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동사열전(東師列傳) / 東師列傳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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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 제4권(東師列傳 第四)
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
연담종사전蓮潭宗師傳
종사의 법명은 유일有一이고 자字는 무이無二이며 호는 연담蓮潭이다. 속성은 천千씨이고 화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의지하고 살았다.
열여덟 살에 법천사法泉寺 성철性哲 스님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며, 심諶(安貧)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후 해인사海印寺 호암虎岩 화상을 찾아가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면서 그의 비밀한 종지를 다 터득했다.
연담은 영허靈虛·벽하碧霞·용암龍岩·영곡靈谷·호암虎岩·설파雪坡·풍암楓岩·상월霜月·용담龍潭·영해影海, 이상 10대 법사들을 참알參謁하고 그들에게 교리를 배워 통달하였다. 또 동문수학을 한 설파 상언雪坡常彦과 함께 서로 학문을 갈고 닦았다. 『화엄경』 강석에 강주講主가 된 뒤 30여 년 동안 무릇 15차례나 강론 법회를 열었는데 늘 따르는 학인들이 100여 명에 근접했다.
강희康熙 59년, 즉 숙종 46년 경자(1720) 4월 30일에 태어나서 가경嘉慶 4년, 즉 정조 23년 기미(1799) 2월 3일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장흥 보림사寶林寺 삼성암三聖庵에서 열반에 들었으니, 세속 나이는 80세이고 승랍은 62년이다.
미래의 학자들을 위하여 사집四集 수기手記 각 1권, 『기신사족起信蛇足』 1권, 『금강하목金剛鰕目』 1권, 『원각사기圓覺私記』 2권, 『현담사기玄談私記』 2권, 『화엄유망기華嚴遺忘記』 5권, 『제경회요諸經會要』 1권, 『염송착병拈頌着柄』 2권, 『임하록林下錄』자신의 문집 4권을 저술하여 모두 간행, 세상에 유포하였다.
연담 대사의 부도는 대둔사大芚寺·미황사美黃寺·법천사法泉寺에 각각 세워져 있다. 그 이유는 경진년(영조 36, 1760)에는 대둔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고, 무자년(영조 44, 1768)에는 미황사에서 큰 법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사람 됨됨이가 질박하고 정직하며 탁 트이고 소탈하여 비록 한 시대에 종주로서 추앙을 받는 몸이긴 하지만, 조금도 교만하게 굴거나 자신을 과시하는 법이 없었다.

010_1030_b_02L東師列傳第四

010_1030_b_03L[傳]

010_1030_b_04L頭輪山人九堦選集編次

010_1030_b_05L蓮潭宗師傳

010_1030_b_06L
宗師名有一字無二號蓮潭姓千氏
010_1030_b_07L和順人早失父依母而居十八投法
010_1030_b_08L泉寺性哲師出家受戒於諶師投海印
010_1030_b_09L寺虎岩和尙隨侍累年盡得其密旨
010_1030_b_10L叅於靈虛碧霞龍岩靈谷虎岩雪坡楓岩
010_1030_b_11L霜月龍潭影海十大法師通敎理又從
010_1030_b_12L同門雪坡常彥琢磨主華嚴講席三十
010_1030_b_13L餘歲凡十五周常隨者恒近1) [1] 百人
010_1030_b_14L康熙五十九年肅宗四十六年庚子四月
010_1030_b_15L三十日生嘉慶四年正宗二十三年己
010_1030_b_16L未二月初三日未時示寂于長興寶林
010_1030_b_17L寺三聖庵世壽八十僧臘六十二
010_1030_b_18L來學者2) [2] 四集手記各一卷起信蛇
010_1030_b_19L足一卷金剛鰕目一卷圓覺私記二卷
010_1030_b_20L玄談私記二卷華嚴遺忘記五卷諸經
010_1030_b_21L會要一卷拈頌着柄二卷林下錄

010_1030_b_22L并行於世建浮屠於大芚美黃法泉
010_1030_b_23L庚辰大會於大芚戊子大會於美黃
010_1030_b_24L爲人質直通簡雖爲一世所宗仰不自

010_1030_c_01L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함이 남보다 뛰어나 온갖 서적을 널리 읽었는데 한번 눈이 지나가기만 하면 다 기억할 정도였다.
교학을 널리 유통하였으며, 의미가 오묘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나 난해한 곳을 명쾌하게 해석하여 학인들이 의심하고 어려워하는 곳을 풀어 주곤 하였다. 대사가 직접 쓴 시문은 모두가 붓만 들었다 하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일부러 꾸미고 수식하기를 일삼지 않아도 천기天機가 난만爛漫하게 드러났다.
학인들을 대할 때에도 상대방의 근기를 따라 설법해 주었으므로 두루 응하여 모두 다 들어맞게 하였으니 그것은 덕이 있는 이의 말임을 알 수 있다.
이충익李忠翊1)는 연담 스님의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 스님을 따르고 좇는 제자들을 자주 만나 스님에 대해 많은 것을 들어 알고 있다. 늦게나마 연담 스님의 문집을 얻어 연담이 직접 쓴 글들을 읽어 보니 자기의 좋은 면만 부각시키지도 않았고 자신의 허물을 숨기지도 않아 스님의 속마음을 소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덕이 그 재주보다 뛰어났고 잘난 인품 또한 도를 손상하지도 않았다. 그는 또한 주공周公과 공자를 존경하였고 윤리와 의리를 돈독하게 하는 등 어떤 특정한 법에 얽매이지 않고 널리 유통시킨 인물이다.
대사의 비석은 두륜산에 세웠는데 비명은 수관 거사水觀居士 이충익이 지었다. 선법禪法을 전수받은 제자가 42명이고 교법敎法을 전수받은 제자는 33명이다. 스님의 진영眞影은 두륜산과 백양사에 각각 봉안되어 있다. 정승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교리校理 이담원李聃園이 스님의 진영 찬문을 지었다.
정암선사전晶岩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즉원卽圓이고 자字는 이우離隅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변한弁韓 임금의 후손이다. 대대로 영암 송지방松旨坊에서 살았다. 건륭乾隆 무오년(영조 14, 1738)에 태어나 3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9세 때부터 절에서 키웠으니 미황사美黃寺 재심再心 스님의 은혜였다.
16세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20세 때부터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사집四集과 사교四敎는 송파 각훤松波覺暄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대교大敎와 『현담玄談』은 연담 유일蓮潭有一 스님에게 배웠다.
점점 자라 30세가 되어 송파 스님의 법통을 이어받고, 불혹不惑의 나이인 40세에 설봉雪峰 스님에게서 선禪을 참구했다. 정암 스님에게는 제자가 되어 학문을 배우겠다고 하는 이들이

010_1030_c_01L矜持尊重自幼聰悟絕人博覽群書
010_1030_c_02L過目悉記流通敎海觽解奧結沛然
010_1030_c_03L無疑難所著詩文皆信手爲之不事
010_1030_c_04L藻飾而天機爛熳隨機說法泛應曲
010_1030_c_05L知其爲有德者言也李忠
未見師
010_1030_c_06L面貌屢從遊方者耳之晩獲文集
010_1030_c_07L其所自叙不讓 [3] 不隱過曠然如見
010_1030_c_08L其衷德勝其才俊不傷道尊周孔敦倫
010_1030_c_09L不縛於法而弘通之者也碑立於頭
010_1030_c_10L輪山水觀居士李忠翊所撰傳禪弟子
010_1030_c_11L四十二人傳敎弟子三十三人眞影
010_1030_c_12L頭輪白羊樊庵蔡相國聃園李校理并
010_1030_c_13L撰贊

010_1030_c_14L

010_1030_c_15L晶岩禪師傳

010_1030_c_16L
師名即圓字離隅姓金氏弁故王之
010_1030_c_17L世居靈岩松旨坊以乾隆戊午生
010_1030_c_18L三歲而喪其母九歲而糓於寺美黃再
010_1030_c_19L心之恩也十六薙而名二十遊而學
010_1030_c_20L四集四敎松坡覺暄之誨也大敎玄談
010_1030_c_21L蓮潭有一之授也長而立授法於松坡
010_1030_c_22L即不惑叅禪於雪峰弟子之從學者
010_1030_c_23L「近」甲本正誤表曰衍字「述」作「逑」{甲}

010_1031_a_01L구름처럼 안개처럼 많았으며 호를 받은 이만도 볏짚처럼 삼대처럼 많았다.
건륭乾隆 갑인년(정조 18, 1794)에 궁복도弓福島 중암中庵에서 적멸을 보이셨다. 5년 뒤에 아암 혜장兒庵惠藏이 궁복도에 들어가 정암 선사의 영정을 모셔 놓고 향을 사르고 제향祭享을 올렸으니 아암은 바로 정암의 법을 전해 받은 적자嫡子였기 때문이다.
정암 스님이 비록 많은 대중들을 거느리고 경을 강설하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은 오로지 자비를 실천하는 일에 힘썼고 사시舍施로 업을 삼았다. 늘 찌그러진 모자에 해진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팔꿈치가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 스님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춥고 배고픈 거지 모습 같았다.
그러나 친척 또는 제자들이 어쩌다가 비단옷을 선물로 주면 흔쾌하게 받기는 하나 얼마 못되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헌옷으로 바꿔 입고 돌아오곤 하였다. 시봉했던 스님에게 물어보면 추워 떨고 있는 이에게 벗어 주었다고 한다.
하루는 어떤 거지가 절에 찾아왔는데 그에게 이가 많다 하여 대중들이 문밖으로 쫓아냈다. 그런데 정암 스님이 그를 데리고 방장실로 가서 그에게 따뜻한 자리를 내어주고 같은 이불을 덮고 잤다. 무릇 사람으로서 명예를 위하는 자가 스님 앞에서 입을 한번 열면 그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옷 궤에 남은 옷이 없었고 항아리에 남은 곡식이 없었다. 이에 거지 수십 명이 송지松旨의 저자에 모여 약속하며 말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정암 스님이 계시는 방에 가서 곡식을 얻어 오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대중들이 다 같이 그를 쫓아내 우리들 축에 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정암 스님이 보시하여 남을 돕는 명성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날이 저물려고 할 적에 혼자서 산사로 돌아오는데 숲속에서 호랑이(於菟)가 튀어나와 스님의 옷자락을 발로 거머잡고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가 집주인을 반갑게 맞이하듯 하였다. 그래서 정암 스님이 지팡이를 휘둘러 못하게 했지만, 호랑이는 계속 스님의 뒤를 따라서 절 문 앞까지 이르러서야 꼬리를 흔들며 돌아갔다. 스님의 자비 실천이 저 동물까지 감동시킨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육근六根(눈·귀·코·혀·몸·뜻)을 베어 내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도 ‘말라빠진 똥 막대기(乾屎橛)’라 하였으니, 이미 불법을 터득했으면 호연浩然히 다 잊어버리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그러나 일단 정암 스님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은 몸이 마치도록 그를 애모愛慕하여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틀림없이 슬픈 기색을 띠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스님의 자비심에 대하여 예찬해 마지않았으니 스님에 대한 애모의 정이 뿌리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암 스님은 또 편지를 잘 써서 반 글자 한 구절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곤 했다. 스님은 글씨에도 조예가 깊어 필체가 구불구불 기괴하여 속류俗流의 솜씨로는 미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제자들 중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연파 혜장蓮坡惠藏이다. 매년 5월 12일 스님의 기일을 맞으면 재齋를 베풀고 모여 의논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기일에 정암 스님의 탑비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010_1031_a_01L1) [4] 如霧受號者如稻如麻乾隆甲
010_1031_a_02L示寂于弓福島之中庵後五年兒庵
010_1031_a_03L惠藏設像而拈香是其嫡傳也晶岩
010_1031_a_04L雖領衆說經乃其心專以慈悲爲務
010_1031_a_05L施爲業破帽壞衣捉補見肘望若寒
010_1031_a_06L然親戚弟子或贈以袍襺欣然受
010_1031_a_07L未幾出遊以故衣還問之從者
010_1031_a_08L於寒矣一日有丐者至性多虱衆共
010_1031_a_09L出之戶外晶岩引入丈室與之溫處
010_1031_a_10L同衿而宿焉凡以人爲名者一開口
010_1031_a_11L無不獲其所求以故笥無餘衣瓶無儲
010_1031_a_12L於是乞人數十會于松旨之市
010_1031_a_13L有徃得糓於晶岩禪師之室中者
010_1031_a_14L共棄不齒其以舍施名如此甞日暮獨
010_1031_a_15L有於菟隨之攀衣爲戱一似畜狗之
010_1031_a_16L其主者晶岩以杖撓止之及門彷
010_1031_a_17L搖尾而去其慈悲感物又如此佛法
010_1031_a_18L貴割根故以世尊爲乾屎橛旣得法
010_1031_a_19L然相忘例也乃一遊晶岩之門者終身
010_1031_a_20L2) [5] 語及之必戚色含涕說其慈不
010_1031_a_21L有深根焉晶岩又善尺牘隻字半
010_1031_a_22L有足以感動人心筆軆紆回奇恠
010_1031_a_23L非俗流可及弟子知名者曰蓮坡惠藏
010_1031_a_24L每五月十二日以忌設齋而龥議立晶

010_1031_b_01L그로 인해 천 리 먼 길에 사람을 보내 나(정약용)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기에 내가 그 비명을 지어 주었다.

六牖不扃主人馳    여섯 창문(六牖, 육근) 단속 못하자 주인이 치달리니
五濁胥汨貪嗔痴    오탁五濁 세계에서 탐貪·진嗔·치癡에 빠지는구나
貙虎可伏猶有私    범은 조복이 가능하나 사심은 조복하기 어려워
潮聲八萬行則陂    팔만 해조음海潮音2) 있건만 행실은 비뚤어지네
疇其力行圓禪師    그 누가 실천하나? 즉원即圓 선사가 실천하니
寒自煖他飢救飢    자신은 추워도 남을 입히고 당신은 배고파도 남을 먹이셨네
攫者來攀鄙夫慈    맹수도 순종하고 걸인들도 자비심 가졌거늘
嗟于曲經不于逵    아! 네거리 길 가지 않고 굽은 길로 가시었네
是悼是惜鑱丁碑    슬퍼하고 아쉬워하면서 겨우 비명을 지었네

비명은 열수洌水 정약용丁若鏞이 지었다. 문인은 대여섯 명이 있다.
백련선사전白蓮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도연禱演이고 호는 백련白蓮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왕가(璿潢)의 후예이다. 조선 태조太祖대왕의 손자인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후예이고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의 13세손이다. 할아버지는 해선海仙이고 아버지는 춘정春鼎이며, 강진 백도방白道坊 갈두리葛頭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그의 백부伯父는 두륜산으로 출가하였는데, 법명은 총오聰悟이다.
백련 스님은 13세에 큰아버지 총오 스님을 좇아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16세에 만화萬化 선사를 따라 구족계를 받았고, 응성應星 스님을 참알參謁하고 외전外典3)을 익혔으며, 동강桐江 이李 선생이름은 의경毅敬이다.을 뵙고 의문이 나는 점을 물었으며, 연담蓮潭 법사에게서 사교四敎를 배웠다.
선암사仙巖寺로 상월霜月 선사를 참알하고 그곳에서 열린 큰 법회의 법연法筵에 참석하였다가 상월 스님으로부터 법기法器임을 인정받았다. 18세 때부터 여러 지방을 마음대로 소요逍遙하며 선사들을 찾아뵙기도 하고 학문을 배우기도 하다가 안목이 푸르러지고 견해가 밝아지자 연담 법사에게 나아가 전법게傳法偈를 받았다. 그 게송은 이러하다.

萬丈蓮潭水      만 길 연못 물 위에
白蓮抽一枝      하얀 연꽃 한 가지 피어올랐네

이 게송으로 인하여 그의 호를 백련白蓮이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스님이 일생 동안 한 일이 하얀 연꽃의 정백精白(티 없이 맑음)함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님은 한 산문을 열고(開山) 대중들을 거느리고서 20여 년 동안 법장法藏을 열어 보였다.
건륭乾隆 2년 정사(영조 13, 1737)에 태어나 가경嘉慶 12년 정묘(순조 7, 1807) 4월 3일 진불암眞佛庵 조실에서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010_1031_b_01L岩之碑是以遣人千里乞余銘余銘
010_1031_b_02L六牖不扃主人馳五濁胥汨貪嗔痴
010_1031_b_03L貙虎可伏猶有私潮聲八萬行則陂
010_1031_b_04L其力行圓禪師寒自煖他飢救飢攫者
010_1031_b_05L來攀哼夫慈嗟于曲經不于逵是悼是
010_1031_b_06L惜鑱丁碑洌水丁若鏞撰門人五
010_1031_b_07L六人

010_1031_b_08L

010_1031_b_09L白蓮禪師傳

010_1031_b_10L
師名禱演號白蓮姓李氏系出璿潢
010_1031_b_11L太祖大王孫德泉君厚生之裔雲水君
010_1031_b_12L孝誠之十三世孫祖海仙父春鼎
010_1031_b_13L津白道坊葛頭里人其伯父出家於頭
010_1031_b_14L輪山名聦悟十三從悟師零染十六
010_1031_b_15L從萬化禪師受具叅應星師習外典
010_1031_b_16L謁桐江李先生
質疑從蓮潭法師
010_1031_b_17L四敎叅仙岩寺霜月禪師質大會之法筵
010_1031_b_18L師深器之十八質任性逍遙叅之學之質
010_1031_b_19L眼已靑見已白就蓮潭法師受傳法
010_1031_b_20L偈曰萬丈蓮潭水白蓮抽一枝
010_1031_b_21L號白蓮一生所作之事無異白蓮之精
010_1031_b_22L白也開山領衆開示法藏二十餘年
010_1031_b_23L乾隆二年丁巳生嘉慶十二年丁卯四
010_1031_b_24L月三日示寂于眞佛庵祖室世壽七十

010_1031_c_01L승랍은 55년이다.
조정에서는 백련 스님에게 ‘해남 표충사수호 겸팔도승풍규정 선교양종화엄강주 대각등계보제존자 도총섭海南表忠祠守護兼八道僧風糾正禪敎兩宗華嚴講主大覺登階普濟尊者都摠攝’이라는 승직을 추증追贈하였다.
스님은 소박하고 진실하였으며 거짓이 없었고 자신을 자랑하거나 밖으로 겉치장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제자 네 명이 있었으니 평월 계형平月戒馨·송악 우신松岳佑信·인담 의철仁潭義哲·완호 윤우玩虎倫佑이고, 상자上資(上佐) 두 사람이 있었으니 정지正持 스님과 설현雪賢 스님이며, 계를 받은 제자로는 시오始悟·승일勝一·승헌勝憲·승환勝還·승현勝賢·지홍智弘 등 20여 명이나 된다.
대둔사 서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며, 탑명은 감역監役 정학연丁學淵4)이 지었다.
현해선사전懸解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모윤慕閏이고 호는 현해懸解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해남 온수동溫水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영곡靈谷 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다. 스님은 세속의 일에도 밝아서 세속에 출입하면서 절 밖에 모아 둔 재물도 풍족하였다. 조정에서는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증직하였으며, 대둔사 주지의 직책을 수행하다가 세속 나이 70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다비를 하던 날 초골超骨이 나오자 이는 실로 기이한 일이라 하여 산문의 대중들이 일제히 모였으며 스님의 권속들은 환희하였다. 계를 받을 때 스님은 영곡靈谷 스님의 영전에 향을 사르고 호를 받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선생에게 비명을 써 달라고 청하자 다산은 이렇게 비명을 지어 주었다.

生而嘉善其爵     살아서는 가선대부의 벼슬을 했고
死而懸解其號者    죽어서는 현해라는 호를 받았으니
頭輪山僧慕閏也    바로 두륜산 모윤慕閏 스님이로다
生而齧肥       살아서는 풍족한 생활을 하셨고
死而超骨       죽어서는 사리를 남기시니
論者奇之       여기 모인 모든 사람 기이하다 하네

스님으로부터 깊은 은혜를 입은 제자는 표운表雲·율견律堅·색성賾性·도우道祐·도익道益 등이 있는데, 이 제자들이 돌을 캐어다가 사리탑을 세우고 탑에 올라가는 계단도 돌로 장식했다.

010_1031_c_01L僧臘五十五贈海南表忠祠守護兼
010_1031_c_02L八道僧風糾正禪敎兩宗華嚴講主大覺
010_1031_c_03L3) [6] 普濟尊者都揔攝師朴實無僞
010_1031_c_04L不矜外飾有弟子四人曰平月戒馨
010_1031_c_05L松岳佑信仁潭義哲玩虎倫佑上資
010_1031_c_06L二人曰正持雪賢傳戒者曰始悟勝
010_1031_c_07L一勝憲勝還勝賢智弘等二十餘人
010_1031_c_08L塔于大芚寺之西麓塔銘監役丁學淵
010_1031_c_09L

010_1031_c_10L

010_1031_c_11L懸解禪師傳

010_1031_c_12L
師名慕閏號懸解姓李氏海南溫水
010_1031_c_13L洞人出家於頭輪山受戒於靈谷禪師
010_1031_c_14L出入世諦外財饒足贈嘉善大夫行住
010_1031_c_15L年至稀歲奄然順世茶毘之日
010_1031_c_16L超骨是實異矣山中齊會眷屬歡喜
010_1031_c_17L向受戒師靈谷靈前拈香受號請茶山
010_1031_c_18L丁先生塔銘銘曰生而嘉善其爵
010_1031_c_19L而懸解其號者頭輪山僧慕閏也生而
010_1031_c_20L齧肥死而超骨4) [7] 者奇之受其恩者
010_1031_c_21L表雲律堅賾性道祐道益攻石封層▼(土+遂)
010_1031_c_22L「雪」甲本正誤表作「雲」「暮」甲本正誤表
010_1031_c_23L作「慕」
「堦」甲本正誤表作「階」「論」作
010_1031_c_24L「輪」{甲}

010_1032_a_01L
또 스님에게서 법을 받은 제자인 화성 문암花城聞庵은 스승의 영정을 제작해 봉안하고 재를 올렸다. 정약용 선생이 스님의 상찬像贊을 지었다.
완호강사전玩虎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윤우倫佑이고 자는 삼여三如이며, 호는 완호玩虎이다. 아버지는 시택時澤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해남군 별진別津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13세에 출가하여 두륜산 서일瑞日 장로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어 스님이 되었다. 17세에 구족계를 받은 뒤 백련白蓮 법사로부터 내전內典(불경)을 배웠고, 연담蓮潭 조사를 참알하고 선참禪懺을 배웠으며, 백련 법사의 의발을 전해 받았다.
을묘년(정조 19, 1795)에 불호사佛護寺의 일봉암日封庵에 주석하였고, 병진년(정조 20, 1796)에 나주 쌍계사雙磎寺 보현암普賢庵에 머물렀으며, 그해 겨울에는 서운암瑞雲菴에 가서 살았다. 정사년(정조 21, 1797) 여름에는 도갑사道甲寺 하동암下東庵에 옮겨 가서 살았다.
무오년(정조 22, 1798) 가을에는 본사本寺(대둔사)의 경을 강론하는 큰 법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고, 10월에 본사에 와서 청풍료淸風寮에 머물면서 겨울을 나는 동안 스님이 지도한 학인들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기미년(정조 23, 1799) 정월 보름이 지난 뒤에 상원암上院庵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였는데, 그 무렵 은암銀岩 대사가 새로 입실入室하였기 때문에 강석을 은암 대사에게 물려주었다. 그해 9월에는 미황사美黃寺의 초청을 받고 중암中庵으로 가서 거주하였고, 경신년(정조 24, 1800)에는 다시 본사의 초청을 받고 남암南庵으로 가서 대보전大寶殿의 단청을 고쳤다.
신유년(순조 1, 1801)에는 일봉암에 거주하였고, 임술년(순조 2, 1802) 3월에 함평 용천사龍泉寺로 가서 용문암龍門庵에 머물렀다. 12월에는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 관음전觀音殿으로 이주하였고, 계해년5)(순조 3, 1803) 봄에는 환봉煥峯 스님과 미황사의 여척如倜 스님과 함께 서울(京師)로 올라가 석재를 사다가 연담 대사 비석을 세웠다.
갑자년(순조 4, 1804)에는 나주 쌍계사雙磎寺 은선암隱仙庵으로 이주하였고, 그해 여름에는 문수암文殊庵에 머물렀다. 을축년(순조 5, 1805) 겨울에는 보림사寶林寺 동암東菴에 머물렀고 정묘년(순조 7, 1807) 봄에는 청운당靑雲堂에서 가사불사袈裟佛事를 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는 법사였던 백련 화상이 입적하자 스님은 장례식에 참석해서 곡을 했다. 무진년(순조 8, 1808) 겨울에는 대둔사 낭암朗岩 화상에게서

010_1032_a_01L受其法者花城聞庵設像奉奠丁先
010_1032_a_02L亦撰像贊

010_1032_a_03L

010_1032_a_04L玩虎講師傳

010_1032_a_05L
師名倫佑字三如號玩虎父時澤
010_1032_a_06L金氏海南別津人十三出家依頭輪
010_1032_a_07L山瑞日長老薙髮染衣十七受具
010_1032_a_08L白蓮法師受內典叅蓮潭祖師受禪
010_1032_a_09L受白蓮法師衣鉢乙卯住佛護之日
010_1032_a_10L丙辰住羅州雙溪之普賢冬住瑞雲
010_1032_a_11L丁巳夏移住道甲之下東戊午秋
010_1032_a_12L本寺大會之1) [8] 十月來住淸風寮
010_1032_a_13L學人百餘人己未正月望後移住
010_1032_a_14L上院銀岩大師新入室故傳講於銀
010_1032_a_15L九月受美黃寺請徃住中庵庚申
010_1032_a_16L又受本寺請來徃南庵改大寶殿之金
010_1032_a_17L辛酉居日封壬戌三月赴咸平龍
010_1032_a_18L泉寺住龍門庵臘月移住南平雲興之
010_1032_a_19L觀音殿癸未 [8] 送煥峯及美黃如倜
010_1032_a_20L徃京師買石刻蓮潭祖師碑甲子移住
010_1032_a_21L羅州雙溪之隱仙住文殊庵乙丑冬
010_1032_a_22L住寶林之東菴丁卯春設袈裟佛事于
010_1032_a_23L靑雲堂四月三日哭法師白蓮和尙之
010_1032_a_24L戊辰冬自日封受大芚寺朗岩和尙

010_1032_b_01L강경講經 법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청을 받고 일봉암에서 내려와 겨울을 지낸 뒤, 기사년(순조 9, 1809) 정월에는 다시 일봉암으로 돌아가 머물렀다.
경오년(순조 10, 1810)에는 창평昌平에 있는 용흥사龍興寺 보현암普賢庵에서 머물렀고, 신미년(순조 11, 1811) 2월에는 가리포加利浦 첨사僉使가 이경二更에 절에 들어왔는데 세 사람의 보좌관들이 횃불을 들고 창고에 들어왔다가 불씨가 떨어진 줄을 몰라서 그로 인해 불이 났다. 불은 가허루駕虛樓에서 일어나 가허루는 물론 천불전千佛殿·대장전大藏殿·용화당龍華堂·팔해당八解堂·적조당寂照堂·지장전地藏殿·약사전藥師殿·향로전香爐殿 등 아홉 채의 요사가 하룻밤에 다 타버렸다. 스님은 손수 권선문勸善文을 가지고 다니면서 권선하여 이 건물들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임신년(순조 12, 1812) 봄에는 호의縞衣 스님이 조실로 입실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정축년(순조 17, 1817)에는 서울로 올라가 그림 그리는 화가를 찾아 경주 기림사祇林寺로 내려가 크게 불사를 하였다. 그 무렵 석 달 사이에 세 번 방광放光을 하였고 세 번 서기瑞氣가 어렸다. 그해 10월에 1천 불상을 조성하여 점안식까지 마친 뒤에 11월 16일 불상을 배로 옮겨 실었는데 700구軀는 큰 배에 싣고 그 배에는 증명법사인 인봉仁峰 스님과 그림 그리는 스님 풍계楓溪 대사가 함께 타고, 300구는 작은 배에 싣고 그 배에는 호의 스님이 같이 탔다. 동래 오륙도에 이르렀을 때 태풍을 만났는데 작은 배는 연안으로 돌아갔으나 큰 배는 표류하다가 11일 만에 일본국 장기도長崎島 축전주筑前州에 도착했다.
이듬해인 무인년(순조 18, 1818) 6월 17일에 배를 타고 일본을 떠나 11일 만에 부산진釜山鎭 앞바다로 돌아왔다. 7월 14일에 완도 원동院洞 대진강大津江에 이르렀다. 15일에 절로 올라와서 8월 15일에 새로 지은 법당에 천불을 봉안하였다. 천불 중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갔던 불상들은 그 어깨 위에 모두 ‘일日’ 자를 써서 표시해 놓았다.
완호 스님은 일선에서 물러나 한산전寒山殿에 주석하다가 병술년(순조 26, 1826) 가을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스님 열여섯 명이 와서 말하기를 “들으니 스님께서 어디론가 떠나신다고 하기에 특별히 와서 작별 인사를 나누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말하였다.
“응진應眞(나한)들이 와서 작별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삶의 인연이 다 되었구나.”
그러더니 과연 8월 23일에 한산전에서 적멸을 보이니, 세속 나이는 69세이고 승랍은 53년이었다.

010_1032_b_01L大會之請下來過冬己巳正月還住
010_1032_b_02L日封庚午住昌平龍興之普賢辛未二
010_1032_b_03L加利僉使二更入寺三補取炬入庫
010_1032_b_04L不知火落因而火起駕虛樓千佛殿大
010_1032_b_05L藏殿龍華堂八解堂寂照堂地藏殿藥師
010_1032_b_06L殿香爐殿等九寮一夜燒燼師自荷勸
010_1032_b_07L以次起立壬申春設縞衣入室
010_1032_b_08L上京得畫師下慶州祇林寺大作
010_1032_b_09L佛事三朔之間放光者三瑞氣者三
010_1032_b_10L十月千佛造成點眼訖十一月十六日
010_1032_b_11L運佛以船七百軀載以大船仁峰證師
010_1032_b_12L楓溪畫師同乘三百軀載以小船縞衣
010_1032_b_13L禪師同乘至東萊五六島逢大風
010_1032_b_14L船則沿岸而還大船漂流凡十一日
010_1032_b_15L至日本國長崎島筑前州着焉翌戊寅
010_1032_b_16L六月十七日自日本發船凡十一日
010_1032_b_17L還泊釜山鎭前洋七月十四日到莞島
010_1032_b_18L院洞之大津江中十五日上寺八月十
010_1032_b_19L五日奉安千佛于新造法堂凡遭漂流
010_1032_b_20L之佛其肩上皆書日字以志之退居
010_1032_b_21L寒山殿丙戌秋夢有僧十六人來告曰
010_1032_b_22L聞師有行特來相別覺曰應眞來辭
010_1032_b_23L生緣盡矣果於八月二十三日示寂于
010_1032_b_24L寒山殿世壽六十九僧臘五十三

010_1032_c_01L
일찍이 영원사에 머물 때 꿈속에서 이런 말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과거도 여여하고(過如) 현재도 여여하며(現如) 미래도 여여하다(未如).”
이 말을 듣고 나서 완호 스님은 자를 삼여三如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스님이 선근善根의 힘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진여인眞如印을 얻어 미래의 중생들을 위하여 나타내 보인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스님은 평생 토지를 구한 적이 없었고 죽는 날까지 음식을 가려 먹지 않으셨다.
스님이 선학을 전해 준 제자는 20여 명이고, 교학을 전해 준 제자는 10여 명이며, 계를 설해 준 제자는 무려 80여 명이나 된다.
나라에서 스님에게 ‘선교양종 화엄강주禪敎兩宗華嚴講主’라는 승직을 추증追贈했는데, 그런 직분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위대한 강백이었다.
우선 두륜산 왼쪽에 부도를 세웠다가 얼마 후에 탑 오른쪽에 비석을 세웠다. 비명은 정승(相國) 권돈인權敦仁6)이 지었다. 대둔사 동쪽 산골짜기에 영각影閣을 세우고 스님의 영정을 모셨다. 스님의 호는 완호玩虎가 아니라 본래는 완호玩湖였다.
낭암강사전朗巖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시연示演이고 호는 낭암朗巖이며,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달마산達摩山에서 출가했으며, 설봉雪峰 스님과 벽하碧霞 스님의 문하에서 내전과 외전을 모두 배웠고, 송암松庵 스님의 조실에 들어가 향을 사르어 올리고 게偈를 받아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으니, 스님은 백월白月 스님과는 법형제가 되고 송파 스님의 손자 제자가 된다.
스님은 두륜산 대둔사 약사전藥師殿에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학인들이 100여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을축년(순조 5, 1805)에 능주 개천사開天寺 백련암白蓮庵에 머물렀다. 그는 널리 배우고 깊이 사색하였으나 일찍이 글자에 얽매여 열람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대하여 토론을 하면 마치 겹겹이 닫혔던 문이 하나하나 열리듯이 명확하게 밝혀 주었다. 스님의 성품은 소박하고 신실하여 털끝만큼도 꾸밈이 없었다. 계율을 엄정하게 지켰으며 교학의 바다가 수정처럼 맑게 비추었다.
눈을 감으면 동원東園의 꽃을 잊고 입을 열면 서강西江의 물을 다 마시는 기상을 지녔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드는 이들이 너무 많아 문을 가득 메우고 주변에 피해를 입힐 지경이었다. 뿌리가 서리고 가지가 엉겨 있는 것처럼 복잡한 내용(盤錯)을 풀고자 몰려드는 이들이 손뼉을 치고 힘차게 뛰어오르면서 달마대사가 다시 나타났거나 사명 스님이 얼굴을 바꾸어 나타나신 게 아니냐고 하였다.
위에는 두 소나무(兩松, 松庵과 松坡)의 그늘이 드리웠고 아래에는 세 달 (三月, 月 자 이름의 세 제자)이 밝게 비추고 있으니

010_1032_c_01L於靈源得夢曰過如現如未如遂以
010_1032_c_02L三如字之師以善根力得諸佛眞如印
010_1032_c_03L爲未來示現且無疑矣生無田地料
010_1032_c_04L死無衣食分別傳禪弟子二十餘人
010_1032_c_05L傳敎弟子十餘人傳戒者八十有餘
010_1032_c_06L禪敎兩宗華2) [9] 講主云云3) [10] 心底
010_1032_c_07L先立浮屠于輪山之左後立碑于塔之
010_1032_c_08L權相國4) [11] 仁之撰建影閣于大
010_1032_c_09L芚之東峽玩虎本是玩湖也

