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十住毘婆沙論卷第十六 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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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주비바사론 제16권


용수 지음
후진 구마라집 한역
번역


31. 호계품(護戒品)1)

이 보살은 이와 같이 여러 착한 길을 행한다.

착한 길과 착하지 아니한 길에
온 모양[總相]과 부분 모양[別相]으로
저마다 나누어 갈라서 알아보면
두 가지씩의 과보가 있다.

열 가지 착한 업의 길에서 온 모양[總相]으로서의 과보는 천상에 나기도 하고 인간에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부분 모양[別相]으로서의 과보는 산목숨 죽임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오래 삶이며, 둘째는 병이 적은 것이다.
도둑질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크게 부자가 됨이며, 둘째는 혼자만이 재물을 지니는 것이다.
삿된 음행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아내가 정숙하고 어짊이며, 둘째는 외인(外人)에게 유린당하지 않는 것이다.
거짓말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남에게 헐뜯음을 받지 않음이며, 둘째는 남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간질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좋은 권속을 얻음이며, 둘째는 남에게 파괴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나쁜 말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뜻을 따라 좋아하는 음성을 듣게 됨이며, 둘째는 다투는 일이 없는 것이다.
어지러운 말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음이며, 둘째는 말하는 바가 틀림이 없는 것이다.
탐냄을 여의는 착한 행에는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만족한 줄을 앎이며, 둘째는 욕심이 적은 것이다.
성냄을 여의는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살고 있는 곳에서 언제나 다른 이의 좋은 일을 구함이며, 둘째는 중생들을 괴롭히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바른 소견의 착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아첨과 간사함을 여읨이며, 둘째는 소견이 맑고 깨끗한 것이다.
열 가지 착하지 못한 길에도 그와 같아서 온 모양의 과보로서 으뜸가는 행은 지옥에 떨어지고, 중간의 행은 축생에 떨어지고, 맨 아래의 행은 아귀에 떨어진다.
부분 모양으로서의 과보로서 산목숨 죽이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목숨이 짧음이며, 둘째는 병이 많은 것이다.
도둑질하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가난함이며, 둘째는 재물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삿된 음행을 하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추악한 아내를 얻으며 또 정숙하거나 어질지 않음이며, 둘째는 남에게 유린을 당하는 것이다.
거짓말하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남에게 헐뜯음을 받음이며, 둘째는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간질하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악한 권속들을 만남이며, 둘째는 권속이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나쁜 말을 하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귀로 나쁜 소리를 들음이며, 둘째는 언제나 다툼이 있는 것이다.
어지러운 말을 하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말하여도 믿어 받지 않음이며, 둘째는 말에 처음과 끝이 없는 것이다.
탐을 내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마음에 만족한 줄을 모름이며, 둘째는 욕심이 많아서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성을 내는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성질이 나빠짐이며, 둘째는 중생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것이다.
삿된 소견의 착하지 못한 행에 두 가지의 과보가 있으니, 첫째는 그 마음이 아첨하며 간사함이며, 둘째는 삿된 소견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미 법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알므로
법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나니
모든 중생들에게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더욱 나아진다.

‘법을 사랑한다’ 함은 다만 법만을 사랑하고 다시 그 보다 뛰어난 일은 없는 것이니, 이 중에서 법이라 함은 먼저 말한 열 가지 착한 업의 길이다. ‘법을 즐긴다’ 함은, 다만 법만을 즐기고 다시 그 밖의 일은 없는 것이다. ‘법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함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끝내 법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이와 같은 법을 행하면 모든 중생들에게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더욱 나아지며, 초지 중에서 비록 사랑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 지에서 보다는 못하다.
죄와 복업의 인연을 통달한 까닭에 중생들이 모두가 업에 매여 자재할 수 없음을 가엾이 여기므로 성냄과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이와 같이 행하는 이는 사랑함과 가엾어 함이 더욱 나아지므로 이런 생각을 한다.

애달프다, 중생들이여
삿된 소견에 깊이 떨어졌구나.
나는 마땅히 바른 소견 말하여
바른 길에 들을 수 있게 하리라.

보살은 죄와 복업의 인연을 통달하였으므로 중생들에게 사랑함과 가엾이 하는 마음을 깊이 행하면서 생각하기를 ‘중생들은 불쌍하기 짝이 없다. 모든 법의 진실한 형상을 모르는 까닭에 망령된 생각을 많이 하고, 모든 삿된 소견으로 인하여 여러 번뇌가 일어나며, 번뇌로 인하여 모든 업을 일으키며, 업을 일으키는 인연 때문에 나고 죽음에서 바퀴처럼 돈다.
나는 먼저 마음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바른 소견을 말하여야겠으며, 이 모든 중생들은 바로 내가 제도하리라. 이제 그들을 위하여 바른 소견을 말하여 참된 도에 들게 하고 제도 해탈할 수 있게 하겠다’고 한다. 이런 생각을 한 뒤에 중생들에게 가지가지의 번뇌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일어나는 번뇌와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자세히 살피매
갖가지 검은 나쁜 업으로
가지가지의 괴로움을 받는구나.

모자람과 적은 많이 있게 되는
모든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면서
갖가지로 자세히 살펴 마치니
이는 모두 내 몸에 있는 것과 같다.

즉시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방편으로써 큰 원을 세우되
어떻게 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이 모든 고통을 없앨 수 있으리오.

‘번뇌와 번뇌의 때’라 함은 부림[使]에 포섭된 것을 번뇌라 하고, 감김[纒]에 포섭된 것을 때[垢]라고 한다.
부림에 포섭된 번뇌라 함은 탐냄ㆍ성냄ㆍ잘난 체[慢]ㆍ무명(無名)ㆍ몸에 대한 고집ㆍ치우친 소견ㆍ소견에 대한 고집ㆍ계율에 대한 잘못된 소견ㆍ삿된 소견ㆍ의심 등이다. 이 열 가지의 근본은 삼계의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에서 끊어지는 것을 따라 분별하는 까닭에 98사(使)라고 한다.
부림에 포섭된 것이 아닌 것으로서는, 믿지 않음[不信]ㆍ제부끄럼이 없음[無慚]ㆍ남부끄럼이 없음[無愧]ㆍ아첨ㆍ간사함ㆍ희롱함ㆍ뉘우침ㆍ고집ㆍ게으름ㆍ물러남ㆍ졸음ㆍ패려궂고 사나움ㆍ간탐ㆍ질투ㆍ교만ㆍ참지 않음ㆍ음식에 만족한 줄 모름 등이니, 역시 삼계의 견도위와 수도위에서 끊어지는 것을 따라 분별하는 까닭에 916의 얽힘의 더러움[纒垢]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번뇌는 깊은 마음에 있고 때는 얕은 마음에 있다’고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가림[障蓋]을 얽힘의 더러움이라 하고 그 밖은 모두를 번뇌라고 한다’고 한다.
‘검은 나쁜 업[黑惡業]’이라 함은, 곧 이는 일곱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과 탐냄ㆍ성냄ㆍ삿된 소견과 서로 응하는 생각이니, 괴로움과 과보를 낸다.
‘가지가지의 괴로움[苦惱]이라 함은 몸 안에서의 갖가지 나쁜 일을 고(苦)라 하고 마음 가운데 갖가지 나쁜 일을 뇌(惱)라고 하며, 또 금세(今世)의 괴로움을 고라고 하고 뒤에 나쁜 길에 떨어지는 것을 뇌라고 한다.
‘몸 모자람과 적은 것이, 많이 있다 함은 혹은 모든 감관과 팔 다리이기도 하고, 혹은 살림에 필요한 것이기도 하고, 혹은 믿음ㆍ계율 등의 모든 공덕이기도 하나니, 다 갖추지 못한 까닭에 적다고 한다.
그 밖의 구절은 이해하기 쉬워서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으므로 다시 풀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생각한 뒤에, ‘중생들은 매우 가엾도다. 2승에 떨어져 있으니, 나는 장차 그들을 위하여 원을 세워서 대승에 머무르게 하리라’고 하나니, 이 일은『십지경(十地經)』에서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스스로 말한 것과 같다.
이 보살은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여의고 중생들에게도 열 가지 착한 업의 길에 머무르게 하고자 중생들을 위하여 훌륭한 마음[勝心]ㆍ좋은 마음[好心]ㆍ 즐거운 마음[樂心]ㆍ불쌍히 여기는 마음[憐愍心]ㆍ자비로운 마음[慈悲心]ㆍ이익되는 마음[利益心]ㆍ수호하는 마음[守護心]ㆍ나에게 있다는 마음[我所有心]ㆍ큰 스승의 마음[大師心]ㆍ거두어 주는 마음[攝取心]ㆍ받아들이는 마음[受取心] 등을 깊이 구하면서, 생각하기를 ‘이 중생들은 매우 가엾도다. 갖가지 삿된 뜻과 삿된 소견에 떨어져서 삿되고 험한 길을 가고 있으니, 나는 이제 진실하고 바른 소견의 길 가운데에 머물러 있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종류가 같지 않아 서로가 다투며 언제나 분을 품고서 성을 냄이 대단하나 그러나 나는 위없는 큰 사랑에 머무르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만족함이 없이 다른 이익을 탐내어 구하면서 삿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는 깨끗한 몸과 입과 뜻의 업에 머무르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인연 가운데 있으면서 언제나 갖가지 번뇌를 일으키면서도 방편을 써서 스스로가 나오려고 하지 않으니, 나는 그 모든 괴로운 일을 없애서 괴로움이 없는 데에 머무르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무명에 가림을 당하여 캄캄하고 빽빽한 숲에 들어가서 스스로가 벗어나지 못한다. 지혜의 광명은 그 소견의 험악한 길 안에 들어가 있으니, 나는 그를 구제하여 걸림 없는 지혜의 눈을 얻게 하고 이 지혜의 눈으로써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으며 온갖 법에 사실대로의 형상을 알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나고 죽음의 긴 흐름에 떨어져 있으면서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의 구덩이에 떨어져서 삿되고 굽은 그물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갖가지 번뇌의 나쁜 풀에 가려졌으나 길잡이가 없으므로 나오려는 마음을 내지 않을뿐더러 길을 길이 아니라 말하고 길이 아닌 것을 길이라 말하며, 악마와 도둑들이 늘 함께 따르는지라 훌륭한 스승이 없으므로 악마의 뜻을 따르면서 부처님 법을 멀리 여읜다. 이러한 중생들에게 나는 이 모든 나고 죽음의 험악한 길을 건네주어 두려움 없고 쇠함이 없는 온갖 지혜의 성(城)에 머무를 수 있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욕심세계의 흐름[欲流], 형상세계의 흐름[有流], 소견의 흐름[見流], 무명의 흐름[無明流]에 떠다니면서 갖가지 죄업의 파도에 덮여서 애욕의 강물에 빠져 있으며, 나고 죽음의 물결을 따라 맴돌면서 스스로가 나오지 못한다.
욕심내는 생각[欲覺]ㆍ성내는 생각[瞋覺]ㆍ해치려는 생각[惱覺]의 짠물에 절여지고, 몸에 대한 고집의 나찰에게 붙잡히며, 다섯 가지 욕심의 깊은 숲에 들어가서 물들기 좋아함에 집착하여 잘난 체하는 육지에서 숨을 쉬고 있으나, 매우 가엾게도 섬이 없고 구하는 이 없구나.
여섯 감관의 빈 마을에서 움직여 출발할 수 없음은 잘 제도하는 이가 없어서이니, 이와 같은 중생을 나는 이제 크게 가엾이 여김의 굳은 지혜의 배로써 실어다 편안하고 두려움 없는 온갖 지혜의 섬에 이르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괴로움이 많아서 가엾기 짝이 없다. 나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감옥에 갇혀서 탐냄ㆍ성냄ㆍ사랑함ㆍ미워함을 많이 품고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에 떨어지며, 네 가지 원소의 독사에 침해 받고, 다섯 가지 쌓임의 원수에게 해침을 당하며, 물들기 좋아함의 간사한 도둑에게 빠져 여섯 감관의 빈 무더기에 있으면서 한량없는 괴로움을 받고 있으니, 나는 그 나고 죽음의 감옥을 깨뜨려서 자재하고 걸림 없는 열반과 편안하고 고요한 쾌락을 얻게 하리라.
이 중생들은 매우 가엾도다. 좁고 낮은 작은 마음으로 조그마한 이익을 즐겨 움츠러들어서 온갖 지혜의 마음이 없으며, 설령 벗어나기를 구하는 이라 하여도 곧 성문과 벽지불승을 즐기니, 나는 큰마음을 얻게 하고 부처님의 넓고 큰 법을 즐기게 하리라’고 하였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곧 계율 지니는 힘을 얻으며
착한 업을 일으킬 줄 알아서
더욱 자랄 수 있게 하나니
이야말로 곧 부처님의 제자요
이구지(離垢地)에 깊이 들어감이다.

