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乘掌珍論卷下

ABC_IT_K0620_T_002
017_0657_a_01L대승장진론 하권
017_0657_a_01L大乘掌珍論卷下
청변 지음
현장 한역
이현옥 번역
017_0657_a_02L淸辯菩薩造
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이와 같이 관행(觀行)을 닦은 자는 총괄적인 모습에 의해, 유위(有爲)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지만 무위(無爲)의 속성이 공함은 미처 깨닫지 못한다. 무(無)를 드러내 깨달음을 나타내지 못하고 무분별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여 수행이 진전돼도 궁극적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무위는 실체로서 있지 않아 생기하지 않으니 마지 허공의 꽃과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017_0657_a_04L如是已說修觀行者摠相悟入有爲性空而未悟入無爲性空若不開示無由悟入若不悟入無分別慧能趣入行終不得成爲開示故復說是言無爲無有實不起似空花
여기서 간별하여 주장하는 것은 곧 최상승(最上勝)의 진성(眞性)이니, 뜻을 간별할 필요가 없다. 간별의 의미는 반드시 앞과 같이 알아야 한다. 진성에서 무위(無爲)가 공하다는 주장을 세우지만 세속에서는 아니다. 유위가 아닌 까닭에 무위라 이름한다. 유위와 반대되는 것이 곧 무위의 뜻이니, 곧 허공(虛空)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ㆍ진여성(眞如性)이다. 이른바 앞서 제거한 법처(法處)에 속하는 것이다.
017_0657_a_09L此中簡別立宗言詞卽上眞性須簡別意如前應知就眞性故立無爲空非就世俗非有爲故說名無爲翻對有爲是無爲義卽是虛空擇非擇滅及眞如性前所除法處一分
허공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는 과정을 우선 나타내 보이겠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니, 허공에만 질애(質礙)의 사물이 있지 않아, 세간에서는 모두 공하다는 말을 하기에 허공을 문(門)으로써 삼아 나머지 무위(無爲)의 공성(空性)을 깨닫게 한다. 즉, 세간이 아는 허공은 진성에서 공하여 실체로서 있지 않으니, 이것이 곧 주장명제이다.
017_0657_a_14L先顯悟入虛空性易開示故唯就空無有質碍物閒共立名虛空故由此爲門悟入所餘無爲空性卽此世閒所知虛空眞性故空無有實是名立宗
진성(眞性)은 실재하지만 허공은 없다는 주장을 세운다. 두 주장을 모두 허용하여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가립(假立)에 의해서는 생기하지만 불생(不生)의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를 든다. ‘허공의 꽃’은 실체가 없고 또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법의 비유를 세우려, 이품(異品)을 부정하면 부동법(不同法)의 비유가 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앞과 같이 알아야 한다.
017_0657_a_18L卽此所就眞性故無實虛空二宗皆許不起故或假立爲不起法故說名爲空花無實亦不起故立爲同喩說遮止異品立爲不同法喩如前應
017_0657_b_01L 어째서 여기서 비량을 건립하는 것인가? 이른바 진성에서 보면 허공에는 실체가 없다.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나 지혜 있는 자도 모든 생기하지 않는 것은 다 그 속성이 실체로서 없기에,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고 안다. 이 주장의 이유로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간략한 명상(名相)을 들고, 다시 또 다른 이유인 ‘작용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작용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괴멸이 없기 때문에’라는 그와 같은 이유로써 무위의 자성을 부정한다. 이 까닭으로 상응하는 대로 다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치 ‘당신은 새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이 연유를 잘 지키시오’라는 명령을 받고 근접하지 못하게 지키며 고양이와 쥐 등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다.
017_0657_b_01L云何此中建立比量謂就眞性虛空無實以不起故諸不起者愚智同知其性無實猶如空花此所立因不起故者略擧名相復有餘因非所作非能作故無滅壞故如是等因遮所說無爲空性是故如應皆得爲如說汝當守掌此酥勿令烏近令所守無損污故亦應遮彼猫鼠等類
비바사(毘婆沙) 논사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비난을 한다.
“만약 무위에 실체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공처(空處) 및 등지(等至)에는 곧 소연(所緣)이 없는데, 어떻게 있다는 말을 하는가? 그렇기에 장애가 없는 것이 곧 허공의 모습이 된다.”
017_0657_b_09L毘婆沙師咸作是難若所立宗無爲無實是無有義空處等至卽無所緣云何得有然無障碍是虛空相
이에 흑은 방편 때문에 비량(比量)을 세워 말한다.
“공처(空處)와 등지(等至)에는 실제로 소연(所緣)이 있다. 혹은 경계가 실체로서 존재하면 등지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등지는 소연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밖에 등지나 연(緣)처럼. 그밖에 등지나 저 소연은 유위이기 때문이다. 이미 속성이 공함을 변론하면 동법의 비유는 없다.
017_0657_b_12L此若方便立比量言空處等至實有所緣或境實有是等至故如是等至所緣境故如餘等至或如彼緣其餘等至及彼所緣是有爲故已辯性空則無同喩
이것은 승의제에서 허공의 모습을 변론하는 것이다. 세속에서 허공을 세워도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고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처럼. 이 비량(比量)에 의하여 세워진 ‘실체의 존재’는 있지 않다. 곧 내가 말한 이유 때문에, 그대가 말하는 ‘등지는 소연의 경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는 결정상위(決定相違)의 과실이 생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세운 뜻은 성립한다.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017_0657_b_17L此就勝義辯虛空相若就世俗所立虛空亦非實有以不起故猶如空花由此比量彼所建立實有不成又卽由此我所說因汝言等至所緣境故因有決定相違過失是故我先所立義成無障難故
017_0657_c_01L우리 부파나 다른 부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약 ‘진에서 허공이 실체로서 없으니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이 말의 뜻에 준해 볼 때, 생기하는 것에는 다 실체가 있다. 만약 ‘생기해도 실체로서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이 이유는 동품(同品)에 편재하지 않아 이유의 속성을 못 이룬다.”
017_0657_b_22L自部他部有作是言若就眞性虛空無實以不起故此言義准起者皆實若言起者亦無有實是則此因不遍同品因性不成
이것은 곧 뜻에 준한 것이며, 상사(相似)의 오류이고 불성의 오류와 비슷하다. 이것을 판정하여 ‘생기하지 않는 것은 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으나 ‘실체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생기하지 않는다’는 말은 못한다. 다시 ‘꾸준히 쉴 사이 없이 발생하는 것’은 동품(同品)에 편재하지 않고 또 원인을 허용하기에 이것에 오류는 없다.
017_0657_c_03L此是義准相似過類似不成過此審定言諸4567890不起者皆無有實非審定言諸無實者悉皆不起雖復勤勇無閒所發不遍同品亦許爲因故此無過
다른 사람이 힐난하여 말한다.
“허공에는 속성이 있으니 세간 모두 알기 때문이다. 꽃에도 속성이 있으니, 올발라(嗢鉢羅) 등은 세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과 꽃의 두 종류는 상응하지 않지만 속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공의 꽃’을 비유로 세우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57_c_07L有餘難言虛空有性世共知故花亦有性嗢鉢羅等世現見故空花二種雖不相應非無自性故空花喩所立不成
이 힐난은 옳지 않다. 이 허공의 꽃의 비유는 여섯 번째의 전의사훈석(轉依士訓釋)에 의해 보면, ‘공의 꽃’이기 때문에 ‘허공꽃’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이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비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도리에 의해 관행을 닦는 자는 곧 바로 허공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고, 택멸(擇滅) 등의 세 무위(無爲)의 속성이 공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017_0657_c_11L此難不然此空花喩就第六轉依士訓釋空之花故說名空花此旣非有故喩非無由此道理修觀行者應正悟入虛空性空於擇滅等三種無爲性空道理亦當悟入
비바사 논사가 택멸무위(擇滅無爲)를 부정하는 것을 듣고 참지 못하여 다시 이러한 힐난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택멸은 유위와 대치되기 때문에 출리(出離)라 이름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만약 ‘없다’는 비방을 말하면 그대들은 또다시 주장에 위배되는 과실이 생긴다. 또 세손께서는 ‘즐거움이나 욕심 등의 작용을 감수(感受)하는 것이 다 없어졌으면, 이를 이름하여 열반적정미묘(涅槃寂靜微妙)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째서 없다는 말을 하는가?”
017_0657_c_16L毘婆沙師不忍遮破擇滅無爲復作是難佛說擇滅對治有爲故名出離若謗言無汝等便有違宗過失又世尊說喜貪俱行諸愛盡滅名爲涅槃寂靜微妙云何言無
017_0658_a_01L세존께서는 화현된 유위의 경계에 관해 꾸준히 염리(厭離)를 닦아, 무위의 경계를 즐거워하지 않으셨기에, 세속의 입장에서 택멸ㆍ출리ㆍ열반적정미묘가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화생(化生)의 유정(有情)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무위열반(無爲涅槃)이 있다는 말도 그와 같다. 그 존재를 허용하기에 주장에 위배되는 오류는 없다. 다만 진성의 입장에서 택멸을 부정할 뿐이다.
