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攝大乘論釋論卷第五

ABC_IT_K0593_T_005
017_0029_a_01L
섭대승론석론 제5권
017_0029_a_01L攝大乘論釋論卷第五


세친 지음
수 천축삼장 급다ㆍ행구 등 한역
김묘주 번역
017_0029_a_02L世親菩薩造
隋天竺三藏笈多共行矩等譯


2. 응지승상승어 ②
017_0029_a_04L應知勝相勝語第二之二

3) 분별장 ②
017_0029_a_05L分別章第三之餘
【論】또한 의타성(依他性)이 분별성(分別性)의 모습으로 현현하여 머물더라도 분별성의 자체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명칭 앞에 지각이 없어서 자체에 위배되기 때문이고, 명칭이 많고 자체가 많아서 이것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명칭이 결정적이지 않아서 자체의 잡염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29_a_06L論曰:復次云何得知依他性,爲分別性相顯現而住,然非分別性體也?於名前無智,卽體相違故多名有多體,此相違故名不定,雜體相違故.此中有偈:

명칭 앞에 지각이 없음,
많은 명칭, 결정적이지 않음,
자체에 계합함, 자체가 많음, 자체의 잡염이
이 위배됨을 성취하네.
017_0029_a_11L於名前無智,
多名及不定,
同及多雜體,
成就此相違.

법은 비존재이지만 볼 수 있고
잡염이 없고 청정이 있네.
마땅히 알지니 요술과 같으며
또한 허공과 비슷하도다.
017_0029_a_13L法無而可見,
無染而有淨,
應知如幻事,
亦復似虛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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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의타성에서와 같이 분별성의 일부분은 볼 수는 있어도 그 자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명칭 앞에 지각이 없어서 자체에 위배되기 때문’이란, 만일 의타성과 분별성이 하나의 자체라면 명칭을 떠나서 대상에 대해서 지각이 생겨난다. 마치 병(甁)이 병의 명칭을 여의면 병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병의 지각이 생겨나지 않음과 같다. 만약 병의 명칭과 병의 대상이 하나의 양상이라면 마땅히 지각이 자연히 생겨나야 한다. 하나의 양상이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지 않는다.
만일 명칭과 대상이 동일한 자체라고 말하면 곧 위배된다. 여기서 명칭은 의타성을 이루고 대상은 분별성을 이룬다. 왜냐하면 이 의타성은 명칭의 세력으로 인하여 분별의 대상을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의 대상에 많은 명칭이 있다. 만약 명칭과 대상이 하나의 양상이라면, 명칭이 많이 있듯이 대상도 역시 많아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 대상은 마땅히 자체가 많아야 한다. 이 하나의 대상이 자체가 많다면 곧 위배된다. 그러므로 두 자성이 하나의 자체라면 곧 두 번째 과실이 된다.
017_0029_a_14L釋曰:如依他性中,雖分別一分可見,然不成彼性,顯示此故,於名前無智.同體相違故者,若分別與依他是一體,則離名於義中智生.如甁離甁名,於甁義中,甁智不生.若甁名與甁義,是一相者,則應智自生.以不一相故,若言名義同體,卽是相違.此中成立名是依他,義是分別.何以故?此依他,由名力故,成所分別.又一義有多名,若名義是一相,如名有衆多,義亦應衆多.若爾,此義則應有多體.此一義有多體,卽是相違.是故兩性一體,卽是第二相違.
또한 명칭은 결정적이지 않다. 마치 구(瞿, go)라는 명칭이 능히 아홉 가지 의미를 나타냄과 같다.1) 만일 명칭과 대상이 하나라고 집착하면 많은 대상이 자체가 같아야 한다. 이 집착은 세 번째 과실이다. 수많은 개별적인 양상의 대상이 다 평등한 하나의 자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송에서 역시 이런 의미를 말한다. 게송에서 ‘성취한다’고 말함은, 의타성과 분별성이 동일한 자체가 아닌 의미를 밝혀서 성취한다.
‘법은 비존재이지만 볼 수 있고’ 등의 한 게송은 제자들에게 요술 등의 비유를 가르치기 위해서이다. 제자에게 두 가지 위배된 의문이 있다. “법이 비존재인데 어떻게 현재 볼 수 있는가?”와 “어째서 잡염이 없고 청정함이 있는가?”이다. 여기서 ‘요술 등과 같다’는 것은, 마치 요술로 만들어진 코끼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볼 수 있음과 같은 것이다. 대상도 역시 그러하다. 존재하지 않더라도 역시 볼 수 있다. 또한 마치 허공과 같아서 구름 등이 능히 오염시킬 수 없다. 본성이 청정하지만 구름 등이 없어졌을 때를 청정하다고 말한다. 마땅히 알라.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해서 잡염이 없고 본성이 청정하지만, 객관적인 장애의 오염을 없앨 때에 청정하다고 부른다.
017_0029_b_04L又名不定,如瞿名能目九義,若執名義是一,卽諸義同體,此執是第三相違.以無量別相義,皆成牛等一體故,偈中亦說此義.於偈中言成就者,明依他與分別,不同體義成就.法無而可見等,此一偈爲教諸弟子,幻等譬喩故.弟子有二種相違疑,難法無而可見`無染而有淨,於此有疑.於中如幻事者,如幻象實不有而可見.義亦如是,雖不有而亦可見.又如虛空雲等,不能染污本性淸淨,然雲等除時,名爲淸淨.諸法亦爾,無有染污本性淸淨,然除客塵障垢時,名爲淸淨應知.
【論】또한 현현하는 바와 같은 것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이 의타성은 일체가 모두 비존재가 아닌가? 만약 의타성이 비존재라면 성취성도 역시 비존재이다. 일체가 비존재이면 이 대상도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의타성과 성취성이 모두 비존재라면 잡염과 청정이 없다는 과실이 된다. 그런데 현재 잡염과 청정을 보기 때문에 일체가 다 비존재는 아니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29_b_17L論曰:復次如所顯現旣不有,此依他性,一切種悉無.何故不成,若無依他成就性亦無,一切無所有?此義不成.若依他性及成就性俱無,則無染污及淸淨過.現見染污及淸淨,是故非一切無.此中有偈:

만일 의타성이 없다면
성취성도 역시 없네.
또한 잡염과 청정이
항상 없도다.
017_0029_b_23L若無依他性,
成就性亦無,
則亦恒不有,
染污及淸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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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釋】의타성은 현현한 것처럼 이와 같이 비존재이다. 이제 모든 종류가 다 비존재임이 성립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만일 의타성이 없다면 성취성도 역시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잡염이 있기 때문에 청정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 두 가지가 모두 비존재라면 일체가 다 비존재이다. 이런 의미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제 마땅히 잡염과 청정이 없다고 비방함을 나타내야 한다. 이것은 과실이다. 왜냐하면 현재 잡염이 있고 청정이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 의타성과 성취성의 두 법은 현재 존재함을 본다. 만약 비존재라고 집착해서 말하면, 실제로 잡염과 청정이 있는데 부정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된다.
017_0029_c_02L釋曰:依他性如所顯現,不如是有.今爲顯一切種,悉無不成故,說此依他若不有,成就亦不有.何以故?由有染故,則有淨,是故若二種俱無,卽一切悉無.此義不成,今當顯示.謗無染淨,此是過失.何以故?現見有染有淨故.此依他`成就二法現見是有,若執言無,則是實有染淨而謗言無.
【論】부처님 세존은 대승의 방광경(方廣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분별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알지니, 비존재라고 말한다. 의타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알지니, 비유하면 요술ㆍ아지랑이ㆍ꿈ㆍ영상ㆍ그림자ㆍ메아리ㆍ물에 비친 달ㆍ변화 등과 같다. 성취성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마땅히 알지니, 네 가지 청정법을 말한다.
네 가지 청정법이란, 첫째는 본성의 청정이니, 이른바 진여ㆍ공ㆍ실제ㆍ무상(無相)ㆍ제일의(第一義)ㆍ법계 등이다. 둘째는 오염을 여읜 청정이니, 이른바 모든 장애의 오염을 여읜 것이다. 셋째는 증득에 이르는 수도의 청정이니, 이른바 모든 보리분법과 바라밀 등이다. 넷째는 수도가 생겨나는 경계의 청정이니, 이른바 설해진 대승의 정법이 청정의 원인이기 때문에 분별성이 아니다. 가장 청정한 법계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의타성이 아니다. 이러한 네 가지 법 가운데 모든 청정법을 포섭한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29_c_10L論曰:於佛世尊大乘方廣經中,彼經中說:云何應知分別性?若說無所有門應知.云何應知依他性?若說幻`焰`夢`像`影`響`水月`化等譬喩應知.云何應知成就性?若說四種淸淨法應知.四種淸淨法者,一本性淸淨,所謂眞如`空`實際`無相`第一義`法界等.二離垢淸淨,謂卽是離一切障垢.三至得道淸淨,謂一切菩提分法波羅蜜等.四道生境界淸淨,謂所說大乘正法,此是淸淨因,故非分別性最淸淨法界,所流津液,故非依他性.此等四法中,攝得一切淨法.此中有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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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 등은 생겨남을 말하고
비존재라고 말함은 분별을 나타내네.
네 가지 청정법이 있나니
이것을 성취성이라고 말하네.
017_0029_c_23L幻等說於生,
說無顯分別,
四種淸淨法,
此說成就性.

