶺南竺念曰
010_1075_b_09L橐到底而時運4) [92] 年事亢旱首鼠
010_1075_b_10L兩端跋前㚄後以待命分欲行不行
010_1075_b_11L師作一偈以示5)离中 [93] 義湘懶翁之事
010_1075_b_12L適同事蹟元曉之還歸古今眞跡
010_1075_b_13L處無容膝之窟何山無一食之松乎
010_1075_b_14L亦作一章禪偈授受而記其機緣以旌
010_1075_b_15L晦光自現之跡如此光緖甲午三十三
010_1075_b_16L時在杆城乾鳳

010_1075_b_17L
010_1075_b_18L
原本朝鮮史編修會藏

010_1075_b_19L昭和十六年七月謄寫

010_1075_b_20L「跋」甲本正誤表作「撥」「牴」甲本正誤表
010_1075_b_21L作「羝」
「惟」甲本正誤表作「維」「丕」甲本
010_1075_b_22L正誤表作「否」
「离中」甲本正誤表曰衍字
  1. 1)종환瘇患 : 다리가 붓는 병, 즉 수중다리.
  2. 2)단자端字 :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으나 다만 동산·나운·서현 등은 범해 각안梵海覺岸의 사법 제자인 점을 감안할 때 사제 간의 의식에 쓰이는 물건이 아닌가 생각된다.
  3. 3)철선 스님과~다니기도 했다 : 철선과 초의의 문장과 열수와 추사의 글씨가 워낙 뛰어났으므로 자작시나 자필 글씨에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이다.
  4. 4)사람娑囕은 보이지~여유가 있다 : ‘사람娑囕’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고, ‘알가閼伽’는 원래 ‘가치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불전에 바치는 공양물을 말하나 여기에서는 스님의 입적과 관계된 것인 듯하다.
  5. 5)완함阮咸 :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명으로 완적阮籍의 조카이다. 호방하여 세속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음률에 밝아 비파를 잘 탔다. 여기서는 ‘조카’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6. 6)무착無着 : 4세기 때 북인도 바라문 출신의 유식불교 대성자. 범어로 아상가라고 한다. 음역해서 아승가阿僧伽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착無着, 무장애無障㝵로 의역한다. 유식학으로 유명한 세친世親의 형이다. 여기서는 법형法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7. 7)화상和尙 아사리阿闍梨 : 아사리는 제자들의 행위를 바로잡아 주는 스승을 말하고 화상은 수계사를 지칭한다.
  8. 8)삼제三際 : 인도에서 열제熱際, 우제雨際, 한제寒際로 나누었던 것을 말한다.
  9. 9)사사四事 : 네 가지 공양 거리인 의복·음식·탕약·방사를 말한다.
  10. 10)백수아사白首阿師 : 머리 하얀 스님이란 뜻으로 아무 지위를 얻지 못한 스님을 지칭하는 듯하다.
  11. 11)이 운문체의 글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원해 스님의 행장을 말한 것 같다.
  12. 12)시홀방장十笏方丈 : 작은 방을 의미한다.
  13. 13)십팔공十八公 : ‘十八公’ 세 자를 조합하면 ‘松’ 자가 되니 송광사를 의미하는 말이다.
  14. 14)세 가닥 서까래 아래 : 한 사람이 차지하는 길이 6척 너비 3척의 공간을 말한다.
  15. 15)일곱 근 장삼(七斤衫) : 『禪門拈頌集』 408칙則 「萬法」 조에 “조주趙州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지만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선사가 말하였다. ‘내가 청주靑州에서 베 장삼(布衫) 하나를 지었는데, 무게가 일곱 근이더라.’”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16. 16)여섯 수 옷(六銖衣) : 1수銖는 1양兩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무게로 여섯 수의 옷이란 아주 가벼운 옷을 말한다.
  17. 17)호윤好潤이 아닌가 생각된다.
  18. 18)아난阿難과 같은 벗 : 학식이 아난처럼 다문多聞한 경지에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19. 19)계환戒環 같은 무리 : 경전 주석을 잘하는 스님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20. 20)남복南服 : 복服은 서울 밖 500리 되는 지역을 뜻한다.