‘계율 지닌 힘’이라 함은 한 마음으로 깨끗하게 열 가지 착한 길을 완전히 갖추는 것이다. 계율이란 곧 복덕을 닦고 모을 수 있는 힘이다.
‘착한 업을 일으킬 수 있다’ 함은 스스로가 착한 길을 더욱 자라게 함을 잘 아는 것이며, 또한 다른 중생에게 깊이 들게 한다 함은 하는 일이 점차 멀어서 변두리와 밑까지 다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라 함은 능히 법을 따라 행하면 부처님의 제자라 하며, 초지에서 나기 시작하여 2지에 이르면 더욱 자라는 것이다.
이 보살은 이와 같이 부지런히 행하고 힘써 나아가야 한다.

보살로서 만약
이구지의 끝에 이르게 되면
그때에는 곧
백 분ㆍ천 분의 부처님을 뵐 수 있다.

초지 중에서 이미 말하였으며, 반주삼매(般舟三昧)는 지금 계신 부처님을 뵙고 삼매법을 돕는다. 이른바 서른두 가지 거룩한 모습과 여든 가지 잘 생긴 모습이며, 마흔 가지 특수한 법으로써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온갖 법에 탐내거나 집착하는 것이 없고 또한 이익을 말하는 삼매며 과보의 세력을 성취할 수 있다.
【문】만약 보살이 초지 중에 이미 그 끝에 이르러서 모든 부처님을 뵈올 수 있고 처음 제2지에 들어가서 곧 모든 부처님을 뵈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여 제2지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든 부처님을 뵙게 된다고 말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제2지에 들어가서 처음과 중간에는 이 삼매를 당연히 잃었어야 하고 뒤에 이르러서야 얻는 것이리라.
【답】처음 제2지 중에 들어가서도 모든 부처님을 뵈올 수 있고 또한 이 삼매를 잃지도 아니 한다. 그대는 게송의 뜻을 잘 이해 못한 까닭에 이런 힐난을 하는 것이며, 제2지의 처음과 중간에는 다만 백 분의 부처님만을 뵙고 그 끝에 이르러서는 백 분 천 분의 부처님을 뵈올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을 뵙고 나면 마음이 크게 기뻐져서 부처님 법을 얻으려는 까닭에 부지런히 행하고 힘써 나아간다.

곧 네 가지 일로써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게 되며
모든 부처님에게서
다시금 열 가지의 착한 길을 받는다.

네 가지 일이란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이니, 그 밖의 뜻은 알 수 있으리라.

이와 같은 행을 지은 뒤에는
부처님으로부터 착한 길을 받으며
백천만겁 동안에 이르기까지
무너뜨리지 않고 또한 잃지도 않는다.

‘무너뜨리지 않는다’ 함은 계율을 약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혹은 깨끗한 일이면 무너뜨리지 않는다 하기도 하고, 모두 다시는 행하지 않게 되는 것을 잃는다고 한다.
이 보살은 이와 같이 초지를 지나서 제2지에 들게 되나니, 다음의 말과 같다.

간탐의 때를 잘 여의고
깨끗한 버림[捨]을 즐겁게 행하며
간탐의 때를 잘 여의고
깨끗한 계율을 깊이 사랑한다.

‘깨끗하다’ 함은 착한 마음만으로써 버림을 행하고 모든 번뇌에 뒤섞이지 않음을 말하며, ‘깊이 사랑한다’ 함은 그 가운데 굳게 머물러서 마침내 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 지 중에는 간탐의 때와 계율을 깨뜨리는 때가 남아 있음이 없으므로 이 지를 이구지(離垢地)라고 한다.
보살은 이와 같이 간탐과 계율 깨뜨리는 마음이 없이 네 가지 거두어 줌의 법에서 사랑하는 말[愛語]를 힘써 이익되게 하고 여섯 가지 바라밀 중에서 계율바라밀을 치우치게 힘쓰나니, 힘쓴다[利] 함은 많이 행하여 세력이 더욱 깊어지는 것이다.
【문】만약 제2지 중에서 시라(尸羅)바라밀이 세력을 얻는다면, 이 제2지 중에서 시라바라밀의 부분[分]ㆍ생김[生]ㆍ힘[力]ㆍ깨끗함[淨]과 차별(差別)을 해설하여야 하리라.

【답】시라바라밀을 간략하게 말하면
예순 다섯 가지의 부분이 있고
생김ㆍ힘ㆍ깨끗함ㆍ차별은
곳곳의 논(論) 중에서 말하리라.

시라바라밀은 한량없고 그지없지만 다만 간략하게 예순 다섯 가지의 부분만을 말하고, 그 밖에 계율의 생김[戒生]ㆍ계율의 힘[戒力]ㆍ계율의 깨끗함[戒淨]ㆍ계율의 차별은 논 중의 앞과 뒤의 곳곳에서 형상을 말하겠다.
『보정경[寶頂經]』의「화합불법품(和合佛法品)」에서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부처님 앞에서 예순 다섯 가지 시라바라밀의 부분을 말한 것과 같다.
“시라는 괴로움을 없게 함[不惱]이라 하나니, 일체 중생이 다른 이의 물건을 훔치겠다는 생각이 없으며, 남의 여색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을 속이지 않으며, 권속이 완전히 갖추어진 까닭에 이간질 하지 않으며, 나쁜 말을 많이 참는 까닭에 남에게 욕설하지 않으며, 언제나 이익되는 말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까닭에 어지러운 말이 없으며, 남의 즐거움을 기뻐하는 까닭에 마음에 탐냄이 없으며, 모든 괴로움을 참는 까닭에 성냄이 없으며, 딴 스승을 칭찬하지 않는 까닭에 바른 소견이라 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믿는 까닭에 부처님을 믿으며, 법의 진실을 아는 까닭에 법을 믿으며, 즐거이 성현들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까닭에 스님을 믿으며 부처님을 생각하며 온몸을 땅에 던져 공양하고 공경하며, 작은 계율에 이르기까지 깊은 마음으로 두려워하는 까닭에 계율이 약해지지 않으며, 다른 법[乘]을 의지하지 않는 까닭에 계율을 무너뜨리지 아니 합니다.
삿된 행을 여의는 까닭에 계율에 모자람이 없으며, 나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까닭에 뒤섞이지 아니한 계율이라 하며, 끝까지 언제나 선법을 더욱 자라게 하는 까닭에 흐리지 아니한 계율이라 하며, 뜻을 따라 행하는 까닭에 자재한 계율이라 하며, 지혜로운 이에게 꾸지람을 받지 않는 까닭에 성인이 찬탄하는 계율이라 하며, 언제나 생각을 지혜에 두는 까닭에 쉽게 행하는 계율이라 합니다.
온갖 것에 허물이 없는 까닭에 꾸짖을 수 없는 계율이라 하며, 모든 감관을 수호하는 까닭에 잘 보호하는 계율이라 하며, 모든 부처님이 생각하는 것인 까닭에 이름이 널리 떨치는 계율이라 하며, 법답게 물건 중에 수량을 지닐 줄 아는 까닭에 욕심을 적게 하는 계율이라 합니다.
간탐을 끊는 까닭에 만족할 줄 아는 계율이라 하며, 몸과 마음을 멀리 여읜 까닭에 멀리 여읜 계율이라 하며, 뭇 소란스런 말을 여읜 까닭에 아련야 계율이라 하며, 다른 이의 눈치를 보면서 얻는 것이 있으리라고 바라지 않는 까닭에 성인의 종자를 완전히 갖춘 계율이라 하며, 착한 뿌리에 매인 까닭에 자세하게 행하는 두타(頭陀)의 계율이라 하며, 사람과 하늘 안에 나는 까닭에 말씀을 따르며 행하는 계율이라 합니다.
일체 중생을 구하는 까닭에 인자함의 계율이라 하며, 온갖 고통을 참는 까닭에 가엾이 여김의 계율이라 하며, 마음에 물러나지 않는 까닭에 기쁨의 계율이라 하며, 미움과 사랑을 여읜 까닭에 버림의 계율이라 하며, 마음을 항복받는 까닭에 스스로가 허물을 보는 계율이라 하며, 저들의 마음을 보호하는 까닭에 그릇되지 않은 계율이라 하며, 계율을 잘 보호하는 까닭에 잘 거둔 계율이라 합니다.
중생을 성숙시키는 까닭에 보시의 계율이라 하며, 원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욕을 참는 계율이라 하며, 게을러서 물러나지 않는 까닭에 힘써 나아가는 계율이라 하며, 선법(禪法)을 모으고 돕는 까닭에 선의 계율[禪戒]이라 하며 많이 들음과 착한 뿌리에 만족한 줄 모르는 까닭에 지혜의 계율이라 합니다.
많이 들음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까닭에 많이 들음을 구하는 계율이라 하며, 7각(覺)의 법을 모으고 돕는 까닭에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계율이라 하며, 삿된 도를 버리는 까닭에 나쁜 벗을 여의는 계율이라 하며, 무상함을 자세히 살피는 까닭에 몸을 탐내지 않는 계율이라 하며, 착한 뿌리를 권하며 모으는 까닭에 목숨을 믿지 않는 계율이라 합니다.
깊은 마음이 깨끗한 까닭에 후회하지 않는 계율이라 하며, 행이 깨끗한 까닭에 거짓되지 아니한 계율이라 하며, 깊은 마음이 때가 없는 까닭에 열이 없는 계율[無熱戒]이라 하며, 업을 잘 일으키는 까닭에 근심이 없는 계율이라 하며, 스스로 높은 체하지 않는 까닭에 잘난 체함이 없는 계율이라 하며, 욕심에 물듦을 여읜 까닭에 실없음이 없는 계율이라 합니다.
마음이 질박하고 정직한 까닭에 스스로 높은 체 하지 않는 계율이라 하며, 마음이 조화되는 까닭에 부끄러움이 있는 계율이라 하며, 나쁜 마음이 나지 않는 까닭에 조화되고 착한 계율이라 하며, 모든 번뇌를 없애는 까닭에 적멸의 계율이라 하며, 말씀대로 행하는 까닭에 가르친 것을 따르는 계율이라 하며, 네 가지 거두어 줌의 법을 행하는 까닭에 중생을 교화하는 계율이라 합니다.
스스로 법을 잃지 않는 까닭에 법을 보호하는 계율이라 하며, 본래 깨끗한 까닭에 온갖 서원이 가득한 계율이라 하며, 위없는 도에 회향한 까닭에 부처님 법에 이르는 계율이라 하며, 일체 중생에게 마음이 평등한 까닭에 부처님의 삼매를 얻는 계율이라 합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이것이 예순다섯 가지의 부분입니다.”
모든 보살의 깨끗한 계율은 곧 끝이 없으며, 생김의 계율은 곳곳에서 말하고 있지만 간략하게 여덟 가지의 생김의 계율을 말하겠다.
네 가지는 몸으로부터 생기고 네 가지는 입으로부터 생기는데, 몸으로부터 생기는 것에는 목숨 빼앗는 것을 여의고, 중생 괴롭게 하는 짓을 여의게 하고, 도둑질을 여의며, 삿된 음행을 여의는 것이다. 입으로부터 생기는 것에는 거짓말과 이간질과 나쁜 말과 어지러운 말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이다.
이 여덟 가지의 계율은 받음[受]으로부터 생기나니, 이 받음의 법은 혹은 몸으로 혹은 입으로 혹은 마음으로써 받기도 하므로 합하면 24가지이다. 남을 가르쳐서 받게 하는 것에도 24가지이며, 따라 기뻐하며 받는 것에도 24가지이며, 닦아 익혀 행하는 때의 것에도 24가지이므로 합하면 아흔여섯 가지이다.
모두가 이는 욕심세계의 매임으로서 이로부터 밤낮으로 생기나니, 왜 그러냐 하면 처음 받은 마음이 없어지면 그 두 번째의 마음이 밤낮으로 늘 생기기 때문이다.
복덕을 행함에도 그러하나니, 그 까닭은 처음 보시하는 마음이 없어지면 두 번째의 마음으로부터는 그 뒤에 행할 때마다 나게 되기 때문에 이를 착한 몸의 업이라 한다.
열 가지 착한 업의 길에 포섭되는 것이 있고 포섭되지 않는 것이 있나니, 욕심세계의 매임에도 그러하다.
형상세계의 매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몸으로부터 생기고, 둘째는 입으로부터 생긴다. 몸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서는 열 가지 착하지 못한 길을 여의는 것이니 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며, 입으로부터 생기는 것으로서는 어지러운 말을 여의는 것이다.
이 계율은 몸으로 받고 입으로 받고 마음으로 받음으로써 2곱하기 3은 6이며, 남을 가르치는 것에도 여섯이며, 따라 기뻐하는 것에도 여섯이며, 익혀 행하는 때의 것에도 여섯이므로 4곱하기 6은 24이니, 먼저 말한 96가지와 합하면 120가지인데, 이와 같이 행으로부터 계율이 생긴다.
또 도를 증득할 때에 계율이 생기고 도에 물러날 때에 계율이 생기며, 처음 나는 때에 계율이 생기나니, 일이 광범위한 까닭에 이제 다만 간략하게 말할 뿐이다.
계율의 힘이라 함은, 바라밀이 더욱 자람에 따라 계율은 차츰차츰 힘을 얻게 되고, 얻어지는 지(地)에 따라 계율 또한 깨끗하게 힘을 얻게 된다.
계율의 깨끗함이라 함은 무너뜨리거나 모자람이 없게 하는 것 등이니, 먼저 말한 것과 같다.
또 계율의 깨끗함과 깨끗하지 못한 형상은 일곱 가지 맑은 행의 법[七梵行法] 중에서 말한 것과 같으며, 경전의 말씀과 같다.
“일곱 가지의 음욕으로써 하면 계율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나니, 첫째 비록 음욕을 끊었다 하더라도 물든 마음으로 여인에게 몸을 씻기고 안마를 받음이며, 둘째 물든 마음으로 여인의 냄새를 맡으며 함께 말하면서 익살을 부림이며, 셋째 물든 마음으로 같이 서로가 봄이며, 넷째 비록 장애가 있다 하더라도 물든 마음으로 여인의 음성을 들음이며, 다섯째 먼저 여인과 함께 말하며 웃다가 뒤에 서로 갈라졌는데도 기억하면서 버리지 않음이며, 여섯째 스스로 그러한 때에 한하여 음욕을 끊었지만 그런 뒤에 음행하게 됨이며, 일곱째 천상에 나서 천녀의 즐거움과 후생 몸의 쾌락을 바라며 그 때문에 음욕을 끊는 것이니, 이를 깨끗하지 못함이라 하느니라”고 하였으니 이 일곱 가지의 일을 여의면 계율의 깨끗함이라 한다.
계율의 차별이라 함은 두 종류로서는 첫째 샘이 있음[有漏]이며, 둘째 샘이 없음[無漏]이다.
세 종류로서는 욕심세계의 매임과 형상세계의 매임과 매이지 아니한 것[不繫]이다.
네 종류로서는 바른 생활[正命]에 포섭된 것으로 두 가지인 바른 말[正語]과 바른 행위[正業]이며, 바른 생활에 포섭되지 아니한 것으로 두 가지인데 역시 바른 말과 바른 행위이다.
다섯 종류로서는 범부의 계율[凡夫戒]ㆍ보살의 계율[菩薩戒]ㆍ성문의 계율[聲聞戒]ㆍ벽지불의 계율[辟支佛戒]ㆍ위없는 부처님의 계율[佛戒]이다.
여섯 종류로서는 욕심세계의 바른 생활에 포섭되는 몸과 입이 첫째이며, 그 바른 생활에 포섭되지 아니한 것이 둘째이며, 형상세계 매임의 바른 생활에 포섭되는 몸과 입의 업이 셋째이며, 그 바른 생활에 포섭되지 아니한 것이 넷째이며, 샘이 없는 바른 생활에 포섭되는 몸과 입이 다섯째이며, 그 바른 생활에 포섭되지 아니한 것이 여섯째이다.
일곱 종류로서는 일곱 가지 착한 업의 길이다.
여덟 종류로서는 먼저의 말한 것과 같이 몸에서 네 가지이며, 입에서 네 가지이다.
아홉 종류로서는 일곱 가지 욕심세계의 매임[七欲界繫]과 일곱 가지 착한 업의 길에서 두 가지인데, 먼저 말한 것과 같다.
열 종류로서는 도의 계율[道戒]에 세 가지이며, 다스림의 계율[對治戒]에 세 가지이며, 계율 만에서 세 가지여서 이것이 아홉 가지이며, 샘이 없는 계율과 샘이 있는 계율까지 하면 열 가지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분별하며 차별하게 된다.
【문】성문승 중에서 몸의 업과 입의 업을 말하여 시라(尸羅)라고 하시는데, 이는 두 가지 착한 업은 좋은 것이며, 두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은 나쁘다고 하리니, 바로 착한 몸과 입의 업을 시라라고 하는가? 이 논 중에서는 곧 이것을 시라라고 하는가? 또 시라라는 것이 있는가?