010_1032_c_10L

010_1032_c_11L朗巖講師傳

010_1032_c_12L
師名示演號朗巖靈岩人出家於達
010_1032_c_13L摩山習內外典於雪峰碧霞之門拈香
010_1032_c_14L受偈於松庵之室與白月比肩松坡之
010_1032_c_15L設華嚴法會於頭輪山之藥師殿
010_1032_c_16L數百餘人乙丑住綾州開天寺白蓮
010_1032_c_17L博學深索曾不苟閱對人討論
010_1032_c_18L開重門性本朴實毫無餙華戒器嚴
010_1032_c_19L敎海晶照閉目絕東園之花開口
010_1032_c_20L吞西江之水聞腥薌而至者寘門甐域
010_1032_c_21L解盤錯而歸者抃手蹈足達摩重現
010_1032_c_22L泗溟換面上垂兩松之蔭下照三月之
010_1032_c_23L「淸」甲本正誤表作「請」「華」甲本正誤表
010_1032_c_24L作「嚴」
「愢」甲本正誤表作「愧」「敦」作
010_1032_c_25L「郭」{甲}

010_1033_a_01L산은 비록 운이 물러갔으나 인걸은 간간이 태어나는가보다.
연주蓮舟가 월화月華의 못에 닻을 내리고 혼허渾虛가 철산鐵山의 자리에 꽃을 뽑아 들었네.
낭암 스님에게서 선禪과 교敎와 계戒를 전해 받은 제자는 손꼽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출가한 동기와, 스님이 되어 생활한 일과, 세상을 떠난 일 등은 비석에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니 어찌 군말을 하겠는가? 낭암 스님의 비석은 달마산에 세워져 있으며, 그 비문은 감역監役 정학연丁學淵이 지었다.
스님의 제자는 일곱 명이 있다.
연파강사전蓮坡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장惠藏이고 호는 연파蓮坡이며, 또는 아암兒庵이라고도 한다. 연파 스님은 설봉雪峰 스님의 증손 제자이고 송파松坡 스님의 손자 제자이며 정암晶岩 스님의 법을 이은 사법嗣法 제자이다.
일찍이 두륜산 청풍료淸風寮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는데, 그 당시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다산茶山이 쓴 비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암의 본래 호는 연파이다. 대둔사 12종사宗師 중에 연담 대사가 맨 끝인 열두 번째이고, 또 그 뒤 12강사講師 중에는 연파 대사가 맨 끝인 열두 번째이다. 그런데 끝이란 것은 뒤처진다는 말이 아니고 꽃을 피웠다는 의미이다. 연담 노장은 대련大蓮이고 연파 공은 소련小蓮이다.”
탑명塔銘에 말하였다.
“아암은 본래 김金씨이고 혜장은 그의 법명이다. 자字는 무진無盡이고 본래의 호는 연파이다. 새금현塞琹縣 화산방華山坊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어려서 출가하여 대둔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월송 재관月松再觀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춘계 천묵春溪天默 스님으로부터 학업을 연마했다. 천묵 스님은 외전外典도 두루 꿴 석학이었고, 아암은 지혜가 출중하였으므로 그에게 학업을 닦은 지 수년 만에 스님들 사이에 그 명성이 자자했다.
이미 장성해서는 불서를 널리 배우고 연담 유일蓮潭有一과 운담 정일雲潭鼎馹을 차례로 섬겼다. 스님은 나이 27세에 정암 즉원晶巖即圓 스님 아래에서 향을 뽑아 사르고 그의 법통을 이었으니, 정암 스님은 곧 소요逍遙 스님의 종통을 계승한 분으로 화악 문신華岳文信의 적전嫡傳이다.
아암 스님은 여러 스승들로부터 경전을 배웠는데, 비록 머리를 숙이고 강설을 듣곤 하였으나 문밖을 나설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기를 “틀렸다.(呸)”라고 말하곤 하였다. ‘비呸’란 ‘비웃는 말(哂)’이다. 그러나 오직 연담 스님의 글이나 가르침에 대해서는 틀렸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010_1033_a_01L山雖運退人則間生蓮舟下碇於
010_1033_a_02L月華之潭渾虛拈花於鐵山之席禪傳
010_1033_a_03L敎傳律傳指不勝屈出家作家棄家
010_1033_a_04L碑在何贅碑豎達摩山監役丁學淵撰
010_1033_a_05L門人七人

010_1033_a_06L

010_1033_a_07L蓮坡講師傳

010_1033_a_08L
師名惠藏號蓮坡又曰兒庵雪峯之曾
010_1033_a_09L松坡爲孫晶岩之嗣甞於頭輪山
010_1033_a_10L淸風寮設華嚴大法會時年甫三十
010_1033_a_11L碑銘曰兒庵本號蓮坡也大芚之十二
010_1033_a_12L宗師蓮潭居其末焉又其後十二講師
010_1033_a_13L蓮坡居其末焉非末也華也蓮老
010_1033_a_14L蓮也坡公小蓮也塔銘曰兒庵本金
010_1033_a_15L惠藏其法名字曰無盡本號蓮坡
010_1033_a_16L塞琹縣之華山坊人幼而出家落髮於
010_1033_a_17L大芚寺受月松再觀具從春溪天默學
010_1033_a_18L天默淹貫外典而兒庵警慧出衆學之
010_1033_a_19L數年名噪緇林旣長廣受佛書歷事
010_1033_a_20L蓮潭有一雲潭鼎馹年二十七拈香
010_1033_a_21L於晶岩即圓即逍遙之宗華岳文信之
010_1033_a_22L嫡傳也兒庵從諸師受經雖低首聽說
010_1033_a_23L及出戶外覺口中有聲曰呸呸也者
010_1033_a_24L哂之也唯蓮潭手劄口授則不呸也

010_1033_b_01L나이 겨우 30에 두륜산 큰 법회에 주맹主盟이 되었는데 그 법회에 모인 학인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아암은 외전에 대해서는 『주역』과 『논어』를 매우 좋아하였는데, 그 지취旨趣를 연구할 때는 그 깊은 이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또 기윤期閏의 수, 즉 율력律曆과 율려律呂(음률)의 법과 성리학 등 모든 책에 대하여 그 정핵精核을 모조리 연마하였다. 그러므로 웬만한 세속의 유생들은 그에 미칠 사람이 없었다.
스님은 성품이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가 지은 시는 매우 적었고, 게다가 운韻을 부르면 그 운을 따라 즉석에서 시를 짓는 것은 잘 못했지만, 누가 시를 지어 주면 반드시 화답和答을 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곧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특히 병려騈儷와 율격律格에 재능이 있었다.
스님은 불서에 대해서 지독하게도 『수능엄경』과 『기신론』을 좋아했으며, 『조왕경竈王經』이나 「측주厠呪」 따위는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아 다른 스님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스님에게는 유명한 제자 세 명이 있었으니, 수룡 색성袖龍頣性·철경 응언掣鯨應彦·침교 법훈枕蛟法訓이 스님의 의발을 전해 받았다.
아암 스님도 어느새 늙어 신미년(순조 11, 1811) 가을에 병을 얻었다. 9월 16일 북암北庵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마흔 살이다.”
두륜산에 비석을 세웠는데 비명은 열수洌水 정약용이 지었다. 스님의 문집 1권이 세상에 유포되었으며 상원암上院庵에 영각影閣을 지었다.
백파강사전白坡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긍선亘璇이고 호는 백파白坡이며, 거주하던 방의 당호堂號는 구산龜山이고 무장茂長(전북 고창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선운사禪雲寺에서 출가하여 사방의 산문을 유람하면서 오교五敎를 두루 열람하였다. 순창 구암사龜巖寺에 주석하면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학인 승려들을 맞이하여 강론한 지 30여 년이 지나자, 그는 일선에서 물러나 별원別院에 거처하면서 변별辨別하기가 불편한 책들을 개선하는 일에 대부분 시간을 보냈다.
말하자면 『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는 글자가 너무 작아서 강학講學을 하기에 편리하지 못한 것을 큰 글자로 고쳐서 개간開刊하였고, 따로따로 간행되어 있던 불교의식(齋儀)을 한데 모아 편집해서 『작법귀감作法龜鑑』 2권을 간행하였으며, 『선문강요禪門綱要』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에 주석을 달아 편집하여 『선문수경禪門手鏡』을 만들었고, 내전은 물론 외전의 사기私記까지도

010_1033_b_01L年甫三十主盟於頭輪之會會者百有
010_1033_b_02L餘人兒庵於外典酷好周易論語
010_1033_b_03L索旨趣期不遺蘊若期閏之數律呂
010_1033_b_04L之度及性理諸書皆精核硏磨非俗
010_1033_b_05L儒可及性不喜詩所作絕少又不能
010_1033_b_06L急有贈必追和之乃驚人尤工駢
010_1033_b_07L儷律格精嚴於佛書篤好首楞嚴起信
010_1033_b_08L而竈經厠呪未或被脣髠者病之
010_1033_b_09L有三徒曰袖龍頣性1) [12] 鯨應彥
010_1033_b_10L2) [13] 蛟法訓旣授衣鉢兒庵乃老辛未
010_1033_b_11L得病九月旣望示寂于北庵其壽
010_1033_b_12L四十立碑于頭輪山洌水丁若鏞
010_1033_b_13L文集一卷行于世建影閣于上院
010_1033_b_14L

010_1033_b_15L

010_1033_b_16L白坡講師傳

010_1033_b_17L
師名亘璇號白坡室曰龜山茂長人
010_1033_b_18L出家於禪雲寺遊學四山徧覽五敎
010_1033_b_19L住錫於淳昌之龜岩開門接乘講者
010_1033_b_20L十餘年退處別院辨別於不便者
010_1033_b_21L曰起信之記細小難便於講學者
010_1033_b_22L大字開刊齋儀之散行者會集開刊
010_1033_b_23L名曰龜鑑集二卷禪門綱要之難解者
010_1033_b_24L集註開刊曰禪門手鏡內外之私記

010_1033_c_01L학인들이 배우기 편리하도록 정리하는 등 매우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백파 스님이 적멸을 보이자 문도들이 그의 행장을 수집하여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7)에게 올려 서문을 받았다. 추사의 서문은 이러하다.
“우리 동방의 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의 한 종사宗師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그에 해당하는 스님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백파 스님을 율사라고 쓰는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8)은 바로 백파 스님이 80 평생 가장 힘을 쏟았던 부분이다.
혹 어떤 이들은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두고 백파 스님의 논리가 갈피를 잡을 수 없다고 하거나 너무 천착한 부분이라고들 말하지만 이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무릇 보통 사람들을 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것이든 살활殺活과 기용機用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비록 대장경이 팔만이나 되지만 어느 한 가지 법도 살활기용을 벗어난 것이 없다. 다만 사람들은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백파 스님이 살활과 기용에 집착하고 있다고 함부로 오해를 하고 있으니, 이는 비유하면 마치 하루살이가 나무를 흔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이들이 어찌 족히 백파를 안다고 하겠는가?
지난날 백파 스님과 함께 여러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란을 벌인 일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함부로 논의하지 않았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하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
아무리 온갖 일을 다 동원하여 입에 단내가 나도록 설한다 해도 사람들은 다 이해하고 깨달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백파를 다시 살아나게 하여 서로 마주하고 앉아서 크게 한번 웃어 볼 수 있을까?
지금 백파 스님의 비석을 세운다 하니 그 비석의 앞면에 만약 ‘대기대용’이라는 한 구절을 크게 새기지 않는다면 백파의 비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백암白岩과 설두雪竇 등 여러 문도들에게 글을 써서 보여 주는 것이다.”
추사는 큰 글씨 한 줄로 ‘화엄종주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고 써 주었다.
비명은 이러하다.

貧無卓錐       가난하여 송곳 꽂을 땅도 없었으나
氣壓須彌       늠름한 기상은 수미산을 누르고
事親如事佛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섬기듯 하니
家風最眞實      가풍은 가장 진실하여라
厥名兮亘璇      그 이름은 긍선亘璇이지만
不可說轉轉      그러나 그를 전전轉轉한다 말할 순 없네9)

스님이 자찬自賛한 글은 이러하다.

頭髼鬆兮眼卓朔    머리는 더부룩하고 눈은 툭 불거졌으니
此其老僧眞面目    그 모습이 이 늙은이의 진면목이라네
上柱天下柱地     위로는 하늘을 버티고 아래로는 땅을 버티고 있는 것을
佛祖元來覔不得    부처님도 조사祖師도 원래 찾아내지 못했네

010_1033_c_01L任便學者甚多矣師示寂收集行狀
010_1033_c_02L上金秋史秋史序之曰我東近無律師
010_1033_c_03L一宗惟白坡可以當之故以律師書之
010_1033_c_04L大機大用是白坡八十年藉手着力處
010_1033_c_05L或有以機用殺活支離穿鑿是大不然
010_1033_c_06L凡對治凡夫者無處非殺活機用雖大
010_1033_c_07L藏八萬無一法出於殺活機用之外者
010_1033_c_08L特人不知此義妄以殺活機用爲白坡
010_1033_c_09L拘執着相者是皆蜉蝣撼樹也是爲足
010_1033_c_10L以知白坡也昔與白坡徃復辨難者
010_1033_c_11L即與世人不3) [14] 議者大異此個處
010_1033_c_12L坡與吾知之雖萬般苦口說人皆不解
010_1033_c_13L悟者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4) [15]
010_1033_c_14L作白坡碑面字若不大書特書於大機
010_1033_c_15L大用一句不足以爲白坡碑也書示白
010_1033_c_16L岩雪竇諸門徒大書一行曰華嚴宗主
010_1033_c_17L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銘曰貧無
010_1033_c_18L卓錐氣壓須彌事親如事佛家風最
010_1033_c_19L眞實厥名兮亘璇不可說轉轉師自
010_1033_c_20L賛曰頭髼鬆兮眼卓朔此其老僧眞面
010_1033_c_21L5) [16] 天下*柱地佛祖元來覔不得
010_1033_c_22L「製」甲本正誤表作「掣」「鮫」甲本正誤表
010_1033_c_23L曰「衍字」
「忘」甲本正誤表作「妄」「令」甲
010_1033_c_24L本正誤表作「今」
「柱」甲本正誤表作「拄」次
010_1033_c_25L

010_1034_a_01L呵呵呵是甚麽     하하하! 도대체 그게 무어란 말인가?
南北東西唯是我    남북동서에 오직 나뿐이로세

문인들이 선운사에 비석을 세웠으며, 비문은 참판을 지낸 김정희추사가 지었다. 백파 스님은 설봉雪峰의 법을 이은 사법 제자이고 퇴암退庵의 손자 제자이며, 설파 상언雪坡常彦의 증손 제자이고 호암 체정虎岩體淨의 현손 제자이다. 그의 제자로는 구봉龜峰·도봉道峰·정관定觀·백암白岩·영산影山·혜암惠庵 등이 있다. 문집 4권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다.
양악선사전羊岳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계선啓璇이고 호는 양악羊岳이며, 속성은 오吳씨이고 창평昌平(전남 담양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 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설파雪坡와 운담雲潭 스님에게 내전과 외전을 배웠다. 학문의 바다가 넓어지고 교학의 눈이 맑아지자 문장의 가풍을 크게 떨치고 덕이 많기가 남들보다 뛰어나 백암이 다시 온 것인지 각진覺眞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지 의심할 정도였다.
스님은 학문이 이미 이루어지고 도가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르자 연담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연담 스님의 저서 중에 『비망기備忘記』 5권이 있다. 그런데 그 책을 손수 2본을 써서 한 본은 강설하는 자리에 놓아두고 다른 한 본은 양악 스님에게 주어 보게 하였는데 영남 지방에서 온 학인이 강력하게 간청하여 가져가 버렸다.
양악 스님은 일찍이 『고문사기古文私記』 1권을 지었는데 강론하는 도량에 전해지고 있다. 조정에서는 ‘해남 표충사수호 겸팔도승풍규정 선교양종 화엄강주 대각등계보제존자 도총섭海南表忠祠守護兼八道僧風糾正禪敎兩宗華嚴講主大覺登階普濟尊者都摠攝’이라는 직첩을 추증하였다.
표충사表忠祠에 머물고 있을 때 마침 송광사松廣寺의 형암荊庵 화상과 함께 살게 되자 사람들은 스님 문장가가 다 모였다고들 말하였다. 누가 간혹 글에 대하여 물어 오면 형암 화상은 말하기를, “양악 노장님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글에 대해 말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오른쪽에는 양악 스님, 왼쪽에는 형암 스님’이라고 말했다.
일찍이 시를 짓는 자리에서 양악 스님이 ‘하사何事’라는 글귀를 ‘저사底事’라고 고친 이후로 사람들은 양악 스님을 ‘일자사一字師’라고 불렀다. 스님은 청류암淸流庵에 오래 머물러 살았다.
스님께 계를 받은 제자는 20여 명이고 수은受恩 제자의 이름은 범운梵雲이며, 법을 전해 받은 제자로는 침송 성순枕松聖詢·문곡 치성文谷致成·침월 윤성枕月允成·

010_1034_a_01L呵呵呵是甚麽南北東西唯是我立碑
010_1034_a_02L于禪雲寺叅判金正喜
雪峯
010_1034_a_03L之嗣退庵之孫雪坡彥之曾虎岩淨
010_1034_a_04L之玄弟子有龜峰道峰定觀白岩影山
010_1034_a_05L惠庵等文集四卷行于世

010_1034_a_06L

010_1034_a_07L羊岳禪師傳

010_1034_a_08L
師名啓璇號精岳姓吳氏昌平人
010_1034_a_09L家於白羊山落髮於□□禪師學內外
010_1034_a_10L典於雪坡雲潭學海汪洋敎眼淸明
010_1034_a_11L文風大振德量過人白岩之應歟
010_1034_a_12L眞之興歟學已成道已熟拈香於蓮
010_1034_a_13L潭法師所述偹忘記五卷手書二本
010_1034_a_14L一本留講筵一本授師看自嶺南來學
010_1034_a_15L力請抱去甞記古文私記一卷
010_1034_a_16L于講場贈海南表忠祠守護兼八道僧
010_1034_a_17L風糾正禪敎兩宗華嚴講主大覺登1) [17]
010_1034_a_18L普濟尊者都揔攝住於表忠祠適會松
010_1034_a_19L廣荊庵和尙同住2) [18] 僧文章並會云
010_1034_a_20L人或問書荊曰羊老之時何敢言耶
010_1034_a_21L時右羊岳左荊庵故也甞於詩席改何
010_1034_a_22L事爲底事人稱一字師久住淸流庵
010_1034_a_23L有受戒弟子二十餘人受恩弟子名梵
010_1034_a_24L傳法弟子 [9] 聖詢文谷致成枕月允

010_1034_b_01L해운 신영海雲愼英·인암 의준仁岩儀俊·석암 익진石岩翼振 등이 있다.
지금 양악 스님의 법맥은 제4대까지 이어져서 보경寶鏡·응운應雲·금해錦海 등이 서로 돌부鈯斧(법통)를 지켜 오고 있으며, 영각을 세워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 천신薦新하고 있다.
문집 2권이 그의 문중에 소장되어 있으며, 부도는 두륜산에 세워졌다.
은암강사전銀岩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정호正浩이고 호는 은암銀岩이며, 속성은 송宋씨이고 해남군 용당龍塘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 두륜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처음 돌아다니면서 학문을 익힐 때에는 솔잎을 먹고 풀로 지은 옷을 걸치고 다녔으나 나중에는 법재法財가 풍족하였다.
가경嘉慶 4년 기미(정조 23, 1799) 가을에 의암 창인義庵暢印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이어 완호 종사玩虎宗師의 회하會下에서 강학講學을 전해 받고 산내 암자인 상원암上院庵에서 강석講席을 여니 학인들이 30여 명이나 되었으며, 총섭摠攝의 직책을 맡아 보기도 하였다.
을유년(순조 25, 1825)에 명적암明寂庵을 중창하였다. 명적암은 일찍이 명안明眼 스님이 화주化主를 하여 중창하였던 절인데, 절이 너무 퇴락한 곳이 많아서 보수한 것이다. 중건할 때에 연담 조사의 영각影閣을 함께 지었으니 그것은 은암 스님이 그의 법손이었기 때문이다.
은암 스님은 도광道光(淸 宣宗의 연호) 갑오년(순조 34, 1834) 3월 22일, 자신이 중수한 명적암에서 적멸을 보였다. 사유闍維(다비) 의식을 할 때에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베풀었더니 여러 산문에서 대중들이 구름처럼 모여서 스님이 세상 떠난 것을 애도하였다. 스님의 혼령을 천도하는 절차가 고금을 통해 보기 드물 정도로 장엄하였다.
문인으로는 경월鏡月·수월水月·포운浦雲·연호蓮湖 등이 있으며, 부도는 두륜산 왼쪽 산기슭에 세웠다.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제자 20여 명이 있다.
설곡화상전雪谷和尙傳
스님의 법명은 윤훤允暄이고 호는 설곡雪谷이며, 속성은 장張씨이고 해남 현산縣山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찰탄察坦 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010_1034_b_01L成海雲愼英仁岩儀俊石岩翼振等
010_1034_b_02L今其四世寶鏡應雲錦海等相守鈯斧
010_1034_b_03L建閣設像行祭薦新文集二卷藏於
010_1034_b_04L門中浮屠立於頭輪山

010_1034_b_05L

010_1034_b_06L銀岩講師傳

010_1034_b_07L
師名正浩號銀岩姓宋氏海南龍塘
010_1034_b_08L早入頭輪山剃染遊學初乃食松
010_1034_b_09L衣草後則法財具足嘉慶四年己未秋
010_1034_b_10L拈香於義庵暢印禪師之室仍受傳講
010_1034_b_11L於玩虎宗師會下開講於上院庵學人
010_1034_b_12L三十餘行揔攝之職乙酉重剏明寂庵
010_1034_b_13L曾經明眼化主之重剏以其有頹落
010_1034_b_14L處也重建之時附蓮潭祖師之影閣者
010_1034_b_15L爲其法孫故也道光甲午三月二十二
010_1034_b_16L示寂于明寂闍維之時設無遮大
010_1034_b_17L諸山雲集群眞降臨薦靈之節
010_1034_b_18L今希覯門人有鏡月水月浦雲蓮湖等
010_1034_b_19L立浮屠於輪山之左麓傳戒弟子有二
010_1034_b_20L十餘人

010_1034_b_21L

010_1034_b_22L雪谷和尙傳

010_1034_b_23L
師名允暄號雪谷姓張氏海南縣山
010_1034_b_24L出家于頭輪山剃染于察坦禪師

010_1034_c_01L뒷날 응성 민훈應星旻訓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도광道光 정유년(현종 3, 1837) 9월 8일 백설당白雪堂에서 적멸을 보였다. 다비식을 하던 날 멀고 가까운 곳의 스님들과 속인들이 그 도량에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범패와 법악法樂이 저 하늘 범천궁梵天宮에까지 사무쳤다. 다비를 할 적에 옥 알 같은 구슬이 나와 사람들의 안목을 놀라게 하였으며, 천발薦拔 의식의 성대하기가 당송唐宋 시대에 비교할 만하였다.
설곡 스님은 사람됨이 풍후豊厚하고 말을 했다 하면 반드시 사람들을 감동하게 하였으니 부드러운 얼굴로 설법을 하는 것임을 여기에서 알 만하다. 스님은 또 수행이나 사찰의 행정(理事)을 모두 잘하였으며, 공적인 일이나 사사로운 일을 모두 민첩하게 처리하였는데 공적인 일을 우선 처리하고 사사로운 일은 뒤에 처리하는 가르침을 이 스님에게서 증명할 수 있다.
겨울철에는 모든 사미들을 모아 놓고 밤낮없이 글을 가르쳤다. 작법作法은 온화하고 기품이 있었으며, 글귀를 읽는 것이 매우 정확하여 합리적이었으며, 옛날 옥천사玉泉寺의 아름다웠던 범패 소리가 다시 남방 세계에 떨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범패에도 능했다.
일찍이 조정으로부터 ‘가선嘉善’이라는 직급을 받았고 만년에는 종주宗主의 자리에 앉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의식衣食이 모두 풍족하였으며, 법자와 법손들도 매우 많았으니 진실로 당대에 뛰어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수은受恩 제자는 다섯 명이고 계를 받은 제자는 열 명이며 법을 받은 제자는 두 명이다. 스님은 당시 이름을 떨치던 제성濟醒·우현佑玄·근적根績·표운表雲·호훈好訓 등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이 여섯 스님을 육도六度(육바라밀)에 비교하여 말하곤 하였다.
용암선백전龍巖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혜언慧彦이고 호는 용암龍岩이며, 율봉 청고栗峰靑杲의 사법 제자이고 월송 성일月松性日과는 법형제지간이며, 청봉 거안晴峯巨岸의 손자 제자이고 호암 체정虎岩體淨의 증손 제자이다.
스님은 일찍이 율봉栗峯 노장과 청봉晴峯 스님의 문하에 참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산이란 산은 모두 밟았고 물이란 물은 다 마셨으며, 경전이란 경전은 모두 읽었고 율서律書란 율서도 모두 보았으며, 가르침을 잘 듣고 계율도 엄격하게 지켰다.
완숙하게 경전을 다 읽고 익숙하게 법을 다 들은 다음 그는 율봉 스님의 당堂에서 돌부鈯斧(법통)를 이어 받았다. 누구든지 그를 초청하면 문득 가서 그들이 구하는 것을 다 이루게 해 주었다.
동쪽으로는 통도사와 해인사, 서쪽으로는 구월산과 묘향산, 남쪽으로는 조계산과 지리산, 북쪽으로는 금강산과 오대산, 중앙으로는 삼각산과 용문사龍門寺에 이르기까지 머물러 살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의 교화는 고루고루 베풀어진 셈이다.

010_1034_c_01L拈香于應星旻訓之室道光丁酉九月
010_1034_c_02L八日示寂于白雪堂闍維之齋遠近
010_1034_c_03L緇素雲集道場梵唄法樂徹天梵宮
010_1034_c_04L玉粒珠粟驚人眼目薦拔之盛侔於
010_1034_c_05L唐宋矣爲人豊厚言必感人緩頰
010_1034_c_06L之說於此可覺理事並行公私雙敏
010_1034_c_07L先公後私之戒於師可證冬則會諸沙
010_1034_c_08L晝夜訓導作法雍容句讀吻合
010_1034_c_09L泉餘響復振於南方世界矣早授嘉善
010_1034_c_10L晩坐宗席衣食具足子孫衆多誠一
010_1034_c_11L時人物也受恩者五人受戒者十人
010_1034_c_12L受法者二人與當時之濟醒佑玄根
010_1034_c_13L績表雲好訓齊名人之言比之六度云

010_1034_c_14L

010_1034_c_15L龍巖禪伯傳

010_1034_c_16L
師名慧彥號龍岩栗峰靑杲之嗣
010_1034_c_17L月松性日鴈行晴峯巨岸之孫虎岩淨
010_1034_c_18L之曾孫早叅栗老晴師之門山山水水
010_1034_c_19L履之飮之經經律律聽之持之眼已
010_1034_c_20L耳已熟受鈯斧於栗峰之堂請則
010_1034_c_21L便到有求皆遂東則通度海印西則
010_1034_c_22L九月妙香南則曺溪智異北則金剛五
010_1034_c_23L中則三角龍門無不息捿敎化均
010_1034_c_24L「堦」疑「階」{編}「人」下甲本正誤表有「稱」

010_1035_a_01L
스님이 두륜산 만일암挽日庵에 머물자 만일암 도량이 오히려 좁아서 백운당白雲堂으로 옮겼으나 바깥의 장기瘴氣가 더욱 침범했다. 스님은 오직 보광당普光幢에서의 법회와 『원각경』 산림山林법회에만 열정을 기울였다.
스님에게는 두 제자가 있었으니 설월 원민雪月圓旻과 포운 윤경布雲閏褧이다. 포운 스님의 제자로는 화운 관진華雲寬眞·보봉 이선寶峰利善·응허 보신應虛普信·우담 유언雨潭有彥이 있다.
용암 스님이 세상을 살아온 행장은 그의 문중 법손들에게 있다.
금계선사전錦溪禪師傳
선사의 법명은 근적根績이고 호는 금계錦溪이다. 영암 금강錦江에서 출생하였고 속성은 이씨이다.
금계 스님은 영조 46년 경인(1770)에 태어나서 철종哲宗 5년 갑인(1854) 11월 27일에 대흥사 산내 암자인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였다. 사유闍維(다비)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 법도에 맞게 하였다. 스님의 다비식을 즈음하여 일기가 너무도 추워서 고금에 보기 드문 강추위가 몰아치자 사람들은 “영산靈山법회가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인가, 설사雪師(석가모니)가 정말 강림한 것인가?”라고 하며 수군거렸다. 이런 일이 있은 이래로 해마다 이날만 되면 춥지 않은 날이 없으므로 세속 사람들은 이 무렵의 강추위를 ‘금계당錦溪堂 추위’라고 말했다. 금계 스님의 세속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9년이다.
스님은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필조弼照 장로를 은사로 삼고 뒷날 지월 필희智月弼熙 법사에게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지략이 뛰어났는데 장성해서는 권모술수까지 갖추었다. 사물과 현상의 겉모양에 빠져서 아까운 세월만 다 흘려보냈으므로 공적인 명예는 대단하였으나 개인적인 생활에는 별로 유익함이 없었다.
스님은 대흥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위를 받았으니 작위와 명예는 영광을 얻었으나 자기 자신의 삶에는 오히려 손해였다.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스무 명이고 학업을 전한 제자는 다섯 명이었으며, 법을 전한 제자로는 월연月淵 스님이 있다.
은봉대사전隱峰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두운斗云이고 호는 은봉隱峰이다. 두륜산으로 출가하였으며,

010_1035_a_01L住挽日庵物情猶隘移白雲堂
010_1035_a_02L瘴益侵普光幢會圓覺山中爲其投向
010_1035_a_03L有二弟子曰雪月圓旻布雲閏褧
010_1035_a_04L雲有弟子曰華雲寬直 [10] 寶峰利善
010_1035_a_05L虛普信雨潭有彥其時順間行狀
010_1035_a_06L於門孫處

010_1035_a_07L

010_1035_a_08L錦溪禪師傳

010_1035_a_09L
禪師名根績號錦溪靈岩錦江人
010_1035_a_10L李氏英宗庚寅生哲宗甲寅十一月二
010_1035_a_11L十七日寂于明寂闍維之齋一準古
010_1035_a_12L日氣沍寒前後初見靈山之會移
010_1035_a_13L來歟雪師之眞降臨歟自此以後
010_1035_a_14L年不寒方俗謂之錦溪堂寒世壽八十
010_1035_a_15L法臘六十九出家于輪山受恩于
010_1035_a_16L弼照長老拈香于智月弼熙法師師少
010_1035_a_17L有智畧長行權數溺於事相之窠臼
010_1035_a_18L閱盡光陰之春秋公名有優私生無益
010_1035_a_19L行住持位受嘉善爵名則榮矣己乃
010_1035_a_20L損也授戒者二十人傳業者五人
010_1035_a_21L法者月淵

010_1035_a_22L

010_1035_a_23L隱峰大師傳

010_1035_a_24L
師名斗云號隱峰出家於頭輪山

010_1035_b_01L오파鰲坡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형암 자옥荊庵自玉 스님과는 법형제 사이이다. 은봉 스님에게서 법을 전해 받은 제자로는 묵화 준훤默和俊暄·취암 찬영鷲岩贊永·여여 서심如如瑞心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벽해 채홍碧海采弘이 있다.
가경嘉慶 4년(정조 23, 1799)에 스님은 자암 전평慈庵典平 스님과 함께 만일암挽日庵을 중건하였다. 「만일암중건기」의 내용에 이런 말이 있다.
“10일 만에 버리는 것은 누에고치이고, 6개월 만에 버리는 것은 제비집이며, 1년 만에 버리는 것은 까치집이다. 그런데도 둥지를 경영하여 지을 때에는 혹 뱃속에서 실을 뽑아 얽기도 하고, 혹은 침을 뱉어 진흙을 개기도 하며, 혹은 열심히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제 살 집을 짓느라 부리는 병이 들고 마음은 타들어 가지만 정작 제 자신이 병들어 가는 줄은 모른다.
이러한 것을 보는 사람들은 미물들의 지혜가 얕다는 것을 알고 얕은 지혜 때문에 몸이 고달플 수밖에 없는 저들의 삶에 대하여 비애를 느끼곤 한다. 이는 사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붉게 단청한 정자나 푸른 단청을 한 높은 누각이라 하더라도 손가락 한 번 튀길 사이에 잿더미가 되고 만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 사람들이 집을 짓는 일 역시 이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 인간들이 반드시 100년을 살고 버린다 할지라도 오히려 족히 할 짓이 못되거늘 하물며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이들이겠는가? 중이 되어 집을 수리하는 것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도모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리라. 두운斗云 스님이 그 집을 새로 짓고 넓혀 이미 준공을 마친 다음 다산茶山의 집으로 나(정약용)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서 있는 사찰이 마치 바둑돌을 늘어놓은 것 같고, 종소리와 북소리가 절과 절에서 서로 들려 어디를 가든지 내 집 아닌 데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나의 머리털은 어느새 숱이 적어지기 시작했는데(種種)10) 내 비록 어리석긴 하지만 내 자신을 위해 어찌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그저 무너져 가는 절을 수리해서 뒷사람들에게 물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두운 스님의 그 말이 훌륭하다 여겨 그대로 기록해 두는 것이다. 고쳐 지은 집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두륜산 만일암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기록한다.”
완호 윤우玩虎倫佑 스님도 역시 기문을 썼으며, 연파 대사는 상량문을 지었다.
두운 스님이 입적하여 다비의식을 치를 때 정약용이 기원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殼純美棄而去噫    육신이 순박하고 아름다웠는데 버리고 가셨으니, 슬프구나!
屋精敞棄而去噫    집이 깨끗하고 널찍한데 버리고 가셨으니, 슬프구나!
山回包棄而去噫    산이 빙 둘러싸고 돌았는데 버리고 가셨으니, 슬프구나!
鼓寂寂不復鼓噫    법고法鼓 소리 사라져 적막하여 들을 수 없으니, 슬프구나!
鐸寂寂不復語噫    목탁 소리 또한 사라져 적막하여 들을 수 없으니, 슬프구나!
蓮花世界在何處噫   연화세계蓮華世界는 도대체 어디 있는고, 슬프구나!

스님의 수은受恩 제자로 세관世寬이 있다.

