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卷第十五

ABC_IT_K0590_T_015
016_1251_b_01L섭대승론석 제15권
016_1251_b_01L攝大乘論釋卷第十五


세친 해석
진제 한역
변상섭 번역
016_1251_b_02L世親菩薩釋
陳天竺三藏眞諦譯


10. 석지차별승상 ③
016_1251_b_04L釋智差別勝相第十之三

【論】또한 모든 부처님과 여래 정토의 청정, 그 상은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釋】앞의 일곱 가지 억념 가운데서 여래의 큰 부유함과 즐거움이 곧 정토라는 것을 밝혔다. 앞에서 여덟 가지 사람은 얻을 수 없고, 두 가지 사람은 얻을 수 있다는 것만을 설하고, 얻을 수 없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는 곳을 밝히지는 못했다.
이제 이러한 곳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기 때문에 정토의 상을 묻는다.
016_1251_b_05L論曰復次諸佛如來淨土淸淨其相云何應知釋曰前於七念中明如來大富樂卽是淨土前但說八人不可得二人可得未明不可得及可得所在之處今欲顯示此處故問淨土
【論】백 가지, 천 가지 경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살장(菩薩藏)을 연기 가운데서 설한다.
【釋】모든 경전을 총체적으로 거론하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처럼이라고 일컫는다. 보살장 가운데 따로 『정토경』이 있고, 경전에는 백 구, 천 구의 게송이 있기 때문에 백 가지, 천 가지 경전이라고 한다. 또한 『화엄경』에 백 구, 천 구의 게송이 있기 때문에 백 가지, 천 가지 경전이라고 말한다. 이 경전에서 연기(緣起) 가운데서 정토의 상을 자세히 설한다. 이와 같은 정토의 문구(文句)는 무슨 공덕을 드러내는가?
016_1251_b_11L論曰如言百千經菩薩藏緣起中說釋曰摠擧諸經故稱如言薩藏中有別淨土經經有百千偈名百千經又華嚴經有百千偈故名百千經於此經緣起中廣說淨土相如此淨土文句顯何功德
【論】불세존께서는 두루 미치는 광명의 7보로 장엄한 곳에 계시며,
【釋】첫째는 금이고, 둘째는 은이며, 셋째는 유리이고, 넷째는 마사라(摩娑羅)1)이며, 다섯째는 아수마갈파(阿輸摩竭婆)이며, 여섯은 인다라니라(因陀羅尼羅)2)이며, 일곱째는 노희지가목다(盧嬉胝柯目多)이다. 이 하나하나의 보물의 광명이 모든 곳에 두루 미친다. 이곳은 7보로써 장엄되어 있고, 부처님께서는 그 가운데 머문다.
016_1251_b_16L論曰世尊在周遍光明七寶莊嚴處釋曰一金二銀三琉璃四摩娑羅阿輸摩竭婆六因陁羅尼羅七盧嬉胝柯目多此一一寶光明皆周遍一切處此處以七寶爲莊嚴佛住其中
016_1251_c_01L【論】큰 광명을 발할 수 있어서 헤아릴 수 없는 세계를 널리 비추니,
【釋】이것은 일곱 가지 보물의 광명에 의해 비추어지는 곳을 밝혀 두루 미친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이 두 구절은 색상(色相)이 원만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밝힌다.
016_1251_b_21L論曰能放大光明普照無量世界釋曰此明七寶光明所照之處釋周遍義此兩句明色相圓淨
【論】헤아릴 수 없는 신묘하게 장식한 계(界)와 처(處)가 각각 성립한다.
【釋】이 장엄함은 드물게 존재하며 비길 데가 없기 때문에, 신묘하게 장식한다고 말한다. 많은 신묘한 장식이 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노니는 지(地)가 계(界)가 되고, 거주하는 곳이 처가 된다. 하나하나의 계와 하나하나의 처가 장엄함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성립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형모(形貌)가 원만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밝힌다.
016_1251_c_02L論曰量妙飾界處各各成立釋曰此莊嚴希有無等故言妙飾有衆多妙飾故言無量所遊行地爲界所居地爲一一界一一處莊嚴具足故言成此句明形貌圓淨
【論】큰 성곽의 변제(邊際)는 길이를 재고 용적을 달 수 없으니,
【釋】지름을 재는 것이 재는 것[度]이 되며, 둘레[周圍]가 용적을 다는 것[量]이 된다. 하나하나의 부처님의 정토의 변제는 범부가 유순(由旬)3) 등의 숫자로써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도량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016_1251_c_07L論曰大域邊際不可度量釋曰徑度爲度周圍爲量一一佛淨土邊際非凡夫以由旬等數所能度量此句明量圓淨
【論】삼계의 행하는 곳을 벗어나 넘어선다.
【釋】삼계의 집제(集諦)가 행이 되고, 삼계의 고제(苦諦)가 처(處)가 된다. 정토는 계의 고제와 집제 두 가지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삼계의 행하는 곳을 벗어나 넘어선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처의 원만함과 깨끗함을 밝힌다. 만약 고제와 집제가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슨 원인으로써 생할 수 있으며 무슨 인식현상으로써 체를 삼는가?
016_1251_c_10L出過三界行處釋曰三界集諦爲行三界苦諦爲處淨土非二界苦集所攝故言出過三界行處此句明處圓淨若非苦集諦攝以何因得生以何法爲體
【論】출출세간[出出世]의 바른 인식현상[善法]의 공능에 의해 생하여지므로
【釋】2승의 올바름[善]을 출세간이라고 하고, 8지 이상으로부터 불지(佛地)까지를 출출세간이라고 한다. 출세간의 인식현상은 세간의 인식현상을 대하여 다스리고, 출출세간의 인식현상은 출세간의 인식현상을 대하여 다스린다. 공능은 네 가지 연[四緣]으로써 상을 삼는다. 출출세간의 선법의 공능으로부터 이 정토를 생하여 일으키기 때문에 집제로써 인을 삼지 않는다. 이 구절은 인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무엇이 출출세간의 바른 인식현상인가? 무분별지와 무분별후지에 의해 생하여지는 선근을 출출세간의 바른 인식현상이라고 한다.
016_1251_c_15L論曰出出世善法功能所生釋曰二乘善名出世從八地已上乃至佛地名出出世出世法爲世法對治出出世法爲出世法對功能以四緣爲相從出出世善法功能生起此淨土故不以集諦爲因此句明因圓淨何者爲出出世善法無分別智無分別後智所生善根出出世善法
016_1252_a_01L【論】가장 청정하고 자재하는 유식(唯識)으로써 상을 삼는다.
【釋】보살과 여래의 유식의 지혜는 상이 없고 공용이 없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말한다. 모든 장애를 떠나서 물러나고 상실함[退失]이 없기 때문에 자재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유식의 지혜가 정토의 체가 되기 때문에 고제로써 체를 삼지 않는다. 이 구절은 과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016_1251_c_23L論曰最淸淨自在唯識爲相釋曰菩薩及如來唯識智無相無功用故言淸淨離一切障無退失故言自在此唯識智爲淨土體不以苦諦爲體此句明果圓淨
【論】여래에 의해 진정(鎭定)되며,
【釋】이와 같은 모습의 정토는 여래께서 항상 그 가운데 기거하고 모이는 것을 우두머리로 삼기 때문에 진정한다고 말한다. 이 구절은 주인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016_1252_a_04L論曰如來所鎭釋曰如此相淨土如來恒居其中最爲上首故言鎭句明主圓淨
【論】보살이 안락하게 머무는 곳이다.
【釋】스스로 바른 가르침을 받아 행하고, 남이 바른 가르침을 받아 행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안락하다고 한다. 보살은 정토에서 부처님을 돕고 도를 돕는다. 이 두 가지 일을 갖추기 때문에 안락하게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이 구절은 도움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016_1252_a_07L論曰菩薩安樂住處釋曰自受行正教教他受行正教名安樂菩薩於淨土助佛助道具此二事故名安樂住處此句明助圓淨
【論】헤아릴 수 없는 천(天)ㆍ용(龍)ㆍ야차(夜叉)ㆍ아수라(阿修羅)ㆍ가루라(迦樓羅)4)ㆍ긴나라(緊那羅)ㆍ마후라가(摩羅伽)ㆍ사람이 아닌 사람 등에 의해 행하여진다.
【釋】정토 가운데 이러한 중생이 실제로 없지만 공허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잡된 종류를 변화하여 만들었다. 이 구절은 권속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만약 이러한 중생이 있다면 보살 등은 모두 무엇으로 먹게 되는가?
016_1252_a_10L論曰無量天龍夜叉阿修羅迦樓羅緊那羅摩睺羅伽人非人等所行釋曰淨土中實無此衆生欲令不空佛化作如此雜類此句明眷屬圓若有如此衆生諸菩薩等皆何所
【論】큰 법(法:교법)의 맛과 기쁨 그리고 즐거움을 지니게 된다.
【釋】대승의 12부 경전을 큰 법이라 하고, 진여와 해탈 등이 맛이다. 이 법의 맛을 연하여 모든 보살의 기쁨과 즐거움을 생하며, 모든 보살의 다섯 부분의 법신을 키우고 기른다. 이 구절은 지님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이 인식현상의 맛을 보고서 어떠한 업(業)들을 짓는가?
016_1252_a_16L論曰大法味喜樂所持大乘十二部經名大法眞如解脫等爲味緣此法味生諸菩薩憙樂養諸菩薩五分法身此句明持圓淨飡此法味作何等業
016_1252_b_01L【論】모든 중생의 모든 이익되는 일을 작용[用]으로 삼는다.
【釋】범부와 3승을 모든 중생이라고 한다.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을 따라 바른 법을 설한다. 설하는 대로 수행하게 하여 네 가지 악도를 떠나고 생사를 떠나며 2승의 스스로를 사랑하는 행을 떠나는 것을 모든 이익이라고 한다. 이 구절은 업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만약 보살이 중생에게 이와 같은 업을 행한다면 행하는 주체와 행하는 처(處)는 무슨 이익을 얻는가?
016_1252_a_20L論曰一切衆生一切利益事爲用釋曰凡夫三乘名一切衆生隨其所能爲說正教令如說修行離四惡道離生死離二乘自愛行名一切利益此句明業圓若菩薩於衆生行如此業能行及行處得何利益
【論】모든 번뇌와 재앙 그리고 횡액으로부터 떠나게 되며,
【釋】삼계의 집제를 모든 번뇌라고 하며, 삼계의 고제를 모든 재앙과 횡액이라고 한다. 이 둘이 모두 생하는 주체와 행하는 곳을 떠난다. 이 구절은 이익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만약 이와 같은 법을 떠나면 두려움이 남지 않는다.
016_1252_b_03L論曰一切煩惱災橫所離釋曰三界集諦名一切煩三界苦諦名一切災橫此二悉離能行行處此句明利益圓淨若離如此法有餘怖畏不
【論】모든 마귀가 행하는 곳이 아니며,
【釋】정토 가운데는 음마(陰魔)ㆍ번뇌마(煩惱魔)ㆍ사마(死魔)ㆍ천마(天魔)가 없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을 떠난다. 이 구절은 두려움이 없는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만약 정토 가운데 모든 두려움이 없다면 6근(根)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쓰여지는 인식현상은 모두 갖추어 있는가, 없는가?
016_1252_b_07L論曰非一切魔所行處釋曰淨土中無陰魔煩惱魔死魔天魔故離一切怖畏此句明無怖畏圓淨若淨土中無一切怖畏六根所受用法悉具有不
【論】모든 장엄함보다 수승한 여래의 장엄함에 의지하는 곳이다.
【釋】오직 모든 받아들여지고 쓰여지는 것만이 있어서 가장 수승하고 비길 데가 없는 것이 아니고, 여래의 복덕과 지혜의 행이 원만한 인(因)에 감응되는 것이다. 여래의 수승한 과보는 이 처(處)를 의지하기 때문에 가장 수승하다. 이 구절은 머무는 곳[住處]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정토 가운데에서는 무슨 인식현상으로써 나오고 들어가는 길을 삼는가?
016_1252_b_11L論曰一切莊嚴如來莊嚴所依處釋曰非唯是有一切所受用具最勝無等是如來福德智慧行圓滿因所感來勝報依止此處是故最勝此句明住處圓淨淨土中以何法爲出入路
【論】큰 사념과 지혜 그리고 행을 벗어나 떠나서,
【釋】대승의 바른 법을 큰 법이라고 한다. 큰 법 가운데의 문혜(聞慧)를 사념이라고 하고, 사혜(思慧)를 지혜라고 하며, 수혜(修慧)를 행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정토에서 가고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에 벗어나 떠난다고 한다. 이 구절은 길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만약 이러한 길이 있다면 무슨 인식현상에 탈 수 있는가?
016_1252_b_16L論曰大念慧行出離釋曰大乘正法名大法於大法中聞慧名念思慧名慧修慧名行此三於淨土是往還故名出離此句明路圓淨若有此路爲乘何法
016_1252_c_01L【論】큰 사마타비발사나(奢摩他毘鉢舍那)를 올라탈 수 있다.
【釋】대승 가운데 5백 가지의 선정을 사마타라고 한다. 여리여량지(如理如量智)를 비발사나라고 한다. 이 두 가지가 탈 것[乘]이다. 이 구절은 탈 것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탈 것이 있다면 무슨 문으로 들어가는가?
016_1252_b_21L論曰大奢摩他毘鉢舍那乘釋曰大乘中五百定名奢摩他如理如量智名毘鉢舍那以此二爲乘此句明乘圓淨若有此乘從何門入
【論】크게 비었고 상이 없으며, 원이 없는 해탈문이 들어가는 곳이다.
【釋】대승 가운데는 세 가지 해탈문은 무성(無性)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체이며, 공함이다. 공하기 때문에 상이 없으며, 상이 없기 때문에 원이 없다. 만약 이 문에 도달한다면 정토에 들어갈 수 있다. 이 구절은 문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세간의 세계의 지륜은 수륜에 의지하고, 수륜은 풍륜에 의지하는데, 정토는 무슨 법에 의지하는가?
016_1252_c_02L論曰大空無相無願解脫門入處釋曰於大乘中三解脫門一體由無性故空空故無相無相故無願若至此門得入淨土此句明門圓淨世閒世界地輪依水輪水輪依風輪淨土爲依何法
【論】헤아릴 수 없는 공덕의 모임으로 장엄하여진 큰 연꽃의 왕을 의지한다.
【釋】큰 연꽃의 왕으로 대승에 의해 드러나는 법계인 진여를 비유한다. 연꽃은 비록 흙탕물 속에 있지만 흙탕물에 물들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법계의 진여가 세간에 있더라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연꽃의 성질이 스스로 개발(開發)한다는 것은 법계인 진여가 스스로 개발하므로 만약 중생이 증득한다면 모두 깨달음[覺悟]을 얻는다. 또한 연꽃이 벌떼들에 의해 채취되는 것은 법계인 진여가 많은 성스러운 사람에 의해 쓰이는 것을 비유한다. 또한 연꽃은 네 가지 덕을 가지고 있으니, 첫째는 향기이고, 둘째는 깨끗함이고, 셋째는 유연함이며, 넷째는 사랑할 수 있음이다.
016_1252_c_07L論曰無量功德聚所莊嚴大蓮花王爲依止釋曰以大蓮花王譬大乘所顯法界眞如蓮花雖在泥水之中不爲泥水所污譬法界眞如雖在世閒不爲世閒法所污又蓮花性自開發譬法界眞如性自開發衆生若證皆得覺悟又蓮花爲群蜂所採譬法界眞如爲衆聖所用又蓮花有四德一香二淨三柔軟四可愛
016_1253_a_01L법계인 진여가 통틀어 네 가지 덕, 즉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을 가지고 있음을 비유한다. 많은 꽃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왕이라고 이름한다. 법계인 진여가 모든 인식현상 가운데 가장 수승하다는 것을 비유한다. 이 꽃은 헤아릴 수 없는 색상(色相)5)의 공덕의 모임에 의해 장엄되어 모든 법을 짓는 의지가 될 수 있다. 법계인 진여는 헤아릴 수 없는 출세간의 공덕의 모임에 의해 장엄되며, 이 법계인 진여는 정토를 만드는 의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여래의 원력에 감응된 보배로운 연꽃은 모든 꽃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수승하기 때문에 왕이라고 한다. 헤아릴 수 없는 색상 등의 공덕의 모임으로 장엄되어져서 정토를 만드는 의지가 될 수 있다. 이 구절은 의지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밝힌다. 정토 가운데 무슨 법이 여래께서 머무는 곳인가?
016_1252_c_16L譬法界眞如摠有四謂常樂我淨於衆花中最大最勝故名爲王譬法界眞如於一切法中最勝此花爲無量色相功德聚所莊能爲一切法作依止譬法界眞如爲無量出世功德聚所莊嚴此法界眞如能爲淨土作依止復次如來願力所感寶蓮花於諸花中最大最勝故名王無量色相等功德聚所莊嚴能爲淨土作依止此句明依止圓淨淨土中何法是如來住處
【論】대보중각(大寶重閣), 여래께서는 이 곳에서 머문다.
【釋】이것은 별도로 여래께서 머무는 곳을 밝힌다. 마치 세간이 기세계를 받아들여 쓰지만 헤아릴 수 없는 과실이 있는 것과 같이 정토를 받아들여 쓴다면 무슨 공덕이 있는가?
016_1253_a_03L論曰寶重閣如來於此中住釋曰此別明如來住處如世閒受用器世界無量過失若受用淨土有何功德
【論】이와 같은 정토의 청정은 색상(色相)의 원만하고 깨끗함ㆍ형모(形貌)ㆍ양(量)ㆍ처(處)ㆍ인(因)ㆍ과(果)ㆍ주체[主]ㆍ도움[助]ㆍ권속(眷屬)ㆍ지님[持]ㆍ업(業)ㆍ이익ㆍ두려움이 없음ㆍ머무는 곳ㆍ길ㆍ탈 것[乘]ㆍ문(門)ㆍ의지(依止)의 원만하고 깨끗함을 드러낸다. 앞의 문구로 말미암아 이것들과 같이 원만하고 깨끗함이 모두 현현한다. 또한 다시 이와 같이 정토의 청정함을 받아들여 쓰므로 한결같이 깨끗하고, 한결같이 즐겁고, 한결같이 상실함이 없고, 한결같이 자재하다.
016_1253_a_06L論曰如此淨土淸淨顯色相圓淨貌量處因果主助眷屬持業利益無怖畏住處路乘門依止圓淨由前文如此等圓淨皆得顯現復次受用如此淨土淸淨一向淨一向樂一向無失一向自在
【釋】항상 뒤섞임과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깨끗하다고 말한다. 단지 신묘한 즐거움을 받아들여서 고통이 없고 버림이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즐겁다고 말한다. 오직 참다운 선이어서 악과 무기가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상실함이 없다고 말한다. 모든 일이 바깥의 연을 관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자재하다고 말한다. 또한 큰 깨끗함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깨끗함을 설하고, 큰 즐거움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즐겁다고 설한다. 큰 항상함[大常]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상실함이 없다고 설하며, 큰 자성[大我]에 의거하여 한결같이 자재하다고 설한다. 만약 보살이 여래의 부유함과 즐거움을 억념한다면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16_1253_a_12L釋曰恒無雜穢故言一向淨但受妙樂無苦無捨故言一向樂唯是實善無惡及無記故言一向無失一切事悉不觀外緣皆由自心成故名一向自在復次依大淨說一向淨依大樂說一向樂依大常說一向無失依大我說一向自在薩若憶念如來富樂應如此知
016_1253_b_01L【論】또한 다시 부처님의 법계에는 다섯 가지 업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釋】이 가운데서 법신의 업을 밝혀야 하므로 모든 부처님의 법계라는 것을 말한다. 법신에 법계의 다섯 가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바꾸어서 법계라고 이름한다. 다섯 가지 의미란 첫째는 성(性)이라는 의미이니, 두 가지 자성이 없음[二無我]6)으로써 자성을 삼으며, 모든 중생은 이 자성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因)의 의미이니, 모든 성인의 4념처(念處) 등의 인식현상은 이것을 연하여 생하고 자라기 때문이다.
셋째는 장(藏)의 의미이니, 모든 허망한 법에 의해 감추어지고 덮여져서 범부와 2승에 의해 연하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016_1253_a_19L論曰復次諸佛法界恒時應見有五業釋曰此中應明法身業而言諸佛法界者欲顯法身含法界五義故轉名法界五義者一性義以無二我爲性一切衆生不過此性故二因義一切聖人四念處等法緣此生長故三藏一切虛妄法所隱覆非凡夫二乘所能緣故
넷째는 진실의 의미이니, 세간의 법을 넘어선다. 세간의 법은 혹은 자연히 무너지고 혹은 대하여 다스림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므로 이 두 가지 무너짐을 떠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깊고 깊다는 의미이니, 만약 이것과 더불어 상응한다면 자성은 깨끗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것이 서로 응하지 않는다면 자성이 새알을 이루기 때문이다. 법신이 법계의 다섯 가지 의미를 포함함으로 해서 모든 보살은 법신이 다섯 가지 업과 서로 응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016_1253_b_04L四眞實義過世閒法世閒法或自然壞或由對治壞離此二壞五甚深義若與此相應自性成淨善故若外不相應自性成㲉故由法身含法界五義諸菩薩應見法身恒與五業相應無時暫離
【論】첫째는 재앙과 횡액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오직 나타남으로 말미암아7) 눈멀고 귀먹고 미친 것 등의 질병과 재앙 그리고 횡액을 멸하고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대비의 힘을 밝힌다. 만약 정하여진 업보의 중생이라면 여래께서는 그 가운데 곧 자재함이 없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만약 정하여지지 않은 업보의 중생이라면 혹은 현재에 과실이 있거나 혹은 대하여 다스려야 하는 업이 있거나, 이와 같은 중생이 만약 부처님의 처소에 이른다면 여래께서 뜻을 짓든 짓지 않든지 간에 모두 이러한 재앙과 횡액들을 떠나게 할 수 있다.
016_1253_b_09L論曰一救濟災橫爲業由唯現盲聾狂等疾惱災橫能滅除故釋曰此明大悲力若定業報衆生如來於中則無自在此如前釋若不定業報或現在過失或有對治業如此衆生若至佛所來作意及不作意皆能令離此等災撗
【論】둘째는 악도를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악처(惡處)로부터 끌어당겨 뽑아내어 선처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정행(正行)의 힘을 밝힌다. 여래께서 뜻을 짓든지 짓지 않든지 간에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처소에 다다른다면 악을 그만두고 선을 행하지 않음이 없다.
016_1253_b_15L論曰二救濟惡道爲業從惡處引拔安立於善處故釋曰此明正行力如來作意及不作意一切衆生若至佛所無不息惡行善
016_1253_c_01L【論】셋째는 방편이 아닌 행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모든 외도들의 방편이 아닌 가행(加行)을 항복시켜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안립하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위덕(威德)의 힘을 밝힌다. 모든 외도의 많은 행이 방편이 아니다. 상견(常見)의 외도라면 고행을 많이 행한다. 미래의 생이 있다고 계교(計巧)하기 때문이다. 단견(斷見)의 외도는 즐기는 행을 많이 행한다. 미래의 생이 없다고 계교하기 때문이다. 혹은 자재천이 도라고 사유하고, 혹은 자아가 도라고 사유하고, 혹은 자성이 도라고 사유하고, 혹은 자아와 자성의 중간(中間)이 도라고 사유하기도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방편의 행이 아니다. 여래께서는 통혜도(通慧導)8)로써 그 교만함을 항복시키며, 기심도(記心導)9)로써 그 불신(不信)을 항복시키고, 정교도(正敎導)10)로써 그 사견을 항복시킨다. 이미 항복시킨 뒤에 그 근성을 따라 3승의 바른 가르침 가운데 안립한다.
016_1253_b_19L論曰三救濟行非方便爲業諸外道等加行非方便降伏安立於佛正教故釋曰明威德力諸外道多行非方便若常見外道多行苦行以計有未來生故斷見外道多行樂行以計無未來生或思惟自在天爲道或思惟我爲或思惟自性爲道或思惟我自性中閒爲道如此等悉是非方便行來以通慧導降伏其高慢以記心導降伏其不信以正教導降伏其邪見旣降伏已隨其根性安立於三乘正教中
【論】넷째는 신견(身見)을 행하는 것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삼계를 넘어 건너가게 되며, 성스러운 도의 방편으로 인도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방편의 힘을 밝힌다. 모든 삼계의 중생은 신견을 떠나지 않는다. 신견이란 많은 물건[物]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체가 무상하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고, 5음 등이 화합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물건이라고 한다. 있지 않았던 것이 있으며 이미 있었던 것이 없어지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한다. 외도는 많음에서 하나를 계교하고, 무상함에서 항상함을 집착하여 하나이고 항상하다고 하며 자아[我]를 삼는다. 이러한 견해를 깨뜨리게 되니, 역시 하나가 아니고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신견이라고 한다. 만약 신견을 떠난다면 곧 삼계의 집(集)11)을 뛰어넘을 수 있고 삼계의 고통을 건널 수 있다.
016_1253_c_08L論曰四救濟行身見爲業過度三界能顯導聖道方便故釋曰此明方便力一切三界衆生無離身見身見者若爲多物所成體是無常故名身爲五陰等和合所成故名多物未有有已有滅故名無常道於多計一於無常執常謂是一是常爲我爲破此見亦非一非常故名身見若離身見則得過三界集度三界苦
바른 가르침을 설하므로 드러낸다고 하고, 그들에게 세 가지 지혜를 생하므로 인도한다고 한다. 고법(苦法)을 인(忍)함이 이미 지나가고 이에 아라한과에 이르니 성스러운 도라고 한다. 출가하는 것으로부터 계를 받고, 세간의 제일인 인식현상[世第一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스러운 도의 방편이 된다. 도를 드러내어 방편을 닦아 성스러운 도를 얻게 한다. 또한 여래께서는 중생으로 하여금 신견을 떠나서 삼계를 벗어나게 한다. 이것은 아직 진실한 성스러운 도가 아니며, 단지 성스러운 도의 방편일 따름이다. 먼저 인도함을 드러내어 이러한 성스러운 도의 방편을 닦게 하므로, 진실한 성스러운 도의 연유(緣由)를 얻게 된다.
016_1253_c_17L說正教名顯生彼三慧爲導法忍已去乃至阿羅漢果名聖道出家受戒乃至世第一法爲聖道方便顯道令修方便得聖道又如來令衆生離身見出三界此未是眞實聖但是聖道方便先顯導令修此方便聖道爲得眞實聖道緣由
016_1254_a_01L【論】다섯째는 승(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니, 다른 승을 치우쳐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보살과 근(根)과 성(性)을 아직 정하지 못한 성문(聲聞), 그들이 대승을 수행하도록 안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釋】이것은 진실한 가르침의 힘을 밝힌다. 승(乘)에는 인식 주관과 인식현상이 있다. 인식 주관에는 대승인과 소승인이 있고, 인식현상에는 방편승(方便乘)의 인식현상과 정승(正乘)의 인식현상이 있다. 방편승을 바꾸어서 정승을 닦고 다스리기 때문에 승을 구제한다고 한다. 『마하반야경』에 승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첫째는 성(性)의 의미이고, 둘째는 행(行)의 의미이며, 셋째는 과(果)의 의미이다. 2공(空)에 의해 드러나는 3무성의 진여를 성이라고 한다. 이 성으로 말미암아 10바라밀과 10지(地)를 닦는 것을 행이라고 한다. 이 행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구경에 상ㆍ낙ㆍ아ㆍ정의 네 가지 덕을 증득하는 것을 과라고 한다.
016_1253_c_23L論曰五救濟乘爲業諸菩薩欲偏行別乘及未定根性聲聞能安立彼爲修行大乘故釋曰此明眞實教力有人法人有大乘人有小乘人法有方便乘法有正乘法轉方便乘修治正乘故名救濟乘摩訶般若經說有三義一性義二行義三果義二空所顯三無性眞如名性由此性修十度十地名行由修此行究竟證得常樂我淨四德名果
또한 『중변론(中邊論)』에는 승(乘)에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첫째는 벗어나 떠남이 체가 되는 것이니, 진여라고 한다. 둘째는 복덕과 지혜가 인(因)이 되는 것이니, 이끌어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중생이 섭지하게 되는 것이니, 근과 성이 섭지하여 과(果)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위없는 보리가 과가 되는 것이니, 구경(究竟)을 행하여 이 과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세 가지 혹이 장애가 되니, 이 세 가지 혹을 없애어 앞의 네 가지 정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은 10신위(信位) 가운데 있어서는 대행(大行)을 닦지만 아직 견고하지 않고, 생사를 많이 싫어하고 두려워하며,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오히려 열등하고 엷어서, 기꺼이 대승의 본원(本願)을 버리고 소승의 도를 닦고자 하기 때문에 다른 승을 치우쳐 행하려 한다고 말한다. 소승은 성문을 말한다.
016_1254_a_10L又中邊論說乘有五義一出離爲體謂眞如二福慧爲因能引出故三衆生爲攝如根性攝令至果故四無上菩提爲果行究竟至此果故五三惑爲障除此三惑四義成故諸菩薩在十信位中修大行未堅固多厭怖生死慈悲衆生心猶劣薄喜欲捨大乘本願修小乘道故言欲偏行別乘小乘說聲聞
016_1254_b_01L만약 신(信) 등의 다섯 가지 근(根)을 얻었다면 아직 성스러움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을 정하였다고 일컫지 않는다. 만약 미지욕지(未知欲知) 등의 세 가지 근12)을 얻는다면 성스러움을 얻었기 때문에 근을 정하였다고 일컫는다. 만약 정위(頂位)13)에 이른다면 4악도(惡道)를 면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性)을 정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인위(忍位)14)에 이른다면 4악도를 면하기 때문에 성을 정하였다고 한다. 소승에 의거하여 풀이한다면 근과 성을 정할 수 없어서 곧 소승을 바꾸어 대승이 될 수 있다. 만약 근과 성을 정할 수 있다면 바뀔 수 없다. 따라서 성문은 소승을 고쳐서 대승이 된다는 의미가 없다. 어찌하여 1승(乘)을 설할 수 있는가? 이제 대승에 의거하여 풀이한다면 오로지 보살승만을 닦지 않는 것은 모두 근과 성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성문은 바뀌어서 대승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대승인과 소승인을 안립하여 대승을 수행하게 한다.
016_1254_a_18L若得信等五根不名定根以未得聖故得未知欲知等三根則名定根以得聖故若至頂位不名定性以不免四惡道故若至忍位名爲定性以免四惡道故若依小乘解未得定根性可轉小爲大若得定根性則不可轉如此聲聞無有改小爲大義云何得說一乘今依大乘解未專修菩薩道悉名未定根性故一切聲聞皆有可轉爲大義安立如此大小乘人令修行大乘
【論】이와 같은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모두 이 업과 함께한다.
【釋】세간의 중생은 다섯 가지 업에 있어서 같지 않다. 모든 부처님의 다섯 가지 업은 같지 않다는 의미가 없다.
016_1254_b_06L論曰於如此五業應知諸佛如來共同此業釋曰世閒衆生於五業不同諸佛五業無不同義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중생의 같지 않은 업과 모든 부처님의 동일한 업을 드러내기 위해서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54_b_08L論曰此中說偈釋曰欲顯衆生不同業諸佛同業是故說偈

