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卷下

ABC_IT_K0588_T_003
016_1071_c_01L섭대승론 하권
016_1071_c_01L攝大乘論卷下


무착 지음
016_1071_c_02L無著菩薩造
진제 한역
변상섭 번역
016_1071_c_03L眞諦三藏譯


5. 입인과수차별승상(入因果修差別勝相)
016_1071_c_04L入因果修差別勝相第五

이와 같이 이미 인과에 들어가는 수승한 모습을 설하였다. 어떻게 인과에 들어가는 닦음의 차별을 알아야 하는가? 열 가지 보살지(菩薩地)로 말미암아 알 수 있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환희지(歡喜地)이며, 둘째는 무구지(無垢地)이며, 셋째는 명염지(明焰地)이며, 넷째는 소연지(燒然地)이며, 다섯째는 난승지(難勝地)이며, 여섯째는 현전지(現前地)이며, 일곱째는 원행지(遠行地)이며, 여덟째는 부동지(不動地)이며, 아홉째는 선혜지(善慧地)이며, 열째는 법운지(法雲地)이다. 이러한 정의로 모든 지를 성립시켜 열 가지가 되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10지의 장애인 열 가지 무명을 대하여 다스리기 위함이다. 열 가지 모습에 나타나는 법계에 열 가지 무명이 있어서 오히려 장애가 된다.
016_1071_c_05L如此已說入因果勝相云何應知入因果修差別由十種菩薩地何者爲十一歡喜地二無垢地三明焰地四燒然地五難勝地六現前地七遠行地八不動地九善慧地十法雲地云何應知以此義成立諸地爲十對治地障十種無明故於十相所顯法界有十種無明猶在爲障
무엇으로 법계의 열 가지 상(相)을 드러내는가? 초지(初地)에서는 모든 것에 두루 가득하다는 의미로 말미암아서 법계를 알아야 한다. 2지(地)에서는 가장 수승하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3지(地)에서는 수승한 흐름의 의미로 말미암는다. 4지(地)에서는 섭지함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5지(地)에서는 서로 이어져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6지(地)에서는 더러움과 깨끗함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7지(地)에서는 여러 가지 법이 다름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8지(地)에서는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9지(地)에서는 선정의 자재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으며, 토자재(土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으며, 지자재(智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는다. 10지(地)에서는 업자재(業自在)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고, 다라니문과 삼마제문의 자재를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말미암아 법계를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1_c_13L何者能顯法界十相於初地由一切遍滿義應知法界於二地由最勝義於三地由勝流義於四地由無攝義於五地由相續不異義於六地由無染淨義於七地由種種法無別義於八地由不增減義於九地由定自在依止義由土自在依止義由智自在依止義於十地由業自在依止義由陁羅尼門三摩提門自在依止義應知法界此中說偈
016_1072_a_02L
두루 가득하고 가장 수승하다는 정의와
수승한 흐름과 섭지하지 않는다는 것,
다름이 없다는 것과 더럽고 깨끗함이 없다는 것,
여러 가지 법과 다르지 않음,
016_1072_a_02L遍滿最勝義
勝流及無攝
無異無染淨
種種法無別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는 것,
네 가지 자재의 근거라는 정의,
업자재의 근거,
삼마제를 총지(摠持)한다.
016_1072_a_04L不增減四種
自在依止義
業自在依止
摠持三摩提

이 두 게송과 같이 『중변분별론』에 의거하여 깨달아 알아야 한다. 또한 다시 이 무명은 이승(二乘)에서는 더러움에 물듦이 아니지만 보살에서는 더러움에 물듦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2_a_05L如此二偈依「中邊分別論」應當了知復次此無明應知於二乘非染污菩薩是染污
어찌하여 초지를 환희(歡喜)라고 하는가? 처음으로 자신과 남에게 이익되는 공능(功能)을 얻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2지를 무구(無垢)라고 일컫는가? 이 지는 보살의 계율을 범하는 더러움[垢]을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3지를 명염(明焰)이라고 하는가? 삼마제와 삼마발제의 의지로부터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며, 큰 법광명(法光明)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4지를 소연(燒然)이라고 하는가? 보리의 법을 도와서 모든 장애를 태워 없애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5지를 난승(難勝)이라고 하는가? 다시 서로 어긋나는 진제와 속제의 두 지혜를 합하며, 어려운 것을 합하여 서로 상응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6지를 현전(現前)이라고 하는가? 12연행의 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며, 반야바라밀이 현전하여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016_1072_a_08L云何初地名歡喜由始得自他利益功能故云何二地名無此地遠離犯菩薩戒垢故云何三地名明焰由無退三摩提及三摩跋提依止故大法光明依止故云何四地名燒然由助菩提法能焚滅一切障云何五地名難勝眞俗二智更互相違能合難合令相應故云何六地名現前由十二緣生智依止故能令般若波羅蜜現前住故
어찌하여 7지를 원행(遠行)이라고 하는가? 공용이 행하는 마지막 끝에 도달하여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8지를 부동(不動)이라고 하는가? 모든 상과 뜻을 일으키는 공용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9지를 선혜(善慧)라고 하는가? 가장 수승한 무애해가 지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10지를 법운(法雲)이라고 하는가? 경계를 연하여 꿰뚫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을 안다.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제문이 장(藏)이 되기 때문에 구름에 비유한다. 허공과 같이 거친 장애를 덮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며, 법신을 원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016_1072_a_17L云何七地名遠行由至有功用行最後邊故云何八地名不動由一切相及作意功用不能動故云何九地名善慧由最勝無㝵辯智依止故云何十地名法雲由緣通境知一切法一切陁羅尼及三摩提門爲藏故譬雲能覆如虛空麤障故能圓滿法身故
016_1072_b_02L모든 지(地)를 얻은 모습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 상으로 말미암으니, 첫째는 이미 신락(信樂)의 상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하나하나의 지에서 신락을 결정코 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미 얻은 행의 상으로 말미암아 지와 더불어 상응하는 열 가지 법의 바른 행을 얻기 때문이다. 셋째는 이미 얻은 통달의 상으로 말미암아 먼저 초지에서 진여인 법계를 통달했을 때 모든 지를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미 얻어진 성취의 상으로 말미암아 이 10지는 모두 궁극의 수행에 이미 이르렀기 때문이다.
016_1072_a_24L云何應知得諸地相由四種相一由已得信樂相於一一地決定生信樂二由已得行相得與地相應十種法正行故三由已得通達相先於初地通達眞如法界時皆能通達一切地故四由已得成就相此十地皆已至究竟修行故
모든 지를 닦는 모습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모든 보살은 각각의 진 가운데서 사마타비바사나를 닦아 익힌다. 각각에는 닦아 익혀서 이룰 수 있는 다섯 가지 상이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집총수(集摠修)이며, 둘째는 무상수(無相修)이며, 셋째는 무공용수(無功用修)이며, 넷째는 치성수(熾盛修)이며, 다섯째는 부지족수(不知足修)이다. 마땅히 모든 지에 있어서 이러한 다섯 가지 닦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다섯 가지 닦음이 생하는 다섯 가지 인식현상이 과보가 된다.
016_1072_b_08L云何應知修諸地相諸菩薩先於地地中修習奢摩他毘鉢舍那各有五相修習得成何者爲一集摠修二無相修三無功用修四熾盛修五不知足修應知於諸地皆有此五修此五修生五法爲果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찰나찰나 법에 의거하는 모든 추중(麤重)을 무너뜨릴 수 있음이며, 둘째는 갖가지 어지러운 상념으로부터 벗어난 법락을 얻을 수 있음이며, 셋째는 모든 곳에서 헤아릴 수 없고 분별이 없는 상인 선법(善法)의 광명을 볼 수 있음이다. 넷째는 분별된 것과 똑같은 법상이 바뀌어 청정분(淸淨分)을 얻어 항상 서로 이어져 생하는 원만함을 이루고 법신을 성취함이다. 다섯째는 상품 가운데서 점차 늘어나서 최상상품(最上上品)의 인연이 모이게 됨이다. 10지에서는 10바라밀을 닦아 차례대로 이루어지고 앞의 6지에서는 6바라밀이 있다는 것은 차례로 설명한 것과 같다.
016_1072_b_13L者爲五一剎那剎那能壞一切麤重依法二能得出離種種亂想法樂能見一切處無量無分別相善法光四如所分別法相轉得淸淨分恒相續生爲圓滿成就法身五於上品中轉增爲最上上品因緣聚集
016_1072_c_02L뒤의 4지(地)에는 네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바라밀이니, 6바라밀에 의해 생장되는 선근 공덕이며,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 모두 평등하게 하고 모든 중생을 위없는 보리에 회향하게 한다. 둘째는 바니타나(波尼他那)바라밀이니, 이 바라밀은 미래세에 6바라밀을 생하는 연을 감응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착한 원을 이끌어 섭지한다. 셋째는 바라(婆羅)바라밀이니, 사유하여 간택하는 힘과 닦아 익히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바라밀을 굴복시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에 6바라밀을 이끌어 서로 이어 생할 수 있어서 빈틈이 없다. 넷째는 야나(若那)바라밀이니, 이 바라밀은 앞의 6바라밀의 지혜를 성립시킬 수 있으며, 보살로 하여금 큰 집회에서 법락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중생을 성숙시킬 수 있게 한다.
뒤의 네 가지 바라밀은 무분별후지(無分別後智)를 섭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바라밀이 모든 지 가운데서 서로 다른 시기에 닦아 익힌다. 바라밀장(波羅蜜藏)의 장경으로부터 이 법문이 모든 의미를 자세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2_b_19L於十地中修十波羅蜜隨次第成於前六地有六波羅蜜如次第說於後四地有四波羅蜜一漚和拘舍羅波羅蜜六波羅蜜所生長善根功德施與一切衆生悉令平等爲一切衆生迴向無上菩提二波尼他那波羅蜜此度能引攝種種願於未來世感六度生緣故三婆羅波羅蜜由思擇修習力伏諸波羅蜜對治故能引六波羅蜜相續生無有閒缺四若那波羅蜜度是能成立前六度智能令菩薩於大集中受法樂及成熟衆生後四波羅蜜應知是無分別後智攝一切波羅蜜於一切地中不同時修習
얼마만한 시간 동안에 10지를 수행하여 바른 행이 원만함을 얻는가? 다섯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혹은 3아승기겁을 수행하여 원만하여지고 혹은 7아승기겁을 혹은 33아승기겁을 수행하여야 한다. 다섯 종류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원행지를 행하는 사람은 1아승기겁에 채워지고, 청정의행(淸淨意行)을 행하는 사람과 유상행(有相行)을 행하는 사람 그리고 무상행을 행하는 사람은 6지 내지 7지에서 두 번째의 아승기겁에 채워지며, 이 뒤로부터 무공용을 행하는 사람 내지 10지는 세 번째의 아승기겁에 채워진다.
016_1072_c_10L從波羅蜜藏藏經應知此法門廣顯諸義於幾時中修習十地正行得圓滿五種人於三阿僧祇劫修行圓滿七阿僧祇劫或三十三阿僧祇劫者爲五人行願行地人滿一阿僧祇行淸淨意行人行有相行人行無相行人於六地乃至七地滿第二阿僧祇劫從此後無功用行人乃至十地滿第三阿僧祇劫
또한 다시 어찌하여 7아승기겁을 말하는가? 지 이전에 셋이 있고 지 가운데 넷이 있다. 지 이전의 셋이란 하나는 부정(不定)아승기이고, 둘은 정(定)아승기며, 셋은 수기(授記)아승기이다. 지 가운데 있는 넷이란 첫째는 실제(實諦)에 의거하는 아승기이고, 둘째는 사(捨)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며, 셋째는 적정(寂靜)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며, 넷째는 지혜에 의거하는 아승기이다.
016_1072_c_19L復次云何七阿僧祇劫地前有三地中有四地前三一不定阿僧祇二定阿僧祇三授記阿僧祇地中有四者一依實諦阿僧祇二依捨阿僧祇三依寂靜阿僧四依智慧阿僧祇
016_1073_a_02L또한 어찌하여 다시 30아승기를 말하는가? 방편 가운데 3아승기가 있으니, 첫째는 신행(信行)의 아승기이고, 둘째는 정진행(精進行)의 아승기이며, 셋째는 취향행(趣向行)의 아승기이다. 10지 가운데의 각 지지에 3아승기가 있으니 들어감과 머무름과 나옴이라고 일컫는다. 이와 같은 아승기를 수행하여 10지의 정행이 원만하다.
016_1072_c_24L復次云何三十三阿僧祇方便地中有三阿僧祇信行阿僧祇二精進行阿僧祇三趣向行阿僧祇於十地中地地各三阿僧祇謂入住出如此阿僧祇修行十地正行圓滿