017_0657_c_21L此中世尊欲令所化於有爲境勤修厭離於無爲境隨順欣樂故就世俗說有擇滅出離涅槃寂靜微妙如佛說有化生有情說有無爲涅槃亦爾許此有故無違宗過但就眞性遮破擇滅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제 존재가 열반의 존재를 살펴 구한다면 우린 어리석은 그들을 외도의 제자라 말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 또한 ‘여래께서는 생사 및 열반을 보지 않으셨다. 열반이란 여래께서 가립(假立)한 것이다. 여기서 모두 열반의 자성은 없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17_0658_a_03L故世尊言諸有尋求涅槃有性我說癡人外道弟子乃至廣說又言如來不見生死及以涅槃言涅槃者如來假立此中都無涅槃自性乃至廣說
또 사성제를 비방하는 과실은 없다. ‘세제에서 존재의 애욕이나 괴로움은 궁극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출리ㆍ열반적정미묘에는 전도가 없다’는 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승의제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애욕이나 괴로움은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아 본성이 적멸하니, 이를 멸성제라 이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 성스런 가르침 및 말씀하신 이치로 인하여 ‘진성에서는 그러므로 택멸이 없다’는 말에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017_0658_a_07L亦無誹謗聖諦過失以就世俗說有愛苦畢竟不生出離涅槃寂靜微妙無顚倒故非就勝義說有愛苦畢竟不生本性寂滅名爲滅諦由此聖敎及所說理就眞性故說無擇滅無此過失
옳지 못한 또 다른 정리론자가 다음과 같은 힐난을 한다.
“무위는 실체로서 없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무위가 이미 없으면 세우는 주장도 성립하지 못하며 의지하는 것도 성립하지 못한다. 허공의 꽃이란 없기 때문에 유법(有法)은 성립하지 못하며, 주장ㆍ이유ㆍ비유 모두에 다 과실이 있다.”
017_0658_a_12L有餘不善正理論者作如是難所立宗言無爲無實無爲旣無所立不成所依不成空花無故有法不成立宗皆有過失
이 힐난은 옳지 않다. 인상[想]의 시설력(施設力)은 있으나 질량과 부피가 없는 사물을 허공이라 이름하고, 지혜의 택멸[簡擇]로 인하여 번뇌가 전혀 생기하지 않으면, 이를 비택멸(非擇滅)이라 하고, 또한 뭇 연(緣)이 없어 일체 법의 생기가 없는 것을 비택멸이라 이름한다. 일체 집착하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을 진여(眞如)라 이름한다. 인상의 시설력에 의해 가립을 용인하여, 허공 등은 그러므로 차별이 드러나지 않는다.
017_0658_a_16L此難不然想施設力於唯無有有質碍物立爲虛空由慧簡擇於唯無有煩惱生起立爲擇滅由闕衆緣於唯無有諸法生起立非擇滅於唯無有一切所執立爲眞如想施設力許有假立虛空等故不顯差別
017_0658_b_01L 모두 힘을 용인하여, 총괄적으로 유법(有法)을 세운다. 차별을 부정하면 공지(共知)하는 것이 다 없게 되니, 이를 종법(宗法)으로써 세운다. 저 생기하지 않는 것 등을 공지하는 것이 인법(因法)이다. 이 까닭으로 주장과 이유에 오류가 있지 않다. 허공의 꽃은 사실 있지 않아도 이 불기(不起) 등의 법은 유법으로서 속설이 없는 것을 속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우려는 목적과 내용이 성립하여 유법에는 불성의 오류가 없다.
017_0658_a_21L由共許力摠立有法差別遮遣非所共知立爲宗法彼不起等共所了知立爲因法是故無有立宗因過所說空花雖無有事是不起等法之有法無性性故由是能成所成立義故無有法不成過失
비바사 논사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 또한 옳지 않다. 택멸은 실체로서 있다. 도(道)에는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이며, 번뇌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법에는 이 사실이 있을 수 없다.”
017_0658_b_04L毘婆沙師復作是說此亦不然擇滅實有道所緣故違煩惱故非無實法可有是事
이 말은 오로지 이품(異品)만을 부정하고, 허공의 실유성(實有性)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으니 거듭 집착해서는 안 된다.
017_0658_b_07L此言唯有遮異品故如遮虛空實有性故前已具破不應重執
경량부의 논사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허공 등은 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면, 이렇게 비량에는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긴다. 만약 이 뜻이 질량과 부피가 있는 색 등이 무(無)를 실체로 삼는 것이라면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며, 그 무(無)를 변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가 실체로서 없다는 주장은 실체의 존재성에 대한 집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또한 부수적으로 실체의 비존재성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017_0658_b_08L經部諸師咸作是說立虛空等皆非實有如是比量立已成過若此義言有碍色等無性爲體非立已成辯彼無故所立宗言無爲無實此言正遣執實有性亦復傍遣執實無性
동엽부(銅鐷部) 논사가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틈 사이의 물질들을 허공이라 이름한다. 자기주장에서는 허공은 유위라 주장하기 때문이니, 그대가 무위를 부정하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긴다.”
017_0658_b_13L銅鍱部師復作是說諸閒隙色說名虛空我宗立彼是有爲故汝遣無爲立已成過
유위의 자성은 앞서 부정한 것과 같은 오류가 생기기에 옳지 못하다. 비바사 논사와 독자부의 집착은 많은 부분이 같아 마땅히 그와 같이 논파해야 할 것이다.
017_0658_b_16L有爲自性如前已遣故亦不然毘婆沙師與犢子部所執多同應如彼破
상응(相應)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의보다 높은 승의는 없기에 진여는 일체법의 승의가 된다. 그러므로 승의의 입장에서 진여가 공하다는 말을 하면 이치라 할 수 있으나 진여에 실유(實有)가 없다는 말을 하면 이치라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출세간의 무분별지 및 후득청정세지(後得淸淨世智)가 무위(無爲)의 경계를 연하는 이것이 바른 이치인 것이다.”
017_0658_b_18L相應論師有作是說於勝義上更無勝義眞如卽是諸法勝義故就勝義說眞如空此言稱理而言眞如非實有者此不稱理云何出世無分別智及此後得淸淨世智緣無爲境是應正理
017_0658_c_01L진실한 이치가 마땅히 아니다. 세간의 지혜가 무위의 경계를 연하면 마땅히 바른 이치가 아니고, 이와 같이 지혜가 유위의 경계를 연해도 도리가 아니다. 진여가 실체에 집착하지 않으면 도리다. 이 실유성은 힐난을 이른다. 진여를 연하는 지혜는 진실한 출세간의 무분별지가 아니다.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유위이기 때문이다. 세간을 연한 지혜와 같다.
017_0658_c_01L實不應理如說世智緣無爲境不應正理如是此智緣有爲境亦不應理非執眞如實有應理此實有性難成立故緣眞如智非眞出世無分別智有所緣故及有爲故如世緣智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한다. ‘만수실리(曼殊室利)여, 지혜의 눈으로써 무엇을 보는가?’ 답한다. ‘지혜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또한 ‘무엇을 승의제라고 말하는가?’ 답한다. ‘여기서 지혜도 오히려 작용하지 않는데 하물며 여러 명자(名字)랴.’ 또한 ‘범지(梵志)여, 여래의 보리는 능히 현관(現觀)하지 못한다.’”
017_0658_c_05L是故經言曼殊室利慧眼何見答言慧眼都無所見又說云何名勝義諦答言此中智尚不行況諸名字又說梵志如來菩提非能現觀
계경에서 말한다. “‘만수실리여, 무엇이 진리를 보는 것인가?’ 답한다. ‘여기서는 법으로서 보고 기억하는 것은 없다.’” 이들의 여러 계경에서는 무분별지를 현관하는 것 및 진여를 연(緣)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017_0658_c_09L又契經言曼殊室利云何見諦答言此中無法可見憶持此等諸契經者不應許此無分別智是能現觀及緣眞如
진여는 진실한 승의가 아니다. 진여에는 소연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색(色) 등과 같다. 또 그대는 “승의 위에 다시 승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은 말이 만약 그 위에 공이 없는 까닭으로 공이라 이름한다. 비단옷 위에 다시 비단 옷이 없는 것은 소나 양치는 사람 등도 공지(共知)한다. 그것도 마땅히 진리를 보는 자라고 이름해야 한다.