청정ㆍ본성과
오염이 없는 수도ㆍ인식대상이니
모든 청정법은
이 네 가지에 포섭되네.
017_0030_a_02L淸淨有本性,
無垢道攀緣,
一切淸淨法,
此四種所攝.

【釋】‘본성이 청정함’이란 자체의 청정을 말한다. 이것의 자체는 곧 진여이다. 모든 중생이 다 평등한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존재하므로 일체법을 여래장이라고 말한다. ‘오염이 없는 청정’이란 이 진여가 번뇌장과 지장의 오염을 여읜 것이다. 이 진여가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증득에 이르는 수도의 청정’이란 그것을 증득하는 수도가 역시 청정하기 때문이다. 곧 4념처 등의 보리분법과 바라밀이다. ‘수도가 생겨나는 경계의 청정’이란, 모든 보리분법이 생겨나는 조건을 뛰어나게 증득함이다. 이 생겨나는 조건 역시 청정하기 때문에 수도가 생겨나는 경계의 청정이라고 말한다. 곧 계경[修多羅] 등 12분교이다. 만일 이 12분교가 분별성이라면 염오의 원인을 이룬다. 만일 의타성이라면 허망됨을 이룬다. 가장 청정한 법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허망되지 않다. 이 두 가지 자성을 여의기 때문에 성취성을 이룬다.
017_0030_a_03L釋曰:本性淸淨者,是自體淸淨,此自體卽是眞如,一切衆生皆有,以平等相故.由有此故,說一切法爲如來藏.離垢淸淨者,卽此眞如離,煩惱障`智障垢已,由此眞如淸淨故,得名爲佛.至得道淸淨者,得彼之道,亦是淸淨,卽是菩提分`念處等波羅蜜故.道生境界淸淨者,是諸菩提分法,勝得生緣,此生緣亦是淸淨,故說道生境界淸淨,卽是修多羅等十二部言教.此言教若是分別,卽成染污因若是依他,卽成虛妄.最淸淨法界,所流津液,故非虛妄.由離此二性,故得爲成就.
마땅히 알지니, 또한 이 네 가지 양상은 대승 안에서 한 종류로 말하여 성취성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 처음의 두 가지는 변이가 없는 성취이기 때문에 성취성이라고 한다. 나중의 두 가지는 전도됨이 없기 때문에 성취성이라고 부른다.
017_0030_a_17L又此四種相,於大乘中,隨說一種,應知卽是說成就性.於中初二不變異成就,故名成就,後二以不顚倒故,名成就.
017_0030_b_01L나중의 게송에서 이런 의미를 갖추어 밝힌다. ‘요술 등은 생겨남을 말한다’는 것은 의타성을 생겨남[生]2)으로 이름한다. 어느 곳에서 일체법이 마치 요술 나아가 변화 등과 같다고 말하면, 마땅히 알지니, 이것은 의타성을 말한다. ‘비존재라고 말함은 분별을 나타낸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아가 일체법이 비존재라고 말하면, 마땅히 알지니, 이것은 분별성을 말한다.
017_0030_a_20L於後偈中,具明此義.幻等說於生者,依他性說名爲生.隨於何處,說一切法如幻,乃至如化等,應知此說依他性.說無顯分別者,若說無有色無所有,乃至一切法無所有,應知此說分別性.
【論】또한 무슨 까닭에 경전에서 말씀한 바와 같이 의타성에 대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말하는가? 의타성에 대해서 다른 이의 허망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또한 어떻게 다른 이가 의타성에 대해서 허망된 의심을 갖는가? 다른 이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경계를 이루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의 비유를 말한다. 만약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심왕과 심소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비유를 말한다. 만일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함의 수용이 성립되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말한다. 만약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선업과 불선업의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못한 결과가 생겨나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 영상의 비유를 든다.
017_0030_b_02L論曰:復次何因緣故,如經所說,依他性,譬幻事等,爲除他人,於依他性中,虛妄疑故.又云何他人,於依他性,虛妄中生疑?他人作如是念:云何實無有義,而成境界?爲除此疑故,說幻事譬.若實無有義,心及心法云何得生?爲除此疑故,說焰譬.若實無有義,云何愛`非愛受用得成?爲除此疑故,說夢譬.若實無有義,善`不善業,愛`非愛果,云何得生?爲除此疑故,說鏡像譬.
만일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갖가지 식이 생기하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한다. 만약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갖가지로 언설을 유포하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든다. 만일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실제로 삼마제의 경계를 취할 수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든다. 만약 실제로 대상이 없다면, 자재를 얻은 보살이 전도되지 않은 마음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가?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변화의 비유를 말한다.
017_0030_b_12L若實無有義,種種識云何得生?爲除此疑故,說光影譬.若實無有義,種種流布言說,云何得生?爲除此疑故,說嚮譬.若實無有義,取實三摩提中境界,云何得成?爲除此疑故,說水月譬.若實無有義,得自在菩薩,以不顚倒心,爲作衆生利益事故生,云何得成?爲除此疑故,說變化譬.
017_0030_c_01L【釋】의타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말한다. 여기서 ‘허망된 의심’이란 허망된 자체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의타성에 대해서 요술 등의 비유를 들어서 요술의 형상이 실제로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경계를 이루듯이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함을 나타낸다.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요술의 비유를 든다.
만일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연되는 것도 없는데, 심왕과 심소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다른 이의 이러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아지랑이의 비유를 든다. 여기서 아지랑이는 심왕과 심소를 비유하고, 물은 대상을 비유한다. 마치 아지랑이가 움직임으로써 물이라는 대상의 지각이 생겨나지만 실제로는 물이 없음과 같다. 이와 같이 심왕과 심소도 역시 그러하다. 움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대상이 없는데도 식을 일으킨다.
017_0030_b_20L釋曰:爲顯示依他性故,說幻等譬.於中虛妄疑者,於虛妄體中生疑故,於依他性中,以幻等譬喩,顯示如幻像實無有義,而成境界,諸法亦爾,爲除彼疑故,作幻譬.若無義則無所攀緣,心及心法,云何得生?爲對治他人此疑故,說焰譬.於中焰譬心及心法,水喩於義,如焰動故,水義識生,實無有水.如是心及心法亦爾,由動故實無有義而生於識.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또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수용이 이루어지는가?”라고 한다.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꿈의 비유로써 의타성을 나타낸다. 마치 꿈속에서 실제로 대상이 없는데도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수용이 이루어짐과 같다. 여기서도 역시 그러해서 수용이 이루어진다.
017_0030_c_07L諸小凡夫又復有疑:若無有義,云何愛非愛受用得成?爲除此疑故以夢譬.依他性如夢中,實無有義,而愛非愛受用得成.此中亦爾,受用得成.
또한 다시 의심하기를 “만일 선업과 불선업이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의 대상이 성립되는가?”라고 한다.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거울 영상의 비유로써 의타성을 나타낸다. 마치 거울의 영상이 실제로 대상이 없어도 거울면에 영상의 지각이 생겨나서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도 영상의 대상이 생겨난다. 마땅히 알지니, 이것도 역시 그러해서 사랑스럽거나 사랑스럽지 않은 과보의 대상이 실제로는 없어도 역시 볼 수 있다.
017_0030_c_11L又復有疑:若善`不善業無義,云何愛不愛果義得成?爲除此疑故,以鏡像譬喩.依他性如鏡像,實無有義,卽於自面有像智生,實無有像義可得.此亦如是,愛`非愛果義,實無所有,然亦可見應知.
또한 다시 의심하기를 “만일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갖가지 식이 생기하는가?”라고 한다.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로써 의타성을 나타낸다. 가령 사람이 그림자 장난을 하여 갖가지 모습에 따라 많은 종류의 그림자가 나타나지만, 실제 그림자의 대상은 얻을 수 없다. 식도 역시 이와 같아서 실제로 갖가지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갖가지 대상을 볼 수 있다.
017_0030_c_16L又復有疑:若無有義,云何得有種種識生?爲對治此故,以光影譬.依他性如人弄影,隨種種相貌,則有多種影現,然無實影義可得.識亦如是,實無種種義,然有種種義可見.
또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량없는 종류의 언설이 유포되는가?”라고 한다. 이런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로써 의타성을 나타낸다. 마치 메아리는 실제 대상이 없어도 들을 수 있듯이 유포된 언설도 실제로 대상이 없어도 역시 얻을 수 있다.
017_0030_c_21L又復有疑:若無有義,云何無量種流布言說得生?爲除此疑故,以嚮譬.依他性如嚮,實無有義,而亦可聞,如是流布言說,實無有義,而亦可得.
017_0031_a_01L또한 다시 의심하기를, “만일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선정에 든 이의 심왕과 심소가 대상을 보는가? 경전에서 ‘선정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 알고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런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든다. 마치 물에 비친 달은 실제로 대상이 없어도 역시 볼 수 있음과 같다. 물이 부드럽고 맑으며 깨끗하기 때문이다. 선정의 마음도 역시 그러해서 실제로 경계의 대상이 없어도 역시 볼 수 있다. 삼마제는 마치 물의 자체가 맑고 부드러움과 같기 때문이다.
