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 / 梵海禪師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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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선사 행장梵海禪師行狀
스님의 휘諱는 각안覺岸이요 자는 환여幻如, 호는 범해梵海이다. 가경嘉慶 25년 경진년(1820,, 순조 20) 6월 15일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22년【조선 개국 505년】 병신년(1896, 고종 33) 12월 26일 입적하였으니 동방에 몸을 나타내신 것이 77년이요 서방의 계율을 행한 지 64년이었다.
호남 청해淸海 범진梵津 구계九堦 사람으로 그 세계世系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명철明哲 최치원의 후예요 본조本朝의 은사隱士인 최수강崔壽崗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철徹이요, 어머니는 성산星山 배씨裵氏로 꿈에 연못의 백어白魚를 보고 낳았다. 좌우의 넓적다리 바깥에 길고 흰 무늬가 아롱져 있어 어언魚堰이라 이름하고 또한 초언超堰이라고도 하였다. 성품이 물고기를 즐겨 하지 않았으니 태교를 생각하여 결단코 속세를 벗어날 기연인 듯하다.
14세에 해남군 두륜산 대둔사 호의縞衣 선사【선사는 임진 창의모량사倡義募糧使이자 성균관 진사인 효자 창랑공滄浪公 정수암丁壽巖의 8세손이다.】에게 귀의하였고 16세에 삭발하고 출가하여 하의荷衣 선사에게 십계十戒를 받았으며, 초의草衣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묵화黙和 선사, 화담華潭 선사를 갈마교수羯摩敎授108)의 지위로 삼았다.】 호의ㆍ하의ㆍ초의ㆍ문암聞菴ㆍ운거雲居ㆍ응화應化 등 6대 종사께 참학하였고 요옹寥翁 이 선생께 유교를 열독하였으며 재의齋儀는 태호太湖ㆍ자행慈行 스님께 전수받았다.
27세에 호의 선사의 법인法印을 이어받아 불자拂子를 들어 개당하니 진불암과 상원암은 보리菩提의 법 도량이 되었고 북암과 만일암은 선禪을 설하는 별궁이 되었다. 여섯 번을 두루 화엄축기삼승법華嚴逐機三乘法을 강론하니 학인이 다투어 모였고, 열두 번 범망수연비니회梵網遂緣毘尼會를 설함에 문득 의론이 수레를 채웠으니, 실로 삼교三敎 학인의 스승이요 12종사의 적손嫡孫이다.
갑진년(1844, 헌종 10) 봄에 동쪽으로 방장산에 들어가셨고 인하여 조계산, 가야산, 영취산의 종찰宗刹을 참방하였다. 계유년(1873, 고종 10) 여름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탐라耽羅(제주도)의 한라산 명승지에 올랐다.

010_1097_c_01L梵海禪師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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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諱覺岸字幻如梵海其號也嘉慶
010_1097_c_03L二十五年庚辰六月十五日生光緖二
010_1097_c_04L十二年朝鮮開國
五百五年
丙申十二月二十六日化
010_1097_c_05L應東身者稀又七服西戒者順有四
010_1097_c_06L湖南淸海梵津九堦人泝其世系新羅
010_1097_c_07L明哲崔孤雲之裔本朝隱士崔公壽崗
010_1097_c_08L之六世也父徹母星山裴氏夢見堰
010_1097_c_09L沼白魚而生左右外胯有長白紋彬彬
010_1097_c_10L仍名魚堰又曰超堰性不嗜魚物
010_1097_c_11L顧念胎敎決爲超塵之機歟十四投海
010_1097_c_12L南郡頭輪山大芚寺縞衣禪師師即壬辰倡
義慕粮使
010_1097_c_13L成均進士孝子滄浪
公丁壽巖之八世也
十六薙染受十戒於
010_1097_c_14L荷衣禪師得具戒於草衣律師以默和禪
師華潭禪
010_1097_c_15L爲羯摩
敎授之位
叅學於縞衣荷衣草衣聞菴雲
010_1097_c_16L居應化六大宗師閱儒敎於寥翁李先
010_1097_c_17L受齋儀於太湖慈行師二十七佩縞
010_1097_c_18L衣父之法印竪拂開堂眞佛上院
010_1097_c_19L菩提之法場北庵挽日爲說禪之別宮
010_1097_c_20L六周講華嚴逐機三乘法竸抱斗量
010_1097_c_21L二說梵網遂緣毘尼動論車載實三
010_1097_c_22L敎學人之敎父乃十二宗師之嫡孫也
010_1097_c_23L甲辰春東入方丈芿叅曹溪伽耶鷲嶺
010_1097_c_24L之宗刹癸酉夏南浮瀛海躋攀耽羅漢

