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智度論釋習相應品第三之餘

ABC_IT_K0549_T_037
014_0872_a_01L대지도론 제37권
014_0872_a_01L大智度論釋習相應品第三之餘卷三十七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014_0872_a_02L聖者龍樹造
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


3. 습상응품을 풀이함③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살바야(薩婆若)는 과거의 세상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과거의 세상조차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가 과거의 세상과 합하겠느냐. 살바야는 미래의 세상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미래의 세상은 볼 수조차도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가 미래의 세상과 합하겠느냐. 살바야는 현재의 세상과 합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은 볼 수조차도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가 현재의 세상과 합하겠느냐.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2_a_04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薩婆若不與過去世合何以故過去世不可見何況薩婆若與過去世合薩婆若不與未來世合何以故未來世不可見何況薩婆若與未來世合薩婆若不與現在世合何以故現在世不可見何況薩婆若與現在世合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名與般若波羅蜜相應
【논】해석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살바야와 과거의 세상이 같다고는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과거의 세상은 허망한 것이요 살바야는 진실한 법이기 때문이다. 과거 세상은 바로 나고 멸하는 모양이요 살바야는 나고 멸하는 모양이 아니다. 과거의 세상 및 법은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살바야와 과거의 세상이 합하는 일이랴.
014_0872_a_13L【論】釋曰菩薩行般若波羅蜜不觀薩婆若與過去世何以故過去世是虛妄薩婆若是實法過去世是生滅相薩婆若非生滅相過去世及法求覓不可得何況薩婆若與過去世合
또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과거의 세상을 보지도 않는데 하물며 살바야와 과거의 세상이 합하겠느냐. 미래와 현재의 세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셨다. 미래의 세상은 나고 멸하는 모양을 제외하고 그 밖의 이치도 동일하다.
014_0872_a_18L復次佛自說因緣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見過去世何況薩婆若與過去世合未來現在世亦如是未來世除生滅相餘義同
또 시간[時] 때문에 3세(世)가 있다고 말하나니,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한 때의 이치는 일시(一時)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72_a_22L復次以時故說有三世過去未來現在一時中說
014_0872_b_01L또 살바야는 바로 시방과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진실한 지혜이다. 3세(世)는 범부의 허망한 생각에서 생기니 어떻게 살바야와 합쳐지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치 순금은 헌쇠[弊鐵]와 모양을 같이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72_b_01L復次婆若是十方三世諸佛眞實智慧世者從凡夫虛妄生云何與薩婆若譬如眞金不與弊鐵同相
【문】수희품(隨喜品) 가운데 설명하듯이, 보살마하살은 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살바야 지혜 등의 모든 공덕을 염(念)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廻向)하는데 어떻게 과거ㆍ현재의 세상이 살바야와 합하지 않는다고 하시는가?
014_0872_b_04L問曰「隨喜品」中說菩薩摩訶薩念過去在諸佛薩婆若智慧等諸功德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云何言過去現在世不與薩婆若合
【답】만일 집착하는 마음으로 모양을 취하면서 살바야를 염한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고 하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독이 섞인 음식은 처음에는 비록 향기롭고 맛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몸을 편치 않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이 과거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살바야를 분별한다면 마땅히 3세와 합쳐져야 하겠지만 지금은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곧 합하는 일이 없다.
014_0872_b_08L答曰若以著心取相念薩婆若者不名迴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譬如雜毒食初雖香美後不便身若菩薩分別過去在諸佛薩婆若者應與三世合今不取相故則無有合
【문】보살도 역시 생각하기를 “미래의 세상에 부처님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살바야도 역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살바야를 얻어야 한다.”고 하리니, 이것을 미래 세상의 살바야와 합한다고 하겠는데 어떻게 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
014_0872_b_13L問曰菩薩亦念來世當成佛薩婆若亦自念我當得薩婆若是名與未來世薩婆若合何言不合
【답】살바야는 삼계(三界)를 뛰어나고 3세를 벗어나서 필경 청정한 모양이다. 수행하는 이는 단지 생각하고 분별하여 “나는 이 살바야를 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세간의 법에서 마땅히 얻을 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이 일이 생기지 않았고 아직 있지 못한 것과 같을 뿐이다. 시절이 아직 이르지 못했고 인연이 아직 만나지 못해서 도무지 처소가 없으니 어떻게 합쳐지겠는가. 마치 다음날에 소(蘇)를 먹어야 할 터인데 지금 벌써 냄새가 날 것을 기억하는 것과 같다.
014_0872_b_16L答曰薩婆若過三界出三畢竟淸淨相行者但以憶想分別我當得是薩婆若如世閒法憶想當有所得而是事未生未有時節未至因緣未會都無處所云何當與合明當服蘇今已憶臭
014_0872_c_01L또 마치 가전연(迦栴延)의 제자들이 미래 세상 안의 보리(菩提)를 말하면서 보살에게 말하기를 “만일 상호(相好)의 몸을 잘 닦으면 나는 장차 와서 그 몸에 있을 것이다.”고 한 것과 같나니, 마치 귀한 집 딸이 제멋대로 주저함도 없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가난한 집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잘 장엄하고 방사(房舍)와 장막들을 갖가지로 두루 갖추어 놓으면 나는 장차 그대의 집 안에 가 있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여법(如法)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살바야와 3세는 합할 수가 없다.
014_0872_b_21L又如迦栴延弟子輩言未來世中菩提語菩薩言能修相好身者我當來處之如貴家女自恣無難遣使語貧家子言汝好莊嚴房舍幃帳種種備具我當來處汝家中如是說者是不如法以是故不得以薩婆若與三世合
【문】그 밖의 다른 법도 심히 많은데 무엇 때문에 단지 살바야만을 말씀하는가?
014_0872_c_04L問曰餘法甚多何以但說薩婆若
【답】이 살바야는 보살이 귀의하고 나아갈 데요 깊은 마음으로 얻기를 원해 3세 동안에 구하고 찾기 때문이다.
014_0872_c_05L答曰是薩婆菩薩所歸趣深心欲得於三世中求索故
【문】무엇 때문에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법 중에서는 구하지 않는가?
014_0872_c_07L問曰何以不於有爲無爲法中求
【답】뒤에 온갖 법 안에서 구하는 일을 설명할 것이다.
答曰後當說一切法中求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물질[色]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물질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그와 같으니라. 눈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눈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그와 같으니라. 빛깔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빛깔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소리ㆍ냄새ㆍ맛ㆍ닿임ㆍ법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2_c_08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色不與薩婆若合色不可見故識亦如是眼不與薩婆若合眼不可見故意亦如是不與薩婆若合色不可見故法亦如是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名與般若波羅蜜相應
【논】【문】무엇 때문에 단지 5중(衆)과 12입(入)만 말씀하시고 18계(界)와 12인연(因緣)은 말씀하시지 않으셨는가?
014_0872_c_15L【論】問曰何以但說五衆十二入不說十八界二因緣
【답】당연히 말씀하셨겠지만, 혹 독송한 이가 잊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런 줄 아느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5중과 18계와 12인연의 일은 더럽기[垢]도 하고 깨끗하기[淨]도 하기 때문이다. 5중과 12입과 18계와 12인연을 일[事]이라 하는데, 그것은 더러운 것이라고 정해져 있지도 않고 그것은 깨끗한 것이라고 정해져 있지도 않다. 이 가운데에는 혹 번뇌[結使]가 생기는 일도 있고 혹은 착한 법이 생기는 일도 있다. 마치 밭은 반드시 곡물을 낼 수는 있되 종자에 따라 나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872_c_17L答曰應當說或時誦者忘失何以知之佛所說五衆十二入十八十二因緣五衆十八界二入十二因緣名爲事不定是垢定是淨是中或有結使生或有善法如田定能生物隨種皆生
014_0873_a_01L중ㆍ계ㆍ입과 12인연은 바로 일[事]이고, 6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一切種智)는 바로 청정한 종자가 된다. 더럽다[垢]고 말하지 않는 까닭은 이 보살은 번뇌가 이미 얇아져서 스스로 괴롭히지 않는지라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 것이다.
014_0872_c_22L十二因緣是爲事六波羅蜜乃至一切種智是爲淨種所以不說垢者菩薩結使已薄不以自惱是故不說
또 보살의 지혜가 깊어서 모든 법이 공한 줄 알고 모든 번뇌가 없으며 단지 모든 공덕만을 쌓으니, 이 때문에 마땅히 18계와 12인연을 말씀하셔야 하는 것이다. 물질 등의 일 가운데서는 마땅히 살바야와 합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살바야는 3세(世) 안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고, 물질 등의 일 안에서도 역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두 세간의 인연의 화합이요 정해진 성품이 없다.
014_0873_a_02L又菩薩智慧深入解諸法空無諸煩但集諸功德以是故應說十八界十二因緣如色等事中不應有薩婆若合所以者何是薩婆若三世中不可得故色等事中亦不可得是皆世閒因緣和合無有定性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단(檀)바라밀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느니라. 단바라밀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 보살마하살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4념처(念處)는 살바야와 합하지 않으니, 4념처는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8성도분(聖道分)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014_0873_a_08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檀波羅蜜不與薩婆若合檀波羅蜜不可見故乃至般若波羅蜜亦如是四念處不與薩婆若合四念處不可見故乃至八聖道分亦如是
【논】【문】5중(衆) 등은 바로 세간의 법이어서 살바야와 합하지 못하겠지만, 6바라밀은 어떻게 합하지 않는가?
014_0873_a_13L【論】問五衆等是世閒法可不與薩婆若六波羅蜜云何不與合
【답】6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세간이고, 둘째는 출세간(出世間)이다. 세간을 위한 단바라밀이면 합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되지만 출세간의 단바라밀이면 마땅히 합해야 된다.
또 보살이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했으면 부처님의 살바야와는 합할 수가 없다.
