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僧法顯傳一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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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49_c_01L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
법현(法顯) 지음
이재창 번역
[동진(東晉)의 사문 법현(法顯)이 천축(天竺)에 유람한 일을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법현은 예전에 장안(長安)1)에 있으면서 율장(律藏)이 부족함을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홍시(弘始) 원년(399)2) 기해(己亥)에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嵬) 등과 인도[天竺]에 가서 계율의 책을 구해 오기로 뜻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처음 장안을 출발하여 농(隴)3)을 지나 건귀국(乾歸國)4)에 이르러 하안거[夏坐]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마치자 길을 재촉하여 욕단국(褥檀國)5)에 이르렀고, 다시 양루산(養樓山)6)을 지나 장액진(張掖鎭)7)에 이르렀는데 장액은 대란(大亂)이 일어나 도로가 불통이었다. 장액왕(張掖王:段業)8)은 은근하게 이들을 머무르게 하고 단월(檀越)이 되었다. 여기에서 지엄(智嚴)ㆍ혜간(慧簡)ㆍ승소(僧紹)ㆍ보운(寶雲)ㆍ승경(僧景) 등과 만나, 흔쾌히 뜻을 모으고 함께 하안거9)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마치자 다시금 나아가 돈황(燉煌)10)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가 약 80리, 남북이 40리나 되는 성(城)의 요새가 있었다.
여기서 일행은 함께 1개월 남짓 머무른 다음 법현 등 다섯 사람은 사신(使臣)들을 따라 먼저 출발하게 되어 다시 보운 등과 헤어지게 되었다. 돈황태수 이호(李暠)는 일행이 사하(沙河:고비사막)를 지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 주었다. 사하에는 악귀(惡鬼)와 열풍(熱風)이 많아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었으니,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가야 할 곳을 알 수 없었다. 오직 죽은 사람의 고골(枯骨)만이 표지가 될 뿐이었다.
17일 만에 약 1,500리를 가서 선선국(鄯鄯國)11)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은 지형이 험하고 척박하였으며 속인들의 의복은 전갈(氈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 중국 사람들의 옷과 마찬가지로 거칠었다. 이 나라의 왕은 불교를 믿었으며 승려는 4천여 명 정도였는데 모두 소승(小乘)을 배우고 있었다. 모든 나라의 승려는 물론 속인들도 인도의 율법을 행하고 있었는데 단지 세련됨과 조잡함에 차이가 있을 뿐이며 이곳뿐 아니라 서쪽에 걸쳐 있는 여러 나라들도 대개 이와 비슷하였다. 다만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지만 출가한 사람들은 모두 인도의 책을 익히고 인도의 말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서 1개월을 머문 후 다시 서북쪽으로 15일 동안 가다가 오이국(烏夷國)12)에 이르렀다. 여기에도 승려가 역시 4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으며, 예법을 따름에 있어 가지런하고 정연하여 중국[秦土]의 어떤 승려들도 이런 점에서 그 승려들에게 미칠 수가 없었다. 법현은 부행당공손(符行當公孫)의 경제적인 도움을 얻어 2개월 남짓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다시 보운 등과 합류하게 되었다. 오이국 사람들은 예의를 지킬 줄 모르고 손님을 맞이해도 매우 야박했으므로 지엄ㆍ혜간ㆍ혜외 등13)은 여행할 물자를 구하고자 결국 고창(高昌)14)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법현 등은 부공손(符公孫)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아 마침내 서남쪽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가는 도중에는 사는 사람들도 없어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니, 그 고생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견줄 데가 없었다. 이리하여 길을 떠난 지 한 달 하고 닷새 만에 우전(于闐)15)에 겨우 도착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풍요롭고 즐거웠으며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하였고, 모두 불법을 받들어 불법에 대한 기쁨이 서로 충만해 있었다. 승려는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었으며 모두 중식(衆食)16)을 하고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 앞에 작은 탑을 세워 놓았는데, 그중 제일 작은 것의 높이는 약 2장(丈) 가량 되어 보였고, 사방에 승방(僧房)을 지어 놓고 객승(客僧)에게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 것들도 제공하였다. 이 나라의 왕은 법현 등을 승가람(僧伽藍:사원)에 편안히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승가람의 이름은 구마제(瞿摩帝)로서 대승의 사찰이었다. 3천 명의 승려들은 건추(楗槌)17) 소리에 따라 공양을 하러 모여드는데 그들은 식당에 들어갈 때 위의(威儀)가 가지런하고 엄숙하여 차례로 앉는다. 그리고 모두 조용하여 발우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시중드는 자[淨人]에게 음식을 더 청하려고 부득이하게 상대를 부를 때에도 단지 손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달(慧達)은 먼저 갈차국(竭叉國)18)을 향해 떠났으나 법현 등은 행상(行像)을 보려고 3개월을 머물렀다. 그 나라에는 네 개의 큰 승가람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 4월 1일이 되자 성안의 도로들은 깨끗이 청소되고 거리는 장엄하게 꾸며졌다. 성문 위에는 갖가지 장식으로 꾸며진 큰 장막이 쳐지고, 그 아래에 왕과 왕후 그리고 채녀(婇女)들이 자리를 잡았다. 구마제 사원의 승려들은 대승을 배우고 있어서 왕이 공경하고 존중하는 바이기에 제일 먼저 행상(行像)을 하게 된다. 성에서 3,4리 떨어진 곳에 불상을 모시는, 네 바퀴로 된 수레를 만드니 높이가 3장(丈)이 넘었고 형상은 마치 칠보로 꾸민 움직이는 전당과 같았으며 비단으로 된 번(幡)과 천개(天蓋)를 매달았다. 불상을 그 수레 안에 세워 두 보살로 하여금 모시게 하였고 여러 천신(天神)들을 만들어 모시게 하였는데 모두 금과 은으로 조각하여 공중에 매달았다. 불상의 수레가 성문 100보 앞에 이르자 왕은 왕관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서 손에 꽃과 향을 들고 맨발로 성문에서 걸어 나와 불상을 맞이하여 이마를 부처님의 발에 대면서 절하고 꽃을 뿌리고 향을 살랐다. 불상이 성으로 들어올 때 문루(門樓) 위에 있던 왕비와 채녀들이 꽃을 뿌리자 그 꽃들은 나부끼며 밑으로 떨어졌다. 이와 같이 장엄하게 꾸며진 수레들은 저마다 각기 달랐는데, 한 승가람이 하루씩 행상을 했으므로 백월(白月)19) 1일에 시작해서 14일에 행상을 마쳤고 행상을 마치면 왕과 왕비는 궁으로 돌아갔다.
그 성 서쪽 7,8리 지점에 왕신사(王新寺)라는 승가람이 있었는데 그 절이 완성되기까지는 80년의 세월과 3대의 왕을 거쳤다고 한다. 높이가 25장(丈)이나 되며 조각을 아로새긴 뒤에 금ㆍ은으로 그 위를 덮고 갖가지 보물로써 탑을 단장한 후에 불당을 지어 미묘하고 호화롭게 장엄하였다. 서까래며 기둥 그리고 문과 창이 모두 금박으로 장식되었고, 따로 승방을 지어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장엄하고 질서정연하게 꾸몄는데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영동(嶺東) 여섯 나라20) 왕들은 저마다 소유하고 있던 값진 보물들을 대부분 여기에다 공양하여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적었다.
4월의 행상을 마치자 승소(僧韶)는 호족(胡族)의 도인을 따라 홀로 계빈국(罽賓國)으로 떠났고 법현 등21)은 자합국(子合國)22)을 향해 떠나 25일 만에 그 나라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의 왕은 불법에 정진하고 있었으며 나라 안에는 1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에서 15일을 머문 후 남쪽으로 4일 동안 가서 총령산맥(蔥嶺山脈)23)에 들어가 오휘국(於麾國)24)에 이르러 안거(安居)25)에 들어갔다.
안거가 끝나자마자 산행(山行)하여 25일 만에 갈차국(竭叉國)에 이르러 혜경 등과 다시 합류하게 되었다. 이 나라의 왕은 반차월사(般遮越師)26)를 열고 있었는데 반차월사란 중국말로 5년 만에 여는 대회(大會)라는 뜻이다. 이 대회 때에는 사방의 승려들을 초청하며 승려들은 구름같이 모여든다. 모인 다음에는 승려들이 앉을 곳을 매우 장엄하게 꾸미고 비단으로 만든 번개(幡蓋)를 매달며 금과 은으로 연꽃을 만들어 승려들이 앉는 자리 뒤에 붙이고 앉는 자리를 말끔히 해 놓는다. 왕과 신하들은 법도에 맞게 공양을 올리는데 1개월이나 2개월 또는 3개월씩 걸리며 주로 봄에 거행된다. 왕이 여는 그 대회가 끝나면 왕은 다시 신하들에게 권하여 공양거리를 준비하게 하고 공양을 올리게 하는데, 이것은 하루, 이틀, 사흘, 닷새 또는 이레씩 걸리기도 한다. 공양이 모두 끝나면 왕은 자기가 타는 말에 안장을 스스로 얹고 나라 안의 귀족ㆍ중신으로 하여금 그 말을 타게 한다.
또한 여러 가지 백첩(白氎)27)과 갖가지 진귀한 보배 그리고 승려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여러 군신과 함께 발원ㆍ보시하게 하고 보시가 끝나면 승려들로부터 그것을 다시 사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산지(山地)이고 추운 곳이어서 다른 곡식은 나지 않고 오직 보리만이 날 뿐이었다. 승려들의 수세(受歲)28) 때면 번번이 서리가 내리므로 왕은 매양 승려들에게 보리가 익은 연후에 수세하도록 했다. 이 나라에는 부처님께서 쓰시던 타호(唾壺:침 뱉는 그릇)가 있는데, 돌로 만들었으며 색깔은 부처님께서 쓰시던 발우(鉢盂)와 비슷하였다. 또한 이 나라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이 부처님의 치아를 모셔 놓기 위해 탑을 세워 놓았다. 이 나라에는 1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산 동쪽으로 속인들이 입는 옷은 중국[秦土]과 마찬가지로 투박했으나 이곳 사람들은 전갈(氈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승려들의 법용(法用)은 수승하나 구체적으로는 적을 수가 없다. 이 나라는 총령산맥 중에 있고 총령산맥에 이르기 전의 초목ㆍ과실과는 모두 다른데 오직 대나무와 석류 그리고 감자의 세 가지만이 중국 땅의 것과 같을 뿐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북인도[北天竺國]를 향해 떠난 지 1개월 만에 총령산맥을 넘을 수가 있었다. 총령은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눈이 덮여 있었고, 또한 독룡(毒龍)29)이 있어 만약 그의 뜻에 거슬리면 독풍(毒風)과 눈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을 날리므로 이를 만나면 만에 한 사람도 온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총령을 설산(雪山)이라고 불렀다.
총령을 지나면 북인도에 이르게 되는데, 북인도에 들어가자마자 타력(陀歷)30)이라 부르는 한 작은 나라가 있었다. 역시 많은 승려들이 있었고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옛날 한 나한31)이 있었는데 신통력으로 아주 솜씨 좋은 조각가를 도솔천(兜率天)에 올려 보내 미륵(彌勒)보살의 키와 형색과 모습 등을 관찰하게 하고, 아래로 내려온 다음에 나무로 미륵보살상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후 세 차례에 걸쳐 도솔천에 올라가 관찰한 연후에 그 보살상이 완성되었는데 높이가 8장(丈)이요, 결가부좌한 다리가 8척(尺)이나 되었다. 재일(齋日)이면 항상 광명을 나투곤 하여 여러 나라 왕들이 다투어 공양을 올렸는데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있어 여기서는 볼 수가 있다.
총령을 따라 다시 서남쪽으로 15일을 갔는데 그 길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산길이었으며 낭떠러지는 험준하기 짝이 없었다. 이 산은 오직 석벽으로 천 길이나 되고 칼처럼 서 있어 가까이 가면 어지럽고 나아가려면 발 디딜 곳을 찾을 수조차 없었으며 아래로는 신두하(新頭河:인더스강)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돌을 깎고 쪼아 통로를 만들고 의지할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무릇 7백 개를 건너야 했다. 사다리들을 건너면 느슨하게 매인 조교(弔橋)를 밟고 강을 건너게 되는데 강의 폭은 80보(步)가 채 못 되었다. 한(漢)나라의 장건(張騫)32)이나 감영(甘英)33)도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승려들은 법현에게 불법이 중국[東]으로 간 시발점을 아느냐고 묻곤 하였다. 법현은 물음에 대해 말하기를 “그곳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서로 전해지는 말로는 미륵보살상을 세운 직후에 어떤 인도 스님이 경ㆍ율을 가지고 이 강을 건너면서부터라고 했다.”고 했다. 그 보살상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3백여 년 후의 일이므로 헤아려 보면 중국 주(周)나라 평왕(平王) 때이다. 이로 보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이 보살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릇 미륵보살상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능히 석가를 계승하여 삼보를 널리 알리고 변방 사람들이 불법을 알게 했겠는가? 본래부터 부처님의 운이 열린 것이고 본래 사람의 힘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꿈34)도 이러한 데에 그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강을 건너 곧 오장국(烏長國)35)에 이르렀는데 그 오장국은 바로 북인도이다. 여기서는 모두 중인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인도는 소위 중국(中國)36)이라고 한다. 속인들의 의복이나 음식 또한 중인도와 같으며 불법이 대단히 성했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곳을 승가람(僧伽藍)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에는 약 5백의 승가람이 있었으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만약 객(客) 비구가 오면 사흘 동안은 극진히 공양하지만 사흘이 지나면 스스로 안주할 곳을 구하도록 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부처님께서 북인도에 오셨을 때, 이 나라에 이르셨는데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족적(足跡)37)을 남기셨다고 한다. 이 족적은 혹은 길기도 하고 혹은 짧기도 하니 그 길이는 사람들의 신심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역시 그러하다. 그 외에 쇄의석(曬衣石)38)이라든지 악룡(惡龍)을 제도하신 곳39)도 있는데, 이 또한 모두 현존한다. 쇄의석은 높이가 1장 4척, 폭이 2장으로 한쪽 변이 판판하다. 여기서 혜경ㆍ혜달ㆍ도정의 3인은 먼저 떠나 부처님 그림자[佛影]가 있는 나갈국(那竭國)40)으로 향하였고 법현 등은 이 나라에 머무르면서 하안거41)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끝내고 남쪽으로 내려와 숙가다국(宿呵多國)42)에 이르렀다. 이 나라 역시 불법이 성했는데 옛날 천제석(天帝釋)이 보살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매와 비둘기로 화현하여 쫓고 쫓기고 있었는데 보살이 자기 살을 잘라 비둘기를 살려 준43) 곳이 있다. 그 뒤에 석존께서 성도하시고 여러 제자들과 함께 유행(遊行)하셨을 때 “이곳은 본래 내가 살을 잘라 비둘기를 살려 준 곳이니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탑을 세우고 금ㆍ은으로 꾸몄다.
여기서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揵陀衛國)44)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아육왕(阿育王:아소카왕)의 아들 법익(法益)이 통치하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셨을 때, 또한 이 나라에서 당신의 눈[眼]을 남에게 보시하셨다고45) 한다. 그곳에도 역시 큰 탑이 세워지고 금ㆍ은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竺刹尸羅)46)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축찰시라란 중국어로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실 때 여기에서 머리를 남에게 보시하셨다고47) 한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동쪽으로 이틀쯤 가면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인48) 곳에 이르게 된다. 이 두 곳에도 큰 탑이 세워져 있었고 모두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여러 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다투어 공양을 올렸고 꽃을 뿌리고 등을 켜는 것이 계속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 앞의 두 탑과 함께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사대탑(四大塔)이라고 하였다.
건타위국에서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弗樓沙國)49)에 이르렀다. 옛날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를 데리고 이 나라에 유행(遊行)하실 적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열반[般泥洹]한 후 계니가(罽膩伽)50)라는 국왕이 나타나서 이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
훗날에 계니가왕이 세상에 나와 유람차 다니고 있을 때에 천제석(天帝釋)은 그러한 마음을 계발하고자 소를 치는 목동[小兒]으로 몸을 나투어 길가에서 탑을 쌓고 있었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
“불탑을 만들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매우 훌륭하구나.”
그리고 왕은 곧바로 소년이 만든 탑 위에 다시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40여 장이나 되었으며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무릇 경에서 본 탑묘(塔廟) 중에서 이 탑51)만큼 아름답게 장엄되고 위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염부제(閻浮提)52)의 탑은 오직 이 탑이 최상(最上)이라고 했다. 왕이 만든 탑이 완성되자 높이 3척 가량의 소탑(小塔)이 돌연 대탑 남쪽에 솟아났다고 했다.
부처님 발우[佛鉢]53)는 바로 이 나라에 있다. 옛날 월지(月氏)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이 나라로 쳐들어와 부처님 발우를 빼앗아 가려고 하였으나 이 나라를 정복하면서 불법을 독실하게 믿게 되었으므로 월지왕은 부처님 발우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모셔 가기 위해 공양을 올리게 되었다. 삼보 전에 공양을 마치자마자 큰 코끼리를 장엄하게 꾸미고 그 등에 부처님 발우를 안치하였다. 그러나 코끼리는 바로 땅에 엎어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다시 사륜마차를 만들고 그 위에 부처님 발우를 얹은 뒤에 여덟 마리의 코끼리로 하여금 함께 끌게 하였으나 역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왕은 부처님 발우와의 인연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면서 이곳에 탑과 승가람을 세우고 아울러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면서 여러 가지 공양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대략 7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정오가 되면 부처님 발우를 꺼내서 속인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공양을 올리고 그런 뒤에 점심을 먹었다. 해 질 무렵에 향을 사를 때도 그렇게 했다. 부처님 발우는 그 용량이 2두(斗) 정도로 색깔은 흑색이 짙은 잡색(雜色)이며 사제(四際)54)가 분명하고 두께는 2푼 정도로 매우 광택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속에 꽃을 조금만 넣어도 발우가 가득 차지만 부자는 많은 꽃으로 공양하려고 백천만 곡(斛)을 넣어도 결국 발우를 채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보운과 승경은 이곳에 머물러 부처님 발우에 공양을 올리고 곧 돌아갔다. 일행 중 혜경ㆍ혜달ㆍ도정은 먼저 나갈국으로 향하였는데 거기서 부처님 그림자[佛影]ㆍ부처님 치아[佛齒] 그리고 정골(頂骨)에 공양하였으나 혜경이 병에 걸려 도정이 남아서 간호하였고 혜달 혼자서 불루사국으로 돌아와 보운ㆍ승경 등과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혜달ㆍ보운ㆍ승경은 드디어 중국[秦土]으로 돌아갔고 혜경은 불발사(佛鉢寺)에 머무르다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법현은 혼자서 발길을 옮겨 부처님 정골(頂骨)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서쪽으로 16유연(由延)55)을 가서 나갈국 경계의 혜라성(醯羅城)56)에 이르렀다. 성안에는 부처님 정골을 모신 정사(精舍)가 있었는데 금박과 칠보로 골고루 꾸며져 있었다. 국왕은 정골을 공경하고 중히 여겼으며 사람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한 나머지 나라 안의 호성(豪姓) 8인을 골라 저마다 도장[印] 하나씩을 갖게 하고 이 도장으로 봉인(封印)하여 수호하게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함께 아침 일찍 정사에 이르러 각각 자기의 봉인을 보이고 그런 연후에 빗장을 열었다. 빗장을 열면 향즙(香汁)으로 손을 씻고 부처님 정골을 꺼내서 정사 밖의 고좌(高座) 위에 안치하였다. 그 고좌는 칠보의 둥근 받침대가 밑에 있고 위에는 유리종(琉璃鍾)을 덮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진주 구슬로 장식되어 있었다. 골(骨)은 황백색이며 사방[方圓]이 4촌(寸)이며 윗부분이 융기되어 있었다.
매일 해가 뜨면 정사의 사람이 고루(高樓)에 올라 큰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며 동발(銅鉢)을 두드렸다. 왕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정사에 예방하여 꽃과 향으로 공양을 올리고, 공양이 끝나면 왕과 신하들이 차례로 예배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동문(東門)으로 들어왔다가 서문으로 나갔는데 왕은 매일 이와 같이 공양 예배한 후에 나랏일을 다스렸다. 거사ㆍ장자(長者)들도 마찬가지로 먼저 공양을 올리고 난 뒤에 집안일을 돌봤다. 이런 일은 매일 되풀이되었으며, 이 일에 조금도 게을리하거나 지겨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공양이 모두 끝나면 정골은 정사에 돌려졌다. 그 안에는 칠보로 꾸며진 해탈탑(解脫塔)이 있었는데 열렸다 닫혔다 했다. 높이는 5척 정도인데 정골은 이 탑 안에 모셔졌다. 정사의 문 앞에는 매일 아침 늘 꽃과 향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무릇 공양을 올리려고 하는 사람은 여기서 여러 가지를 사곤 했다. 여러 나라의 왕들도 마찬가지로 늘 사람을 보내 공양하게 하였다. 이 정사가 있는 곳에서 사방 30보(步) 되는 지역만은 비록 다시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갈라진다 하더라도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북쪽으로 1유연을 가서 나갈국성(那竭國城)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원래 보살이 은전(銀錢)으로 오경화(五莖華)를 사서 정광불(定光佛)57)을 공양한 곳이다. 성안에는 또한 불치탑(佛齒塔)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공양은 부처님 정골에 행했던 방법과 같았다.
성의 동북쪽으로 1유연을 가면 한 계곡의 입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는 부처님의 석장(錫杖)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도 정사를 세워 공양했다. 그 석장은 우두전단(牛頭旃檀)58)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1장 6,7척 정도 되었고 목통(木筒)에 넣어져 있었는데 백천 인이 아무리 들어 올리려 하여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 계곡 입구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가면 부처님의 승가리(僧伽梨)59)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정사가 세워져 있었으며 사람들이 공양하고 있었다. 그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그 나라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그 옷을 꺼내 예배하고 공양을 올렸으며 그러자마자 하늘은 큰비를 내렸다.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연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산을 뚫어서 이곳에 당신의 그림자를 넣어 두셨다. 10여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금색 상호(相好)는 빛나며 뚜렷했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졌는데 그래도 그림자는 있는 것 같았다. 여러 곳의 왕들은 화가를 보내 이를 묘사하게 했으나 해낼 수는 없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전하기를 천불(千佛)은 모두 이곳에 그림자를 남기셨다고 했다.
부처님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4백 보 정도 가면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머리를 깎으시고, 손톱을 자르시며, 제자들과 함께 높이 7,8장(丈)의 탑을 세워 후세에 탑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던 곳이 있는데 그 탑은 현재에도 있다. 그 옆에는 절이 있었으며 절 안에는 7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곳에는 여러 나한과 벽지불(辟支佛)60)의 탑이 있었는데 그 수는 1천을 헤아렸다.
여기에서 겨울 석 달 동안 머문 법현 등 3인61)은 남쪽으로 나아가 소설산(小雪山)62)을 넘었다.
소설산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으로 덮여 있었고 산 북쪽의 음지(陰地) 에서 사납게 기승을 부르는 한풍(寒風)을 만나면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일행 중 혜경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입에서 흰 거품을 뿜으면서 법현에게 말하였다.
“나 역시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러니 빨리 갈 수 있을 때 가십시오. 우물쭈물하다가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63) 법현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비통해 했다.
“우리들은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죽어 버리고 마니 어인 일이오?”
그러고는 다시 힘을 내어 전진을 하자 드디어 고개를 넘고 남하하여 나이국(羅夷國)64)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3천 명에 가까운 승려가 있었는데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여기에 머물러 하안거65)를 하고 하안거가 끝나자 다시 남쪽으로 10일 동안 가다 발나국(跋那國)66)에 이르렀다. 여기에도 3천 명 정도의 승려가 있었는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3일 동안 가다가, 다시 신두하(新頭河:인더스강)를 건넜는데 강 양쪽은 모두 평지였다. 강을 건너자 비다국(毗茶國)67)이란 나라가 있었다. 이곳도 불법이 성했고 대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는데 중국 승려가 오는 것을 보자 매우 동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떻게 변지(邊地)의 사람들이 출가의 의의를 알고 불법을 구하고자 이토록 멀리 떠나오셨습니까?”
그러고는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법에 맞게 대접해 주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80유연 좀 못 가는 동안 대단히 많은 절들을 지나게 되었는데 승려 수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다. 이런 여러 곳을 지나 한 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 이름은 마두라(摩頭羅)68)라 했다. 또한 포나하(蒱那河)69)를 지났는데, 강변 좌우로 20개의 승가람이 있고 승려는 거의 3천 명이나 되어 불법이 매우 성했다. 무릇 사하(沙河) 서쪽의 인도 여러 나라는 국왕들이 모두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고 승려들을 공양하고 있었다. 왕이 승려들을 공양할 때에는 왕관을 벗고 여러 종친ㆍ신하들과 더불어 손수 음식을 대접했고 공양이 끝나면 융단을 땅에 깔고 승려들을 윗자리에 앉게 하고서 아랫자리에서 승려들을 향해 앉았는데 승려들 앞에서는 감히 상(床)에 앉지를 않았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 생존 시에 여러 왕이 부처님께 공양했던 예법과 방식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남쪽 지역을 중국(中國:중인도)이라 했다. 중국은 추위와 더위가 조화를 이루어 서리나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은 즐겁고 호적도 없으며 관법(官法)도 없었다. 다만 왕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지세(地稅)를 내며, 가고 싶은 사람은 자유로이 가고 살고 싶은 사람은 자유로이 사는 것이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참형(斬刑)을 사용하지 않았고, 죄가 있는 자는 죄과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리게 할 뿐이었다. 비록 거듭하여 악역(惡逆)의 모의를 하여도 그 오른손을 자르기만 했다. 왕의 시위(侍衛)나 좌우의 신하는 모두 공록(供祿)을 받았다. 나라 안 사람들은 모두 살생을 하지 않으며 음주도 하지 않고 마늘이나 파도 먹지 않았다. 오직 전다라(旃茶羅)70)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전다라는 악인이라고 불리며 일반 사람들과 따로 살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성시(城市)에 들어오면 판목(板木)을 쳐서 스스로 다른 신분의 사람임을 알리고 그것을 알고 피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돼지나 닭은 기르지 않으며 노예를 팔지도 않고 시중에는 도살자나 술집이 없었다. 물건의 교역에는 패치(貝齒)를 사용했는데 오직 전다라와 어부ㆍ사냥꾼만이 고기를 팔 뿐이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로 여러 국왕이나 장자ㆍ거사들은 승려들을 위하여 정사를 세우고 전택(田宅)ㆍ원포(園圃)ㆍ민호(民戶)ㆍ우독(牛犢) 등을 공급하고 철권(鐵券:옛날 공신에게 내렸던 표시물)에 기록해 두었다.71) 이런 것들은 훗날 왕이 왕에게 서로 전하여 감히 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단절되지 않았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방사(房舍)나 상욕(床蓐), 또는 음식이나 의복 등은 모두 부족함이 없었으니 이는 어느 곳이건 다 같았다. 승려들은 항상 공덕을 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 독경이나 좌선도 하고 있었다. 객승이 찾아오면 예전부터 있던 승려가 맞이하며 오히려 옷과 발우를 가져다주고 발 닦는 물과 발에 바르는 기름[塗足油]은 물론 비시장(非時漿)72)을 주었다. 잠시 쉰 다음 다시 법랍 햇수를 묻고 방사와 침구[臥具]를 주었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는 다 법도에 따른 것이다.
