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사열전(東師列傳) / 東師列傳第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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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 제5권(東師列傳 第五)
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
벽담선백전碧潭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도문道文이고 호는 벽담碧潭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경산京山(서울) 영도사永道寺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주상전하主上殿下(고종)의 파계派系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숙종肅宗대왕에게 여섯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경종景宗대왕이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넷째 아들이 영조英祖대왕이고, 다섯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여섯째 아들은 연령군延齡君이다.
연령군의 아들은 낙천군洛川君 온薀이고본종本宗은 선조宣祖 임금의 아홉째 아들 경창군慶昌君 유㻥이다., 낙천군의 아들은 은신군恩信君이며본종은 장헌세자莊獻世子 계파로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은신군의 아들은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다본종은 인평대군麟平大君 요㴭 계파로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이다..
남연군에게 네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흥녕군興寧君 응창昌應이고, 둘째는 흥원군興完君 정응晸應이며, 셋째는 흥인군興仁君 최응最應이고, 넷째는 흥선군興宣君 하응昰應이다. 하응에게 세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재면載冕이고, 둘째가 현 주상인 재황載晃이니 어릴 때의 이름은 개동開東이었고 아이 때의 이름은 명복命福이었는데, 관례를 올릴 때에 형熒음은 형逈이다.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함풍咸豊 2년 임자(철종 3, 1852) 7월 25일에 태어나서 동치同治 2년 계해(철종 14, 1863) 12월 17일에 왕위에 오르니, 그 당시의 나이는 12세였다. 이 무렵 고종은 한양 영도사 벽담 대선사 도문道文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고 있었다.
소년은 언젠가 영도사에 가서 놀다가 절의 벽에 성명을 써 놓았는데, 뒷날 보위寶位에 오른 다음 그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고쳤다. 이는 주상의 어서御書인데다 벽담 스님을 존중하는 뜻에서 취한 조치이다.
그 뒤에 덕산德山(충남 예산군)의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일명 ‘가야산 보덕사保德寺’를 ‘생왕산生王山 보덕사報德寺’라고 고쳤다.1) 새로 터를 잡아 새 절을 짓고 옛 절터에는 남연군의 묘를 면례緬禮(이장)한 뒤 벽담 대사로 하여금 남연군의 묘를 수호하게 하고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품계를 주었다.
벽담 대사가 적멸을 보인 뒤에 스님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그 묘를 수호하였다.
벽담 스님의 제자는 한 명이 있는데 평택 망한사望漢寺를

010_1050_b_02L東師列傳第五

010_1050_b_03L[傳]

010_1050_b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1050_b_05L碧潭禪伯傳

010_1050_b_06L
師名道文號碧潭姓鄭氏京山永道
010_1050_b_07L寺人主上殿下派系肅宗大王有六
010_1050_b_08L一景宗大王二男三男早卒四英
010_1050_b_09L宗大王五男早卒六男延齡君子洛川
010_1050_b_10L君薀本宗宣祖第九
子慶昌君㻥
子恩信君本宗莊獻世子
派英宗二男

010_1050_b_11L子南延君球本宗麟平大君㴭
派仁祖第三子
有四子一興
010_1050_b_12L寧君昌應二興完君晸應三興仁君最
010_1050_b_13L四興宣君昰應有三子一載冕
010_1050_b_14L主上載晃幼名開東兒名命福冠名
010_1050_b_15L
咸豊二年壬子七月二十1) [1] 日生
010_1050_b_16L同治二年癸亥十二月十七日即位
010_1050_b_17L年十二定養於永道寺碧潭大禪師道
010_1050_b_18L文處有出遊永道寺寺壁題姓名
010_1050_b_19L寶位改其寺名曰開運寺2) [2] 主上御
010_1050_b_20L書及碧潭尊師故也其後德山象王山
010_1050_b_21L一名伽倻山保德寺改名曰生王山報
010_1050_b_22L德寺移建新基舊寺址緬禮南延君墓
010_1050_b_23L使碧潭大師贈階守護一品大僧大師
010_1050_b_24L示寂弟子繼守弟子一人平澤望漢

010_1050_c_01L중창하고 남연군의 묘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어록 2권이 문인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퇴은선백전退隱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여훈如訓이고 호는 퇴은退隱이며, 머물던 방의 현판은 향적정사香積精舍이다.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정양암正陽庵에 퇴은 스님이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친 방이 있으니 바로 향적정사이다.
그 뒤 스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제자들이 그 방을 지키고 있으면서 무너지면 보수하곤 하였다. 스님은 화문化門 스님·영암靈岩 스님 등과 더불어 금강산 내원통암內圓通庵 및 나한전羅漢殿을 중수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한번 금강산에 들어간 뒤로 사방 산의 절을 두루 유람하면서 사찰을 중수하고 흩어진 유물들을 모아 정리 보존하였다. 또한 스님의 문장력은 사적을 기록하는 데 충분하였고 선禪은 미혹한 중생들을 교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물질은 하늘로부터 얻지 않아도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지을 수 있었고 손수 일을 하지 않아도 성대한 모습으로 다시 지어지곤 하였다.
스님은 손수 누에를 치지 않고도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멀리서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는 아주 적었다.
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달밤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날로 많아졌으며, 삼매三昧에 떨어져서 수행하는 사람들도 자리를 가득 메웠다. 대승의 교리(大空)를 참구하거나 소승의 교리(小空)를 공부하거나 모두들 오라 가라 부르곤 하였다. 스님은 또 상근기上根機이든 중근기中根機이든 모두를 막론하고 앉아서 맞이하고 일어나서 전송하였다. 스님에게 율전律典을 전해 받고 경학經學을 전해 받은 이는 먹물로는 이루 기록할 수 없으며, 법法을 받고 계戒를 전해 받은 제자 역시 손꼽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스님은 온갖 풀과 나무까지도 한 권속으로 여기셨으며, 모든 남자나 여자들까지 나의 부모처럼 생각하였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고, 이 세계도 이룩되고 무너짐이 있거니 죽어서 수고우水牯牛2)가 된다 한들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며, 또한 김대성金大城처럼 다시 환생할 것을 어찌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
인곡강백전仁谷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영환永奐이고 호는 인곡仁谷이다.
덕룡산 불호사佛護寺에서 출가하였고 혜월 제해慧月濟海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인곡 스님은 연담蓮潭의 손자 법제자이다. 일찍이 두륜산 완호玩虎 스님과 달마산 낭암朗岩 스님을 찾아뵙고 학문을 익혔으며,

010_1050_c_01L重創守護語錄二卷在傳門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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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0_c_03L退隱禪伯傳

010_1050_c_04L
師名如訓號退隱室曰香積精舍
010_1050_c_05L剛山表訓寺正陽庵有師隱居終老之
010_1050_c_06L曰香積精舍其後塵世守補廢
010_1050_c_07L與化門靈岩等重修內圓通及羅漢殿
010_1050_c_08L一入金剛周遊四山寺補闕拾遺
010_1050_c_09L足以記事禪足以化迷物不天來
010_1050_c_10L改舊營新手不役作而輪焉奐焉
010_1050_c_11L蚕之衣着身不耕之食糊口遠尋者衆
010_1050_c_12L空去者小推敲月下之門日多落昧修
010_1050_c_13L行之人滿座大空小空喚來喚去
010_1050_c_14L根中根坐迎起送傳律傳經無墨可
010_1050_c_15L受法受3) [3] 無指可屈盡草木爲我
010_1050_c_16L眷屬擧男女爲我父母壽有分限
010_1050_c_17L有成壞何愧水牯牛何望金大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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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0_c_19L仁谷講伯傳

010_1050_c_20L
師名永奐號仁谷出家於德龍山佛護
010_1050_c_21L拈香於慧月濟海禪師蓮潭之孫
010_1050_c_22L甞叅於頭輪之玩虎達摩之朗岩設大
010_1050_c_23L「六」甲本正誤表作「五」「謂」下甲本正誤
010_1050_c_24L表有「有」
「大」甲本正誤表作「火」

010_1051_a_01L그 후에 대둔사大芚寺 청풍료淸風寮에서 강경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참예하여 학문을 배운 사람들의 수효가 100여 명에 달했다.
스님은 일봉암日封庵에 주석하면서 사방에서 밀려드는 학인들을 맞아 학문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을 떨치고 일어나 강론을 중단하고 전국 명산과 옛 도읍지 네 곳을 두루 유람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이래로 낮에는 사천四天에 예배하고 밤에는 구성九聖에 예배하며, 도량을 돌고 어려운 일이나 고달픈 일들은 혼자 도맡아 하곤 하였다.
그런 스님을 두고 세속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도량 80리는 인곡당仁谷堂이요, 만경창파萬頃蒼波는 낭암당朗岩堂이로구나.”
인곡 스님의 동문同門 형제로는 영파 덕수永坡德壽 선사가 있는데, 선강禪講과 교강敎講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그 누구도 까마귀의 암수를 가릴 줄 모르듯이 우열을 분간하지 못했다.
스님은 필력筆力도 경간勍幹하여 수많은 서책을 손수 베껴 썼다. 심지어는 옥편玉篇과 자휘字彙까지도 하나하나 베끼곤 하였다. 스님의 글씨는 용과 뱀이 비등飛騰하는 것처럼 힘차고 생동감이 있었으며, 마사麻絲가 가지런하듯이 정연하였다.
인곡 스님과 영파 스님이 글씨까지 구비具備하여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니 이에 대해서도 가히 숭상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스님의 제자 중에서는 성담 수언性潭修彦 스님이 특히 유명하다. 성담 스님은 교학을 배운 뒤에 놓아 버리고 선문禪門에 들어가 하루 한 번만 자고 한 끼니만 먹으면서 행리行李가 엄격하였으니,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고 한 말은 이 스님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밖의 제자로는 지봉 유홍智峰有洪과 인허 혜한印虛惠閒 등 수레에 실을 만큼, 말로 되어 헤아려야 할 만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스님의 문집 1권이 있다.
영파 스님에게도 제자가 있었으니 경암 승정鏡庵勝正·백암 정헌白庵正軒·용담 한일龍潭漢日·백인 선길白印善吉이다. 용담 스님 아래에는 백월 태순白月台淳이 있었는데, 백월 스님은 문장과 글씨는 물론 지식까지 아울러 갖춘 스님이었다. 그는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 현재 일봉암日封庵에 머물고 있다.
남호선백전南湖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영기永奇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며, 삼각산 북한北漢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속세(火宅)를 싫어하더니, 성장하자 결국에는 영원히 공문空門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고 경전을 열심히 염송하였으며, 게다가 경전을 베끼는 사경과 경전을 큰소리로 읽는 독경으로 소일하였다.
스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섭수攝受하였으며, 겉은 비구의 몸을 나타냈으나 속마음은 보살의 행을 품고 있었다. 또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구비하여 법신法身 1천 부처님께 찾아가 예를 올리기 위하여 곧 함풍咸豊 임자년(철종 3, 1852) 겨울에 보개산寶盖山(철원에 있는 산)에 들어가서

010_1051_a_01L會於大芚淸風寮叅學之數百餘人
010_1051_a_02L住日封庵提接四來學者一朝奮身
010_1051_a_03L周遊四山四都以來日禮四天夜禮
010_1051_a_04L九聖周匝道場難行苦會諺言曰
010_1051_a_05L場八十里仁谷堂萬頃滄波朗岩堂
010_1051_a_06L門兄弟有永坡德壽禪師禪講敎講
010_1051_a_07L誰知烏之雌雄師筆力勍幹許多書册
010_1051_a_08L手皆謄書至於玉篇字彙一一書寫
010_1051_a_09L1) [4] 師筆畫勍彊龍蛇飛2) [5] 麻絲叅差
010_1051_a_10L此二師3) [6] 具備難兄難弟於此可尙
010_1051_a_11L有弟子性潭守彥捨敎入禪一宿一食
010_1051_a_12L行李嚴冷靑出於藍非師而誰其餘
010_1051_a_13L智峰有洪印虛惠閒等車載斗量
010_1051_a_14L可勝數者有文集一卷永坡有弟子
010_1051_a_15L鏡庵勝正白庵正軒龍潭漢日白印善吉
010_1051_a_16L龍潭下有白月台淳白月有文筆知識
010_1051_a_17L光緖甲午在日封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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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1_a_19L南湖禪伯傳

010_1051_a_20L
師名永奇號南湖三角山北漢人
010_1051_a_21L厭火宅長入空門薙髮染衣守律念
010_1051_a_22L書寫讀誦慈悲攝受外現比丘身
010_1051_a_23L內含菩薩行乃具文房四友徃禮法身
010_1051_a_24L千佛乃於咸豊壬子冬入寶盖山

010_1051_b_01L『아미타경』을 사경하였다.
자신의 몸을 찔러 피를 내어 먹물에 섞어서 맹세하는 마음으로 붓을 잡고 글자 한 자를 쓸 때마다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세 번 예배하고 세 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곤 하였다.
한 점 한 획에 담긴 극진한 마음은 법계法界 중생의 비원悲願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으며, 한 글귀·한 소절마다 마땅히 온 대지大地의 좋고 나쁜 것 위에서 발현한 것처럼 보였다.
스님은 사경을 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날 조사님들의 규범을 따랐으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면서도 아픔을 잊었던 일 등은 예전 성념省念 스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송宋나라 때 원정圓淨 법사가 있었는데 법명은 성념이고, 속성은 안顔씨이다. 17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는데 계행이 매우 청청하였다. 송나라 순화淳化(宋 太宗의 연호) 연간(990~994)에 남소경사南昭慶寺에 주석하면서 서호西湖 지역 불자들과 결사結社를 하여 화엄으로 종요宗要를 삼았던 스님이다.
이때에 성념 스님은 스스로 제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짜서 먹물에 섞어 경을 베껴 쓰면서 늘 한 글자를 쓸 때마다 세 번 절하고 세 바퀴 돌고 부처님의 명호를 세 번 칭념稱念하곤 했었다. 그렇게 하여 베껴 쓴 경전을 판목에 새겨 1천 권을 간행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성념 스님이 머물던 연사蓮社의 이름을 바꾸어 정행사淨行社로 불렀으며, 사경 법회에 참예했던 사람들을 정행淨行의 제자라고 불렀다. 천희天禧(宋 眞宗의 연호) 3년(1019) 정월에 단정하게 앉아서 염불을 하며 입적했는데, 사람들은 성념 스님을 연종蓮宗의 7대 조사로 삼았다. 성념 스님의 꽃다운 발자취는 불법을 위해 육신을 잊은 거룩한 표본이라 하겠다.
남호 스님은 계축년(1853) 초여름 삼각산 내원암內院庵으로 들어가 피를 섞어서 쓴 경전을 판목板木에 새겨 간행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동시에 『무량수경』도 함께 간행하였다.
그 당시 사경대회寫經大會에는 전국의 용상대덕龍象大德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인허 성유印虛性惟·혼성 취선渾性就善·금계 장환錦溪壯渙·대연 수찰大演守察·혜봉 최성慧峰最性·제월 보성霽月寶成·예봉 학윤禮峰學潤·동화 축전東化竺典·중봉 혜호中峰慧皓·성봉 성호聖峰性顥 등 모든 선사들이 모두 증명법사의 자리에 모였다.
함풍咸豊 3년 계축(철종 4, 1853) 여름에 삼각산 내원암의 사경불사재寫經佛事齋를 거행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모두 남호 스님이 화주가 되어 시행한 자비의 원력이었다.
문암강백전聞庵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영유永愈이고 호는 문암聞庵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표운表雲 장로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현해懸解 조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다.

010_1051_b_01L寫阿彌陀經刺血和墨誓心秉筆
010_1051_b_02L寫一字4) [7] 三禮拜三穪佛名
010_1051_b_03L一點一劃盡心等法界悲願中流出
010_1051_b_04L一句一讀宜乎盡大地善惡上發現
010_1051_b_05L一遵古祖師垂範指血忘痛實踵省念
010_1051_b_06L宋圓淨法師名省念5) [8] 顏氏十七
010_1051_b_07L出家6) [9] 行嚴謹淳化中住錫
010_1051_b_08L昭慶結社西湖以華嚴爲宗要自刺
010_1051_b_09L指血和墨書之每書一字三拜三圍
010_1051_b_10L三穪佛名刊板印施千卷易蓮社
010_1051_b_11L爲淨行社預會者皆穪淨行弟子
010_1051_b_12L禧三年正月端坐念佛7) [10] 8) [11]
010_1051_b_13L祖云省念師芳躅爲法忘軀越癸丑
010_1051_b_14L夏初三角山內院庵刊板印布同時
010_1051_b_15L同刊無量壽經時會龍象大德印虛性
010_1051_b_16L渾性就善錦溪壯渙大演守察慧峰最
010_1051_b_17L霽月寶成禮峰學潤東化竺典中峰慧
010_1051_b_18L聖峰性顥等諸禪師皆會證席咸豊
010_1051_b_19L三年癸丑夏三角山內院庵佛事齋場
010_1051_b_20L南湖化主慈願力

010_1051_b_21L

010_1051_b_22L聞庵講伯傳

010_1051_b_23L
師名永愈號聞庵姓李氏靈岩人
010_1051_b_24L年出家剃染於表雲長老拈香於縣解

010_1051_c_01L그 후에 화담華潭·수룡袖龍·대운大雲 스님을 두루 찾아다니며 참학하였다. 여러 지방을 유람하면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공부의 수준을 인정받아 스승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스님은 강당에 앉아 강론을 할 때에는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며, 대둔사의 상원암上院庵과 북암北庵, 수인사修仁寺의 석문암石門庵, 보림사寶林寺의 동암東庵 등에 인연을 따라 거주했다.
말년에는 스님도 비로소 교학은 거두고 선문에 들어가 보림사의 내원암과 송광사의 삼일암三日庵, 태안사의 미타암彌陀庵, 지리산의 칠불암七佛庵과 불일암佛日庵, 대둔사의 만일암挽日庵과 남미륵암南彌勒庵 등의 선방에서 성품대로 소요逍遙하였다.
스님은 심적암深寂庵에서 머물러 계시다가 미미한 질병 증세를 보이더니 열반에 드셨다.
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로는 기봉 장선奇峰壯善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남하 성현南河性衒과 환명 경운煥溟敬雲이 있으며, 수은受恩 제자로는 주지의 직을 맡고 있는 회일會日이 있다.
동문수학을 한 법형法兄 중에는 화성 도우花城道祐가 있으며, 화성 스님의 제자로는 은곡 봉신銀谷奉信과 학봉 선일鶴峰仙一 등이 있다. 스님에게서 계를 받은 제자로는 보헌普憲 등 21명이 있다.
스님은 성품이 본래 유순하였다. 특히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사음邪婬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으니, 이 네 가지 바라이波羅夷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한 것이 있는지를 저마다 숨김없이 드러낼 때에 한 가지 죄도 드러나지 않는 이는 백 명에 한 명 정도 있을 정도였다. 선실禪室의 문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다른 대중들과 서로 수순隨順(화합)한 예는 근래에는 없었던 일이다.
스님이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손수 쓴 책이나 글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선방에 들어간 이후에 모두 다 흩어지고 잃어버려 남아 있는 게 없으니, 그의 문하생들의 불초不肖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영암선백전靈岩禪伯傳

010_1051_c_01L祖師叅學於華潭袖龍大雲遊方入
010_1051_c_02L坐講堂誨之不倦大芚之上院北庵
010_1051_c_03L修仁之石門寶林之東庵隨絠居住
010_1051_c_04L末乃捨敎入禪寶林之內院松廣之三
010_1051_c_05L太安之彌弛 [12] 智異之七佛佛日
010_1051_c_06L芚之挽日南彌任性逍遙住深寂
010_1051_c_07L微疾而寂受法弟子有奇峰壯善
010_1051_c_08L弟子南河性衒煥溟敬雲受恩業者
010_1051_c_09L行住持會日同門兄有花城道祐花城
010_1051_c_10L弟子有銀谷奉信鶴峰仙一等受戒者
010_1051_c_11L有普憲竺二十一人性本柔順不殺
010_1051_c_12L9) [13] 不偸盜不邪淫不妄語此波羅
010_1051_c_13L夷中發露之時無一露罪者百中之
010_1051_c_14L一也入禪室門隨順大衆近古所無
010_1051_c_15L者也自初至終手書之文數不可筭
010_1051_c_16L而入禪以後散失無遺門下人之不肖
010_1051_c_17L可想

010_1051_c_18L

010_1051_c_19L靈岩禪伯傳

010_1051_c_20L「披」甲本正誤表作「坡」「謄」甲本正誤表
010_1051_c_21L作「騰」
「文」下甲本正誤表有「筆」「統」甲
010_1051_c_22L本正誤表作「繞」
「錢」甲本正誤表作「姓」
010_1051_c_23L「其」甲本正誤表作「具」「之」甲本正誤表
010_1051_c_24L作「入」
「蓮」下甲本正誤表有「宗」「庄」甲
010_1051_c_25L本正誤表作「生」次同

010_1052_a_01L
스님의 법명은 취학就學이고 호는 영암靈岩이며, 본래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무정한 세월이 길 위에서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을 애달프게 생각한 나머지 심지心志에 서원을 세워 산중에 몸을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런 과정은 다른 스님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스승을 찾아가 은사를 정하고 법을 받은 이후로는 완연히 생불生佛과 같았다.
스님은 금강산을 토굴로 삼고 ‘법기法起 보살이 나를 불러 제자로 삼았다’고 하였다. 1만 2천 봉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53부처님이 눈앞에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금강수金剛水·감로수甘露水·장군수將軍水를 마시며 마군의 구름을 씻어 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길러 내는 등 청정한 삶을 영위하였다.
스님은 주로 금강산에 있었던 불지암佛地庵·정양암正陽庵·영원암靈源庵에 앉아서 뜨거운 번뇌를 녹여 없애고 청량함을 얻는 일에 몰두하였다.
스님은 또 수불암須佛庵과 내원통암內圓通庵 등을 중수하였는데, 수불암 중수하는 일은 강명철姜明哲이 화주를 맡았고 내원통암은 퇴은退隱 스님과 힘을 함께하여 일을 잘 성사시켰다.
스님은 팔도의 강과 산을 총괄해서 『토굴가土窟歌』 1권을 지었는데, 그것을 베끼느라 시전市廛의 종이가 품절되었고, 산야山野에는 그 노래를 불러 귀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퇴은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영암 선백도 석실石室에서 세상을 떠나니, 도를 같이 닦던 도반들은 비로소 두 분이 막상막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로봉毘盧峰 중향성衆香城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으니 누구를 칭찬하고 누구를 헐뜯을 것인가?
혼성선백전混性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취선就善이고 호는 혼성混性이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극락전極樂殿 사람이다.
스님은 타고난 천품天稟이 호연浩然하여 자질구레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학문은 구류九流를 골고루 섭렵하여 모든 학문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삼장三藏과 오교五敎를 두루 열람하였다.
다섯 도의 법회도량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교학을 가르치고 사방 산문의 선원禪苑을 두루 다니면서 명패를 걸어 놓고 결제안거를 하였다. 책궤를 짊어지고 배우기 위해 대사를 찾아온 학인들이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빗물로 목욕을 하면서까지 모여들었다. 보배를 가슴에 품고 그 가치를 점검하려고 찾아오는 이들은 스님을 찾아와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까지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연演 보살비연秘演 스님과 천天 수좌관천觀天 스님는 먼 지방에서 스님을 찾아와서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은 스님이다. 또 이李 처사이름은 동환東煥이다.와 안 한량安閒良이름은 기선箕仙은 스님 앞에서 재齋를 섭수하여 묘당廟堂에 오른 대표적인 사람이다.
하은荷隱구월산, 용선龍船천불산, 낙파洛波금강산,

