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0598_T_001
- 017_0325_a_01L결정장론(決定藏論) 상권
- 017_0325_a_01L決定藏論卷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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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제(眞諦) 한역
김철수 번역 - 017_0325_a_02L梁天竺三藏眞諦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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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품(心地品) - 017_0325_a_03L心地品第一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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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7_0325_b_01L
지혜가 통하지 않음이 없으시고
깨끗함에 대하여 더 이상 닦아 다스릴 필요도 없으시며
세간을 구제하시고 세간에 대하여 다 논의해 마치신
가장 수승하고 존귀하신 분께 머리 숙여 예경하옵니다.
말씀하신 법은
정지도(靜地道)를 도(道)로 삼으셨으니
이 세 가지 법을 이해하지 못하면
세간을 따라 윤회함이 마치 수레바퀴가 구르는 것과 같네.
성스러운 승중(僧衆)은 법에 머물러
번뇌의 결박 벗어나고 다른 나머지 범부 대중을 초월했으니
십분(十分) 가운데 팔분인(八分人)의
과도(果道)는 도과(道果)이기 때문이네.
가령 모든 대사(大士:보살)들이 논(論)을 짓고자 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이나 전도된 견해와 의혹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함이다. 이른바 그 이익은 바른 지혜[正智]로부터 생겨난다. 바른 지혜란 『출결정장론(出決定藏論)』에 이르기를 “본래 이미 지(地)에 관해 말한 바 있으나 이제 이 지(地)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고 풀이하여 문난(問難)에 잘 답하려 한다”고 하였다. 『오식지심지경(五識地心地經)』에서는 “아라야식(阿羅耶識)은 널리 모든 것의 근본 바탕[種本]이니 어떻게 그것이 존재함을 알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여래장에서 설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해절경(解節經)』의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대한 식(識)은 널리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며
깊고 미세한 흐름은 물이 넘쳐흐르는 것과 같다.
범부들에게는 설하지 않나니
아견(我見)을 생할까 염려해서이다.
울타남(鬱陀南)양나라 말로는 설할 내용을 간추려 밝히는 게으로 아라야식의 성질을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집지(執持)ㆍ본(本)ㆍ분명(分明)과
종본(種本)ㆍ비시사(非是事)와
신수(身受)ㆍ무식정(無識定)과
또한 기절하지 않은 자이라.
이 여덟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 식을 떠나서 근(根)이 집지(執持)하는 게 있다고 한다면 진실로 이러한 이치는 없다. 집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아라야식은 선세(先世)의 업을 간직하고, 또한 현세의 인(因)으로부터 나중에 모든 식(識)이 생긴다. 부처님께서는 아비담에서 근(根)ㆍ진(塵)ㆍ심(心)의 업(業)으로 인해 모든 식이 생길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둘째, 선과 불선 등의 6식(識)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6식 가운데서 만일 하나의 무기식(無記識)이 존재하여 홀로 이것이 집착하여 섭지(攝持)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넷째, 모든 식은 각기 근을 의지하여 생겨나니, 따라 생겨난 어느 한 식의 근이 집지하는 것이 있다면 나머지 근들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근들이 자주자주 여러 번 집지한다는 뜻은 옳지 않다. 이상 다섯 가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으로 인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근에 집지한다는 명칭이 존재하게 된다. 본(本)이란 처음부터 모든 식이 함께 생겨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라야식이 존재하면 모든 식이 함께 생겨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대가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한다면 과실이 된다. 왜냐하면 진실한 뜻이 있기 때문이고 아함과 같기 때문이다. 두 가지 식은 함께 생길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예컨대 어떤 사람이 듣거나 보려고 하면 식들에는 각각 자신의 근과 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이 욕구하는 것이 다르지 않으면 근ㆍ진도 다르지 않나니, 하나의 식이 생겨날 경우 나머지 식도 함께 생긴다고 한들 어떠하랴. 이는 진실한 뜻이니, 아함의 뒷부분에서 설하고 있다. 분명(分明)이란 모든 식을 함께 취(取)하지 않으면 그 경계를 훤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 심식(心識)과 안식(眼識) 등이 동반하여 경계를 취한다면 이는 곧 분명히 그 경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찍이 여러 진(塵)을 취하는 행을 한 다음에 추억하고 사념하여도 대부분 분명하게 알지 못하니, 모든 식이 함께하지 않고 의식만이 물로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현량경계(現量境界)1)를 반연하는 경우에 쉽고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식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들이 함께 생겨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본(種本)이란 만약 아라야식을 떠나서 안(眼) 등 6식(六識)이 서로 바탕이 된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선식(善識)이 멸할 때 불선심(不善心)이 생기고, 불선식(不善識)이 멸할 때 선심(善心)이 다시 생하며, 선식과 불선식이 멸할 때 무기심(無記心)이 생긴다. 하계심(下界心)이 멸하면 중계식이 생기고 중계심(中界心)이 멸하면 상식(上識)이 생기며 상식이 또한 멸하면 하심(下心)이 다시 생긴다. 유루식이 멸하면 무루심이 생기고, 무루심이 멸하면 유루가 다시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6식은 서로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례대로 마음[心]이 멸하면서 무수겁 동안에 또한 다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비시사(非是事)란 모든 식이 함께하지 않으면 이런 경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는 기사(器事)이고, 둘째는 착신사(捉身事)이며, 셋째는 이를 아사(我事)라고 말하는 것이고, 넷째는 진사(塵事)에 관한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일은 생각생각[念念]에 함께 생겨난다. 만약에 하나의 식이 한 생각 가운데서 네 가지 경우를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수(身受)에 대해 말하자면, 만일 아라야식을 떠나 신수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 신수의 뜻은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진실한 마음을 짓든 진실하지 않은 마음을 짓든 반드시 먼저 사유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정심(定心)이든 부정심(不定心)이든 모든 수(受)는 몸[身]에서 갖가지 많은 것을 생해야 온갖 수(受)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아라야식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무식정(無識定)에서라면 이런 의미가 성립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만일 무상정(無想定)이나 무식정(無識定)에 들어가면 6식은 다 멸하니 이 사람은 마땅히 죽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의하면 무심정(無心定)에 들어가도 식은 멸하지 않는다. 기절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만약에 아라야식이 떠나면 기절한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두 사람의 목숨이 임종시에는 선한 사람은 발이 차가워지면서 위로 정수리까지는 따뜻하다. 정수리가 차가울 때 그 사람의 목숨은 곧 멸한다. 악한 사람이 죽을 때에는 정수리로부터 차가워져 발에 따뜻한 기운이 없어졌을 때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친다. 의식이 항상 몸에 있는 것은 아라야식이 몸을 집지(執持)하기 때문이니 아라야식이 멸하면 몸이 곧 차가워져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이 차고 따뜻한 두 가지 일은 의식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울타남을 설하면 다음과 같다.
경계는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다시 상호간에 인연이 되며
함께 상응하여 생하고
번뇌와 함께 멸하네.
간략히 말해서 네 가지 뜻이 있어 아라야식의 일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나타났다가 멸하는 경계는 아라야식을 바탕으로 두 가지 경계가 생기니, 첫째는 내부를 집지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외부의 기세간[器]을 집지하되 모든 상모(相貌)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내부를 집지함이란 그릇된 아견을 집착한 습기(習氣)의 세력이 근(根)ㆍ색(色)과 더불어 함께할 때 집지하면 경계가 된다. 이러한 경우는 욕계와 색계에 있고,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그릇된 아견에 집착한 습기의 세력만이 존재한다. 두 번째의 외부의 기세간을 집지하되 상모를 분별할 수 없다는 것은 내부에서 아라야식에 의해 집지되면 곧 외부의 기세간을 집지하는 것이 된다. 비유하자면 등이 심지와 기름을 내부에 간직하면 외부로 비추는 작용이 있는 것과 같이 아라야식의 경우도 내외가 또한 그러하다. 이 경계는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고 미세하여 세간의 다문(多聞) 지혜인이라도 알 수가 없다. 이 경계는 항상하면서도 달라짐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달라짐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최초의 일념으로부터 집지되어 온 경계와 나아가 생사에 이르기까지가 일미사(一味事)이기 때문이다. 아라야식은 경계 가운데서 생각생각에 생멸하는데 욕계 중에서는 경계를 취함이 미세하고, 색계 중에서는 경계를 취함이 광대하고, 무색계의 무량공처(無量空處)와 무량식처(無量識處)에서는 무량한 경계를 취하고 무소유처(無所有處)에서는 미세한 경계를 취하며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에서는 깊고 미묘한 경계를 취한다. 이렇듯 두 가지 내외의 경계이기 때문에, 미묘하기 때문에, 일미이기 때문에, 생각생각에 멸하기 때문에, 미소란 경계이기 때문에, 광대한 경계이기 때문에, 무량한 경계이기 때문에, 미세한 경계이기 때문에, 지극히 깊고 미묘한 경계이기 때문에 아라야식의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의지하여 일어남[相賴起]이란 아라야식이 5심수법(心數法)과 더불어 서로 의지하여 생하는 것을 말한다. 사(思)ㆍ촉(觸)ㆍ수(受)ㆍ상(想)ㆍ작의(作意)라는 이 다섯 가지 대지(大地)2)는 과보에 속하는 것이다
5심수법은 미세하여 세간의 지혜 있는 사람이라도 훤히 알 수는 없다. 하나의 경계를 함께 반연하여도 다른 차이가 없으니 모두 함께 불고불락의 무기수(無記受)와 함께한다. 나머지 네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대지심수법(大地心數法)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같은 과보가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미세하게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함께 하나의 결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비고비락(非苦非樂)이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무기(無記)가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상호 인연이 된다는 것은 아라야식이 나머지 식들과 더불어 상호 인연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종본(種本)이고, 둘째는 의탁(依託)이다. 종본이란 무엇인가? 모든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 등의 식이 모두 아라야식으로 인하기 때문에 종본이라 한다. 의탁이란 아라야식이 모든 색과 근을 간직하면 5식(識)이 생겨나고 간직하지 않으면 생겨나지 않으며, 아라야식이 존재할 때 의식은 6식을 생한다. 두 가지 현상으로 아라야식이 다시 상호 인연이 되니, 첫째는 현전(現轉)하여 증장하는 종본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미래에 태어나려고 할 때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증장하는 종본이란 모든 식이 선이나 불선이나 무기를 낳아 생각생각에 훈수(熏修)하듯이 아라야식 또한 그러하다. 무슨 까닭인가? 후에 모든 식을 생하여 선이나 악을 점차적으로 증장하여 더욱 더 우세하게 하니, 과보를 받는 사람이나 선이나 불선에 대해 식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미래세에 아라야식이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이다. 종본(모든 것의 근본 바탕)이기 때문에, 의탁하기 때문에, 증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과보를 받게 하기 때문에 아라야식이 모든 식과 더불어 상호 인연을 짓는 것임을 알아라. 함께 상응하여 생함이란 아라야식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식과 함께 상응하여 생하니 예를 들어 마음(말나식)에 대해 말하자면 마음에 아견(我見)이 있으면 교만함을 상(相)으로 삼아 의식이나 무의식에서 아라야식과 항상 상응하여 생한다. 이 아만심은 아라야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아 이것을 나[我]라고 말하거나 나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두 가지 식이 함께 생하니 말나식과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세 가지 식이 함께 생하니 의(意)와 의식, 그리고 5식(識) 가운데서 하나의 식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네 가지 식이 상응하여 생하니 5식 가운데 두 가지 식을 취하고 나아가 5식ㆍ6식ㆍ7식이 함께 생하는 것을 말한다.
