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혼원집(混元集) / 混元和尙遺稿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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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원 화상 유고 후발混元和尙遺稿後跋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는데, 공자께서 답하기를 “문왕(文)과 무왕(武)의 정치가 문헌에 다 기록되어 있듯이, 그러한 군주가 있으면 그러한 정치가 거행되고, 그러한 군주가 없으면 그러한 정치가 그치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진실한 말인가.

011_0733_b_22L混元和尙遺稿後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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哀公問政子曰文武之政布在方册
011_0733_b_24L其人存則其政擧其人亡則其政息

011_0733_c_01L이러한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정치가 있는 것이로다. 우리 선덕先德 혼원 공混元公께서는 극암克庵 장로를 법부로 삼고, 석응石應 스님을 법자로 삼았으니, 그 어떤 근심도 없으셨다. 극암 장로께서는 석문釋門의 고덕高德으로, 문장에는 도道가 있었고 타고난 성품이 고결하였으며, 선정에 들지 않은 여가에는 오직 문장에만 힘썼다. 항상 혼원 화상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코끼리를 잡을 올가미이니,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용이 용의 자식을 낳았구나.”라고 하였으니, 우리 혼원 공을 법자로 인정하신 것이다.
혼원 공의 재주는 보통 사람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으니, 청출어람처럼 그 재능이 스승을 넘어섰다. 금강산과 소백산은 일찍이 그가 도를 묻던 곳이었으며, 스승을 닮지 못하고 부족한 듯이 자리를 같이하는 인연을 겸손히 맺었고, 긴 가르침의 이익을 많이 돌아보았으니, 용호龍湖 함석凾席259)께서 일찍이 혼원 공을 칭찬하여 말하길 “우리 총림의 인물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배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벼와 삼처럼 많이 모여들었다. 사방의 먼 곳으로부터 천 리가 멀다 않고 찾아왔으니, 이에 덕화德化가 더욱 넓고 크게 행해졌다.
아, 그러나 영산靈山의 법회260)는 끝내 펼치지 못하고, 쌍수雙樹261)에서 열반에 들게 되었도다. 기축己丑년(1889) 12월(臘) 2일 저녁에 적멸에 들어선 선정을 보였다. 또한 극암 장로로 하여금 갑작스레 법자를 잃는 고통을 느끼게 하였다. 아, 슬프도다. 공께서 세상에 머무른 시간이 안씨顏氏262)와의 차이가 5년이구나. 어찌 대덕大德은 반드시 그 천수를 다 누린다고 한 설이 이에는 해당되지 않는단 말인가. 영감靈龕 아래에 다만 댕기머리를 한 한 명의 승려만이 있으니, 노장께서 어루만지며 말씀하시기를 “뜻을 이은 사람은 다만 이 사람뿐이노라. 배에는 양식을 채워 주고 귀에는 가르침을 주니, 명주실이 이미 비단을 이루고 문장이 나날이 발전하였다. 이전에 추자鶖子263)가 균제均提264)에게 그러하였듯이 지금 관서關西의 공자가 되었네. 이러한 장로에 이러한 법손이로다. 인仁을 구하는 경지에서 사람을 얻고, 거의 꺼져 가던 등불이 다시 불붙게 되었다. 스님의 육체는 없지만 스님의 정신은 남아 있네.”라고 하였다. 장로의 서원이 끝날쯤에 갑자기 입적하였도다. 아아, 스님이 장로를 스승으로 삼고 스승도 또한 그에 화답하니, 스님은 말년에 명을 받아서 그 주공周公이 선조의 뜻을 따르는 예법을 본받았도다. 그 슬픔을 다하고 그 마음을 펼쳐서 그 효를 다하였다.
장차 혼원 공의 문집을 간행하려고 할 때에 나를 스님에 대해 잘 아는 사람으로 여겨서, 말미에 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으나, 나는 글재주가 없어서 감히 옥에 티를 남길 수 없었다. 그러나 스님을 향한 그리움의 마음을 스스로 금할 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말하기를 “스님의 글을