017_0031_a_02L又復有疑:若無有義,云何得定者,心及心法得見於義?由經說:得定心者如實知`如實見故.爲對治此故,說水月喩.如水月實無有義,而亦可見,以水潤滑澄淸故.定心亦爾,實無境界義,而亦得見,三摩提如水體潤滑故.
또한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실제의 중생이 없다면 여실한 지혜를 얻은 보살들이 어떻게 먼저 지혜로써 관찰하고 그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여러 윤회세계에서 신체를 받겠는가?”라고 한다. 이런 의심을 다스리기 위해서 변화의 비유로써 의타성을 나타낸다. 마치 변화가 실제로는 대상이 없어도 변화자의 마음에 따라 모든 일이 성취되며, 변화가 아니고서는 대상을 얻을 수 없음과 같다. 마땅히 알라. 그와 같아서 비록 받는 신체가 실제의 대상이 없어도 모든 중생을 위해서 신체를 받으며, 이 대상은 볼 수 있다.
017_0031_a_08L又復有疑:若無實衆生,云何得如實智諸菩薩等,先以智慧觀察,爲彼等衆生,於諸趣受身?爲對治此疑故,以變化譬喩.依他性,如變化實無有義,隨化者,心一切事成,非無化事可見.如是雖無受身實義,然爲一切衆生故,受身此義可見應知.
017_0031_b_01L또한 어떤 취지에서 세존께서 요술 등 여덟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여기서 ‘요술의 비유’는 눈 등 여섯 가지 내부의 포섭처를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마땅히 알지니, 눈 등은 마치 환상과 같아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역시 볼 수 있다. ‘아지랑이의 비유’는 자연계를 나타낸다. 그것의 자체가 광대하기 때문이다. 마치 아지랑이가 동요함으로써 실제로 물이 없어도 물을 볼 수 있음과 같다. 물질 등을 수용함을 다스리기 위해서 ‘꿈의 비유’를 든다. 마치 꿈속에서 물질 등이 실제로 없어도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랑ㆍ증오 등의 수용이 이루어짐과 같다. 신업을 다스리기 위해서 ‘거울 영상의 비유’를 든다. 착하거나 착하지 못한 신업이 인연이 되어 다른 물질의 영상이 생겨난다. 구업을 다스리기 위해서 ‘메아리의 비유’를 든다. 구업이 원인이 되어 구업의 결과가 생겨남이 마치 메아리와 같다. 의업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욕계3)이고, 둘째는 고요한 지위4)이며, 셋째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 등이다. 그 중에서 욕계의 의업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림자의 비유’를 말한다. 의업의 과보가 마치 그림자와 같기 때문이다. 고요한 지위의 의업을 다스리기 위해서 ‘물에 비친 달의 비유’를 말한다. 고요한 지위의 의업의 과보가 물에 비친 달과 같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고요한 마음 가운데 갖가지 과보가 현현한다. 들어서 이루는 지혜 등의 의업을 다스리기 위해서 ‘변화의 비유’를 말한다. 여기서 들어서 이루는 지혜 등이란 들어서 이루는 지혜와 사유해서 이루는 지혜가 훈습하는 바이다. 이 들어서 이루는 지혜 등이 생기함이 변화와 같음을 나타낸다.
017_0031_a_14L復次爲何意故,世尊說幻等八喩?今當顯示.於中說幻喩者,爲對治眼等六內入.由眼等猶如幻像,實無所有而亦可見,應知以此顯示.焰譬喩者,喩器世閒,以體寬大,是故如焰.由動搖故,實無有水,而見有水.爲對治受用色等故,說夢喩,如夢中色等,實無所有,然以此爲因,愛憎等受用得成,以此顯示.爲對治身業故,說鏡像喩,由善不善身業,爲因緣故,有餘色像生.爲對治口業故,說嚮譬,由口業爲因故,得口業,果猶如嚮,以此顯示.意業有三種:一欲界`二靜地`三聞等生.於中爲對治欲界意業故,說光影譬,由意業果報,猶如光影故,以此顯示.爲對治靜地意業故,說水月譬,由靜地意業果,如水中月,實無所有,然於靜心中,有種種果顯現.爲對治聞等意業故,說變化譬,於中聞等者,謂聞思熏習,顯示此聞等意生如化.
【論】세존께서는 어떤 취지에 의해서 『범천문경(梵天問經)』에서 “여래는 생사를 보지 않고 열반을 보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는가? 의타성 중에서 분별성과 성취성을 잡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의 자체가 차별된 의미가 없다. 그 중에서 이 의타성의 분별분은 생사를 이루고, 성취분은 열반을 이룬다.
017_0031_b_11L論曰:世尊依何義故,於『梵天問經』中說,如來不見生死`不見涅槃?於依他性中,約分別性`成就性故.生死`涅槃體無差別義,彼中卽此依他性,分別分成生死,成就分成涅槃.
【釋】이러한 3성(性)의 법의 양상이 계경에서 말씀하신 바대로 수순하여 상응함을 이제 마땅히 나타내야 한다. 어떤 의미에 의거해서 『범천문경』에서 “여래는 생사와 열반을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가? 생사와 열반이 차별이 없는 의미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의타성은 생사가 아니다. 성취분은 열반이기 때문이다. 또한 열반이 아니다. 그 분별분이 생사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우쳐서 한 부분을 말할 수 없다. 세존께서는 의타성에서 한 부분으로도 치우침이 없음을 보셨다. 이런 의미 때문에 그 경전에서 “생사도 보지 않고 열반도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017_0031_b_16L釋曰:此等三性法相,如修多羅所說,隨順相應,今當顯示.依何義故『梵天問經』中,說如來不見生死及涅槃?依生死`涅槃無差別義故.依他性非是生死,由成就分,卽是涅槃故亦非涅槃,由卽彼分別分成生死故,是故不可偏說一分.世尊見依他中,無偏一性,由此意故,於彼經中,說不見生死`不見涅槃.
017_0031_c_01L【論】세존께서 『아비달마경』에서 “세 가지 법이 있나니, 염오분ㆍ청정분ㆍ그 두 부분이다”라고 말씀한 바와 같다. 어떤 의미에 의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의타성 중에서 분별성은 염오분이고, 성취성은 청정분이다. 이 의타성은 그 두 부분이다. 이런 의미에 의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이런 의미는 어떤 비유로써 나타내는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金土藏]로써 비유를 삼는다. 마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서 세 가지를 볼 수 있음과 같다. 첫째는 지계(地界)이고, 둘째는 흙이며, 셋째는 금이다. 지계 가운데 흙은 실재하지 않지만 볼 수 있고, 금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볼 수 없다. 만일 불로 달구면 흙은 나타나지 않고 금이 현현한다. 또한 지계에서 흙의 모습이 현현할 때 이것은 허망된 자체가 현현함이고, 금의 자체가 현현할 때는 진실된 자체가 현현함이다. 그러므로 지계에 두 부분이 있다. 참으로 이와 같아서 이 식의 체성이 아직 무분별지혜의 불로 태워지지 않았을 때는 식의 체성 중에서 허망된 분별성이 현현하고 성취성이 현현하지 않는다. 이 식의 체성이 만일 무분별지혜의 불로 태워지면, 식의 체성 가운데 참존재인 성취성이 현현하고 허망된 분별성은 현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허망된 분별성의 자체인 의타성에 두 부분이 있는 것이 마치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에 지계가 있음과 같다.
017_0031_c_02L論曰:如世尊於阿毘達磨經中說,三種法,染污分`淸淨分,彼二分.依何義故作如此說?依他性中,分別性是染污分,成就性是淸淨分,卽此依他性是彼二分,由此義故,作如此說.此義以何譬顯示?以金土藏爲譬.如金土藏,有三種可見,謂一地界`二土`三金.於地界中.土非有而可見,金實有而不可見.若以火燒,土則不現,金則顯現.復次於地界中,土相現時,是虛妄體現,金體現時,是眞實體現,是故地界有二分.如是如是,此識性,未爲無分別智火所燒時,於識性中,虛妄分別性顯現,成就性不顯現此識性,若爲無分別智火所燒,於識性中,實有成就性顯現,虛妄分別性不顯現.是故此虛妄分別識體,依他性有二分,如金藏土中所有地界.
017_0032_a_01L【釋】이와 같이 『아비달마수다라』에서 말씀하신다. 분별성은 염오성이고, 성취성은 청정성이며, 의타성은 그 두 부분의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 의해서 세 가지 법을 말씀하신다. 이른바 염오분ㆍ청정분 그 두 부분이다. 이것은 금을 함장한 흙덩어리의 비유로써 나타낸다. 여기서 ‘금의 함장’은 금의 종자5)이고, ‘지계’는 견고함의 속성이며, ‘흙’은 만들어진 물질이다. 흙의 물질에서 세 가지를 얻을 수 있다. 그 지계 중에 금이 있지만 다만 흙의 양상이 현현하고, 그 금의 자체는 이후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불로 달구면 금이 현현하기 때문에 금이 본래 존재함을 알 수 있다.
017_0031_c_20L釋曰:如是阿毘達磨修多羅中說:分別者染污性,成就者淸淨性,依他者彼二分體.由此義故,說三種法,謂染污分`淸淨分,彼二分,以此金藏土譬喩顯示.於中金藏者,是金種子,地界者是堅性,土者是所造色,於土顏色中,則有三種可得.彼地界中,所有金但土相顯現,彼金體以後時,可得故知.何以故?若以火燒金則得現,是故知金本來是有.
【論】세존께서는 어느 곳에서는 “일체법이 상주한다”고 말씀하시고, 혹은 “무상하다”고 말씀하시며, 혹은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의미 때문에 상주를 말하는가? 의타성 중에서 성취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주를 말하고, 분별성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무상을 말한다. 그 두 부분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의미 때문에 상주ㆍ무상ㆍ상주도 무상도 아니라고 말하듯이 괴로움ㆍ즐거움ㆍ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님, 선ㆍ불선ㆍ선도 불선도 아님, 공ㆍ공이 아님ㆍ공도 공이 아님도 아님, 자아ㆍ무아ㆍ자아도 무아도 아님, 고요함ㆍ고요하지 않음ㆍ고요함도 고요하지 않음도 아님, 자성이 있음ㆍ자성이 없음ㆍ자성이 있음도 자성이 없음도 아님, 생겨남ㆍ생겨나지 않음ㆍ생겨남도 생겨나지 않음도 아님, 소멸ㆍ불멸ㆍ소멸도 불멸도 아님, 본래 고요함ㆍ본래 고요함이 아님ㆍ본래 고요함도 아니고 본래 고요하지 않음도 아님, 본성열반ㆍ본성열반이 아님ㆍ본성열반도 본성열반이 아닌 것도 아님, 생사ㆍ열반ㆍ생사도 열반도 아님 등 이와 같은 차별은 모든 부처님 세존의 비밀스런 뜻의 말씀으로서 모두 세 가지 자성에 수순한다. 상주ㆍ무상 등의 법문과 같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32_a_07L論曰:世尊有處說一切法常,或說無常,或說非常非無常.爲何義故說常?於依他性中,約成就性分故說常,約分別性分故,說無常,約彼二分故,說非常非無常.爲此義故,說如常無常不二`苦樂亦不二`善不善亦不二`空非空不二`我無我不二`寂靜非寂靜不二`有自性無自性不二`生無生不二`滅無滅不二`本寂非本寂不二`本性涅槃非本性涅槃不二`生死涅槃無二.如是等差別,諸佛世尊一切密語,皆隨順三性,如常無常門說.此中有偈:

법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현재 수많은 종류이듯이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님도 아니네.
그러므로 둘이 아닌 의미를 말하네.
017_0032_a_19L如法無所有,
而現無量種,
非法非非法,
故說無二義.

한 부분에 의해서 나타내면
혹은 존재이거나 혹은 비존재이네.
두 부분에 의해서 말하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네.
017_0032_a_21L依一分顯示,
或有或非有,
依二分說言,
非有非非有.

현현하듯이 존재함이 아니네.
그러므로 비존재라고 말하네.
이와 같이 현현하므로
따라서 존재라고 말하네.
017_0032_a_22L如顯現非有,
是故說爲無,
由如是顯現,
是故說爲有.
017_0032_b_01L
스스로 비존재를 나타내나니
자체가 머물지 않기 때문이네.
집착하듯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없음을 이루네.
017_0032_a_23L自顯無所有,
自體不住故,
如取旣不有,
故成無自性.

자성이 없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이전이 이후의 의지처가 되네.
생겨남도 소멸함도 없고 고요하며
본성이 열반이네.
017_0032_b_02L由無性故成,
前爲後依止,
無生滅寂淨,
及本性涅槃.

【釋】‘법이 존재하지 않으면서 현재 수많은 종류이듯이’에서 이 윗부분 절반의 게송은 그 순서대로 법이 아닌 것ㆍ법이 아님도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고 부른다. 법으로 현현하지 않음도 아니기 때문에 법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둘이 아닌 의미’를 말한다.
017_0032_b_03L釋曰:如法無所有,而現無量種者,此上半偈,如其次第,卽是非法`非非法.何以故?以無所有故,名非法,以非無顯現法故,名非非法.以非法,非非法故,說卽是無二義.
‘한 부분’이란 한 쪽이기 때문이다. ‘혹은 존재이거나 혹은 비존재’란 혹은 존재 쪽이거나 혹은 비존재 쪽이다. ‘나타내면’은 말하기 때문이다. ‘두 부분에 의해서 말하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네’라는 것은, 의타성이 두 부분의 자체를 갖추므로 이런 의미에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현현하듯이 존재함이 아니네’라는 것은, 보는 바와 같은 법 그것은 비존재임을 말한다. 이렇기 때문에 비존재라고 이름한다. ‘따라서 존재라고 말하네’는 이런 의미 때문에 존재라고 부른다. 이제 마땅히 자성 없는 뜻을 나타내야 한다. ‘스스로 비존재’라는 것은 일체법이 인연을 떠나서는 능히 스스로 존재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무자성의 의미이다. ‘자체가 비존재’란 또한 일종의 무자성의 의미이다. 어떤 법이 소멸하면 그 자체가 다시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 ‘자체가 머물지 않기 때문’이란, 모든 법이 생겨날 때에 한 찰나를 지나서는 세력이 능히 머물지 못함을 말한다. 이것도 역시 자성이 없다.
017_0032_b_08L一分者,一邊故.或有或非有者,或於有邊,或非有邊,顯示者說故.依二分說言,非有`非非有者,由依他性具二體,取此義故,說爲非有`非非有.如顯現非有者,如所見法,彼是非有,以如是故,說名爲無.是故說爲有者,卽以此義故,說名爲有.今當顯示說,無自性意.自不有者,由一切法無有,離因緣能自有者,此是一種無自性意.體不有者,又是一種無自性意,若法滅已,彼體不復更生,是故無自性.自體不住故者,諸法卽於生時,無力能過一剎那住,此亦是無自性.
017_0032_c_01L이러한 자성이 없는 법은 성문과 공통된다. ‘집착하듯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것은 성문과 공통되지 않는다. 범부가 집착한 바와 같은 분별성은 이처럼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뜻을 대승에서 자성 없는 법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것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이 없는 것 등 모두가 다 성취된다. 무슨 까닭인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생겨남도 없고,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소멸함도 없다. 생겨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기 때문에 본래 고요하며,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자성이 열반이다. ‘이전이 이후의 의지처가 된다’는 것은 곧 이전을 이후의 원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017_0032_b_21L此等無自性法與聲聞共有.如取旣不有者,此不與聲聞共,如凡夫所取分別性,不如是有故,此意名爲大乘中,無自性法.又卽以此無自性故,無生等一切皆得成就.何以故?由無自性故無生,由無生故無滅,由無生無滅故,本來寂靜,由本來寂靜故,自性涅槃.前爲後依止者,卽是前爲後因故.