  21. 21)장구령張九齡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의 명재상이며 뛰어난 문장가. 자는 자수子壽. 저서에는 『曲江集』이 있다.
  22. 22)주애珠涯 : 중국 최남단에 있는 지명.
  23. 23)숙수菽水 : 자로子路가 집안이 빈한해서 어버이에 대한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탄식을 하자, 공자가 “콩죽을 쑤어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린다면 그것이 효이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위로했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禮記』 「檀弓」 하.
  24. 24)오유吾幼 : 『맹자』 「梁惠王章句」 상편에 “내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겨서 남의 어버이에게까지 미치며 내 자식을 자식으로 사랑하여 남의 자식에게까지 미친다.(老吾老以及人之老。 幼吾幼以及人之幼。)”라고 한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25. 25)결계結界 : ⓢ simābandha. 반타야사만畔陀也死曼, 만타야사만滿馱也徙滿이라 음역. 제한된 경계라는 뜻이다. ①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장애를 없애기 위해서 비구의 의·식·주를 제한하는 것. 곧 일정한 장소에 거처하는 것, 남은 음식을 간직하여 두지 않는 것, 옷을 벗지 않는 것을 말한다. ② 마군의 장난을 없애기 위하여 인명법印明法에 따라 제정한 도량의 구역. 이것은 밀교에서 쓰는 법으로, 주로 도량의 정결을 그 목적으로 한다.
  26. 26)백성(普率) : “넓은 하늘(普天) 아래 다스리고 있는 땅(率土)의 백성들이 모두 황제의 백성이다.”라고 한 말에서 따온 말이다.
  27. 27)교리행과敎理行果 : 사법四法이라 한다. 구경究竟 목적에 이르는 수양의 과정을 네 단계로 분류한 것이다. 교敎는 언어·문자로써 말하는 교설, 이理는 교의 내용인 도리, 행行은 그 도리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 과果는 수행의 결과로 체득하는 결과, 곧 깨닫는 것. 교는 이를 나타내고, 이는 행을 일으키고, 행은 과를 얻는 순서로 어떤 종의宗義에도 통용되며, 그중 교敎·리理·행行은 문聞·사思·수修에 배당된다.
  28. 28)구당瞿塘 : 장강長江의 삼협三峽 가운데 하나로, 사천성四川省 백제성白帝城에 있는데, 강물의 흐름이 아주 빠르고 산세가 몹시 험하기로 유명하여 서촉西蜀의 관문關門이라고 칭해진다.
  29. 29)『논어』 「爲政篇」에 나오는 말이다.
  30. 30)설리라設利羅 : ⓢ Śarīra의 음역. 즉 사리舍利.
  31. 31)선불장選佛場 : 교학과 참선 수행을 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32. 32)입승立繩 : 선방의 법규와 질서를 담당한다. 대개 선방의 회장 격인 셈이다.
  33. 33)발전치후跋前疐後 : 『시경』 「豳風」 〈狼跋〉에서 나온 말로, 이리가 앞으로 가려 하면 턱살이 밟히고 뒤로 가려 하면 꼬리가 밟히는 것처럼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처지에 놓인 것을 말한다.
