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bined Buddhist Canon

高僧法顯傳一卷

ABC_IT_K1073_T_001
032_0749_c_01L고승법현전(高僧法顯傳)


법현(法顯) 지음
이재창 번역


[동진(東晉)의 사문 법현(法顯)이 천축(天竺)에 유람한 일을 스스로 기록한 것이다.]
법현은 예전에 장안(長安)1)에 있으면서 율장(律藏)이 부족함을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홍시(弘始) 원년(399)2) 기해(己亥)에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응(慧應)ㆍ혜외(慧嵬) 등과 인도[天竺]에 가서 계율의 책을 구해 오기로 뜻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처음 장안을 출발하여 농(隴)3)을 지나 건귀국(乾歸國)4)에 이르러 하안거[夏坐]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마치자 길을 재촉하여 욕단국(褥檀國)5)에 이르렀고, 다시 양루산(養樓山)6)을 지나 장액진(張掖鎭)7)에 이르렀는데 장액은 대란(大亂)이 일어나 도로가 불통이었다. 장액왕(張掖王:段業)8)은 은근하게 이들을 머무르게 하고 단월(檀越)이 되었다. 여기에서 지엄(智嚴)ㆍ혜간(慧簡)ㆍ승소(僧紹)ㆍ보운(寶雲)ㆍ승경(僧景) 등과 만나, 흔쾌히 뜻을 모으고 함께 하안거9)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마치자 다시금 나아가 돈황(燉煌)10)에 이르렀는데, 이곳에는 동서가 약 80리, 남북이 40리나 되는 성(城)의 요새가 있었다.
여기서 일행은 함께 1개월 남짓 머무른 다음 법현 등 다섯 사람은 사신(使臣)들을 따라 먼저 출발하게 되어 다시 보운 등과 헤어지게 되었다. 돈황태수 이호(李暠)는 일행이 사하(沙河:고비사막)를 지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제공해 주었다. 사하에는 악귀(惡鬼)와 열풍(熱風)이 많아 이를 만나면 모두 죽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위로는 날아가는 새도 없고 아래로는 달리는 짐승도 없었으니, 아무리 둘러보아도 망망하여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가야 할 곳을 알 수 없었다. 오직 죽은 사람의 고골(枯骨)만이 표지가 될 뿐이었다.
17일 만에 약 1,500리를 가서 선선국(鄯鄯國)11)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은 지형이 험하고 척박하였으며 속인들의 의복은 전갈(氈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 중국 사람들의 옷과 마찬가지로 거칠었다. 이 나라의 왕은 불교를 믿었으며 승려는 4천여 명 정도였는데 모두 소승(小乘)을 배우고 있었다. 모든 나라의 승려는 물론 속인들도 인도의 율법을 행하고 있었는데 단지 세련됨과 조잡함에 차이가 있을 뿐이며 이곳뿐 아니라 서쪽에 걸쳐 있는 여러 나라들도 대개 이와 비슷하였다. 다만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달랐지만 출가한 사람들은 모두 인도의 책을 익히고 인도의 말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서 1개월을 머문 후 다시 서북쪽으로 15일 동안 가다가 오이국(烏夷國)12)에 이르렀다. 여기에도 승려가 역시 4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으며, 예법을 따름에 있어 가지런하고 정연하여 중국[秦土]의 어떤 승려들도 이런 점에서 그 승려들에게 미칠 수가 없었다. 법현은 부행당공손(符行當公孫)의 경제적인 도움을 얻어 2개월 남짓 이곳에서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다시 보운 등과 합류하게 되었다. 오이국 사람들은 예의를 지킬 줄 모르고 손님을 맞이해도 매우 야박했으므로 지엄ㆍ혜간ㆍ혜외 등13)은 여행할 물자를 구하고자 결국 고창(高昌)14)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법현 등은 부공손(符公孫)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아 마침내 서남쪽으로 곧바로 나아갈 수 있었으나, 가는 도중에는 사는 사람들도 없어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으니, 그 고생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견줄 데가 없었다. 이리하여 길을 떠난 지 한 달 하고 닷새 만에 우전(于闐)15)에 겨우 도착하게 되었다. 이 나라는 풍요롭고 즐거웠으며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하였고, 모두 불법을 받들어 불법에 대한 기쁨이 서로 충만해 있었다. 승려는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었으며 모두 중식(衆食)16)을 하고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집집마다 문 앞에 작은 탑을 세워 놓았는데, 그중 제일 작은 것의 높이는 약 2장(丈) 가량 되어 보였고, 사방에 승방(僧房)을 지어 놓고 객승(客僧)에게 제공하였으며 그 외에 것들도 제공하였다. 이 나라의 왕은 법현 등을 승가람(僧伽藍:사원)에 편안히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승가람의 이름은 구마제(瞿摩帝)로서 대승의 사찰이었다. 3천 명의 승려들은 건추(楗槌)17) 소리에 따라 공양을 하러 모여드는데 그들은 식당에 들어갈 때 위의(威儀)가 가지런하고 엄숙하여 차례로 앉는다. 그리고 모두 조용하여 발우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 시중드는 자[淨人]에게 음식을 더 청하려고 부득이하게 상대를 부를 때에도 단지 손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혜경(慧景)ㆍ도정(道整)ㆍ혜달(慧達)은 먼저 갈차국(竭叉國)18)을 향해 떠났으나 법현 등은 행상(行像)을 보려고 3개월을 머물렀다. 그 나라에는 네 개의 큰 승가람이 있었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은 사찰들이 있었다. 4월 1일이 되자 성안의 도로들은 깨끗이 청소되고 거리는 장엄하게 꾸며졌다. 성문 위에는 갖가지 장식으로 꾸며진 큰 장막이 쳐지고, 그 아래에 왕과 왕후 그리고 채녀(婇女)들이 자리를 잡았다. 구마제 사원의 승려들은 대승을 배우고 있어서 왕이 공경하고 존중하는 바이기에 제일 먼저 행상(行像)을 하게 된다. 성에서 3,4리 떨어진 곳에 불상을 모시는, 네 바퀴로 된 수레를 만드니 높이가 3장(丈)이 넘었고 형상은 마치 칠보로 꾸민 움직이는 전당과 같았으며 비단으로 된 번(幡)과 천개(天蓋)를 매달았다. 불상을 그 수레 안에 세워 두 보살로 하여금 모시게 하였고 여러 천신(天神)들을 만들어 모시게 하였는데 모두 금과 은으로 조각하여 공중에 매달았다. 불상의 수레가 성문 100보 앞에 이르자 왕은 왕관을 벗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서 손에 꽃과 향을 들고 맨발로 성문에서 걸어 나와 불상을 맞이하여 이마를 부처님의 발에 대면서 절하고 꽃을 뿌리고 향을 살랐다. 불상이 성으로 들어올 때 문루(門樓) 위에 있던 왕비와 채녀들이 꽃을 뿌리자 그 꽃들은 나부끼며 밑으로 떨어졌다. 이와 같이 장엄하게 꾸며진 수레들은 저마다 각기 달랐는데, 한 승가람이 하루씩 행상을 했으므로 백월(白月)19) 1일에 시작해서 14일에 행상을 마쳤고 행상을 마치면 왕과 왕비는 궁으로 돌아갔다.
그 성 서쪽 7,8리 지점에 왕신사(王新寺)라는 승가람이 있었는데 그 절이 완성되기까지는 80년의 세월과 3대의 왕을 거쳤다고 한다. 높이가 25장(丈)이나 되며 조각을 아로새긴 뒤에 금ㆍ은으로 그 위를 덮고 갖가지 보물로써 탑을 단장한 후에 불당을 지어 미묘하고 호화롭게 장엄하였다. 서까래며 기둥 그리고 문과 창이 모두 금박으로 장식되었고, 따로 승방을 지어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장엄하고 질서정연하게 꾸몄는데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영동(嶺東) 여섯 나라20) 왕들은 저마다 소유하고 있던 값진 보물들을 대부분 여기에다 공양하여 사람이 사용하는 것은 적었다.
4월의 행상을 마치자 승소(僧韶)는 호족(胡族)의 도인을 따라 홀로 계빈국(罽賓國)으로 떠났고 법현 등21)은 자합국(子合國)22)을 향해 떠나 25일 만에 그 나라에 도착하였다. 이 나라의 왕은 불법에 정진하고 있었으며 나라 안에는 1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대부분 대승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에서 15일을 머문 후 남쪽으로 4일 동안 가서 총령산맥(蔥嶺山脈)23)에 들어가 오휘국(於麾國)24)에 이르러 안거(安居)25)에 들어갔다.
안거가 끝나자마자 산행(山行)하여 25일 만에 갈차국(竭叉國)에 이르러 혜경 등과 다시 합류하게 되었다. 이 나라의 왕은 반차월사(般遮越師)26)를 열고 있었는데 반차월사란 중국말로 5년 만에 여는 대회(大會)라는 뜻이다. 이 대회 때에는 사방의 승려들을 초청하며 승려들은 구름같이 모여든다. 모인 다음에는 승려들이 앉을 곳을 매우 장엄하게 꾸미고 비단으로 만든 번개(幡蓋)를 매달며 금과 은으로 연꽃을 만들어 승려들이 앉는 자리 뒤에 붙이고 앉는 자리를 말끔히 해 놓는다. 왕과 신하들은 법도에 맞게 공양을 올리는데 1개월이나 2개월 또는 3개월씩 걸리며 주로 봄에 거행된다. 왕이 여는 그 대회가 끝나면 왕은 다시 신하들에게 권하여 공양거리를 준비하게 하고 공양을 올리게 하는데, 이것은 하루, 이틀, 사흘, 닷새 또는 이레씩 걸리기도 한다. 공양이 모두 끝나면 왕은 자기가 타는 말에 안장을 스스로 얹고 나라 안의 귀족ㆍ중신으로 하여금 그 말을 타게 한다.
또한 여러 가지 백첩(白氎)27)과 갖가지 진귀한 보배 그리고 승려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여러 군신과 함께 발원ㆍ보시하게 하고 보시가 끝나면 승려들로부터 그것을 다시 사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산지(山地)이고 추운 곳이어서 다른 곡식은 나지 않고 오직 보리만이 날 뿐이었다. 승려들의 수세(受歲)28) 때면 번번이 서리가 내리므로 왕은 매양 승려들에게 보리가 익은 연후에 수세하도록 했다. 이 나라에는 부처님께서 쓰시던 타호(唾壺:침 뱉는 그릇)가 있는데, 돌로 만들었으며 색깔은 부처님께서 쓰시던 발우(鉢盂)와 비슷하였다. 또한 이 나라에는 부처님의 치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이 부처님의 치아를 모셔 놓기 위해 탑을 세워 놓았다. 이 나라에는 1천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산 동쪽으로 속인들이 입는 옷은 중국[秦土]과 마찬가지로 투박했으나 이곳 사람들은 전갈(氈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승려들의 법용(法用)은 수승하나 구체적으로는 적을 수가 없다. 이 나라는 총령산맥 중에 있고 총령산맥에 이르기 전의 초목ㆍ과실과는 모두 다른데 오직 대나무와 석류 그리고 감자의 세 가지만이 중국 땅의 것과 같을 뿐이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북인도[北天竺國]를 향해 떠난 지 1개월 만에 총령산맥을 넘을 수가 있었다. 총령은 겨울은 물론 여름에도 눈이 덮여 있었고, 또한 독룡(毒龍)29)이 있어 만약 그의 뜻에 거슬리면 독풍(毒風)과 눈비를 토하며 모래와 자갈을 날리므로 이를 만나면 만에 한 사람도 온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총령을 설산(雪山)이라고 불렀다.
총령을 지나면 북인도에 이르게 되는데, 북인도에 들어가자마자 타력(陀歷)30)이라 부르는 한 작은 나라가 있었다. 역시 많은 승려들이 있었고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이 나라에는 옛날 한 나한31)이 있었는데 신통력으로 아주 솜씨 좋은 조각가를 도솔천(兜率天)에 올려 보내 미륵(彌勒)보살의 키와 형색과 모습 등을 관찰하게 하고, 아래로 내려온 다음에 나무로 미륵보살상을 조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후 세 차례에 걸쳐 도솔천에 올라가 관찰한 연후에 그 보살상이 완성되었는데 높이가 8장(丈)이요, 결가부좌한 다리가 8척(尺)이나 되었다. 재일(齋日)이면 항상 광명을 나투곤 하여 여러 나라 왕들이 다투어 공양을 올렸는데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있어 여기서는 볼 수가 있다.
총령을 따라 다시 서남쪽으로 15일을 갔는데 그 길은 거칠고 울퉁불퉁한 산길이었으며 낭떠러지는 험준하기 짝이 없었다. 이 산은 오직 석벽으로 천 길이나 되고 칼처럼 서 있어 가까이 가면 어지럽고 나아가려면 발 디딜 곳을 찾을 수조차 없었으며 아래로는 신두하(新頭河:인더스강)란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돌을 깎고 쪼아 통로를 만들고 의지할 사다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무릇 7백 개를 건너야 했다. 사다리들을 건너면 느슨하게 매인 조교(弔橋)를 밟고 강을 건너게 되는데 강의 폭은 80보(步)가 채 못 되었다. 한(漢)나라의 장건(張騫)32)이나 감영(甘英)33)도 여기까지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 승려들은 법현에게 불법이 중국[東]으로 간 시발점을 아느냐고 묻곤 하였다. 법현은 물음에 대해 말하기를 “그곳 사람들에게 옛날부터 서로 전해지는 말로는 미륵보살상을 세운 직후에 어떤 인도 스님이 경ㆍ율을 가지고 이 강을 건너면서부터라고 했다.”고 했다. 그 보살상은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3백여 년 후의 일이므로 헤아려 보면 중국 주(周)나라 평왕(平王) 때이다. 이로 보면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이 보살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무릇 미륵보살상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능히 석가를 계승하여 삼보를 널리 알리고 변방 사람들이 불법을 알게 했겠는가? 본래부터 부처님의 운이 열린 것이고 본래 사람의 힘이 아님을 알 수 있으니, 한(漢)나라 명제(明帝)의 꿈34)도 이러한 데에 그 연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 강을 건너 곧 오장국(烏長國)35)에 이르렀는데 그 오장국은 바로 북인도이다. 여기서는 모두 중인도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중인도는 소위 중국(中國)36)이라고 한다. 속인들의 의복이나 음식 또한 중인도와 같으며 불법이 대단히 성했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곳을 승가람(僧伽藍)이라고 하는데, 이 나라에는 약 5백의 승가람이 있었으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만약 객(客) 비구가 오면 사흘 동안은 극진히 공양하지만 사흘이 지나면 스스로 안주할 곳을 구하도록 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부처님께서 북인도에 오셨을 때, 이 나라에 이르셨는데 부처님께서는 여기에 족적(足跡)37)을 남기셨다고 한다. 이 족적은 혹은 길기도 하고 혹은 짧기도 하니 그 길이는 사람들의 신심에 따라 다르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역시 그러하다. 그 외에 쇄의석(曬衣石)38)이라든지 악룡(惡龍)을 제도하신 곳39)도 있는데, 이 또한 모두 현존한다. 쇄의석은 높이가 1장 4척, 폭이 2장으로 한쪽 변이 판판하다. 여기서 혜경ㆍ혜달ㆍ도정의 3인은 먼저 떠나 부처님 그림자[佛影]가 있는 나갈국(那竭國)40)으로 향하였고 법현 등은 이 나라에 머무르면서 하안거41)에 들어갔다.
하안거를 끝내고 남쪽으로 내려와 숙가다국(宿呵多國)42)에 이르렀다. 이 나라 역시 불법이 성했는데 옛날 천제석(天帝釋)이 보살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매와 비둘기로 화현하여 쫓고 쫓기고 있었는데 보살이 자기 살을 잘라 비둘기를 살려 준43) 곳이 있다. 그 뒤에 석존께서 성도하시고 여러 제자들과 함께 유행(遊行)하셨을 때 “이곳은 본래 내가 살을 잘라 비둘기를 살려 준 곳이니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탑을 세우고 금ㆍ은으로 꾸몄다.
여기서 동쪽으로 5일간 가서 건타위국(揵陀衛國)44)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아육왕(阿育王:아소카왕)의 아들 법익(法益)이 통치하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셨을 때, 또한 이 나라에서 당신의 눈[眼]을 남에게 보시하셨다고45) 한다. 그곳에도 역시 큰 탑이 세워지고 금ㆍ은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7일쯤 가자 축찰시라(竺刹尸羅)46)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는데 축찰시라란 중국어로 머리를 자른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보살로 계실 때 여기에서 머리를 남에게 보시하셨다고47) 한다. 그래서 이런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동쪽으로 이틀쯤 가면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인48) 곳에 이르게 된다. 이 두 곳에도 큰 탑이 세워져 있었고 모두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여러 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다투어 공양을 올렸고 꽃을 뿌리고 등을 켜는 것이 계속 이어져 끊이질 않았다. 앞의 두 탑과 함께 그 지방 사람들은 이를 사대탑(四大塔)이라고 하였다.
건타위국에서 남쪽으로 나흘쯤 가자 불루사국(弗樓沙國)49)에 이르렀다. 옛날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를 데리고 이 나라에 유행(遊行)하실 적에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열반[般泥洹]한 후 계니가(罽膩伽)50)라는 국왕이 나타나서 이곳에 탑을 세울 것이다.”
훗날에 계니가왕이 세상에 나와 유람차 다니고 있을 때에 천제석(天帝釋)은 그러한 마음을 계발하고자 소를 치는 목동[小兒]으로 몸을 나투어 길가에서 탑을 쌓고 있었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너는 무엇을 만들고 있느냐?”
“불탑을 만들고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매우 훌륭하구나.”
그리고 왕은 곧바로 소년이 만든 탑 위에 다시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40여 장이나 되었으며 갖가지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무릇 경에서 본 탑묘(塔廟) 중에서 이 탑51)만큼 아름답게 장엄되고 위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염부제(閻浮提)52)의 탑은 오직 이 탑이 최상(最上)이라고 했다. 왕이 만든 탑이 완성되자 높이 3척 가량의 소탑(小塔)이 돌연 대탑 남쪽에 솟아났다고 했다.
부처님 발우[佛鉢]53)는 바로 이 나라에 있다. 옛날 월지(月氏)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이 나라로 쳐들어와 부처님 발우를 빼앗아 가려고 하였으나 이 나라를 정복하면서 불법을 독실하게 믿게 되었으므로 월지왕은 부처님 발우를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모셔 가기 위해 공양을 올리게 되었다. 삼보 전에 공양을 마치자마자 큰 코끼리를 장엄하게 꾸미고 그 등에 부처님 발우를 안치하였다. 그러나 코끼리는 바로 땅에 엎어져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다시 사륜마차를 만들고 그 위에 부처님 발우를 얹은 뒤에 여덟 마리의 코끼리로 하여금 함께 끌게 하였으나 역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왕은 부처님 발우와의 인연이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스스로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면서 이곳에 탑과 승가람을 세우고 아울러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게 하면서 여러 가지 공양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곳에는 대략 7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정오가 되면 부처님 발우를 꺼내서 속인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공양을 올리고 그런 뒤에 점심을 먹었다. 해 질 무렵에 향을 사를 때도 그렇게 했다. 부처님 발우는 그 용량이 2두(斗) 정도로 색깔은 흑색이 짙은 잡색(雜色)이며 사제(四際)54)가 분명하고 두께는 2푼 정도로 매우 광택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속에 꽃을 조금만 넣어도 발우가 가득 차지만 부자는 많은 꽃으로 공양하려고 백천만 곡(斛)을 넣어도 결국 발우를 채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보운과 승경은 이곳에 머물러 부처님 발우에 공양을 올리고 곧 돌아갔다. 일행 중 혜경ㆍ혜달ㆍ도정은 먼저 나갈국으로 향하였는데 거기서 부처님 그림자[佛影]ㆍ부처님 치아[佛齒] 그리고 정골(頂骨)에 공양하였으나 혜경이 병에 걸려 도정이 남아서 간호하였고 혜달 혼자서 불루사국으로 돌아와 보운ㆍ승경 등과 다시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혜달ㆍ보운ㆍ승경은 드디어 중국[秦土]으로 돌아갔고 혜경은 불발사(佛鉢寺)에 머무르다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법현은 혼자서 발길을 옮겨 부처님 정골(頂骨)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서쪽으로 16유연(由延)55)을 가서 나갈국 경계의 혜라성(醯羅城)56)에 이르렀다. 성안에는 부처님 정골을 모신 정사(精舍)가 있었는데 금박과 칠보로 골고루 꾸며져 있었다. 국왕은 정골을 공경하고 중히 여겼으며 사람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한 나머지 나라 안의 호성(豪姓) 8인을 골라 저마다 도장[印] 하나씩을 갖게 하고 이 도장으로 봉인(封印)하여 수호하게 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함께 아침 일찍 정사에 이르러 각각 자기의 봉인을 보이고 그런 연후에 빗장을 열었다. 빗장을 열면 향즙(香汁)으로 손을 씻고 부처님 정골을 꺼내서 정사 밖의 고좌(高座) 위에 안치하였다. 그 고좌는 칠보의 둥근 받침대가 밑에 있고 위에는 유리종(琉璃鍾)을 덮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진주 구슬로 장식되어 있었다. 골(骨)은 황백색이며 사방[方圓]이 4촌(寸)이며 윗부분이 융기되어 있었다.
매일 해가 뜨면 정사의 사람이 고루(高樓)에 올라 큰 북을 치고 소라를 불며 동발(銅鉢)을 두드렸다. 왕은 이 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정사에 예방하여 꽃과 향으로 공양을 올리고, 공양이 끝나면 왕과 신하들이 차례로 예배하고 돌아갔다. 그들은 동문(東門)으로 들어왔다가 서문으로 나갔는데 왕은 매일 이와 같이 공양 예배한 후에 나랏일을 다스렸다. 거사ㆍ장자(長者)들도 마찬가지로 먼저 공양을 올리고 난 뒤에 집안일을 돌봤다. 이런 일은 매일 되풀이되었으며, 이 일에 조금도 게을리하거나 지겨워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공양이 모두 끝나면 정골은 정사에 돌려졌다. 그 안에는 칠보로 꾸며진 해탈탑(解脫塔)이 있었는데 열렸다 닫혔다 했다. 높이는 5척 정도인데 정골은 이 탑 안에 모셔졌다. 정사의 문 앞에는 매일 아침 늘 꽃과 향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무릇 공양을 올리려고 하는 사람은 여기서 여러 가지를 사곤 했다. 여러 나라의 왕들도 마찬가지로 늘 사람을 보내 공양하게 하였다. 이 정사가 있는 곳에서 사방 30보(步) 되는 지역만은 비록 다시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갈라진다 하더라도 흔들리거나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북쪽으로 1유연을 가서 나갈국성(那竭國城)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원래 보살이 은전(銀錢)으로 오경화(五莖華)를 사서 정광불(定光佛)57)을 공양한 곳이다. 성안에는 또한 불치탑(佛齒塔)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공양은 부처님 정골에 행했던 방법과 같았다.
성의 동북쪽으로 1유연을 가면 한 계곡의 입구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는 부처님의 석장(錫杖)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에도 정사를 세워 공양했다. 그 석장은 우두전단(牛頭旃檀)58)으로 만들어졌으며 길이는 1장 6,7척 정도 되었고 목통(木筒)에 넣어져 있었는데 백천 인이 아무리 들어 올리려 하여도 꼼짝하지 않았다. 그 계곡 입구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가면 부처님의 승가리(僧伽梨)59)가 있었고 마찬가지로 정사가 세워져 있었으며 사람들이 공양하고 있었다. 그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그 나라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그 옷을 꺼내 예배하고 공양을 올렸으며 그러자마자 하늘은 큰비를 내렸다.
나갈성 남쪽으로 반 유연 되는 곳에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는 산을 뚫어서 이곳에 당신의 그림자를 넣어 두셨다. 10여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 부처님의 참모습을 보는 것 같았고, 금색 상호(相好)는 빛나며 뚜렷했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점점 희미해졌는데 그래도 그림자는 있는 것 같았다. 여러 곳의 왕들은 화가를 보내 이를 묘사하게 했으나 해낼 수는 없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전하기를 천불(千佛)은 모두 이곳에 그림자를 남기셨다고 했다.
부처님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4백 보 정도 가면 부처님께서 살아 계실 때에 머리를 깎으시고, 손톱을 자르시며, 제자들과 함께 높이 7,8장(丈)의 탑을 세워 후세에 탑의 모범이 되도록 하셨던 곳이 있는데 그 탑은 현재에도 있다. 그 옆에는 절이 있었으며 절 안에는 7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곳에는 여러 나한과 벽지불(辟支佛)60)의 탑이 있었는데 그 수는 1천을 헤아렸다.
여기에서 겨울 석 달 동안 머문 법현 등 3인61)은 남쪽으로 나아가 소설산(小雪山)62)을 넘었다.
소설산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으로 덮여 있었고 산 북쪽의 음지(陰地) 에서 사납게 기승을 부르는 한풍(寒風)을 만나면 사람들은 모두 숨죽인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일행 중 혜경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입에서 흰 거품을 뿜으면서 법현에게 말하였다.
“나 역시 다시는 살아날 수 없을 것 같군요. 그러니 빨리 갈 수 있을 때 가십시오. 우물쭈물하다가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63) 법현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비통해 했다.
“우리들은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죽어 버리고 마니 어인 일이오?”
그러고는 다시 힘을 내어 전진을 하자 드디어 고개를 넘고 남하하여 나이국(羅夷國)64)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3천 명에 가까운 승려가 있었는데 대승과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 여기에 머물러 하안거65)를 하고 하안거가 끝나자 다시 남쪽으로 10일 동안 가다 발나국(跋那國)66)에 이르렀다. 여기에도 3천 명 정도의 승려가 있었는데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3일 동안 가다가, 다시 신두하(新頭河:인더스강)를 건넜는데 강 양쪽은 모두 평지였다. 강을 건너자 비다국(毗茶國)67)이란 나라가 있었다. 이곳도 불법이 성했고 대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는데 중국 승려가 오는 것을 보자 매우 동정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어떻게 변지(邊地)의 사람들이 출가의 의의를 알고 불법을 구하고자 이토록 멀리 떠나오셨습니까?”
그러고는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고 법에 맞게 대접해 주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80유연 좀 못 가는 동안 대단히 많은 절들을 지나게 되었는데 승려 수가 거의 만 명에 이르렀다. 이런 여러 곳을 지나 한 나라에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 이름은 마두라(摩頭羅)68)라 했다. 또한 포나하(蒱那河)69)를 지났는데, 강변 좌우로 20개의 승가람이 있고 승려는 거의 3천 명이나 되어 불법이 매우 성했다. 무릇 사하(沙河) 서쪽의 인도 여러 나라는 국왕들이 모두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고 승려들을 공양하고 있었다. 왕이 승려들을 공양할 때에는 왕관을 벗고 여러 종친ㆍ신하들과 더불어 손수 음식을 대접했고 공양이 끝나면 융단을 땅에 깔고 승려들을 윗자리에 앉게 하고서 아랫자리에서 승려들을 향해 앉았는데 승려들 앞에서는 감히 상(床)에 앉지를 않았다. 이러한 것은 부처님 생존 시에 여러 왕이 부처님께 공양했던 예법과 방식이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다.
