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中論卷第四

ABC_IT_K0577_T_004
016_0387_c_01L중론 제4권
016_0387_c_01L中論卷第四

용수보살 지음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범지 청목주석
박인성 번역
016_0387_c_02L龍樹菩薩造
梵志靑目釋
姚秦三藏鳩摩羅什譯

22. 여래를 관찰하는 장[觀如來品]16偈
016_0387_c_04L觀如來品第二十二[十六偈]

【문】 모든 세간에서 존귀하신 분을 들라면 오직 바르게 변지(遍知)하시는 여래가 있을 뿐이다. 법왕(法王)이라 불리는 일체지자(一切智者) 이 분은 존재하신다.
016_0387_c_05L問曰一切世中尊唯有如來正遍知號爲法王一切智人是則應有
【답】 이제 자세히 생각해 보라. 만약 존재한다면 파악되어야 한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해 파악되겠는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래는 다음과 같다.
016_0387_c_07L答曰今諦思惟若有應取若無何所取以故如來

5온이 아니네. 5온을 떠난 것이 아니네.
이 분과 그것이 서로의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네.
어디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1)
016_0387_c_09L非陰不離陰
此彼不相在
如來不有陰
何處有如來
016_0388_a_01L
만약 여래가 실재한다면 5온이 곧 여래이겠는가, 5온을 떠나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겠는가,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여래가 5온을 소유하겠는가? 이것들은 모두 옳지 않다. 5온이 곧 여래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생멸의 상(相)을 갖기 때문이다. 5온은 생멸의 상을 갖는다. 만약 여래가 곧 5온이라면 여래는 생멸의 상을 갖는 것이 된다. 만약 생멸의 상을 갖는다면 여래는 무상해서 단멸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또 취착하는 자[受者]와 취착[受法]이 하나가 될 것이다. 취착하는 자는 여래이고 취착은 5온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가 곧 5온인 것은 아니다.
5온을 떠나서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5온은 떠나 여래가 존재한다면 생멸의 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래는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또 눈 등의 감관[根]들은 보거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5온을 떠나 또한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016_0387_c_11L若如來實有者爲五陰是如來爲離五陰有如來爲如來中有五陰爲五陰中有如來爲如來有五陰是事皆不然五陰非是如來何以故生滅相五陰生滅相若如來是五陰如來卽是生滅相若生滅相者如來卽有無常斷滅等過又受者受法則一者是如來受法是五陰是事不然故如來非是五陰離五陰亦無如來若離五陰有如來者不應有生滅相若爾者如來有常等過又眼等諸根不能見知但是事不然是故離五陰亦無如來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이 마치 그릇 속에 과실이 있고 물 속에 물고기가 있는 것과 같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 다름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또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 상 위에 사람이 있고 그릇 속에 우유가 있는 것과 같다면, 그렇다면 다름[異]이 있게 되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자식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면, 그렇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떤 것들이 여래이겠는가?
016_0388_a_02L如來中亦無五陰何以故若如來中有五陰如器中有果水中有魚者則爲有異若異者卽有如上常等過是故如來中無五陰又五陰中無如來何以故若五陰中有如來如牀上有人器中有乳者如是則有別異如上說過是故五陰中無如來如來亦不有五陰何以故若如來有五陰如人有子如是則有別異若爾有如上過是事不然是故如來不有五陰如是五種求不可得何等是如來
【문】 이와 같은 주장[義]으로 여래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
016_0388_a_13L問曰如是義求如來不可得五陰和合有如來

【답】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2)
016_0388_a_14L答曰
陰合有如來
則無有自性
若無有自性
云何因他有

만약 여래가 5온이 화합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5온의 화합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016_0388_a_16L若如來五陰和合故有卽無自性何以因五陰和合有故
【문】 여래는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할 따름이다.
016_0388_a_18L問曰如來不以自性有但因他性有
【답】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타성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다. 또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성을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타성이라 하지 못한다.
016_0388_a_19L答曰若無自性云何因他性有何以故他性亦無自又無相待因故他性不可得不可得故不名爲他

만약 어떤 법(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我)’가 없는 것이네.
‘나’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 (3)
016_0388_a_22L復次
法若因他生
是卽爲非我
若法非我者
云何是如來
016_0388_b_01L
또 만약 어떤 법이 뭇 연(緣)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다섯 손가락에 의존해서 주먹이 있을 때 이 주먹에는 자체(自體)가 없듯이, 그렇듯이 5온에 의존해서 ‘나’라 할 때 이 ‘나’에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 ‘나’에는 중생ㆍ사람[人]ㆍ천신ㆍ여래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만약 여래가 5온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떻게 여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만약 어떤 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가 없는 것이네. ‘나’가 법(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라고 읊은 것이다.
016_0388_b_01L若法因衆緣生卽無有我如因五指有拳是拳無有自體如是因五陰名是我卽無自體我有種種名或名衆生如來等若如來因五陰有卽無自性無自性故無我若無我何說名如來是故偈中說法若因他是卽爲非我若法非我者云何是如來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4)
016_0388_b_09L復次
若無有自性
云何有他性
離自性他性
何名爲如來

또 자성이 없다면 타성 또한 있지 않다. 자성에 의존하기에 타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성과 타성 둘 모두 없는 것이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016_0388_b_11L若無自性他性亦不應有因自性故名他性此無故彼亦無是故自性性二俱無若離自性他性誰爲如來


만약 5온(陰)에 의존하지 않고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지금 5온을 취착(取著)하는 것이기에
여래라 말하네. (5)
016_0388_b_14L復次
若不因五陰
先有如來者
以今受陰故
則說爲如來

지금 실제로는 5온을 취착하지 않으니
다시 여래가 존재하지 않네.
(5온을) 취착하지 않아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취착하겠는가? (6)
016_0388_b_17L今實不受陰
更無如來法
若以不受無
今當云何受

만약 아직 취착하지 않았다면
취착되는 것[受法]1)을 취착이라 하지 않네.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네. (7)
016_0388_b_18L若其未有受
所受不名受
無有無受法
而名爲如來

만약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여래를 구할 수 없다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여래가)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취착 속에 존재하겠는가? (8)
016_0388_b_19L若於一異中
如來不可得
五種求亦無
云何受中有

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9)
016_0388_b_21L又所受五陰
不從自性有
若無自性者
云何有他性
016_0388_c_01L
만약 5온을 아직 취착하지 않았는데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이 여래는 지금 5온을 취착해서 여래가 된 것이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을 때는 먼저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5온을) 취착하겠는가?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다면 5온을 취착(取著)이라 하지 않는다.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는다. 또 여래는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5온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럴진대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타성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해서 존재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자성이 없기 때문에 타성 또한 없다.
016_0388_b_22L若未受五陰先有如來者是如來今應受五陰已作如來而實未受五陰先無如來今云何當受又不受五陰者五陰不名爲受無有無受而名爲如來又如來一異中求不可得陰中五種求亦不可得若爾者云何於五陰中說有如來又所受五陰從自性有若謂從他性有若不從自性有云何從他性有何以故以無自性故又他性亦無

이런 이치가 있기에
취착함도 공(空)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네.
어떻게 공한 것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10)
016_0388_c_09L復次
以如是義故
受空受者空
云何當以空
而說空如來

이런 이치로 사유해 보면 취착함[受]과 취착하는 자[受者] 모두 공하다. 만약 취착이 공(空)하다면 어떻게 공한 취착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016_0388_c_11L以是義思惟受及受者皆空若受空云何以空受而說空如來
【문】 그대는 취착함도 공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공한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는가?
016_0388_c_13L問曰謂受空受者空則定有空耶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공한 것은 언설할 수 없네.
공하지 않은 것은 언설할 수 없네.
공한 것이면서 공하지 않은 것,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은 언설할 수 없네.
단지 가명(假名)으로 말할 따름이네. (11)
016_0388_c_14L答曰何以故
空則不可說
非空不可說
共不共叵說
但以假名說

법들은 공하니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하지 않으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한 것이면서 공하지 않으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2) 모순되는 것을 타파하고자 가명(假名)으로 언설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해 보건대, 법들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이런 저런 공박으로 공박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016_0388_c_17L諸法空則不應說諸法不空亦不應諸法空不空亦不應說非空非不空亦不應說何以故但破相違故假名說如是正觀思惟諸法實相中不應以諸難爲難何以故

적멸에는
‘상주한다’나 ‘무상하다’ 따위의 네 가지가 있지 않네.
적멸에는
‘한계가 있다’나 ‘한계가 없다’ 따위의 네 가지가 있지 않네.(12)
016_0388_c_22L寂滅相中無
常無常等四
寂滅相中無
邊無邊等四
016_0389_a_01L
법들의 실상(實相)은 이와 같이 미묘한 적멸(寂滅)이다. 단지 과거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그릇된 견해을 일으킨다. 즉 ‘세간은 상주한다’, ‘세간은 무상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이면서 무상한 것이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이다. 적멸에는 (이 견해들이) 모두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들의 실상은 완전히 청정해서 취할 것이 없다. 공성(空性)은 취착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하물며 네 종류의 견해가 있겠는가? 네 종류의 견해는 모두 취착[受]에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법들의 실상에는 취착에 의존하는 것이 없다. 네 종류의 견해는 모두 자기의 견해는 귀하다고 하고 남의 견해는 천하다고 한다. 법들의 실상에는 이편이나 저편이 없다. 그래서 적멸에는 네 종류의 견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견해가 있듯이, 미래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견해가 있는데 또한 그와 같다. 즉 ‘세간은 한계가 있다’, ‘세간은 한계가 없다’, ‘세간은 한계가 있는 것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이다’, ‘세간은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이다.
016_0389_a_01L諸法實相如是微妙寂滅但因過去世起四種邪見世閒有常世閒無常世閒常無常世閒非常非無常寂滅中盡無何以故諸法實相畢竟淸淨不可取空尚不受何況有四種見種見皆因受生諸法實相無所因受四種見皆以自見爲貴他見爲賤法實相無有此彼是故說寂滅中無四種見如因過去世有四種見因未來世有四種見亦如是世閒有邊閒無邊世閒有邊無邊世閒非有邊非無邊
【문】 이와 같이 여래를 타파하는데 그렇다면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016_0389_a_13L問曰若如是破如來者則無如來耶

【답】
그릇된 견해가 깊고 두터운 자는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여래의 적멸에 대해서도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네. (13)
016_0389_a_14L答曰
邪見深厚者
則說無如來
如來寂滅相
分別有亦非
016_0389_b_01L
그릇된 견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는 열반의 도(道)를 파괴하는 것이다.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란, 추대(麤大)한 그릇된 견해로, ‘죄나 복이 없다’, ‘여래 등의 성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일으켜서 선을 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다. ‘열반의 도를 파괴하는 것’이란, ‘나’(我)에 탐착(貪著)해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선을 일으키고 악을 멸한다면 선을 일으키기 때문에 세간의 즐거움을 얻지만,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깊고 두터운 그릇된 견해이다. 이에 세간의 즐거움을 잃는데 하물며 어찌 열반을 잃지 않겠는가? 만약 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그릇된 견해이다. 왜 그러한가? 여래의 적멸에 대해서 갖가지로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멸 속에 여래가 존재한다고 분별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016_0389_a_16L邪見有二種一者破世閒樂二者涅槃道破世閒樂者是麤邪見言無無福無如來等賢聖起是邪見善爲惡則破世閒樂破涅槃道者著於我分別有無起善滅惡起善故得世閒樂分別有無故不得涅槃故若言無如來者是深厚邪見乃失世閒樂何況涅槃若言有如來亦是邪見何以故如來寂滅相而種種分別故是故寂滅相中分別有如來爲非

이와 같이 자성이 공한데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네. (14)
016_0389_b_04L如是性空中
思惟亦不可
如來滅度後
分別於有無

법들의 실상은 공하기 때문에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해서는 안 된다. 여래는 본래부터 완전히 공한데 하물며 어찌 멸도한 후에랴?
016_0389_b_06L諸法實相性空故不應於如來滅後思惟若有若無若有無如來從本已來畢竟空何況滅後

여래는 희론을 넘어서 있는데
사람들은 희론을 만드네.
희론은 혜안(慧眼)을 망치니
이들은 모두 부처님을 보지 못하네.
(15)
016_0389_b_09L如來過戲論
而人生戲論
戲論破慧眼
是皆不見佛