017_0658_c_12L又彼眞如非眞勝義是所緣故猶如色等又汝所說於勝義上更無勝義如是等言若於此上空無此故說名爲空諸衣絹上更無衣絹牧羊人等亦共了知彼亦應名見眞理者
또 악견(惡見)들을 대치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공이라 한다. 승의 위에 다시 승의가 있다는 이러한 악견은 일찍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정하여 이와 같이 공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017_0658_c_17L又爲對治諸惡見故說如是空於勝義上更有勝義此類惡見曾未有故不應遮彼說如是空
또 그 진여는 실유성(實有性)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량(比量)의 이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래가 생사 및 열반을 보지 않는 것은 바르게 이해하고 알기에 전도를 일으키는 번뇌가 있지 않은 것이나, 본성은 궁극에는 무생(無生)을 자성으로 한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의 본성은 궁극에는 정지(正知)도 아니고, 부정지(不正知)도 아니다.
017_0658_c_20L又彼眞如非實有性違如前說比量理故如說如來不見生死及以涅槃已正了知非有顚倒所起煩本性畢竟無生自性如是正知本性畢竟非是正知非不正知
017_0659_a_01L 이 성스런 가르침에 의해, 진여만이 일체 분별의 영원한 사멸을 알기에 실유성이 아니며, 비유(非有)를 떠난 것도 아니기에, 진성진여를 변화의 형상으로 삼아 법신을 성취한다. 공을 관하여 대치도(對治道)를 얻고 일체 분별과 변계소집의 종자가 의지하는 이숙식(異熟識) 속에 있는 분별 등의 종자를 남김없이 영원히 단멸한다. 인연이 없기에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본성은 발생하지 않아 본성은 상주(常住)이다. 이것을 여래의 나투신 법신이라 이름한다.
017_0659_a_01L由此聖應知眞如唯是一切分別永滅實有性非離非有實性眞如轉依爲法身成就由得觀空眞對治道切分別遍計所執種子所依異熟識中分別等種無餘永斷因緣無故竟不生本性無生本性常住是名如來轉依法身
여러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으니, “만수실리여, 여래라는 것은 필경 본래부터 발생하는 것이 없는 말이다. 상주하여 발생하지 않는 법, 이것을 여래라 이름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만약 ‘진여가 언어를 떠났어도 이것이 실유다’라는 말을 하면 곧 외도가 자아를 명상(名想)으로 차별하여 진여라고 했던 것이 된다. 저 진여는 비록 실체로서 있으나 승의에서는 존재ㆍ비존재 등의 분별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59_a_08L如契經說曼殊室利如來者卽是畢竟本無生句常無生是名如來乃至廣說若言眞如雖離言說而是實有卽外道我名想差別說爲眞如如彼眞如雖是實有就勝義有非有等分別不成
아자(我者) 역시 그와 같고 그 또한 자아를 계탁한 것이다. 진여는 곧 실유(實有)ㆍ주변(周遍)ㆍ상주(常住)로서 업을 짓는 자와 받는 자이며 분별을 떠난 것이다. 언어가 작용하는 곳이 없고, 분별 각혜(覺慧)를 연하지 않아 분별을 떠났다고 한다. 그 가르침 중에 ‘언설을 행하지 않고 심의(心意)를 증득하지 않는 것을 자아라고 말한다.
017_0659_a_13L我亦如彼亦計我雖是實有周遍常住作者受者而離分別以非語言所行處故分別覺慧所不緣故名離分別彼敎中說言說不行心意不證故名爲我
아상(我相)도 이미 그러하니, 그래서 ‘진여를 연한 지혜는 능히 해탈을 얻지만 자아를 연한 지혜는 해탈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을 다시 하면 이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또한 언어는 없지만 실체로서의 속성은 있기 때문이니, 오로지 붕당에 집착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와 같이 비슷한 자아 및 진여의 실유(實有)ㆍ비존재[非有]를 믿을 수 없다.
017_0659_a_17L我相旣爾而復說言緣眞如智能得解脫非緣我智此有何別竝無言說有實性故唯執朋黨說如是言故我不能信受如是似我眞如實有非有
다시 모든 존재에 관한 자세한 쟁론은 번쇄한 문장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두겠다. 진실로 감로에 들어 이미 모두 분별하여 마쳤다.
017_0659_a_21L且止廣諍諸有厭怖廣文義者難受持入眞甘露已具分別
017_0659_b_01L다시 동류의 승(乘)과 열등한 승이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12처는 유위와 무위를 섭수되기에 반드시 자성이 있다. 고(苦) 등의 16성행(十六聖行)이 사성제(四聖諦)를 관하여 견수(見修)하고 두 방법을 정진 수습하여 잘 보고 닦아 일체의 삼계에 포함된 번뇌의 불꽃을 끊어 또한 삼계의 뭇 괴로움을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
017_0659_a_23L復有同類乘劣乘者作如是言十二處攝有爲定有自性以有苦等十六聖行觀四聖諦精勤修習見修二道能滅見修所斷一切三界所攝煩惱熾火令三界衆苦息故
만약 모든 법의 성공(性空)을 열어 보이지 못하면 누가 장차 이와 같이 과실을 버리고 누가 다시 이와 같이 공덕을 잘 닦을 수 있는가? 삼승(三乘)에는 자량과 근성(根性)과 승해(勝解)의 차별이 있으나, 성도(聖道)를 현관하려면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017_0659_b_05L若不開示諸法性誰當能捨如是過失誰復能修如是功德三乘雖有資糧根性勝解差現觀聖道應無差別
이와 같이 일체를 다 믿고,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에 세속의 이치에 의탁하여 방법을 차별하는 것이다. 만약 법무아성(法無我性)의 증득을 떠나 소지장(所知障)을 영원히 단절할 수 없다면 대사(大師)가 약간의 해탈을 이루어도 마땅히 해탈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해탈에는 차별이 없는가? 실유라는 이 말은 모두 다 해탈번뇌장(解脫煩惱障)이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017_0659_b_08L如是一切皆信受爲欲斷除煩惱障故依世俗彼道差別若離證入法無我性能永斷所知障故大師應成少分解爲不說言解脫解脫無差別耶實有此說皆同解脫煩惱障故作如是言
“일체종(一切種)에서는 아니다. 비유하면 털구멍과 그 틈새 허공은 속성은 같아도 차별이 없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승과(勝果)의 작용인 여의신통(如意神通)을 일으킬 수 없고, 증득한 것은 진실한 궁극적 경지는 아닌 것이 된다. 또한 부수적인 논의는 그만하고 정론(正論)을 변론해야 한다.
017_0659_b_13L非一切種譬如毛孔與其太虛空性雖同非無差別若不爾者應不能發勝果作用如意神通所證應非眞實究竟且止傍論應辯正論
관행을 닦는 자는 이미 우리 주장이 허공(虛空) 등을 계탁하여 공함을 깨닫고, 또 다른 주장에 의해 분별된 자성 그대로 사대부(士大夫)ㆍ극미(極微)ㆍ자재(自在)ㆍ시간ㆍ방위 등의 말이 공함을 장차 깨닫는다.”
017_0659_b_17L修觀行者如已悟入自宗所計虛空等空亦當悟入他宗所計自性士夫極微自在命等諸句義空
여기서 자성사부론자(自性士夫論者)는 이러한 힐난을 한다.
“우리 주장은 삼계(三界)의 일체는 모두 공화(空華)와 비슷하게 전변하니, 허공의 꽃은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에 의래 동법의 비유를 이루어, 세운 주장과 상위되기 때문이다.”
017_0659_b_20L此中自性士夫論者作是難言我宗三界一切皆似空花轉變非無空花由彼是有同喩不成違所立故
017_0659_c_01L지금 힐문하겠다. 그대는 삼계의 일체는 다 허공의 꽃처럼 전변한다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삼계는 곧 허공의 꽃인가, 허공의 꽃이 아닌가? 삼계(三界)가 다 허공의 꽃이라면 자기주장 및 공지(共知)와 위배되기 때문에 도리가 아니어야 마땅하다. 삼계가 곧 공화가 아니라면 이것은 곧 동법의 비유가 없어지게 되어, 그대의 본래 주장에 과실이 성립한다.
017_0659_b_23L今應詰問汝言三界一切皆似空花轉變如是三界爲是空花爲非空花若言三界皆是空花違害自宗及共知故不應道理若言三界非是空花是則爲無同喩成就失汝本宗
만약 과실이 없다면 ‘허공의 꽃은 없다. 소리는 삼계에 자성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시 관찰해야 한다. 그대는 우리의 ‘허공의 꽃은 없다’는 말을 동법의 비유로 삼는가? ‘허공의 꽃’을 동법의 비유로 삼는가? 만약 그대는 우리의 ‘공화는 없다’라는 말을 이른바 동법의 비유로 삼는다면 이것은 잘못된 관찰이다. 우리는 ‘허공의 꽃’을 동법의 비유로 삼기 때문이다.