  1. 1)「擅」甲本正誤表作「檀」。
  2. 2)「守」甲本正誤表作「字」。
  3. 3)「詩」甲本正誤表作「諸」。
  4. 4)「猫」甲本正誤表作「描」。
  5. 5)「文」疑「丈」{編}。
  6. 6)「中」甲本正誤表作「申」。
  7. 7)「秩」下甲本正誤表有「奈」。
  8. 8)「伯」下甲本正誤表有「之」。
  9. 9)「開」甲本正誤表作「聞」。
  10. 1)「柩」甲本正誤表作「樞」次同。
  11. 2)「寺」甲本正誤表作「師」。
  12. 3)「當」甲本正誤表作「堂」。
  13. 4)「若」甲本正誤表作「岩」。
  14. 5)「開」甲本正誤表作「關」。
  15. 1)「養」甲本正誤表作「癢」。
  16. 2)「師」下疑脫「傳」{編}。
  17. 3)「葉迦」甲本正誤表作「迦葉」。
  18. 4)「月」下甲本正誤表有「師」。
  19. 5)「佛」下甲本正誤表有「之」。
  20. 6)「師」甲本正誤表作「士」。
  21. 7)「巋」下甲本正誤表有「然」。
  22. 8)「荊」疑「剏」{編}。
  23. 1)「玩」甲本正誤表作「阮」。
  24. 2)「之」下甲本正誤表有「席」。
  25. 3)「里」甲本正誤表作「釐」。
  26. 4)「胎」甲本正誤表作「昭」。
  27. 5)「空」甲本正誤表作「孔」。
  28. 1)「及」作「反」{甲}。
  29. 2)「盤」甲本正誤表作「般」。
  30. 3)「時」甲本正誤表作「昧」。
  31. 4)「文」下甲本正誤。表有「之」。
  32. 5)「澹」甲本正誤表曰當細書。
  33. 6)甲本正誤表曰兼下缺。
  34. 7)「大」甲本正誤表作「火」。
  35. 1)「師」下甲本正誤表有「躡」。
  36. 2)「立」甲本正誤表作「岳」。
  37. 3)「問」甲本正誤表作「間」。
  38. 4)「松」下甲本正誤表有「庵」。
  39. 5)「電」甲本正誤表作「雷」。
  40. 6)「好」疑「妙」{編}。
  41. 7)「之」疑衍字{編}。
  42. 8)「有孫」作「孫有」{甲}。
  43. 9)「曰」甲本正誤表曰衍字。
  44. 1)「▼(彳+歩)」甲本正誤表作「徙」。
  45. 2)「壁」作「避」{甲}。
  46. 3)「意」甲本正誤表作「億」。
  47. 1)「敎」甲本正誤表曰衍字。
  48. 2)「▼(虫+(枕-木))」甲本正誤表作「蛇」次同。
  49. 3)「栖」甲本正誤表作「柄」。
  50. 4)「洞」甲本正誤表作「同」。
  51. 5)「住」作「徃」{甲}。
  52. 6)「住」甲本正誤表作「任」。
  53. 7)「文劫」甲本正誤表作「言功」。
  54. 8)「戎」甲本正誤表作「戒」。
  55. 9)「線」上甲本正誤表有「針」。
  56. 10)「直」作「眞」{甲}。
  57. 11)「切」甲本正誤表作「功」。
  58. 12)「劇」甲本正誤表作「遽」。
  59. 1)「下」甲本正誤表作「不」。
  60. 2)「外」甲本正誤表作「升」。
  61. 3)「白」甲本正誤表作「句」。
  62. 4)「跡」作「路」{甲}。
  63. 5)「行」疑衍字{編}。
  64. 6)「忍」下甲本正誤表有「難」。
  65. 7)「必」作「心」{甲}。
  66. 8)「折里」甲本正誤表作「析釐」。
  67. 9)「或」甲本正誤表作「惑」。
  68. 1)「傳」甲本正誤表作「展」。
  69. 2)「夏」下甲本正誤表有「在」。
  70. 3)「受」甲本正誤表曰衍字。
  71. 4)「堂之」甲本正誤表作「之堂」。
  72. 5)「王」甲本正誤表曰衍字。
  73. 1)「肆」甲本正誤表作「師」。
  74. 2)「限」上甲本正誤表有「期」。
  75. 3)「佛」甲本正誤表作「修」。
  76. 4)「綱」甲本正誤表作「綱」。
  77. 5)「微」甲本正誤表作「徵」。
  78. 6)「窟幕」甲本作「窟募」而正誤表曰衍字。
  79. 7)「暝」甲本正誤表作「溟」次同。
  80. 8)「▼(艹/罒/心)」甲本正誤表作「夢」。
  81. 9)「當」甲本正誤表作「堂」。
  82. 1)「跋」甲本正誤表作「撥」。
  83. 2)「牴」甲本正誤表作「羝」。
  84. 3)「惟」甲本正誤表作「維」。
  85. 4)「丕」甲本正誤表作「否」。
  86. 5)「离中」甲本正誤表曰衍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