여섯 가지 진경계(塵境界)가 지금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이 의식은 마음[心, 즉 말나식]을 의지하여 성립한다. 마음[心]이 아직 멸하지 않았을 때에는 의식은 박(縛)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마음이 멸하게 되면 의식도 풀어진다. 의식에는 두 가지 경계가 있으니 타진경계(他塵境界)와 자진경계(自塵境界)이다.
타진이란 5식의 진(塵)3)을 취하여 경계로 삼는 것이요, 자진경계란 법에 대해 취하되 이 의식이 나머지 7식과는 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라야식은 6식의 3수(受)와 상응하여 함께 생하니, 고(苦)와 낙(樂) 그리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다. 욕계의 인간이나 천상, 축생, 아귀에는 약간의 3수가 존재하여 자신의 불고불락수와 더불어 함께 생한다. 지옥도(地獄道)에서는 고수(苦受)가 떠나지 않고 아라야식을 의탁하여 수가 함께 생한다. 3선지(禪地)에서는 오로지 낙수(樂受)만이 아라야식을 의탁하여 수가 함께 생한다. 4선(禪)에서부터 비상비비상지(非想非非想地)에서는 오로지 불고불락수만이 존재하여 아라야식을 의탁하여 수가 함께 생한다. 이와 같이 6식 가운데의 선ㆍ불선ㆍ무기법은 아라야식과 상응하여 함께 생한다. 또 아라야식은 모든 식과 상응하여 함께 생한다. 객(客)의 3수와 객의 선ㆍ불선ㆍ무기 등의 온갖 식과 더불어 상응하여 함께 생하되 서로 섞이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똑같은 경계를 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안식은 다른 식과 함께 경계를 생하여도 눈과 더불어 섞이지 않듯이 아라야식도 모든 식과 함께 경계를 생하여도 서로 섞이지 않음이 또한 이와 같다. 모든 심수(心數)는 똑 같이 심법이니 갖가지 상(相)이 상응하여 함께 생하여도 서로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처럼 아라야식이 7식(前七識을 뜻함)과 상응하여 함께 생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비유하자면 흐르는 물이 파도와 더불어 생하여도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밝은 거울이 모든 모습을 다 함께 비추어도 서로 간에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는 것처럼 아라야식도 모든 식과 더불어 상응하여 생하여도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음이 이와 같다. 또한 예를 들어 안식이 하나의 색과 하나의 종류와 하나의 상(相)을 취하든 많은 색과 많은 종류와 많은 상을 취하든, 이식(耳識)이 소리에 대해, 비식(鼻識)이 냄새에 대해, 설식(舌識)이 맛에 대해, 신식(身識)이 촉감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며 의식(意識)도 갖가지 모든 상을 널리 취하여도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으니, 6식을 분별하면 그 뜻이 이와 같다. 마음(말나식)의 경계는 이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멸함에 이를 때까지 네 가지 번뇌와 더불어 서로 섞여 생한다. 아견(我見)ㆍ교만ㆍ아욕(我欲)ㆍ무명 이 네 가지 번뇌는 정지(定地)나 부정지(不定地)에서, 선법이나 불선법이나 무기법 가운데서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없으니 이는 곧 예오무기(穢汚無記)4)의 법이다. 따라서 아라야식이 모든 식과 상응하여 생하기 때문에, 또한 3수(受)와 상응하여 생하기 때문에, 또한 선(善) 등과 상응하여 생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이러한 이치 때문에 그러므로 아라야식이 상응하여 함께 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뇌와 함께 멸함이란 아라야식이 일체 번뇌의 근본 바탕이라는 데 그 근거가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능히 중생세간을 일으키는 근본 바탕이며, 5근(根)이나 6식(識)을 생하며, 또한 국토세간을 일으키는 근본 바탕이며, 일체의 업이 모들 인연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또한 서로 간에 과보를 이끄는 근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다른 중생이 3수를 생하지 않음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중생은 서로 간에 증상연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렇듯 아라야식은 일체의 근본 바탕이기 때문에 현재의 세간에서는 고제(苦諦)의 체(體)이고, 미래의 세간에서는 능히 집제(集諦)를 생할 수 있다. 이것이 일체 번뇌의 근본 바탕이 된다.
【문】만약에 아라야식이 일체법이 되어서 근본 바탕을 짓는다고 말하면 해탈분선(解脫分善)이나 통달분선(通達分善) 등 이러한 모든 선근(善根)은 이것들이 집제와 함께할 경우에는 마땅히 방해되거나 장애됨이 있지 않겠는가?
【답】아라야식은 통달분 등 모든 선근의 근본 바탕이 되지 않는다. 세간의 온갖 선이 증장하면 통달분의 선근은 점차적으로 더욱 밝고 뛰어나게 되며 통달분의 선근이 점차적으로 밝고 뛰어나게 되기 때문에 세간의 모든 선도 또한 뛰어난 과보를 얻을 수 있다. 세존께서는 아라야식이 일체의 종본(種本)이라는 것에 의탁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말하자면 안계와 색계와 안식계 및 나아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와 의식계에 이르기까지 아라야식에는 갖가지 성품[性]이 있기 때문에 따라서 종본을 쌓아 모으는 비유로써 설명하셨다. 이와 같이 아라야식은 일체 번뇌의 근본이니, 선법을 닦기 때문에 이 식을 멸할 수 있다. 선법을 닦는다는 것은 모든 범부인들이 선한 사유를 일으켜 모든 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고 앞으로 나아가 마음을 편안히 하여 맨 처음 모든 제(諦)를 관찰한다. 만일 4제(諦)를 증득하여 눈 밝은 지혜를 얻었으면 아라야식5)을 능히 파괴할 수 있다. 아직 4제를 깨닫지 못한다면 파괴할 수 없으니 어느 때 아라야식을 제대로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앞으로 나아가 만일 모든 성문인이 불퇴지(不退地)에 들어가고 또한 모든 보살이 불퇴지에 들어가서 법계를 통달하면 능히 알 수 있다. 이 식 가운데서는 모든 번뇌의 덩어리를 알 수 있으니 내부에 대해서든 외부에 대해서든 자신의 몸이 번뇌의 결박임을 알 수 있다. 내부에 대해서 자신의 몸은 삼계의 추악한 번뇌와 온갖 괴로움[苦]이 결박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일체행(一切行)에 갖가지 번뇌를 섭지(攝持)한 이는 아라야식 중에 쌓아 놓은 진여 경계를 얻어서 더욱 행하고[增上行] 수습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아라야식을 끊으면 범부의 성품을 전환하고 범부의 법을 버려서 아라야식을 멸한다. 이 식이 멸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멸하며, 아라야식이 대치되기 때문에 아마라식(阿摩羅識)이 증득된다. 아라야식은 무상(無常)이며 유루법이다. 아마라식은 항상[常]하며 무루법이다. 진여 경계의 도(道)를 증득하기 때문에 아마라식을 증득할 수 있다. 아라야식은 추악한 고과(苦果)가 따르는 것이고 아마라식에는 일체의 추악한 고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라야식은 일체 번뇌의 근본 바탕이지만 성스러운 도[聖道]가 아니므로 근본을 짓지 못한다. 아마라식은 또한 번뇌의 근본 바탕이 될 수 없으나 다만 성스러운 도이므로 도(道)를 증득하고 짓는 근본이 된다. 아마라식은 성도(聖道)가 의지하는 인(因)을 짓지만 생인(生因)을 짓지는 않는다. 아라야식은 선(善)이나 무기(無記)에 대해 자재 할 수 없으며, 아라야식이 멸할 때에는 다른 상모가 존재하니 말하자면 미래세에는 번뇌나 불선(不善)의 인(因)이 멸하며, 인이 멸하기 때문에 미래세의 5성음고(盛陰苦)가 다시는 생기지 않는다. 현재세에서는 일체 번뇌와 악의 인(因)이 멸하기 때문에 범부의 음(陰)이 멸한다. 이 몸이 자재해지면 변화가 가능하고 일체의 추악한 과보를 버려 벗어나고 아마라식을 증득할 수 있는 인연을 얻기 때문에 이 몸의 수명은 자재함을 얻을 수 있다. 수명의 인연은 능히 몸을 멸할 수 있고 또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다하여 남김없이 멸하면 모든 수(受)가 다 청정함을 얻으며, 나아가 경에서 자세히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일체 번뇌의 모습이기 때문에, 통달분에 들어가기 때문에, 선한 사유[善思惟]를 닦기 때문에 아마라식을 증득할 수 있다. 따라서 아라야식은 번뇌와 함께 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심의식(心意識)을 분별하여 진실하게 해석했으니, 이렇게 심의식을 해석했기 때문에 삼계(三界) 가운데 일체의 번뇌법에서 모든 청정법을 증득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설하는 심의식이란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모든 중생이 아직 깊은 지혜가 없어도 쉽게 신해(信解)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단지 6식(識)만을 설한 것을 말한다.
【문】어떤 사람에게 아라야식도 있고 6식도 있는가, 어떤 사람에게는 6식은 있고 아라야식은 없는가?