010_1052_a_01L
師名就學號靈岩本是靈岩人無情
010_1052_a_02L歲月過去于路上有願心志依托於
010_1052_a_03L山中削髮被緇元同他人尋師受恩
010_1052_a_04L完如生佛金剛爲我窟宅法起召我弟
010_1052_a_05L萬二千峯飽藏心中五十三佛
010_1052_a_06L立眼前喫金剛水甘露水將軍水
010_1052_a_07L1) [14] 濯魔雲生瑞氣坐佛地庵正陽庵
010_1052_a_08L靈源庵消除熱惱獲淸凉重修須佛
010_1052_a_09L化主姜明哲成內圓通退隱同力
010_1052_a_10L括盡八垓江巒作一卷土窟歌市廛紙
010_1052_a_11L山野耳聒退隱化門石室幻空
010_1052_a_12L道方知頡之頏之誰毁誰譽於毘盧
010_1052_a_13L峰頭衆香城2) [15]

010_1052_a_14L

010_1052_a_15L混性禪伯傳

010_1052_a_16L
師名就善號混性妙香山普賢寺極樂
010_1052_a_17L殿人天禀浩然不拘小節學覽九流
010_1052_a_18L3) [16] 經閱三藏五敎五道法場徃復
010_1052_a_19L無際四山禪苑掛牌結臘負笈從師
010_1052_a_20L櫛風沐雨而至懷寶求價者負薪
010_1052_a_21L汲水而歸演菩薩
天首座
遠訪而
010_1052_a_22L求善賈與價
李處士
安閒良
4) [17]
010_1052_a_23L而昇廟堂荷隱
龍船
洛波

010_1052_b_01L허주虛舟조계산, 환종幻宗고령古寧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막역한 친구 관계였다.
청북淸北과 청남淸南청淸은 청천강淸川江을 말한다., 관북關北과 관남關南 지역의 사람들이 한형주韓荊州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識荊之願)처럼 스님을 간절히 만나보기를 소원했다.
남호南湖 스님법명은 영기永奇이다.이 사경한 경전을 간행하는 법회 자리에 증명법사로 단상에 올랐으며, 쌍월雙月 스님법명은 성활性濶이다.의 법회를 여는 자리에 초청을 받아 멀리서 그 도량에 가서 참예하기도 하였다.
삼재三才인 하늘·땅·사람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며, 사시四時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에서 소임을 다 이룬 것은 물러가는 법이다.『범수전范睢傳』에서 나온 말이다. 귀한 것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은 하늘 법도의 떳떳한 이치이니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것도 똑같은 이치이다. 부처님을 본받아 반열반에 드셨으니 스님은 틀림없이 안락한 가문에 태어나셨을 것이다.
원담선사전圓潭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내원乃圓이고 호는 원담圓潭이다.
회운 진환會雲振桓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고 서월 거감瑞月巨鑑의 손자 법제자이며, 규암 낭성圭岩朗誠의 증손 법제자이고 용담 조관龍潭慥冠의 4대 법손이며, 상월霜月의 5대 법손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풍곡 덕인楓谷德仁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함명 태선涵溟太先이 있다.
스님은 무등산 원효암元曉庵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림을 잘 그리기로 이름이 나서 가르침을 받으러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뜰 안을 가득 메웠고 집 안에 가득 찰 정도였다. 이들 중에는 혹 불모佛母(불화를 그리는 사람)로 이름이 난 사람도 있었고, 혹은 병풍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혹은 건물·단청·소상塑像·도금塗金 등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있었다.
원담 스님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냇물에 연이어졌으며, 스님에게 학문을 익히려는 사람들은 볏짚처럼, 삼대처럼 열을 이루었다.
이는 마치 도덕道德에 있어서는 정자程子3)와 주자朱子4) 같았고, 문장에 있어서는 반고班固5)와 사마천司馬遷6) 같았으며, 병가兵家에 있어서는 손자孫子7)와 오기吳起8) 같았고, 화가畫家에 있어서는 오도자吳道子9)와 미불米芾10) 같았다.
풍계風溪 스님은 원담의 스승이고 해운海雲은 그의 벗이며, 풍곡楓谷은 그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금암金庵·용완龍玩·운파雲玻·화담華潭은 모두 서남쪽에 사는 그의 절친한 벗들이다.
원담 스님은 「화보畫譜」에 꽃다운 이름이 올라 있으며, 성품이 사람 길러 내기를 좋아하여 많은 법을 받은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으며, 오이처럼 덩굴이 한없이 뻗어나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듯이 배출하였다. 존귀한 불상을 단장하여 장엄한 공덕으로 원담 스님은 대대로 쾌락을 느끼게 될 것이다.

010_1052_b_01L
幻空
以爲莫逆之交淸北淸南
010_1052_b_02L淸川
關北關南切識荊之願南湖

010_1052_b_03L刊經貴在證壇雙月
之設會遙臨
010_1052_b_04L道場5) [18] 天地人之中惟人㝡貴也
010_1052_b_05L四時春夏
秋冬
之序成功者去矣范睢
傳出
棄貴而
010_1052_b_06L天道之常也般涅槃同也效佛
010_1052_b_07L而般涅槃必*庄 [19] 安樂家

010_1052_b_08L

010_1052_b_09L圓潭禪師傳

010_1052_b_10L
師名乃圓號圓潭會雲振桓之子
010_1052_b_11L月巨鑑之孫圭岩朗誠之曾孫龍潭慥
010_1052_b_12L冠之四世霜月之五世弟子有楓谷德
010_1052_b_13L孫有涵溟太先久住無等山元曉
010_1052_b_14L6) [20] 鳴世來受業者滿庭盈室
010_1052_b_15L或鳴於佛母或馳騁屏障或屋或丹雘
010_1052_b_16L塑像塗金請之者影綴岩溪學之者
010_1052_b_17L稻麻成列若道德之程朱文章之班馬
010_1052_b_18L兵家之孫吳畫家之吳米也楓溪我師
010_1052_b_19L海雲我友楓谷我嗣金庵龍琓雲玻華
010_1052_b_20L皆我之西南得朋畫譜聯芳性好
010_1052_b_21L種樹子孫綿綿瓜瓞靚莊尊像功德
010_1052_b_22L世世快樂

010_1052_c_01L
문담강백전文潭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원장元長이고 호는 문담文潭이며, 한수漢水 이북에서 태어나 자랐다.
영허映虛(善影) 스님에게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어릴 적에는 공자와 노자의 학문을 배웠고 성장해서는 불교의 산문으로 들어가 불경과 여타 학문을 탐구한 지 4, 5년이 지나 스승으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아 깃발을 세우고 강론을 펼친 것이 7, 8년이다. 그 무렵 삼각산三角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법문을 듣기 위해 스님을 모셔 가려고 하는 신도들이 많았다.
스님은 황주黃州(황해도) 서원사西院寺에 머물며 2년 동안 표충사총섭表忠祠摠攝을 역임하였다. 만년 시절에는 북쪽으로 설봉산 석왕사釋王寺에 들어가 은법사恩法師의 일상생활을 시봉하면서 도량을 소제하고 지내다가 법사인 영허 스님보다 먼저 입적하였다. 이치로 보아서는 거스른 것이지만 천명의 길고 짧음을 어찌하겠는가?
문담 스님의 제자들은 마음을 합하여 의논한 나머지 할아버지 스승인 영허 스님과 은사 스님의 비석 두 개를 동시에 세우기로 하였으니, 할아버지인 영허 스님의 비는 생전에 세운 것이고 은사의 비석은 돌아가신 뒤에 세운 것이다. 석왕사 동쪽 산기슭에 두 개의 비석을 나란히 세워 아름다운 인연을 증명해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
은사는 영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법제자이고 인봉 덕준仁峯德俊의 손자 제자이다. 뇌묵 등린雷默等麟 스님의 증손 제자이고 완월 궤홍玩月軌泓 스님의 4대 법손이며, 함월 해원涵月海源 스님의 5대 법손이고 환성 지안喚醒志安 스님의 6대 법손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용연 혜흔龍淵慧昕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경연 철구鏡淵哲球가 있다. 문담 스님의 동문 형제 중 용암 전우庸庵典愚가 있는데 항상 서울 근교의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 살았다. 흥국사는 일명 덕사德寺라고 부르기도 했다. 용암 스님의 제자로는 성곡 유척聖谷惟倜과 취은 기순翠隱奇淳이 있으며, 두 명의 손자 제자가 있으니 영실永實과 의직義直이다.
수은受恩 제자로는 정운 채규定雲彩奎가 있으며, 스님의 영정 두 본이 전해진다. 은사 영허 스님은 경진년(고종 17, 1880)에 입적하였다.

010_1052_c_01L文潭講伯傳

010_1052_c_02L
師名元長號文潭生長漢北出家映
010_1052_c_03L幼學孔老長入佛7) [21] 通方學人者
010_1052_c_04L四五秋建幢大師者七八歲住三角山
010_1052_c_05L迎接檀氏者多矣住黃州西院寺行表
010_1052_c_06L忠祠摠8) [22] 9) [23] 晩節北入雪峯山釋
010_1052_c_07L王寺恩法師若侍缾錫掃道場先法
010_1052_c_08L示寂理則逆命之延促何也弟子等
010_1052_c_09L同心10)豎議 [24] 祖師恩師兩碑同寺成11) [25]
010_1052_c_10L祖師生前之碑恩師死後之碑雙立于
010_1052_c_11L寺之東麓盛事之大者也恩師映虛之
010_1052_c_12L仁峰德俊之孫雷默等12) [26] 之曾
010_1052_c_13L月軌泓之四世涵月海源之五世喚老
010_1052_c_14L之六世弟子有龍淵慧昕有鏡淵哲
010_1052_c_15L同門兄弟庸庵典愚常居京山水
010_1052_c_16L落山興國寺一名德寺其弟子有聖谷
010_1052_c_17L惟倜翠隱奇淳有二孫曰永實義直
010_1052_c_18L恩者有定雲彩奎有影子二本恩師
010_1052_c_19L後庚辰入寂

010_1052_c_20L「洗」甲本正誤表曰衍字「理」甲本正誤表
010_1052_c_21L作「裡」
「九」甲本正誤表作「凡」「齊」甲本
010_1052_c_22L正誤表作「齋」
「村」甲本正誤表作「才」
010_1052_c_23L「盡」甲本正誤表作「畵」
「仙」作「山」{甲}
010_1052_c_24L「攝」下甲本正誤表有「者」
「手」甲本正誤表
010_1052_c_25L作「年」
「豎議」甲本正誤表作「議豎」「主」
010_1052_c_26L甲本正誤表作「立」
「仁」甲本正誤表作「麟」

010_1053_a_01L
쌍월선백전雙月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성활性濶이고 호는 쌍월雙月이다.
스님은 학식이 넓고 심원深遠하였고 지행知行이 뛰어났다. 그런 스님에게 조정에서는 ‘남북표충수충총섭南北表忠酬忠摠攝’이라는 직첩을 주었다. 쌍월 스님은 산문 밖을 나서면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였고, 절로 돌아오면 선방에 들어가 선나禪那에 몰입하였다.
깊은 산골짜기에 난蘭이 피면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하여 향기롭지 않을 리가 없고, 소나무가 무성하여 숲을 이루면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혼자 우뚝 솟아 있는 잣나무가 기뻐하는 법이다.
임자년(철종 3, 1852) 봄에 재물을 모으고 장인匠人을 불러 『유마경』 3권·『관경觀經』 1권·『아미타경』 등을 유성종劉聖鍾의 집에서 간행했다. 오민수吳旻秀가 경전을 쓰는 일을 맡았으며, 보월 혜소寶月慧昭·혜봉 최성慧峯最性·벽담 도문碧潭道文 등 여러 대존숙大尊宿들께서 증명법사의 자리에 참예하였다.
계축년(철종 4, 1853)에 경전 간행불사를 마쳤다. 동화 축전東化竺典과 화은 호경華隱護敬이 지혜를 다투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간행한 경전을 보개산 성주암聖住庵에 간직해 두었으니 훌륭한 일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일이라 하겠다.
쌍월 스님의 제자로는 승주 선암사仙岩寺에 머물고 있는 철경鐵鏡 스님이 있는데, 그의 속성은 최씨이고 순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 나머지 인연을 맺은 일과 법등法燈을 이어간 일 등은 스님의 문집과 일기에 수록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호봉선백전虎峰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응규應奎이고 호는 호봉虎峰이며, 서울 인근 광주 봉은사奉恩寺에 거주하였던 사람이다.
경오년(고종 7, 1870)에 호남표충사총섭湖南表忠祠摠攝의 직을 수행하였다. 스님은 문장과 글씨 둘 다 갖추었으며, 재주와 덕까지 겸비하였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서 손수 『화엄경』 1부를 사경한 뒤에 널리 팔도에 명성이 있는 법사들을 초청하여 모두 증명법사의 자리에 앉게 하고, 이 경전들을 간행하여 인출하는 한편 전각을 짓고 판목을 그 안에 간직하였으니,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 판목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영각사靈覺寺의 훌륭했던 업적과는 동일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 공도 호봉 스님이 베낀 『화엄경』 80권을 보고 그의 필력筆力과 공로를 크게 칭찬하고 직접 서문을 쓰고 찬문贊文을 지어 주었으니 그 찬문은 이러하다.
“‘수보리須菩提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은 몸을 가지고 보시하되, 이와 같이

010_1053_a_01L雙月禪伯傳

010_1053_a_02L
師名性濶號雙月學識曠遠知行挺
010_1053_a_03L贈南北表忠酬忠揔攝帖出則頭陀
010_1053_a_04L入則禪那蘭開幽谷無人不可不芳
010_1053_a_05L松茂盛林同類而孤秀栢悅於壬子
010_1053_a_06L鳩集僝功刊注維摩經三卷觀經一
010_1053_a_07L彌陀經於劉聖鍾家吳旻秀書寶月
010_1053_a_08L慧昭慧峯最性碧潭道文諸大尊宿
010_1053_a_09L坐證席於癸丑告功東化竺典華隱護
010_1053_a_10L爭智序跋藏於寶盖山聖住庵善事
010_1053_a_11L之首也有弟子鐵鏡在仙岩姓崔氏
010_1053_a_12L順天人其餘結緣續燈者文集及日記
010_1053_a_13L錄之而傳後

010_1053_a_14L

010_1053_a_15L虎峰禪伯傳

010_1053_a_16L
師名應奎號虎峰京山廣州奉恩寺人
010_1053_a_17L庚午行湖南表忠祠揔攝文筆具足
010_1053_a_18L才德兼全克誠致齋手書華嚴經一部
010_1053_a_19L廣募八道有名法師並坐證席開印
010_1053_a_20L開閣藏板海印大藏不可比肩
010_1053_a_21L靈覺勝事同日而語矣秋史金1) [27]
010_1053_a_22L峰所書華嚴經八十卷筆力功勞大加
010_1053_a_23L稱贊作序2)作贊 [28] 作贊曰須菩提
010_1053_a_24L男子善女人以恒河沙等身布施如是

010_1053_b_01L무량無量 백천억겁百千億劫 동안 몸으로써 보시한다 하자.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이 생겨 가르침에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면, 그 복은 위에서 몸으로써 보시한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물며 손수 경을 베껴 쓴 것이겠는가?’ 이 말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나오는 말로서 여래께서 이미 증명하신 것이거늘 지금 호봉 스님이 손수 『화엄경』을 베껴 썼으니 그 복이 어떠하겠는가? 승련勝蓮 노인이 강변의 절11)에서 써서 보이노라.”
호봉 스님은 전각 안에 있는 판각을 가지고 인쇄 출간하여 산문의 스님들과 세속 신도들에게(山野) 유포하였으니, 그 훌륭한 신심은 남호南湖 스님이 손수 『아미타경』을 써서 세상에 유포한 것과 공덕이 같을 것이다.
그 당시 큰 법사들이 모두 그 자리에 와서 증명법사의 자리에 올라 지켜본 것 또한 남호 스님 때와 비슷하다 하겠다. 판각版閣의 액제額題는 김정희 공이 임종할 무렵에 쓰고 나서 붓을 끊어 버렸으니 그 인연 또한 크다고 하겠다.
스님에 대한 기연機緣과 어구語句들은 모두 스님의 문집과 행장에 자세히 갖추어 수록되어 있다.
철요선백전鐵鷂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사문師文이고 호는 철요鐵鷂이며, 거처하는 방의 당호는 단파檀波이다. 속성은 조趙씨이며, 함남 안변에서 출생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문文씨이다.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살면서 아이를 절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죽은 남편을 위해 여성으로서의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스님이 이미 장성했으나 어머니의 절개를 잊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 주선하던 끝에 김 만호金萬戶12)로 인하여 임금이 거둥하는 길에서 기다렸다가 단자單子를 올렸다. 임금이 특별히 교지를 내려 열녀려烈女閭를 세우게 하였으니, 어머니는 열녀가 되었고 그 자식은 효자가 되었다. 이 두 모자의 이야기는 세상에 아주 드문 일이다.
신미년(고종 8, 1871) 봄에 김 만호가 이진梨鎭 만호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할 때 스님은 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스님은 그 문적文蹟(임금의 교지)을 가지고 나(梵海)를 찾아와서 숙식을 함께하며 이진으로 가서 진장鎭長을 만나곤 하였다. 그러다가 김 만호가 서울로 올라갈 때 스님도 곧바로 떠나갔다.
그 뒤 5년이 지난 을해년(고종 12, 1875) 봄에 내가 석왕사로 가서 내원암의 영허映虛 노덕老德이 계신 곳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조실로 있던 철요 스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2천 리 밖에 떨어져 살고 있다가 여기에서 다시 만났으니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철요 스님이 나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 주기에 나도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010_1053_b_01L無量百千億劫以身布施若復有人信
010_1053_b_02L聞此經典信心不逆 3)福其勝彼何況
010_1053_b_03L書寫此是金剛般若經如來之所已證
010_1053_b_04L今虎峰之手寫華嚴經八十卷其福
010_1053_b_05L當如何勝蓮老人書示虎公於江上寺
010_1053_b_06L閣中板刻印出流布山野其所善信
010_1053_b_07L與南湖手書彌陁經同功時諸大法師
010_1053_b_08L皆來證席如也板閣額題金公臨終
010_1053_b_09L而絕筆其緣大矣機緣語句具載文
010_1053_b_10L集行4) [29]

010_1053_b_11L

010_1053_b_12L鐵鷂禪伯傳

010_1053_b_13L
師名師文號鐵鷂室曰檀波姓趙氏
010_1053_b_14L安邊人母文氏早失父獨居送子于
010_1053_b_15L烈於亡夫盡於女節師旣長成
010_1053_b_16L忘母節徃京周旋因金萬戶呈單子
010_1053_b_17L于殿下擧動之路特下敎旨立烈女閭
010_1053_b_18L母爲烈女子爲孝薦母子之事世所
010_1053_b_19L稀罕辛未春金萬戶爲梨鎭萬戶
010_1053_b_20L任後師與其下來時持其文蹟尋予
010_1053_b_21L宿食徃見鎭長上去時直去後五年
010_1053_b_22L乙亥春予徃釋王寺入內院庵映虛老
010_1053_b_23L德處鐵鷂在祖室相距二千里之外
010_1053_b_24L再逢稀有之事贈予一絕予次贈曰

010_1053_c_01L本是同門千里外    본시 동문인데 천 리 밖에 살고 있어
擧頭北望斗牛淸    고개 들어 북쪽 하늘 두우성斗牛星을 바라봤지
一之爲幸况逢再    한 번 만남도 다행인데 두 번씩이나 만났으니
談罷山空夢寐淸    법담 마치자 산은 맑고 잠자리도 편안하네

그 원운原韻(철요) 스님의 시를 부쳐 넣었으니 이러하다.

三尊一路北風淸    삼존三尊의 한 길 북쪽 바람 맑고
云云         ……운운云云……

뒷날 경연鏡淵 스님이 오니, 피차간에 오고감이 있었다. 그 뒤 추사 김 참판金參判의 시집에 추사가 사문師文(철요)에게 증정한 절구시 한 수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五天竺在掌中間    다섯 천축국天竺國 손바닥 안에 있고
八水三峰徃復還    팔수八水와 삼봉三峰을 오고 가네
莫把示趺傳祖印    관 밖에 발 드러낸 것으로 조사의 심인心印 삼지 마시게
金身無善錫蘭山    부처님은 아무 탈 없이 석란산錫蘭山(스리랑카)에 계신다네

또 나중에 추사의 문집을 얻어 보았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명나라 이우李祐가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사자후국獅子吼國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사자좌獅子座에 앉아서 설법을 하고 있었다.”
문집의 주석에 “석란산은 사자후국의 옛 이름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김정희는 철요 스님과 친밀하게 지낸 정이 백파白坡·초의草意·호봉虎峰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교분이 있었다.
철요 스님은 영허 노스님으로부터 선법을 전해 받았다.
한양선백전漢陽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용주龍珠이고 호는 한양漢陽이며, 또는 붕명 한익鵬溟漢翊이라고도 한다. 양주楊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용주사龍珠寺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백양산으로 옮겨 가서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도 다 열람하고, 선종과 교종의 학문까지 참구하였다.
스님은 경을 보는 안목이 원만하게 밝아지고 범패를 읊는 소리도 청아해지자 덕운德雲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한양 스님은 침송枕松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양악羊岳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스님의 범궁梵宮 음악이 삼남 지방까지 알려지자 코를 움켜잡고 흉내를 내며 본받으려고 하는 이들이 길을 메우고 문지방이 닳아 빠질 지경이었다.
스님은 더욱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영령英靈들에게도 정성을 다해서 어떤 때는 영험을 얻은 적도 있고, 어떤 때는 복을 받은 적도 있다.

010_1053_c_01L本是同門千里外擧頭北望斗牛淸
010_1053_c_02L之爲幸况逢再談罷山空夢宣淸附其
010_1053_c_03L原韻曰三尊一路北風淸云云後鏡淵
010_1053_c_04L之來彼此有徃復後得見秋史金叅判
010_1053_c_05L詩集贈師文詩一絕曰五天竺在掌中
010_1053_c_06L八水三峰徃復還莫把示趺傳祖印
010_1053_c_07L金身無5) [30] 錫蘭山後得見文集曰
010_1053_c_08L李祐使西域至獅子吼國釋迦文佛
010_1053_c_09L弟子坐獅子座說法注錫蘭山獅子
010_1053_c_10L吼國古號也金公與鐵鷂情好日密
010_1053_c_11L與白坡草衣虎峰無異也師受禪於映
010_1053_c_12L虛老云

010_1053_c_13L

010_1053_c_14L漢陽禪伯傳

010_1053_c_15L
師名龍珠號漢陽又鵬溟漢翊楊州
010_1053_c_16L入龍珠寺祝髮未幾移入白羊山
010_1053_c_17L閱內外典叅禪敎師經眼圓明梵唄
010_1053_c_18L淸雅拈香於德雲法師師枕松之子
010_1053_c_19L羊岳之孫梵宮音樂淸徹於三南
010_1053_c_20L鼻而效者閼路甐閾尤勤於轉經
010_1053_c_21L於英靈有時以得驗有時以受福
010_1053_c_22L「公」下甲本正誤表有「見」「作賛」甲本正
010_1053_c_23L誤表曰衍字
「福其」甲本正誤表作「其福」
010_1053_c_24L「裝」甲本正誤表作「狀」「善」甲本正誤表
010_1053_c_25L作「恙」

010_1054_a_01L그러니 이것은 응진應眞(아라한)이 영험을 내려 단나檀那(신도)들이 귀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옷과 음식이 넉넉하여 여유가 있었으며, 죽어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극락에 왕생할 것이다.
스님이 적멸을 보이시던 날 밤에 붉은 광명이 서렸고 사유闍維 의식을 거행하던 날에는 하얀 기운이 하늘까지 뻗쳤다. 이 광경을 본 스님들과 신도들은 찬탄하여 마지않았으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할 것 없이 이를 보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는 보경 응운普鏡應雲 등이 있고, 스님의 영각影閣은 청류암淸流庵에 시설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연담蓮潭 대사 이래로 5대 내지 6대에 이르는 스님들을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린다. 여기에는 스님의 진영 1축軸도 봉안되어 있는데, 찬문은 다음과 같다.