승려들이 머무는 곳에는 사리불탑(舍利弗塔)ㆍ목련탑(目連塔)ㆍ아난탑(阿難塔)ㆍ아비담탑(阿毘曇塔)ㆍ율경탑(律經塔)이 세워져 있었다. 안거 후 1개월이 되면 복을 바라는 여러 사람이 권화(勸化)하여 승려를 공양하고 비시장을 보시했다. 승려들은 큰 모임을 갖고 설법을 했는데, 설법이 끝나면 사리불탑을 공양하고 여러 꽃과 향을 바치며 밤새도록 등을 밝혔다. 그러면서 사리불을 만들어 기악인(伎樂人)으로 하여금 그가 대바라문이었을 때 부처님께로 와서 출가하기를 구하던 모습을 연출하게 하고, 그 밖에 대목련과 대가섭 또한 그렇게 했다. 비구니는 대부분 아난탑을 공양했다. 그것은 아난이 세존께 청하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미(沙彌)는 대부분 라운(羅云)73)을 공양한다. 아비담 논사들은 아비담탑을, 그리고 율사(律師)들은 율탑을 공양했다. 이와 같이 해마다 한 번씩 공양했는데 그날은 각기 달랐다. 마하연(摩訶衍)74)의 사람들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ㆍ문수사리(文殊師利)ㆍ관세음(觀世音) 등을 공양했다. 승려들의 수세(受歲)가 끝나면 장자ㆍ거사ㆍ바라문 등은 각각 여러 가지 옷과 사문(沙門)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와서 승려들에게 보시했다. 그러면 승려들은 그것을 받아서 승려들끼리 서로서로 보시했다. 부처님의 열반 이래 모든 성중(聖衆)들이 행하는 그 위의법칙(威儀法則)은 대대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신두강[新頭河]을 건너서 남인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남해에 이르는 4,5만 리는 모두 평탄하여 큰 산천이 없고 오직 하수(河水)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18유연을 가면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이름은 승가시국(僧伽施國)75)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76)에 올라가 3개월간 어머님을 위해 설법하고 내려오셨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실 때에 신통력으로 모든 제자들이 모르게 하셨는데 3개월이 되기 7일 전에 신족통(神足通)77)을 놓으시자 아나율(阿那律)78)이 천안(天眼)으로 멀리 계신 세존을 뵙고는 존자 대목련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도리천에 가서 세존에게 그 뜻을 여쭈어 보시오.”
이에 목련은 도리천으로 가서 부처님 발에 머리와 얼굴을 맞대고 예를 올리며 여쭤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7일 후에 염부제(閻浮提)로 내려갈 것이다.”
목련은 그 말씀을 듣고 내려왔다. 그 무렵 8국의 대왕들과 여러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뵙기를 갈망하여 이 나라에 모여들었는데, 세존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때 우발라(優鉢羅)79)비구니는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국왕이나 신하ㆍ백성들은 모두 부처님을 받들어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인데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먼저 뵐 수가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신족통으로 그녀를 전륜성왕(轉輪聖王)80)으로 변하게 하여 맨 앞에서 부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도리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실 때 신족통으로 세 개의 보배 계단[寶階]을 만들고 가운데로 난 일곱 개의 보배 계단 위로 내려오셨다. 범천왕(梵天王)은 또한 백은으로 된 계단[白銀階]을 만들고 우측에서 흰 불자(拂子)를 손에 쥐고 모시면서 내려왔고, 제석천(帝釋天)은 자금(紫金)으로 된 계단을 만들고 좌측에서 칠보개(七寶蓋)를 들고 모시면서 내려왔는데, 여러 천신들이 무수히 부처님을 따라 내려왔다. 부처님께서 땅 위에 내려오시자 세 계단은 모두 땅속에 파묻히고 일곱 계단만이 지상에 남아 있었다. 뒤에 아육왕(阿育王:아소카왕)이 그 끝을 알고 싶어 사람을 보내 파 보게 하였다. 그러나 황천에 이르러서도 그 끝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더욱 믿고 공경하여 세 계단이 묻힌 자리 위에 정사를 세우고 가운데로 난 칠보계 자리에 장륙(丈六) 불상을 세웠다.
정사 뒤에는 석주(石柱)를 세웠는데 높이가 20주(肘)81)나 되었다. 석주 위에는 사자(師子)를 만들고 석주 안 사방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석주는 투명하여 유리처럼 맑았다. 이곳은 일찍이 외도(外道)의 논사(論師)와 사문이 주처(住處)를 다툰 일이 있었다. 그때 사문은 논쟁 중 궁지에 몰리자 두 사람은 함께 서원을 세우며 말하기를 “만약 그곳이 사문이 머물 곳이라면 틀림없이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순간 주두(柱頭)의 사자가 크게 울어 그 영험함을 보이자 이에 외도는 크게 두려워하여 마음으로 굴복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도리천에서 천식(天食)을 3개월간이나 받으셨기 때문에 몸에서는 천향(天香)을 발하여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내려오시자마자 목욕을 하셨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욕실을 세웠다. 이곳은 바로 우발라비구니가 처음 부처님을 예배한 곳으로 지금은 탑이 세워져 있다. 부처님께서 생존 시에 머리털과 손톱을 깎으시던 곳에도 탑을 만들었으며, 과거 삼불(過去三佛)82)과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좌처(坐處)와 경행처(經行處), 그리고 여러 부처님이 형상을 나투신 곳에도 모두 탑을 세웠는데, 이들은 모두 현존하고 있다.
천제석과 범천왕이 부처님을 따라 내려온 곳에도 탑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비구ㆍ비구니가 약 1천 명가량 있었으며, 그들은 공양을 함께하고 대ㆍ소승을 가리지 않고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 흰 귀를 가진 한 마리의 용이 있었는데 승려들을 위하는 단월(檀越)이 되어 나라 안을 풍요롭게 하고, 시절에 맞게 비를 내려 여러 가지 재해가 없게 하며 승려들이 항상 평안(平安)을 얻게 했으니 승려들은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겼다. 그리하여 용을 위해 용사(龍舍)를 짓고 좌처(坐處)를 마련했다. 또한 용을 위해 복식(福食)을 베풀었으며 승려들은 매일 세 사람씩 골라 용사로 보내 음식을 공양했다. 매번 하안거가 끝날 때면 용은 그 형상을 변화시키고 두 귀 언저리가 흰 한 마리의 작은 뱀이 된다. 승려들이 이를 알고는 동(銅)쟁반에 소락(酥酪)을 가득 담아 놓고 용을 가운데 둔 채 상좌(上座)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안부를 묻듯 용을 향해 엎드린다. 그러면 뱀은 다시 용으로 변해 가버리곤 했는데 매년 한 번씩은 이와 같이 했다. 그 나라의 풍요로움과 백성들의 번성함은 견줄 바 없이 매우 영화로웠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게 되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
이 절 서북쪽 50유연 되는 곳에 대분사(大墳寺)라 하는 절이 있었는데 대분이란 악귀(惡鬼)의 이름이다. 부처님께서 본래 이 악귀를 제도하신 일이 있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곳에 정사를 세우고 그 정사를 아라한에게 보시하였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손을 씻으실 때 물방울이 떨어진 곳이 있는데,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곳은 청소를 잘했지만 물방울이 떨어진 자국은 없어지지 않고 언제나 남아 있다.
이곳에는 따로 불탑이 있는데, 이 불탑은 착한 귀신이 항상 깨끗이 청소를 해서 처음부터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떤 삿된 견해[邪見]를 가진 국왕이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청소를 잘한다면, 내가 여기에 다수의 장병을 머무르게 하고 많은 오물을 쌓으리라. 그렇게 하면 그대는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바로 큰 바람을 일으켜 그것들을 날려 보냈으며 그곳을 전과 다름없이 깨끗하게 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또 백 개의 작은 탑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수를 온종일 헤아려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알고 싶은 사람이 있어 하나의 탑 모서리에 한 사람씩 배치하여 계산하고 또 계산하여도 사람마다 많거나 적거나 하여 알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승가람이 있었는데 6,7백 명의 승려가 있었다. 그곳에는 벽지불이 공양을 한 곳이 있는데, 그 땅의 넓기는 수레바퀴만 했다. 다른 곳은 풀이 나 있으나 그곳만은 유독 풀이 나 있지 않으며, 옷을 말렸던 곳도 역시 풀이 나지 않고, 옷을 깔았던 자리도 지금까지 있다.
법현은 용정사(龍精舍)에 머물면서 하안거83)를 마치고 동남으로 7유연을 가서 계요이성(罽饒夷城)84)에 도착하였다. 이 성은 항수(恒水:갠지스강)에 접해 있었는데, 여기에는 두 개의 승가람이 있었고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성 서쪽으로 6,7리 되는 항수의 북쪽 기슭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신 곳이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과 육신은 물거품과 같다고 설하셨다고 한다. 이곳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항수를 건너 남쪽으로 3유연을 가서 가리(呵梨)라는 촌에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마을에서 설법하시고 경행(經行)하시며 좌선(坐禪)하셨다고 하는데 그곳에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10유연을 가서 사기대국(沙祇大國)85)에 이르렀다. 사기성 남문(南門)을 나가면 길 동쪽으로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실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꽂으신 곳이 있었다. 그 버드나무 가지는 자라서 높이가 7척에 이르자 더 이상 크거나 줄지 않았다. 여러 외도와 바라문들이 질투하여 잘라 버리거나 뽑아서 멀리 버리기도 하였지만 그 나무는 계속 자라나 본래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성중에는 네 분의 부처님께서 경행하고 앉았던 곳이 있었는데, 탑이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8유연을 가서 구살라국(拘薩羅國)의 사위성(舍衛城)86)에 도착하였다. 성내 인구는 얼마 되지 않아 모두 2백여 가구 남짓이었는데 곧 파사닉왕(波斯匿王)87)이 다스리던 곳이다. 대애도(大愛道)88)의 본래 정사가 있던 곳, 수달장자(須達長者)89)의 정벽(井壁), 그리고 앙굴마(鴦掘魔)90)가 득도 열반하고 소신(燒身)한 곳에 후세 사람이 탑을 세웠는데, 모두 다 이 성안에 있다. 여러 외도와 바라문이 질투심을 일으켜 이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하늘에서 곧 천둥 번개와 벼락을 쳐 결국 파괴할 수가 없었다.
성의 남문을 나와 1,200보 되는 길 서편에 장자 수달이 정사를 세웠는데, 이 정사는 동쪽을 향해 문호(門戶)가 열려 있고 문호의 양쪽에 두 개의 석주(石柱)가 있었다. 왼쪽 석주 위는 수레 모양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석주 위는 소[牛] 모양으로 만들었다. 정사 좌우의 지류(池流)는 청정했고 나무와 숲은 무성하며 갖가지 꽃들은 울연(蔚然)히 피어 있어 볼 만했는데 여기가 이른바 기원정사(祇洹精舍:祇園精舍)였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님을 위해 90일간 교설하실 때, 파사닉왕은 부처님을 뵙고자 우두전단(牛頭旃檀)을 깎아 불상을 만들고 부처님의 좌처(坐處)에 두었다. 그 후에 부처님께서 돌아오시고 정사에 들어가시자 그 상(像)은 곧 부처님을 피하여 밖에 나와 부처님을 마중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 앉으라. 내가 열반[般泥洹]한 후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해 법식(法式)이 되리라.”
그러자 상(像)은 곧 돌아가 제자리에 앉았다. 이 상은 모든 불상의 최초의 것으로 후세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20보 떨어진 남쪽 변의 작은 정사(精舍)로 이주하여 상(像)과 거처를 달리하셨다.
기원정사는 본래 7층이었는데, 여러 나라의 왕과 백성이 다투어 공양하고 비단 번개(幡蓋)를 매달고 꽃을 뿌리며 향을 사르고 계속 등을 밝혀 다음 날 낮에도 그치지를 않았다. 그런데 쥐가 등주(燈炷)를 갉아먹는 바람에 번개(幡蓋)에 불이 붙고 드디어 정사에도 옮겨 붙어 7중(重)이 모두 타 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국왕과 백성들은 모두 크게 슬퍼하며 전단상(栴檀像)이 다 타 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4,5일이 지난 뒤에 동쪽의 작은 정사의 문을 열자 홀연 본상(本像)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여 함께 정사를 고쳐 양중(兩重)으로 짓고 상을 제자리에 옮겼다.
법현과 도정은 처음으로 기원정사에 이르러 옛날 세존께서 이곳에 25년 간 머무르셨던 것을 생각했다. 자신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유력(遊歷)하는 동안 되돌아간 사람도 있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오늘 여기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음을 보고 창연(愴然)히 마음으로 비통해했다. 그러자 기원정사의 여러 승려들이 나와서 법현 등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대답했다.
“중국[漢]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승려들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변방의 나라 사람이 법을 구하려고 용하게 여기까지 오셨군요.”
그러면서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들의 여러 스승님들이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동안 아직 중국의 도인이 이곳까지 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정사의 서북쪽 4리 되는 곳에 득안(得眼)91)이라 불리는 숲이 있다. 본래 5백 인의 맹인들이 정사에 의지해서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모두 눈을 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맹인들은 기쁜 나머지 지팡이를 땅에 꽂고 부처님께 머리를 땅에 대고 예배하였다. 그 후 지팡이가 자라나서 커지자 세상 사람들은 이를 중하게 여겨 아무도 베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큰 숲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득안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정사의 여러 승려들 가운데는 점심을 먹고 나서 이 숲에 들어가 좌선하는 자가 많았다. 기원정사의 동북 6,7리에 비사거모(毗舍佉母)92)가 정사를 짓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했는데 이곳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원정사의 대원(大院)에는 각각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북쪽을 향해 있었다. 이 동산은 수달장자가 금전을 깔고 땅을 샀던 곳이다. 정사는 동산 중앙에 있으며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가장 오래 머무셨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고, 사람들을 제도하시며 경행하시고 앉으셨던 곳에는 모두 탑이 세워져 있으며 이름자[名字]가 붙어 있었다. 또한 손타리(孫陀利)93)를 죽여 부처님을 비방했던 곳도 있었다.
기원의 동문을 나와 북쪽으로 70보 되는 길 서편은 옛날에 부처님께서 96종의 외도들과 함께 논의하시던 곳이다. 이때 국왕ㆍ대신ㆍ거사ㆍ백성들은 모두 운집하여 논의를 들었다. 그때 여자 외도 전차마나(旃遮摩那)94)가 질투심을 일으켜 옷을 뭉쳐 배에 붙이고 마치 임신한 것처럼 꾸미고는 대중들의 모임에서 부처님께서 비법(非法)을 행하였다고 비방하였다. 이에 천제석이 흰 쥐로 변화하여 그 여자의 허리띠를 갉아서 끊어 버리자 배에 붙였던 옷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별안간 땅이 갈라지면서 그 여자는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것이다. 또 조달(調達)95)이 독이 묻은 손톱으로 부처님을 해치려 하다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곳에도 후세 사람은 모두 . 또한 논의를 하시던 곳에는 정사가 세워져 있었는데, 높이는 6장 정도 되고 내부에는 좌불상이 있었다. 그 길 동편에는 영복(影覆)이라고 하는 외도의 천사(天寺)가 있었는데 논의하던 곳의 정사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서 있었다. 이 천사의 높이 또한 6장 정도이다. 천사 이름을 영복이라 한 것은, 해가 서쪽에 있을 때는 세존 정사의 그림자가 외도의 천사에 비치지만, 해가 동쪽에 있을 때에는 외도 천사의 그림자는 북쪽에 비치고 부처님 정사에는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는 항상 사람을 보내서 그 천사를 지키며 청소하고 향을 사르게 했고 연등 공양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등불은 부처님의 정사 안에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라문은 크게 노하며 사문들이 자기들의 등불로 부처를 공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바라문은 밤이 되자 몰래 숨어서 그 사실을 살피고자 하였다. 그런데 천신(天神)이 나타나 등불을 들고 부처님 정사를 세 번 돌더니 공양을 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에 바라문은 부처님 신통력의 위대함을 알게 됐고 즉시 집을 버리고 불도에 귀의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근래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기원정사를 둘러싸고 98개의 승가람이 있는데 모두 승려들이 거처했으며 한 곳만 승려가 없었다. 중인도에는 96종의 외도가 있었는데 모두 현재ㆍ미래를 알며 각각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모두 걸식을 하는데 발우만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복을 구하여 넓은 길옆에 복덕사(福德舍)96)를 세운다. 그리하여 집ㆍ침상ㆍ침구류ㆍ음식을 여행자나 출가자, 또는 가고 오는 객들에게 제공하는데 기간마다 다를 뿐이었다. 조달 또한 무리와 함께 있으면서 항상 과거 삼불을 공양하면서도 오직 석가문불(釋迦文佛)은 공양하지 않았다.
사위성(舍衛城) 동남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유리왕(琉璃王)97)이 사이국(舍夷國)98)을 정벌하려고 하였을 때, 세존께서 길옆에 서 계시던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탑이 세워져 있었다.
성 서쪽 50리 되는 곳에 도유(都維)라 하는 읍(邑)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가섭불(迦葉佛)99)의 본생처(本生處)이고, 부자(父子)가 상견한 곳이자 열반한 곳인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가섭여래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있는 곳에도 대탑이 세워져 있었다.
사위성의 동남으로 12유연을 가다 나비가(那毘伽)라 불리는 읍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구루진불(拘樓秦佛)100)이 출생한 곳이고 부자가 상견한 곳이자 열반한 곳인데 역시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1유연 채 못 가면 한 읍에 이르는데, 이곳은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101)이 출생한 곳이고 부자가 상견한 곳이자 열반한 곳인데 역시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유연 채 못 가서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102)에 이르렀다. 이 성안에는 왕과 백성이 없고, 매우 황폐했으며, 승려들과 민호(民戶) 수십 가구만 있을 뿐이었다. 백정왕(白淨王)103)의 고궁 터에 태자모(太子母)104)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는 곧 태자가 흰 코끼리를 타고 어머니의 태내에 들어갈 때의 상이었다. 또한 태자가 성의 동문을 나와 병자를 보고 수레를 돌렸던 곳 등에도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아이(阿夷)105)가 태자의 상(相)을 보던 곳, 난타(難陀)와 더불어 코끼리를 타고 활을 쏘던 곳도 있었다. 이때 그 화살은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땅에 꽂혀 샘물이 솟아나게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손질하여 우물을 만들고 길 가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돌아와서 부왕을 만나셨던 곳, 5백 명의 석가족이 출가하여 우파리(優波離)106)를 향해 절을 하고 대지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했던 곳, 부처님께서 제천(諸天)을 위해 법을 설하셨을 때 사천왕(四天王)이 네 문을 지켜 부왕(父王)도 들어올 수 없었던 곳,107) 부처님께서 니구율수(尼拘律樹)108) 밑에서 동쪽을 향하고 앉으시자 대애도(大愛道)가 부처님께 승가리(僧伽梨)109)를 보시하던 곳 등이 있었는데 이 나무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유리왕(琉璃王)은 석가족을 모두 죽였지만, 석가족이 그에 앞서서 모두 수다원(須陀洹)110)을 얻었던 곳에도 탑이 세웠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의 동북쪽 몇 리 정도에 왕전(王田)이 있었는데, 이곳은 태자가 나무 아래 앉아서 밭 가는 농부를 보셨던 곳111)이다.
성의 동쪽 50리에 왕원(王園)이 있었는데 정원 이름을 논민(論民)112)이라했다. 부인이 못에 들어가 목욕하고 나와 북쪽 기슭으로 스무 걸음을 걷다가 (멈추고) 손을 들고 나뭇가지를 잡은 채 동쪽을 향해 태자를 낳았다. 태자는 땅에 떨어지자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두 용왕이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던 곳이다. 이 욕처(浴處)는 뒤에 우물로 만들었고, 부인이 목욕했던 못에서는 지금도 승려들이 늘 그 물을 마시고 있다.
부처님께서 항상 선정(禪定)에 들었던 곳이 네 군데였는데, 첫째는 성도한 곳이며, 둘째는 법륜(法輪)을 굴리셨던 곳이고, 셋째는 설법하고 논의하면서 외도를 항복시키신 곳이며, 넷째는 어머니를 위하여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오신 곳이었다. 그 밖에도 수시로 계셨던 곳이 있었다.
가유라위국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은 흩어지고 인적이 드물었는데 길 가기가 무서워 백상(白象)이나 사자도 함부로 다니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에서 동쪽으로 5유연을 가면 람막(藍莫)113)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은 부처님 사리의 일부분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탑을 세웠는데 그 이름이 곧 람막탑이었다. 탑 옆에는 못이 있고 이 못 속에는 용이 있었는데 항상 이 탑을 수호하며 주야로 공양하고 있었다. 아육왕이 이 세상에 나와 8탑을 파괴하고 8만 4천의 탑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7탑을 헐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 탑을 헐려고 하였는데, 그때 용이 몸을 드러내면서 아육왕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 여러 가지 공양구를 보여 주면서 왕에게 말하였다.
“만약 당신의 공양이 이보다 훌륭하다면 지키던 탑을 헐어도 좋소이다. 나는 당신과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육왕은 그 공양구가 이 세상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탑을 헐지 않고 돌아갔다. 탑 근처는 너무도 황폐해서 청소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코끼리 떼만이 코로 땅에 물을 뿌리고 여러 가지 꽃과 향을 가져다 탑에 공양하곤 했다. 여러 나라 도인114)이 이곳에 와서 탑을 예배하려고 하였으나 코끼리와 맞닥뜨리자 크게 겁을 먹고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겼다. 그러다 코끼리가 법답게 탑에 공양하는 것을 보자 이 원중(園中)에 탑을 공양할 승가람이 없어 코끼리에게 청소를 시키게 된 것을 스스로 매우 슬퍼했다. 그리하여 그 도인은 대계(大戒)115)를 버리고 사미(沙彌)로 되돌아가 스스로 초목을 뽑으면서 그 근처를 정비하고 정결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국왕에게 승려가 머물 곳을 만들도록 권하고 사주(寺主)가 되었다. 지금도 여기에는 승려가 살고 있다. 이는 근래의 일로서 그 후 대대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항상 사미가 사주가 되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유연을 가면 태자가 차닉(車匿)116)과 백마를 돌려보낸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4유연을 가면 탄탑(炭塔)117)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도 승가람이 있었다.
다시 동쪽으로 12유연을 가면 구이나갈성(拘夷那竭城)118)에 이른다. 성 북쪽 쌍수(雙樹) 사이, 희련하(希連河)119)변에서 세존께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열반하신 곳 및 수발(須跋)120)이 마지막으로 득도한 곳, 금관(金棺)에 넣어 7일 동안 세존을 공양한121) 곳, 금강역사(金剛力士)122)가 금강저(金剛杵)를 놓아 버린 곳, 여덟 왕들이 사리를 나눈123) 곳 등이 있었는데, 이곳에도 모두 탑이 세워졌고 승가람이 있었는데 지금도 모두 현존하고 있다. 이 성중에는 백성들이 매우 적어 약간의 승려와 민호가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12유연을 가다 여러 이차족(梨車族)124)들이 부처님의 열반을 뒤좇으려고 한 곳에 이르렀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지 않자 그들은 부처님을 흠모하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변화하여 크고 깊은 구덩이를 파서 건너올 수 없게 하시고 유품(遺品)으로 발우를 주고 신심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곳에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명제(銘題)가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유연을 가서 비사리국(毘舍離國)125)에 이르렀다. 비사리성 북쪽에는 대림중각정사(大林重閣精舍),126)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곳, 그리고 아난반신탑(阿難半身塔)127)이 있었다. 이 성 뒤에는 본래 암바라녀(菴婆羅女)128)의 집이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을 위해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성의 남쪽 3리 되는 곳 길 서편에 암바라녀가 동산을 부처님께 보시하여 부처님께서 주처로 하신 곳이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려고 여러 제자와 더불어 비사리성의 서문을 나와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도셨다. 그리고 비사리성을 뒤돌아보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곳이 내 마지막 소행처(所行處)이니라.”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 탑을 세웠다.
성의 서북쪽 3리 되는 곳에 방궁장(放弓仗)129)이라는 탑이 있는데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은 항수(恒水:갠지스강) 상류에 국왕이 있었는데, 왕의 소부인(小夫人)이 하나의 육태(肉胎)를 낳았다. 대부인(大夫人)은 이를 투기하면서 말했다.
“그대가 낳은 어린아이는 상서롭지 못한 징후가 보인다.”
그러고는 그 육태를 목함에 넣어 항수에 던져 버렸다. 하류에 있는 나라의 왕이 돌아보던 중 물 위로 떠내려오는 목함을 발견하고 열어 보았는데 단정하고 뛰어난 1천 명의 어린아이들이 있는지라 데려다 길렀다. 드디어 이들이 자라자 그들은 대단히 용감하고 강건해져서 정벌(征伐)에 나아가면 반드시 상대를 항복시키곤 했다. 결국 이들은 부왕의 나라를 치게 되었다. 왕이 크게 근심하고 있을 때 소부인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근심하고 계십니까?”
왕이 말했다.
“저쪽 나라 왕에게 비할 데 없이 용감하고 강건한 1천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들이 우리나라를 치러 온다고 해서 근심하고 있던 중이오.”
소부인은 말했다.
“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다만 성 동쪽에 높은 누(樓)를 만들고 적이 쳐들어오면, 저를 누 위에 올려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적군을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왕은 그와 같이 하였다. 드디어 적이 쳐들어오자 소부인은 누 위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내 아들이니라. 어째서 너희들은 반역을 하려는가?”
적들이 말했다.
“당신이 누군데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하십니까?”
소부인이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믿지 못하겠거든 모두 위를 보고 입을 벌려라.”
소부인이 두 손으로 양쪽 젖을 짜자 한쪽 젖에서 각각 5백 줄기로 흘러내려 1천 명 자식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에 적들은 그 여인이 자기들의 어머니인 것을 알고 즉시 무기[弓仗]를 던져 버렸다. 그러자 두 부왕은 함께 사유(思惟)하다 모두 벽지불이 되었고 이 두 벽지불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뒤에 세존이 성도하시고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옛날 내가 무기를 버렸던 곳이니라.”
후세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는 이곳에 탑을 세웠는데 그런 이유로 방궁장탑이라 하였다. 1천 명의 어린아이란 현겁 천불(賢劫千佛)130)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방궁장탑 옆에서 목숨을 마치셨는데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로부터 3개월 후에 열반(涅槃)에 들 것이다.”