【답】여기에는 네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사람이 무심(無心)하게 수면 상태에 있을 때, 의식이 민절(悶絶)되거나 혼미(昏迷)하여 인사불성일 때, 무상정(無想定)에 들었을 경우,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났을 경우, 아나함인(阿那含人)이 멸진정에 들었을 경우이니 이 다섯 종류의 사람에게는 아라야식은 존재하나 의식은 없다. 둘째, 아라한ㆍ벽지불ㆍ불퇴 보살(不退菩薩)ㆍ여래 세존 이 네 종류의 사람은 마음이 있는 곳에 6식을 존재케 하지만 아라야식은 얼다. 셋째, 범부인이나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은 마음이 있는 곳에 6식도 존재하고 아라야식도 존재한다. 넷째, 모든 아라한ㆍ벽지불ㆍ보살ㆍ세존께서 멸진정에 들었을 경우나 또한 세존께서 무여열반에 들었을 경우에는 아라야식도 없고 6식도 없다. 일체의 내외법(內外法)에는 각기 일정한 성품이 있어 상(相)에 대해서 흔들림이 없다. 무엇 때문에 18계(界) 가운데 단지 6식만을 말하는가? 일정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모든 계(界)는 근(根)이나 진경계(塵境界)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식은 낮이나 밤, 모후라(牟㖃羅)ㆍ라바(羅婆)ㆍ찰나6)를 넘어서기 때문에 갖가지 인연을 지으니 안(眼) 등 모든 근(根)과 색(色) 등 모든 진경계와 심수(心數)를 짝으로 삼아 갖가지 인연을 낳는 것이다. 그 생하는 처소에 따라 이름을 얻으니, 이름이 같지 않다. 비유하자면 불이 태우는 사물은 태우는 처소에 따라 갖가지 이름을 얻으니 예를 들면 초화(草火)ㆍ목화(木火)ㆍ분화(糞火)가 있다. 이렇듯 안과 색이 식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것을 모두 안식(眼識)이라 하며 나아가 심식(心識)도 역시 이와 같다. 안 등의 계(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과보가 무기(無記)여서 다양한 모습이 존재할 수 있으나 식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식계(識界)는 분별할 수 있으나 다른 나머지 계는 분명하게 밝힐 수 없다. 만약에 어떤 비구가 식의 덩어리[聚]를 알고자 하면 이러한 행을 닦아 익혀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많은 종류의 상모를 훤히 알 수 있는 마음에는 간략하게 말해 세 가지가 있으니 번뇌를 즐겨 집착하는 경우와 물든 마음이 허물이 되는 경우와 번뇌[惑]를 끊는 방편인 경우이다. 어떻게 비구는 번뇌를 알 수 있는가? 이렇게 사유해야 한다. 즉 ‘이 마음은 오랜 옛날부터 번뇌를 즐겨 집착하였고 번뇌를 즐겨 한 까닭에 설령 다시 그 마음을 뽑아 버리고 무욕처(無欲處)에 안치하여도 탐욕에 이끌려 잠깐 머무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신속히 다시 퇴전하여 돌아가 다시 욕처로 들어간다. 이와 같이 탐욕처ㆍ진에처ㆍ우치처(愚癡處)ㆍ수면처와 나아가 방일처(放逸處)까지도 설령 다시 그 마음을 뽑아버리고 무방일처에 안치하여도 신속히 퇴전하여 돌아가 방일처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라고. 이와 같이 비구는 번뇌에 대해서 이해한다. 어떻게 물든 마음[染心]이 허물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이 마음에 물듦이 있으면 그것은 자신을 손상시키고 또한 다른 사람도 손상시키며, 현세에 악을 일으키고 내세에도 역시 그러하다. 그것이 짓는 근심[憂]ㆍ슬픔[悲]ㆍ고통[苦]ㆍ고뇌[惱] 등 모든 악한 인연과 나아가 방일에 이르기까지 허물과 병통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고(苦)를 받는 것 역시 이와 같으니 자신의 마음에 모든 허물과 병통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번뇌를 끊는 방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자신의 마음속에 이와 같은 허물과 근심ㆍ슬픔ㆍ고통ㆍ고뇌가 있음을 알고 나는 지금 이와 같은 마음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모든 고뇌를 받지 않아야겠다고 응당 자신의 마음이 아(我)를 쫓아 따르는 것을 억제하고 내[我]가 마음을 쫓지 않아야겠다고 사량(思量)하며 마음에는 탐욕[欲]이 있음을 알아 욕심을 뽑아버리고 무욕처에 안치하여 자신의 마음으로 하여금 복리(福利)를 볼 수 있게 하며, 나아가 방일심을 뽑아버리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선근(善根)을 쌓고 익히면 이 때 이 마음은 다시는 다른 나머지 인연이 없으며 모든 선법에 대하여 닦아 익혀 증장하여 안주함을 얻는다. 번뇌와 증오는 앞서의 허물과 병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는 마음을 청정하게 닦아 이미 ‘즐겨 번뇌를 집착함’을 아는 까닭에, 이미 ‘물든 마음이 허물과 병통임’을 아는 까닭에, ‘번뇌를 끊는 방편이 있음’을 아는 까닭에 신속히 무상청정무루심(無上淸淨無漏心)을 증득한다. 또 별도로 마음을 알아 또한 전심(轉心)을 말하니 이른바 가명이다. 또 별도로 마음을 알아 또한 전심을 말하니 이른바 타인(他因)이다. 마음을 잘 닦게 되면 두 가지 공덕이 있으니 공덕을 얻어 과보를 얻을 때 마음이 흔쾌하고 즐거우며, 선법(善法)을 닦아 익히면 자재 무애하게 된다. 세 가지의 허물이 있어 마음을 탁하게 물들이니, 첫째는 바르지 못한 사유[不正思惟]이고, 둘째는 번뇌의 부림[結使]을 아직 끊지 못함이며, 셋째는 번뇌를 일으켜 나타내는 것이다. 비구는 3처(處)에서 머물며 6행(行)으로 말미암아 능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 3처란 무엇인가? 첫째는 해탈에 머무는 것이고, 둘째는 해탈문(解脫門)에 머무는 것이며, 셋째는 해탈지(解脫至)에 머무는 것이다. 인연법은 6행으로 말미암아야 하니, 첫째는 달라짐이 없는 행[無有異行]이고, 둘째는 마음을 한 곳에 섭수함[攝心一處]이며, 셋째는 선근을 생할 수 있음이고, 넷째는 헤아려 진리를 보고 다른 맛을 보지 않음이며, 다섯째는 증상만이 없음이고, 여섯째는 믿음의 보시[信施]를 바르게 사용함이다. 보시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시를 받는 사람의 보시[信施]이고, 둘째는 보시를 하는 사람의 보시[施者施]이다. 보시의 과에도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크게 부유하게 되는 과보이고, 둘째는 경사스럽고 즐거운 일의 과보이다. 마땅히 미래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마땅히 미래에 이루어져 미래법이 되는가? 없지도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마땅히 행상(行相)을 생한다. 어떻게 머무를 수 있는가? 만약에 미래법이 있으면 행상이 생기고, 만일 이르기[度] 때문에 생한다면, 미래로부터 현재로 이르는 것이니, 이것으로부터 저것이 생기고 미래세로부터 목숨을 마친 사람은 현세에서 몸을 받아 태어난다. 미래법으로 인해 현세법이 생기니 이와 같이 머무르면서 변하여 달라짐이 없다. 미래법으로 인해 나머지 현세법이 생하고 미래세로부터 현세의 온갖 법들이 비롯되지만 미래세나 현세의 모든 법은 아직 업(業)이 존재하지 않는다. 현세에 어떤 현상이 생기면 이미 구체적인 모습[相]이 생긴 것이다. 미래세에서는 아직 구체적인 모습이 있지 않으나 현세에서는 구체적인 모습이 생긴다. 만일 미래세에서 다른 모습[異相]이 생한다면 미래성(未來性)을 말미암기[因] 때문이고, 인성(因性)을 말미암기[因] 때문이니 이 두 가지 성품 때문이다. 현세 가운데 이미 다른 모습을 생했다면 현세성(現世性)이기 때문이고, 과성(果性)이기 때문에 다른 모습으로 생하는 것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 미래세의 법은 어떤 뜻도 낳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처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곳으로부터 저 곳으로 이른다[度]는 이러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아직 생하지 않았는데 어찌 사라짐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현세의 법은 만약에 미래법으로 말미암으면 현세법이 생긴다. 미래세의 모든 법은 마땅히 모든 법을 생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흔들리는 모습[動相]이 없으니 자상(自相)을 떠나기 때문에 별도의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와 현재가 만일 같은 모습이라면 현세 중의 법만이 홀로 업이 있게 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업이 생기지 않았어도 지금 생길 수 있다고 한다면 제행(諸行)은 그렇지 않으니, 부처님의 바른 말씀인 제행무상(諸行無常)은 파괴된다. 여기서는 지금 업이 무상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니 만약에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제행이 항상[常]하다고 한다면 승거(僧佉)7)에서 말하는 “이 법이 본래 존재하지 않았으면 생긴다는 의미를 얻을 수 없고 이미 모든 법이 생겼으면 멸한다는 의미가 없다”는 견해와 같으니, 이 말이 마땅히 이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법은 아직 생기지 않았어도 마땅히 곧 수생(受生)할 수 있으며, 생겨났던 것은 마땅히 멸한다. 만일 그대가 이 의미가 아니라고 한다면 이 모든 법들은 동일한 모습이 돼 버리니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에 분별할 수 있다면 이는 곧 무궁하여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길 수 있으니, 어찌 상(相)을 존재케 할 수 있겠는가? 미래법의 성품은 색(色) 등으로부터 상응하니 별도의 다른 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라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만 현세법이라는 것은 곧 과(果)를 말하나니 이러한 뜻이 없다. 마땅히 성취되기 때문에 존재하나니 이 진실한 말은 증험하여 믿을 수 있다. 미래의 모든 법은 아직 행상(行相)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생긴다는 뜻이다. 미래법과 같이 과거법도 또한 그러하다. 무엇이 과거의 행법인가? 멸하여 없어진 모습[滅相]이란 생겨난 이래로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다. 무엇이 현재의 행법인가? 이는 아직 멸하지 않은 모습이니 생겨남으로부터 아직 지나가 버리지 않았고 오직 생길 때 머무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 미래의 행법인가? 현세법의 인(因)이지만 아직 자상(自相)을 생하지 않아 자신의 몸을 받지 못한 것을 말한다.
【문】미래의 모든 법은 이미 본래의 존재함이 없어서 생(生)을 받을 수 있는데, 허공의 꽃ㆍ석녀(石女)ㆍ토끼의 뿔은 어떻게 무생(無生)이라 하는가?
【답】이러한 무생인(無生因)의 미래의 행법은 바로 생하는 인이 있다.
【문】만약에 미래법에 바로 생하는 인[正生因]이 있다면 무엇 때문에 일시에 함께 생할 수 없습니까?