氣鍾花山       기운은 화산花山에 모였고
燈續羊山       법등은 양산羊山에 이어졌네
重顯玉泉       옥천玉泉의 영광 되살아나
全移魚山       어산魚山이 그대로 옮겨 왔네
奉事那時       어느 때나 재를 받들어 올려
感應檀那       단나檀那들을 감응케 했네
庵入寂滅       암자에서 적멸에 들어가니
權示漚和       임시 선교방편 보이셨네
克誠誦經       경전 독송에 온 정성 다하고
臨終呈祥       임종을 하고 나니 상서를 드리웠네
白日震雷       밝은 대낮에 우렛소리 들리고
昏夜亘光       캄캄한 밤에 광명이 솟아올랐네
寔繁有徒       이에 제자들은 날로 늘어나고
滿室桂香       방 안엔 계수나무 향기 가득하였네
本無分段       본래는 분단分段이 없건만
人穪漢陽       사람들은 한양漢陽이라 불렀네
誰打丹靑       그 누가 단청에 덧칠을 할 건가?
永見羹墻       영원히 갱장羹墻13)을 보이리라

병술년(1886) 봄 3월에 종제從弟는 삼가 짓는다.
서암강사전恕庵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선기善機이고 호는 서암恕庵이며, 속성은 조曺씨이고 전남 나주 금마金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 운흥사雲興寺의 대운大雲 스님에게 몸을 의탁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 이후에 불호사佛護寺의 인곡仁谷 스님과 영파永坡 스님, 대둔사大芚寺의 화담華潭 스님·문암聞庵 스님·용연龍淵 스님, 보림사寶林寺의 인암忍庵 스님, 선암사仙巖寺의 침명枕溟 스님, 미황사美黃寺의 붕명鵬溟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서암 스님은 마침내 은사에게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또 은사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도 받았다.
스님은 이어 운흥사雲興寺 동암東庵에서 강석을 열고 찾아와 묻는 학인들을 지도한 지 몇 년이 지나 대둔사로 들어가서 선정禪定을 일생의 중대한 일로 삼아 정진하였다.
스님은 본래 성품이 교리敎理를 좋아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유가의 글은 원래 맛을 붙일 곳이 없다.”라고 하면서, 찾아와 유교의 글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절대로 응대하지 않았으니, 이는 본래 세속적 이익에 대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필력은 추사의 글씨 중에 아주 잘 쓴 부분에서 심오한 법을 터득하였으며, 문장 또한 끊어져서 간간이 단절된 곳이 있기는 하지만 반복해서 재삼 음미해 보면 전영雋永14)하고 정중鄭重하여 마치 문자삼매文字三昧에 들어간 듯하였다.
스님은 또 지식이 탁월한데다 도의 이치마저 깊이 탐구하였으니,

010_1054_a_01L眞降靈檀那歸依生而衣食有餘
010_1054_a_02L而徃生無疑示寂之夜有赤光闍維
010_1054_a_03L之日亘白氣緇素賛歎遠近觀感
010_1054_a_04L法弟子普鏡應雲等設影閣於淸流庵
010_1054_a_05L奉蓮潭以來五六世春秋時享有眞影
010_1054_a_06L一軸賛曰氣鍾花山燈續羊山重顯
010_1054_a_07L玉泉全移魚山奉事那時感應檀那
010_1054_a_08L庵入寂滅權示漚和克誠誦經臨終
010_1054_a_09L呈祥白日震雷昏夜亘光寔繁有徒
010_1054_a_10L滿室1) [31] 本無分段人穪漢陽誰打
010_1054_a_11L丹靑永見羹墻丙戌春三從弟謹撰

010_1054_a_12L

010_1054_a_13L恕庵講師傳

010_1054_a_14L
師名善機號恕庵姓曺氏羅州金馬
010_1054_a_15L幼投雲興之大雲佛護之仁谷永坡
010_1054_a_16L大芚之華潭聞庵龍淵寶林之忍庵
010_1054_a_17L庵之枕溟美黃之鵬溟拈香於恩師
010_1054_a_18L又受比丘戒菩薩戒於恩師開講於雲
010_1054_a_19L興之東菴接誨來問者幾年移入大芚
010_1054_a_20L以禪定爲一生2)▼(木+覊) [32] 性好敎理甞曰
010_1054_a_21L儒文元無着味處有來問者絕不應對
010_1054_a_22L本無世利之心故也筆力深得秋史眞
010_1054_a_23L好處文有斬截3) [33] 斷處反復再三
010_1054_a_24L永鄭重如入文字三味知識卓越

010_1054_b_01L스님에게서는 참으로 글자나 헤아리는 공부를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찍이 양반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과 교유한 적이 있었는데 언어에 법도가 있고 행동이 항상 여일如一하였으니 산림의 대장부라고 할 만하다.
덕언德彥 등은 계를 전해 받은 제자이고, 상운 응혜祥雲應惠·쌍수 송원雙修松源 등은 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이다.
광서光緖 병자(고종 13, 1876) 가을 8월 28일에 비봉산 낙서암樂捿庵에서 단정하게 앉아 세상을 떠났으니, 세속 나이는 65세이고 법랍은 50년이었다.
스님의 문중 아우 자여 범인自如梵寅이 법사의 비석과 부도를 대둔사 왼편 산기슭에 세웠다. 탑명은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이 지었으며, 비명은 양석養石 배헌裵櫶이 지었다. 아직 비석에 새겨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침월선사전枕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경순景淳이고 호는 침월枕月이며, 속성은 고高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에 만덕산萬德山(강진)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절의 일에 골몰하였건만, 절은 동쪽이 무너지고 서쪽 벽이 헐리는 등 퇴락해 갔으며, 화살처럼 빠른 세월은 늘 절이 무너지고 스님이 흩어지기를 재촉할 뿐이었다. 스님은 종가宗家가 장차 망하려고 하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스님은 마침내 해남 은적사隱跡寺로 옮겨 갔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나주 다보사多寶寺로 옮겨 갔다. 스님은 갑자기 노 행자盧行者(육조 혜능)가 신주新州로 돌아갔던 일을 기억하고 다시 만덕산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남은 건물이라곤 오직 노전爐殿만 있을 뿐이었다. 스님은 노전에 기거하면서 수년 동안 절을 지키다가 아무 질병도 없었는데 입적하고 말았다.
스님이 열반하자 구름은 골짜기 입구에 가로놓이고, 노을은 옛 전각을 떠나 사라지고 말았다. 스님의 제자 완주 기원玩珠奇元이 삼베옷을 입고 삼년상을 거행하다가 훌쩍 세상을 뜨고 마니 풀과 나무도 빛을 잃고 새들과 짐승들도 슬픔을 머금은 듯하였다.
손자 제자인 화산 인선華山仁善 스님은 장례와 제례祭禮 절차를 옛 법에 따라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스님은 천불산 화엄암華嚴庵에 살고 있었는데, 절을 나갈 때는 반드시 가는 곳을 알리고, 돌아와서는 꼭 보고하곤 하였다. 그는 절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밥이나 축낸다는 비방을 면하기 위해 재물을 모아 중수 불사를 시작하였다.
열여섯 채의 옛 건물을 넓히고 수리하는 한편

010_1054_b_01L究道理眞無尋行數墨之究工夫處也
010_1054_b_02L甞遊4) [34] 紳冠帶之門言語有度進止
010_1054_b_03L恒一山林之5) [35] 夫也有德彥等傳戒
010_1054_b_04L之徒有祥雲應惠雙修松源等傳燈之
010_1054_b_05L光緖丙子秋住飛鳳山樂捿庵八月
010_1054_b_06L二十八日端坐而逝雲鎻洞門谿咽
010_1054_b_07L斜陽世壽6) [36] 六十五法臘五十與其
010_1054_b_08L門弟7) [37] 如梵寅立法師碑浮屠於大
010_1054_b_09L芚之左麓塔銘松坡李喜豊撰碑銘
010_1054_b_10L養石8) [38] 櫶撰尙未刻立

010_1054_b_11L

010_1054_b_12L枕月禪師傳

010_1054_b_13L
師名景淳號枕月姓高氏靈岩人
010_1054_b_14L入萬德山下髮上戒汨沒寺中事
010_1054_b_15L破西壁年矢每催寺敗僧散不忍見
010_1054_b_16L宗家之將亡移住於海南隱跡寺復移
010_1054_b_17L於羅州多寶寺忽念盧行者歸新州之
010_1054_b_18L還入萬德山但存爐殿守在數年
010_1054_b_19L無疾而寂雲橫谷口烟消古殿有弟
010_1054_b_20L玩珠奇元麻衣三年奄然示寂
010_1054_b_21L木無色飛走含愁孫弟子華山仁善
010_1054_b_22L喪葬祭禮一遵古道寄住千佛山華嚴
010_1054_b_23L出必9) [39] 反必面欲免尸位素饌之
010_1054_b_24L誹談鳩聚僝功廓掃十六舊舍突兀

010_1054_c_01L나한전을 새로 우뚝하게 지으니, 마치 봉황 한 쌍이 마주 서 있는 것 같았고 원앙 한 쌍이 같이 나는 듯하였다. 그러자 소나무도 무성해지고 잣나무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스님은 천성이 온화하고 단아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애가 넘쳐흘렀다. 사림들의 초청이 있으면 꼭 나가서 만나 주고 무엇을 빌려 달라고 하면 빚을 내어서라도 꼭 주곤 하였으며, 뒷날 빌려 준 것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자신이 대신 갚아 주었다. 사람들이 스님을 속이는 말을 해도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늘 낭패를 보곤 하였다.
세상에 살아 있는 육신보살로서 보살행 때문에 도리어 집안을 망치자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의 재물을 빼앗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사람들의 자손들은 귀하게 잘되고 영화를 누린다.”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는 순생順生 순후順後의 업보業報15)라고 하겠다.
「백이전伯夷傳」을 숙독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행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이는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이요, 뒷걸음질 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스님의 손자 제자 중에 사심을 극복하고 공적인 일을 봉행하여 그 명성을 멀고 가까운 곳에 떨친 이가 있었으니,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틀림없이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16)라고 한 말을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다.
금월선사전錦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의관誼寬이고 호는 금월錦月이며, 속성은 송宋씨이고 전남 낭주朗州(영암) 금강錦江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집안에 작은 분량(儋石)의 양식도 없어서 곧장 두륜산으로 들어가 성묵 지원聖默志遠 대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 만허 색척萬虛賾陟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초의草衣 법사의 선관禪關에서 선법을 받았다. 그 후에도 철선鐵船 화상에게 불교의 경전과 유가·도가의 전적까지 두루 다 배웠다.
이어 문암聞庵·화담華潭·용연龍淵 등 여러 강사들로부터 대승경전을 공부했으며, 마침내 먼저 돌아가신 은사 성묵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010_1054_c_01L羅漢新堂鳳凰對峙䲶鴦比翼松茂
010_1054_c_02L栢悅從此可覺天性溫雅見人慈
010_1054_c_03L人有請則期於出債而應之後必
010_1054_c_04L失之自當報給焉人有詭言必信
010_1054_c_05L實無疑以此必見致敗在世肉身菩薩
010_1054_c_06L以菩薩行必見敗家人之言曰10)
010_1054_c_07L [40] 物肥己者有子孫爲貴榮云此順生
010_1054_c_08L11) [41] 之報也熟讀伯夷傳而不覺己行
010_1054_c_09L世多有之此掩耳偸鈴退步求進
010_1054_c_10L者也有克12) [42] 奉公名於近遠者
010_1054_c_11L積善之家必有餘慶於此可覺也

010_1054_c_12L

010_1054_c_13L錦月禪師傳

010_1054_c_14L
師名誼寬號錦月姓宋氏朗州錦江
010_1054_c_15L幼失怙恃家無儋石之貯徑入頭
010_1054_c_16L輪山剃染於聖默志遠大師之室受具
010_1054_c_17L於萬虛賾陟禪師之壇受禪於草衣法
010_1054_c_18L師之關受內外典於鐵船和尙受大乘
010_1054_c_19L經於聞庵華潭龍淵師拈香於先恩師
010_1054_c_20L「桂」作「柱」而又正誤表作「炷」{甲}「▼(木+覊)」甲
010_1054_c_21L本正誤表作「欛」
「問」甲本正誤表作「間」
010_1054_c_22L「廌」疑「薦」{編}
「太」甲本正誤表作「大」
010_1054_c_23L「立」甲本正誤表曰衍字
「目」甲本正誤表作
010_1054_c_24L「自」
「囊」甲本正誤表作「裵」「顧」疑「告」
010_1054_c_25L{編}
「之人」甲本正誤表作「人之」「順」下
010_1054_c_26L甲本正誤表有「後」
「有」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55_a_01L
스님은 가경嘉慶 16년 신미(순조 11, 1811)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16년 무자(고종 25, 1888) 4월 25일에 적멸을 보이셨으니, 세속의 나이는 78세이고 법랍은 62년이었다.
스님은 일에 있어서는 걸림이 없는 법계法界에 들고 나고 하면서 기실記室의 소임을 역임했고 수승首僧의 소임도 역임하였다. 주지의 직첩을 받기도 했고 유나維那의 소임도 보았으며, 도총섭의 직에 임명되어 그 소임을 맡기도 하는 등 어려운 일이나 고달픈 일 할 것 없이 도맡아 하셨다. 또한 이치에 있어서는 걸림이 없는 실제의 자리에 들어가 능오能悟 스님과 문오文悟 스님 등 21명을 득도시켰으며, 염불과 참선에 있어서는 걸림 없는 선문禪門에 들어가 보리암菩提庵 석문石門을 비롯하여 조계산의 삼일암三日庵과 칠전七殿, 두륜산의 만일암挽日庵과 적련암赤蓮庵 등지에서 안거를 거듭하다가 명적암明寂庵에 머물던 중 조용히 적멸을 보이시니, 사람과 귀신들은 눈물을 흘리고 물과 산도 빛을 잃었다.
스님은 설곡 윤훤雪谷胤烜의 족손族孫이고 연담蓮潭의 4대 법손이며, 용연 유정龍淵有正·대연 미순大淵美淳·해월 도홍海月道弘은 동문의 형제지간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완파 창기玩坡昶基가 있었으니,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표충사 어서각 수호 겸도내승풍규정 도총섭表忠祠御書閣守護兼道內僧風糾正都摠攝’을 역임하였다. 또 다른 제자 덕언德彦은 성이 조曺씨이고, 손자 제자 인환仁煥 스님은 속성이 정鄭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포운선사전浦雲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응원應元이고 호는 포운浦雲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전남 강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해남에서 타향살이를 하였다. 우연히 대둔사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은암銀岩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 연하 간순緣何侃淳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학업도 받았으며, 은암 정호 선사의 조실에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두루 돌아다니면서 학문 익히기를 비로소 마치고 절의 소임을 맡아보았는데, 혹은 수승首僧과 주지의 문첩文牒을 담당하는 서기의 직책을 맡아보기도 했고, 혹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총섭의 직책으로 정각政閣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만년에는 곧바로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서 금은을 흙덩이처럼 하찮게 여기고 마음을 진상眞常에 부합하는 수행자의 생활을 하였다.
병인년(고종 3, 1866) 가을에는 움막을 짓고 홀로 앉아 큰 서원을 세우고 자성 부처를 직시直視하는 선법을 수행했으며,

010_1055_a_01L嘉慶十六年辛未生光緖十六年戊子
010_1055_a_02L四月二十五日示寂世壽七十八法臘
010_1055_a_03L六十二出入事無碍之法界行記室
010_1055_a_04L行首僧受住持帖受維1) [43] 差行揔攝
010_1055_a_05L難行苦行回入理無碍之實地
010_1055_a_06L能悟文悟等二十一人入念佛叅禪無
010_1055_a_07L碍之禪門結夏於菩提之石門曹溪之
010_1055_a_08L三日七殿頭輪之挽日赤蓮住明寂庵
010_1055_a_09L泊然示寂人神含淚山水變色雪谷胤
010_1055_a_10L烜之族孫蓮潭之四世龍淵有正大淵
010_1055_a_11L美淳海月道弘爲門兄弟弟子有玩坡
010_1055_a_12L昶基姓金氏靈岩人贈表忠祠御書閣
010_1055_a_13L守護兼道內僧風糾正都揔攝者德彥
010_1055_a_14L姓曹氏孫弟子有仁煥姓鄭氏靈岩人

010_1055_a_15L

010_1055_a_16L浦雲禪師傳

010_1055_a_17L
師名應元號浦雲姓金氏康津巴尾
010_1055_a_18L早年離鄕作客海南偶入大芚
010_1055_a_19L發僧心銀岩禪師室剃染緣何侃淳大
010_1055_a_20L師壇受具受業師室入室遊學方畢
010_1055_a_21L執寺任之柄或行首僧住持之文牒書
010_1055_a_22L或坐嘉善揔攝之欽差政閣晩節
010_1055_a_23L入如來之地塊視金銀心合眞常
010_1055_a_24L寅秋結幕獨坐立大誓願直佛視2) [44]

010_1055_b_01L정묘년(1867) 봄에는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홀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두타행頭陀行을 하였다. 그러고는 계룡산 동악東岳에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것이 곧 마음이요 곧 부처라네.(非心非佛。 即心即佛。)”라는 게송을 쓰고는 붓을 던지고 누워서 평온한 모습으로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61세이고 법랍은 45년이었다.
사유闍維(다비) 의식을 하던 날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을 떠다니고 붉은 노을이 골짜기를 감쌌다. 이때가 동치同治 6년 정묘(고종 4, 1867) 5월 29일이었다.
스님은 태고太古(普愚)의 15대 법손이고 청허淸虛 스님의 9대 법손이며, 의암義庵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로는 예암 광준禮庵廣俊이 있으니, 광준 스님은 속성은 최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하였다. 손자 제자로는 육파 기운六波奇雲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金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의 소조小照(眞影) 1축軸이 있는데 소치小癡 허련許鍊17)이 그리고 만휴 자흔萬休自欣이 찬문을 지었다.
보운선사전寶雲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석일碩一이고 호는 보운寶雲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청해淸海(완도) 망리望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려서 두륜산에 들어가 풍암 의례豊庵宜禮 선사로부터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경월 영오鏡月寧傲 율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스님은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품계를 받고 승통僧統의 직책을 받기도 했다. 주지의 직책을 역임하고 수승의 자리에 앉기도 했다.
보운 스님은 공무를 집행하고 사찰 행정을 함에 있어서 일을 잘 해결하고 결함을 잘 보충하였다. 몸집은 우람하고 과묵한 성격이었다.
가경嘉慶 18년 순조純祖 13년 계유(1813)에 태어나 광서光緖 9년 계미(고종 20, 1883) 3월 3일에 조용히 세상을 마치니,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승랍은 56년이었다. 스님은 70 평생 동안 덕행을 쌓았고 자비는 구곡九曲(전국)에 흘러 퍼졌다. 조금도 나이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스님의 죽음에 슬픔을 머금었다.
스님은 철선鐵船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풍암豊庵 스님의 법제자이다. 남파 교율南坡敎律과 팔굉 관홍八紘寬弘의 동문 법형이고 부헌富憲 화상의 같은 스승을 모신 법형이다. 제자로는 호은 경은虎隱敬恩·해은 처율海恩處律·용은 계언龍隱戒彥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010_1055_b_01L丁卯春居於月出山上見性庵獨作遊
010_1055_b_02L方抖擻之行結夏於鷄龍山東岳書偈
010_1055_b_03L非心非佛即心即佛投筆而臥
010_1055_b_04L然而寂世壽六十一夏臘四十五
010_1055_b_05L維之日祥光騰空紫氣鎖谷時同治
010_1055_b_06L六年丁卯五月二十九日也太古十五
010_1055_b_07L淸虛九世義庵之孫也受法弟子
010_1055_b_08L有禮庵廣俊崔氏朗州人孫弟子
010_1055_b_09L有六波奇雲金氏靈岩人有小照一
010_1055_b_10L小癡許鍊描萬休自欣贊

010_1055_b_11L

010_1055_b_12L寶雲禪師傳

010_1055_b_13L
師名碩一號寶雲姓李氏淸海望里
010_1055_b_14L早投輪山從豊庵宜禮禪師剃髮
010_1055_b_15L染衣向鏡月寧傲律師受火禀戒
010_1055_b_16L嘉善資賜僧統職行住持令坐首僧
010_1055_b_17L行公治政解事補闕軀榦茂碩
010_1055_b_18L吻默重嘉慶十八年純祖十三年癸酉
010_1055_b_19L光緖九年癸未三月初三日泊然而
010_1055_b_20L世壽七十一僧臘五十六德行七
010_1055_b_21L慈流九曲小不惜年人多含哀
010_1055_b_22L船之孫豊庵之子南坡敎律八紘寬弘
010_1055_b_23L之同門兄富憲和尙之同3) [45] 弟子
010_1055_b_24L有虎隱敬恩海恩處律龍隱戒彥孫弟

010_1055_c_01L응허 성안應虛聖按·능허 계종凌虛戒宗·익환翼煥·재민在敏·근종謹宗이 있으며, 증손 제자로는 취운 혜오翠雲慧悟·정찬 태우晶贊泰祐가 있다. “너의 조상에 염려를 끼치는 일 없으니 그래서 자손이 번성한다.”라고 한 말은 이들 말고 그 누구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자연慈演 등 열두 명이 있으며, 스님의 진영 1축이 있는데 화악영각華岳影閣에 배향되어 있다.
일여선백전一如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신순信淳이고 호는 일여一如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전남 청해淸海 망리望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가경嘉慶 12년, 순조 7년 정묘(1807)에 태어나서 16세에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경월 영오鏡月寧傲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과거 세상에 선근을 심어 그 성품이 자애롭고 스승을 정성으로 모셨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자기 재물을 덜어 그 사람에게 주고 헌 옷 입은 사람을 보면 빨고 꿰매어 갈아입히곤 하였다.
19세에 화담華潭 선사의 강석에서 『능엄경』과 『기신론』을 배우고, 20세에 가지산으로 옮겨 가는 화담 스님을 따라가 그곳에서 『원각경』을 배웠다. 인하여 동문수학하던 백인白印 스님과 함께 이름 있는 산들을 돌아다니면서 선지식을 참례하였다.
25세 되던 신묘년(1831)에 풍악산으로 들어가 만회암萬灰庵에서 발길을 멈추니, 암자는 텅 비어 있고 눈은 한 길 남짓 쌓여 있었다. 암자 뒤에는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암자 앞과 좌우에는 남순봉南巡峰과 해상봉海上峰 두 산이 있었다. 표훈사表訓寺 위쪽 산줄기이고 마하연摩訶衍과는 아주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중향성衆香城의 오른쪽 계곡이고 비로봉毘盧峰의 내룡來龍이며, 백운대白雲臺와는 같은 계곡에 있고 금강산의 제일 아름다운 봉우리 중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절 이름을 만회암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서원하였다.
“백 일 동안 기한을 정해 놓고 관음봉에서 기도를 하되 불이 없는 차가운 재만 담은 화로를 시설해 놓고 백 일 안에 그 향로에서 연기가 일어나면 기도를 마치고, 연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리라.”
스님은 날마다 나무를 베어다가 햇볕에 말려 차곡차곡 쌓아 놓고

