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論卷第六

ABC_IT_K0593_T_006
017_0036_c_01L
섭대승론석론 제6권
017_0036_c_01L攝大乘論釋論卷第六


세친 지음
수 천축삼장 급다ㆍ행구 등 한역
김묘주 번역
017_0036_c_02L世親菩薩造
隋天竺三藏笈多共行矩等譯


3. 입응지승상승어(入應知勝相勝語)
017_0036_c_04L入應知勝相勝語第三

【論】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應知相]을 말하였다.1)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들어감[入應知相]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다문훈습(多聞熏習)의 의지처이고, 아리야식이 포섭하는 바는 아니다. 아리야식이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다. 바른 사유에 포섭되는 바로서 법으로 사현[似]하고 의미로 사현하며 인식대상의 사물로 사현하고, 유견식(有見識)인 생각 속의 언어[意言]2)이다.
017_0036_c_05L論曰:如此已說應知相,入應知相,云何可見?多聞所熏習依止,非阿梨耶所攝,如阿梨耶成種子.正思惟所攝,似法似義所生,似所取物,有見意言.
【釋】이와 같은 부류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들어가야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들어감이 다문훈습을 의지처로 삼는다’는 것은 대승법이 훈습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야식이 포섭하는 바가 아니다’라는 것은 아리야식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아리야식의 종자를 이루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아리야식이 잡염법의 원인이 되듯이, 이것이 청정법의 원인이 됨도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바른 사유에 포섭된다’는 것은 바른 사유의 자성이기 때문이다. ‘법으로 사현하고 의미로 사현한다’는 것은 법과 의미의 양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식대상의 사물로 사현한다’는 것은 빛깔 등의 자체와 같기 때문이다. ‘유견식’은 또한 견분의 자체로 사현하기 때문이다. 곧 상식(相識)과 견식(見識) 두 가지 식이 성립한다.
017_0036_c_09L釋曰:如此等,應知相如應得入,顯示此故,入應知相.多聞熏習,爲依止者,謂大乘法所熏身故.非阿梨耶所攝者,謂對治阿梨耶識故.如阿梨耶識成種子者,如阿梨耶識,爲染法因,此爲淨法因亦爾故.正思惟所攝者,謂正思惟自性故.似法似義所生者,謂爲法義相而生故.似所取物者,謂如色等體故,有見者,亦似見體故,卽是成立相及見二識.
【論】여기서 어떤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가?3) 대승의 다문훈습이 상속하고,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친견할 수 있으며, 한결같이 믿고 이해하며 선근을 잘 쌓기 때문에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구족한 보살이다.
017_0036_c_19L論曰:於中何人,能入應知相?大乘多聞熏習相續已故,得親近無量出世諸佛故,一向信解善集善根故,善滿足福智資糧諸菩薩.
017_0037_a_01L【釋】어떤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능히 깨달아 들어가는가? 이와 같은 상속 중에서 모든 방편에 들어감을 이제 나타내 보여야 한다. ‘대승의 다문훈습’이란 성문승 등이 갖는 다문훈습을 가려내기 위해서이다.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에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심에 다 현전하여 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믿고 이해한다’는 것은 대승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믿고 이해하여 악한 벗이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바로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인연4) 중에서 선근을 잘 쌓았기 때문에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쌓은 보살이라고 이름한다.
017_0037_a_01L釋曰:何人能入應知相者,如此相類中,若入所有方便,今當顯示.大乘多聞所熏者,爲離聲聞乘等多聞故.得親近無量出世諸佛者,過數量諸佛出世,皆得現前親近故.一向信解者,於大乘中,決定信解,不爲惡知識之所動壞故.卽此次前所說三因緣中,善集善根故,名爲善集福智資糧菩薩.
또한 복덕과 지혜의 자량은 어떻게 차례로 원만해질 수 있는가? 원인의 세력ㆍ착한 벗의 힘ㆍ사유의 힘ㆍ의지처의 세력에 의해서이다. 여기서 앞의 두 문구는 두 가지 세력이며, 그 숫자대로 알아야 한다.5) 그 바른 사유의 힘은 곧 한결같이 믿고 이해함이다. 이것은 대승의 훈습을 원인으로 삼는다. 이 한결같이 믿고 이해함은 곧 바른 행을 수행함이다. 바른 행을 수행함으로 써 선근을 쌓을 수 있다. 이 바른 사유의 힘에 의해서 선을 얻고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구족한다. 이런 순서가 있다.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구족함으로써 보살의 초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 의지처의 세력이다.
017_0037_a_10L復次福智資糧,云何得次第滿足?由因力`善友力`思惟力,依持力故.於中前二句爲二力,如其數應知.彼正思惟力,卽是一向信解,此以大乘熏習爲因,此一向信解,卽是修行正行,由修行正行故,則得聚集善根,由此正思惟力故,得善具足福智資糧.有此次第,由此善具足福智資糧故,得入菩薩初地,此是依持力.
【論】어떤 곳에 깨달아 들어가는가? 그 유견식이 법으로 사현하고 의미로 사현한 생각 속의 언어[意言]에 대해서 대승법의 양상이 일으킨 바이기 때문이다.
017_0037_a_18L論曰:於何處入?卽於彼有見,似法及義意言,大乘法相所生中故.
【釋】이와 같은 양상에 들어가고 이러한 행의 양상에 들어감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의식의 분별6)을 ‘생각 속의 언어[意言]’라고 부른다. 이 생각 속의 언어의 종류는 대승의 법을 원인으로 삼아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대승법의 양상이 일으킨 바라는 것’은 설해진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다.
017_0037_a_20L釋曰:入如是相,此入行相,今當顯示.意地分別名意言,此意言種類,以大乘法爲因生故.大乘法相所生者,攀緣所說法故.
017_0037_b_01L【論】믿고 이해하는 지위[信解地]7)ㆍ견도ㆍ수도ㆍ구경도이다.8) 일체법은 오직 식(識)임을 듣고서 믿고 이해하기 때문이고,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며,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고,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017_0037_b_01L論曰:信解行地中,見道中修道中,究竟道中,一切法唯識,隨聞信解故,如理通達故`對治一切障故,無障㝵故.
【釋】어떤 곳에 깨달아 들어가는가? 믿고 이해하는 지위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일체법은 오직 식뿐임을 듣는 것만으로도 매우 뛰어난 믿음과 이해를 일으킴을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견도9) 가운데 깨달아 들어감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이치 그대로 통달한다’는 것은, 생각 속의 언어의 분별에 대해서 이치 그대로 통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치 그대로 통달하는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주체도 없고, 인식대상도 없다. 만일 이렇게 하면 ‘생각 속의 언어의 분별을 통달한다’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수도10) 중에 깨달아 들어감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리기 때문’이란, 이 생각 속의 언어가 법이 아니고, 의미가 아니며, 인식주체도 없고, 인식대상도 없다고 관찰할 때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린다. 이것을 ‘수도 중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한다.
구경도11) 가운데 깨달아 들어감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장애가 없기 때문’이란 가장 청정한 지혜에 안주하기 때문이고, 가장 미세한 장애도 소멸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경도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한다.
017_0037_b_04L釋曰:何處得入?於信解地中得入,由但聞一切法,唯有識,卽起增上信解,名爲得入故.於見道中得入,今當顯示.如理通達者,於意言分別中,如理通達故.云何如理通達?非法非義,無能取無所取,若如此名通達意言分別故.於修道中得入,今當顯示.對治一切障故者,觀此意言,非法非義,無能取無所取時,能對治一切障,此名修道中得入.究竟道中得入,今當顯示.無障㝵故者,住最淸淨智處故,最微細障滅故,名究竟道中得入故.
【論】어떤 인연으로 깨달아 들어가는가? 선근의 힘을 지니기 때문이다. 세 가지로 마음을 연마하기 때문이고, 네 곳을 끊기 때문이며, 법과 의미를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고, 사마타ㆍ위빠사나로 항상 바른 수행을 닦고 방일 등이 없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세계의 수많은 인간세계의 중생은 찰나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르게 깨친다. 이것을 첫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이라고 한다.
017_0037_b_16L論曰:何緣得入?善根力持故`三種練治心故`滅除四處故`法義爲所緣故`奢摩他毘鉢舍那,常修正修,無放逸等故.無量世界中,無量人道衆生,剎那剎那,正覺阿耨多羅三藐三菩提,是爲第一練治心.
017_0037_c_01L【釋】무슨 인연으로 깨달아 들어가는가? 말한 바와 같이 선근의 힘을 지니는 것 등 여덟 가지 상응이 있다. 여기서 ‘항상 닦는다’는 것은 언제나 행하기 때문이다. ‘잘 닦는다’는 것은 공경히 행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렇게 상속하면 방일하지 않는다.
여기서 세 가지 퇴굴심을 다스리기 때문에 세 가지 연마하는 마음이 있다.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가장 심오하고 광대하여 증득하기 어렵다고 듣고서 마음이 문득 퇴굴한다.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첫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이 있게 된다. 또한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두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이 있게 된다.
017_0037_b_22L釋曰:何緣得入?如所說善根力持等,有八處相應.於中若常修者,一切時作故.善修者,恭敬作故.若作如此相類,卽是不放逸,於中對治三種退屈心故.有三種練治心,菩薩聞阿耨多羅三藐三菩提,第一甚深寬大難可證得,心則退屈.爲對治此故,有第一練治心云云.又云云故,有第二練治心.
【論】노력하는 마음[專心]으로써 능히 보시 등 여러 바라밀을 행하고 “나는 이미 이 노력하는 마음을 얻었다. 이것에 의해 나는 노력하여 모든 바라밀을 닦아서 장차 원만해진다”고 한다. 이것이 두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이다.
017_0037_c_07L論曰:由專心故,能行施等,諸波羅蜜.我已得此專心,由此故我修諸波羅蜜,當得圓滿,不足爲難.是爲第二練治心.
【釋】‘이런 의욕으로 인하여 보시 등 바라밀이 현행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의욕’은 믿음과 욕구를 말한다. 보살은 바라밀에 대해서 믿고 안다. 참존재이기 때문이고, 공덕이기 때문이며,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살의 믿음이다. 믿음에 의해서 기쁘게 수행함을 의욕이라고 부른다. 보살은 이 믿음과 의욕을 얻음으로써 6바라밀을 수행하여 나아가고 원만해지고 어려움이 없게 된다.
017_0037_c_11L釋曰:由此意故,施等波羅蜜,卽得現行者,於中意者,謂信及欲.菩薩於波羅蜜中,信知實有故`功德故`可得故.此是菩薩信,由信故,喜樂修行名欲,菩薩得此信欲意故,修行六波羅蜜,進趣圓滿不以爲難.
【論】비록 그 장애가 있는 선이라도 선법을 구족하면, 목숨이 다할 때에 생각하는 바에 따라 모든 것이 신체에 구족되고 그때 태어난다. “하물며 나에게는 이 가장 뛰어난 선과 장애 없는 선이 있어서, 그때 일체를 구족하는데 이것을 어찌 얻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면, 이것이 세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37_c_17L論曰:雖彼有㝵善者,善法具足已,卽於死時,隨所念欲,一切具足身,彼時得生況我此最勝善無㝵善,於彼時,一切具足,何爲不得!是名第三練治心.此中有偈:

인간세계에 머물면서
한량없는 중생들이
찰나마다 깨달음을 증득하네.
그러므로 퇴굴심을 없애도다.
017_0037_c_22L在於人道中,
無量諸衆生,
念念得菩提,
故除退屈心.
017_0038_a_01L
착한 사람은 의욕을 기울여서
능히 보시 등을 행하네.
뛰어난 사람은 이 의욕을 얻고
또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네.
017_0038_a_01L善心人專意,
能行布施等,
勝人得此意,
亦能行施等.

착한 이는 죽을 때에
마음에 따라 과보를 얻네.
이미 적멸 지위의 선이니
어찌 과보가 없겠는가?
017_0038_a_02L善人於死時,
隨心得果報,
旣有滅位善,
果報云何無!

【釋】또한 보살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관찰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증득하기 어렵다. 한순간의 마음을 단절하여12) 비로소 증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문득 퇴굴한다.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닦는다.
017_0038_a_03L釋曰:復次菩薩於諸佛,甚深寬大言教中,起推尋時,作思念:阿耨多羅三藐三菩提難可證得,一剎那心斷已乃得.卽生退屈.爲對治此故,修第三練治心.
‘하물며 나에게는 이 가장 뛰어난 선이 있는데’라는 것은 “하물며 나는 열 가지 모든 지위에서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잘 구족하였는데”라고 하기 때문이다. ‘장애가 없는 선’이란 다음과 같다. 마음의 번뇌가 미세하여 없애기 어려운데, 마치 금강삼마제가 능히 이 장애를 없애는 것과 같다. 이 삼마제 이후에 모든 장애를 벗어나고 의지처가 전환된다. ‘이것을 어찌 얻지 못하겠는가?’라는 것은 장애를 벗어나서 죽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체가 구족된다’는 것은 일체를 아는 지혜[一切種智]를 얻기 때문이다.13)
017_0038_a_08L況我此最勝善者,況我於一切十地中,善具足福智資糧故.無障㝵善者,謂心煩惱微細,難破如金剛,三摩提能破此障,此三摩提後出離一切障㝵,依止轉已,於此云何不得?此顯出離障㝵,與死無異故.一切具足者,謂得一切種智故.
017_0038_b_01L‘선근의 힘을 지니기 때문에 세 가지로 마음을 연마함’은 선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 힘에 의해서 세 가지로 마음을 연마해서 퇴굴하지 않는다. 여기서 ‘두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연마되는 그대로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이런 생각에 의해서 모든 장애를 떠나고, 인색 등 바라밀의 장애가 없기 때문에 바라밀을 구족하고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 구족에 의해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세 번째로 마음을 연마함’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여기서 ‘장애가 있는 선’이란 세간의 선이기 때문에 장애가 있는 선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장애 없는 선에 의한다. 이 선이 부처를 이루지 못한다는 일은 없다”고 한다. 이런 의미를 게송으로 나타낸다.
게송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퇴굴심을 없애도다’라는 것은, 이른바 열등한 마음에 머물러서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착한 마음’이란 악하거나 무기(無記)의 마음이 아니다. 무기심으로 보시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산란되고 거만한 마음으로 보시를 행하고, 외도 등은 불선심으로써 보시를 행하기도 한다.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한다는 것은 이 선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뛰어난 사람은 이 의욕을 얻고 또한 능히 보시 등을 수행하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마음을 전념할 때 이러한 양상이 있고, ‘능히 보시 등 6바라밀을 수행한다’는 것은 인색 등의 장애를 소멸한 마음을 얻음을 말한다. ‘뛰어난 사람’이란 최상이기 때문이고 보살을 가리킨다. ‘보시 등’이란 지계 및 지혜 바라밀 등을 포함한다.
‘마음에 따라 과보를 얻는다’는 것은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의 과보를 얻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적멸의 선’이란 장애를 멸했기 때문이다. ‘어찌 과보가 없겠는가?’는 불신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017_0038_a_14L善根力持故,三種練治心者,善根不薄少故,菩薩由有此力,則能三種練治心,令不退屈.於中第二練治心,如所練治,今當顯示.由此念故,離諸障㝵,慳等波羅蜜障無故,滿足波羅蜜,不以爲難,由此滿足故,得成菩提.第三練治心,今當顯示.於中有㝵善者,謂世閒善故,名爲有㝵善.我此無㝵善,此善不得成佛,無有是處,此義以偈顯示.偈言故,除退屈心者,謂不令下劣心得住,云我不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善心者,謂非惡無記心故.由有無記施故,如有人散漫心行施,外道等以不善心行施.又復求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此善最勝勝,人得此意.亦能行施等者,於中得專心時,有如是相,能修施等,六波羅蜜,謂得滅慳等障㝵心.勝人者,最上故,謂諸菩薩.施等者,謂攝取戒,及智波羅蜜等.隨心得果報者,乃至得非想非非想處果報故.滅善者,滅障㝵故.果報云何無者,謂得佛身故.
【論】성문ㆍ벽지불의 사유를 멀리 떠남으로써 사유가 소멸된다. 대승에 대해서 모든 의심이 없기 때문에 삿된 생각과 의심이 소멸된다. 듣고 사유한 법에 대해서 나ㆍ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여읨으로써 법집(法執)이 소멸된다. 현재 눈앞에 머물러서 안립한 모든 양상을 사유하되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분별이 소멸된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38_b_13L論曰:遠離聲聞,辟支佛思惟故,思惟則滅於大乘中,一切疑無疑故,邪意及疑則滅於聞思法中,離我`我所執故,法執則滅.現前住安立一切相,思惟不分別故,則滅分別.此中有偈:

안립하고 자연히 머물러서
현재 눈앞에 있는 모든 양상
일체를 분별하지 않으므로
지혜로운 이는 뛰어난 깨달음을 얻네.
017_0038_b_18L立及自住,
所有現前相,
一切不分別,
智人得勝覺.
017_0038_c_01L
【釋】본 논서에서는 네 곳[四處]의 소멸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사유를 소멸한다’는 것은 성문 등의 사유를 소멸하기 때문이다. ‘삿된 생각과 의심이 소멸된다’는 것은 대승의 매우 심오하고 광대한 법에 대해서 삿된 생각과 의심이 마땅히 제거되기 때문이다. ‘삿된 생각’이란 비방하는 생각과 마음의 동요를 말하고, ‘미혹’은 의심이기 때문이다.
‘모든 의심이 없기 때문에’는 이 대승법에 대해서 법상을 안립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일체법은 자성이 없고 생겨남도 없고 소멸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열반이다. 이처럼 일체법은 실재가 없는 문(門)이다. 이것은 분별성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만일 요술ㆍ아지랑이ㆍ꿈ㆍ그림자ㆍ영상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라고 말하면, 이것은 의타성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만약 진여ㆍ실제ㆍ무형상ㆍ제일의제(第一義諦)ㆍ법계ㆍ공 등의 문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성취성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법에 대해서 삿된 생각과 의심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017_0038_b_20L釋曰:此中論本爲顯四處滅故.於中滅思惟者,謂滅聲聞等思惟故.邪意及疑滅者,謂於大乘甚深寬大法中,邪意及疑應滅除故.邪意者,誹嫌意及心動搖.惑者,疑心故.一切疑無疑故者,於此大乘中,爲安立法相故,說有三性,所謂一切法無性`無生無滅`本來靜寂`自性涅槃.如是等,一切法無所有門,此就分別性故.若說幻`焰`夢`光`影`像`響`水月`變化,此就依他性故.若說眞如`實際`無相`第一義`法界`空等門,此依成就性故.於此諸法中,一切邪意及惑不生故.
‘듣고 사유한 법에 대해서 나ㆍ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여읜다’는 것은 법집을 없앰을 나타낸다.14) ‘법집을 없앤다’는 것은 법에 대해서 듣거나 사유함에 있어서 나ㆍ나의 것이라는 집착을 일으키지 않음을 말한다.
‘현재 눈앞에 머물러서 안립한 모든 양상을 사유하되 분별하지 않기 때문’이란 수행자가 무분별지혜를 닦을 때에 바르게 사유하는 지위에 머물러서 이러한 모든 적정한 마음의 분별을 없애는 것이다. 현재 눈앞에 빛깔 등과 골쇄(骨鎖)15) 등 적정한 마음이 안립한 모든 인식대상의 모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을 때를 무분별지혜의 방편에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만약 분별한다면 깨달아 들어갈 수 없다. 현재 눈앞에 안립한 게송은 최후의 적멸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017_0038_c_10L於聞思法,離我我所執故者,此中爲顯除滅法執故.滅除法執者,謂於法中,若聞若思,乃至不令我`我所得入故.現前住安立一切相,思惟不分別故者,謂行者修無分別智時,在正思惟位,滅此等一切寂靜心分別也.於現前住色等,及靜心所有安立骨鎖等,於此一切所緣相中,不念不分別時,名入無分別方便,若分別則不得入.此現前安立偈者,爲顯最後滅義故.
【論】무엇에 의거해서 들어가며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는가? 문훈습으로 생겨난 바른 사유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법과 대상으로 사현된 유견식(有見識)의 생각 속의 언어[意言]16)이다.
017_0038_c_20L論曰:因何入?云何入?聞熏習所生`正思惟所攝故,似法及義,顯現有見意言.
017_0039_a_01L【釋】여기서는 이것에 의거해서 들어가고 이렇게 깨달아 들어감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문훈습으로 생겨난 것’이란 문훈습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곧 이것은 도리에 들어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승의 문훈습으로 생겨난 것이다. 마땅히 알지니, 성취성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017_0038_c_23L釋曰:此中顯示以此入`如此入故.於中聞熏習所生者,聞熏習爲因故,卽此入道理.如前所說,卽是大乘聞熏習所生,應知成就性所攝故.
【論】네 가지 사색[求]17)이 있나니,18) 이른바 명칭ㆍ대상[義]ㆍ자성ㆍ차별의 가설을 사색한다.
017_0039_a_04L論曰:有四種求,謂名`義`自性`差別,假說相求.
【釋】여기서는 이렇게 깨달아 들어감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네 가지 사색은 본 논서에서 말했듯이, 명칭ㆍ대상ㆍ자성ㆍ차별 등을 말한다.
017_0039_a_06L釋曰:此中爲顯示,如此入故.四種求者,如論本說,謂名`義`自性`差別等所說.
【論】또한 네 가지 여실한 지혜가 있다. 명칭ㆍ사물[事]ㆍ자성ㆍ차별의 가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如實知]19)이다. 그것의 자성과 차별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위해서 수행한다. 그 글자와 대상으로 사현한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그 글자와 명칭은 오직 생각 속의 언어임을 알고, 이 명칭의 의지처인 대상도 역시 오직 생각 속의 언어임을 안다. 곧 그 명칭의 자성과 차별은 오직 가설임을 안다. 이때 오직 생각 속의 언어만이 있음을 깨닫는다. 곧 명칭과 대상의 자성과 차별의 가설에 대해서 자성과 차별의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가지 사색과 네 가지 여실한 지혜에 의거해서, 그 명칭과 대상으로 사현한 생각 속의 언어에 대해서 유식의 이치를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017_0039_a_09L論曰:復有四種如實知,謂名`事`自性`差別假相說中如實知,彼自性差別,不可得故.菩薩如是如實,爲入意言唯識故修行.於彼似字義意言中,知彼名字,唯是意言,知彼名所依義,亦唯意言,卽知彼名自性及差別,唯是假相說,是時證得唯有意言,則於名及義`自性`差別假相說中,不見有性差別義相故.由四種求,及四種如實知,於彼似名及義意言中,得入唯識.
017_0039_b_01L【釋】네 가지 여실한 지혜는 논서에서 말했듯이, 명칭ㆍ사물의 자성ㆍ차별의 가설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이다. 그 ‘자성과 차별이기 때문’이란 각각 자성과 차별이 있음은 이와 같은 가설이기 때문이다. ‘명칭의 자성과 차별의 가설’이란 의미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그 명칭의 자성과 차별은 오직 가설임을 안다’는 것은 그 명칭이 자성과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 명칭의 자성과 차별이 오직 가설임에 대해서 능히 인가하여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사색이라고 말하고, 얻을 수 없음을 아는 것을 여실한 지혜라고 한다.
017_0039_a_19L釋曰:四如實知者,如論說名`事`自性`差別假說中如實知.其自性及差別故者,謂各有自性`差別,作如是假說故,名自性`差別假說者,義不可得故,卽是知彼名`自性及差別,唯是假說者.以彼名字,無有自性,及差別故,卽能於彼名字`自性及差別,唯是假說中忍受故.若如是知是謂求,若知不可得,名爲如實知.
【論】이 유식관은 어떤 법에 깨달아 들어가며, 어떤 법으로써 들어가는가? 오직 인식방법[唯量]인 것에 들어가기 때문이고, 상분ㆍ견분을 두 가지로 삼아서 들어가기 때문이며, 갖가지 양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명칭과 사물의 자성과 차별이 다만 가립된다. 자성과 차별은 여섯 가지 일이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취착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자체가 머물기 때문이고, 동시에 갖가지 양상의 사물로 사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두울 때에 노끈이 뱀으로 사현함과 같다. 비유하면 노끈 위의 뱀은 허망된 것으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진실된 대상을 보면 허망됨이 없다. 뱀의 지각은 없어지고 오직 노끈의 지각이 남는다. 그런데 미세하게 분석하면 노끈도 역시 실재가 아니다.20) 빛깔ㆍ냄새ㆍ맛ㆍ감촉의 양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빛깔 등의 지각21)에 의지함으로써 노끈의 지각도 역시 제거된다.
이상과 같이 그 글자와 대상으로 사현한 그 여섯 가지 양상의 생각 속의 언어는 마치 뱀의 지각과 같다. 그 여섯 가지 양상이 진실된 사물이 없음을 앎으로써 이 유식의 지각도 역시 없어져야 한다. 성취성의 지혜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017_0039_b_05L論曰:此唯識觀,入何法?似何法入?謂入唯量故,相及見爲二故,種種相故.名`義`自性`差別但假立,自性差別六種事無事故.爲能取及所取體而住故,一時似種種相事生故.如闇中繩似蛇,譬如繩中蛇是妄,以不有故.若見實義,則無有妄,蛇智則滅,唯繩智在.若細分折繩,亦不實,以色香味觸相故,於中依止色等智故,繩智亦得除滅.如是如是,彼似字及義,六種相意言如蛇智,以知彼六種相無實義,此唯識智,亦須除滅,由成就性智故.
017_0039_c_01L【釋】여기서는 깨달아 들어가는 법과 들어감의 비유를 묻는다. ‘오직 인식방법’이란 오직 식의 인식방법이기 때문이다. ‘상분과 견분을 두 가지로 삼는다’는 것은 유상식(有相識)과 유견식(有見識)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양상으로 사현한다. 원인으로 삼고 머무는 곳으로 삼으며, 양상으로 삼고 그림자로 삼아서 현현하기 때문이다. 오직 이 하나의 식이 갖가지 양상으로 생겨난다. 속히 지나가지 않기 때문에 차례로 생겨난다. 이 세 가지와 같이 유식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동시에 갖가지 양상의 의미로 사현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란 다음과 같다. 갖가지 명칭[名]ㆍ문구[句]ㆍ글자[文]22)의 갖가지 양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이고, 그것 역시 의지처인 명칭이 나타내는 의미와 갖가지 양상으로 사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3성관에 들어감을 노끈의 비유로 나타낸다. 여섯 가지 의미 중에서 자재함이란 명칭 등 여섯 가지 의미 중에서 자재함을 말한다. 자재함은 제거함을 말하기 때문이다.
017_0039_b_17L釋曰:此中問所入法及入譬.唯量者,唯識量故.有相及見爲二者,此顯相及見二識故,此似相顯現爲因`爲住處`爲相`爲影顯現故,唯是一識,種種相生,非速疾故,次第而生,如此三種得入唯識.一時似種種相義生故者,謂似名句味身種種相義生故,彼亦似依名所目義種種相生故.於中入三性觀,以繩譬顯示.六種義中,自在者,謂於名等,六種義中自在,言自在者,謂除滅故.
【論】이 보살은 이와 같이 대상의 양상으로 사현한 생각 속의 언어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분별성에 들어가게 된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의타성에 들어간다. 어떻게 성취성에 들어가는가? 만약 유식의 표상, 즉 그 법을 들어서 훈습한 생각 속의 언어를 없애면, 그때 보살은 대상의 표상을 없애게 된다. 모든 대상으로 사현한 것은 생겨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유식으로 사현한 것도 역시 생겨날 수 없다.
그리하여 분별이 없는 모든 대상의 명칭에 안주한다. 바로 법계를 증득하고 상응하여 안주한다. 이때 보살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에 대해서 평등하고 평등한 무분별지혜가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성취성에 깨달아 들어감이다.
017_0039_c_05L論曰:此菩薩,如是入似義相意言故,得入分別性.入唯識故,得入依他性.云何入成就性?若滅離唯識想.彼聞法熏習所生意言,是時菩薩滅離義想,似一切義,無有生處故,是故似唯識顯現,亦不得生,卽住不分別,一切義名中,正證法界相應而住.是時菩薩,於能緣所緣平等平等無分別智生,卽是菩薩入成就性.
017_0040_a_01L【釋】‘대상의 양상으로 사현한 생각 속의 언어에 깨달아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대상은 오직 분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분별성에 깨달아 들어간다. ‘유식에 깨달아 들어가기 때문’이란, 이 생각 속의 언어는 오직 식에 포섭되며23) 의타성에 깨달아 들어감을 말한다.
‘모든 대상으로 사현한 것은 생겨나는 곳이 없다’는 것은 대상으로 사현하여 생겨나는 종류가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유식의 종류도 역시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유식의 분별을 일으킬 때면 곧 대상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 이후에는 진여를 증득한다. 이 진여는 말로 나타낼 수 없다. 오직 내면에서 스스로 알기 때문이다.
‘이때 보살은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평등하고 평등한 무분별지혜가 생겨난다’는 것은 인식주체인 지혜와 인식대상인 진여의 두 법 자체가 평등함을 말하니,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취착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취착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지혜라고 한다. 이것은 곧 성취성에 들어감이다.
‘분별이 없는 모든 대상의 명칭에 머문다’고 말함은 다음과 같다. 어떤 명칭에 몇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인가? 이것은 명칭의 차별이다. 게송으로 나타낸다.
017_0039_c_14L釋曰:入似義相意言故者,謂所有義唯是分別故,如是卽入分別性.入唯識故者,此之意言,唯識所攝,得入依他性.似一切義,無有生處者,謂無有似義,生種類故,唯識種類,亦不得生.何以故?若起唯識分別時,則成義故.次後得證眞如,此如不可言說,唯內自知故,是時菩薩,能取所取平等.平等無分別智生者,謂能緣智`所緣眞如二法,其體平等猶如虛空,謂無有能取所取體而住,以不分別能取所取故,名無分別,卽是得入成就性.所言住無分別一切義名中者,謂有何名?有幾種此名差別?以偈中顯示.
【論】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40_a_05L論曰:此中有偈:

24)ㆍ윤회의 주체ㆍ법25)ㆍ의미ㆍ
총체적인 것ㆍ개별적인 것ㆍ본성ㆍ
부정ㆍ청정ㆍ구경은
명칭의 경계 차이이네.
017_0040_a_06L法人及法義,
若廣若略性,
不淨淨究竟,
是名境差別.

【釋】여기서 ‘법의 명칭’은 물질ㆍ감수작용ㆍ눈 등이고, ‘윤회의 주체[人]라는 명칭’은 부처님과 법을 좋아하고 믿고 행하는 이 등이다. 또 있는 ‘법의 명칭’은 계경 등을 말하고, ‘의미의 명칭’은 법에 의지해서 나타나는 의미를 말한다. ‘총체적인 것의 명칭’은 중생을 말하고, ‘개별적인 것의 명칭’은 그 중생이 각각 다른 이름이 있음을 말한다. ‘본성의 명칭’은 모든 글자의 본모(本母)를 말하고, ‘부정의 명칭’은 범부 등이고, ‘청정의 명칭’은 수행인[學人]26)을 말한다. ‘구경의 명칭’은 총체적인 양상의 법을 반연함이다.
017_0040_a_08L釋曰:於中法名者,謂色受及眼如是等.人名者,謂佛法愛及信行`法行如是等.復有法名者,謂修多羅等.義名者,謂依法所顯義.摠名者,如言衆生.別名者,卽彼衆生各各有名.性名者,謂字本.不淨名者,謂凡夫等.淨名者,謂學人.至究竟名者,謂所緣通相法.
017_0040_b_01L또한 간략히 열 가지 명칭을 말한다. 이것은 보살의 인식대상이다. 이른바 ‘법의 명칭’은 눈 등이고, ‘윤회의 주체’는 자아 등이다. 또 있는 ‘법의 명칭’은 12분교를 말하고, ‘의미의 명칭’은 그 12분교의 의미이다. ‘총체적인 것의 명칭’은 일체법ㆍ유위법ㆍ무위법 등이고, ‘개별적인 것의 명칭’은 물질ㆍ감수작용 등과 허공 등이다.
‘본성의 명칭’은 아자(阿字)를 최초로 삼고, 하자(訶字)를 마지막으로 삼는다.27)
‘부정의 명칭’은 범부 등이고, ‘청정의 명칭’은 4성제를 관찰하는 사람 등이다. ‘구경의 명칭’은 공통된 양상의 법을 대상으로 삼는 두 가지 지혜의 인식대상이다. 출세간의 지혜와 그 후득지혜가 일체법의 진여를 반연하기 때문이고, 일체법의 갖가지 양상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10지 중에서와 같다.28) 모든 의미의 총체적인 양상을 반연하는 지혜의 인식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명칭들은 모든 보살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017_0040_a_15L又略說十種名字,是菩薩攀緣,所謂法名者眼等,人名者我等.復法名者,十二部言教.義名者,卽彼十二部言教義.摠名者,一切法有爲`無爲等.別名者,色受等及虛空等.性名者,阿字爲初`訶爲最後.不淨名者,凡夫等.淨名者,見諦等.至究竟名者,通相法爲境.二智所緣,謂出世智及彼後得智,緣一切法眞如故`一切法種種相故,如於十地中,一切義通相緣智所緣故.如是等諸名,是諸菩薩境界故.
【論】이 보살은 이렇게 유식성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깨달아 들어간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환희지에 들어가고, 법계를 잘 통달한다. 여래의 집에 태어나고, 모든 중생과 평등한 마음을 얻으며, 모든 보살과 평등한 마음을 얻고,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 이것을 보살이 견도를 증득했다고 말한다.
017_0040_b_03L論曰:此菩薩,如是入唯識故,得入應知相.由入應知相故,卽得入歡喜地,善通達法界,得生如來家,得一切衆生平等心,得一切菩薩平等心,得一切佛平等心.此卽是菩薩得見道.
【釋】‘여래의 집에 태어난다’는 것은 부처님의 종자가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자신이 열반에 들어가고자 하듯이 모든 중생도 역시 그러하며, 이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중생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모든 보살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잡염되고 청정한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이 지위에 머물 때에 모든 부처님의 법신을 증득하고, 법신을 증득함으로써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
또한29) ‘모든 중생과 평등한 마음’이란, 자신과 남이 평등함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이 갖가지 고통을 없애려고 하듯이 남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보살과 평등한 마음’이란 모든 보살과 마찬가지로 잡염되고 청정한 마음을 얻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과 평등한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계와 자신이 차별이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017_0040_b_08L釋曰:得生如來家者,由佛種不斷故.得一切衆生平等心者,如自身欲入涅槃,於一切衆生亦爾,由此心故,名一切衆生平等心.得一切菩薩平等心者,由同得深淨心故.得一切佛平等心者,由住此位時,得諸佛法身,得法身故,卽得一切佛平等心.復次一切衆生平等心者,得自他平等故,如自身欲盡諸苦,於彼亦爾.一切菩薩平等心者,謂同諸菩薩得深淨心,作利益衆生事.得一切佛平等心者,見諸佛法界,與己無差別故.
017_0040_c_01L【論】또한 어떻게 유식관에 들어가는가? 총체적인 법을 반연하기 때문이고, 출세간의 사마타ㆍ비발사나(毘鉢舍那:위빠사나)의 지혜이기 때문이며, 그 후득의 갖가지 양상의 식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원인의 양상30)인 아리야식에 있는 모든 원인의 양상인 종자를 단멸하기 때문이고, 법신에 이르는 종자를 증장하기 때문이다. 의지처를 전환하기 때문이고,31) 모든 불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를 얻기 위해서 유식관에 들어간다.
017_0040_b_20L論曰:復次何故入唯識觀?爲緣通相法故`出世奢摩他毘鉢舍那智故`彼後得種種相識智故.滅有因相阿梨耶識一切因相種子故`增長得觸法身種子故`轉依止故`出生一切佛法故`爲得一切智智故,入唯識觀.
【釋】‘사마타ㆍ비발사나’란 곧 사마타ㆍ비발사나를 지혜로 이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인의 양상인 아리야식에 있는 모든 원인의 양상인 종자를 단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양상’은 곧 인연으로서 아리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의 종자를 말한다. 다시 ‘양상’을 말하는 것은 이 종자가 인식대상의 양상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32) 이렇게 말해서 이 모든 종자의 원인과 결과가 모두 단멸함을 나타낸다.
017_0040_c_03L釋曰:奢摩他毘鉢舍那智者,卽奢摩他毘鉢舍那,名爲智故.於中有因相,阿梨耶識,一切因相種子滅者,於中有相者,卽是因緣,謂阿梨耶識中,所有一切染法種子.復言相者,爲顯示卽此種子,爲所緣相故.如是說已,卽得顯示此諸種子因果俱滅.
【論】또는 그 후득지혜는 아리야식이 일으키는 모든 식의 체성과 양상에 대해서 요술 등과 같이 봄으로써 자연히 다시는 전도됨이 없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하면 요술쟁이가 요술로 일으킨 사물에서와 같이 보살은 모든 양상에 대해 인과를 말함에 있어서 언제나 역시 전도됨이 없다.
017_0040_c_10L論曰:復次彼後得智,於阿梨耶識,所生一切識性相中,由見如幻等故,自然不復顚倒.是故猶如幻師於幻事中,菩薩於諸相中,設說因果,一切時亦得無倒.
【釋】만일 무분별지혜가 모든 장애를 끊고 불법을 생겨나게 하면 이 후득지혜는 다시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분별지혜는 그 인과법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득지혜를 필요로 하며, 그 인과법을 말함에 있어서 언제나 전도되지 않는다.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만든 사물에서와 같다.
‘아리야식이 일으킨 모든 것’이란, 이것들이 다 아리야식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모든 식의 체성과 양상에 있어서’란 식의 체성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요술로 생겨난 사물에서와 같이 후득지혜는 전도됨이 없고, 말하는 것도 역시 전도됨이 없다.
017_0040_c_15L釋曰:若無分別智,滅障㝵出生佛法者,此後得智,復何所用?無分別智,不能說彼因果法.何以故?無分別故.是故須後得智,說彼因果法,一切時,不顚倒,如幻師於所幻事.阿梨耶識,一切所生者,此等皆以阿梨耶識爲因.一切識性相中者,謂以識性爲因故.如所幻事,後得智,於中不顚倒說亦不倒.