010_1098_a_01L을해년(1875, 고종 12)에 북쪽으로 한양에 가서 삼각산의 자줏빛 기운과 구잠九岑의 높은 봉우리, 송악松岳(개성)의 준령, 기도箕都(평양)의 수려함을 눈과 마음으로 보고 취하였다. 묘향산의 보현암을 참배하고 금강산의 법기암에 예를 올렸다.
이에 명산대천의 화려함과 장강의 넓은 파도가 지혜의 산과 가슴의 바다에 가득하여 이로부터 사람들이 보지 않아도 메아리처럼 호응하고 친구를 부르지 않아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사람과 더불어 수창하면 훈도되어 취하고 격식에 맞추어 화운和韻하면 미리 지어 놓은 듯 솜씨가 있었다.
스님이 일찍이 말하였다. “정情이 속에서 움직여 밖을 꾸미는 것은 이백李白과 두보杜甫109)의 문장이요, 회포가 마음에 쌓여 겉으로 드러난 것은 왕희지王羲之110)와 조맹부趙孟頫111)의 필법이다. 나는 다만 틈틈이 느낌을 일으켜 속된 말만 많을 뿐인데 알고도 고치지 못하는 것은 다만 회포를 서술하고 언어를 희롱할 뿐이기 때문이다.” 대개 지으신 시문은 화려함은 제거하고 열매만 취하였으니 이른바 “살찐 껍질은 탈락하고 오직 참된 전단향栴檀香만 남았다.”고 한 말이 참으로 그릇되지 않다.
저작을 대강 살펴보면 『경훈기警訓記』ㆍ『유교경기遺敎經記』ㆍ『사십이장경기四十二章經記』ㆍ『사략기史略記』ㆍ『통감기通鑑記』ㆍ『진보기眞寶記』ㆍ『박의기博議記』ㆍ『사비기四碑記』ㆍ『명수집名數集』ㆍ『동시선東詩選』 각각 1권씩이요 『동사전東師傳』 4편, 시고詩稿 2편,, 문고文稿 2편 합 20여 편이 세상에 행해진다. 다만 인쇄하여 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우니 혹 시절 인연을 기다리느라 그러한 것인가. 그 나머지 일생 동안 뛰어난 자취로 물욕에 깨끗하고 범행梵行이 우뚝하며 학문과 행실이 박통하고 교훈을 자애롭고 순순히 하시는 것은 어찌 감히 거친 붓과 짧은 언사로 만분의 일이나마 표현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마음은 하늘을 거스르지 아니하였고 얼굴은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함이 바로 스님을 일컫는 것이다.
병신년(1896) 12월 25일에 문인【취운 동산翠雲東山】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세상 인연이 이미 다하여 죽음이 곧 다가오니 나는 내일 떠나리라. 선과 교를 전수한 이는 손가락을 꼽아 헤아릴 수 있다.

010_1098_a_01L挐之名勝乙亥秋北登漢陽三角之紫
010_1098_a_02L九岑之崇峨松岳之峻嶺箕都之
010_1098_a_03L秀麗目醉而心飽之叅妙香之普賢
010_1098_a_04L禮金剛之法起於是明山大川之華麗
010_1098_a_05L長江洪浪之浩渺汗漫於智岳胸海之
010_1098_a_06L自是人不見而響應朋不招而雲會
010_1098_a_07L與人酬唱有熏陶之醉對格和韻
010_1098_a_08L宿搆之能也師甞曰情動內而華外者
010_1098_a_09L李杜之文章懷積衷而發表者王趙之
010_1098_a_10L筆法也吾唯隨暇興感俚語襍遝
010_1098_a_11L而不改者但述懷弄假而已盖所著詩
010_1098_a_12L袪華取實所謂脫落肥膚惟眞旃
010_1098_a_13L檀在者信不謬矣槩考著作警訓記
010_1098_a_14L敎經記四十二章經記史畧記通鑑記
010_1098_a_15L寶記博議記四碑記名數集東詩選各一
010_1098_a_16L東師傳四篇詩稿二篇文稿二篇
010_1098_a_17L合二十餘篇幷行于世而只恨未暇印
010_1098_a_18L或待時緣而然歟其餘時順間
010_1098_a_19L蹟犖犖者即物慾之潔潔梵行之亭亭
010_1098_a_20L學行之博通敎訓之慈諄安敢以秃穎
010_1098_a_21L短詞售其萬一哉摘要觀之心不逆
010_1098_a_22L面不愧人正謂此也赤猿之臘念
010_1098_a_23L五日命門人翠雲
東山
等曰世緣已盡大命
010_1098_a_24L俄遷吾當明日行矣禪敎所傳