‘희론’이란 기억하고 표상해서 이것 저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부처가 ‘멸도했다’, ‘멸도하지 않았다’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희론을 만들어서 혜안(慧眼)을 덮기에 여래 법신(法身)을 볼 수 없다.
이 「여래를 관찰하는 장」에서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거쳐서 사유해 보아도 여래의 확정된 자성[定性]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이렇게 읊는다.
016_0389_b_11L戲論名憶念取相分別此彼言佛滅不滅等是人爲戲論覆慧眼故不能見如來法身此「如來品」中後思惟如來定性不可得是故偈說

여래의 자성은
세간의 자성이네.
여래에게 자성이 없으니
세간에도 자성이 없네. (16)
016_0389_b_15L如來所有性
卽是世閒性
如來無有性
世閒亦無性

이 장에서 사유하고 궁구해 보건대 여래의 자성은 곧 모든 세간의 자성이다.
016_0389_b_17L此品中思惟推求如來性卽是一切世閒性
【문】 어떤 것들이 여래의 자성인가?
問曰何等是如來性
【답】 여래에게는 자성이 없다. 세간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다.
016_0389_b_19L答曰來無有性同世閒無性

23. 전도(顚倒)를 관찰하는 장[觀顚倒品]24偈
016_0389_b_20L中論觀顚倒品第二十三[二十四偈]

【문】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발생하네.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顚倒)는
모두 뭇 연에서 발생하네. (1)
016_0389_b_21L問曰
從憶想分別
生於貪恚癡
淨不淨顚倒
皆從衆緣生
016_0389_c_01L
경전에서는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顚倒)에 의존해서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탐욕[貪]과 증오[恚]와 무지[癡]가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89_c_01L經說因淨不淨顚倒憶想分別生貪是故當知有貪

【답】
만약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에 의존해서 3독(毒)3)이 발생한다면
3독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그러니 번뇌는 실체가 없네. (2)
016_0389_c_03L答曰
若因淨不淨
顚倒生三毒
三毒卽無性
故煩惱無實

만약 번뇌들이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들은 실체가 없다.
016_0389_c_05L若諸煩惱因淨不淨顚倒憶想分別卽無自性是故諸煩惱無實

‘나[我]’의 있음이나 없음
이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네.
‘나’가 없으니 번뇌들의
있음이나 없음도 성립하지 않네. (3)
016_0389_c_07L復次
我法有以無
是事終不成
無我諸煩惱
有無亦不成

또 ‘나’에 있음이나 없음이 성립할 이유[因緣]가 없다. 이제 ‘나’가 있지 않으니 번뇌들에 어떻게 있음이나 없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왜 그러한가?
016_0389_c_09L我無有因緣若有若無而可成今無諸煩惱云何以有無而可成何以故

누군가가 이 번뇌를 소유하는 것인데
이 사람이 성립하지 않네.
만약 이 사람 없이 있다면
번뇌는 속하는 데가 없는 것이네. (4)
016_0389_c_11L誰有此煩惱
是卽爲不成
若離是而有
煩惱則無屬

‘번뇌’란 남을 뇌란[惱亂]하는 것이다. 뇌란을 당하는 남이란 중생이다. 이 중생은 모든 곳에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중생 없이 오직 번뇌만 있다고 말한다면 이 번뇌는 속하는 데가 없는 것이다.
만약 비록 ‘나’가 없다 해도 번뇌는 마음[心]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89_c_13L煩惱名爲能惱他惱他者應是衆生是衆生於一切處推求不可得若謂離衆生但有煩惱是煩惱則無所屬若謂雖無我而煩惱屬心是事亦不何以故

몸이 있다는 견해를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는 염오심(染汚心)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네. (5)
016_0389_c_18L如身見五種
求之不可得
煩惱於垢心
五求亦不得

몸이 있다는 견해를 5온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들도 염오심[垢心]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또 염오심도 번뇌들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016_0389_c_20L如身見五陰中五種求不可得諸煩惱亦於垢心中五種求亦不可得垢心於煩惱中五種求亦不可得
016_0390_a_01L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는
자성이 없네.
어떻게 이 둘에 의존해서
번뇌들이 발생하겠는가? (6)
016_0389_c_23L復次
淨不淨顚倒
是則無自性
云何因此二
而生諸煩惱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란, -- 전도(顚倒)는 허망(虛妄)을 말한다. 허망하다면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다면 전도가 없다. 전도가 없는데 어떻게 전도에 의존해서 번뇌들이 발생하겠는가?
016_0390_a_02L淨不淨顚倒者顚倒名虛妄若虛妄卽無性無性則無顚倒若無顚倒何因顚倒起諸煩惱

【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그리고 법(法)은 여섯인데
이 여섯 가지는
3독의 근본이네. (7)
016_0390_a_05L問曰
色聲香味觸
及法爲六種
如是之六種
是三毒根本

이 여섯 입처(入處)는 3독(毒)의 근본이다. 이 여섯 입처에 의존해서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가 발생한다.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발생한다.
016_0390_a_07L是六入三毒根本因此六入生淨不淨顚倒因淨不淨顚倒生貪

【답】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그리고 법(法) 자체 여섯 가지는
모두 공해서 신기루나 꿈과 같고
간다르바성과 같네. (8)
016_0390_a_09L答曰
色聲香味觸
及法體六種
皆空如炎夢
如乾闥婆城

이 여섯 가지 중
어느 것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마치 화인[幻化人]과 같고
또 마치 거울의 영상과 같네. (9)
016_0390_a_11L如是六種中
何有淨不淨
猶如幻化人
亦如鏡中像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法) 자체가 아직 마음과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공해서 있는 바가 없다. 마치 신기루와 같고 꿈과 같고 화인[化]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다. 단지 마음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일 뿐 확정된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여섯 중 어느 것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016_0390_a_12L色聲香味觸法自體未與心和合時空無所有如炎如夢如化如鏡中但誑惑於心無有定相如是六入何有淨不淨

청정함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청정하지 않음이 없네.
청정함에 의존해서 청정하지 않음이 있네.
그러니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네. (10)
016_0390_a_16L復次
不因於淨相
則無有不淨
因淨有不淨
是故無不淨

또 청정함에 의존하지 않고서 먼저 청정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에 의존해서 청정하지 않음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다.
016_0390_a_18L若不因於淨先無有不淨因何而說不淨是故無不淨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청정함도 없네.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청정함이 있네.
그러니 청정함이 있지 않네. (11)
016_0390_a_20L復次
不因於不淨
則亦無有淨
因不淨有淨
是故無有淨

또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고서 먼저 청정함이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에 의존해서 청정함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청정함이 있지 않다.
016_0390_a_22L若不因不淨先無有淨因何而說淨是故無有淨
016_0390_b_01L
청정함이 있지 않은데
어디에 탐욕이 있겠는가?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은데
어디에 증오가 있겠는가? (12)
016_0390_b_01L復次
若無有淨者
何由而有貪
若無有不淨
何由而有恚

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기에 탐욕과 증오가 발생하지 않는다.
016_0390_b_03L無淨不淨故則不生貪
【문】 경전에서 상주함 따위의 네 가지 전도를 말하고 있다. 만약 무상한 것에서 상주함을 본다면 이것은 전도된 것이다. 만약 무상한 것에서 무상함을 본다면 이것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전도도 이와 같다. 전도가 있기에 전도된 자도 있는 것인데 왜 도무지 있지 않다고 말하는가?
016_0390_b_04L問曰經說常等四顚倒若無常中見常是名顚若無常中見無常此非顚倒餘三顚倒亦如是有顚倒故顚倒者亦應何故言都無

【답】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이것을 전도라 하네.
공함[空]에 있어서는 상주하는 것이 없는데
어느 곳에 상주함의 전도가 있겠는가? (13)
016_0390_b_08L答曰
於無常著常
是則名顚倒
空中無有常
何處有常倒

만약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전도라 한다. 법들의 자성이 공한 것에는 상주하는 것이 있지 않다. 이 중의 어느 곳에 상주함의 전도가 있겠는가? 나머지 세 가지4) 또한 이와 같다.
016_0390_b_10L若於無常中著常名爲顚倒諸法性空中無有常是中何處有常顚倒三亦如是

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면
공함에 있어서는 무상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전도 아닌 것이 있겠는가? (14)
016_0390_b_13L復次
若於無常中
著無常非倒
空中無無常
何有非顚倒

또 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면 법들의 자성이 공한 것에는 무상한 것이 있지 않다. 무상한 것이 있지 않은데 무엇이 전도 아닌 것이 되겠는가? 나머지 셋도 또한 이와 같다.
016_0390_b_15L若著無常言是無常不名爲顚倒者諸法性空中無無常無常無故誰爲非顚倒餘三亦如是

집착되는 것, 집착하는 자, 집착함,
집착 수단,
이것은 모두 적멸해 있는데
어떻게 집착이 있겠는가? (15)
016_0390_b_18L復次
可著著者著
及所用著法
是皆寂滅相
云何而有著

또 ‘집착되는 것[可著]’이란 (집착의) 대상[物]이다. ‘집착하는 자[著者]’란 (집착의) 행위자이다. ‘집착함[著]’이란 행위[業]이다. ‘집착에 쓰이는 법[所用著法]’5)이란 (집착에) 쓰이는 사물[事]이다. 이것은 모두 자성이 공해서 적멸해 있다. 「여래를 관찰하는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집착이 있지 않다.
016_0390_b_20L可著名物著者名作者著名業所用法名所用事是皆性空寂滅相如「如來品」中所說是故無有著
016_0390_c_01L
만약 집착이 있지 않다면
누가 그릇된 것을 전도라고 말하겠으며
누가 바른 것을 전도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16)
016_0390_b_23L復次
若無有著法
言邪是顚倒
言正不顚倒
誰有如是事

또 ‘집착’이란 이것이다, 저것이다, 있다, 없다 따위를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런 집착이 있지 않다면, 누가 그릇된 것을 전도라고 하겠으며 누가 바른 것을 전도 아닌 것이라고 하겠는가?
016_0390_c_02L著名憶想分別此彼有無等若無此著誰爲邪顚倒誰爲正不顚倒

전도가 있는 자에게는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가 없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된 자에게는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되지 않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17)
016_0390_c_04L復次
有倒不生倒
無倒不生倒
倒者不生倒
不倒亦不生

지금 전도되고 있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누구에게 전도가 발생하는지
그대 스스로 관찰해 보거라. (18)
016_0390_c_06L若於顚倒時
亦不生顚倒
汝可自觀察
誰生於顚倒

또 이미 전도된 자에게는 다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전도가 없기 때문이다. 전도되고 있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두 과실6)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 지금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누가 전도를 행하는 지를 스스로 잘 관찰해 보거라.
016_0390_c_07L已顚倒者則更不生顚倒已顚倒故不顚倒者亦不顚倒無有顚倒故倒時亦不顚倒有二過故汝今除憍慢心善自觀察誰爲顚倒者

갖가지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도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전도된 자가 있겠는가? (19)
016_0390_c_11L復次
諸顚倒不生
云何有此義
無有顚倒故
何有顚倒者

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기 때문에 전도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따른다. 그 사람은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에 탐착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不生]이야말로 전도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나아가 무루법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전도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전도된 자가 있겠는가? 전도에 의존해서 전도된 자가 있는 것이다.
016_0390_c_13L顚倒種種因緣破故墮在不生彼貪著不生謂不生是顚倒實相是故偈云何名不生爲顚倒乃至無漏法尚不名爲不生相何況顚倒是不生顚倒無故何有顚倒者因顚倒有顚倒者