【답】다만 몸과 입의 업만을
이름하되 시라라 함이 아니며
닦으며 가까이 하고 즐거이 행하는
이것 또한 시라라 이름하게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하나의 이치이니, 이른바 닦고 익히며 가까이 하며 즐거이 행하는 것이다.
【문】만약 닦고 익히며 가까이 하며 즐거이 행함으로써 시라라 한다면 온갖 법을 모두 시라라고 해야 하리라. 왜냐하면 언제나 닦고 익히며 가까이 하며 즐거이 행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제 가장 훌륭하게 닦고 익히는 시라를 말하여야 하리라.

【답】만약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고
쓸모없는 이론들을 멀리 여의며
온갖 것에 얻는 것이 없게 된다면
이를 으뜸가는 시라라고 한다.

만약 안팎의 법의 진실한 모양을 모르면 곧 시라로 인하여 교만과 탐냄과 집착을 내는 까닭에 모든 죄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 안의 법에서는 나가 있음을 보지 않고 밖의 법 중에서는 내 것을 얻지 못하여 안팎의 법이 마침내 공(空)하여 얻을 것이 없다. 또한 마침내 공(空)에서는 형상을 잡아서 쓸모없는 이론을 하지 않는다 함을 안다면, 이것을 가장 훌륭한 시라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시라 중에서는 오히려 마음에 그릇됨이 없거든 하물며 몸과 입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첫째로 시라를 행할 수 있는 이이며, 온갖 법에 얻는 것이 없으므로 으뜸가는 시라라고 하나니,『가섭경(迦葉經)』에서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시라는 나가 없고 나 아님이 없고, 지음이 없고 지을 것이 없다.
지음이 없다 함은 행이 없고 행하지 않음이 없고, 이름이 없고 빛깔이 없고, 형상이 없고 형상 없음이 없고, 착함이 아니고 착함 아님이 아니고, 적멸이 아니고 적멸 아님이 아니고, 잡음이 아니고 버림이 아니고, 중생이 없고 중생의 인연이 없고, 몸이 없고 입이 없고 마음이 없고, 세간이 없고 세간의 법이 없고 세간을 의지하지 않고, 시라로써 잘난 체하지 않고 시라로써 남을 낮추지 않고 시라로써 뛰어난 체 함을 일으키지 않으며, 시라로써 이것이니 저것이니 하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를 모든 성현들의 시라라고 하느니라.”
삼계를 여의어 샘이 없고 매임이 없는 것은 무진의보살의「시라품(尸羅品)」중에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시라는 분별하지 않는 것이라 하나니, 이 중생은 이것이 나[我]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것이 수명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것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것이 기르는 이[養育者]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것이 빛깔의 쌓임이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의 쌓임이라고 말하지 않으며, 이것이 땅ㆍ물ㆍ불ㆍ바람의 요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라는 분별하지 않는 것이라 하나니, 이 눈의 모양은 이 빛깔 모양을 분별하지 않으며, 이는 귀의 모양이다, 소리의 모양이다, 코의 모양이다, 냄새의 모양이다, 혀의 모양이다, 맛의 모양이다 몸의 모양이다, 닿음의 모양이다, 뜻의 모양이다, 법의 모양이다 함을 분별하지 않습니다.
시라는 이것은 몸이며 이것은 입이며 이것은 마음이라고 분별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마음을 거두는 까닭에 이는 한 마음의 모양이며, 모든 법을 선택하는 까닭에 이는 지혜의 모양이라 합니다.
시라는 공(空)에 이르며, 형상 없는 것에 이르며, 삼계에 뒤섞이지 않으며, 지음이 없고 일어남이 없고 남이 없는 지혜[忍]라고 합니다.
시라는 전 세상에서부터 온 것이 아니고, 뒤의 세상까지 이른 것도 아니며, 지금의 세상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마음과 뜻과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생각과 화합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욕심세계에 의지하지 않으며, 형상세계에 의지하지 않으며, 무형세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탐냄의 티끌을 여의며 성냄의 때를 제거하며 무명의 어둠을 없애며, 항상함도 아니고 아주 없음도 아니며, 뭇 인연이 생기는 형상을 어기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나[我]라는 마음을 여의며, 내 것[我所]이라는 마음을 버리며 몸에 대한 고집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이름과 모양을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으며, 이름과 빛깔과도 섞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번뇌의 부림을 받지 않으며, 모든 얽매임에 가림을 받지 않으며, 장애와 의심과 뉘우침 중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탐냄의 착하지 못한 뿌리에 머무르지 않고 성냄의 착하지 못한 뿌리를 뛰어넘어, 어리석음의 착하지 못한 뿌리를 끊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급함이 없고 열이 남이 없으며 마음을 믿고 의지하여 유쾌하게 즐기는 것이라 합니다.
시라는 모든 부처님 종자를 끊지 않는 까닭에 법신(法身)을 깨뜨리지 않으며, 법의 성품을 분별하지 않는 까닭에 법의 종자를 끊지 않으며, 함이 없는 형상인 까닭에 승가의 종자를 끊지 않는 것이라 합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모든 보살의 가장 훌륭하고 위없는 시라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시라는 끝이 없으며, 오직 부처님들의 시라를 제하고서는 모두가 다함이 있다.

범부의 시라로부터
뒤의 벽지불에 이르기까지
이는 모두 다함의 형상이 있지만
보살은 곧 다함이 없도다.

범부로부터 지닌 시라가 비록 오래오래 과보를 받는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다함에 돌아가게 되고,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이 지닌 시라도 모두 역시 다함이 있지만 보살의 시라는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온갖 얻는 것을 여의고 모든 쓸모없는 이론을 없애므로 다함이 있나니, 무진의보살의「시라품」중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모든 범부의 시라는 나는 곳을 따라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외도는 다섯 가지 신통이 물러날 적에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사람은 열 가지 착한 업의 길로써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욕심세계의 하늘들은 복덕이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형상세계의 하늘들은 4선(禪)과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이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무형세계의 하늘들은 선정이 나는 곳을 따라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여러 배우는 이와 배울 것 없는 사람은 열반에 들면서 다하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하며, 모든 벽지불을 크게 가엾이 여김이 없는 까닭에 시라는 곧 다합니다.
대덕 사리불이여, 모든 보살의 시라만은 다함이 없나니, 왜냐하면 보살의 시라로부터 모든 시라의 차별을 내며, 원인이 다함이 없는 까닭에 결과 역시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의 시라가 다함이 없는 까닭에 여래의 시라 역시 다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거룩한 분들의 시라는 다함이 없다고 한다.
【문】그대는 거친[麁] 시라를 풀이할 적에 예순다섯 가지의 시라를 말하면서 ‘성문 중에는 여덟 가지의 시라가 있는데, 네 가지는 몸으로부터 나고 네 가지는 입으로부터 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서로가 어긋난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답】서로가 어긋나지 않나니, 무엇 때문인가?

비록 시라의 바탕[體]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롭게 하는 까닭에 부분[分]이라 하나니
여덟 가지의 몸과 입의 업은
곧 이는 시라의 바탕이니라.

비록 예순 다섯 가지의 부분이 시라의 바탕이 아니라손 치더라도 몸과 입의 여덟 가지 거친 시라를 이롭게 하는 까닭에 시라의 부분이라고 한다.
무릇 이롭게 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부분이라 하나니, 마치 코끼리와 말과 부채와 일산을 왕에게 딸린 부분이라 함과 같다.
그러므로 선정과 지혜 등은 비록 시라의 바탕은 아니라 하더라도 시라를 이롭게 하는 까닭에 역시 시라의 부분이라고 한다.


32. 해두타품(解頭陀品)2)

보살은 이와 같이 시라 법을 행한다.

열 가지의 이익을 보려면
두 가지와 여섯 가지의 옷을 입어야 하며
또 열 가지 이익을 봄으로써
몸이 다하도록 걸식하여야 한다.

