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사열전(東師列傳) / 東師列傳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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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 제3권(東師列傳 第三)
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
백암종사전栢庵宗師傳
종사의 법명은 성총性聰이고 호는 백암栢庵이다. 취미翠微 스님의 법제자이고 백곡 처능白谷處能 스님의 조카 제자이며, 무용 수연無用秀演의 스승이다. 조계산에서 출가하였다.
기사년(숙종 15, 1689) 봄에 낙안 징광사澄光寺로 가서 『화엄연의초華嚴演義鈔』·『대명법수大明法數』·『간정기刊定記』·『정토보서淨土寶書』·『영험록靈驗錄』 등의 책을 간행하여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을 틔워 주려고 애를 썼다.
임신년(숙종 18, 1620) 봄에 화엄법회를 성대하게 열자 사부대중들이 노루를 좇듯이 밀려들었다. 그해 겨울에 방호方壺1)로 옮겨 갔다.
경진년(숙종 26, 1700) 7월에 지리산 신흥사神興寺로 들어가 7월 25일 밤 자정이 채 못 되어 홀연 열반에 들었다. 대사가 열반에 든 뒤 연일 밤마다 상서로운 광명이 서리더니 7일째 밤 다비식(火浴)을 하는데 그 상서로운 기운이 더욱 커져 한 줄기 하얀 빛으로 변하였다. 그것은 마치 한 필의 하얀 비단이 남북으로 뻗어 있는 것 같았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두 그 광경을 보았다.
그 후 3일이 지난 뒤 영골靈骨을 수습할 때에 소나무 가지 위에서 한 조각 영골을 얻어 그 절의 백호白虎(오른쪽으로 뻗은 산) 바깥쪽 높다란 봉우리 언덕 위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다.
스님이 남긴 원고는 거의 10여 편에 이르지만 다 흩어져 없어지고 겨우 몇 편을 거두어 판목에 새겼는데 그 서문은 최상국崔相國이 썼다. 스님의 가르침을 전해 받은 제자 중에 무용無用 대사와 석실石室 대사 등 23명이 여러 지방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여 사방의 산을 뒤덮었다.
무용법사전無用法師傳
법사의 법명은 수연秀演이고 자字는 무용無用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스님들과 속인들이 모두들 무용이라고 불렀으므로

010_1023_a_02L東師列傳第三

010_1023_a_03L

010_1023_a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1023_a_05L[傳]
栢庵宗師傳

010_1023_a_06L
宗師名性聰號栢庵翠微之子白谷
010_1023_a_07L處能之侄無用秀演之師也出家於曺
010_1023_a_08L溪山己巳春赴澄光寺刻華嚴演義
010_1023_a_09L鈔及大明法數刊定記淨土寶書靈驗等
010_1023_a_10L欲開人天眼目壬申春大設華嚴
010_1023_a_11L法會四部之衆逐麏相至移入方
010_1023_a_12L庚辰七月徃智異山神興寺七月
010_1023_a_13L二十五日夜未半奄然歸盡時連夜
010_1023_a_14L有光瑞而第七日火浴之夜其瑞益大
010_1023_a_15L一道白氣如一匹練亘于南北遠近
010_1023_a_16L皆覩越三日收骨之時得一片靈骨
010_1023_a_17L于松樹上樹塔于寺之白虎外高峰原
010_1023_a_18L遺稿幾至十餘篇而散亡之餘
010_1023_a_19L得數篇授梓崔相國作序文傳敎者
010_1023_a_20L有無用石室等二十三人雄於諸方
010_1023_a_21L於四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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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3_a_23L無用法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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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師名秀演字無用遐邇緇素咸穪

010_1023_b_01L마침내는 이를 헌호軒號로 삼았다. 속성은 오吳씨이고 용안龍安(전북 익산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고려 때 태위太尉 벼슬을 지낸 문양공文襄公 오연총吳延寵2)의 후손으로서 대가 끊이지 않고 우리 조선조에 이르렀다.
그의 증조부 하몽下蒙은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3) 행정의현감行旌義縣監4)과 행무안현감行務安縣監에 이르렀고, 할아버지 응정應鼎은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5) 행순천부사行順天府使에 이르렀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6)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섬무暹武는 절행벽단첨사絶行碧團僉使를 역임하였다.
아버지가 어느 날 누런 무늬를 띤 호랑이(大蟲)가 꿈틀거리며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얼마쯤 지나자 다시 내려와서 집을 여러 바퀴 도는 꿈을 꾸고 난 뒤 부인에게 태기가 있어 순치順治(淸 世祖의 연호) 8년 신묘(효종 2, 1651) 3월 13일에 옥동자를 분만하였다. 어린아이는 탄생할 때부터 특이하였으며 몸뚱이는 곱고 깨끗하였고 이마가 각이 진 게 오뚝하게 생겼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고 말수가 적었으며, 나이 겨우 여덟 살에 경사經史를 배우기 시작했다. 열세 살 때 갑자기 부모를 여의고 오직 형에게 의지하여 지내다가 열아홉 살에 우연히 조계산 송광사松廣社에 들렀다가 혜관惠寬 노스님을 의지해 출가한 후 혜공慧空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에 침굉枕肱 스님을 알현하고 선지禪旨를 들었으며, 다시 조계산 은적암隱寂庵으로 백암栢庵 스님을 배알하고 경전의 어려운 부분을 물었다. 그 뒤에 용문산龍門山 금화동金華洞 신불암新佛庵, 팔영산八影山 칠불암七佛庵 등을 유유자적 돌아다녔고 수석정水石亭을 짓기도 하였다. 10월 17일 가부좌를 한 채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69세이고 법랍은 51년이었다. 7일이 지난 뒤에 절의 백호白虎(오른쪽으로 뻗은 산) 바깥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였다.
문집 두 권이 세상에 유포되었다. 진도 「쌍계사사적雙磎寺事蹟」과 영암 「도갑사수미왕사비문道甲寺守眉王師碑文」과 전주 「송광사사적비문松廣寺事蹟碑文」은 모두 대사가 직접 지은 것이다.
문인으로는 영해 약탄影海若坦과 두륜 청성頭輪淸性 등 모두 22명이 있다.
화악조사전華岳祖師傳
조사의 법명은 문신文信이고 호는 화악華岳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해남 화산華山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010_1023_b_01L以無用遂爲軒號姓吳氏龍安人也
010_1023_b_02L高麗太尉文襄公延寵之裔孫世不絕
010_1023_b_03L逮至我朝曾祖下蒙官至通訓大夫行
010_1023_b_04L旌義及務安等縣監祖應鼎官至通政
010_1023_b_05L大夫行順天府使贈嘉善大夫漢城左
010_1023_b_06L父暹武節行碧團僉使夢一黃章大
010_1023_b_07L蜿蜒上空少選還墜繞室數匝
010_1023_b_08L以有娠以順治八年辛卯三月十三日
010_1023_b_09L誕生而有異軆軀鮮潔頭角巋然
010_1023_b_10L而聰慧少言語牛甫初八始入書史
010_1023_b_11L十三奄違考妣惟兄是依十九偶入曹
010_1023_b_12L溪之松廣社依惠寬老師出家受具於
010_1023_b_13L慧空大師謁枕肱聽禪旨謁栢庵于
010_1023_b_14L曺溪之隱寂執經問難優遊於龍門山
010_1023_b_15L金華洞新佛庵八影山七佛庵築水石
010_1023_b_16L十月十七日趺坐而寂報年六十
010_1023_b_17L坐夏五十一越七日茶毘於寺之
010_1023_b_18L白虎外文集二卷行于世珍島雙溪
010_1023_b_19L寺事蹟文靈岩道甲寺守眉王師碑文
010_1023_b_20L全州松廣寺事蹟碑文皆其手選門人
010_1023_b_21L影海若坦頭輪淸性等凡二十二人

010_1023_b_22L

010_1023_b_23L華岳祖師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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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師名文信號華岳姓金氏海南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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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둔사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돌아보건대 그는 바탕이 노둔하여 글을 몰랐다. 농사 기구를 팔아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갔는데 하루는 너무도 피곤해서 상원루上院樓 밑에 이르러 짐을 벗어 놓고 쉬고 있었다. 때마침 그 누각에서는 취여 삼우醉如三愚 선사가 대중들을 모아 놓고 『화엄경』의 종지를 강론하고 있었다.
화악 대사는 누각 아래에서 한두 구절을 엿듣고는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닫고, 지고 있던 농기구를 같이 장사하던 친구에게 넘겨주고 누각으로 올라가 꿇어앉아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불법의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였다. 삼우 대사는 매우 기특하게 여겨 그의 소원을 허락하였다. 그날 사방에서 몰려와 강론을 듣던 대중들은 쇄연灑然해졌다.
화악 스님은 매일 밤마다 주워 온 솔방울로 불을 밝히고 오경五更이 될 때까지 글을 읽기를 3년이나 하였다. 그와 같이 공부하던 도반들은 모두 뒤로 처지고 말았다. 스님은 대둔사를 떠나 여러 지방으로 구름처럼 전국 명산을 돌아다니며 선지식들을 참배하고 그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학문이 완성되자 마침내 취여醉如 스님의 조실에서 염향拈香7)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자 그의 문전에는 배우려는 사람들이 폭주하였다. 대둔사에서 강론 법회를 여는 날이면 모여드는 대중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당시 북쪽에서 명성을 떨치던 월저月渚(1638~1715) 선사가 남쪽으로 대둔사에 왔다. 화악은 그와 더불어 선지禪旨를 토론하고 나서 그를 종주宗主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 여겨 거느리고 있던 모든 대중들을 월저 대사에게 양보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대중들은 매우 놀라며 만류하였다. 대사가 대중들을 타일러 말하였다.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니라.”
그러고는 스스로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월저 대사의 화엄법회가 끝날 때까지 면벽面壁에 들어갔다. 월저 대사는 법회를 마치고 묘향산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남쪽 지방에 갔다가 육신보살肉身菩薩을 친견하였다.”
화악 스님은 숭정崇禎(明 毅宗의 연호) 2년 기사(인조 7, 1629)에 태어나서 강희康熙(淸 聖祖의 연호) 16년 정해(숙종 39, 1707) 6월 26일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로는 79세였다. 막 열반에 들었을 때에 두륜산에 우렛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다비식을 마치고 나서 사리 2매를 얻었다. 스님의 비명은 이러하다.

有嗈買䤥       농기구 파는 이의 울음소리
鳴彼中林       저 숲 속에 울려 퍼졌네
有嚖者蟬       매미 우는 소리 맴맴
旣蛻旣唫       이미 허물 벗고 노래를 읊네
黃梅依法       황매산黃梅山 홍인 대사의 법
舂者受之       방아 찧던 사람에게 주었네
山林有壁       산림山林에서의 면벽으로
遂撤皐比       마침내 고비皐比8)를 거두셨네
是謂能讓       이를 일러 능양能讓이라 하나니
匪伊有出       그가 아니면 뉘라서 하랴
早不可踰       일찍이 그를 뛰어넘을 수 없기에
號爲生佛       그를 일러 산부처라 불렀네

010_1023_c_01L山人出家於大芚寺落髮顧椎鹵不識
010_1023_c_02L爲貿田器且行且鬻以取飽一日
010_1023_c_03L憊甚至上院樓下捨擔而休焉時醉
010_1023_c_04L如三愚禪師集大衆講華嚴宗旨
010_1023_c_05L在樓板下竊聽之立地頓悟悉以所
010_1023_c_06L負田器付其伴升樓而跪涕簌簌
010_1023_c_07L受課程三愚大奇之許其所願是日
010_1023_c_08L四座灑然每夜拾松子爲燎讀書達五
010_1023_c_09L旣三年同列皆殿雲遊四方參伍
010_1023_c_10L印證學旣成遂於醉如室中拈香
010_1023_c_11L學者輻輳1) [1] 講會之日衆至數
010_1023_c_12L百人時北方月渚禪師南遊至芚*師
010_1023_c_13L與論禪旨知其可宗悉以所領大衆
010_1023_c_14L讓于月渚學者大駭師喩之曰微爾
010_1023_c_15L等之所知也自歸一室杜門面壁
010_1023_c_16L終其會月渚歸語人曰吾至南方
010_1023_c_17L肉身菩薩云師生於崇禎二年己巳
010_1023_c_18L康熙四十六年丁亥六月二十六日示寂
010_1023_c_19L壽七十九方示寂之時頭輪雷鳴
010_1023_c_20L茶毘得舍利二枚銘曰有嗈買䤥
010_1023_c_21L彼中林有嚖者蟬旣蛻旣唫黃梅依
010_1023_c_22L舂者受之山林有壁遂撤皐比
010_1023_c_23L謂能讓匪伊有出早不可踰號爲生
010_1023_c_24L「師」甲本正誤表作「寺」次同