만약 상주함[常]ㆍ즐거움[樂]ㆍ아(我)ㆍ청정함[淨]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네. (20)
016_0390_c_19L復次
若常我樂淨
而是實有者
是常我樂淨
則非是顚倒
016_0391_a_01L
또 만약 상주함[常]ㆍ즐거움[樂]ㆍ아ㆍ청정함[淨] 이 넷의 자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실체[實事]가 확정되어 존재하는데 어떻게 전도라 말하겠는가?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 이 넷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상함[無常]ㆍ괴로움[苦]ㆍ무아(無我)ㆍ청정하지 않음[不淨] 이 넷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다. 전도와 모순되기에 전도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90_c_21L若常淨是四實有性者是常淨則非顚倒何以故定有實事故云何言顚倒若謂常淨倒是四無者無常無我不淨是四應實有不名顚倒顚倒相違故名不顚倒事不然何以故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我)ㆍ청정함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상함ㆍ괴로움ㆍ청정하지 않음이
존재하지 않네. (21)
016_0391_a_04L若常我樂淨
而實無有
者無常苦不淨
是則亦應無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 이 넷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 등 네 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6_0391_a_06L若常淨是四實無無故無常等四事亦不應有何以故無相因待故

이와 같이 전도가 소멸하기에
무명도 소멸하네.
무명이 소멸하기에
행들도 소멸하네. (22)
016_0391_a_08L復次
如是顚倒滅
無明則亦滅
以無明滅故
諸行等亦滅

또 ‘이와 같이’란 그 의미와 같이라는 뜻이다. 전도들이 소멸하기에 12연기(緣起)의 근본인 무명(無明)도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에 세 종류의 행[行業] 내지 늙음과 죽음(老死) 등도 소멸한다.
016_0391_a_11L如是者如其義滅諸顚倒故十二因緣根本無明亦滅無明滅故三種行業乃至老死等皆滅

만약 번뇌의 자성이 실재하고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면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
016_0391_a_14L復次
若煩惱性實
而有所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其性

또 만약 번뇌들이 전도이고 그 자성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번뇌들은 모두 허망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91_a_16L若諸煩惱卽是顚倒而實有性者何可斷誰能斷其性若謂諸煩惱皆虛妄無性而可斷者是亦不然何以故

만약 번뇌가 허망해서 자성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자성이 없는 법을 끊을 수 있겠는가? (24)
016_0391_a_19L若煩惱虛妄
無性無屬者
云何當可斷
誰能斷無性

번뇌들은 허망해서 자성이 없으니, 속하는 데가 없는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자성이 없는 법을 끊을 수 있겠는가?
016_0391_a_21L若諸煩惱虛妄無性則無所屬云何可斷誰能斷無性法

24. 사제를 관찰하는 장[觀四諦品]40偈
016_0391_a_23L中論觀四諦品第二十四[四十偈]
016_0391_b_01L
【문】 네 가지 전도(顚倒)7)를 타파해서 4성제(聖諦)를 통달하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四沙門果]를 얻는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공해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4성제가 있지 않을 것이네. (1)
016_0391_b_01L問曰破四顚倒通達四諦得四沙門果
若一切皆空
無生亦無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4성제가 있지 않기에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모두 있지 않네. (2)
016_0391_b_04L以無四諦故
見苦與斷集
證滅及修道
如是事皆無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기에
네 과보(果報)도 있지 않네.
네 과보가 있기 않기에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있지 않네. (3)
016_0391_b_05L以是事無故
則無四道果
無有四果故
得向者亦無

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네.
4성제가 있지 않기에
또한 법보(法寶)도 있지 않네. (4)
016_0391_b_06L若無八賢聖
則無有僧寶
以無四諦故
亦無有法寶

법보과 승보가 있지 않기에
또한 불보(佛寶)도 있지 않네.
이와 같이 공함을 말한다면
이는 3보(寶)를 파괴하는 것이네. (5)
016_0391_b_08L以無法僧寶
亦無有佛寶
如是說空者
是則破三寶

만약 모든 세간이 다 공해서 있지 않다면, 발생하지 않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4성제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집제(集諦)에서 고제(苦諦)가 발생한다. 집제는 원인이고 고제는 결과이다. 고제와 집제를 소멸시키는 것이기에 멸제(滅諦)이다. 멸제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기에 도제(道諦)이다. 도제는 원인이고 멸제는 결과이다. 이와 같이 4성제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만약 발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면 4성제가 있지 않을 것이다. 4성제가 있지 않으니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證得)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고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을 끊는 것, 멸을 증득하는 것, 도를 수습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네 사문(沙門)의 과보가 있지 않을 것이다. 네 사문의 과보가 있지 않으니 네 부류의 (과보로) 향하는 자8)와 네 부류의 (과보를) 얻은 자9)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4성제(聖諦)가 있지 않으니 법보(法寶)도 있지 않을 것이다. 법보와 승보가 있지 않은데 어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법(法)을 얻은 이를 불(佛)이라 한다. 법이 없는데 어찌 불이 있겠는가? 그대가 모든 법이 다 공하다고 말한다면 3보10)를 파괴하는 것이 된다.
016_0391_b_09L若一切世閒皆空無所有者卽應無生無滅以無生無滅故則無四聖諦何以故從集諦生苦諦集諦是因諦是果滅苦集諦名爲滅諦能至滅名爲道諦道諦是因滅諦是果是四諦有因有果若無生無滅則無四諦四諦無故則無見苦斷集證滅修道見苦斷集證滅修道無故則無四沙門果四沙門果無故則無四向四得者若無此八賢聖則無僧寶四聖諦無故法寶亦無若無法寶寶者云何有佛得法名爲佛無法何有佛汝說諸法皆空則壞三寶

공성[空法]은 원인과 결과를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모든 세속의 법도
파괴하네. (6)
016_0391_b_22L復次
空法壞因果
亦壞於罪福
亦復悉毀壞
一切世俗法
016_0391_c_01L
또 만약 공성[空法]을 받아들인다면 죄와 복, 죄와 복의 과보, 세속의 법도 파괴한다.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은 공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016_0391_c_01L若受空法者則破罪福及罪福果報亦破世俗法有如是等諸過故諸法不應空

【답】
그대는 지금
공성[空]과 공성의 목적[空因緣]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그리고 공성의 대상[空義]를 알지 못하네.
그래서 스스로 번민을 만들어 내네. (7)
016_0391_c_04L答曰
汝今實不能
知空空因緣
及知於空義
是故自生惱

공성[空相]이 무엇인지, 무슨 목적[因緣]으로 공성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또 공성의 대상[空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 것이다.
016_0391_c_06L汝不解云何是空相以何因緣說空亦不解空義不能如實知故生如是疑難

모든 부처님들은 이제(二諦)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네.
하나는 세속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일의제이네. (8)
016_0391_c_09L復次
諸佛依二諦
爲衆生說法
一以世俗諦
二第一義諦

만약 사람이
이제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면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하네. (9)
016_0391_c_11L若人不能知
分別於二諦
則於深佛法
不知眞實義

또 ‘세속제’란,-- 모든 법의 자성은 공한데 세간의 전도(顚倒) 때문에 허망한 법이 발생한다. 세간에 있어서는 이것이 진실이다. 성인들은 전도성(顚倒性)을 핍진하게 알기 때문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고 발생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성인에게 있어서는 이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진실이다. 부처님들은 이 이제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만약 사람이 이제의 구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만약 모든 법의 발생하지 않음인 제일의제는 제2의 속제(俗諦)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91_c_12L世俗諦者一切法性空而世閒顚倒生虛妄法於世閒是實諸賢聖眞知顚倒性故知一切法皆空無生聖人是第一義諦名爲實諸佛依是二諦而爲衆生說法若人不能如實分別二諦則於甚深佛法不知實義若謂一切法不生是第一義諦不須第二俗諦者是亦不然何以故

만약 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하네. (10)
016_0391_c_20L若不依俗諦
不得第一義
不得第一義
則不得涅槃
016_0392_a_01L
제일의제는 모두 언설(言說)에 의존한다. 언설은 세속제이다. 그러므로 만약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언설할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이 비록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二諦)는 있다.
016_0391_c_22L第一義皆因言說言說是世俗是故若不依世俗第一義則不可說若不得第一義云何得至涅槃是故諸法雖無生而有二諦

공성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없어서
근기가 약한 자는 스스로를 해치네.
마치 주술에 능하지 못하고
뱀을 잡는 것에 능하지 못한 것과 같이. (11)
016_0392_a_03L復次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呪術
不善捉毒蛇

또 만약 어떤 사람이 근기가 약하다면 공성[空法]을 잘 알지 못한다. 공성[空]을 상실해서 그릇된 견해가 일어난다. 마치 이득을 위해 독사를 잡으려다 제대로 잡지 못해 도리어 해가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주술로 무엇을 만들려다가 제대로 만들지 못해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같다. 근기가 약한 자가 공성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016_0392_a_05L若人鈍根不善解空法於空有失生邪見如爲利捉毒蛇不能善捉爲所害又如呪術欲有所作不能善則還自害鈍根觀空法亦如是

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근기가 약한 자가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려 하지지 않으셨네. (12)
016_0392_a_09L復次
世尊知是法
甚深微妙相
非鈍根所及
是故不欲說

또 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근기가 약한 자가 알 바가 아니기에 말씀하시려 하지 않으셨다.
016_0392_a_12L世尊以法甚深微妙非鈍根所解故不欲說

그대는 내가 공성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하네.
그대가 지금 말하는 과실은
공성에는 있지 않네. (13)
016_0392_a_14L復次
汝謂我著空
而爲我生過
汝今所說過
於空則無有

또 그대가 만약 내가 공성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는 성질의 공성은 공성[空]도 또한 공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016_0392_a_16L汝謂我著空故爲我生過我所說性空亦復空無如是過

공성의 이치가 있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네.
만약 공성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네. (14)
016_0392_a_18L復次
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

또 공성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다 성취된다. 만약 공성의 이치가 없다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016_0392_a_20L以有空義故一切世閒出世閒法皆悉成就若無空義則皆不成就

그대는 지금 자신에게 과실이 있으면서
나에게 돌리네.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을 때
(말을) 탄 것을 스스로 잊어 버리는 것과 같네. (15)
016_0392_a_22L復次
汝今自有過
而以迴向我
如人乘馬者
自忘於所乘
016_0392_b_01L
또 그대는 있다고 하는 것에 과실이 있는데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공하다 하는 것에서 과실을 본다.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으면서 그 (말을) 탄 것을 잊어 버리는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016_0392_b_01L汝於有法中有過不能自覺而於空中見過如人乘馬而忘其所乘何以故

만약 그대가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본다면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네. (16)
016_0392_b_03L若汝見諸法
決定有性者
卽爲見諸法
無因亦無緣

또 그대는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법에 인과 연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만약 법들이 인과 연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들에 자성이 존재한다면 인과 연이 없는 것이다.
만약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92_b_05L汝說諸法有定性若爾者則見諸法無因無緣何以故若法決定有性應不生不滅如是法何用因緣若諸法從因緣生則無有性是故諸法決定有性則無因緣若謂諸法決定住自性是則不然何以故

원인과 결과,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 수단[作法],
또 모든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17)
016_0392_b_11L卽爲破因果
作作者作法
亦復壞一切
萬物之生滅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것이 있지 않게 된다.
이렇게 게송으로 읊는다.
016_0392_b_13L諸法有定性則無因果等諸事如偈說

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無]’이라고 말하네.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하네. (18)
016_0392_b_14L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인과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19)
016_0392_b_16L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
016_0392_c_01L
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空]’이라고 말한다. 왜 그러한가? 인과 연들이 다 갖춰지고 화합해서 사물이 발생한다. 이 사물은 인과 연들에 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있지 않다. 자성이 있지 않기에 공하다. 공함도 또 공하다.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말하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의 양 극단을 여의었기에 중도(中道)라 한다. 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공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이다. 만약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법이 있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은 없다.
그대가 위에서 말한 공성[空法]에 과실이 있다고 한다면 이 과실은 이제 다시 그대에게 있다. 왜 그러한가?
016_0392_b_17L衆因緣生法我說卽是空何以故緣具足和合而物生是物屬衆因緣無自性無自性故空空亦復空爲引導衆生故以假名說離有無二故名爲中道是法無性故不得言亦無空故不得言無若法有性相則不待衆緣而有若不待衆緣則無是故無有不空法汝上所說空法有過者此過今還在汝何以故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네.
그렇다면
4성제[聖諦法]도 없을 것이네. (20)
016_0392_c_03L若一切不空
則無有生滅
如是則無有
四聖諦之法

만약 모든 법이 각각 자성이 있어서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다. 발생과 소멸이 없기 때문에 4성제[聖諦法]가 없다.
왜 그러한가?
016_0392_c_05L若一切法各各有性不空者則無有生無生滅故則無四聖諦法何以故