이때 마왕은 아난의 정신을 어지럽게 해서 아난으로 하여금 부처님께 이 세상에 더 머무시도록 청하지 못하게 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4리쯤 가면 탑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백 년이 지나 비사리(毘舍離:Vaiśāli)의 비구가 계율을 잘못 행하여 십사(十事)의 증언131)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때 여러 나한과 계율을 지키는 비구 등 7백 명이 모여 다시 율장을 검교(檢校)132)하였다고 한다. 후세 사람이 이곳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4유연을 가서 5하(河)가 합류하는 곳133)에 이르렀다. 아난은 마갈국(摩竭國)에서 비사리로 가다가 열반에 들려고 하였다. 이때 제천(諸天)이 아사세(阿闍世)왕에게 고하였으므로 아사세왕은 즉시 스스로 가마에 올라타고 사중(士衆)을 이끌고 뒤쫓아 와 강 상류에 이르렀다. 비사리의 이차족(梨車族)들도 아난이 온다는 말을 듣고 또한 달려 나와 마중하였다. 쌍방이 다 강 상류에 이르렀다. 아난은 앞으로 나아가면 아사세왕이 한스러워할 것이고 뒤로 되돌아가면 이차왕이 원망할 것이라 생각하고 강 중앙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가 몸을 태워 열반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둘로 나누어 각각 반씩 양쪽 강변으로 나누었다.134) 두 왕궁은 각각 반신(半身)의 사리를 얻고 자기 나라에 돌아가 탑을 세웠다.
강을 건너 남쪽으로 1유연 내려가서 마갈제국(摩竭提國)의 파련불읍(巴連弗邑)135)에 이르렀다. 파련불읍은 아육왕이 다스리던 곳이다. 성중의 왕궁은 모두 귀신에게 짓게 한 것으로 돌을 쌓아 담과 문을 만들었으며, 조각이나 장식은 이 세상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아육왕의 동생은 나한도(羅漢道)를 깨치고136) 항상 기사굴산(耆闍崛山)137)에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왕은 동생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집에서 공양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동생은 산속에서 조용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동생에게 말하였다.
“내 청을 받아 주기만 하오. 그렇게 산이 좋다면 마땅히 그대를 위해 성 뒤에 산을 만들어 줄 것이오.”
그러고는 왕은 음식을 갖추어 여러 귀신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일은 모두 내 청을 받아 줘야겠소. 좌석이 없으니 각자 돌을 가지고 와 주시오.”
그리하여 그 다음 날 대귀신(大鬼神)들은 각각 커다란 돌을 가지고 와서 4,5보 간격으로 둘러앉았다. 왕은 귀신들에게 그 돌을 쌓아 큰 돌산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산 바닥에 다섯 개의 커다란 방석(方石)으로 길이 3장, 너비 2장, 높이 1장 남짓의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대승바라문(大乘婆羅門)의 아들로 나태사미(羅汰私迷)라는 사람이 이 성 안에 살았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지혜가 많고 도달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청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왕은 두터이 공경하며 사사(師事)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묻는 경우에도 결코 함께 나란히 앉지를 않았다. 왕이 설령 애경심(愛敬心)으로 손을 잡는다고 해도 손을 잡고 난 다음에 바라문은 바로 손을 씻는 것이었다. 나이는 50세가량으로 온 나라에서 존경과 숭앙을 받았다. 이 한 사람에 의뢰하여 불법을 널리 펴고 있었기 때문에 외도들도 불법의 승려들에게 박해를 가할 수 없었다.
아육왕탑 부근에 마하연승가람(摩訶衍僧伽藍:대승 사찰)이 세워져 있는데, 대단히 엄숙하고 수려했다. 또 소승의 절도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6,7백의 승려가 있었다. 그들의 위의(威儀)와 질서는 볼 만하다. 사방의 덕이 높은 사문이나 학문(學問)하는 사람으로 불법의 깊은 뜻과 학문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절에 왔다. 일찍이 바라문의 스승으로서 문수사리(文殊師利)라 일컫는 분도 이 승가람에 머무셨는데, 국내의 대덕 사문과 여러 대승의 비구들도 모두 존경하여 우러렀다. 무릇 중인도에서는 이 나라의 도성(都城)인 파련불읍이 제일 컸다. 성안 사람들은 부유하고 융성하며 다투어 인의(仁義)를 행했다. 매년 건묘월(建卯月)138)의 8일에는 항상 행상(行像)을 행했다. 사륜마차를 만들고 그 위에 대나무를 묶어 5층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승로(承攎)139)와 언극(椻戟)140)이 있으며 높이가 2장 정도로 그 모양은 흡사 탑과 같았다. 그 위를 백첩(白氎)으로 덮고 제천(諸天)의 형상을 그림으로 담았다. 다시 금은과 유리로 그 위를 장식하고, 비단으로 만든 번개(幡蓋)를 달며 네 모퉁이에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감실에는 모두 좌불(坐佛)이 있고 보살이 서서 시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륜마차는 20개가량 되는데, 수레마다 장식이 각각 달랐다. 행상일(行像日)이 되면 경내(境內)의 도속(道俗)은 모두 모여들어 기악(伎樂)을 부르고 연주하며 꽃과 향으로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 바라문이 와서 불상을 초청하면 불상은 차례차례 성내에 들어와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은 밤새껏 등을 켰고 기악의 공양을 했다. 그러한 것은 나라마다 모두 같았다.
이 나라의 장자와 거사는 각각 성안에 복덕의약사(福德醫藥舍)141)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인도에서 궁핍한 이, 고독한 이, 장애인과 일체의 병자들은 모두 이 복덕의약사에 와서 여러 가지 것을 공급받았다. 여기서 의사는 병을 진찰하고 음식과 탕약(湯藥)을 주어 안락하게 하고, 차도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아육왕은 7탑을 부수어 8만 4천의 탑을 만들었다. 그중 최초로 만든 대탑이 이 성의 남쪽 3리 남짓한 곳에 있었다. 이 탑 앞에는 부처님의 족적(足跡)이 있어 거기에 정사142)가 세워졌는데 문호[戶]의 북쪽이 탑을 향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석주(石柱)가 하나 있었는데, 둘레는 1장 4,5척, 높이는 3장 남짓 되었다. 상부에는 아육왕이 이 염부제에서 사방의 승려에게 보시하고 그것을 돈으로 다시 사들이기를 세 번 되풀이하였다는 명제(銘題)가 있었다. 반대로 탑의 북쪽 3,4백 보 되는 곳은 아육왕이 본래 니리성(泥梨城)을 지었던 곳이다. 니리성 안에는 석주가 있었는데, 그 높이 또한 3장 남짓이 되었다. 상부에는 사자(師子)가 조각되어 있었고 석주 위에는 명문(銘文)이 있었는데 니리성을 만든 인연과 연월일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9유연을 가서 일소고석산(一小孤石山)143)에 이르렀다. 산의 정상에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석실은 남쪽을 보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그 안에 앉으시고 천제석(天帝釋)이 하늘의 악사 반차(般遮)144)를 거느리고 거문고를 타면서 부처님을 즐겁게 해 드렸던 곳이다. 그때 제석은 42사(事)145)를 질문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일이 손가락으로 돌에 탑을 그렸는데, 지금도 그린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안에는 또한 승가람이 있었다.
이곳에서 서남으로 1유연을 가서 나라(那羅)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은 본래 사리불이 태어난 촌락이었다. 그 뒤에 사리불은 이곳에 돌아와서 열반에 들었고 그리하여 이곳에 탑이 세워졌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유연을 가서 왕사신성(王舍新城)146)에 이르렀는데 이 신성은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세운 성이었다. 성안에는 두 개의 승가람이 있었다. 성의 서문을 나와 3백 보 되는 곳에 아사세왕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분을 얻어 탑을 세웠는데 이 탑은 높고 크며 장엄하고 수려했다. 성을 나와 남쪽으로 4리를 가다 남쪽을 향해 골짜기로 들어가 오산(五山)147)의 뒤에 이르렀다. 오산의 둘레는 성곽처럼 되어 있는데, 이곳은 곧 병사왕(蓱沙王)148)의 구성(舊城)이었다. 성은 동서로 약 5, 6리, 남북으로 7, 8리나 되었다. 여기에 사리불과 목련이 처음으로 알비(頞鞞)149)를 본 곳, 니건자(尼犍子)150)가 불구덩이를 만들고 독으로 밥을 지어 부처님을 청한 곳, 아사세왕이 흑상(黑象)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해치려 하던 곳151) 등이 있다. 성의 동북방 굴곡된 곳에 기구(耆舊)152)가 암바라(菴婆羅)의 동산 안에 정사를 세우고, 부처님과 1,250명의 제자를 청하여 공양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성안은 비고 황폐하여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골짜기로 들어가 산을 끼고 동남쪽으로 15리를 올라가서 기사굴산에 이르렀다. 정상에 3리 못 미친 곳에 석굴이 있는데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본시 이곳에서 좌선하셨다고 했다. 그 서북으로 30보 되는 곳에 또 하나의 석굴이 있는데 아난이 그 속에서 좌선했다. 천마(天魔)153) 파순(波旬)은 수리로 변하여 이 굴 앞에 살면서 아난을 무섭게 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신통력[神足力]으로써 돌 사이로 손을 뻗쳐 아난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자 공포가 즉시 없어졌다고 한다. 이 사나운 새의 발자취와 손 구멍[手孔]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조취굴산(鵰鷲窟山)이라고 했다. 굴 앞에 4불(佛)의 좌처(坐處)가 있었고, 여러 나한들이 각각 좌선하던 석굴들도 있었는데 수백 곳이나 되었다. 부처님께서 석실(石室) 앞에 계시면서 동서로 경행(經行)하실 때 조달(調達)이 산의 북쪽 높고 험한 산길 사이에서 옆으로 돌을 떨어뜨려 부처님의 발가락을 상하게 했던 곳도 있었는데,154) 그 돌은 지금도 있다. 부처님의 설법당(說法堂)은 이미 허물어져 버렸고 벽돌로 쌓았던 터만이 남아 있었다.
이 산은 봉우리가 수려하고 단엄(端嚴)하며 오산(五山) 중 가장 높았다. 법현은 신성(新城)에서 꽃ㆍ향과 유등(油燈)을 사서 두 장로 비구에게 청하여 가져오게 해 기사굴산에 올라갔다. 법현은 꽃과 향을 공양하고 등화(燈火)를 계속 밝히며 탄식하고 비통해 하였다.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옛날에 이곳에 머무셨고 수능엄(首楞嚴)을 설하셨는데 법현은 살아서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유적처소(遺跡處所)만 볼 뿐이로다.”
그리하여 석굴 앞에서 수능엄경(首楞嚴經)을 송(誦)하고는 하룻밤을 머물고 다시 왕사신성으로 돌아갔다.
구성(舊城)을 나가 북쪽으로 3백여 보를 가면 길 서쪽에 가란타(迦蘭陀)155) 죽원정사(竹園精舍)가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데 승려들에 의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정사의 북쪽 2,3리 되는 곳에 시마사나(尸磨賒那)156)가 있었는데, 시마사나란 한(漢)나라 말로 ‘죽은 사람을 버린 묘’를 말한다.
남산(南山)을 돌아 서쪽으로 3백 보를 가서 빈파라굴(賓波羅窟)157)이라고 하는 석실 하나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식후에 항상 이곳에서 좌선하셨다고 했다. 다시 서쪽으로 5,6리를 가면 산의 북쪽 그늘진 곳에 차제굴(車帝窟)158)이라고 불리는 석실 하나가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 후 5백 아라한이 경전을 결집(結集)했던 곳이다. 그때에 세 개의 높은 자리를 마련하고 장엄하였는데, 사리불은 왼쪽에 있었고 목련은 오른쪽에 있었다.159) 모여든 아라한은 5백 명에서 한 사람이 부족했는데 대가섭을 상좌로 삼았다고 한다. 그때에 아난은 문 밖에만 있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160) 그곳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 산을 끼고 돌면 또한 여러 나한들이 좌선했던 석굴이 대단히 많았고 구성(舊城)을 나가 북동쪽으로 3리를 내려가면 조달의 석굴이 있었다. 이곳에서 50보 떨어진 곳에는 커다랗고 네모난 흑석굴(黑石窟)이 있었는데, 옛날 어떤 비구가 이 위에서 경행(經行)을 하면서 이 몸이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空)이라고 사유했다고 한다. 그 비구는 부정관(不淨觀)을 얻고 제 몸을 싫어하여 칼을 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또 세존께서 계(戒)를 제정하신 것을 생각하니 자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또 생각하기를 ‘다만 나는 삼독(三毒)의 적(賊)을 죽이려는 것이다’라 하고 즉시 칼로 자기의 목을 잘랐다. 처음 상처를 냈을 땐 수다원(須陀洹)을 얻었고, 반쯤 목을 잘랐을 땐 아나함(阿那含)161)을 얻었으며, 목이 다 잘렸을 때에는 아라한(阿羅漢)162)의 과위를 성취하여 열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4유연 가서 가야성(伽耶城)163)에 이르렀다. 이곳 역시 성안은 비고 황폐했다. 다시 남쪽으로 20리를 가서 보살께서 본시 6년간 고행하시던 곳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임목(林木)164)이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3리를 가다 부처님께서 물에 들어가 목욕하시고 하늘이 드리워 준 나뭇가지를 잡고 못에서 나오신 곳에 이르렀다. 다시 북으로 2리를 더 가면 미가(彌家)의 여자가 부처님께 우유죽을 바친 곳이 있었고 여기서 다시 북으로 2리를 더 가면 부처님께서 큰 나무 아래에 있던 돌 위에서 동쪽으로 앉으셔서 우유죽을 잡수시던 곳이 있었는데 그 나무와 돌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돌은 너비와 길이가 약 6척이고 높이는 약 2척가량 되었다.
중인도는 추위와 더위가 엇비슷하고 조화로워 수목은 수령이 수천 년에서 1만 년에 이른다. 이곳에서 동북으로 반 유연을 가서 한 석굴165)에 이르렀다. 보살께서 그 안에 들어가 결가부좌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성도한다면 마땅히 신통한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던 곳이다. 석벽 위에는 부처님의 그림자가 나타나 있었는데 길이는 3척 정도로 지금도 매우 뚜렷하다. 이때 천지가 크게 움직이더니 여러 천신(天神)이 공중에서 또렷하게 말했다.
“이곳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여러 부처님의 성도처가 아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반 유연을 조금 못 가면 패다수(貝多樹)166) 아래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야말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여러 부처님 성도처이다.”
제천은 이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앞장서서 이끌었다. 이렇게 이끌고 가자 보살은 일어나서 따라갔다. 나무에서 30보 떨어진 곳에서 하늘은 길상초(吉祥草)167)를 주었는데 보살은 그것을 받았다. 다시 15보를 가니 5백 마리의 푸른 참새가 날아와 보살 둘레를 세 바퀴 돌고 날아갔다. 보살은 앞서 가서 패다수 아래에 이르자 길상초를 깔고 동쪽으로 앉았다. 이때 마왕(魔王)이 보낸 세 옥녀(玉女)가 북쪽에서 와서 시험했고 마왕 자신은 남쪽으로부터 와서 시험했다.
그러나 보살께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자 마왕의 병사들은 흩어져 물러났고 세 옥녀는 노모(老母)로 변했다. 상술한 6년간 고행하던 곳에서 이곳까지 여러 곳에는 후세 사람이 모두 그 안에 탑을 세우고 상(像)을 세웠는데, 지금도 모두 남아 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7일 동안 나무를 보시면서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시던 곳, 부처님께서 패다수 아래에서 7일간 동서로 경행하던 곳, 여러 천신이 칠보당(七寶堂)을 짓고 부처님을 7일간 공양하던 곳, 문린맹룡(文鱗盲龍)168)이 7일간 부처님을 맴돌던 곳, 부처님께서 니구율수(尼拘律樹)169) 아래의 네모난 돌 위에서 동쪽으로 앉으셨을 때 범천(梵天)이 와서 부처님을 청하던 곳, 사천왕이 발우를 바치던 곳, 5백 명의 상인들이 초밀(麨蜜)을 부처님께 바치던 곳, 그리고 부처님께서 가섭(迦葉) 형제의 사도(師徒) 1천 명을 제도하시던 곳 등 이 모든 곳에 각각 탑이 세워져 있었다.
부처님께서 득도하신 곳에는 세 개의 승가람이 있었는데 모두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 승려와 민호(民戶)들도 공급이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이곳의 계율은 위의(威儀)ㆍ좌기(坐起)ㆍ입중(入衆)의 법170)에 있어 부처님 재세(在世) 시에 성중(聖衆)이 행했던 것과 같이 준엄하게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래 사대탑(四大塔)이 있던 곳은 서로 전승하여 단절되지 않았다. 사대탑이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 득도하신 곳, 법륜(法輪)을 굴리신 곳, 열반하신 곳이다.
아육왕이 옛날 어린아이 시절에 길에서 놀고 있을 때, 걸식하러 가는 가섭불(迦葉佛)171)과 마주쳤다. 어린아이는 환희하면서 한 줌의 흙을 집어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부처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경행하는 길 위에 물을 섞어 뿌리셨다. 이 과보(果報)로 인해 왕은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철륜(鐵輪)을 타고 염부제를 순행하다가 철위(鐵圍)172)의 두 산(山) 사이에 있는 지옥에서 죄인 다스리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신하들은 대답하였다.
“이것은 귀신의 왕 염라왕(閻羅王)173)이 죄인을 벌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귀신의 왕조차 능히 지옥을 만들어 죄인을 다스리고 있는데, 인간의 왕인 내가 어찌 지옥을 만들어 죄인을 징벌하지 않겠는가?’
그러고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위해 지옥의 주인이 되어 죄인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극악한 자만이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곧 신하들을 각처로 보내 널리 악인을 구하였다. 어느 연못가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키가 크고 장대하며, 피부색은 검고 머리는 황색이며, 눈은 파랗고, 다리로는 물고기를 잡고, 입으로는 금수(禽獸)를 불러 금수가 오자마자 사살(射殺)하여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다. 신하들은 이 사람을 왕에게 데리고 갔다. 왕은 그에게 은밀히 교지를 내렸다.
“너는 사방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갖가지 꽃과 과일 나무를 심고 좋은 욕지(浴池)를 만들고 장엄하게 꾸며 사람들로 하여금 갈망하여 우러러보게 하여라. 그리고 감옥에는 문호를 만들어 만약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체포하고 여러 가지 죄로 다스려 두 번 다시 나갈 수 없게 하여라. 설사 내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죄로 다스려 놓아 보내지 말지어다. 이제 나는 그대를 지옥의 주인으로 명하노라.”
그 후 어떤 비구가 걸식을 하다가 점차로 그 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옥졸이 그를 발견하고 즉시 그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다. 비구는 크게 겁을 먹고 잠시 중식(中食) 들기를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옥졸은 그를 절구 속에 넣고 공이로 찧었는데 시뻘건 피가 튀었다. 비구는 이를 보고 이 몸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空)하며 물거품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마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졸은 비구를 붙잡아 물이 끓는 가마솥에 넣었다. 그러나 비구의 마음은 기쁘기만 하였다. 그러자 불은 홀연히 꺼지고 끓던 물은 식으면서 그 안에 연꽃이 피고 비구는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옥졸은 즉시 왕에게로 가서 옥중의 괴이한 일을 말하고 왕에게 직접 가서 보기를 원했다. 왕은 말했다.
“나는 우선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은 갈 수 없다.”
그러나 옥졸은 말했다.
“이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왕이시여, 빨리 가 주십시오. 먼저 하시겠다고 하는 긴요한 일은 뒤로 미루어 주십시오.”
그러자 왕은 할 수 없이 옥졸을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비구는 왕을 위해 설법을 했고 이로써 왕은 신해(信解)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옥을 허물고 전에 했던 여러 가지 악업을 후회했다.
이로부터 왕은 두터이 삼보를 믿고 항상 패다수 아래에 가서 허물을 뉘우치고 자책(自責)하여 팔재계(八齋戒)를 받았다.
그러자 왕의 부인이 물었다.
“왕은 항상 어느 곳에 가십니까?”
신하들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항상 패다수 아래로 가십니다.”
부인은 왕이 없을 때를 틈타 사람을 보내 그 나무를 잘라 버렸다. 뒤에 왕이 와서 이것을 보고는 정신이 어지러워지면서 땅에 쓰러졌다. 신하들이 한참 동안 얼굴에 물을 뿌리자 겨우 소생하였다. 왕은 사방에 벽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고 1백 개의 단지에 든 우유를 그 나무뿌리에 부어 주고는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맹세하였다.
“만약 이 나무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나도 끝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맹세를 마치자 나무뿌리가 위로 자라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나무의 높이는 10장이 못 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3유연을 가면 계족산(鷄足山)174)이라는 산이 나오는데, 대가섭이 지금 이 산중에 있다고 했다. 산의 갈라진 틈 아래로 가섭이 들어갔는데, 들어간 곳에는 보통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밑으로 들어간 곳은 극히 멀고 곁으로 구멍이 나 있는데 가섭의 전신은 이 속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구멍 밖으로는 가섭이 본래 손을 씻었던 흙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머리가 아플 때에는 이 흙을 머리에 바르면 낫는다고 했다.
이 산중에는 옛날부터 여러 나한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에 터 잡고 있는 여러 나라 도인들은 해마다 이곳에 와서 가섭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가섭을 마음속 깊이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밤이 되면 나한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함께 논의하고 의문 나는 것이 풀리면 홀연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산에는 개암나무가 무성하고 또한 사자ㆍ호랑이ㆍ늑대가 많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법현은 되돌아와 파련불읍으로 향했다. 항수(恒水)를 따라 서쪽으로 10유연 내려가서 광야(曠野)175)라는 정사에 이르렀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지금도 승려가 있다.
다시 항수를 따라 서쪽으로 12유연을 가서 가시국(迦尸國)176)의 바라날성(波羅捺城)177)에 이르렀다. 이 성의 동북쪽으로 10리 정도 되는 곳에 선인녹야원정사(仙人鹿野苑精舍)178)가 있었다. 이 정원에는 원래 벽지불(辟支佛)이 머무르고 계셨으며, 항상 야생 사슴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세존께서 성도하시려 할 때에 제천이 공중에서 합창하였다.
“백정왕자(白淨王子)는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이로부터 7일 후에 마땅히 성불하실 것이다.”
벽지불은 이것을 듣고 즉시 열반[泥洹]에 드셨다. 그래서 이곳을 선인녹야원(仙人鹿野苑)이라고 한다. 세존께서 성도하시자 후세 사람은 이곳에 정사를 세웠다. 부처님께서는 구린(拘驎)179) 등 5인을 제도하시려고 하였으나 그들 5인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문 구담(瞿曇)은 본래 6년간 고행을 하면서 매일 1마(麻) 1미(米)를 먹었어도 도를 얻지 못했다. 하물며 인간으로 돌아가180) 신(身)ㆍ구(口)ㆍ의(意)를 제멋대로 하였으니 무슨 도가 있겠는가? 오늘 그가 오면 서로 삼가며 말을 주고받지 말도록 하세.”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곳에 이르자 5인은 모두 일어나 예를 다하였다고 한다.
다시 북쪽으로 60보를 가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동쪽으로 앉으시어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셔서 구린(拘驎) 등 5인을 제도하신 곳이 있었다. 그 북쪽 20보 되는 곳은 부처님께서 미륵(彌勒)을 위해 수기(授記)하셨던 곳이다. 그 남쪽 50보에는 예라발룡(翳羅鉢龍)181)이 언제쯤 이 용신(龍身)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부처님께 물었던 곳이 있었다.
이러한 곳에는 모두 탑이 세워졌으며 현존하고 있다. 그중에 두 승가람이 있는데 다 승려가 살고 있다.
녹야원(鹿野苑)의 정사로부터 서북으로 13유연을 가면 구섬미(拘4dk24彌)182)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의 정사는 구사라원(瞿師羅園)이라 하는데, 부처님께서 옛날에 머무셨던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많은 승려가 있어 소승을 배우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8유연을 가면 부처님께서 본시 여기에서 악귀(惡鬼)를 제도하셨던 곳과 항상 머무르고 경행하시면서 앉은 곳이 있는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승가람이 있었는데 약 1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2백 유연을 가면 달친(達嚫)183)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여기에는 과거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이 있었다. 그것은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들었고 전부 5중으로 되어 있었다. 제일 아래층은 코끼리의 형상으로 만들고 5백 칸의 석실(石室)이 있었다. 제2층은 사자의 형상으로 만들고 4백 칸의 석실이 있었고, 제3층은 말의 형상으로 만들고 3백 칸이 있었으며, 제4층은 소의 형상으로 만들고 2백 칸이 있었고, 제5층은 비둘기 형상으로 만들고 1백 칸으로 되어 있었다. 제일 꼭대기에는 샘이 있었는데, 거기서 솟는 샘물은 석실 앞을 통하여 방을 거쳐 흘렀다. 이와 같이 모든 석실 둘레를 돌며 구부러져 하층으로 흘러내렸다. 하층의 방을 둘러 가면서 흐르는 샘물은 문을 통해 흘러 나갔다. 모든 승려들의 방 곳곳에 돌을 뚫어서 창을 만들어 방 안을 밝게 하였으며, 실내는 밝게 빛나 전혀 어두운 곳이 없었다. 그 석실 네 귀퉁이 위로는 돌을 쪼아 계단을 만들어 그것을 밟고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사람들은 몸이 왜소해서 그 계단을 올라가 위층에 이를 수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한 걸음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하여 이 절을 파라월(波羅越)이라고 했는데 파라월이란 인도말로 비둘기란 뜻이다.
이 절에는 항상 나한이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토지는 거칠어 일반 사람은 살지 않았다. 이 산을 떠나 아주 먼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주민은 모두 사견(邪見)에 빠져 불법을 모를 뿐 아니라 사문, 바라문 및 이학(異學)들도 알지 못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항상 사람이 날아와서 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때로 여러 나라의 도인(道人)이 이 절로 예배하려고 오면 그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날지 않소? 내가 본 이 지방 도인들은 모두 날았소.”
그러면 도인은 방편(方便)으로 대답했다.
“나는 날개가 아직 나지 않았소.”
달친국(達嚫國)은 깊고 험하고 도로 사정이 매우 어려워 가고 싶어도 갈 길을 알 수가 없었다. 부득이 가려고 하는 자는 우선 전화(錢貨)를 그 나라 왕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왕은 그 후 사람을 보내 길을 가리켜 주게 하고 사람들이 오가게 했다. 법현은 결국 이 나라에 갈 수가 없었는데, 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듣고 여기에 그것을 적을 따름이다.