이곳에서부터 남쪽 지역을 중국(中國:중인도)이라 했다. 중국은 추위와 더위가 조화를 이루어 서리나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은 즐겁고 호적도 없으며 관법(官法)도 없었다. 다만 왕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지세(地稅)를 내며, 가고 싶은 사람은 자유로이 가고 살고 싶은 사람은 자유로이 사는 것이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참형(斬刑)을 사용하지 않았고, 죄가 있는 자는 죄과의 경중에 따라 벌금을 물리게 할 뿐이었다. 비록 거듭하여 악역(惡逆)의 모의를 하여도 그 오른손을 자르기만 했다. 왕의 시위(侍衛)나 좌우의 신하는 모두 공록(供祿)을 받았다. 나라 안 사람들은 모두 살생을 하지 않으며 음주도 하지 않고 마늘이나 파도 먹지 않았다. 오직 전다라(旃茶羅)70)만은 그렇지 않았는데 전다라는 악인이라고 불리며 일반 사람들과 따로 살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성시(城市)에 들어오면 판목(板木)을 쳐서 스스로 다른 신분의 사람임을 알리고 그것을 알고 피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치는 일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는 돼지나 닭은 기르지 않으며 노예를 팔지도 않고 시중에는 도살자나 술집이 없었다. 물건의 교역에는 패치(貝齒)를 사용했는데 오직 전다라와 어부ㆍ사냥꾼만이 고기를 팔 뿐이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로 여러 국왕이나 장자ㆍ거사들은 승려들을 위하여 정사를 세우고 전택(田宅)ㆍ원포(園圃)ㆍ민호(民戶)ㆍ우독(牛犢) 등을 공급하고 철권(鐵券:옛날 공신에게 내렸던 표시물)에 기록해 두었다.71) 이런 것들은 훗날 왕이 왕에게 서로 전하여 감히 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도 단절되지 않았다. 승려들이 거처하는 방사(房舍)나 상욕(床蓐), 또는 음식이나 의복 등은 모두 부족함이 없었으니 이는 어느 곳이건 다 같았다. 승려들은 항상 공덕을 짓는 것을 업으로 삼고 독경이나 좌선도 하고 있었다. 객승이 찾아오면 예전부터 있던 승려가 맞이하며 오히려 옷과 발우를 가져다주고 발 닦는 물과 발에 바르는 기름[塗足油]은 물론 비시장(非時漿)72)을 주었다. 잠시 쉰 다음 다시 법랍 햇수를 묻고 방사와 침구[臥具]를 주었는데, 이러한 여러 가지는 다 법도에 따른 것이다.
승려들이 머무는 곳에는 사리불탑(舍利弗塔)ㆍ목련탑(目連塔)ㆍ아난탑(阿難塔)ㆍ아비담탑(阿毘曇塔)ㆍ율경탑(律經塔)이 세워져 있었다. 안거 후 1개월이 되면 복을 바라는 여러 사람이 권화(勸化)하여 승려를 공양하고 비시장을 보시했다. 승려들은 큰 모임을 갖고 설법을 했는데, 설법이 끝나면 사리불탑을 공양하고 여러 꽃과 향을 바치며 밤새도록 등을 밝혔다. 그러면서 사리불을 만들어 기악인(伎樂人)으로 하여금 그가 대바라문이었을 때 부처님께로 와서 출가하기를 구하던 모습을 연출하게 하고, 그 밖에 대목련과 대가섭 또한 그렇게 했다. 비구니는 대부분 아난탑을 공양했다. 그것은 아난이 세존께 청하여 여성의 출가를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여러 사미(沙彌)는 대부분 라운(羅云)73)을 공양한다. 아비담 논사들은 아비담탑을, 그리고 율사(律師)들은 율탑을 공양했다. 이와 같이 해마다 한 번씩 공양했는데 그날은 각기 달랐다. 마하연(摩訶衍)74)의 사람들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ㆍ문수사리(文殊師利)ㆍ관세음(觀世音) 등을 공양했다. 승려들의 수세(受歲)가 끝나면 장자ㆍ거사ㆍ바라문 등은 각각 여러 가지 옷과 사문(沙門)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와서 승려들에게 보시했다. 그러면 승려들은 그것을 받아서 승려들끼리 서로서로 보시했다. 부처님의 열반 이래 모든 성중(聖衆)들이 행하는 그 위의법칙(威儀法則)은 대대로 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신두강[新頭河]을 건너서 남인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서 남해에 이르는 4,5만 리는 모두 평탄하여 큰 산천이 없고 오직 하수(河水)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18유연을 가면 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이름은 승가시국(僧伽施國)75)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76)에 올라가 3개월간 어머님을 위해 설법하고 내려오셨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실 때에 신통력으로 모든 제자들이 모르게 하셨는데 3개월이 되기 7일 전에 신족통(神足通)77)을 놓으시자 아나율(阿那律)78)이 천안(天眼)으로 멀리 계신 세존을 뵙고는 존자 대목련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도리천에 가서 세존에게 그 뜻을 여쭈어 보시오.”
이에 목련은 도리천으로 가서 부처님 발에 머리와 얼굴을 맞대고 예를 올리며 여쭤 보았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목련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7일 후에 염부제(閻浮提)로 내려갈 것이다.”
목련은 그 말씀을 듣고 내려왔다. 그 무렵 8국의 대왕들과 여러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오랫동안 부처님을 뵙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 뵙기를 갈망하여 이 나라에 모여들었는데, 세존께서 내려오시는 것을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그때 우발라(優鉢羅)79)비구니는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국왕이나 신하ㆍ백성들은 모두 부처님을 받들어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인데 어떻게 하면 부처님을 먼저 뵐 수가 있을까?’
부처님께서는 신족통으로 그녀를 전륜성왕(轉輪聖王)80)으로 변하게 하여 맨 앞에서 부처님을 예배할 수 있게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도리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실 때 신족통으로 세 개의 보배 계단[寶階]을 만들고 가운데로 난 일곱 개의 보배 계단 위로 내려오셨다. 범천왕(梵天王)은 또한 백은으로 된 계단[白銀階]을 만들고 우측에서 흰 불자(拂子)를 손에 쥐고 모시면서 내려왔고, 제석천(帝釋天)은 자금(紫金)으로 된 계단을 만들고 좌측에서 칠보개(七寶蓋)를 들고 모시면서 내려왔는데, 여러 천신들이 무수히 부처님을 따라 내려왔다. 부처님께서 땅 위에 내려오시자 세 계단은 모두 땅속에 파묻히고 일곱 계단만이 지상에 남아 있었다. 뒤에 아육왕(阿育王:아소카왕)이 그 끝을 알고 싶어 사람을 보내 파 보게 하였다. 그러나 황천에 이르러서도 그 끝이 다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더욱 믿고 공경하여 세 계단이 묻힌 자리 위에 정사를 세우고 가운데로 난 칠보계 자리에 장륙(丈六) 불상을 세웠다.
정사 뒤에는 석주(石柱)를 세웠는데 높이가 20주(肘)81)나 되었다. 석주 위에는 사자(師子)를 만들고 석주 안 사방에 불상을 조각하였으며, 석주는 투명하여 유리처럼 맑았다. 이곳은 일찍이 외도(外道)의 논사(論師)와 사문이 주처(住處)를 다툰 일이 있었다. 그때 사문은 논쟁 중 궁지에 몰리자 두 사람은 함께 서원을 세우며 말하기를 “만약 그곳이 사문이 머물 곳이라면 틀림없이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순간 주두(柱頭)의 사자가 크게 울어 그 영험함을 보이자 이에 외도는 크게 두려워하여 마음으로 굴복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도리천에서 천식(天食)을 3개월간이나 받으셨기 때문에 몸에서는 천향(天香)을 발하여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내려오시자마자 목욕을 하셨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욕실을 세웠다. 이곳은 바로 우발라비구니가 처음 부처님을 예배한 곳으로 지금은 탑이 세워져 있다. 부처님께서 생존 시에 머리털과 손톱을 깎으시던 곳에도 탑을 만들었으며, 과거 삼불(過去三佛)82)과 석가문불(釋迦文佛)의 좌처(坐處)와 경행처(經行處), 그리고 여러 부처님이 형상을 나투신 곳에도 모두 탑을 세웠는데, 이들은 모두 현존하고 있다.
천제석과 범천왕이 부처님을 따라 내려온 곳에도 탑을 세웠는데, 여기에는 비구ㆍ비구니가 약 1천 명가량 있었으며, 그들은 공양을 함께하고 대ㆍ소승을 가리지 않고 배우고 있었다. 이곳에 흰 귀를 가진 한 마리의 용이 있었는데 승려들을 위하는 단월(檀越)이 되어 나라 안을 풍요롭게 하고, 시절에 맞게 비를 내려 여러 가지 재해가 없게 하며 승려들이 항상 평안(平安)을 얻게 했으니 승려들은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겼다. 그리하여 용을 위해 용사(龍舍)를 짓고 좌처(坐處)를 마련했다. 또한 용을 위해 복식(福食)을 베풀었으며 승려들은 매일 세 사람씩 골라 용사로 보내 음식을 공양했다. 매번 하안거가 끝날 때면 용은 그 형상을 변화시키고 두 귀 언저리가 흰 한 마리의 작은 뱀이 된다. 승려들이 이를 알고는 동(銅)쟁반에 소락(酥酪)을 가득 담아 놓고 용을 가운데 둔 채 상좌(上座)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안부를 묻듯 용을 향해 엎드린다. 그러면 뱀은 다시 용으로 변해 가버리곤 했는데 매년 한 번씩은 이와 같이 했다. 그 나라의 풍요로움과 백성들의 번성함은 견줄 바 없이 매우 영화로웠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방문하게 되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
이 절 서북쪽 50유연 되는 곳에 대분사(大墳寺)라 하는 절이 있었는데 대분이란 악귀(惡鬼)의 이름이다. 부처님께서 본래 이 악귀를 제도하신 일이 있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곳에 정사를 세우고 그 정사를 아라한에게 보시하였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손을 씻으실 때 물방울이 떨어진 곳이 있는데,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곳은 청소를 잘했지만 물방울이 떨어진 자국은 없어지지 않고 언제나 남아 있다.
이곳에는 따로 불탑이 있는데, 이 불탑은 착한 귀신이 항상 깨끗이 청소를 해서 처음부터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어떤 삿된 견해[邪見]를 가진 국왕이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청소를 잘한다면, 내가 여기에 다수의 장병을 머무르게 하고 많은 오물을 쌓으리라. 그렇게 하면 그대는 그것을 다시 깨끗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바로 큰 바람을 일으켜 그것들을 날려 보냈으며 그곳을 전과 다름없이 깨끗하게 했다고 한다. 그곳에는 또 백 개의 작은 탑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수를 온종일 헤아려도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알고 싶은 사람이 있어 하나의 탑 모서리에 한 사람씩 배치하여 계산하고 또 계산하여도 사람마다 많거나 적거나 하여 알 수가 없었다. 또 하나의 승가람이 있었는데 6,7백 명의 승려가 있었다. 그곳에는 벽지불이 공양을 한 곳이 있는데, 그 땅의 넓기는 수레바퀴만 했다. 다른 곳은 풀이 나 있으나 그곳만은 유독 풀이 나 있지 않으며, 옷을 말렸던 곳도 역시 풀이 나지 않고, 옷을 깔았던 자리도 지금까지 있다.
법현은 용정사(龍精舍)에 머물면서 하안거83)를 마치고 동남으로 7유연을 가서 계요이성(罽饒夷城)84)에 도착하였다. 이 성은 항수(恒水:갠지스강)에 접해 있었는데, 여기에는 두 개의 승가람이 있었고 모두 소승을 배우고 있었다. 성 서쪽으로 6,7리 되는 항수의 북쪽 기슭에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설법하신 곳이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과 육신은 물거품과 같다고 설하셨다고 한다. 이곳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항수를 건너 남쪽으로 3유연을 가서 가리(呵梨)라는 촌에 도착하였다. 부처님께서 이 마을에서 설법하시고 경행(經行)하시며 좌선(坐禪)하셨다고 하는데 그곳에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10유연을 가서 사기대국(沙祇大國)85)에 이르렀다. 사기성 남문(南門)을 나가면 길 동쪽으로 부처님께서 이곳에 계실 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꽂으신 곳이 있었다. 그 버드나무 가지는 자라서 높이가 7척에 이르자 더 이상 크거나 줄지 않았다. 여러 외도와 바라문들이 질투하여 잘라 버리거나 뽑아서 멀리 버리기도 하였지만 그 나무는 계속 자라나 본래의 모습과 같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성중에는 네 분의 부처님께서 경행하고 앉았던 곳이 있었는데, 탑이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8유연을 가서 구살라국(拘薩羅國)의 사위성(舍衛城)86)에 도착하였다. 성내 인구는 얼마 되지 않아 모두 2백여 가구 남짓이었는데 곧 파사닉왕(波斯匿王)87)이 다스리던 곳이다. 대애도(大愛道)88)의 본래 정사가 있던 곳, 수달장자(須達長者)89)의 정벽(井壁), 그리고 앙굴마(鴦掘魔)90)가 득도 열반하고 소신(燒身)한 곳에 후세 사람이 탑을 세웠는데, 모두 다 이 성안에 있다. 여러 외도와 바라문이 질투심을 일으켜 이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하늘에서 곧 천둥 번개와 벼락을 쳐 결국 파괴할 수가 없었다.
성의 남문을 나와 1,200보 되는 길 서편에 장자 수달이 정사를 세웠는데, 이 정사는 동쪽을 향해 문호(門戶)가 열려 있고 문호의 양쪽에 두 개의 석주(石柱)가 있었다. 왼쪽 석주 위는 수레 모양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석주 위는 소[牛] 모양으로 만들었다. 정사 좌우의 지류(池流)는 청정했고 나무와 숲은 무성하며 갖가지 꽃들은 울연(蔚然)히 피어 있어 볼 만했는데 여기가 이른바 기원정사(祇洹精舍:祇園精舍)였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 어머님을 위해 90일간 교설하실 때, 파사닉왕은 부처님을 뵙고자 우두전단(牛頭旃檀)을 깎아 불상을 만들고 부처님의 좌처(坐處)에 두었다. 그 후에 부처님께서 돌아오시고 정사에 들어가시자 그 상(像)은 곧 부처님을 피하여 밖에 나와 부처님을 마중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가 앉으라. 내가 열반[般泥洹]한 후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위해 법식(法式)이 되리라.”
그러자 상(像)은 곧 돌아가 제자리에 앉았다. 이 상은 모든 불상의 최초의 것으로 후세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20보 떨어진 남쪽 변의 작은 정사(精舍)로 이주하여 상(像)과 거처를 달리하셨다.
기원정사는 본래 7층이었는데, 여러 나라의 왕과 백성이 다투어 공양하고 비단 번개(幡蓋)를 매달고 꽃을 뿌리며 향을 사르고 계속 등을 밝혀 다음 날 낮에도 그치지를 않았다. 그런데 쥐가 등주(燈炷)를 갉아먹는 바람에 번개(幡蓋)에 불이 붙고 드디어 정사에도 옮겨 붙어 7중(重)이 모두 타 버렸다. 그리하여 여러 국왕과 백성들은 모두 크게 슬퍼하며 전단상(栴檀像)이 다 타 버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4,5일이 지난 뒤에 동쪽의 작은 정사의 문을 열자 홀연 본상(本像)이 보였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기뻐하여 함께 정사를 고쳐 양중(兩重)으로 짓고 상을 제자리에 옮겼다.
법현과 도정은 처음으로 기원정사에 이르러 옛날 세존께서 이곳에 25년 간 머무르셨던 것을 생각했다. 자신은 변지(邊地)에서 태어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유력(遊歷)하는 동안 되돌아간 사람도 있고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오늘 여기에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음을 보고 창연(愴然)히 마음으로 비통해했다. 그러자 기원정사의 여러 승려들이 나와서 법현 등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대답했다.
“중국[漢]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승려들은 감탄하면서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변방의 나라 사람이 법을 구하려고 용하게 여기까지 오셨군요.”
그러면서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우리들의 여러 스승님들이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동안 아직 중국의 도인이 이곳까지 온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정사의 서북쪽 4리 되는 곳에 득안(得眼)91)이라 불리는 숲이 있다. 본래 5백 인의 맹인들이 정사에 의지해서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셨기 때문에 모두 눈을 뜰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맹인들은 기쁜 나머지 지팡이를 땅에 꽂고 부처님께 머리를 땅에 대고 예배하였다. 그 후 지팡이가 자라나서 커지자 세상 사람들은 이를 중하게 여겨 아무도 베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큰 숲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득안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정사의 여러 승려들 가운데는 점심을 먹고 나서 이 숲에 들어가 좌선하는 자가 많았다. 기원정사의 동북 6,7리에 비사거모(毗舍佉母)92)가 정사를 짓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했는데 이곳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기원정사의 대원(大院)에는 각각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향하고 다른 하나는 북쪽을 향해 있었다. 이 동산은 수달장자가 금전을 깔고 땅을 샀던 곳이다. 정사는 동산 중앙에 있으며 부처님께서는 이곳에 가장 오래 머무셨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시고, 사람들을 제도하시며 경행하시고 앉으셨던 곳에는 모두 탑이 세워져 있으며 이름자[名字]가 붙어 있었다. 또한 손타리(孫陀利)93)를 죽여 부처님을 비방했던 곳도 있었다.
기원의 동문을 나와 북쪽으로 70보 되는 길 서편은 옛날에 부처님께서 96종의 외도들과 함께 논의하시던 곳이다. 이때 국왕ㆍ대신ㆍ거사ㆍ백성들은 모두 운집하여 논의를 들었다. 그때 여자 외도 전차마나(旃遮摩那)94)가 질투심을 일으켜 옷을 뭉쳐 배에 붙이고 마치 임신한 것처럼 꾸미고는 대중들의 모임에서 부처님께서 비법(非法)을 행하였다고 비방하였다. 이에 천제석이 흰 쥐로 변화하여 그 여자의 허리띠를 갉아서 끊어 버리자 배에 붙였던 옷이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별안간 땅이 갈라지면서 그 여자는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것이다. 또 조달(調達)95)이 독이 묻은 손톱으로 부처님을 해치려 하다가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던 곳에도 후세 사람은 모두 . 또한 논의를 하시던 곳에는 정사가 세워져 있었는데, 높이는 6장 정도 되고 내부에는 좌불상이 있었다. 그 길 동편에는 영복(影覆)이라고 하는 외도의 천사(天寺)가 있었는데 논의하던 곳의 정사와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서 있었다. 이 천사의 높이 또한 6장 정도이다. 천사 이름을 영복이라 한 것은, 해가 서쪽에 있을 때는 세존 정사의 그림자가 외도의 천사에 비치지만, 해가 동쪽에 있을 때에는 외도 천사의 그림자는 북쪽에 비치고 부처님 정사에는 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외도는 항상 사람을 보내서 그 천사를 지키며 청소하고 향을 사르게 했고 연등 공양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이 되면 그 등불은 부처님의 정사 안에 옮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라문은 크게 노하며 사문들이 자기들의 등불로 부처를 공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바라문은 밤이 되자 몰래 숨어서 그 사실을 살피고자 하였다. 그런데 천신(天神)이 나타나 등불을 들고 부처님 정사를 세 번 돌더니 공양을 했다. 그리고 부처님께 공양하고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에 바라문은 부처님 신통력의 위대함을 알게 됐고 즉시 집을 버리고 불도에 귀의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근래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기원정사를 둘러싸고 98개의 승가람이 있는데 모두 승려들이 거처했으며 한 곳만 승려가 없었다. 중인도에는 96종의 외도가 있었는데 모두 현재ㆍ미래를 알며 각각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또한 모두 걸식을 하는데 발우만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복을 구하여 넓은 길옆에 복덕사(福德舍)96)를 세운다. 그리하여 집ㆍ침상ㆍ침구류ㆍ음식을 여행자나 출가자, 또는 가고 오는 객들에게 제공하는데 기간마다 다를 뿐이었다. 조달 또한 무리와 함께 있으면서 항상 과거 삼불을 공양하면서도 오직 석가문불(釋迦文佛)은 공양하지 않았다.
사위성(舍衛城) 동남쪽으로 4리 되는 곳에 유리왕(琉璃王)97)이 사이국(舍夷國)98)을 정벌하려고 하였을 때, 세존께서 길옆에 서 계시던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탑이 세워져 있었다.
성 서쪽 50리 되는 곳에 도유(都維)라 하는 읍(邑)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가섭불(迦葉佛)99)의 본생처(本生處)이고, 부자(父子)가 상견한 곳이자 열반한 곳인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가섭여래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있는 곳에도 대탑이 세워져 있었다.
사위성의 동남으로 12유연을 가다 나비가(那毘伽)라 불리는 읍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구루진불(拘樓秦佛)100)이 출생한 곳이고 부자가 상견한 곳이자 열반한 곳인데 역시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1유연 채 못 가면 한 읍에 이르는데, 이곳은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101)이 출생한 곳이고 부자가 상견한 곳이자 열반한 곳인데 역시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유연 채 못 가서 가유라위성(迦維羅衛城)102)에 이르렀다. 이 성안에는 왕과 백성이 없고, 매우 황폐했으며, 승려들과 민호(民戶) 수십 가구만 있을 뿐이었다. 백정왕(白淨王)103)의 고궁 터에 태자모(太子母)104)의 형상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이는 곧 태자가 흰 코끼리를 타고 어머니의 태내에 들어갈 때의 상이었다. 또한 태자가 성의 동문을 나와 병자를 보고 수레를 돌렸던 곳 등에도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아이(阿夷)105)가 태자의 상(相)을 보던 곳, 난타(難陀)와 더불어 코끼리를 타고 활을 쏘던 곳도 있었다. 이때 그 화살은 동남쪽으로 30리 떨어진 땅에 꽂혀 샘물이 솟아나게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손질하여 우물을 만들고 길 가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돌아와서 부왕을 만나셨던 곳, 5백 명의 석가족이 출가하여 우파리(優波離)106)를 향해 절을 하고 대지가 육종(六種)으로 진동했던 곳, 부처님께서 제천(諸天)을 위해 법을 설하셨을 때 사천왕(四天王)이 네 문을 지켜 부왕(父王)도 들어올 수 없었던 곳,107) 부처님께서 니구율수(尼拘律樹)108) 밑에서 동쪽을 향하고 앉으시자 대애도(大愛道)가 부처님께 승가리(僧伽梨)109)를 보시하던 곳 등이 있었는데 이 나무도 지금까지 남아 있다. 유리왕(琉璃王)은 석가족을 모두 죽였지만, 석가족이 그에 앞서서 모두 수다원(須陀洹)110)을 얻었던 곳에도 탑이 세웠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성의 동북쪽 몇 리 정도에 왕전(王田)이 있었는데, 이곳은 태자가 나무 아래 앉아서 밭 가는 농부를 보셨던 곳111)이다.
성의 동쪽 50리에 왕원(王園)이 있었는데 정원 이름을 논민(論民)112)이라했다. 부인이 못에 들어가 목욕하고 나와 북쪽 기슭으로 스무 걸음을 걷다가 (멈추고) 손을 들고 나뭇가지를 잡은 채 동쪽을 향해 태자를 낳았다. 태자는 땅에 떨어지자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두 용왕이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던 곳이다. 이 욕처(浴處)는 뒤에 우물로 만들었고, 부인이 목욕했던 못에서는 지금도 승려들이 늘 그 물을 마시고 있다.
부처님께서 항상 선정(禪定)에 들었던 곳이 네 군데였는데, 첫째는 성도한 곳이며, 둘째는 법륜(法輪)을 굴리셨던 곳이고, 셋째는 설법하고 논의하면서 외도를 항복시키신 곳이며, 넷째는 어머니를 위하여 도리천에 올라가 설법하고 내려오신 곳이었다. 그 밖에도 수시로 계셨던 곳이 있었다.
가유라위국은 큰 흉년이 들어 백성은 흩어지고 인적이 드물었는데 길 가기가 무서워 백상(白象)이나 사자도 함부로 다니지 못했다.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에서 동쪽으로 5유연을 가면 람막(藍莫)113)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왕은 부처님 사리의 일부분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탑을 세웠는데 그 이름이 곧 람막탑이었다. 탑 옆에는 못이 있고 이 못 속에는 용이 있었는데 항상 이 탑을 수호하며 주야로 공양하고 있었다. 아육왕이 이 세상에 나와 8탑을 파괴하고 8만 4천의 탑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래서 7탑을 헐고 나서 마지막으로 이 탑을 헐려고 하였는데, 그때 용이 몸을 드러내면서 아육왕을 데리고 궁에 들어가 여러 가지 공양구를 보여 주면서 왕에게 말하였다.
“만약 당신의 공양이 이보다 훌륭하다면 지키던 탑을 헐어도 좋소이다. 나는 당신과 다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자 아육왕은 그 공양구가 이 세상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탑을 헐지 않고 돌아갔다. 탑 근처는 너무도 황폐해서 청소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코끼리 떼만이 코로 땅에 물을 뿌리고 여러 가지 꽃과 향을 가져다 탑에 공양하곤 했다. 여러 나라 도인114)이 이곳에 와서 탑을 예배하려고 하였으나 코끼리와 맞닥뜨리자 크게 겁을 먹고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겼다. 그러다 코끼리가 법답게 탑에 공양하는 것을 보자 이 원중(園中)에 탑을 공양할 승가람이 없어 코끼리에게 청소를 시키게 된 것을 스스로 매우 슬퍼했다. 그리하여 그 도인은 대계(大戒)115)를 버리고 사미(沙彌)로 되돌아가 스스로 초목을 뽑으면서 그 근처를 정비하고 정결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국왕에게 승려가 머물 곳을 만들도록 권하고 사주(寺主)가 되었다. 지금도 여기에는 승려가 살고 있다. 이는 근래의 일로서 그 후 대대로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항상 사미가 사주가 되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유연을 가면 태자가 차닉(車匿)116)과 백마를 돌려보낸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에서 다시 동쪽으로 4유연을 가면 탄탑(炭塔)117)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에도 승가람이 있었다.
다시 동쪽으로 12유연을 가면 구이나갈성(拘夷那竭城)118)에 이른다. 성 북쪽 쌍수(雙樹) 사이, 희련하(希連河)119)변에서 세존께서 머리를 북쪽으로 하고 열반하신 곳 및 수발(須跋)120)이 마지막으로 득도한 곳, 금관(金棺)에 넣어 7일 동안 세존을 공양한121) 곳, 금강역사(金剛力士)122)가 금강저(金剛杵)를 놓아 버린 곳, 여덟 왕들이 사리를 나눈123) 곳 등이 있었는데, 이곳에도 모두 탑이 세워졌고 승가람이 있었는데 지금도 모두 현존하고 있다. 이 성중에는 백성들이 매우 적어 약간의 승려와 민호가 있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12유연을 가다 여러 이차족(梨車族)124)들이 부처님의 열반을 뒤좇으려고 한 곳에 이르렀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를 허락하시지 않자 그들은 부처님을 흠모하여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변화하여 크고 깊은 구덩이를 파서 건너올 수 없게 하시고 유품(遺品)으로 발우를 주고 신심을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곳에 석주(石柱)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명제(銘題)가 있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10유연을 가서 비사리국(毘舍離國)125)에 이르렀다. 비사리성 북쪽에는 대림중각정사(大林重閣精舍),126)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곳, 그리고 아난반신탑(阿難半身塔)127)이 있었다. 이 성 뒤에는 본래 암바라녀(菴婆羅女)128)의 집이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을 위해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 성의 남쪽 3리 되는 곳 길 서편에 암바라녀가 동산을 부처님께 보시하여 부처님께서 주처로 하신 곳이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려고 여러 제자와 더불어 비사리성의 서문을 나와 몸을 돌려 오른쪽으로 도셨다. 그리고 비사리성을 뒤돌아보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곳이 내 마지막 소행처(所行處)이니라.”