고(苦)가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가 있겠는가?
“무상한 것은 고이다”고 설파하네.
확정된 자성(自性)은 무상하지 않네. (21)
016_0392_c_07L苦不從緣生
云何當有苦
無常是苦義
定性無無常

고(苦)가 뭇 연(緣)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고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고이다”고 설파하고 있다.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무상하겠는가?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016_0392_c_09L苦不從緣生故則無苦何以故經說無常是苦義若苦有定性云何有無以不捨自性故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왜 (업과 번뇌의) 집(集)에서 발생하겠는가?
그러니 집(集)이 있지 않네.
공성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네. (22)
016_0392_c_12L復次
若苦有定性
何故從集生
是故無有集
以破空義故

또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집제가 있지 않을 것이다. 공성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016_0392_c_14L若苦有定性者則不應更生先已有若爾者則無集諦以壞空義故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멸(滅)이 있지 않을 것이네.
그대가 자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멸제를 파괴하는 것이 되네. (23)
016_0392_c_16L復次
苦若有定性
則不應有滅
汝著定性故
卽破於滅諦

또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멸이 있기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있다면 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016_0392_c_18L苦若有定性者則不應滅何以故則無滅故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만약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네. (24)
016_0392_c_20L復次
苦若有定性
則無有修道
若道可修習
卽無有定性
016_0393_a_01L
또 만약 법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도를 수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실재한다면 상주하는 것일 터이고, 상주하는 것이라면 증대[增益]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도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016_0392_c_22L法若定有則無有修道何以故若法實者則是常常則不可增益若道可道則無有定性

고제가 없고 그리고
집제와 멸제가 없는데
고를 멸할 수 있는 도에 대체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25)
016_0393_a_02L復次
若無有苦諦
及無集滅諦
所可滅苦道
竟爲何所至

또 만약 법들에 미리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고제와 집제와 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고를 멸하는 도는 고를 멸하는 어떤 곳에 다다르는 도이겠는가?
016_0393_a_04L諸法若先定有性則無苦集滅諦滅苦道竟爲至何滅苦處

만약 고(苦)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지금 어떻게 보겠는가?
그 자성이 상이하기 때문이네. (26)
016_0393_a_06L復次
若苦定有性
先來所不見
於今云何見
其性不異故

또 만약 앞서 범부의 시절에 고(苦)의 자성을 볼 수 없었다면 지금도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확정된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016_0393_a_08L若先凡夫時不能見苦性今亦不應何以故不見性定故

고(苦)를 보는 것이 그렇지 못하듯이
(업과 번뇌의 집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하는 것,그리고 네 가지 과보
이것들도 모두 그렇지 못하네. (27)
016_0393_a_10L復次
如見苦不然
斷集及證滅
修道及四果
是亦皆不然

또 고제(苦諦)의 자성을 전에 보지 못하는 자는 후에도 보지 못하듯이 그렇듯이 (업과 번뇌의 집을) 끊지 못하고, 멸을 증득(證得)하지 못하고, 도를 수습(修習)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집(集)의 자성을 이제껏 끊지 못했다면 지금도 끊지 못할 것이다. (집의) 자성은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멸을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증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를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성제(四聖諦)의 보는 것, 끊는 것, 증득하는 것, 수습하는 것인 네 가지 수행[行]이 모두 있지 않다. 네 가지 수행이 있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도(道)의 과보도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93_a_12L如苦諦性先不見者後亦不應見是亦不應有斷集證滅修道何以故是集性先來不斷今亦不應斷性不可斷故滅先來不證今亦不應證來不證故道先來不修今亦不應修先來不修故是故四聖諦見四種行皆不應有四種行無故四道果亦無何以故

이 네 가지 도의 과보는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법들의 자성이 확정된 것이라면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28)
016_0393_a_20L是四道果性
先來不可得
諸法性若定
今云何可得

또 만약 법들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를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이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얻을 수 있다면 자성이 확정된 것이 아니다.
016_0393_a_22L諸法若有定性四沙門果先來未得云何可得若可得者性則無定
016_0393_b_01L
만약 네 가지 과보가 없다면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네.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으니
승보(僧寶)가 없네. (29)
016_0393_b_01L復次
若無有四果
則無得向者
以無八聖故
則無有僧寶

또 네 가지 사문의 과보가 없기에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다면,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는 것이니 승보(僧寶)가 없다. 그러나 경전에서 여덟 부류의 성인을 승보라고 말하고 있다.
016_0393_b_03L無四沙門果故則無得果向果者八賢聖故則無有僧寶而經說八賢聖名爲僧寶

4성제가 없으니
또한 법보도 없네.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30)
016_0393_b_06L復次
無四聖諦故
亦無有法寶
無法寶僧寶
云何有佛寶

또 4성제를 수행하면 열반을 얻는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법보가 없는 것이다. 두 가지 보(寶)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그대는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3보(寶)를 파괴한다.
016_0393_b_08L行四聖諦得涅槃法若無四諦則無法寶若無二寶云何當有佛寶汝以如是因緣說諸法定性則壞三寶
【문】 그대가 법들을 타파했지만 완전무결한 도(道)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11)는 있다. 이 도가 있기에 불(佛)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393_b_11L汝雖破諸法究竟道阿耨多羅三藐三菩提應有因是道故名爲佛

【답】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보리(菩提)에 의존하지 불(佛)이 있고
또한 불에 의존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는 것이 되네. (31)
016_0393_b_13L答曰
汝說則不因
菩提而有佛
亦復不因佛
而有於菩提

그대가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보리(菩提)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佛)이 있고 불에 의존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자성은 항상 확정돼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016_0393_b_15L汝說諸法有定性者則不應因菩提有佛因佛有菩提是二性常定故

부지런히 정진(精進)해서
보리의 도를 수행하더라도
만약 미리 불성(佛性)이 없다면
성불할 수 없을 것이네. (32)
016_0393_b_17L復次
雖復勤精進
修行菩提道
若先非佛性
不應得成佛

또 미리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쇠에 금의 자성이 없어서 설사 갖가지로 단련한다 해도 결코 금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016_0393_b_19L以先無性故如鐵無金性雖復種種鍛煉終不成金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가 없을 것이네.
공하지 않은데 무엇을 짓겠는가?
그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33)
016_0393_b_21L復次
若諸法不空
無作罪福者
不空何所作
以其性定故
016_0393_c_01L
또 만약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사람이 죄나 복을 짓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죄나 복의 자성이 이미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또 짓는 일과 짓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016_0393_b_23L若諸法不空終無有人作罪福者以故罪福性先已定故又無作作者

그대가 죄나 복이 있어도
과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죄나 복 없이
과보가 있는 것이 되네. (34)
016_0393_c_03L復次
汝於罪福中
不生果報者
是則離罪福
而有諸果報

또 그대가 죄나 복의 인연이 있어도 전혀 과보가 없다고 한다면 죄나 복의 인연 없이 과보가 있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과보가 인연에 의존해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016_0393_c_05L汝於罪福因緣中皆無果報者則應離罪福因緣而有果報何以故果報不待因出故
【문】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있을 수 없다. 단지 죄나 복에서 선악의 과보가 생길 따름이다.
016_0393_c_08L問曰離罪福可無善惡果報但從罪福有善惡果報

【답】
만약 죄나 복에서
과보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과보가 죄나 복에서 발생했는데
어떻게 공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35)
016_0393_c_09L答曰
若謂從罪福
而生果報者
果從罪福生
云何言不空

만약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없다면 어떻게 과보가 공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12) 짓는 자 없이 죄나 복이 없을 것이다. 그대가 앞에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93_c_11L若離罪福無善惡果云何言果不空若爾離作者則無罪福汝先說諸法不空是事不然

그대가 모든 법의
인연성[因緣法]13)과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세속의 모든 다른 법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36)
016_0393_c_14L復次
汝破一切法
諸因緣空義
則破於世俗
諸餘所有法

또 그대가 만약 여러 인연성[衆因緣法]과 제일(第一)의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모든 세속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016_0393_c_16L汝若破衆因緣法第一空義者則破一切世俗法何以故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지어야 할 것이 없고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고
짓지 않아도 지은 자라 할 것이네. (37)
016_0393_c_18L若破於空義
卽應無所作
無作而有作
不作名作者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모든 결과에는 전혀 짓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원인이 없었을 것이다.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을 것이다. 또 모든 짓는 자들에게는 지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또 짓는 자 없이 업(業)이 있고 과보가 있고 받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그러므로 공성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
016_0393_c_20L若破空義則一切果皆無作無因不作而作又一切作者不應有所作又離作者應有業有果報有受者是事皆不然是故不應破空
016_0394_a_01L
만약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네. (38)
016_0394_a_01L復次
若有決定性
世閒種種相
則不生不滅
常住而不壞

또 만약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 즉 천신ㆍ사람ㆍ축생ㆍ사물들은 모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실재하는 자성이 있는 것은 변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물들은 각각 변이의 상(相)이 있어서 생멸하고 변이한다. 그러므로 확정된 자성이 있지 않다.
016_0394_a_03L若諸法有定性則世閒種種相畜生萬物皆應不生不滅常住不壞何以故有實性不可變異故而現見萬物各有變異相生滅變易是故不應有定性

만약 공성이 없다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고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며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네.(39)
016_0394_a_08L復次
若無有空者
未得不應得
亦無斷煩惱
亦無苦盡事

또 만약 공성[空法]이 없다면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功德)을 아직 얻지 못한 자는 모두 (그 공덕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016_0394_a_10L若無有空法者則世閒出世閒所有功德未得者皆不應得亦不應有斷煩惱者亦無苦盡何以故以性定故

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약 인연성[因緣法]을 본다면
부처님을 보게 되고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보게 된다”고 말하고 있네. (40)
016_0394_a_13L是故經中說
若見因緣法
則爲能見佛
見苦集滅道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법들이 인과 연들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본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볼 수 있다. 지혜를 증대시켜서 4성제인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볼 수 있다. 4성제를 본다면, 네 가지 과보를 얻기에 모든 고가 소멸한다. 그러므로 공성의 이치[空義]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인연성[因緣法]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인연성을 파괴한다면 3보(寶)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3보를 파괴한다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016_0394_a_15L若人見一切法從衆緣生是人卽能見佛法身增益智慧能見四聖諦見四聖諦得四果滅諸苦惱是故不應破空義若破空義則破因緣法破因緣法則破三寶若破三寶則爲自破

25. 열반을 관찰하는 장[觀涅槃品]24偈
016_0394_a_21L中論觀涅槃品第二十五[二十四偈]
016_0394_b_01L
【문】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부르는가? (1)
016_0394_a_22L問曰
若一切法空
無生無滅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들은 공하지 않다. 모든 법들이 공하지 않기에 모든 번뇌들을 끊고 5온을 멸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열반이라 이름한다.
016_0394_b_02L若一切法空則無生無滅無生無滅何所斷何所滅而名爲涅槃是故一切法不應空以諸法不空故斷諸煩滅五陰名爲涅槃

【답】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부르는가? (2)
016_0394_b_06L答曰
若諸法不空
則無生無滅
何斷何所滅
而稱爲涅槃

만약 모든 세간의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는가?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14)의 두 문(門)을 통해서 열반에 다다르지 못한다.
016_0394_b_08L若一切世閒不空則無生無滅何所斷何所滅而名爲涅槃是故有無二則非至涅槃
열반이란,다음 게송에서와 같다.