비구가 계율 지니는 품[持戒品]을 완전히 갖추어서 행하려 하면 두 가지와 여섯 가지의 옷을 입어야 하나니, 열 가지 이익을 보려는 까닭이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첫째 부끄러운 까닭이며, 둘째 추위ㆍ더위ㆍ모기ㆍ등에ㆍ독충을 막으려는 까닭이며, 셋째 사문으로서의 거동과 법을 표시하려는 까닭이며, 넷째 모든 하늘과 사람들이 법의(法衣)를 보고서 공경하고 존중함이 마치 탑과 절과 같게 하려는 까닭이며, 다섯째 싫증내며 여의는 마음으로써 물들인 옷을 입고 좋은 것을 탐내지 않으려는 까닭이며, 여섯째 적멸을 따름으로써 번뇌가 훨훨 타지 않으려는 까닭이며, 일곱째 법의를 입고서 나쁜 짓이 있으면 보기 쉽게 하려는 까닭이며, 여덟째 법의를 입고서 다시는 다른 물건으로 장엄하지 않으려는 까닭이며, 아홉째 법의를 입고서 여덟 가지 거룩한 길을 따르며 닦으려는 까닭이며, 열째 ‘나는 힘써 나아가 도를 행하며 더러움에 물드는 마음이 없으려면 잠깐 동안이라도 빛깔을 무너뜨린 옷을 입어야 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열 가지 이익을 보려는 까닭에 두 가지의 옷을 입어야 하는데 첫째는 거사의 옷[居士衣]이며, 둘째는 누더기[糞掃衣]이다.
여섯 가지라 함은, 첫째 겁패의[劫貝]이며, 둘째 추마의[芻摩]이며, 셋째 교치야의[憍絺耶[]]이며, 넷째 취의(毳衣)이며, 다섯째 적마의(赤麻衣)이며, 여섯째 백마의(白麻衣)이다.
‘열 가지 이익이 있음을 봄으로써 몸이 다하도록 걸식하여야 한다’ 함은, 첫째 쓰이는 것과 목숨을 살리는 것은 자신에게 매이고 남에게 매이지 않았음이며, 둘째 ‘중생으로서 나에게 밥을 보시하는 이에게는 삼보에 머무르게 한 연후에 먹어야겠다’ 함이며, 셋째 ‘만약 나에게 밥을 보시하는 이가 있으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야겠으며, 나는 부지런히 행하며 힘써 나아가 보시를 짓는 데에 잘 머무르게 한 뒤에야 먹겠다’고 함이며, 넷째 부처님이 가르치신 행을 따르는 까닭이며, 다섯째 배부르기 쉽고 기르기 쉬움이며, 여섯째 행에 교만을 깨뜨리는 법이며, 일곱째 이 보다 맨 위의 착한 뿌리는 볼 수 없음이며, 여덟째 내가 걸식한 것을 보고서 그 밖에 선법을 닦는 이가 있으면 역시 나를 본받게 됨이며, 아홉째 모든 남자 여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도 여러 인연의 일이 있음이며, 열째 차례로 걸식하는 까닭에 중생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내며 곧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심고 돕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공양청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이롭게 하며
다른 이도 이롭게 하려는 까닭에
곧 공양청을 받지 않으신다.

‘자신을 이롭게 한다’ 함은 모든 바라밀을 잘 갖추시는 것이며, ‘남을 이롭게 한다’ 함은 중생을 교화하여 삼보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는 이와 같이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열 가지 이익이 있음을 보는지라
늘 비고 한가한 데를 버리지 않으며
앓는 이를 찾아보며 법을 듣게 하는 등의
교화할 일이 있어야 비로소 절에 온다.

아련야 처소를 받는 비구는 비록 갖가지 공덕을 더욱 자라게 하나, 간략하게 말하면 열 가지 이익을 보는 까닭에 몸이 다하도록 버려서는 안 된다.
무엇이 열 가지냐 하면, 첫째 자재하게 오고 감이며, 둘째 나[我]가 없고 내 것[我所]이 없음이며, 셋째 뜻을 따라 사는 데에 장애가 없음이며, 넷째 마음으로 더욱 아련야의 살 데를 즐거이 익힘이며, 다섯째 사는 데에 욕심이 적고 일이 적음이며, 여섯째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아니 함은 공덕을 완전히 갖추려는 까닭이며, 일곱째 뭇 소란스런 말을 멀리 여의는 까닭이며, 여덟째 공덕을 행하더라도 은혜의 갚음을 구하지 않음이며, 아홉째 선정을 따르면 한 마음을 얻기 쉬움이며, 열째 빈 데서 살면 장애가 없다는 생각을 내기 쉽다는 것 등이다.
‘앓는 이를 찾아보는 등, 절에 온다’ 함은

만약 인연되는 일이 있어서
절[塔寺]에 와서 머무르게 된다고 하면
온갖 하는 일 가운데서
비고 한가한 생각[空閑想]을 버리지 않는다.

비구가 몸이 다하도록 아련야의 법을 받는다고는 하나 인연되는 일이 있으면 절[塔寺]에 들어오게 되나니, 부처님 법에는 통함이 있고 막힘이 있어서 외도와 같지는 않다.
아련야는 언제나 비어 한가하고 조용한 곳을 좋아하여 온갖 법에 공(空)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온갖 법의 바탕은 마침내 모두가 공(空)한 까닭이다.
【문】무슨 인연이 있으면 짐짓 절[塔寺]에 와 이르는가?
【답】첫째 앓는 사람을 공양하기 위해서이며, 둘째 병에 의약 거리를 구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앓는 이를 돌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이며, 넷째 앓는 이에게 법을 말해 주기 위해서이며, 다섯째 다른 비구들에게 법을 말하기 위해서이며, 여섯째 법을 들리어 교화시키기 위해서이며, 일곱째 대덕에게 공경하고 공양하기 위해서이며, 여덟째 성인들에게 물건을 이바지하기 위해서이며, 아홉째 깊은 경전을 읽고 외기 위해서이며, 열째 남에게 깊은 경전을 읽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따위의 여러 인연이 있으면 절에 와 이르게 된다.

모든 생각[覺] 부지런히 행하려면
아련야의 법을 따르라.
비구가 이미
아련야의 처소에 머무르게 되었다면
언제나 마땅히 부지런히 힘써서
갖가지 선법들을 내어야 하며
담력이 큰마음으로 나[我]를 없애서
모든 두려움을 없애 버리라.

‘아련야에서 힘써 나아간다’ 함은, 만약 비구가 탐냄을 끊으면 몸과 목숨과 이양을 아끼지 않는 까닭이니, 밤낮 언제나 부지런히 힘써 나아가 마치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하며 몸을 아련야에 의지하고 따른 것이다.
‘생각’이라 함은, 이른바 벗어나려는 생각[出覺], 성내지 않으려는 생각[不瞋覺], 괴롭히지 않으려는 생각[不惱覺] 등의 여러 착한 생각이다.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바로 모두 옳게 깨달은 이[正遍知者]로서 중생 중에서 높으신 이며, 부처님의 법은 바로 좋은 말씀임을 생각하여 제자들은 그 바른 행을 따른다.
또, 공(空)을 따르고 형상 없음을 따르고 소원 없음을 따른다.
‘모든 생각’이라 함은 아련야를 따르는 생각을 말한다. 또 네 가지 훌륭한 것을 따르며 여섯 가지 바라밀을 따르는 모든 생각은 바로 아련야를 따르는 생각이다.
또, 부처님께서 욱가(郁伽) 장자에게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로써의 보살행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약 집을 떠난 보살이면 아련야의 법을 받으면서 이와 같이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나[我]는 무엇 때문에 아련야 처소에 머무를까? 나는 다만 아련야에 머문다고 하여 이름이 사문이라 하지 못하리라. 아련야 처소에는 중생이 많이 있으나, 악하고 착하지 못한 것이 많으니, 모든 감관을 보호하지 않고 힘써 나아가지 않으며 선법을 닦아 익히지 않는다면 마치 노루ㆍ사슴ㆍ원숭이와 여러 가지 새와 나쁜 도둑이며, 전다라(旃陀羅) 등과 같아서 비구라고는 이름하지 못하리라. 나는 이제 무슨 일 때문에 아련야 처소에 머무르는가? 마땅히 그 일을 이룩하여 마치리라.’
장자여, 어떠한 것이 그 일이냐 하면 첫째 산란하지 않겠다고 생각함이며, 둘째 모든 다라니를 얻음이며, 셋째 인자한 마음을 행함이며, 넷째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행함이며, 다섯째 자재하게 다섯 가지 신통에 머무름이며, 여섯째 여섯 가지 바라밀을 두루 갖춤이며, 일곱째 온갖 지혜의 마음을 버리지 않음이며, 여덟째 방편의 지혜를 닦고 익힘이며, 아홉째 중생을 거두어 줌이며, 열째 중생을 성취시키는 것이니라.
열한째 네 가지 거두어 줌의 법을 버리지 않음이며, 열두째 언제나 여섯 가지 기억[六念]을 생각함이며, 열셋째 많이 듣기 위하여 힘써 나아감이며, 열넷째 바르게 자세히 살펴서 모든 법을 선택함이며, 열다섯째 바르게 해탈하여야 함이며, 열여섯째 얻은 결과를 앎이며, 열일곱째 바른 지위에 머무름이며, 열여덟째 부처님 법을 수호함이며, 열아홉째 업의 과보를 믿는 까닭에 바른 소견이라 함이며, 스무째 온갖 기억과 분별과 생각을 여의는 까닭에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스물한째 중생들의 믿고 즐기는 것을 따라 그들에게 법을 말하는 까닭에 바른 말이라 함이며, 스물둘째 모든 업을 없앤 까닭에 일어나는 행위를 바른 행위라 함이며, 스물셋째 번뇌의 기운을 깨뜨린 까닭에 바른 생활이라 함이며, 스물넷째 위없는 도를 얻는 까닭에 바른 노력이라 함이며, 스물다섯째 허망하지 않은 법을 자세히 살피는 까닭에 바른 기억이라 함이며, 스물여섯째 온갖 지혜를 얻는 까닭에 바른 선정이라 함이며, 스물일곱째 공(空)에 두려워하지 않음이며, 스물여덟째 형상 없음에 두려워하지 않음이며, 스물아홉째 소원(所願) 없음에 빠지지 않음이며, 서른째 짐짓 지혜로써 몸을 받는 것이니라.
서른한째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않음이며, 서른둘째 지혜에 의지하고 알음알이에 의지하지 않음이며, 서른셋째 요의경(了義經)에 의지하고 요의경 아닌 데에 의지하지 않음이며, 서른넷째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 등이니라.
장자야, 이와 같은 것들을 하면 집을 떠난 보살이며, 비구라 하나니 이익되는 일을 생기게 해야 하느니라.”
아련야의 법을 따른다 함은, 이른바 4선[禪],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無量心], 천이통(天耳通), 천안통(天眼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등이다.
‘모든 두려움을 없애 버린다’ 함은 이 사람은 세 가지 인연으로써 두려움을 없앨 수 있나니, 첫째 나와 내 것이 없다는 법의 모양을 보기 때문에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둘째 방편의 힘 때문이며, 셋째 마음의 담력 때문에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나와 내 것이 없음을 본다 함은 초지 중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다섯 가지의 두려움을 없앤다. 방편의 힘이라 함은 이 논 중에서 바른 생각으로 업의 과보를 생각하는 까닭에 방편의 힘이라 하나니,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여러 큰 나라의 왕은 깊은 궁전에 있고 상병ㆍ마병ㆍ거병ㆍ보병이 모시며 호위하지만 그 업의 인연이 다하면 역시 갖가지의 모든 쇠망함과 괴로운 일을 받으리라. 또 업의 인연을 수호하면 비록 험한 길 가운데를 가고 큰 바닷물 속에 들며 큰 싸움의 진영에 있다 하더라도 역시 편안하고 고요하며 근심이 없으리라. 나의 전생 업의 인연은 마을에 있거나 아련야 처소에 있거나 간에 업의 인연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으리라.’
이렇게 생각한 뒤에 두려움을 없애 버린다.
또, 생각하기를 ‘만약 내가 몸을 수호하기 위하여 도시와 마을에 들어가고 아련야 처소를 버린다면, 보다 훌륭하게 착한 몸의 업과 착한 입의 업과 착한 뜻의 업을 수호할 수 있는 것이 없으리니, 부처님께서 파사닉왕(波斯匿王)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만약 사람이 몸의 착한 업을 행하고 입의 착한 업을 행하고 뜻의 착한 업을 행하면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가 잘 수호한다고 하며, 이 사람이 만약 나는 스스로가 잘 수호하는 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말입니다.
대왕이여, 이 사람은 비록 네 가지 병사로 호위함이 없다 하더라도 역시 잘 수호되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수호를 안의 수호라 하고 밖의 수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몸의 업의 착한 행과 입의 업의 착한 행과 뜻의 업의 착한 행이므로 스스로가 잘 수호한다고 하리라’고 한다.
또, 생각하기를 ‘이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이며 기어 다니는 벌레 따위는 아련야에 있으면서도 몸으로 착함을 행하지 않고 입으로 착함을 행하지 않으나, 마을을 멀리하여 사는 까닭에 두려워함이 없다. 나의 마음과 지혜는 어찌 이 날짐승 길짐승보다 못하단 말이냐’ 하고, 이렇게 생각하며 여러 두려움을 없앤다. 또, 부처님을 생각함으로써 아련야에 있으면서 온갖 두려운 일들을 깨뜨릴 수 있나니, 경전에서의 말씀과 같다.
“너희 비구들아, 아련야 처소에서 나무 아래 있거나 빈집에 있거나 간에 혹시 두려움이 생겨서 마음이 내려앉고 털이 곤두선다면, 너희들은 나의 이 여래ㆍ응공ㆍ정변지ㆍ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조어장부ㆍ천인사 ㆍ불세존을 생각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에 두려움은 곧 없어지리라.”
‘담력이 크다’ 함은 마음에 겁이 많지 않으며, 결정코 도를 구하는 것이다. 다음의 말과 같다.

비구는 비고 한가한 데 머물러서
마음에 겁이 없는 용감한 힘으로써
모든 두려움을 없애야 하리니
부처님을 생각하면 두려운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업을 일으키면
두려움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두렵지 않은 것도 벗어나지 못하나니
두려움은 곧 바른 이익을 잃는다.