법현은 바라날국(波羅捺國)에서 동쪽으로 가 다시 파련불읍에 이르렀다. 법현은 본래 계율책을 구하고 있었으나 북인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구전(口傳)되어 오기 때문에 베낄 만한 책이 없었다. 그래서 멀리 찾아다니다 중인도에 이르러 이 마하연(摩訶衍)의 승가람에서 일부의 율을 얻었다. 그것은 마하승기중(摩訶僧祇衆)의 율184)로 부처님 재세 시에 최초의 대중(大衆)이 행한 것이다. 그 책은 기원정사에 전해졌다. 그 외의 18부185)도 각각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되어 전승됨[師資]이 있어서 대요(大要)는 다르지 않으나 세부에 들어가서는 같지 않고 혹은 개색(開塞)186)을 쓰고 있었다. 다만 이 율(마하승기율)은 가장 널리 설해지고 다 갖추어진187) 것이다.
다시 또 7천 게송[偈]이 되는 1부의 초율(抄律)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살바다중(薩婆多衆)188)의 율이니 즉 중국[秦地]의 승려들이 행하는 바의 것이다. 이것 또한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口傳)하여 전수(傳授)되었고 문자로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시 이 가운데에서 잡아비담심(雜阿毘曇心)189)을 얻었는데 6천 게송이 된다. 또 2천 5백 게송의 1부의 정경(綎經)190)을 얻었고, 또 1권의 방등반니원경(方等般泥洹經)191)을 얻었는데 약 5천 게송이 된다. 또한 마하승기의 아비담(阿毘曇)192)도 얻었다.
그리하여 법현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우고 율을 베꼈다. 도정(道整)은 중인도에 도착한 후 사문(沙門)의 법칙이나 승려들의 위의(威儀)와 촉사(觸事)193)에 볼 만한 것이 많음을 보고, 중국의 변지(邊地)에서는 승려들의 계율이 훼손되어 있음을 탄식하여 서원해 말하였다.
“지금부터는 부처가 될 때까지 변지에 태어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그러고는 드디어 인도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았다. 법현은 본래 마음에 계율을 한(漢)나라 땅에 유통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혼자 돌아오게 되었다.
항수(恒水)를 따라서 동쪽으로 18유연을 내려가면 그 남쪽 기슭에 첨파대국(瞻波大國)194)이 있었다. 여기에 부처님의 정사, 경행처 그리고 4불의 좌처(坐處)가 있었는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에는 승려가 살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50유연 가까이 가서 마리제국(摩梨帝國)195)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항구였다. 이 나라에는 24곳에 승가람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모두 승려가 살고 있었고 불법 또한 성했다. 법현은 이곳에 2년간 머물면서 경을 베끼고 상(像)을 그렸다.
여기서 상인의 큰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서남으로 향하였다. 초겨울의 신풍(信風)196)을 얻어 밤낮으로 14일 만에 사자국(師子國)197)에 이르렀다. 그 나라 사람들은 말하기를 첨파국에서 사자국까지의 거리는 약 7백 유연이라고 했다.
이 나라는 본래 섬 위에 있었는데, 그 섬은 동서가 50유연, 남북이 30유연이나 되었다. 좌우의 작은 섬은 1백여 개나 되며, 섬과 섬 사이의 거리는 혹은 10리, 혹은 20리, 때로는 2백 리나 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큰 섬에 통속(統屬)되며 진보(珍寶)와 주옥[珠璣]이 많이 나왔다. 그중에는 마니주(摩尼珠)가 나오는 섬도 있었는데, 사방이 약 10리가량 되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이를 수호하도록 했고 만약 채취하는 자가 있으면 10분의 3을 취했다.
이 나라에는 본래 사람들은 없었고 귀신과 용만이 살면서 여러 나라의 상인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거래할 때 귀신은 스스로 몸을 나타내지 않고 다만 값을 평가하여 보물을 내어 놓는다. 상인들은 곧 그 가격에 따라 값을 치르고 물건을 가져갈 뿐이었다. 이리하여 상인들이 내왕하여 머물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은 이곳이 즐거운 곳이라는 말을 듣게 되어 모두 찾아오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대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기후가 좋고 여름과 겨울의 구별이 없어 초목이 항상 무성했다. 따라서 파종도 사람의 형편에 따라 하며 정해진 시절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나라에 오셔서198) 악룡을 제도하시고자 신통력으로 한쪽 은 왕성(王城)199)의 북쪽을 밟고 다른 발로는 산꼭대기200)를 밟으셨다고 하는데 두 발자취의 거리는 15유연이나 되었다. 왕은 성 북쪽의 발자국 위에 큰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40장이나 되며 금은으로 장식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꾸몄다. 탑 근처에는 또 한 승가람을 일으키고 무외산(無畏山)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5천의 승려가 있었다. 또 한 불전(佛殿)을 세워 금은으로 새겨 박고 모두 여러 가지 보물로 꾸몄다. 그 안에는 높이 3장 정도 되는 청옥상(靑玉像)이 있었다. 전신에 칠보(七寶)가 번쩍번쩍 빛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장엄하게 나타나며 그 훌륭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청옥상의 오른쪽 손바닥 안에는 일정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배 구슬이 있었다.
법현은 중국을 출발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접하는 사람은 모두 이역(異域)의 사람이고 산천초목도 눈을 들어 보면 중국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 동행자도 헤어져 어떤 사람은 머물고 어떤 사람은 죽어 버려서 돌아보면 자기 혼자뿐이어서 마음에 항상 슬픔을 품고 있었다. 마침 이 옥상(玉像) 근처에서 상인이 진지(晉地)201)의 백견선(白絹扇)으로 공양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처량해져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나라의 전왕(前王)은 사신을 중인도에 보내 패다수(貝多樹)의 묘목을 가져와서 불전 옆에 심게 하였다. 이 나무는 그 높이가 20장이나 되었다. 이 나무가 동남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왕은 나무가 쓰러질 것을 두려워하여 여덟, 아홉 아름의 기둥으로 나무를 지탱하게 하였다. 그런데 나무를 지탱하는 곳에 싹이 나더니 드디어 기둥을 뚫고 밑으로 내려가서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를 이루었는데 그 크기가 네 아름쯤 되자 비록 기둥은 속이 찢겨져 있었지만 그 외측은 완전히 나무로 뒤덮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이것을 제거하지 않았다. 패다수 아래에 정사가 세워졌고 그 안에 좌상(坐像)이 있었는데 도속(道俗)이 우러러 존경해 마지않았다. 성 가운데에도 또한 불치(佛齒)의 정사가 세워졌는데 모두 칠보(七寶)로 만들어졌다.
왕은 범행(梵行)을 잘 닦아 성안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의 정 또한 두터웠다. 이 나라는 건국 이래 기근이나 전란도 없었고, 스님들의 창고에는 많은 보배와 값을 매길 수 없는 값진 마니주(摩尼珠)가 있었다. 그 왕은 일찍이 승려의 창고에 들어가 둘러보다가 마니주를 보자 곧 탐심(貪心)이 일어나 이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이를 반성하고 곧 승려들에게로 가서 머리를 조아려 전의 죄스러운 마음을 뉘우쳤다. 그러고는 승려들에게 고백하여 말하였다.
“원컨대 스님들께서는 법칙을 세우셔서 지금부터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창고에 들어가 그 안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마도록 하시고, 비구는 40랍(臘)이 지난 후에야 들어가도록 하소서.”
그 성중에는 많은 거사와 장자, 그리고 살박상인(薩薄商人)202)이 있었다. 집들은 화려하게 꾸몄고, 도로는 정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동서남북의 모퉁이에는 모두 설법당을 만들고 매월 8일, 14일, 15일에는 고좌(高座)203)를 포시(鋪施)하여 도속 사중(道俗四衆)이 모두 모여 법을 들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도시에는 약 6만 명의 승려가 있는데, 전부 중식(衆食)을 한다고 했다. 왕은 별도로 성안에서 5,6천 명에게 중식을 공양하고 있었다. 이 중식을 받는 자는 본발(本鉢)204)을 가지고 가서 취하는데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모두 가득 채우고 돌아갔다.
불치(佛齒)는 항상 3월 중에 불치정사로부터 꺼냈다.205) 이것을 꺼내기 10일 전에 왕은 큰 코끼리를 장식하고 한 사람의 말주변이 능한 자에게 왕의 의복을 입혀 코끼리 위에 태우고 북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합창하게 했다.
“보살은 3아승기겁206)에 걸쳐 고행을 하시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라와 처자, 그리고 스스로의 눈을 빼서 남에게 주시며, 살점을 베어서 비둘기의 몸값을 치르시고, 머리를 잘라 보시를 하셨으며,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내주고 수뇌(髓腦)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고행을 하시어 중생을 위하셨기 때문에, 성불하시고 세상에 머무시는 45년간 설법 교화하사 불안한 자를 편안하게 하시고, 제도하지 않은 자를 제도하시고 중생의 연(緣)을 다하시자 열반하셨도다. 열반하신 이래 1497년, 세간안(世間眼)은 멸하고 중생은 긴 근심 속에 있다. 이제부터 10일 후 불치는 불치정사를 나와 무외산정사(無畏山精舍)에 이를 것이다. 국내의 도속(道俗)과 복을 심고자 하는 자는 각각 도로를 평탄하게 하고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며 여러 가지 꽃ㆍ향과 공양의 기구를 마련할지어다.”
이와 같이 합창을 마치면 왕은 곧 길 양쪽에 보살의 오백신(五百身)207) 이후로의 여러 가지 변현(變現)208)을 만들었다. 혹은 수대나(須大拏)209)를 만들고, 혹은 섬(睒)210)의 변(變)을 만들며, 혹은 상왕(象王)이나 사슴ㆍ말 등을 만들었다.211) 이와 같은 형상은 모두 채화(彩畵)로 장식하여 그 형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그런 후 불치를 모셔 내어 길 가운데를 통해서 지나갔다. 길마다 사람들은 공양하며 무외산정사의 불당 위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도속이 운집하여 향을 사르고 등을 켜고 여러 가지 법사(法事)가 주야로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만 90일이 되면 불치는 성내의 정사로 돌아갔다. 성내의 정사에서는 재일(齋日)이 되면 곧 문호(門戶)를 열고 법에 따라 예경을 했다.
무외산정사의 동쪽 40리 되는 곳에 산212)이 있었는데, 그 산 속에 지제(支提)213)라고 하는 정사가 있었다. 승려는 약 2천 명가량 되었다. 이러한 승려들 중에 달마구제(達摩瞿諦)214)라는 대덕 사문이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함께 숭앙하고 있었다. 그는 한 석실 안에서 40여 년이나 살고 있었는데, 항상 자비심을 행하여 능히 뱀이나 쥐에게도 감화를 주어 같은 석실 안에 머물지만 서로 해를 주지 않게끔 했다.
성 남쪽 7리 되는 곳에 한 정사가 있었는데 마하비가라(摩訶毘呵羅)215)라고 했다. 여기에는 3천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그 중 덕이 높은 한 사문이 있었는데, 계행이 맑고 깨끗하여 나라 사람들은 모두 나한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임종 시에 왕은 이곳에 와서 자세히 살펴보고 법에 따라 승려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비구는 득도하셨는가?”
그러자 승려들은 곧 사실을 보이고 대답했다.
“그는 나한입니다.”
얼마 안 있어 그가 입적하였다. 왕은 경률을 조사하여 나한의 장례법으로 장사 지내게 하였다. 즉 정사의 동쪽 4,5리 되는 곳에 크고 좋은 장작을 가로 세로 3장이 되게 쌓고, 위쪽에 전단(栴檀)과 침수(沈水) 등의 향목을 올려놓고 네 변(邊)에 계단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위쪽에 깨끗한 흰 목면(木綿)을 두르고 장작을 쌓아 큰 상여를 만들었으니, 그 모양은 마치 중국의 영구차[轜車]216)와 같았는데 다만 용과 물고기의 장식이 없을 뿐이었다. 사유(闍維)217)시에는 왕과 국민, 사중이 모두 모여 꽃과 향으로 공양을 하고 상여를 따라 묘소에 이르렀다. 왕은 스스로 꽃과 향을 공양하고 공양이 끝난 후 상여를 쌓아 놓은 장작 위에 올려놓고 소유(酥油)를 두루 붓고 난 후에 불을 질렀다. 불이 탈 때에 사람들은 숭경하는 마음으로 각각 입었던 옷과 우의(羽儀)ㆍ일산[傘]ㆍ번개[蓋] 등을 벗어서 멀리 불 속에 던져 다비[闍維]를 도왔다. 다비가 끝나자 재를 긁어모아 뼈를 추려 탑을 세웠다. 법현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이 나한은 살아 있지 않고 오직 장사 지내는 광경만을 볼 수가 있었다.
왕은 불법을 돈독하게 믿어 승려들을 위하여 새로운 정사를 짓고자 하였다. 먼저 대회(大會)를 베풀어 음식을 승려들에게 공양하고 공양이 끝나자 상품(上品)의 소 한 쌍을 골라 금ㆍ은ㆍ보물로 뿔 위를 장식하였다. 다시 아름다운 금의 쟁기[犁]를 만들어 왕 스스로 밭의 네 변을 경작하고 그런 연후에 민호(民戶)와 전택(田宅)을 나누어 주고 이를 철권(鐵券)에 적었다. 이로부터 이런 일은 대대로 계승되어 감히 폐지하거나 바꾸지 않고 있다.
법현은 이 나라에서 인도의 도인이 고좌(高座)에서 경을 외우는 것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부처님의 발우는 본래 비사리(毘舍離)에 있었는데, 지금은 건타위국(揵陀衛國)에 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면[법현이 경을 읽는 것을 들은 때는 정확한 연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 틀림없이 다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이를 것이다. 다시 몇 백 년 만에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러 여기서 몇 백 년간 있다가 굴자국(屈茨國)218)에 이를 것이다. 다시 또 몇 백 년 후에는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렀다가 여기서 몇 백 년 만에 다시 중국[漢地]에 이르고, 다시 몇 백 년 만에 중인도로 돌아갈 것이다. 중인도에 이르면 부처님 발우는 틀림없이 도솔천상에 오를 것이다. 미륵보살은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석가모니불의 발우가 왔다고 하면서 모든 천신과 더불어 7일 간 꽃과 향을 바쳐 공양한다. 7일이 지나면 부처님 발우는 염부제로 돌아오고 그러면 바다의 용왕은 이를 가지고 용궁으로 들어가서 미륵보살이 성도할 때까지 모시게 된다. 미륵보살이 막 성도하려고 하면 발우는 넷으로 쪼개져서 다시 본래의 알나산(頞那山)219) 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성도하면 사천왕(四天王)은 마땅히 다시 미륵불을 생각하기를 앞서의 부처님 법과 같이 할 것이다.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은 모두 이 한 개의 발우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발우가 없어지면 불법도 점차로 멸해지고, 불법이 멸한 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짧아져서 5세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수명이 5세 때가 되면 갱미(粳米)ㆍ소유(酥油)는 전부 없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극악해져서 풀과 나무를 잡으면 곧 칼과 막대기로 변해 함께 서로 찌르고 베고 한다. 그중에 복이 있는 자는 이를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가 악인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하여 다 없어진 다음에 다시 산에서 나와 서로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는다.
“옛날 사람의 수명은 매우 길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우 악하게 되어 여러 가지 비법(非法)을 행하였기 때문에 우리들 수명이 결국 이와 같이 짧아져 5세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은 이제야말로 여러 가지 선행을 함께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서 신의(信義)를 수행하도록 하자.”
부처님 발우란 곧 이것을 말한다. 본문에서 부처님 발우가 네 조각으로 쪼개져서 본래의 알나산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고 각각 신의를 행하면 몸이 점차로 바뀌어져 수명이 자꾸 배가 되어 8만 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미륵이 세상에 출현하여 처음으로 법륜을 굴릴 때, 먼저 석가의 유법(遺法) 제자와 출가자, 그리고 삼귀(三歸)ㆍ오계(五戒)ㆍ팔재법(八齋法)을 받고 삼보를 공양하는 자들을 제도하고, 제2ㆍ제3차로 인연 있는 사람들을 제도할 것이다.
법현이 이때 이 경을 베끼려고 하자 그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경본(經本)이 없이 그저 마음으로 구송(口誦)할 뿐이다.”
법현은 이 나라에 2년 머물고, 다시 미사색율장(彌沙塞律藏)220)의 책을 구해 얻고, 또한 장아함(長阿含)과 잡아함(雜阿含), 그리고 일부의 잡장(雜藏)의 책221)을 얻었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에 없는 경전들이다.
법현은 이들 범본(梵本)을 얻은 후 상인의 큰 배에 승선하였는데, 그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항해에는 위험이 많기 때문에 큰 배 뒤에는 하나의 작은 배를 매달고 큰 배의 파손에 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순풍을 만나 동쪽으로 사흘 동안 잘 갔지만 곧 대풍(大風)을 만나 배가 새고 물이 들어오자 상인들은 작은 배로 옮겨 타려고 하였다. 작은 배 위의 사람들은 큰 배에 탄 사람들이 많이 옮겨 올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 배에 매어 있던 밧줄을 끊어 버렸다. 큰 배의 상인들은 두려워하여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배에 물이 차는 것을 겁을 내고 큰 재화(財貨)들을 바다로 던져 버렸다. 법현 또한 군지(君墀)222)와 조관(澡罐)223) 및 그 이외의 물건들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는 상인들이 경전이나 불상을 던져 버릴 것만 두려워하면서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念)하고 줄곧 중국 승려들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멀리 인도까지 와서 법을 구하였습니다. 원컨대 위신력(威神力)으로 해류를 따라 목적지에 이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대풍 속에서 주야로 13일 만에 섬가224)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바람이 자는 것을 기다렸다가 배에서 새는 곳을 찾은 다음 즉시 그곳을 수리해서 막고는 다시 전진을 계속하였다.
이 해상에는 해적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게 되면 무사할 수가 없다. 대해(大海)는 어디까지나 끝없이 넓고 넓어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고, 오직 해ㆍ달이나 별자리를 보면서 나아갈 뿐이었다. 만약 비가 온다면 바람에 불려가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에는 큰 파도만 서로 부딪쳐 황연(晃然)히 불빛 같았으며 거북 종류인 듯한 괴물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상인들은 그저 겁만 먹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바다는 깊이를 알지 못할 만큼 깊었고 또한 닻으로 쓰는 돌을 내려도 바다가 깊어 바닥에 닿지를 않았다. 하늘이 맑으면 그제야 동서를 알게 되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약 암초[伏石]를 만나게 되면 활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90일 정도 가서 야바제(耶婆提)225)라는 나라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외도 바라문이 흥성하여 불법을 말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이 나라에 머물기를 5개월, 다시 다른 상인을 따라 배에 올랐다. 큰 배 위에는 역시 2백 명 정도의 사람이 탔고 50일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4월 16일에 이 나라를 출발하였는데 법현은 배 위에서 안거를 하였다.226) 배는 동북으로 광주(廣州)를 향하여 나아갔다.
1개월 정도 지나 밤의 북소리가 2시를 알렸을 때 흑풍(黑風)과 폭우가 쏟아져 상인이나 손님이 모두 공포에 떨었다. 법현은 이때에도 역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중국의 승려들을 생각하였는데 위신력의 도움으로 하늘이 밝아졌다. 아침이 되자 여러 바라문들은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배에 사문이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롭지 못하게도 큰 고난을 만났던 것이다. 마땅히 이 비구를 바다 섬 주변에 내려놓아야 하겠다.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들이 위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자 법현의 단월(檀越)이 말하였다.
“당신네들이 만약 이 비구를 내려놓는다면 나 또한 함께 내려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죽여주시오. 당신네들이 어떻든지 이 사문을 내려놓는다면, 나는 중국에 도착해서 마땅히 국왕에게 당신들의 말을 고하겠소. 중국의 왕 또한 불법을 믿고 존경하며 비구승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오.”
그러자 상인들은 주저하면서 감히 내려놓지 못하였다.
그때 하늘에서는 연이어 많은 비가 내렸고 황망해진 선장은 수로를 잘못 잡아 결국 7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식량과 물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닷물을 떠서 밥을 짓고 남은 식수를 나누었는데, 한 사람당 두 되밖에 되지 않아 결국 물도 다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상인들은 의논하였다.
“보통 갈 때에는 꼭 50일이면 광주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50일 하고도 여러 날이 지났으니 아마 항로를 벗어난 것 같다.”
그리하여 곧 배를 서북방으로 돌리고 해안을 찾았는데 주야 12일 만에 장광군계(長廣郡界)의 뇌산(牢山)227) 남쪽 기슭에 이르러 좋은 물과 채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다만 험난한 해로를 배를 타고 오면서 매일 근심 속에서 보냈는데, 문득 이 해안에 닿을 수가 있었고, 법현은 여기에서 명아주 잎과 콩잎[藜藿]을 보고서야 이곳이 중국 땅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인민이나 사람의 자취가 보이지 않아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은 아직 광주에 이르지 못하였다고도 말하고, 혹은 광주를 이미 지나쳤다고도 말했는데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배를 타고 강 어귀[浦]로 들어가, 사람을 찾아서 장소를 물어보려고 두 사람의 사냥꾼을 데리고 돌아와 법현이 통역하도록 하고 질문을 하였다. 법현은 먼저 두 사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면서 천천히 질문을 하였다.
“당신들은 어떤 분들이오?”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불제자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산에 들어가 무엇을 구하려고 하였소?”
그러자 말하였다.228)
“내일은 7월 15일이기 때문에 복숭아를 따서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였소.”
다시 물었다.
“이곳은 어느 나라입니까?”
대답했다.
“여기는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의 경계로 진가(晉家)에 통속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상인들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재물을 거두어 사람을 보내 장광군에 가게 하였다.
그때 태수(太守) 이의(李[山머리+밑疑])는 불법을 믿어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문이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배를 타고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사람들을 이끌고 해변까지 가서 경전과 불상을 영접하고 자기가 다스리는 군으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상인들은 법현과 함께 양주(揚州)로 향하여 청주(靑州)에 이르렀다. 청주자사 유연(劉兗)은 법현을 청하여 각각 겨울과 여름 한 철을 나게 하였다. 하안거를 마치자 법현은 오랫동안 여러 선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안(長安)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다만 해야 할 일이 중대하기에 드디어 도(都)229)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 선사(禪師)230)를 좇아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역출하였다.
법현은 장안을 출발하여 6년 만에 중인도에 갔다가 거기서 6년 간 머물고, 3년 만에 돌아와 청주에 도착하니 무릇 근 30국을 유력(遊歷)하였던 것이다. 사하(沙河:고비사막) 서쪽으로 인도에 이르기까지 승려들의 위의(威儀)와 법화(法化)의 미(美)는 너무도 훌륭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여러 선사들은 아직 이 지방의 것에 대해 자세하게 듣지 못하였다. 다행히 나는 미명(微命)을 돌아보지 않고 바다에 떠서 돌아왔다. 그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삼존(三尊)231)의 위력과 신령스러움의 은총을 입어 여러 차례 위험이 있었지만 구법(求法) 여행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죽백(竹帛)에 체험한 바를 기술하여 현자(賢者)로 하여금 그 견문을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금년은 갑인년(甲寅年)232)이다.233)
진(晉)의 의희(義熙) 12년(416), 세(歲)는 수성(壽星:丙辰年)에 있다. 하안거 말에 우리들은 법현도인을 맞이했다. 법현도인은 와서 머물며 동재(冬齋)234)를 함께하였다. 그리하여 이야기한 것을 수집할 때에 거듭 유력(遊歷)한 것을 물었다. 그분은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에 의거하여 공순(恭順)하게 말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간략하게 한 것을 자세하게 기재(記載)하도록 권하였다.
법현은 다시 자세하게 그 시말(始末)을 서술했다.
“돌이켜 경과한 곳을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렁거려 땀이 흐른다. 위험한 곳을 밟고 험준한 곳을 건너 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모두 굳은 뜻이 있어 그 우직(愚直)함을 오로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필사(必死)의 땅에 던졌고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의 희망을 달성한 것이다.”