4) 사의사합의장(四意四合義章)
017_0032_c_06L四意四合義章第四
【論】또한 네 가지 취지와 네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6)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니, 마땅히 수순해서 들어가야 한다. 첫째는 평등한 취지이니, 이른바 “나는 옛날에 비바시정변지(毘婆尸正遍知)7)라고 이름했느니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둘째는 다른 시기의 취지이니, 이른바 “다보여래의 명호를 염송하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또한 경전에서 “오직 발원하는 것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셋째는 별도 의미의 취지이니, 이른바 경전에서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부처님을 가까이하면 대승법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넷째는 중생의 마음을 따르는 취지이니, 이른바 혹은 이 중생을 위해서 먼저는 보시를 찬탄하고 나중에는 이 중생을 위해서 보시를 비방함이다. 보시와 마찬가지로 계율 및 나머지 수행도 역시 그러하다. 이것을 네 가지 취지라고 한다.
017_0032_c_07L論曰:復有四種意`四種合義,一切佛語應隨順入.一平等意,如言:我於昔時,名毘婆尸正遍知二別時意,如言:誦持多寶如來名,決定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又如經說:唯發願得生極樂世界三別義意,如經說:親近恒伽河沙等諸佛,得解大乘法義四隨人心意,所謂或爲此人讚歎布施,後復爲此人毀訾布施.如布施,戒及餘修,亦如是.是名四種意.
017_0033_a_01L【釋】‘평등의 취지’는 마치 어떤 사람이 같은 법을 취해서 “그것은 곧 나다”라고 말함과 같다. 세존도 역시 그러해서 마음이 평등한 법신에 머무시기 때문에 “나는 그때에 비바시불 등으로 불렸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비바시불이 곧 석가모니불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평등을 취지로 삼기 때문이다.
‘다른 시기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이 취지는 오직 부처님의 명호를 염송하는 것만으로 결정적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하나의 금전으로써 천 개의 금전을 얻는 것이 어찌 하루 만에 이루어지겠는가? 이 취지는 다른 시기의 증득에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금전은 천 개 금전을 얻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 마땅히 알라. 오직 발원하는 것만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취지도 역시 그러하다.
017_0032_c_17L釋曰:如有人取同法故,言彼卽是我.世尊亦爾,心在平等法身故,說我於彼時,名毘婆尸等,非毘婆尸,卽是釋迦牟尼佛,此中以平等爲意故.別時意者,此意非唯稱佛名,決定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言以一金錢,得千金錢,豈一日得耶?此意在別時得故,以彼一金錢,得千金錢因故.如是如是,唯發願得生極樂世界,意亦如是應知.
‘별도 의미의 취지’ 중에서 ‘대승법을 해석한다’는 것은 3성의 도리에 대해서 스스로 그 양상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세존의 취지가 다만 문장 그대로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라면, 범부도 역시 마땅히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의미를 해석하는 이는 반드시 수많은 부처님을 가까이하고서야 비로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취지이다.
‘중생의 마음을 따르는 취지’란, 혹은 이 사람에 대해서 보시를 찬탄하고 혹은 이 사람에 대해서 보시를 비방함이다. 이러한 취지는 그 사람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인색하면 그에게 보시를 찬탄하고, 이 사람이 보시에 대해서 뛰어난 의욕을 얻으면 곧 그에게 보시를 비방한다.8) 만일 이런 취지가 없다면 하나의 보시에 대해서 혹은 찬탄하고 혹은 비방함은 위배된다.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찬탄하거나 비방함이 다 도리에 맞다. 마땅히 알라. 계율 등도 역시 그러하다. ‘나머지 수행’은 세간의 수행을 말한다.
취지와 의미의 양상 차이는 다음과 같다. 만일 세존께서 마음을 두어서 말씀하시면 취지라고 하고, 말씀에 의거해서 결정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가게 함을 의미라고 부른다.
017_0033_a_04L別義意中,得解大乘法者,謂於三性道理,自覺其相.若世尊意,但以如文詞,爲解義者,凡夫亦應正解,彼解義者,必由親近,無量諸佛,方乃得故,此是佛意.隨人心意者,或於此人,讚歎布施,又於此人,毀呰布施,如是意者,隨彼得成.若人慳悋,於彼讚若此人於施,已得勝欲,卽於彼所毀呰布施.若無此意,於一施中,或讚或毀,卽是相違.由有此意故,若讚若毀,皆悉相應.戒等亦爾應知.一分修者,謂世閒修故.意與義異相者,若世尊心有所在,而說者爲意,由所說決定,令入佛教中者名義.
【論】네 가지 함축적인 의미가 있다. 첫째는 들어가게 하는 의미이니, 성문승이나 대승에서 세속제의 도리에 의지해서 윤회 주체와 법의 두 가지의 자성과 차별을 말함이다. 둘째는 양상의 의미이니, 말한 바 법의 양상에 따라서 다 세 가지 자성으로 나타낸다. 셋째는 다스림의 의미이니, 이른바 8만 4천 가지 모든 다스림의 수행문을 말하기 때문이다.
017_0033_a_17L論曰:四種合義者,一令入義,所謂如於聲聞乘中`若大乘中,依世諦道理,說人法二種,自性及差別二相義,謂隨所說法相中,皆以三性顯示三對治義,所謂說八萬四千諸對治行門故.
017_0033_b_01L【釋】여기서 ‘들어가게 하는 의미’란 다음과 같다. 윤회 주체와 법의 두 가지에 대해 세속제의 도리를 기준으로 해서 자성이나 차별을 말한다. 중생을 불법에 들어가게 함이니, 이것을 들어가게 하는 의미라고 부른다. ‘양상의 의미’란 이 가운데 마땅히 양상의 의미로써 그 양상을 말함이다. 세 가지 자성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스림의 의미’란 중생의 행동을 다스림을 말함이다. 모든 중생의 번뇌의 다스림을 말하여, 중생의 번뇌를 다스리는 곳을 안립하기 위해서이다.
017_0033_a_22L釋曰:於中令入義者,於人法二種,約世諦道理,或說自性,或說差別,爲令衆生入佛法故,是名令入義.相義者,於中應以相義,說其相,由說三性故.對治義者,謂說衆生行對治,卽是說諸衆生,煩惱對治,爲安立衆生,對治煩惱處故.
【論】넷째는 바뀜[飜]9)의 의미이니, 저 별도 의미의 언어ㆍ문자가 별도의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여기에 게송이 있다.
017_0033_b_06L論曰:四翻義,如別義語字,顯示別義故.此中有偈:

아사리사 라말다야 비발리야 사자소싣티 다자길리시날자 소싱길리슬
阿娑犁娑 羅末多耶 毘鉢唎耶 斯柘素悉▼(肆-聿+頁)他棄多者吉犁絁捺柘 素僧吉利瑟
타 라반뎌몯디모답마
吒 羅槃低菩提沒答摩
017_0033_b_08L阿娑犂娑 羅末多耶 毘鉢唎耶 斯柘素悉鬚他棄多者吉犂絁柰柘 素僧吉 利瑟咤 羅槃低菩提沒答摩

【釋】여기서 ‘아사리(阿娑犁)’의 드러난 의미는 진실되지 못함을 말하고, 은밀한 의미는 부동을 말한다. 곧 선정이 부동이기 때문에 아사리라고 부른다. ‘사라말다야(娑羅末多耶)’는 번역하면 선정에 대해서 존중의 의미를 일으킴을 말한다. ‘비발리야사자(毘鉢唎耶斯柘)’의 드러난 의미는 전도를 말하고, 은밀한 의미는 전도되게 하는 것[飜倒]을 말한다. ‘소싣티다자(素悉镸頁 多者)’는 전도되게 하는 것에 잘 머무는 것을 말한다. 잘 머물기 때문에 무상을 상주라고 말하니, 이것은 전도됨이다. 그 무상을 돌이켜서 상주라고 말해서 전도 가운데 잘 머물기 때문이다. ‘길리시날자(吉犁絁捺柘)’의 드러난 의미는 번뇌이고, 은밀한 의미는 정진하여 고뇌함을 말한다. ‘소싱길리슬타(素僧吉利瑟吒)’는 잡염에 잘 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생사 가운데 오랫 동안 물들면서 정진하여 고뇌하네”라고 말씀한다. ‘나반뎌몯디모답마(羅槃低菩提沒答摩)’는 번역하면 장차 뛰어난 보리를 얻는다는 뜻이다. 이 문구는 알기 쉽다.
017_0033_b_11L釋曰:於中阿娑犂者,顯了義名不實,隱密義名不動,卽是定以不動故,名阿娑犂.娑羅末多耶者,翻名於定起尊重意.毘鉢唎耶斯柘者,若顯了義名顚倒,隱密義名翻倒.素悉鬚多者,謂善住於翻倒中,善住故無常謂常.此爲顚倒,翻彼無常,謂常倒中善住故.吉犂絁柰柘者,若顯了義,名煩惱,隱密義名勤苦.素僧吉利瑟咤者,謂善染,是故經說:於生死中,久染勤苦.羅槃低菩提沒答摩者,翻云當得勝菩提,此句可解.
017_0033_c_01L【論】만약 대승법을 해석하고자 하면 간략히 말해서 세 가지 양상으로 해석해야 한다. 첫째는 연생(緣生)을 해석하여 말하고, 둘째는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해석하여 말하며, 셋째는 가르침의 의미를 해석하여 말함이다.
여기서 연생을 해석하여 말함은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033_b_23L論曰:若欲解釋大乘法,略說應以三種相解釋:一解說緣生`二解說因緣所生法`三解說言教中義.於中解說緣生者,如偈說:

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 법이니
이것이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네.
017_0033_c_04L言熏所生法,
此於彼亦爾.

이것은 과보식10)과 생기식(生起識)11)이 서로 연생이 됨을 나타낸다. 그 인연으로 생겨난 법은 생기식을 양상으로 삼고, 유상식과 유견식의 자체를 본성으로 삼는다. 그것은 머물러 지니는 것으로써 양상을 삼고, 분별로써 양상을 삼으며, 법의 본래 모습으로써 양상을 삼는다. 이것은 세 가지 자성의 양상을 나타낸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033_c_05L此顯果報識,及生起識,更互爲緣生故.彼因緣所生法者,生起識爲相,有相及見識體性.彼以住持相`分別相`法爾相,卽此得顯三性相.如偈說:

유상식과 유견식이 있나니
마땅히 세 가지 양상을 알아야 하네.
017_0033_c_09L有相及有見,
是應知三相.

또한 그 양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분별상은 의타상 중에서 자체가 없고, 성취상은 의타상 중에서 존재한다. 이 두 가지로 인하여 비존재와 존재, 얻지 못함과 얻음, 진실을 보지 못함과 진실을 보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이다. 또한 의타상 중에서 분별상은 없고 성취상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얻으면 이것을 얻지 못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을 얻는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17_0033_c_10L復次云何解釋彼相?謂分別相,於依他相中無體,成就相,於依他中是有,由此二故不有及有`不可得可得`不見眞實見眞實,此二同時.又於依他性中,分別無所有,成就是有故,得彼不得此,不得彼得此.如偈說:

의타상에는 분별상이 없고
오직 성취상이 있네.
얻지 못함과 얻음은
그 안에서 두 가지는 평등하네.
017_0033_c_16L依他無分別,
唯成就是有,
不得及可得,
於中二平等.
017_0034_a_01L
【釋】‘언어의 훈습에서 생겨난 법’이란 다음과 같다. 외부의 분별 훈습이 아리야식 안에 저장되어 있고, 이 훈습을 원인으로 일체법을 생겨나게 한다. 곧 이것은 생기식의 자성이다. ‘이것이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은, 이 분별 훈습이 곧 그 모든 법을 원인으로 삼음을 말한다. 이것은 아리야식이 생기식과 서로 원인이 됨을 나타낸다. 또한 그 생기식의 체성은 일체법이다.
‘유상식과 유견식의 자체를 본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만일 식의 자체가 유상식과 유견식이라면 곧 그것의 자체임을 말한다. 이 모든 법에 세 가지 양상이 있다. 이른바 ‘머물러 지니는 양상’이란 곧 의타상이다. 이렇게 말한 바에 의거해서 세 가지 자성이 갖는 양상이 현현한다.
이러한 의미들을 게송으로 나타낸다. ‘유상식과 유견식이 있나니, 마땅히 세 가지 양상을 알아야 하네’에서 이러한 세 가지 양상은 본 논서의 해석에서 나타낸 것과 같다. ‘비존재와 존재, 얻지 못함과 얻음, 진실을 보지 못함과 진실을 보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017_0033_c_18L釋曰:言熏所生法者,謂外分別熏習阿梨耶識,卽於識中住,以此熏習爲因,生一切法,卽是生起識自性.此於彼亦爾者,此分別熏習,卽以彼諸法爲因,此顯示阿梨耶識,與生起識,更互爲因.又彼生起識性,所有諸法,有相有見識體爲性者,謂若識體有相及有見,卽是彼體.此諸法有三相,所謂住持相者,卽是依他相.由此等所說故,三性所有相,卽得顯現.如是等義,以偈義顯現有相有見.是應知三相者,此等三相,如論本解釋中顯示,不有及有`不可得可得`不見眞實見眞實,此二同時等者,以顯示之.
여기서 두 가지는 분별성과 성취성이다. 이 두 부분에 있어서 하나는 비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비존재와 존재라고 말한다. 만약 분별성을 얻으면 곧 성취성을 얻지 못한다.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 분별성을 얻지 못하면 성취성을 얻는다. 진실을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들을 또한 게송으로 나타낸다.
게송에서 ‘평등’이라고 말함은 한 찰나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는 의타성 안에서이다. ‘두 가지’란 진실을 보는 것과 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는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의타성에서 분별성은 비존재이고 성취성은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 모든 범부들은 전도된 견해로써 보고, 모든 성인은 바른 견해로써 본다.
017_0034_a_09L此中二者,謂分別及成就,於此二分,一不有`一是有故,說名有不有.若得分別,則不得成就,由不見眞實故,卽於彼時,不得分別,而得成就,由見眞實故.如是等義,又以偈顯示.偈中言:平等者,謂一剎那故.於中者,謂依他性中故.二者,謂見眞實,不見眞實故.故者,有因緣故.由依他性中,分別是無`成就是有故,彼諸凡夫,顚倒取故見,諸聖人正見故見.
017_0034_b_01L【論】가르침의 의미를 해석함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문구를 근본으로 삼고, 나머지 문구로써 그 부분을 나타낸다. 혹은 공덕의 의지처이고 혹은 의미의 의지처이다.
공덕의 의지처란 부처님의 공덕을 말함과 같다.12) 즉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고, 두 가지 법13)이 현행하지 않으며, 형상이 없는 법14)을 뛰어난 길로 삼고, 부처님이 안주하는 곳15)에 머무르며, 모든 부처님의 평등한 성품을 증득하고, 장애 없는 곳에 이른다. 외도 등에 의해 퇴전하지 않는 법으로서 걸림 없는 경계이며, 안립하는 바16)가 불가사의하다. 삼세가 평등함17)에 들어가고, 모든 세계에 몸을 두루 나투며, 일체법에 대해서 걸림 없는 지혜이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행이 지혜를 구족한다.18) 법에 대해서 지혜가 걸림이 없고, 분별이 없는 신체19)이며, 모든 보살이 수용하는 지혜이다. 부처님의 둘이 없는 경지20)에 이르러 첫째 가는 바라밀에 안주한다. 궁극적으로 여래의 차별 없는 해탈의 지혜를 이루고, 중간과 극단이 없는 부처님 지위의 평등함에 들어가며, 법계의 첫째이고, 허공계를 다하는 것 등이다.21)
017_0034_a_19L論曰:解釋言教中義者,如說初句爲本,以餘句顯示其分,或功德依止`或義依止.功德依止者,如說佛功德,最淸淨覺`無二法`行無相法爲勝道`住於佛住`得一切佛平等`至無障㝵處`不退轉法`無㝵境界`不可思議成立`入三世平等`遍行一切世界身`一切法無疑智`一切行具足知`於法智無疑`無分別身`一切菩薩所受智`到無二佛住第一波羅蜜`至究竟無差別如來解脫智`入無邊無中佛地平等法界`第一盡虛空界等.
마땅히 알지니, 가장 청정한 깨달음을 근본으로 삼고, 그 나머지 모든 문구는 이 문구의 차별이다. 이러한 것들을 이름하여 모든 법의 본체를 잘 해석한 것으로 삼는다. 마땅히 알지니,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란 이 부처님 세존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으로서 나머지 21가지 부처님의 공덕을 포섭한다.
017_0034_b_08L最淸淨覺爲本,其餘諸句,是此句差別應知,如是等名爲善解釋.諸法體最淸淨覺者,此佛世尊最淸淨覺,應知攝餘二十一佛功德.
017_0034_c_01L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 한결같이 장애 없이 전전하는 공덕, 유무(有無)의 두 가지 양상이 없는 진여의 가장 청정한 것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의식적인 노력 없이 불사(佛事)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공덕, 법신을 의지처로 삼고 마음과 업에 차별이 없는 공덕,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것을 닦는 공덕, 모든 외도를 항복시키는 공덕,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법에 걸림이 없는 공덕, 법을 안립하는 공덕, 수기(授記)하는 공덕, 모든 세계에서 수용신과 화신을 시현하는 공덕, 의심을 끊은 공덕, 갖가지 행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 미래의 법에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 하고자 하는 그대로 시현하는 공덕, 한량없는 신체를 중생교화의 일로 삼는 공덕,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이 성취된 공덕, 불국토의 차별 없이 믿고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나타내는 공덕, 세 가지 불신이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 생사가 다하도록 항상 모든 중생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는 공덕, 다함 없는 공덕 등이다.
017_0034_b_12L謂於應知中,一向無障㝵轉功德,令入有無無二相,眞如最淸淨功德無功用佛事不休息,佛住功德法身爲依止,心業無差別功德修對治一切障功德降伏一切外道功德生在世閒,不爲世法所㝵功德成立法功德授記功德一切世界中,示現受用身,化身功德斷疑功德令入種種行功德未來法生智功德如所樂欲,爲顯示功德無量身,爲教化衆生事功德平等法身波羅蜜,成就功佛剎無差別,隨所信樂,顯示功德三種佛身,無方所限分功德窮生死際,恒爲利樂一切衆生功德無盡功德.
【釋】‘그 부분을 나타낸다’는 것은, 본문에서 해석한 바와 같이 이제 그 의미를 나타내야 한다. 혹은 공덕에 포섭되고 혹은 의미에 포섭된다. 공덕에 포섭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을 첫 번째 문구로 삼고 나머지 모든 문구는 그 의미를 나타낸다.
이 중에서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의 현행이 있을 수 없음을 두 가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문ㆍ벽지불의 지혜가 장애22)가 있기도 하고 또한 장애23)가 없기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유무(有無)의 두 가지 양상이 없다. ‘가장 청정하다’는 것은 청정진여를 말한다. 곧 형상이 없는 법이다. 이 진여는 형상이 없다. 일체법이 비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형상이 없지도 않다. 자체의 양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 진여는 형상 없는 법 가운데 가장 청정함에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들어가게 하는 공덕’이라고 말한다.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길[道]이라고 부른다. 길이란 들어가는 곳의 의미이기 때문에 길이라고 부른다.
017_0034_c_02L釋曰:顯示其分者,如所應解釋,今顯示此義.或功德所攝,或義所攝,於功德所攝中,最淸淨覺者,此爲初句,所餘諸句,顯示其義.於中無二行者,二行不可得,是名無二行.非如聲聞,辟支佛智,亦有障㝵,亦無障㝵.有無無二相,第一淸淨者,謂淸淨眞如,卽是無相法.此眞如非有相,由一切法,無所有故亦非無相,由有自體相故.此眞如於無相法中,爲第一淸淨.入處故,言令入功德.最勝故名爲道,道者入處義,故名爲道.
‘의식적인 노력 없이 불사를 짓고 휴식 없이 머무는 공덕’이란, 모든 불사가 항상 행해지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것을 닦는 공덕’이란, 언제나 항상 깨달음을 닦음으로써 능히 모든 장애를 다스리는 것이다. ‘세간에 머물러도 세간법에 걸림이 없는 공덕’이란 다음과 같다. 범부는 세간에 태어나면 반드시 세간의 경계를 행한다. 그러나 보살은 비록 세간에 살더라도 세간의 이익 등 여덟 가지 법24)에 물들지 않는다.
017_0034_c_14L無功用佛事不休息,佛住功德者,謂於所有佛事,常行不住故.修對治一切障功德者,以一切時恒修覺故,能對治一切障㝵.生在世閒,不爲世法所㝵功德者,凡生在世閒,必行世境界,然雖生世閒,不爲世閒,利等八法所染.