010_1055_c_01L有應虛聖按凌虛戒宗翼煥在敏謹宗
010_1055_c_02L曾孫弟子有翠雲慧悟晶贊泰祐等
010_1055_c_03L念爾祖寔繁有徒捨此誰謂也受戒
010_1055_c_04L有慈演等十二人有眞影一軸
010_1055_c_05L享于華岳影閣

010_1055_c_06L

010_1055_c_07L一如禪伯傳

010_1055_c_08L
師名信淳號一如姓李氏淸海望里
010_1055_c_09L嘉慶十二年純祖七年丁卯生
010_1055_c_10L出家于頭輪山薙髮于鏡月寧傲禪
010_1055_c_11L師之室宿植善根性本慈愛侍師典
010_1055_c_12L見人貧竆損己與人見人垢衣
010_1055_c_13L縫更着十九投華潭禪師講下學楞嚴
010_1055_c_14L經起信論二十從轉山於伽智山學圓
010_1055_c_15L覺經仍與同學白印遊名山叅知識
010_1055_c_16L二十五辛卯入楓岳止萬灰庵庵空虛
010_1055_c_17L積雪仭餘庵後有觀音峯前右左
010_1055_c_18L南巡海上二峰表訓寺之上榦摩訶衍
010_1055_c_19L之隣近衆香城之右峽毘盧峰之來龍
010_1055_c_20L白雲臺之同峽金剛山之第一故名曰
010_1055_c_21L萬灰庵於此發心誓願 [46] 定百日
010_1055_c_22L禱於觀音峰設冷灰爐百日內起烟則
010_1055_c_23L不烟則燒身供養日復日伐木積
010_1055_c_24L「邦」疑「那」{編}「祥」甲本正誤表作「禪」
010_1055_c_25L「師」作「時」{甲}

010_1056_a_01L공양을 올리고 정근하였다. 하루는 백인 스님에게 말하였다.
“백 일을 가득 채웠는데도 향로에 연기가 일어나지 않으니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내 마땅히 이 몸을 불로 태워 공양하리라.”
백인 스님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대에게는 부모님과 스승이 계시지 않은가? 그대는 유독 그대의 부모와 스승이 그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가?”
신순信淳(일여) 스님은 말하였다.
“나는 이미 끝났네.”
그러고는 마침내 옷을 추켜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백인 스님이 따라가며 만류했지만 힘으로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백인 스님은 암자로 들어가서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밖으로 나가 보니 장작더미 위에 불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신순 스님이 그 위에 서서 합장한 채 관음봉을 향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외치고 있었다.
백인 스님이 큰소리로 불렀다.
“그대는 도대체 왜 그러는가?”
그러나 신순 스님은 듣지 못한 듯이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
백인 스님은 황급하여 두 손으로 눈을 뭉쳐 불을 꺼 보았으나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신순 스님이 말하였다.
“그대는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이 각각 흩어지면 마치 꿈과 같다(四大各離如夢中)’는 이 게송을 모르는가? 나는 극락으로 왕생할 것이다.”
불길 속에 얼굴은 이미 타서 문드러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백인 스님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자 울면서 신순 스님에게 말했다.
“그대가 만약 이 산에서 죽는다면 장차 극락세계에 가지 못할 것이다.”
신순 스님이 엄숙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째서 극락세계에 가지 못한다는 건가?”
백인 스님이 말했다.
“우리 승가의 의상義湘 조사께서도 행여나 큰 도량을 더럽게 할까 봐 이 산에서 죽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도 속히 불 속에서 나오게.”
신순 스님은 비로소 마음이 움직여 백인 스님 쪽을 향하여 몸을 굴렸다. 백인 스님이 신순 스님을 끌어안고 나와서 눈 위에 올려놓고 급히 인근 절로 달려가서 여러 스님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대중들이 급히 달려가서 살펴보니 신순 스님이 눈 위에 앉아 있는데 그 몸뚱이가 먹빛처럼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러나 아직 기도가 막히지는 않아 입속으로 그때까지 중얼중얼 염불하는 소리가 났다.
대중 스님들은 크게 놀라서 백인과 신순 두 스님이 화목하지 못해서 백인 스님이 신순 스님을 불구덩이로 밀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백인 스님에게 신랄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신순 스님이 말했다.
“내가 스스로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은 극락세계에 가려고 함일 뿐입니다.”
그날 밤 표훈사 스님은, 많은 스님들이 가사를 입고 갖가지 채색 연꽃으로 꾸며진 수레를 메고 가는데 만폭동萬瀑洞 골짜기에 음악 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어떤 스님은 꿈에 오색구름이 만회암 위에 엉겨 있는 광경을 보고 꿈에서 깨어나 서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던 중 어제 불에 탄 그 스님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한마디씩 했다.
그때 모든 절의 스님들이 큰 법회를 열고

010_1056_a_01L設供精勤一日告1) [47] 印曰滿百日
010_1056_a_02L而香不烟起吾誠不足吾當燒身作供
010_1056_a_03L印驚曰爾有父母及師獨不念爾父
010_1056_a_04L母師念爾乎淳曰吾止矣遂拂衣而
010_1056_a_05L印從而挽之力不能挽之入庵覓
010_1056_a_06L索而出視之木火大發淳立其上
010_1056_a_07L掌向觀音峰琅琅誦觀音聲也印大呼
010_1056_a_08L爾何爲此淳若不聞者念佛不已
010_1056_a_09L印遑急兩手拱雪撲火熱不可近
010_1056_a_10L四大各離如夢中爾不識此2) [48]
010_1056_a_11L吾欲徃生極樂耳面目已焦爛不可相
010_1056_a_12L識也印無不奈何泣曰爾死於此山
010_1056_a_13L將不徃生淳厲聲曰何不徃生印曰
010_1056_a_14L吾家義湘祖師恐汙大道場不死於此
010_1056_a_15L爾速出淳始心動轉身向印印抱
010_1056_a_16L之而出急走隣寺乞請衆僧急趍視
010_1056_a_17L淳坐雪上其黑如墨氣尙不塞
010_1056_a_18L中尙喃喃作聲念佛衆僧大愕以爲兩
010_1056_a_19L僧不睦而印敺之火中也詰之3) [49]
010_1056_a_20L淳曰吾自爲此欲徃生極樂耳是夜
010_1056_a_21L入寂其夜表訓寺僧夢衆僧被袈裟
010_1056_a_22L荷彩轝鼓樂聲振萬瀑洞向上而去
010_1056_a_23L一僧夢五色雲凝萬灰庵上覺而相告
010_1056_a_24L及聞死事咸大異之於是諸寺僧大

010_1056_b_01L그 스님의 다비식을 하던 날 밤에 산속을 바라보니 마치 산불이라도 난 듯이 환하게 밝아 대낮과 같았다. 이러한 현상은 사흘 밤낮이나 계속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전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신순 스님이 성불하여 하늘에 태어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들 입을 모았다.
곧 도광道光 12년(순조 32, 1832) 정월 10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에 금강산 표훈사 만회암에서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26세이고 승랍은 10년이었다.
백인 스님은 사유闍維 의식을 마친 뒤에 일여 스님의 기연機緣을 기록하여 표훈사 주지의 인장과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와서 고하였다. 또한 오고 갈 때 사례할 선물을 장만하여 일여 스님의 삼촌 되는 스님인 연익 전서演益錢絮 스님으로 하여금 납의衲衣를 입고 가서 일여의 영혼을 위로하고 죽은 후에 호를 내리게 하였으니, 그의 시호는 일여一如라 했다.
그의 어머니 김씨는 신순 스님이 와서 공양거리를 갖추어 가지고 가시자고 하는 기이한 꿈을 꾸고 그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베를 짜던 일을 멈추고 베틀에서 내려와 자리에 눕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산천山泉 거사 김명희金命喜18)가 『행장록行狀錄』 1권을 지었는데 그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
종암강사전鍾庵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백인白印이고 호는 종암鍾庵이며, 속성은 조趙씨이고 해남 현산방縣山坊 고담古潭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두륜산에서 출가하여 복한福閒 상인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화담華潭 선사로부터 『능엄경』과 『기신론』을 배웠으며, 신순信淳·석훈碩訓 스님과 함께 『원각경』을 익혔다. 백인·신순·석훈 세 스님은 도반이 되어 유학을 떠나 묘향산으로 들어갔다가 석훈 스님은 구월산으로 들어갔고 신순 스님과 백인 스님은 풍악산으로 들어가 표훈사 만회암에 기거하였다. 신순 스님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을 하고 나자 백인 스님은 금강산을 내려와 철선鐵船 대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그 후에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은사도 어떤 사람(철선)에게 건당建幢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환속하여 물러나며 종암 스님을 자기 대신 잇게 하고는 속가로 내려갔다.
백인 스님은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하루에 한 끼니만 먹고 대중들을 모아 강설을 하는 등 괴로운 수행 절차를 굳게 지켜 나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태백산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영혼은 옛 절로 돌아갔을 터이나

010_1056_b_01L其茶毘之夜見山中若有火起
010_1056_b_02L朗如晝如是者三日盛傳成佛生天
010_1056_b_03L無疑也即道光十二年正月初十日戌
010_1056_b_04L入寂于金剛山表訓寺萬灰庵世壽
010_1056_b_05L二十六僧臘十白印闍維後記其機
010_1056_b_06L受表訓寺住張印簡而來告4) [50]
010_1056_b_07L回謝徃來之物使其叔師演益錢絮
010_1056_b_08L衲衣而徃慰勞而來贈死號曰一如
010_1056_b_09L其母金氏夢淳來設供具而請徃其日
010_1056_b_10L巳時織布而下仍臥不起山泉居士
010_1056_b_11L金命喜作行5) [51] 錄一卷留傳門中

010_1056_b_12L

010_1056_b_13L鍾庵講師傳

010_1056_b_14L
師名白印號鍾庵姓趙氏海南縣山
010_1056_b_15L坊古潭人出家於頭輪山剃染於福閒
010_1056_b_16L上人從華潭禪師學楞嚴起信與信
010_1056_b_17L淳碩訓講圓覺經白印信淳碩訓
010_1056_b_18L伴遊學入妙香山訓入九月淳印
010_1056_b_19L楓岳居表訓寺萬灰庵信淳自己燒散
010_1056_b_20L師下來拈香於鐵船大師後入智異山
010_1056_b_21L其恩師亦建幢於何人未幾還退
010_1056_b_22L庵立己代追後其師下俗入太白山
010_1056_b_23L一日一食聚衆設講執守苦節未幾
010_1056_b_24L以經病示寂於太白山魂歸古寺

010_1056_c_01L조문할 친한 사람 하나 없어 그 발자취는 일여一如 스님과 같았다.
회암선백전悔庵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심훈心訓이고 호는 회암悔庵이며, 속성은 박朴씨이고 옥주沃州(전남 진도) 의신義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첨찰산尖察山으로 출가하여 평철 동지平哲同知 스님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하의荷衣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화담華潭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초의草衣 율사에게서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받았다.
스님은 가경嘉慶 무진년(순조 8, 1808)에 태어나 광서光緖 13년 정해(고종 24, 1887) 2월 6일에 심적암深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80세이고 승려 생활을 한 해는 65년이었다.
스님은 화담 스님과 인곡仁谷 스님에게서 학업을 닦고, 불갑사佛甲寺·정방사井芳寺·은적암隱寂庵·대둔사大芚寺와 미황사美黃寺의 미타암彌陀庵·보림사寶林寺의 내원암內院庵·송광사松廣寺의 삼일암三日庵·선암사仙巖寺의 칠전七殿에서 주석하였다. 또한 네 도읍지와 팔방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 가지 관법觀法과 다섯 종파의 종지宗旨를 증득하였고, 세속에 얽매임을 초탈하여 마음의 부처님을 잘 보호하였다.
간성의 만일회萬日會에 참예하였고 순천 수선사修禪寺에 있었던 수선결사修禪結社에 참예하기도 했으며, 대둔사의 무량회無量會 결사에도 참예하였고 장춘長春 고을 무량회에도 동참하는 등 수선에 힘쓰니, 나무들도 기뻐하며 영화로운 빛을 발하고 시냇물도 소리 내어 흐르기 시작했다. 스님은 오래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불국토에 나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스님에게서 계를 전해 받은 제자는 경운敬雲 등 21명이고, 선참禪懺을 전해 받은 사람은 승려와 속인을 통틀어 모두 30여 명에 이른다. 대응大應 스님의 사형師兄이고 인파印波 스님의 사숙師叔이며, 득훤 유은得烜遺恩 스님의 상족上足이다.
연호대사전烟湖大師傳

010_1056_c_01L無親跡同一如

010_1056_c_02L

010_1056_c_03L悔庵禪伯傳

010_1056_c_04L
師名心訓號悔庵姓錦城朴氏沃州
010_1056_c_05L義新人出家於尖察山薙髮於平哲同
010_1056_c_06L受具於荷衣大師拈香於華潭禪師
010_1056_c_07L受大乘菩薩戒於草衣律師嘉慶戊辰
010_1056_c_08L光緖十三年丁亥二月初六日入寂
010_1056_c_09L於深寂庵世壽八十僧年六十五
010_1056_c_10L學於華潭師仁谷師住於佛甲井芳隱
010_1056_c_11L跡大芚美黃之彌陀寶林之內院
010_1056_c_12L廣之三日仙岩之七殿徧行四都八域
010_1056_c_13L證得三觀五宗6) [52] 世名精護心佛
010_1056_c_14L念杆城之萬日會依順天之修禪寺
010_1056_c_15L無量會於大芚之陽念無量壽於長春
010_1056_c_16L之洞木欣欣而向榮川涓7) [53] 始流
010_1056_c_17L命不願佛國不期傳戒者敬雲等二
010_1056_c_18L十一人傳禪者緇素並三十有餘
010_1056_c_19L應之兄印波之叔得烜遺恩上足

010_1056_c_20L

010_1056_c_21L烟湖大師傳

010_1056_c_22L「百」甲本正誤表作「白」「倡」甲本正誤表
010_1056_c_23L作「偈」
「其」甲本正誤表作「甚」「辨」甲本
010_1056_c_24L正誤表作「辦」
「裝」甲本正誤表作「狀」
010_1056_c_25L「屐」甲本正誤表作「屣」
「涓」下甲本正誤表
010_1056_c_26L有「而」

010_1057_a_01L
스님의 법명은 승정勝正이고 호는 연호烟湖이며, 속성은 강씨이고 보길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 보리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배우고 또 때때로 익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지경이 되자 은사의 방에 들어가 호를 받았으며, 성품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대사大師가 아니겠는가?
스님은 환양 도우喚羊禱祐 선사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환양 선사는 회운 덕윤會雲德潤 스님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다. 회운 스님은 도암 복환道庵復還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동연洞然(智演) 스님의 속가 동생이며 또한 출가한 승가의 법제이기도 하다. 도암 스님은 영허 성준靈虛性俊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영허 스님은 원조圓照(碧虛)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며, 벽허 스님은 설암 추붕雪岩秋鵬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설암 스님은 월저 도안月渚道安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연호 대사의 수은受恩 제자로는 ▣▣▣ 스님 등이 있다.
연호 스님은 뜻이 크고 호매豪邁하여 조그만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보림사寶林寺·송광사松廣寺·백양사白羊寺·화엄사華嚴寺·지리산·가야산·계룡산 등지에 머물면서 선참禪懺을 구하는 이에게는 선참을 주고 계를 받고자 하는 이에게는 계를 설해 주었으며,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주린 이를 만나면 같이 굶주리며, 힘으로 겨루면 힘으로 이기고 말로 논쟁하면 말로 이겼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연호 스님을 기피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태연하여 마치 천하가 태평한 봄날과 같았다.
스님은 저 천하태평수좌天下太平首座와 일장춘몽선객一場春夢禪客과 더불어 삼한 천지를 나란히 달리는 선객禪客이었다.
가경嘉慶 병자년(순조 16, 1816)에 태어났으며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에 천은사泉隱寺에 주석하고 있다. 그의 세속 나이는 79세이건만 마치 48세 비구의 모습 같다.
영허선백전靈虛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의현義玄이고 호는 영허靈虛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달마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로 마음이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찾아다녔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두루 지나서 운흥사雲興寺와 불호사佛護寺를 오가면서 선재善財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학습한 것처럼, 설산雪山동자가 설산에 들어가 수행한 고풍古風처럼 학문과 수행을 겸하여 닦았다.
영허 스님은 고로추古老錐19)를 모두 참알參謁하고 찾아드는 학인 도반들을 편안하게 결집하더니 보월寶月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인암忍庵 율사의 계단에서 선참禪懺을 받았다. 혹은 영침影枕에 주석하면서 강론을 펼치기도 하였고, 혹은 북암北庵에 머물면서 학인들을 맞아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010_1057_a_01L
師名勝正號烟湖姓姜氏甫吉人
010_1057_a_02L入菩提山學而時習之有朋自遠來
010_1057_a_03L入室贈號人不知而不慍不亦大師乎
010_1057_a_04L嗣法於喚羊禱祐禪師喚羊會雲德潤
010_1057_a_05L之子會雲道庵復還之子洞然之家弟
010_1057_a_06L亦出家弟道庵靈虛性俊之子靈虛
010_1057_a_07L照之子碧虛雪岩秋鵬之子雪岩月渚
010_1057_a_08L道安之子有受恩弟子曰□□□等
010_1057_a_09L倜儻豪邁不拘小節住寶林松廣白
010_1057_a_10L羊華嚴智異伽倻鷄龍求懺與懺求戒
010_1057_a_11L與戒逢茶喫茶遇飢同飢力戰力勝
010_1057_a_12L口爭口勝人則忌之泰然若天下太平
010_1057_a_13L春也與彼天下太平首座一場春夢禪
010_1057_a_14L并驅三韓天地也嘉慶丙子生
010_1057_a_15L緖甲午住泉隱年則七十九若四十
010_1057_a_16L八化 [15] 丘像然也

010_1057_a_17L

010_1057_a_18L靈虛禪伯傳

010_1057_a_19L
師名義玄號靈虛姓朴氏靈岩人
010_1057_a_20L達摩山剃髮染衣從心所如入叅所
010_1057_a_21L仙松徧歷雲佛去來善財餘習
010_1057_a_22L山古風盡謁古老錐稔結來集伴
010_1057_a_23L香於寶月法師之室1) [54] 禪於忍庵律師
010_1057_a_24L之壇或住於影沈講論或住於北庵提

010_1057_b_01L
미타암彌陀庵에서 미타회彌陀會를 개설하니 안온함이 마치 안양국安養國의 세계와 같았으며, 달마사에서 달마선達磨禪을 증명하니 완연하기가 마치 백화도량白華道場 같았다. 그런 소문이 나자 풀숲을 헤치고 불조佛祖의 가풍을 우러러 찾아오는 학도들이 방 안을 빽빽하게 메우고 돈을 내놓고 지팡이 짚고 떠나가는 이들로 길이 좁았다.
이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겁劫이 있고 세월은 춘하추동의 변화가 있는 법이다. 스님은 어느 날 대중들을 불러 간단한 법을 설한 다음 문을 닫고 적멸을 보였다. 사유闍維 의식을 거행하던 날 서기가 상서로움을 드리우고 봉송奉送할 때에는 감로의 비가 먼지를 잠재웠다.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선참禪懺을 받고 법을 받은 제자를 하필 누구누구라고 지적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님은 가경嘉慶 병자년(순조 16, 1816)에 태어나 동치同治 갑술년(고종 11, 1874)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59세이고 승하僧夏는 43년이었다.
충파忠波·천학天學·권종權宗은 백어白魚와 같은 법제자이고, 환명幻溟·근정謹定·환봉幻峰·성준性俊은 자사子思와 같은 손자 제자이다.
무위선백전無爲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안인安忍이고 호는 무위無爲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청해淸海 세포細浦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11세에 보타산으로 출가했다가 16세에 두륜산으로 옮겨가 호의縞衣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완해玩海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신월信月·철선鐵船·문암聞庵·용연龍淵·화담華潭·초의草衣·인암忍庵·성담性潭·호의縞衣 등 9대 법사의 법연法筵에서 교학을 배웠다. 이어 호의 스님으로부터 법인을 전해 받고 초의 스님에게 대승보살계를 받음으로써 연꽃 향기 피어오르고 매실도 익었다.
스님은 호남총섭湖南摠攝의 직에 올라 표충사 수호 임무를 역임하였으며, 성담 스님과 인암 스님의 선석禪席을 물려받고 초의 스님의 다양한 기능을 배워 익혔다. 스님은 입을 열었다 하면 1천 부처님의 1만 게송이 차례로 흘러나왔고, 손을 움직였다 하면 10목目의 8자字가 부러워하고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스님이 가장 싫어한 것은 점괘(爻象)를 뽑는 것이요, 좋아한 것은 적정寂靜에 드는 것이었다.
조신암趙信庵이 스님의 탑명을 짓고 신백파申白坡가 그의 진영에 찬미하는 글을 지었다. 가경嘉慶 21년

010_1057_b_01L設彌陀會於彌陀隱然若安養世界
010_1057_b_02L證達摩禪於達摩完然如白花道場
010_1057_b_03L草瞻風而來者密室腰包手錫而去者
010_1057_b_04L狹路世界有成住壞空之劫光陰有春
010_1057_b_05L夏秋冬之變召衆才訣閉門示寂
010_1057_b_06L維之日瑞氣呈祥奉送之時甘雨滌
010_1057_b_07L受戒受敎受禪受法者何必持某
010_1057_b_08L嘉慶丙子生同治甲戌寂俗年五十九
010_1057_b_09L僧夏四十三忠波天學權宗白魚之子
010_1057_b_10L幼溟謹定幻峰性俊子思之孫

010_1057_b_11L

010_1057_b_12L無爲禪伯傳

010_1057_b_13L
師名安忍號無爲字眞如姓金氏
010_1057_b_14L海細浦人十一出家於補2) [55] 十六
010_1057_b_15L移入頭輪山剃染於縞衣禪師室受具
010_1057_b_16L於玩海大師壇受敎於信月鐵船聞庵
010_1057_b_17L龍淵華潭草衣忍庵性潭縞衣等九大法
010_1057_b_18L師法筵受法印於縞衣師受大乘菩薩
010_1057_b_19L戒於草衣師蓮香已矣梅且熟也
010_1057_b_20L攝湖南守護表忠奪性潭忍庵之禪席
010_1057_b_21L照草衣之工巧開口則千佛萬偈次第
010_1057_b_22L而流出動手則十目八字健羨而驚怛
010_1057_b_23L所憎者爻象所樂者寂靜趙信庵銘其
010_1057_b_24L申白坡賛其象嘉慶二十一年

010_1057_c_01L순조대왕 16년 병자(1816) 12월 10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에 태어나 광서光緖 12년 병술(고종 23, 1886) 8월 15일 축시丑時(오전 1시~3시)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법랍은 55년이었다.
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는 두 명이니, 복암 관준福庵寬準 스님은 속성이 박씨이고 노호路湖 포전蒲田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표충사도총섭表忠祠都摠攝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석담 치일石潭致一 스님은 속성은 박씨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고 주지의 소임을 역임하였다. 계를 받은 제자는 복헌福憲과 복운福雲 등 15명이고, 스님의 작은 영정 1축軸이 전해 온다.
혜봉선사전惠峰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이순爾順이고 호는 혜봉惠峰이며, 속성은 노盧씨이고 낭주朗州(영암) 통호通湖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 달마산으로 들어가 호기好奇 장로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쌍연雙連(性貫)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학문이 원만해지고 도의 경지가 높아지자 쌍연 성관雙蓮性貫 대사의 조당祖堂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혜봉 스님은 설봉雪峯 스님의 6대 법손이고 연파蓮坡 스님의 3대 법손이다.
가경嘉慶 21년 순조純祖대왕 16년 병자(1816)에 태어나 광서光緖 7년 신사(고종 18, 1881) 정월 17일 해남 대둔사 남미륵암南彌勒庵에서 조용히 적멸을 보이시니, 소나무와 삼나무도 슬픔을 띠고 구름도 노을도 오열하였다. 세속 나이는 66세이고 법랍은 51년이었다.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12명이고 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로는 지월智月·능환能環·원월圓月·세영世英·보응普應·응오應悟 등이 있다.
스님의 천성은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덕망德望은 멀리까지 알려졌다. 말을 하면 감미로웠고 몸을 움직이면 착한 일을 하였다. 분노에 찬 기색이 전혀 없고 늘 자애롭고 인자한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였다. 몸집은 근간이 풍후豊厚하고 모발은 검푸른 빛을 띠었다. “너의 조상에 염려를 끼치는 일이 없으니 이에 자손이 번성한다.(無念爾祖。 寔繁有徒。)”라고 한 옛말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었다.