010_1024_a_01L惟淨惟暄       설봉 회정雪峰懷淨과 송파 각훤松坡覺暄
惟圓惟藏       정암 즉원晶巖即圓과 연파 혜장蓮坡惠藏
燈燈相繼       진리의 등불 서로 이어오더니
五世其昌       5대에 이르러 융창하였네
百歲之後       백세百歲(세상을 마침) 뒤에
始刻貞珉       비로소 비석에 새기노니
繫茲伽陀       이 가타伽陀9)가 계속되어
以詔後人       후세 사람 깨우치게 함이니라

비문은 한치응韓致應이 지은 것이다. 문인으로는 설봉雪峰과 벽하碧霞 등 21명이 있었으며, 스님의 진영은 대흥사大興寺 상원上院의 영각影閣에 모셔져 있다.
설암종사전雪巖宗師傳
종사의 법명은 추붕秋鵬이고 호는 설암雪巖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강동江東(평안남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가냘프고 여윈 모습에 위의 또한 빼어난 데가 없었으나 두 눈동자만큼은 형형炯炯한 빛이 사람을 쏘았다. 계행戒行이 매우 높았지만, 사람들을 대할 때에는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대하였다.
사람들과 담론할 때의 예봉銳鋒은 불꽃이 일어나듯 정열적이었으며, 샘물이 솟아나듯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 종안宗眼 장로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된 뒤 벽계 구이碧溪九二 선사를 찾아가 참배하고 몸소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면서 경론을 배워 통달하였다.
설암이 월저 도안月渚道安 대사를 찾아가 예를 올리자 그 둘은 침개針芥10)가 서로 투합하듯이 서로 뜻이 맞지 않는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도안은 설암이 특이한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리고 제자로 받아들여 의발을 전해 주었다. 설암은 곧 남쪽 지방을 유람하니 남방의 모든 스님들은 높은 명망을 듣고 우러러 사모하여(望風) 그의 가르침에 깊이 심취하였다.
스님은 병술년(숙종 32, 1706) 8월 5일에 입적하였다.강희康熙 45년 스님은 신묘년(1651)순치順治 8년, 우리 효종 대왕 2년 8월 27일에 태어났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56세였다.
다비를 하여 사리 5과를 얻었는데 나누어서 낙안 징광사澄光寺와 해남 대둔사大芚寺에 각각 탑을 세워 봉안하였다. 사명泗溟 존자가 입적한 지 8년 되던 해인 무오년(광해군 10, 1618)에 문인들의 호소로 인하여 임금이 특명을 내려 밀양 재약사載藥寺(표충사)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그 후 137년이 지나서 그의 5세 법손 남붕南鵬이 표충사가 퇴락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재물을 모아 중건하고 여러 군자들에게 간청하여 『시문집詩文集』 1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을 지었다.
그의 저술로 『선원제전집도서과평禪源諸詮集都序科評』과 『법집별행록절요法集別行錄節要』 2집集의 과문科文과 사기私記 2권이 세상에 전해진다.
언젠가 대둔사 백설당白雪堂에서 큰 법회를 열었는데

010_1024_a_01L惟淨惟暄惟圓惟藏燈燈相繼
010_1024_a_02L世其昌百歲之後始刻貞珉繫茲伽
010_1024_a_03L以詔後人乃韓致應所撰也
010_1024_a_04L人有雪峰碧霞等二十一人安眞影于
010_1024_a_05L上院影閣

010_1024_a_06L

010_1024_a_07L雪巖宗師傳

010_1024_a_08L
宗師名秋鵬號雪巖姓金氏江東人
010_1024_a_09L師纖癯無威儀而雙眸炯炯射人其戒
010_1024_a_10L行甚高其接人平等無貴賤其談鋒
010_1024_a_11L若焱至泉湧而不可窮也初從宗眼長
010_1024_a_12L老剃落叅碧溪九二禪師躳執井臼
010_1024_a_13L淹通經論徃禮月渚道安大師針芥相
010_1024_a_14L無不脗合安公深加器異授以衣鉢
010_1024_a_15L乃遊南方南方諸釋望風心醉焉
010_1024_a_16L戌八月初五日示寂康熙四
十五年
距其生辛卯
010_1024_a_17L順治八年我
孝宗二年
八月二十七日世壽五十六
010_1024_a_18L茶毘得舍利五顆分塔於樂安澄光及
010_1024_a_19L海南大芚泗溟尊者入寂後八年戊午
010_1024_a_20L因門人之呼訴特命立祠于1) [2] 藥寺
010_1024_a_21L賜額曰表忠後一百三十七年五世孫
010_1024_a_22L南鵬愍其傾圮鳩村重建請諸君子
010_1024_a_23L詩文作爲一卷并奮忠錄一卷序要
010_1024_a_24L二集科文私記二卷行于世甞大會於

010_1024_b_01L그 『강회록講會錄』에 내용이 실려 있다. 홍문관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가 스님의 비문을 지었다. 문인은 34명이다.
환성종사전喚醒宗師傳
선사先師의 법명은 지안志安이다.
스님이 춘주春州(춘천) 청평사淸平寺에 머물고 계실 때 일이다. 경내의 누각 아래에 영지影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진흙이 그 연못을 메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래서 그 연못을 복구하는 도중에 작은 비석을 발견하였는데, 그 비석에 ‘유충관부천리래儒衷冠婦千里來’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 글을 해석하면 이러하다.
‘선비의 마음(儒衷)’이란 ‘지志’ 자를 의미하고 ‘부인이 관을 썼다(冠婦)’는 것은 ‘안安’ 자를 뜻하며 ‘천리千里’란 ‘중重’ 자를 의미하니, 이를 풀이하면 ‘지안志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이곳에 다시 온다’는 뜻이었다. 그 때문에 환성의 법명이 지안으로 된 것이다.
환성이 해남 대둔사에 머물고 있으면서 부처님께 공양을 진설할 때, 공중에서 세 번 부름을 받았고, 그때마다 환성도 역시 세 번 응답한 사실이 있어 마침내 호를 환성喚醒이라 하고 자字를 삼낙三諾이라고 하였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고 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현종顯宗 5년 갑진(1664)강희康熙 3년에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미지산彌智山 용문사龍門寺에서 머리를 깎고 쌍봉 정원雙峰(霜峰)淨源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17세에 월담月潭 스님에게 법을 구하니 월담 스님은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을 알고 의발을 그에게 전했다.
스님의 골상은 맑고 엄숙하였으며 음성은 신령스럽고 밝았다. 말은 간략하였고 안색은 늘 온화하였다. 부처님의 경전(內典) 연구에 몰두하느라 아예 침식을 모두 잊기가 예사였다.
27세 때에는 모운 진언慕雲震言(1622~1703) 대사가 금산金山(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법회를 개설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갔는데, 모운이 그의 학덕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탄복하고 수백 명의 학인들에게 말하였다.
“내 이제 사자좌獅子座를 거두고 떠나니 너희들은 스승의 예로 이 스님을 섬기도록 하라.”
이런 당부를 하고는 자리를 물려준 후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산으로 떠나갔다. 환성은 마침내 대중들 앞에 나아가 종縱으로 설법하고 횡橫으로 설법하였는데, 털을 나누고 실을 가리듯 그 호연浩然함이 마치 강물이 콸콸 흘러가는 듯하여, 대중들이 그의 설법을 듣고 활연豁然히 다 깨달았다. 그로 말미암아 사방의 승려들이 바람에 쏠리듯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언젠가 지리산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떤 도인이 앞에 나타나 말하였다.
“스님께서는 속히 이 자리를 떠나십시오.”
과연 며칠이 지나자 화재를 만나 그곳이 다 타버렸다.
또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하늘에서 큰비가 내렸는데 대사가 행장을 꾸려 그곳을 떠났다. 산 아래 부잣집에서 초청하였으나

010_1024_b_01L大芚寺白雪堂載在講會錄弘文舘大
010_1024_b_02L提學李德壽撰碑門人三十四

010_1024_b_03L

010_1024_b_04L喚醒宗師傳

010_1024_b_05L
先師名志安住春州淸平寺樓下有影
010_1024_b_06L淤塞已久濬之得短碑刻曰儒2) [3]
010_1024_b_07L冠婦千里來解之者曰儒*乘志也
010_1024_b_08L冠婦安也千里重也謂志安重來
010_1024_b_09L仍名焉住海南大芚寺設淨供空中
010_1024_b_10L三呼醒亦三應出遂號曰喚醒字曰
010_1024_b_11L三諾姓鄭氏春州人顯宗五年甲辰
010_1024_b_12L康熙
三年
十五出家落髮於彌智山龍門寺
010_1024_b_13L受具於雙峰淨源十七求法於月潭
010_1024_b_14L大器之以衣鉢托焉師骨相淸嚴
010_1024_b_15L韻靈朗言簡而色和精硏內典寢食
010_1024_b_16L俱忘二十七聞慕雲震言大士設法會
010_1024_b_17L於金山直指寺徃從之 3) [2] 雲大敬服
010_1024_b_18L語其衆數百人曰吾今輟獅子座汝等
010_1024_b_19L禮事之乃潜出居他山遂進大衆
010_1024_b_20L說竪說毫分縷4) [4] 浩然若江河之決
010_1024_b_21L5) [5] 豁然開6)𤕻 [6] 由是四方緇徒靡然
010_1024_b_22L雲集甞於智異山有一道人前言
010_1024_b_23L師速去果數日火灾住金剛山正陽寺
010_1024_b_24L一日天甚大雨師促裝去山下割家請

010_1024_c_01L스님은 그 집에 가지 않고 인근 작은 집에 들어가 투숙하였다. 그런데 그날 밤에 사찰과 부잣집은 모두 물에 떠내려가고 말았다.
을사년(영조 원년, 1725)에 금산사金山寺에서 큰 법회를 베풀었는데 대중들이 무려 1,500여 명이나 모였다. 옹정雍正(淸 世宗의 연호) 7년 기유(영조 5, 1729)에대사 66세 때 마침내 그 법회의 일로 인하여 그를 시기하던 이가 무고誣告하여 지리산에서 체포되어 호남의 옥사에 갇히게 되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나게 되었으나 그 도道의 고위 관리가 석방 불가를 고집하여 마침내 탐라耽羅(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지 7일 만인 7월 7일에 그곳에서 별안간 적멸을 보였으니 3일 동안 산천이 울고 바닷물이 끓어올랐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예전에 세 성현이 탐라에 온다는 예언이 있었는데 환성이 그 한 분이라고들 말했다. 세 분 성현에 대해서는, 한라산 꼭대기에 돌부처가 있는데 그 돌부처 등에 새겨진 글이 있었으니 그 내용은 이러했다.
“세 분 성현이 입적할 곳으로서 한 분은 중국의 정법正法 보살로서 이곳에 와서 살다가 입적할 것이요, 또 한 분은 동국의 허응虛應 존자로서 이곳에 들어와 살다가 입적할 것이며, 다른 한 분은 환성 종사로서 이곳에 유배되어 살다가 입적하게 될 것이다.”
저술로는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 1권과 『문집文集』 3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으며 문인은 33명이 있다. 세속 나이는 66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11)가 비문을 지었고, 그의 비탑碑塔은 두륜산 대둔사에 있다.
벽하종사전碧霞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대우大愚이고 호는 벽하碧霞이다. 속성은 박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어느 날 스님의 어머니는 푸른 새들이 어깨 위로 모여들고 푸른 노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뒤에 잉태하여 대사를 낳았다고 한다. 스님은 뒷날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출가할 마음을 내었고 호 또한 벽하로 지었다.
스님은 조연照淵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화악華岳 대사에게서 경전을 배웠으며, 환성喚醒 대사에게서 선법을 이어받고 고압孤鴨 선사에게서 계율을 전해 받았으니(懺悔),

010_1024_c_01L不入投宿矮舍其夜寺及富家俱沒
010_1024_c_02L水去乙巳設大法會於金山寺衆凡一
010_1024_c_03L千五百人雍正七年己酉六十
竟以會
010_1024_c_04L有誣揑者自智異逮繫湖南獄
010_1024_c_05L幾蒙宥道臣執不可竟流於耽羅到彼
010_1024_c_06L七日爲七月七日也忽示寂山鳴三
010_1024_c_07L海水沸騰驗三聖之讖矣三聖者
010_1024_c_08L漢拏山上有石佛有文在背曰三聖入
010_1024_c_09L寂處一中國正法菩薩來居入寂二東
010_1024_c_10L國虛應尊者入居示寂三喚醒宗師
010_1024_c_11L居示寂五宗綱要一卷文集三卷
010_1024_c_12L行於世門人三十人世壽六十六
010_1024_c_13L臘五十一吏曹判書洪啓禧撰碑碑塔
010_1024_c_14L并在頭輪山大芚寺

010_1024_c_15L

010_1024_c_16L碧霞宗師傳

010_1024_c_17L
師名大愚號碧霞姓朴氏靈岩人
010_1024_c_18L李夢靑鳥集肩碧霞入懷娠而生師
010_1024_c_19L師後來聞鳥鳴聲發出家心且以碧霞
010_1024_c_20L爲號薙髮于照淵長老受敎于華岳大
010_1024_c_21L承禪于喚醒大師懺悔於孤鴨禪師
010_1024_c_22L「在」甲本正誤表作「載」「乘」甲本正誤表
010_1024_c_23L作「衷」次同
「暮」甲本正誤表作「慕」「柝」
010_1024_c_24L甲本正誤表作「析」
「開」甲本正誤表作「聞」
010_1024_c_25L「𤕻」疑「悟」{編}

010_1025_a_01L이들 모두는 서산 대사의 5대 법손이다.
스님은 기상이 높고 준엄해서 사람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었으며,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굽힘이 없이 의연함을 잃지 않고 정직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비록 사나운 호랑이가 목전에 나타나도 마음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경교經敎를 공부하고 틈틈이 남는 시간을 활용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역사서를 섭렵해 두루 통달했다. 만년에는 선송禪頌을 즐겨 보아 그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일찍이 구곡龜谷 스님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에 간간이 잘못된 곳이 있다고 말하면서 손수 붓과 말로써 늙음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고 그것을 바로잡아 나갔다.
환성 스님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東國大宗匠      동국의 큰 종장宗匠은
碧霞長老其      벽하 장로가 바로 그분이네
西江萬里水      서쪽 강 만 리 물을
一口能呑之      한 입에 다 삼켰구나

스님의 양미간에는 하얀 털이 나서 그걸 보는 사람들마다 기이하게 여겼다. 스님의 얼굴 모양은 반듯반듯 모가 나서 쳐다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였으며, 그에게 참례하고 학문을 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부질없는 생각을 떨쳐 버리게 하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직접 붓을 들어 게송을 지었다.