【論】인(因)ㆍ의지[依]ㆍ일[事]ㆍ의(義)ㆍ모든 행(行)이
다르기 때문에 세간에서 허용되는 업이 다르다.
016_1254_b_10L論曰
因依事意及諸行
異故世閒許業異

【釋】이것은 중생의 다섯 가지 업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첫째는 인이고, 둘째는 의지이며, 셋째는 일이고, 넷째는 의(意)이고, 다섯째는 행이다. 인이 다르다는 것은 다른 인으로 지옥을 이루고, 다른 인으로 하늘을 이루며, 다른 인으로 사람을 이루듯이 축생과 아귀 등도 역시 이와 같다. 인이 다르기 때문에 짓는 업도 다르다. 의지가 다르다는 것은 의지는 곧 그들의 신(身)인데, 신이 다르기 때문에 짓은 업이 다르다. 일이 다르다는 것은 인도(人道) 가운데서 혹은 장사를 하고, 혹은 종자를 키우며, 혹은 사업을 하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은 일들이 다르기 때문에 업이 다르다. 의(意)가 다르다는 것은 모든 중생의 근(根)과 욕망과 성(性)을 의라고 하는데, 이것들이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에 업이 다르다. 모든 행이 다르다는 것은 색 등의 5음을 모든 행이라고 하는데, 색음 가운데서 불이 짓는 것과 물 등이 짓는 것이 다른 것처럼, 수음(受陰)이 짓는 것과 상음(想陰) 등이 짓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업이 다르다. 이 다섯 가지 일로 말미암아 이것이 지으면 저것이 짓지 않는다. 세간의 어리석음과 지혜가 모두 허용하는 그 업은 다름이 있다.
016_1254_b_11L釋曰此明衆生五業不同一因二依三事四意五行因不同者如別因成地獄別因成天別因成人畜生餓鬼等亦爾由因不同故作業不同依不同者依卽彼身由身不同故作業不事不同者如人道中或商估或耕種或事王如此等事不同故業不同意不同者一切衆生根欲性名意等種種不同故業不同諸行不同者色等五陰名諸行色陰中如火所作異水等所作受所作異想等所作業不同由此五事此作非彼作世閒愚智皆許其業有異
016_1254_c_01L
【論】이러한 다섯 가지 차이는 부처님에게는 없다.
따라서 세상의 장수[世將]는 동일한 업이다.
016_1254_c_01L論曰
此五種異於佛無
是故世將同一業

【釋】앞의 다섯 가지 일은 모든 부처님에게는 모두 없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의 인(因)은 똑같이 복덕과 지혜의 행을 함께 닦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의지는 동일한 법신이기 때문에 똑같다. 모든 부처님의 일은 똑같이 스스로 이익되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부처님의 의지는 똑같이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다. 모든 부처님의 모든 행이 없음이 동일하다. 똑같이 유위법을 벗어나 떠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차이가 없기 때문에 모두 동일한 업이다. 대비(大悲)로 중생을 인도하여 모두 열반으로 향하여 가게 하기 때문에 세상의 장수라고 한다.
016_1254_c_02L釋曰前五種事於諸佛悉無何以故諸佛因同同修福德智慧行故諸佛依同同一法身故諸佛事同同有自利利他事故諸佛意同同有利益安樂衆生意故諸佛無諸行同同出離有爲法故由無此五異故皆同一業大悲引導衆生俱向涅槃故名世將
【論】만약 이러하다면 성문과 독각에 의해 함께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많은 덕(德)은 모든 부처님의 법신과 서로 응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써 그들에게 모두 1승으로 나아가서 불승과 같다고 설하는가?
【釋】모든 부처님께서는 앞의 다섯 가지 차이가 없다면 법신으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업이 동일하다. 2승인은 다섯 가지 업의 차이가 있어서 법신을 얻지 못하고, 다섯 가지 업이 같지 않다. 여래께서는 무슨 의미가 되기 때문에 2승인이 똑같이 1승을 향하여 모두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설하는가?
016_1254_c_09L論曰若爾聲聞獨覺非所共得如此衆德相應諸佛法身諸佛以何意故說彼俱趣一乘與佛乘同釋曰諸佛無前五異由法身五業是同乘人有五業異不得法身無五業同如來爲何義故說二乘人同趣一乘皆得成佛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1승의 의미를 드러내 설하기 위하여 게송으로 읊는다. 앞의 게송은 요의(了義)로써 1승을 설하고 뒤의 게송은 밀의(密義)로써 1승을 설한다.
016_1254_c_16L論曰此中說偈釋曰爲顯說一乘意是故說偈前偈以了義說一乘後偈以密義說一乘

【論】성(性)을 정하지 못한 성문과
나머지 모든 보살을
대승으로 이끌어 포섭하여
성을 정하므로 1승을 설한다.
016_1254_c_18L論曰
未定性聲聞
及諸餘菩薩
於大乘引攝
定性說一乘
016_1255_a_01L
【釋】소승에는 근과 성을 정하지 못한 모든 성문 등이 있어서 이끌어서 대승을 믿고 받아들이게 포섭하여 대승을 수행하게 하니, 얻지 못하였으면 얻게 하고, 이미 얻었으면 물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그들은 소승의 도를 버리고 대승에서 열반에 드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뜻을 위해서 1승을 설하시고 이끌어 포섭하여 대승에 들어가 머물게 한다.
016_1254_c_21L釋曰有諸聲聞等於小乘根性未定欲引令信受大乘攝令修行大乘未得令得已得令不退云何彼捨小乘道於大乘般涅槃佛爲此意故佛說一乘引攝令入住大乘
【論】모든 나머지 보살을 대승으로 이끌어 포섭하여
【釋】대승에서 근과 성을 정하지 못한 모든 보살이 있으니 어떻게 그들을 대승에 안립하여 소승에서 대승을 버리지 않고 열반에 들게 하는가? 이러한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1승을 설하시고 이끌어 포섭하여 대승에 들어가 머물게 한다.
016_1255_a_03L論曰諸餘菩薩於大乘引攝釋曰有諸菩薩於大乘根性未定云何安立彼於大乘令不捨大乘於小乘般涅槃爲此意故佛說一乘引攝令入住大乘
【論】성을 정하므로 1승이라 설한다.
【釋】어떤 보살은 대승에서 이미 근(根)과 성(性)을 정하여 물러나거나 다른 뜻이 없다. 이러한 보살을 위하여 1승을 설한다.
016_1255_a_07L論曰定性說一乘釋曰有諸菩薩於大乘根性已定無退異意爲此菩薩故說一乘

【論】인식현상과 무아(無我) 그리고 해탈
등의 것 때문에 근성(根性)이 같지 않으므로
두 가지 의미의 열반을 얻기 때문에
궁극[究竟]에 1승을 설한다.
016_1255_a_10L論曰
法無我解脫
等故性不同
得二意涅槃
究竟說一乘