010_1098_b_01L【교는 원응 계정圓應戒定에게 전해지고 선교는 취운 혜오翠雲慧悟, 서해 묘언犀海妙彦, 금명 보정錦溟寶鼎, 율암 찬의栗庵讚儀 등에게 전해졌다.】 그대는 다만 선을 전하니 또한 힘쓸지어다.” 입으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妄認諸緣稀七年  여러 인연을 그릇 인식한 지 77년
窓蜂事業摠茫然  창봉窓蜂112)의 사업도 모두 망연하구나
忽登彼岸騰騰運  문득 피안에 올라 시운 따라 소요하니
始覺浮漚海上圓  비로소 바다 위 물거품임을 깨닫네

그리고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서 평상시와 같이 차를 마시고 이야기 나누며 밤새 서방을 염원하시다가 6일 여명에 이르러 문득 좌화坐化하시었다. 오호라, 스님이 오실 때 그 꿈이 이와 같았고 가실 때에 신령함이 이와 같았다. 천년의 후에도 영식靈識이 홀로 드러나고 진광眞光이 어둡지 않음을 증명하리라. 문생들이 이와 같이 이른다.
대정大正 6년 정사년(1917) 3월 모일 조계산 율암 찬의栗庵讚儀가 분향하고 삼가 기록하다.

010_1098_b_01L可屈而得也敎傳圓應戒定禪敎幷傳翠雲慧悟
犀海妙彥錦溟寶鼎栗庵讚儀等云

010_1098_b_02L君唯傳禪亦勉旃口占一絕曰妄認諸
010_1098_b_03L緣稀七年窓蜂事業摠茫然忽登彼岸
010_1098_b_04L騰騰運始覺浮漚海上圓仍以灌浴改
010_1098_b_05L茶話一如竟夜念西至六日黎明
010_1098_b_06L奄然坐化嗚呼師之來也其夢如是
010_1098_b_07L師之去也其靈如是千載之下靈識
010_1098_b_08L獨露眞光不昧想應證明門生之如
010_1098_b_09L是如是云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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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正六年丁巳三月日曹溪山栗庵
010_1098_b_11L讚儀焚香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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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8)갈마교수羯摩敎授 : ⓢ karmācārya. 또는 갈마사羯魔師. 계단戒壇에서 계를 받는 이에게 지침이 되는 스님. 소승계小乘戒에서는 학덕과 법랍을 갖춘 스님으로 선정, 원돈교圓頓敎에서는 문수를 갈마아사리로 한다.
  2. 109)두보杜甫(712~770) :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소년 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처자와 함께 사천성四川省의 성도成都에 정착하여 교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성도를 떠나 여기저기 방랑하다가 병을 얻어 동정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3. 110)왕희지王羲之(307~365) : 자는 일소逸少. 우군장군右軍將軍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의 산동성山東省 임기현臨沂縣 출신이며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書聖으로 존경받고 있다.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의 서풍書風은 전아典雅하고 힘차며 귀족적인 기품이 높다.
  4. 111)조맹부趙孟頫(1254~1322) : 자는 자앙子昻, 호는 송설 도인松雪道人, 시호는 문민文敏. 절강성浙江省 오흥현吳興縣 출생. 송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세조世祖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다. 원나라의 화가이자 서예가이다. 서예에서 왕희지의 전형에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그림에서는 당나라와 북송의 화풍으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림은 산수·화훼·죽석·인마 등에 모두 뛰어났고 서예는 특히 해서·행서·초서의 품격이 높았으며 당시 복고주의의 지도적 입장에 있었다.
  5. 112)창봉窓蜂 : 고령 신찬古靈神讚 선사는 백장 회해百長懷海 선사의 법사法嗣로서 대중사大中寺에서 수행하다가 하루는 벌이 창문의 종이를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을 보고 이르기를, 세계가 이같이 넓은데 나가지 못하고 부질없이 옛 종이만 뚫으니 당나귀 해에나 나가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