生來寄他界      인생의 삶은 타향에 잠시 몸을 붙인 것이요
去也歸吾鄕      죽음이란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네
去來白雲裡      오고 가는 흰 구름 속에
且得事平常      터득한 일 평상平常함일세

시를 다 쓰고 붓을 놓고는 조용히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스님은 병진년 성조聖祖 강희康熙 15년 숙종대왕 2년(1676)에 태어나 건륭乾隆 28년 영조 39년12) 계미(1763) 6월에 생애를 마치니 세속 나이는 88세였다.
다비를 하여 정골頂骨 한 조각에서 사리 1과를 얻었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13)이 대사의 비명을 지었다. 문인들은 현암玄岩과 채미采微 등 네다섯 명이 있다.
설봉종사전雪峯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회정懷淨이고 자는 윤중允中이며 호는 설봉雪峯이다. 속성은 조曺씨이고 낭주朗州(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대사의 어머니는 평생 산목숨을 죽이지 않았으며 한창 자라나는 것을 꺾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사물이나 나나 매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꿈에 신인神人이 밝은 구슬 하나를 주는 꿈을 꾸었는데 그러고 나서 아이를 가져 숙종 4년강희康熙 16년 무오(1678) 상원上元(정월) 15일에 아이를 낳았다.
스님은 골격이 맑고 밝았다. 나이 겨우 아홉 살에 달마사達摩寺의 조명照明 장로에게 몸을 의지하고 열여섯 살 되던 해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에 화악 문신華岳文信

010_1025_a_01L皆於西山爲五世孫也氣岸高峻人不
010_1025_a_02L得攀援遇事直前無回撓雖猛虎當前
010_1025_a_03L心不少動經敎1) [7] 傍通子史晩喜禪
010_1025_a_04L手不釋卷甞言龜谷說話間有誤
010_1025_a_05L自爲筆說至老不輟喚醒老師贈
010_1025_a_06L詩曰東國大宗匠碧霞長老其西江萬
010_1025_a_07L里水一口能呑之眉間有白毫見者
010_1025_a_08L異之面貌稜稜瞻望悚然諸叅問者
010_1025_a_09L不自覺妄念之消落臨終執筆書偈曰
010_1025_a_10L生來寄他界去也歸吾鄕去來白雲裡
010_1025_a_11L且得事平常放筆泊然坐逝生於丙辰
010_1025_a_12L聖祖康熙十五年肅宗大王二年乾隆
010_1025_a_13L二十八年純祖大王十一年癸未六月卒
010_1025_a_14L壽八十八茶毘得頂骨一片舍利一顆
010_1025_a_15L世子翊衛司副率李毅敬撰碑門人玄
010_1025_a_16L岩采薇等四五人

010_1025_a_17L

010_1025_a_18L雪峯宗師傳

010_1025_a_19L
師名懷淨字允中號雪峯姓曺氏
010_1025_a_20L州人母金氏平生不殺生又不折方
010_1025_a_21L長曰物我一般一日夢神人授一顆
010_1025_a_22L明珠而己有娠以肅廟四年康熙十
六年
戊午
010_1025_a_23L上元日生骨格淸朗甫九歲投達
010_1025_a_24L摩之照明長老十六落髮就華岳文信

010_1025_b_01L대사를 찾아가 대사로부터 법을 받았다. 이미 그의 법을 전해 받고 또 여러 경전을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어 걸림이 없었으며, 글을 분석함에 있어서도 정밀하고 미세하였다.
그리하여 남쪽 지방의 모든 비구들과 ‘선림의 종주(禪林宗主)’라고 불리던 많은 스님들도 설봉 스님의 설법을 한번 듣고는 경복敬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설봉 스님은 본디 성품이 박애博愛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하였으며, 평소에는 입을 닫고 적묵寂黙함으로써 스스로를 지켜 나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스님의 깊은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고, 또한 겉치레를 좋아하지 않아 의복이 남루해도 기워 입지 않았으며, 머리칼과 수염이 자라도 어떤 때는 깎지 않아 덥수룩할 때가 많았다. 사람들이 간혹 나무라면 문득 시 한 수를 낭랑하게 읊곤 하였다.

生平踈逸無拘檢    평소에 소탈하여 거리낌 없어
酒肆茶坊信意遊    술집 다방을 소신껏 드나든다
漢地不收秦不管    한漢나라도 거둬 주지 않고 진나라도 모른 체하니
楊州之詩而不少變   다시 나귀 타고 양주楊洲를 지나간다14)

이 시를 보면 가슴 속이 얼마나 큰가를 엿볼 수 있다.
설봉은 간간이 외딴 섬에 들어가 토굴을 짓고 ‘야은野隱’이라는 편액을 달아 놓고 기거하곤 했다. 스님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하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었으나 실은 이름을 감추고 자취를 감추려고 그랬던 것이다.
무오년(영조 14, 1738)은 스님이 회갑을 맞은 해인데, 이 해 6월 8일에 입적했다.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에 게송 한 편을 읊었다.

浮雲來無處      뜬구름은 온 곳이 없고
去也亦無蹤      갈 때도 역시 자취가 없다
細看雲來去      구름이 오가는 걸 자세히 보면
只是一虛空      다만 하나의 허공일 따름이네

사유闍維(다비)를 마치고 사리 1립粒과 영골靈骨 1매枚를 얻어 미황사美黃寺로 가지고 가서 탑을 세우고 비석을 세워 봉안하였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金鎭商15)이 지었다.
스님의 문인은 송파松坡와 진봉珍峰 등 16명이 있다.
상월종사전霜月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새봉璽篈이고 호는 상월霜月이며, 속성은 손孫씨이고 순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숙종 정묘년(1687)에 태어났다.
11세에 조계산 선암사仙巖寺 극준極俊 장로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16세에 문신文信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18세에 설암雪巖 화상을 찾아뵙고 학문을 참구하다가 도가 이미 통하자 의발을 전해 받았다.
이어서 벽허碧虛·남악南岳·환성喚醒·연화蓮花 등을 두루 참알參謁하고 그들로부터 모두 심인心印을 받았다. 27세에 고향 조계산으로 돌아오니,

010_1025_b_01L大師受法旣密傳其旨又叅互諸經
010_1025_b_02L證悟無碍辨柝精微南方諸比丘
010_1025_b_03L爲禪林宗主者一聽師言莫不敬服
010_1025_b_04L素性博愛同人憂樂而平居塞兌
010_1025_b_05L默自持人不能窺其涯岸又不屑於飾
010_1025_b_06L巾衲襤褸而不補綴髭髮有時不剪
010_1025_b_07L髼鬆如也人或譏之輒朗吟生平踈
010_1025_b_08L逸無拘檢酒肆茶坊信意遊漢地不收
010_1025_b_09L秦不管楊州之詩而不少變此可見
010_1025_b_10L胸懷之落落間入海島結幕而居
010_1025_b_11L曰野隱盖托以養痾而實藏名晦跡也
010_1025_b_12L歲戊午師回甲也六月八日示寂
010_1025_b_13L夕吟一偈曰浮雲來無處去也亦無蹤
010_1025_b_14L細看雲來去只是一虛空闍維得舍利
010_1025_b_15L一粒靈骨一枚就美黃寺建塔立碑
010_1025_b_16L弘文舘副提學金鎭商撰門人松坡
010_1025_b_17L珍峰等十六人

010_1025_b_18L

010_1025_b_19L霜月宗師傳

010_1025_b_20L
師名璽特號霜月姓孫氏順天人也
010_1025_b_21L肅宗丁卯生十一投曹溪山仙巖寺極
010_1025_b_22L俊長老出家十六受具於文信大師
010_1025_b_23L叅雪巖和尙道旣通受衣鉢編叅
010_1025_b_24L碧虛南岳喚醒蓮花皆獲心印二十七

010_1025_c_01L사방에서 승려들이 상월 스님에게 밀려들었다. 대사는 강론할 때 항상 분명하고 군더더기 없는 해석을 하여 마음으로 지증智證을 실천하는 것으로 법문法門을 삼았다.
스님은 처음 배우는 사람이라 해서 깨달음의 길(覺路, 禪)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했으며, 재주가 뛰어나다 하여 계율을 등한히 하지 않도록 하였다. 더욱이 옛사람들의 주석과 해설에 얽매이는 것을 걱정하여 반드시 배우는 이로 하여금 문자에 얽매이지 말고 그 이치를 취하여 본원本源을 환히 보도록 지도하였다.
갑인년 봄에 선암사에 기거하면서 화엄강회華嚴講會를 열었다. 이 상황을 기록한 『대회록大會錄』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건륭乾隆 19년 갑술(영조 30, 1754) 3월 16일에 상월당霜月堂 선암사 큰 법회에 모인 대중들의 현황은 이러하다.

상실上室 : 종사宗師 19, 학인學人 56, 어산魚山 3, 소동小童 16.
지장전地藏殿 : 종사 24, 학인 56, 어산 2, 동자童子 9.
선당禪堂 : 종사 24, 학인 93, 어산 1, 동자 7.
승당僧堂 : 종사 16, 학인 60, 어산 1, 동자 15.
동상실東上室 : 종사 12, 학인 49, 어산 1, 동자 2.
명경당明鏡堂 : 종사 33, 학인 78, 어산 7, 동자 18.
관음전觀音殿 : 종사 23, 학인 180, 어산 2, 동자 5.
칠전七殿16) : 종사 7, 수좌首座 217.
천불전千佛殿·무우당無憂堂 : 도합 어산 50.
독락당獨樂堂 : 우바이優婆夷 도합 150.
배면당背面堂 : 비구니 44.

이상 종사 158, 학인 519, 어산 69, 동자 74로서 대중을 모두 합하면 1,287명이었다.
강론 과목(講目)은 다섯인데, 첫째는 『화엄경』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으로 화일 현간華日玄侃이 담당하였고,

010_1025_c_01L歸故山四方緇流多歸之師常以講
010_1025_c_02L2)眞眞 [8] 心踐智證爲法門不以初學
010_1025_c_03L而忽覺路不以高才而畧戒律尤以注
010_1025_c_04L說之桎梏爲憂必使學者離文取義
010_1025_c_05L洞見本源甲寅春在仙巖寺設華嚴講
010_1025_c_06L大會錄云乾隆十九年甲戌三月十
010_1025_c_07L六日霜月堂仙岩寺大會大衆上室
010_1025_c_08L師十九學人五十六魚山三小童十
010_1025_c_09L地藏殿宗師二十四學人五十六
010_1025_c_10L魚山二童子九禪堂宗師二十四
010_1025_c_11L人九十三魚山一童子七僧堂宗師
010_1025_c_12L十六學人六十魚山一童子十五
010_1025_c_13L上室宗師十二學人四十九魚山一
010_1025_c_14L童子二明鏡堂宗師三十三學人七十
010_1025_c_15L魚山七童子十八觀音殿宗師二
010_1025_c_16L十三學人一百八十魚山二童子五
010_1025_c_17L七殿宗師七首座二百十七千佛殿
010_1025_c_18L無憂堂合魚山五十獨樂堂優婆夷合
010_1025_c_19L一百五十背面堂比丘尼四十四已上
010_1025_c_20L宗師一百五十八學人五百十九魚山
010_1025_c_21L六十九童子七十四衆合一千二百八
010_1025_c_22L十七講目五一世主妙嚴品當機華
010_1025_c_23L「之」下甲本正誤表有「睱」ㆍ「睱」當作「暇」{編}
010_1025_c_24L「眞」甲本正誤表作「直」

010_1026_a_01L둘째는 「십지품十地品」으로 연담 유일蓮潭有一이 담당하였으며, 셋째는 『선문염송』으로 용담 조관龍潭慥冠이 담당하였고, 넷째는 『묘법연화경』으로 용암 증숙龍岩增肅이 담당하였으며, 다섯째는 『금강경』으로 두월 청안斗月晴岸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 강회講會는 3월 16일에 개경開經하여 4월 3일에 마쳤다. 또 대둔사大芚寺 청풍료淸風寮에서도 큰 법회를 열었다.
영조 정해년(1767)건륭 32년 10월에 상월 스님은 몸에 가벼운 질병 증세가 있자 입으로 게송 한 수를 읊었다.

