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卷下

ABC_IT_K0559_T_002
015_0349_a_01L금강반야바라밀경파취착불괴가명론 하권(下卷)
015_0349_a_01L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卷下


공덕시보살 지음
당나라 지바하라 등 한역
김두재 번역
015_0349_a_02L功德施菩薩造唐中天竺國沙門地婆訶羅等奉 詔譯


수보리가 다시 생각하기를 ‘여러 부처님께서 모든 망상을 여의고 법의 성품이 없음을 증득하셨다면 세간에서는 무슨 모습을 가지고 믿고 알겠는가?’라고 하니, 그런 까닭에 경에서 “여래께서는 진실만을 말씀하는 분이며, 사실만을 말씀하는 분이며, 여여한 말씀만 하는 분이며, 달라지지 않는 말씀만을 하는 분이다”라고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다만 이와 같은 네 구절만을 말했는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실제를 증득하시고 망상을 여의셨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세간에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는 자들은 부처님[上人]의 법에 대하여 증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증득했다고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진실한 말씀만을 하시는 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세간 사람들은 더러운 마음을 탐하고 간사하고 허망함이 많아서 일찍이 신통을 얻었다 해도 그것을 이미 잃어버렸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이 와서 물으면, 다만 ‘지난날에 신통을 얻었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런 마음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사실만을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 사람들이 세간의 선정을 닦아서 마음이 잠시 생겨나지 않아 그 모습이 적멸(寂滅)의 경지와 같아지면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를 “내가 열반(涅槃)을 증득했다”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영원히 이런 오류(誤謬)를 제거하셨기 때문에 여여(如如)한 말씀만 하신다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여(如)라고 말한 것은 이와 같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여자(如字)와 반드시 동행(同行)하기 때문이니, 여(如)라는 말의 뜻은 시간은 서로 같으나 행동은 서로 어긋난 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15_0349_a_04L須菩提復念言諸佛離一切想證法無性世閒以何相故而信知耶是故經言如來是眞語者ㆍ實語者ㆍ如語者ㆍ不異如語者何故但以如是四句顯示諸佛證實離想以世閒中求名利者於上人法未證言證佛異彼人故說眞語復有貪鄙情多矯妄曾獲神通自知已失有人來問但云先得遠離是心說於實語又有修得世閒之定心暫不生相同寂滅而向人說我證涅槃永除此謬故說如語此言取如是義所隨如字應可比知同行故如說義時相同行相違乃至廣說
015_0349_b_01L이 가운데 ‘동행(同行)’이라는 것은 마치 어미 소가 오면 새끼는 따라 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如)와 여시(如是)는 마땅히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래께서 모든 장애를 끊고 저처럼 밝게 깨달은 것을 이처럼 말하여 밝힌 것이다.
‘세간의 선(禪)을 닦아 증득한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은 세간의 선일 경우 열반을 증득했다는 말을 하자마자 잠시 후 다시 후퇴하여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어째서 다시 달라지지 않는 여여한 말씀만을 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는가?
모든 범부(凡夫)가 건달바성(乾闥婆城)1)에서 꿈ㆍ허깨비ㆍ메아리의 형상과 더울 때의 아지랑이, 선화(旋火)의 둥근 바퀴2)에 대하여 그 앞에 나타난 모습을 그대로 집착하고 인정하는 것을 이여(異如)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은 그렇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달라지지 않는 여여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모든 범부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성(城) 등과 성이 아닌 것 등은 이여(異如)라고 이름하지만 여래께서 증득하신 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며 광성(誑性)이 아니기 때문에 이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시는 것이 일찍이 허망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미 깨끗하여 모든 장애를 제거하셨기 때문이며, 증득한 것이 있고 또한 가르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증득했다고 하는가?
비유하면 색(色)에 대한 설명도 무상(無常)과 같으며 색법(色法)을 나타낸 것도 무상과 같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교시(敎示)라고 말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동자야, 나는 일체를 다 알았으며, 일체를 다 보았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진실한 말 등에 네 가지 진리의 이름이 붙여지니, 여래께서는 이 네 가지 깊은 이치를 깨달아 알고 계셨다. 그런 까닭에 능히 말씀하실 수 있으셨으니, 말하면서 알지 못하는 그런 이치는 없기 때문이다.
015_0349_a_18L是中同行者如母牛來子亦隨如與如是應知亦然此顯如來斷一切障如彼明證如是而說不同學得世閒禪者言證涅槃尋復退失爲復說不異如語以諸凡夫於乾闥婆城ㆍ夢幻響像ㆍ熱時之焰ㆍ旋火之輪如其所對如是取著名爲異如諸佛不然是故說不異如語此復云何凡夫人所取城等非城等有名爲異如來所證非虛妄有不誑性故不異如是故所言未嘗虛妄云何知佛已淨除一切障故有證及教可辨明故云何爲證譬如說色是無常色法現是無常等故云何爲教有經言童子我一切知ㆍ一切見也次眞等四諦之名如來證知此四深理是以能說說而不知無是處故
이 가운데 ‘진실한 말’이란 고제(苦諦)에 대한 설명이니 색질 등 모든 온(蘊)이 진실로 곧 괴로움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을 말한다’는 것은 집제(集諦)에 대한 설명이니 애욕이 실제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어 자재(自在)하지 못한 것 등이 능히 그 원인이 되기 때문이며, ‘여여한 말’이란 멸제(滅諦)에 대한 설명으로서 무위(無爲)는 열반이고 유위(有爲)는 허망한 것인데 이와 반대로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니, 여(如)한 말이란 무위의 법으로서 허망한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하여 여(如)라고 한다.
‘달라지지 않는 여여한 말’이란 도제(道諦)에 대한 설명으로, 여덟 가지 각지(覺支)의 도를 여의고 열반을 증득했다고 말하는 것이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어서 사실이 아니지만, 이 도는 능히 진실하고 거짓이 아닌 것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기억하여 말하기를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모든 생각을 여의었다면 어떻게 법에 대하여 증득한 것을 나타내어 여덟 가지 각지도(覺支道)가 바로 진실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물이나 불에 들어간다는 말도 거짓이 될 것이니 거짓을 진실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분별상(分別想)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하므로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여래께서 얻은 법과 말씀하신 법은 실제도 없고 거짓도 없다”고 하였다.
015_0349_b_12L眞語者說於苦諦色等諸薀眞是苦故實語者說於集諦愛實苦因自在等能爲因故如語者說於滅諦無爲涅槃有爲虛妄無爲反是如說無爲之法非虛妄性名之爲如不異如語者說於道諦離八支道言得涅虛誑不實此道能得實非妄故念言若諸佛離一切想云何於法現而說言八支道是實ㆍ入水火等爲說實妄故有分別想是故經言菩提如來所得法ㆍ所說法無實無妄此義云何如來證第一義一切法本性無生無生故不曾是有云何名實旣無生豈有滅是故非妄實妄二境皆不可得於何而生彼分別想所說之法是文字性文字有爲故非實依而證實故非妄
015_0349_c_01L이 뜻은 무엇인가?
여래께서 증득하신 제일의법(第一義法)은 바로 모든 법의 본래 성품이어서 생겨남이 없다. 생겨남이 없는 까닭에 일찍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까닭에 실제라고 말하는가?
이미 생겨남이 없는데 어찌 멸하는 이치가 있겠는가? 그런 까닭에 거짓이 아닌 것이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두 경계를 다 얻을 수 없다면 어떻게 저 분별의 생각이 생겨나는가?
말로 설명한 법은 곧 문자(文字)의 성품이니, 문자는 유위(有爲)이기 때문에 사실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사실을 증득했기 때문에 거짓도 아니다.
015_0349_c_06L復次疑曰若所證法無生無性非實非妄是卽諸佛第一義身從此爲因二身成滿菩薩何故捨所證法住於事等而行施耶爲遣此疑經曰須菩譬如有人入闇卽無所見若菩薩心住於事而行布施如是等此闇明二喩示有住無住過失功德