017_0041_a_01L【論】이 유식관에 들어감에 있어서 네 가지 삼마제가 있으며, 네 가지 통달분33)의 의지처로 삼는다.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네 가지 사색[求]의 의미에 의거한다. 외부대상의 비존재[無塵]를 하품으로 인가하는 득명삼마제(得明三摩提)34)는 난행(暖行)35) 통달분의 의지처이다. 외부대상의 비존재를 매우 뛰어나게 인가하는 증명삼마제(增明三摩提)36)는 정행(頂行)37) 통달분의 의지처이다.
네 가지 여실한 지혜[如實知]에 의거해서 유식성에 들어간다. 외부대상의 비존재를 결정적으로 아는 것은, 대상의 진실성[眞實義]38) 일부분에 들어가는 삼마제이다. 이것은 진리에 수순하는 인가[順諦忍]39)의 의지처이다. 이 삼마제의 최후에 유식의 표상작용이 제거되나니, 이 무간삼마제는 세제일법40)의 의지처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 모든 삼마제는 정위의 궁극[正位邊]이다.41)
017_0040_c_23L論曰:於此入唯識觀中,有四種三摩提,爲四種通達分依止.云何可見?由四種求義故.下品無塵忍,得明三摩提,爲暖行通達分所依止.若增上忍增明三摩提,爲頂行通達分所依止.由四種如實知故,得入唯識,決定塵無所有.此入眞實義,一分三摩提,是順諦忍所依止.此三摩提,最後唯識想除,是無閒三摩提,世第一法所依止,應如是見.此諸三摩提,是正位邊應知.
【釋】모든 곳에서 진실에 들어갈 때 통달분을 얻는다. 이제 여기서 역시 나타내야 한다. ‘통달분 선근의 의지처’란 통달분의 원인이기 때문에 의지처라고 부른다. ‘외부대상의 비존재를 하품으로 인가하는 득명삼마제’는 외부대상의 비존재에 대해서 약간의 즐거움을 일으킨다. 외부대상의 비존재성을 아는 지혜임을 명(明)의 명칭으로 나타낸다. ‘득명삼마제’는 외부대상의 비존재성을 아는 지혜의 의지처인 삼마제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외부대상의 비존재를 매우 뛰어나게 인가한다’는 것은 여기서의 인가는 다시 그 즐거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명증삼마제’는 명(明)의 명칭으로써 외부대상의 비존재를 매우 뛰어나게 아는 지혜를 나타내고, ‘삼마제’는 외부대상의 비존재를 아는 지혜의 의지처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진리에 수순하는 인가의 의지처’란 다음과 같다. 법무아를 진리[諦]라고 부르고, 그 무아에 대해서 진리에 수순하는 인가이기 때문이다. 이 순제인(順諦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외부 사물의 비존재성을 결정적으로 앎으로써 인식주체도 역시 비존재임을 안다. 마땅히 알라. 진리에 수순하는 빠르고 예리한42) 인가에 안주할 때에 이 즐거움을 얻는다. ‘정위(正位)의 궁극’은 정위의 시기를 말한다.
017_0041_a_10L釋曰:一切處入眞實時,得通達分.今此中,亦顯示通達分善根依止者,是通達分因,故言依止.下品無塵忍,得明三摩提者,謂於無塵中,薄少樂欲,顯示無塵智名明.得明三摩提者,顯示無塵智,所依止三摩提故.增上無塵忍者,此中忍還,是彼欲故.明增三摩提者,顯示增上無塵智名明.言三摩提者,顯示是無塵智,所依止故.順諦忍所依止者,法無我名諦,於彼無我隨順忍故.此順諦忍云何成?以決定無別外物故,能取亦不有.應知住疾利隨順忍時,得此樂欲.正位邊者,謂正位時.
017_0041_b_01L【論】이와 같이 10지의 지위에 들어간 보살은 유식관에 들어감으로써 견도43)를 얻는다. 어떻게 수도를 일으키는가?44) 성립된 바에 따라 말하고 있는 10지의 모든 계경을 포섭하여 현전에 머무는 사물에서 총체적인 양상의 법을 인식대상으로 삼는 출세간과 후득의 사마타ㆍ비발사나의 지혜로 한량없는 백천 구지45) 나유타46) 겁을 누누이 닦아 익히기 때문이다. 전의의 의지처로서 세 가지 불신을 얻기 위해 수행한다.
017_0041_b_01L論曰:如是入地菩薩,入唯識故得見道.云何發起修道?隨所成立說十地,一切修多羅,攝取現住事,通相法爲緣,出世閒及後得奢摩他毘鉢舍那智,無量百千俱胝那,由他劫數習故,爲轉依止得三種佛身故修行.
【釋】‘성립된 바에 따라 말한다’는 것은 성립하기 위해 『십지경』에서 모든 지위를 말씀하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양상의 법을 인식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의 양상을 반연하고 문구[句]를 별도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47) ‘출세간’이란 무분별지혜를 말하고, 그것의 후득은 성립하는 지혜48)를 말한다. 이것 역시 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간에서 쌓아 익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한결같이 출세간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세간에 수순해서 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하나의 양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49)
‘전의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은 총체적인 양상을 반연하는 지혜에 의거함으로써 전의를 얻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불신을 증득하기 위해서’란 자신이 장차 세 가지 불신을 증득하기 위해 부지런히 수행함을 말한다.
017_0041_b_07L釋曰:隨所成立說者,謂若爲成立故說,十地經中諸地故.通相法爲緣者,謂一相緣,非句別緣故.出世者,無分別智故.彼後得者,謂成立智.此亦不可說爲世閒.何以故?非世閒積習故.亦非一向出世閒,以隨順世閒行故,是不可定說一相故.爲轉依止者,由此通相攀緣智故,得轉依故.爲得三種佛身者,謂令我當得三種佛身故修行.
017_0041_c_01L【論】성문이 정위에 들어가는 것과 보살이 정위에 들어가는 이 두 가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50) 마땅히 알라. 성문의 정위는 열 가지 차이가 있어서 보살의 정위와 다르다. 첫째는 인식대상의 차이이니, 대승법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둘째는 안주하여 지니는 것의 차이이니, 큰 복덕과 지혜의 자량으로 안주하여 지니기 때문이다. 셋째는 통달의 차이이니, 인무아와 법무아를 통달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열반의 차이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묾이 없는 열반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지위의 차이이니, 10지에 의지해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청정의 차이이니, 번뇌의 단멸과 부처님의 청정 국토이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모든 중생과 자신이 평등한 마음임을 증득하는 차이이니, 중생을 성숙시키는 행을 일으켜서 휴식함이 없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태어남의 차이이니, 여래의 집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화현의 차이이니, 부처님의 법회 가운데 항상 화현해서 섭수되기 때문이다. 열째는 증과의 차이이니, 10력51)ㆍ네 가지 두려움이 없음[無所畏]52)ㆍ18가지 불공법53)인 부처님 법의 한량없는 공덕의 증과가 성취되기 때문이다.
017_0041_b_17L論曰:聲聞入正位`菩薩入正位,此二有何差別?聲聞正位,有十種差別,與菩薩正位異應知.一所緣差別,大乘法爲緣故二住持差別,大福智資糧住持故三通達差別,通達人法無我故四涅槃差別,攝取無住著涅槃故地差別,依十地出離故六淸淨差別,煩惱斷及佛淨剎故七得一切衆生,與自身平等心差別,起成熟衆生行不休息故八生差別,生如來家故化現差別,佛集輪中,一切時,化現所攝故十果差別,十力無畏,不共佛法等,無量功德果成就故.
【釋】‘열반의 차이’란 보살이 생사와 열반에 머묾이 없는 열반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성문은 그렇지 않다. ‘청정의 차이’란 보살은 번뇌와 습기를 단멸하고 아울러 청정한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성문은 그렇지 않다.
017_0041_c_07L釋曰:涅槃差別者,由菩薩攝取無住著涅槃故,聲聞不爾.淸淨差別者,由菩薩滅煩惱及習幷淨佛土故,聲聞不爾.
【論】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41_c_11L論曰:此中有偈:

명칭과 사물을 사색[推尋]하니
각각 서로 객관이 되네.
두 가지가 오직 인식작용[唯量]임을 사색하나니
두 가지의 시설도 역시 그러하네.
017_0041_c_12L推尋名及義,
各各互爲客,
推尋二唯量,
二施設亦然.

이로부터 진실된 지혜를 일으키나니
세 가지 분별은 대상의 비존재이네.
만일 그것의 비존재성을 보면
곧 세 가지 무자성[三無性]54)에 깨달아 들어가도다.
017_0041_c_14L從此生實知,
三分別無義,
若見彼非有,
卽入三無性.
017_0042_a_01L
【釋】진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여기서 게송을 말한다. ‘명칭과 사물을 사색[推尋]하니 각각 서로 객관이 되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명칭은 사물[義]55)에 대해서 객관이 되고, 사물이 명칭에 대해서도 역시 객관이 된다. 각기 별도의 양상이기 때문이다.56)
‘사색[推尋]’이란 마땅히 선정의 마음에서 보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오직 인식작용[唯量]임을 사색하나니, 두 가지의 시설(施設)도 역시 그러하네’는 다음과 같다. 사물에는 자성과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라. 자성은 오직 시설이고 차별도 오직 시설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진실한 지혜를 일으키나니’는 이 가운데 여실한 지혜이기 때문이다. 네 가지 사색[尋思]을 원인으로 삼음으로써 네 가지 여실한 지혜[如實知]를 얻는다.
‘세 가지 분별을 대상의 비존재성 중에서 본다’는 것은 세 가지 분별을대상의 비존재성 중에서 보기 때문이다. 이른바 명칭의 분별이고, 자성의 분별이며, 차별의 분별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의 비존재성을 보면 곧 세 가지 무자성에 깨달아 들어가도다’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사물이 비존재이기 때문에 분별도 역시 없다. 왜냐하면 분별의 대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분별은 그것을 반연하여 생기할 수 있다. 그 사물이 비존재이기 때문에 분별도 역시 실재할 수 없다. 마땅히 알지니, 이런 의미 때문이다.
‘세 가지에 깨달아 들어가도다’는 세 가지 자성에 들어감을 말한다. 여기서 명칭과 사물이 서로 객관이 됨을 봄으로써 명칭과 사물의 각기 다른 분별성에 깨달아 들어간다. 만일 명칭에 대해 자성의 시설과 차별의 시설이 오직 분별임을 보면 곧 의타성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분별의 주체인 식도 역시 보지 않으면 곧 성취성에 깨달아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을 세 가지 자성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이름한다.
017_0041_c_15L釋曰:如眞實入,此中說偈.推尋名及義,各各互爲客者,名於義爲客,義於名亦爲客,各別相故.推尋者,謂應於靜心中見故.推尋二唯量二施設亦然者,義無有自性及差別故,卽應知自性唯是施設`差別唯是施設故.從此生實知者,謂於此中如實知故.由四種尋思爲因故,得四種如實知.三分別無義中見者,於三種分別無有義中見故,謂名分別`自性分別`差別分別故.彼非有卽入三無性者,義無所有,故分別亦無.何以故?若所分別義是有,分別可得緣彼而生由彼義不有故,分別亦不得有,應知此義故.入三者,謂入三性.於中由見名義,互爲客故,得入名義,各異分別性.若見名自性施設`差別施設,唯見分別,卽得入依他性.卽此能分別識亦不見,卽得入成就性.此名三種入.
【論】다시 가르침의 게송이 있다. 『관행차별론(觀行差別論)』57)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042_a_11L論曰:復有教授偈,如『觀行差別論』說:

보살은 선정의 고요한 마음 가운데
그 마음의 영상을 볼 수 있네.
대상의 표상을 없애고
다만 자신의 표상을 관찰하네.
017_0042_a_12L菩薩靜心中,
得見其心影,
滅除於義想,
但觀於自想.

마음이 이렇게 내면에 안주하면
인식대상이 비존재임을 알도다.
곧 인식주체도 비존재임을 아나니
그러므로 무소유를 깨닫네.
017_0042_a_14L如是心住內,
知所取非有,
卽無能取者,
故證無所有.
017_0042_b_01L
【釋】관찰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다시 이 가르침의 게송을 말한다. ‘보살이 마음의 영상을 본다’는 것은 그 법과 의미로 사현한 영상은 오직 자신의 마음임을 보는 것이다. 누가 관찰하는가? 보살이다. 어떤 지위에서 보는가? 선정의 고요한 마음에서 본다. ‘대상의 표상을 없애고 다만 자신의 표상을 관찰하네’라는 것은, 선정의 고요한 마음 가운데 대상의 표상은 일어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마음이 법과 대상의 모습으로 현현함을 아는 것이다.
‘마음이 이렇게 내면에 안주하면’이란, 만일 마음이 이처럼 대상의 무소유 가운데 안주하면 곧 마음이 마음에 안주하는 것이다. ‘인식대상이 비존재임을 알도다’라는 것은 인식대상이 무소유임을 알기 때문이다. ‘인식주체도 비존재’라는 것은, 인식대상이 비존재이기 때문에 인식주체의 마음도 역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소유를 깨닫네’라는 것은 이미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이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곧 진여를 깨닫는 것이다. 진여는 불가득이기 때문이다.
017_0042_a_15L釋曰:爲令得入觀故,復說此教授偈.菩薩見心影者,見彼似法義影,唯是自心.何人見?謂菩薩.何處見?謂靜心中.滅除於義想但觀於自想者,謂於靜心中,義想不起,知唯是自心,爲法義相顯現.如是心住內者,若心如是得住於義無所有中,卽是心住於心中.知所取非有者,謂解知所取義,無所有故.卽無能取者,由所取義不有故,則能取心,爲能取者,亦不可得故.證無所得者,旣無能取所取已,卽說名爲證眞如,以眞如不可得故.
【論】다시 바른 지위에 들어가는 별도의 게송이 있다. 『대승경장엄론』에서 말한 바와 같다.58)
017_0042_b_04L論曰:復有入正位別偈,如『大乘經莊嚴論』中所說:

보살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을
구족하여 끝이 없네.
법에 대해서 사유하여 잘 결택하니
대상은 오직 생각 속의 언어가 생기한 것임을 아네.59)
017_0042_b_06L菩薩具滿無邊際,
福德智惠之資糧,
法中思量善決已,
則了義類意言生.

그가 모든 대상은 오직 생각 속의 언어임을 알면
곧 대상으로 사현하되 오직 마음인 도리에 안주하여60)
이와 같이 법계를 바르게 증득하므로
두 가지 양상을 멀리 여의네.
017_0042_b_08L彼知諸義唯意言,
卽住似義唯心中,
如是正證法界已,
是故遠離二種相.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비존재임을 알 수 있네.
지혜로운 이는 두 가지가 다 비존재임을 통달하여
두 가지가 비존재인 법계에 안주하도다.61)
017_0042_b_10L以知心外無有他,
故得知心亦非有,
智者了知二俱無,
卽住無二法界中.

지혜로운 이는 무분별지혜의 힘으로
평등하게 수순하여 행하고 항상 두루 하네.
의지처의 무성한 죄악의 덩어리를
마치 훌륭한 양약이 갖가지 독을 없앰과 같이 하도다.62)
017_0042_b_12L智者無分別智力,
平等順行常普遍,
所依稠密罪惡聚,
如大伽陁拔衆毒.