水流元去海      물은 흘러 본래 바다로 돌아가고
月落不離天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기쁜 모습으로 순세順世(입적)하니 세속 나이로 81세였다.
다비식을 하였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승려 탁준卓濬이 유골을 받들고 관서關西의 묘향산에 가서 초제醮祭를 지내려고 할 때 구멍이 있는 구슬 3개를 얻었다. 마침내 오도산悟道山에 부도를 세우고 그중 하나를 봉안하였고, 나머지 둘은 선암사와 대둔사에 각각 봉안하였다.
규장각 제학提學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이 비문을 지었으며, 비석은 두륜산에 세웠다. 문인은 32명이 있었는데 세상에 이름을 떨친 이는 용담龍潭·해월海月·화월華月 세 사람이다.
호암종사전虎巖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체정體淨이고 호는 호암虎巖이며, 속성은 김金씨이고 흥양興陽(전북 고창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숙종 정묘년(1687)에 태어나 상월霜月 종사와 같고, 무진년(영조 24, 1748)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62세이고 법랍은 47년이다.
환성喚醒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합천 해인사와 양산 통도사에서 주로 주석했는데 가르침을 받기 위해 따르는 스님들이 늘 수백 명에 달했다. 늙음에 이르러서는 대중들을 물리고 편안히 앉아 마음을 관觀하곤 하였다.
무진년(영조 24, 1748) 3월에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서 오십삼불을 조성하고 스님을 증명법석에 앉기를 청하니 스님이 허락하였다. 떠날 때 유일有一을 불러 부촉하여 말하였다.
“기구箕裘18)를 이어 내 법을 잘 보전하도록 하라. 너는 부디 부지런히 배우고 행업行業을 신중히 하여 우리 법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라. 이번 행차는 기약이 되어서 가는 것이니, 너에게 손도끼(鈯斧子)19)를 주는 것이다.”

010_1026_a_01L日玄侃二十地品當機蓮潭有一
010_1026_a_02L拈頌當機龍潭慥冠四蓮華經當機
010_1026_a_03L龍岩增肅五金剛經當機斗月晴岸
010_1026_a_04L三月十六日開經四月初三日終又大
010_1026_a_05L芚寺淸風寮設大會英宗丁亥乾隆三
十二年

010_1026_a_06L有微疾口授一偈曰水流元去海
010_1026_a_07L月落不離天怡然順世壽八十一
010_1026_a_08L茶毘無所得僧卓濬奉骨之關西之
010_1026_a_09L香山將設醮得有孔珠三遂起浮屠
010_1026_a_10L悟道山以其一安焉以其二安於仙岩
010_1026_a_11L大芚奎章閣提學樊巖蔡濟恭撰碑
010_1026_a_12L於頭輪山門人三十二出世者龍潭
010_1026_a_13L海月華月三人

010_1026_a_14L

010_1026_a_15L虎巖宗師傳

010_1026_a_16L
師名軆淨號虎巖姓金氏興陽人
010_1026_a_17L宗丁卯生與霜月同年戊辰歾世壽
010_1026_a_18L六十二法臘四十七得法於喚醒
010_1026_a_19L住於陜之海印梁之通度緇徒徃從者
010_1026_a_20L常數百人老而捨衆宴坐觀心矣
010_1026_a_21L辰三月江原道長丘山造成五十三佛
010_1026_a_22L請師坐證席師許赴臨行招有一而囑
010_1026_a_23L紹箕裘吾保汝能勤學問謹行業
010_1026_a_24L以世吾家此行當期期而還付汝鈯斧

010_1026_b_01L
그러고는 금강산 표훈사 내원통암內圓通庵에 들어가 게송 하나를 썼다.

講法多差失      강의한 법에는 잘못도 너무 많아
指西喚作東      서쪽 가리키며 동쪽이라 우겼다
今朝大笑去      오늘 아침 크게 웃고 풍악산의
楓岳衆香中      중향성衆香城으로 떠나가노라

그러고는 붓을 던지고 서거하였다.
스님은 겨우 걸음마를 배울 때 집안에 불이 나서 사면이 다 타버리고 말았다. 누가 구해 내는 사람도 없었는데 스스로 불 속에서 걸어 나왔으며, 조금 자라서는 큰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졌는데 그때도 물 위로 솟아올라 살아났으며, 또 한번은 산길을 가다가 호랑이를 만나 돌로 된 굴에 숨어 무사히 살아났으니, 이러한 삼재를 벗어나게 된 것은 틀림없이 환성의 의발을 전해 받고 청허의 금탕金湯20)을 보호할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두륜산 정진당精進堂에서 크게 『화엄경』 강회를 열기도 하였다.
부도와 비석을 세웠는데, 비문은 이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지었고, 진영眞影이 남아 있는데, 제자 유일이 찬문贊文을 지었다.

身是光明幢      몸은 광명의 깃발이요
心是通神藏      마음은 신통의 창고로다
目淸四大海      눈은 맑아 큰 바다 같고
眉毛三千丈      눈썹은 3천 길이나 되네
手把漫天網子     손에는 하늘에 펼쳐진 그물을 잡고
羅籠百萬龍象     백만 용상龍象을 얽어매었네
一朝大笑金剛去    하루아침에 크게 웃고 금강산으로 떠나니
萬二千峯眞身相    1만 2천 봉우리가 진신眞身이로구나

문인은 31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이름이 강산을 뒤흔든 사람은 10여 명이다.
함월종사전涵月宗師傳
스님의 법명은 해원海源이고 자字는 천경天鏡이며, 호는 함월涵月이다. 속성은 이씨이고 본관은 완산完山이며 함흥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조趙씨인데, 큰 물고기 꿈을 꾸고 잉태하여 열 달이 훨씬 지나서야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나이 14세에 도창사道昌寺에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그 뒤 명성이 높은 덕 있는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며 학업을 익혔다. 뒷날 환성喚醒 스님을 섬겨서 그 종문宗門의 미묘한 진리(妙銓)를 모두 터득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아 지녔는데 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곤 했다.
해마다 남쪽으로 가서 교화를 펼치곤 하여 마치 기러기가 계절 소식을 알리듯 하였으니 이것이 스님의 믿음이며, 사람들이 배고파하고 추워하는 것을 보면 자기의 옷과 음식을 나누어 입히고 먹여 주었으니 이것이 스님의 자비이다. 스님은 질병이 들자 대중들을 불러 모아놓고 게송 한 수를 써서 주고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것은 스님의 통달함이다.

010_1026_b_01L入金剛山表訓寺內圓通庵書一偈
010_1026_b_02L講法多差失指西喚作東今朝大
010_1026_b_03L笑去楓岳衆香中擲筆而逝師僅學
010_1026_b_04L步時家中失火四面皆焚無引自出
010_1026_b_05L稍長涉大江沒而踊出山路逢虎
010_1026_b_06L岩穴得免脫此三灾必是爲傳喚醒
010_1026_b_07L之衣鉢護淸虛之金湯而然也頭輪山
010_1026_b_08L精進堂設大華嚴講會有浮屠立碑
010_1026_b_09L乃吏曹判書洪啓禧所撰有眞影
010_1026_b_10L子有一撰賛曰身是光明幢心是通
010_1026_b_11L神藏目淸四大海眉毛三千丈手把
010_1026_b_12L漫天綱子羅籠百萬龍象一朝大笑金
010_1026_b_13L剛去萬二千峯眞身相門人三十一
010_1026_b_14L動江山者十餘人

010_1026_b_15L

010_1026_b_16L涵月宗師傳

010_1026_b_17L
師名海源字天鏡號涵月姓李係完
010_1026_b_18L山咸興人母趙氏夢大魚而孕過期
010_1026_b_19L而乳年十四出家于道昌寺落髮染衣
010_1026_b_20L歷叅名宿後事喚醒盡得其宗門妙詮
010_1026_b_21L修持朝夕起居先乎鷄鳴行化南地
010_1026_b_22L來徃曁乎鴈1) [9] 是信也見人之饑寒
010_1026_b_23L以己之衣食衣食之是慈也疾病
010_1026_b_24L召大衆書偈唱佛恬然而逝是達也

010_1026_c_01L
스님은 신미년(숙종 17, 1691)강희康熙 31년에 태어나 경인년(영조 46, 1770)건륭乾隆 35년에 세상을 마쳤으니, 세속의 나이는 80세였다.
스님은 환성 지안喚醒志安의 의발을 이어받아 전한 분이다. 환성 스님의 입실 제자가 된 이래 40여 년 동안 정진精進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교학을 강론하는 것을 더욱 부지런히 하였다. 생존 시에 어금니가 빠지면서 사리가 나온 일도 있었다.
다비를 마치고 초골超骨을 얻어 그 제자들이 석왕사에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대둔사 화엄대회를 펼쳤던 도량에 스님의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영의정 김상복金相福21)이 지었다.
문인은 24명이나 있었는데 완월玩月 스님과 영파影波 스님의 향기가 사방 산을 뒤덮었다. 스님의 진영은 설봉산과 두륜산 두 곳에 모셔져 있는데 해마다 기일이 되면 제향을 올리곤 한다.
만화강사전萬花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원오圓悟이고 호는 만화萬化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해남 우수영右水營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갑술년(숙종 20, 1694) 9월에 태어나 무인년(영조 34, 1758) 8월 7일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의 나이는 65세였다.
어릴 때에 수군영水軍營의 공생貢生(校生)이 되어 관아를 출입하였으나 성품이 본디 과묵하고 침착하며 고요하여 명리名利를 영위하는 일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대둔사大芚寺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결국에는 환성喚醒 스님과 호암虎巖 스님을 참알하고 경론을 배워 나이 30세에 여러 경전의 깊은 이치를 두루 통달하였다.
묘향산과 오대산 등지를 돌아다녔으며, 인허 해안印虛海岸에게 계(懺)를 받았다. 학식과 계행 둘 다 완전하게 갖추었는데, 그중에서도 화엄에 더욱 정통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화엄보살華嚴菩薩’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산부처라고 일컫기도 하였다.
스님의 명성(腥薌)이 먼 데까지 날아가 쟁쟁한 스님들(律虎義龍)이 스님의 법풍法風을 흠모하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스님은 늘 “제 자신의 업業도 아직 밝히지 못한 처지에 어떻게 남을 가르치겠느냐?”고 사양하다가 마침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게다가 사는 장소마저 일정하지 않았으니, 천지 사이에 한가한 도인이라고 말할 만하다.
스님은 다시 상원암上院庵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화엄경』 39품品의 종지를 밝혔다. 그때 스님을 모시고 학문을 배우던 사람들은 80~90명에 이르렀다. 만년에는 선禪을 통한 깨달음으로 구경법究竟法을 삼기도 했다.