또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증득하게 되는 법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성품도 없으며 실제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제일의의 몸이 된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두 몸을 원만하게 성취하였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중득한 법을 버리고 일 등에 머물러서 보시를 행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깜깜한 곳에 들어가게 되면 곧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보살이 마음을 일에 머물러 둔 채로 보시를 행한다면 그러하다”라고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하였다.
여기에서 어둡고 밝음의 두 가지 비유는 유주(有住)와 무주(無住)의 과실(過失)과 공덕(功德)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가령 어떤 사람이 깜깜한 가운데에서 평탄한 길을 버리고 길이 아닌 곳으로 가다가 험한 곳에 엎어지고 떨어져서 갖가지 고난을 받는 것과 같다. 즐거운 곳이 가까이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보살들이 일에 머물러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얻을 수 없는 성품인 평탄하고도 빠른 도는 버리고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험난한 길을 행하는 것이어서, 나고 죽음이 있는 가운데에서 갖가지 곤경과 액운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의 경지를 어느 때에야 이를 수 있겠는가?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을 증득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며, ‘밤이 이미 다 지났다’라는 것은 과보에 대한 애착을 버린 것을 말한다. ‘햇빛이 밝게 비춘다’는 것은 모든 법에 성품이 없음을 결정코 깨달아 아는 것이며, ‘갖가지 색깔을 본다’는 것은 모든 법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끊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아니어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 등을 깨달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보시를 행하므로 속히 정각(正覺)을 성취하고 큰 열반을 증득한다.
015_0349_c_13L其義云如人闇中捨平坦路行於非道墜艱險受諸苦難於所樂處近而不若諸菩薩住事行施捨無得性平疾之道行於有得險難之路於生死中受諸困厄涅槃之所何時可至人有目得無生忍也夜分已盡捨於果愛也日光明照決定了知諸法無性見種種色悟一切法不滅不生ㆍ不斷不常ㆍ不一不異ㆍ不來不出ㆍ無所得等菩薩如是行不住施成正覺得大涅槃
015_0350_a_01L이 일체법을 수행하는 가운데에는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두 가지 이익이 있다. 자신을 이익 되게 하는 데에는 다시 교수행(敎修行)과 의수행(義修行)이 있으니, 교수행이란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讀誦)하는 것이고 의수행이란 설법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남을 이익 되게 한다는 것은 중생들을 위하여 연설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경에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법문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거나 닦고 익히며 남을 위해 연설하면, 여래는 이런 사람을 다 알고 이런 사람을 다 보느니라. 그리고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한량없는 복덕의 덩어리가 생겨서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취하게 하리라”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50_a_01L此一切法修行中有自他二利自利復有教義修行教修行者謂受持讀義修行者聽聞思惟利他者謂爲人演說如經須菩提若善男子善女於此法門受持讀誦修習演說來悉知是人ㆍ悉見是人生如是無量福德聚ㆍ取如是無量福德
이 가운데 ‘받는다’는 것은 마음으로 작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지닌다’는 것은 돌이켜 기억하고 잊지 않기 때문이며, ‘읽고 외운다’는 것은 그 글을 펴놓고 독송하기 때문이며, ‘닦고 익힌다’는 것은 법문을 듣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한량없는 복의 덩어리’라고 했는데 그 모습은 어떤 것인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첫 아침[初日分]에 항하강 모래알과 같이 많은 몸을 보시하고”에서 부터 “이 법문에 대하여 믿는 마음을 내고 비방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등의 보시한 복덕은 앞의 것보다 더 우세하니 그것은 일과 시간, 이 두 가지가 크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일이 크다’는 것은 경에서 “항하강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몸을 보시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고, ‘시간이 크다’는 것은 경에서 “백천억 나유타겁(那由他劫)“이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5_0350_a_08L此中受者作心領納故持者溫記不忘故讀誦披諷其文故修習者謂聽聞及思惟故無量福聚其相云何經曰若善男子善女人初日分以恒河沙等身布施乃至於此法門信心不謗如是此布施福轉勝於前以事與時二種大故事大者如經以恒河沙等身布施時大者如經百千億那由他
015_0350_b_01L여기에서 임운과(任運果)를 수행한다고 말했는데 어떤 것을 임운과라고 말하는가?
‘수행’이라고 말한 것은 처음 발심했을 때부터 아직 정각을 성취하지 못한 때까지를 말하는 것이니, 이 생(生)과 다른 생에서 모든 공덕을 획득해 간다. 본래 기대하였던 것이 불과(佛果)이기 때문이다.
공덕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마(魔)와 이교의 도[異道]가 저해하거나 교란할 수 없는 것이며 공덕이 크기 때문에 수승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는 것이며, 복의 과보가 굳고 단단한 것이며, 최상의 법기(法器)이며, 원만한 자량(資糧)이며, 이기기 어려운 것을 능히 감당하는 것이며, 복의 원인이 된다는 이치를 깊고 크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며, 모든 죄를 뽑아버리고 속히 깨달음을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마와 이교의 도가 저해하거나 교란하지 못한다’는 것은 경전에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이다.
015_0350_a_17L修行任運果今說云何名爲任運果謂修行者從初乃至未成正覺此生餘生獲諸功德本所期者是佛果故功德是何所謂魔及異道不能沮亂功德大故殊勝無等堅牢福果最上法器圓滿資糧能荷難勝深大信解福因之處拔一切罪速疾證地此中魔及異道不能沮亂者經曰此法門不可思議
그 뜻이 어떤 것인가?
법의 위력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에 이 사람의 복과 지혜는 모든 지혜의 경계를 초월하니, 그런 까닭에 삿된 무리들이 저해하거나 교란할 수 없다.
‘공덕이 크기 때문에 수승하기가 이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은 경전에서 “칭량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한량없이 많은 법을 받아 지녔기 때문에 그 공덕과 위력이 다른 어떤 것도 이와 동등한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 사람은 가장 수승하게 된다.
‘복의 과보가 굳고 단단하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과보(果報)가 한량없기 때문에 삿된 것이 저해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니, 공덕이 광대(廣大)하기 때문에 천상과 인간 가운데서 받은 모든 뛰어난 복이 그것을 핍박하여 빼앗거나 받지 못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최상의 법기(法器)’라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 법문은 여래께서 대승을 발심한 사람을 위하여 설명하며, 최상승(最上乘)을 발심한 이를 위하여 설명한다”고 한 것이 그것인데, 법을 어떻게 헛되이 수행하는 자에게 주어서 그릇을 만들겠는가?
‘원만한 자량(資糧)’이라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독송하며, 닦아 익히고 남을 위해 연설하면“이라는 등의 이와 같은 말을 한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하기 때문에 복덕이 증장하며, 법을 듣고 깊이 생각하기 때문에 지혜가 증장한다.
015_0350_b_03L其義云何以法威力不思議故斯人福慧超諸智境是故邪徒莫能沮亂功德大故殊勝無等者不可稱量以能受持不可量法德威力餘無與等是故此人最爲殊堅牢福果者經曰無量果報邪莫能沮故功德廣大故於天人中受諸勝福無能逼奪令其不受最上法器經曰此法門如來爲發大乘者說ㆍ爲發最上乘者說法豈虛行授之以圓滿資糧者經曰若有人受持讀誦修習演說如是等此中受持讀誦爲他說故福德增長聽聞思惟故慧增長
어떻게 증장함을 보였는가?
경에서 “모두가 불가사의하고 칭량할 수 없으며, 가없고 한량없는 공덕의 덩어리를 성취한다”고 한 것과 같다.
여기에서 ‘한량없다’고 한 것은 이 공덕은 일체의 마음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경계가 아님을 밝힌 것이니, 그런 까닭에 생각으론 알 수도 없고 취할 수도 없으며 가없는 그러한 공덕을 얻는다고 말하였다.
‘이기기 어려운 것을 능히 감당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질 만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마치 부처님께서 생각하기 어려운 미묘한 법을 성취하고 널리 수많은 고통에서 중생을 구제하여 조금도 남김이 없는 것처럼 경을 지닌 사람은 마땅히 이와 같기 때문이다.
015_0350_b_16L云何增長如經皆成就不可思不可稱無有邊無量功德聚言無量者顯此功德非是一切心量之境是故思所不能知ㆍ不可取而稱ㆍ無邊際可得能荷難勝者經曰如是人等卽爲荷擔如來阿耨多羅三藐三菩此義云何如佛成就難思妙法濟群苦無復遺餘持經之人當如是
015_0350_c_01L‘넓고 크게 매우 깊이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소승법(小乘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곧 이 경전에 대하여 능히 받아 지니거나 독송하지 못한다”라고 한 이 말과 같다.
이 가운데 ‘넓고 크게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소승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매우 깊게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나라는 등의 견해가 없기 때문이다.
‘복의 원인이 되는 곳’이라고 한 것은 경에 이르기를 “어느 곳에 있거나 만약 이 경을 말하면”이라고 한 이 말과 같다.
복을 쌓고 죄를 없애버리기 때문에 지제(支提)라 말하니 사람들이 법을 연설하면 그 공이 탑이 있는 땅과 동등하여 비록 생각하거나 지니거나 남을 위해 설법하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체의 죄업에서 구제받는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멸시 당하거나 천대를 받으면”이라는 이 말을 한 것과 같다.
015_0350_c_01L廣大甚深信解者經曰若樂小法卽於此經不能受持讀誦如是等此中廣大信解者無小意樂故甚深信解者無我等見故福因之處者在在處處若說此經如是等集福捨罪故名支提人能演法功與之等地雖無思持說者故拔一切罪者若善男子善女人受持讀誦此經爲人輕賤如是等
이 경전을 받아 지니면 마침내 부처가 된다고 하였는데 도리어 멸시 당하고 천대를 받는다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경에 이르기를 “이 사람은 과거 세상에 지은 죄업 때문에 마땅히 악한 세계에 떨어져야 하겠지만 금세(今世)의 사람들이 경멸하고 천대하기 때문에 과거 세상의 죄업이 곧 소멸된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래품(如來品)」에 말하기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나아가 다른 이를 위하여 연설하면, 이 사람은 현세(現世)에 혹 악한 꿈을 꾸거나 혹 중한 질병을 만나거나 혹 핍박을 당하거나 억지로 남에게 부림을 당하고 멀리 떠나게 되거나 꾸지람을 당하고 욕을 먹거나 매를 맞아서 나아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이미 지었던 모든 악업이 다 소멸하며 없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게송을 말하리라.
015_0350_c_09L受持此經方致成反被輕賤其故者何經曰是人先世罪業應墮惡道以今世人輕賤故先世罪業卽爲消滅如來品說若復有人受持此經乃至演說是人現世或作惡夢ㆍ或遭重疾ㆍ或被驅逼强使遠行ㆍ罵辱鞭打乃至殞命所有惡業咸得消除復有頌言