획득되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하네. (3)
016_0394_b_11L所名涅槃者
無得亦無至
不斷亦不常
不生亦不滅
是說名涅槃

‘획득되지 않는다’란, 수행[行]과 과보[果]가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달되지 않는다’란, 도달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단멸하지 않는다’란, 5온은 원래 완전히 공하기 때문에 도(道)를 획득해서 무여열반에 들어갈 때 단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주하지 않는다’란,분별되는 법이 있다면 이 법을 상주한다고 한다. 열반은 적멸이어서 분별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하지 않는다. 발생함과 소멸함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상(相)을 갖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또 경전에서는 “열반은 존재[有]가 아니며, 비존재[無]가 아니며,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아니며, 비존재[非有]인 것도 아니고 존재[非無]인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을 그 안에 수용하지 않고 적멸해 있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016_0394_b_13L無得者於行於果無所得無至者處可至不斷者五陰先來畢竟空故得道入無餘涅槃時亦無所斷不常若有法可得分別者則名爲常涅槃寂滅無法可分別故不名爲常滅亦爾如是相者名爲涅槃復次說涅槃非有非無非有無非非有非非無一切法不受內寂滅名涅槃以故

열반은 존재[有]가 아니네.
존재라면 늙음과 죽음의 상(相)이 있네.
늙음과 죽음의 상을 떠난
존재[有法]는 결코 없네. (4)
016_0394_b_22L涅槃不名有
有則老死相
終無有有法
離於老死相
016_0394_c_01L
모든 사물들이 다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눈에 보이니, 이것15)은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갖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기에 열반을 존재라 하지 않는다. 또 발생과 소멸, 늙음과 죽음을 떠나서 별도로 열반이라 하는 확정된 법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발생과 소멸, 늙음과 죽음의 상이 있을 것이다. 늙음과 죽음의 상을 떠났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016_0394_c_01L眼見一切萬物皆生滅故是老死相涅槃若是有則應有老死相但是事不然是故涅槃不名有又不見離生滅老死別有定法而名涅槃若涅槃是有卽應有生滅老死相以離老死相故名爲涅槃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열반은 유위일 것이네.
무위인 법은 결코
한 법도 없을 것이네. (5)
016_0394_c_07L復次
若涅槃是有
涅槃卽有爲
終無有一法
而是無爲者

또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모든 사물들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유위이다. ‘무위인 법은 결코 한 법도 없을 것이네’란,-- 비록 상주하는 법을 임시로 무위라 이름하기는 하지만, 이치에 의거해서 추구해 보건대, 무상한 법도 있지 않거늘 하물며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상주하는 법이 있겠는가?
016_0394_c_09L涅槃非是有何以故一切萬物從衆緣生皆是有爲無有一法名爲無爲雖常法假名無爲以理推之無常法尚無有何況常法不可見不可得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어떻게 취착이 없는 것이겠는가?
취착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존재[有法]라고 이름하는 것은 없네. (6)
016_0394_c_14L復次
若涅槃是有
云何名無受
無有不從受
而名爲有法

또 만약 열반이 존재[有法]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취착이 없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있는 존재[有法]는 없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016_0394_c_16L若謂涅槃是有法者經則不應說無受是涅槃何以故無有有法不受而是故涅槃非有
【문】 만약 존재가 열반이 아니라면 비존재가 열반일 것이다.
016_0394_c_19L問曰若有非涅槃無應是涅槃耶

【답】
존재가 열반이 아닌데
하물며 비존재가 열반이겠는가?
열반에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디에 비존재가 있겠는가? (7)
016_0394_c_20L答曰
有尚非涅槃
何況於無耶
涅槃無有有
何處當有無
016_0395_a_01L
존재[有]가 열반이 아닌데 어떻게 비존재[無]가 열반이겠는가? 왜냐 하면, 존재에 의존해서 비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비존재가 있겠는가? 경전에서는 “전에는 있다가 지금 없는 것을 비존재[無]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반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가 변이해서 비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존재도 열반이 아니다.
016_0394_c_22L若有非涅槃無云何是涅槃何以故因有故有無若無有何有無如經說先有今無則名無涅槃則不爾何以非有法變爲無故是故無亦不作涅槃

만약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어떻게 취착이 없는 것이겠는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비존재[無法]라 이름하는 것은 없네. (8)
016_0395_a_04L復次
若無是涅槃
云何名不受
未曾有不受
而名爲無法

또 만약 비존재가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취착이 없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비존재[無法]라 이름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비존재가 아니다.
016_0395_a_06L若謂無是涅槃經則不應說不受名涅槃何以故無有不受而名無法故知涅槃非無
【문】 만약 열반이 존재가 아니고 비존재가 아니라면 어떤 것들이 열반인가?
016_0395_a_09L問曰若涅槃非有非無者何等是涅槃

【답】
인연들을 받기 때문에
생사 속을 굴러가네.
인연들을 받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네. (9)
016_0395_a_10L答曰
受諸因緣故
輪轉生死中
不受諸因緣
是名爲涅槃

여실하게 전도(顚倒)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5취온(取蘊)에 의존해서 생사를 왕래한다. 전도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다시 5취온에 의존해서 생사를 왕래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는 5온(蘊)은 다시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이라 말하는 것이다.
016_0395_a_12L不如實知顚倒故因五受陰往來生如實知顚倒故則不復因五受陰往來生死無性五陰不復相續故名涅槃

부처님은 경전에서
유(有)도 끊고 비유(非有)도 끊으라고 말씀하셨네.
그러니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10)
016_0395_a_16L復次
如佛經中說
斷有斷非有
是故知涅槃
非有亦非無

또 유(有)란 3유(有)이다. 비유(非有)란 3유가 단멸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끊으라고 말씀하셨으니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0395_a_18L名三有非有名三有斷滅佛說斷此二事故當知涅槃非有亦非無
【문】 존재도 비존재도 열반이 아니라면 이제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한 것이 열반인 것인가?
016_0395_a_20L若有若無非涅槃者今有無共合是涅槃耶

【답】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 말한다면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해탈일 것이네.
이것은 옳지 않네. (11)
016_0395_a_22L答曰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有無卽解脫
是事則不然
016_0395_b_01L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가 합한 것이 해탈일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한 장소에 있겠는가?
016_0395_b_01L若謂於有無合爲涅槃者卽有無二事合爲解脫是事不然何以故有無二事相違故云何一處有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열반은 취착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둘은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네. (12)
016_0395_b_04L復次
若謂於有無
合爲涅槃者
涅槃非無受
是二從受生

또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열반은 취착이 없는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고, 서로 의존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합함을 얻더라도 열반이 되지 않는다.
016_0395_b_06L若謂有無合爲涅槃者經不應說涅槃名無受何以故有無二事從受生因而有是故有無二事不得合爲涅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해서 성립한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열반은 무위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유위인데. (13)
016_0395_b_10L復次
有無共合成
云何名涅槃
涅槃名無爲
有無是有爲

또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함께 합하더라도 열반이라 할 수 없다. 열반은 무위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유위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는 열반이 아니다.
016_0395_b_12L有無二事共合不得名涅槃涅槃名無爲有無是有爲是故有無非是涅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가 함께한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이 둘은 장소를 같이하지 않네.
마치 밝음과 어둠처럼. (14)
016_0395_b_15L復次
有無二事共
云何是涅槃
是二不同處
如明暗不俱

또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열반이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이어서 한 장소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일 때 비존재는 없고 비존재일 때 존재는 없는 것인데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한 것을 열반이라 하겠는가?
016_0395_b_17L有無二事不得名涅槃何以故有無相違一處不可得如明暗不俱是故有時無無無時無有云何有無共合而名爲涅槃
【문】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하지 않은 것이 열반이 아니라면, 이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열반일 것이다.
016_0395_b_21L問曰若有無共合非涅槃者今非有非無應是涅槃

【답】
만약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 한다면
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무엇에 의해 분별되겠는가? (15)
016_0395_b_22L答曰
若非有非無
名之爲涅槃
此非有非無
以何而分別
016_0395_c_01L
만약 열반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면, 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은 무엇에 의해 분별되겠는가? 그러므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95_c_01L若涅槃非有非無者此非有非無因何而分別是故非有非無是涅槃者是事不然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분별해서
이것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네.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성립할 것이네. (16)
016_0395_c_04L復次
分別非有無
如是名涅槃
若有無成者
非有非無成

또 그대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분별해서 이것을 열반이라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그런 연후에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할 것이다. 존재와 모순되는 것을 비존재라 하고, 비존재와 모순되는 것을 존재라 한다. 이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은 제3구(第三句)에서 부정되었다.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아니다.
016_0395_c_06L汝分別非有非無是涅槃者是事不何以故若有無成者然後非有非無成有相違名無無相違名有是有無第三句中已破有無無故云何有非有非無是故涅槃非非有非非無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17)
016_0395_c_11L復次
如來滅度後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여래가 현재에 있을 때도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18)
016_0395_c_14L如來現在時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또 여래가 멸도한 후든 현재에 있을 때든 여래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기도 하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 인정되지 않으니 ‘열반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를 분별해서는 안 된다. 여래를 떠나서 누가 열반을 얻겠으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법으로 열반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때 모든 종류로 열반의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016_0395_c_15L若如來滅後若現在有如來亦不受無如來亦不受亦有如來亦無如來亦不受非有如來非無如來亦不受以不受故不應分別涅槃有無等如來誰當得涅槃何時何處以何法說涅槃是故一切時一切種求涅槃相不可得

열반은 세간과
어떤 차이도 없네.
세간은 열반과
어떤 차이도 없네. (19)
016_0395_c_22L復次
涅槃與世閒
無有少分別
世閒與涅槃
亦無少分別
016_0396_a_01L
또 5온(蘊)이 상속하고 윤회하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5온의 자성은 완전히 공하고 취착이 없으며 적멸해 있다. 이 이치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세간은 열반과 차이가 없고, 열반은 세간과 차이가 없다.
016_0396_a_01L五陰相續往來因緣故說名世閒陰性畢竟空無受寂滅此義先已說以一切法不生不滅故世閒與涅槃無有分別涅槃與世閒亦無分別

열반의 한계와
세간의 한계
이 두 한계는
아주 적은 차이도 없네. (20)
016_0396_a_05L復次
涅槃之實際
及與世閒際
如是二際者
無毫釐差別

또 세간과 열반의 한계를 완벽하게 궁구해 보아도, 한계가 생기는 일이 없고 평등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적은[毫釐] 차이도 없다.
016_0396_a_07L究竟推求世閒涅槃實際無生際平等不可得故無毫氂差別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따위,
‘유한하다’ 하는 따위, ‘상주한다’ 하는 따위
견해들은 열반과
미래세와 과거세에 의거한 것이네. (21)
016_0396_a_09L復次
滅後有無等
有邊等常等
諸見依涅槃
未來過去世

또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여래가 존재한다’,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도 하다’,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간은 유한하다’, ‘세간은 무한하다’, ‘세간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세간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유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세간은 상주한다’, ‘세간은 무상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 하는 이 세 부류의 열두 견해 중에서,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의 네 견해는 열반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고, ‘세간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하는 따위의 네 견해는 미래세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고, ‘세간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네 견해는 과거세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다.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따위를 얻을 수 없듯이 열반도 그러하다. 세간은 과거세[前際]로부터 ‘상주한다’, ‘무상하다’ 하는 따위와, 세간은 미래세[後際]가 ‘유한하다’, ‘무한하다’ 하는 따위를 얻을 수 없듯이 열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간과 열반 따위는 차이가 없다.
016_0396_a_11L如來滅後有如來無如來亦有如來亦無如來非有如來非無如來世閒有邊世閒無邊世閒亦有邊亦無邊世閒非有邊非無邊世閒常世閒無世閒亦常亦無常世閒非有常非無常此三種十二見如來滅後有無等四見依涅槃起世閒有邊無邊等四見依未來世起世閒常無常等四依過去世起如來滅後有無等不可得涅槃亦如是如世閒前際後際有邊無邊有常無常等不可得涅槃亦如是是故說世閒涅槃等無有異
016_0396_b_01L
모든 법들이 공한데 무엇이 유한한 것이고,
무엇이 무한한 것이며,
무엇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며,
무엇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것인가? (22)
016_0396_a_23L復次
一切法空故
何有邊無邊
亦邊亦無邊
非有非無邊

무엇이 같은 것이고 무엇이 다른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고, 무엇이 무상한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 것인가? (23)
016_0396_b_03L何者爲一異
何有常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모든 법(法)들은 인식할 수 없고,
모든 희론들이 적멸하네.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장소에서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네. (24)
016_0396_b_04L諸法不可得
滅一切戲論
無人亦無處
佛亦無所說