010_1026_c_01L生於辛未康熙三
十一年
卒於庚寅乾隆三
十五年
壽八
010_1026_c_02L是唯喚醒志安衣鉢之傳也入室四
010_1026_c_03L十餘年精進不怠講敎益勤牙落而
010_1026_c_04L出舍利茶毘得超骨其徒建塔于釋王
010_1026_c_05L立碑于大芚寺華嚴大會之道場
010_1026_c_06L則領議政金相福撰門人有二十四
010_1026_c_07L月影波香襲四山雪峯頭輪兩山掛眞
010_1026_c_08L影時享

010_1026_c_09L

010_1026_c_10L萬化講師傳

010_1026_c_11L
師名圓悟號萬化姓李氏海南右水
010_1026_c_12L營人甲戌九月生戊寅八月初七示寂
010_1026_c_13L壽六十五幼時隷水軍營貢生出入衙
010_1026_c_14L而性本寡默沈靜不以名利爲營
010_1026_c_15L一日赴大芚寺薙髮遂叅喚醒虎岩
010_1026_c_16L通諸經義出遊妙香五臺受懺於印
010_1026_c_17L虛海岸學行兩全尤精於華嚴人穪
010_1026_c_18L華嚴菩薩亦謂生佛腥薌遠飛律虎義
010_1026_c_19L望風雲趨每以己業未明爲辭晦迹
010_1026_c_20L深山居無定處可謂天地間一個閒道
010_1026_c_21L人也還住上院庵明三十九品宗旨
010_1026_c_22L學者八九十人晩年以禪悟爲究2) [10]
010_1026_c_23L「侯」甲本正誤表作「候」「意」甲本正誤表
010_1026_c_24L作「竟」

010_1027_a_01L스님이 일찍이 게송 한 편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了知諸行皆如幻    모든 행行이 다 환幻과 같음을 알고는
見法惟心心自閒    법法을 보아도 오직 마음인지라 마음 절로 한가하네
無際性空智日滿    끝 간 데 없는 공空한 성품에 지혜의 해 가득하니
無靜無作獨團團    고요함도 없고 작용도 없이 홀로 둥글둥글하구나

대둔사에 탑을 세웠는데,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부솔副率 이의경李毅敬이 탑명塔銘을 짓고 동해상인東海上人 조병민趙炳敏이 글씨를 썼다. 영각影閣은 만일암挽日庵 동국선원東國禪院에 있으며, 문인 80여 명이 있다. 스님의 행장은 『해남여지승람海南輿地勝覽』에 실려 있으며,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입적하였다.
연해강사전燕海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광열廣悅이고 호는 연해燕海이며,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두륜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는데, 성격이 호매豪邁하고 이야기 나누기를 좋아하였으며, 형식에 구속되지 않고 소탈하였다. 그릇과 도량이 깊고 원대하여 사람들이 그 마음속을 알지 못했다고 한다.
환성喚醒 스님과 호암虎岩(1687~1748) 스님의 문을 드나들면서 그들의 미묘한 법을 다 터득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폭주하였는데, 빈손으로 와서는 실속을 챙겨 가지고 돌아가곤 했다. 스님의 선강禪講과 교강敎講은 한 시대의 종맹宗盟으로서 강론하는 자리마다 크게 성황을 이루었는데 근래에 있지 않은 일이었다. 스님은 강설을 하고 난 여가에 또 염불로 업을 삼기도 하였다.
호암 선사의 법통을 이었고, 자암 전평慈庵典平에게서 심인心印을 전해 받았다. 전평은 이름에 걸맞게 자비의 실천을 저버리지 않은 스님이다.
문인은 12명이 있었고, 탑비는 두륜산 비전碑殿에 안치되어 있다.
영곡강사전靈谷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영우永愚이고 호는 영곡靈谷이며, 무장茂長(전북 고창군) 선운사禪雲寺 인근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호암虎巖의 법통을 이은 제자로서 연담蓮潭의 법형이다. 일찍이 대둔사 지장전地藏殿에서 경전을 강독하는 큰 법회를 열었는데, 그 법회에 모인 대중이 수백 명이나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두고 “영산회상靈山會相이 두륜산에서 다시 일어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연담 대사의 연보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010_1027_a_01L甞作偈曰了知諸行皆如幻見法
010_1027_a_02L惟心心自閒無際性空智日滿無靜無
010_1027_a_03L作獨團團建塔于大芚寺世子翊衛司
010_1027_a_04L副率李毅敬撰塔銘東海上人趙炳敏
010_1027_a_05L影閣在挽日東國禪院門人八十餘
010_1027_a_06L行狀載在海南輿地勝覽入寂於順
010_1027_a_07L1) [11] 2) [12]

010_1027_a_08L

010_1027_a_09L燕海講師傳

010_1027_a_10L
師名廣悅號燕海海南人落髮於頭
010_1027_a_11L輪山爲人豪邁善談笑無拘束器度
010_1027_a_12L深遠人莫知崖岸出入喚醒虎巖之門
010_1027_a_13L盡得其妙學者輻輳空徃實歸其禪
010_1027_a_14L講敎講爲一時之宗盟講席爲盛且大
010_1027_a_15L近古未有講說之餘又以念佛爲業
010_1027_a_16L受法於虎岩禪師傳印於慈庵典平
010_1027_a_17L之名不負其慈行門人十有二人
010_1027_a_18L塔于輪3) [13] 碑殿

010_1027_a_19L

010_1027_a_20L靈谷講師傳

010_1027_a_21L
師名永愚號靈谷茂長禪雲寺人也
010_1027_a_22L虎巖之嗣蓮潭之兄甞於大芚寺地藏
010_1027_a_23L殿設大講會會衆數百人人穪靈山
010_1027_a_24L會上復興輪山云蓮潭年譜云乾隆

010_1027_b_01L
“건륭乾隆 기미년(영조 15, 1739) 봄에 벽하碧霞 노장이 대둔사에서 논강을 할 적에 학인들이 그 법회에 많이 모였다. 그때 나유일有一는 그 법회에서 벽하 스님께 『능엄경』을 배웠고, 여름 안거를 마친 뒤에 보림사寶林寺에 가서 용암龍岩 스님법명은 증숙增肅이다.으로부터 『기신론』을 배웠으며, 경신년(1740)에 취서사鷲棲寺를 방문하여 영곡靈谷 스님에게 『원각경』을 배웠는데 그때 내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스님의 문인은 11명인데 모두 북쪽 지역에 있었으며, 현해 모윤懸解慕潤 일파는 두륜산에 있었고, 또 다른 일파는 월출산月出山에서 이름을 떨쳤다. 문인 두 사람이 스님의 탑비塔碑를 수호하고 있다.스님은 2월 8일에 입적하였다.
나암강사전懶庵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승제勝濟이고 호는 나암懶庵이며, 능주綾州(화순군 능주면) 쌍봉사雙峯寺 인근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설담 자우雪潭自優의 법통을 이은 제자로서 모은 지훈暮隱智薰의 손자 제자이고 화월 현옥華月玄玉의 종손 제자이며, 제월 수일霽月守一의 현손 제자이며, 소요 태능逍遙太能의 후예이다.
일찍이 두륜산 정진당精進堂에서 화엄대강회를 열자 사부대중 수백 명이 모였다. 자홍慈弘이 말하였다.
“나암 선사는 설담법명은 자우自優이다.에게서 사교四敎『원각경』·『반야경』·『기신론』·『능엄경』를 배웠고, 설파雪坡법명은 상언常彦이다.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나암 선사는 설파 스님으로부터 인가를 크게 받았는데 스승과 제자 사이는 마치 침개針芥가 서로 투합하듯이 의기가 투합하였다.”
스님은 우연히 본사本寺(대둔사)에 들렀다가 설담의 입실 제자가 되어 법통을 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뒷날 대둔사에서 강론 법회를 열게 되었는데 배우려고 하는 이들이 많이 모였다. 이른바 삼담三潭이라 불렸던 춘담 몽인春潭夢忍과 화담 영규花潭永圭와 운담 대일雲潭大日도 모두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만년에 나암은 설파 스님을 잊지 못해서 다시 지리산으로 갔는데, 그때 스승이 훌쩍 떠나버리자 삼담은 모두 설담에게 귀의하여 입실 제자가 되었다.
얼마 뒤에 나암은 병을 얻어 서쪽으로 돌아와 문정門庭에서 쓸쓸히 입적했다. 이것을 삼담 스님들은 매우 슬프게 여겼다. 나암이 교학을 가르치는 기술은 여느 스님들보다 훨씬 뛰어났다는 것을 후세 사람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저술로는 일명 『몽유록夢遊錄』이라 불리는 『설담집雪潭集』 1권이 총림叢林에 유포되어 있다.22) 삼담은 모두 큰 강사로서 당시 사람들은 “삼남三南의 학인들이 모두 삼담에게 귀의했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010_1027_b_01L己未春碧霞大老設講大芚寺學人
010_1027_b_02L多會
從之學楞嚴夏滿向寶林
010_1027_b_03L從龍岩
學起信論庚申訪鷲
010_1027_b_04L棲寺從靈谷4) [14] 學圓覺經時

010_1027_b_05L二十一也門人十一皆在北域懸解
010_1027_b_06L慕潤一派在頭輪山一派在月出山
010_1027_b_07L門人二人守護塔碑二月初
八日卒

010_1027_b_08L

010_1027_b_09L懶庵講師傳

010_1027_b_10L
師名勝濟號懶庵綾州雙峯寺人
010_1027_b_11L潭自優之嗣暮隱智薰之孫華月玄玉
010_1027_b_12L之曾霽月守一之玄逍遙太能之裔
010_1027_b_13L甞於頭輪山精進堂設華嚴大講會
010_1027_b_14L衆數百餘人慈弘曰懶庵禪師受四
010_1027_b_15L圓覺般若
起信楞嚴
於雪潭
受華嚴於雪坡

010_1027_b_16L大蒙雪坡印可若針芥之相投偶歸本
010_1027_b_17L入室於雪潭轉作大芚之會學者
010_1027_b_18L大集春潭夢忍花潭永圭雲潭大日
010_1027_b_19L皆出其門晩年未忘雪坡再遊智異山
010_1027_b_20L於是三潭皆歸於雪潭入室而懶庵得
010_1027_b_21L病西還門庭冷落此三潭之所深悲也
010_1027_b_22L若其經術超越諸方之上後人宜知之
010_1027_b_23L雪潭集一卷一名夢遊錄行于樷林
010_1027_b_24L三潭皆大講師時稱三南學人盡歸三

010_1027_c_01L
문인 5명이 있는데 춘계 적암春溪翟庵은 두륜산 사람이다.
영파강사전影波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성규聖奎이고 호는 영파影波이다. 함월涵月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고 환성喚醒의 법손이다. 합천 해인사 인근 마을 출신이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지략이 뛰어나 구류九流23)를 두루 열람하였고 글씨도 뛰어나 이원교李圓嶠24)의 문하로 참예할 정도였는데, 그의 필법은 용이 하늘을 날듯 뱀이 앞으로 내달리듯 하였다. 스님은 또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을 거침없이 말하였는데 방약무인하기가 마치 금산원金山元과 부산원浮山遠25)처럼 대범하고 거리낌이 없으므로(頡頏), 대중들은 부르지 않아도 물이 바다로 모여들듯 밀려오고 명성을 팔지 않아도 늘 문전은 저자를 이루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어느 절이든 주석住錫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두륜산 약사전藥師殿에서 크게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법회를 마친 뒤에 신월암新月庵에서 하안거를 결제하였고 진불암眞佛庵에서 동안거를 결제하였다. 침계루枕溪樓와 진불암眞佛庵에 시를 지어 써 붙이기도 하였다.
영파 대사가 시오始悟 대사에게 시와 그 시 앞의 서문을 써서 주었는데 그 서문과 시는 이러하다.
“호남 대둔사 오 상인悟上人이 완호玩虎 스님의 방으로 좇아와서 그를 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소매 속에서 연담蓮潭 노스님의 율시律詩를 꺼내 보여 주면서 화답하는 시를 지어 달라고 하기에 나는 노쇠한지라 지어 주지 못하고 선게禪偈 하나를 그에게 보여 주었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七日關中亦有言    7일 동안 관중關中(서울)에서 설법이 있었으니
威音雷若震乾坤    위엄스런 음성 우레 같아 천지를 진동했네
欲聆無說傳千古    말없이 전한 천고千古의 진리 알고 싶으신가?
秋夜寒鍾掛寺門    가을밤 싸늘한 종만 절 문에 걸려 있구나

갑자년(순조 4, 1804) 가을에 낙동洛東 문인 성파聖坡(影波)가 쓰다.”
또 제자弟子(雪虛)가 시오 스님에게 써 드린 시도 있는데 이러하다.

湖南勝友嶺南遊    “호남의 좋은 벗이 영남에 와서 노닐더니
訪我小山雪滿樓    소산小山으로 날 찾던 날 누각엔 눈이 가득했지
萬二金剛無限景    만 이천 금강산 끝없이 펼쳐진 경치
紅棠去路問眠鷗    붉은 해당화 진 길에서 졸고 있는 갈매기에게 묻노라

경오년(순조 10, 1810) 맹춘孟春(초봄)에 영남의 설허가 쓰다.”
문인은 11명이 있었는데 설허 스님이 그중에 으뜸이었다. 대종사 두운斗芸이 말하였다.