만약 어떤 사람이 악한 업을 지었으나
짓고 나서 무서움과 두려움이 생겨
스스로 뉘우치고 만약 사람들에게 향한다면
영원히 그 악업의 근본을 없앨 수 있다.
015_0350_c_16L若人造惡業
作已生怖畏
自悔若向人
永拔其根本

마음으로 두려워하고 허물을 뉘우치더라도 오히려 악의 근본이 제거되는데, 더구나 어떤 사람이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겠는가? 이것이 어찌 다른 가르침과 서로 다른 점이 아니겠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50_c_18L怖心悔過尚除根本何況有人受持正法此豈不與餘教相違如說

업장은 비록 백겁을 지난다 해도
끝내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아
갖가지 인연 만날 때마다
반드시 과보가 생겨나게 된다.
015_0350_c_20L業雖經百劫
而終無失壞
衆緣會遇時
要必生於果
015_0351_a_01L
서로 어김이 없다고 하니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또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악취(惡趣)의 업은, 바른 법을 지니거나 과거의 죄를 뉘우침으로 인하여 비록 악취의 과업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현재의 몸에 여러 가지 괴로움의 과보로 받게 된다. 현재 여러 가지 괴로움을 받는다고 해서 어찌 다 없어지거나 무너질 수 있겠는가? 악한 세계에 나지 않는다 해도 그 뿌리까지 다 뽑힌 것은 아니다.
만약 무간(無間)지옥에서 업을 받도록 결정된 사람은 목숨을 마친 뒤엔 결정코 그곳에 태어나기 때문이며, 마땅히 겁(劫) 동안 머물면서 죄를 받다가 잠시 나오기 때문이며, 아사왕(阿闍王)3) 등과 같게 되기 때문에 그러므로 어김없다고 한 것이다.
‘속히 깨달음을 증득한다’는 것은 경에 이르기를 “내가 기억해보니 과거 한량없는 아승기겁으로부터 만약 또 어떤 사람이 나중의 말법 세계에 이 경전을 받아 지니거나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널리 설법하면 내가 모든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으로는 이것의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 이런 말과 같다.
015_0350_c_22L非有相違此復云何且十不善惡趣之業由持正法及悔先罪惡趣果雖永不生然於現身受諸苦報現受諸豈失壞耶不生惡趣非拔根耶有無閒決定業者命終之後定生彼應住劫受須臾出故如阿闍王等是故無違速疾證地者經曰我念過去無量阿僧祇劫乃至若復有人於後末世能受持讀誦此經ㆍ廣爲人說我所供養諸佛功德於此百分不及如是等
이 뜻은 무엇인가?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공양한 복으로는 진실을 증득하지 못하지만 이 법문을 지니면 금방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 경을 받아 지닌 공덕의 위력은, 가령 100으로 나누었을 때 저 앞에서 얻은 복의 덩어리가 그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천으로 나누거나 백천으로 나누거나 몇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니, 취류(取類)를 마땅히 알아야 한다.
‘수(數)’라는 것은 60위(位)를 말한다. 이것을 벗어난 이왕(已往)의 수로는 가라(歌羅)4)에도 미칠 수 없고 비교하고 따져서도[校計] 미칠 수 없다.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곧 가라의 미세한 뜻에 의거해서 설명한 것이니, 경을 받아 지닌 복이 아주 미세한 성품이어서 그 공덕이 이미 많으므로 앞에서 얻은 공덕은 미칠 바가 못 된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비교하고 따지기에 이르러도 끝내 이와 같을 수는 없으니, 미세한 것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일체(一切)이겠는가?
015_0351_a_10L此義云何無邊佛所供養之福不證眞實持此法門速疾能證是故受持功德威力設爲百分彼前福聚不及其一如是千分ㆍ百千分ㆍ數分不及取類應知數者謂六十位斯已往數不能及歌羅不及ㆍ挍計不及者此依歌羅微細義說謂受持福最微細性功德已多非前所及窮於挍計終無與等微細尚爾況一切耶
015_0351_b_01L‘우파니사(優波尼沙)’라는 것은 인(因)이다. 그 뜻이 무엇인가?
이 작은 부분의 복은 가장 뛰어난 과보에 대하여 인성(因性)이 되지만 앞의 복덩어리의 전체는 또한 원인이 되지 못하니, 그것은 진실한 과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치지 못한다고 비유한 것은 마치 어떤 어린 소녀[童女]를 달덩이 같은 얼굴[月面]이라고 말할 때 어린 소녀의 얼굴만 가지고 어떻게 전체의 달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오직 깨끗한 빛깔 일부분만이 서로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앞의 복덩어리는 이와 같지 않아서 조금도 서로 비슷한 것으로 비유할 수 없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다만 문자를 받아 지닌 복을 말하는 것이니, 앞의 복은 이것과 서로 비슷한 성품이 없다. 그러니 박복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 문자를 듣고 받을 수 있기에 경에서 “만약 내가 갖추어 설명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미혹하여서 멸시하고 천대할 마음이 생겨나리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이러한 공덕과 위력에 대하여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믿음을 내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 경에서 “이 법문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도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생각하기 어렵고, 그 위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015_0351_a_18L優波尼沙者因也其義云何此少分福於最勝果卽成因性摠前福聚亦不成因不能得眞實果故譬喩不及如有童女稱爲月面女面豈能全類於月以有光潔少分相同彼前福聚卽不如是無少相似可爲譬喩復云何謂但受持文字之福前福於此無相似性匪薄福人而能聽受此文字故如經若我具說者或有人聞心則迷惑而生輕賤謂聞此功德威力思惟時不信時也如經此法門不可思議果報亦不可思議二俱難思威力勝故
수보리는 무슨 까닭에 또 보살승(菩薩乘)을 언급하며 마음을 마땅히 어떻게 머물러야 하느냐고 말했는가?
원인이 청정한 모습을 갖추어 밝히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갖추지 못한 것이며 어떤 것을 갖추어 나타냈다고 하는가?
닦은바 원인은 단지 세 가지 일의 모습과 생각을 버림으로 그 이름이 청정하게 되는 것뿐이 아니고, 내가 머문다, 나는 수행한다, 나는 마음을 항복받았다는 생각까지도 마땅히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이 비로소 청정해져야 하기 때문에 경에서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내어야 하며 진실로 어떤 법도 없는 것을 보살승의 마음을 낸 사람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제일의에는 중생이 반열반을 증득하는 경우도 없으며 또한 어떤 법을 보살이라고 이름하는 경우도 없다. 발심(發心)ㆍ주과(住果)ㆍ수행(修行)ㆍ항복(降伏),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인데 이런 가운데에서 생각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뒤바뀐 행으로써 청정한 원인이 아니다.
015_0351_b_08L須菩提何故復言發菩薩乘應云何住等欲具顯因淸淨相故何者不具云何具顯謂所修因非但離於三事相想卽名淸淨要當遠離我住我修我降伏心如是諸想方得淨故如經應生如是心乃至實無有法名爲發菩薩乘者此復云何第一義無有衆生得般涅槃亦無有法名爲菩薩發心住果修行降伏於無有中而起有是顚倒行非淸淨因
015_0351_c_01L또 의심하는 자는 말한다.
“만약 보살이 대승으로 향하는 마음을 내는 일이 없다면 불과(佛果)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네 가지 이익의 업을 원만히 성취하는 일도 없을 터인데, 어째서 세존께서는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수기(授記)를 얻어 ‘네가 미래 세계에 틀림없이 부처가 되어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부를 것이다. 능히 네 가지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는 일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까?”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는 말하였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날 연등부처님의 처소에 있을 때에 어떤 법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느냐, 그렇지 않았겠느냐?”
이와 같은 말을 하였으니, 이 말의 뜻은 부처님께서 과거에 진실한 이치를 증득하여 수기를 얻었을 때에 조그만 법도 보지 않았으니, 이것이 무상보리(無上菩提)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因)의 실체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것인데 존귀한 수기를 얻은 것이다. 이것은 곧 일체법이 다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달아 안 것이다. 경에서 “수보리야, 여래(如來)라고 말한 것은 진여(眞如)이기 때문이니라”라고 한 것과 같다.
‘진여’라는 것은 얻을 바가 없다는 뜻이다.
015_0351_b_18L復次疑曰無菩薩發趣大乘則無有因證於佛果成滿四種利益之業云何世尊然燈佛所而得授記汝於來世當得作號釋迦牟尼能成四種利衆生事爲遣此疑經曰須菩提於意云何來昔在然燈佛所頗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如是等此中意說佛於往昔證眞實義得授記時不見少法而是無上菩提因體以無所得得授尊記此卽證知一切法皆無所如經須菩提言如來者以眞如故
수보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이 설법에 대하여 비록 아무런 의심이 없으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어떤 법도 보지 않았으나 보리를 증득하여 깨달음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와 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리라’
그러므로 경에서는 말하였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진실하지 못한 말을 하는 것이다. 여래가 증득한 법 가운데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이 뜻은 무엇인가?
대체로 진실과 거짓은 얻는 것이 있는 데에서 생겨난다. 얻는 것이 있을 때에는 진실이라 말하지만 무너질 때에는 거짓임을 알게 되니, 얻을 것이 없는 가운데 이 두 가지는 다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015_0351_c_06L眞如者無所得義須菩提心念我於此說雖復無疑然有人言然燈佛所不見有法能得菩提昇于覺座豈亦如是是故經言須菩提若有人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人不實語乃至如來所得法是中無實無此義云何夫實妄者生於有得時言實ㆍ壞時知妄無所得中此二俱
또 생각하여 말하였다.
“만약 여래께서 다만 얻을 것이 없는 것을 증득하셨다면 부처님 법은 한결같이 가없지 않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는 말하였다.
“여래께서 설명하신 모든 법은 다 부처님의 법이다”
어떤 것을 부처님의 법이라고 말하는가?
곧 얻을 것이 없는 것이어서 일찍이 어느 한 법도 얻을 수 있는 성품이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은 부처님의 법 아닌 것이 없다.
어째서 모든 것이 다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가?
경에서는 “일체법이라는 것은 곧 모든 법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째서 아니라고 하는가?
생겨나는 성품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생겨남이 없다면 곧 성품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모든 법이라고 말하는가?
성품이 없는 가운데 말을 빌어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법은 성품이 없는 것이며, 곧 중생이 바로 여래장(如來藏)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세존께서 거듭 열어 밝히신 것이다.
015_0351_c_15L復有念言若如來但證無所得者佛法卽一非是無邊是故經言如來說一切法皆是佛法佛法謂何卽無所得未曾一法有可得性是故一切無非佛法云何一切皆無所得經曰一切法者卽非一切法云何非耶生性故若無生卽無性云何名一切於無性中假言說故一切法無有性者卽是衆生如來藏性是故世尊垂次開顯
015_0352_a_01L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그 몸이 미묘하고 크다고 한 것과 같다”고 한 말씀과 같다.