010_1035_b_01L香於鰲坡禪師與荊庵自玉爲法兄弟
010_1035_b_02L有傳法弟子曰默和俊暄鷲岩贊永
010_1035_b_03L如如瑞心孫曰碧海采弘嘉慶四年
010_1035_b_04L與慈庵典平重建挽日庵記曰十日
010_1035_b_05L而棄者蚕之繭也1) [19] 而棄者燕之
010_1035_b_06L窠也一年而棄者鵲之巢也然方其
010_1035_b_07L經營而結搆也或抽腸爲絲或吐涎爲
010_1035_b_08L或拮据2)荼租 [20] 口瘏3)尾譙 [21] 而莫之
010_1035_b_09L知瘦人之見之者無不淺其知而哀其
010_1035_b_10L雖紅亭翠閣彈指灰塵吾人室屋
010_1035_b_11L之計無異4)星也使吾人必百年而棄
010_1035_b_12L猶不足爲矧剃染爲僧者哉僧而
010_1035_b_13L繕室屋者其非自爲身謀可知也浮屠
010_1035_b_14L斗云新其室而大之旣竣過余于茶
010_1035_b_15L山之舘而語之曰蘭若之在域中者
010_1035_b_16L棊布鍾皷之聲相聞無適而非吾室也
010_1035_b_17L而吾之髮已種種吾雖愚豈爲是哉
010_1035_b_18L聊繕之以遺後人余善其言而識之
010_1035_b_19L其室曰頭輪山之挽日庵也茶山丁若
010_1035_b_20L鏞記玩虎倫佑亦有記蓮坡作上樑文
010_1035_b_21L入寂茶毘丁若鏞祝之曰殼純美棄
010_1035_b_22L而去屋精敞棄而去山回包棄
010_1035_b_23L而去鼓寂寂不復鼓鐸寂寂不
010_1035_b_24L復語蓮花世界在何處受恩弟

010_1035_c_01L
환봉대사전煥峯大士傳
스님의 법명은 섭민攝旻이고 호는 환봉煥峯이며, 속성은 임任씨이고 옥천 가치加峙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영조 43년 정해(1767)에 출생하여, 철종 원년 경술(1850) 2월 3일 대흥사 명적암明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84세이고 승랍은 68년이다.
가경嘉慶 8년 계해(순조 3, 1803)에 스님의 나이 37세 때 선사先師를 따라 남평南平 운흥사雲興寺 관음전觀音殿에 있다가 완호玩虎 법사의 입실 제자가 되어 법을 이었다. 이어서 미황사美黃寺 여척如倜 화상과 함께 경성京城으로 올라가 연담 노장님의 비석에 쓸 석재를 사서 다듬어 비문을 새겨 가지고 돌아왔다.
환봉 스님은 두루 넓은 안목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마침내 알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말재주까지 뛰어나 서로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조화調和하여 주곤 하였다. 만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으면서도 한 번만 보거나 들으면 빠뜨리거나 잊는 법이 없었다. 100여 명이나 되는 강론을 듣는 학인들의 이름이나 그 밖의 사항들을 갖추어 열거하여 조금도 틀리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스님은 이 세상에 90세가 되도록 살면서도 마음속에 나쁘다고 생각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신미년(1811)에 절이 큰 화재를 만났을 때 멀리 영주瀛洲(제주도)에까지 건너가 재물을 화주하여 절을 복원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호의縞衣 스님을 데리고 기림사祇林寺로 가서 불상을 조성하여 공역工役을 마치기도 하였다.
선사先師가 강론하던 자리에서 함께 공부를 한 문하생들 중에 덕행德行에는 성묵聖默·호의縞衣·하의荷衣이고, 언어에는 환봉煥峰·중화中和·영서靈瑞이며, 정사政事(행정사무)에는 설암雪岩·치암癡庵이고, 문학에는 화담華潭·초의草衣가 있었다. 이는 마치 공부자孔夫子를 따르던 제자들 중에 네 부류로 나눈 십철十哲의 경우와 같다.
환봉 스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72세 제자이고 태고太古의 16세 제자이며, 청허淸虛의 10세 제자이고 연담蓮潭의 3세 법손이다.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는 퇴연 축인退淵竺仁이고 손제자는 견향 상훈見香尙薰이며

010_1035_c_01L有世寬

010_1035_c_02L

010_1035_c_03L煥峯大士傳

010_1035_c_04L
師名攝旻號煥峰姓任氏沃州加峙
010_1035_c_05L英宗四十三年丁亥生哲宗元年庚
010_1035_c_06L戌二月三日入寂于明寂庵世壽八十
010_1035_c_07L僧臘六十八嘉慶八年癸亥時年
010_1035_c_08L三十七隨先師在南平雲興寺觀音殿
010_1035_c_09L入室於玩虎法師仍與美黃寺如倜和
010_1035_c_10L偕徃京城5) [22] 蓮翁碑刻之而來
010_1035_c_11L偏多眼致人不知者卒知尤有口辯
010_1035_c_12L人不意者調和閱人甚多一有見聞
010_1035_c_13L更不遺忘百餘講徒纖悉偹擧無所
010_1035_c_14L違戾在世九十人無心非者辛未
010_1035_c_15L深入瀛洲化財而告功率縞衣
010_1035_c_16L祇林造佛而竣役門下之從先師於講
010_1035_c_17L肆者德行聖默縞衣荷衣言語煥峰中
010_1035_c_18L和靈瑞6) [23] 事雪岩痴庵文學華潭草
010_1035_c_19L如從夫子者之四科十哲也釋迦文
010_1035_c_20L之七十二世太古十六世淸虛十世
010_1035_c_21L蓮潭三世孫也嗣法退淵竺仁孫見香
010_1035_c_22L「日」甲本正誤表作「月」「荼租」甲本正誤
010_1035_c_23L表作「苟且」
「尾譙」甲本正誤表作「心焦」
010_1035_c_24L「星」甲本正誤表作「是」「買」下疑脫「石」
010_1035_c_25L{編}
「改」甲本正誤表作「政」

010_1036_a_01L증손曾孫 제자는 금성 보헌錦城普憲이다. 보헌은 진양晋陽 강姜씨이고 낭주朗州(전남 나주) 금성산錦城山 아랫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또 현손玄孫 제자는 능암 세환楞庵世煥인데, 세환은 청해淸海(전남 완도) 숙승봉宿僧峯 아랫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30여 명이다.
철우선덕전鐵牛禪德傳
스님의 법명은 표운表云이고 호는 철우鐵牛이며, 강진 백도白道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두륜산으로 들어가 먹고 살기 위해 적지 않은 고생을 하다가 스님이 될 생각을 하였다.
스님은 현해 모윤懸解慕閏 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수룡袖龍 스님과 화성花城 스님의 법형法兄이고 문암聞庵 스님의 은사恩師이다. 작용이 없는 넉넉함을 지으셨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품을 받았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자비를 실천하셨고 종사宗師의 호를 받으셨다.
신미년(순조 11, 1811) 화재를 만났을 때 물건을 꺼내려 하지 않고 불을 끄는 데 주력하였으며, 임인년(현종 8, 1842) 화재에는 스스로 방석을 잘라 그것으로 불을 껐다. 스님은 쌀을 낼 때에는 항상 기준보다 큰 말이나 되를 사용하였으므로 쌀을 사려는 사람들이 단壇을 만들고 제祭를 올리며 말하기를, “스님의 쌀을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빌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어느 과객過客이 벽에 게송을 써 붙여서 스님의 행적을 칭송하였다.
“대둔사 표운 보살은 공역公役이 있으면 대중들보다 앞장서고 빌러 온 사람이 있으면 자기의 쌀을 퍼다 주며, 비가 내리면 경내를 돌면서 비가 새는 곳이 없나 살펴보았다가 날이 개면 반드시 지붕을 고치고 손상된 곳이 있으면 목수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수리해 줄 것을 청했다네.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 주고 배고파하는 사람을 보면 음식을 주어 그에게 먹였다. 남을 꾸짖는 소리는 걱정된다는 말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성을 낼 적에 그의 얼굴색은 성내는 빛이 전혀 없었다. 자비가 방안에 가득 넘쳤는가 하면 승려나 속인들이 모두 스님의 위엄에 두려움을 가졌다네. 공적인 일을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은 뒤로 미루었으며, 자신을 책망하고 남을 칭찬하였다네. 옷은 꼭 필요한 것만 갖추고 음식은 여러 가지 곁들여 차리지 않으셨네. 멀고 가까운 데를 막론하고 모두들 말하기를 ‘포운 보살’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네.”
철우鐵牛 스님을 기리는 게송과 서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나는 들었다. 사대四大(地水火風)가 변화하여 어떤 물질과 접촉하여 형체를 이루었다. 헛것의 본바탕은 비록 아름다우나 본체는 더욱 존귀하다네. 그런 까닭에 흙 소(土牛)는 겨울을 보내고 돌 소(石牛)는 비를 부르며, 나무 소(木牛)는 검각劒閣으로 양곡을 실어 나르고 쇠 소(金牛)는 험한 동정호洞庭湖를 건너가나니,

010_1036_a_01L尙薰曾錦城普憲晋陽姜氏朗州
010_1036_a_02L錦城山下人玄孫楞庵世煥淸海宿
010_1036_a_03L僧峯下人受戒者三十餘人

010_1036_a_04L

010_1036_a_05L鐵牛禪德傳

010_1036_a_06L
師名表云號鐵牛康津白道人幼失
010_1036_a_07L怙恃入頭輪山力作衣食仍發爲僧
010_1036_a_08L之心剃染於懸解慕閏禪師袖龍花城
010_1036_a_09L之兄聞庵之恩師也作無作之饒
010_1036_a_10L嘉善之資行無相之慈受宗師之號
010_1036_a_11L辛未之火不救物而救火壬寅之燒
010_1036_a_12L自剪席而壓塵恒用大斗升貿米之人
010_1036_a_13L設壇而祭曰願得云同知過客之人
010_1036_a_14L書壁而頌曰大芚云菩薩有公役則先
010_1036_a_15L衆人有丐者則出己米有雨則行點雨
010_1036_a_16L漏處陽必改瓦有傷則固待匠人來
010_1036_a_17L坐修補見寒者解衣衣之見飢者
010_1036_a_18L食食之責人之聲不出阿憂嗔人之
010_1036_a_19L不現阿睹慈悲滿室緇素畏威
010_1036_a_20L公而後私責己而贊他衣不必偹
010_1036_a_21L不兼味無論遠1) [24] 皆曰云菩薩鐵牛
010_1036_a_22L序偈曰以是我聞四大之變觸物成
010_1036_a_23L幻質雖美本軆更尊故土牛送寒
010_1036_a_24L石牛招雨木牛輸量於劒閣金牛躡險

010_1036_b_01L반드시 털이나 피 따위로 된 소가 그런 것이 아니라 신령한 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요 태능逍遙太能이 시에서 ‘뿔 없는 쇠 소가 하늘에 오르매, 꼬리 치고 머리를 흔드니 눈 덮인 고갯마루 바람이 이네’라고 읊었으니 미묘한 깨달음을 얻고 한 말이로다. 사문 표운表云은 본성이 질박하고 진실하며 꾸밈이 없기에 그 본바탕을 보존할 수 있었으니 비구 대중들이 그에게 호를 붙여 철우鐵牛 선사라고 하였다. 게송은 이러하다.

頭在黃河南      머리는 황하 남쪽에 있고
尾在黃河北      꼬리는 황하 북쪽에 있네
千人鞭不動      천 사람의 채찍에도 끄떡 안하고
六丁挽不得      여섯 장정이 잡아당겨도 끌려오지 않네
是爲奇異獸      참으로 기이한 짐승이로고
色空空則色      색色이 공空이요 공이 곧 색이라네
無號又無角      이름도 없고 또 뿔도 없건만
背負千鈞力      등에는 1천 균鈞을 짊어질 힘이 있었네
不似泥牛軆      진흙 소 본체와는 같지 않으나
入水隨水泐      물속에 들어가면 물 따라 갈라지네
不似李軍頭      이李 장군의 머리와 같지 않으나
再號旋風黑      두 번 호령하니 회오리바람이 이네
不念阿彌陁      아미타불을 염하지 않고
不願極樂國      극락국 가기 원하지 않네
回看紫霞山      고개 돌려 자하산紫霞山 바라보니
欣慕無窮極      흠모하는 정 그지없구나

다산茶山 정 승지丁承旨가 짓다.”
가경嘉慶 갑술(순조 14, 1814)에 조정으로부터 호를 받았다. 도광道光 병오년(현종 12, 1846) 3월 27일에 적련암赤蓮庵에서 입적하였다. 스님의 법자法子는 영유永愈이고 손자 제자는 회일會日이다.
화담강사전華潭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영원靈源이고 호는 화담華潭이며, 속성은 박朴씨이고 무안 중화리中和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건륭乾隆 병신년(영조 52, 1776)에 태어나 도광道光 기유년(현종 15, 1849) 9월 13일에 적련암赤蓮庵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의 나이는 74세이고 법랍은 58년이다.
어려서 승달산僧達山 법천사法泉寺에서 출가하였다. 그 후 계룡산에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지리산을 유람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조계산·백양산·가지산·두륜산·달마산 등 여러 산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이렇게 선지식들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공부에 전력하여 학문이 내전과 외전 모두를 달통하였다. 필체는 이왕二王(王羲之와 王獻之)의 필법을 배웠다.
스님은 완호玩虎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살라 예를 올리고 법을 이어받았다. 그 후 두륜산에 머물면서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打開八字) 여러 지방에서 몰려오는 학인들을 맞아 학문 가르치기를 20여 년 동안 하였다. 찾아드는 학인들을 거절하지 못하다가 병이 들어 자리에 눕고서야 비로소 그만두었다.

010_1036_b_01L於洞庭不必毛血者爲靈牯也故逍遙
010_1036_b_02L太能之詩曰鐵牛無角陟虛空擺尾搖
010_1036_b_03L頭雪嶺風妙悟之言也沙門表云
010_1036_b_04L實無華保其本質比丘大衆號之曰
010_1036_b_05L鐵牛禪師偈曰頭在黃河南尾在黃河
010_1036_b_06L千人鞭不動六丁挽不得是爲奇
010_1036_b_07L異獸色空空則色無號又無角背負
010_1036_b_08L千鈞力不似泥牛軆入水隨水泐
010_1036_b_09L似李軍頭再號旋風黑不念阿彌陁
010_1036_b_10L不願極樂國回看紫霞山欣慕無窮極
010_1036_b_11L茶山丁承旨撰嘉慶甲戌受號道光丙
010_1036_b_12L午三月二十七日卒于赤蓮庵子永愈
010_1036_b_13L孫會日

010_1036_b_14L

010_1036_b_15L華潭講師傳

010_1036_b_16L
師名靈源號華潭姓朴氏務安中和
010_1036_b_17L里人乾隆丙申生道光己酉九月十三
010_1036_b_18L示寂于赤蓮庵世壽七十四法臘
010_1036_b_19L五十八幼而出家於僧達山法泉寺
010_1036_b_20L入鷄龍山或遊智異2) [25] 或住曹溪山
010_1036_b_21L3) [26] 伽智頭輪達摩諸山優遊4) [27]
010_1036_b_22L通內外筆師二王拈香於玩虎法師之
010_1036_b_23L止於頭輪山打開八字接其方來
010_1036_b_24L二十餘年拒之不得至於老卧

010_1036_c_01L
계를 받은 제자와 수참受懺 제자와 법을 받은 제자가 법천사法泉寺에도 있고 대둔사에도 있다. 대응大應·학능學能·회암悔庵·심훈心訓 등 스님은 법을 이은 제자이고, 지찬志贊 스님과 지영志永 스님은 계를 받은 제자이며, 인파印波·영해映海·득훤得烜 등은 손자 제자이다. 화담 스님의 진영은 보련각寶蓮閣에 안치되어 있다.
설암선사전雪岩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의성義誠이고 호는 설암雪岩이며, 또는 영주靈珠라고도 했다. 속성은 김씨이고 무안 석진石津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총지사摠持寺11)로 출가하여 해암海庵 선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뒷날 총지사의 주지와 승통僧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용흥사龍興寺로 이주한 뒤에도 다시 그곳의 승통 직책을 역임하였다. 설암 스님은 완호 법사에게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그 후 대둔사로 이주하였다. 주로 대둔사 경내에 있는 만일암挽日庵·남미륵암南彌勒庵·은적암隱寂庵 등에서 주석하다가 마침내는 완호 법사의 조실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린 후 법통을 이어받았다.
기해년(현종 5, 1839) 9월 9일에 한산전寒山殿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82세이고 법랍은 67년이었다. 스님의 신장은 여덟 자나 되었으며 말은 조용하게 하였다.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참례하고 가르침을 청해 듣고 돌아와서는 선나禪那를 찬양하였다. 스님은 연담 대사의 3대 법손이며, 그에게 법을 받은 제자로는 석호 녹일石虎祿一이 있고, 녹일 스님 아래에는 금파 응신金波應信이 있다.
수룡강사전袖龍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색성賾性이고 호는 수룡袖龍이며, 속성은 임任씨이고 해남의 관촌館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건륭乾隆 정유년(정조 원년, 1777)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더니 마침내 두륜산에서 출가하여 모윤慕閏 스님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외전外典을 충분하게 듣고 배운 것은 수시로 익혔다. 여러 곳을 유람하면서 선지식을 참알參謁하고 불교 경전을 참구하였으며, 이성理性의 이치에 대하여 깊이 몰입하여 연구를 거듭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연파蓮坡 법사를 찾아가 뵙자

010_1036_c_01L受戒受懺受法者在法泉在大芚
010_1036_c_02L大應學能悔庵心訓受法者志贊志永
010_1036_c_03L受戒者印波映海得烜等孫弟子也
010_1036_c_04L安眞影于寶閣

010_1036_c_05L

010_1036_c_06L雪岩禪師傳

010_1036_c_07L
師名義誠號雪岩又曰靈珠姓金氏
010_1036_c_08L務安石津人出家於揔持寺剃髮於海
010_1036_c_09L庵禪師行住持行曾統移住於龍興
010_1036_c_10L又行僧統受禪懺於玩虎法師
010_1036_c_11L住大芚寺住挽日南彌勒隱跡等庵
010_1036_c_12L拈香於玩虎法師之室己亥九月九日
010_1036_c_13L示寂寒山殿世壽八十二僧臘六十七
010_1036_c_14L身長八尺口門從容徃而叅善知識
010_1036_c_15L還而讚禪那蓮潭之三世受法者
010_1036_c_16L虎祿一一下有金波應信

010_1036_c_17L

010_1036_c_18L袖龍講師傳

010_1036_c_19L
師名𧷤性號袖龍姓任氏海南舘村
010_1036_c_20L乾隆丁酉生幼而頴悟出家於頭
010_1036_c_21L輪山剃染於慕閏之室飽聞外典
010_1036_c_22L而時習之遊叅經學深入理性徃謁
010_1036_c_23L「行」甲本正誤表作「近」「白」甲本正誤表
010_1036_c_24L作「山」
「羊」當置「白」字之下{編}「編」甲
010_1036_c_25L本正誤表作「徧」

010_1037_a_01L연파 스님은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전해 주고 법인法印을 부촉하면서 ‘수룡’이라는 호까지 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문서에 서문을 지어 주었으니, 그 서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용의 직분은 신령하고 괴이한 힘을 부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여 아래 땅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용이 게으름만 피우고 그 직분을 소홀히 하므로 태백太白이라는 호승胡僧(인도 스님)이 그 용을 소매 속에 가두고 그 죄를 다스렸다 하니 이는 해학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용은 신통변화가 황홀한 것이어서 사람들이 보통 동물처럼 다루지는 못한다. 이렇게 신령한 용도 하루아침에 게으름을 피워 저렇게 갇혀 치죄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하물며 사람이 게으름을 피워서야 되겠느냐? 용이 소매 속에 갇혔다는 해학적인 이야기의 진정한 의미는 게으름을 꾸짖기 위한 것이지 구차스럽게 그냥 해 본 농담만은 아니니라.”
색성 스님은 해남 새금현塞琴縣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적에 연파 스님을 따라 보살(大士)이 되는 학문을 배웠는데, 연파 스님이 학습이 이미 익숙해진 것을 보고 당호堂號를 내려 주고 자신의 법통을 전해 주었다. 법을 전해 주는 자리에서 연파 스님은 주장자로 탁상을 내려치면서 색성 스님에게 말했다.
“색성아, 너는 게으르다. 게으르면 남에게 통제를 받게 되지 않겠느냐? 만약 게으른 버릇을 고친다면 장차 신통력 있는 용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대에게 ‘소매 속에 갇힌 용(袖龍)’이라는 당호를 내리나니 그대는 언제고 이 점을 명심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말지어다.”
삿갓 쓴 나그네가(籜皮旅人)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짤막한 게송 한 편을 지어 주었다. 그 게송의 내용은 이러하다.

飂裔其豢       요숙안飂叔安의 자손이 용을 기르고
鬷夷擾之       종이鬷夷의 자손도 용을 길들였다네
孰紹厥武       누가 그 발자취를 이을 것인가?
庚山之緇       경산庚山의 스님이 그분이로세
胡皐之聲       그러나 코 고는 소리만 들릴 뿐
怠棄厥司       맡은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구나
咨善男賾       아! 선남자 색성이여
尙鑒于茲       언제나 이 점을 귀감으로 여기게

다산茶山 정 승지丁承旨가 이 시를 지었다.
8월 15일에 북암北庵에서 열반에 드셨으며, 그의 문집 1권이 있다. 문인으로는 서주 의수犀舟懿修·철선 혜즙鐵船惠楫·태호 세관太湖世觀이 있다.
철경강사전掣鯨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응언應彦이고 호는 철경掣鯨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만덕산에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철경 스님은 어릴 때부터 강개慷慨12)한 의지가 있어서 ‘차라리 맑고 깨끗한 경지에 들어가 적묵寂黙의 도를 닦다가 바위 굴 속에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맹세코 말장난이나 일삼는 학문의 세계에는 노닐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는 마침내 집에 하직 인사를 드리고 산문에 들어갔다. 스님은 내전과 외전을 모두 통달하고

010_1037_a_01L蓮坡法師以正法眼藏傳附法印
010_1037_a_02L以袖龍賜號繼之以序序曰龍之職
010_1037_a_03L所以役靈恠興雲雨以降 [11] 下土也
010_1037_a_04L龍焉懶不職太白胡僧囚之袖以罪
010_1037_a_05L此諧之言也然龍神變恍惚人不
010_1037_a_06L能物之一朝坐於懶而遘此辱而懶
010_1037_a_07L諧之意所以策懶非苟爲是諧譎
010_1037_a_08L浮屠𧷤性塞琴縣人也少從蓮坡
010_1037_a_09L藏大士學曹習旣熟將錫之號以傳
010_1037_a_10L其法以杖叩其卓而告之曰𧷤性女懶
010_1037_a_11L爲人所制改之將神龍也堂女曰
010_1037_a_12L龍女尙鑑于茲毋懶哉籜皮旅人
010_1037_a_13L其說而悅之爲小偈而遺之曰飂裔其
010_1037_a_14L鬷夷擾之孰紹厥武庚山之緇
010_1037_a_15L皐之聲怠棄厥司咨善男賾尙鑒于
010_1037_a_16L茶山丁承旨撰八月十五日示寂
010_1037_a_17L于北庵有文集一卷門人犀舟懿修
010_1037_a_18L船惠楫太湖世觀

010_1037_a_19L

010_1037_a_20L掣鯨講師傳

010_1037_a_21L
師名應彥號掣鯨姓金氏靈岩人
010_1037_a_22L家于萬德山幼有慷慨之志寧入淸淨
010_1037_a_23L寂默之道虛送光陰於岩穴之間誓不
010_1037_a_24L遊於口學之中辭家入山通內外典

010_1037_b_01L스승을 찾아 예불을 올리고 유학자(東家丘)13)는 찾아다니지 않았다.
연파蓮坡 법사를 찾아가서 배알하였더니 법사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우리 서로 만남이 이리도 늦었는고? 기다린 지 오래되었네.”
그러면서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하자 철경 스님이 꽃을 뽑아 드니(分座拈花)14) 마침내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아 법을 전하는 의식을 마쳤다. 연파 스님이 의발을 미루어 그에게 전하고 가풍을 전하여 가통家統을 잇게 하니, 배우는 학인들이 마치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고 불이 마른 나무로 번지듯이 철경 스님의 회상으로 몰려들었다. 방장실이 비록 넓었으나 학인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좁았고 강당에는 해조음海潮音(설법하는 소리)이 울려 퍼지며 부엌에는 깨끗한 음식이 풍성하였다.
이에 자하거사紫霞居士(정약용)가 그의 말을 듣고 장하게 여겨 철경 스님에게 게송을 써 주며 그를 드높여 말하였다.
“‘경鯨’은 굳세다는 의미이니 그 힘이 굳셈을 말하는 것이며, ‘경䲔’은 강하다는 의미이니 그 등뼈가 강한 것을 말한다. 고래가 바다를 휘젓고 달릴 때에 숨을 토하면 우렛소리가 나고 물을 뿜으면 무지개처럼 뻗힌다. 큰 배를 삼킬 때에는 마치 물고기가 먹이를 삼키는 것 같고 큰 파도를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은 흡사 날아가는 새가 허공을 능멸하는 것과 같다. 한번 거동하면 만 리를 가는데 바닷물이 들끓어 바람이 일어난다. 그때를 당하면 비록 용백龍伯15)이 낚시를 던지고 소열蘇烈16)이 낚싯줄을 잡는다고 해도 그 누가 끌어서 되돌아오게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존재의 현상을 살펴보면 육근六根은 앞에서 끌고 오탁五濁은 뒤에서 밀며, 온갖 번뇌가 일어나 하늘을 가리고 마군魔軍이 좌우에서 온갖 유혹을 다하고 있는데 걸음이 일정하지 못하고 더디게 나아가되 용감하게 가는 것이 마치 큰 고래가 곧장 내닫는 것과 같다. 아! 이러한 형편에서 진여眞如가 미약하다면 끌어서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가 있겠는가? 가령 끌어서 되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용사勇士였던 분육夏育17)도 짝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사문 응언應彦은 아암 혜장兒庵惠藏 스님의 문도이다. 이 스님은 용감하게 팔뚝을 걷어붙이고 대중들을 모아 놓고 큰소리로 외쳤다.
“우리 스님에게는 좋은 비결이 있다. 내가 그 비법을 전해 받았으니 나야말로 무턱대고 앞으로만 질주하는 것을 끌어다 되돌려 놓을 능력이 있다.”
대중들은 이 스님의 말을 따라 ‘철경掣鯨’ 스님이라고 불렀다. 자하산인紫霞山人도 그 말을 듣고 장하게 생각하여 게송을 지어 주었으니, 그 게송은 이러하다.

生物之大無如鯨    생물 중에 고래보다 더 큰 것은 없나니
齒若雪山鰭金城    이는 설산雪山 같고 지느러미는 금성金城 같네
仰鼻噓吸倒滄瀛    코를 들어 숨을 쉬니 바닷물이 뒤집히고
朱翹翕張霹靂聲    지느러미 펄떡이니 벽력 같은 소리 나네
滿牢震怖海若驚    포뢰浦牢18)도 두려워하고 바다도 놀란 듯
濤山直立坤軸傾    파도의 산 곧게 서니 지축도 기우네
有夫癯枯毛骨淸    수척한 대장부 모골毛骨이 깨끗한데
獨立岸上愁屏營    언덕 위에 홀로 서서 시름에 잠기네

010_1037_b_01L尋師禮佛不叅東家丘訪謁蓮坡法師
010_1037_b_02L師曰何相見之晩也待之久矣分座拈
010_1037_b_03L示趺傳法了推衣衣之傳家家之
010_1037_b_04L學衆水就濕火就燥方丈雖寬物情
010_1037_b_05L猶隘堂聒潮音厨豊淨食於是紫霞
010_1037_b_06L居士聞其言而壯之與之偈而揚之曰
010_1037_b_07L鯨者勍也其力勍䲔者彊也其脊彊
010_1037_b_08L鯨之奔於海也吼氣成雷歕水爲
010_1037_b_09L呑巨艦如游魚之仰餌排洪波如飛
010_1037_b_10L鳥之凌空一擧萬里溟渤生風方其
010_1037_b_11L時也雖龍伯投其釣蘇烈操其緡
010_1037_b_12L誰能掣而還之哉1)新薑之 [28] 見物也
010_1037_b_13L根挽乎前五濁推乎後塵勞堀堁以
010_1037_b_14L蔽天魔障2)梆楡 [29] 而左右踸踔勇徃
010_1037_b_15L長鯨之直走眞如之微弱掣而還之
010_1037_b_16L能掣而還之斯賁育弗能耦矣
010_1037_b_17L門應彥兒庵藏公之徒也悍然攘其腕
010_1037_b_18L而號於衆曰吾師有訣吾有所受之
010_1037_b_19L吾能掣之衆從之呼曰掣鯨紫霞山
010_1037_b_20L聞其言而壯之授之以伽陀之詞
010_1037_b_21L其辭曰生物之大無如鯨齒若雪山鰭
010_1037_b_22L金城仰鼻噓吸倒滄瀛朱翹翕張霹靂
010_1037_b_23L3)滿 [30] 牢震怖海若驚濤山直立坤軸
010_1037_b_24L有天癯枯毛骨淸獨立岸上愁屏營

010_1037_c_01L有眉如髮籰車縈    머리칼 같은 눈썹 얼레에 감아
因風龡去其飛輕    바람에 불리니 가볍게 날아가네
黏鯨之尾無相攖    고래 꼬리에 붙어도 서로 얽매임 없으나
順受捉掣如孩嬰    고래가 아이처럼 묶여서 끌려오네
鉗龍絡虎不足并    용을 사로잡고 호랑이 묶는 것이 비교나 되랴
瓠巴長庚堪齊名    호파瓠巴19)와 장경長庚20)에 손색이 없네
本然微弱五蘊勍    본연本然이 미약하면 오온五蘊이 강하니
有能掣者斯豪英    능히 끌어당길 수 있다면 이가 호걸일레라

다산 정약용이 짓고 아울러 서문도 썼다.
스님의 문집 2권이 있다. 문인으로는 쌍련雙蓮과 성관性貫 등이 있다.
해붕강백전海鵬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전령展翎이고 자는 천유天遊이며, 호는 해붕海鵬이고 순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선암사仙岩寺에서 출가하였으며, 묵암 최눌嘿庵最訥 선사의 법인을 받았다. 풍암楓岩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영해影海 스님의 증손 제자이며 무용無用 스님의 현손 제자이다.
해붕 스님은 선禪과 교敎에 대하여 칼날을 맞듯이21) 모두 쉽게 순리적으로 해결하였으며, 문장이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여 덕은 총림叢林에 으뜸이었고 그 명성 또한 선비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당시 호남 일대에 고매한 이름을 떨치던 일곱 명의 벗(湖南七高朋)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곱 명의 고매한 벗이란 첫째는 노질盧質이니, 자는 수이秀爾이고 호는 하정荷亭이며 함양咸陽에 살았다. 둘째는 이학전李學傳이니, 자는 계명季明이고 호는 복재復齋이며 남원에 살았다. 셋째는 김각金珏이니, 자는 태화太和이고 호는 운와雲臥이며 함양에 살았다. 넷째는 심두영沈斗永이니, 자는 칠지七之이고 호는 영교永橋이며 곡성에 살았다. 다섯째는 이삼만李三萬이니, 자는 십천十千이고 호는 강재强齋이며 창암蒼岩에 살았다. 여섯째는 석전령釋展翎이니, 자는 천유이고 호는 해붕이며 선암사에 살았다. 일곱째는 석의순釋意恂이니, 자는 중부中孚이고 호는 초의草衣이며 대둔사에 살고 있었다. 세속에서는 흔히 백곡栢谷·무용無用·해붕을 승가의 문장가라고 일컫는다.
도광道光 7년 병술(순조 26, 1826) 10월 6일에 열반에 들었다. 스님이 살아 계셨을 때의 세간사는 그의 행장과 연보에 수록되어 있다.

010_1037_c_01L有眉如髮籰車縈因風龡去其飛輕
010_1037_c_02L鯨之尾無相攖順受捉掣如孩嬰鉗龍
010_1037_c_03L絡虎不足并瓠巴長庚堪齊名本然微
010_1037_c_04L弱五蘊勍有能掣者斯豪英茶山撰并
010_1037_c_05L有文集二卷門人有雙蓮性貫等

010_1037_c_06L

010_1037_c_07L海鵬講伯傳

010_1037_c_08L
師名展翎字天游號海鵬順天人
010_1037_c_09L家於仙岩寺受嘿庵最訥禪師之法印
010_1037_c_10L楓岩之孫影海之曾無用之玄也
010_1037_c_11L禪敎刃迎文章珠聯德冠叢林名聞
010_1037_c_12L士路湖南七高朋之一也七高朋者
010_1037_c_13L盧質字秀爾號荷亭居咸陽二李學
010_1037_c_14L4) [31] 號復齋居南原三金珏
010_1037_c_15L字太和號雲臥居咸陽四沈斗永
010_1037_c_16L七之號永橋居谷城五李三萬字十
010_1037_c_17L號强齋居蒼岩六釋展翕字天遊
010_1037_c_18L號鵬海居仙岩七釋意恂字中孚
010_1037_c_19L草衣居大芚俗穪栢谷無用海鵬僧家
010_1037_c_20L文章云爾道光七年丙戌十月初六日
010_1037_c_21L時順間事載在行狀及年譜中

010_1037_c_22L「新薑之」甲本正誤表曰衍字「椰楡」甲本
010_1037_c_23L正誤表作「揶揄」
「滿」甲本正誤表作「浦」
010_1037_c_24L「李」甲本正誤表作「季」

010_1038_a_01L
호의대사전縞衣大士傳
대사大士의 법명은 시오始悟이고 호는 호의縞衣이며, 어릴 적 이름은 계방桂芳이고 속성은 정丁씨이며, 동복同福(화순군) 적벽赤壁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삼달三達이고 할아버지는 이순以順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언세彥世이고 고조할아버지는 남강南康이다. 5대 할아버지는 림琳이고 6대 할아버지는 병자창의장丙子倡義將 적송공赤松公 지준之儁이며, 7대 할아버지는 임진창의장壬辰倡義將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 공조참의工曹參議 유성有成이고 8대 할아버지는 성균진사成均進士 효자임진창의장孝子壬辰倡義將 창랑공滄浪公 암수岩壽이며, 어머니는 정鄭씨이다.
대사의 아버지가 말이 계수나무 잎을 먹는 꿈을 꾸고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대사는 정조 2년 무술(1778) 7월 16일에 태어나 15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16세 때에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낸 뒤에 처음에는 화순 만연사萬淵寺로 들어갔다. 대사는 만연사 스님들과 기피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매우 다정하고 친하게 지냈는데 그것은 그가 문장에 대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9월에 그 절에 화재가 일어났다. 이듬해인 갑인년(1794) 봄에 절을 다시 수리하는 역사役事에 전국의 목수들이 다 모였는데, 이때 선사先師 경관慶冠통정대부通政大夫이 도료장都料匠의 직책을 맡아 일을 지휘하였다. 소년은 모집에 응하여 와서 역사를 마친 뒤에 그곳을 떠나는 경관 스님을 따라가서 가경嘉慶 병진년(정조 20, 1796)에 경관 스님을 은사로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백련白蓮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20세(1797) 때 대둔사 명적암明寂庵으로 연담蓮潭 스님을 찾아가 사집四集을 공부했다. 8월에는 미황사美黃寺 영침대靈沈臺로 갔다.
호의 스님은 21세 때에 대둔사 상원암上院庵의 백련 선사를 참알參謁하고, 3월에는 장흥 보림사寶林寺 서쪽에 있는 부도암浮屠庵으로 연담 조사를 찾아가 뵙고, 6월에는 송대松臺로 옮겨 가서 살다가 그해 가을에 삼성암三聖庵으로 옮겼으며, 10월에는 대둔사에서 완호玩虎 법사가 강론 법회를 열었는데 거기에 참예하여 『능엄경』을 공부하였다.
기미년(정조 23, 1799) 봄에는 완호 법사가 머물고 계시는 상원암에 가서 머물렀으며, 9월에는 완호 스님을 따라 미황사 중암中庵으로 가서 『기신론』을 배웠다. 경신년(정조 24, 1800)에는 또 완호 스님을 따라 대둔사 남암南庵으로 갔다가 12월에는 일봉암日封庵으로 갔다.
임술년(정조 26, 1802) 봄에는 함평 용흥사龍興寺 용문암龍門庵으로 가서 『반야경』을 공부하였으며, 12월에는 남평 운흥사雲興寺에 있는 관음전에 가서 『원각경』을 공부하였다.