이와 같이 면하지 못하는 줄 알면서
그 밖의 이익을 깨뜨린다면
곧 소인(小人)으로서의 일을 행함이니
비구로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두려울 것 있어야 한다면
나고 죽음을 두려워할지니
온갖 두려움이란
나고 죽음에서 다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 이로서
나고 죽음을 벗어나려고 하거나
또한 다른 사람을 구하려 하면
두려움을 내지 않아야 한다.

『불리포외경(佛離怖畏經)』중에서 두려워함의 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다.
“어떤 사문과 바라문이라도 아련야 처소에 머무르면 이러한 생각을 하여야 하느니라. ‘몸의 업이 깨끗하지 못하고 입의 업이 깨끗하지 못하고 뜻의 업이 깨끗하지 못하고 생각이 깨끗하지 못하고, 자신은 높이고 남을 낮추며, 마음이 게으르고 기억을 잊으며, 마음이 안정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까닭에 두려워지며, 이와 어긋나게 몸의 업이 깨끗하다든가 하는 따위이면 곧 두려움이 없다.’”
또 부처님이 욱가 장자를 위하여 말씀하셨다.
“집을 떠난 보살이 아련야 처소에 있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나[我]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있을까? 즉시 스스로가 알겠구나. 두려움을 여의려고 여기에 와 이르렀도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여러 가지 시끄러움을 두려워하고, 여러 가지 말들을 두려워하고,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을 두려워하고, 교만과 원망과 질투와 다른 이양을 두려워하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음을 두려워하고, 다섯 가지 쌓임의 악마를 두려워하고, 여러 어리석고 장애되는 곳을 두려워하고, 때 아닐 적의 말을 두려워하고, 보지 않았으면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듣지 않았으면서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깨닫지 못했으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모르면서 안다고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모든 사문의 때[垢]를 두려워하고, 서로가 함께 미워하고 싫어함을 두려워하고, 욕심세계ㆍ형상세계ㆍ무형세계의 온갖 나는 곳을 두려워하고, 지옥ㆍ축생ㆍ아귀와 여러 어려운 곳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간략히 말하면 온갖 나쁘고 착하지 못한 법을 두려워하는 까닭에 여기에 와서 머물러 있다.
만약 사람이 집에 있으면서 뭇 시끄러움에 있기를 좋아하면 도를 닦고 익히지 못하며 삿된 생각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이와 같은 두려운 곳을 여읠 수가 없다.
과거에 있었던 여러 보살들은 모두가 아련야 처소에 있으면서 모든 두려움을 여의고 두려움이 없는 곳을 얻었으며 온갖 지혜를 얻었다.
장차 오는 세상에 있을 보살들 역시 아련야 처소에 있으면서 모든 두려움을 여의고 온갖 지혜를 얻을 것이며, 지금 현재의 보살들도 아련야 처소에 머무르면서 모든 두려움을 여의고 두려움 없는 곳을 얻으며 온갖 지혜를 이룩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온갖 나쁨을 두려워하며 모든 두려움을 건너려는 까닭에 아련야 처소에 머물러야 한다.
다음에 또, 온갖 두려움은 모두가 나[我]를 집착함에서부터 생기나니, 나를 탐내며 집착하는 까닭이며, 나를 사랑하고 받드는 까닭이며, 나라는 생각을 내는 까닭이며, 나라고 보는 까닭이며, 나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이며, 나를 분별하는 까닭이며, 나를 수호하는 까닭이다.
만약 내가 아련야 처소에 머무르면서 나를 탐내며 집착하는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헛되이 아련야 처소에 있는 것이 되리라.’
또, 장자야, 얻을 것이 있으리라고 보는 이는 곧 아련야 처소에 머무름이 아니며,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에 머무르는 이는 곧 아련야 처소에 머무름이 아니며, 뒤바뀜에 머무르는 이는 곧 아련야 처소에 머무름이 아니니라.
장자야, 열반의 생각을 내는 이도 오히려 아련야 처소에 머무름이 아니거든 하물며 번뇌의 생각을 일으키는 이이겠느냐.
장자야, 마치 풀과 나무가 아련야 처소에 있으면서도 놀라거나 두려워함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아련야 처소에 있으면 풀과 나무라는 생각, 돌과 기와라는 생각을 내며, 물 가운데 그림자라는 생각, 거울 가운데 영상이라는 생각을 내며, 말에는 메아리라는 생각을 내며, 마음에는 허깨비라는 생각을 내어야 하나니, 이 가운데서 누가 놀라며 누가 두려워하겠느냐.
보살은 그때에 곧 바르게 몸을 살피면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중생이 없고 수명이 없으며, 기르는 이가 없고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아는 이와 보는 이도 없으리니, 두려움이라 함은 허망하게 분별하는 것이므로 나는 허망하게 분별함을 따르지 않아야겠다고 하며, 보살은 이와 같이 풀과 나무처럼 아련야 처소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또 온갖 법을 알되 모두를 또한 이와 같이 할지니라. 다툼을 끊으면 아련야 처소라 하며, 나가 없고 내 것이 없으며 매이는 바가 없으면 아련야 처소라고 하나니,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간에 여러 시끄러운 곳에서 살기를 좋아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도 아련야 처소의 비구에게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와 함께 뒤섞여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느니라.”
【문】부처님께서 온갖 대중들과 함께 뒤섞여 있음을 허락하지 않으셨는가?
【답】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 네 가지의 뒤섞임을 허락하고
그 밖은 곧 허락하지 않으셨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가까이 해야 하되
그 밖은 곧 멀리 여의어야 한다.

보살은 아련야 처소에 있으면서 네 가지 대중과는 화합함이 허락된다. 이른바 법을 들으려는 대중에게 들어감이며,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이며,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서이며, 온갖 지혜를 여의지 않는 마음으로 화합함이니, 그 때문에 이 네 가지 일의 화합만을 허락하셨으므로 그 밖의 것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또, 보살은 생각하기를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아련야 주처(住處)인가? 나는 가까이 하여야겠다. 나는 혹시 아련야 주처가 아닌데 이는 아련야의 처소라고 하여 머무르기도 하며, 혹은 착각하여 잘못하고 있지 않는가?’라고 하여야 한다.
【문】어떤 곳들이 아련야 주처이며, 보살은 당연히 화합해야 하는가?
【답】부처님께서 스스로 경전 중에서 아련야 주처의 이름을 말씀하셨다.
“온갖 법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티끌에 돌아가지 않고 온갖 법의 모양을 잡지 않고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닿음을 탐내지 않으면 온갖 법이 평등한 까닭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데가 없으리니, 아련야 주처라고 하느니라.
스스로 마음이 착한 까닭에 머무르는 데와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니, 아련야 주처라고 한다. 온갖 짐과 의지를 버리고 즐거이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온갖 번뇌를 벗어나서 두려움이 없이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모든 흐름[流]을 건너서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阿練若) 주처라고 하느니라.
성인의 종자에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족한 줄 알면서 얻음[得]에 나아가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가득 차기 쉽고 기르기 쉬워서 적은 욕심으로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지혜가 만족하게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바르게 행하고 많이 들으면서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느니라.
공(空)ㆍ형상 없음ㆍ소원 없음의 해탈문이 앞에 나타나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모든 속박을 끊고 해탈을 얻으면서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12인연을 차례로 따르면서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며, 필경에는 적멸하여 할 일을 다 마치고 머무르는 까닭에 아련야 주처라고 하느니라.”
아련야 주처는 계품(戒品)을 따르고, 정품(定品)을 돕고 혜품(慧品)을 이롭게 하고, 해탈품(解脫品)을 얻기 쉽게 하고, 해탈지견품(解脫知見品)을 얻기 쉽게 하고, 모든 보리 돕는 법을 행하기 쉽게 하고, 모든 두타의 공덕을 거둘 수 있다.
아련야 주처는 모든 진리를 통달하며, 아련야 주처는 모든 쌓임[陰]을 알고 보며, 아련야 주처는 모든 성품이 법의 성품과 같이 되며, 아련야 주처는 12입(入)을 벗어나 여의며, 아련야 주처는 보리의 마음을 잃지 않으며, 아련야 주처는 공(空)을 자세히 살피어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련야 주처는 부처님 법을 보호할 수 있으며, 아련야 주처는 해탈을 구하는 이가 공덕을 잃지 않으며, 아련야 주처는 온갖 지혜를 얻은 이가 더욱 더하게 할 수 있으며, 아련야 주처는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하면 빨리 여섯 가지 바라밀[六度]을 갖출 수 있다.
왜냐하면 만약 보살이 아련야의 처소에 머물러 있으면서 몸과 목숨을 탐내거나 아끼지 않으면 이는 보시바라밀의 행이며, 세 가지 착한 업이 깨끗하여 미세한 두타의 행에 들어가면 이는 계율바라밀의 행이며, 중생들에게 성을 내지 않고 인자한 마음으로 두루하게 하며, 다만 즐거이 살바야승(薩婆若乘)만을 인증(忍證)하고 그 밖의 법[乘]에 있지 않으면 이는 인욕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서원을 세워 아련야의 처소에 있으면서 바른 법의 지혜를 얻지 못하여도 끝내 이곳을 버리지 않으면 이는 정진바라밀이며, 선정을 얻은 까닭에 나는 곳을 살피지 않고 착한 뿌리를 닦고 익히면 이는 선정바라밀이며, 몸처럼 아련야도 그러하고 몸처럼 보리도 그러하여 사실과 꼭 같은 가운데서 차별이 없으면 이는 지혜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네 가지 법이 있는 이면
아련야 처소에 머무름을 허락하셨다.

무엇이 네 가지냐 하면 부처님께서 장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다.
“첫째는 많이 들음이며, 둘째는 결정된 뜻을 잘 앎이며, 셋째는 바른 기억을 즐거이 닦음이며, 넷째는 말씀하신대로 쫓으며 행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이면 아련야의 처소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또, 어떤 보살이 번뇌가 깊고 두터운 데, 이 사람이 만약 여러 시끄러운 데 있다고 하면 번뇌가 일어날 것이므로 아련야 처소에 있으면서 번뇌를 항복시켜야 한다.
또, 보살이 다섯 가지 신통을 얻었는데 이 사람이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를 교화하려고 하면 아련야의 처소에 머물러야 한다.
또, 어떤 보살은 생각하기를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고 허락하신 곳이 바로 아련야의 처소이다’라고 한다.
또 아련야의 처소에 살면 온갖 선법을 도와 원만히 하고 착한 뿌리를 더욱 자라게 하므로 그런 뒤에라야 마을에 들어가 중생을 위하여 법을 말한다.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여야 비로소 아련야의 처소에 머무를 수 있다.

『결정왕경(決定王經)』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아련야의 비구로서는
네 번 네 가지 법에 머물러야 하느니라.

보살로서 아련야의 처소에 머무르는 이는 첫째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를 멀리 여의며, 둘째 깊은 경전을 읽고 외우려 하며, 셋째 중생을 인도하여 아련야 처소의 공덕을 얻게 하며, 넷째 밤낮으로 부처님 생각하기를 여의지 않는다.
또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이라도 중생들에게 성내거나 원망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둘째 한 때만이라도 잠을 자서 마음이 가려지게 하지 않아야 하며, 셋째 찰나 동안이라도 중생이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넷째 찰나 동안이라도 보리의 마음을 잊거나 버리지 않아야 한다.
또 네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 언제나 한가히 앉아야 하고 대중을 모아서는 안 되며, 둘째 언제나 거닐기를 좋아하며, 셋째 언제나 모든 법에는 새 것과 묵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자세히 살피며 넷째 깊이 공(空)ㆍ형상 없음ㆍ소원 없음의 법을 여의지 않아야 한다.
또 네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 4선(禪)을 행하고 세간의 선을 행하지 않으며,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행하여 중생을 반연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어 중생이라는 모양을 가지지 않는다.
둘째, 비록 인자한 마음을 행한다 하더라도 중생을 반연하지 않으며, 비록 기쁜 마음을 행한다 하더라도 즐거움을 탐내지 않으며, 비록 버리는 마음을 행한다 하더라도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셋째, 스스로 몸에는 네 가지 성스러운 종자[四聖種]의 행이 있음을 보고서 스스로 높은 체하거나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지 않는다.
넷째, 스스로가 많이 들어서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법이다.