‘미묘하고 큰 몸’이라는 것은 공성(空性)의 몸을 말한다.
어째서 미묘하고 큰가?
있는 곳에 따라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들에게 다 있기 때문이다.
말한 것처럼 이 한 중생이 공한 성품이라면 저 모든 중생들도 공한 성품이어서 여래에게 있으면 중생에게도 있을 터인데, 무슨 까닭에 여래장은 모든 중생에게 있다고 말하고 중생장(衆生藏)이 여래에게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모든 중생들은 공하다는 이치를 깨닫지 못했고 여래만이 깨달았기 때문이니, 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중생들의 몸 안에 여래장이 있어서 장엄한 상호(相好)를 갖추고 있다면 어째서 신비한 내[神我]가 있다고 망령되게 헤아리는 것과는 같지 않은가?
비록 이와 같이 말하지만, 그러나 공한 성품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법신이라 이름하며, 법신이 인(因)이 되어 마침내 색상(色相)이 생겨난다. 외도(外道)들이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015_0352_a_01L經曰須菩提譬如有人其身妙大如是等妙大身者謂空性身云何妙大隨於所在而不異故一切衆生咸共有故如說此一衆生空性彼一切衆生空性如來有之衆生亦何故但說如來藏一切衆生有說衆生藏如來有耶以諸衆生未證空理如來證故如有經說衆生身內有如來藏具相莊嚴豈不同於妄計神我雖如是說然了空性名爲法身法身爲因乃生色相非與外道所說我同
015_0352_b_01L마치 『능가경(楞伽經)』5)의 이 말과 같다.
“대혜(大慧)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수다라(修多羅)에서 말하기를 여래장의 본성(本性)은 청정하며 서른두 가지 모습을 갖추고 일체 중생의 몸속에서 항상 머물러 변하지 않건만,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의 망령된 분별의 때로 더럽혀지고 5온(蘊)과 18계(界)와 12처(處)의 옷에 얽히고 싸였으니, 값을 매길 수 없이 귀한 보배가 때가 찌든 옷 속에 싸인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말씀이 어째서 외도들의 삿된 논리와 같지 않습니까? 외도들은 나는 바로 항상한 것으로 만들어졌으므로 그 바탕은 모든 인연을 따르지 않고도 모든 것에 두루 하고 멸진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내가 말한 여래장의 뜻은 외도들이 말하는 나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여래장이란 곧 공한 성품이며 실제(實際)이며 열반이어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모양도 없고 원할 것도 없다는 이와 같은 뜻이다. 여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나라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그치게 하고자 분별도 없고 허망한 경계도 없는 것이 여래장의 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대혜야, 현재와 미래의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이 아견(我見)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수보리는 미묘한 몸과 큰 몸이 곧 공한 성품이라는 이치를 천명(闡明)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미묘하고 크다는 것은 곧 미묘하고 큰 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몸이 아니다’라는 것은 색신을 진실한 이치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니, 생겨남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에 생겨남이 없는 성품을 미묘하고 큰 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색신이 아니다.
015_0352_a_12L如『楞伽經』大慧菩薩白佛言修多羅中說如來藏本性淸淨三十二相在於一切衆生身中常住不變爲貪瞋癡妄分別垢薀界處衣之所纏裹如無價寶垢衣所纏世尊此說云何不同外道邪論外道說我是常作者體非求那周遍無盡佛言大慧我所宣說如來藏義不同外道所說之我如來藏者卽是空性實際涅槃不生不滅無相無願如是等義如來爲欲止息愚人無我怖畏說無分別無虛妄境如來藏門大慧現在未來諸菩薩摩訶薩不應於此計著生於我見乃至廣說須菩提爲欲闡明妙身大身是空性義經曰如來說人身妙大卽是非身非身者謂以色身依實義說無生性故說無生性爲妙大身非色身也
위에서 말한 청정한 모습이라는 뜻이 원만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만족하게 하기 위한 까닭에 경전에서는 “수보리야, 보살도 이와 같으니,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하게 하리라’라고 말한다면 곧 보살이 아닌 것이다”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은 제도하는 이와 제도 받는 사람이라는 모든 분별을 제거하여 보살의 수행하는 인(因)이 마침내 깨끗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015_0352_b_06L上所說因淸淨相義未圓滿爲滿足經曰須菩提菩薩亦如是若作是我當滅度無量衆生卽非菩薩是等以要除能度所度一切分別薩修因方得淨故
다시 분별없는 마음을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는 말하였다.
“‘자못 어떤 법이라도 보살이라고 할 것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모든 법에는 나라는 것도 중생이라는 것 등도 모두 없다는 말씀을 하였으니, 이것은 제일의(第一義)엔 보살도 없고 범부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마땅히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하게 하리라고 말하면 보살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한 것은 원인이 염착(染着)된 색(色) 등이 모여 부처님의 국토가 이루어지는데, 이와 같은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곧 장엄이 아니다’라는 것은 진실한 이치는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며, ‘이것을 장엄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속제(俗諦)에 의한 말이기 때문이며, ‘나니 법이니 하는 모습이 없음을 통달한 사람을 보살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모든 생각의 원인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015_0352_b_11L復爲成就無分別經曰頗有法名爲菩薩不須菩提不也世尊乃至佛說一切法無我無衆生第一義無菩薩無凡夫故我當莊嚴佛國土不名菩薩染著因故於色等聚所成佛土如是取故卽非莊嚴實義無生故是名莊嚴俗諦言說故通達無我法說名菩離一切想因淸淨故
015_0352_c_01L
또 의심하여 말하였다.
“만약 청정한 인(因)이 모든 생각을 여읜다고 한다면 경계에 있어서는 얻을 수가 있는가, 얻을 수가 없는가?”
이런 까닭에 부처님의 경계를 설명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는 육안(肉眼)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을 것입니다’ ‘여래께는 불안(佛眼)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눈을 갖추었다고 말씀하셨는가?
경계에 대하여 깨달아 알지 못함이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이 가운데 중생수(衆生數)의 경계와 중생수가 아닌 경계가 있는가?
경에서 “그러한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들의 여러 가지 마음이 머문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중생수의 경계를 깨달아 알고 있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항하강 모래알과 같이 많은 세계” 등이라고 한 것은 중생수가 아닌 경계를 잘 알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여러 가지의 마음’이라는 것은 욕락(欲樂)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머문다’고 한 것은 서로 계속 이어져 변천해가기 때문이다.
015_0352_b_19L復次疑曰若淸淨因離諸想者有境可得爲無有耶是故此中說佛境界經曰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肉眼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肉眼乃至如來有佛眼不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佛眼如是等何故世尊說具五眼示於境界無不了知此中有衆生數境ㆍ非衆生數境如經所有衆生若干種心住顯示了知衆生數境恒河沙數世界顯示了知非衆生數境若干種心欲樂不同故住者相續而轉故
어떤 사람이 생각하였다.
‘마음이 만약 머무를 수 있다면 이것은 마땅히 실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하였다.
“여래께서 모든 마음이 머무른다고 말씀하신 것은 마음 모두가 머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제일의(第一義)로서 서로 계속 이어짐이 없기 때문이니,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현재의 마음은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며, 형상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보적경(寶績經)』에 이르기를 “가섭아, 모든 부처님도 과거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미래의 마음도 보지 못하며, 현재의 마음도 보지 못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하였다.
015_0352_c_08L或作是念心若能斯應有體是故經言如來說諸心住皆爲非心住非心住者第一義相續故如經何以故須菩提過去心不可得ㆍ現在心不可得ㆍ未來心不可此復云何過去心已滅故未來心未生故現在心不住故ㆍ無形故『寶積經』言迦葉一切佛不見過去心ㆍ不見未來心ㆍ不見現在心乃至廣說
015_0353_a_01L경에 이르기를 “만약 복덕의 덩어리가 진실로 있다면 여래께서는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뜻은 무엇인가?
‘덩어리’라는 것은 쌓인다[蘊]는 뜻이다. 가명(假名)이라면 진실하지 못한 것이고 진실하다면 쌓이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가명이 진실이 아님을 아는가?
제일의는 쌓여 덩어리가 됨이 없기 때문이며 속제(俗諦)에서만 언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다섯 가지 눈으로써는 전혀 얻을 것이 없는 것이 곧 부처님의 경계이니 이것으로써 마땅히 알게 된다.
생각을 여읜 청정한 인(因)은 그 경계를 얻을 수 없으니, 이런 까닭에 『대반야바라밀경(大般若波羅蜜經)』에서 “수보리야, 여래의 다섯 가지 눈은 제일의이어서 전혀 얻을 것이 없다. 만약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나를 비방하는 것이리라”고 이와 같이 말하였다.
015_0352_c_16L經曰若福德聚有實如來卽不說福德聚此意云何聚者薀義假名不實實卽非薀於何說聚云何知假名不實一義無積聚故俗諦中有言說故是五眼都無所得是佛境界以是應離想淨因無境可得是故大般若波羅蜜中如是言須菩提如來五眼於第一義都無所得若言有得愚人謗我
또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제일의인 부처님의 경계는 곧 얻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색상(色相)으로서의 여래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인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를 원만하게 갖추어진 색신(色身)으로써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신을 보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어떻게 보는가?
경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원만히 갖춘 색신은 곧 원만하게 갖춘 색신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실제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니 곧 색상(色相)으로서의 법신(法身)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원만하게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곧 법신이기 때문이니 생겨남이 없는 성품이 바로 항상 머물러 있는 여래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015_0353_a_02L復次疑曰若第一義佛境界是無所色相如來豈亦非有爲遣此疑須菩提於意云何如來可以具足色身見不須菩提言不也世尊如是此顯示見佛法身云何見耶如經如來說具足色身卽非具足色身此依實義卽於色相而見法身非具是法身故如說無生性是常住如來乃至廣說