선근력과 선원력이 있어서
마음이 견고하게 나아가 증상하며,
세 가지 아승기를 지나
바른 행이 성취된다고 설한다.
016_1073_a_06L有善根願力
心堅進增上
三種阿僧祇
說正行成就

6. 의계학승상(依戒學勝相)
016_1073_a_08L攝大乘論依戒學勝相第六

이와 같이 인과에 들어가는 닦음의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계학에 의한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보살지에서 바르게 받는 보살계품 가운데서 설하는 것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보살계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품류의 차별이며, 둘째는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배우는 곳의 차별이며, 셋째는 넓고 큼의 차별이며, 넷째는 매우 깊음의 차별이다.
016_1073_a_09L如此已說入因果修差別云何應知依戒學差別應知如於菩薩地正受菩薩戒品中說若略說由四種差別應知菩薩戒有差別何者爲四一品類差別二共不共學處差別三廣大差別四甚深差別
품류의 차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며, 둘째는 선법을 섭지하는 계율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다. 이 가운데 바르게 지켜야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이 나머지 두 가지 계율의 근거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법을 섭지하는 계율은 불법을 생하여 일으킬 수 있는 의지이며,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섭지하는 계율은 중생을 성숙시키는 근거이다.
016_1073_a_15L品類差別者有三一攝正護戒二攝善法戒三攝衆生利益戒此中攝正護戒應知是二戒依止攝善法戒是得佛法生起依攝衆生利益戒是成熟衆生依止
함께 배우는 곳의 계율이란 보살이 성죄(性罪)를 멀리 여의는 것을 말한다. 함께 배우지 않는 곳의 계율이란 보살이 계율로 세워진 제죄(制罪)를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 계율 가운데 성문은 이곳이 죄가 되지만 보살은 죄가 되지 않기도 하고, 혹은 보살은 이 곳이 죄가 되지만 성문은 죄가 되지 않는다.
016_1073_a_19L共學處戒者是菩薩遠離性罪戒共學處戒者是菩薩遠離制罪所立此戒中或聲聞是處有罪菩薩於中無罪或菩薩是處有罪聲聞於中無罪
016_1073_b_02L보살은 몸과 입과 뜻의 세 가지 품류를 다스림을 계율로 삼고, 성문은 단지 몸과 입만을 다스리는 것을 계율로 삼는다. 따라서 보살은 심지(心地)가 죄를 범하는 것이 있지만 성문은 곧 이러한 일이 없다.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가지고 있는 신ㆍ구ㆍ의업의 일이 중생에게 이익을 생하면 잘못이 없다. 보살은 이 업을 모두 받아 배우고 수행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함께하고 함께하지 않는 계율의 차별을 알아야 할 것이다.
016_1073_a_24L菩薩有治身口意三品爲戒聞但有治身口爲戒是故菩薩有心地犯罪聲聞則無此事若略說所有身口意業事能生衆生利益無有過此業菩薩皆應受學修行如此應知共不共戒差別
넓고 큼의 차별이란 네 가지 큼으로 말미암아 네 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여러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배우는 곳의 넓고 큼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섭지할 수 있는 넓고 큼이다. 셋째는 모든 중생을 포섭하여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지의 넓고 큼이다. 넷째는 위없는 보리의 근거가 넓고 큼이다.
016_1073_b_06L廣大差別者應知有四種由四種廣大故一種種無量學處廣大二能攝無量福德廣大攝一切衆生利益安樂意廣大四無上菩提依止廣大
매우 깊은 차별이란 만약 보살의 이러한 방편이 수승한 지혜로 말미암아 살생 등의 열 가지 일을 행하더라도 더럽혀지는 과실이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생하여 위없는 보리의 수승한 과보를 빠르게 얻는 것을 말한다. 또한 다시 변화(變化)에 의해 만들어지는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 있으니, 이것이 보살의 매우 깊은 계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계율로 말미암아 보살은 어느 때는 대왕의 위에 바로 머물러서 혹은 여러 가지로 중생을 협박하고 괴롭히는 것을 드러내어 중생을 계율 가운데 안립하게 한다. 혹은 여러 가지의 본생(本生)을 드러내어 남을 핍박하고 괴롭히며 상대를 핍박하고 괴롭히며 원망함으로 말미암아 남으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고 이익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우선이 되고, 뒤에 삼승의 성스러운 도 가운데서 그들의 선근이 성숙되게 한다. 이것을 보살의 매우 깊은 계율의 차별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보살이 받아 지니는 계율의 차별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다시 이러한 네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다시 차별이 있어서 헤아릴 수 없다. 보살계의 차별은 『비나야구사비불략경(毘那耶瞿沙毘佛略經)』 가운데 설한 것과 같다.
016_1073_b_10L甚深差別者若菩薩由如此方便勝智行殺生等十事無染濁過失生無量福德速得無上菩提勝果復次有變化所作身口業應知是菩薩甚深戒由此戒有時菩薩正居大王位或現種種逼惱衆生爲安立衆生於戒律中或現種種本由逼惱他及逼惱怨對令他相愛利益安心