017_0659_c_05L若言不失空花無聲所說三界有性故者且應審察汝爲謂我說空花無爲同法喩爲說空花爲同法喩若汝謂我說空花無爲同法喩是惡審察我說空花爲同法喩故
만약 ‘허공의 꽃’이 동법의 비유라면, 즉 삼계가 아닌 것이다. 마땅히 ‘삼계가 있기에 그 또한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대 자신의 지혜가 경미함을 드러낸 것이다. 또 부정의 주체는 부정의 대상을 수승한 것으로 삼는다. 부정하는 내용을 부정하여 이미 공능이 바로 다 없어져서, 다시 차별을 부정하는 것을 표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힐난의 말은 앞에서 이미 다 해석하였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017_0659_c_10L若說空花爲同法喩非三界不應說言三界有故彼亦是此言顯汝自慧輕微又遮詮言止爲勝遮所遮已功能卽盡無能更表所遮差別如是難辭前已具釋故非智者心所信受
수론(數論) 논사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친현(親現)으로써 최승의 사대부를 세울 수 없으나 공지(共知)로써 변이(變異) 취합(聚合)하여 방편을 세운다. 저 실체로서의 실유(實有)란 이른바 모든 현사(顯事)가 존재의 속성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종류이기 때문이다. 일체 존재의 종류는 다 존재의 속성을 원인으로 함을 볼 수 있다.
017_0659_c_15L諸數論師復作是說我雖不能親現成立最勝士夫然就共知諸變異聚方便成立彼體實有謂諸顯事有性爲因有種類故諸有種類一切皆見有性爲因
017_0660_a_01L 마치 향나무 조각 등과 같이, 현사는 이미 종류가 있기에 유성(有性)을 원인으로 한다. 이와 같이 현사에는 능히 받는 자가 있고, 받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받는 작용마다 다 받는 자가 있음을 본다. 마치 바라문이 받는 음식처럼, 현사(顯事)는 이미 받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받는 자가 있다. 앞에서 말한 비량(比量)은 다시 적량(敵量)에 위배되는 것이다.”
017_0659_c_20L如檀片等顯事旣是有種類故有性爲因如是顯事有能受者所受用故諸所受用一切皆見有能受者如婆羅門所受飮食顯事旣是所受用故有能受者前說比量便爲敵量之所違害
이것은 세속에서 만약 총상(摠相)으로써 현사(顯事)를 세워 유성(有性)을 원인으로 삼아 차별을 변론하지 않으면 다시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만약 현사를 세워 즐거움 등을 원인으로 세우면 곧 동법의 비유가 없어 이유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즐거움 등의 종류는 함께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비량으로서 이유를 세워 ‘4온(蘊)은 다 괴로움ㆍ즐거움ㆍ어리석음의 속성이 되며, 이것은 5온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마치 수온(受蘊)처럼’이라고 말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수온에 섭수되지 알아 동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60_a_02L此就世俗若以摠相立諸顯事有性爲因不辯差別便立已成若立顯事樂等爲因卽無同喩因亦不成樂等種類非共許故若以比量成立因言四薀皆是苦樂癡性是薀性故如受薀者此所說癡非受薀攝同喩不成
또 그대의 ‘사대부’가 여러 체상(體相)에 편재하는 적취의 뜻이 있으면 곧, 온(蘊)의 뜻이다. 이것에 의해 사대부의 원인은 부정인을 이룬다. 또 그대의 ‘즐거움’ 등은 각각 의미가 달라 능히 낱낱의 주장을 세울 수 없으나, 이것이 온성(蘊性)이기 때문에, 이유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승의에서 실체로서 향나무 조각이 있어 유성(有性)을 원인으로 한다면 모든 이가 용인하는 것이 아니기에 동법의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60_a_08L又汝士夫多體相遍有積聚義卽是薀義由此士夫因成不定又汝樂等各別無能一一立宗是薀性故因義不成若就勝義有實檀片有性爲因非共許故同喩不成
또 세속에서 만약 총상에 의해 모든 현사(顯事)에 ‘받는 자가 있다’는 주장을 세우고 차별을 변론하지 않는다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세간이 공지하는 젓이고, ‘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사(顯事)에 실체로서 ‘받는 자’가 있고 상주(常住)하고 주변(周遍)하는 사(思)를 자성으로 세운다면 동법의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체상(體相)은 모든 바라문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승의에서 동법의 비유가 성립하지 않고, 받는 자와 음식 모두 실유성이라면 모두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비량은 인식수단과 위배됨이 있지 않다.
017_0660_a_12L又就世俗若以摠相立諸顯事有能受者不辯差別便立已成世所共知受者有故若立顯事有實受者常住周遍思爲自性同喩不成如是體相諸婆羅門非共許故若就勝義同喩不成受者飮食皆實有性非共許故前說比量無有敵量能爲違害
승론자(勝論者)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생명의 운동이나 감각기관의 변상(變相)에는 반드시 형상의 대상이 있다. 이것은 능상(能相)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횃불 등을 보는 것처럼.”
017_0660_a_19L諸勝論師復作是說諸入出息閉目開目令意行動根變等相定有所相是能相故如見煙等
017_0660_b_01L이 세속에서 만약 총상으로써 저 모든 모습에 반드시 형상의 대상이 있다고 주장하고 차별을 변론하지 않으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세속에서는 자아가 없지 않음을 공지(共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상에 형상의 대상인 자아[我]가 상주하고 편재하여 즐거움 등이 의지하는 곳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다시 동법의 비유가 안 돼, 세우는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설령 승의라도 그와 같은 비유는 불성(不成)의 오류가 있다. 시간ㆍ방위ㆍ공간 등은 이 도리로 인하여 또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017_0660_a_22L此就世俗若以摠相立彼諸相定有所相不辯差別便立已成世俗共知我非無故若立彼相有所相我常住周遍樂等所依便無同喩違所立故若就勝義亦有如是喩不成過空等由此道理亦應遮破
승론(勝論) 논사는 다시 이러한 힐난을 한다.
“극미와 의(意)를 우리는 무위(無爲)라 주장하고, 공을 세우는 이유인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란 이유는 스스로 성립 못하는 이유이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유위에 섭수되어 공하여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란 이유를 들면 다른 것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이기에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60_b_05L諸勝論師復作是難極微與意我立無爲成立空因不起故者自不成因若謂此二是有爲攝成立空因緣生故者他不成因應成少分悟入空性
만약 의(意)와 극미(極微)를 세속에서 곧 무위라 허락한다면 이것은 어려움이 생겨, 세우는 주장 또한 무위가 아닌 것이 된다. 지혜는 발생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색 등처럼. 이와 같은 ‘동이(同異)의 속성이기 때문에’ ‘생각[念]에 발생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라는 구절의 다른 원인도 장차 설하겠다. 또 모든 극미도 무위가 아니고 성립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실 따위처럼.
017_0660_b_09L若意極微世俗亦許是無爲者可有此難然所立意且非無爲智生因故猶如色等如是句義同異性故念生因故此等餘因如應當說又諸極微亦非無爲能成因故猶如縷等
이와 같이 저 나머지 ‘집합 및 분산(合離), 수(數)의 동이(同異)’ 등의 이유에 의해 상응하는 대로 장차 말하겠다. 흑은 두 극미가 이루는 거친 사물은 상주의 원인이 아니다. 이것은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병 등처럼. 이와 같이 그 나머지 ‘작용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괴멸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有)의 원인이기 때문에’라는 이들의 여러 원인에 의해 상응하는 데 따라 장차 말하겠다. 이 도리에 의하면 의(意)와 극미라는 다른 망집은 다 자성이 공하니, 이 까닭으로 말한 것과 같은 오류는 없다.
017_0660_b_14L如是其餘有合離數同異等因隨應當說或二極微所成麤物非常爲因是所成故猶如甁等如是其餘是所作故可滅壞故是有因故此等諸因隨應當說由此道理他所妄執意與極微皆自性空是故無有如所說過
위에서 말한 것처럼 수론(數論)ㆍ승론(勝論)의 구의(句義)를 여러 도리에 의해 부정하였다. 무의(無衣) 등의 논의에 집작한 말의 뜻도 상응하는 데 따라 공(空)을 세우겠다.
017_0660_b_20L如上所說遮破數論勝論句義種種道理無衣等論所執句義亦隨所應當立爲空
017_0660_c_01L이와 같이 여러 오류들을 제거하였다.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바른 비량(比量)의 힘에 의해 자타의 두 주장에 집착하는 무위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는다. 지혜의 사다리의 힘에 의해 이미 성공에 증입하였어도 뛰어난 수행력 없이는 마땅히 제거해야 할 소지장(所知障)을 영원히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정근으로써 뛰어난 수행을 익혀야 한다.
017_0660_b_23L如是遣除諸過難已修觀行者正比量力悟入自他二宗所執無爲性空雖聞所成智階梯力已入性空闕勝修力未能永斷所應除障故復精勤習勝修力
만약 여기에 일종(一種)이 있어 무위 형상[無爲相]의 유간(有間)이나 무간(無間)으로서 다시 현행(現行)해도 곧 이치대로 저 성(性)이 공함[空]을 관하여 저 상(相)을 제거하면 현현하지 알아 모든 법을 깨닫는다. 자성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성은 본디 공하여 성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형상이 실체를 이루지 못하면 곧 무상(無相)이 된다. 무상으로 인하여 원하는 것이 없게 되면 무원(無願)이 된다.