017_0035_a_01L‘법을 안립하는 공덕’이란 계경 등의 모든 법이 한량없고 불가사의하여 범부가 능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이 가장 청정한 깨달음의 문구는 하나하나의 문구에 다 상응한다.25)
‘미래의 법에 지혜를 일으키는 공덕’이란, 미래세의 법이 이와 같이 생겨남에 대해서 모두 능히 알기 때문이다. ‘한량없는 신체를 중생교화로 삼음에 상응하는 공덕’은 다음과 같다. 한량없는 보살의 신체가 중생을 교화하는 일을 하면, 모든 부처님이 자신과 남이 평등한 지혜를 얻기 때문이고, 그 지혜가 부처님의 지혜에 포섭되기 때문에 곧 부처님의 교화사업이 된다.
017_0034_c_20L成立法功德者,修多羅等諸法,無量不可思議,以凡夫不能入故,名最淸淨覺.卽此最淸淨覺句,一一句中,皆相應.未來法,生智功德者,謂於未來世法,如是生皆能知故.無量身爲教化衆生相應功德者,謂無量諸菩薩身,若作教化衆生事,諸佛得自他平等智故,彼智卽爲佛智所攝故,卽是佛教化事.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이 성취된 공덕’이란, 법신은 두 가지가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 이름하고, 이 두 가지가 없는 법신이기 때문에 가장 청정한 바라밀을 얻는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차별이 없는 해탈의 지혜에 이른다’는 것은, 여래의 차별 없는 지혜에 대해서 해탈이 궁극에 이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탈이란 매우 뛰어난 이해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불신이 장소에 한계가 없는 공덕’이란 법신은 약간의 장소에 대해서도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수용신과 화신은 모든 세계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하다. ‘법계의 첫째’란 가장 청정한 법계의 첫째이기 때문에 법계의 첫째라고 이름한다. ‘허공계를 다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지혜가 허공처럼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고 부른다.
017_0035_a_06L平等法身波羅蜜,成就功德者,謂法身無二故,名平等,以此無二法身故,名得最淸淨波羅蜜.至究竟無差別解脫智者,謂於如來無差別智中,解脫究竟故.此中解脫者,卽是增上解故.三種佛身,無方所限分功德者,謂法身於若干方處,不能分限,如是受用身`化身於諸世界亦爾.法界第一者,最淸淨法界第一故,名法界第一.盡虛空界者,佛智如虛空無盡故,是故名爲最淸淨覺.
017_0035_b_01L【論】또한 의미의 의지처란 경전에서 “보살이 32가지 법을 구족하면 곧 보살이라 이름한다”고 말씀한 바와 같다. 모든 중생에 대해서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어떤 가치가 있는 지를 알기 때문이고, 교만을 버리기 때문이다. 견고한 의욕이기 때문이고, 위하는 바가 있어서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친한 이와 친하지 않은 이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이기 때문이고, 영원히 착한 벗이 되어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기 때문이고, 미소를 머금고 먼저 말하기 때문이며, 무한한 대자비이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지고서 퇴전하지 않기 때문이고, 피곤해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교의의 의미를 듣고서 싫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해서 능히 그 허물을 보기 때문이고, 남이 지은 죄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모든 위의 가운데 보리심을 닦기 때문이고, 과보를 바라지 않고 보시를 행하기 때문이고, 모든 중생의 윤회세계에 의지하지 않고 계율을 지니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에 대해서 걸림 없이 인욕을 행하기 때문이고, 모든 선법을 섭수해서 정진하기 때문이다. 무색계를 여의면서 선정을 닦기 때문이고, 방편에 상응하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017_0035_a_16L論曰:復次義依止者,如經說:菩薩具足三十二法者,說名菩薩,於一切衆生起利樂意故,令入一切智智故,知我何價故,捨憍慢故牢固意故,非有所爲作憐愍故,於親非親平等心故,究竟親友乃至涅槃際故,應量而語故,微笑先言故,無限大悲故,荷負重擔無退屈故,無疲惓意故,聞義無厭故.自所作罪能見其過故,於他罪失不嫌而誨故,一切威儀中修菩提心故,不求果報而行施故,不依止一切有趣生而持戒故,於一切衆生無㝵行忍故,攝取一切善法而行精進故,捨離無色界而修禪故,方便相應智慧故.
네 가지 포섭하는 일[攝事]26)로써 포섭의 방편을 삼기 때문이고,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파함에 있어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두 가지가 없기 때문이다. 공경히 정법을 듣기 때문이고, 공경히 아련야(阿練若)27) 장소에 머물기 때문이고, 세간의 번잡한 일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등한 교법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고, 대승 안에서 공덕을 보기 때문이다. 나쁜 벗을 멀리하고 착한 벗을 가까이하기 때문이고, 네 가지 청정한 행[四梵行]28)을 닦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신통에서 노닐기 때문이고, 지혜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이다. 바른 행에 머물거나 바른 행에 머물지 않는 모든 중생의 무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말이 한결같기 때문이고, 진실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보리심을 머리로 삼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들이 모두 첫 번째 문구의 차별로서 모든 중생에 대해서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이다.
017_0035_b_08L以四攝事爲攝方便故,持戒破戒慈愛無二故,恭敬聽聞正法故,恭敬住阿蘭若處故,於世閒雜事不樂著故,於下乘中無悕欲故,於大乘中見功德故,遠離惡友故,親近善友故,淨修四梵行故,遊戲五通故,隨智行故,於住正行不住正行諸衆生不棄捨故,一向語故,重眞實故,菩提心爲首故.如是諸句,皆初句差別應知.於一切衆生中,利樂意者.
017_0035_c_01L마땅히 알지니, 이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의 문구에 16가지 업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16가지 업이란 첫째는 전전히 행을 일으키는 업이고, 둘째는 전도됨이 없는 업이며, 셋째는 남이 청하지 않아도 역시 자연히 행하는 업이고, 넷째는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는 업이다. 다섯째는 구하는 바가 없는 업이니, 이에 세 가지 문구가 있다. 과보가 돌아오기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거스르거나 수순하는 중생,에 대해서 증오나 애착이 없기 때문이며, 끊임없는 윤회의 삶[生生]29)에서 수순해서 따르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이 부류 중에 신업과 구업의 두 문구가 있고, 일곱째는 괴로움ㆍ즐거움ㆍ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닌 것[無二]에 대해서 평등한 업이며, 여덟째는 열등하지 않은 업이고, 아홉째는 퇴전하지 않는 업이며, 열째는 중생을 섭수하는 방편의 업이다. 열한째는 장애를 혐오하는 업이니, 이에 두 문구가 있다. 열두째는 끊임없이 사유하는 업이다. 열셋째는 뛰어나게 나아가는 업이니, 이에 일곱 문구가 있다. 6바라밀을 바르게 수행하고, 네 가지 포섭하는 일을 수행한다. 열넷째는 방편을 수행하여 성취하는 업이니, 이에 여섯 문구가 있다. 선지식을 가까이하기 때문이고, 정법을 청해 듣기 때문이며, 아련야 장소에 머물기 때문이고, 나쁘게 헤아리는 생각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바르게 사유하는 공덕30)이니, 이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일을 함께하는 공덕이니, 이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열다섯째는 성취하는 업이니, 이에 세 가지가 있다. 한량없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큰 위덕을 얻기 때문이며, 뛰어난 공덕을 얻기 때문이다. 열여섯째는 그것을 안립하는 업이니, 이에 네 문구가 있다. 대중을 섭수하는 공덕이기 때문이고, 결정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며, 법과 재물의 두 가지를 포섭하여 하나로 삼기 때문이고, 잡염심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지니, 이상과 같은 여러 문구가 모두 첫 번째 문구의 차이이다.
경전의 게송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017_0035_b_17L此利樂意句,有十六業差別應知.於中十六業者,謂展轉起行業不顚倒業他不請作,亦自行不動壞業無所求業,此有三句,不求返報故,於違順衆生無憎愛故,生生隨逐故卽此類中,身口業有二句,於苦於樂,及非二中平等業不畀劣不退轉業攝取方便業厭惡障㝵業,此有二句,無閒思惟業`進勝業,此有七句,正修行六波羅蜜,及修行四攝事修行成就方便業,此有六句,親近善丈夫故,聽聞正法故,住阿蘭若處故,遠離惡覺故,正思惟功德有二種,共事功德有二種,成就業有三種,無量淸淨故,得大威德故,得勝功德安立彼業,此有四句,攝衆功德故,決定教授故,法財二攝爲一故,無染污心故.如是句皆句差別應知.如經偈說:

첫 번째 문구에 포섭되기 때문에
공덕에 의해 문구의 차이가 있네.
첫 번째 문구에 포섭되기 때문에
의미의 차이에 의해 문구의 차이가 있네.
017_0035_c_12L初句所攝故,
由功德句別,
初句所攝故,
由義別句別.
017_0036_a_01L
【釋】‘의미의 의지처’는 다음과 같다. 모든 중생에 대해서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이라는 이 문구의 의미는 16가지 업과 나머지 문구로써 나타낸다. 여기서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이란 어떤 업들을 짓는가?
‘모든 것을 아는 지혜[一切智智]에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많은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아는 지혜에 들어가게 함이다. 이것은 전전히 행을 일으킴이다. 비유하면 하나의 등불이 전해져서 천 개의 등불을 밝힘과 같다. 이것은 곧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모든 문구들이 다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과 상응한다. ‘자신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안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이 있더라도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이롭고 안락하게 하면서 음주 등을 권함과 같다. 만일 있는 그대로 스스로 안다면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계합해서 중생을 가르친다. 교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지 못하면서 마음을 일으켜 이익되게 하려고 들면 반대로 이롭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
‘교만을 버리기 때문’이란 교만한 마음을 버려서 남이 청함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법을 설하는 것이다. ‘견고한 의욕’이란 중생이 전도된 행을 하더라도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마음이 견고해서 동요하거나 무너지지 않음을 말한다. ‘위하는 바가 있어서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란, 이익을 위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017_0035_c_14L釋曰:義依止者,謂一切衆生中,利樂意.此句義有十六業,及餘句顯示,此中利樂意.作何等業,令入一切智智者,若令諸衆生,入一切智智,此是展轉行.譬如一燈,傳燃千燈,卽是顯示利樂意.如是等諸句,皆與利樂意相應.自知我爲何價者,自有利樂意,仍是顚倒.如有人意欲利樂,而以飮酒與之,若如實自知稱己,分量教示衆生,不以憍慢故,自無所知,起心利益,反成無利.捨憍慢者,以捨憍慢心故,不待勸請自爲說法.牢固意者,不以衆生顚倒行故,牢固利樂心動壞.非有所爲作憐愍意者,以不爲利養,作利益衆生故.
이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신업과 구업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하고 먼저 말하는 것 등이 구업이다. 미소를 머금으며 무한한 대자비 등이 신업이다. 여기서 ‘올바른 인식에 상응하여 말한다’는 것은 오직 법답게 말하기 때문이고, ‘무한한 대자비’는 세 가지 괴로움을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며, 괴로운 이는 괴로움의 고통[苦苦]31)이기 때문이고, 즐거운 이는 파괴됨의 고통[壞苦]32)이기 때문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이는 무상의 괴로움[行苦]33)이기 때문이고, ‘두 가지가 없다’는 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기 때문이다.
017_0036_a_06L此利樂愍意,云何可知?以順行身,口業故.於中應量,而語及先言等,是口業,微笑及無限大悲等,是身業.此中應量語者,謂唯作法語故.無限悲者,愍三苦故.苦者,苦苦故.樂者,壞苦故.不苦不樂者,行苦故.非二者,不苦不樂故.
‘열등하지 않은 업’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가벼이 여겨서 “나는 능히 성불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 이와 같은 부류이다. ‘피곤해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란 피곤해도 싫어하지 않고 능히 불도를 수행함이다. ‘교의의 의미를 듣고서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이 듣지 않으면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의 지혜가 없게 된다.
‘모든 위의 가운데’라는 문구는 『정행수다라(淨行修多羅)』에서 말씀한 바와 같다.
‘뛰어나게 나아가는 업’이란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을 말한다. 나아가고 증장하는 원인의 자체이기 때문이다.
‘방편을 닦아서 성취하는 업에 여섯 가지 문구가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이 행을 가까이하면 곧 성취됨을 말한다. ‘공경히 아련야의 장소에 머문다’는 것은, 그 장소에 안주함으로써 나쁜 분별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세간의 잡된 일’이란 가무ㆍ잡된 유희 등을 말한다. ‘성취하는 업’은 그 성취의 양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위덕’은 여섯 가지 신통을 말한다. ‘지혜에 따라 행한다’는 것은 지혜에 따르고 식에 따르지 않음을 말한다. 스스로 지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 지혜로 인하여 바른 증득과 상응하여 모든 법에 안주한다.
017_0036_a_12L不畀劣業者,不自畀劣,云我不能成佛,如此等類.無厭惓意者,若不疲惓,則能修佛道.聞義無厭者,若不多聞,則無教化衆生方便智.一切威儀中者,此句義,如淨行修多羅中說.進勝業者,是利樂意,趣向增長因體故.修成就方便業,有六句者,若人親近此行,卽得成就.恭敬住阿蘭若處者,由住彼處故,能離惡.覺世閒雜事者,歌舞雜戲等.成就業者,謂表彼成就相故.威德者,謂六神通.隨智慧行者,謂隨智不隨識,自智慧生故,由此智慧正證相應.住諸法中.
017_0036_b_01L‘그것을 안립하는 업’이란, 이롭고 안락하게 하려는 의욕이 있기 때문에 능히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안립함이다. 여기서 ‘대중을 섭수한다’는 것은, 파계하는 사람도 역시 버리지 않고 맞아들이고 불선을 버리고 선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한결같이 가르침을 주며, 스스로 말하고 나서 다시 “내가 전에 한 말은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듣는 이가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017_0036_b_02L安立彼業者,由有利樂意故,能以利樂安立衆生.於中攝衆者,於破戒者,不捨安立亦不驅儐,令離不善,令與善合.決定教授者,由一向與立教誡,不自說已後,復言我前所說,不善故,聞者授教.
‘재물과 법을 포섭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 진실되게 말하고, 법과 의복 등의 재물로 포섭함이다. ‘잡염심이 없다’는 것은 보리심으로 섭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공양을 받기를 구하지 않는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 선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보리를 바르게 깨닫게 할 것인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섭수하기 때문이다. 게송의 의미도 역시 그러하다.
이상으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의 양상[應知相]을 해석하였다.
017_0036_b_07L財法攝者,由誠實告彼等言,以法及衣服等,財利攝故,如言具攝.無染污心者,由攝行菩提心,作衆生利益事,非爲自求供養,但念云何以此善,令衆生正覺無上菩提,如此攝受故.偈中義亦爾.釋應知相竟.
攝大乘論釋論卷第五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아홉 가지 의미는 장소[方]ㆍ짐승[獸, 牛]ㆍ땅[地]ㆍ빛[光]ㆍ말[言]ㆍ금강보(金剛寶)ㆍ눈[眼]ㆍ하늘[天]ㆍ물[水]이다. 산스크리트 go에 이와 같은 의미들이 있음을 말한다.
  2. 2)생멸의 의미이다. 인연에 의해 생겨나고 멸함을 말한다.
  3. 3)욕계의 산란되게 움직이는 업을 말한다.
  4. 4)여기서 적정지(寂靜地)는 선정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안정시킨 것을 말한다. 현장 역본에는 등인지(等引地)로, 진제 역본에는 수혜(修慧)로 되어 있다.
  5. 5)여기서 종자는 흙에 함장되어 있는 금의 분자(分子)로서 아직 그 금의 양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종자라고 부른다.
  6. 6)이하 네 가지 의미와 네 가지 비밀에 관한 장이다.
  7. 7)과거 7불의 한 분인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śyin)의 의역어(意譯語)이다.
  8. 8)만일 그가 나중에 보시를 행하는 것만을 즐기면, 방편으로 그에게 보시를 비방하여 뛰어난 행을 닦도록 인도한다.
  9. 9)한 단어에 여러 의미를 가진 용어에서 의미의 바뀜을 의미한다.
  10. 10)제8 아리야식이다.
  11. 11)아리야식에서 전변 생기된 7식을 가리킨다. 현장 역본에는 전식(轉識)으로 되어 있다.
  12. 12)이하 여래의 경계에 대해서 우선 총덕(總德:最淸淨覺)을 말하고 나서 21가지 별덕(別德)을 들어서 그 원만함을 나타낸다.
  13. 13)번뇌장과 지장(智障)을 가리킨다.
  14. 14)진여이다.
  15. 15)대비심을 말한다.
  16. 16)중생구제를 위해 정법을 시설하고 안립함이다.
  17. 17)삼세의 일을 모두 잘 아는 것을 말한다.
  18. 18)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적절하게 제도함을 말한다.
  19. 19)타수용신과 화신을 가리킨다.
  20. 20)법신진여(法身眞如)이다.
  21. 21)미래 영겁이 다하도록 중생구제의 이타활동을 하는 덕을 갖춘 것을 말한다.
  22. 22)지장(智障)을 가리킨다.
  23. 23)번뇌장을 말한다.
  24. 24)이득[利]ㆍ손실[衰]ㆍ뒤에서 험담함[毁]ㆍ뒤에서 칭찬함[譽]ㆍ면전에서 칭찬함[稱]ㆍ면전에서 비방함[翅]ㆍ괴로움[苦]ㆍ즐거움[樂]이다. 이 여덟 가지 법은 세인(世人)의 마음을 동요시키기 때문에 8풍(風)이라고도 한다.
  25. 25)가장 청정한 깨달음은 총덕(總德)이며, 이 구절을 해설하기 위해 21가지 덕[別德]을 들기 때문에 이 구절은 각 구절마다 공통적으로 해당된다.
  26. 26)4섭사(攝事)는 4섭법(攝法)이라고도 하며, 보살이 중생을 제도할 때 취하는 네 가지 기본적인 태도이다. 첫째, 보시섭(布施攝)은 재물을 기꺼이 베풀거나 진리를 가르쳐 주는 일이다. 둘째, 애어섭(愛語攝)은 남에게 미소띤 얼굴과 부드럽고 온화한 말로 대하는 일이다. 셋째, 이행섭(利行攝)은 신체ㆍ언어ㆍ의지의 3업에 의한 선행으로 남에게 이익을 주는 일이다. 넷째, 동사섭(同事攝)은 자타가 일심이 되어 협력하는 일이다. 중생과 같이 일하며 제도한다.
  27. 27)아련야는 범어 ārāṇya의 음역(音譯)으로 아란야(阿蘭若)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떨어진 고요하고 한가한 장소[空閑靜處]를 말한다. 세속의 번뇌ㆍ산란ㆍ투쟁 등이 이르지 않는 곳으로서 출가 구도자가 머무는 곳이다.
  28. 28)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無量心]을 말한다.
  29. 29)생사에 유전(流轉)하여 끝이 없음을 말한다.
  30. 30)여기서는 바르게 사유하는 공덕, 즉 2승(乘)을 버리고 대승을 구하는 것이다.
  31. 31)탐탁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괴로움이다.
  32. 32)좋아하는 대상이 변하고 소멸됨으로써 느끼는 괴로움이다.
  33. 33)세상의 일이 바뀌는 것을 보고 느끼는 괴로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