또 부처님께서 6바라밀조차도 공하여 오히려 볼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살바야와 합하겠는가. 37품(品)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73_a_15L答曰六波羅蜜有二種一者世閒二者出世閒爲世閒檀波羅蜜故說不與合出世閒檀波羅蜜應與合復次菩薩行六波羅蜜漏結未盡不得與佛薩婆若合復次佛說六波羅蜜空尚不可見況與薩婆若合三十七品亦如是
【문】이 6바라밀은 도인이나 속인에게 섞여 있기 때문이지만 37품은 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인데 어떻게 합하지 않겠는가?
014_0873_a_21L是六波羅蜜雜有道俗故三十七品趣涅槃道云何不合
【답】37품은 바로 2승(乘)의 법이어서 단지 열반만을 위할 뿐이나 보살은 부처님의 도를 위하고 있나니,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014_0873_a_23L答曰三十七品是二乘法但爲涅槃菩薩爲佛道是故不合
014_0873_b_01L【문】마하연품(摩訶衍品) 안에도 37품(品)이 있고, 역시 보살의 도인데 어떻게 살바야와 합하지 않는가?
014_0873_b_01L問曰「摩訶衍品」中有三十七品亦是菩薩道云何不與薩婆若
【답】어떤 보살은 집착하는 마음 때문에 37품을 행하면서 거의 모두를 열반에 회향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합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014_0873_b_03L答曰有菩薩以著心故行三十七多迴向涅槃是故佛說不合
【경】“부처님의 10력(力) 내지 18불공법(不共法)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나니, 부처님의 10력 내지 18불공법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3_b_04L【經】佛十乃至十八不共法不與薩婆若合佛十力乃至十八不共法不可見故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논】해석한다. 이 10력 내지 18불공법이 비록 미묘한 법이라 하더라도 살바야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 보살은 번뇌를 아직 다하지 못한지라 당연히 살바야와는 합하지 않아야 된다.
014_0873_b_08L【論】釋曰是十力乃至十八不共法雖是妙法爲薩婆若故以菩薩漏結未盡故不應與薩婆若合
또 부처님의 10력 등의 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살이 행하는 바이니, 비록 아직 부처님의 도를 못 얻었다 하더라도 점점 닦아 익히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서 얻는 바이니, 보살은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그것을 구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마음으로 얻는 바이다.
위의 두 가지는 합하지 않아야 되고 아래의 한 가지는 합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보살이 아직은 얻지 못한지라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또 공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고 볼 수 없기 때문에 합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모두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014_0873_b_11L復次佛十力等法有三種一者菩薩所行雖未得佛道漸漸修習佛所得而菩薩憶想分別求之佛心所得上二種不應與合下一種雖可合而菩薩未得是故不合復次空故不可見不可見故不合是以皆不可見故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부처님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고 살바야는 부처님과 합하지 않으며, 보리는 살바야와 합하지 않고 살바야는 보리와 합하지 않느니라.
014_0873_b_17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佛不與薩婆若合薩婆若不與佛合菩提不與薩婆若合薩婆若不與菩提合
【논】【문】보살 및 보살의 법은 살바야와 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부처님과 보리도 합하지 않는가?
014_0873_b_21L【論】問曰菩薩及菩薩法可不與薩婆若合云何佛及菩提復不與
014_0873_c_01L【답】부처님은 바로 사람이고 살바야는 곧 법이다. 사람은 붙인 이름[假名]이고 법은 곧 인연(因緣)이다. 중생(衆生) 내지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는 없기 때문에 부처님도 역시 없는 것이다. 중생들 가운데서 존귀하기가 가장 으뜸가는 분을 부처님이라 하나니, 이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
014_0873_b_23L答曰佛是人薩婆若是法人是假法是因緣衆生乃至知者見者無佛亦無——衆生中尊上第一是名爲是故不合
또 살바야를 얻으셨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한다. 만일 부처님은 살바야를 얻은 이라 하면 그로써 먼저 이 부처님은 살바야가 필요 없게 된다. 만일 부처님이 살바야를 얻는 이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살바야를 얻는다.”고 말하겠는가. 이 때문에 화합한 인연으로 생겨난 선후(先後)는 말할 수가 없다.
014_0873_c_03L復次得薩婆若故名爲若佛得薩婆若先以是佛不須薩婆若若非佛得薩婆若者何以言得薩婆若以是故和合因緣生不得言先後
또 부처님을 여의면 살바야가 없고 살바야를 여의면 부처님이 없으며, 살바야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고 부처님의 소유(所有)이기 때문에 살바야라 한다.
014_0873_c_07L復次離佛無薩婆若離薩婆若無佛得薩婆若故名佛佛所有故名薩婆若
【문】부처님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만 보리(菩提)는 바로 위없는 도[無上道]인데 어찌하여 합하지 않는가?
014_0873_c_09L問曰佛是人故可不與合菩提是無上道云何不合
【답】보리는 부처님의 지혜라 하고 살바야는 부처님의 온갖 지혜[一切智慧]라 한다. 10력(力)의 지혜를 보리라 하고 열한 번째의 여실지(如實智)를 살바야라 하는데 이 두 가지의 지혜는 하나의 마음속에서 생길 수 없다.
014_0873_c_10L答曰菩提名爲佛智慧薩婆若名爲佛一切智十力智爲菩提第十一如實智名爲薩婆若——二智不得一心中生
또 이 10력 등의 모든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의 보리는 모두 보살이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지라 진실이 아니며 오직 부처님께서 얻으신 살바야만이 진실이다. 지금의 이 보리는 바로 보살의 보리이니, 이 마음속은 허망하고 아직 진실이 못 되는데 어떻게 살바야와 합하겠는가.
또 이 경 안에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합하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셨다.
014_0873_c_13L復次是十力等諸佛法及佛菩提皆是菩薩憶想分別非實唯佛所得薩婆若是實今此菩提是菩薩菩提是心中虛妄未實云何與薩婆若合復次經中佛自說不合因緣
【경】왜냐하면 부처님이 곧 살바야이고 살바야가 곧 부처님이며, 보리가 살바야이고 살바야가 곧 보리이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3_c_18L【經】何以故佛卽是薩婆若薩婆若卽是佛菩提卽是薩婆若薩婆若卽是菩提舍利弗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014_0874_a_01L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色]은 있는[有]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없는[無]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항상한 것[有常]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무상한 것[無常]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 또한 그러하느니라.
014_0873_c_22L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習色不習色無識亦如是不習色有常不習色無常識亦如
물질은 괴로운[苦]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즐거운[樂]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나[我]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나가 아니라[非我]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고요히 사라지는[寂滅]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고요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014_0874_a_03L不習色苦不習色樂識亦如是不習色我不習色非我識亦如是不習色寂滅不習色非寂識亦如是
물질은 공(空)한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공한 것이 아니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모양이 있는[有相]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모양이 없는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물질은 조작이 있는[有作] 것이라고 익히지 않고 물질은 조작이 없는 것이라고도 익히지 않나니,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014_0874_a_06L不習色空不習色非空識亦如是不習色有不習色無相識亦如是習色有作不習色無作識亦如是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거나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거나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아니고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4_a_10L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作是念我行般若波羅蜜不行般若波羅蜜非行非不行般若波羅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논】해석한다. 만일 보살이 5중(衆)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면서 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으면 그때에 반야바라밀과 상응하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세간에는 있다[有] 없다[無] 하는 두 가지의 소견에 집착하기 때문이니, 생사(生死)의 흐름을 따르는 이는 다분히 있다는 데에 집착하고 생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는 대개 없다는 데에 집착하고, 나라는 소견[我見]이 많은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며, 삿된 소견[邪見]이 많은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한다.
014_0874_a_14L【論】釋曰若菩薩觀五衆非有非無於是亦不著爾時般若波羅蜜相應所以者何一切世閒著二見若有若無順生死流者多著有逆生死流者多著無我見多者著有邪見多者著無
또 네 가지 소견[四見]이 많은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고 삿된 소견이 많은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하고, 3독(毒)이 많은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며, 무명(無名)이 많은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한다. 5중은 인연이 쌓여서 생긴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있다는 데에 집착하고, 쌓임[集]을 모르는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하며, 삿된 벗과 삿된 소견의 외도의 가르침[外書]을 가까이 하는 까닭에 단멸(斷滅)에 떨어져서 죄와 복도 없다면서 없다는 소견을 지닌 이는 없다는 데에 집착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있다는 데에 집착한다.
014_0874_a_19L復次四見多者著有邪見多者著無二毒多者著有無明多者著無不知五衆因緣集生著有不知集者著無近惡知識及邪見外書故墮斷滅無罪福中無見者著無餘者著有
014_0874_b_01L혹 어떤 중생은 모두가 공하다고 여기면서 마음으로 이 공에 집착한지라 이 공에 집착하기 때문에 없다는 소견[無見]이라 한다. 혹 어떤 중생은 온갖 6근(根)으로 아는 법은 모두가 있다고 여기나니, 이것을 있다는 소견[有見]이라 한다.
014_0874_b_01L或有衆生謂一切皆心著是空著是空故名爲無見有衆生謂一切六根所知法皆有有見
애욕이 많은 이는 있다는 소견에 집착하고, 견해가 많은 이는 없다는 소견에 집착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중생들은 있다는 소견과 없다는 소견에 집착하는데 이 두 소견은 허망하고 진실한 것이 아니어서 중도(中道)를 무너뜨린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좁은 길을 갈 때, 한쪽에는 깊은 물이 있고 한쪽에는 큰 불이 타고 있어 양쪽이 모두 죽게 하는 것과 같다.
014_0874_b_04L愛多者著有見見多者著無如是等衆生著有見無見是二種虛妄非實破中道譬如人行狹道一邊深水一邊大火二邊俱死
있다는 데에 집착하거나 없다는 데에 집착하는 두 가지의 일은 다 함께 과실이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면 인연이 없고, 만일 인연에서 화합하여 생긴다면 이 법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그것은 곧 공하다. 만일 법이 없는 것이 진실이라면 죄와 복이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또한 모든 법의 갖가지의 다름도 없게 된다.