지혜가 없고 정진이 없으면서
비고 한가한 처소에 머문다면
곧 네 가지의 법을 얻게 되고
다시 그 밖에 네 가지 법을 얻으며
또 다시 세 가지의 일을 얻나니
이와 같은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아련야의 비구는 모든 공덕 중에 부지런히 닦고 익혀야 하리니, 왜냐하면 아련야 공덕 중의 이 두 가지 일은 모든 공덕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비구가 어리석고 게으르게 아련야의 처소에 머무는 이라면 네 가지의 그릇된 법을 얻으리니, 첫째 잠이 많음이며, 둘째 이양을 많이 탐냄이며, 셋째 인연을 써서 속이며 괴이한 형상을 나타냄이며, 넷째 실제로 아련야의 처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또 네 가지의 법이 있으니, 첫째 뛰어난 체하며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함이며, 둘째 깊은 경전에 몹시 미워하는 마음을 품음이며, 셋째 공(共)ㆍ형상 없음ㆍ소원 없음의 법을 무너뜨림이며, 넷째 깊은 경전을 가진 이에게 성을 내며 원망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또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 만약 아련야의 처소에 있으면서 힘써 나아가지 않고 지혜가 없다면 혹은 여인을 만나 그릇된 법에 떨어지기도 하여 승잔(僧殘)을 얻거나 중죄(重罪)를 얻거나 계율을 위반하여 세속으로 돌아가게 되나니, 이것이 세 가지 일이다.
다시 말하겠다.

비고 한가한 법과
걸식하는 법을 자세히 말하고
그 밖에 열 가지 두타의 덕도
모두 자세히 말하여야 하겠다.