011_0733_c_01L哉言乎有是人則有是政矣我先德混
011_0733_c_02L元公以克庵老爲父以石應士爲子
011_0733_c_03L師其無憂乎克老釋門高德文有道而
011_0733_c_04L性賦高擧定餘閒事惟文而已常曰
011_0733_c_05L得象之罤豈可忽諸肆以龍生龍子
011_0733_c_06L子我元公公才邁異常沮本其茜 [12]
011_0733_c_07L剛小白曾所問津之處不肖無似
011_0733_c_08L結同床之緣顧多長庥之益龍湖凾席
011_0733_c_09L嘗稱公曰林下有人矣自後請益者
011_0733_c_10L所至稻麻矣四遠向風千里願陟
011_0733_c_11L益溥而化大行矣未終靈山之會
011_0733_c_12L遽値夢鍾雙樹己丑臘二之夕示入羅
011_0733_c_13L迦之定又使克老奄起▼(夾/亡)予之痛
011_0733_c_14L公之寄於世差過顏氏壽五年矣
011_0733_c_15L何大德必得其壽之說多踈於此也
011_0733_c_16L龕之下只有髧髧一衲而老撫背曰
011_0733_c_17L繼志者祇遮是矣腹而養之耳而警
011_0733_c_18L絲已錦而文日章曩以鶖子之均提
011_0733_c_19L今作關西之孔子有是老有是孫
011_0733_c_20L人於求仁之地續焰於幾盡之燈師無
011_0733_c_21L而師有矣老願已適遽又見棄嗟乎
011_0733_c_22L士之師之師又謝之士受命於末
011_0733_c_23L法其周公追先之禮罄其哀伸其情
011_0733_c_24L而竭其孝將梓先稿以余爲有知於師
011_0733_c_25L求其足尾之文余無文不敢玷白圭
011_0733_c_26L而自難禁感慕之懷於是乎難曰師之

011_0734_a_01L판목에 새겨 넣는 것은 스님의 귀함을 다하기에는 부족하도다. 스님은 본래 글자를 남김이 없었으니, 광대경권廣大經卷은 광명장光明藏에 감추어져 있음이로다. 이것은 만덕萬德의 근원이 되고 군경群經의 시초가 되니, 삼장三藏 십이부十二部 일체수다라一切修多羅가 모두 이로부터 나온 것이라, 어찌 이 몇 권의 글로 다할 수 있단 말인가. 스님은 이것을 새겨 넣을 수 없고 나는 이 글을 얻을 수 없으니, 결국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뜻을 잇고 그 일을 서술하는 것은 다만 이 사람이 있을 때뿐이로다. 예는 효로써 우선을 삼으니 부모를 공경하는 오랜 친분을 어찌 끝내 저버릴 수 있겠는가.”
때는 신해辛亥년(1911) 10월(小春) 29일(小晦)에 회응晦應 석주錫柱 삼가 발문을 짓다.

011_0734_a_01L文之登於梓者不足爲師之貴師有
011_0734_a_02L沒字廣大經卷藏在光明藏中此爲萬
011_0734_a_03L德之源羣經之祖三藏十二部一切
011_0734_a_04L修多羅皆從此出豈獨此數卷文而已
011_0734_a_05L士梓此不得我文此不得畢竟如
011_0734_a_06L繼其志述其事只自是人存而已
011_0734_a_07L禮以孝爲先尊親之誼終不可諼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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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辛亥小春小晦晦應錫柱謹跋
  1. 259)함석凾席 : 스승의 자리라는 뜻으로, 스승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함장函丈이라고도 한다.
  2. 260)영산靈山의 법회法會 :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던 때의 모임을 말한다.
  3. 261)쌍수雙樹 : 한 쌍의 나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하였을 때 동서남북에 각각 한 쌍씩 서 있었던 사라沙羅나무를 말한다. 동쪽의 한 쌍은 상주常住와 무상無常을, 서쪽의 것은 진아眞我와 무아無我를, 남쪽의 것은 안락安樂과 무락無樂을, 북쪽의 것은 청정淸淨과 부정不淨을 상징한다.
  4. 262)안씨顏氏 : 춘추시대 말기 노魯나라 사람인 안회顔回(B.C. 521~B.C. 490)를 말한다. 자가 자연子淵이라 안연顔淵으로도 불린다. 안무요顔無繇의 아들이다. 공자가 가장 신임했던 제자로, 공자보다 30살 어렸지만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안회의 향년이 32세이고, 혼원 공의 향년은 37세였기 때문에 5세의 차이가 난다고 한 것이다.
  5. 263)추자鶖子 : ⓢ Sāriputta의 음역어로, 사리자舍利子·사리불舍利弗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수제자로, 지혜가 가장 뛰어나, ‘지혜제일智慧第一’로 칭송받았다.
  6. 264)균제均提 : ⓢ Kunti의 음역어로, 7세에 사리불에게 출가하여 뒤에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다.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여 종신토록 사미로 시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