010_1038_a_01L縞衣大士傳

010_1038_a_02L
大士名始悟號縞衣幼名桂芳姓丁
010_1038_a_03L同福赤壁人父三達祖以順曾祖
010_1038_a_04L彥世高祖南康五世祖琳六世祖
010_1038_a_05L子倡義將赤松公之儁七世祖壬辰
010_1038_a_06L倡義將軍資監主簿工曹叅議有成
010_1038_a_07L世祖成均進士孝子壬辰倡義將
010_1038_a_08L浪公岩壽母鄭氏父夢馬食桂葉而生
010_1038_a_09L正宗二年戊戌七月十六日生十五父
010_1038_a_10L歿十六母逝初入和順之萬淵寺
010_1038_a_11L不忌厭每多狎近粗有文眼故也
010_1038_a_12L月寺灾甲寅春重修之役梓人大會
010_1038_a_13L先師慶冠通政
大夫
以都料匠應募而來
010_1038_a_14L畢後隨之而去以嘉慶丙辰剃染之
010_1038_a_15L受具於白蓮禪師二十叅蓮潭師于明
010_1038_a_16L讀目集八月隨徃美黃寺影沈臺
010_1038_a_17L二十一叅白蓮1) [32] 于上院三月叅蓮潭
010_1038_a_18L祖師于寶林之西浮屠六月移松臺
010_1038_a_19L移住三聖庵十月叅玩虎法師于大芚
010_1038_a_20L寺之大會閱楞嚴經己未春住上院玩
010_1038_a_21L虎法師處九月隨徃美黃之中庵閱起
010_1038_a_22L信論庚申又隨徃大芚之南庵十二月
010_1038_a_23L徃日封壬戌春徃咸平龍興之龍門庵
010_1038_a_24L閱般若經十二月徃南平雲興寺之觀

010_1038_b_01L갑자년(순조 4, 1804)에는 나주 쌍계사雙磎寺에 있는 은선암隱仙庵에 머물다가 여름에 문수암文殊庵으로 옮겨가 살면서 『화엄현담華嚴玄談』을 공부하였다.
을축년(순조 5, 1805) 겨울에는 능주 개천사開天寺의 산내 암자인 백련암白蓮庵 낭암朗岩 스님의 처소로 가서 『통감通鑑』·『사기史記』·『고문진보古文眞寶』를 배우고, 병인년(1806) 가을에는 약사전에 기거하면서 서기書記 소임을 맡아 보았다.
정묘(1807) 4월에는 계사戒師인 백련 스님의 상을 당하여 다비식에 참예하고, 무진년(1808) 4월에는 서암西庵에 머물다가 겨울에는 약사전에서 열린 낭암 대사의 큰 법회에 참예하여 색성賾性 스님 등과 함께 『화엄경』 초회初會를 공부하였다.
기사년(1809)에는 일봉암으로 가서 법사에게 『화엄경』 2회를 공부하였으며, 가을에는 무주 구천동·지례知禮 봉곡사鳳谷寺·금산 직지사直指寺·상주 남장사南長寺를 순례하였으며, 경오년(1810)에는 풍기 희방사喜方寺로 일지一指 법사를 찾아가 뵙고, 이어 부석사浮石寺·갈래사葛來寺·각화사覺華寺·월정사月精寺 등 여러 사찰을 두루 돌아다녔다.
영동의 아홉 고을을 관람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각 사찰을 순례한 다음 정양사正陽寺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5월 5일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마가목馬柯木을 취하여 얼음 녹인 물에 넣고 달여서 고약을 만들었다. 7월에 스님은 이 고약을 가지고 제주도로 돌아가 대정현 모슬포로 은사 스님을 찾아뵈었다.
이보다 앞서 은사 스님이 5월 5일 오시午時에 나무에서 떨어져서 거의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으나 머리를 깎지 못해서 더부룩하였고 허리와 등이 구부정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 고약을 드렸더니 은사는 3개월 동안 꾸준히 복용하자 병이 다 나아 평소처럼 되었다. 경관 스님이 나무에서 떨어진 때와 호의 스님이 고약을 만든 그 시기가 우연히도 일치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효성이 극진하여 감응이 온 것이라고들 했다.
신미년(순조 11, 1811) 봄에 다시 기실記室 소임을 맡아 보다가 임신년(1812) 봄에는 완호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을 이어받았다. 그 당시 정다산은 마침 강진에 있으면서 인근 지역 스님들과 두터운 교분을 맺고 있었는데, 호號에 대한 게송과 서문을 지어 주었다.
정축년(순조 17, 1817)에 시봉하던 법사 완호 스님을 따라 기림사祇林寺로 가서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배에 싣고 돌아오던 길에 표류하여 일본 장기도長崎島 축전현筑前縣에 도착하였다. 무인년(순조 16, 1816)에 일본에서 돌아와 7월 15일에 본사에 돌아왔다.
신사년(순조 21, 1821) 10월 1일에 은사인 경관 스님의 입적을 당하여 곡을 하고 임오년(1822)에

010_1038_b_01L音殿閱圓覺經甲子住羅州雙溪之隱
010_1038_b_02L仙庵住文殊庵閱華嚴玄談
010_1038_b_03L丑冬徃綾州開天寺之白蓮庵朗岩師處
010_1038_b_04L覽通史古文丙寅秋居藥師殿行書記
010_1038_b_05L丁卯四月遭戒師白蓮之喪戊辰四月
010_1038_b_06L住西庵叅藥師殿朗岩師之大會
010_1038_b_07L2) [33] 性等閱華嚴初會己巳徃日封庵
010_1038_b_08L閱華嚴二會於法師巡禮茂朱之九
010_1038_b_09L知禮之鳳谷金山之直指尙州之
010_1038_b_10L南長庚午叅豊基喜方寺一指法師
010_1038_b_11L浮石葛來覺華月精等諸寺觀嶺東九
010_1038_b_12L入金剛巡禮各寺到正陽寺以五
010_1038_b_13L月五日午時取馬柯木氷澌水煎成膏
010_1038_b_14L七月歸到濟州謁恩師於大靜之摹
010_1038_b_15L瑟浦師以五月五日午時落木幾死
010_1038_b_16L僅生頭髮髼鬆腰背彎曲遂進其膏
010_1038_b_17L長服三個月病皆平復盖其落木
010_1038_b_18L與煮藥同其日時人稱孝誠所感
010_1038_b_19L未春再受記室壬申春拈香於玩虎之
010_1038_b_20L時丁茶山適在康津敦其宗誼
010_1038_b_21L號偈及序文以贈之丁丑侍法師徃祇
010_1038_b_22L林寺造千佛歸路漂到日本長崎島
010_1038_b_23L筑前州戊寅六月自日本還七月十
010_1038_b_24L五日歸寺辛巳十月一日哭恩師壬午

010_1038_c_01L도장사道藏寺에 머물다가 무인년(순조 30, 1830)에 선실禪室로 돌아와 머물렀으며, 경자년(현종 6, 1840)에 북암에 머물렀다.
계묘년(현종 9, 1843)에 일로향실一爐香室에 머물렀으며, 무신년(현종 14, 1848)에 만일암挽日庵에 머물렀고, 신해년(철종 2, 1851)에 십육나한전에 머물렀으며, 계축년(철종 4, 1853)에 남암南庵으로 옮겨 주석하다가 갑인년(1854)에 진불암眞佛庵에 거주하였으며, 무오년(철종 9, 1858)에 초의 선사와 함께 법사인 완호 스님의 비석을 세웠다.
무진년(고종 5, 1868) 9월 15일 축시丑時(오전 1시~3시)에 조용히 입적하시니, 세속 나이는 91세이고 하랍夏臘(법랍)은 72년이다.
스님은 사대부 집안의 자제로서 산문에 들어간 이후에는 유가의 문장과 과문科文 장구章句를 돌아보지 않고 분발하여 학습하지 않았으며, 지극한 효성과 한결같은 마음의 가풍이 은사에게 옮겨 온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예절 바른 가풍을 본받았다. “효자는 다함이 없나니, 길이 대대로 효자가 있을 것이다.(孝子不匱。 永錫爾類。)”22)라고 한 말을 호의 스님에게서 볼 수 있었다.
스님은 사람들의 비리를 보면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스님을 두려워하였다. 또한 스님은 천한 일이나 힘든 노역을 몸소 앞장서서 하였기 때문에 이를 본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산 적도 많다.
글씨는 명필은 아니었으나 모두 스님의 쉬운 글씨를 배웠으며, 스님의 문장은 또한 문장가는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모두 스님의 정직한 문장을 배우려고 하였다. 항상 의식이 넉넉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권속들도 매우 많았는데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80 내지 100세 사이가 많았다. 스님은 기로耆老에 참예하였으며, 효성은 대를 이어 전해 내려갔다.
열수 정약용이 호의 스님 호에 대하여 게송을 썼고, 해마海馬 홍현주洪顯周23)가 그의 모습을 찬양하는 글을 썼으며, 백파白坡 신헌영申獻永이 스님의 진영에 대하여 찬미하는 글을 썼고 아울러 그의 탑명도 썼다.
스님의 저술로는 손수 쓴 『행장行狀』 1권과 『견문록見聞錄』 1권이 있다. 법을 받은 제자와 수은受恩 제자 그리고 계를 받은 제자는 남보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있었다.
하의대사전荷衣大士傳
대사의 법명은 정지正持이고 호는 하의荷衣이며, 속성은 임林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가 구슬을 받는 꿈을 꾸고 나서 아이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릴 적부터 번거로움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 세상에 익혀 온 것을 사람이 어떻게 숨길 수 있겠는가? 또한 어릴 때에 원하는 것을 아버지가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010_1038_c_01L住道藏寺庚寅還住禪室庚子住北庵
010_1038_c_02L癸卯住一爐香室戊申住挽日庵辛亥
010_1038_c_03L住十六殿癸丑移南庵甲寅居眞佛
010_1038_c_04L戊午與草衣建法師玩虎碑戊辰九月
010_1038_c_05L十五日丑時泊然而寂世壽九十一
010_1038_c_06L夏臘七十二以士夫之裔入山以後
010_1038_c_07L不顧儒文科文章句憤不學習誠孝一
010_1038_c_08L自是家風以孝移於師人多效其
010_1038_c_09L孝子不匱永錫爾類於師可3) [34]
010_1038_c_10L見人非理一不忍之人多畏之賤役
010_1038_c_11L勞務躳自行之見者笑之筆非名筆
010_1038_c_12L皆學其易文非文章盡效其正衣食
010_1038_c_13L4) [35] 後屬蕃衍壽躋期賾叅於耆老
010_1038_c_14L孝傳箕裘洌水丁若鏞偈其號海馬
010_1038_c_15L洪顯周贊其相白坡申獻永贊其影
010_1038_c_16L而銘其塔有自述行狀一卷見聞錄一
010_1038_c_17L受法受恩受戒者不愧於人

010_1038_c_18L

010_1038_c_19L荷衣大士傳

010_1038_c_20L
大士名正持號荷衣姓林氏靈岩人
010_1038_c_21L母夢受珠而娠生不好華幼不好煩
010_1038_c_22L夙世所習人焉瘦哉幼時所願父何
010_1038_c_23L「寺」疑「師」{編}「蹟」甲本正誤表作「賾」
010_1038_c_24L「覺」甲本正誤表作「見」
「用」甲本正誤表作
010_1038_c_25L「周」

010_1039_a_01L
어려서 두륜산에 들어가 백련白蓮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완호玩虎 법사의 계단戒壇에서 향을 사르고 구족계를 받았다. 남쪽으로 달마사達摩寺에 갔고 북쪽으로 덕룡사德龍寺를 찾아갔으며, 동쪽으로 능가사楞伽寺를 유람하고 서쪽으로 첨찰사尖察寺에 살았다.
여러 지방을 유람하는 일을 마치고 문을 닫아걸고 부처님 가르침의 이치를 증득하기를 30여 년이나 하였다. 동문 수행을 한 사람이 비록 많으나 특별히 호의縞衣 스님과 초의草衣 스님과 더불어 서로 많이 좋아하였으므로 여러 산문에서는 이들을 삼의三衣라고 호칭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것은 마치 설담雪潭 스님 문하에 삼담三潭(雪潭·春潭·華潭)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스님은 몸집이 풍후豊厚하고 입이 무거워서 사찰 행정을 함에 있어서 신중하게 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게송을 읊으면 구슬을 꿰어 놓은 듯하며 문장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마치 칼날이 닿으면 대나무가 바로 쪼개지듯이 명석하게 풀이하였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맛있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며 처신處身이나 도를 닦음에 있어서도 남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건륭乾隆 44년 정조대왕 3년 기해(1779)에 태어나서 함풍咸豊 2년 철종대왕 3년 임자(1852) 6월 11일에 대둔사 도반암導般庵에서 열반에 드셨으니, 세속 나이는 74세이고 법랍은 58년이었다.
어록語錄 1권이 있으며, 백파 신헌영이 그의 진영에 대한 찬贊과 서문을 지었다.
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자는 중부中孚이며, 호는 초의草衣 또는 일지암一枝庵이라 불렸으며, 성은 장張씨이고 나주 삼향三鄕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머니가 큰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이를 잉태하여 낳았다고 한다.
정조 병오년(1786) 4월 5일에 태어나서 동치同治 4년 을축(고종 2, 1865) 7월 2일에 쾌년각快年閣에서 열반에 드셨으니, 세속 나이는 80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5세에 급류에 휩쓸려 죽게 되었을 때 협객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며, 15세에 홀연히 출가할 마음이 있어 남평 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벽봉 민성碧峰敏性 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19세에 월출산에 올라갔는데 마침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다. 밤에 앉아서 달을 바라보다가

010_1039_a_01L靳也幼入輪山剃染於白蓮禪師之室
010_1039_a_02L受具拈香於玩虎法師之壇南徃達摩
010_1039_a_03L北叅德龍東遊楞伽西棲尖察遊方
010_1039_a_04L已罷掩關證理者三十餘年門行雖
010_1039_a_05L特與縞衣草衣互相鍾愛諸山之
010_1039_a_06L稱三衣者多矣若雪潭門下之三潭也
010_1039_a_07L地大豊厚舌根默重政無腹非者矣
010_1039_a_08L偈頌則珠聯訓解則刃迎食不擇品
010_1039_a_09L飮不求香處身行道多異於人乾隆
010_1039_a_10L四十四年正宗大王三年己亥生咸豊
010_1039_a_11L二年哲宗三年壬子六月十一日示寂
010_1039_a_12L于大芚寺之導般庵世壽七十四法臘
010_1039_a_13L五十八有語錄一卷白坡申獻永
010_1039_a_14L其影并書

010_1039_a_15L

010_1039_a_16L草衣禪伯傳

010_1039_a_17L
師名意恂字中孚號草衣又曰一枝
010_1039_a_18L姓張氏羅州三鄕人母夢大星入
010_1039_a_19L仍有娠正宗丙午四月初五日生
010_1039_a_20L同治四年乙丑七月初二日示寂于快
010_1039_a_21L年閣世壽八十法臘六十五五歲
010_1039_a_22L悍流中有挾而出者十五忽有出家之
010_1039_a_23L投南平雲興寺剃染于碧峰敏性師
010_1039_a_24L十九登月出山適日落月出夜坐望月

010_1039_b_01L심흉心胸이 탁 트이는 것을 경험하였다.
스님은 이때부터 선지식을 두루 찾아뵙고 삼장三藏을 통달하였으며, 완호玩虎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입실 제자가 되었으며, 금담金潭 조사에게 선법禪法을 받은 후에 금강산·지리산·한라산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러고는 열수洌水정약용丁若鏞·자하紫霞신위申緯24)·해거海居홍석주洪奭周·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석오石梧윤치영尹致英25) 등 당시 석학들과 교유를 가졌다.
초의 선사는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점점 꼬리가 드러나게 되자 비로소 은신하여 살 처소를 마련하였는데, 그곳이 일지암一枝庵이다. 나중에 또 하나의 작은 토굴을 마련하였으니 그곳은 용마암龍馬庵이며, 다시 몸을 마칠 움막을 세웠으니 그곳이 바로 쾌년각快年閣이다.
초의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은 제자가 40여 명이고 보살계를 받은 제자는 70여 명이나 되며, 선교禪敎와 잡공雜工을 받은 제자는 수백 명에 달한다. 대둔사 남쪽 산기슭에 부도를 세웠는데,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26) 공이 그 탑명塔銘을 지었고, 탑 오른쪽에 비석을 세웠는데 양석養石 신관호申觀浩27)가 그 비문을 지었다.
문집 4권과 『사변만어四辨漫語』 1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송암대사전松庵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최흠最欽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속성은 허許씨이다. 아버지는 허주許珠이고 할아버지는 허규許珪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이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능학能學 선사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두루 다 배웠다. 학문이 견실堅實해지고 나이가 많아지자 남악 영오南岳暎晤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스님은 쌍운 금화雙運錦華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송매 성원松梅省遠 스님의 증손 제자이며, 포월 초민抱月楚旻 스님의 현손 제자이고 환성喚醒 스님의 5대 법손이다.
송암 스님은 개당開堂법회를 통해 푸른 눈의 학인들에게 오교五敎를 가르쳐 주었으며, 문을 걸어 잠그고 승복 입은 선화禪和들에게 3구句를 창唱하였다. 스님은 동치同治 9년 경오(고종 7, 1870) 4월 26일에 열반하였다.
교학을 전해 받은 제자는 호성 긍준虎惺肯俊과 화월 보간華月普侃 등이 있고, 선법을 전해 받은 제자는 늑암勒庵과 치백緇白 등 20여 명이 있다.

010_1039_b_01L心胸開通1) [36] 叅知識學通三藏拈香
010_1039_b_02L於玩虎法師受禪于金潭祖師遊覽金
010_1039_b_03L剛知異漢拏之仙界飽叅冽水丁若
紫霞
010_1039_b_04L
海居洪奭
秋史金正
石梧尹致
之文藪
010_1039_b_05L可匿者名聲也猶可露者巴尾也
010_1039_b_06L構隱身之巢一枝庵也後結容膝之窟
010_1039_b_07L龍馬庵也復立終身之幕快年閣也
010_1039_b_08L沙彌戒者四十餘人受菩薩戒者
010_1039_b_09L十餘人受禪敎雜工者數百餘人
010_1039_b_10L浮屠於大芚之南麓李松坡喜豊作其
010_1039_b_11L建碑于塔之右申養石觀浩述其
010_1039_b_12L文集四卷四辨漫語一卷傳于世

010_1039_b_13L

010_1039_b_14L松庵大師傳

010_1039_b_15L
師名最欽號松庵姓許氏父珠祖珪
010_1039_b_16L廣州人母李氏十五出家染衣於能學
010_1039_b_17L禪師習內外典學已實年已深拈香
010_1039_b_18L於南岳暎2) [37] 禪師雙運錦華之孫
010_1039_b_19L梅省遠之曾抱月楚旻之玄喚醒之五
010_1039_b_20L開堂示五敎於靑眼學者掩關唱三
010_1039_b_21L句於緇衣禪和示寂於同治九年庚午
010_1039_b_22L四月二十六日受敎者虎惺肯俊華
010_1039_b_23L3) [38] 普侃等受禪者勒庵緇白等二十
010_1039_b_24L餘人

010_1039_c_01L
철선강사전鐵船講師傳
스님의 법명은 혜즙惠楫이고 호는 철선鐵船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응손應孫이고 어머니는 윤씨이다.
어머니가 어떤 노인이 붓을 주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건륭乾隆 56년 신해(정조 15, 1791)에 태어나서 함풍咸豊 8년 무오(철종 8, 1858) 정월 25일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상원암上院庵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67세이고 법랍은 55년이다.
을묘년(정조 19, 1795)에 부모를 잃고 갑자년(순조 4, 1804)에 출가하여 두륜산 성일性一 존숙에게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열아홉 살에 완호玩虎 선사에게 나아가 『치문緇門』을 배웠고 연암蓮庵 조사에게로 가서 사집四集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철경 대운掣鯨大雲 스님을 참알하고 오교五敎를 배웠다. 그러고 나서 수룡 색성袖龍頣性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스님은 이후에 각 산문을 돌아다니면서 개당開堂설법을 하기 시작하여 찾아오는 학인들을 맞아 가르치기를 20여 년 동안 하였으며, 아무 말 없이 앉아서 지관止觀을 수행한 지 20여 년이나 되었다.
스님의 문장은 우뚝하고 찬란하였으며 필법筆法 또한 걸출하여 당시 사람들이 ‘철필鐵筆’이라고 불렀다. 열수 정약용 선생도 찬탄하여 마지않았으며, 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격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둔사지大芚寺誌』를 살펴보았더니 ‘철선 스님의 글씨는 조려藻麗하면서도 소략하고 속되고 촌스러운 티를 벗어났다. 겸하여 스님의 문장을 보면 마음자리가 고요하고 탁 트임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후배들 중에 출중한 인물이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말이 치달리는 것처럼 세월이 빠르니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고 내전과 외전을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꽃다운 이름을 드날려 아암兒庵의 광명을 이은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스님에 대한 기대는 깊고도 깊으며, 수년이 지난 뒤에 귀족들과 선비들이 틀림없이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들 것이니, 그때를 당해서 어떻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겠습니까?”
문집 1권이 남아 있다. 스님은 청허淸虛 스님의 9대 법손이고 연파蓮坡 스님의 손자 제자이며, 서주犀舟 스님, 태호太湖 스님과는 백중伯仲(형제) 관계이다.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32인이고 법을 받은 제자는 일곱 명이다. 비석은 두륜산 왼편 산기슭에 세웠으며,

010_1039_c_01L鐵船講師傳

010_1039_c_02L
師名惠楫號鐵船姓金氏靈岩人
010_1039_c_03L應孫母尹氏夢老人授筆仍以有娠
010_1039_c_04L乾隆五十六年辛亥生咸豊八年戊午
010_1039_c_05L正月二十五日未時示寂于上院庵
010_1039_c_06L壽六十七法臘五十五乙卯失怙
010_1039_c_07L出家剃染於頭輪性一尊宿十九
010_1039_c_08L玩虎禪師學緇門就蓮庵祖師受四
010_1039_c_09L叅掣鯨大雲受五敎拈香於袖龍
010_1039_c_10L賾性之室開幢轉山接來叅者二十
010_1039_c_11L餘年默坐止觀者二十餘年文章卓
010_1039_c_12L筆法鉤傑時稱鐵筆冽水丁先生
010_1039_c_13L贊歎不已書以勸之曰觀寺志筆力藻
010_1039_c_14L脫畧蔬荀之氣兼見心地靜廓
010_1039_c_15L以後塵有人爲喜光陰如駛幸勿4) [39]
010_1039_c_16L劬心內外之典早歲蜚英以紹兒
010_1039_c_17L庵之光深冀深冀數年之後肯遊薦
010_1039_c_18L紳先生必尋鐵船之聲迹當此時
010_1039_c_19L以塞之有集一卷淸虛之九世蓮坡
010_1039_c_20L之孫犀舟太湖伯仲之間受戒者三十
010_1039_c_21L二人受法者七人立碑于頭輪之左麓
010_1039_c_22L「編」甲本正誤表作「徧」「梧」甲本正誤表
010_1039_c_23L作「晤」
「目」甲本正誤表作「月」「忨」甲
010_1039_c_24L本正誤表作「玩」

010_1040_a_01L판서判書 남병철南秉哲28)이 비문을 지었다.
대은선백전大隱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낭오朗旿이고 호는 대은大隱이며, 속성은 배裵씨이고 낭주朗州(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건륭乾隆 경자년(정조 4, 1780)에 태어났다.
스님은 영암 월출산으로 출가하여 금담金潭 선사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금담 선사는 연담蓮潭의 제자이다. 대은 스님은 연담·백련白蓮·의암義庵·낭암朗岩·완호玩虎·연파蓮坡 등 여러 용상龍象29)들을 참알參謁하고 학문을 익혔다.
도가 이미 이루어지자 향을 뽑아 사르고 개당開堂하여 설법을 하면서 후학들을 맞아 학업을 가르치니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오히려 자리가 비좁을 지경이었다. 정신은 일월日月처럼 밝고 굳은 절개는 송백松栢처럼 곧았다. 손으로는 삼장三藏을 베끼고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으며, 하루 세 때 부처님께 예배하며 공양을 올리되 향과 차와 집기들을 신심信心을 가지고 장만하곤 하였다.
앉으나 누우나 항상 그가 하는 정공精功은 아무도 따라 행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교학敎學을 버리고 선학禪學으로 들어가자 여러 지방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스님에게로 개미떼처럼 밀려와 하루 한 번만 자고 한 끼니만 먹는 계율을 따랐다. 유명한 절에서 스님을 초청했다가 스님이 거절하면 도리어 죄송스러워했다. 각 산문을 전전할 때는 업고 가겠다고 자청하는 이도 있었으며, 우리나라의 큰 선지식으로서 남산南山의 도선道宣 스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신 것이라고들 하였다.
도광道光 신축년(헌종 7, 1841) 윤3월 25일에 두륜산 만일암에 있으면서 설법을 마치고 나서 조용히 앉아서 열반에 들었으니, 세속 나이는 62세이고 법랍은 47년이었다. 주인을 잃은 선림禪林의 법중法衆들은 오열하면서 목이 메어 했다.
대은 선사의 법을 이은 제자는 혜홍慧洪이고, 혜홍 스님의 아래에는 유진有眞 스님이 있었으며, 그 밖에 선법을 받은 제자와 교학을 받은 제자는 어느 문중도 이만큼 성대한 문중이 없었다.
월출산 상견암上見庵·두륜산 만일암挽日庵·달마산 지장암地藏庵·덕룡산德龍山 천축암天竺庵·반야산般若山 무량사無量寺·가지산 내원암內院庵·조계산 삼일암三日庵의 칠전七殿·동리산 미타암彌陀庵·쌍계사의 불일암佛日庵·칠불암七佛庵의 승당僧堂에는 아직도 대은 스님의 공손한 유풍과 성대한 규범이 보인다.
스님의 3대 법손 성연聖演이 말하였다.
“스님께서 손수 쓰신 장경藏經이

010_1040_a_01L判書南秉哲撰

010_1040_a_02L

010_1040_a_03L大隱禪伯傳

010_1040_a_04L
師名朗旿號大隱姓裵氏朗州人
010_1040_a_05L隆庚子生出家於月出山剃染於金潭
010_1040_a_06L禪師禪師蓮潭之弟子也叅於蓮潭
010_1040_a_07L白蓮義庵朗岩玩虎蓮坡諸龍象道已
010_1040_a_08L拈香開堂提接物情猶隘日月精
010_1040_a_09L松栢固節手書三藏左右分安
010_1040_a_10L時禮拜供養香茶什器信心備辦
010_1040_a_11L臥常向其所精功人所難行舍敎入
010_1040_a_12L諸方蟻附克從一宿一食之戒
010_1040_a_13L名之1) [40] 以不得請邀爲罪轉山之時
010_1040_a_14L有自願背負之人我東方大善知識南
010_1040_a_15L山道宣重興於世云道光辛丑後三月
010_1040_a_16L二十五日在頭輪山挽日庵說法了
010_1040_a_17L泊然坐寂世壽六十二夏臘四十七
010_1040_a_18L禪林失主法衆如咽有受法弟子慧洪
010_1040_a_19L洪之下有有眞其餘受禪受敎孰如其
010_1040_a_20L月出之上見2) [41] 之挽日達摩之地
010_1040_a_21L德龍之天竺般若之無量3) [42] 智之
010_1040_a_22L內院曹溪之三日七殿桐裡之彌陁
010_1040_a_23L雙溪之佛日七佛之僧堂尙見其遺風
010_1040_a_24L欽欽餘規濟濟三世孫聖演曰手書

010_1040_b_01L지금까지도 절의 문중 법손 제자들에게 전해 내려온다.”
성담선백전性潭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수의守意이고 호는 성담性潭이며, 전남 해남군 죽음竹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세속을 좋아하지 않았고 마음속에 출가할 것을 서원하더니, 몰래 집을 나가 두륜산으로 가서 담연湛演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학문이 이미 성숙되자 인곡仁谷 법사의 조실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연담蓮潭 스님의 증손 법제자이다. 스님은 기골이 장대하고 지식이 바다처럼 넓었으며, 성대한 의식이나 작은 행동에 이르기까지 우바국다憂婆國多 존자보다 밑돌지 않을 정도였다. 스님은 참선에 들어 화두話頭를 참구함에 있어서 대은大隱 스님과 인암忍庵 스님과 더불어 모두 우리 동방에 한 발 앞선 스님이었다.
일찍이 초의草衣 스님과 함께 힘을 합해 작은 암자 하나를 짓고 정진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혼자 수행하리라고 스스로 기약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조차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치 나비가 모여들듯 개미떼가 밀려오듯 하였다. 스님은 지팡이 하나와 표주박 하나로 혹은 앉아서 혹은 걸어가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었다. 전도顚倒된 망상도 모두 여의고 나무 밑에서 하루 한 번만 잠을 자고 온종일 한 끼니만 먹었다.
스님은 성격이 엄격하고 냉담하였으며 청렴하고 담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꺼려하였다. 잘못은 조금도 숨겨 주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더러는 스님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일찍이 아버님 기일에 참예하였다가 집안사람들이 닭을 잡으려 하자 말렸으나 듣지 않으므로 그 뒤로는 발길을 끊고 다시는 참예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또 목이버섯 요리를 막 먹으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고기 같다고 하자 다 버리고 먹지 않았다. 그가 진실로 얼마나 계율을 지키려고 했는지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도광道光 26년 정미(헌종 13, 1847) 9월 29일에 가지산 내원암內院庵에서 적멸을 보이셨다. 스님이 입적하신 뒤로부터는 묵언黙言이 고성高聲으로 변하였다.30)
인암선백전忍庵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의한意閑이고 호는 인암忍庵이며, 속성은 박朴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일찍이 부모를 잃은 후 의지할 친척이 아무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단지 입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섰으니, 어찌 승려들이 사는 절이나 속가를 따졌겠는가?
우연히 미황사美黃寺에 들렀다가 완해 견현玩海見賢 선사에 의지하여

010_1040_b_01L藏經至今相傳於4)玉果 [43] 寺之門孫弟子
010_1040_b_02L處云

010_1040_b_03L

010_1040_b_04L性潭禪伯傳

010_1040_b_05L
師名守意號性潭海南竹陰人幼不
010_1040_b_06L好俗心願出家暗投輪山染衣於湛
010_1040_b_07L演長老學已成拈香於仁谷法師
010_1040_b_08L潭之曾孫氣骨長大知識汪洋盛儀
010_1040_b_09L細行不下於波離毱多叅禪話頭
010_1040_b_10L大隱忍庵並驅東方曾與草衣同結
010_1040_b_11L草庵未幾以獨行自期拒之而來者
010_1040_b_12L若蝶聚而蟻附一杖一彯或坐或行
010_1040_b_13L無有恐怖遠離顚倒一宿樹下一食
010_1040_b_14L日中性嚴冷枯淡人皆畏忌之少不
010_1040_b_15L隱過人欲報復者有之甞叅親忌
010_1040_b_16L內殺鷄止之不聽絕不更叅甞辦木
010_1040_b_17L人言似肉渾棄不喫其信愼如此
010_1040_b_18L道光二十六年丁未九月二十九日
010_1040_b_19L寂于伽智山內院庵自此默言爲高聲

010_1040_b_20L

010_1040_b_21L忍庵禪伯傳

010_1040_b_22L
師名意閑號忍庵姓朴氏靈岩人
010_1040_b_23L失怙恃無依親戚但知衣食何論僧
010_1040_b_24L望門投宿偶入美黃依玩海見賢

010_1040_c_01L먹고 자고 하면서 학문을 익히게 되었는데, 그런 중에서도 계율을 한결같이 잘 지켰다. 나이가 이미 장성해서는 완해 스님의 조실에서 의발을 전해 받았으니, 곧 완해 스님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며 연담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인암 스님은 여러 산문의 납자衲子들을 교화하고 이어 선관禪關에 들어가 정진하였다. 스님은 행장을 꾸려 허리에 차고 나무 아래에서 하루 한 번만 자고 온종일 한 끼니만 먹으면서 정진하였으며 계율을 엄정하게 지켰다.
장흥 보림사寶林寺 수남암水南庵에 거주하면서 선화자禪和子들을 맞아 가르침을 주다가 대둔사 적련암赤蓮庵으로 옮겨 여러 해를 머물러 계시면서 경론에 대하여 묻고 답하기를 오랫동안 하였다.
스님에게 교학을 받은 제자와 선법을 받은 제자와 계를 받은 제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다.
스님은 인곡仁谷 선사에게 수참受懺(禪懺)을 받고 영허 의현靈虛義玄 선사에게 계참戒懺을 전해 주었다. 선사의 세속 나이는 51세이고 법랍은 36년이다.
문인으로는 능화 필언能化必彥이 있는데, 그는 비록 인암 스님만은 못하지만 스승의 자취를 계승하였다. 인암 스님의 크고 작은 공덕과 업적에 대해서는 행장 1축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허강백전映虛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선영善影이고 자는 무외無畏이며, 호는 영허映虛이고 거주하던 방의 당호堂號는 역산櫟山이다. 속성은 임林씨이고 아버지는 득원得元이며 어머니는 조趙씨이다. 어머니가 불상에서 서광瑞光이 비치는 꿈을 꾸고 아이를 잉태하여 왕성王城인 서울의 운현현雲現峴에서 낳았다. 그때가 건륭乾隆 57년 정조 16년 임자(1792) 3월 23일이며, 광서光緖(淸 德宗의 연호) 6년 경진(고종 17, 1880) 5월 7일에 설봉산雪峰山 내원암內院庵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89세이고 하랍夏臘은 77년이다.
열두 살 때 용운 승행龍雲勝行 선사를 좇아가 경기도 양주 학림암鶴林庵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성암 덕함聖岩德凾 선사로부터 계戒를 받았고, 이어 화악 지탁華岳知濯 대사에게 선법禪法을 받았으며,