또 의심하여 말하였다.
“만약 제일의인 부처님의 경계와 색상(色相)의 몸이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많은 덕을 원만히 갖추었을까? 말로 설법하는 상신(相身)도 또한 존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는 ‘내가 설법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시리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결정코 설법한 것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을 제거시키고자 하셨으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께서 설법한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곧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말로는 설할 수 없는 법을 바로 설법(說法)이라고 이름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설법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며 내외(內外)의 누(漏)와 무루(無漏)의 법에 얼마의 진실이 있어서 설할 수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015_0353_a_11L復次疑曰若第一義佛境界及色相身皆無有體豈具足衆德言說相身亦復非有遣此疑故經曰須菩提意云何如來作是念我有所說法耶如是等欲使定除有說執故經曰人言如來有所說法卽爲謗佛乃至無法可說是名說法此義云何說無體故不見內外漏ㆍ無漏法少有眞實而可說故
015_0353_b_01L수보리는 다시 이 설법에 대하여 믿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 세상에 이 법 설함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이가 있겠습니까? 저들은 중생도 아니고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닐 것입니다”라는 등의 말을 한 것이다.
어째서 중생이 아니라고 하였는가?
제일의에서는 온(蘊)과 이온(異蘊)에 나아가 그 실체를 추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경에서 “중생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왜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속제(俗諦)로써 5온(蘊)의 업(業)과 과(果)가 서로 호응하는데 의거해서 시설(施說)했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이라고 한다”고 한 것과 같다.
015_0353_a_20L須菩提復欲顯示於此所說信受者是故言頗有衆生於未來世聞說是法生信心不乃至彼非衆生非不衆生云何非衆生第一義卽薀異推求其體不可得故如經說非衆云何非不衆生以俗諦依於五薀業果相應而施設故如經是名衆生
또다시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제일의인 부처님 경계의 색신(色身)과 언설신(言說身)을 모두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법신의 실체가 성품이라 해서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자못 어떤 법에서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진실에서는 조그만 법이라도 얻은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얻은 것이 없는 그런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부른다고 말하였다.
어째서 얻은 것이 없는가?
경에 이르기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무슨 까닭에 평등하다고 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나라는 생각도 없고 중생이라는 생각도 없으며, 목숨이라는 생각도 없고 취한다는 생각도 없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나라는 것이 없는 가운데 평등함이 생겨나기 때문에 얻은 법이 없으니, 나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015_0353_b_04L復次疑曰若第一義佛境界色身ㆍ言說身皆不可得法身體性豈亦然耶爲遣此疑經曰須菩提於意云何頗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須菩提言世尊如是等此義云何佛證眞實不見少法是所得故以無所得是故說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故無所得經曰是法平等無有高下何故平等經曰以無我ㆍ無衆生ㆍ無命ㆍ無取如生無我中平等故無所得法無我亦如是
이와 같이 얻은 이치가 없다면 무슨 인(因)으로써 증득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모든 것이 착한 법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것이 착한 법인가?
실체가 있어서 얻을 수 있지만 얻을 것이 없다는 이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법이 서로 비슷하지 않다면 어떻게 그 인(因)을 성취할 수 있는가?
경에 이르기를 “착한 법이라고 말한 것은 여래께서 착한 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어떤 것을 법이 아니라고 하는가?
제일의는 생겨남이 없는 성품이기 때문이니, 이 인(因)은 곧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착한 법이란 속제의 언설로서 진실한 뜻이 아니다.
015_0353_b_16L此無得理以何因證經曰一切善法云何善法有體可得而能證無所得理法不相似豈得成因善法者如來說爲非法云何非法第一義無生性故當知此因卽無所善法俗諦言說非眞實義
무슨 까닭에 다시 수미산 티끌의 양만큼 많은 보배를 보시한 복에 비교하여 말했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에 용맹 정진하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다.
015_0353_b_21L何故復以須彌塵量寶施之福而挍量耶令修行者心勇進故
015_0353_c_01L
다시 의심하여 말하였다.
“만약 여래께서 중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면 어째서 다른 교파들과 더불어 서로 차이가 없이 경에서 ‘내가 선지식이 되었기 때문에 한량없는 중생을 태어나는 등의 모든 고통에서 다 해탈시킨다’라는 말을 했는가?”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내가 중생들을 제도했다’라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여기느냐? 여래께서는 실제로 어떤 중생도 제도하신 적이 없느니라”라는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중생이 없다’는 것은 제일의(第一義)이기 때문이고, 또한 큰 자비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똑같이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여래와 다른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제도해야 할 대상이 되기 때문에 여래에게도 곧 나라는 등의 네 가지 집착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능히 중생을 제도한다고 보면 이것은 아취(我取)가 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나라는 등에 집착하려고 하지 않는가?
015_0353_b_23L復次疑曰若如來說非衆生者云何不與餘教相違如有經言無量衆生以得我爲善知識故生等諸苦竝皆解脫爲遣此疑經曰須菩提於意云如來作是念我度衆生耶乃至實無有衆生如來度者如是等無衆生第一義故復次以大悲心攝同己若實有衆生異於如來是所度者如來卽有我等四取何以故若見有己能度衆生是我取故
경에 이르기를 “나라는 것에 대한 집착은 여래께서 집착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아니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선하지 않다는 말이다.
어떤 것이 착하지 않은 것인가?
모든 중생을 얽어매어 생사(生死)에 머물게 하는 까닭이다.
또한 ‘아니다’라는 것은 실체와 성품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엔 또 어떤 뜻이 있는가?
취할 대상도 없고 나 또한 취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니, 나라는 등의 집착은 얻을 만한 실체가 없다.
무엇 때문에 나라는 집착을 버리는 것이 집착이 아니라고 말하는가?
모든 범부들은 전도되어 망령되게 집착하므로 집착이 아니라고 말하여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경에서 “다만 무지(無智)한 범부생(凡夫生)이 망령되게 집착한다”라는 이와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아직 성인의 지위를 증득하지 못한 사람들이 각각 나라는 데에 봉착해 차별된 생각을 내므로 범부생(凡夫生)이라고 말한다. 그는 곧 비생(非生)이며 불선생(不善生)이기 때문이니, 설하는 사람이 착하지 못하면 비인(非人)이 된다.
또 법은 인연을 따라 일어날 뿐 내가 조작함이 없기 때문에 비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범부생이라고 말한 것은 세속을 따라 말한 것이다.
015_0353_c_10L何故不欲我等取耶經曰我取者如來說爲非取非者何義所謂不善云何不善縛諸衆生住生死故復次非者無體性義此復云何以無所取我亦無能取故若我等取無體可得何用遣我言非取耶以諸凡夫顚倒妄取言非取者令彼解故如經但無智凡夫生之所妄取如是等未得聖者各封於我別而生名凡夫生彼卽非生不善生如不善人說爲非人復次法從緣無我造作故名非生是故說名凡夫生者隨俗言故
015_0354_a_01L모든 중생들은 부처님의 색신(色身)에 대하여 대부분 집착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 까닭에 다시 색신은 성품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서른두 가지 상호를 성취한 것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 전륜성왕(轉輪聖王)도 마땅히 곧 여래일 것이니라”라는 이러한 말을 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색(色) 등의 몸에서 법신(法身)의 이치를 깨닫게 하고 이 법을 받아 지니는 시간이 쉬워지게 하려 하였다. 그런 까닭에 게송을 설하였다.
015_0353_c_22L以諸衆生於佛色身多生取著是故復說色身無性經曰須菩提於意云可以相成就見如來不乃至轉輪聖王應是如來如是等佛欲令於色等身見法身義受持時易故說頌言

만약 색상(色相)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니라.
015_0354_a_04L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여래는 법(法)으로 된 몸이니
다만 마땅히 법성(法性)만을 관찰할 것이나
법성은 보이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또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015_0354_a_06L如來法爲身
但應觀法性
法性非所見
彼亦不能知