7. 의심학승상(依心學勝相)
016_1073_b_18L生他信心爲先後於三乘聖道中令彼善根成熟是名菩薩甚深戒差別由此四種差別應知是略說菩薩受持戒差別復次由此四種差別更有差別不可數量菩薩戒差如毘那耶瞿沙毘佛略經中說
016_1073_c_02L
이와 같이 이미 계학에 의한 차별을 설명하였다. 심학에 의한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간략하게 설하여 여섯 가지 차별로 말미암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인가? 첫째는 경계의 차별이고, 둘째는 많은 품류의 차별이고, 셋째는 대하여 다스림의 차별이고, 넷째는 좇아 씀의 차별이며, 다섯째는 좇아 이끄는 차별이고, 여섯째는 사(事)로 말미암은 차별이다.
016_1073_b_23L攝大乘論依心學勝相第七
경계의 차별이란 대승법을 연하여 경계가 되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많은 품류의 차별이란 대승광삼마제(大乘光三摩提), 복덕(福德)을 모으는 왕(王)삼마제, 현호(賢護)삼마제, 수능가마(首楞伽摩)삼마제, 갖가지 삼마제의 품류를 포섭하기 때문이다. 대하여 다스림의 차별이란 모든 인식현상을 연하여 통경(通境)의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쐐기로써 쐐기를 빼내는 방편과 같기 때문이며, 본식 가운데서 모든 추중의 장애를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좇아서 사용하는 차별이란 현세에 삼마제의 즐거움에 오래 안주하며 뜻대로 수승한 곳에서 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좇아 끌어당기는 차별이란 모든 세계에 장애가 없는 신통(神通)을 이끌어올 수 있음이다. 사의 차별로 말미암는다는 것은 움직이게 하며, 빛을 비추며, 두루 가득하며, 드러내 보이며, 움직여 변하며, 갔다가 돌아오며, 먼 것을 재촉하여 가깝게 만들며, 거친 것을 바꾸어 미세한 것으로 만들며, 미세한 것을 바꾸어 거친 것으로 만든다. 모든 색(色)을 몸 속에 들어가게 하며, 그들과 비슷한 같은 무리로 큰 집회에 들어가며, 혹은 드러내고 혹은 감추며, 여덟 가지 자재를 갖춘다. 다른 신통력을 굴복시키고 가로막으며, 혹은 그들에게 말 잘하는 재주를 주기도 하고 생각함을 주기도 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혹은 광명을 비추고 상을 갖춘 큰 신통을 끌어당길 수 있으며, 모든 행하기 어려운 것을 이끌어 바르게 행할 수 있으니, 열 가지 어려운 수행을 섭지하여 바르게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016_1073_b_24L如此已說依戒學差別云何應知依心學差別略說由六種差別應知者爲六一境差別二衆類差別三對治差別四隨用差別五隨引差別由事差別
016_1074_a_02L무엇이 열 가지인가? 첫째는 스스로 받는 어려운 수행이니, 보리(菩提)의 좋은 서원을 스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돌이킬 수 없는 수행이니, 생사의 많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물러나 바뀔 수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등지지 않는 어려운 수행이니, 중생이 악을 짓더라도 한결같이 그를 대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눈앞에 드러난 어려운 수행이니, 중생을 원망할 일이 있어 눈앞에 드러나도 모든 이익되는 일을 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더러움이 없는 어려운 수행이니, 보살은 세간에서 살더라도 세속의 법에 물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신락(信樂)의 어려운 수행이니, 도달함이 없는 대승을 행하여 넓고 크며 매우 깊은 의미를 신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통달의 어려운 수행이니,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의 두 가지 자성이 없음을 통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수각(隨覺)의 어려운 수행이니,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깊고 깊은 불료의경(不了義經)을 이치에 맞게 판별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떠나지 않고 더렵혀지지도 않는 수행이니, 생사를 끊지 않으며 생사에 오염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열째는 가행의 어려운 수행이니,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모든 장애를 해탈한 가운데 머물러서 공용을 짓지 아니하고도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행할 수 있으며, 이에 궁생사후제(窮生死後際)에 이르며, 이와 같은 가행을 즐거이 닦기 때문이다.
016_1073_c_06L境差別者由緣大乘法爲境起故衆類差別者大乘光三摩提集福德王三摩提賢護三摩提首楞伽摩三摩提等攝種種三摩提品類對治差別者由緣一切法爲通境智慧如以楔出楔方便故於本識中拔出一切麤重障故
수각의 어려운 수행에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설하신 불료의경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보살은 이치를 좇아 깨우치고 살펴야 한다. 경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찌하여 보살은 한 물건도 훼손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베풀지 않는가? 보살이 올바르게 수없이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보시할 수 있으려면 그러하여야 한다. 따라서 시방세계에서 보시행을 닦아 서로 이어져 생하여 일어난다. 어찌하여 보살은 참다운 보시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는가? 보살이 모든 보시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보시에 대해 믿는 마음[信施心]으로 행하는가? 보살이 모든 부처님과 여래를 믿는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016_1073_c_12L隨用差別者現世久安住三摩提樂中如意能於勝處受生隨引差別者能引無㝵神通於一切世界由事差別者令動放光遍滿顯示轉變往還促遠爲近麤爲細變細爲麤令一切色皆入身似彼同類入大集中或顯或隱八自在伏障他神力或施他辯才及憶念喜樂或放光明能引具相大神能引一切難行正行以能攝十種難修正行故
016_1074_b_02L어떻게 보살은 보시를 일으켜 행하는가? 보살은 보시 가운데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한다. 보살은 어찌하여 항상 보시를 즐기는가[遊戱]? 보살이 보시할 때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를 크게 행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바라(婆羅)의 상념을 떠난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은 보시에 있어서 청정하다고 하는가? 만약 보살이 탐욕과 인색함을 울파제(鬱波提)한다면 그러하다. 보살은 어떻게 보시에 머물 수 있는가? 보살이 구경후제(究竟後際)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살이 보시에 있어서 자재하는가? 만약 보살이 보시에 있어서 자재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러하다. 어떻게 보시에 있어서 다함이 없는가? 보살은 다함이 없음 가운데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러하다. 지금까지 보시에서와 같이 지계 내지는 반야에 대해서도 이치에 맞게 알아야 한다.
016_1073_c_22L何者爲十一自受難修自受菩提善願故二不可迴難修生死衆苦不令退轉故三不背難修由衆生作惡一向對彼故四現前難於有怨衆生現前爲行一切利益事故五無染難修菩薩生於世閒不爲世法之所染故六信樂難修行於無底大乘能信樂廣大甚深義故通達難修能通達人法二無我故隨覺難修諸佛如來甚深不了義經能如理判故九不離不染難修不捨生死不爲生死染污故十加行難修諸佛如來於一切障解脫中住不作功用能行一切衆生利益事乃至窮生死後際樂修如此加行故
다시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어째서 보살은 살생을 하는가? 만약 보살이 명(命)이 있는 중생이 서로 이어지는 것을 끊는다면 그럴 수도 있다. 어찌하여 보살은 남이 주지 않은 것을 빼앗는가? 만약 보살이 남이 주지 않은 중생을 스스로 빼앗는다면 그러할 수도 있다. 어찌하여 보살이 삿된 음란함을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욕망의 대상[欲塵]에 대하여 삿된 의(意) 등을 일으킨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이 허망한 말[妄語]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허망한 것을 말할 수 있어서 거짓이 된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두 가지 말[兩舌]을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항상 가장 궁극적인 공적한 곳에 머문다면 그러하다.
016_1074_a_13L於隨覺難修諸佛如來說不了義經其義云菩薩應隨理覺察如經言云何菩薩不損一物不施一人若菩薩善能行施無量無數於十方世界修布施行相續生起云何菩薩樂行布施菩薩不樂行一切施云何菩薩行信施心若菩薩不行諸佛如來信心
어찌하여 보살이 파류사(波留師)에 머물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알려진 피안(彼岸)에 머문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서로 응하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만약 보살이 모든 법을 나누어 깨뜨려서 종류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아비지가루(阿毘持訶婁)를 행하는가? 만약 보살이 거듭거듭 스스로 위없는 모든 선정을 얻게 한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미워하고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가? 만약 보살이 자신과 남의 심지(心地)에서 모든 혹을 해칠 수 있다면 그러하다. 어찌하여 보살은 삿된 견해를 일으키는가? 만약 보살이 모든 곳에서 두루 행하는 삿된 성질을 이치에 맞게 관찰한다면 그러하다. 또한 어떤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법은 매우 깊다”라고 하셨다. 무엇이 매우 깊음인가? 이 논서 가운데서 스스로 모든 불법을 자세히 분별한다.
016_1074_a_20L何菩薩發行布施若菩薩於布施中不策自身云何菩薩恒遊戲布施菩薩無布施時云何菩薩能大行施若菩薩於施離娑羅想云何菩薩於施淸淨若菩薩鬱波提貪悋云何菩薩能住於施若菩薩不住究竟後際云何菩薩於施自在若菩薩於施不得自在云何菩薩於施無盡若菩薩不住無盡中如施經於戒乃至般若如理應知
016_1074_c_02L법신이 항상 머물기 때문에, 일체 불법이 항상 머문다는 것은 성품이 된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모든 것을 끊음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장애가 끊어져 다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법은 생하여 일어나는 것이 성품이 된다. 화신이 항상 생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얻을 수 있음이 성품이 된다. 중생의 8만 4천 번뇌를 모두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탐욕이 있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탐욕이 있는 중생을 사랑하고 포섭하여 스스로의 체를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성냄이 있는 것을 성품으로 삼으며, 모든 불법은 어리석음이 있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불법은 범부의 인식현상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모든 불법은 더러운 집착이 없음으로써 성품을 삼는다. 진여를 성취하여 모든 장애가 더럽힐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불법은 물들고 집착할 수 없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더라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의 법이 매우 깊다고 말한다. 바라밀을 수행하고, 중생을 성숙시키며, 불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이끌어 섭지하기 위하여 보살삼마제의 업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016_1074_b_08L復有經言云何菩薩行殺若菩薩有命衆生斷其相續云何菩薩奪非他所與若菩薩自奪非他所與衆生云何菩薩行邪婬若菩薩於欲塵起邪意等云何菩薩能說妄若菩薩是妄能說爲妄云何菩薩行兩舌若菩薩恒住最極空寂處

8. 의혜학승상(依慧學勝相)
016_1074_b_14L何菩薩能住波留師若菩薩住所知彼岸云何菩薩能說不相應語若菩薩能分破諸法隨類解釋云何菩薩行阿毘持訶婁若菩薩數數令自身得無上諸定云何菩薩起憎害心菩薩於自他心地能害諸惑云何菩薩起邪見若菩薩一切處遍行邪性如理觀察復有經言佛法甚深何者甚深此論中自廣分別

이와 같이 이미 의정학차별(依定學差別)을 설하였다. 의혜학차별(依慧學差別)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무분별지의 자성ㆍ의지ㆍ연기ㆍ경계ㆍ상모ㆍ입구난(立救難)ㆍ섭지ㆍ반류(伴類)ㆍ과보ㆍ등류(等流)ㆍ출리(出離)ㆍ구경(究竟)ㆍ행선(行善)ㆍ가행ㆍ무분별지 뒤에 얻는 지혜의 공덕ㆍ무차별의 가행ㆍ무분별지와 후득지의 비유ㆍ위덕ㆍ공용 없는 짓는 사(事)의 매우 깊은 의미로 말미암아 마땅히 의지하는 혜학의 차별을 알아야 하며, 의지하는 혜학의 차별로 말미암아 무분별지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016_1074_b_23L一切佛法常住爲性由法身常住故一切佛法皆斷爲性由一切障皆斷盡故一切佛法生起爲性由化身恒生起故一切佛法能得爲性能得共對治衆生八萬四千煩惱行故一切佛法有欲爲性欲衆生愛攝令成自體故一切佛法有瞋爲性一切佛法有癡爲性一切佛法凡夫法爲性一切佛法無染著爲性成就眞如一切障不能染一切佛法不可染著諸佛出現於非世法所能染故是故說佛法甚爲修行波羅蜜爲成熟衆生爲淸淨佛土爲引攝一切佛法故菩薩三摩提業差別應知
016_1075_a_02L무분별지의 자성은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둘째는 각관지(覺觀地)가 아니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셋째는 멸상수정(滅想受定)의 적정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넷째는 색(色)의 자성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진실한 실체적 대상[眞實義]에서의 다른 분별이라는 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상을 떠난 지혜 가운데서, 무분별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설하여진 무분별지의 자성 가운데서 게송으로 읊어 말한다.
016_1074_c_14L攝大乘論依慧學勝相第八

모든 보살의 자성인
다섯 가지의 상을 떠난
무분별지의 자성은
진실한 실체적 대상에서 분별이 없다.
016_1074_c_15L如此已說依定學差別云何應知依慧學差別由無分別智自性依止境界相貌立救難攝持伴類果報等流出離究竟行善加行無分別智後得智功德無差別加行無分別後得智譬威德無功用作事甚深義故應知依慧學差別由依慧學差別知無分別智差別

모든 보살의 의지(依止)는
마음도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 무분별지는
사유가 빠른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016_1074_c_23L無分別智自性知離五種相五相者一離非思惟故二離非覺觀地故三離滅想受定寂靜故四離色自性故五於眞實義離異分別故是五相所離智此中應知是無分別智於此中如所說無分別智性中故說偈言

모든 보살의 인연은
언어가 있는 문훈습(聞熏習)으로
무분별지이며,
이치에 맞게 바르게 사유함이다.
016_1075_a_06L諸菩薩自性
五種相所離
無分別智性
於眞無分別

모든 보살의 경계는
있다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법성이다.
이 무분별지는
두 가지의 자성이 없는 진여이다.
016_1075_a_08L諸菩薩依止
非心非非心
是無分別智
非思疾類故

모든 보살의 상모는
진여의 경계 가운데이다.
이 무분별지는
상이 없고 차별이 없다.
016_1075_a_09L諸菩薩因緣
有言聞熏習
是無分別智
如理正思惟

상응하는 자성인 실체적 대상이
분별의 대상이며, 다른 것은 없다.
문자들이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체적 대상과 상응함이 성립하므로
016_1075_a_10L諸菩薩境界
不可言法性
是無分別智
二無我眞如

언설을 떠나서는
지혜가 인식된 것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언어에 있어서 같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언설할 수 없다.
016_1075_a_12L諸菩薩相貌
於眞如境中
是無分別智
無相無差別

모든 보살이 섭지하는 것은
이 무분별지다.
이후로 얻는 행을 지켜서
궁극에까지 생장하게 된다.
016_1075_a_13L相應自性義
所分別非他
字字相續故
由相應義成

모든 보살의 반려[伴]가 되는 것들은
설하여 두 가지 도이며,
이 무분별지는
다섯 가지 바라밀의 품류이다.
016_1075_a_14L離言說智慧
於所知不起
於言不同故
一切不可言