014_0874_b_07L著有著無二事俱失所以者何若諸法定實有則無因緣若從因緣和合生法無自性若無自性卽是空若無法是實則無罪福無縛無解亦無諸法種種之異
또 있다는 소견을 지닌 이와 없다는 소견을 지닌 이는 서로가 어긋난다.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시비(是非)가 있고 시비가 있기 때문에 함께 다투게 되며, 다툼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업이 생기며, 업이 생기기 때문에 악도(惡道)의 문을 열게 되나니, 실상(實相) 안에는 서로 틀린 것이거나 옳고 그른 것이거나 다툼이 없다.
014_0874_b_12L復次有見者與無見者相相違故有是非是非故共諍有諍故起諸結使結使故生業生業故開惡道門實相中無有相違是非鬪諍
또 있다는 데에 집착한 이는 일이 만일 무상하게 되면 근심과 괴로움을 내게 되고 만일 없다는 데에 집착한 이면 모든 죄업을 짓고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된다. 있다 없다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등의 허물이 없게 되나니, 이런 것을 버려야 진실을 얻게 된다.
014_0874_b_15L復次著有者事若無常則生憂惱著無者作諸罪業死墮地獄受苦不著有無者無有如是等種種過失應捨是則得實
또 이 5중(衆)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5중이 항상하다면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으며,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선악의 과보도 없게 된다.
014_0874_b_19L復次是五衆若常若無常是事不然所以者何若五衆常則無生無無生無滅故則無罪福無罪福故則無善惡果報
014_0874_c_01L세간이 마치 열반과 같고 파괴되지 않는 모양이라 한다면 이러한 거짓말을 누가 믿겠는가. 현실에서 죽는 것을 보고 슬피 통곡하는 이것이 중생의 무상이다. 마치 풀과 나무가 시들고 떨어지며 꽃과 열매가 없어짐과 같은 것은 바로 바깥 물건[外物]의 무상이며, 대겁(大劫)이 다할 때에 온갖 것이 모조리 멸하는 이것은 큰 무상[大無常]이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5중이 항상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014_0874_b_22L世閒如涅槃不壞相如是妄語誰當信者現見死亡啼哭是則衆生無常如草木彫落華果磨是則外物無常大劫盡時一切都是爲大無常如是等種種因緣是五衆常不可得
또 무상은 항상함을 무너뜨리지만 그렇다고 무상함이 옳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무상한 모양이어서 생각생각마다 모두 없어진다면 곧 6정(情)으로 6진(塵)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안의 마음과 바깥의 대경은 다 같이 머무르는 일이 없으므로 반연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어야 하며, 또한 인연과 과보를 닦아 익히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인연이 많기 때문에 과보 역시 많은 것인데 이 일도 얻지 못해야 한다.
또 항상하다는 소견과 무상하다는 소견이 있기에 서로 다투게 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이 있다.
014_0874_c_04L復次無常破常應以無常爲是所以者何若諸法無常相念念皆滅則六情不能取六塵所以者何內心外塵俱無住故不應得緣不應得知亦無修習因緣果報因緣多故果報亦多此事不應得以有常見與無常見共諍如是等種種因緣
5중이 무상하다면 곧 “괴롭다ㆍ즐겁다ㆍ나다ㆍ나 아니다ㆍ공하다ㆍ진실이다ㆍ모양이 있다ㆍ모양이 없다ㆍ조작이 있다ㆍ조작이 없다.”고 함도 얻을 수 없으니, 이런 뜻에 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874_c_11L五衆無常則不可得苦樂非我若空若實有相無相有作無作此義如先處處說
5중이 고요히 사라진다[寂滅] 함은,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성품이 없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진 것이다. 고요히 사라졌기 때문에 마치 열반과 같다. 3독(毒)이 활활 타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고 무상한 불에 타고 있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으며, 3독의 실상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고 3독으로 저마다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에 고요히 사라지지 않았나니, 이 이치에 대해서는 먼저 설명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것이다.
014_0874_c_13L五衆寂滅因緣生故無性無性故寂滅寂滅故如涅三毒熾然故不寂滅無常火然故不寂滅不著三毒實相故不寂滅毒各各分別相故不寂滅此義先未故今是中說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두 치우침[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도 얻을 수 없고 반야바라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4_0874_c_18L若菩薩摩訶薩能如是離二邊行中道行般若波羅蜜不著所以者何菩薩不可得般若波羅蜜亦不可得故
014_0875_a_01L그리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왜냐하면, 그 밖의 모든 범부는 보살과 같이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할 수 없으니 어떻게 “나는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에서도 집착하지 않으니, 두 가지 모두가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고 한다.
014_0874_c_21L不行般若波羅蜜亦不著所以者何餘諸凡夫不能如菩薩觀諸法實相云何當言我不行般若波羅蜜不行亦不著二俱過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相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단(檀)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선(禪)바라밀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014_0875_a_02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不爲般若波羅蜜故行般若波羅蜜不爲檀波羅蜜尸羅波羅蜜羼提波羅蜜毘梨耶波羅蜜禪波羅蜜故行般若波羅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碍智)ㆍ18불공법(不共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014_0875_a_07L不爲阿鞞跋致地故行般若波羅不爲成就衆生故行般若波羅蜜不爲淨佛世界故行般若波羅蜜爲佛十力四無所畏四無碍智十八不共法故行般若波羅蜜
내공(內空)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외공(外空)ㆍ내외공(內外空)ㆍ공공(空空)ㆍ대공(大空)ㆍ제일의공(第一義空)ㆍ유위공(有爲空)ㆍ무위공(無爲空)ㆍ필경공(畢竟空)ㆍ무시공(無始空)ㆍ산공(散空)ㆍ성공(性空)ㆍ제법공(諸法空)ㆍ자상공(自相空)ㆍ불가득공(不可得空)ㆍ무법공(無法空)ㆍ유법공(有法空) 및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며,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를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014_0875_a_11L不爲內空故行般若波羅蜜不爲外空內外空空空大空第一義空有爲空無爲空畢竟空無始空散空性空諸法空相空不可得空無法空有法空無法有法空故行般若波羅蜜不爲如實際故行般若波羅蜜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5_a_17L何以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壞諸法相故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논】【문】6바라밀 내지 여(如)와 법성과 실제,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 보살이 만일 이 부처님 법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법이 있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가?
014_0875_a_20L【論】問曰六波羅蜜乃至如法性實際此是佛法菩薩若不爲是佛法故行般若波羅蜜更有何法可爲行般若波羅蜜
014_0875_b_01L【답】마치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파괴하는 이가 없고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역시 ‘이것이 보시[檀]이다,’ ‘이것이 간탐[慳]이다.’ 내지 ‘이것이 삼계(三界)이다,’ ‘이것이 실제(實際)이다.’라고 분별하지 않게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014_0875_a_23L答曰如佛此中自說諸法無有破壞者不壞諸法相故亦不分別是檀是慳乃至是三界是實際
또 어떤 보살은 이 착한 법에 대하여 마음 깊이 매어두나니, 매어 두기 때문에 죄가 생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 6바라밀 내지 실제는 모두가 공하고 자성이 없어서 마치 꿈과 같고 환과 같으므로 그대는 집착하지 말라. 참된 보살은 이를 위하여 행하지 않느니라.”고 말씀해 주신다.
014_0875_b_02L有菩薩於此善法深心繫著以繫著故能生罪爲是人故是六波羅蜜乃至實際皆空無有自性如夢如幻汝莫生著眞菩薩不爲是故行
또 어떤 보살은 마음에 집착함이 없이 6바라밀 내지는 실제를 행하므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 일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씀해 주시나니, 마치 후품(後品) 중에서 “6바라밀을 두루 갖추기 위하여 내지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014_0875_b_06L有菩薩心無所著行六波羅蜜乃至實際爲是人故說爲是事故行般若波羅如後品中說爲具足六波羅蜜至爲敎化衆生淨佛世界故行般若波羅蜜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여의신통(如意神通)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천이(天耳)를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타심지(他心智)를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숙명지(宿命智)를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천안(天眼)을 위하여 행하지 않으며, 누진신통(漏盡神通)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오히려 반야바라밀조차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하물며 보살의 신통을 보겠느냐.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5_b_11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爲如意神通故行般若波羅不爲天耳故不爲他心智故不爲宿命智故不爲天眼故不爲漏盡神通故行般若波羅蜜何以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尚不見般若波羅蜜何況見菩薩神通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行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논】【문】먼저 선(禪)바라밀을 말씀한 가운데서 이미 자세히 5신통을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또 거듭 말씀하시는가?
014_0875_b_20L【論】問曰先說禪波羅蜜中已具說五神通今何以復重說
【답】그 경우에는 전체의 모양[總相]을 말씀하면서 이름을 나열하지 않았지만 여기서는 개별적인 모양[別相]을 말씀하고 계신다.
또 공덕의 과보는 이른바 이 5신통이다. 보살은 이 5신통을 얻어야 널리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
014_0875_b_21L答曰彼中摠相說不列名字此中別相說復次德果報所謂五神通菩薩得是五神廣能利益衆生
014_0875_c_01L또 비록 자비(慈悲)와 반야바라밀이 있다 하더라도 5신통이 없으면 마치 두 날개가 없는 새가 높이 날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치 용맹한 사람이 무기도 없이 적진(敵陣)으로 들어간 것 같으며, 마치 나무에 꽃과 열매가 없어서 이익되는 것이 없는 것과 같고, 마치 마른 도랑에 물이 없으므로 윤택하게 해 줌이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거듭 5신통을 말씀하는 것이며, 그리고 그 밖의 다른 한량없는 부처님 법 중에서 특별히 말씀하셨다 해도 허물될 것은 없다.
014_0875_c_01L復次雖有慈悲若波羅蜜無五神通者如鳥無兩翼不能高翔如健人無諸器杖而入敵如樹無華果無所饒益如枯渠無無所潤及以是故重說五神通餘無量佛法中別說無咎
【문】만일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5신통을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가?
014_0875_c_06L問曰若爾佛何以言莫爲五神通故行般若波羅蜜
【답】다분히 방편이 없는 보살은 5신통을 얻으면 다른 보살들을 가벼이 여기면서 마음에 교만을 부리므로 이런 이들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데도 오히려 집착하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5신통이겠는가.