010_1027_c_01L潭云門人五人春溪翟庵頭輪山人
010_1027_c_02L

010_1027_c_03L

010_1027_c_04L影波講師傳

010_1027_c_05L
師名聖奎號影波涵月之嗣喚醒之
010_1027_c_06L陜川海印寺人也少有智畧5) [15]
010_1027_c_07L九流筆叅李圓嶠龍蛇飛走說如來
010_1027_c_08L禪祖師禪旁若無人金山元浮山遠
010_1027_c_09L頡之頏之衆不召而水歸聲不沽而市
010_1027_c_10L轉山涉川無不住錫設大法會於
010_1027_c_11L頭輪山藥師殿會罷結夏於新月
010_1027_c_12L冬於眞佛題詩於枕溪樓眞佛庵贈悟
010_1027_c_13L大師詩并序曰湖南大芚寺悟上人
010_1027_c_14L玩虎室來見袖出蓮老律示之求和而
010_1027_c_15L老不能究以禪偈示之曰七日關中亦
010_1027_c_16L有言威音雷若震乾坤欲聆無說傳千
010_1027_c_17L秋夜寒鍾掛寺門甲子秋洛東門人
010_1027_c_18L聖波書弟子贈詩曰湖南勝友嶺南遊
010_1027_c_19L訪我小山雪滿樓萬二金剛無限景
010_1027_c_20L棠去路問眠鷗庚午孟春嶺南雪虛稿
010_1027_c_21L門人十一人雪虛居首大宗師斗芸曰
010_1027_c_22L「大」甲本正誤表作「天」「廣」上甲本正
010_1027_c_23L誤表有「松」
「王」甲本正誤表作「山」
010_1027_c_24L「寺」甲本正誤表作「師」
「編」甲本正誤表作
010_1027_c_25L「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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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담 대사가 입적하신 후 명성과 덕행이 영파 스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다.”
스님의 비석은 은해사銀海寺에 있다.
두륜대사전頭輪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청성淸性이고 호는 두륜頭輪이다. 또는 명주明晝로 부르기도 하며 속성은 김씨이고 해남 화산방華山坊 석전石田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두륜산으로 들어가 인원印元 노스님을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학문이 이미 이루어지자 스님은 화악華岳·환성喚醒·설암雪岩 등 여러 대선백大禪伯들을 참알參謁하였다. 스님은 문장이 문채 있고 풍부해서 크고 작은 절에서 쓰이는 여러 가지 글(行文)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는데, 문집 한 권이 후손들의 손에 있으니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무용無用 선사에게서 법인法印을 받고 영해影海 스님, 금파金波 스님과 함께 동림東林으로 갔다.
옹정雍正(淸 世宗의 연호) 정미년(영조 3, 1727)에 무주로 가서 희암希庵 채팽윤蔡彭胤26)을 만나 「대둔사사적비大芚寺事蹟碑」를 받았는데, 절에 기증한 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청성 스님은 처음부터 열심히 노력하여 비석을 세우는 일에 큰 공이 있다. 더구나 그의 소탈하면서도 담담한 마음 씀씀이는 매우 아름답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또 비석의 칭송하는 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珠騈璧聯       구슬을 꿴 듯한 아름다운 문장
其德有鄰       덕은 이웃들 많다고 했으니27)
越有淸性       그 스님은 바로 청성 스님이라네

또 희암이 두륜 스님에게 시를 써 주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祇樹開山問幾時    기수祇樹28)의 처음 설법 언제였던가?
使君拈翰兩忘機    사군使君29)도 염한拈翰도 모두 잊었구려
虛敎雪衲煩來徃    부질없이 스님을 번거롭게 오라 가라 하니
實恠雲蹤枉是非    구름 같은 자취 시비에 굽힘이 괴이하구나
溪舘拂蠅三日語    계관溪舘에서 불자 흔들며 3일간 설법하고
海門如鶴一笻飛    해문海門에서 학鶴처럼 지팡이를 날리네
此回相送前期濶    지금 전송하면 다시 만날 기약 아득하니
秋及田園我亦歸    전원에 물든 가을빛 따라 나도 가련다

그러자 두륜 스님도 화답하는 시를 지어 희암에게 주었으니 그 시는 이러하다.

大抵人生後五時    대저 인생이 오교시五敎時의 뒤에 태어나나
無如萬事早知機    온갖 일의 기미를 일찍이 깨닫느니만 못하리
若將身世安丘壑    만약 산골에서 이 몸 편안하게 살려 하면
豈向仙翁定是非    어찌 신선 늙은이에게 시비를 따지겠는가?
酒引梅軒丹九轉    매헌梅軒에 술 가져다 단약丹藥을 만들고
詩題杏葉鳥雙飛    은행잎에 시를 쓰니 새는 짝지어 날아가네
相送桃源洞裏路    도원동桃園洞 속에서 이별하며 서로 전송하니
使君歸北我南歸    사군使君은 북으로 가고 나는 남으로 간다

정사년(정조 21, 1797) 중추仲秋(9월)에 무이 유일無二有一 스님도 이 시의 운을 따서 시 두 수를 지었다.

010_1028_a_01L蓮潭沒後名德之盛無出波之右
010_1028_a_02L在銀海寺

010_1028_a_03L

010_1028_a_04L頭輪大師傳

010_1028_a_05L
師名淸性號頭輪又曰明晝姓金氏
010_1028_a_06L海南華山坊石田村人早投頭輪山
010_1028_a_07L髮於印元老師學旣成叅於華岳喚醒
010_1028_a_08L雪岩諸大禪伯文章彬蔚大小行文
010_1028_a_09L多出其手文集一卷在於後孫不可
010_1028_a_10L多說得法印於無用禪師與影海金波
010_1028_a_11L並驅東林焉雍正丁未徃茂朱見希
010_1028_a_12L庵蔡彭胤受大芚寺事蹟碑寄寺中
010_1028_a_13L性師自初勤勞有功於碑役不細
010_1028_a_14L况其簡淡心事極可嘉愛又碑頌曰
010_1028_a_15L珠騈璧聯其德有鄰越有淸性希庵
010_1028_a_16L贈詩曰祇樹開山問幾時使君拈翰兩
010_1028_a_17L忘機虛敎雪衲煩來徃實恠雲蹤枉是
010_1028_a_18L溪舘拂蠅三日語海門如鶴一笻飛
010_1028_a_19L此回相送前期濶秋及田園我亦歸
010_1028_a_20L次呈曰大抵人生後五時無如萬事早
010_1028_a_21L知機若將身世安丘壑豈向仙翁定是
010_1028_a_22L酒引梅軒丹九轉詩題杏葉鳥雙飛
010_1028_a_23L相送桃源洞裏路使君歸北我南歸
010_1028_a_24L巳仲秋無二有一亦次二首

010_1028_b_01L
묵암종사전默庵宗師傳
종사의 법명은 최눌最訥이고 호는 묵암黙庵이다.
조계산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응암 벽담應庵碧潭의 법형法兄이고 풍악 세찰楓岳世察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며, 영해 약탄影海若坦의 손자 제자이고 무용 수연無用秀演의 증손 제자이며, 백암 성총栢庵性聰의 현손玄孫 제자이니, 법문法門의 가풍이 높고 우뚝하여 많은 석덕碩德들이 배출된 집안이다.
묵암은 당대의 큰 스님들(義龍)을 두루 찾아다니며 학문을 쌓으니, 마치 꼭두서니에서 붉은 물감이 나왔으나 꼭두서니보다 더 붉어 빛을 잃게 하듯이 스승들보다 더 뛰어난 경지를 열어 보였다.
많은 학인들을 맞이할 때에는 노파심이 간절하였으며, 『화엄경』의 대의를 총괄하여 이해하기 쉽도록 분합分合하여 『화엄품목華嚴品目』 1권을 만들었고, 사교四敎의 행상行相을 널리 채집하여 『제경문답반착회요諸經問答盤錯會要』 1편을 만들었으니, 이 책은 식수識數의 요체(肎綮)로서 학자들의 안목이 되어 주는 중요한 저술이다.
또한 연담 스님과는 성리학에 대한 대의를 함께 앉아 토론하기도 하였으며, 사자후를 토하여 천지를 진동시키기도 하였다. 나이 60세 무렵에 율시 한 수를 읊으니 그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衰暮頹齡耳又鳴    저물어 가는 늙은이라 귀울림병 생겨나고
流光六十減神淸    60년 흘러간 세월에 맑던 정신 줄어졌네
律儀因病成踈逸    병이 들어 계율조차 자주 거르게 되고
禪學多思未發明    선학禪學을 깊이 생각해도 뜻을 알지 못하겠네
虛說脫空消百歲    부질없이 해탈을 떠들면서 백 년이나 흘렀고
耽眠昏黑過三更    졸음 못 이겨 잠 속에서 삼경이 지나가네
願將出得瓶鵝藥    병 속의 거위를 꺼내는 약을 얻을 수만 있다면
分施刀圭起死生    도규刀圭30)를 나누어 주어 기사회생시키련만

연담은 묵암의 시운을 따서 화답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竹裡寒泉目下鳴    대숲을 흘러가는 맑은 냇물 눈 아래서 우는데
獨憑禪几耳根淸    홀로 선궤禪几에 기대어 이근耳根을 맑히네
鳶飛魚躍天機動    수리 날고 물고기 뛰니 천기天璣가 동하고
水綠山靑祖意明    녹색 물 푸른 산 조사의 뜻 분명하네
至道無難皆可學    지극한 도 어렵잖아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斯言有玷急須臾    이 말은 결함 있어 서둘러 고쳐야 하리
嘿翁近日耽佳句    묵암 노인 근자에 시 짓기 즐긴다 하니
或恐愁肝太瘦生    행여 고심하다 몸 상할까 염려되오

스님은 74세에 세상을 떠났다. 연담이 만사挽詞를 지으니 그 글은 이러하다.

七十星霜又四年    70년 세월에 또 4년을 더하도록
講經吟病遞相連    경을 강론하고 질병에 시달리기 번갈아 하셨구나
平生博覽兼聰慧    평생토록 많은 경 읽은 데다 총명하기까지 하니
那箇宗師敢比肩    어느 종사宗師인들 이 스님과 비교할 수 있으리

연담 스님은 또 한 수의 시를 읊었다.

衰年却恨隔音容    한스러운 일은 늘그막에 소식이 뜸한 것이었으나
猶謂前頭得重逢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만난다고 생각했었소
誰識今朝先我去    오늘 아침 나보다 먼저 가실 줄 어찌 알기나 했겠소?
不堪回首淚無從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돌릴 수도 없다오

문집 2권이 간행되었고, 문인은 15명이다.

010_1028_b_01L默庵宗師傳

010_1028_b_02L
宗師名最訥號默庵落髮於曹溪山
010_1028_b_03L應庵碧潭之法兄楓岳世察之嗣影海
010_1028_b_04L若坦之孫無用秀演之曾1) [16] 庵性聰
010_1028_b_05L之玄門風高峻碩德草偃2) [17] 叅義龍
010_1028_b_06L3)西 [18] 失色提接衆人老婆心切揔括
010_1028_b_07L華嚴大義分合品目一卷博採四敎行
010_1028_b_08L*編集會要一篇此是識數之肎綮
010_1028_b_09L學者之眼目又與蓮潭共論性理之大
010_1028_b_10L獅吼震天六十之年吟一律曰
010_1028_b_11L暮頹齡耳又鳴流光六十減神淸律儀
010_1028_b_12L因病成踈逸禪學多思未發明虛說脫
010_1028_b_13L空消百歲耽眠昏黑過三更願將出得
010_1028_b_14L瓶鵝藥分施刀圭起死生蓮潭次之曰
010_1028_b_15L竹裡寒泉目下鳴獨憑禪几耳根淸
010_1028_b_16L飛魚躍天機動水綠山靑祖意明至道
010_1028_b_17L無難皆可學斯言有玷急須更嘿翁近
010_1028_b_18L日耽佳句或恐愁肝太瘦生七十四示
010_1028_b_19L蓮潭挽曰七十星霜又四年講經
010_1028_b_20L吟病遞相連平生博覽兼聰慧那箇宗
010_1028_b_21L師敢比肩又曰衰年却恨隔音容猶謂
010_1028_b_22L前頭得重逢誰識今朝先我去不堪回
010_1028_b_23L首淚無從文集二卷印行門人十五人

010_1028_c_01L
금주강사전錦洲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복혜福慧이고 호는 금주錦洲이며, 속성은 권씨이고 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기개가 호걸스러웠으며 권모술수가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혹 그를 권도장權都將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아암兒庵은 그를 이렇게 평하였다.
“금주 대사는 몸집이 크고 걸출하며 특출난 사람이다. 말법 시대에 부처님의 법이 쇠미한 때를 만나 금주 대사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호탕하기 때문에 종풍宗風을 떨칠 만한 인물이다.”
어디를 가든지 유나維那나 주지들까지도 모두 몸을 구부려 대접하였으며, 마을에 사는 선비들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벗으로 대하였고 나이가 젊은 사람들은 제자의 예로써 섬겼다. 혹 지방 관청의 수장守長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경우에도 말을 타지 않고는 가지 않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에서도 대의를 통하는 데에 힘썼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학인들이 매우 많았다. 일찍이 두륜산에 기거하고 있을 때에 용화당龍華堂에서 『화엄경』 강독회를 열었는데, 대중들의 수효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금주 스님은 화악 문신華岳文信의 증손 제자이고 벽허碧虛 선사의 손자 제자이며, 월파月坡 대사의 법을 이은 법제자이다.
스님의 문인은 서너 명이 있다.
서암선사전瑞巖禪師傳
선사의 법명은 일화日華이고 호는 서암瑞巖이며, 장흥 지제산支提山 천관사天冠寺 인근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부용 영관芙蓉靈觀의 문하에 두 파가 있는데, 한 파는 청허 휴정淸虛休靜이고 다른 한 파는 부휴 선수浮休善修이다. 부휴의 법을 이은 제자는 벽암 각성碧巖覺性이고 벽암의 법제자는 취미 수초翠微守初이며, 취미의 법제자는 설파 민기雪坡敏機이고 설파의 법제자는 빙곡 덕현氷谷德玄이며, 빙곡의 법제자는 서암 일화瑞巖日華이고 서암의 법제자는 석담 만의石潭萬宜이며, 석담의 법제자는 호봉 성관虎峰聖舘·포암 덕정蒲庵德政·선월 행정船月幸政이다.
일화는 불가佛家의 명필이다.
스님의 글씨체는 이원교李圓嶠의 필법과 같아서