017_0660_c_05L若於此中隨有一種爲無爲相有閒無閒復現行時卽應如理觀彼性空遣除彼相令不顯現悟入諸法離自性故其性本空由性空故相不成實則是無相由無相故無所願求則是無願
상구(相垢)를 여의었기 때문에 원리(遠離)를 이루고, 또 원리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번뇌를 연해도 궁극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정을 이룬다. 원하는 것이 없다면 곧 무원(無願)이 된다. 그러므로 적정(寂靜)을 이룬다. 자성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생(無生)을 이룬다. 또 무생에 의해 무상(無常), 고(苦)가 있지 않고 또 무아(無我)도 없다. 또 발생이 없고, 무상(無相)에 의거하기 때문에 무상의 만행으로서 일체 법을 관하여 무이(無二)를 깨닫는다. 이 행상(行相)으로 인하여 꾸준히 익히고 뛰어난 수행력을 증장한다.
017_0660_c_10L由離相垢故成遠離又離性故緣彼煩惱畢竟不生故成寂靜自性無起故成無生由無生故則無無常亦無有苦亦無無我又無生故則無有相由無相故能以無相一相之行觀一切法悟入無二由此行相勤習勝修增長
이와 같이 뛰어난 수행력의 힘 때문에 추상(麤相)을 제거하고 현현하지 않아, 이로 인하여 작용하는 바의 행상이 없으니, 이른바 유위와 무위의 행상을 취한다. 장님이 추상을 떠나면, 청정한 눈을 얻어도 먼저 취한 형상들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서 비록 이미 무성(無性)을 얻었지만 공 등의 분별현행으로 인하여 공용이 있는 마음은 상속하여 머물고 있어, 아직 움직임이 없는 앎을 얻지 못한다
017_0660_c_16L如是勝修力故遣除麤相令不顯現由此令無所行行相謂取有爲無爲行相如眩瞖者離麤眩瞖眼得淸淨不見先來所取諸相雖於此中已得無住然由空等分別現行有功用心猶相續住未得無動
017_0661_a_01L. 공 등의 분별이 현행한다면 출세간의 무분별혜를 장애한다. 버리기 위하여 용맹정근하고 이와 같이 관찰하라. 승의에서는 그러므로 공성(空性)의 경지에 관한 공 등의 분별도 실유가 아니다. 연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환상 등과 같다.
017_0660_c_22L了知空等分別現行障碍出世無分別慧爲欲棄捨勇猛正勤如是觀察就勝義故空性境上空等分別亦非實有從緣生故猶如幻等
이와 같이 꾸준히 수행하고 다시 공 등의 분별을 잘 제거하면, 그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공(空)ㆍ불공(不空) 등의 두 치우친 견해를 멀리 여의고, 다시 그 공 등의 행상으로써 일체 법을 관하지 않는다.
017_0661_a_02L如是勤修復能除遣空等分別除遣彼故空不空等二邊遠離不更以其空等行相觀察諸法
마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바로 현행(現行)할 때, 그 색(色)에 대해 상주(常住)라 관하지 않고 무상(無常)이라 관하지 않는다. 즐거움이라 관하지 않고 또한 고(苦)라 관하지 않는다. 아(我)라 관하지 않고 또한 무아(無我)라고 관하지 않는다. 적정이라 관하지 않고 부적정(不寂靜)이라 관하지 않는다. 공이라 관하지 않고 또한 불공(不空)이라 관하지 않는다. 또한 상(相)이라 하지 않고 또한 무상(無相)이라 관하지 않는다. 원(願)이라 관하지 않고 또한 무원(無願)이라 관하지 않는다. 원리(遠離)라 관하지 않고 불원리(不遠離)라고도 관하지 않는다.
017_0661_a_05L如說般若波羅蜜多正現行時於其色上不觀爲常不爲無常不觀爲樂亦不爲苦不觀爲我亦非無我不觀寂靜非不寂靜不觀爲空亦非不空不觀爲相亦非無相不觀爲願亦非無願不觀遠離非不遠離
이와 같이 그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 일체의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과 그것들을 가지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과 보시바라밀다(布施波羅蜜多)ㆍ지계(持戒)바라밀다ㆍ인욕(忍辱)바라밀다ㆍ정진(精進)바라밀다ㆍ정려(靜慮)바라밀다ㆍ반야(般若)바라밀다와 염주(念住)ㆍ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ㆍ도지(道支)와 정려(靜慮)ㆍ무색(無色)의 등지(等至)ㆍ신통(神通)ㆍ십력(十力)ㆍ무외(無畏), 여러 무애해(無礙解)ㆍ불공불법(不共佛法), 여러 삼마지(三摩地)ㆍ다라니문(陀羅尼門), 일체지(一切智)에 관해 상주(常住)라 관하지 않고 또 무상(無常)이라 관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17_0661_a_11L如是於其受一切色所有眼布施持戒忍辱精進靜慮般若波羅蜜多念住正斷神足覺支道支靜慮無色等至神通十力無畏諸無碍解不共佛法諸三摩地陁羅尼門一切智上不觀爲常亦非無常乃至廣說
이미 능히 이와 같이 두 치우친 견해를 멀리 여의면 있는 곳에서 미묘한 행을 생장(生長)한다. 두 치우친 견해를 떠나면 중도(中道)의 이치이다. 위에서 말한 두 종류의 비량(比量)에 의하여 유위와 무위는 색(色)들이 없기 때문에 무색(無色)이라 이름한다. 무색이기 때문이고, 또한 유(有)ㆍ무(無) 등의 모든 분별이 있기 때문이니, 유ㆍ무의 법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상(相)을 표시할 수 있다.
017_0661_a_17L旣能如是遠離二邊卽能生長處中妙行此離二邊處中道理由如上說二種比量有爲無爲色類無故說名無色由無色故亦無有等諸分別故無有少法可相表示
017_0661_b_01L 그것은 이미 옳다고 말했고 이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지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성(無性)이기에 의지하는 대상과 의지하는 주체를 다 성취하지 않는다. 머물며 지탱하는 것이 있지 않은 것을 무주(無住)라 이름한다. 만약 유위상 흑은 무위상, 분별의 대상 혹은 분별의 대상이 아닌 것도, 흑은 분별의 주체도 분별의 주체가 아닌 이들의 형상은 각혜(覺慧)에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무현(無現)이라 이름한다.
017_0661_a_22L言彼旣然此亦如是故名無示由無性故所依能依皆不成就無有住持故名無住若有爲相或無爲相若所分別非所分別若能分別非能分別如是等相覺慧不行故名無現
일체의 유상무상(有相無相)을 멀리 여의고 이 경계의 식(識)은 모두 발생하지 않기에 무요별(無了別)이라 이름한다. 무색(無色)이고, 형태와 질량이 없고, 방위나 표시 등이 다 있지 않기 때문에 무표시이라 이름한다.
017_0661_b_04L遠離一切有相無相此境界識皆不生故名無了別由無色故無形質故方維幖幟皆無有故名無幖幟
세존께서 가섭파(迦葉波)에게 말씀하시기를, “상주(常住)는 첫 번째의 치우친 견해이며, 무상(無常)은 두 번째의 치우친 견해이다. 이 둘 중에 무색ㆍ무시(無示)ㆍ무주ㆍ무현을 요별하는 것이 없고 표식이 하는 것이 있지 않으면, 이것을 곧 있는 곳에서 미묘한 행을 한 것이라 이름한다. 진실로 일체의 법성을 현찰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나아가 유위는 첫 번째의 치우친 견해이고 무위는 치우친 두 번째 견해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017_0661_b_07L如世尊告迦葉波言常爲一邊無常第二此二中閒無色無示無住無現無所了別無有幖幟是則名爲處中妙行如實觀察一切法性廣說乃至有爲一邊無爲第二乃至廣說
또 부처님께서 가섭파에게 고하여 말씀하신 것과 같다.
“명(明)과 무명(無明)은 두 가지 다 있지 않고 두 차별이 없는 여기의 정지(正智)를 곧 있는 곳에서 미묘한 행을 하는 것이라 이름한다.”
017_0661_b_12L又如佛告迦葉波言明與無明皆無有二無二差別此中正智是則名爲處中妙行
이미 이와 같이 두 치우진 견해를 멀리 잘 여의었다면 능히 무이(無二)의 상(想) 위에 안주하여 생기하는 바의 분별에는 ‘두 상(想)’이 없다. 또한 능히 장애를 요지하여 출세간의 무분별지혜[無分別慧]로써 적정에 안주하여 설한 원인과 같은 것을 빨리 영원히 단멸한다. 그것을 영원히 단멸하였기 때문에 곧 그와 같은 분별은 없다.