014_0875_c_08L答曰多有無方便菩薩得五神通輕餘菩薩心生憍高爲是故說所以者何菩薩於般若波羅蜜諸佛之母尚不著何況五神通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여의신통으로써 동방으로 날아가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겠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남쪽ㆍ서쪽ㆍ북쪽과 네 간방과 위와 아래도 또한 그러하니라.
014_0875_c_11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作是念我以如意神通飛到東方供養恭敬如恒河沙等諸佛西北方四維上下亦如是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천이로써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을 듣겠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타심지로써 시방의 중생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알아야겠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숙명지로써 시방의 중생들이 전생에 지었던 일들을 알겠다.”고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는 천안으로써 시방의 중생들이 여기서 죽고 저기 가서 나는 것을 보겠다.”고도 생각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나니, 역시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제도하게 되느니라.
014_0875_c_15L復次舍利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作是念我以天耳聞十方諸佛所說法不作是念我以他心智當知十方衆生心所念不作是念我以宿命通十方衆生宿命所作不作是念我以天眼見十方衆生死此生彼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行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亦能度無量阿僧祇衆生
【논】해석한다. 먼저 비록 5신통의 이름을 말씀하셨으나 지금 여기에서 그 공용(功用)을 말씀하신다.
014_0875_c_23L【論】釋曰先雖說五神通名今此中說其功用
014_0876_a_01L【문】보살은 무엇 때문에 “나는 여의신통으로써 시방으로 날아가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014_0876_a_02L問曰菩薩何以故不作是念——以如意神通飛到十方供養恭敬如恒河沙等諸佛
【답】이미 나라는 소견[我見]의 근본을 뽑아버렸기 때문이고, 이미 교만의 산을 꺾어 부셨기 때문이며, 3해탈문(解脫門)과 3삼매(三昧)를 잘 닦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몸이 비록 미묘하다 하더라도 역시 3해탈문으로 들어가나니, 마치 이글거리는 쇠구슬[金丸]이 빛깔은 묘하게 보인다 해도 손으로 댈 수는 없는 것과 같다.
014_0876_a_04L答曰已拔我見根本已摧破憍慢山故善修三解脫門三三昧故佛身雖妙亦入三解脫門如熱金丸雖見色妙不可手觸
또 모든 법은 마치 환과 같고 허깨비와 같아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가까운 것도 없고 먼 데도 없어서 일정한 모양이 없다. 마치 환술로 만든 사람과 같은데 그 누가 가고, 그 누가 오겠는가. 신통이거나 국토, 이것이나 저것, 멀거나 가깝거나 하는 모양을 취하지 않는 까닭에 허물될 것은 없다.
014_0876_a_07L又諸法如幻如化無來無去無近無遠有定相如幻化人誰去誰來不取神國土此彼近遠相故無咎
만일 부처님 앞에 있으면서 선정에 머물러 변화로 한량없는 몸이 되어 시방으로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 해도 분별하는 바가 없다. 이미 법애(法愛)를 끊었기 때문이니, 그 밖의 다른 신통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76_a_10L若能在佛前住於禪定變爲無量身至十方供養諸佛無所分別已斷法愛故通亦如是
보살은 이 신통을 얻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하여 한량없는 몸으로 변화되어 큰 신력(神力)을 나타내면서 시방세계의 3악취(惡趣)1) 안에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나니, 마치 왕생품(往生品)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76_a_13L菩薩得是五神通爲供養諸佛故變無量身顯大神力於十方世界三惡趣中度無量衆生如「往生品」中說【經】舍利弗菩薩摩訶薩能如是行般若波羅蜜惡魔不能得其便世閒衆事所欲隨意十方各如恒河沙等諸佛皆悉擁護是菩薩令不墮聲聞辟支佛地四天王天乃至阿迦尼咤天亦擁護是菩薩不令有碍是菩薩所有重罪現世輕受何以故是菩薩摩訶薩用普慈加衆生故舍利弗是菩薩摩訶薩如是行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014_0876_b_01L【경】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능히 행하면 악마도 그 틈을 얻을 수 없고 세간의 모든 일들이 바라는 대로 되느니라. 시방으로 각각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 이 보살을 옹호하면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게 하고 사천왕천(四天王天)에서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에 이르기까지도 모두가 역시 이 보살을 옹호하면서 장애가 없게 하느니라. 이 보살에게 있는 중한 죄는 금생에 가벼이 받게 되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두루한 사랑[慈]으로써 중생에게 가(加)하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6_b_03L【論】釋曰今讚是菩薩如上行般若波羅蜜得大功德是名菩薩智慧功力果報得此五利
【논】해석한다. 지금은 이 보살을 찬양하는 것이다. 위에서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큰 공덕을 얻은 그를 바로 보살이라 하며 지혜와 공력의 과보로 이 다섯 가지의 이익을 얻게 된다.
014_0876_b_05L問曰魔是欲界主菩薩是人肉眼不得自在云何不能得其便
【문】악마는 바로 욕계(欲界)의 주인이다. 보살은 사람이며 육안(肉眼)을 가져 자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하겠는가?
014_0876_b_07L答曰如此中佛自說諸佛大天擁護故
【답】여기서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부처님과 모든 큰 하늘들이 옹호하기 때문이다.
014_0876_b_08L復次是菩薩行畢竟不可得自相空故於一切法中皆不著不著故無違錯無違錯故魔不能得其便譬如人身不瘡雖臥毒屑中亦不入若有小瘡則死無疑
또 이 보살은 필경공(畢竟空)과 불가득공(不可得空)과 자상공(自相空)을 행하는 까닭에 온갖 법 안에서 모두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오가 없고 착오가 없기 때문에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의 몸에 상처가 없으면 비록 독(毒) 가루 속에 누워 있다 하더라도 그 독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조금이라도 상처가 있으면 틀림없이 죽게 되는 것이다.
014_0876_b_12L又是菩薩於諸佛中心不著於諸魔中心不瞋故魔不得便
또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에 대해서도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악마에 대해서도 마음에 성을 내지 않나니, 이 때문에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한다.
014_0876_b_14L復次菩薩深入忍波羅慈三昧故一切外惡不能中傷謂水火刀兵等
또 보살은 깊이 인(忍)바라밀과 자삼매(慈三昧)에 들어 있기 때문에 온갖 바깥의 악(惡)이 해칠 수 없나니, 이른바 물과 불과 칼과 병기 따위이다.
014_0876_b_16L世閒衆事者資生所所謂治生諧偶種蒔果樹曠路作安立客舍如法理事皆得如意欲造立塔寺作大福德若作大施欲說法敎度衆生皆得如意
세간의 여러 가지 일[世間衆事]이라 함은 살림살이에 필요한 것으로서, 이른바 생활의 방도를 차리고 배우자를 만나며, 씨를 뿌리고 과일나무를 심으며, 넓은 길에 우물을 만들고 객사(客舍)를 세우는 등 여법하게 다스리는 일들이니, 모두가 뜻대로 다 이루어진다. 탑과 절을 세워서 큰 복덕을 지으려 하거나, 크게 보시를 하거나, 법을 설하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려 한다면, 모두가 다 뜻대로 되는 것이다.
014_0876_b_20L如是等世閒衆事若大若小皆得如法隨意所以者何是菩薩世世集無量福德智慧因緣故
이와 같은 등의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은 큰 것이거나 작은 것이거나 간에 모두가 다 여법하게 뜻대로 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은 세상마다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의 인연을 쌓았기 때문이다.
014_0876_b_23L復次是菩薩行般若波羅蜜於一切法中心不著心不著故結使薄結使薄故能生深厚善根厚善根生故所願如意
014_0876_c_01L또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온갖 법 가운데서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는다.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結使]가 얇아지고 번뇌가 얇기 때문에 깊고 두터운 선근(善根)을 내며, 깊고 두터운 선근이 생겼기 때문에 원하는 바가 모두 뜻대로 되는 것이다.
014_0876_c_03L復次是菩薩行般若波羅蜜故諸大天皆敬念是菩薩讚歎稱揚其名諸龍鬼等聞諸天稱說亦來助成其事是故世閒衆事皆得如意復次是菩薩爲諸佛所念威德所加皆得如意
또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모든 큰 하늘들이 모두가 이 보살을 공경하면서 그의 이름을 찬양하게 되며 모든 용과 귀신들도 모든 하늘이 찬양하는 말을 듣고 와서는 그의 일을 도와 이루어지게 한다. 이 때문에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뜻대로 된다.
또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해 주시고 위덕(威德)을 가하시는지라 모두가 뜻대로 된다.
014_0876_c_08L問曰十方諸佛心等何以偏念是菩薩
【문】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평등하신데 무엇 때문에 치우치게 이 보살만을 생각해 주시는가?
014_0876_c_09L答曰是菩薩智慧功德大故諸佛心雖平等法應念是菩薩以勸進餘人又是菩薩得佛智慧氣分故別知善惡賞念好人過於佛是故佛念
【답】이 보살은 지혜와 공덕이 크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비록 평등하다 하더라도 으레 이런 보살을 생각해 줌으로써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잘하도록 권하게 된다. 또 이 보살은 부처님의 지혜의 기운[氣分]을 얻기 때문에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안다. 좋은 사람에게 상(賞)을 주고 생각하심이 부처님보다 더한 이가 없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014_0876_c_13L復次佛念不欲令墮聲聞辟支佛故所以者何入空無作以佛念故而不墮落譬如魚母念故得生不念則壞
또 부처님께서 생각해 주심은 성문이나 벽지불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공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에 들어가도록 부처님께서 생각해 줌으로써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고기의 새끼들이 어미고기가 생각해 줌으로써 살 수 있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살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014_0876_c_16L諸大天擁不欲令失其所行諸天效佛念又諸天以菩薩行般若波羅蜜無所著不樂世樂但欲敎化衆生故住於世閒知其尊貴故念
모든 큰 하늘들이 옹호(擁護)한다 함은 그가 행한 바를 잃지 않게 하려고 모든 하늘들이 부처님의 생각을 본받기 때문이다. 또 모든 하늘은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도무지 집착하는 바가 없고 세간의 즐거움을 좋아하지 않으며, 단지 중생만을 교화하려고 세간에 살고 있을 뿐이므로 그의 존귀함을 알기 때문에 돌보아 주는 것이다.