12두타의 법은 위에서 오면서 두 가지 일만은 자세히 말하였나니, 그 밖의 열 가지 두타의 공덕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곧 열 가지 두타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니, 그 밖의 것은 곧 이해하기 쉽다.
열 가지 두타라 함은 첫째 누더기를 입음이며, 둘째 한 번만 앉음이며, 셋째 언제나 앉아 있음이며, 넷째 밥 먹은 뒤에는 때 아닐 적의 음식을 받지 않음이며, 다섯째 세 가지 옷만을 지님이며, 여섯째 솜털 옷[毳衣]이며, 일곱째 펴놓은 대로 앉음이며, 여덟째 나무 아래서 머무름이며, 아홉째 빈 땅에서 머무름이며, 열째 죽은 사람 사이에서 머무르는 것이다.
누더기 옷이라 함은 사람이 버린 것을 받아서 뒤에 입는 것이다. 받는다 함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기도 하고 입으로 말을 해서 하기도 한다.
한 번만 앉음이라 함은 먼저 밥을 받아서 먹었던 곳에서는 또 다시 먹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언제나 앉아 있음이라 함은 밤에도 언제나 눕지 않는다는 것이다.
밥 먹은 뒤에 과일즙을 마시지 않는다 함은 밥 먹은 뒤에 때 아닐 적의 음식과 사탕 따위의 먹을 만한 물건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가지 옷만을 지님이라 함은, 오직 세 가지 옷만을 받고 다시 그 밖의 옷은 저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솜털 옷이라 함은 솜털로써 이루어진 거친 모직물의 옷이니, 거친 털옷과 흠바라(欽婆羅) 따위이다.
펴놓은 대로 앉음이라 함은 자리가 나는 대로 앉고 남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무 아래서 머무름이라 함은 나무 아래 머물기를 좋아하고 가려진 데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빈 땅에 앉는다 함은 노지(露地)에 머무르는 것이며, 죽은 사람 사이에서 머무른다 함은 싫어하여 여의려는 마음을 따르려고 언제나 죽어 있는 사람의 사이에서 머무르는 법이니, 이것이 열두 가지의 두타로서 계율을 깨끗하게 한다.
누더기 옷에 열 가지의 이익이 있다. 첫째 옷 때문에 집에 있는 이들과 함께 뒤섞이지 않으며, 둘째 옷 때문에 옷을 구걸하는 모양을 나타내지 않으며, 셋째 또한 방편을 써서 옷을 얻는 모양도 말하지 않으며, 넷째 옷 때문에 사방에서 구하지도 않으며, 다섯째 혹시 옷을 얻지 못하여도 근심하지 않으며, 여섯째 얻어도 기뻐하지 않으며, 일곱째 천한 물건이라 얻기 쉬우므로 근심이 없으며, 여덟째 이는 순행(順行)으로서 처음에 네 가지 의지함의 법[四依法]을 받은 것이며, 아홉째 거친 옷의 숫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며, 열째 남이 탐내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한 번만 앉아서 먹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다음번에 먹을 데를 구하는 고달픔이 없으며, 둘째 받은 것에 대하여 가벼우며, 셋째 쓸데에 대한 고달픔이 없으며, 넷째 밥 먹기 전에 고달픔이 없으며, 다섯째 미세한 행[細行]의 먹는 법에 들어 있는 것이며, 여섯째 밥이 소화된 뒤에 먹으며, 일곱째 방해되는 근심이 적으며, 여덟째 질병이 적으며, 아홉째 몸이 가뿐하며, 열째 몸이 상쾌하고 즐겁다.
언제나 앉아 있는 데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몸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으며, 둘째 잠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으며, 셋째 침구의 즐거움을 탐내지 않으며, 넷째 누울 때에 겨드랑이가 자리에 닿게 되는 고통이 없으며, 다섯째 몸의 욕심을 따르지 않으며, 여섯째 좌선(坐禪)을 하기 쉬우며, 일곱째 경전을 읽고 외기 쉬우며, 여덟째 잠이 적으며, 아홉째 몸이 가벼워서 일으키기 쉬우며, 열째 방석과 침구며 의복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엷다.
밥 먹은 뒤에는 때 아닐 적의 음식을 받지 않는 것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많이 먹지 않으며, 둘째 배부르게 먹지 않으며, 셋째 맛있는 음식을 탐내지 않으며, 넷째 구하고자 하는 욕심이 적으며, 다섯째 방해되는 근심이 적으며, 여섯째 질병이 적으며, 일곱째 만족하기 쉬우며, 여덟째 기르기가 쉬우며, 아홉째 족한 줄을 알며, 열째 좌선하고 경전을 읽는 데에 몸이 피곤하지 않다.
세 가지 옷만을 지니는 데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세 가지 옷 외에는 구하고 받겠다는 고달픔이 없으며, 둘째 지키고 보호하는 데에 고달픔이 없으며, 셋째 저축해야 할 물건이 적으며, 넷째 몸에 입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며, 다섯째 계행이 미세하며, 여섯째 가고 오는 데에 성가심이 없으며, 일곱째 몸이 가벼우며, 여덟째 아련야 처소에 머무는 법을 따르며, 아홉째 아무데서 살면서도 섭섭한 것이 없으며, 열째 도의 행을 따른다.
솜털 옷을 받음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거친 옷의 숫자에 있으며, 둘째 구하게 되는 것이 적으며, 셋째 뜻대로 앉을 수 있으며, 넷째 뜻대로 누울 수가 있으며, 다섯째 빨래하기가 쉬우며, 여섯째 물들일 때에도 쉬우며, 일곱째 좀이 슬 일이 적으며, 여덟째 잘 해지지 않으며, 아홉째 다시 그 밖의 옷을 받지 않으며, 열째 구하던 도를 그만두지 않는다.
펴놓은 대로 앉음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좋은 정사(精舍)를 구하여 살려는 고달픔이 없으며, 둘째 좋은 방석과 침구를 구하려는 고달픔이 없으며, 셋째 상좌(上座)를 괴롭히지 않으며, 넷째 하좌(下座)에게 근심이 되게 하지 않으며, 다섯째 욕심이 적으며, 여섯째 일이 적으며, 일곱째 얻은 그대로 사용하며, 여덟째 적게 사용하면 일이 적으며, 아홉째 다툼의 인연이 일어나지 않으며, 열째 남이 쓰는 것을 빼앗지 않는다.
나무 아래에서 앉음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방과 집을 구하려는 고달픔이 없으며, 둘째 방석과 침구를 구하려는 고달픔이 없으며, 셋째 아껴야 한다는 고달픔이 없으며, 넷째 받아쓰는 고달픔이 없으며, 다섯째 처소의 이름이 없으며, 여섯째 싸울 일이 없으며, 일곱째 네 가지 의지함의 법을 따르는 것이며, 여덟째 적으면서 얻기가 쉽고 허물이 없으며, 아홉째 도를 닦는 법을 따르는 것이며, 열째 뭇 시끄러운 행이 없다.
죽은 사람의 사이에 머무름에도 열 가지 이익이 있다. 첫째 언제나 무상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둘째 언제나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셋째 언제나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넷째 언제나 온갖 세간에는 즐거울 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다섯째 언제나 온갖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여읠 수 있으며, 여섯째 언제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낼 수 있으며, 일곱째 실없음을 멀리 여의며, 여덟째 마음으로 언제나 싫증을 내어 여의며, 아홉째 부지런히 행하고 힘써 나아가며, 열째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
빈 땅에 앉음에도 열 가지의 이익이 있다. 첫째 나무 아래를 구하지 않으며, 둘째 나의 소유를 멀리 여의며, 셋째 다툼이 없으며, 넷째 혹은 딴 데로 가게 되어도 아까운 것이 없으며, 다섯째 실없음이 적으며, 여섯째 바람과 비ㆍ추위ㆍ더위ㆍ모기ㆍ등에ㆍ독충 등을 참을 수 있으며, 일곱째 음성의 가시나무에 찔림을 받지 않으며, 여덟째 중생들이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게 되며, 아홉째 자신에게도 근심과 원한이 없으며, 열째 여러 가지 소란스런 행이 없는 처소이다.
016_0789_b_01L十住毘婆沙論卷第十六 資聖者龍樹造後秦龜茲國三藏鳩摩羅什譯護戒品第四是菩薩如是行諸善道於善不善道 摠相及別相 各各分別知有二種果報十善業道摠相果報者若生天上生人中別相果報者離殺生善行有二種果報一者長壽二者少病離劫盜善行有二種果報一者大富二者獨有財物離邪婬善行有二種果報一者妻婦貞良二者不爲外人所壞離妄語善行有二種果報一者不爲人所謗毀二者不爲人所欺誑離兩舌善行有二種果報一者得好眷屬二者不爲人所壞離惡口善行有二種果報一者得聞隨意所樂音聲者無有鬪諍離散亂語善行有二種果報一者人信受其語二者所言決離貪取善行有二種果報一者知二者少欲離瞋惱善行有二種果一者在所生處常求他好事二者不喜惱害衆生正見善行有二種果一者離諂曲二者所見淸淨十不善道亦如是摠相果報者上行墮地中行墮畜生下行墮餓鬼別相果報者殺生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短命二者多病劫盜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貧窮二者失財邪婬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得醜惡妻婦不貞良二者爲他所壞妄語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人所謗毀二者爲人欺誑兩舌不善行有二種果報者得惡眷屬二者眷屬可壞惡口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耳聞惡聲者常有鬪諍散亂語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語不信受二者言無本末貪取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心不知足二者多欲無厭瞋惱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惡性二者喜惱衆生邪見不善行有二種果報一者其心諂曲二者墮在邪見知已愛樂法 於法心不動 於諸衆生中慈悲心轉勝愛法者但愛於法更無勝事此中法先說十善業道樂法者但樂於法更無餘事於法心不動者乃至失命終不捨法菩薩行如是法於衆生中悲轉勝初地中雖有慈悲不及此地以通達罪福業因緣故衆生可愍屬於業不得自在則無瞋恨憎恚之如是行者慈悲轉勝作是念咄哉諸衆生 深墮於邪見 我應說正見令得入正道菩薩通達罪福業因緣於諸衆生行慈悲作是念衆生可愍不知諸法實相故多行妄想生諸邪見因邪見起諸煩惱因煩惱故而起諸業業因緣故輪轉生死我先發心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度衆生故說正見是諸衆生是我應度今當爲說正見令入眞道使得度脫如是念知諸衆生有種種煩惱所謂觀所起煩惱 及諸煩惱垢 種種黑惡業受種種苦惱 愍念諸衆生 多有所闕少種種觀察已 是皆如我有 卽時以悲心方便發大願 云何令衆生 得滅是諸苦煩惱煩惱垢者使所攝名爲煩惱所攝名爲垢使所攝煩惱者無明身見邊見見取戒取邪見十根本隨三界見諦思惟所斷分別故名九十八使非使所攝者不信無愧諂曲戲侮堅執懈怠退沒很戾慳嫉不忍食不知足亦以三界見諦思惟所斷分別故有一百九十六纏垢有人言煩惱在深心垢在淺心有人言諸障蓋名爲纏垢餘皆名煩惱黑惡業者卽是七不善業道及貪取瞋惱邪見相應思能生苦報種種苦惱者身中種種惡事名爲苦心中種種惡事名爲惱又今世苦爲苦後墮惡道名爲惱多有所少者或諸根支體或資生所須或信戒等諸功德不具故名爲少餘句易解偈中所說不復須釋如是思惟已生甚可愍墮在於二乘我當爲發願令住於大乘是事如此十地經中金剛藏菩薩自說是菩薩離十不善業道亦令衆生住十善業道爲衆生深求勝心好心樂心憐愍心慈悲心利益守護心我所有心大師心攝取心受取心#作是念此諸衆生甚可憐愍墮種種邪意邪見行邪險道我今應令住在眞實正見道中是諸衆生種類不同互相諍競常懷忿恚瞋惱熾然我當令住無上大慈是諸衆生無有厭足貪求他利邪命自活我當令住淸淨身口意業是諸衆生在貪欲瞋恚愚癡因緣中常起種種煩惱使而不方便求欲自出我當滅其諸苦惱事令住無苦惱處是諸衆生爲無明所翳入黑闇稠林不能自出智慧明入在諸見險惡道中我應救使得無㝵智慧之眼以是慧眼隨他人於一切法知如實相是諸衆生墮在生死長流欲墮地獄畜生阿修羅坑入邪曲網中種種煩惱惡草所覆無有導師不生出心道言非道非道言道魔民怨賊常共隨逐無有善師隨順魔意遠離佛法如是衆生我應令度此諸生死險惡道住無畏無衰一切智慧城是諸衆生爲欲流有流見流無明流所漂種種罪業濤波所覆沒在愛河隨生死波爲洄澓所轉不能自出爲欲覺惱覺鹹水淹爛爲身見羅剎之所執持入五欲深林爲喜染所著吹我慢陸地甚可憐愍無洲無救於六入空聚落不能動發無善度者如是衆生我今應以大悲牢堅智慧之舩載至諸安隱無怖畏一切智洲是諸衆生多苦可愍閉在生死憂悲苦惱牢獄多懷貪恚愛憎墮四顚倒爲四大毒蛇所害爲五陰怨家所殘喜染詐賊所陷在六入空聚受無量苦惱我應破其生死牢獄令得自在無㝵涅安隱快樂是諸衆生甚可憐愍劣小心樂於少利縮沒無有一切智設求出者則樂聲聞辟支佛乘應令得大心使樂佛廣大之法菩薩如是行 則得持戒力 善知起善業使令得增長 是則爲佛子 深入離垢地持戒力者一心淸淨具足十善道則得修集福德力能起善業者善知自生增長善道亦令他衆生深入者行轉遠盡其邊底佛子者能隨法行名爲佛子於初地始生至二地增長是菩薩應如是勤行精進菩薩若得至 離垢地邊際 爾時則得見百種千種佛初地中已說般舟三昧見現在佛助三昧法所謂以三十二相八十種好四十不共法念佛於一切法無所貪亦說利益三昧能成就果報勢力問曰若菩薩於初地中已到其邊見諸佛初入第二地卽應見諸佛何言乃至第二地邊乃見諸佛若爾入第二地初中應失此三昧至後乃答曰初入第二地中亦見諸佛不退失是三昧汝不能善解偈義故作此難第二地初中但見百種佛至其邊得見百種千種佛見諸佛已心大歡喜欲得佛法故勤行精進卽能以四事 供養於諸佛 能於諸佛所復受十業道四事者衣服飮食臥具醫藥餘義則可知作如是行已 從佛受善道 至百千萬劫不毀亦不失不毀者不令戒羸弱或以淸淨事不毀都不復行名爲失是菩薩如是過初地入第二地已如說善離慳貪垢 樂行淸淨捨 善離慳貪垢深愛淸淨戒淸淨名但以善心行捨不雜諸煩惱深愛名堅住其中究竟不捨此地中慳貪垢破戒垢無有遺餘是故此地名爲離垢菩薩如是無慳貪破戒心於四攝法中愛語偏利六波羅蜜中戒度偏利利名多行勢力轉深問曰若第二地中尸羅波羅蜜已得勢力今此地中應解說尸羅波羅蜜分差別答曰略說尸羅度 有六十五分 生力淨差別處處論中說尸羅波羅蜜無量無邊但略說有六十五分餘戒生戒力戒淨戒差別中先後處處說相如寶頂經中和合佛法品中無盡意菩薩於佛前說六十五種尸羅波羅蜜分尸羅名不惱一切衆生於他物中無劫盜想不著外色不誑衆生眷屬 