이에 감탄하노니 이분은 고금에 보기 드문 분이시다. 불교가 동방으로 유전된 이래 몸을 돌보지 않고 법을 구하기를 아직 법현과 같이 한 사람은 없었다. 이리하여 지성(至誠)의 감응(感應)함은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통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뜻이 있는 곳에 공업(功業)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나니 무릇 공업을 이룬 자는, 중(重)하게 여기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잊혀진 소중한 것을 얻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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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49_c_01L高僧法顯傳一卷東晉沙門釋法顯,自記遊天竺事。法顯昔在長安,慨律藏殘缺。於是遂以弘始二年,歲在己亥,與慧景、道整、慧應、慧嵬等同契,至天竺,尋求戒律。初發迹長安,度隴至乾歸國,夏坐。夏坐訖,前至褥檀國,度養樓山,至張掖。鎭張掖大亂,道路不通。張掖王慇勤遂留,爲作檀越。於是與智嚴、慧簡、僧紹、寶雲、僧景等相遇,欣於同志,便共夏坐。夏坐訖,復進到燉煌,有塞東西可八十里,南北四十里,共停一月餘日。法顯等五人,隨使先發,復與寶雲等別燉煌。太守李浩供給度沙河,沙河中,多有惡鬼。熱風遇則皆死,無一全者。上無飛鳥,下無走獸,遍望極目,欲求度處,則莫知所擬。唯以死人枯骨,爲幖幟耳。行十七日,計可千五百里,得至鄯鄯國。其地崎嶇薄瘠,俗人衣服粗,與漢地同。但以氈褐爲異。其國王奉法,可有四千餘僧,悉小乘學。諸國俗人及沙門,盡行天竺法。但有精麤,從此西行,所經諸國,類皆如是。唯國國胡語不同。然出家人皆習天竺書、天竺語,住此一月日,復西北行十五日,到烏夷國。僧亦有四千餘人,皆小乘學,法則齊整。秦土沙門至彼,都不豫其僧例也。法顯得符,行當公孫經理。住二月餘日,於是還與寶雲等,共合烏夷國。人不修禮儀,遇客甚薄。智嚴、慧簡、慧嵬,遂返向高昌,欲求行資。法顯等蒙符公孫供給,遂得直進西南,行路中無居民。涉行艱難,所經之苦,人理莫比。在道一月五日,得到于闐。其國豐樂,人民殷盛,盡皆奉法,以法樂相娛。衆僧乃數萬人,多大乘學。皆有衆食,彼國人民星居,家家門前,皆起小塔。最小者可高二丈許。作四方僧房,供給客僧,及餘所須。國主安頓供給法顯等,於僧伽藍。僧伽藍名瞿摩帝,是大乘寺,三千僧共揵搥食。入食堂時,威儀齊肅,次第而坐。一切寂然,器鉢無聲,淨人益食,不得相喚。但以手指麾。慧景、道整、慧達,先發向竭叉國。法顯等欲觀行像,停三月日。其國中有四大僧伽藍,不數小者。從四月一日,城裏便掃灑道路,莊嚴巷陌,其城門上,張大幃幕,事事嚴飾。王及夫人、婇女,皆住其中,瞿摩帝僧是大乘學,王所敬重,最先行像。離城二四里,作四輪像車,高三丈餘,狀如行殿。七寶莊挍,懸繒幡蓋,像立車中,二菩薩侍,作諸天侍從,皆以金銀彫瑩,懸於虛空。像去門百步,王脫天冠,易著新衣,徒跣持花香,翼從出城。迎像頭面禮足,散花燒香。像入城時。門樓上夫人、婇女,遙散衆花,紛紛而下。如是莊嚴供具,車車各異。一僧伽藍則一日行像,自月一日爲始,至十四日,行像乃訖。行像訖,王及夫人乃還宮耳。其城西七八里,有僧伽藍,名王新寺,作來八十年,經三王方成。可高二十五丈,彫文刻鏤,金銀覆上,衆寶合成。塔後作佛堂,莊嚴妙好,梁、柱、戶、扇、窗牖,皆以金薄。別作僧房,亦嚴麗整飾,非言可盡。嶺東六國諸王,所有上價寶物,多作供養。人用者少,旣過四月行像,僧韶一人,隨胡道人,向罽賓。法顯等進向子合國,在道二十五日,便到其國。國王精進,有千餘僧。多大乘學。住此十五日已,於是南行四日,至蔥嶺山。到於麾國安居,安居已,山行二十五日。到竭叉國,與慧景等合,値其國王作般遮越師,般遮越師漢言五年大會也。會時,請四方沙門,皆來雲集。集已莊嚴衆僧坐處,懸繒幡蓋,作金銀蓮華,著僧座後,鋪淨坐具。王及群臣如法供養。或一月、二月,或三月,多在春時,王作會已,復勸諸群臣,設供。供養或一日、二日、三日、五日乃至七日,供養都畢,王以所乘馬,鞍勒自副,使國中貴重臣騎之,幷諸白㲲種種珍寶沙門所須之物,共諸群臣,發願布施衆僧。布施僧已,還從僧贖其地。山寒不生餘穀,唯熟麥耳。衆僧受歲已,其晨輒霜,故其王每請衆僧,令麥熟,然後受歲。其國中,有佛唾壺,以石作之。色似佛鉢。又有佛一齒,其國中人,爲佛齒起塔。有千餘僧徒,盡小乘學。自山以東,俗人被服類粗,與秦土同。亦以氈褐爲異沙門法用轉勝,不可具記。其國當蔥嶺之中,自蔥嶺已前,草木果實皆異。唯竹及安石榴、甘蔗三物,與漢地同耳。從此西行,向北天竺國。在道一月,得度蔥嶺。蔥嶺山冬夏有雪,又有毒龍。若失其意,則吐毒風,雨雪飛沙礫石。遇此難者,萬無一全。彼土人卽名爲雪山也。度嶺已,到北天竺。始入其境,有一小國,名陁歷。亦有衆僧,皆小乘學。其國昔有羅漢,以神足力,將一巧匠,上兜率天,觀彌勒菩薩長短色貌,還下刻木作像。前後三上觀,然後乃成像。長八丈,足趺八尺,齋日常有光明。諸國王競興供養。今故現在。於此順嶺西南,行十五日,其道艱岨,崖岸嶮絕。其山唯石,壁立千仞,臨之目眩。欲進則投足無所下。有水名新頭河,昔人有鑿石通路,施傍梯者,凡度七百。度梯已,躡懸絙過河,河兩岸相去減八十步。九譯所記,漢之張騫、甘英,皆不至此。衆僧問法顯:‘佛法東過,其始可知耶?’顯云:‘訪問彼土人,皆云古老相傳,自立彌勒菩薩像後,便有天竺沙門齎經律,過此河者。’像立在佛泥洹後三百許年,計於周氏平王時,由茲而言,大教宣流始自此像。非夫彌勒大士繼軌釋迦,孰能令三寶,宣通邊人識法?固知冥運之開,本非人事。則漢明帝之夢,有由而然矣。度河便到烏長國。其烏長國,是正北天竺也。盡作中天竺語。中天竺所謂中國,俗人衣服、飮食亦與中國同。佛法甚盛,名衆僧止住處,爲僧伽藍,凡有五百。僧伽藍皆小乘學。若有客比丘到,悉供養三日。三日過已,乃令自求所安。常傳言佛至北天竺,卽到此國也。佛遺足迹於此,或長或短,在人心念,至今猶爾。及曬衣石度惡龍處。悉亦現在。石高丈四尺,闊二丈許,一邊平。慧景、慧達、道整三人,先發,向佛影那竭國。法顯等住此國夏坐。坐訖,南下到宿呵多國。其國佛法亦盛。昔,天帝釋試菩薩,化作鷹鴿,割肉貿鴿處。佛旣成道,與諸弟子,遊行語云:‘此本是吾割肉貿鴿處。’國人由是,得知於此處起塔,金銀挍飾。從此,東下五日,行到揵陁衛國。是阿育王子法益所治處。佛爲菩薩時,亦於此國,以眼施人。其處亦起大塔,金銀挍飾。此國人多小乘學。自此東行七日,有國名竺剎尸羅。竺剎尸羅漢言截頭也。佛爲菩薩時,於此處,以頭施人,故,因以爲名。復東行二日,至投身餧餓虎處。此二處亦起大塔,皆衆寶挍飾。諸國王、臣民競興供養,散華然燈,相繼不絕。通上二塔,彼方人亦名爲四大塔也。從揵陁衛國,南行四日,到弗樓沙國。佛昔將諸弟子,遊行此國,語阿難云:‘吾般泥洹後,當有國王,名罽膩伽。於此處起塔。’後罽膩伽王出世,出行遊觀時,天帝釋欲開發其意,化作牧牛小兒,當道起塔。王問言:‘汝作何等?’答言:‘作佛塔。’王言:‘大善。’於是王卽於小兒塔上,起塔,高四十餘丈,衆寶挍飾。凡所經見塔廟壯麗威嚴,都無此比。傳云:閻浮提塔,唯此塔爲上。王作塔成已,小塔卽自傍出大塔南,高三尺許。佛鉢卽在此國,昔月氏王大興兵衆,來伐此國,欲取佛鉢。旣伏此國已,月氏王等篤信佛法,欲持鉢去。故大興供養。供養三寶畢,乃挍飾大象,置鉢其上。象便伏地,不能得前。更作四輪車,載鉢八象共牽。復不能進。王知與鉢緣未至,深自愧歎。卽於此處,起塔及僧伽藍,幷留鎭守,種種供養。可有七百餘僧,日將欲中,衆僧則出鉢,與白衣等種種供養。然後中食。至暮燒香時,復爾。可容二斗許,雜色而黑多,四際分明,厚可二分,甚光澤。貧人以少華投中,便滿,有大富者,欲以多華供養,正復百千萬斛,終不能滿。寶雲、僧景止,供養佛鉢便還。慧景、慧達、道整,先向那竭國,供養佛影、佛齒及頂骨。慧景病,道整住看。慧達一人還於弗樓沙國相見,而慧達、寶雲、僧景,遂還秦土。慧景在佛鉢寺無常。由是,法顯獨進向佛頂骨所。西行十六由延,至那竭國界。醯羅城。城中有佛頂骨。精舍盡以金薄七寶挍飾。國王敬重頂骨,慮人抄奪,乃取國中豪姓八人,人持一印,印封守護。淸晨八人俱到,各視其印,然後開戶。開戶已,以香汁洗手,出佛頂骨,置精舍外高座上。以七寶圓碪,碪下瑠璃鍾覆上。皆珠璣挍飾,骨黃白色,方圓四寸,其上隆起。每日出後,精舍人則登高樓,擊大鼓,吹蠡敲銅鉢。王聞已,則詣精舍,以華香供養。供養已次第頂戴而去。從東門,入西門出。王朝朝如是供養禮拜。然後聽國政。居士、長者亦先供養,乃修家事,日日如是。初無懈倦。供養都訖,乃還頂骨於精舍中。有七寶解脫塔,或開或閉,高五尺許,以盛之。精舍門前,朝朝恒有賣花香人。凡欲供養者,種種買焉。諸國王亦恒遣使供養。精舍處方三十步,雖復天震地裂,此處不動。從此北行一由延,到那竭國城。是菩薩本以銀錢貿五莖華,供養定光佛處。城中亦有佛齒塔,供養如頂骨法。城東北一由延,到一谷口,有佛錫杖。亦起精舍供養。杖以牛頭旃檀作,長丈六七許,以木筒盛之。正復百千人擧,不能移。入谷口西行,有佛僧伽梨。亦起精舍供養。彼國土俗亢旱時,國人相率出衣,禮拜供養,天卽大雨。那竭城南半由延,有石室,博山西南,向佛留影。此中去十餘步觀之,如佛眞形,金色相好光明炳著,轉近轉微,髣髴如有,諸方國王遣工畫師摹寫,莫能及。彼國人傳云:千佛盡當於此留影。影西四百步許,佛在時,剃髮翦爪,佛自與諸弟子共造塔,高七八丈,以爲將來塔法。今猶在。邊有寺,寺中有七百餘僧。此處有諸羅漢、辟支佛塔,乃千數。住此冬三月,法顯等三人,南度小雪山,雪山冬夏積雪,山北陰中,遇寒風暴起,人皆噤戰。慧景一人不堪復進。口出白沫,語法顯云:‘我亦不復活,便可時去,勿得俱死。’於是遂終。法顯撫之,悲號。本圖不果,命也奈何?復自力前得過嶺,南到羅夷國。近有三千僧,兼大小乘學。住此夏坐,坐訖,南下行十日,到跋那國。亦有三千許僧,皆小乘學。從此東行三日,復渡新頭河,兩岸皆平地。過河有國,名毘荼。佛法興盛,兼大小乘學。見秦道人往,乃大憐愍,作是言:‘如何邊地人能知出家,爲道遠求佛法?’悉供給所須,待之如法。從此東南行,減八十由延,經歷諸寺甚多,僧衆萬數。過是諸處已,到一國。國名摩頭羅。又經蒱那河,河邊左右有二十僧伽藍,可有三千僧,佛法轉盛。凡沙河已西天竺諸國,國王皆篤信佛法,供養衆僧時,則脫天冠,共諸宗親、群臣,手自行食。行食已,鋪氈於地,對上座前,坐於衆僧前,不敢坐牀。佛在世時,諸王供養法式相傳至今。從是以南,名爲中國。中國寒暑調和,無霜雪,人民殷樂,無戶籍官,法唯耕王地者,乃輸地利。欲去便去,欲住便住。王治不用刑斬,有罪者但罰其錢。隨事輕重,雖復謀爲。惡逆,不過截右手而已。王之侍衛左右皆有供祿,擧國人民悉不殺生,不飮酒,不食蔥蒜,唯除旃荼羅。旃荼羅名爲惡人,與人別居。若入城市,則擊木以自異。人則識而避之,不相搪揬。國中不養豬鷄,不賣生口,市無屠店及沽酒者。貨易則用貝齒,唯旃荼羅漁獵師賣肉耳。自佛般泥洹後,諸國王、長者、居士爲衆僧起精舍,供給田宅、園圃、民戶、牛犢,鐵券書錄後,王王相傳,無敢廢者至今不絕衆僧住止房舍牀蓐飮食衣服都無闕乏處處皆爾衆僧常以作功德爲業,及誦經坐禪。客僧往到,舊僧迎逆,代擔衣鉢,給洗足水塗足油與非時漿須臾息已復問其臘數,次第得房舍、臥具,種種如法。衆僧住處,作舍利弗塔、目連阿難塔幷阿毘曇律經塔,安居後一月,諸希福之家,勸化供養。僧行非時漿,衆僧大會說法。說法已,供養舍利弗塔,種種華香,通夜然燈,使伎樂人作舍利弗大婆羅門時,詣佛求出家。大目連、大迦葉亦如是。諸比丘尼多供養阿難塔。以阿難請世尊聽女人出家故。諸沙彌多供養羅云。阿毘曇師者供養阿毘曇,律師者供養律,年年一供養。各自有日,摩訶衍人則供養般若波羅蜜、文殊師利、觀世音等。衆僧受歲竟,長者、居士、婆羅門等,各將種種衣物,沙門所須以用布施衆僧。僧受,亦自各各布施。佛泥洹已來,聖衆所行威儀法則,相承不絕。自度新頭河,至南天竺,迄于南海四五萬里,皆平坦無大山川。正有河水耳。從此東南,行十八由延,有國名僧迦施。佛上忉利天,三月爲母說法,來下處。佛上忉利天,以神通力,都不使諸弟子,知來滿七日,乃放神足。阿那律以天眼遙見世尊,卽語尊者大目連:‘汝可往問訊世尊。’目連卽往,頭面禮足,共相問訊。問訊已,佛語目連:‘吾卻後七日,當下閻浮提。’目連旣還,于時,八國大王及諸臣民,不見佛久,咸皆渴仰,雲集此國,以待世尊。時,優鉢羅比丘尼卽自心念今日國王臣民皆當迎佛我是女人:何由得先、見佛?卽以神足,化作轉輪聖王,最前禮佛。佛從忉利天上來向下,下時化作三道寶階,佛在中道七寶階上。行梵天王亦化作白銀階,在右邊,執白拂而侍。天帝釋化作紫金階,在左邊,執七寶蓋而侍。諸天無數從佛來下,佛旣下三階,俱沒于地,餘有七級而現。後阿育王欲知其根際,遣人掘看,下至黃泉,根猶不盡。王益敬信,卽於階上,起精舍。當中階,作丈六立像。精舍後,立石柱,高二十肘上,作師子柱。內四邊有佛像,內外映徹,淨若琉璃。有外道論師,與沙門諍此住處。時沙門理屈,於是共立誓言:‘此處若是沙門住處者,今當有靈驗。’作是言已,柱頭師子乃大鳴吼見驗於是外道慴怖心伏而退佛以受天食三月故身作天香,不同世人。卽便浴身,後人於此處,起浴室。浴室猶在。優鉢羅比丘尼初禮佛處,今亦起塔。佛在世時,有翦髮爪作塔,及過去三佛幷釋迦文佛坐處、經行處及作諸佛形像處,盡有塔,今悉在。天帝釋、梵天王從佛下處,亦起塔。此處僧及尼可有千人,皆同衆食。雜大小乘學,住處有一白耳龍與此衆僧作檀越。令國內豐熟,雨澤以時,無諸災害,使衆僧得安。衆僧感其惠故,爲作龍舍,敷置坐處。又爲龍設福食供養。衆僧日日衆中別差三人,到龍舍中食。每至夏坐訖,龍輒化形作一小蛇,兩耳邊白。衆僧識之,銅盂盛酪,以龍置中,從上座至下座行之。似若問訊,遍便化去。每年一出,其國豐饒,人民熾盛,最樂無比。諸國人來,無不經理,供給所須。寺西北五十由延,有一寺,名大墳。大墳者,惡鬼名也。佛本化是惡鬼,後人於此處,起精舍,布施阿羅漢,以水灌手。水瀝滴地,其處故在。正復掃除,常現不滅。此處別有佛塔,善鬼神常掃灑。初不須人功,有邪見國王言:‘汝能如是者,我當多將兵衆,住此益積糞穢。汝復能除不?’鬼神卽起大風,吹之令淨。此處有百枚小塔,人終日數之,不能得知。若至意欲知者,便一塔邊,置一人已,復計數人。人或多或少,其不可得知。有一僧伽藍,可六七百僧。此中有辟支佛食處泥地,大如車輪,餘處生草,此處獨不生。及曬衣地處,亦不生草。衣條著地迹今故現在。法顯在龍精舍夏坐,坐訖東南行七由延,到罽饒夷城。城接恒水,有二僧伽藍。盡小乘學,去城西六七里恒水北岸,佛爲諸弟子說法處。傳云說無常苦空,說身如泡沫等,此處起塔猶在。度恒水,南行三由延,到一村名呵梨佛。於此中說法、經行、坐處,盡起塔。從此東南行十由延,到沙祇大國。出沙祇城南門道東,佛本在此,嚼楊枝已,刺土中,卽生長七尺,不增不減。諸外道、婆羅門嫉妒,或斫或拔,遠棄之。其處續生如故。此中亦有四佛經行坐處,起塔故在。從此南行八由延,到拘薩羅國舍衛城。城內人民希曠,都有二百餘家。卽波斯匿王所治城也。大愛道故精舍處、須達長者井壁及鴦掘魔得道般泥洹燒身處,後人起塔,皆在此城中。諸外道婆羅門,生嫉妒心,欲毀壞之。天卽雷電霹靂,終不能得壞。出城南門千二百步,道西長者須達起精舍,精舍東向開門,門戶兩邊有二石柱。左柱上,作輪形,右柱上,作牛形。精舍左右,池流淸淨,樹林尚茂,衆花異色,蔚然可觀。卽所謂祇洹精舍也。佛上忉利天,爲母說法九十日,波斯匿王思見佛,卽刻牛頭栴檀,作佛像,置佛坐處。佛後還入精舍,像卽避出迎佛。佛言:‘還坐。吾般泥洹後,可爲四部衆作法式。’像卽還坐。此像最是衆像之始,後人所法者也。佛於是移住南邊,小精舍,與像異處,相去二十步。祇洹精舍本有七層,諸國王、人民競興供養,懸繒幡蓋,散華,燒香,然燈續明。日日不絕。鼠含燈炷,燒幡蓋,遂及精舍,七重都盡。諸國王、人民皆大悲惱,謂栴檀像已燒。卻後四五日,開東邊小精舍戶,忽見本像,皆大歡喜。共治精舍,得作兩重,還移像本處。法顯、道整初到祇洹精舍,念昔世尊住此二十五年,自傷生在邊地,共諸同志,遊歷諸國,而或有還者,或有無常者。今日乃見佛空處,愴然心悲。彼衆僧出,問法顯等言:‘汝等從何國來?’荅曰:‘從漢地來。彼衆僧歎曰:‘奇哉!邊國之人乃能求法至此。’自相謂言:‘我等諸師和上相承以來,未見漢道人來到此也。’精舍西北四里,有林名曰得眼。本有五百盲人,依精舍住此。佛爲說法,盡還得眼。盲人歡喜,刺杖著地,頭面作禮,杖遂生長大,世人重之,無敢伐者,遂成爲林。是故以得眼爲名。祇洹衆僧中食後,多往彼林中坐禪。祇洹精舍東北六七里,毘舍佉母作精舍,請佛及僧,此處故在。祇洹精舍大院各有二門,一門東向,一門北向。此園卽須達長者布金錢買地處。精舍當中央,佛住此處最夂,說法度人,經行坐處,亦盡起塔。皆有名字,及孫陀利殺身謗佛處,出祇洹東門,北行七十步,道西佛昔共九十六種外道論議,國王、大臣、居士、人民皆雲集而聽。時外道女名旃遮摩那,起嫉妒心,乃懷衣著腹前,似若妊身,於衆會中,謗佛以非法。於是天帝釋卽化作白鼠,嚙其腰帶,帶斷所懷衣墮地。地卽裂,生入地獄。及調達毒爪欲害佛,生入地獄處,後人皆幖幟之。又於論議處,起精舍,高六丈許,中有坐佛像。其道東,有外道天寺,名曰影覆。與論議處,精舍裌道相對。亦高六丈許,所以名影覆者。日在西時,世尊精舍影則映外道天寺,日在東時,外道天寺影則北映。終不能得映佛精舍也。外道常遣人,守其天寺,掃灑,燒香,然燈,供養,至明旦,其燈輒移在佛精舍中。婆羅門恚言:‘諸沙門取我燈,自供養佛爲爾不止。’婆羅門於是,夜自伺候,見其所事天神,將燈繞佛精舍三帀供養。供養佛已,忽然不見。婆羅門乃知佛神大,卽捨家入道。傳云近有此事,繞祇洹精舍,有十八僧伽藍,盡有僧住。唯一處空,此中國有九十六種外道。皆知今世、後世,各有徒衆,亦皆乞食,但不持鉢。亦復求福,於曠路側,立福德舍,屋宇、牀臥、飮食供給行路人。及出家人來去,客,但所期異耳。調達亦有衆在,常供養過去三佛,唯不供養釋迦文佛。舍衛城東南四里,琉璃王欲伐舍夷國,世尊當道側立。立處起塔,城西五十里,到一邑,名都維,是迦葉佛本生處。父子相見處、般泥洹處,皆悉起塔。迦葉如來全身舍利亦起大塔。從舍衛城東南,行十二由延,到一邑,名那毘伽。是拘樓秦佛所生處。父子相見處、般泥洹處,亦皆起塔。從此北行減一由延,到一邑,是拘那含牟尼佛所生處。父子相見處、般泥洹處,亦皆起塔。從此東行減一由延,到迦維羅衛城。城中都無王民,甚丘荒。止有衆僧民戶數十家而已。白淨王故宮處,作太子母形像,及太子乘白象入母胎時,太子出城,東門見病人,迴車還處,皆起塔。阿夷相太子處,與難陁等撲象捅射處,箭東南去三十里入地,令泉水出,後世人治作井,令行人飮。佛得道,還見父王處,五百釋子出家向優波離作禮,地六種震動處,佛爲諸天說法,四天王等守四門,父王不得入處,佛在尼拘律樹下,東向坐,大愛道布施佛僧伽梨處,此樹猶在。瑠璃王殺釋種,釋種死,盡得須陁洹,立塔今亦在。城東北數里,有王田太子坐樹下,觀耕者處。城東五十里,有王園,園名論民。夫人入池洗浴,出池北岸二十步,擧手攀樹,枝東向生太子,太子墮地,行七步,二龍王浴太子身浴處,遂作井及上洗浴池。今衆僧常取飮之。凡諸佛有四處常定。一者成道處,二者轉法輪處,三者說法論,議伏外道處,四者上忉利天爲母說法來下處。餘者則隨時示現焉。迦維羅衛國大空荒,人民希疏,道路怖畏,白象師子不可妄行。從佛生處東行五由延,有國名藍莫。此國王得佛一分舍利,還歸起塔,卽名藍莫塔。塔邊有池,池中有龍,常守護此塔,晝夜供養。阿育王出世,欲破八塔,作八萬四千塔。破七塔已,次欲破此塔,龍便現身,將阿育王,入其宮中,觀諸供養具已,語王言:‘汝供養若能勝是,便可壞之,持去。吾不與汝諍。’阿育王知其供養具,非世之所有。於是便還。此中荒蕪,無人灑掃,常有群象,以鼻取水,灑地,取雜花香而供養塔。諸國有道人來,欲禮拜塔,遇象大怖,依樹自翳,見象如法供養。道人大自悲感,此中無有僧伽藍,可供養,此塔乃令象灑掃。道人卽捨大戒,還作沙彌,自挽草木,平治處所,使得淨潔。勸化國王,作僧住處,已爲寺主。今現有僧住,此事在近,自爾相承至今,恒以沙彌爲寺主。從此東行三由延,太子遣車匿白馬還處,亦起塔。從此東行四由延,到炭塔,亦有僧伽藍。復東行十二由延,到拘夷那竭城。城北雙樹閒,希連禪河邊,世尊於此北首而般泥洹及須跋最後得道處。以金棺供養世尊七日處。金剛力士放金杵處、八王分舍利處,此諸處皆起塔,有僧伽藍。今悉現在。其城中人民亦希曠,止有衆僧民戶。從此東南行十二由延,到諸梨車欲逐佛般泥洹處,而佛不聽戀佛,不肯去,佛化作大深塹,不得度,佛與鉢作信,遣還其家處,立石柱,上有銘題。自此東行十由延,到毘舍離國。毘舍離城北大林重閣精舍佛住處及阿難半身塔,其城裏本菴婆羅女家,爲佛起塔,今故現在。城南三里道西,菴婆羅女以園施佛,作佛住處。佛將般泥洹,與諸弟子出毘舍離城西門,迴身右轉,顧看毘舍離城,告諸弟子:‘是吾最後所行處,後人於此處起塔。’城西北三里,有塔名放弓仗。以名此者,恒水流有一國王,王小夫人生一肉胎。大夫人妒之,言汝生不祥之徵,卽盛以木函,擲恒水中,下流有國王,遊觀見水上木函,開看見千小兒,端正殊特。王卽取養之,遂便長大,甚勇健,所往征伐,無不摧伏。次伐父王本國王,大愁憂。小夫:‘人問王何故愁憂?’王曰:‘彼國王有千子,勇健無比,欲來伐吾國。是以愁耳。’小夫人言:‘王勿愁憂。但於城東,作高樓。賊來時,置我樓上,則我能卻之。’王如其言。至賊來時,小夫人於樓上,語賊言:‘汝是我子,何故作反逆事?’賊曰:‘汝是何人,云是我母?’小夫人曰:‘汝等若不信者,盡仰向張口。’小夫人卽以兩手,搆兩乳,乳作五百道,俱墮千子口中。賊知是其母,卽放弓仗,二父王於是思惟,皆得辟支佛。二辟支佛塔猶在。後世尊成道,告諸弟子:‘是吾昔時,放弓仗處。’後人得知,於此處立塔。故以名焉。千小兒者,卽賢劫千佛是也。佛於放弓仗塔邊,捨壽,佛告阿難言:‘我卻後三月,當般泥洹。’魔王嬈固,阿難使不得請佛住世。從此東行三四里,有塔。佛般泥洹後百年,有毘舍離比丘,錯行戒律,十事證言,佛說如是。爾時,諸羅漢及持律比丘,凡有七百僧,更撿挍律藏。後人於此處,起塔。今亦現在。從此東行四由延,到五河合口。阿難從摩竭國,向毘舍離,欲般泥洹。諸天告阿闍世王,阿闍世王卽自嚴駕,將士衆追到河上。毘舍離諸梨車聞阿難來,亦復來迎,俱到河上。阿難思惟前則阿闍世王致恨還,則梨車復怨,卽於河中央,入火光三昧,燒身而般泥洹,分身作二分,一分在一岸邊。於是二王各得半身舍利,還歸起塔。度河南下一由延,到摩竭提國巴連弗邑。巴連弗邑是阿育王所治城。城中王宮殿皆使鬼神,作累石起牆闕。彫文刻鏤,非世所造。今故現在。阿育王弟得羅漢道,常住耆闍崛山,志樂閑靜,王敬心,欲請於家供養,以樂山靜,不肯受請。王語弟言:‘但受我請,當爲汝於城裏,作山王。’乃具飮食,召諸鬼神,而告之曰:‘明日悉受我請。