014_0876_c_20L所有重罪先世重罪應入地獄以行般若波羅蜜故現世輕受譬如重囚應死勢力者護則受鞭杖而已又如王子雖作重罪以輕罰除之以是王種中生故
있는 바의 중한 죄[重罪]라 함은 앞 세상에서 지었던 중한 죄로서 당연히 지옥에 들어가야 되겠지만 반야바라밀을 행한 까닭에 이 세상에서 가벼이 받고 만다. 비유하건대 마치 중한 죄인인지라 당연히 죽어야 되는 데도 세력이 있는 이가 보호해 주면 곤장(棍杖)만을 맞고서 끝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왕자가 아무리 중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경한 벌로써 그 죄를 없애는 것과 같나니, 그는 왕의 종성 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014_0877_a_02L菩薩亦如是能行是般若波羅蜜得實智慧故卽入佛種中生佛種中生故雖有重罪云何重受
014_0877_a_01L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진실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곧 부처님의 종성 안에 태어난 것이고, 부처님의 종성 안에 태어났으니 아무리 중한 죄가 있다 한들 어떻게 중하게 받을 수 있겠는가.
014_0877_a_04L復次譬如鐵器中空故在水能浮中實則沒薩亦如是行般若波羅蜜智慧心虛不沒重罪凡人無智慧故沈沒重
또 비유하건대 마치 쇠그릇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물에 있어도 뜨게 되지만 속이 꽉 차게 되면 빠져버리듯이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한 지혜로 마음이 비었기 때문에 중한 죄에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범부는 지혜가 없으므로 중한 죄에 침몰하게 된다.
014_0877_a_08L復次佛此中自說因緣所以得五功德者用普慈加衆生故
또 부처님은 여기에 대하여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다섯 가지 공덕을 얻게 되는 까닭은 두루한 사랑으로 중생에게 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014_0877_a_09L問曰先言行般若波羅蜜故具五功德今何以用普慈加衆生故
【문】먼저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다섯 가지 공덕을 갖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무엇 때문에 “두루한 사랑으로 중생에게 가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가?
014_0877_a_11L答曰能生無量無過於慈是慈因般若波羅蜜生得無量利益
【답】한량없는 복을 내게 함은 사랑[慈]보다 더한 것이 없나니, 이 사랑은 반야바라밀로 인하여 생겨서 한량없는 이익을 얻게 한다.
014_0877_a_13L復次惡魔不得便諸佛所念重罪今世輕受是般若波羅蜜世閒衆事所欲隨意諸天擁護大慈力
또 악마가 틈을 얻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께서 생각해 주시고 중한 죄를 이 세상에서 가벼이 받음은 바로 반야바라밀의 힘이며, 세간의 여러 가지 일들이 뜻대로 다 되고 모든 하늘들이 옹호함은 바로 큰 사랑의 힘이다.
014_0877_a_16L復次有二種緣一者衆生是菩薩若緣衆生則是慈心緣法則是行般若波羅蜜是慈從般若波羅蜜生隨順般若波羅蜜敎故說慈無咎
또 두 가지의 반연[緣]이 있나니, 첫째는 중생이고, 둘째는 법이다. 이 보살이 만일 중생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이요 만일 법을 반연한다면 그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반야바라밀로부터 생기며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따르나니, 이 때문에 사랑을 말씀하신다 해도 허물될 것은 없다.
014_0877_a_20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疾得諸陁羅尼門諸三昧門在所生處常値諸佛乃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初不離見佛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014_0877_b_01L【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신속히 모든 다라니(陀羅尼) 문과 모든 삼매(三昧) 문을 얻고,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까지 끝내 부처님 뵙는 일을 여의지 않느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7_b_02L【論】釋曰陁羅尼三昧如先說
【논】해석한다. 다라니와 삼매의 문에 대해서는 먼저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877_b_03L疾得福德因緣故心柔行深般若波羅蜜故智慧心利是故疾得如上說五功德故疾得
신속히 얻는다 함은, 복덕의 인연 때문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까닭에 지혜의 마음이 날카로워지나니, 이 때문에 신속히 얻게 되는 것이다. 마치 위에서의 설명과 같아서 다섯 가지 공덕 때문에 신속히 얻게 된다.
014_0877_b_05L生處常値諸佛是菩薩除諸佛母般若波羅蜜其餘一切衆事皆不愛是以在所生處常値諸佛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함은 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인 반야바라밀을 제외한 그 밖의 온갖 일들에는 모두 애착하지 않나니, 이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014_0877_b_08L如人常喜鬪諍生還活地獄復執刀杖共相加害婬欲多故常受胞胎又作婬鳥瞋恚多故還生毒獸蛇虺之屬愚癡多者如燈蛾赴火地中隱虫等
마치 사람이 항상 싸우기를 좋아하면 살아 있으면서도 도리어 지옥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다시 칼과 몽둥이를 들어 서로 해치며 음욕이 많기 때문에 언제나 태(胎) 안에서 태어나고, 또한 음탕한 새[鳥]가 되는 것과 같으며, 성냄이 많아 도로 독한 짐승이나 뱀의 족속으로 나는 것과 같으며, 어리석음이 많아 불나방이 되어 불로 날아들고 땅속에 숨어 사는 벌레들이 되는 것과 같다.
014_0877_b_12L是諸菩薩愛敬於佛及實相般若波羅蜜及修念佛三昧業故所生處常値諸復次如先菩薩願見諸佛中說
이 모든 보살은 부처님과 실상(實相)인 반야바라밀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리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업을 닦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또한 마치 앞에서 “보살이 모든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는[菩薩願見諸佛]”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77_b_15L不離見佛又人雖一世見佛更不復値如毘婆尸佛時王師婆羅門雖得見佛及僧而惡口毀呰此人等如畜不別好人見我不起以是罪故經九十一劫墮畜生中
끝내 부처님 뵙는 것을 여의지 않는다 함은 사람이 한 세상 동안 부처님을 뵈었다 하더라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비바시불(毘婆尸佛) 때에 왕사(王師)로 있던 바라문과 같으니, 그는 부처님과 스님들을 뵈었으면서도 삿된 말로 헐뜯기를 “이 사람들은 짐승처럼 좋은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고 나를 보면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었다. 이 죄 때문에 91겁 동안 축생 가운데 떨어졌다.
014_0877_b_20L復次深念佛故不離佛世世善修念佛三昧故不失菩薩心故作不離佛願願生在佛世種値佛業緣常相續不斷故乃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終不離見佛
또 부처님을 깊이 염(念)하기 때문에 끝내 부처님을 여의지 않는다. 세상마다 염불삼매를 잘 닦기 때문이고, 보살의 마음을 잃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을 여의지 않으려는 서원을 세우며 태어날 적마다 부처님의 세상에서 있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만날 업연(業緣)을 심어서 언제나 계속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끝내 부처님 뵙는 것을 여의지 않게 된다.
014_0877_c_01L問曰此是果報事云何說與般若波羅蜜相應
014_0877_c_01L【문】그것은 과보로서의 일인데 어찌하여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셨는가?
014_0877_c_03L答曰般若波羅蜜相應故値佛或時果中說因故相應有二種一者心相應二者應菩薩行所謂生好處値遇諸佛常聞法正憶念——是名相應
【답】반야바라밀과 상응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데, 간혹 결과[果] 안에서 원인[因]을 말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응하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의 행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른바 좋은 곳에 태어나고 모든 부처님을 만나며 항상 법을 듣고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니, 이것을 상응한다고 한다.
014_0877_c_07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作是念有法與法若合若不合若等若不等何以故是菩薩摩訶薩不見是法與餘法若合若不合等若不等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과 법이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거나 동등하다거나 동등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 법과 다른 법이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거나 동등하다거나 동등하지 않음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7_c_13L【論】釋曰一切法無有法與法共合者何以故法無少分合故譬如二指有四方其一方合三方不合不合多故何以不名爲不合
【논】해석한다. 온갖 법에는 법이 법과 함께 합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조그마한 부분도 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두 개의 손가락은 네 곳의 방향이 있되 그 한 곳의 방향은 합하고 세 곳의 방향은 합하지 않음과 같다. 합하지 않은 곳이 많기 때문이니, 어찌 합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014_0877_c_17L問曰以有合處故名爲合何言不合
【문】합한 곳이 있기 때문에 합했다고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합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014_0877_c_18L答曰合處不爲指是指分但是指分更無指法以二指相近故假名爲合更無合法
【답】합한 곳은 손가락 전체가 아니고 손가락의 일부분이다. 단지 이 손가락의 일부분일 뿐이므로 다시 다른 손가락이라는 법이 없으며, 두 손가락이 서로 가깝기 때문에 임시로 합한다고 이름 붙였지만 달리 합한다는 법도 없다.
014_0877_c_20L復次摠名爲指但觸有合力餘三無合是故不得言指合
또 빛깔[色]ㆍ냄새[香]ㆍ맛[味]ㆍ닿임[觸]을 통틀어서 손가락이라고 하는데, 단지 닿임만이 합하는 힘이 있을 뿐이요 나머지 세 곳은 합한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손가락이 합한다고 말할 수 없다.
014_0877_c_22L復次如異類同處不名爲合相各異故諸法亦爾地相地中水相水中火相火中如是性異不名爲合以是故言無有法與法若不合
014_0878_a_01L또 다른 종류가 처소를 같이한다 하여 합한 모양이라고 하지도 못하나니,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하여 땅의 모양은 땅 가운데에 있고, 물의 모양은 물 가운데에 있으며, 불의 모양은 불 가운데에 있다. 이와 같이 성품이 다르다면 합한다고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법과 법이 합한다거나 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고 한다.
014_0878_a_03L一切法一相故名以皆是有相皆是無常相皆是苦相皆是空無我相皆是不生不滅相事無異故名爲
동등하다[等] 함은 온갖 법은 한 모양이기 때문에 동등하다고 한다. 모두가 바로 있는 모양[有相]이고 모두가 바로 무상한 모양[無常相]이며, 모두가 바로 괴로운 모양[苦相]이고 모두가 바로 공하고 나 없는 모양[空無我相]이며, 모두가 바로 나지도 않고[不生] 멸하지도 않는 모양[不滅相]이니, 그 일에 다름이 없기 때문에 동등하다고 한다.