후세 사람들은 이곳에 탑을 세웠다.
성의 서북쪽 3리 되는 곳에 방궁장(放弓仗)129)이라는 탑이 있는데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은 항수(恒水:갠지스강) 상류에 국왕이 있었는데, 왕의 소부인(小夫人)이 하나의 육태(肉胎)를 낳았다. 대부인(大夫人)은 이를 투기하면서 말했다.
“그대가 낳은 어린아이는 상서롭지 못한 징후가 보인다.”
그러고는 그 육태를 목함에 넣어 항수에 던져 버렸다. 하류에 있는 나라의 왕이 돌아보던 중 물 위로 떠내려오는 목함을 발견하고 열어 보았는데 단정하고 뛰어난 1천 명의 어린아이들이 있는지라 데려다 길렀다. 드디어 이들이 자라자 그들은 대단히 용감하고 강건해져서 정벌(征伐)에 나아가면 반드시 상대를 항복시키곤 했다. 결국 이들은 부왕의 나라를 치게 되었다. 왕이 크게 근심하고 있을 때 소부인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근심하고 계십니까?”
왕이 말했다.
“저쪽 나라 왕에게 비할 데 없이 용감하고 강건한 1천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들이 우리나라를 치러 온다고 해서 근심하고 있던 중이오.”
소부인은 말했다.
“왕이시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다만 성 동쪽에 높은 누(樓)를 만들고 적이 쳐들어오면, 저를 누 위에 올려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적군을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왕은 그와 같이 하였다. 드디어 적이 쳐들어오자 소부인은 누 위에 올라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내 아들이니라. 어째서 너희들은 반역을 하려는가?”
적들이 말했다.
“당신이 누군데 우리들의 어머니라고 하십니까?”
소부인이 말했다.
“만약 너희들이 믿지 못하겠거든 모두 위를 보고 입을 벌려라.”
소부인이 두 손으로 양쪽 젖을 짜자 한쪽 젖에서 각각 5백 줄기로 흘러내려 1천 명 자식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에 적들은 그 여인이 자기들의 어머니인 것을 알고 즉시 무기[弓仗]를 던져 버렸다. 그러자 두 부왕은 함께 사유(思惟)하다 모두 벽지불이 되었고 이 두 벽지불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뒤에 세존이 성도하시고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가 옛날 내가 무기를 버렸던 곳이니라.”
후세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는 이곳에 탑을 세웠는데 그런 이유로 방궁장탑이라 하였다. 1천 명의 어린아이란 현겁 천불(賢劫千佛)130)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방궁장탑 옆에서 목숨을 마치셨는데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로부터 3개월 후에 열반(涅槃)에 들 것이다.”
이때 마왕은 아난의 정신을 어지럽게 해서 아난으로 하여금 부처님께 이 세상에 더 머무시도록 청하지 못하게 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3,4리쯤 가면 탑이 있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1백 년이 지나 비사리(毘舍離:Vaiśāli)의 비구가 계율을 잘못 행하여 십사(十事)의 증언131)으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때 여러 나한과 계율을 지키는 비구 등 7백 명이 모여 다시 율장을 검교(檢校)132)하였다고 한다. 후세 사람이 이곳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4유연을 가서 5하(河)가 합류하는 곳133)에 이르렀다. 아난은 마갈국(摩竭國)에서 비사리로 가다가 열반에 들려고 하였다. 이때 제천(諸天)이 아사세(阿闍世)왕에게 고하였으므로 아사세왕은 즉시 스스로 가마에 올라타고 사중(士衆)을 이끌고 뒤쫓아 와 강 상류에 이르렀다. 비사리의 이차족(梨車族)들도 아난이 온다는 말을 듣고 또한 달려 나와 마중하였다. 쌍방이 다 강 상류에 이르렀다. 아난은 앞으로 나아가면 아사세왕이 한스러워할 것이고 뒤로 되돌아가면 이차왕이 원망할 것이라 생각하고 강 중앙에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가 몸을 태워 열반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둘로 나누어 각각 반씩 양쪽 강변으로 나누었다.134) 두 왕궁은 각각 반신(半身)의 사리를 얻고 자기 나라에 돌아가 탑을 세웠다.
강을 건너 남쪽으로 1유연 내려가서 마갈제국(摩竭提國)의 파련불읍(巴連弗邑)135)에 이르렀다. 파련불읍은 아육왕이 다스리던 곳이다. 성중의 왕궁은 모두 귀신에게 짓게 한 것으로 돌을 쌓아 담과 문을 만들었으며, 조각이나 장식은 이 세상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아육왕의 동생은 나한도(羅漢道)를 깨치고136) 항상 기사굴산(耆闍崛山)137)에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왕은 동생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집에서 공양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동생은 산속에서 조용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왕은 동생에게 말하였다.
“내 청을 받아 주기만 하오. 그렇게 산이 좋다면 마땅히 그대를 위해 성 뒤에 산을 만들어 줄 것이오.”
그러고는 왕은 음식을 갖추어 여러 귀신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내일은 모두 내 청을 받아 줘야겠소. 좌석이 없으니 각자 돌을 가지고 와 주시오.”
그리하여 그 다음 날 대귀신(大鬼神)들은 각각 커다란 돌을 가지고 와서 4,5보 간격으로 둘러앉았다. 왕은 귀신들에게 그 돌을 쌓아 큰 돌산을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그 산 바닥에 다섯 개의 커다란 방석(方石)으로 길이 3장, 너비 2장, 높이 1장 남짓의 석실을 만들게 하였다.
대승바라문(大乘婆羅門)의 아들로 나태사미(羅汰私迷)라는 사람이 이 성 안에 살았다. 그는 깨달음을 얻어 지혜가 많고 도달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청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왕은 두터이 공경하며 사사(師事)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묻는 경우에도 결코 함께 나란히 앉지를 않았다. 왕이 설령 애경심(愛敬心)으로 손을 잡는다고 해도 손을 잡고 난 다음에 바라문은 바로 손을 씻는 것이었다. 나이는 50세가량으로 온 나라에서 존경과 숭앙을 받았다. 이 한 사람에 의뢰하여 불법을 널리 펴고 있었기 때문에 외도들도 불법의 승려들에게 박해를 가할 수 없었다.
아육왕탑 부근에 마하연승가람(摩訶衍僧伽藍:대승 사찰)이 세워져 있는데, 대단히 엄숙하고 수려했다. 또 소승의 절도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6,7백의 승려가 있었다. 그들의 위의(威儀)와 질서는 볼 만하다. 사방의 덕이 높은 사문이나 학문(學問)하는 사람으로 불법의 깊은 뜻과 학문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절에 왔다. 일찍이 바라문의 스승으로서 문수사리(文殊師利)라 일컫는 분도 이 승가람에 머무셨는데, 국내의 대덕 사문과 여러 대승의 비구들도 모두 존경하여 우러렀다. 무릇 중인도에서는 이 나라의 도성(都城)인 파련불읍이 제일 컸다. 성안 사람들은 부유하고 융성하며 다투어 인의(仁義)를 행했다. 매년 건묘월(建卯月)138)의 8일에는 항상 행상(行像)을 행했다. 사륜마차를 만들고 그 위에 대나무를 묶어 5층으로 만들었다. 여기에는 승로(承攎)139)와 언극(椻戟)140)이 있으며 높이가 2장 정도로 그 모양은 흡사 탑과 같았다. 그 위를 백첩(白氎)으로 덮고 제천(諸天)의 형상을 그림으로 담았다. 다시 금은과 유리로 그 위를 장식하고, 비단으로 만든 번개(幡蓋)를 달며 네 모퉁이에 감실(龕室)을 만들었다. 감실에는 모두 좌불(坐佛)이 있고 보살이 서서 시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륜마차는 20개가량 되는데, 수레마다 장식이 각각 달랐다. 행상일(行像日)이 되면 경내(境內)의 도속(道俗)은 모두 모여들어 기악(伎樂)을 부르고 연주하며 꽃과 향으로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 바라문이 와서 불상을 초청하면 불상은 차례차례 성내에 들어와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은 밤새껏 등을 켰고 기악의 공양을 했다. 그러한 것은 나라마다 모두 같았다.
이 나라의 장자와 거사는 각각 성안에 복덕의약사(福德醫藥舍)141)를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인도에서 궁핍한 이, 고독한 이, 장애인과 일체의 병자들은 모두 이 복덕의약사에 와서 여러 가지 것을 공급받았다. 여기서 의사는 병을 진찰하고 음식과 탕약(湯藥)을 주어 안락하게 하고, 차도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아육왕은 7탑을 부수어 8만 4천의 탑을 만들었다. 그중 최초로 만든 대탑이 이 성의 남쪽 3리 남짓한 곳에 있었다. 이 탑 앞에는 부처님의 족적(足跡)이 있어 거기에 정사142)가 세워졌는데 문호[戶]의 북쪽이 탑을 향하고 있었다. 남쪽에는 석주(石柱)가 하나 있었는데, 둘레는 1장 4,5척, 높이는 3장 남짓 되었다. 상부에는 아육왕이 이 염부제에서 사방의 승려에게 보시하고 그것을 돈으로 다시 사들이기를 세 번 되풀이하였다는 명제(銘題)가 있었다. 반대로 탑의 북쪽 3,4백 보 되는 곳은 아육왕이 본래 니리성(泥梨城)을 지었던 곳이다. 니리성 안에는 석주가 있었는데, 그 높이 또한 3장 남짓이 되었다. 상부에는 사자(師子)가 조각되어 있었고 석주 위에는 명문(銘文)이 있었는데 니리성을 만든 인연과 연월일이 적혀 있었다.
이곳에서 동남으로 9유연을 가서 일소고석산(一小孤石山)143)에 이르렀다. 산의 정상에 석실(石室)이 있었는데 석실은 남쪽을 보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그 안에 앉으시고 천제석(天帝釋)이 하늘의 악사 반차(般遮)144)를 거느리고 거문고를 타면서 부처님을 즐겁게 해 드렸던 곳이다. 그때 제석은 42사(事)145)를 질문했다. 부처님께서는 일일이 손가락으로 돌에 탑을 그렸는데, 지금도 그린 자국이 남아 있다. 이 안에는 또한 승가람이 있었다.
이곳에서 서남으로 1유연을 가서 나라(那羅)라는 마을에 이르렀다. 이곳은 본래 사리불이 태어난 촌락이었다. 그 뒤에 사리불은 이곳에 돌아와서 열반에 들었고 그리하여 이곳에 탑이 세워졌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유연을 가서 왕사신성(王舍新城)146)에 이르렀는데 이 신성은 아사세왕(阿闍世王)이 세운 성이었다. 성안에는 두 개의 승가람이 있었다. 성의 서문을 나와 3백 보 되는 곳에 아사세왕이 부처님의 사리 일부분을 얻어 탑을 세웠는데 이 탑은 높고 크며 장엄하고 수려했다. 성을 나와 남쪽으로 4리를 가다 남쪽을 향해 골짜기로 들어가 오산(五山)147)의 뒤에 이르렀다. 오산의 둘레는 성곽처럼 되어 있는데, 이곳은 곧 병사왕(蓱沙王)148)의 구성(舊城)이었다. 성은 동서로 약 5, 6리, 남북으로 7, 8리나 되었다. 여기에 사리불과 목련이 처음으로 알비(頞鞞)149)를 본 곳, 니건자(尼犍子)150)가 불구덩이를 만들고 독으로 밥을 지어 부처님을 청한 곳, 아사세왕이 흑상(黑象)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해치려 하던 곳151) 등이 있다. 성의 동북방 굴곡된 곳에 기구(耆舊)152)가 암바라(菴婆羅)의 동산 안에 정사를 세우고, 부처님과 1,250명의 제자를 청하여 공양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성안은 비고 황폐하여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골짜기로 들어가 산을 끼고 동남쪽으로 15리를 올라가서 기사굴산에 이르렀다. 정상에 3리 못 미친 곳에 석굴이 있는데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본시 이곳에서 좌선하셨다고 했다. 그 서북으로 30보 되는 곳에 또 하나의 석굴이 있는데 아난이 그 속에서 좌선했다. 천마(天魔)153) 파순(波旬)은 수리로 변하여 이 굴 앞에 살면서 아난을 무섭게 하였다. 그때 부처님께서 신통력[神足力]으로써 돌 사이로 손을 뻗쳐 아난의 어깨를 어루만져 주시자 공포가 즉시 없어졌다고 한다. 이 사나운 새의 발자취와 손 구멍[手孔]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이곳을 조취굴산(鵰鷲窟山)이라고 했다. 굴 앞에 4불(佛)의 좌처(坐處)가 있었고, 여러 나한들이 각각 좌선하던 석굴들도 있었는데 수백 곳이나 되었다. 부처님께서 석실(石室) 앞에 계시면서 동서로 경행(經行)하실 때 조달(調達)이 산의 북쪽 높고 험한 산길 사이에서 옆으로 돌을 떨어뜨려 부처님의 발가락을 상하게 했던 곳도 있었는데,154) 그 돌은 지금도 있다. 부처님의 설법당(說法堂)은 이미 허물어져 버렸고 벽돌로 쌓았던 터만이 남아 있었다.
이 산은 봉우리가 수려하고 단엄(端嚴)하며 오산(五山) 중 가장 높았다. 법현은 신성(新城)에서 꽃ㆍ향과 유등(油燈)을 사서 두 장로 비구에게 청하여 가져오게 해 기사굴산에 올라갔다. 법현은 꽃과 향을 공양하고 등화(燈火)를 계속 밝히며 탄식하고 비통해 하였다. 이윽고 눈물을 거두고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옛날에 이곳에 머무셨고 수능엄(首楞嚴)을 설하셨는데 법현은 살아서 부처님을 뵙지 못하고 유적처소(遺跡處所)만 볼 뿐이로다.”
그리하여 석굴 앞에서 수능엄경(首楞嚴經)을 송(誦)하고는 하룻밤을 머물고 다시 왕사신성으로 돌아갔다.
구성(舊城)을 나가 북쪽으로 3백여 보를 가면 길 서쪽에 가란타(迦蘭陀)155) 죽원정사(竹園精舍)가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데 승려들에 의해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정사의 북쪽 2,3리 되는 곳에 시마사나(尸磨賒那)156)가 있었는데, 시마사나란 한(漢)나라 말로 ‘죽은 사람을 버린 묘’를 말한다.
남산(南山)을 돌아 서쪽으로 3백 보를 가서 빈파라굴(賓波羅窟)157)이라고 하는 석실 하나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식후에 항상 이곳에서 좌선하셨다고 했다. 다시 서쪽으로 5,6리를 가면 산의 북쪽 그늘진 곳에 차제굴(車帝窟)158)이라고 불리는 석실 하나가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 후 5백 아라한이 경전을 결집(結集)했던 곳이다. 그때에 세 개의 높은 자리를 마련하고 장엄하였는데, 사리불은 왼쪽에 있었고 목련은 오른쪽에 있었다.159) 모여든 아라한은 5백 명에서 한 사람이 부족했는데 대가섭을 상좌로 삼았다고 한다. 그때에 아난은 문 밖에만 있고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160) 그곳에 탑을 세웠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다.
이 산을 끼고 돌면 또한 여러 나한들이 좌선했던 석굴이 대단히 많았고 구성(舊城)을 나가 북동쪽으로 3리를 내려가면 조달의 석굴이 있었다. 이곳에서 50보 떨어진 곳에는 커다랗고 네모난 흑석굴(黑石窟)이 있었는데, 옛날 어떤 비구가 이 위에서 경행(經行)을 하면서 이 몸이 무상하고 고(苦)이고 공(空)이라고 사유했다고 한다. 그 비구는 부정관(不淨觀)을 얻고 제 몸을 싫어하여 칼을 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또 세존께서 계(戒)를 제정하신 것을 생각하니 자살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또 생각하기를 ‘다만 나는 삼독(三毒)의 적(賊)을 죽이려는 것이다’라 하고 즉시 칼로 자기의 목을 잘랐다. 처음 상처를 냈을 땐 수다원(須陀洹)을 얻었고, 반쯤 목을 잘랐을 땐 아나함(阿那含)161)을 얻었으며, 목이 다 잘렸을 때에는 아라한(阿羅漢)162)의 과위를 성취하여 열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4유연 가서 가야성(伽耶城)163)에 이르렀다. 이곳 역시 성안은 비고 황폐했다. 다시 남쪽으로 20리를 가서 보살께서 본시 6년간 고행하시던 곳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임목(林木)164)이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3리를 가다 부처님께서 물에 들어가 목욕하시고 하늘이 드리워 준 나뭇가지를 잡고 못에서 나오신 곳에 이르렀다. 다시 북으로 2리를 더 가면 미가(彌家)의 여자가 부처님께 우유죽을 바친 곳이 있었고 여기서 다시 북으로 2리를 더 가면 부처님께서 큰 나무 아래에 있던 돌 위에서 동쪽으로 앉으셔서 우유죽을 잡수시던 곳이 있었는데 그 나무와 돌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돌은 너비와 길이가 약 6척이고 높이는 약 2척가량 되었다.
중인도는 추위와 더위가 엇비슷하고 조화로워 수목은 수령이 수천 년에서 1만 년에 이른다. 이곳에서 동북으로 반 유연을 가서 한 석굴165)에 이르렀다. 보살께서 그 안에 들어가 결가부좌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성도한다면 마땅히 신통한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던 곳이다. 석벽 위에는 부처님의 그림자가 나타나 있었는데 길이는 3척 정도로 지금도 매우 뚜렷하다. 이때 천지가 크게 움직이더니 여러 천신(天神)이 공중에서 또렷하게 말했다.
“이곳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여러 부처님의 성도처가 아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반 유연을 조금 못 가면 패다수(貝多樹)166) 아래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야말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여러 부처님 성도처이다.”
제천은 이렇게 말을 마치자마자 앞장서서 이끌었다. 이렇게 이끌고 가자 보살은 일어나서 따라갔다. 나무에서 30보 떨어진 곳에서 하늘은 길상초(吉祥草)167)를 주었는데 보살은 그것을 받았다. 다시 15보를 가니 5백 마리의 푸른 참새가 날아와 보살 둘레를 세 바퀴 돌고 날아갔다. 보살은 앞서 가서 패다수 아래에 이르자 길상초를 깔고 동쪽으로 앉았다. 이때 마왕(魔王)이 보낸 세 옥녀(玉女)가 북쪽에서 와서 시험했고 마왕 자신은 남쪽으로부터 와서 시험했다.
그러나 보살께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자 마왕의 병사들은 흩어져 물러났고 세 옥녀는 노모(老母)로 변했다. 상술한 6년간 고행하던 곳에서 이곳까지 여러 곳에는 후세 사람이 모두 그 안에 탑을 세우고 상(像)을 세웠는데, 지금도 모두 남아 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7일 동안 나무를 보시면서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시던 곳, 부처님께서 패다수 아래에서 7일간 동서로 경행하던 곳, 여러 천신이 칠보당(七寶堂)을 짓고 부처님을 7일간 공양하던 곳, 문린맹룡(文鱗盲龍)168)이 7일간 부처님을 맴돌던 곳, 부처님께서 니구율수(尼拘律樹)169) 아래의 네모난 돌 위에서 동쪽으로 앉으셨을 때 범천(梵天)이 와서 부처님을 청하던 곳, 사천왕이 발우를 바치던 곳, 5백 명의 상인들이 초밀(麨蜜)을 부처님께 바치던 곳, 그리고 부처님께서 가섭(迦葉) 형제의 사도(師徒) 1천 명을 제도하시던 곳 등 이 모든 곳에 각각 탑이 세워져 있었다.
부처님께서 득도하신 곳에는 세 개의 승가람이 있었는데 모두 승려들이 살고 있었다. 승려와 민호(民戶)들도 공급이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이곳의 계율은 위의(威儀)ㆍ좌기(坐起)ㆍ입중(入衆)의 법170)에 있어 부처님 재세(在世) 시에 성중(聖衆)이 행했던 것과 같이 준엄하게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이래 사대탑(四大塔)이 있던 곳은 서로 전승하여 단절되지 않았다. 사대탑이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곳, 득도하신 곳, 법륜(法輪)을 굴리신 곳, 열반하신 곳이다.
아육왕이 옛날 어린아이 시절에 길에서 놀고 있을 때, 걸식하러 가는 가섭불(迦葉佛)171)과 마주쳤다. 어린아이는 환희하면서 한 줌의 흙을 집어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부처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가 경행하는 길 위에 물을 섞어 뿌리셨다. 이 과보(果報)로 인해 왕은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염부제(閻浮提)의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은 철륜(鐵輪)을 타고 염부제를 순행하다가 철위(鐵圍)172)의 두 산(山) 사이에 있는 지옥에서 죄인 다스리는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신하들은 대답하였다.
“이것은 귀신의 왕 염라왕(閻羅王)173)이 죄인을 벌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은 스스로 생각하였다.
‘귀신의 왕조차 능히 지옥을 만들어 죄인을 다스리고 있는데, 인간의 왕인 내가 어찌 지옥을 만들어 죄인을 징벌하지 않겠는가?’
그러고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위해 지옥의 주인이 되어 죄인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극악한 자만이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곧 신하들을 각처로 보내 널리 악인을 구하였다. 어느 연못가에 한 남자가 있었는데 키가 크고 장대하며, 피부색은 검고 머리는 황색이며, 눈은 파랗고, 다리로는 물고기를 잡고, 입으로는 금수(禽獸)를 불러 금수가 오자마자 사살(射殺)하여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다. 신하들은 이 사람을 왕에게 데리고 갔다. 왕은 그에게 은밀히 교지를 내렸다.
“너는 사방에 높은 담장을 쌓고, 그 안에 갖가지 꽃과 과일 나무를 심고 좋은 욕지(浴池)를 만들고 장엄하게 꾸며 사람들로 하여금 갈망하여 우러러보게 하여라. 그리고 감옥에는 문호를 만들어 만약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체포하고 여러 가지 죄로 다스려 두 번 다시 나갈 수 없게 하여라. 설사 내가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죄로 다스려 놓아 보내지 말지어다. 이제 나는 그대를 지옥의 주인으로 명하노라.”
그 후 어떤 비구가 걸식을 하다가 점차로 그 문에 들어가게 되었다. 옥졸이 그를 발견하고 즉시 그 죄를 다스리려고 하였다. 비구는 크게 겁을 먹고 잠시 중식(中食) 들기를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옥졸은 그를 절구 속에 넣고 공이로 찧었는데 시뻘건 피가 튀었다. 비구는 이를 보고 이 몸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空)하며 물거품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마자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졸은 비구를 붙잡아 물이 끓는 가마솥에 넣었다. 그러나 비구의 마음은 기쁘기만 하였다. 그러자 불은 홀연히 꺼지고 끓던 물은 식으면서 그 안에 연꽃이 피고 비구는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옥졸은 즉시 왕에게로 가서 옥중의 괴이한 일을 말하고 왕에게 직접 가서 보기를 원했다. 왕은 말했다.
“나는 우선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지금은 갈 수 없다.”
그러나 옥졸은 말했다.
“이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왕이시여, 빨리 가 주십시오. 먼저 하시겠다고 하는 긴요한 일은 뒤로 미루어 주십시오.”
그러자 왕은 할 수 없이 옥졸을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비구는 왕을 위해 설법을 했고 이로써 왕은 신해(信解)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옥을 허물고 전에 했던 여러 가지 악업을 후회했다.
이로부터 왕은 두터이 삼보를 믿고 항상 패다수 아래에 가서 허물을 뉘우치고 자책(自責)하여 팔재계(八齋戒)를 받았다.
그러자 왕의 부인이 물었다.
“왕은 항상 어느 곳에 가십니까?”
신하들이 대답했다.
“왕께서는 항상 패다수 아래로 가십니다.”
부인은 왕이 없을 때를 틈타 사람을 보내 그 나무를 잘라 버렸다. 뒤에 왕이 와서 이것을 보고는 정신이 어지러워지면서 땅에 쓰러졌다. 신하들이 한참 동안 얼굴에 물을 뿌리자 겨우 소생하였다. 왕은 사방에 벽돌을 쌓아 울타리를 만들고 1백 개의 단지에 든 우유를 그 나무뿌리에 부어 주고는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맹세하였다.
“만약 이 나무가 살아나지 못한다면 나도 끝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맹세를 마치자 나무뿌리가 위로 자라서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다. 지금 이 나무의 높이는 10장이 못 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3유연을 가면 계족산(鷄足山)174)이라는 산이 나오는데, 대가섭이 지금 이 산중에 있다고 했다. 산의 갈라진 틈 아래로 가섭이 들어갔는데, 들어간 곳에는 보통 사람은 들어갈 수가 없다고 했다. 밑으로 들어간 곳은 극히 멀고 곁으로 구멍이 나 있는데 가섭의 전신은 이 속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구멍 밖으로는 가섭이 본래 손을 씻었던 흙이 있었다. 그곳 사람들이 머리가 아플 때에는 이 흙을 머리에 바르면 낫는다고 했다.

이 산중에는 옛날부터 여러 나한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인도에 터 잡고 있는 여러 나라 도인들은 해마다 이곳에 와서 가섭에게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가섭을 마음속 깊이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밤이 되면 나한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함께 논의하고 의문 나는 것이 풀리면 홀연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산에는 개암나무가 무성하고 또한 사자ㆍ호랑이ㆍ늑대가 많아 함부로 다닐 수 없었다.
법현은 되돌아와 파련불읍으로 향했다. 항수(恒水)를 따라 서쪽으로 10유연 내려가서 광야(曠野)175)라는 정사에 이르렀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곳으로 지금도 승려가 있다.
다시 항수를 따라 서쪽으로 12유연을 가서 가시국(迦尸國)176)의 바라날성(波羅捺城)177)에 이르렀다. 이 성의 동북쪽으로 10리 정도 되는 곳에 선인녹야원정사(仙人鹿野苑精舍)178)가 있었다. 이 정원에는 원래 벽지불(辟支佛)이 머무르고 계셨으며, 항상 야생 사슴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세존께서 성도하시려 할 때에 제천이 공중에서 합창하였다.
“백정왕자(白淨王子)는 출가하여 도를 배우고 이로부터 7일 후에 마땅히 성불하실 것이다.”
벽지불은 이것을 듣고 즉시 열반[泥洹]에 드셨다. 그래서 이곳을 선인녹야원(仙人鹿野苑)이라고 한다. 세존께서 성도하시자 후세 사람은 이곳에 정사를 세웠다. 부처님께서는 구린(拘驎)179) 등 5인을 제도하시려고 하였으나 그들 5인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문 구담(瞿曇)은 본래 6년간 고행을 하면서 매일 1마(麻) 1미(米)를 먹었어도 도를 얻지 못했다. 하물며 인간으로 돌아가180) 신(身)ㆍ구(口)ㆍ의(意)를 제멋대로 하였으니 무슨 도가 있겠는가? 오늘 그가 오면 서로 삼가며 말을 주고받지 말도록 하세.”