017_0661_b_14L旣能如是遠離二邊於能安住無二想上所起分別無二之想亦能了知障碍出世無分別慧寂靜安住如所說因速能永斷永斷彼故卽無如是如是分別
말과 뜻이라는 두 말이 함께 다 끊겨 무동(無動)ㆍ무현(無現)ㆍ무상(無相)을 증득하여 모든 희론을 떠나, 모든 법의 실성(實性)은 그 소연(所緣)에 대해 무동임을 증득하여, 자상의 미묘한 지혜를 상속하여 비록 전도 없는 공관을 꾸준히 수습해도 공성을 끝내 증득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승의정려(勝義靜慮)라고 한다.
017_0661_b_18L語意二言竝皆止息證得無動無現無相離諸戲論諸法實性於其所緣無動證入自相妙智相續安住雖勤修習無倒空觀而於空性終不作證如是名爲勝義靜慮
017_0661_c_01L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정려를 닦아도 그러나 색(色)에 의하여 정려를 닦지는 않는다. 이와 같이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에 의착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에 의착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 의착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신분별(身分別)에 집착하고 안주(安住)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017_0661_b_23L如世尊言雖修靜慮然不依色而修靜慮如是不依受識而修靜慮不依眼意而修靜慮不依色法而修靜慮不依於身分別安住而修靜慮不依於心分別安住而修靜慮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허공ㆍ해ㆍ달ㆍ별자리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제석(帝釋)ㆍ범왕(梵王)ㆍ세주(世主)에 의타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의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이 세상ㆍ저 세상에 의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017_0661_c_04L不依於地與風而修靜慮不依於空星宿而修靜慮不依帝釋梵王世主而修靜慮不依欲界無色界而修靜慮不依此世及以他世而修靜慮
교만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이 머물며 정려를 닦는다. 아견(我見)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정(有情)ㆍ명자(命者)ㆍ양육(養育)ㆍ사대부(士大夫)ㆍ보특가라(補特伽羅) 및 의생마납바(意生摩納婆)의 견해에 의지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017_0661_c_08L不高不下證住無動而修靜慮不依我見而修靜慮如是不依有情命者養育士夫補特伽羅及以意生摩納婆見而修靜慮
단상(斷常)ㆍ유무(有無)의 견해에 의탁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번뇌를 다 없애는 것으로서 정려를 닦지 않는다. 정성리생(正性離生)에 들어가기 위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결과를 증득하기 위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궁극에는 출생하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정려를 닦지 않는다. 전도됨이 없는 공관을 수습하기 위하여 정려를 닦아도 그러나 공성(空性)을 증득하려고 정려를 닦지 않는다.
017_0661_c_12L不依斷無有見而修靜慮不爲漏盡而修靜慮不爲趣入正性離生而修靜慮不爲證果而修靜慮不爲畢竟無所造作而修靜慮雖爲修習無倒空觀而修靜慮然於空性不爲作證而修靜慮
상응(相應) 논사가 집착하여 반드시 있다고 집착하여 말한다.
“일체의 집착의 대상과 집착의 주체에 관한 분별을 더 멀리 여의면 이것은 출세간의 무분별지혜이다. 곧 거기에서 바로 견실한 상(想)을 일으켜 꾸준히 닦아 익힌다.”
017_0661_c_17L相應論者有定執言一切所取能取分別悉皆遠離是出世閒無分別智卽於其中起堅實想精勤修習
다른 어떤 사람이 이것에 대해 바르게 자세히 관찰하여 말한다.
“이와 같이 지혜가 발생할 때, 비록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분별이 없어도 그러나 무상(無相)의 경계에 따라 상(相)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성분별을 좆기 때문에, 이것은 유위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현량(現量)의 분별에 관한 깨달음이 같기에 무분별지가 성립하지 않는다.”
017_0661_c_20L有餘於此正審察言如是智生雖無如上所說分別而隨無相境相起故自性分別所隨逐故是有爲故如餘現量有分別覺不成出世無分別智
017_0662_a_01L또 그것은 계탁의 상을 여의고 말을 여읜 진여승의를 계탁한 것이다. 이것은 소연이기 때문에, 그 밖의 소연과 같이 승의가 성립하지 않는다. 곧 이 이유로 인하여 모두 가장 수승한 뜻은 아니다. 여러 경에 말씀하시길 “무엇을 여기서 승의제라고 이름하는가? 이른바 거기에서 지혜도 또한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만수실리여, 지혜의 눈이란 장차 무엇을 관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답하여 말하길 “만약 조금이라도 관하는 것이 있다면 곧 지혜의 눈이 아니다”라고 한다.
017_0662_a_01L又彼所離相離言眞如勝義是所緣故餘所緣不成勝義卽由此因俱非最如契經言云何此中名勝義諦於其中智亦不行又如問言曼殊室言慧眼者當何所觀答言若有少所觀者卽非慧眼
이 지혜는 무분별이기 때문에 유위를 관하지 않는다. 또한 다시 무위를 관할 수 없다. 모든 무위는 이 지혜의 눈과 상응하는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이치와 가르침으로 인하여 그들도 마땅히 이 고착된 집착을 단절해야 한다.
017_0662_a_07L由此慧眼無分別不觀有爲亦復不能觀於無爲諸無爲非此慧眼所應行故由此理彼亦應斷於此定執
다시 자세히 관찰하여 말하길 “승의제에서 이와 같은 출세간의 무분별지도 실유가 아니다. 연(緣)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허깨비 사대부와 같다. 방해ㆍ어려움ㆍ과실이 있기에 이치대로 관하여 장차 바로 제거하라. 다시 정근(精勤)하고 자세히 관찰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지 않겠다.
017_0662_a_10L復審察言勝義諦如是出世無分別智亦非實從緣生故猶如幻士於中所有妨難過失如理觀見當正遣除若智能斷如是定執此亦如彼有過失故復精勤審察開示
이러한 집착을 이미 멸제(滅除)했다면 상응하는 지혜는 무상(無相)의 경성(境性)에 대해 또한 행해(行解)가 없고 인연(因緣)이 없기 때문에 그밖에 지혜는 발생하지 않는다. 행해가 없기 때문에 이 까닭으로 진실행해(眞實行解)라 이름한다”고 한다.
017_0662_a_15L如是等執旣滅除於所應知無相境性亦無行解緣闕故餘智不生由無行解是故說名眞實行解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무엇을 이름하여 진실행해라 이름하는가? 이른바 일체 법에 대해 모두 행해(行解)가 없으면 곧 진실행해라고 한다.”
017_0662_a_18L如世尊言云何名爲眞實行解謂於諸法都無行解是則名爲眞實行解
또 경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다.
‘여래의 보리(菩提)를 모두 현관(現觀)할 수 없다.’ 또 묻는다. ‘만수실리여, 모든 진리를 보는 자는 장차 무엇을 보는가?’ 답한다. ‘적은 법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왜냐 하면 무릇 보이는 것이 있다면 다 허망한 것이다. 만약 보이는 것이 없다면 내지 진리를 보는 것[見諦]이라고 이름한다.’
017_0662_a_20L又如經言如來菩提都無現觀又如問言曼殊室利諸見諦者當何所見答言無有少法可見以者何凡有所見皆是虛妄若無所乃名見諦
017_0662_b_01L또 묻는다. ‘어떻게 정려(精麗)하여 마땅히 현관(現觀)을 닦아야 하는가?’ 답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법에 사유분별하는 것이 있지 않음을 안다면 이와 같이 정근하여 마땅히 현관을 닦아야 한다.’ 다시 묻는다. ‘무엇이 이미 현관을 증득하는가?’ 답한다. ‘만약 능히 일체법은 다 평등성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답한다. ‘만약 일체의 법은 모두 평등성(平等性)임을 관찰한다.’ 다시 묻는다. ‘일체법의 평등성을 보는 것이 있는가?’ 답한다. ‘보는 것의 평등성은 없다. 만약 보이는 것이 있다면 이는 곧 불평등의 봄을 이룬다.’”
017_0662_b_01L又如問言云何精勤應修現觀答言若知無有少法思惟分如是精勤應修現觀復問云何已證現觀答言若能觀一切法皆平等復問有能見一切法平等性耶無能見平等性若有所見是則應成不平等見
진실행해(眞實行解)와 견제(見諦)와 현관(現觀)이란 모두 동일한 뜻이다. 관행을 닦는 자가 지금 심(心)ㆍ의(意)ㆍ식(識)ㆍ지(智)의 작음을 하지 않는 것을 정행무분별지혜(正行無分別智慧)라 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행하여 작용하는 것이 없으면 곧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등각(正等覺)의 진실한 수기를 얻는다.