‘색상으로써 나를 보려고 한다’는 것 등은 그 뜻이 무엇인가?
밝고 빛나는 상호를 보고 부처를 보았다고 말하고, 경전 등의 문자를 듣고 받아 지니고서는 나는 이것을 따라서 여래를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말한다.
“상호의 몸과 언설의 몸을 반연하여 닦고 익히면 마땅히 번뇌를 끊을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말하였다.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사람이니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 뜻은 무엇인가?
색(色)이나 문자(文字)는 그 성품이 진실하지 못하니 그 가운데 집착하면 이것은 삿된 도가 된다. 그러므로 이런 도를 행하면서 어떻게 부처를 볼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015_0354_a_07L以色見我其義云何謂有見光明相好言見於佛及有聽受經等文字言我隨逐而得如來彼作是言於相好身及言說身攀緣修習當斷煩惱爲除此見經曰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此義云何色及文字性非眞實於中取著是邪道故行於此道何能見佛
015_0354_b_01L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볼 수 있겠는가?
경에 이르기를 “여래는 법으로 된 몸이니 다만 마땅히 법의 성품만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법의 성품’이란 이른바 공(空)한 성품이니, 자성(自性)도 없고 생성(生性)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모든 부처님의 제일의(第一義)의 몸이니 만약 이것을 보면 부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마치 경에서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여래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십만송경(十萬頌經)』에서도 또 말하기를 “자씨(慈氏)가 공한 성품을 보면 이것을 여래를 보았다고 한다”라고 하였고, 『살차경(薩遮經)』에서는 또 말하기를 “집착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을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고 하였다.
“만약 집착함이 없어야 부처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면 법성(法性)을 반연하는 것은 장차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서 깨끗한 지혜의 마음으로써 법성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법성을 깨달아 알아야 할까?”라고 한다.
그런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법성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또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법성의 이치에서는 어떤 한 물건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저 지혜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대왕이여, 모든 법성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물질이 의지하는 것과 같지만 그 체성(體性)은 물질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물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능히 그 가운데에서 적연(寂然)히 아는 것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아 안다고 말한다”고 하였다.
‘이름하여 안다’고 하는 것은 속제를 따라 말로 설명하는 것이다.
015_0354_a_15L云何見耶經曰如來法爲身應觀法性法性者所謂空性ㆍ無自性ㆍ無生性等此卽諸佛第一義身若見於此名爲見佛如有經說不生不滅是如來故十萬頌經復作是說慈氏以見空性名見如來『薩遮經』中又作是說無取著見名爲見佛若無取著名見佛者攀緣法性將非取著以淨智心了知法性法性豈是所了知耶是故經言法性非所見彼亦不能知法性之處無有一物可名所知由是彼智亦不能知如有經言大王一切法性猶如虛空等與衆物爲所依止而其體性非是有物亦非無物能於此中寂然無知名爲了知名爲知者隨俗言說

또 의심하여 말하였다.
“지혜로도 법성을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모든 부처님은 장부의 상호를 원만히 갖추시고서 보리를 증득하셨을까? 아마도 원만히 갖춘 장부의 모습을 보게 되면 보리를 증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모든 상호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는 법계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015_0354_b_07L復次疑曰若智亦不能知法性者何諸佛具丈夫相而證菩提以見具足丈夫相者得菩提故爲遣此疑須菩提於意云何如來諸相成就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如是等此中顯示法界相
그 뜻은 무엇인가?
만약 모습이 성취되는 것이라면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실체일 것이니 이 모습이 소멸할 때를 곧 단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보살도 법이 단멸하는 것은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생겨나기 때문에 곧 단멸이 있는데 모든 법은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존재한다는 견해와 아주 단멸한다는 두 가지 극단적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하니,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를 멀리 여의면 그것이 바로 법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 생겨남이 없는 이치를 믿고 이해한 복이 온갖 보배를 보시한 복보다 많음을 설명한 것이다. 경에서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항하강 모래알과 같이 많은 세계에 가득한 일곱 가지 보배를 보시에 사용한다 해도 만약 어떤 보살이 나라는 것이 없음을 깨달아 생멸이 없는 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한다면”이라는 이와 같은 말을 한 것과 같다.
다만 생겨남이 없는 이치를 좋아하고 즐거워하여 닦고 익힌 복이 저것보다 많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하였다.
015_0354_b_13L其義云何若相成就是眞實有此相滅時卽名爲斷有菩薩見法斷故何以故以生故卽有斷一切法是無生性所以遠離常斷二邊遠離二邊是法界相是故於此說能信解無生之福多於寶施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以恒河沙等世界七寶持用布施若菩薩得無我無生法忍如是等但於無生愛樂修習福多彼故如有頌言

만약 어떤 사람이 바른 법을 지니거나
보리의 마음을 낸다고 해도
공(空)한 이치를 깨닫느니만 못하니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015_0354_b_22L若人持正法
及發菩提心
不如解於空
十六分之一
015_0354_c_01L
혹 어떤 이가 기억하여 말하였다.
“만약 모든 법이 생겨남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복덕(福德)이 생겨날까?”그러므로 경에서는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복덕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는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복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일의 가운데에서는 어떤 복도 취할 것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보살은 복덕에 집착하지 않습니다≻라고 아뢰었다’라는 말은 보살은 마땅히 복이 원만하기 때문이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보살이 마땅히 집착한다≻라고 하였다’라는 것은 속제(俗諦)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탐하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제일의제이기 때문이다.
015_0354_c_01L或念言若一切法無生者云何而有福德生耶是故經言須菩提菩薩不應取福德如是等不應取福非第一義中有福可取故須菩提白佛言世尊菩薩不取福德者菩薩於福應圓滿故佛言須菩提菩薩應取者諦故不應貪著者第一義諦故

또다시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제일의제에 취할 만한 복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경전에서는 ‘여래는 복과 지혜의 자량(資糧)이 원만하여 보리좌(菩提座)에 앉아서 열반(涅槃)에 나아가셨다’라고 하였을까?”
그러므로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는 오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며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한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설명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하였다.
열반에는 진실한 처소도 없는데 거기에 이르는 것을 간다고 이름하고, 생사에도 진실한 처소가 없는데 저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을 온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래라는 뜻은 가는 것도 아니요 오는 것도 아니니, 여기에서는 머무름이 없는 열반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록 나고 죽음과 열반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지만 삼계의 뇌옥(牢獄)에서 중생들을 인도하고 깨우쳐서 미래제(未來際)가 다할 때까지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다.
015_0354_c_08L復次疑曰若第一義無福可取何故餘經作如是說如來福智資糧圓滿坐菩提座趣於涅槃爲遣此疑經曰須菩提若有人言如來若去若來ㆍ若住若坐若臥是人不解我所說義是等涅槃無有眞實處所而至於彼名之爲去生死亦無眞實處所而從彼出名之爲來不去不來是如來義此卽顯示無住涅槃雖生死ㆍ涅槃無有一異而於三界牢獄引喩衆生未來際而爲利益
015_0355_a_01L
또 의심하여 말한다.
“만약 나고 죽음과 열반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가고 옴이 없는 것이라면 여래께서는 어찌하여 수미산(須彌山)과 같이 쌓이고 모인 것과 동등하여 편안히 머문다고 할까?”
그러므로 이런 가운데 이것은 하나이고 이것은 항상한 것이며, 나뉨이 없느니 있느니 하는 견해와 하나로 합쳐진 것이라는 견해를 버리게 하기 위해서 경에서 이르기를,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작은 티끌로 만든다고 한다면 이 작은 티끌의 수효는 많겠느냐, 그렇지 않겠느냐?”라고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한 것이다.
이 가운데 ‘작은 티끌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로 합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버리게 하려는 것이고, ‘작은 티끌의 수효가 아니다’라는 것은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하나로 합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버리게 하려는 것이며, ‘이것을 이름하여 작은 티끌의 수효이다’라고 한 것은 나누어질 수 있는 물질이 아닌데 중(衆)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 쌓여서 이루어진 덩어리라는 견해를 버리게 하기 위한 까닭에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다”라는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하였다.
015_0354_c_19L復次疑曰若生死ㆍ涅槃不可得故無去來者如來豈如須彌山等積聚一合而安住耶爲遣此中是一是常ㆍ無分有分一合見故經曰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以三千大千世界碎爲微塵是微塵衆寧爲多不如是等微塵衆多遣無分一合見非微塵衆遣有分一合見是名微塵衆非有分物說之爲衆復爲遣積聚見故經曰如來說三千大千世界卽非世界如是等
무엇 때문에 다시 세계가 아니라고 말했는가?
경에 이르기를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곧 이것은 하나로 합해진 것이다’라는 견해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에 하나로 합해진 것이라는 견해를 없애고자 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견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째서 견해가 아니라고 했는가?
아무것도 있지 않은 가운데에서 망령되게 보기 때문이니, 경에서 “하나로 합해진 모습은 곧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나라는 견해에 집착한 범부들이 그 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하나로 합해진 것’이라는 말은 곧 속제(俗諦)의 모습이며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일체법의 본래 성품이 생겨남이 없으니,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도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언설(言說)을 여의었는데 나라고 집착하는 범부가 이 가운데에서 망령되게 집착하는 것이다.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가 가르침과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하시려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였다.
015_0355_a_07L何故復說非世界耶經曰若世界實有卽是一合見何故不欲一合見耶經曰卽爲非見云何非見於非有中而妄見故如經一合者卽是不可說但我見凡夫而取其此義云何一合者是俗諦相非眞實有何以故第一義一切法本性無無生故不可得不可得故離於言而我執凡夫於中妄取若不欲我見與教相違如有頌言