그러나 부처님께서 이곳에 이르자 5인은 모두 일어나 예를 다하였다고 한다.
다시 북쪽으로 60보를 가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동쪽으로 앉으시어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셔서 구린(拘驎) 등 5인을 제도하신 곳이 있었다. 그 북쪽 20보 되는 곳은 부처님께서 미륵(彌勒)을 위해 수기(授記)하셨던 곳이다. 그 남쪽 50보에는 예라발룡(翳羅鉢龍)181)이 언제쯤 이 용신(龍身)을 면할 수 있겠느냐고 부처님께 물었던 곳이 있었다.
이러한 곳에는 모두 탑이 세워졌으며 현존하고 있다. 그중에 두 승가람이 있는데 다 승려가 살고 있다.
녹야원(鹿野苑)의 정사로부터 서북으로 13유연을 가면 구섬미(拘4dk24彌)182)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곳의 정사는 구사라원(瞿師羅園)이라 하는데, 부처님께서 옛날에 머무셨던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도 많은 승려가 있어 소승을 배우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8유연을 가면 부처님께서 본시 여기에서 악귀(惡鬼)를 제도하셨던 곳과 항상 머무르고 경행하시면서 앉은 곳이 있는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또한 승가람이 있었는데 약 1백여 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2백 유연을 가면 달친(達嚫)183)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여기에는 과거 가섭불(迦葉佛)의 승가람이 있었다. 그것은 큰 돌산을 뚫어서 만들었고 전부 5중으로 되어 있었다. 제일 아래층은 코끼리의 형상으로 만들고 5백 칸의 석실(石室)이 있었다. 제2층은 사자의 형상으로 만들고 4백 칸의 석실이 있었고, 제3층은 말의 형상으로 만들고 3백 칸이 있었으며, 제4층은 소의 형상으로 만들고 2백 칸이 있었고, 제5층은 비둘기 형상으로 만들고 1백 칸으로 되어 있었다. 제일 꼭대기에는 샘이 있었는데, 거기서 솟는 샘물은 석실 앞을 통하여 방을 거쳐 흘렀다. 이와 같이 모든 석실 둘레를 돌며 구부러져 하층으로 흘러내렸다. 하층의 방을 둘러 가면서 흐르는 샘물은 문을 통해 흘러 나갔다. 모든 승려들의 방 곳곳에 돌을 뚫어서 창을 만들어 방 안을 밝게 하였으며, 실내는 밝게 빛나 전혀 어두운 곳이 없었다. 그 석실 네 귀퉁이 위로는 돌을 쪼아 계단을 만들어 그것을 밟고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사람들은 몸이 왜소해서 그 계단을 올라가 위층에 이를 수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한 걸음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하여 이 절을 파라월(波羅越)이라고 했는데 파라월이란 인도말로 비둘기란 뜻이다.
이 절에는 항상 나한이 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의 토지는 거칠어 일반 사람은 살지 않았다. 이 산을 떠나 아주 먼 곳에 마을이 있었는데, 주민은 모두 사견(邪見)에 빠져 불법을 모를 뿐 아니라 사문, 바라문 및 이학(異學)들도 알지 못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항상 사람이 날아와서 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때로 여러 나라의 도인(道人)이 이 절로 예배하려고 오면 그 마을 사람들은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날지 않소? 내가 본 이 지방 도인들은 모두 날았소.”
그러면 도인은 방편(方便)으로 대답했다.
“나는 날개가 아직 나지 않았소.”
달친국(達嚫國)은 깊고 험하고 도로 사정이 매우 어려워 가고 싶어도 갈 길을 알 수가 없었다. 부득이 가려고 하는 자는 우선 전화(錢貨)를 그 나라 왕에게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면 왕은 그 후 사람을 보내 길을 가리켜 주게 하고 사람들이 오가게 했다. 법현은 결국 이 나라에 갈 수가 없었는데, 이 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듣고 여기에 그것을 적을 따름이다.
법현은 바라날국(波羅捺國)에서 동쪽으로 가 다시 파련불읍에 이르렀다. 법현은 본래 계율책을 구하고 있었으나 북인도의 여러 나라들은 모두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구전(口傳)되어 오기 때문에 베낄 만한 책이 없었다. 그래서 멀리 찾아다니다 중인도에 이르러 이 마하연(摩訶衍)의 승가람에서 일부의 율을 얻었다. 그것은 마하승기중(摩訶僧祇衆)의 율184)로 부처님 재세 시에 최초의 대중(大衆)이 행한 것이다. 그 책은 기원정사에 전해졌다. 그 외의 18부185)도 각각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되어 전승됨[師資]이 있어서 대요(大要)는 다르지 않으나 세부에 들어가서는 같지 않고 혹은 개색(開塞)186)을 쓰고 있었다. 다만 이 율(마하승기율)은 가장 널리 설해지고 다 갖추어진187) 것이다.
다시 또 7천 게송[偈]이 되는 1부의 초율(抄律)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은 살바다중(薩婆多衆)188)의 율이니 즉 중국[秦地]의 승려들이 행하는 바의 것이다. 이것 또한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口傳)하여 전수(傳授)되었고 문자로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시 이 가운데에서 잡아비담심(雜阿毘曇心)189)을 얻었는데 6천 게송이 된다. 또 2천 5백 게송의 1부의 정경(綎經)190)을 얻었고, 또 1권의 방등반니원경(方等般泥洹經)191)을 얻었는데 약 5천 게송이 된다. 또한 마하승기의 아비담(阿毘曇)192)도 얻었다.
그리하여 법현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면서 범서(梵書)와 범어(梵語)를 배우고 율을 베꼈다. 도정(道整)은 중인도에 도착한 후 사문(沙門)의 법칙이나 승려들의 위의(威儀)와 촉사(觸事)193)에 볼 만한 것이 많음을 보고, 중국의 변지(邊地)에서는 승려들의 계율이 훼손되어 있음을 탄식하여 서원해 말하였다.
“지금부터는 부처가 될 때까지 변지에 태어나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그러고는 드디어 인도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았다. 법현은 본래 마음에 계율을 한(漢)나라 땅에 유통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에 혼자 돌아오게 되었다.
항수(恒水)를 따라서 동쪽으로 18유연을 내려가면 그 남쪽 기슭에 첨파대국(瞻波大國)194)이 있었다. 여기에 부처님의 정사, 경행처 그리고 4불의 좌처(坐處)가 있었는데 모두 탑이 세워져 있었다. 현재에는 승려가 살고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50유연 가까이 가서 마리제국(摩梨帝國)195)에 이르렀는데, 이곳은 곧 항구였다. 이 나라에는 24곳에 승가람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모두 승려가 살고 있었고 불법 또한 성했다. 법현은 이곳에 2년간 머물면서 경을 베끼고 상(像)을 그렸다.
여기서 상인의 큰 배를 타고 바다에 떠서 서남으로 향하였다. 초겨울의 신풍(信風)196)을 얻어 밤낮으로 14일 만에 사자국(師子國)197)에 이르렀다. 그 나라 사람들은 말하기를 첨파국에서 사자국까지의 거리는 약 7백 유연이라고 했다.
이 나라는 본래 섬 위에 있었는데, 그 섬은 동서가 50유연, 남북이 30유연이나 되었다. 좌우의 작은 섬은 1백여 개나 되며, 섬과 섬 사이의 거리는 혹은 10리, 혹은 20리, 때로는 2백 리나 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큰 섬에 통속(統屬)되며 진보(珍寶)와 주옥[珠璣]이 많이 나왔다. 그중에는 마니주(摩尼珠)가 나오는 섬도 있었는데, 사방이 약 10리가량 되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이를 수호하도록 했고 만약 채취하는 자가 있으면 10분의 3을 취했다.
이 나라에는 본래 사람들은 없었고 귀신과 용만이 살면서 여러 나라의 상인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다. 거래할 때 귀신은 스스로 몸을 나타내지 않고 다만 값을 평가하여 보물을 내어 놓는다. 상인들은 곧 그 가격에 따라 값을 치르고 물건을 가져갈 뿐이었다. 이리하여 상인들이 내왕하여 머물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은 이곳이 즐거운 곳이라는 말을 듣게 되어 모두 찾아오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대국이 되었다. 이 나라는 기후가 좋고 여름과 겨울의 구별이 없어 초목이 항상 무성했다. 따라서 파종도 사람의 형편에 따라 하며 정해진 시절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나라에 오셔서198) 악룡을 제도하시고자 신통력으로 한쪽 은 왕성(王城)199)의 북쪽을 밟고 다른 발로는 산꼭대기200)를 밟으셨다고 하는데 두 발자취의 거리는 15유연이나 되었다. 왕은 성 북쪽의 발자국 위에 큰 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40장이나 되며 금은으로 장식하고 여러 가지 보석으로 꾸몄다. 탑 근처에는 또 한 승가람을 일으키고 무외산(無畏山)이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5천의 승려가 있었다. 또 한 불전(佛殿)을 세워 금은으로 새겨 박고 모두 여러 가지 보물로 꾸몄다. 그 안에는 높이 3장 정도 되는 청옥상(靑玉像)이 있었다. 전신에 칠보(七寶)가 번쩍번쩍 빛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장엄하게 나타나며 그 훌륭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청옥상의 오른쪽 손바닥 안에는 일정한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보배 구슬이 있었다.
법현은 중국을 출발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났는데 접하는 사람은 모두 이역(異域)의 사람이고 산천초목도 눈을 들어 보면 중국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 동행자도 헤어져 어떤 사람은 머물고 어떤 사람은 죽어 버려서 돌아보면 자기 혼자뿐이어서 마음에 항상 슬픔을 품고 있었다. 마침 이 옥상(玉像) 근처에서 상인이 진지(晉地)201)의 백견선(白絹扇)으로 공양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처량해져서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 나라의 전왕(前王)은 사신을 중인도에 보내 패다수(貝多樹)의 묘목을 가져와서 불전 옆에 심게 하였다. 이 나무는 그 높이가 20장이나 되었다. 이 나무가 동남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왕은 나무가 쓰러질 것을 두려워하여 여덟, 아홉 아름의 기둥으로 나무를 지탱하게 하였다. 그런데 나무를 지탱하는 곳에 싹이 나더니 드디어 기둥을 뚫고 밑으로 내려가서 땅속으로 들어가 뿌리를 이루었는데 그 크기가 네 아름쯤 되자 비록 기둥은 속이 찢겨져 있었지만 그 외측은 완전히 나무로 뒤덮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한 이것을 제거하지 않았다. 패다수 아래에 정사가 세워졌고 그 안에 좌상(坐像)이 있었는데 도속(道俗)이 우러러 존경해 마지않았다. 성 가운데에도 또한 불치(佛齒)의 정사가 세워졌는데 모두 칠보(七寶)로 만들어졌다.
왕은 범행(梵行)을 잘 닦아 성안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의 정 또한 두터웠다. 이 나라는 건국 이래 기근이나 전란도 없었고, 스님들의 창고에는 많은 보배와 값을 매길 수 없는 값진 마니주(摩尼珠)가 있었다. 그 왕은 일찍이 승려의 창고에 들어가 둘러보다가 마니주를 보자 곧 탐심(貪心)이 일어나 이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 이를 반성하고 곧 승려들에게로 가서 머리를 조아려 전의 죄스러운 마음을 뉘우쳤다. 그러고는 승려들에게 고백하여 말하였다.
“원컨대 스님들께서는 법칙을 세우셔서 지금부터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창고에 들어가 그 안을 보는 것을 허락하지 마도록 하시고, 비구는 40랍(臘)이 지난 후에야 들어가도록 하소서.”
그 성중에는 많은 거사와 장자, 그리고 살박상인(薩薄商人)202)이 있었다. 집들은 화려하게 꾸몄고, 도로는 정연하게 펼쳐져 있었다. 동서남북의 모퉁이에는 모두 설법당을 만들고 매월 8일, 14일, 15일에는 고좌(高座)203)를 포시(鋪施)하여 도속 사중(道俗四衆)이 모두 모여 법을 들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도시에는 약 6만 명의 승려가 있는데, 전부 중식(衆食)을 한다고 했다. 왕은 별도로 성안에서 5,6천 명에게 중식을 공양하고 있었다. 이 중식을 받는 자는 본발(本鉢)204)을 가지고 가서 취하는데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모두 가득 채우고 돌아갔다.
불치(佛齒)는 항상 3월 중에 불치정사로부터 꺼냈다.205) 이것을 꺼내기 10일 전에 왕은 큰 코끼리를 장식하고 한 사람의 말주변이 능한 자에게 왕의 의복을 입혀 코끼리 위에 태우고 북을 치면서 다음과 같이 합창하게 했다.
“보살은 3아승기겁206)에 걸쳐 고행을 하시면서 목숨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라와 처자, 그리고 스스로의 눈을 빼서 남에게 주시며, 살점을 베어서 비둘기의 몸값을 치르시고, 머리를 잘라 보시를 하셨으며, 굶주린 호랑이에게 몸을 내주고 수뇌(髓腦)를 아끼지 않으셨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고행을 하시어 중생을 위하셨기 때문에, 성불하시고 세상에 머무시는 45년간 설법 교화하사 불안한 자를 편안하게 하시고, 제도하지 않은 자를 제도하시고 중생의 연(緣)을 다하시자 열반하셨도다. 열반하신 이래 1497년, 세간안(世間眼)은 멸하고 중생은 긴 근심 속에 있다. 이제부터 10일 후 불치는 불치정사를 나와 무외산정사(無畏山精舍)에 이를 것이다. 국내의 도속(道俗)과 복을 심고자 하는 자는 각각 도로를 평탄하게 하고 거리를 아름답게 꾸미며 여러 가지 꽃ㆍ향과 공양의 기구를 마련할지어다.”
이와 같이 합창을 마치면 왕은 곧 길 양쪽에 보살의 오백신(五百身)207) 이후로의 여러 가지 변현(變現)208)을 만들었다. 혹은 수대나(須大拏)209)를 만들고, 혹은 섬(睒)210)의 변(變)을 만들며, 혹은 상왕(象王)이나 사슴ㆍ말 등을 만들었다.211) 이와 같은 형상은 모두 채화(彩畵)로 장식하여 그 형상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았다. 그런 후 불치를 모셔 내어 길 가운데를 통해서 지나갔다. 길마다 사람들은 공양하며 무외산정사의 불당 위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도속이 운집하여 향을 사르고 등을 켜고 여러 가지 법사(法事)가 주야로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만 90일이 되면 불치는 성내의 정사로 돌아갔다. 성내의 정사에서는 재일(齋日)이 되면 곧 문호(門戶)를 열고 법에 따라 예경을 했다.
무외산정사의 동쪽 40리 되는 곳에 산212)이 있었는데, 그 산 속에 지제(支提)213)라고 하는 정사가 있었다. 승려는 약 2천 명가량 되었다. 이러한 승려들 중에 달마구제(達摩瞿諦)214)라는 대덕 사문이 있었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모두 함께 숭앙하고 있었다. 그는 한 석실 안에서 40여 년이나 살고 있었는데, 항상 자비심을 행하여 능히 뱀이나 쥐에게도 감화를 주어 같은 석실 안에 머물지만 서로 해를 주지 않게끔 했다.
성 남쪽 7리 되는 곳에 한 정사가 있었는데 마하비가라(摩訶毘呵羅)215)라고 했다. 여기에는 3천 명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 그 중 덕이 높은 한 사문이 있었는데, 계행이 맑고 깨끗하여 나라 사람들은 모두 나한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임종 시에 왕은 이곳에 와서 자세히 살펴보고 법에 따라 승려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비구는 득도하셨는가?”
그러자 승려들은 곧 사실을 보이고 대답했다.
“그는 나한입니다.”
얼마 안 있어 그가 입적하였다. 왕은 경률을 조사하여 나한의 장례법으로 장사 지내게 하였다. 즉 정사의 동쪽 4,5리 되는 곳에 크고 좋은 장작을 가로 세로 3장이 되게 쌓고, 위쪽에 전단(栴檀)과 침수(沈水) 등의 향목을 올려놓고 네 변(邊)에 계단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그 위쪽에 깨끗한 흰 목면(木綿)을 두르고 장작을 쌓아 큰 상여를 만들었으니, 그 모양은 마치 중국의 영구차[轜車]216)와 같았는데 다만 용과 물고기의 장식이 없을 뿐이었다. 사유(闍維)217)시에는 왕과 국민, 사중이 모두 모여 꽃과 향으로 공양을 하고 상여를 따라 묘소에 이르렀다. 왕은 스스로 꽃과 향을 공양하고 공양이 끝난 후 상여를 쌓아 놓은 장작 위에 올려놓고 소유(酥油)를 두루 붓고 난 후에 불을 질렀다. 불이 탈 때에 사람들은 숭경하는 마음으로 각각 입었던 옷과 우의(羽儀)ㆍ일산[傘]ㆍ번개[蓋] 등을 벗어서 멀리 불 속에 던져 다비[闍維]를 도왔다. 다비가 끝나자 재를 긁어모아 뼈를 추려 탑을 세웠다. 법현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이 나한은 살아 있지 않고 오직 장사 지내는 광경만을 볼 수가 있었다.
왕은 불법을 돈독하게 믿어 승려들을 위하여 새로운 정사를 짓고자 하였다. 먼저 대회(大會)를 베풀어 음식을 승려들에게 공양하고 공양이 끝나자 상품(上品)의 소 한 쌍을 골라 금ㆍ은ㆍ보물로 뿔 위를 장식하였다. 다시 아름다운 금의 쟁기[犁]를 만들어 왕 스스로 밭의 네 변을 경작하고 그런 연후에 민호(民戶)와 전택(田宅)을 나누어 주고 이를 철권(鐵券)에 적었다. 이로부터 이런 일은 대대로 계승되어 감히 폐지하거나 바꾸지 않고 있다.
법현은 이 나라에서 인도의 도인이 고좌(高座)에서 경을 외우는 것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부처님의 발우는 본래 비사리(毘舍離)에 있었는데, 지금은 건타위국(揵陀衛國)에 있다. 그러나 수백 년이 지나면[법현이 경을 읽는 것을 들은 때는 정확한 연수가 있었으나 지금은 잊어버렸다.] 틀림없이 다시 서쪽의 월지국(月氏國)에 이를 것이다. 다시 몇 백 년 만에 우전국(于闐國)에 이르러 여기서 몇 백 년간 있다가 굴자국(屈茨國)218)에 이를 것이다. 다시 또 몇 백 년 후에는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렀다가 여기서 몇 백 년 만에 다시 중국[漢地]에 이르고, 다시 몇 백 년 만에 중인도로 돌아갈 것이다. 중인도에 이르면 부처님 발우는 틀림없이 도솔천상에 오를 것이다. 미륵보살은 이것을 보고 감탄하여 석가모니불의 발우가 왔다고 하면서 모든 천신과 더불어 7일 간 꽃과 향을 바쳐 공양한다. 7일이 지나면 부처님 발우는 염부제로 돌아오고 그러면 바다의 용왕은 이를 가지고 용궁으로 들어가서 미륵보살이 성도할 때까지 모시게 된다. 미륵보살이 막 성도하려고 하면 발우는 넷으로 쪼개져서 다시 본래의 알나산(頞那山)219) 위로 돌아가는 것이다.

미륵보살이 성도하면 사천왕(四天王)은 마땅히 다시 미륵불을 생각하기를 앞서의 부처님 법과 같이 할 것이다. 현겁(賢劫)의 천불(千佛)은 모두 이 한 개의 발우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다. 발우가 없어지면 불법도 점차로 멸해지고, 불법이 멸한 후에는 사람의 수명이 짧아져서 5세에 이르게 된다. 사람의 수명이 5세 때가 되면 갱미(粳米)ㆍ소유(酥油)는 전부 없어지게 되고, 사람들은 극악해져서 풀과 나무를 잡으면 곧 칼과 막대기로 변해 함께 서로 찌르고 베고 한다. 그중에 복이 있는 자는 이를 피해 산으로 들어갔다가 악인들이 서로 죽고 죽이고 하여 다 없어진 다음에 다시 산에서 나와 서로 함께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는다.
“옛날 사람의 수명은 매우 길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우 악하게 되어 여러 가지 비법(非法)을 행하였기 때문에 우리들 수명이 결국 이와 같이 짧아져 5세가 되어 버렸다. 우리들은 이제야말로 여러 가지 선행을 함께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일으켜서 신의(信義)를 수행하도록 하자.”
부처님 발우란 곧 이것을 말한다. 본문에서 부처님 발우가 네 조각으로 쪼개져서 본래의 알나산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런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고 각각 신의를 행하면 몸이 점차로 바뀌어져 수명이 자꾸 배가 되어 8만 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미륵이 세상에 출현하여 처음으로 법륜을 굴릴 때, 먼저 석가의 유법(遺法) 제자와 출가자, 그리고 삼귀(三歸)ㆍ오계(五戒)ㆍ팔재법(八齋法)을 받고 삼보를 공양하는 자들을 제도하고, 제2ㆍ제3차로 인연 있는 사람들을 제도할 것이다.
법현이 이때 이 경을 베끼려고 하자 그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경본(經本)이 없이 그저 마음으로 구송(口誦)할 뿐이다.”
법현은 이 나라에 2년 머물고, 다시 미사색율장(彌沙塞律藏)220)의 책을 구해 얻고, 또한 장아함(長阿含)과 잡아함(雜阿含), 그리고 일부의 잡장(雜藏)의 책221)을 얻었다. 이것들은 모두 중국에 없는 경전들이다.
법현은 이들 범본(梵本)을 얻은 후 상인의 큰 배에 승선하였는데, 그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항해에는 위험이 많기 때문에 큰 배 뒤에는 하나의 작은 배를 매달고 큰 배의 파손에 대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순풍을 만나 동쪽으로 사흘 동안 잘 갔지만 곧 대풍(大風)을 만나 배가 새고 물이 들어오자 상인들은 작은 배로 옮겨 타려고 하였다. 작은 배 위의 사람들은 큰 배에 탄 사람들이 많이 옮겨 올 것을 두려워하면서 그 배에 매어 있던 밧줄을 끊어 버렸다. 큰 배의 상인들은 두려워하여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배에 물이 차는 것을 겁을 내고 큰 재화(財貨)들을 바다로 던져 버렸다. 법현 또한 군지(君墀)222)와 조관(澡罐)223) 및 그 이외의 물건들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리고는 상인들이 경전이나 불상을 던져 버릴 것만 두려워하면서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念)하고 줄곧 중국 승려들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고 빌었다.
“나는 멀리 인도까지 와서 법을 구하였습니다. 원컨대 위신력(威神力)으로 해류를 따라 목적지에 이르고 싶습니다.”
이와 같은 대풍 속에서 주야로 13일 만에 섬가224)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바람이 자는 것을 기다렸다가 배에서 새는 곳을 찾은 다음 즉시 그곳을 수리해서 막고는 다시 전진을 계속하였다.
이 해상에는 해적이 많기 때문에, 그들을 만나게 되면 무사할 수가 없다. 대해(大海)는 어디까지나 끝없이 넓고 넓어 동서를 분별할 수가 없고, 오직 해ㆍ달이나 별자리를 보면서 나아갈 뿐이었다. 만약 비가 온다면 바람에 불려가 아무런 대비책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어두운 밤에는 큰 파도만 서로 부딪쳐 황연(晃然)히 불빛 같았으며 거북 종류인 듯한 괴물 같은 것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상인들은 그저 겁만 먹고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했다. 바다는 깊이를 알지 못할 만큼 깊었고 또한 닻으로 쓰는 돌을 내려도 바다가 깊어 바닥에 닿지를 않았다. 하늘이 맑으면 그제야 동서를 알게 되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약 암초[伏石]를 만나게 되면 활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90일 정도 가서 야바제(耶婆提)225)라는 나라에 이르렀다. 이 나라는 외도 바라문이 흥성하여 불법을 말하기에 족하지 못하다. 이 나라에 머물기를 5개월, 다시 다른 상인을 따라 배에 올랐다. 큰 배 위에는 역시 2백 명 정도의 사람이 탔고 50일분의 식량을 준비하였다. 4월 16일에 이 나라를 출발하였는데 법현은 배 위에서 안거를 하였다.226) 배는 동북으로 광주(廣州)를 향하여 나아갔다.
1개월 정도 지나 밤의 북소리가 2시를 알렸을 때 흑풍(黑風)과 폭우가 쏟아져 상인이나 손님이 모두 공포에 떨었다. 법현은 이때에도 역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과 중국의 승려들을 생각하였는데 위신력의 도움으로 하늘이 밝아졌다. 아침이 되자 여러 바라문들은 의논하여 말하였다.
“이 배에 사문이 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롭지 못하게도 큰 고난을 만났던 것이다. 마땅히 이 비구를 바다 섬 주변에 내려놓아야 하겠다.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들이 위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자 법현의 단월(檀越)이 말하였다.
“당신네들이 만약 이 비구를 내려놓는다면 나 또한 함께 내려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죽여주시오. 당신네들이 어떻든지 이 사문을 내려놓는다면, 나는 중국에 도착해서 마땅히 국왕에게 당신들의 말을 고하겠소. 중국의 왕 또한 불법을 믿고 존경하며 비구승을 중하게 여기고 있다오.”
그러자 상인들은 주저하면서 감히 내려놓지 못하였다.
그때 하늘에서는 연이어 많은 비가 내렸고 황망해진 선장은 수로를 잘못 잡아 결국 70여 일이 지나는 동안 식량과 물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닷물을 떠서 밥을 짓고 남은 식수를 나누었는데, 한 사람당 두 되밖에 되지 않아 결국 물도 다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상인들은 의논하였다.
“보통 갈 때에는 꼭 50일이면 광주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50일 하고도 여러 날이 지났으니 아마 항로를 벗어난 것 같다.”
그리하여 곧 배를 서북방으로 돌리고 해안을 찾았는데 주야 12일 만에 장광군계(長廣郡界)의 뇌산(牢山)227) 남쪽 기슭에 이르러 좋은 물과 채소를 얻을 수가 있었다. 다만 험난한 해로를 배를 타고 오면서 매일 근심 속에서 보냈는데, 문득 이 해안에 닿을 수가 있었고, 법현은 여기에서 명아주 잎과 콩잎[藜藿]을 보고서야 이곳이 중국 땅인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인민이나 사람의 자취가 보이지 않아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은 아직 광주에 이르지 못하였다고도 말하고, 혹은 광주를 이미 지나쳤다고도 말했는데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작은 배를 타고 강 어귀[浦]로 들어가, 사람을 찾아서 장소를 물어보려고 두 사람의 사냥꾼을 데리고 돌아와 법현이 통역하도록 하고 질문을 하였다. 법현은 먼저 두 사람을 안심시키고 위로하면서 천천히 질문을 하였다.
“당신들은 어떤 분들이오?”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불제자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산에 들어가 무엇을 구하려고 하였소?”
그러자 말하였다.228)
“내일은 7월 15일이기 때문에 복숭아를 따서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였소.”
다시 물었다.
“이곳은 어느 나라입니까?”
대답했다.
“여기는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의 경계로 진가(晉家)에 통속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상인들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재물을 거두어 사람을 보내 장광군에 가게 하였다.