017_0662_b_07L眞實行解見諦現觀同一義修觀行者爾時心意識智不說名正行無分別慧若能如是行無所行則得如來應正等覺眞實授
여러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세존이여, 보살은 어떻게 그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수행하여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의 진실한 수기를 얻습니까? 범지(梵志)여, 보살이 만약 이때 생을 행하지 않고, 소멸을 행하지 않고, 선을 행하지 않고, 불선을 행하지 않고, 세간을 행하지 않고, 출세간을 행하지 않고, 유루(有漏)를 행하지 않고, 무루를 행하지 않고, 유죄(有罪)를 행하지 않고, 무죄를 행하지 않고, 유위를 행하지 않고, 무위를 행하지 않고, 상응(相應) 및 불상응을 행하지 않고, 단멸(斷滅) 및 부단멸(不斷滅)을 행하지 않고,
017_0662_b_11L如契經言世尊菩薩云何修行於其無上正等菩提得諸如來應正等覺眞實授記梵志菩薩若於是時不行於生不行於滅不行於善不行不不行世閒不行出世不行有漏行無漏不行有罪不行無罪不行有不行無爲不行相應及不相應行於斷及以不斷
017_0662_c_01L 생사 및 열반을 행하지 않는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깨닫는 등의 행을 하지 않고, 보시 및 버림[棄捨]을 행하지 않는다. 계 및 율의(律儀)를 행하지 않고 인욕을 행하지 않고 정진을 행하지 않고 정려(靜慮)를 행하지 않고 등지(等持)를 행하지 않고 혜(慧)를 행하지 않고 해(解)를 행하지 않고, 지혜를 행하지 않고, 증득을 행하지 않고,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해도 행하는 것이 없다면 무상정등보리에서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의 진실한 수기(授記)를 얻을 것이다.”
017_0662_b_18L不行生死及以涅不行於見及聞不行於施及以棄捨不行於戒及以律儀不行於不行精進不行靜慮不行等持行於慧不行於解不行於智不行於菩薩如是行無所行於其無上正等菩提得諸如來應正等覺眞實授記
이와 같은 지혜의 작용을 성침묵(聖黙緣)이라 이름한다. 여러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37보리분법(菩提分法)에 대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실하게 개시(開示)하는 것을 설법이라 이름한다. 다시 이 법에 대해 몸으로써 증득해도 몸을 떠나 법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또한 법을 떠나서 몸이 있다고 관찰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관찰한다면 이른바 무이(無二)도 무이가 아님을 관찰한다. 그와 같이 관찰할 때에 관찰현량(觀察現量)의 지견(智見)에 떨어지지 않는다. 관찰하지 않기 때문에 성스런 침묵이라 이름한다.”
017_0662_c_02L如是慧行名聖默然如契經言於三十七菩提分法如佛所說如實開示是名說法復於是法雖以身證而不觀察離身有法亦不觀察離法有身如是觀察謂觀無二亦無不二如是觀時不隨觀察現量智見不觀察故名聖默然
이 이치와 가르침으로 인하여 자세히 관찰할 때는 일체의 유위ㆍ무위와 자성은 능히 마음이나 지혜나 분별이나 무분별의 경계를 자성으로 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알았다면 지혜[明慧]의 햇빛이 능히 일체 어리석음의 암흑을 제거할 것이다.
017_0662_c_09L由是理敎審觀察時一切有爲無爲自性無有能爲若心若慧若有分別若無分別境界自性如是知已明慧日光能除一切愚癡黑闇
모든 마음과 지혜의 경계 가 현현해도
지혜로운 자는 취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가 무분별을 행하여
행하는 것 없이 행하게 되네.
017_0662_c_13L諸心慧境現
智者由不取
慧行無分別
無所行而行
여기에 능히 모든 행의 종자가 모이고 또한 모든 행의 종자(種子)가 되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마음이라 한다. 능히 뛰어난 덕(德)을 지니고 흑은 저 지닌 것이 흐르거나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지혜라 이름한다. 마음과 지혜가 작용하는 것을 심혜(心慧)의 경계라 이름한다. 경지가 작용하는 것을 ‘차별’이라 이름한다.
017_0662_c_15L此中能集諸行種子或爲諸行種子所集故名爲心能持勝德或由彼持令不流散故名爲慧心慧所行名心慧境境地所行是名差別
017_0663_a_01L 마음의 경계는 곧 유위와 무위에 있는 모든 형상이고, 지혜의 경계는 곧 유위와 무위에 있는 공성이다. 여러 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무상(無相)에서는 분별혜(分別慧)가 끝내 전변(轉變)하지 않는다.” ‘현(現)’이란 이른바 현현한다는 것이다. 곧 마음과 지혜가 작용하는 것과 비슷한 경계의 속성과 형상이 현현한다는 뜻이다. ‘모든’이란 이른바 지(地) 등을 말하며 그 한 부류마다 총상 및 별상이 있다.
017_0662_c_19L心境卽是有爲無爲所有諸相慧境卽是有爲無爲所有空性如契經言無相分別慧終不轉謂顯現卽似心慧所行境界性相現義謂地等隨其一類或摠或別如是眼等及以色等隨其一類或摠或別
이와 같이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그 한 부류마다 총상 및 별상이 따른다. 이와 같이 염주(念住) 및 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ㆍ도지(道支)ㆍ바라밀다(波羅蜜多)ㆍ일체의 신통(神通)ㆍ십력(十力)ㆍ무외(無畏)ㆍ불공불법(不共佛法), 모든 삼마지(三摩地)ㆍ다라니문(陀羅尼門), 예류(預流)ㆍ일래(一來) 및 불환(不還)이나 혹은 아라한(阿羅漢)이 가진 도과(道果)도 그 같은 부류에 따라 총상 및 별상이 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일체지지(一切智智)에까지 이른다.
017_0663_a_02L如是色行與識隨其一類或摠或別如是念住及以正斷神足覺支道支波羅蜜多一切神通十力無畏不共佛法諸三摩地陁羅尼門預流一來及以不還若阿羅漢所有道果隨其一類或摠或別廣說乃至一切智智
일체법에 대해 능히 바르게 알며 전도성이 없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라고 이름한다. ‘인하여’[由]란 이른바 사상(捨相)의 인연을 말한다. ‘취착하지 않고’란 집착이 없고 견해가 없는 것이다. 즉, 이것은 각혜로써 계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취착하지 않고’라는 이유는 무엇을 증득하는 것인가?
017_0663_a_08L於一切法能正了知無顚倒性故名智者由者謂說捨相因緣言不取者無執無見卽是覺慧不計度義由不取因爲何所證
지혜가 무분별(無分別)을 행하여 행하는 것이 없이 행하는 것이, 곧 무분별지이다. 다시 영원히 일체의 분별을 여읜 각혜(覺慧)의 증익(增益)을 가설(假設)하여 ‘지혜’라고 이름하고, 영상(影像)이 없고 상(相)이 없고 언어가 없어 경계(境界)의 생기의 형상과 자성분별 또한 있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 이름한다.
017_0663_a_12L慧行無分別無所行而行慧者卽是無分別智雖復永離一切分別覺慧增益假名爲智以無影像無相無言境界起相自性分別亦無有故名無分別
머무는 자가 비록 없어도 다른 상태에 대해 가명(假名)을 건립이라 이름한다. ‘등불이 소멸한다’ ‘아라한(阿羅漢)이 사멸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각혜가 증익할 때 세속의 언설에 의하여 이 상속(相續)에 대해 무분별이라 이름한다. 분별지(分別智)를 유분별(有分別)이라 이름하는 것처럼. 여기서 의(意)가 지혜를 취해도 발생의 작용이 없는 것을 ‘행(行)’이라 이름한다. 이 지혜가 자타(自他)의 법성(法性)을 행할 때 일체종(一切種)의 형상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는 주체라 이름하지 않는다.
017_0663_a_16L雖無住者而就異位假名建立如言燈滅阿羅漢滅覺慧增益依俗言說於此相續名無分別如分別智名有分別此中意取智無生行說名爲行由此智行自他法性一切種相非所見故不名能見
즉, 보는 주체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진실한 봄이라 이름한다. 증득의 대상과 같기 때문이다. 보는 대상이 아닌 것이 없는 대상의 형상을 만들고 혹은 분별 혹은 무분별로서 진실한 봄을 이른다고 할 수 없다.
017_0663_a_21L卽非能見說名眞見如所證故非非所見作所見相或有分別或無分別眞見得成
017_0663_b_01L 진여가 만약 보는 대상의 속설이라면 마땅히 진여가 가히 볼 수 없는 속성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세속제에 의탁하여 평등의 견해가 있는 것을 진실한 봄이라 이름해도 마땅히 모든 볼 수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해(解)를 일으키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햇빛과 불꽃과 물과 같이. 일체의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진실이 아니다.
017_0663_a_23L眞如若是所見性者不應說爲非可見性雖依世俗有平等見說名眞見不應執此不平等見說名眞見諸可見者皆非眞實起解因故如陽焰水一切可見皆非眞實
진실이 만약 볼 수 있는 속성이라면 볼 수 있는 형상을 취하여 진실한 봄이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볼 수 없다면 마땅히 진여를 증견(證見)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보이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어찌 평등하다고 이름하는가? 또 지혜는 유위이며 진여는 무위의 속성이다. 평등하지 않다. 만약 본다면 마땅히 불평등의 견해를 이룬다. 또 모든 법성은 모두 보는 주체가 아니다. 보는 대상도 또한 마땅히 그러하다. 모두 무생으로써 자성을 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보지 않는 것을 가설하여 본다고 하나 불평등은 아니다.
