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범해선사문집(梵海禪師文集) / 梵海禪師詩集後跋

ABC_BJ_H0259_T_004

010_1098_b_13L
범해선사시집 후발梵海禪師詩集後跋
병진년(1916) 겨울에 두륜산 장춘강원長春講院에 머물렀는데 석덕碩德 인월印月과 완월玩月 두 높은 벗이 있었으니 곧 범해 선사의 법손이었다. 4편 2권을 꺼내어 나에게 보여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범해 선조께서 선정의 여가에 지으신 보배로운 시문인데 미처 인쇄할 겨를이 없었으니 스님께서 열독하고 편집하여 주시겠는가.” 내가 빙그레 웃고 공경히 읽어 보았으나 인쇄할 겨를이 없었다. 다음 해 봄에 조계산으로 가지고 가서 눈 높은 선비에게 값을 정하려고 하였다.
마침 송 사마宋司馬【태회】 염재 공念齋公이 있었으니 공은 산중의 재상이요 해외의 명사라, 학문은 소동파蘇東坡113)와 두보처럼 넉넉하고 필법은 왕희지, 조맹부와 나란하였다. 승려인 나는 태전太顚과 혜원惠遠의 식견이 없건마는 당신은 한유韓愈114)와 도연명陶淵明115)의 취지가 있었다. 그 머무는 곳에 찾아가 이유를 말하고 읽도록 하였더니 박학의 자질을 사랑하여 진실로 음미하며 꼼꼼히 평을 하고 또 서문을 주시니 이 원고가 이로부터 금옥의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곧 젊은 스님 주완섭朱完爕에게 명하여 날을 기약하여 인쇄하고 옛 편집을 그대로 따라 책을 이루었다.

010_1098_b_13L梵海禪師詩集後跋 [21]

010_1098_b_14L
赤龍之冬住頭輪之長春講院有碩德印
010_1098_b_15L月玩月二高朋即禪師法孫雲仍也袖四
010_1098_b_16L扁二𢎥而示余曰此即梵海先祖禪餘寶
010_1098_b_17L而未暇榟印唯師閱而編之否予莞
010_1098_b_18L爾而拜讀不遑寫了翌春帶至曹溪
010_1098_b_19L將定價於高眼矣適有宋司馬
念齋公
010_1098_b_20L公即山中宰相海外名士學富蘇杜
010_1098_b_21L叅王趙僧無顚遠之識見自有韓陶之趣
010_1098_b_22L旨也賚就其舘說由而使讀之愛其博
010_1098_b_23L學之質實玩之而點評之又以弁文而賜
010_1098_b_24L但斯稾也從玆爲金聲之有在也
010_1098_b_25L命小闍黎朱完燮剋日寫了仍舊扁而成

010_1098_c_01L
아, 병술년(1886, 고종 23) 봄에 만일단挽日壇 앞에서 선사에게 수계하였고, 병진년(1916) 겨울에 선사의 진영을 보련각寶蓮閣에서 뵈었으며, 정사년(1917) 여름에 조계산방에서 선사의 시를 편찬하게 되었으니, 혹 영겁의 기연奇緣을 두륜의 계산溪山 가운데서 마치게 된다면 다만 일시의 느낌만 있을 뿐만이 아니다. 훗날 이 시집을 읽는 자는 능히 두 높은 벗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를 체득한 이후에 비로소 알 것이다.
정사년(1917) 4월 욕불일浴佛日 조계산 계생戒生 보정寶鼎이 삼가 쓰다.

010_1098_c_01L帙之丙戌春受禪師戒於挽日壇前
010_1098_c_02L丙辰冬禮禪師眞於寶蓮閣裡丁巳夏
010_1098_c_03L禪師詩於曹溪山房倘是浩劫奇緣要終
010_1098_c_04L於海崙溪山之中非特有一時感遇而已
010_1098_c_05L後之讀此者能軆乎二高朋之本意果安
010_1098_c_06L在而後始得之也夫

010_1098_c_07L
丁巳四月浴佛日曹溪山戒生寶鼎
010_1098_c_08L謹書
  1. 113)소동파蘇東坡(1037~1101) : 미산眉山(지금의 사천성四川省 미산시眉山市) 출생.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 이름은 식軾. 소순蘇洵의 아들이며 소철蘇轍의 형으로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송宋나라 제1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 ≺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2. 114)한유韓愈(768~824) : 자는 퇴지退之, 시호는 문공文公. 회주懷州 수무현修武縣(하남성河南省) 출생. 792년 진사에 급제하였다. 당나라의 문학가 겸 사상가. 그의 공적은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변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宋나라 이후 중국 산문 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모범이 되었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사상 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불교를 배격하였다.
  3. 115)도연명陶淵明(365~427) : 자는 연명 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 오류五柳 선생이라 칭하였다.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의 시상柴桑 출생. 동진東晋과 남조南朝 송나라의 시인. 기교를 부리지 않고 평담平淡한 시풍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로부터는 경시를 받았지만 당唐대 이후는 육조六朝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시풍은 당나라 맹호연孟浩然, 왕유王維 등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주요 작품으로 ≺桃花源記≻, ≺歸去來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