014_0878_a_06L不等各各別相故如色相無色相堅相濕相是等各異不同是名不等
동등하지 않다[不等] 함은 저마다 개별적인 모양이기 때문이다. 마치 형상이 있는 모양[色相]과 형상이 없는 모양[無色相]과 단단한 모양[堅相]과 축축한 모양[濕相]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저마다 다르면서 동일하지 않으니, 이것을 같지 않다고 한다.
014_0878_a_08L菩薩不見等與不等何以故一切法無故自性空故無法無法故不可見不可見故無等不等等與合是習相應不合是不相應
보살은 같다거나 같지 않다 함을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온갖 법은 없기 때문이다.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에 법이 없고, 법이 없기 때문에 볼 수가 없으며,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같거나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동등하다[等]는 것과 합한다[合]는 것은 바로 익혀서 상응한 것이요 합하지 않는[不合] 것과 같지 않다[不等]는 것은 바로 상응하지 않은 것이다.
014_0878_a_12L問曰何以不說相應竟然後讚歎
【문】무엇 때문에 상응함을 말씀하고 난 뒤에 찬탄하시지 않는가?
014_0878_a_13L答曰聽者厭懈是故佛讚歎果報功德聞者心得悅樂故
【답】듣는 이가 싫증을 낸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과보의 공덕을 찬탄하시니, 듣는 이가 마음에 즐거움을 얻는 까닭이다.
014_0878_a_14L【經】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不作是念我當疾得法性若不得何以故法性非得相故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신속히 법성(法性)을 얻겠다.”거나 “얻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이란 얻는 모양이 아닌 까닭이니라.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8_a_19L【論】釋曰法性諸法實相除心中無明諸結使以淸淨實觀得諸法本性名爲法性名眞實以衆生邪觀故縛正觀故解
【논】해석한다. 법성이라 함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다. 마음속의 무명(無明)과 모든 결사(結使)를 없애고 청정하고 진실한 관(觀)으로써 모든 법의 본래 성품[本性]을 얻음을 일컬어 법성이라 한다. 성품[性]이란 진실을 말하나니, 중생은 삿된 관[邪觀] 때문에 속박되고 바른 관[正觀] 때문에 해탈한다.
014_0878_a_22L菩薩不作是念疾得法性何以故法性無相無有遠亦不言我久久當得何以故法性無遲無久法性如如法性實際義中說
014_0878_b_01L보살은 “나는 신속히 법성을 얻겠다.”고 생각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은 모양이 없으며 멀고 가까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오랜 뒤에나 얻어야겠다.”고도 말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은 더디거나 오래 걸리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법성의 뜻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의 뜻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014_0878_b_03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見有法出法性者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어떤 법이 있어 법성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8_b_06L【論】釋曰無明等諸煩惱入一切法中故失諸法自自性失故皆邪曲不正聖人除卻無明等諸法實性還得明顯譬如陰雲覆虛空淸淨性除陰雲則虛空淸淨性現
【논】해석한다. 무명 등의 모든 번뇌가 온갖 법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법의 자성을 잃게 된다. 자성을 잃기 때문에 모두가 삿되고 굽으면서 바르지 않게 되지만 성인은 이 무명 등을 물리쳐 없애므로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이 도로 환히 밝아지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검은 구름이 허공의 청정한 성품을 가렸을 때 그 검은 구름만 걷히면 허공의 청정한 성품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014_0878_b_11L若有法無明不入者是則出於法性但是事不然無有法出無明是故菩薩不見是法出法性者如衆流皆歸於海如粟散小王皆屬轉輪聖王如衆小明皆屬於日
만일 어떤 법이라도 무명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법성에서 벗어나겠지만, 이 일만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떤 법도 무명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법이 법성에서 벗어남을 보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뭇 흐름은 모두가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고, 마치 좁쌀처럼 흩어진 작은 왕[小王]들은 모두가 전륜성왕에게 속한 것과 같으며, 마치 여러 작은 광명들은 모두가 해에 딸린 것과 같다.
014_0878_b_15L【經】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作是念法性分別諸法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법성은 모든 법을 분별한다.”고 생각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8_b_18L【論】問曰何以故不作是念法性分別諸法
【논】【문】무엇 때문에 “법성은 모든 법을 분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014_0878_b_19L爲著法性貴於法性以是因緣生諸結使是故不作是念
【답】법성에 집착하게 되면 법성을 귀히 여기게 되며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결사(結使)를 내게 되나니, 그러므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014_0878_b_21L問曰若法性一相無相云何分別諸法
【문】만일 법성은 공하고 한 모양이어서 모양이 없다 하면 어떻게 모든 법을 분별하겠는가?
014_0878_b_22L答曰是法性滅無明等諸煩惱破諸法實相者然後心淸淨智慧明了知諸法隨法性者爲善不隨法性者爲不
014_0878_c_01L【답】이 법성을 얻고 무명 등의 모든 번뇌를 소멸하고 모든 법의 실상을 깨뜨리면 그런 뒤에는 마음이 청정하여지고 지혜가 명료해지면서 모든 법의 실상을 알게 된다. 법성을 따르면 선(善)이 되고 법성을 따르지 않으면 불선(不善)이 된다.
014_0878_c_03L如婆蹉梵志問佛世尊天地閒有善惡好醜不佛言婆蹉言我久歸命佛願爲我善說
마치 바차 범지(婆蹉梵志)가 부처님께 묻기를 “세존이시여, 천지(天地) 간에는 선과 악과 아름다운 것[好]과 추한 것[醜]이 있나이까?”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있느니라.”고 하셨다. 바차가 말하기를 “저는 오랫동안 부처님께 귀명하고 있나이다. 원하옵건대 저를 위하여 잘 말씀해 주옵소서.”라고 했다.
014_0878_c_05L佛言有三種惡種善十種惡十種善所謂貪欲是惡除貪是善瞋恚愚癡是惡除恚癡是殺生是惡除殺生是善乃至邪見是惡除邪見是善能如實分別善惡是我弟子入於法性名爲得道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세 가지의 악과 세 가지의 선과 열 가지의 악과 열 가지의 선이 있나니, 이른바 탐욕은 바로 악이고 탐욕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며, 성냄과 어리석음은 바로 악이요 성냄과 어리석음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며, 살생(殺生)은 바로 악이요 살생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니라. 나아가 삿된 소견[邪見]은 바로 악이고 삿된 소견이 제거되면 이는 선이니, 사실대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으면 그는 나의 제자이며, 법성에 들어감을 일컬어 득도라고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014_0878_c_10L【經】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作是念是法能得法性若不何以故是菩薩不見用是法能得法性若不得舍利弗菩薩摩訶薩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이 법은 법성을 얻는다.”거나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이 법으로써 법성을 얻거나 얻지 못함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8_c_15L【論】釋云何得法性行八聖道分得諸法實相所謂涅槃是名得法性復次名諸法實相名般若波羅蜜菩薩不作是念行般若波羅蜜得是諸法何以故般若波羅蜜及諸法性二法無有異皆畢竟空故云何以般若波羅蜜得達法性
【논】해석한다. 어떻게 법성을 얻고 8성도분(聖道分)을 행하여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가? 이른바 열반을 바로 법성을 얻는다고 한다.
또 성품[性]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고 법(法)을 반야바라밀이라 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이 모든 법성을 얻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과 모든 법성의 이 두 가지 법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필경공(畢竟空)인 까닭이니, 어떻게 반야바라밀로써 법성을 통달할 수 있겠는가.
014_0878_c_22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法性不與空合空不與法性如是習應是名與般若波羅蜜相應
014_0879_a_01L【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법성이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법성과 합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익히고 응한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과 상응한다 하느니라.
014_0879_a_02L【論】釋曰菩薩不觀法性是空不觀空是法性行空得法性緣法性得空以是故無異所以者何是二畢竟空故
【논】해석한다. 보살은 법성이 바로 공이라고 관하지 않고 공이 바로 법성이라 관하지 않으며, 공을 행하여 법성을 얻고 법성을 반연하여 공을 얻는다. 이 때문에 다름이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다.
014_0879_a_05L【經】復次舍利弗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眼界不與空合空不與眼界色界不與空合空不與色界合識界不與空合空不與眼識界合
【경】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눈의 경계[眼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눈의 경계와가 합하지 않으며, 빛깔의 경계[色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빛깔의 경계와 합하지 않으며, 안식의 경계[眼識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안식의 경계와 합하지 않느니라.
014_0879_a_09L至意界不與空合空不與意界合界不與空合空不與法界合意識界不與空合空不與意識界合是故利弗是空相應名爲第一相應
나아가 뜻의 경계[意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뜻의 경계와 합하지 않으며, 법의 경계[法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법의 경계와 합하지 않으며, 의식의 경계[意識界]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의식의 경계와 합하지 않느니라. 그러므로 사리불아, 이 공과 상응함을 일컬어 제일상응(第一相應)이라 하느니라.
014_0879_a_13L【論】釋曰眼界不與空合空不與眼界合是有空是無有云何合
【논】해석한다. 눈의 경계가 공과 합하지 않고 공이 눈의 경계와 합하지 않는다 했는데, 눈은 있는 것[有]이요 공은 없는 것[無]이니, 공과 있는 것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014_0879_a_15L復次菩薩種種因緣分別散滅是眼眼則空無眼名因本故有眼空空亦無分別是眼空是非眼空是則眼不與空合
또 보살은 갖가지의 인연으로 분별한다. 이 눈이 흩어지고 소멸하면 눈은 곧 공이며, 공하면 눈이라는 이름조차 없게 된다. 원인[本]으로 인하여 있으며, 눈이 공하면 그 공도 또한 없나니, 이 눈이 공함을 분별해 보면 이것은 눈의 공도 아니다. 그렇다면 눈이 공과 합하지 않는다.
014_0879_a_18L又空不從眼因緣生何以故是二法本自空故乃至意識界亦如是
또 공은 인연에서 생기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두 가지의 법은 본래부터 스스로 공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의식의 경계 역시 그와 같다.