부처님께서는 모든 정법을 잘 말씀하셔서
마음을 선근의 마음과 법계에 안주케 하네.
생각의 작용은 오직 분별임을 알고
지혜로운 이는 속히 공덕 바다의 언덕에 이르도다.63)
017_0042_b_14L牟尼善說諸正法,
安心有根法界中,
已知念行唯分別,
智者疾至德海岸.
017_0042_c_01L
【釋】다시 바른 지위에 들어가는 게송이 있으니, 『대승경장엄론』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 중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을 여기서 나타낸다.
‘끝이 없네’라는 것은 피안에 이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가없다고 말함과 같다. 끝없다는 말은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매우 많기 때문에 끝없다고 말한다.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
무엇이 자량인가? 복덕과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보시 등 세 가지 바라밀64)은 복덕의 자량이고, 반야바라밀은 지혜의 자량이다. 정진바라밀의 경우는, 만일 지혜를 위해서 정진하면 지혜의 자량이고, 복덕을 위해 정진하면 복덕의 자량이다. 이와 같이 선정바라밀도 역시 두 종류가 있다. 만일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65)을 반연하는 선정이라면 복덕의 자량66)이고, 나머지는 지혜의 자량67)이다. 누구에게 이러한 자량이 있는가? 보살이다. ‘법에 대해서 사유하여 잘 결택하기 때문’이란, 삼마제 이후의 세력에 의거함으로써 모든 법을 사유하여 잘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이가 아니다. ‘대상은 오직 생각 속의 언어가 생기한 것임을 아네’라는 것은 모든 대상이 다 생각 속의 언어를 원인으로 삼음을 아는 것이다.
017_0042_b_16L釋曰:復有入正位偈,如『線莊嚴論』中說.若有最極難知者,彼中顯示.於中無邊際者,謂極難度彼岸故.如言無邊言,說非無有邊,但以多故,得名無邊,此亦如是.何者爲資糧?謂福德智慧.於中施等三波羅蜜,是福德資糧,般若波羅蜜,名智慧資糧,精進波羅蜜,若爲智慧精進,是智慧資糧,若爲福精進,是福資糧.如是禪波羅蜜亦二種,於中若緣四無量禪,名福資糧,餘名智資糧.誰有此資糧?謂菩薩.法中思量善決故者,由依三摩提後力故,思量諸法,得善決定非餘.則了義類意言生者,謂了知諸義,皆以意言爲因故.
‘대상으로 사현하되 오직 마음인 도리에 안주하여’라는 것은 그 모든 대상이 오직 생각 속의 언어임을 알기 때문이다. 곧 이 자신의 마음이 대상으로 사현하여 현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법계를 증득하므로 두 가지 양상을 멀리 여의네’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대상으로 사현한 것임을 알고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여읜 진여를 증득함을 말한다. 또한 증득에 들어감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마음을 떠나서 별도의 사물이 없음을 알기 때문에 마음도 역시 비존재임을 알 수 있네’라는 것은 마음을 떠나서 외부에 반연되는 대상이 없고, 그것이 비존재이기 때문에 반연의 주체인 마음도 역시 비존재이다. ‘보살은 그 두 가지가 비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두 가지가 비존재인 법계에 안주하도다’라는 것은 마음과 대상을 여의기 때문이다.
‘무분별지혜의 힘’이란 분별을 떠난 지혜의 힘이고, ‘평등하게 수순하여 행하고’라는 것은 평등 안에서 수순하여 행하기 때문이다. 계경 등의 모든 법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두루하네’라는 것은 내부와 외부의 모든 법에 대해서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항상’이란 어느 때나 그러하기 때문이다.
017_0042_c_08L卽住似義唯心中者,由知彼諸義,唯意言故,卽此自心似義而現故.如是正證法界已,是故遠離二種相者,知自心似義而現已,卽於離能取所取眞如中得證.又復如所入證,今當顯示.以知心外無有他故,得知心亦非有者,謂離心外,無有所攀緣義,彼不有故,能緣之心,則亦不有.菩薩知彼二不有故,卽住無二法界,謂離心及義故.無分別智力者,離分別智力故.平等順行者,於平等中順行故,見修多羅等,一切諸法平等,猶如虛空故.普遍者,於若內若外,諸法中如是見故.常者一切時故.
017_0043_a_01L‘의지처의 무성한 죄악의 덩어리’란 다음과 같다. 이 모든 잡염법의 원인을 ‘무성하다’라고 말한다. 관찰하여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죄악의 덩어리’란 잡염법이 훈습의 자성을 자체로 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정법을 잘 말씀하셔서 마음을 선근의 마음과 법계에 안주케 하네’라는 것은 의욕을 선근의 마음에 안주케 함을 말한다. 만일 그 마음과 진여를 반연하면, 이것이 선근의 마음이다. 여래의 바른 가르침을 반연하여 구족해서 부족함이 없는 전체를 하나의 양상으로 삼으면, 마땅히 알라. 이것이 무분별지혜이다.
‘생각의 작용이 오직 분별임을 알고’라는 것은 이 선근의 마음에 안주하고서 바른 가르침을 설하기 위하여 그 후득지에서 대상을 생각하며, 역시 이 생각의 작용도 오직 분별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무분별지혜와 후득지혜의 두 가지 지혜에 의거해서 모든 보살은 속히 불과의 피안에 이르게 된다.
017_0042_c_21L所依稠密罪惡聚者,此諸染法因名稠密,以難可觀解故.罪惡聚者,卽是染法熏習自性爲體故.牟尼善說,諸正法安心有根法界中者,謂以意安住有根心中.若攀緣彼心眞如,此是有根心,謂緣如來正說,具足無闕摠爲一相,應知此卽是無分別智.已知念行,唯分別者,住此有根心已,爲欲正說故,於彼後得智中,所憶念義,亦知此憶念行,唯是分別故.由此無分別智及後得二種智故,諸菩薩疾至佛果彼岸.
이러한 여러 게송의 의미를 종합하면 첫 번째 게송은 자량도를 밝히고, 두 번째 게송의 의미는 방편도를 밝히며, 세 번째 게송의 의미는 이후의 견도를 밝히고, 네 번째 게송의 의미는 수도를 밝히며, 다섯 번째 게송의 의미는 구경도를 밝힌다. 이상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에 들어감[入應知相]을 해석하였다.
017_0043_a_09L此等諸偈摠集義者,初偈明資糧道第二偈義,明方便道第三偈義,明後見道第四偈義,明修道第五偈義,明究竟道.此釋入應知相竟.
攝大乘論釋論卷第六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상에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應知相]으로서 심식론과 삼성설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유식학의 이론문(理論門)이다. 이제는 그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수행문에 들어간다.
  2. 2)뜻 속의 말, 즉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3. 3)이하 유식학에서 보살의 수행과정인 5위(位) 중에서 제1위인 자량도(資糧道)의 수행을 설명한다. 이것은 길고 긴 수행의 도정에서 재산이 될 정신적인 양식을 저장하는 단계이다. 여기서 자량(資糧)은 복덕과 지혜를 가리킨다. 37보리분법과 6바라밀을 닦는 과정이다. 10주ㆍ10행ㆍ10회향(제10회향의 住心)까지이다.
  4. 4)본문에서 말한 다문훈습,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김, 선근을 쌓는 것이다.
  5. 5)본문의 두 구절이 그대로 원인의 세력과 착한 벗의 세력을 해석하므로, 이하는 나머지 두 세력만을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6. 6)의식의 헤아림[意地尋思]은 명칭[名]ㆍ대상[義] 등에 의한 의식의 사유분별을 말한다.
  7. 7)10주ㆍ10행ㆍ10회향지를 가리킨다. 현장 역본에는 승해행지(勝解行地)로 되어 있다.
  8. 8)유식학에서는 보살의 수행단계를 41단계(10주ㆍ10행ㆍ10회향ㆍ10지ㆍ불지)로 인정하고, 이것을 자량도ㆍ방편도ㆍ견도ㆍ수도ㆍ구경도의 5위(位)에 배대한다. 현장 역본에는 각각 자량위ㆍ가행위ㆍ통달위ㆍ수습위ㆍ구경위로 되어 있다.
  9. 9)10지 중에서 초지의 입심(入心)의 수행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무루의 지혜가 생겨나서 진여의 일분(一分)을 관찰하게 된다. 후천적인 분별기(分別起)의 번뇌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구생기(俱生起)의 번뇌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제6의식과 제7말나식의 일분이 지혜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10. 10)초지의 주심(住心)부터 제10지의 끝까지 지위이다. 견도에서 일부 증득된 진여의 도리를 반복적으로 닦아 익혀서 번뇌장과 지장을 정화해 나간다. 아집과 법집을 정화하는 아공관과 법공관을 닦아서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제7지에서 번뇌장이 정화되어 아집이 단절되고, 제10지에서 지장을 정화해서 법집이 단절된다.
  11. 11)불과(佛果)를 증득한 지위이다. 대보리[四智]와 대열반[無住處涅槃]을 증득한다.
  12. 12)제10지의 금강심(金剛心)의 다음 찰나에 모든 장애를 다 소멸함을 말한다.
  13. 13)이해를 돕기 위해 현장 역본을 인용하면 “장애의 속박을 벗어남으로써 그 목숨이 다할 무렵에 모든 것을 아는 지혜가 그 자체 그대로 원만해진다고 말한다”로 되어 있다.
  14. 14)아집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오직 법집만을 끊는 것을 말한다.
  15. 15)선정 중에 관찰되는 인식대상이다. 골쇄관은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서 신체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서 신체가 죽어서 백골(白骨)이 되는 모습을 관찰한다.