그때 태수(太守) 이의(李[山머리+밑疑])는 불법을 믿어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사문이 경전과 불상을 가지고 배를 타고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사람들을 이끌고 해변까지 가서 경전과 불상을 영접하고 자기가 다스리는 군으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상인들은 법현과 함께 양주(揚州)로 향하여 청주(靑州)에 이르렀다. 청주자사 유연(劉兗)은 법현을 청하여 각각 겨울과 여름 한 철을 나게 하였다. 하안거를 마치자 법현은 오랫동안 여러 선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장안(長安)으로 가고자 하였으나 다만 해야 할 일이 중대하기에 드디어 도(都)229)를 향해 남쪽으로 내려가 선사(禪師)230)를 좇아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을 역출하였다.
법현은 장안을 출발하여 6년 만에 중인도에 갔다가 거기서 6년 간 머물고, 3년 만에 돌아와 청주에 도착하니 무릇 근 30국을 유력(遊歷)하였던 것이다. 사하(沙河:고비사막) 서쪽으로 인도에 이르기까지 승려들의 위의(威儀)와 법화(法化)의 미(美)는 너무도 훌륭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조용히 생각하건대 여러 선사들은 아직 이 지방의 것에 대해 자세하게 듣지 못하였다. 다행히 나는 미명(微命)을 돌아보지 않고 바다에 떠서 돌아왔다. 그 어려움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삼존(三尊)231)의 위력과 신령스러움의 은총을 입어 여러 차례 위험이 있었지만 구법(求法) 여행을 끝낼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죽백(竹帛)에 체험한 바를 기술하여 현자(賢者)로 하여금 그 견문을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금년은 갑인년(甲寅年)232)이다.233)
진(晉)의 의희(義熙) 12년(416), 세(歲)는 수성(壽星:丙辰年)에 있다. 하안거 말에 우리들은 법현도인을 맞이했다. 법현도인은 와서 머물며 동재(冬齋)234)를 함께하였다. 그리하여 이야기한 것을 수집할 때에 거듭 유력(遊歷)한 것을 물었다. 그분은 전부 실제로 있었던 일에 의거하여 공순(恭順)하게 말하였다. 이리하여 먼저 간략하게 한 것을 자세하게 기재(記載)하도록 권하였다.
법현은 다시 자세하게 그 시말(始末)을 서술했다.
“돌이켜 경과한 곳을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울렁거려 땀이 흐른다. 위험한 곳을 밟고 험준한 곳을 건너 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모두 굳은 뜻이 있어 그 우직(愚直)함을 오로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필사(必死)의 땅에 던졌고 그렇게 해서 만에 하나의 희망을 달성한 것이다.”
이에 감탄하노니 이분은 고금에 보기 드문 분이시다. 불교가 동방으로 유전된 이래 몸을 돌보지 않고 법을 구하기를 아직 법현과 같이 한 사람은 없었다. 이리하여 지성(至誠)의 감응(感應)함은 다하지 아니함이 없고 통하지 아니함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뜻이 있는 곳에 공업(功業)이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나니 무릇 공업을 이룬 자는, 중(重)하게 여기는 것을 잊어버림으로써 잊혀진 소중한 것을 얻음이 아니겠는가.
032_0749_c_01L高僧法顯傳一卷東晉沙門釋法顯自記遊天竺事法顯昔在長安慨律藏殘缺於是遂以弘始二年歲在己亥與慧景道整慧應慧嵬等同契至天竺尋求戒律初發迹長安度隴至乾歸國夏坐坐訖前至褥檀國度養樓山至張掖鎭張掖大亂道路不通張掖王慇勤遂留爲作檀越於是與智嚴慧簡寶雲僧景等相遇欣於同志便共夏坐夏坐訖復進到燉煌有塞東西可八十里南北四十里共停一月餘日法顯等五人隨使先發復與寶雲等別燉煌太守李浩供給度沙河沙河多有惡鬼熱風遇則皆死無一全上無飛鳥下無走獸遍望極目求度處則莫知所擬唯以死人枯骨爲幖幟耳行十七日計可千五百里得至鄯鄯國其地崎嶇薄瘠俗人衣服粗與漢地同但以氈褐爲異其國王奉法可有四千餘僧悉小乘學國俗人及沙門盡行天竺法但有精從此西行所經諸國類皆如是國國胡語不同然出家人皆習天竺天竺語住此一月日復西北行十五日到烏夷國僧亦有四千餘人小乘學法則齊整秦土沙門至彼不豫其僧例也法顯得符行當公孫經理住二月餘日於是還與寶雲等共合烏夷國人不修禮儀遇客甚薄智嚴慧簡慧嵬遂返向高昌欲求行法顯等蒙符公孫供給遂得直進西南行路中無居民涉行艱難所經之苦人理莫比在道一月五日得到于闐其國豐樂人民殷盛盡皆奉法以法樂相娛衆僧乃數萬人多大乘皆有衆食彼國人民星居家家門皆起小塔最小者可高二丈許四方僧房供給客僧及餘所須國主安頓供給法顯等於僧伽藍僧伽藍名瞿摩帝是大乘寺三千僧共揵搥入食堂時威儀齊肅次第而坐切寂然器鉢無聲淨人益食不得相但以手指麾慧景道整慧達先發向竭叉國法顯等欲觀行像停三月其國中有四大僧伽藍不數小者從四月一日城裏便掃灑道路莊嚴巷陌其城門上張大幃幕事事嚴飾王及夫人婇女皆住其中瞿摩帝僧是大乘學王所敬重最先行像離城二四里作四輪像車高三丈餘狀如行殿七寶莊挍懸繒幡蓋像立車中二菩薩侍作諸天侍從皆以金銀彫懸於虛空像去門百步王脫天冠易著新衣徒跣持花香翼從出城像頭面禮足散花燒香像入城時樓上夫人婇女遙散衆花紛紛而下如是莊嚴供具車車各異一僧伽藍則一日行像自月一日爲始至十四行像乃訖行像訖王及夫人乃還宮耳其城西七八里有僧伽藍名王新寺作來八十年經三王方成可高二十五丈彫文刻鏤金銀覆上衆寶合成塔後作佛堂莊嚴妙好窗牖皆以金薄別作僧房亦嚴麗整飾非言可盡嶺東六國諸王所有上價寶物多作供養人用者少旣過四月行像僧韶一人隨胡道人向罽法顯等進向子合國在道二十五便到其國國王精進有千餘僧大乘學住此十五日已於是南行四至蔥嶺山到於麾國安居安居已山行二十五日到竭叉國與慧景等値其國王作般遮越師般遮越師漢言五年大會也會時請四方沙門皆來雲集集已莊嚴衆僧坐處懸繒幡蓋作金銀蓮華著僧座後鋪淨坐王及群臣如法供養或一月二月或三月多在春時王作會已復勸諸群臣設供供養或一日二日三日日乃至七日供養都畢王以所乘馬鞍勒自副使國中貴重臣騎之幷諸白㲲種種珍寶沙門所須之物共諸群臣發願布施衆僧布施僧已還從僧贖其地山寒不生餘穀唯熟麥耳衆僧受歲已其晨輒霜故其王每請衆僧令麥熟然後受歲其國中有佛唾壺以石作之色似佛鉢又有佛一其國中人爲佛齒起塔有千餘僧盡小乘學自山以東俗人被服類與秦土同亦以氈褐爲異沙門法用轉勝不可具記其國當蔥嶺之中自蔥嶺已前草木果實皆異唯竹及安石榴甘蔗三物與漢地同耳從此西行向北天竺國在道一月得度蔥蔥嶺山冬夏有雪又有毒龍若失其意則吐毒風雨雪飛沙礫石遇此難者萬無一全彼土人卽名爲雪山度嶺已到北天竺始入其境有一小國名陁歷亦有衆僧皆小乘學國昔有羅漢以神足力將一巧匠兜率天觀彌勒菩薩長短色貌還下刻木作像前後三上觀然後乃成像長八丈足趺八尺齋日常有光明國王競興供養今故現在於此順嶺西南行十五日其道艱岨崖岸嶮絕其山唯石壁立千仞臨之目眩欲進則投足無所下有水名新頭河昔人有鑿石通路施傍梯者凡度七百梯已躡懸絙過河河兩岸相去減八十步九譯所記漢之張騫甘英皆不至此衆僧問法顯佛法東過其始可知耶顯云訪問彼土人皆云古老相傳立彌勒菩薩像後便有天竺沙門齎經律過此河者像立在佛泥洹後三百許年計於周氏平王時由茲而言教宣流始自此像非夫彌勒大士繼軌釋迦孰能令三寶宣通邊人識法固知冥運之開本非人事則漢明帝之夢有由而然矣度河便到烏長國其烏長國是正北天竺也盡作中天竺中天竺所謂中國俗人衣服飮食亦與中國同佛法甚盛名衆僧止住爲僧伽藍凡有五百僧伽藍皆小乘學若有客比丘到悉供養三日日過已乃令自求所安常傳言佛至北天竺卽到此國也佛遺足迹於此或長或短在人心念至今猶爾及曬衣石度惡龍處悉亦現在石高丈四尺闊二丈許一邊平慧景慧達道整三人先發向佛影那竭國法顯等住此國夏坐坐訖南下到宿呵多國其國佛法亦盛天帝釋試菩薩化作鷹鴿割肉貿鴿處佛旣成道與諸弟子遊行語此本是吾割肉貿鴿處國人由是得知於此處起塔金銀挍飾從此下五日行到揵陁衛國是阿育王子法益所治處佛爲菩薩時亦於此國以眼施人其處亦起大塔金銀挍飾此國人多小乘學自此東行七日國名竺剎尸羅竺剎尸羅漢言截頭佛爲菩薩時於此處以頭施人因以爲名復東行二日至投身餧餓虎此二處亦起大塔皆衆寶挍飾諸國臣民競興供養散華然燈相繼不通上二塔彼方人亦名爲四大塔從揵陁衛國南行四日到弗樓沙佛昔將諸弟子遊行此國語阿難吾般泥洹後當有國王名罽膩伽於此處起塔後罽膩伽王出世出行遊觀時天帝釋欲開發其意化作牧牛小兒當道起塔王問言汝作何等作佛塔王言大善於是王卽於小兒塔上起塔高四十餘丈衆寶挍飾凡所經見塔廟壯麗威嚴都無此比傳云閻浮提塔唯此塔爲上王作塔成已小塔卽自傍出大塔南高三尺佛鉢卽在此國昔月氏王大興兵來伐此國欲取佛鉢旣伏此國已月氏王等篤信佛法欲持鉢去故大興供養供養三寶畢乃挍飾大象置鉢其上象便伏地不能得前更作四輪載鉢八象共牽復不能進王知與鉢緣未至深自愧歎卽於此處起塔及僧伽藍幷留鎭守種種供養可有七百餘僧日將欲中衆僧則出鉢與白衣等種種供養然後中食至暮燒香復爾可容二斗許雜色而黑多際分明厚可二分甚光澤貧人以少華投中便滿有大富者欲以多華供正復百千萬斛終不能滿寶雲景止供養佛鉢便還慧景慧達道整先向那竭國供養佛影佛齒及頂骨慧景病道整住看慧達一人還於弗樓沙國相見而慧達寶雲僧景遂還秦土慧景在佛鉢寺無常由是法顯獨進向佛頂骨所西行十六由延至那竭國醯羅城城中有佛頂骨精舍盡以金薄七寶挍飾國王敬重頂骨慮人抄乃取國中豪姓八人人持一印封守護淸晨八人俱到各視其印後開戶開戶已以香汁洗手出佛頂置精舍外高座上以七寶圓碪下瑠璃鍾覆上皆珠璣挍飾骨黃白方圓四寸其上隆起每日出後精舍人則登高樓擊大鼓吹蠡敲銅鉢王聞則詣精舍以華香供養供養已次第頂戴而去從東門入西門出王朝朝如是供養禮拜然後聽國政居士長者亦先供養乃修家事日日如是初無懈倦供養都訖乃還頂骨於精舍中有七寶解脫塔或開或閉高五尺許以盛之精舍門前朝朝恒有賣花香人凡欲供養者種種買焉諸國王亦恒遣使供養精舍處方三十步雖復天震地裂此處不動從此北行一由延到那竭國城是菩薩本以銀錢貿五莖華供養定光佛處城中亦有佛齒塔供養如頂骨法城東北一由延到一谷口有佛錫杖亦起精舍供杖以牛頭旃檀作長丈六七許木筒盛之正復百千人擧不能移谷口西行有佛僧伽梨亦起精舍供彼國土俗亢旱時國人相率出衣禮拜供養天卽大雨那竭城南半由有石室博山西南向佛留影此中去十餘步觀之如佛眞形金色相好光明炳著轉近轉微髣髴如有諸方國王遣工畫師摹寫莫能及彼國人傳云千佛盡當於此留影影西四百步佛在時剃髮翦爪佛自與諸弟子共造塔高七八丈以爲將來塔法猶在邊有寺寺中有七百餘僧此處有諸羅漢辟支佛塔乃千數住此冬三法顯等三人南度小雪山雪山冬夏積雪山北陰中遇寒風暴起人皆噤戰慧景一人不堪復進口出白沫語法顯云我亦不復活便可時去得俱死於是遂終法顯撫之悲號圖不果命也奈何復自力前得過嶺南到羅夷國近有三千僧兼大小乘住此夏坐坐訖南下行十日到跋那亦有三千許僧皆小乘學從此東行三日復渡新頭河兩岸皆平地河有國名毘荼佛法興盛兼大小乘見秦道人往乃大憐愍作是言何邊地人能知出家爲道遠求佛法悉供給所須待之如法從此東南行八十由延經歷諸寺甚多僧衆萬數過是諸處已到一國國名摩頭羅經蒱那河河邊左右有二十僧伽藍有三千僧佛法轉盛凡沙河已西天竺諸國國王皆篤信佛法供養衆僧時脫天冠共諸宗親群臣手自行食食已鋪氈於地對上座前坐於衆僧不敢坐牀佛在世時諸王供養法式相傳至今從是以南名爲中國國寒暑調和無霜雪人民殷樂無戶籍官法唯耕王地者乃輸地利欲去便去欲住便住王治不用刑斬有罪者但罰其錢隨事輕重雖復謀爲不過截右手而已王之侍衛左右皆有供祿擧國人民悉不殺生不飮不食蔥蒜唯除旃荼羅旃荼羅名爲惡人與人別居若入城市則擊木以自異人則識而避之不相搪揬中不養豬鷄不賣生口市無屠店及沽酒者貨易則用貝齒唯旃荼羅漁獵師賣肉耳自佛般泥洹後諸國王居士爲衆僧起精舍供給田宅民戶牛犢鐵券書錄後王王相傳無敢廢者至今不絕衆僧住止房舍牀蓐飮食衣服都無闕乏處處皆爾衆僧常以作功德爲業及誦經坐禪僧往到舊僧迎逆代擔衣鉢給洗足水塗足油與非時漿須臾息已復問其臘數次第得房舍臥具種種如法衆僧住處作舍利弗塔目連阿難塔幷阿毘曇律經塔安居後一月諸希福之家勸化供養僧行非時漿衆僧大會說法說法已供養舍利弗塔種華香通夜然燈使伎樂人作舍利弗大婆羅門時詣佛求出家大目連迦葉亦如是諸比丘尼多供養阿難以阿難請世尊聽女人出家故沙彌多供養羅云阿毘曇師者供養阿毘曇律師者供養律年年一供養自有日摩訶衍人則供養般若波羅蜜文殊師利觀世音等衆僧受歲竟居士婆羅門等各將種種衣物沙門所須以用布施衆僧僧受亦自各各布佛泥洹已來聖衆所行威儀法則相承不絕自度新頭河至南天竺于南海四五萬里皆平坦無大山川有河水耳從此東南行十八由延國名僧迦施佛上忉利天三月爲母說法來下處佛上忉利天以神通力都不使諸弟子知來滿七日乃放神阿那律以天眼遙見世尊卽語尊者大目連汝可往問訊世尊目連卽頭面禮足共相問訊問訊已佛語目連吾卻後七日當下閻浮提目連旣還于時八國大王及諸臣民不見佛咸皆渴仰雲集此國以待世尊鉢羅比丘尼卽自心念今日國王臣民皆當迎佛我是女人何由得先卽以神足化作轉輪聖王最前禮佛從忉利天上來向下下時化作三道寶階佛在中道七寶階上行梵天王亦化作白銀階在右邊執白拂而侍天帝釋化作紫金階在左邊七寶蓋而侍諸天無數從佛來下旣下三階俱沒于地餘有七級而現後阿育王欲知其根際遣人掘看至黃泉根猶不盡王益敬信卽於階起精舍當中階作丈六立像精舍立石柱高二十肘上作師子柱四邊有佛像內外映徹淨若琉璃外道論師與沙門諍此住處時沙門理屈於是共立誓言此處若是沙門住處者今當有靈驗作是言已柱頭師子乃大鳴吼見驗於是外道慴怖心伏而退佛以受天食三月故身作天香不同世人卽便浴身後人於此處起浴室浴室猶在優鉢羅比丘尼初禮佛處今亦起塔佛在世有翦髮爪作塔及過去三佛幷釋迦文佛坐處經行處及作諸佛形像盡有塔今悉在天帝釋梵天王從佛下處亦起塔此處僧及尼可有千人皆同衆食雜大小乘學住處有一白耳龍與此衆僧作檀越令國內豐熟雨澤以時無諸災害使衆僧得安僧感其惠故爲作龍舍敷置坐處爲龍設福食供養衆僧日日衆中別差三人到龍舍中食每至夏坐訖輒化形作一小蛇兩耳邊白衆僧識銅盂盛酪以龍置中從上座至下座行之似若問訊遍便化去每年一其國豐饒人民熾盛最樂無比諸國人來無不經理供給所須寺西北五十由延有一寺名大墳大墳者惡鬼名也佛本化是惡鬼後人於此起精舍布施阿羅漢以水灌手瀝滴地其處故在正復掃除常現不此處別有佛塔善鬼神常掃灑不須人功有邪見國王言汝能如是我當多將兵衆住此益積糞穢復能除不鬼神卽起大風吹之令淨處有百枚小塔人終日數之不能得若至意欲知者便一塔邊置一人復計數人人或多或少其不可得有一僧伽藍可六七百僧此中有辟支佛食處泥地大如車輪餘處生此處獨不生及曬衣地處亦不生衣條著地迹今故現在法顯在龍精舍夏坐坐訖東南行七由延到罽饒夷城城接恒水有二僧伽藍盡小乘學去城西六七里恒水北岸佛爲諸弟子說法處傳云說無常苦空身如泡沫等此處起塔猶在度恒水南行三由延到一村名呵梨佛於此中說法經行坐處盡起塔從此東南行十由延到沙祇大國出沙祇城南門道東佛本在此嚼楊枝已刺土中卽生長七尺不增不減諸外道婆羅門嫉妒或斫或拔遠棄之其處續生如此中亦有四佛經行坐處起塔故從此南行八由延到拘薩羅國舍衛城內人民希曠都有二百餘家波斯匿王所治城也大愛道故精舍須達長者井壁及鴦掘魔得道般泥洹燒身處後人起塔皆在此城中諸外道婆羅門生嫉妒心欲毀壞之天卽雷電霹靂終不能得壞出城南門千二百步道西長者須達起精舍精舍東向開門門戶兩邊有二石柱左柱上作輪形右柱上作牛形精舍左右池流淸淨樹林尚茂衆花異色蔚然可觀卽所謂祇洹精舍也佛上忉利天爲母說法九十日波斯匿王思見佛卽刻牛頭栴檀作佛像置佛坐處佛後還入精舍像卽避出迎佛佛言還坐吾般泥洹後可爲四部衆作法式像卽還坐此像最是衆像之後人所法者也佛於是移住南邊小精舍與像異處相去二十步祇洹精舍本有七層諸國王人民競興供懸繒幡蓋散華燒香然燈續明日不絕鼠含燈炷燒幡蓋遂及精舍七重都盡諸國王人民皆大悲惱栴檀像已燒卻後四五日開東邊小精舍戶忽見本像皆大歡喜共治精得作兩重還移像本處法顯道整初到祇洹精舍念昔世尊住此二十五年自傷生在邊地共諸同志遊歷諸國而或有還者或有無常者今日乃見佛空處愴然心悲彼衆僧出法顯等言汝等從何國來荅曰從漢地來彼衆僧歎曰奇哉邊國之人乃能求法至此自相謂言我等諸師和上相承以來未見漢道人來到此也精舍西北四里有林名曰得眼本有五百盲人依精舍住此佛爲說法還得眼盲人歡喜刺杖著地頭面作杖遂生長大世人重之無敢伐者遂成爲林是故以得眼爲名祇洹衆僧中食後多往彼林中坐禪祇洹精舍東北六七里毘舍佉母作精舍佛及僧此處故在祇洹精舍大院各有二門一門東向一門北向此園卽須達長者布金錢買地處精舍當中央佛住此處最夂說法度人經行坐處盡起塔皆有名字及孫陀利殺身謗佛出祇洹東門北行七十步道西佛昔共九十六種外道論議國王大臣居士人民皆雲集而聽時外道女名旃遮摩那起嫉妒心乃懷衣著腹前似若妊身於衆會中謗佛以非法於是天帝釋卽化作白鼠嚙其腰帶帶斷所懷衣墮地地卽裂生入地獄及調達毒爪欲害佛生入地獄處後人皆幖幟之又於論議處起精舍高六丈許中有坐佛像其道東有外道天寺名曰影覆與論議處精舍裌道相對亦高六丈許所以名影覆者日在西時世尊精舍影則映外道天寺日在東時道天寺影則北映終不能得映佛精舍也外道常遣人守其天寺掃灑然燈供養至明旦其燈輒移在佛精舍中婆羅門恚言諸沙門取我燈自供養佛爲爾不止婆羅門於是自伺候見其所事天神將燈繞佛精舍三帀供養供養佛已忽然不婆羅門乃知佛神大卽捨家入傳云近有此事繞祇洹精舍十八僧伽藍盡有僧住唯一處空此中國有九十六種外道皆知今後世各有徒衆亦皆乞食但不持亦復求福於曠路側立福德舍牀臥飮食供給行路人及出家人來去但所期異耳調達亦有衆在常供養過去三佛唯不供養釋迦文舍衛城東南四里琉璃王欲伐舍夷國世尊當道側立立處起塔城西五十里到一邑名都維是迦葉佛本生處父子相見處般泥洹處皆悉起塔迦葉如來全身舍利亦起大塔從舍衛城東南行十二由延到一邑名那毘伽是拘樓秦佛所生處父子相見處般泥洹處亦皆起塔從此北行減一由延到一邑是拘那含牟尼佛所生處父子相見處般泥洹處皆起塔從此東行減一由延到迦維羅衛城城中都無王民甚丘荒有衆僧民戶數十家而已白淨王故宮處作太子母形像及太子乘白象入母胎時太子出城東門見病人車還處皆起塔阿夷相太子處與難陁等撲象捅射處箭東南去三十里入地令泉水出後世人治作井令行人飮佛得道還見父王處五百釋子出家向優波離作禮地六種震動處佛爲諸天說法四天王等守四門王不得入處佛在尼拘律樹下東向大愛道布施佛僧伽梨處此樹猶瑠璃王殺釋種釋種死盡得須陁洹立塔今亦在城東北數里有王田太子坐樹下觀耕者處城東五十里有王園園名論民夫人入池洗浴出池北岸二十步擧手攀樹枝東向生太子太子墮地行七步二龍王浴太子身浴處遂作井及上洗浴池今衆僧常取飮凡諸佛有四處常定一者成道處者轉法輪處三者說法論議伏外道四者上忉利天爲母說法來下處餘者則隨時示現焉迦維羅衛國大空荒人民希疏道路怖畏白象師子不可妄行從佛生處東行五由延有國名藍莫此國王得佛一分舍利還歸起卽名藍莫塔塔邊有池池中有龍守護此塔晝夜供養阿育王出世破八塔作八萬四千塔破七塔已欲破此塔龍便現身將阿育王入其宮中觀諸供養具已語王言汝供養若能勝是便可壞之持去吾不與汝諍阿育王知其供養具非世之所有是便還此中荒蕪無人灑掃常有群以鼻取水灑地取雜花香而供養諸國有道人來欲禮拜塔遇象大依樹自翳見象如法供養道人大自悲感此中無有僧伽藍可供養塔乃令象灑掃道人卽捨大戒還作沙自挽草木平治處所使得淨潔化國王作僧住處已爲寺主今現有僧住此事在近自爾相承至今恒以沙彌爲寺主從此東行三由延太子遣車匿白馬還處亦起塔從此東行四由延到炭塔亦有僧伽藍復東行十二由延到拘夷那竭城城北雙樹希連禪河邊世尊於此北首而般泥洹及須跋最後得道處以金棺供養世尊七日處金剛力士放金杵處八王分舍利處此諸處皆起塔有僧伽今悉現在其城中人民亦希曠止有衆僧民戶從此東南行十二由延諸梨車欲逐佛般泥洹處而佛不聽戀佛不肯去佛化作大深塹不得度佛與鉢作信遣還其家處立石柱有銘題自此東行十由延到毘舍離毘舍離城北大林重閣精舍佛住處及阿難半身塔其城裏本菴婆羅女家爲佛起塔今故現在城南三里道西菴婆羅女以園施佛作佛住處佛將般泥洹與諸弟子出毘舍離城西門迴身右轉顧看毘舍離城告諸弟子是吾最後所行處後人於此處起塔城西北三里有塔名放弓仗名此者恒水流有一國王王小夫人生一肉胎大夫人妒之言汝生不祥之徵卽盛以木函擲恒水中下流有國王遊觀見水上木函開看見千小端正殊特王卽取養之遂便長大甚勇健所往征伐無不摧伏次伐父王本國王大愁憂小夫人問王何故愁憂王曰彼國王有千子勇健無比欲來伐吾國是以愁耳小夫人言勿愁憂但於城東作高樓賊來時我樓上則我能卻之王如其言至賊來時小夫人於樓上語賊言汝是我何故作反逆事賊曰汝是何人是我母小夫人曰汝等若不信者仰向張口小夫人卽以兩手搆兩乳乳作五百道俱墮千子口中賊知是其母卽放弓仗二父王於是思惟得辟支佛二辟支佛塔猶在後世尊成道告諸弟子是吾昔時放弓仗處後人得知於此處立塔故以名焉小兒者卽賢劫千佛是也佛於放弓仗塔邊捨壽佛告阿難言我卻後三當般泥洹魔王嬈固阿難使不得請佛住世從此東行三四里有塔般泥洹後百年有毘舍離比丘錯行戒律十事證言佛說如是爾時羅漢及持律比丘凡有七百僧更撿挍律藏後人於此處起塔今亦現從此東行四由延到五河合口難從摩竭國向毘舍離欲般泥洹天告阿闍世王阿闍世王卽自嚴駕士衆追到河上毘舍離諸梨車聞阿難來亦復來迎俱到河上阿難思惟前則阿闍世王致恨還則梨車復怨卽於河中央入火光三昧燒身而般泥洹分身作二分一分在一岸邊於是二王各得半身舍利還歸起塔度河南下一由延到摩竭提國巴連弗邑連弗邑是阿育王所治城城中王宮殿皆使鬼神作累石起牆闕彫文刻鏤非世所造今故現在阿育王弟得羅漢常住耆闍崛山志樂閑靜王敬心欲請於家供養以樂山靜不肯受請語弟言但受我請當爲汝於城裏作山乃具飮食召諸鬼神而告之曰日悉受我請無坐席各自齎來明日諸大鬼神各齎大石來壁方四五步坐卽使鬼神累作大石山又於山底以