010_1040_c_01L禪師衣食學業一遵約束年旣長成
010_1040_c_02L入室受衣即玩海之嗣蓮潭之孫
010_1040_c_03L化諸山衲子仍入禪關腰包行裝
010_1040_c_04L下一宿日中一食嚴持戒律住於寶
010_1040_c_05L林之水南庵提接禪和子多年住於大
010_1040_c_06L芚之赤蓮庵問難經5) [44] 久矣受其
010_1040_c_07L敎者禪者戒者不可悉錄受懺於仁谷
010_1040_c_08L禪師授戒懺於靈戲義玄禪師世壽五
010_1040_c_09L十一法臘三十六門人有能化必彥
010_1040_c_10L雖不如師師迹繼矣大小功業備在
010_1040_c_11L行狀一軸

010_1040_c_12L

010_1040_c_13L映虛講伯傳

010_1040_c_14L
師名善影字無畏號映戲室曰櫟山
010_1040_c_15L姓林氏父得元母趙氏母夢見佛像
010_1040_c_16L之瑞生於王城之雲現峴乾隆五十
010_1040_c_17L七年正宗十六年壬子三月二十三日也
010_1040_c_18L光緖六年庚辰五月初七日示滅于雪
010_1040_c_19L峯山內院庵世壽八十九夏臘七十七
010_1040_c_20L十二從龍雲勝行禪師祝髮于楊州鶴
010_1040_c_21L林庵受戒于聖岩德凾禪師受禪于華
010_1040_c_22L「奇」甲本正誤表作「寺」「輪」上甲本正誤
010_1040_c_23L表有「頭」
「伽」甲本正誤表作「迦」「玉果」
010_1040_c_24L甲本正誤表曰衍字
「綸」甲本正誤表作「論」

010_1041_a_01L스물한 살에 인봉 덕준仁峯德俊 스님의 문하에서 건당建幢하고 법통을 이었으니, 청허淸虛 선사의 계파이고 환성喚醒의 5대 법손이다. 영허 스님은 어릴 때에는 주로 남쪽 지방에서 지내다가 늦게야 석왕사釋王寺 내원암에 들어갔다.
스님은 풍채가 우람하고 음성音聲이 웅장하고 명랑하였다. 특히 강론을 잘하여 강론하는 도량에 두루 돌아다니며 강론하였으므로 명성이 남북을 뒤흔들 지경이었다. 재능의 그릇이 이미 가득 채워지자 강당 문을 열고 미혹한 중생들을 교화하기 시작하니 여러 지방에서 물이 바다로 모여들듯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영허 스님이 강단에서 물러나 별원別院에 머물렀다. 그러나 스님에게 글귀와 계를 받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마치 여름 구름이 일어나는 것처럼 많았으며, 의발을 전해 받고 법을 얻은 제자는 마치 겨울 고갯마루에 우뚝 솟아 있는 소나무와 같았다.
특히 문담文潭과 용암庸庵 같은 걸출한 수행자는 호남과 관서 지방에서 총섭摠攝을 지낸 바 있다.
영허 스님의 탑비는 설봉산 동편 기슭에 세웠으며, 진영은 석왕사와 대둔사의 영각影閣에 걸려 있다. 비석은 영허 스님이 살아 계실 때에 세운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한 줄로 된 큰 글씨로 ‘유명조선국 조계종사 화엄강백 영허당대선사지비有明朝鮮國曹溪宗師華嚴講伯映虛堂大禪師之碑’라고 쓰여 있는데, 그 글씨는 임금이 직접 써서 하사한 것이다.
영허 스님의 비석 뒷면에 귤산橘山 가오실嘉梧室 이유원李裕元31)이 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헌종憲宗 기유년(1849) 봄에 나의 선대부先大夫 문정공文貞公께서 대종백大宗伯(예조판서)으로 계시면서 왕명을 받아 관북 지역에 있던 왕릉을 살펴보기 위하여 안변 석왕사釋王寺에 들렀다가 마침 그곳에서 역산櫟山 스님을 만났다고 한다. 선친의 말에 의하면, 스님은 모습이 고박古朴하고 언행과 논변이 시원스럽고 달변이었으며 선친과 나이가 같았으므로 스님과 깊이 친분을 맺었다고 한다.
그 무렵 소자小子(이유원)는 의주 부윤府尹으로 만부灣府(의주)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선대부先大夫께서는 연공사年貢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오다가 만부에 머무셨다. 이때 영허 스님이 선친에게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친께서는 직접 답장을 써서 보내곤 했다. 소자는 그 당시 아버님을 측근에서 모시고 있었으므로 오가는 편지의 내용을 통해 스님의 어진 인품을 알 수 있었다.
그 후 14년이 지난 뒤에 내가 관북關北(함경도)의 관찰사가 되어 철령을 넘었을 때 공사公事가 워낙 촉급하여 설산雪山을 지나가지 못했다. 갑자년(고종 1, 1864)에 외람되게도 비상非常의 명을 받아 조정의 부름이 지엄하고 급박해서 두 번째로 산문山門(석왕사)을 지났으나 영허 스님을 찾아뵐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산천에 머물고 있을 적에 봉선사奉先寺를 찾아갔다가 용암庸菴 석전우釋典愚 스님으로부터 그의 스승인 역산 스님의 탑명을 지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이렇게 탑명을 기록하였다.
역산 스님은 나의 선대부와는 이념을 초월한 공문空門의 벗이다. 어찌 한 말씀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님의 법명은 선영이고

010_1041_a_01L岳知濯大師二十一建幢于仁峯德俊
010_1041_a_02L之門淸虛之派喚醒之五世早年
010_1041_a_03L南土晩入釋王寺內院庵1) [45] 相豊厚
010_1041_a_04L音聲雄朗周遊講場名動南北才器
010_1041_a_05L已滿開門化迷諸方水歸退處別院
010_1041_a_06L乞句受火者若夏雲之多傳衣得法者
010_1041_a_07L如冬嶺之秀文潭庸庵之傑行湖南關
010_1041_a_08L西之揔攝建塔碑于雪峯山之東麓
010_1041_a_09L眞影於釋王大芚之影閣碑則生時所
010_1041_a_10L故大書一行曰有明朝鮮國曹溪宗
010_1041_a_11L師華嚴講伯映虛堂大禪師之碑御書
010_1041_a_12L所賜橘山嘉梧室李裕元書碑後曰
010_1041_a_13L憲宗己酉春我先大夫文貞公以大宗
010_1041_a_14L承命奉審北陵行安邊之釋王寺
010_1041_a_15L遇櫟山見形貌古朴言論曠達
010_1041_a_16L嘉其爲同庚托契甚厚時小子守灣府
010_1041_a_17L先大夫以年貢使留灣專指馳凾
010_1041_a_18L大夫手書以答小子侍左右知師之
010_1041_a_19L後十四年余伯關北踰嶺公事促
010_1041_a_20L不得歷雪山甲子猥承非常之命馹召
010_1041_a_21L嚴急再過山門無暇尋眞又十年退
010_1041_a_22L居鄕山遊奉先寺庸菴釋典愚以其
010_1041_a_23L師櫟山塔銘屬余余曰櫟山吾先大
010_1041_a_24L夫之空門交也安得無一言贈乎

010_1041_b_01L자는 무외이며, 호는 영허이고 역산은 스님의 맨 처음 호이다. 속성은 안동 임林씨이고 아버지의 성함은 득원得元이며 어머니는 한양 조趙씨이다.
어머니가 불상에서 서광이 비치는 기이한 꿈을 꾸고 아이를 잉태하여 왕성인 서울의 운현현에서 스님을 낳았으니, 그때가 정묘正廟(정조) 임자년(1792) 3월 23일이다.
나이 열두 살에 용운 승행 선자를 좇아가 양주 학림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성암 덕함 선사에게 계법戒法을 받았으며, 화악 지탁 대사에게서 선법禪法을 받았다. 스물한 살에 인봉 덕준 스님의 문하에서 건당建幢하고 법통을 이었으니, 그 연원을 소급해 살펴보면 청허 선사의 계파이고 환성 스님은 5대 조사이다. 이것이 스님의 내력이다.
영허 스님은 어릴 적에는 주로 남쪽 지방에서 지내다가 늦게야 석왕사 내원암에 들어갔다. 그의 학문은 8만 모든 경전을 근본으로 하여 정법안장正法眼藏을 확립하여 단전單傳의 계통을 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지방의 사문들이 ‘조계종사 화엄강백曹溪宗師華嚴講伯’으로 존경하였다.
나는 탑명에 대하여 본디 명문銘文을 써 주는 것에 아주 인색하지만, 영허 스님은 선친 때부터 교분이 있었던 데다가 과거에 함주咸州(함경도)에 있으면서 살펴본 바 헛된 명성과 상相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사람됨이 명銘의 글에 부합함을 알 수 있기에 명문을 짓고 게송을 붙인다.

一枝宗法海之東    한 가지 종법宗法이 해동海東으로 흘러오니
在雲靑天水在中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그 속에 있네
石虎抱兒眠正熟    돌 호랑이 아기 안고 잠이 막 깊어지는데
松風瑟瑟萬緣空    솔바람 솔솔 부니 온갖 인연 비어지네

성상聖上(고종) 10년 계유(1873) 가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원임규장각 직제학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이 짓고, 통정대부 안변도호부사通政大夫安邊都護府使 전의全義 이희준李熙準이 쓰다.”
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는 13명이고 수참受懺 제자는 80여 명이며, 문집 2권이 남아 있다.
낙파선사전洛波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인성印性이고 호는 낙파洛波이며, 동래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 금정산으로 들어가

010_1041_b_01L名善影字無畏號映虛櫟山王初號
010_1041_b_02L俗姓安東林氏父曰得元母漢陽
010_1041_b_03L趙氏有夢佛之異生師於王城之雲現
010_1041_b_04L2) [46] 廟壬子三月二十三日也年十
010_1041_b_05L從龍雲勝行禪者祝髮于楊州鶴林
010_1041_b_06L受戒法于聖岩德凾大師叅禪于華
010_1041_b_07L岳知濯大師二十一建幢于仁峯德俊
010_1041_b_08L之門溯其淵源乃淸虛派而喚醒爲五
010_1041_b_09L世祖此師之來歷也早年由南土
010_1041_b_10L晩入釋王寺內院其學宗八萬諸經
010_1041_b_11L於正法眼藏得單傳之統諸路沙門
010_1041_b_12L尊爲曹溪宗師華嚴講伯余於塔銘
010_1041_b_13L靳爲銘而映虛世交也粵在咸州
010_1041_b_14L以名相聞於此可知其爲人而合於銘
010_1041_b_15L偈曰一枝宗法海之東3)在雲 [47] 靑天
010_1041_b_16L水在中石虎抑兒眠正熟松風瑟瑟萬
010_1041_b_17L緣空聖上十年癸酉秋大匡輔國崇祿
010_1041_b_18L大夫領中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月
010_1041_b_19L城李裕元撰通政大夫安邊都護府使
010_1041_b_20L全義李熙準書受法弟子十三人受懺
010_1041_b_21L弟子八十餘人有文集二卷

010_1041_b_22L

010_1041_b_23L洛波禪師傳

010_1041_b_24L
師名印性號洛波東萊人幼入金井

010_1041_c_01L머리를 깎고 법을 받았다.
24세~25세 무렵 그 절의 기실記室 소임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그의 친구였던 죽은 스님이 와서 안부를 묻고 앉아서 말하였다.
“그대가 서기 소임을 맡았는가?”
낙파 스님이 대답하였다.
“그렇다.”
그가 말하였다.
“서기 소임을 맡지 마라.”
스님이 되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친구 스님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과거에 서기 소임을 맡아보면서 죄를 지은 까닭에 모두 뱀의 몸을 받아 현재 이 도량에 살고 있다. 그대가 만일 믿지 못하겠거든 누각 옆으로 와서 한번 살펴보게.”
홀연히 놀라 깨고 보니 꿈이었다. 스님은 곧 누각 옆으로 가서 살펴보니 수없이 많은 구렁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마치 굵기가 서까래만 하였다. 너무도 놀라서 곧바로 그 직책을 사임하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약간의 사물私物을 팔아 절에 헌납하였다. 그러고는 다만 옷가지와 발우만 가지고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니 그때 스님의 나이가 27세였다. 그 이후 스님은 다시는 산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스님은 마침내 홍명 궤관鴻鳴軌觀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홍명은 응파 태인凝波兌仁의 법제자이다. 응파 스님은 용파 도주龍波道周의 법제자이고, 용파 스님은 호암虎岩 조사의 법제자이니 낙파 스님은 곧 호암 스님의 4대 법손이다.
스님은 옷 한 벌과 발우 하나로 하루 종일 한 끼의 식사를 하면서 수행에만 전념하였다. 마음 쓰지 않아도 옷이 이르고 생각하지 않아도 먹는 것이 저절로 해결되었다. 스님은 율신律身 섭생攝生의 도가 함께 수행을 하던 도반들에 비하여 단연 뛰어났다. 그 당시 사방 산문 가운데 낙파 스님이 제일가는 선지식이라고 모두들 칭송이 자자했다.
스님은 광서光緖 정축년(고종 14, 1877)에 마하연에서 적멸을 보이셨다. 사유闍維 의식을 하던 날 밤낮없이 광명이 비추자 사람들은 모두 우러러보면서 찬탄하였다. 세속 나이는 84세이고 하랍夏臘은 68년이었다.
설월대사전雪月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봉준奉準이고 호는 설월雪月이며, 속성은 윤尹씨이고 전남 낭주朗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010_1041_c_01L剃髮受法二十四五時行其寺記
010_1041_c_02L室之任一日晝眠其友僧已死者來
010_1041_c_03L問訊而坐曰君爲書記乎曰然曰莫
010_1041_c_04L作書記曰奚爲也曰我等已作書記之
010_1041_c_05L皆爲蛇身現在此道場君若不信
010_1041_c_06L來見樓側因忽驚起即徃樓側無數
010_1041_c_07L4)𧉃 [48] 蜿蜒若椽梠大驚之仍辭其職
010_1041_c_08L放賣若干己物納之于寺但持衣鉢
010_1041_c_09L奔入金剛山摩訶衍時年二十七更不
010_1041_c_10L出山門外拈香於鴻鳴軌觀禪師之室
010_1041_c_11L鴻鳴凝波兌仁之子凝波龍波道周
010_1041_c_12L之子龍波虎岩祖師之子乃虎岩之
010_1041_c_13L四世一衣一鉢日中一食不意而衣至
010_1041_c_14L不念而食至律身攝生之道并出自儕
010_1041_c_15L乃於四山之中皆稱爲第一善知識
010_1041_c_16L光緖丁丑示寂于摩訶衍闍維之
010_1041_c_17L光透晝夜人皆歎仰世壽八十四
010_1041_c_18L夏臘六十八

010_1041_c_19L

010_1041_c_20L雪月大師傳

010_1041_c_21L
師名奉準號雪月姓尹氏朗州人
010_1041_c_22L「自」甲本正誤表作「身」「王」甲本正誤表
010_1041_c_23L作「正」
「在雲」甲本正誤表作「雲在」「𧉃)」
010_1041_c_24L甲本正誤表作「蚖」

010_1042_a_01L달마산으로 출가하여 은묵 만정隱默萬正 스님에게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미봉眉峰 대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제자가 되었다.
스님은 성품이 준엄하여 사람들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마음에 삿되고 굽음이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학식과 덕행이 모두 성취되자 깃대를 세우고(建幢) 대중들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만년에는 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22명이다. 스님은 낭호朗湖 스님과는 백중伯仲의 관계이고 인암忍庵 스님, 보문普門 스님과는 같은 문하의 종형제 관계이니 모두 연담 조사의 법손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청연淸淵 스님과 응운應雲 스님 등이 유명하다. 응운 스님이 적멸을 보이자 사유闍維 의식을 거행하던 날 밤에 밤새도록 방광하였다. 초골超骨을 얻어 그의 법형法兄 청연 스님이 달마산 오른편 산기슭에 두 개의 부도를 세웠는데, 하나는 법사法師이신 설월雪月 스님의 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법제法弟인 응운 스님의 부도이다.
제봉선백전霽峰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운봉雲峯이고 호는 제봉霽峰이며, 또 다른 칭호로는 제산운사霽山雲史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영남 지방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중간에 전주 위봉사威鳳寺로 옮겨 주석하면서부터 뛰어난 문장력으로 그 명성이 초의草衣·해붕海鵬·초엄草广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제봉 스님은 초의 스님과 함께 『서방산진묵조사어록西方山震默祖師語錄』을 교정하여 간행 유포하기도 했다.
스님은 지식이 심원深遠하고 문장이 웅장하고 호방豪放하였으며, 초대하면 언제고 나아가 설법을 해 주었고, 사람이 찾아가면 항상 놀아 주었으므로 자취를 숨기고 살 수가 없었다. 전주 종남산 송광사松廣寺 대웅전 동쪽 벽에 스님의 영상影像(진영)이 있다. 스스로 찬양하는 게송을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人間萬事夢中緣    인간의 온갖 일 꿈속의 인연인데
自性彌陀在目前    자성미타自性彌陀가 눈앞에 있네
海濶風淸雲已散    넓은 바다 시원한 바람에 구름 이미 흩어지고
一帆風送向西天    돛배 하나가 바람에 불려 서천西天으로 향해 가네

제봉 스님의 제자 중에 유명한 스님은 용허 서운龍虛瑞雲이 있는데 불명산 화엄사華嚴寺에 살고 있다.
제봉 스님의 스승은 구담 전붕九潭展鵬 스님이고 할아버지는 의봉 유영義峰有英 스님이며, 증조는 동운東雲 스님이고 5대조는 영주靈珠 스님이며, 6대조는 송계松溪 스님이고 7대조는 대암大岩 스님이며, 8대조는 용암龍岩 스님이고

010_1042_a_01L家於達摩山剃染於隱默萬正拈香於
010_1042_a_02L眉峰大師之室性峻嚴不容人過
010_1042_a_03L無邪曲人皆畏之學行并成建幢領
010_1042_a_04L晩節推柄於弟子受戒者二十二人
010_1042_a_05L師與朗湖爲伯仲與忍庵普門爲門從
010_1042_a_06L皆蓮祖法孫弟子有淸淵應雲等
010_1042_a_07L及應雲示寂闍維之夜放光徹夜
010_1042_a_08L超骨其兄淸淵爲立二浮屠於達摩山
010_1042_a_09L之右麓一則法師雪月之浮屠一則法
010_1042_a_10L弟應雲之浮屠

010_1042_a_11L

010_1042_a_12L霽峰禪伯傳

010_1042_a_13L
師名雲峯號霽峰一稱霽山雲史
010_1042_a_14L是嶺南之人也中間住錫於全州威鳳
010_1042_a_15L文章聲名與艸衣海鵬艸广齊名
010_1042_a_16L與艸衣校正西方山震默祖師語錄而
010_1042_a_17L刊布知識深遠文章雄豪招之而
010_1042_a_18L尋之而遊不可匿跡終南山松廣
010_1042_a_19L寺大雄殿東壁有霽峰影像自贊曰
010_1042_a_20L人間萬事夢中緣自性彌陀在目前
010_1042_a_21L濶風淸雲已散一帆風送向西天弟子
010_1042_a_22L有龍虛瑞雲在佛明山華嚴寺師之師
010_1042_a_23L九潭展鵬祖義峰有英曾祖東雲
010_1042_a_24L世靈珠六世松溪七世大岩八世龍

010_1042_b_01L9대조는 환성喚醒 스님이다.
허주선백전虛舟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덕진德眞이고 호는 허주虛舟이다.
스님은 과거 세상에서 선근善根을 심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출가하기를 서원하다가 조계산으로 들어가 홀로 절개를 지키며 스님이 되었다. 학업을 이룩하고 도를 통달하자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소임을 맡아 대중들을 교화하기 시작했다.
허주 스님은 대중들을 물리치고 홀로 정진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피했으나 그럴수록 학인學人들은 더욱 몰려들었으며, 자취를 숨기려 하면 할수록 자취가 더욱 드러났다.
혹은 송광사松廣寺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선암사仙岩寺에 머물기도 했으며, 혹은 동리산 칠불암七佛庵에 머물기도 했고 혹은 불일암佛日庵과 능가사楞伽寺에 머물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백운암白雲庵에 머물다가 두륜산에 머물기도 하였고, 달마사達摩寺·도갑사道甲寺 상견성암上見性庵·가지산 내원암內院庵·백양산 물외암物外庵·화엄사華嚴寺 구층탑九層塔·연곡사燕谷寺 문수암文殊庵·용흥사龍興寺 보현암普賢庵·내장산 원적암圓寂庵·선운사禪雲寺 도솔암兜率庵·서방산 상운암上雲庵·운문사雲門寺·금당사金塘寺·화암사華巖寺·안심사安心寺·문수사文殊寺 등이 모두 허주 스님이 주석하였던 곳이다.
스님은 다시 경산京山에 들렀다가 운현궁雲峴宮(흥선대원군)의 부름에 응하여 철원에 있는 보개사寶蓋寺와 고산 운문사雲門寺에서 대원군을 위하여 기도 축원을 하였다.
스님이 가는 곳마다 사부대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하루에 한 끼니만 먹으니 오관五觀32)이 샘물 솟아오르듯 하였다. 또한 스님은 옷을 입지 않아도 늘 옷이 이르고 음식을 먹지 않아도 공양거리가 다 이르곤 하였으니, 이것이 과거 세상에 심은 선업善業이 아니라면 어찌 이와 같을 수가 있겠는가?
계율을 받은 제자와 선법을 받은 제자, 그리고 법을 받은 제자와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사미·사미니·식차마나式叉摩那·신남信男·신녀信女를 따질 것 없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가르침을 청하는 모습은 마치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께서 꽃을 뽑아 대중들에게 보이며 가르침을 주셨던 그 모습과 같았다.
설법을 마치고 나면 감격해서 우는 이도 있고 웃는 이도 있었으며, 모두 보배를 얻어 가지고 돌아가 믿음으로 받고 받들어 실천하였다. 그러나 백옥白玉에도 티가 있는 법, 허주 스님에게 한 가지 결함이 있다면 자기 자신보다 나은 이를 싫어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을 살피지 못했다는 점이다. 구름이 끼어 해와 달을 가린다 해도 해와 달이 무슨 손상을 입겠는가?
광서光緖 무자년(고종 25, 1888) 10월 13일에 입적하였다. 그가 입적하자 한창 떨치던 선풍禪風도 서서히 쇠잔해 가기 시작하였다.

010_1042_b_01L九世喚醒也

010_1042_b_02L

010_1042_b_03L虛舟禪伯傳

010_1042_b_04L
師名德眞號戲舟夙植善根幼願出
010_1042_b_05L投入曹溪獨守孤節學成道達
010_1042_b_06L1) [49] 行職退衆樂獨避人而人來匿跡
010_1042_b_07L而跡露或住松廣或住仙岩或住桐
010_1042_b_08L裡七佛或住佛日楞枷住白雲住頭
010_1042_b_09L住達摩道甲之上見性伽智之內
010_1042_b_10L白精之物外華嚴之九層燕谷之
010_1042_b_11L文殊龍興之普賢內藏之圓寂禪雲
010_1042_b_12L之兠率西方之上雲雲門金塘華岩安
010_1042_b_13L心文殊皆其住錫處再遊京山應雲
010_1042_b_14L峴之召祈祝於鐵原之寶盖高山之雲
010_1042_b_15L到處四衆雲集一食五觀泉湧
010_1042_b_16L着之衣自至不食之供並臻非夙植之
010_1042_b_17L豈能若是受戒者受禪者受法者
010_1042_b_18L受業者不論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
010_1042_b_19L夷沙沙彌沙彌尼式蹉摩那信男信女
010_1042_b_20L2) [50] 合掌啓請如在靈山拈華示
010_1042_b_21L泣者笑者皆得寶而歸信受奉行
010_1042_b_22L然白玉之玷師之未察勝己者厭
010_1042_b_23L之常也雲蔽日月日月何損光緖戊
010_1042_b_24L子十月十三日示寂禪風遂3)▼(宀/(羽/木))▼(宀/(羽/木)) [51]

010_1042_c_01L
영산선백전影山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경순敬淳이고 호는 영산影山이다. 어린 시절 출가하여 물들인 옷을 입고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고창 선운사禪雲寺에 다시 나타난 선지식善知識이다. 설파雪坡·영곡靈谷·백파白坡·영산影山이 서로서로 계승하여 이어 온 명현名賢들이다.
스님이 통도사通度寺에 살 때에는 가까이에서 섬기고 싶어 하는 이가 많았고, 관음사觀音寺에 머물 때에는 스스로 찾아와서 선등禪燈을 이은 이가 있었다. 또 송광사松廣寺에 머물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화주化主가 되었고, 해인사海印寺에 머물 때에는 절에 구경을 온 사람들에게 찬贊이나 인引의 글을 지어 주기도 했다.
범해암梵海庵 앞에서 진불眞佛을 세 번 불렀고, 추사秋史의 마당에 들어가 정직한 답변을 하고 도량으로 돌아왔다. 스님은 또 옷을 벗어 남들에게 주었으나 몸은 춥지 않았고 음식을 미루어 아이들에게 먹였으나 배는 고프지 않았다. 잠은 하루에 두 번 자지 않고 뽕나무 아래에서 한 번만 자는 계율을 지켰고, 밥은 때가 아니면(午時) 먹지 않고 하루 종일 점심 한 끼니만 먹는 재법齋法을 지켰다.
‘천하가 태평한 봄이니 사방에 아무 일이 없다(天下太平春。 四方無一事。)고 한 말은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산자락 노을로 아침밥 삼고 송라松蘿에 걸린 달로 등불을 삼았다(山霞朝作飯。 蘿月夜爲燈。)고 한 말은 나를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니 옥산玉山이 무너지려고 하고 기쁨이 다하고 슬픔이 오니 직철直裰33)이 앞에 이르렀구나.’
스님은 관음고사觀音古寺에서 단정하게 앉아서 적멸을 보이시니, 밤중인데도 밝기가 불이 타오르는 듯하였고 땅이 흔들려 지진이 일어난 듯하였다. 광서光緖 계미년(고종 20, 1883) 11월 24일의 일이다.
수은受恩 제자와 수법受法 제자가 다비의 재를 올리자 사부대중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원암선백전圓庵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득원得圓이고 호는 원암圓庵이다. 승주 조계산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스님은 옛 법을 한결같이 지켰으며 공적인 업무나 사적인 일에 대하여 털끝만큼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공부를 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도 마치 명경대에 달린 거울을 보듯이 환하게 비추어 사람들의 마음에 꼭 맞게 하였다.

010_1042_c_01L影山禪伯傳

010_1042_c_02L
師名敬淳號影山幼而出家染衣受具
010_1042_c_03L禪雲寺重現之善知識也雪坡榉谷
010_1042_c_04L坡影山相繼名賢也住於通度有自
010_1042_c_05L願近事者住於觀音有自續禪燈者
010_1042_c_06L住於松廣爲貧窶者化主住於海印
010_1042_c_07L爲觀玩者贊引梵海庵前三呼眞佛
010_1042_c_08L入秋史庭上直答道場來解衣與人
010_1042_c_09L身不寒推衣 [12] 施兒腹不飽宿不再宿
010_1042_c_10L桑下一宿之戒食不非時日中一食之
010_1042_c_11L天下太平春四方無一事非我而
010_1042_c_12L山霞朝作飯蘿月夜爲燈指我而
010_1042_c_13L寒來暑徃玉山將頹興盡悲來
010_1042_c_14L綴臨前觀音古寺端坐示滅夜光如
010_1042_c_15L地動如雷光緖癸未十一月二十四
010_1042_c_16L日也受恩者受法者設茶毘之齋
010_1042_c_17L衆齊會

010_1042_c_18L

010_1042_c_19L圓庵禪伯傳

010_1042_c_20L
師名得圓號圓庵出家于曹溪山
010_1042_c_21L髮上戒一準古道公務私産毫無異
010_1042_c_22L師受敎授如鏡當臺煥如合心
010_1042_c_23L「仰」甲本正誤表作「印」「坐」甲本正誤表
010_1042_c_24L作「座」
「▼(宀/(羽/木))▼(宀/(羽/木))」甲本正誤表作「寥寥」

010_1043_a_01L
원암 스님에게 학업을 배운 제자들은 사람들로부터 풍류가 있다고 칭송을 받았고 법을 전해 받은 제자들은 스승에게 전해 받은 내재內財를 아끼곤 하였다. 스님은 세속의 번잡함을 피하여 자주 거주지를 옮겨 다녔으며, 조용하여 수행하기 좋은 곳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고, 깨끗하고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꼭 찾아가서 참알參謁하였다. 마음은 소심하게 가져 조심하면서도 도에 대해서는 한껏 키우려고 하였으며, 자기 자신은 춥게 하고 남을 따뜻하게 해 주려고 하였다.
머물고 있는 곳에서는 손수 나무를 해다가 불을 지폈으며, 가는 곳마다 길을 소제하고 물길을 터 주는 등 부지런히 일을 했다. 스님은 선방에서 참선을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수행하기 적합한 한가한 곳 찾는 일을 자신의 소임으로 여겼다.
지리산 연곡사燕谷寺에 토굴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문수굴文殊窟이고 다른 하나는 용수굴龍樹窟이었다. 문수굴에는 수행하는 주인이 있었으나 용수굴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취운翠雲 스님을 도반으로 삼아 용수굴에 들어가 하루에 한 끼니 밥만 먹고 수년 동안 용맹정진하였다. 하루는 두 손님이 용수굴로 스님을 찾아와 문밖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스님을 모시러 왔으니 행장을 꾸리십시오.”
스님은 방으로 들어와서 이러이러하게 하라고 말하고는, 조금 있다가 편안한 자세로 열반에 드시니 그때가 을유년(고종 22, 1885) 12월이었다.
스님은 평생 죽을 때까지 일을 함에 있어서 시작을 했으면 반드시 결과를 보고야 말았다.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들도 스승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 이들은 이른바 안국사安國寺의 덕암德菴 스님과 대둔사大芚寺의 순우順祐 스님과 더불어 스승의 뜻을 잘 받든 효자의 문 안에 함께 노닐었던 분들이니, 어찌 세염洗染(원진 국사)만을 효성스럽다고 말하겠는가?
하은선백전荷隱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예가例珂이고 호는 하은荷隱이며, 구월산 패엽사貝葉寺의 대화상이다.
스님의 명성은 해서海西에 자자하였으며, 점점 넘쳐흘러 사방 산문에 퍼졌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학인이 하은 스님의 문하에서 학업을 받지 않으면 학인들 축에 끼지 못할 정도였으며, 은사隱士랍시고 하은 스님을 알지 못하면 은사 축에 들지 못할 정도였다.
스님은 강당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여래의 가르침을 20여 년 동안 거침없이 강설하였으며, 문을 닫아걸고 조사선祖師禪을 참구하며 20여 년 동안 안거를 마쳤다.
홍보살弘菩薩이란 하은 스님을 지칭하는 말이고 안처사安處士란 저 예가例珂를 칭송하는 말이다. 최오장崔五將이란 그의 증명證明을 천양하는 것이고 영허사映虛師란 그의 기망欺罔을 탄식한 말이다.
스님은 사부대중들에게 빙 둘러싸여서 오분五分의 법장을 연설하여 가르침을 폈고, 팔삼八衫으로 몸을 가리고 육수六銖가 어깨를 뚫었다. 법인 을 전한 뒤에 문을 닫고 생生을 마치니, 원숭이와 두루미도 그 맹주盟主를 잃음에 슬퍼했고 시냇물과 푸른 산도 그 법왕을 잃음에 오열하였다.

