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혼원집(混元集) / 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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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행장行狀
스님의 호號는 혼원混元이다. 속명(諱)은 세환世煥이고, 자字는 정규正圭이며, 성姓은 두杜씨다. 본관은 두릉杜陵으로, 대명大明 태사공太師公 휘諱 사충思忠의 9세손世孫이다. 스님은 철종(哲廟) 계축癸丑년(1853) 2월 초9일에 청도군淸道郡 동부리東部里 자택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서 힘겹게 살아가며 삶의 재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16세에 입산하여 극암克庵 화상和尙께 머리를 깎았다.
극암 화상이 장차 경서를 가르치려고 할 때 묻기를 “일찍이 어떤 경서를 읽어 보았느냐?”라고 하자, 손을 모으며 대답하길 “열 살 때 『통감通鑑』 6권을 읽었으나, 『사략史略』은 아직 읽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책을 배우길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서책에서 얻는 깨달음은 책을 많이 읽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니, 『통감』을 3년 더 읽은 후에 『사략』을 읽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 가르침을 따라서 3년이 지난 후에 『사략』을 배웠으니, 마치 물 흐르듯 읽어 나가서 한 달도 채 되기도 전에 모두 읽었다. 경전을 읽음에 깊은 이치를 탐구하고 은미한 뜻을 분별하여서, 마치 거울이 훤하게 사물을 비추듯 하였다. 제자백가諸子百家에 이르러서는 눈이 닿는 대로 문득 외웠으며, 서예를 배움에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스님에게 배우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세상에 명성을 드날렸다. 용호龍湖 화상께 계戒를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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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_0732_c_12L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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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尙號混元諱世煥字正圭姓杜
011_0732_c_14L出杜陵大明太師公諱思忠之九世孫
011_0732_c_15L以哲廟癸丑二月初九日和尙生于
011_0732_c_16L淸道郡東部里第幼失怙恃坎壈無聊
011_0732_c_17L十六歲入山祝髮于克庵和尙和尙將
011_0732_c_18L敎書問曾讀何書拱手對曰十歲讀
011_0732_c_19L通鑑六卷而未讀史畧願學焉書之
011_0732_c_20L得力不在多卷讀此三年後學他書
011_0732_c_21L從其言期至三年而學通史如水就
011_0732_c_22L不幾月而盡讀讀經傳探賾析微
011_0732_c_23L如鏡照物諸子百家寓目輒誦學筆
011_0732_c_24L筆進精妙願學者多名揚於世受具

011_0733_a_01L극암 화상께 법을 받았으니, 임제종臨濟宗 33세 영파影波 화상의 7세손이 되었다.
계미癸未년(1883)에 예천醴泉의 용문사(龍門)에 들어가 용호 화상께 가르침을 받았으며, 북쪽으로는 금강산을 올랐고 동쪽으로는 동해를 내려다보았으니, 산수山水의 훌륭한 경관을 모두 섭렵하여 불교의 기상(吾氣)을 북돋웠다. 건봉사乾鳳寺에 가서 대응大應ㆍ하은荷隱 두 종백宗伯께 도를 물었다. 이듬해 가을에 다시 용문사로 돌아가서 더욱 학문에 힘썼으니, 이에 내외內外의 학문에 있어서 이른바 ‘넉넉하여서 칼날에 남음이 있다(恢恢有餘刃)’254)라 할 만하게 되었다.
병술丙戌년(1886) 가을에 군위군(軍威)의 백련사(白蓮)의 요청을 받아서 법석을 열어 설법을 하였으며, 정해丁亥년(1887) 가을에는 성주星州 청암사(靑巖)의 요청을 받아서 불자(麈)를 잡고 현묘한 이치를 강설하였다. 학인들의 수행이 점차 더욱 진전되자 법우法雨가 두루 적시어 메말라 있던 것들이 모두 윤택해지고, 산가지(籌)255)처럼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서 계행戒行이 엄격해지고 청정해졌으며, 삼취三聚256)가 진실로 그것을 지키게 되었다. 이에 앉을 때는 의발衣鉢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발로는 여승들이 머무는 절터의 땅은 밟지도 않았으니, 사람들이 말하길 ‘청량淸凉 국사가 환생하였구나’라고 할 정도였다. 일찍이 말하길 “경전의 가르침은 마치 통발이나 올가미(筌蹄)257)와 같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니, 이미 그 터득한 바를 알았다면 어찌 반드시 이곳저곳을 여러 번 찾아다니며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가르치고 남는 시간에는 마음을 관조하는 것으로 주를 삼았으니, 그 깨달아 들어가는 묘법이라는 것이 스스로 얻지 못하고 꺼내어 주어서 얻은 것은 얻지 못한 것과 같음을 사람들에게 어찌 말해 준 것이 아니겠는가.