【답】생인(生因)이 존재하여도 연(緣:조건)을 기다리는 일이 같지 않기 때문이니, 이 모든 행법은 가까운 연이 있어야 인(因)이 곧 능히 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함께 생하지 않는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첫째는 인연이고, 둘째는 차제(次第)이며, 셋째는 연연(緣緣)이고, 넷째는 증상(增上)이다. 첫 번째 것은 인이면서 또한 연이며 나머지 세 가지는 단지 연일뿐이지 인은 아니다. 무엇이 인연인가? 근(根)에 색(色)이 있으면 의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식이라는 것이 성립한다. 이 두 가지 법은 일체종(一切種)이 된다. 일체의 색근종(色根種), 일체의 색법종(色法種), 일체의 심심법종(心心法種)은 다 색근(色根)을 의지하며 또한 식(識)을 의지한다. 하지만 4대색(大色)은 제외된다. 이 4대색은 두 가지 의지함이 있으니, 첫째는 4대종(大種)이고, 둘째는 11일종(種)이다. 이 종(種)들이 상속하여 모든 법에 의지하는 것을 일컬어 인연이라 한다. 만일 색근이 심심법종(心心法種)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만약에 멸정(滅定)이나 무상정(無想定)에 들거나 무상천(無想天)에서 태어난다면 미래세의 식은 다시는 생기지 않아야 하지만 생긴다는 것을 마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색근은 심심법(心心法)의 인이다. 만약에 이 식이 색종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범부인은 무색계에서 태어나지만 그 곳에서의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기 때문에 그 곳으로부터 사라져 아래의 세계[下界]8)에 태어나게 될 경우 이 색종이 없다면 마땅히 다시는 태어나지 못해야 하는데도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식은 색근의 근본이다. 세속도(世俗道)를 쫓아 초선정(初禪定)에 들어 초선지(初禪地)에서 태어나면 욕계의 부정법(不淨法)이나 정법(淨法)은 이미 파괴되어 없어졌어도 그 종본(種本)은 아직 다 굳어져 제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초선정으로부터 퇴전하여 다시 부정법을 일으키면 초선의 처소로부터 물러나 욕계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끊음[斷]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피단(避斷)이고, 둘째는 괴단(壞斷)이며, 셋째는 정단(定斷)이고, 넷째는 본영발단(本永拔斷)이다. 피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욕락을 집착하는 경우에 그 욕락을 끊기 위하여 욕락을 끊는 계를 받아 범하지 않도록 견고하게 지키고 이를 증장하게 한다. 증장하기 때문에 다시는 집착욕을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욕심으로 인한 번뇌가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 이를 피단이라 한다. 괴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과실강(過失想)ㆍ부정상(不淨想)ㆍ청어상(靑瘀想)9) 등이 있을 경우 잘 사유함으로써 탐욕을 무너뜨린다. 아직 탐욕을 다하지 못하였으면 탐욕에 따르지 않는다. 진경계(塵境界)에 대해 마음이 탐착하지 않는 것을 괴단이라 한다. 정단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세속도(世俗道)를 따라 욕계의 물듦을 떠나고 색계의 물듦을 떠나면 적정(寂靜)을 증득하여 마음의 상속이 다시는 욕계나 색계에 집착하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것을 정단(定斷)이라 한다. 본영발단(本永拔斷)이란 무엇인가? 성인(聖人)이 출세간의 도를 닦아 삼계의 물듦을 떠나면 삼계 가운데 있는 모든 번뇌의 근본 바탕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세 중에 무욕(無欲)을 증득하여 끝내 퇴전하지 않고 이미 위의 세계[上界]에 태어나 다시는 퇴전하여 아래의 세계[下界]에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벼나 보리 등 모든 종자들이 허공이나 건조한 땅에 심어지면 영원히 싹이 날 수 없더라도 종자라고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만약에 불이 그것을 태워 모두 다 불살라 없애면 종자의 상(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모든 번뇌의 근본도 끊어 없어짐이 또한 이와 같다. 성인이 만약에 무여열반에 들면 선(善)이나 무기(無記)의 종본(種本)은 다 잠복[伏]한다.
【문】만약에 이것들이 잠복하여 다 멸하지 않았다면 어찌하여 과보를 낳지 않는가?
【답】이미 불선(不善)의 종본(種本)은 끊어서 미래세에 과보를 낳지 않으며 또한 스스로 생하지도 않으니 이를 본영발단이라 한다. 완전히 번뇌에 결박된 사람은 마음이 생(生)하면 고(苦)가 있고, 낙(樂)이 있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게 된다. 이 일체의 마음은 세 가지가 그 종본이다. 선과 불선과 무기의 법도 또한 그것의 종본이다. 모든 학인(學人)은 세간의 선심(善心)과 염오심(染汚心)과 무기심(無記心)이 있으니 수도위(修道位)에서 번뇌[惑]를 끊는 것을 종본으로 삼는다. 세간의 선심(善心) 등은 다시 다른 법[餘法]이 되어 근본이 된다. 무학인(無學人)은 번뇌를 끊어 없애 세간의 선심이 존재하니 세간에 속하는 것과 같다. 만약 출세간이나 무기(無記)라면 일체의 모든 번뇌흑이 근본이 되지 않고 일체의 선법과 무기법이 근본이 된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의 근본을 분별하였으나 이들의 처소를 아라야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처소를 말하자면 모든 세속법은 아라야식이 다 근본이 된다. 모든 법 가운데 출세간의 무단도법(無斷道法)은 아마라식이 그 종본이다. 부처님께서는 “비구여, 모든 아라한이 심법(心法)을 배우기 위해서는 4선(禪)에 의지하여야 하며, 안락함에 머묾[安樂性]을 나타내는 것도 또한 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나는 퇴전하여 떨어지면 낱낱의 처소에 가게 된다고 말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문】만약 이와 같다면 모든 아라한은 영원히 번뇌를 끊는 것인데 어떻게 낮은 지위[下地]의 번뇌가 다시 생기는가? 만약에 다시 갱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퇴전하여 떨어지겠는가?
【답】퇴(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실퇴(失退)이고, 둘째는 주퇴(住退)이다. 실퇴란 범부인에 해당한다. 주퇴란 범부나 성인 모두에 통한다. 세속도에 의거하여 번뇌가 이미 떠났다가 후에 다시 일어나는 것을 퇴실퇴(退失退)라 하고 또한 주퇴퇴(住退退)라고 하기도 한다. 출세간도에 의거하여 번뇌가 이미 끊어지면 마음이 어떤 것에 매달려 일을 하더라도 짓는 마음[作心]을 내지 않기 때문에 이 중간에 다시는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안락함에 머묾[安樂住]을 나타내니 그 전후의 사정이 이와 같다. 또한 다시는 아래 지위[下地]의 번뇌[惑]를 일으키지 않으므로 이 주처(住處)의 퇴는 퇴실퇴가 아니다. 모든 아라한은 일체의 번뇌를 다한 과위인데 만약에 불선법(不善法)이 아직 그 종본을 끊지 못했다면 어떻게 아라한의 마음이 잘 해탈하여 모든 누(漏)를 이미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불선법의 종본이 이미 끊어졌다면 어떻게 아라한이 마음에 바르지 못한 생각[不正思惟]을 상속하겠는가? 어찌 다시 생하겠으며, 어떻게 모든 번뇌[惑]가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출세간도에 의지하여 이미 번뇌를 끊어 없앴으면 퇴실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설한 바와 같이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인(生因)이고, 둘째는 방편인(方便因)이다.
차제연(次第緣)이란 모든 심수법(心數法)이 차례에 따라 나머지 다른 법들이 생기는 것이니, 이 심수법은 생겨나는 것의 연이 된다. 어느 하나의 식은 그 식이 차제연을 지으니 의(意)라 이름하기도 하고 의입(意入)이라 이름하기도 하며 심계(心界)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이 차제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미 멸함[已滅]이요, 둘째는 처소를 이주함[移處]이다.
연연(緣緣)이란 이 다섯 가지 식[五種識]은 색(色) 등 모든 진(塵)이 그 연연이며, 또한 심식의 경우에는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입(入)이 곧 연연이다. 이 상을 연연이라 하는데 이에는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의증(猗證)이고, 둘째는 불의증(不猗證)이다.
증상연(增上緣)이란 안(眼) 등 내입(內入)이 함께할 때 생기는 것으로 안식(眼識) 등과 더불어 증상연이 되어 마음으로 하여금 짓게 만든다. 경계 가운데서 만일 함께하면 마음[心]과 심수법은 서로 연(緣)이 된다. 과거에 지은 선업과 불선업은 미래세에서 여의(如意)하게든 불여의(不如意)하게든 과보를 생하게 하는 증상연이 된다. 밭과 물과 거름 등이 모든 종자에게는 증상연이 되는 것처럼 세간의 기술이나 모든 다양한 행위의 업은 모든 지혜의 증상연이 된다. 이 증상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불리(不離)이고, 둘째는 유공(有空)이다.
이 인연(因緣)은 주체적으로 생하는 것이고 그 나머지 세 가지 연은 오직 증장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행(行)의 연이 갖추어졌을 때에는 함께 이르지만[同至] 이 행의 종본(種本)은 갖가지 행을 낳기 때문에 모든 행은 연을 갖추지 않았을 때에도 생긴다. 네 가지 연을 의지하여 열 가지 인을 훤히 알 수 있으니 보살지에서와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과거행을 반연하여 마음이 생기고 미래행을 반연하여 또한 마음을 생한다고 하셨는데, 만일 과거행이나 미래행이 없다고 한다면 어떤 법에 대하여 마음이 경계를 삼는다는 것인가? 이러한 경계에 의하여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생긴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경계가 없다고 한다면 이 마음은 곧 경계를 삼는 것이 없게 된다.
【문】만약에 마음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분명하다면 쌍쌍을 의대(依對)함을 말미암아 모든 식이 생겨나는데 쌍쌍이란 눈이 색을, 귀가 소리를, 나아가 마음이 법을 의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그것이 진정으로 부처님 말씀이라면 어떻게 무방할 수 있겠는가?
【답】여기서의 법진(法塵)은 5식(識)이 경계로 삼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진(塵)을 법연(法緣)이라고 하셨다. 마음이 반연[緣]하는 법은 무릇 심식이 방편으로 생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뜻을 말씀하셨으니, 다시 무슨 목적이 있었겠는가? 이 심식은 과거의 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지 않으며 또한 미래의 온갖 식을 취하여 경계로 삼지 않으니 과거나 미래의 모든 식의 법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만약에 법이 있다고 하면 유법상(有法相)이 모이고, 법이 없다고 하면 무법상(無法相)이 모이게 된다.
이 심식이 법이 있다는 생각을 바르면 법이 있다는 뜻[有法義]을 취하고 법이 없다는 생각을 따르면 법이 없다는 뜻[無法義]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모든 식이 없는 것[無者]을 경계로 삼는다는 것을 믿어 알 수 있다. 만약에 이 식이 유(有)나 무(無) 두 가지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체법의 뜻을 취할 수 없다. 만일 심식이 유나 무를 경계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실단다(悉檀多)의 이치를 방해하는 것이다.
【문】이 식이 만일 없는 법[無法]을 경계로 취한다면 식도 또한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답】과거나 미래인 경우에는 식이 존재하지 않으나 현재의 경우에는 식이 존재한다.