010_1028_c_01L錦洲講師傳

010_1028_c_02L
師名福慧號錦洲姓權氏羅州人
010_1028_c_03L4) [19] 權數故人或嘲之曰權都將兒庵
010_1028_c_04L錦洲大師魁梧傑特人也末法衰
010_1028_c_05L而錦洲以*毫邁不覊之故能復振
010_1028_c_06L宗風所至維那住持之等皆屈躳供獻
010_1028_c_07L鄕中士族年高者友之年少者待之
010_1028_c_08L以侍生或官長見招非騎馬不徃
010_1028_c_09L講務通大義故從學者衆甞於頭輪
010_1028_c_10L設大華嚴講會於龍華堂衆數百餘
010_1028_c_11L華岳之曾孫碧虛之孫月坡之嗣
010_1028_c_12L門人三四人

010_1028_c_13L

010_1028_c_14L瑞巖禪師傳

010_1028_c_15L
禪師名日華號瑞巖長興支提山天冠
010_1028_c_16L寺人芙蓉靈觀下有二派一淸戲休靜
010_1028_c_17L一浮休善修浮休之嗣碧巖覺性
010_1028_c_18L岩之子翠微守初翠微之子雪坡敏
010_1028_c_19L雪坡之子氷谷德玄氷谷之子
010_1028_c_20L岩日華瑞岩之子石潭萬冝石潭之
010_1028_c_21L虎峰聖舘蒲庵德政船月幸政
010_1028_c_22L華佛家之名筆也其軆若李員嶠而作
010_1028_c_23L「伯」疑「栢」{編}「編」甲本正誤表作「徧」次
010_1028_c_24L
「西」甲本正誤表作「茜」「毫」甲本正
010_1028_c_25L誤表作「豪」次同

010_1029_a_01L병풍을 만들어 거기에 새겨 넣는 등 치백緇白(僧俗) 간에 다투어 낙관落款을 받아 표구를 잘해서 간직하려고 했다. 그 뒤에 영남의 영파 성규影波聖奎와 호남의 영파 덕수永坡德壽의 필법이 서암 스님과 같았다.
옛날 진晋나라 왕우군王右軍31)은 『유교경遺敎經』을 써서 후대에 전하였고, 송나라 도긍道肯은 『금강경』을 썼으며, 원나라 조송설趙松雪32)은 「증도가證道謌」를 썼다. 백옥봉白玉峯33)의 병풍의 글씨와 김추사金秋史34)의 『심경心經』과 서산 대사의 『사가록四家錄』과 윤낙서尹洛西·서학로徐學老·이창암李蒼岩의 편액扁額, 연천 용운蓮泉龍雲 스님이 기둥에 쓴 주련柱聯과 초의 스님의 범서梵書와 철선鐵船 스님의 간독簡牘과 원기元奇 스님의 책서冊書는 모두 서예가(筆家)에서 이름 있는 것들이다.
일화 스님의 글씨는 고금의 명필들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여서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 칭송하였다. 이 책의 편자(覺岸)도 한번 병풍에 쓴 서암 스님의 글씨를 본 적이 있는데, 마치 용이 하늘을 날고 뱀이 달려 나가는 듯하여 그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었다.
몽월영홍전夢月泳泓傳
스님의 속성은 이씨이고 창평군昌平君 창敞의 12세손으로 회양淮陽(강원도 지명)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의 어머니가 달을 품 안에 안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불도佛道를 찾아 사방의 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삼교三敎(유불선)를 통달하였으며, 만년에는 선禪의 진리를 터득하는 데에 마음을 돌렸다.
스님은 뽕나무 밑에서 잠을 자고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면서 수행하였으며, 간성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 만일회萬日會에 들어가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빠져들었다가 편안한 표정으로 열반하였다.
열반에 들던 날 스님의 몸에서 불꽃 같은 광명이 뿜어져 나왔으며, 사유闍維(다비)하던 날 무지개 같은 서기가 어렸다. 소나무와 삼杉나무도 시름겨워하였고 새와 짐승들도 소리를 감추었다. 사리 48과顆를 얻어 돌을 다듬어 부도를 세우고 봉안하였다.
스님의 신령하고 기이한 행적은 이루 다 기술할 수가 없으며, 스님의 기연機緣을 드러낸 어구들은 부도 도량에 새겨진 탑명塔銘에 소상하게 갖추어 기재되어 있으니 거기에서 상고해 보면 될 것이다. 스님의 세속 나이는 80세이고 승랍은 65년이다. 그의 문인 등이 스승의 자취가 파묻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국 선찰禪刹에 두루 알려

010_1029_a_01L屛入刻緇白爭印裝潢者也其後1) [20]
010_1029_a_02L之影波聖奎湖南之永坡德壽筆法如
010_1029_a_03L昔者晋王右軍書遺敎經傳之于後
010_1029_a_04L宋道肯書金剛經元趙松雪書證道謌
010_1029_a_05L白玉峯之屏書金秋史之心經西山大
010_1029_a_06L師之四家錄尹洛西徐學老李蒼岩之
010_1029_a_07L蓮泉龍雲之楹聯草衣之梵書
010_1029_a_08L船之簡牘元奇之册書皆是筆家之有
010_1029_a_09L日華之筆亦不愧於古今伊時人
010_1029_a_10L皆稱道之岸亦一見屏書若龍蛇飛走
010_1029_a_11L莫知其始終也

010_1029_a_12L

010_1029_a_13L夢月泳泓傳

010_1029_a_14L
師姓李氏昌平君敞之十二世孫淮陽
010_1029_a_15L母夢苞月而生幼尋佛道周遊四
010_1029_a_16L達通三敎晩節回心禪詮桑下一
010_1029_a_17L宿日中一食投入杆城之乾鳳萬日會
010_1029_a_18L入念佛三昧怡然而化涅槃之日
010_1029_a_19L光如火闍維之時瑞氣如虹松杉加
010_1029_a_20L鳥獸匿聲得舍利四十八顆伐石
010_1029_a_21L立浮屠藏之靈異之跡不可盡2) [21]
010_1029_a_22L3) [22] 語句備載塔銘于浮屠道場之讖
010_1029_a_23L於此可尙世壽八十僧臘六十五
010_1029_a_24L門人等不㘿其迹 4) [23] 告於八域禪刹

010_1029_b_01L비록 지혜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보고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동봉욱일전東峯旭日傳
스님의 속성은 지池씨이고 홍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전생에 선근善根을 심었던 탓에 일찍이 불도佛道에 들어가 수행 생활을 하였다. 쌀겨와 보리싸라기 같은 음식도 달게 먹었고 해진 옷들을 즐겨 입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갑게 대하였고 험난한 일에 부딪혀도 마치 평탄한 길을 가듯이 태연하였다.
선지식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꼭 참례하였고 가난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구제해 주곤 하였다. 그러니 옛사람이 이르기를 ‘알았으면 실천하지 않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여러 지방을 유람하던 일을 여기에서 중지하고 다시 건봉사乾鳳寺로 들어갔다. 스님은 다른 사람이 하기 어려워하는 것도 자신은 반드시 쉽게 해내고, 혹은 한 끼도 먹지 않고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혹은 눕지도 않고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으니, 사람들은 스님이 겪는 구도의 괴로움(苦節)을 헤아릴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하게 앉아서 입적하니 상서로운 기운이 여섯 번이나 비추고 광명을 방출한 것이 두 번이나 되었다. 사리 50개를 얻어 돌을 다듬어 탑을 세우고 그 안에 봉안하였다. 스님이 입적할 당시 신령한 자취와 살아 계셨을 때 기이한 행적이 털끝만치도 차이가 없었으니 기이한 일이며 신령한 일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가경嘉慶(淸 仁宗의 연호) 경진년(순조 20, 1820)에 태어나 함풍咸豊 무오년 (철종 8, 1858)에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39세이고 승년僧年은 23년이다. 건봉사 서쪽 산기슭에 부도를 세웠다. 살아 있었을 적의 기록은 탑명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대인등전전大印燈傳傳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고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가 홀로되어 철저하게 절개를 지키는 한편, 떠돌면서 거친 풀을 헤치고 조사의 가풍을 우러러 보아(撥草瞻風) 비구와 비구니가 계신 곳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아 어떤 말을 듣건 그 뜻을 다 깨달아 마음이 넉넉해지자 그 밖에 다른 소원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청신녀淸信女로서, 즉 재가보살로서의 훌륭한 행실이 찰 만큼 채워지자 비로소 몸을 버릴(脫身)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금강산 건봉사로 급히 들어가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은 상태에서 앉은 채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그녀는 만약 지지보살地持菩薩이 아니면 필시 관세음보살일 것이다. 그녀의 자비 실천은 사람으로서는 따라 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나이는 41세였고 수행한 세월은 22년이었다. 사유闍維를 마치고 사리 17개를 얻어

010_1029_b_01L雖聾盲于智者無不見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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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9_b_03L東峰旭日傳

010_1029_b_04L
師姓池氏洪川人夙植善根早入佛
010_1029_b_05L食甘糠麧衣好粗踈見人如舊
010_1029_b_06L險如夷聞善知識必叅逢貧窶人必救
010_1029_b_07L古所謂知無不爲遊方茲已旋入乾鳳
010_1029_b_08L人所難己必易或不齋而過日或不卧
010_1029_b_09L而達夜人不可測其苦節一日泊然而
010_1029_b_10L坐寂六瑞氣二放光得舍利五十箇
010_1029_b_11L伐石安塔其入寂靈跡與生時行能
010_1029_b_12L毫釐不差異哉靈哉人焉5) [24] 嘉慶
010_1029_b_13L庚辰生咸豊戊午寂俗壽三十九
010_1029_b_14L年二十三樹浮屠於西麓時順間行蹟
010_1029_b_15L備載塔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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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9_b_17L大印燈傳傳

010_1029_b_18L
師姓金氏黃州人童年出家極守冷
010_1029_b_19L節風沐雨撥草瞻風叅比丘比丘
010_1029_b_20L尼之堂耳順心飽更無餘願淸信女
010_1029_b_21L在家菩薩之行已滿脫身時急入於金
010_1029_b_22L剛山乾鳳寺不老不病而坐化若非地
010_1029_b_23L6) [25] 必是觀音其所慈悲人所難行
010_1029_b_24L年四十一臘二十二闍維舍利十七

010_1029_c_01L돌을 다듬어 탑을 세우고 봉안하였으며, 재곡在鵠 스님이 지은 탑명에 그의 행적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해봉성찬전海峯聲賛傳
스님은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원암산猿岩山 원등암遠燈庵에 살았다. 원등암의 옛 이름은 목부암木鳧庵이다.
진묵震默 조사(1562~1633)가 부안 월명암月明庵에 있을 때의 일이다. 매일 밤 등불 빛이 휘황찬란하게 비치자 그 등불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찾아보았더니, 목부암에서 그 불빛이 나오는 것이었다. 목부암 법당에 열여섯 분의 응진應眞(아라한)을 모셔 놓았는데 그 응진이 신통력으로 등불을 허공에 매달아 멀리 월명암까지 비추어 주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목부암을 원등암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그 산의 굴속에 나한당羅漢堂을 세우고 응진을 봉안한 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어떤 어리석은 스님이 굴 밖으로 나한당을 옮겼는데, 임오년(고종 19, 1882)에 그 절에 불이 나자 사람들은 나한당을 옮긴 데 대한 신벌(祟)이라고 말했다.
계미년(1883) 가을에 다시 굴속으로 옮겨 지으려고 옛터를 닦다가 글이 쓰인 돌을 발견했다.

我昔常遊遠岩山    “나는 예전에 늘 원암산을 유람했었는데
影落漢陽作宰身    그림자가 한양에 떨어져 재상의 몸 되었네
我去五十年      내가 떠난 지 50년이 지나면
湖南觀察使      호남의 관찰사가 되리니
甲午以前海峯僧    갑오년 이전에는 해봉이란 스님이다가
甲午以後金聲根    갑오년 이후에는 김성근金聲根35)이 되리라
甲午五月十三日    갑오년 5월 13일 원암산 원등사의 중 성찬聲贊이 쓰다.”