  16. 16)유견(有見)만 말하고 유상(有相)을 들지 않은 것은, 이 관법이 내부의 식을 반연하고 외부 대상을 제외하기 때문이다.
  17. 17)여기서는 심구(尋求)ㆍ심사(尋思)의 의미이다. 이해의 편의상 사색으로 번역한다.
  18. 18)이하 방편도에서 닦는 4구관(求觀, 4尋思觀)과 4여실지관(如實智觀)에 대해서 설명한다. 네 가지 사색은 인식의 대상인 명칭[名]ㆍ대상[義]ㆍ자성(자체의 體性)ㆍ차별(모습과 작용의 차별성)의 네 가지 법이 임시적인 존재[假有]이고 실무(實無)라고 사색 관찰하는 관법이다.
  19. 19)4여실지관(如實智觀)이다. 이것은 네 가지 사색 다음에 다시 명확히 인가(認可) 결정하고 또한 이렇게 관찰하는 마음[能取心]까지도 가유실무(假有實無)라고 인가 결정하는 관법이다.
  20. 20)노끈을 그 구성요소로 미세하게 분석하면 노끈의 모습이 없으므로 허망하다고 말한다.
  21. 21)빛깔ㆍ냄새 등 노끈의 요소를 지각함을 말한다.
  22. 22)명칭[名, nāma]은 어떤 의미를 갖는 최소단위의 단어ㆍ명칭이라는 뜻이다. 사물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언어표현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문구[句, pada]는 단어로 구성된 문구ㆍ문장 전체를 가리킨다. 글자[文, vyanjana:味]는 단어나 문구ㆍ문장을 구성하는 낱낱의 글자를 가리킨다. 예를 들면 “이 논서는 『섭대승론석』이다”라고 할 때에 ‘이’ㆍ‘논’ㆍ‘서’ 등 한 자 한 자가 글자[文]이고, ‘논서’ㆍ‘섭대승론석’이 명칭[名]이며, 이들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전체가 문구[句]이다.
  23. 23)유식에 깨달아 들어간다고 말하여 ‘유식’이란 말을 거론하지만 여기서는 유식의 생각 속의 언어[意言]의 의미에서 그렇게 말한다.
  24. 24)존재의 구성요소라는 의미이다.
  25. 25)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법의 의미이다.
  26. 26)이미 4성제 등의 진리를 지견(知見)하여 자각하지만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했기 때문에 번뇌를 소멸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항상 계율ㆍ선정ㆍ지혜의 3학(學)을 닦는다. 성문의 4과(果) 중에서 최후의 아라한과를 제외한 다른 단계(수다원과ㆍ사다함과ㆍ아나함과)를 유학이라고 한다.
  27. 27)범어의 37가지 자모(字母) 중에서 최초의 a자와 최후의 ḥ자를 들고 중간은 생략하였다.
  28. 28)10지의 관법(觀法) 중에서는 지위마다 각기 다른 법을 인식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29. 29)이하 별도의 의미를 서술한다.
  30. 30)아리야식의 세 가지 양상[相:自相ㆍ果相ㆍ因相] 가운데 원인의 양상[因相]의 측면을 말한다.
  31. 31)의지처[所依]인 식을 전환하여 반야의 지혜를 이루는 전의(轉依)이다.
  32. 32)양상이란 언어에 의지해서 능훈(能熏)의 결과 양상을 보인다. 그러므로 다음에 종자의 원인과 결과를 함께 끊는다고 말한다.
  33. 33)난행(暖行)ㆍ정행(頂行)ㆍ순제인행(順諦忍行)ㆍ세제일법행(世第一法行)의 네 가지 선근의 지위이다. 5위 중에서 방편도는 견도에 수순하고 그것을 이끌어 내는 단계이므로 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도 부른다.
  34. 34)4선근위(善根位) 중의 난행(煖行)에서 하품(下品)의 사색관[求觀]을 일으켜서 취할 바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이다.
  35. 35)난(暖)은 따뜻함을 느끼는 것처럼 견도무루지화(見道無漏智火)의 전상(前相)으로 뛰어난 유루의 지혜가 일어남을 말한다. 지혜를 증득하려고 준비하는 단계이다.
  36. 36)정행(頂行)에서 상품(上品)의 사색관을 발하여 취할 바 대상의 경계가 공함을 관찰하는 선정이다. 이 선정에서 지혜의 밝은 양상이 점점 더해지므로 그렇게 부른다.
  37. 37)동선(動善) 중에서 최극위(最極位)이므로 마치 사람의 정수리와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38. 38)취착된 인식대상[所取]을 공(空)으로 볼 뿐만 아니라, 취착된 인식주체[能取]도 공으로 보아 대상도 식도 모두 공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39. 39)보살이 하품의 여실지(如實智)를 내어서 능취(能取)가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 결정하는 지위이다.
  40. 40)10회향의 만심(滿心)에서 상품의 네 가지 여실지(如實智)를 내어서 인식의 대상뿐만 아니라 관하는 식 그 자체를 공무(空無)라고 분명하게 결택한다. 이 지위에서 일어나는 선근은 유루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고 부른다.
  41. 41)난위에서 대상이 공함을 관찰하고(下品의 尋思觀), 정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확실하게 관찰한다(上品의 심사관). 인위에서는 대상이 공함을 인가하고, 나아가 인식주체도 공함을 관찰하여 인가하며(하품의 여실지관), 세제일위에서는 대상과 주체가 공함을 쌍(雙)으로 인가한다.
  42. 42)지혜의 작용이 예리하고 강렬함을 말한다
  43. 43)무루(無漏)의 근본지혜[正智]가 처음으로 진리를 관조하는 시기로서 초지(初地)의 입심(入心)이다.
  44. 44)이하 5위 중에서 견도와 수도의 수행을 설명한다.
  45. 45)범어 koṭi의 음역어로서 억(億)이라고 번역한다. 인도에서 쓰던 숫자의 단위이다.
  46. 46)범어 nayuta의 음역으로서 매우 큰 수를 나타낸다. 천만(千萬)이라고도 하고, 천억(千億)이라고도 한다.
  47. 47)하나하나의 양상을 각기 별도로 반연하지 않고 전체를 하나의 양상으로 해서 그 공통된 양상, 즉 진여를 반연하는 것이다.
  48. 48)후득지(後得智)가 일체법의 차별상을 능히 성립하는 지혜임을 말한다.
  49. 49)후득지는 세간의 지혜라거나 출세간의 지혜라거나 어느 한 가지로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50. 50)이하 성문과 보살의 현관(現觀) 차이를 11가지로 설명한다.
  51. 51)부처님만이 갖는 열 가지 지혜의 힘이다. 첫째는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변별하는 지혜의 힘이다. 둘째는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혜의 힘이다. 셋째는 4선(禪)ㆍ8해탈(解脫)ㆍ3삼매(三昧)ㆍ8등지(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넷째는 중생의 근기의 고하(高下) 우열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다섯째는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 성향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여섯째는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일곱째는 어떤 수행에 의해서 어떤 도에 나아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여덟째는 중생의 숙명(宿命)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아홉째는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열째는 모든 번뇌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52. 52)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지혜의 힘이 있으므로 아무런 두려움이 없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것을 아는 분[一切智者]으로서의 자신감, 둘째 모든 번뇌를 극복했다는 자신감, 셋째 수행에 장애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모든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 넷째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말할 수 있는 자신감(모든 괴로움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53. 53)불공법(不共法)이라 함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ㆍ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님 특유의 법이란 뜻이다. 이에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3념주(念住)ㆍ대비(大悲)의 18가지가 있다.
  54. 54)현장의 역본에는 3성(性)으로 되어 있다.
  55. 55)여기서 사물[義]은 명칭에 의지해서 나타나는 사상(事相)이다.
  56. 56)명칭과 사물이 서로 객관이 되어 각기 다르게 떨어져 있는 것은 명칭과 사물이 하나의 체(體)가 아니기 때문이다.
  57. 57)『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을 가리킨다.
  58. 58)제2 「진실품」의 게송에 상당하는 5언(言)의 게송으로 되어 있다.
  59. 59)이 게송은 자량도에 대한 내용이다.
  60. 60)이 두 문구는 방편도에 대한 내용이다.
  61. 61)위의 게송의 두 문구와 이 게송은 견도에 대한 내용이다.
  62. 62)이 게송은 수도에 대한 내용이다.
  63. 63)이 게송은 구경도에 대한 내용이다.
  64. 64)보시ㆍ지계ㆍ인욕 바라밀다이다.
  65. 65)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無量心:慈ㆍ悲ㆍ喜ㆍ捨]을 가리킨다.
  66. 66)4무량심을 반연하여 선정을 닦으면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복덕에 속한다.
  67. 67)아공ㆍ법공 등을 반연할 때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