【문】예컨대 안식(眼識)은 없는 것[無]을 경계로 취할 수 없는데, 심식은 어떻게 없는 것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답】삼세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다시 자세히 말하자면 다섯 가지의 뜻이 있으니, 이로써 심식이 없는 것[無]을 경계로 취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입(內入)과 외입(外入)을 떠나서 나[我]라는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我)가 없다는 것은 유위법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다. 이렇듯 모든 식은 무아(無我)를 취하여 경계로 삼는다.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총상법(摠相法)을 알면 믿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것이 첫 번째 뜻이다.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이라는 네 가지 진(塵)을 떠나면 전당(殿堂)ㆍ수레ㆍ음식ㆍ의복 및 나머지 여러 기구들을 헤아려 알 수가 없다. 이 전당 등의 법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유위법도 아니고 무위법도 아니다. 그런데 모든 식은 전당 없음[無殿堂]을 취하여 경계로 삼는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총상법을 알면 믿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 뜻이다. 모든 옳지 못한 견해[邪見]는 일체를 비방하는 것이니,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고 번뇌의 결박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한다. 이 모든 법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이치에 따라 이 모든 법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이는 사견이 아니다. 이것들은 진실로는 모두 다 존재하지 않는다. 옳지 못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없음[無]을 취하여 경계로 삼으니 식을 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세 번째 뜻이다. 또한 모든 행은 상주함이 없으니, 이 상주함이 없는 것은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지만 이 모든 식은 무상(無常)을 경계로 취하지 않음도 없다. 지혜 있는 사람은 총상법이 식을 생하지 않음이 없으며 항상 경계가 없는 식이라는 것을 안다. 만약에 일체의 행을 낳지 못하여 항상함을 볼 수 없어 아무런 뜻도 없다면 바른 지혜를 의지하여도 싫증냄[厭]을 낳을 수 없고 무염(無染) 역시 그러하다. 또한 해탈도 없으며 열반도 얻을 수 없게 된다. 만약에 이런 이치대로라면 일체 중생의 모든 번뇌혹(煩惱惑)은 영원히 결박되어 풀어지지 않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뜻이다. 모든 미래행은 아직 생겼다는 의미가 없는데 어찌 멸함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성인들은 미래행에 대해서도 그 생과 멸의 이치를 관조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다섯 번째의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업을 헤아려 보아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수(苦受)와 낙수(樂受)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과거의 생은 선과 불선의 업을 지었나가 이미 사라졌으나 미래세에 좋아할 만하거나[愛] 좋아할 만하지 못한[不愛] 과보를 받는다. 이 행의 상속은 업종자에 의해 유지된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과거의 업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두 가지 취지가 있다. 첫째는 정인(正因)이 아닌 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집착을 막기 위함이다. 그들은 자재천ㆍ범석(梵釋)ㆍ여러 천신[諸天]ㆍ자성(自性)ㆍ신아(神我)ㆍ시절(時節)ㆍ미진(微塵)이 존재하며 이런 법들을 바탕으로 중생의 고와 낙이 모두 나 생긴다고 말한다. 둘째는 어떤 근본 원인도 없다[無因]고 말하는 사람들의 집착을 막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말하고, 중생들에게 깨끗함[淨]이 있거나 깨끗함이 없거나[不淨] 한 것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예컨대 나무나 돌 등의 사물이나 또는 존중하는 일이나 경만(輕慢)하는 일 등은 이러한 일을 나타내고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과거의 행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현성(賢聖)들은 이 처소[處]에 집착하지 않고서도 안락하게 머문다고 하는데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과거의 모든 행은 과(果)를 낳기 때문에 존재하고 미래의 모든 행은 인(因)이 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한다면, 현재의 온갖 행[諸行]에 대해서는 어떻게 믿어 알 수 있는가? 세 가지 양상으로 드러나나니, 과거행의 과이기 때문이고, 미래행의 인이기 때문이며, 자상(自相)이 상속하여 단절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 뜻을 의지하여 이 두 가지 법을 나타낸다. 첫째, 과거행이나 미래행이 진실하다고 여기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함이 만약에 과거행이나 미래행의 모습[相]이 실유(實有)하는 것이라면 과거나 미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무엇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無見人]은 과거나 미래가 없다고 말하고 또한 현재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들을 끊기 위함이다. 부처님께서는 “과거나 미래의 세계도 있고 현재의 세계도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뜻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종자가 상속하여 이미 과를 생한 경우에는 이 뜻을 과거라고 하며, 생기려고 하는 것의 종자가 상속하는 것을 미래라고 한다. 현재의 온갖 종자의 과(果)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면 이를 현재계(現在界)라 한다. 따라서 이런 뜻[意]을 설한 것이다. 비구가 종자의 상속이 한 가지의 경계가 아닌 한량없는 법임을 아는 것을 계(界)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색(色) 등의 음(陰)으로부터 태어남[生]ㆍ늙음[死]ㆍ머물[住]ㆍ멸함[滅]이 비롯되나니, 다시 별도의 법이 없으며 또한 실유(實有)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미래의 행은 실유함을 부정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어 진실로 있다[實有]는 뜻을 끊는다. 어떻게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는가? 미래의 생(生)은 스스로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능히 다른 것을 생하겠는가? 현재의 모든 생도 능히 생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현재의 법을 낳을 수도 없다. 이 생하는 모습[生相]을 온갖 행이 이루어진다거나 온갖 행이 일어난다거나 온갖 행이 나타나 있다라고 말하지만 이는 하나의 뜻을 밝히고 있으나 다른 많은 명칭이 존재한다. 이 많은 명칭을 떠나 다시 생하는 모습이 있다고 하지만 모든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이들 명칭을 생하는 양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 모든 법에는 각기 종자의 인(因)이 정해져 있는데 무엇 때문에 별도의 생함[生]을 필요로 하겠는가? 이 생함이라는 것은 허약하여 이를 가명이라 한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무릇 생함이란 행이 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행을 생하는 것인가? 만약에 생함이 스스로의 행으로 행법을 능히 생할 수 있다면 생함이 있는 곳에 행법이 발생하니, 이는 이치에 맞지 않다. 만약 능히 일으키는 것이라면 이를 행이 생한다[行生]고 한다. 하나의 행 가운데에 응당 두 가지 생함이 있게 되니, 능히 생하는 것과 모든 행이 스스로를 생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생의 뜻은 나머지 세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현재의 인으로부터 앞서 존재하지 않았던 온갖 행이 일어나는 양상을 생이라 한다. 앞에 없었던 이 행이 달라지는 모습을 노(老)라 한다. 일어났으되 아직 멸하지 않은 것을 주(住)라 하는데 이는 찰나생(刹那生)이다. 모든 행이 무너지는 모습을 멸이라 한다. 만약에 이 네 가지 법이 유위의 양상[有爲相]이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세 가지 양상, 즉 생과 멸과 주이(住異)만을 설하셨는가? 일체의 행법은 삼세(三世)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래세로부터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미래세에 의지하여 발생되는 것은 유위상(有爲相)이다. 그런데 이것은 아직 생긴 것이 아니므로 취착(取著)할 처소가 없다. 이미 생겼던 것은 과거세에서 이미 다 멸하였으니 과거세에 의지하면 이를 멸이라 한다. 이는 유위상이며 또한 취착할 처소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이기 때문이다. 현세에 나타난 것은 머무는[住] 것이니, 현세에 의지하면 이는 유위상이며 취착할 처소가 존재하지만 이 머무는 것은 또한 다시 달라짐이 있으니 많은 허물이 존재한다. 이것이 생(生)의 모양인데 누구라서 감히 그것을 구할 수 있겠는가? 길상한 일이든 길상하지 못한 일이든 이에 따르므로 머무름과 달라짐[異]을 합하여 하나의 양상[相]으로 여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삼세에서 유위법의 모습[有爲法相]이 나타난다. 만약에 이 세 가지 양상이 성인들에 의해 사량(思量)된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모든 음(陰) 가운데서 기상(起相)과 멸상(滅相)을 관찰하시고 법을 의존하여 머무르셨을까? 또한 왜 주이상(住異相)을 관찰하지 않으셨을까? 생(生)과 주이(住異) 이 두 가지는 기(起)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생과 주이 이 두 가지 양상을 합하여 하나로 말씀하신 것이다. 일어남이 끝에 이르는 경우에는 일어남의 양상을 관찰하여 머문다고 말하고 그 밖의 한 양상은 제2분에서 한 끝자리에 안치하는 경우에는 이를 멸상을 관찰하여 머문다고 말한다. 또한 별도의 뜻이 있으니 이 멸상을 의지하기 때문에 무염(無染)을 증득할 수 있으며 유루(有漏)의 괴로움을 싫어하기 때문에 해탈을 증득할 수 있다. 오직 두 가지 양상(즉 기상과 멸상)만을 관찰하여 이를 사유하여 모든 행법이 무상(無常)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유루의 괴로움을 싫어하게 된다. 이른바 무상이란 무엇인가?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이 생기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생겼다가 무너져 없어지는 것을 멸이라 하니, 이를 무상이라 한다.
생에는 또한 여러 가지가 있으니, 즉 찰나생ㆍ수생생(受生生)ㆍ기생생(起生生)ㆍ별심생(別心生)ㆍ불석의생(不如意生)ㆍ여의생(如意生)ㆍ하생(下生)ㆍ중생(中生)ㆍ상생(上生)ㆍ유상생(有上生)ㆍ무상생(無上生) 등이다. 찰나에 일어난다는 것은 찰나찰나에 모든 행이 생기는 것이니, 이를 찰나생이라 한다. 수생생이란 번뇌의 결박을 갖추었든 갖추지 않았든 처처에 따라 떨어져 그 각각의 처소에서 갖가지 음(陰)이 생기는 것을 수생생이라 한다. 기생생이란 영아에서부터 청장년, 노인에 이르는 것을 기생생이라 한다. 별심생이란 갖가지 연(緣)과 갖가지 수(受)와 갖가지 선(善) 등과 갖가지 도(道)를 의지하여 해탈을 증득하였든 아직 해탈을 얻지 않았든 한량없는 종류의 마음이 있으니, 이를 별심생이라 한다. 불여의생이란 지옥, 아귀, 축생의 세 악취(惡趣)에서 온갖 고뇌를 받는 것이니, 이를 불여의생이라 한다. 여의생이란 인간이나 천상 세계에서 쾌락의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하생이란 욕계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고, 중생(中生)이란 색계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상생이란 무색계에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첫 번째 수태(受胎)된 경우를 하생이라 하고, 두 번째나 세 번째 수태된 경우를 중생이라 하며, 네 번째 수태된 경우를 상생이라 한다. 또한 온갖 악과(惡果)를 받는 것을 하생이라 하고, 모든 무기법(無記法)에서 선과(善果)를 일으키는 것을 제외한 경우를 중생이라 하며, 일체의 선법이 일체의 선과를 낳는 것을 상생이라 한다. 유상생(有上生)이란 욕계의 처소로부터 나아가 무불용처(無不用處)에 이르기까지이다. 무상생(無上生)이란 비상비비상처를 말한다. 또한 유상생이란 아라한이 태(胎)에 든 것으로부터 아직 최후 1찰나의 음(陰)에 이르지는 않은 상태를 말하며, 최후의 일념을 무상생이라 한다.
늙음[老]의 의미를 분별해 보면 또한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것들이 있는가? 신체의 늙음[身老]ㆍ마음의 늙음[心老]ㆍ수명의 늙음[壽老]ㆍ변하여 달라지는 늙음[變異老]ㆍ음의 늙음[陰老] 등이 있다. 신체의 늙음이란 머리가 희어지고 이빨이 떨어져 나가며 피부가 늘어지고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들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몸에는 갖가지 모습이 잇다. 마음의 늙음이란 낙수(樂受)와 상응하던 마음이 변하여 달라져 생기는 것을 말하니, 만일 선심(善心)이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바뀌면 즐기는 사물에 대해 애착처(愛著處)를 낳지만 다시 생겨나 변하여 달라지므로 이 처(處)는 아무런 과(果)가 없다. 이것을 마음의 늙음이라고 한다. 수명의 늙음이란 낮과 밤, 찰나, 라바, 모후라가 경과하기 때문에 수명이 점차 줄어들어 나아가 차례대로 모든 것이 점차적으로 촉박하게 하니, 이를 수명의 늙음이라고 한다. 변하여 달라지는 늙음이란 일체의 자재함과 부귀영화와 병이 없던 색력(色力) 등이 점차적으로 감소하여 일실되는 경우를 말한다. 음(陰)이 달라져 늙음[變異老]이란 인간이나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 음이 점차적으로 증장하여 이곳으로부터 사라져 악도의 하천한 곳에 태어나니 이를 음이 달라지는 늙음이라 한다. 또 별도의 한 가지 늙음의 반연[緣]이 있으니, 이 한 가지 늙음은 전에 말한 바 있는 늙음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이냐 하면 모든 행이 찰나찰나 생겨나면서 달라지는 것을 별도의 한 가지 늙음이라 한다.