이런 글의 내용이 16간間 석함石函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갑신년(고종 21, 1884) 6월 길일吉日을 택해서 전주 위봉사威鳳寺 승통僧統 윤輪 스님이 도내道內에 다음과 같은 통문通文을 돌렸다.
“원암산 원등암은 곧 열여섯 분 응진을 모신 굴입니다. 당초에 원등암 굴속에 처음 십육나한을 모신 스님이 이런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뒷날 축전竺典이라 하는 외도外道가 굴 밖으로 십육나한을 옮길 것이다’라고 했는데, 뒷날 과연 축전이 굴 밖으로 옮겨 모시고 절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금년에 다시 굴 안으로 봉안하기 위해

010_1029_c_01L伐石樹塔具在鵠著塔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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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29_c_03L海峯聲賛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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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州人居猿岩山遠燈庵遠燈舊名
010_1029_c_05L木鳧庵震默祖師 7) [26] 在扶安月明庵
010_1029_c_06L每夜燈光晃朗尋其燈光所自則自木
010_1029_c_07L鳧庵來照安十六應眞於法堂應眞以
010_1029_c_08L神力懸燈遠照也故改遠燈其山窟
010_1029_c_09L建羅漢堂安應眞者舊矣有愚僧
010_1029_c_10L移建于穴外壬午寺灾人謂秪建之祟
010_1029_c_11L癸未秋更欲還建8) [27] 穴內修其舊址
010_1029_c_12L有石文曰我昔常遊遠岩山影落漢陽
010_1029_c_13L作宰身我去五十年湖南觀察使
010_1029_c_14L午以前海峯僧甲午以後金聲根
010_1029_c_15L午五月十三日遠岩山遠燈寺僧贊書
010_1029_c_16L藏于十六間石凾中甲申六月吉日
010_1029_c_17L州威鳳寺僧統輪回通文于道內曰
010_1029_c_18L岩山遠燈庵即十六應眞窟也當初安
010_1029_c_19L窟內曰後有竺典外道移安窟外云
010_1029_c_20L後果竺典移安於外今年欲更安內
010_1029_c_21L「嶺」下疑脫「南」{編}「述」作「逑」{甲}「椽」
010_1029_c_22L甲本正誤表作「緣」
「編」甲本正誤表作「徧」
010_1029_c_23L「瘦」甲本正誤表作「庾」「特」甲本正誤表
010_1029_c_24L作「持」
「當」甲本正誤表作「甞」「于」作
010_1029_c_25L「干」{甲}

010_1030_a_01L옛터를 중수하던 중에 돌에 새겨진 글에 위와 같은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監事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성근聲根이며, 아이 때의 이름은 암우岩字이고 호는 해사海士인데다가 태어난 해도 을미년(1853) 3월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일을 감사에게 보고합니다.”
이 보고를 받은 감사가 그곳에 직접 가자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사무쳤다. 감사는 나한당을 중건하는 일을 힘써 도왔으며, 용운龍雲 스님을 도감都監으로 임명하여 공사를 독려하게 하고 직접 상량문까지 지어 주었다. 공사가 완공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 화주化主의 직책을 맡았던 호산 해봉湖山海峯이 그 절에 살면서 잘 관리하고 있다.
원근암 가까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그 일을 알고 있는 이가 많다. 김성근 감사는 을유년(고종 22, 1885) 봄에 임기를 마치고 체직되어 서울로 돌아갔다.
동사열전 제3東師列傳第三

원본原本은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 소장되어 있다.
소화昭和 16년(1941) 7월에 등사謄寫한 것이다.

010_1030_a_01L重修舊基則有書云云如上今覽使
010_1030_a_02L姓金名聲根兒名岩字1)贊遠 [28] 號海士
010_1030_a_03L乙未三月生以此告于使使徃則瑞氣
010_1030_a_04L徹天助力建堂以龍雲差都監2) [29]
010_1030_a_05L作上樑文告功化主湖山海峯在其寺
010_1030_a_06L勤修近村之人今知其事者多矣
010_1030_a_07L公乙酉春遞歸京師

010_1030_a_08L
東師列傳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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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30_a_10L
原本朝鮮史編修會藏

010_1030_a_11L昭和十六年七月謄寫

010_1030_a_12L「贊遠」甲本正誤表曰衍字「薰」甲本正誤
010_1030_a_13L表作「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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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방호方壺 : 신선이 산다는 곳인데, 여기에서는 방장산方丈山, 즉 지리산을 말한다.
  2. 2)오연총吳延寵 : 고려 시대의 문신. 1055~1116.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태평어람』을 구해 왔다. 한림학사·승지·형부상서 등을 지내고 여진을 소탕하여 상서좌복야·참지정사가 되었다.
  3. 3)통훈대부通訓大夫 : 조선 시대 정3품 당하관의 관계官階.
  4. 4)행정의현감行旌義縣監 : 행行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품계와 관직이 상응하지 아니하는 벼슬아치를 구별하여 붙이던 칭호. 관직이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행行을, 그 반대의 경우에는 수守를 붙였다. 여기에서 행行 자를 붙인 것은 품계보다 관직이 낮았기 때문이다. 정의旌義는 남제주 지역의 지명이다.
  5. 5)통정대부通政大夫 : 조선 시대 문관·종친·의빈의 정3품 관계.
  6. 6)가선대부嘉善大夫 : 조선의 관계, 종2품으로 문·무반·종친이 받았다.
  7. 7)염향拈香 : 향을 향로에 사르는 것을 말하는데, 때로는 법통을 이어받을 때나 불사佛事를 할 때 행하는 의식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법사로부터 법통을 이어받는 의식을 말하는 듯하다.
  8. 8)고비皐比 : 호피虎皮를 말한다. 옛날 스승이 앉는 자리에는 반드시 호피를 깔고 앉았으므로 후대에 강석講席 또는 사석師席을 고비라 칭한다.
  9. 9)가타伽他 : ⓢ gatha의 음역. 풍송·게·게송으로 한역한다. 법회 때에 일정한 가락으로 풍송하는 게송.
  10. 10)침개針芥 : 개자투침芥子投針의 준말. 극히 만나기 어려움을 뜻함.
  11. 11)홍계희洪啓禧 : 조선 후기 문신. 1703~1771. 1750년 병조판서로 균역법 시행에 힘썼다. 『列聖誌』를 증보하는 한편, 왕명으로 『海東樂』을 지었다. 저서로 『三韻聲彙』, 편서編書에는 『濬川事實』 등이 있다.
  12. 12)원문에는 ‘순조대왕십일년純祖大王十一年’으로 되어 있는데 건륭 28년은 영조 39년이고, 또한 순조 11년은 신미辛未이니 원문의 표기가 잘못인 듯하여 고쳐 번역하였다.
  13. 13)이의경李毅敬 : 호는 낙천樂天이며 선계仙溪 망룡望龍의 후손이다. 천품이 밝고 높으며 언론이 바르고 준엄하였다.
  14. 14)이 게송은 『禪門拈頌』 제2권 61번째 칙則에 있는 보령용保寧勇의 염송이며, 원문에는 네 번째 글귀인 ‘양주지시이불소변楊州之詩而不少變’이 ‘우기려자과양주又騎驢子過楊州’로 되어 있다.
  15. 15)김진상金鎭商 :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이다. 1699년(숙종 25) 진사가 되고 1712년(숙종 38) 정시 문과에 급제했고, 설서說書·지평持平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申壬士禍 때 무산茂山에 유배당했으며,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다시 등용됐다. 글씨에 능해서 많은 비문을 썼다. 저서로는 『退漁堂遺稿』가 전한다.
  16. 16)칠전七殿 : 칠성전七星殿의 잘못이 아닌가 생각된다.
  17. 17)채제공蔡濟恭 :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庵·번홍樊翁.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급제하고는 관직에 나갔다. 이후 영조대에 이르기까지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영의정까지 지냈다.
  18. 18)기구箕裘 : 아비의 유업을 잘 계승한다는 뜻이다. 『禮記』의 「學記」 편에 “활을 잘 만드는 집 자식은 틀림없이 키 만드는 법을 배우고, 풀무질을 잘하는 집 자식은 틀림없이 갖옷 짓는 법을 배운다.(良弓之子。 必學爲箕。 良冶之子。 必學爲裘。)”라는 말이 있다. 활을 잘 만드는 집 자식은 그 아버지가 나무를 부드럽게 휘어서 활 만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버들가지를 휘어서 키를 만들 것이고, 대장장이 아들은 그 아버지가 단단한 쇠를 녹여 솥 만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부드러운 짐승의 가죽을 모아 갖옷을 만든다는 뜻이다.
  19. 19)손도끼(鈯斧子) : 돌鈯은 무디다는 의미이고 부斧는 도끼인데, 지혜를 비유한 말이다.
  20. 20)금탕金湯 : 쇠로 만든 성과 끓는 물로 된 참호(金城湯池)의 준말로 견고한 성지城池, 또는 산하山河의 견고함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청허 스님의 법풍法風을 비유한 말이다.
  21. 21)김상복金相福 : 조선 후기 문신. 1714~1782.
  22. 22)이 문장은 나암의 스승 설담 자우雪潭自優에 관한 것이다.
  23. 23)구류九流:한漢나라 때 분류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아홉 유파. 반고班固의 『漢書』 「藝文志」에서 분류한 유가儒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법가法家·명가名家·묵가墨家·종횡가縱橫家·잡가雜家·농가農家의 9학파를 말한다.
  24. 24)이원교李圓嶠 :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호가 원교圓嶠이다. 조선 후기의 서예가이자 양명학자. 정제두에게서 양명학을 배워 아들 영익에게 전수하였으며, 원교체라는 특유한 필체를 이룩하였다.
  25. 25)부산원浮山遠 : 송나라 승려. 부산 법원浮山法遠.
  26. 26)채팽윤蔡彭胤 :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1669~1731. 승지·대사간·병조참판·동지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이수대·오상렴과 함께 당대의 삼문장이라 일컬어졌다.
  27. 27)덕은 이웃들 많다고 했으니 : 『논어』 「里仁」 편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28. 28)기수祇樹: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준말. 기타 태자의 동산이라는 뜻. ‘기수’는 절이 서 있는 숲의 주인이었던 기타 태자의 이름을 딴 것이며, ‘급고독’은 재물을 내어서 이 절을 세운 급고독 장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29. 29)사군使君: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파견된 사신使臣의 경칭. 군수나 현령 등 지방관을 지칭하기도 한다.
  30. 30)도규刀圭 : 의술醫術.
  31. 31)왕우군王右軍 : 왕희지王羲之를 말함. 진대晉代의 저명한 서예가로 일찍이 우군장군右軍將軍을 지냈기 때문에 왕우군이라 부른다.
  32. 32)조송설趙松雪 : 원나라 때 명필 조맹부趙孟頫. 송설은 호. 그의 서체를 송설체松雪體라고 한다.
  33. 33)백옥봉白玉峯 : 옥봉은 조선 중종中宗 때 사람 백광훈白光勳의 호. 그는 당시에 시로 이름을 날렸는데 얼굴이 아주 못생겨서 이름만 듣고 만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34. 34)김추사金秋史 : 조선 말기 금석학金石學과 서예書藝 등에 크게 뛰어났던 김정희金正喜의 호이다.
  35. 35)김성근金聲根 :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1835~1919. 자는 중원仲遠, 호는 해사海士. 철종 13년(1862)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판서·전라도 관찰사·탁지부 대신을 지냈다. 서예에 뛰어났는데, 특히 미남궁체米南宮體를 잘 썼다.
  1. 1)「師」甲本正誤表作「寺」次同。
  2. 1)「在」甲本正誤表作「載」。
  3. 2)「乘」甲本正誤表作「衷」次同。
  4. 3)「暮」甲本正誤表作「慕」。
  5. 4)「柝」甲本正誤表作「析」。
  6. 5)「開」甲本正誤表作「聞」。
  7. 6)「𤕻」疑「悟」{編}。
  8. 1)「之」下甲本正誤表有「睱」ㆍ「睱」當作「暇」{編}。
  9. 2)「眞」甲本正誤表作「直」。
  10. 1)「侯」甲本正誤表作「候」。
  11. 2)「意」甲本正誤表作「竟」。
  12. 1)「大」甲本正誤表作「天」。
  13. 2)「廣」上甲本正誤表有「松」。
  14. 3)「王」甲本正誤表作「山」。
  15. 4)「寺」甲本正誤表作「師」。
  16. 5)「編」甲本正誤表作「徧」。
  17. 1)「伯」疑「栢」{編}。
  18. 2)「編」甲本正誤表作「徧」次同。
  19. 3)「西」甲本正誤表作「茜」。
  20. 4)「毫」甲本正誤表作「豪」次同。
  21. 1)「嶺」下疑脫「南」{編}。
  22. 2)「述」作「逑」{甲}。
  23. 3)「椽」甲本正誤表作「緣」。
  24. 4)「編」甲本正誤表作「徧」。
  25. 5)「瘦」甲本正誤表作「庾」。
  26. 6)「特」甲本正誤表作「持」。
  27. 7)「當」甲本正誤表作「甞」。
  28. 8)「于」作「干」{甲}。
  29. 1)「贊遠」甲本正誤表曰衍字。
  30. 2)「薰」甲本正誤表作「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