나는 나로써 의지를 삼거늘
어찌 다른 이로 의지를 삼으랴.
지혜로운 이는 능히 나를 조복시켜
천상에 태어나서 안락(安樂)을 누린다.
015_0355_a_16L我以己爲依
詎以他爲依
智者能調我
生天受安樂
015_0355_b_01L
이런 의심을 버리게 하기 위하여 경에 이르기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나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수명이라는 견해, 취한다는 견해를 설법한다’고 한다면 바른 말씀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등의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나를 본다고 말씀하셨는가?
인도하고 포섭하여 믿고 즐거워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여기에서는 5온(蘊)은 속제를 따라 말한 것이어서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 나를 본다고 한 것은 곧 그 성품을 멀리 여읜 것이니, 경에서 “곧 나라는 견해 등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세존께서는 나고 죽음과 열반과 나라는 것 등이 합해진 것이라는 소견을 여의었기 때문에 보리를 증득하셨고, 또 모든 중생[含識]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그들로 하여금 함께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려고 하셨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보살승(菩薩乘)의 마음을 낸 자는 모든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여 법이라는 생각을 내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알고[知] 본다[見]’는 것은 깨달음을 증득할 때를 말하며, ‘믿고 이해한다[信解]’는 것은 닦고 배울 때를 말한다. 믿고 이해한 사람은 오히려 법이라는 생각조차도 내지 않는데, 더구나 법이 아닌 생각이겠느냐?
여기에서 ‘법이라는 생각이니 법이 아니라는 생각이니 하는 것’은 법과 같다고 분별하거나 법과 같지 않다고 분별하는 법상(法想)을 말한다.
015_0355_a_18L爲遣此疑經曰須菩提若有人言來說我見ㆍ衆生見ㆍ命見ㆍ取者見爲正語不如是等佛何故說見我耶爲誘攝信樂者故此於五薀隨俗名言謂眞實是故諸佛所見我者是遠離如經卽非我見世尊以離生死涅槃我等合見而得菩提復愍諸含識欲令同證是故言須菩提發菩薩乘者於一切法應如是知ㆍ如是見ㆍ如是信解不生法想知見者謂證時解者修學時信解之人法想尚不生況非法想此云法想非法想謂如法分別ㆍ不如法分別法想
법과 같다면 어째서 생겨나지 않는가?
경에 이르기를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생각이 아니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모든 법은 생겨나는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생겨남이 없다면 그것은 곧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본단 말인가? 속제(俗諦)이기 때문이니, 경에 이르기를 “그것을 법상(法想)이라고 말한다”고 한 것과 같다.
무슨 까닭에 다시 이 경을 받아 지닌 복에 대하여 말하였는가?
중생들로 하여금 마침내는 믿게 하려고 한 까닭이다.
경에 이르기를 “가령 연설함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제일의에는 세간(世間)도 출세간(出世間)도 없고, 어떤 법이나 어떤 물질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설법할 만한 것이 없으며, 여실(如實)한 이치를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을 이름하여 설법이라고 한다.
이 머무름이 없는 열반은 유위법을 관찰한 연후에야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
어떻게 관찰하는가?
경에 이르기를 “그때 세존께서 게송을 설하셨다”고 하였다.
015_0355_b_08L如法何故不生經曰法想者如來說爲非想復云何一切法無生性故若無生卽非有於何知見以俗諦故如經曰名法想何故復說受持之福欲令衆生畢竟信故經曰如無演說是名爲此何謂耶第一義無世出世ㆍ若法若物少有可說能如實義如是說者乃名爲說此無住涅槃觀察有爲然後方證云何觀察經曰爾時世尊而說頌言