기축己丑년(1889) 가을, 작은 질병으로 약간 고생을 하였는데, 약 처방이나 식이조절 등으로도 차도가 없었다. 12월(臘月) 2일, 스스로 세상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서, 힘든 몸을 이끌고서 미음을 마시며 목욕을 하고 깨끗한 의복으로 갈아입고 가사를 착용하였다. 대중에게 법상法床을 펼치고 모이라고 명하고서 말하기를 “세속의 사람들은 각자 욕심 부리는 것에 빠져 밝은 덕(明德)을 어둡게 하고 저버려서, 살아서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알지 못하고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니, 너무나도 애석한 일이로다. 오늘 저녁이 바로 내가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날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화엄경華嚴經』 ≺각림보살게覺林菩薩偈≻를 설하고 ≺회향공덕게回向功德偈≻로 마무리를 하고서 홀연히 눈을 감았다. 그곳에 모인 모든 대중이 목이 메도록 울고불고하자, 스님께서 다시 깨어나 말하기를 “저 피안의 국토에 도착하니 장엄莊嚴이 이곳의 그것보다 훨씬 훌륭하며,

011_0733_a_01L于龍湖和尙受法于克庵和尙爲臨濟
011_0733_a_02L宗三十三世影波和尙七世孫也歲癸
011_0733_a_03L登醴泉之龍門受經于龍湖和尙
011_0733_a_04L北躡金剛東臨大瀛盡山水之大觀
011_0733_a_05L以助吾氣抵乾鳳寺遍質大應荷隱
011_0733_a_06L兩宗伯翌年秋還到龍門益溫故
011_0733_a_07L內外之學所謂恢恢有餘刃矣丙戌
011_0733_a_08L受軍威之白蓮請設榻以肆講
011_0733_a_09L亥秋受星州之靑巖請執𪊧 [11] 以說玄
011_0733_a_10L學人稍益進法雨普沾枯槁悉潤而化
011_0733_a_11L籌積戒行嚴淨三聚固已守之而坐
011_0733_a_12L不離衣鉢之側足不踏尼寺之地人稱
011_0733_a_13L淸凉重來嘗曰經敎如筌蹄旣知所得
011_0733_a_14L則何必尋數專勞也敎授之餘以內照
011_0733_a_15L爲主其得入之妙豈非說與人不得拈
011_0733_a_16L出呈似人不得者耶己丑秋以微疾小
011_0733_a_17L藥餌無靈到臘月二日自知住世
011_0733_a_18L無多强飮粥沐浴衣淨服着袈裟
011_0733_a_19L設法床會大衆曰世人汨於所欲
011_0733_a_20L却明德生不知來處死不知去處
011_0733_a_21L勝惜哉今夕乃余還元之日也說華嚴
011_0733_a_22L經覺林菩薩偈終以回向功德偈忽溘
011_0733_a_23L然閉目一會老少無不涕呼哽咽
011_0733_a_24L覺曰到彼土國界莊嚴與此地逈勝

011_0733_b_01L불보살佛菩薩의 교화敎化도 자재自在하고 선우지식善友知識이 길을 안내하여 슬슬 거닐어도 보았노라. 그러나 나의 은사恩師께서 연로하여 계신데 내가 아직 공양을 다 베풀지 못하고 이렇게 먼저 떠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내 눈을 감자, 대중이 일제히 소리 내어 통곡을 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깨어나 조용히 말하길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은 천명에 달린 것이니, 이 몸뚱이(色身)는 비록 남아 있지만 본체인 법신法身은 이미 떠났노라. 반드시 부지런히 수행하고 공부하여 연화장세계(蓮國)258)에서 서로 만나도록 하자. 절대 슬퍼하거나 아파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입적하니, 세수世壽 37세요, 법랍法臘은 21년이었다. 기이한 향기(異香)가 방안에 가득하였고, 온화한 기운(和氣)이 따스한 봄날과 같았다. 드디어 3일째 되는 날 다비식을 거행하였는데, 가마의 불(駕火)이 채 반도 타지 않았을 때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무 탈 없이 편안히 다비식을 마치니, 다비식에 참석한 승속들이 이러한 현상을 보고는 흠모하는 마음에 감탄하면서 절을 올렸다.