具足故不兩舌多忍惡言故無有惡口常思惟籌量利益語故無散亂語喜人樂故心無貪取忍諸苦故無有瞋惱不稱譽餘師名爲正見信淨心故信佛知法眞實故信法樂尊重恭敬賢聖衆故念佛以五體投地供養禮敬乃至小戒深心怖畏故戒不羸弱不依餘乘不毀戒離邪行故戒不缺損不起惡煩惱故名不雜戒畢竟常樂增長善法故名不濁戒隨意行故名自在不爲智者所呵故名爲聖所讚戒常在念安慧故名爲易行戒一切無過故名不可呵戒守護諸根故名爲善護戒諸佛所念故名爲名聞戒法物中知量取故名爲少欲戒斷慳貪故名知足戒身心遠離故名遠離離衆鬧語故名阿蘭若戒不視他望有所得故名爲具足聖種戒善根故名細行頭陁戒生人天中故名隨說行戒救一切衆生故名爲慈忍一切苦故名爲悲戒心不退沒名爲喜戒離憎愛故名爲捨戒伏心故名爲自見過戒護彼心故爲不錯戒善護戒故名爲善攝戒成熟衆生故名爲布施戒無所願故忍辱戒不懈退故名精進戒集助禪法故名爲禪戒多聞善根無厭足故名爲智慧戒從多聞得智慧故名爲求多聞戒集助七覺法故名親近善知識戒捨邪道故名離惡知識戒無常故名不貪身戒勤集善根故不信命戒深心淸淨故名不悔戒淸淨故名不假僞戒深心無垢故無熱戒善起業故名無憂戒不自高名無慢戒離染欲故名不戲調戒心質直故名不自高戒心調和故名有羞戒惡心不發故名調善戒滅諸煩惱故名爲寂滅戒如說行故名爲隨所教戒行四攝法故名教化衆生戒不失自法故名爲護法戒本來淸淨名一切願滿戒迴向無上道故至佛法戒等心一切衆生故名得佛三昧戒大德舍利弗是六十五分菩薩淸淨戒則爲無盡生戒者處處略說有八種生戒四從身生四從口生從身生者離奪命離惱苦衆生離劫盜離邪婬從口生者離妄語兩舌惡口散亂語是名八是八種戒從受是受法若以身若以口若以心受#和合爲二十四教他受亦二十四喜受亦二十四修習行時亦二十四九十六皆是欲界繫從是晝夜生以故初受心已滅是第二心晝夜常用福德亦如是所以者何初布施心滅已從第二心後用時當生是名善身業有十善業道所攝有不攝界所繫如是色界繫有二種一從身二從口生從身生者離十不善道不攝罪從口生者離散亂語是戒以身口受心受二三爲六教他亦六隨喜亦六習行時亦六四六二十四先說九十六合爲百二十如是從行生戒復有證道時生戒退道時生戒初生時以事廣故今但略說戒力者隨波羅蜜增長戒轉得力隨所得地戒亦堅固得力戒淨者不毀壞缺減等先說復次戒淨不淨相七梵行法中如經說以七種婬欲名戒不淨者雖斷婬欲而以染心受女人洗浴按摩二以染心聞女人香共語戲笑三以染心目共相視四雖有障㝵染心聞女人音聲五先共女人語笑後雖相離憶念不捨六自限爾所時斷婬欲然後當作七期生天上受天女樂及後身富樂是故斷婬欲是名不淨離此七事名戒淸淨戒差別者有二種一有漏二無漏三種欲界繫色界繫不繫四種正命所攝二種正正業正命所不攝亦二種正語五種凡夫戒菩薩戒聲聞戒辟支佛戒無上佛戒六種欲界正命所攝身口一正命所不攝二色界繫正命所攝身口業三正命所不攝四無漏正命所攝身口五正命所不攝六七善業道八種如先說身四種四種九種七欲界繫七善業道二種如先說十種道戒三種對治戒三種但戒三種是九種無漏戒有漏戒爲如是等種種分別差別問曰聲聞乘中說身業口業名爲尸羅此二善業名好二不善業名惡是善身口業名尸羅此論中卽以此爲尸羅爲更有尸羅答曰不但身口業 名之爲尸羅 修親近樂行亦名爲尸羅此三事一義所謂修習親近樂行若以修習親近樂行名爲尸羅者一切法皆應名尸羅何以故常修習親近樂行故汝今應說最勝修習尸答曰若無我我所 遠離諸戲論 一切無所得是名上尸羅若不知內外法實相卽因尸羅生憍貪著故開諸罪門是故若於內法不見有我於外法中不得我所知內外法畢竟空無所得亦於畢竟空取相戲論是名最勝尸羅何以故如是尸羅中尚無心錯何況身口是故諸佛菩薩第一能行尸羅者於一切法無所得名爲上尸羅如迦葉經中說告迦葉尸羅名無我無非我無作無所無作者無行無不行無名無色無無相非善非非善非寂滅非非寂滅非取非捨無衆生無衆生因緣無身無口無心無世閒無世閒法依世閒不以尸羅自高不以尸羅下不以尸羅起增上慢不以尸羅分別此彼迦葉是名諸賢聖尸羅離於三界無漏無繫如無盡意菩薩尸羅品中語舍利弗尸羅名不分別是衆生不說是我不說是壽者命者不說是人不說是養育者不說是色陰識陰不說是地種風種尸羅名不分別是眼相不分別是色相分別是耳相聲相鼻相香相舌相身相觸相意相法相尸羅名不分別是身是口是心尸羅名攝心故一心相選擇諸法故是慧相尸羅名到空至無相際不雜三界無作無起無生忍尸羅名不從先際來不至後亦不住中際尸羅名不住心意識不與念和合尸羅名不依欲界不依色界不依無色界尸羅名離貪塵瞋垢滅無明闇非常非斷不違衆緣生相尸羅名離我心捨我所心不住身見尸羅名不貪著名相不與名色和合尸羅名不爲結使所使不爲諸纏所覆不住障㝵疑悔中尸羅名貪不善根所不住過瞋不善根斷癡不善根尸羅名無急無熱猗心快樂尸羅名不斷諸佛種故不破法身不分別法性故不斷法種無爲相故不斷僧舍利弗是名諸菩薩最勝無上尸如是尸羅則不可盡唯除諸佛尸皆有盡也所謂從凡夫尸羅 後至辟支佛 是皆有盡相菩薩則無盡從凡夫來所有尸羅雖久受果報歸於盡諸阿羅漢辟支佛所有尸羅皆亦有盡菩薩尸羅無我無我所一切所得滅諸戲論是故無盡如無盡意菩薩尸羅品中說諸凡夫尸羅隨生處盡故尸羅則盡外道五通退轉時盡故尸羅則盡人以十善業道盡故尸羅則盡欲界諸天福德盡故尸羅則盡色界諸天四禪四無量盡尸羅則盡無色界諸天隨定生處盡故尸羅則盡諸學無學人入涅槃盡故尸羅則盡諸辟支佛無大悲故尸羅則盡大德舍利弗但諸菩薩尸羅無有盡何以故從菩薩尸羅出諸尸羅差別因無盡故果亦無盡菩薩尸羅無盡故如來尸羅亦無盡是故諸大人尸羅名爲無盡問曰汝解麤尸羅時說六十五種尸羅聲聞中八種尸羅四種從身生四種從口生如是事者何得不相違答曰不相違何以故雖非尸羅體 益故名爲分 八種身口業卽是尸羅體雖六十五種分非尸羅體而利益身口八種麤尸羅故名尸羅分凡能有所利益皆名爲分如象蓋名爲王分是故禪定智慧等雖非尸羅體以利益尸羅故亦名尸羅分解頭陁品第五菩薩如是行尸羅法見十利應著 二六種依法 又以見十利盡形應乞食比丘欲具足行持戒品應著二六種以見十利故何等十一以慚愧故二障寒熱蚊蝱毒虫故三以表示沙門儀法故四一切天人見法衣恭敬尊貴如塔寺故五以厭離心著染衣非爲貪好故六以隨順寂滅非爲熾然煩惱故七著法衣有惡易見故著法衣更不須餘物莊嚴故九著法隨順修八聖道故十我當精進行不以染污心於須臾閒著壞色衣以見是十利故應著二種衣一者居士衣二者糞掃衣六種者一劫貝芻摩三憍絺耶四毳衣五赤麻衣白麻衣見有十利盡形乞食者一所用活命自屬不屬他二衆生施我食者令住三寶然後當食三若有施我食當生悲心我當勤行精進令善住布施作已乃食四隨順佛教行故易滿易養六行破憍慢法七無見頂善根八見我乞食餘有修善法者當效我九不與男女大小有諸因緣十次第乞食故於衆生中生平等卽種助一切種智佛雖聽請食 欲以自利己 亦利他人故則不受請食自利者能具諸波羅蜜利他者教化衆生令住三寶行者如是自利利他見有十利故 常不捨空閑 問疾及聽法教化乃至寺受阿練若處比丘雖增長種種功德略說見十利故盡形不應捨何等爲一自在來去二無我無我所三隨意所住無有障㝵四心轉樂習阿練若住處五住處少欲少事六不惜身爲具足功德故七遠離衆鬧語故雖行功德不求恩報九隨順禪定得一心十於空處住易生無障㝵想問訊病等來至寺者若有因緣事 來在塔寺住 於一切事中不捨空閑想比丘雖受盡形阿練若法有因緣事則入塔寺佛法有通有塞非如外道阿練若名常樂空閑靜處於一切不捨空想以一切法體究竟皆空問曰有何因緣故來至塔寺答曰一供給病人二爲病求醫藥具三爲病者求看病人四爲病者說法五爲餘比丘說法六聽法教化七爲供養恭敬大德者八爲供給聖衆九爲讀誦深經十教他令讀深經有如是等諸因來至塔寺精進行諸覺 隨阿練若法 比丘已住於阿練若處者 常應精勤生 種種諸善法大膽心無我 滅除諸怖畏阿練若精進者若比丘斷貪不惜身命利養故晝夜常勤精進如救頭然依隨阿練若覺者所謂出覺不瞋覺不惱覺等諸善覺復次念佛是正遍知者衆生中尊佛法是善說弟子衆隨順正行復次隨順空隨順無相順無願諸覺名隨阿練若覺復次順四勝處隨順六波羅蜜諸覺是名隨順阿練若覺復次如佛爲郁伽長者說在家出家菩薩行若出家菩薩受阿練若法應如是思惟我何故阿練若處我非但住阿練若處故爲沙門而阿練若處多有衆生多惡不善不護諸根不精進不修習善法如獐鹿猿猴衆鳥惡賊旃陁羅等不名爲比丘我今爲何事故住阿練若處應成辦其事長者何等爲事謂念不散亂二得諸陁羅尼三行慈四行悲心五自在住五神通六具足六波羅蜜七不捨一切智心八修習方便智九攝取衆生十成就衆生十一不捨四攝法十二常念六思念十三爲多聞故不捨精進十四正觀擇諸法十五應正解脫十六知得果十七住於正位十八守護佛法十九信業果報故名正見二十離一切憶想分別思惟故名正思惟二十一隨衆生所信樂爲說法故名爲正語二十二滅諸業故起業名爲正業二十三破煩惱氣故名爲正命二十四得無上道故名正精進二十五觀不虛妄法故名正念二十六得一切智慧故名正定二十七於空不怖二十八於無相不畏二十九於無願不沒三十故以智受身三十一依義不依語十二依智不依識三十三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三十四依法不依人長者如是等名爲出家菩薩比丘利益事應生隨順阿練若法者所謂四四無量心天耳天眼他心智宿命神通等滅諸怖畏者是人以三因能滅怖畏一見無我我所法相故能除怖畏二以方便力故三以心膽力故能除怖畏見無我我所者如初地中所說除五種怖畏方便力者論中念正思惟果報故名方便力應作是念諸大國王在深宮殿步四兵侍衛業因緣盡亦受種種諸衰惱事又業因緣守護者雖行險道中入大海水在大戰陣亦安隱無我先世業因緣若在聚落若在阿練若處業因緣必受其報如是思惟除滅怖畏復作是念若我爲守護身故入城邑聚落捨阿練若處者有能勝善身業善口業善意業守護如佛告波斯匿王若人行身善業行口善業行意善業是名爲人善自守護是人若言我善自守護者是爲實說大王是人雖無四兵衛護亦可名爲善好守護何以故如是守護內守護非外守護是故我以身業行口業善行意業善行故名爲善自守護復作是念是諸鳥獸腹行虫等在阿練若處身不行善口不行善不行善以遠聚落住故而無所畏之心智豈不如此鳥獸等耶如是思除諸怖畏又以念佛故在阿練若能破一切諸怖畏事如經說汝諸比丘阿練若處若在樹下若在空舍或生怖畏心沒毛豎者汝當念我是如來正遍知明行足善逝世閒解無上士調御丈夫天人師佛世尊是念時怖畏卽滅大膽名心不怯弱決定求道如說比丘住空閑 當以心膽力 除滅諸怖畏念佛無畏者 若人自起業 怖畏不得脫不怖亦不脫 怖則失正利 如是知不免而破餘利者 則行小人事 比丘所不應若有怖畏者 應畏於生死 一切諸怖畏生死皆爲因 是故行道者 欲脫於生死亦救於他人 不應生怖畏如佛離怖畏經中說怖畏法有沙門婆羅門住阿練若處應如是念以不淨身業故不淨口業故不淨意業故不淸淨故自高卑人故懈怠心故憶念故心不定故愚癡故怖畏與此相違身業淸淨等則無怖畏又佛爲郁伽長者說出家菩薩在阿練若處應作是念我何故在此卽時自知欲離怖畏故來至於此怖畏於誰畏衆憒畏衆語言畏貪欲瞋恚愚癡畏憍恚恨嫉他利養畏色五陰魔畏諸愚癡障㝵處畏非時語畏不見言見畏不聞言聞畏不覺而畏不知而知畏諸沙門垢畏共相憎惡畏欲界色界無色界一切生處畏墮地獄畜生餓鬼及諸難處略說畏一切惡不善法故來在此住若人在家樂在衆鬧不修習道住在邪念不能得離如是怖畏所有過去諸菩皆在阿練若處離諸怖畏得無畏得一切智慧所有當來諸菩薩亦在阿練若處離諸怖畏得一切智慧今現在諸菩薩住阿練若處離諸怖得無畏處成一切智慧以是故我怖畏一切諸惡度諸怖畏故應住阿練若處復次一切怖畏皆從著我生貪著我故愛受我故生我想故見我貴我故分別我故守護我故若我住阿練若處不捨貪著我者則爲空在阿練若處復次長者見有所得者則不住阿練若處住我我所心者不住阿練若處住顚倒者則不住阿練若處長者乃至生涅槃想者尚不住阿練若處何況起煩惱想者長者譬如草木在阿練若處無有驚畏薩如是在阿練若處應生草木想瓦想水中影想鏡中像想於語言響想於心生幻想此中誰驚誰畏薩爾時則正觀身無我無我所無衆無壽者命者無養育者無男無女無知者見者怖畏名爲虛妄分別則不應隨虛妄分別菩薩如是應如草木住阿練若處又知一切法皆亦如是斷鬪諍名阿練若處無我無我無所屬名阿練若處不應樂在家出家衆鬧處住諸佛不聽阿練若處比丘與在家出家者和合問曰佛不聽與一切衆人和合耶不然佛聽四和合 餘者則不聽 是故應親近餘者則遠離菩薩在阿練若處聽與四衆和合謂入聽法衆教化衆生供養於佛離一切智心和合是故唯聽此四事和合餘者不應親近復次菩薩應作是念云何諸佛所聽阿練若住處當親近我或非阿練若住處謂是住阿練若處或有錯謬問曰何等是阿練若住處菩薩應當和合答曰佛自經中說阿練若住處名不住一切法不歸諸塵不取一切法相不貪色一切法平等故無所依止住名阿練若處住自心善故不相違住處名阿練若住捨一切擔猗樂住故名阿練若住脫一切煩惱無怖畏住名阿練若住度諸流住故名阿練若住住聖種故名阿練若住知足趣得故名阿練若住易滿易養少欲住名阿練若住智慧足住故名阿練若住正行多聞住故名阿練若住無相無願解脫門現前故名阿練若斷諸縛得解脫住故名阿練若住順十二因緣隨順住故名阿練若住畢竟寂滅所作已作住故名阿練若住阿練若住處者隨順戒品佐助定利益慧品易得解脫品易得解脫知見品易行諸助菩提法能攝諸頭陁功德阿練若住處通達諸諦阿練若處見知諸陰阿練若處諸性同爲法性阿練若處出離十二入阿練若處不忘失菩提心阿練若處觀空不阿練若處能護佛法阿練若處求解脫者不失功德阿練若處能得一切智者則能增益阿練若處菩薩如是行疾得具六度何以故若菩薩在阿練若處住不貪惜身命是名檀波羅蜜行三種善業淸淨入細頭陁行法是名尸波羅蜜不瞋恨心於諸衆生慈心普遍但忍樂薩婆若乘不在餘乘是名羼提波羅蜜自立誓願於阿練若處不得正法忍終不捨此處是名毘梨耶波羅蜜得禪定故不觀生處修習善根名禪波羅蜜如身阿練若亦如是身菩提亦如是如實中無差別是名般若波羅蜜佛聽有四法 住阿練若處何等四如佛告長者一者多聞二善知決定義三樂修正憶念四隨順如所說行如是人應住阿練若處復有菩薩煩惱深厚是人若在衆鬧則發煩惱應在阿練若處住降伏煩惱復次菩薩得五神通是人欲教化就天夜叉乾闥婆故應住阿練若復有菩薩作是念諸佛所讚聽處是阿練若處復次住阿練若處助滿一切善法增長善根然後入聚落衆生說法成就如是功德乃可住阿練若處復次決定王經中 佛爲阿難說 阿練若比丘應住四四法菩薩住阿練若處者一遠離在家二欲讀誦深經三引導衆生使得阿練若處功德四晝夜不離念佛有四法一乃至彈指頃於衆生中生瞋恨心二不應一時頃使眠睡覆三於一念頃不應生衆生想四於一念頃不應忘捨菩提心復有四法一常應閑坐不應聚衆二常樂經行三常觀諸法無新故想四不應離深無相無願法復有四法一行四禪不行世閒禪行四無量緣衆生生悲而不取衆生相二雖行慈心而不緣衆生雖行喜心而不貪樂雖行捨而不捨衆生三自見身有四聖種而不自高卑下他人四自行多聞如所聞行是爲四復次無智無精進 而住空閑處 卽得於四法復得餘四法 又復得三事 如是佛所說阿練若比丘於諸功德中應勤修習何以故阿練若功德中此二事能生諸功德故若比丘愚癡懈怠在阿練若處住者則得四非法一多眠睡多貪利養三以因緣現矯異相四現不樂阿練若處復有四法一增上慢未得謂得二於深經心懷憎惡三壞無相無願法四於持深經者心生瞋恨復有三事一若在阿練若處精進無智慧或値女人墮在非法得僧殘若得重罪若反戒還俗是爲復次廣說空閑法 及與乞食法 餘十頭陁德皆亦應廣說十二頭陁法上來以廣解二事餘十頭陁功德亦應如是知何以故是二則爲開十頭陁門餘則易解十頭陁一著糞掃衣二一坐三常坐四食不受非時飮食五但有三衣六毳七隨敷坐八樹下住九空地住十死人閒住糞掃衣者人所棄捨受而後著受者若心生若口言一坐者先受食處更不復食常坐者夜常不臥後不飮漿者食後不受非時飮石蜜等可食之物但有三衣者唯受三衣更不畜餘衣毳衣者從毳所成麤毛毳衣褐氈欽婆羅等隨敷坐者隨所得坐處不令他起樹下住者樂住樹不入覆處空地坐者露地止住死人閒者隨順厭離心故常止宿死人閒法是名十二頭陁令戒淸淨掃衣有十利一不以衣故與在家者和合二不以衣故現乞衣相三亦不方便說得衣相四不以衣故四方求五若不得衣亦不憂六得亦不喜七賤物易得無有過患八是順行初受四依法九入在麤衣數中十不爲人所貪著一坐食亦有十利一無有求第二食疲苦二於所受輕少三無有所用疲苦四食前無疲苦五入在細行食法六食消後食七少妨患少疾病九身體輕便十身快樂常坐亦有十利一不貪身樂二不貪眠睡三不貪臥具樂四無臥時脅著席五不隨身欲六易得坐禪七易讀誦經八少睡眠九身輕易起十求坐臥具衣服心薄食後不受非時飮食亦有十利一不多食二不滿食三不貪美味四少所求欲五少妨患六少疾病七易滿八易養九知足十坐禪讀經身不疲極但三衣亦有十利於三衣外無求受疲苦二無有守護疲苦三所畜物少四唯身所著爲足五細戒行六行來無累七身體輕便八隨順阿練若處住九處處所住所顧惜十隨順道行受毳衣亦有十一在麤衣數二少所求索三隨意可坐四隨意可臥五浣濯則易六染時亦易七少有虫壞八難壞九更不受餘衣十不廢求道隨敷坐亦有十一無求好精舍住疲苦二無求好坐臥具疲苦三不惱上座四不令下坐愁惱五少欲六少事七趣得而用八少用則少務九不起諍訟因緣不奪他所用樹下坐亦有十利一無有求房舍疲苦二無有求坐臥具疲三無有所愛疲苦四無有受用疲五無處名字六無鬪諍事七隨順四依法八少而易得無過九隨順修道十無衆鬧行死人閒住亦有十利常得無常想二常得死想三常得不淨想四常得一切世閒不可樂想常得遠離一切所愛人六常得悲心七遠離戲調八心常厭離九勤行精十能除怖畏空地坐者亦有十利一不求樹下二遠離我所有三無有諍訟四若餘去無所顧惜五少戲調六能忍風雨寒熱蚊蝱毒虫等七不爲音聲刺蕀所刺八不令衆生瞋恨九自亦無有愁恨十無衆鬧行處十住毘婆沙論卷第十六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고려대장경에 의하면, 앞의 목차의 순서와 달리 ‘호계품제사(護戒品第四)’로 되어 있다.
  2. 2)고려대장경에 의하면, 앞의 목차의 순서와 달리 ‘해두타품제오(解頭陀品第五)’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