五大方石作一石室可長三丈二丈高一丈餘有一大乘婆羅門子名羅汱私迷住此城裏爽悟多智無不達以淸淨自居國王宗敬師事若往問訊不敢竝坐王設以愛敬心執執手已婆羅門輒自灌洗年可五十餘擧國瞻仰賴此一人弘宣佛法道不能得加陵衆僧於阿育王塔邊造摩訶衍僧伽藍甚嚴麗亦有小乘寺都合六七百僧衆威儀庠序可觀四高德沙門及學問人欲求義理詣此寺婆羅門子師亦名文殊師利國內大德沙門諸大乘比丘皆宗仰亦住此僧伽藍凡諸中國唯此國城邑爲大民人富盛競行仁義年年常以建卯月八日行像作四輪車竹作五層有承攎椻戟高二丈許狀如塔以白㲲纏上然後彩畫作諸天形像以金銀琉璃莊挍其上懸繒幡蓋四邊作龕皆有坐佛菩薩立侍可有二十車車車莊嚴各異當此日境內道俗皆集作倡伎樂華香供養婆羅門子來請佛佛次第入城入城內再宿通夜然燈伎樂供養國國皆爾國長者居士各於城內立福德醫藥凡國中貧窮孤獨殘跛一切病人皆詣此舍種種供給醫師看病隨宜飮食及湯藥皆令得安差者自去阿育王壞七塔作八萬四千塔最初所作大塔在城南三里餘此塔前有佛起精舍戶北向塔南有一石柱丈四五高三丈餘上有銘題云阿育王以閻浮提布施四方僧還以錢贖如是三反塔北三四百步阿育王本於此作泥梨城泥梨城中有石柱高三丈餘上有師子柱上有銘記作泥梨城因緣及年數日月從此東南行九由延至一小孤石山山頭有石石室南向佛坐其中天帝釋將天樂般遮彈琴樂佛處帝釋以四十二事問佛一一以指畫石畫迹故在此中亦有僧伽藍從此西南行一由延那羅聚落是舍利弗本生村舍利弗還於此中般泥洹卽此處起塔今現從此西行一由延到王舍新城城者是阿闍世王所造中有二僧伽出城西門三百步阿闍世王得佛一分舍利起塔高大嚴麗出城南四里南向入谷至五山裏五山周圍狀若城郭卽是蓱沙王舊城城東西可五六里南北七八里舍利弗目連初見頞鞞處尼犍子作火坑毒飯請佛處闍世王酒飮黑象欲害佛處城東北角曲中耆舊於菴婆羅園中起精舍請佛及千二百五十弟子供養處故在其城中空荒無人住入谷搏山南上十五里到耆闍崛山未至頭三有石窟南向佛本於此坐禪西北三十步復有一石窟阿難於中坐禪天魔波旬化作雕鷲住窟前恐阿難佛以神足力隔石舒手摩阿難肩怖卽得止鳥迹手孔今悉在故曰雕鷲窟山窟前有四佛坐處又諸羅漢各各有石窟坐禪處動有數百佛在石室前東西經行調達於山北嶮巇閒撗擲傷佛足指處石猶在佛說法堂已毀壞止有塼壁基在其山峯秀端嚴是五山中最高法顯於新城中買香華油燈倩二舊比丘送法顯到耆闍崛華香供養然燈續明慨然悲傷淚而言佛昔於此說首楞嚴法顯生不値佛但見遺迹處所而已卽於石窟誦首楞嚴停止一宿還向新城舊城北行三百餘步道西迦蘭陁竹園精舍今現在衆僧掃灑精舍北二三里有尸磨賖那尸磨賖那者漢言棄死人墓田搏南山西行三百步一石室名賓波羅窟佛食後常於此坐禪又西行五六里山北陰中有一石室名車帝佛泥洹後五百阿羅漢結集經處出經時鋪三高座莊嚴挍舍利弗在左目連在右五百數中少一阿羅漢大迦葉爲上座阿難在門外不得入其處起塔亦在搏山亦有諸羅漢坐禪石窟甚出舊城北東下三里有調達石窟離此五十步有大方黑石窟昔有比丘在上經行思惟是身無常得不淨觀厭患是身卽捉刀欲自殺復念世尊制戒不得自殺又念雖爾我今但欲殺三毒賊便以刀自刎始傷得須陁洹旣半得阿那含斷已成阿羅漢果般泥洹從此西行四由延伽耶城城內亦空荒復南行二十里到菩薩本苦行六年處處有林木此西行三里到佛入水洗浴天案樹枝得攀出池處又北行二里得彌家女奉佛乳糜處從此北行二里佛於一大樹下石上東向坐食糜樹石今悉石可廣長六尺高二尺許中國寒暑均調樹木或數千歲乃至萬歲此東北行半由延到一石窟菩薩入中西向結加趺坐心念若我成道有神驗石壁上卽有佛影現長三尺今猶明亮時天地大動諸天在空中白言此非是過去當來諸佛成道去此西南行減半由延到貝多樹是過去當來諸佛成道處諸天說是語已卽便在前唱導導引而去菩薩起行離樹三十步天授吉祥菩薩受之復行十五步五百靑雀飛來繞菩薩三帀而去菩薩前到貝多樹下敷吉祥草東向而坐王遣三玉女從北來試魔王自從南來試菩薩以足指案地魔兵退散三女變成老母自上苦行六年處此諸處後人皆於中起塔立像今皆佛成道已七日觀樹受解脫樂處佛於貝多樹下東西經行七日處諸天化作七寶堂供養佛七日處文鱗盲龍七日繞佛處佛於尼拘律樹下石上東向坐梵天來請佛處四天王奉鉢處五百賈人授麨蜜處度迦葉兄弟師徒千人處此諸處亦盡起塔佛得道處有三僧伽藍皆有僧住民戶供給饒足無所乏少戒律嚴威儀坐起入衆之法佛在世時衆所行以至于今佛泥洹已來四大塔處相承不絕四大塔者佛生處得道處轉法輪處般泥洹處阿育王昔作小兒時當道戲遇迦葉佛行乞小兒歡喜卽以一掬土施佛佛持還泥經行地因此果報作鐵輪王閻浮提乘鐵輪案行閻浮提見鐵圍兩山閒地獄治罪人卽問群臣此是何等答言是鬼王閻羅王治罪人自念言鬼王尚能作地獄治罪人是人主何不作地獄治罪人耶卽問臣等誰能爲我作地獄主治罪人者臣答言唯有極惡人能作耳王卽遣臣遍求惡人見池水邊有一人長壯黑色髮黃目靑以腳鉤魚口呼禽獸禽獸來便射殺無得脫者得此人已將來與王王密勅之汝作四方高牆植種種華果作好浴池莊嚴挍飾人渴仰牢作門戶有人入者輒捉種種治罪莫使得出設使我入亦治罪莫放今拜汝作地獄主時有比丘第乞食入其門獄卒見之便欲治罪比丘惶怖求請須臾聽我中食俄頃復有人入獄卒內置碓臼中擣之沫出比丘見已思惟此身無常如泡如沫卽得阿羅漢果旣而獄卒捉內鑊湯中比丘心顏欣悅火滅湯冷中生蓮華比丘坐上爾時獄卒卽往白王獄中有奇怪願王往看王言前有要今不敢往獄卒言此非小事王宜疾往更改先要王卽隨入比丘爲王說法王得信解卽壞地獄悔前所作衆惡由是信重三寶常至貝多樹下悔過自責受八戒齋王夫人問常遊何處群臣荅言恒在貝多樹夫人伺王不在時遣人伐其樹倒王來見之迷悶躄地諸臣以水灑面久乃蘇王卽以塼累四邊以百甖牛乳灌樹根身四枝布地作是誓言若樹不生我終不起作是誓已樹便卽根上而以至于今高減十丈從此南三里到一山名鷄足大迦葉今在此山中山下入入處不容人下入極遠有旁孔迦葉全身在此中住孔外有迦葉本洗手土彼方人若頭痛者以此土塗之卽差此山中卽日故有諸羅漢住彼諸國道人年年往供養迦葉心濃至夜卽有羅漢來共言論釋其疑已忽然不現此山榛木茂盛又多師子虎狼不可妄行法顯還向巴連弗邑順恒水西下十由延得一精舍名曠野佛所住處今現有僧復順恒水西行十二由延到迦尸國波羅柰城城東北十里許得仙人鹿野苑精舍此苑本有辟支佛住常有野鹿拪宿世尊將成道諸天於空中唱言白淨王子出家學道卻後七日當成佛辟支佛聞卽取泥洹故名此處爲仙人鹿野世尊成道已後人於此處起精舍佛欲度拘驎等五人五人相謂言瞿曇沙門六年苦行日食一麻一米尚不得道況入人閒恣身口意何道之有今日來者愼勿與語佛到五人皆起作禮處復北行六十步佛於此東向坐始轉法輪度拘驎等五人處其北二十步佛爲彌勒授記處其南五十步翳羅鉢龍問佛我何時得免此龍身此處皆起塔見在中有二僧伽藍悉有僧住自鹿野苑精舍西北行十三由旬有國名拘睒彌其精舍名瞿師羅園佛昔住處今故有衆僧小乘學從是東行八由延佛本於此度惡鬼處亦常在此住經行坐處起塔亦有僧伽藍可百餘僧從此南行二百由延有國名達嚫是過去迦葉佛僧伽藍穿大石山作之凡有五最下重作象形有五百閒石室二層作師子形有四百閒第三層作馬形有三百間第四層作牛形有二百閒第五層作鴿形有一百閒最上有泉水循石室前繞房而流周圍迴曲如乃至下重順房流從戶而出諸僧室中處處穿石作窗牖通明室中朗都無幽闇其室四角穿石作梯蹬處今人形小緣梯上正得至昔人一腳躡處因名此寺爲波羅越波羅越者竺名鴿也其寺中常有羅漢住此土丘無人民居去山極遠方有村皆是邪見不識佛法沙門婆羅門及諸異學彼國人民常見飛人來入此寺于時諸國道人欲來禮此寺者彼村人則汝何以不飛耶我見此閒道人飛道人方便答言翅未成耳達嚫國幽道路艱難難知處欲往者要當齎錢貨施彼國王王然後遣人送展轉相示其逕路法顯竟不得往承彼土人言故說之耳從彼波羅柰國東行還到巴連弗邑法顯本求戒律而北天竺諸國皆師師口傳無本可寫是以遠涉乃至中天竺於此摩訶衍僧伽藍得一部律是摩訶僧祇衆律佛在世時最初大衆所行也於祇洹精舍傳其本自餘十八部各有師資大歸不異小小不同或用開塞但此最是廣說備悉者復得一部抄律可七千偈薩婆多衆律卽此秦地衆僧所行者亦皆師師口相傳授不書之於文復於此衆中得雜阿毘曇心可六千偈又得一部經二千五百偈又得一卷方等般泥洹經可五千偈又得摩訶僧祇阿毘曇故法顯住此三年學梵書梵語寫律道整旣到中國見沙門法衆僧威儀觸事可觀乃追歎秦土邊地衆僧戒律殘缺誓言自今已去得佛願不生邊地故遂停不歸法顯本心欲令戒律流通漢地於是獨還順恒水東下十八由延其南岸有瞻波大國佛精舍經行處及四佛坐處悉起塔現有僧住從此東行近五十由延到摩梨帝國卽是海口其國有二十四僧伽藍盡有僧住佛法亦興法顯住此二年寫經及畫像於是載商人大舶泛海西南行得冬初信風晝夜十四日到師子國彼國人云去可七百由延其國本在洲上東西五十由延南北三十由延左右小洲乃有百數其閒相去或十里二十里或二百里皆統屬大洲多出珍寶珠有出摩尼珠地方可十里王使人守護若有採者十分取三其國本無人民正有鬼神及龍居之諸國商人共市易市易時鬼神不自現身但出寶題其價直商人則依價雇直取物商人來往住故諸國人聞其土樂悉亦復來於是遂成大國其國和適無冬夏之異草木常茂田種隨人無有時節佛至其國欲化惡龍以神足力一足躡王城北一足躡山頂兩迹相去十五由延王於城北迹上起大塔高四十金銀莊挍衆寶合成塔邊復起一僧伽藍名無畏山有五千僧起一佛殿金銀刻鏤悉以衆寶中有一靑玉高三丈許通身七寶焰光威相嚴非言所載右掌中有一無價寶珠顯去漢地積年所與交接悉異域人山川草木擧目無舊又同行分披流或亡顧影唯己心常懷悲忽於此玉像邊見商人以一白絹扇供養覺悽然淚下滿目其國前王遣使中取貝多樹子於佛殿傍種之高可二十丈其樹東南王恐倒故以八九圍柱柱樹樹當柱處心生遂穿柱而入地成根大可四圍許柱雖中裂猶裹其外人亦不去樹下起精舍有坐像道俗敬仰無倦城中又起佛齒精舍皆七寶作王淨修梵行城內人敬信之情亦篤#其國立治已來有飢荒喪亂衆僧庫藏多有珍寶無價摩尼其王入僧庫遊觀見摩尼珠生貪心欲奪取之三日乃悟卽詣僧稽首悔前罪心因白僧言願僧立制自今已後勿聽王入庫看比丘滿四十然後得入其城中多居士長者薄商人屋宇嚴麗巷陌平整四衢道皆作說法堂月八日十四日十五鋪施高座道俗四衆皆集聽法國人云都可六萬僧悉有衆食王別於城內供養五六千人衆食須者則持大鉢往取隨器所容皆滿而還佛齒常以三月中出之未出前十日王莊挍大使一辯說人著王衣服騎象上擊鼓唱言菩薩從三阿僧祇劫作行不惜身命以國城妻子及挑眼與人割肉貿鴿截頭布施投身餓虎不悋髓腦是種種苦行爲衆生故成佛在世四十五年說法教化令不安者安不度者度衆生緣盡乃般泥洹泥洹已來一千四百九十七歲世閒眼滅衆生長悲卻後十日佛齒當出至無畏山精舍國內道俗欲殖福者各平治道路嚴飾巷陌辦衆華香供養之具如是唱已王便夾道兩邊作菩薩五百身已來種種變現或作須大拏或作睒變或作象王或作鹿如是形像皆彩畫莊挍狀若生人然後佛齒乃出中道而行隨路供養到無畏精舍佛堂上道俗雲集燒香然燈種種法事晝夜不息滿九十日還城內精舍城內精舍至齋日則開門禮敬如法無畏精舍東四十里有一中有精舍名支提可有二千僧僧中有一大德沙門名達摩瞿諦其國人民皆共宗仰住一石室中四十許年常行慈心能感蛇鼠使同止一室不相害城南七里有一精舍名摩訶毘呵羅有三千僧住有一高德沙門戒行淸潔國人咸疑是羅漢臨終之時王來省視依法集僧而問比丘得道耶其便以實答言是羅漢王卽按經律以羅漢法葬之於精舍東四五里積好大薪縱廣可三丈高亦爾近上著栴檀沈水諸香木邊作階上持淨好白㲲周帀蒙積大輿狀似此閒輀車但無龍魚耳闍維時王及國人四衆咸集以華香供養從輿至墓所王自華香供養養訖擧著𧂐上以酥油遍灌然後燒之火然時人人敬心各脫上服及羽儀遙擲火中以助闍維闍維已收斂取卽以起塔法顯至不及其生存唯見葬時王篤信佛法欲爲衆僧作新精舍先設大會飯食供養已乃選好上牛一雙金銀寶物莊挍角上作好金犂自耕墾規郭四邊然後割給民戶田書以鐵券自是已後代代相承敢廢易法顯在此國聞天竺道人高座上誦經云佛鉢本在毘舍離今在揵陁衛竟若干百年法顯聞誦時有定歲數但今忘耳當復至西月氏國若干百年當至于闐國住若干百年當至屈茨國干百年當復至師子國若干百年當復來到漢地若干百年當還中天竺已當上兜術天上彌勒菩薩見而嘆曰釋迦文佛鉢至卽共諸天華香供養七日七日已還閻浮提龍王將入龍宮至彌勒將成道時還分爲四復本頞那山上彌勒成道四天王當復應念佛如先佛法劫千佛共用一鉢鉢去已佛法漸滅佛法滅後人壽轉短乃至五歲五歲之時粳米酥油皆悉化滅人民極惡草木則變成刀杖共相傷割其中有福者逃避入山惡人相殺盡已還復來出共相謂言人壽極長但爲惡作非法故我等壽命遂爾短促至五歲我今共行諸善起慈悲心行信義如是各行信義展轉壽倍至八萬歲彌勒出世初轉法輪時度釋迦遺法中弟子出家人及受三歸五戒八齋法供養三寶者第二三次度有緣者法顯爾時欲寫此經其人云此無經本我心口誦耳法顯住此國二年更求得彌沙塞律藏本得長阿含雜阿含復得一部雜藏此悉漢土所無者得此梵本已卽載商人大舶上可有二百餘後係一小舶海行艱嶮以備大舶毀壞得好信風東下三日便値大舶漏水入商人欲趣小舶小舶上人恐人來多卽斫絙斷商人大怖#命在須臾恐舶水滿卽取麤財貨擲著水中法顯亦以君墀及澡罐幷餘物棄擲海中但恐商人擲去經像一心念觀世音及歸命漢地衆僧我遠行求法願威神歸流#得到所止如是大風#晝夜十三日#到一島邊潮退之見舩漏處卽補塞之於是復前海多有抄賊遇輒無全#大海彌漫無不識東西唯望日月星宿而進陰雨時爲逐風去亦無所准當夜闇但見大浪相搏晃若火色黿鼉水性怪異之屬商人荒懅不知那向#海深無底又無下石住處至天晴已#乃知東西還復望正而進若値伏石#則無活路如是九十許日乃到一國#名耶婆提其國外道婆羅門興盛法不足言停此國五月日復隨他商大舶上亦二百許人齎五十日糧以四月十六日發法顯於舶上安居#東北行趣廣州一月餘日夜鼓二時遇黑風暴雨商人賈客皆悉惶怖顯爾時亦一心念觀世音及漢地衆僧蒙威神祐得至天曉曉已諸婆羅門議言坐載此沙門使我不利遭此#大苦當下比丘置海島邊不可爲一人#令我等危嶮法顯檀越言汝若下此比亦幷下我不爾便當殺我如其下此沙門吾到漢地當向國王言汝也漢地王亦敬信佛法重比丘僧諸商人躊#躇不敢便下于時天多連陰海師相#望僻誤遂經七十餘日糧食水漿欲盡#取海鹹水作食分好水人可得二升#遂便欲盡商人議言常行時#政可五十日便到廣州今已過期多日#將無僻耶卽便西北行求岸晝夜十二日到長廣郡界牢山南岸便得好水菜但經涉險難憂懼積日忽得至此岸#見藜藿菜依然知是漢地然不見人#民及行迹未知是何許或言未至廣州或言已過莫知所定卽乘小舶入浦覓人欲問其處得兩獵人卽將歸令法顯譯語問之#法顯先安慰之#徐汝是何人答言我是佛弟子又問汝入山何所求其便詭言明當七月十五日欲取桃臈佛又問此是何國答言此靑州長廣郡界統屬晉家聞已商人歡喜卽乞其財物遣人往長廣郡太守李嶷敬信佛法聞有沙持經像乘舶泛海而至卽將人從來至海邊迎接經像歸至郡治商人於是還向楊州到靑州請法顯一冬一夏夏坐訖法顯離諸師#久欲趣長安但所營事重遂便南下向都就禪#師出經律藏法顯發長安六年到中#印國停經六年還經三年達靑州凡#所遊履減三十國沙河已西迄于天#僧威儀法化之美不可詳說竊#惟諸師未得備聞是以不顧微命海而還艱難具更幸蒙三尊威靈而得濟故將竹帛疏所經歷欲令賢者同其聞見是歲甲寅晉義熙十二年矣歲在壽星夏安居末迎法顯道人留共冬齋因講集之餘重問遊歷其人恭順言輒依實由是先所略者勸令詳載顯復具敍始末#自云顧尋所經不覺心動汗流所以乘危履險不惜此形者蓋是志有所存專其愚故投命於必死之地以達萬一之冀於是感歎斯人以爲古今罕有自大教東流未有忘身求法如顯之比後知誠之所感無窮否而不通志之所將無功業而不成成夫功業者不由忘夫所重重夫所忘者哉法顯傳一卷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당(唐)나라의 서울로 지금의 서안(西安).
  2. 2)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과 신수대장경(新修大藏經)에는 홍시 2년으로 되어 있으나 동양 연표(東洋年表)에는 홍시는 후진(後秦)의 연호로서 기해년은 홍시 원년(A.D. 399)이며 동시에 동진의 융안(隆安) 3년에 해당된다고 하므로 역자는 이를 따랐다.
  3. 3)한(漢)나라 때의 천수군(天水郡). 당(唐)나라 때의 농주(隴州)로서 지금의 농현(隴縣)이다. 섬서성(陝西省)과 감숙성(甘肅省)의 경계에 농산(隴山)이 있다.
  4. 4)지금의 감숙성 정원현(靖遠縣)의 서쪽에 해당되는데, 건귀(乾歸)는 동진(東晋)의 태원(太元) 13년에 임금이 되었다가 융안(隆安) 4년(400)에 후진(後秦)에 항복하였다.
  5. 5)남량(南凉)의 경왕(景王)이 독발욕단(禿髮褥檀)의 거성(居城)인 낙도(樂都)로서 지금의 감숙성 서녕부(西寧府) 연박현(碾泊縣)에 해당된다. 처음 융안 3년에 독발오고(禿髮烏孤)가 죽자 그 아우 독발리록고(禿髮利鹿孤)가 왕위에 올랐다. 욕단은 독발리록고의 아우로서 융안 5년(401)에 도독중외제군사 양주목(都督中外諸軍事 凉州牧)이 되어 그 형 이록고를 도와 군국(軍國)의 대사를 맡았다. 원흥(元興) 원년(402) 3월 이록고가 병사하자 욕단이 그 자리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뒤에 의희(義熙) 10년(414) 7월에 서진(西秦)에게 멸망되었다. 법현이 여기에 도착한 것은 욕단이 왕위에 오르기 2년 전이었지만 욕단국이라고 불렀다.
  6. 6)서녕현(西寧縣)의 북쪽 대통하(大通河)의 남쪽에 누워 있는 산맥으로 양녀산(養女山)으로 통한다.
  7. 7)북량왕(北凉王) 단업(段業)의 거성으로 한의 장액군(張掖郡), 지금의 감숙성 장액현(張掖縣)이다.
  8. 8)본시는 북량왕 단업인데 장액진을 거성으로 하였기 때문에 장액왕 단업이라고 한 것이다. 단업은 우둔하고 나약하여 재략이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융안 3년 2월에 북량왕이 되었는데 저거몽손(沮渠蒙遜)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삼고 융안 4년(400) 4월 이호(李暠)를 돈황태수(燉煌太守)로 삼았다. 그러나 뒤에 다시 이호를 대신하여 색사(索嗣)를 돈황태수로 삼자 이호가 크게 분노하여 색사를 공격하였다. 색사가 패하여 장액으로 돌아오자 단업은 겁이 나서 색사를 죽이고 이호에게 사죄하였다고 한다. 장액에 대란이 일어나 도로가 불통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이호는 뒤에 서량(西凉)의 주인이 된다.
  9. 9)법현 출발 후 두 번째의 하안거로서 융안 4년(400)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이다.
  10. 10)한나라의 돈황군. 현재의 감숙성 돈황현으로 당대(唐代)에는 사주(沙州)라고도 하였는데, 실크로드상의 교통 요지로 불교 또한 매우 성했던 곳이다.
  11. 11)한나라의 누란국(樓蘭國). 동진(東晉)의 태원(太元) 7년(382)에 선선국 왕이 전진(前秦)의 대병을 거느리고 서역(西域)을 침범한 사실이 있었으나 지금 그곳에는 선선국 또한 이미 매몰되어 그 자취를 찾을 길 없다.
  12. 12)한나라의 언기국(焉耆國)으로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는 아기니국(阿耆尼國)이라 하였다. 또 청조(淸朝)에서는 객나사이(喀喇沙爾)라 하였으며 현재의 언기현(焉耆縣)이 이에 해당된다.
  13. 13)지엄은 그 후 계빈국(罽賓國)에 이르러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맞이하여 함께 장안으로 돌아가 그에게 사사하다가 진승(秦僧)의 배격을 받게 되어 함께 산동(山東)을 지나 건강(建康:현재의 南京)에 이르렀다. 그는 만년에 해로로 인도에 갔다가 다시 계빈국에 이르러 78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입적(入寂)하였다. 혜간ㆍ혜외는 둘 다 그 이후의 행적이 자세하지 않다.
  14. 14)진(晋)의 고창군(高昌郡), 청의 토로번청(吐魯番廳)으로 현재의 투루판(Turfan)이다.
  15. 15)현재의 호탄(Khotan)으로 『대당서역기』에서는 구살단나국(瞿薩旦那國)이라 하고 있는 곳. 타클라마칸사막의 서남쪽에 위치한 인도와 페르시아 간의 교통의 요충지로 땅이 기름진 옛날부터 일대 강국이었다.
  16. 16)국왕이 음식을 마련하여 승려들을 공양하는 것. 『대당서역기』에 보면 이러한 모습을 잘 알 수가 있으니 즉 11권 승가라국(僧伽羅國) 항(項)에 ”왕궁 옆에 큰 주방을 세워 하루에 1만 8천 명의 승려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나니 식사 때가 되면 승도(僧徒)들은 발우를 들고 와서 음식을 받아 식사를 마치고 각각 자기 처소로 돌아간다.”고 하여 중식의 상황을 알게 하여 준다.
  17. 17)Ghaṇṭa의 음역으로 건추(楗椎)로도 쓴다. 종ㆍ목탁 등 두드려서 소리를 내게 하여 신호하는 것의 하나이다.
  18. 18)총령산맥(蔥嶺山脈) 중 인더스강 북안(北岸)의 한 나라. 기사국(奇沙國) 또는 소발률국(小勃律國)이라고도 한다.
  19. 19)인도에선 월(月)의 전반을 흑월(黑月), 후반을 백월이라고 한다.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자월(自月)’로 되어 있으나 신수장경 각주에 의하면 송(宋)ㆍ원(元)ㆍ명(明)본에는 자(自)가 사(四)로, 궁(宮)본에는 백(白)으로 되어 있다. 역자는 궁본을 따랐다.善
  20. 20)영동이란 총령산맥의 동쪽을 가리키며, 여섯 나라란 선선(鄯善)ㆍ단말(旦沫)ㆍ정절(精絶)ㆍ우미(扜彌)ㆍ우전(于闐)ㆍ사거(沙車)의 6국을 말한다.
  21. 21)지엄ㆍ혜간ㆍ혜외는 오이국에서 고창으로 가 버렸고, 혜경ㆍ도정ㆍ혜달은 우전국에서 갈차국으로 직행하였으며, 승소는 홀로 계빈국으로 향했으므로 여기에서 법현 등이라고 함은 곧 법현ㆍ혜응ㆍ보운ㆍ승경의 4인을 가리킨다.