010_1043_a_01L受業者人稱風流有傳法者自惜內
010_1043_a_02L屢遷居處閴寂地聞必徃居人淸
010_1043_a_03L期尋叅謁心欲小而道欲大己欲
010_1043_a_04L寒而彼欲溫所止拾柴燒灶1) [52]
010_1043_a_05L路決水叅院已久覔閒爲任智異山
010_1043_a_06L燕谷有土窟一曰文殊二曰龍樹
010_1043_a_07L有主者龍樹無主者與翠雲爲禪侶
010_1043_a_08L日中一食居做數夏有二賔來呼戶
010_1043_a_09L外曰奉邀來治行焉入戶言如此如此
010_1043_a_10L良久恬然而寂乙酉十二月也終身
010_1043_a_11L行事有始有終繼其後者不負先志
010_1043_a_12L可謂與安國之德菴大芚之順祐同遊
010_1043_a_13L於孝經之內者也何必洗染之旌也

010_1043_a_14L

010_1043_a_15L荷隱禪伯傳

010_1043_a_16L
師名例珂號荷隱九月山貝葉寺大和
010_1043_a_17L尙也聲滿海西溢流四山學人不叅
010_1043_a_18L荷隱非學人隱士不知荷隱非隱士
010_1043_a_19L開門弄如來敎者二十許春秋
010_1043_a_20L關究祖師禪者二十餘結解弘菩薩
010_1043_a_21L指其荷隱安處士誦其例珂崔五將
010_1043_a_22L揚其證明映虛師歎其欺罔四衆圍
010_1043_a_23L五分演暢八衫掩身六銖穿肩
010_1043_a_24L印了閉門了猿鶴失其盟主溪山咽

010_1043_b_01L
그러나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은 그의 문장이요 높이 드러나는 것은 그의 탑비塔碑이다. 스님은 도광道光 무자년(순조 28, 1828)에 태어나 광무光武(조선 고종의 연호) 무술년(1898)에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법랍은 58년이었다.
스님의 행장과 어록은 그의 문중에 간직되어 있으며, 제자로는 기룡騎龍 등 여러 스님이 있다.
용호강백전龍湖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해주海珠이고 호는 용호龍湖이며, 청화산 백련암白蓮庵의 대강사이다.
스님은 속가에 살고 있었을 때에는 학문과 예절의 가르침을 받았고(趍庭之訓),34) 출가해서는 발을 씻은 한탄(洗足之歎)35)을 끊어 버렸다.
스님은 입산하여 도를 수행하면서 좋은 인연을 맺어 나갔다. 축씨祝氏의 풀을 깎던 것을 본받고 설산의 법 구한 것을 흠모하였으며, 덕산德山 선사의 예분銳憤을 발發하고 무착無着의 참방參訪을 실천했다.
스님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전 지역에 걸쳐 두루 노닐면서 고승 대덕들에게 질의質疑를 했고, 호남 지역과 호북 지역을 소요하면서 맺혔던 의문을 풀었다. 나라의 부름에 응해 갔다가 선물을 받들고 돌아왔으며, 초청하는 편지를 받고 가서는 선불장選佛場에서 입적하셨다.
스님이 세상에 살아 계셨을 때의 사적들은 선교禪敎의 옛 기록에 실려 있으며, 총림에서 펼쳤던 권교權敎와 현교現敎(顯敎)는 세워 놓은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계를 받고 계를 전해 주며 법을 받고 법을 전해 주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한바탕 춘몽春夢에 지나지 않으니, 삼생의 정혼이 구한 것인가, 받은 것인가? 비석도 더럽혀지고 탑도 이지러지니 입으로 전하여 천년만년 이으리.
지봉강백전智峯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우기祐祈이고 호는 지봉智峯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삼각산 도선암道詵庵으로 출가하여 인파 축현仁坡竺絃 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이 인연으로 뒷날 향을 사르고 인파 스님의 법통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스님은 효성스럽고 어질며 자애하기로 이름이 나서 산중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일례로 스님은 한 개의 커다란 놋차관을 만들어 가지고 언제나 거동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안에 물을 가득 담아가지고 나갔다가 목마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곤 했다.
언젠가 운현군雲峴君(흥선대원군)도 그에게 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고마운 마음에 그에게 참서參書의 직책을 주었으나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대원군은 다른 날 다시 스님을 불러 말하였다.
“지봉 판서, 물 한 잔만 주시오.”
이렇게 말한 이후로

010_1043_b_01L其法王不朽者文高顯者塔導光戊
010_1043_b_02L子生光武戊戌寂行狀語錄藏在門
010_1043_b_03L弟子有騎龍諸師

010_1043_b_04L

010_1043_b_05L龍湖講伯傳

010_1043_b_06L
師名海珠號龍湖靑華山白蓮庵大講
010_1043_b_07L士也在家受趍庭之訓出家絕洗足之
010_1043_b_08L人山行道逢因結緣效祝氏之除
010_1043_b_09L慕雪山之求法發德山之銳憤
010_1043_b_10L無着之叅訪洛東洛西優遊質疑
010_1043_b_11L南湖北逍遙解結應召而徃奉賚而
010_1043_b_12L請狀而赴選佛而寂時順事迹
010_1043_b_13L敎古紙權現叢林空竪頑石受戒傳
010_1043_b_14L受法傳法一場春夢三生精魂
010_1043_b_15L之歟與之歟碑以之累塔以之玷
010_1043_b_16L之傳之千世萬世

010_1043_b_17L

010_1043_b_18L智峯講伯傳

010_1043_b_19L
師名祐祈號智峯楊州人出家於三
010_1043_b_20L角山道詵庵剃染於仁坡竺絃師仍以
010_1043_b_21L拈香孝仁慈愛夙著山野鑄一大錫
010_1043_b_22L每當擧動時必負水施渴人雲峴
010_1043_b_23L飮一盃贈叅書職人不穪之 2) [53]
010_1043_b_24L更呼曰智峯判書取一盃水來自後

010_1043_c_01L사람들은 모두 지봉 판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봉 스님은 해남 대흥사大興寺 표충사表忠祠의 총섭摠攝과 적멸궁寂滅宮 총섭이란 승직을 역임했다. 표충사를 중수할 때 전라도 안찰사按察使가 용운龍雲과 지봉 두 스님에게 임명장을 주고 그 일을 지휘 감독하는 도감동都監蕫의 직책을 주었다. 두 스님의 감독 아래 표충사 중수는 무사히 마쳤다.
스님이 입적한 지 수년이 지난 뒤에 본국本國의 세공사歲貢使가 연경燕京(북경)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중국의 큰 벼슬아치 한 사람이 사신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들어가 어린 손자를 보여 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의 팔뚝 위에 ‘해동지봉海東智峯’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것이 조선의 산 이름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이름입니까?”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 동국東國 경산京山에 살았던 스님의 이름입니다.”
고관이 말했다.
“그 스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사신이 대답했다.
“세상을 떠난 지 이미 3~4년이나 되었습니다.”
고관이 말하였다.
“그 스님의 덕행은 어떠하였습니까?”
사신이 대답했다.
“스님들 중에 제일가는 분이라 사람들이 그 스님을 보살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스님에게 판서의 직책까지 증직할 정도였습니다.”
큰 벼슬아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극진하게 대접하고 전송했다.
스님의 제자 중에는 운구雲句 대사가 있었으며, 예천 용문사龍門寺에서 선불장選佛場을 시설하고 스스로 화주化主가 되어 화엄 조사 일곱 분의 영정을 모셔 놓고 봄가을로 예향禮享을 올렸는데, 그 역시 성대한 일이었다.
추사 김정희와는 아주 가깝게 지내던 사이라 추사가 스님에게 운구雲句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지봉 스님에게 선과 교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기연機緣의 어구語句들은 그의 어록에 자세하게 갖추어 기록되어 있다.
침명강백전枕溟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한성翰醒이고 호는 침명枕溟이며, 속성은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이혁以爀이며 어머니는 맹孟씨이다. 경북 흥양興陽 남양방南陽坊 장담촌長潭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가경嘉慶 신유년(순조 1, 1801) 4월 9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는데 마음속에 출가할 것을 서원하다가 홀연히 부처님께서 왕성王城을 넘어 출가하신 것을 기억하고, 곧바로 팔영산 선계禪界(楞伽寺)로 가서 권민權敏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춘파春坡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백파白坡 선사에게 선참禪懺을 공부하였으며, 영봉 혁원影峯奕謜 법사에게 법인을 전해 받았다. 침명 스님은 부휴浮休 스님의 10대 법손이고

010_1043_c_01L人皆呼以智峯判書行表忠祠揔攝
010_1043_c_02L寂滅宮揔攝表忠祠重剏時全羅按察
010_1043_c_03L使授都監蕫差帖於龍雲智峯二師
010_1043_c_04L遂得告功示寂後數年本國歲貢使
010_1043_c_05L入燕京有大官引入其宅示其幼孫
010_1043_c_06L此兒臂上有海東智峰四字此是
010_1043_c_07L山名耶人名耶曰東國京山僧名也
010_1043_c_08L曰早晩幾許曰去世已三四年曰德行
010_1043_c_09L何如曰僧中第一人穪菩薩贈判書
010_1043_c_10L大官喜不自勝欵待而別其弟子
010_1043_c_11L雲句大師設選佛𤳈於醴泉龍門寺
010_1043_c_12L爲化主設華嚴七祖影春秋禮享
010_1043_c_13L盛事也金秋史狎之而贈號雲句
010_1043_c_14L禪敎門人機緣語句備載語錄

010_1043_c_15L

010_1043_c_16L枕溟講伯傳

010_1043_c_17L
師名翰醒號枕溟姓金氏父以爀
010_1043_c_18L孟氏興陽南陽坊長潭村人嘉慶辛酉
010_1043_c_19L四月初九日生幼而頴悟志願出家
010_1043_c_20L忽念踰3) [54] 徑詣八影禪界祝髮於權
010_1043_c_21L敏長老受具於春坡大師受禪懺於白
010_1043_c_22L坡禪師得法印於影峯奕謜法師浮休
010_1043_c_23L□甲本正誤表作「到」「他」作「也」{甲}
010_1043_c_24L「跡」甲本正誤表作「城」

010_1044_a_01L영해影海 스님의 5대 법손이다.
스님이 계를 준 제자와 선법禪法을 전해 준 제자는 한가하게 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법을 전해 준 제자로는 보운 기준普運箕準·화산 오선華山晤善·영암 상흔影岩尙欣·만암 대순萬岩大淳 등이 있다.
스님은 광서光緖 병자년(고종 13, 1876) 10월 1일에 대중들을 불러 모으고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76세이고 법랍은 61년이었다.
스님은 여러 산문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선지식을 참알하고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모든 전적을 널리 달통하였다. 그리하여 한 지방의 종사가 되어(把茅盖頭) 예전 현인의 자리를 물려받아 강설하는 자리를 활짝 열어젖히고 배움을 위해 찾아오는 학인들을 거절하지 않고 가르침을 주었다.
스님은 때로는 동리산에 거처하기도 하였고 혹은 조계산에 머물기도 하면서 배우기 위해 찾아오는 정성 어린 학인들을 맞아 가르치기를 20여 년이나 하였다. 만년에는 선암사 대승암大乘庵에 머물면서 갖가지 유발 학인들을 가르치기를 또 수십 년 동안 하였다.
노 행자盧行者36)가 신주新州로 돌아간 해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요, 왕양명王陽明이 전각殿閣 문을 걸어 잠갔던 날은 언제 다시 열릴지 기약할 길이 없다. 발걸음이 빠른 사람에게 권한을 미루어 주듯이 다리를 죽 펴고 잔 사람이 부끄럽지 않았다.
하하하 우습구나. 천하에 한가한 스님은 바로 이 스님이로구나.
경월선사전鏡月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영오寧遨이고 호는 경월鏡月이며, 속성은 배裵씨이고 전남 무안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우연히 두륜산에 들어갔다가 속세와 영원히 인연을 끊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3년간의 관학官學을 이수하고 경전의 깊은 이치를 탐구한 다음 은암 강백銀岩講伯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으니, 수월水月·포운浦雲·연호蓮湖 스님과는 동문 법형제이다.
스님은 화운化運·견향見香·무위無爲·영호靈湖 스님과 함께 초의草衣 선사에게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받았으며, 승직으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역임했다. 스님은 법사인 은암 스님의 탑을 대둔사 왼편 산기슭에 세웠다.
경월 스님의 문하에서는 큰스님으로 불리는 20여 명의 스님이 배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영담 지명影潭智明·혜운 보정惠雲普淨·수성 근헌壽星謹憲·수암 석근壽庵碩謹 등이 법인을 받은 제자이다. 스님의 진영 1축軸이 있는데 연담각蓮潭閣에 봉안되어 있다.

010_1044_a_01L之十世影海之五世傳戒傳禪不可
010_1044_a_02L暇論而傳法弟子則有普運箕準華山
010_1044_a_03L晤善影岩尙欣萬岩大淳等光緖丙子
010_1044_a_04L十月一日召衆示寂山愁日嚬人感
010_1044_a_05L川咽世壽七十六法臘六十一1) [55]
010_1044_a_06L諸方博通內外典籍把茅盖頭奪古
010_1044_a_07L賢席開說話門不拒來者或住桐裡
010_1044_a_08L或住曹溪接憧憧之躅者二十餘年
010_1044_a_09L晩住於仙岩之大乘庵養種種之髮者
010_1044_a_10L又數十年盧行者歸新州之年在前
010_1044_a_11L王陽明閉殿門之日無期推柄於疾足
010_1044_a_12L不慙於伸脚人阿呵呵是甚麽
010_1044_a_13L2) [56] 人有是僧

010_1044_a_14L

010_1044_a_15L鏡月禪師傳

010_1044_a_16L
師名寧遨號鏡月姓裵氏務安人
010_1044_a_17L入頭輪永絕鄕曲剃髮3)禀戒 [57] 官學三
010_1044_a_18L探經大義拈香於銀岩講伯之室
010_1044_a_19L與水月浦雲蓮湖爲洞 [13] 門兄弟與化運
010_1044_a_20L見香無爲靈湖等受大乘菩薩戒於草
010_1044_a_21L衣禪師行八道都揔攝立法師銀岩之
010_1044_a_22L塔於大芚之左麓度碩字僧二十許人
010_1044_a_23L授弟子印於影潭智明惠雲普淨壽星謹
010_1044_a_24L憲壽庵碩謹等有眞影一軸安于蓮潭

010_1044_b_01L
스님은 함풍咸豊 정사년(철종 8, 1857) 3월 10일 입적하니, 숲속에서는 새소리가 끊어지고 냇물에서는 고기들이 오열했다.
스님의 성품은 본래 낙천적이고 간이簡易하였으며, 행동은 활협闊狹한 데가 있었다. 스님의 상호相好는 원만하였고 일을 만나면 완협緩頰하게 진행하였으며, 어려운 일을 당해도 반드시 인내하면서 풀어 나갔고 남의 고통을 들으면 꼭 위로해 주었다. 그리하여 온 사찰 안이 화목하고 순박하였으며 산중 권속들도 모두 다 평안하였다.
그런데도 베풀어 준 이에게 반드시 잃는 게 있고 믿는 이에게 속임을 당했다. 어진 사람은 바보가 되고 악한 사람은 잘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도가 같지 않으면 서로 함께 일을 도모하지 말라.(道不同。 不相爲謀。)”37)라고 하였으니, 이는 서로 뜻이 맞는 사람끼리 어울릴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스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자비로운 마음을 베풀었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평등하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았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스님의 일기日記 1권이 전해 온다.
회산강백전晦山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보혜普慧이고 호는 회산晦山이며, 동래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인근 마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유년 시절 범어사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으며, 이후로 전국의 유명한 강론 자리를 찾아다니며 불교경전은 물론 유가·도가의 전적들까지 두루 배우고 익혔다.
또한 조계산·가지산·두륜산·달마산·백양산 등 여러 산문의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면서 학문의 깊이와 폭을 늘려 갔다. 그 후 일봉암日封庵에 주석하고 있던 인곡仁谷 선사가 강론하는 자리에서 대둔사의 수언守彦 스님, 법천사法泉寺의 학능學能 스님, 도갑사道甲寺의 회성會成 스님과 함께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이때 초의草衣 스님이 운흥사雲興寺 반야대般若臺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서로 오가며 시를 주고받았다.
경전 공부를 마치고 나서 울암 경의蔚庵敬儀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효암 윤찰孝庵允察·해월 보선海月普宣·은봉 지척隱峰志倜·평암 연정平庵涓定·해성 금찰海城錦察·성허 지찰性虛志察·영송 영선影松永善 등과 법형제가 되자고 결의한 사이이며, 낙성 취규洛城就奎와는 숙백叔伯 관계이고 금파 임추金坡任秋의 손자 법제자이며, 용파 도주龍波道周의 증손 법제자이고 호암虎岩의 4대 법손이다.
스님은 성품이 호걸스러웠고 모습은 풍후豊厚하였으며, 재주는 문장과 글씨 두 가지를 겸했고 덕德은 삼남三南에 으뜸이었으니, ‘봉황의 꼬리가 길어 배를 지나간다(鳳尾跨肚)’는 사실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었다.
스님의 문집 1권이 그의 문중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낙성洛城에 세 명의 제자가 있었으니, 보월 한엽寶月漢曄·동학 병준東鶴丙俊·

010_1044_b_01L咸豊丁巳三月初十日示寂林無禽
010_1044_b_02L澗有魚咽性本樂易多行濶狹
010_1044_b_03L好圓滿見事緩頰臨難必忍聞苦必
010_1044_b_04L寺內和淳山中同安與者必也失
010_1044_b_05L信者必也䛘之仁者拙之惡者興
010_1044_b_06L子曰道不同不相爲謀亦各從其
010_1044_b_07L志也以平等之慈行於人反受其不
010_1044_b_08L平等之謀豈不惜哉有日記一卷

010_1044_b_09L

010_1044_b_10L晦山講伯傳

010_1044_b_11L
師名普慧號晦山金井山梵魚寺人
010_1044_b_12L幼入梵魚下髮上戒周遊講肆習內
010_1044_b_13L外典叅曹溪伽智頭輪達摩白羊諸山
010_1044_b_14L詣日封仁谷禪師講下與大芚之守彥
010_1044_b_15L法泉之學能道甲之會成同學華嚴
010_1044_b_16L草衣在雲興之般若臺徃來和韻看經
010_1044_b_17L已畢拈香於蔚庵敬儀法師與孝庵允
010_1044_b_18L海月普宣隱峰志4) [58] 平庵涓定海城
010_1044_b_19L錦察性虛志察影松永善結爲法兄弟
010_1044_b_20L洛城就奎爲叔伯仲金坡任秋之孫
010_1044_b_21L龍波道周之曾虎岩之四世管性傑豪
010_1044_b_22L相豊貌厚才供二筆德冠三南鳳尾
010_1044_b_23L跨肚至此可驗有文集一卷留傳于
010_1044_b_24L門中洛城有三弟子曰寶月漢曄東鶴

010_1044_c_01L덕운 화문德雲和紋이 바로 그들이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낙파 스님은 선문禪門의 선지식이고, 비연秘演 스님은 모든 산문의 보살이며, 회산 스님은 승려 중에 문장가이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저들은 지역의 특별한 영기靈氣를 받은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봉선백전离峯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낙현樂玹이고 호는 이봉离峯이며, 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인근의 덕룡산 쌍계사雙溪寺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먼저 외전外典을 배웠으며, 뒤에 선경禪經을 보았다.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학문 배우기를 마치고 법통을 전해 받은 다음 팔八 자로 활짝 열고 종설宗說까지 겸하여 달통했다.
스님은 가지산 송대松臺로 옮겨가 살다가 다시 대원산과 조계산으로 옮겨 다니며 거주하였다.
가경嘉慶 갑자년(순조 4, 1804)에 태어나 광서光緖 경인년(고종 27, 1890) 2월 12일 조계산 송광사松廣寺에서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77세38)이고 하랍夏臘은 62년이었다. 스님의 나이 비록 고희古稀를 넘겼으나 정신은 가을 달처럼 맑았으며, 모든 상호相好를 구족具足하였고, 지식 또한 크게 빛났으며 자비와 지혜를 함께 실천하신 분이었다.
모습에 집착하여 그것을 근간으로 삼아 사는 미혹한 사람들도 한번 보고 설법을 들으면 마음속에 쌓였던 의혹이 얼음 녹듯 풀리고,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도 스님의 설법을 듣고는 머물러 떠나지 않는 이들의 수효가 늘어나 손가락을 꼽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막힘없는 설법은 마치 설법제일이었던 부루나富樓那 존자처럼 변화무쌍하였으며, 읊는 게송은 부산 법원浮山法遠이 다시 온 듯하였다. 보림寶林(禪風)이 울창하게 일어남은 마치 위산潙山의 영우靈祐와 조계산의 용운龍雲 스님과 같아 계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고 선의 가풍이 총림을 뒤흔들었다.
이봉 스님에게 법인을 얻은 제자가 20여 명쯤 되었고, 계율의 향기가 몸에 밴 제자는 40여 명이나 되었으며, 선등禪燈에 비추어진 제자는 무려 200여 명에 이른다.
나라에서는 스님에게 ‘팔도 대각등계 보제존자 도총섭八道大覺登階普濟尊者都摠攝’이라는 승직을 제수하였다. 문집 2권과 행장 1권이 스님의 법제자에게 소장되어 전해 오고 있다.

010_1044_c_01L丙俊德雲和紋人謂洛波禪門之善知
010_1044_c_02L秘演諸山之菩薩晦山僧中之文
010_1044_c_03L盖其地靈之所感

010_1044_c_04L

010_1044_c_05L离峯禪伯傳

010_1044_c_06L
師名樂玹號离峯羅州人出家于德
010_1044_c_07L龍山雙溪寺祝髮受具學外典看禪
010_1044_c_08L叅訪了受法了打開八字宗說兼
010_1044_c_09L移居伽智山松臺復移大原曹溪
010_1044_c_10L嘉慶甲子生光緖庚寅後二月十二日
010_1044_c_11L示寂于松廣寺世壽七十七夏臘六十
010_1044_c_12L師年雖過稀而秋月精神諸相具
010_1044_c_13L知識卓犖悲智雙連肯綮于着相
010_1044_c_14L一見而聞語心累氷解聞名而至
010_1044_c_15L聽說而留者數難屈指說則富樓
010_1044_c_16L羅變化偈則浮山遠重來寶林蔚興
010_1044_c_17L5) [59] 山之於靈祐曺溪之於龍雲
010_1044_c_18L香滿室禪風動林得其法印者二十許
010_1044_c_19L薰其戒香者四十零照其禪燈者二百
010_1044_c_20L贈八道大覺登6) [60] 普濟尊者都揔攝
010_1044_c_21L文集二卷行狀一卷留藏于法弟子

010_1044_c_22L「編」甲本正誤表作「徧」「間」甲本正誤表
010_1044_c_23L作「閒」
「禀戒」甲本正誤表曰衍字「個」
010_1044_c_24L甲本正誤表作「倜」
「譌」甲本正誤表作「潙」
010_1044_c_25L「堦」疑「階」{編}

010_1045_a_01L
벽파선사전碧波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찬영贊英이고 호는 벽파碧波이며, 옥주沃州(전남 진도) 벽파정碧波亭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과묵한 성격이었다.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척잠陟岑 스님에게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연하緣何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은 다음 가지산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그러자 사찰의 재정도 자족自足할 수 있게 되었고, 몸속에 있는 구슬도 탐득探得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스님에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승직을 제수했고, 삼성三聖을 지키는 임무도 맡겼다. 스님은 뒤늦게나마 “한 번 이상 잠을 자지 않는다.(一宿)”39)라고 한 계율에 대한 참뜻을 깨닫고 조계산에 편지를 보내 선암사로 주석처를 옮기고 그곳 연서蓮棲 대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연서 대사는 해암 청윤海岩淸潤 스님의 법통을 이었고 청윤 스님은 낭송 유화朗松有華 스님의 법통을 이었으며, 유화 스님은 설파 상언雪坡常彦 스님의 법통을 이었고 상언 스님은 호암虎岩 조사의 법통을 이었으니, 벽파 스님은 곧 호암 선사의 5대 법손이 된다.
문인으로는 신봉 청호信峯淸浩 스님 등이 있다. 벽파 스님은 나이가 중년쯤 되었을 무렵 해가 한낮이 되자 조용히 열반에 드시니 사람들은 물론 신神까지도 슬퍼하는 것 같았다. 다비식을 마치자 상서로운 재(사리)가 한 움큼 나왔는데, 인근의 벌들도 꿀을 품고 와서는 스님의 영전에 세 번 바쳤다.
용운선백전龍雲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처익處益이고 호는 용운龍雲이며, 당호堂號는 경암敬庵이고 속성은 이씨이다. 곡성 석곡방石谷坊 용계龍溪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가경嘉慶 계유년(순조 13, 1813) 10월 7일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무자년(고종 25, 1888) 5월 5일에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76세이고 법랍은 61년이다.
15세에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했으며, 17세에 남일南日 장로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기봉奇峯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제봉霽峰 선사에게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27세에 보봉寶峰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스님의 문정門庭은 높고 넓었으며, 법계의 연원을 살펴보면 성대하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내전과 외전을 두루 배워 다 통달하였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인 이李이름은 삼만三晩와 견줄 만하였으며, 문장은 종단에 으뜸이었다.
스님의 인품은 소박하고 진실하였고, 지혜는 거울처럼 맑고 원만하였다. 도道는 선원禪苑에 우뚝 높았고 명성은 유림儒林에까지 알려졌으니, 목서의 향기를 맡았는가(聞木穉香乎)? 매화 열매 익은 것을 보았다네(看梅子熟矣).40)
스님은 침명枕溟 스님을 찾아뵙고 모든 경론을 배웠고, 인파仁坡 스님을 찾아가서 모든 선학과 교학에 대해 강의를 들었으며, 옛 현인賢人의 법석을 물려받아

010_1045_a_01L碧波禪師傳

010_1045_a_02L
師名贊英號碧波沃州碧波亭人
010_1045_a_03L而性默暗然出家於頭輪山剃染於陟
010_1045_a_04L受具於緣何移住於長興伽智山
010_1045_a_05L外財自足內珠探得揔攝八道守在
010_1045_a_06L三聖晩覺一宿之戒移札曹溪住錫
010_1045_a_07L仙巖拈香於蓮棲大師蓮棲嗣海岩淸
010_1045_a_08L嗣朗松有華嗣雪坡常彥
010_1045_a_09L嗣虎岩祖師即虎岩之五世門人有信
010_1045_a_10L峯淸浩等年將中壽日可亭午泊然
010_1045_a_11L而寂人神俱悲1) [61] 灰一掬蜂蜜三獻

010_1045_a_12L

010_1045_a_13L龍雲禪伯傳

010_1045_a_14L
師名處益號龍雲室曰敬庵姓李氏
010_1045_a_15L谷城石谷坊龍溪人嘉慶癸酉十月初
010_1045_a_16L七日光緖戊子五月初五日世壽
010_1045_a_17L七十六法臘六十一十五出家於曹溪
010_1045_a_18L十七祝髮於南日長老受具戒於奇
010_1045_a_19L峯禪師受禪懺於霽峰禪師二十七
010_1045_a_20L香於寶峯禪師門庭高廣淵源蔚興
010_1045_a_21L學通內外筆叅李
文孟宗2) [62] 局朴實
010_1045_a_22L智鑑圓明道高禪苑聲傳儒林聞木
010_1045_a_23L穉香乎看梅子熟矣叅枕溟師受諸
010_1045_a_24L3) [63] 訪仁坡師聽諸禪敎奪古賢席

010_1045_b_01L신참新參한 학인들을 가르치다가 조수처럼 구름처럼 밀려드는 대중들을 버려두고 홀로 선정禪定을 닦는 관문關門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스님에게 ‘호남 표충사 도총섭湖南表忠祠都摠攝’의 관직을 제수하였고, 또 ‘영남 표충사 도총섭領南表忠祠都摠攝’의 관직도 제수했으며, 다시 도내道內의 ‘도총섭’ 직위까지 받아 직무를 수행했다. 을유년(고종 22, 1885) 중하仲夏에는 스님에게 특별히 ‘판서判書’의 교지도 내렸다.
또 스님은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전을 간행하는 일을 했고 해인사海印寺에서도 경전을 간행하는 일을 했으며, 통도사通度寺에서는 계단戒壇을 시설하였고 태고사太古寺 중수를 하였으며, 갈래사葛來寺에 석탑 세우는 불사를 하였고 회암사檜岩寺에서는 산문의 송사를 처리하였으며, 임인년(1842)에는 본사本寺(송광사)의 회록回祿(화재) 중창에 화주化主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경신(철종 11, 1860)과 신유(1861) 양년에는 지봉智峯 스님과 함께 해남 표충사를 중수하였고, 전주 송광사松廣寺의 삼존불 개금불사를 하였으며, 이어서 보성의 대원암大原庵, 곡성 도림사道林寺의 길상암吉祥庵에 있는 나한전羅漢殿, 운봉雲峯의 백장암百丈庵, 곡성谷城의 천태암天台庵, 금산사金山寺의 큰 법당과 본사의 용화龍華·보제普濟·도성道成 등의 전각을 모두 중수하였으니, 몸소 노동을 해서 모든 일을 잘 마무리 지은 스님의 힘을 누가 당할 수 있겠는가?
안팎의 재물이 모두 넉넉했으며 법시法施로써 중생들을 구제하고 재시財施로써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를 봉행하는 등 아끼고 탐하는 마음을 깨뜨려 없애는 삶을 살았음을 우리 스님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런즉 스님은 백암栢庵 스님의 법풍法風과 묵암黙庵 스님, 벽담碧潭 스님의 기개가 감로사甘露寺41) 보조普照 스님의 도량에서 다시 떨친 것이다.
스님에게 계참戒懺을 받고 선참禪懺을 받은 제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고, 교학을 배우고 법을 전해 받은 제자들도 볏짚처럼 삼대처럼 열을 이룰 정도로 많았다.
문집과 그의 행장이 문인들에게 남겨져 소장되고 있으며, 문인으로는 응해 성홍應海晟弘·한운 한오漢雲漢悟·구연 법선九淵法善 등이 유명하다. 한운漢雲 스님의 제자 중에 법해 봉주法海琫注 스님이 있는데, 그는 기골氣骨이 있고 경학에 밝아 봉황의 꼬리로 지칭되고 있다.
화운선사전化運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은철銀哲이고 호는 화운化運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전남 해남 화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010_1045_b_01L領新叅衆捨衆海雲集之席入獨修禪
010_1045_b_02L定之關贈湖南表忠祠都揔攝之職
010_1045_b_03L贈領南表忠祠都揔攝之職又受道內
010_1045_b_04L都揔攝之位乙酉仲夏特下判書敎旨
010_1045_b_05L若夫奉恩寺之刊經海印寺之印經
010_1045_b_06L度寺之戒壇太古寺之重修葛來寺之
010_1045_b_07L石塔檜岩寺之山訟壬寅之本寺回祿
010_1045_b_08L重剏皆爲化主庚申辛酉兩年與智
010_1045_b_09L重修海南之表忠祠全州松廣之三
010_1045_b_10L佛改金寶城之大原谷城道林之吉祥
010_1045_b_11L庵羅漢殿雲峯之百丈庵谷城之天台
010_1045_b_12L金山之大法堂本寺之龍華普濟道
010_1045_b_13L成諸堂皆其重修則勞身成功之力
010_1045_b_14L人誰當之內外之財并足法施以濟人
010_1045_b_15L財施以4) [64] 破除慳貪吾於師見之
010_1045_b_16L然則栢庵之風默庵碧潭之氣更振於
010_1045_b_17L甘露普照之道場受戒受禪之輩項背
010_1045_b_18L相望受學得法之徒稻麻成列文集
010_1045_b_19L行狀留藏于門人門人有應海晟弘
010_1045_b_20L雲漢悟九淵法善漢雲有弟子法海琫
010_1045_b_21L有氣骨有經學鳳尾之稱

010_1045_b_22L

010_1045_b_23L化運禪師傳

010_1045_b_24L
師名銀哲號化運姓李氏海南華山

010_1045_c_01L
스님은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온곡 영택溫谷永澤 스님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만우萬愚 스님에게 계를 받고 침교枕蛟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초의草衣 선사의 법좌法座에서 보살대승계菩薩大乘戒를 받았다.
스님은 성품이 엄숙하고 행동이 평등하였으며 지혜가 바다처럼 넓었다. 연파蓮坡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화악華岳 스님의 6대 법손이다. 등운 무가等運無可 스님과는 백중伯仲 사이이다.
스님에게 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는 두 명이 있었다. 하나는 설허 지연雪虛智演이니, 속성은 박씨이고 반남潘南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조정으로부터 ‘총섭摠攝’의 직책을 제수받았다. 다른 하나는 찬율贊律 스님이니,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 홍해洪海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조정으로부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증직을 받았다. 계를 받은 제자는 세원世元·예운禮云·도홍道弘 등 21명이 있다.
스님은 동치同治 3년 갑자(고종 1, 1864) 4월 5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에 대흥사 상원암上院庵에서 적멸을 보였다.
손자 제자 중에 유명한 스님으로는 석주 익운石舟翼雲이 있는데,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고 속성은 고高씨이며, 이는 곧 설허 지연雪虛智演 스님의 법을 계승한 제자이다.
방월선백전傍月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의연義演이고 자字는 백련白蓮이며, 호는 삼담三潭이고 선호禪號는 방월傍月이다. 속성은 차車씨이고 나주 자은慈恩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출가 이전 속가에 있었을 적에 안례雁禮(혼례)를 치렀고 부인과의 사이에 아이도 낳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부처님께서 왕성王城을 넘어 출가하였다는 고사古事를 듣고 자기의 권속들에게서 떠나 두륜산의 춘담 양옥春潭養玉 선덕禪德에게 몸을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구름처럼 이름난 산문을 돌아다니면서 선지식들을 두루 참방參訪한 끝에 양산 통도사通度寺 보광전普光殿 용암龍岩 스님의 선회禪會에서 소비燒臂의식을 치르고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받았다.
스님은 그 뒤로 가야산·팔공산·지리산·금강산·묘향산·구월산·용문산·계룡산·백양산·월출산 등지에서 각각 한 철씩 결하結夏(안거)를 마치고, 만년에는 첨찰산으로 들어가 은사인 춘담春潭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계승하였다.