010_1057_c_01L祖大王十六年丙子十二月十日戌時生
010_1057_c_02L光緖十二年丙戌八月十五日丑時示寂
010_1057_c_03L世壽七十一法臘五十五傳燈弟子
010_1057_c_04L福庵寬準姓朴氏路湖蒲田人
010_1057_c_05L表忠祠都揔攝石潭致一姓朴氏
010_1057_c_06L3) [56] 大夫行住持受戒弟子福憲福雲
010_1057_c_07L等十五人有小照一軸

010_1057_c_08L

010_1057_c_09L惠峰禪師傳

010_1057_c_10L
師名爾順號惠峰姓盧氏朗州通湖
010_1057_c_11L幼入達摩剃染於好奇長老之室
010_1057_c_12L受具於雙連大師之壇學圓道高拈香
010_1057_c_13L於雙蓮性貫之堂雪峯之六世蓮坡之
010_1057_c_14L三世嘉慶二十一年純祖大王十六年
010_1057_c_15L丙子生光緖七年辛巳正月十七日
010_1057_c_16L南大芚寺南彌勒庵泊然而示寂松杉
010_1057_c_17L帶愁雲烟感咽世壽六十六法臘五
010_1057_c_18L十一受戒者十二人傳燈者智月能
010_1057_c_19L環圓月世英普應應悟師賦性溫良
010_1057_c_20L望遠達言吐則甘身動則善無忿怒
010_1057_c_21L之色每發慈仁之談軀榦豊厚毛髮
010_1057_c_22L4) [57] 無念爾祖寔繁有徒於斯可驗
010_1057_c_23L「愛」甲本正誤表作「受」「弛」甲本正誤表
010_1057_c_24L作「陀」
「資」下甲本正誤表有「憲」「甘」甲
010_1057_c_25L本正誤表作「紺」

010_1058_a_01L
스님의 법제자 지월은 만덕산에 머물고 있었고 원월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으며, 보응 스님은 보은報恩에 머물고 있었다. “영리한 토끼는 굴 세 개를 파놓고 위기를 모면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세 명의 제자가 우연하게도 저절로 그런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운파선사전雲坡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익화益化이고 호는 운파雲坡이며, 속성은 문文씨이고 청해淸海 장자리長者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14세에 두륜산으로 들어가 속세를 떠날 뜻을 굳히고, 16세에 영철永哲 장로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지허知虛 선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스님은 은사인 영철 스님이 일찍 입적하자 할아버지 스승(祖師)의 양성養性에 전적으로 의지하였으며, 동서로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저 성명姓名이나 쓸 정도였다.
진불암眞佛庵으로 철선鐵船 스님을 찾아 배알하고 사집四集과 선교禪敎의 연원을 깊이 탐구하고, 북암北庵의 문암聞庵 스님을 참문參聞하고 사교四敎의 깊고 옅은 계제階際를 광범위하게 들었다.
다시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속제俗諦에 들어갔으니, ‘만약 산중에서 종자기鍾子期를 만났더라면 어찌 누런 나뭇잎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겠는가?’라는 의미와 같은 격이요, 오래도록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法界에 놀았으니,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서 자비로 뗏목을 만들고 번뇌의 산 앞에서 지혜로 등불을 만든다’는 격이다.
용파 영훤龍坡永烜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는데, 용파 스님은 만허 색척萬虛賾陟 스님의 법제자이고 만허 스님은 명진 진봉明眞珎峰 스님의 법제자이며, 진봉 스님은 설봉雪峯 스님의 법제자이다.
운파 스님의 제자로는 동화 경운東化敬雲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임林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손자 제자로 원응 계정圓應戒定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허許씨이고 해남 녹산방鹿山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손자 제자 원응 스님은 문장과 글씨가 모두 뛰어나고 교화敎化의 문을 활짝 열어 ‘쪽에서 푸른 물감이 나왔으나 그 색이 쪽보다 더 진하다’는 것과 같으니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
스님은 성품이 엄격하고 냉정하며 고담枯淡하여 삿되고 왜곡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범음을 잘하여 그것을 배우려는 이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으니, 범음은 자행慈行 스님과 대호大湖 스님의 유풍遺風이다.
스님은 주로 서동사瑞桐寺·보적사寶積寺·은적사隱跡寺 등에 주석하였으며, 수인사修仁寺에 머물 때에는 당우堂宇를 보수하였고 낙서사樂捿寺에 머물 적에는 암자와 전당殿堂을 새로 짓기도 하였다. 삼각산에 들어가서 혜봉惠峰 스님과 나이를 잊고 교제하였고 도총섭의 직첩을 받기도 하였다. 익윤翼允 스님이 운파 스님에게 코를 잡고 흉내를 내는 범패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010_1058_a_01L智在萬德圓在金剛普在報恩狡兎
010_1058_a_02L三穴偶然自成

010_1058_a_03L

010_1058_a_04L雲坡禪師傳

010_1058_a_05L
師名益化號雲坡姓文氏淸海長者
010_1058_a_06L里人十四入頭輪山堅志厭俗十六
010_1058_a_07L染衣於永哲長老受戒於知虛禪師
010_1058_a_08L哭恩師永哲長老全恃祖師養性僉知
010_1058_a_09L遊學東西惟記姓名尋鐵船師於眞佛
010_1058_a_10L深探四集禪敎之淵源叅聞庵師於北
010_1058_a_11L博聞四敎淺深之階際還入理事無
010_1058_a_12L碍之俗諦若也山中逢子期豈將黃葉
010_1058_a_13L下山下之意也長遊事事無碍之法界
010_1058_a_14L死生海內悲爲栰煩惱山前智作燈之
010_1058_a_15L格也拈香於龍坡永烜之室龍坡萬虛
010_1058_a_16L賾陟之子明眞珎峰之子珎峰雪峰之
010_1058_a_17L師有弟子東化敬雲姓林氏靈岩
010_1058_a_18L孫弟子有圓應戒定姓許氏海南
010_1058_a_19L鹿山坊人文筆雙運開敎化門靑藍
010_1058_a_20L絳茜人焉1) [58] 性嚴冷枯淡不忍
010_1058_a_21L邪曲尤能梵聲效者盈室慈行大湖
010_1058_a_22L之遺風住瑞桐寶積隱跡住修仁
010_1058_a_23L修堂宇住樂捿改作庵堂入三角山
010_1058_a_24L慧峯爲忘年交行都揔攝翼允受掩

010_1058_b_01L정묘년(1867) 겨울에 혜慧 자를 받고 갑술년(1874) 봄에는 민敏 자를 받았다.
운파 스님은 가경嘉慶 23년 무인(순조 18, 1818)에 태어나 광서光緖 원년 을해(고종 12, 1875) 12월 20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조용히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58세이고 법랍은 41년이었다. 스님의 작은 진영이 있는데 용완龍玩 스님이 그리고 석치石痴가 색칠을 고쳤으며, 백파白坡가 찬문과 서문을 지었다.
보경선사전寶鏡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경慧璟이고 호는 보경寶鏡이며, 용담龍潭(진안군 용담면)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가경嘉慶 기묘년(순조 19, 1819)에 태어났다.
16세에 불명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에 여러 강당을 참예하며 두루 경학經學을 공부하였으며, 지방으로 돌아다니기를 겨우 마치자마자 춘담 대연春潭大演 선사의 조실에서 법위法位를 이어받았다.
스님의 계파를 말하자면 청허淸虛에서 정관靜觀, 정관에서 임성任性, 임성에서 원응圓應, 원응에서 추계秋溪, 추계에서 무경無竟, 무경에서 운봉雲峯, 운봉에서 반룡蟠龍, 반룡에서 낙암樂庵에 이르고 다시 낙암에서 임성 천성任城天性, 임성에서 낙봉 대인樂峰大仁으로 이어졌으니, 춘담 대연은 곧 서산西山 대사의 13대 법손이 된다.
스님은 뒷날 불명산 화암사華庵寺로부터 공주 마곡사麻谷寺로 거주처를 옮겨 스승과 제자가 함께 살았으며, 내재內財(學德)와 외재外財(財物)를 구족하였다. 스님은 『식화전殖貨傳』을 많이 읽었다. 갑오년(1894) 현재 보경 스님은 살아 계시며 그의 나이는 76세이다.
우담강백전優曇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우행禹行이고 자字는 홍기洪基이며, 호는 우담優曇이고 속성은 권權씨로, 안동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국重國이고 어머니는 조趙씨이다. 도광道光 임오년(순조 22, 1822) 3월 3일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영특하고 숙성하였고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영리하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지학志學(15세)의 나이에 마음으로 출가할 것을 맹세했으나 부모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여 허락하지 않으므로 석가모니부처님이 몰래 왕성을 넘어 출가한 인연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어느 날 집을 나서 순흥 희방사喜方寺를 찾아가 자신自信 장로에게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우담 스님은 스스로 보조普照 스님의 초심장初心章(誡初心學人文)과

010_1058_b_01L鼻傳度慧字於丁卯冬度敏字於甲戌
010_1058_b_02L嘉慶二十三年戊寅生光緖元玍乙
010_1058_b_03L亥十二月二十日巳時泊然而寂世壽
010_1058_b_04L五十八法臈四十有一小照龍琓描
010_1058_b_05L石痴改彩白坡賛幷書

010_1058_b_06L

010_1058_b_07L實鏡禪師傳

010_1058_b_08L
師名慧璟號寶鏡龍潭人嘉慶己卯
010_1058_b_09L十六投2) [59] 明山剃染受具叅諸講
010_1058_b_10L遊方才畢受法位於春潭大演禪師
010_1058_b_11L言其派系則淸虛靜觀任性圓應秋
010_1058_b_12L溪無竟雲峯蟠龍樂庵及任城天性樂
010_1058_b_13L峰大仁春潭大演乃西山之十三世也
010_1058_b_14L自佛山華庵寺移居公州麻谷寺師子
010_1058_b_15L并居外內財具足多讀貨殖傳甲午
010_1058_b_16L存年七十六

010_1058_b_17L

010_1058_b_18L優曇講伯傳

010_1058_b_19L
師名禹行字洪基號優曇也姓權氏
010_1058_b_20L安東人父重國母趙氏道光壬午三
010_1058_b_21L月三日生生而頴達夙成幼而敏悟好
010_1058_b_22L志學之年誓心出家父母靳持不
010_1058_b_23L窃念踰城之緣尋順興3)希芳 [60]
010_1058_b_24L自信長老圓頂方袍自閱普昭初心章

010_1058_c_01L원효元曉 스님의 발심장發心章(發心修行章)과 야운野雲 스님의 자경장自警章(自警文) 등을 열람하였다. 그러고는 마음이 맞는 도반들과 팔공산으로 혼허渾虛 선사를 찾아가 사교四敎를 배우다가 홀연히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선지식들을 만나 볼 마음이 생겨 고찰과 유적지 등을 두루 돌아보았으니, 호연浩然한 기상이 마치 구름이 용을 좇아 일어나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라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
스님은 옛 수선사에 이르러 지봉智峰 선사의 조실에 발길을 멈추고 머물면서 침명枕溟 화상이 강론하는 자리에서 교학을 공부하였다. 인파仁坡 율사의 계단에서 선을 배웠으며, 연월蓮月 선사의 도량에서 향을 사르고 의발을 전해 받은 뒤 개당開堂하고 설법을 시작했다.
우담 스님이 강당 문을 열고 앉으니 영동·영서·호서·호남 지방에서 책궤를 짊어지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려고 풀숲을 헤치고 불조佛祖의 가풍을 우러러 찾아오는 학도들이 밀려들었다. 스님은 마치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는 것처럼, 오랑캐가 거울 앞에 서면 오랑캐가 보이고 한인漢人이 거울 앞에 서면 한인이 보이듯이 상대의 근기에 맞추어 자재自在하게 법을 설했다.
고려조에 진정 부암眞靜浮庵이 『선문강요禪門綱要』 1권을 지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파白坡 노장이 『선문수경禪門手鏡』 1권을 지었으며, 다시 이로 인하여 초의草衣 노장이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1권을 지었고, 이로 인하여 설두雪竇 스님이 『해정록楷正錄』 1권을 지었으니, 이 네 분 스님이 지은 네 권의 책은 장차 이 세상에 크게 드러날 것이다.
스님의 문인 제자로는 담화 관훈曇華寬訓이 있다. 스님은 도광道光 2년 임오(순조 22, 1822)에 태어나 광서光緖 6년 신사(고종 18, 1881) 9월 8일에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로는 60세이고 승랍은 45년이었다.
화월선사전化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숙홍淑葒이고 호는 화월化月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에 해남 두륜산에 들어가 서주犀舟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010_1058_c_01L元曉發心章野雲自警章與心友道伴
010_1058_c_02L訪八公山渾虛禪師受四敎忽有叅師
010_1058_c_03L遊方之意人之眞4) [61] 跡之古5) [62]
010_1058_c_04L浩然若雲從龍風從虎之氣依止於古
010_1058_c_05L之修禪社智峰禪師室中受敎於枕溟
010_1058_c_06L和尙講筵受禪於仁坡律師戒壇拈香
010_1058_c_07L開堂於蓮月禪師道場開門而坐嶺東
010_1058_c_08L西湖西南負笈售6) [63] 之人跋草瞻風
010_1058_c_09L而至應大小叩窺胡漢鏡麗朝眞靜
010_1058_c_10L浮庵作禪門綱要一卷因此白坡老
010_1058_c_11L作禪文手鏡一卷因此草衣老作四辨
010_1058_c_12L漫語一卷因此優曇師作禪門證正錄
010_1058_c_13L一卷因此雪竇師作楷正錄一卷
010_1058_c_14L四師四卷將顯於世也門人弟子
010_1058_c_15L華寬訓道光二年壬午生光緖六年辛
010_1058_c_16L巳九月初八日入寂世壽六十僧臈四
010_1058_c_17L十五

010_1058_c_18L

010_1058_c_19L化月禪師傳

010_1058_c_20L
師名淑葒號化月姓金氏靈岩人
010_1058_c_21L入海南頭輪山剃頭於𡱝舟禪師室
010_1058_c_22L「瘦」甲本正誤表作「廋」「拂」甲本正誤表
010_1058_c_23L作「佛」
「希芳」甲本正誤表作「喜方」「必」
010_1058_c_24L下甲本正誤表有「尋」
「諸」甲本正誤表作
010_1058_c_25L「詣」
「賈」甲本正誤表作「價」

010_1059_a_01L철선鐵船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산내에 있는 암자인 북암北庵·진불암眞佛庵·상원암上院庵의 강석을 돌아다니며 경전을 독송하고 베껴 쓰고 보느라 하루 종일 한가한 틈이 없었다.
마침내 은사恩師(犀舟)의 책상 앞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은 후 강진 보리산으로 들어가 솔잎을 먹고 풀옷을 걸친 채 보낸 세월이 30여 년이었다. 스님에게서 많은 신남信男과 신녀信女들도 오디를 먹은 이가 많았으며, 사미와 비구로 계를 받은 이도 많았다.
스님은 어진 사람을 친근히 하고 좋은 이들을 이웃으로 하여 그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이는 가히 ‘명성을 피할수록 명성은 더욱 따르고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나를 따른다’고 한 말과 같다고 하겠다. 지난 날 솔잎을 양식으로 삼고 지난 날 풀을 엮어 옷으로 삼았던 까닭에 네 가지 인연토지土地(수행 장소)와의 인연, 납자衲子(도반)들과의 인연, 시주施主와의 인연, 외적 시설과의 인연이 구족具足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
화월 스님은 가경嘉慶 경진년(순조 20, 1820)에 태어나 광서光緖 병술년(고종 23, 1886)에 입적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67세이고 승랍僧臘은 51년이었다.
스님은 평소 행실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 법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글씨도 잘 썼고 말재주도 뛰어나 닥치는 경계마다 막힘이 없었다. 스님은 사중寺中의 재물을 함부로 쓰지 않았고 옷 또한 화려하게 입지 않았으므로 어릴 때부터 죽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다.
스님에게 법을 전해 받은 사람은 34명이고 계를 받은 사람은 20여 명 남짓하였으며, 선법을 전해 받은 사람은 31명이고 수은受恩 제자는 한두 명이었으며, 사숙私淑한 이는 매우 많았다.
기봉선사전騎峯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장선壯善이고 호는 기봉騎峯이며, 속성은 ▣씨이고 전남 동복同福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월출산으로 들어가 자원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침송 회성枕松會聖 대사의 조실에서 구족계를 받고 문암聞庵 강주의 강당에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강론 방법에 있어서 깊이 궁리하였고 그림 그리는 솜씨가 정교하였다. 화법畫法은 도현道玄20)과 원장元章21)의 기교를 본받았고, 지혜는 율호律虎 스님과 의룡義龍 스님을 참방參訪하여 터득했다.
스님은 혹은 표충사의 수호총섭 직책을 맡아 주관하였으며, 보리산의 전좌典座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원효암元曉庵·유마사維摩寺·수인사修仁寺·정관암鼎丳庵은 스님이 주석했던 곳이고, 도갑사道甲寺와 대둔사大芚寺는 무구無口의 고향22)이다.

010_1059_a_01L具於鐵船禪師壇從遊北庵眞佛上院
010_1059_a_02L講席讀誦書寫看經日不暇給拈香
010_1059_a_03L於受恩師榻移入於康津菩提山食松
010_1059_a_04L草衣送月迎日者三十餘年信男信
010_1059_a_05L女之食葚者多矣沙彌比丘之受火者
010_1059_a_06L衆也親仁善隣聲名溢高可謂避聲
010_1059_a_07L聲我隨逃名名我逐者也前日之松爲
010_1059_a_08L前日之草爲衣四緣土地緣衲子緣
施主緣外設緣

010_1059_a_09L以此可覺也嘉慶庚辰生光緖丙
010_1059_a_10L戌寂世壽六十七僧臘五十一師行
010_1059_a_11L身處事一準古法善筆善談適當境
010_1059_a_12L財不濫用衣不濫着自幼至終
010_1059_a_13L無至非傳法人三四座傳戒人二十有
010_1059_a_14L傳禪人三十一人受恩者一二人
010_1059_a_15L私淑衆多

010_1059_a_16L

010_1059_a_17L騎峯禪1) [64]

010_1059_a_18L
師名壯善號騎峯姓□氏同福人
010_1059_a_19L入月出山自願爲僧受具於枕松會聖
010_1059_a_20L大師之室得法印於聞庵講主之堂
010_1059_a_21L竆講伯術精畫法徃效於道玄元章之
010_1059_a_22L叅訪於律虎義龍之智或表忠祠之
010_1059_a_23L主管或菩提山之典座元曉維摩修
010_1059_a_24L仁鼎丳住錫之地道甲大芚無口之鄕

010_1059_b_01L
스님에게는 제자 두 명이 있는데 남하 성연南河性衍은 불갑사佛甲寺, 환명 경운煥溟敬雲은 도갑사 스님이다. 계를 준 제자와 선법을 준 제자들은 매우 많으니 어떻게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들어 말할 수 있겠는가.
환허강백전幻虛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봉규奉奎이고 자字는 문일文一이며, 호는 환허幻虛이고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불명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지식이 남보다 뛰어나고 문장이 남보다 월등하였다. 강론하는 자리면 어디든 참예하여 학문을 익혔으며, 뒤에 용선龍船 선사로부터 불조佛祖의 법인을 받았으니, 곧 영파 성규影波聖奎 대사의 6대 법손이다.
환허 스님은 대중들을 불러 모으지 않아도 대중들이 저절로 찾아왔으니 유마의 방(維摩之室)은 오히려 좁았고,23) 중향성衆香城의 음식이 부족할 지경이었다.24)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열어 보였고 삼학三學의 이치를 찾아 보여 주었다. 스님은 고기도 고기를 잡는 통발도 모두 버리고 몸과 마음을 친구로 삼아 마음을 다스려 반려伴侶로 삼았다.
스님은 임오년~계미년(1882~1883) 사이에 포련布蓮·용운龍雲·용명龍溟 등 대종사들과 더불어 화주를 하여 돈을 모아 금산사金山寺 장육금신丈六金身의 개금불사를 돕기도 하였다.
불명산 화암사華岩寺는 일명 보당산寶幢山 정혜사定慧寺라고도 한다. 지금 환허 스님이 이 절에 있는데, 나이가 63세이다. 스님에게 선등禪燈을 전해 받은 제자들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함명강백전涵溟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대현台現이고 호는 함명涵溟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화순읍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동복同福 오吳씨이다. 어머니가 범승梵僧 만나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비린 음식을 싫어하였고 성장해서는 스님 되기를 소원하더니, 마침내 14세에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풍곡 덕인豊谷德仁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도암道菴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침명枕溟 강백이 강론하는 자리에서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풍곡 법사의 조당祖堂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010_1059_b_01L弟子有二人南河性衍佛甲人煥溟
010_1059_b_02L道甲人傳戒傳禪何必名某

010_1059_b_03L

010_1059_b_04L幻虛講伯傳

010_1059_b_05L
師名奉奎字文一號幻虛全州人
010_1059_b_06L入佛明山剃髮受具知識卓犖文章
010_1059_b_07L超等尋諸名山叅於講肆得佛侯印
010_1059_b_08L於龍船禪師即影坡聖奎大師之六世
010_1059_b_09L孫也不召衆而衆自至維摩之室猶隘
010_1059_b_10L衆香之飯不足開三藏之敎覓三學之
010_1059_b_11L魚筏俱離心身作友治心爲作伴
010_1059_b_12L壬午癸未之間與布蓮龍雲龍溟
010_1059_b_13L大宗師化財補金於金山丈六金身之
010_1059_b_14L佛明山華岩寺一名寶幢山慧定寺
010_1059_b_15L時師在此寺年六十三受戒禪燈者
010_1059_b_16L未詳名某