  22. 22)원래는 유목민이었는데 한ㆍ진ㆍ당대를 통해 점차 강대하여지고 불법도 성해진 나라로, 우전의 서쪽 1천 리, 소륵(疏勒)의 동남 8,9백 리, 총령까지는 약 3백 리의 지점에 해당하는 곳으로 지금의 kujar에 비정된다.
  23. 23)총령산맥이란 파미르고원의 산들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단지 총령이라고도 한다.
  24. 24)총령 중의 한 소국으로 오차국(烏秅國)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Agzi에 해당된다.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조용하고 한가로워 머물러 수도하기에 적합한 신령스런 도량이라 한다.
  25. 25)세 번째 하안거로서 융안 5년(401)의 일이다. 그런데 법현은 인도의 4월 15일에 해당하는 날 행상이 끝난 후, 우전을 출발하여 도중 25일, 자합국 체재 15일, 다시 남으로 여행한 지 4일 만에 오휘국에 이르러 중국의 6월 16일에 해당하는 날에 안거에 든 것이다. 4월 16일 하안거에 드는 정해진 날보다 40여 일이 지난 뒤의 일이다. 생각건대 인도의 법에 따라 후안거(後安居:6월 16일~8월 15일)에 든 것으로 여겨진다. 이 이후 법현은 인도에 들어가 계속 후안거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26. 26)Pancavarsika의 번역으로 반차우필(般遮于必)이라고도 한다. 국왕이 5년마다 여는 대재회(大齋會)를 말한다.
  27. 27)산남(山南) 지방에서 산출되는 엷고 가벼운 견사(絹絲)로서 옛날부터 보배와 같이 귀중하게 여겼다.
  28. 28)안거를 마친 후 승랍이 1년 더 늘어나는 것.
  29. 29)파미르(Pamir)고원이나 카라코람(Karakoram)산맥 또는 서부 히말라야산맥에는 특유한 열풍(熱風)이 있어 때때로 눈이나 비, 그리고 사석(砂石)을 날려 사나운 위세를 떨치는데, 이것을 독룡의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30. 30)인더스강의 한 지류인 KishanGanga의 상류의 계곡에 있던 Tilail국.
  31. 31)Madhyāntika(末田底迦ㆍ末田地ㆍ摩彈提ㆍ末彈提 등으로 음역된다.)를 가리키는 인명인데, 그는 아소카왕의 즉위 18년에 파견되어 계빈국에 포교를 담당했던 고승이다.
  32. 32)한(漢) 무제(武帝) 때의 사람으로 군사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대월지국(大月氏國)으로 파견됐는데 도중에 흉노족에 붙잡혀 10여 년을 감금당했다. 요행히 도망하여 대원국(大宛國)ㆍ강거(康居)ㆍ대월지국에 이르러 목적을 달성하였고, 뒤에 다시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오손(烏孫)에 이르러 대원ㆍ강거ㆍ대하(大夏) 등에 부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서역 제국(西域諸國)이 처음으로 한나라와 교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33. 33)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서역도호(西域都護)를 지낸 바 있다.
  34. 34)후한 명제(明帝)가 영평(永平) 10년(A.D. 67) 금(金)으로 된 사람이 뜰에 내리는 꿈을 꾸고 불교를 받아들였던 것을 가리킨다.
  35. 35)인더스강의 한 지류인 Swat강 유역에 번영하였던 고대 왕국인 udyana로, 달리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서는 오장국(烏場國), 『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慈恩寺三藏法師傳)』에서는 오장나국(烏仗那國)으로도 번역된다. 불타의 전설적인 유적이 많은데, 수도는 현재의 Mirgora이다.
  36. 36)고대로부터 인도인들은 인도의 오장국 지방을 중앙에 있는 나라라고 해서 중국이라 하였다.
  37. 37)불타의 족적(足跡)을 돌에 조각한 것. 초기 불교에서는 불상(佛像) 대신 법륜(法輪)이나 불족적(佛足跡) 또는 연화좌대(蓮華座臺) 등을 돌에 새겨 예배하였다.
  38. 38)『낙양가람기』 제5권에 보면 부처님께서 오장국에 이르셨을 때 용왕이 노해서 큰 비를 내리게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사는 속까지 젖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어느 큰 바위 밑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앉으시고 가사를 바위 위에 널어 말리셨는데 그 바위에는 가사의 무늬가 선명하게 남았다고 한다. 바로 그 바위를 가리킨다.
  39. 39)『대당서역기』 제3권에 보면 오장국의 동북 스와트강의 원류(源流)가 되는 곳에 부처님께서 농사에 해를 끼치는 악룡을 제도하신 곳이 있다고 한다.
  40. 40)현재의 Nagarahara로 『대당서역기』에서는 나게라갈국(那揭羅葛國)이라 하고 있다.
  41. 41)네 번째의 하안거로 동진 원흥(元興) 2년(402)에 해당된다.
  42. 42)지금의 스와트(Swat) 지방에 해당된다.
  43. 43)『자타카(Jātaka)』라고 불리는 불본생담(佛本生譚)의 하나로 부처님께서 전세에 시비왕(尸毘王)으로 계셨을 때 비둘기 한 마리가 매에 쫓겨 도망치다가 시비왕의 옷자락 속에 숨었다. 매는 왕에게 비둘기를 내놓든가 그렇지 않으면 왕의 살점을 비둘기의 양(量)만큼 떼어 주라고 요구하였다. 왕은 자기의 허벅다리의 살을 잘라 주었으나 모자라서 팔의 살, 겨드랑이의 살을 떼어 주었다. 그러나 역시 모자라다고 하여 드디어 전신을 저울에 올려놓아 그 비둘기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자타카』 499, 『보살본생만론(菩薩本生鬘論』), 『대지도론(大智度論)』 제4권 등에 보인다.
  44. 44)Gandhara의 음역인데, 달리 건타라국(乾陀羅國)[『아육왕경』 제2, 또는 『낙양가람기』 제5권], 건타라국(乾陀羅國)[『대당서역기』], 건타라국(建陀羅國)[『왕오천축국전』] 등으로도 음역되고 있다.
  45. 45)석존이 전세에 일월명왕(日月明王)이었을 때, 거리에서 구걸하던 맹인을 만나 어떤 약이 좋으냐고 물었는데 맹인은 왕의 눈만이 자기 눈을 밝게 하는 약이 된다고 대답하므로 왕은 즉시 자기 두 눈을 빼내 그 맹인에게 주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고 하는 본생담. 『현우경(賢愚經)』 제6권 및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 등에 나온다.
  46. 46)범어의 Taksasila를 음역한 말인데, 달리 달시라(呾尸羅), 득차시라(得叉尸羅) 또는 달차시라(呾叉尸羅) 등으로도 음역된다. 현재의 Taxila로 고대로부터 서북 인도의 요충지로 1913년 이래 22년에 걸친 J. Marshall의 발굴로 희랍 문화와 불교 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이 밝혀진 바가 있다.
  47. 47)석존이 전세에 월광왕(月光王)이었을 때 변경의 비마시나왕은 월광왕의 소문을 듣고 약한 바라문인 로오드샤를 보내 왕의 머리를 구하게 하였다. 왕은 7일간의 말미를 얻어 왕비와 여러 신하들과 결별하고 스스로 머리를 잘랐다고 하는 월광왕의 설화인데 『육도집경(六度集經)』 제1권, 『현우경』 제6권 등에 나온다.
  48. 48)석존이 전세에 마하살타 왕자(摩訶薩陀王子)였을 때, 어느 날 두 형과 함께 산림에서 노닐고 있었다. 마침 호랑이가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고 7일이 지났는데 굶주린 어미 호랑이를 둘러싸고 젖을 빨려고 야단들이었다. 왕자는 그 광경을 보고 대비심을 발하여 자기의 전신(全身)을 버리고자 먼저 두 형을 돌아가게 하고는 홀로 숲 속으로 들어가 굶주린 호랑이 곁에 가서 옷을 벗고 누워 버렸다. 그러나 호랑이는 왕자의 자비로운 위엄에 압도되어 감히 덤벼들지 못하였다. 왕자는 이를 보고 높은 곳에 올라가 몸을 던져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산신(山神)이 왕자를 받아서 왕자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왕자는 마른 대꼬챙이로 목을 찔러 선혈을 흘리면서 호랑이 곁으로 다가갔다. 굶주린 호랑이는 유혈을 보자 피를 빨면서 왕자를 잡아먹었다는 본생담으로, 이는 『최승왕경(最勝王經)』 「신사품(身捨品)」, 『육도집경』 제1권, 『보살투신아호기탑인연경(菩薩投身餓虎起塔因緣經)』, 『현우경』 제1권, 『보살본생경(菩薩本生經)』 등에 보인다.
  49. 49)불루사는 Puruṣapura의 음역으로 지금의 Peshawar에 해당된다. 『낙양가람기』 제5권에서는 불사복성(佛沙伏城), 『대당서역기』 제2권에서는 포로사포라성(布路沙布羅城)이라 했다.
  50. 50)카니시카(Kaniska)의 음역으로 가니색가(迦膩色伽)로도 쓴다. 대월지국 쿠샨(Kushan) 왕조의 제3대 왕으로 2세기 때의 인물이다. 그는 서북 인도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남쪽은 Vindhya 산맥으로부터 북쪽은 중앙아시아, 서쪽은 이란의 일부까지도 석권하여 아소카왕 이래의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의 불교 보호 정책은 아소카왕에 비할 만큼 너무도 유명하다.
  51. 51)『낙양가람기』 제5권에서 말하는 작리부도(雀離浮圖)인데 여기서도 거의 같은 설화를 말하고 있다. 『낙양가람기』에서는 탑의 높이를 4백 척, 탑 위의 철주(鐵柱)의 높이 3백 척, 합계 7백 척이라 했다.
  52. 52)잠부디파(Jambudipa)의 음역으로 수미산(須彌山) 남쪽에 있는 4대주의 하나. 본래는 인도를 가리켰으나 뒤에는 인간 세계를 가리키게 되었다.
  53. 53)부처님께서 생존 시 지니고 사용하시던 돌로 된 발우(鉢盂).
  54. 54)네 개의 융기(隆起)를 가리키니, 부처님께서 성도하셨을 때, 사천왕이 각각 청석(靑石)의 발우를 바쳤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네 개의 발우로 하나의 발우를 만드셨기 때문에 부처님 발우의 외측에는 네 개의 융기가 있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제8권에 보인다.
  55. 55)요자나(Yojana)의 음역으로 유순(由旬)ㆍ유선나(踰繕那) 등으로도 쓴다. 인도의 거리 단위로 고대 인도 군인의 1일 행정(行程)을 말한다.
  56. 56)혜라(醯羅)는 Hilla의 음역인데 Hilla란 범어의 변화어(變化語)로 골(骨)의 뜻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불정골성(佛頂骨城)으로 유명한데 지금의 지명은 Hiḍa이다.
  57. 57)광불이란 범어의 Dīpānkara-Buddha를 번역한 것인데 연등불(燃燈佛)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옛날에 정광불의 출세를 만나 다섯 줄기의 연화를 사서 정광불에게 공양하고 스스로 머리카락을 풀어 니토(泥土)에 깔고 정광불로 하여금 그 머리카락을 밟으시게 하여 미래 성불의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제11권, 『불본행집경』 제3권 등에 보인다.
  58. 58)인도산 전단을 말하는데, 인도의 전단은 마리산(摩梨山:일명 摩羅那山)으로부터 산출되지만 이 산의 암봉우리가 소머리와 닮았다 하여 우두전단이란 이름이 붙었다.
  59. 59)승가리란 범어의 Samghāti의 음역으로 가사(袈娑)를 뜻한다. 『낙양가람기』 제5권에서는 이 승가리를 모신 절을 기하반사(耆賀盤寺)라 하고 있다.
  60. 60)벽지불은 범어인 Pratyeka-Buddha의 역으로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출세를 만나 12인연의 이치를 깨달아 미혹됨을 끊고 진리를 증득함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 무불(無佛)의 세상에서 천지자연의 변화와 같은 외연(外緣)에 의해서 미혹을 끊고 이치를 깨닫는 것을 독각(獨覺)이라고 한다.
  61. 61)3인이란 법현과 불정골사에서 요양 중이던 혜경 그리고 그를 간호하고 있던 도정의 3인을 가리킨다.
  62. 62)Sefid-Kuh 산맥을 가리키는데, 이는 Sulaiman 산맥의 동북부에 있다.
  63. 63)앞서 불루사국의 불발사에서 혜경이 입적했다고 하였는데, 그곳에서는 혜응이 입적하였고, 이 소설산에서는 혜경이 입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64. 64)인더스강 상류의 서쪽 Kurram강 남쪽 기슭에 있는, 현재 지명이 Lakky인 곳으로 추정된다.
  65. 65)다섯 번째의 하안거로 동진 원흥 2년(403)의 일이다.
  66. 66)『대당서역기』에서는 벌자라국(伐刺羅國)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Harana(Harnai)에 해당된다. 『대당서역기』 제11권에 의해 살펴보면 벌자라국은 신도국(信度國)의 동북 9백여 리에 있으며, 나라의 둘레 4천여 리, 도성 둘레 2천여 리의 대국으로 예로부터 불교가 상당히 융성했다고 한다. 이곳은 가필시국(迦畢試國)ㆍ북인도ㆍ중인도, 그리고 신도국을 넘나드는 행로의 교차점에 위치한 중요 지점이다.
  67. 67)학자에 따라서 비다국의 현재의 위치에 대한 견해가 다른데 Ponjab 지방의 Bhida로 추정하는 Giles와 Beal의 견해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68. 68)Mathur의 음역으로, 마투라(摩偸羅)ㆍ마돌라(摩突羅)ㆍ말토라(秣菟羅) 등으로 음역되기도 하며, 공작(孔雀) 또는 밀선(密善)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지금의 Muttra로 Jumna하(河)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고래로 유명한 도시이다.
  69. 69)지금의 Jumna River로 갠지스강의 지류인데, 옛날에는 이를 야무나(Yamun)강이라 불렀으며 포나하(蒱那河:捕那河), 박나하(縛那河) 또는 포나반하(捕那般河) 등의 한역은 야무나강의 번역인 것이다.
  70. 70)Chandāra의 음역으로 전타라(旃陀羅)라고도 한다. 사성 계급에 들지 않는 부류로 도살업(屠殺業)에 종사하는 사람들.
  71. 71)중앙아시아 및 인도에는 철판이나 동판에 토지를 하사하는 글을 적은 것이 많은데 이것은 후세에 영구히 그러한 사실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72. 72)부처님께서 식사하는 시간을 정한 오시(午時) 이후의 시간을 비시(非時)라고 하는데 비시에는 음식을 금한다. 다만 소유(蘇油)ㆍ밀(蜜)ㆍ석밀(石蜜)ㆍ과즙(果汁) 등은 마실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것을 비시장이라 한다.
  73. 73)라훌라(Rāhula)의 음역으로 보통 라후라(羅睺羅)라고 많이 부른다. 부처님의 아들이자 10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밀행제일(密行第一)이라고 한다.
  74. 74)마하야나(Mahāyāna)의 약음역(略音譯)으로 대승을 가리킨다.
  75. 75)Srmghasya의 음역으로 승가사(僧伽舍:僧伽沙)라고도 한다. 『대당서역기』에서 말하는 겁비타국(劫比他國)으로 현재의 Etah 지방의 Sankisa이다.
  76. 76)수미산(須彌山)의 정상에 있으며 천제석(天帝釋)의 주처(住處)라고 한다.
  77. 77)오신통(五神通)의 하나로 여의통(如意通)이라고도 하며 어디든지 자유로이 왕래를 할 수 있는 신통력.
  78. 78)Aniruddha의 음역으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 천안제일(天眼第一)이라고 한다.
  79. 79)Utpala의 음역으로 연화색(蓮華色)비구니라고도 한다. Ujiayani의 상가(商家)의 미녀로 복잡한 결혼 생활을 보낸 후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행에 힘써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80. 80)수미사주(須彌四洲)의 세계를 통솔하는 대왕으로 이 왕은 몸에 32상을 갖추고 즉위할 때에는 하늘로부터 윤보(輪寶)를 감득(感得)하고 이 윤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케 하므로 전륜왕이라 한다.
  81. 81)척도의 단위로 Hasta의 역어이다. 1척 5촌~1척 8촌 정도의 길이인데, 『대당서역기』에서는 이 석주의 높이를 70척이라 하여 이 『법현전』과의 차이가 크게 기술되어 있다.
  82. 82)석가모니불 이전에 출세하셨던 부처로 일곱 분이 계셨는데 이를 과거칠불(過去七佛)이라고 한다. 그중 네 번째의 구류손불(拘留孫佛), 다섯 번째의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여섯 번째의 가섭불(迦葉佛) 등 세 분을 과거 삼불이라고 한다.
  83. 83)여섯 번째의 하안거로 원흥 3년(404)의 일이다.
  84. 84)지금의 Kanauj로 갈나급(葛那及)ㆍ갈약국사(羯若鞠闍)ㆍ곡녀성(曲女城)이라고도 한다. 현장이 인도를 방문하던 당시에는 유명한 계일왕(戒日王)의 거성이었다.
  85. 85)Vaisākha의 약음역(略音譯)으로 지금의 Ayodhya지방으로 추측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여기에 보이는 양지식생(楊枝植生)의 설화는 『대당서역기』 제5권에도 나타나 있다.
  86. 86)구살라는 Kosalā, 사위성은 Śrāvast의 음역으로 단지 사위국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Balrāmpur 서북 약 19km의 Sahet-Mahet로서 Sahet는 기원정사의 터이고 Mahet는 사위성의 터이다.
  87. 87)Prasenajit의 음역으로 승군왕(勝軍王) 또는 명광왕(明光王)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재세(在世) 시의 구살라국왕으로 불교 교단의 큰 외호자(外護者)였다.
  88. 88)부처님의 이모이자 양모로 달리 대세주(大世主), 애도(愛道), 대애(大愛)라고도 한다.
  89. 89)Sudatta의 음역인 수달다(須達多)를 줄인 것으로 사위성의 한 장자(長者)의 이름. 그는 인정이 많아서 항상 빈궁한 사람이나 고독한 사람에게 옷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Anthapindada, 즉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라고 한다. 그는 황금을 땅에 깔고 기타 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사서 정사를 짓고 부처님께 바쳤다. 바로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가 그것이다.
  90. 90)Aṅgulimāla의 음역으로 인명이다. 사람을 죽이고 난 후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들었으며, 부처님까지도 죽이려 하였으나 부처님의 정법을 듣고 불도에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91. 91)Andhavana, 득안림(得眼林)의 역으로 안타림(安陀林)이라고도 한다.
  92. 92)비사거란 Viśākha의 음역으로 인명이다. 다른 명칭으로는 비사거녹모(毗舍佉鹿母), 녹자모(鹿子母), 녹모(鹿母) 등으로도 쓴다. 앙가국 장자의 딸인 비사카가 사위성의 장자인 녹자(鹿子)에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인 녹자가 비사카의 용모가 자기 어머니와 같다고 하여 비사카를 늘 녹자모라고 불렀다고 한다. 녹자모는 부처님께 귀의한 후 기원정사의 동쪽에 180만 금을 내고 목련이 감독해서 2층의 대강당을 세웠다. 이를 부처님께 바쳤는데, 이것을 녹자모강당, 동원녹자모강당(東園鹿子母講堂) 또는 동원정사라고 한다.
  93. 93)Sundarī의 음역으로 음녀(淫女)의 이름이다. 외도는 부처님을 비방하기 위해 손타리로 하여금 항상 부처님의 설법을 듣게 하고 그 뒤에 그녀를 죽여서 기원 원중(祇洹園中)에 파묻었다. 시체가 발견된 후 외도는 부처님이 그녀를 범한 후 죽였다고 비방하였지만 도리어 진상이 밝혀져서 그 외도는 세상의 신용을 잃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당하셨던 10난(難) 중의 하나이다.
  94. 94)Ciñca-Manavia의 음역으로 바라문 여성의 이름이다. 여기에 나오는 설화는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제173권, 『대당서역기』 제6권 등에 보인다.
  95. 95)Devadatta의 음역인 조바달다(調婆達多)의 약칭으로 제바달다(提婆達多) 또는 천수(天授)라고도 번역한다. 조달은 아난(Ānanda)의 형이며 석존의 사촌 동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석존의 명성을 투기했는데 12년 간 수행 끝에 오신통(五神通)을 얻었고, 독이 묻은 손톱으로 석존을 상해하려 하였으나 왕사성(王舍城)으로 가는 도중 땅이 갈라져서 산 채로 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대지도론(大智度論)』 제14권, 『대당서역기』 제6권 등에 보인다.
  96. 96)Punyaśāla 또는 Dharmasala를 번역한 말로, 인도나 네팔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무료 숙박소를 말한다.
  97. 97)Virdūdabha를 번역한 말로 악생왕(惡生王)이라고도 한다. 사위국 파사닉왕의 아들이다.
  98. 98)석존의 고국인 가비라국을 가리킨다.
  99. 99)Kāśyapa의 음역으로 음광(飮光)이라고도 한다. 과거 칠불(七佛)의 제6불이다.
  100. 100)Krakucchanda의 음역으로 구류손(拘留孫)ㆍ가라구손타(迦羅鳩孫陀)ㆍ구류손(俱留孫) 등으로도 번역된다. 과거 칠불의 제4불이다.
  101. 101)Kanakamuṇi의 음역으로 가나가모니(迦那迦牟尼), 구나함(俱那含) 등으로도 번역된다. 과거 칠불의 제5불이다.
  102. 102)Kapilavastu의 음역으로 가비라(迦毘羅) 또는 겁비라벌솔도(劫比羅伐4dk24堵) 등으로도 쓰인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생지(本生地)로 석가족(釋迦族)의 거성이었다.
  103. 103)Śuddhodana의 음역으로 정반왕(淨飯王)이라고도 한다. 석존의 부친이다.
  104. 104)석존의 생모(生母)를 가리킨다..
  105. 105)Asita의 음역으로 아사타(阿私陀) 또는 아사다(阿私多)라고도 쓴다. 선인(仙人)의 이름.
  106. 106)Upāli의 음역으로 부처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고 한다. 그는 본래 가빌라성 궁정(宮廷)의 이발사였다고 한다. 5백 명의 석가족이 출가할 때 제일 먼저 출가하여 499명의 정례(頂禮)를 받았다고 한다.
  107. 107)석존은 사위성으로부터 가비라성에 가서 근처의 니구율수(尼拘律樹) 밑에 앉아 정반왕의 행렬을 기다렸다. 석존은 부왕의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자 사자좌에 결가부좌하고 사천왕이 이를 호위했다. 그러자 부왕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108. 108)Nyagrodha의 음역으로 니구수(尼拘樹) 또는 니구류수(尼拘類樹)로도 쓴다. 다근수(多根樹)라고 하며 용수(榕樹)이다.
  109. 109)승가리란 곧 가사(袈裟)를 가리키는데, 석존의 양모인 대애도가 석존에게 금루가사(金縷袈裟)를 보시하였다고 한다. 『대지도론』 제22권에 보인다.
  110. 110)Srota-āpana의 음역으로 예류과(預流果)라고도 한다. 소승에 있어서 수행 계위(修行階位)를, 과(果)를 향해 수행해 가는 단계[向]와 그것에 의해 도달한 경지[果]에 네 가지 즉 사향사과(四向四果)가 있는데, 그 첫 번째를 수다원이라고 한다.
  111. 111)태자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고 신고(身苦), 고역(苦役) 그리고 새와 벌레가 서로 잡아먹는 것을 보고 무상을 느꼈다는 곳을 말한다.
  112. 112)Lumbini의 음역으로 람비니(藍毘尼) 또는 유민(流民) 등으로도 쓴다. 석존의 탄생지인데, 지금의 Nogar역 북쪽 35km 지점에 있다.
  113. 113)Rāmagrāma의 음역으로 라마가(羅摩伽), 람마(藍摩)로도 쓴다. 현 위치는 미상이나 『대당서역기』에서는 룸비니의 동쪽 1백여 리라 했다.
  114. 114)『대지도론』에 의하면 도를 얻은 자나 얻지 못한 자나 다 도인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불법에 귀의한 출가 수행자를 이렇게 불렀다.
  115. 115)구족계(具足戒)를 말한다. 즉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이다.
  116. 116)Chandaka의 음역으로 석존 출가 시 흰 말 건척을 끌던 마부의 이름이다.
  117. 117)석존의 사리는 8분되어 각지의 탑에 안치되었는데, 그때 나머지 탄신(炭燼)을 모아 이곳에 탑을 세웠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제6권에 보인다.
  118. 118)Kusinagara의 음역으로 구시나게라(拘尸那揭羅), 구시나(拘尸那) 등으로도 적는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곳이다.
  119. 119)Airavatī의 번역으로 아리라발제(阿利羅跋提) 또는 무승하(無勝河), 유금하(有金河) 등으로도 적는다. 지금의 갠지스강의 지류인 Rapti의 상류이다.
  120. 120)Subhadra의 음역으로 수발타라(須跋陀羅), 수발타(須拔陀)로도 적는다. 구이나갈성의 범사(梵士)의 이름이다. 그는 입멸 직전의 최후의 제자인데 그는 부처님보다 먼저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대열반경』 제14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8권에 보인다.
  121. 121)부처님께서 입멸하시자 유법(遺法)에 따라 전륜성왕의 장법(葬法)에 좇아 향탕(香湯)으로 몸을 씻고 5백 장의 목면(木綿)으로 싸서 금관에 넣은 뒤 7일간 공양했다고 한다. 『장아함경』 제5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8권, 및 『대당서역기』 제6권 등에 보인다.
  122. 122)Vajrapāni의 음역으로 집금강신밀적역사(執金剛神密迹力士)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것을 비통해 하면서 금강저를 버리고 사라쌍수 옆으로 절도했다고 한다. 『불입열반밀적금강역사애련경(佛入涅槃密迹金剛力士哀戀經)』에 보인다.
  123. 123)부처님의 유체는 7일간 공양한 후 금관에 넣고 희련하를 건너서 천관사(天冠寺)에서 다비하였다. 다비가 끝나자 8대국은 병력으로 사리를 차지하려 하였는데 돌로내(突路奈)란 바라문의 중재에 의해 여덟 나라에 균등하게 분배되었다고 한다. 『장아함경』 제4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8권 등에 보인다.
  124. 124)이차는 Licchavī의 음역으로 이차(離車), 이창(梨昌) 등으로도 역한다. 바이살리국을 구성하고 있던 종족(種族)이다.
  125. 125)Vaiśāli의 음역으로 비야리(毘耶離), 폐사리(吠舍釐), 유야리(維耶離) 등으로도 번역된다. 중인도 16대국의 하나로 이차족의 주처(住處)였다. 지금의 Bengal주 Patna 북방의 Besārh 부근.
  126. 126)Mahāvane Kūṭāgārasāla의 역으로 마하벌나(摩訶伐那), 마하바나(摩呵婆那)로도 역한다. 바이살리의 큰 숲 속에 있었던 정사인데 『대반열반경』 상권에 의하면 1천2백5십 명의 비구들이 있었다고 한다.