010_1045_c_01L出家於頭輪山剃染于溫谷永澤之
010_1045_c_02L受戒於萬愚之壇拈香於枕5) [65]
010_1045_c_03L受菩薩大乘戒于草衣禪師之座
010_1045_c_04L行肅均智海汪洋蓮坡之孫華岳之
010_1045_c_05L六世等運無可爲伯仲傳燈者有二
010_1045_c_06L曰雪虛智演姓朴氏潘南人贈揔
010_1045_c_07L曰贊律姓金氏靈岩洪海人贈資
010_1045_c_08L憲大夫受戒者有世元禮云道弘等二
010_1045_c_09L十一人同治三年甲子四月初五日戌
010_1045_c_10L示寂于上院庵孫弟子有石舟翼
010_1045_c_11L靈岩人姓高氏即雪虛智演之嗣

010_1045_c_12L

010_1045_c_13L傍月禪伯傳

010_1045_c_14L
師名義演字白蓮號三潭禪號傍月
010_1045_c_15L姓車氏羅州慈恩人在家成雁禮
010_1045_c_16L有已出忽聞踰城古事離其己屬
010_1045_c_17L入頭輪春潭養玉禪德下髮上戒雲遊
010_1045_c_18L名山叅訪知識住通度寺普光殿龍岩
010_1045_c_19L禪會燒臂受大乘菩薩戒伽倻八公
010_1045_c_20L智異金剛妙香九月龍門鷄龍白羊月出
010_1045_c_21L一一結夏晩入尖察山6) [66] 香於恩師
010_1045_c_22L「祚」時本正誤表作「柞」「基」作「其」{甲}
010_1045_c_23L「倫」甲本正誤表作「論」「顧」甲本正誤表
010_1045_c_24L作「預」
「蚊」甲本正誤表作「蛟」「指」甲
010_1045_c_25L本正誤表作「拈」

010_1046_a_01L
스님은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쌍계사雙溪寺에 머물면서 짚신을 삼아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나물을 캐다가 주리고 병든 이들을 도와주었다. 사람을 만나면 염불과 불경 공부하기를 권유하였으며,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좌선을 하면서 출가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스님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처하여,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 너무 나쁘다고 말하면 스님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곳이 제일 좋은 도량이다.”라고 하고, 사람들이 장소가 너무 시끄럽다고 말하면 스님은 또 말하기를, “이곳이 나에게는 극락세계이다.”라고 하곤 했다.
나이도 많아지고 법랍도 늘어가던 어느 날 편안한 모습으로 앉은 채 세상을 떠나시니, 쌍갈래 흐르는 냇물도 오열하는 것 같았고 삼보도 주인을 잃고 말았다. 부녀자들은 스님이 열반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초동樵童들도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스님은 운봉雲峯 스님의 4대 법손이고 진봉珍峰 스님의 3대 법손이며, 금담金潭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춘담 스님의 법자法子이다. 호연浩然 스님은 불문의 형이고 청하靑霞 스님과는 종형제지간이다. 그러나 그 문손門孫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스님의 대에서 그치고 말았으니, 아! 슬픈 일이로구나.
자행선사전慈行禪師傳
스님의 법명은 책활策活이고 호는 자행慈行이며, 속성은 장張씨이고 영암 옥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해남 두륜산 ▣▣ 선사에게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완호玩虎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중화 덕홍中和德弘 대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다.
또 삼여三如 대사의 법단法壇에서 계율과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고, 호훈好訓 화상에게서 범음梵音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님은 동치同治 원년 임술(철종 13, 1862) 정월 3일 유시(오후 5시~7시)에 승당僧堂에서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81세이고 법랍은 65년이었다.
스님은 몸은 비록 작았으나 지혜와 덕행은 넓고 컸다. 게다가 범패를 잘하여 코를 쥐고 흉내를 내면 옥천사玉泉寺 진감 국사의 음향이 이 시대에 이르러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그리하여 오묘한 불교음악을 배우기 위하여 향을 사르고 가르침을 청하는 제자들이 문을 메우고 길을 가득 채웠다.
스님은 언제나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였으며, 일찍이 신분이 높고 귀하다 하여 친하게 지내려고 하거나 신분이 낮고 천하다 하여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자행慈行 대사라고 불렀으며, 비단 스님의 법사께서 내려 준 호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만은 아니다.
스님에 의해 득도得度된 제자는 경은 부인敬恩富仁 등 21명이나 되었으며, 범패를 배우기 위해 스님에게 득도된 제자는 용연龍淵과

010_1046_a_01L久居雙溪寺織屨而施無告者采蔬而
010_1046_a_02L救飢病者逢人則勸念通經1) [67] 行夜
010_1046_a_03L不忘本分不擇處而處之人言處
010_1046_a_04L則曰此是第一道場人言紛擾
010_1046_a_05L曰此是極樂世界年高臘長怡然坐化
010_1046_a_06L雙溪如咽三寶失主婦女聞之而泣
010_1046_a_07L樵童聽之而悼於雲峯爲四世珍峰之
010_1046_a_08L三世金潭之孫春澤 [14] 之子浩然之門
010_1046_a_09L靑霞之從兄弟而其孫不振嗚呼
010_1046_a_10L局哉

010_1046_a_11L

010_1046_a_12L慈行禪師傳

010_1046_a_13L
師名策活號慈行姓張氏靈岩玉泉
010_1046_a_14L出家於頭輪山□□禪師受具於玩
010_1046_a_15L虎禪師拈香於中和德弘大師受律禪
010_1046_a_16L於三如大師之壇受梵音於好訓和尙
010_1046_a_17L同治元年壬戌正月初三日酉時入寂
010_1046_a_18L于僧堂世壽八十一法臘六十五
010_1046_a_19L相短小智行博大尤善於梵唄掩鼻
010_1046_a_20L之規玉泉之響重興於一時炷香而
010_1046_a_21L請益者2) [68] 門塞路見人慈愛未甞以
010_1046_a_22L尊卑貴賤親踈之人皆謂之慈行大師
010_1046_a_23L非但法師賜號也其所度人有敬恩富
010_1046_a_24L仁等二十一人以音聲得度者有龍淵

010_1046_b_01L운파雲坡 등 수백 명이나 된다. 또한 돌부鈯斧를 전해 받은 제자는 응암 학성應庵學性 등 세 명이 있다.
스님의 제자 중에 스님보다 먼저 열반한 제자가 있었으니 법명은 유원有元이고 속성은 한韓씨이며 옥주沃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사유闍維식을 한 다음 사리 1과顆와 영주靈珠 1립粒과 초골超骨 한 조각을 얻었다.
스님의 제자 중에는 또 도안 대윤到岸大允이 있는데 범패로는 한 지방에 으뜸이었으며, 가지산에서 입멸하였다.
청해대사전淸海大士傳
스님의 법명은 혜운惠雲이고 호는 청해淸海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청해 당인塘仁 고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스님은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인담 의철仁潭義哲 선사에 의하여 양육되는 은혜를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인담 선사는 백련白蓮 스님의 사법嗣法 제자이고 연담蓮潭 스님의 손자 법제자이다.
청해 스님은 본래 가진 재물이 아무것도 없어서 탁발로 학문의 비용과 식량을 마련하였다. 그러면서도 종장宗匠들을 두루 찾아뵙고 결국에는 선문의 실학實學을 터득하였다.
그런 다음 스님은 본사의 공무公務를 맡아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 너그럽고 활달한 성품으로 최고인 청해 스님은 절의 서기書記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고 수승首僧에 차출되기도 하였으며, 원院의 간사도 역임하였고 주지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사찰 안의 유나維那 소임도 맡아 본 적이 있다.
청해 스님은 이처럼 사찰의 중요한 소임을 두루 거쳐 마침내는 종사宗師의 지위에까지 잠깐 올랐는데, 얼마 뒤에 작은 질병의 증상을 보이더니 함풍咸豊 신해년(철종 2, 1851) 10월 16일 대흥사 만월당滿月堂에서 반열반般涅槃에 들었다. 소나무와 삼나무도 슬픈 기색을 띠었는데 그의 문하 제자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님의 세속 나이는 57세이고 법랍은 41년이다. 청해 스님은 죽음을 두고 말하기를, “각문覺文이 몸을 버리고 태홍太弘이 집으로 돌아가니 남은 재산은 어디다 보시할 건가? 사람이 죽으면 돌아오기 어렵나니 이 말을 귀감으로 삼을지어다.”라고 하였다.
완파대사전玩坡大師傳
스님의 법명은 위규瑋珪이고 호는 완파玩坡이며, 속성은 권權씨이고 경북 안동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어릴 때 용담사龍潭寺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이 된 뒤에 불경 공부를 마치고 설봉 완첨雪峰玩沾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스님의 종파를 미루어 살펴보면 곧 환성 지안喚醒志安·용암 신감龍岩信鑑·대암 국탄大岩國坦·회암 나식檜岩懶湜·

010_1046_b_01L雲坡等數十百人其所傳鈯斧者有應
010_1046_b_02L庵學性等三人有先亡弟子曰有元
010_1046_b_03L姓故氏沃州人闍維得舍利一顆
010_1046_b_04L珠一粒超骨一片有到岸大允者
010_1046_b_05L唄甲于一方入滅於伽智山

010_1046_b_06L

010_1046_b_07L淸海大士傳

010_1046_b_08L
師名惠雲號淸海姓金氏淸海塘仁
010_1046_b_09L出家於頭輪山受養育之恩于仁潭
010_1046_b_10L義哲禪師白蓮之嗣蓮潭之孫
010_1046_b_11L無資財乞備學糧徧叅宗匠終作實
010_1046_b_12L揔察公務寬濶居最任書記差首
010_1046_b_13L行院幹事居住持位內行維那
010_1046_b_14L登宗席微示病相以咸豊辛亥十月十
010_1046_b_15L六日船涅槃於滿月堂松析含悲
010_1046_b_16L門下弟子乎壽五十七臘四十一
010_1046_b_17L之云亡覺文棄身太弘歸家餘財何
010_1046_b_18L人亡則難追此可鑑

010_1046_b_19L

010_1046_b_20L玩坡大師傳

010_1046_b_21L
師名瑋珪號玩坡姓權氏安東人
010_1046_b_22L投龍潭寺出家剃染經學方畢拈香
010_1046_b_23L於雪峯玩沾禪師之室追其宗派則喚
010_1046_b_24L醒志安龍岩信鑑大岩國坦檜岩懶

010_1046_c_01L영허 성엽暎虛聖曄·금파 긍잠錦波兢箴·웅파 위성雄波偉性·경월 유성慶月有成·설봉 완첨雪峯玩沾·완파 위규玩坡瑋珪·포련 취환布蓮就洹으로 이어져 왔으니, 스님은 환성 스님의 9대 법손이고 포련布蓮 스님의 스승이 된다.
포련 스님 아래에 도영道榮 상인이 있는데, 도영 스님의 속성은 김씨이고 문경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오래도록 서울 근교 산문에 살고 있었다.
완파 스님은 나이 47세에 전주 위봉사威鳳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원의 집들을 중수하였고 염불회念佛會를 개설하였다. 55세 때에는 조정으로부터 ‘팔도승풍규정 대각등계 보제존자 도총섭八道僧風糾正大覺登階普濟尊者都摠攝’이라는 직첩의 임명장을 받았으며, 갑술년(고종 11, 1874) 봄에는 포련 스님도 역시 스승과 똑같은 직첩을 받았다.
신미년(고종 8, 1871)에 조정에서 표충사에 올리던 제향을 철폐하라는 명령에 완파 스님은 무한하게 온 힘을 다하여 주선하여 원우院宇의 제향 문제를 회복하는 데 주력하였다. 병자년(고종 13, 1876)에 열린 법회에 포련 스님이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스님은 가경嘉慶 병자년(1816)에 태어났다.
만휴선백전萬休禪伯傳
스님의 법명은 자흔自欣이고 호는 만휴萬休이며, 속성은 서徐씨이고 영암 금강錦江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만휴 스님은 가경嘉慶 9년 갑자(순조 4, 1804)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원년 을해(고종 12, 1875) 정월 28일 신시申時(오후 3시~5시)에 대둔사大芚寺 신월암新月庵에서 적멸을 보이셨으니, 세속 나이는 72세이고 승랍은 56년이다.
스님은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추위에 떨고 굶주렸으며 몸은 의지할 데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출가할 것을 서원하다가 곧바로 두륜산에 몸을 던져 거기서 살았다.
열여섯 살 때에 탁권卓權 대사에게 무명초無明草(머리카락)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형암荊庵 원장에게 사미계를 받고 설곡雪谷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초의草衣 화상으로부터 선참禪懺을 받고 승달사僧達寺의 화담華潭 스님과 운흥사雲興寺의 대운大雲 스님, 그리고 불호사佛護寺의 인곡仁谷 스님으로부터 경론을 배워 경·율·론 삼장을 모두 달통하였다.
만휴 스님은 만일암挽日庵 법회 때에는 주맹主盟이 되어 오종五宗의 가르침을 자유롭게 드러내 보이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010_1046_c_01L暎虛聖曄錦波兢箴雄波偉性
010_1046_c_02L月有成雪峯玩沾玩坡瑋珪布蓮就
010_1046_c_03L喚醒之九世布蓮之師布蓮之下
010_1046_c_04L有道榮上人姓金氏聞慶人久居京
010_1046_c_05L年四十七住全州威鳳寺重修院
010_1046_c_06L開念佛會五十五受八道僧風糾正
010_1046_c_07L大覺登3) [69] 普濟尊者都揔攝甲戌春布
010_1046_c_08L亦受其職辛未大表忠撤享之令
010_1046_c_09L乃無限周旋有力於院宇丙子之會
010_1046_c_10L布蓮有力嘉慶丙子生

010_1046_c_11L

010_1046_c_12L萬休禪伯傳

010_1046_c_13L
師名自欣號萬休姓徐氏靈岩錦江
010_1046_c_14L嘉慶九年甲子生光緖元年乙亥正
010_1046_c_15L月二十八日申時示寂于大芚之新月
010_1046_c_16L俗壽七十二僧臘五十六早失怙
010_1046_c_17L最苟衣食身無聊賴志願出家
010_1046_c_18L投頭輪因居焉十六除無明草於卓權
010_1046_c_19L大士受沙彌戒於荊庵院長拈香於雪
010_1046_c_20L谷禪師叅禪於草衣和尙受經論於僧
010_1046_c_21L達之華潭雲興之大雲佛護之仁谷
010_1046_c_22L明通三藏主盟於挽日弄現五宗
010_1046_c_23L「盡」甲本正誤表作「晝」「窴」甲本正誤表
010_1046_c_24L作「塡」
「堦」疑「階」{編}

010_1047_a_01L스님의 몸집은 매우 크고 원만하였고 생각은 깊고 원대하였다.
스님이 계를 전해 준 제자는 예암 광준禮庵廣俊 등이 있고, 의발을 전해 준 제자로는 덕암 영준德庵永俊 등이 있다.
스님의 진영이 남아 있으며 그 진영을 찬미하는 게송과 서문은 백파 신헌영申獻永이 지었다.
응화강백전應化講伯傳
스님의 법명은 유한有閑이고 자字는 심한心垾이며 호는 응화應化이다.
어렸을 때 달마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송월松月 대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전해 받았으며, 낭암朗岩·침명枕溟·대운大雲 등 여러 스님을 찾아뵙고 학문을 연마하여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두루 섭렵하여 통달하고는 깃발을 세우고 학인들을 가르치니 일문一門이 협소할 정도로 학인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대둔사 북암北庵, 보림사寶林寺 서쪽에 있던 부도암浮屠庵, 송광사 보조암普照庵 등은 모두 스님이 주석하면서 강석을 열어 학인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스님은 해인사에서 경전을 간행할 때 증명법사가 되었고 다시 대둔사에 돌아와 진불암眞佛庵과 상원암上院庵에서 각각 한 철씩 안거를 마쳤다. 이어 도성암道成庵에 머물러 계시면서 암자를 중건한 뒤 낭암朗岩 스님의 비석을 세우는 일을 하였고, 송월松月 스님의 탑을 세우는 일을 하였다.
스님은 세상의 온갖 일에는 무심無心하여 사대四大(地水火風)로 이루어진 몸뚱이가 흩어지려고 하였다.
스님은 가경嘉慶 18년 계유(순조 13, 1813)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11년 을유(고종 22, 1885) 4월 2일 인시寅時(새벽 3시~5시)에 편안한 모습으로 적멸을 보이셨다. 적멸을 보이시던 날 아침에 몸에서 광명이 방사되었고 사유闍維 의식을 치르던 날에는 서기가 하늘까지 뻗쳤다. 그러자 스님은 물론 속인들까지 모두 기뻐하였고 늙은이나 젊은이들이 다 같이 우러러 찬탄하였다. 스님의 세속 나이는 73세였고 하랍夏臘은 57년이었다.
스님은 몸 전체가 풍만하였고 언어는 웅대하고 낭랑하였다. 말법 시대에 웅장한 문장가였고 지략이 매우 컸으며, 남쪽 지방에서 명성을 떨친 큰스님이었다.
소요逍遙 스님 때에 활짝 피운 선禪의 꽃이 설봉 스님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낭암 스님이 그(응화)의 할아버지이고 금곡錦谷·신월信月·벽해劈海 스님은 그의 숙부뻘이 되고 붕명 준진鵬溟準眞·완송 의순玩松意淳·휴암 선일休庵善日·취암 금환翠庵錦還 스님 등은 그의 형제지간이 되며, 경담 두원鏡潭斗元·인담 두인仁潭斗印·경운 화윤敬雲華允·훈허 상능渾虛尙能 스님은 모두 스님의 법제자들이다. 그 외에 응화 스님에게 은혜를 받은 제자와 계를 받은 제자, 그리고 선참禪懺을 받은 제자들은 너무 많아 줄을 지어 어깨를 서로 바라볼 지경이었다.

010_1047_a_01L大圓滿意根深遠傳戒者禮庵廣俊
010_1047_a_02L傳衣者德庵永俊等有眞影白坡
010_1047_a_03L申獻永贊并書

010_1047_a_04L

010_1047_a_05L應化講伯傳

010_1047_a_06L
師名有閑字心埤號應化幼入達摩
010_1047_a_07L祝髮染衣拈香於松月大師之室叅學
010_1047_a_08L於朗岩枕溟大雲諸師學通內外經籍
010_1047_a_09L建幢度人一門狹小大芚之北庵
010_1047_a_10L林之西浮屠松廣之普照皆其住錫開
010_1047_a_11L講之處證海印之印經回入大芚眞佛
010_1047_a_12L上院各結一夏住於成道重建其庵
010_1047_a_13L豎朗岩碑立松月塔萬事無心四大
010_1047_a_14L欲散嘉慶十八年癸酉生光緖十一年
010_1047_a_15L乙酉四月初二日寅時怡然示寂示寂
010_1047_a_16L之辰放光闍維之日亘氣緇白皆喜
010_1047_a_17L老少歎仰世壽七十三夏臘五十七
010_1047_a_18L全軆豊滿語言雄朗季世之雄文巨畧
010_1047_a_19L南方之金聲玉振逍遙之開花雪峯之
010_1047_a_20L結實朗岩爲其祖錦谷信月劈海
010_1047_a_21L其叔鵬溟準眞玩松意淳休庵善日翠
010_1047_a_22L庵錦還爲其兄弟鏡潭斗元仁潭斗
010_1047_a_23L敬雲華允渾虛尙能爲其弟子
010_1047_a_24L其恩者受其戒者受其禪者項背相

010_1047_b_01L
스님의 부도는 남암南庵 오른편 산기슭에 세웠으며, 스님의 문집 1권과 일기 1권이 문인들에게 소장되어 있다.
자서전自敍傳
원래 저 부처님의 법이 처음으로 동국東國에 유통된 뒤에 고구려성천成川 백제부여 신라경주 고려개성로부터 우리 조선한양에 이르기까지 전성시대에는 승려들에게는 도첩度牒·승과僧科·승관僧官 등의 제도가 있었다.
역사가 있으면 전기傳記도 있게 마련이건만 여러 번 전쟁을 겪은 나머지 공적 사적 기록이 다 소실되어 한결같이 믿고 고찰할 만한 것이 없다. 비록 비갈碑碣에 새겨진 글이 있긴 하지만 이끼가 끼고 침식되어 고찰해 보기가 어렵고, 또한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1권가 전해지고는 있지만, 중간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법명法名과 호號를 억지로 끌어다 붙인 것이라서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내가 학인들과 더불어 경론을 문답하고 남는 시간에 우리나라 승려들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의 일들을 채집하고 선각자들의 행적을 갖추어 후각後覺들의 경계로 삼게 하였다. 또한 대략적인 나의 계보와 계파를 기록하여 둔다.
나는 신라 시대의 명철明哲인 고운 최치원의 후예이고, 본조本朝(조선)의 은사隱士인 숭록대부崇祿大夫 최공崔公수강壽崗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철徹이시고 어머니는 성산星山 배裵씨이다.
어머니가 방죽을 수리하다가 흰 물고기를 본 꿈을 꾸고 나를 잉태하여 나았다고 하는데, 나의 넓적다리에는 하얗고 기다란 무늬가 많이 있다. 그래서 내 이름을 어은魚堰이라 하였으며, 또 초은超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천성이 어물魚物 따위는 먹지 않았으며, 청해淸海 범진梵津 구계九階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14세에 해남 두륜산 대둔사大芚寺 한산전寒山殿으로 출가하였으며, 16세에 호의 시오縞衣始悟 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호의 스님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모아 조달하였던 성균관 진사進士 효자 창랑공滄浪公 정공丁公이름은 암수巖壽의 8세손이다.
나는 하의荷衣법명은 정지正持 선사를 설계사說戒師로 삼고, 묵화默和법명은 준훤俊暄 선사를 수계사授戒師로 삼고, 화담華潭법명은 영원永源 선사를 증계사證戒師로 삼고, 초의草衣법명은 의순意恂 선사를 비구比丘 및 보살계사菩薩戒師로 삼고,

010_1047_b_01L立浮屠於南庵之右麓文集一卷
010_1047_b_02L日記一卷門人藏之

010_1047_b_03L

010_1047_b_04L自序傳

010_1047_b_05L
原夫佛法始通東國自高句麗

010_1047_b_06L
新羅
高麗
以至我朝
全盛時
010_1047_b_07L有度牒僧科僧官有史有傳屢經
010_1047_b_08L兵燹公私文簿一無考信雖有碑碣
010_1047_b_09L苔蝕難考亦有佛祖源流
中間收錄
010_1047_b_10L附會名號不可準信予與學人問答餘
010_1047_b_11L1) [70] 集東師時順間事以備先覺
010_1047_b_12L覺之箴亦畧著2) [71] 系派系新羅明哲
010_1047_b_13L崔孤雲致遠之裔本朝隱士崇祿大夫
010_1047_b_14L崔公
之六世父徹母星山衰氏
010_1047_b_15L夢堰治見白魚而生左右外胯多有白
010_1047_b_16L長紋仍名曰魚堰又曰超堰性不食
010_1047_b_17L魚物淸海梵津九階人十四出家於海
010_1047_b_18L南頭輪山大芚寺寒山殿十六薙髮染
010_1047_b_19L衣於縞衣始悟禪師壬辰倡義募粮
010_1047_b_20L有司成均進士孝子滄浪公丁公
之八
010_1047_b_21L世孫荷衣
禪師爲說戒師默和

010_1047_b_22L爲授戒師華潭
禪師爲證戒師
010_1047_b_23L草衣3)
[72]
禪師爲比丘及菩薩戒師縞衣

010_1047_c_01L호의縞衣법명은 시오始悟 선사를 또 전법사傳法師로 삼았다.
그 후에 호의·하의·초의·문암聞庵·운거雲居·응화應化 등 여섯 법사를 참알參謁하고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요옹寥翁 이병원李炳元 선생에게 유서儒書를 배웠으며, 태호太湖법명은 성관性寬와 자행慈行법명은 책활策活 두 선사에게 재의齋儀하는 법을 배웠다.
『화엄경』을 강론한 것이 6주년이었고, 『범망경』을 강론한 것이 12주년이나 되었다. 22년간 강석講席의 장막에 걸려 부질없이 세월만 보내고 말았다. 내가 편집한 『동사열전』은 3권으로 무릇 198명의 행적을 기록하여 곁에 놓아두고 책 속의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나를 따르는 학인 승려들에게도 나누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사마씨司馬氏(司馬遷)가 『사기史記』 「백이전伯夷傳」에서 언급한 여항閭巷과 청운靑雲 두 스님이 귀숙歸宿한 곳을 알도록 한 것처럼 하였다.
찬민贊敏이 말하였다.
“이미 학인 승려들을 위해 열전을 지으셨으니 또한 역년歷年도 기록해 보여 주십시오.”
그래서 나는 아래와 같이 답해 주었다.
“천황天皇씨로부터 지금 광서光緖 갑오년(1894)까지가 49,851년이고, 단군檀君으로부터 지금까지는 4,219년이며, 태조太祖 임신년(1392)으로부터 지금까지는 503년이다.
전단향나무로 만든 서상瑞像(불상)이 전해진 주 목왕周穆王 경인년으로부터 원元나라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 계유(1333)까지는 2,324년이고, 또 광서 20년 갑오(1894)까지는 564년이 되니 합계 2,888년이다.
그중에 서토西土(인도)에 있었던 것이 1,285년이고 구자국龜玆國에 있었던 것이 68년이며, 양주凉州에 있었던 것이 14년이고 장안長安에 있었던 것이 17년이다. 강남江南에 있었던 것이 173년이고 회남淮南에 있었던 것이 367년이다.
다시 강남에 돌아갔던 것이 23년이고 변량汴凉에 있었던 것이 177년이며,

010_1047_c_01L
禪師又爲傳法師叅學於縞衣荷衣
010_1047_c_02L草衣聞庵雲居應化六法師受儒書於
010_1047_c_03L4)▼(宀/(羽/木)) [73] 翁李先生炳元受齋儀於太湖

010_1047_c_04L
二禪師講華嚴經者六周說梵5) [74]
010_1047_c_05L經者十二周二十二年拘於講幕
010_1047_c_06L送日月所集東師列傳三卷凡一百九
010_1047_c_07L十八人行蹟書置左右爲作書中先師
010_1047_c_08L亦以遺隨我學侶使知司馬氏伯傳閭
010_1047_c_09L巷靑雲二師之歸宿處贊敏6) [75] 旣爲
010_1047_c_10L學侶作列傳亦須記示歷年曰自天皇
010_1047_c_11L至今光緖甲午爲四萬九千八百五十
010_1047_c_12L一年自檀君至今爲四千二百十九年
010_1047_c_13L自太祖壬申至今爲五百三年栴檀瑞
010_1047_c_14L自周穆王庚寅至元順帝元統元年
010_1047_c_15L癸酉爲二千三百二十四年又至光緖
010_1047_c_16L二十年甲午爲五百六十四年合計二
010_1047_c_17L千八百八十八年之內在西土者一千
010_1047_c_18L二百八十五年在龜茲六十八年在凉
010_1047_c_19L州十四年在長安十七年在江南一百
010_1047_c_20L七十三年在淮南三百六十七年復歸
010_1047_c_21L江南二十三年在汴梁一百七十七年
010_1047_c_22L「來」甲本正誤表作「采」「譜」上甲本正誤
010_1047_c_23L表有「予」
「淳」甲本正誤表作「恂」「▼(宀/(羽/木))」
010_1047_c_24L甲本正誤表作「寥」
「綱」疑「網」{編}「日」
010_1047_c_25L疑「曰」{編}

010_1048_a_01L연경燕京에 있었던 것이 12년이고 북상경北上京에 있었던 것이 20년이며, 연궁燕宮 안에 있었던 것이 54년이고 성안사聖安寺에 있었던 것이 59년이며, 만안사萬安寺에 있었던 것이 26년이다. 지금은 절 뒤의 전각에 있다. 원元나라 연우延祐 3년 병진(1316)까지는 2,307년이다.
세존께서 입멸入滅하신 것이 주 목왕周穆王 52년 임신인데, 원나라 순제順帝 원통元統 원년(1333)까지 2,282년이고, 또 광서光緖 갑오년까지가 564년이니 이를 합하면 2,846년이다.
대교大敎가 동쪽으로 중국에 전해진 것이 한漢나라 명제明帝 무진년(68)이니 원나라 순제 원통 원년까지는 1,366년이고 또 광서 갑오년까지가 564년이니, 이를 합하면 1,930년이다.”
찬민이 말하였다.
“사방을 유람하신 자취는 왜 기록하지 않으십니까?”
내가 답하였다.
“나는 갑진년(헌종 10, 1844)에 동쪽으로 방장산方丈山(지리산)에 들어가 신라 신문왕神文王 일곱 왕자가 다함께 선도仙道를 닦아 일곱 부처님이 되었다는 자취와 고운孤雲이 쓴 진감眞鑑 선사의 비문과 육조 대사의 탑을 하나하나 구경하였다.
그러고는 화개동花開洞을 나와 섬진강 물을 따라 내려가다가 섬진강을 버리고 하양河陽(하동)을 지나 진양晋陽(진주)으로 들어갔다. 촉석루矗石樓에 올라가서 김 장군이름은 천일千鎰이고 아들은 상건象乾이다.과 황 목사黃牧使이름은 진進와 최 병사崔兵使 경회慶會, 그리고 충성스런 기생이었던 논개論介의 영혼을 조문하였다. 그러고는 ‘술 한 잔 마시고 웃으면서 긴 강물을 가리킨다’고 하는 글귀가 든 시42) 한 수를 읊으니 감개무량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월경대月鏡臺에 이르러 파경노破鏡奴43)가 세상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옛 자취를 구경하고, 한 그루 감나무에 기대어 비추어 징험해 보았다.
가락국에 이르러서 수로왕릉首露王陵에 참배하고 절구44)를 지었다. 낙동강을 건너 금정산성金井山城을 지나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금파金波법명은 임추任秋 스님의 영각影閣에 참배하고 회산 보혜晦山普惠 스님의 조실에서 하룻밤 잤다.
동래의 약천藥泉(온천)동쪽은 남탕이고 서쪽은 여탕이다.에서 목욕을 하고 동래와 부산을 지나 왜관倭關에 이르니 수문장守門將이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므로 다시 부산진釜山鎭으로 돌아왔다.

010_1048_a_01L在燕京十二年在北上京二十年在燕
010_1048_a_02L宮內五十四年在聖安寺五十九年
010_1048_a_03L萬安寺二十六年今居寺後殿元延祐
010_1048_a_04L三年丙辰凡二千三百七年世尊入滅
010_1048_a_05L在周穆王五十二年壬申至元順帝元
010_1048_a_06L統元年爲二千二百八十二年又至光
010_1048_a_07L緖甲午爲五百六十四年合爲二千八
010_1048_a_08L百四十六年大敎東被中國在漢明帝
010_1048_a_09L戊辰至元順帝元統元年爲一千三百
010_1048_a_10L六十六年又至光緖甲午爲五百六十
010_1048_a_11L四年合爲一千九百三十年敏曰四方
010_1048_a_12L遊覽之跡何不載錄曰甲辰東入方丈
010_1048_a_13L新羅神文王七子俱修仙道仙爲七佛
010_1048_a_14L之迹孤雲眞鑑之碑六祖之塔一一
010_1048_a_15L觀玩出花開洞㳂流而下舍蟾江過
010_1048_a_16L河陽入晋陽登矗石樓吊金將軍1) [76]
子象乾

010_1048_a_17L黃牧使崔兵使慶會及忠妓論介之魂
010_1048_a_18L2) [77] 一盃笑指長江水之句不勝感慨
010_1048_a_19L至月鏡臺觀破鏡奴逃世入山古跡
010_1048_a_20L一株杮樹而照驗至駕洛國謁首露王
010_1048_a_21L作二絕韻渡洛過金井山城入梵
010_1048_a_22L魚寺謁金波
影閣宿晦山普惠之室
010_1048_a_23L浴東萊藥泉東男湯
西女湯
過東萊釜山至倭
010_1048_a_24L關設門門將禁人回至釜山鎭

010_1048_b_01L정 첨사鄭僉使이름은 발發의 비석과 장수단을 관람하고 납창納倉으로 내려와 부府에 들어가 이동악李東岳(李安訥)의 시를 베꼈으며, 충렬忠烈 송 공宋公이름은 상현象賢임의 사당을 보았다.
양산읍梁山邑에서 잤는데 곽란을 만나 3일 동안 고통을 겪었다. 통도사에 들어가 사리탑과 ‘정자계단중수비丁字戒壇重修碑’를 참배하였고, 자장굴慈藏窟에 올라가 바위 구멍 속에서 한 쌍의 금개구리를 보고 감로수甘露水를 마시고 「금와기金蛙記」를 베껴 쓰고 제명을 붙였다. 그때가 마침 6월 15일이었는데 이날은 내 생일이었다.
황산黃山역驛 이름의 물금勿禁도방都防과 삼랑三浪창倉을 지나서 환선정喚仙亭순천順天에 이르렀다. 삼일三日포구 이름과 흥국興國절 이름과 여계암如鷄岩과 옥화玉華역 이름와 금탑金塔흥양興陽(고흥군)에 있음을 두루 거쳐서 송광사松廣寺에 이르러 능견난사能見難思를 구경하였다.
물염勿染정자 이름과 적벽赤壁동복同福에 있음과 천불천탑千佛千塔능주綾州(화순군)에 있음과 운주동運舟洞의 약사藥師절 이름를 두루 구경하고, 일봉암日封庵의 원진탑元禛塔과 남평의 불회사佛會寺(다도면에 있음)와 보조 국사가 남겼다는 대나무보림사寶林寺에 있음에 참배하였다. 지제산 천관사天冠寺 방광계放光界에 들어가 아육왕탑阿育王塔장흥에 있음에 참배하였다.
용검산踴劒山에 올라가 협천대제協天大帝고금도古今島의 옥천사玉泉寺에 있음에 참배하고, 천작관음상암天作觀音像庵혜일惠日 선사가 창건한 절에 있음과 정鄭 장군이름은 연年이 만든 옛성죽청리竹靑里에 있음과 구계탄九階灘범진梵津 포구 가에 있음과 숙승봉宿僧峯청해淸海의 상봉임을 두루 구경하였다. 전짐암銓斟巖불목리佛目里 북쪽에 있음과 해월루海月樓고달도古達道에 있음와 성도암成道庵두륜산 남쪽 외산外山에 있음을 골고루 유람하였다.
계유년(고종 10, 1873)에 보헌普憲(1825~1893) 상인上人과 함께 이현梨峴에서 자고 조천진朝天鎭에서 선철善哲의 신선信船(연락선)을 타고 소완도小莞島 비자동榧子洞 앞바다에 이르렀다. 자시子時(밤 11시~1시)에 배를 띄워 석양에 조천朝天(제주도 조천읍) 선창船艙에 닿았다.
영좌領座45) 강 파총姜把摠이름은 손孫의 집에 들어가 사흘 밤을 자고 안산安山 임달삼林達三기奇 참판의 제자을 만나 보았다. 제주성 동쪽 문 안에 있는 칠성동七星洞 육인 도사陸人都司 나중경羅仲卿나랑 동갑내기임의 가숙家塾에 들어가 장방長房영청營廳 소속임을 만나 보았다.
이李 목사이름은 복희▼(牛+宓)羲를 배알하고 망월루望月樓에 올라가 차를 나누어 마셨다. 김 판관金判官이름은 기홍其弘을 배알하고 삼성혈三姓穴제주도 남쪽 3리쯤 평지에 있음을 관람하고 애월涯月·명월明月·차구遮鷗를 지나서

010_1048_b_01L鄭僉使3) [78] 及將壇下納倉入府
010_1048_b_02L李東岳詩見忠烈宋公
宿梁山
010_1048_b_03L遭霍亂苦痛三日入通度拜舍
010_1048_b_04L利塔丁字戒壇重修碑登慈藏窟
010_1048_b_05L岩孔中見一雙金蛙飮甘露水謄金
010_1048_b_06L蛙記而題名時適六月十五日是余生
010_1048_b_07L日也過黃山勿禁
三浪歷至喚仙
010_1048_b_08L
三日興國如鷄岩玉華金塔

010_1048_b_09L而到松廣見能見難思歷勿染赤壁
010_1048_b_10L
千佛千塔
運舟洞藥師拜日封元
010_1048_b_11L4) [79] 南平佛會寺普照竹寶林
入支提
010_1048_b_12L山天冠寺放光界謁阿育王塔
上踴
010_1048_b_13L劒山拜協天大帝古今島
玉泉寺
歷觀天作觀
010_1048_b_14L音像庵惠日禪
師創建
鄭將軍古城竹靑
九階灘
010_1048_b_15L梵津
浦邊
宿僧峰淸海
上峯
遊銓斟巖佛目
里北
海月樓古達

010_1048_b_16L成道庵頭輪南
外山
癸酉與普憲上人宿梨
010_1048_b_17L乘朝天鎭善哲信船到小莞島榧子
010_1048_b_18L洞前洋子時放船夕陽泊朝天船艙
010_1048_b_19L入領座姜把揔舍三宿見安山林達
010_1048_b_20L奇叅判
弟子
入州城東門內七星洞陸人都
010_1048_b_21L司羅仲卿家塾
見長房
謁李牧
010_1048_b_22L使▼(牛+宓)
登望月樓分茶謁金判官5) [80]

010_1048_b_23L三姓穴州南三
里平地
過涯月明月遮鷗至大

010_1048_c_01L대정大靜의 종주인 이 호장李戶長이름은 명백命伯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장張 군수이름은 덕오德五를 알현하였는데, 김 참판호는 추사秋史과 초의법명은 의순意恂 스님과 만휴萬休호는 자흔自欣와 영호靈湖법명은 율한栗閑의 정헌서지正軒棲遲하던 방은 끝내 서재로 변해 있었다.
모슬포 진영鎭營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곧 조은祖恩 스님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배를 타고 남쪽 30리 밖에 있는 가파도加波島너울섬에 건너가서 사흘 밤을 지내고 대정으로 건너와 산방굴사山房屈寺 옛터에 올라가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46)
다시 감산柑山에 있는 서청書廳에 들어가서 절구 한 수를 더 읊었다. 창천蒼川에 이르러 양오일梁五一 군을 만나서 그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상예上猊로 와서 오 수좌吳首座를 만났다. 그의 손자 두현斗鉉과 정현井鉉, 그리고 이맹근李孟根이들은 모두 열다섯 살 아이들이었다.을 시켜 시를 짓고 화답하는 시를 짓게 하는 등 매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법환法還정의靜義와 연접된 경계이다.에 이르니 그 남쪽 바닷가 언덕에 ‘서불이 이곳을 지나간다(徐市過此)’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서구진西丘鎭을 지나서 정방폭포正房瀑布를 구경하고, 수산진水山鎭에 이르러 한승방韓承邦이 시를 써 달라고 하는 말에 응하여 시를 지어 주었다.
정의旌義 고을을 관장하던 정옥구鄭沃溝의 집에 들러 정의 현감 이병한李炳漢을 배알하고, 형산荊山의 일출봉日出峯과 별방진別方鎭과 귀덕歸德 그리고 봉개奉盖봉을음를 지났는데 봉개는 강홍엽姜弘曄이 태어난 곳이다.
연북정戀北亭조천朝天에 있는 정자47)과 연신각戀宸閣명월明月에 있음48)에 붙어 있는 청음淸陰(金尙憲) 선생 시의 운자를 따서 시를 지었다. 화북진禾北鎭에 이르러 ‘영주 바다를 건너(越瀛海)’49)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서암書岩보길도 동쪽에 있는 바위50)이라는 시의 운을 따서 시를 지었다. 백서문白瑞文의 배를 타고 육지로 나왔다.
을해년(고종 12, 1875, 각안의 나이 56세)에 월여月如법명은 범인梵寅 스님과 금성錦城법명은 보헌普憲 스님과 함께 도반이 되어 노령蘆嶺장성에 있는 고개을 넘고 차령車嶺공주에 있는 고개을 지났으며, 지지현遲遲峴 고개를 넘어 동작銅雀에서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남대문 밖 이문리离門里에 살고 있는 이석만李石萬의 집에 숙소를 정하고 양왕현梁王賢을 불러 기름병을 전해 주었다.
이튿날 남산에 올라가 장안長安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수락산 덕사德寺에 이르러 용암庸庵 스님의 산방山房에서 이틀 밤을 잤다.
직동直洞흥선대원군이 은퇴하여 머물던 곳, 의정부·궁예성弓裔城·검불랑劒拂浪 토성土城·분수령分水嶺·