모든 보살의 과보는
부처님의 두 가지 원만한 모임[圓聚]에 있어서
이 무분별지를
가행함으로 말미암아 이르러 얻는다.
016_1075_a_16L諸菩薩攝持
是無分別智
此後得行持
爲生長究竟

보살의 등류과(等流果)는
뒤에 생하는 가운데서
이 무분별지가
점차 수승하게 바뀌는 것으로 말미암는다.
016_1075_a_17L諸菩薩伴類
說是二種道
是無分別智
五度之品類

모든 보살의 벗어나 떠나는 것이
얻음과 성취함과 상응하기 때문에
이 무분별지가
10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5_a_18L諸菩薩果報
於佛二圓聚
是無分別智
由加行至得

모든 보살의 구경(究竟)은
청정한 세 가지 신(身)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이 무분별지가
지극히 수승하고 자재(自在)하기 때문이다.
016_1075_a_20L菩薩等流果
於後後生中
是無分別智
由展轉增勝

허공과 같이 더럽혀지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갖가지 무거운 악업에 물들지 않는다.
오직 믿고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016_1075_a_21L諸菩薩出離
得成相應故
是無分別智
應知於十地

허공과 같이 청정한
이 무분별지는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얻음과 성취함으로 말미암음이다.
016_1075_a_22L諸菩薩究竟
由得淨三身
是無分別智
至勝自在故
016_1075_b_02L
허공과 같이 물들지 않는
이 무분별지는
만약 세간에 출현한다고 하더라도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는다.
016_1075_a_24L不染如虛空
此無分別智
種種重惡業
由唯信樂故

벙어리가 진(塵: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벙어리가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벙어리가 아닌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016_1075_a_25L淸淨如虛空
此無分別智
解脫一切障
由得及成就

어리석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고자 구하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사람이 바르게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016_1075_b_02L如虛空無染
是無分別智
若出現於世
非世法所染

다섯 가지 식이 대상을 받아들이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다섯 가지 식이 대상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다섯이 아닌 것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세 가지 지혜를 이와 같이 비유한다.
016_1075_b_04L如瘂求受塵
如瘂正受塵
如非瘂受塵
三智譬如此

식별하지 못하면서 이해하기를 구하는 것과 같고,
읽어서 바르게 법(法:인식현상)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으며,
받아들인 법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차례로 세 가지 지혜를 비유한다.
016_1075_b_05L如愚求受塵
如愚正受塵
如非愚受塵
三智譬如此

사람이 눈을 꼭 감고 있는 것처럼
무분별도 역시 이러하다.
사람이 눈을 바르게 뜨고 있는 것처럼
후득지(後得智)도 역시 이러하다.
016_1075_b_06L如五求受塵
如五正受塵
如非五受塵
三智譬如此

무분별은 허공과 같아서
물듦ㆍ장애ㆍ변이ㆍ변제(邊際)가 없다.
허공 가운데 차별적 대상성[色]이 드러나듯이
후득지도 역시 이러하다.
016_1075_b_08L如未識求解
如讀正受法
如解受法義
次第譬三智

비유하건대 마니(摩尼)와 하늘의 북[天鼓]이
사유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일을 이루듯이
이와 같이 분별하지 아니하고
갖가지 불사(佛事)를 이룬다.
016_1075_b_09L如人正閉目
無分別亦爾
如人正開目
後得智亦爾

이것이 아니며 이것이 아님도 아니다.
지혜가 아니며 지혜가 아님도 아니다.
경계와 더불어 차별이 없으니,
이 지혜를 무분별이라고 일컫는다.
016_1075_b_10L如空無分別
無染㝵異邊
如空中色現
後得智亦爾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法:인식현상)의 자성이
무분별하다고 설하셨다.
분별의 대상[所分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분별도 없다.
016_1075_b_12L譬摩尼天鼓
無思成自事
如此不分別
種種佛事成

이 가운데의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행의 무분별지이고, 둘째는 무분별지이며, 셋째는 무분별후지이다. 가행이 무분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인연(因緣)과 인통(引通)과 수습(數習)의 힘이 차별을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다. 무분별지에도 역시 세 가지가 있으니, 지족(知足)과 무전도(無顚倒)와 무희론(無戱論)의 무분별의 차별 때문이다.
016_1075_b_13L非此非非此
非智非非智
與境無差別
智名無分別
무분별후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통달(通達), 억지(憶持), 성립(成立), 상잡(相雜), 여의(如意)의 드러내 보임의 차별 때문이다. 무분별지를 이루어 세우기 위하여 다시 다른 게송을 읊는다.
016_1075_b_14L佛說一切法
自性無分別
所分別無故
彼無無分別
016_1075_c_02L
아귀ㆍ축생ㆍ인간과
모든 하늘[天] 등이 응하는 것과 같이
경계는 하나이나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경계들을 성립하는 것을 허용한다.
016_1075_b_16L此中無分別有三種一加行無分別二無分別智三無分別後智加行無分別有三種謂因緣引通數習力生起差別故無分別智亦有三種謂知無顚倒無戲論無分別差別故分別後智有五種謂通達憶持成立相雜如意顯示差別故爲成立無分別智復說別偈

과거와 미래에
꿈과 두 그림자 가운데
지혜는 있지 않는 경계를 연한다.
이것은 변하지 아니하고 경계가 된다.
016_1075_b_24L餓鬼畜生人
諸天等如應
一境心異故
許彼境界成

만약 차별적 대상이 성립하여 경계가 된다면
무분별지는 없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불과(佛果)가
마땅히 얻어지는 이러한 처(處)는 없다.
016_1075_c_03L於過去未來
於夢二影中
智緣非有境
此無轉爲境

자재를 얻은 보살은
원락(願樂)의 힘으로 말미암아
여의지(如意地) 등을 이룬다.
선정을 얻은 사람도 역시 이러하다.
016_1075_c_04L若塵成爲境
無無分別智
若此無佛果
應得無是處

간택(簡擇)을 성취한 사람은
지혜가 있고 선정을 얻은 사람이다.
내면에서 모든 인식현상을 사유하여
실체적 대상[義]과 같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016_1075_c_05L得自在菩薩
由願樂力故
如意地等成
得定人亦爾

무분별을 닦을 때에
모든 실체적 대상은 드러나지 않으니
차별적 대상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러하기 때문에 식(識)도 없다.
016_1075_c_07L成就簡擇人
有智得定人
於內思諸法
如義顯現故

이 무분별지는 곧 반야바라밀이다. 이름이 다를 뿐 실체는 같다.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만약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머문다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있다.
016_1075_c_08L無分別修時
諸義不顯故
應知無有塵
由此故無識
무엇이 처에 머물지 않는 수행이며, 나머지 바라밀을 원만하게 수행하게 하는가? 다섯 가지 처를 떠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외도의 아집처(我執處)를 떠나는 것이며, 둘째는 진여를 보지 못한 보살의 분별처를 떠남이며, 셋째는 생사와 열반의 두 가지 극단의 처[二邊處]를 떠남이며, 넷째는 오직 혹장(惑障)만을 없애고 만족함을 아는 행의 처[知足行處]를 떠남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관하지 않고 무여열반처(無餘涅槃處)에 머무는 것을 떠남이다.
016_1075_c_09L此無分別智卽是般若波羅蜜名異義同如經言若菩薩住般若波羅蜜由非處修行能圓滿修習所餘波羅
성문승의 지혜와 보살의 지혜의 차별은 어떠한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분별의 차별로 말미암아 음(陰) 등의 모든 법문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며, 한 부분이 아닌 차별로 말미암아 두 가지 공(空)의 진여를 통달하여 모든 인식되는 상[所知相]에 들어가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의지하기 때문이며, 머묾이 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주처열반에 머물기 때문이며, 항상하다는 차별로 말미암아 무여열반에서 끊어지고 다하는 변제(邊際)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위없는 차별로 말미암아 실제로 이보다 수승한 다른 승(乘)은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5_c_13L何者非處修行能圓滿修習所餘波羅蜜謂離五種處一離外道我執二離未見眞實菩薩分別處三離生死涅槃二邊處四離唯滅惑障知足行處五離不觀利益衆生事住無餘涅槃處
016_1076_a_02L
지혜의 다섯 가지 수승한 차이로 말미암아
대비(大悲)에 의거하여 복을 닦는다.
세간과 출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
이것이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016_1075_c_18L聲聞智慧與菩薩智慧差別云何應知由無分別差別不分別陰等諸法門故由非一分差別通達二空眞如入一切所知相故依止一切衆生利益事故由無住差別住無住處涅槃故由恒差別於無餘涅槃不墮斷盡邊際故由無上差別實無異乘勝此故此中說偈

만약 보살이 세간에 실제로 있다면 역시 다시 알 수 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계학과 정학과 혜학의 공덕의 모임[聚]에 의거하여 상응한다면 열 가지 자재에 도달하여 모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수승한 능력을 얻는다.
016_1076_a_02L由智五勝異
依大悲修福
世出世富樂
說此不爲遠
어찌하여 세간 가운데서 중생이 무거운 고통과 어려움을 당함이 있는가? 보살은 그 중생들에게 업(業)이 있어서 수승하고 즐거운 과(果)를 장애하고 고통스러운 보(報)를 감수(感受)할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이와 같이 비록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풀더라도 곧 그들이 선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그들이 즐거움을 갖추지 않아도 생사를 싫어하고 미워함을 눈앞에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보살은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푼다고 하더라도 모든 악법을 생하여 키우는 인연이라는 것을 보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에게 즐거움을 모두 베푼다면 곧 나머지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핍박하고 해치는 인연이 된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살은 이와 같이 수승한 능력이 없지 않다. 세간에서도 역시 이러한 중생이 나타남이 있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6_a_04L若菩薩於世閒實有亦復可知若菩薩如此依戒定慧學功德聚相應十種自在於一切利他事得無等勝云何於世閒中見有衆生遭重苦由菩薩見彼衆生有業能感苦報障勝樂果故由菩薩見如此若施彼樂具則障其生善由菩薩見彼無樂具能現前厭惡生死由菩薩見若施彼樂具則是生長一切惡法因緣菩薩見若施彼樂具則是逼害餘無量衆生因緣是故菩薩不無如此能世閒亦有如此衆生顯現此中說偈

업(業)이 선을 장애함,
싫어함을 나타냄, 악법이 늘어남,
남을 해치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 중생은 보살의 보시를 감수(感受)할 수 없다.
016_1076_a_16L見業障㝵善
厭現及惡增
害他彼衆生
不感菩薩施