【釋】법들과 무아들 그리고 해탈들로 말미암아 1승을 설한다. 이 가운데 법은 진여이다. 모든 3승은 다 진여를 떠나지 않으므로 그들에 의해 응하여지는 승(乘)의 법이다. 진여의 법이 동일하기 때문에 1승을 설한다. 모든 법은 오직 법이며 인식 주관이 없다.
만약 인식 주관이 실제로 없다면 어떻게 분별하는가? 이 사람은 성문이고, 이 사람은 독각이고, 이 사람은 보살이라는 이러한 분별은 도리에 맞지 않다. 자성이 없음[無我]의 정의가 동일하기 때문에 1승을 설한다. 3승의 사람은 동일하게 혹장을 해탈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이 해탈과 차별이 없다. 혹을 멸한다는 정의가 같기 때문에 1승을 설한다. 세 가지 3승의 정의가 같기 때문에 들[等]이라고 한다.
016_1255_a_12L釋曰由法等無我等解脫等故說一此中法卽眞如一切三乘皆不離眞如是彼所應乘法由眞如法同故說一乘一切法唯法無人若人實無云何分別此人是聲聞此人是獨覺此人是菩薩如此分別不稱道理無我義同故說一乘三乘人同解脫惑障如佛言解脫與解脫無有差別由滅惑義同故說一乘三義同故名等
016_1255_b_01L【論】근성[性]이 같지 않으므로
【釋】어떤 2승의 사람은 스스로의 승의 위계에서 근성(根性)이 같지 않다. 이 사람은 비록 2승의 도를 구하더라도 2승을 얻지 못한다. 2승의 근성이 아직 정하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바꾸어서 대승의 근과 성을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을 교화하기 위하여 1승을 설한다.
016_1255_a_21L論曰性不同釋曰有二乘人於自乘位根性不同此人雖求二乘道得二乘由二乘根性未定故可轉作大乘根性爲化此人故說一乘
【論】두 가지 의미의 열반을 얻기 때문에
【釋】두 가지 의미 가운데 처음 것을 중생에 대한 평등한 뜻이라고 말한다. 모든 성문 등의 사람은 모든 중생에 대하여 이와 같은 뜻을 짓는다. 그들이 곧 나이고, 내가 곧 그들이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정각을 얻는 것이 곧 내가 정각을 얻는 것이고, 내가 정각을 얻는 것이 곧 그들이 정각을 얻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자신을 해탈하여야 하는 것처럼 역시 이와 같이 중생을 해탈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뜻을 위하여 1승을 설한다.
뒤의 것을 법여에 있어서의 평등한 뜻이라고 한다. 모든 성문 등의 사람은 『법화경』 가운데 여래께서 수기(授記)를 받아서 이미 부처를 얻는다는 의미에서 단지 법여가 평등하다는 의미만을 얻고, 부처님의 법신을 얻지 못한다. 만약 이러한 법여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얻었다면 그들은 여래의 법여가 곧 나의 법여라고 하는 사유를 일으킨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1승을 설한다.
016_1255_b_02L論曰得二意涅槃釋曰二意中初名於衆生平等意諸聲聞等人於一切衆生作如此意彼卽是我我卽是由此意故謂彼得正覺卽是我得正覺我得正覺卽是彼得正覺如我應解脫自身亦應如此解脫衆生如此意故說一乘後名於法如平等諸聲聞等人如來於法華經中其授記已得佛意但得法如平等意未得佛法身若得此法如平等意作是思惟如來法如卽是我法如如此意故說一乘
또한 법화대집회 가운데 사리불(舍利弗)과 이름이 같은 모든 보살이 있어서 이 보살이 이 뜻을 얻으니, 부처님께서 수기(授記)하시기 때문에 1승을 설한다. 또한 다시 부처님께서 사리불 등이 성문을 변화시켜 만들어서 수기하게 하시니, 근성(根性)을 정하지 못한 성문으로 하여금 다시 근을 닦아서 보살이 되게 하고자 하신 것이고, 근성을 정하지 못한 성문으로 하여금 곧바로 불도를 닦아서 불도로 말미암아 열반에 들게 하심이다. 부처님께서 “나는 지금 깨달아 마쳤지만 과거에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는 겁을 지나도록 성문승에 의해 열반에 들었다. 소승이 구경처(究竟處)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어 소승을 버리고 대승을 구하게 하고자 이러한 일을 드러내 행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정의로 말미암아 1승을 설한다.
016_1255_b_14L復次於法花大集有諸菩薩名同舍利弗等此菩薩得此意佛爲授記故說一乘復次佛化作舍利弗等聲聞爲其授記欲令已定根性聲聞更練根爲菩薩未定根性聲聞令直修佛道由佛道般涅如佛言曰我今覺了過去世中經無量無數劫依聲聞乘般涅槃顯小乘非究竟處令其捨小求大故現爲此事由如此義故說一乘
016_1255_c_01L【論】궁극[究竟]에 1승을 설한다.
【釋】만약 승(乘)의 정의를 설한다면 오직 1승만이 승이니, 나머지는 승이 아니다. 이 승을 넘어서는 다른 행이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 승보다 위에 있으니 이른바 불승이다. 이러한 의미로 말미암아 만약 그 승들을 이 승과 비교한다면 이 승은 비길 데가 없다. 그 승들이 상실되어 없어지기 때문에 궁극이라 한다. 이와 같은 정의로 말미암아 1승을 설한다.
016_1255_b_23L論曰究竟說一乘釋曰若說乘義唯一乘是乘所餘非乘若過此乘別行故餘乘有上所謂佛乘由此義若彼乘比此乘此乘無等彼乘失沒故名究竟由如此義故說一乘
【論】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하나의 법신을 함께한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에 있어서 세대[世]의 수가 같지 않는가?
【釋】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이미 하나의 법신을 얻었는데 어찌하여 삼세가 있으며 많음이 있는가? 만약 삼세와 많음이 있다면 어찌하여 하나라고 말하는가?
016_1255_c_05L論曰三世諸佛若共一法身云何世數於佛不同釋曰諸佛旣同得一法身云何有三世復有衆多若有三世及衆多云何言一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모든 부처님께서 혹은 하나이고 혹은 많은 것을 입증할 원인이 있으니, 이제 이 의미를 드러내 보이고자 하기 때문에 게송으로 읊는다. 어찌하여 혹(或)은 하나인가?
016_1255_c_09L論曰此中說偈釋曰有因證諸佛或一或多今欲顯示此義是故說偈云何或一

【論】하나의 계(界) 가운데 둘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원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차례로 성불한다는 것은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일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는 의미가 성립한다.
016_1255_c_11L論曰
於一界中無二故
同時因成不可量
次第成佛非理故
一時多佛此義成