017_0663_b_05L眞如若是可見性者可見相取不成眞見若非可見不應說言證見眞如見非可見豈名平等又智有爲眞如無爲性不平等若見應成不平等見又諸法性皆非能見見亦應爾俱以無生爲自性故如是非見假名爲見非不平等
또 일찰나에 일체법을 증명하여 모두 현관(現觀)이 없는 것을 진실한 현이라 이름한다. 마땅히 ‘자체를 오히려 비춘다는 힐난을 이루기 때문에 지혜는 응당 지혜의 진실한 속성을 증득할 수 없다”고 힐난해서는 안 된다. 두 종(種)은 다 볼 수 있는 경성(境性)은 아니다. 차별이 없기 때문에 동시에 다 증득해서는 안 된다. 만약 승의에서 대상의 모습과 비슷한 지혜는 본성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현관(現觀)이 없고 증득(證得)도 없다. 계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7_0663_b_11L又一剎那證一切法皆無現觀名眞現觀不應難言返照自體難成立故智應不證智之實性二種俱非可見境無差別故同時俱證若就勝義似境相智本性無生故無現觀亦無證得如契經言
“그대는 마땅히 현관(現觀)으로써 증득해서는 안 된다. 여래의 실체를 관하면 이것은 무위(無爲)로서 일체의 눈이 작용하는 바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범지여, 여래께서 보리의 자리에 안주하실 때 일체의 법은 다 무소득임을 증득하고 일체 허망전도에서 일어난 번뇌를 영원히 단멸한다.”
017_0663_b_17L汝不應以現觀證得觀於如來體是無爲出過一切眼所行故如是梵志如來安坐菩提座時證一切法皆無所得永斷一切虛妄顚倒所起煩惱
017_0663_c_01L이러한 경에 모두 다 따른다. 다시 부수적인 논의는 그치고 정론(正論)을 변론한다. 유복(遊履)하는 것을 작용이라 이름한다. 유복한 것이 없기 때문에 ‘작용하는 것이 없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행해(行解)가 없고 생기가 없는 것이 무분별혜의 뜻이다. 작용의 모습이 없는 것으로서 행을 삼기 때문이다. 즉, 작용하는 것이 없는 것을 행이라 한다. 이것은 곧 앞에서 꾸준히 노력하여 얻은 결과와 같은 것을 생략하여 말한 것이다.
017_0663_b_21L如是等經悉皆隨順且止傍論應辯正論遊履名行無遊履故名無所行是無行解無生起義無分別慧以不行相而爲行故卽無所行說名爲行此則略說如前正勤所成立果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이와 같이 지혜로써 무분별을 행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 없이 행하니, 행이 곧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일체의 소연과 작의(作意)를 멀리 여의고 일체 법에서 모두 머무는 것이 없으니, 마치 허공과 같다. 일체의 변계소집과 분별을 버리어 담박하고 적연(寂然)하여 멸정(滅定)에 들어 모든 법성을 관하는 것과 같다.
017_0663_c_03L修觀行者如是慧行無分別故不行而行行卽不行遠離一切所緣作意於一切法都無所住猶如虛空棄捨一切遍計分別淡泊寂然如入滅定觀諸法性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불가사의하고 요별할 수 없다. 무이(無二)ㆍ무장(無藏)ㆍ무상(無相)ㆍ무견(無見)으로서 표시할 수 없다. 무생ㆍ무멸하여 생기가 다하여 담박하고 적연하여 차별이 있지 않고 무상(無相)ㆍ무영(無影)하여 모든 티끌을 여의어 일체 각혜언어(覺慧言語)의 경계의 도를 초월한다.
017_0663_c_07L諸佛法身不可思議不可了別無二無藏無相無見不可表示無生無滅無有起盡淡泊寂然無有差別無相無影離諸瑕穢超過一切覺慧語言境界道路
이와 같이 관해도 보는 것이 없다. 보는 것 없이 본다. 보는 것이 곧 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묘한 견해에 포함되기 때문에 능히 바른 헤아릴 수 없는 복취(福聚)를 증장하여 능히 치우침이 없는 미묘한 낙과(樂果)에 감응하고 청정한 한 맛으로서 능히 다른 괴로움을 소멸하여 약수왕(藥樹王)과 같이 일체를 바르게 구원하는 요익(饒益)을 얻는다.
017_0663_c_11L雖如是觀而無所見不見而見見卽不見如是妙見所攝受故能正增長無量福聚能感無邊微妙樂果淸淨一味能滅他苦如藥樹王饒益一切正所求願
이와 같이 바르게 여래의 법신을 관하면 일제법의 유무(有無)의 모습을 보지 않기에 이름하여 정견(正見)이라 한다. 일체 변계소집과 허망분별을 그치므로 정사유(正思惟)라고 이름한다. 일체법을 증득하여 모든 희론을 떠나 일체 언어가 고요하게 다 그치므로 정어(正語)라고 한다.
017_0663_c_15L如是正觀如來法身不見諸法有無相故名爲正見以息一切遍計分別名正思惟由證諸法離諸戲論一切語言悉皆靜息名爲正語
일체법은 작용하는 속성이 없어 원인이 되는 몸ㆍ언어ㆍ생각의 세 가지 업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정업(正業)이라 한다. 일에 증감이 없으며 법성에 증감이 다 영원히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정명(正命)이라 한다. 일체법으로써 두 발기(發起)하는 것이 없고 조작하는 것이 있지 않는 용맹방편(勇猛方便)을 정정진(正精進)이라 이름한다.
017_0663_c_19L由一切法非所作性不造彼因身語意業名爲正業以一切法皆是無增無減法性所有增減皆永不生名爲正命以一切法皆無發起無有造作勇猛方便名正精進
017_0664_a_01L 일체의 법에 대해 궁극적으로 경성(境性)의 유무를 증득하지 않고 기억이 있지 않고 사유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정념(正念)이라 한다. 일체종(一切種)에 대해 일체 법을 취하지 않고 의지하여 머무는 것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정정(正定)이라 한다. 이와 같이 바로 관하여 능히 이와 같은 팔정도[八支聖道]를 닦는다. 이 뜻은 보살장(菩薩藏)의 곳곳에서 자세히 선설(宣說)한 것과 같다.
017_0664_a_01L以於諸法畢竟不證境性有無無有憶念無所思惟名爲正念以一切種不取諸法無所依住名爲正定如是正觀能修如此八支聖道此義廣如菩薩藏中處處宣說
이와 같이 바르게 관하면 다만 능히 팔정도를 닦을 수 있다. 또한 육바라밀을 간략히 설한다. 이것은 원만하여 비록 다른 행을 하지 않아도 성불할 수 있다. 그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일체 종상(一切種相)을 버리고 또한 일체 번뇌를 버리는 것을 이름하며 보시바라밀다[施波羅蜜多]라고 한다.
017_0664_a_05L如是正觀非但能修八支聖道亦能圓滿略說六種波羅蜜多雖無加行而有是事其義云何謂能棄捨一切種相及能棄捨一切煩惱是名爲施波羅蜜多
일체 소연과 작의(作意)가 그치어 얻는 것이 없으면 이를 이름하여 지계바라밀다[戒波羅蜜多]라고 한다. 모든 소연에 대해 참아내면 이것을 이름하여 인욕바라밀다[忍波羅蜜多]라고 이름한다. 취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일체행을 여의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진(精進)바라밀다라고 한다. 일체 작의(作意)는 다 현행(現行)하지 않아 모두 작용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정려(靜慮)바라밀다라 한다. 일체법에 대해 희론을 일으키지 않고 두 모습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이름하여 반야(般若)바라밀나라 한다. 이 뜻은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 등의 여리 곳에서 자세히 선설한 것과 같다.
017_0664_a_10L能息一切所緣作意修無所得是名爲戒波羅蜜多於諸所緣能不忍受是名爲忍波羅蜜多無取無捨離一切行是名精進波羅蜜多一切作意皆不現行都無所作名靜慮波羅蜜多於一切法不起戲遠離二相是名般若波羅蜜多義廣如『梵問經』等處處宣說
이와 같이 미묘한 머묾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문이 있다. 수많은 경전에서 세존께서 자세히 말씀하셨다.
“큰 뜻에는 이익이 있고 요익이 많으니, 지혜로운 사람들은 반드시 여실하게 알아야 하며, 방일을 떠나 꾸준히 닦아야 한다.”
017_0664_a_17L如是妙住有無量門無量經中世尊廣說有大義利多所饒益諸有智者應如實知離諸放逸當勤修學
大乘掌珍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