또 모든 때 모든 종류의 모든 법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공해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 중에서 무엇이 유한한 것이고 누가 유한한 것을 행하며, 무엇이 무한한 것이며, 무엇이 유한한 것이기도 하고 무한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고 누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것을 행하는가?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고 누가 상주하는 것을 행하며, 무엇이 무상한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고 누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 것을 행하는가? 몸과 ‘나[神]’가 같다는 것은 무엇이고, 몸과 ‘나’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예순둘의 그릇된 견해들은 완전한 공함 속에서는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식이 다 지식(止息)하고, 희론이 다 적멸한다. 희론이 적멸하기 때문에 법들의 실상(實相)에 통달해서 안은(安隱)한 도(道)를 얻는다.
016_0396_b_05L一切法一切時一切種從衆緣生故畢竟空故無自性如是法中何者是有邊誰爲有邊何者是無邊亦有邊亦無邊非有邊非無邊誰爲非有邊非無邊何者是常誰爲是常何者是無常常無常非常非無常誰爲非常非無常何者身卽是神何者身異於如是等六十二邪見於畢竟空中皆不可得諸有所得皆息戲論皆滅戲論滅故通達諸法實相得安隱道
「인연을 관찰하는 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법들을 구별해서 궁구해 보아도, 존재하는 것[有]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無]도 없고,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有無]도 없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도 없다.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또한 진여ㆍ법성ㆍ실제(實際)ㆍ열반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어떤 때에도 어떤 곳에서도 사람을 위해 열반의 확정된 상(相)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게송에서는) “모든 인식이 다 지식(止息)하고 희론이 다 적멸하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396_b_15L從「因緣品」來分別推求諸法有亦無無亦無有無亦無非有非無亦無名諸法實相亦名如法性實際涅槃是故如來無時無處爲人說涅槃定是故說諸有所得皆息戲論皆滅

26.12연기를 관찰하는 장[觀十二因緣品]9偈
016_0396_b_20L中論觀十二因緣品第二十六[九偈]

【문】 그대는 대승의 법에 의거해서 제일의(第一義)의 도를 말해 왔다. 나는 이제 성문(聲聞)의 법에 의거해서 제일의의 도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
016_0396_b_21L問曰汝以摩訶衍說第一義道我今欲聞說聲聞法入第一義道
016_0396_c_01L
【답】
중생은 무지[癡]에 덮여 있어서
후생(後生)을 위해 3행(行)을 일으키네.
이 행(行)을 일으키기에
행에 따라서 6취(趣)에 떨어지네. (1)
016_0396_b_23L答曰
衆生癡所覆
爲後起三行
以起是行故
隨行墮六趣

모든 행(行)을 인연으로 해서
식(識)은 6도(道)의 몸을 받네.
식의 집착이 있어서
명색(名色)이 증장(增長)하네. (2)
016_0396_c_02L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著故
增長於名色

명색이 증장하기에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6입(入)이 생기네.
근[情]과 경[塵]과 식이 화합해서
6촉(觸)이 생기네. (3)
016_0396_c_03L名色增長故
因而生六入
情塵識和合
而生於六觸

6촉을 인연으로 해서
3수(受)가 생기네.
3수를 인연으로 해서
갈애(渴愛)가 생기네. (4)
016_0396_c_04L因於六觸故
卽生於三受
以因三受故
而生於渴愛

갈애를 인연으로 해서 4취(取)가 생기고,
4취를 인연으로 해서 유(有)가 생기네.
취착하는 자가 취착하지 않는다면,
해탈하기에 유가 없을 것이네. (5)
016_0396_c_06L因愛有四取
因取故有有
若取者不取
則解脫無有

유(有)로부터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으로부터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네.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근심ㆍ비애ㆍ고뇌가 있네. (6)
016_0396_c_07L從有而有生
從生有老死
從老死故有
憂悲諸苦惱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
다 태어남[生]으로부터 있는 것이네.
이런 인연들 때문에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집기(集起)하네. (7)
016_0396_c_08L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

이것을 태어나고 죽는
행(行)들의 근본이라고 말하네.
지혜가 없는 자[無明者]가 만드는 것이지
지혜가 있는 자[智者]가 만드는 것이 아니네. (8)
016_0396_c_10L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明者所造
智者所不爲

이것이 소멸하기에
이것이 발생하지 않네.
오직 고(苦)만의 집적이
바르게 소멸하네. (9)
016_0396_c_11L以是事滅故
是事則不生
但是苦陰聚
如是而正滅
016_0397_a_01L범부는 무명(無明)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으로 후생(後生)의 몸을 위해 6취(趣)16)의 모든 행(行)을 일으킨다. 일으키는 바의 행에 따라서 상과 중과 하가 있다. 식(識)17)은 6취에 들어가 행(行)에 따라서 몸을 받는다. 식의 집착을 인연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집기(集起)한다. 명색이 집기하기에 6입(入)18)이 발생한다. 6입을 인연으로 해서 6촉(觸)19)이 발생한다. 6촉을 인연으로 해서 3수(受)20)가 발생한다. 3수를 인연으로 해서 갈애(渴愛)21)가 발생한다. 갈애를 인연으로 해서 4취(取)22)가 발생한다. 4취를 취착할 때 신업과 구업과 의업으로 죄나 복이 일어나서, 후의 3유(有)23)를 상속하게 한다. 3유로부터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으로부터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다.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근심ㆍ비애ㆍ고뇌의 여러 가지 환난(患難)들이 생겨서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집기(集起)한다. 그러므로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태어나고 죽는 행(行)들의 근본을 일으킨다. 지혜가 있는 자[智者]는 (그것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실하게 보기에 무명이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에 행들이 소멸한다. 원인이 소멸하기에 결과도 소멸한다. 이와 같이 12연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지혜를 수습(修習)하기에, 이것이 소멸한다. 이것이 소멸하기에 나아가 태어남, 늙음과 죽음, 근심, 비애,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모두 여실하게 바르게 소멸한다. ‘바르게 소멸하네’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 이 12연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이치는 아비달마 경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016_0396_c_12L凡夫爲無明所盲故以身意業爲後身起六趣諸行隨所起行有上下識入六趣隨行受身以識著因緣名色集名色集故有六入六入因緣故有六觸六觸因緣故有三受受因緣故生渴愛渴愛因緣故有四四取取時以身意業起罪福後三有相續從有而有生從生而有老死從老死有憂悲苦惱種種衆患但有大苦陰集是故知凡夫無智此生死諸行根本智者所不起以如實見故則無明滅無明滅故諸行亦以因滅故果亦滅如是修習觀十二因緣生滅智故是事滅是事滅故乃至生老死憂悲大苦陰皆如實正正滅者畢竟滅是十二因緣生滅如阿毘曇修多羅中廣說

27. 그릇된 견해를 관찰하는 장[觀邪見品]31偈
016_0397_a_06L中論觀邪見品第二十七[三十一偈]

【문】 이제까지 대승의 법으로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 성문의 법으로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을 듣고 싶다.
016_0397_a_07L問曰已聞大乘法破邪見今欲聞聲聞法破邪見

【답】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세간이 상주하는가 하는 따위의 견해들은
모두 과거세에 의거한 것이네. (1)
016_0397_a_09L答曰
我於過去世
爲有爲是無
世閒常等見
皆依過去世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세간이) 유한한가 하는 따위의 견해들은
모두 미래세에 의거한 것이네. (2)
016_0397_a_11L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有邊等諸見
皆依未來世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는가, 이것들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과거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겠는가, 이것들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릇된 견해이다.
무슨 이유로 그릇된 견해라 하는가? 이것에 대해 이제 설명하겠다.
016_0397_a_12L我於過去世爲有爲無爲有無爲非有非無是名常等諸見依過去世於未來世爲作爲不作爲作不作非作非不作是名邊無邊等諸見未來世如是等諸邪見何因緣故爲邪見是事今當說

과거세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은
얻을 수 없네.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되지 않네. (3)
016_0397_a_18L過去世有我
是事不可得
過去世中我
不作今世我

만약 내가 바로 그 사람이지만
몸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몸을 떠나서
어디에 별도로 ‘나’가 있겠는가? (4)
016_0397_a_20L若謂我卽是
而身有異相
若當離於身
何處別有我

몸을 떠나서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성립했네.
만약 몸이 곧 ‘나’라고 말한다면
그대에게는 도무지 ‘나’가 있지 않은 것이네. (5)
016_0397_a_21L離身無有我
是事爲已成
若謂身卽我
若都無有我

그러나 몸은 ‘나’가 아니네.
몸은 생멸하기 때문이네.
어떻게 취착이
취착하는 자이겠는가?24) (6)
016_0397_a_22L但身不爲我
身相生滅故
云何當以受
而作於受者
016_0397_b_01L
만약 몸을 떠나서 ‘나’가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취착이 없이 ‘나’가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얻을 수 없네. (7)
016_0397_b_01L若離身有我
是事則不然
無受而有我
而實不可得