9. 학과적멸승상(學果寂滅勝相)
016_1076_a_18L攝大乘論學果寂滅勝相第九
016_1076_b_02L
이와 같이 혜학에 의한 차별을 이미 설명하였다. 적멸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모든 보살의 혹이 멸하는 것이 곧 무주처열반이다. 이것의 모습은 어떠한가? 혹을 버리고 떠나면서 생사를 버리고 떠나지 않으며, 둘이 의지하는 것의 전의(轉依)가 상이 된다. 이 가운데 생사는 의타성의 부정품인 한 부분을 체로 삼으며, 열반은 의타성의 정품인 한 부분을 체로 삼는다. 본의(本依)란 정품과 부정품의 두 부분을 갖춘 의타성이다. 전의란 대치를 일으킬 때에 이 의타성은 부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바꾸며 정품의 부분으로 말미암아 본성을 영원히 이룬다. 만약 이 전의를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의 전변이 있다.
016_1076_a_19L如此已說依慧學差別云何應知寂滅差別諸菩薩惑滅卽是無住處涅此相云何捨離惑與不捨離生死二所依止轉依爲相此中生死是依他性不淨品一分爲體涅槃是依他性淨品一分爲體本依者是具淨不淨品二分依他性轉依者對治起時此依他性由不淨品分永改本性淨品分永成本性
첫째는 힘을 더하고 혹의 공능을 줄이는 전변이니, 신락위(信樂位)를 좇아서 문훈습의 힘에 머물기 때문이다. 번뇌가 있으니 부끄러워하고 행하여 부끄러워함으로 말미암아 약하게 행하거나 혹은 영원히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통달의 전변이니, 이미 지(地)에 오른 모든 보살을 말한다. 진실과 허망이 드러나는 것이 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전변은 초지로부터 6지까지다. 셋째는 수습(修習)의 전변이니, 아직 장애를 떠나지 못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진실이 현현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전변은 7지로부터 10지까지이다. 넷째는 과가 원만한 전변이니, 이미 장애를 떠난 사람으로 말미암으며 모든 상이 현현하지 않고 청정한 진여가 드러나서 모든 상의 자재에 도달하여 얻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하열한 전변이니, 성문은 인식 주관이 자성이 없음[人無我]을 통달하였기 때문에 한결같이 생사를 배척하여 영원히 생사를 버리고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넓고 큰 전변이니, 보살은 인식현상이 자성이 없음[法無我]을 통달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 적정의 공덕을 관하기 때문이며, 버리고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016_1076_b_05L此轉依若略說有六種轉一益力損能轉由隨信樂位住聞熏習力故由煩惱有羞行慚弱行或永不行故二通達轉謂已登地諸菩薩由眞實虛妄顯現爲能故轉從初地至六地三修習轉由未離障人是一切相不顯現眞實顯現依此轉從七地至十地
만약 보살이 하열한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보살의 법을 지나쳐 떠나며, 낮은 승(乘)의 사람들과 똑같은 해탈을 얻는다. 이것이 과실이 된다.
016_1076_b_12L四果圓滿轉由已離障人一切相不顯現淸淨眞如顯現至得一切相自在依故五下劣轉由聲聞通達人無我故由一向背生死爲永捨離生死故六廣大轉由菩薩通達法無我故於中觀寂靜功德故爲捨不捨故
016_1076_c_02L모든 보살이 넓고 큰 전변의 위계에 있다면 무슨 공덕이 있는가? 생사의 법 가운데서 스스로 전의하여 의지가 되기 때문에 모든 자재를 얻으며, 모든 도 가운데서 모든 신(身)을 드러낼 수 있으며, 세간의 부유함과 즐거움에서 그리고 삼승에서 여러 가지 교화의 방편인 승능(勝能)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바른 가르침에 안립할 수 있다. 이것이 넓고 큰 전변의 공덕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6_b_18L若菩薩在下劣轉位有何過失不觀衆生利益事故遠離菩薩法與下乘人同得解脫爲過失

범부에 있어서 진실을 엎어버리고
그들에게 허망을 드러낸다.
보살에 있어서 한결같이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드러낸다.
016_1076_b_21L諸菩薩若在廣大轉位有何功德於生死法中由自轉依爲依故得諸自在於一切道中能現一切身於世閒富樂及於三乘由種種教化方便勝能能安立彼於正教是廣大轉功德此中說偈

허망과 진실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보살의 전의이며,
뜻과 같이 해탈하기 때문이다.
016_1076_c_03L於凡夫覆眞
於彼顯虛妄
於菩薩一向
捨虛顯眞實

생사와 열반에서
지혜를 일으킨다면 평등하다.
생사가 곧 열반이니,
이 둘에는 이것과 저것이 없기 때문이다.
016_1076_c_05L不顯現顯現
虛妄及眞實
是菩薩轉依
解脫如意故

따라서 생사에서
버리지 않고 버리지 않음도 없다.
열반에서도 이와 같으니,
얻음이 없고 얻지 않음도 없다.
016_1076_c_06L於生死涅槃
若智起等等
生死卽涅槃
二無此彼故

10. 지차별승상(智差別勝相)
016_1076_c_07L是故於生死
非捨非非捨
於涅槃亦爾
無得無不得

이와 같이 이미 적멸의 차별을 설하였다. 지혜의 차별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세 가지 신(身)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차별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자성의 신이며, 둘째는 수용(受用)하는 신이며, 셋째는 변화하는 신이다.
016_1076_c_09L攝大乘論智差別勝相第十
이 가운데 자성신이란 모든 여래의 법신이다.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자재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수용신이란 모든 부처님의 여러 가지 토(土)와 대인집륜(大人集輪)에 의지하여 드러내어지며, 이것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으며, 모든 불토의 청정한 대승의 인식현상이 즐거움을 받고 씀을 받는 인이기 때문이다.
변화신이란 법신으로써 의지를 삼는다. 도솔타천(兜率陀天)에 머무는 것으로부터 물러나 생을 받으며, 배움을 받고 탐욕의 대상을 받으며, 출가하여 외도(外道)에게 가서 닦게 된 고행과 위없는 보리를 얻어 법륜을 굴리고 큰 반열반(般涅槃) 등의 사(事)에 의해 드러내어지기 때문이다.
016_1076_c_10L如此已說寂滅差別云何應知智差由佛三身應知智差別一自性身二受用身三變化身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 갖는 법신은 어떤 모습인가? 만약 그 모습을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울타나(鬱陀那)의 게송을 읊는다.
016_1076_c_13L此中自性身者是諸如來法身於一切法自在依止受用身者諸佛種種土及大人集輪依止所顯現此以法身爲依止佛土淸淨大乘法受樂受用因故化身者以法身爲依止從住兜率陁及退受生受學受欲塵出家往外道所修苦行得無上菩提轉法輪般涅槃等事所顯現故

상(相)ㆍ증득(證得)ㆍ자재(自在)와
의지(依止)ㆍ섭지(攝持)와
차별(差別)ㆍ덕(德)ㆍ심심(甚深)과
억념[念]ㆍ업(業) 등이 부처님의 몸을 밝힌다.
016_1076_c_21L諸佛如來所有法身其相云何若略說其相應知有五種此中說鬱陁那偈
016_1077_a_02L
다섯 가지 상이란 첫째는 법신은 전의로써 상을 삼는다. 모든 장애와 부정품분의 의타성이 이미 멸하여 모든 장애를 해탈한다. 모든 법에 있어서 자재를 얻어 능(能)이 되며, 청정성인 부분의 의타성인 전의가 상이 되기 때문이다.
016_1076_c_23L相證得自在
依止及攝持
差別德甚深
念業明佛身
둘째는 희고 맑은 법을 상으로 삼는다. 6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법신에게 열 가지 자재를 얻기에 이르러 승능(勝能)을 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무엇이 열인가? 첫째는 명(命)의 자재이며, 둘째는 심(心)의 자재이며, 셋째는 재물의 자재이니, 이 셋은 보시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넷째는 업의 자재이며, 다섯째는 생의 자재이니, 이 둘은 지계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다. 여섯째는 욕락(欲樂)의 자재이니, 인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일곱째는 원(願)의 자재이니, 정진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통혜(通慧)의 자재이니, 이 5신통(神通)에 의하여 섭지되며, 선정바라밀이 원만함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다. 아홉째는 지혜의 자재이고, 열째는 법의 자재이니, 이 둘은 반야바라밀이 원만함으로 이룰 수 있다.
016_1077_a_02L五相者一法身轉依爲相一切障及不淨品分依他性滅已解脫一切障於一切法得自在爲能淸淨性分依他性轉依爲相故
셋째는 둘이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식현상이 있는 바가 없으며 공(空)한 상이 없지 않아서 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의 두 가지가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혹과 업의 모임에 의해 생하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자재를 얻음으로 해서 유위의 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같다, 다르다는 두 가지가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의지는 다르지 않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의지로 말미암아 이것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7_a_06L二白淨法爲相六度圓滿於法身至得十種自在勝能爲相故何者爲十一命自在二心自在三財物自在此三由施度圓滿得成四業自在五生自在此二由戒度圓滿得成六欲樂自在由忍度圓滿得成七願自在由精進度圓滿得八通慧自在此五通所攝由定度圓滿得成九智自在十法自在此二由般若波羅蜜圓滿得成

아집이 없기 때문에
그 가운데 의지의 다름이 없다.
앞에서 많은 의지를 증명하였듯이
거짓 이름으로 설하니 하나가 아니다.
016_1077_a_15L三無二爲由無有無二相故一切法無所有空相不無爲相故復次有爲無爲無二爲相非惑業集所生故由得自在能顯有爲相故復次一異無二爲相諸佛如來依止不異故由無量依止能證此故此中說偈