【釋】하나의 법계는 평등하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계에 의해 드러내어지는 것이다. 법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은 하나이다. 또한 다시 한 세계에 있어서 한 때에 두 부처님이 모두 나오시는 일은 없기 때문에 혹은 하나이다라고 설한다. 어찌하여 혹은 많은가?
016_1255_c_13L釋曰一法界平等諸佛是法界所顯由法界一故諸佛是一復次一時中於一世界無二佛俱出故說或一何或多
【論】동시에 원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釋】한때에 셀 수 없는 모든 보살이 있어서 동시에 복덕과 지혜의 두 가지 행을 닦아서 원인이 이미 성숙하였으나, 만약 동시에 위없는 보리의 과를 얻지 못한다면 곧 수행은 공허하고 쓸모없다. 모든 보살이 원인을 닦아 동시에 성숙해져서 동시에 과를 얻기 때문에 일시에 많은 보살이 부처를 이루어 헤아릴 수 없다. 만약 원인이 비록 모두 이루어졌더라도 반드시 앞뒤의 순서로 부처를 이룬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정의는 옳지 않다. 왜냐 하면
016_1255_c_17L論曰同時因成不可量釋曰於一時有無數諸菩薩同時修福德智慧二行因已成熟若不同時得無上菩提果則修行唐捐以諸菩薩修因同時成熟同時得果故一時有多菩薩成佛不可度量若言因雖俱成必前後次第成佛是義不然以故
016_1256_a_01L【論】차례로 부처를 이룬다는 것은 이치가 아니기 때문에
【釋】모든 보살은, 나는 마땅히 서로 순서를 기다려서 부처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러한 원을 세우지 않는다. 이러한 원으로 말미암아 원인이 비록 성숙하더라도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이러한 원이 이미 없으니 어떻게 원인이 함께 성숙하겠는가? 동시에 과를 얻을 수 없는데, 어찌하여 많은 사람이 같은 시기에 원인을 닦으면서 순서를 관하지 않는가? 과를 얻을 때에 반드시 순서를 관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 정의는 도리가 아니다.
016_1256_a_01L論曰次第成佛非理故釋曰諸菩薩不作是願我當相待次第成佛由此願故因雖成熟故待次旣無此願云何因俱成熟不同時得果云何多人俱時修因不觀次第得果之時必觀次第故此義非理
【論】일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는 이러한 정의를 이룬다.
【釋】이 구절은 한때에 시방세계에 헤아릴 수 없는 부처님께서 계셔서 동시에 세상에 나오신다는 것을 밝힌다. 만약 어떤 경전에서 말씀하시어 세간에 단지 한 여래께서 함께 나오시지 않는다는 의미를 증명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경전에 처(處)가 없고 위계도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아라가(阿羅訶)와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라는 두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은 처가 있고 위계가 있음이다. 그리고 한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마치 두 전륜왕이 동시에 한 곳에 함께 생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경전은 큰 삼천세계에 두 여래께서 없다는 것을 마땅히 설하는 것이며, 모든 세계에 두 여래께서 없다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마땅히 상세히 해설하여야 할 것이다.
이 경전은, 모든 세계가 어찌하여 세존의 수승한 공능을 제한하고 가로막지 못하는가를 설하고 있다. 오직 세존 한 분만이 모든 것 속에서 수승한 공능을 갖는다. 만일 한 부처님께서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할 수 없다면 나머지 부처님께서도 역시 할 수 없어야 한다.
016_1256_a_06L論曰一時多佛此義成釋曰此句明一時中十方世界有無量佛同時出世若言有佛經證於世閒但一如來無俱出義是義不然經言無處無位非前非後二如來阿羅訶三藐三佛陁出現於世有處有位若一如來出現於世譬如二轉輪王不得同時共生一處此經爲當說大三千世界無二如來爲當說一切世界無二如宜應詳釋此經說一切世界何以不應限㝵世尊勝能唯世尊一人於一切處有勝能若一佛不能於餘處化度衆生餘佛亦應不能
016_1256_b_01L다시 경전에 말씀하셨으니, “사리불아, 만약 사람들이 너에게 와서 질문하기를, ‘대덕 사리불이여, 지금 사문 바라문과 사문 구담이 위없는 보리에 있어서 평등하고 평등한가, 그렇지 않는가’ 하고 너에게 묻는다면 마땅히 어떻게 답하겠느냐?” 사리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제게 와서 이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당연히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선남자여, 이때 사문 바라문과 세존께서는 위없는 보리에 있어서 평등하지 않다. 왜냐 하면 세존에게서 직접 듣고 세존께서 얻으신 것으로 볼 때, 세존께서는 처(處)가 없고 위계가 없으며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두 여래께서 세상에 나란히 나오시는 것은 처가 있고 위계가 있어서 오직 한 여래만이 세상에 출현하신다.’ ” 만약 이러하다면 어찌하여 『범왕경(梵王經)』 가운데 부처님께서 단지 큰 삼천세계 가운데 내가 자재함이 이루어진다고 설하셨는가? 이와 같이 말씀하신 가르침에는 달리 밀의(密意)가 있다.
만약 세존께서 뜻을 짓지 아니하여도 단지 자성 가운데 있어서, 공용하는 마음을 짓지 아니하여도 큰 삼천세계에 언어와 광명과 5식(識) 등의 일이 자연히 이루어질 수 있다. 만약 공용하는 마음이 있다면 끝없는 세계가 여래의 경계이다.
016_1256_a_19L復有經舍利弗若人至汝所作如是問德舍利弗於今時有沙門婆羅門沙門瞿曇平等平等於無上菩提不汝得此問當云何答舍利弗言若有人至我所作如是問我當如是答男子於今時無沙門婆羅門與世尊平等平等於無上菩提何以故世尊我從世尊吉祥口聞從世尊所得處無位無前無後二如來竝出於世有處有位唯一如來出現於世若爾云何於梵王經中佛說但大三千世界中我自在成如此言教別有密意世尊不作意但在自性中無功用心於大三千世界言語光明五識等事自然得成若有功用心無邊世界是如來境
다시 어떤 부(部)에서는 그 밖의 다른 세계에 달리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는 것이 있다고 설한다. 왜냐 하면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이 동시에 6바라밀을 행하여 이미 원인이 성숙한 것이 헤아릴 수 없으니, 한 곳 한 때에 모든 부처님께서 함께 생한다는 도리는 없으며, 그 밖의 다른 곳에서 그들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가로막을 다른 법이 없다. 따라서 그 밖의 다른 세계에 달리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다는 것을 결정코 알아야 한다. 이 경전은 모든 부처님께서 동일한 시간에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비유하건대 전륜성왕과 같다. 이제 이 경전을 상세히 가르쳐 깨닫게 하여야 한다. 이 경전에서 만약 한 세계에 한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다고 설하였다면 나머지 곳은 방해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세계에 한 부처님만이 세상에 나오신다고 설한다면 나머지 전륜왕은 다른 세계에 생할 수 없어야 한다. 이미 전륜왕이 함께 생하지 않는다고 설하여 모든 부처님을 비유하였다.
016_1256_b_12L復有餘部說於餘世界別有諸佛出世何以故有無量菩薩同時修行六度因已成熟不可數量無有道理諸佛於一處一時共生無有別法能㝵彼於餘處出世是故定知於餘世界別有諸佛出世此經證諸佛不同一時出世譬如轉輪王今當詳辯此經此經若說一世界一佛出世不妨餘處若說一切世界一佛出世餘轉輪王於別世界不應得生旣說轉輪王不俱生譬諸佛
016_1256_c_01L만약 네가 그 밖의 다른 세계에 다른 전륜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모든 부처님께서 그 밖의 다른 세계에 나오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는 것은 크게 길상(吉祥)한 일인데, 어찌하여 많은 세계에 많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가? 이것은 잘못과 허물이 없다. 세간에는 많은 중생이 있어서 가장 수승한 이익과 상응하는데, 어떻게 하나의 세계에 두 부처님께서 함께 출현하시지 않겠는가? 공용이 없이 숙원(宿願)을 따르기 때문에 모든 보살은 예전에 어두운 세계의 이끌어 인도하는 사람이 없는 곳인 어두운 세계에서 정각을 이룰 수 있고, 광명을 일으키게 되고 다른 사람을 이끌어 인도하게 되기를 원하는 이러한 원을 세운다. 이러한 원으로 말미암아 두 부처님께서 함께 나오시지 않는다.
만약 이러하다면 어째서 오직 한 부처님만을 설하고, 많은 부처님을 설하지 않는가? 중생으로 하여금 극히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고, 급히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 하면 만약 한 부처님에 대하여서 극히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덕이 없다고 말하면 역시 급히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수행할 수 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열반에 계신다면 우리들은 귀의할 곳이 없다. 따라서 게송에서 일시에 많은 부처님께서 계신다는 이러한 정의가 성립한다.
016_1256_b_22L汝若忍許餘世界有別轉輪王云何不忍許諸佛出餘世界佛出於世是大吉祥故不許於多世界有多佛出世此無過咎世閒有多衆生與最勝利益相應故云何於一世界二佛不俱出現以無用故又隨宿願故諸菩薩昔作是願願我於盲闇世界無人將導處得成正覺爲作光明爲彼將導由此願故無二佛俱出若爾何故唯說一不說多佛爲令衆生起極尊重急修行故何以故若但於一佛則起極尊重心謂他無如此德亦能急修行如來正教何以故佛若涅槃我等則無歸依處故偈言一時多佛此義成
【論】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한결같이 열반도 아니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님도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釋】어떤 스승들은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설하고, 다른 부(部)의 성문승의 사람은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는 영원히 열반에 든다고 설한다. 이러한 두 가지 집착은 요의(了義)의 설명이 아니고 비밀한 뜻에 의해 드러내어진 것이다.
016_1256_c_13L論曰云何應知諸佛法身非一向涅非非一向涅槃釋曰有諸師說諸佛如來不永般涅槃別部聲聞乘人說諸佛如來永般涅槃此二執非了義說是密意所顯
【論】이 가운데 게송을 읊는다.
【釋】이러한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56_c_18L論曰此中說偈釋曰爲顯此義是故說偈
【論】모든 장애를 떠나고,
마땅히 지어서 마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은 한결같은 열반이며,
한결같이 열반이 아니다.
016_1256_c_19L論曰
由離一切障
應作未竟故
佛一向涅槃
不一向涅槃
016_1257_a_01L
【釋】모든 부처님께서는 혹장과 지장을 영원히 해탈하셨다. 따라서 한결같은 열반이다. 여래께서는 마땅히 바른 일을 행하여 끝마치지 않으시니, 성숙하지 않은 것은 성숙하게 하고, 이미 성숙한 것은 해탈하게 하는 이러한 두 가지 일을 쉬거나 그만둘 수 없다. 따라서 여래께서는 한결같이 열반이 아니다. 만약 2승같이 한결같은 열반이라면 여래의 본래의 원(願)은 단지 원만이 있고 과는 없다. 만약 요의로 설한다면 열반도 있고 열반이 아닌 것도 있다.
016_1256_c_21L釋曰諸佛永解脫惑障及智障是故一向涅槃如來應作正事未究竟未成熟令成熟已成熟令解脫此二事不可休廢是故如來不一向涅槃若如二乘一向涅槃如來本願但有願無果若了義說應言有涅槃有不涅槃
【論】어찌하여 수용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釋】응신이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이고, 응신이 법신을 이룬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이것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016_1257_a_05L論曰云何受用身不成自性身釋曰應身不成法身是道理應身成法身非道理此是非義云何可知
【論】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釋】여섯 가지 원인이 있어서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016_1257_a_07L論曰由六種因故釋曰有六種因證是非義
【論】첫째는 색신(色身)과 행신(行身)으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釋】열 가지 입(入:處)을 색신이라고 하고, 수(受) 등을 행신이라고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진여의 법으로써 신(身)을 삼으니, 법신 가운데 차별적 대상성[色]과 행(行)15)을 얻을 수 없다. 응신은 그렇지 않으니, 이 의미는 어떠한가? 일체지와 큰 정[大定]과 큰 연민[大悲] 등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의 공덕은 비록 법신에 의지하지만, 만약 현현할 때에는 화신을 떠나지 않는다. 이 화신은 부처님과는 유사하지만 모든 중생과는 달라서 응신의 사(事)의 상이 된다. 따라서 색과 행은 응신에 있지 법신에는 있지 않다. 따라서 응신은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는 이러한 도리가 성립하므로 곧 응신이 법신을 이룬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016_1257_a_09L論曰一由色身及行身顯現故釋曰十入名色身受等名行身諸佛以眞如法爲身於法身中色行不可得應身則不爾此義云何一切智大定大悲等恒河沙等如來功雖依法身若顯現時不離化身此化身似佛異一切衆生爲應身事相色行於應身有於法身無是故應身不成法身是道理成則非道理
016_1257_b_01L【論】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대집처(大集處)의 차별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이다.
【釋】응신에는 차별이 있다. 불제자의 대집륜(大集輪)으로 말미암은 차별이기 때문에 응신은 보살 제자의 무리들을 모을 수 있다. 법신은 이와 같지 않으니, 왜냐 하면 큰 통혜(通慧:神通)는 보살의 대종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큰 통혜가 곧 응신이므로 바른 법(法:敎法)을 설할 수 있고, 정의를 세울 수 있고, 의심을 풀 수 있다. 이것은 반야의 공용(功用)이므로 반야는 곧 응신이다. 낮과 밤의 여섯 시간 가운데 중생의 근성을 관하여 그들에게 나아가서 이익되는 일을 행하니, 큰 연민[大悲]의 공용이므로 큰 연민은 곧 응신이다. 만약 응신으로써 곧 법신이라고 한다면 보살을 모아서 교화할 수 없다. 만약 법신이 곧 응신이라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물 수 없다. 이러한 차별로 말미암아 현현하기 때문에 응신은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
016_1257_a_17L論曰二由無量大集處差別顯現故釋曰應身有差別由佛弟子大集輪差別故應身能集菩薩弟子衆法身不爾何以故大通慧能集菩薩衆通慧卽是應身能說正法立義釋疑此是般若功用般若卽是應身日夜六時觀衆生根性往彼爲作利益事是大悲功用大悲卽是應身若以應身卽是法身則不能集化菩薩若法身卽是應身則諸佛非常住由此差別顯現故應身不成法身
【論】셋째는 그들의 욕락(欲樂)을 따라서 보는데, 현현하는 자성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釋】그들은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의 욕락이 되어서 여래의 많은 덕을 관한다. 단지 응신에 의지해서 관하여 그 욕락을 따라 보여지는 많은 덕이 현현하니, 같지 않다. 이와 같은 응신의 자성은 많은 종류이기 때문에 정하여지지 않으나, 법신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응신은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
다시 어떤 다른 경전에서는 응신이 중생의 욕락을 따르니 드러나는 상이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왜냐 하면 모든 중생이 응신에 있어서 보고자 하는 노란 색과 푸른 색, 낙수(樂受)와 사수(捨受), 그리고 식이 있음과 식이 없음 등 여러 가지로 같지 않음이 있으나,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전은 응신의 자성이 정하여지지 않으나 법신은 이러하지 않기 때문에 응신ㆍ법신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016_1257_b_05L論曰隨彼欲樂見顯現自性不同故釋曰彼爲無量菩薩欲樂觀如來衆但依應身觀隨其欲樂所見衆德顯現不同如此應身自性不定以多種類故法身不爾是故應身不成法復有別經爲證應身隨衆生欲樂現相不同何以故有諸衆生於應身欲見黃色靑色等及樂受捨受等識無識等種種不同皆悉得成此經顯應身自性不定法身則不爾故應身不成法身