014_0879_a_20L問曰此中何以不說五衆等諸法但說十八界
【문】이 안에서는 무엇 때문에 5중(衆) 등의 모든 법을 말씀하지 않고 단지 18계(界)만을 말씀하시는가?
014_0879_a_22L答曰應說或時誦寫者忘失有人言若說十八界則攝一切法衆生於心色中錯心法中不錯應聞十八界得度是故但說十八界
014_0879_b_01L【답】당연히 말씀하셨어야 하리라. 혹은 외우면서 베껴 쓰는 이가 망실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일 18계를 말하면 온갖 법이 포함된다. 어떤 중생은 심색(心色) 중에서는 잘못이 있지만 심법(心法) 중에서는 잘못되지 않나니, 마땅히 18계를 들으면 제도될 수 있으리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단지 18계만을 말씀하신다.
014_0879_b_02L問曰何以名爲第一相應
【문】무엇 때문에 제일상응(第一相應)이라 하는가?
014_0879_b_03L答曰空是十方諸佛深奧之藏唯一涅槃門更無餘門能破諸邪見戲論是相應不可不可破是故名爲第一復次佛自說第一因緣所謂——
【답】공은 모든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광[藏]이다. 오직 하나뿐인 열반의 문이니 다시는 다른 문이 없다. 모든 삿된 소견과 쓸모없는 이론을 깨뜨리니, 이것과 상응하면 무너뜨릴 수도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이 때문에 으뜸간다고 한다.
다시 부처님은 스스로 으뜸가는 인연을 다음에서 말씀하신다.
014_0879_b_07L【經】舍利弗空行菩薩摩訶薩不墮聲聞辟支佛地能淨佛成就衆生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경】사리불아, 공을 행하는 보살마하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014_0879_b_10L舍利弗諸相應中般若波羅蜜相應爲最第一最尊最勝最妙爲無有上何以故是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相應所謂空無相無作當知是菩薩如受記無異若近受記
사리불아, 모든 상응한 가운데서 반야바라밀의 상응이 맨 첫째가며 가장 높고 가장 수승하고 가장 묘하여 보다 위의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이 행하는 반야바라밀의 상응은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수기(授記)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혹은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014_0879_b_14L舍利菩薩摩訶薩如是相應者能爲無量阿僧祇衆生作益厚是菩薩摩訶薩亦不作是念我與般若波羅蜜相諸佛當授我記我當近受記我當淨佛土我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當轉法輪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상응하면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위하여 이익을 지음이 두터울 것이며 이 보살마하살은 또한 ‘나는 반야바라밀과 상응하니, 모든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셔야 한다.’거나 ‘나는 머지 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거나 ‘나는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거나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여 법륜(法輪)을 굴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014_0879_b_20L何以故是菩薩摩訶薩不見有法出法性亦不見有法行般若波羅蜜亦不見有法諸佛授記亦不見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법성(法性)에서 벗어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고 또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또한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시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고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014_0879_b_23L何以故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時不生我相衆生相乃至知者見者相何以衆生畢竟不生不滅故衆生無有生無有滅若法無有生相滅相云何是法當行般若波羅蜜
014_0879_c_01L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나라는 모양[我相]과 중생이라는 모양[衆生相]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라는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중생은 마침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중생은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느니라. 만일 법에 나는 모양[生相]이나 멸하는 모양[滅相]도 없다면 어떻게 이 법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겠느냐.
014_0879_c_04L如是舍利弗菩薩摩訶薩不見衆生故爲行般若波羅蜜衆生不受故衆生空故衆生不可得故衆生離故爲行般若波羅
그와 같아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중생을 보지 않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이 되며, 중생은 받지 않기 때문에, 중생은 공하기 때문에, 중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여의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행한 것이 되느니라.
014_0879_c_08L舍利弗菩薩摩訶薩於諸相應中爲最第一相應所謂空相應是空相應勝餘相應菩薩摩訶薩如是習空能生大慈大悲菩薩摩訶薩習是相不生慳心不生犯戒心不生瞋心不生懈怠心不生亂心不生無智心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의 모든 상응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상응은 이른바 공과의 상응[空相應]이니, 이 공과의 상응은 그 밖의 상응보다 수승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공을 익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내며, 보살마하살은 이 상응을 익혀 간탐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계율을 범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성내는 마음을 내지 않고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으며, 산란한 마음을 내지 않고 지혜 없는 마음을 내지 않느니라.
014_0879_c_13L【論】釋曰不墮聲聞辟支佛地空相應有二種一者但空二者不可得空行空墮聲聞辟支佛地行不可得空亦不可得則無處可墮
【논】해석한다.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함은, 공과의 상응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단공(但空)이고, 둘째는 불가득공(不可得空)이다. 단공만을 행하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경지에 떨어지지만 불가득공을 행하면 공도 또한 얻을 수 없으므로 떨어질 만한 곳조차 없다.
014_0879_c_17L復有二種空無方便空墮二地二者有方便空無所墮直至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다시 두 가지의 공이 있다. 첫째는 방편이 없는 공이니, 두 지위에 떨어지게 되며, 둘째는 방편이 있는 공이니, 떨어질 데가 없이 곧장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된다.
014_0879_c_19L復次本有深悲心入空則不墮無大悲心則墮如是等因緣不墮二地
또 본래 깊은 비심(悲心)이 있으면서 공으로 들어가면 떨어지지 않지만 큰 비심이 없으면 곧 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두 지위에 떨어지지 않는다.
014_0879_c_21L淨佛世界成就衆生菩薩住是空相應中無所復碍敎化衆生令行十善道及諸善法以衆生行善法因緣佛土淸淨以不殺生故壽命長不劫不盜故佛土豐樂應念卽至是等衆生行善法則佛土莊嚴
014_0880_a_01L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킨다 함은, 보살이 이 공과 상응하는 데에 머물러 다시는 장애가 없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10선도(善道)와 모든 착한 법을 행하게 한다. 중생들이 착한 법을 행하는 인연 때문에 부처님 국토는 청정해지고 살생(殺生)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명이 길게 되며, 빼앗지도 않고 훔치지도 않기 때문에 부처님 국토는 풍요하고 쾌락이 있으면서 생각하는 대로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착한 법을 행하면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게 되는 것이다.
014_0880_a_03L問曰敎化衆生則佛土淨何以別說
【문】중생을 교화하면서 부처님 국토는 청정하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따로 말씀하는가?
014_0880_a_04L答曰衆生雖行善要須菩薩行願迴向方便力因緣故佛土淸淨如牛力挽車要須御者乃得到所至處以是故別疾得行是空相應無有障碍能疾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답】중생이 비록 착한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보살의 행원(行願)과 회향(廻向)과 방편력의 인연을 구해야 한다. 그 때문에 부처님 국토는 청정해지나니, 마치 소의 힘으로 수레를 끌지만 반드시 부리는 사람이 있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따로 말씀하신다.
신속히 얻는다 함은 이 공과 상응함을 행하면서 장애가 없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신속히 얻게 되는 것이다.
014_0880_a_09L問曰先說空相應今說般若波羅蜜相應後說無相無作相應有何差別
【문】먼저는 공과의 상응함을 말씀하고 이번에는 반야바라밀과의 상응함을 말씀하며 뒤에는 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의 상응함을 말씀하는데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
014_0880_a_11L答曰有二種空一者般若空二者非般若先言空相應聽者疑謂一切空說是般若波羅蜜空
【답】두 가지의 공이 있나니, 첫째는 반야의 공[般若空]이고, 둘째는 반야가 아닌 공[非般若空]이다. 먼저 공과의 상응함을 말하면 듣는 이가 의심하면서 “온갖 것은 공하다.”고 한다. 때문에 이 반야바라밀의 공을 설명해 준다.
014_0880_a_14L復有人疑但言空第一無相無作非第一耶是故說無相無作相應亦是第一何以故空則是無相若無相則是無作如是爲一名字爲別
다시 어떤 사람은 “단지 공의 으뜸감[第一]만을 말하니, 무상과 무작은 으뜸가지 않는 것인가”라고 의심하나니, 이 때문에 “공ㆍ무상ㆍ무작과의 상응함도 역시 첫째간다.”고 설명해 준다. 왜냐하면 공하면 그것은 모양[相]이 없고 모양이 없으면 그것은 조작[作]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름은 하나이면서 구별되는 것이다.
014_0880_a_18L最上故言破有故得是相應不復樂餘是爲最妙如一切衆生中佛爲無上一切法中涅槃無上一切有爲法中善法習相應爲無上餘義如「讚般若品」中說
맨 위이기 때문에 높다[尊] 하고, 있는 것[有]을 깨뜨리기 때문에 수승하다[勝] 하며, 이 상응함을 얻으면 다시는 그 밖의 것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것을 가장 묘하다[最妙]고 한다. 마치 온갖 중생 중에서는 부처님이 위없는[無上] 이가 되고, 온갖 법 중에서는 열반이 위없으며, 온갖 유위법 중에서는 착한 법을 익히어 상응함이 위없는 것이 되는 것과 같다. 그 밖의 이치는 찬반야품(讚般若品)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80_a_22L若能行如是空相應便應受記何言如受記無異若近受記
【문】만일 이와 같이 공과의 상응함을 행하면 곧 수기(授記)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수기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으며, 혹은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고 말씀하는가?
014_0880_b_01L答曰菩薩新行道肉身未得無生法忍得般舟三昧但以智慧力故能如是分別深入空佛讚其入空功德故言如受記無異
014_0880_b_01L【답】이 보살은 새로이 도를 행해 육신이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했고 반주삼매(般舟三昧)도 아직 얻지 못했으면서 단지 지혜의 힘 때문에 이와 같이 분별하면서 공에 깊이 들어갈 뿐이다. 부처님은 그 공에 들어가는 공덕을 찬탄하시기 때문에 “수기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014_0880_b_05L有三種菩薩得受記者如受記者近受記者得受記者如「阿毘跋致品」中說三種如此中說
보살로서 수기를 얻는 이에 세 가지가 있나니, 마치 수기를 받은 것과 같은 이고,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이며, 이미 수기를 얻은 이다. 「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에서의 설명과 같으니, 이 세 가지는 그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80_b_07L問曰如此說相應第一無上云何不與受
【문】이처럼 상응함이 으뜸 가며 위없음을 말씀하시면서 어찌하여 수기를 주시지 않는가?