오호라, 청암사(靑巖)는 바로 스님의 신령스런 산(靈山)이요, 또한 스님의 진흙 속 연꽃(泥蓮)이로다. 떠나실 날을 미리 알고서 대중들을 불러 모아 설법하고, 입적 후에 서로 만날 것을 알려 주니, 마치 옛날 옛적 조사祖師들과 같도다. 만약 평소에 스스로 닦고 스스로 깨달아서 항상 깨어 있고 어둡지 않은 사람(惺惺不昧)이 아니라면, 어찌 그러할 수 있었겠는가. 스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사람들과 주고받은 시문과 저술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혹 보게 되면 애지중지하여 마치 여의주(驪珠)를 보듯이 하였다. 그러나 글들이 모두 흩어지거나 없어져서 오직 「금강록金剛錄」과 초년에 지은 기記ㆍ서序ㆍ찬賛만이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으로 스님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후세에 사람들이 스님을 공경하고 추모하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삼가 위와 같이 글을 지어 판각하게 하노라.
석가모니 탄생(敎主降生) 2937년 경술庚戌년(1910) 춘삼월 갑인甲寅에 법자法子 석응 달현石應達玄 눈물을 닦으며 삼가 글을 짓다.

011_0733_b_01L佛菩薩敎化自在善友知識引路以逍
011_0733_b_02L遙矣然恩師年老在堂而吾未供奉
011_0733_b_03L先歸是所恨也因合眼徒衆齊聲呼之
011_0733_b_04L又覺而從容謂曰脩短有命色身雖存
011_0733_b_05L法身已去須勤修工夫期圖蓮國相逢
011_0733_b_06L而勿爲悲痛言訖而逝世壽三十七
011_0733_b_07L法臘二十一異香滿室和氣如春
011_0733_b_08L三日而闍維之駕火未半凉風遽至
011_0733_b_09L安安以終緇白觀者欽歎禮拜嗚呼
011_0733_b_10L靑巖卽和尙之靈山也亦和尙之泥蓮
011_0733_b_11L先知臈晦因緣會徒衆說法而戒
011_0733_b_12L後相逢如古昔祖師苟非平日自修自
011_0733_b_13L惺惺不昧焉得然乎在世時與人
011_0733_b_14L酬唱往復著述不爲不多而人或得
011_0733_b_15L愛之如驪珠所以散亡無有而惟
011_0733_b_16L金剛錄與初年所作記序賛若干在此
011_0733_b_17L不足爲和尙輕重也祗足爲後昆之追
011_0733_b_18L慕羹墻謹書以付諸鋟梓云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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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主降生二千九百三十七年庚戌春
011_0733_b_20L三月甲寅法子石應達玄抆泣謹
011_0733_b_21L
  1. 254)『莊子』 「養生主」에서 백정이 말하기를 “소의 뼈 마디와 마디 사이에는 틈이 있는 공간이 있고, 나의 칼날에는 두께가 없으니, 두께가 없는 것을 그 틈 사이에 밀어 넣으면 그 공간이 널찍해서 칼을 놀릴 적에 반드시 여유가 있게 마련이다.(彼節者有間。 而刀刃者無厚。 以無厚入有間。 恢恢乎其於遊刃必有餘地矣。)”라고 하였는데, 이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2. 255)산가지(籌) : 인도 불교의 제4조 우바국다優婆鞠多 존자는 한 사람을 교화할 때마다 석실石室에 산가지(籌)를 하나씩 던져 넣어 가득 채운 데서 유래한 말이다.
  3. 256)삼취三聚 : 중생을 세 부류로 나눈 것으로, 견혹見惑을 끊어 반드시 열반에 이를 정정취正定聚, 오역죄五逆罪를 저질러 반드시 지옥에 떨어질 사정취邪定聚, 열반에 이를지 지옥에 떨어질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부정취不定聚를 말한다.
  4. 257)통발이나 올가미(筌蹄) : 고기를 잡는 통발(筌)과 토끼를 잡는 올가미(蹄)라는 뜻으로, 목적을 위한 방편方便을 이르는 말이다.
  5. 258)연화장세계(蓮國) : 연국蓮國은 연화국蓮華國의 줄임말로, 비로자나불毗盧遮那佛이 계신 정토淨土를 말한다.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세계라는 뜻에서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