머묾[住]의 뜻을 분별해 보면 또한 많은 종류가 있으니, 찰나주(刹那住)ㆍ상속주(相續住)ㆍ의연주(依緣住)ㆍ일심주(一心住)ㆍ여제법주(如制法住) 등이다. 찰나주란 오직 생길 때만 머무르는 것이고, 상속주란 처소를 따라 이미 생긴 모든 음이나 의복ㆍ음식과 나아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와 또한 외부 세계인 기계(器界)와 나아가 겁이 다할 때까지를 상속주라 한다. 의연주란 고락 등의 수(受)와 선악 등의 법이 각각 현재를 연하여 이를 따라 간직하며 머무르는 것을 의연주라 한다. 일심주란 바른 선정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이전의 선정상태와 같이 현재에 머무르는 것을 일심주라 한다. 여제법주란 처소의 경계에 따라 왕이 율령으로 다스리는 국가나 성읍이나 취락에는 네 가지 종성(種姓)의 사람들이 앞서 제정한 일에 의거하여 주지(住止)하는 것을 여제법주라 한다.
무상(無常)의 뜻 또한 한 가지에만 그치지 않으니, 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괴무상(壞無常)ㆍ변이무상(變異無常)ㆍ별리무상(別離無常)ㆍ당생무상(當生無常)ㆍ내지무상(來至無常)이 있다. 괴무상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생겨났으면 곧 멸하는 것을 달하니, 이를 괴무상이라 한다. 변이무상이란 진애할 만한 행이 이전과는 다르게 생기는 것을 말하니, 이를 변이무상이라 한다. 별리무상이란 친애할 만한 사물이 분산되어 떠나버린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 무상이 미래세에 있게 되는 경우를 당생무상이라 한다. 또 이들 세 가지가 현세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지무상이라 한다. 오욕락을 받아도 스스로 간직할 수 없고 떨어져 나가고 영락(零落)하니, 친애하는 것과 멀어지게 되며 이런 일이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고뇌를 준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경에 따르면 탐탐치 않게 여겨 싫어해야 하는 것들이다. 법을 행하는 가운데 모든 외도 무리들은 얼마간 이것들이 무상하다고 생각하고 또한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지만 오직 욕계만 떠날 뿐이며 모든 행법에서 부분적으로 싫어 떠나는 마음을 낸다. 만일 성문(聲聞)들이 이것들이 무상하다고 원만하게 갖추어 사유하면 마침내 이것들을 모두 싫어하여 떠남으로써 무염(無染) 내지 해탈을 증득할 수가 있다. -
017_0325_a_04L智慧靡不通 於淨更無治 濟世論世盡‘頂禮,最勝尊 法如所說者 靜地道爲道未解此三法。 世轉如輪轉 聖僧住於法過縛過餘衆 十分八分八。 果道道果故若諸大士夫欲造論益無知人倒見疑者所言利益從正智生言正智者出決定藏論曰本已說地今廣分別解此地義善答,問難五識。地心地經言阿羅耶識普爲種,本云。何,知有此是如來藏說故解節經偈云盛識普種本 深細流如溢 不爲凡人說恐生我見故鬱陁南梁言持散執持本分明 種本非是事 身受無識定亦非氣絕者以此八種因。緣知有阿羅耶。識若離此識根有執。持實無此。理執持有?五一者阿,羅耶識持,先世業復,從現因後。諸識生如,佛阿毘曇。說因根塵,心業諸識。得生二者善,不善等,六識得生。三者於六識中,若有一無記識。而獨是執,所攝持者。無有是處。四者諸識,各依根生。隨生一識。根有執持。餘根應無。五者諸根數執持,義則不然。以此五義,因阿羅耶識。是故諸根名有。執持本者。從初諸識,不得俱生,亦無是處。若人問言:有阿羅耶識,諸識俱生?答曰:如是。汝言無者。則爲過失何以故?有實義故。如阿含故。二識俱生。何以知之?如有一人。欲得見聞。乃至於知諸識各各。自根、塵心欲無異根。塵無異。一識得生,餘者何妨?此爲實義。阿含後說分明者。諸識不俱取境不了。若以心識,與眼識等,爲伴取境是則分明何以故曾行諸塵然後追思多,不明了。識識不俱意,獨緣故,不如緣現,則易明了。識識俱故。故知俱生種本者。若離阿羅耶識,眼等六識互爲本者,則無是處。云何知耶?善識滅時,不善心生,不善識滅,善心復生。善不善滅。無記心生。下界心滅。中界識生。中界心滅。上識卽生。上識亦滅:下心還生,有漏識滅,無漏心生,無漏心滅有漏還生故。知六識不互爲,本,如次第心滅,於無數劫,還更得生。故知阿羅耶識以爲種本,非是事者。諸識不俱,則無此事。何以故?此有四事一者器事二者捉身事三者言是我事。四者於塵事。如此四事,念念俱生。若言一識,於一念中,知四事者。無有是處言身受者若離阿羅耶識有身受者,則無此義。云何知耶?猶如有人,若實心作,不實心作。要先思惟。若定心不定心諸受,於身種種多生諸受得生故知有阿羅耶識有無識定亦無此義。何以知之?若入無想定,入無識定者,六識皆滅,此人應死。如佛所說。入無心定,而識不滅。言非氣絕者若離阿羅耶識有氣絕者無有是處云何知耶如善惡二人臨命終時善人足冷,煖上至頂,頂若冷時,人命卽滅。惡人死時,從頂冷至足,煖氣滅時,此人命終。意識常在身,阿羅耶識持身故,阿羅耶識滅,而身卽冷,便不覺觸。此冷、煖二事不由意識故,知有阿羅耶識,鬱陁南。‘境界相賴起 更互爲因緣 得共相應生與煩惱俱滅。’略說四義。知有阿羅耶識事。一種現有滅境界者,阿羅耶識因二境生。一者在內持事故,二者在外持器,不能分別諸相貌故。此內持者,執著邪我見習勢力,與根、色俱時,而執持者,卽爲境界。此欲、色界有,無色界中,唯有執著邪我見習勢力。二者在外持器,不分像貌者,在內爲阿羅耶識所持,卽持外界。譬燈持炷油,在於內,而有外照。阿羅耶識事內外,亦爾。此境界者,甚深妙細若以世中,多聞智人亦不能了此境。是恒而有異。云何無異?從初一念來,被持境,乃至於死生,一味事。阿羅耶識,於境界中,念念生滅,在欲界中,取境微小,於色界中。取境廣大,於無色界,無量空處,無量識處取無量境於無所有處取微細境於非有想非無想取境甚深微妙此兩境故,微妙故,一味故,念念滅故,微小境故,廣大境故,無量境故,微細境故,甚深微妙境故,知有阿羅耶識事。相賴起者,阿羅耶識,與五心數法,相賴得生。思、觸、受想及於作意,此五大地,是報所攝五法微細,世中智人,所不能了。同緣一境。無有別異,共不苦、不樂無記受俱,餘四亦爾。大地心數法相賴故。同報相賴故。微細相賴故。同緣一境故。非苦、非樂相賴故。無記相賴故。知有阿羅耶識相賴而起,更互爲因緣者。阿羅耶識,與餘諸識,互爲因緣。此義有二:一者種本,二者依託,云何種本?諸善、不善、無記等識,皆因阿羅耶識,以爲種本。依託者,阿羅耶識,持諸色根、五識得生,不持不生。有阿羅耶識時,意識得生六識。二事爲阿羅耶識更互因緣。一者現轉增長種本,二者未來欲生之時,令受報故。增長種本者諸識生善、不善、無記念念熏修。阿羅耶識,亦復如是。所以者何?後生諸識,漸增長。善惡轉勝。令受報者,有識於善、不善有力者,未來世令阿羅耶識,受果報。種本故,依託故能增長故,令受報故知有阿羅耶識與諸識,互爲作因緣,得共相應生者,阿羅耶識,或共一識相應得生。如說於心心,有我見憍慢爲相,於有意識,於無意識,阿羅耶識,恒相應生。此我慢心,取阿羅耶識爲境,言是我言有我爲相,或二識俱生,謂於意識。或三識共生謂於意意識於五識中隨取一識或四識相應生於五識取二識乃至於五、六、七識共生。六塵現在前故此意識依心得立,因心未滅之時。意識不解縛故,因心若滅,意識則解。意識有二境界,他塵境界、自塵境界。他塵者,謂取五識塵爲境。自境界者。謂取於法,而此意識,於餘七識,有異義故。阿羅耶識,與六識三受,相應共生,謂苦、樂不苦不樂,於欲界人、天、畜、生、餓鬼少分有三受。與自不苦、不樂受,共生地獄道,苦受不離,託阿羅耶受共生。三禪地。唯有樂受,託阿羅耶識,受共生。四禪乃至非想非非想地,唯有不苦、不樂受,託阿羅耶識,受共生。如是六識中,善、不善、無記法,與阿羅耶識相應共生又阿羅耶識與諸識,相應共生,與客三受,客善、不善、無記諸識,相應得生,不得相雜。何以故不同境界生故,猶如眼識,俱生不與眼雜。阿羅耶識,與諸識俱生不得相雜,亦復如是。如諸心數,同是心法。有種種相,相應俱生,無有妨㝵阿羅耶識而與七識相應俱生亦復如是譬如流水,與波俱生,無有妨㝵。又如明鏡諸像俱生,不相妨㝵,於阿羅耶識,而與諸識,相應得生無有妨㝵,亦復如是。復如眼識,或取一色一種一相,或取多色,多種多相。耳識於聲,鼻識於香,舌識於味,身識於觸,亦復如是。意識遍取種種諸相。無有妨㝵,分別六識,其義如此。心界於前已說,至於滅時,與四煩惱,共相雜生。我見憍慢,我欲無明。此四煩惱。於定、不定地。於善不善、無記法中,無有妨㝵,卽是穢污,無記之法。是故阿羅耶識。而與諸識。相應生故。復與三受相應生故。