010_1059_b_17L

010_1059_b_18L涵溟講伯傳

010_1059_b_19L
師名台現號涵溟姓密陽朴氏和順
010_1059_b_20L邑人母同福吳氏母夢梵僧而生
010_1059_b_21L而厭腥長而願僧十四出家於長城白
010_1059_b_22L羊山剃染於豊谷德仁禪師之室受具
010_1059_b_23L足戒於道菴禪師之壇受禪懺於枕溟
010_1059_b_24L講伯之座拈香於恩師豊谷法師之堂

010_1059_c_01L
스님은 천성적으로 똑똑하기가 어느 누구도 비교할 수 없었으며, 경전을 이해하는 지식이 널리 통하였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고 말에 있어서는 남을 속이거나 화려하게 꾸며 대어 말하는 일이 없었다. 새로 제자가 되어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예전부터 알던 사람을 만난 듯이 반겼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에는 항상 향등香燈을 보여 주곤 하였다.
강의하는 규칙은 엄격하면서도 명백하였으며 재齋를 올리는 법에 대해서도 역시 엄숙하면서도 조용하였다. 학인들을 지도한 지 30여 년이 되자 스님의 명성이 여러 지방에까지 퍼져서 전국에서 많은 스님들이 몰려와 한마음이 되어 공부를 하였다. 이는 아마도 백암栢庵 스님과 무용無用 스님의 유풍遺風인 것 같기도 하고, 설암雪岩 스님과 상월霜月 스님의 여향餘香인 것 같기도 하다.
예전에는 왼쪽에는 형암荊庵이요 오른쪽에는 양악羊岳이라 하였고, 중간 시대에는 오른쪽에 백파白坡요 왼쪽에는 침명枕溟이라 하더니, 지금은 오른쪽에는 설두雪竇요 왼쪽에는 함명涵溟이라고들 말한다. 마치 옛날 중국에서 북쪽에는 신수神秀요 남쪽에는 혜능慧能이라고 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가렵고 이런 말을 하면 혀가 매끄러우니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이다지도 흠모하게 한 것인가?
스님의 제자로는 경붕 익운景鵬益運이 있다. 석옥石屋 화상이 태고太古 스님에게 의발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늙은 중이 오늘 발을 뻗고 잘 수 있겠구나.”라고 했던 옛일이 생각난다.
경붕 스님에게도 제자가 있었으니 경운 원기擎雲元奇이다. 일찍이 일행一行 선사가 말하기를, “골짜기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내가 도를 전해 줄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선道詵 스님이 홀연히 와서 그의 술법術法을 다 배워가지고 가게 되자 일행 스님이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하였던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저들이 산문에 들어와서 스님이 된 이래로 단 한 가지도 증득하여 깨달음이 없이 도리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고 강론을 훼방하는 한편 받기만 하고 전해 주지 못하는 자들은 이러한 법 전한 이야기를 듣고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백파·침명·응화應化·우담優曇이 차례로 적멸을 보이자 함명·설두·경담鏡潭·연주蓮舟·퇴은退隱·휴암休庵이 두려워하는 것은 향방처向榜處가 없어서이니, 애석한 일이다.
스님은 도광道光 4년 갑신(순조 24, 1824) 9월 9일에 태어났다. 그의 계파를 살펴보면 청허 휴정淸虛休靜에서 편양 언기鞭羊彥機, 편양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 풍담에서 월저 도안月渚道安, 월저에서 설암 추붕雪岩秋鵬, 설암에서 상월 새봉霜月璽篈, 상월에서 용담 조관龍潭慥冠, 용담에서 규암 낭성圭岩朗城, 규암에서 서월 거감瑞月巨鑑, 서월에서 회운 진환會雲振桓, 회운에서 원담 내원圓潭乃圓, 원담에서 풍곡 덕인豊谷德仁, 풍곡에서 함명 태선涵溟太先, 함명에서 경붕 익운景鵬益運, 경붕에서

010_1059_c_01L性敏悟絕倫知解博達工不虛送天
010_1059_c_02L言不謾餙綺語新見請益者如舊
010_1059_c_03L相識每送移去者常見香燈講䂓嚴
010_1059_c_04L齋法2) [65] 三十年開導聞於諸方
010_1059_c_05L八方來衆僧合於一心栢庵無用之遺
010_1059_c_06L風歟雪岩霜月之餘香歟古有左荊庵
010_1059_c_07L右羊岳中有右白坡左枕溟今有右雪
010_1059_c_08L竇左涵溟如昔之北秀南能聞之耳痒
010_1059_c_09L言之舌滑何其令人之欽慕哉有弟子
010_1059_c_10L景鵬益運石屋傳衣於太古曰
010_1059_c_11L僧今日展脚而睡矣是也景鵬有弟
010_1059_c_12L子曰擎雲元奇一行甞曰洞水逆流
010_1059_c_13L則傳吾道者來道詵忽來盡得其術而
010_1059_c_14L別曰吾道東矣是也彼入山披緇
010_1059_c_15L一無證悟毁敎謗講有受而不傳者
010_1059_c_16L愧夫心哉白坡枕溟應化優曇輪次
010_1059_c_17L示寂涵溟雪竇鏡潭蓮舟退隱休庵
010_1059_c_18L畏者無向榜處惜哉道光四年甲申
010_1059_c_19L九月初九日生派系淸虛休靜鞭羊彥
010_1059_c_20L楓潭義諶月渚道安雪岩秋鵬霜月璽
010_1059_c_21L龍潭慥冠圭岩朗城瑞月巨鑑會雲振
010_1059_c_22L圓潭乃圓豊谷德仁涵溟太先景鵬益
010_1059_c_23L「師」下甲本正誤表有「傳」「爾」甲本正誤
010_1059_c_24L表作「肅」

010_1060_a_01L경운 원기擎雲元奇로 이어져 왔다.
설두강백전雪竇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봉기奉琪이고 호는 설두雪竇이며, 속성은 완산完山 이씨이고 옥과玉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17세 때에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정관 쾌일正觀快逸 대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백암 도원白岩道圓 율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침명枕溟 강주의 탑상榻床 아래에서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백암白岩 계사의 조당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일찍이 속가 서당(黌舍)을 찾아가서 태사사太史史(司馬遷)의 『사기』와 소미서少微書(『通鑑節要』)를 배웠는데, 그때 고추古錐(서당 선생님)에게 사집四集과 삼경三經의 의미를 판별해 달라고 떼를 써 간청하여 스승을 당혹하게 한 적도 있었다. 침명 스님이 강론하는 자리를 찾아가서 사교四敎의 의문점을 증득하였고, 백파 스님의 회상을 참알하고 대교大敎의 관문을 해결하였다. 이 회상에서 한 가닥 담병談柄(화두)을 받고 일곱 자의 포단蒲團(방석)에 앉아 탐구하였다.
설두 스님은 불갑사佛甲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황폐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시킨 다음 용흥사龍興寺에 옮겨 가서 사찰의 낡은 곳을 뜯어내고 새롭게 짓는 일을 하였다. 또한 대기대용비大機大用碑(백파 긍선 스님의 비석)를 세우고 어제어필御製御筆의 전각을 지었으며, 큰 글자로 간행한 『기신론起信論』의 예를 본받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판목板木을 주선하였다.
사계절도 제 할 일을 마치면 물러가는 법인가? 월주越州의 탑이 건립되자 허현도許玄度25)가 세상을 버렸던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김대성金大城이 다시 온 것과 지안志安 스님이 다시 온 줄을 알겠는가?
스님의 저서인 『해정록楷正錄』 1권은 문장이 엄밀하고 그 뜻이 정확하여 일단 대단한 논리임은 분명하나 백옥白玉에도 흠집은 조금 있는 법이다. 자신의 글 중에 잘못된 곳에 자평自評을 달아 놓은 것을 모아 내게(각안) 보내왔으니 “어떻게 하면 다시 스님을 살아나게 하여 마주 앉아서 한바탕 웃어 볼까나?”라고 했던, 추사가 쓴 「백파 선사 비명」 마지막 장의 내용과 정녕 비슷한 심정이구나.
스님의 저술인 『통방정안通方正眼』·『선원소류禪門溯流』·『시집詩集』·『사기私記』는 문인들의 처소에 남아 있다.
백파의 법맥은 구봉 인유龜峰仁裕에서 도봉 국찬道峰國燦, 도봉에서 정관 쾌일正觀快逸, 정관에서 백암 도원白岩道圓으로 전해 내려왔으며, 설두의 동문형제로는 보월 만익普月萬益과 영월 경문影月鏡文이 있으며, 문인은 어떤 이들이 있는지 자세하지 않다.

010_1060_a_01L擎雲元奇

010_1060_a_02L

010_1060_a_03L雪竇講伯傳

010_1060_a_04L
師名奉琪字有炯號雪竇姓完山李
010_1060_a_05L玉果人十七出家於長城白羊山
010_1060_a_06L剃染於正觀快逸大師室受具於白岩
010_1060_a_07L道圓律師壇受禪懺於枕溟講主榻
010_1060_a_08L香於白岩戒師堂早訪黌舍學太史史
010_1060_a_09L少微書强請古錐辨四集義三經謁枕
010_1060_a_10L溟席證四敎之疑叅白坡會決大敎
010_1060_a_11L之關傳一枝談柄坐七尺蒲團住佛
010_1060_a_12L甲寺補闕拾遺居龍興寺掃舊迎新
010_1060_a_13L1) [66] 大機大用之碑2) [67] 製*禦筆之閣
010_1060_a_14L效起信論之大刊設拈頌集之板役
010_1060_a_15L時之序成功者去歟越州之塔許玄
010_1060_a_16L度去歟天不唱告誰知金大城之重來
010_1060_a_17L志安之重來也楷正錄一卷辭嚴義直
010_1060_a_18L一段大論而少有白玉之玷會自評送
010_1060_a_19L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此是碑銘
010_1060_a_20L卒章意正同也通方正眼禪門溯流
010_1060_a_21L詩集私記在門人處白坡門人有龜
010_1060_a_22L峰仁裕道峰國燦正觀快逸白岩道圓師
010_1060_a_23L門兄弟有普月萬益影月鏡文師門人
010_1060_a_24L未詳誰某

010_1060_b_01L
경담강사전鏡潭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서관瑞寬이고 호는 경담鏡潭이다.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구암사龜岩寺(순창)의 백파 선백白坡禪伯을 찾아가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스님은 또 선암사仙巖寺에 머물러 계시던 침명枕溟 강백을 찾아가 계를 받고 선법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선지식 참방을 마친 뒤부터 선배들보다 도리어 앞 좌석에 앉게 되었고, 찾아오는 학인들이 먼 곳에서까지 몰려들었는데 스님은 항상 즐거워하면서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힘이 차차 빠져서 학인들을 거절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고 남아 있자 마침내 어떤 제자에게 강석을 물려주었다. 제자가 강석을 물려받아 학인들을 제접提接하고부터 찾아오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떠나가는 이를 붙잡지 않아 손님과 주인이 모두 꺼리는 일이 없어졌다.
이때부터 예를 올려야 할 때에는 예를 올리고 주문을 독송해야 할 때는 주문을 염송하며 자기의 일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화목하고 원만하게 되었다. 입고 먹을 것 때문에 애쓰지 않아도 옷과 음식이 저절로 풍족했고 특별히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지 않아도 스님의 나이는 고희古稀를 이미 지났다. ‘하늘은 먹고 살 것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고 한 말을 스님에게서 증험할 수 있다.
법손들도 많이 번성하였고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었으며, 몸은 편안하였고 도는 높아졌으니 사람들이 맨발로 따라간다 해도 스님에게는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선법을 전해 주고 법통을 전해 준 제자들에 대해서와 언제 나서 언제 입적했는지에 대해서는 미리 앞서 기록할 수가 없다.
용명선사전龍溟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각민覺敏이고 호는 용명龍溟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주부全州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성품이 대범하고 호탕하여 조그만 절차에 구애됨이 없고 마음자리는 호연浩然하며, 기질은 산과 강을 압도하였고 서원이 견고하였으며, 다스리는 기강은 엄격하고 장엄하였다.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쪽 바다를 뛰어넘는 일은 불가하나 그래도 해 보려고 노력하였고, 힘으로 산을 뽑고 기운이 세상을 덮는 것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나 그래도 해 보려고 애를 썼으니 기이할 정도이다. 우리 태조太祖대왕 이래로 나라는 팔도로 나뉘었고 매 도마다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뉘어 총 16개 지역으로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각 지역마다 십육종정 총섭규정十六宗正摠攝糾正을 두어 상사上司의 뜻을 받들게 하고 승가의 풍속을 바로잡게 하였다.
전라도 금구金溝 금산사金山寺에는 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있었으므로

010_1060_b_01L鏡潭講師傳

010_1060_b_02L
師名瑞寬號鏡潭出家於白羊山
010_1060_b_03L髮受戒叅龜岩白坡禪伯學內外典
010_1060_b_04L3) [68] 枕溟講伯受戒禪叅訪乃了
010_1060_b_05L坐先席有朋自遠來樂而寬待之
010_1060_b_06L深力亡拒而不退者有之遂傳講於人
010_1060_b_07L而人受柄而提接之來者不拒去者不
010_1060_b_08L賓主無憚也於是禮之時禮之
010_1060_b_09L之時呪之自家之事穩便爲人之方
010_1060_b_10L壅容甚非所以料理而衣食滋生
010_1060_b_11L不所以祝壽而稀年已過天不生無祿
010_1060_b_12L之人從此可驗諸孫詵詵頭髮皤皤
010_1060_b_13L身爲之安道爲之高人無脫足而及者
010_1060_b_14L傳禪傳法年之始終不可預先述作

010_1060_b_15L

010_1060_b_16L龍溟禪師傳

010_1060_b_17L
師名覺敏號龍溟姓鄭氏全州府人
010_1060_b_18L性倜黨豪邁不拘小節心地浩然
010_1060_b_19L壓岳凟志願堅固經紀嚴莊挾太山
010_1060_b_20L超北海不能而欲爲之力拔山氣盖
010_1060_b_21L不能而欲爲之異哉自我太祖以
010_1060_b_22L國分八域域分左右每域贈二八
010_1060_b_23L十六宗正揔攝糾正所以奉上司以正
010_1060_b_24L僧風而全羅道金溝金山寺有如來舍

010_1060_c_01L이를 수호하기 위하여 수호승통守護僧統을 두었는데 이를 우규정右糾正이라고 하였다. 광양 옥룡사玉龍寺에는 국사國師(道詵)의 비석과 탑이 봉안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수호하기 위하여 수호공원守護公員을 두었는데 이를 좌규정左糾正이라고 하였다. 이들 승직僧職은 승가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그 법이 느슨해져서 도리어 승려들의 폐단이 되고 있었다. 그러자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서 모의하여 규정소糾正所를 없애고 해남 표충사 승통僧統이 겸하도록 했는데, 겸행하는 승통이 일이 많고 업무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곧바로 예조禮曹에 보고하여 소임을 아예 없애 달라고 하였다.
이에 각민 스님은 본도 우어사右御史를 통하여 서울로 올라가 머물면서 앞서 없애 버린 직책의 관인官印을 다시 만들어 가지고 돌아와 스스로 승통이 되어 좌우左右에 영을 시행하였으니 사람 중에 큰 인물이라 하겠다.
그러니 누가 감히 용의 비늘을 거스를 것이며, 호랑이의 머리를 감싸 잡을 것인가? 승단에서는 용명 스님의 행위를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종내에는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아 입실하면서 받은 호칭이 용명이다. 스님은 그 승통의 관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물러나 별실別室에 기거하였다. 스님은 뜻을 세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대종장大宗匠의 권한을 활용하였으니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취할 일이 아니다. 옛날에 공자도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였다면 자우子羽26) 같은 인물을 잃을 뻔했다.”라고 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그 전례를 볼 수 있다.
스님에게는 선법과 계를 전해 준 제자들이 많았다. 속인들과 스님들이 우러러 ‘스님 중에 용상龍象’이라고 찬탄했다. 더구나 스님은 국가의 명을 받들어 국태민안을 위하여 금산사金山寺에서 기도를 올렸고, 한라산에서도 기도를 하였으며, 백양사白羊寺에서도 기도를 올렸으니 훌륭하고 위대하다.
영월선사전映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윤영允英이고 호는 영월映月이다.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대운大雲 스님 처소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학당學堂을 드나들며 불교의 경전과 논論 등을 열람하였다. 절의 크고 작은 모든 일과 암자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빠짐없이 잘 살펴 처리하였다.
스님은 조당祖堂에 올라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고 입실한 다음 강당의 문을 열고 후학들을 맞이하여 가르침을 폈다. 행실은 자비로웠으나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기개는 호걸스럽고 몸은 항상 가벼웠다. 그러나 일의 기미를 한번 놓치고 나서는

010_1060_c_01L利安塔置守護僧統穪右糾正光陽
010_1060_c_02L玉龍寺有國師碑塔奉安置守護公
010_1060_c_03L穪左出正釐正僧風歲久法弛
010_1060_c_04L爲僧弊左右合謀輩破糾正所兼行
010_1060_c_05L於海南表忠祠僧統矣兼行僧統事多
010_1060_c_06L蝟務直報禮曹鎖印永破敏公因本
010_1060_c_07L道右御史留京周施鑄印出差自作
010_1060_c_08L僧統行令左右人之巨擘也誰敢批龍
010_1060_c_09L扼虎頭哉始則行螫終乃食甚
010_1060_c_10L法入室號穪龍溟傳其印於他人退
010_1060_c_11L處別室立志行事務用大宗匠之欛柄
010_1060_c_12L以貌取人失之子羽以今可見有傳法
010_1060_c_13L禪法戒弟子緇素歎仰僧中之龍象
010_1060_c_14L以此言之况奉命爲祝金山爲祝漢拏
010_1060_c_15L爲祝白羊善哉偉哉

010_1060_c_16L

010_1060_c_17L映月禪師傳

010_1060_c_18L
師名允英號映月入雲興寺剃染於
010_1060_c_19L大雲師處出沒學堂閱盡經4) [69] 寺中
010_1060_c_20L庵中5) [70] 揔察無遺入室昇堂開門
010_1060_c_21L迎賓行慈振威氣傑身輕一失事機
010_1060_c_22L「主」甲本正誤表作「立」「禦」甲本正誤表
010_1060_c_23L作「御」次同
「仙」下甲本正誤表有「岩」
010_1060_c_24L「綸」甲本正誤表作「論」
「寺」疑「事」{編}

010_1061_a_01L지난 발자취를 회복하지 못했다. 텅 빈 산사에 아무도 없는데 냇물만 졸졸 흘러가고 꽃만 활짝 피어 있었다. 사찰의 운세가 막히고 선풍禪風도 고요하기만 했다. 표충사表忠祠를 주관하던 대흥사의 세력이 덕룡산德龍山(운흥사)을 기울게 하면서부터 해월海月 스님은 주석처를 옮겼고 청담淸潭 스님도 다른 산으로 옮겨갔다. 불각不覺에 기미가 미약해져서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으며, 대대로 옛 건물만 지키다가 낙엽처럼 마침내 뿌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운흥사를 지날 때마다 타루비墮淚碑27)와 멸망한 진秦나라 들판의 옹중翁仲28)과 망한 진晋나라 조정의 동타銅駝29)가 생각난다.
금곡강사전錦谷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장홍壯弘이고 호는 금곡錦谷이며,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쌍계사雙溪寺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염의染衣를 입고 스님이 되어 세속을 버리고 승가의 풍속을 따랐다. 스님이 된 뒤로 머리 위에는 흰 구름을 이고 발아래에는 맑은 냇물을 밟으며 허리에는 공화空花를 차고 다니거나 숨어 있었고, 세월 따라 장춘동長春洞에서 학문 연구에 몰입하였다.
스님은 신월 호윤信月好閏과 법문法門의 형제지간이 되어 함께 사부를 찾다가 낭암 시연朗岩示演 스님을 찾아가 법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완호玩虎 스님에게 경론의 의문점을 풀었고, 백파白坡 스님으로부터 선정의 길을 증득하였다.
선대 스님들이 후학들에게 보여 주었던 가르침을 모아 꽃잎 떨어져 붉은빛 아롱진 나무 아래 자리를 잡으니 질문 있는 자들이 와서 의문점을 해결하곤 떠나갔다. 단상에 올라가 설법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으며, 반인飯人이 참예하고 강인講人이 돌아가곤 하는 사이에 해가 가고 달이 지나니, 나(금곡)도 게을러지고 학인들도 적어져서 휴강해도 별로 해로움이 없을 정도가 되자 덕 있는 제자에게 강석을 물려주었다.
금곡 스님은 이후 참선(打眠)하는 것을 옳게 여기고 진언眞言을 독송하는 것을 서원 삼아 정진을 계속하였다. 많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득도시킨 스님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인간은 올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고 갈 때에 또한 빈손으로 가는 법이다. 그러나 예불을 하고 경전을 독송한 공덕은 세간에 가득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보문선사전普門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묘환妙煥이고 호는 보문普門이며, 속성은 문文씨이고 강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달마산으로 출가하였으며 구족계를 받고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학문의 눈이 통하여 밝아졌고

010_1061_a_01L未復覆轍空山無人水流花開寺運
010_1061_a_02L丕泰禪風寥寂主管表忠勢傾德龍
010_1061_a_03L海月移錫淸潭轉山不覺幾微貽笑
010_1061_a_04L後人世守舊物落葉歸根過雲興寺
010_1061_a_05L思墮淚碑秦野之翁仲晋廷之銅1) [71]

010_1061_a_06L

010_1061_a_07L錦谷講師傳

010_1061_a_08L
師名壯弘號錦谷羅州人出家於雙
010_1061_a_09L剃頭染衣棄俗從僧頭上所戴白
010_1061_a_10L足下所履淸溪腰包行藏空花
010_1061_a_11L月入學長春與信月好2) [72] 爲法門兄
010_1061_a_12L徃覓師父侍朗岩示演爲嗣法弟
010_1061_a_13L解經疑於玩虎證禪路於白坡
010_1061_a_14L先師示後學基落花斑紅樹底3) [73]
010_1061_a_15L決者去上壇了下壇罷飯人叅
010_1061_a_16L講人歸如是年如是月我亦懶人亦
010_1061_a_17L休講無妨傳講有德打眠是可
010_1061_a_18L呪是願傳法有人度僧無幾來無一
010_1061_a_19L物來去亦空手去猶有禮佛轉經功德
010_1061_a_20L滿世4) [74] 不滅

010_1061_a_21L

010_1061_a_22L普門禪師傳

010_1061_a_23L
師名5) [75] 號普門姓文氏康津人
010_1061_a_24L出家於達摩受具而遊方學眼通明

010_1061_b_01L하는 일마다 정직하게 되자 영월 성신靈月誠身 스님의 계단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이어서 초의草衣 선백禪伯으로부터 비구 이백오십계와 보살 오십팔계를 받았다. 스님은 낭은 성순朗隱性順·낭운 영밀朗雲永密 등과는 동문이고 각해 재연覺海在演·성해 처진性海處眞 등은 법제자이며, 연담蓮潭(有一)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스님은 대둔사의 만일암挽日庵, 보림사寶林寺의 내원암內院庵, 송광사松廣寺의 삼일암三日庵 등에 주로 주석했으며, 만년에는 담양 보리암菩提庵으로 주석처를 옮겼다가 거기에서 고요히 적멸을 보이시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순수하게 하얗고 바위틈의 소나무도 다투어 우는 듯했다.
스님은 본래 세속 보통 사람들의 격식을 벗어나 세속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고, 뜻이 한가하고 고요한 데 있어서 스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토굴이 있고 소나무가 있었으며, 행장이라곤 옷 한 벌이요 도반이라곤 새 한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문장과 글씨는 여유가 있었으며 목소리 또한 청아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스님이 소리를 잘하는 것은 인암忍庵 스님의 유풍遺風 때문이고 낭암朗岩 노장님의 경훈警訓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동쪽이 숨으면 서쪽이 드러나고 사람은 없어져도 도는 남는 법이다. 소림少林이 울창하니 어린 계수나무 그늘을 드리우듯 하였다.
스님은 가경嘉慶 병자년(순조 16, 1816)에 태어나 광서光緖 임진년(고종 29, 1892)에 입적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77세이고 승하僧夏로는 62년이었다.
스님이 법을 전해 준 제자와 손제자는 보림선찰寶林禪刹에 뿌리를 내리고 잘 지내고 있다.
월여선백전月如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범인梵寅이고 호는 월여月如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며, 해남 녹산방鹿山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4년 갑신(순조 24, 1824) 10월 17일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두륜산에 몸을 던져 양악羊岳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초의 스님의 계단에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또한 화담華潭·문암聞庵·용연龍淵·운거雲居·응화應化 등 이름난 강사의 회상에서 경학經學을 공부하였다.
구도求道를 위한 참방을 마치고 학문을 위한 유력遊歷을 마친 뒤 일지산방一枝山房에서 향을 사르고 초의 선사로부터 법인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이후부터 교학을 놓아 버리고 선방에 들어가 곳곳마다 찾아다니면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결제하고 또 해제를 거듭하며 참선 수행에 힘썼다.