금세의 ‘나’는 취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취착인 것도 아니며
취착이 없는 것도 취착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네.
이것은 확정된 이치이네. (8)
016_0397_b_02L今我不離受
亦不卽是受
非無受非無
此卽決定義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선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아니다. 상주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무한한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령 사람이 복을 닦은 인연 때문에 천신이 됐다가 이후에 다시 사람이 된 경우에, 만약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라면, 천신이 그대로 사람일 것이다. 또 사람이 죄업(罪業)의 인연 때문에 전다라(旃陀羅)가 됐다가 이후에 다시 바라문(婆羅門)이 된 경우에, 만약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라면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제바달(提婆達)이라 하는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이 왕사성(王舍城)에 갔어도 제바달이라고 부르지 왕사성에 갔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선세에는 천신인데 후세에는 사람이라면 천신이 그대로 사람일 것이고, (만약 선세에는 전다라인데 후세에는 바라문이라면)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천신이 그대로 사람인 것이 아니고,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인 것이 아니다. 이 상주의 과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016_0397_b_03L我於過去世有者是事不然何以故先世中我不卽作今我有常過故則有無量過何以故如人修福因緣故作天而後作人若先世我卽是今我者天卽是人又人以罪業因緣作旃陁羅後作婆羅門若先世我卽是今我者旃陁羅卽是婆羅門如舍衛國婆羅門名提婆達到王舍城亦名提婆達不以至王舍城故爲異先作天後作人則天卽是人旃陁羅卽是婆羅門但是事不然何以故不卽是人旃陁羅不卽是婆羅門此等常過故
016_0397_c_01L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가 아니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박한다.
“가령 사람이 옷을 빨때는 빨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풀 벨 때는 풀 베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빨래하는 사람이 풀 베는 사람과 다르진 않지만 빨래하는 사람이 그대로 풀 베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나’가 천신의 몸을 받았을 때는 천신이라고 부르고, ‘나’가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다르지 않지만 몸은 다르다.”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대로라면, 천신이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빨래하는 사람은 풀 베는 사람과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빨래하는 사람이 그대로 풀 베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듯이 선세의 천신은 그대로 사람일 것이며 전다라는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니, ‘나’에게도 또한 상주의 과실이 있다. 만약 다르다면, 빨래하는 사람이 풀 베는 사람이 되지 못하듯이, 천신은 사람이 되지 못하니 ‘나’ 또한 무상해서 ‘나’의 특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로라고 말할 수 없다.
016_0397_b_16L若謂先世我不作今我如人浣衣時名爲浣者刈時名爲刈而浣者與刈者雖不異而浣者不卽是刈者如是我受天身名爲天受人身名爲人我不異而身有異者是事不然何以故若卽是者不應言天作人今浣者於刈者爲異爲不異若不異浣者應卽是刈者如是先世天卽是人旃陁羅卽是婆羅門我亦有常過若異者浣者卽不作刈者是天不作人我亦無常無常則無我是故不得言卽是
【문】 ‘나’는 그대로이다. 단지 취착에 의해서 ‘이것은 천신이다’, ‘이것은 사람이다’고 분별할 따름이다. 취착이란 5온의 몸을 말한다. 업의 인연 때문에 ‘이것은 천신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전다라이다’, ‘이것은 바라문이다’라고 분별하는 것이지 ‘나’는 실제로 천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016_0397_c_04L問曰我卽是因受故分別是天是人受名五陰身以業因緣故分別是天是人是旃陁是婆羅門而我實非天非人非旃陁羅非婆羅門是故無如是過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몸이 천신이 되고 사람이 되고 전다라가 되고 바라문이 되는 것이어서, ‘나’가 아니라면 몸을 떠나 별도로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죄나 복을 지어 생사 윤회하는 것은 모두 몸이지 ‘나’가 아니다. 죄의 인연 때문에 3악도(惡道)25)에 떨어지고, 복의 인연 때문에 3선도(善道)26)에 태어난다. 만약 괴로움ㆍ즐거움ㆍ미움ㆍ기쁨ㆍ두려움 따위가 모두 몸이지 ‘나’가 아니라면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마치 속인의 죄를 다스리는데 출가인을 참여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5온의 인연이 상속해서 죄나 복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해탈이 있는 것이다. 만약 모두 몸이고 ‘나’가 아니라면,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016_0397_c_08L答曰是事不然何以故若身作天作人旃陁羅作婆羅門非是我者則離身別有我今罪福生死往來皆是身是我罪因緣故墮三惡道福因緣故生三善道若苦樂瞋喜憂怖等皆是非我者何用我爲如治俗人罪豫出家人五陰因緣相續罪福不失故有解脫若皆是身非我者何用我
016_0398_a_01L【문】 죄나 복 등은 ‘나’에 의지한다. ‘나’에는 인식 작용[所知]이 있지만 몸에는 인식 작용이 없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는 ‘나’이어서 업(業)을 일으키는 인연이다. 죄나 복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짓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짓는 자는 ‘나’이고 몸은 ‘나’가 사용하는 것이고 ‘나’가 거주하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집 주인이 풀ㆍ나무ㆍ진흙ㆍ매흙[墍:벽에 바르는 흙] 등을 써서 집을 고칠 때 스스로 몸을 위해 쓰임에 따라서 집을 고치기에 좋은 데도 있고 좋지 않은 데도 있다. ‘나’도 이와 같아서, 선이나 악을 짓는 것에 따라서 아름답거나 추한 몸을 받으니 6도(道)의 생사가 모두 ‘나’가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나 복의 몸은 모두 ‘나’에 속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집은 주인에게만 속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016_0397_c_17L問曰罪福等依止於我我有所知身無所知故知者應是我起業因緣罪福是作法當知應有作者作者是身是我所用亦是我所住處譬如舍主以草木泥墍等治舍自爲身故隨所用治舍有好惡我亦如是隨作善惡等得好醜身六道生死皆我所是故罪福之身皆屬於我譬如舍但屬舍主不屬他人
【답】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집 주인은 형체가 있고 감촉이 있어서 힘이 있기에 능히 집을 고칠 수 있지만, 그대가 말하는 ‘나’는 형체가 없고 감촉이 없어서 짓는 힘이 없다. 자기에게 짓는 힘이 없기에 다른 것에게 짓도록 시키지도 못한다. 만약 세간에 형체가 없고 감촉이 없으면서도 능히 지을 수 있는 것이 한 법이라도 있다면, 인식 작용[知]이 짓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나’가 짓는 자라면 스스로 괴로운 일[苦事]을 짓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나’가) 기억하는 자라면 즐거운 일을 탐내는 것을 잊고 말 것이다. 만약 ‘나’가 괴로움[苦]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어찌할 수 없이[强] 생기는 것이라면, 여타의 모든 것도 다 스스로 생기는 것이지 ‘나’가 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보는 자가 ‘나’라면 눈이 능히 색을 볼 수 있으니 눈이 ‘나’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눈이 보는데 ‘나’가 아니라면, 보는 자가 ‘나’라는 앞에서 말한 것과 어긋나게 된다. 만약 보는 자가 ‘나’라면,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등 다른 경계를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는 자라는 것은 옳지 않다.
016_0398_a_02L答曰是喩不然何以故舍主有形有觸有力故能治汝所說我無形無觸故無作力無作力亦不能使他作若世閒有一無形無觸能有所作者則可信受知有作者但是事不然若我是作者則不應自作苦事若是念者可貪樂事不應忘失若我不作苦而苦强生餘一切皆亦自生非我所作若見者是我眼能見色眼應是我若眼見而非我則違先言見者是我若見者是我我則不應得聞聲等諸塵何以眼是見者不能得聞聲等塵故故我是見者是事不然
016_0398_b_01L만약 마치 풀 베는 사람이 낫을 써서 풀을 베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이 손 등을 써서 능히 짓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경우는 낫을 떠나서 별도로 풀 베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몸과 마음과 감관을 떠나서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짓는 자가 비록 눈[眼]ㆍ코[鼻] 등으로 지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짓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석녀의 자식이라 해도 능히 짓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감관[根]들은 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오른쪽 눈이 사물을 보아도 왼쪽 눈이 그것을 인식하므로 별도로 보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지금 오른 손이 익힌 일을 (후에) 왼 손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한다면 왼 손이 익힌 일을 오른 손도 할 수 있어야 할 터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016_0398_a_15L若謂如刈者用鐮刈草我亦如是以手等能有所作者是事不然何以故今離鐮別有刈者而離身心諸根無別作者若謂作者雖非眼耳等所得亦有作者石女兒能有所作如是一切諸根皆應無我若謂右眼見物而左眼識知別有見者是事不然今右手習作左手不能是故無別有作者若別有作右手所習左手亦應能而實不能是故更無作者
또 ‘나’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과일을 먹는 것을 보면 입에서 침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의 상(相)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기억[念]의 힘이지 ‘나’의 힘이 아니다. 또 이것은 ‘나’를 타파하는 이유가 된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침이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데도 침이 저절로 흘러나와 제어가 되지 않으니,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전도의 과오가 있게 된다. 선세에는 아버지이던 자가 금세에는 아들이 될 때 아버지와 아들은 ‘나’는 하나인데 몸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 된다. 마치 한 집에서 다른 한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선세에) 아버지였기에 (금세에도) 아버지이다.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나’가 존재한다면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큰 과실이 있는 것이다.
016_0398_b_02L復次有我者言見他食果口中涎出是爲我相是事不然何以故是念力故非是我力又亦卽是破我因緣人在衆中愧於涎出涎强出不得自在當知無我復次又有顚倒過罪先世是父今世爲子是父子我一但身有異如從一舍至一舍父故是父不以入異舍故便有異有我是二應一如是則有大過
만약 무아(無我)인 5온의 상속(相續)에도 이 과실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5온은 비록 상속하지만 어떤 때는 작용이 있고 어떤 때는 작용이 없다. 비유하면 계(戒)를 지키는 자는 포도즙은 마셔도 되지만 포도주는 마셔서 안 되는데, 만약 변질되어 포도산[苦酒]이 되면 다시 마셔도 되는 것과 같다. 5온의 상속도 이와 같아서 작용이 있을 때가 있고 작용이 없을 때가 있다. 만약 시종 동일한 ‘나’가 존재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5온의 상속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단지 5온이 화합한 것일 뿐이기에 임시로 ‘나’라고 이름붙인 것이니 확정된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대들보와 서까래가 화합해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대들보와 서까래를 떠나서 별도로 집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5온이 화합해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5온 없이 별도로 ‘나’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임시로 이름붙인 것[假名]일 뿐이지 확정된 실체[定實]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016_0398_b_10L若謂無我五陰相續中亦有是過是事不何以故五陰雖相續或時有用時無用如蒲桃漿持戒者應飮蒲桃酒不應飮若變爲苦酒還復應飮陰相續亦如是有用有不用若始終一我有如是過五陰相續無如是過但五陰和合故假名爲我無有決定如梁椽和合有舍離梁椽無別舍是五陰和合故有我若離五陰實無別我是故我但有假名無有定實
016_0398_c_01L그대는 앞에서 “취착을 떠나서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 취착에 의해서 취착하는 자를 분별해서 ‘이것이 천신이다’, ‘이것이 사람이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취착만이 존재할 뿐이지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취착을 떠나서 별도로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취착을 떠나서 ‘나’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나’의 상(相)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상이 없는데도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취착을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만약 몸을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고 몸이 바로 ‘나’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몸에는 생멸의 상(相)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016_0398_b_20L先說離受別有受者以受分別受者是天是人是皆不然當知但有受別受者若謂離受別有我是事不然若離受有我云何可得說是我相無相可說則離受無我若謂離身無但身是我是亦不然何以故身有生滅相我則不爾
또 어떻게 취착이 곧 취착하는 자이겠는가? 만약 취착을 떠나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5온을 취착하지 않고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5온을 떠나서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할 것이니, 눈[眼] 등의 감관[根]에 의해서 지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취착을 떠난 것도 아니고, 취착 그대로인 것도 아니며, 취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취착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확정된 이치이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나’가 존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398_c_04L復次云何以受卽名受者若謂離受有受者是亦不然若不受五陰而有受者應離五陰別有受者眼等根可得而實不可得故我不離受不卽是受亦非無受復非無此是定義是故當知過去世有我者是事不然何以故

과거세의 ‘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옳지 않네.
과거세의 ‘나’가 금세의 ‘나’와 다르다는 것도
옳지 않네. (9)
016_0398_c_10L過去我不作
是事則不然
過去世中我
異今亦不然

만약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없어도 지금의 것이 존재할 것이네.
‘나’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고
금세에 ‘나’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네. (10)
016_0398_c_12L若謂有異者
離彼應有今
我住過去世
而今我自生

그렇다면 단멸이니
업과 과보를 상실하는 것이네.
그 자가 지었는데 이 자가 받는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네. (11)
016_0398_c_13L如是則斷滅
失於業果報
彼作而此受
有如是等過

선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금세에 존재한다는 것에도
과실이 있네.
‘나’가 지어진 것이고
원인이 없는 것이네. (12)
016_0398_c_14L先無而今有
此中亦有過
我則是作法
亦爲是無因
016_0399_a_01L
과거세의 ‘나’가 금세의 ‘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네. 왜 그러한가?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와 다르지 않다. 만약 금세의 ‘나’가 과거세의 ‘나’와 다르다면, 그 세(世)27)의 ‘나’가 없이 금세의 ‘나’가 존재할 것이다. 또 과거세의 ‘나’는 그 세(世)에 머물러 있고 이 세(世)의 몸은 스스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단멸의 극단에 떨어져서 모든 업과 과보를 상실하게 된다. 또 그 자가 죄를 지었는데 이 자가 과보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무한한 과실들이 있다. 또 이 ‘나’가 선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금세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도 과실이 있다. ‘나’는 지어진 것이고 원인이 없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016_0398_c_16L過去世中我不作今我是事不然以故過去世中我與今我不異若今我與過去世我異者應離彼我而有今我又過去世我亦應住彼此身自更若爾者卽墮斷邊失諸業果報彼人作罪此人受報有如是等無量又是我應先無而今有是亦有過我則是作法亦是無因生是故過去我不作今我是事不然

그와 같이 과거세에
나는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견해들은
모두 옳지 않네. (13)
016_0399_a_02L復次
如過去世中
有我無我見
若共若不共
是事皆不然

또 그와 같이 궁구해 보니, 과거세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 즉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다’ 하는 그릇된 견해들은 앞에서 그 이유를 말한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옳지 않다.
016_0399_a_04L如是推求過去世中邪見亦有亦無非有非無是諸邪見先說因緣過故是皆不然

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모두 과거세의 경우와 같네. (14)
016_0399_a_07L我於未來世
爲作爲不作
如是之見者
皆同過去世

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이와 같은 4구(句)28)는 과거세의 경우와 과실이 같으니, 그 속에 들어 있는 대로 설명해야 한다.
016_0399_a_09L我於未來世中爲作爲不作如是四如過去世中過咎應在此中說

만약 천신이 그대로 사람이라면
상주의 극단에 떨어지네.
천신은 태어나지 않을 것이네.
상주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네. (15)
016_0399_a_11L復次
若天卽是人
則墮於常邊
天則爲無生
常法不生故

또 만약 천신이 그대로 사람이라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천신이 사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이라 하겠는가? 상주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주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016_0399_a_13L若天卽是人是則爲常若天不生人云何名爲人常法不生故常亦不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 되네.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은 상속이 없는 것이네. (16)
016_0399_a_16L復次
若天異於人
是卽爲無常
若天異人者
是則無相續

또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무상한 것이 된다. 무상하다면 단멸 등의 과실이 있게 된다. 앞에서 말한 과실과 같다.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상속이 없는 것이다. 만약 상속이 있다면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016_0399_a_18L若天與人異則爲無常無常則爲斷滅等過如先說過若天與人異則無相續若有相續不得言異