성정(性情)과 가행(加行)이 다르지만 허망됨이 없고,
원만하며, 시작이 없기 때문에
같지 않으며, 다르지 않기 때문에
많지도 않으며, 진여에 의지한다.
016_1077_a_21L我執不有故
於中無依別
如前多依證
假名說不一
016_1077_b_02L
넷째는 항상 머무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진여의 청정한 상이기 때문이며, 예전의 원(願)을 끌어당기고 꿰뚫어서 가장 궁극이 되기 때문이며, 마땅히 바른 일을 행하여 끝마치지 않기 때문이다.
016_1077_a_23L性行異非虛
圓滿無初故
不一無異故
不多依眞如
다섯째는 사의(思議)할 수 없음을 상으로 삼는다. 이 진여의 청정은 스스로 증득한 지혜에 의하여 아는 것이기 때문이며, 비유(譬喩)할 수 없기 때문이며, 각관(覺觀)이 행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016_1077_a_24L四常住爲相眞如淸淨相故昔願引通最爲極故應作正事未究竟故不可思議爲相是眞如淸淨自證智所知故無譬喩故非覺觀行處故
또한 다시 이 법신을 깨우쳐[證] 얻는[得] 것은 어떠한가? 처음부터 얻어진 것으로부터의 촉인가? 서로 섞인 대승법을 연하여 경계가 되는 무분별지와 무분별 뒤에 얻어지는 지혜는 5상수(相修)를 성숙(成熟)하게 닦고 익혀서 모든 지(地)에서 자량(資糧)을 잘 모으며, 미세하여 깨뜨리기 어려운 장애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에, 금강(金剛)을 삼마제에 비유한다. 다시 이 삼마제는 뒤에 모든 장애를 멸하여 떠나기 때문에 이때에 의지가 전변함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얻음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7_b_05L復次此法身證得云何是觸從初所由緣相雜大乘法爲境無分別智無分別後所得智五相修成熟修習於一切地善集資糧能破微細難破障故金剛譬三摩提卽此三摩提後滅離一切障故是時由依止轉成證得應知
이 법신은 몇 가지의 자재(自在)가 있어서 그 가운데서 자재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다섯 가지 자재가 있으며, 그 가운데서 자재를 얻는다. 첫째는 정토(淨土), 자신을 드러내 보임, 상호(相好)나 변제(邊際)가 없는 음성, 볼 수 없는 정수리의 자재이니, 색음(色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상실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큰 안락함에 머무는 자재이니, 수음(修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모든 명자(名字)와 문구(文句)의 모임[聚]들 가운데 모두 갖추어서 바르게 설하는 자재이니, 상(相)의 차별을 집착하는 상음(想陰)의 의지가 전변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변화시킴[變化]과 고쳐서 바꿈[改易]과 큰 모임을 이끌어 섭지함과 하얗고 깨끗한 품류를 끌어당김의 자재이니, 행음(行陰)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현료지(顯了智)ㆍ평등지(平等智)ㆍ회관지(廻觀智)ㆍ작사지(作事智)의 자재이니, 식음(識陰)이 의지를 전하기 때문이다.
016_1077_b_12L此法身有幾自在於中得自若略說有五自在於中得自在淨土顯示自身相好無邊音不可見頂自在由轉色陰依故二無失無量大安樂住自在由轉受陰依故三具足一切名字文句聚等中正說自在由轉想陰執相差別依故四變化改易引攝大集牽白淨品自在由轉行陰依故五顯了平等迴觀作事智自由轉識陰依故
이 법신은 몇 가지 법을 의지로 삼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오직 세 가지이니,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여러 가지 머무는 곳[住處]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7_b_21L此法身應知爲幾法依止若略說唯諸佛如來種種住處依止故此中說偈
016_1077_c_02L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다섯 가지 기쁨을 받는다.
모든 인(因)은 스스로의 계(界)를 얻기 때문에
이승은 깨닫지[證] 못함으로 해서 기쁨이 없다.
기쁨을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불계(佛界)를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016_1077_b_24L諸佛如來受五喜
皆因證得自界故
二乘無喜由不證
求喜要須證佛界

공능이 무량함과 행하여야 하는 일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법의 훌륭한 맛과 바라던 덕(德)을 이루는 것으로 말미암아,
가장 수승한 기쁨을 얻어 잃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가 다함이 없음을 항상 본다.
016_1077_c_03L由能無量作事立
由法羙味欲得成
得喜最勝無有失
諸佛恒見四無盡

여러 가지 수용신(受用身)의 의지가 모든 보살의 선근을 성숙시키게 되기 때문이며, 여러 가지 화신의 의지는 성문과 독각의 선근을 많이 성숙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016_1077_c_05L種種受用身依止爲成熟諸菩薩善根故種種化身依止爲多成熟聲聞獨覺善根故
이 법신을 섭지하는 불법이 몇 가지가 있다고 알아야 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청정한 부류의 법이니, 아리야식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법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과보의 부류인 법[果報類法]이니, 색이 있는 근[有色根]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과보인 수승한 지혜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머무는 부류의 법[住類法]이니, 욕계의 대상[欲塵]을 받아들여 행하는[行]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헤아릴 수 없는 지혜가 머물기 때문이다. 넷째는 자재하는 부류의 법[自在類法]이니, 여러 가지 업 등을 섭지하여 자재하는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시방세계에서 걸림이 없는 6신통의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언설하는 부류의 법[言說類法]이니, 모든 언설을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의 마음을 만족하게 채울 수 있는 바른 설법의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뽑아내어 구제하는 부류의 법[拔濟類法]이니, 모든 재앙과 횡액과 과실을 뽑아내어 구제하려는 뜻의 의지를 전변하기 때문이며, 이 모든 중생의 재앙과 횡액과 과실을 뽑아내어 구제하는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016_1077_c_08L有幾種佛法應知攝此法身若略說有六種一淸淨類法轉阿黎耶識依故由證得法身故果報類法由轉有色根依故由證得果報勝智故三住類法由轉受行欲塵依故由無量智慧住故四自在類由轉種種業等攝自在依故由於一切十方世界無閡六通智自在故五言說類法由轉一切見聞覺知言說依故由能飽滿一切衆生心正說智自在故六拔濟類法由轉一切災撗過失拔濟意依故由一切衆生災撗過失拔濟智自在故
모든 부처님과 여래의 법신이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부류의 법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고,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하다. 의지와 뜻을 씀[意用] 그리고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정각(正覺) 등의 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7_c_20L如此六種類法所攝諸佛如來法身應知諸佛法身爲可說有差別爲無差別由依止意用業無異故應知無差別由無量正覺等事故應知有差別
016_1078_a_02L법신과 같이 수용신도 역시 이러하다. 의지와 업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의지 주체의 차별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지 않으니, 헤아릴 수 없는 의지가 전의하기 때문이다. 변화신은 수용신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7_c_24L如法身受用身亦爾由依止業不異故應知無差別不由依止差別故無差別無量依止轉依故變化身應知如受用身
이 법신은 몇 가지 공덕과 더불어 상응한다고 알아야 하는가? 가장 청정한 4무량(無量)과 더불어 상응하며 8해탈(解脫)ㆍ8제입(制入)ㆍ10일체입(一切入)ㆍ무쟁(無諍)삼마제ㆍ원지(願智)ㆍ4무해해(四無閡解)ㆍ6통혜(通慧)ㆍ32대인상(大人相)ㆍ80소상(小相)ㆍ네 가지 모든 상이 청정함[四種一切相淸淨]ㆍ10력(力)ㆍ4무외(無畏)ㆍ4무호(無護)ㆍ3념처(念處)ㆍ습기를 뽑아내어 없앰[拔除習氣]ㆍ잊고 상실함이 없는 법[無忘失法]ㆍ대비(大悲)ㆍ18불공법(不共法)ㆍ모든 상이 가장 수승한 지혜[一切相最勝智] 등의 모든 인식현상[法]과 더불어 상응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8_a_04L此法身應知與幾種功德相應與最淸淨四無量相應與八解脫八制入十一切入無諍三摩提願智四無閡六通慧三十二大人相八十小相四種一切相淸淨十力四無畏四無三念處拔除習氣無忘失法大悲十八不共法一切相最勝智等諸法相應此中說偈

중생에 대하여 크게 연민하며[大悲],
모든 결박(結縛)의 의(意)를 떠나지만
중생의 의(意)를 떠나지 않으며,
이익되고 즐거운 의를 얻으므로 엎드려 예경한다.
016_1078_a_12L於衆生大悲
離諸結縛意
不離衆生意
利樂意頂禮

모든 장애를 해탈하고
세간의 지혜를 항복시킨 사람으로
인식되는 것[應知]에 지혜가 두루 가득하고
마음을 해탈하였으므로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14L解脫一切障
降伏世智者
應知智遍滿
心解脫頂禮

모든 중생에게서 남음이 없이
모든 혹을 멸할 수 있으며,
혹을 해치며, 더러움에 물듦이 있는 것(중생)을
항상 연민하므로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15L諸衆生無餘
能滅一切惑
害惑有染污
常憐愍頂禮

공용(功用)이 없고 집착이 없으며,
장애도 없어서 항상 적정(寂淨)하다.
모든 중생의 어려운 문제[難問]를
풀어줄 수 있으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16L無功用無著
無㝵恒寂靜
一切衆生難
能釋我頂禮

대상[依:所依]과 인식 주관[能依]에 대해
응하여 말과 지혜를 설한다.
설함에 있어서 장애가 없으므로
설하는 사람에게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18L於依及能依
應說言及智
於能說無㝵
說者我頂禮

모든 중생은 존귀한 사람을 보고서
믿고 존경하여 수승한 인물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이 봄으로 해서 맑은 마음을 생할 수 있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19L故隨彼類音
行往還出離
證知諸衆生
正教我頂禮

따라서 그들의 품류와 음성을 따라
감[往]과 돌이킴[還] 그리고 벗어나 떠남[出離]을 행하며,
네 가지 모든 상의 청정을 깨달아 알아
모든 중생을 바르게 가르치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20L諸衆生見尊
信敬調勝士
由他見能生
淨心我頂禮

수명(壽命)ㆍ머묾[住]ㆍ버림[捨]을 섭지하여
변화하고 자성을 고쳐서[改性],
정(定)과 지혜의 자재를 얻은
세존께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22L攝受住及捨
變化及改性
得定智自在
世尊我頂禮

방편과 귀의(歸依)와 깨끗함 가운데서
중생을 장애하며
대승에서 벗어나 떠난
마귀를 물리치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23L方便歸依淨
於中障衆生
於大乘出離
摧魔我頂禮
016_1078_b_02L
지혜[智]ㆍ멸(滅)ㆍ벗어나 떠남[出離]과
장사(障事)를 드러내어 설할 수 있으니,
나와 남에게 이익되고
삿됨을 항복시키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a_24L智滅及出離
障事能顯說
於自他兩利
降邪我頂禮

제지함 없이도 과실이 없고
더러움과 흐림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며,
모든 법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고,
희론(戱論)이 없으니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03L無制無過失
無染濁無住
於諸法無動
無戲論頂禮

대중 가운데서 남을 굴복시키고자 설하실 때
두 가지 혹을 멀리 떠나고,
보호하지 않아도 잊고 상실하지 않으며,
대중을 포섭하므로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04L於衆伏他說
二惑所遠離
無護無忘失
攝衆我頂禮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존귀하신 분은 때를 기다려서 지나가지 않으며,
짓는 것이 항상 허망하지 않고,
미혹이 없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05L於利益他事
尊不過待時
所作恒無虛
無迷我頂禮

모든 행하고 머무는 것에 있어서
원만한 지혜는 사(事)가 아닌 것이 없으며,
모든 세상을 두루 아는
실체(實體)이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07L於一切行住
無非圓智事
遍知一切世
實體我頂禮

밤과 낮의 여섯 시간 가운데
모든 중생계를 관하여
크게 연민함과 더불어 상응하여
이익되고 즐거운 의(意)에 나는 예경합니다.
016_1078_b_08L日夜六時觀
一切界衆生
與大悲相應
利樂意我禮

행(行)으로 말미암거나 얻음[得]으로 말미암거나
지혜로 말미암거나 사[事]로 말미암거나
모든 것에서 이승에 대하여
비길 수 없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09L由行及由得
由智及由事
於一切二乘
無等我頂禮

3신(身)으로 말미암아 존귀하신 분은
3덕(德)의 상을 갖추고 위없는 깨달음을 얻기에 이른다.
모든 법(法:敎法)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심을
능히 제거할 수 있으니 나는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11L由三身尊至
具相無上覺
一切法他疑
能除我頂禮