無坐席;各自齎來。’明日諸大鬼神各齎大石來,壁方四五步坐訖,卽使鬼神,累作大石山。又於山底,以五大方石,作一石室。可長三丈,廣二丈,高一丈餘,有一大乘婆羅門子,名羅汱私迷。住此城裏,爽悟多智,事無不達。以淸淨自居。國王宗敬,師事。若往問訊,不敢竝坐。王設以愛敬心執手,執手已,婆羅門輒自灌洗,年可五十餘。擧國瞻仰,賴此一人,弘宣佛法。外道不能得加陵,衆僧於阿育王塔邊,造摩訶衍僧伽藍,甚嚴麗。亦有小乘寺,都合六七百僧衆。威儀庠序,可觀四方,高德沙門及學問人,欲求義理,皆詣此寺。婆羅門子師亦名文殊師利,國內大德沙門、諸大乘比丘,皆宗仰焉。亦住此僧伽藍。凡諸中國唯此國城邑爲大,民人富盛,競行仁義,年年常以建卯月八日,行像。作四輪車,縛竹作五層有承攎椻戟,高二丈許,其狀如塔,以白㲲纏上,然後彩畫,作諸天形像,以金銀、琉璃莊挍其上,懸繒幡蓋,四邊作龕,皆有坐佛。菩薩立侍可有二十車,車車莊嚴各異,當此日,境內道俗,皆集作倡伎樂,華香供養。婆羅門子來請佛,佛次第入城。入城內再宿,通夜然燈、伎樂供養,國國皆爾。其國長者、居士,各於城內,立福德醫藥舍。凡國中貧窮、孤獨、殘跛,一切病人皆詣此舍,種種供給。醫師看病,隨宜飮食及湯藥,皆令得安,差者自去。阿育王壞七塔,作八萬四千塔。最初所作大塔,在城南三里餘。此塔前,有佛迹,起精舍。戶北向塔,南有一石柱,圍丈四五,高三丈餘。上有銘題。云阿育王以閻浮提,布施四方僧?還以錢贖,如是三反,塔北三四百步,阿育王本於此,作泥梨城。泥梨城中,有石柱,亦高三丈餘,上有師子柱,上有銘記作泥梨城因緣及年數日月。從此東南,行九由延,至一小孤石山。山頭有石室,石室南向,佛坐其中。天帝釋將天樂般遮,彈琴樂佛處。帝釋以四十二事問佛,一一以指畫石。畫迹故在。此中亦有僧伽藍。從此西南,行一由延,到那羅聚落。是舍利弗本生村。舍利弗還於此中,般泥洹。卽此處起塔,今現在。從此,西行一由延,到王舍新城。新城者是阿闍世王所造。中有二僧伽藍,出城西門三百步,阿闍世王得佛一分舍利,起塔,高大嚴麗。出城南四里,南向入谷,至五山裏。五山周圍狀若城郭。卽是蓱沙王舊城。城東西,可五六里,南北七八里。舍利弗、目連初見頞鞞處。尼犍子作火坑毒飯,請佛處,阿闍世王酒飮黑象,欲害佛處,城東北角曲中,耆舊於菴婆羅園中,起精舍,請佛及千二百五十弟子供養處。今故在。其城中,空荒無人。住入谷搏山,東南上十五里,到耆闍崛山。未至頭三里,有石窟,南向,佛本於此坐禪。西北三十步,復有一石窟,阿難於中坐禪,天魔波旬化作雕鷲,住窟前,恐阿難。佛以神足力隔石,舒手摩阿難肩,怖卽得止。鳥迹手孔今悉在。故曰:雕鷲窟山窟前,有四佛坐處。又諸羅漢各各有石窟坐禪處。動有數百佛,在石室前。東西經行。調達於山北,嶮巇閒,撗擲石,傷佛足指處,石猶在。佛說法堂已毀壞,止有塼壁基在。其山峯秀端嚴,是五山中最高。法顯於新城中,買香華、油燈,倩二舊比丘,送法顯到耆闍崛山,華香供養,然燈續明。慨然悲傷,抆淚而言。佛昔於此,說首楞嚴。法顯生不値佛,但見遺迹處所而已。卽於石窟前,誦首楞嚴,停止一宿,還向新城。出舊城,北行三百餘步,道西迦蘭陁竹園精舍今現在。衆僧掃灑精舍,北二三里,有尸磨賖那。尸磨賖那者,漢言棄死人墓田。搏南山西,行三百步,有一石室,名賓波羅窟。佛食後,常於此,坐禪。又西行五六里,山北陰中,有一石室,名車帝。佛泥洹後,五百阿羅漢結集經處。出經時,鋪三高座,莊嚴挍飾。舍利弗在左,目連在右,五百數中,少一阿羅漢,大迦葉爲上座。時,阿難在門外,不得入其處,起塔,今亦在,搏山亦有諸羅漢坐禪石窟甚多。出舊城,北東下三里,有調達石窟。離此五十步,有大方黑石窟。昔有比丘在上經行,思惟是身無常、苦、空,得不淨觀,厭患是身,卽捉刀欲自殺,復念世尊制戒不得自殺,又念雖爾,我今但欲殺三毒賊,便以刀自刎,始傷肉,得須陁洹,旣半得阿那含,斷已成阿羅漢。果般泥洹。從此西行,四由延,到伽耶城。城內亦空荒。復南行二十里,到菩薩本苦行六年處。處有林木,從此西行三里,到佛入水洗浴,天案樹枝得攀出池處。又北行二里,得彌家女奉佛乳糜處。從此北行二里,佛於一大樹下石上,東向坐食糜,樹石今悉在。石可廣長六尺,高二尺許。中國寒暑均調,樹木或數千歲,乃至萬歲。從此東北行半由延,到一石窟。菩薩入中西向結加趺坐,心念:若我成道,當有神驗。石壁上,卽有佛影現,長三尺許。今猶明亮。時天地大動,諸天在空中白言:‘此非是過去,當來諸佛成道處。去此西南,行減半由延,到貝多樹下,是過去當來諸佛成道處。’諸天說是語已,卽便在前唱導,導引而去。菩薩起行,離樹三十步,天授吉祥草。菩薩受之,復行十五步,五百靑雀飛來,繞菩薩三帀而去。菩薩前,到貝多樹下,敷吉祥草,東向而坐。時,魔王遣三玉女,從北來試。魔王自從南來試菩薩,以足指案地,魔兵退散,三女變成老母。自上苦行六年處。及此諸處,後人皆於中,起塔立像,今皆在。佛成道已,七日觀樹,受解脫樂處,佛於貝多樹下,東西經行七日處,諸天化作七寶堂供養佛七日處;文鱗盲龍七日繞佛處,佛於尼拘律樹下,方石上,東向坐,梵天來請佛處,四天王奉鉢處,五百賈人授麨蜜處,度迦葉兄弟師徒千人處,此諸處亦盡起塔。佛得道處,有三僧伽藍,皆有僧住。衆僧、民戶,供給饒足,無所乏少。戒律嚴峻,威儀坐起,入衆之法,佛在世時,聖衆所行,以至于今,佛泥洹已來,四大塔處相承不絕。四大塔者,佛生處、得道處、轉法輪處、般泥洹處。阿育王昔作小兒時,當道戲,遇迦葉佛,行乞食,小兒歡喜,卽以一掬土施佛。佛持還泥經行地,因此果報,作鐵輪王,王閻浮提。乘鐵輪,案行閻浮提。見鐵圍兩山閒地獄治罪人,卽問群臣:‘此是何等?’答言:‘是鬼王閻羅王治罪人。’王自念言:鬼王尚能作地獄治罪人,我是人主,何不作地獄治罪人耶?卽問臣等:‘誰能爲我作地獄,主治罪人者?’臣答言:‘唯有極惡人能作耳。’王卽遣臣遍求惡人,見池水邊,有一人長壯黑色髮黃,目靑,以腳鉤魚,口呼禽獸。禽獸來便射殺,無得脫者。得此人已,將來與王。王密勅之:‘汝作四方高牆,內植種種華果,作好浴池,莊嚴挍飾,令人渴仰。牢作門戶,有人入者,輒捉種種治罪,莫使得出。設使我入,亦治罪莫放。今拜汝作地獄主。’時有比丘,次第乞食,入其門。獄卒見之,便欲治罪。比丘惶怖求請,須臾聽我中食。俄頃復有人入,獄卒內置碓臼中擣之。赤沫出,比丘見已,思惟此身無常、苦、空,如泡如沫,卽得阿羅漢果。旣而獄卒捉內鑊湯中比丘,心顏欣悅,火滅湯冷。中生蓮華,比丘坐上。爾時,獄卒卽往白王。獄中有奇怪,願王往看。王言:‘我前有要,今不敢往。’獄卒言:‘此非小事,王宜疾往。’更改先要,王卽隨入。比丘爲王說法。王得信解,卽壞地獄,悔前所作衆惡。由是信重三寶,常至貝多樹下,悔過自責。受八戒齋,王夫人問王;‘常遊何處?’群臣荅言:‘恒在貝多樹下。’夫人伺王不在時,遣人伐其樹倒。王來見之,迷悶躄地。諸臣以水灑面,良久乃蘇。王卽以塼累四邊,以百甖牛乳灌樹根。身四枝布地作是誓言:‘若樹不生我終不起。’作是誓已,樹便卽根上而生。以至于今高,減十丈。從此南三里,行到一山,名鷄足。大迦葉今在此山中。擘山下入入處不容,人下入極遠,有旁孔。迦葉全身在此中住。孔外有迦葉本洗手土,彼方人若頭痛者,以此土塗之,卽差。此山中,卽日故有諸羅漢住彼。諸國道人年年往供養迦葉,心濃至者,夜卽有羅漢來共言。論釋其疑已,忽然不現。此山榛木茂盛。又多師子、虎狼,不可妄行。法顯還向巴連弗邑,順恒水西下十由延,得一精舍,名曠野。佛所住處,今現有僧。復順恒水,西行十二由延,到迦尸國波羅柰城。城東北十里許,得仙人鹿野苑精舍。此苑本有辟支佛住,常有野鹿拪宿。世尊將成道,諸天於空中唱言:‘白淨王子出家學道,卻後七日,當成佛。’辟支佛聞已,卽取泥洹。故名此處爲仙人鹿野苑。世尊成道已後,人於此處,起精舍。佛欲度拘驎等五人,五人相謂言:‘此瞿曇沙門六年苦行,日食一麻一米,尚不得道。況入人閒,恣身口意,何道之有?今日來者,愼勿與語。’佛到,五人皆起作禮處。復北行六十步,佛於此東向坐,始轉法輪,度拘驎等五人處。其北二十步,佛爲彌勒授記處。其南五十步,翳羅鉢龍問:‘佛我何時得免此龍身?’此處皆起塔,見在。中有二僧伽藍,悉有僧住。自鹿野苑精舍,西北行十三由旬,有國名拘睒彌。其精舍名瞿師羅園。佛昔住處,今故有衆僧。多小乘學。從是東行八由延,佛本於此,度惡鬼處。亦常在此住經行坐處。皆起塔,亦有僧伽藍,可百餘僧。從此南行二百由延,有國名達嚫。是過去迦葉佛僧伽藍,穿大石山作之。凡有五重,最下重作象形,有五百閒石室。第二層作師子形,有四百閒,第三層作馬形,有三百間,第四層作牛形,有二百閒,第五層作鴿形,有一百閒,最上有泉水循石室前繞房,而流周圍,迴曲如是,乃至下重,順房流,從戶而出。諸僧室中處處穿石,作窗牖通明,室中朗然,都無幽闇。其室四角,穿石作梯蹬。上處今人形小緣梯上,正得至昔人一腳躡處,因名此寺,爲波羅越。波羅越者,天竺名鴿也。其寺中,常有羅漢住。此土丘荒,無人民居。去山極遠,方有村,皆是邪見不識佛法。沙門、婆羅門及諸異學彼國人民常見飛人來入此寺。于時,諸國道人欲來禮此寺者,彼村人則言:‘汝何以不飛耶?我見此閒道人,皆飛道人。’方便答言:‘翅未成耳。’達嚫國幽嶮,道路艱難,難知處欲往者,要當齎錢,貨施彼國王。王然後,遣人送,展轉相付,示其逕路。法顯竟不得往,承彼土人言故,說之耳。從彼波羅柰國,東行還到巴連弗邑。法顯本求戒律,而北天竺諸國,皆師師口傳,無本可寫。是以遠涉,乃至中天竺,於此摩訶衍僧伽藍,得一部律。是摩訶僧祇衆律。佛在世時,最初大衆所行也。於祇洹精舍,傳其本,自餘十八部,各有師資,大歸不異,然小小不同。或用開塞,但此最是廣說備悉者復得一部抄律,可七千偈。是薩婆多衆律,卽此秦地衆僧所行者也。亦皆師師口相傳授,不書之於文字。復於此衆中,得雜阿毘曇心,可六千偈。又得一部經二千五百偈,又得一卷方等般泥洹經,可五千偈,又得摩訶僧祇、阿毘曇故,法顯住此三年,學梵書、梵語,寫律。道整旣到中國,見沙門法則,衆僧威儀觸事可觀。乃追歎秦土邊地衆僧戒律殘缺。誓言:‘自今已去,至得佛願不生邊地。’故遂停不歸。法顯本心欲令戒律流通漢地。於是獨還,順恒水,東下十八由延,其南岸有瞻波大國。佛精舍經行處及四佛坐處,悉起塔,現有僧住。從此東行,近五十由延,到摩梨帝國。卽是海口,其國有二十四僧伽藍,盡有僧住,佛法亦興。法顯住此二年,寫經及畫像。於是載商人大舶泛海,西南行,得冬初信風,晝夜十四日,到師子國。彼國人云:‘相去可七百由延。’其國本在洲上,東西五十由延,南北三十由延,左右小洲乃有百數。其閒相去或十里、二十里,或二百里,皆統屬大洲。多出珍寶珠璣,有出摩尼珠地,方可十里。王使人守護,若有採者,十分取三。其國本無人民,正有鬼神及龍居之。諸國商人共市易,市易時,鬼神不自現身,但出寶物,題其價直。商人則依價雇直取物,因商人來往住,故諸國人聞其土樂,悉亦復來。於是遂成大國。其國和適,無冬夏之異。草木常茂,田種隨人,無有時節。佛至其國,欲化惡龍,以神足力,一足躡王城北,一足躡山頂,兩迹相去十五由延。王於城北迹上,起大塔,高四十丈,金銀莊挍,衆寶合成。塔邊復起一僧伽藍,名無畏山。有五千僧。起一佛殿,金銀刻鏤,悉以衆寶。中有一靑玉像,高三丈許,通身七寶。焰光威相嚴顯,非言所載。右掌中,有一無價寶珠。法顯去漢地,積年所與交接,悉異域人。山川草木擧目無舊。又同行分披,或流或亡,顧影唯己,心常懷悲。忽於此玉像邊,見商人以一白絹扇供養,不覺悽然淚下滿目。其國前王,遣使中國,取貝多樹子,於佛殿傍種之。高可二十丈,其樹東南,傾,王恐倒故,以八九圍柱柱樹。樹當柱處,心生遂穿柱而下,入地成根。大可四圍許,柱雖中裂,猶裹其外。人亦不去,樹下起精舍,中有坐像,道俗敬仰無倦。城中又起佛齒精舍,皆七寶作。王淨修梵行,城內人敬信之情亦篤#其國立治已來,無有飢荒喪亂,衆僧庫藏多有珍寶、無價摩尼。其王入僧庫,遊觀見摩尼珠,卽生貪心,欲奪取之。三日乃悟,卽詣僧中,稽首悔前罪心,因白僧言:‘願僧立制,自今已後,勿聽王入庫看。比丘滿四十臈,然後得入。’其城中,多居士、長者、薩薄商人,屋宇嚴麗,巷陌平整,四衢道頭,皆作說法堂。月八日、十四日、十五日,鋪施高座,道俗四衆皆集聽法。其國人云:都可六萬僧。悉有衆食,王別於城內,供養五六千人。衆食須者,則持大鉢往取。隨器所容,皆滿而還。佛齒常以三月中出之。未出前十日,王莊挍大象,使一辯說人,著王衣服,騎象上,擊鼓唱言:‘菩薩從三阿僧祇劫作行,不惜身命,以國城、妻子,及挑眼與人,割肉貿鴿,截頭布施,投身餓虎,不悋髓腦。如是種種苦行,爲衆生故,成佛。在世四十五年,說法教化,令不安者安,不度者度,衆生緣盡,乃般泥洹。泥洹已來,一千四百九十七歲,世閒眼滅,衆生長悲。卻後十日,佛齒當出,至無畏山精舍。國內道俗欲殖福者,各各平治道路,嚴飾巷陌,辦衆華香供養之具。’如是唱已,王便夾道兩邊,作菩薩五百身已,來種種變現。或作須大拏,或作睒變,或作象王,或作鹿馬,如是形像皆彩畫莊挍,狀若生人。然後佛齒乃出,中道而行,隨路供養,到無畏精舍佛堂上。道俗雲集,燒香然燈,種種法事晝夜不息,滿九十日,乃還城內精舍。城內精舍至齋日,則開門戶,禮敬如法。無畏精舍東四十里,有一山,中有精舍,名支提,可有二千僧。僧中有一大德沙門,名達摩瞿諦。其國人民皆共宗仰。住一石室中,四十許年,常行慈心,能感蛇鼠,使同止一室,而不相害。城南七里,有一精舍,名摩訶毘呵羅。有三千僧住。有一高德沙門,戒行淸潔,國人咸疑,是羅漢。臨終之時,王來省視,依法集僧,而問比丘得道耶?其便以實答言是羅漢。旣終,王卽按經律,以羅漢法葬之。於精舍東四五里,積好大薪,縱廣可三丈餘,高亦爾,近上著栴檀沈水諸香木。四邊作階,上持淨好白㲲,周帀蒙積,作大輿狀似。此閒輀車但無龍魚耳。當闍維時王及國人四衆咸集,以華香供養。從輿至墓所,王自華香供養。供養訖,擧著𧂐上,以酥油遍灌。然後燒之,火然時,人人敬心,各脫上服及羽儀、傘蓋,遙擲火中,以助闍維。闍維已,收斂取骨。卽以起塔。法顯至,不及其生存,唯見葬時。王篤信佛法,欲爲衆僧,作新精舍,先設大會,飯食供養已,乃選好上牛一雙,金銀寶物莊挍角上,作好金犂王,自耕墾,規郭四邊。然後割給民戶田宅,書以鐵券。自是已後,代代相承,無敢廢易。法顯在此國,聞天竺道人,於高座上,誦經云。佛鉢本在毘舍離,今在揵陁衛竟若干百年法顯聞誦時有定歲數但今忘耳當復至西月氏國,若干百年,當至于闐國。住若干百年,當至屈茨國。若干百年當復至師子國。若干百年當復來到漢地。若干百年當還中天竺已,當上兜術天上。彌勒菩薩見而嘆曰:‘釋迦文佛鉢至。’卽共諸天,華香供養七日,七日已,還閻浮提。海龍王將入龍宮,至彌勒將成道時,鉢還分爲四。復本頞那山上。彌勒成道已,四天王當復應念佛,如先佛法。賢劫千佛共用一鉢,鉢去已,佛法漸滅。佛法滅後,人壽轉短,乃至五歲。五歲之時,粳米、酥油皆悉化滅。人民極惡,捉草木則變成刀杖,共相傷割。其中有福者,逃避入山。惡人相殺盡已,還復來出,共相謂言:‘昔,人壽極長,但爲惡甚,作非法故,我等壽命遂爾短促,乃至五歲。我今共行諸善,起慈悲心,修行信義。’如是各行信義,展轉壽倍,乃至八萬歲。彌勒出世初轉法輪時,先度釋迦遺法中弟子,出家人及受三歸五戒,八齋法供養三寶者。第二、第三次度有緣者。法顯爾時,欲寫此經,其人云:‘此無經本,我心口誦耳。’法顯住此國二年,更求得彌沙塞律藏本,得長阿含、雜阿含,復得一部雜藏。此悉漢土所無者,得此梵本已卽載商人。大舶上,可有二百餘人。後係一小舶,海行艱嶮,以備大舶毀壞。得好信風,東下三日,便値大風。舶漏水入,商人欲趣小舶小舶上人恐人來多,卽斫絙斷。商人大怖#命在須臾,恐舶水滿。卽取麤財貨擲著水中。法顯亦以君墀及澡罐幷餘物棄擲海中。但恐商人擲去經像,唯一心念觀世音及歸命。漢地衆僧我遠行求法,願威神歸流#得到所止。如是大風#晝夜十三日#到一島邊。潮退之後,見舩漏處,卽補塞之。於是復前海中,多有抄賊,遇輒無全#大海彌漫無邊,不識東西。唯望日月星宿而進。若陰雨時,爲逐風去,亦無所准。當夜闇時,但見大浪相搏,晃若火色,黿鼉水性怪異之屬。商人荒懅,不知那向#海深無底。又無下石住處,至天晴已#乃知東西,還復望正而進。若値伏石#則無活路。如是九十許日,乃到一國#名耶婆提。其國外道婆羅門興盛,佛法不足言。停此國五月日,復隨他商人,大舶上,亦二百許人。齎五十日糧以四月十六日發。法顯於舶上安居#東北行趣廣州,一月餘日。夜鼓二時,遇黑風暴雨。商人賈客皆悉惶怖。法顯爾時,亦一心念觀世音及漢地衆僧蒙威神祐,得至天曉。曉已諸婆羅門議言:‘坐載此沙門使我不利遭此#大苦。當下比丘置海島邊不可爲一人#令我等危嶮。’法顯檀越言:‘汝若下此比丘,亦幷下我。不爾,便當殺我。如其下此沙門,吾到漢地,當向國王,言汝也。漢地王亦敬信佛法,重比丘僧。’諸商人躊#躇不敢便下。于時,天多連陰。海師相#望僻誤遂經七十餘日糧食、水漿欲盡#取海鹹水作食分好水人可得二升。#遂便欲盡。商人議言:‘常行時#政可五十日便到廣州。今已過期多日#將無僻耶?’卽便西北行求岸。晝夜十二日到長廣郡界牢山南岸。便得好水菜。但經涉險難憂懼積日忽得至此岸。#見藜藿菜依然知是漢地然不見人#民及行迹未知是何許。或言未至廣州或言已過,莫知所定,卽乘小舶入浦覓人,欲問其處得兩獵人,卽將歸。令法顯譯語問之#法顯先安慰之#徐問:‘汝是何人?’答言:‘我是佛弟子。’又問:‘汝入山何所求?’其便詭言:‘明當七月十五日欲取桃臈佛。’又問:‘此是何國’答言;‘此靑州長廣郡界,統屬晉家。’聞已,商人歡喜,卽乞其財物,遣人往長廣郡。太守李嶷敬信佛法,聞有沙門,持經像,乘舶泛海而至。卽將人從來至海邊,迎接經像,歸至郡治。商人於是,還向楊州,到靑州,請法顯一冬一夏。夏坐訖法顯離諸師#久欲趣長安但所營事重遂便南下向都。就禪#師出經律藏法顯發長安,六年到中#印國停經六年還經三年達靑州凡#所遊履減三十國。沙河已西迄于天#竺,衆、僧威儀法化之美不可詳說竊#惟諸師未得備聞,是以不顧微命,浮海而還。艱難具更,幸蒙三尊威靈,危而得濟。故將竹帛,疏所經歷,欲令賢者,同其聞見。是歲甲寅,晉義熙十二年矣。歲在壽星,夏安居末,迎法顯道人,旣至,留共冬齋,因講集之餘,重問遊歷。其人恭順,言輒依實,由是先所略者,勸令詳載。顯復具敍始末#自云顧尋所經,不覺心動汗流。所以乘危履險不惜此形者,蓋是志有所存,專其愚直。故投命於必死之地,以達萬一之冀。於是感歎斯人,以爲古今罕有。自大教東流,未有忘身求法,如顯之比。然後知誠之所感,無窮否而不通,志之所將,無功業而不成。成夫功業者,豈不由忘夫所重,重夫所忘者哉!法顯傳一卷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당(唐)나라의 서울로 지금의 서안(西安).
- 2)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과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는 홍시 2년으로 되어 있으나 동양 연표(東洋年表)에는 홍시는 후진(後秦)의 연호로서 기해년은 홍시 원년(A.D. 399)이며 동시에 동진의 융안(隆安) 3년에 해당된다고 하므로 역자는 이를 따랐다.
- 3)한(漢)나라 때의 천수군(天水郡). 당(唐)나라 때의 농주(隴州)로서 지금의 농현(隴縣)이다.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경계에 농산(隴山)이 있다.
- 4)지금의 감숙성 정원현(靖遠縣)의 서쪽에 해당되는데, 건귀(乾歸)는 동진(東晋)의 태원(太元) 13년에 임금이 되었다가 융안(隆安) 4년(400)에 후진(後秦)에 항복하였다.
- 5)남량(南凉)의 경왕(景王)이 독발욕단(禿髮褥檀)의 거성(居城)인 낙도(樂都)로서 지금의 감숙성 서녕부(西寧府) 연박현(碾泊縣)에 해당된다. 처음 융안 3년에 독발오고(禿髮烏孤)가 죽자 그 아우 독발리록고(禿髮利鹿孤)가 왕위에 올랐다. 욕단은 독발리록고의 아우로서 융안 5년(401)에 도독중외제군사 양주목(都督中外諸軍事 凉州牧)이 되어 그 형 이록고를 도와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았다. 원흥(元興) 원년(402) 3월 이록고가 병사하자 욕단이 그 자리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뒤에 의희(義熙) 10년(414) 7월에 서진(西秦)에게 멸망되었다. 법현이 여기에 도착한 것은 욕단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이었지만 욕단국이라고 불렀다.
- 6)서녕현(西寧縣)의 북쪽 대통하(大通河)의 남쪽에 누워 있는 산맥으로 양녀산(養女山)으로 통한다.
- 7)북량왕(北凉王) 단업(段業)의 거성으로 한의 장액군(張掖郡), 지금의 감숙성 장액현(張掖縣)이다.
- 8)본시는 북량왕 단업인데 장액진을 거성으로 하였기 때문에 장액왕 단업이라고 한 것이다. 단업은 우둔하고 나약하여 재략이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융안 3년 2월에 북량왕이 되었는데 저거몽손(沮渠蒙遜)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삼고 융안 4년(400) 4월 이호(李暠)를 돈황태수(燉煌太守)로 삼았다. 그러나 뒤에 다시 이호를 대신하여 색사(索嗣)를 돈황태수로 삼자 이호가 크게 분노하여 색사를 공격하였다. 색사가 패하여 장액으로 돌아오자 단업은 겁이 나서 색사를 죽이고 이호에게 사죄하였다고 한다. 장액에 대란이 일어나 도로가 불통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호는 뒤에 서량(西凉)의 주인이 된다.
- 9)법현 출발 후 두 번째의 하안거로서 융안 4년(400)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이다.
- 10)한나라의 돈황군. 현재의 감숙성 돈황현으로 당대(唐代)에는 사주(沙州)라고도 하였는데, 실크로드상의 교통 요지로 불교 또한 매우 성했던 곳이다.
- 11)한나라의 누란국(樓蘭國). 동진(東晉)의 태원(太元) 7년(382)에 선선국 왕이 전진(前秦)의 대병을 거느리고 서역(西域)을 침범한 사실이 있었으나 지금 그곳에는 선선국 또한 이미 매몰되어 그 자취를 찾을 길 없다.
- 12)한나라의 언기국(焉耆國)으로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는 아기니국(阿耆尼國)이라 하였다. 또 청조(淸朝)에서는 객나사이(喀喇沙爾)라 하였으며 현재의 언기현(焉耆縣)이 이에 해당된다.