【論】넷째는 다르고 다른 견(見)의 자성이 변동하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釋】어떤 한 중생은 먼저는 이 응신의 다른 상이 현현하는 것을 보았으나, 이 중생은 뒤에 다시 또 이 응신에 다른 상이 현현함이 있다는 것을 본다. 한 사람이 보는 것이 같지 않듯이 그 밖의 다른 중생이 보는 것도 역시 이러하다. 이 중생의 선근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처음에는 거친 상을 드러내고, 다음에는 중간의 상을 드러내고, 뒤에는 미세한 상을 드러낸다. 응신은 이러한 변동하는 상이 있으나, 법신은 이렇지 않다. 따라서 응신은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
016_1257_b_16L論曰四別異別異見自性變動顯現故釋曰有一衆生先見此應身別異相顯現此衆生後見此應身更有別異相顯現如一人見不同餘衆生見亦爾爲成熟此衆生善根故初現麤相次現中相後現微妙相應身有此變動相法身不爾故應身不成法身
016_1257_c_01L【論】다섯째는 보살과 성문과 하늘 등의 갖가지 큰 집회에서 서로 섞여 화합할 때에 서로 섞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釋】응신이 항상할 때나, 보살 등의 갖가지 큰 집회에서 서로 섞여 법문을 들을 때에, 응신에는 세 가지 서로 섞임이 있다. 첫째는 모든 중생은 각각 부처님을 보아 모두 그 면전에서 대하기 때문에 서로 섞인다고 말한다. 둘째는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을 따라 색상이 같지 않으나 부처님께서는 그 색상과 같기 때문에 서로 섞인다고 말한다. 셋째는 그 근성을 따라 마땅한 큰 지혜와 큰 정(定) 그리고 큰 연민이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사(事)를 쓰기 때문에 서로 섞인다고 말한다. 응신이 이러한 서로 섞임이 있으나, 법신은 그렇지 않다. 만약 법신으로써 응신을 삼는다면 부처님에게는 중생을 이익케 하는 일이 없으며, 만약 응신으로써 법신을 삼는다면 부처님에게는 현세의 안락이라는 정의가 없다. 항상 떠들썩하게 동요하므로 적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응신은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
016_1257_b_23L論曰五菩薩聲聞天等種種大集相雜和合時相雜顯現故釋曰應身恒時由菩薩等種種大集相雜聽法時應身有三相一一切衆生各各見佛皆對其前故名相雜二隨無量衆生色相不同佛如其色相故名相雜三隨其根性所宜大智大定大悲有無量事用名相雜應身有此相雜法身不爾以法身爲應身佛無利益衆生事以應身爲法身佛無現世安樂義恒喧動離寂靜故是故應身不成法身
【論】여섯째는 아려야식(阿黎耶識)과 생기식(生起識)에서 전의를 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釋】아려야식과 생기식은 곧 수용신(受用身)이다. 이 두 가지 식의 전의를 법신이라고 한다. 만약 자성신을 곧 수용신이라고 한다면 두 식의 의지를 전변하여서는 다시 무슨 신을 얻는가? 이러한 연유로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수용신은 자성신(自性身)을 이루지 않는다. 만약 수용신을 자성신이라고 한다면 곧 큰 지혜 등의 많은 덕이 없다. 많은 덕이 없지 않기 때문에 자성신은 수용신을 이루지 않는다.
016_1257_c_11L論曰六阿黎耶識及生起識見轉依非道理故釋曰阿黎耶識及生起識卽是受用身此二識轉依名法身若自性身卽是受用身轉二識依復得何身由此非道理故受用身不成自性身若受用身卽是自性身則無大智等衆德由不無衆德故自性身不成受用身
【論】따라서 수용신이 자성신을 이룬다는 정의는 없다.
【釋】이 여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도리인 정의와 도리가 아닌 정의를 깨우쳐 안다.
016_1257_c_19L論曰是故受用身道理成自性身釋曰由此六因知是道理非道理義
【論】어찌하여 변화신은 자성신을 이루지 않는가?
【釋】변화신은 법신을 이루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이고, 변화신이 법신을 이룬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옳고 그른 정의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016_1257_c_21L論曰云何變化身不成自性身釋曰變化身不成法身是道理變化身成法身非道是非義云何可知
016_1258_a_01L【論】여덟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釋】여덟 가지 원인이 있어서 옳고 그른 정의를 증명한다.
016_1258_a_01L論曰由八種因故釋曰有八種因證是非義
【論】첫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전부터 도솔타천도(兜率陀天道)와 인도(人道) 가운데 무퇴삼마제(無退三摩提)를 얻어서 생을 받으므로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釋】보살은 초지(初地)를 얻음으로부터 10지까지 30대겁 아승기를 경과하여 5백 가지의 물러나지 않는 정[不退定]을 얻으며, 이미 오래 전에 삼계의 탐욕을 떠나므로 천도(天道) 가운데 생한다는 도리마저도 없는데, 하물며 인간에 태어난다는 도리가 있겠는가? 석가의 왕족 가운데 생하여 하열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나투시어 인간의 몸을 받으신다. 이 몸은 원인 없이 세간에 있기 때문에 과보신(果報身)도 아니고 자성신도 아니다. 단지 변화신이다.
016_1258_a_02L論曰一諸菩薩從久遠來得無退三摩提於兜率陁天道及人道中受生不應道理釋曰菩薩從得初地乃至十地經三十大劫阿僧祇得五百不退定久已離欲三界無有道理生天道中何況有道理於人閒在釋迦王種中生爲化下衆生故現受人身此身無因而於世閒是有故非果報身及自性身但是變化身
【論】둘째는 모든 보살이 오래 전부터 항상 기억하고 예전에 머물던
【釋】보살은 초지로부터 10지까지 오랜 시간 동안에 예전의 명(命)을 항상 기억하여, 먼저 닦아 얻은 헤아릴 수 없는 기량과 능력을 모두 잊거나 상실하지 않는다.
016_1258_a_11L論曰諸菩薩從久遠來恒憶宿住釋曰菩薩從初地至十地於長時中恒憶宿命先所修得無量伎能悉不忘失
【論】방서16)ㆍ계산ㆍ수량ㆍ인상(印相)17)ㆍ공예ㆍ논서를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행하고, 탐욕의 차별적 대상 가운데서 받아들여 쓰는 것을 보살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釋】예순네 지방의 다른 책[六十四方土異書],18) 곱하고 나누는 등의 열여섯 가지 계산법, 곱하기와 나누기 등을 제외한 열여섯 가지의 관(觀), 수(數)의 많고 적음을 아는 것들, 양(量)의 많고 적음을 아는 관의 무리, 인물(印物)19)을 찍음으로써 상을 삼는 것, 혹은 늘리고 혹은 줄이며 혹은 지키고 혹은 다스리는 예순네 종류의 능력[六十四能],20) 18명처(明處)21) 그리고 예순네 가지 왕의 기량과 비밀한 기예와 술법을 아직 얻지 못하였으면 얻게 하고, 이미 얻었으면 증장하게 하며, 이미 증장되었으면 선인(善人)에게 부촉(付囑)하니, 여섯 가지 차별적 대상[六塵] 가운데서 탐욕의 차별적 대상을 행하게 된다. 노래하고 춤추고 화합하고 옷을 입고 솥을 고르는[調鼎] 등의 일을 탐욕의 차별적 대상을 받아들여 쓴다고 말한다.
016_1258_a_14L論曰方書筭計數量印相工巧等論行欲塵及受用欲塵中菩薩無知不應道理釋曰六十四種方土異書乘除等十六種筭計法離乘除等十六種觀聚知數多少觀聚知量多少以印印物爲相或增或減或守或相六十四能十八明處六十四王伎秘巧術法未得令得已得令長已長付囑善人爲行欲塵於六塵中如歌儛和合衣著調鼎等事名受用欲塵
016_1258_b_01L보살은 헤아릴 수 없는 겁(劫) 이래로 숙세(宿世)에 닦아온 모든 기량과 능력을 항상 기억하여 모두 잊거나 상실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러한 도리는 없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낮은 품류의 사람에게 내보여서, 상품으로 바꾸어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직 이러한 공능이 없다면 마침내 반드시 닦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이 몸은 변화신이고, 자성신이나 수용신이 아니다.
016_1258_b_01L薩於無量劫來常憶宿世所修一切伎能悉無忘失無有道理於此等事不知不憶爲化衆生示下品人可轉成上品故顯自身未有此能方須修是故此身是變化身非自性身及受用身
【論】셋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이미 삿된 교법과 바른 교법을 식별하였으니, 외도들에 의해 받들어 모셔지는 그 사람에게 가서 스승을 삼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釋】보살은 33대겁 아승기에서 바른 행 가운데 정근(正勤)을 닦아, 복덕과 지혜의 행이 모두 이미 원만한데, 최후의 신(身)에서 삿된 교설과 바른 교설의 차이를 요별할 수 없다는 도리는 없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부처를 얻을 때에 무슨 인식현상을 알게 되는가?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기 위해 드러내어 이러한 일이 된다. 따라서 이 신은 변화신이며 나머지 두 가지 신이 아니다.
016_1258_b_07L論曰三諸菩薩從久遠來已識別邪正法教往外道所事彼爲不應道理釋曰菩薩於三十三大劫阿僧祇於正行中修正勤福德智慧行悉已圓滿無有道理於最後不能了別邪正說異若無此知佛之時爲知何法爲欲降伏諸外道現爲此事是故此身是變化身餘二身
016_1258_c_01L【論】넷째는 모든 보살은 오래 전부터 3승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를 이미 통달하여 도를 구하게 되기 때문에 허망한 고행(苦行)을 닦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釋】모든 보살은 33대겁 아승기로부터 10해(解)와 10행(行)이 있으므로 초지에서 이미 3승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를 통달하여 단(斷)과 상(常)의 두 집착을 떠나며, 2승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인 고행(苦行)과 낙행(樂行)의 삿된 행을 행하지 않으니, 유(有)와 무(無)의 집착을 버리고 모든 분별을 떠나 보살의 성스러운 도의 바른 이치인 무분별경지(無分別境智)의 바른 행을 닦는다. 외도의 고행은 이미 얻은 법(法:敎法)조차도 멸할 수 있으며, 얻지 못한 법을 얻을 수 없으니, 두 세계 가운데 단지 손해일 뿐 이익이 없기 때문에 허망함이라고 이름한다. 보살이 이러한 일을 행한다는 도리는 없다. 고행을 닦는다는 것은 과보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을 드러내 행한다. 따라서 이 신은 변화신이며, 나머지 두 가지 신이 아니다.
016_1258_b_15L論曰四諸菩薩從久遠來已通達三乘聖道正理爲求道故修虛苦行不應道理釋曰諸菩薩從三十三大劫阿僧祇來在十解十行初地已通達三乘聖道正理離斷常不行苦樂邪行是二乘聖道正理捨有無執離一切分別修無分別境智正行是菩薩聖道正理外道苦行能滅已得法不能得未得法於二世中但損無益故名爲虛無有道理菩薩應習行此事爲化衆生示修苦行無有果報故現行此事是故此身是變化身非餘二身
【論】다섯째는 모든 보살이 백 구지(拘胝)22)의 염부제(閻浮提)23)를 버리고 한 처(處)에서 위없는 보리와 법륜을 굴리는 것을 얻는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釋】모든 보살이 도를 닦을 때에 만억(萬億)의 염부제에 편만하여 만억의 염부제의 중생을 성숙시키고, 부처를 이룰 때에는 곧 두루 가득하게 신(身)을 받으나, 과보신은 오직 하나만이 있을 수 있고 많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하다면 어찌하여 하나의 수승한 처에서 신을 받는 것과는 구별하지 않는가? 화신으로써 두루 일체처에서 교화를 행하니, 만억의 염부제를 버리고 하나의 염부제에 치우쳐서 부처를 이루고 법륜(法輪)을 굴린다는 이러한 도리는 없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는 것을 알게 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일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신은 변화신이며 나머지 두 가지 신이 아니다.
016_1258_c_04L論曰五諸菩薩捨百拘胝閻浮提於一處得無上菩及轉法輪不應道理釋曰諸菩薩修道之時遍滿萬億閻浮提成熟萬億閻浮提衆生成佛之時則應遍滿受身然果報身唯得有一不得有若爾何故不別於一勝處受身化身遍一切處行化無有道理捨萬億閻浮提偏於一閻浮提成佛轉法爲化衆生令知佛出世故現爲此是故此身是變化身非餘二身
【論】여섯째는 만약 위없는 보리의 방편을 드러냄을 떠나서 단지 화신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마침내 불사(佛事)를 행한다면, 마땅히 도솔타천(兜率陀天)에서 정각(正覺)을 이루어야 한다.
【釋】만약 네가 단지 하나의 염부제의 처(處)에서만 위없는 보리를 얻는다고 집착한다면 그 밖의 다른 처에서는 태(胎)에 들어가는 등의 방편을 떠나므로 그 밖의 다른 처에서는 오직 화신이 짓는 불사만을 드러낸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보살이 도솔타천 위에 있어서 위없는 보리를 얻고 그 밖의 다른 처에서는 화신이 짓는 불사를 드러낸다고 집착하지 않는가? 따라서 이 신(身)은 변화신이며 나머지 두 가지 신이 아니다.
016_1258_c_14L論曰六若離顯無上菩提方便但以化身於他方作佛事若爾則應於兜率陁天上成正覺釋曰若汝執但於一閻浮提處得無上菩提餘處則離入胎等方便於餘處唯現化身作佛事云何不執如此菩薩在兜率陁天上得無上菩提於餘處現化身作佛事是故此身是變化身非餘二身
016_1259_a_01L【論】일곱째는 만약 이러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는 모든 염부제 가운데 평등하게 출현하시지 않는가? 만약 다른 곳에 출현하시지 않는다면 이러한 도리를 입증할 수 있는 아함과 도리는 없다.
【釋】만약 천(天) 가운데서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면 곧 마땅히 두루 얻어야 하므로, 보살이 모든 네 가지 천(天) 아래에서 두루 위없는 보리를 얻지 못하고 단지 하나의 처에서 얻는다는 이러한 정의를 입증할 아함과 도리는 없다. 따라서 이 신은 변화신이고 나머지 두 가지 신이 아니다.
016_1258_c_22L論曰七若不爾云何佛不於一切閻浮提中平等出現若不於他方出現無阿含及道理可證此義釋曰不於天中得菩提則應遍得而菩薩於一切四天下不遍得無上菩提於一處得無阿含及道理能證此義是故此身是變化身非餘二身
【論】여덟째는 만약 화신(化身)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두 여래께서 하나의 세계에 함께 나타나신다는 것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釋】하나의 사하(娑訶)세계에 두 여래께서 함께 세상에 나오신다고 하는 것은 정의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왜냐 하면 화신이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화신은 이미 많으니 곳곳에 화신이 있어서 이것이 방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신은 변화신이며, 나머지 두 가지 신이 아니다.
016_1259_a_06L論曰八二如來於一世界俱現此不相違若許化身成多釋曰一娑訶世界有二如來俱出世此與義不相何以故以許化身成多故化身旣處處有化身此無所妨是故此身是變化身非餘二身
【論】네 가지 천(天) 아래에 하나의 세계를 포섭하므로 마치 전륜왕이 하나의 세계에서 하나의 주인 혹은 다른 주인과 함께 생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모든 부처님도 역시 이러하다.
【釋】이러한 증거로 인하여 이와 같이 설할 수 있다. 백 구지의 세계 가운데에 있는 어느 하나의 세계 가운데서도 부처님을 보지 않는다. 만약 네가 이와 같이 말한다면 경전과는 서로 어긋난다. “두 부처님께서 한 때에 큰 삼천세계에 함께 생하지 않으신다. 마치 전륜왕과 같이”라는 이러한 설명이 있으니, 이 가운데서 너는 이 경전을 판별하여야 할 것이다. 전륜왕과 같다고 하는 의미는 두 전륜왕이 하나의 세계에는 함께 생할 수 없지만, 나머지 세계에 함께 생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두 여래께서 함께 생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의미를 판단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아야 한다.
016_1259_a_12L論曰由四天下攝一世界如轉輪王於一世界或一主或別主俱生不應道理諸佛亦爾釋曰因此證可說如此有一世界百拘胝世界中於中不見佛若汝說如此則與經相違有如此說謂二佛不一時俱生大三千世界譬如轉輪此中汝應判此經同轉輪王義兩轉輪王於一世界不得俱生不妨於餘世界俱生兩如來俱生非道理判義亦應如此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상을 갖춘 위없는 깨달음의 정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59_a_22L論曰此中說偈釋曰爲顯具相無上覺義故說此偈
016_1259_b_01L
【論】부처님의 미세한 화신은
평등하게 많은 태(胎)에 들어가니,
상을 갖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
세간에 내보이신다.
016_1259_a_23L論曰
佛微細化身
多入胎平等
爲顯具相覺
於世閒示現