만약 반은 천신이고 반은 사람이라 한다면
상주함과 무상함이라는
두 극단에 떨어지게 되네.
이것은 옳지 않네. (17)
016_0399_a_21L復次
若半天半人
則墮於二邊
常及於無常
是事則不然
016_0399_b_01L
또 만약 중생이 몸의 반은 천신이고 몸의 반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상주함과 무상함이 있게 된다. 반인 천신은 상주하는 것이고 반인 사람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한 몸에 두 상(相)이 있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016_0399_a_23L若衆生半身是天半身是人若爾有常無常半天是常半人是無常是事不然何以故一身有二相過故

만약 상주하는 것과 상주하지 않는 것
이 둘이 동시에 성립한다면
그렇다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성립할 것이네. (18)
016_0399_b_03L復次
若常及無常
是二俱成者
如是則應成
非常非無常

또 만약 상주하는 것과 상주하지 않는 것 둘이 동시에 성립한다면 연후에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성립할 것이다.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29)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지금 실제로는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016_0399_b_06L若常無常二俱成者然後成非常無常與常無常相違故今實常無常不成是故非常非無常亦不成

또 이제 생사에 시작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어떤 법에 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가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생사에는 시작이 없을 것이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없네. (19)
016_0399_b_09L復次今生死無始是亦不然何以故
法若定有來
及定有去者
生死則無始
而實無此事

만약 어떤 법에 어디에서 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어디로 가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생사에는 시작이 없을 것이다. 이 법을 지혜로써 구해 보아도 어디서 오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어디로 가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이것은 옳지 않다.
016_0399_b_12L法若決定有所從來有所從去者死則應無始是法以智慧推求不得有所從來有所從去是故生死無始是事不然

이제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지 않는 것,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20)
016_0399_b_16L復次
今若無有常
云何有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016_0399_c_01L
또 만약 그렇다면, 지혜로써 구해 보아도 상주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는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의거해서 ‘세간은 상주한다’ 등의 4구(句)30)는 얻을 수 없다.
‘유한하다’, ‘무한하다’ 등의 4구31)는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인데 이것은 얻을 수 없다. 이제 설명하겠다. 왜 그러한가?
016_0399_b_18L若爾者以智慧推求無法可得常者誰當有無常因常有無常故若二俱無者云何有亦有常亦無常若無有無常云何有非有常非無常因亦有常亦無常故有非有常非無常故依止過去世常等四句不可得邊無邊等四句依止未來世是事不可得今當說何以故

만약 세간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후세가 존재하겠는가?
만약 세간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후세가 존재하겠는가? (21)
016_0399_c_03L若世閒有邊
云何有後世
若世閒無邊
云何有後世

만약 세간이 유한하다면 후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후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세간이 무한하다면 또한 후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후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간이 무한하다는 것도 옳지 않다.
016_0399_c_05L若世閒有邊不應有後世而今實有後世是故世閒有邊不然若世閒無亦不應有後世而實有後世是故世閒無邊亦不然
또 이 두 극단은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5온[陰]의 상속은
등불의 불꽃과 같네.
그러니 세간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네. (22)
016_0399_c_09L復次是二邊不可何以故
五陰常相續
猶如燈火炎
以是故世閒
不應邊無邊

5온(蘊)에서 다시 5온이 발생한다. 이 5온은 순차적으로 상속한다. 마치 뭇 연(緣)이 화합해서 등불의 불꽃이 있을 때 만약 뭇 연(緣)이 소멸하지 않으면 등불이 소멸하지 않고 뭇 연이 소멸하면 등불이 소멸하듯이.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399_c_12L從五陰復生五陰是五陰次第相續如衆緣和合有燈炎若衆緣不盡則不滅若盡則滅是故不得說世閒有邊無邊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고
이 5온에 의존해서
다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유한할 것이네. (23)
016_0399_c_16L復次
若先五陰壞
不因是五陰
更生後五陰
世閒則有邊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지 않고
또 이 5온에 의존해서
후의 5온의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무한할 것이네. (24)
016_0399_c_18L若先陰不壞
亦不因是陰
而生後五陰
世閒則無邊
016_0400_a_01L
또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고 이 5온에 의존해서 다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세간은 유한할 것이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했을 때 다시 다른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를 한계[邊]라고 한다. 한계는 최후의 몸[末後身]을 말한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지 않고서 이 5온에 의존해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무한할 것이니, 이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은 무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세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국토 세간과 중생 세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중생 세간이다.
016_0399_c_19L若先五陰壞不因是五陰更生後五如是則世閒有邊若先五陰滅已更不生餘五陰是名爲邊邊名末後若先五陰不壞不因是五陰而生後五陰世閒則無邊是則爲常而實不爾是故世閒無邊是事不然世閒有二種國土世閒衆生世閒此是衆生世閒

또 『사백관론(四百觀論)』32)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참된 가르침, 말하는 자,
듣는 자를 얻기가 어려우니
그러니 생사는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네.
016_0400_a_04L復次如『四百觀』中說
眞法及說者
聽者難得故
如是則生死
非有邊無邊

참된 가르침을 얻을 수 없기에 생사 윤회는 유한하지 않다. 어떤 시기에 참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어 道를 얻기 때문에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016_0400_a_06L不得眞法因緣故生死往來無有邊或時得聞眞法得道故不得言無邊
이제 다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을 타파하겠다.

만약 세간의 반은 유한하고
세간의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인데, 옳지 않네. (25)
016_0400_a_08L今當更破亦有邊亦無邊
若世半有邊
世閒半無邊
是則亦有邊
亦無邊不然

만약 세간의 반은 유한하고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 법에 두 상(相)이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016_0400_a_11L若世閒半有邊半無邊則應是亦有邊亦無邊若爾者則一法二相是事不然何以故

그 5온을 취착하는 자가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옳지 않네. (26)
016_0400_a_14L彼受五陰者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則不然

취착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옳지 않네. (27)
016_0400_a_16L受亦復如是
云何一分破
一分而不破
是事亦不然

5온(蘊)을 취착하는 자가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한 가지의 것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할 수는 없다. 취착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는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016_0400_a_17L受五陰者云何一分破一分不破事不得亦常亦無常受亦如是云何一分破一分不破無常二相過故是故世閒亦有邊亦無邊則不然
이제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견해를 타파하겠다.

만약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이 둘이 성립할 수 있다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것도
성립할 것이네. (28)
016_0400_a_21L當破非有邊非無邊見
若亦有無邊
是二得成者
非有非無邊
是則亦應成
016_0400_b_01L
유한한 것과 반대되기에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 마치 긴 것과 반대되기에 짧은 것이 존재하듯이. 있는 것[有]이나 없는 것[無]과 상반되기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 존재한다.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과 상반되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 만약 유한한 것이기도 하고 무한한 것이기도 한 것이 확정되어 성립한다면,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닌 것이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미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제3구(第三句)를 타파했으니 어떻게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구해 보아도, 미래세에 의지해서 세간은 유한하다 등의 네 견해들 모두 얻을 수 없다.
016_0400_b_01L與有邊相違故有無邊如長相違有與有無相違則有亦有亦無與亦有亦無相違故則有非有非無若亦有邊亦無邊定成者應有非有邊非無邊何以故因相待故上已破亦有邊亦無邊第三句今云何當有非有邊非無邊以無相待故如是推求止未來世有邊等四見皆不可得

모든 법들이 공한 것인데,
세간은 상주한다 등의 견해들,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누가 이 견해들을 일으키겠는가? (29)
016_0400_b_09L復次
一切法空故
世閒常等見
何處於何時
誰起是諸見

또 위에서는 성문의 법으로써 견해들을 타파했다. 지금은 이 대승의 법에서는 모든 법들이 본래부터 완전히 공한 것[空性]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공성[空性法]에는 사람도 있지 않고 법도 있지 않으니 그릇된 견해든 바른 견해든 내서는 안 된다. ‘어느 곳[處]’이란 대지[土地]를 말한다. ‘어느 때[時]’란 년ㆍ월ㆍ일을 말한다. ‘누가’란 사람을 말한다. ‘이[是]’란 견해들 자체를 말한다. 만약 ‘상주한다’, ‘무상하다’ 등이 확정된 견해라면 이 견해들을 내는 사람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나’를 타파했으니 이 견해들을 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처소도 타파되거늘 하물며 시간과 장소이랴? 만약 견해들이 존재한다면 확정된 실체[定實]가 존재할 것이고, 만약 확정된 것이라면 타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해 왔으므로 견해들에는 확정된 자체[定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런 견해들을 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누가 이 견해들을 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016_0400_b_11L上以聲聞法破諸見今此大乘法中說諸法從本以來畢竟空性如是空性法中無人無法不應生邪見正見名土地名日月歲數名爲人名諸見體若有常無常等決定見應當有人出生此見破我故無人是見應有處所色法現見尚可破況時方若有諸見者應有定實若定則不應破上來以種種因緣破是故當知見無定體云何得生如偈說處於何時誰起是諸見

위대한 성인 구담(瞿曇)께서는
연민을 품고서 이 진리를 말씀해 주셔서
모든 견해들을 다 끊게 하셨으니,
나는 이제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리네. (30)
016_0400_b_22L瞿曇大聖主
憐愍說是法
悉斷一切見
我今稽首禮
016_0400_c_01L
모든 견해들이란 간략히 말하면 5견(見)33)이고 자세히 말하면 62견(見)이다. 이 견해들을 끊게 하기 위해 진리[法]를 말씀하셨다. 위대한 성인 구담[瞿曇]은 지혜가 무량하고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린다.
016_0400_c_01L一切見者略說則五見廣說則六十二見爲斷是諸見故說法大聖主瞿曇是無量無邊不可思議智慧者是故我稽首禮
中論卷第四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5온(蘊)을 말한다.
  2. 2)그런데 왜 언설했느냐는 뜻이다.
  3. 3)탐욕[貪]ㆍ증오[恚]ㆍ무지[癡].
  4. 4)고(苦)를 낙(樂)이라고 집착하는 것,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청정하지 않음을 청정함이라고 집착하는 것의 세 가지를 말한다..
  5. 5)5)고려대장경에는 “소용법(所用法)”으로 되어 있다.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本)을 따라 “소용저법(所用著法)”으로 바꾸었다.
  6. 6)이미 전도된 자의 과실과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의 과실을 말한다.
  7. 7)앞 장에서 말한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고(苦)를 낙(樂)이라고 집착하는 것,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의 네 가지 전도를 말한다.
  8. 8)8)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을 가리키는 말이다..
  9. 9)9)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을 가리키는 말이다.
  10. 10)승보(僧寶), 법보(法寶), 불보(佛寶).
  11. 11)범어 anuttara-saṃyak-saṃbodhi의 음사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한역한다.
  12. 12)‘만약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없다면’이라는 뜻이다.
  13. 13)모든 법의 인연성이란 연기(緣起)를 가리킨다.
  14. 14)공하지 않음과 공함을 말한다.
  15. 15)존재(有)를 말한다.
  16. 16)6도(道)라고도 한다. 미혹한 중생이 업에 따라 나아가는 천신ㆍ인간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ㆍ지옥 등이다.
  17. 17)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
  18. 18)6입처(入處) 또는 6처(處)라고도 한다.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등 이다.
  19. 19)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
  20. 20)고수(苦受)ㆍ낙구(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21. 21)애욕(愛欲)에 탐착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무유애(無有愛)를 말한다.
  22. 22)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23. 23)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
  24. 24)‘어떻게 취착을 취착하는 자로 삼겠는가?’라는 뜻이다.
  25. 25)축생ㆍ아귀ㆍ지옥.
  26. 26)인간ㆍ아수라ㆍ천신.
  27. 27)과거세이다.
  28. 28)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의 4구이다.
  29. 29)상주함과 무상함이 동시에 있는 것을 뜻한다.
  30. 30)상주한다, 상주하지 않는다,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다,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의 4구이다.
  31. 31)유한하다, 무한하다, 유한하면서 무한하다,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의 4구이다.
  32. 32)성천(聖天)의 『四百論』.
  33. 33)유신견(有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