- 13)지엄은 그 후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맞이하여 함께 장안으로 돌아가 그에게 사사하다가 진승(秦僧)의 배격을 받게 되어 함께 산동(山東)을 지나 건강(建康:현재의 南京)에 이르렀다. 그는 만년에 해로로 인도에 갔다가 다시 계빈국에 이르러 78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혜간ㆍ혜외는 둘 다 그 이후의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 14)진(晋)의 고창군(高昌郡), 청의 토로번청(吐魯番廳)으로 현재의 투루판(Turfan)이다.
- 15)현재의 호탄(Khotan)으로 『대당서역기』에서는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이라 하고 있는 곳. 타클라마칸사막의 서남쪽에 위치한 인도와 페르시아 간의 교통의 요충지로 땅이 기름진 옛날부터 일대 강국이었다.
- 16)국왕이 음식을 마련하여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 『대당서역기』에 보면 이러한 모습을 잘 알 수가 있으니 즉 11권 승가라국(僧伽羅國) 항(項)에 ”왕궁 옆에 큰 주방을 세워 하루에 1만 8천 명의 승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나니 식사 때가 되면 승도(僧徒)들은 발우를 들고 와서 음식을 받아 식사를 마치고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간다.”고 하여 중식의 상황을 알게 하여 준다.
- 17)Ghaṇṭa의 음역으로 건추(楗椎)로도 쓴다. 종ㆍ목탁 등 두드려서 소리를 내게 하여 신호하는 것의 하나이다.
- 18)총령산맥(蔥嶺山脈) 중 인더스강 북안(北岸)의 한 나라. 기사국(奇沙國) 또는 소발률국(小勃律國)이라고도 한다.
- 19)인도에선 월(月)의 전반을 흑월(黑月), 후반을 백월이라고 한다.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자월(自月)’로 되어 있으나 신수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본에는 자(自)가 사(四)로, 궁(宮)본에는 백(白)으로 되어 있다. 역자는 궁본을 따랐다.善
- 20)영동이란 총령산맥의 동쪽을 가리키며, 여섯 나라란 선선(鄯善)ㆍ단말(旦沫)ㆍ정절(精絶)ㆍ우미(扜彌)ㆍ우전(于闐)ㆍ사거(沙車)의 6국을 말한다.
- 21)지엄ㆍ혜간ㆍ혜외는 오이국에서 고창으로 가 버렸고, 혜경ㆍ도정ㆍ혜달은 우전국에서 갈차국으로 직행하였으며, 승소는 홀로 계빈국으로 향했으므로 여기에서 법현 등이라고 함은 곧 법현ㆍ혜응ㆍ보운ㆍ승경의 4인을 가리킨다.
- 22)원래는 유목민이었는데 한ㆍ진ㆍ당대를 통해 점차 강대하여지고 불법도 성해진 나라로, 우전의 서쪽 1천 리, 소륵(疏勒)의 동남 8,9백 리, 총령까지는 약 3백 리의 지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의 kujar에 비정된다.
- 23)총령산맥이란 파미르고원의 산들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단지 총령이라고도 한다.
- 24)총령 중의 한 소국으로 오차국(烏秅國)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Agzi에 해당된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조용하고 한가로워 머물러 수도하기에 적합한 신령스런 도량이라 한다.
- 25)세 번째 하안거로서 융안 5년(401)의 일이다. 그런데 법현은 인도의 4월 15일에 해당하는 날 행상이 끝난 후, 우전을 출발하여 도중 25일, 자합국 체재 15일, 다시 남으로 여행한 지 4일 만에 오휘국에 이르러 중국의 6월 16일에 해당하는 날에 안거에 든 것이다. 4월 16일 하안거에 드는 정해진 날보다 40여 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생각건대 인도의 법에 따라 후안거(後安居:6월 16일~8월 15일)에 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이후 법현은 인도에 들어가 계속 후안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 26)Pancavarsika의 번역으로 반차우필(般遮于必)이라고도 한다. 국왕이 5년마다 여는 대재회(大齋會)를 말한다.
- 27)산남(山南) 지방에서 산출되는 엷고 가벼운 견사(絹絲)로서 옛날부터 보배와 같이 귀중하게 여겼다.
- 28)안거를 마친 후 승랍이 1년 더 늘어나는 것.
- 29)파미르(Pamir)고원이나 카라코람(Karakoram)산맥 또는 서부 히말라야산맥에는 특유한 열풍(熱風)이 있어 때때로 눈이나 비, 그리고 사석(砂石)을 날려 사나운 위세를 떨치는데, 이것을 독룡의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 30)인더스강의 한 지류인 KishanGanga의 상류의 계곡에 있던 Tilail국.
- 31)Madhyāntika(末田底迦ㆍ末田地ㆍ摩彈提ㆍ末彈提 등으로 음역된다.)를 가리키는 인명인데, 그는 아소카왕의 즉위 18년에 파견되어 계빈국에 포교를 담당했던 고승이다.
- 32)한(漢) 무제(武帝) 때의 사람으로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됐는데 도중에 흉노족에 붙잡혀 10여 년을 감금당했다. 요행히 도망하여 대원국(大宛國)ㆍ강거(康居)ㆍ대월지국에 이르러 목적을 달성하였고, 뒤에 다시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오손(烏孫)에 이르러 대원ㆍ강거ㆍ대하(大夏) 등에 부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서역 제국(西域諸國)이 처음으로 한나라와 교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 33)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지낸 바 있다.
- 34)후한 명제(明帝)가 영평(永平) 10년(A.D. 67) 금(金)으로 된 사람이 뜰에 내리는 꿈을 꾸고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을 가리킨다.
- 35)인더스강의 한 지류인 Swat강 유역에 번영하였던 고대 왕국인 udyana로, 달리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서는 오장국(烏場國),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서는 오장나국(烏仗那國)으로도 번역된다. 불타의 전설적인 유적이 많은데, 수도는 현재의 Mirgora이다.
- 36)고대로부터 인도인들은 인도의 오장국 지방을 중앙에 있는 나라라고 해서 중국이라 하였다.
- 37)불타의 족적(足跡)을 돌에 조각한 것.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佛像) 대신 법륜(法輪)이나 불족적(佛足跡) 또는 연화좌대(蓮華座臺) 등을 돌에 새겨 예배하였다.
- 38)『낙양가람기』 제5권에 보면 부처님께서 오장국에 이르셨을 때 용왕이 노해서 큰 비를 내리게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사는 속까지 젖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느 큰 바위 밑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앉으시고 가사를 바위 위에 널어 말리셨는데 그 바위에는 가사의 무늬가 선명하게 남았다고 한다. 바로 그 바위를 가리킨다.
- 39)『대당서역기』 제3권에 보면 오장국의 동북 스와트강의 원류(源流)가 되는 곳에 부처님께서 농사에 해를 끼치는 악룡을 제도하신 곳이 있다고 한다.
- 40)현재의 Nagarahara로 『대당서역기』에서는 나게라갈국(那揭羅葛國)이라 하고 있다.
- 41)네 번째의 하안거로 동진 원흥(元興) 2년(402)에 해당된다.
- 42)지금의 스와트(Swat) 지방에 해당된다.
- 43)『자타카(Jātaka)』라고 불리는 불본생담(佛本生譚)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전세에 시비왕(尸毘王)으로 계셨을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매에 쫓겨 도망치다가 시비왕의 옷자락 속에 숨었다. 매는 왕에게 비둘기를 내놓든가 그렇지 않으면 왕의 살점을 비둘기의 양(量)만큼 떼어 주라고 요구하였다. 왕은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잘라 주었으나 모자라서 팔의 살, 겨드랑이의 살을 떼어 주었다. 그러나 역시 모자라다고 하여 드디어 전신을 저울에 올려놓아 그 비둘기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자타카』 499, 『보살본생만론(菩薩本生鬘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권 등에 보인다.
- 44)Gandhara의 음역인데, 달리 건타라국(乾陀羅國)[『아육왕경』 제2, 또는 『낙양가람기』 제5권], 건타라국(乾陀羅國)[『대당서역기』], 건타라국(建陀羅國)[『왕오천축국전』] 등으로도 음역되고 있다.
- 45)석존이 전세에 일월명왕(日月明王)이었을 때, 거리에서 구걸하던 맹인을 만나 어떤 약이 좋으냐고 물었는데 맹인은 왕의 눈만이 자기 눈을 밝게 하는 약이 된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즉시 자기 두 눈을 빼내 그 맹인에게 주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고 하는 본생담. 『현우경(賢愚經)』 제6권 및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 등에 나온다.
- 46)범어의 Taksasila를 음역한 말인데, 달리 달시라(呾尸羅), 득차시라(得叉尸羅) 또는 달차시라(呾叉尸羅) 등으로도 음역된다. 현재의 Taxila로 고대로부터 서북 인도의 요충지로 1913년 이래 22년에 걸친 J. Marshall의 발굴로 희랍 문화와 불교 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이 밝혀진 바가 있다.
- 47)석존이 전세에 월광왕(月光王)이었을 때 변경의 비마시나왕은 월광왕의 소문을 듣고 약한 바라문인 로오드샤를 보내 왕의 머리를 구하게 하였다. 왕은 7일간의 말미를 얻어 왕비와 여러 신하들과 결별하고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고 하는 월광왕의 설화인데 『육도집경(六度集經)』 제1권, 『현우경』 제6권 등에 나온다.
- 48)석존이 전세에 마하살타 왕자(摩訶薩陀王子)였을 때, 어느 날 두 형과 함께 산림에서 노닐고 있었다. 마침 호랑이가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고 7일이 지났는데 굶주린 어미 호랑이를 둘러싸고 젖을 빨려고 야단들이었다. 왕자는 그 광경을 보고 대비심을 발하여 자기의 전신(全身)을 버리고자 먼저 두 형을 돌아가게 하고는 홀로 숲 속으로 들어가 굶주린 호랑이 곁에 가서 옷을 벗고 누워 버렸다. 그러나 호랑이는 왕자의 자비로운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덤벼들지 못하였다. 왕자는 이를 보고 높은 곳에 올라가 몸을 던져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산신(山神)이 왕자를 받아서 왕자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왕자는 마른 대꼬챙이로 목을 찔러 선혈을 흘리면서 호랑이 곁으로 다가갔다. 굶주린 호랑이는 유혈을 보자 피를 빨면서 왕자를 잡아먹었다는 본생담으로, 이는 『최승왕경(最勝王經)』 「신사품(身捨品)」, 『육도집경』 제1권,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 『현우경』 제1권, 『보살본생경(菩薩本生經)』 등에 보인다.
- 49)불루사는 Puruṣapura의 음역으로 지금의 Peshawar에 해당된다. 『낙양가람기』 제5권에서는 불사복성(佛沙伏城), 『대당서역기』 제2권에서는 포로사포라성(布路沙布羅城)이라 했다.
- 50)카니시카(Kaniska)의 음역으로 가니색가(迦膩色伽)로도 쓴다. 대월지국 쿠샨(Kushan) 왕조의 제3대 왕으로 2세기 때의 인물이다. 그는 서북 인도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남쪽은 Vindhya 산맥으로부터 북쪽은 중앙아시아, 서쪽은 이란의 일부까지도 석권하여 아소카왕 이래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의 불교 보호 정책은 아소카왕에 비할 만큼 너무도 유명하다.
- 51)『낙양가람기』 제5권에서 말하는 작리부도(雀離浮圖)인데 여기서도 거의 같은 설화를 말하고 있다. 『낙양가람기』에서는 탑의 높이를 4백 척, 탑 위의 철주(鐵柱)의 높이 3백 척, 합계 7백 척이라 했다.
- 52)잠부디파(Jambudipa)의 음역으로 수미산(須彌山) 남쪽에 있는 4대주의 하나. 본래는 인도를 가리켰으나 뒤에는 인간 세계를 가리키게 되었다.
- 53)부처님께서 생존 시 지니고 사용하시던 돌로 된 발우(鉢盂).
- 54)네 개의 융기(隆起)를 가리키니, 부처님께서 성도하셨을 때, 사천왕이 각각 청석(靑石)의 발우를 바쳤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발우로 하나의 발우를 만드셨기 때문에 부처님 발우의 외측에는 네 개의 융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제8권에 보인다.
- 55)요자나(Yojana)의 음역으로 유순(由旬)ㆍ유선나(踰繕那) 등으로도 쓴다. 인도의 거리 단위로 고대 인도 군인의 1일 행정(行程)을 말한다.
- 56)혜라(醯羅)는 Hilla의 음역인데 Hilla란 범어의 변화어(變化語)로 골(骨)의 뜻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불정골성(佛頂骨城)으로 유명한데 지금의 지명은 Hiḍa이다.
- 57)광불이란 범어의 Dīpānkara-Buddha를 번역한 것인데 연등불(燃燈佛)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옛날에 정광불의 출세를 만나 다섯 줄기의 연화를 사서 정광불에게 공양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풀어 니토(泥土)에 깔고 정광불로 하여금 그 머리카락을 밟으시게 하여 미래 성불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11권, 『불본행집경』 제3권 등에 보인다.
- 58)인도산 전단을 말하는데, 인도의 전단은 마리산(摩梨山:일명 摩羅那山)으로부터 산출되지만 이 산의 암봉우리가 소머리와 닮았다 하여 우두전단이란 이름이 붙었다.
- 59)승가리란 범어의 Samghāti의 음역으로 가사(袈娑)를 뜻한다. 『낙양가람기』 제5권에서는 이 승가리를 모신 절을 기하반사(耆賀盤寺)라 하고 있다.
- 60)벽지불은 범어인 Pratyeka-Buddha의 역으로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출세를 만나 12인연의 이치를 깨달아 미혹됨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무불(無佛)의 세상에서 천지자연의 변화와 같은 외연(外緣)에 의해서 미혹을 끊고 이치를 깨닫는 것을 독각(獨覺)이라고 한다.
- 61)3인이란 법현과 불정골사에서 요양 중이던 혜경 그리고 그를 간호하고 있던 도정의 3인을 가리킨다.
- 62)Sefid-Kuh 산맥을 가리키는데, 이는 Sulaiman 산맥의 동북부에 있다.
- 63)앞서 불루사국의 불발사에서 혜경이 입적했다고 하였는데, 그곳에서는 혜응이 입적하였고, 이 소설산에서는 혜경이 입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 64)인더스강 상류의 서쪽 Kurram강 남쪽 기슭에 있는, 현재 지명이 Lakky인 곳으로 추정된다.
- 65)다섯 번째의 하안거로 동진 원흥 2년(403)의 일이다.
- 66)『대당서역기』에서는 벌자라국(伐刺羅國)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Harana(Harnai)에 해당된다. 『대당서역기』 제11권에 의해 살펴보면 벌자라국은 신도국(信度國)의 동북 9백여 리에 있으며, 나라의 둘레 4천여 리, 도성 둘레 2천여 리의 대국으로 예로부터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다고 한다. 이곳은 가필시국(迦畢試國)ㆍ북인도ㆍ중인도, 그리고 신도국을 넘나드는 행로의 교차점에 위치한 중요 지점이다.
- 67)학자에 따라서 비다국의 현재의 위치에 대한 견해가 다른데 Ponjab 지방의 Bhida로 추정하는 Giles와 Beal의 견해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 68)Mathur의 음역으로, 마투라(摩偸羅)ㆍ마돌라(摩突羅)ㆍ말토라(秣菟羅) 등으로 음역되기도 하며, 공작(孔雀) 또는 밀선(密善)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지금의 Muttra로 Jumna하(河)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고래로 유명한 도시이다.
- 69)지금의 Jumna River로 갠지스강의 지류인데, 옛날에는 이를 야무나(Yamun)강이라 불렀으며 포나하(蒱那河:捕那河), 박나하(縛那河) 또는 포나반하(捕那般河) 등의 한역은 야무나강의 번역인 것이다.
- 70)Chandāra의 음역으로 전타라(旃陀羅)라고도 한다. 사성 계급에 들지 않는 부류로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는 사람들.
- 71)중앙아시아 및 인도에는 철판이나 동판에 토지를 하사하는 글을 적은 것이 많은데 이것은 후세에 영구히 그러한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 72)부처님께서 식사하는 시간을 정한 오시(午時) 이후의 시간을 비시(非時)라고 하는데 비시에는 음식을 금한다. 다만 소유(蘇油)ㆍ밀(蜜)ㆍ석밀(石蜜)ㆍ과즙(果汁) 등은 마실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을 비시장이라 한다.
- 73)라훌라(Rāhula)의 음역으로 보통 라후라(羅睺羅)라고 많이 부른다. 부처님의 아들이자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한다.
- 74)마하야나(Mahāyāna)의 약음역(略音譯)으로 대승을 가리킨다.
- 75)Srmghasya의 음역으로 승가사(僧伽舍:僧伽沙)라고도 한다. 『대당서역기』에서 말하는 겁비타국(劫比他國)으로 현재의 Etah 지방의 Sankisa이다.
- 76)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있으며 천제석(天帝釋)의 주처(住處)라고 한다.
- 77)오신통(五神通)의 하나로 여의통(如意通)이라고도 하며 어디든지 자유로이 왕래를 할 수 있는 신통력.
- 78)Aniruddha의 음역으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한다.
- 79)Utpala의 음역으로 연화색(蓮華色)비구니라고도 한다. Ujiayani의 상가(商家)의 미녀로 복잡한 결혼 생활을 보낸 후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행에 힘써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 80)수미사주(須彌四洲)의 세계를 통솔하는 대왕으로 이 왕은 몸에 32상을 갖추고 즉위할 때에는 하늘로부터 윤보(輪寶)를 감득(感得)하고 이 윤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케 하므로 전륜왕이라 한다.
- 81)척도의 단위로 Hasta의 역어이다. 1척 5촌~1척 8촌 정도의 길이인데, 『대당서역기』에서는 이 석주의 높이를 70척이라 하여 이 『법현전』과의 차이가 크게 기술되어 있다.
- 82)석가모니불 이전에 출세하셨던 부처로 일곱 분이 계셨는데 이를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한다. 그중 네 번째의 구류손불(拘留孫佛), 다섯 번째의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여섯 번째의 가섭불(迦葉佛) 등 세 분을 과거 삼불이라고 한다.
- 83)여섯 번째의 하안거로 원흥 3년(404)의 일이다.
- 84)지금의 Kanauj로 갈나급(葛那及)ㆍ갈약국사(羯若鞠闍)ㆍ곡녀성(曲女城)이라고도 한다. 현장이 인도를 방문하던 당시에는 유명한 계일왕(戒日王)의 거성이었다.
- 85)Vaisākha의 약음역(略音譯)으로 지금의 Ayodhya지방으로 추측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여기에 보이는 양지식생(楊枝植生)의 설화는 『대당서역기』 제5권에도 나타나 있다.
- 86)구살라는 Kosalā, 사위성은 Śrāvast의 음역으로 단지 사위국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Balrāmpur 서북 약 19km의 Sahet-Mahet로서 Sahet는 기원정사의 터이고 Mahet는 사위성의 터이다.
- 87)Prasenajit의 음역으로 승군왕(勝軍王) 또는 명광왕(明光王)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재세(在世) 시의 구살라국왕으로 불교 교단의 큰 외호자(外護者)였다.
- 88)부처님의 이모이자 양모로 달리 대세주(大世主), 애도(愛道), 대애(大愛)라고도 한다.
- 89)Sudatta의 음역인 수달다(須達多)를 줄인 것으로 사위성의 한 장자(長者)의 이름. 그는 인정이 많아서 항상 빈궁한 사람이나 고독한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Anthapindada, 즉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라고 한다. 그는 황금을 땅에 깔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사서 정사를 짓고 부처님께 바쳤다. 바로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그것이다.
- 90)Aṅgulimāla의 음역으로 인명이다. 사람을 죽이고 난 후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었으며, 부처님까지도 죽이려 하였으나 부처님의 정법을 듣고 불도에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 91)Andhavana, 득안림(得眼林)의 역으로 안타림(安陀林)이라고도 한다.
- 92)비사거란 Viśākha의 음역으로 인명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비사거녹모(毗舍佉鹿母), 녹자모(鹿子母), 녹모(鹿母) 등으로도 쓴다. 앙가국 장자의 딸인 비사카가 사위성의 장자인 녹자(鹿子)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인 녹자가 비사카의 용모가 자기 어머니와 같다고 하여 비사카를 늘 녹자모라고 불렀다고 한다. 녹자모는 부처님께 귀의한 후 기원정사의 동쪽에 180만 금을 내고 목련이 감독해서 2층의 대강당을 세웠다. 이를 부처님께 바쳤는데, 이것을 녹자모강당, 동원녹자모강당(東園鹿子母講堂) 또는 동원정사라고 한다.
- 93)Sundarī의 음역으로 음녀(淫女)의 이름이다. 외도는 부처님을 비방하기 위해 손타리로 하여금 항상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하고 그 뒤에 그녀를 죽여서 기원 원중(祇洹園中)에 파묻었다. 시체가 발견된 후 외도는 부처님이 그녀를 범한 후 죽였다고 비방하였지만 도리어 진상이 밝혀져서 그 외도는 세상의 신용을 잃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당하셨던 10난(難) 중의 하나이다.
- 94)Ciñca-Manavia의 음역으로 바라문 여성의 이름이다. 여기에 나오는 설화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제173권, 『대당서역기』 제6권 등에 보인다.
- 95)Devadatta의 음역인 조바달다(調婆達多)의 약칭으로 제바달다(提婆達多) 또는 천수(天授)라고도 번역한다. 조달은 아난(Ānanda)의 형이며 석존의 사촌 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석존의 명성을 투기했는데 12년 간 수행 끝에 오신통(五神通)을 얻었고, 독이 묻은 손톱으로 석존을 상해하려 하였으나 왕사성(王舍城)으로 가는 도중 땅이 갈라져서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4권, 『대당서역기』 제6권 등에 보인다.
- 96)Punyaśāla 또는 Dharmasala를 번역한 말로, 인도나 네팔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무료 숙박소를 말한다.
- 97)Virdūdabha를 번역한 말로 악생왕(惡生王)이라고도 한다. 사위국 파사닉왕의 아들이다.
- 98)석존의 고국인 가비라국을 가리킨다.
- 99)Kāśyapa의 음역으로 음광(飮光)이라고도 한다. 과거 칠불(七佛)의 제6불이다.
- 100)Krakucchanda의 음역으로 구류손(拘留孫)ㆍ가라구손타(迦羅鳩孫陀)ㆍ구류손(俱留孫) 등으로도 번역된다. 과거 칠불의 제4불이다.
- 101)Kanakamuṇi의 음역으로 가나가모니(迦那迦牟尼), 구나함(俱那含) 등으로도 번역된다. 과거 칠불의 제5불이다.
- 102)Kapilavastu의 음역으로 가비라(迦毘羅) 또는 겁비라벌솔도(劫比羅伐4dk24堵) 등으로도 쓰인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생지(本生地)로 석가족(釋迦族)의 거성이었다.
- 103)Śuddhodana의 음역으로 정반왕(淨飯王)이라고도 한다. 석존의 부친이다.
- 104)석존의 생모(生母)를 가리킨다..
- 105)Asita의 음역으로 아사타(阿私陀) 또는 아사다(阿私多)라고도 쓴다. 선인(仙人)의 이름.
- 106)Upāli의 음역으로 부처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고 한다. 그는 본래 가빌라성 궁정(宮廷)의 이발사였다고 한다. 5백 명의 석가족이 출가할 때 제일 먼저 출가하여 499명의 정례(頂禮)를 받았다고 한다.
- 107)석존은 사위성으로부터 가비라성에 가서 근처의 니구율수(尼拘律樹) 밑에 앉아 정반왕의 행렬을 기다렸다. 석존은 부왕의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자 사자좌에 결가부좌하고 사천왕이 이를 호위했다. 그러자 부왕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 108)Nyagrodha의 음역으로 니구수(尼拘樹) 또는 니구류수(尼拘類樹)로도 쓴다. 다근수(多根樹)라고 하며 용수(榕樹)이다.
- 109)승가리란 곧 가사(袈裟)를 가리키는데, 석존의 양모인 대애도가 석존에게 금루가사(金縷袈裟)를 보시하였다고 한다. 『대지도론』 제22권에 보인다.
- 110)Srota-āpana의 음역으로 예류과(預流果)라고도 한다. 소승에 있어서 수행 계위(修行階位)를, 과(果)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向]와 그것에 의해 도달한 경지[果]에 네 가지 즉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있는데, 그 첫 번째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 111)태자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 신고(身苦), 고역(苦役) 그리고 새와 벌레가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고 무상을 느꼈다는 곳을 말한다.
- 112)Lumbini의 음역으로 람비니(藍毘尼) 또는 유민(流民) 등으로도 쓴다. 석존의 탄생지인데, 지금의 Nogar역 북쪽 35km 지점에 있다.
- 113)Rāmagrāma의 음역으로 라마가(羅摩伽), 람마(藍摩)로도 쓴다. 현 위치는 미상이나 『대당서역기』에서는 룸비니의 동쪽 1백여 리라 했다.
- 114)『대지도론』에 의하면 도를 얻은 자나 얻지 못한 자나 다 도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불법에 귀의한 출가 수행자를 이렇게 불렀다.
- 115)구족계(具足戒)를 말한다. 즉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이다.
- 116)Chandaka의 음역으로 석존 출가 시 흰 말 건척을 끌던 마부의 이름이다.
- 117)석존의 사리는 8분되어 각지의 탑에 안치되었는데, 그때 나머지 탄신(炭燼)을 모아 이곳에 탑을 세웠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제6권에 보인다.
- 118)Kusinagara의 음역으로 구시나게라(拘尸那揭羅), 구시나(拘尸那) 등으로도 적는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 119)Airavatī의 번역으로 아리라발제(阿利羅跋提) 또는 무승하(無勝河), 유금하(有金河) 등으로도 적는다. 지금의 갠지스강의 지류인 Rapti의 상류이다.
- 120)Subhadra의 음역으로 수발타라(須跋陀羅), 수발타(須拔陀)로도 적는다. 구이나갈성의 범사(梵士)의 이름이다. 그는 입멸 직전의 최후의 제자인데 그는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대열반경』 제14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8권에 보인다.
- 121)부처님께서 입멸하시자 유법(遺法)에 따라 전륜성왕의 장법(葬法)에 좇아 향탕(香湯)으로 몸을 씻고 5백 장의 목면(木綿)으로 싸서 금관에 넣은 뒤 7일간 공양했다고 한다. 『장아함경』 제5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8권, 및 『대당서역기』 제6권 등에 보인다.
- 122)Vajrapāni의 음역으로 집금강신밀적역사(執金剛神密迹力士)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것을 비통해 하면서 금강저를 버리고 사라쌍수 옆으로 절도했다고 한다. 『불입열반밀적금강역사애련경(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哀戀經)』에 보인다.