  127. 127)바이살리 사람들은 오하구(五河口)에서 아난의 반신사리(半身舍利)를 얻어 공양했다고 한다. 『대당서역기』 제7권에 의하면 탑은 대림중각강당의 여북(餘北)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128. 128)Āmrapāli의 음역으로 비사리성의 유녀(遊女) 이름이다. 『증일아함경』 제10권, 『장아함경』 제2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36권, 『대반열반경』 상권 등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바이살리성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5백 명의 유녀들과 함께 부처님을 찾아갔으며, 그 다음 날 부처님과 제자들을 모시고 공양을 올리기를 청하여 부처님의 허락을 받았다. 이차(梨車)는 유녀들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을 뉘우치면서 그녀에게 다음 날 공양하는 것을 양보하라고 하였으나 암바라녀는 듣지 않았다. 다음 날 부처님은 그녀에게 가서 공양을 받으시고 설법했으며 득도하게 하셨다. 그러자 그녀는 감격하여 부처님께 암바라원을 바쳤고 부처님은 그곳에 머무셨다고 한다.
  129. 129)Bahuputraka Caitya의 역어로 다자탑(多子塔), 다자지제(多子支提)라고도 번역한다. 이 탑에 괸한 설화는 『수경주(水經注)』 제1권, 『대방편불보은경(大方便佛報恩經)』 제3권, 『잡보장경(雜寶藏經)』 제1권, 그리고 『대당서역기』 제7권 등에 보인다.
  130. 130)현겁이란 현재의 주겁(住劫)을 가리키는 말. 미래의 주겁은 성수겁(星宿劫), 과거의 주겁은 장엄겁(莊嚴劫)이라 한다. 현겁에는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 등의 1천불이 출현하여 세상과 중생을 구제한다는 천불사상(千佛思想)에 의한다.
  131. 131)불멸 후 1백 년경에 비사리의 발사자(跋闍者) 비구는 십사의 비법(非法)을 불설이라고 하여 정법(正法)으로 실행하였는데 이것을 십사의 증언이라 한다.
  132. 132)제2회 결집(結集)을 가리킨다.
  133. 133)비사리에서 파트나(Patna)에 이르는 도중에 있는 5대하(大河)의 합류점이다.
  134. 134)당시 마갈타국과 비사리국은 항쟁 중이었는데, 양국이 서로 아난의 사리 때문에 다투려는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에 아난은 갠지스강 중앙에서 삼매에 들어가 사리를 양국에 나누었던 것이다.
  135. 135)마갈제국은 마가다(Magadha)국의 음역으로 갠지스강 남쪽에 있는 중인도 최대의 왕국. 파련불읍은 파탈리푸트라(Pātaliputra)의 음역으로 그 수도인데, 달리 바라리불다라(婆羅利弗多羅), 화씨성(華氏城), 향화궁성(香花宮城)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파트나(Patna)이다.
  136. 136)처음 아육왕의 동생은 매우 교만 방자하였으나 아육왕이 “너의 죄는 죽을 죄에 해당된다. 이제 너에게 7일간 왕위를 줄 테니 먹고 사는 것을 자유롭게 하도록 하라. 그 후에 너를 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하자 근심과 고민 끝에 왕으로부터 무상(無常)을 설교 받고 활연히 크게 깨달아 나한도(羅漢道)를 얻었다고 한다.
  137. 137)Gṛdhraktūṭva의 음역으로 영취산(靈鷲山), 영산(靈山)으로도 번역된다. 부처님의 설법지로 유명하다.
  138. 138)인도의 각월(角月:歲首)로 북두성(北斗星)이 묘위(卯位)를 세우는 때이다.
  139. 139)두공(斗拱)을 말한다.
  140. 140)노반(露盤) 위에 솟아 있는 구륜(九輪)의 기둥을 말한다.
  141. 141)이러한 시약(施藥)ㆍ요병(療病)ㆍ비전(悲田) 등의 시설은 아소카왕 시대 때 시작되어 그 후 인도는 물론 중국ㆍ한국ㆍ일본 등 여러 국가에 있어서 불교사회구제사업의 원형이 되었다.
  142. 142)이 절을 아육사(阿育寺) 또는 계두마사(鷄頭摩寺)라고 한다.
  143. 143)영취산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제석굴산(帝釋窟山)이라고도 한다.
  144. 144)하늘 악신(樂神)의 이름.
  145. 145)천제석이 번뇌, 애증(愛憎) 등 스스로 품고 있는 42항의 의문을 부처님께 물은 것.
  146. 146)왕사성은 Rāja-gṛha의 음역으로 마갈제국 아사세왕(阿闍世王)의 거성이었다. 지금의 Rajgir이다.
  147. 147)구 왕사성(舊王舍城) 둘레에 있는 산군(山群) 중 정사가 많은 다섯 개의 산을 가리킨다.
  148. 148)병사란 Bimbisāra의 약음역(略音譯)으로 그는 석존 재세 시에 마갈제국의 왕이었다. 구성(舊城)은 쿠사가라구라(Kusāgārapura)로 상모성(上茅城)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오산(五山)을 둘러싸고 있고 길상(吉祥)의 향모(香茅)가 많이 났다고 한다.
  149. 149)인명. Aśvajit를 번역한 것으로 아설시(阿說示) 또는 마승(馬勝)으로도 번역한다. 녹야원에서 석존의 첫 제자가 된 5비구 중의 한 명이다. 그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행동거지의 단정함이 사리불과 목련으로 하여금 불제자가 되게 하였다.
  150. 150)니건외도(尼犍外道)의 문도. 니건은 Nigrantha의 역으로 이계(離繫)의 고행을 하는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하나이다. 어느 때 왕사성에 시리굴다(尸利崛多)라고 하는 장자가 니건외도를 믿고 있었다. 그때 니건자와 범지(梵志)라고 하는 외도가 시리굴다를 설득하여 은밀히 옥내에 큰 불구덩이를 만들고 또 밥 속에 독을 섞어 놓고 석존을 청하여 해치고자 하였다고 한다. 성안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하여 석존의 행차를 말렸으나 석존은 듣지 않고 그대로 가셨다. 그리하여 문 안에 들어서자 불구덩이는 스스로 꺼져 버리고 독이 든 밥을 드셨으나 해를 입지 않으시자 시리굴다는 크게 놀라 사죄하고 불도에 귀의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증일아함경』 제14권 및 『대당서역기』 제9권 등에 보인다.
  151. 151)조달은 아사세왕과 서로 모의하여 석존을 해치고자 하였다. 아사세왕에게는 호재(護財)라는 사나운 코끼리가 있었는데 왕은 코끼리 조련사에게 명하여 코끼리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코끝에 날카로운 칼을 달아 석존께서 탁발하러 나오실 때 풀어 놓았다. 그러나 코끼리는 석존을 만나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핥았다고 하는데 이 설화는 『증일아함경』 제9권,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19권, 그리고 『대당서역기』 제9권 등에 보인다.
  152. 152)Jivaka의 음역으로, 달리 기바(耆婆) 또는 시박가(時縛迦)로도 음역되는데 인명이다. 병사왕의 아들로 왕사성의 명의(名醫)였다. 그는 자기 소유의 암바라원(Ambapālivana, 菴婆羅園)에 정사를 세워 석존께 바쳤는데 이른바 죽림정사가 바로 이것이다.
  153. 153)Pāpīyas의 역으로 사람의 목숨이나 선근(善根)을 끊어 버리는 악마를 일컫는다.
  154. 154)조달이 석존의 발가락을 상하게 한 설화는 『대지도론』 제14권, 『사분율』 제4권, 『증일아함경』 제17권, 및 『대당서역기』 제9권 등에 보인다.
  155. 155)가란타는 Karaṇḍa의 음역으로 석존 재세 시 왕사성의 한 장자의 이름이다. 그는 구성(舊城)의 북쪽에 있는 죽림(竹林)을 처음에는 니건외도에게 주었지만 뒤에 석존에게 바쳤다.
  156. 156)Śmasāna의 음역으로 기시인묘(棄尸人墓) 또는 시타림(尸陀林)이라고도 번역한다.
  157. 157)Pippaliguhā의 음역으로 필발라굴(畢鉢羅窟)이라고도 번역한다. 이곳에서도 불전 결집(佛典結集)이 행해졌다는 설이 있다.
  158. 158)Saptapaṇṇaguhā의 와전된 번역으로 찰제산굴(刹帝山窟) 또는 칠엽굴(七葉窟)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왕사성 불전 결집이 행해진 곳이다. 『대당서역기』 제9권에서 죽림원(竹林園) 서남으로 5,6리쯤 가면 남산 북쪽의 대죽림(大竹林) 중에 대석실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되는 지점으로, 지금의 구(舊) 왕사성의 서문 밖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159. 159)사리불과 목련은 석존보다 먼저 열반했다. 그래서 대가섭은 세 개의 빈 좌석을 마련하여 중앙에 석존, 왼쪽에 사리불, 오른쪽에 목련의 자리를 만들어 장엄하게 꾸미고 그 다음에 대가섭의 자리를 만들고 뒤이어 5백 나한의 자리를 만들었으며 두터이 공양을 한 후에 결집을 행하였다.
  160. 160)왕사성 결집 때 가섭은 아난의 누(漏)가 다하지 않았다 하여 처음부터 나한의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하룻밤 문 밖에서 남은 번뇌를 없애게 하여 비로소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161. 161)욕계(欲界) 수혹(修惑)의 9품(品) 가운데 6품의 수혹을 일래향(一來向)으로 끊고 나머지 3품을 끊어 버린 자리. 이것을 끊어 버리면 욕계에 돌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162. 162)소승의 수행 단계 중 최종 단계. 이 과에 달하면 일체의 견혹(見惑), 수혹(修惑)을 끊고 미혹[迷]의 세계에 유전함이 없이 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한다.
  163. 163)Gayā의 음역. 구 왕사성의 서남 26마일에 있는 지금의 Gaya에 해당된다.
  164. 164)이른바 고행림(苦行林)으로 지금의 부다가야 대탑의 약간 남쪽 문린맹룡지(文鱗盲龍池) 부근에 해당된다.
  165. 165)부다가야(Buddha-Gaya)의 동북 약 5km쯤에 있는 전정각산(前正覺山)의 불영석굴(佛影石窟)을 말한다. 석존은 처음 여기에서 선정에 들려고 하였으나 제천(諸天)의 신험(神驗)에 의해 수승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로 향하셨다.
  166. 166)보리수를 가리킨다. 원어인 Aśvattha의 ‘Aś’ 음을 생략한 음역이다. Pippala(畢鉢羅)의 이명동수(異名同樹)이다.
  167. 167)Kuśa의 역으로 구시초(鳩尸草), 시초(尸草)로 음역되기도 하고 세모(細茅), 세추(細秋)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68. 168)Mucalinda의 역으로 용왕(龍王)을 말한다.
  169. 169)Nigorodha의 음역으로 용수(榕樹)를 가리킨다.
  170. 170)대중과 함께 기거(起居)하고 유행(遊行)하는 작법(作法)으로 첫째 하의(下意), 둘째 자심(慈心), 셋째 공경(恭敬), 넷째 지차제(知次第), 다섯째 불설여사(不說餘事)를 입중(入衆)의 5법이라고 한다.
  171. 171)남송본(南宋本)에는 석가불이라 하고 있다.
  172. 172)Cakravāḍa의 역으로 윤위산(輪圍山)이라고도 한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7산(山) 8해(海)가 있는데, 제8해를 둘러싼 산을 철위산이라고 한다.
  173. 173)Yama의 역으로 이른바 염라왕(閻邏王, Yama-rāja) 또는 염라대왕으로 지옥의 주신(主神)이다.
  174. 174)Kukkuṭapada-giri의 역으로 존족산(尊足山)ㆍ계각산(鷄脚山)ㆍ굴굴타파타산(屈屈吒播陀山)ㆍ낭적산(狼跡山) 등으로도 번역된다. 부다가야의 동남쪽 32km의 Gurpa Hill에 추정되고 있다.
  175. 175)Āṭavika의 역으로 아타바구(阿吒婆拘) 또는 임야(林野) 등으로도 번역된다. 『잡아함경』 제50권, 『불본행집경』 제4권, 『대당서역기』 제7권 등에는 석존이 여기에서 광야귀(曠野鬼)를 교화하셨다는 설화가 보인다. 현재의 위치는 미상(未詳)이다.
  176. 176)가시국의 가시는 Kāśi의 음역으로 가시(伽尸), 가시(加尸)로도 한역된다. 지금의 베나레스(Benāres) 지방 일대로 알려져 있다.
  177. 177)Bārāṇasi의 음역으로 파라나(波羅奈), 파라니사(波羅。斯)로도 번역된다. 지금의 베나레스이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녹야원(鹿野苑)에 가깝다. 예로부터 종교 도시로 유명하다.
  178. 178)Ṛṣipatana Mṛgadāva의 번역으로 선인주처(仙人住處), 선원(仙園), 녹원(鹿苑)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베나레스의 북쪽에 있는 사르나트(Sārnāth)로 최초 설법지인 녹야원을 가리킨다.
  179. 179)Kauṇḍinya의 번역으로 교진여(憍陳如)라고도 한다.
  180. 180)고행을 하던 수도자가 고행을 그만둔 것을 가리킨다.
  181. 181)Etpāattra의 번역으로 이라발(伊羅鉢), 이라발다라(伊羅鉢多羅)로도 번역된다. 이 용은 과거에 이라초(伊羅草)를 해쳐서 그 과보로 용이 되어 항상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던 중 가섭불을 만나 석존의 출세를 듣고, 석존을 만나자마자 용신에서 벗어나는 법을 물었다. 석존은 불도에 귀의하여 수행을 계속하면 미륵보살의 출세에 인간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한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 제21권, 『불본행집경』 제37~38권 등에 보인다.
  182. 182)Kauśambī의 음역으로 교상미(憍賞彌), 장유(藏有)로도 번역된다. 알라하바드(Allahabad)의 남서 약 60킬로의 코삼(Kosam) 지방. 부처님께서 도리천에서 오셨을 때, 전단상(旃檀像)을 만들어 산카샤에게 네 마리의 코끼리를 인솔하고 영접한 우전왕(優塡王)이 머물던 성(城)이다.
  183. 183)구미섬국에서 남쪽으로 2백 유연이라고 하므로 데칸(Dekkan)고원 중의 한 국가일 것이나 현 위치는 자세하지 않다.
  184. 184)마하승기는 Mahāsaṅghika의 음역으로 대중의 뜻이고 중(衆)은 부(部)의 뜻이므로 곧 대중부(大衆部)의 율을 말한다. 이는 세존 재세 시에 행해지던 것으로 대중부에 의해 전해지는 율장(律藏)이라고 한다. 법현이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와 함께 도량사(道場寺)에서 역출(譯出)한 『마하승기율』 40권이 이것이다.
  185. 185)소승 18부파(部派)를 가리킨다.
  186. 186)개색엄숙(開塞嚴肅)의 뜻으로 계율의 적용에 너그러움과 엄정함의 도(度)가 있음을 말한다.
  187. 187)자세하게 적혀 있다는 말.
  188. 188)상좌부(上座部) 계통의 살바다부(薩婆多部, Sarāvstivādin)를 말한다.
  189. 189)『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의 요의를 간략하게 발췌한 것을 아비담심(阿毘曇心)』이라고 하는데, 아비담심은 너무 간략하게 되어 있어서 이것을 증정(增訂)한 것을 『잡아비담심』이라 하고 약해서 『잡심론(雜心論)』이라고도 한다. 법현이 불타발타라와 함께 도량사에서 역출한 『잡아비담심』 13권이 이것이다.
  190. 190)선경(線經)이라고도 한다. 경이 부처님의 설법을 관철(貫徹), 보지(保持)함이 선(線)과 같음에 비유해서 선경 또는 정경이라고 하는 것이다.
  191. 191)방등(方等)은 대승과 같은 뜻이므로 곧 『대승반니원경(大乘般泥洹經)』을 가리킨다. 법현은 역시 불타발타라와 함께 도량사에서 『대승반니원경』 6권을 역출하였다.
  192. 192)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와 같은 말로 삼장의 하나인 논(論)을 가리킨다.
  193. 193)위의(威儀)는 행동하고[行], 머무르고[住], 앉고[坐], 눕고[臥] 하는 용의(容儀)이고, 촉사(觸事)는 식사시의 정(淨), 부정(不淨)의 마음가짐을 말한다.
  194. 194)첨파는 Camp의 음역으로 점파국(占波國)이라고도 한다. 파련불읍의 동쪽 18유연의 갠지스강 남안에 있던 대국으로 지금의 바갈푸르(Bhāgalpur) 지방에 해당된다.
  195. 195)Tāmralipti의 음역으로 다마율저(多摩栗底), 다마치(多摩致)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고려대장경에서는 마리제국(摩梨帝國)으로 되어 있으나 신수대장경의 각주를 보면 송(宋)ㆍ명(明)ㆍ궁(宮)본에는 다마리제국(多摩梨帝國)으로 표기되어 있어 이를 따랐다. 이 나라는 갠지스 하구(河口)의 지류인 Hooghly 하구 부근의 Jamluk로 비정(比定)된다.
  196. 196)인도양에서는 12월에서 2월에 걸쳐서 동북풍이 부는데, 예로부터 이 계절풍을 이용하여 남해 무역이 성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초겨울의 신풍이란 의희(義熙) 5년(409) 12월의 계절풍을 가리킨다.
  197. 197)Siṃhala의 번역으로 집사자국(執師子國), 승가라국(僧伽羅國)이라고도 번역된다. 또 일명 능가주(楞伽洲, Lanka)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스리랑카를 가리킨다.
  198. 198)석존께서는 이 나라에 세 번 오셨다는 전설이 있다.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娑)』 제3권에 의하면 첫 번째에는 야차(夜叉)를 교화하셨고, 두 번째는 용왕을 교화하셨다고 한다.
  199. 199)당시의 왕성은 지금의 Anurādhapura로 고적이 많다.
  200. 200)산은 왕성의 남쪽 15유연에 있는 불족산(佛足山)으로 현재의 Adams Peak이다.
  201. 201)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진지(晋地)란 단어가 본문에 빠져 있지만 신수대장경과 송(宋)ㆍ원(元)ㆍ명(明)ㆍ궁(宮)본에는 이 내용이 나타나 있다. 역자는 번역의 내용상 뒤의 것이 합당하다고 보아 이를 따랐다.
  202. 202)Sārthavāho의 역으로 상주(商主) 또는 대상(隊商)의 장(長)을 가리킨다.
  203. 203)강사(講師)ㆍ도사(導師) 또는 계사(戒師) 등을 위하여 한층 높게 마련한 좌석, 또는 그들의 존칭.
  204. 204)부처님은 석발(石鉢), 사문은 철발(鐵鉢)을 사용함을 원칙으로 하였으므로 본발은 본래의 원칙적인 발우, 즉 철발을 가리킨다.
  205. 205)사자국의 불치는 예로부터 유명하여 많은 구법승(求法僧)들이 불치 예배를 위해 이곳을 방문하고 있다.
  206. 206)아승기는 무량(無量)의 뜻으로서 아승기겁은 무한의 장시간을 가리킨다. 석존은 3기의 아승기겁의 수업에 의해 성도하셨기 때문에 그 기간을 3아승기겁이라 한다.
  207. 207)오백신은 오백세와 같다.
  208. 208)변상(變相)과 같다.
  209. 209)Sudāna의 음역으로 선시(善施), 선여(善與)로도 번역된다. 『육도집경(六度集經)』 제2권 『대당서역기』 제2권 등에 보면, 보살이 전세에 엽파국(葉波國) 살사왕(薩闍王)의 태자로 태어나 보살행을 행하고 있을 때의 이름인데, 그는 나사화대단백상(羅闍和大檀白象)을 팔범지(八梵志)에게 주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쫓겨났었다. 천제석은 차례차례로 수레ㆍ말ㆍ모든 물건, 그리고 두 아이도 달라고 하여 태자의 굳은 뜻을 시험하고 드디어는 왕비(王妃)마저 달라고 하여 사여(捨與)를 받았다고 한다. 뒤에 두 아이는 모국(母國)으로 팔려 가기까지 하였으나, 결국 태자는 용서를 받고 나라로 돌아가 크게 치적을 세웠다고 한다.
  210. 210)Sāma의 음역으로 달리 상막가(商莫迦)로도 번역된다. 『육도집경』 제5권, 『섬자경(睒子經)』 등에 보이는 본생담의 하나로 일찍이 석존께서 섬선인(睒仙人)으로서 나중에 부모와 함께 살면서 부모를 위해 물을 긷고 있을 때, 가리국왕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이를 알고 현장으로 달려가 섬선인의 유해를 안고 비탄 통곡하였는데 천제석이 그 지성에 감동하여 하늘의 신약(神藥)을 섬선인의 입에 넣어 주어 소생시켰다고 한다.
  211. 211)모두 본생담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예컨대 상왕은 육아백상본생담(六牙白象本生譚), 사슴은 녹왕본생담(鹿王本生譚), 말은 운마본생담(雲馬本生譚) 등에 근거를 두고 형상을 만든 것이다.
  212. 212)구 왕성(舊王城)인 Anurdhapura의 동쪽 약 12km에 있는 Mihintale산이다. 미사가산(眉沙迦山, Misaka) 또는 지제야산(支帝耶山, Cetyagiri)이라고도 불리며 마힌다지(摩哂陀地)라고도 한다.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毗婆娑)』 제3권에 의하면 마힌다는 사자국(師子國)에 건너와 미사가(眉沙迦)에 이르렀는데, 그때 국왕 제수(帝須)는 수렵을 하다가 이곳에서 마힌다와 처음으로 만나 그의 교화를 받았다. 그 후 마힌다는 항상 이곳에 머물렀다. 제수왕은 여러 대덕들과 함께 항상 이곳을 찾아와서 설법을 들었다고 한다. 이곳은 나무 그늘이 깊고 암굴(岩窟)이 그윽하며 조망 또한 훤하다. 현재도 마힌다가 머물렀던 유적을 볼 수 있다.
  213. 213)Bhadrika의 역으로 발제(跋踶)라고도 한다. 지금의 Mihintale산에 있는 Ambstala정사의 전신. 지제라고 번역되는 것은 산 이름이 지제야산이라는 데서 연유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214. 214)Dharmagupta의 음역으로 법현 당시 지제에 있던 고승의 이름.
  215. 215)Mahāvihra의 음역으로 대사(大寺)라고도 번역된다. 스리랑카의 유명한 절 이름으로 왕성인 Anurādhapura의 남쪽 지금의 Ruvanveli탑 근처에 그 유적이 있다. 이는 곧 제수왕(帝須王)의 미가왕원(彌伽王園)의 땅에 해당된다. 제수왕은 마힌다의 설에 따라 부다가야의 보리수와 마힌다의 누이동생인 승가밀다(僧伽蜜多) 비구니를 맞이하여 보리수를 미가원에 심었다. 또 미가원에 마하비하라(摩訶毘訶羅)를 세워 승가밀다를 이곳에 거주하게 하여 아원라(阿寃羅, Anul)부인을 제도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마하비하라는 대승상좌부(大乘上座部)인 마하비하라주부(摩訶毘訶羅住部)의 본산으로 스리랑카 불교의 연총(淵叢)이 되었고 그 후 B.C. 87년에 창건된 무외사의 무외산주부(無畏山住部)와 함께 스리랑카 불교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216. 216)중국의 상거(喪車)를 말한다. 무륜거(無輪車)또는 무복거(無輻車)라고도 한다. 본래 중국의 상여에는 선두나 네 귀퉁이에 용사(龍蛇)의 형을 만든다고 한다.
  217. 217)Jhāpita의 역으로 사유(闍維) 또는 야유(耶維)로도 번역한다. 화장(火葬)을 말한다.
  218. 218)한의 구자국(龜茲國)으로 지금의 중국 신강성의 Kucha이다.
  219. 219)Vintaka의 역으로 빈나산(頻那山), 비나항가산(毘那恒迦山)으로도 음역된다. 수미산 칠금산(七金山)의 하나로 사천왕이 거주하는 곳. 부처님께서 처음에 성도하시자 사천왕은 각각 석발(石鉢)을 바쳤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받고 포개서 하나의 발우로 만드셨다.
  220. 220) 미사색은 Mahīśīsaka의 음역으로 달리 미사(彌沙), 화지(化地) 등으로도 번역된다. 율부에는 살바다부(薩婆多部)ㆍ미사색부ㆍ가섭유부(迦葉遺部)ㆍ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ㆍ담무덕부(曇無德部)의 5분파가 있는데, 미사색부의 율을 가리킨다. 자세하게는 미사색부화혜오분율(彌沙塞部和醯五分律)이라고 하는데, 이를 줄여서 오분율(五分律)이라고도 한다.
  221. 221)『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 제2권에 의하면 법현, 불타발타라가 역출(譯出)한 경전의 항목에 보이는 잡장경 제1권의 원전일 것으로 짐작된다.
  222. 222)Kuṇḍika의 음역으로 군지(軍持)로 음역되기도 하고 정병(淨甁)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223. 223)조관(澡灌)으로도 쓴다. 양치질 등에 쓰이는 물통.
  224. 224)인도양의 Nicobar 군도(群島) 중의 한 섬으로 추정된다.
  225. 225)Yardripa의 역으로 현 위치는 미상. Java 또는 Sumatra 동남부의 두 설이 있다.
  226. 226)의희(義熙) 8년(412)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법현은 인도에 머물 때에는 인도의 법에 따라 5월(또는 6월) 16일부터 8월(또는 9월) 15일까지의 기간에 하안거에 들었지만 이곳에서는 중국식대로 4월 16일부터 안거에 들었다.
  227. 227) 장광군은 진(晉)의 청주(靑州) 장광군으로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의 동남 교주만(膠州灣)의 동북부이고, 뇌산은 지금의 즉묵현(卽墨縣)의 동남 60리에 있는 노산(勞山)으로 예로부터 유명한 영산(靈山)이다.
  228. 228)고려대장경 본문에는 이 부분이 ‘궤(詭)’자로 되어 있으나 송(宋)ㆍ궁(宮)본에는 ‘설(說)’자로 되어 있다. 해석상으로는 ‘설(說)’자가 더 합당하여 후자를 따르기로 한다.
  229. 229)건강(建康)을 가리킨다.
  230. 230)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를 가리킨다. 법현은 건강의 도량사(道場寺)에서 인도에서 가지고 온 『마하승기율』ㆍ『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ㆍ『정경(綎經)』ㆍ『잡아비담심(雜阿毘曇心)』 등을 불타발타라와 함께 번역하였다.
  231. 231)불ㆍ법ㆍ승 삼보를 가리킴.
  232. 232)진(晉) 의희(義熙) 10년(414). 법현은 의희 8년 7월 14일 뇌산의 남안에 표착(漂着)하여 동년 9월 이후 유연(劉兗:劉道隣의 다른 이름)에게 가서 일동일하(一冬一夏)를 보내고 의희 9년 하안거를 마치고 건강에 돌아가, 다음 해인 의희 10년(甲寅)에 이 법현전을 완성한 것이다.
  233. 233)이하는 『법현전』에 바로 이어지는 송승(宋僧)의 발문(跋文)이다.
  234. 234)동지(冬至)에 사감(寺監)이 주지를 대신하여 법좌(法座)에 올라 승려들에게 계경(戒經)을 설하여 그 실행을 재촉하는 법회.