모든 유위법(有爲法)은
별과 삼눈[翳]과 등불과 환상과 같고
이슬과 물거품과 꿈과 번개와 구름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015_0355_b_18L一切有爲法
如星翳燈幻
露泡夢電雲
應作如是觀
015_0355_c_01L
지금 이 게송 가운데 유위법의 아홉 가지 실체와 모습을 관찰함을 말하였다.
어떤 것을 아홉 가지라고 말하는가?
이른바 자재(自在)함을 관찰하는 것이고, 대상 물질을 관찰하는 것이며, 옮겨감[遷]과 움직임[動]을 관찰하는 것이며, 실체와 자성을 관찰하는 것이며, 젊고 장성함을 관찰하는 것이며, 수명을 관찰하는 것이며, 작자(作者)를 관찰하는 것이며,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며, 있고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자재함을 관찰한다’하는 것은 별과 같은 것이다. 비유하면 별들은 형상을 허공에 붙여 방향을 따라 운행하며 광채[光色]가 치성(熾盛)해지니 가령 이 별이 오래도록 머문다 해도 마침내는 법을 따라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와 같은 인천(人天)은 모든 복의 과보를 받아서 재물이 풍부하고 지위가 귀하고 막중하여 대중들이 우러러보는 이것이 비록 자재하긴 하지만 마침내는 공(空)으로 돌아가고 만다.
‘대상 물질을 관찰한다’는 말은 눈에 백태가 낀 것[瞖]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눈병이 나면 깨끗한 허공 가운데 솜뭉치[毛輪]나 떠다니는 꽃잎[飛花]이 보이거나 달이 두 개로 보이는 것과 같다. 밝지 않은 눈먼 인식작용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진실한 이치인 아무 물질도 없는 곳에서 안팎 세간과 출세간의 가지가지 모든 법을 보게 된다.
015_0355_b_20L今此頌中觀察有爲九種體相何謂爲九所謂觀察自在ㆍ觀察境物ㆍ觀察遷動ㆍ觀察體性ㆍ觀察少盛ㆍ觀察壽ㆍ觀察作者ㆍ觀察心ㆍ觀察有無此中觀察自在如星譬如星等著象於空隨方運行光色熾盛假令久住終隨劫盡如是人天受諸福報豐財重位衆所瞻仰雖久自在會亦歸空觀察境物如瞖譬如瞖目於淨空中見有毛輪ㆍ飛花ㆍ二月無明瞖識亦復如是於眞實理無物之處而見內外世出世閒種種諸法
‘옮겨가는 움직임[遷動]을 관찰한다’하는 것은 등불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등의 불꽃이 생겨난 자리에서 소멸되고 다른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불꽃으로 인하여 다른 곳에서도 불꽃이 생겨나듯이 생각마다 계속 이어져 옮겨감과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앞 세계의 모든 온(蘊)은 앞 세계에서 사라지고 다른 세계에 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앞의 온으로 인하여 뒤 세계의 온이 생겨나 서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그 형상은 마치 옮겨가고 움직이는 듯하니, 모든 범부들이 자주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것을 말한다.
‘실체와 성품을 관찰한다’는 것은 환상[幻]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환상의 힘으로 인하여 변화로 여인의 용모를 만들어 놓으면 실체와 성품이 있지도 않은데도 그것을 보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진실한 것이라고 집착한다.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허망한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라서 애초부터 실체가 없는 것인데 진실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실체가 있는 것이라는 견해를 내게 된다.
‘젊고 장성함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은 비유하면 마치 아침 이슬과 같아서 해가 떠오르면 곧 말라버린다. 성년(盛年)의 용모와 형색도 이와 같아서 한번 무상(無常)함을 만나면 이미 쇠퇴하여 사라지게 된다.
015_0355_c_09L觀察遷動如燈譬如燈焰卽生處滅不至餘處然因此焰餘處焰生念念相續如有遷動衆生亦爾前趣諸薀卽前趣滅不往餘趣然因前薀後趣薀生以相續故狀如遷動言諸凡夫數往餘趣觀察體性如幻如因幻力變作女人容貌可觀體性非有不了之者取爲眞實一切法亦復如是從妄緣生初無實體未了實者生有體見觀察少盛如露譬如朝露見日卽晞盛年容色亦復如是遇無常已從衰謝
015_0356_a_01L‘수명을 관찰한다’하는 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물거품과 같아서 혹 처음 생겨날 때부터 실체와 형상을 이룩하지 못하거나, 혹은 겨우 생겨나자마자 잠깐 동안 머물러 있다가 곧 다시 흩어져 소멸되듯이 수명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혹 처음에 생(生)에 의탁하여 태속에 감추어져 있다가 생을 받아 태어난 뒤엔 어린아이가 되었다가 소년ㆍ중년, 나아가 마침내 쇠퇴하여 늙어지게 되면 무너져 소멸하고 만다.
‘작자(作者)를 관찰한다’하는 것은 꿈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꿈속에서 먼저 보고 듣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고 훈습된 일을 따라 머물게 되는 것처럼 비록 작자가 없다 하더라도 갖가지 경계가 분명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시작이 없는 과거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번뇌와 선(善)ㆍ불선(不善)의 업(業)이 있어서 거기에 훈습된 채 머무니, 비록 내가 짓는 행위의 실체가 아니라 하더라도 끝없는 생사(生死) 등의 일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을 관찰한다’하는 것은 번개와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번개의 빛이 생겨날 때에 즉시 소멸하는 것처럼 마음도 이와 같아서 찰나(刹那)에 반드시 소멸하고 만다.
015_0355_c_20L觀察壽如泡譬如水泡或有始生未成體相或纔生已或暫停住卽歸散滅壽亦如是或始託生在於胎藏正生生已從作嬰兒少年中年乃至衰老歸於壞滅觀察作者如夢譬如夢中隨先見聞憶念分別熏習住故雖無作者種種境界分明現前如是衆生無始時來有諸煩惱善不善業熏習而住雖無有我是能作者而現無涯生死等事觀察心如電譬如電光生時卽滅心亦如剎那必謝
‘있고 없음을 관찰한다’하는 것은 구름과 같은 것이니, 비유하면 마치 공중에 구름이 먼저는 없다가 뒤에 별안간 생겨나고 잠시 후엔 또다시 소멸하는 것처럼 유위(有爲)의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실체와 자성도 본래 공(空)한 것이건만 허망한 인연을 따라 존재하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도로 무(無)로 돌아가고 만다.
또 먼저는 속제(俗諦)에 의거하여 별 등 아홉 가지로써 비유를 들어 유위법을 안립(安立)하였고, 나중에는 중론(中論) 제일의(第一義)에 의거하여 모든 법은 소멸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며, 끊어져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 존재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반야바라밀 가운데 모든 법은 쌓이거나 머무는 성품이 아니라는 것으로 이 게송을 해석하였다.
015_0356_a_08L觀察有無如雲如空中先無後有須臾復滅有爲諸法亦復如是體性本空從妄緣有有緣旣散還復歸無復次先依俗諦以星等九喩安立有爲後依中論第一義切法不滅不生ㆍ不斷不常ㆍ不一不異ㆍ不來不出及般若波羅蜜中一切法非積住性解釋此頌
015_0356_b_01L그 뜻은 무엇인가?
비유하면 마치 별빛과 같아서 자체가 항상 소멸하는 것처럼 유위법도 그러하여 그 성품이 항상 변천하여 없어진다.
비유하면 사람의 눈병과 같아서 비록 작용은 없더라도 병의 인연 때문에 생겨나는 것처럼 유위법도 그러해서 다만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비유하면 등(燈)의 불꽃과 같아서 생각마다 꺼져버리듯이 유위의 법도 이와 같아서 찰나라도 머무르지 않는다.
비유하면 환술(幻術)로 만들어놓은 것과 같아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하고 항상한 것이라고 집착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이 실상이라고 빠져들듯이 유위법에 집착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비유하면 마치 아침 이슬과 같아서 물질에 있어서는 비록 번창한다 해도 그 실체는 오직 하나인 것처럼 이른바 유위의 내온(內蘊:身)을 불어나게 하고 윤택하게 하여 생(生)마다 다름이 있을지라도 본래의 성품은 같은 것이니 모두가 애욕을 바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마치 많이 모인 물이 원인이 되어 빗방울이 물거품을 이루면서 각각 따로 생겨났다가 각각 따로 소멸하듯이 중생들의 모든 행업(行業)도 또한 이와 같아서 8만 4천이 각각 따로 생기고 따로 소멸한다.
015_0356_a_15L其義云何譬如星光自體常滅有爲亦爾性恒遷謝如人目瞖雖無作者病緣故生有爲亦然但從緣起譬如燈焰念念恒斷有爲如是剎那不住如幻所作不了之者取爲實常愚夫迷實取有爲法亦復如是譬如泫露在物雖繁體唯是一所謂滋潤有爲內薀生生有別本性亦同咸資愛故如因積水雨渧成泡各別而生各別而滅衆生諸行亦復如是八萬四千別生別滅
비유하면 마치 꿈속의 경계와 같아서 온다 해도 온 곳이 없는데 저들은 꿈속의 마음을 가지고 부질없이 온 곳에 집착하고 있는 것과 같다. 유위의 법도 그러하여 온 곳을 얻을 수 없는데 무명(無明)의 혼몽한 인식작용이 망령되게 온 곳에 집착한다.
비유하면 마치 번개[奔電]와 같아서 그 성품은 변천해 움직이지 않으나 앞의 처소에서 앞의 것은 소멸하고 뒤의 처소에서 뒤의 것이 생겨나며 그 모습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간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유위의 모든 법이 가는 것도 이와 같다.
비유하면 마치 허공의 구름과 같아서 항상 쌓이거나 머물지 않는 것처럼 유위법의 모습도 이와 유사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이와 같은 이름은 세속제(世俗諦)에 의거한 것이기 때문에 유위법을 안립(安立)하였지만, 중론(中論) 가운데에서는 진실하여 생겨나지 않는 등의 이치를 성립하고 있으니 유위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만 한다.
015_0356_b_02L如夢中境來無所從而彼夢心妄見來處有爲亦爾來不可得無明夢識妄見爲來譬如奔電性非遷動前處前滅後處後生以相相似說之爲去有爲諸法去亦如是譬如空雲非恒積住有爲之相類此應知如是名爲依俗諦故安立有爲如『中論』中成立眞實不生等義於有爲法應如是知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저 논(論) 가운데서는 자생(自生)ㆍ타생(他生)ㆍ자타공생(自他共生)ㆍ무인생(無因生)으로 모든 법을 관찰해보면 본래 생겨나는 이치가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은 눈병이 난 사람과 비슷하여 유위법이 생겨난다 해도 이 법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빛이 소멸함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유위법도 그처럼 마땅히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 등불 자체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어찌 찰나라도 끊어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유위법이 단멸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또 생겨나는 것이 아니어서 환술(幻術)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기 때문에 유위의 법은 항상 존재하는 이치가 없고 마땅히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치를 알아야만 한다.
015_0356_b_10L此復云何彼論中以自ㆍ他ㆍ共ㆍ無因觀察諸法本無生義如是似瞖有爲生法應知不生以不生故星光有滅違於道有爲亦然應知不滅復次不生故彼燈自體尚不可得何有剎那而說爲斷有爲不斷類此應知復次不生故似幻所作有爲之法無有常義知不常
015_0356_c_01L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침 이슬과 같으니, 유위의 모든 법도 한결같이 지속되는 이치가 성립될 수 없다. 애욕이 생겨남을 윤택하게 하며 이치에 계합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한결같이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물거품과 같으니, 차별성이 있는 유위의 법은 그 성품이 다르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꿈속에서 보는 경계와 같으니, 유위의 법은 본래 오는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오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번개의 빛과 같으니, 생겨나고 소멸되는 법도 이와 비슷하므로 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와 서로 맞지 않다. 그러므로 가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름과 같으니, 그 자체도 오히려 존재하는 실체가 아닌데 어떻게 쌓이고 머무르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를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게송을 설하리라.
015_0356_b_18L復次不生故似於朝露有爲諸法一義不成愛能潤生不契理故應知不一復次不生故似泡差別爲之法異性不成應知不異復次不生故似夢中境有爲之法本無來義應知不來復次不生故似於電光滅之法以相似故說爲去者理不相應知不去復次不生故如雲之法體尚非有豈積住耶如是應知頌曰

지금 나 공덕시(功德施)는
모든 미혹과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중관문(中觀門)을 열어
이 경의 뜻을 대략 서술하였다.
015_0356_c_03L我今功德施
爲破諸迷取
開於中觀門
略述此經義

바라건대 모든 중생의 무리는
보고 듣고 이 경을 받아 지녀
진제를 비추고 속제를 무너뜨리지 않아야
밝고 또렷한 마음 걸림 없으리라.
015_0356_c_05L願諸衆生類
見聞若受持
照眞不壞俗
明了心無㝵
015_0356_c_06L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범어 gandharva-nagara의 번역으로 건달바성(揵闥婆城)ㆍ건달박성(健達縛城)ㆍ헌달박성(巘達縛城)으로도 표기한다. 줄여서 바성(婆城)ㆍ건달성(乾達城)ㆍ건성(乾城)이라고도 한다. 의역하면 심향성(尋香城)이라고 한다. 실체가 없이 공중에 출현하는 누각ㆍ산천ㆍ임야를 가리키는 말이다. 건달바신(乾闥婆神)이 공중에서 변화하여 보이는 성곽이기 때문에 건달바성이라고 칭한다고 전한다. 혹은 바다나 사막, 또는 열대의 원시림 중에서 공기 밀도가 다를 때 광선이 굴절되어 나타나는 신기루를 가리키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이것으로 실상이 없는 법을 비유한다.
  2. 2)선화륜(旋火輪)은 사람이 횃불을 공중에서 돌릴 때 바퀴 같이 둥근 모양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3. 3)아사세왕(阿闍世王)을 말한다. 범명 Ajātaśatru, 팔리명 Ajātasattu의 간략한 음역이다. 중인도 마가다국의 빈바사라왕의 아들로, 모친이었던 위제희(韋提希) 부인이 회태했을 때, 점을 보니 장차 부왕을 살해할 아이라 했기에 아자타샤트루, 즉 미생원(未生怨)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미생원이란 태어나기 전에 원한을 가졌다는 뜻이다. 훗날 석가모니에게 귀의하여 불법의 보호자로서 널리 교법을 폈다.
  4. 4)가라(歌羅)는 범어 kalā의 음역이다. 지극히 작은 수량을 말한다. 혹은 달의 직경의 16분의 1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가라분(歌羅分)ㆍ가라분(哥羅分)ㆍ가라분(伽羅分), 가라분(迦羅分)이라고도 표기한다. 수절(豎折)ㆍ계분(計分)ㆍ역승(力勝)ㆍ분칙(分則)ㆍ교량분(校量分) 등으로 의역한다.
  5. 5)『능가경』 제3권「집일체불법품(集一切佛法品)」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