【釋】부처님께서는 위로는 도솔타천과 아래로는 염부제에 있어서 태(胎)를 받는다. 이때 여래께서는 교화하여 모든 부처님의 제자를 짓는다. 마치 정명(淨命) 사리불 등이 태를 받는 것과 같다. 만약 그것을 안립한다면 상을 갖춘 위없는 깨달음은 현현할 수 있지만, 만약 하품과 중품의 2승이 없다면 부처님께서 위가 없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다. 만약 2승의 지혜가 얕고 편협하지 않다면 곧 부처님께서 상을 갖추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다. 이러한 정의를 드러내기 위해 화신이 세상에 출현하니, 모든 부처님과 여래께서는 한결같은 열반이 아니다. 이제 마땅히 이러한 정의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016_1259_b_03L釋曰佛在兜率陁天上下閻浮提受是時中如來化作一切佛弟子淨命舍利弗等受胎若安立彼具相無上覺則得顯現若無下中二乘不得顯佛是無上若無二乘智慧淺則不得顯佛是具相爲顯此義故化身出現於世諸佛如來非一向涅今當顯示此義
【論】여섯 가지 원인이 있어서 모든 불세존께서는 화신으로 영원히 머물 수 없다.
【釋】여섯 가지 원인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화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016_1259_b_11L論曰有六種因諸佛世尊於化身中不得永住釋曰有六因證佛須捨化身
【論】첫째는 바른 사(事)의 궁극이기 때문에, 이미 해탈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釋】여래의 화신의 바른 사(事)가 이미 궁극이기 때문에 화신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중생을 성숙시켜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 화신의 바른 일이다. 중생이 이미 모두 성숙하여 해탈하였기 때문에 바른 일의 궁극이라고 한다.
016_1259_b_13L論曰一正事究竟故由已解脫成熟衆生釋曰如來化身正事已究竟故化身不永住成熟衆生令得解脫化身正事衆生旣悉成熟解脫故名正事究竟
【論】둘째는 만약 이미 해탈을 얻어서 열반에 들기를 구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열반에 들려는 의지를 버리게 하고, 항상 불신(佛身)에 머물기를 얻고자 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釋】만약 혹장을 이미 해탈하여 무여열반을 구한다면 그러한 뜻과 욕심을 바꾸기 위해 화신이 실제로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자 하기 때문에 화신을 버리고, 따로 법신이 항상 머묾이 있다는 것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인다. 마땅히 소승의 무여열반심(無餘涅槃心)을 구하는 것을 바꾸어서 법신에 항상 머물기를 구하기 때문에 화신에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016_1259_b_18L論曰二若已得解脫般涅槃爲令彼捨般涅槃意欲求得常住佛身故釋曰若已解脫惑障求無餘涅槃爲轉其意欲示化身實有故捨化身示別有常住法身是眞實有應轉求小乘無餘涅槃心常住法身故化身不永住
016_1259_c_01L【論】셋째는 그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갖는 경망하고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깊고 깊은 진여의 법과 바르게 설한 교법을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釋】그들은 모든 중생을 말한다. 부처님에게도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 등이 있어서 자기와 더불어24) 다르지 않다고 계교하기 때문에 여래에 대하여 경망하고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므로, 중생으로 하여금 여래의 진실한 신(身)과 가명(仮名)의 신을 식별하게 하고자 한다. 진실한 신이란 곧 진여의 법과 바르게 설한 교법이다. 바르게 설한 교법은 진여의 법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에 바르게 설한 신(身)이라고 한다. 이 둘은 법신을 말한다. 이 법은 가장 깊고 깊어서 통달하기 어려우니, 하열한 위계의 사람들의 경계가 아니다. 만약 이 신을 통달한다면 곧 여래에 대하여 극히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가명의 신이란 화신이다. 이 신을 내보이는 것은 분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어서 실제로 있지 않기 때문에 화신은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016_1259_c_01L論曰爲除彼於佛所有輕慢心故爲令彼通達甚深眞如法及正說法故釋曰彼謂一切衆生計佛有生老病死等與已不異故於如來起輕慢心欲令衆生識如來眞實身及假名身眞身卽眞如法及正說法正說法從眞如法流出名正說身此二名法身此法最甚深難可通達非下位人境若通達此身則於如來起極尊重假名身卽化身示此身是分別所作非眞實有故化身不永住
【論】넷째는 중생으로 하여금 불신(佛身)에 대하여 독실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고, 거듭 보아서 만족해 하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釋】만약 하나의 화신에 항상 머문다면 중생은 처음 보고서는 독실한 믿음을 생하고 뒤에 곧 쉬어 가벼이 여긴다. 만약 색형(色形)이 갖가지로 희유하게 바뀌어 변한다면 중생은 거듭 보고서 새롭고 새롭게 돈독하게 믿으며, 곧 만족해 함이 없기 때문에 화신은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016_1259_c_12L論曰四爲令衆生於佛身起渴仰心數見無厭足故釋曰若恒住一化衆生始見生渴仰後則歇薄若色形改變種種希有衆生數見新新渴則無厭足故化身不永住
【論】다섯째는 바르게 설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앎으로 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향하여 지극한 정진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釋】만약 부처님께서 항상 화신에 머문다면 중생은 곧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화신을 버려서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께서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여, 지극한 정근(正勤)을 일으키게 한다. 급히 자신을 제도하여 남에게서 찾지 않으며, 스스로 그것의 옳고 그름을 깨우치므로 스스로를 향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화신은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016_1259_c_17L論曰五爲令彼向自身起極精進知正說者不可得故釋曰若佛恒住化身衆生則不起難遭想故如來捨化身令其知佛不久住世起極正急度自身不觀於他又以自身證其是非名向自身故化身不永住
016_1260_a_01L【論】여섯째는 그들로 하여금 속히 성숙한 위계를 얻어 이르게 하여, 스스로를 향하여 짐을 버리지 않고 지극히 정진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釋】앞에서 정근을 닦지 못하였으면 정근을 닦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만약 정근을 이미 닦았으면 정근을 버리지 않게 하여 정(定)과 혜(慧)를 닦고 익혀서 빠르게 원만함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따라서 화신은 영원히 머물지는 않는다.
016_1259_c_23L論曰六爲令彼速得至成熟位向自身不捨荷負極精進故釋曰前明爲未修正勤令修正勤此明若已修正勤令不捨正勤修習定慧疾得圓滿故化身不永住
【論】이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앞의 여섯 가지 원인을 섭지하여 많이 잊고 상실한 것을 쉽게 기억하고 지닐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거듭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60_a_05L論曰此中說偈釋曰爲攝前六因令多忘失者易得憶持故重說偈