010_1048_c_01L靜主李戶長
謁張郡守
金叅判

010_1048_c_02L草衣
萬休6)
[81]
灵湖
正軒棲遲之室
010_1048_c_03L爲書齋至摹瑟鎭即祖恩居止之處
010_1048_c_04L乘南入三十里海加波島너울
三宿出靜
010_1048_c_05L登山房窟寺古址次一絕詩入柑山書
010_1048_c_06L作一絕詩至蒼川遇梁君五一宿
010_1048_c_07L至上猊來逢吳首座使其孫斗鉉井鉉
010_1048_c_08L李猛根皆十五
歲兒
唱和極歡至法還靜義
連界

010_1048_c_09L南海岸刻有徐市過此四字過西丘鎭
010_1048_c_10L觀正房瀑布至水山鎭應韓承邦之求
010_1048_c_11L入旌義主鄭沃溝家謁李旌義炳漢
010_1048_c_12L過荊山日出別方鎭歸德奉盖봉을
姜弘
010_1048_c_13L
次戀北亭
戀宸閣
淸陰先生韻
010_1048_c_14L7) [82] 北鎭作越瀛海詩次書岩韻甫吉
東岩
010_1048_c_15L
乘白瑞文船出陸乙亥與月如

010_1048_c_16L
作伴踰蘆嶺
過車嶺
踰遲遲
010_1048_c_17L渡銅雀江主南大門外离門里李石
010_1048_c_18L萬家召梁王賢傳油瓶登南山望長
010_1048_c_19L至水落山德寺再宿庸庵山房
010_1048_c_20L直洞雲峴
弓裔城劒拂浪土城分水嶺秋
010_1048_c_21L「鑑」疑「鎰」{編}「今」甲本正誤表作「吟」
010_1048_c_22L「發」甲本正誤表作「撥」
「稹」甲本正誤表作
010_1048_c_23L「禛」
「基」作「其」「白坡」甲本正誤表作
010_1048_c_24L「自欣」{甲}
「米」甲本正誤表作「禾」

010_1049_a_01L추가령秋柯嶺·평강원平康院·삼방동三防洞을 차례로 지나서 함경도 안변 용지원龍池院에 이르렀다.
설봉산 석왕사釋王寺 내원암內院庵에 있는 영허 선영映虛善影 선사의 처소에서 지팡이를 멈추고 나흘 밤을 잤다.
철계 천월鐵溪川月 스님과 함께 유람하여 인지료仁知寮와 석왕사 오백나한과 개복당改服堂을 구경하고, 석대石臺·쇄철암鎖鐵岩·개철암開鐵岩을 두루 관람하였으며, 태조대왕이 손수 심었다는 송비松碑51) 두 그루에 참배하였다. 소나무는 모두 말라 죽었는데 하나는 쓰러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감히 범접을 못하였고 그런 이유로 빙 둘러 담을 쌓아 놓았다.
용지원으로 돌아와서 동쪽으로 길을 따라 들어가 고산역高山驛에 이르렀다. 철령에 올라갔는데, 그 고개 북쪽은 함경도 경계이고 동쪽은 강원도 경계이다. 그곳에 서천鼠川이라는 내가 있는데 그 냇물 북쪽에 서묘鼠廟가 있었다.
회양읍淮陽邑에 이르러 하룻밤 자고 괘인정掛引亭을 지나 장안사長安寺로 들어가는 동네 입구에 이르러 구 서방具書房의 집에 행낭을 풀어 놓고 장안사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백양산 스님 한양 덕송漢陽德松 스님을 만나 함께 하룻밤 자면서 신선루神仙樓에 붙어 있던 시의 운을 따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영원靈源에 이르니 동네 입구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아들이 고려의 군대를 피하여 돌로 성을 쌓았던 터가 남아 있었다. 그 성안에는 업경대業鏡臺와 황천강黃泉江이 있었고, 또 푸른색과 누런색 두 뱀이 살았다는 굴이 있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금화錦和라는 스님이 죽어서 뱀이 되었는데, 그의 제자 영원靈源 조사가 법을 설하여 천도하자 용으로 화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그 가운데 영원암靈源庵이 있었으니, 이는 곧 영원 조사가 도를 터득한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는 또 지장봉地藏峰·시왕봉十王峰·판관봉判官峰·사자봉使者峰·죄인봉罪人峰 등의 산봉우리가 있었다. 그 북쪽에는 옥초대沃焦臺가 있었고 그 뒤에는 곧 백탑동百塔洞·수렴동垂簾洞·망군대望軍坮·정양사正陽寺·헐성루歇惺樓·천일대天一臺·표훈사表訓寺가 있었다.
동네 입구에는 백화암白華庵이 있었는데, 그 암자 앞에는 삼불암三佛岩과 수충영각酬忠影閣이 있었으며, 암자 뒤에는 비석을 세운 전각이 있었는데 서산西山·편양鞭羊·풍담楓潭·허백虛白 네 분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담무갈상曇無謁像이 있었다.
금강문金剛門 만폭동萬瀑洞에 들어가니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 글자는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의 글씨라고 하였다.

010_1049_a_01L柯嶺平康院三防洞至咸鏡道安邊龍
010_1049_a_02L池院入雪峯山釋王寺內院庵映虛善
010_1049_a_03L影禪師處停笻四宿鐵溪川月同遊
010_1049_a_04L觀仁知寮釋王寺五百羅漢改服堂
010_1049_a_05L石臺鎖鐵岩開鐵岩太祖大王手植松碑
010_1049_a_06L二株松俱枯一仆一立人不敢侵犯
010_1049_a_07L築石圍之回至龍池院入東向路
010_1049_a_08L高山驛登鐵嶺嶺北咸鏡界嶺東
010_1049_a_09L原界有鼠川其北有鼠廟至淮陽邑
010_1049_a_10L一宿過掛引亭長安寺洞口具書房家
010_1049_a_11L留布囊入長安寺逢白羊山漢陽德松
010_1049_a_12L同宿次神仙樓韵至靈源洞口有新
010_1049_a_13L羅敬順王子避高麗兵築石城之址
010_1049_a_14L其內有業鏡臺黃泉江又有靑黃二蛇
010_1049_a_15L傳說云昔者錦和僧死爲蛇
010_1049_a_16L弟子靈源祖師說法薦度化龍而去
010_1049_a_17L中有靈源庵即靈源祖師得道處有地
010_1049_a_18L藏十王判官使者罪人等峰其北有沃
010_1049_a_19L焦臺其後即百塔洞垂簾洞望軍坮正
010_1049_a_20L陽寺歇惺樓天一臺表訓寺洞口有百
010_1049_a_21L華庵庵前有三佛岩酬忠影閣庵後
010_1049_a_22L碑殿立西山鞭羊楓潭虛白四碑有銅
010_1049_a_23L甑曇無謁像入金剛門萬瀑洞刻有蓬
010_1049_a_24L萊楓岳元化洞天八字楊蓬萊士彥之

010_1049_b_01L신 어사申御史가 영화담暎花潭을 더하여 구담九潭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또 세두분洗頭盆·만상암萬像岩·보덕굴普德窟이 있었는데, 이 굴은 19층으로 구리 기둥과 돌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사자항獅子項에 성을 쌓았던 터가 남아 있었다. 마하연摩訶衍은 곧 낙파洛坡 스님이 거주했던 곳이고 내원통內圓通은 퇴은 영암退隱靈岩 스님이 머물렀던 곳이며, 만회암萬灰庵은 곧 일여一如 스님이 소신燒身 공양을 했던 곳이다. 불지암佛地庵 아래에는 묘길상암妙吉祥岩과 백운대白雲臺가 있었는데, 길에 한 쌍의 쇠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백운대 왼쪽 중향성衆香城에 금강수金剛水가 있었고, 그 위의 비로봉毘盧峰 태상동太上洞에 선암船庵·청량뇌淸凉瀨·수미탑須彌塔·수미암須彌庵·가섭굴伽葉窟·돈도암頓道庵·배재령拜再嶺·단발령斷髮嶺 등이 있었으며, 그 밖의 명승지는 너무 많아 이루 다 기술할 수가 없다.
보개산 심원사深源寺의 큰 법당에는 똑같은 이름으로 된 1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석대암石臺庵에는 석지장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었는데, 오른쪽 어깨에 탄환을 맞은 흔적이 두 군데 있었다. 이 절에는 ‘연기비緣起碑’도 있었다.
소요산 대자암大慈庵에는 원효元曉 국사가 지팡이를 꽂았는데 거기서 물이 나왔다는 샘과 관음암觀音岩 위의 소나무와 화정和貞 공주의 대궐 유지遺址가 있었고, 용주사龍珠寺에는 철판·석판·목판 세 가지의 『부모은중경』 판이 남아 있었다.
직산稷山에는 봉선사奉先寺와 홍경사弘慶寺의 옛터가 남아 있었으며, 평택읍 동쪽 1리쯤에는 망한사望漢寺가 있었는데 중국의 장수가 세운 절이라고 하였다.
온양에는 온천이 있었고 마곡사麻谷寺에는 사리탑이 안치되어 있었다. 목천원木川院 터에는 걸로桀路가 있었다. 은진 반야산 관촉사灌燭寺에는 석상관음불石像觀音佛이 있었다.
전주성 안에는 조경전肇慶殿과 경기전慶基殿 두 전각이 있었는데 화상畫像이 안치되어 있었다. 금산사金山寺에는 장육상丈六像이 있었고 큰 법당에는 화주나한化主羅漢이 있었으며 부처님의 탑이 봉안되어 있었다. 선운사禪雲寺 도솔암兜率庵에서 검탄黔炭(검단) 선사의 비결서秘訣書를 읽었다.
영암 구림鳩林에는 황장생皇長栍과 국장생國長生의 두 비석이 있었고, 해남 은적사隱跡寺의 철불鐵佛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경진년(고종 17, 1880, 각안의 나이 61세)에 진도 쌍계사雙溪寺로 들어가 대법당과 시왕전과 첨성각瞻星閣을 중수하였는데, 동산東山 스님이 주관하고

010_1049_b_01L申御史加暎花潭爲九潭有洗頭
010_1049_b_02L盆萬像岩普德窟立十九層銅柱石柱
010_1049_b_03L獅子項有築城遺址摩訶衍即洛坡師
010_1049_b_04L住處內圓通則退隱靈岩住處萬灰庵
010_1049_b_05L則一如師燒身處佛地庵下有妙吉祥
010_1049_b_06L岩白雲臺路垂雙鐵索臺左衆香城
010_1049_b_07L有金剛水其上毘盧峰太上洞有船庵
010_1049_b_08L淸凉瀨須彌塔須彌庵伽葉窟頓道庵拜
010_1049_b_09L再嶺斷髮嶺等名勝不可盡記寶盖山
010_1049_b_10L深源寺大法堂安同名千阿彌陀佛
010_1049_b_11L臺庵安石地藏像右肩有中丸二痕
010_1049_b_12L有緣起碑逍遙山大慈庵有元曉國
010_1049_b_13L卓錫泉觀音岩松和貞公主大闕遺址
010_1049_b_14L龍珠寺有鐵石木三種恩重經版稷山
010_1049_b_15L有奉先弘慶寺遺址平澤邑東一里
010_1049_b_16L望漢寺唐將所建溫陽有溫井麻谷寺
010_1049_b_17L安舍利塔木川院基有桀路恩津般若
010_1049_b_18L灌燭寺有石像觀音佛全州城內
010_1049_b_19L肇慶慶基二殿安畫像金山寺有丈六
010_1049_b_20L大法堂有化主羅漢奉安佛塔
010_1049_b_21L雲寺兠率庵奉黔炭禪1) [83] 秘訣靈岩
010_1049_b_22L鳩林有皇長栍國長生二石碑海南隱
010_1049_b_23L跡寺鐵佛有流汗庚辰入珍島雙溪寺
010_1049_b_24L重修大法堂十王殿瞻星閣東山作主

010_1049_c_01L지순知淳 스님이 힘을 보태 주었다.
이보다 앞서 김金 군수가 쌍계사의 큰 누각을 뜯어다가 양서재兩書齋를 짓고 읍내에서 백일장을 열어 시제詩題를 ‘쌍계사를 뜯어다가 양서재를 짓다(破雙溪寺設兩書齋)’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기묘년(1879)에 이 부사李府使이름은 규원奎遠이다.가 부임하여 와서 양서재를 헐어다가 절에 반환하고, 또 조력助力하여 중수하게 되었으니 그 복덕이 어떠하겠는가?
나의 행장은 이상과 같을 따름이다.”
찬민이 말하였다.
“법을 전해 준 제자에 대해서는 왜 논하지 않습니까?”
내가 답하였다.
“수은受恩 제자는 두 명이 있고, 사미계를 준 제자는 성윤性允 등 스물세 명이 있으며, 교학을 전해 준 제자는 예순禮淳 등 세 명이고 선참禪懺을 전해 준 제자는 여든한 명이나 된다.”
나는 가경嘉慶 25년 경진(순조 20, 1820) 6월 15일 미시未時(오후 1시~3시)에 태어났고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21, 1894) 현재 나이 75살에 두륜산 일로향실一爐香室에 상주하고 있다.
성품은 본디 유화柔和하고 행동은 편안하고 자상하였으며 느슨한 일이나 급한 일 그 어느 것에도 나에게서는 무엇 하나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하늘을 거스르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사람들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 부지런히 배우고 널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물어서 지식은 넓어졌고 문장은 간이하다. 사람은 보지 않아도 듣기만 하면 알고 친구는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온다. 사람들과 문답을 주고받으면 틀림없이 다투게 될 것이고 사람들과 시를 창화唱和하면 당연히 마음속으로 비난할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시란 감정의 꽃이고 글씨는 마음의 마디이다. 감정이 안에서 움직였을 때 손뼉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바깥에 꽃이 피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문장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속에서 피어나 가로로 긋고 세로로 그어 글씨를 쓰는 것은 겉에 나타내는 것이니, 이는 왕희지王羲之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가 그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감히 선현先賢들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가끔씩 읊은 시는 속태俗態가 줄줄 흐르고 기록한 글들은 저속어가 잡다하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은 또한 남들이 허물을 본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자 등을 우리 나운羅云 스님과 성학聖學인 찬민에게 기록해 보인다.

010_1049_c_01L與知淳同力前者金郡守破雙溪寺大
010_1049_c_02L作兩書齋於邑中設白日場題曰
010_1049_c_03L破雙溪寺設兩書齋己卯李府使

010_1049_c_04L毁兩書齋還許于寺又助力修之
010_1049_c_05L其福德何如我之行藏如此而已
010_1049_c_06L傳法者不論乎曰受恩者二人受沙
010_1049_c_07L彌戒者性允等二十三人敎傳者
010_1049_c_08L淳等三人禪傳2) [84] 八十一人嘉慶二
010_1049_c_09L十五年庚辰六月十五日未時生光緖
010_1049_c_10L二十年甲午年七十五常居頭輪山一
010_1049_c_11L爐香室性本柔和行履安詳緩急有
010_1049_c_12L一無可觀然心不逆天仰不愧人
010_1049_c_13L勤學博訪知廣文易人不見而聞知
010_1049_c_14L朋不期而自至所與人問答者必有口
010_1049_c_15L所有人唱和者應多心非古人曰
010_1049_c_16L詩者情華筆者心節情動於內
010_1049_c_17L抃之蹈之華於外也此李杜之文章也
010_1049_c_18L心發於衷而縱者橫者節於表也
010_1049_c_19L趙之筆法也何敢擬於先賢也有時所
010_1049_c_20L吟者俗態夥多所記者俚語雜遝
010_1049_c_21L而不改者亦含於不畏人之效尤也
010_1049_c_22L等文字記示我羅云聖學賛敏輩上所
010_1049_c_23L「寺」甲本正誤表作「師」「者八十…室曰梵
010_1049_c_24L海」二百七十七字底本缺落編者依甲本補入

010_1050_a_01L위에서 이른바 ‘나를 따르는 학인 도반’이라고 한 것은 곧 계정戒定호는 원응圓應·혜오慧悟호는 취운翠雲·의준儀準호는 금명錦溟·찬의贊儀·율암栗庵·묘언妙彦 등을 두고 한 말이다.
만약 부질없는 이야기이거나 빠진 곳 또는 잘못된 곳이 있으면, 그곳을 따라 필삭筆削을 가하는 것도 무방하다. 나 또한 가까이에 놓아두고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책 속의 스승으로 삼고자 한다.
내 법명은 각안覺岸이고 자는 환여幻如이며, 당호堂號는 범해梵海이다.

010_1050_a_01L謂隨我學侶云者戒定
慧悟
儀準

010_1050_a_02L賛儀栗庵妙彥等也若有浮談落漏詿
010_1050_a_03L誤處隨處筆削無妨予亦置諸左右
010_1050_a_04L以爲日用書中先師焉名覺岸字幻如
010_1050_a_05L室曰梵海

010_1050_b_01L
  1. 1)이충익李忠翊 : 이충익이 쓴 글을 그대로 전제한 부분이다. 이충익은 조선 후기의 학자. 1744~1816. 그는 정제두鄭齊斗의 학통을 계승, 연구하였고, 공안파公安派의 성령문학에 기본을 두고 있다. 또 유학 이외에 노장老莊·선불禪佛에도 해박하였으며, 시와 음악 및 서화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저서로 『答韓生書』와 『椒園遺稿』가 있다.
  2. 2)해조음海潮音 : 부처님이 설법하는 음성을 해조음이라 한다.
  3. 3)외전外典 : 불교 이외의 전적을 가리킨다.
  4. 4)정학연丁學淵 : 아명은 학가·무장. 호는 유산. 1783~1859. 다산 정약용의 맏아들이다.
  5. 5)원문에는 계미癸未로 되어 있는데, 문맥상 앞에 임술壬戌이 나오고 바로 뒤에 갑자甲子가 나오니, 그렇다면 그 중간은 계미가 아닌 계해癸亥가 옳다.
  6. 6)권돈인權敦仁 : 조선 후기 헌종 때의 문신. 1783~1859.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냈다. 원상으로 잠시 국정을 맡았다. 철종 때 경의군을 추존하고, 위패를 영녕전으로 옮길 때, 헌종을 먼저 모시도록 주장해 파직되었다.
  7. 7)김정희金正喜 : 조선 후기의 서화가·문신·문인·금석학자. 1786~1856.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켰는데, 특히 예서와 행서에서 새로운 경지를 완성시켰다.
  8. 8)대기대용大機大用 : 깨달음이 원숙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유자재한 경지를 말한다.
  9. 9)그 이름은~순 없네 : ‘긍선亘璇’이란 ‘돈다’는 의미이므로, 비록 법명은 구른다는 뜻이지만 생사에 전전轉轉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10. 10)‘종종種種’이라는 말은 ‘가끔’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머리털이 드물어졌다는 말이다.
  11. 11)총지사摠持寺 : 무안 승달산에 있는 절.
  12. 12)강개慷慨 :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의기가 북받쳐 원통하고 슬픔.
  13. 13)동가구東家丘 : 동쪽 집의 공구孔丘라는 뜻으로, 즉 노나라 사람으로서 공자의 서쪽 이웃에 살던 한 어리석은 자가 공자가 성인인 줄을 모르고 “저 동쪽 집의 공구를 내가 안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本姓解」, 『傳習錄』.
  14. 14)부처님께서 법회의 자리에 늦게 도착한 가섭에게 자신의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하고, 가섭이 꽃을 들어 보여 법을 전했던 것을 말한다.
  15. 15)용백龍伯 : 옛날 대인국大人國 사람으로 키가 30길이 되는데, 몇 걸음에 오산五山에 이르러 한 번에 여섯 마리의 거오巨鼇를 낚았다고 한다. 그 여섯 마리의 큰 자라는 알고 보니 바다 밑에서 지구를 떠받치고 있던 것들이었다고 한다.
  16. 16)소열蘇烈 : 당나라의 무장 소정방蘇定方.
  17. 17)분육賁育 : 옛날의 용사勇士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힘에는 오획烏獲, 날래기는 경기慶忌, 용맹은 분과 육.”이라는 말이 있다. 『漢書』.
  18. 18)포뢰浦牢 : 용처럼 생겼으며, 울기를 좋아하고 고래(鯨)를 두려워한다고 한다.
  19. 19)호파瓠巴 : 거문고를 잘 탔던 사람으로 거문고를 이용해 짐승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이다. “호파가 거문고를 타면 새가 춤을 추고 물고기가 뛰어오르곤 했다.(巴鼓琴。 鳥舞魚躍。)”는 기록이 『列子』 「湯問」 편에 나온다.
  20. 20)장경長庚 : 장경은 저녁 무렵에 보이는 태백성太白星의 별칭인데, 여기에서는 태백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이태백李太白을 지칭한 듯하다.
  21. 21)칼날을 맞듯이 : 원문 ‘인영刃迎’은 ‘영인이해迎刃而解’의 줄임말로서 ‘대나무가 칼날이 닿자마자 쉽게 쪼개지다, 문제나 일이 순리적으로 처리되다’라는 뜻이다.
  22. 22)효자는 다함이~있을 것이다 : 『詩經』 「大雅」 〈生民之什〉 ‘旣醉’에 나오는 말이다.
  23. 23)홍현주洪顯周 : 1793~1865. 조선 정조의 사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약헌約軒. 인모仁謨의 아들이며, 우의정 석주奭周의 아우이다. 정조의 둘째딸 숙선옹주淑善翁主와 혼인하여 영명위永明尉에 봉하여졌다. 1815년(순조 15)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문장에 뛰어나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저서로는 『해거시집』이 있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다.
  24. 24)신위申緯 : 시詩·서書·화畫의 삼절三絶이라 불렸던 조선 후기 문신 겸 시인, 서화가. 1769~1845. 저서로는 『警脩堂全藁』와 『紫霞詩集』 등이 있다.
  25. 25)윤치영尹致英 : 자는 관여觀汝, 호는 석오石梧,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아버지는 참판을 역임한 윤명렬尹命烈이다. 1836년(헌종 2) 북부도사北部都事를 시작으로 주부主簿, 공조와 호조 낭관郎官, 토산 현감 등을 거치고 1847년(헌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전적典籍·부교리副校理·규장각 직각·부수찬·형조참의·승지를 역임하였다.
  26. 26)이희풍李喜豊 : 자는 성부盛夫, 호는 송파松坡,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813∼1886. 병원炳元의 아들이며 무주茂朱 출신이다. 평생을 시골에 은거하면서 독서와 시문詩文 작성 및 후진 교육에만 힘썼다.
  27. 27)신관호申觀浩 : 자는 국빈國賓, 호는 위당威堂, 본명은 헌櫶,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810∼1888. 훈련대장 홍주鴻周의 손자이고, 의직義直의 아들이다. 금위영대장禁衛營大將이 되어 1849년(철종 즉위년) 헌종이 위독할 때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한 죄로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는데, 1854년(철종 5)에 무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857년에 풀려나왔다.
  28. 28)남병철南秉哲 :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자는 자명子明 또는 원명原明이며, 호는 규재圭齋·강설絳雪·구당鷗堂·계당桂塘 등 여러 개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817~1863. 1837년(헌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안동 김씨 세도 때 중용되어 1851년(철종 2)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1856년 예조판서, 이조판서 겸 대제학 등의 요직을 지냈다.
  29. 29)용상龍象 : 덕 높은 스님을 가리키는 말. 용과 코끼리의 위력이 매우 높은 점을 비유로 삼은 것이다.
  30. 30)묵언黙言이 고성高聲으로 변하였다 : 이 말은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으나 아마도 묵언 정진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31. 31)이유원李裕元 : 조선 시대의 문신. 1814~1888. 자는 경춘景春이고 호는 귤산橘山·묵농默農이다. 영의정을 지냈으며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과의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저서에 『林下筆記』와 『嘉梧藁略』이 있다.
  32. 32)오관五觀 : 스님이 밥 먹는 때에 자기의 공·덕행德行·허물·도업성취 등을 위하여 약으로 생각하고 먹으며 마음을 닦는 일을 말한다.
  33. 33)직철直裰 : ① 수를 놓지 아니한 옷. ② 승려가 입는 옷의 하나. 편삼偏衫과 군자裙子를 합하여 하나로 만든 옷으로, 아래에는 주름을 많이 잡았다.
  34. 34)학문과 예절의 가르침을 받았고(趍庭之訓) : 백이추정伯鯉趍庭에서 나온 말로 『논어』의 “공자가 일찍이 혼자 서 있는데, 이鯉가 허리를 굽혀 절하고 뜰 앞을 지나가자 공자가 불러서, ‘시詩와 예禮를 배우라’고 하였다.”라는 구절에서 응용한 말이다.
  35. 35)발을 씻은 한탄(洗足之歎) : 세속을 버린 한탄. 굴원屈原이 진세塵世를 떠날 때 「漁父詞」를 지어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더러우면 발이나 씻으련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고 한 데에서 응용한 말이다.
  36. 36)노 행자盧行者 : 노능盧能, 즉 육조 혜능의 행자 시절 명칭.
  37. 37)『논어』 「衛靈公」 편에 나오는 말이다.
  38. 38)간지로 보면 87세가 된다.
  39. 39)『四十二章經』에 나오는 말이다.
  40. 40)목서의 향기를~것을 보았다네 : ‘목서의 향기를 맡았는가(聞木穉香乎)?’라는 말은 황정견黃庭堅이 회당 조심晦堂祖心에게 도를 물었을 때 ‘목서의 향냄새를 맡았는가?’ 하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고, ‘매화 열매 익은 것을 보았네(看梅子熟矣)’라는 말은 어느 스님과 대매大梅 화상의 ‘즉심즉불卽心卽佛’ 등에 대한 문답을 듣고 뒷날 대매의 스승 마조馬祖가 대매의 공부가 성숙되었음을 인가하면서 ‘매실이 익었음을 알겠구나’라고 한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용운 스님의 도가 무르익었음을 말한 것이다.
  41. 41)감로사甘露寺 : 천은사泉隱寺의 옛 이름. 전라남도 구례군 광의면에 있는 절.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흥덕왕 3)에 덕운 선사德雲禪師와 인도에서 온 승려 스루가 창건하였고, 경내에 이슬처럼 맑고 찬 샘이 있어 이름을 감로사甘露寺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어 불탄 뒤 중건할 때, 샘에 큰 구렁이가 자꾸 나타나 잡아 죽였더니 샘이 솟아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샘이 숨었다는 뜻으로, 천은사라고 바꾸자 그 뒤로 원인 모를 화재와 재앙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절을 지키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선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더니 그 뒤로 재앙이 그쳤다고 한다.
  42. 42)“촉석루 안의 세 장사 / 술 한 잔 마시고 웃으면서 긴 강물을 가리킨다 / 긴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가는데 / 강물 마르지 않고 영혼도 죽지 않으리(矗石樓中三壯士。 一盃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라는 시이다.
  43. 43)파경노破鏡奴 : 소설 「최고운전」에서 나 소저의 거울을 깨뜨리고 스스로 그 집의 종이 되었다 하여 최치원이 자작自作한 이름. 최 정승이 용꿈을 꾼 후 계집종과 관계를 가졌는데 아들을 낳았다. 아들은 열한 살이 되자 아버지 최 정승을 찾아와 위협을 했다. 최 정승은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증서와 돈을 주었다. 아이는 돈을 가지고 나 정승 집으로 가서 거울 고치는 사람 시늉을 하다가 일부러 거울을 깬 후 거울 값 대신 그 집에서 종으로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이름이 파경노가 되었다. 나 정승 딸이 글에 짝을 채우지 못해 고생하는 것을 보고 파경노가 살짝 짝을 맞추어 주었다. 이때 중국에서 상자 속에 어떤 물건을 넣고 봉한 후 속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맞히라고 했다. 아무도 맞히지 못하자 파경노가 나서서 맞혔다. 중국 천자는 파경노를 시험해 보고 비단 백 필을 하사했다. 아이는 조선으로 돌아와 나 정승의 딸과 결혼했다.
  44. 44)『梵海遺集補遺』의 〈過首露王陵甲辰夏〉라는 시 참조.
  45. 45)영좌領座 : 한 마을이나 한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 조선 시대 저잣거리에서 60세 이상의 공로자功勞者를 높여 부르던 말.
  46. 46)『梵海遺集補遺』의 〈大靜山房窟寺〉.
  47. 47)『梵海禪師詩集』 권1의 〈次戀北亭金淸陰先生韻〉.
  48. 48)『범해선사시집』 권1의 〈次戀宸閣韻〉.
  49. 49)『범해선사시집』 권1의 〈越瀛海〉.
  50. 50)『범해유집보유』의 〈甫吉島書巖庚寅年〉.
  51. 51)송비松碑 : 소나무가 말라 비석처럼 된 것.
  1. 1)「近」甲本正誤表曰衍字。
  2. 2)「述」作「逑」{甲}。
  3. 1)「雪」甲本正誤表作「雲」。
  4. 2)「暮」甲本正誤表作「慕」。
  5. 3)「堦」甲本正誤表作「階」。
  6. 4)「論」作「輪」{甲}。
  7. 1)「淸」甲本正誤表作「請」。
  8. 2)「華」甲本正誤表作「嚴」。
  9. 3)「愢」甲本正誤表作「愧」。
  10. 4)「敦」作「郭」{甲}。
  11. 1)「製」甲本正誤表作「掣」。
  12. 2)「鮫」甲本正誤表曰「衍字」。
  13. 3)「忘」甲本正誤表作「妄」。
  14. 4)「令」甲本正誤表作「今」。
  15. 5)「柱」甲本正誤表作「拄」次同。
  16. 1)「堦」疑「階」{編}。
  17. 2)「人」下甲本正誤表有「稱」。
  18. 1)「日」甲本正誤表作「月」。
  19. 2)「荼租」甲本正誤。表作「苟且」。
  20. 3)「尾譙」甲本正誤表作「心焦」。
  21. 4)「星」甲本正誤表作「是」。
  22. 5)「買」下疑脫「石」{編}。
  23. 6)「改」甲本正誤表作「政」。
  24. 1)「行」甲本正誤表作「近」。
  25. 2)「白」甲本正誤表。作「山」。
  26. 3)「羊」當置「白」字之下{編}。
  27. 4)「編」甲本正誤表作「徧」。
  28. 1)「新薑之」甲本正誤表曰衍字。
  29. 2)「椰楡」甲本正誤表作「揶揄」。
  30. 3)「滿」甲本正誤表作「浦」。
  31. 4)「李」甲本正誤表作「季」。
  32. 1)「寺」疑「師」{編}。
  33. 2)「蹟」甲本正誤表作「賾」。
  34. 3)「覺」甲本正誤表作「見」。
  35. 4)「用」甲本正誤表作「周」。
  36. 1)「編」甲本正誤表作「徧」。
  37. 2)「梧」甲本正誤表作「晤」。
  38. 3)「目」甲本正誤表作「月」。
  39. 4)「忨」甲本正誤表作「玩」。
  40. 1)「奇」甲本正誤表作「寺」。
  41. 2)「輪」上甲本正誤表有「頭」。
  42. 3)「伽」甲本正誤表作「迦」。
  43. 4)「玉果」甲本正誤表曰衍字 。
  44. 5)「綸」甲本正誤表作「論」。
  45. 1)「自」甲本正誤表作「身」。
  46. 2)「王」甲本正誤表作「正」。
  47. 3)「在雲」甲本正誤表作「雲在」。
  48. 4)「𧉃)」甲本正誤表作「蚖」。
  49. 1)「仰」甲本正誤表作「印」。
  50. 2)「坐」甲本正誤表作「座」。
  51. 3)「▼(宀/(羽/木))▼(宀/(羽/木))」甲本正誤表作「寥寥」。
  52. 1)□甲本正誤表作「到」。
  53. 2)「他」作「也」{甲}。
  54. 3)「跡」甲本正誤表作「城」。
  55. 1)「編」甲本正誤表作「徧」。
  56. 2)「間」甲本正誤表作「閒」。
  57. 3)「禀戒」甲本正誤表曰衍字。
  58. 4)「個」甲本正誤表作「倜」。
  59. 5)「譌」甲本正誤表作「潙」。
  60. 6)「堦」疑「階」{編}。
  61. 1)「祚」時本正誤表作「柞」。
  62. 2)「基」作「其」{甲}。
  63. 3)「倫」甲本正誤表作「論」。
  64. 4)「顧」甲本正誤表作「預」。
  65. 5)「蚊」甲本正誤表作「蛟」。
  66. 6)「指」甲本正誤表作「拈」。
  67. 1)「盡」甲本正誤表作「晝」。
  68. 2)「窴」甲本正誤表作「塡」。
  69. 3)「堦」疑「階」{編}。
  70. 1)「來」甲本正誤表作「采」。
  71. 2)「譜」上甲本正誤表有「予」。
  72. 3)「淳」甲本正誤表作「恂」。
  73. 4)「▼(宀/(羽/木))」甲本正誤表作「寥」。
  74. 5)「綱」疑「網」{編}。
  75. 6)「日」疑「曰」{編}。
  76. 1)「鑑」疑「鎰」{編}。
  77. 2)「今」甲本正誤表作「吟」。
  78. 3)「發」甲本正誤表作「撥」。
  79. 4)「稹」甲本正誤表作「禛」。
  80. 5)「基」作「其」。
  81. 6)「白坡」甲本正誤表作「自欣」{甲}。
  82. 7)「米」甲本正誤表作「禾」。
  83. 1)「寺」甲本正誤表作「師」。
  84. 2)「者八十…室曰梵海」二百七十七字。底本缺落編者依甲本補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