010_1061_b_01L行事正直拈香於靈月誠身之壇受比
010_1061_b_02L丘二百五十戒及菩薩五十八戒於草衣
010_1061_b_03L禪伯之室與朗隱性順朗雲永密同門
010_1061_b_04L覺海在演性海處眞等爲弟子
010_1061_b_05L潭之孫住於大芚之挽日寶林之內院
010_1061_b_06L松廣之三日晩居於潭陽之菩提庵
010_1061_b_07L然示寂天雲精白岩松爭鳴本出
010_1061_b_08L6) [76] 不戀世利志在閒靖投之所
010_1061_b_09L有窟有松行裝一衣道伴一禽
010_1061_b_10L文筆有餘韵曲淸雅皆曰忍庵師之
010_1061_b_11L遺風朗岩老之警訓東隱西顯人亡
010_1061_b_12L道存少林挺茂嫩桂垂蔭嘉慶丙子
010_1061_b_13L光緖壬辰寂世壽七十七僧夏六
010_1061_b_14L十二傳法弟子及孫弟子托根於寶林
010_1061_b_15L禪刹

010_1061_b_16L

010_1061_b_17L月如禪伯傳

010_1061_b_18L
師名梵寅號月如姓金氏首露王之裔
010_1061_b_19L海南鹿山坊人道光四年甲申十月十
010_1061_b_20L七日生幼投頭輪山剃染於羊岳禪師
010_1061_b_21L之室受具戒7) [77] 菩薩8) [78] 草衣法師之
010_1061_b_22L受經學於華潭聞庵龍淵雲居應化
010_1061_b_23L講師之會叅訪了遊歷9) [79] 拈香於一
010_1061_b_24L枝山房10) [80] 入禪結制解夏在在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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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암에 가서 결제를 마치고 흥국사興國寺에 와서 참학하였으며, 선암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송광사에서 동안거를 하였으며, 대둔사 조사전祖師殿에서 무량회無量會 법회를 열었다.
미황사美黃寺에 거주하다가 첨찰사尖察寺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일성산日城山에 머물다가 서동사瑞桐寺로 옮겨서 살기도 하였고, 은적사隱跡寺와 비봉산飛鳳山에 살기도 했다. 신남과 신녀들 중 스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원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계를 전해 준 제자는 기운奇雲·기은奇隱·성학聖學 등 22명이고 법을 받은 제자와 수은受恩 제자는 운담雲潭과 성환性煥 등이 있다. 스님은 총섭의 직책을 역임하였고, 화주가 되어 왕실의 번영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천성이 좋고 자비하고 어질었으며, 마음 씀이 온화하고 순박하여 사람들은 “도인 중에 사자왕獅子王이다.”라고 칭송하였다.
금허선백전錦虛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세원世元이고 호는 금허錦虛이며, 속성은 천안 전全씨이고 나주 금마金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생계가 구차하고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큰아버지가 나주 쌍계사雙溪寺로 출가하여 금주 등혜錦洲等惠 강백의 처소에서 스님이 되었으니 바로 서주 의수犀舟懿修 선사라고 불렀다. 서주 스님이 해남 대둔사로 옮겨가서 살게 되자 소년도 숙부를 따라가서 글을 읽다가 홀연히 출세법出世法을 생각하게 되어 대둔사에 눌러앉아 속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소년은 마침내 하의荷衣 선사의 조당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화운化運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이어 은사인 하의 스님에게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범해 각안梵海覺岸 스님의 강의실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대승보살 오십팔계를 받았다.

010_1061_c_01L結徃七佛叅來興國結夏仙岩
010_1061_c_02L冬松廣開無量會於大芚之祖師殿
010_1061_c_03L11) [81] 12) [82] 住尖察山住日城山住瑞
010_1061_c_04L桐寺住隱跡寺飛鳳山信男信女之願
010_1061_c_05L爲師弟者其數不知爲傳戒者有奇
010_1061_c_06L雲奇隱聖學等二十二人受法受恩弟
010_1061_c_07L雲潭性煥等行揔攝職就化主權
010_1061_c_08L主管爲祝性好慈仁心行和淳人稱
010_1061_c_09L道人中之獅子王矣

010_1061_c_10L

010_1061_c_11L錦虛禪伯傳

010_1061_c_12L
師名世元號錦虛姓天安全氏羅州
010_1061_c_13L金馬人早孤偏侍生計苟艱俗伯
010_1061_c_14L出家於羅州雙溪寺錦洲等惠講伯處
010_1061_c_15L號曰犀舟懿修禪師移居于海南大芚
010_1061_c_16L從叔讀書忽念出世法因存不歸
010_1061_c_17L遂投荷衣禪師堂剃染從化運禪師壇
010_1061_c_18L受具受恩師傳法印受比丘二百五十
010_1061_c_19L戒及大乘菩薩五十八戒於梵海覺岸講
010_1061_c_20L「馳」甲本正誤表作「駝」「閨」甲本正誤表
010_1061_c_21L作「閏」
「間」甲本正誤表作「問」次同「問」
010_1061_c_22L甲本正誤表作「間」
「妨」甲本正誤表作「妙」
010_1061_c_23L「之」甲本正誤表作「也」「於」當在「菩薩
010_1061_c_24L戒」之下{編}
「戒」下甲本正誤表有「於」
010_1061_c_25L「破」甲本正誤表作「罷」
「放」甲本正誤表作
010_1061_c_26L「敎」
「美」甲本正誤表曰衍字「黃」下甲
010_1061_c_27L本正誤表有「寺」

010_1062_a_01L
금허 스님은 성품이 청아하고 인자하였으며 사물을 보면 이해하여 밝게 통달하였다. 수승首僧과 유나維那의 직책을 맡아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자 상하가 통명通明하게 되었으며, 주지와 총섭의 행정을 맡아 승풍의 규정을 바로잡으니 곡직曲直이 환하게 가려졌다.
이후 스님은 세속적인 일을 다 놓아 버리고 선의 관문 깊숙이 들어가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나갔다. 스님은 늘 공적인 일을 우선 처리하고 사적인 일은 뒤에 처리하였다. 스님은 또 세지염불문勢至念佛門에 들어가 관음참선도觀音叅禪道를 실행하였다.
스님은 연담蓮潭 스님의 4대 법손이고 백련白蓮 스님의 족손族孫이며, 제자는 두 명이 있었는데 서룡 성윤瑞龍性允 스님은 속성이 임林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환운 대은幻雲大隱 스님은 속성이 김씨이고 청해淸海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계를 받은 제자는 준학 경문俊學敬文 스님 등 15명이 있다.
스님은 도광道光 4년, 순조대왕 24년 갑신(1824)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1, 1894)에 대둔사 천불전千佛殿에서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71세였다.
호월선사전湖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관례寬禮이고 호는 호월湖月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청해淸海 두읍斗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려서 해남 두륜산으로 들어가 보해 지영普海志英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신월 호윤信月好潤 선사의 계단에서 사미계를 받았으며, 범해 각안梵海覺岸 강백의 강당에서 비구계 및 보살계를 받았다.
스님은 오랫동안 절 안의 각종 업무를 맡아보았고, 수승과 주지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조정으로부터 ‘자헌대부資憲大夫’ ‘도총섭’의 직첩을 제수 받았다.

浮沈出沒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나왔다 사라지곤 하는 생활 속에
辛酸苦楚       온갖 신산辛酸과 고초를 다 겪었다
物不受變則不成初   모든 물질은 변화를 겪지 않으면 재목을 이루지 못하고
人不涉難則不知道   사람이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는 법이다
歷盡世諦       세상일을 두루 다 겪었으며
汨沒塵臼       티끌 구덩이 속에 빠져서 살았네
流水歲月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고
幻花身命       몸과 목숨은 헛꽃과 같아라
早溺世利       일찍이 세상 명리에 빠졌다가
晩悟浮漚       뒤늦게 물거품 같은 것인 줄 깨달았다

먼저 작고하신 은사의 영단靈壇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계승하고 선조의 영정 앞에 법손으로 자처하였으니, 연담蓮潭 조사의 5대 법손이요 치암癡岩 조사의 2대 법손이며, 태고太古 스님의 17대 법손이고 청허淸虛 스님의 11대 법손이다.

010_1062_a_01L雅性慈仁見解通明掌判首僧維
010_1062_a_02L那之事上下通明糾正住持揔攝之政
010_1062_a_03L曲直炳煥放捨世諦深入禪1) [83] 補闕
010_1062_a_04L拾遺先公後私入勢至念佛門行觀
010_1062_a_05L音叅禪道蓮潭之四世白蓮之族孫
010_1062_a_06L有二弟子瑞龍性允林氏朗州人
010_1062_a_07L雲大隱金氏淸海人受戒弟子有俊
010_1062_a_08L學敬文等十五人道光四年純祖大王
010_1062_a_09L二十四年甲申生光緖二十年甲午寂
010_1062_a_10L年七十一在千佛殿

010_1062_a_11L

010_1062_a_12L湖月禪師傳

010_1062_a_13L
師名寬禮號湖月姓金氏淸海斗邑
010_1062_a_14L幼入海南頭輪山剃染於普海志英
010_1062_a_15L禪師室受沙彌戒於信月好潤禪師壇
010_1062_a_16L受比丘菩薩戒於梵海覺岸講伯堂
010_1062_a_17L滯寺中事行首僧住持事贈資憲大夫
010_1062_a_18L都揔攝帖浮沈出沒辛酸苦楚物不
010_1062_a_19L受變則不成2) [84] 人不涉難則不知道
010_1062_a_20L歷盡世諦汨沒塵臼流水歲月幻花
010_1062_a_21L身命早溺世利晩悟浮漚拈香於先
010_1062_a_22L恩師靈壇竪尾於先祖師小照蓮潭祖
010_1062_a_23L之五世癡岩祖之二世釋迦文之七十
010_1062_a_24L四世太古之十七世淸虛之十一世

010_1062_b_01L
이미 종문의 계파를 이었으면 반드시 종정宗正을 실행해야 한다. ‘종宗’이란 16종을 의미하며 ‘정正’이란 자신의 행동을 규정糾正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종정을 실행하는 이를 종사宗師라고 말한다. 이미 종문의 계파에 들어왔으면 부처님 법을 곧바로 전해 받은 사람이니 승려가 가야 할 큰 길을 실천해야 한다.
스님은 천성이 크고 대범하였으며 행실이 맑고 법도를 잘 지켰다. 행동은 신중하게 천천히 하였고 말은 어눌한 듯이 조심성 있게 하였으니, 참으로 상고上古 시대의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
스님에게 제자가 두 명 있는데 능오能悟는 속성이 정鄭씨이고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수승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 묘언妙彦은 속성이 최崔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그 역시 수승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손자 제자도 두 명이 있었으니 근우謹祐와 재익在益이다.
원화강백전圓華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덕주德柱이고 호는 원화圓華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남 담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기철基喆이고 어머니는 오吳씨이며, 도광道光 19년 기해(헌종 5, 1839) 5월 25일에 태어났다.
스님은 전생에 지혜의 종자를 뿌렸던 탓에 도리어 지혜가 총명한 남자의 몸을 받은 모양이다. 우담優曇·포허抱虛·응월應月 등 4대 종사를 참방하여 선교를 공부하였으며, 스님이 저술한 『회경록會鏡錄』 1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들은 스님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17세가 되던 을묘년(철종 6, 1855)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서 서우西藕 대사를 은사恩師로 삼고 두월斗月 대사에게 법을 받았으니, 스님은 곧 벽암碧岩 스님의 11세 법손이다.

早入禪園       일찍이 선원禪園에 들어가서
飽聞戒香       계戒의 향기를 실컷 맡고는
東叅西訪       동쪽으로 찾아가고 서쪽을 참방하며
空徃實歸       빈손으로 갔다가 실속을 얻어 돌아왔다
七尺皮囊       일곱 자 가죽 주머니는
芥納須美       겨자씨에 수미산을 수용하였으며
書轉五車       다섯 수레 책을 싣고
經閱八萬       팔만 장경 다 읽었네
開門八字       팔八 자로 문을 열고
看待四山       사방 산을 기다리네
說華嚴於華嚴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여
證昏眼於昏眼     눈 어두운 이 눈 어두운 줄 알게 하였다
隱身蔀屋       작은 집에 몸을 숨겼으나
巴尾先露       그 존재 먼저 드러났다
麝過春山       사향노루 봄 동산을 지나가니
草樹益香       풀과 나무 더더욱 향기롭구나
戒傳吾徒       우리 제자들에게 계를 전해 주고
印封我臣       우리 제자들에게 법인을 전해 주셨다
錦溟熏臭       금명錦溟은 훈습薰習 제자이고
栗庵攝齋       율암栗庵은 입실 제자이다
伯樂憎賈       백악伯樂이 보니 값이 올라가고
可匠石禀材      장석匠石이 지목하니 재목인 줄 알아 준다
爲諸群迷       모든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壽躋期頣       일백 세나 장수하게 하였다

스님은 광서光緖 19년

010_1062_b_01L已繼宗派必行宗正宗者十六宗
010_1062_b_02L糾正已行宗正必稱宗師已入宗派
010_1062_b_03L佛之直傳爲僧之大道也心性坦盪
010_1062_b_04L行履淑準行遲遲語吶吶眞上古之人
010_1062_b_05L有弟子二人能悟鄭氏海南人
010_1062_b_06L行首僧妙彥崔氏靈岩人行首僧
010_1062_b_07L有孫弟子二人謹祐在益

010_1062_b_08L

010_1062_b_09L圓華講伯傳

010_1062_b_10L
師名德柱號圓華俗姓鄭氏全□潭陽
010_1062_b_11L父基喆母吳氏道光十九年己亥
010_1062_b_12L五月二十五日生夙植智慧之種子
010_1062_b_13L受智慧之男形叅優曇抱虛應月四大
010_1062_b_14L宗師所著會鏡錄一卷行於世詳在行
010_1062_b_15L3) [85] 十七歲乙卯入智異山華嚴寺
010_1062_b_16L西藕大師爲恩師受法於斗月大師
010_1062_b_17L碧岩十一世孫也早入禪園飽聞戒香
010_1062_b_18L東叅西訪空徃實歸七尺皮囊芥納
010_1062_b_19L4) [86] 書轉五車經閱八萬開門八字
010_1062_b_20L看待四山說華嚴於華嚴證昏眼於昏
010_1062_b_21L隱身蔀屋巴尾先露麝過春山
010_1062_b_22L樹益香戒傳吾徒印封我臣錦溟熏
010_1062_b_23L栗庵攝5) [87] 伯樂6)憎賈 [88] 7) [89] 匠石禀
010_1062_b_24L爲諸群迷壽躋期頣光緖十九年

010_1062_c_01L계사(고종 30, 1893) 5월 30일에 적멸을 보이셨으니, 세속 나이로는 55세이고 법랍은 38년이다.
상운선사전祥雲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응혜應惠이고 호는 상운祥雲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 의지할 데 없이 추위와 더위를 다 겪으면서 어렵게 지내다가 두륜산으로 들어갔으나 거기에서도 온갖 곤궁함을 다 겪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일勝日 대사의 처소에서 은혜를 받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 호연浩然 선사의 처소에서 계를 받고, 금계錦溪 선사의 처소에서 법명과 계명戒名을 받았으며, 서암恕庵 선사의 처소에서 향을 사르고 법인을 이어받았다.
또한 범해梵海 교주敎主의 처소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보살 오십팔계 즉 대승계大乘戒를 받았으니, 연담蓮潭의 5대 법손이 되고 초의草衣의 손자 법제자이며, 쌍수雙修·송원松源과는 동문 형제가 된다.
상운 스님은 이미 주지와 유나維那의 인신印信을 차고 그 소임을 맡아보기도 했으며, 조정으로부터 특별히 ‘자헌대부규정총섭資憲大夫糾正摠攝’의 직첩을 제수받기도 했다.
행정은 깨끗하게 하였고 송사는 순리대로 해결하느라 치아는 듬성듬성하였고 머리는 번들번들해지니 창창한 갈대가 서리맞아 하얗구나. 몸을 가리는 도구와 입에 풀칠하는 방책, 나무 하는 무리들과 다리 펴고 의탁하는 일들은 크게 근심할 일 아니며 고생이 끝나면 기쁨이 오는 법이다.
스님은 도광道光 정해년(순조 27, 1827)에 태어나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에 심적사深寂寺 별실에 있는데, 세속 나이는 68세이다. 제자로는 처흔處欣·묘원妙元·법윤法允 등이 있다.

010_1062_c_01L癸巳五月三十日示寂世壽五十五
010_1062_c_02L臈三十八

010_1062_c_03L

010_1062_c_04L祥雲禪師傳

010_1062_c_05L
師名應惠號祥雲姓朴氏海南人
010_1062_c_06L失怙恃獨自伶仃閱盡寒暑投入頭
010_1062_c_07L備閱窮困嘉善大夫勝日同知處
010_1062_c_08L受恩染衣浩然禪師處受火聽戒
010_1062_c_09L溪禪師處作名授戒恕庵禪師處
010_1062_c_10L香受印梵海敎主處受比斤二百五十
010_1062_c_11L戒及菩薩五十八大乘戒蓮潭之五世
010_1062_c_12L草衣之孫與雙修松源門兄弟已佩住
010_1062_c_13L持維那之印信特贈資憲大夫糾正揔
010_1062_c_14L攝之差帖政淸訟理齒豁頭童蒹葭
010_1062_c_15L蒼蒼霜露爲雪遮身之具糊口之策
010_1062_c_16L負薪之徒展脚之托甚非所以大憂
010_1062_c_17L盡甘來歟道光丁亥生光緖甲午在深
010_1062_c_18L寂別室世壽六十八弟子有處欣妙元
010_1062_c_19L法允等

010_1062_c_20L「開」甲本正誤表作「關」「初」甲本正誤表
010_1062_c_21L作「材」
「裝」甲本正誤表作「狀」「美」甲本
010_1062_c_22L正誤表作「彌」
「齋」甲本正誤表作「齊」
010_1062_c_23L「憎賈」甲本正誤表作「增價」
「可」甲本正誤
010_1062_c_24L表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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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송선사전德松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호의皓衣이고 호는 덕송德松이며, 속성은 임林씨이고 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우연히 백양산에 들어갔다가 양개良价 스님이 어버이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출가했던 뜻에 감동하여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속가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단하丹霞 스님이 무명초無名草(머리)를 깎고 귀를 막고 달아났던 일을 본받아 스님이 되었다.
덕송 스님은 수월 재인水月在仁 스님의 법인을 받았으니 침송 성순枕松聖詢 스님의 손자 법제자이고, 양악羊岳 스님의 증손 법제자이며, 연담蓮潭 스님의 현손 법제자가 된다.
스님은 본래 사대부 가문 출신이며, 문장은 아름답고 언어는 어눌한 듯 조심스럽게 하였으니, 장자長者의 덕행을 갖춘 분이었다. 한양漢陽 스님은 동문 형제이고, 응운應雲은 조카 제자이다.
울유欝攸30)가 직무를 수행함으로 인하여 묵은 재를 쓸어버리고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여덟 사람이 과거에 공장工匠을 독려하여 공사를 마쳤으니 건물이 큰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우뚝하였다. 어사御史가 시를 지으니 진사進士가 화답한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生老病死長在遠    생로병사가 길고도 머니
年月日時豈該載    연월일시를 어찌 다 기록하랴
金剛萬二千峰月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의 달은
開眼合目照森前    눈을 뜨나 감으나 삼삼하게 눈앞을 비추네

연주강백전蓮舟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극현極玄이고 호는 연주蓮舟이며, 속성은 신申씨이고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두륜산에 들어가 신월信月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 무하 시윤無何始允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은사인 신월 스님의 조실에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
연주 스님은 달마산으로 응화應化 스님과 허령虛靈 스님의 도량을 찾아가 내전과 외전을 다 배우고, 조계산으로 침명枕溟 스님과 용운龍雲 스님의 강석을 찾아가 선교禪敎의 이치를 배웠다. 스님은 비로소 교화의 문을 열고 제자들에게 바른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의 공부 수준을 평가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를 마치 대낮의 시장 바닥과 같았으며, 스님의 명성을 듣고 결하結夏(안거)를 일삼는 선객들이 찾아와 흡사 물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듯 하였다. 그리되자 낭암朗岩의 법등은 다시 빛나고 설봉雪峯 스님의 달은 5대만에 원만해졌다.
스님이 계를 설하여 득도得度시킨 제자는 자연 법흔慈演法欣 등 10여 명이다. 스님이 옥리산과 비봉산에 머무니,

010_1063_a_01L德松禪師傳

010_1063_a_02L
師名皓衣號德松姓林氏羅州人
010_1063_a_03L入羊山有良价辭親之志因存不歸
010_1063_a_04L有丹霞除草掩耳之擧佩水月在仁之
010_1063_a_05L枕松聖詢之孫羊岳之曾蓮潭之
010_1063_a_06L本士夫之族文章彬彬言語訥訥
010_1063_a_07L長者之德行也漢陽爲我之鴒應雲
010_1063_a_08L我之咸欝攸行職掃舊灰而新建
010_1063_a_09L1) [90] 八人過去蕫工匠而竣2) [91] 翼然
010_1063_a_10L3) [92] 御史題詩進士唱和生老病死
010_1063_a_11L長在遠年月日時豈該載金剛萬二千
010_1063_a_12L峰月開眼合目照森前