계박(繫縛)이 없으니 과실이 없고,
거침과 흐림이 없으니 머묾이 없으며,
모든 법에서 흔들림이 없고,
희론이 없으니 엎드려 절한다.
016_1078_b_12L無繫無過失
無麤濁無住
於諸法無動
無戲論頂禮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단지 이것들과 같은 공덕하고만 상응하는 것이 아니고, 다시 그 밖의 다른 공덕과 더불어 상응한다. 자성과 인(因)과 과(果)와 업과 상응하고 사[事]와 행(行)의 공덕과 상응한다. 따라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위없는 공덕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8_b_13L諸佛法身不但恒與如此等功德相復與餘功德相應謂自性因果業相應行事功德相應是故應知諸佛法身有無上功德此中說偈

존귀한 분은 진여를 성취하고
모든 지(地)를 닦아 벗어나 떠나고,
다른 사람과 비길 수 없는 위에 이르러서
모든 중생을 해탈시킨다.
016_1078_b_17L尊成就眞如
修諸地出離
至他無等位
解脫諸衆生

다함이 없음 등의 공덕과
서로 응하여 세상에 나타나니,
3륜(輪)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나
인간과 천상에서는 보기 힘들다.
016_1078_b_19L無盡等功德
相應現於世
於三輪易現
難見人天等

또한 다시 여래 법신의 깊고 깊음이 가장 깊고 깊다. 이 깊고 깊음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8_b_20L復次如來法身甚深最甚深此甚深云何可見此中說偈

부처님께서는 생함이 없음으로써 생함을 삼고,
머묾이 없음으로써 머묾을 삼으며,
공용 없이 사(事)를 지으며,
네 번째의 식(食)으로 식을 삼는다.
016_1078_b_22L佛無生爲生
以無住爲住
作事無功用
第四食爲食

다름이 없고 역시 헤아릴 수 없으며,
헤아려 셀 수 없지만 하나의 사(事)이다.
가장 견고하면서도 견고하지 않은 업이어서
위가 없으며, 3신과 서로 응한다.
016_1078_b_24L不異亦無量
無數量一事
最堅不堅業
無上應三身
016_1078_c_02L
하나의 법도 깨달을 수 있음이 없으며,
모든 것이 깨달음이 아닌 것이 없어서
한 생각 한 생각이 헤아릴 수 없지만
유(有)가 있지 않음이 드러내어진다.
016_1078_c_02L無一法能覺
一切無不覺
一一念無量
有不有所顯

탐욕이 없으니 탐욕을 떠남[離欲] 또한 없으며,
탐욕에 의해 벗어나 떠남[出離]을 얻는다.
이미 탐욕과 무욕(無欲)을 알았기 때문에
탐욕의 법여(法如)에 들어간다.
016_1078_c_03L無欲無離欲
依欲得出離
已知欲無欲
故入欲法如

모든 부처님께서는 5음(陰)을 넘어서서
5음 가운데 머무신다.
음(陰)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며,
음을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드신다.
016_1078_c_05L諸佛過五陰
於五陰中住
與陰非一異
不捨陰涅槃

모든 부처님의 일은 서로 섞여서
마치 큰 바다의 물과 같다.
나는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이미 지었고, 현재 짓고 있으며,
마땅히 지어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없다.
016_1078_c_06L諸佛事相雜
猶如大海水
我已正應作
他事無是思

과실로 말미암아 세존께서 현현하지 않는 것이
마치 깨어진 그릇의 달과 같고,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하니,
법광(法光)으로 말미암아 해와 같다.
016_1078_c_07L由失尊不現
如月於破器
遍滿諸世閒
由法光如日

마치 불과 같이 혹은 정각을 얻는 것을 드러내고,
혹은 열반을 얻는 것을 드러내지만
이 두 가지가 실제로 있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시기 때문이다.
016_1078_c_09L或現得正覺
或涅槃如火
此二實不有
諸佛常住故

여래께서는 나쁜 사(事)에 있어서나
인도(人道)와 악도(惡道)에 있어서나
범행(梵行)이 아닌 인식현상에 있어서
제일(第一)의 머묾과 자성[我]에 머무신다.
016_1078_c_10L如來於惡事
人道及惡道
於非梵行法
住第一住我

부처님께서 모든 처(處)에 행하시거나,
역시 하나의 처에도 행하지 않으시거나,
모든 생함에서 드러나는 것은
6근(根)의 경계가 아니다.
016_1078_c_11L佛一切處行
亦不行一處
於一切生現
非六根境界

모든 혹을 이미 멸하여 굴복시키니
마치 독이 주술(呪術)로써 방해되는 것과 같다.
혹으로 말미암아 혹을 다함에 이르니,
부처님께서는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신다.
016_1078_c_13L諸惑已滅伏
如毒呪所害
留惑至惑盡
佛證一切智

이치[諦]와 혹이 깨달음의 부분[覺分]을 이루고,
생사가 열반이 되어
큰 방편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사의(思議)하기 어렵다.
016_1078_c_14L諸惑成覺分
生死爲涅槃
得成大方便
故佛難思議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열두 가지 깊고 깊음이 생부주업주심심(生不住業住甚深)ㆍ안립수업(安立數業)심심ㆍ정각(正覺)심심ㆍ이욕(離欲)심심ㆍ음멸(陰滅)심심ㆍ성숙(成熟)심심ㆍ현현(顯現)심심ㆍ보리열반현현(菩提涅槃顯現)심심ㆍ주(住)심심ㆍ현현자체(顯現自體)심심ㆍ멸혹(滅惑)심심ㆍ불가사의(不可思議)심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016_1078_c_15L由此義故十二種甚深應知謂生不住業住甚深安立數業甚深正覺甚離欲甚深陰滅甚深成熟甚深現甚深菩提般涅槃顯現甚深住甚顯自體甚深滅惑甚深不可思議甚深
016_1079_a_02L모든 보살은 법신을 연하여 부처님을 억념(憶念)한다. 이 억념은 몇 가지 상을 연하는가? 간략하게 설한다면 모든 보살은 법신에 의하여 부처님에게 일곱 가지 상이 있음을 억념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든 인식현상에 있어서 비길 데 없는 자재에 도달하므로 이와 같이 부처님을 억념하는 것을 닦아 익힌다. 이 억념이 법신과 더불어 하나를 이루게 하기 때문에 닦아 익힌다고 말한다. 모든 세계에서 장애가 없고 변제가 없는 6신통의 지혜를 이르러 얻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8_c_21L諸菩薩緣法身憶念佛此念緣幾相若略說諸菩薩依法身修習念佛有七種相何等爲七一諸佛於一切法至無等自在如此修習念佛於一切世界至得無㝵無邊六通智故此中說偈

장애를 당하거나 원인을 갖추지 못한
모든 중생계가
두 가지 정(定) 가운데 머물면
모든 부처님을 자재하지 못한다.
016_1079_a_04L被障因不具
一切衆生界
住二種定中
諸佛無自在

둘째는 여래의 신(身)이 항상 머무니, 진여로 말미암아 빈틈 없이 모든 더러움을 해탈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과실이 없으니, 모든 혹장과 지장을 영원히 서로 떠났기 때문이다. 넷째는 모든 여래의 일은 공용이 없이 이루어지므로 공용을 말미암지 않고 항상 바른 일을 일으켜서 영원히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여래의 큰 부유함과 즐거움의 위계[富樂位]이니, 모든 불토(佛土)의 가장 미묘하고 청정함이 부유함과 즐거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여래께서는 가장 더러움에 집착함[染著]이 없으시니, 티끌이 허공을 더럽힐 수 없는 것과 같이 세간에 나와 나타내지만 모든 세간의 법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여래께서는 세간에서 큰 일의 씀을 가지시니, 위없는 보리와 큰 열반에 드는 것을 나타내 이룸[現成]으로 말미암아 성숙하지 못한 중생을 성숙시키고, 이미 성숙한 중생은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9_a_06L二如來身常住由眞如無閒解脫一切垢故三如來最無失一切惑障及智障永相離故四一切如來事無功用成不由功用恒起正事永不捨故五如來大富樂位一切佛土最微妙淸淨爲富樂故六如來最無染著出現世閒非一切世法所染如塵不能染空故七如來於世閒有大事用由現成無上菩提及大般涅槃未成熟衆生令成熟已成熟衆生令解脫故此中說偈

여래의 마음을 좇아 따르니,
원만한 덕이 항상하고, 상실하지 않는다.
공용이 없이
중생에게 큰 법의 즐거움을 베풀 수 있다.
016_1079_a_17L隨屬如來心
圓德常無失
無功用能施
衆生大法樂