- 123)부처님의 유체는 7일간 공양한 후 금관에 넣고 희련하를 건너서 천관사(天冠寺)에서 다비하였다. 다비가 끝나자 8대국은 병력으로 사리를 차지하려 하였는데 돌로내(突路奈)란 바라문의 중재에 의해 여덟 나라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고 한다. 『장아함경』 제4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8권 등에 보인다.
- 124)이차는 Licchavī의 음역으로 이차(離車), 이창(梨昌) 등으로도 역한다. 바이살리국을 구성하고 있던 종족(種族)이다.
- 125)Vaiśāli의 음역으로 비야리(毘耶離), 폐사리(吠舍釐), 유야리(維耶離) 등으로도 번역된다. 중인도 16대국의 하나로 이차족의 주처(住處)였다. 지금의 Bengal주 Patna 북방의 Besārh 부근.
- 126)Mahāvane Kūṭāgārasāla의 역으로 마하벌나(摩訶伐那), 마하바나(摩呵婆那)로도 역한다. 바이살리의 큰 숲 속에 있었던 정사인데 『대반열반경』 상권에 의하면 1천2백5십 명의 비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 127)바이살리 사람들은 오하구(五河口)에서 아난의 반신사리(半身舍利)를 얻어 공양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제7권에 의하면 탑은 대림중각강당의 여북(餘北)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 128)Āmrapāli의 음역으로 비사리성의 유녀(遊女) 이름이다. 『증일아함경』 제10권, 『장아함경』 제2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6권, 『대반열반경』 상권 등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바이살리성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5백 명의 유녀들과 함께 부처님을 찾아갔으며, 그 다음 날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시고 공양을 올리기를 청하여 부처님의 허락을 받았다. 이차(梨車)는 유녀들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을 뉘우치면서 그녀에게 다음 날 공양하는 것을 양보하라고 하였으나 암바라녀는 듣지 않았다. 다음 날 부처님은 그녀에게 가서 공양을 받으시고 설법했으며 득도하게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감격하여 부처님께 암바라원을 바쳤고 부처님은 그곳에 머무셨다고 한다.
- 129)Bahuputraka Caitya의 역어로 다자탑(多子塔), 다자지제(多子支提)라고도 번역한다. 이 탑에 괸한 설화는 『수경주(水經注)』 제1권,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 제3권, 『잡보장경(雜寶藏經)』 제1권, 그리고 『대당서역기』 제7권 등에 보인다.
- 130)현겁이란 현재의 주겁(住劫)을 가리키는 말. 미래의 주겁은 성수겁(星宿劫), 과거의 주겁은 장엄겁(莊嚴劫)이라 한다. 현겁에는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 등의 1천불이 출현하여 세상과 중생을 구제한다는 천불사상(千佛思想)에 의한다.
- 131)불멸 후 1백 년경에 비사리의 발사자(跋闍者) 비구는 십사의 비법(非法)을 불설이라고 하여 정법(正法)으로 실행하였는데 이것을 십사의 증언이라 한다.
- 132)제2회 결집(結集)을 가리킨다.
- 133)비사리에서 파트나(Patna)에 이르는 도중에 있는 5대하(大河)의 합류점이다.
- 134)당시 마갈타국과 비사리국은 항쟁 중이었는데, 양국이 서로 아난의 사리 때문에 다투려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아난은 갠지스강 중앙에서 삼매에 들어가 사리를 양국에 나누었던 것이다.
- 135)마갈제국은 마가다(Magadha)국의 음역으로 갠지스강 남쪽에 있는 중인도 최대의 왕국. 파련불읍은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의 음역으로 그 수도인데, 달리 바라리불다라(婆羅利弗多羅), 화씨성(華氏城), 향화궁성(香花宮城)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파트나(Patna)이다.
- 136)처음 아육왕의 동생은 매우 교만 방자하였으나 아육왕이 “너의 죄는 죽을 죄에 해당된다. 이제 너에게 7일간 왕위를 줄 테니 먹고 사는 것을 자유롭게 하도록 하라. 그 후에 너를 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자 근심과 고민 끝에 왕으로부터 무상(無常)을 설교 받고 활연히 크게 깨달아 나한도(羅漢道)를 얻었다고 한다.
- 137)Gṛdhraktūṭva의 음역으로 영취산(靈鷲山), 영산(靈山)으로도 번역된다. 부처님의 설법지로 유명하다.
- 138)인도의 각월(角月:歲首)로 북두성(北斗星)이 묘위(卯位)를 세우는 때이다.
- 139)두공(斗拱)을 말한다.
- 140)노반(露盤) 위에 솟아 있는 구륜(九輪)의 기둥을 말한다.
- 141)이러한 시약(施藥)ㆍ요병(療病)ㆍ비전(悲田) 등의 시설은 아소카왕 시대 때 시작되어 그 후 인도는 물론 중국ㆍ한국ㆍ일본 등 여러 국가에 있어서 불교사회구제사업의 원형이 되었다.
- 142)이 절을 아육사(阿育寺) 또는 계두마사(鷄頭摩寺)라고 한다.
- 143)영취산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제석굴산(帝釋窟山)이라고도 한다.
- 144)하늘 악신(樂神)의 이름.
- 145)천제석이 번뇌, 애증(愛憎) 등 스스로 품고 있는 42항의 의문을 부처님께 물은 것.
- 146)왕사성은 Rāja-gṛha의 음역으로 마갈제국 아사세왕(阿闍世王)의 거성이었다. 지금의 Rajgir이다.
- 147)구 왕사성(舊王舍城) 둘레에 있는 산군(山群) 중 정사가 많은 다섯 개의 산을 가리킨다.
- 148)병사란 Bimbisāra의 약음역(略音譯)으로 그는 석존 재세 시에 마갈제국의 왕이었다. 구성(舊城)은 쿠사가라구라(Kusāgārapura)로 상모성(上茅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오산(五山)을 둘러싸고 있고 길상(吉祥)의 향모(香茅)가 많이 났다고 한다.
- 149)인명. Aśvajit를 번역한 것으로 아설시(阿說示) 또는 마승(馬勝)으로도 번역한다. 녹야원에서 석존의 첫 제자가 된 5비구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행동거지의 단정함이 사리불과 목련으로 하여금 불제자가 되게 하였다.
- 150)니건외도(尼犍外道)의 문도. 니건은 Nigrantha의 역으로 이계(離繫)의 고행을 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하나이다. 어느 때 왕사성에 시리굴다(尸利崛多)라고 하는 장자가 니건외도를 믿고 있었다. 그때 니건자와 범지(梵志)라고 하는 외도가 시리굴다를 설득하여 은밀히 옥내에 큰 불구덩이를 만들고 또 밥 속에 독을 섞어 놓고 석존을 청하여 해치고자 하였다고 한다. 성안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하여 석존의 행차를 말렸으나 석존은 듣지 않고 그대로 가셨다. 그리하여 문 안에 들어서자 불구덩이는 스스로 꺼져 버리고 독이 든 밥을 드셨으나 해를 입지 않으시자 시리굴다는 크게 놀라 사죄하고 불도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증일아함경』 제14권 및 『대당서역기』 제9권 등에 보인다.
- 151)조달은 아사세왕과 서로 모의하여 석존을 해치고자 하였다. 아사세왕에게는 호재(護財)라는 사나운 코끼리가 있었는데 왕은 코끼리 조련사에게 명하여 코끼리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코끝에 날카로운 칼을 달아 석존께서 탁발하러 나오실 때 풀어 놓았다. 그러나 코끼리는 석존을 만나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핥았다고 하는데 이 설화는 『증일아함경』 제9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19권, 그리고 『대당서역기』 제9권 등에 보인다.
- 152)Jivaka의 음역으로, 달리 기바(耆婆) 또는 시박가(時縛迦)로도 음역되는데 인명이다. 병사왕의 아들로 왕사성의 명의(名醫)였다. 그는 자기 소유의 암바라원(Ambapālivana, 菴婆羅園)에 정사를 세워 석존께 바쳤는데 이른바 죽림정사가 바로 이것이다.
- 153)Pāpīyas의 역으로 사람의 목숨이나 선근(善根)을 끊어 버리는 악마를 일컫는다.
- 154)조달이 석존의 발가락을 상하게 한 설화는 『대지도론』 제14권, 『사분율』 제4권, 『증일아함경』 제17권, 및 『대당서역기』 제9권 등에 보인다.
- 155)가란타는 Karaṇḍa의 음역으로 석존 재세 시 왕사성의 한 장자의 이름이다. 그는 구성(舊城)의 북쪽에 있는 죽림(竹林)을 처음에는 니건외도에게 주었지만 뒤에 석존에게 바쳤다.
- 156)Śmasāna의 음역으로 기시인묘(棄尸人墓) 또는 시타림(尸陀林)이라고도 번역한다.
- 157)Pippaliguhā의 음역으로 필발라굴(畢鉢羅窟)이라고도 번역한다. 이곳에서도 불전 결집(佛典結集)이 행해졌다는 설이 있다.
- 158)Saptapaṇṇaguhā의 와전된 번역으로 찰제산굴(刹帝山窟) 또는 칠엽굴(七葉窟)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왕사성 불전 결집이 행해진 곳이다. 『대당서역기』 제9권에서 죽림원(竹林園) 서남으로 5,6리쯤 가면 남산 북쪽의 대죽림(大竹林) 중에 대석실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되는 지점으로, 지금의 구(舊) 왕사성의 서문 밖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 159)사리불과 목련은 석존보다 먼저 열반했다. 그래서 대가섭은 세 개의 빈 좌석을 마련하여 중앙에 석존, 왼쪽에 사리불, 오른쪽에 목련의 자리를 만들어 장엄하게 꾸미고 그 다음에 대가섭의 자리를 만들고 뒤이어 5백 나한의 자리를 만들었으며 두터이 공양을 한 후에 결집을 행하였다.
- 160)왕사성 결집 때 가섭은 아난의 누(漏)가 다하지 않았다 하여 처음부터 나한의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룻밤 문 밖에서 남은 번뇌를 없애게 하여 비로소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 161)욕계(欲界) 수혹(修惑)의 9품(品) 가운데 6품의 수혹을 일래향(一來向)으로 끊고 나머지 3품을 끊어 버린 자리. 이것을 끊어 버리면 욕계에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 162)소승의 수행 단계 중 최종 단계. 이 과에 달하면 일체의 견혹(見惑), 수혹(修惑)을 끊고 미혹[迷]의 세계에 유전함이 없이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한다.
- 163)Gayā의 음역. 구 왕사성의 서남 26마일에 있는 지금의 Gaya에 해당된다.
- 164)이른바 고행림(苦行林)으로 지금의 부다가야 대탑의 약간 남쪽 문린맹룡지(文鱗盲龍池) 부근에 해당된다.
- 165)부다가야(Buddha-Gaya)의 동북 약 5km쯤에 있는 전정각산(前正覺山)의 불영석굴(佛影石窟)을 말한다. 석존은 처음 여기에서 선정에 들려고 하였으나 제천(諸天)의 신험(神驗)에 의해 수승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로 향하셨다.
- 166)보리수를 가리킨다. 원어인 Aśvattha의 ‘Aś’ 음을 생략한 음역이다. Pippala(畢鉢羅)의 이명동수(異名同樹)이다.
- 167)Kuśa의 역으로 구시초(鳩尸草), 시초(尸草)로 음역되기도 하고 세모(細茅), 세추(細秋)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 168)Mucalinda의 역으로 용왕(龍王)을 말한다.
- 169)Nigorodha의 음역으로 용수(榕樹)를 가리킨다.
- 170)대중과 함께 기거(起居)하고 유행(遊行)하는 작법(作法)으로 첫째 하의(下意), 둘째 자심(慈心), 셋째 공경(恭敬), 넷째 지차제(知次第), 다섯째 불설여사(不說餘事)를 입중(入衆)의 5법이라고 한다.
- 171)남송본(南宋本)에는 석가불이라 하고 있다.
- 172)Cakravāḍa의 역으로 윤위산(輪圍山)이라고도 한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7산(山) 8해(海)가 있는데, 제8해를 둘러싼 산을 철위산이라고 한다.
- 173)Yama의 역으로 이른바 염라왕(閻邏王, Yama-rāja) 또는 염라대왕으로 지옥의 주신(主神)이다.
- 174)Kukkuṭapada-giri의 역으로 존족산(尊足山)ㆍ계각산(鷄脚山)ㆍ굴굴타파타산(屈屈吒播陀山)ㆍ낭적산(狼跡山) 등으로도 번역된다. 부다가야의 동남쪽 32km의 Gurpa Hill에 추정되고 있다.
- 175)Āṭavika의 역으로 아타바구(阿吒婆拘) 또는 임야(林野) 등으로도 번역된다. 『잡아함경』 제50권, 『불본행집경』 제4권, 『대당서역기』 제7권 등에는 석존이 여기에서 광야귀(曠野鬼)를 교화하셨다는 설화가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未詳)이다.
- 176)가시국의 가시는 Kāśi의 음역으로 가시(伽尸), 가시(加尸)로도 한역된다. 지금의 베나레스(Benāres) 지방 일대로 알려져 있다.
- 177)Bārāṇasi의 음역으로 파라나(波羅奈), 파라니사(波羅。斯)로도 번역된다. 지금의 베나레스이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녹야원(鹿野苑)에 가깝다. 예로부터 종교 도시로 유명하다.
- 178)Ṛṣipatana Mṛgadāva의 번역으로 선인주처(仙人住處), 선원(仙園), 녹원(鹿苑)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베나레스의 북쪽에 있는 사르나트(Sārnāth)로 최초 설법지인 녹야원을 가리킨다.
- 179)Kauṇḍinya의 번역으로 교진여(憍陳如)라고도 한다.
- 180)고행을 하던 수도자가 고행을 그만둔 것을 가리킨다.
- 181)Etpāattra의 번역으로 이라발(伊羅鉢), 이라발다라(伊羅鉢多羅)로도 번역된다. 이 용은 과거에 이라초(伊羅草)를 해쳐서 그 과보로 용이 되어 항상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던 중 가섭불을 만나 석존의 출세를 듣고, 석존을 만나자마자 용신에서 벗어나는 법을 물었다. 석존은 불도에 귀의하여 수행을 계속하면 미륵보살의 출세에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21권, 『불본행집경』 제37~38권 등에 보인다.
- 182)Kauśambī의 음역으로 교상미(憍賞彌), 장유(藏有)로도 번역된다. 알라하바드(Allahabad)의 남서 약 60킬로의 코삼(Kosam) 지방.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오셨을 때, 전단상(旃檀像)을 만들어 산카샤에게 네 마리의 코끼리를 인솔하고 영접한 우전왕(優塡王)이 머물던 성(城)이다.
- 183)구미섬국에서 남쪽으로 2백 유연이라고 하므로 데칸(Dekkan)고원 중의 한 국가일 것이나 현 위치는 자세하지 않다.
- 184)마하승기는 Mahāsaṅghika의 음역으로 대중의 뜻이고 중(衆)은 부(部)의 뜻이므로 곧 대중부(大衆部)의 율을 말한다. 이는 세존 재세 시에 행해지던 것으로 대중부에 의해 전해지는 율장(律藏)이라고 한다. 법현이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와 함께 도량사(道場寺)에서 역출(譯出)한 『마하승기율』 40권이 이것이다.
- 185)소승 18부파(部派)를 가리킨다.
- 186)개색엄숙(開塞嚴肅)의 뜻으로 계율의 적용에 너그러움과 엄정함의 도(度)가 있음을 말한다.
- 187)자세하게 적혀 있다는 말.
- 188)상좌부(上座部) 계통의 살바다부(薩婆多部, Sarāvstivādin)를 말한다.
- 189)『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의 요의를 간략하게 발췌한 것을 아비담심(阿毘曇心)』이라고 하는데, 아비담심은 너무 간략하게 되어 있어서 이것을 증정(增訂)한 것을 『잡아비담심』이라 하고 약해서 『잡심론(雜心論)』이라고도 한다. 법현이 불타발타라와 함께 도량사에서 역출한 『잡아비담심』 13권이 이것이다.
- 190)선경(線經)이라고도 한다. 경이 부처님의 설법을 관철(貫徹), 보지(保持)함이 선(線)과 같음에 비유해서 선경 또는 정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 191)방등(方等)은 대승과 같은 뜻이므로 곧 『대승반니원경(大乘般泥洹經)』을 가리킨다. 법현은 역시 불타발타라와 함께 도량사에서 『대승반니원경』 6권을 역출하였다.
- 192)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와 같은 말로 삼장의 하나인 논(論)을 가리킨다.
- 193)위의(威儀)는 행동하고[行], 머무르고[住], 앉고[坐], 눕고[臥] 하는 용의(容儀)이고, 촉사(觸事)는 식사시의 정(淨), 부정(不淨)의 마음가짐을 말한다.
- 194)첨파는 Camp의 음역으로 점파국(占波國)이라고도 한다. 파련불읍의 동쪽 18유연의 갠지스강 남안에 있던 대국으로 지금의 바갈푸르(Bhāgalpur) 지방에 해당된다.
- 195)Tāmralipti의 음역으로 다마율저(多摩栗底), 다마치(多摩致)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에서는 마리제국(摩梨帝國)으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의 각주를 보면 송(宋)ㆍ명(明)ㆍ궁(宮)본에는 다마리제국(多摩梨帝國)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이 나라는 갠지스 하구(河口)의 지류인 Hooghly 하구 부근의 Jamluk로 비정(比定)된다.
- 196)인도양에서는 12월에서 2월에 걸쳐서 동북풍이 부는데, 예로부터 이 계절풍을 이용하여 남해 무역이 성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초겨울의 신풍이란 의희(義熙) 5년(409) 12월의 계절풍을 가리킨다.
- 197)Siṃhala의 번역으로 집사자국(執師子國), 승가라국(僧伽羅國)이라고도 번역된다. 또 일명 능가주(楞伽洲, Lanka)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스리랑카를 가리킨다.
- 198)석존께서는 이 나라에 세 번 오셨다는 전설이 있다.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娑)』 제3권에 의하면 첫 번째에는 야차(夜叉)를 교화하셨고, 두 번째는 용왕을 교화하셨다고 한다.
- 199)당시의 왕성은 지금의 Anurādhapura로 고적이 많다.
- 200)산은 왕성의 남쪽 15유연에 있는 불족산(佛足山)으로 현재의 Adams Peak이다.
- 201)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진지(晋地)란 단어가 본문에 빠져 있지만 신수대장경과 송(宋)ㆍ원(元)ㆍ명(明)ㆍ궁(宮)본에는 이 내용이 나타나 있다. 역자는 번역의 내용상 뒤의 것이 합당하다고 보아 이를 따랐다.
- 202)Sārthavāho의 역으로 상주(商主) 또는 대상(隊商)의 장(長)을 가리킨다.
- 203)강사(講師)ㆍ도사(導師) 또는 계사(戒師) 등을 위하여 한층 높게 마련한 좌석, 또는 그들의 존칭.
- 204)부처님은 석발(石鉢), 사문은 철발(鐵鉢)을 사용함을 원칙으로 하였으므로 본발은 본래의 원칙적인 발우, 즉 철발을 가리킨다.
- 205)사자국의 불치는 예로부터 유명하여 많은 구법승(求法僧)들이 불치 예배를 위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 206)아승기는 무량(無量)의 뜻으로서 아승기겁은 무한의 장시간을 가리킨다. 석존은 3기의 아승기겁의 수업에 의해 성도하셨기 때문에 그 기간을 3아승기겁이라 한다.
- 207)오백신은 오백세와 같다.
- 208)변상(變相)과 같다.
- 209)Sudāna의 음역으로 선시(善施), 선여(善與)로도 번역된다. 『육도집경(六度集經)』 제2권 『대당서역기』 제2권 등에 보면, 보살이 전세에 엽파국(葉波國) 살사왕(薩闍王)의 태자로 태어나 보살행을 행하고 있을 때의 이름인데, 그는 나사화대단백상(羅闍和大檀白象)을 팔범지(八梵志)에게 주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났었다. 천제석은 차례차례로 수레ㆍ말ㆍ모든 물건, 그리고 두 아이도 달라고 하여 태자의 굳은 뜻을 시험하고 드디어는 왕비(王妃)마저 달라고 하여 사여(捨與)를 받았다고 한다. 뒤에 두 아이는 모국(母國)으로 팔려 가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태자는 용서를 받고 나라로 돌아가 크게 치적을 세웠다고 한다.
- 210)Sāma의 음역으로 달리 상막가(商莫迦)로도 번역된다. 『육도집경』 제5권, 『섬자경(睒子經)』 등에 보이는 본생담의 하나로 일찍이 석존께서 섬선인(睒仙人)으로서 나중에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를 위해 물을 긷고 있을 때, 가리국왕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이를 알고 현장으로 달려가 섬선인의 유해를 안고 비탄 통곡하였는데 천제석이 그 지성에 감동하여 하늘의 신약(神藥)을 섬선인의 입에 넣어 주어 소생시켰다고 한다.
- 211)모두 본생담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예컨대 상왕은 육아백상본생담(六牙白象本生譚), 사슴은 녹왕본생담(鹿王本生譚), 말은 운마본생담(雲馬本生譚) 등에 근거를 두고 형상을 만든 것이다.
- 212)구 왕성(舊王城)인 Anurdhapura의 동쪽 약 12km에 있는 Mihintale산이다. 미사가산(眉沙迦山, Misaka) 또는 지제야산(支帝耶山, Cetyagiri)이라고도 불리며 마힌다지(摩哂陀地)라고도 한다.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毗婆娑)』 제3권에 의하면 마힌다는 사자국(師子國)에 건너와 미사가(眉沙迦)에 이르렀는데, 그때 국왕 제수(帝須)는 수렵을 하다가 이곳에서 마힌다와 처음으로 만나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 후 마힌다는 항상 이곳에 머물렀다. 제수왕은 여러 대덕들과 함께 항상 이곳을 찾아와서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나무 그늘이 깊고 암굴(岩窟)이 그윽하며 조망 또한 훤하다. 현재도 마힌다가 머물렀던 유적을 볼 수 있다.
- 213)Bhadrika의 역으로 발제(跋踶)라고도 한다. 지금의 Mihintale산에 있는 Ambstala정사의 전신. 지제라고 번역되는 것은 산 이름이 지제야산이라는 데서 연유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 214)Dharmagupta의 음역으로 법현 당시 지제에 있던 고승의 이름.
- 215)Mahāvihra의 음역으로 대사(大寺)라고도 번역된다. 스리랑카의 유명한 절 이름으로 왕성인 Anurādhapura의 남쪽 지금의 Ruvanveli탑 근처에 그 유적이 있다. 이는 곧 제수왕(帝須王)의 미가왕원(彌伽王園)의 땅에 해당된다. 제수왕은 마힌다의 설에 따라 부다가야의 보리수와 마힌다의 누이동생인 승가밀다(僧伽蜜多) 비구니를 맞이하여 보리수를 미가원에 심었다. 또 미가원에 마하비하라(摩訶毘訶羅)를 세워 승가밀다를 이곳에 거주하게 하여 아원라(阿寃羅, Anul)부인을 제도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마하비하라는 대승상좌부(大乘上座部)인 마하비하라주부(摩訶毘訶羅住部)의 본산으로 스리랑카 불교의 연총(淵叢)이 되었고 그 후 B.C. 87년에 창건된 무외사의 무외산주부(無畏山住部)와 함께 스리랑카 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 216)중국의 상거(喪車)를 말한다. 무륜거(無輪車)또는 무복거(無輻車)라고도 한다. 본래 중국의 상여에는 선두나 네 귀퉁이에 용사(龍蛇)의 형을 만든다고 한다.
- 217)Jhāpita의 역으로 사유(闍維) 또는 야유(耶維)로도 번역한다. 화장(火葬)을 말한다.
- 218)한의 구자국(龜茲國)으로 지금의 중국 신강성의 Kucha이다.
- 219)Vintaka의 역으로 빈나산(頻那山), 비나항가산(毘那恒迦山)으로도 음역된다. 수미산 칠금산(七金山)의 하나로 사천왕이 거주하는 곳. 부처님께서 처음에 성도하시자 사천왕은 각각 석발(石鉢)을 바쳤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받고 포개서 하나의 발우로 만드셨다.
- 220) 미사색은 Mahīśīsaka의 음역으로 달리 미사(彌沙), 화지(化地) 등으로도 번역된다. 율부에는 살바다부(薩婆多部)ㆍ미사색부ㆍ가섭유부(迦葉遺部)ㆍ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ㆍ담무덕부(曇無德部)의 5분파가 있는데, 미사색부의 율을 가리킨다. 자세하게는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서 오분율(五分律)이라고도 한다.
- 221)『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제2권에 의하면 법현, 불타발타라가 역출(譯出)한 경전의 항목에 보이는 잡장경 제1권의 원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 222)Kuṇḍika의 음역으로 군지(軍持)로 음역되기도 하고 정병(淨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 223)조관(澡灌)으로도 쓴다. 양치질 등에 쓰이는 물통.
- 224)인도양의 Nicobar 군도(群島) 중의 한 섬으로 추정된다.
- 225)Yardripa의 역으로 현 위치는 미상. Java 또는 Sumatra 동남부의 두 설이 있다.
- 226)의희(義熙) 8년(412)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법현은 인도에 머물 때에는 인도의 법에 따라 5월(또는 6월) 16일부터 8월(또는 9월) 15일까지의 기간에 하안거에 들었지만 이곳에서는 중국식대로 4월 16일부터 안거에 들었다.
- 227) 장광군은 진(晉)의 청주(靑州) 장광군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의 동남 교주만(膠州灣)의 동북부이고, 뇌산은 지금의 즉묵현(卽墨縣)의 동남 60리에 있는 노산(勞山)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영산(靈山)이다.
- 228)고려대장경 본문에는 이 부분이 ‘궤(詭)’자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궁(宮)본에는 ‘설(說)’자로 되어 있다. 해석상으로는 ‘설(說)’자가 더 합당하여 후자를 따르기로 한다.
- 229)건강(建康)을 가리킨다.
- 230)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를 가리킨다. 법현은 건강의 도량사(道場寺)에서 인도에서 가지고 온 『마하승기율』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ㆍ『정경(綎經)』ㆍ『잡아비담심(雜阿毘曇心)』 등을 불타발타라와 함께 번역하였다.
- 231)불ㆍ법ㆍ승 삼보를 가리킴.
- 232)진(晉) 의희(義熙) 10년(414). 법현은 의희 8년 7월 14일 뇌산의 남안에 표착(漂着)하여 동년 9월 이후 유연(劉兗:劉道隣의 다른 이름)에게 가서 일동일하(一冬一夏)를 보내고 의희 9년 하안거를 마치고 건강에 돌아가, 다음 해인 의희 10년(甲寅)에 이 법현전을 완성한 것이다.
- 233)이하는 『법현전』에 바로 이어지는 송승(宋僧)의 발문(跋文)이다.
- 234)동지(冬至)에 사감(寺監)이 주지를 대신하여 법좌(法座)에 올라 승려들에게 계경(戒經)을 설하여 그 실행을 재촉하는 법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