亦與善等相應生故以是義故是故知有阿羅耶識相應共生。與煩惱俱滅者阿羅耶識,卽是一切煩惱根本。云何知耶?能起衆生世閒根本,能生五根及於六識,亦起國土,世界根本一切業,起諸因緣故,亦是交互牽報根本。云何知耶?無有見他衆生,不生三受。是故佛說衆生遞互爲增上緣,是以阿羅耶識爲一切本。現在世中,是苦諦體未來世中能生集諦是爲一切煩惱根本。問曰:若言阿羅耶識爲一切法,而作根本。解脫分善通達分善,是諸善根,以此與集諦,應有妨㝵?答曰:阿羅耶識,不爲達分諸善根本,世閒諸善得增長達分善根轉更明勝達分善根,轉明勝故。世閒諸善得報亦勝。世尊依阿羅耶識,爲一切種本,故說此言。謂眼界、色界、眼識界,乃至意界、法界,意識界。阿羅耶識中,有種種性故故說種本積聚譬喩如是阿羅耶識而是一切煩惱根本修善法故,此識則滅。言修善者,諸凡夫人,起善思惟,而取諸識,以爲境界,進行安心,初觀諸諦,若證四諦,得眼智明慧,則能破壞阿羅耶識。未見四諦,則不能破。何時能見阿羅耶識?如是進行,若諸聲聞,入不退地。又諸菩薩入不退地:得通達法界,則能得見。於此識中,卽見一切諸煩惱聚,於內於外,卽見己身爲煩惱縛。於內見身,而爲三界麤惡煩惱,諸苦所縛。一切行種煩惱攝者,聚在阿羅耶識中,得眞如境智,增上行故,修習行故。斷阿羅耶識:卽轉凡夫性,捨凡夫法,阿羅耶識滅。此識滅故,一切煩惱滅。阿羅耶識對治故。證阿摩羅識,阿羅耶識是無常:是有漏法。阿摩羅識是常,是無漏法。得眞如境道故,證阿摩羅識。阿羅耶識,爲麤惡苦果之所追逐,阿摩羅識無有一切麤惡苦果。阿羅耶識。而是一切煩惱根本,不爲聖道,而作根本。阿摩羅識,亦復不爲煩惱根本,但爲聖道得道,得作根本。阿摩羅識,作聖道依因,不作生因。阿羅耶識,於善、無記,不得自在,阿羅耶識滅時,有異相貌。謂來世煩惱,不善因滅,以因滅故則於來世,五盛陰苦,不復得生,現在世中,一切煩惱,惡因滅故,則凡夫陰滅。此身自在,卽便如化。捨離一切麤惡果報,得阿摩羅識之因緣故。此身壽命,便得自在,壽命因緣,能滅於身。亦能斷命盡滅無餘一切諸受皆得淸淨,乃至如經廣說。一切煩惱相故。入通達分故,修善思惟故,證阿摩羅識故知阿羅耶識與煩惱俱滅如是分別眞實解釋心、意、識義,因此解釋心意識故於三界中得知一切煩惱之法諸淸淨法餘處所說心意識者爲欲教化諸衆生故。爲諸衆生,未有深智易生信解但說六識問曰有人有阿羅耶識,有六識不,有人有六識無阿羅耶識不?答曰:此有四句:一者如人無心眠時,迷悶心時,入無想定生無想天,阿那含人,入滅盡定,此五種人有阿羅耶識,則無六識。二者阿羅漢及辟支佛、不退菩薩、如來世尊,此四種人,以有心處,有於六識,無阿羅耶識。三者凡夫之人,須陁洹、斯陁含、阿那含以有心處有六識有阿羅耶識四者諸阿羅漢及辟支佛菩薩世尊入滅盡定,又世尊入無餘涅槃,無阿羅耶,亦無六識,一切內外法各有定性。於相不動。何故從十八界,唯說六識?有定性故。所餘諸界,是根是塵,是伴侶故。此諸識等,日夜牟㖃羅羅婆剎那過故。種種因緣,眼等諸根色等諸塵,心數爲伴,種種緣生,隨所生處,得名不同。如火燒物,隨所燒。處得種種名。謂草火、木火、糞火,因眼因色,隨識得生,皆名眼識乃至心識,亦復如是眼等諸界從始至終皆是果報無記。有異相識,則不爾。是故分別識界,不明餘界,若有比丘,欲知識聚修習此行令心淸淨多種相貌能了心者、略說有三。樂著煩惱故,染心爲過故,斷惑方便故,云何比丘知於煩惱?作是思惟:此心久來樂著煩惱,樂煩惱故,縱復拔心,置無欲處,爲欲所牽,不樂蹔住速疾退還更入欲處如是貪欲處瞋恚處愚癡處睡眠處乃至放逸之處,縱復拔心,置無放逸處,速疾退還入放逸處。亦復如是。如是比丘,知於煩惱,云何當知染心爲過?此心有染其旣自損亦復損他現世起惡,來世亦爾。從其所作憂悲、苦惱、諸惡因緣,乃至放逸有過患故。受種種苦,亦復如是。知於自心,有諸過患,云何當知斷惑方便?知於自心,有如是過。憂悲苦惱。我今不應隨如是心,受諸苦惱,應制自心,隨逐於我,我不逐心。如是思量,知心有欲,拔有欲心,置無欲處卽令自心見於福利乃至拔放逸心,亦復如是。如是修行,積習善根,是時此心,無更餘緣,於諸善法,修習增長,而得安住。憎惡煩惱見,先過患。是故比丘,修心淸淨,已知樂著煩惱故,已知染心過患故,已知斷惑方便故,卽得速證無上淸淨無漏之心。又別知心,亦說轉心,謂爲假名。又別知心,亦說轉心,謂爲他因。所治心善有二功德,得功德得果之時,心則快樂,修習善法,自在無㝵,有三種失染濁於心。一者不正思惟,二者結使未斷三者現起煩惱。比丘有三處住,因於六行能受佛教云何三處一者住於解脫二者住解脫門三者住解脫至因緣法因於六行一者無有異行二者攝心一處:三者善根得生:四者思度見諦,不嘗餘味:五者無增上慢:六者正用信施。施有二種:一受者施,二施者施。施果亦二:一大富果報,二慶悅果報、爲應來就故,何者爲應來就爲未來法?無以未有故。如是應生行相,云何得住?若未來法有行相生,若度故生,從未來已度於現在,終此生彼,從未來世終者,現世受生,因未來法,現世法生。如是住者,無有變異。因未來法餘,現法生,於未來世,現世諸法。而未來世,現世諸法,而未有業,於現世中,卽有事生。已生具相,於未來世,未有具相,於現世中,具相而生。若異相生,於未來世,因未來性故,因因性故,此兩性故,已生異相,於現世中,現世性故。以果性故,異相而生。以此六種未來世法,無義得生。何以故?其未有處,從於此處,度於彼處,無有是義。旣自未生,豈容有沒?諸現世法,若因未來法,現世法,生未來諸法。不應未生一切諸法,無有動相。離自相故無有別業,未來、現在若同有相,現世中法,獨偏有業,無有是處。唯業未生,而今得生,諸行不爾。如佛正說諸行無常,是說則破。今演業無常,若如汝說諸行應常,僧佉所云是法未有無義得生,已生諸法,無義得滅。此說應是。如佛所說。是法未生,應卽受生,生已應滅。若如汝說,此義應非。以此諸法,若同一相,云何分別?若可分別,是則無窮,未生得生,豈有於相未來法性,從色等相應?無別異果,未來者,以卽未有。現世法者,言卽是果,無有此義爲應成就故有此實說可爲證信未來諸法,未有行相,言未有者,而卽得生。如未來法、過去亦然,何者過去行法?是滅相者,從生已過,何者現在行法?是未滅相。從生未過,唯生時住。何者未來行法?乃現有因,未生自相未受己身。問曰:未來諸法,旣本無有,能得受生,虛空華等、石女、兔角,云何不生?答曰:此無生因,未來行法,有正生因。問曰:若未來法,有正生因,何故不得一時俱生?答曰:乃有生因,待緣不同。是諸行法,有近緣者,因卽能生。是故不俱。何者因緣?佛說有四:一者因緣,二者次第,三者緣緣,四者增上。初一亦因亦緣,餘三但緣非因。何者因緣?根有色者,有依者是。以是識者,此二種法,爲一切種、一切色根種、一切色法種、一切心、心法種。悉依色根,亦依於識。除四大色。此四大色,有二種依:一四大種,二十一種。是種相續,依於諸法所說者,卽是因緣。若有色根、心心法,種而不依耶?若入滅定,入無想定,生無想天,未來世識,不應更生會當有生。是故色根、心心法因,若有此識,不隨色種,諸凡夫人,生無色界。壽命盡故,以業盡故,從彼沒已,來生下界。此色無種,不應更生,會應更生。是故諸識,是色根本,從世俗道,入初禪定,生初禪地。欲界不淨,及諸淨法已破種本未悉斷除何以故從初禪定,後更退還,起不淨法,從初禪處,退生欲界,斷有四種:一者避斷,二者壞斷,三者定斷,四者本永拔斷。何者避斷?如有一人,著於欲樂,爲斷欲故,受離欲戒,堅持不犯,令得增長。以增長故,不復著欲。欲因煩惱,不更得生,是名避斷。何者壞斷?猶如一人,有過失想及不淨想、靑瘀等想及善思惟,卽壞貪欲,未盡欲者,不隨於欲,於塵境界,心不貪著,是名壞斷。何者定斷?猶如一人,隨世俗道,離於欲染,及離色染,得證寂定,持心相續,於欲及色,不復更著,是名定斷。何者本永拔斷?猶如聖人,修出世道,離三界染,而卽得證。於三界中,諸煩惱本,不復得生。何以故?於現世中,已證無欲,畢竟不退。已生上界,決不更退還生下界。譬如稻麥及諸種子種虛空中,及乾燥地,永不得生,非不是種。若火焚之,皆悉燋滅,失於種相,諸煩惱本。於斷於滅,亦復如是。聖人若入無餘涅槃,是善、無記種本悉伏。問曰:若言是伏,而不都滅,何不生報?答曰:已斷不善種本於未來世,不能生,報亦不自生,是名本永拔斷。具縛人者,是心有生有苦,有樂不苦,不樂此一切心,爲三種本:善與不善、無記等法。亦爲種本。諸學人者,有世善心及染污無記,修道斷惑,以爲種本。世善心等,復爲餘法,而作根本。無學人者,斷惑已盡,有世善心,若屬世閒,若出世閒,及無記者,以一切諸煩惱惑,不作根本。一切善法及無記法,卽爲根本。如是分別諸法根本。是處不說阿羅耶識。有處說者,諸世俗法,阿羅耶識,悉爲根本。一切諸法、出世閒者,無斷道法,阿摩羅識,以爲種本。如佛所說。比丘、諸阿羅漢爲學心法,依於四禪,現安樂住,亦從此心。我說退墮還一一處。問曰:若如此者,諸阿羅漢,永斷煩惱,云何下地煩惱,更生若不更生,云何退墮?答曰:退有二種:一者失退,二者住退。失退者,是凡夫人,住退者,通於凡聖。依世俗道,煩惱已離,後復更起名退失退,亦住退退,依出世道,煩惱已斷,心著作務不作心故。以此中閒,不能更起現安樂住,如前後亦如是。亦不更起下地諸惑,此住處退、非退、失退。諸阿羅漢一切惑盡。若不善法未斷種本,云何羅漢,心善解脫諸,漏已盡?若不善法,種本已斷,云何羅漢,於心相續不正思惟;豈復更生,云何諸惑,而得生耶?是故依出世道,已斷惑,盡知無退失。已說因緣,復有二種:一者生因,二方便因。