014_0880_b_09L答曰餘功德方便禪定等未集有智慧是故未與受記
【답】그 밖의 공덕과 방편과 선정 등을 아직 쌓지 못했고 단지 지혜만이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아직 수기를 주시지 않는다.
014_0880_b_10L復次是菩薩雖復利根智慧餘功德未熟故聞現前受記或生憍慢是故未與受記以讚歎者欲以勸進其心
또 이 보살은 비록 근기가 영리하고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밖의 공덕이 아직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수기 주시는 것을 듣게 되면 혹시 교만한 마음을 내게도 되나니, 이 때문에 아직 수기는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찬탄하는 까닭은 그의 마음을 권하면서 정진하게 하려 함에서다.
014_0880_b_13L利根者行是空相應如受記無異鈍根者行是空相應若近受記令衆生常安隱涅槃是名利益
근기가 영리한 이가 이 공과 상응함을 행하면 마치 수기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고, 근기가 둔한 이가 이 공의 상응함을 행하면 머지않아 수기를 받게 된다. 중생들로 하여금 항상 안온하면서 열반을 얻게 하므로 이것을 이익(利益)이라 한다.
014_0880_b_16L復有二種利益一者離苦二者與樂復有二種滅衆生身心苦復有三種天樂人樂涅槃樂有三種離三界入三乘如是菩薩摩訶薩無量阿僧祇利益衆生衆生如先說
다시 두 가지의 이익이 있나니, 첫째는 고통을 여의게 하고, 둘째는 안락을 주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중생들의 몸의 고통[身苦]과 마음의 고통[心苦]을 없애주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천상의 즐거움[天樂]과 인간의 즐거움[人樂]과 열반의 즐거움[涅槃樂]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삼계(三界)를 여의고 3승(乘)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아승기에 중생을 이익되게 하나니, 중생에 관한 뜻은 먼저의 설명과 같다.
014_0880_b_21L世人有大功勳則生憍心其報賞以求報故則爲不淨菩薩則不然雖與般若波羅蜜相應利益無量衆生無我心無憍慢故不求功報地雖利物功重不求其報
014_0880_c_01L세간 사람들은 곧 공훈이 있게 되면 교만한 마음을 내면서 그 보상(報賞)을 구한다. 보상을 구하기 때문에 청정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그렇지가 않아서 비록 반야바라밀과 상응하여 한량없는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하더라도 나라는 마음이 없고 교만이 없기 때문에 공덕의 보상을 구하지 않는다. 비록 땅이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그 공훈이 중하다 하더라도 그 보상을 구하지 않는 것과 같다.
014_0880_c_02L以是故說是菩薩不作是念我與般若相應諸佛當受我記若近受記我當淨佛得無上道轉法輪轉法輪如先說
이 때문에 말씀하시되 “이 보살은 ‘나는 반야와 상응하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마땅히 나에게 수기를 주셔야 한다. 머지않아 수기를 받을 것이다. 나는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위없는 도를 얻고서 법륜을 굴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시는 것이다. 법륜을 굴린다[轉法輪]는 뜻은 먼저의 설명과 같다.
014_0880_c_05L問曰何等法出法性
【문】어떠한 법이 법성(法性)에서 벗어나는가?
014_0880_c_06L答曰此中佛說所謂行般若波羅蜜者行般若波羅蜜者卽是菩薩知者見者卽是衆生法性中衆生變爲法性以是故菩薩自不生高心不從衆生求恩分不見諸佛與受記
【답】이에 대하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나니, 이른바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이가 곧 보살이요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가 곧 중생이다. 법성 가운데서 중생이 변하여 법성이 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스스로 교만한 마음을 내지도 않고 중생으로부터 은혜의 보답도 구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께서 수기 주시는 것도 보지 않는다.
014_0880_c_11L如菩薩空佛亦如是行者空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亦空何以故佛自說菩薩摩訶薩行般若波羅蜜不生衆生相乃至知者見者相
마치 보살이 공하듯이 부처님도 역시 그러하며, 수행하는 이가 공하듯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역시 공하다. 왜냐하면 부처님 스스로가 말씀하시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이라는 모양[衆生相] 내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라는 모양을 내지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014_0880_c_15L菩薩行般若波羅蜜尚不生法相何況衆生相何以故佛自說因是衆生畢竟不生不生故不滅法不生不滅卽是法性相法性卽是般若波羅蜜云何般若波羅蜜行般若波羅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오히려 법이라는 모양[法相]조차도 내지 않는데 하물며 중생이라는 모양이겠는가.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스스로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 중생은 마침내 나지 않나니, 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면 곧 그것이 법성의 모양이다. 법성이 곧 반야바라밀이니, 어떻게 반야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겠는가.
014_0880_c_20L菩薩不受衆生不受神但有虛妄計我衆生空衆生法無所有故衆生不可得以實智求索不可得故衆生離一切法自相離一切離自相者如火離熱相等相空中廣說第一相應勝餘相應上說
014_0881_a_01L보살은 중생을 받지 않는다[不受衆生] 함은 신(神)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니, 단지 허망하게 나[我]라고 헤아림이 있을 뿐이다. 중생이 공하다[衆生空] 함은 중생이라는 법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중생은 얻을 수 없다[衆生不可得] 함은 진실한 지혜로써 구하고 찾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여읜다[衆生離] 함은 온갖 법은 자상(自相)을 여의기 때문이다. 온갖 법이 자상을 여읜다 함은 마치 불이 더운 모양[熱相]을 여의는 것과 같다. 마치 상공(相空) 중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으뜸가는 상응은 그 밖의 상응보다 수승하다 함은 위에서의 설명과 같다.
014_0881_a_03L菩薩行是衆生空法空深入空相應憶本願度衆生見衆生狂惑顚於空事中種種生著卽生大悲心我雖知是事餘者不知以敎化故大慈大悲亦能常不生破六波羅蜜
보살이 이 중생공(衆生空)과 법공(法空)을 행하며 공과의 상응으로 깊이 들어가 본래의 서원을 기억하면서 중생을 제도한다. 중생들이 헷갈리고 뒤바뀌어 공한 일 가운데서 갖가지로 집착을 내는 것을 보고는 곧 대비(大悲)의 마음을 내어 “나는 이 일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들은 모르고 있다.” 하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대자대비를 내지만 언제나 6바라밀을 깨뜨리는 법을 내지 않는다.
014_0881_a_08L所以者何初發心菩薩行六波羅以六惡雜行故六波羅蜜不增長不增長故不疾得道
그것은 왜냐하면, 처음 발심한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여섯 가지의 삿되고 뒤섞인 행[惡雜行]을 하기 때문에 6바라밀이 더욱더 자라지 않나니, 더욱 자라지 않기 때문에 신속히 도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014_0881_a_10L今知諸法相是六惡法根本所以者何菩薩知布施爲善慳心不善能墮餓鬼貧窮中
지금은 모든 법의 모양을 알고서 이 여섯 가지 나쁜 법의 근본을 뽑아버린다. 그것은 왜냐하면, 보살은 보시는 착한 것이요 간탐하는 마음은 착하지 않아 능히 아귀(餓鬼)나 빈궁함 가운데 떨어지게 함을 알기 때문이다.
014_0881_a_12L知慳貪如是自惜其身著世閒樂故還生慳心是菩薩輕物能施重物不外物能內物不能以著我著受者以取相著財物以是故破檀波羅蜜雖有所施而不淸淨
간탐이 이와 같음을 알고도 스스로 그의 몸을 아끼고 세간의 즐거움에 집착하는 까닭에 도리어 간탐하는 마음을 내게 된다면, 이런 보살은 대수롭지 않은 하찮은 물건은 베푸나 중한 물건은 베풀지 못하며, 바깥 물건[外物]은 베푸나 안의 물건[內物]은 베풀지 못한다. 나에 집착하므로 받는 이[受者]에도 집착하고 모양을 취한지라 재물(財物)에 집착하나니, 이 때문에 단(檀)바라밀을 깨뜨리며 비록 보시함이 있더라도 청정하지 않게 된다.
014_0881_a_17L是菩薩行空相應故不見我亦不見世閒樂云何生著而破檀波羅蜜
그러나 이 보살은 공과 상응함을 행하기 때문에 나를 보지도 않고 또한 세간의 즐거움을 보지도 않나니 어떻게 집착을 내면서 단바라밀을 깨뜨리겠는가.
【문】만일 나를 보지 않고 세간의 즐거움을 보지 않기 때문에 깨뜨리지도 않고 또한 단(檀)도 보지 않아야 한다면 어떻게 보시를 행하는가?
014_0881_a_19L問曰若不見我見世閒樂故不破亦應不見檀云何行布施
014_0881_b_01L【답】이 보살이 비록 보시를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청정하고 공한 마음으로써 보시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보시는 공하여 아무것도 없다. 중생이 바라기 때문에 베풀어 준다.”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는 흙을 금은으로 여긴다 해도 어른은 그것을 금은으로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곧 뜻을 따라 베풀어 주면서도 끝내 주는 바가 없나니, 그 밖의 다섯 가지의 법도 역시 그와 같다.
014_0881_a_21L答曰是菩薩雖不見布施淸淨空心布施作是念是布施空無所有衆生須故施與如小兒以土爲金銀長者則不見是金銀便隨意與竟無所與餘五法亦如是
이 때문에 비록 똑같이 공으로 여기면서 간탐을 깨뜨린다 하더라도 단(檀)은 깨뜨리지 않는다. 사리불이나 보살마하살은 이런 공과의 상응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항상 이 여섯 가지의 삿된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014_0881_b_02L以是故同空破慳而不破檀舍利弗菩薩摩訶薩住是空相應中能常不生是六惡心
大智度論卷第三十七
庚子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6도(道) 가운데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세 가지 생존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