【論】궁극적인 바른 사(事)로 말미암아
열반을 즐기는 것을 제거하여
부처님을 가벼이 교만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게 하고
돈독하게 믿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게 하고
016_1260_a_07L論曰
由正事究竟
爲除樂涅槃
令捨輕慢佛
發起渴仰心

신(身)을 지향하여 정진하게 하며
빠르게 성숙하게 하기 위해
모든 부처님께서는 화신에 있어서
한결같이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016_1260_a_09L令向身精進
及爲速成熟
諸佛於化身
許非一向住

【釋】여래께서는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 보여야 할 것이다.
016_1260_a_10L釋曰如來不永般涅槃今當顯示此義
【論】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발원하고 수행함으로 말미암아 위없는 보리를 찾아 구하지만, 한결같이 열반에 든다는 이러한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釋】여래께서는 예전에 원락지(願樂地) 가운데 있어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든 수승한 원을 일으키고 위없는 보리를 구한다. 견(見) 등의 위계에 있어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모든 수승한 행을 닦아서 위없는 보리를 찾는다. 만약 지극한 과(果)를 얻어서 중생을 버리고 열반에 든다고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다. 왜냐 하면
016_1260_a_11L論曰爲度一切衆生由發願及修行尋求無上菩提一向般涅槃此事不應道理釋曰如來昔在願樂地中爲度衆生發諸勝願求無上菩提見等位中爲度衆生修諸勝行尋無上菩提若得極果而捨衆生般涅槃不應道理何以故
016_1260_b_01L【論】본래의 원과 수행과 서로 어긋나는 과는 없기 때문이다.
【釋】보살은 예전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발원하고 수행하여, 자신으로 하여금 장차 항상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게 한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곧 원(願)과 행(行)의 과이다. 이제 지극한 과를 얻어서 만약 중생을 버리고 영원히 열반에 든다면 곧 발원과 수행의 본래의 의도를 어기고, 원과 행이 단지 스스로를 이익되게 하는 과만이 있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과가 없다. 여래께서는 영원히 열반에 들지는 않음으로 해서 서로 응하여 과가 있다.
016_1260_a_18L論曰本願及修相違無果故釋曰菩薩昔爲度衆生發願及修行令我當來常能利益一切衆生利益衆生卽願行果得極果若棄捨衆生永般涅槃則違發願修行本意願行但有自利益果無利益他果由如來不永般涅槃故相應有果
【論】또한 수용신과 변화신은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머무는 법으로써 신을 삼는가?
【釋】만약 여래께서 영원히 열반에 들지는 않는다면 곧 여래께서는 항상 머무는 법으로써 신을 삼으니, 수용신과 변화신은 당연히 무상(無常)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항상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다시 항상 머무는 법으로써 신을 삼는다고 말하는가?
016_1260_b_02L論曰復次受用身及變化身無常故云何諸佛以常住法爲身釋曰若如來不永般涅槃如來以常住法爲身受用身及變化不應是無常若是無常云何復言以常住法爲身
【論】응신과 화신은 항상 법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釋】법신은 두 가지 신의 근본이다. 근본이 이미 항상 머물며, 말단은 근본에 의지하여 서로 이어져 항상 존재한다. 따라서 말단도 역시 항상 머문다.
016_1260_b_07L論曰由應身及化恒依止法身故釋曰法身爲二身本本旣常住末依於本相續恒在故末亦常住
【論】응신으로 말미암아 버리고 떠나지 않기 때문이며,
【釋】여래의 스스로의 원만한 덕과 모든 보살을 이익되게 하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여래와 더불어 항상 서로 떠나지 않는다. 이 두 가지 일은 곧 응신이다. 따라서 당연히 항상 머문다.
016_1260_b_10L論曰由應身無捨離釋曰如來自圓德及利益諸菩此二事與如來恒不相離此二事卽是應身故應常住
【論】화신으로 말미암아 거듭 일어나 드러나기 때문이다.
【釋】화신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생사가 다할 때까지 한 찰나의 시간에도 서로 이어지지 않음이 없이 위없는 보리를 얻는 것과 열반에 드는 것을 내보여 드러낸다. 왜냐 하면 제도되어야 할 중생이 항상 있고, 여래의 큰 연민[大悲]이 쉬거나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신도 역시 항상 머무는 것이다.
016_1260_b_13L論曰由化身數起現故釋曰化身爲度衆生至窮生死際無一剎那時不相續現得無上菩提及般涅槃何以故度衆生恒有如來大悲無休廢故故化身亦是常住
【論】항상 즐거움을 받고 항상 음식을 베풀 듯이 두 가지 신은 항상 머문다는 것을 이와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釋】두 가지 신이 항상 머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이 두 가지 일을 인용하여 비유로 삼는다. 마치 세간에서 이 사람은 항상 즐거움을 받고 이 사람은 항상 음식을 베푼다고 말하지만, 즐거움을 받는 것과 음식을 베푸는 두 가지 일이 간격이 없지 않은데도, 이것을 말하여 항상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근본과 사(事)의 두 가지 의미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일컫게 된다. 두 가지 신도 역시 이러하다. 근본과 사(事)의 두 가지 정의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머문다고 말한다.
016_1260_b_18L論曰如恒受樂如恒施食二身常住應如此知釋曰爲顯二身常住故引此二事爲如世閒說此人恒受樂此人恒施非受樂施食二事無閒名之爲恒由本及事二義不斷故名爲恒二身亦爾由本及事二義不斷故名常住
016_1260_c_01L【論】만약 법신이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차별이 없고 세어 헤아릴 수 없다고 하더라도
【釋】만약 법신이 시작함이 없는 때로부터 본래 있어서 모든 중생에 있어서 차별이 없고, 헤아릴 수 없으며, 모든 부처님께서는 법신으로 말미암아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수승한 공능을 모두 갖추었다면, 중생이 법신을 얻기 위해 정진하여 도를 닦는 것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016_1260_b_24L論曰若法身無始時無差別無數量釋曰若法身無始本有於一切衆生無差別不可度量諸佛由法身於利益他事具足勝能衆生爲得法身用精進修道
【論】법신을 얻기 위한 공용을 짓지 아니하여서는 안 된다.
【釋】비록 이렇다고 하더라도 공용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된다. 자연히 증득하는 법신은 없기 때문이다.
016_1260_c_05L論曰爲得法身不應不作功用釋曰雖爾不應不作功無自然證得法身故
【論】가 가운데 게송으로 읊는다.
【釋】이러한 힐난을 풀기 위해서 게송으로 읊는다.
016_1260_c_07L論曰此中說偈釋曰爲釋此難是故說偈

【論】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평등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이 원인을 중생이 힘써 닦지 않는다면
증득은 항상 원인을 이루지 않으며
바른 원인을 끊어 제거하니, 도리에 맞지 않다.
016_1260_c_08L論曰
諸佛證得等無量
是因衆生若捨勤
證得恒時不成因
斷除正因不應理