次第緣者,諸心數法,以從次第,餘法得生。此心數法,爲生者緣,一是識爲識作次第緣,亦名爲意,亦名意入,亦名心界。是次第緣,復有二種:一者已滅,二者移處。緣緣者,此五種識,色等諸塵,是其緣緣。復於心識,內外諸入,卽是緣緣。是說緣緣,亦有二種:一者猗證,二不猗證。增上緣者眼等內入俱時生者與眼識等爲增上緣能使心作於境界中若俱時生心心數法,更互爲緣,過去所造,善、不善業於未來世,如意不如意,所生果報,爲增上緣。田水糞等,爲諸種子,作增上緣。世閒工巧及諸雜業,此等諸智,爲增上緣,是增上緣,復有二種:一者不離,二者有空。此因緣者,能生者是,所餘緣者,唯能增長,以是行緣,俱時同至。是行種本,能生諸行,是故諸行不俱時生。以依四緣,了知十因。如菩薩地,如佛所說。緣過去行,而心得生。緣未來行,亦生於心。若過去行及未來無,何法爲心,而作境界?言因此境,佛說生心,以是此心,卽無爲境,問曰:若心境無,是佛所說?正分明者,因雙雙對,諸識得生,雙雙對者,眼色、耳聲、乃至心法,此正佛說。云何不妨?答曰:此是法塵,不爲五識而作境界。佛說是塵卽名爲法緣、心緣法。夫言心識以方便生佛說此義復何所爲以此心識,不取過去識,以爲境界。亦不取未來諸識爲境,去來諸識,法塵不攝。若有法者,有法相聚,若無法者,無法相聚。以此心識,隨有法者,有法義取,隨無義者,無義法取。以是義故,信知諸識無者爲境。若以此識,不取有、無二種境界,卽不能取一切法義。若有說言,心識不取有、無爲境,是人卽妨悉檀多義。問曰:此識若取無法爲境,識亦應無?答曰:去來故無識,現在故有。問曰:眼識不得取無爲境,心識云何能取無耶?答曰:三世境故。復應廣說有五種義。以現心識取無爲境,如佛所說。離內外入,無有我義,是我無者,非有爲法,非無爲法,以是諸識,是取無我爲境界者。於有智人,知摠相法則無不信此是一義色香味觸離此四塵,了不能得。殿堂、輦輿、飮食、衣服及餘衆具,殿堂等法,是其所無,非有爲法,非無爲法。以是諸識,取無殿等,爲境界者,於有智人知摠相法,則無不信。此是二義。是諸邪見,誹謗一切,無因無果,無縛無解,是諸法無若隨義理,有此諸法,則非邪見,此實都無。於邪見人,取無爲境,無不生識。此是三義。復於諸行無有常住,此無常住,亦非有爲,亦非無爲,而此諸識亦非不取無常爲境。於有智人,知摠相法,非不生識,常無境識。若不得生於一切行,不見於常無有義者,依正智慧,則不生厭,無染亦爾。亦無解脫,不得涅槃。若以此義,一切衆生,諸煩惱惑,永縛不脫此是四義。諸未來行,未有生義,豈容言滅?然諸聖人,於未來行,亦無不觀生滅之義,此是五義。以是義故,定知諸識取無爲境。如佛所說。若過去業了無有者?則無有苦受、樂受。此義何謂?於過去生已作已滅善、不善業,爲未來世,受愛不愛果,是行相續,業種所生。爲此義故,如佛所說有過去業,復有二義,是諸人說不正因者。遮其執故。其有說言,有自在天、梵釋諸天自性、神我、時節、微塵,言因此法衆生苦樂,皆悉得生,復爲諸人說無因者,爲遮其執故,有衆多人,說言無因,亦說無緣。爲諸衆生,有淨、不淨,不從因緣,木石等物,或有尊重,或有輕慢,現此事故。是故佛說有過去行,諸賢聖人不著此處。安樂而住此說,何義?過去諸行,生果故有,未來諸行,爲因故有,云何信知現在諸行,三相顯現?過去果故,未來因故,自相相續,不斷絕故,復依兩義,現此二法,謂於過去及未來,行除實執故。若去來行,其相實有,則非去來,諸無見人,謂去來無現在,亦無。如是見等,斷此執故。如佛所說。有去、來界,有現在界此義何謂?種子相續,已生於果故,說此義。是名過去。欲生之者,種子相續,是名未來。現在諸種果,未斷者,是現在界。故。說此意比丘,知於種子相續,是無量法,非一種界。是名知界。何以故從色等陰生老住滅,無更別法,亦非實有。諸未來行,遮實有故,無有生者,斷於實義,云何知耶?於未來生,旣自未生,云何能生,生於他法?現世諸生,亦不能生,生於現法。此言生相,是諸行成,是諸行生,是諸行起,諸行現在。此明一義,而有多名,離此多名,復有生相。諸有智人,不說此名,以爲生相,於此諸法,各定種因,何用別生?此生羸劣,而是假名,云何知耶?夫有生者,卽行生耶,能生行耶?若生自行,能生行法,於有生者,行法得起,是義不然。若能起者,是名行生,於一行中,應有二生。謂能生者,諸行自生,此亦不然。如說生義,餘三亦、爾。於現在因,先所未有諸行起相,是名爲生。不以先者,是行異相,卽名爲老,起而未滅,卽名爲住,是剎那生,諸行壞相,是名爲滅。若此四法,是有爲相。何故佛說唯有三相?謂生滅住異,一切行法,三世所現,從未來世,未生得生,是故依未來世。是生起者,是有爲相,此未生故,不可著處。已生之者,於過去世,悉皆已滅,依過去世,此言滅者,是有爲相,亦不可著。已過去故,現世所現,是住之者,依於現世,是有爲相,是可著處。以此住者,亦復有異,多有過失,此是生者,誰敢求之?如於吉祥不吉相隨,是故住異合爲一相,以是義故,三世所現有爲法相。若此三相,是諸聖人之所思量,何故佛於諸陰中,觀起滅相,依法而住?復更不觀於住異相,生及住異,此兩種相,是起所現,是故生及住異,此二種相合而,爲一說。於起邊故,言觀起而住,所餘一相於第二分,安置一邊故。說此言觀滅相住,復有別義,依此相故,便證無染,爲厭患故,得證解脫。唯觀二相,是所思惟,以見無常於諸行法故,生厭患,所云無常。未生者生,是名爲生,生而卽壞,是名爲滅,是名無常。生復多種,謂剎那生,謂受生生,謂起生生,謂別心生,謂不如意生,謂如意生,謂下中上生有上生無上生。剎那起者,剎那剎那,諸行生起,是名剎那,生。受生生者,具縛及不具縛,從處處墮,於處處中,諸陰生起,名受生生。起生生者,從於嬰兒,乃至壯老,名起生生。別心生者,依種種緣,與種種受、種種善等及種種道,若證解脫及未解脫,無量種心,名別心生。不如意生者,地獄、畜生、餓鬼於三惡趣受諸苦惱,是名不如意生。如意生者,於人、天道受快樂報,下生者,生於欲界,中生者,生於色界,上生者,生無色界、又第一受胎,是名下生,第二第三,是名中生,第四受胎,是名上生。又受諸惡果,是名下生,諸無記法,除起善果,是名中生,一切善法,一切善果,是名上生。有上生者,從欲界處,乃至無不用處,無上生者,非想非非想處,又有上生者,謂阿羅漢,從於入胎,未至最後,一剎那陰,最後一念,名無上生。分別老義,復有多、種何者身老、心老、壽老、變異老、陰老。身老者,髮白、齒落、皮緩、面皺乃至如經,身有諸相。心老者與樂受應變異生者若以善心轉爲不善,於所樂物,生愛著處,復生變異,是處無果,是名心老。壽老者,日夜剎那,羅婆牟㖃羅過故,壽轉減少,乃至次第一切轉促,是名壽老。變異老者,一切自在,富貴榮華,無病色力轉減少失故。陰異老者,以生人天,陰轉增長,從此處,沒生於惡道、下賤之處名陰異老。又別一老緣此一老前所說老而便得生。何者諸行,剎那剎那,所生異異?名別一老,分別住義亦復多種剎那住、相續住、依緣住、一心住如制法住剎那住者唯生時住相續住者,隨處已生諸陰、衣食乃至壽盡,復外世器乃至劫盡,名相續住。依緣住者,苦樂等受、善惡等法各各緣現,隨是持住,名依緣住。一心住者,正定心人,住現前定,名一心住。如制法住者,隨處境界,王領治化國邑,聚落,於四種姓依先制事,而立住止。名如制法住,無常義者,復不一種,何者壞無常變異,無常別離,無常當生,無常來至,無常。壞無常者,諸有已生,卽便失滅,名壞無常。變異無常者,可愛行生,不似前者,名變異無常。別離無,常者,於可愛物,分散別離,此三無常。於未來世,是名當生,起於現世,是名來至無常,受五欲樂,不能自持,脫有零落,愛別離至,思惟是事憂悲苦惱,乃至如經不肯厭患,於行法中,諸外道輩。多所思惟,是等無常,亦生厭離,唯離欲界,於諸行法分,生厭離。若諸聲聞具足思惟是等無常,究竟厭離得證無染,乃至解脫。
決定藏論卷上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다섯 식[五識]이 다섯 경계를 반연하거나 다섯 식이 똑같이 의식을 반연하는 경우와 또 다섯 식이 의식을 함께 갖추는 경우, 그리고 선정 상태의 의식과 제8식이 여러 경계를 반연하는 것을 뜻한다.
- 2)대지법이란 일체의 심(心)과 상응하여 함께 일어나는 열 가지 심리 작용을 말한다. 대지법에는 다섯 심수법인 5변행심소(遍行心所)와 5별경심소(別境心所)를 합해 열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 다섯 가지 대지란 5변행심소를 뜻한다.
- 3)색ㆍ성ㆍ향ㆍ미ㆍ촉을 의미한다.
- 4)유부무기(有覆無記)와 같은 뜻이다. 즉 그 성품이 물들어 오염되어 성스러운 도를 덮어 막고 또한 마음으로 하여금 깨끗하지 못하게 하므로 유부라고 하지만, 그 세력이 약해 이숙과(異熟果)를 이끌지 못하므로 유부무기라 칭하는 것이다.
- 5)여기서의 의미는 집장식(執藏識)의 의미이다.
- 6)이상의 명칭은 시간의 단위이다.
- 7)수론학파(數論學派)를 말하며, 인도 6파 철학 가운데 가장 먼저 성립하였다.
- 8)여기서는 욕계나 색계를 의미한다.
- 9)본래 열 가지 부정상(不淨想) 가운데 하나로 죽은 사람의 몸이 퍼렇게 변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