010_1063_a_13L

010_1063_a_14L蓮舟講伯傳

010_1063_a_15L
師名極玄號蓮舟姓申氏海南人
010_1063_a_16L入頭輪山薙髮於信月禪師室受具戒
010_1063_a_17L於無何始允禪師壇得傳法印於恩師
010_1063_a_18L信月師之堂訪達摩山應化虛靈之道
010_1063_a_19L受內外典叅曹溪山枕溟龍雲之講
010_1063_a_20L受禪敎理通開化門打弄4) [93]
010_1063_a_21L懷寶售5) [94] 之徒若日中爲市聞名結
010_1063_a_22L夏之士如水流必東 6) [95] 岩之燈再傳
010_1063_a_23L雪峯之月五世圓滿說戒度人者
010_1063_a_24L慈演法欣等十餘人住玉理山飛鳳山

010_1063_b_01L새와 짐승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지금은 진불암眞佛庵을 참알參謁하고 만일암挽日庵을 중수하고는 눈과 귀를 조용히 하고 참선 중이다. 도광道光 7년 정해(순조 27, 1827)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1, 1894) 현재 만일암에 머물고 있는데, 세속 나이는 68세이다.
화선전華先傳
화선華先은 세속에서의 이름이 성순性淳이고 성은 박씨이며, 황해도 수안遂安 방계방方契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7년 정해(순조 27, 1827)에 태어나 네 살 되던 해에 학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으며, 열다섯 살에 경서를 모두 열람하였다. 소년은 차례로 부모를 잃고 두 형제는 춥고 배고픈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년은 홀연히 강산江山의 고적이나 구경하리라 생각하고 구월산과 고달산高達山에 올라 감로甘露와 호암好岩의 유적을 관람하였으며, 송도松都와 한경漢京(서울)으로 들어가 궁궐과 부조府曹의 흥폐를 구경하였다. 서쪽의 나그네로 떠돌기도 하였고 또는 남방을 전전하였으며, 동쪽으로 오르락내리락 돌아다니면서 여덟 분 거룩한 스님이 도를 증득한 높은 발자취를 보았고, 지리산을 드나들면서 일곱 왕자가 득도한 기연機緣을 구경하였다.
일봉암日封庵에 들어가 천불탑을 조성한 것을 보고 만일암挽日庵으로 들어가서 두 미륵의 그림을 보기도 하였다.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와 견훤甄萱이 쌓았다고 하는 큰 성곽, 그리고 백마白馬·주룡朱龍·구강九江·사포四浦의 강산을 두루 다니면서 유람하였다.
20세에 구곡九曲을 나와 선암사로 들어가서 비상非相의 게송과 ‘부처님의 경계로 즉입卽入한다’는 설법을 들었다. 22세에 밀홍 수좌蜜弘首座에게 출가하였고 침명 좌주枕溟座主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청공靑空 스님과 우담優曇 스님의 문을 찾아가서 사교四敎를 배우고 화선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이후에 ‘하루에 한 번 자고 한 끼니만 먹는다’는 계율을 지키고 난행고행難行苦行의 가르침을 따랐다. 밀홍 스님은 전주 장불산으로 들어갔고 화선 스님은 회양 중향성衆香城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나이가 28세이다.
용파선사전龍坡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기홍基弘이고 호는 용파龍坡이며, 속성은 ▣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010_1063_b_01L鳥獸咸樂叅眞佛工挽日耳目虛靜
010_1063_b_02L道光七年丁亥生光緖二十年甲午
010_1063_b_03L挽日庵年六十八

010_1063_b_04L

010_1063_b_05L華先傳

010_1063_b_06L
華先者俗名性淳姓朴氏遂安方契
010_1063_b_07L坊人道光七年丁亥生四歲入學
010_1063_b_08L盡閱經書父母輪次捐舍兄寒弟薄
010_1063_b_09L忽念江山之古跡登九月高達覽甘露
010_1063_b_10L好岩之遺躅入松都漢京觀宮闕府曹
010_1063_b_11L之興廢迤邐西客輾轉南方7) [96]
010_1063_b_12L見入 [97] 聖僧證道之高蹈出入智異
010_1063_b_13L玩七王子得道之機8) [98] 日封而千佛塔
010_1063_b_14L之成挽日而兩彌勒之畫馬故之舊都
010_1063_b_15L㼼萱之大城白馬朱龍九江四浦之江
010_1063_b_16L周覽而偏行二十出九曲9) [99] 10) [100]
010_1063_b_17L非相之11) [101] 即佛之說二十二出家
010_1063_b_18L於蜜弘首座受具於枕溟座主謁靑空
010_1063_b_19L優曇之門受四敎名曰華先從一宿
010_1063_b_20L一食之戒遵難行苦行之訓弘入全州
010_1063_b_21L長佛先入淮陽衆香時年二十八

010_1063_b_22L

010_1063_b_23L龍坡禪師傳

010_1063_b_24L
師名基弘號龍坡姓□氏朗州人

010_1063_c_01L
일찍이 월출산으로 들어가 장선壯善 상인을 은사로 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침월枕月 대사에게서 계를 받았으며, 화암 성옥和岩性玉 스님으로부터 법인을 전해 받았다. 화암 성옥은 환양 팔원喚羊八元의 법을 이었고, 환양 팔원은 낭송 유화朗松有華의 법을 이었으며, 낭송 유화는 설파 상언雪坡常彥의 법을 이었고, 설파 상언은 호암虎岩의 법을 이었다.
스님은 두륜산 북암北庵의 운거雲居도갑사道甲寺에 있었던 스님 화사火師와 달마산 중암中庵의 응화 대사, 가지산 동암東庵 대사의 강론 도량에서 경학을 공부하였다.
스님은 기골이 준수하였고 덕행이 훌륭하였으며, 항상 자신의 재물을 덜어 내 망가진 절을 보수하여 열세 채의 전각을 세웠다. 그러고는 보타산 도장사道藏寺의 시왕十王을 옮겨 봉안하니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광명을 방출하였다. 기계를 시설하고 군중을 모아 맨땅에 엎어져 있던 불상을 일으켜 세운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스님은 불사佛事라면 몸이 고달프고 생각이 타들어가도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였지만, 도리어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한번은 사찰 소유의 산에 어떤 사람이 묘를 쓴 것을 소송을 하여 파서 옮기게 한 뒤 도리어 횡액을 당하기도 했다. 늘 일의 기미를 잘 살피지 못하여 역풍으로 먼지를 뒤집어쓰는 격이요, 도리어 더러운 오물이 자신의 얼굴에 튀긴 꼴이었다. 때가 이롭지 못하니 일을 성공하지 못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일을 이룩하고 나면 떠나가야 하는 것을 잊었던가? 기미를 보고 나면 그 시기를 넘기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겁劫을 지었던가?
이침산전李枕山傳
처사의 이름은 동환東煥이고 호는 침산枕山이며, 성은 이李씨이고 경북 상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정해년(순조 27, 1827)에 태어났다.
이 처사는 통도사의 관허觀虛 선사에게서 참회계를 받았고, 금강산 해명海溟 대사에게서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010_1063_c_01L投月出山受壯善上人之恩禀枕月大
010_1063_c_02L師之戒得和岩性玉之印12)老師主 [102]
010_1063_c_03L喚羊八元之嗣朗松有華之嗣
010_1063_c_04L坡常彥之嗣虎岩之嗣學於頭輪山
010_1063_c_05L北庵雲居火師道甲
達摩山中庵應化大
010_1063_c_06L13) [103] 智山東庵大師之講場氣骨俊
010_1063_c_07L德行廣長損己補廢建十三殿
010_1063_c_08L陁山道藏寺十王移安瑞氣放光設機
010_1063_c_09L募軍起立俯佛於露地勞身焦思
010_1063_c_10L心竭力動輙得口寺山有犯葬者
010_1063_c_11L訟掘移反被橫厄不察事機逆風揚塵
010_1063_c_12L反汙己面時不利兮事不成矣 14) [104]
010_1063_c_13L功者去忘歟見機而作劫歟

010_1063_c_14L

010_1063_c_15L李枕山傳

010_1063_c_16L
處士名東煥號枕山姓李氏尙州人
010_1063_c_17L道光丁亥生受懺悔火於通度寺觀虛
010_1063_c_18L禪師受大乘菩薩戒於金剛山海溟大
010_1063_c_19L「焉」下甲本正誤表有「奐焉」「狡」甲本正
010_1063_c_20L誤表作「役」
「峳」甲本正誤表作「巋」「眞」
010_1063_c_21L作「直」{甲}
「賈」甲本正誤表作「價」「郞」甲
010_1063_c_22L本正誤表作「朗」
「朽」甲本正誤表作「沈」
010_1063_c_23L「椽」甲本正誤表作「緣」
「八」甲本正誤表作
010_1063_c_24L「入」
「岩」下甲本正誤表有「聽」「倡」甲本
010_1063_c_25L正誤表作「偈」
「老師主」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63_c_26L「倻」甲本正誤表曰衍字「魔」甲本正誤表
010_1063_c_27L曰衍字

010_1064_a_01L전주 봉서사鳳捿寺에 머물다가 무진년(고종 5, 1868) 8월에 옥주沃州(진도) 쌍계사雙溪寺로 들어갔다.
이때 나(각안)는 절구 시 한 수를 지어 이 처사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尺布行裝何所有    괴나리봇짐 속에 그 무엇이 있는가?
金剛一卷自家珎    한 권 『금강경』이 우리 집 가보라네
龐公事業頭頭現    방공龐公31)의 사업이 곳곳에 나타나니
應是維摩小化身    그대는 필시 유마거사 화신일레라

이 처사는 뒤에 순천 흥국사興國寺 만일회萬日會에 참석하였으며, 월여月如 스님이 찾아오자 보리수 열매로 만든 염주 1목目에 글을 써서 보내왔다. 다시 전주 봉서사로 가서 머물렀으며, 포련布蓮 총섭이 오자 『유마경』 1질을 서사書寫하여 보낸 적도 있다.
이 처사는 또 『진불지眞佛志』 1권을 서사하고 그 책 말미에 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고 자비의 실천도 구족하였으니, “믿음은 도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이다.”라고 한 게송의 내용에 부합되는 사람인 듯하다.

010_1064_a_01L住全州鳳捿寺戊辰八月入沃州
010_1064_a_02L雙溪寺子贈一絕曰尺布行裝何所有
010_1064_a_03L金剛一卷自家珎龐公事業頭頭現
010_1064_a_04L是維摩小化身後順天興國寺萬日會
010_1064_a_05L菩提子念珠一目月如師來便作
010_1064_a_06L書送之後全州鳳捿寺居布蓮揔攝來
010_1064_a_07L便作維摩經一秩書送之眞佛志一卷
010_1064_a_08L書之作跋尾 1) [105] 識超等慈行具足
010_1064_a_09L以應信爲道元功德母之偈哉

010_1064_a_10L「如」甲本正誤表作「知」

010_1064_b_01L
  1. 1)『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덕산현 서쪽 11리쯤에 가야산이 있고, 북쪽 13리에는 상왕산이 있다. 이 두 산은 덕산현과 해미현海美縣에 걸쳐 있으며 서로 연이어져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절의 당초 이름도 가야산 보덕사가 아니라 가야산 가야사였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절이 있는 자리에 묘를 쓰면 2대 왕을 지낼 자리이다’라고 하는 풍수의 말을 듣고 1844년(현종 10) 가야사를 헐고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새로 지어 보덕사라 이름하고 초대 주지에 영도사 주지였던 벽담 선사를 임명하였다.
  2. 2)수고우水牯牛 : 남전 보원南泉普願(748~834) 선사가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와 나눈 문답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주가 남전에게 묻기를, “유有를 안 사람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자, 남전이 “산 앞의 신도 집에 한 마리의 수고우가 되어 가나니라.”라고 하였다.
  3. 3)정자程子 :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형제를 높여 이르는 말.
  4. 4)주자朱子 : 송나라 유학자. 1130~1200.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5. 5)반고班固 : 후한 초기 역사가. 32~92. 표彪의 아들, 서역도호 초超의 형이다. 『한서』 편집 중, 국사를 개작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20여 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백호통의』를 편집하였다.
  6. 6)사마천司馬遷 : 전한 시대의 역사가이며 『史記』의 저자이다. 기원전 145~86. 무제의 태사령이 되어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91년 완성하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7. 7)손자孫子 : 손무孫武. 춘추 시대 병법兵法의 대가. 저서에 『손자』가 있다.
  8. 8)오기吳起 :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 저서에 『吳子』가 있다.
  9. 9)오도자吳道子 : 당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말한다. 도자는 곧 오도현의 자이다.
  10. 10)미불米芾 : 송나라 때의 서화가. 그는 특히 고서화古書畫를 매우 좋아하여 고서화를 대단히 많이 수집하였으므로, 그를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고 일컬었다.
  11. 11)강상사江上寺 : 봉은사를 일컫는다.
  12. 12)만호萬戶 : 종4품 무관직이다.
  13. 13)갱장羹墻 : 선왕의 거룩한 업적을 사모하며 좋은 정치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앙모仰慕한 나머지, “앉아 있을 때에는 담벼락에 요임금이 보이고 식사를 할 때에는 국그릇 속에 보였다.(坐則見堯於墻。 食則覩堯於羹。)”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李固傳」에 나온다.
  14. 14)전영雋永 : 살져 맛이 좋은 고기라는 뜻으로, 의미심장하여 깊은 뜻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15. 15)순생順生 순후順後의 업보業報 : 순생의 업이란 현세에 선악의 업을 지어 다음 생에 그 보를 받는 것이고, 순후의 업이란 현세에 지은 업을 제3생 이후에 받는 과보를 말한다.
  16. 16)『주역』 「坤卦」에 나오는 말이다.
  17. 17)허련許鍊 : 조선 후기의 서화가. 1809~1893.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글,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하경산수도〉 등의 작품이 있다.
  18. 18)김명희金命喜 : 본관은 경주.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山泉. 1788~?. 노경魯敬의 아들이며, 추사 정희의 아우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강동현령 등을 지냈다. 1822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인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경燕京에 가서,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우리나라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 19)고로추古老錐 : 노고추老古錐를 바꾸어 한 말로 노고는 존경한다는 뜻이고, 추는 송곳처럼 예민함을 뜻하는 말로서, 즉 노대원숙老大圓熟함을 의미한다.
  20. 20)도현道玄 : 당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말한다. 궁중에 들어가 인물·산수·초목·조수鳥獸 등을 그렸으며, 제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원과 도관道觀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21. 21)원장元章 : 송나라 미불米芾(1051~1107)의 자인데, 천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무위군無爲軍을 맡아보게 되어 처음으로 주해州廨에 들어가자 입석立石을 보고 자못 기이하게 여겨 곧 포홀袍笏을 가져오라 하여 그 돌에 절하고 늘 석장石丈이라 불렀다고 한다.
  22. 22)무구無口의 고향 : 입을 닫고 선지禪旨를 참구하였다는 의미인 듯하다.
  23. 23)유마의 방(維摩之室)은 오히려 좁았고 : 유마의 방은 여기에서는 방장실方丈室을 의미한다. 옛날 유마 거사가 사방 열 자 되는 방에 3만 2천 사자좌를 시설해 놓았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24. 24)중향성衆香城의 음식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 담무갈曇無竭이 중향성의 주인이 되어 항상 『般若波羅蜜多經』을 설하니 대중들이 몰려왔고, 심지어는 상제常啼보살도 와서 들었다고 하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25. 25)허현도許玄度:동진東晋 시대 허순許詢을 말한다. 『續晉陽秋』에 이르기를, “허순의 자는 현도이다. 고양 사람이며 위나라 중령군 윤현의 현손玄孫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모두들 신동이라고 말했다. 자라서는 풍정이 간소하고 사도연으로 발탁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찍 죽었다.”라고 하였다.
  26. 26)자우子羽 :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의 호이다.
  27. 27)타루비墮淚碑 : 진晉나라 양호羊祜가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을 때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그가 노닐던 현산峴山에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그 비문 가운데 “우주가 생기면서 이 산도 생겼을 텐데, 그동안 우리들처럼 이곳에 올라와서 멀리 바라보았던 멋진 인사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마는, 모두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백 년 뒤에라도 나에게 혼이 있다면 혼령이라도 여기에 다시 찾아오리라.”라고 했던 양호의 말이 쓰여 있어, 이 비문을 보고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자, 당양후當陽侯 두예杜預가 ‘타루비’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있다. 『晋書』 「羊祜傳」.
  28. 28)옹중翁仲 : 옹중은 보통 능묘陵墓 좌우에 서 있는 석물石物을 말한다. 진秦나라 때의 키가 큰 사람이었는데, 뒤에 동상銅像이나 석상石像을 말하기도 한다. 그의 성은 완씨阮氏였는데 키가 12척이나 되었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는 그에게 임조臨洮를 지키게 하였다. 뒤에 그가 죽자 동상을 만들어 함양咸陽에 세웠다. 『山堂肆考』.
  29. 29)동타銅駝 : 진晋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낙양洛陽의 궁문宮門 앞에 세워진 구리로 만든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네가 형극荊棘 속에 묻히는 것을 곧 보겠구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30. 30)울유欝攸 : 울유는 화신火神이다. 그가 직무를 수행했다는 말은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31. 31)방공龐公 : 이름은 온蘊, 자는 도현이다. 중국의 형주 형양현 사람. 마조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는 이가 무슨 사람입니까?”라고 하니, 마조가 “네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마셔 버린 뒤에야 일러 주마.”라고 하였다. 거사는 이 말에 의심을 가지고 2년 동안 정진하였다. 죽으려 할 즈음에 딸 영조를 시켜 해그늘을 보아서 오시午時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하였다. 영조가 “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을 합니다.”라고 하니, 거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문밖에 나가 보는 동안에 영조가 거사의 평상에 올라 앉아 죽어 버렸다. 이를 보고 거사는 웃으면서 “내 딸이 솜씨가 빠르구나!”라고 하고는 7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1. 1)「六」甲本正誤表作「五」。
  2. 2)「謂」下甲本正誤表有「有」。
  3. 3)「大」甲本正誤表作「火」。
  4. 1)「披」甲本正誤表作「坡」。
  5. 2)「謄」甲本正誤表作「騰」。
  6. 3)「文」下甲本正誤表有「筆」。
  7. 4)「統」甲本正誤表作「繞」。
  8. 5)「錢」甲本正誤表作「姓」。
  9. 6)「其」甲本正誤表作「具」。
  10. 7)「之」甲本正誤表作「入」。
  11. 8)「蓮」下甲本正誤表有「宗」。
  12. 9)「庄」甲本正誤表作「生」次同。
  13. 1)「洗」甲本正誤表曰衍字。
  14. 2)「理」甲本正誤表作「裡」。
  15. 3)「九」甲本正誤表作「凡」。
  16. 4)「齊」甲本正誤表作「齋」。
  17. 5)「村」甲本正誤表作「才」。
  18. 6)「盡」甲本正誤表作「畵」。
  19. 7)「仙」作「山」{甲}。
  20. 8)「攝」下甲本正誤表有「者」。
  21. 9)「手」甲本正誤表作「年」。
  22. 10)「豎議」甲本正誤表作「議豎」。
  23. 11)「主」甲本正誤表作「立」。
  24. 12)「仁」甲本正誤表作「麟」。
  25. 1)「公」下甲本正誤表有「見」。
  26. 2)「作賛」甲本正誤表曰衍字。
  27. 3)「福其」甲本正誤表作「其福」。
  28. 4)「裝」甲本正誤表作「狀」。
  29. 5)「善」甲本正誤表作「恙」。
  30. 1)「桂」作「柱」而又正誤表作「炷」{甲}。
  31. 2)「▼(木+覊)」甲本正誤表作「欛」。
  32. 3)「問」甲本正誤表作「間」。
  33. 4)「廌」疑「薦」{編}。
  34. 5)「太」甲本正誤表作「大」。
  35. 6)「立」甲本正誤表曰衍字。
  36. 7)「目」甲本正誤表作「自」。
  37. 8)「囊」甲本正誤表作「裵」。
  38. 9)「顧」疑「告」{編}。
  39. 10)「之人」甲本正誤表作「人之」。
  40. 11)「順」下甲本正誤表有「後」。
  41. 12)「有」甲本正誤表曰衍字。
  42. 1)「邦」疑「那」{編}。
  43. 2)「祥」甲本正誤表作「禪」。
  44. 3)「師」作「時」{甲}。
  45. 1)「百」甲本正誤表作「白」。
  46. 2)「倡」甲本正誤表作「偈」。
  47. 3)「其」甲本正誤表作「甚」。
  48. 4)「辨」甲本正誤表作「辦」。
  49. 5)「裝」甲本正誤表作「狀」。
  50. 6)「屐」甲本正誤表作「屣」。
  51. 7)「涓」下甲本正誤表有「而」。
  52. 1)「愛」甲本正誤表作「受」。
  53. 2)「弛」甲本正誤表作「陀」。
  54. 3)「資」下甲本正誤表有「憲」。
  55. 4)「甘」甲本正誤表作「紺」。
  56. 1)「瘦」甲本正誤表作「廋」。
  57. 2)「拂」甲本正誤表作「佛」。
  58. 3)「希芳」甲本正誤表作「喜方」。
  59. 4)「必」下甲本正誤表有「尋」。
  60. 5)「諸」甲本正誤表作「詣」。
  61. 6)「賈」甲本正誤表作「價」。
  62. 1)「師」下甲本正誤表有「傳」。
  63. 2)「爾」甲本正誤表作「肅」。
  64. 1)「主」甲本正誤表作「立」。
  65. 2)「禦」甲本正誤表作「御」次同。
  66. 3)「仙」下甲本正誤表有「岩」。
  67. 4)「綸」甲本正誤表作「論」。
  68. 5)「寺」疑「事」{編}。
  69. 1)「馳」甲本正誤表作「駝」。
  70. 2)「閨」甲本正誤表作「閏」。
  71. 3)「間」甲本正誤表作「問」次同。
  72. 4)「問」甲本正誤表作「間」。
  73. 5)「妨」甲本正誤表作「妙」。
  74. 6)「之」甲本正誤表作「也」。
  75. 7)「於」當在「菩薩戒」之下{編}。
  76. 8)「戒」下甲本正誤表有「於」。
  77. 9)「破」甲本正誤表作「罷」。
  78. 10)「放」甲本正誤表作「敎」。
  79. 11)「美」甲本正誤表曰衍字。
  80. 12)「黃」下甲本正誤表有「寺」。
  81. 1)「開」甲本正誤表作「關」。
  82. 2)「初」甲本正誤表作「材」。
  83. 3)「裝」甲本正誤表作「狀」。
  84. 4)「美」甲本正誤表作「彌」。
  85. 5)「齋」甲本正誤表作「齊」。
  86. 6)「憎賈」甲本正誤表作「增價」。
  87. 7)「可」甲本正誤表曰衍字。
  88. 1)「焉」下甲本正誤表有「奐焉」。
  89. 2)「狡」甲本正誤表作「役」。
  90. 3)「峳」甲本正誤表作「巋」。
  91. 4)「眞」作「直」{甲}。
  92. 5)「賈」甲本正誤表作「價」。
  93. 6)「郞」甲本正誤表作「朗」。
  94. 7)「朽」甲本正誤表作「沈」。
  95. 8)「椽」甲本正誤表作「緣」。
  96. 9)「八」甲本正誤表作「入」。
  97. 10)「岩」下甲本正誤表有「聽」。
  98. 11)「倡」甲本正誤表作「偈」。
  99. 12)「老師主」甲本正誤表曰衍字。
  100. 13)「倻」甲本正誤表曰衍字。
  101. 14)「魔」甲本正誤表曰衍字。
  102. 1)「如」甲本正誤表作「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