두루 행하여 장애가 없고,
많은 사람을 평등하고 이익되게 한다.
모든 것은 여러 부처님이라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억념을 연한다.
016_1079_a_19L遍行無有㝵
平等利多人
一切一切佛
智人緣此念
016_1079_b_02L
또한 다시 모든 부처님과 여래 정토의 청정, 그 상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백천 가지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살장(菩薩藏)을 연기 가운데서 설한다. 불세존께서는 두루 미치는 광명의 7보로 장엄한 곳에 계시며, 큰 광명을 발할 수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널리 비추니,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하게 장식한 계(界)와 처(處)가 각각 성립한다. 큰 성곽의 변제(邊際)는 길이를 재고 용적을 달 수 없으니, 삼계의 행하는 곳을 벗어나 넘어선다. 출출세간[出出世]의 바른 인식현상의 공능에 의해 생하여지므로 가장 청정하고 자재하는 유식으로써 상을 삼는다. 여래에 의해 진정(鎭定)되며, 보살이 안락하게 머무는 곳이다. 헤아릴 수 없는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睺羅伽)ㆍ사람과 사람이 아닌 이[人非人] 등에 의해 행하여지며, 큰 교법의 맛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지니게 된다.
016_1079_a_20L復次諸佛如來淨土淸淨其相云何應知如言百千經菩薩藏緣起中說佛世尊在周遍光明七寶莊嚴處放大光明普照無量世界無量妙飾界處各各成立大城邊際不可度量出過三界行處出出世善法功能所最淸淨自在唯識爲相如來所鎭菩薩安樂住處無量天龍夜叉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人非人等所行大法味喜樂所持
모든 중생의 모든 이익되는 일을 작용[用]으로 삼는다.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으로부터 떠나게 되며, 모든 마귀가 행하는 곳이 아니며, 모든 장엄보다 수승한 여래의 장엄에 의지하는 곳이다. 큰 사념과 지혜 그리고 행을 벗어나 떠나서, 큰 사마타비바사나를 올라탄다. 크게 비었고 상이 없으며 원이 없는 해탈문이 들어가는 곳이다.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모임으로 장엄하여진 큰 연꽃의 왕으로 의지를 삼는다. 여래께서는 대보중각(大寶重閣)에서 머무신다.
016_1079_b_07L一切衆生一切利益事爲用一切煩惱災撗所非一切魔所行處勝一切莊嚴如來莊嚴所依處大念慧行出離大奢摩他毘鉢舍那乘大空無相無願解脫門入處無量功德聚所莊嚴大蓮花王爲依止大寶重閣如來於此中
이와 같은 정토의 청정은 색상(色相)의 원만하고 깨끗함ㆍ형모(刑貌)ㆍ양(量)ㆍ처(處)ㆍ인(因)ㆍ과(果)ㆍ주체[主]ㆍ도움[助]ㆍ권속(眷屬)ㆍ지님[持]ㆍ업(業)ㆍ이익ㆍ두려움이 없음ㆍ머무는 곳ㆍ길ㆍ탈 것[乘]ㆍ문(門)ㆍ의지(依止)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드러낸다. 앞의 문구로 말미암아 이것들과 같이 원만하고 깨끗함이 모두 현현한다. 또한 다시 이와 같이 정토의 청정함을 받아들여 쓰므로 한결같이 깨끗하고, 한결같이 즐겁고, 한결같이 상실함이 없고, 한결같이 자재하다.
016_1079_b_14L如此淨土淸淨顯色相圓淨形貌量處因果主助眷屬持業利益無怖畏住處路乘門依止圓淨由前文句如此等圓淨皆得顯現復次受用如此淨土淸淨一向淨一向樂一向無一向自在
016_1079_c_02L또한 다시 모든 부처님의 법계에는 다섯 가지 업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첫째는 재앙과 횡액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오직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소경, 벙어리, 미친 것 등의 질병과 재앙 그리고 횡액을 멸하고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악도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악처(惡處)로부터 끌어당겨 뽑아내어 선처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방편이 아닌 행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모든 외도들의 방편이 아닌 가행을 항복시켜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신견(身見)을 행하는 것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삼계를 넘어 건너가게 되며, 성스러운 도의 방편으로 인도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승(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다른 승을 치우쳐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보살과 근(根)과 성(性)을 아직 정하지 못한 성문(聲聞), 그들이 대승을 수행하도록 안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모두 이 업과 함께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9_b_19L復次諸佛法界恒時應見有五業救濟災橫爲業由唯現盲聾狂等疾惱災橫能滅除故二救濟惡道爲業從惡處引拔安立於善處故三救濟行非方便爲業諸外道等加行非方便降伏安立於佛正教故四救濟行身見爲業爲過度三界能顯導聖道方便故五救濟乘爲業諸菩薩欲偏行別乘未定根性聲聞能安立彼爲修行大乘故於如此五業應知諸佛如來共同此業此中說偈

인(因)ㆍ의지[依]ㆍ일[事]ㆍ의(義)ㆍ모든 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세간에서 허용되는 업이 다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차이는 부처님에게는 없다.
따라서 세상의 장수[世將]는 동일한 업이다.
016_1079_c_07L因依事意及諸行
異故世閒許業異
此五種異於佛無
是故世將同一業

만약 이러하다면 성문과 독각에 의해 함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많은 덕(德)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서로 응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써 그들에게 모두 일승으로 나아가서 불승(佛乘)과 더불어 같다고 설하시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9_c_09L若爾聲聞獨覺非所共得如此衆德相應諸佛法身諸佛以何意故說彼俱趣一乘與佛乘同此中說偈

성(性)을 정하지 못한 성문과
모든 나머지 보살을
대승으로 이끌어 포섭하여
자성을 정하므로 일승이라 설한다.
016_1079_c_12L未定性聲聞
及諸餘菩薩
於大乘引攝
定性說一乘

인식현상[法]과 무아(無我) 그리고 해탈
등 때문에 근성(根性)이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 의미의 열반을 얻으므로
궁극[究竟]에 일승을 설한다.
016_1079_c_14L法無我解脫
等故性不同
得二意涅槃
究竟說一乘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하나의 법신을 함께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에 있어서 세대[世]의 수가 같지 않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9_c_15L三世諸佛若共一法身云何世數於佛不同此中說偈

하나의 계 가운데 둘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원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차례로 성불한다는 것은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한때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가 성립한다.
016_1079_c_17L於一界中無二故
同時因成不可量
次第成佛非理故
一時多佛此義成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한결같이 열반도 아니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님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79_c_19L云何應知諸佛法身非一向涅槃非一向涅槃此中說偈

모든 장애를 떠나고,
마땅히 지어서 마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한결같이 열반이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니다.
016_1079_c_21L由離一切障
應作未竟故
佛一向涅槃
不一向涅槃
016_1080_a_02L
어찌하여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첫째는 색신(色身)과 행신(行身)으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대집처(大集處)의 차별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의 욕락(欲樂)을 따라서 보므로 현현하는 자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는 다르고 다른 견(見)의 자성이 변동하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보살과 성문과 하늘 등의 갖가지 큰 집회에서 서로 섞여 화합할 때에 서로 섞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아리야식과 생기식에서 전의를 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룬다는 도리는 없다.
016_1079_c_23L云何受用身不成自性身由六種因一由色身及行身顯現故二由無量大集處差別顯現故三隨彼欲樂見顯現自性不同故四別異別異見自性變動顯現故五菩薩聲聞天等種種大集相雜和合時相雜顯現故六阿黎耶識及生起識見轉依非道理故是故受用身無道理成自性身
어찌하여 변화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여덟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첫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도솔타천도(兜率陀天道)와 인도(人道) 가운데 무퇴삼마제(無退三摩提)를 얻어서 생을 받으므로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는 모든 보살이 오래 전부터 항상 기억하고 예전에 머물던 방서(方書), 계산, 수량, 인상(印相), 공예, 논서를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행하고,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받아들여 쓰는 것을 보살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셋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이미 삿된 교법과 바른 교법을 식별하였으니, 외도들에 의해 받들어 모셔지는 그 사람에게 가서 스승을 삼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넷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삼승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를 이미 통달하여 도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허망한 고행(苦行)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016_1080_a_08L云何變化身不是自性身由八種因一諸菩薩從久遠來得無退三摩於兜率陁天道及人道中受生不應道理二諸菩薩從久遠來恒憶宿方書筭計數量印相工巧等論欲塵及受用欲塵中菩薩無知不應道理三諸菩薩從久遠來已識別邪正法教往外道所事彼爲師不應道四諸菩薩從久遠來已通達三乘聖道正理爲求道故修虛苦行不應道理
016_1080_b_02L다섯째는 모든 보살이 백 구지(拘胝)의 염부제(閻浮提)를 버리고 한 처(處)에서 위없는 보리와 법륜을 굴리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여섯째는 만약 위없는 보리의 방편을 드러냄을 떠나서 단지 화신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마침내 불사(佛事)를 행한다면, 마땅히 도솔타천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어야 한다.
일곱째는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염부제 가운데 평등하게 출현하시지 않는가? 만약 다른 곳에 출현하시지 않는다면 이러한 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아함과 도리는 없다.
여덟째는 만약 화신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두 여래께서 하나의 세계에 함께 나타나신다는 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네 가지 천(天) 아래에 하나의 세계를 포섭하므로 마치 전륜왕이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주인 혹은 다른 주인과 함께 생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이러하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80_a_19L五諸菩薩捨百拘胝閻浮提一處得無上菩提及轉法輪不應道六若離顯無上菩提方便但以化身於他方作佛事若爾則應於兜率陁天上成正覺七若不爾云何佛不於一切閻浮提中平等出現若不於他方出現無阿含及道理可證此義八二如來於一世界俱現此不相違若許化身成多由四天下攝一世界如轉輪王於一世界或一主或別主俱生不應道理諸佛亦爾此中說偈

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평등하게 많은 태(胎)에 들어가니,
상(相)을 갖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세간에 내보이신다.
016_1080_b_06L佛微細化身
多入胎平等
爲顯具相覺
於世閒示現

여섯 가지 원인이 있어서 모든 불세존께서는 화신 가운데 영원히 머무실 수 없다. 첫째는 바른 사(事)의 궁극이기 때문에, 이미 해탈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둘째는 만약 이미 해탈을 얻어서 열반에 들기를 구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려는 의지를 버리게 하고, 항상 불신(佛身)에 머물기를 얻고자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그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갖는 경망하고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진여인 법과 바르게 설한 교법을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016_1080_b_08L有六種因諸佛世尊於化身中不得永住一正事究竟故由已解脫成熟衆生故二若已得解脫求般涅槃令彼捨般涅槃意欲求得常住佛身三爲除彼於佛所有輕慢心故令彼通達甚深眞如法及正說法故
넷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불신(佛身)에 대하여 독실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거듭 보아서 만족해하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바르게 설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하여 지극한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그들로 하여금 속히 성숙한 위계를 얻어 이르게 하여, 스스로를 향하여 짐을 버리지 않고 지극히 정진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80_b_14L四爲令衆生於佛身起渴仰心數見無厭足故五爲令彼向自身起極精進由知正說者不可得故六爲令彼速得至成熟位向自身不捨荷負極精進故此中說偈

궁극적인 바른 사(事)로 말미암아
열반을 즐기는 것을 제거하게 되어
부처님을 가벼이 교만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게 하고
돈독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게 하며
016_1080_b_19L由正事究竟
爲除樂涅槃
令捨輕慢佛
發起渴仰心

신(身)을 지향하여 정진하게 하고
빠르게 성숙하게 하기 위해
모든 부처님께서는 화신에 있어서
한결같이 머물지 않기를 바라신다.
016_1080_b_21L令向身精進
及爲速成熟
諸佛於化身
許非一向住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발원하고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를 찾아 구하지만, 한결같이 열반에 든다는 이러한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본래의 원과 수행과 서로 어긋나는 과는 없기 때문이다.
016_1080_b_22L爲度一切衆生由發願及修行尋求無上菩提一向般涅槃此事不應道本願及修行相違無果故
016_1080_c_02L또한 수용신과 변화신은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는 법으로써 신을 삼는가? 응신과 화신은 항상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응신으로 말미암아 버리고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화신으로 말미암아 거듭 일어나 드러나기 때문이다. 항상 즐거움을 받고 항상 음식을 베풀듯이 두 가지 신은 항상 머문다는 것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법신이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차별이 없고 세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법신을 얻기 위한 공용을 짓지 아니하여서는 안 된다. 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016_1080_c_02L復次受用身及變化身無常故云何諸佛以常住法爲身由應身及化身恒依止法身故由應身無捨離故化身數起現故如恒受樂如恒施食二身常住應如此知若法身無始時無差別無數量爲得法身不應不作功用此中說偈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평등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이 원인을 중생이 힘써 닦지 않는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으며,
바른 원인을 끊어 제거하니, 도리에 맞지 않다.
016_1080_c_09L諸佛證得等無量
是因衆生若捨勤
證得恒時不成因
斷除正因不應理

『아비달마대승장경』 가운데 섭대승(攝大乘)이라고 한다. 이것은 궁극[究竟]을 바르게 설한다.
016_1080_c_11L『阿毘達磨大乘藏經』中名攝大乘正說究竟
攝大乘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