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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_0523_a_23L[跋]옛날 진사왕陳思王 조식曺植이 어산魚山에 올라갔다가 홀연히 공중에서 들리는 범천梵天의 음악을 듣고 이를 본받아 수륙회水陸會에 사용하고 그 이름을 범음梵音이라 하였다. 그러니 범음이 처음 만들어져 전해 온 지는 아주 오래되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은 바다 모퉁이 구석에 있어서 그 일파一派를 얻지 못하다가 진감眞鑑 국로國老가 중국에서 돌아온 때에 이르러서야 -
011_0523_a_23L[跋]
011_0523_a_24L昔陳王曺植。登魚山。聞梵天之音。倣
011_0523_a_25L其音。用之水陸會。仍名曰梵音。梵音
011_0523_a_26L之剏傳。厥惟久哉。而吾東僻處海隅。
011_0523_a_27L未得其一派。至眞鑑國老自中國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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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_0523_b_01L그 법이 처음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중세中世 이후에는 그 범패를 익힌 사람이 대부분 그 바른 법을 잃고 말았는데, 근래 지환智還 노스님이 홀로 그 종지宗旨를 터득하여 승단에 명성을 떨쳤다. 그것은 아마도 총민하고 두루 통달한 재주로써 독실하게 공부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하여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이들이 손가락을 꼽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만세萬世에 전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방책方册에 기록해 두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번잡한 것은 삭제해 버리고 생략된 부분을 보완하여 두 권의 책으로 만들어서 여러 종문의 거장들에게 널리 자문을 받아 곡성谷城 도림사道林寺에서 판각하게 하였다. 또 화악華岳에서 판각(剞劂)을 하고자 하여 나(不慧)에게 맡기니, 나는 후학들에게 규범서가 생기는 것이 기쁘고 지환 스님의 성대한 뜻에 감격하였다. 그러나 새기는 일손이 여유가 없어 몇 해를 미루어 오다가 이제야 비로소 간행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우리 불가의 모든 불자들은 앞으로는 범음집의 바른 법을 얻을 것이요 지환 스님은 백 대代의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공역을 이미 마치자 지환 스님이 권말에 한마디 말을 써 주기를 청하기에 사양하다가 마지못해 그 시종始終을 대략 서술한다.금상 4년 계묘癸卯(1723) 월 일에 부종수교 전불심등 복국우세 광제중생 비지보조 해행쌍운 원융무애 일체종선 선교도총섭 겸 팔방도승통 홍각등계 국일자도대선 가의대부 팔도도총섭 겸 승대장扶宗樹敎 傳佛心燈 福國祐世 廣濟衆生 悲智普照 觧行雙運 圓融無礙 一切種善 禪敎都揔攝 兼 八方都僧統 弘覺登階 國一紫都大禪 嘉義大夫 八道都揔攝 兼 僧大將 계파 성능桂坡聖能13)은 삼가 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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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_0523_b_01L其法始播。而中世以後。習之者多失
011_0523_b_02L其正法。近有智還老釋。獨得其宗。名
011_0523_b_03L動緇林。盖以敏達之才。有篤實之工也。
011_0523_b_04L四方來學者。指不勝屈。然傳之萬世
011_0523_b_05L而不爽者。終不若載之方册。故删其繁
011_0523_b_06L補其略。作爲兩卷。廣質於諸宗匠。鋟
011_0523_b_07L于谷城之道林寺。又欲剞劂於華岳。勒
011_0523_b_08L托於不慧。不慧喜後學之有範。感還公
011_0523_b_09L之盛意。而匠手無暇。延遷數載。今始
011_0523_b_10L刊行。自此吾家諸子。其將得正法於梵
011_0523_b_11L音。而還公亦爲百代之師表也。工吿訖。
011_0523_b_12L還公請一言於卷末。辭不獲已。略敍其
011_0523_b_13L始終焉。
011_0523_b_14L上之四年癸卯。月。日。扶宗樹敎。傳
011_0523_b_15L佛心燈。福國祐世。廣濟衆生。悲智普照。
011_0523_b_16L觧行雙運。圓融無礙。一切種善。禪敎都
011_0523_b_17L揔攝。兼八方都僧統。弘覺登階。國一紫
011_0523_b_18L都大禪。嘉義大夫。八道都揔攝。兼僧大
011_0523_b_19L將。桂坡聖能謹跋。
- 13)생몰연대 미상. 숙종 3년(1711) 팔도도총섭이 되어 북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휘 관리하였으며 이후 30여 년간 북한산성 안에 있는 중흥사에 머물렀다. 영조 21년(1745)에 『북한지北漢志』를 펴냈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두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