【論】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평등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이 원인을
【釋】과거와 현재의 부처님께서는 법신을 증득하셨다. 증득함에는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하고, 얻어진 공덕은 한도를 정하지 않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증득은 중생이 구하여 얻는 법신이며, 정근(正勤)의 인(因)이다.
016_1260_c_11L諸佛證得等無量是因釋曰過去現在佛證得法身證得無高下故言平等所得功德無定齊限故言無量如此證得是衆生求得法身正勤之因
【論】중생이 만약 정근을 버린다면
【釋】이러한 증득이 만약 중생이 정근을 버리는 인이라고 한다면 앞에서 계교한 것처럼 반드시 스스로 정근을 짓지 않아야 한다. 타인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제[度]이기 때문이다.
016_1260_c_15L論曰衆生若捨勤釋曰此證得若是衆生捨正勤因如前所計不須自作正勤由他得度故
【論】증득은 항상 인을 이루지 않으며,
【釋】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법신은 모두 있으니, 스스로의 정근을 떠난다고 하더라도 이 증득은 스스로 증득하는 인을 이루지 않는다. 왜냐 하면 만약 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전부터 다시 범부가 없고, 모두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러한 정의는 없으니, 따라서 비록 증득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인을 이루지 않는다.
016_1260_c_18L論曰證得恒時不成因釋曰諸佛證得法身一切是有若離自正勤此證得則不成自證得因何以故若是因者從昔以來無復凡夫皆由他得度故旣無此義是故雖有證得不成自因
016_1261_a_01L【論】바른 원인을 끊어 제거하니, 도리에 맞지 않다.
【釋】정근이 증득함과 상응하는 것이 바른 원인이라고 한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끊어 제거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다. 또한 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방편의 인이고, 둘째는 바른 인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것은 방편이니, 타인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근을 닦는 것이 바른 인이 된다. 자신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바른 인을 끊어 제거하고 방편인에 머문다면 이러한 일은 도리에 맞지 않다. 스스로 원하던 것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보살에 있어서 자비로 장엄하게 꾸밈이 서로 이어져서 중생에 대하여 사랑으로 생각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모든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남이 짓거나 짓지 않거나 간에 나는 반드시 지어야 한다. 만약 중생이 보살의 마음에 응하여 정근을 짓지 않는다면 보살의 이익된다는 정의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정근은 법신을 증득하는 첫 번째의 바른 인이다. 이러한 원인은 끊어 제거할 수 없으니, 만약 이러한 인을 끊어 제거한다면 남으로 말미암아 법신을 얻는다는 이러한 처(處)는 없다.
016_1260_c_23L論曰除正因不應理釋曰正勤與證得相應名正因若斷除此二則不應道復次因有二種一方便因二正因諸佛證得爲方便因以屬他故自修正勤爲正因以依自身故若斷除正因留方便因此事不應道理以不能成就自所願故復次有諸菩薩慈悲莊飾相續於衆生起愛念心皆如子想不作此意是衆生利益事願他作我不作常作是意若他或作或不作必應作若衆生不應菩薩心作正勤無得菩薩利益義是故正勤是證得法身第一正因此因不可斷除若斷除此因由他得法身無有是處
【論】아비달마대승장경(阿毘達磨大乘藏經) 가운데 섭대승(攝大乘)이라고 한다. 이것은 궁극[究竟]을 바르게 설한다.
016_1261_a_13L論曰阿毘達磨大乘藏經中名攝大此正說究竟

부처님의 말씀과 도리에 의거하여
논을 설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청정을 얻게 되고
지혜를 믿고 바르게 행하는 사람에게 이익이 되며,
바른 법을 세우게 되어 오래 머무르게 하네.
016_1261_a_15L由依佛言及道理
說論爲自得淸淨
爲利智信正行人
爲立正法令久住

등불과 번개 그리고 보배로운 태양과 달의 빛으로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많은 색(色)을 보는 것과 같고
지혜와 자비 그리고 세 가지 해(解)에 의해
존자께서 깨달아 논을 설하신 것도 역시 이러하다.
016_1261_a_17L依燈電寶日月光
如淨眼人見衆色
依具智悲三解尊
通達說論亦復爾

만약 진실한 실체적 대상[義]이 교법(敎法)의 문구와 상응한다면
피(皮)와 육(肉)과 심(心)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으니
모든 열반을 드러내는 도의 공덕
이것이 성스러운 말씀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니다.
016_1261_a_19L若眞實義應法句
能除皮肉心煩惱
能顯涅槃道功德
此是聖言餘悉非

만약 어지러운 마음의 사람이 이러한 설법을 행하여
부처를 드러낼 수 있다면, 이 위없는 스승은
열반의 도의 자량을 좇아 따르므로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이 이 말씀에 엎드려 절한다.
016_1261_a_21L若亂心人作是說
能顯佛是無上師
隨順涅槃道資糧
頂戴此言如佛教

세간의 지혜롭지 못한 사람도 부처님보다 뛰어날 수 있어서
지혜를 갖추고 진리를 통달하여 남음이 없으며
이러한 부처는 스스로 교법을 요달하여 흔들릴 수 없지만,
만약 정법에 어긋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좇을 지라도 비방하네.
016_1261_a_23L世無慧人能勝佛
具智通眞理無餘
是佛自了法叵動
若違正法由佛教
016_1261_b_01L
성인(聖人)과 바른 법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의 견집(見執)에 의해 행하여지는 것,
이것들에서 생하는 지혜로 세 가지 염오를 떠나니
마치 옷이 더러움을 받아도 깨끗하여 때가 묻지 않는 것과 같다.
016_1261_b_01L若謗聖人及正法
迷人見執之所作
於此生智離三污
如衣受染淨非垢

지혜에 어두운 사람은 믿음과 하얀 법이 없으니
삿되고 교만한 가르침의 재앙을 깨닫지 못하고 집착한다.
이익을 탐하고 삿된 견해를 받드는 교법은
수승한 교법을 원망하고 떠나며, 하열한 원(願)으로 바른 교법을 비방한다.
016_1261_b_03L智鈍離信及白法
邪慢法災不了執
貪利邪見事法怨
離勝下願謗正法

불ㆍ뱀ㆍ원망ㆍ벽력(霹靂)에 대하여서도
교법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할지언정 이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 등은 단지 세간의 명(命)을 끊을 따름이니,
틈이 없이 두려워할 수 있다는 것은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016_1261_b_05L於火蛇怨及霹靂
法傷可畏此非畏
火等但斷世閒命
無閒可畏不由此

만약 사람이 거듭 모든 나쁜 벗을 받든다면
사견과 다섯 가지 거역함은 선근을 끊으니,
교법을 사유하여 틈이 없는 고통을 속히 떠나야 한다.
법을 비방한다면 무슨 원인[因]으로 해탈을 얻을 것인가?
016_1261_b_07L若人數事諸惡友
邪見五逆斷善根
思法速離無閒苦
謗法何因得解脫

많은 보배로운 계(界)는 깨달음과 덕의 업과 같으니
내가 설한 구절의 의미에 의해 생하여진 선(善),
이것으로 인하여 모두 미타(彌陀)를 보기를 원하며,
청정한 혜안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정각을 이루소서.
016_1261_b_09L衆寶界如覺德業
我說句義所生善
因此願悉見彌陁
由得淨眼成正覺

이와 같은 열 구의 게송의 총체적인 의미, 이러한 총체적인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거듭 세 구의 게송을 읊는다.
016_1261_b_11L如此十偈摠義爲顯此摠義重說三偈

이것으로부터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이것으로 말미암아 설하여지니,
이 흘러흘러 설한 네 구의 게송은
앞의 다섯 가지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016_1261_b_12L從此及爲此
由此是所說
此流說四偈
爲顯前五義

자신을 지키는 방편
이러한 연유로 두 구의 게송을 설하고
법의 인(因)을 걱정하여 하나를 설하고
법의 과(果)를 걱정하여 둘을 설한다.
016_1261_b_14L守自身方便
是故說二偈
傷法因說一
傷法果說二

크게 모인 법인에 이르러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니
이 세 가지 법을 간략하게 밝히니
거듭 수승한 과를 설함이다.
016_1261_b_15L至大集法忍
證無上菩提
略明此三法
是重說勝果

삼장법사께서 번역하여 강론할 지경에 이 세 게송을 읊는다.
016_1261_b_16L三藏法師翻講論竟說此三偈

만약 논을 사량하여 의미를 요달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삼보를 믿고
지혜와 믿음의 두 근으로 말미암아
진여관(眞如觀)에 들어갈 수 있다.
016_1261_b_17L若思了義論
智人信三寶
由智信二根
得入眞如觀

따라서 나는 본 기록에 의거하여
섭대승을 번역하고 풀이하여
두루 생하여지는 공덕은
회향하여 세 가지 공능이 되니,
016_1261_b_19L故我依本記
飜解攝大乘
凡所生功德
迴向爲三能

부처님과 가르침과 스님께 공양하옵니다.
삿된 생의 사람을 항복시켜
많은 고통과 재난을 뽑아내어 구제하는
이러한 공능이 무궁하기를 원하옵니다.
016_1261_b_20L供養佛法僧
降伏邪行者
救拔衆苦難
願此能無窮
攝大乘論釋卷第十五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musāra의 음사(音寫). 모사라(牟娑羅)라고도 한다. 호박이라는 보물을 말한다.
  2. 2)indranīla의 음사. 사파이어 종류의 보석을 말한다.
  3. 3)yojana의 음사. 인도의 길이의 단위이며, 삼십 리(里) 또는, 사십 리라고도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4. 4)garuḍa의 음사(音寫). 가상의 커다란 새.
  5. 5)차별적 대상성인 형상(形相)을 말한다.
  6. 6)인식 주관의 무자성(無自性)과 인식현상의 무자성을 말한다.
  7. 7)현장 역에는 잠시 친견할 때에[於暫見時]라고 번역되어 있다. ‘마주치기만 하여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8. 8)부처님의 3도(導)를 설명하는 것 가운데 여의성도(如意成導)를 말하고 있다(『아비달마구사석론』, 진제 역, 대정장 31권, p. 294 a 참조). 현장 역에서는 신변시도(神變示導)라고 번역하고 있다.
  9. 9)기심(記心)은 범어로는 ādeśanā로 마음을 읽어 식별하는 것을 말한다. 현장 역에서는 기심시도라고 번역하며, 범어로는 ādeśanā-pratihārya이다.
  10. 10)현장 역에서는 교계시도(敎誡示導)라고 번역하고 있다.
  11. 11)4성제(聖諦) 중 집제를 말한다.
  12. 12)근(根)을 위계에 따라 작용하는 양상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한 분류이다. 미지욕지근은 견제(見諦)에 있어서 혹을 없애는 가운데서 증상(增上)하는 것을 말하며, 지근(知根)은 도를 닦음에 있어서 혹을 없애는 가운데서 증상하는 것을 말하고, 지이근(知已根)은 현세의 안락함에 머무는 가운데 증상하는 것을 말한다(앞의 책, p.173 c 참조).
  13. 13)난위(煖位)의 선근이 하품ㆍ중품ㆍ상품으로 점차 증장하여 원만하여져서 생하게 되는 선근을 정법(頂法)이라고 한다. “이 정법은 움직이는 선근 가운데서는 가장 수승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에 정(頂)이라 하고, 수행함에 있어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산꼭대기와 같다고 하여 정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앞의 책, p.119 b 참조).
  14. 14)“정법(頂法)의 선근이 하품ㆍ중품ㆍ상품으로 점차 증장하여 원만하여져서 생하는 선근을 인법이라 하고, 4제의 이치에서 인가할 수 있는 가장 수승한 것이기 때문에 인(忍)이라 하고, 물러나 타락함이 없기 때문에 인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앞의 책, p.119 c 참조).
  15. 15)앞에서 주석하였듯이 인식작용의 과정에서 대상을 정립하는 형성작용이다.
  16. 16)뒤에 육십사방토이서(六十四方土異書)의 주석 참조.
  17. 17)mudrā. 밀인(密印) 또는 계인(契印)이라고 한역한다. 표식의 뜻으로 도장을 찍는다든지, 내면적인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한 유형ㆍ무형의 표시를 말하기도 하고, 좌선의 자세에서 손을 놓는 방식을 말하기도 한다.
  18. 18)고대 인도에서 행하여진 예순네 종류의 방언으로 만들어진 책들을 말한다.
  19. 19)도장(圖章) 같은 물건을 말한다.
  20. 20)64예(藝) 또는 64기(技)라고 한다. 예순네 가지 기예를 말한다.
  21. 21)18대경(大經)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베다[皮陀, veda]와 6론 그리고 8론을 말한다.
  22. 22)koṭi. 변제(邊際)ㆍ우수(優秀)ㆍ천만(千萬) 등의 의미.
  23. 23)jambu-dvipa. 수미산의 남쪽에 있다는 대륙. 사바세계.
  24. 24)고려대장경에는 여사불이고(與巳不異故)로 되어 있으며, 대정장(大正藏)에는 여이불이고(與已不異故)로 되어 있다. 의미상으로는 사(巳)나 이(已)를 기(己)로 바꾸어서 ‘자기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계교하기 때문에’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